지미 카터 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 1924년 10월 1일 ~ )는 민주당 출신 미국 39번째 대통령 (1977년 ~ 1981년)이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미국 해군 대위로 예편하였고 이후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별명이 "땅콩 농부" (Peanut Farmer)로 알려졌다. 1962년 조지아 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나 그 선거가 부정선거 였음을 입증하게 되어 당선되고, 1966년 조지아 주 지사 선거에 낙선하지만 1970년 조지아 주 지사를 역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조지아주 상원의원을 두번 연임했으며,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지사로 근무했다. 조지아 주지사로 지내면서, 미국에 사는 흑인 등용법을 내세웠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도덕주의 정책으로 내세워, 포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에너지 개발을 촉구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카터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조정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수상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당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의 반발을 일으켰다. 1979년 백악관에서 양국 간의 평화조약으로 이끌어졌다. 또한 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에 조인했다. 카터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취임 이후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인질 구출 실패를 이유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져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또한 임기 말기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의 보이콧을 내세웠다. 지미 카터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대통령 중 하나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과의 논란으로 불협화음을 냈으나, 1979년 6월 하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관계가 다소 회복되었다. 1979년 ~ 1980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후에 대한민국 내에서 고조되는 반미 운동의 한 원인이 됐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는 강하게 비난했으나, 미국 정부가 신군부를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 카터는 카터 행정부 이후 미국이 북핵 위기, 코소보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최후로 선택하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군사적 행동을 선행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 하며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아이티의 세드라스 장군, 팔레인스타인의 하마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권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사태의 위기를 초래한 인물 및 단체를 직접 만나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직 대통령의 권한과 재야 유명 인사들의 활약으로 해결해 나갔다. 1978년에 채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이행이 지지부진 하자 중동 분쟁 분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3년 퇴임 후 직접 이스라엘과 팔레인스타인의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임박했으나,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과 북 양국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해 위기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주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여 김일성과 김영삼의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세계의 인권문제에서도 관심이 깊어 유엔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노력하여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약을 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드는 데 기여하여 독재자들 같은 인권유린범죄자를 재판소로 회부하여 국제적인 처벌을 받게 하는 등 인권 신장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 2011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북한을 3일간 방문했다.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이란 사태는 미국 내 이란 재산을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사실상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후에 훨씬 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중에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 그는 2002년 말 인권과 중재 역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수학 수학(數學, ) 은 양, 구조, 공간, 변화, 미적분 등의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다. 현대 수학은 형식 논리를 이용해서 공리로 구성된 추상적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수학은 그 구조와 발전 과정에서는 자연과학에 속하는 물리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하지만, 어느 과학의 분야들과는 달리, 자연계에서 관측되지 않는 개념들에 대해서까지 이론을 일반화 및 추상화시킬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수학자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추측을 하고, 적절하게 선택된 정의와 공리로부터의 엄밀한 연역을 통해서 추측들의 진위를 파악한다. 수학은 숫자 세기, 계산, 측정 및 물리적 대상의 모양과 움직임을 추상화하고, 이에 논리적 추론을 적용하여 나타났다. 이런 기본 개념들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인도, 고대 중국 및 고대 그리스의 수학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는 엄밀한 논증이 발견된다. 이런 발전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16세기의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수학적 발전과 과학적 방법들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 혁명적인 연구들이 진행되며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 의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에서도 중요한 도구로서도 사용된다. 수학을 이런 분야들에 적용한 응용수학은 그 결과로써 수학 자체의 발전을 이끌고 새로운 분야들을 낳았다. 응용이 아닌 수학 자체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추구하며 연구하는 것을 순수수학이라 하는데,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순수수학적 연구를 다른 분야에 응용할 방법이 발견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자료를 보면, "mathematics"는 "수리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mathmaticus와 그리스어 mathematikos에서 유래되었거나, "학식있는"을 뜻하는 mathema와 "배우다"를 뜻하는 manthanein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줄여서 "mat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수학은 기원전 600년 경에 살았던 탈레스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탈레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수학을 연구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역•분배•과세 등의 인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을 수학이 담당해 왔고, 농경 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측과 달력의 제정, 토지의 측량 또한 수학이 직접적으로 관여한 분야이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나라로는 이집트, 인도, 그리스, 중국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는 처음으로 수학의 방정식에서 변수를 문자로 쓴 나라이다. 한국의 수학은 약 1,500년 전부터 기록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신라 시대에 수학을 가르쳤으며, 탈레스가 최초로 발견한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정도로 발달했다. 조선 시대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수학 연구를 명하는 등, 조선의 수학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많은 서적들이 불타고, 천문학 분야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조선 후기의 한국의 수학은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발전하였고, 새로운 결과도 성취되었다. 수학의 각 분야들은 상업에 필요한 계산을 하기 위해, 숫자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그리고 천문학적 사건들을 예견하기 위해 발전되어왔다. 이 네 가지 목적은 대략적으로 수학이 다루는 대상인 양, 구조, 공간 및 변화에 대응되며, 이들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각각 산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이라 한다. 또한 이 밖에도 근대 이후에 나타난 수학기초론과 이산수학 및 응용수학 등이 있다. 산술은 자연수와 정수 및 이에 대한 사칙연산에 대한 연구로서 시작했다. 수론은 이런 주제들을 보다 깊게 다루는 학문으로, 그 결과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이 유명하다. 또한 쌍둥이 소수 추측과 골드바흐 추측 등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문제들도 여럿 있다. 수의 체계가 보다 발전하면서, 정수의 집합을 유리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유리수의 집합은 실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며, 이는 또다시 복소수 집합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사원수와 팔원수 등의 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자연수를 무한대까지 세어나간다는 개념을 형식화하여 순서수의 개념을 얻으며, 집합의 크기 비교를 이용하여 무한대를 다루기 위한 또다른 방법으로는 기수의 개념도 있다. 수 대신 문자를 써서 문제해결을 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적 법칙을 일반적이고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대수학은 대수방정식 및 연립방정식의 해법에서 시작하여 군, 환, 체 등의 추상대수학을 거쳐 현대에 와서는 대수계의 구조를 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선형대수학으로 전개되었다. 수의 집합이나 함수와 같은 많은 수학적 대상들은 내재적인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대상들의 구조적 특성들이 군론, 환론, 체론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대수적 구조들을 연구하면서 다루어지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내재적 구조를 지닌 수학적 대상이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은 벡터, 벡터 공간으로의 일반화, 그리고 선형대수학에서의 지식들이다. 벡터의 연구에는 산술, 대수, 기하라는 수학의 중요한 세개의 분야가 조합되어 있다. 벡터 미적분학은 여기에 해석학의 영역이 추가된다. 텐서 미적분학은 대칭성과 회전축의 영향 아래에서 벡터의 움직임을 연구한다.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와 관련된 많은 고대의 미해결 문제들이 갈루아 이론을 사용하여 비로소 해결되었다. 공간에 대한 연구는 기하학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롯되었다. 삼각법은 공간과 수들을 결합하였고,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포함한다. 현대에 와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개념들은 더 높은 차원의 기하학을 다루기 위해 비유클리드 기하학(상대성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함)과 위상수학으로 일반화되었다. 수론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모두 해석 기하학, 미분기하학, 대수기하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 군도 공간과 구조, 변화를 다루는데 사용된다. 위상수학은 20세기 수학의 다양한 지류속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분야이며, 푸앵카레 추측과 인간에 의해서 증명되지 못하고 오직 컴퓨터로만 증명된 4색정리를 포함한다. 변화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일반적인 주제이며, 미적분학은 변화를 탐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발전되었다. 함수는 변화하는 양을 묘사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개념으로써 떠오르게 된다. 실수와 실변수로 구성된 함수의 엄밀한 탐구가 실해석학이라는 분야로 알려지게 되었고, 복소수에 대한 이와 같은 탐구 분야는 복소해석학이라고 한다. 함수해석학은 함수의 공간(특히 무한차원)의 탐구에 주목한다. 함수해석학의 많은 응용분야 중 하나가 양자역학이다.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양과 그 양의 변화율의 관계로 귀착되고, 이러한 문제들이 미분방정식으로 다루어진다. 자연의 많은 현상들이 동역학계로 기술될 수 있다. 혼돈 이론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 수학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수리논리학과 집합론이 발전하였고, 이와 더불어 범주론이 최근에도 발전되고 있다. “근본 위기”라는 말은 대략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탐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몇 가지 의견 불일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학의 기초에 대한 위기는 그 당시 수많은 논쟁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 논쟁에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브라우어-힐베르트 논쟁이 포함되었다. 수학 상수 수학에서 상수란 그 값이 변하지 않는 불변량으로, 변수의 반대말이다. 물리 상수와는 달리, 수학 상수는 물리적 측정과는 상관없이 정의된다. 수학 상수는 대개 실수체나 복소수체의 원소이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상수는 (거의 대부분 계산 가능한) 정의가능한 수이다. 특정 수학 상수, 예를 들면 골롬-딕맨 상수, 프랑세즈-로빈슨 상수, formula_1, 레비 상수같은 상수는 다른 수학상수 또는 함수와 약한 상관관계 또는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문학 문학(文學)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의 하위분야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미적(美的)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은 원래 문예(文藝)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며, 문학을 학문의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의 명칭 역시 문예학이다. 문예학은 음악사학, 미술사학 등과 함께 예술학의 핵심분야로서 인문학의 하위범주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정의는 텍스트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국가들은 고유한 문학을 가질 수 있으며, 이는 기업이나 철학 조류,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한 국가의 문학을 묶어서 분류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어, 성서, 베오울프, 일리아드, 그리고 미국 헌법 등이 그러한 분류의 범주에 들어간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문학은 특정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 시, 희곡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야기, 시, 그리고 희곡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한 아이템을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문학"은 어떠한 상징적인 기록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지나 조각, 또는 문자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문학은 오직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구성된 것만을 포함한다. 좀 더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 개념이 꼭 물리적인 형태를 가진 텍스트여야 하고, 대개 그러한 형태는 종이 등의 눈에 보이는 매체에서 디지털 미디어까지 다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면, "문학"과 몇몇 인기있는 기록형태의 작업들, 소위 "대중문학" 사이에는 인식가능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때 "문학적인 허구성"과 "문학적인 재능"이 종종 개별적인 작품들을 구별하는 데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즈의 작품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제프리 아처의 작품들은 영문학이라는 일반적인 범주 아래 두기에는 다소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예를 들어 문법과 어법에 서투르거나, 이야기가 혼란스러워 신뢰성을 주지 않거나, 인물들의 성격에 일관성이 없을 경우에도 문학에서 제외될 수 있다. 로맨스, 범죄소설, 과학소설 등의 장르 소설도 때로 "문학"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중문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문학은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이 외에도 편의에 따라 발생적으로 대별하기도 한다. 문학은 처음은 유일한 종류, 즉 노래하고, 말하고, 춤춘다는 것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춤추는 것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연극(演劇)이며, 노래하는 것이 발달하여 시(詩), 말하는 것이 발달하여 산문(散文)의 이야기가 되었다. 시는 정형시·자유시·산문시로, 또한 서사시와 서정시로 나뉜다. 산문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야기, 근대 리얼리즘의 수법 이후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있다. 이야기나 소설과 같이 특별한 구상에 의하지 않고, 작자의 흥미에 의해서 씌어지는 것이 잡문(雜文) 또는 수필이며, 이것이 날짜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일기, 여행의 과정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기행문이다. 일기와 마찬가지로 발표의 의도가 작은 것에 서간(書簡)이 있다. 이 밖에 사건의 경험에 따른 회고록, 사건 등의 특정시(特定時)에 한정되지 않는 자서전, 제삼자에 의해서 씌어지는 전기(傳記)가 있다. 또한 이것들을 포함하는 예술작품의 가치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평론(評論)이다. 대중문학이란 상업성을 띠며 대중을 겨냥하여 그들의 통속적인 흥미와 욕구를 채워주는 문학을 말한다. 대중문학의 하위장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문학을 창작하는 예술가를 문예가라고 부른다. 문예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문예학자라고 부른다.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을 따로 저술가라고 한다. 문예학자와 언어학자를 합쳐 어문학자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와, 언어를 사용한 예술인 문학은 현격한 차이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반영론적 관점에 의한 감상은 작품을 창작된 당시 시대 정황과 연결시켜 감상하는 입장이고, 내재적 관점의 감상은 작품의 형식, 내용에 국한하여 감상하는 것이다. 표현론적 관점의 감상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것이고, 수용론적 관점의 감상은 독자와 작품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나라 목록 이 문서는 나라 목록이며, 전 세계 206개 나라의 각 현황과 주권 승인 정보를 개요 형태로 나열하고 있다. 이 목록은 명료화를 위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두 목록은 모두 가나다 순이다.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로서의 자격에 논쟁의 여부가 있으며, 이 때문에 이러한 목록을 엮는 것은 매우 어렵고 논란이 생길 수 있는 과정이다. 이 목록을 구성하고 있는 국가를 선정하는 기준에 대한 정보는 "포함 기준" 단락을 통해 설명하였다.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는 "국가"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목록은 주권을 주장하고 점유한 영토를 실제로 관리하고 있으나, 많은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못한 나라를 설명하고 있다. 극소형 국가는 이 목록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 목록에 실린 국가 기준은 1933년 몬테비데오 협약 1장을 참고로 하였다. 협정에 따르면, 국가는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 조건은 국제 공동체의 참여 용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승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목록에 포함된 모든 국가는 보통 이 기준을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이다. 하지만 몬테비데오 협약 기준을 만족하는지의 여부는 많은 국가가 논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몬테비데오 협약 기준만이 국가 지위의 충분한 자격이든 아니든, 국제법의 견해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다른 이론에 대한 고리는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위 기준에 논거하여 이 목록은 다음 206개 국가를 포함하고 있다. 위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다음 국가는 몬테비데오 협약의 모든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거나, 자주적이고 독립적임을 주장하지 않는 국가이다. 화학 화학(化學, )은 물질의 성질, 조성, 구조, 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에너지의 변화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학도 역시 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물리학이 원소와 화합물을 모두 포함한 물체의 운동과 에너지, 열적·전기적·광학적·기계적 속성을 다루고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통일된 이론을 구축하려는 것과는 달리 화학에서는 물질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화학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이용하여 특정한 목적에 맞는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길을 제공하며, 이는 농작물의 증산, 질병의 치료 및 예방, 에너지 효율 증대, 환경오염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고대 화학 인간에 의해 발견된 최초의 기록된 금속은 금인 것으로 보이며 구석기 후기(BC 40,000)에 스페인 동굴에서 소량의 천연 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은, 구리, 주석 및 유성 철 또한 고대 문화에서 제한된 양의 금속 가공을 허용하면서 고대문화로 발견 될 수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 유성 철제로 만든 이집트 무기는 "천국의 단검"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 아마도 통제 된 방식으로 사용 된 최초의 화학 반응은 불이였다. 그러나 천년 동안 불는 단순히 열과 빛을 생성하면서 한 물질을 다른 물질 (타는 나무 또는 끓는 물)로 변형시킬 수있는 신비한 힘으로만 알려졌다. 불는 초기 사회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요리 및 서식지 조명과 같은 일상 생활의 가장 단순한면에서 도기, 벽돌 및 금속을 녹여 도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고급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유리의 발견과 금속의 정화로 이어지는 불로 인해 야금이 부상했다. 야금의 초기 단계에서 금속의 정화 방법이 요구되었고, 금은 BC 2900 년 초기의 고대 이집트의 귀중한 금속이되었다. 17 세기와 18 세기 : 초기 화학 "*로버트 보일" 영국계 미국인 화학자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 1627-1691)은 연금술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정제하고 화학을 연금술과 분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연구가 연금술 전통에 뿌리를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일은 오늘날 현대의 화학자이자 현대화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실험 과학 방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보일이 원래 발견자가 아님에도 보일은 1662 년에 제시한 보일의 법칙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보일의 법칙은 온도만 폐쇄된 시스템 내에서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가스의 절대 압력과 부피가 반비례함을 의미한다.보일은 또한 화학 분야의 초석으로 간주되는 1661 년의 《의심 많은 화학자》 에 대한 획기적인 저서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에서 보일은 모든 현상이 움직이는 입자의 충돌의 결과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보일 (Boyle)은 화학자들에게 실험을 호소했으며 실험은 지구, 화염, 공기 및 물과 같은 고전적인 4 가지 원소만으로 화학 원소를 제한한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또한 화학이 의학이나 연금술에 종속되어 과학의 지위로 부상하는 것을 중단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중요한 것은 과학 실험에 대한 엄격한 접근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이론이 사실로 간주되기 전에 실험적으로 입증되어야한다고 믿었다. 이 작품은 원자, 분자 및 화학 반응의 가장 초기의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현대 화학의 역사의 시작을 나타낸다. 보일은 또한 화학 물질을 정제하여 재현 가능한 반응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재료 물질의 물리적 특성과 상호 작용을 설명하고 정량화하기 위해 René Descartes가 제안한 기계 철학의 보컬 지지자였다. 보일은 원자핵론자 였지만 원자보다 더 많은 입자를 선호했다. 그는 속성이 유지되는 물질의 가장 정밀한 부분은 미립자의 수준에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또한 공기 펌프로 수 많은 조사를 수행했으며, 공기가 펌프로 퍼져 나감에 따라 수은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또한 컨테이너에서 공기를 펌핑하면 화염을 없애고 내부에있는 작은 동물을 죽일 수 있음을 관찰했다. 과거 화학에서 더 이상 나뉘지 않는 기초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 기초적인 요소를 원자(atom)라 한다. 원자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로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그 존재가 주장되었는데, 1803년 존 돌턴에 의해서 원자론으로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화학자들은 원자를 구성하는 더 작은 입자들, 즉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자는 음전하를 띠고 있고, 양성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으며, 중성자는 전하를 띠지 않고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핵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는 이 주변에 오비탈을 이루며 분포되어 있다. 원소(element)는 일반적인 화학적, 물리학적 방법으로는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의미한다. 원소는 원자핵에 존재하는 양성자 수로 정의되는 원자 번호로 구별된다. 산소, 황, 주석, 철 등은 원소이다. 19세기 중엽까지 약 80가지의 원소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주기율에 따라 배열될 수 있다. 동위원소는 아이소토프 또는 동위체라고도 한다. 서로 화학적으로는 거의 구별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질량이 서로 다른 원소를 동위원소라고 한다. 영어의 isotope는 그리스어인 isos(같은)와 topos(장소)의 합성어인데, 질량은 서로 달라도 원소의 주기율표에서 같은 장소에 배열되는 데서 1901년 영국의 화학자 F. 소디가 isotope라는 명칭을 붙였다. 대부분의 원소는 동위 원소를 가진다. 동위 원소는 원자 번호는 같으나, 중성자수가 다른 원소를 뜻한다. 동위 원소는 화학적인 성질은 동일하나, 원자량의 차이를 이용하여 분리할 수 있다. 자연에서도 발견되는 92개의 원소 중 88개는 동위 원소가 지표면 상에 존재한다.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더라도 동위 원소는 핵반응을 이용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동위 원소는 방사능을 가지기도 하는데, 이 경우 동위 원소의 원자핵은 불안정하고 방사선을 방출하며 자연적으로 붕괴된다. 동중 원소(isobar)는 원자 질량은 같으나, 양성자수가 다른 원소를 뜻한다. 동중 원소는 화학적, 물리적 성질이 다르며 S, Cl, Ar, K, Ca등이 있다. 분자란 원자의 결합체 중 독립 입자로서 작용하는 단위체이다. 일정한 개수의 원자가 특정하게 정렬되어 서로 결합해 분자가 형성된다. 원자가 원소의 최소단위이듯, 분자는 화합물의 최소단위가 된다. 원자가 결합될 때 전자의 재배치가 일어나는데, 이는 화학에서의 중요한 관심사중 하나이다. 화학 반응은 원자 혹은 분자가 화학적인 변화를 겪는 일을 말한다. 화학 반응은 원자간의 결합이 끊어지는 일과 다시 이어지는 일을 포함한다. 결합이 끊어질 때는 에너지가 흡수되고, 결합이 이어질 때는 에너지가 방출된다. 화학 반응의 간단한 예로는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물이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반응식에서 알 수 있듯이, 화학 반응에서는 원자가 새로 생성되거나 나타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ΔH는 에너지 또는 엔탈피 변화를 뜻한다. 반응은 발열반응일 수도 있고, 흡열반응일 수도 있다. 발열반응은 주위로 열을 방출하는 반응으로 엔탈피 변화가 음수로 나타난다. 반면에 흡열반응은 주위 열을 흡수하는 반응으로 엔탈피 변화가 양수로 나타난다. 위 반응의 경우는 발열반응인데, 이는 계로부터 주위로 열이 이동하였다는 의미이다. 화학 결합을 주된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보면 이온 결합, 공유 결합 그리고 금속결합으로 나눌 수 있다. 이온이란 전하를 띤 원자 또는 분자를 뜻한다. 이온 결합은 양전하와 음전하의 전기적인 인력에 의해서 생성되는 화학 결합이다. 예를 들면 염화 나트륨은 양전하를 띤 나트륨 이온(Na)과 음전하를 띤 염화 이온(Cl) 사이의 전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온 화합물이다. 이러한 물질을 물에 녹이면 이온은 물 분자에 의해 수화되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용액은 전기전도도를 가진다. 공유 결합은 오비탈이 겹쳐진 결과 두 원자가 전자쌍을 공유하게 되어 생성되는 결합을 의미한다. 공유 결합이 형성되는 결합은 발열반응인데, 이때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이 그 결합의 결합 에너지이다. 결합 에너지만큼의 에너지를 그 결합에 가해주면 결합은 끊어질 수 있다. 금속 결합은 금속 원자에서 전자들이 떨어져 나와 자유전자를 생성하게 되어 생성되는 결합을 의미한다. 금속의 특성인 연성과 전성이 생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합물은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종류, 수, 배치에 의해서 그 특성이 결정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거나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화합물의 수는 엄청나고, 이들 중 대부분은 유기 화합물이다. 유기 화합물을 이루는 주된 화학 원소인 탄소는 다른 화학 원소와는 다르게 매우 긴 사슬 형태로 정렬될 수 있으며, 같은 수많은 이성질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분자식 CHO는 약 천 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을 뜻할 수 있다. 화학은 취급 대상 및 대상의 취급 방법에 따라서 몇 가지 분과로 구분될 수 있다. 물질을 분석하는 분석화학은 크게 물질의 존재를 취급하는 정성 분석과 물질의 양을 결정하는 정량 분석으로 나눌 수 있다. 탄소를 포함한 유기 화합물을 다루는 유기화학과 유기 화합물을 제외한 무기 화합물을 다루는 무기화학도 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에는 물리화학이 있고 생물학과의 경계에는 생화학이 있다. 물리화학에서 특히 분자의 구조와 성질과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을 구조화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방사화학이 발전하였고 화학 공업을 다루는 공업화학도 있다. 이 외에도 화학의 분과는 매우 다양하다. 화학의 분과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의 분과는 더욱 세분화될 수 있다. 무기화학은 유기화학에서 다루지 않는 물질을 다루며 주로 금속이나 준금속이 포함된 물질에 대해서 연구한다. 따라서 무기화학에서는 매우 넓은 범위의 화합물을 다루게 된다. 초기에는 광물의 구성이나 새 원소의 발견이 주요 관심사였고 여기서부터 지구화학이 분기되었다. 주로 전이 금속 등을 이용한 촉매나 생물에서 산소 수송, 광합성, 질소 고정 등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속 원자들에 대해 연구하며 이 외에도 세라믹, 복합재료, 초전도체등에 대한 연구를 한다. 물리화학은 화학적 현상에 대한 해석과 이를 설명하기 위한 물리적 원리들에 대해 다루는 분과이다. 화학반응에 관련된 열역학적 원리와 물질의 물리학적 성질에 대한 설명은 물리화학이 다루는 고전적인 주제이다. 물리화학은 양자화학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분광계나 자기 공명, 회절 기기 등 물리화학에서 사용하는 실험 장비나 실험 방법들은 다른 화학의 분과에서도 매우 많이 사용된다. 물리화학이 다루는 대상은 유기 화합물, 무기 화합물, 혼합물을 모두 포함한다. 분석화학은 물질의 조성이나 혼합물의 구성요소 등을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화학의 분과이다. 혼합물을 이루고 있는 성분의 탐색, 분리, 정량과 분자를 이루고 있는 원자의 비율을 측정하여 분자식을 결정하는 일 등이 분석화학에서 행해진다. 1950년대의 분석화학의 발전은 많은 질량 분석계를 포함한 분석 기구의 등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외에도 고해상도 크로마토그래피, 전기화학에서의 많은 실험방법 등은 분석화학에 있어서 중요한 분석법이다. 분석화학에 있어서 최종 목표는 더 정확한 측정법이나 측정기기 등을 개발하는 것이다. 분석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환경오염 물질 등을 피코그램의 수준에서도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생화학은 생물을 화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문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세포에서 발견되는 물질이나 일어나는 화학 반응들이 주 관심사이다.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핵산, 호르몬 등은 유기 화합물이라서 유기화학에서도 다루어지기도 하나, 이들 화합물에 관련된 물질대사 과정이나 조절 과정에 대한 연구는 생화학의 고유 분야이다. 효소와 조효소, 그리고 이들의 작용 과정에 대해서도 연구하며, 세포막을 통과하는 이온과 분자, 신경전달물질과 다른 조절 물질들의 작용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생화학은 내분비학, 유전학, 면역학, 바이러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기화학은 탄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을 연구하는 분과이다. 원래 유기 화합물은 식물이나 동물로부터 추출해낸 화합물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유기 화합물의 범위가 크게 넓어져 탄소 사슬 또는 탄소 고리를 가진 모든 화합물을 뜻한다. 유기화학의 오랜 관심사는 유기 화합물의 합성 메커니즘이다. 현대에 들어서 핵자기 공명법과 X선 결정학 등이 개발되어 유기 화합물 분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플라스틱, 합성섬유등의 고분자물질 등도 유기화학에서 다루어진다. 체첸 공화국 체첸 공화국(, , ), 또는 줄여서 체첸(, , )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체첸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체첸어와 러시아어이다. 체첸어는 캅카스제어 중, 북동 캅카스제어로 불리는 그룹에 속하는데 인구시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거의 대부분이 체첸인이다. 일부는 러시아인, 인구시인과 기타 북코카서스계 민족도 섞여있다. 1989년에 행해진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의 통계에서는 체첸인이 956,879명, 인구시인이 237,438명으로, 269,000명의 러시아인은 인구의 약 23%로 소수 민족이었다. 그 후 서부가 잉구슈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인구시인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감소하고, 내전과 사회불안으로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체첸공화국에서 대부분 떠났다. 1990년대 체첸 공화국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은 약 6만 명이었다. 체첸 공화국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연방 중에서도 젊은 층이 가장 많은 인구 구성을 가진다. 1990년대에는 몇몇 지방에서 인구증가가 있었다. 다게스탄 지역을 통해 16세기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체첸인들은 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으며 러시아 정교회도 소수 존재한다. 1830년에서 1859년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 군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접경지역 안보를 이유로 체첸에 진주했다. 체첸은 1859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됐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비에트 정부는 체첸이 나치군과 협력했다고 맹비난하였다. 스탈린은 체첸 국민 전체에게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를 명령했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957년에 이르러서야 체첸인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체첸전쟁 때 러시아의 엄청난 공세로 인해 체첸 전역은 초토화 되었다. 맥스웰 방정식 맥스웰 방정식(Maxwell方程式, )은 전기와 자기의 발생, 전기장과 자기장, 전하 밀도와 전류 밀도의 형성을 나타내는 4개의 편미분 방정식이다. 맥스웰 방정식은 빛 역시 전자기파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각각의 방정식은 가우스 법칙, 가우스 자기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앙페르 회로 법칙으로 불린다. 각각의 방정식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종합한 이후 맥스웰 방정식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자기역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 법칙으로 요약된다. 로런츠 힘은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네 개의 법칙을 모아 종합하여 구성한 것이다. 맥스웰의 방정식은 빛과 같은 전자기파의 특성을 설명한다. 각 방정식의 수학적 표현은 공식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은 방정식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맥스웰의 방정식에 나타난 각 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된 전기와 자기의 특성을 종합한 것이다. 인류는 고대 시대부터 이미 정전기에 의한 인력과 방전 현상을 알고 있었고 자석의 특징을 이용한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근대에 이르러 전기와 자기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쿨롱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앙페르 회로 법칙과 같은 법칙들이 발견되었다. 맥스웰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전기와 자기가 하나의 상호작용, 즉 전자기력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면서 빛역시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혔고, 전자기 복사의 발견을 예언하였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두 전하 사이에 인력과 척력이 작용한다는 것은 고대 이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관계와 크기는 측정하기 매우 어려웠는데, 그 까닭은 작용하는 힘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이었다. 1784년 샤를 드 쿨롱은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장치를 고안하여 대전된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쿨롱 법칙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쿨롱 힘은 전하 사이의 작용뿐만 아니라 자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두 자극의 세기를 각각 m, m라 할 때, 이 두 자극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자극의 세기 단위는 웨버(Wb)로 쿨롱은 세기가 같은 두 개의 자극을 1m 떨어뜨려 놓았을 때 작용하는 힘의 세기가 formula_5인 경우를 1Wb로 정의했다. 따라서 상수 k의 값은 다음과 같다. 자극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는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으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전하는 양전하이든 음전하이든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데 반해 자극은 홀극으로 존재할 수 없고, N극과 S극이 언제나 쌍으로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각각 독립적으로 다루어져 오던 전기와 자기의 법칙들을 종합하여 맥스웰 방정식을 수립하였다. 맥스웰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역선"(力線) 개념과 앙드레마리 앙페르의 회로 이론을 근간으로 방정식을 정리하였다. 1861년 맥스웰은 논문 《물리적인 역선에 대해》 를 발표하여 모두 4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맥스웰 방정식을 소개하였다. 이 방정식은 1865년 발표된 논문 《전자기장의 역학 이론》과 1873년 출간된 《전기와 자기에 대한 논문집》제2권의 9장에서 다시 소개되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이 방정식에 비하면 남북전쟁조차 큰 의미없는 지엽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맥스웰 방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865년 맥스웰 자신에 의해 발표된 맥스웰 방정식의 원래 형태는 8개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1884년 올리버 헤비사이드가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한 형태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와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역시 헤비사이드와 동일한 작업을 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맥스웰 방정식은 헤르츠-헤비사이드 방정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맥스웰 방정식"이란 이름이 더 폭넓게 쓰이고 있다. 1861년 맥스웰은 《물리적인 역선에 대해》에서 앙페르 회로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방정식들을 열거하였다. 맥스웰은 이 논문에서 앙페르 회로 법칙에 치환 전류를 덧붙였다. 1865년 발표한 《전자기장의 역학 이론》에서는 전자기파 방정식을 기술하면서 빛이 전자기파임을 제시하였다. 맥스웰의 이론은 1887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장"(場)이란 개념은 마이클 패러데이가 도입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이 장 개념을 도입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당시 이 방정식은 헤르츠-헤비사이드 방정식 또는 멕스웰-헤비사이드 방정식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사이언스에의 기고문에서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 부르며, 이 방정식들이 이론물리학의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맥스웰은 방정식을 정리하면서 헤비사이드의 전위와 벡터 위치 등 위치 요소를 중요한 개념으로 도입하였다. 1884년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전달을 중력과 같이 원격에서 상호작용하는 힘이 아닌 전자기장에서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전위로 파악하였다. 라디오 안테나에 대한 현대의 분석에서도 맥스웰의 백터와 스칼라 위키에 대한 수식만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안테나 사이에 작용하는 전파의 영향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맥스웰 방정식과 관련한 헤비사이드의 업적은 맥스웰이 여러 논문과 책에서 서술한 맥스웰 방정식을 오늘날과 같은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4개의 방정식으로 정리된 맥스웰의 방정식은 1861년 발표된 논문인 《물리적 역선에 대해》에 기반한 것이다. 이 논문에는 전자기장에 대한 다수의 방정식이 실려있다. 1855년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철학 학회에서 《패러데이의 역선》을 발표하면서 formula_8와 formula_9 벡터의 차이점을 설명하였다. 이 논문은 오늘날에도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에 대한 가장 간결한 모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맥스웰은 전류에 관한 모든 지식을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내었다. 1855년 맥스웰이 제안한 분자 와동의 바다란 개념은 1861년 《물리 역선에 대해》에서 보다 분명하게 소개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자기장이 형성되는 분자 규모의 와동에서 formula_8의 밀도에 따라 formula_9의 순 와동 운동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맥스웰은 와동의 밀도를 측정하기 위한 값으로 투자율 µ 을 정의하였다. 이 논문에서 밝힌 맥스웰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이 때 formula_14 는 전하 밀도이다. formula_8는 축을 이루어 회전하는 자기 전류이고 formula_9는 그 주위를 돌게 되는 자기력선의 자기 선속이다. 투자율 µ는 결국 자기장 formula_8에 의해 유도되는 자기 선속 formula_9의 비가 된다. 전류 방정식은 전하의 대류 전류가 선형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자기 방정식은 유도 전류의 회전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formula_8 벡터의 방향성으로 인해 비선형 방정식이 된다. 따라서 자기 유도 전류는 역선으로 표현된다. 자기력선은 역제곱 법칙에 의해 전류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지게 된다. 1864년 맥스웰은 《전자기장의 역학이론》을 출간하였다. 맥스웰은 이 책에서 빛이 전자기파임을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 맥스웰은 8개의 방정식을 전자기장에 대한 일반적인 방정식으로 제시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 "맥스웰 방정식"이라는 표현이 오늘날의 4개의 방정식을 가리키는 것인지 1864년 제시된 8개의 방정식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혼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4개로 구성된 방정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헤비사이드가 정리한 맥스웰 방정식(멕스웰-헤비사이드 방정식)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현대 벡터 표기를 사용하여 정리한 멕스웰의 8개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표현된 방정식 D는 로런츠 힘의 효과를 나타낸 것으로 1861년 논문의 방정식 77번을 보다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맥스웰은 1865년 논문에서 전자기파 방정식을 정의하였는데 이 책의 방정식 D를 전자기 유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방정식 D 대신 패러데이전자기 유도 법칙이 쓰인다. 맥스웰은 전자기파 방정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방정식 D의 formula_36 를 버렸다. 1873년 맥스웰이 출간한 《전기와 자기에 대한 논문집》에서 방정식은 두 개의 묶음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묶음 두 번째 묶음 다음은 국제단위계를 사용하여 수식으로 표현한 맥스웰 방정식이다. 발산정리와 스토크스의 정리를 이용하면 미분형과 적분형 방정식이 동치임을 알 수 있다. 아래 표는 각 기호의 뜻과 단위를 나타낸다. formula_41는 발산 연산자(단위: 1 / 미터), formula_42는 회전 연산자(단위: 1 / 미터)이다. 두 번째 방정식은 자기 홀극이 없음을 뜻한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대전된 입자에 미치는 힘은 로런츠 힘에 따라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44는 입자의 전하량이고 formula_45 는 입자의 속도다. (CGS 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을 다르게 정의하므로, formula_45 대신 formula_47를 쓴다.) 위의 수식은 국제단위계로 표현되었지만, 다른 단위계에서도 맥스웰 방정식은 변하지 않거나, 약간의 상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과 공학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국제단위계 이외에도 특수한 경우 CGS 단위계가 쓰인다. 초월수 초월수(超越數, )는 계수가 유리수인 어떤 다항 방정식의 해도 될 수 없는 복소수이다. 다항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있는 수인 대수적 수와 반대 개념이다. 실수인 초월수는 모두 무리수이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formula_1는 무리수이지만 다음 이차방정식 의 해이므로 초월수가 아니다. 대수적 수의 집합이 가산 집합인 데 비하여 복소수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따라서 초월수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 된다. 이것은 대수적 수의 개수보다 초월수의 개수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초월수는 많지 않고, 어떤 특정한 수가 초월수임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초월수의 존재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예상하였으나, 최초의 초월수는 1844년에 조제프 리우빌이 발견하였다. 그는 초월수의 예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리우빌 상수를 제시하였다.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수가 아닌 수 중에서 처음으로 초월수임이 증명된 수는 상수 e로, 샤를 에르미트가 1873년에 증명하였다. 1882년에는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원주율 또한 초월수임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의 난제였던 원적문제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1874년에 게오르크 칸토어는 구체적인 초월수를 제시하는 대신, 앞에 설명된 가산 집합과 비가산 집합의 논리를 이용하여 초월수가 존재함을 보였다. 1900년에 다비트 힐베르트는 힐베르트의 23 문제 가운데 7번째 문제로 초월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였다. 힐베르트는 이 문제의 구체적인 예로 formula_7를 들었다. 이 문제는 1934년에 겔폰트-슈나이더 정리에 의해 참임이 밝혀졌다. 이 결과는 1960년에 앨런 베이커에 의해 확장되었다. 음계 음계(音階)는 음악에서 음높이(pitch) 순서로 된 음의 집합을 말한다. 악곡을 주로 구성하는 음을 나타낸 것이며 음계의 종류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음계의 각각의 음에는 위치에 따라 도수가 붙는다. 음계는, 음계가 포함하고 있는 음정(interval)에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또는 음계가 포함하고 있는 서로 다른 피치 클래스의 수에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음계의 음정(interval) 뿐만 아니라 음계를 만드는 음(note)의 수가, 한 문화권의 음악에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지니게 한다" "어떤 음계의 음의 수보다, 음의 거리(interval, pitch distance)가 음악의 소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온음계와 반음계(半音階)는 서양 음악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자체로는 음계에 관한 말이지만, 온음계적·반음계적인 선율, 화음, 화성 진행 등의 표현으로도 쓰인다. 대부분의 경우 온음계는 7개 음으로 이루어진 장음계를 말한다. 20세기 음악론에서는 반음계가 아닌 모든 음계(이를테면 팔음음계)를 말할 때 쓰이기도 한다. 반음계는 12개의 반음으로 이루어진 음계를 말한다. 계이름은 음계를 기준으로 한 음의 이름이다. 장음계를 이루는 음의 계이름은 으뜸음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각각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가 된다. 서양 음악에서는 도·레·미·파·솔·라·시로 된 7음계가 많이 쓰이지만 한국 전통 음악에는 황종(黃鍾)-미♭·태주(太蔟)-파·중려(仲呂)-라♭·임종(林鍾)-시♭·무역(無射)-레♭으로 된 5음계가 많이 쓰이고, 중국 전통 음악에는 궁-도·상-레·각-미·변치(變徵)-올림화(Fa )·치-솔·우-라·변궁(變宮)-시로 7음계를 많이 쓴다. 한국 전통 음악에서는 5음계 외에도 3음계 또는 악계통에서는 7음계 등이 쓰인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 12월 19일 목요일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로 치러졌다. 16대 대선은 지난 15대 대선에서 간발의 차로 낙선하고 재도전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사상 최초의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다. 대선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는 경험이나 세력 면에서 노무현 후보보다 대권 고지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이전 대선부터 불거진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를 비롯한 네티즌들의 열성적인 노무현 지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성공 등에 힘입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이 있었다. 즉, 198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투표를 할 자격이 있었다. 만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피선거권을 가졌다. 즉, 196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후보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국 정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과반 득표자인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한나라당은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최다 득표자인 이회창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노동당은 9월 8일 당원들에 의한 단일 후보 찬반 투표를 통해 권영길 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통합21은 11월 5일 창당대회를 열고 정몽준 의원을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사회당은 10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김영규 전 인하대학교 교수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김영규 후보는 대의원 찬반투표 결과 전체 투표수의 95%를 득표하였다. 하나로연합은 11월 15일 재적 대의원 8,500명 중 8,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이한동 전 국무총리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개혁당 추진위는 독자 후보를 내는 대신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이를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창당 발기인 28,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모바일 찬반 투표에 부친 결과 총투표수 16,733표 중 15,723표가 찬성으로 나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와의 대선 연대가 결정되었다. 개혁당 추진위는 10월 20일 창당 발기인 대회에서 이를 발표하였으며, 대회에 참석한 노무현 후보는 수락을 선언하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2001년 12월 11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그러나 박근혜 부총재는 2월 28일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으며, 이후 신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대선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결국 5월 17일 박근혜 대표가 이끄는 미래연합이 창당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미련은 6·13 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당한 뒤 동력을 잃었으며, 그 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다가 대선 한 달 전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0월 21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장세동 후보는 12월 18일 당선 가능성이 없다며 사퇴를 선언하였다. 호국당은 11월 25일 재적 대의원 645명 중 5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김길수 법륜사 주지를 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제16대 대선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두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어, 1971년 제7대 대선 이후 최초로 3자, 4자가 아닌 양자 구도로 치러진 대선이 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선에서 패한 후 차근차근 대권 재도전을 준비해오던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진보 성향 인사이면서 보수 정당 민주당의 후보가 된 노무현 후보는 끊임없이 당 내부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었으나, 제15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아들 병역기피 의혹에 시달리며 난관에 봉착한데다 노무현 후보가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선풍적 인기를 끌어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통합21 후보와 극적으로 단일화에 성공, 이를 발판 삼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맹추격했다.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약했다. 선거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는 등 참패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개혁 포럼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후보·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이인제 등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의 후보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한축구협회장이던 정몽준 무소속 의원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해내고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얻어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정몽준이 대선에 출마하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토막났고, 안 그래도 노무현 후보와 갈등이 있던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그러던 10월 17일 김민석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민주당 탈당 및 통합21 합류를 선언했는데, 노무현에게 큰 타격이 되리라는 관측과 달리 오히려 이는 노무현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동정론이 불었고, 결국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제시되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정몽준 캠프는 11월 1일 양 캠프가 협상·담판을 통해 단일 후보를 정할 것을 제안했고, 노무현 캠프는 11월 3일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로 국민 경선을 실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한 여론조사상 노무현 후보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정몽준 후보 측은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정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통합21은 노무현 캠프의 국민경선 실시 주장에 대해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표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꾸준히 회복해 이미 판세는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고 노·정 두 후보가 2위 싸움을 벌이는 1강 2중 구도로 재편되고 있었으므로, 정몽준 캠프로서도 하루 빨리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일정 수준에 미달할 시 그 여론조사는 무효 처리하자는 정몽준 캠프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주요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결과보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올 시 그 결과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역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무효 처리하기로 하였다.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것은 국민일보-월드리서치가 11월 25일 실시한 결과에서의 30.4%였다. 따라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0.4%보다 낮을 시 그 조사 결과는 무효 처리하도록 했다. 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 방식 등 쟁점 사항에 있어 통큰 양보를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단일화의 방식은 합의되었으나, 여론조사의 설문 내용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는데,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가 더 마음에 드느냐'는 지지도 질문에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반면, '어느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경쟁력 질문에는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양 캠프는 조율을 거친 결과 지지도 질문과 경쟁력 질문을 조금씩 섞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후보는 여론조사 실시에 앞서 텔레비전 토론을 가지기로 했는데,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사전 선거 운동이 될 수 있다며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한 차례에 한해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하였고, 두 후보 간 토론은 11월 22일 실시되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는 11월 24일 오후 1시부터 8시 30분까지 7시간 반에 걸쳐 실시되었다. 여론조사는 월드리서치와 리서치앤리서치, 2개 업체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한 업체가 각각 2,000명, 총 4,000명을 상대로 실시되었다. 민주당과 통합21은 11월 24일 자정 공동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는 응답자 중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32.1%가 나와, 무효 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무효화 기준인 30.4%에 미달하여 무효 처리되었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를 얻음으로써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무효 처리된 월드 리서치 조사 결과 또한 노무현 후보가 38.8%, 정몽준 후보가 37.0%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서 패배함에 따라 사퇴를 선언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계기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2위를 했던 이인제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데 이어 이틀 뒤인 12월 3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으며, 입당과 동시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지명을 받아 총재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이인제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할 계획으로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김종필 총재의 강력한 의지로 자민련은 12월 12일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다만 당원 및 당직자들이 개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막지 않기로 해,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 정몽준 역시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긴급 발표를 통해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를 선언하였다. 정몽준은 지지 철회 발표문에서 그 날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한 것에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의식에 문제를 느껴 지지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정몽준의 자택 앞까지 찾아갔으나, 정몽준 대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전파를 타며 당시 진보 진영이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 선거는 본격적인 세대론의 대두와 함께 노사모의 등장 등 인터넷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결국 임기 중이던 2003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지만,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고 총선에서 참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함석헌 함석헌(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을 하였다. 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자였다가 중기에는 기독교였으나 후기에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게 된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당숙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덕일소학교(德一小學校)에 입학, 1914년에 덕일소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1916년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1 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이때 안창호, 이승훈, 이광수, 조만식 등과도 알게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유석동(柳錫東), 양인성(楊仁性)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역사과 수석)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년~1935년에 동인지 《성서조선》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 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1940년 평안남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聖書朝鮮) 제 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 하나는 화제가 되었다.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또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있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62년 미국 국무성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파(Quaker敎派) 인사들과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돌아왔다.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3공화국 출범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후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간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어오고 있다.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또한 동아일보로부터 제1회 인촌상을 수여받았다.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향년 87세).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가족산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 현충원(애국지사 제3-329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일대기로 《내가 본 함석헌》, 《함석헌 평전》이 있다. 그는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을 두고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길사에서 30권으로 발간한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 '함석헌 저작집 발간에 부치는 말'에서 그가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는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로 소개하며, 함석헌 사상에서 거듭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들었다. 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김상봉은 이어 함석헌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김상봉은 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함석헌에게)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2010년 김영호는 3월 16일 열린 함석헌학회 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서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나섰다. 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 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곧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하였다. 함석헌은 '누가 나처럼 수줍은 놈을 미친놈을 만들어 놓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 김용준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선생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라고 하였다. 백남준 백남준(白南準, ,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아트가,작곡가, 전위예술가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생전에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와 독일 쾰른과 일본 도쿄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와 대한민국 서울에 주로 거주한 그는 여러 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다. 특히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을 창안하여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로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구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출신이다.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심플 머리를 위한 선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미국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레이다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2년여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실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적인 TV를 통해 훗날 비디오 아트라고 불리게 되는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는 백남준이 자신의 즉흥음악 또는 무음악의 발상에 기초한 실제 퍼포먼스, 그 흔적과 결과물처럼 유럽에서 자신이 진행해온 작업의 성과와 함께 TV를 비롯한 미디어로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시도하는 작업이 공존하고 있었다. ‘적분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레코드 샤슐릭’같은 20세기 전위음악에 젖줄을 대고 있는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걸음을 위한 선' '바람을 위한 선' 같은 우상파괴적 설치 작업 및 참여예술 형태의 퍼포먼스가 함께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전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정리하는 종합적인 큐레이팅 전시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전시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면서 아카이빙 작업과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한동안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은 1963년 첫번째 전시를 비디오아트의 기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이 일어난다.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영상으로서의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미술적 방법인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그에 따라 ‘TV 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생명의 상징을 전자적으로 결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합성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특히 'TV 붓다'는 그의 초기 비디오 설치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문화적 환경이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호의적으로 변화하면서 폭발적인 수준의 미디어 전시가 빈발했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그룹전 형태로 수많은 전시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74년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과 함께 이라는 예술과 기술을 교차시키는 하이브리드에 관한 저작을 내놓아 미디아 아트의 이해를 도왔으며,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네트워크 방송을 끌어들여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을 꾀한 놀라운 시도였다. 나아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까지 연결된 이 국제적인 규모의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오잉고 보잉고,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의 예술가과 대중문화의 스타가 다수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하였다. 이로써 전세계적인 차원의 대중적 각인이 이루어졌고, 마치 대중스타처럼 성가를 높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져 위성 연결을 통한 전세계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새로운 부족사회를 낳는지 실감시켰다. 1984년 일본 도쿄 소게쓰[草月]홀에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퍼포먼스 '코요테 콘서트 II'가 펼쳐졌으며, 이들이 각각 몽골의 늑대 울음소리와 초원의 달빛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1961년 첫 만남부터 계속 이어온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후 퍼포먼스 계획은 요셉 보이스의 죽음과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1992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는 독일 쿤스트 할레와 스위스 쮜리히에서 진행된 전시의 서울 투어전시로서 당시 과천 막계동에 자리잡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총 관람 인원 20만명이 찾은 첫번째 전시로 기록되었다. 이 전시의 주요한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이다. 1993년 백남준은 독일 작가 한스 하케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국가전시관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문명의 동서남북'이라는 주제의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는 국내외 총 관람객이 160만 명에 달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백남준이 직접 관여한 ‘INFO Art’전이 주목받았다. 또한 백남준은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시관 부문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 진출하는 교두보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같은 해 그의 예술적 정수가 담긴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 전시를 진행했다. 1996년 4월 9일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6개월만인 그해 10월에 재기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 유해가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2002년 2002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며, 이 해는 21세기의 첫 대규모 행사의 해이다. 12월 19일 12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3번째(윤년일 경우 354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31일 5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1번째(윤년일 경우 152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30일 6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1번째(윤년일 경우 182번째) 날에 해당하며, 6월의 마지막 날이다.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 )는 동유럽의 국가이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 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예프가 수도며 가장 큰 도시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 및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인구의 절반(주로 동남부 지역)은 러시아어 사용자이다. 주요 도시로는 키예프,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리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공국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튀르크족·몽골족 등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부분이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제하에 놓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의 적용을 받았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군사력 운영의 질적 수준은 아직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중간사이다.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주민은 73%가 우크라이나인, 22%가 러시아인이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의 생산에 있어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풍부한 수력전기를 이용하여 기계제조공업·화학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의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제조업, 화학공업의 중심은 돈바스·드네프르 주이며, 드네프르강의 하구에서 키이우까지의 사이에는 6개소의 수력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반도 남단과 광천(鑛泉)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이다.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의 배경이 되기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 및 러시아어가 쓰이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이다. 국토 면적 603,700km²에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중앙아프리카 공화국보다는 작고, 마다가스카르보다는 크다.)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 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 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체르노젬(흑토)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 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대개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데 남쪽의 크림 반도 인근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비는 북서부 지방에 가장 많이 내리고 동부와 남동부 지역은 덜 오는 편이다. 겨울은 흑해 인근 지방이라면 따뜻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대체로 추워진다. 여름에는 전반적으로 따뜻하지만 남쪽 지방은 무덥다. 슬라브족의 역사에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건너와 동유럽을 정복한 투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3세기부터 시작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의 유럽 침공과 슬라브족 정복 그리고 이주는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바르 카간국에 이어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까지 이어진다. 동유럽 슬라브 원주민들은 사바르 카간국에 정복당해 프랑크족들과 대립하기도 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의 우크라이나 초원 정복으로 인해 슬라브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와는 조금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들은 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카간을 자칭하는 슬라브 민족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슬라브 민족들도 슬라브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슬라브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키예프 공국은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키예프 공국의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930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슬라브족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 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바랑기 바이킹들의 분파로 알려진 류리크가 합류하면서 키예프 공국이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대공이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дека името Украина доаѓа од старословенскиот поим "украина" што значи „гранична област“ или „крајина“ 가위 가위()는 손으로 잡아 종이 등을 쉽게 자를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두 장의 얇은 금속 날을 결리지 않도록 엇갈리게 나사로 엮어, 그 두 날이 지레의 원리로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면 절단력이 발생한다. 플라스틱 판, 얇은 철판, 머리카락, 끈, 종이, 옷감, 강삭 등을 자를 때 쓰인다. 핑킹가위는 무늬를 내며 자를 때 사용하는 가위이다. 무늬의 종류는 여러가지이며 물결무늬 지그재그 톱니모양 등이 있다. 지렛대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지레의 작용점 · 받침점 · 힘점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힘점이 작용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원지점식(元支點式), 지레의 받침점이 힘점과 작용점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점식, 작용점이 힘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선(先)지점식의 3가지로 구별된다. 따라서 이것을 응용한 가위도 3종으로 대별된다. 원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손자수용 가위 ·잎따기가위 ·망(綱)베기가위 등이 있고, 중간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는 재단가위 ·꽃가위 ·전정가위 ·전지가위 ·잔디가위 ·양철가위 ·버튼홀가위 ·의료가위 ·이용(理容)가위 등이 있다. 선지점식에 속하는 것은 눌러서 자르는 가위와 과일따기 가위 등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가위는 양모를 깎는데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1000년경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철쇠로 만든 가위이다. 청동가위는 보기가 힘들다. 특히 로마 시대의 유물로 가위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이 시대 가위는 라틴 문화 중기에 중부 및 북유럽 등으로 전해졌다. 라틴 문화의 가위는 남자의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려져있던 양모를 깎기 위한 것이 아니고 수염을 깎는 데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로마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된 날이 짧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위는 철사나 튼튼한 실, 얇은 철판등을 자르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가 위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모양이나 쓰임새가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걸로 보아 가위는 중국 에서 건너왔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전 세계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해볼 때 가위는 서양에서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중국에 전해졌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위키 위키(, )는 불특정 다수가 협업을 통해 직접 내용과 구조를 수정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말한다. 일반적인 위키에서 텍스트는 단순화된 마크업 언어(위키 마크업)을 이용하여 작성되며, 리치 텍스트 에디터의 도움을 받아 편집하기도 한다. 위키는 지식경영이나 기록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 공동체용 웹사이트나 조직 내 인트라넷에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개인적인 용도로 이용되는 위키도 있는데, 이를 개인 위키라고 한다. 최초의 위키 소프트웨어인 위키위키웹(WikiWikiWeb)을 만든 워드 커닝엄은 위키를 "동작하는 가장 단순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라고 설명했다. "위키"는 "빠른"을 뜻하는 하와이어 "wiki"(발음은 위티[ˈwiti]나 비티[ˈviti])에서 왔다. 워드 커닝엄이 보 뢰프와 같이 쓴 《위키 방식: 웹 상의 빠른 협업("The Wiki Way: Quick Collaboration on the Web")》이라는 책에서, 위키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위키는 간단한 마크업 언어와 웹 브라우저를 이용, 함께 문서를 작성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위키 웹사이트의 한 문서는 "위키 문서"라 부르며, 하이퍼링크로 서로 연결된 전체 문서를 "위키"라 한다. 위키는 본질적으로 정보를 만들고, 찾아보고, 검색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다. 위키는 비선형적인, 진화하는, 복잡하게 얽힌 문서, 토론, 상호 작용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위키 기술을 정의하는 특징은 문서를 간단히 만들고 고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수정이 반영되기 전에 승인이나 검토의 과정이 없다. 대부분의 위키는 사용자 등록을 요구하지 않고,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많은 편집자가 실시간으로 만들며, 즉시 온라인으로 배포된다. 단 이는 시스템의 남용을 유발할 수 있지만 주로 장점이 더 많다. 개인 위키는 문서를 고치거나 읽기 위해 사용자 인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위키 문서는 위키 마크업이라 불리는 간단한 마크업 언어로 이뤄져 있다. 예를 들어 별표(*)로 시작하는 줄은 목록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 위키 마크업의 문법은 위키 소프트웨어마다 다르며, 일부는 HTML을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점차 사용자가 위지윅(WYSIWYG) 편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위키가 늘고 있다. 위지윅 편집은 위키 마크업의 모든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이들 사이트에서는 편집자가 위키 문서를 직접 수정하는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위키는 위키 문서의 변경 이력을 보존하고 있다. 편집자는 쉽게 문서를 예전 판의 내용으로 되돌릴 수 있으며, 이는 사용자의 실수나 고의적 훼손 때문에 필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미디어위키를 비롯한 많은 위키 소프트웨어는 문서를 편집할 때, "편집 요약"을 남길 수 있도록 한다. 이 편집 요약은 문서 본문에는 남지 않으나, 문서의 이력에서 편집 이유를 설명할 수 있도록 지원함 대부분의 문서는 다른 문서를 가리키는 수많은 하이퍼링크를 포함하고 있다. 사용자는 필요에 따라 다른 문서의 목차나 색인을 따로 구축할 수도 있다. 여러 편집자가 임의로 문서를 만들고 삭제하기 때문에 수동으로 이런 목차나 색인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위키 소프트웨어는 이를 돕기 위해 분류나 태그 기능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위키는 현 문서를 가리키는 다른 문서를 찾는 백링크 기능을 제공한다. 위키에서 존재하지 않는 문서를 가리키는 링크를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 다른 사용자가 자신이 아는 내용을 채울 수 있도록 유도한다. 위키의 문서는 문서의 제목과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등의 경우에 해당되면 그 문서의 제목과 거의 같은 명칭, 혹은 그 문서의 제목과 같은 명칭이 아니지만 그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있는 경우 넘겨주기를 이용해서 넘겨주기 문서를 만들어 그 명칭으로도 그 문서가 설명하는 대상의 원래 제목과 같은 내용의 문서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문서에 대한 링크는 "링크 패턴"이라는 문법을 통해 지원된다. 원래 대부분의 위키는 낙타 표기법(CamelCase) 방식으로 문서를 만들고 연결했다. 단어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하고, 사이의 공백을 지워서 만들 수 있다. 이 방식은 로마자를 쓰는 경우, 쉽게 링크를 만들 수 있다. 한 단어로 되어 있는 문서를 만들 경우, 단어 중간의 한 글자를 임의로 대문자로 만들어서 이용한다. (예를 들어 "wiki"라는 문서를 "WiKi"로 표기한다거나 한다.) 낙타 표기법을 쓰는 위키는 "TableOfContents" 등을 링크로 사용하므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일부 소프트웨어는 두 단어 사이에 다시 공백을 넣어서 사용자가 보기 좋게 표시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문자 표기를 되돌리는 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RichardWagner"는 "Richard Wagner"처럼 각 단어가 대문자로 표시되어야 하나, "PopularMusic"은 소문자인 "popular music"로 표시되어야 한다. 일부 위키는 괄호를 이용한 자유 링크 기능을 지원하기도 하며, 일부는 낙타 표기법 링크 기능을 막기도 한다. 대부분의 위키는 문서 제목을 이용한 검색을 지원하며, 일부 위키는 본문 검색을 지원하기도 한다. 검색의 확장성은 위키 엔진이 사용하는 데이터베이스에 따라 좌우된다. 일부 위키는 일반 파일을 사용하기도 한다. 미디어위키도 초기 버전에서는 일반 파일을 저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2000년대 초에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도록 다시 작성되었다. 데이터베이스의 색인 기능은 대형 위키에서 빠른 검색을 위해 필요하다. 대안으로 일부 위키는 구글 검색 등 외부의 웹 검색 엔진을 이용하기도 한다. 최초의 위키 소프트웨어는 위키위키웹(WikiWikiWeb)으로, 워드 커닝엄이 창안했다. 커닝엄은 1995년에 위키위키웹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위키의 개념을 고안했고, 위키라는 이름도 지었다. 또한 최초의 위키 서버를 만들기까지 했다. 위키 소프트웨어는 디자인 패턴 모임에서 패턴 언어를 쓰면서 생겼으며, Portland Pattern Repository(PPR)가 최초의 위키였었다. 지구과학 지구과학(地球科學, )은 행성인 지구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들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지구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학, 지구 표면의 물질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지질학, 바다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 지구의 깊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물리학 등이 있다. 지구과학에는 많은 전문 분야가 포괄되지만 대체로 여섯 가지로 나뉜다. 아오조라 문고 아오조라 문고()는 ‘일본어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불리는 일본의 인터넷 전자도서관으로, 저작권이 풀린 문학작품을 수집, 전자문서화해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난 메이지, 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문학 작품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어 외 문학 작품의 일본어 번역 작품도 다수 있다. 1997년 2월 도미타 미치오, 노구치 에이치, 야마키 미에, 란무로 사테이 등 4명이 창설하여 시작되었다. 2016년 연간 방문객수는 940만 건 이상이다. 아오조라 문고에 수록된 작품은 JIS X 0208에 해당되는 한자 범위 내에서 자원봉사자에 의해 아오조라 문고 형식 텍스트파일이나 HTML 파일로 전자화된다. 또 아오조라 문고 수록파일 취급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수록된 작품을 PC는 물론 PDA와 휴대전화로도 볼 수 있다. 텍스트 파일을 큰 글자로 인쇄하거나 전용 소프트웨어에 불러들여 시각장애인용으로 이용하는 방안도 기대되고 있다. 아오조라 문고의 열람 소프트웨어는 따로 개발 및 제공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전자사전이나 아이폰용 어플리케이션 등은 타사에서 개발하여 출시되어 있다. 저자 사망 이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한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의 서적 대부분이 존재한다. 외국 번역작품이나 저자가 무료보기를 인정한 현대작품도 포함된다. 장르는 정치부터 취미까지 다양하지만, 비교적 문학작품(시대소설, 추리소설등의 오락작품 포함)이 많다. 유명작가의 작품이 모두 갖춰져있진 않지만 그래도 일본어작품에 관련해서는 충실하게 갖춰진 편이다. (번역작품의 경우 번역저작권을 문제로 수가 많지 않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보존, 소개하는 장점도 있다. 작품 텍스트화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며 2011년 3월 15일 현재 등록작품수가 1만권이 넘었다. 고전작가인 모리 오가이, 나츠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최근의 작가로는 나카지마 아츠시, 다자이 오사무, 하야시 후미코, 미야모토 유리코, 호리 다쓰오, 사카구치 안고, 다카무라 고타로, 나가이 가후, 요시카와 에이지 등 인물의 작품이 있다. 아오조라 문고는 자원봉사로 운영되며 열람 역시 무료이다. 서비스 개시 초반에는 보이저 사에서 서버를 제공하였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는 토미타가 작업 수칙과 매뉴얼을 만들었다. 자원봉사로 운영되기 때문에 작품의 입력과 교정 역시 자원봉사자가 한다. 입력은 원본을 보면서 타자입력이나 스캐너로 입력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또 작품을 입력하는 '입력자'와 입력된 작품을 교정하는 '교정자'는 별도의 자원봉사자가 담당한다. 따라서 작품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작품을 입력한 뒤 교정자가 교정을 예약할 때까지 '교정대기' (校正待ち)가 되고, 작업을 멈추게 된다. 즉, 입력하는 자원봉사자가 작품을 입력해 교정을 맡은 자원봉사자가 교정예약을 해서, 교정작업을 완료하기 전까지는 작품을 공개할 수 없다. 때문에 입력이 완료되어도 작업 상태가 '교정대기' 상태인 작품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입력에 비해 교정 작업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아오조라 문고 출범 당시부터 안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작품의 교정작업을 하지 않고 공개하는 방안과 입력자가 교정한 것도 인정하자는 방안이 제기된 적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이 방안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2011년 12월 16일 공개분부터는 기부금을 재원으로 삼은 '유상교정' 서비스가 진행되고 있다. 2013년 8월 아오조라 문고의 설립자인 토미타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아오조라 문고에 지속적인 지원을 해줄 '책의 미래 기금' (本の未来基金)이 설립됐다. 하지만 2015년부터는 엔지니어가 없는 상태로 서버를 강제로 돌리고 있으며, 서버 자체도 노후화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2015년 5월 "'Code for 아오조라 문고' 아이디어 송"이 개최되어 향후 시스템 운용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그 이후에는 해당 모임을 바탕으로 시스템 관리와 코드수정 등을 맡는 'aozorahack'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텍스트 파일을 아오조라 문고에 수록할 때, 텍스트 파일이 갖추어야 할 서식을 '아오조라 문고' 형식이라 부른다. 아오조라 문고 형식은 텍스트 파일로서 많은 환경에서 읽을 수 있도록 규격화되어있다. 때문에 가능한 한 원본의 충실한 재현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줄 바꿈이나 삽화 등의 정보는 원칙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아오조라 문고 형식에 대응하는 텍스트 뷰어와 텍스트 편집기도 존재하며, 올림문자와 방점 등도 재현할 수 있다. 또 이러한 텍스트 뷰어에서는 본래 아오조라 문고 형식에 포함되지 않았던 삽화 정보를 삽입하거나 세로쓰기로 표시할 수 있으며, 텍스트를 읽기 쉽도록 만드는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는 유료와 무료를 불문하고 종류가 다양하다. 일본어 표기에 많이 쓰이는 올림문자 (후리가나)는 그대로 올려쓰지 않고 '|'나 '《》'로 표시한다. 올림문자를 《》 로 묶거나 |로 올릴 문자열을 특정하는 방식은 일본 시각장애인 독서지원협회 (BBA)의 원문입력 수칙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을 예시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라고 표기했다면 'ぶんこ' (분코)라는 올림표기가 '文庫' 부분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다만, 처럼 올림표기를 쓸 한자가 가나로 충분히 구분된다면 |를 써서 분리할 필요가 없으므로 쓰지 않는다. 또한, 처럼 가나에 올림표기를 강제로 쓰는 것도 가능하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PG)는 인류의 자료를 모아서 전자정보로 저장하고 배포하는 프로젝트로, 1971년 미국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t)가 시작했다. 인쇄술을 발명하여 지식의 전달을 급속도로 확장시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인터넷에 전자화된 문서(e-text)를 저장해 놓고 누구나 무료로 책을 받아 읽을 수 있는 가상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기여하여 만들어지는 프로젝트로 수많은 고전의 원문이 모여 있다. 2006년 3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발표에 따르면, 프로젝트는 18,000개 항목 이상의 전자문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매주 50여개의 새로운 전자책이 새롭게 등록되고 있다고 한다. 프로젝트에 등록된 전자책은 대부분이 서구의 문학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시, 단편소설, 드라마 등의 문학작품 외에 요리책, 사전류, 정기간행물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부 오디오 파일과 음악 악보 파일도 갖고 있다. 대부분은 영문 서적이지만,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네덜란드어, 핀란드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스웨덴어, 라틴어, 에스페란토로 된 책도 있으며, 여타 언어 문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서는 주로 아스키 문자 집합, 때때로 ISO-8859-1 문자 집합으로 인코딩된 텍스트문서를 언제나 내려받을 수 있으며, HTML등의 다른 형식의 문서도 받을 수 있다. 편집이 어려운 PDF등의 문서형식은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바와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PDF형식을 이용할 수 있는 문서도 있다. 최근 수년동안 XML형식을 도입할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지만, 토론은 지지부진하다. 1990년대 들어 스캐닝과 OCR기술에 힘입어 마이클 하트는 컴퓨터 제조회사에서 스캐닝장비를 기증받아 문서를 스캐닝한후 OCR소프트웨어로 이를 텍스트화하는 작업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발전된 프로세스는 현재 주요한 작업기술이다. 한편 PG는 다중원본제공을 지원하며 또한 사용자 제공 콘텐츠 절차를 지원한다. 이는 셀프 출판을 의미한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라이선스(The Project Gutenberg License,PGL)는 아래와 같은 2개의 큰 맥락을 갖는다. 1.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영구적, 전 세계적, 비 독점, 철회 불가능한 저작권 라이선스를 부여하고, 무 제한적인 재배포를 허용함. 2. 작품은 플레인 텍스트 또는 HTML버전, 또는 두 가지 버전으로 제공되어야 함. 이러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라이선스는 이후 몇몇 추가된 라이선스를 도입했으며 이전의 라이선스와 추가변형된 라이선스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의 공식웹사이트에서 전문을 확인할수있다. 겐지 이야기 《겐지 이야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11세기)에 지어진 소설이다. 작가는 무라사키 시키부라고 여겨지지만. 54첩에 달하는 장편으로 800여 수의 와카(和歌)가 들어있다. 고대의 일본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야기는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천황의 황자로 태어나 신하 계급으로 강하한 히카루 겐지(光源氏)와 그의 아들 세대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은 500명에 가깝고 4대의 임금 70여 년에 걸친 장편이다. 작자는 궁정 귀족사회의 진상을 포착하고, 인간의 운명을 깊고 예리하게 응시하고 있다. 성격묘사라든지 자연묘사에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빛을 발하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귄터 그라스 귄터 그라스(, 1927년 10월 16일 ~ 2015년 4월 13일)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다. 독일 단치히 자유시(오늘날 폴란드의 그단스크)에서 식료품 상인이었던 독일계 아버지와 슬라브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노동봉사대(RAD)에서 근무하던 중, 1944년에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여 10 SS기갑사단 프른즈베르크로 발령받아 참전했다. 징집당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당시 친위대의 독일인 대원들은 징집 대상이 아니라 자원 입대가 기본이었다(국방군 육군은 징병제였다). 종전후 부상당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런 사실은 그라스 자신이 최근 발간한 자서전에서 인정했다. 전후 1947~48년에는 광산에서 일하며 석공 기술 과정을 마친다. 이어 1948년부터 1952년까지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그래픽과 조각을,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웠다. 1955년 슈투트가르트 방송국의 서정시 경연대회에 입상하고, 1956~57년에 예술 작품 전시와 별도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58년까지 단문, 시, 희곡 등을 발표한다. 1954년에 결혼을 하고, 1960년부터 계속 베를린에 산다. 1959년에 매우 묘사적인 언어로 나중에 영화화 되기까지 한 《양철북》을 발표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으로 세계 문학계에 이름을 날린 독일 작가가 된다. 이어 <고양이와 쥐> <개의 해>에서도 전쟁 전과 전쟁 후에 걸친 시대의 과오와 대결하고 있으며, 무대는 다같이 단치히이다. 이밖의 작품에 <달팽이의 일기에서> <넙치> 등이 있다. 1996년 유럽문화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소설가로 활약하는 한편, 부조리극적인 소품(小品)인 <요리사> <홍수> <버팔로까지 앞으로 10분> 등을 발표한 바 있는데, 현대정치에도 직접 행동으로 참가하여 동·서 독일의 분열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대담하게 도전한 <천민의 폭동연습>(1965)을 발표했다. 1953년 동독의 폭동 당시 브레히트를 모델로 하여 예술과 정치의 관련을 추구한 작품으로 <독일의 비극>이 있다. 그라스는 전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요 지지자가 되어 외국인 혐오증, 신나치주의 등에 반대하는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반 상대성이론 일반 상대성이론(一般相對性理論, , ) 또는 일반상대론(一般相對論, )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발표한, 중력을 상대론적으로 다루는 물리 이론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력을 다루는 이론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시공간의 곡률이라는, 기하학적 언어로 기술한다. 시공의 곡률(아인슈타인 텐서)은 (우주 상수를 무시하면) 4차원 운동량 밀도에 비례하는데, 이를 아인슈타인 방정식이라고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계뿐만 아니라 비관성계를 포함한 임의의 좌표계에 대해 물리 법칙이 동등한 형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자유낙하하는 승강기와 승강기 바닥에서 승강기 천장으로 쏘여진 빛을 떠올려보자. 승강기 안에서 승강기와 같이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빛에서 어떠한 도플러 효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등가원리를 따르면,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중력장이 없는 관성계의 관찰자와 같으며, 중력장이 없는 관성계에서는 빛에 어떠한 변형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승강기 천장에 설치된 빛 감지기에서 어떠한 도플러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승강기 밖에서 땅 위에 서있는 관찰자는 빛에서 도플러 효과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승강기가 자유낙하를 시작할 때 빛이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빛이 승강기 바닥에서 승강기 천장으로 가는 시간 formula_1 동안 승강기 천장은 formula_2만큼 빠르게 되고, 이 속도에 따라 빛에 대한 청색편이를 감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색편이는 느린 속도 근사식 formula_3만큼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감지기가 어떤 관찰자에게는 도플러 효과가 없다고 감지하고, 어떤 관찰자에게는 청색편이의 도플러 효과가 있다고 감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청색편이의 결과를 상쇄시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의 결과와 일치시킬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 중력장이란 존재가 있으므로, 중력장이 청색편이를 상쇄시키는 적색편이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중력 적색편이는 formula_4만큼 일어나며, 여기에 빛이 감지되었을 때의 승강기 천장의 속도와, 빛이 승강기 천장으로 가는 시간을 대입하면 formula_5라는, 중력 퍼텐셜의 차이 formula_6에 따른 적색편이의 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승강기에서처럼 빛 방출기와 빛 감지기가 서로 상대적인 운동에 있는 상황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 정지해있는 상황이라면, 빛의 감지기는 청색편이로 상쇄되지 않는 중력 적색편이를 감지할 것이다. 빛의 감지기가 빛의 방출기에 대해서 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진동수를 얻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빛의 감지기와 빛의 방출기가 단위 시간 당 서로 다른 개수의 파면을 받아들일까?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대해서 파면의 개수는 동일하지만, 빛의 감지기와 빛의 방출기가 서로 다른 시간 단위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즉, 서로 다른 중력 퍼텐셜에 위치한 시계에서는 서로 다른 빠르기로 시침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진동수는 그 곳의 고유 시간에 반비례 하므로, formula_7이며, 이를 중력 적색편이 식에 집어넣으면, formula_8의 식을 얻을 수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을 특수 상대성 이론의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임의의 (로런츠 계량 부호수 −+++를 가진) 준 리만 다양체로 확장한다. 다양체의 계량 텐서 formula_9로서 시공간의 곡률을 정의하고, 이 곡률을 중력으로 재해석한다. 뉴턴 역학에서 중력은 (중력적) 질량의 밀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질량의 밀도를 자연스럽게 상대화하면 에너지-운동량 텐서를 얻는다. 아인슈타인과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 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장 방정식을 얻었으며, 이는 오늘날 아인슈타인 방정식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기호는 다음과 같다. 이 식으로부터, 중력장이 약하다고 가정하면 뉴턴의 역제곱 법칙을 비상대론적 극한으로 얻는다. 공간 좌표를 formula_17으로 하고 시간 좌표를 formula_18로 하면, 세계선의 선소 formula_19는 formula_20 로 표시된다. formula_21와 formula_22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나타내는 인덱스로 0은 시간, 1,2,3은 공간 성분을 표시한다. formula_9는 시공간 사이의 변환을 나타내는 계량 텐서이다. 예를 들어 가장 평탄한 시공간을 나타내는 민코프스키 계량 텐서의 경우 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중력 밖의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고, 그 무게가 무시할 만큼 작은 입자는 시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움직인다. 측지선은 시공에서 고유 시간을 극대화하는 경로이다. 즉, formula_25이다. 일반적으로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량이 큰 물체는 시공간을 휘게 할 수 있고 그것이 중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실험적으로 성공적이나, 이를 주로 양자장론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확장할 수 있다. 일반상대론에 비틀림을 더한 이론은 아인슈타인-카르탕 이론이고, 중력상수를 스칼라장으로 승진시키면 브랜스-딕 이론을 얻는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추가 차원을 도입하여 다른 상호작용을 포함시키는 이론은 칼루차-클라인 이론이며, 초대칭을 도입하면 초중력 이론을 얻는다. 또한 초끈이론 에서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으며, 고리 양자 중력에서는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작용을 가지고 이를 양자화 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데니스 리치 데니스 매캘리스테어 리치(, 1941년 9월 9일 ~ 2011년 10월 12일)는 미국의 저명한 전산학자이자 현대 컴퓨터의 선구자이다. C와 유닉스의 개발자로 알려져있다. 미국의 뉴욕 주 브롱스빌(Bronxville)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응용수학 학위를 얻었다. 1968년부터 벨 연구소 컴퓨터 연구 센터에서 일했다. 2007년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시스템 소프트웨어 연구부장으로 은퇴했다. 홀로 살고 있던 그는 미국 시각으로 2011년 10월 12일 뉴저지 주 버클리 헤이츠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71세). 켄 톰슨(Ken Thompson) 등과 함께 최초의 유닉스(Unix) 시스템을 개발했고, 1971년 최초의 〈Unix Programmer's Manual〉을 썼다. 또한 C 언어를 개발한 후 브라이언 커니핸과 함께 〈C 프로그래밍 언어〉(The C Programming Language)를 기술했다. 커니핸과 〈C 프로그래밍 언어〉책을 썼기에 커니핸이 C 언어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종종 오해받으나 커니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C언어 개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ALTRAN, B언어, BCPL, Multics 등의 개발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83년에 켄 톰프슨과 "범용 운영체제 이론개발, 특히 유닉스 운영체제의 구현에 대한 공로"로 튜링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에서는 '현재의 애플 컴퓨터는 거의 모두 데니스 리치의 업적에 기반하고 있다'이라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현재 애플 매킨토시의 OS X와 아이폰의 iOS는 모두 유닉스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다. 주기율표 주기율표(週期律表, , ) 또는 주기표(週期表)는 원소를 구분하기 쉽게 성질에 따라 배열한 표로,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처음 제안했다. 1913년 헨리 모즐리는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개량시켜서 원자번호순으로 배열했는데, 이는 현대의 원소 주기율표와 유사하다. 가장 많이 쓰이는 주기율표에는 단주기형과 장주기형이 있다. 단주기형 주기율표는 1주기와 3주기를 기준으로 하고, 4주기 아래로는 전형원소와 전이원소가 같은 칸에 있다. 이 단주기형 주기율표는 초기에 쓴 모델로 원자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많이 사용하였다. 장주기형 주기율표는 현재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주기율표이다. 주기율표의 역사는 요한 볼프강 되베라이너의 "세 쌍 원소"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험을 통해 세 개의 원소로 이루어진 무리 중 어떤 원소들은 첫 번째 원소와 세 번째 원소의 물리량 평균이 두 번째 원소의 물리량과 같음을 확인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칼슘(Ca), 스트론튬(Sr), 바륨(Ba)'의 세 원소가 있는데 여기서 스트론튬(Sr)의 물리량은 칼슘(Ca)과 바륨(Ba) 원소의 물리량을 합하여 2로 나눈 평균값과 비슷하거나 같다. 되베라이너는 이들을 세 쌍의 원소라고 불렀다. 이러한 세 쌍 원소 관계를 만족하는 원소들은 칼슘-스트론튬-바륨, 염소-브로민-아이오딘, 그리고 리튬-나트륨-칼륨이 대표적인데 이를 만족하는 원소수가 적어 인정받지 못하였다. 영국의 과학자 존 뉴랜즈는 원소들을 원자량의 순으로 배열하면 8번째 원소마다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를 피아노의 개념에 대입하여 옥타브 법칙을 세웠다. 하지만 이 대응성은 3번째 줄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고, 처음 이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그는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이후 여러가지 실험이 뉴랜즈의 법칙의 중요성을 보였다. 현재는 비활성 기체가 발견되었으므로 원소들은 9번째마다 비슷한 성질이 나타난다. 멘델레예프는 화학 교수였다.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규칙을 밝히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결국 원소들을 원자량순으로 나열하면 되베라이너의 세쌍원소, 뉴랜즈의 옥타브 법칙을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원소가 어떤 함수의 결과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지만 비활성 기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주기율표는 바뀌기 시작했다. 멘델레예프의 문제는 영국의 모즐리에 의해 풀렸다. 그는 음극선관을 이용하여 생성되는 X선의 파장을 연구하여 양성자 수에 따라 화학적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를 모즐리의 법칙이라하며, 이것을 기본으로 현대적 의미의 주기율표가 탄생하였다. 최근, 수소와 헬륨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주기율표에서는 수소를 수소와 마찬가지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수소는 금속 원소가 아니며 수소가 전자의 구조 면에서는 알칼리 금속이 아닌 할로겐에게 가깝고 할로젠 원소와 성질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며, 수소의 위치를 17족 원소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수소가 1족 원소라면 헬륨도 베릴륨 위에 2족 원소로 배치해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헬륨은 비활성 기체이므로 현재처럼 네온 위인 18족 원소가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아미노산 아미노산(영어: amino acid)은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 단위로, 단백질을 완전히 가수분해하면 암모니아와 함께 생성된다. 화학적으로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를 포함한 모든 분자를 지칭하기도 하며 화학식은NHCHRCOOH(n=1~20)이다. 생화학에서는 흔히 α(알파)-아미노산을 간단히 아미노산이라 부른다. α-아미노산은 아미노기와 카복시기가 하나의 탄소(알파 탄소라고 부른다)에 붙어있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프롤린(proline)은 실제로는 아미노기 대신 이미노기를 포함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미노산'(imino acid)으로 분류해야 되지만, 생화학적으로 보통의 아미노산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아미노산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인 α-아미노산의 구조는 오른쪽 그림과 같다.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아미노산은 중성에서 양쪽성 이온으로 존재하며, 카복실기가 공명 상태로 안정화를 취한다. 오른쪽의 구조에서 R은 나머지라는 뜻의 "Residue" 혹은 "Remainder"의 머릿글자로 곁사슬(Side chain)을 나타내고, 곁사슬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가 결정된다. 아미노산은 곁사슬의 성질에 따라 산성, 염기성, 친수성(극성), 소수성(무극성)의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곁사슬이 수소 원자뿐인 글라이신(glycine)을 제외하고, 다른 아미노산은 모두 두가지 광학 활성을 가져, D형과 L형으로 구분된다. 단백질(protein)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거의 대부분은 L-아미노산 형태로 존재한다. 청자고둥(cone snail)같은 일부 특이한 바다생물에서 D-아미노산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축합 중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히라가나 히라가나(,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가나중 하나이다. 가타카나는 주로 외래어 표기 등에 쓰이고, 히라가나는 다음과 같은 용도로 쓰인다. 히라가나는 여성이 많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온나데(; )라고 불린 적도 있다. 이런 이유로 히라가나는 여자들만 쓰는 글이라 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공용 문서에선 가타카나와 한자(칸지)만이 사용되었다. 현재 일본 철도의 역명판에는 히라가나와 칸지가 적혀 있다. 히라가나는 헤이안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유아들도 가나를 배울 때는 히라가나를 먼저 배우고 가타카나를 나중에 배우기 때문에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쓰인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히라가나는 만요가나에서 왔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히라가나의 모양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고, 여러 형태의 문자가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학제 시행 후에야 위와 같은 자형이 표준화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위 이외의 구식 자형은 헨타이가나(変体仮名)라고 부른다. 나라 이름순 수도 목록 나라 이름순 수도 목록(국가명 가나다순)은 나라 이름순으로 정렬된 수도 목록이다. 토마스 만 토마스 만(, 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을 비롯,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 만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다. 그리고 6명의 자식 중 3명인 Erika Mann, 클라우스 만, Golo Mann들도 또한 독일의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 토마스 만은 평의원이며 곡물 상인이었던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독일의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율리아는 7살 때 독일로 망명한 부분적 독일계 브라질리안이다. 토마스 만의 아버지가 1891년에 돌아가시면서 회사는 청산되었다. 1893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보험 회사의 견습 사원이 되었다. 이때 첫 작품 <호의>가 잡지에 실리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당시 그는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게 되면서 언론계로 커리어를 준비하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을 제외하면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이자 소설가인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하게 된다. 토마스 만은 보험회사에서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일을 하게 된다. 그가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토마스 만의 첫 번째 소설은 1898년에 출판된 "꼬마 프리데만 씨" 이다. 1901년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장편 <부덴브로크스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여 문단에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여러 정황이 있으나 종국에는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사랑에 빠졌다. 1905년, 그는 그녀와 결혼을 하며, 6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고, 점차 구낭만주의적인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휴머니즘을 품기 시작하였다. 1924년 12년간의 노력의 결정인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서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29년 토마스 만은 Nidden(, 리투아니아)에 있는 어촌에 오두막을 가진다. 그 곳에는 독일 예술 공동체가 있었으며, 1930년에서 1932년 여름에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Joseph and his Brothers")"을 집필한다. 현재 이 오두막은 소규모 전시를 하면서 토마스 만에 대한 문화적인 중심이 됐다. 1933년 나치스 정권 성립으로 조국을 떠나, 남프랑스·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높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 1942년 그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로 이사를 한다. 그 곳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게 된다. 1944년 6월 23일,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된다. 1952년에 스위스, 취리히 근처에 있는 에서 살게 된다. 그는 독일을 규칙적으로 여행하긴 했지만, 그 후로 살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독일 방문은 1949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200주년이다. 1955년 취리히에 있는 한 병원에서 아테롬선 동맥 경화증으로 죽고, Kilchberg에 묻힌다. 많은 협회들이 그의 이름을 기린다. 토마스 만의 작품은 처음으로 H. T. Lowe-Porter가 번역했다. 그녀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어권 사회에 크게 전파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토마스 만은 카이저의 (독일의 빌헬름 2세)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진보주의를 공격한다. 1930년 토마스 만은 베를린에서 "An Appeal to Reason" 라는 연설을 한다. 그는 강하게 나치중심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운동권들에 의한 반대를 격력한다. 이것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평론과 문학에서 나치를 공격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에 대해서 늘어나는 동정을 표현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을 했을 당시, 토마스 만과 아내는 스위스에서 주말을 보냈다. 나치 정책에 대한 그의 매우 강력한 비난 때문에, 아들 클라우스는 돌아가지 말자고 권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책은 하인리히나 클라우스의 책들과는 달리,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태워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1929년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1936년 나치 정권이 공식적으로 토마스 만의 독일 시민권을 빼앗아간다. 몇 달 후,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1933년 8월 26일이라고 기록된 개인적인 편지(그러나 2007년 8월 30일에 공개됐다)에서, 이미, 토마스 만은 나치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와 일치한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 만은 2차 대전에서 모든 잔인함에 대한 독일 국민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가진 몇몇 지역들을 언급한다. 전쟁 동안, 토마스 만은 반-나치 라디오 연설 시리즈()를 만든다. 이것은 미국에서 녹음돼서 영국에 전해지고, BBC가 방송을 하게 되면서 독일 청취자들이 듣기를 원한다. 사회 비판가 의 컬렉션 "The Accidental Century"에 있는 "Images of Disorder'는 토마스 만의 정치적 성형이 바뀌는 것을 설명한다. 하인리히 뵐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 , 쾰른, 1917년 12월 21일 - 랑엔브로이히(Langenbroich) 1985년 7월 16일)은 독일의 소설가다. 1917년 쾰른에서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후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독일작가들 중 하나. 청소년기 나치 하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여하지 않는다. 서점의 견습공으로 있다가,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프랑스,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 등지에서 복무한다. 4차례 부상당한 후 1945년 4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2년이 지나 그의 나이 30에 전업작가가 된다. 전후 귀향하여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년 병사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열차는 정확했다』를 시작으로, 참혹한 참전 경험과 전후 독일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고, 1953년에 출간한 로 비평가와 독자들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비롯해 『9시 반의 당구』, 『어느 광대의 견해』, 『신변 보호』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1967년에는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을 수상했다. 1970년대에는 사회 참여가 더욱 적극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위해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또한 1971년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의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은 43년 만이었다. 그의 작품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는 아직까지 독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진력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독일 녹색당은 그의 저항적 삶을 기리기 위하여 당의 정책 연구소 이름을 '하인리히 뵐 연구소'라고 짓기로 결정하였다. 방정식 방정식(方程式, )은 미지수가 포함된 식에서, 그 미지수에 특정한 값을 주었을 때만 성립하는 등식이다. 이때, 방정식을 참이 되게 하는(성립하게 하는) 특정 문자의 값을 해 또는 근이라 한다. 방정식의 해는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고, 모든 값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불능이라고 하고, 중자의 경우는 방정식, 후자의 경우는 항등식(부정)이라 한다. 부정방정식은 해가 무수히 많지만, 항등식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은 문자 formula_2가 어떤 값이든 항상 등호가 성립하므로 항등식인 반면, 은 방정식이고, 그 해는 formula_4와 formula_5이다. 또한, 방정식의 방정(方程)은 고대 중국의 산학서인 구장산술의 여덟 번째 장의 제목인 方程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方은 연립방정식의 계수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다는 뜻이고, 程은 이렇게 배열한 계수를 조작하여 해를 구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 해법은 약 1500년 뒤에 등장하는 가우스 소거법에 해당한다. 고대 중국의 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음수의 계산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방정식에서 해를 구하려는 문자, 즉 미지수로는 보통 formula_2를 사용한다. 미지수로 알파벳의 뒤쪽 문자 formula_9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의 수학자겸 철학자인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었다. 다항 방정식과 분수 방정식을 통틀어 유리 방정식이라 한다. 일차방정식, 이차방정식, 삼차방정식, 고차방정식 등과 같이 미지수에 대한 다항식으로만 이루어진 방정식을 다항 방정식이라고 한다. 다항 방정식(多項方程式)은 과 같은 꼴로 나타낼 수 있는 방정식을 말한다.(formula_2는 변수, formula_12는 상수) 이 때, formula_13이면 이를 n차 방정식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다항 방정식 의 해는 다음과 같이 구한다. formula_15를 인수 분해하여 formula_16 와 같은 꼴로 만든다. formula_17의 해집합은 이므로, 위 방정식의 해도 이와 같다. 일차 방정식(一次方程式)은 최고차항의 차수가 1인 방정식을 뜻한다. 선형방정식으로도 불린다. 일차방정식의 풀이 일차방정식은 등식의 성질을 이용하여 풀 수 있다. 이차 방정식이란, 최고차항의 차수가 2인 다항 방정식을 뜻한다. 일반적인 모양은 와 같고, 여기에서 formula_23와formula_24는 각각 formula_25의 계수라고 한다. formula_26는 상수항이라고 부른다. 복소수 범위에서 이차방정식은 두 복소수 해를 갖는다. 이 두 해는 서로 같을 수 있고, 이런 경우는 중근이라고 한다. 이차방정식의 풀이 이차 방정식은 인수 분해, 완전제곱식, 근의 공식을 이용하여 풀 수 있다. 분모에 미지수를 포함하는 분수식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분수방정식이라 한다. 방정식에서 모든 항을 좌변으로 이항하여 과 같은 꼴로 정리하였을 때, 등과 같이 formula_29 가 분모에 미지수를 포함하는 분수식으로 이루어지는 방정식이다. 분수방정식을 풀 때에는 각 항의 분모의 최소공배수를 양변에 곱하여 다항방정식으로 고쳐서 푼다. 여기서 나온 해 중에서 분모를 formula_30으로 만드는 근을 무연근이라고 하며, 무연근은 해집합에서 제외한다. 방정식의 항에 무리식(루트)을 포함하는 다항식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무리 방정식이라 한다. 인수분해하면, 그러나, 무리방정식은 해에 대해서 무연근 검사로 마무리검산을 해야하므로, 위의 두 근인 formula_42을 원래의 식인 formula_31에 대입해보면, 우선 양변으로 놓으면, formula_45 이어서, formula_46일때,formula_47 따라서, formula_31 방정식의 근은 formula_46이 되겠다. 삼차방정식과 사차방정식 그리고 그 이상을 고차방정식이라고 한다. 인수 분해를 해서 해를 구한다. 오차 이상의 일반적 방정식은 대수적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벨이 증명하였다. A가 B보다 크다고 하면 A>B, A가 B보다 작다고 하면 A\sin x^2+\cos x^2=1 formula_57 연립 방정식은 서로 다른 2개의 미지수가 주어진 방정식들에 모두 적합할 때 이 방정식의 쌍을 의미한다. 연립 방정식도 미지수의 차수에 따라 일차 연립 방정식, 이차 연립 방정식 등으로 나뉜다. 일차 연립 방정식에선 y=ax+b와 같이 한 미지수를 어떠한 값으로 나타내어 이 값을 그 미지수에 대입하는 방법인 대입법과 미지수의 계수를 같게 곱하여 둘을 더하거나 빼서 그 미지수를 없애는 가감법, 그리고 행렬을 이용한 가우스 소거법이 주로 사용된다. 방정식은 2x+3=0과 같이 x(미지수)의 값에 따라 등식이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한다. 방정식은 중국의 구장산술이라는 산학서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방정식에도 원 방정식, 직선의 방정식, 미분 방정식 등 여러가지가 있고, 또, 미지수의 차수에 따라 일차 방정식, 이차 방정식, 삼차 방정식, 고차 방정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이차 방정식에는 미지수의 값을 구하는 근의 공식이라는 식이 있다. 이차방정식 ax^2+bx+c=0(a≠0) 의 근의 공식은 -b±√b^2-4ac/2a 이고, ax^2+2b'x+c=0(a≠0) 의 근의 공식은 -b'±√b'^2-ac/a 이다. 삼차 방정식과 사차 방정식은 특수한 경우에 성립하는 근의 공식이 있다. 오차 방정식부턴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벨이 증명) 삼각함수 항등식 수학에서, 삼각함수 항등식(三角函數恒等式, )은 삼각함수가 나오는 항등식을 말한다. 이 공식들은 삼각함수가 나오는 복잡한 식을 간단히 정리하는 데 유용하며, 특히 치환적분에서 매우 자주 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참고로 아래에서 formula_1, formula_2 등의 함수는 formula_3와 같이 정의된다. 다음 관계는 단위원을 사용하면 쉽게 보일 수 있다. 다음 식은 삼각함수의 주기성을 나타낸다. 다음 식은 삼각함수의 대칭성을 나타낸다. 다음은 삼각함수의 이동 성질을 나타낸다. 또한, 주기가 같지만, 상(phase)이 다른 사인파들의 선형결합은 또 다른 상의 동일주기의 사인파가 된다. 즉, 다음과 같다. 여기서 다음 식들은 삼각함수의 정의와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쉽게 보일 수 있다. 다음의 삼각함수의 덧셈정리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일러의 공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탄젠트 공식은 위의 둘을 결합하여 얻는다. 여기서 다음 공식은 바로 위 덧셈 공식에서 formula_22로 놓으면 바로 얻어진다. 피타고라스의 식을 쓰면 변형을 얻는다. 또한 드무아브르의 공식에서 formula_23로 놓아도 된다. 아래 공식들은 덧셈정리에서 한 각을 2x, 다른 한 각을 x로 놓고 전개하면 얻을 수 있다. 아래 공식들은 배각의 공식에서 x를 2x로 두고 전개하여 풀면 얻을 수 있다. formula_40이 formula_41번째 체비쇼프 다항식일 때, 드무아브르의 공식: 디리클레 핵formula_44 은 다음의 항등식의 양변에서 도출되는 함수이다. : 디리클레 핵을 갖는 2n차의 어떤 제곱적분 가능함수의 합성곱(convolution)은 함수의 n차 푸리에 근사와 함께 동시에 일어난다. n차 제곱한 삼각함수를 일차식의 삼각함수 식으로 바꾼다. 두배각 공식의 코사인 공식을 formula_46 과 formula_47으로 푼다. 차수 줄이기 이차식 공식에서 formula_58에 formula_59을 대입하고, formula_60 과 formula_61으로 푼다. 또한, formula_65는 formula_66과 같고, 여기에 분자 분모에 같은 formula_67을 곱한다. 그러면, 분자는 사인의 두배각 공식에 의해 formula_68이 되고, 분모는 formula_69 이므로 코사인 두배각 공식을 쓰면 formula_70 이 된다. 두 번째 식은 분자와 분모에 다시 formula_68를 곱하고, 피타고라스 공식으로 간단히 하면 얻어진다. 우변을 덧셈정리로 전개하면 증명된다. 위 식의 formula_58를 formula_78로, formula_79를 formula_80 로 바꾼다. 그리고 또 다른 식들로 다음과 같이 있다. 다음 식들은 아마 변수가 있는 일반화된 식을 찾기가 위 보다 어려울 것이다. 21을 택해서 각을 나누면, 도로 표현한 각이 더이상 깔끔하지 않다. 다음 식을 보자. 1, 2, 4, 5, 8, 10 이란 인자를 보면 차츰 답이 드러난다. 이 수들은 모두 보다 작고, 21과의 공약수가 1인 수 들이다. 사실 위 세 가지 예는 더 인수분해되지 않는 원분다항식(cyclotomic polynomial)에 대한 기본정리의 따름정리이다. 코사인값은 다항식의 영(zero)들의 실수부이고, 그들의 합은 21(가장 마지막 예)의 뫼비우스 함수값이다. (식에선 값의 반만이 나타난다.) 미적분학의 삼각함수에선 각을 라디안(radian)으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관계식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선 삼각함수가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후에 함수들의 미분을 구하기 위해선 우선: 과 을 증명한다. 그리고, 미분의 극한 정의와 덧셈정리를 이용한다. 삼각함수가 테일러 급수로 정의되었다면, 각 항을 미분하여 알아낼 수 있다. (참고 formula_92 나머지 삼각함수의 미분은 위 항등식과 미분법칙으로 얻어진다. 적분식은 적분표를 참고하라. 노무현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생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재벌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대기업 총수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한 것, 대기업 간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한 것 등이 높게 평가받는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지만 역대 대한민국 정부 중 OECD의 성장률을 하회한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치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나, IMF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세계 경제성장률 대비 국내 경제성장률이 노무현 정부 -0.7%, 이명박 정부 +0.0%, 박근혜 정부 -0.5%로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는 골디락스 호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를 가장 크게 하회한 대한민국 정부로 기록되었다. 주요 실책으로는 정치적으로 친인척 및 측근비리, 사회적으로 교육 정책 및 부동산 정책의 실패, 경제적으로 양극화 심화에 따른 민생경제 파탄, 외교적으로 햇볕정책의 실패 등이 꼽힌다. 부동산 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소득 분배 지표가 더욱 악화되어 서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소득 불평등도는 이후 보수 정권 9년 간 완화되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역대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반미적 입장, 편협한 국수주의, 친북적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모순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이렇듯 서민 생활과 직결되는 분야에서의 정책적 과오와 외교·안보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여론 조사가 정례화 된 제6공화국 이래 노태우를 제치고 임기 평균 국정 지지율 최하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가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재임 시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듣고 대중적 인기가 부족했으며 적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노무현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은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은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500만여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있는 형 2명 중 맏형 영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 형 건평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노건평은 1968년 세무직 9급 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 세무서에서 근무하였다. 노무현은 광주 노씨 광주군파 31대 손으로 광주 노씨는 광주광역시 일곡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가문이다. 1953년에 진영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6학년 때 담임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 1959년 3월에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재학 당시 노무현은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는 외상으로 입학하였다고 한다.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일으키다가 정학을 당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다. 이후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였다. 1968년 군에 입대하여 제12사단 을지부대에서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72년 27세에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3년에 아들 건호를, 1975년에 딸 정연을 낳았다.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4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하게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이후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밝혔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서,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1987년 부산 추도회에서 연행된 노무현에 대해 부산지방법원 한기춘 판사가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자 검찰은 한밤 중에 기각된 영장기록 보따리를 들고 3명의 부장판사를 찾아다니며 영장발부를 종용하다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광주항쟁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강의하였다.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이러면 우리가 당신을 잡아가야 된다면서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안기부 직원들에게 민중, 노동운동 관련 비디오, 자료들을 태연히 보여주었다. 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문제 변호사'가 네 명 있는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이들 네 명은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이흥록이었다. 인사차 찾아간 이화춘과 점심을 같이하던 노무현은 4시간 동안 노동.학생운동 사태 등 시국을 논했다. 8년간 미국 자료만 들여다봤던 이화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노무현은 "당신같이 무지한 정보 요원은 처음 봤다. 당신 큰일났다"고 걱정했다. 이씨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노변호사는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 노무현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고 안기부의 직원들은 당황해했다. 이화춘 등은 "이러면 내가 당신을 잡아가야 한다"며 뿌리치자 노무현은 "나중에 잡아가더라도 일단은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노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독후감을 물었다. 이화춘은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답했다.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가 같이 운영하는 '노동문제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을 출입했다. 사무실은 늘 학생.노동자로 붐볐다. 이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 갔고, 그와 노무현은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다. 한편, 1987년 12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에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구절이 문제가 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았다.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퇴서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3당 합당 선언을 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노무현은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고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 등과 함께 민주당 (1990년)을 창당하였다.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 당시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노무현이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며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1990년 7월 5일 민주당 중앙당 기획조정실장이 되었다. 한편 노무현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이는 1990년 10월 4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서 수사에 협조해 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밝혀졌다. 1991년 10월 14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주간조선'이 게재한 ‘노 의원은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인권 변호사로 알려진 당시 노무현 의원이 부동산 투기의 전력이 있고 호화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등 재산 규모 및 형성 과정의 의혹을 보도했다. 노무현 의원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1년여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이 기사가 선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계량할 수 없으나 결국 노무현은 1992년 민주당 (1991년)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민주당 후보로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1995년에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 행태'라고 비난하면서 합류하지 않았다. 많은 의원들이 민주당(1991년)를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가면서 민주당(1991년)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주당(1991년)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는데, 노무현도 이 통합민주당(1995년)에 합류하였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지역등권론을 주장하자 노무현은 이부영 등과 함께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을 비판하였다. 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부산시장 경선에 출마하여 황백현 부산진을 위원장을 13표 차로 누르고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시행된 15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통추 활동기간 동안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3김 정치에 한 번도 저항하지 않은 이인제 후보는 세대교체를 논할 자격도 없다"라며 이인제가 주장한 세대교체에 대해 강력 비판하는 뜻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흐른 후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철회하게 되는데, 이는 통추의 '노무현 대선 출마'에 대한 강력한 비토로 인한 것이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1995년)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면서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라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김원기·김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라며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단순히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 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라는 말로 과거의 일을 반성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무현은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고,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김대중을 보좌해온 한화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당시의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남 출신인데다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이렇다 할 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거세게 불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무너지면서 광주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작 1위를 장담했던 호남 출신인 한화갑 후보는 3위를 기록했고, 영남 출신 후보가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당시 연단에 서서 "광주시민 여러분들의 위대한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면서 감격적인 소감을 밝혔고,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연단에서 "동서화합의 큰 가능성이 열린 것으로 평가한다"며 "선전해 준 두 후보께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 세력 대통합론'(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젖히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합론의 취지를 전달하고 김영삼에게 지방 선거 후보 추천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 세력 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보이면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한편 노무현은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친(親)이인제 성향의 반노(反盧), 노무현의 집권 가능성에 회의적이던 비노(非盧) 의원들은 지방 선거에 참패하자 집단으로 신당 창당, 후보 사퇴를 주장하며 '노무현 흔들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신당 창당과 재경선 수용 입장을 밝혔다. 한때 정몽준, 박근혜, 이한동 의원과 자민련 등이 신당 참여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고, 정몽준과 이한동은 각자 독자적으로 당을 만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 천정배 의원은 8월 16일 국회의원,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반노 진영의 행동은 '경선 불복 행위'라고 말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이때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후보 단일화는 정 대표로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민주당 내 반(反)노무현, 비(非)노무현 측의 요구에서 비롯하였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민주당 김원기 고문은 노무현의 결단은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시행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노 후보 측은 이날 승리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원칙과 정도를 지켜온 것이 국민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단일화가 되고 나서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한 직후 이인제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등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2002년 11월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성난 농부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 후보는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노무현은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대표는 만나주지 않았고,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위기감을 느낀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난다. 노무현은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역전극을 반복하다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이듬해인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선 과정에서 인터넷의 젊은 지지층을 만들어 이끌어냈다. 대통령 취임 전인 2003년 1월 14일,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은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라면서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취임 초 노무현은 노무현 정부, 즉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외교안보 분야와 정치행정 분야의 기조로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 개혁이 경제 분야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이 제시되었다. 사회 문화 여성 보건 분야로는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 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 국민 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등을 제시하였다. 외교 방식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여겨졌는데,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 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 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유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또 3월 23일에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신조 총리와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의 한 예로 든 것을 언론이 전격 제안으로 보도했다"라고 해명했다.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라고 질문에 언급해서 이를 받아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라는 언급이 한 번 있었다"면서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했다고 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이튿날에는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또 이튿날에는 참여정부 조각 발표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 한편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노무현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친인척 의혹 등 부적절한 발언이 거론되자 대통령이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죠”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보수 언론은 이를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구설수에 올렸다. 검사들은 토론회의 의도에 대해 "대통령께서 토론의 달인으로 알고 있는데, 토론의 아마추어인 검사들을 말로써 제압하려 한다면 무의미하다"는 비판을 했다. 당시 이 토론회는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탈권위적인 '토론하는 대통령'을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받았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라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편 3월 24일에는 원칙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운용되거나 국회의원들이 유용해 온 특별 교부금에 대해 폐지 또는 보통 교부금에 통합하는 등 개선을 명령했다. 그러나 2008년 12월까지 이러한 관행은 개선되지 않았다. 4월 18일에는 노무현의 지시에 따라 청남대가 개방되고 모든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하였으며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초기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는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생긴다" 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편 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2004년 2월 25일 민주당은 참여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실패한 1년, 잃어버린 1년이라는 제목의 국정평가 보고서를 배포했다. 보고서에는 참여정부의 7대 비리의혹을 꼽았으며,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11가지 자질부족 사례를 꼽았다. 불법 관권선거 개입 사례로는 노무현의 양강구도 언급 등 총선관련 발언들과 군복무기간 추가단축 검토를 비롯한 행정부의 총선용 선심성 공약 남발 사례, 민주당 파괴공작, 총선 올인 등을 꼽았으며 이와함께 장관임기 보장 약속 파기, 대북송금 특검 수용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을 비롯한 사례 21가지 등 총 43가지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1년을 혹평했다. 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최도술이 SK그룹으로부터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터지고,10월 10일에는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되었고,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노무현은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2003년 12월 29일 국회는 여야의 합의로 신행정수도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2004년 1월 14일 그는 연두 기자 회견에서 "지난 수십 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 특권적 유착 구조는 완전히 해체될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성큼 다가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1월 16일에는 2003년 말에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신행정수도법을 공포했다. 2004년 1월에 노무현의 며느리인 배정민이 개인 홈페이지에 "150만 원짜리 유모차가 사고 싶은데 엄마 아빠(노무현, 권양숙 추정)에게 사 달라고 졸라야겠다."라는 글을 올린 이른바 유모차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뒤 항의가 일자 배정민은 결국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2004년 노무현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던 국회는 새천년민주당의 주도 하에 그를 탄핵하였고,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 여파로 좌파진영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이 고발한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 있다고 인정하고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을 했다. 민주당은 이 조치를 근거로 노무현이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며 야3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그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남상국을 질타했고, 2004년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이 사건으로 노건평은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남상국의 자살이 노무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무현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의 본질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마녀사냥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형에 대한 인사청탁에 대해서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당시 송영길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탄핵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 권한 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노무현의 탄핵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으로 적용되었다. 탄핵 당일인 3월 12일부터 3월 27일 보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약칭 탄핵무효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3월 13일에는 가장 많은 인파가 촛불을 들고 탄핵 무효를 주장했는데, 주최 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5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편 80여 개의 보수 단체로 이루어진 '바른선택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2000여 명(경찰 추산)이 운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후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이 영향으로 '정신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였고, 4월 15일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단숨에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진보세력이 중심이 되는 국회가 출범하였고,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었다. 이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0일 노무현은 1당이 된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입당하여 열린우리당은 공식적인 여당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1일에는 1월에 공포한 신행정수도법에 따라 국회는 신행정수도를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정했다. 한편 8월에는 노무현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악성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H(49세) 씨에 대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증거 조사 결과 그런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 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관습 헌법'이라는 일반에 생소한 개념까지 동원하며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수긍할 수 없다는 일부 여론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이에 따라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게 된다. 같은 해 12월 16일 FTA 추진 지시를 내렸다. 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 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혔으며, 봉하 마을에 대한 관심이 누리꾼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노무현의 귀향으로 김해시 봉하 마을에 지지자 및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언론에 비친 모습을 통해 특정 누리꾼들에게 친근한 대통령으로 다가왔다. 또한 특정 네티즌들은 '노간지'라는 애칭을 붙여 줬다. 노무현이 봉하 마을 귀향 이후 관심을 갖고 추진한 사업으로 오리쌀 농법과 화포천 정화, 생태숲 조성 등 친환경·친농촌 생태사업이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09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 토론글을 게시하자 곧바로 심리전단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09년 3월 1일 홈페이지 '사람세상'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이후 추기경의 행적을 둘러싼 평가를 놓고 네티즌 사이에 논쟁이 일자 '민주주의와 관용과 상대주의'라는 제목으로 "민주주의 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용"이라며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다름을 상호수용하고 통합할 줄 아는 사고와 행동이 필요하다 ... 우리가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관용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강정구 교수의 처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라면 그 정도의 발언은 용납돼야 할 자유이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게시하였다. 2009년 3월 3일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내부 회의에서 심리전단에 해당 글을 언급하면서 적극적인 대응 심리전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사저인 봉하 마을로 귀향하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날에 노무현 정권 인사들이 고의적으로 청와대의 컴퓨터 시스템에 보안 장치를 걸어 새 정권이 시스템을 사용 못하게 막아 놓았다는 뉴스가 나왔고, 그 후 약 2주간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단순히 화면 보호기에 암호가 걸렸으며, 이는 남아 있는 'e-지원'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2008년 4월 20일,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위치한 노씨 문중 선산에서 열린 종친회 삼릉단 제종회 대제에 참석해 제관인 초헌관 자격으로 제를 지냈다. 같은 날 오후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사사로이 봉하 마을로 옮긴 건에 대하여 검찰에 불법적인 '무단 유출'로 기록물에 관련된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되었다. 기록원의 고발 조치에 대해 노무현 측 비서관인 김경수는 "청와대와 정부의 목적이 기록 회수가 아닌 참여정부 흠집 내기였음이 분명해진 것"이라고 밝히며 "참모진과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하겠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대통령 기록물 유출 실체 규명에 나서게 됨에 따라 신·구 정권 간 대립과 갈등이 격해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편 회수 조치를 하는 와중에 기록이 담긴 하드디스크(데이터)뿐만 아니라 노무현이 개인 자금으로 구매한 e-지원 시스템 서버(하드웨어)까지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노무현 측은 개인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때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5항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 및 전직 대통령이 지정한 대리인은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고, 그것이 비밀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출판하거나 언론매체에 공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다만 이 조항은 2010년 2월 4일 개정되었다). 그러나 법률 내용에도 불구하고 외부로 반출하여 지정되지 않은 장소에 보관하는 것은 기록물의 관리 및 보안상 유출 우려가 있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다수 견해가 있었다. 2008년 9월 18일, 그는 건전한 토론 문화 조성을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했다. 노무현 측은 사용자 참여 중심의 인터넷 환경인 '웹 2.0'에서 착안한 이름으로 체계적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8년 10월 17일, 한국 정치학회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보수주의를 비판하였다. 2008년 10월 21일, 보수적 성향의 시민단체인 자유시민연대(대표회장 이강욱)는 노무현을 국가보안법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노무현과 관련한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은 훗날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의 자살로 인하여 검찰에서 불기소 종결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은 대통령 당선 직후,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피력하여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 가능성을 배제하였고, 복수의 정관계 관계자들은 이 시기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2008년 5월부터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국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상황은 바뀌게 된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박 정부는 정황상 이 사태의 배후의 중심에 친노세력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2008년 7월 한상률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의 측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여, 전임자에 대한 방침을 급선회하였다. 이후 노무현은 부인과 자녀 등이 노무현의 퇴임 후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2008년 10월, 박연차가 정관계 인사 등에게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때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 의원이 로비 상대로 거론되었다. 2008년 12월 4일,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은 세종증권 매각비리 의혹과 관련, 농협의 인수 청탁과 함께 29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영장 실질 심사를 거쳐 구속 수감되었다. 2008년 12월 5일, 자신의 친형인 노건평의 비리 사건에 대해 "내가 사과하면 형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대(對)국민 사과를 거부하였다. 2009년 3월 26일,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오보를 문화일보 등에서 보도하였다. 이때 노무현 게이트라는 말을 문화일보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이호철 및 정윤재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그해 4월 7일, 노무현은 검찰이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을 체포하자 자신의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 부인 권양숙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사과문에 대해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순자는 같은 날 기자 회견에서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노회한 승부수를 던지는 모습에 국민들은 참담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라며 비판하였다. 2009년 4월 9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검사장 이인규)는 박연차가 정상문 전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을 거쳐 10억여원(달러 포함)을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에게 전달한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돈은 차용증이 포함되지 않았고, 박연차는 빌려준 것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검찰은 정상문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4월 10일 새벽 법원은 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2009년 4월 10일 오전 9시, 검찰은 박연차의 홍콩 비자금 500만 달러를 송금받은 혐의로 노무현의 조카사위인 연철호를 체포했다. 2009년 4월 12일, 뇌물 수수 관련 혐의로 그의 부인인 권양숙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때 문재인은 변호인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같은 날 아들 노건호가 소환 조사 받았다. 4월 19일, 권양숙 여사가 빌려 썼다는 3억 원에 대해 ‘검찰이 거짓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권양숙 여사가 정상문 비서관에게 말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12월 18일 정상문 유죄 판결문에서는 노무현이 3억 원을 빌렸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2009년 4월 22일, 검찰이 노무현에게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와 관련된 서면 질의서 7장을 발송했다. 그에 대한 답변서(진술서)를 4월 25일 노무현이 검찰에 전자 우편으로 먼저 제출했고, 검찰은 이것을 검토하였다. 2009년 4월 30일 오전 8시 노무현은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출발, 오후 1시 20분 경 대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120호 특별조사실에서 오후 11시 20분 경까지 조사를 받았다. 노무현은 진술조서를 검토한 뒤 익일 오전 2시 10분쯤 청사를 나와 귀가했다. 노무현은 박연차로부터 2007년 6월 말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을 통해 100만 달러를 받고, 2008년 2월 말 조카사위 연철호를 통해 500만 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았다. 또한 검찰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횡령한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 5천만원에 대해 보고를 받았는지, 박연차의 명품 시계 선물과 15억원의 차용증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노무현의 조사는 주임검사인 우병우 중수1과장이 신문을 하였고, 직무관련성 부분은 김형욱 검사가, 100만달러 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이주형 검사가 조사했다. 또한 500만달러 수수 혐의와 특수활동비 12억 5000만원 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이선봉 검사가 조사했고, 이인규 중수부장과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조사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지휘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자정까지 청사에 남아 수사 내용을 보고 받았으며, 노무현의 변호인 측은 문재인과 전해철 변호사가 번갈아 가며 변호했다. 수사팀은 오후 1시 40분 경부터 4시 10분까지 대통령의 직무와 권한, 박연차와의 관계에 대해 조사하였으며, 10분간 휴식한 뒤 박연차로부터 100만달러를 수수한 혐의에 대해 오후 6시 30분까지 조사를 진행했다. 저녁 식사 후 오후 7시35분부터 박연차로 부터 500만 달러를 수수한 혐의, 정상문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이 횡령한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천만원, 박연차가 노무현 측에게 선물한 명품시계 등에 대해 조사했다. 검찰은 박연차의 베트남 화력발전소 사업 등에 도움을 준 대가로 600만 달러를 받은 게 아니냐고 신문했으나, 노무현은 대통령이 한국 기업의 해외 사업에 도움을 준 게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2007년 박연차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에 대해 채무를 갚는데 자신의 배우자 권양숙이 쓴 것이며, 대통령 재임 중 이같은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100만 달러의 구체적인 사용처에 대해서는 서면 답변과 마찬가지로 밝힐 수 없다고 진술했다. 2008년 500만 달러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대통령 퇴임 후에 알게 된 사실이며, 호의적인 투자일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정상문이 횡령한 12억 5000만원에 대해서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노무현의 조사에 앞서 금융정보분석원(FIU)에서 외화송금 거래 내역을 건네받아 2006∼2007년 권양숙이 다른 사람을 시켜 30만 달러 이상을 미국에 체류하던 장남 노건호와 딸 노정연에게 송금한 사실을 확인했다. 노무현은 기존 서면 답변과 같이 사실이 아니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했으나, 검찰이 확보한 금융정보분석원 자료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노무현이 전반적으로 혐의를 부인함에 따라 검찰은 오후 11시경 노무현과 박연차의 대질 조사를 시도했으나, 노무현과 변호사 문재인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거부해 11시 20분 경 조사를 종료했다. 2009년 5월 13일,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이 노무현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진술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에 "부인·아들에 딸까지 돈을 받고 이제는 증거 인멸 시도까지 하느냐"며 강하게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검찰은 노무현이 검찰 조사에서 "논두렁"”이라는 말은 없었고, "집에서(권양숙 여사로부터)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진술했다고 확인했다. 2009년 5월 1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이 받은 40만 달러를 놓고 검찰과 노무현 측이 진실 공방을 벌였으며, 검찰은 권양숙을 5월 16일 재소환하기로 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이 자살함으로써 노무현에 대한 검찰 수사를 종료하였다. 2009년 6월 12일, 검찰은 23일 박연차 사건과 관련하여 노무현을 조사하던 부분을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하고, 관련된 수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에 관한 수사도 노무현의 장례가 마무리될 때까지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 2009년 9월 9일, 해운회사로부터 비자금과 관련해 세무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거액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3심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9년 9월 17일, 박연차가 여러 정치인에게 뇌물을 준 뇌물공여죄의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 및 그 가족과 관련해서는 뇌물 수수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으나 기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보수 언론은 "노무현이 재판을 받았다면 유죄"라고 추정했다. 2009년 12월 16일, 이호철 전 민정수석과 정윤재 전 비서관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문화일보의 기사 내용이 오보이므로 손해배상 및 정정 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2009년 12월 18일,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을 위해) 15억 원이나 관리하면서 박연차로부터 노무현이 3억 원이나 빌릴 때에도 그 돈을 내놓지 않고 차명 계좌에 은닉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을 국민은 없다"라고 판시하였다. 2009년 12월 18일,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상문의 재판 판결문에서 노무현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2010년 1월 8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관련자 가운데 다수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1월 14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노건평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3년 1월 11일, 창원지검 결심공판에서 노건평은 변호사법 위반·업무상 횡령 혐의로 징역 5년에 추징금 13억5000만원을 구형 받았다. 2013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노정연에게 외화 100만 달러를 불법 송금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징역 4월과 집행유예 1년의 형을 선고했다. 2013년 2월 20일 노무현이 자살한 것은 전날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노무현재단에 의해 고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013년 3월 29일 외화 밀반출 혐의로 재판을 받아온 노정연이 항소를 취하해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항소가 취하됨에 따라 이 재판은 1심 선고인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이 확정됐다. 2013년 9월 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의 '13억원 불법송금' 사건에 연루된 재미교포 경연희가 1심에서 벌금 1500만원을 선고 받았다. 검찰 수사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여론 조사에서도 검찰 책임론이 대두되었으나, 검찰은 원칙대로 수사하였을 뿐이라 주장하였다. 사망 이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말은 공공연해졌다. 또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보수 언론과 함께 검찰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으로부터 시작된 검찰 수사는 노무현의 일가와 주변 인물에만 집중됐다는 지적이 있다. 정상문 전 비서관 구속으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언론은 봉하 마을에 있는 노무현의 사저 앞에서 24시간 대기에 들어갔다. 노무현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라고 괴로운 심경을 드러냈다. 검찰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세무 조사 무마 청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 대해서는 혐의가 없어 수사 초기 단계에서 제외됐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번 검찰 수사는 2008년 7월 '태광실업 특별 세무 조사'에 대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청와대 보고 후 시작됐다. 그리고 검찰이 수사 과정을 언론에 피의사실을 공표하여 피의 사실 공표 금지법을 검찰 스스로 위반하였으며, 그 뒤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및 그 가족의 피의 사실 입증에 실패하자 스스로 '빨대' 논쟁을 일으키는 등의 무리수를 두었다는 지적이 있다. 검찰의 수사에 대한 비판은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나는 가장 큰 실수가 노 대통령에 대한 신병처리 결정을 빨리 하지 않은 거라고 본다. 구속 여부를 신속하게 했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이래저래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한 셈"이라며 검찰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 측근들의 지속된 거짓 증언 및 증거 인멸로 의심되는 행위를 하는 등 노무현 측근들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편에서는 그 물품 자체를 받은 사람이 노무현 부처가 아니라 노건평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검찰 책임론이 거세지자 임채진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해 퇴임했고, 이인규 대검찰청 중수부장도 사표를 내 퇴임했다. 야당과 진보 성향의 시민 단체들은 검찰 수사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가했으며, 검찰 수사와 관련된 시국 선언도 줄을 이었다. 대검찰청 홈페이지에는 검찰을 비하하는 '떡검'이라는 표현이 넘치며,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공직자 부패 수사처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보수 언론 및 시민단체에서는 전직 대통령이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죄를 지으면 누구나 처벌받을 수 있다는 원칙을 다시 세움으로써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임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노무현과 관련한 인물에 대해 그가 죽었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은 데 대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예전에 노건평과 남상국 사이에 벌어졌던 뇌물 수수 사건에서 남상국이 자살했음에도 노건평을 기소한 예 와도 모순이 된다는 의견도 있으며, 검찰이 노무현과 관련한 사항에서 유죄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소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와 별개로 검찰은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의 거짓 증언이 사법 방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하려 했으나 노무현의 자살에 따른 동정 여론으로 인해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앞서의 남상국 예와 같이 과거에 자살한 사람에 대해 그 상대방을 기소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박연차와 권양숙이 관련된 자금에 대해서는 뇌물이 아닌 빌린 돈이라고 정상문 유죄 판결문에서 적시했다. 2015년 1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이인규는 그 당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한 진술은 국정원의 조작이었으며, 피의사실을 과장하여 언론에 흘린 주체가 국정원이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이인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검찰은 구속 수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국정원이 망신주기 여론전을 제안하였으며 이에 수사권 침해라며 검찰이 국정원 직원의 멱살까지 잡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그 당시 국정원의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주장했다. 2009년 5월 23일 11시 양산 부산대학교 병원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의 직접 원인은 두부외상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23일 8시 13분 경 인공호흡을 시행하며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센터로 이송됐다. "도착 당시 의식과 자발 호흡이 없었으며, 심전도 모니터 상 박동이 없었다"라고 백승완 원장은 밝혔다. 백 원장은 "두개골 골절 등이 관찰됐으며 두부의 외상이 직접 사망원인으로 판단되고 늑골골절, 척추골절 등 다발성 골절도 관찰됐다"라고 말했다. 경남지방경찰청장은 "노무현은 수행 중이던 경호원 이병춘을 인근 정토사로 심부름을 보낸 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호원은 자책감 때문에 노무현이 "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한 후 뛰어내렸다고 거짓 진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병춘이 진술을 번복하고, 경호관 사이에 있었던 휴대 전화 교신 기록이 발견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경호관이 초기 수사에서 사망 당시 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진술을 계속 번복한 것에 대해 경찰은 "경호 실패에 대한 문책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무현이 정확하게 언제 투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후 인터넷을 통해 일부 네티즌이 타살설과 유서 조작설 등 음모론을 언급하자 노무현의 유족과 측근은 이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전 8시50분께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사망 원인이 '투신 자살'로 최종 확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전 6시 40분께 경호원과 함께 간단한 복장으로 사저 인근 뒷산으로 등산하던 중 10분 뒤 벼랑에 떨어져 크게 다쳤다. 노 전 대통령은 7시 인근 김해 세영 병원과 양산 부산대 병원(오전 8시10분)으로 호송됐으나 이미 상태가 다발성 골절로 소생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사망했다. 경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 원인을 실족사에 무게를 두고 조사했으나 집을 나설 당시 평소와 달리 권양숙 여사, 보좌관 등 측근에게 알리지 않고 경호원만을 대동한 점, 뒷산의 경사가 완만하다는 점 등을 종합해 투신 자살로 최종 공식 확인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원인과 관련, 유서를 남겼다고 밝힘에 따라 자살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문 전 실장은 기자들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뛰어내렸다"면서 "가족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라고 확인했다. 김경수 비서관도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노무현이 5월 22일 검찰 소환 조사를 응하면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결벽증에 가까운 정치적 자산이자 무기인 '도덕성'이 상처를 입고, 검찰의 수사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인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면서 이와 함께 노무현은 자신으로 인해 자신들의 참모와 가족들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이 대해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평도 있으며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고 비통한 일"이라고 애도의 뜻을 표하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라고 지시했다. 정계나 학계, 시민단체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잇따라 공식 논평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서울에서는 네티즌과 시민들이 서울 도심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조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나의 오래된 친구"라며 "재임 기간에 중국과 한국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및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라고 밝혔다. 원자바오 총리는 애도하면서 노무현의 대(對)중국 관계의 중시, 노무현의 솔직함과 성실함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한중 관계의 전면적 발전 추진을 위해 기울인 공헌을 기억하겠다는 소회를 덧붙였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긴급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노무현 재임 기간에 한국과 미국 간의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외상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청와대에 애도 조문을 보내어, "지난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영국 공식 방문은 한·영 양국 관계 증진에 중요한 이정표였다"라고 전했다. 반기문 국제 연합 사무총장은 사망 관련 성명을 발표하고 애도의 뜻을 표명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촉진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노 전 대통령을 칭송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역시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래는 그가 투신 자살하기 전에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이다. 이 유서는 사저의 컴퓨터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라는 제목의 한/글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에 따르면 이 유서 파일이 저장된 시간은 투신 1시간 19분 전인 오전 5시 21분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이 유서에는 돈 문제와 관련된 일부분이 누락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경찰은 조작설을 일축했다. 연합뉴스는 "유서 조작 의혹은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 유서에 담긴 내용이라며 전한 이야기를 일부 매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도하면서 비롯된 혼선 때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면서 "삭제됐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경찰의 공식 발표 이전에 일부 매체들이 보도한 내용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라며 평했다. 그의 사망은 또한 '언론 책임론'을 불러 일으켰다. 검찰의 몰아붙이기식 수사도 문제였지만, 이를 "받아쓰기"하듯이 그대로 전달하거나, 한발 앞서 검찰 수사의 방향까지 제시한 언론 은 여론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에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한 천정배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권력기관의 사유화와 보수언론의 탐욕이 만들어낸 재앙이다"라고 말하여 검찰과 함께 보수 언론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보수 신문은 "일부 세력은 신문과 방송이 노 전 대통령의 혐의를 중계하듯 보도해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갔다"라고 주장하지만, 2009년 9월 17일 판결이 나오자 "이번 판결을 보더라도 노 전 대통령이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또 "언론이 신속 정확한 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자신들을 비롯한 언론이 검찰의 모욕 주기 수사·흘리기 수사를 받아쓰고,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를 했던 것을 정당화했다. 한겨레는 보수지의 노무현과 관련된 보도를 "비판 대신 증오, 죽은 권력 물어뜯기"라고 평가하며 사망의 책임이 보수 언론에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한겨레, 경향신문 만평도 달라져"란 제목의 기사에선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때 진보 신문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노무현을 비판하고 희화화해 이전의 우호적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사망 전후 확연히 다른 보도 행태를 보였다며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겨레신문에서 조사한 여론 조사에서 누가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 "56.3%는 검찰, 49.1%는 언론을 꼽았다"라고 보도했다. 이에 빅뉴스는 한겨레 여론 조사는 응답 1순위에서 노 전 대통령 자신(27.9%)을 꼽은 응답이 가장 많았는데도 여론 조사 항목을 자의적으로 배치하고 1,2,3순위를 합산하여 결과를 왜곡했다며 비난했다. 이렇듯 언론 책임론이 나오자 신문들은 즉각 보수·진보 양쪽으로 헤쳐 모여서 상대편의 책임이 더 크며, 상대편의 사망 전·후 보도 행태가 완전히 상반된다는 식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서거일 이틀 후인 2009년 5월 25일에 위원회가 결성된 뒤, 5월 29일까지 거행되었다. 당초 유족들은 가족장을 추진하였으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전 국민적인 추모열기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노무현의 영결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져 전국적으로 500만(봉하 마을 장례 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각지에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봉하 마을을 찾은 조문객의 수는 100만으로 사망 직후부터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총 301곳 이 설치되었다. 일주일간의 추도 기간 동안 인터넷 포털, 언론사, 기업의 로고는 검은색으로 바뀐 추도배너가 내걸렸고, 대다수의 방송사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이 결방 하였으며, 지지 세력들이 이웃처럼 느껴지던 서민 출신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자결에 충격과 슬픔과 정부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따른 분노가 함께 표출되었고, 여론 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명박과 검찰의 책임이라고 응답하였다. 한편으로는 위법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자살을 택한 것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한나라당에서는 추모 열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덕수궁 앞 대한문 앞에 마련된 장례 기간 동안 시민 분향소에서는 2킬로미터가 넘는 장례 행렬이 밤새 이어졌다. 임시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일대에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시청 앞 서울 광장을 원천 봉쇄하여 전의경 버스가 시민들의 추모발길을 막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 시위대로 간주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정부는 "애석하고 비통하다"라고 조의를 표할 때와 말과 행동이 다르다며 진정성과 이중성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처럼 정부가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도 서울 광장과 청계 광장의 민간 분향소 설치를 막으면서 ‘과잉 통제’ 논란이 일었다. 정부와 경찰 측은 장례식 참석자들의 돌출 행동으로 인한 폭력 사태가 우려되어 부득이한 통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노무현 수사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고, 과잉 통제 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정 운영 지지율이 이명박이 집권한 이후 가장 낮은 20%대까지 폭락하였다. 이날 영결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세계 150여 해외 공관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각국 주요 인사가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미국 백악관의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 보좌관과 성 김 대북 특사가 분향소가 차려진 주미 한국 대사관을 찾아 조문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조문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일본 정·관계 주요 인사들이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분향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노무현의 사망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장례위원회에 보냈다. 영결식은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시신은 봉하 마을에서 새벽 5시에 출발, 5월 29일 오전 11시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가족, 정부, 종교단체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일본에서는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미국은 스티븐스 주한 대사를 단장으로 알렉스 아비주 국무성 동아태 부차관보, 마이클 그린 국가 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 빅터차 전 NSC 보좌관이 영결식에 참석했다. 5월 23일 서거한 노무현 제16대 대통령의 시신은 당일 오후 6시 30분 봉하마을 마을회관으로 옮겨져 빈소가 마련되었다. 임시 분향소에서 5월 23일 오후 10시부터 조문객을 맞았으며, 이튿날 마을회관 앞 광장에 공식 분향소가 세워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뒤 곳곳에서 추모객이 몰려 들었으며 5월 29일 국민장 기간이 끝날 때까지 100만명 이상의 추모객이 봉하마을 분향소를 방문하였다. 정부에서 세운 공식 분향소는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102개소에 마련되었으며 총 조문인원은 5월 29일 18시까지 98만 5331명에 달하였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분향소는 대한문 앞을 비롯해 알려진 것만 150여곳에 달하였다. 5월 29일 새벽까지 조문객은 500만여명에 달하였다. 정부는 5월 23일 관계 국무위원 간담회를 개최해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뜻을 모았고, 5월 24일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 국무위원회의를 개최하여 국민장 거행을 의결하였다. 장의위원장은 관례에 따라 국무총리인 한승수가 선정되기로 하였으나 유가족 측이 공동위원장을 제의, 5월 25일 현직 국무총리 한승수와 전 국무총리 한명숙이 선정되었다. 장의위원은 전·현직 고위공무원, 사회지도층 인사, 유족이 추천한 친지 및 친분이 있는 인사 총 1,383명으로 구성되어 역대 최대 규모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5월 27일 국민장 영결식을 5월 29일 경복궁 흥례문 앞 뜰에서 거행하기로 공고하였다. 한명숙 전 총리의 추도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도사가 영결식 동안 진행되었다. 2009년 5월 29일 오전, 많은 주민들과 지지자들의 애도 속에서 운구차량이 출발하였다. 주민들과 지지자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표하는 색깔인 노란 풍선과 종이 비행기를 운구차량에 날렸다. 주민들의 슬픔을 뒤로하고 고속도로를 5시간을 달려 경복궁 영결식장에 도착하였다. 노무현의 시신은 당초 예정보다 약 2시간여 늦게 경기도 수원 연화장에 도착해 화장되었다. 화장 후 수습된 유골은 고향인 경남 김해 봉화산의 정토원에 49재가 끝나고 매장되기 전까지 안치되었다. 당초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고 유언하였으며, 한때 국립묘지 안장 여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바로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형태로 안장되었다. 경찰은 덕수궁 분향소에 조문가는 일반 시민들이 촛불을 켜 들고 이동하는 것을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불법) 시위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면서 제지하기도 하여 시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한편 시민분향소 주변을 시청 앞 서울광장을 전경 및 의경 버스로 둘러 막아 이곳에서의 추모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시위대로 간주하여 시민들과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6월 24일 오전 5시 30~40분경 국민행동 본부 50여명이 비공식 분향소를 파괴 및 강제철거하고 영정사진을 강탈(절도)했다. 국민행동본부는 고엽제 전우회와 함께 분향소를 철거했다고 밝혔다. 서정갑 본부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불법 시설물을 치운 것이라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경찰이 이를 방치한 것은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시민분향소 운영진은 오전 10시 30분 기자회견을 열어 분향소 파괴 및 철거와 영정 강탈을 규탄했으며, 49재가 끝나는 날까지 분향소를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특별시 중구청은 직원 30여명을 동원해 오후 2시 20분부터 50여분간 파괴된 분향소 잔해를 철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민 5명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8시 30분쯤 분향소 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 28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분향소 파괴 관련자를 수사하겠다고 밝히고 서정갑을 불구속 입건했다. 한편 분향소를 파괴한 애국기동단 측은 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 표창장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절도한 영정은 당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북핵도발 총궐기대회에서 서정갑의 연설도중 등장하였으며, 이후 영정은 택배편으로 봉하마을에 보내졌다. 서정갑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쓰레기를 청소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공권력이 완수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분향소 철거를 위해 사전답사를 하고 파트별 임무를 부여하는 등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2009년 9월 23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약칭 노무현재단)이 출범했다. 2009년 9월 24일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2009년 10월 1일 노무현의 회고록인 《성공과 좌절》은 출간한 지 열흘 만에 베스트셀러로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9년 12월 2일 전국 7개 도시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멘토로 삼고 싶은 대통령" 에 대한 설문조사에 41.1%로 노무현이 1위를 기록했다. 서울 41.4%, 경기도 39.5%, 경상도 41.5%, 전라도 36.7%, 충청도 47.2%, 강원도 30%, 제주도 45%로 전국적으로 고른 인기를 얻었다. 또한 '2009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에는 12%로 2위를 기록했다. 2009년 12월 19일 중국의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 신문사가 선정한 《2009년 세계 10대 뉴스인물》 중 노무현이 3위에 선정됐다. 선정한 이유로 "그의 자살 사건은 한국 정치에 깊은 생각거리를 남겼다"라면서 "노 전 대통령은 많은 공헌을 남긴 평민정치가였지만 재임 기간의 공적, 특히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라고 전했다. 2010년 1월 1일 G세대 505명을 대상으로 한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인물》 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2010년 5월 23일 노무현 사망 1주기를 맞아 광주, 대구, 대전, 창원, 인천, 대전, 충남 등 전국 각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김제동이 사회를 보기도 했으며, 봉하마을에 7만명, 서울에도 2만 5천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또한 2010년 6월 2일에는 전국 지방선거가 있는 날인데 노무현 추모 열기로 인해 지지율 하락을 걱정하던 한나라당의 이른바 '천안함 사건 대응 문건'에는 "노풍(노무현 바람)이 확산되지 않도록 재빨리 세간의 관심을 다른 이슈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책이슈개발 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공개되기도 하였다. 2010년 11월 14일 오후 1시경 봉하마을 노무현 묘소에 인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62세의 정모씨는 노무현 묘소에 인분을 투척하고 유인물 22장을 살포하였는데 그가 뿌린 유인물은 노무현 그대 무덤에 똥물을 부으며"라는 제목으로, "전교조·전공노·민주노총 같은 좌파세력들이 생성되도록 도와 청소년들의 정신을 세뇌시키고, 국가 정체성을 혼돈에 빠뜨렸으며,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정모씨는 인분 투척후 현장에서 바로 경찰에 붙잡혔으며 경찰 진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직 중 좌익세력이 판을 치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범행을 계획했다" 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정모씨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짓고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입건하고, 인분이 투척된 봉분을 세척 조치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차영 대변인은 "믿기지 않는 이번 사건에 대해 민주당은 국민과 함께 분노하며 유감의 뜻을 밝힌다. 아울러 경찰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밝혀야 하고, 만약 배후가 있다면 철저히 가려내 엄벌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소설가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런 사람들일수록 국격 자주 들먹거리면서 애국자 행세를 한다. 단세포적인 구토유발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도 "이번 불상사는 깊이 개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법에 따라 엄정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6년 7월 21일에도 노무현 묘소에 소변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41세의 최모씨는 노무현 묘역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게 무엇이 있느냐"며 500ml 페트병 2통에 담긴 소변을 너럭바위 위로 뿌리고, 묘역에서 경비를 서던 의무경찰이 제지를 하자 들고 있던 페트병으로 의경을 폭행하였다. 경찰은 최씨를 재물손괴, 사체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하였다. 계속되는 배설물 투척 사건에 대해 묘역을 관리하는 노무현재단 측은 경비와 시설 강화는 노무현 생전의 뜻과 배치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토로하였다. 198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의 정치 인생은 원칙을 굽히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정치 타파를 위해 애쓴 노력의 연속이었다. 재임 중에는 대연정 제안과 사법 개혁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탈피하려고 애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지지 정당으로부터도 비판받으면서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서 당정 분리라는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2010년 9월에 시행된 "역대 대통령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누구인지"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올랐다. 전체 지지율은 25.3%로 나타났으며 특히 20~30대 젊은층과, 화이트칼라 직종,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층에서는 박정희를 능가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 뒤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없앴고, 사법 고시 23회인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사법부에 뿌리 깊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 2003년 구태의연한 대법관 선발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서열을 무시한 여성 대법관(김영란)을 탄생시켰다. 또 사법 개혁 위원회를 통해 법조 일원화, 국민의 사법 참여 등의 사법부 개혁을 위한 밑거름을 쌓았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의전 등으로 문제가 되던 법원들의 재판 사무 감사가 2006년 폐지된 이유가 김영란 대법관이 기수를 파괴하며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언론인 강준식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돈이 들지 않는 선거제를 확립한 것이라든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한 것이라든지, 시장 개입을 없앰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상당 부분 끊은 것이라든지, 인권을 신장시킨 것이라든지, 권위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권위주의를 청산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 등은 다 그의 공이다."라고 말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으로 연안 어족자원 복원에 노력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저인망식 불법어로를 근절하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제조하는 업체에 영업정지를 가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했으며 연안에 인공 어초를 대량 투입하는 등의 대책을 시행하였다.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참고하십시오.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 이런 파병결정에 대해 훗날 문재인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대북 제한폭격을 거론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파병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스스로 지역주의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주류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혁 정당인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국회에서의 그는 자신의 지지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과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부족해 다수당의 횡포로 탄핵 사태에 이르러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회의원 김경재는 그의 정치력 자체를 의심하였다. 2004년 김경재는 노무현을 가리켜 "미국은 노 대통령이 다중인격자처럼 행동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노대통령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등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지도자"라고 지적하였다. 김근태는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노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라면서 "어떻게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金九) 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대선 당시 깨끗한 정치, 낡은 정치 타파를 기치로 내걸어 집권에 성공했으며, 재임 중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도덕성을 강조했다. 참여정부가 내건 제일의 기치 또한 도덕성이었다. 그러나 친형인 노건평을 비롯하여 안희정, 이광재 등의 측근 비리에 연루되었다. 항상 도덕성을 토대로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던 노무현이었지만 측근과 친인척의 비리를 막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취임 첫 해부터 대선 자금 문제로 안희정, 최도술 등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는 상황에 몰리지만 특유의 공세적 대응으로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밖에 2004년 3월에는 전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에게서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형 노건평이 불구속 기소되자 기자 회견을 열어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라고 형을 두둔하였고, 이 발언 이후 남 전 사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변양균-신정아 의혹이 터졌을 때는 "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들이 많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참여정부의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 상대를 비난하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07년 11월 "대통령 취임 후 새살림을 꾸리려고 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 마지막 청소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는 설거지 정부"라고 평가하면서 참여정부 시절 불거나온 비리 의혹들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이종걸은 "'청년 노무현'은 대통령 되기 이전까지가 끝"이라며 "권력의 맛을 본 대통령 이후의 노무현은 더 이상 '청년 노무현'이 아니다"라며 비판했다. 2009년 5월 그는 일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이 밝히면서도 "'청년 노무현'은 남에게 빚을 졌다고 하면, 갚지 않아도 될 빚까지 갚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밝히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증(愛憎)을 피력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민정수석도 구속됐다"면서 "법의 형평성 차원에서, 임채진 검찰총장 입장에서 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속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포괄적 뇌물죄 적용과 관련, "돈의 액수가 적다는 게 문제는 안 된다. 대통령 위치에서도 돈을 받았다면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까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무현은 60년 김해 진영중학교 2학년 재학중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회 시험에 합격해 1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상고에 입학해서도 동문회장인 김지태가 교내에 만든 '백양장학회'에서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78년에는 김지태가 설립한 삼화그룹 고문 변호사로 일했으며 자신의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 과정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장학금만 바라보고 부산상고에 입학해 김지태 선생의 후배가 되었다"면서 "나의 오늘은 그 분(김지태)이 디딤돌을 놓아준 셈"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또한 1984년엔 김지태 회장의 유족들이 부탁한 117억원 짜리 상속세 소송을 맡아 전액을 취소 시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그는 착수금 2000만원, 승소 사례금 4000만원을 포함 총 6000만원을 김지태 유족으로 부터 받았다고 한다. 정수장학회 논란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22일,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노무현과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원래 명칭)의 원소유자인 김지태와의 이와 같은 인연을 들어 논란을 촉발 시켰다. 이정현은 "김지태씨는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데, 민주당이 언제부터 그런 의혹이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됐냐"라고 말했다. 같은날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이정현의 발언을 비판하며 "민주당이 '왜 강압과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고 그 위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냐'고 묻자 느닷없이 새누리당 이 단장이 '너도 한패냐'고 윽박지르고 나섰다"라고 말했다. 참여정부 5년간 가장 실패한 정책으로 부동산 정책이 꼽힌다. 참여정부 시절 전국 미분양 주택은 2003년 3월 2만 3000여 가구에 불과했 것이 참여정부 말기 2007년 12월 11만여 가구로 약 4.7배 이상 증가하였다. 또한 참여정부 5년 동안 신도시 집값은 56% 상승했으며 전국 집값은 36%나 상승했다. 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시장의 해법을 경제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소득 계층간 갈등구조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로인해 서울 강남권 등 일부 부유층을 향해 반 시장적 규제를 가했고 이는 결국 주변집값마저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전국토의 난개발로 인해 토지가격 급등과 저금리 기조에 따른 과잉 유동성에 대한 대처 등 부동산시장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수요가 몰리는 곳에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이 아닌 단순히 투기적 수요를 근절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는 수요측면에서만 접근함으로써 불씨를 키웠다. 정상적인 수요도 투기로 간주해 수요를 차단시켰고 공급은 지나친 가격 규제를 도입해 공급을 더욱 줄어들게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임기 내내 소득 분배가 악화됐다. 지니계수는 2002년 0.293에서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0.283으로 낮아졌다가 이후 2004년 0.293, 2005년 0.298, 2006년 0.305, 2007년 0.316으로 올랐다. 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0.319에서 2009년 0.320으로 올랐으나 2010년 0.315, 2011년 0.313, 2012년 0.310으로 내려 소득 분배가 소폭이지만 개선됐다. 박근혜 정부에선 2013년 0.307, 2014년 0.308, 2015년 0.305로 비슷했다.[*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17043091677]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했던 참여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증가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었고, 참여정부보다 성장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감소하면서 소득 불평등이 개선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2018년 8월 23일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 부문) 결과에 따르면, 노무현정부(2004~2007년·2003년은 통계 작성 시작연도로 전년과 비교 불가)에서의 1분위 가구 연평균 소득성장률은 4.0%였으며, 5분위 가구는 5.0%를 기록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보수정권으로 분류되는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는 오히려 1분위 가구의 소득성장률이 높게 나타났다. 이명박정부에서 1분위 가구의 가계소득은 연평균 6.6%나 오른 반면 5분위 가구 성장률은 4.6%에 그쳤다. 박근혜정부는 1분위 가구가 2.5%, 5분위 가구는 2.0%의 성장률을 보였다. 보수 정권기에는 소득 5분위 배율과 지니계수가 개선되었으나 진보 정권기에는 도리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수정권에서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란 통념과 달리 2000년대 이후로는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사회보장성 제도가 대폭 확대돼 왔다"며 "오히려 높은 경제성장을 통해 분배도 개선시키는 방식이 효율적임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소득주도성장은 이번 2분기 가계소득 통계를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된다. 그동안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취약계층의 소득을 올려주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지난 1분기에 이어 이번 2분기에도 저소득층의 소득이 절대적으로는 물론 상대적으로도 큰 폭으로 감소한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2003년 7.23배였던 소득 5분위 배율은 해마다 증가해 2006년 7.64배까지 벌어졌고, 지니계수는 2003년 0.341에서 2006년 0.351로 증가해 소득 불평등이 심화됐다. 소득 5분위 배율은 상위 20% 소득을 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값이고,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함을 나타낸다. 양극화를 해소할 참여정부의 정책이 없었다는 비판이 있으며, 관료들이 주도한 정책은 양극화를 더 심화시켰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유종일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경제학)는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에 ‘국민소득 2만불론’이라는 성장우선주의 담론을 내걸었고, 집권하자마자 법인세 인하 조치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2003년 4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논쟁이 뜨거웠다. 토론회, 집회 등에 여러 가지 양상으로 도입 반대 의견들이 쏟아졌다. 결국 출결, 성적만 관리하는 형태인 호주의 경우와 달리 모든 업무를 관리하는 초기 설계로 관철 되었다. 반대측에 우려대로 운영 초기 시스템 부하 문제 등이 발생하였으나 일선 교사들은 전산화로 업무가 편해졌다고 찬사를 보낸다. 산간 벽지에 폐교 위기의 학교가 아닌 부촌에 사립 학교 조차 IoT, Cloud 등을 도입하여 전산 시스템을 증설하기 힘든 결함이 존재한다. 황우석 사건에서의 태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 2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이 황당한 취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협박과 위협도 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PD수첩의 줄기세포에 진위에 대한 취재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했으며, 이후 줄기세포가 가짜로 판명된 후에도 "자, 이걸로 정리를 하자"라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 이후 2006년 12월 28일에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월에 물러난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박 전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2007년 12월 노동운동계에서는 노무현 정권에서 구속되거나 희생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권의 두 배라며 비판하였다. 일부 노동단체는 노무현 정권에게 인권을 유린당했다고 주장하였으며 20여 명의 구속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한 일도 있었다. 단식 농성에 참여한 구속 노동자들은 "하중근 사망 사건" 관련 싸움을 진행했던 포항건설 노조의 9명, 타워크레인 노동자 5명, 뉴코아-이랜드 관련 2명, 비정규직 철폐와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서 연행 구속된 3명, 노사관계 로드맵 야합에 반대하며 한국노총 점거 농성을 진행한 2명의 노동자 등이다. 언론에서는 이렇게 많은 수가 감옥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한 것은 독재 타도를 외치던 80년대 이후 처음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언론지 '참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구속 노동자 후원회가 집계한 2007년 11월 30일 당시 구속 노동자는 총계 62명으로 집계하였으며, 노무현 정권에만 1천 37명의 노동자가 구속된 바 있다고 주장했다. 그중 2007년 11월에만 17명이 구속되었다. 이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는 김영삼 정권 때 632명보다 두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구속 노동자들은 그 외에 "강제 구금당한 이주 노동자의 수는 너무 많아서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2003년 6월의 일본 방문에서 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발언과, 2004년 7월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발언한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그의 외교 정책을 "굴종 외교"로 규정하였다. 2004년 한일정상회담 직후에는 한나라당 이상배 정책위의장이 그의 외교를 '등신외교'라고 비판하자 청와대와 민주당이 강력 반발, 국회 본회의를 거부하는 등 여야가 정면 충돌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국회 의사 진행이 중단되는 등의 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는 거의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문제를 놓고 괜히 어릴 적 땅따먹기.할 때 땅에 줄 그어놓고 니 땅 내 땅 그러는 것 같다"면서 NLL이 안보상의 실질적 문제가 아닌 정서적인 문제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어 "대강 그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느 쪽도 대강그릴 수 없는 심리적 상태,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NLL이 '영토선'이라는 시각에 대해서도 "내가 NLL이 무슨 영토선이냐고 했더니 '목숨 걸고 지킨 우리의 영토선이고 방위선'이라고 하던데 일리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선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이니까 그 선이 합의가 되어있는 선이라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냐"면서 NLL에 대한 새로운 합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이에 송대성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무현의 민주평통 NLL발언에 대해 "어떻게 국군통수권자로서 농담처럼 NLL문제를 얘기할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영토문제에 대해 통수권자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북측은 NLL이 일방적으로 그어졌다고 주장하면서도 70년대 중반까지 실제적인 영토선으로 준수해왔으나 대북햇볕정책이 실시되면서부터 북한이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이어 "NLL이 무너질 경우 수도권 방어가 어렵고, 국익과 안보에 위해가 올 것이기 때문에 NLL 준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대통령은 국민들보다도 안보의식이 해이한 것 같다"면서 "노 대통령이 임기말 대북관계에서 억지 성과를 내려는 데 집착해 누가 봐도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망언들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보수적인 색채를 띄는 사람들이 NLL(북방한계선)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영토선적인 인식을 가지고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지만, 이런 문제는 김영삼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한 발언 을 볼 때 단순히 '트집잡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건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대북低(저)자세 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민간 차원의 북한 반대 운동을 탄압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민간단체의 인공기 소각 퍼포먼스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대북 굴종 외교 논란이 있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반론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헌법 제66조 제3항)를 다하여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 대북 적대를 하여 괜히 국익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남북관계개선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남북신뢰를 다지기 위한 전략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진보적 가치 실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등등을 노무현 정신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무현 정신의 핵심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보 노무현 의 삶처럼 사람 냄새 나는 삶의 실현이었던 듯하다. '대통령의 언어'가 아닌 '서민의 언어'로 말하고 서민의 몸짓으로 행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언행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안티도 많았다. 이 모든 해프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뒤에도 털어내지 못한 서민적 언행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민적 풍모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낙향해 살면서 보여준 봉하마을 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노무현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노무현을 "고졸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국제 무대에서는 신인이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신념이 확고하다"고 평가했다. 2010년 10월, 30여개 분야 전문가 1,500여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11.1%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우리 시대 영웅'으로 꼽았다.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또한 정치, 통일, 국제, 외교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이어 12월 4일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정치발전에 대한 긍정 평가가 67.9%에 달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남북 화해 부분에서는 80% 이상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2011년 5월 12일에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가 리서치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시 대선에 출마할 경우 다시 뽑겠다는 응답이 47.4%로 나타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또한 전현직 대통령들 중 가장 호감 가는 인물을 묻는 단순 호감도 조사에서도 30.3%로, 31.9%를 기록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02년 12월 11일 당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이날 인천을 방문해 유세를 하면서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 공약을 내세웠다. 당시 그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대전일보는 다음날 1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노 후보는 이날 인천 유세에서 정치 행정은 충청권으로 분산시키고 경제·금융·비즈니스는 수도권에 남는다"면서 "돈 되는 것은 여기서하고 돈 안되고 시끄럽고 싸움하는 것은 충청권으로 보내자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샀다"고 보도했다. 2006년 1월 18일 그는 2006년도 대국민 신년연설을 통해 한미 FTA 협상 의지를 발표 하였다. 2월 3일 당시 미국시각으로는 2월 2일 그는 미국으로 간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협상 출범을 선언했다.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에 재임 중인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타결되었다. 6월 5일부터 6월 9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이 개최되었다. 2006년부터 그는 한미 FTA 추진을 강행한다. 그러나 한미 FTA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허세욱은 결국 협상이 타결 직전에 이르러 가자 2007년 4월 1일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정문 부근에서 분신하였다. 그는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실려 가면서까지 한미FTA 중단과 노무현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4월 3일 민주노동당은 지역위원회별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고 언론에 밝혔고, 4월 4일 참여연대 등도 '병원비가 많이 나올 텐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자'며 성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참여연대 게시판 등에도 많은 네티즌들의 격려와 후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망하면서 모두가 비정규직이니 모금성금은 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2007년 3월 8일부터 3월 12일 한미 FTA 8차 협상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협상은 1개월만에 체결된다.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최종 타결된다. 그러나 6월 16일 미국 측에서 노동, 환경 등 7개 분야 수정안 제의하여 6월 21일부터 6월 22일 FTA 추가협상 1차 협상을 개최하여 6월 29일 추가협상도 최종타결되었다. 한편 분신자살기도로 입원중인 허세욱을 문병왔다가 허세욱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은 경제학자이자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경제비서관 출신정태인(鄭泰仁)은 그의 뜻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정태인은 이후 노무현 정부와 결별했고, 더불어 그의 30년 친구인 유시민 등과도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이후 정태인은 진보신당에 입당하였다. 2003년 그의 둘째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 언론에 출연하여 남상국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있다. 노무현의 남상국 비난 발언은 언론을 통해 공식 보도되었다. 이 사건 직후 남상국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 13일만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돈인 배병렬(62) 전 NH-CA자산운용(구 농협CA투자신탁운용, 이하 CA자산운용) 상임감사가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2005년 자신의 삼촌이 회장으로 있던 회사가 농협에서 수십억원대의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개입,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경남 김해시 소재 농협 내외동지점 부지점장을 역임한 김모 씨 주장에 따르면, 배씨는 자신의 삼촌 배OO이 회장으로 일하던 T개발이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농협 대출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농협 김해 내외동지점과 심사를 맡은 농협중앙회 등에 압력을 행사해 대출이 가능토록 했다. 김 전 부지점장은 당시 대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배 전 감사를 만났고 압력에 가까운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T개발에 대한 대출이 문제가 있었음은 이 대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농협 인사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들 사이에서는 노무현이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발언했다고 보도하면서 비판했다. 광주의 도청이전반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재단 앞에 부끄럼없이 살아온 분을 일국의 대통령이 침략자였던 일본 국민들 앞에서 실패한 정치인으로 평가한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며 "그렇다면 항일독립운동이 실패한 정치활동이란 말이냐"고 분개했다. 김근태는 그가 외교 문제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교에 있어서도 실패하고 있다. 중국 가서 하는 이야기, 일본 가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의 자부심을 상처낸다. 한미 정상회담까지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했지만 한일정상회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천황과 건배하는 것이나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김구 선생이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철학과 원칙은 함께 하지만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 김구선생이 바르게 평가돼야'라는 글을 게시한 네티즌은 "외세의 힘에 의해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야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백범 김구선생의 중립적인 민족주의 국가는 어디에 세워야하고 국민은 어떻게 김구를 선택하고 어떻게 따라야했던가"라며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티즌은 "결국 김구는 훌륭한 인격자이자 지도자이지만 남에도 북에도 설자리가 없었던 비운의 지도자였고 우리 국민은 훌륭한 지도자 김구를 두고 북에서는 공산주의를 따라갔고 남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갔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강조했다. 성균관대 교수 김삼웅은 "일왕이나 수상과 공식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은 존경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실패했다는 발언 하나 가지고 왈가불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고 더 이상의 코멘트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발언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비판거리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2004년 7월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7월 21일 한.일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 과정에 일본 기자의 질문에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무심결에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며 부르는 '다케시마(竹島)'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나온 '실수'이나,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고 야당도 이를 문제삼고 나와 논란이 되었다. 노무현의 다케시마 발언은 곧 일본 언론들에게도 보도되었다. 지지통신은 "영토와 역사문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무심코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 기자도 있었다"고 비꼬았다. 그의 다케시마 발언을 일본 극우 인사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다케시마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상 북방한계선을 포기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새누리당 서상기, 정문헌 의원이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다. 당시 공세를 주도했던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훗날 밝혔다. 노무현이 3당 합당을 거부하고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된 직후인 1991년 10월 조선일보는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이력과 재산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에 나서 승소했다. 국민의 정부 때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언론사 세무조사를 앞장서 지지하고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에 공개 찬성했다. 보수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처음 '이인제 대세론'에 묻혀 있다가 2002년 3월 16일 광주 지역 경선부터 본격적인 노풍(盧風)을 일으켰고, 언론들은 이 현상을 신기한 듯 부쩍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 바람에 심상치 않은 무게가 실리자 보수 언론의 견제가 본격화됐다. 대선 당일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라며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방점을 찍은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집권 1년 만에 보수 언론의 포화 속에 헌정 사상 유례없는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탄핵 반대 촛불 여론으로 권좌를 되찾은 후에도 보수 언론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며, 여기에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협정 추진, 대연정 구상 등으로 인해 진보 언론도 노무현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임기 말에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기자실 폐쇄로 이어지면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은 모든 언론이 비판을 퍼부었다. '박연차 회장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진보 언론마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언론들은 검찰발로 노무현의 가족과 관련된 비리를 낱낱이 보도하며 노무현을 부도덕과 비리의 몸통인 양 매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망으로 노무현의 생애가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면서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들이 등장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언론과의 관계가 가장 순탄치 않았던 정치인으로 평가되었다. 1986년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당감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의 종교란에는 무교로 쓴다고 밝힌 적이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인 2002년 6월 20일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이던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노무현이 먼저 신앙 문제를 화제로 꺼냈다. 노무현은 "1986년 부산에서 송기인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라고 소개하고 "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도 못하고 성당도 못 나가 프로필 쓸 때 종교란에 '무교'로 쓴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김수환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노무현은 "희미하게 믿는다."라고 답했다. 김수환이 "어려울 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하자 노무현은 "앞으로는 종교란에 '방황'이라고 쓰겠다."고 대답했다. 노무현은 자택 옆에 있던 정토원이라는 사찰에서 사시 공부를 하였다. 이후에는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암에 머무르면서 사시를 준비했으며, 틈틈이 불교 경전을 탐독했다. 9년간 사시 공부를 하여 1975년 3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평소 불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진 아내 권양숙은 2002년 10월 1일 당시 대선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받았는데, '대덕화'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받은 법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명 수계는 불교계의 민심이 실린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계의 기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2003년 12월 22일에 노무현은 아내와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를 불시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환담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사패산 터널 문제에 대한 공약을 지키게 못하게 되었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또한 노무현은 2005년 8월 30일에 T-50 골든이글 양산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목조 불상인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해인사에 들러 비행기 사고 없이 잘 날아다니고 잘 팔아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취임 이래 2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고 해인사 대비로전 건립에 30여억 원의 국고 지원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2007년 11월 24일 해인사 대비로전(大毘盧殿) 낙성 대법회에 참석하면서 축사를 하였는데 3번째로 해인사를 방문했다. 2009년 5월 23일에 과거 사시 공부를 했던 정토원의 법당에 모셔진 부모와 장인의 위패에 예를 표한 뒤 그 옆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봉하마을 뒤편 봉화산에 자리 잡은 정토원은 그가 투신한 부엉이 바위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한 사찰이다.2009년 5월 24일 해인사의 승려 300여 명이 분향소를 찾아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했다. 노무현은 청와대 온라인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 시스템인 'e지원'을 개발하게 하였다. e지원 시스템으로 청와대에서 종이 서류를 없애고 대신, 대통령의 모든 지시가 'e지원' 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e지원으로 인해 행정관이나 비서관의 업무 기안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대통령을 비롯해 간부들은 실시간으로 추진 중인 업무에 대해 댓글로 지시, 보완하고 결재까지 해서 간소화되었다. 노무현은 임기 후 e지원의 복사본을 제작해 봉하 마을에 설치하였는데, 국가정보 보안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사본을 제작하여 사유하는 것에 대하여 법적 근거가 없다는 법제처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차후 국가기록원에 반납 처리되었다. 사법 시험 준비생 시절 그는 '개량 독서대'를 고안해 특허받기도 했다. 아울러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인 지난 1994년에는 정치인을 위한 인명록 통합 관리 프로그램인 '한라 1.0'을 개발했고, 이는 버전 업을 거쳐 몇 년 후 '노하우(KnowHow) 2000'으로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또한 의자 등받이를 높게 해 윗부분을 옷걸이 모양으로 해 웃옷을 걸어놓은 '옷걸이 의자'도 발명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퇴임 후에는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했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은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이며, 줄여서 '사람사는 세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9년 5월 홈페이지 개편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다가 5월 23일에 노무현이 사망하자 개편알림 내용을 추모 이미지로 깔아놓기도 했다. 청와대로 연결되는 주소 "맞습니다 맞고요", "맞습니다", "맞고요"는 넷피아에 의해 넘어가기도 했었다. 한명숙이 서울본부 이사장, 권양숙이 경남본부 이사장이며, 경남본부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있으며, 서울본부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해 있다. 격식 없는 그의 발언이 인기를 끌면서 일베와 합필갤 이용자들은 그의 사진과 동영상을 합성하여 비하하고 희화화하였다. 노무현 사후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합필갤에서 자살 장면과 운지버섯 자양강장제 광고를 합성한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추락을 뜻하는 '운지'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일베저장소에서는 그의 육성을 '패션시티' 같은 노래와 합성한 영상을 상당히 많이 제작하면서 'MC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일베저장소에서 노무현을 교묘하게 합성한 사진이 사진 검색 결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탓에 공식적인 곳에 실수로 사용되어 관련자들이 물의를 빚는 일이 잦다. 노무현은 여전히 일베저장소에서 폄하되고 있다. 곱셈적 함수 수론에서, 곱산술 함수(-的函數, ) 또는 곱산술 함수(-算術函數)는 서로소인 두 정수의 곱셈을 보존하는 수론적 함수이다. 함수 formula_1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곱셈적 함수라고 한다. 함수 formula_1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완전 곱셈적 함수(完全-的函數, )라고 한다. (완전) 곱셈적 함수의 정의역은 formula_8의 곱셈에 대하여 닫혀있는 부분 집합일 수도 있다. 곱셈적 함수 formula_1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함수들 역시 곱셈적 함수이다. 곱셈적 함수 formula_1에 대하여, 만약 formula_13의 소인수 분해가 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추가로 formula_16가 완전 곱셈적 함수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즉, 곱셈적 함수는 소수의 거듭제곱의 상에 의하여 결정되며, 완전 곱셈적 함수는 소수의 상에 의하여 결정된다. 곱셈적 함수 formula_18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항등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23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곱셈적 함수 formula_24의 정의역 formula_25이 formula_26를 만족한다면, 이다. 곱셈적 함수는 디리클레 합성곱에 대하여 아벨 군을 이룬다. 즉, 곱셈적 함수 formula_18의 디리클레 합성곱 와 디리클레 역원 은 곱셈적 함수이다. 곱셈적 함수 formula_1에 대하여, 만약 formula_13의 소인수 분해가 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추가로 formula_16가 완전 곱셈적 함수일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다음과 같은 수론적 함수들은 완전 곱셈적 함수이다. 다음과 같은 수론적 함수들은 곱셈적 함수이나, 완전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양의 정수를 두 정수의 제곱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의 (더하는 순서를 고려한) 가짓수를 구하는 함수 는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1을 제곱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4가지가 있다. 즉, 이다. 폰 망골트 함수 는 formula_46이 어떤 소수 formula_48의 양의 정수 제곱일 경우 formula_75를, 소수의 거듭제곱이 아닐 경우 0을 값으로 취한다. 이므로, 이는 곱셈적 함수가 아니다. 체비쇼프 다항식 수학에서, 체비쇼프 다항식(Чебышёв多項式, )은 삼각 함수의 항등식에 등장하는 직교 다항식열이다. 실수 formula_1차 다항식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5을 formula_1차 체비쇼프 다항식이라고 한다. 드무아브르의 공식의 실수부를 비교하면 formula_17가 formula_18의 formula_1차 다항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변의 실수부는 formula_17, 우변의 실수부는, formula_18와 formula_22의 다항식이다. 체비쇼프 다항식들은 다음의 무게 함수에 대해, 구간 formula_14에서 직교한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짝수 차수의 체비쇼프 다항식은 짝함수이며, 홀수 차수의 체비쇼프 다항식은 홀함수이다. formula_1차 체비쇼프 다항식 formula_5은 닫힌구간 formula_14 속에서 formula_1개의 서로 다른 근을 가지며, 이들은 다음과 같다. 체비쇼프 다항식을 복소수 함수 로 여길 때, formula_33의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예를 들어, 의 경우, 이는 분지 지표 2의 두 분지점 formula_39를 가지며, 그 값은 formula_40 및 formula_41이다. 마찬가지로, 의 경우, 분지 지표 2의 두 분지점 formula_43 및 분지 지표 3의 분지점 formula_44를 가지며, 그 값은 각각 formula_45 및 formula_46이다. 이에 따라, formula_32는 벨리 사상을 이루며, 이에 대응하는 데생당팡은 formula_15개의 꼭짓점을 갖는 선형 그래프이다. 낮은 차수의 체비쇼프 다항식들은 다음과 같다. 파프누티 체비쇼프가 1854년에 도입하였다. 체비쇼프 다항식의 통상적인 기호 T는 체비쇼프의 이름의 프랑스어 표기 () 또는 독일어 표기 ()에서 딴 것이다. 파이의 날 파이의 날(Pi Day) 일명 황금비의 날은 원주율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일이다. 파이의 날은 원주율의 근삿값 3.14을 기준으로 하여 3월 14일에 치러진다. 보통 3.14159에 맞추기 위해 오후 1시 59분에 기념하는데, 오후 1시 59분은 엄밀히 말하면 13시 59분이기 때문에 오전 1시 59분 혹은 15시 9분(오후 3시 9분)에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 각국의 수학과에서 기념행사를 연다. 또한, 파이데이(파이의 날)에는 파이를 먹어야 한다. 3월 14일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생일이기도 하면서 스티븐 호킹의 기일이다. 이 날은 여러 방법으로 기념된다. 사람들이 모여서 원주율이 그들의 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원주율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모임에서는 보통 파이를 먹는다. 또한 많은 행사에서 원주율을 소수점 나래의 숫자를 얼마나 외우는지에 대한 외우기 대회가 열린다. 분수 3과 7분의 1을 가분수로 나타내면 7분의 22가 나오는데, 이를 유리수 (순환소수) 로 나타내면 3.•142857• 이 되어 π의 근사값이므로 파이 근삿값 날은 7월 22일이다. 코사인 법칙 기하학에서, 코사인 법칙(cosine法則, )은 삼각형의 세 변과 한 각의 코사인 사이에 성립하는 정리이다. 이에 따르면, 삼각형의 두 변의 제곱합에서 사잇각의 코사인과 그 두 변의 곱의 2배를 빼면, 남은 변의 제곱과 같아진다. 삼각형의 두 변의 직각 삼각형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일반화이다. 코사인 법칙은 삼각형의 두 변과 그 사잇각을 알 때 남은 한 변을 구하거나, 세 변을 알 때 세 각을 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삼각형 formula_1의 세 각 formula_2가 마주하는 변이 각각 formula_3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5은 삼각 함수의 하나인 코사인이다. 이를 코사인 법칙이라고 한다. 코사인 법칙을 통해 삼각형의 두 변과 그 사잇각으로부터 제3의 변을 구할 수 있다. 또한, 삼각형의 세 변으로부터 세 각을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코사인 법칙에서 formula_7가 직각일 경우, formula_8이므로, 다음과 같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얻는다. 유클리드의 《원론》 2권 명제12 및 명제 13은 코사인 법칙과 동치인 명제를 서술한다. 레기오몬타누스는 1462~3년에 작성한 《삼각형에 대하여》()에서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제시하였다. 프랑수아 비에트는 1579년 저서 《표준 수학》()에서 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을 제시하였다. 그림과 같이, formula_7를 둔각으로 하는 둔각 삼각형 formula_1의 높이선 formula_12를 긋자. 그렇다면, formula_13는 formula_14를 직각으로 하는 직각 삼각형이므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또한, formula_16이므로, 다음이 성립한다. 마지막 두 항을 직각 삼각형 formula_18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 정리하면 다음을 얻는다. 이로써 유클리드의 《원론》 2권 명제12가 증명된다. 코사인의 정의에 따라 이므로, 코사인 법칙 이 formula_7가 둔각일 경우 성립함을 알 수 있다. formula_7가 예각일 경우의 증명은 이와 비슷하다. 삼각형의 세 변을 각각 높이선으로 안에서 또는 밖에서 나누면 다음을 얻는다. 세 등식의 양변에 각각 formula_3를 곱하면 다음을 얻는다. 이제 첫째 등식에 둘째 등식을 더한 뒤 셋째 등식을 빼면 다음을 얻는다. 이로써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 다음과 같은 세 벡터를 정의하자. 그렇다면, 벡터 formula_33의 길이는 각각 formula_3이며, 벡터 formula_35와 formula_36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이다. 따라서, 코사인 법칙을 벡터의 스칼라곱의 성질에 따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단위 구면 위의 구면 삼각형 formula_1의 세 각 formula_2가 마주하는 세 변이 각각 formula_3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43은 각각 코사인, 사인이다. 이를 (제1) 구면 코사인 법칙(第一球面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쌍대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를 제2 구면 코사인 법칙(第二球面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이 둘은 각각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벡터들을 정의하자. 즉, formula_48는 각각 formula_7 위의 formula_50를 향하는 단위 접벡터이다. 그렇다면, formula_48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이다. 또한, formula_53는 각각 평면 formula_54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루므로, formula_55를 각각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단위 구면의 중심을 formula_59라고 하자. 또한, 다음과 같은 세 벡터를 정의하자. 그렇다면, formula_33의 길이는 모두 1이며, formula_62 사이의 각도는 formula_63이며, formula_64 사이의 각도는 formula_65이며, formula_66 사이의 각도는 formula_67이다. 따라서, 벡터곱 formula_68, formula_69, formula_70의 길이는 각각 formula_71, formula_72, formula_73이다. 또한, formula_68와 formula_69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6이며, formula_77와 formula_70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9이며, formula_80와 formula_81 사이의 각도는 formula_7이다. 이제, 비네-코시 항등식에 따라 다음이 성립함에 주의하자. 여기에 위의 결과들을 대입하면 다음을 얻는다. 이로써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 구면 삼각형 formula_1의 극삼각형을 formula_86라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 따라서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극삼각형 formula_86에 적용하면, 구면 삼각형 formula_1에 대한 제2 구면 코사인 법칙을 얻는다. 가우스 곡률 -1의 쌍곡면 위의 쌍곡 삼각형 formula_1의 세 각 formula_2이 마주하는 변이 각각 formula_3라고 하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95는 각각 쌍곡 코사인, 쌍곡 사인이다. 이를 (제1) 쌍곡 코사인 법칙((第一)雙曲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음이 성립한다. 이를 제2 쌍곡 코사인 법칙(第二雙曲cosine法則, )이라고 한다. 이 두 법칙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특히, formula_7가 직각일 경우의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은 쌍곡 피타고라스 정리가 된다. 복소 평면 formula_101 위의 열린 단위 원판 formula_102 위에서 푸앵카레 원판 모형을 취하자. 쌍곡 삼각형 formula_103의 세 각의 크기를 formula_2, 세 변의 길이를 formula_3라고 하자. formula_106 위에 적절한 등거리 변환을 가하여 formula_107을 각각 원점 0, 양의 실수 formula_108, 허수부 formula_109가 0보다 큰 복소수 formula_110로 옮길 수 있다. 등거리 변환의 성질에 따라 새로운 삼각형 formula_111의 세 변 및 세 각은 원래의 삼각형 formula_103와 같으므로, 새로운 삼각형 formula_111에 대하여 증명하는 것으로 족하다. 쌍곡 거리의 정의에 따라, 세 변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17은 자연 로그이며, formula_118은 복소수의 절댓값이다. 이 셋을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122는 쌍곡 탄젠트이다. 쌍곡선 함수의 항등식을 사용한 뒤 위의 결과를 대입하여 정리하면 다음을 얻는다. 쌍곡 사인 법칙에 나오는 비율의 구체적인 값은 다음과 같다. 이에 따라 각 formula_2의 사인 값은 다음과 같다. 또한,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에 따라 formula_2의 코사인 값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마지막 등호에는 항등식 formula_135이 사용되었다. 이로써 제2 쌍곡 코사인 법칙이 증명된다. 평면 코사인 법칙은 제1 구면 및 쌍곡 코사인 법칙의 극한이다. 예를 들어, 평면 코사인 법칙이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의 극한임을 다음과 같이 보일 수 있다. 푸앵카레 원판의 반지름이 formula_136일 경우,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된다. 이 경우, formula_138일 때 쌍곡 거리 formula_139는 유클리드 거리의 2배 formula_140로 수렴하며, 쌍곡각 formula_141은 유클리드 각 formula_142로 수렴한다. 테일러 정리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이를 법칙에 대입하면 다음을 얻는다. 다음에 주의하여, 양변에 formula_147을 곱한 뒤 극한 formula_138을 취하고 다시 양변에 4를 나누자. 그러면 평면 코사인 법칙을 얻는다. 제2 쌍곡 코사인 법칙 에 극한 formula_138을 취하면 다음과 같은 자명한 항등식이 된다. 이는 formula_156이므로 자명하다.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제2 코사인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인 법칙 기하학에서, 사인 법칙(-法則, )은 삼각형의 변의 길이와 각의 사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리이다. 이에 따라 삼각형의 두 각의 크기와 한 변의 길이를 알 때 남은 두 변의 길이를 구할 수 있다. 삼각형 formula_1의 각 formula_2을 마주보는 변을 formula_3라고 하자. 사인 법칙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5은 삼각형 formula_1의 외접원의 반지름이다. 삼각형 formula_1의 변 formula_8 위의 높이를 formula_9라고 하자. 삼각법에 따라 formula_10이므로, 삼각형 formula_1의 넓이 formula_12는 다음과 같다. 자모를 치환하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얻는다. 양변에 formula_15를 나누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 삼각형 formula_1의 외접원을 그리자. formula_18를 지나는 지름을 formula_19라고 하자. 따라서 formula_20는 직각 삼각형이며, 빗변은 formula_21이다. 삼각법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formula_23가 예각일 경우, formula_23와 formula_25는 같은 호의 원주각이므로 formula_26이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만약 formula_23가 직각일 경우, formula_29와 formula_25는 같은 점이므로, formula_31이며 formula_32이다. 따라서 역시 위와 같은 식이 성립한다. 만약 formula_23가 둔각일 경우, formula_23와 formula_25는 내접 사각형의 두 마주보는 각이므로, formula_36이다. 따라서 역시 위와 같은 식이 성립한다. 남은 두 각 formula_37에 대한 식 역시 마찬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코사인 법칙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결과가 formula_3에 대하여 대칭적이므로, 변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세 변과 세 각의 사인은 모두 양수이므로, 사인 법칙이 성립한다. 단위 구면 위의 구면 삼각형 formula_1의 각 formula_2가 마주보는 변을 formula_3라고 하자. 구면 사인 법칙(球面-法則, )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 구의 중심을 formula_44라고 하자. formula_45에서 아무 점 formula_46를 취하자. formula_46를 지나는 평면 formula_48의 수선을 formula_49라고 하자. formula_25를 지나는 직선 formula_51의 수선을 각각 formula_52라고 하자. 삼수선 정리에 따라 formula_53는 각각 formula_51와 수직이다. 삼각법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두 식에서 formula_57를 소거하면 다음을 얻는다. 남은 한 등식 역시 같은 방법으로 증명하면 구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 구의 중심과 세 꼭짓점 formula_2를 잇는 벡터를 각각 formula_60라고 하자. 삼중곱의 정의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따라서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에 다음을 대입하면 구면 사인 법칙을 얻는다. 제1 구면 코사인 법칙을 사용하여 구면 사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가우스 곡률이 -1인 쌍곡면 위의 쌍곡 삼각형 formula_1의 각 formula_2가 마주보는 변을 formula_3라고 하자. 쌍곡 사인 법칙(雙曲-法則, )에 따르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73는 쌍곡 사인이다. 제1 쌍곡 코사인 법칙을 사용하여 쌍곡 사인 법칙을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벡터 공간 벡터 공간(vector空間, , )은 선형대수학에서 원소를 서로 더하거나 주어진 배수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공간이다. 체에 대한, 가군의 특수한 경우다. 벡터 공간의 원소를 벡터(, )라고 하며, 이는 직관적으로 방향 및 길이의 비가 정의된 대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노름이 주어지지 않은 일반적인 벡터 공간에서는 벡터의 길이 자체는 정의되지 않는다. 체 formula_1에 대한 벡터 공간 formula_2은 formula_1에 대한 가군이다. 즉, 다음과 같은 튜플이다. 이 데이터는 다음과 같은 공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실수체 formula_30에 대한 벡터 공간을 실수 벡터 공간(實數vector空間, )이라고 하며, 복소수체 formula_31에 대한 벡터 공간을 복소수 벡터 공간(複素數vector空間, )이라고 한다. 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4의 부분 집합 formula_34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35가 formula_4의 부분 벡터 공간(部分vector空間, )이라고 한다. 즉, 부분 벡터 공간은 formula_4의 연산들을 제한시켜 새로운 더 작은 벡터 공간을 이룰 수 있는 부분 집합이다. 벡터 공간 formula_4의 부분 집합 formula_45에 대하여, formula_45의 생성() formula_47는 formula_45를 포함하는 모든 부분 공간들의 교집합이다. 만약 formula_45에서, formula_50인 원소 formula_51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formula_45가 선형 독립 집합이라고 한다. 생성이 벡터 공간 전체인 선형 독립 집합을 기저라고 한다. 선택 공리를 가정하면, 모든 벡터 공간은 하나 이상의 기저를 가지며, 모든 기저들은 항상 같은 크기를 갖는다. 벡터 공간 formula_4의 기저의 크기를 벡터 공간의 차원(次元, ) formula_54이라고 한다. 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은 벡터 덧셈과 스칼라 곱셈을 보존하는 사상이다. 만약 두 벡터 공간 사이에 가역 선형 변환이 존재한다면, 그 두 벡터 공간이 서로 동형이라고 한다. 주어진 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의 집합은 점별 벡터 덧셈과 점별 스칼라 곱셈에 의하여 벡터 공간을 이룬다. 두 유한 차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은 주어진 기저에 대한 행렬로 나타낼 수 있다. 선택 공리를 가정하자. 체 formula_1에 대한 벡터 공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즉, 주어진 체에 대한 벡터 공간은 그 차원에 따라서 완전히 분류된다. 이는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며, 선택 공리가 없으면 모든 벡터 공간이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 여기서 formula_58는 formula_1의 formula_60개의 직합이며, formula_61인 경우 이는 곱집합과 다르다. 같은 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이 주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연산들을 정의할 수 있다. 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4와 그 임의의 부분 공간 formula_35가 주어졌을 때, 몫 벡터 공간(몫vector空間, ) formula_66을 정의할 수 있다. 우선 formula_4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다.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동치류는 다음과 같다. 몫 벡터 공간 formula_66는 집합으로서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몫집합(=동치류들의 집합)이다. 그 위의 벡터 공간 연산은 다음과 같다. 이 정의는 동치류의 대표원을 선택하는 방식과 무관하다. 또한, 이들 연산은 집합으로서의 연산과 일치하지 않는다.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formula_75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직접곱 은 집합으로서 formula_77들의 곱집합이다. 이 위에는 자연스러운 formula_1-벡터 공간의 구조가 존재한다. 즉, 이는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곱이며, 대수 구조로서의 직접곱이다. 즉, 자연스러운 사영 사상 이 존재하며, 이는 선형 변환을 이룬다.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formula_75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직합은 다음과 같다. 즉, 직접곱에서, 오직 유한 개의 성분만 0이 아닌 원소들로 구성된 부분 집합이다. 이는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쌍대곱이며, 가군의 직합의 특수한 경우이다. 즉, 자연스러운 포함 사상 가 존재하며, 따라서 각 formula_77는 formula_87의 부분 공간을 이룬다. 유한 직합은 직접곱과 같으나, 무한 직합은 일반적으로 직접곱의 부분 공간이다. 만약 formula_88가 formula_77의 기저라면, 는 formula_87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이다. 여기서 우변은 기수의 합이다.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들의 집합 formula_75이 주어졌을 때, 이들의 텐서곱 이 존재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다중 선형 사상 을 가지며, 또한 임의의 다른 다중 선형 사상 이 주어졌을 때, 유일한 선형 사상 가 존재한다. 텐서곱은 이 보편 성질로부터 유일하게 정의되며, 또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무한 개의 벡터 공간들의 텐서곱은 직접 정의하기 힘들다. 임의의 두 벡터 공간 formula_4, formula_35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103은 기수의 곱셈이다. 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1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즉, 체 위에서는 모든 가군이 자유 가군이 된다. 체 formula_1 위의 벡터 공간 formula_4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벡터 공간에 성질을 추가하여 만든 구조로는 거리의 개념을 준 노름 공간 · 바나흐 공간, 각의 개념을 준 내적 공간 · 힐베르트 공간, 위상적 성질을 가진 위상 벡터 공간 · 국소 볼록 공간 · 프레셰 공간, 벡터 곱을 준 체 위의 대수 등이 있다. 벡터 공간은 임의의 환 위의 가군의 개념의 특수한 경우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환 위의 일반적인 가군은 벡터 공간과 매우 다른 성질을 보인다. 벡터 공간과 비슷한 성질을 보이는 가군을 자유 가군이라고 한다. 펜로즈 삼각형 펜로즈 삼각형( 또는 )는 불가능한 물체의 일종이다. 1934년 스웨덴의 화가 오스카르 레우테르스베르드가 처음 쓰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 영국의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그와는 독자적으로 고안하여, 널리 알렸다. 그 후에도 펜로즈 삼각형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에서 쓰이기 시작하여,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가능한 물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 삼각형은 단면이 사각형인 입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2차원 그림으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각 변을 이루는 평행한 면들은 각 꼭짓점에 이르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본 직각의 모서리이기 때문이다. 각 변을 이루는 막대는 모두 서로 직각을 이루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각형을 만든다. 이 방법을 일반화 시켜서 펜로즈 다각형으로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펜로즈 사각형은 그 시각적 효과가 삼각형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펜로즈 삼각형처럼 보이는 입체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에 각 변은 꼬이거나, 끊어져야 한다. 수론적 함수 정수론에서 수론적 함수(數論的函數, )는 모든 양의 정수에 대해 정의된 함수이며 복소수 함수값을 가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수론적 함수는 복소수의 수열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수론적 함수로 덧셈적 함수와 곱셈적 함수가 있으며, 수론적 함수 사이의 연산으로는 디리클레 합성곱이 중요하다. 곱셈적 함수와 덧셈적 함수에 몇몇 수론적 함수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아래 예들은 곱셈적이지도, 덧셈적이지도 않은 함수들이다. 물리 상수 물리 상수(物理常數, )는 물리학에 나오는 값이 변하지 않는 물리량을 말한다. 물리 상수는 실제적인 물리적 측정과는 관계없이 고정된 값을 갖는 수학 상수와 대비되어, 대부분이 그 값이 실험을 통한 측정을 통해 얻어진다. 물리 상수들 중에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플랑크 상수, 중력 상수, 아보가드로 수 등이 있다. 물리 상수는 여러가지 양을 의미한다. 플랑크 길이는 자연의 기본적인 거리, 광속은 가능한 최고 속력, 미세 구조 상수는 차원이 없는 양으로 전자와 광자 사이의 상호작용의 정도를 각각 의미한다. 유효자리는 굵게 표시했다. Peter J. Mohr and Barry N. Taylor, "CODATA Recommended Values of the Fundamental Physical Constants: 1998," "Journal of Physical and Chemical Reference Data," Vol. 28, No. 6, 1999 and "Reviews of Modern Physics," Vol. 72, No. 2, 2000. 대수학의 기본 정리 대수학의 기본 정리(代數學의 基本 定理 ; fundamental theorem of algebra)란 상수가 아닌 복소계수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영점을 갖는다는 정리이다. 즉, 복소계수 다항식 에 대해 formula_2 인 복소수 formula_3 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정리는 복소수체가 실수체와는 달리 대수적으로 닫힌 체임을 뜻한다. 수학자들은 17세기에 이미 이 정리가 옳으리라 생각하였으나 증명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복소수의 개념이 없던 당시에는 “모든 실계수 다항식은 실계수 일차식들과 실계수 이차식들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라는 예상이었다. 장 르 롱 달랑베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 등이 증명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불완전하였고, 최초로 엄밀한 증명에 성공한 수학자는 19세기 초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다. 그 이후 이 정리는 복소수 계수 다항식으로 확장되었다. 가우스는 생애 동안 몇 가지의 다른 증명을 발표했다. 현재까지 순수하게 대수적인 증명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약간의 해석학 또는 위상수학을 도입해야 증명할 수 있다. 다음은 복소해석학을 이용한 증명이다. 복소 다항식 가 영점을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즉 모든 복소수 formula_5 에 대해 formula_6 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formula_7 는 전해석함수이다. 이제 삼각 부등식을 이용하여 를 얻고, formula_9라 하면, 양수 formula_10에 대해 formula_11이면 이 성립하므로 식 (a)로부터 을 얻는다. 즉, formula_7 는 유계인 전해석함수이다. 따라서 리우빌 정리에 의해 formula_15는 상수함수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formula_16는 상수가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formula_15 도 상수함수가 될 수 없다.(모순) 그러므로 formula_16 는 적어도 하나의 영점을 갖는다. 대수학의 기본 정리로부터 다음의 유용한 따름정리를 얻을 수 있다. 이 따름정리를 대수학의 기본정리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모든 formula_19차 복소 다항식은 중근까지 고려하여 formula_19개의 근을 갖는다. 따름정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복소 다항식 에 대해 (서로 다를 필요는 없는) 복소수 formula_22이 존재하여 와 같이 쓸 수 있다. 대수학의 기본 정리에 의해 formula_24인 점 formula_25이 존재하므로 와 같이 쓸 수 있다. 그런데 formula_27은 formula_28차의 다항식이므로, 다항식의 차수에 대한 귀납법을 사용하면(대수학의 기본 정리 이용) 증명이 끝난다. 실계수 formula_19차 다항식의 경우, 위의 따름정리를 적용하면 이 역시 복소수체 위에서 중근을 고려할 경우 formula_19개의 근을 갖는다. 이 표현 형식은 곱하는 순서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유일하므로, 만약 허수부가 0이 아닌 근을 갖는다면 실수체 위에서는 그 근을 표현할 수 없다. 즉 실수체 위에서는 반드시 formula_19개의 근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실수체 위에서 실계수 다항식을 기약다항식들로 인수분해할 때, 기약다항식이 갖는 최대의 차수는 formula_32 이다. 이는 실계수 다항식의 근이 갖는 켤레성, 즉 formula_33가 실계수 다항식의 근이면 이의 복소켤레 formula_34도 그 다항식의 근이 되는 성질 때문이다. 두 개의 복소계수 일차식의 곱은 와 같이 (formula_36는 실수) 실계수 이차식으로 환원된다. 만일formula_37가 실계수 다항식 의 복소수 근이면 즉, formula_39이면 formula_40이다. 복소켤레 연산의 성질에 의해 이다. 대수학의 기본정리에 의해 formula_19 차의 실계수 다항식은 반드시 복소수의 범위에서 formula_19개의 근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실계수 다항식의 근의 켤레성에 의해 (실수가 아닌)복소수 근을 갖지 않거나, 갖는다면 짝수개이어야 하므로 차수가 홀수인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실근을 가져야함을 알 수 있다. 정규 분포 \; \exp\left(-\frac{\left(x-\mu\right)^2}{2\sigma^2} \right) \! 확률론과 통계학에서, 정규 분포(正規 分布, ) 또는 가우시안 분포(Gauß 分布, )는 연속 확률 분포의 하나이다. 정규분포는 수집된 자료의 분포를 근사하는 데에 자주 사용되며, 이것은 중심극한정리에 의하여 독립적인 확률변수들의 평균은 정규분포에 가까워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정규분포는 2개의 매개 변수 평균 formula_2과 표준편차 formula_10에 대해 모양이 결정되고, 이때의 분포를 formula_11로 표기한다. 특히, 평균이 0이고 표준편차가 1인 정규분포 formula_12을 표준 정규 분포(standard normal distribution)라고 한다. 정규분포는 아브라암 드무아브르가 1733년 쓴 글에서 특정 이항 분포의 formula_13이 클 때 그 분포의 근사치를 계산하는 것과 관련하여 처음 소개되었고 이 글은 그의 저서 《우연의 교의》 2판(1738년)에 다시 실렸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그의 저서 《확률론의 해석이론》(1812년)에서 이 결과를 확장하였고 이는 오늘날 드무아브르-라플라스의 정리로 알려져있다. 라플라스는 실험 오차를 분석하면서 정규분포를 사용했다. 1805년에는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매우 중요한 방법인 최소제곱법을 도입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이 방법을 1794년부터 사용해왔다고 주장했는데 1809년에는 실험 오차가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가정하에 최소제곱법을 이론적으로 엄밀히 정당화했다. 위에서 첫 번째 적분은 홀함수의 적분으로 0이고 두 번째 적분은 가우스 적분으로 적분값이 formula_16로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기댓값은 formula_2다. 정규 분포 밀도 함수에서 formula_18를 통해 X를 Z로 정규화함으로써 평균이 0, 표준편차가 1인 표준정규분포를 얻을 수 있다. z-분포라고도 부른다. z-분포로 하는 검정(test)을 z-검정(z-test)이라고 한다. formula_19에서 k값이 변화함에 따라 구해지는 formula_20값을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formula_21를 90% 불확실성, formula_22는 95% 불확실성, formula_23은 99% 불확실성이다. 특히, formula_24를 50% 불확실성이라고 하며, 확률오차(probable error)라고도 한다. 이는 관측값이 전체 관측값의 50%에 있을 확률을 의미한다. 공각기동대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Ghost in the Shell)는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에서 만들어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한 무리의 작품들을 가리킨다. 공각기동대는 극장판 영화,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소설,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만들어졌다. 뫼비우스 반전 공식 수론에서의 뫼비우스 반전 공식(Möbius inversion formula)은 19세기 수학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의 이름을 딴 공식이다. "g"("n") 과 "f"("n")이 수론적 함수(arithmetic function)이며 1보다 큰 모든 formula_1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고 하자. 이 때, 1보다 큰 모든 formula_1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5는 뫼비우스 함수(Möbius function)이고, 덧셈은 "n"의 양의 약수 "d" 전체에 대해 이루어진다. 수론적 함수 formula_6는 formula_7의 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역으로 formula_6를 통해 formula_7를 꺼내는 공식이므로 반전 공식이라 불린다. "f"와 "g"가 자연수에서 어떤 아벨 군으로의 함수일 때에도 공식은 성립한다. 디리클레 합성곱(Dirichlet convolution)을 사용하여 공식을 써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 는 디리클레 합성곱이고, 1은 모든 formula_1에 대해 항상 1인 수론적 함수이다. 이 경우, 가 성립한다. 즉, 뫼비우스 함수는 모든 함수값이 1인 수론적 함수의 역원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14은 formula_15일 때만 1이고 나머지는 모두 0인 수론적 함수이다. 다양한 수론적 함수의 계산의 예는 Apostol의 책을 참조하면 좋다. 조합론(combinatorics)에서 자주 쓰이는 동치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F"("x")와 "G"("x")가 구간 [1,∞)에서 복소수로의 함수이고, 1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formula_16에 대해 을 만족하면, 1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formula_16에 대해 이 성립한다. 여기서 합은 "x"보다 작거나 같은 모든 양의 정수 "n"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푸리에 급수 수학에서, 푸리에 급수(Fourier級數, )는 주기 함수를 삼각함수의 가중치로 분해한 급수다. 대부분의 경우, 급수의 계수는 본래 함수와 일대일로 대응한다. 함수의 푸리에 계수는 본래 함수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푸리에 급수는 전자 공학, 진동 해석, 음향학, 광학, 신호처리와 화상처리, 데이터 압축 등에 쓰인다. 천문학에서는 분광기를 통해 별빛의 주파수를 분해하여 별을 이루는 화학 물질을 알아내는 데 쓰이고, 통신 공학에서는 전송해야 하는 데이터 신호의 스펙트럼을 이용하여 통신 시스템 설계를 최적화하는 데 쓰인다.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조제프 푸리에가 열 방정식을 풀기 위하여 도입하였다. 푸리에 급수는 주기함수를 기본적인 조화함수인 삼각함수 또는 복소 지수 함수의 급수로 나타낸 것이다. 주기함수 formula_1가 formula_2의 주기를 가진다고 하자. 즉, 라고 하자. 또한, formula_4가 모든 유한 구간()에서 제곱적분 가능하다고 하자. 즉, 임의의 formula_5에 대하여, 가 유한한 값으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4의 푸리에 계수() formula_8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formula_10에 대하여, 다음 식이 성립하지 않는 formula_11의 집합은 르베그 측도 0을 가진다. 만약 formula_4가 연속미분가능 (formula_14) 함수라면 (즉, formula_4의 도함수가 존재하고 연속적인 경우) formula_4의 푸리에 급수는 모든 formula_11에서 formula_18로 수렴한다. 가수 가수(歌手)는 목소리를 이용해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고전음악이나 오페라에서 목소리는 악기와 동일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각 음역별로 전문성이 계발되었다. 목소리는 음역별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감마 함수 수학에서, 감마 함수(Γ函數, )는 계승 함수의 해석적 연속이다. 감마 함수의 기호는 감마(Γ)라는 그리스 대문자를 사용한다. 양의 정수 n에 대하여 formula_1이 성립한다.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동치임을 보일 수 있다.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은 적분으로 정의된다. 이 적분을 오일러 적분이라고 한다. 오일러 적분은 상반평면 formula_3 인 영역에서 절대수렴한다. 여기에 해석적 연속을 사용해 이 함수의 정의역을 위의 단순극을 제외한 전 복소평면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 확장된 함수를 감마 함수라 부른다. 이 정의는 오일러의 이름을 따 오일러 극한 형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formula_6 는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이다. 이 정의는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의 이름을 따 바이어슈트라스 무한곱 형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만약 감마함수를 자연수 formula_7에 대해 을 만족하는 함수로 정의하면 감마 함수는 유일하지 않다. 예를 들어 또한 위 성질을 만족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감마 함수는 이중 유일하게 formula_10가 양의 실수축상에서 볼록함수이다. 감마 함수는 정의역에서 정칙 함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감마 함수는 복소평면에서 유리형 함수이며, 양이 아닌 정수 formula_12에서 단순극을 가진다. 단순극 formula_13에서 유수의 값은 formula_14이다. 감마 함수는 영점을 갖지 않는다. 즉, 그 역수 formula_15는 전해석 함수이다.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은 함수 방정식을 만족시킨다. 두 번째 공식은 오일러 반사 공식()이라고 불린다. 특히, 이 정리의 특수한 경우로 다음과 같은 두 배 공식을 유도할 수 있다. 감마 함수의 미분은 다음과 같이 폴리감마 함수 formula_20로 주어진다. 특별히, 양수 m에서의 감마 함수의 미분은 아래와 같이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γ를 사용해 나타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마 함수의 n차 미분은 다음과 같다. 감마 함수의 극, z가 음수인 경우에서의 유수의 값은 다음과 같다. 반정수에서 감마 함수는 다음과 같다. 음이 아닌 정수 "n"에 대하여, 이 공식들은 formula_27로부터 수학적 귀납법으로 유도할 수 있다. 몇몇 경우의 감마 함수의 값은 다음과 같다. 감마 함수는 확률 분포를 비롯한 여러 확률과 통계, 조합론, 그 외 여러 공학 분야들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반지름이 formula_30인 formula_7차원 초구의 부피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감마 함수의 피적분 함수를 감마 함수의 적분값으로 나눈 함수를 실수의 양수축에서 적분을 하면 1이 된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 새로운 분포를 정의할 수 있다. 이 분포를 감마분포라 하고, 그 확률 밀도 함수 formula_33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35는 감마 함수의 매개 변수로 양수이다. 큐-감마 함수는 감마 함수가 큐-아날로그화 된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892년 3월 1일 ~ 1927년 7월 24일)는 일본의 근대 소설가이다. 호는 징강당주인(澄江堂主人)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我鬼)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단편 소설이다. 「참마죽」, 「덤불 속」, 「지옥변」 등 주로 일본의 《곤자쿠 이야기집》·《우지슈이 이야기》 등 전통적인 고전들에서 제재를 취하였다. 또한 「거미줄(원제: 蜘蛛の糸)」, 「두자춘(杜子春)」 등 어린이를 위한 작품도 남겼으며, 예수를 학대한 유대인이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방황한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방황하는 유대인」도 있다. 1892년(메이지 25년) 3월 1일 도쿄에서 우유 판매업자였던 아버지 니하라 도시조(新原敏三)와 어머니 후쿠(フク)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아쿠타가와라는 성은 원래 그의 어머니쪽 성씨였다). 이때 태어난 시간이 공교롭게도 진년(辰年) 진월(辰月) 진일(辰日) 진시(辰時)였기 때문에 '용(龍)' 자를 이름에 넣어 류노스케(龍之介)라 짓게 되었다고 전하나, 실제 그가 태어난 1892년 3월 1일은 간지로는 임진년·임인월·임진일에 해당하며, 출생 시각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 없다. 이름도 호적상으로는 '龍之介'이지만 그가 양자로 들어갔던 아쿠타가와 집안이나 졸업한 학교의 명단 등의 문서에는 '龍之助'로 되어 있다(아쿠타가와 자신은 '龍之助' 표기를 싫어했다). 원래 류노스케의 위로는 하쓰(はつ)와 히사(ひさ)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큰누나였던 하쓰는 류노스케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겪어서 류노스케를 양육할 수 없었다. 생후 7개월 된 류노스케는 도쿄시 혼죠구 고이즈미쵸에 있던 외가 아쿠타가와 집안에 맡겨졌고, 백모 후키(フキ)가 양육을 맡았다. 11살 때인 1902년에 어머니가 끝내 사망하자 이듬해에 그는 외삼촌으로 도쿄시의 토목과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쿠타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을 쓰게 된다. 아쿠타가와 집안은 에도 시대에는 사족(士族)으로서 대대로 도쿠가와(德川) 집안을 섬겨 다도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스키야호즈(數寄屋坊主) 집안이었고, 예술·연예를 애호하던 에도의 문인적 취미가 집안에 남아 있었다. 도쿄부립 제3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성적우수자라는 상장을 받기도 했고, 덕분에 제1고등학교는 시험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1910년부터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의 성적 우수자에게는 고등학교 입학시 시험 없이도 입학을 허가하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제1고등학교 제1부 을류(乙類)에 입학한 류노스케의 동기 가운데는 기쿠치 간도 있었다. 2학년으로 오르면서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한 방을 쓰던 이가와 쿄(井川恭)와는 평생의 친구가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이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과는 1학년 가운데 합격자가 불과 몇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어려운 곳으로 유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4년(다이쇼 3년) 2월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기쿠치 간·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3차)을 간행하여, 우선 '야나가와 다카노스케(柳川隆之助)' 라는 필명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바르타자알」, 이에이트의 「봄의 심장」의 일역을 기고한 뒤, 10월에 『신사조』가 폐간될 때까지 그의 초기작 「노년」을 동잡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의 작가 활동의 시작이었다. 1915년 10월, 『데이코쿠 분가쿠』(帝國文學)에 그의 대표작 「라쇼몽」(羅生門)을 본명으로 발표했고, 급우였던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의 소개로 나쓰메 소세키 문하에 들어간다. 1916년에는 제4차 『신사조』(멤버는 제3차와 거의 같다)을 발간하는데, 그 창간호에 실었던 「코(원제: 鼻)」는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아 문단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 이 해에 대학을 20인 중 2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이때 그의 졸업 논문은 「윌리엄 모리스 연구」였다. 12월에 해군기관학교 영어 교관을 맡아왔던 아사노 가사부로(浅野和三郎)가 황도대본(皇道大本)이라는 신종교에 입신하기 위해 사직하면서 구로야나기 가이슈(畔柳芥舟)나 이치카와 산키(市河三喜)등의 영문학자의 추천으로(나쓰메 소세키의 조언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쿠타가와는 아사노의 후임으로서 해군기관학교의 촉탁 교관(담당은 영어)으로서 근무하였다. 그 틈틈이 창작에 힘써 이듬해 5월에는 첫 단편집 『라쇼몽』을 간행했다. 그 후로도 단편 작품을 하나씩 발표해, 11월에는 이미 두 번째 단편집 『담배와 악마(원제: 煙草と悪魔)』를 발간하고 있다. 1916년의 가을, 『미타문학』(三田文学)의 동인으로서 친하게 지내던 고지마 마사지로(小島政二郎)의 알선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취직 제의를 받고 이력서도 제출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17년 3월에, 해군 기관 학교의 교직을 물러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로 출근 의무는 없다)해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덧붙여서 스승의 소세키도 10년 전인 1907년에 똑같이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아쿠타가와는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由比ガ浜)에서 하숙생활을 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오오 정(大町)에 거주했다. 1919년 3월 12일에 친구 야마모토 기요시(山本喜誉司)의 조카(누나의 딸)이었던 쓰카모토 후미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3월 30일에 장남 히로시가 태어났다. 1921년 2월에 요코스카카이(横須賀海) 해군 대학교를 퇴직하고, 기쿠치 간과 함께 오사카 마이니치의 객외(客外) 사원이 되어, 본래 거주하던 가마쿠라에서 도쿄 부 기타토시마 군 다키노가와초로 돌아온다. 동년 5월에는 기쿠치와 함께 나가사키를 여행했고, 친구인 화가 곤도 고이치로(近藤浩一路)로부터 극작가 나가미 도쿠타로(永見徳太郎)를 소개받기도 했다. 또한 이 해에 해외 특파원으로서 중화민국을 방문하였고,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는 후스를 만나 그와 검열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7월에 귀국한 그는 「상해유기(上海遊記)」 등의 기행문을 지었다. 1922년(다이쇼 11년) 11월 8일에는 차남 다카시(多加志)가 태어났다. 그런데 중화민국을 방문한 1921년 이후로 아쿠타가와는 신경쇠약, 장카타르 등의 병을 얻는 등 점차 심신이 쇠약해지기 시작해,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유가와라마치(湯河原町)로 온천 치료를 떠나기도 했다. 작품수도 줄어들기 시작하여 이른바 '호키모노(保吉もの)' 등의 사소설적 경향의 작품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은 만년작 「톱니바퀴(원제: 歯車)」, 「갓파(河童)」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이 해에 일본을 강타했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주동 세력인 자경단의 단원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25년경에 아쿠타가와는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로 취임하였는데, 1926년부터 위궤양에 신경쇠약과 불면증이 다시 심해져 유가와라에서 요양해야 했다. 한편 아내 후미도 남동생 쓰카모토 핫슈(塚本八洲)와 함께 요양을 위해 구게누마(鵠沼)에 있던 친가 소유의 별장으로 이주했다. 2월 22일, 류노스케도 구게누마의 여관 아즈마야(東屋)에 머무르며 그곳으로 처자를 불러온다. 7월 12일에 3남 야스시(也寸志)가 태어났고, 20일에는 아즈마야의 대별장 「이-4호」를 빌려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야스시와 살았다(여름방학이 되면서는 히로시나 다카시도 불러왔다). 그 사이에 「집을 빌리고 나서(원제: 家を借りてから)」, 「구게누마 잡기(鵠沼雑記)」, 나아가 「점귀부(點鬼簿)」 등의 작품을 탈고하였고, 또한 구게누마의 개업 의사 후지 다카시(富士山)의 병원에 통원치료를 다녔다. 9월 20일에 류노스케 일가는 「이-4호」의 서쪽에 있던 '시산노 니카이케(柴さんの二階家)'를 연말까지 빌려 옮긴다. 여기서 구게누마를 무대로 한 「유유장(悠々荘)」을 탈고한다. 이는 간토대지진이 있기 전에는 기시다 류세(岸田劉生)가 살았고 지진 후에 재건되어 시인 구니키다 도라오(国木田虎雄)가 빌리고 있던 대별장을 돌아봤을 때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류노스케 일가가 구게누마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또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사이토 모키지(斎藤茂吉)나 쓰치야 분메이(土屋文明), 쓰네토 야스시(恒藤恭),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쿠치 간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연호가 쇼와로 바뀐 뒤 류노스케는 「이-4호」로 돌아왔다. 조카이자 문예평론가였던 구즈마키 요시토시(葛巻義敏)와 가마쿠라에서 섣달 그믐을 지새고 나서 처자가 가있던 다바타(田端)로 돌아오지만, 구게누마에서 살던 집은 4월까지 빌려두고서 때때로 방문하고 있다. 1927년 1월, 의형 니시카와 유타카(西川豊)가 방화와 보험금 사기 혐의로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바람에 아쿠타가와는 니시카와가 남긴 빚이나 가족을 떠맡아야 했다. 4월부터 「문예적인, 너무 문예적인(원제: 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이라는 문예평론에서 '이야기의 재미'를 주장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맞서 '이야기의 재미'가 소설의 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론해, 훗날 패전 뒤에 일본에서 벌어질 이야기 비판적인 문단의 메인 스트림을 예견한 일본문학사상 유명한 논쟁을 펼친다. 여기서 아쿠타가와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다」 순수한 소설의 명수로서 시가 나오야를 칭찬했다. 1927년 4월 7일, 부인의 동창생으로 아쿠타가와 자신의 비서로 있던 히라마쓰 마쓰코(平松麻素子)와 데이코쿠(帝國) 호텔에서 함께 동반 자살을 약속하였으나 여자가 변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7월 24일 새벽, 「속(續) 서방의 사람(원제: 続西方の人)」를 모두 쓴 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사이토 모키지로부터 받아온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막연한 불안(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 그가 밝힌 자살 이유였다. 그의 계명(戒名)은 의문원용지개일숭거사(懿文院龍之介日崇居士). 묘소는 지금의 도쿄 도 도시마구(豊島区) 스가모(巣鴨)에 있는 자안사(慈眼寺)이다. 그가 죽은 지 8년 후인 1935년 친구이며 문예춘추사 사주였던 기쿠치 간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현재 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다. 아쿠타가와의 초기 작품에서는 서양의 문학을 일역한 것도 존재하며(「발타자알」등) 번역문학 특유의 논리적으로 정리된 간결하고 공정한 필치가 특징이다. 그는 주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오늘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걸작으로 알려진 작품 또한 대부분 단편소설이다. 그런 반면에 장편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미완성 소설로 「사종문邪宗門」이나 「노상」이 있다). 또한 생활과 예술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주의류의 자기 고백에 대해서 알몸뚱이를 사람 앞에 내놓는 것과 같다고 하여 멀리하고 진실한 자기는 허구의 세계에서만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삶과 예술을 분리한다는 이상으로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다른 작가보다 표현이나 시점이 생생하다. 말년엔 시가 나오야의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다"는 심경소설을 긍정하고 스토리성이 있던 자신의 문학을 완전히 부인하였다(그때의 작품이 "신기루"이다). 「두자춘」(杜子春) 등 고전을 참조한 것이나(원래 이야기는 태평광기에 실린 당대의 소설 『두자춘전』)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가 창간한 『붉은 새』에 발표한 것과 같은 동화적인 작품도 많다.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물이나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한 왕조물로 분류된다. 또한 고전(설화문학)에서 구상을 얻은 작품이 많은데, 「라쇼몽」이나 「코」, 「마죽」 등은 《곤자쿠 이야기집》을, 「지옥변」 등은 《우지슈이 이야기》에서 제재를 얻었다. 또한 아포리즘의 제작이나 한문에도 뛰어났다. 좌익, 반군부적인 자기 주장을 펼쳤고 실제로 그런 작품도 다수 발표하고 있는데, 군인의 계급 투쟁을 「유치원생 장난 같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혹평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군부에서 저작물에 대한 검열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 검열 때문에 정정되거나 가필, 삭제를 면치 못한 부분도 많다. 그러한 한편으로 해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의를 품은 듯, 육군 유년학교 교관이던 도요시마 요시오(豊島与志雄)에게 「좋은 직장이 있다」며 해군 기관학교로 초정하여 도요시마가 프랑스어 촉탁 교관으로 근무하게도 주선하였다. 우치다 햣켄(内田百間)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추천으로 해군 독일어 촉탁 교관이 되었고, 훗날 우치다는 1934년(쇼와 9년)에 쓴 「죽장기」(竹杖記)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신의 강사직 알선 및 협상에 어느 정도 역할을 맡았던 것을 적고 있다. 작품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등장시킬 때는 별명인 "오히루메무치"(大日孁貴)을 이용했는데, 이는 "아마테라스"라는 호칭이 당시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기도 했던 아마테라스를 그대로 글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되어 불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기에, 태양신, 그것도 자연신의 성격을 가진 신으로써 "오히루메무치"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담배를 몹시 좋아해서 하루 180개피씩 피웠다고 하며, 『바다 주변』, 『교토 일기』, 『겐가쿠 산보』에도 시키시마 종목의 담배가 등장한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당시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살 첫날 밤 후 그 경험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공포스러워서 자경단 활동을 접었다고 한다. 장국영 장국영(, , , 1956년 9월 12일 ~ 2003년 4월 1일)은 홍콩의 배우이자 가수이다. 하카계 출신으로, 홍콩 출생이며 원적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성 메이저우 시이다. 중산층 집안의 10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영국 북부의 리즈 대학교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공부했으나 졸업하진 못했다. 홍콩으로 귀국후 우연히 나간 노래콘테스트에서 AMERICAN PIE를 불러 2위로 입상하여 데뷔하였다. 1970년대에 홍콩 RTV (現 ATV/亞洲電視)에 가입, 《악어루 (鰐魚淚)》,《완화세검록 (浣花洗劍錄)》,《 (情人箭)》등에 출연했지만 평가는 전무했다. 그러다가 《영웅본색》, 《패왕별희》 등으로 아시아 권을 비롯한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에서 저우룬파(주윤발)과 함께 주연을 함으로써 이 영화의 인기와 함께 한국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6년 홍콩 ATV의 Asian Music Contest에서 2등상을 수상. 가수 활동으로 슈퍼스타가 된 후 TV 브라운관으로 시작해서 영화와 가요계를 넘나들어 활동했다. 그러다 1990년 고별콘서트를 끝으로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캐나다에서 1년간 휴식 후 귀국하여 영화배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 후로 영화속 O.S.T.제작 등에 한하여 음악활동을 해오다 1995년 앨범 총애 (寵愛)를 발매함으로 다시 가수로 재개, 2000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여러 아시아 지역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러나 2000년에 가수 분야에서 다시 은퇴하고 2003년 사망할 때까지 영화배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다음은 그의 앨범목록이다.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 22세 쯤에 여배우 모순균과 교제했었으며, 1981년 영화 "Agency 24"를 촬영하면서 만난 여배우 예시배(倪詩蓓)와도 2년 동안 교제한 바 있다 1997년 콘서트에서 남자 애인 탕허더와 함께 나타났으며, 탕허더는 장국영이 죽을 때까지 관계를 지속했다.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투신 자살했다. 향년 48세다. 그해 4월 5일 추도식에 많은 팬들이 SARS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 홍콩으로 찾아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국영이 죽은 4월 1일은 만우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론사들의 만우절 거짓말 이벤트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홍콩 경찰은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고 밝혔는데 여러가지 부분에서 논란이 있으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장국영의 전 재산 460억을 상속받은 애인 당학덕(탕허더, 통혹딱)이 지목된다. 통계학 통계학(統計學, )은 산술적 방법을 기초로 하여, 주로 다량의 데이터를 관찰하고 정리 및 분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근대 과학으로서의 통계학은 19세기 중반 벨기에의 케틀레가 독일의 "국상학(國狀學, Staatenkunde, 넓은 의미의 국가학)"과 영국의 "정치 산술(Political Arithmetic, 정치 사회에 대한 수량적 연구 방법)"을 자연과학의 "확률 이론"과 결합하여, 수립한 학문에서 발전되었다. 통계학은 관찰 및 조사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로부터, 응용 수학의 기법을 이용해 수치상의 성질, 규칙성 또는 불규칙성을 찾아낸다. 통계적 기법은, 실험 계획, 데이터의 요약이나 해석을 실시하는데 있어서의 근거를 제공하는 학문이며, 폭넓은 분야에서 응용되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통계학은 실증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 활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흔히 순수수학과는 다소 구분되는 응용수학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통계학의 방법을 통해, 실제의 수치들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을 막고 연구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통계학은 과학, 산업, 또는 사회의 문제에 적용되며 모집단을 연구하는 과정이 우선시된다. 모집단은 "한나라 안에 사는 모든 사람" 또는 "크리스탈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와 같이 일정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통계학자들은 전체인구(인구조사를 하는 기업)에 대한 데이터를 편집한다. 이것은 정부의 통계관련 법률요약집같은 조직화된 방법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기술통계학은 모집단의 데이터를 요약하는데 사용된다. 도수 및 비율 (경주 등) 범주 형 데이터를 설명하는 측면에서 더 유용할 동안 수치 기술자는 연속적인 데이터 유형 (소득 등)에 대한 평균과 표준 편차를 포함한다. 데이터 분석 방법 엄청난 자료가 연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경제지표연구, 마케팅, 여론조사, 농업, 생명과학, 의료의 임상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는 통계는 단연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고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리통계학은 수학의 방법을 통계학에 적용한 것이다. 통계학은 원래 국가에 대한 과학으로 생각되었는데 즉, 국가의 땅, 경제, 군력, 인구 등에 관한 사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었다. 사용되는 수학적 방법은 해석학, 선형 대수학, 확률분석, 미분 방정식과 측도 이론적 확률이론 등을 포함한다. 영어의 "statistics"(통계학, 통계)는 확률을 뜻하는 라틴어의 "statisticus"(확률) 또는 "statisticum"(상태), 이탈리아어의 "statista"(나라, 정치가) 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국가라는 의미가 담긴 이탈리아 어 "statista"의 영향을 받아, 국가의 인력, 재력 등 국가적 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학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근대에서의 통계학은 벨기에의 천문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근대 통계학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 받는 케틀레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통계학자들로 구성된 9개의 회의를 소집한 것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수집되고 분류된 숫자 데이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1829년부터이고, 약자로 stats가 처음 기록된 것은 1961년부터이다. 또, 통계학자의 의미인 statistician이 사용된 것은 1825년부터이다. 매우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적절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해답을 구하는 과정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방법을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가 통계학이다. 통계학을 필요로 하는 연구분야는 농업, 생명과학, 환경과학, 산업연구, 품질보증, 시장조사 등 매우 많다. 또한 이러한 연구방식은 기업체와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필요한 자료의 형태,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 문제에 대한 최선의 답을 구하기 위한 분석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통계학자의 역할이다. 자료는 어떤 특정한 현상(주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하여 설계하고 계획한 실험에서 나온다. 이런 종류의 자료, 즉 실험자료는 농업연구와 같은 분야에 흔히 있다. 통계학자들은 이미 나온 실험자료를 분석하는데만 관심이 있지않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주어진 문제를 실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실험을 계획하는데 관심이 있다.또 다른 형태의 자료를 관측으로부터 얻는다. 조사자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가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조사한다. 이런 예로는 인구 및 주택센서스와 같은 전수조사, 여론조사, 교통량조사 등등이 있다. 이 경우 조사방법과 설문지 작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설문지 조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설문지 작성 요령이다. 묻고자 하는 질문을 짧고 명확하게 물어야 하고 응답자가 고민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설문지는 묻고자 하는 질문이면 무엇이든지 다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실험의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변인이 다른 어떤 변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조사대상을 기준으로하면 대상이 되는 통계 집단의 단위를 하나하나 전부 조사하는 관찰 방법인 전수조사(全數調査)와 모집단의 일부를 표본으로 추출하여 조사한 결과로써 모집단 전체의 성질을 추측하는 통계 조사 방법인 표본조사(標本調査)가 대표적인 조사 방법이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할때에는 자료의 양질이 측정수준에 따라 분류된다. 자료의 측정수준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측정수준에 따라 통계에 이용해야 할 요약 통계량이나 통계 검정법이 다르게 된다. 조직적인 통계 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질문서를 만들어 선정된 가구에 배포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실험계획은 자료수집전에 미리 어떻게 실험할것인지 계획하여, 원하는 자료를 정확하게 수집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자료 수집의 규모와 대상, 할당 방법을 바르게 결정하고 정당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검토한다. 설문지 작성법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설문지 작성은 실험계획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대개 별개의 실습을 통해 체득하여야 한다. 설문지는 "앙케이트(Enquete)"라고도 하며 통계 자료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을 기록하는 하나의 서식이다. 이를 이용해 설문지 작성자, 응답자들의 객관적인 생각, 각자의 가치와 신념, 태도 등과 같은 여러 정보를 수집할 수있다. 설문지는 가능한 표준화 되도록 작성해야한다. 필요한 정보를 더욱 포괄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설문지는 다섯 가지 요소 응답자에 대한 협조요청, 식별자료, 지시사항, 설문문항, 응답자의 분류를 위한 자료로 구성된다. 설문지는 여러 번 수정, 검토 과정을 거쳐야 의도한 자료의 수집이 가능하다. 설문지를 이용한 통계자료 수집은 비교적 비용이 적게들고 큰 표본에도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수집 방법에 비해 무응답률이 높은 편이며 응답에 대한 보충설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추론 통계는 기술통계로 어떤 모집단에서 구한 표본정보를 가지고 그 모집단의 특성 및 가능성 등을 추론해내는 통계적 방법이다. 보통 수집된 자료는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미리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획득한 자료(모집단)을 가지고 여러 그래프를 그려보는 와중에 또다른 별개의 분석방법을 추가로 채택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집단에 대한 전체적 조감을 해보고 또다른 분석방향을 모색해 보는 과정에 해당한다. 추론 통계는 바탕인 기술 통계량이 있어야 한다. 이 추론 통계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검사를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대규모 집단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 소수의 집단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추론 통계는 기술 통계량의 정확성을 유지하는 작업으로서 사용한다. 보통 일반적인 추론은 실험 결과가 기존의 방식, 또는 다른 품종간 비교 등에서 차이점이 유의한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기술(記述) 통계는 측정이나 실험에서 수집한 자료의 정리, 표현, 요약, 해석 등을 통해 자료의 특성을 규명하는 통계적 방법이다. 기술통계에는 분석방향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단순한 평균 분산 등의 상투적인 분석 이외에, 모집단에서 어떤인자들이 있는지 뽑아내보는 인자분석과, 특정표본이 어떤모집단에 속하는지(원 모집단을 어떻게 여러 집단으로 나눠야 하는지) 판단하는 판별분석, 두 인자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정준상관분석, 인자들의 숫자를 줄여 단순화 하는 주성분분석, 그 외 군집분석 등, 다양한 분석방법이 존재한다. 다양한 통계분석을 할 수 있고 사회과학, 의학 등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프로그램이나 계산 속도가 느려 큰 규모의 자료를 다루기에는 편리하지 않다. 통계학은 컴퓨터 과학, 프로그래밍 언어, 선형대수학, 해석학, 분포론, 수치해석, 확률론 등 여러 학문과 관련되어 있다. 통계학과 사회과학의 발전에 따라 회귀분석, 인과분석 등과 같은 평가모형들이 발전되고, 이들이 정책평가에 응용됨으로써 정책영향의 평가에 공헌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계속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특히 정보화사회와 빅데이터 시대를 맞아 다양한 사회정보의 수집·분석·활용을 담당하는 새로운 직종으로 기업, 정당, 지방자치단체, 중앙정부 등 각종 단체의 시장조사 및 여론조사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조사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는 관련 학문이 필요하게 되어 사회조사분석학이 등장하게 된다. 사회조사분석사란 기업이나 정당, 지자체, 중앙정부 등 각종 단체가 필요로 하는 조사를 수행해 분석, 보고하는 전문 인력군이다. 주로 경영, 조사기획, 자료분석,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므로 조사방법론, 사회통계, SPSS 통계분석 실무 등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현대에 들어와 데이터 과학자들로 구성된 통계 조직은 기관과 단체 그리고 기업의 수익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데이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을 얻어낸다. 미래를 예측해 더 나은 결과물을 처방한다. 수많은 데이터 가운데 의미 있는 데이터를 찾아냄으로써 더 나은 의사결정을 돕는 작업이 있는데 데이터 클리닝, 데이터 마이닝 등이다. 기업과 기관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생산·판매와 서비스 등 핵심 직무에서 영업력 개선과 사원 복지 등 전 영역에 걸쳐 이같은 데이터 과학 조직의 역할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주요 데이터에 대한 분석과 통계가 이뤄지는 비즈니스인텔리전스(BI) 조직이라 부른다. 데이터 분석 조직을 운영하는 IT 조직은 시스템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를 분석해 기업의 핵심 영역에 가치를 더하는 조직으로 변모 중이다. 전사자원관리(ERP)고객관계관리(CRM)생산관리시스템(MES)경영 정보 시스템(MIS)전략적 기업 경영(SEM) 등 각종 시스템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데이터에 대한 분석능력이 미래를 예측하는 핵심 경쟁력인 시대, 이른바 `데이터 경영` 시대의 개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빅 데이터’ 기술의 시대라고 하는데 미국의 유명 경제 출판 및 미디어 기업인 포브스도 미래의 유망직업 중 하나로 '데이터 마이너(정보수집 분석가)'를 선정하기도 했다. 포브스에 의하면 빅 데이터(Big Data) 데이터 마이닝이란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도구의 데이터 수집·저장·관리·분석의 역량을 넘어서는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 세트 및 이러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로되는 ‘빅 데이터’를 보완, 마케팅, 시청률조사, 경영 등으로부터 체계화해 분류, 예측, 연관분석 등의 데이터 마이닝을 거쳐 통계학적으로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부터 정보통신부의 산하단체로 사단법인 한국BI데이터마이닝학회가 설립되어 데이터 마이닝에 관한 학술과 기술을 발전, 보급, 응용하고 있다. ‎또한 국내·외 통계분야에서 서서히 빅 데이터 활용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국가통계 업무를 계획하고 방대한 통계자료를 처리하는 국가기관인 통계청이 빅 데이터를 연구하고 활용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빅 데이터 연구회'를 발족하였다. 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빅 데이터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조직의 전략방향을 제시하는 데이터과학자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와 일부 기업이 데이터과학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에 있어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컴퓨터 과학 컴퓨터 과학()은 전산 이론,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에 중점을 둔 정보과학의 한 분야이다. 정보 자체보다는 정보의 수집ㆍ전달ㆍ축적ㆍ가공을 하는 도구로서의 기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전산 및 그 응용기술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의미하며 전산 이론 및 시스템 설계를 다루는 전문가를 컴퓨터 과학자라 부른다. 컴퓨터 과학의 하위 분야는 컴퓨터 프로그램 실행의 실용적인 기술과 컴퓨터 시스템의 응용 그리고 순수하게 이론적인 분야로 나뉠 수 있다. 몇몇 계산 문제의 기본적인 속성을 공부하는 계산 복잡도 이론과 같은 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이것과 다른 컴퓨터 그래픽스는 그래픽카드가 메인보드의 신호를 받고, 모니터로 전송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 응용에 중점을 둔다. 또 다른 하위 분야는 계산 실행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프로그래밍 언어 이론은 계산 서술의 접근을 공부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문 그 자체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복잡한 시스템 사용의 다양한 측면을 조사하고,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은 컴퓨터와 계산을 유용하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접근이 쉽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컴퓨터 과학의 역사는 현대의 디지털 컴퓨터의 역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판과 같이 계산을 수행하는 기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1623년에는 최초의 계산기계가 만들어졌고, 찰스 배비지는 19세기 초에 차분기관을 만들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 IBM사가 펀치카드 시스템(PCS)을 개발하여 회계에 관련된 일을 하도록 보급하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주어진 한 가지의 일만 수행할 수 있었다. 1920년 이전까지 '컴퓨터'(computer)는 계산(compute)을 담당하는 사무관을 일컫는 용어였다. 쿠르트 괴델, 알론조 처치, 앨런 튜링과 같은 컴퓨터 과학 초기의 학자들은 계산 가능성 문제(종이와 연필만을 가진 사무관이 철저하게 어떠한 지시에 따라 행동하여 계산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에 흥미를 느꼈다. 이러한 흥미는 계산이라고 하는, 지겨울 수도 있고 오류율이 높은 작업을 자동화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은 이리하여 한 가지의 종류의 작업만 수행할 수 있었던 기존의 기계들과는 다른, 이론적으로 어떠한 계산도 가능한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이 현대 컴퓨터 과학의 지평을 열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더욱 강력한 기능을 지닌 계산기들이 등장했고, 이때부터 '컴퓨터'는 사람이 아닌 이들 기계를 부르는 용어로 굳어졌다. 컴퓨터가 단순한 숫자 계산보다 더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알려지면서 컴퓨터 과학이라는 분야가 더욱 넓어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여러 대학에 컴퓨터 과학 학과와 전공 과정이 생기면서 컴퓨터 과학이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으며, 학문의 쓰임새에 따라 세분되었다. 컴퓨터 과학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기계에 대한 학문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유명한 컴퓨터 과학자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는 "컴퓨터 과학에서 컴퓨터란, 천문학에서 망원경 이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보급하는 것은 컴퓨터 과학의 범주내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는 분야는 컴퓨터 공학으로 불리고, 컴퓨터의 보급과 사용에 관한 연구는 정보 기술 또는 정보 시스템의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컴퓨터와 연관된 이러한 분야들은 컴퓨터 과학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왔다. 컴퓨터 과학 연구는 인공지능, 인지 과학, 물리학, 그리고 언어학과 같은 학문과 공생한다. 많은 과학 분야와 비슷하게 컴퓨터 과학도 수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수학에 기초를 둔 과학의 한 분야이다. 컴퓨터 과학의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친 수학이 조지 불의 불 대수이다. 불 대수는 이진법을 기반으로 한 대수학으로, 그 외에 체론과 환론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의 컴퓨터 과학은 쿠르트 괴델과 앨런 튜링 등의 수학자들이 큰 영향을 끼쳤고, 수리논리학, 범주론, 도메인 이론, 대수학과 같은 수학 분류들은 컴퓨터 과학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스탠 켈리-부틀은 ""과학과 컴퓨터 과학의 관계는 유체동력학과 납공업의 관계와 같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컴퓨터 과학이 과학의 특성을 충분히 갖지 않는다는 오해에 기인한다. 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공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공학의 용어 정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모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공학은 컴퓨터 과학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소프트웨어 공학은 다른 분야에 대한 응용이나 자원을 운용하는 방법 등 실용적인 특징에서 컴퓨터 과학의 다른 분야와 잘 구분된다. 컴퓨터 과학은 그 이론의 적용법에 따라 여러 분야로 나뉜다. 일반적인 분류는 다음과 같다. 위키백과 위키백과(Wiki百科, ) 혹은 위키피디아(, )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며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다언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2001년 1월 15일,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가 시작하였고, 대표적인 집단 지성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위키백과의 운영은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이 하고 있다. 2016년 5월 기준, 영어판 532만여 개, 한국어판 개를 비롯하여 300여 언어판을 합하면 4천만 개 이상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위키백과의 저작권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두 라이선스 모두 자유 콘텐츠를 위한 것으로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사용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위키백과 이전에도 온라인 백과사전을 운영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위키백과 영어판은 전문가들이 작성했던 백과사전인 누피디아(지금은 없어짐)에서 비롯하였다. 누피디아는 웹 포털 회사인 보미스가 2000년 3월 9일 개시하였다. 보미스의 CEO였던 지미 웨일스와 편집장 래리 생어는 누피디아의 글들을 오픈 콘텐츠로 제시하기로 하였고 리처드 스톨먼이 주도한 GNU 자유 문서 라이선스로 제공하였다. 누피디아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고,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백과사전으로 위키백과를 개설하였다. 생어는 모두의 백과사전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름에 위키를 넣었다. 2001년 1월 10일, 생어는 누피디어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누피디어 프로젝트를 보완하기 위해 위키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위키백과는 2001년 1월 15일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도메인은 www.wikipedia.com을 사용하였고 사용 언어는 영어 하나뿐이었다. 래리 생어는 위키백과의 출범 소식 역시 누피디어 메일링 리스트를 통하여 알렸다. 위키백과가 시작된 지 한 달 안에 정책이 수립되었다. 이후 몇 가지 정책이 수립되면서 위키백과는 누피디아와는 별개인 서비스가 되었다. 애초에 보미스는 위키백과를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위키백과의 초기 편집자들은 누피디아, 슬래시닷, 그리고 웹 검색 엔진을 통해 유입되었다. 2001년 8월 8일 위키백과의 문서수는 약 8,000 개가 되었다. 2001년 말이 되자 위키백과는 18개 언어판으로 늘었고, 문서 수는 2만여 개까지 늘어났다. 위키백과를 서비스 하는 언어는 2002년 말에는 26개, 2003년 말에는 46개, 2004년 말에는 161개로 늘어났다. 누피디아는 위키백과와 병립하여 운영되다가 컨텐츠를 위키백과로 넘기고 2003년 서버를 다운시켜 마감하였다. 2002년 사용자 사이에서 위키백과의 광고 수주와 그에 따른 상업적 운용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이에 따라 스페인어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위키백과 소스를 포크하여 별도의 위키백과인 엔시클로페디아 리브레(Enciclopedia Libre Universal en Español)를 개설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지미 웨일스는 위키백과에 광고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도메인을 wikipedia.com에서 wikipedia.org로 변경하였다. 영어 위키백과의 증대 속도는 2007년 초 정점을 찍었고, 2009년 8월 3백만 문서를 넘겼다. 위키백과 전체의 문서수는 2006년 가장 빠르게 늘어 매일 약 1,800 개의 문서가 새로 생겨났다. 그 뒤로 문서 증가 속도는 둔화되어 2013년의 경우 연평균으로 보았을 때 매일 약 800개의 문서가 새로 생겨났다. 위키백과의 성장 둔화 원인에 대해 팰로앨토 연구소는 프로젝트의 품질이 고급화 되면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성장 둔화에 대한 다른 분석으로는 "낮은 가지에 달린 열매"처럼 주제나 가치가 분명하여 쉽게 만들 수 있는 문서는 이미 다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2009년 11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 대학교의 연구자는 2009년 1분기 동안 영어 위키백과가 49,000 여명의 기여자를 잃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2008년의 같은 기간에 줄어든 기여자 수가 4,900 여명이었던 것에 비해 열 배나 더 많은 수치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까다로워진 편집 지침의 증가가 이러한 경향을 이끌었다고 보도하였다. 지미 웨일스는 이러한 연구가 잘못된 방법론에 의한 것이라며 분석 결과를 거부하였다. 2년 뒤인 2011년 지미 웨일스는 한 인터뷰에서 기여자 감소를 인정하였지만, 2010년 6월의 "최소 36,000 명의 편집자"에서 2011년 6월 당시의 35,800 명의 편집자 사이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위키백과 편집자의 수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라고 말하였다. 2013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테크놀로지 리뷰》에 실린 〈위키백과의 하락〉("The Decline of Wikipedia")은 지미 웨일스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 글의 분석에 따르면 위키백과는 2007년 이후 위키백과 문서를 업데이트하고 교정하던 자원 편집자 가운데 3분의 1을 잃었으며, 편집자의 상당수는 사소한 편집만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디 애틀랜틱》 2012년 7월호는 의 수 역시 줄어들었다고 보도하였다. 2013년 11월 25일 《뉴욕》의 캐서린 워드는 “여섯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웹싸이트인 위키백과가 내부 비판에 휩싸였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2007년 1월 위키백과는 처음으로 가장 인기있는 웹사이트 리스트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컴스코어는 위키백과의 연간 방문자를 4,290만 명으로 집계하며 9위로 올렸고, 《뉴욕타임즈》는 10로 올렸다. 애플은 11위로 집계하였다. 2006년도의 순위가 33위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부상이었다. 2015년 3월 위키백과는 5위를 기록하였다. 이 시기 순위는 알렉사 인터넷의 조사에 의한 것으로, 위키백과는 2014년 내내 매 월 8억 이상의 페이지 뷰를 기록하였다. 2012년 1월 영어 위키백과는 미국 의회의 온라인 저작권 침해 금지 법안(SOPA)와 지적 재산권 보호 법안(PIPA)의 제정 시도에 맞어 SOPA와 PIPA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24시간 블랙아웃 시위를 벌였다. 2014년 1월 20일 수보드 바르마(Subodh Varma)는 《이코노믹 타임즈》에 투고한 글을 통해 위키백과가 2012년 12월에서 2013년 12월 사이에 전체적으로 페이지 뷰가 10퍼센트에 달하는 2억 번 이상의 페이지뷰를 잃었다고 발표하였다. 주요 언어판에 따라 나누면 영어 위키백과의 페이지뷰 감소율은 12%, 독일어가 17%, 일본어는 9% 였다. 바르마는 "만일 위키백과 운영자들이 통계 집계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지난해 도입된 구글의 지식 그래프가 그 입을 다물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욕 대학교의 부교수 클레이 셔키는 지식 그래프가 다른 사이트들의 페이지뷰를 잠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검색 페이지에서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바로 볼 수 있는데 굳이 그 싸이트를 방문하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2016년 12월 위키백과는 가장 인기있는 웹사이트 리스트에 5위로 기록되었다. 위키백과의 문서 수는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영어 위키백과 5백3십만 개 이상, 스웨덴어 위키백과와 세부아노어 위키백과가 3백7십만 개 이상, 독일어 위키백과 2백만 개 이상, 네덜란드어 위키백과와 프랑스어 위키백과가 1백8십만 개 이상 등의 순위를 보이고 있으며, 운영중인 295개의 모든 언어를 합하면 약 4천3백3십만 개 이상이 된다. 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편집과 관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글을 고칠 수 있는 체계인 위키로 만들어져 있어 집단 지성적 특성을 가진다. 개방성은 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원칙적으로 사용자들은 누구든 거의 모든 문서를 새로 만들고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은 동시에 악의적인 문서의 훼손이나 부정확한 내용의 수록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편집 규칙을 정하고 일부 문서에 대한 생성과 편집을 규제하고 있다. 2009년 이후 여러 언어 마다 위키백과 편집에 대한 커뮤니티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대중적 관심이 높은 문서에 대한 편집을 위해서는 로그인이 필요하도록 하였고, 독일어 위키백과는 모든 문서에 대해 로그인 된 사용자만이 편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과도한 편집 규제는 위키백과 성장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있고,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서도 은 가운데 하나로 새로운 사용자를 포용하기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한편, 위키백과 커뮤니티 내에 존재하는 편향으로 인해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에 대한 개방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2014년 8월 게이머게이트 논쟁에서 영어 위키백과의 가 내린 5명의 여성주의 운동가 차단 결정은 위키백과의 개방성에 대한 많은 논란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위키백과의 문서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수정된다. 위키백과의 편집 시스템인 미디어위키는 다양한 방법으로 문서의 수정 사항을 사용자에게 알려주어 검토할 수 있도록 한다. 사용자는 문서의 역사를 확인하여 누가 언제 어떤 내용을 수정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변경 내용이 악의적인 문서 훼손이라면 사용자는 이를 손쉽게 되돌릴 수 있다. 또한 사용자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최근 바뀜"과 "주시문서 목록" 등의 기능을 통해 문서의 변경 사항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들은 위키백과가 으로부터 문서 훼손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위키백과는 시작과 함께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녔다. 누군가 보다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사용자의 편집을 검토하고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 있다. 위키백과의 공동창립자인 래리 생어는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위키백과를 떠나 전문가의 검토를 거치는 시티즌디움을 창립하였다. 위키백과 역시 몇 차례의 명백한 오류와 특정 집단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완전한 개방 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USA 투데이》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존 시겐설러가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거짓 정보가 위키백과에 올라온 사례는 오랫동안 위키백과 문서의 오류에 대한 사례로 거론되었고, 2016년 1월에는 스위스의 정보 기관 공무원이 수년에 걸쳐 약 5,500 건에 달하는 문서를 악의적으로 편집하였다가 아이피가 차단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위키백과의 문서 품질은 사용자들의 지속적인 수정과 검토에 의해서 유지되고 향상된다. 2003년 안드레 시포릴리는 위키백과 컨텐츠의 유지는 파괴적 활동보다 창조적 활동량이 훨씬 많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묘한 거짓 정보는 매우 오랫동안 검토되지 못하고 남아있기도 한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2005년 1월 31일 등재된 연쇄 강간범 잭 로비쇼라는 문서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을 서술한 것이라는 것을 2015년이 되어서야 발견한 일도 있었다. 이 문서는 2015년 9월 3일 삭제되었다. 위키백과의 컨텐츠는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용자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위키백과는 과 같은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위키백과의 모든 문서에는 "토론" 탭이 있어서 사용자들 사이에 문서 개선을 위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와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위키백과를 운영하고 있는 위키미디어 재단은 매년 세계적인 컨퍼런스인 위키마니아 행사를 갖고 있다. 2016년 위키마니아는 이탈리아의 에시노라리오에서 열렸다. 위키마니아에서는 위키백과뿐만 아니라 위키미디어 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데이터, 위키책, 위키문헌, 위키낱말사전과 같은 여러 자매 프로젝트의 주요 관심사도 함께 논의된다. 위키미디어 재단은 이들 여러 프로젝트의 활성화를 위해 세계 각지의 지부나 사용자 모임을 지원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가 자발적 사용자 모임으로 활동중이다. 한국위키미디어협회는 2016년 1월 15일 위키백과 15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종종 컬트 문화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이 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것은 아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은 훌륭한 활동에 대해 를 부여하여 서로의 동기 유발을 하기도 한다. 위키백과는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한다. 다중이 익명으로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커뮤니티가 활력을 띄면 정보의 질은 꾸준히 향상된다. 위키백과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크라우드 소싱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위키백과에 정보를 추가하는 사람들은 전체 사용자 가운데 극히 소수라는 연구가 있고, 로그인 하지 않은 사용자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커뮤니티가 이등시민 취급을 한다는 비판도 있다. 다트머스 대학교 연구진은 이를 검증하기 위한 2007년 연구에서 "로그인 하지 않은 익명의 편집자나 기여 횟수가 적은 편집자의 활동 역시 로그인 사용자와 동등한 신뢰성을 보인다"고 밝혔다. 2009년 《비지니스 인사이더》의 편집인 헨리 블라젯은 위키백과 문서에 대한 표집 조사 결과 대다수의 문서가 "아웃사이더"에 의해 생성된 뒤 "인사이더"에 의해 완성된다고 분석하였다. 몇몇 언어의 위키백과 커뮤니티는 자체적으로 문서들을 엮어서 출판물을 제작하기도 하는데, 독일어 위키백과의 경우 독일어 위키백과의 문서를 모아 2004년에 CD로, 2005년, 2006년에는 DVD와 책으로 제작하였다. 위키백과의 내용은 처음에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아래 배포되었으나 2009년 6월, 로 변경되었다. 위키백과는 특별한 위계가 없는 사용자들의 집단 활동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요소를 갖는 민주주의 체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내의 모든 문서는 직접 내용 편집에 참여한 사용자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위키백과의 이러한 은 커뮤니티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가치에 대한 사적 이익 추구를 억제함으로써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고자 만들어졌다. 위키백과의 관리는 의 정신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 따라 이루어진다. 정책과 지침은 커뮤니티의 에 의해 수립되거나 수정된다. 총의의 개념은 2005년 찰스 메튜의 위키미디어 메일링 리스트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단순한 만장일치가 아닌 현시점에서 커뮤니티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이다. 위키백과의 커뮤니티는 각각의 언어마다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판마다 총의는 다를 수 있다. 위키백과 초창기 가장 큰 논란은 문서의 중립성 확보였고, 이에 따라 위키백과가 시작된지 한 달 만에 이 정책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역시 2004년 중립적 시각 정책을 도입하였다. 문서와 커뮤니티의 성장에 따라 지침이 필요한 다양한 사안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 역시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늘어났다. 위키백과 사용자들 사이의 논쟁 또는 분쟁은 모두 위키백과 커뮤니티 안에서 해결된다. 사용자들 사이의 문제는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문서의 훼손이나 악의적인 행위 등으로부터 선의의 편집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도 필요하다. 문서를 삭제하거나 악의적인 사용자를 차단하는 것과 같은 활동은 커뮤니티 안에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받아 로 선출 된 사용자가 실행한다. 한편 사용자 사이의 논쟁은 와 같은 기구를 통해 상호 조정을 이루기도 한다. 위키백과는 위키미디어 재단이 운영하는 위키미디어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이다.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에는 위키백과 외에도 위키낱말사전, 위키책, 위키미디어 공용, 위키문헌, 위키인용집, 위키데이터 등이 있다. 모든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용자들의 커뮤니티에 의해 운영되며 위키미디어 재단은 이들 프로젝트의 유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관리, 사용자 커뮤니티에 대한 지원과 같은 일들을 담당한다. 위키미디어 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비영리 기구로 위키백과를 비롯한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의 유지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호스팅하고 있다. 위키백과가 시작된 지 2년 후인 2003년 6월 20일 플로리다 주 법인으로 설립되었으며 2007년 본부를 샌프란시코로 이전하였다. 2013년 귀속분 국세청 신고서에 따르면 재단의 기금 수익은 3천9백7십만 달러이고 지출된 경비는 2천9백만 달러이다. 또한 총 자산은 3천7백2십만 달러로 이 가운데 부채는 230만 달러이다. 2014년 5월 위키미디어 재단은 초대 사무국장 슈 가드너가 퇴임하고 2대 사무국장으로 라일라 트레티코프를 지명하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14년 5월 1일자 보도를 통해 새로운 사무국장의 취임을 소개하면서 트레티코프의 “정보는 공기와 같이 자유를 좋아한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2016년 6월 3대 사무국장으로 캐서린 마허가 취임하였다. 마허는 위키미디어 프로젝트의 운영 방향에 대해 커뮤니티 내에서 상호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위키백과의 운영 프로그램은 미디어위키이다. 오픈 소스로 배포되는 자유 소프트웨어인 미디어위키는 PHP 기반의 위키 소프트웨어로 MySQL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다. 위키백과 초기에는 펄로 작성된 유스모드위키를 사용하였으나 2002년 1월에 마그누스 만스커가 개발한 PHP와 MySQL 기반의 위키가 도입되었고, 다시 2002년 7월 리 다니엘 크로커가 개발한 미디어위키를 3세대 소프트웨어로 도입하였다. 미디어위키는 이후로도 여러차례 업데이트 되어 위키백과를 비롯한 여러 위키미디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가 되었다. 위키백과는 낮 시간을 기준으로 1초에 25,000~60,000페이지 요청을 수신한다. 페이지 요청은 먼저 스퀴드 캐시 서버의 프론트엔드 계층으로 내보낸다. 스퀴드 캐시가 처리할 수 없는 요청은 리눅스 가상 서버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고 있는 부하 제어 서버로 내보낸다. 즉,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렌더링한 페이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아파치 웹 서버들 가운데 하나로 요청을 내보낸다는 뜻이다. 웹 서버는 요청한 페이지를 전달하여 모든 언어판의 위키백과에 대한 페이지 렌더링을 수행한다. 속도를 더 빠르게 하기 위해 렌더링 된 페이지는 만료될 때까지 분산 메모리 캐시에 캐시 처리되며 이로써 대부분의 동일한 페이지 접근을 위해 페이지 렌더링을 완전히 생략할 수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위키백과의 서버는 주로 우분투로 이루어진 리눅스 서버들의 컴퓨터 클러스터로 운영되고 있다. 2009년을 기준으로 위키미디어 재단은 미국 플로리다주에 300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44대의 서버를 운영하였다. 2013년 1월 22일 위키백과는 중요 데이터를 미국의 데이터 센터 공기업인 에퀴닉스로 이전하였다. 위키백과에서는 단순 반복적인 활동을 위해 봇으로 불리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봇은 자주 혼동되는 오탈자를 바로잡거나 자동으로 생성될 수 있는 반복적인 문구의 삽입과 같은 일을 담당한다. 봇 역시 위키백과 커뮤니티의 사용자들이 작성하여 운영하며 잘못된 사용을 막기 위해 별도의 등록 절차를 거친다. 위키백과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편집자의 시각에 따라 누군가 악의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입력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잘못된 정보가 퍼져나갈 수 있다는 점이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2005년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존 시겐설러라는 미국의 전직 언론인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려져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한 익명 사용자가 신바드라는 미국의 코미디언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올려 인터넷 전반에 잘못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또한 위키백과는 미국 내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자유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컨서버피디아가 2006년에 개설되었다. 미 연구팀에 의하면, 영어판 위키백과에 등록된 문서 중 회사 관련 내용의 60% 정도가 잘못된 사실을 담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팀의 교수는 이를 특정 회사들이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위키백과에 회사에 유리한 내용을 삽입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스 신들의 가계도 다음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가계도이다. 광자 광자(光子, photon)는 기본입자의 일종으로, 가시광선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파를 구성하는 양자이자 전자기력의 매개입자이다. 기호는 그리스 문자 formula_1이다. 전자기력의 효과는 미시적, 거시적인 수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데, 광자가 질량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에서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다른 기본입자들과 같이 광자는 양자역학과 입자-파동 이중성 이론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된다. 하나의 현상임에도 파동과 양자라는 두 가지 관측 가능한 모습을 가진 광자의 진짜 성질은 어떤 역학적 모델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빛의 이중성의 묘사, 전자기파에서의 에너지의 위상을 파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전자기파의 양자의 위치는 공간적으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광자 한 개의 에너지는 플랑크 상수(h)에 빛의 진동수(v)를 곱한 값, 즉 hv이고, 운동량은 hv/c(c는 광속)이다. 아이작 뉴턴은 빛이 입자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전적인 입자론은 빛의 파동적인 성질, 특히 간섭을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18세기에 와서는 이중 슬릿 실험을 설명할 수 있는 토머스 영의 파동설이 우세하였고, 제임스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의 완성으로 파동설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와서 고전적인 파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자외선 파탄이 그중 한 예인데, 이에 따르면 열적 평형에 있고 유한한 온도를 가진 고전적 흑체는 무한한 양의 전자기파를 방출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스 플랑크는 전자기파가 양자화 되었다는 가설을 도입하였다 (1901). 그러나 그는 실제로 빛이 입자로 구성되었다기보다는, 어떤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파동의 에너지가 양자화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힐베르트의 가설에서 시작하여, 빛이 실제로 입자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면서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1905). 이후 양자역학의 발전과 양자전기역학의 도입으로, 빛이 양자화되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보손 보손()는 스핀이 정수고,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매개 입자다. 인도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의 이름을 땄다. 페르미온의 반대말이다. 모든 입자는 스핀이 정수이거나 반정수이다. 스핀-통계 법칙에 따라 (유령입자나 애니온 따위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전자(前者)의 경우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고, 후자는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른다. 전자를 보손, 후자를 "페르미온"이라고 부른다. 보손은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므로,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즉, 여러 입자가 동일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광자는 스핀이 1인 보손이다. 따라서, 들어온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흑체가 복사하는 전자기파의 파장 분포는 보스 통계를 따른다. 또 응집물질물리에 나오는 준입자 포논도 보스 통계를 따른다. 현재 알려진 기본 입자 가운데 보손은 다음과 같다. 초대칭이나 각종 대통일 이론 등, 표준 모형을 확장하는 모형들은 대부분 추가 보손을 예측하나, 이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짝수개의 페르미온으로 구성된 합성 보손이 구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구성된 합성 보손이다. 이 밖에도, 보손들로도 합성 보손이 구성될 수 있다. 양자장론의 스핀-통계 정리에 따라, 로런츠 대칭이 깨지지 않는 이상 모든 보손은 항상 정수의 스핀을 갖는다. 즉, 가능한 스핀은 0, 1, 2, … 따위다. 기본 보손의 경우, 와인버그-위튼 정리에 따라 보통 0, 1, 2만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며, 스핀 2인 입자는 중력자, 스핀 1인 입자는 벡터 보손, 스핀 0인 입자는 스칼라 보손으로 불린다. 페르미온과 달리, 보손은 파울리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즉, 한 양자 상태에 임의의 수의 보손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보손은 낮은 온도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등의 특이한 성질을 보인다. 디리클레 합성곱 디리클레 합성곱(Dirichlet convolution) 혹은 디리클레 포갬은 수론적 함수(arithmetic function)의 집합에서 정의되는 이항연산(binary operation)으로, 수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독일 수학자 르죈 디리클레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f", "g"가 수론적 함수 (즉, 자연수에서 복소수로의 함수)일 때, "f", "g"의 디리클레 포갬 "f" * "g"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수론적 함수이다. 여기서 덧셈은 "n"의 모든 양의 약수 "d"에 대해 이루어진다. 이 연산의 일반적인 성질을 몇가지 나열해 보면: 덧셈과 디리클레 포갬으로 수론적 함수의 전체집합은 ε을 곱셈에 대한 항등원으로 하는 가환환(commutative ring)을 이루고, 이를 디리클레 환(dirichlet ring)이라 부른다. 이 환의 unit은 "f"(1) ≠ 0 을 만족하는 f들이다. 나아가, 곱셈적 함수의 집합은 디리클레 포갬과 ε을 항등원으로 하는 가환군(abelian group)을 이룬다. 곱셈적 함수에서 몇가지 중요한 곱셈적 함수들간의 포갬에의한 관계식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주어진 수론적 함수 formula_2에 대해 디리클레 합성곱을 연산으로 하는 역원 formula_3이 존재한다. 이 역원을 계산하는 계산식은 다음과 같다. 맨 첫 번째 항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formula_5일 경우는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모든 formula_7에 대해 1 인 수론적 함수의 역원은 뫼비우스 함수가 된다. 더 일반적인 관계는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의해 유도된다. "f"가 수론적 함수이면, L-급수(L-series)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급수가 수렴하는 복소수 s에 대해, L-급수의 곱은 디리클레 포갬과 다음 관계가 있다. 좌변이 존재하는 모든 s에 대해, 위 관계식은 L-급수를 푸리에 변환과 비교해 보면, 포갬 정리(convolution theorem)과 긴밀하다. 물론 수론적 함수는 연속함수가 아니므로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미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술함수에서 따로 미분을 정의하여 디리클레 합성과 연계하여 사용한다. 주어진 산술함수 formula_2의 미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물론 formula_11는 망골트 함수(Mangoldt function)이다. 예를 들어, 모든 formula_7에 대해 1 인 수론적 함수 formula_14이 있다고 할 때, 관계식 formula_15 때문에 다음이 성립한다 위와 같이 미분을 정의할 경우 다음과 같은 성질들이 성립한다. 동치관계 수학에서, 동치관계(同値關係, )는 논리적 동치와 비슷한 성질들을 만족시키는 이항관계이다. 집합 formula_1 위의 동치관계 formula_2는 반사관계이자 대칭관계이자 추이관계인 이항관계이다. 즉, 다음 조건들이 성립하여야 한다. 집합 formula_1 위에 동치관계 formula_2이 주어졌을 때, 원소 formula_3의, 동치관계 formula_2에 대한 동치류(同値類, ) formula_16는 그 원소와 동치인 원소들의 집합이다 즉, 집합 formula_1의 formula_2에 대한 몫집합(-集合, ) formula_20은 formula_2에 대한 동치류들의 집합이다. 즉, 집합 위의 동치관계로부터, 표준사상을 구성할 수 있다. 즉, 집합 formula_1 위의 동치관계 formula_2에 대하여, 함수 를 표준사상이라고 한다. 반대로, 전사함수 formula_30에 대하여, 이항관계 는 동치관계이며, 그 몫집합은 이다. 집합 위의 동치관계와 그 집합의 분할 사이에는 자연적인 일대일 대응이 존재한다. 즉, 다음과 같다. 집합 formula_1 위의 동치관계 formula_2에 대하여, 그 몫집합 formula_20은 formula_1의 분할이다. 즉, 반대로, 집합 formula_1의 분할 formula_44에 대하여, 이항관계 는 동치관계이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自然哲學- 數學的原理, )는 서양의 과학 혁명을 집대성한 책의 하나이다. 줄여서 '프린키피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라틴어로 쓰여졌다. 이 책에서 뉴턴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요하네스 케플러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알아낸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뉴턴은 자신의 위 두 법칙들로써 증명해 낸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되어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온 천문학의 혁명을 완성하는 한편, 갈릴레오 이후 데카르트, 하위헌스 등을 통해서 이루어져 온 근대 역학의 성공을 눈부시게 보여주고 있다. 에드먼드 핼리도 이 책을 바탕으로 1530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났던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해, 이 혜성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일정한 주기에 따라 1750년대 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견했다. 뉴턴도 핼리도 죽은 뒤인 1758년에 수수께끼 같은 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핼리 혜성이다. 제1편은 운동에 관한 일반적 명제를 논술하였고, 제2편은 매질 속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다루고, 마지막 제3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케플러의 행성의 타원궤도 등의 행성의 운동을 증명하였다. 뉴턴은 그의 이론을 기술하기 위해 미적분학을 개발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로 기하학적인 증명 방법을 사용하고 미적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람들의 이해력을 고려해서라고 한다. 1687년에 초판, 1712년 증보 개정판, 그리고 1726년 제3판이 출간되었다. 저항이 있는 공간 속에서 물질의 입자가 어떻게 운동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 내용은 오늘날의 소위 「유체역학」에 해당한다. 이것은 주로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데카르트의 「소용돌이」우주관에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에 맞추어져 있다. 가장 성과가 많은 부분이다. 태양과 다른 행성들의 질량이 추론되고, 순전히 수량적인 방식을 이용해서 지구의 평평한 모습이 설명되며, 조수의 이론 등이 상세히 제시되고 있다. 슈뢰딩거 방정식 슈뢰딩거 방정식(Schrödinger方程式, )은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적 계의 시간에 따른 진화를 나타내는 선형 편미분 방정식이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도입하였고, 그가 발명한 파동역학의 기본 방정식이다. 파동 함수 formula_1에 대한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해밀토니언 연산자 formula_3는 고전적 해밀토니언에 해당하는 연산자로, 후자를 양자화하여 얻는다. formula_4는 폴 디랙의 브라-켓 표기를 사용해 나타낸, 슈뢰딩거 묘사에서의 힐베르트 공간의 상태 벡터이다. 이를 파동 함수 formula_5로 나타낼 수 있다. (파동 함수에 대한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을 참조하라.) 해밀토니언 연산자 formula_6는 보통 미분 연산자이다. 예를 들어, 퍼텐셜 formula_7 속에 있는, 질량이 formula_8인 비상대론적 입자의 경우 해밀토니언은 다음과 같은 2차 미분 연산자이다. 즉,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2차 편미분 방정식이 된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라그랑지언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퍼텐셜 formula_7 속에 있는, 질량이 formula_8인 비상대론적 입자의 경우 슈뢰딩거 라그랑지언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두 번째 표현은 전미분항(total derivative)을 무시하고 쓴 것이다. 이 라그랑지언을 고전적 가환 또는 반가환 장의 라그랑지언으로 여겨, 양자장론으로 이차 양자화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외부 배경장 속에서 움직이는, 임의의 수의 비상대론적 보손 또는 페르미온을 나타내는 양자장론을 얻는다. 또한, 이 경우 비선형 상호작용항을 추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이 이러한 꼴이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광자의 에너지 E와 진동수 ν 및 플랑크 상수 h 사이의 관계를 로 나타내었다. 1924년 루이 드 브로이는 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가 대응되는 파동함수 formula_16를 가진다는 드 브로이 가설을 발표하고, 파동의 파장 λ와 입자의 운동량 p에 대해 의 관계식을 제안했으며, 이 관계식이 특수상대론 및 위의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식과 일관됨을 보였다. 즉, E = hν는 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위 식들을 각진동수 formula_18와 파수 formula_19 및 formula_20를 이용해 표현하면, p와 k를 벡터로 표현하면 에르빈 슈뢰딩거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1925년 발표하였다. 슈뢰딩거는 평면파의 위상을 복소 위상인자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므로 이며, 마찬가지로 이므로 이고, 따라서 및 각 방향의 부분들을 더하면 이 성립함을 알았다. 이제 이를 총 에너지 E와 질량 m 및 위치에너지에 대한 고전역학적 공식 에 대입하여, 당시에 슈뢰딩거가 얻었던 위치에너지가 주어진 3차원 공간 상의 단일입자에 대한 공식에 도달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비상대론적이므로, 특수상대론과 불합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상대론적으로 일반화하면 스핀에 따라 클라인 고든 방정식이나 디랙 방정식 따위를 얻는다. 이들은 비상대론적인 극한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수렴한다. 또한, 슈뢰딩거 방정식에 비인 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응집물질물리학에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은 슈뢰딩거 방정식에 사승 상호작용을 추가한 것이다. 엔트로피 엔트로피(, )는 열역학적 계의 유용하지 않은 (일로 변환할 수 없는) 에너지의 흐름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 상태 함수다. 통계역학적으로, 주어진 거시적 상태에 대응하는 미시적 상태의 수의 로그로 생각할 수 있다. 엔트로피는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고,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1850년대 초에 도입하였다. 대개 기호로 라틴 대문자 "S"를 쓴다. 엔트로피에는 열역학적 정의와 통계학적인 정의, 두 가지의 관련된 정의가 있다. 역사적으로, 고전 열역학적 정의가 먼저 발전하였다. 고전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그 이론은 원자나 분자 같은 수많은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학설의 안정성은 그러한 성분들의 평균적인 열특성으로 설명된다. 이론을 구성하는 성분의 세부적인 성분들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특성은 온도, 압력, 엔트로피, 열용량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평균적인 지표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 이론의 특성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평형 상태임을 가정하였다. 엔트로피의 고전 열역학적 정의는 최근 비평형 열역학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엔트로피를 포함한 열특성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세계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정역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되었다. 그 예로 처음에는 기체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광자, 음자, 스핀과 같은 양자 역학적으로 생각되는 뉴턴 입자가 있다. 이 이론의 특성에 대한 통계학적 설명은 고전적인 열역학을 사용하여 이론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이 몇몇 변수의 영향을 받는 이론의 최종적인 상태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점점 신뢰할 수 없는 예측 기술이 되어감으로 인하여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적 열역학에서는 엔트로피 "S"의 절대적 값은 정의할 수 없고, 대신 그 상대적 변화만 정의한다. 열적 평형을 이뤄 온도가 formula_1인 계에 열 formula_2를 가하였다고 하자. 이 경우 엔트로피의 증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 식을 적분하여 유한한 엔트로피 차이를 정의한다. 엔트로피는 온도의 함수로써, 주어진 열이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같은 크기의 열량이라도 고온의 계에 더해졌을 때보다 저온의 계에 더해졌을 경우에 계의 엔트로피가 크게 증가한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최대일 때 열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은 최소이고, 반대로 엔트로피가 최소일 때 열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최대가 된다. 실제로 외부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 존재하지만 외부적인 일을 하는 데에 쓰일 수 없는 에너지를 "사용불가능한 에너지"라고 한다. 계의 총 에너지를 "유용한 에너지"와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합으로 정의 할 때, 엔트로피는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주어진 계의 절대 온도에 반비례하는 "사용불가능한 에너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깁스 자유 에너지 또는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와의 관계식에서 "TS" 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엔트로피는 계의 자유 에너지를 결정짓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온도는 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만 정의되는 값이므로, 이와 같은 엔트로피의 열역학적인 정의는 오직 평형 상태에 있는 계에서만 성립한다. 반면 통계역학적인 엔트로피의 정의는 모든 계에 적용된다 (아래 참고). 따라서 엔트로피의 보다 근본적인 정의로는 통계역학적인 정의를 꼽을 수 있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흔히 분자들의 무질서도의 증가로 정의되어 왔으며, 최근들어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분산"으로 해석되고 있다. 통계역학에서는 엔트로피의 차 뿐만 아니라 엔트로피의 절대적 값을 정의할 수 있다. 확률적 상태 분포를 가지는 어떤 계의 앙상블을 생각하자. 여기서 단일계의 상태(미시적 상태) formula_5의 확률을 formula_6라고 하자. 이 경우, 앙상블의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고립된 계의 경우, 통상적으로 모든 미시적 상태의 확률이 같다고 가정한다. 즉 formula_8 (여기서 formula_9는 가능한 미시적 상태의 수)다. 이 경우 다. 여기서 "k" 는 볼츠만 상수다. 이 식은 루트비히 볼츠만이 처음 발견하였다. 열저장고와 열적 평형을 이룬 계의 미시상태는 볼츠만 분포 formula_11를 따른다. 이 경우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3는 분배함수다. formula_14를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로 정의하여, formula_15로 쓰기도 한다. 양자역학적 앙상블은 밀도행렬 formula_16로 나타내어진다. 이 경우, 폰노이만 엔트로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밀도행렬을 대각화하면 그 각 원소는 확률 formula_6가 되므로, 이는 위의 통계역학적 정의와 동등하다. 이 정의는 존 폰 노이만이 발견하였다. 블랙홀은 고전적으로 털없음 정리에 의하여 미시상태가 없다. 그러나 반고전으로 마치 어떤 유한한 엔트로피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 엔트로피는 다. 여기서 formula_20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의 넓이다. 이를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이는 야콥 베켄슈타인(, )이 가설을 세웠고, 스티븐 호킹이 반고전적으로 유도하였다. 또한, 특수한 경우 끈 이론이나 루프 양자 중력 등으로 미시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블랙홀을 포함하는 계의 경우, 베켄슈타인-호킹 엔트로피를 무시하고 계산하면 일반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이를 포함하여 계산하여야만 성립한다. 정보 이론에서의 엔트로피는 확률 변수의 무질서도의 척도이다. formula_21은 특정 온도 formula_22에서 시스템의 에너지 중에서 일로 변환할 수 없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전체 에너지에서 formula_21를 뺀 양이 자유 에너지가 된다. 엔트로피란 우주 내부 어떤 시스템에서 생기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변화하는 량의 척도이다. 엔트로피를 계를 구성하는 성분들의 배열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위치 엔트로피와 열 엔트로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열 엔트로피는 분자들 사이에서의 에너지 양자의 분포들에 의한 구별가능한 배열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된 엔트로피를 말한다. 위와 같이 분류한 엔트로피를 계의 관점에서 본 알짜엔트로피 변화를 나타낼 때 이용할 수 있다. 계와 주위가 갖는 엔트로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formula_24 여기서 열 엔트로피는 계와 주위 모두에 존재하지만, 계를 제외한 모든 곳을 지칭하는 주위에서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는 너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므로 그 변화를 무시할 수 있고, 주위가 갖는 엔트로피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온도, 즉 열 엔트로피이다. 이 때문에 주위의 엔트로피 변화를 열 엔트로피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계에서 열 엔트로피변화는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가 더욱 계의 엔트로피변화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의 엔트로피 변화를 위치 엔트로피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라플라스 방정식 라플라스 방정식(Laplace's equation)은 2차 편미분 방정식의 하나로, 고윳값이 0인 라플라스 연산자의 고유함수가 만족시키는 방정식이다. 전자기학, 천문학 등에서 전위 및 중력 퍼텐셜을 다룰 때 쓰인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땄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를 조화함수라고 한다. formula_1차원 리만 다양체에서 formula_2가 라플라스-벨트라미 연산자라고 하자. 그렇다면 라플라스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2차 편미분방정식이다.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서는 이므로, 이 된다. 우변을 주어진 함수 formula_6로 바꾼 경우 는 푸아송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라플라스 방정식은 formula_8인 푸아송 방정식의 특수한 경우다. 우변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헬름홀츠 방정식을 얻는다. 라플라스 방정식은 formula_10인 경우다. 코시-리만 방정식의 해의 두 성분 모두 각각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즉, 정칙함수의 실수 또는 허수 성분은 조화함수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디리클레 문제란 어떤 영역 formula_11의 경계에서의 φ가 특정 함수로 주어졌을 때, 영역 formula_11위의 해 φ를 구하는 것이다. 열전도에서 등장하는 라플라스 방정식을 빗대어 보면,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경계면의 온도를 특정한 온도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내부의 온도가 더 이상 변화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후 내부의 온도 분포를 찾는 것이 디리클레 문제에 해당한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노이만 경계 조건은 경계 D에서 함수 formula_13 자신이 아니라 법선 도함수를 조건으로 가진다. 물리학에서는 경계에서만 벡터장의 효과를 알고 있을 때 그 벡터장의 퍼텐셜을 구하는 데 사용한다. 라플라스 방정식의 해를 조화 함수라고 한다. 조화 함수는 방정식의 해가 되는 영역에서는 항상 해석적이다. 만일 두 함수가 각각 라플라스 방정식(또는 선형 동차 미분방정식)의 해라면, 두 함수의 선형 결합도 해이다. 이 성질을 중첩의 원리라고 하며 복잡한 문제의 해를 간단한 해들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2차원에서 라플라스 방정식은 두 개의 의존변수 의 형태로 나타난다. formula_16는 격하게 (mesh size) 푸아송 방정식의 차분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복소 범위의 해석적 함수 formula_18의 실수부와 허수부는 모두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formula_19이고 라 하자. formula_21가 해석적이려면 를 만족해야 한다(코시-리만 방정식). 여기서 이다. 따라서 formula_24 는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한다. formula_25도 비슷한 방법으로 라플라스 방정식을 만족함을 보일 수 있다. 극좌표계 formula_26에서 라플라스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그 일반해는 변수분리법으로 구할 수 있고, 다음과 같다. 이는 함수 formula_29의 푸리에 급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즉, 푸리에 급수의 계수는 로랑 급수의 계수와 같다. 3차원 공간에서, 구면좌표계 formula_31에서 변수분리법을 적용하면 라플라스 방정식의 일반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33는 구면 조화 함수이고, formula_34와 formula_35은 임의의 계수다. 물론, formula_18가 원점에서 연속적이려면 formula_37이다. 적분표 적분(積分)은 미적분학의 두 기본연산 중의 하나이다. 적분은 미분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함수에 대한 적분을 모아 놓은 적분표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식에 나오는 formula_1는 적분 상수를 나타낸다. 어떤 함수의 적분은 원시 함수로 나타낼 수 없지만, 특정 구간에서의 적분값을 계산할 수는 있다. 다음은 그들 중 유용한 몇 정적분이다. 삼각함수 수학에서, 삼각함수(三角函數, )는 각의 크기를 삼각비로 나타내는 함수이다. 예각 삼각함수는 직각 삼각형의 예각에 직각 삼각형의 두 변의 길이의 비를 대응시킨다. 임의의 각의 삼각함수 역시 정의할 수 있다. 삼각함수는 복소수의 지수 함수의 실수 · 허수 부분이며, 따라서 복소수를 다룰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장 근본적인 주기 함수이며, 각종 주기적 현상을 다룰 때 푸리에 급수의 형태로 등장한다. 삼각함수에는 3개의 기본적인 함수가 있으며, 이들은 사인(, 기호 sin) · 코사인(, 기호 cos) · 탄젠트(, 기호 tan)라고 한다. 이들의 역수는 각각 코시컨트(, 기호 csc) · 시컨트(, 기호 sec) · 코탄젠트(, 기호 cot)라고 한다. C가 직각인 삼각형 ABC에서, 각 A, B, C의 대변(마주보는 변)의 길이를 formula_1라고 할 때,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또한, 코시컨트, 시컨트, 코탄젠트는 위 세 함수의 역수가 되며,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좌표평면에서 원점을 중심으로 하고 반지름 r의 길이가 1인 원을 단위원이라고 한다. 이 단위원 위의 점 A formula_8에 대해, formula_9축과 점 A와 원점을 잇는 직선간의 각을 formula_10 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오일러의 공식 formula_17에 formula_18를 대입하면, formula_20를 대입하면, 연립하여 풀면, 쌍곡선함수, 사인 · 코사인 · 코시컨트 · 시컨트는 주기가 formula_25인 주기함수이다. 즉, 임의의 복소수 formula_26에 대하여, 탄젠트 · 코탄젠트는 주기가 formula_31인 주기함수이다. 즉, 임의의 복소수 formula_26에 대하여, 사인과 코사인은 실수선 위에서 해석함수이며, 복소 평면 위에서 정칙함수이다. 이들은 복소 무한대 formula_35에서 본질적 특이점을 갖는다. 탄젠트는 실수선의 formula_36 (formula_37)에서 정의되지 않는다. 특별한 각에서의 삼각 함수의 값은 다음과 같다. 각 사분면에 따른 삼각함수의 부호는 다음과 같다. 삼각함수 사이에는 많은 항등식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자주 쓰이는 것은 피타고라스 항등식으로, 어떤 각에 대해서도 사인의 제곱과 코사인의 제곱의 합은 1이다. 이는 반지름의 길이가 formula_43인 빗변이고 밑변이 formula_44 각 formula_9의 대변인 높이 formula_46에 대하여 formula_47를 만족한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삼각함수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또한 단위원에서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삼각함수의 관계는 삼각함수의 덧셈정리이다. 두 각의 합과 차의 사인과 코사인은 x, y에 대한 사인과 코사인으로 구할 수 있다. 이는 제2 코사인 법칙과 두 점 사이의 거리 공식을 연립해 유도할 수 있고, 제1 코사인 법칙과 사인 법칙을 연립해 유도할 수 있고, 오일러의 공식을 이용해 유도할 수도 있다. 두 각의 크기가 같을 경우에는 덧셈정리를 간단하게 배각공식을 이용할 수 있다. 모든 삼각 함수는 다른 삼각 함수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다음은 6개의 기본 삼각함수에 대한 도함수와 부정적분이다. 사인 법칙은 임의의 삼각형 ABC에서 각 A, B, C의 대변 "a", "b", "c"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관계를 만족함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도 성립한다. 여기서 "R"은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의 길이를 나타낸다. 코사인 법칙에는 총 두 가지의 법칙이 있다. 코사인 제 1 법칙에 따르면, 양변의 길이와 알고자 하는 변 사이의 두 각의 크기를 알 경우, 다른 한 변의 길이를 알아낼 때 사용할 수 있다. 코사인 제 2 법칙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확장한 것이다. 가 성립하고, 위의 식을 변형하면 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코사인법칙은 두 변의 길이와 끼인각의 크기를 알 때 삼각형의 나머지 한 변의 길이를 구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또한 모든 변의 길이를 알고 있을 때 각의 코사인값을 구할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 탄젠트법칙은 임의의 삼각형 ABC에서 각 A, B의 대변 "a", "b"에 다음과 같은 식을 만족시킨다. 기원전 2~1세기 그리스의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각도에 대해 달라지는 현의 길이를 다룬 적이 있다. 현재 쓰는 것과 같은 삼각함수의 원형은 굽타 시대 인도 천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후 4~5세기 인도의 천문학 책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아랍어를 통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럽에 전해졌다. 삼각함수가 동아시아에 전해진 것은 16~17세기 때이다. 독일의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요한 슈렉이 명나라에서 저술한 《대측(大測)》(1631) 등의 책에서 사인·코사인·탄젠트를 정현(正弦)·여현(餘弦)·정절(正切)이라고 번역했다. 이 이름은 근대화되기 전의 조선·일본에서 쓰였고, 지금도 중국에서 쓰인다. 르장드르 다항식 르장드르 다항식() formula_1는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다음 미분 방정식의 해가 되는 함수들이다. 스튀름-리우빌 형식으로 쓰면, 이다. 이 함수와 미분 방정식의 이름은 프랑스의 수학자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이 상미분 방정식은 물리와 공학의 여러 분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구면좌표계에서 라플라스 방정식을 풀 때 등장한다. 구체적인 몇몇 르장드르 다항식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formula_4인 경우의 구간 [-1,1]사이에서의 르장드르 다항식의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르장드르 다항식에는 다음과 같은 몇몇 간단한 성질이 있다. 르장드르 다항식 끼리 구간 [-1,1] 에서 formula_13 내적을 취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formula_15은 크로네커 델타를 의미한다. 따라서, 르장드르 다항식은 구간 [-1,1]에서 서로 수직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르장드르 방정식이 스튀름-리우빌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스튀름-리우빌 형식으로 놓을 수 있다. 여기서 고윳값 formula_17이다. 스튀름-리우빌 문제의 해의 집합은 일반적으로 함수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루므로, 르장드르 다항식도 마찬가지로 직교 기저를 이룬다. (다만, 통상적으로 그 노름이 1이 아니게 정의한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점화식이나 선적분, 생성 함수 등 여러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로드리게스 공식()은 르장드르 다항식의 일반식이며, 다음과 같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만족한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생성 함수를 가진다. 르장드르 다항식은 유수적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적분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여기서 적분 경로는 원점을 중심으로 하는 임의의 반시계방향의 폐곡선이다. 소수 소수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로봇 로봇(, )은 사람과 유사한 모습과 기능을 가진 기계, 또는 무엇인가 스스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진 기계를 말한다. 제조공장에서 조립, 용접, 핸들링 등을 수행하는 자동화된 로봇을 산업용 로봇이라 하고, 환경을 인식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가진 로봇을 '지능형 로봇'이라 부른다. 사람과 닮은 모습을 한 로봇을 '안드로이드'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뜻은 형태가 있으며,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라고도 한다. 인공의 동력을 사용하는 로봇은 사람 대신, 또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통상 로봇은 제작자가 계획한 일을 하도록 설계된다. '로봇'이란 용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Carel Čapek)가 1920년에 발표한 희곡 "R.U.R"에 쓴 것이 퍼져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체코어로 "노동"을 의미하는 "robota"가 어원이다. Robot이라는 말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 R.U.R.(Rosuum' s Universal Robots)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robota'에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차페크는 R.U.R.에서 모든 작업능력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면서 인간적 “감정”이나 “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로봇이라고 불리는 인조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다. 로봇은 언젠가 쇠조각으로 변하여 반항하는 정신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죽여 버린다고 하는 비극을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로보틱스(Robotics)라는 말은 로봇의 활용과 로봇 공학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국 과학자이면서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 1920년 1월 2일 ~ 1992년 4월 6일)가 1942년에 발간한 단편 Runaround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명사로서 로봇(robot)은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공포를 주거나 유머스런 행동을 하는 융통성이 없는 기계 인간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을 닮은 것. 팔과 손을 가지고, 인간에게 프로그래밍되어 여러 가지 연속 동작이나 운반 작업을 하고, 주위를 잘 보고, 애초부터 결정된 방법으로 자기의 운동을 조절하여 움직일 수 있는 기계이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1950년 발간한 소설인 'I'Robot'에서 제안된 로봇의 행동에 관한 3가지 원칙이다. 제1법칙: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법칙: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을 거스를 경우에는 제외다. 제3법칙: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을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군사용 로봇이 공격의 기능을 갖출 경우,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게 된다. 그동안 인간이 해 오던 많은 일들을 지금은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는 단조로운 반복 작업이나 따분한 작업, 불쾌한 작업들이 많은데, 이와 같은 작업은 특히 로봇에게 맡기기에 적합하다. 조립 공장에서 리벳 박는 일, 용접, 자동차 차체를 칠하는 일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로봇 쪽이 인간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로봇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정밀도와 정확도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으며, 결코 지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품의 품질은 항상 일정하며 게다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은 양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또한 로봇은 위험한 작업을 대신할 수가 있다. 방호복을 입지 않고 원자력 공장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거나, 유독 화학 물질을 취급할 수가 있으며, 인간에게는 너무 덥거나 추운 환경에서도 일할 수가 있다. 인간의 생명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곳에서도 로봇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폭발물을 수색하거나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일, 그리고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도 그중의 하나이다. 로봇은 우주 공간에서의 작업에 특히 이상적이다. 지구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을 수리하거나 유지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보이저호와 같이 탐사와 발견을 목적으로 먼 천체까지 비행하는 데도 로봇이 사용된다. 한편 가정에서도 점점 많은 로봇이 가사를 돕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많이 이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 간호보조자는 장애자나 노령으로 인해 체력이 약해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서 독립하여 혼자서도 살 수 있도록 해주며,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도와 주게 될 것이다. 로봇이 사용되는 분야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로 힘이나 정밀도를 요하는 작업 담당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컴퓨터를 이용하면, 제품의 생산 계획이나 설계·제조·보관·출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기계 공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작 기계는 금속 등을 가공할 때 사용된다. 과거에는 이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치 제어 공작 기계가 개발되어 기술이 없어도 금속을 가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치 제어 공작 기계는 가공하는 작업의 순서와 내용을 수치 정보로 만들어 기계에 입력시키면 기계가 자동적으로 가공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수치 제어 공작 기계와 자료의 입력 관리를 맡는 컴퓨터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 기계이다. 이 수치 제어 기계에서 더 발전하여 복잡한 가공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가 공작 로봇이다. 주로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 담당 주로 위험한 환경에서의 작업 담당 미국에서는 로봇이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계라기보다 앞으로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어서 주로 터미네이터 등 영화에서 로봇이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나와 있다. 또 무인 조종 비행기 등 군사에서 쓰는 군사 로봇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 2015년, 미국의 로봇 제조사인 한슨 로보틱스에서 일상을 위한 최신 인공지능 로봇 , '한(Han)'을 공개하였다. 한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물론, 사람의 표정, 성, 나이 등을 캐치할 수 있다. 한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인간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에도 시대에는 가라쿠리 인형 같은 로봇이 있었다. 일본은 아시모등과 같은 휴머노이드형 로봇이나 소니의 AIBO와 같은 애완용 로봇 그리고 산업용 로봇 외에도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아톰, 건담 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중국에서는 로봇을 산업이나 가정에 도움을 주는 기계라보다는 사람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과 일본, 심지어는 대한민국까지도 로봇공학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2000년에 선행자(先行者)라는 이름의 직립보행형 로봇을 개발하기도 했으나 선행자의 양 다리 사이에 설치된 파이프 모양의 부속으로 인하여 일본에서 '최종중화병기 선행자'라는 애니메이션이 발표되는 등 개그캐릭터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물의 힘으로 여러 인형이 작동하는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를 제작하였다. 한국은 초기에는 산업이나 경제에 필요한 기계를 제작하였고, 근래에 들어서는 휴머노이드형 로봇 개발에 힘쓰고 있다. 로봇은 산업 뿐 아니라 대회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겨루는 용도로도 제작되고 있다. 또한 물리적인 움직임 없이 사람과 의사소통하며 감정을 교류하는 소셜 로봇도 있다. 예를 들면, 2015년 5월 글로벌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인디고고(Indiegogo)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된 뮤지오가 있다. 깊은 생각 깊은 생각()은 더글러스 애덤스의 과학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등장하는 상상의 컴퓨터이다. 소설 속에서 깊은 생각은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국 컴퓨터는 750만 년 동안 계산을 한 결과 42라는 답을 계산해 내지만, 깊은 생각의 제작자들은 정작 이 답에 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깊은 생각 자신도 궁극의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내놓지 못한 채, 결국 42라는 답에 대한 질문이 무엇인지를 계산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컴퓨터(지구)를 제작할 것을 제안한다. 천만 년 동안 계산을 하고 결과를 내어 놓기 5분을 남겨놓고 지구는 보곤 공병함대에 의해 파괴된다. 원작 라디오 시리즈에선, Geoffrey McGivern이 그 목소리를 담당했고, 후의 LP 녹음과 TV 시리즈에선 Valentine Dyall가 목소리를 연기했다.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던 컴퓨터 딥 블루의 이전 모델도 이 소설 속의 컴퓨터의 이름을 따라 딥 소트(Deep Thought)라 명명되었다. 이후 세대 체스 컴퓨터들의 이름은 딥 프리츠, 딥 주니어 등으로 이어진다. 표준 모형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標準模型, )은 자연계의 기본 입자와, 중력을 제외한 그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전자기 상호작용)을 다루는 게이지 이론이다. 강력을 다루는 양자 색역학과, 약력과 전자기력을 다루는 와인버그-살람 이론으로 이루어진다. 표준 모형에 따르면, 전자와 중성미자 및 기타 렙톤은 기본 입자이나, 강입자는 쿼크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게이지 보손에 의하여 상호작용한다. 게이지 보손은 이론의 대칭을 나타낸다. 표준 모형의 대칭 가운데 강한 상호작용의 대칭은 색가둠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만 관찰할 수 있고, 약한 상호작용의 대칭은 힉스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깨진다. 따라서 거시적으로는 전자기 상호작용의 대칭만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표준 모형은 실험적으로 힉스 메커니즘을 제외하고 1980년대에 완성되었다. 힉스 메커니즘은 2010년대 초에 실험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 표준 모형에서는 중성미자와 게이지 보손, 힉스 보손을 제외한 모든 입자를 디랙 입자로 나타낸다. 이들 입자는 스핀 ½(즉 페르미온)을 가지며, 질량과 전하를 가지고, 그 반입자와 서로 다르다. 표준 모형은 이들 입자의 질량을 예측하지 못하나, 대체로 세대가 높을 수록 더 무겁다. 표준 모형의 디랙 입자 중,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입자는 쿼크, 그렇지 않는 입자는 중성미자와 함께 렙톤으로 분류한다. 쿼크는 ±⅓ 혹은 ±⅔의 전하를 가지고, 중성미자가 아닌 렙톤은 ±1의 전하를 가진다. 이들 입자는 힉스 메커니즘으로 질량을 얻는다. 중성미자는 바일 입자(손지기 페르미온)으로 나타낸다. 즉 스핀 ½(즉 페르미온)을 가지며, 질량과 전하가 없고, 그 반입자와 다른 손지기(chirality)를 가진다. 6종의 쿼크 맛깔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맛깔의 쿼크로 변할 수 있는데, 이를 쿼크 섞임이라고 한다. 쿼크가 섞이는 정도는 CKM행렬이라는 수학적 개체로 나타낸다. 이는 이탈리아의 니콜라 카비보(Nicola Cabbibo)와 일본의 고바야시 마코토와 마스카와 도시히데가 도입하였다. 예를 들어, 중성자는 양성자로 붕괴할 수 있다 (베타 붕괴). 이 과정에서 아래 쿼크는 위 쿼크로 바뀐다. 쿼크 섞임 때문에 표준 모형은 CP 대칭을 보존하지 않는다. 렙톤의 경우, 표준 모형에서는 렙톤이 섞이지 않는다. 즉, 표준모형은 세 종류의 렙톤 수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를 개별적으로 보존한다. 표준모형의 페르미온은 다음과 같이 세 세대로 나뉜다. 각 세대의 서로 대응되는 입자는 질량을 제외하고는 정확히 같은 성질을 지닌다. 표준 모형은 왜 세대 구조가 존재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표준 모형은 게이지군이 SU(3)×SU(2)×U(1)인 게이지 이론이다. 이 중 강력은 SU(3), 약전자기력은 SU(2)×U(1)에 해당한다. 낮은 에너지에서, 약전자기력의 대칭은 힉스 메커니즘에 의해 자발적으로 깨져 전자기력의 U(1)만 남고, 나머지는 약력을 이룬다. 이 과정으로 인해 힉스 보손과 약력의 게이지 보손은 질량을 얻는다. (여기서 U(1)와 U(1)은 서로 다른 군이다.) 강력의 게이지 보손은 글루온이다. SU(3)가 8차원이므로, 글루온은 총 여덟가지의 색을 지닌다. 강력은 오직 쿼크에만 작용하고, 렙톤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쿼크는 세가지의 색을 지닌다. 이를 가시광선의 삼원색을 따서 통상적으로 빨강, 초록, 파랑으로 부른다. 이 때문에 강한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양자장론을 양자 색역학이라고 일컫는다. 글루온을 통하여 쿼크의 색이 바뀔 수 있다. 따라서 글루온의 색을 3가지의 색을 다른 색으로 바꾸는 조합 (초록→빨강, 빨강→파랑 등)으로 볼 수 있다. 3가지의 색을 다른 3가지로 바꾸는 조합은 총 3×3=9가지이나, 그중 모든 색을 그대로 두는 (빨강→빨강, 초록→초록, 파랑→파랑) 변환을 제외하여 8가지의 색이 남는다. 전약력의 게이지 보손은 SU(2)×U(1)이 4차원이므로 4종인데, 이는 대칭 깨짐 이전의 W, W, W (약한 아이소스핀, SU(2)), B (약한 초전하, U(1))에 해당한다. 대칭 깨짐 이후, W과 B는 광자와 Z보손으로 섞인다. 전약력의 게이지 군 가운데 SU(2)의 전하는 약한 아이소스핀, U(1)의 전하는 약한 초전하이다. 대칭이 깨지면서, 약한 아이소스핀의 한 성분과 약한 초전하가 섞여 양자전기역학의 대칭군 U(1)을 이룬다. 표준 모형은 대부분의 양자장론처럼 많은 수의 대칭을 지닌다. 대칭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 약력은 C 대칭과 P 대칭을 최대로 깬다. 따라서 표준 모형은 이들을 따르지 않는다. 강력의 경우 이론적으로 C 대칭을 깰 수 있으나 (강력 CP 문제), 이는 관측 불가능할 정도로 작다. 약력은 2세대 이하에서는 CP 대칭을 보존하지만 3세대 이상으로는 CP 대칭을 깬다 (CP 위반). 표준 모형은 다른 모든 특수상대론적 이론과 같이 푸앵카레 대칭을 따르므로 CPT 정리에 따라 CPT 대칭을 따른다. CPT는 이산대칭이기 때문에 뇌터 정리에 해당하지 않고,연관된 보존량도 없다. 표준 모형은 SU(3)×SU(2)×U(1)의 대칭군을 가진 게이지 이론이다. 여기서 SU(3)은 색력에 해당하고, SU(2)×U(1)은 전약력에 해당한다. SU(2)를 약한 아이소스핀, U(1)을 약한 초전하라고 부른다. 이 중 SU(2)×U(1)은 U(1)으로 깨지게 된다. 여기서 깨진 후 남은 U(1)은 전자기 대칭으로, 약한 초전하의 U(1)과는 다르다. 이에 따라 표준 모형은 색전하, 약한 아이소스핀, 약한 초전하를 보존한다. 표준 모형은 건드림이론 수준에서 네 가지의 전반적 (global) 우연대칭 (accidental symmetry)을 가진다. 이는 쿼크 위상 회전, 전자 위상 회전, 뮤온 위상 회전, 타우온 위상 회전이다. 이에 따라, 표준 모형은 바리온 수,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를 보존한다. 이들은 우연대칭이기 때문에, 대통일 이론에서 깨질 수 있다. 실제로 전자 수, 뮤온 수, 타우온 수의 개별적인 보존은 중성미자 진동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또한, 우연대칭은 건드림이론에서는 성립하지만 비(非)건드림적인 효과로 인해 깨질 수 있다. 실제로 표준 모형에서는 비건드림적 효과로 인하여 바리온 수와 렙톤 수가 개별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즉 "B+L"은 보존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스팔레론(sphaler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B−L"은 비건드림적으로도 보존된다. 물론 모든 비건드림이론적 효과는 대부분의 경우 극히 미미하고, 빅뱅 초기 (바리온 생성 및 렙톤 생성)를 제외하고는 관측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표준 모형은 각종 근사적인 맛깔 대칭을 지닌다. 가장 기본적으로 아이소스핀의 SU(2)와 이를 초전하로 확장한 SU(3)이 있고, 이를 다른 쿼크를 도입하여 더 확장할 수 있다. 맛깔 대칭은 쿼크의 질량에 의하여 깨진다. 질량이 클 수록 깨지는 정도도 더 심하다. 아래의 표는 표준 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마당을 정리한 것이다. 이 가운데 페르미온 장 (스핀 ½)은 질량을 제외하고 모든 성질이 같은 두 개의 세대가 더 존재하지만, 생략하였다. 이 표는 왼손 바일 스피너 대신에 오른손 바일 스피너로 적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쿼크를 반쿼크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약력은 전반성 (P) 대칭을 최대로 불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준 모형에서 중성미자는 오직 왼손만 존재한다. 즉 모든 중성미자는 왼손잡이며, 반중성미자는 오른손잡이다. 페르미온의 경우, 왼손 입자(formula_1, formula_2)는 SU(2)의 기본표현(fundamental representation)을 따르나, 왼손 반입자(formula_3, formula_4, formula_5)는 SU(2)에 따라 변환하자 않는다. (반)쿼크(formula_1, formula_7, formula_8)는 SU(3)의 (반)기본표현을 따르나, 렙톤(formula_2, formula_5)은 SU(3)에 따라 변환하지 않는다. 게이지 장(formula_11, formula_12, formula_13)은 해당 게이지 대칭에 대하여 딸림표현을 따르고, 로렌츠 벡터이며, 다른 게이지 대칭에는 변환하지 않는다. 표준 모형은 19개의 상수를 포함한다. 표준 모형은 이론적으로 여러가지의 결함을 가지고 있고, 또 현상론적으로 관측된 일부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표준모형이 더 기본적인 이론을 근사하는 유효 이론이며, 더 높은 에너지에서는 표준모형이 다루지 않는 새 현상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거대 하드론 충돌기에서 행해지는 여러 실험은 표준모형의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표준 모형은 이론적으로 여러 자연스러움 (naturality) 문제를 안고 있다. 이는 표준 모형에 등장하는 몇몇 상수가 너무나 큰 값 또는 작은 값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개 더 강력한 대칭을 도입하여 상수가 왜 그렇게 크거나 작은 값을 가지는지 설명해야한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대통일 이론이나 초대칭 따위가 있다. 또한, 표준 모형은 여러가지로 임의적인 면이 있다. 표준 모형은 3세대로 구성되어 있지만, 왜 3세대로 구성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2세대가 발견되었을 때,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는 "누가 그걸 주문했어?"라고 외칠 정도로, 세대의 존재와 그 수는 언뜻 보면 불필요한 구조다. 표준 모형은 전하의 양자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폴 디랙은 전하의 양자화를 설명하려면 자기 홀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였으나 표준 모형은 자기 홀극을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표준 모형은 19개의 자유 변수를 가진다. 이 자유 변수의 수는 기본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다. 표준 모형은 입자 물리학의 거의 모든 실험 결과를 오차 범위 안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표준모형은 중력을 다루지 않는다. 또 표준 모형은 중성미자를 무질량 입자로 다루지만, 실제로 중성미자는 아주 작지만 영이 아닌 질량을 가진다 (중성미자 진동). 이 질량이 어떤 종류인지 (즉 중성미자가 디랙 입자인지 마요라나 입자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또한 표준 모형은 아무런 암흑 물질 입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표준 모형에서 암흑 물질로 간주할 수 있는 입자는 중성미자밖에 없는데, 중성미자는 이론적으로 전체 암흑 물질 양의 소량만을 차지한다. 쿼크 쿼크()는 경입자와 더불어 물질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다. 경입자가 아닌, 색전하를 띤 기본 페르미 입자이다. 중입자와 중간자를 이룬다. 이론 물리학자 머리 겔만은 자신이 발견한 우주의 기본 미립자를 '쿼크'(quark)로 명명했는데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 12장 '신부선(新婦船)과 갈매기'에서 갈매기가 외치는 무의미한 조롱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우주 속의 입자들을 구성하는 쿼크는 세 개씩 같이 다닌다. 쿼크는 총 6가지의 종류(type)이 있으며, 다음과 같다. 각 쿼크에는 이에 대응되는 반입자인 반쿼크()가 존재한다. 반쿼크는 대응하는 쿼크와 질량이 같지만 전하와 색전하가 반대다. 각 쿼크는 빨강, 초록, 파랑 세 개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 쿼크는 3세대가 있는데 1세대는 위·아래(up·down) 쿼크, 2세대에 맵시·기묘(charm·strange) 쿼크, 3세대에 꼭대기·바닥(top·bottom) 쿼크로 나눈다. 쿼크는 기본 전하의 −⅓ 또는 +⅔의 전하를 갖는다. 기본 전하의 정수배가 아닌 전하를 가진 입자는 쿼크가 유일하다. 전하량 외에도 쿼크는 색전하(色電荷, )란 물리량을 갖는데, 이 양은 '빨강', '초록', 혹은 '파랑'으로 나타낸다. 이 물리량에 대한 보존법칙은 합쳐진 입자는 언제나 '무색'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쿼크는 '반빨강', '반초록', '반파랑'의 색전하를 갖는다.(색전하는 가시광선의 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양자 색역학의 대칭군인 SU(3)의 3차원 표현의 기저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용어일 뿐이다.) 양자 색역학의 색가둠 현상에 의하여, 일상적인 에너지에서 쿼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중간자나 중입자를 이룬다.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이루어진 입자이고, 중입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진 입자다. 중간자와 중입자를 통틀어 강입자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홑 쿼크는 관측할 수 없으며, 관측 가능한 강입자는 항상 기본 전하의 정수배의 전하를 가지고, 항상 무색이다. 쿼크를 따로 관측할 수 없으므로, 위 표의 쿼크 질량은 정확한 값이 아니라 참값이 놓여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범위다. "쿼크"라는 이름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쿼크"()는 액체의 단위인 쿼트를 변형한 것으로, 등장 인물인 마크에게 술을 권하는 대목이다. 중력 상수 중력 상수(重力常數, , 기호 "G"), 만유인력 상수 또는 뉴턴 상수는 중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기초 물리 상수다. 중력을 다루는 모든 이론,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등장한다. 과학 기술 데이터 위원회 2010년 자료 에 따르면, 국제단위계에서의 값은 다음과 같다. 그 밖에 국제 천문 연맹에서 제공하는 자료도 권위가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의 중력적 인력은 그 두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이 식에서 비례 상수 formula_2를 중력 상수라고 일컫는다. 중력은 자연의 다른 세 상호작용보다 상대적으로 약하다. 예를 들어 두 대의 3000 kg의 자동차가 각각의 질량 중심에 대해 3 m 떨어져 있을 때 두 자동차에 작용하는 중력은 약 67 µN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모래 알갱이의 무게 정도의 힘에 해당한다. 중력 상수는 헨리 캐번디시가 캐번디시 실험을 통해 정교하게 처음으로 측정하였다. 실험을 위해 막대의 양 끝에 납으로 된 공을 매달고 이를 줄에 매달아 수평 방향으로만 회전하게 한다. 막대의 관성 모멘트는 막대가 복원력에 의해 진동하는 주기를 측정하여 알아낼 수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다른 공을 가까이 대면 중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고 막대가 회전한 각도를 측정하여 이 힘을 알아낼 수 있다. (캐번디시의 실험의 본 목적은 중력 상수의 측정이 아니라, 지구의 질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지구 표면의 중력장은 쉽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의 크기와 중력 상수를 알면 지구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다.) 중력 상수의 측정은 캐번디시의 실험 이후로 점차 정확도가 향상되어 왔다. 중력이 다른 기본 상호 작용에 대해 매우 약하고, 다른 물체의 영향을 없애기 어렵기 때문에 중력 상수 formula_3를 측정하는 것은 여러 모로 어렵다. 게다가 중력과 다른 상호 작용 사이에 알려진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를 측정할 수 없다. 최근의 리뷰(Gilles, 1997)에 따르면, 중력 상수의 측정값은 크게 변해 왔고, 최근의 몇몇 측정값은 실제로는 서로 배타적이라고 한다. formula_4 곱 또는 표준 중력 변수는 여러가지 중력과 관계된 수식을 간단히 표현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 특히 태양계에 대해 중력 법칙을 이용할 때 매우 높은 정확도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빈번하게 사용된다. 중력 상수의 정확도가 높지 않은 데 반해 행성의 위치나 중력 가속도와 같은 양은 매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중력 상수와 질량의 곱은 매우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따라서 지구나 태양의 질량의 측정값의 정확도는 중력 상수의 정확도에 의존한다.). 태양계에서의 중력을 계산할 때 거의 대부분의 계산에서 GM 값이 함께 붙어서 나오며, 대부분의 계산에서 이 둘을 따로 대입할 필요가 없어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표준 중력 변수의 값은 formula_5로도 표시하며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은 값을 갖는다. 천체 역학에서는 주로 국제단위계의 킬로그램보다 태양 질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계를 사용하는 것이 계산에 편하다. 이 단위계로 쓴 중력 상수를 가우스 중력 상수() formula_7라 부르며,그 값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9는 천문 단위, formula_10는 평균 태양일, 그리고 formula_11는 태양의 질량이다. 중력 상수를 플랑크 상수와 광속을 이용하여, 임의적인 기본 단위가 전혀 없는 단위계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따 플랑크 단위계라고 부른다. 플랑크 단위계에서 중력 상수는 플랑크 상수와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와 함께 모두 1로 맞추어진다. 변형력 변형력(變形力, )은 역학에서 단위면적당 작용하는 힘을 뜻한다. 응력(應力)이라고도 한다.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1822년 처음 고안했다. 사실상 응력의 개념은 연속체(Continuum)라는 가정 아래 성립할 수 있다. 물체 내부의 경우, 가상의 단위부피를 설정해서 그 가상의 표면 바깥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상의 힘'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표면힘(Surface Force)과 몸체힘(Body Force)이다. 표면힘은 표면에 평행한 힘이며, 몸체힘은 표면에 대하여 수직 방향인 힘이다. 응력의 SI단위는 파스칼(Pa)이다. 압력과 같은 단위지만, 압력과 응력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반적인 단면봉(Prismatic Bar)의 경우, 수직응력(Normal Stress)은 바깥쪽(Tension) 또는 안쪽(Compression)으로 작용한다. 변형률(Strain)과의 연관성 때문에, 보통 바깥쪽 응력을 양으로, 안쪽 응력을 음으로 본다. 이 경우, 보통은 계산의 편리성을 위해 "모든 단면적에 고르게 힘이 작용한다"라고 가정하고 평균값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실제로는 모든 지점마다 작용하는 응력의 값이 다르다. 때문에 코시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텐서를 사용했다. 이 방식은 축이 변할 경우 값이 어떻게 바뀌는지 계산하는 것이 힘들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Mohr's Circle을 사용한다. 또한 코시 텐서는 작은 변형에 맞는 방식이기 때문에, 큰 변형의 경우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대수학 대수학(代數學, )은 일련의 공리들을 만족하는 수학적 구조들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이렇게 일련의 추상적인 성질들로 정의되는 구조들을 대수 구조라고 하며, 그 예시로 반군, 군, 환, 가군, 체, 벡터 공간, 격자 등이 있다. 대수학은 취급하는 구조에 따라서 반군론, 군론, 환론, 선형대수학, 격자론, 정수론 등으로 분류된다. 기하학, 해석학, 정수론과 함께 대수학은 수학의 대분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대수학이란 용어는 단순한 산술적 수학을 가리키기도 하나, 수학자들은 군, 환, 불변량 이론과 같이 수 체계 및 그 체계 내에서의 연산에 대한 추상적 연구에 대해서 "대수학"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algebra라는 명칭은 페르시아의 저명한 수학자인 콰리즈미(783~850)가 쓴 《알 자브르 왈 무카발라》라는 책 제목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대수적 방법들의 근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책의 제목은 "이항과 약분"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대수학은 대수(代數, 수를 대신함)라는 명칭 그대로, 수를 대신해서 문자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시작되었다. 대수(algebra)의 어원은 9세기의 페르시아의 수학자 콰리즈미의 저서인 《약분·소거 계산론》(, 820년)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의 원 제목에 있는 는 (흩어진 것을) 묶음을 의미하며, 방정식에서 항들을 묶어서 소거함을 뜻한다. 이 책은 체스터의 로버트 또는 배스의 아델라드()가 《알게브라와 알무카발라의 서(書)》()란 제목으로 라틴어로 번역하여, 이후 500년 간에 걸쳐서 유럽의 대학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알게브라"()와 "알무카발라"()는 해당하는 아랍어 단어를 음역한 것이다. 또한 콰리즈미의 저서인 "인도 수의 계산법"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2차 방정식, 사칙연산, 십진법, 0 등의 개념이 소개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대수 방정식을 연구하기 위해서 군이라는 대수적 구조를 도입하였고, 조지 불은 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불 대수라는 대수적 구조를 정의하였다. 이후 현대 수학에서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공리 주의나 니콜라 부르바키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고전적인 대수학에서 상당히 거리가 추상화되어 있으며, 방정식의 해법은 "방정식론"(대수방정식론)이라는 대수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군론 군론(群論, )은 군에 대해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수학의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되며, 대칭성을 다루는 특성 탓에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에서도 응용된다. 4차 방정식까지는 대수적인 풀이, 즉 근의 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지만(카르다노, 페라리),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벨에 의해 증명되었으나, 어떤 경우에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어지고 어떤 경우에 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어지지 않는지를 일반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문제였다. 군론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는 과정에서 갈루아(Galois)에 의해 도입된 접근방식이었다. 갈루아는 군론을 이용해서, 다항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에 대한 일반적인 관계를 증명하였다. 갈루아 이론으로 불리는 이 이론은 수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극히 아름다운 이론으로 손꼽힌다. 선형 결합 선형대수학에서, 선형 결합(線型 結合, ) 또는 일차 결합(一次 結合)은 벡터들을 스칼라배와 벡터 덧셈을 통해 조합하여 새로운 벡터를 얻는 연산이다. 벡터 공간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연산이다. formula_1에서 formula_2이며, 이는 벡터의 선형결합의 예이다. formula_3를 체 formula_4 위의 벡터 공간이라고 하자. 벡터 formula_5의 계수 formula_6에 의한 선형(일차)결합은 다음과 같은 벡터이다. 파동 방정식 물리학과 수학에서, 파동 방정식(波動方程式, )은 일반적인 파동을 다루는 2차 편미분 방정식이다. 음파와 전자기파, 수면파 등을 다루기 위하여 음향학, 전자기학, 유체역학 등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등장한다. 양자역학에서 위치 에너지가 없는 경우 파동 함수는 파동 방정식을 따른다. 파동 방정식은 formula_1에 대한 선형 쌍곡 편미분 방정식으로,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3는 파동의 속도를 나타내는 매개변수다. 공기중을 진행하는 음파의 경우에는 대략 300 m/s이고, 이 속도를 음속(音速)이라 부른다. 현의 진동의 경우 formula_3는 다양한 값을 가질 수 있다. formula_1는 시각 formula_6, 위치 formula_7에서의 파동의 진폭을 나타내는 함수다. 음파의 경우 진폭은 그곳에서의 공기의 압력이며, 진동하는 현의 경우엔 기준 위치에서부터의 변위를 나타낸다. 파동의 종류에 따라 formula_8는 스칼라 또는 벡터일 수 있다. formula_9는 위치 formula_10에 대한 라플라스 연산자이다. 기본적인 파동 방정식은 선형 미분 방정식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두 파동의 결합은 단순히 두 파의 더한 것과 같다. 또한 파동을 분석하기 위해 파를 성분별로 나누어도 된다. 푸리에 변환을 이용해 파동은 사인함수들로 쪼개어질 수 있고, 이 방법은 파동방정식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 formula_10축 방향으로 늘어선 1차원 (현)의 경우, 위 식은 다음과 같다. 2차원에선 다음과 같다. 식의 상수를 주파수에 따른 변수로 생각해 더 복잡하고 실제적인 파동방정식을 만들 수 있다. 이때의 방정식은 비선형이 된다. 현악기의 떨리는 현의 파동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장 르 롱 달랑베르,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니엘 베르누이,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등이 연구하였다. 비오-사바르 법칙 비오-사바르 법칙(Biot-Savart法則, )은 전자기학에서 주어진 전류가 생성하는 자기장이 전류에 수직이고 전류에서의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는 물리 법칙이다. 또한 자기장이 전류의 세기, 방향, 길이에 연관이 있음을 알려준다. 비오-사바르 법칙은 전자기학에서 유효하며 앙페르 회로 법칙과 가우스 자기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이 법칙의 이름은 이 법칙을 발견한 장바티스트 비오와 펠릭스 사바르()의 이름을 땄다. 원점 formula_1에 전류 formula_2가 무한소의 길이의 전선 formula_3을 따라 흐른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무한소의 전선에 흐르는 전류에 의하여 발생하는 무한소의 자기장 formula_4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6은향의 단위벡터이고, formula_7은 진공의 투자율이다. 유한한 길이의 전선을 따라 흐르는 전류의 경우, 양변을 적분하면 전류로 인하여 발생하는 총 자기장을 알 수 있다. 직선 전류에 의한 자기장과 솔레노이드 내부의 자기장은 앙페르 법칙을 이용해 구할 수 있고, 비오-사바르 법칙은 원형 전류 중심에서의 자기장의 세기를 구하는 데 이용된다. 원형 도선 중심에서의 자기장 원형 도선이 있을 때, 전류 요소 Idl은 지면 앞으로 나오는 방향이고, r에 수직이다. 또 dB의 방향도 r에 수직인 방향이 된다. r=x+R이므로 비오-사바르 법칙에서 다음과 같다. 원형 전류의 각 전류 요소 Idl에 의한 자기장 dB를 그 회로에 따라 모두 합하면 회로축에 수직인 dB의 y성분은 상쇄되므로 dB의 x성분만 계산하면 된다. formula_8 이므로 x=0일 때 formula_9 가 된다. 구골 구골(Googol)은 10의 100제곱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즉, 1 뒤에 0이 백 개 달린 수이다. 이 수의 이름은 1938년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스 카스너(Edward Kasner)의 9살짜리 조카 밀턴 시로타(Milton Sirotta)에 의해 지어졌다. 카스너는 이 개념을 저서 수학과 상상(Mathematics and the Imagination)에 수록했다. 이 수의 학문적인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고, 다만 주로 수학 수업에서 거론될 뿐이다. 카스너는 이 수를 매우 큰 수와 무한대의 차이를 보이기 위해 고안했다. 이것은, "무한대와 구골의 차이는 무한대와 1의 차이와 같다"라는 칼 세이건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골은 우주의 모든 원자의 수보다 많은 상당히 큰 수이다. 지금으로부터 1구골년 후 우주는 마지막남은 유일한 블랙홀이 호킹 복사에 의하여 증발한다 여담으로 인터넷 검색엔진 업체 구글(Google)은 처음에 구골(Googol)로 등록하려다가 실수로 사명을 잘못 표기한 것에서 구글로 등록하여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마운틴 뷰에 있는 구글 본사도 구골플렉스를 변형시켜 구글플렉스라고 부른다. 구글 구글 LLC()는 전 세계의 정보를 체계화하여 모든 사용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검색 서비스 제공을 주력으로 한다. 구글 검색은 2018년 5월 기준 전 세계 검색량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2008년 웹 페이지 인덱스 수가 1조를 돌파했다. 1998년에 'BackRub'(등 긁기)이라는 이름으로 검색 서비스를 시작하였다.(아마 등을 긁어주는 것처럼 시원하게 궁금증을 해결해준다는 뜻인 듯 하다) 이후 구글(Google)로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이는 10을 뜻하는 구골을 고의적으로 변경 표기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매우 큰 유한수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엄청난 규모의 검색엔진을 만들겠다'는 설립자들의 목표와 맞아 떨어졌으나 당시 이미 '구골'이라는 사이트가 존재하여 구글이 되었다. '왓박스'(whatbox)라는 이름도 고려되었으나 포르노 사이트인 웻박스(watbox)와 유사해 제외되었다. 구글은 세계 최대의 검색엔진으로 현재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이다. 특히 영어권에서는 독보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2006년, 구글은 유튜브라는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를 인수했다. 같은해 11월, 유튜브의 하루 방문자는 2,5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2007년, 구글은 최고의 디지털 마케팅 회사인 더블클릭을 인수했고, 같은해 더블클릭은 하루 170억 개의 광고를 집행했다. 그리하여 구글은 2008년, 증권거래위원회에 보낸 공개문서에서 구글은 "우리는 기술회사로 시작해서 소프트웨어, 기술, 인터넷, 광고, 미디어 회사가 모두 하나로 합해진 기업으로 진화했다" 고 말했다. 23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온라인 광고 시장과 540억 달러에 달하는 전 세계 온라인 광고 시장의 40%를 독식했다. 구글은 PDF, 포스트스크립트,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어도비 플래시 문서들을 포함한 웹 문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외에 구글 이미지 검색, Google 뉴스 한국, 구글 뉴스그룹, 구글 웹 디렉토리, 구글 비디오, Froogle 서비스에서 이름이 변경된 상품 검색, 구글 맵, 구글 어스 등의 주요 검색 서비스가 있다. 또한 검색 서비스 외에 추가적인 서비스들을 제공하는데 이에는 2004년 시작된 이메일 서비스인 Gmail 과 YouTube, 피카사, Google 사전, Google 리더, iGoogle, 기업 사용자를 위해서 각종 웹 애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구글 앱스 등이 있다. 2011년, 모토로라 인코퍼레이티드는 휴대전화사업과 본사의 사업부분이 불안정적으로 운영됨에 대한 걱정과 사업부 실적의 부진으로 인해 사업부가 모토로라 인코퍼레이티드의 자회사로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 2011년 모토로라는 더 발전적이고 공격적인 사업을 위해 새로운 모기업을 찾게되고, 대상기업이 된 구글은 인수할때 각 주당 63%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총 125억 달러(당시 한화 약 13조5천125억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구글의 인수에도 불구하고, 모토로라는 여전히 기존 장치의 안드로이드 버전 업그레이드 서비스와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4년, 구글은 모토로라의 분리된 사업부 중 '스마트폰 제조분야'를 매각하기로 결정하였고 레노버에게 총 29억1천만 달러(당시 한화 약 3조100억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웹 크롤러는 사용자가 검색하기 전에 수천억 개에 달하는 웹페이지에서 정보를 모아 이를 검색 색인에 정리한다. 크롤러는 과거 크롤링으로 만들어진 웹 주소 목록과 웹사이트 소유자가 제공한 사이트맵에서 크롤링을 시작한다. 웹사이트를 방문한 크롤러는 사이트에 있는 링크를 사용하여 다른 페이지를 찾는다. 크롤링하는 동안 새로운 사이트, 기존 사이트의 변경사항, 깨진 링크를 주의 깊게 살핀다. 크롤링할 사이트, 크롤링 횟수 및 각 사이트에서 가져올 페이지 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결정한다. 구글에서는 사이트 소유자에게 웹마스터 도구를 제공하여 사이트 소유자가 구글에서 사이트를 크롤링하는 방법의 세부 사항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사이트 소유자는 페이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자세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으며, 재크롤링을 요청하거나 'robots.txt'라는 파일을 사용하여 아예 페이지가 크롤링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 구글은 비용을 받고 특정 사이트를 더 자주 크롤링하지 않으며 사용자에게 최고의 검색결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웹사이트에 동일한 도구를 제공한다. 사용자에게 수십억 개의 웹페이지가 아닌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은 크게 다섯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검색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분석하기, 검색어와 일치하는 정보가 포함된 웹페이지를 검색하기, 페이지의 유용성을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기, 사용자의 위치나 이전 검색 기록과 같은 맥락을 고려하여 사용자에게 알맞은 검색 결과를 제공하기, 검색 결과가 사용자의 검색 유형에 유용한지 고려하여 최상의 결과를 제공하기. 구글은 광고주에게 애드워즈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입찰함으로써 검색 결과 옆에 뜨는 텍스트 광고를 구매할 수 있다. 희소성이 높은 키워드는 클릭당 광고비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애드센스를 통해서 광고를 하고 싶어하는 회사와 관련 사이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애드워즈와 유사한 자동화 프로그램을 통해 둘을 연결해 준다. 구글은 클릭당 지불 데이터를 가지고 해당 광고를 클릭 할 때만 비용을 내도록 한다. 구글 애널리틱스(Google Analytics)는 광고주에게 해당 광고의 효과를 즉시 확인 할 수 있는 무료 툴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은 매시간 클릭수와 판매량, 해당 키워드의 트래픽, 클릭이 판매로 이어진 비율 등 광고 효과를 즉각 확인 할 수 있게 해준다. 미디어 업체로 하여금 광고 판매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롱테일(long tail)이라는 형태로 변화하도록 한다. 그렇게 한다면 기존에는 광고를 잘 하지 않던 이들까지도 타킷팅이 잘 된 저렴한 광고를 구매하도록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은 사용자들에게 신문이나 책, 잡지를 자유롭게 검색하도록 권장한다. 해당 발행물들 역시 검색 트래픽을 활용해서 무료로 자신들을 홍보하고 광고를 판매해 수익을 창출한다. TV 방송사나 영화사들은 유튜브를 홍보채널 겸 온라인 배급시스템으로 활용하도록 권장한다. 광고주들에게는 구글이 2007년에 인수한 디지털 광고 서비스 업체 더블클릭(Doubleclick)을 통해 온라인 광고를 하도록 권한다. 구글의 수입은 2004년 32억 달러이던 것이 2007년에는 166억 달러로 뛰었다. 세계적 불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구글은 2008년에 42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고 매출은 218억 달러로 상승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97%가 광고 수입이었다. 2008년, 구글의 광고 수입은 5개 방송사(CBS, NBC, ABC, FOX, CW)의 광고 수입을 합한 것에 맞먹었다. 2011년에 이르면 미국 내 웹 광고는 600억 달러(전체 13%)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구글은 tv, 라디오, 신문에 광고를 판매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가일층 확대할 사업구상을 이미 개시했다. 사용자가 텍스트 광고를 클릭할 때만 광고료를 부과해서 광고주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고, 무료이자 2009년 초반까지 광고가 붙지 않았던 구글 뉴스로 뉴스독자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으며, 광고 수익과 신규 고객을 발생시켜 줌으로써 웹사이트와 소규모 사업자들 중에서 우군을 확보했다. 구글은 두 번째 경매 프로그램 애드센스 때부터 수입의 20%만 자기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웹사이트들에게, 아니 구글 표현을 빌리자면 사업 파트너들에게 돌려 주었다. 2008년에 구글은 총 5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수십만에 달하는 '파트너들'에게 제공했다. G메일, 구글 뉴스, 구글 어스, 구글 맵스, 구글 비디오, 구글 번역, 피카사(Picasa-디지털 사진 공유), 구글 북스(발행된 모든 책 검색), 구글 트렌드 (검색량 통계 제공), 오컷(Orkut-인맥, 친목 사이트), 여기에 데스크톱(Desktop)이나 문서도구(Docs) 같은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응용 프로그램까지 제공한다. 구글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는 보통 PC들로 구성된 컴퓨터 클러스터들인데, 이 클러스터들은 일을 병렬적으로 처리하여 방대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처리한다. 특히 여러 대의 PC를 운영하면서 계속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처리하기 위해 한 컴퓨터에 오류가 났을 경우 그 컴퓨터는 꺼지고, 다른 컴퓨터가 일을 계속 처리하도록 한다. 구글은 이러한 방식이 거대하고 비싼 컴퓨터(서버)를 대신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러한 방식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사업에도 투자를 하여 알파고나 무인자동차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구글의 철학은 "You can make money without doing evil."(악해지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와, "You can be serious without a suit."(정장없이도 진지해질 수 있다) 그리고 "Work should be challenging and the challenge should be fun."(일은 도전이어야 하고 도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다. 'Don't Be Evil' (나쁜 짓을 하지 말자)이라는 철학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사용자 컴퓨터 내에 살아 있는 쿠키에 대한 비난으로, 미국의 인권단체 'Public Information Research' 에 의해, 구글은 빅브라더 상(Big Brother Awards)의 후보가 되기도 했다. 구글은 형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롭고 재미있는 기업 문화로 잘 알려져 있다. 2007, 2008 구글은 가장 일하기 좋은 장소로 뽑혔다. 구글 엔지니어들은 '직감'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관계나 판단력 같은 것은 정량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험보다는 효율을 중시한다. 그들은 사실과 베타 테스트와 수학적 논리를 추구한다. 구글은 지구 온난화 문제에도 관심을 보인다. 구글은 사옥 지붕에 미국 기업 캠퍼스 가운데 가장 큰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여 1천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만한 전기를 생산한다. 외부 주차장에 태양발전소를 두어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충전할 수 있게 했고, 연비가 좋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매하는 직원에게는 장려금 (처음에는 5천 달러, 현재는 3천 달러)을 제공한다. 구글은 수익의 1%를 때어내 자선사업 부문인 구글 파운데이션에 보낸다. 넓은 캠퍼스 부지 내에서의 건물 간 이동을 위해 신청에 의해 차량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고 직원들의 건강에도 이바지하기 위해 구글이 제공하는 자전거가 도처에 배치되어 있다. 구글이 1999년 8월 처음 구글플렉스로 이주했을때, 거기에는 '직원들이 내부 일에만 집중하게 하겠다'는 결의가 반영되어 있었다. 구글플렉스에는 2~3층짜리 나지막한 건물이 모여있고, 건물 밖에는 야외테이블과 벤치, 울창한 나무들, 채소 정원, 사람과 자전거로 활기 넘치는 산책로가 있다. 직원들은 무료 식사와 다과를 즐기고 (매년 구글은 여기에만 7천만 달러 정도를 쓴다), 트레이너가 대기하는 체육관과 마사지실이 붙어 있는 건물들 사이로 이동할 자전거를 지급받는다. 직원들은 커다란 카페테리아 탁자에서 식사하고, 당구대와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는 라운지에서 쉰다. 세차나 오일 교환 때문에 캠퍼스를 떠날 필요도 없다. 목요일이면 검진 차량이 찾아오고 뿐만 아니라 이발사, 세탁업자, 보모, 애완동물 도우미, 치과의사, 그리고 무료 검진 담당의도 5명이나 있다. 편안한 좌석에 무선인터넷이 완비된 바이오 디젤 통근 버스가 직원들을 멀게는 샌프란시스코까지 늦은 밤까지 실어 나른다. 노트북 컴퓨터도 살 필요가 없다. 그저 마음에 드는 모델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여성은 출산 휴가를 5개월간 유급으로 낼 수 있고, 신생아 아빠는 마찬가지로 유급으로 7주 휴가를 낼 수 있다. 모든 구글 엔지니어들은 업무 시간중 20%(주 5일 근무 기준으로 일주일중 하루)를 그들이 흥미로워하는 프로젝트에 사용하도록 권장된다. 몇몇 구글의 새로운 서비스들, 예를 들어 Gmail, 구글 뉴스, Orkut, AdSense는 이러한 직원들의 독립적인 프로젝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구글의 검색 제품 및 고객 경험 파트의 부사장인 매리싸 마이어는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새로 론칭되는 서비스의 50%가 이러한 20% 시간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돈을 벌때 나쁜일이 아닌 좋은 일을 통해 돈을 벌자는 의미이다. 구글은 한국의 포털사이트인 다음, 네이버와 다르게 고객센터를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구글직원과 직접 연락하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포럼을 통하여 google employee와 의견 공유가 가능하다. 블로그, 카페, 웹페이지에서 적었던 글은 구글로봇이 수집하여 보관한다. 이를 삭제하려면 웹마스터도구를 이용해야 하는데, 구글의 삭제조건에 들지 않으면 삭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유럽연합에서 잊힐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인정함에 따라, 이에 맞추어 구글도 지울 수 있도록 구글로봇을 수정하고 있다. 블로그 검색을 통해 블로거의 글을 검색할 수 있다. 다만, 블로그를 폐쇄했어도 자신이 작성했던 글에 대해선 계속 검색이 되어 삭제할 방법이 없다. 설사 웹마스터를 통해 삭제를 했어도 블로그 검색에 있던 글은 영구적으로 삭제가 불가능하며, 글을 재발행하는 방법밖엔 없다. 2014년 3월 20일, 구글 메인페이지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게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구글은 2009년 10월 5일부터 2010년 5월 10일까지 스트리트 뷰 서비스와 관련하여 사용자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한국어판 구글 어시스턴트에서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나치의 만행인 홀로코스트를 재밌는 이야기랍시고 유머로서 소비하여 국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홀로코스트가 뭔지 알면 누구나 개그로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건 잘 알테다. 이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한국어 어시스턴트를 설계한 담당자를 당장 구글로부터 해고하라는 등의 분노를 표출 했으며, 트위터나 여러 SNS에선 구글 어시스턴트 삭제 인증을 하거나 아예 사용도 안 했으며, 더 나아가 아예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쓰지 말고 아이폰을 쓰자며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결국 이 사건은 독일을 비롯한 해외에도 퍼졌으며 당장 시정하고 사과할 것을 구글에 요구했다. 다행히도 문제가 되는 회화는 어시스턴트에서 지워졌으나 이에 대한 해명은 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있다. 심지어 해당 설계를 한 구글 직원이 어떤 징계를 받았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구글에 가입하려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13세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14세 이상, 베트남에서는 15세 이상, 네덜란드에서는 16세 이상 가입할 수 있다. 일부 구글 서비스는 특정 연령 요건이 있다. 코리올리 효과 코리올리 효과 (Coriolis effect)는 전향력 또는 코리올리 힘(Coriolis force)라고도 하며, 회전하는 계에서 느껴지는 관성력으로, 1835년 프랑스의 과학자 코리올리가 처음 설명해 냈다. 굵은 글꼴은 그 물리량이 벡터라는 점을 나타내고, m은 질량, v는 물체의 계에서의 속도를, Ω는 계가 돌고 있는 각속도를 나타낸다. 코리올리 힘의 발생원인은 각운동량 보존법칙에 의해 발생한다. 각운동량 보존법칙은 각운동량이 시간에 대해 일정하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이 되어 각운동량이 보존되게 된다. 이를 각운동량 보존법칙 또는 간단히 각운동량보존이라고 부른다. 회전하는 좌표계 내에서 물체가 운동을 하는 경우 회전축에 대해 반지름이 줄어드는 경우에는 줄어드는 반지름에 대해 속도가 변화하게 된다. 이 결과 회전좌표계는 코리올리힘과, 가로힘이 발생한다. 좌표계 x, y, z와 좌표계 x', y', z'을 보자 두 좌표계의 원점은 같다. 각각의 경우에 대해 벡터 formula_4.은 두 좌표계에서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formula_5. (x, y, z 좌표) formula_6. (x', y', z' 좌표계) 벡터의 내적을 이용해 x, y, z를 (formula_7.), (formula_8.), (formula_9.) 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내적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formula_10. formula_11. formula_12. 으로 표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벡터 formula_13.가 축 ox를 기준으로 formula_14.의 각속도로 회전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경우 벡터 formula_13.의 속도 formula_16. 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formula_17 formula_18 회전좌표계의 경우에는 원점을 기준으로 좌표축 x', y', z' 이 회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좌표계가 서로 다른 경우 두 좌표계에서 상대적인 속도는 다음과 같다. formula_19 이를 바탕으로 회전좌표계에서 x', y', z' 의 단위벡터의 회전을 적용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22 축의 회전에 따른 속도는 formula_25 이다. 이를 한번 더 시간에 대해 미분을 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26 뉴턴의 운동방정식이 x, y, z 좌표계에서 성립한다고 가정하면 x', y', z' 좌표계에서 아래의 식을 만족한다. formula_30 우변의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 항을 왼쪽으로 옮기면 뉴턴의 운동 방정식과 비슷한 꼴의 운동방정식이 된다. formula_31 오른쪽 둘째 항은 코리올리 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른쪽 셋째 항은 원심력이라고 한다. 마지막 항은 특별한 이름이 없는데 회전 각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경우에만 나타난다. 원심력과 코리올리 힘을 도입한다면, 회전하고 있는 좌표계에 대한 운동방정식은 고정된 좌표계에 대해서 같다. 그리고 원심력과 코리올리 힘은 실제 힘이 아니라 회전하고 있는 좌표계에서 나타나는 힘이다. 적도에서 북풍이 부는 경우에도 바람은 코리올리 힘을 받게 된다. 코리올리 힘은 다음과 같은 공식에 의해 계산된다. 지구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formula_33의 각속도로 회전하고 있고, 바람은 formula_34 북쪽으로 이동한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기울어져서 고위도쪽을 향하게 된다. 이때 코리올리 정리를 통해 바람이 받는 힘의 방향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코리올리 힘의 방향은 동쪽을 향하게 된다. 즉 운동방향에 대해 오른쪽으로 편향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식의 결과가 아니라 각운동량 보존법칙을 적용해보아도 쉽게 우측편향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도를 중심으로 바람이 고위도 쪽으로 바람이 부는 경우 지구가 타원형이기 때문에 고위도쪽으로 이동할 수록 자전축에 대해 거리가 줄어들게 된다. 이 때에도 각운동량은 보존되어야 한다. 회전축을 중심으로 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각속도가 그만큼 증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위도로 바람이 불면 불수록 반지름이 더더욱 줄어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각속도는 증가하게 된다. 그결과 바람은 우측편향하여 불게 된다. 코리올리의 힘이 적용되는 또 다른 예는 푸코의 진자이다. 푸코의 진자는 어떤 수직면에서 자유롭게 흔들리는 줄에 매단 추이다. 진자는 정확한 수직면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진동하는 수직축에 대해 몇 시간의 주기 동안 천천히 옆돌기를 한다. 진자가 긴 시간의 주기동안에 자유로이 계속하여 흔들릴 수 있도록, 추는 무거운 것으로 하고 줄은 아주 길게 한다. 질량 m인 흔들이 추의 운동의 중심을 원점으로 택하고, 이때 벡터 formula_35은 진자의 작은 진동에 대해 거의 수평이다. 북반구에서 formula_33는 수직과 예각을 이룬다. 줄의 장력을 formula_37 라고 쓰고, 회전좌표계에서 발생하는 원심력과 중력을 formula_38 라고 생각하면 추의 운동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전개 된다. 코리올리 힘에 의해 진자는 수평방향으로 일정한 각속도formula_40로 진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formula_41 을 회전축을 삼고, formula_40로 회전하는 좌표계를 새로 도입하면 이 계에 대한 시간 도함수는 formula_43 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formula_44 를 formula_45로 나타낸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를 추의 운동방정식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된다. 각속도formula_40로 회전을 하는 좌표계를 중심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formula_49 위의 식에서 오른쪽에 있는 모든 벡터는 마지막 항을 빼고는 진자가 있는 수직면에 있다. 하지만 작은 진동에 대해 formula_52 이 실제로 수평이므로, formula_53 를 수평으로 만들어 마지막 항도 이 수직면에 있도록 할 수 있다. formula_56 는 돌고있는 지구의 각속도이고, formula_40 는 지구에 대해 돌고있는 좌표계의 각속도이다. formula_58 는 지구 축과 수직사이의 각이다. 수직은 formula_59 방향을 따른다. 위의 식을 보면 결과적으로 지구에서 푸코의 진자는 각속도 formula_40 로 옆으로 회전한다는 것을 말한다. 북반구에서 내려다 볼 때 그 회전은 시계방향이 된다. 벡터곱 선형대수학에서, 벡터곱(vector곱, ) 또는 가위곱()은 수학에서 3차원 공간의 벡터들간의 이항연산의 일종이다. 연산의 결과가 스칼라인 스칼라곱과는 달리 연산의 결과가 벡터이다. 물리학의 각운동량, 로런츠 힘등의 공식에 등장한다. 두 벡터 formula_1 와 formula_2의 벡터곱은 formula_3라 쓰고(쐐기곱과 연관지어 formula_4라고 쓰기도 한다.),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식에서 formula_6는 formula_1와 formula_2가 이루는 각을 나타내며, formula_9은 formula_1와 formula_2에 공통으로 수직인 단위벡터를 나타낸다. 위 정의에서의 문제점은 formula_1와 formula_2에 공통으로 수직인 방향이 두개라는 점이다. 즉, formula_14이 수직이면, formula_15도 수직이다. 어느 것을 두 벡터의 벡터곱으로 할 것인가는 벡터 공간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오른손 좌표계에서는 formula_3는, formula_17가 오른손 좌표계 방향을 따르도록 정의되고, 왼손좌표계에선 마찬가지로 이 순서의 세 벡터가 왼손 좌표계 방향을 따르도록 정의된다. 이와 같이 좌표계의 방향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두 (참) 벡터의 벡터곱은 참 벡터가 아니라 유사벡터다. (반대로, 참 벡터와 유사벡터의 벡터곱은 참 벡터다, 또한 유사벡터와 유사벡터의 벡터곱은 참 벡터다.) 벡터곱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b, c ∈ R, α ∈ R이라 하자. 벡터곱은 벡터 미분 연산인 회전 (∇×)의 정의에 등장하고, 자기장에서 움직이는 전하가 받는 힘을 기술하는 로런츠 힘의 공식에 등장하며, 돌림힘과 각운동량의 정의에도 나온다. 7차원 벡터 공간의 벡터곱도 사원수의 방법을 팔원수에 적용하여 얻어질 수 있다. 7차원 공간의 벡터곱은 다음과 같은 성질을 3차원 공간의 벡터곱과 공유한다. 빅토르 초이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는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 록 음악 밴드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로크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쏘록 쉐스찌)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소련의 광역 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Gruppa krovi)》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 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1988년에는 영화 《이글라》의 주연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버스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초이는 졸지도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버스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 2010년 8월 16일은 그의 20주기로써, 러시아 곳곳에서 추도식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2018년에는 그와 그 주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레토》가 개봉하였으며, 대한민국에는 2019년 1월 개봉하였다. 《레토》는 칸 영화제에서 사운드트랙 필름어워드 상을 수상하는 등 쾌거를 거두었으며,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가택 연금 중 만든 작품이라는 특징이 있다. 무리수 무리수(無理數, irrational number)는 두 정수의 비의 형태로 나타낼 수 없는 실수를 말한다. 즉,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소수이다. 이에 반해 두 정수의 비에 의해 나타낼 수 있는 수를 유리수(분수)라 한다. 이것도 소수이다. 유리수의 집합은 formula_1로 정의하고, 무리수의 집합은 formula_2로 정의한다. 무리수는 소수점 이하로 같은 수의 배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지 않는(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이다. 무리수는 다시 formula_3와 같은 대수적 수와 formula_4 등의 초월수로 나뉜다. 무리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증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로 전해진다. 히파소스는 이등변 직각삼각형의 밑변과 빗변의 비는 정수의 비율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우주가 완벽하여 모든 것이 정수의 비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에 충격을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동료들이 ‘우주의 섭리에 거스르는 요소를 만들어낸’ 히파소스를 살해했다고 하며, 죽이진 않고 추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10권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 수학책에서는 유리수 비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이를 ‘말할 수 있는()’ 길이,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없는()’ 길이라고 불렀다. 알로고스는 글자 그대로 로고스가 없다는 뜻의 단어로, 말 없음·이성 없음 등을 뜻한다. 이것이 라틴어 로 번역되어 지금에 이른다. 가장 간단히 무리수임이 증명되는 수는 formula_5과 같은 꼴의 수일 것이다. 증명은 귀류법을 사용하며, 다음과 같다: 무리수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일반적으로, 2의 제곱근이 유리수가 아님을 발견한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증명의 한 가지 방법은 다음처럼 귀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일반화하여, 제곱수가 아닌 자연수의 제곱근은 무리수임을 증명할 수 있다. 플랑크 상수 플랑크 상수(Planck常數, , 기호 "h")는 입자의 에너지와 드브로이 진동수의 비 (formula_1)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상수 중 하나다. 이 상수를 도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땄다. 기호는 라틴 문자 "formula_2"이다. 유니코드 기호 ()가 있다. 실험값은 다음과 같다. 2018년 11월 16일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아래의 값으로 정의 되었다. 새로운 정의는 2019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부터 발효된다. formula_2외에,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formula_6가 대신 쓰이기도 한다. (양자역학에서 formula_2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형태이다) 식에서 formula_9는 원주율을 나타낸다. 이 기호는 영어에서는 '( 에이치 바)', 독일어에서는 ")(하 크베어)로 읽는다. 이 상수 formula_6는 폴 디랙의 이름을 따 디랙 상수(Dirac's constant)라고 부른다. 유니코드 기호 가 있다. formula_6는 각운동량의 양자이다. 계의 임의의 축에 대한 각운동량은 언제나 formula_12의 정수배의 값으로 양자화한다. formula_6는 또 불확정성 원리를 기술하는 식에도 등장한다. 그래서 formula_6가 formula_2보다 더 기본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밖에, formula_6는 플랑크 단위의 정의에 사용된다. 처음에는 뉴턴의 역학 이론에서 시작되었지만 재능있는 수많은 학자들이 물리에 뛰어들어 그 영역을 전자기까지 확장을 시켜 모든 영역에서 승승장구하였던 고전물리-막스 플랑크가 물리를 하던 19세기 후반, 물리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이며 소소한 몇몇 문제만 해결되면 완벽한 학문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팽배하였다- 는 흑체 복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물리가 예측하는 결과와 흑체 복사의 실험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긴 파장에서는 잘 일치하지만 짧은 파장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한 사고 실험은 다음과 같다. 어떤 아주 잘 밀폐된 용기 안에(외부와 에너지 교류가 없는) 흑체와 한 줄기 빛을 집어넣고 용기를 다시 밀폐한다고 하자. 이 경우 흑체는 빛을 흡수하여 파장의 형태로 다시 방출을 하게 되는데 고전물리의 등분배법칙에 의하면 흑체가 방출하는 에너지는 모든 파장에 골고루 나뉘어야 한다. 이 말은 아주 작은 빛을 넣게 되더라도 상자를 열게 되면 엑스선이나 감마선이 나오게 되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모순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의 물리학자들이 매달리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착상을 하였다. 그것은 '에너지는 주파수에 비례한다'라는 가정이었다. 즉 에너지가 양자화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이 가정에서 에너지와 주파수를 연결해주는 비례상수가 formula_6 인 것이다. 물론 플랑크는 가정을 통해서 흑체 복사에 관한 문제를 정리하였고 그 식은 실험과 잘 일치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플랑크는 저 식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실험결과와 일치시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도입시킨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역사적으로, CODATA 플랑크 상수 권장값은 지수부를 제외하고 다음과 같다. CODATA 권장값은 새로운 측정 결과를 반영하여 몇 년마다 개정된다. 막스 플랑크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1858년 4월 23일 ~ 1947년 10월 4일)는 양자역학의 성립에 핵심적 기여를 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독일의 킬에서 태어난 플랑크는 1874년 뮌헨에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고, 1879년 베를린에서 졸업했다. 1880년 뮌헨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85년에 고향 킬로 돌아가 1886년에는 마리 메르크와 결혼한다. 1889년에는 베를린으로 가 이론 물리학과장을 맡는다. 1899년 새로운 기본 상수인 플랑크 상수를 발견한다. 일 년 후 플랑크의 복사 법칙이라 불리는 열 복사 법칙을 발견한다. 이 법칙을 설명하면서 그는 최초로 "양자"의 개념을 주창하였고, 이는 양자역학의 단초가 된다. 1905년에서 1909년 사이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의 회장으로 활동한다. 1909년 첫 아내가 죽고, 1년 후 마르가 폰 회슬린(Marga von Hoesslin)과 재혼한다. 1913년엔 베를린 대학교의 학장이 된다. 1918년에 양자역학의 기초를 마련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카이저 빌헬름 학회(Kaiser-Wilhelm-Gesellschaft zur Förderung der Wissenschaften)의 회장을 맡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엔,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대인 과학자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플랑크의 아들 에르빈(Erwin)은 1944년 6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기도와 관련되어 처형되었다. 괴팅겐 (Göttingen)에서 그가 사망한 후, 카이저 빌헬름 학회는 그의 이름을 따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 zur Förderung der Wissenschaften; MPG)로 개명하였다. 막스 플랑크 자신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생존하였으나, 둘째 아들 에르빈 플랑크는 언급한 대로 2차 대전 중 처형당했고, 첫째 아들 카를 플랑크는 1차 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그의 딸이 출산 중 사망하고, 그가 아끼는 많은 후배 과학자들이 유대인 박해 때문에 고초를 입거나 이를 피해 망명하는 등,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개인사는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플랑크는 스위스의 아마추어 과학자에 불과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발굴한 사람이며, 1차 대전 기간 중 과학계의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는 것을 막고자 끝까지 노력하였다. 플랑크는 인격적으로 많은 동료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나치즘 사이에서 최후까지 균형을 유지하고자 애쓴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플랑크는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독일 과학계의 수장으로 후배 과학자 발굴과 과학계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는 20세기 독일 과학계의 눈부신 성과에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핵심적인 기여를 한 양자역학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양자역학을 수용하지 않고 부정하는 태도를 지녔다. 포인팅 벡터 포인팅 벡터()는 전자기장이 가진 에너지와 운동량을 나타내는 벡터로, 전기장과 자기장의 벡터곱이다. 영국의 존 헨리 포인팅()이 1883년에 유도하였다. 포인팅 벡터 S는 국제단위계에서 다음과 같다. CGS 단위계에서는 formula_2 대신 formula_3를 쓴다. 포인팅 벡터의 크기는 전자기장의 에너지 선속 밀도(, 단위 시간 및 단위 면적 당 에너지)의 크기와 같다. 포인팅 벡터의 방향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향과 같으며 항상 전기장 및 자기장과 수직이다. 포인팅 벡터는 전자기장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운동량 formula_4와 각운동량 formula_5과도 다음과 같이 연관되어 있다. 포인팅 정리()는 전자기장을 포함한 계에서의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즉, 전자기장이 한 일의 양은 전자기장이 잃게 되는 에너지의 양과 같다는 정리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우변의 첫 번째 적분은 부피 안에 저장된 전자기장의 에너지이며, 두 번째 적분은 표면의 수직 방향의 전자기파로 방출되는 에너지다. 즉, 포인팅 정리에 따르면, 전자기력에 의하여 전하가 받은 일의 양은 전자기장에 저장된 에너지의 양의 감소량과 표면의 수직 방향의 전자기파로 방출되는 에너지량과 같다. 역학적 에너지 밀도, 전자기장의 에너지 밀도 식을 이용하여 포인팅 정리 식과 발산정리를 이용하면 포인팅 정리의 미분형을 얻을 수 있다. 미세 구조 상수 미세 구조 상수(微細構造常數, , 기호 "α") 또는 조머펠트 미세 구조 상수(Sommerfeld -)는 전자기력의 세기를 나타내는 물리상수다. 원자물리학과 입자물리학에서 자주 나타난다. 1916년 아르놀트 조머펠트가 발견하였다. 원래 조머펠트가 원자 방출 스펙트럼의 미세 구조를 연구할 때 발견하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미세 구조 상수 formula_1는 국제단위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formula_3는 기본 전하, formula_4는 원주율, formula_5는 디랙 상수, formula_6는 빛의 속도, formula_7은 진공의 유전율이다. 이 값은 두 전자가 formula_8(전자의 컴프턴 파장)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때, 그 전기적 위치 에너지와 전자의 정지 에너지 formula_9의 비로 해석할 수 있다. CGS 단위계에서는 formula_10 인자가 전하량에 포함되므로 식이 다음과 같이 바뀐다. formula_1는 차원이 없는 상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단위계에 상관없이 같다. 여기에 들어가는 기본 상수값을 대입해보면 이 나온다. 이 값은 실제 측정값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양자 전기역학에서 예견하는 전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보정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전자의 자기 모멘트와 미세 구조 상수와의 관계를 통해 구해진 것으로, 다음과 같다. 크라메르 공식 선형대수학에서, 크라메르 공식(Cramer公式, ) 또는 크래머 공식은 유일한 해를 가지며 변수와 방정식의 수가 같은 연립 일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공식이다. 계수 행렬과 그 한 열을 상수항으로 대신하여 얻는 행렬들의 행렬식의 비를 통해 해를 나타낸다. 둘 또는 셋 이상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연립 일차 방정식의 경우, 크라메르 공식에 의한 알고리즘은 가우스 소거법에 의한 알고리즘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다. 연립 일차 방정식 에서, formula_2가 정사각 행렬이며, 행렬식이 0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 유일한 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으며, 이를 크라메르 공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formula_4는 formula_2의 formula_6번째 열을 formula_7로 대신하여 얻는 행렬이다. 연립 일차 방정식 의 계수 행렬 formula_2의 formula_13-여인자를 formula_14라고 하자. 그렇다면, 라플라스 전개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이에 따라, 각 formula_17번째 방정식에 formula_14을 곱한 뒤 모두 합하면 를 얻는다. formula_20이므로, 양변을 formula_21로 나누면 를 얻는다. 연립 일차 방정식 이 유일한 해를 갖는다면, 그 해는 다음과 같다. 연립 일차 방정식 이 유일한 해를 갖는다면, 그 해는 다음과 같다. 크라메르 공식은 미분기하학에서 매우 유용하다. 두 개의 방정식 formula_30, formula_31이라 가정한다. 여기서, u와 v는 독립 변수이고, formula_32, formula_33라 정의한다. 여기서 formula_34의 방정식을 찾는 것은 크라메르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먼저, F,G,x,y의 미분을 계산한다. dF, dG에 dx와 dy를 대입하면 u와 v는 독립적이므로, du와 dv의 계수는 0이다. 따라서 계수에 대한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따라서, 크라메르 공식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두 개의 야코비안 항이다. 유사하게 formula_47, formula_48, formula_49의 공식들도 유도할 수 있다. 스위스 수학자 가브리엘 크라메르(Gabriel Cramer, 1704년 - 1752년)에게서 유래한다. 행렬식 선형대수학에서, 행렬식(行列式, )은 정사각행렬에 수를 대응시키는 함수의 하나이다. 대략, 정사각행렬이 나타내는 선형 변환이 부피를 확대시키는 정도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행렬식은 행렬보다 앞서 등장하였다. 행렬식은 원래는 연립 선형방정식의 성질을 결정하기 위해 정의되었고, 행렬식의 영어 이름 "디터미넌트"()는 "디터민"()(결정하다)에서 유래하였다. 행렬식이 0이 아닌지 여부는 연립방정식이 유일한 해를 갖는지를 결정한다. 16세기에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formula_1 행렬식을, 17세기에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일반적인 크기의 행렬식을 정의하였다. 체 formula_2 위의 formula_3 정사각행렬 의 행렬식은 또는 와 같이 표기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세 방법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체 formula_2 위의 formula_3 정사각행렬의 집합을 formula_9로 쓰자. 그렇다면, 행렬식은 다음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함수 formula_10이다. 즉, 행렬식은 표준화된 교대 다중 선형 형식이다. 행렬식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위 정의와 동치이다. 행렬식 formula_11는 formula_12에 대하여 재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행렬식은 라이프니츠 공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formula_18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이에 따라, 우변은 formula_24개 항을 갖는 formula_12차 동차 다항식이다. formula_26인 경우, 반은 더하는 항, 반은 빼는 항이다. 0 × 0 행렬의 행렬식은 1이다. 1 × 1 행렬의 행렬식은 그 유일한 항이다. 2 × 2 행렬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3 × 3 행렬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3 × 3 행렬의 행렬식 공식은 사뤼스의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계산한다. 그러나 이는 더 큰 행렬에 대해 확장할 수 없다. 3 × 3 실수 행렬의 행렬식은 은 스칼라 삼중곱의 표현이기도 하다. 즉, 3차원 벡터의 스칼라 삼중곱은 정규 직교 기저 아래 벡터 좌표 성분에 대한 3 × 3 행렬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실수 3 × 3 행렬의 행렬식과 스칼라 삼중곱의 절댓값은 둘 다 세 벡터가 이루는 평행육면체의 부피를 나타낸다. 3 × 3 행렬의 행렬식과 스칼라 삼중곱은 둘 다 치환 아래 특별한 대칭성을 갖는 데 주의하자. 즉, 이들의 부호는 세 3차원 벡터의 방향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 기하 직관은 높은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다. 4 × 4 행렬의 행렬식은 다음과 같다. 행렬식의 필산 기법 또는 계산 알고리즘에는 가우스 소거법, 라플라스 전개 등이 있다. 가우스 소거법은 정사각행렬을 일련의 기본행연산을 통해 상삼각행렬로 변환한다. 행렬식의 선형성과 교대성에 따라, 기본행연산은 행렬식을 보고 알아낼 수 있는 배수만큼 변화시킨다. 또한, 상삼각행렬의 행렬식은 자명하게 모든 대각항의 곱이다. 따라서, 가우스 소거법을 통해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 라플라스 전개는 행렬식을 소행렬식의 선형 결합으로 전개한다. 따라서 위 예시에서도 알 수 있듯, 라플라스 전개는 큰 행렬의 복잡한 행렬식을 작은 행렬의 간단한 행렬식으로 귀결시킨다. 행렬식 formula_10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 라플라스 전개에 따르면, 행렬식은 다음과 같이 더 작은 행렬식의 결합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formula_39는 formula_40의 여인자이다. 라이프니츠 공식에 따르면, 행렬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리만 제타 함수 수론에서, 리만 제타 함수() formula_1는 소수들의 정수론적 성질을 해석적으로 내포하는 유리형 함수이다. 해석적 수론에서 소수의 분포를 연구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또한 L-함수 이론의 모태이다. 리만 제타 함수는 실수부가 1보다 큰 임의의 복소수 formula_2에 대해, 다음과 같은 디리클레 수열로 정의된다. 이 무한급수는 formula_4의 영역에서 수렴하고, 위 식은 정칙함수를 정의한다. 리만은 제타 함수가 "s" ≠ 1인 모든 점에서 정의된 유리형 함수로 유일하게 해석적 연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리만 가설에 등장하는 제타 함수는 확장된 리만 제타 함수를 뜻한다. 야코비 세타 함수 를 쓰자. 이므로, 자이 함수(formula_8 function)를 얻을 수 있다. 오른쪽의 적분은 모든 복소수 formula_9에 대하여 수렴하지 않으나, 다음 식의 적분은 모든 formula_9에 대하여 수렴한다. 한편 여기서 세타 함수의 성질 를 사용하면, 를 보일 수 있다. 이로부터 제타 함수의 해석적 연속과 함수 방정식 를 얻는다. 다음은 작은 수에 대한 제타 함수의 값이다. 현재 리만 제타 함수가 실수부가 짝수(formula_29)인 실수에서는 formula_30의 유리수배, 즉 초월수임이 알려졌다. 홀수일 때에는 3의 제타 함수 값은 무리수이며, 5, 7, 9, 11의 제타 함수 값 중 적어도 하나가 무리수라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리만 제타 함수가 소수와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위와 같은 절차를 거쳐서 우변의 모든 소수의 배수를 없애주면 특정 합성수는 항상 소수의 곱으로써 나타낼 수 있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라서 분모가 합성수 또는 소수인 수가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1만이 남는다. 즉 위에서 제시되는, 이것은 디리클레 급수(디리클레 덧셈)이다. 따라서, 리만 제타 함수는 규칙적으로 모든 자연수에 대한 무한급수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방법으로 성질을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리만 제타 함수는 오일러 곱을 통해 소수와 연결된다. 따라서, 이 식을 이용하면 소수의 비밀을 수학적으로 파헤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식은 중요하게 이용된다. 즉 리만 제타 함수는 모든 소수 formula_39에 대해 위와 같은 무한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 식은 오일러의 곱셈 공식이라 불리며, 등비급수의 식과 산술의 기본 정리로부터 유도해낼 수 있다.↵그 간단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 우변의 분모에서 2의 배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계속해서 반복하면, 동일한 절차로 우변의 분모에서 3의 배수가 모두 사라진다. 함수 방정식에 따라, 리만 제타 함수는 음의 짝수 formula_48에서 영점을 가진다. 이 영점들을 자명한 영점()이라고 한다. 리만 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영점들은 다음과 같은 임계 구역()에 존재한다. 임계 구역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집합을 임계 직선()이라고 한다. 임계 직선 위에는 무한히 많은 영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계산된 모든 비자명 영점들은 임계 직선 위에 존재하고 있지만, 모든 영점들이 실제로 임계 직선 위에 있는지 여부는 아직 증명되거나 반증되지 못했다. 이는 리만 가설로 일컬어지는 문제로, 현대 수학의 주요 난제로 꼽힌다.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들은 해석적 수론에서 소수의 분포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소수 정리는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들에 대한 동치인 명제로 바뀌어 증명될 수 있다. 리만 제타 함수를 일반화한 몇 가지 제타 함수가 있다. 그중 가장 간단한 것은 후르비츠 제타 함수이며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 함수는 formula_52일 때 리만 제타 함수가 된다. 좌표계 좌표계(座標系, coordinate system) 혹은 자리표계는 유클리드 공간과 같은 다양체의 점이나 기타 기하학적 요소를 고유하게 결정하기 위해 하나 이상의 숫자인 좌표를 사용하는 체계이다. 스칼라 튜플을 이용해 n차원 공간의 각 지점을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스칼라는 보통 실수, 경우에 따라서는 복소수나 다른 일반적인 환(ring)의 원소를 말하기도 한다. 복잡한 우주에서 스칼라는 우주 전체에 대해 효과적인 좌표계를 산출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경우 그래프로 이 좌표계를 우주 지도 책에 함께 수집하여 둔다. 좌표를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인 직교좌표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발명했다. 그는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직교좌표계를 발명해 냈다고 한다. 힐베르트 공간 함수해석학에서, 힐베르트 공간(Hilbert空間, )은 모든 코시 열의 극한이 존재하는 내적 공간이다. 유클리드 공간을 일반화한 개념이다. formula_1가 formula_2 또는 formula_3라고 하자.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5은 완비 거리 공간을 이루는 formula_1-내적 공간이다. 내적 공간으로서, 힐베르트 공간은 표준적인 위상 공간 및 거리 공간 및 벡터 공간 및 노름 공간의 구조를 갖는다. 이와 동치로, formula_1-힐베르트 공간을 다음과 같은 평행사변형 항등식(平行四邊形恒等式, )을 만족시키는 formula_1-바나흐 공간 formula_9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경우, 내적 구조는 가 된다.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의 정규 직교 기저 formula_13는 다음과 같은 두 성질을 만족시키는 부분집합이다. 초른의 보조정리에 의하여, 모든 힐베르트 공간은 정규 직교 기저를 갖는다. 주어진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의 모든 정규 직교 기저의 크기는 항상 같은 기수임을 보일 수 있으며, 이 기수를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 formula_19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힐베르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는 벡터 공간의 기저를 이루지 않으며,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보다 작거나 같다. 이는 벡터 공간의 경우 formula_20를 필요로 하지만, 힐베르트 공간의 경우 formula_21가 오직 조밀 집합임이 족하기 때문이다. 두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 formula_24 사이에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들은 차원에 따라 완전히 분류된다. 또한, formula_1-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즉,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은 음이 아닌 정수이거나 아니면 가산 무한 formula_33이다. 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서,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2는 스스로의 연속 쌍대 공간 formula_35와 동형이며, 만약 formula_36일 경우 이는 표준적() 동형이다. formula_1가 formula_2 또는 formula_3라고 하고, formula_40가 측도 공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다면 L 공간 formula_41는 formula_1-힐베르트 공간을 이룬다. 만약 formula_43가 셈측도가 부여된 집합이라면 이며, 함수 는 formula_41의 정규 직교 기저를 이룬다. 만약 formula_48가 분해가능 시그마 대수(formula_49로 정의한 거리 공간이 분해 가능 공간인 경우)이며, 또한 formula_43가 시그마 유한 공간(가산개의 유한 측도 부분집합들의 합집합)이라면, formula_41는 분해 가능 공간이다. 힐베르트 공간은 해석학의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며, 특히 편미분방정식 이론에서 널리 쓰인다. 양자역학에서, 양자계의 상태 공간은 분해 가능 힐베르트 공간으로 나타내어진다. 이 밖에도, 신호처리에도 힐베르트 공간이 응용된다. 다비트 힐베르트가 1912년에 힐베르트 공간 formula_52을 정의하였다. 이는 유클리드 공간이 아닌 최초의 힐베르트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후 1929년에 존 폰 노이만 이 힐베르트 공간을 추상적으로 정의하였다. 양자역학 양자역학(量子力學, )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와 미시적인 계의 현상을 다루는 즉, 작은 크기를 갖는 계의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등 과학기술,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평가된다. 19세기 중반까지의 실험은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아원자 입자와 관련된 실험들의 결과는 고전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역학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양자역학은 플랑크의 양자 가설을 계기로 하여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디랙 등에 의해 만들어진 전적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학문이다. 양자역학에서 플랑크 상수를 0으로 극한을 취하면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으로 수렴하는데, 이를 대응 원리라 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역학, 전자기학(일반 상대성 이론은 제외)을 포함하는 고전 이론을 일반화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는 거시적으로는 관측이 어렵지만 고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자역학 개념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드하스-판알펜 효과는 양자역학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영역에서는 분명해진다. 양자역학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이 처음 제시했다. 독일어 'Quantenmechanik(퀀텐메카닉)'이 영어 'Quantum mechanics'로 번역되었고 일본에서 이를‘量子力學(료오시리키가쿠)’라 번역했는데 이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와 ‘양자역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와 ‘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평화의 회복과 더불어 물리학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도의 노벨상은 패전국 독일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에게 수여되었으며(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21년, 닐스 보어 1922년),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양자론이 진전되었다. 그 주요 중심지는 1921년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개설된 코펜하겐(닐스 보어)을 비롯하여 뮌헨(아르놀트 조머펠트), 괴팅겐(막스 보른, 막스 플랑크), 레이던(파울 에렌페스트)이며, 그 밖에 취리히의 에르빈 슈뢰딩거, 베를린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담하였다. 이 형성기는 또한 젊은 세대의 활약이 특징적이었다. 양자역학 형성의 길은 두 갈래로 되어 있다. 한쪽은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출발하여 대응원리(對應原理)에서 행렬 역학으로 통한 길이다. 또 한쪽은 아인슈타인의 광자로 비롯하며, 루이 드브로이의 물질파를 거쳐서 도달하는 파동역학의 길이었다. 이 둘은 그 형성과정이나 수립된 이론이 전혀 달랐지만 얼마 안 가서 실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통일체로서의 양자학으로 간추려졌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의 형성이 일단락될 무렵, 물리학은 재차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였고, 전혀 다른 형태를 갖추고 형성되었으나, 그 이룩한 결과는 일치했다.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의 유도를 시도하여 양자의 동등성(同等性)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폴 디랙과 파스쿠알 요르단()은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으로 두 개의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1926년경에는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 양자역학의 형식은 성립되었어도, 그 물리적 해석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파동의 개념에 대하여서도 파동역학의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것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른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마침내 이것도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되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양자론의 개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차차 확실해졌고, 드디어 1927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등장하였다. 파와 입자의 두개의 상(像)을 결부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이 관계는, 미시적 세계에서는 일상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식 일반에 펼쳐 양자역학의 일관된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여, 같은 해 상호보완성 원리를 제창하였다. 현상의 시공적(時空的)인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하는 동시, 서로 배제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EPR 역설 등 의문을 계속 제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주관주의·실증주의 경향의 세력이 증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결론들은 당시 과학자(및 일반인)들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이 이론이 실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해 많은 해석과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보어 등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적 측면들은 우리의 지식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이며, 따라서 결정론적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현상인 도깨비 원격현상등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근본에는 보다 깊은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박을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EPR 역설이라 불린다. 벨은 EPR 역설을 이용해, 조건법적 명확성()을 가정한 경우 양자역학과 국소적 이론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차이가 있음을 증명했다. 실험을 통해서, 실제 세계는 조건법적으로 명확하지 않거나 비국소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인 루이스는 비결정론이 그의 철학적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았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아닌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에서 숨은 변수 이론을 지지했다. 코펜하겐 해석을 둘러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당시의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현재 표준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나,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 --파동함수·불확정성 원리 등장- 앎의 한계 지적-- 양자역학이라는 새 이론은 원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론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새로 꺼내기 시작했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한 하이젠베르크. <출처: (CC) German Federal Archive> 원자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6)’라고도 하고 ‘상태함수’라고도 하는 수학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양자역학이 제안된 초창기부터 많은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전까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수학을 이용해 방정식이나 공식을 만들면, 그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방정식이나 공식에 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안에 소위 ‘불확정성 원리7)’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실용적으로 물리현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있는데, 정작 그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보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피에르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물리학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파동함수와 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개념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랑크와 보어의 초기 양자역학은 전자의 궤도가 점프하는 현상을 강조한 반면 후기의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전자의 위치가 확률적 분포로밖에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양자역학은 원자폭탄, 반도체 등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고 후기의 양자역학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후기 양자역학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성을 인정함으로써 현대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실험가능한 물리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험이 불가능한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내포하기도 했다. 물리학은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21세기 초반까지 끈이론, 통일장 이론 등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나 실험이 불가능한 가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양자역학의 수학 공식화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화는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개념들과 공식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C* 대수 이론, 스튀름-리우빌 이론 등이 쓰일 수 있지만, 보통은 힐베르트 공간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통해 기술한다. 이는 존 폰 노이만이 1930년대에 완성한 것으로, 20세기 이전에 개발된 수학적 모형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나타나는 구조들 중 상당수는 양자역학과 함께 발전해 온 순수수학의 분야인 함수해석학에서 나온 것이다. 에너지와 운동량 등의 물리적 관측량은 더이상 위상 공간상의 함수의 값이 아닌 선형 연산자의 고윳값으로 다루어진다. 편의상 브라-켓 표기법과 슈뢰딩거 묘사를 쓰자. 양자역학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6는 플랑크 상수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대신 밀도 연산자 formula_4를 쓰면, 그 시간 변화는 다음과 같다. 이 수학적 틀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비가환 연산자에 대한 정리가 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 1901년 12월 5일~1976년 2월 1일)는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하며, 행렬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하여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1932년에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양자역학의 행렬적 형식을 1925년 발표했다. 1927년에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가장 유명한 과학적 업적인 불확정성 원리를 출판했다. 또한, 그는 난류의 유체역학,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 소립자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카스파르 하이젠베르크와 안니 베크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0년부터 4년동안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와 괴팅겐-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는 뮌헨에서는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빌헬름 빈에게 지도받았고, 괴팅겐에서는 막스 보른과 제임스 프랑크에게 물리학 교육을,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수학 교육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1923년에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24년에 괴팅겐에서 하빌리타치온(박사학위 후에 따는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정성스럽게 관심을 가져주던 조머펠트는 이를 알고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에서 열린 보어축제에 데려가 주었다. 보어는 축제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강의를 하였고, 하이젠베르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2년 6월의 일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조머펠트의 조언을 따라 난류에 대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는 논문에서 층류의 안정함과 난류의 성질을 연구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 주제를 잠시 다시 연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보른 아래에서 제이만 효과에 관해 연구했다. 이 연구는 그의 하빌리타치온 논문이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괴팅겐에서 사교수로 있었다. 1924년 9월 17일, 하이젠베르크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서 코펜하겐 대학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닐스 보어와 연구를 하게 되었고, 1925년 5월 1일에 괴팅겐으로 귀환했다. 괴팅겐에서 그는 6개월에 걸쳐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양자역학의 행렬적 형식을 개발했다. 1926년 5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보어의 조수이자 대학 강사 일을 하게 되었다. 코펜하겐 생활 도중에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개발하였다. 1927년의 사건이었다. 그 해,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게 되었다. 거기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파울리 배타 원리를 이용해서 물질의 강자성을 연구했다.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자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핵의 중성자-양성자 모형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 해, 그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유대인 물리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가르치던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계와 SS의 비판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본인의 명예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설을 쓰는 등 적극적으로 본인을 충실한 독일 시민으로 포장했다. 1939년에 핵분열의 발견 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력 프로젝트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1년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지배하에 있던 코펜하겐을 방문해서 닐스 보어와 이론 물리와 핵 물리학을 논했다. 이 만남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와 하이젠베르크와 나치의 사람들의 관계는 수십 년간 과학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만남은 마이클 프레인의 연극 《코펜하겐》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은 입실론 작전에 따라 독일의 대표적인 핵물리학자들을 체포했다. 이에 따라 하이젠베르크 역시 체포당했고 조사받았다. 전쟁후 하이젠베르크는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이젠베르크는 1947~1948년에 걸쳐 초전도체에 관한 논문 세 편을 쓰며 초전도체의 이해에 기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1957년에 서독의 첫 원자로를 기획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 빌헬름 과학 협회의 회장이 되었고, 1958년 협회가 뮌헨으로 옮겨지고 막스 플랑크 협회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독일 연구 협회 회장, 핵물리학 위원회 회장,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이사장을 했다. 1957년부터 하이젠베르크는 플라스마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핵융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제 핵물리 협회의 과학 방침 위원회의 회원이었으며, 몇 년 간은 위원장도 했다. 1976년 2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이렇게 관측한 두 개의 값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존재한다는 원리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이 말을 쉽게 풀어 쓰게 되면 관측을 하는 그 순간에도 물체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측한 값은 불확정한 값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RMS)편차 (X의 표준편차)는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P의 표준편차)는 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 하이젠 베르크는 원자 핵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 1932년 하이젠베르크는 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하이젠베르크가 시발점이 되어 시작된 소립자론의 연구와 그 발전 동향이다. 물질의 궁극이라 여겨지는 구성요소와 그 궁극요소의 운동을 연구하는 학문. 소립자와 그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이론은 상대론적인 장의 양자론이다. 이 이론에 의해 여러 가지 소립자의 속성, 즉 질량, 스핀, 스핀과 통계성과의 관계 외에, 소립자의 반응에서 나타나는 각종의 보존법칙과, 이것과 결부된 소립자의 전하, 그 밖의 양자수가 규정된다. 그리고 만약 자연계에 어떠한 종류의 소립자가 존재하며 어떠한 상호작용하에 있는가를 안다면 이들 소립자에 관련된 물리량을 계산으로써 구해 실험과 비교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장의 양자론은 양자전자기학이라 불리는 특별히 잘 알려진 예를 제외하면 실험결과의 정량적 이해를 포함한 그 타당성을 증명하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립자에 임의의 상호작용을 도입하면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수학적 곤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장의 양자론 자체에 본질적인 내부모순이 있다는 견해가 옛날부터 주장되어 왔다. 덧붙여 1950년 무렵부터 실험에 의해 새로이 여러 소립자가 발견되고, 강한상호작용을 하는 소립자의 종류는 점차 증가해 100종류까지 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다양한 소립자의 존재를 통일적으로 기술하는 원리가 장의 양자론에는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도 관련해서 소립자를 기술하는 이론으로서의 장의 양자론의 유효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종종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립자의 약한상호작용 및 강입자의 존재양식과 강입자의 강한상호작용에 관한 지식은, 이 시기에는 아직 현상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 실험적 지식의 집적과 여러 현상의 이론적 분석이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한편에서는 공간반전의 불변성을 파괴하는 약한상호작용의 형태가 점차로 명백해짐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강한상호작용의 영역에 있어서는 1956년의 사카타 모형에서부터 1964년의 쿼크 모형의 제창을 거치며 강입자는 이미 소립자가 아니라, 이에 대체하여 색이라 불리는 3성분의 전하를 가진 몇 종류의 쿼크장이 공통으로 하나의 게이지장과 상호작용함으로써 개개의 강입자가 구성된다고 하는 견해가 70년대 초에 확립되었다. 이러한 게이지장의 입자를 쿼크와 반쿼크를 풀처럼 붙여서 강입자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글루온이라 한다. 약한상호작용도 1967년 S. 와인버그, 68년 A. 살람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이 상호작용을 담당하는 장, 즉 약보존장을 게이지장의 형식으로 기술하여 이것을 전자기적상호작용과 통일시킬 수 있게 되어 약한상호작용이 약한 이유 대해서는 약보존이 큰 질량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이해되었다. 이것에 대해 강한상호작용이 강한 이유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쿼크와 반쿼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글루온의 상호작용에서 도출해 보면, 이 둘이 멀리 떨어짐에 따라 무한히 강해진다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으로써 설명된다. 소립자를 현대적으로 정의해 보면 소립자는 쿼크나 경입자와 같은 스핀 1/2의 페르미형 입자와 강·약-전자기적상호작용을 부여하는 몇 종류의 게이지장이며, 또 약-전자기적상호작용의 게이지불변성의 자발적 붕괴를 일으키는 몇 개의 스핀 0인 입자의 원리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에서 더 나아가 이 3종류를 단 한 종류의 상호작용으로 통일하려는 견해가 1974년 H. 조지와 S.L. 글래쇼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팽창우주론에 따라 우주 초기에 물체가 초고온·초고밀도 상태에 있었을 때 모든 상호작용은 단일한 양상을 띠고 있었고, 그 후 우주팽창에 따른 냉각에 의해 진공이 상변화를 여러 번 일으켜 상호작용의 분화가 진행되고 자유롭던 쿼크와 글루온은 가두어져 강입자를 만들어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물질세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대통일의 상호작용은 쿼크와 경입자를 대등하게 보고 이것을 세대라 하는 표지로 분류하여, 각 세대의 쿼크와 경입자 사이에 각 세대 공통된 게이지장의 군에 의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이와 같은 대통일상호작용에서는 앞서 서술한 3종류의 상호작용 외에 쿼크와 경입자의 상호전화를 일으키는 상호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종래는 절대 안정한 소립자라고 여겨왔던 양성자조차 극히 장시간의 수명을 가지고 붕괴한다고 예상된다. 과학자들은 19 세기 말에 뉴턴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만 있다면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역학은 입자 즉 눈에 보이는 역학을 담당하였고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파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절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파동과 입자 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입자와 파동은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에는 치명적인 문제, 즉, 흑체복사가 있었다. 흑체란 모든 전자기파를 흡수할 수 있는 물체인데 이로 이루어진 상자를 가열하였더니 흑체 안에 무한히 많은 파동들이 제각각의 에너지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플랑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플랑크는 실험 내용을 이용하여 강제로 수식을 만들었는데 이 수식이 의미하는 것이 파동 자체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어 왔던 진리가 깨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 후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이론을 발표한다. 이 이론은 빛이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이로 인하여 빛은 파동이자 입자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값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물리량이 연속 값을 취하지 않고 어떤 단위량의 정수배로 나타나는 비연속 값을 취할 경우, 그 단위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모든 물리량이 불연속적인 값을 가지며 이 불연속적인, 즉 양자화된 것들의 움직임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물체를 '본다'라고 하는 행위는 그 물체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즉 가시적인 물체에 대하여만 적용될 뿐이다. 만약 이러한 물체가 빛의 입자만큼 작아지게 된다면, 이러한 관측 행위는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란 것은 작은 입자들을 볼 때 그 입자들이 양자만큼 작아질수록 “관측”이라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입자들은 그 관찰 행위 자체에 영향을 받게 되어 우리가 “관측”한 물리량에 착오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어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1932년 하이젠베르크는 여러 가지 공로로 인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주로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서의 공로가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의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1250년 무정의 통치기인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경)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하 문명은 여러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본토에서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이래 약 5000년 동안 수많은 민족들이 건국한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 한나라 때 중화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이라는 말이 성립되었고 당나라는 서방의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도 하였다. 한나라 이후에 한족들은 취약해지고 외국 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정복하며 북위를 건국하고 나서부터는 중국 대륙은 이민족의 무대가 된다. 북위부터 당나라까지 이어지는 이민족의 정복 왕조는 중국을 계승하였고 원나라 때는 몽골인들이 중국 전토를 손아귀에 넣는다. 한족들이 건국한 송나라 때에는 중국 중세 문화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유린당하여 사라진다. 또한 여진족은 청나라를 건국하여 지배자로서 중국을 손에 넣고 통치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중국 본토는 "아시아의 병자"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고 대만과 만주는 일본 제국에 지배당하고 중국 한족의 남조의 수도로서 상징적이던 난징은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것처럼 현대에는 일본 제국에 의해 난징 대학살과 강간으로 유린당한다. 홍콩은 영국이 지배했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지배하였다.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한족의 개혁파들에 의해 양무 운동과 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힘이 없었고 열강의 지배와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보수파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에 의해 포섭되기도 하는 각지의 군벌에 의해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고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혼란에 싸여 분열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침략에 의해 중국 동부 지역을 잃고 난징이 유린을 당하며 중국 자체가 지배당할 뻔한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이 때 일본의 중국 정복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워졌으나 러시아 또한 중국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중국 영토로 남하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중국에서는 보통 “해방 전쟁”이라 칭함)과 중일 전쟁(중국에서는 보통 “항일전쟁”이라 칭함)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 많은 중국인 가난한 농민, 소작농 계급들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힘을 키웠고 그 후 중일 전쟁 중에 일본의 세력 아래에 있던 군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세력을 늘려 온 중국 공산당은 계속되는 오랜 내전으로 군인들에 의해 반복되던 민간인에 대한 살인과 강간, 방화에 지친 중국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패망하고 나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일어나던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을 국경절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고대의 전설적 제왕들이다. 삼황(三皇)은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를 말하며, 오제(五帝)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를 지칭한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를 ‘선진 시기’(先秦時期)라고도 한다. 하(夏) (기원전 21세기 - 기원전 17세기)의 경우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대체로 실존했던 국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를 무너뜨리고 세운 상(商)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1세기 중반)은 은허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은(殷)이라고도 부르며, 한때 신화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은허의 유적 발굴 이후 실존했던 국가로 인정되었다. 주(周) (기원전 1050년 경 - 기원전 256년)는 본래 상(은)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상(은)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폭압으로 상(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은 나라다. 이 때 주의 왕을 처음으로 ‘천자’(天子)라고 불렀다. 주의 패권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가 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한다. 춘추 시대에는 여러 주나라의 제후국들이 주의 천자를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로, 세력이 강한 제후국들 중에 주 왕실의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한 제(齊)-환공(桓公), 진(晉)-문공(文公), 초(楚)-장왕(莊王), 오(吳)-합려(闔閭), 월(越)-구천(勾踐)의 5제후를 춘추 오패라고 부른다. 전국 시대로 들어서면서 천자에 대한 충성마저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진(秦),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라는 전국 칠웅이 차례로 왕을 칭하고 오로지 천하 통일을 위해 질주하였다. 진(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은 한(韓), 제(齊), 위(魏), 조(趙), 연(燕), 초(楚)를 무너뜨리고 중국 본토를 통일하였다. 진은 이어 모든 제후국을 폐지하고 조정에서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어 진왕 영정은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진(秦)나라의 무리한 통치와 폭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진 이세황제의 치세에 몰락하여, 그 뒤 멸망하였고, 초한전을 거쳐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다. 한나라는 200년 넘게 유지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서양에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 - 서기 9년)은 한나라(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세운 신(新) (9년 - 23년)에 의해 잠시 명맥이 끊기나, 신나라는 급격한 개혁이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각지의 반란으로 망하였고, 한나라(전한)를 계승한 국가인 후한(後漢) (25년 - 220년)이 다시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무제 이후의 황권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위에게 멸망당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삼국 시대(三國時代) (220년 - 280년)라고 하지만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 - 589년) 까지 포괄하여 위진 남북조 시기라고 한다. 위(魏)는 조비가 후한의 황제로부터 직접 제위를 물려받은 국가로 중원 지역을 차지하였다. 촉(蜀) 후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계승하였으나, 세력권은 서남 지방에 한정되었다. 한편 손권의 오(吳)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장강 이남을 차지하였다. 위는 사마염의 서진(西晉) (265년 - 316년)에게 승계되며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나, 초기부터 황실 분란인 팔왕의 난 등으로 혼란스럽다가, 흉노족의 전조에게 멸망당한다. 서진의 멸망 이후 서진이 있던 자리에 16개의 국가가 들어서 패권을 겨뤘으니 이를 십육국 시대(十六國時代) (316년 - 439년)라 한다. 비한족 국가인 전조(前趙)·후조·전연(前燕)·후연· 남연, 관중(關中)에 있던 전진(前秦)·후진·서진 및 하투(河套)의 하(夏), 사천(四川)의 성한(成漢), 하서(河西)의 후량·북량·남량과, 한족 국가인 북연, 하서(河西)의 전량(前涼), 서량이 있었으며, 전조, 후조, 전진 등이 한때 큰 세력권을 과시했으나 결국 북조의 북위로 통합된다. 북위(北魏)는 선비족 탁발씨의 국가로, 3대 태무제의 시기에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북위는 곧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리되고, 동위는 북제(北齊), 서위는 북주(北周)로 이어진다. 북제는 이후 북주에 흡수되고, 북주는 왕실 외척인 양견에 의해 수(隋)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한편 서진 황실의 계승을 천명한 동진(東晉)은 서진의 영토를 되찾으려 여러 차례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세력권은 주로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동진을 계승한 국가들이 이어진 왕조를 남조라고 하며, 송(宋)=유송(劉宋), 제(齊)=남제(南齊), 양(梁), 진(陳)이 있다. 수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수(隋) (581년 - 618년)는 북주의 외척인 양견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하나, 무리한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고, 당(唐) (618년 - 907년)으로 이어진다. 당나라는 비단길을 통한 유럽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켜 중국 고대 문화를 서양에 전파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황후이던 측천무후가 조정을 장악하고 아들인 당의 황제를 황태자로 격하시키고 국호를 잠시 주(周) (690년 - 705년)로 바꾼다. 측천무후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인재 중심의 정치 역시 펼쳐서 백성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측천무후 이후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꾸게 된다. 후량에게 멸망당한다. 오대십국 시대 (907년 - 960년)는 화북의 정권을 다투던 5개의 대국과 나머지 10개의 소국이 혼재했던 시기이다.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宋) (960년 - 1279년)이 다시 중원을 통일하였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로 상비 해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문화 정치를 펼친 왕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으며,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몽골 지역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거란족이 세운 국가인 요(遼) (916년 - 1125년)에 의해 베이징 이북의 많은 지역을 빼앗기고, 요나라와 서하에 사실상의 조공을 납부하며 별 위세를 떨치지 못하다가, 요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여진족이 요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금(金) (1115년 - 1234년)에게 화북 지방을 빼앗기고 멸망한다. 이 때까지를 북송(北宋)시대라고 하고, 이후 북송의 황실을 계승한 왕조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몽골 제국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몽골 제국을 계승한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다.대성은 닥나라를 멸망시켜 큰 주요 인물이 되었다. 원(元) (1271년 - 1368년)은 만주,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유럽까지 지배한 몽골 제국의 적장자인 쿠빌라이 칸이 몽골고원, 만주, 화북력들을 아우르는 지역의 한족식으로 세운 국가로,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주원장이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몰아내고 명(明) (1368년 -1644년)이라는 한족 왕조를 건국한다. 초기에는 외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과시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진왜란 등 외부 원정의 부담과 문화 침체로 쇠퇴하다가 사르후에서의 패배와 숭정제의 실책으로 멸망한다. 명나라의 몰락을 틈타 금나라의 후예인 만주족이 후금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청(淸) (1616년 - 1912년)은 후금을 계승한 왕조로, 초기에는 한족을 정책적으로 차별했으나, 전체적인 제도 및 왕조의 분위기는 명나라와 유사하였다. 양무 운동을 통해 근대 국가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서구 열강 세력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면서 더욱 더 쇠퇴하고, 1912년에 신해 혁명으로 멸망한다. 청나라 소조정이 1912년 부터 1924년 까지 유지되었지만 결국 붕괴되었다. 그 사이에 청나라 복벽사건이 일어나서 1917년 7월 1일 부터 청 황조가 복벽되었으나 1917년 7월 12일에 끝을 맺었다. 한편 남명(南明) (1644년 - 1662년)은 멸망당한 명나라의 왕실을 계승한 나라로, 명의 부흥을 기도하였으나 청나라에 망하였다. 남명의 신하였던 정성공은 타이난으로 건너가 정씨왕국을 설립하여 청나라에 대항하지만 3대째에 복속당한다.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년 - 현재)은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이다. 이후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군벌로 등장하였다. 특히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거느리는 북양 군벌을 이끌고 쑨원으로부터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았다. 위안스카이가 1916년 사망하자, 이후 그의 부하들이 할거했는데, 대표적으로 안휘파의 돤치루이, 직예파의 펑궈장, 차오쿤, 오패부, 봉천파의 장쭤린, 산시파의 옌시산 등이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였다. 한편 중화민국 최초의 공화정 체제인 북양 정부는 1928년까지 존속했다. 그 후 북벌이 재개되고 모든 세력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난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 국민당 주도의 국민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편 천두슈(陳獨秀)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냈으나, 북벌 과정에서 분열이 일어나,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 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중일전쟁 중에 수도 난징이 점령당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해 옮겼지만, 끝내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난징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내분이 생겨 제2차 국공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국공 내전 중에 정부는 새로운 중화민국 헌법을 통과시켜 국민 정부를 헌정 체제로 격상시킨다.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난징을 점령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기세를 몰아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이후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 정부는 패닉 상태에 빠져, 국민당에 내분이 일어나 공산당 밑으로 들어가거나(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타이완, 영국령 홍콩 또는 국외 등지로 피난하는 국민당 관계자도 속출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장제스의 지도하에 현재의 타이베이 시로 정부를 이전하여 지금까지 중화민국의 법통이 계승되고 있다.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 덕분에 중화민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어도 국제적 위상이 거의 변함없었다. 그러나 점차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실리 외교를 선호하는 세계 다수의 국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울었다. 현재 중화민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있는 나라 수는 대폭 감소했지만, 서로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자처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중국’으로 정부가 병립된 분단 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부로 왕징웨이 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이 있으나 국민 정부에 통합된다. 국공 내전으로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1949년 - 현재)이 건국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여러가지 경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국경 분쟁을 일으키는 등 소련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통해 중화민국을 제치고 유엔에 입성하였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널리 인정받게 된다. 1971년 '핑퐁외교'로 불리던 리처드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마침내 1979년 중화민국의 강력한 후원국이던 미국과도 수교하게 된다. 덩샤오핑()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 대국 반열에 진입하였다. 1990년대에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차례로 편입하였다. 2008년에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이, 2010년에는 상하이 엑스포가 개최되으며, 2022년에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아래의 데이터는 양학통의 《計劃生育是我国人口史発展的必然》(1980년)에 의한다. 브라-켓 표기법 브라-켓 표기법(영어:)은 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를 표현하는 표준 표기법으로, 추상적인 벡터와 선형 범함수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이 표기법은 꺾쇠괄호 '⟨', '⟩'와 ,수직선 '|' 을 사용하여 표기한다. 오른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켓이라고 하며, 주로 열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 왼꺾쇠괄호로 표기한 것을 브라라고 하며, 주로 행벡터를 나타내고, 다음과 같이 쓰인다. 여기에서 는 '켓-'로 읽고, 는 '브라-'로 읽는다. 유한차원벡터공간에 포함된 브라와 켓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다음이 성립한다. 이때, 은 의 켤레 복소수이다. 브라와 켓, 그리고 연산자의 조합은 행렬 곱셈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브라-켓 표기법은 복소벡터공간에서 벡터의 스칼라곱 또는 벡터 위로의 선형 범함수의 작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내적이나 작용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같은 레이블인(같은 내용물을 가진)브라와 켓은 서로에게 에르미트 수반이다. 쌍대공간의 각 브라 벡터에는 꼭 한 개의 켓벡터가 대응된다는 리스 표현 정리에 의해 〈"ψ"| 는 다음과 같이 켓벡터 |"ψ"〉 와 대응되며 잘 정의되어 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1939년에 폴 디랙에 의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디랙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브라-켓 표기법이 생겨나기 100년 전쯤에 헤르만 그라스만이 내적을 formula_7 으로 표기한 전례가 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선형 대수학의 표기법으로, 특히 유한/무한 차원의 복소 벡터 공간에서의 벡터, 내적, 선형 연산자, 에르미트 수반, 쌍대공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며, 특히 양자역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산들을 쉽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양자역학에서 브라-켓 표기법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양자역학으로 설명되는 많은 현상들이 브라-켓 표기법을 사용하여 표현된다. 표기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켓 은 열벡터이며, 같은 레이블의 브라  의 켤레 전치(행벡터)이다. 그리고 브라, 켓, 선형 연산자를 나란히 쓰는 것은 행렬 곱셈을 의미한다. 그러나, 켓은 열벡터로 쓰여지기 어려운 불가산 무한차원 벡터 공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숫자들의 목록으로 열벡터를 쓰는기 위해서는 기저가 필요한데, 이에 반해 ""이라고 쓰는것은 어떠한 특정한 기저를 정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특성은 자주 다른 기저(예를 들자면 위치 기저, 운동량기저, 에너지 고유기저 등)로 바꿔야하는 양자역학에서의 계산에 유용하며, 그래서 브라-켓 표기법은 행렬로 쓰이기 어려운 기저벡터를 명시적으로 표현하기에 좋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는 중요한 두 기저 벡터가 단순히""와""로 표현될 때도 있다. 일부 물리학자들이 선호하는 내적에 대한 표준 수학적 표기법은 다음의 관계로 브라-켓 표기법과 정확히 같은 뜻을 나타낸다. 브라와 켓은 또한 다른 방법으로 구성되어 등의 다른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 다음의 구성은 외적을 나타낸다. 또한 행렬 곱셈(즉, 열벡터 곱하기 행벡터는 행렬)을 나타낼 수도 있다. 만약 켓이 벡터공간의 한 원소일 경우, 대응되는 브라는 쌍대공간의 원소이다. — 리스 표현 정리를 참고하라. 수학에서 "벡터"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벡터 공간의 한 원소를 일컫는 데에 사용된다. 하지만 물리학에서 "벡터"라는 용어는 대부분 실세계의 세 차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물리량(변위, 속도 등)들을 일컫는 데에만 사용된다. 이러한 벡터는 일반적으로 화살표를 위에 표시하거나()또는 굵게 표시하여 () 쓰여진다. 양자역학에서 양자 상태는 일반적으로 추상복소벡터공간의 원소로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파동함수(삼차원 공간의 각 점에서 복소수로 대응되는 함수)의 유한 차원 벡터 공간 등이 있다. 그러나 "벡터"라는 용어가 이미 다른 것들을 가르키는데 사용되면서(이전 단락을 참고하라.) 이러한 추상복소수벡터공간의 원소들은 일반적으로 "켓"으로 불리게 되고 켓 표기법을 사용하여 표기하게 되었다. 디랙이 발명한 켓 표기법은 수직선과 꺽쇠괄호를 사용한다(예시: ). 켓 표기법이 사용된 것들은 "켓"이라고 불리며, 는 "켓-A"로 읽는다. 이러한 켓들은 선형대수학의 일반적인 법칙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다음의 수식은 그 예시이다.. 참고로, 어떠한 기호, 문자, 숫자, 심지어 단어라도 레이블로 적절하다면 무엇이든지 켓 안에 레이블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 수식의 마지막 줄은 각 실수 마다 있는 무한히 많은 켓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서 기호""는 "" 자체의 의미와 관계 없이 구체적이고도 보편적인 수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는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켓 안의 레이블은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붙여진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 에너지 고유켓은 일반적이고 관습적으로 양자수를 나열한 것으로 붙여진다. 내적은 일반화된 스칼라곱으로, 두 벡터의 내적은 스칼라이다. 중성 표기법(오로지 내적에만 사용되는 표기법)에서, 내적은  으로 쓰일 수 있다. 여기에서 와 는 모두 추상벡터공간의 원소, 즉, 둘 다 켓이다. 와 의 내적은 브라–켓 표기법으로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 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브래킷(괄호)"으로 불리는 내적을 다음과 같이 "브라"와 "켓"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는 브라로 불리며, "브라-A"로 읽고, 는 위에서와 같이 켓이다. 내적을 브라와 켓으로 "나누는" 목적은 브라 와 켓 는 "둘다" ,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내적 밖의 다른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와 켓을 분리하는 의미는 크게 두가지가 있지만, 표현 는 아래에 있는 두번째 해석, 즉, 선형 범함수의 작용으로 해석된다. 고정된 정규 직교 기저를 사용하는 유한차원 벡터공간에서, 내적은 다음과 같이 행벡터와 열벡터의 행렬 곱셈으로 쓰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브라와 켓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서는 브라 옆에 켓을 놓는것이 행렬 곱셈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브라의 켤레 전치("에르미트 수반"으로도 알려져 있다.)는 켓과 일치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브라, 가 있을 때, 켤레 복소수를 취하고 행렬을 전치하면 다음과 같은 켓이 되기 때문이다. 무한차원공간으로 일반화하기에 더 쉬운, 동치의 추상적인 정의는 브라를 켓의 공간에서의 선형 범함수로, 즉, 켓을 입력으로 하고 복소수를 출력하는 선형 변환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브라로 표현되는 선형 범함수는 내적과 똑같이 정의된다. 따라서, 만약 가 리스 표현 정리 아래에서 와 상응하는 선형 범함수라면 다음과 같이 함수로 표시할 수 있다. 즉, 이것 또한 내적과 똑같은 복소수를 만들어낸다. 우변의 표현은 여전히 두개의 켓을 포함하지만 "내적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이 혼란스러울 수는 있지만, 결국 같은 숫자가 만들어지므로 내적으로 계산해도 큰 문제는 없다. 수학 용어에서, 브라의 벡터 공간은 켓의 벡터공간의 쌍대 공간이며, 상응하는 브라와 켓은 리스 표현 정리에 따라 연관되어있다. 브라–켓 표기법은 힐베르트 공간이 아닌 벡터 공간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무한의 노름을 가지고 있는 켓, 즉, 규격화 불가능 파동함수들은 관습적으로 쓰이고 있다. 예시로는 디랙 델타 함수나 무한 평면파가 파동 함수로 사용되는 상태 등이 있다. 기술적으로, 이러한 상태는 힐베르트 공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힐베르트 공간"의 정의는 이러한 상태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될 수 있다.(겔판트-나이마르크-세갈 구성과 조작된 힐베르트 공간을 참고하라.) 브라–켓 표기법은 이러한 넓은 맥락에서도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바나흐 공간은 힐베르트공간의 다른 정규화이다. 바나흐 공간 에서, 벡터는 켓으로, 선형 범함수는 브라로 표기될 수 있다. 사실, 위상 공간이 아닌 어떠한 벡터공간에서도 벡터를 켓으로 선형 범함수를 브라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더 일반적인 맥락에서 꺾쇠괄호는 리스 표현 정리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내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구조들의 대부분은 선형대수학을 기반으로 한다. 벡터와 선형 연산자를 포함한 양자역학의 모든 계산은 사실상 브라-켓 표기법으로 표기될 수 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몇가지 예시이다. 스핀-0 점입자의 힐베르트 공간은 "공간기저" 위에 펼쳐져있으며, 이때 레이블 은 모든 점들의 위치 공간의 집합으로 확장된다. 이 레이블은 몇몇 기저 상태에서 작용하는 위치 연산자의 고유값, formula_19이다. 불가산 무한한 수의 벡터의 원소는 기저에 있는, 이것은 불가산 무한 차원 힐베르트 공간. 힐베르트 공간의 차원(일반적으로 무한한) 그리고 위치 공간(보통 1,2,3)은 섞이지 않는다. 이러한 힐베르트 공간에서 시작하는 어느 켓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동함수로도 알려져 있는 스칼라 함수 을 정의할 수 있다. 왼쪽의 은 공간상의 어느 점으로부터 복소수로의 대응이며, 오른쪽의 는 켓이다. 그 다음에는 관습적으로 파동함수(켓)에 작용하는 선형 연산자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운동량 연산자 는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간혹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표기법의 남용이다. 미분 연산자는 반드시 위치기저 에 사영되는, 켓에 작용하는, 파동함수를 미분하는 효과를 가진 추상적인 연산자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량 기저에서, 연산자는  와 같이 단순한 곱셈 연산자에 해당한다. 양자 역학에서 식 은 일반적으로 상태가 상태 으로 붕괴할 확률 진폭으로 해석된다. 수학적으로는 가 으로 사영될 때의 계수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상태 의 상태 로의 사영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적인 스핀- 입자는 이차원 힐베르트 공간을 가진다. 그 공간의 정규 직교 기저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가 각운동량 연산자 "S" 의 값이 확실히 인 상태이고, 는  각운동량 연산자 의 값이 확실히 인 상태이다. 이러한 기저를 통해, 입자의 "어떠한" 양자 상태도 두 기저의 선형결합(즉, 양자 중첩)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이때 "a" 와 "b" 는 복소수이다. 다음처럼 같은 힐베르트 공간에 대한 "다른" 기저도 존재한다. 이 상태들은 대신 의 관점에서 정의된 것이다. 또한, 입자의 "어떠한" 상태도 위의 두 기저의 선형 결합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어떠한 기저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른 벡터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벡터의 "좌표"는 사용된 기저에 의존한다. 이것은 , 와 , 의 수학적 관계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저 변환을 참고하라. 표기법의 몇가지 관례와 오용이 물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러한 표기법은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같은 방정식에서 "레이블"과 상수로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formula_30에서 기호 formula_31는 동시에 "연산자의 이름" , "고유벡터"  그리고 연관된 "고유값" 로 사용되었다. 벡터의 요소를 표기할 때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동 (대문자)는 전통적으로 파동함수와 연관되었고,  (소문자)는 같은 맥락에서 파동함수 또는 복소상수 레이블을 표시하는데 사용되며, 아래첨자에 의해서만 구분된다. 주된 남용은 벡터 레이블 안에 연산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용은 벡터의 크기변환을 빠르게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다. 즉, 만약 벡터 가 배 크기변환될 때, 이것을 으로 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 함수나 숫자가 아닌 레이블(이름)이기 때문에 연산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용은 와 같이 벡터를 텐서곱으로 표현할 때 레이블의 일부가 표기법의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뜻을 갖고있는 세 벡터의 레이블의 일부분이 아래첨자 1, 2와 같이 켓의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 첫번째 벡터의 노름(벡터의 크기)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용되었다. 켓을 입력으로 하고 켓을 출력으로 하는 선형 연산자를 맵이라고 한다. ("선형"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몇가지 속성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만약 가 선형 연산자이고 가 켓일 때, 은 또다른 켓이다. -차원 힐베르트 공간에서,  는  열벡터로 쓰일 수 있으며, 는 복소수 항목을 포함한  행렬로 쓰일 수 있다. 켓 는 일반적인 행렬 곱셈으로 계산될 수 있다. 선형 연산자는 양자역학 이론의 어떠한 부분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나 운동량 같은 관측가능량은 자기 수반 연산자로 표현되며, 변화 과정은 회전이나 시간의 진행과 같은 유니터리 선형 연산자로 표현된다. 연산자는 브라의 "오른쪽"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표기된다. 특히, 만약 가 선형 연산자이고,  가 브라이면, 는 규칙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또 다른 브라이다. -차원 힐베르트 공간에서, 는   행벡터로 쓰일 수 있고,(이전 단락에서와 같은)  는  행렬으로 쓰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브라  는 일반적인 행렬 곱셈으로 계산될 수 있다. 만약 같은 상태 벡터가 다음과 같이 브라와 켓쪽에 둘다 나타나면 이 표현은 상태 에 있는 물리학 계에 대해 관측 가능한 표현 연산자 의 기대값 또는 평균을 나타낸다. 힐베르트 공간  에서 선형 연산자를 정의하는 편리한 방법은 외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만약 가 브라이고 이 켓이면, 외적 은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계급-1 연산자를 나타낸다. 유한차원 벡터 공간에 대해, 외적은 간단한 행렬 곱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외적은 선형 연산자로 볼 수 있는  행렬이다. 외적의 사용 용도 가운데 하나는 사영작용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노름이 1인 주어진 켓 에 대해, 에 펼쳐진 하위공간으로의 직교사영은 다음과 같다. 브라와 켓이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 처럼(를 으로 만듦으로써), 에 상응하는 쌍대공간의 원소는 이다. 이때  는 연산자 의 에르미트 수반이다. 다시말해, 만약  가  행렬로 표현된다면,   는 의 켤레전치이다. 인 자기수반연산자는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관측가능량은 항상 자기수반연산자로 표현된다. 만약  가 자기수반연산자이면, 는 항상 실수이다(복소수가 아니다). 이것은 관측가능량의 기댓값이 실수임을 의미한다. 브라-켓 표기법은 선형대수 표현의 조작을 쉽게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여기에는 조작을 쉽게 하는 몇몇 특성들을 목록으로 정리해두었다. 무엇을 다음과 같이, 과  는 임의의 복소수이고,   는 의 켤레 복소수를 의미하며, 와 는 임의의 선형 연산자를 나타내고, 이러한 특성은 브라와 켓 어느것을 골라도 적용된다. 브라-켓 표기법으로 쓰여진 복소수, 브라, 켓, 내적, 외적, 선형 범함수와 연관된 모든 주어진 식에서, 괄호로 묶는것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는다(즉, 연결결합법칙 속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등과 같다. 식의 오른쪽(어떠한 괄호도 없는)과 표현은 중의적이지만 표현되는것이 허용된다. "왜냐하면" 왼쪽의 표현과 같기 때문이다. 참고로 결합성은 물리의 비선형 시간 역전 연산자와 같은 비선형 연산자 표현까지 적용되지는 않는다. 브라–켓 표기법은 특히 에르미트 수반(또는 데거라고 하며 으로 표시한다.)의 표현입니다. 공식적인 규칙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규칙은 어떠한 표현에 대해서라도 에르미트 수반을 구하기에 충분하다. 아래는 몇가지 예시이다. 두 힐베르트 공간 와  는 텐서곱을 통해 또다른 공간  을 형성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복합계를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만약 계가 각각  와  로 설명되는 두개의 부분계의 합성인 경우, 전체 계의 힐베르트 공간은 두 공간의 텐서곱이다. ( 두 부분계가 동일입자인 경우는 예외이며, 이러한 경우, 상황은 약간 더 복잡해진다.) 만약 가 에 속한 켓이고, 는 ,에 속한 켓일 때, 두 켓의 직접 곱은  에 속한 켓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표기법으로 쓰여진다. 이러한 곱의 적용은 양자 얽힘 과 EPR 역설을 참고하라. 완비정규직교계(기저)이고, 인 노름이 내적인 힐베르트 공간를 고려하자. 기초적인 함수해석에서, 어떠한 켓 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은 힐베르트 공간 위에서의 내적이다. 이것은 켓의 (복소)스칼라의 교환법칙에 따라 다음의. 는 반드시 각 벡터를 자기 자신으로 보내는 '항등 연산자'여야 한다. 브라-켓 표기법을 사용할 때 물리학자가 고려하는 대상은 힐베르트 공간 (완비 내적 공간)이다. 를 힐베르트 공간이라고 하고, 를 안의 벡터라고 하자. 물리학자들이 로 나타내고 싶은 것은 벡터 그 자체이다. 즉, 를 의 쌍대 공간이라고 하자. 이것은   위에서의 선형 범함수의 공간이다. 위상 동형 는 정의된 모든 에 대해  으로 정의된다. 이때, , , , 그리고, 는 단지 힐베츠트 공간의(또는 처음 세 표기법의 경우, 내적 공간에서도) 두 원소 사이의 내적을 표현하는 다른 표기법일 뿐이다. 표기의 혼동은 , 와 , 를 각각 식별하는데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상징적 대체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라고 하자. 이러한 가정은 다음과 같은 식을 제공한다 괄호를 무시하고 두개의 세로선을 제거한 식을 얻게 된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大韓民國, ; ROK)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중남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동쪽으로는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서울특별시이며,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애국가, 공용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이다.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간단히 한국(韓國), 남한(南韓) 등으로도 부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南朝鮮)으로 불린다.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은 3.1 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하며 시작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 거주자들의 자유로운 선거(5.10 총선거)를 통하여 1948년 8월 15일에 공식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출범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통해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탄생한 한반도 유일한 정부로서 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실시한 한반도 이남에서만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도 있다. 199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에 UN에 가입하였다. 한편 국제법 상의 관례와 통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의 판례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였다 하여 가맹국들 상호 간에도 당연히 그 국가성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러한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성을 원칙적으로 부정한다.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래 일명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199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2015년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 총소득(GDP)은 36,601달러로 세계은행에서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고, 2016년 유엔의 인간 개발 지수(HDI) 조사에서 세계 18위로 '매우 높음'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국제 통화 기금(IMF)에서는 대한민국을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명목 국내 총생산(GDP)은 2016년 1조 4112억 달러이다. 또한, 대한민국은 주요 20개국(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개발 원조 위원회(DAC), 파리 클럽과 같은 기구에서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 중 대한(大韓)의 어원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인 한(韓)에서 유래한다.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 삼한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쳐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韓)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고대부터 내려오던 말로서, '하나', '하늘', '크다', '칸(汗) 등 여러 해석이 있다. 근대 국가의 국호로서 '대한'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선택한 것으로 새 국호를 정한 이유를 "조선이라는 이름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은데, 한(韓)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이름이며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므로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당하다"고 밝혔다. 이후 여기에 민국(民國)을 더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정한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임시 정부의 첫 의정원 회의에서 신석우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한 것에 여운형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며 반박하자, 다시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였고, 이에 다수가 공감함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고 전해진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하였고 다시 1950년 1월 16일 국무원고시 제7호 '국호 및 일부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 의해 확정하였다. 이에 20세기 전반까지도 널리 사용되던 지명으로서의 '조선'이라는 이름은 '대한'이나 '한국', '한(韓)'으로 대체되어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호를 '대한민국', '한국' 등으로 부르며, 자국을 호칭할 때는 흔히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며, 한반도 북부에 자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비해 한반도 남부에 있다 하여 '남한'으로도 불리는데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를 남조선(南朝鮮)이라고 부른다.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베트남 등 주로 동아시아에 있는 한자 문화권 국가들에서도 일상에서 대한민국을 간단히 한국(, , )이라 부른다. 다만 여전히 한반도 전체를 부를 때는 조선(, , )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불리는데, 이 명칭의 시초는 중세 왕국인 '고려'라는 국명이 수도인 개성으로 통하는 벽란도를 출입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해지면서 Corea로 음역 되어 전 세계에 전해진 것이다. 그 후 서방에 전해져 프랑스어로 Corée, 스페인어로 Corea, 영어로 Korea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로서, 약칭 'R.O.K.'로도 사용된다. 대한제국 시절 공식 문서에는 Corea 또는 Korea가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1900년대 초기부터 영어권에서는 Korea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1892년 외국인이 자주 보는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5월호에는 “미국 국무부와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 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 지방이 된 것으로부터 Chosen이라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열도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며, 육지로는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맞닿아 있다. 한반도는 제3기 마이오세 이후에 일어난 단층과 요곡운동의 결과 동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급경사로 동해안에 임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서히 고도가 낮아진다. 이를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이라 한다.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부 지방에 치우쳐서 한반도의 등줄기라 불리는 태백산맥에 자리한다. 태백산맥의 대표적인 산이 설악산이다. 태백산맥의 남서쪽으로 소백산맥이 이어지며 그 중에는 지리산이 유명하다. 제주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사화산인 한라산이 있다. 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집중 호우로 연 강수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강바닥을 거의 드러내는 하천이 많다. 대표적인 강은 위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이다. 대다수의 강이 산지가 많은 동쪽에서 평평하고 낮은 구릉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흐르며 중하류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전개된다. 산맥은 교통에 적지 않은 제약을 주어, 산맥을 경계로 지역의 문화나 풍습이 크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방은 고개를 넘어 왕래했는데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연결하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서부와 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이 산맥을 넘는 주요한 교통로로 사용된다. 한반도의 서쪽은 황해, 동쪽은 동해, 남쪽은 남해와 맞닿아 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이며, 가장 큰 부속 도서인 제주도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접한다. 황해와 남해 연안은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클 뿐만 아니라 해안 지형도 꽤 평탄하여 넓은 간석지가 전개된다. 또한 수많은 섬이 있어서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반면에 동해 연안은 대부분 해안선이 단조롭고 수심이 깊으며 간만의 차가 적다. 해안 근처에는 사구·석호 등이 형성되어 있고 먼 해상에 화산섬인 울릉도가 있으며 그보다 동쪽으로 약 87.4km 거리에 대한민국 최동단인 독도가 위치한다. 북위 33도~38도, 동경 126~131도에 걸쳐 있어 냉대 동계 소우 기후와 온대 하우 기후,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겨울에 북부 지역은 편서풍으로 인해 시베리아와 몽골 고원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 기후를 띠어서 건조하고 무척 추우나 남부 지역은 이런 영향을 적게 받아 상대적으로 온난한 편이다. 여름에는 태평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보여서 고온다습하다. 계절은 사계절이 뚜렷이 나타나며 대체로 북부 지역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남부 지역은 봄과 가을이 길다. 4월 초에서 5월에 걸쳐 포근한 봄 날씨, 6월경에서 9월 초에는 무더운 여름이, 9월 말에서 10월 말까지는 화창하고 건조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11월에 기온과 습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하여 12월에서 2월까지는 춥고 건조한 겨울 날씨를 보인다. 중부 산간 지방을 제외하고 대체로 연 평균 기온은 10 ~ 16℃이며, 가장 무더운 달인 8월은 23 ~ 36℃, 5월은 16 ~ 19℃, 10월은 11 ~ 19℃, 가장 추운 달인 1월은 -6 ~ 3℃이다. 비는 주로 여름에 많이 내리는데 연 강수량의 50 ~ 60%가 이때 집중된다. 이를 장마라고 하며 특히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를 장마철이라 한다. 각 지역의 연 평균 강수량은 중부 지방이 1100 ~ 1400mm, 남부 지방이 1000 ~ 1800mm, 경북 지역이 1000 ~ 1200mm이다. 경상남도 해안 지역은 약 1800mm이며 제주도는 1450 ~ 1850mm이다. 습도는 7월과 8월이 높아서 전국에 걸쳐 80%정도이고 9월과 10월은 70% 내외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연평균 28개 정도가 발생하여, 이 중 두세 개가 영향을 미친다. 한반도 전역에 동식물 10만여 종이 분포한다. 호랑이 중에서 가장 큰 종인 시베리아호랑이가 과거 살았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맹수로는 반달곰과 표범이 있으며 소수 개체군이 생존한다. 그 밖에도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의 포유류와 까치, 꿩, 참새, 비둘기를 비롯한 텃새, 두루미, 기러기 같은 철새가 서식하며 지네나 거미, 수많은 곤충류도 있다. 삼면이 바다여서 난류와 한류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패류와 고래도 존재한다. 다만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로 한류성 어류가 감소하고 불가사리나 해파리가 급증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산삼이나 진달래, 소나무 등 많은 식물은 약용이나 기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제주도에는 열대림과 비슷한 야자수가 번육하며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에는 북방계형의 특산 식물들이 자생한다. 백두산에는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침엽수림과 같은 북방계 식물류가 자란다. 중부 지방에는 높은 산지로 말미암아 고산형 식물과 약용식물 여러 종이 자생한다. 시멘트 공업과 석회공업(石灰工業)의 원료인 석회암은 한국의 주요 자원으로 각지에 대량 분포해 있다. 다른 자원은 양이 적거나 품질이 낮아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탓에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다만 21세기 이래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기술의 발전으로 재개장하는 광산이 있다. 석탄은 무연탄만이 있으며 삼척, 태백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철광석은 양양, 충주 등지에서 주로 캤다. 텅스텐은 매장량이 매우 많으며 특히 영월에 엄청난 규모의 광산이 있다. 울산 앞바다에서는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어 개발하고 있으며, 독도 부근 해저에는 메테인 하이드레이트가 상당량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유는 제주도 남방 해역의 대륙붕 제7광구에 천연가스와 함께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언급되지만 실제로 탐사되지는 않았다. 이곳은 1974년에 체결한 한일 대륙붕 협정에 의해 2028년까지 한일이 공동 관리한다. 한반도에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70만 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현생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2만 5천 년 전부터 해안과 강가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 화석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상시굴과 두루봉동굴, 제천시 점말굴 등에서 현생인류로 추정되는 사람 뼈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빗살무늬 토기인, 무문토기인 등 여러 인종의 유입과 주변 세력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문명이 발전했다. 다만 초기 구성원들의 이동과 외부 세력 유입의 구체적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한반도 일대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현전하지 않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록하였고 《동국통감》에서 그 시기를 기원전 2333년이라 하였다. 날짜는 대종교에서 임의로 음력 10월 3일로 약속하고 개천절이라 불렀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 날을 양력으로 고쳐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고조선 멸망을 전후하여 부여, 옥저, 동예, 진국,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생겨났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로 이어졌으며 이 중 신라가 삼국을 부분적으로 통일하는 한편 북쪽의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다. 10세기 고려가 등장하면서 한민족 단일 국가의 시대를 시작했고 14세기 조선이 이를 계승했다. 근대 한국의 뿌리는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이다.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청나라 등과 수교하였다.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를 설치하고, 근대적 사법·토지 제도를 도입하고, 상공업을 진흥하고, 근대적 병원과 학교 및 은행 등을 설립하였다.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 산업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제조·철도·운수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과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은 1895년 청일 전쟁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진 이래 간섭을 받아왔으며,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로 일본의 한국 병합이 본격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7년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국권을 빼앗기며 일제 강점기로 전환, 근대적 자주국가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말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을 위한 3·1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대체로 각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장(시장)의 개장일에 맞추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본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폭압 통치 방식의 한계를 느껴 헌병 경찰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였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4월 11일,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군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노선의 갈등으로 여러 인사들이 빠져나가면서 국무령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일제의 방해까지 겹쳐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탈이 가속화되자 내륙으로 청사를 이전하여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에는 충칭에 정착하였다. 이후 김구를 주축으로 주석중심제로 재정비하고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채택하였다. 한국 광복군도 조직하여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1942년 2월에는 대독 선전포고까지 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하였다. 1942년에는 좌파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세력과 김성숙, 유림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43년 버마 전선의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 취조 및 암호 번역, 선전 전단 작성, 대적 회유 방송 등을 하였다. 미국 OSS와도 연계하여 1945년 9월을 기한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이 3·1운동에 따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반도는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련과 미국의 신탁 통치하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에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구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하여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설립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9월 여운형, 박헌영 등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에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임정정통론' 문제로 갈등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인공 내각(조선인민공화국 내각)과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인공 내각은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 내에는 좌, 우익 세력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소공위가 개최되었으나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이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개시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고자 하였지만, 한민당과 남로당 등 좌우익세력간에 불참으로 중도파 세력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에 여운형 암살 등 해방정국의 잇단 사건으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미 군정은 온건파인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을 통해 좌우 합작과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러나 헤게모니 장악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김구, 윤치영, 박헌영, 허헌 등의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마저 결렬되어버리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로 이관했고, 총회에서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에 김규식, 조소앙, 김구 등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 등을 추진하여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도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한 정부 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정읍 발언) 사실상 남북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한 모양새가 되었다. 1948년 1월부터 한반도의 정국은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 협상을 통한 정부 수립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군을 창건하면서 분단은 사실상 불가피하게 되었다. 5월 10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제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탄생하였고,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초대 헌법인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구성되었다. 7월 22일에는 국회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 한국의 독립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그러한'은 대한민국이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서 주민들 대다수의 자유 의사에 따라 수립되었고, (분단상태를 고려할 때)선거가 가능했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임을 뜻한다. 이미 48년 9월 9일에 한반도 이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음에 미루어 그 해 12월의 결의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남침을 기도하여 공산주의화 하려는 야망을 실현하고자 준비하였다.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을 받자,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에서 지원받은 수십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탱크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이 전혀 없었고 야포와 전투기 등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총만 가진 거의 맨 몸의 한국군은 순식간에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군이 침략한 3일만에 수도인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게 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무장한 인민군을 상대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한국군은 결국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배수진으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학도병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갔으며 많은 사상자와 인명피해가 초래되었다. 하지만 UN군이 파병으로 지원하고 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에 반격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해냈다.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수복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때 유엔 내부에서 맺어진 새로운 결의로 유엔군의 목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완전히 공략하려는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한국과 UN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참전하고 소련이 군사를 지원하여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이후 38도선 인근 중부 지방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오전 10시에 체결된 후에 효력이 발생한 22시에 완전히 전투가 종료되고 군사 분계선이 형성되면서 오늘날까지 휴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20만 명이 과부가 되었고 10만여 명 이상이 고아가 되었으며 1천만여 명 이상이 이산 가족 신세가 되었다. 한반도 내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된 탓에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가 도래하여 한국과 북한의 경제 수준이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국의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분단한 지 70여년에 이르고 있다. 한국 전쟁이 휴전 협정을 맺은 후 19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전후복구사업을 실시하는 가운데 경제원조체제가 성립되던 시기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고위 관료는 부패해 국민의 불만을 샀다. 의원 내각제였던 제1대 내각에서 재선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이승만은 이범석과 장택상을 비롯한 측근들과 족청계,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부산정치파동(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을 일으키고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택상 등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이기붕 계열을 등용한다. 이기붕 계열은 또한 친 자유당 성향의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깡패들을 활용하여 야당 의원의 집회를 탄압, 제1공화국 후반기는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부통령 장면의 피격 사건(1958)과 조봉암 사법살인(1959) 등의 조치까지 겸해졌고 언론의 자유마저 통제당했다. 1959년의 한일회담이 끝나자 곳곳에서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집회가 시작, 1960년 3월 15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계기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4·19 혁명이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전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제1공화국은 붕괴했다.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 내각을 거쳐 장면을 수상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제2공화국은 3차 개헌을 통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구성했고, 언론 자유와 혁신계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제2공화국 당시 각계 각층의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는데, 집권 여당인 민주당 사이에서 신파와 구파가 나뉘어버려서 개혁 의지가 미약한 탓에 이러한 요구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데모가 연이어 벌어졌고, 장면이 단호한 조치를 계획하던 중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쿠데타로 내각 각료들이 체포되면서 장면 내각은 1년 남짓밖에 집권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뒤 윤보선은 형식적인 민정을 실시하였으나 군사정변 세력에게 구정치인 정화법(1962)으로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고 사퇴(1962.3.22)함으로써 1962년 3월부터 1963년 12월까지 5·16 군사정변 세력이 설립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법권·행정권·입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1963년 12월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박정희 등에 의해 제3공화국이 수립됐다.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의 두 차례의 선거전에서 10만 표 안팎의 근소한 차로 집권하였다. 재임 초반 한일 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분을 사 일어난 시위를 무력 진압하며 강행했다. 1960년대 개발 독재의 일환으로 정부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발전과 한일협정·베트남 전쟁 파병 등을 통한 외화 획득으로 경제 발전을 꾀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저임금 노동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도 남겼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같은 해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나는 선전을 이룬 데다가 제1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성장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돌풍으로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해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로 수정하는가 하면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는 법안까지 통과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비정상적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노동운동계, 재야와 학생 세력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잇따른 긴급조치를 통해 억눌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 및 노동운동가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한미 간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 제2차 석유 파동까지 겪으면서 경제위기와 내부 혼란이 크게 가중되었다.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과 YH 무역 농성 사건, 부마 항쟁 등의 사회적 저항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권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되면서(10·26 사건) 박정희의 17년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10·26 사건 이후 유신 체제 하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이끄는 정부가 출범했다. 유신 헌법 폐지를 통해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일부 정치적 억압을 완화했고, 1979년 12월과 1980년 2월, 1980년 4월에 대사면령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이들이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고, 급기야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최규하 정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여 실세로 떠올랐고, 민주화 일정을 지체시켰다. 1980년 초부터 국회와 정부는 유신 헌법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고, 대학생과 재야 세력도 정치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요구를 바탕으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확대하면서,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 금지', '보도검열 강화', '휴교령' 등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폐쇄했다. (5.17 쿠데타)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5·17 쿠데타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 및 특전여단을 투입해 유혈진압을 하고,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했다. 10월 27일에는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제5공화국은 경제 안정에 매진하는 한편, 1981년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유치하기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내걸어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한편으로 임기 중반부터 3저호황으로 인한 수출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체제를 성립하고 민주주의 탄압 및 고문·정치사찰·용공조작으로 대변되는 인권 유린행위를 자행했으며, 정경유착·부정축재·친인척 비리가 빈발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정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에 정부는 호헌조치를 취하며 '개헌할 의도가 없음'을 내세웠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빗발쳐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총재 노태우를 통해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국민의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취임식과 함께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여야가 합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야권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나왔다. 민주정의당은 불리한 여론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조치를 단행(국정감사)하고 민간인들을 정계에 대폭 고용하기도 했다(과거와의 단절). 외교 면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1991년 9월 유엔의 가맹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12월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또한 1992년에는 지방 자치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도 전두환처럼 군인 출신이었고, 12·12 사태를 주도하고 5공 성립 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인물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노태우 정부도 정경유착은 물론 비자금 형성·민간인 사찰·고문 등 5공의 파쇼 정치를 그대로 답습했다(이 때문에 노태우 정권을 군사정권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이는 결국 민주화 시위(1991) 등으로 이어졌고, 노태우는 이른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을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여당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으며 끝내 김영삼을 후계자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함으로써 노태우 정부는 막을 내렸다. 1992년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어 1993년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윤보선 정부 이후 30여년만에 민간인 정부로 회귀했다. 문민정부는 하나회 군부 숙청, 금융실명제, 표현의 자유 허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부활, OECD 가입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군사 정변을 주도할 위험이 있는 군 내 사조직을 숙청하고, 12.12 관련자 및 5.18 관련 정치군인들을 처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기 괌 추락 사고, 우암상가아파트, 성수대교 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 사회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다. 또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준비없는 대규모 개방을 강행했고, 외환관리에 실패해 IMF 구제금융사건을 초래하였다. 결국 국민들의 높아진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야당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치러진 제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IMF 위기의 극복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자유주의' 경제정책 추진과 금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2001년까지 외채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국제 기준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체제를 도입해 기업의 체질개선 등을 단행했다. 국민의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였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0억원에 달하는 현금을 북한 정권에게 불법 송금했다는 혐의가 사후 드러나 큰 비판을 받았다. 대북유화책을 추진했지만 연평해전, 핵실험 등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계속되어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또한,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승자 독식의 기형적 사회구조를 구축했다는 비판이 있으며, 지나친 구조조정과 기업 매각 등으로 대량의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 2002년 치러진 제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2004년에는 대통령 탄핵 소추를 겪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여론의 반발과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직에 복귀했으며,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역풍을 맞은 야당을 누르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국정 탄력을 받았다. 참여 정부는 권위주위 타파, 균형 발전 등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설치를 통한 과거사 정리, 세종특별자치시 추진으로 균형 발전을 꾀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개혁과 대통령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보수층과 중도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의 측근 비리 등 각종 악재로 인하여 임기 중반에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부동산 가격 폭등, 양극화를 심화시켰으며, 양극화의 원인으로 제시되어 많은 사회적 논란을 낳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노무현 재임 당시 교육부총리였던 김진표가 추진한 정책으로 인하여 대학 등록금도 큰 폭으로 상승하는 등 서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2007년 치러진 제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7대 강국, 4만달러 시대, 7% 성장('747 공약')을 내세웠다. 하지만 집권 초인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위기와, 광우병소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동시에 겪었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여러 정책을 시도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4대강 사업이다. 4대강 사업은 건설경기를 살렸고 홍수 피해를 줄였다는 긍정적 평가와 세금 낭비와 환경파괴라는 부정적 평가가 각각 존재한다. 2010년에는 G20정상회의 개최와,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여 외교적 성과를 이뤘고, 금융위기 극복, 국가신용등급 향상, 원전 수주 등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하지만 미디어법 개정으로 언론장악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으며, 세종시 수정안과 같이 여러 정책들의 추진에 대한 찬반 양론이 존재한다. 또한, 종합부동산세 폐지로 부자 감세 의혹이 제기되었고, 야심차게 추진한 자원외교에 대해서는 세금 낭비와 비리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2012년 치러진 제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제기되며 출범부터 논란에 휩싸였고, 이어 잇따른 인사의 실패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 사태 등으로 재난 대책에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창조경제와 노동개혁, 국정교과서 추진,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결정, 통합진보당 해체 등 여러 정책에 대해 사회적 비판과 갈등을 겪은 데다가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다시금 등장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결국 2016년 10월 민간인 신분인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밝혀지면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고,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키며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확립되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된 대통령이 되었다. 2017년 5월 10일에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반기부터 7~8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으며, 탈권위주의 정책 및 적폐청산 정책으로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5대 원칙 공약 파기 및 부실한 인사들을 무리하게 임명하여 논란이 일었고 또 문재인 케어 논란, 탈원전 논란, 코리아 패싱 등으로 계속 논란이 일었다. 그리고 2018년 초반기에 들어서서 남북 단일팀 논란, 가상화폐 규제 등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미세먼지 공약 미이행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보수층과 중도층, 젊은층의 반발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그러나 탈권위주의 정책과 적폐청산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의 흥행으로 다시 지지율이 상승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에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정계인사들이 연루되고, 금융감독원장에 임명된 김기식이 여러 논란에 휩싸임과 동시에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이 불거지면서 다시 위기에 몰렸으나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2018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평화무드를 조성하면서 지지율을 크게 상승시켰고, 이어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크게 승리하면서 국정운영에 계속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지방선거 이후 경제가 하락하고 제주 난민 사태, 일자리 정책 실패, 최저임금 인상 논란, 근로시간 주52시간 단축 논란, 부동산 대책 논란, 리비아 한국인 납치 사건 대처 미흡 논란, 북한 석탄 밀수 사건, 국방백서 북한 주적 삭제 논란, 통계청장 경질 논란이 불거지고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주변의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면서 보수층, 중도층, 젊은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계속 하락했다. 그러나 2018년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잘 이끌어내면서 지지율이 다시 상승기류를 탔다. 하지만 이후로는 경제 불황과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부작용이 다시 이슈가 되고 북미 비핵화 협상 교착화와 혜경궁 김씨 논란, 그리고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음주운전과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 일탈 논란, 그리고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강행으로 인해 다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에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신탁 통치 찬반을 놓고 좌파 진영과 우파 진영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과 구 소련의 분할 군정에 놓여 있다가,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거쳐 7월 17일 첫 헌법이 제정되었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로 공식 출범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절서에 입각한 자유 민주 공화국으로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여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혼합한 정치 제도(그 예로 국무총리가 존재하고, 국회의원이 장·차관급 공직자를 지낼 수 있다)를 채택하고 있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한 후 3·1 운동 정신으로 창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독재의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의 민주주의 이념을 계승함을 헌법 전문에 명백히 밝혀두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으며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헌법은 9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 가운데 박정희 때의 유신 헌법은 긴급조치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해 국민의 자유기본권을 제약하는 비민주적이었지만 그 당시 국내외를 둘러싼 환경에 의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다른 시각도 있다. 현재 발효 중인 헌법은 제6공화국의 수립에 따라 1987년 여야 합의를 통해 개정되었다. 또한 3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독립적인 세 개의 권력 기관을 근간으로 하여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 입법부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국회는 현재 총 300석의 단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부였던 임시의정원을 기원으로 두고 있으며, 1948년 5월 10일 구성된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이다. 매년 1회의 정기회(100일 이내)와 30일 이내의 임시회가 열리며, 회기 중에 국회는 법의 의결권과 예산안의 심사, 국정 감사와 헌법에 명시된 기관장의 임명 동의 및 조약의 체결 및 비준 동의 등의 활동을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임기 중 의사진행과 관한 발언에 대한 면책특권과 회기 중 불체포특권을 가진다. 공직선거법에 따른 피선거권을 충족한 인물로, 국회의원 총선거나 재선거 및 보궐선거, 혹은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비례대표 의석승계 결정에 따라 선출된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부의장은 국회의원 중에서 본회의의 무기명 투표를 거쳐 선출되며, 그 임기는 국회 회기의 절반에 해당되는 2년이다. 대한민국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여 입법부에서 법률로써 정한 사안들을 실행한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국무회의의 조력을 받아 업무를 처리한다. 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한 법률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한 번 거부한 법률을 국회가 다시 통과시킨다면(단,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 법률은 그대로 통과된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3인과 대법관 등을 임명할 수 있다. 대통령은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국군을 통수하며 공무원 임명을 할 수 있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내각을 통할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보좌기관으로서 국무총리를 두고 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국무총리는 내각의 구성원을 대통령에게 임명을 제청하며 내각을 통솔한다. 대통령의 유고 시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며 국무총리가 유고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순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대다수의 현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재판에 있어서 공정한 심판을 위해 3심제로 이루어져 있다.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그 밑에 고등법원, 지방법원, 지방법원의 지원과 특허법원, 가정법원, 행정법원 등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법률 심사를 위해 설치된 특수법원(여기에서의 재판은 1심의 판결과 동일하다.)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군사법원법에 따라 군사재판을 할 수 있으나, 최종심은 대법원이 관할한다. 한편 법원과는 별도로 각종 법령 등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헌법 재판소가 구성되어 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판가름하는 위헌법률심판, 대통령을 비롯한 공무원의 탄핵 소추를 심사하는 탄핵심판, 위헌 정당의 해산 여부를 심사하는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을 심사한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은 총 9명이며,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법관인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따라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법관의 임기는 헌법을 통해 보장되며, 그 연한은 6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헌법 제8조에 의해 자유롭게 정당을 결성할 수 있으며, 복수정당제가 보장된다.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정당의 수명이 짧고 정당 간의 합당이나 분당이 많이 일어난다. 가장 최근에는 20대 국회가 2016년 5월 30일부터 개원하였다. 2017년 6월을 기준으로 여당과 1석 차이로 원내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있으며 그 밖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국회에 의석을 20석 이상 가진 정당)으로는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이 있다. 비교섭단체인 정당(국회에 의석을 1석 이상 가진 정당)으로는 정의당, 민주평화당, 민중당, 우리공화당이 있다. 국회에 의석이 없는 정당으로는 노동당, 녹색당 등이 있다. 제20대 총선 당시에는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으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한 새누리당 전 소속 의원들이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새누리당에 재입당 하여 129석으로 새누리당이 다시 원내 제1당이 되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인해 비박계들이 탈당하였고, 94석으로 줄어 다시 원내 제2당이 되었고, 바른정당 소속의 탈당계가 들어옴에 따라 110석 이상을 확보하였다. 2019년 기준의 정당별 의석 수는 더불어민주당 128석, 자유한국당 114석, 바른미래당 28석, 정의당 6석, 민주평화당 4석, 민중당과 대한애국당이 각각 1석이다. 대한민국의 외교에 관한 업무는 외교부가 맡고 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한국 전쟁을 겪은 뒤 적대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햇볕 정책, 곧 대북유화책을 시도했으나 차후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등 대남 도발 행위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연평도 도발, 천안함 폭침, 목함 지뢰 사건 등이 발생함과 동시에 대북 강경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따라 남북 관계가 상대적으로 경색되었다. 대한민국의 외교는 한국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과거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였던 일본과는 1965년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현재 유엔 회원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마케도니아, 시리아, 쿠바 등 4개국과 외교 관계가 없으며, 이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외에 서사하라, 중화민국, 팔레스타인, 코소보 등도 외교 관계가 없다. 이 중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부터 수교국이었으나 1992년에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양국은 양국 수도에 서로 대표부(타이베이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중에 있고 상호간의 왕래와 민간교류는 자유롭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표부를 설치하여 운영중에 있다. 과거에는 통상에 관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산하 통상교섭본부를 설치해 운영하였으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되었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 이어도 등에 대하여 이웃한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이 각각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엔과 WTO, OECD, 그리고 G-20의 구성원이며 또한 APEC와 동아시아 정상회의의 창립 가맹국이며, 미국의 주요 비NATO 동맹국(MNNA)이다. 한편 2007년부터 2010년 상반기까지 해외에서 추방한 대한민국 국민이 2,111명으로 일본에서 제일 많았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국가로 승인하지 않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하여 국제법상 교전단체의 지위만을 인정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헌법을 비롯한 국내법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 일체를 대한민국의 고유한 영토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국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하는 반국가단체로 본다. 국민의 정부 당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물자 교류는 참여정부 말까지 활발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 등으로 인해 2013년 금강산 관광 산업, 개성공단까지 중지된 상태이였지만 남북회담을 통해 재가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계속해서 대남 도발, 핵 실험, 미사일 발사 등을 진행함에 따라 다시 중지되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19세기 중반인 1871년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완강히버티자 얼마버티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 뒤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되자 미국은 1882년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때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축하해주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 뒤부터 뒤틀어졌는데 당시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가 미국을 대표하여 대한제국에 방문했을때 고종의 환대에도 없는 사람 취급하였고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 무덤앞의 말조각상에서 앉아 사진을 찍는 무례함을 범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강제합병을 계기로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된다. 1948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로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이래로 미국의 대량 원조를 통해 매우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왔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휴전 이후에도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에 의한 군사적 보호속에서 매우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제5공화국 때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도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등으로 일부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문서 공개 이후 한동안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은 촛불 시위로 비화되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을 겪었다. 한편 이명박 정부가 출범된 이후 한미 관계가 상당히 강화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 외교, 경제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양국은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양국 간에 역사 인식, 영토 등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숭배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나 독도 문제, 동해 명칭 문제, 일본군 위안부도 민감한 문제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과 아베 신조 내각 당시에는 한일 셔틀외교가 중단되는 등 양국관계가 멀어졌으나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일본 후쿠다 야스오·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과 한일관계를 보다 중시하는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관계가 개선과 악화를 반복하다가 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취임하면서 한일관계가 강화되었다. 2002년에는 양국이 공동주관하여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한류 열풍'이 불어 양국간 교류가 많이 증진되었다. 그러나 역사·영토(독도) 문제 등 여러 부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강화함으로써 양국 관계도 점차 경직되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며, 1992년까지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1992년 공식 수교하면서, 기존의 중화민국과 단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있는 와중에도 양국은 외교 관계를 이루고 있다. 2016년 주한 미군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AD)' 배치 추진과 미・중 무역 갈등 문제 등 국제 사회에서의 충돌로 인하여 한중 관계과 악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갈등이었던 동・서 냉전으로 인해 대한민국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탈냉전 이후에 한소수교가 199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와 경제, 문화, 우주기술협력, 군사(불곰사업) 등에서 밀접한 관계를 추진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둔도 문제를 포함해서 연해주 등 잠재된 영토 문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남북분단으로 인해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위성인 나로호 발사도 러시아의 협조 하에 발사했다. 현재 12만 5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아에로플로트 등 여러 항공사가 매일 운항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립으로 인해 일찍부터 군사력을 증강시켜 왔으며 1990년대까지는 양적 위주의 성장을 추진했으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무기 기술의 개발과 발달로 인해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국군(國軍)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군을 지휘하고 있다. 2013년 7월 기준 병력 규모는 현역이 약 670,000명으로 세계 6위, 대한민국 예비군은 약 3,200,000명으로 세계 5위이다. 세계에서 11번째로 탄도미사일을 독자 개발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여군은 기갑, 포병, 잠수함 병과에는 진출할 수 없었으나 2014년 9월 창군이래 최초 여군 포병장교가 탄생하였고 기갑병과에도 여군이 진출함에 따라 다양한 병과에서 여군들이 활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520,000명, 전차 약 2,300대, 장갑차 약 2,500대,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포 약 5,200문, 유도무기 30기, 헬기 600기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전차 K2 전차(K2 흑표, Black Panther)를 개발했다. K-2 전차는 2014년 대한민국 육군에 정식으로 배치된다. K-21 전투장갑차는 2012년경 전력화하였고 복합형 소총인 K-11 소총을 운용하고 있다. 2012년 1월 육군에는 현재 39개 사단(전방 기계화보병사단 6개, 그 외 상비 사단 16개, 향토 방위 12개, 동원 예비군 5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해군 예하 해병대 2개 사단이 있다. 2020년까지 1군사령부와 3군사령부를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하며, 5개의 지역군단(수도방위사령부도 지역군단으로 함)과 2개의 기동군단으로 개편하고, 향토사단 자체는 존치하며, 동원사단은 4개로 줄이고 전 부대를 기계화부대로 편성한다. 병사들의 개인화기 및 개인장비, 피복을 개선시키는 중이다. 전투력 향상을 위해 고글+무릎(팔꿈치)보호대+장갑+방탄복+야간 야시장비+스코프+도트사이트+광학장비를 지급하고 보병장비, 개인장비, 장구류, 군장이 늘어나고 저격소총, 옵션장비 ,사격장, 1인당 교탄증가가 되었다. 소대장이 항공근접지원을 직접 유도할 수 있고 병사들은 무인 항공기를 수시로 띄울 수 있다. 시가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속대응 훈련과 CQB 훈련과 시가전 훈련을 자주 진행 중이다. 실전 훈련처럼 진행한다. 현대전에 맞추기 위해 육군 전 부대 대대급 현대화가 진행 중이다. 저격수, 정찰 저격수들을 육군 전 부대(소대급)에서 양성중이다. 저격수 학교를 창설한다. 저격수 규범은 미국 저격수 규범과 똑같은 저격수 교범을 채택하였다. 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F-15K 60대, KF-16 (Block 52+) 134대와 F-16C/D (Block 52+) (PB형) 35여대, F-4E 80대 (퇴역 중),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 195대, T-103 러시아제 훈련기 IL-103 72대,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B (블랙 이글스)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LIFT) 22대를 운용 중이고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전투기인 FA-50 60~120대를 도입 중에 있다. F-4E,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E (타이거 II), KF-5E/F (제공호)는 FA-50 60대로 대체되고, F-4E는 F-35A로 대체되며 T-103 훈련기 72대 역시 기체 노후화로 한국항공우주산업이 개발한 KC-100 나라온으로 대체된다. 수송기는 전략 전술 수송기인 C-130J-30 4대 C-130H 12대, CN-235-220M 18대가 있으며 VIP 수송용으로 대한항공에서 임차한 보잉 747-400 1대를 비롯해 보잉 737-300 1대, VCN-235 2대, VC-118 1대, BAe-748 2대가 있다. 정찰기로는 호커800기를 개조한 금강정찰기와 백두정찰기, RF-4C 18대, RKF-16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를 운용 중이며 회전익 항공기 (헬기)는 구조.탐색용인 HH-60 페이브호크, HH-47 치누크, 카모프 Ka-32가 있으며 병력 수송용인 벨 205, 212, 412, UH-60 블랙호크 등이 있다. 이외에도 VIP 수송용인 VH-92, VH-60, AS-362 '수퍼퓨마'가 있다. 또한 공군은 국산 헬기인 수리온을 2기 주문하였다. 사병들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소화기 실탄 사격장 및 1인당 실탄사격 훈련의 내실화와 사병들의 개인 장비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공군 전력사업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인 한국형 전투기 사업인 KF-X 사업과 차기 대통령전용기 사업인 VC-X사업, 원격지원전자전기 사업, 스텔스 무인 전투기(UCAV)의 개발 및 사업을 진행 중이며 최근 KC-X 사업의 최종 후보로 에어버스 A330 MRTT가 선정, 4대 구매를 체결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8,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 척, 지원함정 20 척, 대잠헬기 및 해상초계기 50 대를 보유하고 있고 차기 군함들을 비롯해 모든 군함들은 선체 전체에 광범위하게 스텔스 설계를 적용하고 레이다 반사율을 줄이기 위해 경사설계를 적용한다. 총 3개 함대와 4개 전단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군으로서 국가 전략 기동군으로서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수행한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9,000명, 잠수함 약 20 척, 전투함정 약 140척, 지원함정 20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50대, K1A1 전차와 K9 자주포, 상륙돌격장갑차(KAAVP7A1) 등의 기갑 차량, 상륙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초대 지휘관에 신현준 중령이 임명되고,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 예하의 국가 전략기동군으로서 상륙 작전을 주임무로 하며, 그 외 김포, 강화, 포항, 경주, 진해, 제주, 도서지역 등 방어, 상륙작전을 하고, 예비군 교육 및 훈련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2014년 기준으로,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고, 이외에도 연평도와 진해, 제주도 및 기타 여러 도서 지역들에도 해병 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혼합자본주의 체재를 택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관료 양성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4.19 혁명으로 세워진 장면 정권에 의해 기존에 양성된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경제 개발 계획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경공업 육성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다. 1973년 이후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발전 정책으로 철강, 전자, 조선 산업 등이 크게 발달하며 수출을 증대 시키고 국가 경제를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 시켰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때에는 3저호황과 중화학공업 과잉 투자 조정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수준의 공업국가로 올라섰다. . 1960~80년대 고속 경제 성장으로 한때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혹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로 불렸으며, 1994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섰다.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사건을 겪었으나, 2년 만에 상당부분 회복했으며 김대중 정부는 이를 해결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량 해고, 청년 실직자 문제, 니트족 현상 등의 부작용이 함께 나타났다. 그 후 노무현 정부의 꾸준한 경제 개혁을 통해 2007년까지 매년 백억 달러 이상의 경상흑자와 평균 4%대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명목 국민소득 2만 달러, 실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를 이루었다. 2015년 현재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PPP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은 3만 6,601달러이며 이것은 세계 29위 수준이다. 2007년 골드만삭스는 대한민국이 2050년, 브릭스+넥스트 일레븐+G7 1인당 명목 GDP가 90,294 달러가 되어 91,683달러인 미국에 이어 주요 경제국 중 2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자본력이 부족한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의 경제발전을 진행시켜 왔는데, 박정희 당시 계획경제체제를 시행, 수출을 통한 성장을 목적으로, 자본 및 기술적 기반이 약한 중소기업보다는 재벌기업이 주류인 대기업을 축으로 하는 기업경제구조를 세웠으며, 천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가공무역을 핵심으로 삼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 수출과 수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며, 주요 무역 상대국은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일본, 중화민국, 독일, 영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이다. 반도체 세계 1위 삼성을 비롯하여 1983년부터 세계 조선 1위를 지켜오고 있는 현대, 백색가전의 LG, 세계 철강 4위인 포스코 등의 여러 기업 집단을 가지고 있으며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17개가 대한민국 기업이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상장기업에는 개인지배주주가 존재한다. 반면에 기업발전에 따른 외부자본조달로 지배주주의 지분율 하락이 불가피한 가운데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 이해상충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지배구조가 계열사간 피라미드 및 순환식 소유구조에 의해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으나, 이는 현금권과 통제권 간의 상당한 괴리를 가져와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권 행사에 따른 사적 경영권 혜택이 과도하여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경영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효율적 산업구조는 대한민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내의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기업들은 임금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해있는 대한민국 기업이 많으며,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도 많이 진출해 있다. 최근에 중앙유럽 국가들이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여 관세가 철폐되면서 중앙유럽으로 진출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개성공단에 입주하는 기업도 늘어났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 도발로 인한 남북 관계 경색으로 가동이 전면 중단된 상태이다. 대한민국의 가계부채는 1999년 ~ 2001년 급증, 2002년 ~ 2004년 감소, 다시 2005년 ~ 2007년 까지 급증,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로 그 증가세가 지속되어 2011년 처음으로 가구당 가계부채가 5000만원을 넘어섰다. 이는 자산 증가보다 부채 증가가 더 빨라짐에 따라 빚을 갚을 능력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소득이 적을수록 부채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2010년 소득 하위 20%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2009년 보다 68.2% 급증한 279.5%에 이르러 소득의 3배에 달하였다. 이는 소득이 적은 20, 30대 가구와 저소득층의 재무건전성 악화를 보여주고있다. 이는 저축은행들이 건설업체의 잇따른 부도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부실해지면서 금리가 높은 가계대출 비중을 늘림과 더불어 전월세값을 포함한 물가의 급등과 교육비 지출에 따른 ‘생계형 대출’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축소된 가계부채 상환 능력에 대하여 이명박 정부는 고소득층의 가계 빚이 가계부채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빚을 갚을 능력이 양호하며 자산불평등도 외국에 비해 낮다는 것을 이유로 당장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낮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 30대와 저소득층의 가계부실이 본격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가계부채 대란'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와 공기업의 공공부분 부채는 2011년 3분기 말 한국은행이 파악한 것만 789조 3600억 원으로 1년 만에 9.2% 급증했으며 이중 공기업의 부채는 1년 만에 14.4%나 급증한 363조 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공기업 부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이나 4대강 공사 등 국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사채 발행 등으로 마련한 결과로 보고있다. 소득 양극화 지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6년 2.12%, 2008년 2.05%, 2010년 0.89%로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조금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2003년 기준으로 증가세가 2009년 5.65%, 2010년 2.73%으로 계속 높게 나타났다. 공적연금 지출은 30개국 중 29위,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30개국 중 30위로 나타났다. 196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의 주요 산업은 농업에 의존하였다. 1963년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공업화,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농업인구는 격감하여 1970년 1천4백42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44.7%였고, 2010년 기준 한국의 농업인구는 3백2만1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농업인구의 고령화 까지 진행되면서 나중에 식량위기가 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업은 중급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산업들에 특화되었고, 주요 산업으로는 조선, 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이 있다. 특히 조선 산업은 2008년 기준 세계 전체 점유율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전자 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있다. 자동차 생산력은 세계 5위 이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로봇, 친환경 에너지 등의 미래형 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 또한 늘리고 있다. 반면, 국가경제 발전수준에 비해 서비스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며, 발달수준도 미흡한 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는 삼성, 현대자동차와 같은 재벌 대기업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한국 공업의 역사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대부터 제철, 제련 공업이 발달하였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근대적인 공업 시설이 건립되었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유입되었다. 일본 자본의 유입에 맞서 국채 보상 운동이 자발적으로 확산되었고 1920년대에는 김성수는 자본을 투자하여 경성방직, 경성직류 등 방직과 면 공업을 육성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 안재홍, 김성수 등에 의해 물산 장려 운동이 진행되어 국산 공업품을 활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공업으로 일변화 된 한국의 공업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의 공업 수준은 미미했으나, 1960년대 이후 출범한 제3공화국 정권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60년대에는 수공업, 수제품 공업, 기술, 근로자 파견 위주로 진행되었고, 식료품과 담배, 섬유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입 대체 산업이 발달하였다. 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 제조업, 수출 위주의 공업정책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이르러 섬유, 의류 산업뿐 아니라 전자 제품, 건설,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골목 상권은 정부가 개입, 규제하지 않는 시장경제를 채택하였고 군사정권 몰락 이후 이러한 시장경제 체제가 대폭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형 슈퍼마켓(SSM), 빵집 등,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다양한 분야 시장 독과점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10년 동반성장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중소기업적합업종을 선정, 대통령이 직접 언급 하는 등 제재가 가해지고 있다. 이에 일부 대기업이 속속 사업에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기업형 슈퍼마켓 기업은 중소 업체를 사들이는 등 여전히 많은 대기업은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민국에는 우측 통행을 하며, 자동차 운전석은 왼쪽에 있다. 4,000km에 달하는 31개의 고속도로 및 국도, 지방도 등의 도로가 있어 대한민국의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는 노선의 일부 이며 국도 제7호선은 노선의 일부이다. 전국적으로 버스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1462만명이다. 과거에는 현금과 함께 회수권과 토큰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며 현금도 대부분 사용 가능하나 환승 혜택이 없다. 또한 교통카드를 통한 환승 할인 혜택 등으로 사용자를 유도하는 중이다. 또한 이를 통한 도시철도와의 연계를 목적으로 수도권의 버스 노선 체계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되었고 수도권 통합요금제가 수립되게 되었다. 현재 버스 체계는 크게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로 나눌수 있으며 시내버스 특정 지역의 면허에 귀속된다. 또한 비교적 작은 지역에서의 운행을 위한 마을버스도 부산, 서울, 경기도 등에서 운행되는 중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시계를 넘어서면 시계 추가 요금이 부과되며 서울, 경기도, 인천의 시내버스는 거리에 따른 추가 요금이 부과된다. 시외버스는 시외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정거장에서 주로 승하차가 이루어지며 대부분 교통카드를 사용할 수 없지만 가끔씩 사용 가능한 노선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버스 회사 중에서는 KD그룹이 가장 규모가 크며 대한민국내 여객용 버스의 10%를 소유하고 있으며 경기도 노선의 절반을 관리한다. 또한 현재 자가용 이용자들을 대중교통으로 유도하기 위해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장애인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자치 단체들이 생기고 있으며 수도권의 도심 지역의 혼란이 극심한 대한민국의 상황에 걸맞은 굴절버스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도입하였으나 대부분 비용 문제 등으로 취소되었다. 대한민국의 철도 및 광역전철의 총 연장 길이는 3,000km에 달한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철도시설은 1963년 9월 1일 교통부 산하에 철도청을 신설하여 이때부터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으나 2005년에는 기업체로 전환하여, 공기업의 형태인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국유 철도를 관리하고 있다. 특히 경의선 철도는 평부선·평의선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철도선에는 경부선, 호남선, 중앙선, 장항선, 경전선, 경춘선, 충북선, 그리고 전라선이 있다. 또 2016년 12월에는 한국철도공사가 자본을 출자하여 설립된 민간기업 SR에서 운행하는 SRT가 개통되며 철도경쟁시대가 도래했다. 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수도권지역과 부산지역,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광주광역시 등에서 운행되고 있다. 시내를 운행하는 도시철도를 일컬어 '지하철' 또는 '전철'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개통된 수도권지역은 1~9호선과 분당선, 중앙선, 경의선, 경춘선, 인천 1호선, 인천국제공항철도, 신분당선, 수인선, 용인경전철, 의정부경전철 까지 총 19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기본요금은 평균적으로 교통카드 이용시 최초 10km까지 1050원, 그이후 5;km 초과시마다 100원씩 추가된다. 그러나 민영 도시철도인 신분당선은 기본요금이 1,750원이고, 다른 노선에서 신분당선으로 환승할 경우 700원이 추가된다. 수도권 전철은 인천 도시철도, 인천공항, 김포공항과도 연결된다. 1985년 개통된 두 번째로 큰 부산 도시철도는 총 길이 131.7km에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부산김해경전철 5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대구지하철 1호선, 2호선 2개 노선이 운행되고 대전지하철 1호선 1개노선이 운영, 광주1호선 1개 노선 운행 등 일부 광역시들을 중심으로 도시철도가 계속되어 건설중이다. 요금은 각 지자체에서 따로 규정하여 조금씩 다르다. 복지 정책으로 65세 이상의 노인과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무임으로 승차할 수 있다.(부산-김해 경전철은 노인도 유임승차) 대한민국의 도시철도는 대체로 운행 시간이 정확하고 위생환경과 전반적인 이용이 쾌적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나 실내먼지 오염농도가 높고, 출퇴근 시간에 사용자가 많은 일부 역에서 극심한 혼란이 빚어지는 등 개선점도 지적되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의자 등의 내부 자제들을 합성수지로 된 쿠션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이후로 모든 자제들을 불연성 재질로만 사용하도록 규정이 변경되어 현재 모든 지하철과 전철에 적용되어 있고 방독면이나 소화기 등도 잘 비치되어 있다. 이 외에 선로 추락 사고나 자살 등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으로 현재 수도권지역의 모든 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 하였으며 최근에 개통한 부산, 대구, 대전, 광주의 일부 도시철도 승강장에도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있는 경우가 있고 부산 도시철도의 경우 모든 승강장에 안전펜스와 스크린도어를 설치하였다. 최근에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도시철도로써 건설비가 많이드는 중전철보다 경전철을 선호하여 전국 각지에서 운행중이거나, 계획과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선 공항이 대한민국 내외의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민영으로 운항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1988년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또한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최근에는 진에어, 에어부산 등 여러 저가항공사도 운행되고 있다.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2010년 10월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주민등록상 5000만 명을 돌파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자동으로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되며 국가가 피부양자로 지정된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은 무상의무교육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명확한 통계는 나온 적이 없으나, 국민의 대부분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이다. 고대부터 중국 대륙 등지로부터의 인구 유입도 잦았으나 그들도 같은 민족으로 융화되었다. 다만 독립 이후 중국,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제 국가로부터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다민족적인 요소 또한 증가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150만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외국인은 중국인으로 그 중 상당수는 한국계 중국인에 해당한다. 그 외의 외국인으로는 미국, 일본,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출신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2016년 8월 기준 전체 대한민국의 임금노동자는 19,627,000명으로 그 가운데 2,664,000명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으로 추산됐다고 통계청은 전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6년 전국 노조 조직현황'에 따르면 국내 전체 노조 조직률은 전년보다 0.1%포인트 오른 10.3%로 집계됐다. 노조 조합원 수는 196만6681명으로 전년보다 2만8136명(1.5%) 증가했다. 이 수치는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며 통계에서 빠진 수치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연맹체로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등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구,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등이 존재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홍석천, 하리수, 이시연 등의 등장 이전에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따돌림, 학교 폭력에 노출되거나 취업 등에 불이익 등을 받아왔다. 성소수자들은 1992년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 성소수자 단체 초동회가 처음 결성되고 1년 뒤에는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 트랜스젠더 모임인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로 분리되었다. 1997년에는 대학생 동성애자 인권단체인 대학생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고 이듬해 동성애자인권연대로 명칭 변경, 2015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로 명칭 변경하였다. 1998년 5월 17일에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 오세인이 1997년 자신이 게이임을 가족에게 밝혔다가 추방당한 후, 활동하던 단체 사무실에서 자살하였고, 2003년 4월 26일에는 동성애자를 악마, 사탄 등으로 비판하는 개신교계의 공격과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 단어, 음란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 등 성소수자 혐오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는 시인 겸 작가 육우당이 끝내 자살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2000년 이후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홍석천을 시작으로 트랜스젠더인 하리수, 이시연 등의 공개적 활동 등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부 단체와 일부 사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소수자들의 활동을 지지, 성소수자 문화제 개최 등의 행사가 본격 등장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내 대표적인 성소수자 인권단체 연맹체로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무지개행동)이 있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에서의 여성의 활약이 미미하다고 분석되는데, 2017년 이코노미스트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의 고위직 여성 비율은 10.5%, 기업 이사회 내 여성 임원 비율은 2.4%로 나타나 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국회 내 여성 비율은 17%로 이는 OECD 평균(28.2%)보다 낮은 수치다. 근 십여 년간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이 외국인 임원과 여성 관리자를 뽑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몇 년도 버티지 못했다. 2010년 SK의 첫 외국인 여성 임원(2008~2010년)이었던 린다 마이어스는 "한국 기업은 다양성 문제에서 너무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리다"고 평가했다. 중화권, 일본, 동남아시아, 아랍, 독립국가연합 등을 비롯한 세계 여러지역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한국인이 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이주가정'이라고 부른다. 특히 농촌 지역 기준 결혼 등록건수의 50%에 해당하는 1만여 건 정도가 국제결혼으로 등록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하였으며, 1970년대의 박정희 정부의 '둘만 낳자'는 가족 계획과 1980년대 전두환 정부의 '하나 낳아 알뜰살뜰' 등의 가족 계획으로 여자 아이에 대한 낙태 현상 등으로 1970년~1990년대 초반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남녀 간의 성 비율이 깨져 여성에 비교하여 남성의 수가 월등히 많은 현상이 도래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농촌 기피 현상으로 일부 농촌 지역 노총각들이 결혼, 연애가 어려운 것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증가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농촌 총각들이 증가하였다.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 이후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면서 1970년대 이후 고졸이던 평균 학력이 1995년 고교평준화와 학력고사 등의 폐지 이후 대졸 내지는 초대졸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청년층이 '3D 업종' 또는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3D 업종과 4D 업종으로 분류되는 직종 외에도 중소기업과 일부 공장 등에 대한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취업 비자를 받고 입국한 산업연수생과 불법적으로 들어온 불법 체류자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이주노동자라 하면 이들 둘을 통틀어 가리킨다.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이주노동자 수는 55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서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의 비율은 10% 대를 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내 난민의 대부분은 북측에서 나온 탈북자로, 정부에서는 이들을 특별 취급하여 국적 부여, 생활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정치적 난민을 인정하기 시작하여 아프리카나 아랍권의 일부 국가로부터 정치적 혹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입국한 이들을 인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 수는 일반적인 선진국에 비해 많지 않다. 2012년 6월 23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통계청은 총인구가 50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세계 194개국 중 26위이다. 광복 직후에는 해외 동포들이 귀국하고, 6.25전쟁 때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들이 많이 월남했는데 광복 직후에는 약 180만 명, 6.25전쟁에 약 100만 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60년대 이후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하게 되는 도시화 현상이 일어났으나, 최근에는 쾌적한 생활을 위한 역도시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970년 이전까지 5백여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1988년에 1천만 명을 돌파하였다.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는 정체 상태에 있으나, 인근 경기도의 인구가 급증하여 2007년 10월말 현재 수도권 거주 인구는 2390만 3785명으로 전국 인구의 48.6%를 차지하였다. 인구 밀도는 503명/km이다. 1990년대 들어 감소 경향을 보이던 서울의 인구는 2000년대 들어 소폭 증가하기 시작, 2009년에는 1046만명으로 6년 연속 증가했다. 인구 유입등으로 수도권 전체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 부산은 지속적 감소로 1995년 381만 명에서 2013년 356만명으로 급감했으나 대신 인근 경상남도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대구 역시 253만명에서 252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인천은 약 298만명, 대전 155만명, 광주 148만명 울산 117만명 등이다.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1.5%로, 전 세계적으로 매우 도시화된 국가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1970년을 전환점으로 하여 2% 미만으로 인구 증가율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은 1.19명으로 전년에 비해 0.06명 감소했다. 최근 3년간 출산율이 증가 하였으나 경제위기로 인해 출산율이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의 출산율은 종전의 2008년 1.19보다도 떨어져 1.15를 기록했다. 출생아수는 445,200명(통계청)으로 여전히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어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이 의무교육이다. 고등학교는 3년 과정이며, 일반계(인문계, 자연계)·전문계(실업계)·특수 목적 고등학교(특목고)로 분리되어 있다. 고등교육에는 4~6년제 대학교와 2~3년제 전문대학이 있다. 2005 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교육을 받는 정규학교 재학자는 1089만 명(24.7%), 졸업자는 2987만(67.8%), 중퇴자는 96만 명(2.2%)이고, 졸업자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졸업자는 750만 명(24.5%), 고등학교 졸업자는 1263만 명 (41.2%), 대학 졸업 이상은 1050만 명(34.3%)을 나타내는데, 이는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높은 교육수준은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기인된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현재에는 오히려 학력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청년실업의 증가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대학교 진학률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르게 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혹은 고등학교 졸업에 상응하는 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치를 수 있다. 이 외에도 각 대학에서는 수시입학전형, 특별전형 등을 통하여 개별 대학의 요구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은 사교육 시장이 크게 발달되어있어,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각 가정마다 월평균 70여만원을 웃돌고 있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는 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이념 대립 등에서 기인한 사회 갈등이 존재한다. 2000년대 들어서 이러한 갈등은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여론에 기반한 전국적인 규모의 촛불 집회로 종종 표출되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대규모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는 이념 진영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촛불 집회에 대하여 좌파진영은 시민들의 민주 의식 신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시민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냈다는 점, 인터넷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에 다가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파진영은 선동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왜곡과 특정 정파 이해집단의 욕구를 위한 창구로 활용된다는 점을 들어 사회 혼란,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한국의 노사갈등에 대하여 상당수의 국민들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국제경영개발원에 의하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57개국 중 56위로 선정되어 시급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이념 대립의 연장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방식에서 국가주도의 사회운영과 성장을 주장하는 국가주의세력과 개인의 자유에 따른 사회운영을 주장하는 동시에 분배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진보주의 세력간 논리의 충돌도 있다. 이는 서방세계와 같은 좌우대립의 이념지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데서 기인한 사회 갈등인데 그 원인으로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반공반북을 중요시하여 좌파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환경이 장기간 지속되었고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 진영에 의해 만들어진 좌우대립의 이념지형도 1990년대 초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사라져 서방세계와 같은 이념지형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갈등 지수는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OECD 회원국 중 4위에 해당하였으며, 이 같이 높은 사회 갈등에 따른 비용으로 국내총생산(GDP)의 27%인 약 300조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소통 지수는 2011년 아시아포럼21이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 중 이명박 정부의 소통 지수는 45.8점, 한나라당의 소통 지수는 42.6점,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 소통 지수는 36.2점으로 모두 50점 이하인 걸로 나타났다. 인종 차별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서 유독 심하며, 백인은 차별이 거의 없으나, 흑인 및 황인은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국어를 모르는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며, 유럽 같은 경우에는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경쟁 심리도 심각하다. 대한민국은 어려서 부터 성적, 경쟁 위주의 교육과 문화 속에서 성장하게 함으로써 경쟁과 그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이에 따라 남과 나를 비교하며 오직 높은 곳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성인이 되어서 학력위주 경쟁, 스펙위주 경쟁, 실적위주 경쟁,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등으로 획일화 된다. SBS와 한국갤럽이 2011년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 사회의 경쟁 수준은 평균 76점으로 10년 전보다 20점 가까이 높아져 경쟁이 계속 가속화 됨을 보여주었으며, 국민 10명중 8명이 "과도한 경쟁에 부담을 느낀다"고 대답하여 상당수가 부담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은 모두를 스트레스 속에 놓이게 하며, 장기간 스트레스는 매우 예민해지게 만들고, 분노, 불면증, 우울증 등의 신체·정신적 증상을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담당하는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 치료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언덕위의 하얀집으로 불리는 등 차별의 대상이 되고있어 상당수가 기피하는 실정이다. 또 경쟁은 다수의 패배자를 생산하게되는데, 이는 다수의 자존감 저하와 수치심, 분노심 상승의 원인이 되고있다. 결국 사회 전반의 동질성 추구와 이질성 거부 심리, 경쟁 심리는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외국인 차별, 왕따, 학교 폭력, 인터넷 악플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피해로 정신 이상자의 수를 늘리거나, 그런 정신 이상자를 방치하게 되어 자살자를 늘리거나, 사회에 불만을 품고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묻지마범죄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있다. 이에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 10월 '대한민국 3, 4차 정부보고서에 대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최종 견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학생의 성적에 따른 차별과 경쟁적인 교육체제에 대해 지적하며 개선을 요구하였다. 학력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라디오 연설에서 '학력차별 없는 사회'를 강조하였으며, 고용노동부가 고등학교 직업 교육에 지원을 강화하는 등 능력 중심의 열린 고용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백혈병이 생겨 산업 재해로 인정 받는 학생이 나오는 등 고등학교 현장 실습이 노동력 착취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2011년 정부에 의해 명칭을 '정신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로 변경하는 등 다양한 진료를 하는 분야임을 알리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남녀 심리,치료,범죄 심리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 주제로 사용하거나, 교수가 직접 매체로 나와 강의를 하는 등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과거 대학교의 비인기 학과였던 '심리학과'가 상위 경쟁률을 기록하고, 관련 주제의 책이 대거 출간되고,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 중 게임이 29.9%로 가장 높았다. 연령별 연령별로는 30대 미만의 경우 역시 게임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30대 이상 연령층은 영화와 TV 시청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2013년 4.12편으로 미국의 3.88편을 제치고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여가생활에 대한 불만족 이유들로는 ‘시간 부족’ 비율이 45.9% 였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 부담’이라는 이유가 45.6%로 나타났다.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고대의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 등 이웃 나라에서 들어온 외래 문화와 한국 고유의 독자적 문화와 융합하여 발전했다. 관습적인 공용어이자 법적인 공용어는 한국어로, 그 계통이 학계에서 확증되지 않은 고립된 언어이지만 많은 학자들이 알타이어족과 연관성 있음을 주장한 바 있고, 특히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언문청(諺文廳) 또는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으로 1446년 반포하였다. 한글은 각 자음과 모음이 하나의 기호로 표시되고, 그 자음과 모음을 모아써서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이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모음은 천(하늘:ㆍ),지(땅:ㅡ),인(사람:ㅣ)을 나타내는 각 부호의 조합으로 만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창제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삼국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써왔던 한자와 이를 당시의 한국인이 쓰던 입말에 맞는 한자의 소리만 따서 문자로 표기한 향찰, 구결, 이두 등이 한국어 기록 수단이었다. 한자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양반층 및 관공서에서 계속 써왔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글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한글 대신 한자로 직접 표기하기도 한다. 1962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면서 표기문자의 주류로 등장했고, 현재 한자 표기는 중의적 표현을 막기 위해 부수적으로 쓰고 있다.(한글맞춤법 참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의무 교육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교육하는 영어는 미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중학교에서부터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제2외국어로는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의 7개 언어가 있다. 고등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를 배울 수 있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때 수험생이 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어와 중국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일간 신문은 크게 전국지와 지방지로 나뉜다. 전국지는 대한민국 전국을 대상으로 발행되며, 지방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 지면을 할애한다. 지방지는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신문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해당 지역의 뉴스를 다룬다. 전국지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의 보수적인 신문, 이른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신문 등의 진보적인 신문, 이른바 '한경오'으로 분류되고 있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점유율은 조선일보 11.9%, 중앙일보 9.1%, 동아일보 6.6%, 경향신문 2.7%, 한겨레신문 1.7% 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지들도 있으며, 크게 경제에 관련된 소식을 다루는 경제지와,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을 다루는 스포츠지를 들 수 있다. 한편 주요 도시의 공공시설에서 출근 시간대에 무료로 배포되는 무가지가 존재하며, 인터넷 매체를 통한 인터넷 신문도 존재한다. 2008년 기준 대한민국 일간지의 수는 약 288종, 주간지의 수는 약 2,896종, 월간지의 수는 약 3,293종, 격월간지의 수는 약 459종, 계간지의 수는 약 981종, 년 2회의 수는 약 325종, 인터넷 신문의 수는 약 1,040종 정도가 있다. 방송의 경우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 FM라디오 방송, AM라디오 방송, 단파 라디오 방송, 케이블 방송, 디지털위성방송, 지상파 DMB 방송 등이 있다. 현재 전국 단위 지상파 방송으로 국공영 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와 준공영방송인 문화방송(MBC)이 있다. 지역 단위 지상파 민영 방송으로는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MBC)을 중심으로 한 계열과 서울지역의 지역민영방송인 에스비에스(SBS)를 중심으로 한 SBS 네트워크 계열이 있으며, 그외 독자적인 지방 민영방송인 경인지역의 경인TV가 있다. 그외 한국교육방송공사법에 따른 공영방송인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이 지상파 방송으로 있다. 종합편성채널 4사로는(JTBC, MBN, 채널A, TV조선)와 보도 채널인 연합뉴스TV와 YTN 등 2개의 보도 채널이 존재하며, 케이블TV 최대 PP사업자인 CJ E&M과 티캐스트도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인 KBS, MBC, SBS, EBS가 점유하는 주파수와 기타 기독교방송(CBS), 극동방송(FEBC), 불교방송(BBS), 평화방송(PBC), 원음방송(WBS) 등 종교방송의 주파수, 교통안내 전문 방송인 교통방송(서울은 TBS, 기타 지역은 TBN 한국교통방송), 국악 전문의 국악방송, 그리고 국방홍보 목적의 국군방송 등의 여러 방송사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이 연결된 나라이며,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 속도를 보유하고 있다. 높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과 인터넷 이용률을 보이는 대한민국은 2000년 초중반 인터넷 신문을 표방한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 신문과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언론 매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인터넷 언론 매체들은 인터넷 매체 특유의 신속성과 높은 접근성 등을 강점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론 형성에 상당한 위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단순 뉴스 전달자에 불과했던 포털사이트가 하나의 언론세력으로 성장하는 변화를 보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인터넷 신문사, 포털사이트를 언론 기관으로 보고 법적 규제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에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인 토착신앙으로서 무교(무속신앙)이 있다. 불교와 유교는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었으며, 불교는 5세기부터 14세기 말(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 이르는 약 1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융성하여 많은 사찰과 문화유산을 남기고 현재 단일 종교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다. 14세기 말 조선에서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교를 학문과 사상, 가치관 그리고 철학으로서 배우는 사람은 있으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교는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풍습이나 습관, 습성, 가치관, 사상, 생활 방식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천주교는 조선 후기에 이승훈 등에 의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그 교세가 확장되자 병인박해, 신유박해 등 대규모 박해 사건이 일어난 일 때문에 프랑스의 병인양요가 일어난 계기가 되어 조선 정부의 탄압이 거세졌다. 당시의 순교자 중 103명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성되어 성인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학교와 개신교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 시기에 감리교, 장로회 등의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선교사가 파송됨으로써 전파되었고 양적인 성장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는 비록 짧으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종교활동 및 선교가 활발하다. 현재 성공회, 천주교와 정교회, 개신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전 종교 중에서 가장 많다. 그 밖에 천도교(동학), 대종교, 원불교, 증산도, 통일교 등 여러 신흥 종교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한국에서 창시되어 현재까지 신봉되고 있다.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전통 민요로는 아리랑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지방마다 다른 민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가수들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권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K-POP)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K-POP가수로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비스트 , 티아라, 인피니트등이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싸이(박재상)의 '강남스타일(Gangnam Style)'로 세계에 강남스타일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노래는 원더걸스의 Nobody 이후, 미국 빌보드 차트에 2위까지 올랐다. 한국 미술은 약 기원전 7천여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조선 시기에는 제의를 위해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 동경 (거울), 방울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을 위한 예술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 백제의 금동대향로,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도자기의 일종인 고려 청자와 먹으로 그리는 문인화가 발달했다. 조선 시대 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을 성리학에 기반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들은 문인화와 백자를 선호하였다. 이들 문화는 다분히 사대주의적이었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원들이 나타나 특색 있는 미술을 만들었다. 동시에 조선시대에는 서민적인 미술인 민화가 발달했다. 그 후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서양 고전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이 도입되었고, 해방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유학생들이 현대 미술을 시도하였다. 현대 한국 미술은 서양적 기술과 재료를 바탕으로한 혼합된 서양화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서예, 동양화와 같은 전통미술 역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백남준은 독창적인 비디오 아트를 선보여 한국 출신 작가 중 가장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순수미술 분야는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건축, 그래픽디자인, 산업디자인, 게임 같은 상업미술 분야에서는 점차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스포츠는 고대부터 무술에 근거한 체육 활동이 발달했으며, 특히 대한민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택되기도 하였다. 태권도 이외에도 한국 전통 무술(스포츠)인 궁술(국궁), 택견, 씨름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하계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참가했다. 또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였으며,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종합 4위를 기록하였다.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강세를 보이는 종목으로는 양궁, 사격, 탁구, 배드민턴, 쇼트트랙, 핸드볼, 유도, 태권도, 역도가 있으며, 최근 20년간 하계 올림픽의 경우 시드니 올림픽을 제외하면 메달 종합 10위 이내의 성적을 올렸다. 특히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동계 올림픽의 경우 201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5위를 기록하며 최고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은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2002년 아시안 게임, 2014년 아시안 게임등을 개최했으며, 종합 1위는 1995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차지한 적이 있다. 실제로 즐겨하는 생활스포츠 그리고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경기 포함 TV로 가장 즐겨보는 스포츠 등 각종 부분에서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로 선정되고 있으며 축구, 야구, 농구, 배구, e스포츠, 바둑의 6개의 종목이 프로 리그를 갖추고 있다. 프로 리그에서 인기 종목으로는 야구와 축구 등이 꼽히며, 한국의 발전에 밑거름에 이어 근래에는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축구는 2002년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며 대회 4위에 오른 적이 있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원정 16강에 성공하였으며, 2018년 대회까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2012년 하계 올림픽 축구에서는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야구는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우승의 경력이 있다. 1990년대 말 게임 및 전자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e스포츠는 2001년 '한국e스포츠협회' 창립 후 선수 관리, 경기 규칙, 대회 방식이 체계화 되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았다. 2004년부터 파트 3 경마국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생산은 1000여 마리였다. 경기도 과천시, 경상남도 김해시와 부산광역시 강서구, 제주도에 경마공원이 있고 32개의 KRA 플라자(장외 마권 발매소)가 있다. 한편 대한민국이 개최했거나 개최 예정인 스포츠 대회는 다음과 같다. 한류(韓流, Korean wave)는 대한민국의 대중문화가 주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대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무렵부터, 문화 수출국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책을 배경으로, 2000년 전후부터 대한민국 드라마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방송되었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도 한국의 대중 문화가 널리 유입되어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국가 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국가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윤치호 또는 안창호로 추정되며, 1919년 안창호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가사의 작사자는 윤치호 설, 안창호 설, 윤치호와 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다. 윤치호의 작사설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애국가를 바꾸려 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의 변호로 계속 애국가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의 정부 수립 이후 국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10년 국민의례규정에서 국민의례 시 애국가를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애국가의 가사는 1900년대 초에 쓰여졌다. 작사자는 크게 윤치호라는 설과 안창호라는 설 두 가지가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미상이다. 작사자 윤치호 설은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1907년에 써서 후에 그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창호가 썼다는 주장은 안창호가 애국가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08년에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에 수록된 것을 비롯한 많은 일제 강점기의 애국가 출판물은 윤치호를 작사자로 돌리고 있는 등 윤치호 설에는 증거가 많은 반면 안창호 설에는 실증적인 자료가 부족하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尹致瑛)은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썼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은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윤치호가 지은 노래 중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안창호가 다시 고쳤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주요한과, 독립운동가 안태국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 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 에서 ´원래 끝 구절의 첫 가사는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 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최초의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국가의 원작자로는 윤치호 설이 유력하다. 한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작사설을 심의했을 때 찬성 11표, 반대 2표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하여 결정을 유보하였고, 그 이후 애국가에 작사자에 대한 결정은 없었다. 따라서 현재 애국가의 공식적인 작사자는 미상이다. 처음 애국가는 가사에 스코틀랜드 가곡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로버트 번스 작사·윌리엄 쉴드 작곡)의 가락을 붙여서 불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하여 1936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6년 10월호에 애국가 악보 광고가 붙기도 하였다. 새 가락을 붙인 애국가의 악보는 1942년 뉴욕한인교회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애국가는 1940년경에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전해졌고 국가로 채택되었으나 한반도에는 전해지지 못했다. 다만 1942년 8월 29일에 개국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애국가 1절을 매일 방송하였다. 한반도의 독립 이후 새 애국가의 악보가 전해졌고, 이후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의 사실상의 국가(國歌)가 되었다. 애국가의 악보는 교과서 등을 통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대한민국의 성문법에서는 국가를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법령상 규정되어 있는 바는 없으나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되어 있어 국가적인 행사 따위에서 연주 또는 가창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홈 경기는 평양이 아닌 중국에서 치러졌었다. 다만 2013년 평양에서 열린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 대항 역도선수권대회에서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의 애국가 연주가 허용되었다. 1 2 3 4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초대된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서울에서 받은 대우가 좋지 않다고 불평하고 음악제를 추진한 안익태를 상대로 비난 성명을 발표하면서 애국가의 가락이 도브리치 시의 시가인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일어날 것입니다"(If Bulgarian singers came to Korea and sang "O Dobrujanski Krai", Korean audiences would stand up!) 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다만 두 곡은 첫소절이 서로 비슷하지만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며, 전체적으로 가락의 분위기가 다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1935년이고, 그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이듬해인 1936년이었기 때문에 그가 불가리아 민요를 접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니콜로프의 논리는 1966년 안익태의 전기인 김경래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현암사)에서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유학시절 무려 40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했다. 또한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삼았다"는 증언에 맞지 않는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1976년 이유선은 그의 책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위의 표절 문제를 거론하며 “대한민국은 완전한 민주독립국가이니만큼 하루 속히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이에 안익태기념사업회 측은 반론자료와 함께 정부 각 부처에 진정서를 보냈다. 문화공보부와 국회사무처는 애국가가 30년 동안 국가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명확한 근거 없이 표절 여부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발표했다. 과거에는 애국가의 저작권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고 안익태의 유족이 그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1992년부터 이에 따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신탁을 통해 저작권료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2003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는 프로축구단 경기에서 애국가를 무단으로 사용한 두 구단을 고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애국가의 저작권을 국가에서 사들이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으며, 결국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에 저작권을 기증함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유력히 추정되는 윤치호가 말년에 일본 제국의 관료로 일했다는 점이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 때 수감을 당한 적이 있는 근대 개화 사상을 전파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초기에는 독립 운동가였지만, 105인 사건 후 전향하면서 30여년을 일본의 식민 지배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또한 작곡가인 안익태도 생전에 친일 활동을 했다 하여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개사하였다는 논란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돌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곡의 음악성에 관하여, 그 선율 자체가 처음에 못갖춘마디처럼 들려, 이로 인해 뒷부분의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YB가 편곡한 애국가에서는 첫마디만 못갖춘마디로 바뀌어 있다. 1977년 한국음악협회의 회장 조상현은 애국가의 표절 의혹과 함께 가사와 선율의 불일치, 소극적인 내용의 가사 등의 이유를 들어 1월 26일 총회에서 새 국가를 만들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 다음 통과되면 이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총회에서 새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국가를 새로 제정하려고 한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정부는 앞으로 국가를 새로 만들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벨 물리학상 노벨 물리학상( - 物理學賞, , )은 6개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년에 한 번 스웨덴 왕립 과학원에 의해 수여된다.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은 1901년, 엑스선을 발견한 독일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에게 수여되었다. 이 상은 노벨 재단이 주관하며,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리학계에서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노벨 물리학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수여된다. 2007년의 노벨 물리학상은 프랑스의 알베르 페르와 독일의 페터 그륀베르크가 거대 자기저항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공동 수상하였고, 상금인 1천만 스웨덴 크로나를 나누어 가졌다. 노벨 물리학상은 사람들이 그 과학자의 업적의 중요성을 알기까지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경우 그 이론은 이미 1930년에 이미 발표하였지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50여년이 지나서야 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앙글레르의 경우 그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게 되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49년 뒤 그의 업적이 사실로 확인되어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론과 발견이 사람들에게 중요성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론이나 발견을 발표한 과학자가 이미 죽어버렸기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DDF 안익태 안익태(安益泰, ,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1921년에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고, 1930년 졸업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했다. 와 커티스 음악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이때 파울 힌데미트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 활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안 에키타이(, 서양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tai Ahn))라는 일본어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로 친일 행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7년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에르뇌 도흐나니 등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살았다.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의 가사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인 일본 제국·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3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가 썼다고 한다. 에하라는 물밑에서 독일 내의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안익태 본인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에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 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독일의 우방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6년에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안익태의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와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2000년에는 음악연속간행물 '객석'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李京粉)이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도시이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이었고, 고려 때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능산, 인왕산, 청계산 등의 여러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넓이는 605.2 km²으로 대한민국 전 국토의 0.6%도 못 미치지만, 천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어 인구밀도는 현저히 높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로 이루어져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 국제적인 도시이다. 서울의 GDP는 세계 4위이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金城)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新羅)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한양 이외에도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그 밖의 표기 중에는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썼던 '徐蔚(서울)'이 있다. 이는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강북의 성저십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京城, 일본어로는 けいじょう)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의 로마자 표기 "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을 《》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한중수교전에는 중국에서는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서울을 한청이라고 불렀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중국이 경제개방을 하고 2005년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 수이)을 서울의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일본어의 표기는 '소우루'()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문서에서, 서울특별시의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로 번역한 것이 굳어져 현재 공식명칭(the Seoul Special City)에 이르고 있다. 서울은 북위 37° 34′, 동경 126° 59′의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울 도심에는 남산, 인왕산(338m)이 있다. 시 주변으로 북한산(837m), 관악산(629m), 도봉산(740m), 수락산(428m), 불암산(510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아차산, 지양산 등이 서울을 둘러싸며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와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²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 도봉구 도봉동이고 최남단은 서초구 원지동이며 최동단은 강동구 강일동, 최서단은 강서구 오곡동이다. 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265m)·응봉(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 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 관악산(629m)외 청계산(618m), 구룡산(306m), 우면산(293m)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 불암산, 수락산, 망우산, 아차산이 있다. 서울의 중심에는 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 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 뚝섬과 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잠실 수중보와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 한강은 일제 강점기까지 별다른 정비가 없었다가, 1960년대 이후 한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한 뒤 여의도를 개발하였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잠실 개발계획으로 잠실섬과 부리도의 남쪽 물길(송파강)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 1982년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둔치를 조성하고, 강변 양쪽에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놓았다. 2006년에는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 주변을 다시 정비하였다. 한강 이외의 주요 하천으로는 불광천,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탄천, 양재천, 여의천, 홍제천 등이 있다. 서울의 임야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²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노원구에 17.73 km², 관악구에 17.53 km², 강남구에 16.11 km²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서울의 지반은 주로 중생대 말기에 형성된 담홍색의 화강암과 고생대 이전에 이루어진 화강편마암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서울의 동북부와 관악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고, 화강편마암은 주로 남서부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경계선은 대체로 북아현동에서 서소문, 남산 서쪽을 돌아 한남동과 행당동을 지나고 있다. 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 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 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 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다. 서울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 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근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 °C보다 높은 -2.4 °C로 높아져 2009년부터 대한민국 기상청은 온대 하우 기후("Cwa")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 °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 °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1981년~201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5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5.7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2.4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4.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계절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봄과 가을이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0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따뜻해진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 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 장마나 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된다. 겨울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1981년 ~ 201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50.5mm이나, 1990년에는 2,355.5mm, 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 °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 °C이다.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에서 8위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3위: 대구 5위: 울산)를 하였다.(중위권)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 황해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의 수많은 공장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연에 서울의 대기질은 겨울과 봄에 최악을 기록하고 있으며, 미세먼지 농도가 100㎍/m을 훌쩍 뛰어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특별시는 2016년 9월 30일 기준 25개 자치구와 424개 행정동이 있다. 한강 남쪽에 11개, 한강 북쪽에 14개 자치구이며 각 자치구는 서울특별시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 기준, 49개 선거구로 나뉜다. 주민등록 인구(외국인 제외)에 따라 29만5천 명 미만인 자치구는 1개, 29만5천 명 이상 ~ 59만 명 미만인 자치구는 2개, 59만 명 이상인 자치구는 3개의 선거구를 가진다. 인구 및 세대 수는 2018년 7월 기준이다. 가장 인구가 많은 구는 송파구, 가장 인구가 적은 구는 중구로 조사된다. 고려 멸망 후 조선이 천도(1394년)한 후인 세종 때 인구는 1000만 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서 과밀화 현상을 빚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5만 명, 인구밀도 6,874명/km²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 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², 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²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을 확장하여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30명/km²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 6,628명/km²이었는데, 외국에서의 귀국, 한반도 북부지역 출신 등으로 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²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에 인구밀도 12,055명/km²으로, 1949년에는 136.05 km²이었던 시의 면적이 268,35 km²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²이 되었다. 1951년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구가 65만 명, 인구밀도는 2,416명/km²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휴전과 환도로 다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인구 157만 명, 인구밀도 5,869명/km², 1960년에는 인구 245만 명(전체 인구의 10%), 인구밀도 913명/km², 1970년에는 인구 543만 명(전체 인구의 18%), 인구밀도 9,013명/km², 1980년 인구는 836만 명, 인구밀도 13,074명/km², 1990년에는 1,061만 명, 인구밀도가 15,532명/km²이 되었다. 이렇게 끝도 없이 증가하던 인구도 1992년 인구 1,097만 명, 인구밀도 18,121명/km²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 분당·일산·평촌·중동과 산본등의 1기 신도시가 개발되었고 이 마저도 포화상태로 현재 운정, 판교, 동탄등 2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이주에 의한 것이다. 계속 감소하던 인구는 2003년 인구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²을 정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뉴타운'으로 불리는 서울 시내 대규모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크다. 2009년 12월말 기준 인구는 10,464,051명, 4,116,660세대이고, 인구밀도는 17,289명/km²이다. 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무작정 서울로 온 이농 인구 덕분이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서울에서 취업을 하거나 생활 터전을 마련한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서울의 높은 전세로 인해 서울의 인구순유출 속도가 한국 도시들 중 가장 빠르며,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1,000만명 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의 인구가 28년만에 100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8년 5월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는 980만명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인구는 경기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세종시나 제주도로의 이동도 이루어지는 역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등 국가의 통치 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종로구에는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중앙 행정 기관과 헌법재판소 등 국가 중요 기관이 있고, 중구 정동에는 각국의 외교 대사관이 밀집해 있다. 또한 여의도에는 국회가, 서초구에는 대법원을 비롯한 법조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2014년 서울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27조 602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2%이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SK, 롯데 등 주요 대기업의 본사가 있다. 대한민국 GDP의 22%를 창출하고 있으며, 금융 기관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 서울의 공업은 1919년에 영등포에 세워진 방직공장을 시초로 한다. 영등포에는 그 외에도 피혁공장과 철도공작창이 지어졌으며, 1940년대 들어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일본의 군수물자 조달을 목적으로 영등포와 용산을 중심으로 군수 산업이 발달하였다. 8·15 광복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잠시 침체 상태에 있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로 인해 서울의 공업은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1971년 형성된 구로동 수출산업공단은 섬유·전자기계·고무합성수지제품·금속·광학기기류 등의 생산으로 서울 최대의 산업단지가 되었으며, 인근의 영등포 기계공단과 묶여 경인공업지구를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 용산·영등포·천호동·노원구 등에 공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수도권이 팽창하면서 인천·시흥·안산·부천 등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 2000년대 들어 첨단산업이 발달하면서 구로동·가산동 지역의 대규모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탈바꿈하여 현재는 수많은 IT 벤처 기업이 있다. 서울의 상업은 4대문 안 서울 도심인 종로·남대문로·충무로·명동·을지로와 청계천 등의 상가와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중부시장 등의 시장과 백화점, 대형 할인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대단위 슈퍼마켓과 연쇄점·지하상가가 시내 요소에 설치되어 새로운 상가를 형성하였다. 전문상가로는 전국에 의류를 공급하는 남대문 의류상가와 동대문 평화시장,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노량진수산시장, 용산전자상가, 경동시장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등 국공립 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균관대학교(인문사회캠퍼스), 한양대학교,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숭실대학교, 세종대학교 등 사립 대학교들이 소재하고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 일부를 가리키는 '서울 강남 8학군'이라는 명칭은 한국의 열성적인 사교육 문화를 대변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대학교 40개교, 교육대학 1개교, 방송통신대학교 1개교, 전문대학 12개교 등이 있다. 서울에 위치한 대학교를 이른바 '인서울'이라 일컫어지며 수능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되기도 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함에 따라 보육 시설이 더 많이 요청되고 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보육 포털을 운영하여 보육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은 대한민국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도서관·박물관·신문사·출판사·방송국·공원과 기타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 서울에는 132개의 국보, 380개의 보물, 61개소의 사적, 11개의 천연기념물, 32개의 무형문화재, 46개의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다. 또한 경복궁 등의 고궁과 각종 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운동경기장으로는 잠실에 잠실 종합 운동장, 목동에 목동 운동장, 성산동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6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서울에는 시립 도서관 23개 소가 있으며, 시립 도서관의 경우 대부분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각 자치구에서 설립한 구립 도서관이 있다. 최근 구립 도서관의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장서(藏書)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외에도 공공 및 사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이 있다. 서울의 도심 지역에는 대형 종합 신문사들의 본사가 몰려 있다. 도심인 중구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매일경제신문, 종로구에는 동아일보, 한국일보 본사가 있고, 마포구에는 한겨레가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티투어버스는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울의 중심 관광지를 순환하고 있다. 서울은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2002년 FIFA 월드컵의 개막전과 4강전을 비롯한 총 3경기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졌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의 개막식, 폐막식이 있었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과 이를 기념하는 올림픽공원이 있으며, 마포구에는 월드컵공원이 있다. 노원구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종합선수합숙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프로스포츠팀을 보유한 도시이며 특히 프로스포츠 양대 산맥인 프로축구 K리그와 프로야구 KBO 리그에서 1990년 럭키금성 황소 (현 FC 서울)와 LG 트윈스 그리고 2016년 FC 서울과 두산 베어스의 2차례 동반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승용차와 대중교통인 지하철, 버스, 택시가 주된 시내 교통 수단이다. 주요 환승지로는 1호선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1,2호선 시청역, 2호선 강남역, 신도림역, 2,4호선 사당역 등이 있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자동차 등록 대수는 2,933,286대로 수송 분담률은 2006년 기준으로 지하철 34.7%, 버스 27.6%, 택시 6.3%, 그 외 자가용이 26.3%이다. 1899년부터 운행하던 전차가 1968년 없어지면서 서울의 대중 교통 수단은 많이 달라졌다. 1966년부터는 시가지의 대폭적인 재개발로 건물의 고층화와 함께 도로의 입체화가 진전되었다. 대중 교통 수단의 재배치는 서울 도시 구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다. 대표적인 예로 1기 지하철, 특히 당초 계획과는 달리 거대 순환선으로 변경된 2호선이 서울의 공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가 남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및 제1·제2경인고속도로는 서쪽에 있는 인천광역시와 연결된다. 시 외곽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도시 내부에는 강변을 따라가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내부순환로, 동부간선도로, 서부간선도로, 남부순환로, 북부간선도로 등의 간선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강변북로는 고양시와 파주시, 올림픽대로는 인천광역시와 부천시, 동부간선도로는 성남시와 의정부시, 서부간선도로는 안양시와 광명시, 북부간선도로는 구리시와 연결된다. 서울시 내의 주요 도로로는 테헤란로, 세종대로, 종로, 강남대로, 시흥대로 등이 있다. 서울에서 버스가 처음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경성 부영버스' 라는 이름으로 10대를 운영했다. 1949년 17개 회사가 서울시로부터 면허를 받고 버스 운영에 뛰어들었다. 이후로 여러 차례의 확장과 개편을 거쳤으며, 2004년 서울특별시 버스 개편으로 버스 준공영제와 환승할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현재 시내버스, 간선버스, 마을버스, 광역버스 등을 포함한 수백개의 버스노선이 시내를 연결하고 있다. 서울에서 택시는 1912년에 처음 운행을 시작하였고, 1919년 최초의 택시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26년에는 미터기가 도입되었다. 8·15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1970년 콜택시가 등장하고, 1988년에는 콜택시 대체용으로 도입된 중형택시, 1992년에는 모범운전수가 운전하고 콜택시를 도입하는 등 서비스 수준을 높인 모범택시가 선을 보였다. 또한 2009년에는 소형택시 부활이 결정된 이후 2011년 12월 부터 소형택시 70여대가 운행되고 있다. 2015년 10월에는 고급택시가 운행을 시작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서울시 소형택시의 기본요금은 2100원, 중형택시는 3000원, 모범택시는 4500원, 고급택시는 8000원이다. 서울에서 다른 도시간을 잇는 철도 교통이 발달되어 있다. 지역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역이 나뉘어 있어, 서울역에서는 경부선과 경전선 KTX, 용산역에서는 호남선·전라선·장항선, 청량리역에서는 중앙선·태백선·영동선 강릉선열차가 출발한다. 그 외에도 영등포역 등의 중간역에서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에서는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서울역까지 접근할 수 있다. 1968년 서울전차의 퇴역으로 이를 대신할 대중교통수단 건설이 논의되었고,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개통으로 본격적인 도시 철도 시대를 열었다. 1기 지하철 사업으로 2호선, 3호선과 4호선이 개통되었고, 그다음 2기 지하철 사업으로 5호선, 6호선, 7호선, 8호선이 새로 건설되어 추가되었다. 이후 9호선이 건설되면서, 2011년 현재 한국철도공사 관할 구간을 제외하고 9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다.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을 이어주며, 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은 서울의 공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의 경우에는 최초로 한강 아래로 터널을 뚫어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포함한 일부 노선은 코레일의 수도권 전철과 연계 또는 직결 운행하여 서울 주변의 위성도시들을 연결한다. 동아시아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단거리 국제선과,대한민국 국내선은 주로 김포국제공항을, 나머지 중장거리 국제선은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한다. 서울 도심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인천국제공항철도 또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과거에는 뚝섬과 마포에 포구가 있어 번창하였으나,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또한 노량도(서울 시흥)·양화도(서울 인천)·한남도(서울 용인)·송파도(서울 광주)·광나루(서울 광주) 등의 나루터가 있었으나 한강대교가 가설된 후부터 옛날의 나루터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강 개발 이후가 된 후 관광용으로, 또한 통근용으로 수상 교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6년 10월 26일부터 관광용 한강 유람선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8개 선착장에서 운행하고 있다.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7년 10월 11일부터 한강 수상택시 운행을 시작했다. 여의도와 잠실 등 한강변 18개 승강장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교통수단 뿐만 아니라 관광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운항정지 중이다. 서울특별시는 2014년 2월 기준 20개국, 24개 해외 자매도시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앙카라 앙카라(, )는 터키의 수도이다.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인구는 4,587,558명이고(2014년 통계), 앙카라 주의 인구는 5,150,072명(2015년 통계)이다. 앙카라는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중심지로,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자, 이스탄불을 대신해 수도로 지정됐다. 앙카라는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공업의 중심지이며, 도로와 철도 교통의 중심지다. 앙카라에는 중동전문대학(Hacettepe Üniversitesi)와 앙카라대학(Ankara Üniversitesi)이 있다. 또 국립도서관, 고고학박물관, 민속학박물관과 국립극장, 대통령 관현악단이 앙카라에 있다. 앙카라가 수도가 된 이후의 개발로 옛 도심지였던 울루스(Ulus)와 신 개발지대인 예니세히르(Yenisehir)로 구분된다. 울루스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양식의 옛 건물과 좁은 도로로 대표되는 데 반해 예니세히르에는 넓은 도로, 호텔, 극장과 아파트 건물이 들어차 더 현대도시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외국 공관도 예니세히르에 소재해 있다. 앙카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700년까지 히타이트 문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1000년 경에는 프리기아인들이 이 곳에 정착했고, 프리기아의 수도인 고르디움이 현재 앙카라 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포랏르에 있었다.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나 후에 지진으로 고르디움은 파괴되었다. 미다스의 손 신화로 유명한 미다스 왕이 프리기아의 왕이었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에도 계승됐다. 프리기아의 풍습은 로마 시대 때까지 계속됐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王道)가 이곳을 지나갔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권은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움을 통해 앙카라에 입성했고 짧은 기간만 머물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마케도니아 제국은 뿔뿔히 나뉘어서 안티고노스 1세가 앙카라 지역을 차지한다, 기원전 3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폰토스가 무역거점으로 삼기위해서 이 지역에 진출했다. 그리고 앙카라의 이름의 기원이 된 안키라(Áγκυρα, 그리스어로 닻)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족(라틴어 Tectosages)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 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 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술탄인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해 1402년 빼앗았다. 그러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후의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터키 독립전쟁 참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 앙카라가 터키 공화국의 수도가 된 이후, 구시가지는 울루스(Ulus)로, 신시가지는 예니셰히르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시대, 비잔틴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적들과 오래된 시장, 옛 관공서 등은 울루스에, 대로, 신식 호텔, 극장, 쇼핑몰, 신식 관공서, 대사관 등은 크즐라이(Kızılay)를 중심으로 하는 신시가지에 위치하게 됐다. 그 이후,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924년에는 앙카라의 인구는 3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286,781명이 사는 도시가 되었고, 2014년에는 5,150,072명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가 되었고, 현재 터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됐다. 2015년 10월 10일 현지시각 오전 10시 4분에(EEST) 앙카라 중앙역 앞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102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이 테러는 터키 공화국의 역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테러였다. 앙카라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 즉 내륙에 위치하다보니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주로 가을과 봄에 비가 내린다. 앙카라는 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여름에는 낮에 덥고 건조하지만, 밤에는 시원하다. 연간 강수량은 402mm 이고 1월 평균기온은 0.4°C, 7월 평균기온은 23.6°C이다. 1923년 터키의 수도가 될 당시 앙카라는 원래 인구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계획이 되었다. 1927년 앙카라의 인구는 75,000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에는 5,045,083명(남자 2,507,525명, 여자 2,537,558명)으로 집계되었다. 앙카라는 중요한 상업·공업도시이며 주변의 농업 지대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다. 역사적으로 앙고라 염소털로 만든 모헤어, 앙고라 토끼 털로 만든 앙고라 울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 발달했었다. 또한,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포도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특히, 카바클데레 와인(Kavaklıdere wine)이 유명하다. 공업에서는 TAI(Turkish Aerospace Industries), MKE, 아셀산(ASELSAN), 하벨산(Havelsan), 로켓산(Roketsan), 누롤 마키나(Nurol Makina) 등의 항공산업 및 방위산업 관련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하여있다. 이들 업체의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또한, 독일의 버스, 트럭 제조 회사인 MAN SE의 공장도 위치하여있다. 또한, 앙카라에 위치한 앙카라 대학교, 중동공과 대학교, 빌켄트 대학교 등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꾸준히 산업에 투입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시장은 울루스에 위치한 츠크르크츠라르 요쿠수("Çıkrıkçılar Yokuşu")로 주로 양탄자, 가죽 제품 등을 판매한다. 바클크라르 시장(Bakırcılar Çarşısı)은 장식품, 카펫, 골동품 등으로 유명한 시장이다. 앙카라성 근처에도 향신료,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 또한, 스히예 광장 주변에는 매일 전통시장이 열린다. 현대적인 쇼핑몰은 크즐라이나 찬카야의 투나르 힐미 에비뉴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크즐라이역 주변에는 크즐라이 쇼핑몰이 있는데 푸드코드, 스타벅스, 옷가게가 입점해있다. 아트리움 몰(Atrium Mall) 옆에 바로 옆에 있는 아타쿨레 타워의 꼭대기 층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AŞTİ역 주변에는 아르마다 쇼핑 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케치외렌의 에트릭 지역에 대형 슈퍼마켓, 오락실, H&M 등이 입점해있는 안타레스 쇼핑몰이 위치하고 있다. 아르마다, CEPA, 켄트파크 쇼핑 몰이 고속도로 변에 있고, 갈레리아, 알자디움, 골디온이 위밋쾨이에 위치한다. H&M, ZARA 등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앙카몰은 앙카라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아크쾨프뤼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앙카라는 정치적으로 이슬람주의 보수당인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 케말주의 중도좌파인 공화인민당(CHP, Cumhuriyet Halk Partisi) 민족주의 극우인 민족주의자운동당(MHP, Milliyetçi Hareket Partisi)가 의석을 나누어 갖고 있다. 선거구 수는 25개이다. 2014년 선거 결과 공화인민당은 2개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앙카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찬카야(Çankaya)에 의석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은 2개의 의석을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정의개발당이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앙카라는 이즈미르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 때 앙카라에서도 이스탄불, 이즈미르 못지 않은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고, 다수의 사상자도 있었다. 메리흐 괵첵(Melih Gökçek)이 1994년부터 현재까지 앙카라의 시장으로 재임 중이며, 터키 복지당(RP, Refah Partisi)에서 선행당(FP, Fazilet Partisi)으로 그리고 정의개발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메리흐 괵첵은 1994년 선거를 시작으로 1999년, 2004년, 2009년까지 당선되었으며, 2014년 선거에서도 당선되면서 5선 시장이 되었다. 민족주의자운동당에서 2009년 보수 정치인인 만수르 야바쉬(Mansur Yavaş)를 내세웠으나 낙선했다. 메리흐 괵첵은 2009년 선거에서 1% 차이로 승리했으며, 만수르 야바쉬는 이를 조직적인 부정 선거라고 주장했다. 만수르 야바쉬는 터키 최고선거관리위원회에 제소했으나 기각당했고, 그 후에 유럽 인권 재판소에 이를 다시 재소했다. 메리흐 괵첵이 5번이나 당선됐지만, 2009년 선거는 상당수의 유권자들이 부정선거로 인식하고 있다. 앙카라 지하철과 대부분의 버스는 EGO(The Electricity, Gas, Bus General Directorate)에서 운영한다. 대다수의 버스는 교통카드만을 이용해서 사용이 가능하지만, 일부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에서는 현금으로만 탑승이 가능하다. 현재 앙카라에는 경전철인 앙카라이(Ankaray, A1)와 M1, M2, M3까지 3개의 지하철이 운행중이며, M4가 건설중이다. 또한, 쉔테페와 예니마할레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도 운행 중이다. 앙카라 중앙역(Ankara Railway Station)은 터키 철도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터키 국영철도에서 앙카라에서 이스탄불, 에스키쉐히르, 시바스 등 전국 각지로 여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신잔역(Sincan)에서부터 카야쉬역(Kayaş)까지 광역철도도 운행중이다. 2009년 3월 13일에 앙카라와 에스키쉐히르를 잇는, 2011년 8월 23일에는 앙카라와 코냐간, 2014년 7월 25일에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3시간 30분만에 연결하는 고속열차인 YHT(Yüksek Hızlı Tren)가 각각 개통되었다. 앙카라는 또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기에 버스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스 터미널인 AŞTİ(Ankara Şehirlerarası Terminal İşletmesi)는 거의 모든 노선을 갖추고 있다. 앙카라의 공항은 시 북서쪽에 위치한 에센보아 국제공항이 있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나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 비해 노선수가 적지만 터키 국내선과 프랑크푸르트, 모스크바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다. 터키의 타지역처럼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1923년 창단된 겐츨레르비를리이 SK가 앙카라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으로 쉬페르리그에서 활동중이다. 겐츨레르비를리이 SK는 1987년과 2001년에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또한, 1910년 창단된 MKE 앙카라귀쥐는 가장 오래된 축구팀이지만 현재는 TTF 2. 리그에 소속되어있다. MKE 앙카라귀쥐는 1972년과 1981년 튀르키예 쿠파스의 우승팀이었다. 겐츨레르비르 B팀과 하제테페 SK도 쉬페르 리그에 소속되었던 적이 있다. 위의 모든 팀들은 앙카라 19 마으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한다. 또한 오스만스포르도 앙카라를 홈으로 하는 팀으로 2010년까지 쉬페르리그에 소속되어 있었다. 홈 구장은 예니켄트 아사쉬 스타디움으로 신잔에 위치한다. 또한, 신잔을 홈으로 하는 부그사쉬스포르, 에티메스구트를 홈으로 하는 에티메스구트 쉐케르스포르, 예니마할레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스포르, 찬카야를 홈으로 하는 앙카라 데미르스포르, 케치외렌의 케치외렌귀쥐, 케치외렌스포르, 푸르사클라르스포르, 바룸스포르, 알튼닥을 홈으로 하는 페트롤 오피시 스포르 같은 군소 팀들도 존재한다. 또한, 농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앙카라에는 앙카라 아레나를 홈으로 하는 튀르크 텔레콤과 TOBB 스포츠 홀을 홈으로 하는 카사 테드 콜레즈리레르 두 개의 농구팀이 있다. 배구에서는 할크뱅크 앙카라가 통산 6회 터키 남자 배구 리그(Türkiye 1. Voleybol Ligi)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다. 아이스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 경기도 앙카라 버즈 파테니 사라이(Ankara Buz Pateni Sarayı)에서 열린다. 1980년대 이후로는 스케이트 보드장도 많이 만들어졌다. 2012년 완공된 THF 스포츠 홀에서는 터키 핸드볼 쉬페르 리그(Türkiye Hentbol Süper Ligi)와 여자 핸드볼 리그(Türkiye Kadınlar Hentbol Süper Ligi)가 개최된다. 앙카라는 이스탄불과 더불어 대학교가 모여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앙카라에는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울루스에 위치한 겐츨릭 공원(Gençlik Parkı)에는 놀이공원과 호수가 있어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크즐라이에 위치한 귀벤 공원(Güven Park)에는 시미트와 꽃을 파는 행상들이 많이 있으며,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있다. 카바크르레데에 위치한 쿨루 공원(Kuğulu Park)에는 중국 정부에서 선물받은 백조와 흑조, 오리 등이 살고 있다. 알튼 공원(Altın Park)는 넓은 공원과 호수가 있으며, 배를 탈 수 있다. 앙카라 외곽지역인 에르야만에는 야경과 호수가 아름다운 괵수 공원(Göksu Park)가 있다. 또한, 앙카라 아레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터키 군인을 기리기 위한 한국 공원(Kore Bahçesi)이 있다. 겐츨릭 공원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00 터키 리라의 뒷면에 그려져있었다. 또한, 시내에 아타튀르크 오르만 치프트리이(Atatürk Orman Çiftliği)라는 아타튀르크가 생전에 농장일을하던 농원이 있는데, 이 곳에는 동물원과 농장, 레스토랑 등이 있다. 또한,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생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은 집도 있다. 농장인 치프트릭(Çiftlik)에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농장에서 생산되는 치즈, 전통 맥주, 아이스크림 등을 맛 볼수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있다. 앙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양이 품종인 터키시 앙고라(Ankara kedisi)가 살던 지방이다. 터키시 앙고라는 주로 희고, 부드러운 긴 털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품종 개량을 통해 검은털이나 붉은털을 가진 터키시 앙고라도 많다. 터키시 앙고라는 페르시안 고양이나 터키시 밴과도 가까운 품종이다. 눈은 파랑색, 녹색, 황색인 경우도 있지만 간혹가다 한쪽 눈과 다른쪽 눈의 색이 다른 오드아이도 있다. 귀는 크고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생겼다. 앙고라 토끼(Ankara tavşanı)는 앙카라 주변에 살던 길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이다. 앙고라 토끼는 가장 오래된 가축용 토끼 중에 하나인데, 중세시대에 프랑스 왕실의 애완용 토끼로 유명하다. 미국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앙고라 토끼는 털인 앙고라 울로 유명한데, 앙고라 울은 희고 길며 가벼워서 의복 재료에 많이 쓰인다. 앙고라 토끼를 사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앙고라 울을 얻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앙고라 토끼는 온순하지만, 주의 깊게 다뤄주어야 한다. 여름에는 털을 짧게 깎기도 하는데, 긴 털 때문에 여름에 열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속도 가속도(加速度 )는 시간에 따라 속도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일반적으로 물체는 속력이나 운동방향이 바뀌면서 속도가 변하는데, 이와 같이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할 때 가속도가 있다고 한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량으로 나타낸다. SI 단위로는 m/s를 사용하며, 주로 a라는 문자를 사용하여 가속도를 표기한다. 고전 물리학에서, 일정한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체는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 다음 식을 만족하게 된다. 여기서 F는 물체에 주어지는 힘을, m은 물체의 질량을, a는 물체의 가속도를 나타낸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가속도는 시간간격 formula_2동안 속도가 변한 정도 formula_3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를 평균가속도 formula_4라 한다. 어떠한 순간의 가속도는 이 시간간격을 0으로 보내는 극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하는 가속도를 순간가속도 formula_6라 한다. 이렇게 정의한 가속도는 어느 순간의 속도를 시간으로 미분한 것으로도 정의된다. 등속운동은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한다. 이에 반하여 속도 혹은 속력이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증가하는 등가속운동에서는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가속운동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증가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이때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또는 등가속운동이라 한다. 등가속운동 또는 등가속도운동은 시간에 따른 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가 일정한 운동을 말한다. 등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에 비례하지만 등가속운동에서 변위(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뉴턴역학에서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므로, 힘과 질량이 일정하다면 물체는 가속도가 일정한 등가속운동을 한다. 지구 표면에서 물체는 일정한 가속도로 운동하며 이를 지구의 중력가속도라고 한다. 감속운동은 어떤 물체의 속도 혹은 속력이 감소하는 운동을 말한다.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증가하는 운동을 등가속도운동 혹은 등가속운동이라고 하는데, 속도 혹은 속력이 일정하게 감속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등감속운동의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고 음(−)의 등가속운동으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속도 속도(速度, , )는 어떠한 물체의 위치 변화를 뜻하는 변위를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변위는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이기 때문에 속도 역시 벡터이다. 단위 시간당 변위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국제단위계에서는 미터 매 초(m/s, 초속 미터)를 사용하며, 일상에서는 킬로미터 매 시간(km/h, 시속 킬로미터)도 자주 쓰인다. 기호로는 주로 v를 사용한다. 속도란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므로, 시간간격 formula_1동안 위치가 변한 정도 formula_2의 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한 속도를 평균속도라고 한다. 평균속도 formula_3는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속도는 물체가 갖는 어떠한 순간의 속도, 즉 순간속도이다. 순간속도는 평균속도를 측정하는 시간간격을 매우 짧게 하여 0에 접근시킨 극한값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순간속도를 formula_5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위와 같이 순간속도는 변위를 시간에 대하여 미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속도라고 할 때는 순간속도를 의미한다. 속도가 방향과 크기를 갖는 벡터량인 반면, 속력은 크기만을 갖는 스칼라량이다. 속력은 물체가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에 대하여 변화가 일어난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50초 동안 앞으로 30m 전진한 다음 80m를 후진하였다고 하자. 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양으로 후진할 때의 위치 변화를 음으로 나타내면 변위는 formula_7가 되지만, 움직인 경로의 전체 거리는 formula_8가 된다. 따라서 이 자동차의 평균속도와 평균 속력은 다음과 같이 계산 할 수 있다. 순간속도는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 변화가 0에 접근하기 때문에 변위와 전체 경로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순간속도를 나타내는 벡터의 크기는 순간속력과 같다. 그러나 보다 큰 시간 간격을 고려하는 평균속도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평균속력과 다르다. 상대속도는 한 좌표계 안의 두 물체의 속도를 비교한 것이다. 두 물체 A, B의 속도를 각각 formula_11, formula_12라고 하면, 고전물리학에서는 A에 대한 B의 상대 속도를 다음과 같이 계산 한다. 예를 들어 두 자동차 A, B가 직선 상에서 마주 보며 달리고 있을 때 A의 속도가 3m/s 이고 B의 속도가 -5m/s 라면 A에 대한 B의 상대속도는 -8m/s 이고 B에 대한 A의 상대속도는 8m/s 가 된다. 일차원 운동만을 고려한다면 상대속도는 스칼라값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물체의 속도가 매우 빠를 때 상대속도가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관성계가 다르더라도 빛의 속도는 일정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두 물체의 속도 관계는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위 식에서 빛의 속도 c는 매우 큰 값이기 때문에 A와 B의 속도가 충분히 느릴 경우 formula_15는 0에 접근하게 되고 그 결과 상대속도는 고전물리학의 계산과 같아지게 된다. 운동량 운동량 (運動量, )은 물리학 특히, 뉴턴 역학에서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운동량의 국제 단위는 뉴턴 초 (N · s) 또는 킬로그램 미터 매 초 (kg · m/s)이고, 통상적인 기호는 라틴 소문자 "p"이다. 선형 운동량() 혹은 병진 운동량()이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어 빠르게 움직이는 무거운 트럭 같은 물체는 운동량이 크다. 무거운 트럭을 빠른 속도까지 가속시키기 위해서는 큰 힘을 한참 동안 가해야 하고, 반대로 그 트럭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도 큰 힘을 오랫동안 가해야 한다. 트럭이 더 가볍다거나 더 느리게 움직인다면 그만큼 운동량도 작아질 것이다. 선형 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으로,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에 의한 영향이 없는 닫힌계의 선형 운동량의 총합은 바뀌지 않는다. 고전역학에서는 선형 운동량 보존법칙이 뉴턴의 운동 법칙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공식을 약간 수정한 형태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일반화된) 선형 운동량 보존 법칙은 적절한 정의를 이용하면 전자기학, 양자역학, 양자장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존 법칙이다. 고전역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갖는 벡터다. 즉, 운동량을 p, 질량을 "m", 속도를 v라고 하면, 운동량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계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계의 총 운동량은 바뀌지 않는다. 두 물체가 충돌할 때도, 두 물체의 운동량의 합은 일정하다. 즉, 두 물체의 질량을 formula_2, formula_3, 충돌 전의 속도를 formula_4, formula_5, 충돌 후의 속도를 formula_6, formula_7라고 하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이 때 formula_9를 반발 계수라고 부르고, 0 이상 1 이하의 값을 가진다. 만약 e = 1인 경우의 충돌은 탄성 충돌이라고 부르고, 이 때에는 운동 에너지 보존 법칙, 즉 이 성립한다. 1차원 공간의 탄성 충돌에서, 두 물체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반면, e < 1인 경우는 비탄성 충돌()이라고 하고, 특히 e = 0인 경우는 완전 비탄성 충돌이라고 부른다. 이 때에는 충돌한 두 물체의 속도차, 즉 입자 사이 상대 속도가 같다. 충격량은 어떤 시간 동안에 운동량의 변화이다. 이에 따라, 충격량의 단위는 운동량의 단위와 같다. 충돌 전후 두 물체가 주고받은 충격량의 합은 무조건 0이 된다. 힘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라 운동량의 시간에 따른 변화율이므로, 일정한 시간 "t"에 대한 힘 F에 대한 충격량 I는 이다. 만약 힘의 세기나 방향이 시간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힘의 정의를 이 식에 다시 사용하면, 다음 식을 유도할 수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3차원의 운동량은 에너지와 함께 사차원 벡터를 이루는데, 이를 사차원 운동량이라고 부른다. 즉,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E는 계의 총 에너지이며, p는 계의 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이다. 상대론적 3차원 운동량은 정지 질량 formula_19과 로런츠 인자 formula_20, 속도 formula_21의 곱이다. 즉, 여기서 formula_22는 신속도이다. 광자등과 같이 정지 질량이 0인 입자도 운동량을 가진다. 정지 질량이 0인 입자의 경우, 에너지 formula_23와 운동량 formula_24는 서로 비례한다. 즉 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은 파동함수에 대한 연산자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입자의 운동량은 (입자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는 한)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정성을 갖는다. 전하와 스핀이 없는 입자의 운동량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도모나가 신이치로 도모나가 신이치로(, 1906년 3월 31일 ~ 1979년 7월 8일)는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양자전기역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공로로 1965년 리처드 파인먼과 줄리언 슈윙거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06년 그는 도쿄도에서 도모나가 산주로(朝永三十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병약하였으며 1913년 부친이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교토로 이사갔다. 1937부터 1939년까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아래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서 연구하였다.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이다. 유카와 히데키와는 제삼고등학교, 교토제국대학 동창으로, 평생의 동료이자 라이벌로 지냈다. 권위적인 유카와 히데키와 달리 도모나가는 소탈한 성품이었으며, 유카와는 직관을 중시함에 비해 도모나가는 논리적인 전개를 선호했다. 학창시절에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성적이 더 좋았으나, 정작 노벨물리학상을 유카와 히데키가 먼저 받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유카와 히데키 유카와 히데키(, 1907년 1월 23일 ~ 1981년 9월 8일)는 일본의 이론물리학자이다. 교토부 교토시 출신이다. 원자핵 내부에 있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서로 강한 상호작용의 매개가 되는 중간자의 존재를 1935년에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1947년, 영국의 물리학자 세실 프랭크 파월이 우주선 중에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 ‘유카와 이론’이 증명돼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9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후 반핵 운동이나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플랑크와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렸고 중간자 이론 외에 비국소장이론, 소영역이론 등의 이론을 계속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창이었던 도모나가 신이치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고 도모나가와 마찬가지로 니시나 요시오의 제자로도 알려져 있다. 목소리가 작고 강의가 상당히 난해했다고 전해진다. 교토 대학·오사카 대학 명예교수, 교토시 명예시민이었다. 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학위는 이학박사이다. 1907년 1월 23일, 도쿄부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이베이정(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에서 부친이자 지질학자인 오가와 다쿠지와 모친인 오가와 고유키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1살 때 부친인 다쿠지(와카야마현 출신)의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것에 따라 가족 모두가 교토부 교토시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아자부의 집에서는 출생 후 1년 2개월 밖에 살지 않았다. 1살 때부터 대학까지는 교토에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잠깐 동안 오사카나 니시노미야에 있었던 적이 있으나 인생의 대부분을 교토에서 생활했다(그러나 노벨상 수상의 대상이 됐던 중간자론을 발표한 것은 유카와가 오사카 제국대학에 근무했던 때였으며 당시에는 니시노미야의 구라쿠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나의 기억은 교토로 이사왔던 때부터 시작된다. 역시 교토가 고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 외가쪽은 유카와의 외할아버지인 오가와 고마키쓰는 예전 기슈 번의 번사였으며, 또한 유카와가 자체가 선조 대대로 와카야마현 출신이었기 때문에 “와카야마 출신”이라고 소개되기도 했지만 유카와 본인에 의하면 교토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실업가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고향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출생지’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유카와의 필체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유카와 본인은 와카야마에서 살았던 경험은 없다. 5, 6세 때 외할아버지인 고마키쓰에 의해서 한문 서적을 읽고 배웠다. 고마키쓰는 한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서양학문을 배워 말년까지 계속해서 런던 타임스를 구독하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 유카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고쿠 보통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교토부립 교토 제1 중학교(현: 교토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 시절의 유카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는데 별명은 ‘곤베에’()였다. 또한 사춘기 때부터는 거의 말을 안들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말 안하겠다’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등 ‘이왕 짱’()이라고 불렸지만 의외로 《바보 이반》에서 따온 별명 같다고 유카와가 스스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말수가 적을 정도의 과묵한 성격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다쿠지로부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홀대를 받았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낮다고 보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전문학교에라도 보낼까’라고 고민했던 시기도 있었다. 교토 제1 중학교의 동기로는 학자가 된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학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똑같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교토 제1 중학교의 1년 선배이며 제3 고등학교와 교토 제국대학 동기였다. 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다마키 가주로 연구실의 조수가 됐다. 1932년에는 교토 제국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일본 수학물리학회 연회가 열렸을 때 야기 히데쓰구와 알게됐는데 당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이학부 물리학과(는 시오미 이화학 연구소)의 초대 주임교수로 부임한 야기에게 부탁해서 오사카 제국대학 강사를 겸임하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작고 강의는 꽤 난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즈음에 오사카 위장 병원(1950년에 유카와 위장 병원이라고 개칭)의 원장인 유카와 겐요의 둘째 딸 유카와 스미와 결혼해 유카와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오가와’에서 ‘유카와’가 됐다. 오사카 제국대학으로 옮긴 후 전혀 성과가 없던 유카와를 야기는 더욱 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주의를 준 뒤 “본래라면 도모나가를 오게 했을텐데 너의 형으로부터 의뢰받아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채용했으니까 도모나가에게 지지 않도록 공부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라고 질책했다. 우치야마 료유에 의하면 야기는 비수같은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 1934년에 중간자 이론 구상을 했고 이듬해 1935년에는 ‘소립자의 상호 작용에 대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중간자(현재의 파이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했다. 중일 전쟁 격화에 따른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던 일본인 과학자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진 않았지만 유카와는 1939년 솔베이 회의에 초청됐다. 회의 자체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중단됐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로버트 오펜하이머 등과 친분을 가졌다. 이러한 업적에 높은 평가를 받아서 1940년에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는 최연소로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6월에는 일본 해군을 중심으로 한 원폭 개발 프로젝트(F연구) 회의에 초청됐으나 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에 일본은 패전을 맞았다. 유카와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해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의뢰를 거절했지만 전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이러한 배경을 기록한 일기가 2017년 12월 교토 대학 유카와 기념관 자료실에 공개된 바있다. 더 나아가 1947년에 세실 프랭크 파월 등이 실제로 파이 중간자를 발견한 것에 의해서 194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시아인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작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나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에 뒤를 이은 세 번째의 수상자였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이 뉴스는 패전과 연합국 점령하에서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 국민에게 큰 힘을 주었다. 2000년에 유카와의 노벨상 관련 문서를 조사한 오카모토 다쿠지는 추천장 대부분이 외국인 추천자로부터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노벨상 역사 가운데에서도 보기 드물게 연구 성과와의 관계가 명료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후에는 비국소장 이론과 소영역 이론 등을 제창했지만 이론적 성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한편 머리 겔만의 쿼크 이론에 대해서는 “전하가 이나 같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존재할 리가 없다”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또 한편으로는 반핵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 등과 함께 공동선언자로 이름을 남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중에는 아라카쓰 분사쿠가 이끄는 교토 대학 그룹에서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56년에 원자력 위원장인 쇼리키 마쓰타로의 요청으로 위원이 됐다. 그러나 유카와는 ‘원자로를 외국에서 구입해 오더라도 5년째까지는 실용적인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쇼리키의 지론에 대해 “기초 연구를 생략한 채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서두르는 것은 장래에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도 있다”며 거세게 반발, 하루 만에 그만두려고 했으나 모리 가즈히사 등이 만류해서 사임을 철회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대립은 깊어졌고 결국엔 건강상의 이유로 이듬해인 1957년에 재임 1년 3개월 만에 사임했다. 1956년 1월에 궁중에서 열린 가회시에 초대받았던 유카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1970년에 교토 대학을 정년 퇴임해 교토 대학의 명예교수가 됐으며 말년에는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특히 생명 현상에 있어서 정보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미우라 바이엔의 심취에 깊이 빠졌다. 휘호를 부탁받으면 자주 ‘지어락’(, ちぎょらく)이라고 썼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라’()는 장자의 ‘추수’(秋水)의 마지막 한 구절이다. 1966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돼 있었다는 것이 노벨 재단이 공표한 후보자 명단에 의해 판명됐다. 교토 대학에서 정년 퇴임 후인 1975년에 전립선암이 발병돼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의해서 암의 진행은 막았지만 그 이후에는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하면서 학술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양국의 긴장 격화로 제4회 과학자 교토 회의의 발기인의 한 명으로서 1981년 6월, 15년 만에 회의 개최가 성사됐다. 이 때 이미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서 회의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상태에서 참석해 핵폐기를 호소했다. 3개월 뒤인 같은 해 9월, 폐렴에 심부전 합병증으로 교토시 사쿄구의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소재한 지온인에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와카바 상의 대좌에 유카와에 의한 단가로서의 명문인 ‘원자폭탄이여 다시 여기에 오지 말지어다.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만이다 여기는’()이라고 새겨져 있다. 4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힘, 약한 힘) 가운데 강한 힘을 어떻게 정식화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당시로서는 문제가 됐고 여러가지 시도가 이뤄졌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유카와는 전자의 200배의 질량을 갖는 중간자를 힘의 매개 입자(보스 입자)를 가정해서 핵력인 강한 힘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강한 힘으로부터 페르미의 약한 힘을 이끌었다. 중간자론은 약한 힘, 강한 힘,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이론으로서 당시에는 가장 기본적인 장의 이론인 것으로 간주됐다. 또한 힘을 입자가 매개하는 것도 명료하게 보여주면서 장을 창출할 입자라는 생각을 정착시켰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유카와의 강한 힘을 낳는 중간자론은 소립자론의 길을 열었다고 당시에는 높이 평가했다. 유카와는 강한 힘의 중간자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후의 일을 장의 양자론에서 스스로 찾아낸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성공하지 못했다. 민코프스키 공간상에서 폐곡면에서의 확률 진폭을 정의하면 인과율이 파괴된다는 문제를 유카와가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생애를 걸었다(이 문제를 ‘유카와의 원()’이라고 말한다. 유카와가 이 문제를 제기한 후 폴 디랙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도모나가의 기여는 있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초대칭성을 세계 최초로 제기한 미야자와 히로나리는 주장하고 있다. 물리학은 유카와의 기본 문제를 회피하여 현상론에 치우쳤다고 한다. 이하는 일본 국내에서의 저명한 인물을 둔다. 제자의 제자에는 현재 활약하는 수많은 이론물리·물성물리·우주물리·천문·수리생물학자가 포함돼 있다. 정몽헌 정몽헌(鄭夢憲, 1948년 9월 14일 ~ 2003년 8월 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02년 9월부터 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현대계동사옥 12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정몽헌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주영이 명예 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버지 정주영 사후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후 2002년 9월에 5억 달러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03년 8월 4일, 서울시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으나 타살 의혹이 있다. 재계 인사들은 '부친의 숙원 사업이었던 대북 사업 등 가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동기'로 추측했다. 정몽헌의 사망 후 부인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한국 한국(韓國), 조선(朝鮮), 또는 코리아(Korea)는 동아시아에 위치한 지역 또는 헌법상의 국가로, 현대사에서는 한반도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은 대한민국을,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이르는 경우가 잦다. 근현대사에서 한국은 고종이 수립한 대한제국을 일컫는 말이었다. 넓은 의미로 한국은 고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설립된 여러 한민족의 국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한국의 역사를 한국사라고 한다. 한국의 강역은 현재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독도, 울릉도, 제주도 등] 를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본래 한민족의 영역은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하였다. 다만 만주와 연해주는 한민족 이외에 숙신, 말갈 등 만주족들도 살아왔고, 한민족의 왕조들이 그들을 통치하였다. 12세기 초 발해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만주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19세기 ~ 20세기 초에 많은 한국인들이 간도 등 만주,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48년 이후로 2019년 오늘날까지 한국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있다. 다만 헌법상 양측은 하나의 나라로 여기고 있다.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면적은 약 22만 km²이며, 인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합쳐 2017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약 7천700만 명이다. 한국인의 뿌리 이루는 종족은 한(韓), 예(濊), 맥(貊)이다. 이들에 의해 고조선, 북부여(扶餘), 진국(辰國, 삼한 성립 이전)과 같은 초기 국가들이 생겨났다. 기원전 15세기 - 기원전 11세기쯤에는 청동기 문화가 들어왔으며 이와 함께 초기 고대 국가들이 생겨났는데 이 중 고조선(古朝鮮)이 가장 강했다. 왕검성(王儉, 고조선 수도)에서 세워진 단군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지녔고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를 만드는 등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후반과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의 거점들을 빼앗긴 뒤 중심지를 오늘날의 평양(平壤) 지역으로 옮겨갔다. 고조선 내 세력들 중 일부는 경주(慶州) 인근 진한 땅으로 이동하여 6개 촌을 이루며 살다가 기원전 57년 사로국을 성립시켜 신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일부는 김해 지역의 변한(弁韓) 땅에 9개의 촌을 형성하여 살다가 1세기경에 구야국에서 가야로 발전하고, 일부세력은 경기도와 전라도 지역의 마한 땅에 정착하였다. 한편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부여가 형성되었으며, 부여에서 주몽 일파가 졸본 지역으로 남하하여 맥족과 연합 또는 병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 일파와 유리 일파가 졸본 지역으로 이동해 오자 온조와 비류 일파는 남쪽의 마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마한 북부 지역의 한강 유역 일대를 중심으로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또한 북부여에서 고씨 세력에 밀린 해씨 세력 일부가 가섭원 지역으로 이주하여 물길족, 예족, 맥족 등을 병합하여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고조선 멸망 이후 1세기-3세기 북쪽에는 고구려와 동부여, 남쪽에는 가야 등이 먼저 발전하여 전기 삼국시대를 형성하였고, 4세기-6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로 대표되는 세 나라는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시켜 수세기 동안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하면서 발전했는데, 이 시기를 전기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때 크게 발전하여 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였고, 대흥안령 산맥에도 진출하였으며, 수,당과 맞서 싸우며 민족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백제는 3세기에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루어 근초고왕때에는 요서, 산둥,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백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비옥한 땅이 신라와 고구려보다 많이 있었으며, 일본에 갖가지 문화를 전파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였으나, 고구려와 동맹하여 가야를 복속시키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며 강성해졌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및 그 북부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냈다. 한편, 고구려의 유장인 대조영은 고구려인과 말갈족을 거느리고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며 발해를 건국하여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하여 신라와 228년간 공존하였다.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발해의 영토는 한국의 역대 국가들 가운데 가장 넓었다. 통일신라보다 3~4배 넓고 고구려보다 1.5~2배에 달하는 아주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다.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되찾은 것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와 헤이룽 강까지 차지하여 북쪽 영토는 옛 고구려보다 더 넓혔다. 발해는 9세기 전반에 최전성기를 맞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00년 뒤인 10세기 전반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남북국 시대도 끝이 났다. 북한에서는 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는 세 나라로 분열되는데, 이를 후삼국 시대라고 한다. 그중 궁예의 후고구려(태봉)가 가장 강력하였으나, 폭정으로 인심을 잃게 되었다. 918년에 왕건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오치고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다. 935년에 혼란기를 겪은 신라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다음 해에 후백제 또한 멸망하여, 한국 통일 왕조가 성립된다. 발해는 발해-요 전쟁의 패배로 인해 926년에 요 의해 멸망되었다. 이 혼란기에 건국된 고려왕조는 경쟁 세력들을 물리치고 옛 신라 강역을 확보하며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의 유민들도 흡수해 한국 최초로 단일 국가를 형성하여 거의 천년 동안 한국에 단일 국가가 유지하면서 고조선과 삼국 등의 다양한 전통을 계승하여 동질화된 독특한 민족 문화가 이루어졌다. 발해는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정안국(954년~986년), 후발해(929년~1114년), 흥요국(1029년~1030년), 대원국(1116년) 등의 나라를 건국하며 190년이나 저항하였다. 고려는 백성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반항하면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의병운동 등 원에 저항했으나, 결국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후 공민왕은 중원에서 원나라가 약해지고 명나라가 강해지는 틈을 타서 반원 친명 정책을 펴며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실지(失地)를 수복하였다. 1392년 고려의 뒤를 이어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창건되었으며 수도를 한양(현 서울)으로 삼았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 문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록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조선은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한국은 1876년 일본이 운요호사건으로 체결한 강화도 조약으로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95년의 을미사변이후 1897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갔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을사늑약과 제 2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 후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본 제국 성향의 내각과 지식인층, 고위층들은 대한 제국 안의 일본 제국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과 불법적인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본과 계속 투쟁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은 자국에 편입된 대한 제국의 효율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 교육,의료,에너지,교통 등 사회의 소프트웨어적·하드웨어적 인프라를 구축시켰다. 그리고 일본 제국은 자국에 편입된 대한 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으로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본 제국내의 공식·비공식적으로 차별받는 종속 천민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민족 말살정책을 집행하였다. 각종의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전례 없이 폭압적이고 악랄하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한쪽 끝,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을 양 옆에 두고기 때문에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과 대립하게된 미국은 철의 장막의 한쪽 끝인 한반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동안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자처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은 여럿있었으나, 대한민국의 헌법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음을 명시한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1945년 8월 15일 독립을 성취했다. 독립 직후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38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에 각각 진주하여 1948년까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고, 남쪽에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북쪽에는 소련의 영향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정권이 각각 수립되어 분단되었다. 쌍방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 전쟁을 벌였고, 한국휴전협정 체결 후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휴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1990년대 초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되었으나, 한반도는 여전히 무력 대치와 이념 대결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제3차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이 65년 만에 종전 선언에 이를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및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는 서쪽으로 황해(서해), 동쪽으로 동해 (East Sea), 남쪽으로 남해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끝은 함경북도의 온성, 서쪽끝은 평안북도의 마안도, 동쪽끝은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한 섬 독도, 남쪽끝은 마라도이다. 한국의 남부 및 서부는 대체로 평야이며, 동부 및 북부는 산지이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2,744m)이며, 관모봉(冠帽峰, 2,541m), 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의 순이다. 한국 북부의 개마고원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불리며, 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산맥인 태백산맥은 백두대간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의 유명한 섬으로는 독도, 제주도, 거제도, 진도, 울릉도 등이 있는데, 제주도와 울릉도는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국의 황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되어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독도는 故 최종덕씨가 1965년 3월부터 최초 거주한 이래, 현재 婦김신열씨 (夫김성도씨 2018년10월 별세),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명 등 거주 중이다. (2019년 3월 기준.) 한국 전체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극지역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반도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한국 문화는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북방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남방계가 혼합된 바탕에 중국과 일본 등 이웃들과의 교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했다. 전통 음악은 풍물놀이이며, 아리랑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대체로 7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조세와 부역 등을 피하려고 호구조사를 기피하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40% 가까이 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실제 인구는 조선 시대 중기에 와서 1천만 명 내외, 후기에는 약 1,300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인구는 약 1,312여만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권 피탈 후 현대적 인구 조사를 한 1925년에는 1,900만여 명, 1935년에는 2,289만9천여 명 1944년에는 2,59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11년의 성비(여자 100명 당 남자의 수)는 110.9로 심한 남초 현상을 보였으나, 1944년에는 99.4로 여초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102.1로 남초 현상을 보이다가 1955년에는 100.1로 균형이 이루어졌다. 2017년 12월 말 기준으로 외국인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총인구는 5천177만8544 명 이고, 2016년 12월 말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약 2천537만 명으로 추산된다. 약 700만 명인 해외 거주 한인(韓人) 중 400여만 명인 외국국적자를 제외한 전체 한국인 수는 약 8천만 명이다. 반도 전체의 공용어는 한국어 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 수화를 추가 공용어로 두고 있다.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교착어로 분류되기도 하며, 또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경기 방언을 기초로 한 대한민국 표준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서북 방언을 기초로 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를 표기하는 글자는 한글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말소리를 기호로 표시하는 표음 문자이고,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는 음소 문자이며, 발음의 유사성에 따라 형태의 규칙성을 띠는 매우 정교한 자질 문자(예. ㄱ·ㅋ·ㄲ, ㅏ·ㅑ·ㅐ·ㅒ)이다. 또,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글자를 결합해 하나의 음절을 독립적으로 표시하는 글자를 만드는 형태로 표기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자와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조선의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직접 만든 문자 체계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후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를 만들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자(漢字)로 문서가 작성되었으나, 표의 문자인 한자로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향찰, 구결, 이두 등 차자 표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지배층인 양반(兩班)층과 관공서에서는 한자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한글은 19세기까지 주로 편지글·시조·가사·한글소설 등에 사용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공문서에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한글의 사용이 억압 받았으나 1945년 해방 후 본격적으로 널리 쓰여져 한국문화 발달의 기틀이 되었다. 최근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약어(略語)의 구별 등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글은 처음 만들었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으나, 지금은 ㅿ(반시옷), ㆆ(여린히읗), ㆁ(옛이응), ㆍ(아래아) 네 글자가 사라져서 스물네 글자가 되었다. 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므로 해당 지역이 관할하고 있는 행정구역의 체계와 형식적으로 통치를 주장하는 지역의 행정구역 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현재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로 편제되어 있다. 3단계 행정체계로 도/특별시/광역시 > 시/군/구 > 읍/면/동으로 구분된다. 다만, 서울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 에는 시 아래에 행정구를 둘 수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광역시이며, 특별시, 특별자치시, 특별자치도도 존재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현재 1직할시, 3특급시, 3지구, 9도로 편제되어 있다. 또한 3단계 행정체계로 도 > 시/군 > 동/리로 구분된다. 이는 광복 직후와는 다른 것으로 면은 통합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읍은 군의 중심지역을 이르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이 외에 로동자구와 직할시에 소속된 구역 등이 있다. 이들 중 도와 동급의 행정구역은 직할시이며 특급시는 도에 소속되고, 지구와 함께 행정상의 특혜를 받게 되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이 같은 행정구역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만을 인정한다(이북5도위원회). 미분방정식 미분 방정식(微分方程式, differential equation)은 미지의 함수와 그 도함수, 그리고 이 함수들의 함수값에 관계된 여러 개의 변수들에 대한 수학적 방정식이다. 미분방정식의 계수(order)는 미분 횟수가 가장 많은 독립 변수의 계수가 결정짓고, 차수(degree)는 계수를 결정 지은 독립 변수의 미분꼴이 거듭제곱된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미분 방정식은 엔지니어링, 물리학, 경제학 등 수학 외의 학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유체역학, 천체역학 등의 물리적 현상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 때에도 사용된다. 따라서 미분 방정식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있는 넓은 학문이다.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위치와 시간값의 변화에 따른 속도로 표현되는 고전역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물체의 미지의 위치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하고, 물체의 위치·속도·가속도·그리고 물체에 작용하는 힘 등을 그 함수에 대한 미분 방정식으로 나타냄으로써 이 변량들을 역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흔히 운동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이 미분 방정식은 아주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미분 방정식을 사용하여 실세계를 표현한 예로는, 중력과 공기저항만 고려하여 공중에서 떨어지는 공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 땅을 향한 공의 가속도는 중력에 의한 가속도 마이너스 공기저항에 의한 가속도이다. 중력은 일정하다고 치고, 공기저항은 공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하자. 이것은 공의 가속도, 즉 공의 속도의 도함수가 공의 속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를 시간에 대한 함수로 나타내면 이 미분 방정식을 풀 수 있다. 수학에서 미분 방정식은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는데, 대개 그 해―방정식을 만족시키는 함수의 집합―에 대한 연구가 흔하다. 명쾌한 함수의 형태로 해가 구해지는 것은 가장 간단한 미분 방정식들 뿐으로, 어떤 미분 방정식은 명확한 해를 구하지 않고, 그 특징만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만약 해를 독립적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컴퓨터를 이용해 수적 근사값을 구할 수도 있다. 동역학계 이론에서는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계의 질적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주어진 정확도 안에서 해를 구하기 위한 많은 수치 해석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의 목표는 다음 세가지 이다. 미분 방정식에 대해 해가 있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해가 유일한지 등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들은 대개 주어진 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고, 여기서 얻어진 해는 전기회로, 다리, 자동차, 비행기, 하수도 등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미분 방정식 이론은 잘 발전되어 왔으며, 학습을 위해 방정식의 형태에 따라 그것을 의미있게 분류시키기도 한다. 상미분 방정식은 미지 함수와 종속변수가 하나의 독립변수를 가지는 함수인 미분 방정식을 말한다. 간단한 형태로 미지함수가 실수 또는 복소수 함수 형태를 가진다. 미지 함수의 독립 변수가 둘 이상인 미분 방정식이다. 1차 제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형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함수이며, 이 방정식은 간단히 변수를 다음과 같이 양변으로 분리하여 놓아서 풀 수 있다. 위 식을 적분하여 다음의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formula_6는 임의의 상수이다. (이 결과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이 식을 원래의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된다.) formula_2가 상수가 아닌 함수이고, 어떤 함수의 경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더라 하더라도) 그 적분이 불가능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풀이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 1차 선형 상미분 방정식 중 일부는 위의 예처럼 분리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1차 비제차 상미분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적분인자를 알아야 한다. 이 방법을 아래에 설명하고 있다.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일반적인 형태를 생각해 보자. 이 방정식을 푸는 방법은 특별한 "적분 인자", formula_9 에 달려있다. 위의 1차 상미분 방정식의 양변에 formula_9를 곱하자. 우리가 선택한 특별한 formula_9의 성질에 의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모양으로 변형된다. 미분에 대한 곱의 법칙에 의해 위 식은 다시 다음과 같이 변형된다. 양변을 적분하면, 를 얻고, 마지막으로 formula_17에 대해 풀고, formula_9로 양변을 나누면, 를 얻는다. formula_9는 formula_21의 함수이므로 더 이상 간단히 할 수 없다. 각운동량 각운동량(角運動量)은 물리학에서 어떤 원점에 대해 선운동량이 돌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각운동량은 좌표의 원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각운동량을 다룰 때에는 둘을 합하거나 그에 관련한 연산을 하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신중히 고려하며 사용해야 한다. 각운동량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공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응용분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각운동량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각운동량은 보존되는 양이 되기 때문이다.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간의 회전대칭성 때문이다. 이러한 각운동량의 보존은 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어떤 원점에 대한 입자의 각운동량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이다. 물리계가 여러 입자로 구성되어 있을 때에는, 한 원점에 대한 총 각운동량은 각각의 각운동량을 더해서 구하거나, 좀 더 복잡한 부피를 가지는 물체의 각운동량은 미소질량에 대해 각운동량을 적분하여 얻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고정된 특정한 한 축에 대한 각운동량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운동량을 3차원 벡터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반시계방향의 회전은 양으로, 시계방향의 회전은 음으로 취급하여 스칼라로 놓기도 한다. 이렇게 할 때에는 벡터곱의 크기로 각운동량을 표기하게 된다. 여기서 formula_10는 formula_5로부터 formula_4까지 재는 각도이다. 각운동량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돌림힘 formula_13 가 된다. 만약 어떤 원점을 기준으로 계에 돌림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이 되어 각운동량이 보존되게 된다. 이를 각운동량 보존 법칙 또는 간단히 각운동량 보존()이라고 부른다. 각운동량 보존 법칙은 특히 중심력이 작용하는 운동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중심력이 작용하는 입자들의 운동에서 두 입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에서 고립된 계를 이루고, 원점은 두 입자를 잇는 선 위의 한 점으로 잡는다. 서로 작용하는 힘의 방향이 언제나 원점에서 입자들까지의 위치벡터와 같은 방향이 되므로, 앞에서 잡은 원점을 기준으로 한 알짜 토크는 언제나 0이 된다. 따라서, 각운동량은 보존된다. 일정한 각운동량을 갖는 이와 같은 경우는 행성, 위성, 보어의 원자모형등의 분석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관성 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질량과 운동량사이의 관계 와 유사하게 꼴의 식이 있다. 경우에 따라 스칼라 관성모멘트 formula_19나 관성텐서 formula_20중 하나를 사용한다. 회전축이 변하지 않는 경우에 각운동량은 간단히 스칼라 관성모멘트 formula_19와 각속도 formula_22의 곱으로 쓰일 수 있다. 위 식은 스칼라 관성 모멘트의 정의 와 각속도의 공식 (formula_22와 formula_5이 수직일 때만 성립.) 을 사용하여 각운동량의 정의로부터 간단히 유도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입자 하나에 대해서만 유도를 하였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도 관성모멘트와 각운동량 사이에는 이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회전축도 변하는 일반적인 회전의 경우, 각운동량과 각속도벡터는 평행하지 않다. 때문에 스칼라 관성모멘트를 사용한 식이 성립하지 않고, 좀 더 일반적인 식인 관성텐서 formula_20를 사용한 아래의 식을 사용한다. 관성텐서의 각 성분 formula_31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이와 속도와 각속도의 일반적 관계 를 사용하면 각운동량과 관성텐서 사이의 관계를 유도할 수 있다. 각운동량의 정의에 이를 대입하면, 를 얻고, 여기서 삼중곱을 전개하면 아래와 같은 식을 얻는다. 이제, formula_3을 성분 formula_37로 표현해 formula_38를 분리한다. 관성텐서의 정의를 대입하면, 가 되어 맨 처음 식이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고전적인 각운동량에 대응하는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은 궤도 각운동량 formula_41이다. 다른 양자역학적 관측 가능량과 마찬가지로, 궤도 각운동량의 값은 디랙 상수 formula_42의 정수 또는 반정수()배로 양자화된다.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에는 고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각운동량 항이 존재하는데, 이를 스핀 formula_43라고 한다. 원주율 원주율(圓周率, )은 원둘레와 지름의 비 즉,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수학 상수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그리스 문자 π로 표기하고, 파이(π)라고 읽는다. 원주율은 수학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상수 가운데 하나이다. 무리수인 동시에 초월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계산이 널리 알려져 있어 아르키메데스 상수라고 부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원주율을 계산한 이후 뤼돌프 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주율의 값은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502884197169399375105820974944... 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이기 때문에 근삿값으로 3.14를 사용한다. 유클리드 평면에서 원은 크기와 관계없이 언제나 닮은 도형이다. 따라서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는 언제나 일정하며, 이를 원주율이라 한다. 즉, 원의 지름을 d, 둘레를 C라 하면 원주율 π는 다음의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 π는 1706년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존스가 최초로 사용했다. 이것은 둘레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페리페레스"(περιφηρής) 또는 "페리메트론"(περίμετρον)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윌리엄 존스는 “특정 도형의 길이나 넓이를 구하는 계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원을 예로 들면 지름이 1인 원의 둘레를 약 3.14159…= π로 표기하는 것이다.”라고 기호 π의 사용을 제안하였다. 원주율은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순환마디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비순환소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통해 만드는 난수표와 성질이 같다. 원주율은 십진법으로는 값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계산에서는 근삿값을 이용한다. 한편, 원주율은 계수가 유리수인 유한 차수 다항식의 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수를 초월수라 부른다. 이 사실은 1882년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증명하였다. 여기에서 원주율은 어떤 정수에 적당한 유리수를 곱하고 제곱근을 씌우는 등의 연산을 조합하여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주율이 초월수라는 사실을 통해, 그리스 3대 난제 중 하나였던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하여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원적문제”가 유한한 대수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원과 원주율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주율이 보이는 복잡한 수열에 비해 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라이프니츠가 정리한 다음 계산식이 널리 알려져 있다.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원주율의 값으로 3이 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원주율을 3으로 계산하였고, 구약성경 열왕기상 7장 23절과 역대하 4장 2절에는 직경과 둘레의 길이를 기술하여 원주율이 3정도 임을 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대 중국의 수학책인 《구장산술》에서도 3을 원주율로 제시하였다. 《구장산술》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실려 있다. 구장산술의 계산은 평균값으로 이루어져있다. (1) 원둘레가 30보인 경우 반지름은 30=2r*3.14 r=4.78 이경우의 면적은 71.74 (2) 지름이 10보인 경우 면적은 78.5. (1)과 (2)의 평균은 75보. 그러므로 구장산술의 계산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구장산술에 실린 계산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은 왼쪽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는 3이고 실제 원의 둘레는 그것과는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문제였고 값을 보다 정확하게 구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통형 바퀴를 굴려 직접 측정해 원주율을 계산하였는데 =3.16049……를 사용하였다. 한편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적분이 없었던 당시에 무한소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formula_3의 근삿값을 계산하였다. 이 방법은 임의 차원의 미지항에 대해 극한을 취하는 것으로, 귀류법을 사용하여 동일한 계산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해답을 얻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변이 매우 많은 다각형이 임의의 원에 내접하는 경우와 외접하는 경우를 비교하여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즉, 임의의 원의 둘레는 그것에 외접하는 다각형의 둘레보다 짧고 내접하는 다각형보다 길다. 이때 다각형의 변이 많아질수록 외접하는 경우와 내접하는 경우의 둘레 차는 작아지므로 원의 둘레에 근사한다. 즉, 지름이 d인 원에 내접하는 변의 개수가 n인 정다각형의 둘레 P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함수의 극한을 취하면 원주율을 얻을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정구십육각형을 이용하여 formula_3의 값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결과에 따라 formula_3의 근삿값으로 3.1416을 제시하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면적이 formula_8임을 증명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저서 《구와 원기둥》에서 어떠한 크기가 주어지더라도 임의의 크기에 적당한 수를 곱하여 주어진 크기를 초과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를 실수에서의 아르키메데스 성질이라고 한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나라 수학자 유휘는 《구장산술》에 주해를 달아 다시 출판하였는데,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원주율을 =3.14 로 계산하였다. 유휘가 계산한 원주율 근삿값은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 2세기에 들어 중국의 장형은 원주율을 3.1623으로 계산하였고 5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조충지는 3.141592로 계산하였다. 독일에서는 1600년대 뤼돌프 판 쾰런이 소수점 이하 35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컴퓨터를 도입하기 이전에 가장 긴 자리수의 원주율을 계산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샹크스였다. 그는 15년이나 걸려 1873년께 소수점 이하 707자리까지 원주율 값을 계산해냈다. 하지만 후에 그 계산은 528자리까지만 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1949년 9월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70시간에 걸쳐 소수점 아래 2,037자리까지 계산하였다. 원주율 계산에 컴퓨터를 도입한 이후 원주율 계산은 단순 알고리즘의 무한 반복에 불과한 작업이 되어 수학적 의미를 잃었다. 이 계산은 종종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2005년 일본 도쿄 대학의 가네다 야스마사 교수는 컴퓨터를 601시간 56분 동안 사용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1,241,100,000,000자리까지 구하였다. 2009년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쓰쿠바 대학 계산과학연구센터는 17일,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원주율 계산에서, 2조 5769억 8037만 자리수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다고 한다. (73시간 59분 소요)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2조 7천억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2010년 8월 3일에는 일본의 회사원 곤도 시게루(近藤茂)가 소수점 이하 5조 자리까지 계산하였다. (90일 7시간 소요, 검증 기간 포함 / PC 사용) 2016년 11월 11일 스위스의 입자 물리학자인 페터 트뤼프(Peter Trüb)는 105일 동안 계산하여,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22조 4591억 5771만 8361자리(formula_9조 개)까지 계산했다. formula_3 값의 소수점 아래 1,000자리 수는 다음과 같다. formula_3 값의 소수점 아래 100만 자리, 10억 자리, 1조 자리 수는 Peter Trüb의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또는 다른 웹사이트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주율은 두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또한, 계수가 유리수인 다항식의 근이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원주율이 무리수라는 것은 1761년에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가 증명했다. 람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탄젠트 함수의 연분수 전개식을 이용하여 이를 증명하였다. x가 0 이 아닌 유리수일 때 위에 전개된 연분수를 십진기수법으로 나타내면 언제나 순환하지 않는 소수이므로 항상 무리수이다. 한편, tan()=1 이므로 는 반드시 무리수여만 한다. 따라서 π 역시 무리수이다. 원주율이 초월수임은 오일러 등식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오일러 등식은, 이다. 이 때 π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formula_14의 근이라면 formula_15이다. 따라서 formula_16 역시 성립하여야 한다. 이제 y=iπ라 하면 π=-iy 이고 -π=iy 이므로, iπ는 다음 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정계수 대수방정식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제 formula_18을 ν차원의 방정식이라 하면 그 근인 y, y,……, y에는 iπ가 존재하여야 하므로, 식 (1)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만족하는 대수방정식의 근이 유리수라고 가정하면 무한히 약분할 수 있어서, 이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유리수를 기약분수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수의 정의에 어긋나므로 π가 정계수 대수방정식 formula_14의 근이라는 최초의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원주율은 초월수이다. 자세한 증명은 링크한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개요에서 밝혔듯이 원주율은 반복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수열을 이룬다. 네덜란드 수학자 라위트전 브라우어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브라우어르는 이 수열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이 수열을 어느 정도까지만 확인한 결과만으로는 위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제 소수점 이하 762번째에서부터 수열 999999 가 출현한다. 이 수열은 파인만 포인트로 알려져 있으며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수열에서 확률 0.08%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경험적 방법으로는 위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브라우어르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중률 은 유한한 개수를 대상으로 한 것에만 적용 수 있을 뿐 무한한 것에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원주율에서 나타나는 수열은 무작위 표집을 사용해 만든 난수표의 성질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원주율의 수열이 완전한 무작위성을 보이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원주율은 무리수이기 때문에 그 값은 근삿값으로밖에 알 수 없다. 대부분의 계산에는 3.14나 22/7 라는 근삿값을 사용해도 충분하다. 355/113은 외우기 좋고, 정밀도도 좋다. 좀 더 정밀한 기술의 계산에서는 3.1416 또는 3.14159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상 예보나 인공 위성 등의 계산에는 소수점 아래 30자리까지 나아간 근삿값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불규칙적인 패턴을 가지는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규칙적인 수식을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더 정확한 값을 얻으려면 수식을 연장하기만 하면 된다. 위 식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전개한 것으로 흔히 라이프니츠의 공식이라고 부른다. 이 식 외에도 원주율을 계산하는 공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7세기의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는 다음과 같은 무한급수로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또한, 스털링 근사를 사용해 원주율을 유도할 수도 있다. 원주율은 다음과 같이 연분수로 표현할 수 있다. 1996년 데이빗 베일리는 피터 보어와인, 시몽 플루프와 공동으로 π에 관련된 새로운 무한급수를 발견했다. 이 식을 이용하면 2진수 그리고 16진수로 표기한 π값의 소수점 아래 "n"자리 값을 "n"-1째 자리까지 구하지 않고 바로 계산해 낼 수 있다. 베일리의 홈페이지 에선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구현한 실제 예를 볼 수 있다. 원주율은 수학과 물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적용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원과 구의 다음과 같은 성질을 증명하였다. 한편, 원은 이심률이 0인 타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타원 방정식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때 타원의 넓이를 A라 하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각의 크기를 나타내는 무차원 단위인 라디안은 오른쪽 그림과 같이 정의하여 반지름과 호의 길이가 같을 때 1라디안이 된다. 따라서, 원 전체는 2π라디안이고 이를 도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1687년 스위스의 바젤의 수학 교수였던 야코프 베르누이와 요한 베르누이 형제는 조화급수가 발산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조화급수의 각 분모를 제곱한 다음 식을 닫힌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며 논문의 끝에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알려주기 바란다고 적었다.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이 문제는 바젤 문제로 알려지며 해석학자의 악몽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레온하르트 오일러로 1735년에 이 급수의 값이 다음과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후일 이 급수는 다음과 같은 일반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리만 제타 함수이다. 리만 제타 함수는 s가 짝수일 때 위 식을 이용하여 그 값을 쉽게 계산할 수 있으나 홀수일 때는 자명하지 않다. 1978년 s가 3일 때 무리수로 수렴하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수렴값은 아페리 상수라고 한다. 복소수 formula_37는 극좌표계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복소해석학에서 π는 복소수 변수가 지수 함수에서 보이는 행동과 연관이 있으며 오일러의 공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i" 는 허수 단위이기 때문에 "i" = −1 이므로 이를 π라디안(=180°)과 함께 자연로그의 밑 "e"의 지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오일러 등식을 얻는다. 따라서 "n" 번째 단위근은 다음과 같다. 이제 가우스 적분으로 나타내면, 이 결과는 반정수의 감마 함수가 √π의 유리수 곱임을 뜻한다. 확률과 통계에서 원주율이 등장하는 정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된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이 제기한 뷔퐁의 바늘 문제는 원주율의 근삿값을 구하는 경험주의적인 방법으로 거론된다. 길이가 L인 바늘을 일정 간격으로 그린 평행선에 떨어뜨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평행선의 간격 S가 바늘의 길이보다 크다고 하면, 바늘을 떨어뜨린 횟수 n번에 대해 바늘이 평행선 밖으로 나간 횟수 x번(단, x>0)에는 몬테카를로 방법에 의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즉, 뷔퐁의 바늘 문제에서 바늘을 떨어뜨리는 횟수가 매우 많아지면 바늘이 평행선을 벗어나는 횟수에 대한 바늘을 떨어뜨린 전체 횟수의 비는 원주율에 근사한다. 원주율 자체는 물리 상수가 아니지만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두루 사용한다. 이는 자연 현상의 상당수가 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전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등속원운동에서 각속도와 원주속도는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이 외에 물리학에서 원주율을 사용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일리야 프리고진 일리야 로마노비치 프리고진(, , 1917년 1월 25일 - 2003년 3월 28일)는 러시아 모스크바 태생의 벨기에의 화학자이다. 벨기에 브뤼셀의 브뤼셀 자유대학(Université Libre de Bruxelles)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산일구조(散逸構造), 복잡계, 비가역성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1977년 비평형 열역학, 특히 소산 구조론의 연구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벨기에의 보두앵 1세 국왕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엔탈피 엔탈피()는 열역학적 계에서 뽑을 수 있는 에너지다. 내부 에너지와, 계가 부피를 차지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에너지(부피와 압력의 곱)의 합이다. 대기압이나 수압과 같이 압력에 둘러싸인 계를 다룰 때 쓴다. 기호는 대개 라틴 대문자 "H"이다. 엔탈피는 다음 식으로 주어진다. 여기서, 위의 엔탈피의 정의는 그 값이 기준을 어떤 점으로 잡느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쓰이는 것 보다는 엔탈피의 변화로 어떤 과정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즉, 어떠한 과정에서 압력의 변화가 0인 경우엔(ΔP=0), 엔탈피의 변화량은 계가 주변과 주고받은 에너지인 열량을 나타낸다. formula_6 따라서 주변의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반응의 전후 열량 출입을 나타내는 데에 많이 쓰인다. 계의 엔탈피는 직접 측정할 수 없으며, 계의 엔탈피 변화로 대신 측정된다 .엔탈피 변화는 다음 방정식으로 정의된다. 반응 엔탈피(ΔH) = 엔탈피 변화량 formula_7 E출입량 formula_7E 차이값 between 반응물 & 생성물 formula_7 반응열 formula_10 ΔH는 "엔탈피 변화량"이다. formula_11는 계의 최종 엔탈피이다. formula_12는 계 의 초기 엔탈피이다. ΔH의 구성 = 부호 + 크기 ΔH 부호의 의미 - (+) 부호 : 흡열 반응 - (-) 부호 : 발열 반응 ΔH 크기의 의미 - E 출입량 = E 차이 between 반응물 & 생성물 역반응 ΔH = -정반응 ΔH 엔탈피는 온도와 압력에 따라 달라지므로 온도와 압력을 표시한다. 온도와 압력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면 25도씨, 1기압 상태이다. 엔탈피 변화는 화학 반응을 일으킬 때 열역적 계 또는 주위에서 관찰된 엔탈피의 변화를 설명한다. 화학반응이 완료된 후 엔탈피 값은 달라진다. 이는 생성물과 반응물간의 엔탈피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엔탈피 변화값 (ΔH)은 (생성물의 엔탈피 값의 총합) - (반응물의 엔탈피 값의 총합)으로 나타 낼 수 있다. 일반적인 엔탈피 변화의 예로서는 표준 생성엔탈피가 있다. 이러한 엔탈피의 측정은 표준화된 환경 또는 표준 조건에서 측정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다. 표준 조건 (Standard conditions)으로는 생성열 formula_7 생성반응식의 E 차이 홑원소 물질 생성열 =0 -> 예외 : O3 생성열 = 연소열인 반응 -> C(흑연) + O2-> CO2 ΔH=C(흑연) 연소열 = CO2 생성열 -> H2 + 1/2O2 -> H2O ΔH=H2 연소열 = H2O 생성열 25도씨 1기압에서의 생성열 = 표준 생성열 formula_7 생성열 일부 표준 형성의 열은 아래 표에 열거되어 있다. 분해열 = - 생성열 -산과 염기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정 (ΔH=-56.2 kJ/mol) 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이 흡수한 열 연소열(kJ/mol) = 물이 흡수한 열량/연소한 물질의 수 = (물의 (비열 X 질량 X 온도변화)) / ((연소한 연료질량/연료의 화학식량)) 원리 : 연료가 연소할 때 방출한 열 = 물과 열량계가 흡수한 열 연소열(kJ/mol) = (물이 흡수한 열량 + 열랑계가 흡수한 열량) / (연소한 물질의 몰수) = ((물(비열 X 질량 X 온도변화)) + (열량계(열용량 X 온도변화)) / (연소된 물질 질량) / (연소된 물질 화학식량) 운동 에너지 운동 에너지 (運動- , kinetic energy)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 또는 입자가 갖는 에너지이다. 주어진 물체의 어떤 속도에서의 운동에너지는 그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그 속도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의 양으로 정의된다. 가속이 되어 운동 에너지를 얻게 되면 속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 한 그 운동에너지를 유지한다. 또한, 그 운동 상태에서 정지 상태까지 감속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 또한 원래 그 물체의 운동 에너지와 같다. 고전 역학에서 질량이 m인 비회전체의 속도의 크기가 v일 때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formula_1이다. 상대론에서는 v가 빛의 속도보다 훨씬 작을경우에 운동 에너지는 formula_1에 가깝다. 운동에너지의 표준 단위는 줄이다. 고전역학에서 "E ∝ mv" 라는 원리는 처음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이 때 운동 에너지를 "살아있는 힘()" 라고 묘사하였다. 네덜란드의 는 이 관계의 실험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물체를 점토 블럭에 떨어뜨리면서 그라브산드는 그들의 관통 깊이가 충돌 속도 크기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브르퇴유는 실험 결과가 암시하는 바를 인지하였고 자신의 설명을 발표하였다. "운동 에너지" 와 "일" 이라는 용어의 현대의 과학적 의미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리올리는 1829년에 "Du Calcul de l'Effet des Machines" 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시도하였다. 윌리엄 톰슨은 약 1849-51년도에 "운동 에너지(kinetic energy)"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에너지는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전자기 복사, 중력 에너지, 전기 에너지, 탄성 에너지, 핵 에너지, 정지 에너지 등과 같이 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바로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이다.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어떻게 전환이 되는지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는 음식에서 제공되는 화학 에너지를 자전거를 가속 시키는데 사용한다. 평평한 표면에서 이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 저항과 마찰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을 빼면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없다. 이 과정에서 화학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효율적인 것이 아니고 열을 부가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운동하는 사이클리스트와 자전거의 운동 에너지는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클리스트가 충분히 높은 언덕을 만나 페달을 밟지 않은 채로 언덕 정상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자. 그럼 운동 에너지는 완전히 중력 위치 에너지로 변환되게 되고 이것은 언덕을 다시 내려오면서 운동 에너지로 바뀌게 된다. 마찰 때문에 에너지의 손실이 생기므로 추가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는 한 원래의 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마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번엔 싸이클리스트가 바퀴 하나에 발전기를 연결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하강하는 과정에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게 된다. 그럼 발전기가 없었을 때보다 싸이클리스트는 언덕 아래에서 더 적은 속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에너지 일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브레이크를 밟게 될 경우 운동 에너지는 마찰에 의해서 열로 빠르게 전환 될 것이다. 다른 속도의 함수인 물리량과 같이 물체의 운동 에너지 또한 물체와 관찰자의 기준계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불변량인 것은 아니다. 우주선은 공전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부터 얻는다. 완벽한 원 궤도의 경우 지구 근방의 우주 공간은 마찰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운동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다시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경우 운동 에너지는 열로 전환된다. 만약 궤도가 타원형이거나 쌍곡선의 형태라면 공전하는 동안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는 지속적으로 교환된다. 근일점에서 운동 에너지는 최대, 위치 에너지는 최소가 되고 원일점에서는 운동 에너지는 최소, 위치 에너지는 최대가 된다. 그렇지만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합은 보존된다.(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 에너지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전달될 수 있다. 당구에서 플레이어가 당구공을 큐로 치게 되면 그 공에게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게 된다. 만약 그 공이 다른 공과 충돌한다면 에너지가 전달 되기 때문에 멈춰 있던 공은 가속되고 다른 공은 급격하게 느려진다. 당구에서의 충돌은 탄성 충돌에 가깝다. 따라서 운동 에너지는 보존된다. 비탄성 충돌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열, 소리 등)로 분산된다. 플라이휠은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운동 에너지가 회전 운동의 형태로 저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물리적 상황에서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뉴턴 역학(고전 역학)에서의 ½mv² 공식이 가장 적합하다. 하지만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가까워지면 상대론적인 효과가 나타나며 상대성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만약 물체가 원자나 아원자 수준의 크기라면 양자 역학적인 효과가 두드러지며 양자 역학이 필요하게 된다. 고전 역학에서 점 입자(너무 작아서 질량이 한 점에 집중해 있다고 봐도 되는 물체) 혹은 비회전 강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의 속력과 질량에 의존한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과 질량의 곱에 1/2을 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 formula_3 이고, 여기서 formula_4은 물체의 질량 formula_5는 물체의 속력(혹은 속도)이다. SI 단위에서 질량은 킬로그램, 속도는 m/s로 측정된다. 그리고 운동 에너지의 단위는 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80kg의 물체가 18m/s로 운동할 때 운동에너지를 계산하려고 한다면 formula_6 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공을 던진다면 당신은 공을 가속시키기 위해 일을 가할 것이고, 그 공이 어떤 물체에 부딪히고 그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면 부딪힐 때 공이 그 물체에게 일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운동 에너지는 정지 상태에서 어떤 속력까지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이므로 알짜힘 x 변위 = 운동 에너지인 것이다. 즉, formula_7 이다. 운동 에너지는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물체의 속력이 두 배가 된다면 운동 에너지는 네 배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차가 다른 동일한 질량의 차보다 두 배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고 하자. 두 차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 마찰력이 동일하다고 하면 속력이 두 배 빠른 차가 네 배더 많은 거리를 브레이크를 밟아야 완전히 멈출 수 있다. 이는 감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네 배인 것을 의미한다.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또한 운동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이는 다음을 만족한다. formula_8 여기서, formula_9는 물체의 운동량, formula_4은 물체의 질량이다. 병진식 운동 에너지, 강체의 선형 운동에서의 운동 에너지 또한 formula_11 이다. 여기서 formula_4은 물체의 질량 formula_5는 강체의 질량 중심의 속력이다. 물체의 운동 에너지는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에 의존한다. 하지만 에너지가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고립계에서의 전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도 그것이 측정되는 기준계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켓 엔진에서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는 화학 에너지는 기준계에 따라 우주선체와 배기 가스에 다른게 나뉜다. 이를 오베르트 효과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기준계를 선택하든지 운동 에너지, 연료의 화학 에너지 등을 포함한 전체 에너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기준계를 따라 움직이는 서로 다른 관측자들이 관측한 전체 에너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기준계에 따라 계의 운동 에너지는 달라지는데 운동량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기준계에서 측정할 때 운동 에너지는 최소값을 가진다. 이는 이 기준계에서 계의 총 운동량이 0이기 때문이다. 극소 시간 "dt" 동안 입자를 가속시키는데 필요한 일은 "힘" 과 "변위" 의 내적과 같다. 따라서, formula_14 이고, 여기서 formula_15 라고 가정하였다. 내적의 성질을 이용하면, formula_16 이므로, 질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17 따라서 이것은 전미분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적분하여 운동 에너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물체가 0초 일 때 정지해있다고 가정하고 0부터 t까지 시간에 대해 적분하면 formula_18 이다. 이 식은 운동 에너지("E")가 속도(v)와 운동량(p)의 미소 변화의 내적과 같음을 의미한다. 또한 물체는 처음에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강제 Q가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어떤 선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면 회전 운동 에너지(formula_19)가 존재하게 된다. 이는 움직이는 부분들의 운동 에너지 합과 같다. 따라서, formula_20 여기서 이 식에서 관성 모멘트는 질량 중심을 통과하는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하며 각속도 또한 그 회전축에 대해 측정되어야 한다. 물체의 편심된 모양때문에 생기는 떨림 운동이 있는 물체의 관한 좀더 일반적인 식도 존재한다. 계에서의 물체는 계와의 상대적인 운동에 의해 생기는 내적인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태양계에서는 행성과 미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가스 탱크 안에서는 분자들이 거의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때 계의 운동에너지는 계가 포함하는 모든 물체의 운동 에너지의 합이다. 정지한 거시적인 물체(즉, 물체의 운동량 중심을 따라 이동하는 기준계)는 원자 또는 분자 수준에서 분자의 병진, 회전, 진동이나 전자의 병진과 스핀 또는 핵 스핀 등 때문에 운동 에너지 형태의 다양한 내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이들 모두는 물체 질량을 구성하게 된다. 거시적인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때 운동 에너지는 거시적인 운동에만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형태의 내적 에너지들은 물체의 질량, 관성, 전체 에너지를 구성하게 된다. 한 물체의 속력 혹은 위치 에너지는 계에 의존적이며 어떤 관성계를 선택하든 음수가 아닌 값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관측자 옆으로 총알이 지나간다고 해보자. 그럼 총알은 관측자의 기준계에서 운동 에너지를 갖게 된다. 이번엔 관측자가 총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고 해보자. 그럼 그 관측자의 기준 계에서 총알의 운동 에너지는 0이 된다. 한편, 계의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 한 어떤 관성계를 선택하든 전체 운동 에너지가 0이 되도록 할 수 없다. 즉, 관성계를 정했을 때 그 안에서 모든 물체가 정지한 상태가 아니면 전체 운동 에너지는 0이 아닌 최소값을 가진다. 계의 전체 운동 에너지는 관성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운동량 중심을 기준계로 하였을 때 전체 운동에너지와 같거나 혹은 전체 질량이 질량 중심에 집중 되었을 때 그 전체 질량이 갖는 운동 에너지와 같다. 이것을 간단히 나타내보자. formula_26를 어떤 기준계 "k" 에서의 질량 중심 기준계 "i" 의 상대적인 속도라고 하자. 그런데, formula_27 이므로 formula_28 이다. formula_29를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운동 에너지라고 한다면 formula_30는 단순히 전체 운동량이 될 것이고 이것은 질량 중심 기준계에서 정의에 의해 0이 된다. 그리고 formula_31는 전체 질량이므로 다음을 얻는다. formula_32 그러므로 계의 운동에너지는 운동량 중심 기준계 즉, 질량 중심이 정지해있는 기준계(질량 중심 기준계 또는 다른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 최소값을 가진다. 이외에 다른 기준계에서는 질량 중심의 속력으로 이동하는 전체 질량에 해당하는 추가적인 운동 에너지가 존재한다. 운동량 중심 기준계에서의 계의 운동 에너지는 불변량이다. 가끔 물체의 운동 에너지를 물체 질량 중심의 병진 운동 에너지와 질량 중심에 대한 회전 에너지로 나누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즉, formula_33 이고, formula_34는 전체 운동 에너지, formula_35는 병진 운동 에너지, formula_36은 질량 중심을 관통하는 선을 회전축으로 하는 회전 운동의 에너지이다.(질량 중심의 기준계에서 관측할 때) 만약 물체의 속력이 빛의 속력에 꽤 가까울 때, 운동 에너지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상대론을 적용해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선형 운동량의 표현은 고전 역학에서와 다르다. 물체의 정지 질량을 formula_4, formula_38와 formula_5를 각각 속도와 속력, formula_40를 진공에서의 빛의 속력이라고 한다면 선형 운동량은 formula_41 formula_42 이다. 한편, 부분 적분에 의해 formula_43 이고, formula_44 이므로 formula_45 이다. formula_46는 부정 적분의 적분 상수이다. 표현을 간단히 하면 formula_47 이다. formula_46는 formula_49일 때 formula_50인 것을 대입하면 formula_51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formula_52 이다. 이 공식에 의하면 물체를 정지 상태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도록 가속할 때 필요한 일의 양이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물체를 빛의 속도 보다 빠르게 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식의 부산물은 바로 질량-에너지 동등성-정지한 물체는 formula_53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가지고있다-이다. formula_54일 때, 상대론적 운동 에너지는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 에너지와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이항근사나 테일러 전개의 앞 두 항만을 취할 때 얻을 수 있다. 즉, formula_55 따라서 낮은 속력에서 전체 에너지 formula_56는 정지 질량 에너지 더하기 뉴턴 운동 에너지로 나뉜다. 빛보다 매우 낮은 속력으로 운동할때(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운동), 첫 테일러 전개의 첫 두항이 지배적인 값을 차지한다. 테일러 전개의 다음항까지 근사를 하면 formula_57 인데 여기서 맨 오른쪽 식의 두번째 항은 낮은 속력에서 매우 작다. 예를 들어, 10km/s로 운동하는 물체의 경우 두번째 항은 0.0417J/kg(첫번째 항은 50MJ/kg)이다. 100km/s 일때는 417J/kg(첫번째 항은 5GJ/kg)이다. 따라서 첫번째 항에 비해 매우 작은 값을 가짐을 알 수 있다. 상대론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는 formula_58 로 주어진다. 이 또한 테일러 전개를 할 수 있으며 첫번째 항이 뉴턴 역학에서의 표현과 일치한다. 양자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같은 관측할 수 있는 물리량들은 연산자의 형태로 나타내어진다. 입자의 질량이 "m" 이라면 운동 에너지 연산자는 해밀토니안에서 하나의 항으로 나타나며 좀 더 기본적인 연산자인 운동량 연산자 formula_59를 사용하여 정의된다. 운동 에너지 연산자를 formula_60라고 하면, formula_61 이다. 이는 고전 역학에서 운동 에너지와 운동량의 관계 formula_8 와 유사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슈뢰딩거의 묘사에서 formula_59는 각각의 위치 좌표에 대해 미분을 취한 형태인 formula_64이며, 따라서 formula_65 이다.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 formula_66는 각 전자의 운동 에너지 기대값의 합이다. formula_67 formula_68는 전자의 질량이며 formula_69는 i번째 전자에 대한 라플라시안이다. 양자 역학에서 밀도범함수 형식화(formailsm)에서는 오로지 전자 밀도에 대한 정보만 필요로한다. 다시 말해서, 보통 파동 함수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자 밀도 함수를 formula_70라고 하면, N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는 알 수 없지만 1개의 전자로 이루어진 계의 경우 운동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formula_71 formula_72는 바이츠제커의 운동 에너지 범함수이다. 열을 가진 모든 입자 또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기체의 운동에너지는 몰수 "n" 과 절대온도 "T" 에 비례한다. 즉, formula_73 와 같다. 여기서 "R"은 기체 상수이다. 가타카나 카타카나(, , )는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음절 문자 중 하나이다. 히라가나와 함께 가나라고 부른다. 가타카나는 해당하는 음을 갖는 한자의 일부분을 가져와 만들어진 것으로, 한문을 뜻으로 읽기 위해 헤이안 시대 초기 신라의 구결문자 일부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가타카나를 히라가나보다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라 일본 유아들이 가나를 배울 때 히라가나를 먼저 배운 뒤에 가타카나를 배우고 유아용 그림책 등에는 가타카나로 쓴 단어 위에 히라가나를 후리가나로 덧붙이기도 한다. 일본어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쓰인다. 이밖에도, 일본에서 어떤 항목들을 열거할 때 그 순서를 구별해 나타내는 기호 (ア, イ, ウ…)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 이로하순 (일본의 가나다순)대로 적는 경우가 많다. 과거 메이지 유신기부터 태평양 전쟁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제국 시대에 작성된 공문서와 법령은 무조건 가타카나와 한자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가타카나라는 말 자체는 '片仮名'라는 한자 표기로 되어 있으나 이를 다시 가타카나로, 즉 'カタカナ'라고 적는 경우도 있다. 또 'v'음을 나타낼 때 쓸 수 있는 가나는 가타카나의 'ヴ' 뿐이며, 그 활용형인 'ヴァ, ヴィ, ヴェ, ヴォ' 역시 가타카나로만 적을 수 있다. 한편 일본어 이외에도 아이누어를 표기할 때 주로 사용되며, 과거 일제 점령기의 대만에서도 대만어를 표기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대만어는 한자 내지는 알파벳 표기법을 따라 쓰이고 있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 표기법을,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의 어중/어말 표기법을 따랐다. (다만, 근현대에 추가된 가타카나에 대해서는 표기법에 정해진 한글 표기가 없다.) 붉은 색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들 또는 사용이 드문 글자들이다. 고대 일본에서 한자의 일부 획을 따서 문자로 삼은 것은 일찍이 7세기부터였으나, 오늘날 가타카나의 직접적 기원은 9세기 초 나라 지방의 고종파 (古宗派)에 속한 학승들이 불경에 쓰인 한문을 일어로 훈독하기 위해 만든 글자 체계에서 비롯됐다. 이들이 만든 글자는 한문 옆에 작게 붙여 쓰는 일종의 훈점 (訓点)으로, 한자음만 빌려 쓰는 만요가나의 일부 획을 다시금 생략하여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カ"(카)는 "加(더할 가)"의 왼쪽 부분을 따서 만들었다. 초창기만 해도 경전의 각 행간 여백에 오코토텐 (ヲコト点)과 같이 쓰였으나 점차 빠르고 조그맣게 적기 위해 형태의 간략화가 이뤄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쓰는 가타카나의 원형이 된 것은 물론, 오코토텐의 역할을 대신하여 훈독에 널리 쓰이기에 이르렀다. 가타카나는 그 유래에서 짐작되듯이 승려나 박사들이 한자의 음과 훈을 주기하기 위해 사용한 경우가 많았으며, 꽤 초창기부터 현대 일본어처럼 한자와 가나를 번갈아 쓴 사례도 발견된다. 나중에는 한문의 주석 역할을 벗어나 노래 가사집이나 이야기집과 같이 일상 속 필기에도 쓰이는 등 사용 범위가 넓어졌지만, 히라가나로 쓰인 글이 미적 가치를 평가받고 감상하는 수준에 이른 것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기호적인 성격이 강했다. 초창기 가타카나는 그걸 쓰는 개개인과 집단마다 글꼴의 차이가 컸고, 1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체자 (異体字)의 종류가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글꼴이 통일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에 가깝게 되었다. 가타카나가 히라가나와 같은 하나의 문자 체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 시대 중기이다. 이때 쓰여진 <우쓰호모노가타리> (宇津保物語) '국양 상' (国譲) 권의 '글씨의 모범' (書の手本)에 가타카나가 실려 있다. 또 에도 시대의 학자였던 반 노부토모 (伴信友)의 설에 따르면, 헤이안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츠츠미추나곤모노가타리> (堤中納言物語)의 '무시메즈루 공주님' (虫めづる姫君) 편에 무시메즈루 공주가 남자에게 보낸 연애편지에서 "가나 (히라가나)는 아직 쓰지 못하오니 가타칸나 (가타카나)로"라는 구절이 있어, 이 당시 문자를 습득하는 순서는 가타카나에서 시작해 히라가나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일어학자 고마쓰 히데오 (小松英雄)는 '무시메즈루 공주님'에서 보이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허구인 이야기에서 쓰인 특수한 사례이며, 실제로는 가나 (히라가나)를 아릅답게 쓸 수 있게 배우는 것이 당대 여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서양 외래어 유입에 따라 그 활용 빈도가 한층 높아졌으며, J. C. 햅번이 지은 일영사전인 <일영어림집성> (和英語林集成)의 도표에서 메이지 초의 가타카나 글꼴을 찾아볼 수 있다. 1900년 소학교령 시행 규칙으로 한 소리 한 글자라는 원칙에 따라 표준 글꼴만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지금의 가타카나가 확립되었다. 한편 가타카나는 히라가나에 비해 학문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보다 정식적인 문자로 취급되어 법령과 기타 공문의 표기 문자로 쓰였고, 교육상으로도 히라가나에 앞서 가르쳤다. 그래서 이 당시 교과서를 보면 가타카나와 한자로만 서술된 것이 많다. 하지만 신문이나 문예집 등 민간 분야에서의 서술법에까지 가타카나 사용이 강제되진 않았다. 다양체 위상수학과 기하학에서, 다양체(多樣體, )는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닮은 위상 공간이다. 즉, 국소적으로는 유클리드 공간과 구별할 수 없으나, 대역적으로 독특한 위상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더 정밀히 말하면, 한 n차원 다양체의 각 점이 n차원의 유클리드 공간에 대해 위상동형사상인 근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정밀한 정의에서 다양체는 n-다양체라고 불린다. 음이 아닌 정수 formula_1에 대하여, formula_2차원 국소 유클리드 공간(局所Euclid空間, ) formula_3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이다.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네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을 다양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위상 공간 formula_3가 formula_13차원 다양체이자 formula_2차원 다양체이며, formula_15이라면 formula_3는 공집합이다. 모든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양체이다. 국소 유클리드 공간 formula_17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모든 제2 가산 다양체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모든 파라콤팩트 분해 가능 국소 유클리드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위상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위상 공간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다양체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다양체가 아닌 국소 유클리드 공간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비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다양체는 (정의에 따라 파라콤팩트 공간이지만) 제2 가산 공간이 아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다양체에 대하여 제2 가산 공간인 것은 가산 개의 연결 성분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 정주영 정주영(鄭周永, 1915년 12월 31일 (1915년 음력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현대그룹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전직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였던 1940년대 초반 시절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의 전신)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뛰어난 상업과 기업경영능력으로써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해 12월에 제14대 대선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을 추진하였다. 1998년 6월 16일을 기하여 1차 소 500마리, 10월 27일 2차 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이 유일하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 중구 신포동(도로명:신포로)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부기를 할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의 전신)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 일제 시대 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그는 차라리 다시 빚을 내어 경성부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계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진출하였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 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김영삼과의 경쟁구도 때문에 생긴 감정 때문인지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 다른 행적이 없다가, 이후 김대중정권을 적극 도우며 방북을 한다던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가 실시한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정부의 햇볕정책을 따른다는 뜻 외에도,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향이 남한이 아닌, 북한영토인 강원도가 고향이라는 사실도 북한에 소를 가져간 이유이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1992년 11월에는 MBC 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진행자의 한사람인 최병서가 사회 저명인사를 흉내, 풍자할 때 그의 성대 모사와 함께 풍자를 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에도 14대 대통령 선거를 전에 두고 다른 대통령후보자들과 함께 최병서의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했다. 현대그룹 회장으로 재직시 아들들과 함께 평소에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에 위치한 현대그룹 본사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평소에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매일 아침 6시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주로 미역국을 준비했으며 이 때문에 현대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2004년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영웅시대》가 제작되었다. 마틴 가드너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 1914년 10월 21일 ~ 2010년 5월 22일)는 미국의 과학 저술가이다. 특히 유희수학() 분야의 저술로 이름이 높다. 오클라호마주 털사 태생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희수학(recreational mathematics) 분야를 집대성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을 비롯한 과학뿐 아니라 마술, 문학(그는 루이스 캐럴의 전문가이다), 유사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져 6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제임스 랜디와 함께 회의주의 운동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미국 노스캐럴라이나 주의 헨더슨빌(Hendersonville)에 만년을 보내다가 2010년 5월 22일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노먼(Norman)에서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미국의 대중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수학 게임(Mathematical Games) 컬럼을 연재하였다. 그가 연재를 그만둔 후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컬럼을 물려받았는데, 마틴 가드너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수학 게임'의 애너그램인 "Metamagical Themas"를 자신의 컬럼 제목으로 정하였다. 1993년이래 그의 유희수학에 대해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여 "Gathering for Gardner"(G4G)란 콘퍼런스를 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컬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제들을 대중에 소개하였다. 65권의 책을 썼으며, 초정상주장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l)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이비과학을 반박하는 책과 글을 다수 발표했다. 프리먼 다이슨 프리먼 존 다이슨(, 1923년 12월 15일 ~ ) 박사는 영국 태생의 미국인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다. 프리먼 다이슨은 1923년 12월 15일 영국 버크셔주 크로손()에서 태어났다. 영국군에 입대하여제2차 세계 대전중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에서 분석가로 일했으며, 전쟁 후 미국의 프린스턴으로 이주했다. 전쟁 후 다이슨은 리처드 파인먼의 경로적분을 이용한 설명과 줄리언 슈윙거와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설명이 서로 같은 이론인 양자 전기역학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는 핵추진기를 이용한 우주비행 계획인 오리온 계획에 참여하였다. 시험 기종은 보통의 폭발물을 사용했으나, 우주에서의 핵무기 사용 금지 조약에 의해 계획은 중도에 파기됐다. 2003년 현재, 다이슨은 제러드 오닐()이 설립한 우주학 연구소() 소장이다. 다이슨은 한 논문에서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항성계의 태양을 완벽히 둘러싸 항성에서 나오는 복사 에너지를 완전히 사용하고 바깥쪽으로는 적외선을 복사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따르면 밤하늘에서 적외선을 복사하는 거대한 물체를 찾아보는 것이 외계 문명체를 탐사하는 SETI 계획의 한 방법이 된다. 다이슨은 복사 차폐물로 자그마한 운석들의 구름을 생각했지만, 과학 소설에선 이어진 고체 구조물이 선호되어 왔다. 이러한 상상 속의 구조를 종종 다이슨 스피어라고 부른다. 다이슨은 다이슨 나무라는 것도 제안해 냈는데, 이는 유전자 조작으로 혜성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다이슨은 혜성을 조작하여 내부에 생물이 숨쉴 수 있는 대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며, 태양계 밖으로 인간을 보낼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기술과 과학, 그리고 미래 사회에 대한 성찰을 내용으로 하는 책을 몇 권 출판했다. 딸 에스더 다이슨(Esther Dyson)은 유명한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다. 아들 조지 다이슨은 역사가로, 과학사를 다룬다. 만프레트 아이겐 만프레트 아이겐(, 1927년 5월 9일 ~ 2019년 2월 6일)은 독일의 생물리학자이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괴팅겐의 막스 플랑크 생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1967년에는 매우 짧은 간격의 에너지 펄스로 유도된 극히 빠른 화학 반응에 대한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로널드 조지 레이퍼드 노리시, 조지 포터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영국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린 마굴리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년 3월 5일 - 2011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매사추세츠 대학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대학교의 지구과학과 교수이다. 세포 생물학과 미생물의 진화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굴리스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 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였다. 마굴리스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을 진핵세포로 들어간 외부 조직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러한 세포 내 공생설은 당시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00여 종의 논문과 더불어 10여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주창한 가이아 이론을 지지하며, 가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도리언 세이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람 사람 또는 호모 사피엔스(')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의 영장류 동물이다. 지구상의 사람을 통틀어 인류(人類)라고도 한다. 사람은 스스로 하고싶은 대로 마음 껏 사유, 언어 사용, 자기반성, 문제 해결을 할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고도로 발달한 두뇌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인간은 개인이 자신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자신을 통합화 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지적, 심리적 능력과 함께, 직립 보행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팔을 이용해 다른 종보다 훨씬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2013년 12월 기준으로 약 72억 명이다. 사람은 현재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대륙에 살고 있으며,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고 있다. 나머지 15%만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신세계)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고등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써 자기표현, 생각의 교환, 조직화를 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비롯한 의사소통 체계를 이용하는 데 능숙하다. 사람은 가족에서 국가까지 협동·경쟁하는 많은 집단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 구조를 만들어 냈고 사회 조직 내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성이나 이름을 가지고 국가에 따라서는 계급을 가진다. 사람끼리의 사회적 상호 작용은 인간 사회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전통, 의식, 윤리, 가치, 사회 규범, 법을 만들었다. 사람의 미를 감상하는 능력과 자기표현의 욕망이 결합하여 예술, 글, 문학, 음악과 같은 문화적 혁신을 이끌었다. 사람은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영향을 미치려는 욕망 때문에 과학, 철학, 신화, 종교를 통해 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고 다루려고 한다. 이 자연스러운 호기심은 도구와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사람은 스스로 불을 만들고, 요리하고, 옷을 입으며, 수많은 기술을 다루고 발전시키는 유일한 종이 되었다. 사람은 이러한 기술과 지식을 교육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아주 신기하게 물려준다. 현생 인류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동한 단일 종이 전 세계로 이주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인류가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 등이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같은 여러 증거를 통해 학계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한 여성과 여러 남성이 짝을 이루는 일처다부제 등의 방식이 있으며 여러 남성과 여러 여성이 짝을 이루는 다부다처제의 경우도 나타난다.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언어와 문자를 이용한다.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6천여개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점차 쓰이지 않는 언어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문자는 적어도 5천년 전부터 쓰여 왔다. 1977년 보이저 1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 보이저 금제 음반에는 115개의 그림과 파도, 바람, 천둥, 새와 고래의 노래와 같은 자연의 소리,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 55개의 언어로 된 인삿말이 실려 있다. 이는 외계의 생명체에게 보내는 인간에 대한 안내서다. 키(신장)는 유전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 성인의 경우 보통 남자는 160 cm~190 cm 여자는 145 cm~170 cm 정도이다. 직립보행으로 이동하며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이용하거나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뇌의 무게는 태어날 때는 약 300g이고 만 5세 무렵에 성인의 뇌 무게인 1300~1400g에 이른다. 성인 기준으로 몸무게에 대한 뇌 무게의 비율은 약 2%이다. 털은 퇴화되어, 피부 부위에 따라 털이 없거나 매우 짧아 피부를 완전히 덮지 못한다. 단, 머리 윗부분, 겨드랑이, 생식기 주위에는 각각 머리카락, 겨드랑이 털, 음모가 나 있는데 이 털은 피부를 덮을 만큼 길고 많다. 머리카락은 어린이 시기부터 있으나, 겨드랑이 털과 음모는 이차성징 이후로 자란다. 또한, 이차성징 이후로 남자에 한해서 입술과 턱 주변에 수염이 난다. 털의 색깔은 검정, 갈색, 금색, 붉은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에 이르면 점차 털이 탈색되어 흰색에 가깝게 변한다. 인간의 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며, 성행위를 통해 생식한다. 성행위를 통해 수정된 배아는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 임신기간을 거친다. 보통 한 번에 하나의 태아(胎兒)를 임신하며, 드물게 둘 이상의 태아를 동시에 임신하기도 하는데, 이를 쌍둥이(일명:쌍생아 (雙生兒)로, 일란성과 이란성 쌍생아로 나뉜다.)라고 한다. 임신기간은 38주 (266일)로 이 기간을 지난 태아는 출산과정을 거쳐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영아 (嬰兒)가 된다. 영아기의 사람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하며, 젖을 떼는 시기는 개체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략 생후 1년에서 6년 사이의 사람을 유아(幼兒)라고 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인 언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따라 그 나라의 모국어부터 습득한다.) 습득이 이루어진다. 이후 대략 만 20세까지는 그 초기를 어린이 또는 소년, 후기를 청소년이라고 하며, 이 시기에 대부분의 외형적 성장이 끝난다. 또한 이 시기에 이차성징이 일어나 남성과 여성의 외형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며, 초경이나 사정, 몽정을 경험하는 등 생식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대략 만 20세에서 만 30세 사이를 청년, 대략 만 30세에서 만 50세 사이를 장년, 대략 만 50세에서 만 60세 사이를 중년, 만 60세를 넘어서면 노년이라고 하나 이러한 시기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끝난 사람은 청년기 이후로 조금씩 노화되기 시작한다. 중년에서 노년 정도가 되면 노화의 결과로 신장(身長) 축소, 각종 감각 기관 둔감, 생식 능력 감퇴 등의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생식 능력의 경우, 남성은 늦게는 70세 이후까지도 생식이 가능하나 청년기를 정점으로 고환에서 생성되는 정자의 수와 운동능력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에 임신 성공 가능성도 같이 떨어지며, 여성은 중년기 (개인차가 있으나 대개 40~50세이다.)에 폐경이 일어나 난자의 배란이 중지되므로 이후 생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70세 정도이며, 보통은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긴 편이다. 사람은 주행성 동물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어릴 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 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자며 성인은 하루에 대략 6시간 ~ 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하며, 사람에 따라,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경우를 올빼미 족이라 한다. 사람은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 이 3가지를 필요로 하고, 이 외에도 미성년자에게는 교육까지 필요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아놀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 , , , 1947년 7월 30일 ~ )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의 배우, 보디빌더, 정치인이다. 배우가 되기 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보디빌더로 활동했으며, 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이기도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보디빌더로서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그의 이름 자체가 근육질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탈에서, 오스트리아 헌병 부사관 출신으로 지역 경찰서장이었던 구스타프 슈바르체네거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961년 보디빌더가 됐으며 1970년까지 미스터 유니버스 1위 5회,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미스터 올림피아 1위 7회 등 역대 최다 우승 타이틀을 얻었다. 1968년 미국 이민 후 1983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로 불리던 슈워제네거는 1973년 기네스북에 '지구상에서 상체근육이 가장 잘 발달된 사람'에 기록되기도했다. 어렸을 때 보디빌더 출신 영화 배우 레그 파크(Reg Park)가 헤라클레스 영화에 나오는 걸 보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보디빌더를 시작했다고한다. 1969년 <뉴욕의 헤라클레스>로 데뷔했으나 초기 10여년간은 배우로서는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코난》(1982), <터미네이터> (1984)로 할리우드에서 인기배우로 자리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1988년, 1990년, 1991년, 1994년, 1996년, 1997년, 2000년, 2003년 '헐리우드 머니메이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11년까지의 주지사 임기중에는 영화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1990년엔 '최초의 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이에 그치지않고 출연료가 끝없이 오르고 올라 1996년엔 '최초의 2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 2003년엔 편당 3천 만 달러에 전 세계 흥행수익의 20%를 받아 '최초의 3천만 달러 이상 받는 배우'가 되어 본인 스스로가 최고 기록인 자신의 기록을 또다시 갱신하는 등 헐리우드에서 수 십년간 1인자의 위치를 지켜왔다. <> (1991)는 슈워제네거에게 최고의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로 꼽힌다. 액션 장르에만 만족하지않고 <트윈스> (1988), <유치원에 간 사나이> (1990), <솔드 아웃> (1996)등의 코미디와 <배트맨과 로빈> (1997)의 악역에도 도전하여 모두 크게 성공하여 배우로서의 연기의 폭을 넓혔다. 원래 슈워제네거는 레드 소냐를 촬영하면서 만난 브리짓 닐센과 연인 사이였으나 평소 슈워제네거는 미국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탓에 브리짓 닐센과 결별하고 1986년 존 F. 케네디의 조카이자 NBC의 유명 언론인이자 기자인 민주당파 마리아 슈라이버와 9년 동안 연애 끝에 결혼했다. 슈워제네거는 사업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하다. 198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상금이 주어지는 보디빌딩 대회 '아널드 클래식'을 설립하였다. 오래전부터 공화당 지지파였는데 1990년 조지 H 부시로부터 '문화 체육관광부 의장'에 직접 임명되어 4년간의 임기를 지내며 미국 전국 51개주를 철통 호위를 받으며 직접 순회하기도했다. 1991년 1200만 달러 짜리 자가용 제트기를 받기도 했다. 1991년엔 실베스터 스탤론, 브루스 윌리스, 데미 무어 등과 'Planet Hollywood' 라는 체인 레스토랑을 설립했다. 1992년엔 자선단체 'After School All Stars' 설립했다.. 1997년 대형 심장 수술을 받기도 했다. 2003년10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2006년 11월 7일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와 민주당 후보를 56% 대 39%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영화로 축적한 부(富) 때문에 주지사 임기중 매년 연봉인 17만5천달러를 받지 않고 모두 사회에 전면 기부하기도 했다.2004년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타임지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2008년엔 <터미네이터>(1984)가 '역대 최고의 영화 top 10'에 선정되었으며, 美의회 도서관에 영구 보존되기 시작했다. 2008년 미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을 공식지지했다. 슈워제네거는 2010년 12월 17일 LA Times 인터뷰에서, 퇴임후 오바마 행정부에 입각할 의사도 있다고 말했다. 8년간의 주지사 임기(2003.11~2011.1) 중에는 몇몇 영화의 카메오 출연을 제외하곤 (2009)를 비롯하여 모든 영화의 제의를 거절해왔다. 2011년 1월 4일 주지사에서 퇴임하였고, 다시 헐리우드 복귀를 공식 선언했는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5탄과 6탄을 비롯하여 30여편의 제의를 받아 기나긴 공백과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해 5월 일명 '가정부 스캔들'로 이혼 소송제기를 받았는데 재산이 7500억원 정도(2012년 기준)로 이는 이전까지의 역대 최고의 위자료 액수였던 마이클 조던의 기록(2800억원)도 훨씬 뛰어넘는 신기록이였으며, 헐리우드 최고의 갑부로 드러났다. 첫 컴백작 <라스트 스탠드> (2013) 촬영에 앞서 친구 실베스터 스탤론의 요청에 따라 <익스펜더블 2> (2012)에 카메오로 4일간 촬영했는데 그 대가로 1천만달러(2012년 기준 약 120억원)를 받았다. 2012년 8월에는 스스로 2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남가주대 슈워제네거국가 및 국제 정책 연구소" 를 설립하여 고문위원회 회장과 교수가 되었다. 같은해 8월, 'The Sun'지는 "최고의 액션 히어로는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고, 슈워제네거가 '최고의 액션 히어로' 에 뽑혔다. 2013년 1월 개봉의 김지운 감독의 헐리우드 진출작으로도 화제가 됐던 <라스트 스탠드> (2013)와 실베스터 스탤론과 공동 주연을 맡은 <이스케이프 플랜> (2013) 등을 시작으로 다시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본격 복귀하였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새로운 리부트 3부작의 첫번째 영화 <> (2015)에 주인공 터미네이터로 돌아오는데, 이는 지난 2003년 개봉한 블록버스터 <> (2003) 이후 12년 만이다. 2015년 1월 26일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차지한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自由文書使用許可書,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GNU FDL, GFDL, GNU FDL)는 일종의 자유문서를 위한 저작권 라이선스의 한 형태로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 "Free Software Foundation")에서 GNU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착안되었다. GFDL에 따라 만든 문서는 자유롭게 복사, 수정, 재배포가 가능하며, 2차 저작물 역시 GFDL을 따라야 한다. GFDL을 따르는 문서는 기본적으로 무료로 배포되지만, 대량으로 제작된 경우 유료로 판매될 수도 있다. 현재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에 따라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가장 큰 프로젝트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다. 위키백과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L)와 GNU 자유 문서(GFDL)의 2중 라이선스를 따른다. 사용 허가서는 소프트웨어의 문서와 다른 이와 유사한 지침서를 대상으로 한다. 이 허가서에 따르는 모든 문서의 복사 및 변경은 역시 이 사용 허가서의 규준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복사 및 변경된 소프트웨어나 자료는 다시 변경되거나 배포 및 판매될 수 있다.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1999년 말 의견 수렴을 위한 초안이 발표되었으며, 검토와 수정을 거쳐 1.1 버전이 2000년 3월에, 1.2 버전이 2002년 11월에, 1.3 버전이 2008년 11월 3일에 공표되었다. 현재의 최종 버전은 1.3이다. 여기서의 '호환'이라는 의미는 다른 라이선스의 저작물을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는 저작물과 섞어 쓸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두 허가서가 비슷한 저작권 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GFDL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와 호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1.3판에서는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를 사용하고 있는 특정 웹 사이트의 저작권을 CC-BY-SA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 예외 조항은 다음의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GFDL 기반의 다중 저자 협력 프로젝트 사이트 (Massive Multiauthor Collaboration Site)에서 CC-BY-SA-3.0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라이선스의 재허용을 허가하는 11장의 조항은 2009년 8월 1일 이후에는 효력이 상실된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와 호환되지 않는다. 아래 목록들 중 몇 가지는 GNU FDL과는 별개로 발전해 온 것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는 GNU FDL의 결함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GNU GNU(, 그누)는 운영 체제의 하나이자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모음집이다. GNU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GNU 프로젝트의 GPL로 라이선스된다. GNU는 ""GNU's Not Unix!""(GNU는 유닉스가 아니다!)의 재귀 약자이며, 이렇게 선정된 이유는 GNU의 디자인이 유닉스 계열이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인 점과 유닉스 코드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을 두려는 것이다. GNU 프로젝트는운영 체제 커널, GNU HURD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에서 본래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GNU가 아닌 커널(가장 유명한 것으로 리눅스)은 GNU 소프트웨어와 함께 사용할 수도 있다. 즉, 허드(Hurd) 커널은 아직 운영용으로 준비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어떻게 GNU 시스템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GNU 소프트웨어와 리눅스 커널의 결합은 리눅스(또는 GNU/리눅스)로 알려져 있다. 프로젝트의 창립자 리처드 스톨먼은 GNU를 "사회에 대한 기술적 수단'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Lawrence Lessig는 스톨먼의 책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사회》 제2판에서 스톨먼은 소프트웨어의 사회적 관념과 어떻게 자유 소프트웨어가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썼다고 언급하였다. 오늘날 GNU의 안정판은 리눅스 커널이 포함된 GNU 패키지로 구성되어 동작하며 기능적인 유닉스 계열 시스템을 만들어준다. GNU 프로젝트는 이를 GNU/리눅스로 부르며, 제공되는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 GNU 자유 시스템 배포 가이드라인(GNU Free System Distribution Guidelines, GNU FSDG)은 GNU/리눅스 배포판과 같은 설치 가능한 시스템 배포판이 자유적인 특성이 있고 배포판 개발자들이 배포판들을 해당 특성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 배포 약속이다. GNU 프로젝트가 GNU 운영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을때,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결과물 카테고리인 자유 소프트웨어 디렉터리에서 보이는 것과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추구하고 있는 바가 운영 체제의 핵심인 커널 즉, GNU 허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면과 하드웨어적인 면을 통해 온전한 자유로운 운영 체제를 만드는 것이 GNU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한다면, GNU Hurd는 하드웨어를 통괄 제어하는 GNU 운영 체제의 커널이 되겠다. 셀빅 셀빅(CellVic)은 대한민국에서 생산했던 PDA의 일종이며, jTel에서 개발하였다. 후일 코오롱이 인수한 후 Cellvic으로 개명되었다. jTel은 팜 파일럿을 벤치마크하여 한국 내 환경에 맞게 자체 O/S를 제작해 한국 내 최초의 PDA OS로서 의의를 가졌다. jTel은 1년에 4회의 애플리케이션 공모전을 통하여 애플리케이션 확보에 박차를 기했으며, 개인개발자에 대한 지원과 이에 힘입은 개인개발자들의 노력으로 다수의 애플리케이션을 확보하였다. 또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발한 토론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인 커뮤니티로는 CoolView(후에 상표등록 문제로 셀북으로 개명됨) 제작자인 연승훈씨가 운영하는 kcug.net(현재 운영중단)을 들 수 있다. 셀빅은 팜 파일럿에 비하여 대한민국 기업의 제품인만큼 한글 지원은 원활하였다. 세계 최소, 최경량 PDA인 CellVic i부터 휴대폰과 카메라 모듈탑재가 가능한 CellVic XG, 더 발전된 형태로서 스마트 폰 mycube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었으나, 코오롱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 PocketPC를 탑재한 스마트폰의 경쟁에서 뒤쳐지면서 끝내 2004년부터 더 이상 후속 지원을 중단하였다. 밀러 실험 밀러 실험 혹은 밀러-유리 실험()은 초기 지구의 가상적인 환경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그 조건에서 화학진화(chemical evolution)가 일어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실험이다. (오파린과 홀데인의 가설에 따르면, 원시 지구는 무기 화합물이 유기화합물로 합성되기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유리-밀러 실험은 이 가설을 검증하려 했다.) 이 실험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전적인 실험으로 여겨지며, 1953년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클레이턴 유리가 처음 실행했다. 실험에는 수증기(HO), 메테인 (CH), 암모니아 (NH), 수소 (H)가 사용된다. 화학물질들은 살균된 유리관과 플라스크로 이루어진 루프형의 실험기구 안에 밀봉된다. 실험기구 중에 플라스크 하나에는 물이 반쯤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한 쌍의 전극이 들어있다. 물은 가열하여 기화시키고, 수증기가 포함된 내부 공기중에 불꽃을 튀겨, 자연의 번개를 흉내낸다. 그리고, 다시 공기는 식혀져서 수증기는 물이 되고 처음 플라스크로 돌아가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일주일 동안 계속 실험을 행한 결과, 유리와 밀러는 10 ~ 15%의 탄소가 유기물질로 합성되어 있는 것을 관찰하였다. 더욱이, 2%의 탄소는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에 몇 종류의 형태라는 결과도 얻었다. 결론적으로 밀러는 원시대기의 조성을 기초하여 원시지구의 모형을 만들고 결과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 연구의 테마였다. 생성된 분자들은 완전한 살아있는 생화학적 시스템을 이루기에는 상대적으로 모자란 단순한 유기물질이었다. 그러나, 실험은 이미 있는 생명체를 가정하지 않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립시켰다. 스탠리 밀러는 이후에 원시대기에 관한 연구를 좀더 진행하여,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하였으며, 사망시까지 연구에 손을 놓지 않았다. 밀러가 사망한 뒤 그의 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제프리 베다 교수는 밀러의 유품에서 1950년대 실험에서 얻은 물질이 들어있는 유리병이 담긴 박스를 발견했다. 최신 분석 장비로 이 물질의 조성을 분석한 결과 당시 밀러가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유기분자(아미노산 22종과 아민 5종)가 들어있음을 확인해 2008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2008년, 제프리 베다 교수는 화산 분출의 구조와 스파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더 많은 아미노산이 발견됨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에는 고출력의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질량분석기등이 이용되었다.그 결과 22가지 아미노산, 5 종류의 아민을 비롯한 수많은 수산화물이 생성되었다. 이 실험은 2010년에 황화수소 스파크 실험으로 재현되었으며, 발견된 아미노산은 아래에 표기한다. 폭스의 실험으로 아미노산 같은 간단한 유기물은 폴리펩타이드, 핵산과 같은 복잡한 유기물로 합성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밀러(Miller, S.)와 유리(Urey, H.)의 실험은 오파린(Oparin, A. I.)과 홀데인(Haldane, J. B. S)의 원시 수프 모델에 의한 화학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운동 단체들이 밀러의 실험에는 오류들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타당한 근거는 없으며 모두 반박되었다. 1. 이들은 원시 대기 환경이 수소, 메테인, 암모니아 등 환원성 기체가 아닌 질소 (N)와 이산화탄소 (CO)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페리스(J. Ferris) 박사와 첸(C. Chen)박사가 원시 대기의 재료로 산화성 대기를 사용했고 그 결과 아미노산은 생성되지 못한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 이들은 원시 지구암석에서 발견된 산소 또한 원시 대기에 포함이 된다면 밀러의 실험대로 아미노산이 생성되어도 금방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원시대기에는 풍부한 산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된다. 3. 이들은 원시대기에는 오존층이 없었기 때문에, 대기중에서 합성된 유기물에 자외선이 쪼여지면, 복잡한 분자들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역시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되었다. 1. 밀러의 실험에선 L-형 아미노산과 D-형 아미노산 두 가지가 생성되었다. 창조설자들은 D-형 아미노산은 죽은 생명체에서 L-형 아미노산이 변화하여 서로 분자의 수가 같아지는데 밀러의 실험에서도 L-형과 D-형의 아미노산이 발견되므로 생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2. 밀러-유우레이 실험을, 이산화탄소, 질소, 수증기로만 이루어진 조건에서 실험하면 어떠한 아미노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3.스탠리 밀러의 오리지날 화학진화 실험은 20개의 아미노산에서 오직 4개만이 생성되었으마, 후에 그럴 듯한 조건에서 실험을 다시하여도 아미노산 20가지를 모두 생성하지는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다: 4.밀러 유우레이 실험은 시아나이드나 포름알데하이드와 같은 독성 물질을 생성하지, 아미노산을 생성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사실과 어긋난다: 창조설자들은 밀러는 원시 대기환경을 실험관에 그대로 옮긴 후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하려 했으나 밀러의 시험 장치와 실제 번개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번개와 같은 방전을 재현한 이유는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결과로 보면, 이는 번개보다 에너지가 적지만 그보다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히 아미노산이 합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물 물(,)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된 것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화학 물질이다. 화학식 를 가지며 표준 온도 압력(STAP : 섭씨 25℃ 1바)에서 무색 투명하고, 무취무미(無臭無味)하다. 물은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지표면의 70% 정도를 덮고 있다. 물은 가장 보편적인 용매로 보통 액체 상태의 물을 가리키지만 고체 상태인 것을 얼음, 기체 상태인 것을 수증기라고 부른다. 흔히 '김'(Steam)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수증기와 혼동하는 경우도 있으나, 김은 엄연히 액체 상태의 작은 물방울들이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수증기와는 다르다. 물 분자는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공유결합(결합 길이 0.096 nm)을 한 H-O-H의 굽은형의 물질이다. 물분자는 수소원자와 산소 원자가 각각 전자를 내놓아 전자쌍을 만들고, 이 전자쌍을 함께 나누어 가짐(공유)으로써 결합되어 있다. 화학식은 HO이다. 물은 자연적으로 세 가지 물질의 상태로 나타나며 지구 상에서 여러 형태를 지닌다. 수증기와 구름은 하늘에 있으며 바닷물과 빙산은 극지 바다에 있고 빙하와 강은 산에 있으며 대수층의 물은 땅 속에 있다. 물은 화학적으로 많은 성질을 갖는다. 대표적인 성질은 공유결합, 산과 염기의 생성, 그리고 금속과의 산화(결합 및 부식)이다. 물에서의 수소결합(평균 결합 길이: 0.197 nm)은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소 원자가 약한 세기의 양이온의 성질을 띠고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산소원자가 강한 세기의 음이온의 성질을 띰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물은 극성 공유결합 물질이다. 또한, 중심 원자로 작용하는 수소 원자의 비공유 전자쌍과 산소와의 결합 고리인 수소결합(공유 전자쌍)의 작용력을 비교할 때 쌍극자 모멘트 값이 0이 아니므로 극성 분자로 분류된다. 한편 물은 높은 비열을 갖는데 이 또한 수소결합에 그 원인이 있다. 물을 가열할 때 쓰이는 에너지의 일부는 수소결합을 끊는 데 쓰이고 나머지의 에너지가 물의 온도를 높이는데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물이 다른 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정한 열에너지의 첨가로 온도를 올리기 어려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수소결합으로 인해 물은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물질에 비해 녹는점, 끓는점, 융해열, 기화열이 크다. 물의 비열과 기화열이 크다는 점은 생물체의 수분과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물보다 얼음의 밀도가 작은 것은 수소결합에 의한 육각형 구조와 관련된다. 또한 표면장력과 모세관 현상도 수소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은 다른 분자와 달리 그 점성에 비교해 표면장력이 큰데, 표면에 있는 물 분자가 공기 중으로 끌려가지 않고 내부에 있는 물 분자의 수소결합력을 받기 때문이다. 모세관 현상은 수소나 산소원자를 포함하지 않은 물질(예: 금속)에서는 잘 안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물이 모세관 현상을 일으킬 때 그 관을 이루는 분자와 수소결합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리관을 이루는 유리는 SiO이므로 수소결합력이 작용한다.) 물은 보통 금속류를 녹여 염기를 만들고 비금속류를 녹여 산을 만든다. 산과 염기의 기준은 양이온으로 하전된 수소 이온과 음이온으로 하전된 수산화이온이며, 수소이온이 많으면 산성이고 수산화이온이 많으면 염기성이며, 두 이온의 값이 0에 가까우면 중성이 된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염산, 질산, 황산 등이 있으며 이 3가지의 산은 모두 강한 산이다. 대표적인 알칼리(염기)로는 수산화나트륨, 수산화 칼륨, 암모니아수 등이 있으며 3가지 모두 강한 염기이다. 한편 산과 염기는 수소이온이나 수산화이온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전해질이고, 이온 물질을 갖는 모든 물이 전해질이다. 물은 산소와 함께 금속을 잘 부식시키는 성질이 있다. 철의 경우 반응성이 크나 직접적으로는 산소와 잘 반응하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산화철을 생성한다. 하지만 물이 묻은 철은 상황이 다른데, 그 원인은 물이 철을 이온화하면서 전자를 내놓고 이 전자를 받은 산소원자가 양이온으로 하전된 철 분자와 결합을 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화는 물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결국 속까지 모두 산화시키고 만다. 금속의 산화를 막기 위해 기름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기름과 물 사이의 반발력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찬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포타슘, 칼슘, 소듐 등이 있고, 뜨거운 물에서 급격히 반응하는 금속은 마그네슘, 알루미늄, 아연 등이 있다. 수리학에서 1기압 하에서 물의 단위 중량은 보통 ω나 γ로 쓰며, 1000kg중/m³(1t중/m³=1g중/cm³)으로 나타낸다. 지구상에서 물의 단위중량을 다룰 때는 편의상 '중'(force)을 빼고 1000kg/m³(1t/m³=1g/cm³)으로 쓴다. 물은 수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어서 맛과 냄새가 다양하다. 사람과 다른 짐승들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부패한 물을 피하기 위하여 마실 수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진보된 감각을 갖고 있다. 샘이나 광천수로 광고하는 맛은 그 안에 녹아있는 광물에서 비롯한 것이다. 순수 HO는 무취무미하다. 물은 생명체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지구 이외의 천체에서 물이 발견되면 항상 관심을 받게 된다. 수증기는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액체로 된 물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얼음은 다음과 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액체와 기체, 고체로서의 물은 지구 위에 사는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지구는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에 위치하여 있다. 태양으로부터 살짝 더 가까이 있거나 살짝 더 멀리 있었더라면 (약 5%, 곧 800만 킬로미터 정도) 기체, 고체, 액체라는 세 가지 형태가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지구의 중력은 물이 대기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대기 속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는 온도에 대한 완충 작용(온실 효과)을 제공하므로 표면 온도를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지구가 더 작았더라면 대기가 더 얇아져 온도가 극단으로 치우칠 것이므로 화성과 같이 극관을 제외한 물의 형성을 막는다. 지구의 표면 온도는 들어오는 태양 복사(일사) 수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 이는 온실 기체와 표면 및 대기 반사가 동반되면서 지구 온도가 유동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일정한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이를 가이아 이론이라고 부른다. 한 행성 위의 물의 상태는 주위 압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한 행성의 중력이 결정한다. 어느 행성의 용적이 충분히 크다면 그곳 위의 물은 온도가 높아도 고체 상태를 유지한다. 그 까닭은 중력이 높은 압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인데 글리제 436 b 와 글리제 1214 b 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수문학은 지구를 지나는 물의 이동, 물의 분포, 수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의 분포를 연구하는 것을 수로학이라고 한다. 물의 분포와 이동에서 지하수의 경우 수문지질학으로, 빙하의 경우 빙하학으로, 내륙수의 경우 육수학, 바다의 경우 해양학으로 부른다. 수문학을 동반한 생태학적 과정을 생태수문학이라고 한다. 한 행성의 표면 위 아래와 공중에 떠 있는 총체적인 물을 수권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물은 대체적으로 1,360,000,000 km (326,000,000 mi)이다. 물은 지구에서 대부분 바다에 액체 형태로 존재한다. 인공적으로는 수소와 산소를 혼합한 뒤 방전을 일으켜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물의 분포는 바닷물 (97.33%), 빙하 (2.04%), 지하수 (0.61%), 호수와 강 (0.01%) 그리고 기타 (0.01%) 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수와 민물은 수자원으로서 인간에게 실질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유용하다. 물의 순환은 수권 안의 물이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대기, 토양의 물, 지표수, 지하수, 식물 사이에서 물은 이동한다. 물은 물의 순환 속에서 이러한 지역을 돌며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다음의 과정을 이룬다. 표면 유출한 일부 물은 이를테면 호수와 같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갇히게 된다. 높은 고도에서 겨울 동안 극북과 극남에서 눈은 만년설, 설괴빙원, 빙하 안에 모인다. 물은 또 땅에 스며들어 대수층으로 이동한다. 그 뒤 지하수는 샘이나 온천, 간헐천 표면으로 거슬러 흘러간다. 또, 지하수는 우물로 말미암아 인공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이러한 물은 깨끗한 민물이며 사람과 길짐승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만큼 중요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민물은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조석은 달과 태양이 대양에 미치는 기조력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대양 표면이 오르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조석은 바다와 삼각강 수체의 깊이 변화를 일으키며 조류를 만들어낸다. 특정 장소에서 바뀌는 이러한 조석은 지구 회전의 영향과 지역적인 수심측량에 따라, 지구 기준에서 태양과 달의 위치가 바뀌어 일어난다. 바닷물은 평균 3.5%의 염분에 적은 양의 기타 물질을 포함한다. 바닷물의 물리적 속성은 민물과 비교하여 몇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더 낮은 온도 (-1.9 °C)에서 얼고, 온도를 어는 점으로 낮추면 밀도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바다의 염도는 발트 해의 0.7% 정도에서 비롯하여 홍해, 페르시아해의 4.0%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물은 다른 물질과 구별되는 점으로 생명의 증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수많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유기 화합물이 궁극적으로 복제를 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들은 물에 의존한다. 물은 체내의 수많은 용질이 녹이는 용매일뿐 아니라 또 체내의 물질대사에 필수적인 부분이므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은 광합성과 호흡에 필수적이다. 광합성을 하는 세포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물의 수소를 산소에서 분리시킨다. 수소는 기체나 물에서 흡수한 CO와 결합하여 포도당을 형성하고 산소를 내뱉는다. 살아있는 모든 세포들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하고, 수소와 산소를 산화시켜 태양 에너지를 포획하며, 그 과정 가운데 물과 CO를 다시 형성한다. (세포 호흡) 지표의 물에는 생물로 가득하다. 생물의 최초의 형태는 물에서 발생하였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예외 없이 물 속에서 살며 돌고래, 고래와 같은 수많은 종류의 해양 포유류가 있다. 양서류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짐승들은 물과 땅을 오가며 산다. 켈프, 말과 같은 식물들은 물에서 자라며 일부 물속 생태계를 위한 기반으로 자리잡혀 있다. 플랑크톤은 일반적으로 바다 먹이 사슬의 토대가 된다. 바다의 척추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산소를 보유하여야 하며 보유 방법은 다양하다. 물고기는 허파가 아닌 아가미를 가지고 있으나 폐어와 같은 어떠한 종류의 물고기들은 아가미와 허파 둘 다 지니고 있다. 돌고래, 고래, 수달, 물개와 같은 해양 포유류들은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지표로 올라와야 한다. 일부 양서류들은 피부를 통하여 산소를 마실 수 있다. 문명은 역사적으로 강과 주된 물길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왔다. 이른바 문명의 요람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민족은 나일 강에 온전히 의지하였다. 로테르담, 런던, 몬트리올, 파리,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상하이, 도쿄, 시카고, 홍콩과 같은 거대 도시들은 물에 다가가기 쉬운 곳에 있고 결과적으로 무역이 팽창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이와 같은 까닭으로 번성하였다. 물이 더 부족한 북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주된 요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은 음료수라고 한다. 마시기에 알맞지 않은 물은 걸러내거나 정제하는 등의 다양한 물 처리로 말미암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다. 마실 수는 없으나 헤엄을 치거나 몸을 씻는 데 사람에게 해가 없는 물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를 안전한 물로 부른다. 개발도상국에서 모든 폐수의 90%가 정화 및 처리되지 않은 채로 지역 강과 개울로 흘러간다. 또한 물의 섭취는 동물의 기초대사량을 증가시켜 체중감량과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농업에서 물은 관개에 이용하며 이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주된 요소로 자리잡혀 있다. 관개는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최대 90% 물을 차지하며 선진국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잡혀 있다. (미국의 경우 민물의 30%가 관개에 이용된다) 사람의 몸은 체형에 따라 최저 55%에서 최고 95%의 물을 지닌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날마다 1~5리터의 물을 마시어야 탈수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섭취하여야 하는 정확한 물의 양은 활동 수준, 온도, 습도 등의 요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은 물을 직접 마시는 것보다 음식이나 음료수를 통하여 소화시켜 물을 흡수한다. 건강한 사람이 물을 얼만큼 섭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은 없으나 날마다 6~8잔의 물 (거의 2리터)을 마시는 것이 최소한의 적절한 양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옹호자들의 생각이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식수에 적합한 최대의 민물 원천이다. 이곳은 소금과 칼슘이 매우 적으므로 상당히 깨끗하다. 외계어 (통신언어) 외계어(外界語)는 통신언어의 일종으로 컴퓨터 문서상에서 쓰이는 한국어의 변칙적인 표기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2000년대 초 정보화의 발달과 PC통신과 인터넷의 보급화로 통신언어가 발달하였고, 통신언어의 한글 변용 정도가 심하여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는 경우를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에 빗대어 외계어라 한다. 주로 청소년 층에서 자주 쓰였으며, 일본의 갸루 문자와 유사하다. 통신언어의 일종인 외계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통, 어미에서 -ㅗ와 -ㅛ가 -ㅓ와 -ㅕ로 변화되는 등의 통신체와 병행해서 쓰인다. 이모티콘과 닿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표현(예: ㅇㅋ, ㅋㅋㅋ)과 인터넷에서 쓰이는 유행어(예: 즐) 등의 표현을 통신에서 쓰는 사람은 위의 것만을 외계어로 여긴다. 하지만 유행어와 닿소리 표현, 이모티콘까지 통틀어서 외계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외계어를 일부에서는 ‘언어 파괴’라고 비판하지만 이를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 청소년층 안에서도 외계어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비판하는 대상인 ‘외계어’의 범주의 차이는 다양하다. 외계어는 2000년대 초반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외계어에 대한 논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한편 미술가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한글이 아닌 문자로 한글을 표현하는 실험을 한다. 콜라츠 추측 콜라츠 추측 (Collatz conjecture)은 1937년에 처음으로 이 추측을 제기한 로타르 콜라츠의 이름을 딴 것으로 3n+1 추측, 울람 추측, 혹은 헤일스톤(우박) 수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콜라츠 추측은 임의의 자연수가 다음 조작을 거쳐 항상 1이 된다는 추측이다. 예를 들어, 6 에서 시작한다면, 차례로 6, 3, 10, 5, 16, 8, 4, 2, 1 이 된다. 또, 27에서 시작하면 무려 111번을 거쳐야 1이 된다. 77번째에 이르면 9232를 정점으로 도달하다가 급격히 감소하여 34단계를 더 지나면 1이 된다. 이 추측은 컴퓨터로 20 × 2 까지 모두 성립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자연수에 대한 증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500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던 에르되시 팔은 "수학은 아직 이런 문제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과 같은 통계적인 설명을 생각하면 이 추측은 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콜라츠 추측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콜라츠 추측의 함수표현 공식 콜라츠 추측 공식의 합동산술(modular arithmetic) 표현식 1 부터 200 까지 핸드링 콜라츠 그래프에서 특정 짝수는 홀수에대한 formula_21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formula_22수가 되는 분기점이 된다. 만약 콜라츠 추측이 성립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formula_25을 제외한 모든 자연수가 formula_9과 연결되기위한 마지막 분기점이다. 따라서, 홀수에대한 formula_21의 수 이면서 동시에 짝수에 대한 formula_22수가 되는 분기점 짝수 formula_31은 formula_32 에서 formula_33의 수이다. 콜라츠 그래프의 분기점 짝수 formula_31은 규칙적으로 출현한다. 최초 출현 수열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콜라츠 그래프 분기점 수열은 6씩 증가하는 수열이다. 또한 십진수 30을 주기로 5개의 자리수 formula_37이 순환적으로 출현한다. 전자 게시판 전자 게시판(電子揭示板, bulletin board system, BBS, 또는 computer Bulletin Board Service, CBBS)은 일반적으로 대학의 게시판 또는 중세 도시의 지역 사회 광고판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적용한 시스템으로, 보통 특정 전자게시판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말한다. 사용자들은 전화선과 터미널 프로그램을 써서 시스템에 접속하고 소프트웨어를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고 게임, 뉴스, 메시지 교환 등을 할 수 있다. 전성기인 1980년대 처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많은 BBS들은 아마추어 시삽들이 여가 시간에 운영하는 무료 서비스였으며 몇몇 BBS들은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BBS는 여러 면에서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과 인터넷의 다른 프로토콜들의 전신이기도 하다. BBS는 친교 목적으로 많이 쓰였으며 논문을 발표하거나 자유 프로그램이 퍼지는 경로이며 게임과 기타 다른 응용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면서 BBS는 인터넷 프로토콜 또는 웹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바뀌어갔다. 공개 게시판의 전신은 1973년 8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시작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였다. 유용한 마이크로컴퓨터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모뎀은 비싸면서도 속도가 느렸다. 이러한 까닭에 커뮤니티 메모리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구동되었으며 여러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주변 지역들에 위치한 터미널들을 통해 접근되었다. 정보 정보(情報, )는 컴퓨터공학에서 특정 목적을 위하여 광(光) 또는 전자적 방식으로 처리되어 부호, 문자, 음성, 음향 및 영상 등을 표현하는 모든 종류의 자료 또는 지식을 말한다. 한편 정보는 일반 용어에서 전문 용어까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언어, 화폐, 법률, 자연환경 속의 빛이나 소리, 온도나 신경, 호르몬 등의 생체 신호등 정보 원천으로부터 비롯한 모든 것을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넓은 의미로 정보의 원천을 다루기위해 정보가 다루어지는 상황도 정보와 연관지을수있다. 요즘에는 컴퓨터의 정보 처리를 기반으로 한 정보(데이터)가 많이 대두된다. 정보의 원래 뜻에 따라, 정보와 자료(데이터)를 구별하고, 정보를 “뜻을 가지는 자료”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러한 분야에서는 전체적으로 정보의 뜻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으므로, 특별히 정보와 자료는 구별하지 않는다. 구분하자면, 데이터를 모아 둔 것이 자료라면 자료를 특정한 목적의 의사결정을 위해 가공한 형태를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한 정보는 목적적합성과 신뢰성 및 적시성을 유지해야 한다. 적시성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첩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하며 가공을 통해 비교적 장기간 활용이 가능한 정보를 지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정보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개인이 하나의 정보를 선택하게 되면 변화에 의해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고, 정보의 가치가 적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된 정보보다 선택되지 않은 정보가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불안감을 갖게 한다. 맥도너(A.M.McDonough)는 '정보란 사실 내지 자료에 지적인 처리를 가하여 얻어진 지식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보는 자료에 특정 의미가 주어진 것으로서 직접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모든 정보는 자료이나, 모든 자료는 모든 정보라고 할 수 없다. 포레스터(J.W.Forrester)는 '경영은 정보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과정(Process)이다.'고 하였다. 이는 경영상의 의사결정에 정보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모든 자료가 정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정보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정보는 가치지향적이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고, 어느 정도의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정보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정리해 놓은 자료의 집합이며,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이용자, 즉 어떤 목적을 갖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료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보는 이용자를 위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재배열, 요약, 삭제하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 프랑스어의 renseignement(안내, 정보)를 번역한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정보를 신식(信息)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첩보라는 뜻도 있다. 정보는 상대방에게 사건을 알릴 때 전달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에 불이 났는지 아닌지 알리는 것도 정보 전달의 한 예이다. 전달 형태가 불이 "났는지 또는 안 났는지"의 두 가지 방법만 존재한다면 1 비트로 전달이 가능하다. 동전도 마찬가지다. 던진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알려 주면 되기 때문에 1 비트로 표현된다. 16가지의 경우가 나오는 회전 룰렛을 사용하여 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를 위해 4 비트를 할당해야 한다. 앞서 말한 3가지 사건에서 사건 요소인 formula_1는 불이 났는지, 앞면이 d던져졌는지, 회전 룰렛에서 1번 칸이 선택되었는지에 해당한다. 각각의 확률을 생각해 보면, 각 사건의 경우의 수가 가지는 확률인 formula_2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순서대로 1/2, 1/2 그리고 1/16이 된다. 이때 비트 단위 정보량은 와 같이 구해지고 각각 값은 1, 1, 4가 된다. 물론 불이 날 확률formula_4이 불이 나지 않을 확률formula_5보다 높은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불이 나지 않을 확률 formula_6이 되어, 이를 나타내는 정보량도 formula_7이 된다. 대한민국의 전자거래기본법에 따르면, “전자문서”라 함은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하여 전자적 형태로 작성, 송신ㆍ수신 또는 저장된 정보를 말한다(전자거래기본법 제2조 제1호). 신용정보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금융거래등 상거래에 있어서 거래상대방에 대한 식별·신용도·신용거래능력등의 판단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정보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정보를 말한다. (동법 제2조 제1호) 위키낱말사전 위키낱말사전(Wiktionary 윅셔너리)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공개된 위키 형식으로 다언어 사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최종 목표는 "모든 언어의 모든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다. 대니얼 올스턴(Daniel Alston)과 몇몇을 포함한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현재의 모양새를 갖춘 프로젝트를 처음 출범시켰다. 위키낱말사전 프로젝트는 2002년 12월 12일 시작되었고, 2002년 12월 26일 공식 주소를 얻어, 2003년 6월 20일 위키미디어 재단의 일원이 되었다. 2016년 2월, 한국어 위키낱말사전은 20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었으나 2018년 7월, 21번째로 표제어 수가 많은 위키낱말사전이 되었다. 채팅 채팅()은 네트워크에서 두 명 이상의 사용자가 실시간으로 글을 주고받는 행동을 말한다. 채팅은 본래 PC통신 때부터 즐겨 쓰던 방법으로, 대화방으로 사용자들이 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웹캠의 발달로 음성 채팅 및 화상 채팅 등의 새로운 기술이 널리 퍼졌다. 또한, 대화방을 사용하지 않는 간편한 인스턴트 메신저도 널리 쓰인다. 최초의 온라인 채팅 시스템은 1973년 일리노이 대학교의 플라토 시스템에서 Doug Brown과 David R. Woolley에 의해 개발되었다. 여러 개의 프로토콜을 지원하는 채팅 프로그램: 캠 기계공학에서 캠(cam)은 동력 전달 장치의 하나로 회전 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꾸는 철덩어리이다. 원동축의 정속(定速) 회전에 대응하여 종동 링크를 복잡한 경과를 더듬게 왕복직선 운동과 왕복 각운동을 부여하는 데는, 운동의 성질에 응해서 각종 기구가 쓰인다. 그중에서도 임의의 경과를 더듬는 운동을 가장 재빠르게 행하게 하는 데에는 캠장치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 평면 캠과 입체 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캠은 회전운동에서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철덩어리로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예는 자동차의 캠축으로, 엔진의 회전 운동을 실린더의 흡배기 밸브 작동에 필요한 왕복운동으로 변환한다. 순/역방향 운동이나 원형운동을 왕복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크랭크라는 철덩어리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휠의 동작에 필요한 회전운동을 전환시키고,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취하는 자동차의 크랭크축은 그 예이다. 캠은 또한 저장된 정보와 도구전송 정보를 볼 수 있게 한다. 스크류 머신의 다양한 도구와 척의 움직임, 또는 뮤직 박스의 노트를 지시하는 'CAM-DRUM'은 그 예이다. 캠에 의해 전송되고 저장된 정보는 ‘어떤 행동이 일어나고, 언제쯤 일어날까?’ 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에는, 비록 뮤직 박스 캠이 더 나은 예 일지라도, 자동차 캠 샤프트에도 본질적으로 이 물음을 답할 수 있다.) 어떤 캠은 축에 대해 회전하는 캠으로 만들어진 롤러 follower의 변화가 반영되는 변위 다이어그램에 의해서 특별할 수 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반경변위의 그 위치에서 각도 위치와 관련된다. 몇 가지 주요 용어는 플레이트 캠의 구조와 연관성이 있다. 변위 다이어그램은 전통적으로 음수가 아닌 값을 그래프로 표시된다. 캠장치는 인도할 운동에 상응한 윤곽을 지닌 회전체(캠)을 일정한 속도로 돌리고, 둥글거나 또는 평면의 단면을 가진 종동절(從動節)을 그것에 대해 밀어붙임으로써, 필요로 하는 운동을 하게끔 한 것이다. 하트캠은 판(板)캠의 일종으로, 종동절의 끄트머리가 나이프에지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캠의 회전 중심을 통과하는 직선상으로 왕복운동 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캠장치이다. 캠은 각종 자동 기계류에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엔진 등의 연료판(瓣)이나 흡배기 밸브의 작동을 제어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배력장치(倍力裝置)는 원동절(原動節)의 변위에 비교해서, 어떤 종동절의 변위가 매우 작을 경우는, 그 종동절에 현저하게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다. 엄밀히 직선을 그리는 링크장치는, 포슬리에 기구(機構) 외에 여러 종류가 있지만, 미끄럼기구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기구가 복잡하게 되므로, 기구를 간단하게 해서 근사적(近似的)인 직선운동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도 여러 종류의 기구가 있는 데 〔그림〕-39는 그 일종으로서, 점 P가 그리는 렘니스케이트곡선(雙葉曲線)의 일부가 직선을 거의 닮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선박용 하역크레인으로 짐을 거의 수평으로 이동하도록 한 기구이다. 구면링크장치에서는, 축선(軸線)이 이루는 중심각이 평면링크장치의 링크의 길이에 상당하며, 중심각이 90°인 것은 평면링크장치의 슬라이더 즉 미끄럼자(子)에 상당한다. 구면링크장치에서도 4절(節)의 것이 기초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은 중심각이 90°인 링크 3개를 지니는 구면양(兩)미끄럼자 크랭크 연쇄로부터 고정링크의 교체로서 얻어지는 회전미끄럼자 기구와 요동(搖動)미끄럼자(子)기구 등이 주이다. 예전에 기차의 천장에 설치된 천장선풍기의 목흔들기 기구도 이의 응용이다. 초기 캠은 기원전 3 세기부터 헬레니즘 문명의 수력식 자동화기기에 내장되었다. 후에 캠축에 캠을 사용하는 방식이 터키 발명가 알-자자리에 의해 채용되었다. 유럽기계에는 캠 및 캠축이 14세기부터 나타났다. PC통신 PC통신(피시통신, )은 개인용 컴퓨터(PC)를 다른 컴퓨터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하여 자료를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개인용 컴퓨터끼리 서로 연결한 통신 형태도 포함되지만, 보통은 정보 서비스 제공을 위한 호스트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설치하고 여기에 가입한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로 접속하여 이용하는 형태의 전화 회선을 통한 통신 네트워크 서비스를 가리킨다. 이때 통신 회선은 주로 전화 모뎀을 통한 전화 회선(PSTN)이 사용되지만 ISDN 등의 다른 회선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1990년대에 게시판과 대화방, 그리고 자료실을 제공하는 PC통신 서비스 회사가 설립되었다. 대한민국의 PC통신은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로 시작되었다. 먼저 천리안은 1984년 5월에 (주)한국데이터통신의 전자사서함 서비스로 출발하여, 1985년 10월 생활정보DB, 1986년 9월 화상정보서비스 '천리안', 1987년 4월 한글전자사서함 '한-메일(H-mail)', 1988년 5월 문자정보서비스 '천리안 II'로 이어져, 1990년 1월에는 'PC-Serve'가 개통되고 1992년 12월 '천리안 II'와 'PC-Serve'가 통합하여 천리안이 되었다. 한편 하이텔은 1986년 11월 1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한국경제 프레스텔(Korea Economic Prestel)'을 개통하여 1987년 4월 15일 '한경 KETEL'로 변경, 1987년 5월 1일에는 한경KETEL 영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1989년 11월 '케텔(KETEL)' 서비스를 시작한 뒤 1991년 12월 한국통신과 합작으로 한국PC통신(주)를 설립하면서 1992년 3월 서비스를 코텔(KORTEL)로 변경하고 같은 해 7월에 명칭을 하이텔(HiTEL)로 변경하였다. 케텔 당시 한국경제신문사에서는 컴퓨터 통신을 홍보하고 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가입자들 중 추첨을 통해서 1200 BPS모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모뎀은 상당히 비싸서 10~20만원의 고가 장비였으며, 구입하여 집에 직접 와서 설치도 해주었다. 1994년 나우누리, 1996년 유니텔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PC통신 서비스는 다양해졌으며, 접속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도 큰사람 정보통신의 이야기 위주에서 새롬 데이타맨, 특정 PC통신회사의 전용 에뮬레이터 등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또한, PC통신은 MUD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즉, PC통신을 통하여 현재의 온라인 게임 및 커뮤니티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VT모드의 PC통신은 일부 기존 업체에서는 서비스가 유지되고는 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지금은 PC통신 사용자가 드물다. 하이텔 서비스는 2007년 2월 28일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VT모드 텍스트 기반 서비스는 다음과 같다. 그 밖에 민간주도의 지역 기반 PC통신망은 다음과 같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전용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제공되는 인터넷 기반 통신망도 생겨났다. 이와 같은 대형 서비스 이외에도 특정 분야 또는 지역에 특화된 통신망도 존재하였고, 소규모 기업 및 단체, 심지어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BBS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사설 BBS는 개인 또는 단체가 운영하는 주로 비영리 목적의 소규모 PC통신 서비스였다. 자발적으로 발생한 이러한 사설 BBS들은 상용 PC통신 서비스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PC통신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과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가 효시로 알려져 있다. 곧이어 대구에서XENIX 환경에서 4개의 접속노드를 갖추어 다중접속자를 지원하는 '달구벌'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EMPal) BBS'가 개설되는데, 이 두개의 BBS는 당시 한국데이터통신에서 제공한 전자사서함 'H-mail'의 사용자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또 와일드캣과 8개의 전화 회선을 이용하여 운영하는 '네트워크 서울'도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사설 BBS들은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주로 와일드캣—을 한글화 해서 사용했는데,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고, 이와 별도로 1991년 최오길의 '호롱불'이 등장하여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당시 유명 사설 BBS는 다음과 같다. 한편, 흔히 01410으로 알려진 한국통신하이텔은 전화망을 활용한 부가통신 서비스의 일종이며, 처음에는 접속번호 157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014XY 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01410을 접속번호로 하였다. 서비스 방식은 접속망 "하이텔"을 한국통신(현 KT)이 운영하면서 "인포샵"이라는 명칭으로 개별 정보제공업체(CP)이 정보서비스를 판매하는 형태이며 현재는 "파우와우"로 이름이 변경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프랑스의 미니텔 서비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미니텔과 마찬가지로 문자 및 비디오텍스(VTX)가 지원되는 전용 단말기 하이텔 단말기를 도입하여 전화가입자들에게 무상임대하였다. 이 하이텔망은 인포샵 서비스 이외에도 다른 여러 PC통신 서비스의 접속 관문의 역할도 하였고, 아울러 전화접속 패킷망으로서 HiNET-P, HiNET-F 등의 네트워킹 서비스도 제공되었다. 나중에는 종량제 PPP 접속서비스도 제공된다. 서비스 명칭 "하이텔"이 PC통신 하이텔과 공유되어 있으나, 서로 구분되는 별도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 내에는 한국PC통신의 하이텔 이외에도 한국통신이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 PC 통신으로 HiTEL-POP도 함께 존재했는데, 이것은 이후 미래텔로 이름이 바뀌었었다가 나중에 PC통신 하이텔로 흡수되었다. 5자리로 구성된 014XY 전화번호는 전기통신번호 관리세칙에 의한 부가통신사업자 식별번호로서, 전화회선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에 할당되는 전용 접속번호이다. 처음에는 PC통신용 접속 번호로 도입되었으나 나중에는 다이얼업 PPP 접속 번호로도 활용되었고, 음성통화에 비하여 40% 요금 할인 또는 정액요금제 등의 혜택이 있었다. 현재는 광대역망의 보급으로 모뎀 사용이 격감하여 대부분의 014XY 번호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공식 서비스는 2017년 8월 31 종료되었으며 다음해까지도 01410 파우와우 서비스는 낮은 접속 성공률로 매회 수분간 접속이 되었으나 더이상 제공되는 컨텐츠와 서비스는 없었으며 , 2018년 7월 경 일자불상에 모든 014xy 전화번호가 퍠쇄되었다. 따라서 2018년 7월 현재 이하 명기된 모든 일체의 서비스는 더 이상 접속이 불가능하다.아울러, 1544 국번으로 시작하던 관련 서비스는 현재 타 기업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2007년 1월 기준으로 부여되어 있는 식별번호는 다음과 같다. 별 표시(*)는 2007년 12월 기준으로 접속 불능 ASCII 아트는 문자를 조합하여 한 화면상에 그림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문자 기반 표시장치만 존재했던 초창기 컴퓨터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ANSI 아트는 터미날의 제어코드(ESC 이스케이프)를 활용하여, 색상 표시, 화면 갱신들을 이용해 동적인 화면을 구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KETEL의 초기화면  CONNECT 2400  [[[[[[[i  ### ketel에 연결되었습니다.(korea:pc)  ### Welcome to ketel!!!  ### 서비스 명에 ketel을 입력하십시오.  ### Please type "ke" for KETEL English Service.  서비스 명(login):ketel        KK  KKK  EEEEE TTTTTTTT  EEEEEE  Ltm        KK KK   EE      TT    EE    L       KKK     EEEE    TT   EEEE   LL       KK KK    EE     TT   EE    LL      KK  KKK EEEEEE   TT   EEEEEE  LLLLLLLL              «<알립니다»>  1.«KETEL 정보서비스 일시 정지 안내»  2.KETEL 전용 단말기 서비스 안내  3.»사용자 번호 변경 업무 개시«  4.»KETEL ID 신청 메뉴 서비스 제공개시«  5.«PC 라인 재판 발행»  6.«동호회 신청 1차 마감... KETEL»  7.한경의 기사를 공모합니다.   ** 공지사항을 보시겠습니까(번호/N/z)?  사용자번호 :  «< 한경 KETEL »>     (TOP)   1. 서비스 안내    2. KETEL-UNICOM NEWS  11. 조선일보뉴스   12. 동아일보뉴스    13. 전남일보뉴스  14. 부산일보뉴스   15. 영남일보뉴스  19. 한국경제신문뉴스  21. 증권/금융     22. 기업/경제통제    23. 무역  24. 환율/금리     25. 중소기업지원 정보  31. 유통/물가     32. 부동산       33. 세무  34. 문화/레저     35. 날씨  41. 의/약/건강    42. 농업정보  51. 전자우편     52. 게시판       53. 토론의 광장  54. 대화실      55. 동호인 코너     56. 컴퓨터/통신  57. PC 라인  번호/명령(H,GO,PF,ME,Z,X) [[분류:컴퓨터 통신]] 통신체 통신체(通信體)는 컴퓨터를 통해 발달한 한국어의 독특한 문체와 그 형태를 의미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PC통신이 널리 쓰이던 때에는 자판을 한 번 치는 시간도 전화요금으로 청구되었다. 그래서, 시간과 돈, 노력을 절약하는 수단으로 통신체가 각광받으며 널리 퍼졌다. 당시 유행하던 '통신체'로는, '어솨요(어서오세요), 리하이(리하)(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_^/^-^(재미있네요)', '방가방가(반가워요, 반가워요)'등이 있었다. 그 이후, 리니지 등의 게임이나, 디시인사이드같은 유저포탈의 생성으로 즐, 원츄, 아햏햏, 뷁 등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문화관광부 연구보고서인 “바람직한 통신 언어 확립을 위한 기초 연구”에 따르면, 통신 언어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네트워크 네트워크(network), 망(網)은 다음을 가리킨다. 햄버거 햄버거(, )는 샌드위치의 일종인 음식이다. 양념, 빵가루 등에 고기를 갈아 넣고 버무린 뒤 구워낸 햄버그 스테이크(패티)와 채소, 양념 등을 두 장 이상의 동그랗거나 길쭉한 빵 사이에 넣어 만들며, 보통 손으로 쥐면서 들고 먹는다.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판매된다. 수많은 패스트푸드 식당들은 햄버거, 감자 튀김, 콜라를 하나로 묶어서 세트로 판매하기도 한다. 독일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이 지난날 몽골에서 독일로 가져온 음식이었던 타르타르 스테이크를 모방하여 그 지역 요리사가 다진 육회를 재료로 반죽하여 뭉친 것을 불에 구운 것으로 햄버그 스테이크 또는 '함부르크 스테이크'라 한다. 18세기 초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게서 이 스테이크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함부르크에서 온 스테이크라는 음식인 햄버그 스테이크(Hamburg steak)로 불리게 된다. 이후 미국 각지에서 햄버그 스테이크를 사용하여 햄버거라는 요리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시초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을뿐 정확히 누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큰 이견이 없다. 햄버거의 시초를 둘러싼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한 요리사가 샌드위치를 만들던 중 너무 바쁜 나머지 함부르크 스테이크를 일반 고기 대신 샌드위치 빵에 넣어 판매한 것이 오늘날 햄버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들어가는 패티의 원료나 양념에 따라서 치킨버거, 불고기버거, 비프버거 등으로 구별해 불리기도 한다. 또 패티 이외의 소에 따라 치즈버거 등으로도 불린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채소만 넣어 만들거나 콩을 원료로 한 패티로 만든 샌드위치(베지 버거)역시 햄버거로 불릴 때가 많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치의 맛을 낸 김치 버거와 밥을 뭉쳐 모양을 낸 것을 빵 대신 사용한 라이스 버거도 존재한다. 놀이 놀이() 또는 유희(遊戱)는 인간이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되지만, 노동에도 유희적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놀이는 기분전환을 위한 여가 활동으로 규정되며, 서양 기원의 승부와 관련 있는 놀이는 게임(game)으로 불리기도 한다. 즐거움 외에도 민첩성이나 사회성 등 성장에 필요한 경험을 얻기 위해 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놀이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학설이 있다. 잉여정력설(剩餘精力說)·생활준비설·반복설·휴양설·생물학설 등이 있다. 놀이를 작업과의 대립개념으로 했을 때 그 본질은 분명해진다. 작업은 진지한 것이며, 피곤함과 고됨이 따른다. 또한 의무적·강제적인 것임에 반해서, 놀이는 자기목적적이며, 자기충족적 운동으로, 활동에는 쾌감이 따르고, 또한 자발적·해방적인 것이다. 놀이에는 기본적인 요소로 참여자와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rule)이 추가 요소로 포함될 때도 있다. 근대의 놀이는 기본적으로 방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이의 핵심은 '즐거움'이다. 놀이의 참여자는 놀이 규칙에 따라 수행하는 여러 가지 행위를 하면서 '즐거움'을 얻거나, 특정 행위 이후에 돌아오는 보상으로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 즉, 한 사람 이상의 참여자가 과정 또는 목표를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통념상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느끼는 '긴장감, 성취감, 기쁨' 등의 건강한 정신 상태를 말한다. 유아기(乳兒期)에는 작업과 놀이가 미분화상태이기 때문에, 놀이에 대해서 어른의 작업에 대한 것과 같이 진지하다. 이 미분화성 때문에 이 시대에서는 놀이 가운데서 작업(간단한 심부름 등)을 시키는 일도 가능하며, 또한 완구(玩具)를 보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도구가 그 역할을 한다. 유아에게는 혼잣놀이나 평행놀이가 많다. 아동기의 중기부터 후기는 집단적 놀이가 특징이며, 소위 갱(gang)시대를 이룬다. 유희집단의 성원 수도 연령과 함께 변화한다. 집단참가의 인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2~4명이던 것이 고학년에 가서는 6~10명으로 증가한다. 그 후 청년기가 됨에 따라 다시 감소한다. 동일유희라도 발달에 따라서 그 구조가 변화한다. 오가와타로(小川太郞)에 의하면, 유희는 혼자서 가능한 조직없는 유희로부터 단순한 규칙을 가진 단순한 조직놀이로, 다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복잡한 조직놀이로 변화한다. 아동기부터 청년기에는 놀이가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규칙이 정해진 그룹조직이라든가 운동경기 등이 왕성하게 실시된다. 이 놀이집단을 통해서 협조성이나 자기통제와 같은 성격형성이 가능해지며, 신체의 훈련, 규칙 존중 등의 사회성의 증진이 학습될 가능성이 많다. 뵐러(Ch. Buhler)는 놀이를, ① 기능놀이(감각을 사용한다든지, 손발을 움직인다), ② 상상(想像)놀이(소위 경쟁놀이), ③ 구성놀이(토막쌓기·찰흙빚기·描畵 등), ④ 수용(受容)놀이(그림극·레코드 등을 보고 들으며 즐기는 것)등으로 분류하여 발달을 고찰한다. 파텐(M. B. Parten)은 사회적 행동양식에 의해서, 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행동, ② 방관적 행동, ③ 혼잣놀이, ④ 평행놀이, ⑤ 연합놀이, ⑥ 협동놀이로 분류한다. 유아기의 놀이의 형태는, 대개 유희활동의 경과형식(經過形式)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그 발달 차이를 알아보고 있다. 가장 원시적인 유희활동. 거의 2-3분 간격으로 다른 활동을 나타내며, 더욱이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유희라고 이름붙일 수 없을 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1세아에 많다. 대부분 적응적 목적을 위해 습득한 어떤 하나의 기제로 순환적 반응을 반복하는 행위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는 심상이 아닌 기능적 동화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단계와 구별된다. 단편적 유희행동이 모자이크식으로 접합한 것이다. 10분간 정도씩 유희(遊戱)가 계속되나 다음 유희와의 관계성이 없이 이루어지는 놀이 방법으로, 1시간에 4~9종의 놀이가 나타난다. 2~3세아에 가장 많다. 이 시기에 이르른 아동은 단순한 감각운동적 면에서 탈피해 상징적 가작화를 통한 놀이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동은 사진의 행동을 가작화로써 이해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의식화하는데에만 머무르며, 이는 누적형놀이와 연속형 놀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같은 종류의 유희가 1시간 가까이 연속된다. 하나의 유희가 그것과 관계 있는 유희로 발전한다든지, 혹은 다른 유희를 도입하여, 잡다(雜多)하게 하나의 유희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5세아에 비교적 많다. 이 때에부터는 놀이가 습관화된 의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징적 도식의 형태를 취한다. 정지된 유희활동이 1시간에 2가지나 3가지의 비율로 실시된다. 4~6세아에 많다. 분절형의 유희가 다시 오래 계속된다. 1시간 내의 대부분이 하나의 유희이다. 분절형 놀이의 상위유희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언뜻 보기에는 연속형 놀이와 비슷해보이지만, 각각의 유희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것으로 연속형 놀이와 구분된다.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없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승부나 규칙과 관련이 있는 놀이는 다음과 같다. 비디오 게임 비디오 게임(video game, )이란 컴퓨터가 사용자의 입력을 받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처리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게임이다. 비디오 게임은 글자나 그림, 소리만으로 출력될 수도 있지만, 많은 비디오 게임이 영상표시장치를 이용한 시각적 출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플랫폼"(platform)이라는 용어는 전자 부품의 특정한 조합이나 컴퓨터 하드웨어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소프트웨어와 결합하여 비디오 게임이 동작할 수 있게 한다. "시스템"(system)이라는 용어 또한 흔히 사용된다. 아래의 구별은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 이상의 플랫폼을 연결하는 게임이 있을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뿐 아니라, 게임을 즐길 수 있으나 전용 비디오 게임 머신이 아닌 다른 장치들도 존재한다. (스마트폰, PDA, 공학용 계산기) 비디오 게임은 여러 종류의 입력 장치를 사용하여 사람의 행위를 게임에 번역, 전달할 수 있으며, 가장 흔한 게임 컨트롤러는 PC 게임의 경우 키보드, 마우스이며, 콘솔의 경우 게임패드, 휴대용 콘솔의 경우 버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밖의 게임 컨트롤러는 일반적으로 레이싱 휠, 라이트 건, 댄스 패드가 있다. 디지털 카메라 또한 플레이어의 신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게임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다. 이스터 에그는 개발자들의 메인 게임의 일부가 아닌 곳에 남겨둔 숨겨진 메시지나 농담이다. 비디오 게임은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혼자서 하는 게임(1인용 게임)이 많았다. 그것은 컴퓨터 자체가 여러 사람이 함께하기 어려우며,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컴퓨터가 알아서 적절한 상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는 게임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서사적 특징을 띠기도 한다. 다른 참여자와의 상호 작용에 크게 의지했던 기존의 게임과는 달리, 다른 참여자가 없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게임이 제공하는 내용이 그 경험 수준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사적 특징의 하나는 주인공의 존재인데, 보통의 게임은 여러 인간 참여자가 이루어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인공이 없던 반면, 혼자 하는 비디오 게임에서는 유일한 인간 참여자에 그 비중이 맞추어진다. 그래서 모든 게임 환경과 컴퓨터 참여자들이 주인공인 인간 참여자의 행동에 맞추어 작용함으로써 의도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나아가 컴퓨터가 더는 참여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간 참여자 개인에 맞추어지는 환경으로서 제공되는 게임도 많다. 그를 위해 비디오 게임은 영화와 소설 등의 다른 서사 매체의 문법을 빌려와 게임 참여자에게 높은 수준의 경험을 제공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신 기술의 발달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함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이 대두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전의 게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동시에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 이론》의 저자인 라프 코스터는 2007년 게임 개발자 회의에서 과거 1인용 게임들의 성행은 놀이의 기형적인 변화였고,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오면서 진정한 놀이로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비디오 게임을 새로운 서사 형태의 출현으로 보는 사람들은 혼자서 하는 비디오 게임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비디오 게임은 종종 다양한 전자 매체가 결합한 멀티미디어의 궁극적 형태로 언급된다. 현대의 비디오 게임은 영화, 문학, 음악 등 여러 표현이 모두 결합하여 상호 작용의 형태로 제공되는 경험 매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의 본질은 그 구조이며 영상과 음악, 문학 등의 표현은 그것을 돕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비디오 게임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임의로 연산된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으로 재미를 제공하며 일련의 학습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디지털의 특성상 널리 배포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교육이나 선전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리처드 도킨스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 1941년 3월 26일~ )는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 및 대중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석좌교수"직과 옥스퍼드 대학교 뉴 칼리지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2009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는 역시 많은 저명한 언론매체의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엔카르타 백과사전과 진화백과사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무신론적 박애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수석편집위원으로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과학적 회의론 잡지의 창립멤버로 편집이사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왕실이 수여하는 패러데이 상의 심사위원, 영국TV 아카데미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으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생물학 부문 수장이기도 하다. 도킨스는 진화에 대한 유전자 중심적 관점을 대중화하고 밈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1982년 그는 표현형의 효과가 유기체 자신의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유기체들의 신체를 포함한 넓은 환경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준 저서 《확장된 표현형》으로 진화생물학계에서 폭넓은 인용을 받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 이며, 철저한 인본주의자, 회의주의자, 과학적 합리주의자 및 브라이트 운동 지지자이다. 그는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다윈의 로트바일러" 로 불렸는데, 이는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가 자연 선택을 지지하면서 "다윈의 불독"으로 불린 것에서 유추되었다. 2006년에 발표한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초자연적 창조자가 거의 확실히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 신앙은 굳어진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007년 11월 현재 《만들어진 신》의 영어판은 150만 권 이상 판매되어 그의 책들 중 1위를 기록했으며, 31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도킨스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대중과학서를 집필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기도 했다. 2004년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Balliol College)는 그의 이름을 딴 도킨스 상을 만들어 인간에 의해 멸종위기에 빠진 동물의 행동양식과 복지에 기여하는 논문을 발표한 사람에게 수상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1941년 3월 26일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클린턴 존 도킨스는 2차대전중 연합군으로 영국에서 케냐로 이주하였으며 도킨스가 8세가 되던 1949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부모 모두 과학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도킨스의 질문들에 과학적 언어로서 답을 해 주었다고 한다. 도킨스는 그의 어린시절을 전형적인 평범한 영국 소년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략 9세 되던 무렵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는 자연에 있는 방향성, 규칙성, 목적성, 질서와 이런 것들의 조합등을 인식하고 다시 신의 존재를 믿도록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영국성공회의 관습들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신보다는 윤리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후에 그가 생물의 진화과정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종교적인 관점은 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 없이도 진화론의 자연선택이 생명의 복잡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도킨스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온들 스쿨(Oundle School)을 다녔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동물학을 수학했는데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동물행태학자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 Tinbergen)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962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 그 후 틴버겐의 지도하에 옥스퍼드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1966년에 받게 된다. 틴버겐은 동물행태연구의 개척자였는데 특히 본능의 문제들, 학습과 선택에 있어 선구자이다. 이 시기에 도킨스의 연구는 동물결정모델에 관한 것이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도킨스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물학 조교수로 재직한다. 이 시기 UC 버클리에서는 당시의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이 거세었는데 도킨스도 행동가로서 베트남 반전 운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는 1970년에 다시 옥스퍼드로 동물학을 강의하러 돌아 왔으며 현재까지 옥스퍼드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5년에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찰스 시모니(Charles Simonyi)가 과학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며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1976년 그의 저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도킨스는 생명과학을 일반대중에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7년, 도킨스는 동료 학자 매리언 스탬프와 결혼했고 1984년에 이혼했다. 그 해 도킨스는 Eve Barham과 재혼했으며 사이에 딸 Juliet Emma Dawkins를 두었으나 역시 이혼했다. Barham은 1999년 암으로 사망했다. 1992년에 그는 여배우 랠라 워드(Lalla Ward)와 결혼했다. 도킨스와 워드는 그들의 공통 친구인 더글러스 애덤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워드는 도킨스 책 중 절반 이상의 삽화를 그렸으며 두 책의 오디오버전(《조상 이야기》와 《만들어진 신》)의 나레이터를 맡았다. 2009년, 그는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도킨스는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는 종교적 믿음인 창조과학에 단호한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창조과학을 불합리하고 지성을 축소시키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의 1986년에 나온 책 《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에서 창조론자의 중요한 논점인 설계론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18세기 영국신학자 윌리엄 패일리(William Paley)의 저서 "자연신학"에서 주장되어 유명해진 시계공비유에 대해 반박했다. 패일리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는 너무 복잡하고 기능적이어서 단순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도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미리 설계되었다"라고 확언했다. 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론의 자연선택도 생물계의 규칙성과 복잡성, 그리고 기능성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있어서 지성을 가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시계제작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86년에 도킨스는 옥스퍼드 헉슬리기념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A. E. 윌더-스미스(A. E. Wilder-Smith), 성경적창조론회 수장인 에드거 앤드루스(Edgar Andrews) 등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만약 그가 그런 토론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창조과학자들이 노리는 기독교인들로부터의 명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만류한 그의 동료 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충고를 따라 이후 창조과학자들과 공식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 도킨스는 토론을 제의하는 창조과학자들이 그런 논쟁에서 완패당하든 아니든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에 따르면 그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화학자와 논쟁을 벌임으로써 얻어지는 명성이었던 것이다. 2004년 12월 미국 언론인 빌 모이어스(Bill Moyers)와 인터뷰할때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느 과학만큼이나 확실하다." 모이어스가 그에게 "이론"이란 단어의 사용에 대해 질문했을때,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화는 이제까지 관측되어 왔다. 단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을 관측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그것은 살인범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경찰이 그 범인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 형사는 당연히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형사는 많은 실마리와 엄청난 양의 상황증거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진화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마치 영어단어게임에서 하나 하나 스펠링을 불러주는 것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도킨스는 아이들의 과학교육에 지적설계를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으며 단지 종교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 진실"이란 영국단체를 강하게 비판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단체가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도록 홍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러한 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위한 리처드 도킨스 재단"을 통해 책, DVD, 팸플릿을 제작해서 학교에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교육 스캔들"이라고도 표현했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 책인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 런던 대학교 교수 스티븐 로즈(Steven Rose)는 도킨스를 초다윈주의자(Ultradarwinist)로 명명하면서, 유기체가 아닌 유전자 수준에서 여러가지 자연 선택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도킨스의 유전자론은 유기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유기체를 유전자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개체로 격하시켜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도킨스는 로즈가 비판하는 유전자 결정론이란 사회생물학자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념임을 지적하고, 로즈의 주장은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다고 답했다. · '에덴 밖의 강'은 사이언스북스에서 '에덴의 강'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판했다. 도킨스는 또한 수많은 연설과 강의를 했는데 그중엔 헨리 시즈위크(Henry Sidgwick) 기념연설 (1989), 첫 번째 에라스무스 다윈(first Erasmus Darwin) 기념강의 (1990),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강의 (1991), T.H. 헉슬리 기념 강연(T.H. Huxley Memorial Lecture) (1992), 어빈 기념 강의(Irvine Memorial Lecture)(1997), 쉘든 도일강의(Sheldon Doyle Lecture) (1999), 틴베르헨 강연 (2004), 그리고 태너 강의(Tanner Lectures)(2003)등이 대표적이다. 1991년에 그는 어린이를 위한 왕실학교 크리스마스 특강을 했고 이것은 2007년에 "이 우주에서 성장한다는 것은"이란 DVD 타이틀로 나왔다. 막스 델브뤽 막스 루트비히 헤닝 델브뤽(, ForMemRS, 1906년 9월 4일 ~ 1981년 3월 9일)은 독일 제국 베를린 출신의 미국의 생물학자이다. 1969년에 바이러스의 복제 기작과 유전적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앨프리드 허시,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델브뤽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천문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이론물리로 전향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영국과 덴마크, 스위스 등 여러 나라들을 순회했다. 볼프강 파울리와 닐스 보어를 만나 생물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32년 베를린에 돌아와 리제 마이트너의 조수가 된다.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초파리(drosophila) 유전자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며 미국에 머물렀다. 1941년 매리 브루스(Mary Bruce)와 결혼하면서 나중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를 얻었다. 1942년 살바도르 에드워드 루리아와 함께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잘 조절된 변화가 아닌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공로로 1969년 앨프리드 허시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950년대 이후 델브뤽은 유전학보다는 생리학쪽의 연구에 집중했고 또한 쾰른 대학교에 분자유전학 연구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손녀였다. 유리수 수학에서, 유리수(有理數, )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이다. 단, 분모가 0이 아니어야 한다. 특히, 분모가 1일 수 있으므로 모든 정수는 유리수이다. 유리수체의 기호는 볼드체 formula_1나 칠판 볼드체 formula_2이며, '몫'을 뜻하는 영어()에서 따왔다. 유리수체 formula_2는 정수환 formula_4의 분수체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집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유리수체 formula_2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시키는 (동형 아래 유일한) 체이다. 유리수체 formula_2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집합 formula_11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 formula_12를 줄 수 있다. 유리수체 formula_2는 집합으로서 몫집합 formula_15이며, 그 위의 덧셈과 곱셈은 다음과 같다. 체가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인 각종 연산 법칙과 덧셈 항등원 formula_18 및 각 유리수 formula_19의 덧셈 역원 formula_20 및 곱셈 항등원 formula_21 및 0이 아닌 각 유리수 formula_22의 곱셈 역원 formula_23의 존재가 성립하므로, 이는 체를 이룬다. 정수환과 유리수체 사이의 표준적인 단사 환 준동형은 다음과 같다. 각 유리수 formula_19를 분수 꼴 로 나타내면, 유리수를 마치 두 정수의 비율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 유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이므로, 나눗셈 기호와 의미가 같은 분수 기호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과 3의 비를 분수로 나타내면 이다. 분자와 분모를 동시에 그 공약수로 나누어 원래와 값이 같지만 꼴이 더 단순한 분수를 얻는 과정을 약분이라고 한다. 분자와 분모가 서로소이어서 더 이상 약분할 수 없는 분수를 기약 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을 최대 공약수 6으로 나눠 약분하면 기약 분수 을 얻는다. 분자가 분모보다 작은 분수를 진분수, 작지 않은 분수를 가분수라고 한다. 가분수는 정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표현한 것을 대분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의 대분수 표현은 1이다. 무리수는 두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분수 표현이 불가능하다. 유리수의 진법 전개는 유한 소수이거나 순환 소수이다. 십진법 전개가 가장 흔하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분수를 소수로 전환하려면 나머지 있는 나눗셈을 통해 순환 마디를 구하면 된다. 유한 소수나 순환 소수를 분수로 전환하려면 = 0.1, = 0.01, = 0.001 및 = 0.111..., = 0.010101..., = 0.001001001... 따위를 이용하면 된다. 반면 무리수의 진법 전개는 비순환 소수이다. 유리수는 유한 연분수 표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분수를 연분수로 나타내려면, 분자와 분모에 유클리드 호제법을 응용하면 된다. 무리수의 경우, 연분수 표현은 항상 무한 연분수이다. 두 유리수가 같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어떤 유리수가 다른 어떤 유리수보다 작을 필요충분조건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두 유리수의 덧셈에는 통분 기법이 쓰이며, 이는 다음과 같다. 유리수의 반수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두 유리수의 뺄셈은 반수를 더하는 것과 같다. 분모의 최소 공배수를 공분모로 취하여 통분하면 더 간단히 구할 수 있다. 두 유리수의 곱셈은 다음과 같다. 0이 아닌 유리수의 역수는 다음과 같다. 두 유리수의 나눗셈은 역수를 곱하는 것과 같다. 집합 formula_2는 정수의 집합 formula_4으로 만든 분수체이며, 따라서 formula_2는 사칙연산이 자유로운 체이다. 집합 formula_2는 표수가 0인 가장 작은 체이다. 즉, 표수가 0인 체는 formula_2와 동형인 체를 반드시 포함한다. 서로 다른 어떤 두 유리수 사이에도 또다른 유리수가 존재하므로 집합 formula_2는 조밀 집합이다. 그러나 formula_2와 formula_4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므로, formula_2는 가산 무한 집합이다. 유리수체에는 표준적인 절댓값과 p진 절댓값을 줄 수 있으며, 이들에 의한 완비화는 각각 실수체와 p진수체이다. 피시방 피시방(PC房, )은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LAN 게임 카페(LAN Gaming Center)이자 다중 PC 카페로서, 보통 시간당 요금 또는 정액 요금을 내고 컴퓨터로 인터넷, 온라인 게임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장소다. 시간당 요금은 지역마다 다르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 카페는 1988년 3월 첫 개장하여 1991년에 폐장된 엠팔의 멤버였던 안상수와 금누리가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만든 ‘일렉트로닉 카페’(전자 카페)이다. 당시 16비트 컴퓨터 두 대를 놓아 전화선으로 PC통신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후 세계 최초의 인터넷 카페는 1994년 4월에 정민호가 대한민국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BNC(BIT COMMUNCATION CAFE)라는 이름으로 첫 개장한, 인터넷카페이다. BNC 인터넷 카페는 당시 최초의 인터넷 카페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언론에서 소개한 인터넷 카페들은 전부 "전자카페"였으나 1994년부터 "모뎀카페", "네트워크카페", "사이버카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995년 여름에 종로 홍대 등지에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지면서 대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인터넷 카페에서는 ISDN과 전화모뎀을 이용한 PC통신으로 하이텔에 연결하여 텍스트 위주의 통신이 가능하였으며, 대형 텔레비전 모니터에 PC와 TV를 연결하여 모르는 사람이 통신을 이용한 바둑을 둘 수 있었고 쥬라기 공원같은 통신을 이용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그 뒤, 1996년 여름에 PC방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다음해인 1997년 11월, IMF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피시방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 경제 상황이 IMF 라는 커다란 혼란으로 침체된 상태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장인 PC방 창업에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1998년 ~ 1999년에는 창업 열풍에 맞추어 상승세를 타게 된다. 또한 1998년에 발매된 미국 블리자드사의 스타크래프트는 5년동안 대한민국의 피시방 2만 곳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PC방의 대중화로 인하여 1998년 여름부터는 PC방의 창업이 한국 컴퓨터 산업이 호황세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업체들이 PC방을 시장으로 이용하였고 많은 사업들이 성공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생각되었다. 게임산업이 발전하면서 그 게임에 맞는 컴퓨터 사양이 필요하였고 PC의 고사양화가 가속화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2001년부터는 PC방 개인사업의 통신선 설치가 일반 가정집까지 연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피시방은 미국 블리자드사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1998년 4월 발매와 동시에 엄청 난 인기를 누리며 함께 널리 퍼졌다. 따라서 대부분 인터넷에 연결되었고, 컴퓨터 게임을 하기에 적합하다. 2000년에 들어서 화상 채팅이 퍼지면서, 많은 피시방들이 웹캠을 설치했다. 또한 넷마블, 넥슨 등의 온라인 게임 서비스 업체들은 피시방을 중심으로 자사가 서비스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을 이벤트 등의 방식으로 홍보하기도 하며,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이용할 경우 보너스 경험치 같은 혜택을 주기도 한다. 피시방은 컴퓨터를 비치하여 방문자가 이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스낵이나 음료수를 판매한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각 가정의 인터넷 접속 방법의 발달과 증가로, 현재 피시방은 사라지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이용료 인하, 시설의 고급화·대형화, 또는 플레이스테이션 4 같은 비디오 게임기를 비치하는 등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피시방은 어린 학생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이용자의 상당수가 청소년 및 어린이지만, 상당수의 피시방이 금연구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지않아 간접흡연의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인터넷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피시방에서 장시간 사용하면서 생활을 망치는 경우가 있으며, 간혹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피시방 사장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에게 노동착취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또한 금연법의 시행으로 2014년 1월 1일부터 100m²이상의 전 사업장, 2015년 1월 1일부터는 100m²이하의 전 사업장이 실시대상이 된다. 또, 주민등록번호나 개인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다. 일부 PC방에서는 회원가입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생일,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수집하고 있으며 PC방의 메인 관리 컴퓨터가 해킹당하거나 업주의 악의적인 이용으로 피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4년 8월 7일부터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이 금지되면서 PC방에서의 주민등록번호 수집 역시 불법이 되었다. 이로 인해 회원가입 수단이 문자 인증으로 바뀌는 추세이나 인증으로 인한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PC방 업주들이 PC방은 더 이상 청소년유해시설이 아닌데도 학교정화구역 안에 일률적으로 설치를 금지하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다. 헌재는 PC방을 학교 근방 200m이내에 설치할 수 없다는 법규가 기본권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또한, 직업수행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노동조합 노동조합(勞動組合, , , )은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의 사회단체를 말한다. 줄여서 노조(勞組, Union)라고도 한다. 인간의 노동은 선사시대 이래 계속되어 온 것이나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 계급의 출현은 산업화 이후의 일이다. 노동자는 기업가와 더불어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기업가에 비해 매우 불리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후 자본가와 국가에 대하여 집단적인 조직체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시드니 웹(S.Webb)에 의하면 노동조합의 정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노동 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 단체"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기초가 되며, 직업·기업·산업별로 조직된다. 시드니 웹의 정의에서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계급분화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질서에 도전하기 보다는 이를 인정하면서 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등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가와 대립하는 노동자 진영의 주요 조직으로 파악한다.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의 성격을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체로서 노동자의 여러 이익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나 연합단체로 보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에 밀려 직조공과 같은 숙련 기술자들이 사라진 대신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산업화 국가의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조건에서 근로하였으나 이들은 아무런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게 되었다. 초기 노동조합 활동은 자본가와 국가의 탄압을 받았으며 법률적으로 엄금되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은 17세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결성한 우애조합, 공제조합 등이었다. 영국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조합의 결성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이들 조직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띄었다. 초기 노동조합의 주요 활동은 일정한 조합비를 걷었다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급하는 일종의 상호부조였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여러 단위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자본가들은 최악의 경우 노동조합 간부를 청부살인하는 등 악랄하고 극심한 탄압을 하였으나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1869년 결성된 노동자 기사단은 후일 세계산업노동자로 개칭하였으며 이 단체의 마더 존스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는 8만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미시건 거리에서 파업집회를 가졌다. 19세기 미국 노동자들은 10-12시간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임금삭감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석유사업 및 탄광사업가인 록펠러가 고용주인 슈일킬 탄광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문제인 임금삭감에 항의하다가 주동자들이 교수형으로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즉,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파업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한 단결이었다. 이 날 노동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경찰은 이들을 폭도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언론들도 미국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 딱지 붙이기 곧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기를 했다. 이후 제2 인터네셔널은 이날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고 결국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8시간 노동제가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 많은 노동자들의 노력끝에 1820년대 영국은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법률(단결엄금법, 18세기 제정)을 폐지하였고 노동조합 활동이 합법화되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산업화된 국가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계속되어 1890년 무렵에는 서구 열강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이 합법화 되었다. 1890년 5월 1일 첫 노동절 기념집회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어 노동조합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었다. 산업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노동운동 역시 파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겪은 일본은 1912년 일본 노동운동 역사 처음의 노동조합인 우애회(友愛會)가 설립되었고 1925년 무렵에는 457개 노동조합에 25만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친목회, 노동회, 노우회와 같은 지역합동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또한 인쇄공과 같은 숙련노동자들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세웠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동총연맹이 출범하였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노동인권 쟁취를 위한 단결투쟁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노동계에서는 부두에서 짐을 배로 실어나르는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하는 등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이 단결투쟁만이 노동인권을 쟁취하는 수단임을 깨닫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노동조합 관련 운동으로는 1929년의 원산의 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투쟁이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가 된 제3세계에서 노동조합의 독립운동 참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1930년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도 있다. 고무공장 주주들은 15~20%의 배당이익을 챙기면서도, 노동자 임금 10% 삭감을 결의하여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130원의 저임금을 받아 3~4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용자들의 임금삭감은 곧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고무노조(위원장 김유창)는 단체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업투쟁으로써 단결투쟁을 하였다.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930년 8월 7일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1개 공장 1천8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사용자들과 경찰은 대체인력 투입, 빨갱이 딱지 붙이기, 활동가 체포, 용역 불량배를 통한 폭력으로써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했으나, 노동자들은 현장복귀 거부와 선전전으로써 저항하였다. 또한 강주룡이라는 노동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미로 고공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이들의 편에 선 관리자들로부터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였으므로, 여성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탄압 및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악선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인권을 쟁취하여갔다. 1980년대 노동자들도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여갔다.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함으로써, 시간외 수당 또는 초과노동수당을 주지 않는 착취근절, 어용노조 폐지(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불량도시락 거부투쟁(1986년), 임금인상 투쟁(현대중공업)등을 실천하였다.하지만 노동조합 활동가에 대해 노무관리라는 구실로 회사에서 감시, 가압류, 임금에서의 불이익, 회유를 하여,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 열사가 분신자살을 하는 등 곧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자본에 의해 탄압되는 등 노동조합은 해결할 과제가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노동조합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들이 생겨나면서 노동조합의 영향력 역시 증대되었다. 1924년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램지 맥도널드는 최초의 노동조합 출신 영국 총리가 되었다. 또한, 1919년 국제노동기구가 설립되어 국제적인 노동 인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사회민주당의 활동과 노동조합의 활동을 전면 엄금 시키는 등 독일에서는 노동조합 운동의 큰 위기가 있기도 하였으나 2차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을 기업별로 하여 결성된 노동조합을 기업별 노동조합이라 하고 산업 직군에 따라 조직된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이라 한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산별노조라고도 한다. 산업별 노조는 산업직군 곧 하는 일이 같은 노동자들이 노동인권을 존중받기 위해 만든 노조이다. 해당 산업직군에서의 노동을 위해 구직하거나 공부하는 노동자까지도 가입할 수 있는 산업별 노조도 있다. 본문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 산업별 노조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자동차, 기계, 조선업, IT, 전자, 전기같은 금속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만든 산업별 노조이다. 금속노동자들은 정규직, 사내하청 등의 비정규직, 한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구분없이 누구나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으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은 일다니는 회사에 어용노조나 유령노조가 있더라도 회사와 단체협약 곧 노동조건과 임금에 대한 약속을 체결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건설업에 종사하거나 일하려는 노동자들의 산업별 노조이며, 산업별 노조이므로 조합원들은 단체교섭을 일다니는 회사와 체결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건설노동자는 거의 대부분 일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단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업별 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같이 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된다. 노동조합은 조직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오픈 숍의 형태로 운영된다. 클로즈드 숍의 인정은 각 나라의 법률에 따라 다르다. 영국은 산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는 반면, 미국은 1935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와그너 법을 제정하여 클로즈드 숍을 인정하였으나 1947년 새롭게 제정된 노사관계법인 테프트-하틀리 법에 의해 금지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항운노조연맹이 클로즈드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노동자, 이른바 이주 노동자들은 차별, 열악한 노동환경, 대한민국 정부의 출입국 정책 등으로 노동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므로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는 소속 조합원 노동자의 연령에 제한을 둔 대신 고용 형태나 소속기업을 따지지 않는 노동조합이 있는데, 대표적인 조직은 청년유니온이다. 청년유니온은 상위 노동조합 조직에 편성 되어 있지 않다. 전 세계 최대 노동조합 연대 기구로는 국제 자유 노동조합 연맹(ICFTU)과 세계 노동 연맹(WCL)을 합병하여 2006년 11월 결성된 국제 노동조합 연맹(ITUC)으로 전 세계 국가별 노동조합 305개, 노동자 1억 7,500만명이 151개국에서 가입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조합 국제 연대 기구는 세계 노동조합 연맹(WFTU)이 조직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다음과 같은 노동조합 연맹이 존재하거나 존재했다. E (상수) 상수 formula_1는 극한값 formula_2이다. 실수 중에서도 무리수에 속하며 초월수로 알려져 있다. 정식 용어는 자연로그의 밑이지만 로그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극한값 formula_1로 쓴다. 그 외에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이름을 따 오일러의 수로도 불리지만 오일러가 발견한 수가 많아 통용되지는 않는 편이고, 로그 계산법을 도입한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를 기려 네이피어 상수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formula_1는 π, 1, 0, i 등과 함께 수학의 중요한 상수로 취급된다. 예컨대,오일러의 공식formula_5에서 그렇다. formula_1는 다음의 극한식으로 표현되는 값이다. formula_1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formula_1는 무리수이기 때문에 십진법으로 표현할 수 없고 근삿값만을 추정할 수 있다. 소수로 나타낸 formula_1의 근삿값은 대략 다음과 같다. formula_1가 계산된 최초의 기록은 1618년 존 네이피어에 의해 발간된 로그표이다. 그러나 네이피어는 로그 계산의 과정에서 나온 결과 값만을 간단히 다루었을 뿐 formula_1를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네이피어의 로그는 formula_20 과 동치이다. 이를 오일러가 정의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로그함수 정의로 옮기면 네이피어의 로그는 인 로그함수 이다. 위의 로그에서 사용된 밑은 formula_1의 역수인 와 매우 가까운 근삿값이다. 후일 윌리엄 오트리드가 네이피어의 로그표를 사용하여 로그 계산자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formula_1를 특별한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formula_1가 특정한 상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야코프 베르누이이다. 그는 복리 이자의 계산이 다음과 같은 극한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르누이는 위의 식이 수렴한다는 것과 그것이 특정한 값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 값은 formula_1이다. 베르누이가 정리한 위의 급수를 처음으로 상수로서 표현한 사람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이다. 라이프니츠는 1690년에서 1691년 사이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 급수를 “b”로 표현하였다. 한편, 오일러는 1727년에서 1728년 사이에 이 상수를 formula_1로 표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e 라는 표기가 정식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36년 출판된 오일러의 《메카니카》이다. 그 이전에는 수학자 마다 여러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 상수를 표기하였으나 《메카니카》의 출판이후 formula_1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복리 적금의 원리합계는 다음의 식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0원을 예금하였을 때의 복리 합계는 이율에 따라 다음과 같이 계산 된다. 위의 식을 이용하면 원리합계가 목표하는 금액이 되기 위해서 얼마의 기간이 필요한 지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천원을 복리 5%로 예금할 때 원리합계가 1억원을 넘기 위해서는 236년이 걸린다. 또한, 위의 표를 보면 이율과 기간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일정 기간이 지났을 때의 원리합계는 특정한 비율을 나타내게 된다. 베르누이는 기간이 n 일때 이율을 이라 하면, 이 원리 합계의 극한이 다음과 같이 네이피어의 로그표에 사용된 밑에 점근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 로그 함수를 복소수로 확장할 경우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이 식을 지수함수로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오일러의 공식은 복소평면에서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복소수를 복소평면 위의 한 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코츠나 오일러 모두 이러한 발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소평면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복소수를 복소평면의 한 점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오일러 공식이 발표된 뒤 50여년이 지난 때부터 였다. 오일러 공식은 테일러 급수를 통해 유도될 수 있다. 아래는 오일러 공식의 유도 과정을 소개한 것이다. 절댓값이 1 보다 작은 어떤 수 x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무한 차수 다항식이 성립한다. 삼각함수 역시 위와 같은 조건을 만족하므로 다음과 같은 무한 차수 다항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 삼각함수의 무한 차수 다항식이 실제 무한히 전개된다는 것은 영국의 브룩 테일러가 증명하였기 때문에 이 전개를 흔히 테일러 급수라고 한다. 사인 함수와 코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다음과 같다. 한편 formula_35인 지수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이다. 이때, formula_37라 하면 이 테일러 급수의 전개는 다음과 같이 변환될 수 있다. 위 식에서 짝수 차수 항과 홀수 차수 항을 따로 모아 정리하면 가 된다. 위 식을 살펴 보면 실수항은 코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이고 허수항은 사인 함수의 테일러 급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오일러 공식이 성립한다. 이 때, "x"에 π 를 대입하면 이 되고, 이를 오일러의 등식이라 한다. formula_1는 대수적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없는 초월수이다. 1873년 프랑스의 수학자 샤를 에르미트에 의해 formula_1가 초월수임이 증명되었다. formula_1가 초월수임을 증명하는 방식은 귀류법에 의한 것으로 만일 formula_1가 대수적인 수라고 가정하면 다항식을 구성하는 계수가 무한히 약분되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formula_1는 무리수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다. 먼저 formula_1의 테일러 전개는 이 성립한다. 이제 formula_1를 유리수라 가정하면 양의 정수 formula_52, formula_53에 대해 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어야 하고 이 부등식의 각 변에 formula_56를 곱하면 이 된다. 한편, formula_1 = 라 가정하였으므로 이 된다. 이에 따라 formula_60와 formula_61 는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하므로 formula_62 역시 양의 정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식 (1)에서 formula_62는 0보다 크고 1보다 작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자연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formula_1는 두 양의 정수의 비, 즉 유리수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formula_1의 근삿값은 다음과 같은 연분수의 전개를 통하여 계산할 수 있다. 테일러 전개를 이용한 formula_1의 근삿값 계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를 사용하여 8차항까지 더하면 위 계산은 소수점 아래 4자리까지 유효하다. 계승이 증가함에 따라 역수는 빠르게 formula_73 에 접근하므로 몇 차례의 계산으로도 formula_1에 매우 근접한 근삿값을 구할 수 있다. 한편 formula_75인 지수함수의 테일러 급수는 이다. formula_1는 함수의 미분과 적분에서 특별하게 취급된다. formula_1에 대한 임의 차원의 지수함수인 formula_80 는 이를 미분한 도함수가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함수이다. 또한, 곡선 formula_80에 대한 formula_82 에서 formula_13까지 아래 넓이는 formula_1이다. 먼저 formula_80의 미분을 보면, 이다. 이에 대한 증명은 다음과 같은 계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오른쪽 그림과 같은 formula_90의 그래프에서 formula_82 에서 formula_13까지 아래 넓이는, formula_1를 밑으로 하는 로그인 자연로그는 여러 분야에 두루 쓰인다. 로그함수는 정의에 의해 여러 밑을 가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밑을 따로 표기하지 않은 formula_95 는 자연로그를 뜻했다. 하지만 상용로그와 헷갈리는 문제 때문에 현재는 formula_96로 표기한다. 로그함수 formula_97의 도함수는 formula_98 이다. 즉, 이고, 이다. 이는 formula_1를 밑으로 한 자연로그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수가 등차적으로 증가할 때 로그곡선의 기울기는 등비적으로 감소한다는 의미가 된다. formula_1를 밑으로 하는 자연로그는 여러가지 증정도과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연수에서 주어진 수가 충분히 클때 1에서 부터 주어진 수까지의 소수의 개수는 로그함수에 점근한다는 소수 정리가 있다. 리만 가설에서 출발한 이 정리는 1896년 프랑스의 자크 아다마르와 벨기에의 발레 푸생이 서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하여 증명하였다. 이외에도 자연로그는 물리와 화학 등 여러 자연 과학의 변화량에서 사용된다. 다음은 자연로그가 자연 과학에 사용된 예이다. formula_1와 연관된 여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문제로는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γ 가 무리수나 초월수인지를 밝히는 것인데,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고 있다. γ 는 조화 급수와 자연로그의 차에 대한 극한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formula_1의 소수 아래 첫 500자리는 아래와 같다. (줄당 100자리) 방일영 방일영(方一榮, 1923년 11월 26일 ~ 2003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경제인·기업인이며 조선일보(朝鮮日報)의 2대 회장이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까지 근무했다. 그 밖에 일신방직의 사외이사로 초빙되기도 하였고, 각종 장학 사업을 후원하였으며 1994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국의 우수 국악인들을 시상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 지원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잠시 양주군청의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의 손자이자, 이후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방우영의 형이다. 첫째 아들 방상훈은 2006년 현재 조선일보 대표이사이며, 둘째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 호텔 대표이사이다. 밤의 대통령, 밤의 황제이라는 별칭이 있다. 평안북도 박천출신으로 본관은 온양이며, 아호는 우초(愚礎)이다.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변 동문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초(愚草)이다. 본관은 온양(溫陽)이고, 본적은 경기도 의정부(議政府市)이며, 출신지는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가산면(嘉山面: 현 남신리)이다.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삼촌 방응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방재윤은 방응모의 양자가 됐고, 그는 방응모의 손자로 출생했다. 그 뒤 할아버지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1963년 의정부시로 승격)로 이주하였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교 전신)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중앙대학 예과를 졸업한 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1999년 이사 고문직을 사임할 때까지 55여 년 동안 조선일보에 몸담아 왔다. 1943년 입사, 그해 사장비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일보를 차지한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방재윤의 장남으로, 1943년 조부인 방응모의 비서로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 때가 조선일보 폐간 시점이어서 '신문 없는 조선일보사' 직원이 된 셈이다. 그러나 돈이 아까운 줄 모른다는 이유로 조부에 의해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방일영은 1944년 11월 세 살 아래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인 부친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한 해 전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당시 그도 학도병 징집 대상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방응모는 손자 방일영이 학병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설립자인 고향 후배 백인제를 불러 상의했다. 이때 백인제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에서부터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을 집도했다. 그런 뒤 방일영은 일단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를 했다.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양주군청 소속 면서기를 지냈다.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의 복간에 참여하였다. 조선일보가 복간된 뒤인 1950년 7월 사장 방응모가 납북되자 같은 해 10월 17일 취체역(이사)에 선임됐고 한국 전쟁 이후 피난했다가 휴전 후 귀환, 1954년 31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일보의 대표 취체역에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그러나 방응모의 납북 9년 뒤까지는 형식적으로 방응모가 대표였고, 조선일보의 1979년 발행분까지도 발행인은 방응모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방응모 사후 몰락한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켰다. 한독당원에 김구의 노선을 추종한 방응모는 야당 인사로 분류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어 사망하면서 조선일보는 몰락했으나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1975년 방일영장학회를 조직,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1964년 11월 15일 회장에 취임하는 동시에 동생인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조선일보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임명해 일선 경영을 맡겼으며, 1970년까지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했다. 방우영은 1970년부터 실질적인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기를 주도하게 된다. 1993년 3월에는 지병인 당뇨로 인해 조선일보 이사 고문직까지 사퇴하며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조선일보 재직기간 중이던 1980년대 조선일보를 급팽창시켜 발행유가부수 1위의 신문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과정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큰 밑바탕이 됐고, 코리아나 호텔 특혜 의혹 등 적잖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선거 등 주요한 정치전환기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족벌언론' 논란에 휘말려있는 상태다. 1975년 방일영의 사재(私財) 출연금으로 '방일영장학회'를 법인으로 발족했다. 방일영은 방우영과 형제가 보유한 15%를 재단의 기금으로 새로 출연하고, 20년간 운영되어 왔던 '방일영장학회'의 장학기금 15억 여원을 합해 그 해 11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방일영장학회(재단)을 설립했다. 방일영장학회는 1974년부터 서울대·연대·고대 학생들을 매년 10여명 선발해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급해 왔다. 지금까지 3백3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고, 최근에는 대학원생에까지 수혜 폭을 넓혔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서중회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조선일보 회장직을 사퇴, 회장직을 동생 방우영에게 넘기고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되었다.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1994년 방일영국악상 등을 제정하여 우수 국악인을 발굴하여 직접 포상하기도 했다. 그 밖에 온양방씨 중앙종친회 제3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에 대한 후원사업을 주관했다. 1999년 일신방직 사외이사에 선임되었고, 동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그해에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조선일보사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2003년 8월 8일 새벽 2시 5분경 서울대 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만81세였다. 8월 8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그 날 오후, 이복 숙부 방재선이 가족을 데리고 빈소에 조문하러 왔다가 상주들로부터 조문거부를 당하고 강제로 추방되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6월 충남 아산시 용화동 '온양방씨(溫陽方氏) 중시조신단묘원'에 방일영 송덕비가 세워졌다. 언론문화의 창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비판으로는 제3공화국, 4공화국 당시 밤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권언유착에 가담한 장본인의 한사람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 밖에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2001년 9월 숙부 방재선으로부터 호주상속권 소송을 당했다. 그러나 법원은 서자와 양손자가 있을 경우 양손자에게 호주상속권이 적용된다며 방일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방일영은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다. 사후의 유산다툼에서 장남 방상훈의 변호사는 '잘 아시겠지만, 선대 회장님은 대한민국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이라고 말했다. 사후 일부 혼외자들이 조선일보와 방일영의 혼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장남 방상훈은 독립운동가 겸 계몽운동가 윤치호의 증손녀이자 철도청 부이사관 윤영구의 딸 윤순명과 결혼했다. 혼내자 3명(1녀 2남), 혼외자 6명(첫 번째 간통상간녀 3남, 두 번째 간통상간녀 2녀 1남)이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줄여서 FSF)은 미국의 자유 소프트웨어 관련 재단이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리처드 스톨만이 세운 재단으로, 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배포하고 수정하는 보편적인 자유를 제고한다. 설립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기금은 GNU 프로젝트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고용하는데 대부분 사용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이 재단의 직원들과 자발적인 기여자들은 대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과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를 위한 법적,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작업을 처리하고 있다. 2002년 11월 25일,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연합 멤버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목표를 지속하기 위해 오직 자유 소프트웨어만이 FSF의 컴퓨터에 사용된다. 자유 소프트웨어 자유 소프트웨어()는 복사와 사용, 연구, 수정, 배포 등의 제한이 없는 소프트웨어 혹은 그 통칭이다. 소프트웨어의 수정 및 수정본의 재배포는 인간이 해독 가능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소스 코드는 GPL 등의 라이선스를 통하거나, 혹은 극히 드물게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되기도 한다.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은 초창기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1983년에 시작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자유 소프트웨어 대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자유로운 사용을 강조하는 대신 기술적인 면에 치우친 용어라는 점에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용어 대신 "자유 소프트웨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독점 소프트웨어 혹은 비자유 소프트웨어 등의 용어도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완전히 무료로 또는 최소한의 금액만을 받고 자유롭게 배포되어야 하며 자유 소프트웨어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대개 고객 지원이나 커스터마이징 등을 통한 것들이다. 반면 독점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비즈니스 모델들은 사용자가 합법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한 허가를 위해서 반드시 일정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 소프트웨어와는 맞지 않는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이제 거대한 전 세계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었으며, 개인 및 거대 단체와 정부 기관 등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파치 웹 서버나 MySQL 데이터베이스, PHP 스크립트 언어 같은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서버 측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완벽히 자유로운 컴퓨터 환경은 리눅스나 FreeBSD 등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들을 기본으로 한 많은 패키지들을 통해서 구성할 수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웹 브라우저나 오피스 제품군 혹은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등의 거의 대부분의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들을 자유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많은 영역에서 개인 사용자를 위한 이런 소프트웨어들은 경쟁 독점 소프트웨어들에 비해 미미한 시장 점유율만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자유 소프트웨어들은 온라인으로 무료로 제공되거나, 오프라인으로 적당한 가격으로 배포된다. 그러나 이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경제적 가능성은 IBM이나 레드햇,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등의 거대 회사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주력 산업이 IT 영역이 아닌 많은 회사들이 인터넷의 홍보 및 판매 사이트를 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 소프트웨어를 선택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이외의 산업에서도 그 연구와 개발을 위해서 자유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좀 더 공개된 개발 과정을 생각하고 있었고, 마이크로칩과 같은 하드웨어들은 카피레프트 라이선스가 적용된 명세서와 함께 개발되기 시작했다.(오픈코어 프로젝트를 참조.) 크리에이티브 커먼스나 자유 문화 운동 등의 움직임들도 또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례이다. 자유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유에 무게중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자유는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유롭게 이용함을 말한다. 자유에는 일정한 책임이 따르게 된다. 자유롭게 이용하더라도 출처를 밝히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유는 본인 혼자서 자유롭게 쓴다 하더라도 결국 재생산, 재배포 등의 활동이 수반될 수 있기 때문에 책임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자유는 결국 책임을 수반한다고 보고 책임을 다하는 것은 출처를 밝히고 사용조건을 준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의는 남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최소한의 조건을 이행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컴퓨터 사용자들은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하게 소프트웨어를 서로 공유했고,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하드웨어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들이 제작되는 것을 기꺼워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복제권을 법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여, 사용자들이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거나 수정하지 못하도록 바이너리 형태로만 배포하는 등의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은 컴퓨터 산업의 이러한 변화에 저항해 GNU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84년에는 GNU 운영 체제의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1985년 10월에 설립되었다. 그는 카피레프트를 주창하며 자유 소프트웨어의 정의를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소프트웨어로 소개하였다. 1991년에는 핀란드에서 리누스 투르발스가 리눅스를 발표하였고 이것이 GNU 프로젝트에 통합되면서, 자유 소프트웨어 커뮤니티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eneral Public License, GNU GPL 또는 GPL)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만든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로, 소프트웨어의 실행, 연구, 공유, 수정의 자유를 최종 사용자에게 보장한다. 대표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이용하는 사용 허가이다. GPL은 가장 널리 알려진 강한 카피레프트 사용 허가이며, 이 허가를 가진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 파생된 프로그램 역시 같은 카피레프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철학에서 GPL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자유 소프트웨어의 권한을 누리며 카피레프트를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자유가 보전되고, 이전 작업 내용을 수정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는 것도 허용됐다. 이는 허용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사용 허가로서, BSD 사용 허가가 대표적인 예이다. GNU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The 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 LGPL)는 이를 변형하여 더 허가된 형태로서,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GNU FDL)은 GNU 소프트웨어에 대한 문서의 사용 허가로 시작하였으나 위키백과 프로젝트와 같이 다른 문서 형태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이 허가서는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 등에서만 법원의 판단 등으로 합법한 허가서로 인정받았고,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에 따른 법률적 판단을 받은 바 없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직접 이 허가서가 합법한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없었으며, 다만 허가서라는 특성상 준법행위를 하는 다수는 분쟁없이 이 허가서의 제약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한 차례 법원의 판단을 받을 뻔했던 엘림넷과 하이온넷 사건이 있었으나, 회사 기밀 유출 사건으로 형사기소되는 바람에 중요 쟁점일 수 있었던 GPL에 대한 판단은 형사법원에서 다루지 않고 다른 이유로 1, 2심 법원에서 유죄를 판결, 최종 확정한 바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적어도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통해 표준 약관심의 따위를 받아 확정지을 필요가 있으며,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표준 허가서가 부당하다는 법률적 판단도 없으므로, 이 허가서의 조건을 위반할 시 저작자로부터 기소당할 수 있다.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는 누구에게나 다음의 다섯 가지의 의무를 저작권의 한 부분으로서 강제한다. GPL은 미국의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이 GNU-프로젝트로 배포된 프로그램의 라이선스로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이것은 Emacs, GNU 디버거(GDB), GNU 컴파일러 모음(GCC)에서 사용된 라이선스의 초기 판의 통합에 기반하고 있다. 이 라이선스들은 현재 GPL과 비슷한 조항들이 있으나, 각각의 프로그램 고유의 라이선스였다. 스톨만의 목표는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라이선스를 만들어서 여러 프로젝트에서 코드를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저작권의 형태로서 GPL이 1989년 1월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1990년에 이르자 몇몇 라이브러리에서 전략적으로 규제를 약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에 대한 조치로 라이브러리-GPL(LGPL,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1991년 6월에 배포된 GPL의 두 번째 판을 따라 LGPL도 두 번째 판으로 같은 번호를 붙여서 두 라이선스가 상호보완적임을 나타내었다. 1999년에는 "LGPL"은 약소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Lesser General Public License)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되면서 2.1판으로 숫자를 바꾸게 되었다. GPL은 오늘날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고 있으며, 대부분의 GNU 프로젝트는 GPL과 LGPL의 규준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모든 LGPL의 규준에 따르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는 동시에 GPL의 규준에 따르고 있다. GPL의 버전 1은 1989년 1월에 발표되었다(GPLv1 전문). 이것은 자유 소프트웨어에서의 두 가지 중요한 자유를 보장해 주었는데, 하나는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지 않은 채 바이너리 파일만 배포하는 것을 막는 경우로 이것을 막기 위해 GPLv1에는 프로그램을 GPLv1로 배포할 때는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소스 코드를 같이 배포해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프로그램에 추가적인 제약을 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GPLv1 프로그램을 수정한 프로그램은 원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GPLv1을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갔다. GPL 버전 2는 1991년 6월에 발표되었다(GPLv2 전문). 중요한 변경 사항은 "자유냐 죽음이냐"Section 7에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GPL 프로그램을 배포하는 것을 막는 조건, 예를 들어 특허로 인하여 추가적으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여 소스 코드의 공개가 불가능하고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만 배포하려고 한다면 소스 코드 뿐만 아니라 실행 바이너리 프로그램조차 배포할 수 없도록 보완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에 대해서는 조금 약화된 GPL 라이선스가 전략적으로 더욱 유용하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이에 대한 내용을 LGPL(the Library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하여, 1991년 6월에 발표된 GPLv2와 동시에 같이 발표되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은 1999년 LGPL v2.1로 발전되었고 LGPL(GNU Lesser General Public License)이라고 불렀다. GPL 버전 3은 2007년 6월 29일에 발표되었다. 2005년 후반에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GPL의 세 번째 판을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6년 1월 16일 첫 번째 초안이 발표되었다. 2판과 다른 점도 비공식적으로 나와 있다 . 2006년 2월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FOSDEM 발표에서 리처드 스톨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6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은 GPL의 바뀔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열두달간의 공공자문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 소프트웨어 자유 법률 센터, 유럽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의견을 조정했다. 2001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인 스티브 발머가 "건드리는 모든 지적 재산권에 퍼지는 암같은 존재(a cancer that attaches itself in an intellectual property sense to everything it touches)"라며 비판했다. 2009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GPL 라이선스를 위반한 하이퍼V의 컴포넌트의 소스코드 20,000여줄을 공개했다. 일본어 일본어(, )는 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줄인 말로 일어(日語)라고도 한다. 문자는 히라가나 가나와 한자()를 사용한다. 일본의 사실상 법적 공용어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일본어를 모어로 한다. 일본어의 문법 체계나 음운 체계를 반영한 수화로는 일본어대응수화가 있다. 사용 인구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일본 국내의 인구 및 일본국 국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계 외국인, 일본에는 약 1억 4천만 명 이상이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통계에 따라 수치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수치가 맞다면 일본어는 모어 화자 수순 언어 목록에서 상위 10위 이내에 드는 언어다.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언어별 사용자 수에서 일본어는 아홉 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다. 일본어의 음운은〈〉와〈〉을 제외하고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 언어의 성격이 강하고, 또한 표준어를 포함해 많은 방언이 모라를 가지고 있다. 악센트는 고저 악센트를 띤다. 이와 더불어 본래의 옛 일본어인 야마토 고토바()에서는 원칙적으로 등의 특징이 있었다. 문장은 주어 - 수식어 - 술어의 어순으로 구성된다. 수식어는 피수식어의 앞에 위치한다. 또한 명사의 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순이나 어미를 바꾸는 것이 아닌 문법적인 기능을 나타내는 기능어(조사)를 뒤에 덧붙인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언어유형론 상에서 어순적으로는 SOV형의 언어로, 형태적으로는 교착어로 분류 된다. 어휘는 옛날의 야마토 고토바 이외에 근대 이후에 들어서는 서양어를 중심으로 하는 외래어가 증가하고 있다. 대우 표현으로는 문법적, 어휘적으로 발달한 경어 체계가 있으며, 서술되는 인물간의 미묘한 관계 차이를 나타낸다. 일본어는 지방별로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특히 류큐 제도의 방언은 다른 방언들과 차이가 두드러진다. 근세 중기 까지는 교토 방언이 중앙어의 지위에 있었지만 근세 후기에는 에도 방언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의 현대 일본어에서는 도쿄의 야마노테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언(야마노테코토바)을 기반으로 표준어(공통어)가 형성되었다.(〈표준어#일본〉문서 참조) 표기 체계는 그밖의 여러 언어들에 비해 복잡하다. 한자(국자를 포함한다. 음독 및 훈독으로 읽는데 쓰인다.)와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일본어에 쓰이는 주요 문자이며, 항상 이 세 종류의 문자를 짝지어 표기한다. 그밖에 로마자나 그리스 문자(의학・과학용어에 주로 이용) 등도 자주 쓰인다. 또한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병용된다.(표기 체계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일본어의 표기 체계〉문서 참조) 음운은〈자음+모음〉음절을 기본으로 하며, 모음은 다섯 종류 밖에 없는 등 알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진 한편, 직음()과 요음()의 대립,〈1음절 2모라〉의 존재, 무성화모음, 말의 구조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고저 악센트 등의 특징이 있다. 일본어는 주로 일본에서 쓰인다. 일본어 사용 인구에 대한 조사는 일본국 국내외를 불문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본국의 인구 수가 곧 화자 인구수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어를 직접적으로 일본의 공용어 내지 국어로 정하는 법적 규정은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법령은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재판소법에서는 “재판소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한다.”(동법 74조)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문자·활자문화진흥법에서는 “국어”와 “일본어”를 동일시한다(동법 3조, 9조). 그밖의 많은 법령에서도 일본어가 유일한 공용어 및 국어임이 당연한 전제로 깔려 있다. 또한 법문 뿐만이 아닌 공용문은 모두 일본어만 쓰이며, 일본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가 “국어” 과목으로서 교육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TV나 라디오, 영화 등의 방송, 소설이나 만화, 신문 등의 출판 분야에서도 대부분 일본어가 쓰이고 있다. 일본국 외의 드라마나 영화가 방송되는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자막이 달리거나 음성이 일본어로 더빙되어 방송되는 등 시청자 및 청취자가 일본어만은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자막이나 더빙이 달려 방송된다. 외국어 그대로 방송되거나 출판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해외로 발표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논문이나 혹은 일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또는 외국어 학습자 등 한정된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대다수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일본 외에서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파라과이 등)나 하와이 등의 일본인 이민자 사이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관찰되지만, 일본계 사람의 3세, 4세로 세대가 내려 갈수록 비 일본어 화자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패전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한반도, 타이완, 구 만주국 영토, 사할린 섬, 남양 제도(현재의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등의 지역에서 일제 당시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중 현재에도 일본어를 기억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조사도 있다. 타이완에서는 타이완 원주민이 다른 부족과 대화할 때 일본어가 종종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팔라우의 앙가우르 주에서는 일본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채용하고 있지만 현재 앙가우르 주 내에는 일본어를 일상 회화에 쓰는 주민은 존재하지 않아 실질적인 주 공용어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국과의 우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요소로만 남아 있다. 일본국 외의 일본어 학습자는 대한민국에 약 96만명, 중화인민공화국에 약 83만명, 인도네시아에 약 72만명을 비롯해 365만명에 이르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학습자 수가 전체 학습자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 교육이 행해지는 지역은 125개국과 8지역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일본국 국내의 일본어 학습자는 아시아 지역의 학습자 약 14만명을 중심으로 약 17만명에 이른다. 일본어를 포함하는 일본어족의 계통은 분명하지 않다. 계통에 관한 몇가지 이론과 가설이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의견이 모이지 않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설은 메이지 시대 말부터 특히 주목받았다. 이러한 설의 근거로는 고대 일본어(야마토 고토바)의 어두에 r음(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 가 보이는 점 등이 있다. 다만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 자체는 언어간의 친족 관계가 증명되어 있지 않아 고대 일본어에 위와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 일본어가 유형상〈알타이형〉언어 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남방계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는 음운 체계나 어휘가 유사하다고 지적되고 있지만, 그러한 예시가 충분치 않고 단순한 추정이나 불확정된 예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드라비다어족과의 관련을 주장하는 설도 있지만 이를 인정하는 연구자는 적다. 오노 스스무는 일본어의 어휘나 문법 등이 타밀어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설을 주장하지만 비교언어학의 방법상의 문제로 인해 비판이 많다. 아이누어는 어순(SOV형)에 있어서는 일본어와 유사하지만 문법과 형태는 유형론적으로 일본어와는 다른 포합어에 속하며, 음운 구조도 유성, 무성의 구별 없이 폐음절이 많은 등의 차이가 있다. 기초 어휘가 유사하다는 지적 도 있지만, 그 예시가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닮아있는 아이누어 중에는 일본어에서 아이누어로 간 차용어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계통적 관련성을 나타내는 자료는 부족하다. 한국어는 문법 구조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기초 어휘가 크게 차이난다. 음운면도 고유어에 있어서 어두에 유음이 오지 않는 점, 일종의 모음조화가 보이는 점 등 앞에서 언급한 알타이어족과 공통되는 유사점이 있는 반면, 폐음절이나 자음 연결의 존재나 유성 및 무성의 없는 점 등 일본어와는 큰 차이도 있다. 한반도의 사어인 고구려어와는 수사 등 유사한 점이 있다고 일컬어지지만, 고구려어의 실태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 시점에는 계통론상의 판단 자료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렙차어, 히브리어 등과의 동계론(同系論)도 과거 존재 했지만, 대부분 의사언어비교의 범주에 머물렀다. 난세이 제도(구 류큐국 영역)의 언어는 일본어와 계통을 같이 하는 언어 중 하나(“류큐어” 내지 “류큐어족”)로 간주해 일본어와 한데 모아 일본어족으로 보는 관점과 일본어의 방언 중 하나(“류큐 방언”)로 보는 관점이 있지만, 연구자와 견해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일본어는 크게 오사카와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서일본 방언()과,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동일본 방언()으로 크게 양분된다. 이즈 제도 남부에는 고대어 표현이 많이 남는 독특한 방언이 있어, 하치조어()라고 불린다. 방언에 관한 일본국의 문헌적인 기록은 현존하는 일본국의 최고의 시가집인 만요슈에서 나오는데 여기에는 아즈마 지방(현재의 간토 지방)의 방언의 노래가 있다. 나라 시대에도 이미 나라 지방을 중심으로 중앙어와 그 외 지역의 방언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국의 방언 연구는 에도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동일본 방언에는 도호쿠 방언, 간토 방언, 나고야 방언 등의 주부 방언이 있고, 서일본 방언에는 호쿠리쿠 방언, 긴키 방언(간사이 방언), 히로시마 방언 등의 주고쿠 방언, 시코쿠 방언, 하카타 방언 등의 규슈 방언 등 수많은 지역성이 강한 방언이 존재한다. 특히 오사카의 방언은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온화한 인상의 도쿄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준어에 비해 오사카는 해상 교통이 있는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오사카 방언은 활발한 억양이 특징이다. 교토 방언은 ‘위쪽 말’()이라고도 하는데 수도가 오랫동안 교토에 있었다가 도쿄에 옮겨졌기 때문에 품위 있고 격조 높은 말로 여겨져 왔다. 도쿄 방언은 거의 표준어에 가깝기 때문에 표준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래 에도 방언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히)와 (시)의 발음의 구별이 되지 않는 등 표준어와는 다르다. 홋카이도 방언도 거의 표준어에 가깝지만 특히 형용사 등에 홋카이도 특유의 방언이 포함된다. 현재 공식 장소 등에서는 평상시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표준어를 이용한다. 일본어 음소는 /m/, /n/, /p/, /b/, /t/, /d/, /k/, /g/, /s/, /z/, /h/, /r/, /y/, /w/, /N/, /Q/가 있다. 일본어는 고저 악센트를 가진 언어이다. 일본어에서는 보통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 등 세 종류의 문자를 주로 사용하여 표기되며, 그 밖에 로마자와 아라비아 숫자도 함께 사용한다. 이들 가운데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표음문자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전통적으로 메이지 시대 초반까지는 일본어의 맞춤법에서는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고 히라가나만을 사용하거나 교육용 문서에서는 단어 사이에 공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구두점 등을 사용할 때도 서양의 문장 부호들(따옴표, 물음표, 느낌표, 온점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오늘날 현대에는 대부분의 공문서와 사문서 모두 단락 부호로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 및 (한국어 맞춤법의 ‘.’에 해당)이 넓게 이용되고 있다. 1951년 10월 30일, 일본국의 국어심의회 건의 제3의 5의 주2에서는 ‘,’및 ‘.’를 사용하도록 가이드라인이 짜여졌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준수되고 있지 않다. 아래는 일본어의 오십음()이다. '[  ]'의 안은 국제 음성 기호(IPA) 표기이다. 일본어에는 본래 일본어의 고유어인 야마토 고토바가 있었고, 한자는 뒤에 중국에서 직접 전해지거나 혹은 한반도 서해안(특히 백제 또는 고구려)을 경유하여 전래되었다. 한자를 읽을 방법은 크게, 한자와 함께 전해진 한자 본래의 음에서 온 음독( 또는 )과, 그 한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야마토 고토바()의 발음을 적용시켜 발음하는 훈독( 또는 )으로 나눌 수 있다. 같은 한자도 음독이나 훈독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일본어에서는 하나의 한자에 여러개의 발음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生”(날 생)에는 47종류의 발음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水”(물 수)를 '수'라고는 읽지만 '물'이라고는 읽지 않는데, 그에 반해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스이(すい)'라고도 읽고 훈독으로 '미즈(みず)'라고도 읽는다.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는 “金”(쇠 금, 성 김)을 '금'으로, 성씨로 쓰일 때 한정으로 '김'이라고는 읽으나, '쇠'라고는 읽지 않는데, 일본어에서는 음독으로 '킨(きん)' 혹은 '콘(こん)'으로도 읽고 훈독으로 '카네(かね)'라고도 읽는다. 한자의 위(세로쓰기에서는 오른쪽)에 작은 크기의 가나로 발음을 적은 것을 후리가나라고 한다. 후리가나를 붙일 때는 읽는 독음이 온요미인지 쿤요미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온요미의 경우에는 가타카나로, 쿤요미의 경우에는 히라가나로 붙이는 게 정석이나, 구별이 필요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상관없이 히라가나로 표기하기도 한다. 만요슈에는 한자를 차용하여 표음문자처럼 이용한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일본어와 가나를 외우기 위한 방법으로 이로하 노래()가 있다. 여기에는 "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한 번씩 들어 갔으며, 일부 변형에는 "도 들어가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 노래의 순서대로 가나의 순을 매기기까지 했었고 현재까지도 종종 쓰인다. 이런 종류의 문장을 팬그램이라 부른다. 그 밖에 이전에도 비슷한 방법으로 아메쓰치노우타나 대위이 노래등이 있었다. 다음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일본어 표현들이다. 로마자 표기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7세기 이전에도 교류가 있어서 일본어를 접한 건 오래되었다. 제국주의시대 에는 강제로 교육시켜 일본 국왕을 찬양하게 강요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된 것은 조선 말기이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정부 수립 이후였다. 1970년대 초에 고등학교 교과목에 일본어가 제2외국어 중 하나로 추가되었고, 2001년에는 '생활 일본어'가 중학교 교과목에 포함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 수험생들은 수능 시험 때 일본어 I을 선택할 수 있다. 허수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는 실수가 아닌 복소수를 뜻한다. 실수의 특성상, 제곱하면 무조건 0 또는 양수가 되기 때문에 이차방정식 formula_1을 실수의 범위에서 해를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한 수직선에 모든 실수를 하나하나 대응시키면, 수직선은 빈틈없이 채워지는 것으로 볼 때,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수는 실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formula_1 꼴과 같이 실수 범위에서 전혀 구할 수 없는 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수의 성질로는 불가능한 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수를 만들어내기위해 제곱하여 -1이 되는 수 formula_3를 만들어내면, 위의 이차방정식의 해는 formula_4또는formula_5이 되므로 이 수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이 수가 수학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허수로 정의했고, formula_3만 있으면 모든 허수들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 수를 imaginary number의 앞글자를 따서 허수 단위 formula_7라고 정의했다. 복소수는 실수와 허수를 포괄하는 수이며, formula_8 (단, a, b 는 실수)로 나타낼 수 있고, 이때 a를 실수부, b를 허수부라 한다. b가 0일 경우 위의 수는 실수가 되고 0이 아닐때에는 허수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양수는 음수, 유리수는 무리수로 대응되는 것처럼 실수는 허수와 대응되는 관계가 있다. 허수는 단순히 억지로 만들어진 수가 아닌, 어떤 한 성질이 있는 수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수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수이다. 또한, 허수는 기존에 있었던 수직선, 실수축(가로)에 허수축(세로)를 덧붙여 복소수평면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허수가 정의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의 개념은 1차원적이었다. 즉, 수의 개념은 오직 수직선으로만 표현되었다. 그러나 허수가 정의된 후, 수의 개념은 2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즉, 수의 개념은 복소평면으로 표현된 것이다. 수의 틀을 직선에서 평면으로 확장시킨 것은 모두 허수의 덕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허수로 인해 수의 틀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또 새로운 어떤 수가 발견되어 수의 틀이 입체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듯 허수의 발견은 복소수와 대응되는 수가 언젠가 누군가의 필요로 인해 만들어질 것임을 알려주는 위대한 발견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헤론은 거듭제곱하여 음수가 되는 수에 대한 개념을 기록한 바 있다. 1572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파엘 봄벨리가 허수 단위를 정의하였다. 이후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의 부록 〈기하〉()에서 상상의 수(imaginary numbers)라고 부른 데에서 허수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허수라는 이름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오일러는 허수 단위 기호로 formula_7 를 도입하였다. 또한 오일러는 이것을 방정식formula_10 일때 이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때 사용하였다. 1799년 카스파르 베셀이 복소수의 기하학적 표현을 완성하였다. 1843년 윌리엄 로언 해밀턴은 복소수를 확장하여 사원수 체계를 만들었다. 미국 수학에서 허수란 formula_11 형태, 즉 순허수이다. 즉 실수에 허수단위 formula_12가 곱해진 형식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제곱하면 음수가 된다. 한 평면상에 직교 좌표계를 정하고 이에 대한 한 점 Z 의 위치 (x, y)를 formula_13로 정하여 복소수를 평면상의 점으로 표시할 수 있다. 이 때, 좌표와 복소수는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 또한, 이렇게 나타낸 점 Z(x,y)는 극좌표를 사용하여 원점에서 부터 점 Z 사이의 반지름과 각도로서도 나타낼 수 있다. 즉, 가 된다. 한편, 왼쪽의 그림과 같이 실수부는 같고 허수부의 부호만 반대인 formula_15 와 formula_16 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켤레복소수(복소켤레)라고 한다. 켤레 복소수는 극좌표에서 반지름이 같고 x축에 대해 대칭인 점이 된다. 복소평면에서 허수의 위치를 극좌표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으므로, 임의의 단위 원을 그려 복소수와 삼각함수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1714년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는 자연로그가 다음과 같은 삼각함수의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740년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이 식을 지수함수로 변형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었다. 이를 오일러의 공식이라 한다. 수 체계에서 허수는 복소수와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복소수체라고 하며 formula_19 로 나타낸다. 선형대수학 선형대수학(線型代數學, )은 벡터 공간, 벡터, 선형 변환, 행렬, 연립 선형 방정식 등을 연구하는 대수학의 한 분야이다. 현대 선형대수학은 그중에서도 벡터 공간이 주 연구 대상이다. 추상대수학, 함수해석학에 널리 쓰이고 있다.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에도 널리 활용된다. 선형 연립방정식을 푸는 좋은 방법으로는 소거법과 행렬식이 있다. 선형대수학은 2차원 혹은 3차원의 직교 좌표계에 대한 연구로 부터 시작되었다. 선형대수학에서 기본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통 3차원까지의 벡터는 그림 등으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벡터는 벡터의 각 구성요소를 괄호 안에 나열함으로써 표기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수학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선형대수학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데, 선형화 혹은 선형 근사를 통해, 복잡한 비선형 방정식 문제를 간단한 선형 방정식 문제로 변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형대수학의 선형성()이라는 성질은 직관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formula_1(formula_2는 상수를, formula_3는 변수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선형성은 변수의 지수승(formula_4)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차함수(formula_5)와 같은 형태를 가리킨다. 선형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비선형이 있는데, formula_6 등 일차함수와 같은 형태의 성질을 만족시키지 않는 함수들을 가리킨다. 선형의 직관적인 이해는 일차함수와 동일시해서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선형의 엄밀한 의미는 일차함수보다 더 확장된다. 수학적으로 정확한 선형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정의역 formula_7에서 임의의 원소 formula_8를 치역 formula_9에 대응시키는 연산 formula_10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만족시킬 때 "선형"이라고 한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예를 들어 일차함수 formula_13를 생각해보자. formula_14로 (1)번 조건을 만족시키고 formula_15로 (2)번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이 함수는 선형이다. 이차함수 formula_16의 경우에는 formula_17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다른 선형연산의 예로는 회전변환, 원점을 지나는 직선에 대한 대칭변환, 어떤 벡터 공간에 대한 수직입사 등이 있다. "선형"이라는 성질은 행렬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연산이 선형이라면 그것은 행렬로 표현이 가능하며, 어떤 행렬은 반대로 어떤 선형연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선형대수학의 행렬이론은 수학의 이론뿐만 아니라 물리학, 전자공학, 컴퓨터 그래픽, 기계공학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학부과정에서 가르치는 선형대수학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이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가르치는 내용이며 각 학교마다 비중있게 다루는 부분이 다를 수 있고 내용을 추가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 커널 (컴퓨팅) 컴퓨터 과학에서 커널()은 컴퓨터의 운영 체제의 핵심이 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하나로, 시스템의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 운영 체제의 다른 부분 및 응용 프로그램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핵심(核心)이라고도 한다. 커널은 운영 체제의 핵심 부분이므로, 커널의 역할 역시 운영 체제의 핵심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초창기의 컴퓨터에서 운영 체제 커널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초기의 프로그램은 하드웨어 추상화나 운영 체제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컴퓨터만으로 불러들인 다음 실행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초창기 컴퓨터들의 일반적인 운영 방식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가 켬으로써 다시 입력자료를 읽어들여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로더와 디버거 같은 작은 프로그램들이 상주해 있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으로 교체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로더, 디버거들이 초기 운영 체제 커널의 기초가 되었다. 단일형 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을 정의한다. 높은 수준의 가상 계층은 기본 연산 집합과 관리자 모드에 작동하는 모듈인 프로세스 관리, 동시성, 메모리 관리 등의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 콜으로 되어 있다. 이 연산들을 제공하는 모든 모듈이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더라도 모든 모듈이 같은 주소 공간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코드의 집적도는 매우 조밀하며 수정하기 어렵고 한 모듈의 버그는 시스템 전반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현이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면 구성 요소의 내부 집적이 내부의 시스템 이용을 효과적이게 하여 좋은 단일형 커널은 높은 효율을 보인다. 단일형 커널의 지지자들은 코드의 정확성 여부와 그런 코드(부정확한 코드)가 커널에 포함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은 마이크로커널에 비해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리눅스, FreeBSD, 솔라리스와 같은 최신의 단일형 커널은 실행 모듈을 실시간으로 읽어들일 수 있다. 실시간으로 실행 모듈을 읽는 특징은 커널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손쉽게 확장할 수 있게 커널 공간의 코드의 양을 최소한으로 유지시켜 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NT 제품군(NT, 2000, XP, 2003, 비스타,7,8,8.1,10)은 처음에는 혼합형 커널이었으나 나중에 나온 것들은 단일형 커널로 바뀌었다. 윈도 NT 시리즈는 상위의 서비스들을 NT executive이라는 서버로 구현하였다. Win32 특성은 처음에는 사용자 모드의 서버 형태로 구현되었으나, 최근 버전에서는 관리자 주소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다양한 서버들이 로컬 프로시저 콜(LPC: Local Procedure Call)이라 불리는 주소 영역간 매커니즘을 통해 통신하며, 성능을 최적화하기 위해 공유 메모리를 이용한다. 주로 다음 운영 체제들의 커널이 단일형 커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커널은 하드웨어 위에 매우 간결한 추상화를 정의한다. 기본 연산 집합과 운영 체제 서비스를 구현한 스레드 관리, 주소 공간, 프로세스간 통신의 작은 시스템 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커널이 제공하는 네트워킹과 같은 다른 서비스들은 사용자 공간 프로그램인 서버로 구현한다. 운영 체제는 서버를 다른 일반적인 프로그램처럼 간단히 시작하고 끌 수 있다. 이를테면 네트워킹 지원이 필요 없는 작은 시스템에서는 간단히 서버를 끄면 된다. 이 경우 전통적인 시스템에서는 재컴파일이 필요했고 일반 사용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론적으로 마이크로커널에서 시스템은 더 안정적이다. 서버가 중단될 때 커널의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 내려버리면 된다. 그러나 서버가 실패한 후 시스템 상태도 잃어버릴 경우 응용 프로그램이 계속 수행되는 것은 그 응용 프로그램이 막 복사된 다른 서버를 이용하게 되더라도 보통은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TCP/IP 연결을 요구하는 (이론적인) 서버가 다시 시작되면 응용 소프트웨어는 연결이 "끊어졌습니다."라고 말하고 서버의 새 인스턴스를 찾아서 다시 연결한다. 그러나 파일과 같은 다른 시스템 객체는 이렇게 편리한 의미론이 없다. 이러한 편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기록할 정보들은 모두 미리 보관해 두어야 한다. 서버 간의 하나의 서버를 다시 시작할 때 중요 상태를 보호하기 위해 트랜잭션, 복제, 대조점의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은 전통적인 디자인의 수행을 잘못하고 때로는 극적이다. 이유는 응용과 서버 간의 자료 교환을 위해 커널을 출입하는 문맥 교환 때문이다. 주의 깊은 조율이 오버헤드를 극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믿어져 왔으나 90년대 중반부터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시도를 포기했다. 최근에 새 마이크로커널은 성능을 최우선으로 설계하며 이 문제를 넓은 부분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현재 운영 체제 시장은 자기 몸 사리며 마이크로커널 설계에 소극적이다. 마이크로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기반한 운영 체제의 예 혼합형 커널은 본질적으로 마이크로커널을 따르나, 일부 커널의 비(非)본질적 기능이더라도 사용자 레벨에서 수행될 때 성능상 느린 코드들을 커널 레벨에서 수행하도록 수정한 것을 말한다. 이는 다양한 운영 체제 개발자들이 마이크로커널 기반의 설계를 받아들이던 시점에 순수한 마이크로커널의 성능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협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OS X의 커널인 XNU는 Mach 커널 3.0 마이크로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통적인 마이크로커널 설계의 지연 현상을 줄이기 위해 BSD 커널의 일부 코드들을 들여와 동일한 주소 영역에서 실행하고 있다. DragonFly BSD는 첫 번째 비 Mach 기반의 BSD OS로 혼합형 커널 구성을 적용한 예이다. 하이브리드 커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혼합형 커널이라는 말을 부팅 후에 모듈을 읽어들일 수 있는 단일형 커널과 혼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혼합형 커널은 단일형 커널과 마이크로커널 설계 양쪽의 구조적 개념과 작동방법에 대한 특히 메시지 전달과 어떤 중요하지 않은 코드는 사용자 공간에 들어가는 반면 어떤 코드는 성능의 이유로 커널 공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엑소커널은 운영 체제 설계에 대한 급진적인 신개념으로 말단 이론을 따르는 수직 구조의 운영 체제이다.엑소커널의 구상은 개발자에게 강제적인 추상화를 줄여 하드웨어 추상화에 대해 선택지를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엑소커널은 기능이 보호를 보장하는 것과 자원을 분배하는 것만 하기에 매우 작아 편익보다 단순함을 제공한다. 이런 특성은 오히려 모든 사용자가 각기 실제 호스트 컴퓨터의 자원을 모방한 컴퓨터를 받는VM/370 운영 체제와 비슷하다. 반면에 모놀리식 커널이든 마이크로 커널이든 전통적인 커널 설계는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HAL)이나 장치 드라이버 아래 자원을 숨김으로써 하드웨어를 추상화한다. 한 예로 전통적인 시스템에서 물리 메모리가 할당할 때 실제 위치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프셋과 기억 관리 장치를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TUNES Project 와 UnununiumOS 는 노커널 실험이다. 노커널 소프트웨어는 단일 중앙 입구의 제약이 없다. 1990년대 초기 모놀리식 커널은 진부한 것으로 여겨졌다. 리누스 토르발스와 앤드류 타넨바움간에 일어난 리눅스의 설계인 모놀리식 커널과 마이크로커널에 대한 프레임 워는 유명했다. 타넨바움과 토르발스의 토론에 제시된 두 진영의 의견은 일장일단이 있다. 두 진영의 성공 사례가 있다. 모놀리식 커널은 정확한 설계가 쉽고 마이크로커널 기반 시스템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마이크로커널은 종종 임베디드 로봇 산업이나 의료 컴퓨터 등에 이용될 수 있다. 운영 체제의 컴포넌트를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고 메모리 공간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모듈을 읽어오는 모놀리식 커널에서도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Mach는 일반적인 용도의 마이크로커널로 알려졌지만 특별한 용도로 설계된 마이크로커널도 있다. L3는 마이크로커널이 느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L4는 L3의 후예로 Fiasco 구현으로 대중적인데 L4 프로세스들과 별도의 공간에서 리눅스 구동이 가능하다. 이런 특성의 스크린숏은 freshmeat.net에서 구할 수 있다. Pistachio라 불리는 새 버전도 역시 가능하다. QNX는 1980년 초에 나타난 운영 체제로 극 최소주의 마이크로커널 설계로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은 Mach가 목표로 했던 마이크로커널 이념을 더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QNX는 우주 왕복선의 로봇 팔과 (작은 실수가 수십억의 손실을 입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의 거울 등의) 오차에 민감한 유리를 닦는 기계에도 적용되었다. 도스 도스(, DOS)는 디스크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서 디스크에 읽고 쓰기 등의 명령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명령어를 직접 치는 명령 줄 기반이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또 부분적으로 MS-DOS 기반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95, 98, 미)를 포함한 2000년까지는 MS-DOS가 IBM PC 호환기종 시장을 장악하였다. 도스는 MS-DOS, PC DOS, DR-DOS, 프리도스, ROM-DOS, PTS-DOS를 포함한 비슷한 명령 줄 시스템의 계열이다. 이 시스템들 중 어느 것도 간단히 "도스"라고 불리진 않았다. (1960년대의 이와 관련이 없는 IBM 메인프레임 운영 체제에만 사용되었음) 이와 무관한 수많은 비x86 마이크로컴퓨터 디스크 운영 체제는 "도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이들을 사용하는 컴퓨터에 대해 논할 때 단순히 "도스"라고 부르곤 했다. (아미가도스, AMSDOS, 애플 도스, 아타리 도스, 코모도어 도스, CSI-DOS, 프로도스, TRSDOS) 디지털 리서치의 CP/M이 가장 대표적인 도스의 원형이다. 8비트 개인용 컴퓨터에는 CP/M이 널리 사용되었으나 애플 II는 독자적인 애플 도스(정식 명칭은 그냥 DOS)를, MSX는 MSX-DOS를 썼다. 이들 컴퓨터도 나중에 CP/M을 지원하지만 디스크의 포맷이 달라서 서로 바꾸어 쓸 수는 없었다. IBM-PC에서는 이를 모방한 QDOS로부터 PC-DOS와 MS-DOS가 나왔으며, 나중에 CP/M은 16비트 버전인 CP/M-86 바탕으로 DR-DOS로 나왔다. 현재는 DR-DOS의 후기작인 오픈도스와, NTFS 등을 지원하는 공개 도스 프로젝트인 프리도스가 있다. MS-DOS는 마이크로소 프트가 만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도스이다. PC-DOS는 IBM의 도스이다. 버전 5.0까지는 사실상 MS-DOS와 같은 제품이었으나 그 이후 추가된 내용이 달라졌다. DR-DOS는 디지털 리서치사에서 만든 도스이다. 이것은 나중에 노벨 도스(Novell DOS)로 바뀌었다가 다시 칼데라 오픈 도스(Caldera OpenDOS)로 바뀐다. 윈도우 3.1 이하의 버전과 같이 초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별도 버전의 도스 위에서 실행되었다. 1990년대 초에 윈도우의 그래픽 셸은 도스 시스템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1995년에 윈도우 95가 별도의 도스 라이선스를 요구하지 않은 독립형 운영 체제로 번들되었다. 윈도우 95(및 이를 따랐던 윈도우 95과 ME)는 기본 OS 커널을 인계 받았지만 MS-DOS 구성 요소는 호환성을 위해 그대로 남겨두었다. 윈도우 미를 제외한 윈도우 95, 98과 더불어 MS-DOS 구성 요소는 윈도우를 시작하지 않고도 구동이 가능하였다. 윈도우 NT 계열 운영 체제가 널리 사용되면서, 윈도우 사용을 위해 더 이상 도스가 필요없게 되자 PC 사용자들 다수가 도스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2012년 기준으로, 프리도스, DR-DOS, ROM-DOS, PTS-DOS, RxDOS, REAL/32와 같은 도스 운영 체제를 이용할 수 있다. 델, HP를 포함한 일부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FreeDOS를 OEM 운영 체제를 포함한 컴퓨터들을 판매한다.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하는 도스 구조는 임베디드 장치에서 이용할 때 매우 이상적이다. 최신 판의 DR-DOS가 현재에도 이 시장에 초점을 두고 있다. ROM-DOS가 캐논 파워샷 프로 70의 임베디드 시스템에 사용되었다. 리눅스 하에서 도스 프로그램들을 거의 네이티브 속도로 구동할 수 있는 DOSEMU라는 리눅스 네이티브 가상 머신을 이용하여 여러 도스 사본들을 실행할 수 있다. 도스박스를 포함하여 여러 버전의 유닉스에서 도스를 구동하기 위한 다른 수많은 에뮬레이터들이 있다. 도스 에뮬레이터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하에서 게임이나 다른 도스용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기에 적절한 방법인데, 현대 버전은 도스와의 완전한 호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 오래된 게임을 즐기도록 고안된 도스박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상에서 도스 운영 체제의 사본으로 도스 응용 프로그램들을 구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오버헤드는 증가되지만 더 나은 호환성을 제공한다. 모든 MS-DOS형 운영 체제들은 인텔 x86 호환 CPU를 갖춘 컴퓨터, 주로 IBM-PC 및 호환기종에서 동작한다. 특정 기계에 의존적인 MS-DOS 버전들은 수많은 비 IBM 호환 x86 기반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며, 여기에는 제조업체 이름을 딴 마이크로소프트의 배포판에서부터 비 IBM-PC 호환 하드웨어와 동작하도록 설계된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응용 프로그램들이 직접 하드웨어 접근 대신 도스 API를 사용하는 한 IBM-PC 비호환 머신들에서도 실행이 가능하다. 1985년, 디지털 리서치는 또한 모토로라 68000 CPU용 컨커런트 도스 68K 버전 및 1990년대 초에 모토로라 CPU용 DOS/NT 파생 오리지널 프리도스 커널 DOS-C가 있었다. 이 시스템들이 도스 구조와 유사하긴 했지만, 응용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x86이 아닌 CPU의 비호환 명령 집합으로 인해 이진 호환성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 언어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들은 쉽게 포팅이 가능했다. 도스는 재진입성이 없는 기본 커널 기능들을 갖춘 단일 사용자, 싱글태스킹 운영 체제이다. 즉,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 해당 커널 기능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도스 스스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을 한 번에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없다. 도스 커널은 문자 입출력, 파일 관리, 메모리 관리, 프로그램 적재 및 종료와 같이 프로그램을 위한 다양한 함수를 제공한다. 도스는 기본적으로 배치 파일(파일 확장자는 codice_1)을 통해 셸 스크립트를 위한 기능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텍스트 파일로서, 문서 편집기를 이용해서 작성이 가능하다. 컴파일된 프로그램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행되며, 배치 파일의 각 줄을 명령 단위로 실행한다. 배치 파일은 또한 여러 내부 명령을 이용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GOTO와 조건문을 들 수 있다. GOSUB 및 단순 산술은 DR-DOS COMMAND.COM 및 4DOS와 같은 일부 서드 파티 셸을 통해 지원되지만, 실질적인 형태의 프로그래밍이 지원되는 것은 아니다. 이 운영 체제는 문자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을 허용하는 API를 제공하지만 그래픽 카드, 프린터, 마우스와 같은 하드웨어 대부분의 접근을 위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하드웨어에 접근하게 하려면 각 프로그램이 개별 하드웨어 주변기기에 맞는 자체 장치 드라이버를 갖추어야 했다.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은 사양을 공개하여 대중화된 응용 프로그램들을 위한 장치 드라이버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증해야 했다. 도스는 8.3 파일 이름을 지원하는 파일 시스템을 사용하며, 여기에서 파일 이름이 8자, 확장자의 경우 3자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도스 2를 기점으로 계층적 디렉터리가 지원된다. 또, 각 디렉터리는 8.3 형식이지만 최대 디렉터리 경로 길이는 64자인데, 이는 도스가 관리하는 내부적인 현재 디렉터리 구조(CDs) 테이블 때문이다. 드라이브 이름을 포함하여, 도스가 온전히 지원하는 최대 길이는 마지막의 널 바이트를 포함, "드라이브:\경로\파일명.확장자"를 이용하여 80자이다. 도스는 파일 할당 테이블(FAT) 파일 시스템을 사용한다. 본래 드라이브 당 최대 4078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2였다. 도스 3.0에는 16비트 할당 엔트리를 사용하여 드라이브 당 최대 65517개의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FAT16 지원을 추가하였다. 도스 3.31은 32 MB 드라이브 제한을 제거하고 최대 2 GB까지 지원하는 FAT16B의 지원을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MS-DOS 7.1(윈도우 9x의 도스 구성 요소)은 32비트 핟랑 엔트리를 사용하는 FAT32의 지원을 추가함으로써 하드 드라이브를 최대 137 GB 이상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도스 3.1을 시작으로 파일 리다이렉터 지원이 도스에 추가되었다. 초기에 네트워킹 지원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MSCDEX를 이용한 CD-ROM 드라이브 지원에 사용되었다. IBM PC DOS 4.0 또한 IFS(installable file system)를 지원했으나 사용되지 않아 도스 5.0에서 제거되었다. 도스에서 드라이브들은 식별 가능한 문자들을 가리킨다. 표준화된 관습으로, "A'와 "B"는 플로피 드라이브를 위해 할당한다. 오직 하나의 플로피 드라이브를 가진 시스템에서 도스는 이 드라이브에 두 개의 문자를 할당하며, 프로그램들이 이들을 교체할 때 사용자에게 디스크를 스왑할 것인지 묻게 된다. 플로피에서 플로피로 복사하거나 다른 곳에서 데이터를 접근하는 동안 특정 플로피로부터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할 때 이용된다. 하드 드라이브들은 본래 문자 "C"와 "D'로 할당되었다. 도스는 드라이브 당 하나의 활성 파티션만 지원할 수 있었다. 도스에는 내부 문자 장치로 점유하고 있는 까닭에 파일 이름을 사용할 수 없는 예약 장치명이 있다. 또, 이러한 제한은 여러 윈도우 버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어떠한 경우에는 충돌이나 보안 취약성을 야기하기도 한다. 도스는 원래 인텔 8086/8088 프로세서용으로 설계되었으므로 최대 1 MB의 램에만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PC 아키텍처로 인해 최대 640 KB만 사용 가능하며(기본 메모리) 그 중 상위 384KB가 예약된다. 도스 시스템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이용한다. 프로그램들은 명령 프롬프트에서 파일 이름을 입력하여 시작할 수 있다. 도스 운영 체제들은 시스템 유틸리티와 같은 몇 가지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프로그램들과 관련되지 않는 내부 명령어라 불리는 추가 프로그램들도 제공한다. 사용자에 더욱 친숙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시도 속에, 수많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들은 메뉴나 아이콘 기반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파일 관리 프로그램들을 작성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가 잘 알려진 예인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x가 프로그램 로더를 기본 내장하면서 가장 흔히 쓰이는 PC 호환 프로그램 로더로서 도스를 대체하였다. 텍스트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들에는 Mdir, 노턴 커맨더, 도스 내비게이터, 볼코프 커맨더, 쿼터데스크 DESQview, 사이드킥이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에는 디지털 리서치의 그래픽 인바이런먼트 매니저(본래 CP/M용으로 작성됨)와 GEOS가 있다. 마침내, 주요 도스 시스템 제조업체들이 자신들만의 환경 관리자를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MS-DOS/IBM DOS 4는 도스 셸을 포함하였다. 이듬해에 출시된 DR DOS 5.0은 GEM 기반의 뷰맥스를 포함하였다. 도스는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도스는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Terminate and Stay Resident, TSR)을 제공하여 여러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에 상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시스템 타이머나 키보드 인터럽트를 후킹하여 이들이 백그라운드에서 작업을 수행하게끔 하거나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적시에 호출할 수 있게 한다. codice_2 명령어는 이를 수행하여 백그라운드 인쇄 스풀링을 구현하였다. 볼랜드 사이드킥도 이 기법을 사용한다. 종료 후 상주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기능을 제공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CED와 도스키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COMMAND.COM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 이상으로 명령 줄 편집 기능을 제공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CD-ROM 확장 (MSCDEX)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CD-ROM 디스크의 파일을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일부 TSR들은 초기 수준의 태스크 전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셰어웨어 프로그램 백 앤드 포스 (1990년)은 단축키를 이용하여 현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의 상태를 디스크로 저장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불러와 전환할 수 있었다. 도스는 지배적인 PC 호환 플랫폼이었으며 수많은 유명한 프로그램들이 도스를 위해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을 포함한다: 라플라스 변환 라플라스 변환()은 어떠한 함수 formula_1에서 다른 함수로의 변환으로, 선형 동역학계와 같은 미분 방정식을 풀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라플라스 변환을 이용하면, 미분 방정식을 계수방정식으로 변환하여, 문제들을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초깃값 문제의 경우 일차적으로 일반해를 구하는 단계가 필요없게 되고, 비제차 미분방정식의 경우에는 대응하는 제차미분방정식을 먼저 풀 필요가 없다. 라플라스 변환은 주어진 식을 간단한 식으로 변환한 뒤, 변형된 식을 푼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진 해를 다시 원식으로 변환한다. 함수 formula_1의 라플라스 변환은 모든 실수 t ≥ 0 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함수 formula_3로 정의된다. 여기서 formula_5는 formula_6를 간단히 나타낸 것이고 복소수 formula_7, σ와 ω는 실수이다. 실제 사용시에는 엄밀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formula_8로 표기하기도 한다. 참고: formula_19는 층계 함수이다. 함수 formula_1의 라플라스 변환을 formula_3라 하면 다음 식을 통해 formula_3로부터 formula_1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위의 계산을 직접 하기 보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라플라스 변환들을 이용해 역변환을 구하는 것이 쉽다. 예를 들어 로 formula_3가 주어져 있는 경우 부분분수 분해를 통해 를 얻게되고 라플라스 변환의 선형성으로부터 formula_1는 다음과 같다. 다음과 같은 formula_32차 연립 상미분 방정식을 고려하자 양변에 라플라스 변환을 취하면 이고 이를 formula_35에 관해 정리하면 이다. 따라서, formula_37는 다음과 같다. IBM 국제사무기기회사(國際事務機器會社, )는 미국의 다국적 기술 및 컨설팅 회사이다. 천공카드 시스템을 고안한 허먼 홀러리스가 1896년 창설한 제표기기회사가 1911년에 국제시간기록회사·Computing Scale Company·번디 제조회사와 합병해 세운 전산제표기록회사(CTR)가 이 회사의 전신이다. 터뷰레이팅 머신의 자동 표작성기는 1890년의 미국 국세조사(國勢調査)에 사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CTR은 한때 경영 부진에 빠졌으나 1914년 토머스 J. 왓슨을 사장으로 영입해 급성장의 계기를 이룩했다. 이후 1924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토머스 왓슨의 아들 토머스 J. 왓슨 주니어의 노력으로 PC를 개발했다. IBM이 PC를 개발한 뒤 내부를 공개 하였으며 수많은 업체들은 PC의 주변기기를 개발하였고 IBM은 로열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PC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래서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PC를 사용하고 있다. IBM은 PC의 기능을 보강하여 PS/2라는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PS/2에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고 그로 인해 수많은 업체들과 사용자들은 PS/2를 외면하였다. 결국 PS/2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IBM은 주로 메인프레임을 위주로 한 하드웨어 업체였으나, 1990년대부터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으로 분야를 넓혀왔다. 2000년대부터는 매출액 중 서비스/컨설팅 비중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리눅스를 강력히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2년 루이 거스너로부터 경영탑을 인수한 후 IBM를 크게 발전시킨 새뮤얼 팔미사노는 이 회사를 파멸에서 건져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론에서는 IBM사를 ‘빅 블루’라고도 부르는데, 이 회사의 로고 마크가 푸른 색으로 그려졌고, 또한 주식도 우량 주식(블루 칩) 가운데서도 뛰어난 최우량주(블루)이기 때문이다. 이 그룹은 IBM의 주된 부서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과 같은 다양한 브랜드가 존재한다: 이사회는 10인~14인이 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은 상황 및 추천된 후보의 자질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될 수 있다. 현재는 이사 12인(사내 1, 사외 11)이며, 2010년도 주총 이후에는 13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사무엘 팔미사노(Samuel J. Palmisano)가 이사회 의장(Chairman of the Board)과 대표이사(President), CEO를 겸하고 있다. CEO의 성과는 집행 평가 및 경영자원 위원회(Executive Compensation and Management Resources Committee)에서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이사회의 집행 부분(executive session)에서 매년 검토하며, 이사회 의장은 정기적으로 승계 계획 및 경영진 계발에 대해 보고한다. 프랙탈 프랙탈() 또는 프랙털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이런 특징을 자기 유사성이라고 하며, 다시 말해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브누아 망델브로가 처음으로 쓴 단어로, 어원은 조각났다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fractus’이다. 프랙탈 구조는 자연물에서 뿐만 아니라 수학적 분석, 생태학적 계산, 위상 공간에 나타나는 운동모형 등 곳곳에서도 발견되어 자연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불규칙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규칙도 찾아낼 수 있다. 복잡성의 과학은 이제까지의 과학이 이해하지 못했던 불규칙적인 자연의 복잡성을 연구하여 그 안의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복잡성의 과학을 대표하는 혼돈 이론에도 프랙탈로 표현될 수 있는 질서가 나타난다. 프랙탈은 수학적 도형으로도 연구되고 있다. 프랙탈 도형은 종종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재귀적이거나 반복적인 작업에 의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프랙탈 도형에는 망델브로 집합, 칸토어 집합, 시에르핀스키 삼각형, 페아노 곡선, 코흐 곡선 등이 있다. 프랙탈은 결정론적이거나 추계학적일 수 있으며, 혼돈적 계와 연관지어 발생할 수도 있다. 프랙탈 기하학은 프랙탈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과학, 공학, 컴퓨터 예술에 적용되기도 한다. 자연계에서도 프랙탈 구조가 자주 발견되며, 구름, 산, 번개, 난류, 해안선 및 나뭇가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프랙탈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며, 현실 세계의 매우 불규칙한 물체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일 수 있다. 프랙탈 기법은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물론, 기술적으로 이미지 압축 등에서도 사용된다. 프랙탈의 역사는 주로 이론적 연구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현대적인 적용에 이르는 길을 따르며, 그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공식적인 프랙탈 형태를 만들었다. Pickover에 따르면, 프랙탈의 수학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Leibniz가 반복적인 자기유사성을 생각했을 때인 17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그는 직선만이 자기 유사라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저서에서, Leibniz는 "fractional exponents(분수적인 지수)"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기하학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실, 다양한 역사적 설명에 따르면, 그 이후로는 몇 명의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고심했고, 그들에 의해 때로는 수학적 "괴물"이라고도 불리는, 낯설게 떠오르는 개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불분명했던 작업들이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1872년 7월 18일 Karl Weierstrass가 왕립 프러시안 과학 아카데미에서 오늘날 프랙탈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연속이지만 모든 곳에서 미분 불가능한, 비직관적인 특성을 가진 함수의 첫 번째 정의를 나타낸 것은 2세기가 지난 후였다. 또한 가산 지표가 커짐에 따라서 계차는 임의로 커진다. 그 뒤 1883년에 바이어 슈트라스의 강의에 참석한 Georg Cantor는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은 프랙탈로 인식되는, 지금은 칸토어 먼지로 알려진 실제 선의 하위 집합들의 예를 출판하였다. 또한, 세기 말에 펠릭스 클라인과 앙리 푸앵카레는 "self-inverse“ 프랙탈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도입했다. 다음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1904년에 온 것인데, 이 때, 푸앵카레의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바이어 슈트라스의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정의에 불만을 품은 헬 폰 코흐는, 지금은 코흐 눈꽃송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함수에 대해 손으로 그린 이미지를 포함한 더 기하학적인 정의를 내렸다.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은 10년 후인 1915년에 왔는데, 그 때 바츠와프 시에르핀스키는 그의 유명한 삼각형을 만들었고, 그 1년 후에, 시어핀스키의 양탄자를 만들었다. 1918년까지, 두 명의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파투와 가스통 쥘리아는, 독립적으로 연구했긴 했으나 복소수와 반복적 함수를 구조화하고, 더 나아가 끌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현대에는 프랙탈의 특성으로 불리는 결과에 동시에 도착했다. 그 연구가 발표된 직후 1918년 3월에 펠릭스 하우스 도프는 프랙탈이라는 정의의 발전을 위해 "차원"의 정의를 상당히 확대하여 프랙탈들이 정수 차원이 아닌 차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자기 유사 곡선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의 1938년 종이 평면이나, 공간 곡선 그리고 새로운 프랙탈 곡선과 유사한 부품들로 이루어진, 폴 레비에 의해 더 나아갔다. 다른 연구원들은 현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 초기 연구원들이 그들이 수동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에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들은 간단하게 사람의 손으로 그리는 반복 작업들로 만들 수 있는 것들로 제한되었고, 그들이 발견한 많은 패턴의 의미를 시각화하고 높이 평가할 수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쥘리아 집합은 간단한 그림들에 대한 반복적인 수행으로 시각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누아 망델브로가 리차드손의 초기 연구에서 나아간 "영국의 해안은 얼마나 길까? 프랙탈 차원과 통계학적 자기 유사성“와 같은 논문에 자기 유사성에 대해 쓰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다. 1975년에 만델브로는 "프랙탈"이라는 단어로 수백년에 걸친 사고와 수학적 발전을 굳히고, 인상적인 컴퓨터 건축 시각화로 그의 수학적 정의를 묘사했다. 망델브로 집합과 같은 그의 공식적인 이미지들은 많은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은 반복에 기초해서 만들어졌고, 프랙탈이라는 용어의 대중적인 의미로 이끌었다. 1980년 로렌 카펜터는 SIGGRAPH에서 프랙탈로서 풍경을 만들고 표현하는 소프트웨어를 소개하였다. 프랙탈을 네 가지 생성 기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중 기하학적 프랙탈만이 완벽한 자기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은 느슨하며,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확대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프랙탈은 자기 유사성의 강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도 있다.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은 아래 점화식으로 만들어진다. formula_1 여기서 z와 c는 복소수이다. 쥘리아 집합은 정해진 c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z의 초기값을, 망델브로 집합은 정해진 z의 초기값에 대해 위 점화식을 수렴시키는 c를 의미한다. 발산 속도에 따라 점의 색을 다르게 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formula_2 에 대해 생각해보자. formula_3 의 초기값을 formula_4로 하여 점화식을 반복하여 계산한다. 그 결과는 formula_5값에 의존한다. 즉formula_5 값에 따라 formula_7가 하나의 값으로 수렴하기도 하고 여러 값 사이를 순환적으로 맴돌기도 하고 아주 큰 값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초기값을 formula_4로 했을 때 formula_1을 발산시키지 않는 복소수 들의 모임이다. formula_12 이라 한다.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① formula_13 가 만델브로트 집합이면, formula_14가 수렴하는 formula_15는 충만한 쥘리아(formula_16: filled in Julia set) 집합이다. ② formula_13가 만델브로트 집합에 속하지 않으면, 비연결 쥘리아 집합 formula_18이다. ③ 쥘리아 집합은 충만한 쥘리아 집합의 경계이다. ④ 쥘리아 집합이 비연결이면 충만한 쥘리아 집합(formula_16)과 쥘리아 집합(formula_20)은 같아진다. ⑤ 만델브로트집합에서 나타나는 주기는 쥘리아 집합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⑥ 만델브로트 집합은 한 개이지만, 쥘리아 집합은 여러 개이다. ⑦ 쥘리아 집합은 내부가 공집합이다. ⑧ 복소수 formula_13에 대하여, 모든 쥘리아 집합은 각각 다르다. 규칙적 프랙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프랙탈의 경우 대부분 부분과 전체의 모양이 대략적으로 비슷할 뿐이나 반복함수계의 경우 전체와 부분의 형태가 완전히 일치한다. 통계학적 프랙탈. 자기유사성이 핵심 개념인 프랙탈 이론은 위상수학 분야에 속하고, 초기조건의 민감성이 핵심인 카오스 이론은 미분방정식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랙탈 도형은 가까운 두 점이 가진 정보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초기조건의 민감성을 가지고 있고, 카오스 이론의 끌개는 프랙탈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프랙탈에서의 차원은 자가복제를 하기위해 필요한 도형의 숫자로 정의된다. 즉, 어떤 도형의 길이를 x배 크게 하였을 때 그 도형의 면적이 n배 증가한다면 그 도형의 차원은 log"n"으로 정의된다. 하우스도르프 차원의 개념.이에 따라 자연수가 아닌 차원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의 경우 프랙탈에서의 차원의 값은 log3으로 나타난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서는 자기 닮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유한한 구조물들이 자주 발견된다. 프랙탈이나 혼돈 이론을 적용한 기술들은 인공 지능, 시뮬레이션, 우주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 예술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프랙탈의 형태적 특징을 기하학적 조형성으로 이용하여 만든 디자인이다. 프랙탈의 성질은 형태적으로 '반복', '자기유사성', '회전'이며, 질서, 통일, 반복, 조화같은 기본적인 디자인 원칙하에 프랙탈의 형태적 특성이 나타난다. 프랙탈 디자인에서의 자기유사성은 기본적 형태요소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면서 배열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런 기본형태요소는 끝없이 반복되며, 이 가운데서 통일성과 질서 조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프랙탈 디자인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컴퓨터 그래픽 툴로 만들 수 있다. 그래픽 툴로 프랙탈 디자인을 만드는 방법은 기본형태를 복사해서 크기를 점점 줄이거나, 점점 늘리면서 반복해서 확장시키는 것이다. 프랙탈 디자인이 적용된 대표적인 예로 존 마에다가 디자인한 Morisawa poster가 있다. Richard F.Voss와 John Clarke가 물질적인 소리 신호에 대한 수학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연구에서 파워 스펙트럼(노이즈) 중에서 주파수 변화량 f에 따라 1/f 특성을 가진 pink noise가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인 자연현상과 유사한 형태를 가짐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1/f 패턴을 갖는 음악을 프랙탈 음악이라 한다. Voss와 Clarke는 pink noise(프랙탈 음악)이 적절한 보통의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랙탈 음악도 자연에서의 프랙탈처럼 전체 구조와 유사한 작은 구조가, 전체 안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프랙탈적인 공간 채움과 조화로운 음 연결도 프랙탈 음악의 특성이다. 프랙탈 음악에는 바흐가 작곡한 클래식부터 컴퓨터로 작곡한 현대 음악 등이 있다. 초파리과 초파리는 초파리과(Drosophilidae) 동물의 총칭으로, 세계에 3,00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는 Morgan 이후 유전학 실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다세포 생물이다. 큰 이유는 초파리의 한 세대는 12일 전후로 상대적으로 짧아서 교배 실험에 효율적이다. 그리고 한 쌍의 교배로 약 500개의 알을 얻을 수 있어 고전적인 통계를 처리할 때에도 좋은 표본이 될 수가 있다. 몸집이 매우 작아서 많은 개체수를 사육 하여도 어렵지 않는 장점이 있고, 환경에서 직접 채취하여 사육하기도 쉽다. 돌연변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염색체 수가 적어서 염색체 지도를 작성하기에도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초파리의 거대 침샘염색체는 매우 잘 알려진 유전자 실험 재료다. 동양안충은 초파리를 중간숙주로 삼는 기생충이다. 2003년 2003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13년 1913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001년 2001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며, 이 해는 21세기와 제3천년기의 첫번째 해이다. 본격적으로 2001년이 밀레니엄 베이비 이다. 2001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며, 이 해는 21세기와 제3천년기의 첫번째 해이다. 21세기는 2001년 1월 1일부터 2100년 12월 31일까지를 말하며, 제3천년기의 첫 번째 세기이기도 하다. 1950년대 1950년대는 1950년부터 1959년까지를 가리킨다. 20세기 20세기는 1901년 1월 1일부터 2000년 12월 31일까지의 기간이며, 제2천년기의 마지막 세기이다. 20세기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발생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가 두 진영으로 갈려 싸운 전쟁이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이외에도 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전쟁과 같이 이념이나 종교, 인종의 차이를 앞세운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국제 사회는 국제법을 확립하고 상호 안보 공조와 경제 협력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유엔을 만들었지만,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는 이념에 따라 양분되어 냉전 체제를 유지하였고 두 진영의 대리전 성격을 띈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동안 맹위를 떨쳤던 서구 열강에 의한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대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고비로 쇠락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수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신생독립국들이 세워졌다. 식민지의 독립은 인도와 같이 평화적으로 진행된 경우도 있었으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리비아 같은 국가들 처럼 독립전쟁을 치르고서야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어느 진영에도 가입하지 않는 비동맹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냉전의 양 진영에 대비되어 흔히 제3세계로 불렸다. 한국의 역사에서 20세기는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분단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8,800명 밖에 남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한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3·1 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맞서는 전민족적인 저항 운동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운동이 있었다. 해외에서는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하는 한편 각국을 상대로한 외교적 노력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수탈에 항거하여 각종 파업과 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거세지던 냉전의 영향력 아래 단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남북의 두 정권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결국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큰 피해를 남기고 휴전을 맞았고, 이후 두 국가는 체제 경쟁을 지속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쟁이후 김일성주의를 표방하고 이후 유일체제라고 불리는 주체사상을 바탕으로한 일당 독재 국가를 이루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장기 독재에 저항한 4·19 혁명이 일어났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 의한 군사 독재가 이루어졌고, 박정희의 사망 이후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에 의해 군사 독재가 지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87년 개정 헌법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는 현행 헌법이기도 한다.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이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한편, 20세기 동안 과학, 기술은 전분야에 걸쳐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에 그레고어 멘델에 의해 발견된 멘델의 유전법칙은 20세기 초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현대 유전학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유전 물질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어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여 DNA가 유전물질임을 증명하였으며,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혔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아인슈타인인 자신의 발견에 대해 “상대성 이론은 돌파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심각하고 깊은 옛 이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이 새로운 이론은 일관성과 간결함을 유지하면서 옛 이론의 모순을 강력히 해결한다.”고 자평하였다. 로켓 공학과 무선 통신의 발달, 그리고 컴퓨터의 출현에 힘입어 인류는 처음으로 우주 공간으로 나갈 수 있었다. 1961년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한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1969년에는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이 달에 착륙하였다. 20세기 화학 분야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인공적인 고분자화합물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것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 레오 베이클랜드가 페놀과 포름알데히드를 반응시켜 베이클라이트를 합성한 이후 다양한 플라스틱이 개발되어 생활 전반에 사용되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도구들이 등장하였다. 비행기, 냉장고, 라디오, 텔레비전, 인공위성, 이동통신, 컴퓨터, 휴대폰, 스마트폰 등 20세기와 발명품들은 오늘날에도 일상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방송과 통신의 발달로 대중 매체가 크게 성장하였고, 이를 통해 대중음악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유행하기도 하였다. 실수 수학에서, 실수(實數, )는 주로 실직선 위의 점 또는 십진법 전개로 표현되는 수 체계이다. 예를 들어, -1, 0, , "e", π 등은 모두 실수이다. 실수에 대하여 사칙 연산(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을 실행할 수 있다. 실수는 크기 비교가 가능하며, 실직선에서 더 왼쪽에 있는 수가 더 오른쪽에 있는 수보다 작다. 특히, 실수는 0보다 큰 양수 · 0보다 작은 음수 · 0으로 분류된다. 또한, 실수는 정수의 비인 유리수와 그렇지 않은 무리수로도 분류되며, 정수 계수 다항식의 근인 대수적 수와 그렇지 않은 초월수로도 분류된다. 실직선은 복소 평면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실수는 허수와 함께 복소수를 이룬다. 공리적으로, 실수는 완비 순서체로 정의되고, 이는 동형 의미 아래 유일하다. 구성적으로, 실수는 유리수 코시 수열의 동치류 · 데데킨트 절단 · 십진법 전개의 동치류로서 구성된다. 실수의 완비성은 공집합이 아닌 실수 유계 집합이 항상 상한과 하한을 갖는다는 성질이다. 이는 유리수와 구별되는 중요한 성질이다. 실수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다. 즉, 자연수 집합과 실수 집합은 둘다 무한 집합이나, 그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자연수 집합의 크기보다 크다. 연속체 가설은 자연수 집합보다 크며 실수 집합보다 작은 크기를 갖는 실수 부분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연속체 가설은 ZFC(즉, 선택 공리를 추가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으며, 연속체 가설을 만족하거나, 그 부정을 만족하는 ZFC의 모형이 모두 존재한다. 실수 체계 formula_1는 실수의 공리계를 통해 정의하거나, 구체적인 모형을 구성하여 정의할 수 있다. 실수는 다음과 같은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이다. 마지막 완비성은 실수를 유리수와 구분짓는 성질이다. 이들 공리를 만족하는 수 체계는 동형 의미 하에 유일하다. 실수는 다음과 같은 대상으로서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한 실수는 실수 공리계의 모형을 이룬다. 즉, 실수 공리계의 모든 공리들을 만족한다. 실수 집합 위에는 덧셈 +, 뺄셈 -, 곱셈 ×, 나눗셈 ÷이 정의되어 있으며, 이들 중 덧셈과 곱셈은 교환 법칙, 결합 법칙, 분배 법칙을 만족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0과 1은 사칙 연산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실수 formula_10과 그 반수 formula_11를 더하면 0이다. 즉, 0이 아닌 실수 formula_13과 그 역수 formula_14를 곱하면 1이다. 즉, 뺄셈과 나눗셈은 다음과 같이 덧셈과 곱셈으로 귀결된다. 양수(=실직선에서 0의 우측의 실수=0보다 큰 수) 밑, 실수 지수의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다. 실수에 대하여 거듭제곱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실수의 완비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략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음수(=실직선에서 0의 좌측의 실수=0보다 작은 수) 밑의 거듭제곱 역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유리수 지수에 한하며, 또한 이렇게 확장된 거듭제곱은 위의 연산 법칙을 비롯한 좋은 성질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실수들 사이에는 순서(즉, 크기 비교)가 존재한다. 두 실수 formula_23의 순서 formula_24가 더 왼쪽에, formula_25가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다. formula_26는 formula_27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실수의 순서는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또한, 실수의 순서는 실수의 연산과 호환된다. 즉, 임의의 실수들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양수()는 0보다 큰 실수를 뜻하며, 음수()는 0보다 작은 실수를 뜻한다. 위의 성질들에 따라, 모든 실수는 양수, 음수와 0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또한, 양수 곱하기 양수는 항상 양수이며, 양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음수이며, 음수 곱하기 음수는 항상 양수이다. 특히, 임의의 실수의 제곱은 항상 음수가 아닌 실수이다. 구간은 특별한 실수 부분 집합으로서, 주어진 두 실수 사이의 실수를 원소로 갖거나, 주어진 한 실수를 시작점으로 하는 반직선에 놓인 실수를 원소로 갖는다. 예를 들어, 임의의 formula_10에 대하여, 다음과 같다. 퇴화 구간은 구간과 비슷한 집합으로서, 두 끝점의 순서가 정상적인 구간의 반대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수들의 집합(예를 들어, 유리수 집합이나 실수 집합)의 모든 수들보다 작지 않은 수를 그 집합의 상계라고 한다. 이는 보통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여럿이 같이 존재한다. 수들의 집합에 상계들이 존재하며,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가 존재한다면, 이를 상한이라고 한다. 실수 집합 formula_40은 다음 성질을 만족시킨다. 이를 상한 공리이라고 한다. 상한 공리는 실수의 완비성에 대한 한 가지 표현이다. 실수의 완비성은 실수의 가장 중요한 성질의 하나이다. 데데킨트 절단()을 통해 서술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실수 집합 formula_40의 두 부분 집합 formula_43의 쌍 formula_44이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면, formula_44를 formula_40의 데데킨트 절단이라고 한다. 이제, 실수의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다. 데데킨트 완비성 공리는 상한 공리와 서로 동치이다. 실수 집합은 아르키메데스 성질을 만족한다. 즉, 두 실수 formula_56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formula_57가 아무리 작고 formula_58가 아무리 크더라도, formula_57를 충분히 많은 횟수 formula_60만큼 더하면, formula_58를 초과한다. 즉, 실수 집합 위의 순서는 조밀 순서이다. 즉,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실수 formula_63에 대하여, 항상 그 사이에 또 다른 실수 formula_64가 존재한다. 실수 집합 위에는 표준적인 위상 공간 · 거리 공간 · 노름 공간 · 내적 공간 구조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실수 부분 집합 formula_71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사실, 모든 유클리드 공간에 대하여, 위 네 조건은 서로 동치이며, 모든 거리 공간에 대하여, 앞에 세 조건은 서로 동치이다. 또한, formula_71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실수는 유리수와 무리수로 분류된다. 실수 formula_75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예를 들어, 1/3 = 0.333...은 유리수이며, "e" = 2.7182...와 π = 3.1415...는 무리수이다. 실수 집합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89은 알레프 0이다. 달리 말해, 실수는 자연수 부분 집합과 일대일 대응한다. 이 둘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여러 가지 만들 수 있다. 실수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게오르크 칸토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리수로부터 실수를 이론적으로 확장하여 그 성질을 규정짓게 된 것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게오르크 칸토어,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같은 수학자들의 공이 지대하였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 약칭 한총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학생운동단체이다. 표어는 1993년 창립시에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였으며 1995년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변경하였다. 1992년를 마지막으로 전대협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창립하였다. 기존의 각 대학교 총학생회장단의 협의체 수준이었던 전대협을 확대하여 전국 모든 대학 단과대 학생회장까지를 대의원으로 하는 학생회 연합체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러나 한총련은 특유의 권위주의적 성향과 패권적 운동관으로 인해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한양대 출범식 사건으로 여러 학생운동그룹들과 상당수 학교들이 탈퇴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당시 한총련을 탈퇴한 학생운동그룹들은 전국학생회협의회, 전국학생연대회의, 참대학 등의 독자적인 학생운동조직, 학생회협의체를 건설하였다. 한총련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되었고 한총련에 가입한 단과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 자동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위반자가 급증하여 사회문제가 되었다. 1997년 191명이 구속되어 전원 기소되었고 1998년 127명 구속되어 121명 기소, 1999년 162명 구속 149명 기소, 2000년 101명 구속 95명 기소, 2001년8월까지 13명 구속 4명 기소로 전체 594명이 구속되어 560명이 재판을 받았다.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판결이 나서 집중적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기소한 건수가 늘었던 김대중 정부에서 전체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의 53%가 한총련 대의원이다. 구체적으로 한총련 제5기(1997년) 사법처리 대상자 388명 중에 206명이 구속, 160명이 불구속되어 351명 구공판 기소, 115명 기소유예,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22명이었으며 1998년 제6기는 301명 중에 145명이 구속되고 118명이 불구속 6명 내사종결되어 구공판기소 252명 기소유예 11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32명이며 7기(1999년)는 291명 중에 97명이 구속되고 48명이 불구속 16명 내사종결이며 구공판 137명 기소유예 8명 체포되지 않은 사람 130명으로 5~7기 전체 사법처리 대상자 980명 가운데 448명이 구속되고 740명이 재판을 받았다. 2000년 중반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으며 2013년 기준으로는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2000년대 초반 한총련 소속 일부 세력이 독자적인 한대련을 만들고, 이후 몇년간 두조직이 함께 존재하였다. 1993년 기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약칭 : 전대협)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전북대학교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갖고 고려대학교에서 8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출범했다. 그러나 한총련은 1996년 여름, 연세대학교에서의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 시위로 인하여, 정부의 대대적 제재 및 폭력 시위에 대한 학생들의 부정적 시각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대법원에 의해 4기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학생들의 무관심이 증대되면서 한총련의 활동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또한 이후의 5기, 6기 한총련도 대법원에 의하여 이적단체로 규정되었고 10기 한총련(2002년, 서울산업대학교(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에서 출범식 개최) 또한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적(利敵)단체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선전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단체를 말한다. 2008년 3월 한총련은 신임 의장 선거에서 후보자를 찾지 못해 출범 16년 만에 처음으로 의장 선출에 실패했다. 한총련은 28일 한양대 캠퍼스에서 한총련 소속 전국 40여 개 대학교 총학생회장과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 대의원 60여 명을 비롯해 1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긴급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김현웅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16기 한총련 투쟁본부장'으로 추대했다. 2007년 기준으로 한총련의 대표자인 의장과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 상임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 상설의결기구인 중앙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또한 집행기구로는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산하에 중앙집행국, 중앙정책위원회, 중앙조직위원회, 연대사업위원회, 사무처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특별기구로는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와 조국통일위원회를 설치하여, 학내문제와 조국통일문제를 가장 주된 과제로 밝히고 있다. 지역별로는 서울(서총련), 강원(강총련), 경기인천(경인총련), 충청(충청총련), 광주전남(남총련), 전북(전북총련), 대구경북(대경총련), 부산경남(부경총련)으로 지역별 총학생회 연합이 있으며 각 지역총련별로 지구를 둔다. 제주(제총협)지구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지역총련과 동격인 특별지구로 한다. 1987년 8월 `전남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계승해 출범한 단체로 1993년에 전남.광주지역 22개 대학이 가입했으며 5공화국,6공화국 청산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5.18 진상규명 및 미군 철수와 함께 북한의 핵사찰반대, 고려연방제 채택 등을 주장하는 『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남총련)은 1993년 11월 2일과 3일 광주 미문화원과 안기부 목포출장소 기습시위를 주도하는 등 1993년에 검찰청과 경찰청, 미국 관련시설,정당 당사 등을 100여차례 기습 또는 항의 방문했으며 화염병과 쇠파이프, 돌 등을 동원한 시위로 중상자 36명을 포함한 경찰관 413명이 부상을 입고 경찰차량 10대를 파손시키기도 하여 정부당국으로부터 「과격폭력집단」으로 규정받고 있다. `자주.민주.통일의 실현' `반미 자주화 외세배격' `민중생존권 쟁취'를 3대 투쟁목표로 내걸고 있는 남총련 (의장 오창규)은 2백∼1천명 단위로 연인원 2만6천여명이 54 차례에 걸쳐 가두 시위를 벌인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 산하 지역 단체 중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를 벌여 운동권내에서 대정부 투쟁의 선봉대다. 남총련 소속 학생은 1000여명인데 시위 때 마다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 진압 경찰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극렬 선봉대원이 600여명에 이른다고 경찰은 밝혔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金在容한양대총학생회장)은 1993년 5월 29일 오전8시10분부터 고려대 학생회관 1층 생활도서관에서 제1기 출범식 행사의 하나로 마련한 북한및 해외 학생대표들과 국제전화를 통해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金在容한총련의장 등 남측본부 의장단 11명은 서울에서, 허창조 조선학생위원장 등 6명의 북측 본부 의장단은 중국 북경 연경호텔에서, 김창오 재일한국청년동맹위원장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은 일본 동경에서 국제전화로 회의를 열고 스피커를 통해 공개적으로 2시간여 동안 통일방안과 제3차 청년학생통일축전 등에 대해 논의했다. 1993년 3월초 북한에 귀환한 리인모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사무총장인 임민식이 북경에서 대독한 연대사에서 "나는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회의를 마친 뒤 남.북.해외 본부 공동의장단은 한반도 평화정착, 8.15 범민족회담 성사, 6.12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개최, 범청학련 연대강화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등의 공동 결의뮨울 채택했다. 대검 공안부(부장 최환)는 1993년 6월 13일 "그동안 한총련이 주도한 대규모 옥외집회에 대해서도 평화시위를 조건으로 개최를 허용해왔으나 한총련측이 그동안 두차례나 당국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법적인 폭력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떠한 형태의 집회개최도 허용치 않기로 했다"는 이유로 김춘도 순경 사망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주관하는 옥외집회를 일체 금지했다. 학생대중단체의 분화가 잇따르고, 다양한 의견그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미평화협정체결, 6·15 남북 공동선언 이행, 학원자주화 등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등과 연대하고 있다. 또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가맹단체이다. 전에는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한총련 의장이 겸하였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력사태다.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광복절을 기념해 북한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2명의 학생을 남측 대표로 참가시켰다. 또 두 학생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판문점으로 행진하는 것과 연세대에서의 집회를 열기로 기획했다. 그래서 전국의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서울로 모였지만 정부는 집회를 완전 봉쇄하려 했다. 당시 연세대에는 2만 명 정도의 학생이 모였고, 정부는 서울·경기 지역의 전경을 동원해 연세대를 포위했다. 이때 연세대에 진입하지 못한 학생들이 한양대, 홍익대, 동국대 등을 거점으로 삼아, 연세대에 포위된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수대를 만들어 신촌 등 연세대 주변지역에서 전경과 산발적인 싸움을 벌였다. 이후 경찰은 연세대에 진입해 학생조직을 검거하려는 당초의 시도가 실패하자 백골단을 투입해 연세대 인근에서 산발적으로 돌격하던 사수대를 제압해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어 전기, 수도, 식량 등을 차단했다. 연세대에 갇힌 2만 여명의 학생은 5일 동안 농성을 하며 버텼다. 학생들은 이과대학 입구와 생활관 각 층마다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농성을 했지만 정부는 헬리콥터를 동원해 학생들이 머문 층의 창문으로 최루탄을 살포해 제압했다. 집회와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연행됐고, 연세대 교내 시설은 크게 파손됐다. 이 같은 학교 분위기로 인해 연세대와 고려대가 해마다 치루던 정기전은 연세대가 고려대에 양해를 구해 열리지 않았다. 그해 열린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는 계기가 됐다. 창원지법 형사1부(재판장 안영율 부장판사)는 한총련이 제작한 이적표현물을 소지,배포하고 화염병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뒤 검찰이 정한 한총련 탈퇴시한을 지키지 않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추가 기소된 인제대 총학생회장 김진영씨(26·법학4)에 대해 『한총련의 이적성 여부에는 아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재판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명확하게 규정한다』라고 판단하면서 징역 2년6월에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했다 전국 법원 가운데 처음으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대법원(주심 대법관 이임수)은 1998년 7월 30일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에 대한 상고심을 기각함으로써 한총련을 이적단체라고 확정하였다. 2000년 대법원에 의해 제6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부합하는 폭력혁명노선을 채택함으로써 그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며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국가보안법 제7조가 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적 단체로 규정되었다. 그 후 2004년 대법원은 재차 10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또한 그 강령 및 규약의 일부 변경하였으나 그 사상과 투쟁목표에 있어서 종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과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없어, 그 지향하는 노선이 반국가단체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일노선과 그 궤를 같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거나 적어도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이적단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한총련과 전대협을 이적단체로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재야와 학생운동계에서 반발, 논란이 진행 중에 있다. 1998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 소속 대학 학생대표들은 선출되는 순간 수배자가 되어 길게는 7년까지 수배생활을 했다. 한총련 대의원 구속자는 2000년 71명, 2001년 72명, 2002년 90명이지만, 이중 실형선고를 받은 이는 2000년 1명, 2001년 3명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한총련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 선고를 받은 대의원 등에 대한 사면,복권 논의가 이루어졌다. 1997년 한총련 활동을 한 혐의로 인천지검에 의해 구속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9년 8월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되고 2000년 8월15일 잔형 집행을 면제하는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 조처된 정모(30)씨에 대해 인천지검은 이어 8월22일 집행과로 정씨의 사면 사실을 통지했으나, 집행과에서 이의 기록을 누락하면서 2001년 10월 별개의 사건으로 서울지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을 때 인천지검은 서울지검에 정씨의 잔형 집행이 면제된 사실을 모르고 그 집행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정씨는 2001년 12월 당시 사건과 관련해 보석 허가를 받고도 남은 형기 79일을 수감되고난 이후인 2003년 3월 6일 형기 종료로 출소했다. 1990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한 대한민국에 대해 규약 감시기구인 유엔 인권이사회가 2005년 7월 열린 제84차 위원회에서 “한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총련 대의원을 처벌하는 것은 국제인권규약 제22조가 정한 ‘결사의 자유권’ 침해에 해당한다 이는 규약 제18조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권리’에도 위배된다 한총련에 가입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에 대해 어떤 실제적인 위협이 있는지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결정했다.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를 개정하고, △피해자에게 적절한 보상과 구제를 하고, △비슷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인권이사회는 1992년과 99년에도 ‘국가보안법을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 2002년 8월 이정은(31·9기 한총련 대의원) 전 건국대 부총학생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김승교 변호사는 한총련의 이적단체 규정을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했으며, 이씨는 200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1997년 6월 한양대학교에서 발생한 이석 치사 사건은 선반기능공 이석이 동료 학생 길소연, 권순욱, 이호준, 정용욱 등에 의해 구타당한 사건이다. 폭행치사 혐의로 길소연, 권순욱, 이호준, 정용욱 등이 구속되었다. 이호준은 5년, 정용욱은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중 길소연과 이호준은 1999년 2월 특별사면되어 가석방되었다. 조선일보 《조선일보》(朝鮮日報, )는 대한민국의 신문 출판 기업인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가 대한민국에서 발행하는 조간 일간지이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다. 조선일보사의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다. 현재 대표이사는 방상훈 사장과 홍준호 부사장이다. 대한민국 신문 구독률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구독점유율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신문 구독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 일주일간 어떤 신문의 기사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주간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률은 16.2%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가 실시한 집계에서 발행부수 1,844,783부로 집계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유료 발행 부수는 1,353,159부였다. 2011년 7월부터 가판 가격이 인상되어 현재 부당 800원이나 월 구독료는 15,000원으로 변함없다. 한국ABC협회가 2013년 발행·유료 부수 현황을 공개한 자료에서 조선일보는 177만부의 공식 발행 부수를 가진 국내 최대 신문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부수 100만부가 넘는 신문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76만9310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중앙일보(129만2498부)·동아일보(106만760부)·매일경제(83만6316부)·한국경제신문(51만7193부) 등의 순이었다. 실제 판매량을 집계하는 유료 부수에서도 '조선일보'가 1위(132만5555부)였다. 2·3위인 '중앙일보', '동아일보'와는 각각 41만, 57만부 격차였다. 2014년 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의 언론 매체 영향력 및 신뢰도·열독률 조사 결과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순위 조사에서 KBS와 조선일보의 양강 체제가 굳건하였다. KBS 59.6%와 조선일보 51.2%로 네이버 32.1%, MBC 22.0%, 중앙일보 15.9% 등 다른 매체들을 압도했다. ‘가장 열독하는 언론 매체’ 조사에서는 한겨레(22.4%)와 조선일보(21.8%)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고, KBS(20.0%)가 그 뒤를 이었다. 한국갤럽이 2013년 9월 30일부터 2주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을 기준으로 조사한 가구 구독률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압도적 1위였다. 2009년 "시사인"이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어느 매체를 가장 불신하느냐는 질문에는 중복응답을 기준으로 할 때 조선일보의 응답률이 20%에서 크게 늘어 34.2%를 차지하여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제치고 1위로 나타났다. 또한 현직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로는 한겨레가 15.4%, MBC 14.3%, KBS 11.2%, 경향신문 8.7%, 한국일보 4.0%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2.4%를 차지하였다. 한편, 조선일보를 비롯한 중앙일보, 동아일보 지국의 98%가 신문고시를 위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2년과 2003년 ABC협회의 조사에서 발행부수중 5만 6,000여부가 부풀려져 175만 6,193부로 수치를 조작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1920년 3월 5일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 해 4월 28일자 에 실린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 당했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대정실업친목회가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이었던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한 논설을 실어서 1주간 정간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에 실린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러한 항일논조와는 달리 1921년 4월 8일 조선일보 판권을 인수한 송병준은 친일성향이었다. 3대 사장은 남궁훈이었다. 그러나 이후 1924년 9월 13일에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반일 민족주의 신문으로 변화하여 4대 사장인 이상재가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문화보전에 힘썼다. 5대 사장은 신석우였다. 하지만 1931년에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6대 사장 안재홍이 연루되어 구속되고, 그 후 7대 사장 유진태 8대 사장 조만식을 거쳐 9대 사장 방응모가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로 인해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었지만 주로 친일 관련 찬양 논조로 변경되었다. 다만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부사장이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민족개량주의 성향을 띄었지만 1936년부터는 다시 친일 성향을 띄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사설과 신문내용을 여러차례 보냈고, 일왕을 찬양하는 사설도 실었으며, 그 외에도 일제 황군 응원, 일장기 침략 전쟁 미화 광고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에 의해 발간을 중단하였었고, 그 이후 사주였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여 친일 행위를 계속했다. 조광에서도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의 지원하에 속간되었다.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 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사주인 방응모의 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는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후 1948년 당시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에서 국군과 경찰을 옹호했다. 이후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승만 정권의 출범을 지지했지만 1948년부터 1950년, 즉 극초반기에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강력처벌과 처단을 주장했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을 때 그 법의 남용소지가 상당히 크다고 비판을 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에게 조선일보가 넘어가면서 한때 조선일보는 인민군 기관지로 전락했지만 그 이후 한국전쟁 이슈들을 상당히 많이 다뤘고 1951년 이후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게 된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다루지 않았으며 발췌개헌과 사사오입을 거치면서 조선일보는 1952년부터 1954년까지의 기간을 거치면서 보수색이 더더욱 강해져서 이승만 정부를 계속 지지하게 된다. 그 이후 조선일보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 정권의 친위 언론이 되어서 부산정치파동 등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았고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행위를 다루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을 계속 지지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진보당 사건, 진공관 구입 밀수출 사건,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금정산 공비 사건,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박정호 간첩 사건, 김정제 간첩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공안정국에는 반공주의 기준과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는 수준으로 기사를 썼다. 또 이 당시 금성사 설립 기사와 삼성 관련 기사를 상당히 많이 썼다. 또 능의선 기공식도 상당히 많이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완간을 보도했고 가짜 이강석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1960년에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 이후 다시 이승만 정권을 맹공격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제2공화국 시기, 장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으나 1960년 당시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원노조 운동 탄압과 노동운동 탄압에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1961년 당시, 이 때 반통일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을 지지함과 동시에 1961년부터 1962년까지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신문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안사건들이던 민족일보 사건, 사대당 사건, 교원노조 사건, 유족회 사건 등에 대해 반공주의적 기준과 박정희 군정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또 이 당시 삼성물산 설립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화방송, 한국방송 설립 기사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군사원호청 발족 기사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립 기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기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발족 기사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다시 반정부적인 성향으로 돌아섰는데 이후 최석채 주필이 재직하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조선일보는 상당히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와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강행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미법도 주민 간첩단 사건, 제1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 사건, 분지 필화사건, 언론계 침투 무전 간첩단 사건, 경향신문 간첩사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의 사법처리 과정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삼척군 해안가 간첩 사건, 군내 반정부 음모사건, 진장언 하사 간첩사건, 송추 간첩사건 같은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적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도 삼성을 상당히 비판하는 논조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력, 중소기업은행 설립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는 조금씩 다시 박정희 정부에 우호적인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이 시기 제2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영호남·서해안 무전 고정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언론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가게 되고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같은 공안정국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또다시 보수언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 이후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서는데 당시 유럽 간첩단 사건과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보도 또한 여러 차례 내보냈다. 또 그 당시 대한항공 민영화 기사, 삼성전자 설립 기사, 현대자동차 설립 기사, MBC 개국, 일간스포츠 창간, 진주 남강댐 준공도 여러차례 보도했다. 1970년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기사, 사설들을 여러차례 내보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의 준공 기사와 정부중앙청사 준공 기사, 병무청 발족 기사, 남산1호터널 개통, MBC 뉴스데스크 첫 방송, 100원 주화 사용 기사 또한 여러차례 내보냈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지지하는 사설과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한 당시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 KAL기 납북미수 사건, 남파간첩 백귀남 사건 등 공안정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실미도 사건과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정부의 입장에서 보도했다. 또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2년에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서자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을 적극 찬양하고 지지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유신 체제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에서는 포항제철 설립,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남해고속도로 개통, 호남고속도로 개통, 삼성중공업 설립, 강남-여의도 개발, 각종 고층건물 건설, 대우중공업 설립 등을 상당히 보도했고 정치 면에서는 민주공화당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고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다. 또한 1973년 당시 발생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때도 중앙정보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썼으며 당시 북제주도 우도 무장 침투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귀화 간첩 사건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전남대 불온 삐라 살포사건,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 고려대 NH회 사건, 서울대 공대 조교수 간첩사건, 나쓰야 간첩사건, 김장현 간첩사건, 김철우 조총련계 간첩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 개장과 현대중공업 설립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유신체제 당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연이어 발생한 여간첩 채수정 사건, 대전·전주 고정간첩단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1,2호 위반 사건, 김영작 간첩사건, 김승효 간첩사건, 부산·경남 거점 고정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진두현 간첩단 사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재일동포 김달남 간첩사건, 재일동포 유정식 간첩사건, 학원침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귀화 일본인 간첩단 사건, 박복순 남파 간첩단 사건, 겨울공화국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유신체제 당시의 공안정국 확성기 노릇을 했다. 그리고 1975년 당시에는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준공 기사와 학도 호국단 창설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 민방위대 창설과 부처님 오신 날, 어린이날 공휴일 제정, 영동고속도로 준공 등을 기사로 내보냈다. 그 뒤 1976년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한민통 간첩사건 또한 집중적으로 보도해서 공안정국의 확성기 노릇을 계속했다. 그리고 연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과 문화 면에서 신용보증기금 설립 기사와 용인자연농원 개장, 반월 신도시 건설, KBS 여의도 사옥 설립, 태권V 개봉, 아이미 개발 등에 대한 기사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최은희 납북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으며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자연보호헌장 선포 등의 기사도 내보냈다. 또한 1979년에는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재건 음모 사건, 부산·삼천포 고정 간첩단 사건 등을 여러차례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10.26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도 특종 보도를 많이 했다. 10.26 사건 이후에는 12.12 쿠데타 또한 많이 보도를 했다. 1972년 3월 5일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하고, 1974년에는 미국 ASI의 조사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에서 1위를 차지했다. 조선일보사는 1968년에 《주간조선》을, 1980년에 《월간조선》을 각각 발간하였고 1991년 《소년조선일보》를 창간하였다. 1999년 3월 2일에는 전면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했다. 1995년 (주)디지틀조선일보를 설립해 인터넷 서비스를 강화하여 2008년 3월 5일부터는 조선일보 지면을 PC상에서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리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사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자금력부족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남궁훈은 민족주의자였던 신석우가 인수해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 받던 이상재를 추대할 때까지 사장으로 재임한다 1924년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관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일제시대 극초기 조선일보에는 다양한 경력과 능력의 소유자들이 집결했다.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과 활동가들이 어울려 민족의 '정신적 정부'를 자임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남궁훈,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은 민족지도자들이었다.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서 일제를 규탄하고 총독 암살을 계획했던 독립운동가 방한민(方漢旻), 일제의 조선인 학살 현장에 달려가 목숨걸고 취재한 이석, 한홍정 등은 펜으로 일제의 총칼에 직접 맞선 행동파였다. 독일 유학 후 혁명의 모스크바로 파견된 김준연,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은 이관용, 미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훈구, 그리고 중국 내전 현장을 누빈 이상철, 홍양명, 홍종인 등은 세계 정세와 선진 문물을 알리는 전령사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친일 신문으로 변질되었다. 조선일보사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지 '주간조선', 스포츠지인 '스포츠조선', 관광 숙박시설에 대한 잡지 '월간 산', 취미 문화에 관한 잡지 '월간낚시' 등의 시사지와 잡지를 발행한다. 자회사로는 '디지틀조선', '월간조선', '조선에듀케이션', '헬스조선' 등이 있으며 이 중 '디지틀조선'은 코스닥에 상장하였고, 2004년부터 연간 80억 정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1년부터 '소년조선일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일반단행본과 백과사전들을 편집하는 출판사업도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출판한 단행본으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년)나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장애인 배형진씨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형진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이외에 영어판, 일본어판, 중국어판 온라인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자회사 '조선일보 일본어판'(구 조선일보JNS)에서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년에 비즈니스앤을 개국하고, 2008년 11월에는 방송기자와 피디를 모집, 2008년 2월에는 대구방송, KNN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제작, 배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종합편성방송 심사에서 2위로 통과한 'TV조선'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조선과 조선일보는 보수적 논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0년 조선일보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관계사를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인 조선미디어를 출범시켰다. 이외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을 제작하는 조선뉴스프레스라는 자회사가 있다.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를 2014년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인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조선일보를 높이 평가했다. 스칼라 (수학) 스칼라()란 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벡터에 대비하는 개념으로, 크기만 있고 방향을 가지지 않는 양을 말한다. 예를 들면 속도가 방향도 포함한 벡터인데 비해, 그 절댓값인 속력은 방향을 가지지 않는 스칼라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칼라는 벡터를 정의하기 위한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스칼라의 정의는 N차원 공간에서 N의 0승개의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량이다. 그러므로 좌표계가 변환되어도 그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양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속도 벡터가 두 개의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x축 방향으로 100 km/h, y축 방향으로 0 km/h) 각각의 성분은 크기만을 가지고 있지만 스칼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도를 나타내기 위한 좌표계가 바뀌면 각각의 성분도 바뀌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x'축 방향으로 80 km/h, y'축 방향으로 60 km/h 라는 식으로). 하지만 막대의 길이가 1 m이면 어느 좌표계에서 재어도 1 m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막대의 길이는 스칼라이다(단 상대론적으로 움직이는 좌표계는 논외로 한다). 수학에서도 스칼라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전산학에서는 스칼라를 단순히 '하나의 숫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한다. 스칼라("scalar")라는 말은 '사다리'를 뜻하는 라틴어 scala의 형용사형인 scalaris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용어를 수학에서 처음으로 쓴 사람은 프랑수아 비에트로, 그의 저서 《해석학입문 (In artem analyticem isagoge) (1591년)》에 쓰였다. 한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영어에서 이를 처음 쓴 사람은 윌리엄 로언 해밀턴으로, 1846년에 사원수의 실수부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면서 사용하였다. 해밀턴의 용례는 사원수 표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회전을 하나의 스칼라(사원수의 실수부)로 표현하고 벡터를 나머지 세개의 허수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스칼라의 다른 예로는 질량, 부피, 온도, 이동 거리 등이 있다. 자연수 수학에서, 자연수(自然數, )는 수를 셀 때나 순서를 매길 때 사용되는 수이다. 양의 정수(陽-整數, ) 1, 2, 3, ...로 정의되거나, 음이 아닌 정수(陰-整數, ) 0, 1, 2, 3, ...로 정의된다. 범자연수(汎自然數, , )라는 용어는 첫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음이 아닌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이에 대응하는 문화어와 영어는 둘째 정의를 택할 경우에 정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자연수의 집합은 대문자 N을 써서 표기하며, 보통 칠판 볼드체 ℕ를 사용한다. 약수 관계나 소수 분포를 비롯한 자연수의 성질들은 수론의 연구 대상이며, 분할이나 계수를 비롯한 자연수의 문제들은 조합론의 연구 대상이다. 자연수는 많은 연산에 대하여 닫혀있지 않다. 정수는 자연수를 뺄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하여 얻는 수 체계이며, 유리수는 자연수를 추가로 나눗셈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수 체계이다. 실수는 추가로 코시 수열의 극한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며, 복소수는 추가로 다항식의 근에 대하여 닫혀있도록 확장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유한하지만, 무한 집합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장 작은 크기"의 무한 집합이며, 자연수와 크기가 같은 집합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자연수가 만족시켜야 하는 일련의 공리들을 제시하여 자연수를 일종의 무정의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수의 공리들이 이루는 체계 가운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하나는 페아노 공리계이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이론에 해당된다. 자연수를 특별한 집합으로서 간주하여 다룰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보통 자연수의 집합은 최소 재귀 집합으로 정의된다. 수리논리학에서 이는 자연수의 모형에 해당된다. 자연수의 수를 세는 역할을 일반화하면 기수의 개념을 얻으며, 자연수의 순서를 매기는 기능을 일반화하면 순서수의 개념을 얻는다. 자연수의 집합의 대수적 성질을 일반화하면 반환의 개념을 얻는다. 가장 통용되는 자연수 이론인 페아노 공리계는 상수 formula_1 및 함수 formula_2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리들로 이루어진 2차 논리 이론 formula_3이다. 이 공리들 가운데 2차 논리 공식은 셋째 공리뿐이다. 이 셋째 공리를 1차 논리 공리꼴로 대신하면, 페아노 산술을 얻으며, 이는 보다 더 약한 공리계이다. 자연수 이론의 한 가지 모형 formula_14을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이 경우, 각 자연수는 그보다 작은 자연수들의 집합이다. 예를 들어, 처음 몇 자연수는 다음과 같다. 고유 모임이 허용되는 집합론의 경우, 자연수를 유한 집합의 대등 관계에 대한 동치류로서 정의할 수 있다. 즉, 각 자연수는 그 자연수를 원소 개수로 하는 집합들의 모임이다. 즉, 이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고유 모임을 사용하므로, 분류 공리꼴을 만족시키는 집합론에서 사용할 수 없다. 자연수의 집합은 가환 순서 반환을 이룬다. 자연수의 집합 formula_3의 정의에 따라, 수학적 귀납법이 성립한다. 즉,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28는 주어진 성질이며, 자연수 부분 집합 formula_30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명제를 증명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귀납법에 따르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특히, formula_36인 경우 이 조건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formula_31인데, 이는 이 조건의 전제가 항상 참이기 때문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의 초한 재귀 정리에 따르면, 수열을 점화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즉, 집합 formula_38에서 값을 취하는 수열 formula_39은, 그 일반항을 통하지 않고서도, 다음과 같은 점화식을 줌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41는 formula_38에서 값을 취하는 각 유한 수열에 formula_38의 원소를 대응시키는 함수이다. 특히, 이 점화식에서 formula_36인 경우, 이 점화식이 뜻하는 바는 공(空)수열 formula_45의 함숫값 formula_46을 첫항 formula_47으로 정의하는 식 formula_48이다. 자연수의 집합은 정렬 집합이다. 즉, 공집합이 아닌 자연수 부분 집합 formula_49은 항상 최소 원소 formula_50를 갖는다. 귀류법을 사용하여, formula_28가 최소 원소를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이제 formula_52임을 강한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증명하자. 만약 formula_53라면, formula_54이다. 그렇지 않다면 formula_55이므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formula_56이며, 이는 모순이다. 자연수의 집합 위에서 무한 강하법이 성립한다. 즉,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 formula_57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위에서 증명한 자연수의 정렬성을 통해 엄밀하게 증명할 수 있다. 즉, 만약 자연수의 감소 무한 수열이 존재한다면, 그 수열의 항들의 집합은 자연수의 부분 집합인데, 이는 공집합이 아니면서 최소 원소를 갖지도 않으므로 모순이다. 무한 강하법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꼴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려면 다음 한 가지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수의 집합 formula_3은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의 집합의 크기를 알레프 0 formula_64으로 정의하며, 이는 최소 무한 기수이다. 즉, 임의의 무한 집합 formula_28에 대하여, formula_66인 부분 집합 formula_67가 존재한다. 자연수의 집합과 크기가 같은 집합(=전단사 함수 formula_68가 존재하는 집합 formula_28)을 가산 무한 집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리수의 집합 formula_70는 가산 무한 집합이며, 실수의 집합 formula_71는 비(非)가산 무한 집합이다. 자연수에 대한 곱셈식 formula_72이 성립할 때, formula_73가 formula_74의 약수라고 하며, 반대로 formula_74를 formula_73의 배수라고 한다. 0은 모든 자연수를 약수로 가지며, 0의 배수는 0뿐이다. 그러나, 양의 정수의 경우만을 생각하기도 한다. 항등식 formula_77에 따라, 자연수는 항상 1과 자기 자신을 약수로 가지는데, 약수가 이들뿐인 자연수를 소수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자연수를 합성수라고 한다. 다만, 0과 1은 소수도 합성수도 아니라고 정의한다.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르면, 모든 합성수는 유한 개의 소수들의 곱으로 표현 가능하며, 이러한 표현은 소수들을 곱하는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하다.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실시간 전략 게임이다. 1998년 3월 31일 북미와 중국에, 4월 9일에는 대한민국에 발매되었다. 게임의 배경은 26세기 초반 미래의 우주로, 지구에게 버림받은 범죄자 집단인 테란()과 집단 의식을 가지고 다른 종족을 흡수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저그(), 초능력과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 종족인 프로토스() 사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스타크래프트》와 그 확장팩인 《》는 1998년 4월(브루드 워는 11월)부터 1999년 1월까지 두달 동안 전 세계에서 150만 장 이상 판매되어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되었고, 2007년 5월 20일 기준으로 블리자드는 950만 장 이상이 팔렸다고 집계했으며, 2009년 2월 28일까지 1100만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1998년 최고의 컴퓨터 전략 게임으로 오리진스 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다수의 올해의 게임, 올해의 전략 게임, 올해의 멀티플레이어 게임 상을 받았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1월 31일까지 세계 판매량의 대략 40%정도인 450만 장이 팔렸으며,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프로 선수와 팀이 생겨 스타크래프트 경기가 방송에도 중계되는 등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스타크래프트》는 LG소프트 를 통해 발매되었다. 한국어로 수정하지 않고 영문판 그대로 출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영문판을 그대로 발매함에 따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에서 한글 채팅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1999년부터는 한글이 지원되는 한스타와 같은 프로그램이 배포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2005년 2월 스타크래프트의 버전이 1.12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는 2009년 1월부터 1.16.1 버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8년이 지난 2017년 3월 26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I <3 StarCraft(아이 러브 스타크래프트) 행사에서 1.17패치를 건너 뛴 1.18패치와 를 공개하였다. 이후 동월 3월 31일 1.18버전을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안정성의 문제로 테스트버전이 먼저 공개되었다. 그 이후 밸런스 문제와 그래픽 카드 호환성 문제로 인해 여러번 연기되었다가 종료되었다. 다음날 4월 19일 새벽부터 정식으로 1.18 패치가 배포되어 전세계 서버가 오픈되었고, 기존 스타크래프트 엔솔로지는 무료로 받을수 있게된다. 상당한 버그와 화질 개선이 이루어졌고 현재 OS 에 맞춘 환경이 지원하는 패치가 이루어졌다. 《스타크래프트》의 기본적인 게임 전개는 플레이어가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테크 트리를 발전시키며 유닛을 생산해 상대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자원에는 모든 종류의 생산 활동에 필수인 '광물'과, 고급 유닛이나 건물의 생산, 각종 업그레이드 연구 등에 사용되는 '베스핀 가스'가 있다. 자원은 종족 별로 존재하는 일꾼 유닛(테란의 ‘SCV’, 프로토스의 ‘프로브’, 저그의 ‘드론’)를 통해 채취할 수 있다. 베스핀 가스는 베스핀 간헐천 위에 가스 채집을 위한 건물을 건설해야 채취할 수 있다. 한 번씩 채취할 때 마다 8의 수치가 축적된다. 게임에는 유닛의 생산을 한정 짓는 한계 수치가 존재한다. 이 한계 수치는 테란의 ‘서플라이 디포’와, 프로토스의 ‘파일런’ 과 같은 지원 관장 건물을 건설해서 늘릴 수 있다. 저그의 경우 지원용 건물이 아니라 수송 유닛인 ‘오버로드’를 통해 한계 수치를 늘린다. 기본적으로 최대 유닛 단위는 종족 당 200으로 한정되어 있다.하지만 프로토스의 다크 아칸을 사용할경우 200을 넘길 수는 있긴 하지만 그럴일은 딱히 없다 상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다양한 전략을 수립해야 하고, 적의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각종 업그레이드와 기지 확장을 통한 효율적인 자원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종족별로 저마다의 특징이 있어 그것이 전략 수립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의 또 다른 게임인 ''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향상되었다. 워크래프트에서의 종족들은 특수능력과 업그레이드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을 뿐 거의 성격이 같았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워 윈드에서 사용된 각 종족의 불균형을 해결하는 방식을 사용해 워크래프트보다 향상된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 종족은 저마다의 개성적인 일면을 가진다. 처음 발매될 당시에는 세 종족 간에 약간의 불균형이 있었지만, 확장 팩과 약 스무 번에 걸친 패치로 지금은 종족 간 균형이 비교적 잘 맞추어져 있다. 블리자드에서 1998년에 출시한 스타크래프트의 확장 팩인 에서는 본편과 이어지는 캠페인과 함께 종족 별로 새로운 유닛들과 업그레이드들이 추가되었다. 스타크래프트에는 테란, 저그, 프로토스 세 종족이 있다. 이 세 종족은 각자 특유한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테란은 인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종족이다. 원래는 개발중이었던 게임 산산조각난 국가(Shattered Nations)에 등장하려고 했으나 무기한 연기로 인하여 취소되어 이곳에서 테란이라는 종족으로 속한 것이다. 스토리에 의하면 서기 24세기 지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범죄자가 늘어나서 망할 지경에 지구는 강대국연합연맹(UPL)을 중심으로 뭉친다. 그들은 한 프로젝트를 계획하는데, 사형할 범죄자나 반정부인사, 복제인간 등을 4대의 우주선에 태워 지구에서 내보내는 것이였다. 이 중 세이렌고 호는 파괴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남은 3대가 코프룰루 구역에 정착한 것이 테란의 시작이다. 건물은 건설 가능한 땅이 있으면 지을 수 있으며, 대다수는 공중에 띄울 수도 있다. 다만 피해를 많이 입어 체력 게이지가 붉은색이 되었을 때에는 공격이 없어도 계속 손상되어 결국엔 파괴되기 때문에 재빨리 건설로봇으로 수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저그의 디파일러가 사용하는 기술 '플레이그'에 약하다. 테란 유닛 하나하나는 비교적 약한 편이고, 대부분 이동속도가 느린 편이다. 크게 마린, 메딕, 파이어뱃, 고스트등의 생체 유닛(일명 바이오닉 유닛)과 그 보다 생산시간이 길고 공격력이 강한 기계(일명 메카닉 유닛)유닛으로 나뉘며, 기계 유닛이 많이 모일수록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게 된다. 대다수 유닛이 원거리 공격을 하기 때문에 컨트롤이 많이 필요하고, 따라서 손이 많이 가는 종족이다. 후반에 유령과 전투순양함 체제를 같이 쓰려면 과학 시설 건물을 두 개 지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테란의 건물과 유닛의 체력은 자동 회복이 불가능하지만 기계 유닛과 건물은 건설로봇의 수리로, 생체 유닛은 확장팩 추가 유닛인 메딕의 치료를 통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 중재자의 '리콜' 기술이나 저그의 나이더스 커널 건물 같은 대규모 유닛을 순간적으로 이동·수송하는 방법이 테란에게는 없고, 지상방어의 측면에서는 저그의 지하 군체나 프로토스의 광자포 같은 구조물과는 다르게 테란은 방어 유닛을 생산하여 배치해야만 공격이 가능한 건물 '벙커'를 이용해야 한다. 테란이 다른 종족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는 소리가 많지만, 테란도 약점에 잘못 걸리면 지는 종족이 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테란은 세 종족 중 유닛과 건물의 체력이 가장 약한 종족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 회복, 건물 수리 및 방해 스킬도 존재한다. 영화 에일리언을 연상시키는 우주 괴물인 저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설정에 의하면 프로토스의 창조주 젤나가가 프로토스의 실패를 바탕으로 창조한 종족이 저그이고, 개체 하나하나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 프로토스와는 반대로 저그는 단 하나의 자아 의식을 가진 초월체(Overmind)를 중심으로 수많은 개체가 군단을 구성한다. 저그가 특정 지역에 정착하면 '점막'(크립)이라고 불리는 생체 물질이 주위 지면을 뒤덮는다. 저그는 이 점막 위에만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종족은 그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 점막은 해처리와 같은 중앙 건물에 의해 최초 생성되고 점막 군체로 확장된다. 자원 수집 역할과 애벌레를 만들어 내 유닛을 생산하도록 하는 부화장의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이것은 테란의 병영과 프로토스의 관문 같은 유닛 생산 건물이 따로 필요하다는 점과 매우 대조적이며, 저그는 다른 종족보다 더 속도감 있게 게임이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또한 처음에 오버로드라는 공중유닛이 주어지기 때문에 초반 정찰에 유용하다. 또한 테란 건설로봇의 건물 건설과 프로토스 탐사정의 건물 소환과 달리 저그의 일꾼 유닛인 일벌레는 자신이 건물로 직접 변태한다. 결국 건물 건설을 위해서는 일벌레 하나를 희생할 수 밖에 없다. 유닛 하나하나가 적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약해서 쉽게 죽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생산시간이 짧아 빠르게 충족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 이동속도가 매우 빨라 기동성의 측면에서 타 종족에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체력이 자동으로 회복이 되는 특징도 있으나,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 타 종족은 건물로 인구수를 충족시키는 반면 저그는 유닛인 대군주가 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공격을 받아 죽는 경우에 인구수에 차질이 생긴다. 테란의 전투순양함이나 프로토스의 우주모함만큼 막강한 유닛은 없지만 대신 유닛의 필요 인구수 수치가 낮아 개체수를 타 종족보다 가장 많이 운용할 수 있고, 테란과 프로토스에는 없는 0.5짜리 인구수 유닛(스커지, 저글링)도 저그에만 존재한다. 저그는 엄청난 물량으로 상대를 이기는 종족이다.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외계종족 프로토스 역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정에 의하면 젤나가가 아이어에서 살고 있는 종족에서 '최초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들에게 젤나가의 모든 것을 부여하여 탄생한 종족이 회복 기사, 암흑 기사는 체력도 회복 가능하다. 유닛의 기본능력(공격력, 방어력, 체력)이 매우 뛰어나서 강력한 편이지만, 생산 시간이 길고 가격이 비싸며 필요 될 수 있으며 기동성은 여러가지 이동 속도 업그레이드를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유닛 크기(Unit Size)와 피해 형태(Damage Type)는 서로 다른 유닛간의 강하고 약한 상성 관계를 설계하는 데 사용된 모델이다. 스타크래프트에 존재하는 모든 유닛은 대형, 소형, 중형 중 하나로 구분된다. 이들 구분은 유닛이 어떤 피해 형태를 가진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느냐를 결정한다. 일반형 공격은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유닛에게 100% 피해를 준다. 진동형 공격은 소형 유닛에게 100%의 피해를, 중형 유닛에게 50%의 피해만을, 대형 유닛에게 25%의 피해만을 준다. 폭발형 공격은 소형 유닛에게 50%의 피해만을, 중형 유닛에게 75%의 피해만을, 대형 유닛에게 100%의 피해를 준다. 스타크래프트에서는 광물(Minerals)과 베스핀 가스(Vespene Gas)라는 두 가지 형태의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플레이어가 더욱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광물에 비해 베스핀 가스는 희소성도 있고, 노동력을 아무리 많이 투입해도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는다. 보통 광물은 7~10 덩어리가 주어진다. 광물 하나를 채취하면 8씩 늘어난다. 여러 일꾼 유닛이 하나의 광물을 동시에 채취할 수는 없다. 대신에 자원 채취가 끝나면 다른 일꾼이 바로 달라붙어 자원을 캐므로 일꾼이 많을수록 자원채취의 공백이 안 생기므로 짧은 시간동안 많은 자원을 충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 덩어리당 2.5기의 일꾼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그러니 너무 많으면 효율성도 떨어진다. 베스핀 가스와 마찬가지로 광물도 한계 지점이 있지만, 베스핀 가스가 자원 기지 당 1개소에서만 캘 수 있는 것에 비해서 여러 덩어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광물을 모으는 일꾼 유닛이 많아질수록 단위시간당 채취 자원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자원인 베스핀 가스의 경우, 일반적으로 하나의 베스핀 가스 채취구에는 일꾼 유닛을 한번에 3기 까지(특정 방향은 4기) 배치하는 것이 가장 채취량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상 일꾼 유닛을 투입해도 채취량은 올라가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베스핀 가스의 단위 시간당 채취량은 항상 일정하다. 게다가 베스핀 가스는 무한한 양을 채취할 수 있으나, 일정 정도 수집 후에는 채취 가능한 양이 8에서 2로 줄어든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베스핀 가스는 광물에 비해 항상 부족하다. 때문에 베스핀 가스의 채취량을 늘리려면 베스핀 가스 채취구가 있는 자원 기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더욱이 게임에 등장하는 강력한 고급 유닛들은 대부분 많은 베스핀 가스를 필요로 한다. 《스타크래프트》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온라인 게이밍 서비스인 배틀넷을 통해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할 수 있다. 한 게임에서 최대 여덟 명이 동시에 플레이할 수 있고, 사람 대신 컴퓨터 플레이어를 인원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플레이어 간에 동맹을 맺어 협동 플레이도 가능하며, 한 쪽의 숫자가 부족한 핸디캡 경기를 가질 수도 있다. 배틀넷에서 유즈 맵 세팅 을 제외한 모든 게임은 조기에 게임이 종료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승/패가 기록으로서 남게 되는데, 간혹 네트워크 연결상의 문제로 게임이 종료되면 DISC(Disconnected)로 표시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 역시 배틀넷 상에서 편법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해킹 프로그램이 존재하는데, 블리자드는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를 발견하면 자사의 모든 배틀넷 망으로부터 그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밀리 게임은 랭킹에 기록되는 게임으로, 인증 받은 전용 맵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다. 공정한 게임을 위해 해킹 방지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게임이 별개의 서버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무한 맵' 등 인증되지 않은 맵으로는 밀리 게임을 할 수 없다. 사용자들의 실력을 고려하여 공정하고 편리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스타크래프트 밀리 랭킹 시스템은 발매 초기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으며 밀리 랭킹 시스템을 이용한 대회 진행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4년 1월에 래더 랭킹 시스템을 폐지하였다. 2017년 8월 15일에 출시 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에서 새로워진 레더 랭킹 시스템이 개선되었고, 전국 PC방의 순위도 기록하게되는 전용 레더 랭킹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1.19패치에서도 적용되었다. 스타크래프트 멀티플레이어 시스템을 배틀넷이라고 하며 배틀넷 서버는 공식적으로 Asia, US East, US West, Europe 4개 서버가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 사설서버인 Fish 서버와 Brain 서버가 있다. 사용자는 사설 서버를 이용하기 위해 레지스트리 설정을 수정해서 서버에 접속할 수 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 1.18 패치가 이루어지면서 사설 서버였던 피쉬 서버가 레지스트리 설정 없이 자동으로 등록되었다. 1.19패치 이후로 아시아 서버의 분리작업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플레이어를 위한 Korea 서버와 일본/중국/대만 등 기타 아시아 국가를 위한 Asia 서버로 분리되었다. 따라서 2017년에 이르러 접속 가능한 배틀넷 서버는 U.S. West, U.S. East, Europe, Korea, Asia, Fish (Korea) 6개 서버가 있다. 그러나 피쉬커뮤니케이션측은 10월 1일부터 서비스 종료되어 서버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스타크래프트 에디터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게임 내 탑재된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에디터(Campagin Editor)가 있다. 많은 초보 맵 개발자가 사용하지만 기능의 한계를 문제로 이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은 세디터(SSEditor), 스타포지(Star Forge) 등의 고급에디터를 많이 사용한다. 리마스터 발매 이후 역언덕, 넓은 언덕 등이 기본 에디터에 내장되었고, 여러 기능의 추가로 고급에디터를 굳이 설치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쓸만한 수준으로 기본 에디터가 발전했지만 시간이 지나 기본 에디터가 삭제되었다. 스타에디트()라는 스타크래프트와 같이 설치되는 맵을 만들거나 편집할 수 있는 도구로 트리거(Trigger)라는 개념을 통해 특정한 논리를 사용자 맵 내에 삽입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타크래프트의 멀티플레이 네트워크의 명칭인 배틀넷에서는 본래의 스타크래프트 게임과는 관계 없는 '유즈 맵 세팅(Use Map Settings)' 이라는 별개의 게임이 성행한다. 이들 게임은 유닛의 이름, 속도, 공격력, 방어력, 체력, 생산비용, 생산시간, 업그레이드 시간, 보유 에너지량 등을 변경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는 1998년 출시된 오래된 게임이지만, 2016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의 하나로 꼽혔다. 또한 《스타크래프트》는 대한민국에 PC방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7월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스타크래프트 리그인 KPGL이 개최되었으며, 1999년 4월 KPGL과 PKO의 양대 리그가 성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하였다. 이를 계승한 온게임넷과 MBC 게임은 2011년까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2002년부터는 스타리그의 프로게이머 중에서는 연봉이 2억이 넘는 선수가 최초로 생겼고, 기업들의 광고와 후원도 많아졌다. 2004년 7월 SKY 프로 리그 2004 결승전에서는 10만 명의 관중이 모여 그 인기를 증명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수많은 RTS 게임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누르기 위해 도전했으나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실패를 기록했다. 《스타크래프트》는 그 설정과 줄거리, 인물 등을 활용한 공식 소설과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또한 만화가 김성모가 스타크래프트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이 작품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드라군 놀이가 유행하였다. 2000년 경에는 신해철, 허니패밀리, 남궁연 등이 참여해서 스타크래프트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음반이 나오기도 하였다. 게다가 스프라이트를 이용하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로 부터 공인받아 제작한 E스포츠 만화《스타크래프트 에쒸비》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과거에는 스타크래프트를 소재로 한 식품 상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종족 전쟁》은 1998년에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 의해 발표된 스타크래프트의 확장팩이다. 이 확장 팩에서는 새로운 캠페인과 각각의 종족에 대해 두 개의 유닛, 새 음악, 새 특수능력과 기술이 추가되었다. 캠페인은 원래 스타크래프트의 이야기, 즉 초월체가 프로토스의 태사다르에 의해 파괴당하고, 프로토스는 저그의 공격을 피해 아이어를 떠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2000년 6월 16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매스 미디어가 《스타크래프트》를 닌텐도 64로 이식한 《스타크래프트 64》를 공동 개발해 닌텐도를 통해 출시되었다. 이 게임은 PC용 원작과 그 확장 팩인 〈〉의 모든 맵을 담았고, 이 게임에서만 가능한 미션과 튜토리얼, 숨겨진 미션인 'Resurrection IV'도 추가되었다. 또한 온라인 멀티 플레이어 게임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 화면 분할 방식의 멀티 플레이어 기능이 포함되었다. 추가적으로, 온라인 멀티플레이 기능을 본판보다 줄였고 미션 브리핑과 컷씬도 줄였다. Resurrection IV은 저그에게 납치되었던 지구에서 온 인물 알렉세이 스투코프를 짐 레이너가 구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브루드 워 미션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닌텐도 64 익스팬션 팩을 필요로 한다. 본래에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개발할 예정이였으나 대신 닌텐도 64로 개발되었다. 닌텐도 64판은 컨트롤러 중앙에 있는 아날로그 스틱을 이용해서 커서를 조작하는데, 이 방식이 마우스에 비해 불편했고, 온라인 기능이 없다는 점 때문에 PC판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영어: StarCraft: Ghost)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하였던 1인칭 슈팅 게임으로, 스타크래프트의 설정을 기반으로 한다. 블리자드는 이 게임을 2002년에 발표했지만, 2006년 3월 24일 게임의 개발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곧 블리자드는 개발 중인 게임 목록에서 이 게임을 지웠고, 웹페이지도 삭제했다. 주인공으로 설정된 여성 유령요원 노바는 에서 나온다. 《스타크래프트 II》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공식적인 스타크래프트의 후속작으로 개발한 PC 게임으로, 2007년 5월 19일 서울에서 개최된 2007 블리자드 월드와이드 인비테이셔널(WWI; World Wide Invitational)에서 스타크래프트2 중 프로토스가 공개되었다. 마침내 2010년 7월 27일 정식 출시가 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9월 18일을 기준으로 오픈베타가 끝나고, 정식으로 출시되었다. 2013년 3월 12일 확장팩인 군단의 심장이 출시되고, 2015년 11월 10일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확장팩인 공허의 유산이 출시되었다. 이후 DLC로 노바의 비밀작전이 출시되었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영어: StarCraft: Remastered)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1년 6개월동안의 비밀 리마스터 작업 끝에 2017년 3월 2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아이 러브 스타크래프트 행사에서 중대 발표를 통해 세계최초로 공개되었다. 기존작과 달리 SD 스프라이트가 HD 스프라이트로 전환하게 되었고, 16:9 HD와 4K UHD까지 지원한다. 한국어를 포함한 13개국 언어를 지원하고 클래식 베틀넷 계정과 현재의 베틀넷 계정까지 연동이 가능하다. 기존 스타크래프트 엔솔로지는 무료로 배포되며, 리마스터 업그레이드판은 유료로 2017년 8월 15일에 출시되었다. 다음은 《스타크래프트》가 세계 게임 매체들로부터 상을 받고 평가받은 내역이다. 대표적인 수상 실적만 표기하였으며 전체 수상 내역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수상 목록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열리는 스타크래프트 관련 경기 대회는 다른 국가에서는 블리자드가 직접 대회를 주관한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 e-스포츠협회에서 주관한 것으로, 블리자드는 이것을 문제삼아 e-스포츠협회와 대회 중계방송사에 지적재산권 보상을 요구해왔으나 e-스포츠협회와 대회 중계방송사 측은 거절하였으며 대회 진행을 강행했다.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다만 비영리 게임대회에 대해서는 지적저작권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결국 블리자드는 2010년 10월 28일 서울지방법원에 MBC플러스미디어(MBC GAME)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다음해에 블리자드가 소송을 취하하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저작권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어 11월 3일에는 온미디어(현CJ E&M)(온게임넷)를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그레고리 하인스 그레고리 올리버 하인즈(Gregory Oliver Hines, 1946년 2월 14일 ~ 2003년 8월 9일)는 미국인 배우이자 춤꾼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그 세대의 최고의 탭댄서로 생각하고 있다. 뉴욕주 뉴욕 태생으로, 하인즈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형에게서 탭댄싱을 배웠다. 5살이 되었을 때부터 형과 춤으로 돈을 벌었으며, 유명한 활동 무대는 할렘의 아폴로 극장이었다. 그는 영화 백야(White Nights)에서의 연기로 가장 유명할 것이다. 다른 출연작품으로는 커튼 클럽(The Cotton Club), Running Scared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TV 시리즈 물에도 출연했다. 그는 여러 번 토니상 후보에 올랐었고, 1992년 뮤지컬 "Jelly's Last Jam."으로 토니상을 수상한다. 하인즈는 암으로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57년의 생을 마친다. 시삽 시삽()은 전자 게시판(BBS)이나 온라인 서비스 가상 공동체 등 다중 사용자 컴퓨터 시스템의 관리자이다. 기타 인터넷 기반 네트워크 서비스들의 관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스템 운영자()의 줄임말이며, 시솝, 시샵 이라고도 한다. 사용자들과의 창구 역할을 맡고, 시스템 상의 문제를 고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용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등의 일을 한다. 본래 기술자를 지칭하는 용어인 이 말은, 1989년 케텔의 등장 이후 PC통신 동호회들의 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오프라인에서 "동호회장"으로 불렸을 말을 "동호회 시삽"으로 부른 것인데, 처음에는 PC통신 서비스 운영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가 동호회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동호회장을 가리키는 말로도 확장된 것이다. 이 당시의 동호회는 PC통신 내부의 단체로서 서비스 회사와 '운영계약'을 체결하는 형식을 취하여, 동호회 시스템을 할당해주는 형태였고 해당 시스템의 관리자 ID도 발급되었다. (하이텔의 경우 k2****, 천리안은 ZS**** 형식으로 ****부분은 동호회 인덱스로 된 ID였다.) 따라서, 동호회 운영진은 동호회의 동호회 내에서는 시스템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므로 시삽으로 지칭된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동호회 운영자들을 "삽질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불렀는데, 시삽의 "삽"에서 말을 따온 것이다. '삽질'이란 표현은 쓸데없는 노력을 일컫는 유머스러운 속어로도 쓰인다. 8월 15일 8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7번째(윤년일 경우 228번째) 날에 해당한다. 400년 동안 이 날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 금요일은 57번, 화요일, 일요일은 56번 온다. 8월 16일 8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8번째(윤년일 경우 229번째) 날에 해당한다. 칸토어 집합 수학에서, 칸토어 집합()은 0과 1 사이의 실수로 이루어진 집합으로, formula_1부터 시작하여 각 구간을 3등분하여 가운데 구간을 반복적으로 제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칸토어 집합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진다. 또는, 앞 단계의 구간을 formula_9크기로 줄인 다음 두 개를 배치하는 방식으로도 같은 집합을 얻을 수 있다. 즉, 이 된다. 칸토어 집합에 포함되는 수는 삼진법 소수로 표기했을 때 모든 자릿수가 0 또는 2가 된다. 이것은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각 단계마다 자릿수에 1이 있는 수를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 번째 단계에는 formula_11가 빠지고, 두 번째 단계에는 formula_12과 formula_13가 빠지는 과정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또한 이것을 이용해 칸토어 집합의 수를 0과 1 사이의 모든 실수와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는데, 3진수 각 자릿수의 2를 2진수에서의 1로 대응한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칸토어 집합은 비가산 집합이며, 크기가 formula_15이다.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빠지는 구간의 길이는 formula_16이 된다. 이 길이를 모두 합하면 이 된다. 즉, 칸토어 집합은 르베그 측도가 0이다. 또한, 칸토어 집합은 조밀한 곳이 없는 집합이며, 완전 집합이다. 칸토어 집합은 자기닮음 성질을 가지고 있는 프랙털이다. 칸토어 집합을 ⅓ 크기로 줄이면 원래 칸토어 집합의 왼쪽 부분과 같다. 따라서 칸토어 집합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이다.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제외되는 구간의 길이 칸토어 집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각 단계에서 제외되지않는 구간의 길이 formula_27 따라서, 칸토어집합의 원소들의 합은 formula_30이다. 따라서, 칸토어는 formula_31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값 formula_32이 전체의 값 formula_33이 됨을 보임으로써 formula_32보다 상대적으로 큰 값 formula_31가 formula_30이 됨을 보여준다. 따라서,칸토어집합은 formula_30이면서 무한한 그리고 formula_38의 보다 작을수있는 비가산 기수의 집합을 보여준다. 구간 수학에서, 구간(區間, )은 주어진 두 실수 (또는 무한대) 사이의 모든 실수의 집합이다. 구간의 개념은 유클리드 공간과 부분 순서 집합으로 일반화된다. 두 실수 formula_1와 formula_2로 표기하자. 유한한 길이의 구간은 다음 중 한 가지 형태의 실수 부분 집합이다. 구간 formula_4의 끝점()은 위 표현에 사용된 formula_5와 formula_6 (또는 무한대)를 뜻한다. 이들은 구간의 하한과 상한이다. 즉, 구간 formula_4의 길이()는 그 오른쪽 끝점과 왼쪽 끝점의 차이다. 이는 구간의 지름이다. 즉, 구간 은 을 만족하는 실수 formula_13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다. 이 구간의 두 끝점은 1과 8이며, 길이는 7이다. 또한, 여집합은 이다. 즉, 을 만족하는 실수 formula_13의 집합이다. 구간은 다음과 같은 여러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구간 formula_4의 두 끝점을 formula_24(a)라고 하자. 구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4를 열린구간() 또는 개구간(開區間)이라고 한다. 구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4를 닫힌구간() 또는 폐구간(閉區間)이라고 한다. 구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4를 반닫힌구간(半-, ) 또는 반열린구간 또는 반폐구간 또는 반개구간이라고 한다. 구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4를 유계 구간(有界區間, ) 또는 유한 구간(有限區間, )이라고 한다. 구간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4를 무계 구간(無界區間, ) 또는 무한 구간(無限區間, )이라고 한다. 실수 부분 집합 formula_53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formula_4를 퇴화 구간()이라고 한다. 즉, 퇴화 구간은 끝점의 크기 비교에 대한 조건에 부정을 취한, 구간 정의의 변형이다. 퇴화 구간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인 구간을 비퇴화 구간()이라고 한다. 퇴화 구간 formula_4의 길이와 분류는 다음과 같다. 확장된 실수 formula_61에서는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간들이 허용된다. 실수 구간과 비슷하게, 임의의 부분 순서 집합 formula_69 위의 구간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부등식 수학에서, 부등식(不等式, )은 두 수 및 두 식에 대한 크기 비교를 나타내는 식이다. 부등식은 두 수 및 그 사이의 부등호(不等號, )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a" > "b""는 "a"가 "b"보다 크다는 뜻이다. 반대로, ""a" < "b""는 "a"가 "b"보다 작다는 뜻이다. "≥"와 "≤"는 두 수가 같은 경우를 포함하는 부등호이다. 또한, ""a" > "b" > "c""는 "a" > "b"이며 "b" > "c"인 것을 줄여 쓴 것이며, 물론 이 경우 "a" > "c"이기도 하다. "부등식"은 한자나 영어나 문자 겉으로는 "같지 않음"을 뜻한다. 실수 집합 formula_1에서, 두 실수 formula_2에 대한 부등식은 다음과 같다. 절대 부등식(絶對不等式)은 모든 변수의 값에 대하여 항상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을 말한다. 반면, 조건 부등식(條件不等式)은 특정한 범위의 변수의 값아래에서만 성립하는, 변수 있는 부등식이다. 어떤 부등식이 절대 부등식인 것을 보이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증명이라고 한다. 어떤 부등식이 성립할 조건을 구하는 과정을 그 부등식에 대한 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실수 부등식 이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조건 부등식이다. 실수 부등식 가 성립할 필요 충분 조건은 이므로, 이는 절대 부등식이다. 토머스 해리엇()이 기호 ">" 및 "<"를 도입하였다. 8월 13일 8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5번째(윤년일 경우 226번째) 날에 해당한다. 마거릿 미첼 마거릿 머널린 미첼(, 1900년 11월 8일 ~ 1949년 8월 16일)은 1936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이다. 그녀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애틀랜타에서 보내며 남부의 역사와 남북 전쟁 시기의 일화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독서광이었던 그녀는 애틀랜타 워싱턴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북부에 있는 명문 여자 대학인 스미스 대학교(Smith College)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한다. 그곳에서 '헨리'라는 육군 장교와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헨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 독감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1918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고향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이 과정은 이후 그녀의 소설에 큰 영향을 준다) 그 후 애틀랜타의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던 중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남북 전쟁을 바탕으로 한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듣던 전쟁 시기의 일화와 치밀하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10년 간 집필하여 1936년 출판된 이 장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몰며 빠른 시간내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듬해 1937년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3년 뒤인 1939년 비비언 리 주연의 영화로 출시되게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미첼은 소설가로서 이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며, 1949년 8월 11일 저녁, 남편 존 마쉬(John Marsh)와 함께 영화 를 보러가는 도중에 애틀란타 13번가의 피치트리 거리(Peachtree Street)를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에 치었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5일 후 그래디 병원(Grady Hospital)에서 48세로 사망했다. 애틀랜타의 에 묻혔다. 5월 5월(五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5월이 가정의 달이다. 이 달과 다음 해의 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음력 3월과 음력 4월이 이 달에 있으며 5월에는 음력 3월 15~16일, 4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윤3월 혹은 윤4월인데 소만 이전은 윤3월, 소만 이후는 윤4월이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등의 리그는 5월이 시즌 초에 해당한다. 음수 음수(陰數)는 -1, -2, -formula_1, -1.414 처럼 0보다 작은 실수를 말한다. 보통 음부호(-)를 붙여서 음수임을 표시한다. 음수는 플러스 부호를 붙이는 양수와 반대로 마이너스 부호를 붙여 나타내므로 양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음수는 기상청에서 온도를 나타낼 때, 영상과 반대되는 개념인 영하를 나타낼 때 쓰이고, 고대 중국에서는 수입과 반대되는 개념 빚을 나타낼 때 쓰였으며, 산의 높이를 측정하는 해발과 반대되는 개념인 해저를 나타낼 때 쓰이는 등 음수는 현대에 이르러 수와 관련된 많은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인도인인 623년경의 브라마굽타로, 단순히 음수에 대한 사칙연산만을 기술하였다. 1650년대 이후로 음수가 자유로이 사용되었지만 그 개념이나 논리적 기초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정당성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그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1657년 존 허드(John Hudde, 1633년~1704년)가 음수와 양수 모두를 표시하는 문자를 사용한 이후부터 수학자들은 자유로이 그런 방식을 따랐다. 두 음수의 더하기는 두 양수의 더하기와 매우 유사하다. 양수와 음수을 혼합하여 더할 때에는 음수를 차감되는 양의 값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음수가 아닌 두 수의 빼기로 음수를 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양수의 빼기는 같은 절대값의 음수의 더하기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그리고 반면, 음수의 빼기는 같은 절대값의 양수의 더하기와 같은 결과를 산출한다. (이 아이디어는 빚의 감소는 신용의 증가와 같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리고 두 음수의 곱이 양수여야 한다는 관습은 곱셈이 분배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러한 경우 다음이 성립한다. 이기 때문에, 곱셈 는 이어야 한다. 음수가 포함된 나누기 또는 분수의 경우 따라서 이디 아민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1923년 혹은 1925년 혹은 1928년 ~ 2003년 8월 16일)은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우간다 북서부의 서나일 아루아의 소부족 카크와 출신. 이슬람교도이자 농부인 아버지와 주술을 통해 사람들을 치료하는 루그바라 부족 주술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공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193cm의 거구였으며, 권투 챔피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디 아민은 버마 전투에 참가하고, 1946년 영국 식민지 군에 입대하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대장으로 영국군으로 마우-마우 저항진압에 가담했다. 1961년 아민은 우간다 최초의 유색 장교가 되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고, 1964년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 밀턴 오보테와 함께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1967년에는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가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1971년 1월 25일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서구 국가들에게 이 쿠테타는 안도를 주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이러한 국가폭력으로 이디 아민은 잔인한 아프리카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이 일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 보다 못한 흑인 취급을 받으면서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을 불렀을 정도다. 1972년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들을 내쫓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하였는데, 그로 인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을 잃게 되었다. 1971년에 대통령과 군사령관, 1975년에는 육군원수, O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선언했다. 1978년 군 내부의 반역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수많은 반 아민 단체와 반군들이 탄자니아군과 연합해 1979년 4월 11일 반격으로 수도 캄팔라가 탄자니아군과 망명 우간다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가 결국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다에 그가 살 빌라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은 '잘 죽었다', '독재자 치고 평화롭게 죽었네', '왜 살아있을 때 안 죽였냐? 고문이라도 하지?'라는 식으로 증오했다. 일본 문학 일본 문학(日本文學, )은 일본어로 적힌 문학 작품, 또는 그러한 작품이나 작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일본문학의 정의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어서, 언어, 발표된 지역, 문학의 형식 등 여러가지 요소가 고려된다(최근에는 외국 국적의 작가가 일본어 작품을 쓰는 사례와 같이, 국적이나 거주지가 언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어문학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는 일도 있다). 역사학과 같이 정권의 이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언제나 합당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上代)・중고(中古)・중세(中世)・근세(近世)・근현대(近現代)와 같은 구분에는 연구자에 따라 다른 의견도 있어서, 중고를 설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서 정해져 있지 않다. 마루야 사이이치는 《칙찬집》에 따라 일본문학사의 역사구분을 할 것을 제안했다. 약 나라 시대까지. 상대문학을 전기·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신화·전설·가요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문자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입으로 전달되는 구송문학(口誦文學)이 발달하여 왔다. 그러다 후기에 들어와 문학 의식이 차츰 높아짐에 따라 여러 가지 장르로 나뉘어 발달하여 원시인의 소박한 모습으로부터 차츰 높은 문예적 성격을 나타내게 됨에 따라 한자 및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기재 문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를 경유하여 한자가 유입되어, 한문과, 자신들의 말에 한자를 끼워맞춘 만요가나가 사용되었다. 이 무렵 신화·전설·가요를 집대성하여 《고지키》(712년) 《니혼쇼키》(720년)와 같은 역사서가 성립되었는데 특히 와카만을 모아 엮은《만요슈》가 나와 순문학을 수립했다. 약 헤이안 시대에 해당한다. 한시・한문이 계속해서 번영을 누림과 함께, 첫 칙찬와카슈인 고킨와카슈가 편찬되고, 와카가 한시와 대등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의 공식문서는 한자로 쓰여져 있었으나, 히라가나로 된 순수한 일본어에 의한 표현이 성행하기 시작하여,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닛키》가 쓰여짐에 이어, 세이 쇼나곤의 수필 《마쿠라노소시》,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모노가타리》 등 고전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 나타나 일본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의 특징은 주관적이고 우미적 정취(優美的情趣)에 중심을 두었다는 데 있다. 또한 고유의 문자인 가나(假名)가 발달하여 특히 여성 작가에 의해 아름답고 고운 문학작품이 만들어졌다. 약 가마쿠라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헤이안 시대 문학의 영향으로 소설·수필 등이 성행하였고 무사계급의 전란을 반영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 《호겐모노가타리》(保元物語) 등의 군담소설과 《호조키》(方戈記) 같은 수필문학이 나왔다. 무사들간의 전란이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에 승려와 일부 은둔자들에 의해 씌어진 작품이 많아 불교사상과 염세적 사상이 깃들여 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등에 의한 화려한 기교에 특징이 있는 《신고킨와카슈》가 편찬되었다. 또한 현대일본어의 직계 선조라 할 수 있는 와칸콘코분을 사용한 많은 작품이 나타났다. 가모노 조메이의 《호죠키》, 요시다 겐코의 《츠레즈레구사》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자 미상의 것으로 《헤이케 모노가타리》를 들 수 있다. 또한 사루가쿠의 발달이 눈에 띈다. 약 에도 시대의 문학. 오토기조시의 흐름을 따라 가나조시나 이하라 사이카쿠 등의 우키요조시가 나타났다. 또한 이제까지의 문학이 주로 귀족·승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 시대의 문학은 신흥 서민계급이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낙천적 생활을 즐겼으므로 오락적인 문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문학의 장르가 나타났다. 이 때 당시 가부키나 조루리가 흥하여 인기몰이를 했다. 하이카이가 유행하여 마쓰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등의 인물들이 활약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개국과 함께 서양의 문명이 흘러들어와 문명개화가 일어나자 일본 문학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서양 근대소설의 이념이 유입되어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 신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소설 총론》《우키구모》 등에 의한 실질적 근대 일본문학이 출발했다. 흔히 말하는 '문학'이라는 개념은 이때 생겨났다. 메이지 20년 전후부터 근대문학이 싹트기 시작하여 사실주의에 이어 낭만주의가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자연주의가 들어와 문단의 주류가 되어 시단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신이상주의문학이 일어났고, 다이쇼 말기로부터 쇼와 10년까지는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문학과 사회주의적 문학이 대립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에 협력하는 전쟁문학만이 허용되어 문학은 전쟁 일색으로 변하고 문학정신은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전후의 문학은 전전의 문학을 추구하여 전전(戰前)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왜곡된 점을 시정하고 자유정신을 회복하고 새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 점은 주로 근대문학에 의하여 비평가들이 정치의 우위성으로부터 문학을 탈환하여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고자 했다. 전전 일본의 지식인들이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저항운동을 조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거기에 일본인의 근대적 인간의 자아의 미성숙을 인정하려고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밑바닥에 근대적 자아의 확충을 꾀하게 됨과 동시에 전후 세대의 자기 주장과 관련된 문예비평의 전개와 호응하여 소설 분야에서도 전전의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학작품이 등장하였다. 그러한 작품들 속에 담겨진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거리 공간 수학에서, 거리 공간(距離空間, )은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정의된 공간이다. 거리의 정의에 따라 표준적인 위상(위상공간)을 갖는다. 집합 formula_1 위의 거리 함수(距離函數, )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마지막 두 공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리로 대체시킬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10로 잡으면 formula_11가 되어, 대칭 공리를 얻는다. 거리 함수의 정의에서, 첫째 조건을 formula_12로 약화시키면 유사 거리 함수의 개념을 얻는다. 거리 공간 formula_13은 거리 함수가 주어진 집합이다. 거리 공간 formula_1에서, 점 formula_15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formula_16인 열린 공 formula_17는 다음과 같다. 점 formula_15를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이 formula_16인 닫힌 공 formula_21는 다음과 같다. 거리 공간 formula_1의 유계 집합 formula_24는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거리 공간 formula_13의 거리 위상(距離位相, )은 formula_28의 시작 위상이다. 즉, 열린 공들을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즉, 거리 위상에서의 열린집합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 formula_29이다. 이에 따라 모든 거리 공간은 일반적으로 위상 공간을 이룬다. 모든 코시 수열이 극한을 갖는 거리 공간을 완비 거리 공간이라고 한다. 거리 공간 formula_13의 지름() formula_34는 그 속의 두 점 사이의 가능한 거리들의 상한이다. 마찬가지로, 거리 공간의 부분 공간은 거리 공간을 이루므로 그 지름을 정의할 수 있다. 지름이 유한한 거리 공간을 유계 공간이라고 한다. 거리 공간 formula_13의 임의의 부분 집합 formula_37에 대하여, formula_38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모든 거리 공간은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 거리 공간 formula_13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노름 공간 formula_53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formula_55는 거리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노름 공간 formula_53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formula_58는 거리 공간이다. 이 거리 함수를 우체국 거리()라고 한다. 임의의 연결 리만 다양체 formula_59에 대하여, 거리 함수를 로 정의한다면, formula_61는 거리 공간이다. 임의의 집합 formula_1 및 양의 실수 formula_63에 대하여, 는 초거리 함수를 이룬다. 이를 이산 거리 함수라고 한다. 임의의 연결 그래프 formula_65에 대하여, 두 꼭짓점 사이의 거리를 이 두 점을 잇는 경로들의 길이의 최솟값으로 정의한다면, 이는 꼭짓점들의 집합 위의 거리 함수를 이룬다. 위상 공간 위상 공간은 다음을 가리킨다. 위상 공간 (수학) 일반위상수학에서, 위상 공간(位相空間, )은 어떤 점의 근처(근방)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점 사이의 거리나 넓이·부피 따위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를 사용하여, 함수의 연속성이나 수열의 극한, 집합의 연결성 등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위상수학 및 이를 기초로 하는 기하학 · 해석학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된다. 위상 공간의 일반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분야를 일반위상수학이라고 한다.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位相, )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들은 서로 동치이다. 즉, 근방 · 열린집합 · 닫힌집합 · 폐포 · 내부 가운데 하나를 기본 무정의 개념으로 삼고, 이로부터 나머지 개념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 formula_63은 위상을 갖춘 집합이다. 같은 집합 formula_1 위의 두 위상 formula_65, formula_66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만약 이 조건이 성립한다면 formula_65이 formula_66보다 더 섬세하다(-纖細-, )고 하며, 반대로 formula_66가 formula_65보다 더 거칠다()고 한다. 주어진 위상 공간 formula_63의 열린집합들은 완비 헤이팅 대수를 이룬다. 즉, 위상 공간은 직관 논리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또한, 위상 공간은 양상 논리 S4의 모형으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 양상 기호 formula_85(필연 기호)는 집합의 내부에, 양상 기호 formula_86(개연 기호)는 집합의 폐포에 대응한다. 주어진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들은 섬세성 관계에 따라서 완비 유계 격자를 이룬다. 이 격자의 최대 원소(즉, 가장 섬세한 위상)는 이산 위상이며, 최소 원소(즉, 가장 거친 위상)는 비이산 위상이다. 주어진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들의 족 formula_89의 하한(만남)은 이다. 주어진 집합 formula_1 위의 위상들의 족 formula_89의 상한(이음)은 formula_93를 기저로 하는 위상이다. 위상 공간과 연속 함수들은 범주를 이루며, 이 범주를 formula_94이라고 한다. 이 경우, 망각 함자 를 통해, formula_94은 구체적 범주를 이룬다. 이 망각 함자는 좌 · 우 수반 함자를 갖는다. 여기서 은 집합을 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키고, 는 집합을 비이산 공간으로 대응시킨다. formula_94은 완비 범주이며 쌍대 완비 범주이다. 즉, 모든 작은 (= 고유 모임 크기가 아닌) 극한과 쌍대극한이 존재한다. 시작 대상은 (유일한 위상을 갖춘) 공집합 formula_104이며, 끝 대상은 한원소 공간 formula_105이다. 유한 집합 위의 위상의 경우, 열린집합들을 그대로 나열할 수 있다. 예들 들어, 집합 "X" = {1,2,3} 위에서, 다음은 위상을 이룬다. 그러나 다음은 위상을 이루지 않는다. 좀 더 복잡한 위상 공간의 경우, 다양한 구조로서 위상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성질을 만족시키는 위상 공간들을 고려한다.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위상 공간은 근방의 개념 밖에는 다른 정보를 추가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하여 여러 다른 정보를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구조들을 정의할 수 있다. 위상 공간의 개념은 매우 일반적인 개념이지만, 대수기하학에서는 이보다 더 일반적인 개념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열린집합들의 포함 관계에 대한 부분 순서 집합을 범주로 추상화하여, 덮개의 개념을 공리화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범주 위의 그로텐디크 위상의 개념을 얻는다. 또한, 이를 한 단계 더 추상화하여, 공간의 열린집합들 대신 공간 위의 모든 층들의 범주의 성질을 공리화하면 토포스의 개념을 얻는다. 범주론 대신, 위상 공간의 열린집합들의 격자론적 성질(완비 헤이팅 대수)을 공리화하면 장소()라는 개념을 얻는다. 1910년대 이전까지는 위상 공간의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열린집합은 거리 공간에 대해서만 정의되었다. 1908년에 리스 프리제시는 거리 함수를 사용하지 않고, 수열의 극한을 사용하여 위상 공간의 개념을 공리화하였고, 1914년에 펠릭스 하우스도르프는 근방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재정의하였다. 하우스도르프의 정의에는 오늘날 하우스도르프 공간의 정의에 들어가는 조건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이후 정의에서 제거되었다. P2P P2P(peer-to-peer network) 혹은 동등 계층간 통신망(同等階層間通信網)은 비교적 소수의 서버에 집중하기보다는 망구성에 참여하는 기계들의 계산과 대역폭 성능에 의존하여 구성되는 통신망이다. P2P 통신망은 일반적으로 노드들을 규모가 큰 애드혹으로 서로 연결하는 경우 이용된다. 이런 통신망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는데, 오디오나 비디오, 데이터 등 임의의 디지털 형식 파일의 공유는 매우 보편적이다. 또한, 인터넷 전화(VoIP)같은 실시간 데이터 등도 P2P 기술을 통해 서로 전달될 수 있다. 순수 P2P 파일 전송 네트워크는 클라이언트나 서버란 개념 없이, 오로지 동등한 계층 노드들(peer nodes)이 서로 클라이언트와 서버 역할을 동시에 네트워크 위에서 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 구성 모델은 보통 중앙 서버를 통하는 통신 형태의 클라이언트-서버 모델과는 구별된다. FTP 서버야 말로 P2P 파일 전송 형식이 아닌, 대표적 반례로 꼽을 수 있다. 어떤 사용자가 FTP 서버에 어떤 파일을 올리면 다른 사용자들이 내려 받는데, 올리는 쪽과 내려받는 쪽 모두 동시에 접속하지 않아도 된다. 냅스터, 오픈냅, IRC @find) 등과 같은 네트워크과 채널은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검색 등과 같은 일부 기능에 쓰고, 다른 기능은 P2P 구조를 쓴다. 누텔라나 프리넷 같은 네트워크는 모든 기능에 P2P 구조를 가지는데, 비록 그 네트워크가 다른 같은 계층의 사용자들(peers)의 네트워크 주소를 알려 주는 데 디렉터리(directory) 서버에 크게 의존하긴 하지만, 때때로 진정한 P2P 네트워크으로 인용된다. P2P 네트워크 구조는 최근에 인터넷 상에서 멀티미디어 파일을 공유하는 용도로 많이 부각되긴 했지만, 1969년 4월 7일에 제정된 RFC(Request for Comments)란 인터넷 규약의 초기 버전부터 핵심적인 기술로 내제되어 있어 유래가 깊다. 최근의 P2P 서비스는 순수 파일 전송 네트워크에서 발달하여 그리드 컴퓨팅 기술로 진화해 웹하드 형태로 서비스되고 있다. 외부적으로 웹하드 형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유저들의 저장장치에 화일이 직접 전송되어 순수 초기 P2P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유저들의 시스템에 부하를 유발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웹하드 형태의 그리드 컴퓨팅 P2P 서비스로는 피디박스, 화일아이, 아이팝 등이 있다. P2P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여러가지 형태의 리소스 (저장 공간, 씨피유 파워, 콘텐츠, 그리고 연결된 컴퓨터를 쓰고 있는 사람 그 자체)를 이용하는 일종의 응용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정된 ip 주소도 없고, 연결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분산된 리소스이다. 따라서 P2P 노드는 종래의 DNS '바깥에서' 운용될 수밖에 없으며 강력한 중앙의 서버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P2P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P2P 디자이너들은 그런 특징을 활용해서 CPU 싸이클들을 모을 수 있는 방법,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 채팅하는 방법 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느냐이다. 냅스터나 ICQ, Popular Power, Freenet 등은 모두 기존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던 리소스를 발굴해서 지렛대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러한 서비스는 다양한 형태로 인터넷에 물려 있는 수천, 수만가지의 장치들을 잘 조합하고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혹자는 P2P 디자이너들이 해결하는 이러한 '연결 문제'(connectivity problem)가 단지 하나의 해프닝적인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방법을 개선하겠다'는 모토가 그 유명한 IP 주소나 DNS, 또는 그전의 TCP, 심지어는 인터넷 그 자체를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 인터넷은 결국 위에서 말한 기술이 탄생한 순간 순간이 모여서 이뤄진 것이다. 1996년 나온 ICQ는 항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와는 다른, 접속하다 끊을 수도 있는 개인용 컴퓨터들끼리 서로 접속할 수 있는 길을 처음으로 터 주었다. 모든 것이 점차 휴대화되어 가는 추세를 맞아, ICQ는 DNS를 우회해서 저만의 독자적인 프로토콜 주소 디렉터리(protocol-specific address directory)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이를 통해 IP 주소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될 수 있었다. Groove, Napster, Netmeeting 등이 ICQ를 따라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모든 P2P 시스템이 이 트릭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누텔라 (Gnutella) 나 Freenet의 경우, DNS를 우회하는 것은 이전 방식과 똑같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IP 주소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Popular Power와 SETI@Home은 각 노드가 고정된 주소에 접속할 수 있는 스케줄을 제공해서, 접속 당시의 IP 주소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Whois에 따르면 IP 주소가 처음 뿌리를 내린 1984년 이후 16년 동안 2천3백만 개의 도메인 이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냅스터는 혼자서 16개월 만에 2천 3백만 개의 비 DNS 주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만약 사용자가 모든 비 DNS 인스턴트 메시징 주소에 가입한다고 하면 동적인 IP 주소에 접근할 수 있는 P2P 주소의 개수는 모두 2억 개를 넘어선다. 평균 DNS 호스트가 10개의 second.first.com 같은 형태의 2차 주소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아도, 현재의 P2P 주소의 모든 개수는 불과 4년 뒤엔 DNS 주소의 모든 개수와 같아지게 될 것이며, 오늘날의 DNS 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세계로 성장해 가게 된다는 셈이 된다. 무선 PDA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인터넷 접속 장치나 TiVo, Replay 같은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가 보급됨에 따라 이들 역시 인터넷의 중요한 일부가 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현재로는 피씨 그 자체야말로 개척되지 않은 리소스의 절대 다수를 갖고 있다. 피씨는 인터넷의 다크호스이다. 그리고 그 피씨가 갖고 있는 '덜' 사용된 리소스는 P2P 혁명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알파벳순 표시 - 매우 비슷한 응용 프로그램 예외 P2P 시스템의 이전 세대는 메타컴퓨팅(metacomputing)이라 불리거나 미들웨어(middleware)로 분류됨. Legion, Globus, Condor, ByteTornado 메신저 메신저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선택 공리 집합론에서, 선택 공리(選擇公理, , 약자 AC)는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서 한 원소를 고를 수 있으며, 또한 이를 무한 번 반복할 수 있다는 공리이다.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비직관적인 결과를 함의한다. 집합족 formula_1 위의 선택 함수(選擇函數, )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2이다. 만약 formula_5라면, formula_1는 물론 선택 함수를 가질 수 없다. 선택 공리 formula_7에 의하면,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 임의의 기수 formula_8에 대하여, formula_9는 "크기가 formula_8 이하인, 공집합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족은 선택 함수를 갖는다"는 명제이다. 특히, formula_11일 때 formula_12를 가산 선택 공리(可算選擇公理, )라고 한다. 임의의 집합 formula_13 및 이항 관계 formula_14가 주어졌고, 또한 이들이 다음 성질들을 만족시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의존적 선택 공리(依存的選擇公理, ) formula_19에 따르면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열 이 존재한다. 집합론의 언어 formula_24에 1항 연산 formula_25를 추가하자. 그렇다면, 이 언어 formula_26에서, 대역적 선택 공리(大域的選擇公理, )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이 경우, formula_25를 선택 연산()이라고 한다. 대역적 선택 공리는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ZF + 대역적 선택 공리는 ZFC의 보존적 확장이다. 집합족 formula_29가 주어졌으며, 각 formula_30 위에 정렬 순서 formula_31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선택 함수 를 다음과 같이 자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특히, 만약 formula_34 위에 정렬 순서가 주어졌다면, 이는 각 formula_30에 대하여 제한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선택 함수를 정의할 수 있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임의의 자연수 formula_36에 대하여 formula_37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는 유한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지만, 무한 개의 선택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무모순적이라면) 불가능하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선택 공리는 의존적 선택 공리를 함의하며, 의존적 선택 공리는 가산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F)이 일관적이라면, 선택 공리는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독립적이다. 즉, 다음을 보일 수 있다. 구성 가능 전체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즉,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 formula_43이 주어졌을 때, formula_43 속의 구성 가능 전체 formula_45은 ZFC의 모형을 이룬다. 반면,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실패하는 모형들을 구성할 수 있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다음 명제들은 선택 공리를 함의한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F)을 가정하면, 선택 공리는 수많은 동치 명제들을 가지며, 다음과 같다. 즉, 인 명제 formula_48의 예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만약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이 일관적이라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으로 다음 정리들을 증명할 수 없지만, 선택 공리를 추가하면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 공리를 의존적 선택 공리(또는 가산 선택 공리)로 약화시킨다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증명 불가능하다. 공식적인 형식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까지 선택 공리는 암묵적으로 수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집합 formula_61가 공집합이 아닌 집합만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수학자들은 종종 “모든 formula_61에 포함된 (집합) formula_63에 대해, formula_64를 formula_63의 원소라고 하자” 라고 기술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함수) formula_66 가 선택 공리 없이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로 인해 체르멜로 이전까지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한편, 모든 함수가 선택 공리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유한 집합 formula_61의 경우, 선택 공리는 다른 집합론의 공리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각각에 적어도 하나의 물건이 담긴 (유한한) 여러 개의 상자들을 상상 해 보자. 이때 우리는 각 상자에서 정확히 하나의 물건을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상자에서 물건 한 개를 선택하고, 두 번째 상자로 옮겨 여기서도 물건 한 개를 선택한다. 그 후 세 번째 상자에서도 물건을 하나 선택하고, 이런 방식을 유한한 횟수로 반복해서, 마지막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 선택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이 때, 각 상자에서 하나 씩의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보여지는 상자-물건의 관계를 선택 함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공집합이 아닌 집합의 모든 가산 집합족에 대해서도 선택 함수가 존재한다는, 가산 선택 공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사용될 수 없다. 같은 방법이 공집합이 아닌 집합들의 무한열에 적용될 경우, 각각의 유한한 단계에서는 함수가 정의되나 전체 집합족에 대한 함수가 정의되는 단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체계 아래서 선택 공리 없이는 어떤 “극한” 선택 함수도 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게오르크 칸토어는 선택 공리와 동치인 정렬 정리가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사고 법칙"()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른 수학자들은 이 "사고 법칙"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1904년에 헝가리의 수학자 쾨니그 줄러()는 정렬 정리를 반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몇 주 뒤 펠릭스 하우스도르프가 이 "반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1904년에 에른스트 체르멜로는 정렬 정리를 보다 더 자명한 원리로부터 유도하기 위하여 선택 공리를 도입하였고, 이를 통해 정렬 정리를 증명하였다. 1923년에 다비트 힐베르트는 일종의 선택 연산을 포함한 논리 체계를 제시하였다. 힐베르트는 이 기호를 formula_68이라고 표기하였다. 예를 들어, 술어 formula_69에 대하여 formula_70는 (만약 formula_71라면) formula_72를 만족시키는 집합이다. 이와 유사하게, 니콜라 부르바키는 1954년에 집합론 교재에서 선택 연산 formula_25를 사용하였다. 1924년에 알프레트 타르스키는 타르스키 정리(선택 공리가 모든 무한 집합 formula_61에 대하여 formula_75인 것과 동치)를 프랑스의 한 유명 저널에 출판하려 하였는데, 이때 원고를 심사한 모리스 르네 프레셰는 "자명하게 참인 두 명제의 동치는 출판될 가치가 없다"고 답변하였고, 반면 같은 원고를 심사한 앙리 르베그는 "자명하게 거짓인 두 명제의 동치는 출판될 가치가 없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타르스키는 결국 논문을 타 저널에 출판하였다. 1938년에 쿠르트 괴델은 내부 모형 이론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일관적임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구성 가능 전체 formula_76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의 모형이며, 이 모형에서는 선택 공리가 성립한다. 폴 코언은 강제법을 사용하여 선택 공리의 부정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일관적임을 보였다. 의존적 선택 공리는 1942년에 파울 베르나이스가 도입하였다. 현재까지도, 많은 수학자들은 선택 공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미국의 수학자 제리 로이드 보나(, 1945~)는 1977년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농담하였다. 이는 위 세 명제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아래 서로 동치이지만 직관적으로는 그 참·거짓 여부가 모순되게 보인다는 것에 대한 농담이다. 불교 불교(佛敎, , )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싯달타 에 의해 시작된 종교이다. 불교는 그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구체적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인데 이는 노자가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고 한 가르침과 다르다.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까지 2,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교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일반적으로 개조(開祖)로서의 부처, 가르침으로서의 법, 그리고 이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의 삼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반야 또는 보리와 혼동하는 주장이 있다. 해탈 또는 열반은 위 설명과 같이 벗어나는 것을 뜻하고 반야 등은 지혜를 뜻하므로 이들은 다르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열반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하다. 불교경전인 《열반경》에는 이러한 견해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도들은 접근의 편이성 때문에 니카야가 한문으로 번역된 중국 경전들, 중국의 선사들이 창작한 경전들, 이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경전들을 주로 공부해 오고 있지만 이들은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에 많은 부분들이 첨삭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최근 니카야 번역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이미 영국에서는 약 한 세기 전부터 괄목할 만한 수준의 니카야 번역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현 네팔과 인도 북동부 지방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싯다르타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성장지는 가비라 성(迦毘羅城, Kapilavastu)이었으나 그의 종교 활동인 수도(修道), 정각(正覺), 포교(布敎)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생각된다. 싯다르타는 갠지스 강 주변의 나라였던 슈라바스티(Srāvastī) 왕국의 기원정사와 마가다 왕국의 죽림정사 같은 곳에서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석가모니 생전의 주요 제자로는 사리불, 목건련, 가섭, 아난과 같은 십대제자가 알려져 있다. 싯다르타의 인생과 관련된 주요한 장소는 팔대성지라고 부른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4세기 - 2세기)의 3대 왕이었던 아소카왕은 정복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으나 전쟁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고 불교로 귀의하였다. 이에 의해 인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인도 이외의 지역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간다라를 거쳐 티베트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타클라마칸 지역으로 전파 되었다. 이들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이라 불리던 곳으로 대월씨(大月氏)안식(安息)강거(康居) 등의 이 지역 승려들에 의해 불경과 불상이 전래되고 경전이 한역되었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는 중국 고유의 도교 사상과 많은 융합이 일어났다. 한국과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경이 근간을 이루었으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 역시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라마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몽골에 전파되었고 원나라 시기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나라 멸망 후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쇠퇴하였으나 이후 청나라 시기에 황궁의 종교가 되기도 하였다. 서쪽으로 전파된 불교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칼미크 공화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기도 한다. 북방 경로를 거쳐 전파된 불교는 북방불교 또는 대승불교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스리랑카태국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 지역의 대다수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부처님 당대의 구어인 빠알리어 경전을 갖춘 상좌부 불교가 있는데, 상좌란 곧 장로라는 뜻이다. 또는, 남방불교라고 부르기도 하며, 원래 명칭 그대로 테라와다 또는 테라바다(Theravada) 불교라고도 부른다. 상좌부 불교 지역에서는 상좌부 불교를 '테라바다'로, 대승불교를 '마하야나'라고 부른다. 불교는 교조인 싯다르타 고타마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깨달음을 얻어 궁극적으로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도에서 불교는 원시 불교, 부파 불교, 대승 불교, 밀교의 순으로 전개되었는데 불교의 사상도 이러한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싯다르타는 당시 인도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형이상학적 문제가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답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법(다르마)을 인정하였으나, 그 안에서의 총합적인 나(아트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아) 오히려 영원한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따른다고 하였다. (일체개고) 싯다르타는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열반(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에는 여러 개의 천국이 있으며, 모두 자신이 지은 업장의 결과 이다. 좋은 업장을 쌓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 불교가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지역으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인도에는 현재 8,000명 정도의 승려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승려 교육 기관은 없다고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세워서, 티베트 승려가 많아짐에 따라 인도인들에게도 불교가 전파되고 있다고 한다. 보통, 인도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불교를 믿으면, 불가촉천민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지식인들과 유명인사들 사이에 참선수행과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불교를 널리 전한 인물로는 일본인 스즈키 다이세츠, 한국인 숭산 행원 선사 등이 손꼽힌다. 쇼펜하우어 등 불교를 이해하고 수용한 철학자, 사상가들이 있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정치 지도자이자 세계적 불교 지도자인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해 온 베트남 출신의 불교지도자 틱낫한(釋一行, Thich Nhat Hanh) 스님이 이끄는 수행공동체인 Plum Village가 프랑스 보르도에 소재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베트남 등지의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주로 모여 있다. 대도시에는 한국 사찰이 운영하는 포교당이 있는데 교민 중심의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러시아 속에 있는 칼미키야 공화국이 유일하게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있다. 그 밖에 투바 공화국이나 부랴트 공화국도 불교를 믿는다. 한국 사찰 건축 강원, 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해인사 해인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수덕사 덕숭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백양사 고불총림의 5대 총림이 있다. 반야심경화엄경묘법연화경부모은중경금강경법구경아함경숫타니파타공덕경관음경능엄경목련경무량수경밀란다왕문경미륵상생경미륵하생경백유경불유교경사십이장경아미타경약사경열반경원각경천수경잡아함경유마경 등이 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안토니오 살리에리 (, 1750년 8월 18일 - 1825년 5월 7일)는 이탈리아 레가노 태생의 음악가이다. 살리에리는 당시 세간의 찬사를 얻었던 음악가였다. 유년기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766년에는 빈 궁정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 후 빈에 머무르며, 1788년에는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며, 사망 직전인 1824년까지 그 지위에 있는다. 빈에서 작곡가로, 특히 오페라, 실내악, 종교음악에서 높은 명성을 쌓는다. 그의 43편의 오페라 중에 가장 성공한 것으론, 《Danaides》(1784)과 《Tarare》(1787)을 꼽을 수 있다. 살리에리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하이든등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교류가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는 모두 어렸을 때,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의 열등감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1790년대 빈에는 살리에리의 도작설, 독살설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이들 중 사실로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는 여러 연극, 영화의 소재가 된다. 이들 중 유명한 것이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이며, 이 안에서 살리에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주변 인물(1인자)로 인하여 2인자로서 열등감과 시기를 보이는 심리적 증상으로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공학 공학(工學, )은 과학적, 경제학적, 사회적 원리와 실용적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제품, 도구 등을 만드는 것 또는 만드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공학의 영역은 넓고, 여러가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다. 공학이라 하면 수학과 자연과학을 기초로 해서, 가끔은 인문, 사회과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공동의 안전, 건설 복지를 위해서 유용한 사물이나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공학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의 자연과학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공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점은 있다. 어떤 현상을 눈앞에 두고 자연과학도는, “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 일까?”나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라고 하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에 반해, 공학은 '어떻게 하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나 물건을 현실에 만들 수 있을까'를 추구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어떻게 하면 목표로 하는 성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학은 안전성, 경제성, 보안성 등 실용적인 관점에서 평가 및 판단을 한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인원, 예산의 제약 속에서 공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검토와 그 평가를 공학적 타당성이라고 하며, 공학적인 성질의 분석에는 환경 적합성, 사용성, 정비성(整備性,), 수명주기비용 등 (질량, 속도같이 즉물적으로 단순하게 측정 가능한 성질과는 다르게, 인간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평가 방법이 필요한 것이 많다. 그렇게 해서 평가방법의 개발도 공학의 중요한 분야이다. 또한 공학은 다른 학문의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이라고 하는 면에서 공동의 복지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며, 공학 각 분야의 학회에 이론적인 내용을 쌓아 놓은 신조()가 정해져 있다. 현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고 하는 용법은 18세기에 돼서 생겨난 것이지만 ‘엔지니어링’의 개념에 합치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행해져왔다고 생각되고 있다. 공학을 실천하는 것을 엔지니어(engineer) 또는 기술자라고 부른다. ‘엔지니어링’이라고 하는 단어는 꽤 최근에 생겨난 것이지만, 그 단어가 있기 전에 엔지니어(engineer, 기술자) 라고 하는 단어는 존재해 있었다. ‘engineer’는 ‘engine’‘’에 접미사인 ‘-er’이 붙은 형태를 하고 기관을 조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engineer’가 군용 병기 제작자의 의미로 쓰인 문헌이 1325년 경에 있었다. 동시에 ‘engine’은 ‘전쟁에 사용되는 기계장치’, 즉, 무기라는 의미가 있었다. ‘engine’의 어원은 1250년 경 라틴어의 잉게니움()으로부터 생긴 말로, 잉게니움은 천성, 성질 특히 재능을 뜻하고, 거기서부터 파생된 기발한 발명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에 민간의 다리나 건축물의 건설법이 공학 분야로서 발전함에 따라 'civil engineering(토목공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애초에 'engine'이 무기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군사와는 관련이 없는 분야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civil(시민)'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8세기 이전에 군사기술만을 의미하던 'engineering‘이라는 단어가 'civil engineering(=군사이외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에너지 등을 이용해서 편의를 얻는 기술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근대적인 공학의 개념은 상기한 경위로 형성된 것이지만, 인류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밝혀내서 찾아본다면 고대에도 근대공학과 일치하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 고대 로마의 수도와 도로나 콜로세움, 마야문명, 잉카제국, 아스테카의 테오티우아칸 등의 도시나 피라미드, 만리장성 등은 고대의 공학의 정교함과 기능을 보여준다. 최초로 토목기술자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는 임호테프가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인 조세르왕을 섬기면서, 기원전 2630년부터 기원전 2611년쯤 사카라에서 조세르왕의 피라미드(계단식 피라미드)의 설계와 건설 감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에는 민간용과 군사용 양쪽의 분야에서 기계가 개발되었다. 안티키테라 섬의 안티키테라 기계가 알려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하며,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기계는 초기 기계공학의 한 예이다. 그 후로 기계에 차동기어 또는 유성기어의 지식이 필요해지면서 그 두 가지 기계이론의 중요한 원리가 산업혁명의 기어 트레인의 설계를 도와주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봇공학이나 자동차공학 등 여러 가지 분야에 넓게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엔 그리스에 투석기가 개발되었고, 중국과 그리스, 로마의 삼단범선은 물론, 바리스타나 캐터펄트라고 하는 복잡한 기계식 병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중세에는 트레뷰셋이 개발되었다. 월리엄 길버트는 1600년에 "De Magnete"을 저술하고, electricity(전기)라고 하는 단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전기공학자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기계공학에서는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들었다.이 증기기관의 개발이 산업혁명을 이끌어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었다. 18세기에는 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직이 확립되고, 공학은 수학이나 과학을 응용하는 분야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동시에 그때까지 군사와 토목으로 나뉘어 있던 공학에 단순한 기술로 간주되었던 기계제작까지 공학의 한 부분으로 추가되었다. 1800년대의 알렉산드로 볼타의 실험이 있고 그 후 마이클 패러데이나 게오르크 옴 등의 선구자의 실험을 거쳐 1872년에 전동기가 발명된 것이 전기공학의 발단이다.19세기 후반에는 제임스 와트, 제임스 맥스웰과 하인리히 헤르츠의 성과에 따라 전자공학이 시작되었다. 그 후,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의 발명에 의해 전자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어 지금은 전자공학이 공학 중에도 특히 기술자가 많은 영역이 되었다. 토마스 세이버리와 제임스 와트의 발명에 의해 기계공학의 발전이 가속되었다. 산업혁명기(期)에 각종 기계나 그 수리와 보수를 위한 도구가 발달하고, 그런 도구들은 영국으로부터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화학공학도 산업혁명기(期)였던 19세기에 기계공학과 같이 발전했다. 대량 생산은 신소재나 새로운 제조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화학물질의 대량 생산이 필수적이었고 결국 그것이 1880년 경 까지 새로운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화학공학은 그러한 화학공장이나 제조법의 설계를 맡았다. 항공공학은 항공기의 설계를 취급하는 분야로 항공우주공학은 우주선의 설계까지 확장된 비교적 최근의 학문분야이다. 그 기원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걸쳐진 항공기의 선구적 발전이지만, 최근엔 18세기 말의 조지 케일리의 업적이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초기의 항공기는 다른 공학 분야의 개념이나 기법을 도입해서 대부분 경험론적으로 발전해갔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해서 약 10년 후에는 항공공학이 크게 발전해, 제 1차 세계대전에 군용 항공기가 발전되기까지 했다. 반면, 과학적 기초를 닦는 연구는 이론 물리학과 실험을 결합하는 것으로 행해졌다. 공학에서 컴퓨터의 역할은 커지고 있다. 공학에 관해서 컴퓨터가 지원을 하는 각종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수리모델의 구축이나,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치해석도 컴퓨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AD소프트웨어는 3차원 모델링이나 2차원의 설계도의 작성을 용이하게 한다. CAD를 응용한 DMU(Digital Mock Up)이나 유한요소법 등을 사용한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를 사용하면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물리적인 프로토타입을 만들지 않아도 모델을 작성해서 해석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으로 제품이나 상품의 결함을 알아내거나, 부품끼리의 맞물림을 조사하거나, 인체공학적인 면을 연구하거나, 압력, 온도, 전자파, 전류와 전압, 유체의 흐름, 운동이나 시스템의 정적 및 동적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정 공학 분야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있다. 예를 들어, CAM소프트웨어는 CNC공작기계에 주어지는 명령렬을 생성한다. 생산 공정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로 공정관리 시스템(MPM)이 있다.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는 반도체 집적 회로나 프린트 기반이나 전자 회로의 설계를 지원한다.간접재 조달을 관리하는 MRO소프트웨어도 있다. 최근엔, 제품 개발에 관련된 소프트웨어의 집합체로 제품 수명 주기 관리(PLM)소프트웨어가 사용되고 있다. 공학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사회의 행동에 좌우된다. 현대의 제품이나 건설은 반드시 공학설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공학 설계는 환경, 사회, 경제에 변화를 미치는 도구이며, 그 응용에는 큰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많은 공학계의 학회는 행동규약을 제정하고, 회원이나 사회에 그것을 알리려고 하고 있다. 공학 프로젝트 중에는 논쟁이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개발, 중유 추출 등이 있다. 이것에 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엄한 방침을 설정해놓은 기업도 있다. 공학은 인간개발의 중요한 원동력 중 한 가지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부근의 공학적 능력은 매우 낮고, 그 때문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대개 자력으로 중요한 기반시설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밀레니엄 개발 목표의 상당부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반시설의 개발과 지속가능한 기술적 개발이 가능하기 위한 충분한 공학적 역량을 필요로 한다. 해외의 개발이나 재해 구조를 실행하는 NGO는 기술자를 다수 모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자선단체가 인류를 위해 공학으로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카르만은 고전적인 공학교과서 Foundation of Solid Mechanics의 개정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학은 과학과 완전히 다르다. 과학자는 자연을 이해하려고 한다. 기술자는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 기술자는 발명을 강조한다. 발명을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실체화해서,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형체로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장치, 도구, 재질, 기법, 컴퓨터 프로그램, 혁신적인 실험,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 기존의 무언가를 개량하는 것이다. 설계는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형태나 수법이나 수치가 설정되어야한다. 새로운 설계에 착수하려면 기술자는 필요한 정보가 모두 준비되어 있을 리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많은 경우 과학지식의 부족에 따라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기술자는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이나 역학을 공부한다. 그러고 나서 공학에 있어서의 필요성에 따라 관련 과학의 지식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적 방법과 공학적 방법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공학적 방법은 과학적으로는 엄밀히 해명돼있지 않은 과거의 여러 사례에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경험론적 법칙을 짜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은 현상의 정확한 관찰이다. 관찰 결과를 분석해서 전달하기 위해, 공학적 방법이든 과학적 방법이든 수학 같은 분류기준을 사용한다. Walter Vincenti의 저서 "What Engineers Know and How They Know it"에 따르면, 공학의 연구는 과학의 연구와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공학은 대체로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분야지만, 문제 자체는 정확한 방법으로 풀기엔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에 관해 공기역학적 흐름을 나비어-스톡스 방정식의 근삿값으로 나타내거나 재료의 피로(疲勞, 영어: fatigue) 손상의 계산에 마이너 법칙을 사용한다. 또한, 공학에서는 태반은 경험론적인 수업도 자주 채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공학은 자연과학과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발달해 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의 효율이 관한 연구로부터 열에 관한 인식이 깊어졌다.열에 관해 자연과학에서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에 따라 냉각기술 또한 개발될 수 있었다. 목적이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의학과 공학의 일부 분야의 공통분모로 인체의 연구가 있다. 의학에 관해선 필요하면 기술을 사용해서도 인체의 기능을 유지, 강화해서 경우에 따라 인체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있다. 현대의학은 이미 일부의 장기의 기능을 인공의 것으로 치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심장 박동기 등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의용생체공학은 생체에의 인공물을 채워 넣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영역이다. 역으로 인체를 생물학적 기계로 취급해 연구대상으로 하는 공학 분야도 있으며, 기술로 그 기능을 진화시키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뉴런 네트워크, 퍼지 논리, 로봇 등이 있다. 공학과 의학의 학제적인 영역 또한 존재한다. 의학과 공학은 실세계에 관한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상을 좀 더 엄밀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두 분야 모두 실험이나 경험적 지식이 필수로 되어있다. 의학은 인체의 기능도 연구한다. 인체는 생체 기계로 인식했을 경우에 공학적 수법으로 모델화 가능한 다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은 펌프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골격은 지렛대와 연결된 듯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또한 뇌는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있다.이런 유사성이나 의학에 관한 공학의 응용의 중요성의 증대에 따라, 공학과 의학의 지식을 응용한 의용생체공학이 태어났다. 시스템 생물학 같은 새로운 과학 분야는 시스템의 모델링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해석 등 공학에서 사용되어 왔던 해석 수법을 채용해서 생명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공학과 예술의 사이에도 관련이 있다. 건축, 조원,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은 마치, 공학과 예술의 접점을 교환하는 분야이다. 다른 부분에도 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가 있다. 시카고 미술관은 NASA의 항공우주 관련 디자인에 관한 전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로베르 마야르가 설계한 다리는 예술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남 플로리다 주립대에서는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공학부에 예술과 공학을 맞추는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기의 예술가 겸 기술자로 유명하다. 정치학에 '공학'이라고 하는 말을 도입한 사회공학이나 정치공학은, 공학의 방법론이나 정치학의 지식을 이용해서, 정치구조나 사회구조의 형성을 연구한다. 라이너스 폴링 라이너스 칼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은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화학자이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신이 쓴 《이중 나선(Double Helix)》에서 라이너스 폴링을 "당시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는 지표 핵실험을 반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마리 퀴리는 물리학상을 남편과 함께 받았고 존 바딘은 두 번의 물리학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으며 프레데릭 생어도 1980년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다.) 또한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폴링은 오레건주 포틀랜드에서 헤만 헨리 윌리엄 폴링(Herman Henry William Pauling, 1876년 - 1910년)과 루시 이사벨 벨레 달링(Lucy Isabelle Belle Darling, 1881년- 1926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 칼(Carl)과 친할아버지(Linus)를 기념하여 라이너스 칼(Linus Carl)을 따라 지어졌다. 아버지 헤만과 어머니 루시는 각각 23살, 18살에 오레건주 콘돈의 한 디너파티에서 만났고 6개월 후 그들은 결혼했다. 헤만 폴링은 미주리 주의 콘코디아에서 독일계 이주 농민으로부터의 후손이다. 칼 폴링은 가족과 함께 오레건주의 오스웨고에 정착하기전 캘리포니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주조공장의 철물상으로 일했다. 중등학교를 마친 다음 헤만 폴링은 약사가 되기위해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의 견습생 수행이 끝난다음, 그는 제과점 도매상인이 되었다. 폴링의 어머니 루시는 영국, 스코틀랜드계 후손이며 교사, 농민, 측량사, 우체국장, 변호사로으로 일한 라이너스 윌슨 달링의 딸이다. 라이너스 달링은 11세에 고아가 되었으며 학교선생이 되기 전에 제빵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는 오레건주 터너에서 온 엘리스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결국 그들은 결혼했다. 1888년 7월 17일 엘리스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유산되었다. 그리고 한달이 채 가기도 전에 네명의 딸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앨리스는 사망했다. 라이너스 폴링 태어난 후 1년을 포틀랜드에서 그의 부모님과 함께 단칸방 아파트에서 보냈다. 1902년 그의 여동생 파울린이 태어난 후 폴링의 부모님은 도시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포틀랜드에서 살면서 아파트는 매우 붐볐고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루시는 헤만이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동안 오스웨고의 헤만의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헤만은 Skidemore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게 된 살렘(Salem) 지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1904년 루실의 출생과 함께 헤만 폴링은 오스웨고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으며 거기서 그는 개인 약국을 개업했다. 그러나 오스웨고의 경기는 안 좋았으며 그과 그의 가족들은 1905년 콘돈으로 다시 이주했다. 1909년 폴링의 친할아버지 라이너스는 그의 두 번째 부인과 이혼했으며 그의 딸 루시(폴링의 어머니)와 나이가 거의 같은 어린 학교선생과 재혼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신장염으로 비롯되어 합병증으로 야기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동안에, 헤만 폴링은 복부의 주기적인 심한통증과 약한 체력으로 매우 고통받고 있었다. 루시의 여형제 애비(Abbie)는 헤만의 목숨이 위태롭도록 아픈 것을 보고 즉시 가정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의사는 통증을 완화시키기위해 헤만에게 진정제를 투여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경감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가오는 몇 달동안 매우 악화되었으며, 1910년 6월 11일 그는 라이너스, 루실, 파울린을 혼자 짊어지게된 루시를 남기고 위궤양으로 결국 사망했다. 폴링은 어린 시절 대단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폴링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아버지 헤르만 폴링은 지방신문 더 오리가니안(The Oregonian)의 편집장에게 아홉 살 아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폴링의 초등학교 친구인 로이드 제프레스는 자기 방에 작은 화학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프레스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은 폴링이 화학공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폴링은 할아버지가 수위로 근무했던 제철 공장에서 많은 실험 기구와 재료를 몰래 운반하여 화학 실험을 계속했다. 고등학생이 된 폴링은 책과 화학실험으로 쌓아온 엄청난 양의 화학지식으로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고 화학 담당 선생님의 방과후 실험을 돕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폴링은 보수도 많이 받을 수 있는 화학공학자가 되고 싶어하였고 대학에 가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어머니 벨은 아들이 생계를 꾸리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돕길 원했고 폴링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었고 철물점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고민하던 폴링은 친구 제프리스 가족의 충고를 듣고 당시 오리건농업대학 (현 오리건 주립 대학) 화학공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폴링은 15세의 3학년 1학기 이미 오리건농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점을 다 채워놓은 상태여서 대학에 진학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으나 당시 오리건 주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필수 학점이었던 미국사 듣지 못하였다. 폴링은 학교장에게 1학기에 일년 과정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폴링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폴링의 모교 워싱턴고등학교는 45년 뒤, 이미 폴링이 두 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후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 해 여름에 폴링은 식료품 잡화점에서 1주일에 8달러를 벌어가면서 아르바이트일을했다. 그의 어머니는 포틀랜드의 제조공장 다수를 운영하는 Schwietzerhoff와 면담을 하여 취직하도록 시켰다. 폴링은 견습공으로 한 달에 40달러를 받으며 고용되었다. 폴링은 그의 일에 매우 능숙해서 월급이 인상되어 한 달에 50달러를 받으며 일했다. 그는 여가시간에 그의 친구 둘과 함께 사진실험실을 세우고 작은 사진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이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후에 그가 대학생활을 할 수있도록 충분한 돈을 벌수있도록 소망했다. 폴링은 오레건주 농업대학에서 입학허가 편지를 1917년 9월에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직장 사장에게 그의 대학입학계획을 알렸다. 1917년 10월, 폴링은 그가 대학생활비용으로 모아두었던 200여달러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촌 Mervyn과 함께 Corvallis 캠퍼스 주변 하숙집에서 살았다. 첫 번째 학기에서 폴링은 화학과에서 두 과목, 수학에서 두 과목, 기계 제도, 현대영어산문, 체육 그리고 군 훈련을 수강신청했다. 폴링은 그의 학교 생활 초기에 1학년 여학생 이린(Irene)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폴링은 그가 저축한 150달러정도으로 그녀를 위해 쓰기도 했다. 그는 곧 여학생기숙사의 주방을 정리하는 업무와 고기를 자르고 난로의 장작을 패는 일을 한달에 100시간 정도하는 그러한 일을 했다. 시간당 25센트의 보수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재정적으로 곤란함을 겪었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캠퍼스의 식당에서 하루에 한끼 식사하는 걸로 때웠다. 폴링은 매우 대학생활을 활발히 했기 때문에, Delta Upsilon이라는 비영리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2학년 이후에 어머니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포틀랜드에서 돈을 벌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그를 정량분석을 가르치는 위치를 그에게 권했고, 그는 마침 정량분석이라는 과목을 막 이수한 상태였다. 그는 일주일에 40시간을 실험실과 교실에서 일하여 한 달에 100달러정도 벌었다. 그리고 이러한 돈은 그가 대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2년간의 대학생활에서 폴링은 원자와 분자의 전자구조에 대한 일을 했던 Gilbert N. Lewis와 Irving Langmuir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연구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물질의 성질을 이용하여 어떻게 그것들이 분자를 이루는 원자들의 구조와 관련되어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자화학이라는 새로운과학분야의 창시자가 되었다. 폴링은 인류학 사회학에 대한 공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게다가 물리, 수학부의 필수과목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다루었다. Samuel Graf교수는 폴링을 높은 수준의 수학과정에서 그의 조교로서 선발했다. 4학년 겨울 무렵, 폴링은 가정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화학부 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제안받았다. 그곳에서는 폴링의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인 Ava Helen Miller가 있었다. 1922년 폴링은 오레건주 주립대학을 졸업했으며 화학공학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원을 캘리포니아 주의 패서디나의 칼텍으로 지도교수인 Roscoe G. Dickinson 지휘 아래로 갔다. 그는 결정의 구조를 결정짓는 X선 회절분광법의 사용을 포함하는 연구로서 졸업을 했고 그가 칼텍에 있는동안 광물질, 무기질들의 결정구조에 관한 7장짜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물리화학에서 phD를 받았으며, 1925년에 수리물리학분야의 최고 영예와 함께 졸업했다. 1917년 폴링은 코발리스(Corvallis)에 위치한 현재 오리건 주립 대학의 전신인 오리건 농업 대학(the Oregon Agricultural College)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는 full-time 으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장작을 쪼개고, 청소를 하고, 여학생 회관의 주방에서 고기를 써는 등의 일을 하였다. 또한 2학년 여름방학에는 아스팔트 성분을 시험하는 일자리를 구했고 쓰고 남은 돈을 집에 보냈다. 그러나 2년의 학업을 마치고 어머니 벨은 아들 폴링에게 1년동안 휴학을 하고 일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폴링은 화학교수로부터 1년동안 정량화학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받게 되고 학교에 계속 남아 돈도 벌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된다. 폴링은 강의 준비에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고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점차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았다. 1922년 겨울학기 가정경제학과의 화학수업을 맞게 된 폴링은 수업에서 아바 헬렌 밀러를 만나게 되고, 둘은 1923년 6월 17일에 결혼하게 된다. OAC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화학과장 길버트 루이스와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공업화학자 어빙 랭뮤어의 원자의 전자구조와 분자를 이루는 화학결합에 대한 성과를 접하게 된다. 그는 두 원자 사이에 공유 전자를 가진 화학 결합이 생긴다는 그들의 이론에 매혹되었고 물리적, 화학적 성질이 원자들의 결합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신의 주 연구분야로 하기로 하고, 양자 화학의 기초를 세운다. 1922년 폴링은 OAC를 졸업하고, 칼텍의 아더왕이라고 불리는 저명한 화학자 아더 아모스 노이즈에게 발탁되어 칼텍(California Institue of Technology, Caltech)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다. 그는 로스코 G. 디킨슨의 지도 아래 X선 구조결정학을 연구하였고 몰리브덴광을 비롯한 다섯 가지 결정의 원자구조를 밝혀냈다. 그는 1925년 물리화학과 수리물리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0년대 말에 폴링은 화학결합의 본질에 관한 논문을 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1939년에 출판한 화학결합에 관련된 그의 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폴링이 1954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인 '화학결합의 본질과 그것을 이용한 복잡한 물질들의 구조규명에 관한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폴링은 그의 화학결합에 관한 연구들을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에 집약시켜서 출판하였고 이 책은 가장 영향력이 큰 화학책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39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를 때까지 이 책은 16000 번 이상 인용되었다. 심지어 8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분야에 관련된 논문들은 종종 그의 책을 인용하고는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련된 업적 중 하나는 혼성오비탈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자에 있는 전자는 s 혹은 p 오비탈등의 오비탈의 모양의 확률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원자간의 결합을 설명할 때에는 다른 종류의 오비탈의 성질을 섞은 새로운 함수를 정의하면 훨씬 설명이 편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탄소원자의 경우 한 개의 2s 오비탈과 3개의 2p 오비탈을 가지고 있는데 이 4개의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4개의 동일한 오비탈(sp3 혼성오비탈)을 만드는 것으로 메탄과 같은 탄소화합물에서 탄소가 4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탄소의 4개 오비탈 중 1개의 2s 오비탈과 2개의 2p 오비탈이 혼성화를 하여 3개의 동일한 오비탈(sp2 혼성오비탈)을 형성하고 2p 오비탈 한 개는 혼성화를 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불포화 탄소화합물인 에틸렌과 같은 화합물의 결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탄소는 다른 화합물에서 다른 형태의 혼성화를 한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대한 업적 중 또 하나는 이온결합과 공유결합간의 관계를 규명한 것이였다. 이온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원자간에 전자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고 공유결합은 결합을 이루면서 전자의 균일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하는 것이다. 폴링은 이 두 종류의 결합이 상극을 이루면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원자간의 결합의 성격은 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폴링 자신이 제창한 '폴링의 전기음성도'의 개념이 쓰이게 된다. 결합을 이루는 두 원자의 전기음성도 차이가 결합의 이온성 즉 원자간의 결합이 이온결합과 공유결합중 어느 결합과 더 비슷하게 존재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폴링의 화학결합에 관한 업적 중 세 번째 것은 방향족 탄화수소의 구조를 규명하는 것이였다. 이 이전까지 벤젠의 구조에 대한 가장 나은 설명은 독일의 화학자인 케쿨레의 설명이였다. 케쿨레는 벤젠이 두 가지의 구조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 하면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때 첫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이중결합으로 이중결합이였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두 번째 구조에서 단일결합으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폴링은 양자역학에 기초하여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벤젠의 탄소-탄소간의 결합은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의 중간쯤 되는 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벤젠의 구조는 케쿨레가 제시한 두 가지 구조의 사이의 구조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두 가지 구조가 존재하여 그 두 가지 구조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후에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공명(resonance)' 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폴링의 벤젠구조에 대한 설명은 앞서 그가 제시한 오비탈의 혼성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설명 모두 여러 개의 전자구조가 합쳐저서 그러한 구조들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1952년 9월 16일에 폴링은 '나는 원자핵 모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겠다' 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연구노트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10월 15일 폴링은 Science 지와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지에 그의 원자핵 모델인 Close-Packed Spheron Model 을 발표하였다. 이후 거의 30년동안 폴링은 1994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spheron cluster model 에 관련된 여러개의 논문을 저술하였다. 폴링의 spheron model 에 깔린 기본적인 생각은 원자핵은 중성미자 무리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은 중성미자 무리에는 중양자, 알파입자, 3중양자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짝수의 원자번호를 갖는 원자핵의 경우 알파입자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폴링은 원자핵의 구 구조를 platonic solid 와 같은 기하적 구조로부터 도출 해내었는데 이는 이 당시의 독립 입자 모델로 부터 이를 도출해내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또한 1990 년에 폴링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모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최근에 나는 실험적으로 측정된 들뜬 상태와 바닥상태의 진동에너지를 분석함으로써 원자핵의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Physical Review Letter' 나 다른 물리학 출판물을 보면서 나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핵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자 중 여태까지는 어느 누구도 내가 밝혀놓은 것까지 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밝힌 사람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연구를 앞으로도 나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할 것이다.' 1930년대 중반, 폴링은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비록 그가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던 것은 무기 분자 구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자금 책임자였던 위버는 폴링에게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대어 주었다. 따라서 그 돈으로 연구 건물을 새로 짓고 직원을 뽑고 장비를 구축하여 분자생물학 분야로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분야로의 연구를 위해 토마스 헌트 모건,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캘빈 브리지스, 알프레드 스터트반트와 같은 생물학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어나갔다. 그 당시 폴링은 생명이 없는 화학물질이 생명체로 변환되는 데에 단백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밝힌다면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X-ray 회절 분석을 통해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분석하려고 하였지만 단백질은 그 방법에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크기가 너무 크고 다양한 거대 분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단백질은 조금만 가열해도 변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정제, 분리도 어려웠다. 따라서 1930년대 영국의 결정학자 윌리엄 아스트버리가 찍은 가장 좋은 X-ray 사진에 대해 폴링은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11년이 걸렸다. 그의 수학적인 분석은 옳았지만, 아스트버리의 사진에서 단백질 분자는 예상 위치보다 기울어져 있었다. 폴링은 단백질의 변성 실험을 통해 단백질은 가역적인 약한 결합과 비가역적인 강한 결합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약한 결합을 수소결합, 강한 결합을 공유결합이라고 추정하였다. 이후 그는 미르스키와 함께 아미노산들이 공유결합의 일종인 펩티드 결합을 통해 사슬을 형성하고 이들이 약한 수소결합을 통해 특별한 모양을 가진 단백질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아미노산의 구조를 밝혀 펩티드 결합의 길이와 각도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단백질의 가능한 구조의 수를 대폭으로 줄일 수 있었고 단백질의 성질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폴링은 이 연구를 통해 헤모글로빈 구조 모델에서는 원자들이 나선형 구조로 배열되어있다고 밝혔고, 이 아이디어를 일반화하여 단백질에 적용시켰다. 1951년, 아미노산과 펩티드의 구조, 그리고 펩티드 결합의 평면 성질을 기반으로 하여 폴링과 로버트 코리, 그리고 헤르만 브랜손은 단백질 2차 구조에서 1차적인 구조적 특징으로서 알파 나선과 베타 병풍 구조를 제안하였다. 1936년 폴링은 오스트리아 출신 과학자 랜스타이너를 만났고 항체에 대한 의문점을 듣게 되었다. 항체들은 모두 비슷한 크기의 단백질인데 어떻게 특정한 항원을 정확히 구별하고 결합할 수 있는가? 폴링은 이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특정한 항원만을 구별하는 항체의 특이성이 분자의 구조와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1940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항체의 한쪽 끝이 항원에 닿으면 주위에서 모양을 형성하여 수소결합이나 정전기적 인력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항체와 항원이 상보적 형태를 가지게 되어 잘 들어맞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으로 폴링은 이 분야를 이끌어갔고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단백질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낸 폴링이었지만 여전히 생명의 비밀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1952년 허쉬와 체이스의 실험 결과로 유전자는 DNA로 구성되어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나자 폴링은 DNA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는 DNA의 구조를 연구한 끝에 DNA는 삼중나선 구조라고 제안하였고, 1952년 DNA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의 모델은 기본적인 실수가 있었다. 폴링은 DNA의 염기를 중심으로부터 바깥쪽에 배치시켰고 인산기를 안쪽에 배치시켜 서로 결합한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폴링이 DNA의 구조의 분자적 모델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캐번디시 연구소에 전해졌을 때, 왓슨과 크릭은 DNA의 분자적 모델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킹스 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가 아직 출판하지 않은 데이터에서 도움을 얻었는데 그들의 데이터는 나선과 그 축을 따라 평면의 염기가 있음을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1953년 초,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올바른 구조로서 DNA 이중 나선을 제안하였다. 사실 왓슨과 크릭도 DNA는 삼중나선 구조를 띠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생각에 대해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들이 건넨 모형을 찢어버렸다. 그 모델의 문제점으로 음전하를 가진 인산기들이 DNA 분자 중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분자가 너무 촘촘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왓슨과 크릭에게 자신이 찍어낸 DNA의 X선 회절사진을 제시하였고 이 때문에 왓슨과 크릭은 바른 길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폴링은 밀도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였고 좋은 품질의 X-ray 회절 사진을 얻지 못하는 등 DNA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실수한 부분들을 인정했다. 폴링이 그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 영국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X-ray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사진은 왓슨과 크릭의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폴링은 자신의 동료 로베르트 코레이가 프랭클린의 사진 몇 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DNA 구조를 고안하기 전에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폴링이 [[DNA 삼중나선]_ 이론을 급하게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얻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9년 11월, 라이너스 폴링, 하베이 이타노, S.J. 싱어, 그리고 이베르트 웰스는 <겸형 적혈구 빈혈증, 분자병>이라는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출판하였다. 이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에 의한 인간 질병의 첫 증거물이었고, 분자 수준에서 이해된 첫 번째 질병이었다. 전기영동을 통해 그들은 겸형 적혈구 빈혈증에 걸린 환자 각각은 적혈구에서 변형된 형태의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겸형 적혈구 형질을 가진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형태의 헤모글로빈 모두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멘델 유전이 단순히 단백질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특정한 물리적 특성까지 결정함을 보여주는 첫 증거였다. 즉, 분자유전학이 도래했음을 나타내었다. 1951년, 폴링은 “분자의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1950년대 후반, 폴링은 정신병이 효소의 기능장애로 발생한다는 믿음에 뇌의 기능에서 효소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였다. 1965년, 폴링은 아브라함 호퍼의 <정신의학에서의 니아신 치료요법>이라는 논문을 읽고, 비타민이 그와 관련된 결핍증의 예방과 무관하게 생화학적으로 중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1968년 폴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정신의학>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사이언스 지에 투고하였다. 하지만 이 논문은 1970년대에 다소 논쟁이 있는 비타민 대량 투여 요법 운동을 야기했다. 폴링은 몸 속에 존재하는 물질의 농도를 변화시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실행을 언급하기 위해 “orthomolecular(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의 생각은 분자 농도 조정론에 입각한 의학의 기초를 형성했으나 통상적인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실행되지 않고 강경하게 논쟁해왔다. 비타민 C에 대한 폴링의 연구는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66년 생화학자 어윈 스톤의 비타민 C 복용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져, 폴링은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 매일 비타민 C 3 g을 복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영향이 있음을 인지하고 1970년 <비타민 C와 감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그는 1971년 영국의 암 외과의사 카메론과 함께 말기 환자들에게 암 치료요법으로 비타민 C를 복용시키거나 정맥 주사를 통해 주입하는 장기 임상 실험을 공동으로 시작하였다. 카메론과 폴링은 그들의 관찰 결과를 담고 있는 많은 전문 논문과 «암과 비타민 C»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 폴링은 비타민 C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결국 비타민 C를 투여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생존 확률이 4배나 더 높다는 결과를 담고 있는, 다소 진위가 의심스러운 말기 환자들 100명 그룹에 대한 두 연구를 출판하였다. 이후 메이오 클리닉에 의해 수행된 임상 시도에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10,000 mg)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플라시보 효과보다 좋지 못했고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이는 비타민 C가 암 치료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의학 협회 역시 비타민 C가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엉터리라고 결론지었다. 폴링은 그 연구 결과들을 비난하였고 최종 연구를 “사기와 계획적인 잘못된 설명”으로 간주하였으며, 비타민 C를 정맥주사를 통해 주입하지 않고 구강 복용을 시킨 연구에 대해 비판하였다. 또한 실험에서 조작 변인은 비타민 C를 복용하는 것이었고, 비타민 C 복용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메이오 클리닉을 비판하였다. 폴링은 암 환자들은 지속적으로 비타민 C를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시도에서 메이오 클리닉 환자들은 두 달 반 동안만 비타민 C를 복용하였다. 그 결과는 공개적으로 오랫동안 폴링과 카메론, 그리고 메이오 클리닉 사이에서 상당히 신랄한 논쟁이 일었다. 특히 서로 간에 위법 행위와 과학적 무능력함에 대해 비난이 일었다. 최종적으로 메이오 클리닉 연구의 결과들이 암 치료제로서의 비타민 C에 대한 관심을 종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링은 비타민 C를 암과 감기 치료제로 진척시키기를 지속하였는데, 비타민 C를 뇌가 손상된 아이들에게 치료제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능력계발연구소 (The Institutes for the Achievement of Human Potential) 와 함께 연구하였다. 그는 이후 캐나다의 내과의사 아브람 호퍼와 함께 부가적인 암 치료법으로서, 비타민 C의 많은 복용을 비롯한 미량 영양소 식이요법을 공동연구를 하였다. 아서 B. 로빈슨, 그리고 다른 동료와 함께 폴링은 1973년에 캘리포니아 먼로 파크에 분자교정의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곧 라이너스 폴링 과학의학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폴링은 비타민 C에 대한 연구를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까지 이론 화학과 물리 연구를 계속하였다. 말년에 그는 동맥경화증 예방에 대한 비타민 C의 역할의 가능성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리신과 비타민 C를 이용해 협심증을 경감시키는 사례보고 3편을 발표하였다. 1996년에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오리건 주 Corvallis로 이전하여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에서 미량영양소, 피토케미컬 (식물에 있는 화학 물질), 그리고 다른 물질들을 식이요법에 적용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연구를 수행하기를 지속하였다. 라이너스 폴링 연구소가 Palo Alto에 있을 때 그곳에서 일했던 연구 조감독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은 연구소가 이전한 뒤에 유전 정보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폴링은 2차 세계대전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으나, 전쟁의 여파와 아내 아바 헬렌의 평화주의는 폴링 역시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해주었다. 그는 대부분이 유태인인 독일의 동료과학자들이 보내는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여행에 필요한 사증을 발급받아 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때부터 폴링은 히틀러의 독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하였고, 1939년 유니언 나우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전 세계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미국의 연방제를 모형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로, 폴링은 이 단체에 가입을 하게 된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나치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폴링은 또한 미 해군 잠수함의 산소측정기, 폭약, 로켓 추진체 등 미국의 군수 관련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맨허튼 프로젝트 초기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주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 폴링을 화학분야 담당으로 초청하나 폴링은 가족과 멀리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여 거절한다. 전쟁 중 미국 정부가 서부해안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자 아바 헬렌은 이것에 항의하여 미국시민 자유연맹의 감금반대 투쟁을 돕는다.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폴링을 포함한 수많은 과학자들은 원자과학자연맹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면서 원자력기술의 공유와 원자력을 민간 통제 하에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에 아인슈타인은 대중에게 핵무기 개발의 위험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를(Emergency Committee of Atomic Scientists) 조직하였고 폴링도 이에 가입한다. 그는 그의 정치적 지지자인 아내 아바 헬렌과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성과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러나 1946년 가을 스탈린의 동유럽 봉쇄와 중국의 공산반군 등 공산주의의 세력이 강해지자 미국인들은 반공주의로 돌아섰으며 원자기술공유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국가적으로 반공주의가 대세였던 1950년대에도 그는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아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칼텍의 많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총장 두브리지는 폴링에게 정치적 연설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1951년 논란이 되는 단체들을 탈퇴하고 연설들을 중지하였으며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나, 언론의 비난과 국회의 의심은 계속되었다. 195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에는 대중과 지인의 의심이 많이 풀렸고 폴링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폴링은 다시 원자폭탄으로 인한 방사능 피폭과 낙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58년 폴링은 배리 커머너 등과 함께 방사성 동위원소 Sr-90의 유아 치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하였고 1962년에는 루이스 라이스 등과 함께 낙진으로 떨어진 Sr-90을 젖소가 먹고 젖소로부터 우유를 먹는 사람의 뼈에 축적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물리학자이자 반공주의자인 텔러와 방사능 낙진의 위험에 대한 TV토론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폴링은 1958년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중지를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 서명목록을 UN에 제출하였다. 대중의 압박과 낙진의 위험에 관한 연구결과는 1963년 미국과 소련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조약은 그해 10월 10일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바로 그날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폴링의 화학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논객들은 폴링의 정치적 행보에 비판적이었으며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1960년 폴링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낙인 찍은 상원의 한 조사 소위원회에 출두를 명령받아 그토록 많은 서명들을 모은 과정에 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여론은 계속되었다. 그가 1962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자 미국 라이프 잡지사는 “노르웨이에서 온 수상한 모욕”이란 헤드라인을 냈다. 칼텍 총장 두브리지 역시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폴링은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평화에 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10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칼텍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1962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노벨의 유언에 적합한 평화상 후보를 찾지 못하였다. 노벨상 규정에 따라, 이 경우 1962년 노벨상 후보를 다음 년도로 미룰 수 있었다. 이 노벨평화상을 폴링이 받게 됨으로써 폴링은 1962년 노벨평화상을 1963년에 받게 된 것이다. 폴링은 1994년 8월 19일 캘리포니아주 Big Sur의 그의 자택에서 7시 20분경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분류:1901년 태어남]] [[분류:1994년 죽음]]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분류:미국의 화학자]]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자]] [[분류:노벨 화학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오리건 주립 대학교 동문]] [[분류:스탠퍼드 대학교 교수]]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고]] [[분류:물리화학자]] [[분류:이론화학자]] [[분류:무기화학자]] [[분류:미국의 생화학자]] [[분류:생물물리학자]] [[분류:미국의 반전 운동가]] [[분류:포틀랜드 (오리건주) 출신]] [[분류:레닌 평화상 수상자]] [[분류:미국의 의학자]] [[분류: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교수]]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20세기 화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빌 클린턴 윌리엄 제퍼슨 "빌" 클린턴(, 본명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 1946년 8월 19일 ~ )은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다.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시대에 대통령이 되었고, 첫 번째 베이비 붐 세대 대통령이었다. 클린턴은 새로운 민주당(New Democrat) 계열로 묘사된다. 그의 정책 중 일부인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복지 개혁은 중도주의 제3의 길 통치 철학 때문에 추진한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에 그는 다른 정책에 대해서 중도 좌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클린턴은 나중에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평화로운 경제적 확장 기간이 된 경제적 확장의 지속을 이끌었다. 의회 예산국은 2000년에 클린턴의 재임기간의 예산이 흑자라고 보고했다. 건강보험 개혁의 실패 이후에 공화당은 1994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40년만에 처음으로 승리했다. 3년 뒤 1997년에 클린턴은 재선되었고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처음으로 두 번의 임기를 채운 대통령이 되었다. 클린턴은 아칸소주의 호프(Hope)에서 태어나 유명한 온천 휴양도시인 핫스프링스(Hot Springs)에서 자랐다. 당시 이 지역은 도박이 난무하였던 곳으로, 후에 근절되었다. 빌 클린턴은 아칸소주 호프(Hope)에서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주니어는 외판원이었고 빌이 태어나기 석달전에 자동차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빌이 태어난후 그의 어머니는 간호사 공부를 위해 뉴 올리언스에 가게 되었고 빌은 마트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외조부모와 함께 호프에서 살았다. 그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이 있었다. 빌의 외조부모는 모든 인종의 사람들에게 신용으로 물건을 팔았다. 1950년 빌의 어머니(출생시 성명: 버지니아 델 캐시디)(1923년–1994년)는 뉴 올리언스에서 돌아왔고 그해 자동차 딜러를 운영하는 로저 클린턴과 재혼하여 핫스프링스(Hot Springs)으로 이사했다. 빌의 어렸을 적 이름은 빌리였고, 어머니와 양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빌의 계부는 노름꾼에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자주 술에 취해 아내를 폭행하고 때로는 빌리의 이부(異父)동생인 로저 주니어(1956년생)나 심하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환경으로 어머니 버지니아는 빌리가 계부의 성을 따르는 것에 반대하고, 계부와 잠시 이혼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안정을 위하여 모친 버지니아는 로저 클린턴과 다시 결혼하였고, 빌은 1962년 법적으로 클린턴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계부 로저 클린턴이 1967년 암으로 사망한 후, 모친 버지니아는 1969년 제프 드와이어와 재혼했다. 빌의 새 계부 제프 드와이어도 1974년 사망했고, 모친 버지니아는 1982년 딕 켈리와 재혼했다. 이와 같이 빌리의 가정은 전통적이기도 하지만, 복잡한 가정 환경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으로 그는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를 즐겨먹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당시 아칸소 주에서 벌어지던 인종 갈등을 생생히 목격하면서 흑인 민권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는 아칸소 주 학생 대표로 뽑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정치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어,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지내고 싶다는 이유로 아칸소 주 출신의 개신교(침례교) 신자로서는 드물게 예수회에서 설립한 조지타운 대학교(워싱턴소재)에 입학했다. 핫스프링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하여 1968년 국제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고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1970년 PPE(철학, 정치, 경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포드 대학교 재학 관계로 외국에 체류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병역의무가 면제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후에 병역을 기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여 3년 후 1973년에 J.D.(법무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예일 로스쿨 재학 중 한 학년 선배였던 힐러리 로댐을 만나게 되었고, 1975년 결혼했다. 예일 로스쿨 졸업 후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에서 교수로서 법을 가르치면서 1974년 불과 28세의 나이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낙선했다. 1975년에는 힐러리 클린턴과 결혼하였고 1976년 아칸소 주의 법무장관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에는 아칸소 주 주지사로 선출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2세로 당시 미국 최연소 주지사였다. 그러나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프랭크 화이트에게 패하여 낙선당했다. 1982년 다시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1986년과 1990년 재선되어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아칸소 주의 주지사를 연임했다. 클린턴은 1992년 선거에서 현직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와 무소속 후보인 로스 페로를 꺾었다. 이 선거에서 그는 국내의 문제들에 집중하여 특히 불경기에 대한 이슈를 제기했다. 그의 선거 운동 본부의 캠페인 문구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클린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로 두번의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12년 간(1981.1~1993.1)의 연속된 공화당 정권(로날드 레이건(1981.1~1989.1), 조지 H. W. 부시(1989.1~1993.1))이 막을 내렸다. 그 선거 이후 민주당은 지미 카터의 통치 이래 최초로 의회 및 행정부를 포함한 연방정부의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나 재임 초기 계속된 실책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크나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특히 하원에서는 40년 만에 공화당에 다수당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즉각적으로 정권을 인수받은 후 클린턴은 1993년 가족의료법안에 관한 대선 공약에 즉각 서명하게 된다. 본 법안은 고용인에게 종업원의 의료문제 발생상황시 의료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근로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보호법안이었다. 이 정책이 대중적이었던 반면, 클린턴이 대선 초기에 공약했던 군대 내 동성애자 권리 정책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태도는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보진영은 정책이 다소 실험적이라고만 주장했고 보수진영은 군생활에서 별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많은 토의가 있은후 클린턴과 팬타곤은 일명 ‘묻지도 말고 대답도 할 필요없다’는 정책에 합의하게 되며 그것은 오바마 대통령 까지 유효하게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공약대로 연방공무원 10만명 감축 지시를 내렸고, 고어 부통령에게 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고어 부통령의 주도 아래 국정성과평가팀(NPR)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미국의 행정 개혁은 '정보기술을 통한 정부 재구축' 프로그램을 통해 공무원을 30만명 이상 감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미국 행정 개혁의 성공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전자정부의 구현을 통해 이룬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클린턴이 재임하는 1990년대 동안에, 클린턴은 연속적인 경제 호황을 이끌었다(클린턴 행정부의 미국의 경영 예산과에 따르면, 1991년 4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수많은 여자들과 스캔들에 관련되어 수모를 겪었는데 1998년 특검 검사 케네스 스타의 집요한 추적으로 모니카 르윈스키 사건이 밝혀져 탄핵 직전까지 몰렸으며 3000만 달러를 부정대출로 받은 화이트워터게이트 사건 등과 폴라 존스 사건 등 각종 스캔들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2009년 8월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 여기자 억류사태 해결 협상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여기자들을 대동하여 귀국했다. 특히 그는 핵문제 해법에 대한 오바마 대통령의 뜻을 전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의 방북은 단순한 여기자 2명을 석방하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북미 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빌과 전 국무장관인 힐러리 사이에 1980년에 태어난 외동딸 첼시 클린턴이 있다. 백악관에서 사춘기를 보낸 첼시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학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옥스포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NBC 뉴스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현재 클린턴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 레온하르트 오일러(, ,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개신교 목사가 되길 바랐지만,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발탁된 후 그의 제자가 되어, 수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함수의 기호 formula_1(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와 같은 수학적 기호 및 법칙들로 인해서 뛰어난 수학자로 기억된다.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바젤에서 태어났지만, 리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것은 어린 오일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당시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했다가 탈락해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그 곳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 젤과 결혼했다. 그러나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된다. 백내장 수술로 잠시 앞이 보이는 행운을 맞았지만, 그 후에는 눈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다시 시력을 잃게 된다. 17년 동안이나 맹인으로 살게 됐지만, 그는 거기서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력을 잃은 후에 더 열심히 연구해서,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 어떤 수학자들보다도 많은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광학 등의 수많은 책을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1권도 쓸모가 없는 내용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783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오일러의 마지막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전에도 오일러는 팽창하는 풍선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으며 오후에는 동료와 함께 새로 발견된 천왕성의 궤도에 관해서 대화를 나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던 그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몇 시간 후 사망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오일러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며 "그는 계산하는 것과 사는 것을 멈췄다."라고 썼다. 이 일화는 훗날, 헝가리의 저명한 수학자가 되는 에르되시 팔이 신발을 신고 죽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일러가 뇌출혈로 쓰러질 때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을 석판에 썼다거나 말로 남겼다는 설이 있다. 오일러가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쾨니히스베르크를 흐르는 강(프레겔 강)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들을 꼭 한 번씩 차례로 건널 수 있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오일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일러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쉽게 대답해 주었다. "이 다리들을 한 번씩 차례대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답니다."라고 말한 후,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증명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 날에는 "한 붓 그리기"와 같은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위상기하학이라는 분야의 태동을 알리는 문제였다. 중국어 방 중국어 방 혹은 중국인 방()은 존 설(John Searle)이 튜링 테스트로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모르는 중국인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중국어 질문을 이해하지 않고 주어진 표에 따라 대답할 뿐이다. 이로부터 중국어로 질문과 답변을 완벽히 한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진짜로 이해하는지 어떤지 판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능이 있어서 질문 답변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있어도 그것이 지능을 가졌는지는 튜링 테스트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논변의 내용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비교해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능'과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동급의 지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인간 또한 외부에서 접한 자극의 반응으로 습득된 기억속에서 대응방식을 도출하여 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골자를 그대로 따라한 중국어 방의 핵심인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 이 '인간의 지능' 과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중국어 방 논변이 갖는 논리적 바탕이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는 입력되는 Data 를 받아 미리 기록된 Database 와 비교 대조를 하여 Output 을 도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연산과정에서 input 과 output 에 대해 '이해' 하였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 이는 중국어방의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중국어 질문과 답변에 대해 '이해' 가 아닌 모양새의 비교 대조를 통한 '인지' 를 하고 있으며 이는 '컴퓨터로부터의 반응을 인간과 구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생각(사고, thinking)할 수 있는 것' 이라고 주장하는 튜링 테스트를 전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1984년 설은 좀 더 정식적인 버전으로 ‘중국어 방’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리해서 발표했다. 그의 전제는 네 명제로 이뤄져 있다. 두 번째 전제는 중국어 방을 통한 논변으로 뒷받침되었고, 때문에 존 설은 오직 형식적인 통사론적 규칙에 따르는 방을 유지시켰으며 또한 이 방 안의 존재는 중국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 설은 곧바로 세 가지의 결론을 도출했다. 설은 이 논증을 “과도하게 조야한(excessively crude)” 것으로서 기술한다. 이 논증이 실제로 타당한지에 대한 고려할 만한 논박이 존재한다. 그 논의들은 전제를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집중되어있다. 어떤 이는 전제 3이 컴퓨터 프로그램은 통사론적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의미론적 내용은 포함할 수 없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전제 2, 3, 4는 타당하게 결론 1을 도출해 낸 것으로 결론낼 수도 있다. 이것은 논쟁을 컴퓨터 프로그램의 의미론적 내용의 기원으로 이끌고 간다. 이와 같은 논리를 뇌 안의 뉴런과 언어이해력에 대해 적용해 보면, 인간조차 언어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지고 만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안의 사람과 중국어 방을 더한 총체는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실제로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이 중국인 방 이론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예로 애플사의 시리는 본질적으로는 미리 저장된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서 입력된 문장을 분석하고 적당한 문장을 출력하는 '중국인 방 이론'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시리가 아주 훌륭한 인공지능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컴퓨터 파일 컴퓨터 파일()은 컴퓨터 등의 기기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담는 논리적인 단위이다. 하드디스크, CD, DVD 등 저장매체에 대하여 추상화된 정보 단위이다. 운영체제는 파일 조작에 관련된 기능을 API로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파일의 이름과 확장자로 식별하며, 운영 체제에 따라 대소문자를 구별하거나 구별하지 않는다. "파일"이라는 낱말은 1952년 일찍이 천공 카드에 저장된 정보를 가리키는 뜻으로 컴퓨터 기억 장치 환경에 나타났다. 이용 초기에 사람들은 콘텐츠라기 보다는 뒷받침하는 하드웨어 자체를 가리키는 개념에서 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IBM 350 디스크 드라이브는 "디스크 파일"이라고 불렸다. 1962년의 CTSS(호환 시분할 시스템)와 같은 시스템은 여러 개의 파일들을 하나의 기억 장치에 제공하였던 파일 시스템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현대의 용어로 자리잡게 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CTSS에서의 파일 이름은 사용자가 인지할 수 있는 기본 이름(primary name)과 파일 형태를 가리키는 두 번째 이름(secondary name),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비롯한 여러 운영 체제에서 이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용어 레지스터 파일이 파일의 초기 개념을 보여주고 있으나 점차 이러한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운영 체제와 그에 수반되는 파일 시스템에 따라 프로그램이 파일을 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다음의 기능이 일반적으로 활용된다: 파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텍스트 파일은 ASCII나 유니코드로 이루어진다. 보통, 텍스트 파일들은 메모장 (소프트웨어) 로 읽을 수 있다. 이진 파일은 0 또는 1의 데이터의 연속을 저장한 파일이다. 대부분의 문서 편집기에서는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글자가 깨진다. 개인 정보 단말기 개인 정보 단말기()는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사용하는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고 가벼운 컴퓨터이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계산장치라는 의미의 휴대용 소형 컴퓨터에 개인의 일정관리와 검색, 관리 기능이 있는 주소록의 기능을 추가한 것을 말한다. 또,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의 자료를 서로 주고 받기 쉽다. 현재는 PDA와 휴대 전화의 기능을 합친 스마트폰이 대중화됨에 따라서 PDA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용어는 1992년 라스베이거스 전자 전시회(CES;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 선보인 애플사의 뉴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6년 Psion 3 와 팜 파일럿이 최초로 PDA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하였다. 현재 PDA의 주요 운영 체제로는 팜소스사의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CE, 리눅스, 심비안 등이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서는 개인 일정 관리 위주의 수첩 대용이었으나, PDA폰으로 대중화된 이후, 이동통신 기능뿐 아니라, 카메라, 무선랜, GPS 등의 여러 기능을 쓸 수 있게 발전하고 있다. 만약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PDA의 정의에 맞는 기기를 추적해 볼 때 현재로서 발견된 최초의 PDA는 영국의 Psion plc.가 출시한 포켓 컴퓨터 Psion Organiser이다. 이때는 PDA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Psion사는 이 제품을 "최초로 쓸만한 포켓 컴퓨터"로 정의하였다. 첫번째 모델은 현재의 공학용 계산기의 기능과 형태에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부가되어 있었으며,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의 구동이 가능하고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모델은 다른 장치와 연결할 수 있었다. 1991년 HP사에서 로터스 1-2-3을 휴대하기 편리하게 쓰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만든 HP95LX은 비록 팜탑 컴퓨터였고 팜탑 컴퓨터로서 판매되었지만, 마찬가지로 PDA의 정의에서 터치 스크린을 주 입력장치로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역시 PDA의 정의에 부합한다. 이 제품은 모바일 OS가 아닌 MS-DOS를 사용하였고, 로터스 1-2-3과 PIMS를 롬에 내장시켰으며 일정관리와 주소록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비표준 디스플레이 및 카드 슬롯과 제한된 메모리 용량으로 인해 일반적인 도스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HP는 1994년에 후계작 HP200LX를 출시했다. HP200LX는 640*240 해상도의 CGA 디스플레이와, 2 메가바이트 메모리, 표준 PCMCIA 슬롯을 사용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이것을 한국에서 보험설계사 공급용으로 대량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단종되었다. 키보드 입력과 텍스트 응용 프로그램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PDA의 대중화에 한 몫 하였다. 최초의 PDA와 관련한 내용은 누군가 잘못된 정보로 작성된 글이 일반화되는 오류가 거듭되고 있다. 1992년 애플이 PD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는 PDA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따라서 Psion 제품을 최초의 PDA 제품이라고 할 수 없으며, HP 95LX, 200LX 제품군은 PDA가 아니라 팜탑(노트북)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모두 PDA라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PDA들은 범용성을 위해 모바일 OS와 더불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SDK를 제공한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최근 스마트폰이란 용어로 통일 되었으나 1990년대 2000년대 초에는 의미가 달랐다. 과거 PDA폰은 핸드폰과 PDA 기능이 결합된 제품, 스마트폰은 핸드폰과 PDA의 기능이 결합 되었으나 기능적으로 부족한 제품들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PDA폰에는 터치 스크린이 적용된 반면 스마트폰에는 일반 스크린이 적용되었다. 하루의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알람 기능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입력 자료를 동기화시킬 수 있다. 또한 작업 스케줄을 조정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가나다/A to Z 순으로 조회를 할 수 있는 주소록은 데스크톱과 연동하여 관리할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과 연동할 수 있다. 개념이 애매 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PDA는 개인 정보 관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용 컴퓨터를 대체 하기 위해서 발전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용량의 한계 때문에 UMPC 등이 출시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 일반 대중에게 흥미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어 단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기타 응용에서는 운영 체제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원하는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산기 프로그램을 설치하여 계산기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게임을 설치하여 휴대용 게임기로도 활용이 가능한 등, 본래 기능 이외에 부가적으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는 것이 PDA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산업용 PDA는 산업시장에서 요구되는 휴대성·컴퓨팅 성능·높은 확장성·견고함을 충족하여 일반 PDA 및 스마트폰과 구별되는 PDA이다. IP rate (방진,방수)과 낙하충격에 대응하는 견고함과 바코드 스캐너, 내장프린터, RFID reader, 마그네틱카드리더, GPS등을 내장 혹은 외장형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업무용도로 적용될 수 있다. 현재는 다양한 vertical market에서 요구되는 제품들로 인해 굳이 산업용 (industrial PDA)라고 명명하기 어려우나 대표적으로는 industrial & enterprise PDA 또는 Rugged Mobile computer로 불리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TOP3 제조사로는 모토톨라(구 Symbol), Intermec, Honeywell(HHP를 인수)사가 있고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중 모토롤라가 전 세계 약 4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 메이저 업체로는 Psion Teklogix, DataLogic, Casio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산업용 PDA 제조사가 존재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용 PDA 제조사로는 블루버드 (Bluebird)가 있고, 그 외 캐치웰(구:이노텔리텍), M3 Mobile(구: 모바일컴피아), 대신정보통신, 포인트모바일, 웅진ST, 모비트론, ITwell, 비인터렉티브 등 여러 업체가 있다. 전 세계 Mobile Computer Manufacturer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개인용 스마트폰 대형 제조사 중 하나인 대만 HTC에서도 바코드 스캐너를 내장한 PDA를 런칭하였고, 중국과 인도의 중소규모 전자업체에서도 산업용 PDA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추세이나 영향력이 높지않다. PDA의 운영 체제는 크게 4가지가 있다. 팜 OS, 마이크로소프트의 포켓 PC, 애플의 iOS 그리고 심비안의 EPOC 등 크게 3가지가 있다. 또 리눅스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셀빅도 있다. 1996년에 처음으로 출시하였다. 팜은 세계 PDA의 약 60%를 차지한다.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많고 배터리 소비가 적으며 많은 반MS 기업과 제휴를 맺었다. (삼성, 소니 등)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PDA의 운영 체제는 윈도우 CE, 포켓 PC와 윈도우 모바일이 있다. 윈도우 CE는 PMP와 같은 기기에 주로 사용되며, 포켓 PC는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운영 체제로 구형 PDA에, 윈도우 모바일은 최근의 PDA에 사용된다. 개인용 컴퓨터용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비슷하며 대개 배터리 소모가 많다. 초기 윈도우 CE 1.0의 경우는 엄청나게 많은 전력 소모와 느린 처리 시간 때문에 외면 받았지만 많은 업그레이드를 통해서 개선되었다. 윈도우 CE 코어를 기반으로 하는 운영 체제이다. 320x240, 640x480, 320x320의 해상도를 지원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승인을 거친 기기만 포켓 PC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다. 2007년에 윈도우 모바일 6이 공개되면서 포켓 PC라는 명칭이 더 이상 자사 제품에 사용되지 않는다. 애플의 iOS는 맥 OS XPC판과 비슷하며, 아이폰, 아이폰 4, 아이팟터치 및 아이패드에 채용되었다. 대한민국 기업인 제이텔이 만든 PDA이자 운영 체제의 이름이다. 셀빅 OS라는 독립적인 운영 체제를 자체 개발하였는데 한글 지원이 내장되어 있어 사용하기 편하다. 셀빅 OS는 팜 OS와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이 있으나 응용 프로그램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컬러를 지원하는 2.0까지 개발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인해 현재는 사실상 회사가 없어진 상태로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리눅스를 기본 운영 체제로 탑재한 PDA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샤프(Sharp) 사에서 만든 자우루스(Zaurus)는 가장 많은 소프트웨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우루스의 운영 체제는 큐토피아(Qtopia)로 리눅스 커널 2.4.20을 기반으로 한다. 오픈 자우루스(open zaurus)로 샤프(Sharp) 사와는 별도로 만들어진 리눅스도 있다. 또한 대한민국 벤처기업인 지메이트사에서 만든 요피(YOPY) 시리즈가 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사업을 접어 현재는 제품이 단종되고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참고로 요피의 운영 체제인 리누피(Linupy)는 커널 2.4 기반의 엑스 윈도우(X-Window) 시스템을 사용한다. 현재 HP iPaq, 팜 및 다른 여러 기기에 리눅스를 탑재하려는 노력이 개인 또는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개발한 운영 체제로서, 스마트폰, PDA, 스마트북 등에 사용된다. 개인용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는 기업이나 가정에서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말한다. 보통 책상 위에 놓고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 PC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미국의 IBM사와 휴렛 팩커드사가 발매한 기종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때는 트랜지스터 방식이었으나 그 후 마이크로 컴퓨터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PC 시대를 맞게 되었다. PC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IBM에서 생산한 개인용 컴퓨터의 상품명인 IBM PC에서 유래하고부터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도입되어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각종 디지털 정보의 저장·관리·통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음악 감상, 게임, 채팅 등에도 쓰인다. 최초로 상업적으로 판매된 개인용 컴퓨터는 MITs사의 이었으며, 이를 본따 많은 개인용 컴퓨터가 출시되었다. 이후 애플 II컴퓨터, 코모도어 VIC-20 등이 상업화에 성공하였다. 1980년대 이후, MS와 인텔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MS-DOS와 윈텔 플랫폼으로 대부분 지배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PC가 16비트에서 32비트로 개편될 조짐을 보였고, 그 후 32비트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컴퓨터 성능이 발전하여, 64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고, 코어가 여러 개인 CPU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AIM - 65 1974 년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개인도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소형 컴퓨터가 등장했다. 개인용 컴퓨터는 1974 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Altair 8800(앨테어 8800)이었다. 애초에 개인용 컴퓨터 (personal computer라는 말부터 Altair 8800의 설계자인 에드 로버츠가 최초로 언급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 후 애플 컴퓨터, 탠디 라디오셱, 코모도, 아타리 등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이 등장했다. 특히 애플 II는 스프레드시트의 VisiCalc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어서 큰 성공을 하였다. 8 비트 시대의 개인용 컴퓨터는 CP/M이나 OS-9 또는 DISK-BASIC을 운영 체제로 사용하였다. 또한 ROM-BASIC를 표준으로 탑재한 컴퓨터가 가장 많았고, OS 부팅 디스크가 없는 경우는 ROM-BASIC이 자동으로 시작되었다. IBM PC(IBM 5150) 1981년 16 비트 IBM PC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IBM PC에서 사용되는 인텔의 x86 계열의 CPU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MS-DOS 프로그램이 주류(사실상 표준)가 되었다. 또한 컴팩 등으로 구성된 IBM PC 호환기종 시장이 형성되고, "개인용 컴퓨터"의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스프레드시트는 로터스 1-2-3, 워드 프로세서는 워드 퍼팩트(일본에서는 이치타로)가 보급되었다. 1984년에 등장한 매킨토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념을 크게 보급시키는 데 성공하여, 다음 세대 컴퓨터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85년 매킨토시에서 동작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이 등장했고, 그 인터페이스는 다음 윈도 응용 프로그램의 원형이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아미가와 코모도어 64, 아르키메데스 같은 취미용의 컴퓨터는 여전히 일정한 점유율을 유지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에서 IBM PC 호환기종 및 매킨토시가 PC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 1991년에 윈도 3.0이, 1995년에 윈도 95가 출시되어 기존의 "16비트 DOS"에서 점차 "32비트 윈도"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파워 유저는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에 맞먹는 기능을 가진 OS/2나 윈도 NT, 더욱 강력한 OPENSTEP를 사용 PC에서 PC - UNIX 이용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인터넷이 급격히 발전하여, 개인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 등의 사이에서 웹 표준을 놓고 브라우저 전쟁이 발생했다. 1998 년 "인터넷을위한 차세대 PC"라고 이름을 붙인 iMac이 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새로운 신기술이 사용되어 1990년경 16 - 20MHz 정도였던 PC용 CPU의 클럭은 2000 년 1GHz에 도달했다. 2001년 매킨토시 OS가 OPENSTEP 기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맥 OS X가 세상에 등장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는 윈도 NT를 기반으로 하는 윈도 XP가 출시되면 윈도 NT와 윈도 9x 계열의 제품 라인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2003년 최초의 64 비트 PC인 파워맥 G5 (PowerPC 970 포함)이 발매되고, 이어 x86의 64비트 확장 버전인 AMD64 (x86 - 64)가 등장했다. OS는 윈도가 여전히 주류이지만, 오픈 소스 GNU / 리눅스 시스템도 일부 보급되고있다. 2000년대에는 개인용 컴퓨터 (PC / AT 호환 기종)의 상용화가 진행되었다. 독자 플랫폼을 견지하고있는 애플을 제외한 PC 제조 업체들은 가격 경쟁 격화로 인한 곤경에 몰리고 개편도 잇따랐다. 2002년 휴렛 팩커드의 컴팩 인수, 2004년 IBM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레노버에 매각, 2007 년 에이서의 팩커드 벨 인수 등 주요 제조 업체의 재편이나 과점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세이코, 샤프, 미쓰비시 전기, 산요전기 등 개인용 컴퓨터 사업의 축소나 철수가 진행되었다. 한편, 2000년대에는 많은 개인 PC가 보급되었다 하여 PC에 연결하여 이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정보 기기와 가전 제품이 보급되었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은 컴퓨터 사용의 확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필름 카메라와 미니 디스크 (MD)의 수요의 대부분을 대체했다. 2001 년, 애플은 PC를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연결하는 허브 (중심)를 담당하는 "디지털 허브"에 자리잡는 비전을 제시하고 iPod을 윈도에 대응함으로써이 개념을 보급시켜 갔다. 다른 PC 메이커도이 기기의 정보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기기로 PC를 입지 수요를 환기하고있다. 2007년부터는 최소 성능을 가진 저렴한 가격의 컴팩트한 노트북이 보급되어 후에 넷북라는 장르를 형성했다. 이 배경에는 클라이언트에서 처리는 최소화하여 네트워크 대상 서버 측에서 처리의 대부분을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보급을들 수있다. 또한 AJAX 등을 기반으로 한 클라우드 컴퓨팅의 보급을 배경으로 다시 브라우저 전쟁이 발발, 사파리, 구글 크롬을 중심으로하는 웹키트 계열 브라우저와 모질라 파이어폭스가 나타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독점하는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2011년대에 들어서, 쿼드코어 CPU가 널리 보급되게 된다. 판매율은 2010년 하반기 30%에서 2011년 2월에는 46%까지 상승하였다.. 개인용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란, 컴퓨터 프로그램과 절차 및 컴퓨터에 대한 지시사항울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다. 소프트웨어는 워드프로세서같은 응용 소프트웨어, 운영 체제같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미들웨어로 나뉜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IBM의 PC와 애플의 매킨토시가 경쟁했다. 그러다 다른 회사에서 IBM 제품과 호환되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PC의 기술은 많은 업체들의 경쟁으로 빠르고 폭넓게 발전해 나갔다. IBM이 PC를 개발할 때 자사의 기술은 바이오스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곧 컴팩이 특허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IBM의 바이오스를 합법적으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하여 복제해 내었다. 그로 인해 PC는 고속의 발전을 이룬다. 초기의 PC는 매킨토시보다 성능이 훨씬 떨어졌고 컬러도 아닌 흑백화면이었으나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매킨토시 대신 PC를 사용하였다. IBM은 PC의 후속기종으로 PS/2를 만들었고 PS/2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받으려 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업체들은 로열티를 주지 않아도 되는 PC를 계속 사용하였고 결국 PS/2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애플의 매킨토시는 잠시 사용 허가서를 다른 기업에게 넘겼지만 이내 회수했다. 이에 따라 PC는 확장이 자유로운, 매킨토시는 구성이 일관된 특징이 드러난다. 해마다 독일의 하노버에서 열리는 세빗에서는 최신 컴퓨터 모델과 미래형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터치스크린 터치스크린(touchscreen, )은 화면을 건드려 사용자가 건드린 위치를 찾아내는 화면을 말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손가락이나 손으로 기기의 화면에 접촉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를테면 모니터에 특수 직물을 씌워 이 위를 손으로 눌렀을 때 감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터치스크린은 스타일러스와 같은 다른 수동적인 물체를 감지해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키오스크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직접 손으로 짚고, PDA와 몇몇 노트북 컴퓨터에서는 스타일러스 펜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펜과 같이 감지된 물체가 능동적이라면 터치스크린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이에 적용되지 않는다. E.A. 존슨은 1965년에 출간한 짧은 논문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에 대한 그의 작업을 기술하였고, 그 뒤 1967년 출간한 논문에서 사진과 다이어그램과 함께 더 자세히 기술하였다. 멀티터치 기술은 1982년 시작하였고 당시 토론토 대학교의 입력 연구 그룹이 최초의 인간 입력 멀티 터치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광학식 터치스크린은 터치스크린의 꼭짓점에 장착된 적외선 카메라와 적외선 조명이 화면을 터치하려는 물체의 그림자로 좌표를 측정하여 작동한다. 백과사전 백과사전(百科事典, )은 학문, 기술, 예술 등 자연과 인간의 모든 활동에 관한 다방면의 지식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주로 참고서로서 활용된다. 백과사전의 영어명 ‘encyclopædia’는 그리스어의 ‘ἐγκύκλιος’와 ‘παιδεία’의 결합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는데, 온갖 종류의 지식을 가르쳐 기른다는 뜻이다. 즉, 백과사전의 원래 목적이 '교육'이었다. 한편 백과사전의 또 다른 목적으로는 '참고'가 있다. 현대의 백과사전들은 '교육'과 '참고' 모두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백과사전에서 내용 분류의 단위이자,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을 표제어라고 한다. 표제어의 범위에 따라 백과사전의 종류가 나뉘는데, 넓은 범위를 갖는 표제어들로 백과사전을 구성하는 것을 대항목주의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의 표제어를 이용하는 것을 소항목주의하고 한다. 대항목주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고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교육 목적의 백과사전이 유명한 학자의 논문을 모아서 엮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소항목주의를 채택한 백과사전은 표제어별로 간결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대항목주의에 비해 다양한 표제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어서 참고 목적의 백과사전에 많이 쓰인다. 오늘날의 백과사전은 절충한 방식이 많으며, 내용에서도 문장 서술뿐만 아니라, 사진, 삽화, 도표 등 다양한 참고자료가 함께 제공되는 형태가 되었다. 현대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서적의 형태가 아니라 CD-ROM, DVD-ROM의 형태로 된 것도 있으며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것도 등장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온라인 으로 서비스해주고 있는 한국어 백과사전으로는 한국어 위키백과,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등이 있다. 백과사전의 기원은 플리니우스가 편찬한 박물지이다. 편찬방식이 중국의 유집과 같았다. 이 유집과 같이 편찬하는것은 17세기까지 편찬하였다. 최초의 알파벳 배열 백과사전은 1674년 모레리가 역사대사전에서 시도하였고, 그 이후 알스티드가 Encyclopaedia Septem Tomisdistincta에도 이용하였다.. 1728년 체임버스가 편찬한 백과사전이 현대적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과사전은 알파벳순으로 배열하고 상호참조표시를 하고 논문을 수록하였다. 이후 체임버스는 증보판을 출간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파 시대가 있었다. 백과전서는 디드로가 중심이 되어 루소,케네,볼테르 등계몽주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 2권이 1751년 발간되었는데 발행금치처분을 받았고, 이후 디드로가 더욱 만들어 1772년 28권을 완성시키고 보유5권과 색인을 참가시켜 모두 35권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이와 비슷한 해에 19세기 세계대사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후 이책은 라루스 백과사전이 된다. 같은 세기 영국에서는 세계적인 백과사전 브리태니커를 1768년부터 매주 분책으로 발행하여 71년에 3권으로 만들었다. 백과사전은 더욱 발전하여 현재 대한민국에는 두산백과사전 등이 있다. 현대적인 백과사전은 1972년에 전32권으로 완간된 고단샤(講談社)의 《휴먼라이프 엔사이클로페디아》을 시작으로, , 1980년 가쿠슈겐큐사(學習硏究社)의 전32권 《그랜드 현대백과사전》, 헤이본샤(平凡社)에서 1988년 완간한 전35권의 《세계대백과사전》, 1988년 쇼가쿠칸(小學館)에서 전25권으로 간행한 《대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등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80년부터 《중국대백과전서》가 발행되기 시작하였고, 타이완에서는 1981년에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이 편찬한 전20권의 《중화백과전서》가 발간되었다. 한국의 현대적 백과사전은 1958년 문학과 교양서적을 전문출판하던 학원사(學園社)에서 간행한 《대백과사전》을 시초로 한다. 4·6배판 전체 6권으로 1958년 9월 25일 제1권을 출판한 후 8년에 걸쳐 완성했다. 50여 명의 편집진과 435명의 집필진이 참여하였고, 원고는 10만 매가 넘었다. 그 후 증보판 2권이 출간되었으며, 1967년에는 전12권의 《세계백과대사전》으로 개정되어 1970년에 전15권, 1973년에 전20권으로 증보된 신판이 발간되었다. 사전류 전문출판사인 동아출판사에서는 1959년 한권으로 발간한 《새백과사전》, 1964년 전2권의 《국민생활백과사전》을 거쳐, 전30권의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을 1978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982년 9월부터 2권씩 출간, 1984년 완간하였다. 여기에는 13만여 항목이 수록되고 4만여 컬러 사진 및 8천여 흑백 사진이 삽입됐으며, 1986년과 1990년에 각각 보유편이 발간되었다. 이것은 후에 1996년 8월에 두산동아(주)에서 출간된 전 30권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으로 이어졌는데, 128167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으며 5개의 CD-ROM이 포함되었다. 1974년 태극출판사(太極出版社)에서 전16권으로 간행한 《대세계백과사전》에서는 다른 백과사전들과는 달리 가나다순의 사전식 배열이 아니라 주제별로 항목을 분류하였다. 동서문화사에서는 《한국세계대백과사전》을 1992년부터 시작하여 1995년에 전30권으로 간행하고, 1997년 8월 8일에 총 31권으로 완간하여 1999년에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으로 개편하였는데, 총13만 항목과 15만 색인이 수록되었고 기존의 백과사전에서 누락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항목과 공산주의 이념까지 포함되었다. 학원출판공사에서는 전 32권의 《학원세계대백과사전》을 간행하는데, 3년의 준비 기간과 5년의 편집 기간을 거쳐 1993년 1월부터 출간하여 1994년에 완간되었다. 이것에는 14만 5천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었고 기존 백과사전과 달리 30여개의 기본 동사가 표제어로 포함되었다. 한편, 외국의 백과사전이 번역된 것으로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이 1989년부터 발간되어 1994년 3월에 전 27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총 11만여 항목이 수록되었으며 제26권은 참고문헌, 제27권은 색인으로 되어 있다. 1972년에 계몽사에서 만든 컬러학습대백과사전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최초로 만든 컬러판 대백과사전이다. 동아출판사(두산동아의 전신)에서 나온 15권으로 구성된 동아학습대백과, 16권으로 구성된 삼성당에서 나온 삼성학생대백과는 컬러 사진과 흑백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또한, 삼성당에 있는 삼성학생대백과사전은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지리사전이 같이 편집되어 있어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새로운 독서습관을 키우게 되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흑백사진으로 편집되어 있는 중앙출판사의 세계대백과사전(전 5권)은 총 5만여 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고, 초등학생을 위하여 편집된 어린이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전 30권), 그리고, 웅진21세기학습대백과사전(학습별), 중앙대백과사전(20권)과 신21세기 학습대백과사전(3만여 항목)이 한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백과사전이다. 영상매체를 이용한 백과사전으로는 중앙 과학 백과사전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7년에 발행된 광명대백과사전(전20권), 조선대백과사전(전 30권, 10만여 항목), 그리고 백과사전(전3권, 3만 항목)이 있다. 그중에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가장 먼저 발행된 백과사전은 정치 사전, 경제 사전, 역사 사전을 통합하여 편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백과사전이다. 인터넷이 보급된 90년대 중반 이후 출판형태의 백과사전들은 종이책 출간을 중지하고 CD롬이나 인터넷으로 변화해나갔는데 두산세계대백과의 후신인 두피디아와 브리태니커가 2012년 현재에도 개정되고 있다. 물명류도 초기형태의 어휘모음이며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띠지만 최초의 백과사전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을 들 수 있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었고 가장 방대한 것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박준식과 김문영은 A. B. Kroeger의 Guide to Reference Books (1902년)와 James I. Wyer의 Reference Work (1930년), Louis Shores의 평가 기준 (1950년대 중반), Kenneth Kister의 저서 (1978년)와 그의 후속 연구, Bopp와 Smith의 백과사전 평가에 관한 조언 (1994년), Sader와 Lewis의 평가기준 (1995년), William A. Katz의 저서 (1997년)을 참고로 하여 백과사전의 평가요소를 다음의 6 가지로 범주화 하였다. 자연과학 자연과학(自然科學, )은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이며, 과학의 한 분야이다. 자연과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일반 원리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과학은 결론도 중요하지만,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과학에 의해 얻어진 지식체계는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추론된 것으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의 고전 역학은 조건에 따라 자연 현상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역학의 실험 방법은 여전히 자연 과학의 한 분야이며 특정 조건 아래에서라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충실하게 과학적 방법을 따른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체계도 다른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언제나 반례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학의 이러한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는 선사 시대부터 이미 여러 가지 자연 법칙에 기반한 생활을 해 왔다. 도구를 만들고 기계를 사용하며 불을 이용한 것 등이 그것이다. 고대 시대에는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각종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근대 과학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정신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기계"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파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출발한 근대 자연과학은 데카르트의 과학적 방법론과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 발견에 의한 고전 역학의 성립으로 현재와 같은 학문 체계를 이루는 기반을 수립하였다. 즉 경험적인 실험을 통하여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과학적 방법이란 실험적인 증명에 기초를 두는 연구 방법이다. 즉, 믿음에 기초하여 이론적인 추측을 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증거를 통해 증명하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에서는 연구 분야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나 다음과 같은 방법이 일반적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유적들을 통해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톤 헨지와 고인돌같은 석조물의 건축을 위해서는 지레, 빗면, 쐐기, 도르래와 같은 단순 기계들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한 초기 고대 사회 문명에서 이미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의 여신 이난나가 사람들에게 시간을 재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이야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시간을 재기 위해 해시계의 일종인 그노몬을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를 관찰하여 1년을 계산하였다. 시리우스가 해뜨기 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5월이 되면 나일 강의 범람이 시작되었다. 나일 강의 범람은 고대 이집트 농업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계절의 계산 역시 중요한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1월을 30일로 하고 12개월을 1년으로 하였다. 마지막달에는 우수리로 5일을 더해 1년은 365일로 계산되었다. 이집트 달력에는 윤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달력과 실제 계절이 차이를 보이게 된다. 헬륨 헬륨(, ←)은 화학 원소로, He(←)이고 원자번호는 2이다. 질량수가 3인 He과 4인 He이 있다. 화학 원소 중 끓는점이 가장 낮으며, 상압에서는 영점에너지로 인하여 절대영도에서도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단, 액체 헬륨의 동위원소는 일정한 온도 및 압력 하에서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기체, 액체, 고체가 공존하는 3중점이 없는 유일한 원소이다. 헬륨은 1868년 프랑스 천문학자 피에르 장센이 발견하였다. 그는 1868년 8월 18일 일식의 관측에서 특정 대역의 노란 빛, 즉 587.6나노미터 부분에 새로운 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고 헬륨의 존재를 밝혔다. 헬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말 헬리오스(Helios)에서 유래하였다. 수소 다음으로 가벼운 원소이며, 다른 원소와 잘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상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의 헬륨은 대부분은 방사성 원소의 핵붕괴로 생성된 알파 입자가 천연 가스에 포획된 상태로 있다가 발굴된다. 1903년, 미국의 천연 가스전에서 다량의 헬륨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헬륨은 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흔한 원소로서, 은하계 전체 원소의 24%를 차지한다. 태양과 가스 행성(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들도 수소와 헬륨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항성이 주계열성으로 빛나면서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수소 핵융합 반응으로도 일부 생성된다. 헬륨은 가장 반응성이 적은 비활성 기체이다. 그뿐만 아니라 알려진 모든 화학 원소 중에서 가장 반응성이 적다. 거의 모든 조건에서 헬륨은 단원자 분자로 존재하며 반응하지 않는다. 헬륨은 매우 높은 압력하에서 고체나 액체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조건을 맞춘 고압력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은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이며, 압력을 가함에 따라 30% 정도 부피가 감소될 수 있다. 5×107 Pa의 압력에서 헬륨의 용적율은 물의 50배에 달한다. 압력 1기압에서 헬륨은 절대 영도에 도달하여도 고체가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양자 역학으로 설명되는데, 즉 헬륨의 영점 에너지가 너무 높아 절대 영도에 이르러도 분자 운동이 활발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헬륨을 고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1~1.5 K(약 −272 ℃)에서 약 2.5 MPa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헬륨의 고체 상태와 액체 상태는 굴절률이 같아 분간이 매우 어렵다. 헬륨은 1기압의 압력에서 약 2.3K에서 초유체로 상변이한다. 고압에서 만들어지는 고체 헬륨도 초유체와 비슷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저온의 액체 헬륨에는 이상한 성질이 많다. 그중 여러가지가 헬륨이 원가자 보즈 입자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다. 한 가지는 액체 헬륨이 점성 저항(viscous resistance) 없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속도가 작은 경우의 '마른 물(dry water)'의 이상적인 예 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액체가 점성을 가지려면 내부 에너지의 손실이 있어야 한다. 즉 액체의 한 부분이 나머지와는 다른 운동을 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자 몇 개를 나머지 원자들과는 다른 상태로 때려서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서는 열운동이 아주 작아지고 모든 원자는 같은 상태로 가려 한다. 몇 개의 원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다른 모든 원자들도 따라서 같은 상태로 움직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운동에는 어떤 경직성(rigidity)이 있어서 독립적인 입자의 경우에 생기는 불규칙한 난류이 형태로 움직임을 깨뜨릴 수가 없다. 보즈 입자로 이루어진 액체는 모든 입자들이 같은 상태로 가려는 강한 경향이 있다. 고온에서는 많은 원자들을 여러 다른 상태들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열에너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 같은 협력적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낮은 온도에선 헬륨 원자들이 모두 같은 상태로 가려 하는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 헬륨이 초유동체(superfluid)가 되는 것이다. 한 자기 덧붙이자면, 이 현상은 헬륨의 동위 원소 중 원자량이 4인 것들에서만 볼 수 있다. 원자량이 3인 동위 원소는 개개의 원자가 페르미 입자이기 때문에 액체 상태에서 보통의 유체가 된다. 초유동체 현상은 He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보즈 입자인 알파 입자의 성지리에 의한 양자역학적 효과이다. 공기보다 가볍고 비활성 기체임을 이용해 폭발하기 쉬운 수소 대신에 비행선, 풍선, 애드벌룬에 이용된다. 또, 심해 잠수부의 산소통의 질소 대체로 이용된다. 그 이유는 질소보다 헬륨이 혈액에 대한 용해도가 작아 잠수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륨의 끓는점이 매우 낮은 것을 이용해 초저온 냉각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헬륨은 산화흔적이 남으면 안 되는 용접을 할 때 산소의 접근을 막기 위한 용도로 헬륨 환경을 조성한다. 반도체 등의 제작을 위해 플라즈마를 생성시킬 때 플라즈마의 균일한 정착을 위해 헬륨을 적정량 사용한다. 또한 목소리 변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헬륨 가스에서는 공기 중에 비해 약 3배정도 전송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약 10~20초정도 목소리의 음이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단 많은 양을 마실 경우 질식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헬륨은 트리믹스에 사용되는데, 트리믹스는 압축 공기에서 질소의 비율을 줄이고 그만큼을 헬륨으로 채운 것이다. 헬륨은 용해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압축 공기를 사용했을 때(30~40m)보다 더욱 깊이 잠수할 수 있다. 그러나 70m~80m 정도까지 내려가면 헬륨이 용해되어 헬륨 마취 현상이 일어난다. H→He→Be→방사성 붕괴→He→C→O→ Ne→Mg→Si→Fe 레드햇 레드햇(Red Hat,)은 1993년에 창립된 리눅스 배포판 제작회사로, 레드햇 리눅스를 제작했다. 레드햇은 오픈 소스를 비즈니스로 전개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공급하고 지원을 유료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최근에는 고도화된 소프트웨어를 유료로 판매하는 비즈니스도 시작하고 있다. 리눅스가 등장하고 초기에는 일반적인 사용자가 사용하기 쉽게 리눅스 커널을 중심으로 GNU 프로젝트, BSD, X11 등의 소프트웨어를 조합하여 공급하는 형태로 리눅스 초기의 확산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레드햇의 리눅스 배포판(이후, 레드햇 리눅스)은 GPL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자체 제작 소프트웨어도 GPL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래드햇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타 기업의 배포판도 많이 존재한다. (예, 수세 리눅스) 2003년 레드햇 리눅스 9을 마지막으로 일반 사용자용 레드햇 배포판의 판매 및 지원을 중지하고, 일반 사용자를 위한 리눅스 배포판의 개발은 오픈 소스인 페도라 프로젝트에 이양했다. 현재는 기업용 배포판인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지원 및 교육 등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06년에는 미들웨어 오픈 소스 업체인 제이보스를 인수하여, OS 뿐 아니라 미들웨어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 덧붙여 지금까지 레드햇은 주식을 나스닥(RHAT)에 상장하고 있었으나, 2006년 12월 12일에 뉴욕 증권거래소(RHT)로 거래소를 변경하였다. 2018년 10월 28일 IBM에 인수되었다. 1993년  Bob Young 이 리눅스와 유닉스 소프트웨어 악세사리를 판매하는 ACC Corporation을 설립하였다. 1994년,  Marc Ewing 은 자신의 리눅스 배포판을 만들어  Red Hat Linux[7] (Ewing은 카네기 멜른 대학에 다닐 때 할아버지가 준 빨간 라크로스 모자를 쓰고 다녔다)라고 이름붙였다. Ewing은 이를 10월에 릴리즈했고, 이에 따라 핼러윈 릴리즈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Young은 1995년 Ewing의 사업을 인수했고, 자신의 사업과 통합하여 Red Hat Software를 설립하여 CEO가 되었다. Red Hat은 1999년 8월 11일 기업을 상장했고, 이날 월 가 역사상 8번째로 높은 상장일 주가 상승이 있었다. 1999년 12월  Matthew Szulik 이 Bob Young의 뒤를 이어 CEO가 되었다. 1999년 11월 15일, Red Hat은  Cygnus Solutions를 인수했다. Cygnus는  free software 에 대한 상업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GNU Debugger 나  GNU Binutils와 같은 GNU 소프트웨어 제품에 대한 유지관리를 제공했다. Cygnus의 창립자 중 한명인  Michael Tiemann은 Red Hat의 CTO가 되었고 2008년까지 오픈 소스 부서의 부사장 역할을 맡았다. 그 후 Red Hat은 WireSpeed, C2Net  Hell's Kitchen Systems를 인수했다. SF (장르) 사이언스픽션() 또는 줄여서 SF는 미래의 배경, 미래의 과학과 기술, 우주여행, 시간여행, 초광속여행, 평행우주, 외계생명체 등을 소재로 하는 장르이다. 소설인 경우, 과학소설(科學小說)이라고 한다. SF는 종종 과학적인것을 포함한 다른 혁신스런 잠재적인 결과를 탐구하여 "아이디어문학"이라 불리곤 했다. SF는 광범위한 하위장르와 주제를 가지고 있어 정의하기 어렵다. 작가이자 편집자인 나이트는 이러한 어려움을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그것이 바로 SF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작가 글래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SF의 정의는 포르노그래피의 정의와 같다. 당신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보는 순간 알게 된다." 나보코프는 엄밀하게 정의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는 SF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는 《프랑켄슈타인》 1818년판 서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인라인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SF에 대한 간편하고 짧은 정의는 아마도 이것이다: 과학적 방법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철저한 이해, 그리고 미래와 과거의 현실 세계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기반한, 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현실적인 추측." 셜링의 정의는 이렇다. "판타지는 개연성 있게 만들어진 불가능한 것. SF는 가능하게 만들어진 개연성 없는 것." 델레이는 "헌신적인 애호가나 팬이라 해도, SF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어 한다"라고 적었다. 그 이유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정의"란 없고, "SF의 윤곽에 한계"란 없기 때문이다. SF는 주로 합리적으로 그리는 대안적인 가능 세계와 미래에 기반해있다. 이 장르는 그런 면에서 판타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이야기의 맥락내에서, SF의 상상적 요소는 과학적으로 정립됐거나 과학적으로 가정된 물리 법칙으로 대부분이 가능해진다.(그렇지만 이야기 속 몇몇 요소는 여전히 순수하게 상상된 사변일 수 있다) SF의 배경은 종종 합의된 현실과 반대이지만, 대부분의 SF는 다양한 가상의 요소로 가능성 있는 과학적 가설이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에 촉진된 상당한 정도의 불신의 유예에 의존하고 있다. SF의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SF를 사색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파악해보면, 이 장르의 기원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흐릿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2세기 루시안의 진짜 역사, 아라비안 나이츠 설화, 10세기의 다케토리 이야기, 13세기 이븐 알 나피스의 독학 신학(Theologus Autodidactus) 을 비롯한 SF의 선구자격 문학들을 만나게 된다. 막 싹트기 시작한 이성의 시대의 생산물들과 근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 는 볼테르의 〈마이크로메가스〉(1752)와 케플러의 〈솜니움〉(1620~1630) 과 더불어 최초의 사이언스 판타지 작품들 중 하나이다. 아시모프와 세이건은 〈솜니움〉을 최초의 SF로 여긴다. 《솜니움》에서는 달 여행과 달에서 바라본 지구의 움직임이 묘사됐다. 영국인 귀족 여성 마거릿 캐번디시의 〈빛나는 세계〉(1666) 역시 초기 SF의 전조로 여겨진다. 또다른 예시는 홀버그의 소설 〈닐스 클림의 지하 여행〉(1741)이다. 18세기 문학 양식으로서 소설의 발달에 뒤따라, 19세기엔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과 〈최후의 인간〉이 SF소설의 정의를 내리는데 도움을 주며, 올디스는 〈프랑켄슈타인〉이 최초의 과학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이보다 나중에 포는 달 여행을 그린 이야기 한 편을 썼다. 이밖에도 더 많은 예시들이 19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전기, 전보와 같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교통시설의 출현에 따라 웰스와 베른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서 광범위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을 창작했다. 웰스의 〈우주 전쟁〉(1898)은 발달된 무기를 장착한 세 발 달린 전투 기계를 탄 화성인들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침략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것은 외계 침공을 실감나게 묘사한 소설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이 픽션을 기술하기 위해 "과학적 로망스(scientific romance)"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이것은 1884년 애벗의 노벨라 《플랫랜드: 다차원의 이야기》를 비롯한 작품을 파생시켰다. 이 용어는 20세기 초반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20세기 초반,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창간인 건스백에 영향받아 나타난 펄프 매거진들을 통해 주로 미국인 SF 작가들로 이뤄진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다. 1912년 버로스는 화성을 배경으로 존 카터가 영웅으로 활약하는 장기 시리즈인 바숨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 《화성의 프린세스》를 출간한다. 1928년, 필립 놀란이 어메이징 스토리즈에 벅 로저스의 원작 소설 아마겟돈 2419를 실은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벅 로저스(1929), 브릭 브래드퍼드(1933), 플래시 고든(1934)으로 이어지는 연재 만화의 바탕이 됐다. 이 연재 만화와 연속된 영화 시리즈는 SF를 대중화시켰다. 1930년대, 캠벨이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의 편집장을 맡게 되고, 아시모프, 나이트, 울하임, 폴, 블리시, 메릴 등을 비롯해 퓨처리안이라 불리게 되는 일군의 신진 작가들이 뉴욕시에서 나타난다. 이 시기의 다른 중요한 작가들로 스미스, 하인라인, 클라크, 스테이플던, 밴보트 등이 있다. 캠벨의 영향력 바깥에서 활동한 작가로 브래드버리와 렘이 있다. 캠벨이 《어스타운딩》지의 편집장으로 지낸 기간은 보통 과학소설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기로 여겨지며, 과학적 발견과 성취를 찬양하는 하드 SF 소설로 특징지어 진다. 이 시기는 전후 기술적 발전, 골드가 편집한 잡지 《갤럭시》의 출현, 그리고 하드 사이언스보다 사회 과학을 더 강조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1950년대 비트 세대는 버로스 같은 사변적 작가들을 포괄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문학적"이거나 예술적 감성의 지식인적 자의식으로 가득찬 일련의 작가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높은 강도의 실험적 시도를 벌인 뉴웨이브가 영국을 중심으로 발흥했고, 동시기 미국에서는 허버트, 덜레이니, 젤라즈니, 엘리슨 등의 작가들이 새로운 경향, 사상, 스타일을 탐구한다. 르귄과 다른 작가들은 소프트 SF 분야를 개척했다. 1980년대, 깁슨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은 전통적인 SF의 낙관론과 발전에 대한 지지에서 방향을 돌렸다. 근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은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 묘사되었다. 《스타 워즈》 프랜차이즈는 과학적 엄밀함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 신경을 쓰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C. J. 체리의 외계인의 삶과 복잡한 과학적 도전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엔 환경 문제, 글로벌 인터넷과 확장된 정보의 우주의 의미, 바이오테크놀러지, 나노테크놀러지, 포스트 냉전, 포스트 자원고갈 사회에 대한 관심을 비롯한 주제들이 급부상했다. 스티븐슨의 《다이아몬드 시대》는 이러한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캐릭터 중심 서사를 되돌려왔다. 텔레비전 시리즈 《》(1987)이 SF쇼의 범람을 예고했고, 이는 세 편의 《스타 트렉》 스핀오프 쇼(, , )와 《바빌론 5》로 이어진다. 고대 포털과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게이트들에 대한 영화 《스타게이트》가 1994년 개봉했다.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SG-1》이 1997년 7월 27일 첫 방영 되고, 이후 10시즌이 이어져 214개의 에피소드를 남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타게이트 인피니티》와 TV 시리즈 《스타게이트 아틀란티스》, 《스타게이트 유니버스》, DVD 직배급 영화 《》, 《》 등의 스핀오프도 나왔다. 《스타게이트 SG-1》은 《엑스 파일》의 최장기 북미 SF TV 시리즈 방영 기록을 돌파했고, 이 기록은 후에 《스몰빌》에게 깨졌다. 기술적 변화의 급격한 속도에 대한 우려는 빈저의 소설 《실시간으로 버려지다》(Marooned in Realtime)로 대중화된 기술적 특이점이란 개념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채택된다. 영어 Science fiction은 흔히 '공상과학', '공상과학소설', '과학소설' 등으로 번역된다. 1959년 일본의 하야카와(早川) 출판사는, 미국의 과학소설 잡지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약칭 F&SF)과 제휴하여 월간지 S-F 매거진(S-F マガジン)을 창간하면서 잡지 표지에 『공상과학소설지()』라는 부제(副題)를 붙였다. 여기서 '공상 과학'이라는 용어는 본래 잡지 이름 중 F&SF를 편의상 의역한 단어였는데, 이를 계기로 'science fiction'의 역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과거 일본에서는 SF소설을 '과학소설', '공상과학소설', '환상과학소설', '미래과학소설'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잘 사용하지 않으며, 공상과학소설은 'SF소설'라고 부르며, 공상과학장르는 '사이언스 픽션' 또는 약칭 'SF'라고 부른다. 과거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의 아동용 소설 전집이나 외국어 사전류를 통째로 중역(重譯)하여 출간하는 일이 많았기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공상 과학'이라는 말이 사이언스 픽션에 대한 역어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현재 사전, 신문기사 등에서 통용되고 있는 표준어이다. '공상과학'이 잘못된 용어이기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다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국내 SF계에서는 팬덤과 작가, 출판사 등을 통틀어 오랫동안 '공상과학소설'을 '과학소설'로 바꿔부르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현재는 영화, 만화, 게임 등 여타 매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장르명으로서 '공상과학'을 대체하는 용어로 'SF'가 선호되는 편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SF장르를 과학환상() 또는 간단히 과환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도 '과학환상작품'이라는 유사용어를 사용한다. Sci-Fi(사이-파이)라는 약어는 1954년에 과학소설 연구가인 애커먼에 의해 공식 문헌에 사용되었다. 하인라인은 이보다 6년 먼저 사적인 글에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SF가 대중문화로 확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더 오락 지향적인 SF물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고, 일부 영화 비평가들이 저급한 'B급 SF 영화'를 'Sci-Fi'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평론가 등은 이 약어를 멸칭(蔑稱)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SF와 마찬가지로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간주된다. SF는 발전과 미래 기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혁신과 새로운 기술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SF 포럼보다는 문학과 사회학에서 더 많이 논의되어왔다. 영화와 미디어 이론가인 비비안 소브책은 SF영화와 기술적 상상력 간의 영향관계를 검토했다. 기술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허구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가상 세계는 과학의 상상력을 확장시켰다. 《윌리엄 섀트너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How William Shatner Changed the World)는 현실에서 실현된 상상 속 기술의 다양한 예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새로운 작가들은 클라크 같은 초창기 SF작가들처럼 현재로선 불가능한 기술들을 곧 실현될 것처럼 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다. 하드 과학소설, 혹은 "하드 SF"는,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 천체 물리학, 화학의 정확한 세부사항에 대한 엄격한 관심, 혹은 더 발전한 기술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세계에 대한 정밀한 묘사로 특징지어진다. 하드 SF에서 몇몇 정확한 미래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수많은 잘못된 예측들 역시 많이 나왔다. 벤퍼드, 랜디스, 브린, 로버트 L. 포워드 같은 몇몇 하드 SF 작가들은 본인들을 현직 과학자로 여기며, 루디 루커, 버너 빈지 같은 수학자 작가들도 있다. 다른 중요한 하드 SF 작가들로는 아시모프, 클라크, 클레먼트, 베어, 니븐, 소여, 백스터, 레이놀즈, 셰필드, 보야, 로빈슨, 이건 등이 있다. "소프트" SF는 아마도 사회 과학, 이를테면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에 기반한 작품들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작가로 르귄, 딕 등이 있다. 소프트 SF라는 용어는 주로 캐릭터와 감정에 집중한 이야기들로 설명할 수 있다; SFWA 그랜드 마스터 브래드버리는 자타공인 이 예술의 장인이었다. 동구권은 폴란드 작가 렘, 자이델과 소련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불리초프, 자먀틴, 예프레모프 등을 비롯한 방대한 분량의 사회과학 소설을 생산해냈다. 어떤 작가들은 하드 SF와 소프트 SF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회과학 소설과 소프트 SF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야기와 연관된다; 오웰의 《1984》,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가 그 모범적인 사례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같은 풍자 소설 또한 과학소설이나 사변소설로 여겨진다. SF를 다양한 하위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각각의 하위장르들이 간단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어떤 연구들은 일반적으로 정의된 장르들을 중복된 것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장르 밖이나 그 사이에서 장르의 경계에 포섭되지 않는 공간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대중 시장과 문학 비평 사이에도 장르와 분류를 설정하는데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이버펑크 장르는 1980년대 초반 나타났다. 이 용어는 사이버네틱스와 펑크의 합성어 로서, 베트케의 1980년 단편 《사이버펑크》를 통해 처음 만들어졌다. 시간적 배경은 주로 근미래이며, 설정은 대개 디스토피아적이고, 특유의 고통으로 형상화된다. 사이버펑크의 일반적인 주제는 정보 기술, 특히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시각적으로 추상화된 인터넷의 발전, 인공 지능, 보철학, 기업이 정부보다 강한 영향력을 지닌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적 제어 등이다. 니힐리즘, 포스트 모더니즘, 필름 느와르 기법이 일반적인 요소이며, 주인공은 반항적인 안티 히어로일 때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깁슨, 스털링, 스티븐슨, 캐디건이 있다. 제임스 오흘레이는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사이버펑크 비주얼 스타일의 결정적인 예시라고 말했다. 이것은 후에 오시이의 《공각 기동대》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의 영상물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시간여행물은 18세기나 19세기에 그 전신이 나타난다. 최초의 중요한 시간여행 소설은 트웨인의 〈아서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이다. 가장 유명한 소설은 웰스의 1895년작 《타임 머신》이다. 트웨인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웰스의 소설에선 시간여행 장치가 조종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차이가 있다. "타임 머신"이라는 용어는 웰스가 만들어낸 것이며, 이젠 시간여행 장치를 부르는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백 투 더 퓨처》는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중 하나이다. 시간여행물은 조부모 패러독스 같은 논리적 문제로 인해 복잡해진다. 시간 여행은 현대 SF에서도 계속해서 인기있는 주제이며, 이를테면 《스타게이트 SG-1》이나 BBC의 텔레비전 드라마 《닥터 후》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대체 역사는 역사적 사건이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분야의 소설들은 종종 과거를 바꾸기 위해 시간 여행을 동원하거나, 간단하게 우리의 역사와는 다른 우주를 설정한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Bring the Jubilee)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분야의 고전이다. 횡향 상은 최고의 대체역사물에 수여된다. 이 이름은 라인스터의 1934년 작품 《시간의 횡향》에서 가져왔다. 터틀도브는 이 분야의 가장 눈에 띄는 작가이며, 종종 "대체 역사 마스터"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밀리터리 SF는 국가, 행성, 항성간의 군사 분쟁을 배경으로 삼은 하위장르이며,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대개 군인이다. 밀리터리 SF는 군사 기술, 절차, 의식, 역사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며, 종종 실제 일어난 역사적 분쟁을 거울처럼 비춘다.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는 고든 딕슨의 《도르세이》와 함께 이 분야 초기의 예시이다. 초기 작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베트남 전쟁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스타일로 창작된 이 장르에 대한 비판이다. 존 링고, 데이비드 드레이크, 데이비드 웨버, 톰 크래트먼, 마이클 Z. 윌리엄슨, S. M. 스털링, 존 F. 칼, 돈 호스론 등이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작가이다. 밴 북스 출판사는 이 소설가들 여럿을 육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인물은 평범한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등장을 주제로 다룬다. 스테이플던의 소설 《이상한 존》과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 와일리의 《검투사》에서처럼 자연적 발생을 기원으로 삼거나, 아니면 밴보트의 소설 《슬랜》에서처럼 과학적 진보를 통한 의도적인 개조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초인물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초인들을 보는 사회의 반응과 초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다. 초인물은 현실 사회에서도 인간 개조에 대한 토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폴의 《맨 플러스》 역시 이 카테고리에 포함 된다. 아포칼립스물은 전쟁을 통한 문명의 종말(해변에서), 전염병(최후의 인간), 운석 충돌(세계가 충돌할 때), 생태학적 재해(미지에서 불어온 바람), 그리고 기타 일반적 재해나 재해 발생 이후의 세계와 문명에 대해 다루는 하위장르이다. 스튜어트의 소설 《견디는 지구》(Earth Abides)와 팻 프랭크의 아아, 바빌론 등이 이 분야의 전형이다.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 근미래(매카시의 《로드》)닥친 재앙의 여파부터 375년 후의 미래(바빌론의 물로 인해), 수백 수천년 후의 미래(러셀 호반의 리들리 워커, 월터 M. 밀러 2세의 레보위츠를 위한 송가)까지 광범위하게 다루는 데 비해, 아포칼립스물은 일반적으로 재앙 그 자체와 그 직후의 여파를 다룬다. 아포칼립스 SF는 비디오 게임에서 인기있는 장르이다.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폴아웃 시리즈는 핵전쟁의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면서 점차 회복되어 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작중 일부, 혹은 작중 전체를 외우주나 여러 개의 (때로 멀리 떨어진) 행성들을 배경으로 삼는 SF 모험물이다. 갈등은 대개 영웅적이고, 대규모로 발생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때로 황당한 플롯, 터무니없는 과학, 골판지 같은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로써 경멸적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 용어는 동시에 노스탤지어적으로도 쓰이며, 현대 스페이스 오페라는 SF의 황금기 시절의 경이감을 재탈환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서브장르의 선구자는 종달새와 렌즈맨 시리즈를 쓴 에드워드 E. (닥) 스미스이다. 조지 루커스의 스타 워즈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 프랜차이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시리즈는 온우주를 가로질러 펼쳐지는 선과 악의 장엄한 대결을 다룬다. 알래스터 레이놀즈의 묵시론 우주(Revelation Space) 시리즈, 피터 F. 해밀턴의 보이드 삼부작, 밤의 새벽, 판도라의 별 시리즈, 버너 빈저의 심연 위의 불길, 하늘의 깊이는 이 장르의 새로운 견본이다. 비디오 게임계에서 나타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좋은 예로 매스 이펙트 시리즈가 있다. 스페이스 웨스턴은 미국 서부극의 책과 영화의 주제를 미래적인 우주 변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하위장르는 일반적으로 갓 테라포밍 됐거나 정착된 콜로니 세계를 다루며, 이것은 무법이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확장되던 옛 미국 서부의 대역이다. 숀 코너리의 영화 《아웃랜드》, 하인라인의 《우주의 농부》, TV 시리즈 《반딧불》, 조스 휘던의 영화 《세레니티》 속편, 만화나 애니메이션인 《트라이건》, 《금지된 별》, 《카우보이 비밥》 등이 이 장르의 예시이다. 사회 과학 소설은 인간 사회와 SF적 설정에 배치된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는 SF 하위장르이다. 대부분 인류에 대한 사변에 집중하는 대신 과학적 엄밀함엔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보통은 소프트 SF로 분류된다. SF 팬덤은 "아이디어 문학의 커뮤니티…새로운 아이디어가 사회에 출시되기 전에 나타나 길러지는 문화이다."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인 "팬"들은 컨벤션이나 클럽, 종이나 온라인 팬진, 웹사이트, 메일링 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통로를 통해 서로 접촉한다. 미국의 SF 팬덤은 《어메이징 스토리즈》의 서한 칼럼을 통해 등장했다. 곧 팬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후에 팬진으로 알려질 비공식 출판물을 통해 자신들의 논평을 모았다. 정기적인 연락이 이어지자 팬들은 서로를 만나고 싶어했고, 지역 클럽을 조직했다. 1930년대, 최초의 SF 컨벤션은 팬들을 더 넓은 공간에서 만나게 했다. 컨벤션, 클럽, 팬진은 인터넷이 더 많은 사람들 간의 통신을 용이하게 만들기 전까지 수십년간 팬 활동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유의미한 형태로 조직된 팬덤은 나우누리, 천리안 등의 PC 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인터넷 시대가 개막하며 보다 개인적인 성향의 팬덤층이 나타났다. 2017년에 이르러 SF작가들만으로 구성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와 넓은 범위의 팬 중심 단체인 한국SF협회가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세계 SF 학회(World Science Fiction Society)의 월드콘에서 수여되는 휴고상, SFWA와 작가 커뮤니티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는 네뷸라 상, 최고의 과학소설을 위한 존 W. 캠벨 기념상, 테오도어 스터전 기념상(단편) 등이 가장 권위있는 SF상으로 취급된다. SF영화 분야에서 유명한 상으로 SF, 판타지, 호러 영화 아카데미가 매년 수여하는 토성 상이 있다. 그밖에 캐나다의 프릭스 오로라 상(Prix Aurora Awards)이나 일본의 성운상 같은 국가별 상, 태평양 북서부 오리콘에서 수여되는 엔데버 상 같은 지역별 상, 판타지 분야의 세계 판타지 상이나 미술 분야의 첼시 상처럼 하위장르에 수여되는 상들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과학기술 창작문예가 있었으나 곧 폐지됐고, 2014년 과천SF영화제의 일환으로서 SF 어워드가 시작됐다. 컨벤션(팬덤에서는 주로 "콘"으로 줄여부름)은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열리는 지방, 지역, 국가, 국제 행사이다. 일반적인 컨벤션은 SF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만, 미디어 팬덤이나 펄킹을 비롯한 몇몇은 특정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대부분 NGO의 자원봉사자들로 조직되지만, 미디어 지향적 이벤트들은 주로 상업적인 프로모터들로 조직된다. 컨벤션의 행사들은 "프로그램"으로 불리며, 이는 패널 토론회, 독서회, 사인회, 코스튬 무도회 등을 포함한다. 프로그램의 일환이 아닌 컨벤션 내내 지속되는 행사들로는 딜러의 방, 아트 쇼, 환영 라운지("콘 스위트룸") 등이 있다. 컨벤션엔 수상식이 포함될 수도 있다. 월드콘은 매년 휴고상을 수여한다. 형식적인 맥락에 집착하지 않는 "클럽"이라 불리는 SF 조직들은 SF팬들을 위한 연중 행사를 연다. 이것은 SF 컨벤션이나 정기 클럽 미팅과 연계될 때도 있다. 대부분의 모임은 도서관, 학교, 대학교, 커뮤니티 센터, 술집, 식당, 조직원의 집에서 열린다. 전통 있는 모임인 뉴잉글랜드 SF 협회, 로스 앤젤레스 SF 협회 등은 모임을 위한 클럽하우스와 컨벤션 자료와 연구 자료들이 보관된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전문 SF 작가들을 위한 미국 SF&판타지 작가 모임(SFWA)는 1965년 데이먼 나이트에 의해 비영리 단체로 설립됐다. 24년 후 데이먼 나이트의 에세이 "단결 또는 저런!"은 국립 판타지 팬 연합에 인계됐다. 팬덤은 미디어 팬덤, 창조적인 시대착오를 위한 모임, 게이머, 플리커, 퍼리 팬덤 등의 관련 그룹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최초의 SF 팬진 《혜성》은 1930년에 출간됐다. 팬진의 출판 방식은 젤라틴판, 둥사판, 저두 기계에서 현대적인 복사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십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통과 배급은 가끔씩 상업 인쇄물의 가격을 결정한다. 현대 팬진은 컴퓨터 프린터나 지역 인쇄소,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발행된다. 현재 가장 유명한 팬진은 데이빗 랭포드가 편집하는 《앤서블》이며, 해당 팬진은 여러 차례 휴고상을 수상했다. 최근 상을 받은 다른 팬진들로 《파일 770》, 《미모사》, 《플록타》가 있다. 브래드 W. 포스터, 테디 할비아, 조 메이휴처럼 팬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업계에서 주목 받고 있으며, 휴고상은 최고의 팬 아티스트 항목을 신설했다. 가장 초창기에 조직된 온라인 팬덤은 SF Lovers 커뮤니티이며, 이것은 본래 1970년대 후반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되는 아카이브 파일을 받던 메일링 리스트에 기반한 것이다. 1980년대, 유즈넷 그룹이 온라인상에서 크게 확장했다. 1990년대, 월드 와이드 웹의 개발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말그대로 수천 수만개의 SF와 관련 장르, 매체를 다루는 웹사이트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이트는 소규모에 짧게 지속됐으며, 좁은 분야에 집중했지만, SF 사이트처럼 광범위한 SF 관련 레퍼런스와 리뷰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있었다. 애호가들 사이에선 주로 "팬픽"으로 불리는 팬 픽션은 기존의 책, 영화, 비디오 게임, TV 시리즈(드라마) 등의 설정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비영리적 픽션을 일컫는다. 이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는 (1970년대 이전의) 전통적인 "팬 픽션"의 의미와 헷갈리기 쉽다. 본래 팬덤 커뮤니티내에서 팬 픽션이란 팬들이 창작해 팬진에 실은 (종종 팬들 자신을 작중 인물로 활용한) 오리지널, 패러디 픽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1956년 아일랜드 팬 존 베리가 그와 아서 톰슨의 팬진인 《징벌》(Retribution)에 실은 군 디펙티브 에이전시(Goon Defective Agency) 이야기가 있다. 최근 몇년간, SF 우주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지향하는 오리온의 팔, 갤럭시키 등의 사이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어떤 경우엔 책, 영화, TV 시리즈의 저작권자가 그들의 변호사를 통해 팬들에게 "중단 및 단념" 권고를 통지하기도 한다. 중요한 로망스 작가로 여겨지는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SF소설을 여럿 썼다. 《유년기의 끝》를 비롯한 많은 SF소설들이 비평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오웰의 《1984》,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등 주류 문학에서 존경받는 여러 작가들이 SF를 썼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레싱은 SF 시리즈 《아르고스의 카노푸스》를 썼고, 보니것이 쓴 대부분의 작품은 SF의 소재나 테마를 포함하고 있다. 학자 시피는 SF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SF와 판타지의 관계란 무엇인가? SF 독자는 여전히 남자 청소년들이 지배적인가? SF는 성숙하지만 괴벽하지 않은 문학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취향인가?" SF 작가 르귄은 그녀의 여러 차례 재판된 에세이 "과학소설과 브라운 부인(Science Fiction and Mrs Brown)"에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영국 작가 울프의 에세이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르귄은 이러한 기준이 SF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에세이 초입부에 수사적으로 던진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시피 는 그의 에세이에서 르귄의 주장에 반론하지는 않으나, SF 소설과 SF 분야 밖에서 쓰인 소설 간에 놓인 본질적 차이를 논의하고 확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와 폴과 C. M. 콘블루스의 《우주 상인》을 비교하고, SF 소설의 기반과 특성은 노붐(다코 수빈이 블로흐에게서 가져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사실과 다르지 않은, (현재의 지식으로는) 확실하게 불가능하지 않은 정보의 개별 조각" 이라고 정의한 용어)의 존재라고 결론짓는다. 한편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창자라 불리는 피들러는 1970년대부터 주류 문학과 SF를 구분하기가 "황금기" 시절 작가들이 주장하던 때처럼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에서나 적절한 불모의 언어"를 통해 "학문적 해석"을 하는 아카데미 학자들이 "부적절하게도 엘리트 비평이론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테면 하인라인, 아시모프, 특히 밴보트, 닥 스미스, 스테이플던 같은 작가들이 영문학계에서 종종 SF소설에 애착을 가진 학자들에게조차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현실은 과학소설의 실패가 아니라 윤리적, 심미적인 엘리트비평이 평가의 잣대로 삼는 전통적 기준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고 논한다. SF는 고전적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직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SF와 비SF 소설을 모두 쓰는 작가 카드는, SF에서 작품의 메시지와 지적 의미는 이야기 내부에 포함되며, 따라서 문체의 기믹이나 문학적 게임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일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언어의 명확성을 예술성의 부족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카드의 말을 인용하면, 판타지 작가 줄리엣 E. 매케나는 비슷한 견지에서 말하길, SF 작가이자 물리학자인 벤퍼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SF는 아마도, 비록 SF의 점령군이 여전히 문학의 성채, 로마 바깥에 야영하고 있더라도,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다." 이러한 배제의 의미는 책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조나단 레뎀의 에세이 "근접 조우: 과학소설의 낭비된 약속" 을 통해 뚜렷이 지적됐다. 레뎀은 1973년, 네뷸러상에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가 노미네이트되고,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수상했을 때, "SF가 주류와 융합될 수 있다는 희망의 죽음을 선언하는 숨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레뎀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SF&판타지 매거진》의 편집자는 "언제쯤 돼야 SF 장르는 메인스트림을 감동시키려는 시도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 라고 되물었다. 이 시점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버넷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베넷은 그의 최근 에세이에서 이 "끝없는 전쟁" 의 새로운 전개를 지적했다: 원자 원자(原子, atom)는 화학 반응을 통해 더 쪼갤 수 없는 단위를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 또 핵반응을 통해서는 더 작은 단위로 나뉜다. 원자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원소'를 들 수 있는데, 원자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라고 한다면,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성분의 종류라고 하겠다. 한편, 여러 원자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자는 물질의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인도 유럽어에서 쓰이는 atom은 고대 그리스어 "a-tomos"에서 온 것으로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a-": 부정, "tomos": 쪼갬)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뜻과는 약간 달리 동양에서 쓰이는 원자(原子)라는 한자어는 물체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준용하여 atom을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atom이라는 낱말은 언어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개념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쓴 것이다. 이러한 어원대로라면 당대에 알고 있는 가장 작은 기본 단위(현재는 쿼크와 렙톤)가 원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물리학과 화학에서는 이 항목의 정의에 따른다. 원자는 원자핵 주변에 전자가 존재하는 구조를 가지는데, 이 구조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주장하였다. 1803년 영국의 과학자 돌턴에 의해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고, 같은 종류의 원자는 크기와 질량이 같아 다른 원자로 변환, 소멸, 생성되지 않는다는 원자설을 제시하였다. 이때 돌턴이 제시한 원자모형은 딱딱한 공 모양이었다. 1897년 영국의 과학자 조지프 존 톰슨은 양극에서 음극으로 음극선을 쏘면서 진행경로에 장애물을 놓거나 전기장과 자기장을 걸어주는 음극선 실험을 수행하였다. 이 실험결과로부터 음극선은 질량이 있고 직진을 하며 전기적으로 (-)전하를 가지는 입자임을 알아냈고, 이를 전자라 명하였다. 이 실험을 바탕으로 1907년에 톰슨은 양전하를 가지는 물체에 음전하를 가지는 전자가 빵 속의 건포도처럼 박혀있는 원자모형을 제시한다. 전자의 발견은 돌턴의 원자 모형에서 전기적으로 양성을 띤 부분과 전기적으로 음성을 띤 부분을 구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11년 영국의 과학자 러더퍼드는 알파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는 알파입자산란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알파입자는 금박을 통과하고 일부는 튕겨 나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러더퍼드는 원자의 중심에는 양전하를 띄는 입자가 모여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공전하고 있는 행성모형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선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13년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는 전자가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층에 존재한다는 양자개념을 도입하여 가설을 세우고 이에 근거한 보어의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양자역학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926년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어 전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 즉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표하여 물질의 이중성을 입증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에 독일의 과학자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이 전자의 파동함수가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함수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확률적 해석을 바탕으로 원자 주위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을 계산하여 확률의 분포를 점으로 찍어 구름처럼 표시하는 현대의 원자모형이 탄생하였다. 양성자·중성자·전자의 특성 원자는 양성자의 양전하량과 총 전자의 음전하량이 같기 때문에 전기적으로 중성을 띄며, 원소에 따라 양성자 개수가 각각 다르다. 따라서 양성자의 개수로 원자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데, 이를 원자번호(Z)라 한다. 따라서 원자번호(Z)는 곧 양성자수이며, 양성자수와 중성자수를 합친 것을 질량수(A)라고 한다. 양성자수가 같지만 중성자수가 달라 질량수가 다른 원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를 동위원소라고 한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강한 상호작용으로 결합해 있다. 이들 양성자와 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를 주기율표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학적인 성질이 결정된다. 이 결합을 바꾸면 아주 강한 힘이 나온다. 전자는 원자핵과 반대인 음의 전하(-1)를 띠며 원자핵 주위에 확률적으로 전자구름을 이루며 존재한다. 양성자는 atom number이고 중성자는 atom mass-atom number이다. 원자 단위의 물리학은 원자 광학과 나노 과학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실험은 원자를 옮기고 운동 속도를 조정하며 이루어진다. 원자보다 더 작은 원자핵의 물리학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의 주제가 된다. 극좌표계 극좌표계(極座標系)는 평면 위의 위치를 각도와 거리를 써서 나타내는 2차원 좌표계이다. 극좌표계는 두 점 사이의 관계가 각이나 거리로 쉽게 표현되는 경우에 가장 유용하다. 직교 좌표계에서는 삼각함수로 복잡하게 나타나는 관계가 극좌표계에서는 간단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2차원 좌표계이기 때문에 극좌표는 반지름 성분과 각 성분의 두 성분으로 결정되며 주로 formula_1로 나타내는 반지름 성분은 극(데카르트 좌표에서 원점)에서의 거리를 나타낸다. 주로 formula_2로 나타내는 각 성분은 0°(직교 좌표계에서 x축의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잰 각의 크기를 나타낸다. 각과 반지름의 개념은 이미 기원전에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기원전 190 ~ 120년)가 여러 각마다 현의 길이를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는데, 그가 항성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묘사한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반지름 성분이 각에 따라 변하는 함수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완성된 좌표계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극좌표를 정식 좌표계로 도입한 예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줄리언 로웰 쿨리지의 《극좌표의 근원》에 서술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에 그레구아르 생뱅상과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는 독립적으로 극좌표의 개념을 발표하였다. 생뱅상은 1625년에 작성해 1647년에 출판하였으며, 카발리에리는 1635년에 출판하였으며, 개정판은 1653년에 나왔다. 카발리에리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극좌표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블레즈 파스칼은 포물선의 길이를 계산하기 위해 극좌표를 사용하였다. 아이작 뉴턴은 《유율법》(Method of Fluxions, 1671년 작성, 1736년 출판)에서 “일곱 번째 방법: 나선에 대하여”로 표현한 극좌표와 다른 아홉 가지 좌표계 사이의 변환을 분석하였다. 야코프 베르누이는 학술지 《"Acta Eruditorum"》(1691년)에서 점과 선을 이용한 좌표계를 사용하고 각각을 극과 극축이라 불렀다. 좌표는 극에서의 거리와 극축에서의 각으로 정의하였다. 베르누이의 연구는 곡선의 곡률반지름을 찾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극좌표”라는 용어는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오 폰타나가 처음 정하였으며, 18세기의 이탈리아 학자들이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조지 피콕이 1816년 라크루아의 《미적분학》(Differencial and Intergral Calculus)을 번역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는 극좌표를 처음으로 3차원으로 확장하였으며, 오일러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극좌표계의 점은 반지름("r")과 각("θ")로 표현된다. "r"은 극에서의 거리를 의미하고, "θ"는 0°(직교 좌표계의 x축 양의 방향에 해당)에서의 각도를 의미한다. 만약 "r"이 음의 값을 갖는다면, "θ"가 가리키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거리 |"r"|만큼 떨어진 점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극좌표 (3, 60°)는 극에서 60° 방향으로 3단위만큼 떨어진 곳을 나타낸다. 극좌표 (3, -300°)도 같은 위치에 그려진다. 데카르트 좌표와는 달리 극좌표에서는 하나의 점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한히 많다. 여러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돌아와도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r, θ")는 로 표현될 수 있다(n은 임의의 정수). (0, "θ")는 일반적으로 극을 뜻하며, 반지름이 0이기 때문에 어떠한 각이든 상관이 없다. 점을 나타내는 방법을 하나로 제한할 때에는 "r"은 양수로, "θ"는 구간 [0, 360°) 또는 (−180°, 180°](라디안으로는 [0, 2π) 또는 (−π, π])의 수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극좌표의 각은 라디안을 이용한 호도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2π rad = 360°),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항행에서는 60분법으로 각을 나타내며, 물리 분야(특히 회전 역학)와 거의 모든 미적분에서는 호도법이 쓰인다. "r"와 "θ"는 삼각함수를 이용해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로 변환할 수 있다. 데카르트 좌표의 "x"와 "y"는 극좌표의 "r"로 변환할 수 있다. "θ"를 정의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0, 2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formula_6는 formula_7의 역함수이다.) (−π, π]에 한정할 때는 다음과 같은 함수가 사용된다. 극좌표를 이용하여 곡선을 나타내는 방정식을 극좌표 방정식 또는 극방정식이라고 한다. 보통은 "r "를 "θ "에 관한 함수로 정의한다. 곡선 위의 점은 formula_10로 정의되며 함수 "r "의 그래프로 생각할 수 있다. 극좌표 방정식 "r"("θ")의 형태로부터 대칭성을 추론할 수 있다. 만약 "r"(−"θ") = "r"("θ") 이라면 곡선은 수평 반경(0° / 18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π−"θ") = "r"("θ")이라면 수직 반경(90° / 270°)에 대하여 대칭이 되며, "r"("α"−"θ") = "r"("θ")일 때는 "α/2"만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린 곳에서 대칭이 된다. 극좌표계의 성질 덕에 많은 곡선이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에 반해 데카르트 좌표로 표현되려면 난해한 곡선이 많이 있다.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곡선은 극좌 장미 곡선, 아르키메데스 나선, 달팽이꼴 곡선, 심장형 등이 있다. 아래에 서술된 내용에는 정의역과 치역의 범위의 제한은 없다. 원의 중심이 ("r ", "φ")이며 반지름이 "a"인 원의 일반적인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위의 방정식은 상황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단순화될 수 있다. 극을 통과하는 선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된다. 위의 방정식에서 "φ"는 극을 통과하는 선의 기울기를 각도로 표현한 것이며("φ" = arctan "m"), "m"은 데카르트 좌표에서의 기울기이다. 직선 "θ" = "φ"에 수직이면서 점 ("r ","φ")를 지나는 직선은 formula_12로 나타낼 수 있다. 수학에서 장미 곡선은 꽃잎을 지닌 꽃처럼 보이는 유명한 곡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k"가 홀수일 때는 "k"개의 꽃잎을 지니며, "k"가 짝수일 때는 2"k"개의 꽃잎을 지닌다. "k"가 정수가 아닐 때에는 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때는 꽃잎이 겹쳐 보이게 된다. 즉, 4"n" + 2개의 꽃잎을 지닌 장미 곡선을 그릴 수는 없다. 변수 "a"는 꽃잎의 길이를 의미한다.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나선이며,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극좌표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매개변수 "a"는 나선의 위치를 돌려 놓으며, "b"는 나선 사이의 폭을 조정한다. "r"("θ") = "bθ"일 경우, 각이 "θ" > 0일 때와 "θ" < 0일 때, 각각의 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는 두 가지의 곡선을 그리며 이들은 극에서 매끄럽게 만난다. 90°/270°선(직교 좌표계의 y축과 같음)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상을 그리면 다른 쪽 곡선이 나온다. 이 곡선은 수학 관련 저술에서 원뿔 곡선 다음으로 등장하는 곡선이며 극좌표로 가장 잘 표현되는 예로 거론된다. 초점 중 하나가 극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0°의 어딘가에 있는(원뿔 곡선의 주축이 극축에 있도록) 원뿔 곡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e"는 이심률이며 formula_16은 극이 아닌 초점에서 주축(major axis)에 수직이 되게 곡선까지 잰 거리(semi-latus rectum)이다. "e" > 1일 때 이 방정식은 쌍곡선이 되며, "e" = 1일 때는 포물선이 되고, "e" < 1일 때는 타원이 된다. "e" = 0일 때는 반지름 formula_16인 원이 그려진다. 모든 복소수는 복소평면 위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직교 좌표계와 극좌표계의 방식으로 모두 표현 가능하다. 복소수 "z"는 다음과 같이 직교 좌표계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formula_19는 허수 단위이다. 이 식은 아래와 같이 극좌표계로 나타낼 수 있다. 이를 복소수의 극형식이라 한다. 자연로그의 밑 e를 이용하면 다음처럼 나타낼 수 있다. 이는 오일러의 공식으로 표현된 것과 같다(이러한 공식은 각 "θ"의 단위가 라디안일 때에만 성립된다). 복소수의 직교 형식과 극형식 사이의 변환은 위에서 서술한 변환 공식을 사용하면 된다. 복소수의 곱셈, 나눗셈, 거듭제곱 연산을 할 때에는 직교 좌표계보다는 극좌표계로 표현하는 것이 계산이 더 간편하다. 지수 법칙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성질이 성립한다. 극좌표 공식은 미적분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각 "θ"의 측정 단위로는 라디안을 사용한다. 극좌표계와 직교좌표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미분 공식이 성립한다. 극좌표 곡선인 "r"("θ")의 직교 좌표계에서의 기울기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곡선을 매개변수 연립방정식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두개의 등식을 "θ"에 대하여 미분하면 두 번째 등식을 첫 번째 등식으로 나누면 ("r", "θ")에 접하는 접선의 기울기가 된다. 곡선 "r"("θ"), "θ" = "a", "θ" = "b"에 의해 둘러싸인 부분을 "R" 라 하자.(0 < "b" − "a" < 2π) 이때 "R" 의 넓이는 다음과 같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를 유도할 수 있다. 먼저 구간 ["a", "b"]를 "n" 개의 구간으로 나눈다("n"은 자연수). 각 구간 "i" = 1, 2, …, "n"에서 "θ"이 각 구간의 중점이라 하고 극에 중심을 두는 부채꼴을 만든다("r"(θ), 중심각 : "Δθ", 호의 길이 : "r"("θ")"Δθ"). 이때 만들어진 각 부분의 넓이는 formula_33이다. 따라서 총 넓이는 다음과 같은 리만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구간의 개수 "n"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극한값은 "R "의 넓이에 가까워진다. 데카르트 좌표를 이용해서 무한소 넓이는 formula_35와 같이 계산된다. 치환 적분법으로 좌표계를 바꾸어 중적분할 때에는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극좌표계의 좌표에 따른 넓이는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이제 극좌표계로 주어진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적분할 수 있다. 여기서 "R "는 곡선 "r"("θ"), "θ"= "a", "θ" = "b"에 둘러싸인 영역이다. "R "의 넓이는 함수 "f "를 1과 같다고 하면 된다. 야코비 행렬식을 이용한 놀라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가우스 적분이다. 벡터 미적분은 극좌표에도 적용할 수 있다. formula_40를 위치 벡터 formula_41, ("r"과 "θ"는 시간 "t"에 의해 좌우된다.) formula_40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위 벡터 formula_43를 다음과 같이 두고, formula_40에 수직인 단위 벡터를 다음과 같이 두자. 이때 "r"의 1계 미분, 2계 미분은 다음과 같다. 극좌표계는 원통좌표계와 구면좌표계로 확장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는 2차원의 극좌표계를 포함한다. 원통좌표계는 거리 좌표를 더해 극좌표계를 확장시키며, 구면좌표계는 각 좌표를 더해 확장한다. 원통 좌표계는 평면 극좌표로 (0,0)을 제외한 "xy" 평면 전체를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으므로, 여기에 "z"축을 더하여, 3차원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평면 극좌표계의 "r, θ," 그리고 "z"로 이루어지는 이 좌표계를 원통 좌표계라고 한다. 원통 좌표계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 좌표 중 "r"이 고정되고, "θ, z"가 임의의 값을 취할 수 있을 때의 자취가 원통이기 때문이다. 원통 좌표계의 특이점은 "z"축 위의 점들이다. 세 가지 원통 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써서 데카르트 좌표로 변환할 수 있다. 구면좌표계는 원점에서의 거리 "r", "z"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θ', "xy" 평면으로의 사영이 "x"축 양의 방향과 이루는 각 "φ," 이 세 가지 변수 "r,θ,φ"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특이점은 "r"="0" 이거나, "θ"="nπ"(단, "n"은 자연수)를 만족하는 모든 ("r,θ,φ")이며, 직교 좌표계에선 각각 ("x,y,z")=(0,0,0), "z"축에 해당한다. 구면 좌표계는 "r"을 고정시켰을 때의 자취가 원점을 중심으로 하는 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면좌표계의 "r"은 원점과의 거리인 반면 원통 좌표계의 "r"은 "z"축과의 거리이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원통 좌표계의 반지름을 "r"대신 "ρ"를 써서 표기하기도 한다. 원통 좌표계의 "θ"는 구면좌표계의 "θ"가 아닌, "φ"와 일치한다. 또한 이 좌표계는 지구의 지도에 사용되는 위도, 경도와 비슷하다. 위도 "δ"는 'θ'의 여각이며("δ" = 90° − 'θ'), 경도 formula_16은 formula_16 = 'φ' − 180°와 같이 정의된다. 세 가지 구면좌표계의 좌표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직교 좌표로 변환될 수 있다. 극좌표계는 2차원이기 때문에 점이 2차원 면에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다. 극좌표계가 가장 널리 쓰이는 곳은 어떤 현상이 중앙에서의 거리와 방향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이다. 위의 예시는 기본적인 극좌표를 사용한 식이 곡선을 정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아르키메데스 소용돌이처럼 직교 좌표계로는 표현했을 때 복잡한 식이 한 예이다). 또한, 물체가 중심에서 돌거나 중심을 두고 발생하는 현상이 자주 관찰되는 물리 체계에서는 극좌표계를 적용하는 것이 보다 간단하고 직관적으로도 이해하기 쉽다. 극좌표계를 도입하고자 한 계기는 등속 원운동이나 궤도 운동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극좌표계는 항행에 자주 쓰이며, 각과 거리로 목적지나 여행 방향을 정해준다. 예를 들어 항공기는 항행을 위해 약간 변형된 극좌표를 사용한다. 0°는 주로 360°로 주로 일컬어지며, 각도는 반시계 방향이 아닌 시계 방향으로 돈다. 360°는 자북극을 가리키며, 90°, 180°, 270°는 각각 동쪽, 남쪽, 서쪽을 일컫는다. 따라서 동향으로 5해리를 이동하는 항공기는 90°로 5단위를 이동하는 것이 된다(항공 교통 관제에서는 90(niner-zero)라고 읽는다). 중앙점이 대칭의 기준이 되는 시스템이면 자연스럽게 극좌표계를 사용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지하수 공식이며, 방사적으로 대칭되는 우물에 곧잘 쓰인다. 또한 중심력이 있는 시스템도 극좌표가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력장(거꿀제곱법칙을 따른다), 안테나와 같이 점광원이 쓰이는 체계 등이다. 방사적으로 비대칭되는 시스템에도 극좌표계가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폰의 지향특성은 음원의 방향에 따라 비례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러한 패턴은 극좌표 곡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마이크인 카디오이드 마이크의 곡선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패턴은 낮은 주파수에 전방향성으로 바뀐다. 확성기의 출력을 3차원으로 모형화한 것은 확성기의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패턴이 주파수에 따라 많이 변하기 때문에 여러 주파수에서 그린 그래프가 필요하다. 극좌표계 그래프는 많은 확성기가 낮은 주파수에서 전방향성으로 향하는지를 알려준다. 덩샤오핑 덩샤오핑(, 1904년 8월 22일 - 1997년 2월 19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국가원수직에 있었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1904년(광서 30년) 청나라 쓰촨 성 광안의 한 마을에서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덩원밍은 아들의 이름을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의 선성(先聖)으로 지어주었고, 다섯 살때에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된 후에 만들어낸 별명이다.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므로, 덩샤오핑은 낙관주의 곧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기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정치가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주었고, 원만한 성격덕분에 공산당에서 적이 없었다. 덩샤오핑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 곧 해외유학을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도 1920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에 덩샤오핑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때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여섯살 어린 덩샤오핑을 아꼈으며, 덩샤오핑도 저우언라이를 큰형님으로 따랐다.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때문이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에 돌아왔다. 덩샤오핑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덩샤오핑은 류보청이 사단장인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일했다. 화이하이 대전에서 덩샤오핑이 이끈 60만명의 군대는 100만명의 국민당 군대를 크게 이겼다. 1946년부터 1949년 국공내전시기에 화중, 화남, 서남지방이 해방되었으며, 서남지방(쓰촨,꾸이저우,윈난,티베트)등 서남지방 4개성을 다스리는 제1서기가 되었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 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 3녀). 덩샤오핑 서기장은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으며, 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로 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금속 노동 경험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생시절 중국 공산당(CCP)에 가입한다. 그는 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재정 부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부총리,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실권하였으나, 1973년 부총리로 다시 복권되었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공산주의 사상을 존중하되 중국의 현실에 맞게 해석하는 합리적인 생각에 근거한 경제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고 1975년에는 중화인민지원군의 총참모장에 내정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슬픔은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 덩푸팡(1944년-)이 베이징대학교에서의 추락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덩푸팡은 1984년 장애인복지기금,1988년 장애인연합회,1999년엔 지적장애인의 자활을 돕는 단체등의 장애인 인권단체들을 만드는 등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다. 그 해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복직한다. 여러번 숙청당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를 반복하여 그에게는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후 마오쩌둥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고 그에게는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고 냉정한 평가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마오쩌둥의 직계는 물론 자신에게 잠재적인 정적이 될 만한 세력의 숙청을 감행한다.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둥과 한나라의 고조와 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점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아직도 화궈펑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 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1975년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1976년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였으나 1978년 복권되었고 1982년까지 당 부주석·총참모장·부총리·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을 지냈다. 1978년부터는 중국 중앙인민협상회의 주석직을 겸하였으며,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은 1983년까지 유지하였다. 1982년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정치국 상무위원·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 주임을 겸직하여 중공의 최고 정치 실력자로 군림했으나, 1993년 사실상 은퇴하여 노환과 숙환에 시달리다 사망하였다.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예젠잉 중화인민공화국 과도정부 국가원수 시대였던 1981년 3월 2일을 기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과도정부 국가부원수 권한대행 직책에 임명되었으며 2개월 후 1981년 5월 29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명예 의장 쑹칭링 여사가 죽고 정식 중공 국가주석직 부활이 무산되자 그는 임시로 1981년 5월 29일에서 1983년 6월 18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 권한대행(기존의 중공 과도정부 국가부원수 권한대행 또한 겸직)에 추대되어 예젠잉 과도정부 중공 국가원수 대신 실권을 쥐었으며 1982년 6월 18일을 기하여 예젠잉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에게 실권을 반환하였고 10일 후 1982년 6월 28일을 기하여 후야오방한테는 중화인민공화국 과도정부 국가부원수 권한대행 직책을 부여하였다. 그 뒤 1983년 국가 주석직이 부활하여 예젠잉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후야오방 중공 과도정부 국가부원수 그들과 함께 자신도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 직책을 사퇴하고 최종 성향으로 리셴녠에게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을 넘겼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위원회와 당 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을 그가 차지하므로써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실권을 회복하는 등 아직도 실권은 그가 쥐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덩샤오핑의 개혁의 목표는 4대 현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현대화, 공업의 현대화, 국방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이다.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공산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들여왔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 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 분야에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 전체에 도입되었다. 많은 개혁들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경험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덩샤오핑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장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톈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3세. 언론인 짐 로워는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공산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과 같이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화장 정책을 추진한 중국 정부답게, 시민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유언했다.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현대화되고 번영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연분수 연분수(連分數)는 다음과 같은 꼴의 분수를 말한다. 식에서 formula_2 은 정수, 나머지 formula_3 은 양의 정수이다. 위 분수꼴의 수는 formula_4로 쓰기도 한다. 같은 방법으로 일반적인 연분수를 formula_5 로 쓴다. 이를 유한에만 한정하지 않고, 무한까지 확장하여, 무한 연분수를 다음과 같이 극한을 이용하여 정의할 수도 있다. 위 극한은 어떤 양의 정수 formula_7 들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모든 유한 연분수는 유리수이며, 모든 유리수는 formula_8 의 경우와 같이 정확히 두가지 유한 연분수로 나타내어진다. 모든 무한 연분수는 무리수이며, 모든 무리수는 무한 연분수로 표현가능하며 그 표현은 유일하다. 무한 연분수 중 꼬리들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순환 연분수라고 한다. 어떤 무리수가 순환 연분수로 표현가능할 필요충분조건은 그것이 어떤 이차방정식의 해가 되는 것이다. 즉, 이차 무리수()인 것이다. 무리수를 무한 연분수로 나타내는 방법은, 처음 몇 항까지의 연분수가 좋은 유리수 근삿값을 주기 때문에 특히 유용하다. 이런 근사 유리수값을 연분수의 "근사분수(convergents)"라 부른다. 짝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작은데 비하여, 홀수 근사분수는 실제값보다 크다. 예를 들어, 원주율 파이(formula_9)의 근사분수들을 계산해 보자.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 이를 반복하면, 무한 연분수 를 얻는다. formula_9의 세 번째 근사분수는 formula_15 이며,이는 실제 formula_9 값에 매우 가까운 값이다. 어떤 무리수의 formula_17번째 근사분수는, 그것을 분모와 분자가 서로소인 분수로 나타내었을 때의 분모보다 작은 분모를 가진 어떠한 유리수보다 주어진 무리수에 가까이 근접해 있다. 이 때의 오차의 한계는 formula_18을 주어진 무리수, 각각 formula_19과 formula_20을 formula_17번째 근사분수의 서로소인 분자와 분모라 할 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주어진다. 또한, 다음 식 을 만족하는 가장 작은 정수 formula_24에 대하여, 적당한 자연수 formula_25가 존재하여 formula_26와 formula_27를 만족한다. 10월 10월(시월, 十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고 2월하고도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그 다음 해가 평년일 경우에는 그 다음 해 4월과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9월과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화요일과 수요일에 57번, 금요일과 일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및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2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일 경우에는 10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및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2015년, 2026년, 2037년)일 경우에는 한글날만 공휴일이며,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1988년, 2016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개천절만 공휴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추석이 있는 해도 있다. 이런 경우는 모두 음력 7월 이전에 윤달을 끼고, 이 가운데에는 9월 30일이 추석 당일인 경우 혹은 대체휴일이 적용된 경우도 포함한다. (예: 2001년, 2006년, 2009년, 2012년 (10월 1일), 2017년, 2020년, 2025년 등) 북한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노동당 창건일이 주말과 겹쳐 10월에 공휴일이 사실상 없는 해가 된다.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16년, 2044년) 및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체육의 날과 겹쳐지며,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8년, 2056년) 및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06년, 2017년, 2023년, 2034년, 2045년)일 경우에는 문화의 날이 경찰의 날과 겹쳐진다. 음력 8월과 음력 9월이 이 달에 있으며 10월에는 음력 8월 15~16일, 9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8월이나 윤9월이 양력 10월에 낀다. 영어의 October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서 유래되었다. 1월 1월(一月)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첫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중 하나이다. 1월의 첫 번째 날은 양력설이다. 이 달과 작년의 5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며, 윤년일 경우에는 이 달과 그 해의 4월, 7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추우며(겨울의 두 번째 달이다.), 남반구의 대부분 지역은 1월에 가장 덥다(여름의 두 번째 달이다.). 북반구에서 1월은 남반구의 7월과 기후적으로 동일하며, 반대로 남반구의 1월은 북반구의 7월 기후와 동일하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음력 11월과 음력 12월이 이 달에 있으며 1월에는 음력 11월 15~16일, 1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영어 'January'(라틴어 Ianuarius)는 문(door)을 뜻하는 라틴어 ianua에서 유래했다. 문의 신인 야누스(Janus)에서 따왔으며, 야누스는 하늘의 문지기로서 한해를 여는 신이기도 하다.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문은 시작을 나타내는 데서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원래 고대 로마 달력은 10개월 (304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겨울은 달로서 생각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713년경, 로물루스의 계승자였던 누마 폼필리우스가 1월과 2월을 추가해 태음년(354일)과 같은 길이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비록 원래의 고대 로마 달력에서는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지만, 누마 통치기, 혹은 기원전 450년경 데켐비리에 의해 1월이 한 해의 첫 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에서는 3월 25일(성모 영보), 12월 25일(크리스마스)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적 축일들이 새해의 첫 날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6세기 초에 공식적으로 다시 1월 1일을 새해의 첫날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이는 1월 1일이 그리스도 할례축일이기 때문이었다. 2월 2월(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8일, 윤년일 때에는 29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3월 및 1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올해의 2월 28일과 작년의 3월 1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그리고 북반구에서는 겨울의 마지막 달이고 남반구에서는 여름의 마지막 달이다. 2월은 한중일월 모두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고 일본에만 공휴일이 있을 수도 있는 달이다. 대한민국에서 2월의 공휴일은 설날이 2월이거나 설 당일이 1월 31일인 경우에만 있다. 그마저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음력설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예 없었다. 반면 북한은 광명성절이 기본적으로 공휴일이며 정월 대보름도 공휴일이기 때문에 2월에 최대 3개의 공휴일이 잡히기도 한다 880년의 2월에 리베몽에서 독일의 루트비히 3세와 프랑스의 루이 3세, 샤를로망 3세 간에 로렌의 영유권을 독일의 루트비히 3세에게 양도하는 리베몽 조약을 체결하였다. 날짜는 미상이다. 음력 12월과 음력 1월이 이 달에 있으며 2월에는 음력 12월 15~16일, 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1년, 1987년, 1998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93년, 2099년 등)일 경우 달력에서 나머지 한 주일의 칸이 비게 된다. 로마의 달인 2월(February)은 고대 로마 달력에서 음력 2월 15일(보름달)에 개최된 정화 의식인 Februa에서 유래하여, 정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februum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월과 2월은 로마 달력에 추가된 마지막 두 달이었는데, 로마인은 원래 겨울을 달력에 없는 기간(monthless period)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3월 3월(三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세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북반구에서는 3월이 되면서 날씨가 풀리기 때문에, 대체로 이 달을 봄의 시작으로 본다. 남반구는 가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종료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윤년의 경우에는 작년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끝난다. 올해의 3월 1일과 내년의 2월 28일은 요일이 항상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2008년, 2036년, 2064년, 2092년)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2003년, 2014년, 2020년, 2025년, 2031년, 2042년, 2048년, 2053년, 2059년, 2070년, 2076년, 2081년, 2087년, 2098년)일 경우에는 3월의 공휴일이 대통령 선거일이 3월 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경우 정월 대보름이 3월 초가 아닌 경우에는 3월에 공휴일이 없다. 음력 1월과 음력 2월이 이 달에 있으며 3월에는 음력 1월 15~16일, 2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낄 경우 춘분 이전은 윤1월, 춘분 이후는 윤2월이 된다. 3월(March)은 가장 오래된 고대 로마 달력의 첫번째 달인 마르티우스()에서 유래되었다. 마르티우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로마인들의 선조 그리고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르스의 달인 마르티우스는 전쟁을 위한 절기의 처음이었다. 4월 4월(四月, )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네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4월이 과학의 달이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7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로 58번, 월요일, 화요일로 57번, 목요일, 토요일로 56번 시작한다. 중국은 청명절, 일본은 쇼와의 날, 베트남은 기일로 인해 4월에는 반드시 공휴일이 있으나 대한민국에서 4월의 공휴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 4월 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2006년 이후로 없으나, 4년에 한 번씩 하는 총선의 선거일이 4월로 잡히기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공휴일이 생긴다. 또한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2006년 이전에도 식목일이 주말과 겹쳐 공휴일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인 예로 1981년, 1987년, 1992년, 1998년 등) 반면 북한은 청명절과 태양절, 인민군 창건일 중 어느 하나가 주말에 겹치더라도 반드시 공휴일이 있다. 음력 2월과 음력 3월이 이 달에 있으며 4월에는 음력 2월 15~16일, 3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6월 6월(유월, , 六▽月)은 에서 한 해의 여섯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는 네개의 달중 하나이다. 이름의 유래는 오비디우스의 "Fasti"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와 동격이자 쥬피터의 아내 로마 여신 유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뜻하는 라틴어 "juniores"인데, 이는 5월을 뜻하는 "May"가 "노인"을 뜻하는 라틴어 "maiore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Fasti"VI.1–88). 어느 해건 6월이 시작하는 요일은 그 해의 다른 달이 시작하는 요일들과는 항상 다르며, 이는 5월과 6월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또한, 6월이 끝나는 요일은 그 해의 3월이 끝나는 요일과 항상 같으며, 6월이 시작되는 요일은 내년 2월이 시작되는 요일과 항상 같다. 또한, 전년도 9월,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단, 평년의 경우에만 해당).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3월, 1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 해 8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58번, 토요일, 일요일에 57번, 화요일, 목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6월에는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긴 날이 있고, 남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짧은 날이 있다. 또한 북반구에서 6월의 계절은 남반구에서의 12월의 계절과 같다. 북반구에서 기상학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날은 6월 1일이며, 반대로 남반구에선 6월 1일에 겨울이 시작된다. 6월엔 특히 결혼식이 많이 치러지는데, 그 유래중 하나로는 6월이 유노(헤라)에서 이름을 따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유노는 결혼의 여신이었고, 그로 인해 6월에 결혼을 하면 운이 따른다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서는 여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에는 겨울이 된다. 대한민국에서는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6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고,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위대한 김정일의 날만,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소년단 창립기념일만 공휴일이다. 일본에는 이 달에 공휴일이 아예 없다. 과거에는 8월과 12월에도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생일인 12월 23일이 천황절, 2016년 8월 11일이 산의 날로 지정되면서 6월만 일본에서 유일하게 주말을 제외한 휴일이 하루도 없는 달로 남게 되었다. 음력 4월과 음력 5월이 이 달에 있으며 6월에는 음력 4월 15~16일, 5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6월에 윤달이 들 경우 하지 이전이면 윤4월, 하지 이후이면 윤5월이 들게 된다. 7월 7월(七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일곱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윤년인 경우 그 해의 1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월요일과 화요일에 57번,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7월의 기온은 북반구에서는 가장 높고, 남반구에서는 가장 낮아, 북반구의 1월 기온과 같다. 11월과 함께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빈약한 달이기도 하다.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7월에 공휴일이 없고, 대한민국에서는 7월에 공휴일이 2008년 이후로 아예 없다. 2007년 이전에도 1983년, 1988년, 1994년, 2005년과 같이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나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인 경우 사실상 7월에 공휴일이 없는 해가 있었다. 반면 북한은 7월 27일이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공휴일이며 월요일,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화요일,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조국 해방전쟁 승리의 날이 주말에 겹쳐서 북한도 7월에는 사실상 공휴일이 없는 해가 된다. 일본의 경우는 7월에 공휴일이 반드시 있다. (바다의 날) 국내에서는 7월부터 휴가철이 시작된다. 음력 5월과 음력 6월이 이 달에 있으며 7월에는 음력 5월 15~16일, 6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끼는 경우는 대서 이전은 윤5월, 대서 이후는 윤6월이다. 영어로 7월을 의미하는 July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전에는 5번째(fifth)를 의미하는 퀸틸리스 (Quintilis 또는 Qinctilis)로 불렸다. 8월 8월(八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덟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이 달부터 연말까지는 2의 배수가 오는 달마다 31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또한,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2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되며, 다음 해도 평년인 경우 다음 해 5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10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 금요일은 57번, 화요일, 일요일은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개국에서 공휴일이 빈약한 달 중 하나로 중국과 베트남은 건국 이래 8월에는 공휴일이 없고 일본은 2015년까지 8월에 공휴일이 하나도 없었다. 단,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20년, 2048년, 2076년)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2004년, 2009년, 2015년, 2026년, 2032년, 2037년, 2043년, 2054년, 2060년, 2065년, 2071년, 2082년, 2088년, 2093년, 2099년) 그리고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066년, 2077년, 2083년, 2094년, 2100년)일 경우에는 8월의 공휴일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휴가철이 끝나는 달이다. 2015년까지는 일본에서 6월과 함께 공휴일이 없는 달이었으나 산의 날이 8월 11일로 지정되면서 빠졌다. 음력 6월과 음력 7월이 이 달에 있으며 8월에는 음력 6월 15~16일, 7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이 달에 윤달이 들 경우 처서 이전은 윤6월, 처서 이후는 윤7월이다. 8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gust는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하였다. 그 전에는 섹스틸리스 (Sextillis)였다. 9월 9월(九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아홉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는 가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과 같은 남반구에는 봄이 된다. 이 달과 그 해의 12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에는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 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이 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의 공휴일이 모두 있을 가능성이 높은 달로 일본과 베트남, 북한은 건국 이래 9월에 공휴일이 최소 하나는 무조건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9월의 공휴일은 추석이 9월 내에 들거나 늦어도 10월 1일이 추석 당일이어야만 있으나 추석이 9월에 들 확률이 10월에 들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9월에 공휴일이 있을 확률은 높은 편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이와 동일하다. 미국에서는 이 달에 학년이 시작한다. 음력 7월과 음력 8월이 이 달에 있으며 9월에는 음력 7월 15~16일, 8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7월 (추분 이전) 윤8월 (추분 이후)이 양력 9월에 있다. 11월 11월(十一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한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다. 이 달과 그 해의 8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고, 그 다음 해가 윤년인 경우 2월과 마지막 요일이 ㄱ. 또한, 이 달과 그 해의 3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평년인 경우 그 해의 2월과도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다음 해가 윤년이면 다음해 5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8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58번, 금요일과 토요일에 57번,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한중일월 4국에서 공휴일이 가장 빈약한 달로, 중국과 베트남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건국 이래로 11월에 법정공휴일이 아예 없다. 반면 북한은 11월 16일이 어머니날로 공휴일이며 남한에는 4번의 임시공휴일이 11월에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은 11월에 공휴일이 2개 있다. 음력 9월과 음력 10월이 이 달에 있으며 11월에는 음력 9월 15~16일, 10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윤달일 경우는 윤9월이나 윤10월이 양력 11월에 든다. 11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mber는 "nine"을 의미하는 라틴어 novem에서 유래하였다. 11월은 고대 로마 달력의 9번째 달이었다. 12월 12월(十二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며, 31일까지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미국에서는 이 달을 대체로 겨울의 시작으로 본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는 여름이 된다. "구랍"이라고도 부르나, 이는 "지난해 섣달"을 뜻하므로, 양력 12월과는 무관한 명칭이다. 이 달과 그 해의 9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하며, 이 달과 그 해의 4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난다. 다만, 다음 해가 윤년일 경우 그 다음 해 3월, 11월과 같은 요일이 되며, 다음해가 평년이면 다음해 6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한다. 또한 이 달에 있는 크리스마스와 내년의 첫날은 항상 같은 요일이다. 또한 올해 첫날 1월 1일 과 마지막날 12월 31일은 평년일 경우만 요일이 같다. 400년 동안 이 달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일요일과 월요일에 57번,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시작한다. 대한민국에서 12월의 공휴일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예 : 2004년, 2032년 등)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윤년(예 : 1982년, 1988년, 1993년, 1999년, 2010년, 2016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4년, 2049년 등) 그리고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예 : 1983년, 1994년, 2005년, 2011년, 2022년, 2033년, 2039년, 2050년 등)일 경우에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북한은 금요일,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토요일,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절만 공휴일이고 화요일,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거나 수요일,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에는 김정숙 생일만 공휴일이 된다. 1988년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12월에 휴일이라곤 없었으나 1989년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와 함께 12월 23일이 천황탄생일로 지정되면서 일본에도 12월에 휴일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에는 12월에 휴일이 없다. 북한은 12월에 휴일이 2개 (김정숙 생일, 사회주의헌법절) 있다. 음력 10월과 음력 11월이 이 달에 있으며 12월에는 음력 10월 15~16일, 11월 15~16일의 보름달을 관측할 수 있다. 12월에 윤달이 낄 경우는 동지 이전에는 윤10월이, 동지 이후는 윤11월이 든다. 원통좌표계 원통좌표계 (cylind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을 나타내기 위해, 평면 극좌표계에 평면에서부터의 높이 formula_1 (혹은 formula_2)를 더해, formula_3 로 이루어지는 좌표계이다. 원통좌표계는 한 축을 중심으로 대칭성을 갖는 경우에 유용하다. 예를 들면, 반지름이 formula_4인 무한히 긴 원통의 직교좌표계에서의 식은 formula_5 이지만, 원통좌표계에서는 간단히 formula_6가 된다. 이런 이유로 원통좌표계(cylinder-ical coordinate)란 이름이 붙어있다. 3차원 공간의 점 P 는 formula_3로 표시된다. 이를 직교좌표계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formula_1에 높이(height)란 의미를 주어 formula_1대신 formula_2를 사용한 formula_19란 표기도 자주 쓰인다. 원통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부피 요소 비활성 기체 비활성 기체(非活性氣體) 혹은 불활성 기체(不活性氣體), 희가스(稀gas), 귀족 기체(noble gas)는 화학 계열로 주기율표의 18족 원소를 말한다. 최외각 전자가 모두 차 있는 이러한 원소들은 전자를 주고 받기 힘들기 때문에 화학결합을 하기 어렵다. 구면좌표계 구면좌표계 (球面座標係, spherical coordinate system)는 3차원 공간 상의 점들을 나타내는 좌표계의 하나로, 보통 formula_1로 나타낸다. 원점에서의 거리 formula_2은 0부터 formula_3까지, 양의 방향의 z축과 이루는 각도 formula_4는 0부터 formula_5까지, z축을 축으로 양의 방향의 x축과 이루는 각 formula_6는 0부터 formula_7 까지의 값을 갖는다. formula_4는 위도로, formula_6는 경도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이 세 수치를 보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공간의 점을 찾을 수 있다.: 원점 formula_10에서 formula_2만큼 z축을 따라 간다. 그 지점에서 x z 평면 안에 있으면서 z축에서부터 formula_4만큼 회전한다. 이 xz 평면 전체를 z축을 축으로 formula_6만큼 반 시계방향(+x축에서 +y축 방향으로)으로 돌린다. 구면좌표계라는 이름은 이 좌표계에서 'formula_14'이 단위구(單位球)를 표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또한 이 좌표계가 구대칭을 기치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면좌표계와 원통좌표계는 평면 극좌표계를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며, 구면좌표계는 구대칭이 나타나는 문제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와 같이 구대칭이 있는 경우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 때 구면좌표계를 사용한다. 아래 변환식을 통해 직교좌표계와 변환할 수 있지만, 변환식에서 사용하는 역삼각함수는 일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공간상의 각 점마다 하나의 좌표만 대응하는 직교좌표계와는 달리, 구면좌표계는 한 점을 나타내는 표현이 여러가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1, 0°, 0°), (1, 0°, 45°), 과 (-1, 180°, 270°) 는 모두 같은 점을 나타낸다. 세 좌표의 표시를 위한 여러가지 다른 약속이 존재한다. 국제 표준 기구의 지침(ISO 31-11)에 따라 물리학에서는 ("r", "θ", "φ")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점에서의 거리, 천정과 이루는 각도(천정거리), 방위각 등을 표시하고, (미국의) 수학에서는 고도와 방위각이 바뀌어 'φ'와 'θ'로 표시된다. 좌표 formula_1는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주어진 점을 P라 하자. 구면좌표계의 경우는 좌표값에 따라 한 점을 여러 좌표가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 변수의 범위를 보통 아래와 같이 제한한다. 다른 3차원 좌표계로 변환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각 단위벡터의 직교좌표에서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면적 요소 부피 요소 기울기 발산 회전 라플라시안 잭슨 5 잭슨 5()는 1964년에 결성하고, 잭슨 형제들로 이루어진 미국 인디애나 주 출신의 대중음악 그룹이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멤버는 재키(1951년생), 티토(1953년생), 저메인(1954년생), 말론(1957년생), 마이클(1958년생)이며, 이 중 막내가 나중에 팝의 황제로 불리게 되는 마이클 잭슨이다.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여 "버블검 소울"이란 스타일의 음악을 유행시켰다. 1972년엔 에픽 레코드으로 계약사를 바꾸었으며, 모타운이 잭슨 파이브란 이름의 소유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했다. 현재까지 약 3천만 장의 앨범을 팔았으며 1989년에 해체했다. 2001년에 잠시 재결성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도로 해체하고 2012년에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잭슨 파이브의 구성원은 모두 시카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개리의 작은 집에서 자라났다. 레비, 티토, 재키, 저메인, 라토야, 말론, 마이클, 랜디, 자넷으로 이어지는 무려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를 키운 어머니 캐서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고, 아버지 조셉은 블루스에 심취한 금속공장 직원이었다. 부부는 아이들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는 반면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어머니 캐서린은 젊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클라리넷도 연주했다. 조셉은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 팔콘스로 활동하며 마을의 바와 클럽, 시카고와 인디애나 북부 지방의 대학 행사들을 휩쓸다가, 결국은 몇 달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 그룹을 해체한다. 밤마다 아이들 모두가 아버지 곁에 모여 위대한 고전 팝송을 연주하는 일이 허다했다. 아버지 조는 자식들이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진짜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아주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렇게 해서 맨 위의 세 형제 재키, 티토, 저메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그룹 더 잭슨 브라더스가 결성되었다. 세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했다. 그러다 말론과 특히 마이클이 합류하면서 그룹은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된다. 어느날 꼬마 마이클이 꼭 제임스 브라운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고 놀란 어머니의 제안으로 그룹에 합류하게 된 마이클은 한동안은 봉고를 연주하다가 그룹의 싱어가 된다.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는데도 몸과 목소리를 다루는 그의 재능은 이미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다. 1963년 말엽, 마이클은 다니던 학교의 연말 축제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다. 마이클은 검은 바지와 힌 셔츠를 차려입고 1959년에 브로드웨이에서 막이 오른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중에서 〈Climb Ev'ry Mountain〉을 부른다. 어린 꼬마의 매끄러운 목소리에 학부모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내가 터져 나갈 듯이 박수를 쳤다. 훗날 마이클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기가 막힌 느낌이었죠." 아버지 조셉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의 모습과 아들이 장내에 일으킨 여파를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조셉은 개리 시와 주변 도시에서 열리는 온갖 콘테스트에 자녀들의 이름을 등록한다. 이들 그룹은 연령도 스타일도 다양한 사람들과 경합을 벌여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그 세계에서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도전자들이 된 잭슨 일행은 무엇 하나 거저 되는 일이 없는 만큼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이며 액세서리며 이것저것 신경쓰기 시작했고, 조셈은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카고로 가서는 흥행하는 공연들을 찾아냈자. 관중이 좋아하는 제스처며 음악이며 몸동작을 기억해두었다가 자식들이 무대에서 그대로 재현해내도록 만들었다. 콘테스트를 거듭할 수록 잭슨 형제는 하루가 다르게 노련해졌고 창의력 역시 견줄 데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 공연마다 따라다니는 일부 극성팬들이 실증내지 않도록 연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꾸준히 신곡을 만들어내야 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승해서 상을 받는 만큼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었다. 집에서 연습이 끝나는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고, 조셉은 아들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마이크며 악기들을 갖추어가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어쨌든 그런 희생이 다음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잭슨 파이브는 아마추어 콘테스트 순회를 계속해 나갔다. 로열 시어터 상에 심취한 잭슨 파이브는 경쟁자들에게 막대한 미해를 끼쳐가며 매주 새로운 곡을 들고 나왔다. 로열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도 좋긴 했지만, 아버지 조는 음악의 신전이랄 수 있는 뉴욕의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편이 훨씬 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인디애나 주와 미시간 주에서 잭슨 파이브가 워낙 대단한 성공을 거둔 덕에 아폴로 시어터에서 예선 없이 곧장 본선에 진출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잭슨 형제는 두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전국 최고 가수들의 얼굴로 도배가 된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잭슨 파이브는 아폴로 시어터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했다. 공연비로 당시 600달러를 받았고, 무엇보다 그룹 최초의 음반을 녹음할 수 있게 해준 값진 우승이었다. 아폴로에서 성공을 거둔 다음에 잭슨 일행은 아버지의 동료인 고든 키스 덕분에 처음으로 앨범을 취입할 기회를 얻었다. 고든 키스는 그 역시 음악에 심취한 사람이자 개리의 스틸타운 녹음 스튜디오 사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조는 집에 올 때 고든 키스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습해야 할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고 왔다. 아이들은 그 곡의 멜로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망스런 마음을 애써 감추고 연습을 시작했다. 조는 데모 테이프르 제작자에게 넘기라 갔다가는 저력 무렵이 되면 새로 연습할 노래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몇 주 후, 잭슨 일가는 최초의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키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러스며 금과악기 연주자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악기를 연결하고 첫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녹음 작업은 주로 일요일에 진행되어서 앨범 전체 녹음을 끝내기까지는 일요일이 여러 번 지나야 했다. 조는 주중에 내내 쉬지 않고 아들들을 연습시켰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그룹은 마침내 그들의 첫 노래 〈Big Boy〉의 녹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첫눈에 반한 소녀와 사귀로 싶은 소녀의 마음을 노래하는 발라드 곡이었지만, 정작 그런 가사를 읊조리는 마이클은 자신이 노래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서둘로 음반을 준비하고 나자 이제 잭슨 가족이 거머쥔 각종 콘테스트의 막간이나 끝났을 때를 이용해서 싱글을 파는 일만 남았다. 그 첫 번째 싱글은 지방 라디오 방송곡에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1968년, 잭슨 파이브는 프로가 되어 돌아온 아폴로 무대에서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스타를 발굴하는 일이 맡겨진 모타운 실무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신동들에게 아무것도 제안하지는 않았다. 모타운의 스타인 바비 테일러가 시카고 공연을 기회로 잭슨 파이브의 실력을 떠벌려 오디션 제안을 받은 건 그로부터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잭슨 일행은 처음 모타운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활량한 건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게다가 그들을 맞는 분위기는 다소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베리 고디는 자리르 옮기면서도 전혀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마이클은 한 치도 양보도 없는 냉정한 시선을 받으며 〈I Got The Feeling〉, 〈Tobacoo Road〉, 〈Who's Loving You〉 세 곡을 불렀다. 잭슨 파이브는 일이 성공적이었는지 어쩐지도 모른 채 개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틀 후인 7월 26일, 그 유명한 음반 회사에서 첫 계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모타운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잭슨 형제는 앨범 취입을 위해 개러와 디트로이트 사이에서 끝없는 줄타기를 했다. 마이클의 목소리는 채 변성기를 맞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잭슨 파이브의 레퍼토리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년들에게 걸맞는 스타일과 노래를 찾아내야 했다. 여러 주가 훌쩍 지나갔서도 잭슨 파이브에게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그러자 고디는 다섯 소년을 그때부터 모타운의 본거지가 된 캘리포니아로 보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한동안 묵게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해서 다섯 형제는 유명한 가수의 집에서 지내게 되어 살짝 주눅이 들었다. 고디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는 이제 히트 퍼레이드에서 상위권에게 들어가게 될 싱글을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곡을 연달아 내놓게 될 거다." 다이애나 로스가 아이들에게 불쑥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어느 저녁 파티에 잭슨 파이브가 등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마이클의 나이는 11살이었지만, 나이가 어릴 수록 실력에 감탄한다는 상업적 전략에 따라 그의 나이는 8살로 표기되었고 잭슨 파이브 모두의 나이가 두 살씩 내려갔다. 1969년 8월 음박 저널계와 상류츨 인사들과 기자들이 다이애나 로스의 집에 도착했고 파티는 성공적이었다. 〈Who's Loving You〉와 〈Zip-a-Dee-Doo-Dah〉를 감칠맛 나게 부르는 마이클의 목소리에 다들 넞을 잃었다. 이내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그 공연이 끝나고 채 며칠도 되지 않아 고디는 작곡가 다크 리처드로부처 원해 글래디스 나이트에게 줄 작정이었던 곡 〈I Wanna Be Free〉를 다이애나 로스의 무대에서 직접 보았던 잭슨 파이브를 위해 다시 손을 보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그 곡은 머지않아 잭슨 파이브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는 곡 〈I Want You Back〉이 된다. 그 뒤로는 내놓은 노래마다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잭슨 파이브는 4년 동안 11개의 앨범을 취입하고 순회공연과 텔레비전 방송을 오가며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살게 된다. 1979년, 잭슨 형제는 그 전해에 발매된 음반 《Destiny》거 거둔 성풍적인 성공에 이어 월드투어를 준비한다. 잭슨 파이브가 전곡을 작곡한 그 음반은 어린 형제들의 독립성과 예술적인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데스티니 월드투어를 준비하면서 조는 론 와이즈너와 프레디 테먼을 매니저로 고용한다. 잭슨 형제는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공연을 펼치게 된다. 투어는 대성공이었다. 가장 높은 고음부를 처리할 때 목소리가 끊어지는 걸 감추기 위해 형들 중 한 명과 짜놓은 작은 전략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이클이 노래하는 첫 입만 방긋거리면 그 소절은 말론이 대신 불렀다. 1984년, 조셉 잭슨은 잭슨 파이브가 새로운 순회공연을 하게 될 거라고 언론에 발표한다. 하지만 데스티니 투어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지 5년이 지난 그때는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마이클은 《Thriller》 앨범을 발매한 뒤 스타가 되어 새로이 맞게 된 자유를 맘껏 우릴 셈이었다. 마이클이 그 투어에 참여하기로 한 건 마지못해서였다. 첫 번째 난점은 바로 빅토리 투어라는 공연 제목이었다. 그 제목은 애초에 예정했던 것처럼 잭슨 파이브 활도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수투표로 빅토리 투어 쪽으로 결정되면서 논쟁은 끝나버렸다. 두 번째로 의견 충돌을 빚게 된 건 부유한 계층보다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이 더 많은 팬들을 위한 티켓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40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라는 점이다. 언론이 나서서 잭슨 일가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지적하고 나서야 마이클의 의견을 따라 티겟 판매가를 절반으로 낮추었다. 투어는 1984년 7월에 시작되었다. 공연이 거듭될수록 다섯 형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리무진으로 제각기 이동했다. 한편, 여동생 자넷이 당시에 사귀던 남자 친구와 비밀리에 결혼해버리는 일까지 일어나 마이클은 벅찬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가 유럽 투어를 연장하려 한다는 사실을 마이클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 가족 관계는 부쩍 더 나빠졌다.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을 마이클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 소식이 팬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12월 9일, 미국 투어 마지막 날, 마이클은 결국 공연 마지막에 마이크를 잡고 그룹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자신은 이제 전격적으로 솔로 활동에 매진할 작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야세르 아라파트 야세르 아라파트 (, , 1929년 8월 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LO)의 초대 수반(1996년 ~ 2004년)이었다. 최대 지파 파타(Fatah)의 지도자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1969년 ~ 2004년)이었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본명은 모하메드 압델-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محمد ياسر عبد الرحمن عبد الرؤوف عرفات القدوة الحسيني)로 카이로에서 부유한 상인의 일곱 아들 중에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예루살렘의 후세이니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카이로에서 성장한 아라파트는 카이로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따고 졸업하였다. 1950년대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지배를 반대하는 게릴라 그룹 파타를 결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학생 시절에 이슬람 형제단과 팔레스타인 학생 연합에 가입하여 그 회장(1952년 ~ 1956년)을 지냈다. 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 위기 당시 군인으로 참전하였다. 1964년 아랍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대표하는 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설립하였다. 1967년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을 물리치고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통치를 획득하였다. 대다수는 아라파트가 이끄는 파타였다. 1969년 2월 3일 카이로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국가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04년 사망할 때까지 지냈다고 한다. 파타와 다른 해방 기구 단체들은 여러 차례로 이스라엘군의 목표들을 공격하였고, 역전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게릴라 기지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유엔의 회원국이기보다 온건파 게릴라의 지도자로서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하여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그해에 유엔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대표로서 인정하였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기지를 둔 레바논을 침입하였다. 아라파트와 그의 지지자들은 레바논에 있는 자신들의 기지들을 떠나야 하였다. 그러고나서 튀니지로 옮겼다. 1991년 걸프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93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통치 지역들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창립에 서명하였다. 1990년대에 이스라엘-PLO 협정은 가자 지구의 대부분과 서안 지구의 많은 도시들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수로 이끌었다. 이스라엘군이 철수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이 지역들의 통치권을 얻었다. 1994년 아라파트는 가자 지구로 이주하여 팔레스타인으로부터 27년간의 망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해에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과 함께 평화적 노력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자치 정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에 올로프 팔메 상이 수여되었다. 2000년 이스라엘-PLO의 평화 교섭이 깨지고 양국 사이에 폭력적 사태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지위가 약해지자 아라파트는 2003년 자신의 어떤 행정적 임무들을 취하는 데 총리를 임명하였다. 2004년 11월 11일 프랑스 클라마르의 페르시 군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이집트 카이로에 안장되었다. 수반 직책은 라우히 파토우흐에게 넘겨주었다.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1867년 2월 9일 ~ 1916년 12월 9일)는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영문학자이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등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꼽힌다. 소설,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사상과 윤리관 등은 후대 일본의 많은 근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은 일본 지폐 천엔(千円)권에 담겨 있었으나, 현재 천엔(千円)권에는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담겨 있다. 현재는 해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서 중국, 미국,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의 근대작가 중에서 가장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1867년 2월 9일(게이오 3년 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지금의 신주쿠 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도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3세쯤에 걸린 천연두의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는 에도 막부가 붕괴된 이후의 혼란기로,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에 의해 잠깐 생가로 되돌아왔다. 이후 양부모의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의 대립으로 인해 나쓰메 가로 복적된 것은 21세 때의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의 관계는 이후의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훗날의 부립 1중, 지금의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는 등으로 인해 2년 뒤에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의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의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의 교사 등으로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가 돌고 있을 때에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것으로 우정이 시작되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의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의 아내 도세()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잇단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나는 것도 이때이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 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처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2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9세로 타계하였다. 소세키가 타계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와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 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지폐의 인물은 아니였다. 일본은 맨 처음 이토 히로부미를 1,000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해서 인쇄를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주변국들과 심각한 외교 마찰을 빚게 되자 일본 정부에서는 1,000엔의 인물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그 자리에 나쓰메 소세키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2004년 이후로는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담겨 있다. 북한 (지역) 북한(北韓) 또는 북조선(北朝鮮)은 한국(조선)의 지역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군사 분계선 이북의 지역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은 이를 전제로 한 단어다. 대한민국의 사전상 사전상 남한(南韓)은 대한민국의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北韓)은 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대한민국의 남쪽 지역) + 북한(대한민국의 북쪽 지역)」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한 조선반도 전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로 규정하여 남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지역, 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어(조선어) 사전상 남한(남조선)과 북한(북조선)은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한국(조선) 내 지역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별개로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남한(남조선)은 대한민국을, 북한(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칭하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이라고 불러,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부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북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남쪽으로는 대한민국(남한)과,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접하고 있다.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평양말과 같은 서북 방언에 기초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지리적 명칭인 북한(北韓)으로 지칭된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북 지역에서 소련군에 의해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에는 '한반도 총선거'에 기초하여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공식 출범했다.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이 자리에는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형식상 다당제이지만 사실상 조선로동당의 1당 독재 체제이며,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김정은 차례로 집권이 이어지며, 사실상 세습에 의한 독재 전제국가가 되었다. 이 국가의 체제 이념의 근간인 '주체사상'은 1972년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최초로 등장하였고, 1992년 4월 헌법 개정 때 주체사상을 유일 지도 사상으로 하게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자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체계를 마련했다. 1998년 사회주의헌법 개정 때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방위원장이 자국의 실권자임을 명시했다. 2013년 6월에는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보다 상위 규범인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 39년 만에 개정되면서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朝鮮)이 사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 등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단지 조선이라고 하면 대개 1392년에 건국된 왕조 국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조조선’ 혹은 ‘리씨조선’(리조)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北韓)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 + 북한'이다. 요컨대 한국어 사전상 북한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밖의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본을 예로하에 동일본(東日本)/서일본(西日本) 구분처럼,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전제로 대한민국 내 일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북한'이라는 용어에는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보는 관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자국을 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남측'(대한민국) 에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양국간의 외교 혹은 문화 교류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이라고 불러, 북한 지역을 가리켜 공화국 북반부라는 표현이 흔히 사용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북조선"()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 나라의 위치에 고대에는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더 정확하게는 현재 둥베이의 일부분도 포함했다). 고조선 멸망 이후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복속했다. 장수왕은 국내성에 있던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대동강 ~ 원산만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했으나, 곧 발해에 복속했다. 한편 그 이남 지역인 황해도 지역은 신라가 차지했다. 고려 때에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불렸으며,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승려 묘청은 한 때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실패하자 난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웠으나 곧 망했다. 한편 함경도 지역은 고려가 차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여진족 등의 치하에 있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東北面)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특히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宣川)·정주(定州)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를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옛 대한제국의 38선 이북 지역은 소련군, 38선 이남 지역은 미군이 각각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平南建準委員會)를 세우자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적화(赤化)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한반도 북부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지고나서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신민당이 연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을 만들고, 이후 남조선노동당과 합당해 조선노동당이 된다. 이후 북조선인민회의와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에 취임했다. 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계열, 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공산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산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1980년대에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후 김정일 중심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되어갔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서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 관련 기능 및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하여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없이, 공고해져 갔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여 김정일(金正日)이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헌법 개정을 한번 더 하면서 주석제가 폐지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김정일의 유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1994년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한다고 했을 때 전쟁 위기가 최고조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민군은 미군과 맞설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이 없었고 비축물자도 없었다. 전투의욕도 상실한 상태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핵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직할시에서 만나 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이 관광 도중 살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핵실험을 강행했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4개월 뒤인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화국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방위원장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직을 신설해 김정은 체제를 공식 출범시켰다. 2012년 7월 1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했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동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민국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 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국방부 또한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 4월 26일, 대한민국의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했다.). 12월 3일, 김정은은 정권 내 제 2인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에게 정치적 숙청을 단행해 축출했다. 이어 12일, 사형을 선고하고 즉결 집행으로 장성택을 제거했다. 그러나 고모 김경희에 대한 처분은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2017년 09월 03일에 12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에서 6차 핵실험에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합중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시작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비핵화를 촉구를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북 제재와 함께 포용정책을 병행하면서 김정은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후 아이스하키팀 등에서 단일팀과 예술단 공연 등을 하면서 2018년 4월 27일에 대한민국과 정상회담을 하여 비핵화 의지를 밝히며, 풍계리 핵 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기지를 폭파 및 폐쇄하였다. 2018년 6월 12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국 CIA조사 에서 풍계리와 동창리 이외 미사일기지와 핵 실험 장소를 비밀리에 더 보유 및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고체 연료를 사용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에만 5월 4일에 1발 (고도 60여km, 사거리 240여km), 5월 9일에 2발 (고도 45~60여km, 사거리 420여km 및 270여km), 7월 25일에 2발 (고도 50여km, 사거리 600여km), 7월 31일에 2발 (고도 30여km, 사거리 250여km), 8월 2일에 2발 (고도 25여km, 사거리 220여km), 8월 16일에 2발 (고도는 30여㎞, 사거리 230여㎞)등을 발사하였다. 대한민국의 킬체인체계 하의 미사일방어체계와 사드는 액체연료는 잘 감시, 탐지, 타격 할 수 있지만, 고체연료는 감지가 매우 어렵고, 고도를 낮추면, 방어체계에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수월하게 특정지역을 타격 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군은 이를 노리고 미사일 개발을 진행 중 인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시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직하게 하고, 그 아래 내각 총리를 두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인 김두봉, 최용건이 국가원수직을 겸했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동시에 국가주석직을 신설해 초대 총리인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으나 1994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규정해 국가주석직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주체사상과 "독재"로 점철되는 일당 독재 체제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 이념인 주체사상과 일반적인 공산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며, 권력을 부계 세습하는 점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의 소멸을 시사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배계급이 유교적인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사람의 지도자가 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조선로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조선로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은 조선로동당 규약과 헌법이 뒷받침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라는 적색파시즘적 이념이 추가되었다. 또한 국가원수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입법부 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영남(金永南)이다. 2010년 김정일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있었으며, 2011년 김정일이 죽자 후계자가 되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정치 구조가 퇴폐하여 2009년에는 "모두가 찬성 투표하자"라는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본 국가 운영 원칙은 국가는 당(黨, 조선로동당)이 “령도(領導)”하고 당은 수령이 “령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국가 전반의 체제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당은 전인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체, 즉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권력기관은 최고인민회의며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따로 기술되어 있을 정도다. 다만 이러한 정치체계는 대통령 중심제도 의원내각제도 아니므로 "회의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소련의 최고 소비에트나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등도 동일한 체제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내각의 조직 및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위원장 1인, 부위원장 2인, 명예부위원장 2인, 서기장 1인)과 국방위원회위원을 선거로 선출한다. 산하 위원회로 법제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와 예산위원회(위원장 1인, 위원 6인)를 설치한다. 국방위원회는 국방사업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로 행정상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 다만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던 시기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를 겸직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권력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 추대연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 력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여 공산주의 조국의 국가체제와 인민의 운명을 수호하며 나라의 방위력과 전반적 국력을 강화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령도하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며 우리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스러운 중책이라 함으로써 사실상의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의 지도, 국방부문의 중앙기관 신설 및 폐지, 중요 군사 간부의 임명 및 해임, 군사칭호 제정 및 장령 이상의 군사 칭호 수여, 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의 선포와 같은 결정과 명령을 내며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위원회 구성은 위원장 1인, 제1부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위원 5인이며 산하기관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성을 둔다. 내각은 과거에는 정무원으로 불린 기관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조직 및 인사권을 통해 구성되며 헌법에 의해 정부를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다. 1998년 9월 5일 10기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의 헌법개정을 통해 내각으로 그 조직이 변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 1인과 부총리 3명으로 구성된다. 2005년 5월 30일 금속기계공업성을 금속공업성과 기계공업성으로 분리한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산하에 3위원회, 29성, 1원, 1은행, 2국을 두고 있다. 그 외에 필요에 따라 임명되는 무임소상도 임의로 구성되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당제를 택하고 있다. 현재 여당은 조선로동당이며, 수십 년 간 장기집권하고 있다. 그러나 로동당은 이름일 뿐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관리하며 야당으로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있으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한 형식적인 야당이며,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정치적 권한은 전무하다. 그 중 천도교청우당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유일한 당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통적으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동독, 베트남, 쿠바, 라오스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립과 동시에 지금까지 “혈맹”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소원해졌으며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조선인민군 일부를 파견받는 등 우호적이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가 개선되고 1992년 대한민국과 수교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괄목하게 증가하였다.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 제3세계 국가들과도 활발한 대사급 관계를 맺어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반미 국가인 쿠바, 시리아와는 계속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 수교국이지만, 대한민국과의 수교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수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무기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우호적이다. 대한민국이 하나의 한국을 폐기한 이후 스웨덴, 스위스, 영국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이 조선을 승인하였다.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몇 안 되는 서방 국가다. 중화민국과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교류가 드물었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는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대한민국과 미국과는 건국 이래로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인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비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적대관계이다. 1983년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이후 미얀마는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의 묘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킨 결례에 대해 분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즉시 단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비동맹국 회의에서 발언권이 약화되었으며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때는 유고슬라비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폭파범들의 당시 종적을 조사해서 미국 측에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 방화사건이 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단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경우 한때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의 친분으로 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1989년 말 차우셰스쿠가 유혈 혁명으로 총살되고 1990년 3월 루마니아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최근에는 이란의 핵 포기선언, 쿠바가 미국과의 수교를 선언, 잇따른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하여 중국과 러시아 이외의 국가와는 사실상 국교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 자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서로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 정권이란 미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의하여 꾸며진 괴뢰정권으로서 미국상전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김일성의 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 내지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남조선혁명"을 통해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적화통일론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 후에도 많은 사건을 일으켰는데, 특히 수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대한민국에 ‘조선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였던 사건인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이 있다. 또한 1974년 8월 15일의 문세광(文世光)에 의한 육영수 저격사건, 1983년에 발생한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비무장지대에 땅굴을 파서 대한민국에 대한 침투를 시도하였으며, 1976년 판문점에서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군사적 도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장 간첩 120명을 15개조로 나누어 울진과 삼척지구의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있다. 1987년에는 대남공작원 김현희를 이용하여 대한항공 858편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1996년의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9년과 2002년에 황해 서북방에서 각각 발생한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 그리고 2008년에 금강산에서 여행 중이던 대한민국 관광객 박왕자가 피격당한 금강산 피격사건 등 여러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2010년에는 연평도 일대를 포격하여 군인과 민간인 3명이 사망하였다. 2015년에는 조선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목함 지뢰를 설치하여 대한민국 군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적으로는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등의 인접국가들의 경제 지원과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금강산관광, 개성공업지구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2006년 10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하여 남북 관계는 소원(疎遠)해졌으며, 각종 남북 협력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2007년 6자 회담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타결로 활발히 재개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얼어붙게 되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노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을 압박, 남북 관계의 차단을 경고해 왔으며, 결국 최근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로동신문의 논평에 대해서 각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체로 대한민국을 길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은 2008년 12월 1일부터 군사 분계선을 통과하는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경색되어 가는 남북관계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화를 제의했으며, 군사 및 실무차원에서 장비지원을 제의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계속 보이고 있자, 남측은 강경한 입장에서 조금씩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11월 15일에 남북관계의 회복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4박 5일의 평양 방문을 마친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대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이라고 발표했다. 민주노동당은 북측 고위급 인사의 말을 인용해서 현 남북 관계가 최악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24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 관광 중단, 개성공단 축소 등을 통보했다. 대한민국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공단 폐쇄에 대해선 희박하지만 배제 못한다고 발표했다. 2009년 11월 10일 인천광역시 대청도 인근 해상 북방 한계선인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오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비정에게 대한민국 해군에서 경고를 하였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비정에서 공격을 가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반격을 가하면서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정이 반파되었다. 그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도발이라고 주장하며 가혹한 군사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하였다. 2010년 3월 26일에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함을 어뢰로 침몰시켰다. 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하였고, 이 포격으로 해병대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연평도 주민들이 인천 본토로 피난하였다. 2008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2025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통일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했다. 대북인권결의안이 11월 21일에 통과되고 대한민국이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북측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말을 인용, 점점 대남압박 행동조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압박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매체를 통해 대한민국을 맹비난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은 경색되어 가는 남북관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정부의 남북 관계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대북대책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했다. 야 3당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하루빨리 전환해야 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통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도발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2008년 12월 5일에 대한민국 통일부는 12월 1일에 남북간 육로통행의 차단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지원사업 및 경협은 활발하다고 발표했다. 조선신보는 2008년 12월 10일에 6자회담으로 참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협상태도를 비판했다. 반면에 국민행동본부 등 일부 보수단체들은 이런 북측의 비난행동의 맞대응으로 정상회담 때 중단하기로 한 전단을 살포하기로 하였다. 2009년 1월 17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참모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과 전면대결태세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선 대북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인민군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명을 통해 남측과 전면대결태세에 돌입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정치권은 반응이 엇갈린 상태이다. 남측에 위치한 서해 5도는 성명발표 뒤에도 평온속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한 단체가 한반도 위기를 주장했다고 조선중앙통신에서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성명을 통해 남북간의 기존 군사적, 정치적 합의사항을 무효로 한다고 선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존에 있던 사항들을 폐기한다고 발표하면서 황해에 위치한 서해 북방한계선은 화약고가 될 가능성을 낳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개성에 직원을 30일이상 억류하고 있으며, 2009년 5월 1일에는 대남 입장을 밝혔다. 그러다가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여기자가 석방되었으며 곧이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으로 유씨가 석방되었다. 또한 조선인민군에 억류되었던 어선들이 귀환하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위급 인사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 과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그 밖의 통일부 장관, 기타 거물급 정치인들과 면담하면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2009년 9월달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 처음으로 이산가족상봉이 금강산에서 이루어졌으며 남북 관계에 순풍이 조금씩 불고 있었으나,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인해 남북 관계가 또다시 얼어붙었고,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17년에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잇따라 도발을 일으키며 남북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고 있다. 특히 연달아 중거리탄도유도탄을 발사하고 6차 핵실험을 강행한 바 있다. 김정은은 4월 9일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주재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의 날짜와 장소를 처음 공개했다.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개최되는 북남수뇌상봉과 회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한반도 핵의 단계적 동시적 조치 주장에 동의를 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선 핵포기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둔 외교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남북은 2018년 7월 14일 판문점에서 장성급 군사회담을 열고 동·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완전히 복원하는 데 합의했다. 서해 군 통신선은 복구됐으나 동해 군 통신선은 2011년 5월 북한이 통신선을 차단한 이후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후에 국방부는 서해지구 남북 군 통신선을 완전히 복구해 모든 기능을 16일부터 정상화했다고 2018년 7월 17일 밝혔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1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며, 국가보안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반(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조항이 평화 통일 원칙을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 제4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도 있으며, 2000년의 6·15 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직시하였으므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한민국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1949년 10월 21일 293(IV)호 결의 또한 이를 확인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 수교하였다. 한국 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했으며 이들 군대는 1958년 10월 26일에 철수했다. 196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1990년대 초 최악이었던 조중 관계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훼손된 관계 회복에 나서 지금껏 모두 7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방중과 장쩌민·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거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함께 한반도 정세의 핵심적 변수가 됐다. 천안함 사건으로 대북 경제협력을 단절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처로 경협 분야에서 북-중 경협이 남북경협의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위화도와 황금평을 100년간 임대하였다. 2010년 12월 26일 중국은 나진항 4, 5, 6호 부두를 5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베이징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역상이 1000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던 중 2018년 3월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시진핑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로써 조중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고, 김정은과 시진핑은 또한 북미정상회담 직후인 6월 19일 베이징에서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일본은 수교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에 나서려 했으나, 일본인 납북자 문제과거사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일 병합 조약에 대한 평가나, 배상문제·청구권문제 등에 대하여도 결말이 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962년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두 개의 정권"이 사실상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해 왔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후에 "한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면서, 일본은 정경분리 원칙을 적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실체를 따로 취급하여 왔다. 한편, 배상 문제도 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처음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나눈 적이 있다. 2002년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배상권을 상호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경제 협력을 얻는 방법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으나, 이후 수교 협상은 정지되었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괴선박 사건으로 대표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동에 대한 일본 여론의 반발과 핵 문제 등으로 고립이 심화된 데에 있다. 일본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 문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테러국가 지정해제를 받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오히려 엄격한 제재조치로 전환하였다. 1956년경, 박영빈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소련은 미국과 평화 공존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평화 공존 정책을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격분하여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국과 직접 전쟁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 빩은이들렇게 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를 단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에는 소련과의 상호 협력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1996년에 효력이 상실되었다. 2000년에는 러시아와의 우호 선린 협력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는 군사 동맹 관련 조항이 삭제되었다. 1990년 독일의 통일로 인해 평양 주재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폐쇄된 독일민주공화국 대사관의 권리는 국제법상 공식적으로는 스웨덴 대사관에 귀속되었다. 1만6천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공관이었다. 2000년 대한민국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평양 주재 독일대사관이 세워졌다. 2002년 1월 서방국가로는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상주 대사를 파견했다. 스웨덴과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했지만 대리대사가 이끌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조직인 조선인민군은 제도상 로동당의 '당군'이며, 선군정치 하에서 권력의 기반이다. 최고사령관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다. 조선인민군은 징집병이며 2002년 병력은 약 110만 명이상으로 추정된다. 부문별로는 육군 120만명, 해군 4만 6000명, 공군 8만 6000명으로, 병력면에서 세계 4위다. 그러나 상당수의 장비가 노후하며 장비를 움직일 자원이 부족하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 장비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유사시 장비들이 전력으로서 큰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조선인민군은 대부분 식량부족이 심각하며 이는 민가에 악탈과 체력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이유 때문에 현재 조선인민군의 90%는 전투 불가능 상태이다. 평양-원산선 이남에 총전력의 70%를 배치하고 있으며, 170mm 자행포 및 240mm 방사포는 대한민국의 수도권 지역을 기습 선제 타격할 수 있다. 현재 이라크 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특수전 전력의 확충과 갱도 건설과 기만기 개발로 후방지역의 생존성 확보에 노력하고 있다. 백령도 인근 장산곶과 옹진반도, 연평도 근처 강령반도의 해안가를 비롯한 장재도, 무도, 대수압도 등에는 해안포 900여문이 배치돼 있다. 군항인 해주항 일원에만 100여문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해안포는 사정거리 27km의 130mm,사정거리 12km의 76.2mm가 대표적이며 일부 지역에는 사정거리 27Km의 152mm 지상곡사포(평곡사포)가 배치되어 있다. 또 사정거리 83~95Km에 이르는 샘릿,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도 NLL 북쪽 해안가에 다수 설치됐다. 조선 인민군은 로동 1호,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등 탄도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대포동 2호는 미국의 영토인 알래스카를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 3위에 준하는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기도 하다. MiG-21 등 전투기들을 무인 항공기(UAV)로 개조하였다. 이란을 통해 무인 정찰기(UAV) 도입을 해서 서해상에서 운용 중이다. 2012년 12월 12일 인공위성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기권 재진입 기술도 확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10,000 ~ 13,000 km 이상의 ICBM 사정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만 km는 미국 서부 지역까지, 13,000 km는 미국 대부분 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KN-08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엔진 성능개량 시험을 실시했다. 몇 기를 개발했는지는 확인 할 수 없다. TEL에 탑재되어 있는데 TEL은 정찰 위성이나 레이다 탐지 사각지역에 숨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위협적인 무기체계다. 150~250여 기가 실전배치된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탄도 미사일의 TEL도 27~40대로 파악되고 있다. 괌을 사정권에 둔 무수단 탄도 미사일 운용부대는 14대의 TEL을 보유한 것으로 분석된다.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대비해 군 보관시설에만 150만t의 전시용 유류를 비축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스스로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각국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보유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핵보유국임을 기정 사실로 보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국 초부터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80년대 후반 핵개발 의혹이 있는 시설에 대한 핵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NPT 탈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지만,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맺어, NPT 잔류와 핵시설 동결을 선언하였다. 2003년 초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합의를 파기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몇 개의 플루토늄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의 핵폐기 요구에 대응하여 미·일·러·중·남·북 6자회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7년 초기 단계를 합의하였다. 절차가 예정대로 진행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만간 핵시설을 불능화하게 된다. 기존의 핵무기에 대한 처리는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처음 핵을 보유한 국가로 지정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빚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9년 3월 24일에 6자회담의 폐기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7월 16일 김영남(金永南)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이라고 하며 6자회담의 종료선언을 했으나, 9월 18일 김정일은 양자 및 다자회담의 틀에 대해 재언급하였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였고 판문점 전화를 차단하였다. 또한 불가침 조약을 폐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105, 2016년 1월 6일' 수소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며 그 진위 여부는 현재 밝혀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으로 밝혀질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소탄 보유국이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1직할시, 2특별시, 9도, 3지구로 나뉜다.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며, 면적 상으로 국토의 1%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에 대한 모든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해당 부분은 6과에서 관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로 아시아 대륙 동부 중앙에 있다. 국토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용하는 시간대를 평양시간이라고 부르며, 현재 동경 135˚ 기준 자오선 표준시(UTC+09:00)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경계는 1948년 9월 9일부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8선(북위 38˚선)이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로는 군사분계선이다. 북으로는 대략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 및 러시아와 인접한다. 국토 북단은 북위 43˚ 00' 36˝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남단은 북위 37˚ 41' 00˝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서단은 동경 124˚ 18' 41˝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동단은 동경 130˚ 41' 32˝ 라선특별시 우암리이다. 면적은 123,138 km²로, 한반도의 약 55%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한민국 영토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장하는 영역과 거의 같다. 이를 따르자면 영토의 남단은 북위 33˚ 6' 32˝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동단은 동경 131˚ 52' 40˝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바뀌게 된다. 이 영토의 면적은 222,209.231 km²이며 한반도 본토를 제외한 섬은 5,974.655 km²이다. 섬을 포함한 남북의 최장 거리는 1,127.16 km, 동서의 최장 거리는 645.25 km이다. 한반도는 긴 지질 시대의 거듭되는 지각운동, 침식, 퇴적작용 등에 의해, 산지, 평지, 계곡, 해안, 고원 등 변화가 많은 지형이 되었다. 국토의 약 90%를 산지가 차지하여, 육지의 평균 표고는 440m이다. 많은 국토가 산지 속에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형은 백두대간인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서쪽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 묘향산맥(妙香山脈), 언진산맥(彦眞山脈), 멸악산맥(滅惡山脈) 등이 펼쳐져 있고, 함경북도에서 함경남도에 걸쳐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 등이 낭림산맥과 이어져 북부와 동부가 높고 서부와 남부로 오면서 점차 낮아진다. 이들 산맥으로부터 발원한 여러 개의 큰 강들은 서해 및 동해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강을 중심으로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산맥은 북부에 위치하는 랑림산맥,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 위치하는 백두산(2744m)이다. 평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점유하는 영토 면적의 약 5분의 1로, 서해안 연안이나 서해안에 도달하는 하천의 유역에 집중하고 있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토양이 있지만, 산지의 토양은 유기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개 불모지이다. 주요 하천은 대개 산지의 수원지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간다. 가장 긴 압록강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이다. 다른 주요 하천은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 재령강 등이 있다. 두만강만은 동쪽으로 흘러서 동해로 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부분 대륙성 냉대 기후로 일부 지역에서는 온대 기후가 나타난다. 냉대 지역에서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 냉대 습윤 기후가 나타나고 온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 온대 하우 기후가 나타난다. 그 외에도 고지대에서는 기후가 Dwc를 띈 아극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도 있고, 백두산 근처의 높은 지대에서는 툰드라 기후를 띈다. 현재 한반도 전역에 10만여 종의 동식물이 분포하며, 식물계에서는 북쪽 함경북도 백두산의 경우 시베리아나 만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북방 침엽수림이나 북방계 식물류가 자생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에서 광물 자원이 풍족한 국가 중의 하나이며, 종류로는 철, 은, 납, 아연, 구리, 니켈, 코발트 등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경제적 가치가 있는 광물은 금속광물 19종, 비금속 광물 20종, 에너지 3종을 합한 4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서 마그네사이트, 중석, 몰리브덴, 흑연, 중정석, 금, 운모 등의 광물은 세계 10위권 내의 매장량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근거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석유의 경우 서한만에서 하루 약 700배럴 정도의 경미한 양은 생산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과거의 다국적 석유 기업들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한때 의문시되었던 수십조원 규모의 대량의 원유의 매장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인당 명목상 GDP는 2012년 기준 583달러, 인구는 약 2500만명이며 수도 평양의 인구는 약 300만, 국내 총생산은 약 123억 달러로 추계되고, 이것은 남한 1인당 국민소득의 40분의 1, 국내 총생산이 남한의 80분의 1에 해당하며 2012년 UN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80위인 개발도상국이다. 그러나 경제 이외에 다른 요소들을 반영할 경우 사실상 후진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그 후의 통제경제는 일관해서 중공업의 발전과 농업의 기계화를 중시해 왔다.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 1957년 5개년 계획, 1961년 7개년 계획, 1971년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력을 보였다고 알려졌지만 당시 폐쇄적이고 선전선동을 앞세운 공산권 국가들이 경제성과를 대외에 과도하게 과장한 사례가 많은데 소련만해도 경제성과를 5배이상 허위로 대외에 알렸던 걸 감안할 때 60~7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개한 경제성과는 신뢰하기 힘들다. 그렇다하더라도 일제시대 건설된 산업시설 대부분이 휴전선 이북에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60~70년대까지 공업부분의 경제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의 성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력을 뛰어넘었다.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시행했고, 1980년대 동구권과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노선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우호가로 거래하던 호혜가 사라졌고 소련과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원조와 지원이 줄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당시 주요 1차 자원을 동구권에 의존해왔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크게 침체되었다. 이는 1차 자원 생산지 인프라를 구축하지않고 중공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큰 경제적 위기였다. 그리하여 1987년 제3차 7개년 계획과 여러 발전 운동-천리마 운동-자력갱생 등으로 계획경제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2003년의 국내총생산(GDP)은 228억 5,000만 달러로 추계된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경제모델의 한계를 인정하고 개혁개방과 변화를 통해 경제위기상황을 이겨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을 유지하면서 경제난은 계속해서 가중되고 있고, 이러한 경제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은 1993년 공식적으로 계획경제의 실패를 자인했다. 2002년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식량난과 경제난이 번갈아 일어나면서, 2002년 7월 1일에 7월경제관리조치를 실시하여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관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정부 관리들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 학습"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정은이 2009년에 경제관리조치를 무효화 시키면서 경제가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마당과 시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2004년부터 시장을 개장하여 시민들이 생활 소비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시장은 락랑구역에 있는 통일 거리 시장과 만경대 구역에 있는 칠골시장이 있다. 통일 거리 시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품 및 남한과 미국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진품이 아닌 것들도 있다. 최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합작으로 물품량이 증가한 상태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식량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굶어 죽었다. 1998년을 기점으로 대량아사 사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굶주린 서민들이 많은 실정이다. 1995년 이후 국제사회의 원조 없이는 주민들의 식생활을 책임질 수 없는 ‘구호경제’ 체제로 접어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북은 2008년 곡물 최소 소요량 520만t 가운데 380만t만 자체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족분 140만t은 남한이나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사회의 원조에 의존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측정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08년 세계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18.8점으로 기아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한다. 해당 리포트에서 기아 상황이 악화된 10개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제외한 9개국이 모두 아프리카 나라들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최근까지도 식량난이 나아지지않고 있으며, 북동쪽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실정이다.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각하에 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을 폐지하고, 민경협 산하에 있던 민족경제련합회(민경련)를 개편해 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로 옮기는 등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하거나 개편했다. 하지만 대남 경협기구를 축소, 개편한다는 설에 대해서 남한 정부나 전문가는 가능성이 낮거나 남북관계 차단의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북은 라면 대량생산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그 효용성은 의문이다. 201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2010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지수는 19.4점으로 20년 전인 1990년 때의 16.2점보다 굶주림 위험도가 20%나 늘었으며, 작년도인 2009년의 18.4점에 비해서도 1점 가량 오른 것을 볼 수 있다. 해당 연도에는 총 9개 국가들이 기아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기아율이 증가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앉게 되었다. 201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한 대한민국과 미국 탓이라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의 월스트릿저널은 원조의 대가로 어뢰와 방사포공격으로 돌려받은 한국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2011년 10월, 유엔 산하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은 "현재 북에 필요한 식량 530만t 가운데 100만t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북 어린이 3분의 1이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일일 식량 배급량이 600g에서 200g으로, 북에 대한 외부 사회의 지원도 10년 동안 10분의 1로 줄었다"고 밝혔다. 2014년 미국 워싱턴의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는 11일 유엔이 정한 ‘세계 식량의 날’을 맞아 발표한 ‘2014 세계 기아 지수(2014 Global Hunger Index)’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굶주림 상태를 심각한 수준으로 평가했다. 세계식량정책연구소의 미셸 피에트로우스키 대변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시아에서 굶주리는 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2016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아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는데, 비록 5세 미만 아동의 발달장애율이나 사망률은 많이 줄었지만 전반적인 기아지수는 여전히 28.6점으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1992년 개정된 공산주의 헌법 70조에 따르면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라고 규정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적으로는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로동당이나 국가기관에서 배치한 데 따라 일해야 하며 그 기준이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성분, 노동력 배치계획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고위층 인재 채용과 관련된 부정부패가 일어나면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04년 1월부터 정치, 경제 과목 등의 시험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인사정책이 개선, 신세대 엘리트들이 출현하는 등 인력구조의 전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아파트 또는 문화 주택으로 부르며, 이는 크게 3층에서 4층까지 있는 콘크리트 고밀도 건축물을 말한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의 법에 따라 주택을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달 사용료를 내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남한 주택제도와 달리 가정 총노동 월급에서 전기료, 수도료 등을 충당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직업에 따라 주택의 구성이 달라진다. 당`정`기업소 간부들은 독립식 다층 주택으로 정원과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되어있는 곳에서 거주하는 반면, 말단 노동자 등은 방 1~2개와 부엌이 딸린 공영주택에서 거주한다. 또한 상위계층은 주택보급률이 굉장히 높은데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입사증"을 받고 이동허가를 받아 이사하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 몇 년이 소요된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은 서류수정작업을 통해 거주지를 변경한다. 대표적인 주택지구는 평양시 중구역 아파트단지와 천리마 거리 아파트 단지, 함경남도 단천시 신단천동 주택단지와 황해북도 개성시 청년거리 아파트 단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주택을 흔히 경제문제에 비유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택건설에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요즘 정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식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택건설도 부진한 면이 없지 않다. 2009년 11월 30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년 만에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하였다. 이는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한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처 이후 화폐 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목적 이외에도 주민들이 보유해 암거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 자금을 끌어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가구당 구화페 100,000원을 신화폐 1,000원으로 교환해주고 그 외에는 교환해주지 않았다. 다만, 정부에서 한 사람당 신화폐 500원(구화폐 50,000원)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다. 즉 4인가구인 경우 정부으로부터 지급 받은 2,000원과 1,000원(구화폐가 100,000원 이상이 있었을 경우임)을 합한 3,000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은 모두가 비슷한 조건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점과 구화폐가 단 10,000원도 없던 하위층의 경우엔 공짜돈이 생겼다는 점, 또 2-3,000원정도의 월급이 생활에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하, 중상위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화폐 교환조건을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여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화폐개혁을 주도한 김정일의 실정을 숨기기 위해 박남기를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초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남기 조선로동당 전 계획재정부장이 '남조선 간첩' 혐의를 받아 숙청된 것으로 확인됐다. 2009년 대한민국의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현지에서 입수한 동영상에 의하면 심각한 경제난의 후유증으로 병사들이 필로폰을 밀매하는 것이 알려졌다. 군인, 민간인이 결탁한 조직적 거래가 확인되었으며 이것은 평양당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총 32분 분량으로 촬영된 이 동영상은 소문만 무성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마약밀매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반도 지역은 세계적으로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한반도 북부에는 과거 퉁구스계 민족(말갈족·여진족 등)의 유입이 잦았으나, 한국 전쟁 이후 외부 민족 유입이 사실상 차단되었다. 현재는 주민의 절대다수가 한민족이며, 매우 소수의 외국인 거주자(주로 중국인, 그 밖에 러시아인, 몽골인 등)가 있다. 그리고 1950년대~1970년대에 월북한 대한민국 주민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201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458만 9,122명(출처:CIA The World Factbook)으로 추산되며, 인구밀도는 200명/km²이다. 인구는 대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해안가 등에 집중되어 있다. 2004년 인구 증가율은 약 1%이다. 1950년대 이후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가속화되어 2002년 기준으로 총인구의 61%가 도시지역에 산다. 최대 도시는 수도인 평양으로, 2010년 인구는 251만4,692 명이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함흥, 청진이 이렇게 평양과 3대 대도시를 이루며 그 외 남포, 개성, 신의주, 원산 등이 있다. 2000년 8월에는 동해안의 경제 무역 도시인 라진과 선봉이 합쳐 인구 40만 명 규모의 라선직할시가 되었으며, 이 도시는 2010년 1월 라선특별시로 승격되었다.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대한민국과 동일하게 한글로 표기된다. 표준어는 문화어라고 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방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표기상 한자의 사용은 완전히 폐지하였으며, 두음법칙(예: 북-녀자, 남-여자)과 사이시옷(예: 북-시내물, 남-시냇물)을 사용하지 않고, 자모의 사전 배열 등에서도 대한민국과 차이가 있다. 어휘는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활용한 어휘를 많이 만들어 쓰고 있다. 영어와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러시아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다. 특히 고유어인 "동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예를 갖추어 상대방을 부르거나 지칭하는 일상적인 말로 자주 쓰인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으나 중국과의 경제교류 등의 교류강화로 중국어를 많이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어는 소련 해체 이후 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는 영국식 영어를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어의 말미에 -니다 대신 -네다를 쓰는것이 널리 알려져있으나, -네다를 쓰는것은 황해도 사투리이다. 세계 유수의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상태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열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파악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 6곳에는 인구의 0.85% 정도인 15만 4천여 명의 주민이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범들과 그 가족이 재판 없이 이들 수용소로 보내지며, 이곳에서는 심문, 강간, 고문, 강제노동, 의료 서비스 배제, 강제낙태, 생체실험 등이 행해진다. 또한 이곳에서 그들은 결혼의 자유도 박탈당하며 턱없이 낮은 식량배급을 받고,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된다.. 또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아편 재배에 어린이를 동원하고 있는 실태를 지적하였으며, 同 위원회에 출석한 북측 대표단은 유사시 미성년 아동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할 의도가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개천(14호 관리소)과 북창(18호 관리소), 함경남도 요덕(15호관리소), 함경북도 화성(16호 관리소), 청진(25호 관리소), 회령(22호 관리소) 등 6곳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은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으로 교회의 수가 남한보다 더 많았으며 종교 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광복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천도교도 약 150만 명, 불교도 약 37만 5000명, 개신교도 약 20만 명, 천주교도 약 5만 7000명 등 총계 약 200만 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구의 22.2% 수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많은 신도수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을 단행했던 이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종교가 ‘반동적이며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어떤 형태의 종교이든 인간의 의식이 환상적으로 왜곡 반영된 ‘허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내용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정되고 있다. 이는 종교탄압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한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는 “실제는 종교 활동에 대한 다양한 제약이 있다.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있다”라는 견해가 주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의 통일 사상인 주체사상이 사실상 종교를 대신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의 단계적 혁명 이론을 가르쳤던 황장엽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주체사상을 취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교수 지위를 박탈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종교를 믿는 신자들은 종교적 탄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건국 때부터 1960년대까지 종교를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국내의 주된 종교로서 유교, 불교, 기독교, 제종교의 요소를 포괄한 천도교가 있다」라고 발표하고 있다. 다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종교 단체 목록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국가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을 말하며 시기는 대한민국과 대체적으로 동일하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2일까지로 대한민국의 신정(1월 1일)보다 오래 휴식을 취한다. 국가명절은 대표적으로 8개를 기념하는데 태양절(김일성 생일, 4월 15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16일),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 노동절(5월 1일), 조국 해방일(8월 15일), 공화국 창건일(건국일, 9월 9일), 조선로동당 창건일(10월 10일), 사회주의헌법절(12월 27일)이 있다. 이 가운데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까지는 연속적인 축제기간이며 특히 김일성의 생일을 가장 크게 기념하고 있다. 기념일으로는 노동자들의 의무 휴식을 위한 농업근로자절(3월 5일), 어부절(3월 22일), 탄부절(7월 7일)이 있고, 조선광복회 창건일(5월 5일), 철도절(5월 11일), 국제아동절(6월 1일), 김일성 서거일(7월 8일), 타도제국주의 동맹결성일(10월 17일), 학생독립기념일(11월 3일)이 있다. 문화 활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보호되고 장려되고 있다. 대도시에는 역사 박물관이나 영화관, 도서관이 정비되고 있다. 정부는 국립의 교향악단, 극장, 무용단 등을 갖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군사문화와 연관 짓고 있으며 농사나 공장에서의 물자 생산을 "농업전투", "공업전투", "생산전투" 등의 단어로 표현할 만큼 아주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인뿐만 아니라 철도공무원도 군대식 계급을 부여(역장 – 대위, 차장 – 소위, 개찰담당 – 상등병, 기관사 – 중사 등)할 정도이다. 문예활동은 당책 구현, 공산주의 선전, 공산주의적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와 주체사상 강화 등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문예정책 또한 선전과 선동의 일환으로서 문학이나 예술을 이용하고 있다. 창작활동은 이른바 공산주의헌법 45조에 규정되어 있는 `민족적 형식에 공산주의적 내용을 담은 혁명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공산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방법이 그 기조가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육정책은 주민들을 공산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투사형 인간으로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우상화와 국방력 강화의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스포츠를 통한 정치외교수단으로서 이용하고자 하며, 반미사상, 대남전략수단으로까지 이용하고 있다. 체육정책의 기준은 공산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자들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일 개교한 평양체육대학과 1977년에 설립한 중앙체육학원, 그리고 73년부터 각 도에 1개교씩 설치한 고등전문학교를 두고 있으며,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에 체육학부가 있다. 최대의 체육시설은 김일성경기장이며, 그 밖에 지방도시인 혜산· 함흥· 사리원· 원산· 신의주 등지에 경기장을 두고 있다. 실내체육관으로는 배구· 농구· 탁구· 체조 등 11개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는 원산· 남포· 함흥· 강서 체육관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이며, 일제 강점기 1920년대 활동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통칭 카프)이라는 문단이 전신이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사실문화를 한국에 전파하면서 지식인들을 개몽하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60년대에 숙청당한 한설야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가입했다. 한설야의 작품은 오늘날 청소년들이 읽을 정도로 해금되어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저서 문학예술론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을 고쳐서라도 읽게 하면 좋다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문학 2003년 5월호는 한설야의 작품 《승냥이》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의 행적을 찬양하는 문화를 "수령형상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문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졌다. 이 문화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체사상을 창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한편, 역사 문학이나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문학, 외국 문학이 있는데, 역사 문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홍명희와 그의 손자 홍석중이다. 홍명희의 작품인 "림꺽정"은 조선 전기의 도적인 임꺽정을 그린 역사적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제국주의에 맞써 투쟁한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이 작품도 역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홍석중은 홍명희의 손자로써, 그도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의 자랑거리이다. 외국소설로는 중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시인으로는 조기천과 백하와 신흥국 등 이 있는데, 조기천은 시 "백두산"과 "휘파람"으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흥시인 신흥국은 얼마 전 음력설에 풍경을 묘사한 시로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본따 만든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은 당과 깊이 연관되어 당의 통제를 받으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정책은 당정책을 반영하는 것인데 한설야는 1953년 9월 26일 전국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진술한 보고에서 "우리의 문학예술은 당적인 문학예술"이라고 천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조선문학> 1953년 10호, 125쪽). 악단으로는 보천보전자악단, 왕재산경음악단,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조선인민군군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그리고 청봉악단 등이 창단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대학생이 대한민국의 가수 안재욱의 노래를 부르다가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다. 평양직할시에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윤이상 (尹伊桑)의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있다.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래는 혁명가요와 선전가요들이 많지만, 꽤 서정적인 노래도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연주한 〈다시 만납시다〉, 〈우리 민족 제일일세〉, 〈반갑습니다〉는 보천보전자악단의 단원인 여성가수 리경숙이 부른 노래로 조선민족제일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작곡한 노래이며, 〈 기러기떼 날으네〉,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의 주제곡이다. 이밖에 혁명가요로 〈적기가〉, 〈총동원가〉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실미도》라는 영화를 만들 때 〈적기가〉를 배경음악으로 쓰다가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소동이 있었다.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이미 부른 노래를 전자악기로 연주한 경음악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격대 말파리 달리네〉, 〈통일아리랑〉, 민요 〈바다의 노래〉가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데 애를 써서, 자신이 직접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집필할 정도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영화는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일제강점기 때 생애를 그린 《조선의 별》, 1992년에 해외동포들의 행적을 그린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예술영화 《온달전》, 스포츠를 장려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책을 바탕으로 만든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 조선 제 13대 임금 명종 때 도적, 임꺽정을 배경으로 하는 예술영화 《림꺽정》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에서는 정책을 따르도록 선동하거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상향시키려는 장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과학영화가 방송되고 있는데, 관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다양한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20시 보도가 끝나기 전에 과학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방송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천연기념물〉,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 〈평양의 4계절〉, 〈강냉이오사리종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콤퓨터상식〉, 〈우리나라의 최초의 철갑선-거북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자〉, 〈3·26전선공장이 어떻게 모범기업이 되었는가〉, 〈조선의 천연기념물 클락새〉, 〈룡정어를 많이 기르자〉, 〈우리나라의 저작권소유법〉이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의 17시 보도 이후 방영되는 아동영화가 인기가 많다. 아동영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어린이가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로 그림을 그려서 만들거나, 인형극을 통해 만드는 경우가 있다. 2019년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영화는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제작된다. 최근 컴퓨터를 이용해서 새로운 아동영화를 제작하는 중이며, 이 촬영소에 대해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직접 기자들이 취재하기도 했다. 아동영화의 문학은 촬영소의 영화문학가가 담당하지만, 김일성의 탄생일인 태양절을 기념하여 전국 아동영화문학현상모집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당선된 문학작품이 아동영화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아동영화의 대사는 방송연극단에서 담당한다. 아동영화의 내용은 도덕, 예절, 과학기술에 관해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아동영화는 다부작 아동영화인, 《령리한 너구리》와 《소년장수》가 있다. 그 중 《령리한 너구리》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과학의 원리로 쉽게 풀이해 과학 교양을 어린이들에게 함양시키는 아동영화이며, 《소년장수》는 "간약한 호비와 착한 쇠매의 결전"이 내용으로, 권선징악을 주요 내용으로 삼은 아동영화이다. 이외에도 친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딸이 인삼을 찾아 험난한 일을 하는 《산삼꽃》과 교통질서에 대한 캠페인 만화인 《교통질서를 잘 지켜요》, 그리고 온갖 나쁜 일을 저질러 동물을 괴롭히다가 고슴도치에게 혼줄이 나는 《호랑이와 고슴도치》, 분도기()를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연필포탄》,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꾀로 늑대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승냥이를 이긴 너구리》, 돌고래를 훈련하여 경제활동을 보다 수월하게 하려는 《곱등어를 기르는 소년》 등이 있다. 2008년,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의 부총장 김관선은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하는 아동영화를 창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각종 영화 음악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이 제작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의 식량 조달 방법은 크게 배급과 스스로의 조달이 있다. 배급은 정부 당국에서 미리 나누어 놓은 9등급에 따라 지급된다. 예를 들자면 유아에겐 100g을, 노동자에겐 900g을 배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식량부족으로 인해 공급이 끊긴지 오래되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 장마당을 이용한다. 장마당은 대한민국의 시장같은 곳이나 암시장 성격이 강하다. 장마당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행하고 있으며 상류층을 제외한 주민들은 사실상 식량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생필품을 장마당에서 조달한다. 음식은 평양냉면 (平壤冷麵)이나 조선인삼 (朝鮮人參)이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식당은 옥류관과 청류관, 평양메기탕집, 평양숭어국집 등이 있는데, 평양냉면과 평양온반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옥류관이다. 옥류관은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6.15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저녁만찬을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주 개를 잡아먹지 않으나,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락랑구역의 평양단고기집과 중구역의 고려단고기집이 있다. (보신탕을 단고기로 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요리사에게 단고기로 부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제난을 타파하고, 외화를 모으기 위해 해외에서 소수의 식당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계가 제일 많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당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해외의 식당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온 유학생이나 국내의 요리사들이 직접 그 식당에 가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식당들은 대한민국에서 살다가 이주한 재중동포들이나 중국인들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손님들이 적은 편이다(대표적인 해외 식당은 "해당화"와 "목란관"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심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만든 김치를 파는 "평양김치대리소"라는 가게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정부의 배급제도가 의생활에도 적용되었다. 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되던 때에는 대다수 주민들이 인민반에서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해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 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의복 배급은 식량 배급보다 먼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옷감을 구한다. 작업복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과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여성은 양복이나 치마같은 것들이 많이 발전했고 머리모양도 파마를 하는 등 외국 문화를 따라갔다. 최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경공업분야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근시기 질좋은 경공업제품을 만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가 갖추어졌다”며 평양양말공장, 신의주방직공장, 보통강신발공장, 평양방직공장 등을 예시했다. 또한 김정은이 현지지도를 나서는 모습까지 포착되면서 직물생산은 더욱 활기를 띄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된 고구려 고분군이 평양직할시와 남포특급시(평안남도)에 있다. 이 유적은,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 (WHC)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초의 세계 유산으로서 등록되었다. 고구려 고분군은, 선명한 벽화 고분을 포함하는 63기의 고분에서, 벽화는, 일본의 다카마쓰쓰가 (高松塚) 고분 이나 키토라 고분 벽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덧붙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 도 동시에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년간의 취학전 교육인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소학교 5년, 고등중학교 6년, 합계 12년간의 의무교육 제도가 정비되고 있다. 유치원은 높은 반과 낮은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높은 반부터는 12년제 의무교육과정에 포함된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00~35,000개의 유치원과 탁아소가 있고, 약 2,500개의 고급중학교, 2,500여개 초급중학교와 5,000여 개의 소학교가 운영된다. 또한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서 약 100개의 분교가 운영하고 있다. 12년제 의무교육 체제에 따라 교육기관은 모두 정부가 운영한다. 그러나 유치원과 탁아소의 경우는 학교와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다. 탁아소의 경우 미혼모가 낳은 사생아도 관리되는데 이러한 사생아들은 국가에서 그 목숨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들을 혁명전사로서 활용한다. 고등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반면 대학의 경우 상위 25~30%의 인원만 입학이 가능하며 교육비는 모두 국가가 지급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토플 응시자 평균점수는 2006년의 경우 120점 만점에 평균 69점으로, 대한민국의 72점, 일본의 65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 학생들의 지능 선발 및 교육을 위해 과외 교육 기관인 학생소년궁전과 학생소년회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기관은 민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운영되며, 평양직할시와 지방을 통틀어 약 2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면 대부분 이곳에 가서 오후 5시까지 과외 학습을 받고 하교한다. 평양직할시의 학생소년궁전은 대표적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중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은 김일성 주석에 의하여 1965년에 세워지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다. 두 번째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8년에 세워져 현재 만경대구역에 있다. 평양학생소년궁전은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탑식으로 건설되어 있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해 곡선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 외에 평양시 승호구역에 승호학생소년회관이 있고, 자강도에는 배움의 천리길 학생소년궁전과 평안북도 정주시에 정주학생소년회관, 그리고 황해북도 개성시에 개성학생소년궁전과 량강도 삼지연지구에 삼지연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고등교육의 중심 기관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이며, 이 외에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 또한, 라디오와 인터넷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김일성방송대학이 마련되어 있다. 대학교는 약 280여 곳이 있으며 30만 명 이상이 배우고 있다. 북위 38도 북위 38도(北緯三十八度)는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8도를 지나는 위선이다. 유럽과 지중해, 아시아, 태평양,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지난다. 특히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나며,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8선(삼팔선, 三八線)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그은 군사분계선이다. 1945년 7월에 미국 육군부(현재의 미국 국방부) 작전국(OPD)에서 처음으로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미국이 경기도 · 강원도(함경남도 원산, 안변 포함) · 충청북도 · 경상남북도를, 소련이 함경남북도(원산·안변 제외)를, 영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중화민국이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미국 합동참모본부 내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일본 주요 열도와 한국에 대한 연합국 관리 및 점령군 계획(JWPC385/1)'에서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대한 4국 분할점령 계획을 작성했다. 미국, 소련, 영국, 중화민국 4개국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서울, 청진, 원산, 평양, 군산, 제주 등 주요 전략지점에 연합군을 주둔시키고, 이후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한반도를 분할관리한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9월 22일 작성된 수정안 'JWPC385/5'에서는 38도선 분할이 확실시되어 영국과 중화민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의 분할점령안으로 바뀌었다. 'JWPC385/1'은 현실적으로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미국 군부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삼팔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시의 룡당포(龍塘浦)는 38도선 이남이지만, 미·소군정은 이를 38선 이북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연천군을 파주군에, 양구군을 춘천군에, 인제군을 홍천군에, 양양군을 강릉군에 편입하고, 벽성군은 해주시의 서쪽 지역을 옹진군에, 동쪽 지역을 연백군에 편입시켰다. 소련군정은 38도선 이북의 춘천군 사내면(가평군 포함)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고, 개풍군과 장단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장풍군으로 통합하였으며, 옹진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벽성군에 편입하였다. 또, 포천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946년 12월에 철원군에 편입하였다.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이에 따라 38선 서남쪽의 황해도 옹진군·연백군과 경기도 개성시·개풍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38선 동북쪽의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양양군·고성군은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었다. 38선(1945.9.2 - 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 - )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도 38선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홍천군 내면은 38선 분단에 따라 변경된 행정 구역이 유지되고 있고, 북위 38도선 이북인 화천군 사내면과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는 38선에 의한 분단 이전과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해 있다. 본초 자오선에서 동쪽 방향으로 다음 지역을 지난다. 모뎀 모뎀(, )은 정보 전달(주로 디지털 정보)을 위해 신호를 변조하여 송신하고 수신측에서 원래의 신호로 복구하기 위해 복조하는 장치를 말한다. 주로 컴퓨터 정보통신을 위한 주변장치로 많이 사용한다. 변조를 하는 이유는 전송선에 디지털 신호를 바로 보내면 신호 전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데이터가 같은 비트로 연속되면 전송특성상 신호 전달에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송선의 특성에 맞추어 변조한다. 모뎀은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의 일종으로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어 전송하고, 아날로그 신호를 받아 디지털 신호로 읽어낸다. 좁은 의미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전화선을 이어주는 주변장치이다. 초기 모뎀은 주로 전화선을 통한 데이터 전송을 위해 사용하였다. 개인이 사용하는 인터넷망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개인이 통신망에 접속하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망을 통해 개인컴퓨터와 서버와의 통신을 하게 되었다. 개인 컴퓨터와 서버 간에, 개인 인증과 망 접속을 위해 PPP프로토콜을 통해 접속한다. 하이텔 같은 망이 대표적이다. 초기 모뎀이 전화망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에 주파수가 제한된다. 따라서 전송 속도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망은 음성을 전달하는 망이긴 하나, 가청 주파수 전체를 전달하지 않고 음성의 일부 주파수만 전송한다. 모뎀의 속도는 BPS로 나타내고 초당 비트 수를 의미한다. 한글 한 문자가 2바이트(16비트)로 되어 있으므로, 16BPS는 초당 한 글자를 전송하는 속도이다. 일반 음성 회선으로는 1990년대에 PC통신용으로 널리 쓰였다. 속도는 300, 600, 1200, 2400, 4800, 9600, 14400, 19200, 28800, 33600, 38400, 56000 bps가 있었다. 초기에는 컴퓨터와 아마추어 무선의 무전기(RIG)를 연결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선 모뎀이 있었다. 여기에는 간단한 저장 장치가 있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편지 등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199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휴대폰을 통한 자료 전송이 가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무선 인터넷이 도입되어 무선 모뎀을 사용하면 액세스 포인트 근처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FM 진동수 대역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DSL용 모뎀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의 회선을 이용하는 HFC 방식의 동축 케이블, 광 섬유 케이블 방식의 FTTH 모뎀도 개발되어, 2000년대에 기존의 전화선을 통해서 초고속 인터넷을 값싸게 공급하는 주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재 인터넷의 속도는 수 MBPS에서 수십 MBPS에 이른다. 오픈 소스 오픈 소스(open source, )는 소프트웨어 혹은 하드웨어의 제작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원시 코드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소프트웨어 혹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에 준하는 모든 통칭을 일컫는다. 어원에 대해서는 History of the OSI 자료에 따르면, 1998년 2월 3일에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의 원시 코드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 공개할까하는 전략회의에서 붙여진 새로운 용어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스 코드를 공개한다고 해서 모두 오픈 소스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체 비율로 보았을 때 극소수의 고객(주로 정부나 거대 다국적 기업 또는 대학교 및 연구소)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소스를 공개했다. 오로지 보안 유지를 위해서만 소스를 직접 수정할 수 있으며, 그 수정본을 재배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것은 오픈 소스의 의의에 어긋나므로 이러한 경우는 오픈 소스라 부르지 않는다. 광의의 의미로는 이렇게 원래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유래했지만 현재에는 오픈 소스 방식이라고 칭하는 가치들인 공동참여,오픈교환,투명성등을 두루 일컫는 개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방식을 일부분으로 포함 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목표로 표방하는 행위까지로 넓혀져 가고 있다.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컨트리뷰션이라고 한다. 버그 수정, 기능 추가, 소스 코드 수정, 코드 테스트와 같은 중요한 활동 이외에도, 오타 수정, 번역, 가이드 문서 작성, 디자인 작업, 의견 제시와 같은 사소한 활동도 컨트리뷰션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컨트리뷰션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용하던 오픈소스를 개선한 경우 자신만 사용하면 버전업이 될 때마다 추가로 패치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컨트리뷰션을 한다. 둘째로 개인의 개발 실력 향상과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로부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특히 개발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셋째로 오픈소스 활동은 공개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구직 활동 시 자신의 이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명성을 높이려고 기여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기여에 참여한다. 대부분 오픈소스 프로젝트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한편 웹 브라우저를 예로 들어보면 과거 웹브라우저의 전설처럼여겨졌던 1994년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시장에서 밀어내고 2004년을 전후로 전세계 웹브라우저 전체 사용량의 90%를 점유하기도했었으며 약20년간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익스플로러(IE) 웹 브라우저는 독과점문제로 이슈가 제기된바있었다. 그러나 2013년을 기점으로 인터넷익스플로러는 구글 크롬 웹브라우저에의해 우월적 자리를 내주고 나서는 윈도우 그룹의 부사장 존 벨피오레는 2018년 12월 6일 회사 블로그에서 "우리는 고객들을 위해 웹 호환성을 높이고 모든 웹 개발자들을 위해 웹 분열화를 줄이고자 크롬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도입하려 한다"고 언급한바있다. 이로서 지난 지속적인 익스플로러 버전별 지원중단에 따른 사용자들의 불편과 관련해서 향후 웹브라우저의 시장점유율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현재 웹브라우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있는 구글 크롬 웹브라우저는 적어도 넷스케이프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전철을 밟지않을 가능성이 높다. 크롬은 크로미움이라는 오픈소스를 기반하고있어서 독과점에의해 소스 공개나 신생 상용 브라우저에의한 경제적인 경쟁 부담이 이미 오픈소스에의해 상대적으로 안정되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픈소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대기업의 사례는 기업과 사용자와의 긍정적인 관계형성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뿐만아니라 역사적으로 얻은 교훈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오일러 피 함수 수론에서, 오일러 파이 함수(Eulerϕ函數, )는 정수환의 몫환의 가역원을 세는 함수이다. 즉, "n"이 양의 정수일 때, ϕ("n")은 "n"과 서로소인 1부터 "n"까지의 정수의 개수와 같다. 예를 들어, 1부터 6까지의 정수 가운데 1, 5 둘만 6과 서로소이므로, ϕ(6) = 2이다. 1부터 10까지의 정수는 모두 11과 서로소이며, 1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가 아니므로, ϕ(11) = 10이다. 1은 자기 자신과 서로소이므로, ϕ(1) = 1이다. 양의 정수 formula_1의 오일러 파이 함수 값 formula_2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여기서 formula_4은 몫환 formula_5의 가역원군이며, formula_6는 최대 공약수이다. 1부터 80까지의 오일러 파이 함수 값은 다음과 같다. 오일러 파이 함수는 곱셈적 함수다. 즉, 만약 두 정수 formula_7이 서로소라면, 다음이 성립한다. 오일러 파이 함수 값은 소인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할 수 있다. 이를 오일러 곱 공식()이라고 한다. 특히, 소수 formula_10의 거듭제곱 formula_11의 오일러 피 함수 값은 이다. 특히 소수 formula_10의 경우 이다. 오일러 파이 함수를 통해 항등 함수를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증명하였다.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17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만약 양의 정수 formula_18이 서로소라면, 다음과 같은 합동식이 성립한다. 이를 오일러의 정리라고 한다. 오일러 파이 함수는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군론에서는 순환군 formula_20의 가능한 생성원(generator)의 수는 formula_2이다. 이는 formula_1과 서로소인 임의의 수를 사용하여 formula_20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n"각형이 작도 가능한 다각형인지, 즉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할 수 있는지는 formula_2이 2의 거듭제곱수인지와 동치이다. 즉, 이라면 이므로 정"n"각형을 작도할 수 있지만, 다른 값의 경우에는 작도할 수 없다. 특히, "n"이 소수인 경우를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오일러 파이 함수는 암호학의 RSA 암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는 인도의 수녀로, 1950년에 인도의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라는 천주교 계통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45년간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인도와 다른 나라들에서 헌신하였다.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이다. 2016년 9월 4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70년대를 통해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할 무렵에는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가 있었다. 그녀는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1910년에 오스만 제국령 북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 의원 자격으로 정치 행사에 참가했다가 의문사하였다. 1928년에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하여,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었고,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그 이후 인도로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로 이주하였다.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자, 인도에 귀화하였고,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를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1952년에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 의 번역)로 불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개설하였고, 이때 테레사 수녀는 당시 콜카타 시청 측에서 제공한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 건물은 칼리 신전 뒤에 있는 건물이었으며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건물이 사용하기 편리했으므로 기꺼이 사용을 마음먹었다. 당시 힌두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건물을 이용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없이 복지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1955년에는 9월 23일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란 이름의 어린이 보호시설을 개설하였고, 1958년에는 이 시설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았으며,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난 아기는 로마 가톨릭 교도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개설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결과로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캘커타에서 8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윤보선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과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6월 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1960년 8월 13일부터 1962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나왔다. 영국이 국왕이 있는 내각책임제 국가인 관계로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할때까지 에딘버러가 배출한 두 명의 대통령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친일파인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경천(敬天), 호(號)는 해위(海葦)이다. 해위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해위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1리 새말부락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李載龍, 다른 이름은 이봉하(李鳳夏))의 장녀인 이범숙(李範淑)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윤웅렬의 아들로 그의 당숙이었다. 윤보선의 10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의 형제 재상이었다. 9대조 윤흔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로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7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6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가계는 몰락하여 5대조 윤발(尹潑, 1728~1798)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고 사후에 증직으로 증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이 최종 관직이었고 사후에 증 이조참의와 증 의정부공찬에 거듭 추증된다. 그러나 윤득실이 일찍 사망하여 형제들은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윤보선의 증조부였던 윤취동의 대에 농토를 마련해 부농이 되고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종조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조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당숙 윤치호가 다시 대한제국에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다시 가계를 일으킨 조부 대에 100칸의 집을 마련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윤치영이 태어났는데,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다. 아버지 윤치소는 아산군의 만석꾼이었다. 외가 역시 부유하였는데 어머니 이범숙 역시 아산의 만석꾼의 딸이었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집안은 부유하였고 선대(先代)는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었기에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 그가 어려서 자란 안국동의 자택 안동장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윤보선은 3백 석 이상을 걷는 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한 윤보선의 집은 증조할아버지 윤취동 이후 다시 아버지 윤치소가 이재와 수완에 밝아 대농토를 꾸렸다. 큰아버지 윤치오가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막대한 빚을 졌지만, 아버지 윤치소의 재력으로 그의 집안은 거지가 되는 것을 면하였다. 그의 조부 윤영렬은 삼도 토포사를 지낸 고관으로, 윤영렬이 삼남 토포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충남 아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비상하였던 그는 유아기 때 '조부가 토포사로 직인을 찍거나 먹찰 하는 것, 집안에서 사무를 보며 죄수들과 병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 뒤 집안에서 선생을 두고 한문을 익혔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틈틈이 그들 형제를 불러 충과 효를 강조하고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이때 그는 유비의 의로움과 관운장의 전공치적과 그의 충의에 감동받았다 한다. 할아버지 윤영렬은 그의 고조부 대에 약주가 과하여 가세를 기울게 하였다 하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훈계를 여러 차례 하였다. 이 때문에 윤보선은 여행지에서나 정계 입문한 뒤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총명하고 명석했던 그는 한편으로 아쉬울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성격적으로 다소 고집이 센 측면도 갖게 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향리에서 지내던 윤보선 그는 을사늑약 체결 사건 직후 한성부로 본격 이사하였는데 10세 때 집 근처에 있었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염려하게 하였다. 1910년 4년 과정의 교동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충무로의 일본인 거류민들이 설립한 일출(日出)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학하였다. 한일합방 후 귀국해서 1년간 경성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고 철학박사라는 점에 이끌려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나 1950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선조들은 당색으로는 서인과 노론 계열이었는데, 서얼 가문이었지만 아버지 윤치소나 조부 윤영렬로부터 가계와 선조들의 이야기를 훈육받고 자란 그는, 양반가의 후예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출소학교 5학년에 편입학한 뒤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 시절의 윤보선은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1913년 윤보선은 소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東京)로 건너가 중학교이던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 그는 게이오 의숙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 모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토 히로유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그는 신념적으로 반일주의자, 반사회진화론 주장자가 되었다. 또한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은 비인간적인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군주나 통치자가 아버지이고 백성, 국민은 자녀라는 주장에도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1913년 일본 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해 말 일본 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두 학기를 다니기도 하다가,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드러내놓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학창시절의 그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그는 어렵지 않은 유학생활을 하였다. 집에서 월 25원의 학비를 부쳐오므로 학업에 별다른 곤란은 없었으나 당시 그의 관심사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쏠려, 학업에 정진하기 힘들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고 한다. 귀국이후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신문에서 신해혁명 관련 기사를 찾아서 읽곤 했다. 그는 여운형을 만났는데,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려 하는 청년들을 중국으로 비밀리에 망명시키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집안에서 안다면 반대를 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며 자금을 모았다. 바로 상하이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면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그는 아버지 윤치소에게 미국으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근처에 사는 어느 양반가의 자제도 기독교 집안이 된 뒤,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목사가 된 것을 그의 부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그에게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 가고자 희망할 때 중화민국에 있던 여운형이 귀국하였다. 그는 청년회관을 통해 여운형의 소재지를 파악, 그가 머무르고 있던 한성은행 사무원의 집을 찾아가 중국으로 갈 의향을 밝혔다. 그의 뜻을 들은 여운형은 윤보선의 망명을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혁명을 하러 상하이로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 윤치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는 신학을 한다는 핑계를 댔다. 아버지 윤치소의 친구들 중에는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목사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는 아들이 같은 과정으로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여권을 얻기 위해 상해를 경유해 간다고 하였고, 아버지 윤치소는 아들의 출국을 허락해 주었다. 이후 윤보선은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그는 배편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가 출국한 뒤에야 그의 집안에서는 윤보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러 상하이로 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승만이 궤변으로 그를 현혹하여 버려놓았다며 원망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당숙 윤치호, 아버지 윤치소, 백부 윤치오 등은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는데, 그가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유학한 뒤에야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게 된다. 1917년봄 상하이 도착 후 며칠뒤 항주에 요양중인 신규식을 찾아 갔다. 이후 신석우, 박찬익, 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가 다시 이들의 소개로 중국혁명의 중진들을 소개받았다. 상하이의 중국인 강도와 조선인 강도들의 존재를 염려한 신규식은 자신의 집, 상하이 시 어양리 5호에 있는 집 2층 다락방을 마련하여 그의 거처로 주었다. 1921년 영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어양리 다락방에서 생활하였다. 1917년 신규식이 1912년에 설립한 신아동제사의 회원이 되었다. 이어 신규식, 김규식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淸年黨)에도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의정원 규약에는 '만 23세 이상의 한국인 남녀는 의정원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는 것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규식, 김규식, 여운형 등은 나이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의정원 의원 피선거권을 관철시켰고, 심사 끝에 그는 경기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여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지시를 받고 국내 잠입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규식은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띄웠고, 이들은 윤보선의 동생 윤완선 등에게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徐謙)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후 윤보선은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자금 조달 중책을 맡고 일단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차림새가 너무도 말쑥한 신사였다'고 한다. 윤치영이 도쿄 YMCA 회관에서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데 누가 찾는다고 해서 나가 보니 해위가 정말 말쑥하게 영국신사처럼 쏙 빼입고 거기 섰더라는 것이다. 그때 윤치영은 그곳에 있던 몇 사람과 2.8 동지회를 구성 해서 활동하였다. 2.8 독립 선언에 가담한 일로 윤치영은 일본 경시청의 감시를 받던 때인데 그렇게 정정당당히 나타나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 걱정 마시라는 표정으로 빙끗 웃으며 들어와서는 포켓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주는데 그 때 중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서겸(徐謙)의 서한이었다고 한다. 서겸은 당시 중국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을 지냈는데 주일중국대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사람은 내 조카인데 볼 일이 있어 일본으로 보내니 모든 여행길에 편리를 도와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그곳에서 공부하던 집안 사람들은 모두 떨었다고 한다. 윤일선 박사, 동생 윤완선 등도 교토에서 올라왔는데 일단 윤보선이 오라 해서 왔지만 그들도 떨었다고 한다. 그 때 윤완선은 형의 전갈을 들고 한국으로 들어가 부모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때 돈 삼천원을 마련해 와 윤보선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해위는 동생에게서 돈 삼천원을 받아 들고 다시 상해로 가서 이승만 박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경에 있는 백관수, 유억겸, 김준연, 김도연 등을 만나고 윤치영과도 만났다. 이들과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피선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 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래를 위해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신규식, 이시영, 신익희 등의 충고로 상하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 체류 중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신규식이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준 것은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연약해보이면서도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1920년 10월부터는 신규식이 1917년부터 창간하던 주간잡지 《진단》지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진단에는 장졔스, 쑨원, 천두슈 등 중국 명사들의 칼럼과 논문, 기행문 등도 수시로 발표되었다. 영국 출국 전까지 신규식의 진단지 발간과 편집일도 도와주었다. 1921년 6월 고국에 들러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영국으로 간다. 뒤에 그는 스승 신규식과 인척이 되는데, 이는 신규식의 아들 신준호와 그의 둘째 딸 윤완희의 결혼으로 사돈이 된다. 신규식의 딸 신명호는 다시 독립운동가인 민필호와 결혼하여 후일 민필호, 김준엽 등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3등 선실에 숨어서 42일만에 마르세유에서 하선,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탑승했다. 이후 정기 여객선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는 의학공부 중인 그의 당숙 윤치왕이 와 있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화물을 취급하는 하물표를 발급받으려다가 거절당하고, 당숙 윤치왕(尹致旺)을 만나 영국에 도착했다. 당숙인 윤치왕이 공부하던 영국에서 체류하며 우드블록 대학에서 약 1년동안 영문학을 공부하고 중퇴하였다. 그 뒤 영국 글래스고의 스캘리쉬 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버밍엄으로 건너가 퀘이커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후 다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 3개월간 수학하다가 다시 에든버러 대학교로 옮겼다.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선택·전공하였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로는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것은 정치학이나 신학 보다는 순수과학일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재학 중 정신적 스트레스와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려 2년간 병중에 있었다. 의사는 절대휴양을 위해 귀국을 처방하였으나,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으로 귀국권유를 사양했다. 이후 병으로 2년간 휴학하였다. 병으로 2년간 휴학한 기간을 합쳐 6년 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이후에도 에든버러를 근거지로 하여 구주를 순방하였다. 대학재학 중 3년간 한반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수학하였으나 일본인 학생들의 접근을 피하고 멀리하였다. 영국 체류 중 그는 꾸준히 기금을 마련하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구미위원부로 100불씩 송금했다가 일본 경찰의 첩보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외 유학생 신분이었고 일본 조계나 일본 영사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으므로, 일본 경찰 역시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없었다. 윤보선은 신앙이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해야 하느냐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를 구원해야 하느냐를 두고 오래 고민하였다. 결론은 신앙이 사회를 구원하여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적극 참여해서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윤보선은 영국의 대학과 석사학위 과정을 배우면서 정치인들과도 어울려서 지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나 맡겨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밥먹듯 했다. 에든버러 대학 유학 시절 6~7명의 일본인 유학생들과는 졸업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인들과는 대화 한마디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독립운동의 장소로 미국과 중국 상하이를 고민하던 중 졸업했으니 집에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집에는 졸업사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에 2년간 머물렀던 장덕수가 귀국후 윤보선 댁에 들러 아버지 윤치소에게 그의 졸업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아버지 윤치소를 비롯하여 문중에서는 그에게 귀국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6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후 조선총독부 왜경으로부터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집에서는 여비를 보내며 귀국을 독촉하였고, 귀국하기 싫어했던 그는 귀국 대신 구주 여행을 떠났다. 두 번째 여비를 발송했을 때도 유럽여행을 하다가 세 번째 여비와 함께 '부자지정을 생각해 다시 여비를 보내나 다음에는 보내지 않는다'는 최후통첩을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 유학 6년 만인 1932년 아내 여흥 민씨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부산역에 도착한 후, 안내원의 소개로 여관을 잡게 되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은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안내원의 집안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일 서울로 도착전보를 보내자, 아버지 윤치소와 어머니 이범숙, 딸 완구(玩求), 완희(玩姬) 등이 부산까지 내려왔다.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한동안 몇몇 신뢰 가능한 지인들을 통해 이승만의 은신처로 방문, 이승만을 간간히 만나곤 했다 한다.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1936년 어머니 이범숙의 환갑연을 기념하여 당숙 윤치호가 세운 신항리 감리교회에 특별히 1500원을 헌금하여 교회를 개축하게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감리교 신자임을 들어 참배를 거부했다. 1938년 5월에는 월성소학교에 평당 시가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였다. 1938년부터 그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에 칼럼, 기고문 발표 등으로 소일하였다. 1940년대 이후 그는 외부출입을 줄이고 가택에 칩거생활하였다. 때로는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별장에 내려가서 지내기도 했다. 미니 골프장을 갖추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 별장은 은둔하기에 너무나 좋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부친과 숙부들의 설득에도 고집을 부렸던 그는, 당시 그는 아내와도 사별한 상태였고 딸만 두 명 있었으므로 자녀들에게 가해질 불이익 같은 것에 쉽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1943년 2월 폐렴(肺炎)을 앓았다. 부친상 직전 아버지 윤치소가 있는 사랑방이 추운가 하는 걱정으로 야밤에 일어나 부엌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오한을 느낀 것이 그대로 폐렴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엽권연을 입에 물고 있다시피 할 정도로 애연가였다. 그러나 폐렴을 계기로 담배를 꼭 피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뒤 담배를 꼭 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자 그는 금연을 하였다. 1942년 이후 숙부 윤치영이나 송진우, 김성수 등으로부터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접하였으나 그는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문중에서 결의된 창씨개명을 거절했던 그는 바깥 출입으로는 기독교 선교 활동과 강연, 문중 종친회 관련 행사 이외에는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철원군 어운면 월성리의 월성소학교에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후반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함경남도 안변군 사기리에 있는 문중의 별장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1945년 8월 16일 그는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국민당은 다시 원세훈의 고려민주당과 통합해 조선민족당이 되고 9월에 조직된 한국민주당에 흡수된다. 한편 그는 상하이에서 본 천두슈계의 중국 공산당을 목격한 적이 있어 평등주의와 폭력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1945년 8월 8·15 해방이 되자 윤보선은 숙부 윤치영이나 부친 윤치소, 당숙 윤치호 등과는 달리 그는 친일경력도 없고 영어에 능통한데다가 막강한 집안 배경으로 정치에 투신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후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신사 참배령에 불응하는 등의 행동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1945년 9월 송진우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위촉되어 임시정부 환영대회 개최 및 장소, 비용 부담 등에 참여하였다. 이에 1945년 9월 1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安東宮) 또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한민당 총무 선출에서 떨어지자 한민당은 그를 한민당 서울시지구당을 맡겼다. 이후 그는 한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한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45년 10월 미군의 한반도 상륙 뒤에는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직을 지냈다. 동시에 미군정청 행정자문위원과 미군정청 금융경제위원회의 고문도 겸직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9월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개설하자, 그는 국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9일 그의 5촌 당숙 좌옹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심한 비판 끝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도 아니었고 문중에서 창씨개명 할 당시 창씨개명하지 않았으며, 임시의정원과 임정에도 참여하였으므로 연좌되지 않았다.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소식을 듣고, 그는 아침 6시경 제일 먼저 송진우의 원서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그 뒤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소극적으로나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하였다. 5월 27일에는 한민당 지역유세대 조직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일대를 다녔다. 1946년 6월 15일 저녁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을 맡았고, 미군정청에서 임명한 경기도지사 고문직에 피선되었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되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 4일에는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정부로 개편되자 남조선과도정부 농림부, 상공부 고문이 되었다. 1947년에는 우남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서정주 등과 함께 이승만 일대기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어떤 직위로든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보선은 사회단체 활동과 민중일보 사장직으로 만족하겠다며 번번이 사양하였다. 7월 4일 이용설 등과 함께 외국의 정세를 연구하는 국제정세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부터 1948년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영국 유학 경력을 인정받아 10월 8일에는 영국과의 친선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영협회(韓英協會)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1948년까지 재직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바로 빈소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12월 13일에는 유엔 한국파견위원단(UN한위) 환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어 유엔의 한국위원회 위원들의 영접을 준비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 김구, 프란체스카 도너, 김병로, 엄항섭 등과 함께 회의에 참관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노선을 줄곧 지지해왔다. 1948년 4월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났을 때 그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했다. 그 해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의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단체를 조직한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출마를 위해 서울시당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충청남도로 내려갔다. 1948년 5월 10일 5·10총선거 때 고향인 충남 아산시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총선 낙선 이후 한동안 칩거하였다. 그러나 칩거 20일만인 5월 30일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비서관이 되어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으나, 7월 국회의장 비서실장 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그는 민중일보사 사장으로 복귀하여 신문사 경영 활동을 하고 있었다. 7월 22일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그에게 장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민중일보사의 사주로 있겠다며 입각제의를 사양하였다. 초대 내각 구성을 놓고, 내각을 조직한 사람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자 그의 숙부였던 윤치영이었기 때문에 시중의 험담과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입각 제의를 모두 사양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호의를 거부한다며 서운한 의사를 나타냈으나 그는 향후 다른 직책으로 그를 도와주겠다며 안심시켰다. 1948년 8월 15일 윤보선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주중국 대사 권유를 받자 그는 가정 사정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기붕을 통해 다시 주일본공사직을 요청했고, 윤보선은 자리를 회피하며 주일본공사직 요청은 불응하였다. 세 번째로 상공장관 임영신을 통해 미국 대사직을 권하며 국무회의에서 이미 결의되었다고 하였으나, 민중일보를 통해 할일이 많다며 이 역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 그의 외교관 파견을 종용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허정과 이기붕을 보내와 주 중화민국 대사, 주 일본 대사, 주 미국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하였다. 1948년 12월 8일 서울에서 조직된 충무공 이순신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48년 12월 윤보선은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 허정(許政)이 각의에 의해 서울시장 임명을 전해오자, 그는 서울시장직을 피하려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별장에 은둔하였으며, 이를 피하려 했으나 신문을 보고 서울시장 발령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삼촌 윤치영(尹致暎)과의 관계를 고려, 시장직을 피하려 하였으나 숙질간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별되는 것이니 구애받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시장으로 부임하였다. 신문기사에 서울시장 임명 기사를 보고 마지못해 내려와 서울시장직에 취임하였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 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 각 자치구 단위로 쓰레기를 수거하여 성과가 좋은 구에 포상을 내렸다. 동시에 시내 방역 소독 활동 역시 적극 추진하고 일일이 보고받고, 위생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청소상태 등을 직접 점검하여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또한 동사무소에도 국문 보급반을 설치하게 하여 성인들에게 한글 정도는 동서기들이 직접 가르치게 했다. 또한 매점매석을 단속하고, 식량 배급을 1가구별로 받도록 정리, 기록케 하였다. 그가 서울시장으로 부임할 무렵의 서울특별시는 거리에 쓰레기와 인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자동차나 열차, 전차에서 혹은 도보로 길에 투척한 쓰레기와 인분, 주취후 구토물로 몸살을 앓았다. 윤보선은 시장이 된 뒤 공무원과 단속요원, 경찰들을 통해 이들을 단속, 정리 및 정리를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시장으로서 제일의 당면과제는 다름 아닌 청소문제였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런데 시청에 가서 보니 그때까지는 청소가 큰 이권으로 화해서 각구에서 청소기재와 도구를 개인에게 청부를 주고 있었다. 이 청부를 맡은 개인들이란 꽤 유력자들이었고 그중에는 그와 친분이 매우 두터운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책임수행은 않고 국고금만 축내며 이권화시키고 있었는데 모든 원인이 있었다. 후일 그는 '이 청소작업은 단시일 내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출되는 쓰레기는 마치 폭풍에 씻겨 내려가는 형국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서울이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시장으로서의 나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만들어 한 때 청소시장이란 별명을 듣게까지 되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청소문제를 수습한 후 그는 시민에게 다시 호소하여 재래의 자기 집 문전을 알뜰히 하는 미풍을 되살리도록 촉구하였다. 시민들의 호응은 말할 것도 없고 각 학교와 각 부인회 그리고 경찰관들마저 비를 들고 나서게 되어 청소작업은 명실공히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시정의 투명성을 선언하고, 서울시 시정사항을 일체 공개하고 공고문을 붙였다. 서울시 시정 공개는 이후 지방행정 사항을 공고, 공시하는 것의 모범 사례가 되었다. 역사 이래로 신라, 고려, 조선왕조시대 이후에도 일부 교서만이 반포되었고 지방 수령의 행정사항은 대부분 공포되지 않았다. 청소 문제를 일단락 짓자 그는 그 다음 착수한 것은 서울시청이 복마전이라는 악명을 일소하는 것과 민원서류의 속결문제였다. 그는 이러한 지방 수령과 이속들의 독단적인 결정이 부정부패와 담합, 암투를 불러오는 요인이라 지적하고 모든 행정사항을 관보 또는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의 게시판에 공개할 것을 지시, 시행하였다. 시정 사항이 공개되면서 복마전이라는 비아냥은 사라지게 되었다. 서울시정이 복마전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자 그는 신생활운동을 본격 전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신생활 운동이라고 하였다. 후일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꼭 실현을 보고자 했던 것인데, 그 실천단계에 들어설 때 상공부장관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라고 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취임 초기부터 양복을 보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취임 초 직원들과 구청, 동사무소 서기들을 통해 양복과 미국에서 반입된 의류들을 보급하였다. 이때 활동하기 편한 운동화도 시중에 보급하였다. 윤보선은 생활의 개량, 의복 개량, 위생상태 점검 등의 시정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재래의 가정생활에서 모순되고 불편한 여러 면을 의식주 전반에 걸쳐 개혁해 보려 했던 것인데 특히 한복의 개량과 주택의 개량이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한다는 것이 주안점이었다.'고 하였다. 주택에는 주방과 변소를 수세식으로 개량 하겠다고 공포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윤보선은 서울시장 재직 당시 관공서와 기타 공중화장실을 대부분 푸세식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교체, 개조하였다. 따라서 흉한 대소변 얼룩과 여름철 파리, 모기 등의 번식을 차단하고 주변에 대소변 악취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사람들은 버튼만 누르면 물이 나와서 변기가 흘러가는 것을 희한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또한 악취가 사라진 것을 놀라워했다. 윤보선은 자신이 1920년대, 30년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수세식 변기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것이 종전 이후 유럽에 보편화되었음을 설명했다. 서울시장 재직 때 보급한 수세식 양변기들은 6.25 전쟁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의 수세식 양변기 보급은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비록 서울시에 한한 것이었지만 수세식 양변기는 그 후 윤보선이 대통령이 된 뒤 1960년에는 경기도로 확대 시행시켰다. 그리고 1982년 이후에 와서는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윤보선은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서 서울특별시장으로 지낸 기간은 나의 역대 관직생활 중 가장 보람있고 만족스런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장직도 내가 선뜻 응해서 취임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서울시장은 당시 나로써는 퍽 떠나기 싫은 자리였다 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재직 중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尹明師) 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崔巨德)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宋昌根)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 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박사 과정을 밟으려 유학하려던 공덕귀는 최거덕 등의 권고로 그와 결혼하였다. 공덕귀는 세 아이를 낳았는데, 곧 장남 윤상구를 낳고, 뒤이어 둘째 아이는 6.25 전쟁 중 대포 소리에 놀라 유산하였고 셋째 아들 윤동구를 연이어 낳아 주었다. 아들을 바라던 그의 어머니 이범숙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1949년 2월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이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민주국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민국당원이 되었다. 민주국민당 창당 직후 그는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6월 상공부장관이 되면서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직은 사퇴하고 평당원이 되었다. 1949년 3월 12일 제9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1949년 6월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전임 임영신 장관이 상공부내의 유력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일로 뇌물수수의 누명을 쓰고 물러났으므로 윤보선은 상공부장관직을 거듭 고사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임영신이 독직, 뇌물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아무도 상공부장관직에 쉽게 앉으려 하지 않았고, 윤보선 역시 누차 사양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상공부장관직을 임명하고 허정을 통해 통보하였다. 부인 공덕귀는 '나는 어디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게 되었는데 "상공장관 윤보선"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하였다. 거듭된 정부의 요청에 공석으로 둘수 없다고 본 그는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상공장관이 되던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이권 운동을 한다면 나는 이 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장관직에 임했다.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 씻을 비누까지 싸들고 갔다. 그는 아내 공덕귀에게 부탁하여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전임 장관이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는데도 정권 실세 유력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뇌물수수 누명을 쓴 것을 그는 늘 신경쓰고 각별히 염두에 두었다. 그는 사소한 종이 한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았고, 비품과 치약 등도 손수 준비해서 다녔다. 또한 저녁식사나 선물 등도 일체 거절하였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라고 밝혔으며, 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라고 회상했다. 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라고 술회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그 동안 외자청을 거쳐 상공부로 와서 고무조합에 배정되어 오던 생고무를 금융조합 연합회가 이승만 대통령을 움직여 상공부 장관 재가 없이 임의로 처리했고, 그 명분은 짚신을 신는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신기겠다는 명분으로 처리되었다. 그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며 이권이 집약된 상공부장관직을 바르게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공부 일을 놓고 이승만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고집센 이승만 대통령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사사로운 대접 한번 받아본 일이 없었으므로 이승만의 부당한 인사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1950년 2월 25일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3월 23일 UN한국위원회의 초청으로 출국, 유엔을 방문하고 4월초에 귀국했다. 1950년 초부터 경전사장으로 있던 이태환을 미워한 대통령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려 하였으나, 윤보선이 볼때 해임이유가 없어서 취체역 회장으로 전임시켰다. 이에 이승만이 진노하여 그 후 책상에는 윤보선은 내말을 안듣는 사람이라고 메모를 해 두었다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한민당계 정당을 멀리하고 배척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그는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그는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승만과의 결별 선언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그는 그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장관직은 5월 10일 국회에서 사직처리 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에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충청남도 아산에서 민주국민당 공천으로 입후보,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그가 한민당 당원이고 이조 양반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반감을 가진 유권자들이 존재하였다. 6월 한국 전쟁 직후 그는 관용차량으로 대전까지 내려갔다가 대구로 따라 이동했다. 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대전을 경유해서 피난지까지 내려갔고, 그의 가족들은 아내 공덕귀 등의 인솔로 그의 집안에 있던 자동차로 아산을 거쳐서 부산까지 피난했다. 1950년 6월 5일 허정, 이윤영, 김도연 등과 함께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1월에는 정부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의 1인으로에 피선되었다. 그해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12월 17일 부산에서 사회부장관 허정을 중심으로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가 결성에 참여, 피난민구호대책협의회 위원의 한사람에 위촉되고, 바로 협의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의 회장으로 초빙되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당시 정부와 국군의 과잉진압과 학살을 무조건 공비와 내통한 자들을 사살한 것이라며 합리화하는 이승만의 태도를 보고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이승만이 우익 단체들을 비호하느라, 사건을 비판하는 자들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공산주의자로 몰자, 윤보선은 억울하게 죽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로 환생하느냐며 이를 비판, 언쟁끝에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윤보선에게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으라고 했다. 1950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하여 주로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고 가는 곳마다 정부 비난의 소리가 높아만 갔다. 어느날 그는 장덕수의 미망인 박은혜와 함께 수영비행장에 갈 일이 있어 동행했다가 도중에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걸인 군상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옷은 다 해지고 사람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얼굴은 모두 부어 있는 상태였다. 많은 청년들을 그토록 떼거지로 만들어 병들고 죽어가게 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들은 다수가 목숨을 잃고 살아 남은 사람들조차 굶주림과 병고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는 즉시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승만에게 목격한 대로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아! 윤 총재도 세상 사람들 모략에 걸렸군."하더니 장장 한 시간에 걸쳐 변명만 늘어놓았다. 나는 내심으로 이 박사도 이제 큰일났구나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그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발생이 가능한 일을, 그것도 직접 목격하고 보고하는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다니 원망하기에 앞서 불쾌감 마저 들었다."고 회상하였다. 1951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격으로 일본을 답방하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그해 2월 한정(덴마크) 문화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재야정치인이 되었다. 7월 18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퇴했다. 1954년 5월 10일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 종로갑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해 9월 국회에 '농림업진흥의 긴급성에 관하여'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윤보선에 의하면 '이 대통령의 독재가 강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한다.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개정이란 당치도 않은 억지를 써서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 하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라는 평을 내리기로 했다. 이박사와는 정치적으로 하관 노릇을 했고 지난 날 혁명 선배로 애국하는데 도와 왔으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사태에서는 그와 일할 수 없다고 절실히 느껴 정치적인 결별을 하기로 작정했다. 1952년 9월 1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직했다. 윤보선에 의하면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이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윤보선은 '회고하면 내가 이 박사와 결별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이승만과의 오랜 감정대립 끝에 결국 그와 결별하였다. 그는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는 것도 내심 불만이었다. 이승만과 친위 세력의 한민당계열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도 그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국무회의는 공전하기 일쑤라 흥미를 잃어오던 나로써는 사임해야 할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50년 5월 사임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윤보선은 이승만이 한민당을 팽하고 독립촉성중앙회를 설립한 것, 그밖에 윤치영, 이인(李仁) 등을 중심으로 친위정당인 민주국민당을 조직되자 국민당을 편애한 것, 1951년에는 이범석, 이기붕 등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결성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사상은 올바른 민주주의 사상이 아니라고 봤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대종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불만이었다. 이승만이 당숙 윤치호의 문하생이라는 점과 아버지 윤치소, 삼촌 윤치성과의 친분관계, 당시 삼촌 윤치영이 이승만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갈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일민주의 사상, 국민 방위군 사건에 대한 편협한 대답과 부산정치파동에 반감을 가진 그는 공개적으로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1952년 민주국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 5월 서울 종로구 갑구에서 민의원 후보에 출마하였다. 그는 종로 갑구에서 처음 출마했기 때문에 무척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순천씨가 여성이어서 전 유권자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동정표를 몰아줄 것인데 남자는 12명이나 되니 절대 불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일찌감치 당선자를 예상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선거를 하려면 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상대해야지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가 가당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종로 갑구에는 박순천, 주요한, 장후영, 유석현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13명이나 출마하여 전국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표차로 박순천과 주요한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3대 민의원의원이 된 윤보선은 민주국민당의 원내총무와 민의원 외교분과위원을 맡았다. 당초 그는 원내총무 지명을 극구 사양하였는데, 당에서는 그의 거부의사에 상관없이 원내총무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원내총무에 지명되고도 요양을 핑계로 부산으로 내려가 끝내 사퇴하고 만다. 그는 민주당 서울시 종로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신익희, 장택상, 조병옥 등이 술자리에 갈 때면 자신은 기독교 신앙인임을 들어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증조부 윤득실이 술을 즐겨서 가산을 탕진, 할아버지 윤영렬이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계한 것을 이유로 들어 술자리 참여를 거부했다. 회식과 술자리 불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회자화되고 언급되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성 의원들과 기독교도 의원들도 회식이나 술자리에 참여하여 술을 마셨으므로 그의 술자리 참석 거부, 회식 거부는 독특한 취향으로 취급되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서 그는 김도연 등과 함께 국회 경제분과 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자 호헌동지회에도 참여하였다. 1955년 2월 김성수가 사망하자 그의 국민장 장례식을 지켰다. 6월 김형근(金亨根) 내무부 장관의 서울시내 판자집 철거 정책에 반대하여 김도연, 민관식(閔寬植), 임흥순(任興淳) 등과 상의한 뒤 판자촌 철거는 민생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이 창당된 후, 그는 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이어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 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5년 11월 민주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뚜렷하게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당내 신구파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56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되고, 1월 24일에는 신병을 이유로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장직을 사퇴하고 민주당 중앙당 의원부 간사가 되었다. 5월 30일 민주당 중앙당 간사직을 사퇴했다. 1956년 9월 7일 서울 재동국민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하였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어 경찰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당내 활동을 하면서 그는 민주당 구파였지만 특정 파벌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색채나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당무에만 전념했는데, 조병옥은 그에게도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번은 조병옥이 '언젠가는 윤보선이 전면에 나서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1957년 10월 19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의 회의에서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다시 유임되었다. 이후 그는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이래 그는 민주당 서울시 지구당과 종로구 지구당을 맡아보았다. 그런데 종로구 지구당은 그의 표현대로 지구당 모임 한 번을 제대로 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자발적인 후원자들의 존재로 당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이를 두고 "조직도 당원도 없는 그에게 언제나 선거 때면 몰표가 쏟아져 나오고, 그렇다고 당선시킨 후에는 무슨 이권 운동이나 폐를 끼치려는 사람도 일체 없고 하다 못해 '적은 돈이나마 보태 쓰라'고 금일봉을 보내오는 사람이 많았으니 어찌 평생을 두고 감사해 마지 않으리요."고 회상하였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신익희, 조병옥이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일약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했다. 1959년에는 민주당 상임위원에 추대되었고, 9월 8일 민의원 각분야 상임위원을 선출할때 민의원 외교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반 당시 조병옥 대표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장면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에 당선될 것이 확실시되자 민주당 신파에서는 윤보선에게 장면의 러닝메이트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에 걸친 제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양하였으며, 이후 조병옥 대표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조병옥 대표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 부통령이 부통령 후보에 선출되면서 신파의 윤보선 러닝메이트 영입 시도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11월 2일 서울 중앙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당 중앙위 의장에 재선출되었다. 4대 민의원에서 그는 주로 세무, 재정 등에 대한 분야에 대한 질의, 안건을 제출하였다. 그러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1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과 함께 이뤄진 최고위원 개선에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과 함께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초 최고위원회는 조병옥과 백남훈 등 구파 2명, 장면, 박순천, 곽상훈 등 신파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파의 강력한 요구로 구파 위원을 한 명 추가하기로 하면서 그 자리가 윤보선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당초 구파 내에서는 김도연과 유진산이 새 최고위원에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별로 야심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 받지 않아 신파의 견제를 가장 덜 받던 윤보선이 최종 낙점된 것이었다. 1959년 11월 27일 서울 시공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구파 몫의 최고위원을 선출할 때 추가로 보선되었다. 12월 23일 민주당 원내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59년 정부로부터 서울시장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하였다. 1960년 곽상훈 등과 함께 김구(金九)선생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직접 커튼을 벗겼다.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던 조병옥이 사망하자 민주당 구파의 대부였던 유진산의 추천으로 조병옥(趙炳玉) 사후 구파 리더로 추대되었다. 유진산의 양보로 그는 구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후에 민주당 구파의 주도권을 놓고 유진산, 유진오 등과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3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부의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관련자 색출 처벌을 요청하였다. 1960년 4월 11일 그는 민주당의 마산시위 진상조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마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우선 현지에 내려가 사태의 진상을 조사, 파악하고 자유당 정권에 강력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 그가 조사단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급히 조사단을 구성, 야당의원 세 사람을 동반하고 마산 현지로 내려갔다. 마산에 도착해 보니 온 시가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완전히 혁명이었다. 법에 의한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마산은 지배되어 있었다. 도착한 즉시 김주열이 안치된 병원에 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 그를 단장으로 한 민주당 진상조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 시민들은 데모를 중지하고 몰려와 사태를 빨리 해결해 시민들을 희생시킨 경찰으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즉석 연설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그는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4월 19일 그는 자유당 의원들을 방문했다. 데모가 한참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을 때 그는 국회에 나가니 이재학(李在鶴) 부의장실에 자유당 의원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이었던 윤보선은 들어가서 거기서 한마디 했다. 그는 자유당 회의장에 이 말을 남기고 거리로 나와 시내를 둘러보았다. 이를 두고 자유당 의원들은 윤보선이 돌아다니며 데모대를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 자유당은 그가 불순한 목적으로 시위대를 선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나는 누군가에게) 데모를 선동한 일이 없다. 다만 상황을 살펴본 결과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더라.'고 응수하였다. 1960년 제4대 민의원은 의원내각제 및 양원제를 골자로 한 제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윤보선은 새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7월 29일에 실시된 제5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원내활동도 적고 또 야당 의원이라 선거구를 위해 해준 일도 별로 없는데 구민들의 지지와 동정이 컸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29표를 받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구파 내 다른 국무총리 후보 희망자였던 김도연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상징적 지위인 대통령을 택했다. 민주당 구파는 대통령에 윤보선을,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신파는 국무총리로는 신파의 장면을 지지하되 대통령은 구파에 내주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가장 선호하고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구파와 신파 모두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8월 16일 윤보선은 구파의 당론에 따라 구파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였으나, 김도연 총리 임명 동의안은 8월 17일 재적의원 227명의 과반인 114표에서 3표가 모자란 111표만의 찬성을 얻어 부결되었다. 반대표는 112표, 무효표는 1표, 그리고 표결 불참자는 3명이었다. 8월 18일, 윤보선은 2차로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였다. 당초 구파는 이마저 부결시킬 계획이었으나, 8월 19일 표결에서 재적의원 228명의 과반인 115표를 2표 넘는 117표의 찬성표가 나와 장면 총리 임명 동의안은 가결되었다. 반대표는 107표, 무효표는 1표, 불참자는 3명이었다. 장면은 훗날 이 일을 놓고 도의상 신파인 자신을 지명하는 것이 옳지 태도가 않았느냐고 비판하였다. 8월 26일 경무대에서 장면 국무총리 등 3부 요인과 각료들로부터 제63회 탄신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당적 보유를 금하였으므로,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8월 13일 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내각출범 20일 뒤, 국무총리 장면은 개각을 단행하여 5명의 장관직을 구파로 교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내각책임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나, 내각인사에 개입 구파에게 준 자리는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한편 그는 자신의 얼굴이 든 우표나 화폐 발행을 반대했다. 우표나 화폐 등은 죽은 사람이거나 공적이 뚜렷한 인물만 등재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반대 이유였다. 8월 경무대에서 특별히 그의 생일 기념 축하를 주관하였다. 그는 성대한 축하식 대신 간단한 파티와 주변 친지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하였다. 파티에는 장면 총리와 각료들 외에 어머니 이범숙,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윤일선, 윤영선 등 일족들과 김도연, 유진산 등의 당직자, 몇몇 친한 친구 등 소수만이 초청되어 간략히 하였다.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1960년 8월 29일 이른 아침, 휴가 겸 민정시찰을 나갔다. 비서실을 통해 전갈을 전달하자 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들이 서울역에 집결하였다. 관 1호차를 탄 윤보선 부부는 서울역에 도착, 8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이 일이 정치권에 알려지자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전송 나오라고 지시한 것은 무엇이며, 이에 군말없이 따르는 장면은 뭐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윤보선은 대통령직에서 월권을 한 것이고, 장면은 자기 밥그릇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이었다. 그는 민주당 구파의 의원들을 모아 그들과 각종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간 정치다툼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대립을 외면하였다. 민주당 구파에서는 싸움에 동참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윤보선을 두고 아군은 맞느냐며 공격했다. 장면 내각 출범 20일 마인 9월 12일 국방 권중돈, 부흥부 김우평, 교통부 박해정, 체신부 조한백, 보사부 나용균 등 구파 5명을 받아들인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로서 처음부터 입각한 정헌주는 교통장관에서 국무원 사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구파의 불만은 여전했다 윤보선은 구파에게 준 자리가 빈탕이라고 비아냥댔다. 10월 10일 장면 국무총리는 허정 과도수반 때 임명된 시도지사를 경질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장면 내각에서 정치에 왜 관여하느냐며 비판하자, 윤보선은 국가적인 큰 잘못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했다고 대응했다. 60년 10월 12일 신정부수립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동안 윤보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한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에 신파도 대통령직에는 윤보선이 적임자라 생각하였으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였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들여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거나 장면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는 했다. 장면은 청와대를 갖은 정략을 꾸미는 구파들의 참모본부로 여겼다.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였던 그는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 현상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의원내각제 헌법 하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의전상 국가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정부에 다소 부담을 주었다. 나아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이를 방조했다는 논란도 있다. 한편 그는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1960년 6월 15일에 제정된 제2공화국 헌법 61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었으나 장면 내각 출범 후에도 내각은 법률을 정하지 않았다. 1960년 가을 윤보선은 비밀리에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비밀리에 국방부장관실에서 의논하였다. 윤보선은 자유당 정권 때의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파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재가 있다면 가려서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결점, 단점을 찾기 보다 그 사람의 좋은 점과 재능을 살리는 것이 정치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당 시절의 인사나 과도 내각의 인사까지 해임시키는 장면 총리와 갈등하였다. 장면 총리의 내각 운영 태도를 답답하다고 여긴 그는 장면에게 그럴 것이면 총리 직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장면은 어이없어 하면서 그 영감이 나더러 총리 직을 내려놓으란다 며 성토하였다.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윤보선은 전국 각지의 유적지 보존, 보호 사업에도 후원하고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1년 1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여 신년치사를 하였다. 그런데 윤보선은 시국을 '국가적 위기'라고 규정하고 "정쟁의 휴전을(당파간에) 협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한 개인, 한 당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당파 이익을 위해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장면 내각을 겨냥해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촉구였다. 장면 내각과 민주당 신파는 당연히 발끈하였다. 2월 27일 국토건설단 창단식에 국무총리 장면과 함께 참석하였다. 1961년 3월 윤보선은 장면에게 거국내각 구성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3월 23일 청와대 요인회담을 하였다. 3월 23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에게 사퇴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나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장면 내각에서 민주당 신파 인사들만 채용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자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권한이던 인사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구파 인사들은 주로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모였고, 신파 인사들은 국무총리 장면의 관저인 반도 호텔을 중심으로 모여서 각자 자파의 정책을 의논하였다. 4월 19일 4·19 혁명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장면내각은 그의 참견이 지나친 간섭이라 비판했고 그는 이를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충고라며 맞받아쳤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은 장도영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속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수녀원에 숨어버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선택권이 쥐어졌다. 하나는 그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을 상실한 장면 정부를 포기하고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나는 대통령이니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키겠다고 하고는 가족들만 피신시켰다.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린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아닌가'하고 힐책하였다. 박정희, 장도영 등이 각료들을 체포하고 청와대에 등장하자 체념한 그는 '올 것이 왔구나'라고 자탄하였다. 그러나 그가 놀라거나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현석호 등은 '영원히 잊을수 없는 한마디'라며 그를 원망하였다. 한편 그는 군사 정변 직후 청와대에 나타나 위스키와 소주를 찾는 군인들의 무례함을 질책하였다. 이때 바로 계엄군 사령관 장도영 중장이 사과를 하여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1961년 5월 19일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저녁 8시 30분 방송을 통해 공표되었다.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 밤 9시, 박정희와 장도영이 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윤보선은 5월 20일 하야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낮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와 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저녁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경제정책의 틀을 수립하고 정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그를 명목상의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을 쥐려는 5.16 군부와 수시로 충돌하게 되었다.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인 안동장에 칩거하였다. 4·19 혁명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이 마땅치 않다면서 박정희가 나오게 해서 나왔어도 감시와 연금이 되풀이 되는 불행한 나날을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윤보선은 대통령을 사퇴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 공격의 선봉에 선 윤보선은 대통령(권한대행)과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군정 세력의 민정이양은 허구이며 군정 세력의 정권 연장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1962년 6월 29일 반공유격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하였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허정은 각각 측근들을 데리고 서울시내에서 산책데모를 하였다. 1963년 3월 16일 낮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이에 그는 '3.16 성명이 박의장의 깊은 사려에서 나온 줄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세상 만사가 그렇게 박의장이 제안한 것처럼 척척 될는지도 의문이고 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은 바로 이승만 박사의 사고방식과 같다. 인간 개조라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고 20년이고 30년이고 점진적으로 이룩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이어 군인의 사명은 국방에 있으니 만큼 군인들은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윤보선의 말을 듣던 박정희는 노하며 오죽 당신네들의 과오를 못 참았으면 군인들이 일선에서 돌아 왔겠느냐 며 응수했다. 논쟁이 격화되자 장택상이 화제를 돌려 논쟁을 막았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구 정치인 정치활동법 제한(정치정화법)을 강행하고 군정을 연장시키자 윤보선은 이윤영, 장택상 등과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장면이 병으로 정당활동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야당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러나 허정 등 일부는 그의 지도력에 반발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 였다. 한편 야당 인사들 중에는 그가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정일형 등에 대한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군사쿠테타를 방조하였다며 그의 리더십을 거절하거나 비판하는 인사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군정 반대와 박정희 퇴진 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므로 반대파들의 음해와 공격은 일시적으로 누그러졌다. 3월 20일 허정 등과 함께 서울시청과 을지로 주변, 주한미국 대사관 주변 등을 활보하며, 박정희의 군정연장에 반대하는 '산책시위'를 했다. 3월 30일부터 윤보선과 함께 3차례 박정희와 조야영수회담을 개최하여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철회시켰다. 이후 그는 박정희를 군정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며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야당이 난립하게 되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러나 통합야당으로 국민의당을 만들게 되지만 바로 깨져버렸고,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통합야당 국민의당 붕괴에는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 유진산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이 당시 유진산은 윤보선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 1963년 초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1963년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체되었던 신민당 및 민주당 구파 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세력이 참여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63년 7월 그는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본래 야당 단일후보로 김병로가 지목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해위(윤보선)라면 양보할 용의가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허정은 5·16 군사 정변 당시의 그의 묵인을 지적하며 처신문제를 질타했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사 및 미국무성 관리들로부터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그가 장면에 대한 적대심 때문에 정변을 묵인했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고, 윤보선은 자신이 군사 정변을 추인하지 않은 점과, 장면 내각 당시 데모와 부정 부패가 심했음을 들어 반박, 심한 말싸움이 벌어졌다. 허정은 1963년 9월 24일 "혁명을 합법화시키고 정치정화법에 도장을 찍어놓고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다, 출마한다고 하는 윤보선씨야말로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허정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상 자신이라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 뒤 허정은 그가 5.16 군사 정변에 호응한 점과 혁신 세력의 반발을 들어 김병로에게 후보자리를 양보하라고 종용하였으나 윤보선은 양보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고, 허정은 그가 독단적이고 고집에 세다며 질타했다.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서 경합하였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하면서 윤보선은 야당의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 뒤 최종 지명되어 출마,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윤보선의 유세는 언론에 의해 사상 논쟁으로 묘사되었다. 공화당은 윤보선을 미국 상원의원을 역임한 존 매카시 의원의 사상에 사로잡힌 과격분자로 규정하고, 그의 주장은 얄팍한 술책이며 중상모략이라고 비난하였다. 박정희는 시대착오적 매카시즘이라며 맞받아쳤고, 윤보선은 그가 친일파, 공산주의자라며 조국을 두 번이나 배신했으며 검증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5대 대선 유세에서 그는 빈익빈이 민주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고 호소하였다. 한편 유세중 기자들이 경제정책에 대한 공약을 집요하게 물어오자,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그는 당선된 뒤에 밝히겠다고 하고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였다. 선거 운동이 한고비에 이르렀을 무렵, 9월 28일 윤보선 후보는 다시 전라북도 전주에서 "여순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는 연설을 통해 박정희 후보가 여순 사건에 관련됐다는 시사를 했다. 이로써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라면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럼 공산주의를 가리킨 것이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고의로 공산주의 의혹을 부풀려 올리려고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분격을 금치 못했다. 김형욱을 필두로 하는 충성파와 민주공화당의 추종자들은 윤보선에게 강경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서둘러 즉각 고발조치를 취했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속히 윤치영 등이 그를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김준연은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하자고 하였다. 공화당 측에서는 윤보선이 김준연을 사주하여 흑색선전을 한다고 맞받아쳤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고 윤보선과 신민당을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무리들이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1963년 9월 23일 윤보선은 전라남도 여수, 순천, 광양 지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하였다. 그런데 9월 23일 박정희는 KBS 방송을 통해 윤보선을 공격,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하였다. 63년 9월 24일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하였다. "기아·부패·실업·분열 등 군정의 5악을 몰아내고 민정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 "고 외치던 윤보선은 9월 24일 전주 유세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윤보선은 "내가 할 말 그사람이 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이질적 민주주의'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인데, 윤보선은 이어서 "9월 23일의 여수 강연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여순 사건 관계자이기 때문에 그의 민족 사상이나 민주주의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 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윤보선의 삼촌인 윤치영은 윤보선의 경쟁자인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이기도 했다. 9월 30일 윤치영은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일각에서는 윤보선의 의혹을 사상공세라고 비난하였고, 숙질간의 싸움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김사만은 "여순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 "(김준연의 폭로에 비교하면) 그 얼마나 점잖은 표현이냐"며 윤보선을 옹호하고 "박정희씨는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람이 일본 제국주의의 군인이 되겠다고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더 출세하겠다고 일본에 가지 않았느냐"며 맹비난을 가했다. 바로 공화당에서 김준연을 고소하겠다고 선언하자 김준연은 고소 할테면 해보라며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한다. 윤보선은 김준연과 함께 박정희에게 과거 전력에 대해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공세를 펼쳤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악수를 거절한다.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10월 2일 국민의당 허정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고, 10월 8일에는 자민당의 대통령 후보 송요찬이 사퇴함으로써 윤보선은 사실상의 야당의 단일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 논쟁은 윤보선 후보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매카시스트로 몰아붙였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를 극우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간주하여 그의 정견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의 사상 논쟁을 과거 보수 정치가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스파이로 매도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야당인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인 윤보선은 박순천, 이범석, 김병로, 장면의 자택을 각각 방문하였다. 허정과 변영태의 집 역시 방문하였으나,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10월 9일 안동 유세를 다녀왔다. 윤보선은 이 날 8천 청중 앞에서 "민주공화당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북괴의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가 20만 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김종필씨가 조선호텔에 모셔다가 황태성이 안에 따라 서울에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놓고 공산당 식으로 점조직을 한 민주공화당이 어떻게 민주주의 정당이냐"하고 반문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윤보선의 안동 발언은 막바지에 이른 선거 정국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이 손해를 본 것으로 분석한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경상도 · 전라도 쪽이 좌익이 강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그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8월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 선거 13년 전 일이어서 그때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좌익으로 몰려 많이 죽고, 또 살아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몹쓸 고생을 하고 있던 터라, "윤보선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되면 큰일 나겠다. 여순 관계로 저렇게 몰아세우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이 때문에 막판에 박정희 지지로 돌아섰다. 윤보선이 6·25 전쟁 당시 양민학살을 반대하여 이승만과 틀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감옥소에 들어가 있는 혁신계 일부도 한민당 간부였던 윤보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혁신계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민당을 굉장히 미워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혁신세력의 혐오는 지속되어 차라리 윤보선이나 민주당 구파 계열을 지지하느니 박정희를 지지하겠다는 여론이 지속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그는 박정희의 전력과 사상이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고 공세를 했다. 이 때에도 박정희의 공산주의 경력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도 하여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고, 미국 대사관의 직원이 윤보선 내외를 위한 차량을 비밀리에 마련하기도 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12월 17일 다시 국회로 복귀했다. 한편 그의 숙부인 윤치영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그의 선거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는 끝내 수인사 조차 나누지 않았다. 윤치영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5대 대통령 선거당일 저녁 선거 결과가 중개될 때, 초반전에는 윤보선 표가 많이 나왔다. 서중석은 서울쪽을 먼저 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봤다. 10월 15일 선거 다음날인 10월 16일 새벽 3시경까지만 해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가 추격해서 이겼다. 이 뒤부터는 박정희는 개표할 때 박정희 표가 많이 나올 쪽을 먼저 하고, 야당 표가 많은 데는 나중에 했다는 말도 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702,640표, 윤보선은 4,546,614표로 15만여 표 차이였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주도에서는 박정희가, 충청 남북도와 서울, 경기도, 강원도에서는 윤보선이 이겨서 남북선거 양상을 띄게 되었다. 서중석은 이를 두고 경상북도는 이때만 해도 몰표가 아니어서 박정희가 83만여 표였고, 윤보선 표도 54만 표나 나왔다. 충청북도도 그렇고, 두 지역은 여당 표가 많이 나오는 곳 이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윤보선은 스스로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다. 사상 논쟁은 얘기할 것이 없었고, 윤보선 측에서는 막판에 개표 부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 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서중석에 의하면 그 당시 선거에서 공무원 가족, 경찰관을 포함해 관권에 의해 좌우되는 표를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로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 라고 하였다. 대선 기간 중 윤보선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67년 5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사상 경력에 대한 공세가 있었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순 사건에 대해 변명하였다. 윤보선은 경상남도 진해에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조봉암과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63년 11월 윤보선은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64년초 한동안 칩거하였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 장택상·박순천·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후일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구파를 함께 이끌어오던 유진산과의 갈등 끝에 1964년 8월 유진산과 결별했다.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구파는 양분되었다.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민주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 그는 '대통령 박정희와 공화당 의장이 집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역적'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이후 그의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의 감시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윤보선의 안동장 건너편에는 망루를 설치하고 그의 집 출입자에 대한 감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윤보선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 없다며 고집하였다. 또한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1965년 초부터는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야당 인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자신이 만든 민정당을 민주당과 통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이 출범하자 총재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박순천에게 패하여 당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낙선원인은 그에게 축출당했던 유진산이 복수차원에서 박순천을 당수후보로 밀었고 여기에 여당인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일부 대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등 복합적인 정치공작의 결과였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그의 강경노선을 누그러뜨릴수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것은 그들의 계산착오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자신의 약화된 입지를 만회하기위하여 더욱 더 강경한 투쟁의 칼날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1965년 5월 박정희정권의 한일회담에 대해 대부분 야당인사들의 생각은 원내외투쟁을 병행해야한다는것이었는데 윤보선은 다가오는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양자대결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초강경투쟁을 주도하면서 선명야당의 지도자로 떠올라야한다는 의도에서 야당의원들의 전원총사퇴로 배수의 진을 칠것을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대다수 야당의원들로부터 "우리가 해위의 대통령 당선을 위한 들러리냐"하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그의 강경노선에 동조하는 윤제술,김도연,김재광,정성태,정일형,정해영,서민호 등 7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의원직사퇴후 그들과 함께 초강경 선명야당 신한당의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여기서도 자신의 당수직과 대통령후보직을 위협할수 있는 서민호와 김도연의 합류를 거부하는 옹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동안 비록 의원직은 내놨을지라도 민중당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대선후보를 내지 못할것이라 보고 느긋한 태도를 나타냈다. 한동안 그랬지만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중당이 대선후보로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를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67년 대선이 박정희와 윤보선 그리고 유진오의 3자대결구도로 간다면 윤보선은 당선은 고사하고 참신성 등에 있어서 유진오에 밀려 3등으로 밀릴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윤보선은 민중당 측에 합당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해 유진오와의 회동을 제안하였고 민중당이 이를 받아들여 윤보선ᆞ유진오 간 회동결과 신한당과 민중당은 신민당으로 통합하고 당 대표에는 유진오,대선후보는 윤보선으로 하기로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정책은 박 대통령의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후 장택상,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굴욕외교 반대 활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 역시 국민을 쥐어짜는 경제 정책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파병 역시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 집권에 이익을 주려는 행위라며 월남 참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조속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 3월 6일 민정, 민주, 자민, 국민의 당 등 재야의 전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심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대일굴욕외교투쟁위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였다. 장택상은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고 비판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회장인 김덕룡(金德龍, 후일 국회의원)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윤보선은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 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다.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현장을 돌며 학생들을 위문했다.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철여하면서 단식학생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윤보선은 그들 의대생, 간호학과 학생들도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 보았다. 사건을 주동한 이명박 등은 피신했고 주동자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 348명을 기소한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윤보선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의로운 학생들이라며 손수 부인 공덕귀, 비서관, 함석헌 등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1965년 4월 30일 오후 방한 중인 마셜 그린 미 국무부 극동담당 부차관보는 서울 중구 정동의 미 대사관저에 윤보선 민정당 총재를 초대하여 한일회담과 관련한 요담을 했다. 그린 副차관보는 5·16 군사 혁명 때는 대리대사로서 당시 윤 대통령을 찾아가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쿠데타軍(군)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동원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한 인연이 있었다. 윤보선은 김준연 등을 대동하고 마셜 그린 부차관보를 면담했다. 이날 민정당의 김준연 의원은 그린 副차관보를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는데 요지는 박정희의 방미(訪美) 정상회담 계획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린 부차관보는 '한일 국교회담의 조속한 정상하를 바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고 윤보선과 야당에게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한잃회담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셜 그린은 '본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이익을 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힘쓰겠다.'고 약속하였다. 윤보선과 마셜 그린의 회담을 불쾌하게 여긴 박정희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이 사실을 보고한 박상길 청와대 대변인에게 "그 X버선인지 헌 버선(편집자 註-윤보선을 지칭)인지 하는 자가 하는 말을 나는 다 알고 있지. 새카만 일본 헤이타이(兵隊) 출신인 째그마한 내가 … 제까짓 게 뭘 알겠느냐, 이런 말 아니오?"라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윤보선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며 그것이 박정희 씨의 인격이고 수준이라고 응수하였다. 1965년 6월 22일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이 민중당으로 통합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통합 민중당의 당대표로 경선에 나왔으나 유진산은 박순천 쪽을 밀어서 박순천이 당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당수가 출현한 것이었는데, 이는 전에 민주당 구파였던 유진산이 신파와 손을 잡은 결과였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투쟁에 나섰는데, 박순천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에 적극적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한 뒤로는 이상하게 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민중당 내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별되는 뚜렷한 대립 노선이 노정되었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강경 노선은 군정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권 자체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불법 정부'이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한일정상화조약은 무효이며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 전쟁 파병 정책은 박정희가 그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으려는 수단이므로 단호히 반대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윤보선은 다시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불법선거라며 비판했다. 윤보선은 1963년 대통령 선거를 공화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65년 7월 22일 윤보선은 민중당 탈당을 선언했다. 7월 28일 윤보선은 정당생활을 청산할 뜻을 비치면서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게 탈당계를 제출했다. 윤보선의 탈당계 제출로 민중당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원외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파와 원내투쟁이 국회의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 이라는 박순천 중심의 온건파의 대립으로 대여투쟁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박순천은 윤보선의 탈당계를 반려했고, 윤보선은 자신의 탈당계가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에 의해 반려되자 정당법에 따라 소속 지구당인 종로구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9월 장택상, 함석헌, 이범석, 장준하, 박순천 등과 함께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서 열린 한일협상 반대집회에 참석하였다.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서 그는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였다. 1965년 8월 14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국회를 떠나고 민중당을 떠났다. 윤보선 파는 민중당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고 비난했고, 당내에서 배척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내 온건파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한·일 협정 비준에 초강경투쟁을 벌이던 윤보선은 따로 나가서 당 하나를 만든다. 신한당이다.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한다. 이때 윤보선과 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하였다. 윤보선이 유진산과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강원용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지적을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지 않고 타인의 말만 듣는 것은 편견이라며 일단 유진산과 함께 움직였다. 한민당 때부터 함께 정치를 해왔고 같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지만 그러나 계속 노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민정당에서 윤보선과 유진산이 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갈등을 벌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윤보선 측은 유진산을 박정희 정권과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해서 벚꽃의 일본말인 '사쿠라'라고 하면서 권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쿠라를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다. 유진산은 한편 그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라며 몰아붙였다. 윤보선과 유진산의 난타전은 계속되었고, 민주당 구파는 1965년말 6대 대선 준비기간 직전까지 양분된다. 민중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박순천으로는 안되겠으니까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를 당수로 영입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민중당은 유진오를 당수로 모셔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해봤는데 실패하였다. 서중석은 '유진오를 국민들이 잘 알지도 못했'고, 당시는 '어두웠던 시대라 유진오를 알 만한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적했다. 윤보선이 대통령에 나올 것은 확실해졌다. 장준하는 주선을 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4자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 결과 당수에는 새로 통합야당을 만들어서 유진오가 차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긴 당이 신민당이다. 1960년대에 윤보선이 신민당을 할 때 유진산과 손을 잡자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과 손잡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꾸라라고 공격했고 유진산은 오히려 윤보선이 1963년 3월과 4월 박정희와 면담 때 박정희의 구정치인 배격을 비판하고 잡토도 섞어야 된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하며 조롱하였다. 민중당을 탈당하고 1966년 2월 28일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으며 3월 30일 신한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해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5월 26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신한당 지구당 창당 및 대선 예비주자로 유세를 개회하려 하였으나, 유세장소허가가 취소되고 강연은 좌절되었다. 윤보선은 정부의 야당탄압이라며 비판, 윤보선 총재를 비롯한 100여 명의 당원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한편 윤보선은 6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사상이 민주주의인가 이질적인 사상인가 의혹을 제기하였다. 1966년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 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주장의 허구성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기자들이 기록을 주저하자 윤보선은 반복해서 재발언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국회에서는 내무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집회불허사건에 대한 야당측의 비판이 제기됐고, 국회는 여야간 갈등으로 번졌으며 검찰은 윤보선 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그는 군사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이라며 바로 항의하였다. 윤보선의 비판 발언은 국회의 1966년 6월 7일에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와 1966년 6월 15일 열린 본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윤보선은 국회에 출두하였고,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은 북괴찬양이나 이적의 목적이 없는 정치적 발언에 법률적 추궁을 하는 것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정치집회나 정당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고 있는데 대한 시정대책, 반공법 적용의 남용문제 등에 관하여 질의가 있었다. 공화당에서는 윤보선을 구속, 처벌하라고 비난하였으나 처벌받지는 않고 비난은 곧 가라앉았다. 1966년 여름부터 윤보선과 여러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성향의 도시 지식인과 중소상공인들로부터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서한과 요청을 수시로 받았다. 이후 야당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압력으로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범 야당 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한편 허정은 그의 대통령 후보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5.16 군사정변의 원인제공자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신민당 공천으로 6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추대되어 출마하였다. 1967년 3월 그는 장준하 등이 주선한 야당의 후보단일화를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에 참여하였으나 의견차이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1967년 5월의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로 나왔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박정희가 나왔고 야당은 윤보선이 대표주자를 하게 되었다. 윤보선이 출마하자 그의 주변에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그의 선거를 도왔다. 강원용은 5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어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그를 돕는 일에 간접적으로 나마 나섰 다. 강원룡은 윤보선 후보에게 직접 자금을 전해 주지 못하는 기업인들을 대신해서 자금을 받아 전달해 주는 일을 몇 차례 맡아 했다. 따라서 강원룡 자신의 회고로도 국민들에게는 '겉으로는 강원룡이 윤보선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1967년 5·3 대통령 선거의 유세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신민당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 경력을 집중 부각, 지적하였다. 윤보선은 이때는 사상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고, 박 정권이 부정부패가 심하니까 "부정부패 바로잡겠다", "썩은 정치 바로잡겠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당 일각에서는 다시 박정희의 남로당 관련 전력이 다시 불거졌고, 박정희가 배신자임을 들어 신의없음을 지적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를 서중석은 '윤보선 하면 낡은 정치인, 늙은 정치인이 연상되어서 신선한 맛을 느낄수 없었'다고 평했다. 6대 대선 유세기간 중 야당의 후보였던 그는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며 여당 후보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윤보선의 집안을 친일파 가문이라 공격하였고, 윤보선은 박정희와 공화당으로부터 친일파로 공격받은 것에 분노하였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경력을 들어 다시 공격했다.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선거기간 중 박정희의 일본군 경력을 예를 들며 공격했다. 윤보선과 민주당은 박정희를 향해 친일파에 공산주의자 경력까지 있으며, 히틀러 등도 긍정적으로 보는 박정희의 사상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며 공격하였다. 6·3 세대로, 저명한 교수 한 분은 "유세기간 중 경제 정책을 발표할 때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원조를 더 받아와 나라살림을 펴겠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라고 말했다. (한일회담 때문에) 박정희는 미웠지만 그의 말은 전율할 만큼 감동으로 다가 왔어. 박정희를 지지하게 되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자립책이 비현실적임을 지적, 미국, 일본과 교류 없이 문을 닫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반론을 제기했다. 6대 대선에서도 박정희의 공산주의사상과 남로당 경력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의혹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선거는 윤보선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그해 5월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116만 표의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 박정희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윤보선의 지지 지역은 수도권과 도심지역이었고, 박정희의 지지 지역은 농촌과 산촌 지역으로 나타났다. 이후 장준하와 함께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였다. 당시에 다른 이들도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과 장준하는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정권 치하에서 3.1 구국 선언,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출석교회였던 안동교회(예장통합측의 장로교회. 안국동 소재)는 형사들의 감시대상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國民黨)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장준하와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 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하였다. 장준하가 한때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의 족청을 거쳐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 역시 윤보선이 장준하를 탐탁치 않게 보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부정적인 시각에 관계없이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한편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윤보선은 신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3년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서울 YMCA에서 기도회 모임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사형 집행자 추모예배가 문제되어 목요기도회는 중단되고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목사 등이 연행되었다. 모임 참가자들은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강요에 동아일보에 목요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때 윤보선은 그들에게 회의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 주었다. 73년 3월 23일 윤보선은 정구영, 지학순 주교 등 10명과 함께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 다른 연루자들은 구속·기소되었으나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인 관계로 가택수사를 받았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1974년 11월 27일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을 선언하고, 함께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을 때, 일부 야당지도자는 박정희의 독재를 들어 육영수 암살을 조롱하였으나 윤보선은 재판중임에도 육영수 피격사건에 대한 애도와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 1974년말 윤보선은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의 대량 기자해고 사태가 발생하자 3월 14일 동아일보 사태를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또한 그날 방송에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한다며 공격하였다. 이어 같은날 3월 14일 단독으로 '3ㆍ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3천 5백만 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생 김상진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했다. 윤보선은 김상진을 김상진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75년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갖기로 했다. 4월 22일 윤보선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제지당하였다. 윤보선은 명동성당 추도식에 참석하여 민주학생의 명복을 빌어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그의 안국동 사저에 모여들더니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윤보선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1976년 봄 제2공화국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정일형의 부인 이태영이 윤보선을 방문했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일어서 행동을 할 때라는 의견을 듣고, 그로부터 이태영, 정일형, 김대중 셋이 정일형, 이태영 부부의 사저에서 3·1절에 구국선언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이태영으로부터 김대중이 초안한 선언문을 입수 하였으나, 선언문이 ‘온건하긴 했으나 독재를 비판하는 강도면에서는 약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윤보선은 아내 공덕귀를 시켜 이태영을 만나, 서명문이 온건하다 하여 서명을 거절하였다. 며칠 뒤 문익환이 서명을 작성하여 그를 찾아왔다. 문익환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은 윤보선은 내용을 읽은 뒤 ‘강도가 높고 할말을 별로 빠뜨리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며 문익환이 초안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1976년 3월 1일 새벽 윤보선은 명동성당에 도착, 앞자리에 앉아 70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정치범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석하였다. 윤보선의 주변에는 감시인이 따라붙었고,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박정희도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법정에 출두했다. 당시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 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 재판정 앞에 선 그의 당당함과 깎듯함에 군정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박정희가 무리하게 고령자를 법정에 세웠다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 여론이 형성되었다. 윤보선은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독재행위라며 노골적으로 공격하였다. 1976년 3월 1일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문익환, 함세운 등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700여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가택수사를 당하였고, 뒤이어 '사실 왜곡 전파', '헌법 왜곡 비방 및 폐지 선동'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최고 징역·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량은 징역 8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법정구속되지 않았다. 5월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고, 윤보선은 공덕귀 및 이희호, 김홍일 등과 함께 김대중 석방 농성을 벌였다. 1977년 이후 그는 일본의 후쿠다 수상에게 유신체제를 비난하며 독재 정권에 협조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 화제가 되었다. 이는 방송에 보도되었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다시 그를 친일파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한편 그는 계속 김대중 석방구명운동에 동참했고, 1978년 김대중은 석방된다. 1977년 3월 22일 3.1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윤보선은 지학순 주교 등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1977년,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일본 후쿠다 수상에게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착한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대한 정책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는 긴 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윤보선의 서신발송을 묵살하던 한국 언론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을 입수,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윤보선이 일본에 내정간섭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보도, 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1977년 강희남, 문익환 목사 등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인사들을 면회하러 공덕귀, 양일동, 이희호 등을 대동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갔다가 거절당하고 되돌아왔다. 1977년 9월 광주 고법의 강희남 목사 첫 공판일에 방청객으로 참관하였으나, 재판을 연기하는 바람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9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과 공동으로 '국민에게 드리는 글(청계피복지부 노동조합 탄압에 붙여)'를 발표하였다. 1977년 12월 성명서 '학생탄압을 중지하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최근 학원 사태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하다. 1978년 1월 6일 재야인사들과 곧동으로 옥중에 수감중인 민주인사를 위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반유신 운동의 해외홍보를 위해 해외인사들과의 연대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해버렸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결국 문익환의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해 10월 17일 윤보선은 함석헌, 문익환 등 야당 및 재야인사 402명과 12개의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10·17 민주국민선언을 발표하였다. 1978년 12월 7일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함께 성명서 '12ㆍ12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다.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국민연합이 체제를 개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의 개편되었을 때 윤보선은 함석헌, 김대중과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4일 안국동 사저에서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였고, 3. 1절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이 됐다. 이후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김영삼 제명 파동 소식을 듣자 그는 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10월 26일 그는 안국동 사저에서 박정희의 피격 운명소식을 접하였다. 1979년 10·26 사태로 현직 대통령 박정희(朴正熙)가 피살되자 그는 인과응보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이후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정권교체를 예상하고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김영삼, 김대중에게 요구하였으나 결렬되었다.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는 서신을 보내 유신 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대의원 간선제로 최규하 총리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야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한다. 윤보선은 최규하의 대통령직 승계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적인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묵살당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가들과 면담, 군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실내에서 결혼식 형태로 하기로 정하고 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타계한 윤형중 신부의 성씨에 민주주의 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가상의 여성)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정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종료 후 계엄군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1979년 11월 YMCA위장결혼사건으로 피체, 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벌써 80이 넘었다. 주목되는 점은 유신체제에서 민주화 투쟁과 관련된 윤보선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미국의 국무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11월 24일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함석헌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윤보선 등은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위장결혼식 참석자들의 형량을 낮추어줄 것을 탄원하여, 전원 형량이 감경되었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함석헌과 불구속되었던 윤보선은 법정구속되지는 않았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직 3부 요인과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고, 바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2월 28일 최규하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윤보선, 김대중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되어, 복권되었다. 9월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의 봄 당시 윤보선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화합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1980년 2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1980년 3월에 이르는 시기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정국을 관망만 했다. 그리고 4월 들어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963년 민정 이양 이후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각자 대권 행보에 나섰다. 또한 김영삼은 기타 야당 인사와 시민단체들에게 딱히 손을 내밀지도 않고 독자적인 행보에 나섰다. 한편 김영삼은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월 7일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을 거부했다. 윤보선은 다시 중재에 섰다. 4월 7일 윤보선의 중재로 두 사람은 4월 12일 윤보선과 함께 3자 회동을 했지만 대권을 향한 두 사람의 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 두 김씨에게 다시 한번 단일화를 추진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지만 실패하자 윤보선도 더이상 이들과의 접촉을 단념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해 8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그가 물러나자 민주당 구파는 장택상과 조병옥이 발탁한 김영삼이 영도하게 된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시절과는 달리 정부에 적극협력하여 국정자문회의등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줄곧 국정자문회의 의원을 지냈다. 1980년 초 전두환과 신군부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을 직접 방문, 면담하였다. 전두환 등은 윤보선에게 박정희정권의 부패상 등을 지적 자신들은 박정희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할테니 도와 달라 고 했다.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핍박을 받아온 데다가 기약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강원룡과 천관우, 지학순 등과 함께 국정자문회의 의원 직을 수락하는데 세간에서는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을 가리켜 '변절자 윤천지강'이라는 비아냥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인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함께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남편을 말렸다. 그러나 말리는 공덕귀와 남편 윤보선 간에 고성이 오갔다. 윤보선은 아니 공덕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가 전두환의 독재에 협력하였다며 학생운동가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동시에 그는 학생운동가들의 반미주의적인 활동은 야당 운동, 학생 운동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후 줄곧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야당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은 공산주의 혁명론과 민족 해방론, 반미주의 사상을 가진 운동권을 극도로 불신하였다. 강원용은 이를 두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81년 4월 23일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4년, 이전에 민청학련에 연루되었던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하였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가 있었다. 전두환은 윤보선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그래서 윤보선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사면, 복권시키는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역시 관련자 사면복권에 활약을 하였다. 한편 1980년대 중반 일부 학생운동가들의 반미 시위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며 반미주의적인 경향에는 반대하였다. 학생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남북협상으로 태어날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생겨난 부산물로 여기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재야, 학생운동가들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정부수립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곧 극우 세력과 학생운동가들의 날선 비난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방관하였다. 1985년 6월 제4회 전국사회복지대회준비위원회에서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에 선임되었다. 1985년 3월 경희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12월 미국 US 국제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87년 6월 22일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6.10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작은 메모를 보냈다. 또한 강원룡, 신현확 등의 개신교 인사와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을 추천, 이들의 말을 듣고 시위대에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를 지지하기도 했고, 1987년 12월 14일에는 대통령 선거에 즈음한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후 줄곧 노태우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노태우 공개 지지 선언은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실패,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함께 학생운동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숙부 윤치영의 구순기념논문 봉헌 행사에 참석하였다. 그밖에 강원룡, 김수환 등의 강연회와 기독교단체의 운동에 적극 후원, 참여하기도 했다. 만년의 윤보선은 양복 한 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 양복은 어려운 중에 있던 자신을 찾아준 것을 감사히 여긴 디자이너 이정송이 재단해준 양복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는데 조카 윤남경에 의하면 1975년경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다 한다.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 1988년 윤관장군기념사업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88년 5월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병세가 악화, 1989년 석오 이동녕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나, 동년 1989년 5월 14일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에 폐렴까지 겹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안정을 되찾아 자택에 요양했으나 급성 신부전증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1990년 3월 말 다시 노환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투병하다가, 7월초 병환에 차도가 없자 퇴원, 임종을 위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1990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가족장(家族葬)으로 진행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에 위치한 가족묘에 5대조·부모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국립묘지 안장 의견에 대해 독재자와 함께 누울수 없다고 반대했다 한다. 상훈으로 '인촌문화상'을 수여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92세였다. 사후 부인 공덕귀는 앞서 간 남편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집안에 상청을 차려두고, 거기에 남편의 사진과 촛대와 꽃을 두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매주 교회에 예배보러 나갈 때는 남편이 늘 앉았던 자리에 꽃을 갖다 놓곤 했다. 안동교회에 아버지 윤치소와 그의 사후 윤보선이 앉아있던 좌측 맨 앞줄의 왼쪽 끝 좌석은 윤보선이 앉던 자리라는 표석이 붙여졌다. 그의 사후에도 1997년까지 부인 공덕귀가 살던 그의 서울 안국동 사저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윤보선의 생가 역시 1984년 12월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12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의 생가에 아산시와 윤보선대통령기념사업회 등의 주최로 윤보선 기념전시관이 열린 뒤, 바로 윤보선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98년 한때 건국훈장 추서 대상자로 한때 논의되었으나 곧 흐지부지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장면 내각에 반발하여 군사정변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점 등으로 외면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오다가, 2000년 이후 박정희 19년에 맞선 야당 정치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서울특별시 안국동 사저는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으로 후에 100칸을 넘게 되었다. 그의 안국동 사저는 한민당때부터 정계 거물들이 출입하던 곳으로, 48년 9월 윤보선이 스스로 자신의 안국동 사저 별채를 한국민주당의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래 계속 한민당과 민국당, 민주당의 주요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저를 이승만의 이화장이나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 박헌영의 혜화장에 비교하여 '안동궁'(安東宮)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았다. 윤보선은 항상 비서관과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는 물과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민족적 민주주의, 우리식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일민주의 등을 거짓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것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이고 타당하다면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매사에 상식을 강조하였다. 비서관 김준하에 의하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을 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마음가짐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상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한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의 일이나 개인 생활이나 정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준하 비서관은 이를 그의 '첫 가르침'이라 회상하였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군사 정권 집권 초,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무상 지원을 시도하면서 야당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자 김병로 등은 반대했지만 윤보선과 장택상은 적극 동조하였다. 오히려 윤보선은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군사 정권에서 도움을 요청한 밀사가 장택상을 방문하였다. 밀사는 장택상에게 정부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비밀리에 미국을 설득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장택상 가인 김병로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김병로는 장택상과 군사정권 인사 사이에 오고 간 말을 듣고 나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는 "비록 국민의 식량 문제라고 할지라도 미국 잉여 농산물이 한국에 때맞춰 들어오고 보면 이 군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장택상은 그자리에서 나와 즉시 안국동 윤보선댁을 찾아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장택상이 김병로가 '나의 도미하는 문제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더라'고 덧붙였더니 윤보선은 대뜸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김병로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가인이 잘못 생각한 것으로 문제가 국민의 식량 문제인만큼 누구 심부름이든 가릴 것 없이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힘닿는대로 해결지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장택상이 정부대표 자격이 아니면 받아줄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택상이 기자회견까지 마치자 윤보선은 직접 환송한다고 자택까지 불러서 저녁 대접까지 해 주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에서는 장택상에게 취소됐다고 연락했고, 장택상과 윤보선은 분개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정당을 초월해서 협력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군사정권 기간 내내 그는 당리당략보다는 국민의 생존권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특히 식량이나 약품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싸움보다는 일단 협력할 것을 역설했다. 윤보선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대단하였다. 강원룡에 의하면 '윤보선 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라고 지적했다. 강원용은 오히려 박정희가 좌익이며 위험 인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원용에 의하면 그는 한때 이범석과 가깝게 지냈던 김정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하였다. 그는 영국 생활과 유럽 생활 중 영수증을 잘 주고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은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바가지를 씌운다는 점과 적당히 바가지를 씌우는 상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내 딴에는 중요한 물건과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쳤는데, 내 수하물을 취급하는 사람이 어찌된 일인지 하물표(영수증)를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짐표를 요구했더니 하물취급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당신 짐은 글래스고에 가서 찾으면 되지 않소? 표는 무슨 표요?"하고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글래스고 시에 도착해서는 마중나와 있는 윤치왕에게 이를 걱정해서 말했더니, 윤치왕은 그를 이끌고 따라오라며 화물차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윤치왕은 그에게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 영국인들은 각자 자기 짐만 집어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남의 짐도 좋은것이 있다 싶으면 가져가는 조선인들의 습성을 봐온 그는 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이 허술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였다.'고 한다. '그때 영국은 이만큼 탄탄한 사회구조에 이미 서 있었으니 10전어치 물건을 사고도 반드시 영수증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온 이 동양인에게 그 사회가 어떻게 보였을까.'하며 이를 오래도록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한국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신적인 혁명부터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부도덕성과 비정직성으로 들었다. 윤보선은 '조국의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와 '정신적 근대화' 역시 병행되거나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의의 원칙에 기반한 의회주의, 보통선거, 정당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한 정부 구성을 이행할 것을 여러번 촉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와 그의 유신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생, 빈민권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되, 그 원칙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상식을 제시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의 후유증이 한국 사회의 비윤리적이고 그릇된 사고와 의식, 타성과 풍조를 심었다고 진단했고, 국민들 스스로 씻어내고 정신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부패와 퇴폐의식을 조장했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를 남기는 등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의 자택은 대지 1천400평에 99칸의 거대한 한옥이다. 3.1 구국 선언, 민주화 운동 단체 가입, 크리스찬아카데미, 민주화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날조한 사법살인으로 확인된 인혁당 사건, YMCA 위장 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지원하거나 민주화운동 탄압에 연루되어 때문에, 그가 출석하던 안동교회는 중앙정보부와 형사들의 감시, 사찰대상이 되었다. 안동교회는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가 설립하여 헌당에 참여한 예장통합측 장로교회이다. 그의 집인 안동장 앞에도 중앙정보부는 3층 높이의 초소를 세워두고 그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였다 한다. 윤보선은 이를 대단히 불쾌히 여기면서도 박정희가 죽고 난 뒤, 이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였다. 윤보선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취임기념우표와 기념주화가 없는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960년 8월 대통령 취임 후 취임기념우표 발행 건의가 들어왔으나 그는 살아있는 인물을 도안할 필요가 있느냐며 거절하였다 기념 주화의 발행에 대한 건의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취임 후 각료에게 각하라는 명칭은 자제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얼굴이 도안된 주화 발행 역시 거부했다. 그는 우표와 화폐에는 나라에서 기념할 만한 인물을 넣는 것이 상식이라며 반대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1960년 8월 27일과 1961년 8월 27일의 청와대에서의 대통령 탄신일 기념행사(의전에 의한 행사)는 수용하였다. 대통령 재직 중 청와대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꿨다. 정원의 화단 가꾸기와 독서를 즐겨하였다. 그는 밥은 꼭 잡곡밥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흰 쌀밥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콩, 보리, 팥, 조 등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식사를 한 것이 궁극적으로는 장수의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 16년간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대선 경쟁자이자 박정희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16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대학교수 겸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통 야당을 고수하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로도 평가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것 역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 운동을 벌인 점은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그가 추진하려던 경제개발 계획에 관련하여 '경제정책 프레임은 비록 미완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꽃을 피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박정희 투쟁에 있어서의 그의 비타협적인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는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반면에 융통성이나 타협능력이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서관이었던 김준하는 평하기를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한다. 이어 김준하는 그가 지극한 효자였다고 평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지 못하고 군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던 나약한 정치인으로도 그려진다. 한영우는 5.16 군사정변 당시 그의 묵인적 행동을 지적, '이 사건(5·16군사 정변) 중심으로 그를 이해한다면, 그는 한국민주당에서 민주국민당, 그리고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보수 야당에서 구파 계열을 대표하는, 한 파벌의 정치인일 뿐이다.'라고 보았다. 더한 지적도 많다. 친일파 집안의 덕으로 학창시절을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수학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그가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으나 그가 직접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친일파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윤보선은 자유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는 비판도 있다. 정대철은 '그가 내심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지지성명 요구를 거부하는 등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의 처세라 아니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의 한 신문은, 쿠데타 주체의 한 사람이었던 유원식의 말을 인용해 윤보선은 이미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군인들과 교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승인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폭로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 묵인했다는 의혹과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서중석은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던 장면 국무총리가 일을 못하게 된 큰 이유가 윤보선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비판했고 박정희와 제3공화국 유신 체제에 정면도전하였으며, 1970년대 내내 인혁당 사건, 크리스찬 아카데미, 김상진 할복 사건, 명동구국민주선언,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수시로 내사를 당하고 감시인이 따라붙는 등의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제5공화국 이후에는 협력적으로 변하면서 재야인사 및 신민당계 인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4.19 혁명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적어도 장면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 눌러 앉아 있었다.'고 비판했다. 허정은 그가 야당 대열에 복귀할 자격이 있느냐며 수시로 공격했다.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에도 '1963년 1월 초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63년 1월 2일 김병로, 윤보선 등이 모여 민정당의 발기에 합의했다. 허정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윤보선 씨의 성급한 정치활동 재개는 나로서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윤보선은 혁명정권과 한 동안 같이 일한 사람인 만큼, 혁명 세력과 대결하는 야당 대열에 복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었다.'고 기술하였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매카시즘 공세를 일으키다가 되려 역공세당했다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이른바 '빨갱이 파문'과 '연좌제'로 심한 상처를 안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윤보선의 '매카시즘 대선 전략'은 과거의 상처만 되살린 꼴이 되어 버렸고 이들은 도리어 '박정희가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다'는 동정심을 가져 박정희에 지지표를 쏟았다. 결국 박정희는 15만표차로 당선 되었는데 여기에는 윤보선의 '매카시즘 공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6대 대선 당시 윤보선은 민중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고집하여 또다시 야당의 분열을 일으켰다 고 보는 시각도 있다. 7대 대선에서도 출마하였으나 후보사퇴를 피하려고 박기출에게 양보한 점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숙부 윤치영에게 수인사나 목례도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 점도 비판받고 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권위주의, 전체주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윤보선도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강준만은 "권위주의적인 윤보선과 다툼을 싫어하는 장면의 대조적인 성격"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강준만은 그를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고 평하였다.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자기 사람이 되면 각별하게 챙기고, 그의 가족의 생일, 기일까지 챙기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남 비서관의 결혼식에 장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으려다가 선우종원이 만류하는 바람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사람들 뒤에 들어가면서 그가 김남 비서의 결혼식을 기피하더라는 말들만 돌고 돌았다. 냉정하고 합리적이라는 인물평이 있다. 한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조선시대의 양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도 있다. 명문가라는 자존심과 더불어 양반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흑백 양자택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타협을 모르고 한 길로만 내달렸다. 1960년 8월 29일 민정시찰 시 각료들을 불렀다가 월권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명사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있다.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전까지 윤보선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나온 신사다.", "대부호 명문집 아들이다" 이렇게만 알았는데, 이주 잘못 안 것이었다 한다. 서중석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야심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이 된 직후 내각 책임제하의 수반이었던 장면 국무총리와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서중석은 윤보선이 1960년 4·19 혁명이 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잘 몰랐는데 대통령이 되었다고 봤다. 서중석은 '윤보선처럼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사람은 없다'며 '그것을 보면 사람은 겉보기하도 다르'다고 평가했다. 깔끔하고 말쑥한 신사였던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아랫배가 나오지 않았고, 피부결이 늘어지지도 않았다. 눈가 주변에 약간의 주름과 검버섯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젊어보이는 편이었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 탓에 그는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히 신경썼다. 195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은 최기일을 면담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윤보선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나는 그이를 싫어했지만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그와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그는 미장 그릴에서 점심 대접을 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후덕한 사람은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사리가 밝은 사람이었다.'는 평을 내렸다. 윤보선 본인은 5·16 군사정변을 승인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제2공화국의 국가원수임에도 5·16 군사정변을 추인 내지는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더 나가 학생혁명만 혁명이고 군사혁명은 혁명이 아니냐고 항의했다고도 한다.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 외에 지지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5월 16일 윤보선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미대리대사를 만났다.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미국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윤보선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5.16 군사 정변이 터지자 그는 1군사령관 이한림 1군단장 임부택 등에게 비서관들을 보내 "국군 끼리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면서 진압하지 말라고 했다는 의혹도 있다. 장면은 윤보선이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자신의 비서관들을 보내 진압을 만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군사정변 당시 장면의 포기로 사실상 국군통수권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전방부대를 서울로 보내 군사 정변을 저지하지 않았고, 박정희의 국군통수권 이양 요구 당시 "올 것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순순히 국군통수권을 이양한 것 때문에 그가 군사정변을 묵인하는 대신 박정희와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매개체로 타협을 보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이 있다. 왜냐하면 내각 책임제 치하에서 대통령은 별 볼 일없는 자리였기에 이에 분개한 윤보선이 박정희와 타협하였다 한다. 윤보선의 정변 방조 의혹은 1962년 5월 유원식이 제기하였다. 유원식은 인터뷰에서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하자,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자신의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 회고록》에서 유원식과는 만난 적이 없으며, 유원식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윤보선은 내각책임제 하에 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장면 총리의의 실권을 부러워하여 5·16 군사정변을 방조 내지는 묵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원수 신분으로서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의 몰락을 바라며 제2공화국 붕괴를 방관했다는 이러한 주장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 중이었던 윤보선에게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었다. 윤보선 측은 5·16 군사정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사실상 승인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여, 유원식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도연으로부터 폭동발생, 정변 음모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김도연에게서 들은 정보를 국무총리 장면에게 알려 철저한 대응을 지시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장면은 윤보선이 비서관들을 보내 쿠데타 진압을 저지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서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는 것이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눈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장면의 주장이다.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을 진압하러 온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등을 진압할 생각을 포기했다. 1961년 5월 17일 낮 11시 두 사람은 쿠데타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를 듣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대통령은 그의 견해가 매그루더 장군과 나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현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국민들은 더 이상 장면 내각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매그루더 미8군사령부 사령관은 미국 합참의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장면의 비서관이었던 박종률은 후일 그의 태도가 애매했다고 봤다. 박종률에 의하면 ‘윤 대통령이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사실 이라는 것이다. 박종률에 의하면 당시 국방차관인 우희창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 윤보선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인정하고 진압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희창 역시 매그루더 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일행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올 것이 왔다"는 발언에 대하여 유원식도 같은 진술을 했다. 후에 유원식이 5·16 군사정변 직전에 대통령 윤보선과 만나 정변 계획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으며 정변 소식을 들은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허정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사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문 조차도 했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를 둘러싼 논쟁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윤보선이 죽을 때까지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 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비서관을 지냈던 김준하에 의하면 그는 5·16 군사 정변에 협력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김준하에 의하면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내통하거나 묵인한 일은 결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군통수권이 없었던 윤 대통령은 마셜 그린 주한 미 대사와 카터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미군을 동원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등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고 덧붙였다. 김씨는“정치군인들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분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고 증언하였다. 또 그는 일부 '혁신세력이 주도한 야간 데모 등 사회적 혼란, 물가 폭등과 경제 파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의 태도 등이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5·16 군사 정변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거나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 점도 있어 그를 협력자라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대학시절 고고학을 택한 이유로 그는 고고학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인간으로서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는 학문"으로 순수과학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 가운데 고고학을 택했다고 한다. 양반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윤보선과 장택상은 박정희가 자신의 가계와 가난한 가정 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것을 간파하고 이를 경멸하였다. 1961년 1월 1일 신정때 한국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의 세배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세배를 받은 후 윤보선은 우표 두 장을 가져와 도안을 문제삼았다. 소가 도안된 우표는 61년은 신축년으로 소의 해였고, 색실로 꽃버선이 도안된 우표를 들고 와, 소(丑)을 내세워 윤씨인 자신을 모독하고 버선을 인쇄해 보선이라는 이름을 놀리는 저의가 어디 있느냐며 항의하였다. 선우종원은 우표 샘플을 올리는 방법과 절차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야 했다. 1961년 자신의 비서관 김남의 동생 김상협의 결혼식이 있었다. 김상협은 조폐공사 직원이기도 했는데,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으로부터 결혼식 참석 부탁을 받자 그는 '국무총리 참석하나요'라고 되물었다. 온다는 답변을 받자 그는 '나는 안 가겠소'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선우종원은 저와 한직장에 근무하는 데다가 인촌 선생의 아들의 혼사인데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며 항의하여 가까스로 달래자 참석하였다. 1960년대 중반 윤보선은 유진산을 사쿠라 라고 공격했고 이는 유진산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계에서 여당과의 타협론을 벌이는 정치인에게는 사쿠라라는 별명이 붙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윤보선은 풍수설을 맹신하였다. 윤보선이 1990년 사망했을 때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묻힐 자리, 즉 신후지지를 미리 만들어놓고 즐겨 찾았다.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보선은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보선 외에도 이승만, 그의 당숙 윤치호도 단골이기도 했다. 사망 직전까지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에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초대되는 것이었으나 전직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그는 독립운동가 자격으로 초대될 수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 최초로 최면시술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 당시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건강문제로 류한평 박사 등의 상담을 받고 최면시술을 받기도 했다. 그의 둘째딸은 그의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하여, 스승 신규식과는 사돈간이 된다. 또한 독립운동가 민필호, 신명호, 김준엽은 사위 신준호를 통해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음악가 겸 방송인 남궁연은 그의 동생 윤완선의 외손자였다. 나도향 나도향 (羅稻香) (1902년 3월 30일 한성부 ~ 1926년 8월 26일)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 소설가이다. 본명은 나경손(慶孫)이며 필명은 나빈(彬)이다. 한성부 용산방 청파계(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하였는데, 한국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폐병으로 인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는데, 민중들의 슬프고 비참한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작품들 중 《벙어리 삼룡이》,《뽕》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문소리 문소리(1974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74년 7월 2일 부산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시절에는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입학을 준비하던 무렵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오디션에서 여자 주인공인 윤순임 역으로 발탁되어 스크린에 데뷔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하였다. 문소리라는 이름을 대중에 알린 것은 《박하사탕》에 이어 2번째로 설경구와 호흡을 맞춘 2002년작 《오아시스》에서였다. 문소리는 《오아시스》에서 뇌성마비에 걸려 자기 방 안에 갇혀 사는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자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바람난 가족》에서는 옆집 고등학생을 유혹하는 변호사 부인 역을,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이발사 부인을 연기한다.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영상예술학 영화제작 전공 과정)에서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하고, 석사 학위 논문 「단편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제작보고서-연출을 중심으로-」를 썼다. 2003년 정재일의 뮤직비디오 〈눈물꽃〉에 출연했고, 이를 연출한 영화 감독 장준환과 2006년 12월 24일 결혼했다. 문소리는 진보신당의 당원으로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덕양구 갑 국회의원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하였으며 2011년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 단일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멘토로 참여하기도 했다. 디지털 디지털(, )은 아날로그를 연속적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離散的)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용어는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digit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를 세는 데 쓰인다. 디지털 컴퓨터에서는 모든 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한다. 문서와 통계 자료뿐만이 아니라 음성 자료도, 영상 자료도 이산적인 값으로 처리한다. 디지털 자료는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음악이나 화상과 같은 일정한 주기로 아날로그 자료 샘플을 채집하여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을 샘플링이라 한다. 이 때, 초당 샘플링 회수는 아날로그 주파수보다 2배 더 높아야 앨리어싱 현상(계단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품질은 필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기계로는 모뎀이 있다. 헤르만 민코프스키 헤르만 민코프스키 (, 1864년 6월 22일 - 1909년 1월 12일)는 러시아 제국 태생 독일 수학자이다. 수론의 문제를 기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푸는 기하학적 수론, 수리물리학, 상대성 이론 등에 업적을 남겼다. 러시아 제국 카우나스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당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후 본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취리히 시절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민코프스키는 "n"개의 변수를 갖는 2차 형식(quadratic forms)을 연구하는 과정에 "n"차원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과 관련된 것을 알아차렸다. 1896년 출판한 저서 《수의 기하학》()에서 수론의 문제들을 기하학적인 방법과 연관시켰다. 1902년 당시 수학의 중심지였던 괴팅겐 대학교에 오랜 친구였던 다비트 힐베르트의 도움으로 수학 교수직을 얻어 연구하였다. 1907년에는 특수상대성이론이 민코프스키 공간이라 불리는 비유클리드 공간을 이용해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상관없는 두 개체가 아니라,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루며, 그를 통해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대칭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이 기하학적인 방법은 나아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1908년 9월 21일 민코프스키는 제80회 독일 자연과학자 모임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지금도 유명하다. 1909년 괴팅겐에서 사망하였다. 화성 화성(火星, )은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이다. 4개의 지구형 행성 중 하나다. 붉은색을 띠기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불을 뜻하는 화(火)를 써서 화성 또는 형혹성(熒惑星)이라 부르고, 서양권에서는 로마 신화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을 따 Mars라 부른다. 오늘날 영어에서 3월을 뜻하는 March도 여기서 생겼다. 지구와의 거리는 7800만 km이다 매리너 4호가 1965년에 화성을 처음으로 근접 비행을 하기 전까지 과학계 안팎의 사람들은 화성에 대량의 물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기대의 근거는 화성의 극지방에서 밝고 어두운 무늬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60년대 중반 이전까지 사람들은 농업을 위한 관개수로가 화성에 있으리라 기대하기까지 했다. 이는 사실 20세기 초·중반의 공상과학 작가들의 상상에 영향받은 것으로, 1950년대 이후의 탐사선에 의한 관측으로 화성 운하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물과 생명체의 발견에 대한 기대로 많은 탐사선들에 미생물을 찾기 위한 센서들이 탑재되어 화성에 보내졌다. 화성에서는 다량의 얼음이 발견되었고,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화성 표면에서의 액체상태의 물은 낮은 대기압으로 인하여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화성의 극관은 물로 구성되어 있어, 이 극관에 존재하는 물은 화성의 표면을 11m 의 깊이로 뒤덮기에 충분히 많은 양이 존재한다. 2016년 나사는 화성 표면 안에 얼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새로운 발표를 하였다. 화성의 자전 주기와 계절의 변화 주기는 지구와 비슷하다. 화성에는 태양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푸스 화산이 있으며, 역시 태양계에서 가장 큰 계곡인 매리너스 협곡과 극관을 가지고 있다. 화성은 밤하늘에 붉은 빛을 띄며 맨눈으로 쉽게 관측이 된다. 겉보기 등급은 -2.91등급이며 태양, 달, 금성, 목성 다음으로 밤하늘에 가장 밝은 천체이다... 화성은 붉게 타는 듯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표면적은 지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부피는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은 두 개의 작은 위성을 가지고 있다. 화성의 대기권은 매우 얇으며, 표면의 기압은 7.5밀리바밖에 되지 않는다. 화성 표면의 95%는 이산화탄소로 덮여 있으며, 이 밖에 3%의 질소, 1.6%의 아르곤과 흔적만이 남아 있는 산소와 2015년 NASA에서 발견한 액체 상태의 물이 포함되어 있다. 궤도선의 관측과 화성 기원의 운석에 대한 분석 결과에 의하면, 화성의 표면은 기본적으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화성 표면의 일부는 지구의 안산암과 같이 좀 더 이산화규소가 풍부하다는 증거가 있으나 이러한 관측은 규산염과 같은 유리의 존재를 통해서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표면의 대부분은 산화철의 먼지로 덮여있다. 화성의 표면에 일시적이나마 물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화성 표면에서 발견된 암염이나 침철석과 같이 대체로 물이 존재할 때 생성되는 광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성 자체의 자기장은 없지만, 과거 행성 표면의 일부는 자화된 적이 있음이 관측을 통해 밝혀졌다. 화성에서 발견된 자화의 흔적(고지자기)은 지구의 해양지각에서 발견되는 교대하는 띠 모양의 고지자기와 비교되어 왔다. 1999년에 발표되고 2005년에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로부터의 관측 결과의 도움으로 재검토된 이론에 따르면, 이들 지자기의 띠들은 과거에 있었던 화성의 판구조 활동의 증거일 수 있다. 극 이동(polar wandering)으로도 화성에서 발견된 고지자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화성의 내부를 설명하는 이론에 따르면, 화성 핵의 반지름은 약 1,480km로 주로 철과 15~17%의 황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화철의 핵은 부분적으로 용융되어 있으며, 지구의 핵에 비하면 가벼운 원소의 함량이 약 2배정도 된다. 핵은 규산염질 맨틀에 둘러싸여 있다. 맨틀은 화성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판구조 활동과 화산 활동을 일으켜 왔으나 현재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화성 지각의 두께는 약 50km이고, 최댓값은 125km정도이다. 화성의 지질 시대는 세 시대로 구분된다. 노아키안 시대는 노아키스 테라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성의 형성으로부터 38억~35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노아키안 시대의 표면은 많은 거대한 크레이터로 덮여 있다. 타르시스 벌지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의 후기에는 엄청난 양의 액체 물에 의한 홍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헤스퍼리안 시대는 헤스퍼리안 평원으로부터 이름이 붙여졌다. 35억 년 전부터 18억 년 전까지의 시대이다. 헤스퍼리안 시대의 화성에서는 넓은 용암대지가 형성되었다. 아마조니안 시대는 아마조니스 평원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억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대이다. 아마조니안 지역은 크레이터가 거의 없으나 상당한 변화가 있는 지형이다. 올림푸스 화산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용암류가 형성되었다. 마스 익스프레스 오비터의 OMEGA 가시광-적외선 광물학 매핑 스팩트로메터 자료를 기초로 또 다른 시대 구분이 제시되고 있다. 화성의 좌표를 설정하기 위하여서는 자오선과 0점 고도가 정해져야 한다. 화성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해수면'이 없어서, 0점 고도면이나 평균 중력 표면이 임의의 지점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적도와는 달리 경도의 기준점은 임의로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통된 규약을 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임의적으로 사이너스 메리디아니(Sinus Meridiani, 적도만('Equatorial Gulf')) 안의 분화구가 0점 자오선을 나타내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화성 지형의 몇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화성은 극 지방이 언 물과 이산화탄소를 포함하는 얼음 지대로 덮여 있다. 또한 화성에는 발레스 매리너리스(Valles Marineris) 또는 "화성의 흉터"라고 불리는 태양계에서 가장 큰 [협곡 지대]가 있다. 이 협곡 지대는 4000km의 길이에 깊이는 7km에 이른다. 화성 북반구와 남반구 지형의 비대칭성은 매우 인상적이다. 북쪽 부분은 용암층이 흘러내림으로 인해 평평하고, 남쪽은 고지대에 오래전의 충격으로 인해 구멍이 파이고 분화구가 생겨나 있다. 지구에서 본 화성의 표면은 확실히 두 부분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먼지와 산화철이 섞인 모래로 뒤덮인 좀 더 창백한 부분은 한때 '아라비아의 땅'이라 불리며 화성의 대륙으로 여겨졌고, 어두운 부분은 바다로 여겨졌다. 지구에서 보이는 가장 어두운 부분은 시르티스 메이저(Syrtis Major)이다. 화성에서 가장 큰 분화구는 헬라스 충돌 분지(Hellas impact basin)인데, 가벼운 붉은 모래로 덮여 있다. 화성 표면 지역의 이름을 짓는 작업은 국제 천문 연맹의 '행성계 명명법 워킹 그룹'이 담당하고 있다. 화성의 대기압은 0.7에서 0.9kPa로, 지구의 대기 밀도와 비교하면 1/100 정도로 매우 낮다. 대기가 적으므로 기압이 매우 낮고 물이 있더라도 기압 때문에 빨리 증발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과거의 화성은 물이 풍부하고 대기도 지금보다 컸으리라고 추측한다. 대기의 주성분인 이산화탄소가 얼어 거대한 극관을 형성하는 과정이 양극에서 교대로 일어나고 이산화탄소는 눈층을 형성하고 봄이 되면 증발한다. 아주 오래전 화성은 태양풍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자기권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40억 년 전 화성의 다이나모가 멈추고 난 뒤에는 투자율이 높은 광물에 잔류자기가 남아있는 정도밖에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광물은 풍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남반구의 고지의 일부에서만 고지자기를 관측할 수 있다. 태양풍은 화성의 전리층에 직접 닿기 때문에 화성의 대기는 조금씩 벗겨져 나가고 있다고 여겨지나 그 양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와 마스 익스프레스는 화성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이온화된 대기의 입자를 탐지하였다. 화성의 궤도 이심률은 약 9%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태양계에서 이보다 더 이심률이 큰 궤도를 가지는 행성은 수성밖에 없다.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약 2억 2천만 km(1.5 천문단위)이며, 공전 주기는 686.98일이다. 화성의 태양일(솔; sol)은 지구보다 약간 길어서 24시간 39분 35.244초 정도이다. 화성의 자전축은 25.19도만큼 기울어져 있어서 지구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 결과 화성에서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계절이 나타난다. 하지만 공전 각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계절의 길이는 지구에 비해 약 2배정도 된다. 포보스(Phobos)와 데이모스(Deimos)가 화성의 위성이다. 이들은 늘 달 쪽으로 같은 면을 향하고 있다. 포보스의 화성 주위 궤도가 화성 자체가 도는 속도보다 빠르며 아주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는 포보스가 화성 표면에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반면에 데이모스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고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두 위성은 모두 1877년 미국인 천문학자 아사프 홀(Asaph Hall)이 발견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의 두 아들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액체상태의 물의 존재를 가지고 생명가능성을 논의한다. 이러한 생명가능성을 논하는 곳은 생명가능지대의 안에 존재하는 곳이다. 태양의 생명가능지대는 금성을 넘은 곳 부터 시작하여 화성 부근 까지 존재한다. 화성은 근일점에 도착하였을때, 이 지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화성의 옅은 대기가 액체상태의 물이 화성의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화성의 과거 물의 흐름은 생명거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근 연구는 화성에 존재하는 물은 너무 염도가 높거나 산도가 높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화성에는 자기권이 없기 때문에 강렬한 태양풍을 막을 수 없다. 또한 화성의 옅은 대기로 인한 낮은 대기압으로 화성의 표면에 액체상태의 물의 형태가 유지 될 수 없다. 지질학적으로 화성의 화산 활동은 종결되어 화성의 내부 화학물질이 화성의 표면으로 순환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화성의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증거로부터 미루어 볼 때 화성이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실제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바이킹 탐사선은 70년대 중반에 화성 표면에서 미생물을 탐지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하여, 과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 존슨 우주센터 연구소는 화성에서 날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 AL 빨리 분해되기 때문에 소량의 이들 분자는 화성에 생물이 사는 증거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들 원소는 화산이나 사문함화작용 같은 지질학적 작용에 의해서도 공급될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물이 흘렀던 적이 있기는 하다. 화성에는 또한 자기권이 없으며 대기가 희박하며, 지각 열류량은 매우 적으며, 외부의 운석 또는 소행성들과의 충돌~ 또는 태양풍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지질활동이 멈춘 화성의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생명활동에 의해서만 공급되므로, 안면석이나 화성 피라미드와 같은 음모론적인 가설도 있으나 과학적인 의미로 주목받지는 못하다. 화성 탐사 지금까지 인류는 다수의 로봇 탐사선을 화성에 보냈고, 그중 몇몇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탐사의 실패율은 매우 높았다. 실패 사례 중 몇은 명백한 기술적 결함에 따른 것이었지만, 많은 경우 연구자들은 확실한 실패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례는 지구-화성 "버뮤다 삼각지대" 혹은 화성탐사선을 먹고 사는 은하귀신(Ghoul)라는 농담을 낳았다. 화성 로봇 탐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사 시간대가 약 2년 남짓(화성의 공전 주기)의 기간을 주기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1960년 소련은 두 기의 탐사선을 화성궤도를 지나쳐 돌아오는 계획으로 발사하였으나, 지구궤도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한다. 1962년 소련은 세 기를 더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두 기는 지구 궤도에 머물렀고, 나머지 하나는 화성을 돌아오는 동안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졌다. 1964년에 또 한번의 시도가 실패한다. 1962년에서 1973년 사이에, NASA(나사)의 제트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는 내태양계(inner solar system)를 탐험할 10개의 매리너 우주선을 설계·제작하였다. 이 우주선은 금성, 화성, 수성을 최초로 탐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매리너 우주선은 비교적 작은 로봇 탐사선으로 아틀라스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각 우주선의 무게는 0.5톤을 넘지 않았다. 매리너 3호와 4호는 동일한 기체로, 최초로 화성을 지나치며 관찰하도록 설계되었다. 매리너 3호는 1964년 11월 5일 발사되었으나, 우주선의 윗부분을 덮은 뚜껑이 적당히 열리지 않았고, 화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3주 후 1964년 11월 28일 매리너 4호는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8개월의 항해를 시작한다. 매리너 4호는 1965년 6월 14일 화성을 지나며, 다른 행성의 근접 사진을 최초로 찍어냈다. 오랜 기간 동안 작은 테이프 레코더에 기록된 그 사진들은 달 모양의 분화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 분화구 들 중 몇몇은 서리가 덮여 추운 화성의 밤을 보여주었다. NASA는 계속해서 매리너 계획을 수행했다. 그들은 다음 발사 시간대에 근접 비행 시험을 또다시 수행하였다. 이 비행선들은 1969년에 화성에 도달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매리너 6호 와 7호를 참조하라. 다음 발사 때 매리너 계획은 두 대의 비행선 중 한 대를 잃는 사고를 겪었다. 살아남은 매리너 9호는 성공적으로 화성 궤도에 진입하였다. 매리너 9호가 화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과 두 대의 소련 인공위성은 행성 전영역에 걸쳐 먼지 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폭풍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매리너 9호는 포보스의 사진을 찍었다. 폭풍이 화성의 표면 사진을 찍기에 충분할 만큼 가라앉았을 때, 전송된 사진은 이전 임무의 결과로 온 사진보다 더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화성에 한때 액체 형태의 물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증거하는 첫 번째 사진이었다. 1976년에 두 대의 바이킹 호가 화성 궤도에 들어가 각각 착륙 모듈을 내려 화성 표면에 내려 앉았다. 이 임무를 통해 인류는 첫 번째 컬러 사진과 더욱 확장된 과학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화성 탐사 계획에서 발사한 우주선들은 바이킹보다 몇 년 일찍 수많은 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매리너 계획이 수행했던 것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마스 패스파인더는 1997년 7월 4일에 화성에 착륙하여, 소저너라는 매우 작은 원격 조정체를 움직여 착륙 지점 주위의 몇 미터를 여행하고, 화성의 환경 조건을 탐색하고 표면의 돌들을 수집해왔다. 다음 탐사는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Mars Global Surveyor)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임무는 20여 년간의 화성 탐사역사에서 첫 번째로 성공적인 것이었고, 1996년 11월 7일에 발사되어 1997년 9월 12일에 화성 궤도에 도달하였다. 1년 반 정도가 흐른 후, 회전 궤도가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자리를 잡았고, 우주선은 1999년 3월부터 기초적인 매핑 임무에 돌입했다. 우주선은 화성을 화성력으로 1년, 지구력으로는 거의 2년간 저고도에서 관찰했다.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호는 최근인 2001년 1월 31일 그 기초적인 임무를 완료하고 현재는 2단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탐사는 화성 표면, 대기권, 그리고 내부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지난 탐사 계획에서 거둬들인 모든 결과물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가져왔다. 이 가치있는 데이터들은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MOLA 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7월 31일 미국 국립항공우주국은 화성탐사선 피닉스가 화성에 물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했다. 피닉스는 2008년 11월 10일 임무가 종료되었다. 기원전 1600년경에 화성에 대한 관측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화성은 불과 같이 붉게 빛나고 다른 천체와 달리 하늘에서 이상하게 움직인다고 알려졌다. ※ 동양의 고대기록에는 낮에 화성을 본 것이 있으나, 검증결과 금성의 착오였으며, 화성을 낮에 맨 눈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비트 힐베르트 다비트 힐베르트( , 1862년 1월 23일~1943년 2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다.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에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형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인 기하학을 공리화하였으며, 힐베르트 공간을 정의하여 함수해석학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전 수학계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사후에도 힐베르트 문제를 통해 수학계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오토 힐베르트()와 마리아 힐베르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지만,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1880년 힐베르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힐베르트는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였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원주율의 초월성을 증명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가 사강사로 부임하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힐베르트는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힐베르트는 1885년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갔다. 1886년 펠릭스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났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였다. 1888년 초에 힐베르트는 파울 고르단()을 만나 소위 "고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헤르만 폰 헬름홀츠,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레오폴트 크로네커 등을 방문하고,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힐베르트는 1892년 30세의 나이로 혼인하였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에는 e와 원주율의 초월성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발표하였다. 곧 뮌헨으로 떠난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되었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5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래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공저로 계획되었는데, 민코프스키는 자신의 몫을 작성하지 못하였고, 1897년 4월 힐베르트는 자신이 작성한 부분만을 출판하였다. 이는 정수론에 대한 교재로서 수학계의 명성을 얻었다. 1898년 ~1899년 겨울 학기에는 기하학의 기초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그 강의록을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성질을 제시하였다. 그 뒤 힐베르트는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였고, 또한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세계 수학자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힐베르트는 20세기 수학의 가장 큰 과제들을 선별한 23개의 힐베르트의 문제들을 발표하였다. 이 문제들은 20세기 수학의 주된 흐름을 예견하였고, 새로운 수학적 분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1901년 힐베르트는 에리크 이바르 프레드홀름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 내용은 1912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1902년 베를린으로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 대학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의 문제를 증명하였다. 1909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수학뿐만 아니라, 힐베르트는 물리학의 공리화를 꿈꾸었다. 물리학의 공리화는 힐베르트의 6번 문제였고, 이 문제의 일환으로 힐베르트는 중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15년 11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출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뒤 라위트전 브라우어르 등은 직관주의를 주장하였고, 고전적 수학의 귀류법 등 여러 증명법들을 배척하였다. 힐베르트는 직관주의에 대응하여 수학은 공리계를 통한 수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식주의를 주장하였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 해 쾌유하였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하였다. 힐베르트는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였고, 같은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1931년에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여, 힐베르트가 꿈꾸었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힐베르트는 불완전성 정리를 피하기 위하여,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HTML HTML은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 )라는 의미의 웹 페이지를 위한 지배적인 마크업 언어다. HTML은 제목, 단락, 목록 등과 같은 본문을 위한 구조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링크, 인용과 그 밖의 항목으로 구조적 문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지와 객체를 내장하고 대화형 양식을 생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HTML은 웹 페이지 콘텐츠 안의 꺾쇠 괄호에 둘러싸인 "태그"로 되어있는 HTML 요소 형태로 작성한다. HTML은 웹 브라우저와 같은 HTML 처리 장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자바스크립트와 본문과 그 밖의 항목의 외관과 배치를 정의하는 CSS 같은 스크립트를 포함하거나 불러올 수 있다. HTML과 CSS 표준의 공동 책임자인 W3C는 명확하고 표상적인 마크업을 위하여 CSS의 사용을 권장한다. 1980년,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계약자였었던 물리학자 팀 버너스리가 HTML의 원형인 인콰이어를 제안하였다. 인콰이어는 CERN의 연구원들이 문서를 이용하고 공유하기 위한 체계였다. 1989년에 팀 버너스리는 인터넷 기반 하이퍼텍스트 체계를 제안하는 메모를 작성했다. 버너스 리는 1990년 말에 HTML을 명시하고, 브라우저와 서버 소프트웨어를 작성했다. 그 해에 버너스리와 CERN 데이터 시스템 엔지니어 로버트 카일리아우와 함께 CERN측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 프로젝트는 CERN으로부터 정식으로 채택 받지 못했다. 버너스리의 개인적인 기록 에 1990년부터 "하이퍼텍스트가 사용되는 여러 분야의 일부"를 열거했고 백과사전을 그 목록의 첫 번째로 두었다. HTML 최초의 일반 공개 설명은 1991년 말에 버너스리가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문서를 "HTML 태그"("HTML tag")로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머릿글자로 이루어진 20개의 요소를 기술하였고, 상대적으로 HTML의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하이퍼링크를 제외한 HTML 태그들은 CERN 자체의 SGML 기반 문서화 포맷인 SGML GUID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이 요소 중 13개는 HTML 4 버전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HTML은 동적인 웹 페이지의 웹 브라우저를 통한 문자와 이미지 양식이다. 문자 요소의 대부분은 1988년 ISO 기술 보고서 9537 "SGML을 이용한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GML 개념의 일반적인 마크업은 단지 개별 효과 보다는 요소 기반이고 또한 구조와 처리의 분리(?)(HTML은 CSS와 함께 이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해 왔다.) 버너스리는 SGML 응용 프로그램이 되는 HTML을 고안해야 했고 그것은 공식적으로 IETF(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에 의하여 1993년 중반, HTML 규격에 대한 최초의 제안을 간행물로 정의했다. (버너스리와 덴 콘놀리에 의한 문법을 규정하는 SGML 문서 형식 정의(SGML DTD)가 포함된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HTML)" 인터넷 초안) 이 초안은 6개월 후 만료된다. 하지만 NCSA 모자이크 브라우저의 인라인 이미지를 내장하는 사용자 정의 태그의 사례는 주목할 만 했고, 성공적인 프로토타입에 대한 표준을 기반한 IETF의 철학을. 이후 1994년 초 HTML과 HTML+ 초안은 만료되었고, IETF는 HTML 작업 그룹을 설립해 1995년에 HTML 2.0을 완성한다. 최초의 HTML의 규격은 미래에 수행될 HTML 표준을 기반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RFC 1996년에 HTML 2.0은 HTML과 HTML+ 초안의 아이디어가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HTML 2.0 지정은 이전의 초안들로부터 새로운 버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IETF의 후원하에 개발은 상충하는 이해 관계 때문에 지연되었다. 1996년부터 HTML 규격은 상용 소프트웨어 제작사의 투입으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에서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00년부터 HTML 또한 국제 표준(ISO/IEC 15445:2000)이 되었다. 현재 W3C에 의해 발표된 최신 규격은 1999년 말에 발표된 HTML 4.01 권고안이며 2001년에 문제와 오류들이 수정되어 발표된 안이 최종 승인되었다.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은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이 버전이 증가되지 않고 조금 수정되어 재발표되었다. 이 W3C 권고안으로 출시되었다. HTML 4.0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문서 형태를 제공한다. 그리고 2001년 5월 12일에 그것에 대한 최종 오류 수정 사항 이 발표되었다. ("ISO HTML", HTML 4.01 Strict 기반)이 ISO/IEC 국제 표준과 함께 출시되었다. ISO에서 이 표준안은 ISO/IEC JTC1/SC34 (ISO/IEC 공동 기술 위원회 1, 소위원회 34 - 문서 표현과 처리 언어)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XHTML은 XML 1.0을 이용하여 HTML 4.01을 새로 만든 독립된 언어다. HTML 마크업은 HTML 요소(엘리먼트, )와 그들의 속성()과 문자 기반 데이터 형태와 문자 참조와 엔티티 참조를 포함하는 몇 가지 핵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또 다른 중요한 구성 요소로는 문서 형식 정의(DTD, )를 명시하는 문서 형식 선언()이다. 차기 HTML 5에서는 DTD를 지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직 레이아웃 모드로 지정된다 . Hello world 프로그램은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크립트 언어 그리고 마크업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HTML에서의 Hello world 프로그램은 단 9줄에 불과하다: (사이의 문자는 웹 페이지를 표현한다. 와 사이의 문자는 표시되는 페이지의 내용이며, 와 사이의 문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웹 페이지를 표현하기위해 필요한 해더 정보를 담고 있다.사이의 문자는 웹 브라우저의 페이지 제목을 정의하는데 사용된다.)Hello world 프로그램을 최대로 짧게 만들고 싶다면: 이라고 해도 되지만, 웹 표준에 위배된다.이 문서 형식 정의는 HTML 5이다. 만약 codice_1로 선언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브라우저는 "쿽스 모드"로 렌더링한다. HTML 문서는 완전한 HTML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HTML 요소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다: "시작 태그"(Start Tag)와 "종료 태그"(End Tag) 와 같은 태그 한 쌍; 몇 가지 요소 속성은 그 태그들 내에서 특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문자와 그래픽 정보 "콘텐츠"를 화면에 표현한다. HTML 요소는 태그의 사이와 포함되는 모든 것이다. 태그는 꺾쇠괄호(<>)로 둘러싸인 키워드이다. "보이는 내용" HTML 요소의 이름은 태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종료 태그의 이름은 슬래시 문자 ("/")로 시작된다. "보이는 내용" 속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시작 태그의 기본값을 사용하게 된다. HTML의 머리부분 (...), 보통 제목은 의 안에 포함된다. 예제: 새 줄(
),
간의 차이점은 'br'은 페이지의 의미론적 구조를 변경하지 않는 줄바꿈(breaks a line)인 반면 'p'는 단락으로 페이지를 구분한다. 주석은 코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웹 페이지에는 표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요소 속성들은 이름-값 형태이고, "="로 구분하고, 요소의 시작 태그 안에서 요소의 이름 다음에 쓰인다. 값은 외따옴표 또는 쌍따옴표로 둘러쌀 수 있다. 비록 어떤 문자로 구성된 값들이 HTML에서 인용부호 없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XHTML에서는 허용되지 않음), 그 값은 따옴표나 쌍따옴표 또는 쌍 인용부호로 둘러쌀 수 있다.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속성값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이름값 쌍 속성과 대조하여, 요소 태그의 시작에 단순히 그 존재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태그가 있다. 대부분의 요소는 몇 가지 일반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단축 요소(codice_31)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속성을 설명하는데 쓰일 수 있다: 이 예제는 대부분의 브라우저에서 HTML처럼 보인다. 이 단축에 커서를 가리키면 그 제목인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가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요소 또한 언어와 관련된 속성인 codice_32과 codice_33을 취한다. HTML은 스크립트 데이터와 스타일시트 데이터, 그리고 ID, 이름, URI, 숫자 길이의 단위, 언어, 미디어 기술자, 색상, 문자 인코딩, 날짜와 시간 등을 포함하는 속성 값의 종류를 위한 몇 가지 데이터 형태를 정의 내린다. 이러한 모든 데이터 형식은 문자 데이터를 최적화하기 위하여 분리되었다. HTML 문서는 문서 형식 선언 (비공식적으로, "doctype")으로 시작해야 한다. 브라우저에서 doctype의 기능은 렌더링 모드를 지시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쿼크 모드를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doctype의 원래의 목적은 문서 형식 정의 (DTD)에 기반한 SGML 도구를 통하여 HTML 문서의 파싱과 유효 여부 확인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DOCTYPE에 대한 DTD는 DTD에 순응하는 문서를 가진 허용 또는 금지된 내용을 지정하고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문법을 포함하도록 지시한다. 반면 브라우저는 HTML을 SGML의 애플리케이션으로 수행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DTD를 읽지 않는다. HTML 5는 기술적인 제한으로 인해 DTD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HTML5에서 doctype 선언 codice_1는 DTD를 참조하지 않는다. HTML 4 doctype의 예제는 다음과 같다. 이런 선언은 엄격한 HTML 4.01을 만들기 위해 DTD를 참조한다. 이것은 선언적인 요소인 codice_35 같은 요소는 포함하지 않으며, CSS나 codice_36, codice_37 요소는 유지한다. SGML 기반의 유효 확인자(validator)들은 문서를 적절히 해석하거나, 유효 여부 확인을 실행하기 위해 DTD를 읽는다.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이 doctype은 쿼크 모드에 반대되는 표준 모드를 활성화한다. 게다가 HTML 4.01은 임시적이고 프레임 단위의 DTD를 제공한다. HTML 문서를 다른 컴퓨터 파일과 같은 방법으로 전송할 수 있다. 하지만 HTML 문서들은 대부분 웹 서버에 의한 HTTP나 또는 이메일을 통하여 전송된다. 월드 와이드 웹은 주로 웹 서버에서 하이퍼텍스트 전송 프로토콜 (HTTP)을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로 전송되는 HTML 문서를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HTTP는 HTML 이외에도 이미지나 소리, 그리고 기타 내용물을 서비스하는 데 사용된다. 브라우저가 받는 각 문서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게 하기 위해, 다른 정보가 문서와 함께 전송된다. 이 메타데이터는 보통 MIME 타입 (예, codice_38 or codice_39)과 문자 인코딩을 포함한다. (HTML에서 문자 인코팅 참조) 최근의 브라우저에서 HTML 문서와 함께 전송되는 MIN 타입은 문서가 초기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X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문서는 잘 구성된 XML로 기대되며, 문법 오류는 브라우저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HTML MIME 타입과 함께 전송된 동일 문서가 HTML에 관대한 브라우저에서는 성공적으로 출력될 것이다. W3C 권고안에서는 권고안 부록 C에 나오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XHTML 1.0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다. 현재의 XHTML 1.1 작업 초안은 또한 XHTML 1.1 문서는 MIME 타입으로 표시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래픽 이메일 클라이언트는 단순 텍스트로는 불가능한 어휘적 마크업과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종종 정의되지 않는 HTML 부분집합 사용을 허용한다. 이것은 색상 제목, 강조, 인용문, 인라인 이미지와 도표와 같은 인쇄정보를 포함한다. 그러한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HTML 이메일 메시지를 작성하는 GUI 편집기와 그것을 해석하여 보여주기 위한 렌더링 엔진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자 메일에서 HTML를 포함시키는 것은 호환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피싱 공격의 은닉을 도와줄 수 있고, 스팸 필터를 혼동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단순 텍스트보다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웹 문서의 가장 일반적인 파일 확장자는 codice_40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codice_41라고도 하며, DOS나 FAT와 같은 초기 운영 체제와 파일 시스템이 파일 확장자를 3자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HTML 애플리케이션 (HTA; 파일 확장자 ".hta")는 애플리케이션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위해 브라우저에서 HTML과 DHTML을 사용하는 윈도용 애플리케이션이다. 정상적인 HTML 파일은 웹 서버와 통신하면서, 웹페이지 객체와 HTTP 쿠키만 다루는 웹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에 제한된다. HTA는 완벽히 신뢰된 애플리케이션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파일의 생성/편집/제거와 윈도 레지스트리 엔트리에 보다 더 많은 특권을 가진다. 그 까닭은 그것은 브라우저의 보안 모델 외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HTA는 HTTP를 경유하여 실행되지 않지만, 실행 파일과 같이 다운로드가 될 수 있으며, 로컬 파일 시스템에서 실행된다. 몇 가지 위지위그(What You See Is What You Get, WYSIWYG) 편집기는 HTML 문서를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직관적으로 나타내고 편집기가 HTML 문서로 생성하여 더 이상 사용자가 HTML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웹 페이지 편집은 위지위그 편집 방식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생성된 코드의 질이 낮았고 위지윔(What Your See IS What You Mean, WYSIWIM)방식으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목소리 늘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다. 위지위그 편집기는 다음과 같은 결함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위그 편집기가 페이지를 작성하는데 편리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HTML에 대한 상세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위지위그 방식이 웹 저작을 지배하고 있다. 웹 브라우저 웹 브라우저 또는 브라우저(, )는 웹 서버에서 이동하며(navigate) 쌍방향으로 통신하고 HTML 문서나 파일을 출력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반의 응용 소프트웨어이다. 웹 브라우저는 대표적인 HTTP 사용자 에이전트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요 웹 브라우저로는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인터넷 익스플로러/마이크로소프트 엣지, 오페라, 사파리가 있다.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1990년에 팀 버너스 리가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W3C의 감독자로서 웹의 지속적인 발전을 감독하며, 월드 와이드 웹 재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의 브라우저는 월드와이드웹으로 불리다가 넥서스(Nexus)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면서 대중이 사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웹 브라우저는 Erwise이다. Erwise의 개발은 로버트 카이유가 시작하였다. 웹 브라우저는 웹 페이지를 가져오기 위해(웹 문서를 열기 위해) 대부분의 웹 서버가 사용하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로 통신한다. HTTP를 이용해 웹 페이지를 가져올 뿐 아니라 웹 서버에 정보를 송신하기도 한다. 작성한 시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HTTP는 HTTP/1.1로 RFC 2616에 정의되어 있다. HTTP/1.1은 현 세대의 다른 브라우저와는 달리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완벽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페이지들은 주소처럼 이용되는 URL(uniform resource locator)을 통해 장소가 정해지고, HTTP 접근을 위해 "http:"로 시작된다. 많은 브라우저가 FTP를 위한 "ftp:", HTTPS(암호화된 HTTP)를 위한 "https:"와 같은 다양한 URL 종류와 대응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웹 페이지의 파일 포맷은 보통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이 쓰이고 HTTP 프로토콜의 MIME "content type"에 의해 확인된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는 HTML 외에 JPEG, PNG, GIF 이미지 포맷들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플러그인을 통해 확장할 수 있다. HTTP의 "content type"과 URL 프로토콜 명세의 조합으로 웹 페이지 설계자들은 이미지, 애니메이션, 동영상, 소리, 스트리밍 미디어 등을 웹 페이지에 덧붙이거나 웹 페이지를 통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초기의 웹 브라우저는 단순한 HTML만을 지원했다. 독점적인 웹 브라우저의 빠른 개발로 HTML의 비표준 확장이 많이 이루어졌고, 웹 호환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다. 현대의 웹 브라우저들은 모든 브라우저에서 동일하게 표시되어야 할 표준 기반의 HTML과 XHTML(HTML 4.01에서 출발한)을 지원한다. 부가적으로 유즈넷 뉴스나 IRC(Internet relay chat), 이메일 등을 지원하는 브라우저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NNTP, SMTP, IMAP 등의 프로토콜 지원이 포함된다. 브라우저 간의 차이는 그들이 지원하는 기능에 따라 구별된다. 오늘날 브라우저와 웹 페이지는 웹 초기에는 없었던 기능과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라우저 전쟁 때 브라우저와 월드 와이드 웹에는 확장 기능이 급속도로 무질서하게 생겨났다. 아래는 특징이 있는 기능에 대한 목록이다.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008년 말까지는 7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파이어폭스, 사파리, 구글 크롬 등 새로운 웹 브라우저들이 나오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계속해서 떨어져 2011년 12월, 38%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음으로 크롬 27%, 파이어 폭스 25%로 뒤따랐다. 그 후, 2013년 8월 18일 시점으로 크롬의 점유율이 43.17%로 1위이며,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5.03%, 파이어 폭스가 19.31%, 사파리 8.65% 오페라 1.14%의 순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인터넷 익스플로러(, I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 체제에 이 소프트웨어를 기본으로 포함하기 시작하며 사용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1999년 이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웹 브라우저가 되었고, 2002년과 2003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5, 6 버전의 사용률이 정점에 이르러 95%에 달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이외의 플랫폼에서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지원을 중단하고,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 대체 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후기 버전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공개되지 않은 윈도우 97의 주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개념이 자리잡혀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윈도우 95의 연장선으로 그려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1994년 여름에 토마스 리어돈(Thomas Reardon)이 시작하여 벤자민 슬리브카(Benjamin Slivka)가 주도하였다. 소스 코드는 스파이글래스사에서 도입했다. 이 소스는 초기 상용 웹 브라우저였던 모자이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한때 맥 OS, 유닉스 등에 사용할 수 있는 버전을 개발해 배포했지만 오래전부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를 위한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개발하지 않았다. 맥 OS용도 2006년 1월 31일부터 개발하지 않고 있고 다운로드 또한 중지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은 1995년 8월에 공개되었으며,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의 수정된 버전이다. 버전 1은 윈도우 95 플러스 팩과 OEM 버전에 포함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5는 몇 개월 뒤에 윈도우 NT용으로 개발되었으며 기본 표 렌더링을 지원하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2와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2는 윈도우 95 OSR1, 윈도우 NT 4.0 영어판 두 곳에 포함되었으며. SSL 프로토콜 등의 기능을 지원했으며. 맥 OS도 지원했던 브라우저다. 윈도우 1.0, 윈도우 2.0, 윈도우 2.1x, 윈도우 3.0,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 윈도우 95, 인터넷 익스플로러 1과 같이 지원이 2001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3은 1996년 8월 13일에 공개되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최초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되었다. 윈도우 95 OSR2, 2.1, 윈도우 NT 4.0 한글판에 기본 내장되어있고, 버전 3에서는 HTML 3.2 및 액티브엑스 제어와 자바 애플릿의 실행 환경을 갖추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에 견줄 만한 기능까지 만들었다.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 RTM과 같이 지원이 2004년 6월 30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는 1997년 9월에 공개되었으며, 윈도우 95 OSR2.5, 윈도우 98에 기본 내장되어 있다. 버전 4부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윈도우 NT 4.0 서버, 윈도우 NT 4.0 워크스테이션, 윈도우 2000 서비스팩 1과 같이 지원이 2004년 12월 31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5는 1999년 3월 18일에 공개되었으며 5.0은 윈도우 98 SE에 5.01은 윈도우 2000에 포함되어 있다. 이 버전은 윈도우 3.1x, 윈도우 NT 3.1, 윈도우 NT 3.5, 윈도우 NT 3.51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0년 7월에 나온 인터넷 익스플로러 5.5는 인쇄 미리 보기, CSS, HTML 표준 지원, 개발자 API가 개선되었으며 128 비트 암호화를 지원한다. 이 버전은 윈도우 ME에 기본 포함되어 있었고, 윈도우 95에서 지원했던 마지막 버전이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윈도우 XP 출시 몇 개월 전인 2001년 8월 27일에 공개되었다. 이 버전은 DHTML 향상, 콘텐츠 제한 인라인 프레임, CSS 수준 1, DOM 수준 1, SMIL 2.0의 부분 지원을 포함하고 있다. 2001년에 출시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이 포함되어 있다. 그 뒤에 버전 6.0 서비스 팩 1이 배포 되었으며, 이 버전은 윈도우 98, 윈도우 98 SE, 윈도우 ME, 윈도우 NT 4.0, 윈도우 2000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2에 인터넷 익스플로러 6.0 서비스 팩 2가 포함되었고, 이는 다른 운영 체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용이 쉬었으나 웹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은 보안상의 문제로 2006년 PC월드 '전대 미문의 최악의 기술' 25위 중 8위에 선정된 바가 있으며, IE6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또는 8로 업그레이드 하거나 모질라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애플 사파리 등 다른 브라우저 사용을 권고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은 오랜 공백을 깨고 2006년 10월 18일에 공개되었다.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에는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버전 6에까지 제공되지 않던 탭 기능과 피싱 필터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되었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2009년 3월 19일 (한국시간)에 정식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 표준 모드"로 알려진 새로운 렌더링 모드를 포함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의 개인 베타 버전의 공개에 대한 초대장을 제공하였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액티브X 기능을 최소화시키기로 했으므로 액티브X 기술을 많이 사용하는 한국 사이트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며,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XP용은 윈도우 XP, 오피스 2003 그리고 윈도우 XP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4년 4월 8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은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같이 지원이 2015년 7월 14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9는 2011년 3월 14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웹 표준을 보다 준수하여 Acid 3에서는 95/100으로 이는 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8보다 높은 수치이다. 일부는 한국에서 호환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부 사이트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9부터는 GPU 가속의 지원으로 CPU 뿐만 아니라 GPU도 함께 쓰고 이 기술이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에서는 지원하기 힘들다는 문제로 윈도우 XP, 윈도우 서버 2003, 윈도우 서버 2003 R2는 지원 대상에는 제외되었다.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만 지원하며,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을 지원하는 마지막 웹 브라우저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고, 윈도우 비스타용은 윈도우 비스타와 같이 지원이 2017년 4월 11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08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종료될 예정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스베이거스의 MIX 11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을 발표하면서 최초의 플랫폼 프리뷰를 공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이 개발에 3주 정도 걸린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번 출시는 CSS3 그라디언트를 포함한 표준 지원을 더 개선한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톱 모드에서는 액티브X를 지원하지만 모던 UI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은 9와 달리 한국의 대부분의 웹에서 호환성 문제를 일으키며 급기야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으로의 업데이트를 막는 킷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기도 했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 윈도우 8용은 윈도우 XP 임베디드, 윈도우 8과 윈도우 비스타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7과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8, 그리고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16년 1월 12일 종료되었으며, 윈도우 서버 201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1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종료될 예정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11 빌드가 2013년 3월 유출된 윈도우 8.1 업데이트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빌드에는 탭 동기화를 위한 불완전한 매커니즘을 포함하며 자체 사용자 에이전트에서 "Gecko"와 비슷한 것으로 식별한다. 나중에 나온 빌드들에는 SPDY, 확장된 개발 도구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며 웹GL 지원도 제공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한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를 지원하는 마지막 인터넷 익스플로러다.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R2용은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08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9와 같이 지원이 2020년 1월 14일,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R2용은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12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10과 같이 지원이 2023년 1월 10일, 윈도우 서버 2016용은 윈도우 서버 2016과 같이 지원이 2027년 1월 12일 종료될 예정이다. 그러나 윈도우 10용과 윈도우 서버 2019용은 해당사항이 없다. 모든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일부 지원이 종료된 경우 - 표시가 붙는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모바일(Internet Explorer Mobile)은 윈도우 모바일을 위한 웹 브라우저이다. 윈도우 모바일 5.0 이전에는 포켓 인터넷 익스플로러(PIE)라고도 불렸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폰에서도 쓰인다. 다만 윈도우 10 모바일에서 보조프로그램으로 격하되고, 모바일에선 CPU 미지원으로 액티브X를 쓸 수 없다. 윈도우 서버 2003 이후부터 제공되는 보안 설정이 강화된 서버용 한정판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과거에는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브라우저였다. 그러나 파이어폭스, 오페라, 구글 크롬 등 다른 웹 브라우저들의 시장 점유율이 오름에 따라 2004년 90%에 육박하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떨어져서 2008년에는 모든 버전을 합쳐서 60% 후반대를 유지하였다. 2011년 3월 14일 인터넷 익스플로러 9가 정식 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의 시장 점유율은 반등하지 못하고 계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날 스탯카운터 통계 기준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은 30% 후반대를 머물고 있다. 2016년이후부터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10%이하로 내려갔다. 스탯카운터의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월부터 8월까지 대한민국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체 버전 점유율은 매달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처음으로 90% 아래로 떨어졌다. 2011년 12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버전별 점유율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이 46.48%로 가장 높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7 13.43%, 인터넷 익스플로러 9 13.06%, 인터넷 익스플로러 6 7.99% 순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전 세계에 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 한 브라우저의 점유율이 매우 높고, 구 버전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점유율도 높기에 웹 표준 문제가 지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시장 점유율은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2019년 4월기준 점유율은 24.6%대로 구글 크롬(63.6%)에 이어서 아직까지는 2위로 사용빈도가 있다. 2014년 4월 26일, 마이크로스프트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6부터 11까지 버전에서 "원격 코드 실행" 취약점을 발표했다. 2014년 4월 28일, 미 행정 부처인 국토안보부의 산하 컴퓨터 긴급 대응팀인, 미국 컴퓨터 긴급 대응팀 (이하, US-CERT)은 성명을 통해 주의보를 내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외부의 프로그램이나 사용자가 "시스템에 접근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취약하다라고 전했다. US-CERT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보안의 취약점으로부터의 공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 사안을 검토하고, 버그를 고칠때 까지 다른 브라우저를 사용하라고 권고하였다. 영국 국립 컴퓨터 비상상황 대응 팀 (The UK National Computer Emergency Response Team) (이하, CERT-UK)는, 자문 발행물을 통해, 예상되었던 우려이며,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추가적인 단계의 백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백신을 최신상태로 유지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이버 보안 회사인 시만텍은, "Windows XP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이는 온라인 뱅킹 호환성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대다수 웹사이트 개발자들이 여러 웹 브라우저와 운영 체제들의 호환성을 고려하지 않고 ActiveX를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것도 그 까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웹 호환성 문제를 참고.) 다만 현재는 여러 대체 브라우저를 지원하는 웹사이트가 많아지고 어떤경우에는 아예 익스플로러만 지원하지 않게하는 웹사이트도 늘어나면서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줄어들었다. 1932년 1932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2000년 2000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며, 이 해는 20세기와 제2천년기의 마지막해이기도 하다. 21세기의 시작은 2001년 1월 1일이며,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문화적이나 상업적으로 연도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두기 위해 2000년 1월 1일을 21세기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미국 정부 등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 발표 또는 사실로 확정하기도 하였다. 단, 미국은 나중에 이를 수정하여 2001년이 21세기의 시작이라고 발표하였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25일 본인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는 3년뒤인 2001년에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잘못된 거짓 논란이다. 20세기는 1901년 1월 1일부터 2000년 12월 31일까지의 기간이며, 제2천년기의 마지막 세기이다. 밀레니엄의 시작점은 2001년 이다.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코퍼레이션()는 미국의 세계 최대의 다국적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기업이다. 기업명의 공식 약칭은 MS이나, 대한민국에서는 마소로도 불린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양한 컴퓨터 기기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제품들을 개발, 생산, 판매, 관리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가장 유명한 제품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라는 운영 체제이다. 1975년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위해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Micro-soft라는 이름으로 이 회사를 세웠다. 2006년 6월 15일 빌 게이츠는 2008년 7월 31일에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후 직접 세운 자선 단체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전력하겠다고 밝혔으며,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빌 게이츠의 대학 시절 친구인 스티브 발머가 사장직을 담당했다. 2009년경, 빌 게이츠가 그의 오른팔인 스티브 발머에게 회사의 최고 리더십을 양하는 과정에서 바통을 정확히 넘기는 방법에 관한 교본을 마련하기도 했다. 게이츠는 2000년 발머에게 CEO직을 넘겼다. 그러나 게이츠는 2008년 6월에야 회사의 일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 그 2년 전에 미리 이 사실을 알려 대비토록 한 바 있다. 그렇지만 게이츠는 여전히 워싱턴 주 레이먼드에 있는 회장실의 주인이다. MS는 발머의 인도 아래 세계 최고 수익성을 갖는 강력한 IT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2008년 여름 게이츠 퇴장 이후 주가가 30%나 떨어졌는데 발머에게 갖는 불안감 보다는 세계 경제의 어려움 탓으로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직원은 2013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0만 여 명이며, 인도, 중국, 영국 등에 컴퓨터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5월 10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전자회사 스카이프를 85억 달러(약 10조 원)에 인수하였다. 더불어 2013년 9월 2일, 마이크로소프트는 핀란드의 휴대전화 생산 업체인 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54억 4,000만 유로(약 7조 8,654억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13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가 12개월 안에 은퇴한다고 밝혔다. 2014년 2월 4일, 사티아 나델라를 CEO로, 존 W. 톰슨을 회장으로 임명했다. 2015년 11월, 마이크로소프트는 HPE와 클라우드 사업부문에서 협력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프라이빗 클라우드에 집중하고 퍼블릭 클라우드 서비스는 MS와 같은 파트너 솔루션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현재, 마이크로소프트가 참여하는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IBM 호환 개인용 컴퓨터(PC)에 MS-DOS를 납품하였고, 때마침 PC의 성공에 힘입어 도스 시장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1995년, 윈도우 95라는 GUI 운영 체제를 출시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수많은 개인용 컴퓨터 주변기기 업체들로 하여금 윈도 전용 드라이버를 중심으로 개발하도록 유도했다. 자사의 MS-DOS 이외의 다른 도스와의 호환성도 인위적으로 버렸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또한 경쟁 업체들이 인터넷에서 앞서나감에 따라, 윈도 95용으로 별도 판매된 PLUS! 팩에 처음 제공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 98부터는 운영 체제에 포함하여 끼워팔기를 하여 비판을 받았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지나친 시장 장악으로 경쟁사들을 시장에서 도태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익스플로러는 점유율 95%의 독점 상태에까지 이르러서, 모질라 파이어폭스 등의 대체 브라우저가 등장하기까지 5년여동안 업그레이드가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을 포함하여 말 그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들은 'Micro$oft'라고 비꼬기도 한다. 원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사용하던 말이었지만 밸브 코퍼레이션이 레프트 4 데드 관련 포럼에서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연도별로 크게 아래와 같은 로고를 사용했다. 맨 처음 사용된 초기의 로고는 1987년 9월까지 사용되었고, 로고의 이름은 blibbet이라고 불렸다. 그 뒤 1987년 10월에 들어서면서 스캇 베이커(Scott Baker)라는 사람이 현재와 같은 모양과 형태를 갖춘 팩맨(Pac-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고를 만들었다. 1994년부터 "Where do you want to go today? (오늘은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라는 광고 캠페인이 진행되면서부터 1987년 디자인된 팩맨 로고 아래에 추가적으로 캠페인 문구가 삽입되었고 이 캠페인 문구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02년까지 각종 인쇄매체, TV 광고, 웹사이트 로고 등에 쓰인다. 2003년부터는 "Your potential, Our passion (당신의 가능성, 우리의 열정)"이란 슬로건 문자가 삽입된 버전의 로고가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슬로건이 삽입된 버전의 로고는 2010년까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2010년에 열린 비공개 MGX (Microsoft Global Exchange) 컨퍼런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새로운 슬로건인 "Be What's Next (다음의 무언가가 되자)"를 공개했다. 이 슬로건은 2011년부터 2012년 8월 22일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2012년 8월 23일 새로운 로고를 선보였다. 이 로고는 물결치는 4색깃발이 사각형 모양으로 바뀐 형태이다. 웹사이트 웹사이트(, )는 인터넷 프로토콜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도메인 이름이나 IP 주소, 루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일반 URL을 통하여 보이는 웹 페이지 (Web Page)들의 의미 있는 묶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홈페이지는 엄밀히 말해 웹사이트를 지칭한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CERN에서 만든 info.cern.ch이다.(지금도 CERN사이트 안에 존재함.) 웹사이트는 인터넷이나 랜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웹 서버 상에서 호스팅된다. 웹 페이지는 HTML/XHTML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일반적으로 순수 문자열로 쓰여진 문서이다. 웹 페이지는 HTTP를 통하여 접속되며 가끔씩은 HTTPS를 통한 암호화를 사용하여 웹 페이지 콘텐츠를 이용한 사람들에게 보안과 개인 정보 보호를 제공한다. 사용자가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HTML 마크업 명령을 모니터에 표시하는 그대로 페이지 내용을 표현한다. 공식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웹사이트는 총체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이루고 있다. 월드 와이드 웹(WWW)는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 리가 만들었다. 1993년 4월 30일에 CERN은 월드 와이드 웹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HTML과 HTTP가 도입되기 전에 파일 전송 프로토콜과 고퍼 프로토콜과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이 서버로부터 개별 파일을 내려받는 데 쓰였다.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사용자가 탐색하고 파일을 내려받는 단순한 디렉터리 구조를 제공한다. 문서는 워드 프로세서 형식 등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문자로만 된 글자로 표현되었다.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 리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웹 사이트로 CERN홈페이지 안에 Welcome to info.cern.ch!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이 웹 사이트에서는 개발자인 팀 버너스 리의 소개와 생애, 연구자료,스크린샷등,여러 CERN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그 후로, 약 24년 동안 전 세계 수억개의 사이트가 새로 생겼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능으로 분류하면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각각의 모든 웹사이트 또는 홈페이지는 특수한 단하나의 예약된 'index.html'이라는 페이지를 갖고있다. 이는 최초 인트로 웹페이지이며 웹브라우저는 디폴트로 브라우저가 방문한 사이트(디렉토리)의 'index.html'의 이름을 갖는 HTML파일을 우선적으로 읽어들이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index.html 파일은 일반적으로 태그와 하위의 태그로 영역 구획 및 여기에 콘텐츠를 넘겨주는 기능을 하는 간단한 구조의 그릇 역할처럼 설정되곤 한다. 하이퍼텍스트 하이퍼텍스트(Hypertext, )는 참조(하이퍼링크)를 통해 독자가 한 문서에서 다른 문서로 즉시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주로 컴퓨터나 다른 전자기기들을 통해 표시된다. 하이퍼텍스트라는 낱말은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이자 철학자인 테드 넬슨이 처음 고안하여 쓰이게 되었다.'hyper(건너 편의, 초월, 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파생텍스트라고도 한다. 인터넷과 결합하여 HTML의 주된 구성요소가 되었다. 기존의 문서가 순차적이면서 서열형 구조라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 따라 그 차례가 바뀌는 임의적이면서 나열형인 구조를 가진다. 즉, 출판된 책처럼 작가의 의도대로 사용자가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문서들을 어떠한 행위(클릭)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등장은 검색엔진과 더불어 정보습득의 새로운 장을 인류에게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탄생케 하였다. 웹이라는 것은 컨텐츠들이 하이퍼텍스트로 묶인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가 쓰인 기술들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HTML과 HTTP이다. HTTP는 하나의 프로토콜으로서, 이 통신규약을 이용해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와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이 HTTP로 HTML 문서가 전달될 수 있다. 1941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에 영감을 준 것으로 간주되는, 갈림길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89년, 당시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의 과학자였던 팀 버너스 리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정보 공유 기능이 CERN 및 기타 학술 기관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 간에 사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 부응하여 새로운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하였고 나중에 원형을 만들었다. 문자 인코딩 문자 인코딩(文字―, ) 또는 줄여서 인코딩은 문자나 기호들의 집합을 컴퓨터에서 표현하는 방법이며 복호화가 지닌 본래의 문자나 기호를 뜻하게 되는 부호를 문자 코드(文字―, )라고 한다. 문자 인코딩의 대표적인 예로 전건을 길게, 또는 짧게 두드려서 라틴 알파벳을 나타내는 모스 부호가 있으며, 라틴 알파벳, 숫자, 특수 문자 등을 정수와 그에 대응되는 7비트 이진수로 표현하는 방법인 아스키(ASCII)가 있다. 컴퓨팅 초기에는, 아스키(ASCII, 1963년), EBCDIC(1964년)과 같은 문자열 세트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자열 세트의 제한은 명백했으며 수많은 애드혹(ad hoc) 방식이 개발되었다. 한중일 계열의 동아시아 스크립트를 포함하여 다중 문자(언어) 지원이 시급했다. 문자 집합(character set, charset) 또는 문자셋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글자들의 집합을 정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문자 집합을 여러 문자 인코딩에서 쓸 수도 있다. 특히 집합 안의 문자들에 음수가 아닌 정수들을 배정한 것을 부호화된 문자 집합(coded character set, CCS)이라 한다. 문자 집합은 ASCII와 같이 더 이상의 문자가 추가될 수 없기도 하고, 유니코드와 같이 문자가 계속 추가될 수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과 문자 인코딩은 어떤 문자를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타낸다는 데서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 역사적인 이유로 MIME이나 그에 기반한 시스템은 문자 집합("charset")을 문자 인코딩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문자 인코딩 형태(character encoding form, CEF)는 특정한 문자 집합 안의 문자들을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일정한 범위 안의 정수(코드값)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유니코드 코드 포인트를 8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8이나, 16비트 숫자의 집합으로 나타내는 UTF-16,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문자 인코딩들이 포함된다. 문자 인코딩 구조(character encoding scheme, CES)는 문자 인코딩 형태로 변환된 코드값을 옥텟 기반의 시스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옥텟들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 형태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으며, 8비트 이상의 숫자를 사용하는 UTF-16과 같은 문자 인코딩 형태의 경우 엔디안을 지정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ISO 2022와 같은 복합 인코딩이나, SCSU와 같은 압축 방법 등이 속한다. 서버 서버()는 클라이언트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컴퓨터 프로그램(server program) 또는 장치(device)를 의미한다. 특히, 서버에서 동작하는 소프트웨어를 서버 소프트웨어(server software)라 한다. 주로 리눅스 등의 운영 체제를 설치한 대형 컴퓨터를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버는 프린터 제어나 파일 관리 등 네트워크 전체를 감시·제어하거나, 메인프레임이나 공중망을 통한 다른 네트워크과의 연결, 데이터·프로그램·파일 같은 소프트웨어 자원이나 모뎀·팩스·프린터 공유, 기타 장비 등 하드웨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서버는 사용자(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의하여 서비스를 하는데 이와 같이 구성된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라고 하며, 이는 하나 이상의 응용 프로그램을 상호 협력적인 환경에서 운용하는 분산처리 형태를 의미한다. 즉, 서비스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처리하는 서버와의 협동작업을 통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처리방식이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다. 클라이언트의 수가 5~20대 정도인 소규모 LAN의 경우에는 한 대의 서버로 충분히 모든 서비스를 소화할 수 있으나, 대규모 LAN의 경우에는 여러 대의 서버를 배치하고, 파일 관리는 파일 서버, 프린터 제어는 프린터 서버, 인터넷 등의 외부와의 교환은 통신 서버가 담당하는 등 각각 역할을 세분하게 된다. 컴퓨팅에서의 "서버"(server)라는 용어의 이용은 대기행렬이론에서 비롯한 것으로,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켄들의 기호를 선보인 논문 에서 "서비스'와 함께 눈에 띄게 사용되었다. 와 같은 초기의 논문들의 경우 "전화 교환원"과 같은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컴퓨팅에서 "서버"는 적어도 RFC 5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RFC는 ARPANET(인터넷의 선구자)을 기술하는 최초의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며 "사용자"와 대비되고 있고 두 가지 종류의 호스트와는 구별하고 있다: "서버 호스트", "사용자 호스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 서빙(serving)이라는 용어 또한 RFC 4와 같은 초기 문서들로 거슬러 올라가며, "serving-host"와 "using-host"를 대조하고 있다. 잘 알려진 서버 운영 체제로는 이를테면 FreeBSD, 솔라리스, 리눅스 등이 있다. 유닉스는 본래 미니컴퓨터 운영 체제였으며 전통적인 미니컴퓨터를 서버가 대체해감에 따라 서버는 효율적인 유닉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서버 지향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서버 환경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의 전반적인 구조는 클라이언트 서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동작하고 있으면서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서버는 수백만 대에 이른다. 인터넷 서버가 제공하는 수많은 서비스 가운데 다음을 포함한다: 전자기 유도 전자기 유도(電磁氣誘導)는 자기장이 변하는 곳에 있는 도체에 전위차(전압)가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수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발생한 전압은 자기 선속의 변화율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법칙은 자속밀도가 변화하거나, 도체가 일정하지 않은 자속밀도가 퍼져있는 공간을 움직일 때 적용할 수 있다. 전자기유도는 발전기와 전동기 등의 전기 구동기의 바탕에 있는 법칙이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은 전자기 유도에 의한 유도 기전력의 크기는 단위 시간당 자기 선속의 변화율과 코일의 감긴 횟수에 비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는 로렌츠 힘을 나타낸다. 이는 직선이나 원형 전류 또는 솔레노이드에 의한 자기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참고: 맥스웰 방정식 발전기는 전동기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석 연료나 수력, 원자력 등으로 얻은 높은 열은 물을 끓이는데 사용되고 여기서 얻은 증기는 터빈을 돌리게 되는데, 이 때 회전하는 터빈에 코일을 연결시키고 그 주위에 자석으로 코일 내부를 통과하는 자속을 매 시간 변화시킨다. 이로부터 코일에는 유도 전류가 흐르고 기전력을 얻을 수 있다. 영구 자석이 도체 또는 그 반대로 이동하는 경우, 기전력이 생성된다. 와이어가 전기 부하를 통해 연결되는 경우, 전류는 흐르고 전기 에너지가 생성된다. 코드분할다중접속 코드분할다중접속(, CDMA)은 이동 통신에서 코드를 이용한 다중접속 기술의 하나이다. 1996년 한국에서 최초로 상용화되었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1996년에 세계 최초로 CDMA를 기반으로 한 이동통신 서비스를 상용화하였다. CDMA는 미국의 퀄컴에서 기술규격을 개발하여, 1989년 샌디에이고에서 최초로 CDMA 기술을 이용한 통화시험에 성공하였다. 1993년 CDMA 기술 규격인 IS-95A가 정립되었으며, 1995년 9월 홍콩에서 허치슨텔레콤에 의해 상용화하였다. 1997년에 이르러 전 세계 가입자 수는 700 ~800백만이었다. 1998년 LG텔레콤(현.LG유플러스)은 CDMA 데이터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99년 전 세계 가입자는 5000만명으로 늘었다. 2000년 CDMA 2000 1x EV/가 3세대 이동통신 규격으로 국제시장에 출시되었지만, KT의 경우, 3G WCDMA 가입자 수요가 많아, 4G LTE 주파수 재배치 문제에 기인하여, 2012년 3월초에 2G CDMA 서비스를 강제 종료하였다. 더욱이, SK텔레콤의 경우, 5세대 이동 통신 주파수 재배치의 일환으로, 2019년에 종료 승인을 확정하였다. 이는, 2G 장비 노후화에 의한 가입자들의 계속적인 감소 현상으로 정상적인 서비스를 계속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전제 조건으로, 2G 서비스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코드를 이용하여 하나의 셀에 다중의 사용자가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동통신은 제한된 주파수 대역을 활용하여 다수가 통신을 하므로 다중접속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코드분할다중접속 이외의 기술 중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기술로는 GSM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다중접속(TDMA)가 있다. 코드분할다중접속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서 다중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할 수 있도록 코드화한 신호를 대역 확산하여 전송한다. 단말기는 확산된 신호를 디코드하여 복조함으로써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다중접속(Multiple Access)은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 다수의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다중접속은 기술 규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기술 별 다중 접속의 대략적 개념은 오른쪽 그림에서 참조할 수 있다. TDMA는 GSM의 기반기술로 상용화되었다. CDMA는 대한민국 등에서 사용된다. 주파수 사용의 효율성이 낮은 FDMA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대역 확산 기술은 일반적으로 전송할 정보신호의 대역폭보다 훨씬 큰 대역폭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보의 다중화와 고속처리가 가능해진다. 대역확산에는 주파수를 변조하는 주파수 도약과 동일 주파수 내에서 변조되는 직접 확산의 방식이 있다. CDMA는 직접확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s(t)Acos(ωt+Φ) 위 수학적 표현의 통신상 의미는 결국 비교적 큰 신호인 통신 신호를 아주 작고 무작위적인 코드신호로 곱하여 변조시킨다는 것이다. 신호 변조의 개념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아래의 그림에서 제일 위는 전달하고자 하는 신호를 가운데는 코드를 나타낸다. 제일 아래는 두 신호를 XOR시킨 결과 변조된 신호이다. 이렇게 변조된 신호가 송출되게 된다. 변조에 사용되는 코드가 다르면 변조된 결과도 다르게 되므로, 사용자마다 다른 확산용 코드를 부여하여 하나의 주파수 대역 내에서 여러 명의 사용자가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다중화라 한다. 다중화에 사용되는 코드는 되도록 백색잡음과 같이 무작위적이어야 한다. 코드가 일정한 경향을 가질 경우 충분히 많은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하면 혼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CDMA에서는 상호상관(Cross-Correlation)이 거의 없는 일종의 무작위 신호를 코드로 사용한다. 이 코드를 생성하는 기술의 특허는 퀄컴이 소유하고 있다. CDMA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실제적으로는 몇 개의 채널(파일럿, 동기, 통화 등)로 구분되어 있어서, 파일럿 채널을 통해 단말기와 기지국 사이에 기본적인 확인을 하고 동기 채널에서 코드 동기화를 하여 통화채널로 음성 데이터를 보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존의 IS-95 방식에서 현재는 CDMA2000과 같은 보다 고속의 데이터 통신을 위한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근본 기술에 대한 칩셋 설계와 관련 기술 특허는 퀄컴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이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블루투스 블루투스()는 1994년에 에릭슨이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통신 기기를 위한 개인 근거리 무선 통신 산업 표준이다. ISM 대역에 포함되는 2.4~2.485GHz의 단파 UHF 전파를 이용하여 전자 장비 간의 짧은 거리의 데이터 통신 방식을 규정하는 블루투스는, 개인용 컴퓨터에 이용되는 마우스, 키보드를 비롯해, 휴대전화 및 스마트폰, 태블릿, 스피커 등에서 문자 정보 및 음성 정보를 비교적 낮은 속도로 디지털 정보를 무선 통신을 통해 주고 받는 용도로 채용되고 있다. 블루투스는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둔 정보기기 사이에, 전파를 이용해서 간단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사용된다. 당초에는 에릭슨을 필두로, 인텔, IBM, 노키아, 도시바 등의 5개 회사가 프로모토로서 규격의 책정에 참가했으며,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 모토로라, 3COM, 루센트 테크놀로지 등의 4개 회사가 추가 참여했다. 현재는 3COM과 루센트 테크놀로지 대신, 애플, Nordic Semiconductor가 추가되어, 총 9개 회사가 프로모터 기업으로 참가했다. IEEE에서는 규격명 IEEE 802.15.1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현재 블루투스는 (SIG)을 통해 관리되고 있다. 이 그룹에는 전기통신, 컴퓨터, 네트워크, 가전 등의 분야의 30,000사 이상의 기업들이 멤버에 가입되어 있다. 블루투스 SIG는 규격의 개발을 감시, 규격의 인증 프로그램의 관리 및 트레이드마크의 보호를 관장하고 있다. 장비 제조사가 블루투스 장비로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SIG에서 제정한 표준 규격을 만족해야 한다. '블루투스'라는 이름은 10세기 경 처음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통합한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Harald Blåtand) 국왕의 별칭이 '파란 이빨의 왕'으로 불렸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Blåtand를 영어식으로 번역한 단어가 블루투스(Bluetooth)이다. 블루투스 이름의 아이디어는, 1997년 인텔 출신의 Jim Kardach 라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제안하였다. 제안했을 당시에, 그는 Frans G. Bengtsson의 역사 소설 "The Long Ships"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이킹과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하랄드 블라톤 왕이 스칸디나비아를 통일했던 것처럼, '난립하는 여러 무선 통신 규격을 통합하자'는 염원이 담겼다고 한다. 블루투스의 로고는, 북유럽의 룬 문자(옐링 거석의 비석에서 찾을 수 있는)로 하랄드 블라톤 국왕의 이름의 앞글자   (H)와  (B)를 결합한 모양에서 유래한다. PANs의 산업 표준중 하나인 블루투스는 ISM 대역인 2.45GHz를 사용한다. 버전 1.1과 1.2의 경우 속도가 723.1kbps에 달하며, 버전 2.0의 경우 EDR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를 통해 2.1Mbps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블루투스는 RS-232, 유선 USB를 대체하는 개념이며 이는 와이파이가 이더넷을 대체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암호화에는 SAFER을 사용한다. 장치끼리 믿음직한 연결을 성립하려면 키워드를 이용한 페어링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이 없는 경우도 있다. 1.0과 1.0B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제조사들이 그들의 제품 간의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과 1.0B는 또한 핸드셰이킹 과정에서 블루투스 하드웨어 장치 주소(BD_ADDR)를 반드시 전송해야 하므로 프로토콜 수준에서의 익명(IP와 같은 주소 없이)의 연결(rendering anonymity)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블루투스 환경에서 제공 되도록 계획한 소비확대정책(Consumerium)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큰 제한사항이었다. 블루투스는 2.4Ghz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무선 랜(802.11b/g/n)도 2.4Ghz대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같은 주파수를 사용하므로 동시사용에 따른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양 제품의 초기 보급 시에는 그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블루투스의 버전업과 연결 특성 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블루투스는 해당 주파수 대역에서 비어있는 채널을 찾아 데이터를 전송하기 때문에 간섭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즉시 다른 빈 곳으로 전송하게 된다. 음성기기의 사용 시 아주 잠깐의 지연현상이 발생하지만 체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기기의 거리가 1cm 이하로 근접해 있을 경우 간섭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무선랜과 블루투스 두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기기의 경우에는 두 장비가 하나의 안테나를 사용하게 되는데, 서로 번갈아가며 데이터를 전송하는 사용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애초부터 그 간섭을 최대한 줄이게끔 되어 있다. 2002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고, 1.0B의 많은 문제점들을 수정하였다. 이 외에 비 암호화 채널(non-encrypted channels)을 지원하였고, Signal Strength Indicator (RSSI)를 수신 받을 수 있게된다. 이 버전은 1.1 버전과 호환되며 주요 향상 점은 다음과 같다: 빠른 접속과 가까운 거리에서의 주파수 간섭 및, 먼 거리에서의 분산스펙트럼(frequency-hopping spread spectrum)에 대비하였다. 실제 전송 속도는 1.1과 같은 723kbit/s이다. 패킷의 오류나 재전송에 따른 음성이나 음원신호의 quality손실을 막는 Extended Synchronous Connections (eSCO)를 지원하게 되었고, three-wire UART를 위한 Host Controller Interface (HCI)를 지원하게 되었다. 2005년 802.15.1 IEEE 표준으로 승인되었다. 2004년 10월에 표준화가 된 이 버전은 1.1과 호환되게 하였다. 주된 향상 점은 3.0Mbit/s의 향상된 데이터 속도(Enhanced Data Rate, EDR)를 지원하게 된 점이다. 이로써 다음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 평균 3배, 최대 10배의 데이터 전송 속도(Data Transfer Rate) 향상(실제 전송 속도 2.1Mbit/s)과 Duty Cycle감소에 의한 저 전력 소비, 또한 multi-link scenarios의 단순화로 사용할 수 있는 대역폭이 늘어났다. 이론상의 전송 속도는 3.0Mbit/s이고, 실제 data전송 속도는 2.1Mbit/s이다. Special Interest Group (SIG)에 표준화가 된 "블루투스 2.0 + EDR"은 많은 업체들이 사용하는 EDR과 표준화되지 않은 "블루투스 2.0"를 포함한다. 앞에 명시된 기술을 보여주는 HTC TyTN pocket PC phone과 다른 블루투스 2.0 without EDR의 기술은 추가적인 문제점들을 수정한 버전 1.2와 거의 같다. 많은 제품들이블루투스 2.0을 지원한다고 명시하지만 실제로 EDR을 지원하는지는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1.2버전과 완벽하게 호환이 되는 핵심 표준화 버전인 블루투스 2.1은 블루투스 SIG에 의해 2007년 7월26일 채택되었다. 이 기술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블루투스 3.0은 2009년 4월 21일에 발표되었다. 블루투스 3.0의 큰 특징은 802.11 PAL(Protocol Adaptation Layer)를 채용해서 속도를 최대 24Mbps로 향상시켰다. (+HS 가 붙어있지 않은 제품에서는 이와 같은 High Speed 연결을 지원하지 않으며 3.0에서 추가된 기능만을 지원한다.) 그리고 블루투스 기기간에 대용량 그림, 동영상, 파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PC를 모바일 기기와 동기화를 할 수 있고 프린터나 PC로 많은 사진을 내려받을 수 있다. 추가된 점으로 내장된 전력 관리 기능을 통해 전력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Bluetooth SIG는 블루투스 사양서 버전 4.0(Bluetooth Smart)을 2010년 6월 30일에 채택하였다. 이 사양에는 클래식 블루투스(Classic Bluetooth), Bluetooth high speed 와 Bluetooth low energy 프로토콜이 포함되었다. Bluetooth high speed 는 Wi-Fi 를 바탕으로, 클래식 블루투스는 기존의 레거시 블루투스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 종래의 버전과 비교해 대폭적으로 소비전력을 낮춘 Bluetooth Low Energy 는, Bluetooth SIG 공개자료에 의하면, 버튼형 전지 1개만으로도 수년간 구동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전송 속도는 1Mbps로, 데이터 패킷 사이즈가 8 - 27옥테드로 매우 작아졌다. 가전제품 등에 탑재된 센서와의 데이터 통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사양으로, 기존 3.0+HS과 방향성을 달리하여, 제품 제작자는 3.0+HS 및 4.0을 별도로 목적에 맞춰 채용하는 식이 되었다. 블루투스 SIG는 2013년 12월 블루투스 4.1의 새로운 기능을 발표했다. 블루투스 4.1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4.2 버전은 2014년 12월 2일 발표되었다. 이 판에는 사물인터넷 지원을 위한 특징을 도입했다. 주요한 개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오래된 블루투스 하드웨어는 4.2를 데이터 패킷 Length Extension으로 받아들이고, 펌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보안을 개선했다. 2016년 6월 16일 런던에서 개최한 미디어 이벤트를 통해 블루투스 5가 블루투스 SIG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은 주로 부상하는 사물인터넷 기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017년 4월에 블루투스5가 지원되는 삼성 갤럭시 S8를 출시했다. 마켓팅을 위해 소숫점 이하의 숫자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용자 편의를 위한 마켓팅을 단순화시키기 위함이다. 주요 개선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2Mbps, 1Mbps, 125kbps가 되었고, 2M와 1Mbps는 예전처럼 도달 거리가 100m, 125kbps는 도달 거리가 400m가 되었다. 블루투스는, 여러 종류의 장비로의 통신에 사용되는 규격인 이유로, 장비의 종류에 따라 규정되는 각각의 별도의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이들 프로토콜의 사용법을 프로파일이라는 용어로 표준화하고 있다. 통신하고자 하는 장비와 장비 간에, 동일한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그 프로파일을 이용한 통신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프로파일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블루투스는, 통신에 이용되는 전파의 강도를 클래스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블루투스 지원 장비는, 어떤 장비든 한 클래스로 분류된다. 쌍방이 같은 클래스일 필요는 없다. 블루투스는 2.402 GHz ~ 2.480 GHz 대역의 마이크로파 무선주파수 스펙트럼을 사용하며 이는 암을 일으키지 않는, 무해한 비전이성 방사선이다. 블루투스 무선이 내뿜는 최대 전기 출력은 클래스 1 장치의 경우 100 mW, 클래스 2 장치의 경우 2.5 mW, 클래스 3 장치의 경우 1 mW이다. 클래스 1의 최대 전기 출력 조차, 가장 전력이 낮은 휴대전화 보다도 수준이 더 낮다. UMTS 및 W-CDMA은 250 mW를, GSM1800/1900은 1000 mW를, GSM850/900은 2000 mW의 출력을 낸다. 1947년 1947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역사 역사(歷史, , )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이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또한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며 명예와는 미래에서 잊히지 않고 이어 전해진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 연구란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연속된 사건들을 검증하고 분석하며 종종 인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역사학은 고고학, 사회학 등의 주변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역사라는 개념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역사적 자료를 탐색한다. 이 자료들은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구분되는데, 1차 사료는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문서, 기록 등이다. 영어의“히스토리"(history) 는 고대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어근은 영어의 "wit", "wise", "wisdom", "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의 "베다"("veda"), 슬라브어의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다.(반면 과학은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이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진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인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한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한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다.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 된다.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 과거"를 참칭하는 가짜 주장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역사 연구는 인문학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과학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는 두 학문 영역의 방법론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를 두 범주 중 한 곳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 학계에서 역사는 점차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20세기에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세계사 연구에서 경제학, 인류학, 지리학을 이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거나 말로 전하며, 기록이나 구전 자료를 연구하여 역사적 의문에 해답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 역사가들은 기념물, 비문, 그림 같은 자료들도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사료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글로 쓴 기록, 구전(口傳), 물리적으로 보존된 것들(유물, 유적). 역사가는 대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참고한다. 그러나 글로 쓴 기록은 선사와 역사의 구분이 된다. 고고학은 땅에 묻힌 유적지나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역사 연구에 유용한 분야이다. 그러나 고고학은 혼자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고고학적 발견을 보충하기 위해 이야기 자료가 쓰인다. 그러나 고고학은 역사학과는 별개의 방법론과 접근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고학은 텍스트 사료의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역사 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은 고고학의 한 분과로서, 종종 현존하는 텍스트 사료와는 상반되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아메리카의 역사상의 아나폴리스(18세기 동부 해안의 한 마을)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마크 리오니(Mark Leone)는 당시 기록 자료에서 보이는 "자유" 이데올로기 불구하고, 이때의 모든 역사적 환경의 연구를 통해 노예 소유와 부의 불평등을 밝혀서 텍스트 자료와 발굴 자료 사이에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역사를 배열하는 방법에는 연대기, 문화, 지역, 주제 등 다양한 기준이 있다. 이런 구분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가령 "1800~1945년 과도기 시대의 국제 여성 운동"같은 경우 처럼 서로 겹치기도 한다. 현대 학문이 전문화 추세를 보이기는 하나, 역사가들은 매우 특정한 것과 매우 일반적인 것을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역사 연구 분야의 하나인 "큰 역사"(Big history)는 이러한 전문화에 반대하여 보편적인 양상이나 추세를 탐구한다. 역사는 종종 어떤 실용적인 혹은 이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하며, 단지 지적 호기심에 의해 연구하기도 한다. 현대 동서양의 인류 문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고 많은 사멸된 고대의 찬란한 문명은 인류 역사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로 여겨진다. 고대 인도 그리고 중국의 황하 유적은 동양 문명 역사의 발판을 이루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기원전 4000년 전후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고대 문명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 예컨대 세계의 7대 기적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경이심을 자아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 즉 역사가 글로써 기록되지 않고 그 역사를 유물로써 알 수 있는 시대다. 문자가 발명된 후 인류가 역사를 글로 기록하여 남긴 시대를 일컫는다. 밑의 시기 구분은 서양 역사관에 입각하여 구분한 것이다. 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종종 지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날씨의 패턴, 물의 공급, 그리고 지표면의 생태 등은 모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왜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성공적인 문명화를 이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집트의 지리학을 참고해야 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변에 세워졌다. 강물은 매년 범람하였고, 그 강둑에 흙이 쌓였다. 비옥한 토양은 농부들이 도시 사람들이 먹기에 충분한 곡식을 기를 수 있게 하였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문명화를 돕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지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일들이 많다. 링크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는 인터넷에서 컴퓨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쓰이는 통신규약(프로토콜)의 모음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 중 TCP와 IP가 가장 많이 쓰이기 때문에 TCP/IP 프로토콜 슈트라고도 불린다. 인터넷 프로토콜 슈트는 1960년대 말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수행한 연구개발의 결과로 탄생하였다. TCP/IP는 패킷 통신 방식의 인터넷 프로토콜인 IP (인터넷 프로토콜)와 전송 조절 프로토콜인 TCP (전송 제어 프로토콜)로 이루어져 있다. IP는 패킷 전달 여부를 보증하지 않고, 패킷을 보낸 순서와 받는 순서가 다를 수 있다.(unreliable datagram service) TCP는 IP 위에서 동작하는 프로토콜로, 데이터의 전달을 보증하고 보낸 순서대로 받게 해준다. HTTP, FTP, SMTP 등 TCP를 기반으로 한 많은 수의 애플리케이션 프로토콜들이 IP 위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묶어서 TCP/IP로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은 보통 네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두 모델은 관련은 있으나 서로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가장 큰 차이는 계층의 수이다. 앞의 모델은 네 계층, 혹은 (링크 계층을 물리 계층과 데이터 링크 계층으로 나눈다면) 다섯 계층 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OSI 모델은 일곱 계층을 사용한다. OSI 모델이 더 잘 맞는 경우는 SSL이나 TLS를 설명할 때이다. 보통 SSL이나 TLS는 TCP의 상위에, 그리고 HTTP나 SFTP, 그 밖에 stunnel이나 VPN 위에서 동작하는 애플리케이션보다는 하위에 있는 세션 계층 프로토콜로 쓰인다. 인트라넷 인트라넷(intranet)은 단체의 직원만 접근이 가능한 사설망이다. 인터넷 프로토콜을 쓰는 폐쇄적 근거리 통신망으로 간주된다. 인터넷을 조직 내 네트워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인트라넷은 근거리 통신망(LAN)을 기반으로 데이터 저장장치인 서버를 연결하고 PC에 설치된 인터넷 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방화벽을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거나 제한하여 보안을 유지한다. 인트라넷은 1994년 수많은 단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프레디 머큐리 프레디 머큐리(,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 1946년 9월 5일 ~ 1991년 11월 24일)는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퀸의 리드 보컬로 잘 알려져 있으며,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보컬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 (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곡들로 〈Bohemian Rhapsody〉, 〈We Are the Champions〉, 〈Love of My Life〉,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Don't Stop Me Now〉 등이 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가계나 이름, 외모 등의 면에서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의 후손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의 뭄바이로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이 시기부터 프레디(Freddy; Frederick의 애칭)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학창시절 프레디는 '헥틱스(Hectics)'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그 때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였고, 프레디는 1969년에 런던의 일링 칼리지(Ealing College, 현 웨스트 런던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본명을 인도식 이름인 '파로크 불사라'에서 영어식으로 '프레드릭 불사라'로 개명했다. 그후 1970년 '프레디 머큐리' 로 개명한다 프레디는 1960년대 후반 아마추어 밴드 (Ibex)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는데, 후에 퀸의 앨범에 수록되는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이 시기에 작곡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팀 스태플(Tim Staffell),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는 밴드 스마일에서 활동하였는데, 보컬 팀 스태플이 (Humpy Bong)으로 이적하기 위해 스마일에서 탈퇴하자, 프레디는 브라이언과 로저와 함께 퀸을 결성하였으며, 베이시스트로 존 디콘을 직접 선발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퀸 활동을 잠시 쉬면서 프로듀서 리처드 울프(Richard Wolf)의 작업에 참여하고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재개봉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85년에는 솔로 앨범 《Mr. Bad Guy》를 발매하였고, 영국 음반 차트 6위에 올랐다. 싱글 발매된 〈I Was Born to Love You〉는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1988년에는 오페라 가수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와 협업하여 솔로 2집 《Barcelona》를 발매한다. 동명의 앨범 수록곡인 〈Barcelona〉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선택되었으나, 프레디의 사망 이후 주제가 선정이 취소되고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Amigos para Siempre〉로 대체되었다. 올림픽 주제가 선정 과정에 힘입어 《Barcelona》는 1992년 재발매되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수록곡 〈Barcelona〉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2위까지 올랐다. 1990년 퀸과 함께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되어버린《Innuendo》레코딩을 시작한 후 공적인 자리에서 사라진 듯 했던 그는 1991년 11월 자신이 에이즈 투병중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에이즈와의 투쟁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지 하루 뒤인 11월 24일 자신의 집에서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45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1992년 4월 20일 부활절. 그를 추모하기 위한 거대한 공연이 영국 런던 웸블리 경기장에서 거행되었으며 퀸의 나머지 멤버들과 엘튼 존, 데이비드 보위, 조지 마이클, 익스트림,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 , 밥 겔도프 , 로버트 플랜트 등 최정상급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콘서트는 전세계 TV로 생중계되어 약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하였다. 1995년에 《Made in Heaven》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에는 〈A Winter's Tale〉 뿐 아니라 퀸의 미발표 곡들, 1991년 《Innuendo》 발매 이후에 녹음한 곡들, 프레디 머큐리가 돌아가시기2주 전 녹음한 곡 〈Mother Love〉, 그의 솔로곡들을 나머지 퀸 멤버들이 편곡한 곡들 등이 담겨졌다.쇼 2011년 프레디 머큐리 출생 65주년을 기념하여 구글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스페셜로고와 모션그래픽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2012년 8월 13일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1986년 웸블리 콘서트 당시 실황 중계 영상의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여 세상을 떠난지 20년 만에 못했던 올림픽 공연을 이루었다.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17473 프레디머큐리라는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현재 퀸의 활동을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으로 다시금 큰 인기를 얻고있다 루트비히 볼츠만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 1844년 2월 20일 - 1906년 9월 5일)은 통계역학과 통계열역학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적 모델에 대해 대단히 논쟁이 심할 시기에 원자론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볼츠만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1844년에 빈에서 태어났다. 볼츠만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George Boltzmann)은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베를린에서 이주한 시계공이었다. 어머니인 카테리나 파우에른파인트(Katharina Pauernfeind)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었다. 볼츠만은 양친으로부터 가정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15세에 린츠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에 볼츠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863년 빈 대학교에 입학해 물리학을 공부해 1867년 기체운동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요세프 슈테판의 조수가 되어 2년간 일했다. 볼츠만에게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업적을 소개한 것은 슈테판이었다. 볼츠만은 그의 나이 25세가 되는 1869년에 그라츠 대학의 이론물리학(수리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1869년의 몇 달간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로베르트 분젠과 레오 쾨니히스베르거와, 1871년에는 베를린에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 연구를 했다. 1873년 볼츠만은 빈 대학의 수학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76년까지 일했다. 1873년에 볼츠만은 그라츠의 교사 양성 대학의 여학생이었던 헨리에테 폰 아이겐틀러를 처음 만났고, 1876년 7월에 헨리에테와 결혼해 슬하에 세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볼츠만은 다시 그라츠로 돌아와 실험물리학과의 학장을 맡았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아레니우스 식으로 유명한 스반테 아레니우스와 열역학 제3법칙으로 유명한 발터 네른스트가 있었다. 볼츠만은 그라츠에서 14년간을 일했으며, 이 당시에 통계 물리학의 기본 개념을 발전시켰다. 1887년에는 그라츠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볼츠만은 1890년 독일에 있는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에는 다시 빈 대학으로 돌아와 요세프 슈테판의 자리를 이어 이론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볼츠만은 빈 대학의 여러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했는데, 특히 당시 빈 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과학사 교수였던 에른스트 마흐와 원자론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곧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초청으로 1900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이직했다. 마흐의 퇴임 이후에 볼츠만은 1902년에 다시 빈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칼 프르지브람(Karl Przibram),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같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에서 볼츠만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가르쳤다. 볼츠만의 자연철학에 관한 강의는 매우 인기가 많아서 그 시대에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장 큰 강의실도 모자라서 사람들은 계단사이에 서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볼츠만의 철학 강의 때문에 황제들이 궁전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린츠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1906년 9월 5일, 볼츠만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방의 두이노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던 중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추측되지만, 명확한 자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볼츠만의 기체분자운동론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들과 에른스트 마흐와 물리화학자인 오스발트같은 과학자들은 그것들의 존재를 반대했다. 1890년대 동안 볼츠만은 원자론자들과 비원자론자 모두가 원자에 대한 논의 없이 물리학을 할 수 있도록 타협안을 만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해결 방법은 원자는 곧 "Builder"라고 하는 헤르츠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비원자론자들은 그 그림이 실제 원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원자론자들은 그림 자체가 실제 원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집단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발트나 순수 열역학의 옹호자들은 볼츠만의 원자와 분자에 관한 가정과 특히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 해석 때문에 기체분자운동론과 통계역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백여년에 걸쳐 볼츠만의 과학은 다른 철학적 반대에 계속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마흐의 학생과 구스타프 야우만 등을 포함한 물리학자들은 헤르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것은 모든 물리적 운동은 궁극적으로 전자기적 운동이며, 전자기적 운동은 원자와 분자 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1900년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것이 볼츠만의 운동론과 열역학 2법칙의 통계적 해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볼츠만을 깊게 우울하게 만들었다. 1901년 빈 대학의 마흐가 사직을 한 후, 볼츠만은 다시 빈으로 돌아가 그의 물리학의 철학적 반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곧 그는 다시 한번 낙담하게 된다. 1904년에 세인트 루이스의 국제 물리학 회의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볼츠만은 물리학 부문에 초청받지 못하고 "응용수학" 분과에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다른 물리학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의 관점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가까운 것으로,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된 철학사상을 계속 이어받고 그래서 그러한 인습을 과학자들이 극복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1905년에 볼츠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 철학자 브렌타노와 광범위하게 뜻을 같이했다. 그는 과학에서 좀 더 철학의 실재를 반박하기 위해서 좀 더 명확하게 철학에 정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에 있어 또 다시 낙담했다. 이듬해 1906년 그의 정신 상태는 매우 나빠졌고, 그는 은퇴하고 말았다. 그는 같은해 9월에 자살했다. 볼츠만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기체의 분자 속도에 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를 포함한 기체분자운동론에 관한 것이다. 맥스웰-볼츠만 통계역학과 에너지에 대한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고전 통계 역학의 기초로 남아있다. 그것들은 양자 역학에 맞지 않는 여러 현상에 적용가능하며, 온도의 의미에 대해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의 확립은 원자와 분자의 실재에 대한 그의 믿음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미국의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 그리고 1808년 존 돌턴의 원자 발견의 이후로 대부분의 화학자와 공유되었다. 그는 분자와 원자에 관해서 독일 물리학지 편집자와 긴 논쟁을 벌였다. 볼츠만이 죽고 2~3년 뒤에 페랭의 브라운 운동 연구에서 아보가드로 수와 볼츠만 상수가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작은 물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계에 납득시켰다. 그의 업적으로는 볼츠만 인자라고 불리는 분배법칙을 들 수 있다. 이 법칙은 종래의 분자들의 속도에 관한 맥스웰 분배법칙을 확장시켜 외적인 힘의 작용을 외적인 힘의 작용을 함께 고려하여 얻은 것으로 분자들의 에너지가 주로 절대온도가 플랑크상수의 곱으로 주어지는 열적인 에너지 근처에 분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또 슈테판-볼츠만 공식을 유도해냈다. 흑체의 단위표면적에서 방출되는 모든 파장의 빛에너지의 총합이 흑체의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1879년에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하고, 이를 1884년에 이론적으로 유도해내었다. 이것은 20세기 양자론이 등장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플랑크의 말을 인용하면 "엔트로피와 확률이 로그로 연결된다는 것을 처음 진술된 것은 볼츠만의 기체분자이론에서였다." 그 유명한 엔트로피 S에 관한 식은 여기서 formula_2 = 1.3806505(24) × 10  J K 는 볼츠만 상수이다. W는 거시상태의 기회의 빈도,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계의 거시적인 상태에 상응하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를 말한다. W는 아래의 식을 이용하여 구해낼 수 있다. 이는 열적인 평형상태에 있는 계에 대하여 열역학적인 성질을 구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계의 주어진 거시적인 상태에 해당하는 가능한 모든 미시적인 상태의 수의 대수를 취한 양에 비례함을 나태낸 것이다. 이 관계식은 모든 미시적인 상태들의 사전확률이 같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이 가정을 보완하기 위하여 볼츠만은 에르고드 가정을 도입하였다. 이 가정에 의하면 하나의 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한 미시적인 상태를 두루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볼츠만 방정식은 이상기체의 동역학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이전에는 기체분자들이 평형상태에 도달해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풀었으나, 볼츠만은 그러한 가정을 배제하고, 비평형상태에 있을 경우 어떻게 평형상태로 변화해 나갈 지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볼츠만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는 주어진 시간에 따른 물질의 위치와 운동량의 분포 함수이며, F는 힘, m은 물질의 질량, T는 시간이며, v는 물질의 평균속도를 의미한다. 이 방정식은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확률 분포의 시공간 미분을 나타내고 있다. 좌변의 첫항은 분포 함수의 시간 미분을 나타내고, 두 번째 항은 위치 미분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항은 물질에 주어지는 어떠한 힘의 효과를 나태내고 있다. 우변은 충돌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원칙적으로, 위 방정식은 적절한 경계조건이 주어진다면 완벽하게 기체들의 총제적인 동역학을 보여준다. 1차 미분 방정식은 믿을 수 없게 간단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f는 멋대로인 물질의 분포함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에 주어지는 힘 또한 본포함수의 속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볼츠만 방정식은 적분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그것을 풀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다고 한다. 충돌항에 관한 모양은 얼추 맞다. 그러나 이상기체에 관한 볼츠만 방정식의 Chapman-Enskog 확장이 더욱 더 정확하다. 볼츠만은 여러 해 동안 그의 방정식을 이용하여 열역학 제 2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H정리이다. 그의 충돌항에서 그가 만든 핵심 가정은 "분자 혼돈"()이다. 가역성을 깨버린 그의 가정은 제 2법칙을 함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연론적인 가정이었고, 볼츠만의 겉보기 성공에 불과했다. 결국 요한 요제프 로슈미트와의 로슈미트의 역설에 관한 긴 논쟁은 결국 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1970년대에 코헨과 도르프만은 높은 밀도에서 볼츠만 방정식의 체계적 확장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따라서 밀집된 기체와 액체의 비평형 통계역학은 그린-구보 관계(Green-kubo relations), 파동이론 그리고 다른 접근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프로그램 지시 사항들이 나열된 순서를 프로그램(, , )이라고 부른다. 만화 만화(漫畵, , )는 시각 예술의 일종으로, 일반적으로 말풍선이나 자막 형태의 글과 그림의 조합을 이루어 생각을 표현한다. 초기에는 캐리커처로써나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많은 하위 장르를 가진 예술 매체로 발전했다. 만화는 종종 그림의 컷이 나란히 연결된 형식이다. 대화, 서술, 음향 효과 기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말풍선, 짧은 해설, 의성어 등의 방법을 사용하며, 컷의 크기와 배열로 묘사의 속도를 조절한다. 만화와, 유사한 형태의 삽화는 만화에 쓰이는 가장 흔한 이미지 제작의 수단이다. 사진 소설은 사진 그림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만화의 흔한 형태로는 연재 만화, 시사 만평, 만화책 등이 있다. 20세기말 이후, 그래픽 노블, 코믹 앨범, 단행본 등의 합본이 점차 흔해졌고, 21세기 들어 인터넷상의 웹 만화가 확산되었다. 만화의 역사는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왔다. 20세기 중반, 만화는 미국, 유럽(특히 프랑스와 벨기에), 일본 등에서 유난히 번창했다. 유럽의 만화는 1830년의 로돌페 퇴퍼(Rodolphe Töpffer)의 연재 만화로 거슬러 올라가며, 땡땡의 모험 등의 1930년대의 연재 만화와 만화책의 성공에 힘입어 널리 확산되었다. 미국의 만화는 20세기 초 신문 연재 만화의 등장으로 대중 매체로 부각되었다. 뒤를 이어 1938년 슈퍼맨이 나타난 이후로 슈퍼히어로 잡지 형태의 만화책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는 12세기부터 만화가 시작되었음을 제시한다. 일본의 현대적인 만화는 20세 초에 등장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시기에 테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의 인기와 함께 만화 잡지와 만화책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만화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저급 문화로 취급받았으나, 20세기 말로 진행되면서 대중과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만화의 기원은 만화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세기 유럽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집트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컷과 그림 안의 말풍선을 가진 현재의 만화 형식 및 '만화'라는 단어 자체가 생겨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만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며, 또한 만화의 매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학자들 중 윌 아이스너는 '그림과 단어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만들거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는 1996년에 만화를 최종적으로 '만화책 등에서 삽화와 말풍선이 순서에 따라 나열된 것'으로 정의했다. 《만화의 이해》(1993)에서 스콧 매클라우드는 아이스너의 연속예술이라는 표현을 만화의 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juxtaposed pictorial and other images in deliberate sequence, intended to convey information and/or to produce an aesthetic response in the viewer)"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는 패밀리 서커스나 풍자 만화와 같은 한컷 만화를 만화가 아닌 카툰으로 분류한다. 그 반면, 코믹스 저널은 "20세기 최고의 만화 100선"이라는 기사에서 수많은 카툰 및 캐리커처 작가들의 한컷 작품을 포함시켰다. 문화를 크게 고맥락(high 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 context) 문화로 구분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맥락 문화에 속하는 나라들인데, 고맥락 문화란, 민족적으로 동질을 이루며 역사, 습관, 언어 등에서 볼 때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 즉 맥락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집단주의와 획일성이 발달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깊은 인간관계로 묶여있으며 멤버 간에 공유하는 정보가 많으며 간단한 메시지라도 깊은 의미를 갖기 쉬운 문화이다. 또한, 언어 코드보다 컨텍스트(context: 비언어코드,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환경, 인간관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고맥락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적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표현이 많고 비언어행동에 있어서는 미묘한 것이 많이 존재한다. 반면에, 저맥락 문화는 다인종,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이 대표국이며, 멤버 간에 서로 공유하고 있는 컨텍스트의 비율이 낮아 개인주의와 다양성이 발달하는 문화를 가진다. 저맥락 문화에 속하는 미국만화는 정교한 그림체와 짧은 이야기 구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선악의 확실한 구분과 수많은 말풍선을 사용한 스토리 전개, 소설식 설명구조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처럼 동서양의 만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서양독자들은 처음 망가를 접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식 이야기 관습에 당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 특유의 느긋한 스토리 구조와 속도조절을 위해 사용되는 감성적 이미지들, 말없는 칸들은 서양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색하며, 감정을 나타내는 많은 기호들과 소리와 움직임뿐 아니라 상황과 심리적 상태까지 표현하고 있는 수많은 그림문자들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표현매체로서 받아들여진다. 한국 만화 생태계의 기본 구조는 '창작-제작-유통-소비'의 흐름을 가진다. 창작 단계는 개인 창작, 공동 창작, 수입 라이선스 만화로 나뉘며 제작 단계는 온라인과 만화전문 출판사, 일반 출판사, 대여점용 출판사 등의 출판으로 나뉜다. 이 밖에도 신문, 동인지 시장, 모바일 등도 제작 단계에 포함된다. 만화 산업은 다양한 제작 단계와 패키징 과정을 거쳐서 제작되며, 하나의 콘텐츠가 동시다발적으로 가치사슬을 만들며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 콘텐츠는 기획에서부터 다수의 가치 사슬에서 활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온라인이라 하면 보통 웹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웹툰 작가들은 개인창작 위주로 활동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있다. 웹툰은 대개 규모가 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가 된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가 되기 위해서 작가들은 수많은 노력을 통해 정식 연재를 하게 된다. 웹툰은 만화 연재 수에 따라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와 계약을 맺어 일정한 원고료를 받고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포털 사이트 방문 횟수를 늘리기 위한 포털 사이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이버'라는 포털 사이트가 있다. 네이버에서는 무료로 이용자들에게 요일별 웹툰을 제공한다. 요일당 평균 24개 정도의 웹툰을 제공하며 작가들과 계약을 맺어 원고료를 제공하고 웹툰을 무로료 제공하고있다. 신문 만화는 전통적으로 '시사만화'의 영역이었다. 1개 신문에 적어도 네 칸 만화와 한 칸 만화가 동시에 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한겨레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네 칸 만화 지면을 폐지할 정도로 시사만화의 창작·제작환경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으로 신문의 판매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로 대여점용 성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과 협조해 적은 비용 혹은 무료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다. 인터넷 프로토콜 인터넷 프로토콜(IP, Internet Protocol, )은 송신 호스트와 수신 호스트가 패킷 교환 네트워크(패킷 스위칭 네트워크, Packet Switching Network)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데 사용하는 정보 위주의 규약(프로토콜, Protocol)이며, OSI 네트워크 계층에서 호스트의 주소지정과 패킷 분할 및 조립 기능을 담당한다. 줄여서 아이피(IP)라고도 한다. IP의 정보는 패킷 혹은 데이터그램이라고 하는 덩어리로 나뉘어 전송된다. IP에서는 이전에 통신한 적 없는 호스트에 패킷을 보낼 때 경로 설정이 필요없다. IP는 비신뢰성(unreliability)과 비연결성(connectionlessness)이 특징이다. 비신뢰성은 흐름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보낸 정보가 제대로 갔는지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송과정에서 패킷이 손상될 수도 있고, 같은 호스트에서 전송한 패킷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고, 같은 패킷이 두 번 전송될 수도 있으며, 아예 패킷이 사라질 수도 있다. 패킷 전송과 정확한 순서를 보장하려면 TCP 프로토콜과 같은 IP의 상위 프로토콜을 이용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표준 프로토콜은 인터넷 프로토콜의 4번째 판인 IPv4이다. 그러나 IPv4는 주소공간 고갈 문제를 겪고 있어 조만간 6번째 판인 IPv6가 대중화될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7, OS X, 리눅스 등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IPv6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다음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IP 주소 (ip address)체계이다. 관련 버전은 현재 IPv4와 IPv6가 있다. IP 버전 0부터 3까지는 실험적인 버전으로,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사용되었다. 다음의 IEN(Internet Experiment Note) 문서들은 현대 버전의 IPv4 이전의 인터넷 프로토콜 버전을 기술한다: 페르마의 소정리 수론에서, 페르마 소정리(Fermat小定理, )는 어떤 수가 소수일 간단한 필요 조건에 대한 정리이다. 추상적으로, 소수 크기의 유한체 위의 프로베니우스 사상이 항등 함수임을 의미한다. formula_1가 소수이고, formula_2가 정수라고 하자. 페르마의 소정리에 따르면, 법 formula_1에서 formula_4와 formula_2는 서로 합동이다. 위 식은 formula_7일 때 자명하게 성립한다. 만약 formula_8일 경우, 양변을 약분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이는 모든 소수가 만족시키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즉, 페르마의 소정리에 나타난 합동식을 만족하는 수가 반드시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를 만족하면서 소수가 아닌 formula_11를, formula_2를 밑수로 하는 카마이클 수라고 부른다.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페르마는 이 정리를 언급했을 뿐, 정확한 증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현재 기록상 남아 있는 증명 가운데 최초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것이다.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합동식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 증명 방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정리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이용하여, 소수가 아닌 정수 n에 대해서까지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n이 자연수, a가 n과 서로소인 자연수일 때, 이 성립한다. 식에서 formula_14는 오일러 파이 함수를 나타낸다. 유한체 이론에서 다항식의 나눗셈에 관련된 결과를 통해 페르마의 소정리를 일반화할 수도 있다. 표수가 formula_1인 유한체 formula_16에 대하여, 다음 두 명제가 성립한다. 여기서, 뫼비우스 반전 공식에 따라 C(p, k)를 얻는 일반적인 공식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7는 뫼비우스 함수이다. 아키라 (만화) 《AKIRA》()(국내수입명: 폭풍소년)는 오토모 가쓰히로가 창작한 일본의 만화이다. 고단샤가 발행한 만화 잡지 주간 영 매거진에서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화(1988년) 및 게임화도 되었다. 근미래의 황폐한 세계를 그린 SF 작품으로, 치밀하고 현실적인 묘사나 연출 등이 화제가 되었으며, 만화와 영화 모두 대히트함과 동시에 혁신적인 기술을 가져왔다. 이후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준 영향도 크다. 원작인 만화판은 '만화계의 두 번째 혁명'이라고도 일컬어진다(첫 번째는 물론, 데즈카 오사무). 제목인 AKIRA는 오토모 자신이 팬으로 삼고 있으며 큰 영향을 받은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유래한다. 붓으로 쓴 제목은 만화가인 히라타 히로시가 쓴 것이다. 단행본은 주간지와 같은 대형판 사이즈와 절단면에 채색을 하는 등, 이목을 끄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지만, 프랑스의 만화가 뫼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작자의 치밀한 묘사로서는 이 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국외에서는 아메리칸 코믹의 스태프가 채색한 외국어판이 유통되었으며, 이것을 일본어로 역번역한 것이 《국제판 AKIRA》 및 《총천연색 AKIRA》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발매됐다. 영화는 제작비에 10억 엔을 건 대규모 작품으로, 치밀한 작화나 음악, 파괴 영상 등으로 당시의 애니메이션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제작 기법으로 애프터 레코딩가 아닌 프리 스코어링을 채용했다. 또, 통상적으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 인물의 입의 움직임은 3종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음의 수와 같은 5종류로 그려졌다. 일본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평가나 수출의 증가에 공헌했다. 비디오화가 될 때에 많은 컷을 손보거나, 음악과 관련해서도 손을 보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본 작품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서양의 대중시장으로 폭발적으로 넓힌 마일스톤이 되어 해외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2009년 여름에 공개할 예정인 실사영화 제작이 계획되어 있다. 제작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감독은 로리 로빈슨, 워너브라더스 배급이다. 하지만 원작이 워낙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많은 탓에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기란 쉽지가 않았고 각본마저 제작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다가 2013년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198X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는 1988년이라고 나온다.) 도쿄는 신형 폭탄에 의해 붕괴되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여, 세계는 황폐되어 가고 있었다. 2019년. 도쿄 만에 떠오르는, 동경 23구를 본뜬 인공 도시 네오동경의 어둠에 버려진 고속도로. 폭주족 소년들이 들어와서 질주한다. 그중 한 멤버인 데쓰오는 백발의 소년과 접촉 사고를 일으켜 중상을 입는다. 백발의 소년은 정부의 초능력 연구 기관에서 반정부 게릴라(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빠져나오게 된 초능력자 다카시였다. 데쓰오는 다카시와 함께 연구 기관에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초능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극장판과 원작에서는 인물의 설정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양자의 공통 사항을 기술하고, 특히 극장판과 원작에서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그 점을 설명한다. 영 매거진에서 1982년 12월 20일호부터 1990년 6월 25일호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인해 일시 중단됐다. 전 120화. 1984년, 제8회 고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 수상. 2002년, 아이즈너 상 최우수 국제 아가이브 프로젝트 부문 및 최우수 국제 작품 부문을 수상. 또, 그 이전의 1992년에 올 컬러 국제판 AKIRA가 최우수 채색 부문을 수상했다. 1988년 제작. 상영 시간 124분. 70mm프린트. 제작비 약 10억 엔. 총 셀화 매수 약 15만 장. 본작에서 AKIRA(28호)가 철인 28호의 오마주인 것은 분명하다. 또, 이것은 주인공인 가네다(쇼타콘의 어원인 가네다 쇼타로)나 데쓰오(철인을 비꼬고 있음)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본 작품은 일본에서도 1960 ~ 70년대에 유행한 서브컬처인 사이키델릭 문화(마약 문화・히피 문화와도 관계 있음)의 영향이 작중에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주인공이나 크라운 등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흥분제(이것은 가네다의 자켓의 등에 그려진 캡슐에도 관계 있음), 더욱이 초능력자가 복용하는 치사량에 달하는 위험한 약물 등의 관련성을 밝혀내는 서브컬처 연구자도 적지 않다. 작중에서 주인공인 가네다가 다루는 '가네다의 바이크'를 시작으로, 다른 모든 개성적인 바이크는 카울부터 프레임 레이아웃에 이르기까지 세미 이지 오더 시스템(semi-easy order system)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차륜 안에 설치된 상온 초전도 모터를 통해 양륜구동을 실현하고, 전력은 가솔린 엔진에 의한 발전(영화 앞부분에서 데쓰오가 제멋대로 찾아왔고, 원작에서는 가네다가 약을 연료 탱크에 숨기고 있음). 또, 보디의 이곳저곳에 붙여진 스티커는, 1980년대 회고 붐에 의한 유행인 것 같다. 하지만 조커가 타는 대형 아메리칸은 현재와 같은 가솔린 엔진의 후륜구동차라는 설정이며(그의 취미), 큰 머플러가 몇 개씩이나 나와 있다. 단행본 4권이 간행된 후에 영화판의 제작이 개시됐으며, 원작 만화의 연재는 장기간 휴재되었다. 5권의 간행까지 실로 3년간을 필요로 했지만, 영화의 세계적인 히트로 발매된 "국제판 AKIRA"(해외에서 발매된 원작 영어판의 역수입)에는 당시 일본에서는 미발매된 5권의 전반에 상당하는 이야기가 게재되어 있었다. 국제판은 1권당 수록화가 일본의 것보다 적었는데, 일본에서 5권으로 발매되기에는 부족한 화수라도 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4권의 권말에는 5권의 광고가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5권이 최종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연재 재개 후에는 장기에 걸쳐 정력적으로 연재가 계속되었으며, 5권은 사전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게 아닐까 예상되었지만, 결국 5권과 6권으로 나뉘면서, 6권이 최종권이 되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아니메(), 애니메 또는 재패니메이션()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통틀어 일컫는다. 주로 기존에 연재되는 동명의 인기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되며, 장면의 대부분은 셀 애니메이션 방식이 사용된다. '아니메'는 영어 단어 'animation(애니메이션)'이 변형된 형태이다. 다른 언어에서, 이 용어는 일본에서 온 애니메이션이나 다채로운 그림, 활기찬 캐릭터와 판타지적 주제를 가진 일본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의미한다. 초기 일본의 상업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후에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은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캐릭터풍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경우 1960년대에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에서 나왔으며, 20세기 후반에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거대한 국내외 시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직접 홈 미디어로, 인터넷으로 배포되었고, 다양한 대중의 수요를 잡기 위해 다양한 장르로 나뉘었다. 아니메는 원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Animation)을 지칭하는 약자였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중 60% 이상을 제작할 정도로 거대해진 오늘날에 '아니메'는 각국의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쓰여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권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또는 줄여서 "일본 애니", "일애니"라고 하고 있어 아니메란 용어의 비중이 낮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 나온 기술에 반응하여 시간에 적응해 온 독특한 제작 방법과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예술의 형태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움직임에는 초점을 덜 맞추고, 패닝, 줌과 앵글 샷을 비롯한 카메라 효과의 사용과 더불어 주위 환경의 사실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다양한 예술 형태가 사용되었으며, 강조된 감정 표현이나 현실적인 크기의 눈을 포함하여, 등장 인물의 조화와 특징은 꽤 다양하다.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430여 회사가 있는데 그 중 유명 회사는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 토에이 애니메이션 등이 있다. 국내 시장을 나눠먹고 있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DVD 판매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외국어 더빙이 증가함에 따라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어서 일본 밖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많아지기는 했지만, 팬과 산업계 모두 이를 단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할 뿐이다. 현재는 일본 아니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는 평이 주로 작품성측면에서 많이 나돌고 있지만 해외수익성 면에서는 어느때보다 전성기이다. 방송영상컨텐츠수출액에서 일본 아니메는 k-pop에 조금 밀리지만 10,13년 때보다 17년 현재 많이 따라잡았고 특히 k-pop은 일본을 필두로 주로 아시아에서 수익이 90%이상 북미,유럽은 10%도 채 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일본 아니메는 북미,유럽 수익이 35%가량 될 정도로 세계적 범용성 측면에서는 k-pop보다 크게 앞서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탄생 배경은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 특수를 맞이해 경제 부흥을 맞아 해외 문화를 탐닉하던 시대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오락으로 정착되며 영화 스타가 등장하던 시기였고, 닛카쓰, 덴카쓰 등의 영화사들도 설립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이제 막 제작되기 시작했던 미국 (존 랜덜프 브레이)과 프랑스 (에밀 콜)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일본에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모카와 오텐, 고치 준이치,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삼인방은 영화사들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아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하고 분석, 기법을 연구한 뒤 1916년부터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1917년 1월 시모카와 오텐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인 《문지기 이모카와 무쿠조 이야기》를 제작하였는데 칠판에 분필로 그리는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조악하고 단순하였지만, 훗날 시모카와는 기초적인 페이퍼 애니메이션 기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기타야마 세이타로는 1917년 5월 《원숭이와 게의 전투》를, 고치 준이치도 6월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를 제작하였다. 이 세 작품은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들로 항상 언급된다.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경우 일본에서 최초의 애니메이션 독립 스튜디오인 기타야마 영화 제작소를 설립하기까지 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설비가 파괴되면서 제작을 중단한다.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공백기를 맞았지만, 위기를 딛고 발전을 계속하였다. 기타야마 영화제작소의 애니메이션 기술자 출신이었던 야마모토 사나에는 1925년 야마모토 만화제작소를 설립, 《노인을 버리는 산》을 시작으로 정부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하였고, 요코하마 시네마 상회 출신의 무라타 야스지는 1926년 첫 작품 《기린의 목은 왜 긴가》 이후 '무타라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컷 아웃 방식의 교육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 전쟁 전 최다 작품을 만들어내 달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오후지 노후로는 1929년 일본 최초의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제작하였으며, 마사오카 겐조는 1932년 셀 방식을 이용해 제작된 본격적인 발성 애니메이션인 《힘과 여자세상》으로 기술을 한층 진보시켰으며, 수년 뒤 《거미와 튤립》을 제작해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중에 1927년 단편 《증기선 윌리》를 시작으로 하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비롯한 해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1930년부터 일본에 연이어 수입된다.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 애니업계는 수입 작품에 비해 비싼 제작비, 엉성한 움직임과 스토리 등으로 경쟁력이 낮았고, 각 영화사들은 흥행 실패를 예감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극장에서 물러난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정부 주관의 교육·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 사회는 군부독재 시절로 서서히 접어들며 1931년 중일 전쟁 발발, 1933년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에 이르렀고, 정부는 이에 맞춰 전의를 고조시키기 위한 선전 홍보 애니메이션들을 여럿 의뢰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세오 미쓰요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 《모모타로·바다의 신병》, 오후지 노부로의 《바다의 사나운 독수리》, 야마모토 사나에의 《스파이 격멸》 등이 있었다. 이들 작품은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하는 등 군국주의 색채가 짙었지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려 했으며, 《모모타로·바다의 신병》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은 전후 애니메이터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GHQ는 신속한 점령정책을 집행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홍보를 활용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1945년 가을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 겐지 등을 중심으로 100여명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소집되어 신일본동화사가 설립되었다. 마사오카 겐조는 봄꽃의 평화를 강조하는 《벚꽃》(1946)을 제작하였으나 극장가에 공개되지는 않았고, 《버려진 고양이 도라짱》 (1947) 등을 제작하였지만 GHQ가 바라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진척되자 디즈니의 역할을 염두에 두었던 GHQ도 이내 포기, 신일본동화사는 1947년에 해산되었다. 신일본동화사의 세 사람은 같은해 일본만화영화사를 설립하나 무라타 야스지만 남고, 무라타는 세오 미쓰요를 불러들여 《임금님의 꼬리》 (1949)를 제작하나 배급사 도호에서 내용 문제를 이유로 비공개 처리, 일본만화영화사는 큰 투자금을 보전하지 못하여 파산하였다. 이외에도 전쟁 전에 활약하던 작가 대부분은 패전의 충격과 사회격변에 순응하지 못하고 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던 실정이었다. 야마모토 사나에, 마사오카 겐조는 도호의 투자를 받아 '일본동화'를 설립하였는데 여기에는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치 등의 인사도 들어와 있었다. 이후 도호의 관련사를 흡수해 투자를 늘려 회사명을 니치도 (日動) 영화로 바꾸고, 1995년에는 도에이의 위탁으로 단편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한 것을 계기로 도에이가 니치도영화를 매입, 도에이 교육영화 소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삼으며 1956년 7월 '도에이동화'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도에이동화는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타파하고 미국식 분업 제작시스템을 차용,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1957년 13분 분량의 첫 작품 《새끼 고양이의 낙서》를 발표한 뒤, 1958년 10월에는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사전》을 개봉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으로 인기를 끌며 절찬리에 상영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수많은 애니메이터 지망생을 낳게 되었다. 이후로도 도에이는 《원숭이 소년 사스케》 (1959), 《서유기》 (1960) 등을 공개하였다. 한편 1952년 〈철완 아톰〉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다, 도에이동화 측에서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서유기》의 제작협력 의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의 기본을 배웠다. 1961년 도에이동화에서 퇴사한 데즈카는 사카모토 유사쿠, 요코야마 다카이치 등과 함께 도쿄 후지미다이에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실험작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1962)을 계기로 데즈카 프로덕션은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이 고도경제성장기에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는 애니메이션 환경의 변화도 이뤄졌다. 1953년 일본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 개시되고, 1959년에는 주간 단위의 만화잡지들이 창간되어 어린이들은 매주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제작한 무시 프로덕션은 앞으로의 방향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설정하고, 철저한 상업적 작품을 기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가의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표현을 생략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방식을 도입하고, 에피소드 방식의 미국 애니와는 다른 '재미있으면서 복잡한 스토리', 즉 이야기와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무시 프로덕션의 첫 정기작품은 탄탄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쌓아가고 있던 〈철완 아톰〉으로 결정되었고, 1년 간의 제작 끝에 1963년 1월 1일 저녁 6시 15분, 후지테레비에서 《철완 아톰》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철완 아톰은 당시 엄청난 시청률로 인기를 구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캐릭터 상품 권리, 최초의 팬클럽 설정 등 여러가지 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철완 아톰》의 성공에 주목한 TV 방송국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속속 참가하였다. TCJ 스튜디오는 1963년 한 해에 《신선부락》, 《철인 28호》, 《에이트맨》을 제작해 방영 개시하였는데 모두 공상과학 장르에 속해 SF 작가가 각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도에이동화는 《늑대소년 켄》을 제작하였지만 그간 장편애니에 집중한 탓에 비효율적인 제작방식이라는 문제를 겪기도 했다. 1964년 데즈카 오사무는 최초의 컬러 TV 애니메이션을 기획하였는데 이미 방영되던 《철완 아톰》이 첫 대상이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정글 대제》를 풀 컬러 애니메이션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기동전사 건담》과 《우주전함 야마토》등의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수용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은 물론 성인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80년대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보급됨.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인 지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고, 일본 애니메이션 중의 인기도에서 2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며,1986년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시작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과 1993년부터 시작한 농구만화 슬램 덩크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 작품 제작비의 70~80%를 차지하는 인건비가 상승하고, 일본의 버블 경제(잃어버린 10년)가 무너지면서 경제 침체로 이어져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판매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화풍, 애니메이션 기법, 생산, 제작에 있어서 다른 형태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를 띈다. 시각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원화가, 감독, 원작가, 스튜디오에 따라 그림체가 상당히 다르다. 어느 한 그림체가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애니메이션 기법과 캐릭터 디자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일반적 애니메이션 제작과 마찬가지로 콘티 작성, 목소리 녹음, 캐릭터 디자인, 셀 제작 등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1990년대 이후 애니메이터들은 점차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의 효율성을 올리기 위해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후지 노부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초기를 개척한 사람으로, 실험적이었고 흑판에 그린 그림, 종이를 잘라 만든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 실루엣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셀 애니메이션은 점차적으로 유명해져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모치나가 타다히토, 카와모토 키하치로, 무라타 토모야스가 만든 스탑 모션 인형극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독립 단편 영화를 제외하고 다른 애니메이션 기법들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컴퓨터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셀 애니메이션과 섞은 공각기동대,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작품이 있다. 셀을 제작하는 주요 회사인 후지필름은 셀 생산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산업 전반에 셀을 모아야 한다는 충격을 주었고 서둘러서 디지털 작화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 시기가 오기 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pose to pose approach를 사용하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추세는 비싼 원화를 덜 사용하고 중간에 동화를 많이 끼워넣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기존의 사용했던 장면을 재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선구자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중점을 두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프레임을 조금 줄여서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단점을 정성을 들인 작화로 극복하는 등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한 기법은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장치의 개념으로서도 사용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면은 삼차원 뷰를 달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배경은 작중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이다. 배경은 항상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서 배경을 따 오는 경우도 있다. Oppliger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모든 스타급 캐스팅을 합쳐서 매우 강한 감동을 자아내는 드문 매체라고 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화적 효과는 미국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카메라가 찍은 것과 같이, 패닝, 줌, 원거리/단거리 샷과 같이 영화같은 샷을 사용하는데, 현실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훨씬 동적인 샷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사 녹음을 먼저 하고 동화 작업을 하는 북미 애니메이션과 달리 동화 작업을 끝낸 다음에 대사를 녹음한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입 모양과 대사가 맞지 않는 오류도 생길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신체의 비례는 현실계의 신체 비례를 정확하게 반영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제작자는 머리 높이를 비례의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한다. 머리 길이는 다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키는 7등신에서 8등신 정도이다. 캐릭터 디자이너는 신체가 상당히 변형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몸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몸은 작은데 머리는 큰 균형에 맞지 않는 캐릭터가 있으며 이 경우 2등신에서 4등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짱구는 못말려 같은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신체 비례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예이며, 서양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눈 크기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 눈이 큰 아니메 캐릭터는 베티 부프와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테즈카 오사무가 눈이 상당히 큰 캐릭터를 그린 것이 시초이다. 테즈카는 일본 만화애니 역사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테즈카가 만든 상징적 예술 스타일과 캐릭터 디자인은 사람 감정 전체를 눈 모양을 통해서 묘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작자는 눈 색깔을 다양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밝은 음영, 색조, 어두운 음영을 섞어서 눈 색을 표현한다. 문화 인류학자 Matt Thorn은, 일본 애니메이터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스타일의 눈이 다소 외국인같은 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눈이 다 큰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사실적인 눈 크기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캐릭터의 머리카락 색도 현실적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럽지 않게 생생하고 다채로우며 독특한 스타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과장되어 있으며 머리카락의 과장된 움직임은 액션과 캐릭터의 감정을 시각적 효과로 강조하는 데에 쓰인다. Poitras는 만화 표지 일러스트의 머리카락 색을 조사했는데, 눈을 사롭잡는 그림과 다채로운 색채는 어린이용 만화에 매력적이라고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국내 시장에서 제작되기는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인종이나 국적은 항상 정의되는 것은 아니며,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같이 의도적으로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특정한 감정과 생각을 이미 정해져 있는 표정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양 애니메이션과 다르다. 또한, 그러한 특징에는 특정한 감정과 기분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사용하는 고정된 도해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종종 과장되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전형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인데, 남캐가 화를 낼 때에는 코피가 난다. 순간적으로 단순그림체가단순해질때도있다.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땀을 그린다거나, 부끄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붉게 그린다거나, 집중해서 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을 반짝거리게 표현하는 것 같은 다양한 시각 기호가 사용된다. 일본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의 오프닝, 엔딩곡은 J-Pop이나 락 음악에 속해 있으며, 때때로는 유명한 밴드의 곡이 사용되기도 한다. 작중 스토리를 마음에 두고 가사를 쓰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시장도 목표를 해서, 주제를 살짝만 내비치는 곡도 나타나며 아예 줄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곡도 나오기도 한다. 음악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배경 음악은 줄거리 노선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단지 애니메이션 장면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다. 몇몇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에 쓰인 음악을 전부 모아서 OST 앨범을 발매하기도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타겟 연령층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동 만화, 소녀 만화, 소년 만화, 청년 만화, 여성 만화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소녀 만화와 소년 만화는 다양한 성별의 독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녀 어린이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애니메이션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성인 애니메이션의 경우 작중 전개 속도가 느리고 줄거리 복잡성이 더 크기도 하며, 성인이 좋아할 만한 주제와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성인 애니메이션 작품 중 일부는 일본에서 "R18"로 분류가 되는데,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헨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르의 하위 장르로, 성적 행위를 직접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성적인 주제나 암시가 들어가 있는 '엣치'라는 것이 있는데 전형적으로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하렘 애니메이션에 이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청소년 계층과 성인 계층에게 인기가 많아서 애니메이션에 판치라를 비롯한 엣치 요소를 넣는 것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류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분류와 달라서 간단한 특징으로 분류할 수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대해 책을 쓴 Gilles poitras는 전쟁과 평화를 전쟁 소설로 여기게 하는 것과 유사하게 '건담 0080'과 그것의 복잡한 전쟁 묘사를 거대 로봇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을 비교했다. SF는 일본 애니의 주된 장르이고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철인 28호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도 있다. SF의 하위 장르 중에는 메카물이 잇는데 건담과 같은 작품이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장르 애니메이션 중에은 일본의 옛 이야기에서 소재를 따 온 '이누야샤'와 같이 동서양의 전통과 설화에 기반한 작품이 있고, 위그드라실이라 불리는 컴퓨터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옮겨 온 스칸디나비아 여신을 묘사한 '오! 나의 여신님'이란 작품도 있다. 애니메이션의 장르는 일반적인 경우도 있는데, 드레곤 하프와 같이 판타지와 코미디가 섞인 작품, 카리오스트로의 성과 같이 범죄 애니메이션에 익살스러움을 첨가한 경우도 있다. 다른 하위 장르로는 마법소녀, 하렘, 스포츠, 무술, 문학의 애니화, 전쟁 등이 있다. 동성애를 다룬 장르도 있다. 원래 용어에는 외설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야오이(남성간 동성애)와 백합(여성간 동성애, 百合)는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다룬 작품을 설명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동성애 성향이 있는 캐릭터는 재미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성애 캐릭터를 진지하면서도 공감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역대 최고 시청률은 다음과 같다. 백로 (절기) 백로(白露)는 24절기의 15번째로 태양 황경이 165도가 될 때이다. 양력으로는 9월 7일 내지 9월 8일에 해당한다.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 하여 백로라 한다. 백로는 이슬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PC PC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양학 해양학(海洋學, )은 바다(해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질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 그리고 이들 각 분야의 학문을 바다와 그 주위에 적용할 공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분야를 포함한다. 해양학의 세부학문으로는 해양지질학(海洋地質學), 물리해양학(物理海洋學), 해양생물학(海洋生物學), 화학해양학(化學海洋學), 해양공학(海洋工學) 등이 있다. 해양지질학은 지구 내부의 성분, 지각의 변동, 해저퇴적물의 특성, 고기후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해양지질학은 순수 학문분야를 넘어 지진예측이나 지하자원의 분포를 분석하는 실용적인 학문에도 영향을 주는 학문분야이다. 물리해양학은 파랑역학, 해류, 해양-대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최근 물리해양학은 공해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한 예측이 중요해짐에 따라 학문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해양생물학은 해양생물의 분포와 특성, 해양-대기의 상관관계로 인한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해양생물로부터 유용한 물질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화학해양학은 해양의 용존 고체 및 기체와 이들 성분이 해양에 미치는 지질학적·생물학적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해양공학은 석유 플랫폼, 선박, 항만 등 해양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구조물의 건조·설계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또 항해의 안전성 제고에 대한 연구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안나 린드 안나 린드(, 1957년 6월 19일 ~ 2003년 9월 11일)는 스웨덴의 정치가이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환경부 장관, 1998년부터 2003년 암살당할 때까지 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스톡홀름 태생이며, 1982년 웁살라 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총선 이후에 예란 페르손 내각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정치적 능력과 인기로 사회민주당에서 페르손의 뒤를 이을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쇠데르만란드주(Södermanland)의 주지사였던 보 홀름베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안나 린드는 2003년 9월 10일 오후 4시 정각 직후에 스톡홀름 시내 누디스카 콤파니엣(Nordiska Kompaniet) 백화점에서 쇼핑 중 칼을 든 한 괴한에게 공격을 받아 가슴과 배, 팔 등을 찔리고 말았다. 당시 관례에 따라 경호원은 곁에 없었으며, 공격직후 카롤린스카(Karolinska)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어 9시간에 걸친 1차 수술을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2차 수술에 들어가지만 다음날 아침 5시 29분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암살범은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가 미야일로 미야일로비치가 체포되어 범행을 자백,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안나 린드는 스웨덴에서 지난 10년 동안 암살된 두 번째 정치인이며, 19세기부터 따지면 3번째이다. 전 총리 올로프 팔메도 1986년 알 수 없는 범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린드는 생전에 스웨덴의 유로화 채택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녀의 암살은 유로화 사용에 대한 국민투표(9월 14일)가 있기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났다. 암살 사건 이후에 유로화 도입 찬반 진영은 찬반 유세 활동을 중지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하여 스웨덴 국민은 유로화 채택을 반대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에드워드 텔러 에드워드 텔러(, , 1908년 1월 15일 ~ 2003년 9월 9일)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 물리학자이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 헝가리를 떠나 독일에서 고등교육을 받는다. 1930년 라이프치히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괴팅겐에서 2년을 보내고, 1934년에 유대인 구출 위원회(Jewish Rescue Committee)의 도움으로 독일을 탈출한다. 잠시 영국에 머물다가, 닐스 보어가 있던 코펜하겐에서 1년을 지낸다. 1935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41년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기서 그는 조지 가모프를 만난다. 1942년 브릭스 위원회(Briggs committee)에서 근무하면서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 앨러모스 과학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문에 소속되어 핵분열을 이용하는 핵폭탄에서 핵융합을 이용하는 핵폭탄(수소폭탄)으로의 발전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1946년에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시카고 대학의 교수가 된다. 1949년 소련의 핵폭탄 개발 성공 이후 1950년 로스 앨러모스로 돌아와, 수소폭탄 계획에 참여한다. 그와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실제 작동하는 수소폭탄의 설계를 제출하였지만, 그 계획을 지휘하는 장이 되지 못한다. 그는 로스 알라모스를 떠나 1952년 새로 설립된 캘리포니아 대학 방사선 연구소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 지부에 참여하게 된다. 1954년 보안 청문회(security clearance hearings) 때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난하여 사이가 나빠진다. 1958년부터 1960년에 걸쳐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그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근무한다. 그는 지치지 않는 핵개발론의 옹호자였으며, 지속적인 핵개발을 주장했다. 레이건 정권에서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가 논의되었을 당시, 그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의 한 명이었다. 1975년 퇴직 후 죽을 때까지 리버모어 연구소의 명예소장이었으며, 또한 후버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003년 9월 캘리포니아 주 스탠포드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브라이언 메이 브라이언 메이(, CBE, 1947년 7월 19일 ~ )는 영국의 음악가이자 천체물리학자이다. 록 밴드 퀸의 기타리스트로, 독특한 기타 음색과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직접 만든 수제 기타 레드 스페셜로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히트곡으로는 〈We Will Rock You〉, 〈Tie Your Mother Down〉, 〈Who Wants To Live Forever〉,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등이 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제4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Liverpool John Moores University) 총장을 지냈다.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연주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그만의 기타 음색은 많은 사람들이 카피를 시도하지만 완벽히 같은 음색을 따라하는 것은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는 다양한 종류의 기타를 연주했는데 주로 레드스페셜을 연주한다. 레드스페셜은 그가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와 함께 디자인한 기타로, 18세기에 화로로 썼던 나무로 만들었다. 레드스페셜에 대한 그의 설명을 《Queen In Their Own Words》(믹 마이클 저, 1992)의 62페이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 큰 넥을 좋아합니다 - 두껍고, 평평한 거요. 핑거보드는 러스틴 플라스틱 코팅으로 칠했고요. 트레몰로는 자전거 안장에 다는 주머니로 만들었는데, 끝부분의 놉은 뜨개질용 바늘로, 스프링은 낡은 오토바이의 벨브 스프링으로 만들었답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독창성은 메이가 오묘하고 독특한 사운드 효과를 낼 수 있게 도왔다. 예를 들어 〈Procession〉이란 노래에선 오케스트라를 흉내낼 수 있었고, 〈Get Down, Make Love〉에서는 신시사이저로 착각할만한 특이한 사운드 효과를 연출했다. 또한 〈Good Company〉에선 트롬본, 피콜로등을 흉내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제 기타와 함께 플라스틱 피크 대신에 영국의 6펜스 동전을 사용하는데, 동전이 딱딱하기 때문에 연주하면서 컨트롤하기에 더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메이는 어린 시절에 클리프 리처드와 더 섀도스의 팬이었는데, 이들은 메이가 거칠고 빠른 곡을 즐겨 연주하도록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퀸의 코러스에서 그는 보통 낮은 음의 배킹 보컬을 맡았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노래 중 〈Some Day One Day〉, 〈All Dead〉, 〈Leaving Home Ain't Easy〉, 〈’39〉와 같은 노래에선 직접 보컬을 맡기도 했다.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후, 2개의 솔로 앨범(《Back to the Light》, 《Another World》)을 내기도 했다. 메이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진학하여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행성간 먼지의 속도에 따른 빛의 반사에 대해 연구하였다. 1970년대 초 퀸 활동이 성공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가, 2007년 10월 황도광에 대한 박사 논문(A Survey of Radial Velocities in the Zodiacal Dust Cloud)을 완성하여 2008년 5월 14일 졸업하였다. 2007년 11월 17일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임되어 2008년 취임하였고, 2013년까지 재임하였다. 메이는 동료 프레디 머큐리, 로저 테일러, 존 디콘과는 달리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마약이나 문란한 여성 관계 등과도 거리가 멀었다. 술은 아주 가끔 마시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기네스, 가장 좋아하는 리큐르는 베일리스다. 그는 꽤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을 기도할 정도의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고백했었다. 그 당시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프레디의 건강 악화로 라이브 투어까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헤럴드 메이가 애연가였기 때문에 메이는 담배를 싫어하며 특히 실내에서의 흡연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담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종종 글 중에 내비치곤 한다. 메이는 2000년 11월 18일 배우 애니타 돕슨과 재혼했으며, 그에겐 3명의 자녀가 있다. 2005년 12월 6일, 브라이언 메이는 음악 산업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팜 팜(palm)은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PDA이다. 저렴한 가격, 휴대성과 실용성이 두드러진다. 2010년 4월 28일에 HP는 팜을 US $12,000,000,000에 인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단종 모델 "파일럿 5000"을 비롯한 초기 모델에서는 팜 파일럿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팜 파일럿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파일럿()은 1996년 팜 컴퓨팅(, 팜 컴퓨팅은 U.S. 로보틱스의 한 사업부였고 이후 U.S. 로보틱스는 3Com에 합병된다)사에서 생산된 첫 번째 세대의 PDA였다. 출시 당시 파일럿은 간결한 디자인과 수많은 응용 소프트웨어 덕분에 미국 내에서 폭발적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만 년필로 유명한 파일럿 펜사에서 제기한 상표권 침해 소송으로 인해 1997년 두 번째 세대인 팜 파일럿이 탄생하였다. 1998년 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팜과 PDA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파일럿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제프 호킨스와 도나 더빈스키, 그리고 에드 콜리건이었다. 이들은 팜 컴퓨팅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의 원래 목적은 그래피티()라 불리는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위한 것이었다. 팜 컴퓨팅이 3Com에 합병되자 설립자들은 팜 제품에 대해 깊게 관여하지 못하게 된 것에 분노했고, 1998년 6월 3Com을 떠나 핸드스프링()사를 설립하게 된다. 호킨스는 팜을 떠날 때 팜 OS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 팜 호환 기종인 핸드스프링 바이저()를 생산하였다. 3Com의 팜 컴퓨팅 사업부는 이후 2000년 팜()사로 분사하였고, 이후 핸드스프링과 합병하였다. 2003년에는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는 팜원()과 소프트웨어를 라이센스하는 팜소스()로 분할되었다. 2005년에 팜원은 다시 팜으로 개명하였고, 팜소스는 일본의 액세스()사가 인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팜 기기들은 초기 모델에서 점점 진화하였다. 초기 모델은 당시에 인기 있었던 모토로라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ARM 아키텍처를 채택한 모델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또한 PC와의 연결도 직렬 RS-232C 케이블에서 USB 케이블로 바뀌어 동기화 속도도 향상되었고 심지어는 PC의 하드 드라이브로 인식되게끔 하는 라이프 드라이브() 모델까지도 생산되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스마트폰으로의 진화도 본격화되어 트레오 600/650() 모델이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650은 휴대폰과 통합되어 스마트폰 형태를 가진 모델로 휴대전화 기능은 물론, 전자우편, SMS 등의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1997년 말 한메소프트가 파일럿 5000을 최초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세스컴, 코오롱정보통신, 팜잇에서 수입, 판매하였으나 대부분 사업을 철수하였다. 1996년 2분기에 발표되었고, 팜 OS가 탑재된 팜 파일럿의 최초 PDA 모델이다. 한메소프트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최초 수입된 모델이 파일럿 5000이었다. 1997년 1분기에 팜 파일럿 퍼스널과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을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인 파일럿 5000에 백라이트 기능을 추가하고, 메모리 용량을 늘렸다. 팜 파일럿 프로페셔널의 경우 최초로 TCP/IP 인터넷 통신 프로토콜과 전자우편 연동기능을 지원하였다. 1998년 1분기에 적외선 통신을 통한 비밍() 기능을 갖춘 팜 파일럿의 3세대 PDA인 팜 III가 발표되었다. 팜 III는 플래시롬()을 탑재한 최초의 모델이었다. 이에 따라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졌다. 1999년 발표되었다. 직전의 팜 III 모델과의 차이점은 메모리뿐이다. 팜 V모델은 1999년 1분기에, Vx 모델은 같은 해 4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파일럿 모델 중에 가장 뛰어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경우 CEO들이 많이 사용하여 CEO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팜 최초의 무선 연결이 가능한 모델이다. 오른쪽 후면에 안테나가 있어 이를 플립식으로 올리면 무선통신이 가능해진다. 무선통신 서비스는 일반 TCP/IP 기반의 서비스가 아닌 웹클리핑()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였다. 미국에서만 이용이 가능했다. 월 $9,99의 표준서비스(50KB 제공)와 $24.99의 확장서비스(150KB 제공)가 있었다. 1999년 3분기에 팜 III 시리즈 중 저가 모델로 발표되었다. 플래시롬이 없어 운영 체제의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하다. 이후에 발표된 팜 IIIe SE(Special Edition) 모델은 투명 외장으로 되어 있다. 팜 III 모델 시리즈와 메모리용량을 제외하고는 같은 사양을 가졌으며, 2000년 1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파일럿 최초의 컬러 디스플레이를 갖춘 모델이다. 2000년 1분기에 출시되었다. 1999년 모토로라는 256컬러를 지원하고 33MHz에서 동작하는 VZ 드래곤볼 프로세서를 발표했지만, 팜 IIIc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팜 VII에 이은 후속모델로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 사양이 확장되었다. 2000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IIIe를 대체하는 저가 모델로 지금까지의 팜 파일럿 모델과는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스틱 플립커버가 있어 액정 화면을 보호할 수 있었으나 작은 액정 화면은 단점으로 지적되었었다. 아울러 PC와 연결되는 USB 케이블은 제공되었으나 크래들()이라 불리는 거치대는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2001년 1분기에 발표되었고, 이전 모델인 팜 m100에 비해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 또한 크래들도 제품 패키지에 포함되었다. 팜 파일럿의 새로운 고급모델로 2001년 팜 m500과 팜 m505가 나란히 발표되었다. 두 모델의 차이는 디스플레이의 컬러 표시 여부이지만, 팜 파일럿 최초로 SD와 멀티미디어카드(MMC)가 지원되는 확장슬롯이 채택되었다. 전체적으로 팜 파일럿의 흥행 모델이었던 팜 V 시리즈의 뒤를 잇는 외형을 가졌으나 출시 당시 가격이 비싼 편이었고, 디스플레이 화면이 어둡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이 모델부터 팜의 새로운 PC 연결방식인 범용커넥터()가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해 2001년 코오롱정보통신이 팜 m500과 m505를 정식으로 수입판매했었다. 한글 입출력을 위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한팁() 3.1이 제공되었다. 한국 출시가는 m500이 56만원, m505가 66만원, 저가 모델로 m105가 25만원이었다. 2001년 1분기에 에 발표되었다.이전 모델인 팜 m100/m105와 같은 외형을 가졌으나 확장슬롯과 함께 USB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1분기 출시되었으며, m125와 같은 외형을 가졌지만, 컬러 스크린을 지원했다. 컬러를 지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던 모델이었다. 2002년 1분기에 팜 VII의 후속 모델로 발표되었다. 무선데이터 통신은 북미지역에서만 서비스가 되었다. 일종의 팜 m505 개선모델로 2002년 발표되었다. 가장 큰 개선점은 디스플레이가 더 밝아지고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팜의 새로운 저가 모델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외형을 가졌다.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이전 저가 모델인 m100이나 팜 IIIe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모았다. 확장슬롯의 부재와 백라이트가 없음에도 과거 "단순한 팜(Simply Palm)"을 잘 지킨 모델이었다. 팜 최초로 슬라이드 방식과 팜 OS 5.0 버전을 채택한 모델이다. 텅스텐 T에서 T는 텅스텐()을 의미하며, 2002년 4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320 X 320의 높은 고해상도와 블루투스를 지원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양으로 출시되었다. 텅스텐 T와 함께 출시되었다. 모델명에서 W가 무선()의 의미하듯이 이동전화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음성통화와 문자 서비스 기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음성 통화는 헤드셋을 이용해야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동전화 서비스는 AT&T Wireless를 통해 제공되었다. 팜의 보급형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팜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으나 블루투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팜 최초로 무선랜(Wi-Fi)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또한 팜 최초로 인텔 CPU가 사용된 모델이기도 하다. 큰 배터리 용량과 메모리 용량, 그리고 미려한 화면이 장점이나 2.5mm 모노 헤드셋은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텅스텐 T를 잇는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발표되었다. 전체적으로 텅스텐 T와 사양이 유사하나 메모리 용량이 늘어났고, 화질이 개선되었다. 휴대전화 기능이 내장된 모델로 2003년 3분기에 핸드스프링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같은 해 10월 핸드스프링과 팜의 합병으로 팜 트레오 600이란 이름으로 팜원에서 계속 판매되었다. 휴대전화 기능과 PDA가 합쳐진 PDA폰은 이전 모델에서도 종종 출시되었으나 이 모델만큼 시장에서 성공한 모델은 없었다. 팜 파일럿 계열의 PDA를 다시 중흥시킨 모델이다. 트레오 600 모델도 휴대전화 표준에 따라 세분되어 있는데, 싱귤라 와이어리스(), T-모바일() 등은 GSM/GPRS 모델을 지원하고, 스프린트()에서 CDMA 모델을 지원한다.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되었으며 팜 OS 5를 채택한 새로운 저가 자이어 모델이다. 자이어 21, T3, TE는 모두 10월 1일에 출시되었다. 텅스텐 T2 이후 2003년 10월 1일에 출시된, 가상 그래피티와 320X480 해상도의 LCD를 채택한 고급 모델이다. 화면 회전기능인 가로보기와 세로보기가 지원되었다. 2003년 10월 1일 자이어 71, T3와 함께 발표되었다. 저렴한 가격임도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와 단순한 외형으로 인해 많은 인기를 모았다. 2004년 4월 28일에 발표되었다. 이전 모델이었던 자이어와 자이어 21에 비해 SD/MMC 확장 슬롯을 지원하고 160X160 해상도이지만, 컬러 스크린을 장착하였다. 이전 모델과는 달리 인텔계열의 CPU를 사용하였다. 2004년 2분기에 출시되었다. 자이어 71의 개선 모델로 여러 부분에서 사양이 늘어났으며, 블루투스 기능이 내장되었다. 텅스텐 T3의 후속 모델로 2004년 10월 4일 출시되었다. 외형은 텅스텐 E와 유사하지만, 기존 모델들과의 큰 차이는 160MB의 플래시램()을 가지고 있어 데스크톱 PC와 연결되었을 때 USB 드라이브로서 동작한다는 것이다. 트레오 600의 뒤를 이은 모델로 2004년 10월 25일에 발표되었다. 트레오 600보다 향상된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용량, 풍부한 번들 소프트웨어로 큰 인기를 끌었던 모델이었다. 휴대전화 서비스는 CDMA의 경우 스프린트()에서, GSM의 경우 싱귤라 와이어리스()와 AT&T Wireless에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다. 텅스텐 E의 후속모델로 블루투스와 비휘발성 메모리가 추가되었다. 팜 모델 최초로 소형 하드디스크인 4GB 마이크로드라이브가 내장된 모델이다. 2005년 2분기에 발표되었으며, 블루투스와 무선랜이 내장된 최상급 모델이다. 정식 명칭은 팜 라이프드라이브 모바일 매니저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와 연결하여 USB 드라이브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사양의 모델이나, 기존의 팜 모델에 비해 동작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100 미만의 가격이 책정된 PDA 초보자를 위한 저가 모델이다. 자이어와는 다른 제품 라인이다. 고급 모델인 팜 TX와 함께 2005년 4분기에 출시되었다. 2005년 4분기에 출시된 고급 모델이다. 700w는 팜 파일럿 최초로 팜 OS가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모바일 운영 체제인 윈도 모바일 5.0을 탑재한 PDA 폰이다. 700w의 후속모델로 700wx가 출시되었으며, 이 모델은 700w와 비교해 사용자 가용 메모리가 두 배로 증가되었고 외관색이 짙은 회색점만 다르다. 700v는 보다폰용으로 유럽에서 출시된 모델명이다. 트레오 650의 뒤를 이은 모델이다. 전체적인 외형은 트레오 700w로 거의 같다. 2007년 1월 발표된 팜 트레오 700w/wx의 후속 모델로 윈도 모바일을 장착했다. 팜 파일럿의 핵심을 이루는 팜 OS는 2바이트 문자코드체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한글을 입력하거나 출력하기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대한민국의 수입사들을 중심으로 팜 OS용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어 번들 형태로 판매되었고, KPUG에서 필명 오마르로 활동하는 개인 개발자에 의해 KOSPI라는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까지 개발되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화소 화소(畵素) 또는 픽셀(; picture element에서 유래)은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표준 디스플레이 해상도는 크게 다음과 같다. 메가픽셀 (줄여서 MP, Mpx)은 100만 화소를 가리키며 영상의 화소 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요소의 수나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디스플레이 요소의 수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2048x1536 센서 요소는 3.1 메가픽셀 (2048 x 1536 = 3,145,728)를 가진다는 말과 같다. 많은 디스플레이와 영상 획득 시스템들은 여러 이유로, 다른 색의 채널들을 하나의 소재에서 보여 주거나 인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소 그리드는 표시되는 단일의 색 영역이나, 일정한 거리에서 보이는 느낄 수 있는 색으로 나뉘게 된다. 컴퓨터 화면에서는 화소 단위보다 세세하게 표현할 수 없다. 벡터가 아닌 비트맵 방식의 사진이나 그림을 확대하면 거칠게 각져서 두드러진 화소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줄이기 위해, 화소의 모서리를 주변의 색과 비슷하게 바꾸어 색을 매끄럽게 바꾸는 것을 앤티에일리어싱(anti-aliasing)이라고 한다. 천문학 천문학(天文學, )은 별이나 행성, 혜성, 은하와 같은 천체와, 지구 대기의 바깥쪽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예를 들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우주의 시작 및 진화, 천체의 운동, 물리, 화학, 기상, 진화 등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선사시대의 여러 문명들은 피라미드, 스톤헨지 같은 천문학적 유물들을 남겼으며, 바빌론, 그리스, 중국, 인도, 이란, 마야문명 같은 동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밤하늘에 관한 많은 관측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망원경이 발명됨으로써 천문학은 현대 과학으로 발전을 하였다. 역사적으로 천문학은 측성학, 역법, 천체 항법, 그리고 심지어 점성술까지 수많은 분야들을 포함했었는데, 현대의 천문학은 보통 천체물리학(astrophysics)을 의미한다. 20세기에 들어와 천문학 분야는 관측 분야와 이론 분야로 크게 나뉘었다. 관측 천문학은, 천체에 대한 자료를 얻고, 이를 물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두며, 이론 천문학은 천체와 천문학적 현상들을 컴퓨터나 해석적인(analytical) 방법으로 설명하는 모형을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이 두 분야는 상호 보완적이며, 이론 천문학은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하고, 관측 천문학은 이론 결과를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천문학은 여러 자연과학 분야 중 아마추어들의 공헌이 아직도 큰 분야 중의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특히 혜성·소행성·초신성 같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현상()들을 발견하고 관측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천문학()은 점성술()과 혼동되어서 안된다. 비록 점성술은 천문학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현재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다. 점성술은 천체들의 하늘에서의 위치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체계로서, 자연과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천문학의 영어 낱말 "astronomy"은 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stron" ("ἄστρον")과 법칙, 문화를 뜻하는 "nomos" ("νόμος")에서 유래했는데, 문자 그대로 "별의 법칙"(또는 별의 문화)를 의미한다. 천문학은 점성술학(인간의 사건이 천체의 위치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두 분야가 공통된 근원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제 완전히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엄밀한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천문학은 "지구 대기 밖의 물체들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천체물리학은 "천문학의 한 분야로서 천체 및 천문현상의 물리적, 운동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학 개론서인 "물리적인 우주("The Physical Universe")"에서처럼 "천문학"은 우주·천체·천문현상을 정성적으로 기술하는 분야를, "천체물리학"은 이러한 대상을 보다 물리적으로 이해하는데 중점을 두는 분야을 의미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측성학 같이 전통적인 천문학에 가까운 분야도 있는 반면, 대부분의 현대 천문학 연구는 물리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므로, 천문학은 실제로는 천체 물리학으로 불릴 수 있다. 여러 대학이나 연구소는 주로 역사적인 이유나, 구성원들의 가지고 있는 학위 등에 따라서 종종 천문학과나 천체물리학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들어 천문학과가 역사적으로 물리학과와 같이 붙어 있었다면, 주로 천체물리학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저명한 천문학 저널로는 유럽의 천문학과 천체물리학()과 미국의 천문학 및 천체물리학 저널(), 천문학 저널()이 있다. 천문학은 인간이 하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동·서양의 양쪽에서 가장 일찍 태동한 학문 중의 하나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사와 날씨 예견 그리고 해양, 지리 관측과 측량이 그 주요 동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스톤헨지처럼 천문학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이 건설되기도 했다. 제사 같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이러한 천문대들은 1년의 길이를 재거나, 매해 일정한 시기에 농사를 짓고, 수확하기 위해 하늘을 관측하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천문관측은 높은 건물 같은 곳에서 맨 눈으로 이루어졌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특히 메소포타미아, 중국, 이집트, 그리스, 인도, 마야 문명 등에서 천문대가 만들어졌고, 우주의 본질에 탐구가 시작되었다. 초기 천문학은 오늘날에는 측성학으로 알려진, 하늘에서 별과 행성들의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관측으로부터, 행성의 운동, 태양, 달, 지구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를 지구중심설, 천동설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바빌론에서 수학·과학적 천문학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월식이 사로스라는 주기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바빌론 천문학자들은 이 후 다른 문명에서 발달할 천문학적 전통의 기반을 닦았다. 바빌론 이후의 천문학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천문학은 천문 현상에 대해 이성적이고 물리적인 답을 구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의 크기를 계산하였고, 달과 태양까지의 상대적 거리를 측정하였다. 한편 그는 처음으로 지동설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히파르쿠스가 세차를 발견하였고 달의 크기와 거리를 계산하였으며, 어스트로랩()이라고 불리는 천문기구를 발명하였다. 히파르쿠스는 또한 방대한 1020개 별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북반구의 대부분의 별자리는 이러한 그리스 천문학에서 유래했다. 반면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고, 당시의 천문학을 집대성한〈알마게스트〉를 남겼다. 천동설은 기독교의 교리에 더 부합하였으므로, 중세에 들어서는 이 책은 천문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졌고,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천동설이 널리 믿어지게 된다. 다른 자연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천문학도 중세 유럽에서는 13세기까지 거의 정체 되었지만, 이슬람과 다른 지역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약 9세기 초에는 이슬람 지역의 최초의 천문대가 등장했다. 964년에는 페르시아 천문학자 알 수피()가 안드로메다 은하를 발견하고, ""라는 책에서 이에 대해 서술하였다. 역사상 기록된 가장 밝은 초신성인 SN 1006가 이집트 출신 아랍 천문학자인 과 중국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1006년에 관측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천문학에 많은 공헌을 한 유명한 천문학자로는 , , , , 알비루니, , 등과 ,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이 있다. 이 당시의 아랍 천문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많은 (예를들어, 베가, 알골)을 도입하였다. 또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팀북투의 유적들도 과거에 천문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에서도 식민지 시대 이전에 천문학 관측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를 전후하여 발명된 망원경으로 천문학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발전된 역학, 전자기학 및 상대성 이론과 같은 현대 물리학의 업적은 천문학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은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서 우주를 관찰·탐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기간에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했으며, 이는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좀 더 확장되고 발전되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천문학에 망원경을 도입하였다. 케플러는 마침내 행성들이 태양을 초점에 놓는 타원궤도를 공전하는 정확한 태양계 모형을 고안해 냈지만, 행성들이 타원 궤도를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는 마침내 뉴턴이 천체역학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뉴턴은 또한 새로운 방식의 반사 망원경을 고안하기도 했다. 망원경의 크기과 성능이 향상되면서 많은 천문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천문학자 라카유에 의해 방대한 별의 목록이 만들어졌으며, 허셜은 방대한 성운·성단목록을 제작했고, 1781년에는 처음으로 새로운 행성인 천왕성을 발견하게 된다. 1838년에는 베셀이 백조자리 61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함으로써 처음으로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다. 18-19세기 중에는 오일러, 클레로, 달랑베르등이 삼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써 달과 태양의 위치를 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라그랑주와 라플라스는 이러한 노력을 더욱 발전시켜서, 달과 행성의 섭동으로부터 질량을 추정하기도 했다. 분광학과 사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천문학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프라운호퍼는 1814–15년에 태양의 스펙트럼에서 약 600여개의 어두운 띠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1859년에 키르히호프에 의해 각기 다른 원소들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밝혀졌다. 분광학을 다른 별들에 적용함으로써, 별들이 태양과 같은 천체이며, 다만 온도, 질량, 크기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정립되었다. 20세기에 들어 하늘에 보이는 은하수가 별들의 집합인 우리은하라는 사실이 확립되었고, 이어서 우리은하 밖의 외부 은하, 그리고 우주의 팽창이 발견되었다. 현대 천문학은 또한 펄서, 퀘이사, 블레이져, 전파은하 같이 특이한 천체들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관측들은 이를 중성자별·블랙홀로 설명하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허블의 법칙, 우주의 원소 함량 등의 관측이 지지하는 대폭발 이론의 등장으로, 물리적 우주론은 20세기 들어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주 망원경의 발전으로 지구 대기에 흡수되어서 그동안 관측 할 수 없었던 전자기파의 영역을 통한 관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천문학에서의 모든 정보는 주로 천체로부터의 가시광 영역의 빛, 또는 일반적으로 다른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감지하고 분석함으로써 얻어진다. 관측천문학은 전자기파의 파장대별로 나눌 수 있다. 지상에서 관측이 가능한 파장대의 빛도 있지만 어떤 영역대는 높은 고도의 지역에서나 또는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전파천문학은 약 1mm보다 긴 파장대의 전자기파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전파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다른 분야와는 달리 관측된 전파를 개개의 광자로 다루기보다는 파동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짧은 파장 영역의 전자기파와 달리, 전파의 세기(amplitude)뿐만아나라 위상()을 측정하는 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어떤 전파는 열적 발산의 형태로 천체에 의해 생성되기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관측 가능한 대부분의 전파는 싱크로트론 복사의 형태이다. (싱크로트론 복사는 전자가 자기장 주변에서 진동할 때 생성된다. 적외선천문학은 적외선 영역대(가시광의 붉은색 빛보다 파장이 긴 대역)의 빛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분야이다. 근적외선(1-3μm)을 제외하고는, 적외선 영역의 빛은 대기에 의해 대부분 흡수되고, 지구대기 또한 많은 양의 적외선을 내뿜는다. 그 결과, 적외선 관측은 높은 고도의 건조한 곳에 위치한 천문대, 또는 우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적외선을 이용하면 행성이나 원시 행성 원반같이 온도가 매우 낮아서 가시광선을 거의 내지 않는 천체들을 관측할 수 있다. 파장이 긴 적외선은 가시광선을 쉽게 가로막는 성간먼지를 투과할 수 있으므로 우리은하의 중심부와 분자구름 깊은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젊은 별들을 연구하는데 유용하다. 어떤 분자들은 적외선에서 특히 강한 방출선을 내는데, 이를 이용하여 성간물질의 화학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적외선 분광학으로 혜성에 존재하는 물분자를 검출하기도 한다. 광학천문학(가시광선 천문학)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천문학 분야이다. 오랫동안 광학 영상은 손으로 그려져 기록되었으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는 사진이나 건판을 주로 이용하였다. 현재는 디지털 검출기, 특히 CCD 카메라(빛을 전하로 변화시켜 이미지를 얻어내는 기기)를 사용하고 있다. 가시광영역은 400 나노미터에서 700 나노미터로, 근자외선(400나노미터에 가까운 자외선 영역)과 근적외선(1μm에 가까운 적외선영역)의 관측에도 같은 기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10 나노미터 에서 320 나노미터 영역대의 자외선 파장을 관측하는 천문학이다. 이 파장대의 빛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천문대는 지구대기층이 얇은 높은 고도, 또는 우주에 세워져야 한다. 자외선천문학은 뜨겁고 파란 별들로부터 나오는 열복사와 방출선들을 연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분야이다. 우리은하 밖의 다른 은하에 위치한 푸른 별들은 몇몇 자외선관측의 주요 관측대상이 되어 왔다. 자외선영역의 또다른 관측대상으로는 행성상 성운, 초신성 잔해,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그러나, 자외선은 성간 먼지에 의해 쉽게 흡수되기 때문에 자외선 관측은 소광()을 정확히 보정해 주어야 한다. X-선 천문학은 엑스선 파장대의 빛을 내는 천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전형적으로 X-선은 매우 뜨거운 천체들로부터 싱크로트론 복사, 제동복사(), 그리고 흑체복사()의 형태로 방출된다. X-선은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기 때문에, 높은 고도로 띄우는 풍선, 로켓, 비행선을 이용하거나 우주망원경 형태로 관측이 이루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X-선 천체로는 엑스선 이중성, 펄서, 초신성 잔해, 타원은하, 은하단, 활동은하핵 등이 있다. 감마선 천문학은 가장 짧은 전자기 파장대의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 분야이다. 감마선은 콤프턴 감마선 천문대(Compton Gamma Ray Observatory)와 같이 인공위성에 의해, 또는 대기 체렌코프 망원경(atmospheric Cherenkov telescopes)이라 불리는 특화된 망원경을 사용하여 관측된다. 체렌코프 망원경은 감마선을 직접적으로 검출하진 않지만, 감마선이 지구대기에 의해 흡수되었을 때 생성되는 가시광 영역의 반짝임(체렌코프 복사)을 감지한다. 대부분의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는 감마선 폭발이다. 감마선 폭발은 짧은 시간 동안 강한 감마선을 방출하고 금방 어두워지는 천체이다. 그 외에 감마선을 내뿜는 천체로는 펄서, 중성자별, 활동은하핵이 있다. 전자기파(빛)이외에도 중성미자, 중력파등을 이용하여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또한 탐사선을 이용하여 달이나 혜성같은 지구밖의 천체에서 직접 시료를 채취하기도 한다. 뉴트리노는 주로 태양 내부나 초신성 폭발에서 만들어지며,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선()이 차례로 붕괴하거나 대기의 입자와 반응하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는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으므로, 지하시설에 위치한 커다란 용기에 많은 양의 물과 얼음을 채워 놓고 이들이 뉴트리노와 아주 가끔 반응할 때 나오는 미세한 빛을 검출하는 방식으로 관측을 한다. 이러한 뉴트리노 검출기로는 , , Kamioka II/III같은 특별한 지하 시설이 있다. 중력파 천문학은 새롭게 발생한 천문학의 분야로서, 블랙홀, 중성자별등으로 구성된 쌍성들이 내는 것 같은 중력파를 검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 같은 관측소가 만들어졌고, 2016년 중력파 검출에 성공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행성과학자들은 직접적인 관측을 위해, 우주탐사선을 행성에 보내거나 시료를 채취해서 돌아오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탐사선이 행성을 지나쳐 가면서 사진을 찍거나, 행성표면에 직접 착륙해서 실험을 수행하기도 하고, 표면에 탐사선을 충돌시키고 이 때 발생하는 물질들을 원거리에서 관측하기도 한다. 측성학()는 천문학뿐아니라 자연과학에서 가장 오래된 분야중의 하나로써,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학문분야이다. 역사적으로 해, 달, 행성, 별들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항해나 달력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측성학은 행성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중력의 섭동에 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이는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천체역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지구근접천체를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혜성이나 소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비껴가는 위험한 경우를 예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까운 별들의 연주시차를 측정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은 우주의 크기를 가까운 곳 부터 먼 곳까지 차근차근 정립해나가는 소위 우주 거리 사다리를 구성하는본가 되는 일이다. 또한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재는 일은 별의 절대 광도같은 물리량을 정확히 잴 수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별들의 시선속도를 재는 것과 함께 고유운동을 재면 별들의 3차원적인 운동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은하 내의 천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연구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는 별의 궤도가 예상과는 달리 약간 흔들거리는 현상()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이러한 별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외계행성을 찾는 방법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천체나 천문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적인 모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 모형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 장점이 있다. 해석적인 모형은—다시말해 어떤 문제를 수식으로 서술하는 방법—어떤 현상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인 통찰력을 제공하며, 수치적인 모형은 매우 복잡한 현상을 몇 가지 기본 물리 법칙으로부터 계산해 냄으로써 어떤 현상이 존재할 수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론 천문학자들은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이 옳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를 연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관측자들은 여러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려줄 관측 자료들을 모으거나 실험을 계획하게 된다. 새로운 관측 자료가 얻어지면, 이론 천문학자들은 이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꾸준히 모형을 바꾸고 발전 시킨다. 만약 자신의 이론이 새롭게 얻어진 관측 자료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관측 결과를 맞출 수 있게 모형을 약간 수정할 수 있지만, 만약 이론이 아주 많은 관측 자료와 모순된다면, 그 모형은 폐기되기도 한다. 이론 천문학의 주제로는 천체 역학, 별의 진화, 은하의 형성과 진화, 우주의 거대 구조(), 우주선의 기원, 일반 상대론, 물리우주론 등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 천문학은 다양한 물리법칙·이론들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천문학에서 상대론은 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주 거대 구조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며, 중력파와 블랙홀등을 연구하는 데 바탕이 된다. 현대 이론 천문학은 급팽창 이론, 암흑 물질, 그리고 기본적인 물리법칙들을 바탕으로 하여 ΛCDM 모형을 정립하였고, 이는 현재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현대 천문학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주제이다. 다음은 이론 천문학에서 어떤 물리 법칙을 바탕으로, 어떤 실험.관측 결과에 기반하여, 이론적인 모형을 만들고, 이로써 어떠한 현상을 설명 또는 예측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태양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8분 거리에 있으며 가장 연구가 자세하게 이루어진 항성이고 전형적인 G형 분광형을 지닌, 46억 살의 주계열성이다. 태양은 변광성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흑점 주기로 알려진, 주기적인 밝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11년 주기에 걸쳐 흑점의 숫자가 변화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흑점은 강력한 자기장 활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태양 표면의 다른 곳에 비해 온도가 낮은 지역이다. 태양은 나이를 먹으면서 밝기가 천천히 증가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주계열성으로 생애를 시작했을 때에 비해 지금 40퍼센트 정도 더 밝다. 태양은 탄생 이후 지구의 생태계에 뚜렷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밝기가 변해 왔다. 예를 들어 마운더 극소기로 인해 중세에 작은 빙하 시대 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의 바깥 표면을 광구라고 부른다. 광구 위에는 채층으로 불리는 얇은 지대가 존재한다. 채층 위에는 코로나가 형성되어 있으며,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태양의 중심부에는 핵이 있으며 핵융합 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충분히 뜨겁고 압력 또한 크다. 중심핵 위에는 복사층이 있는데 여기서 플라즈마는 에너지 플럭스를 복사 형태로 전달한다. 복사층 위에는 대류층이 존재하는데 이 곳에서는 에너지가 물리적인 가스 교환 형태를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태양의 대류층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며, 이 자기장으로 인해 태양 표면에 흑점이 생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플라즈마 입자로 이루어진 태양풍은 태양으로부터 꾸준히 우주 공간으로 흘러 나와서 태양권계면까지 이어진다. 태양풍은 지구의 자기권과 반응하여 밴 앨런대를 형성하고, 지구의 자기력선이 대기로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로라를 형성한다. 행성천문학은 행성, 위성, 왜행성, 혜성, 소행성, 기타 태양을 공전하는 다른 천체들, 그리고 외계 행성 집단들을 연구 대상으로 다룬다.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과거에는 관측 도구로 주로 망원경을 이용했으며 최근에는 우주 탐사선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련의 탐사로 인해 태양계의 형성과 진화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하여 발견되고 있다. 태양계는 내행성, 소행성대, 외행성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내행성계로 일컫는 지구형 행성들로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있다. 바깥쪽을 공전하고 있는 외행성계는 가스 행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왕성 너머로는 카이퍼대가 존재하며, 가장 바깥쪽에는 최대 1광년에 이르는 거리까지 오르트 구름이 펼쳐져 있다. 행성들은 원시 태양을 두르고 있던 원시행성계원반에서 생겨났다. 중력에 의한 끌어당김, 충돌, 강착 과정을 통하여 원반에 있던 물질들은 큰 덩어리들로 자라났으며 이후 원시행성들로 진화했다. 태양풍에 의한 복사압으로 인해 덩어리로 뭉치지 못한 물질들은 쓸려 나갔고, 자기가 지닌 가스 대기를 잃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천체들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행성들은 계속 커지거나 또는 극심한 충돌로 인해 자기가 갖고 있던 물질을 방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극심한 충돌의 증거는 달이나 수성 등에 있는 많은 충돌구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원시행성들 중 일부는 충돌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행성들은 충분한 질량을 획득한 뒤, 무거운 물질은 행성 중심부로 가라앉고 가벼운 물질은 위에 남는, 행성 구별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행성들의 중심에는 철이나 석질의 중심핵이 생성되고 그 위는 보다 가벼운 물질들로 이루어진 맨틀이 형성되었다. 핵 부위는 고체 또는 액체 성분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 행성의 중심핵은 고유의 자기장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자기장은 행성의 대기를 태양풍으로부터 보호하여, 벗겨져 나가지 않게 한다. 행성이나 위성들의 내부열은 이들을 만들었던 물체(방사성 물질로 예를 들면 우라늄, 토륨, Al 등이다)들끼리 충돌하여 발생한 열 및, 조석가속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일부 천체들의 경우 화산이나 지각 운동 등 지질학적 활동이 생겨날 정도의 열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들 중 대기를 갖게 되는 천체는 바람이나 물로 인하여 지각의 침식 과정을 겪는다. 질량이 작은 천체들은 빠르게 식었고, 충돌구 생성을 제외한 일체의 지질학적 활동을 멈추었다. 항성 및 그들의 진화 과정을 아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천체물리학은 관측 및 이론, 항성 내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항성 연구에 기여해 왔다. 항성 생성은 거대 분자 구름으로 알려진, 먼지와 가스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시작된다. 분자 구름이 불안정 해지면, 분자 구름이 중력때문에 붕괴하면서 여러 조각들로 깨지게 되고, 각각의 조각들은 원시별을 형성한다. 중심핵 부분이 충분히 밀도가 높고, 뜨거워지면 핵융합 작용이 시작되며, 여기서 주계열성이 탄생하게 된다. 수소와 헬륨, 리튬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들을 천문학에서는 중원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항성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계열성을 벗어난 항성의 진화 과정은 주로 별의 질량에 의해 결정된다. 별이 질량이 크면 클수록 더욱 밝아지며 중심핵에서 수소 연료를 더 빨리 태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별이 갖고 있던 수소가 헬륨으로 모두 바뀌면, 항성은 진화하기 시작한다. 헬륨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중심핵의 온도가 더 뜨거워져야 하기 때문에 항성의 중심핵 밀도는 증가하며, 부피 또한 커지게 된다. 부피가 증가한 항성은 헬륨을 다 태울 때까지 잠시 동안 적색 거성 단계에 머무른다.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의 경우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태우는 일련의 진화 단계를 따로 걷게 된다. 항성의 최후 양상 역시 마지막에 남은 별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 정도 질량을 갖는 별은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질량을 방출하고 중심부에 백색왜성을 남긴다. 주계열 시절 질량이 태양의 8배 이상이었던 별들의 경우 중심핵이 붕괴하면서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초신성 폭발 후 중심에 남은 물질은 중성자별이 되거나, 혹은 폭발 후 남은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는 경우 블랙홀로 진화한다.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쌍성의 경우 주성에서 나온 물질이 반성인 백색 왜성으로 흘러들어가서 신성 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더욱 복잡한 진화 경로를 겪게 된다. 행성상 성운 및 초신성은 중원소를 성간 공간에 퍼뜨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생명체가 탄생할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새롭게 탄생하는 별들 및 행성들은 수소와 헬륨으로만 이루어질 것이고, 지구형 행성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태양계는 국부 은하군에 속해 있는 막대나선은하인 우리 은하()에 속해 있으며,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 가스,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서로의 중력을 통해 묶여 우리은하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통 질량중심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다. 태양계는 성간 먼지를 포함하는 바깥쪽 나선팔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먼지가 시야를 가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은하의 모습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 은하 중심부에는 막대 모양의 팽대부가 있으며, 은하 중심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은하중심부는 바깥쪽으로 소용돌이처럼 퍼져나가는 네 개의 나선팔로 둘러싸여 있다. 나선팔은 금속함량이 많고 젊은 항성종족 I 별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은하 원반을 구형의 은하 헤일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여기에는 주로 늙은 항성종족 II 별들과 별들이 조밀하게 뭉친 구상성단들이 분포하고 있다. 별들 사이에는 가스와 먼지 등으로 이루어진 희박한 성간 물질이 분포하고 있다. 성간 물질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수소 분자 및 다른 원소들로 구성된 분자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 곳에서 별들이 태어난다. 별의 생성은 처음에는 분자구름이 밀집된 암흑 성운의 형태로 시작되며, 이들은 압축되고 붕괴되어 원시별을 형성하게 된다. 질량이 큰 별들이 태어나는 곳의 주변은 빛을 방출하는 가스와 플라스마로 이루어진 H II 영역으로 진화한다. 무거운 별들은 강한 항성풍을 방출하고 초신성 폭발로 일생을 마치는데, 이로 인해 주변의 성간물질이 흩어지게 된다. 때로는 여러 별들로 이루어진 산개 성단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산개 성단의 별들은 점차 흩어지게 되면서 우리 은하의 항성 종족에 편입된다. 우리 은하 및 외부 은하에 대한 운동학적 연구를 통해 보이는 물질보다 더 많은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은 가지는 암흑물질의 본질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암흑물질 헤일로가 우주에 있는 물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부은하 천문학은 우리은하 밖의 천체와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주로 은하의 형성과 진화, 외부은하의 형태와 분류, 활동성은하, 은하단과 은하군,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지는 우주의 거대 구조를 연구한다. 대부분의 은하들은 모양에 따라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로 분류된다. 이름대로 타원은하는 하늘에 투영된 모습이 타원을 띄는 은하이다. 타원은하의 별들은 무작위적인 궤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성간물질이 적으며, 새로 생성되는 별이 적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원은하들은 주로 은하단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여러 은하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나선은하는 납작한 회전하은 원반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중심부의 팽대부(또는 막대)와 나선 모양의 팔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선팔들은 성간먼지를 많이 포함하고, 주로 별들이 형성되는 곳으로 푸른 빛을 띠고 있다. 나선은하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별들로 이루어진 헤일로에 둘러 싸여 있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대표적인 나선은하이다. 불규칙은하는 나선은하와 타원은하로 분류할 수 없는 일정한 모양을 갖지 않는 은하이다. 이러한 불규칙한 모양은 다른 은하와의 상호작용 때문에 만들어진다. 활동성 은하는 방출하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별, 먼지, 성간물질 같은 것이 아닌 은하 중심의 다른 에너지 원(블랙홀)으로부터 나오는 은하이다. 이러한 활동은하핵()은 응축원반()을 가진 매우 무거운 블랙홀()이라고 여겨진다. 활동은하에는 시퍼트 은하(), 퀘이사(), 블레이저(), 전파은하()등이 있다. 전파은하는 일반적인 은하와 달리 전파에서 매우 강한 빛을 내며, 퀘이사는 우주에서 가장 밝은 천체 중 하나이다. 우주의 거대구조는 이러한 개개의 은하들이 모여서 이루는 구조를 의미한다. 우주의 거대 구조은 계층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은하들이 모여 은하군을 이루고, 이 은하군들이 모여 은하단을 형성하며, 다시 초은하단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거대한 군집들은 다시 필라멘트()와 그 사이의 공동()을 이루며 분포한다. 물리 우주론()은 우주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진화했는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는 분야이다. 우주론의 연구 대상으로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대폭발 핵합성, 우주의 거대구조,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등이 있다. 우주론의 밑바탕이 되는 이론은 우주가 약 137억년 전에 시공간의 한 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팽창하여 왔다는 대폭발 이론이다. 1965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 발견됨으써 대폭발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우주는 여러 중요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대폭발 직후 아주 초기에는 우주가 급팽창이라고 불리는 기하급수적인 빠른 팽창을 겪었다고 생각되며, 이 급팽창 때문에 우주가 현재 관측되는 것처럼 균질()하고 등방적()이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급팽창 이후에는 중수소, 헬륨과 같은 기본적인 원소들이 만들어졌는데,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물질(바리온)이 만들어진 이 과정을 대폭발 핵합성 또는 원시 핵합성이라고 부른다. 우주가 팽창하고 식어감에 따라 중성 원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덕분에 빛이 이온화된 전자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우주가 투명해지게 된다. 이 때 발생한 빛이 현재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 관측이 된다. 그러나 아직 빛을 낼 수 있는 별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후의 시기를 우주의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우주에 존재하던 작은 밀도 요동으로부터 처음으로 천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질들이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뭉치면서, 거대한 가스 덩어리를 만들고, 여기서 처음으로 별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별들은 내부의 핵융합을 통해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게 되고, 이 때 발생하는 빛들은 주위의 가스를 이온화시켜서, 소위 재전리라는 과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별들이 중력에 의해 모이면서 처음으로 은하들을 만들게 되고, 이 은하들이 다시 중력에 의해 분포하면서 은하군이나 은하단 같은 더 큰 구조들을 만들고, 이는 우주의 거대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소위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이러한 우주론의 근본적인 구성성분이 되어왔으며, 두 성분을 합쳐서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대 우주론과 천문학의 주요 미해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은 다른 과학분야와 관련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를 활발하게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고천문학 ()은 고고학과 융합된 학문으로서 고대 또는 전통적인 천문학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편, 천문생물학()은 지구 이외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우주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의 생성, 변화, 소멸등을 연구하는 분야는 천문화학()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물질들은 주로 분자운, 온도가 낮은 별들, 갈색왜성, 그리고 행성들에서 주로 발견된다. 우주화학()은 태양계내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들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원소과 동위원소의 상대적인 비율을 다룬다. 이 두 분야들은 천문학과 화학이 융합된 분야이다. 천문학은 비전문가들(아마추어들)이 가장 많이 기여를 하는 과학분야 중 하나이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다양한 천체와 천문 현상들을 관측한다. 일반적인 관측대상으로는 달, 행성, 별, 혜성, 유성우, 심원천체(성단, 은하, 성운)등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관측에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장비가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아마추어 천문인들은 밤하늘이나 특정 천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이러한 예술적인 사진을 천문사진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취미활동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천문학 연구에 꾸준히 공헌해왔다. 실제로 천문학은 아직까지도 비전문가들이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해내기도 하고, 변광성을 꾸준히 관측한다. 디지털 관측기기의 발전으로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은 천문 사진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다. 비록 천문학은 우주와 그 구성원들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왔지만, 아직도 중요한 미해결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상·우주 망원경, 그리고 획기적인 이론·실험 물리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보물()는 여러 장의 화면을 연속 촬영, 조작하여 움직이도록 보이게 만든 영화의 일종이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 "anima"에서 비롯하였다. 간단히 동화(動畵)라고도 부른다. '만화'나 '동화'는 그림의 의미를 갖고 있으나, 각 장면은 그림이 아닐 수 있다. 3차원 모델링을 통해 컴퓨터 화면상으로 재현된 영상의 경우도 애니메이션에 포함된다.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니라고 짧게 표기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는 아니메()로 줄여 부르거나 도가(, 동화)라고 말한다. 외부적으로는 일본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을 일본(Japan)과 애니메이션(animation)의 합성어인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초기 애니메이션은 배경에 그림을 그려 움직이게 하는 셀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흙이나 모형 등의 피사체를 조금씩 변형하여 각 장면을 촬영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생겼고,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프로그램으로 등장인물의 각 동작과 배경을 구현하는 3D 애니메이션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2D의 셀 애니메이션만을 쓰거나, 3D와 셀을 조합하여 사용한다. 애니메이션은 유통 형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이 외에도 페이퍼 애니메이션, 모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제작 기법이 있다. 현재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소스들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있다. 성격상 가장 유사한 만화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고, 자체적으로 창작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법은 결국 애니메이션 기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독자들이나 필자가 디자이너라면 캐릭터를 미술이나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프로그래머에게 캐릭터란 결국 메시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런 메시들의 집합을 어떤 애니메이션 방식과 결합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표현 방식과 한계가 정해져 있다. 심리현상 중 하나인 투사는 지니고 있을 법한 자신의 측면을 타인의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타인이 지닌 자신의 측면을 혐오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태도나 특성이 보기 언짢다면 그 캐릭터는 자기 내면의 모습일수도 있고 가정된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본인의 측면 중 하나일 수 있다. 전이는 특정 상황에 각별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장면의 유사 요소가 많은 상황이 찾아오면 해당 애니메이션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정서가 그 실제 상황에 반영돼 느껴진다. 태풍 매미 태풍 매미(태풍 번호: 0314, JTWC 지정 번호: 15W, 국제명: MAEMI, 필리핀 기상청(PAGASA) 지정 이름: Pogi)는 2003년 9월 12일 한반도에 상륙해 경상도를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태풍이다. “Super Typhoon Maemi” 혹은 “2003년 태풍 제14호”라고도 불리며,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 중 상륙 당시 기준으로 가장 강력한 급이고, 2003년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태풍으로 발달하였다. '매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곤충 매미에서 온 이름이다. 한편 이 태풍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태풍 이름 목록에서 "매미"라는 이름이 영구 제명되어, 후에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무지개"로 재명명되었다. 2003년 9월 4일 괌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은 느리게 발달하면서 북서쪽으로 나아가 약 이틀이 지난 9월 6일 오후 3시 무렵 제14호 태풍 매미가 되었다. 이렇게 열대저기압에서 태풍으로 인정되기까지 발달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당초 기상청 등은 이와 같은 느린 발달 경향이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태풍은 9월 9일의 무렵 일본 사키시마 제도 남동쪽 먼 바다에 접근하면서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9월 10일에는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에 달하는 최강 급의 태풍으로 성장했다. JTWC의 해석에서는 1분 평균 최대 풍속 75 m/s (150 kt) 의 “카테고리 5급”이며 일본의 기준으로는 “맹렬한 태풍” 이다. 최성기를 맞이한 태풍은 진로를 서서히 북쪽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9월 11일 새벽에는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을 통과해 동중국해로 들어갔다. 태풍의 중심이 지나간 미야코 섬의 기상관청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12.0 hPa, 최대순간풍속 74.1 m/s 가 관측, 일본에서는 수십 년 만의 기록이 되었다. 동중국해에 들어가서는 북북동 방면으로 전향하여 한반도를 향해 북상, 그러면서 차츰 쇠퇴기에 접어들어 11일 오후에 중심 기압 920 hPa / 최대 풍속 50 m/s 의 강도 “매우 강”으로 조금 약해진 뒤, 9월 12일 오후 3시에는 중심 기압 935 hPa / 최대 풍속 45 m/s 의 세력으로 제주도 남동쪽 해상에 이르렀다. 같은 날 오후 8시 20분경에는 약간 더 쇠약해진 중심 기압 954 hPa / 최대 풍속 40 m/s 의 “중형의 강한 태풍”으로서 경상남도 고성군 일대에 상륙, 이후 빠른 속도로 한반도 남동부를 관통하여 상륙 후 약 6시간 만인 9월 13일 오전 2시 30분경에 울진 앞 바다로 빠져나와 동해상으로 진출했다. 이어서 일본 홋카이도 부근 해상까지 나아가, 9월 14일 오전 6시경에는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 남부 지방과 일본 미야코 섬의 큰 피해, 그리고 경로, 위력 등에 있어서 1959년의 제14호 태풍 사라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태풍이다. 태풍 매미의 최대 세력은 대한민국과 일본 기상청의 해석으로 중심 기압 910 hPa / 최대 풍속 55 m/s (105 kt) 이며, 풍속 값을 1분 평균으로 산출하는 JTWC의 해석으로는 중심 기압 885hPa / 최대 풍속 75 m/s (150 kt) 가 된다. 그 위력은 2003년에 발생한 모든 태풍 중에서 으뜸인 것은 물론, 그 해의 모든 허리케인과 사이클론을 통틀어도 가장 강하다. 게다가 북위 30도 이북에까지 진행하였음에도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 (95 kt) 의 강도 “매우 강”에 해당하는 세력을 유지, 북상하면서도 좀처럼 그 세력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가장 강한, 중심 기압 954 hPa / 최대 풍속 40 m/s (80 kt) 의 세력으로 상륙 했다. 상륙 시의 중심 기압 950 hPa 은 이전에 강한 세력으로 상륙했던 2000년 제14호 태풍 사오마이 (상륙 시 중심 기압 959 hPa), 2002년 제15호 태풍 루사 (상륙 시 중심 기압 960 hPa) 의 기록을 크게 경신하는 것이다. 태풍이 이렇게 강력한 세력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원인을 꼽자면, 당시 한반도 주변 해역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았던 것과 비교적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평년보다 2~3도 높았던 해수면 온도는 태풍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다소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는 태풍이 미처 쇠약해지기 전에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따라, 태풍의 상륙 지점에 가까웠던 여수, 통영, 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기압이 되어, 그중 통영에서는 최저해면기압 954.0 hPa 를 관측했다. 이것은 태풍에 의해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부문 역대 2위가 되는 기록이다. 특히 일본 기상청의 기록 에 의하면 중심 기압 930 hPa 이하의 세력을 북위 30도 이상까지 유지한 태풍은 극히 드물어, 이러한 태풍은 1951년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1450여개의 태풍 중 매미를 포함하여 11개밖에 없다. 매우 강한 바람을 동반했던 것이 이 태풍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비록, 상륙 시의 폭풍역 (풍속 25 m/s 이상의 폭풍 범위) 이 남동쪽으로 반경 150 km, 북서쪽으로는 반경 55 km 정도로 북서 방향의 폭풍역이 다소 작았기 때문에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져있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최대순간풍속 10~20 m/s 내외의 수준에 그쳤지만, 태풍의 폭풍역에 해당했던 제주도와 전라남도, 경상도, 그리고 대마도 등지에서는 기록적인 강풍이 되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에 속한 대부분의 관측 지점에서 종전의 풍속 기록이 바뀌었다. 관측된 최대순간풍속은 제주 60.0 m/s, 고산 60.0 m/s, 여수 49.2 m/s, 부산 42.7 m/s 등으로, 제주도와 여수 등의 지역은 태풍의 가항반원에 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상위 기록의 대부분은 태풍의 중심권에 가까웠던 남부 지방에 집중되었다. 고산에서는 최대 풍속 51.1 m/s 가 함께 관측되어,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최대 풍속 부문 역대 1위 기록이었던, 2000년 제12호 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를 내습하면서 세운 최대순간풍속 58.3 m/s, 최대 풍속 47.4 m/s 를 3년 만에 다시 경신했다. 기존의 최대순간풍속 역대 1위를 바꾼 60.0 m/s 의 풍속이 제주와 고산 두 지점에서 동시에 관측된 것은 대단히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편, 최대순간풍속은 비공식으로는 공식 기록보다 훨씬 높은 값을 관측한 경우가 있어, 일본 미야코 섬 자위대 주둔지에서는 공식 기록 (최대순간풍속 74.1 m/s, 미야코 섬 기상관청 관측) 을 훨씬 뛰어넘는 86.6 m/s 를 기록했는가 하면, 부산에서도 공식 기록인 42.7 m/s 를 넘는 비공식 기록이 잇달아, 구덕산 레이다에서 53.4 m/s, 광안대교에서 56.2 m/s, 신선대 부두에서 52.0 m/s 등을 기록했다. 이와 같이 기록적인 강풍이 일었던 원인은 물론 강력했던 태풍의 세력이 일차적이지만, 부가적인 요인으로서 두 가지를 더 꼽을 수 있다. 먼저 한반도 상륙 시 45 km/h 정도의 상당히 빨랐던 태풍의 이동속도를 들 수 있는데, 이 이동속도가 태풍의 풍속 (상륙 시 최대 풍속 40 m/s) 에 더해져 위험반원에서의 바람의 힘을 그만큼 더 강하게 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태풍의 특성상 진행방향의 오른쪽, 다시 말해 위험반원에서는 태풍의 회전과 진행방향이 중첩되어, 태풍의 이동속도가 그대로 풍속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풍 상륙 일인 9월 12일 오후의 한반도 주변 기압배치는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매우 낮은 중심 기압의 태풍과 북쪽의 고기압이 마주치는 형국이 되어 있어, 이 부근의 기압경도를 급격하게 만듦에 따라 강풍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을 형성했다. 즉, 이 두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태풍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던 바람의 힘을 이중 삼중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의 이미지가 크게 각인되어 있으나, 강수에 있어서도 꽤 큰 영향을 끼친 태풍이다. 전체적인 강수량은 큰 비를 수반한 대표적인 태풍으로 꼽히는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나 태풍 아그네스 등이 몰고왔던 호우와 같이 극단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남해 410.0 mm, 강릉 307.5 mm, 고흥 291.0 mm 가 기록되는 등, 남해안과 영동 지방을 중심으로 최대 450 mm 에 달하는 매우 많은 비가 내렸다. 무엇보다 태풍이 다소 빠른 속도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나감에 따라 비구름대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강수량이 기록된 것으로서, 비교적 단시간에 강수가 집중되는 형태를 보였다. 위에 언급된 강수량의 대부분은 태풍이 한반도 가까이에 존재했던 12일 오후 늦게부터 13일 새벽 사이에 기록된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강수량의 편차가 꽤 크게 나타났는데, 주로 태풍의 중심권이 통과한 제주도, 전남 동부, 경남 서부, 대구 근방 지역에서 총강수량 200 mm 이상의 기록적인 호우가 관측된 반면, 그 외의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가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남해의 강수량은 약 400 mm 에 이르렀지만 동쪽으로 불과 100 km 정도 떨어진 부산의 강수량은 60 mm 안팎에 지나지 않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태풍 진행방향의 서쪽 (가항반원) 으로 꽤 떨어진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는 그보다도 적은 강수를 기록했다. 특히, 대관령과 강릉을 포함한 영동 지방에서는 태풍이 몰고온 온난 다습한 기류와 북동쪽에서 유입된 비교적 한랭한 기류가 태백산맥에서 부딪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비구름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 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지형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영동 지방에 300 mm 가 넘는 비가 쏟아진 원인이다. 태풍 매미 강타시 일본 미야코 섬에서 관측된 최저해면기압 912.0 hPa 과 최대순간풍속 74.1 m/s 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일본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씩 기록될 만한 값으로, 최저해면기압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4위 기록, 최대순간풍속은 해당 부문 일본의 역대 7위 기록이다. 태풍 매미는 발생에서 소멸까지 태풍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물선 형태에 가까운 경로를 밟았기 때문에, 진로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한반도 상륙의 가능성도 꽤 일찍부터 예상되었다. 기상청은 9월 10일 오후 5시에 보도자료를 통해 태풍의 한반도 남해안 상륙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이 소식은 주요 언론기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9월 11일 오전 4시에는 태풍이 최대순간풍속 74.1 m/s 의 맹렬한 강풍과 함께 일본의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을 직격하여 태풍에 대한 방재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이곳에서조차 심대한 피해가 발생, 태풍의 위력이 실상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태풍이 곧 당도할 대한민국 역시 큰 피해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이에 기상청은 9월 11일 오후 2시 30분에 2차 보도자료를 발표해 주의를 촉구했으며, 오후 6시에는 본청을 포함한 전국의 기상관서에서 태풍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주요 방송사 및 신문에서는 태풍의 북상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59년의 태풍 사라에 비견되는 태풍 매미가 북상 중”등으로 연달아 보도함에 따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태풍의 영향이 본격화된 9월 12일에는 초특급 태풍의 한반도 내습 소식을 주요 방송사에서 따로 특보를 편성,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정부 당국의 대처는 매우 미흡해 마산 지하 상가 참사 등의 결과로 이어졌으며, 또한 전봇대나 송전 철탑 등의 전기 공급 시설을 확실히 정비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으로, 강풍에 의해 정전이 속출하여 이 일대는 뉴스 특보마저 시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세력의 태풍은 당시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으로서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에 따른 희생자가 매우 많았고, 재산 피해액은 전년의 태풍 루사에 이어 사상 최대 급에 이르렀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워낙 커, 수도권 일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었다. 태풍의 상륙 시각이 남해안의 만조 시각과 겹쳐 가공할 만한 해일이 발생, 마산에서는 지하 노래방에 갇힌 사람들이 그대로 익사하는 등 1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마산의 고조(高潮) 높이는 약 180 cm 로 예측되었으나 태풍에 의한 해일은 최대 439 cm 에 달해 예측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해일을 예상하지 못했던 마산 당국은 제대로 된 대피령을 내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부두의 원목 수천여 개가 바닷물과 함께 밀려와 지하 건물의 출구를 막으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 부산에서는 해일에 가까운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신속한 대피가 이루어져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해운대에 위치한 부산 아쿠아리움이 침수되고 해안가에 자리 잡은 많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해 재산 피해가 매우 컸다. 이밖에, 태풍을 피해 남해안에 정박해 있던 선박들의 피해가 상당하여 수천 척의 선박이 해일에 의해 파손되거나 침몰했으며 도심에서는 해일에 밀려온 크고 작은 선박들이 널려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해 지역이 워낙 넓었고, 유입된 물의 양이 많아 복구가 늦어졌기 때문에 함께 밀려왔던 쓰레기 및 폐수의 처리가 늦어져 위생 상태가 나빴던 지역이 많았다. 태풍에 동반된 최대순간풍속 50 m/s 가 넘는 강풍으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신주와 철탑이 쓰러져 전국적으로 145만여 가구가 정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거제도 지역에서는 송전 철탑이 강풍에 파괴되어 약 4일 동안이나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고층 건물에서는 유리창이 바람에 의해 파손되는일이 잇달았고 도심에서는 날린 간판과 뽑힌 가로수, 깨진 유리창 등이 뒤엉켜 굴러다녀, 일부 거리는 마치 폭격을 당한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날려지던 물체의 일부는 주차된 차량을 덮쳐 곳곳에서 파손된 차량이 수천 대에 달했으며 부산항에서는 800톤이 넘는 컨테이너 크레인 11대가 강풍에 의해 무너지거나 궤도를 이탈 하는 한편, 해운대에서는 7000톤이 넘는 해상관광호텔이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전복되어 피해액은 헤아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여기에, 옥상에서 물건을 줍던 사람이 바람에 떠밀려 추락하여 숨지거나 폭풍속에서 배를 살피러 나온 노인이 파도에 휩쓸리는 등, 바람에 대한 경계심 부족이 인명 피해를 가져오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바람 피해는, 태풍의 위험반원에 해당했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다. 태풍이 통과하던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쏟아진 폭우로 강원도 영동 지방과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400 mm 에 가까운 강수를 관측, 더욱이 이 강수량의 대부분이 태풍이 한반도 내륙에 위치했던 6시간 동안에 집중되어, 짧은 시간 동안의 강렬한 호우로 산간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발생해 주택가를 덮쳐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다. 호우에 따른 산사태의 위험성이 제대로 경고되지 않은 것과 대피 명령이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으로, 지난 2002년의 제15호 태풍 루사의 교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단시간에 쏟아진 많은 양의 비는 곳곳의 하천을 범람시켜, 농경지가 침수되고 주택가에는 물이 들어차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는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때의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태풍 매미에 의한 폭우가 쏟아져 심대한 피해가 되었다. 태풍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사망 3명, 부상자 110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 했고, 그 피해는 주로 미야코 섬에 집중되었다. 태풍 매미는 거의 최성기의 세력을 유지한 채 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의 상공을 통과하여, 미야코 섬에 1968년의 제16호 태풍 이래 35년 만의 대 재해를 낳았다. 강력한 폭풍으로 약 1300여 동의 주택이 파손되거나 침수된 것과 함께 160여 억엔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1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부상했다. 미야코 섬은 태풍에 대한 수준 높은 방재시스템이 있어 웬만한 태풍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는 곳인 만큼 태풍 매미에 의한 이 같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태풍이 대한민국에 입힌 피해가 너무나도 극심했기 때문에, 2005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38차 태풍위원회 총회에서는 이 태풍의 이름이었던 “매미(MAEMI)”를 퇴출시키고 “무지개(MUJIGAE)”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2015년에 사용한 무지개라는 이름도 필리핀과 중국에 끼친 심대한 피해로 퇴출되었고 대신 "수리개(SURIGAE)"가 쓰이게 되었다. 속보 해석으로 태풍 매미는 북위 30도를 넘은 시점에서 중심 기압 945 hPa 까지 약화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기상청의 사후 해석 에 의해, 북위 30.5도에서의 세력이 “중심 기압 945 hPa / 최대 풍속 40 m/s”에서 “중심 기압 930 hPa / 최대 풍속 50 m/s”로 상향 수정 되었다. 또한, 사후 해석을 참고하면 태풍의 상륙 지점은 당초 대한민국 기상청이 발표했던 경상남도 사천시 부근보다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가까운 것이 된다. 베른하르트 리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 1826년 9월 17일~1866년 7월 20일)은 독일의 수학자이다. 해석학, 미분기하학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리만 기하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리만 적분, 코시-리만 방정식, 리만 제타 함수, 리만 다양체 등의 수학 용어에 남아 있다. 그는 리만 가설을 최초로 고안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현재 독일의 다넨베르크(Dannenberg) 근처인 하노버 왕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Friedrich Bernhard Riemann)은 루터 교회의 가난한 목사였고, 리만은 6명의 자녀들 중 둘째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잘 타고, 자주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보기 드문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지만, 대중 앞에서 말하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었다. 1840년 할머니와 살면서 중학교(lyceum, middle school)를 다니기 위해서 하노버(Hanover)에 갔다. 1842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요하네움 뤼넨부르그(Johanneum Lüneburg)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자주 수학으로 돌아가곤 했다. 심지어 창세기의 정확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생각까지 했다. 담당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천재성을 간파했고, 그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당연히 그 제자는 교사의 수학(授學) 능력 범위를 벗어나곤 했다. 1846년 리만이 19세였을 때, 목사가 되어서 가계(家計)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47년 아버지로부터 신학 공부를 그만두고 수학을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자코비(Jacobi), 디리클레(Dirichlet), 슈타이너(Steiner) 등이 가르치는 독일 베를린으로 가서, 2년동안 머물렀다가 1849년 독일 괴팅겐(Göttingen)으로 돌아왔다. 짧은 일생을 통해서 발표한 논문의 수는 비교적 적지만, 수학의 각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복소함수론(複素函數論)에서의 연구의 특징은 유체역학적(流體力學的) 고찰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수학의 다른 많은 영역과 복소함수론 사이에 광범위한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 복소함수론의 기하학적인 이론의 기초를 닦아준 점이다. 1851년 학위 논문에서 그는 (x, y) 평면을 (u, v) 평면 위에 등각적(等角的)으로 사상(寫象)시켜서, 한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單一連結域)이 다른 평면 위의 임의의 단일연결역으로 변형될 수 있는 함수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이것은 1857년에 아벨 함수에 관한 논문으로, 위상수학적(位相數學的) 고찰을 해석함으로써 도입한 리만 곡면의 개념으로 유도한 것이었다. 1854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에서 그는 리만 적분을 정의하고, 삼각 급수의 수렴(收斂)에 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적분의 정의인 함수가 적분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 정의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H.르베그에 의해서 더욱 포괄적으로 정의가 부여되었다. 1854년 취임 강연에서 그는, 기하학의 기초를 논하면서 리만 공간의 개념을 도입해서 리만 공간의 곡률(曲率)을 정의하였다. 만년에는 W. E. 베버의 영향을 받아서, 이론물리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偏微分方程式)에 관해서 강의하였고, 그가 죽은 뒤 베버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리만은 40세 생일의 두 달 전인 1866년 7월 20일 사망했다. 피크 피크()는 기타를 치는 데 쓰는 삼각형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다. 의 일종이다. 피크를 사용해 기타를 연주할 경우 손가락으로 연주할 때보다 강하고 명료한 소리를 낼 수 있다. 피크의 종류에는 물방울, 변형삼각형, 엄지손가락 착용형 등이 있다. 기타 기타(Guitar)는 현(스트링=Strings)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이다. 머리(Head=헤드), 목(Neck=네크), 몸체(Body=바디)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 부분에는 20여 개의 프렛(Fret)이 박혀 있다. 기타는 주로 6개의 현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경우에는 머리가 없는 기타(Headless Guitar=헤드리스 기타)나, 프렛이 없는 기타(Fretless Guitar=프렛리스 기타)도 있다.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재즈, 록, 팝 음악 등 넓은 장르에 쓰인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기타리스트(Guitarist)라고 부른다. 기타 몸체의 울림구멍(Sound Hole=사운드홀)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고, 프렛을 통해 음정을 제어한다. 현의 양 쪽에는 몸체의 브릿지(Bridge) 위에 위치한 하현주(Saddle=새들)와 목 부분의 상현주(Nut=너트)가 있다. 그리고 현의 장력을 조절하여 음정을 맞추는 페그(Peg=줄감개)가 머리에 고정되어 있다. 6개의 현은 연주를 위해 기타를 안았을 때 위쪽이 가장 굵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또한 현이 가늘어질수록 음역이 점점 높아진다. 목 부분에는 손가락을 짚는 지판(핑거보드=Finger Board)이 있는데, 지판 위의 프렛에 현을 닿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기타의 종류로는, 몸체의 울림을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통기타(Acoustic Guitar=어쿠스틱기타)와 마그네틱 픽업(Pickup)과 앰프(Amplifier)를 통해 소리를 증폭하는 전기 기타(Electric Guitar=일렉트릭기타, 일렉기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근대 기타는 기턴(gittern)에서 유래되었다. 기턴은 류트와 비슷한 작은 악기로 13세기 후반에 무어인의 지배 하에 있던 스페인을 거쳐 유럽에 도입되었다. 4줄의 거트 현이 있는 기턴은 음유시인뿐 아니라 귀족 사이에서도 인기 있었다. 이 악기는 15세기 동안 길게 만들어졌고 현은 3줄의 복현이 각각 D, G, B로 조현되었으며 단현은 E로 조현되었다. 각 복현의 제2현은 한 옥타브 높다. 스페인에서 기턴은 비우엘라(vihuela)로 변형되었다. 비우엘라는 평평한 악기로써 옆면은 구부러져 있고, 복현 5줄과 단현 1줄로 되어 있다. 이 악기는 스페인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영국의 헨리 8세는 스페인 비우엘라를 4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아라곤왕 페르디난드의 딸 케서린과의 결혼을 통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우엘라는 궁정용 악기인데 반해, 복현 4줄의 기타는 대중적인 음악에 사용된 악기로 16세기 후반에 유럽 도처에 알려졌다. 16세기 중엽에는 특별히 기타를 위한 곡이 작곡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아마트는 1586년에 최초의 교본 《기타라에스파뇨라》를 출판하였다. 100년도 안 되어 기타는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악기가 되었고 비우엘라는 서서히 사라졌다. 15세기 초반에는 4줄의 복현 르네상스 기타가 출연했다. 이 기타는 깃대 플렉트럼으로 연주했으며, 현은 목둘레에 묶인 거트 프렛과 움직이는 줄받침을 거쳐 전면의 줄 고정 장치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타보다 작으며, 작은 크기의 기턴과 비우엘라의 큰 몸통을 결합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4줄에 다섯 번째 복현이 더해졌다. 복현이 단현으로 되면서 연주 기술이 단순화되었고, 18세기에는 옆면이 안으로 굽고 뒤판은 평평한 나무 공명기가 있는, 6현의 근대 기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근대 기타는 오늘날의 기타보다 폭이 좁고 길었다. 유명한 제작자로는 스페인 카디스의 호세 파게스, 파리의 르네 프랑수아즈 라코테, 런던의 루이스 퍼너모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 기타는 몸통의 폭이 넓어졌고 안쪽의 버팀대가 부채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금속 프랫을 목에 끼워 고정시켰고, 줄받침은 높게 제작되었다. 이같은 혁신은 스페인 기타 제작자 안토니오 토레스 후라도에 의한 것이었다. 현을 65cm 길이로 표준화시킨 사람 또한 토레스였다. 20세기에는 나무못으로 만든 줄감개를 금속 나사로 바꾸고, 지판을 울림 구멍까지 아래로 늘리는 등 더 많은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기타를 가장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대중음악 밴드이다. 1930년대에 픽업을 사용하여 현의 음을 증폭시키는 전자 기타가 개발되었고 1940년대에는 단단한 몸체의 기타가 레스 폴에 의해 발명되었다. 록 음악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카포 타스토(이동 줄베개)가 개발되어 조옮김이 쉽게 되었다. 카포 타스토를 프렛판 위에 끼우면 모든 현을 동시에 누를 수 있다. 현대 전기 기타는 굵은 금속 현으로 되어 있으며 플렉트럼으로 연주한다. 현은 6개가 주류이지만 그 밖에 7현, 10현, 12현 기타 등도 존재한다. 또, 베이스 기타는 4개의 현을 갖춘 것이 보통이지만, 5, 6현을 갖춘 것도 널리 사용된다. 현은 금속, 나일론 등이 쓰인다. 클래식 기타에서 고음의 1~3현에 부드러운 나일론 현을 이용한다. 저음의 4~6현에는 가는 나일론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이용한다. 과거에는 양의 창자를 말려 만든 거트 현을 이용하였으나 안드레스 세고비아 이후로 현대에는 내구성이 높은 나일론 등의 화학 합성 섬유로 만든 현이 주로 쓰인다. 통기타나 전기 기타 대부분은 강철 현의 금속(니켈, 스테인리스 등)의 현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 저음의 현은 가는 금속의 심에 금속을 휘감은 현을 사용한다. 보통 통기타가 3~6현, 전기 기타는 4~6현을 감는다. 현의 종류나 두께에 따라 기타의 음색이 달라지며, 이에 따라 저마다 기타의 느낌이 다르다. 현의 튜닝도 여러 가지가 쓰인다. 보통 저음의 현(6현)부터 E-A-D-G-B-E라는 표준 튜닝이 일반적이다. 이는 수많은 코드나 음계 등을 연주할 때 알맞은 튜닝으로 정착하고 있다. 보통 오른손잡이는 반대쪽 왼손으로 넥 부분을 잡고 현을 누르며 오른손으로 현을 탄현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갖출 필요는 없다. 왼손잡이인 사람은 가격, 상품 수 등이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용 기타를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오른손잡이에 맞춰진 기타에 기존의 반대 자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는 있지만, 전기 컨트롤러의 위치가 다를 수 있다. 현을 누르는 손은 넥 부분의 아래쪽을 빠져나가듯이 하여 엄지를 목 뒤쪽에 잡고, 집게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4개의 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클래식 스타일, 곧 기본 자세이다. 또 엄지를 넥 위쪽 핑거보드에 가깝게 목 부분을 잡는 스타일도 주로 록 음악에서 이용된다. 시각이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목의 아래쪽부터 손가락을 위치해 현을 누르지 않고, 위쪽부터 손가락을 감싸듯이 하여 현을 눌러 연주하는 연주인도 있다. 클래식 기타의 경우 왼발을 발판에 실어 다리의 위치를 높여서 몸체 측면의 움푹한 곳을 왼발의 넓적다리에 실어 기타를 몸 전체로 감싸 안는 자세로 연주한다. 그 밖의 통기타나 전기 기타의 경우는 발판은 쓰지 않고 기타 측면의 움푹한 곳을 오른쪽 다리의 넓적다리에 실어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또, 무대에서 클래식 기타는 반드시 의자에 앉아 연주하며, 그 밖에는 주로 기타 끈을 매고 어깨에 내려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재즈 기타리스트는 앉아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한 때 빅 밴드 시대의 무대 형태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록 음악인은 앉아서 연주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전자우편 전자 우편(電子郵件) 혹은 이메일()은 컴퓨터 통신망(주로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과 해당 편지를 일컫는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전자 메일(electronic mai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무료 이메일인 한메일이나 구글의 G메일처럼 해당 서비스에 가입함으로써 인터넷이 연결되면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웹 메일, 자신의 컴퓨터에 선택적으로 내려 받을 수 있는 POP3, 간단하게 메일을 보내는 SMTP 방식 등이 주로 쓰인다. PC통신 시절에는 유료로 아이디를 만들어서 전자 우편을 사용하곤 했다. 전자 우편은 인터넷의 발단으로 거슬로 올라가며, 사실 인터넷이 만들어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였다.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원격 전화 접속 터미널에서 IBM 7094에 기록할 수 있게 하였고 디스크에서 온라인으로 파일을 저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능은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정보를 주고 받는 데 힘을 북돋어 주었다. 전자 우편은 1965년에 시분할 본체 컴퓨터의 여러 명의 사용자들을 위한 방법으로 시작했다. 이렇다 할 만한 역사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시설을 갖춘 첫 시스템들 사이에 SDC의 Q32와 MIT의 CTSS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자 우편은 빠르게 퍼져나가 "네트워크 전자 우편"이 되었으며, 사용자들이 적어도 1966년까지 다른 컴퓨터들 사이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허용하였다. (SAGE 시스템이 이전에 이와 비슷한 것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넷(ARPANET) 컴퓨터 네트워크는 전자 우편의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1969년에 실험적인 교환 시스템 전자 우편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전송된다는 보고가 있다. 1971년에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은 컴퓨터와 사용자의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 사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파넷은 전자 우편의 대중성을 점진적으로 늘려 나갔으며 아파넷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되었다. 현대적 형태의 전자 우편은 1979년, 당시 14살의 인도계 미국인인 시바 아야두라이()에 의해 구상되었다. 뉴저지 의치과대학(University of Medicine and Dentistry of New Jersey) 컴퓨터네크워크 연구소(LCN)에서 프로젝트를 담당한 시바는 포트란을 이용해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제목, 파일 첨부, 내용, 발신함, 수신함, 임시보관함, 주소록' 등과 같은 현대적 형태의 전자 우편을 구현하였다. 이에 대한 공헌으로 1981년에 웨스팅하우스 과학상(Westinghouse Award)을 수상하였으며, 1982년 8월 30일, 미국 저작권협회로부터 이것에 대한 저작권을 승인받았다. 오늘날 전자우편의 기원에 관해서 일부 논란이 되고 있다. 전자우편 주소는 '아이디@메일서버이름'의 형식이다. 전자우편 주소의 아이디로 한글 등 영문 외 문자를 지원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영문, 숫자, 일부 기호만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메일서버이름(domain)은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고 아이디(local-part)는 대소문자를 구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메일 서비스들은 아이디도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무료 전자 메일 서비스로는 전 세계적으로 야후! 메일, MSN 핫메일, 구글 G메일 등이 많이 쓰이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서 무료 전자 메일 서비스를 운영한다. 벡터 벡터()는 크기 만으로 나타낼 수 있는 스칼라()와 달리 방향과 크기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벡터는 유향선분(방향이 있는 선분 즉, 화살표)를 써서 표현할 수 있다. 행렬 수학에서, 행렬(行列, )은 수 또는 문자를 괄호 안에 직사각형 형태로 배열한 것이다. 다음은 여섯 개의 원소를 가진 2 × 3 행렬의 예이다. 크기와 모양이 같은 행렬은 원소별로 더하거나 뺄 수 있다. 행렬을 곱하는 방법은 더 복잡하며, 앞선 행렬의 열의 수와 뒤선 행렬의 행의 수가 같을 때에만 곱셈이 행해진다. 선형변환(와 같은 일차함수의 일반화)의 행렬 표현은 행렬의 중요한 응용이다. 선형 변환의 예인 삼차원 공간 벡터의 회전은 회전행렬로 나타낼 수 있다. R이 회전행렬, v가 공간 위 점의 위치를 가리키는 열벡터(한 개의 열로 된 행렬)라고 하면, 곱 Rv은 회전 후의 점의 위치를 가리키는 새 열벡터이다. 두 행렬의 곱은 두 선형 변환의 합성을 나타낸다. 행렬은 또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에도 응용된다. 정사각행렬의 일부 성질은 그 행렬식을 계산함으로써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행렬의 가역성 문제는 행렬식의 값이 0인지 아닌지로 전환할 수 있다. 선형 변환에 대한 기하학적 통찰은 그 고유벡터와 고유값을 찾아냄으로써 얻어낼 수 있다. 행렬은 과학의 곳곳에서 그 응용 분야가 발견된다. 물리학에서는 전기 회로, 광학, 양자 역학 등에서 쓰이고, 컴퓨터 그래픽스에서는 3차원 이미지를 2차원 평면에 투영하거나 사실적인 움직임을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한다. 행렬 미적분학의 발견으로 미분이나 지수 함수 같은 고전 해석학적 개념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일반화시키기도 했다. 수치해석학의 한 분과에서는 몇 세기 전부터 수학자들이 관심가져 왔던 더 효율적인 행렬 계산법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행렬 분해법(Matrix decomposition methods)은 행렬의 계산을 이론과 실응용 부문 모두에서 단순화시켰고, 특정한 구조의 행렬에 맞춤화된 알고리즘(예: 희소행렬, 대각행렬 등)은 유한요소법 및 다른 계산 분야에 진척을 가져왔다. 행성 이론이나 원자론에서는 무한 행렬도 등장하는데, 함수의 테일러 전개에 작용하는 미분 연산자의 행렬이 그 예다. 1848년 수학에 처음으로 실베스터가 사용한 행렬(matrix)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해부학에서 자궁(子宮,모체母體)을 뜻한다. 행렬식에대해서 행렬의 의미를 표현한것으로 전해진다. 행렬을 이루는 각각의 수나 문자를 성분(), 원소() 또는 항이라고 한다. 행렬의 가로줄을 행(行, ), 세로줄을 열(列, )이라고 한다. "m" 개의 행, "n" 개의 열로 이루어진 행렬을 m" × "n" 행렬이라고 한다. 한 행 또는 한 열 뿐인 행렬을 벡터에 빗대어 행벡터(row vector),열벡터(column vector) 라고 한다. 행과 열의 개수가 같은 행렬을 ("n"차) 정사각행렬 또는 정방행렬이라고 한다. 위에서 아래로 "i"번째인 행을 i"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j"번째인 열을 "j"열이라고 한다. "i"행 "j"열에 위치한 성분을 ("i", "j") 성분이라고 한다. 행과 열의 지표수가 같은 성분을 대각성분(대각항, )또는 대각요소(main diagonal)라고 한다. 예를 들어 행렬 은 3 × 4 행렬이고, 5를 (2, 3) 성분으로 한다. 행렬 은 각각 1 × 5 행벡터, 3 × 1 열벡터이다. 행렬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하고 대괄호나 소괄호 등 괄호형태로 감싸 표기한다. 행렬은 주로 대문자로 나타내고, 다른 대상과의 구별을 위해 굵은 글씨체를 자주 사용한다(예: , 또는 ). 행렬의 각 성분은 문자에 행과 열의 지표를 첨수하여 나타낸다(예: , 또는 ). 모든 항을 나열하는 대신, '일반항'을 간추려 표기하기도 한다. 이때 불분명해진 지표의 범위를 표기해줄 수 있다. 행렬의 표기는 행렬의 성분이 직사각형 모양의 행과 열로 배열된것을 의미하는것을 표현하기위해 일반적으로 대괄호나 중괄호등 괄호형태로 감싸 표기하지만 간혹 감싸는 표기자체를 생략한 경우도 있다. formula_4 행렬은 엄밀하게는 정수의 순서쌍 ("i", "j")(1 ≤ "i" ≤ "m", 1 ≤ "j" ≤ "n")의 집합에서 성분들이 속하는 집합으로 가는 함수로 정의된다. 실행렬(모든 성분이 실수인 행렬)을 예로 들면, (여기서 )따라서 모든 "m" × "n" 실행렬의 집합은 ["m"] × ["n"]에서 로 가는 함수의 집합임을 나타내는 으로 표기한다. 행렬의 상등의 의미도 함수 정의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두 실행렬 이 일 필요충분조건은, "m" = "p", "n" = "q", 그리고 "a" = "b"가 모든 정수 순서쌍 ("i", "j")(1 ≤ "i" ≤ "m", 1 ≤ "j" ≤ "n")에 대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두 "m" × "n" 행렬 와 에 대해, 덧셈과 뺄셈은 각각 성분별 덧셈과 뺄셈으로 정의된다. 즉, 예를 들어, 크기가 다른 행렬들에게는 덧셈과 뺄셈이 정의되지 않는다. 주어진 "m" × "n" 행렬 와 스칼라 "formula_10" 에 대해, 스칼라배 연산은 성분별로 스칼라배를 취한 것으로 정의된다. 즉, 예를 들어, 와 을 스칼라, 를 크기가 같은 행렬이라 하자. 이때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이들 성질은 모두 그 행렬 성분의 성질로부터 유도된다. 이를테면 덧셈의 교환법칙은 다음과 같이 유도된다. 주어진 "m" × "n" 행렬 와 "n" × "p" 행렬 의 곱은 "m" × "p" 행렬이며, 각 ("i", "j") 성분은 의 "formula_19"행벡터와 의 "formula_20"열벡터의 점곱으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좌측 행렬의 열수와 우측 행렬의 행수가 같아야 곱셈이 정의된다. 를 스칼라, 를 각 공식에서 연산이 정의되도록 크기를 정한 행렬이라고 하자. 이때 다음이 성립한다. 행렬의 곱셈은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우선, 가 정의되었어도, 는 정의되지 않았을 수 있다. 둘 모두 정의되었어도, 크기가 다를 수 있다. 크기가 같은 경우(즉 와 가 같은 크기의 정사각행렬인 경우)에도, 두 곱셈의 결과값은 다를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다만,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는 경우에는 교환법칙이 성립한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할 때 행과 열의 개수가 같은 정사각행렬 A와 B에 대해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한다. 위의 조건들은 충분조건이다. 즉, 정사각행렬 A와 B가 위의 조건을 만족할 때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하지만,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하는 모든 행렬이 위의 조건을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곱셈의 교환조건을 만족하는 정사각행렬 A와 B는 다음의 교환법칙을 만족하고 그 역도 만족한다. 즉 다음의 식에 대해 필요충분조건을 이룬다. 행렬formula_39 와 formula_40에서, 스칼라 formula_10는, 행렬의 전치란 행과 열을 바꾸는 것으로, 행렬 A의 전치는 A로 나타낸다. 즉 주어진 "m"×"n" 행렬 A의 전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A는 "m"×"n" 행렬이 아니라 "n"×"m" 행렬임에 유의하자. 예를 들어, "a"를 스칼라, A, B를 크기가 같은 행렬이라 하자. 이때 다음이 성립한다. 벡터 행렬에서, 행 벡터를 formula_48행렬 , 즉formula_49의 단일 행으로 구성된 행렬이고, 마찬가지로, 열 벡터를 formula_50 행렬, 즉, formula_51 열의 단일 열로 구성된 행렬로 예약해보면, 행(row)벡터(vector)는 또는 열(column)벡터는 대각합이란 정사각행렬의 대각항들의 원소를 전부 더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n차 정사각행렬 A의 대각합은 다음과 같다. "c"를 스칼라, A, B를 크기가 같은 정사각행렬이라 하자. 이때 다음이 성립한다. 행렬식은 formula_64 또는 formula_65로 표시하며 선형 행렬 A의 크기를 나타낸다. 행렬 2x2 행렬 A가 와 같이 주어진다면, det(A)는 와 같이 정의된다. 영행렬이란 행렬의 모든 원소의 값이 0인 행렬을 말한다. 영행렬은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다. 단위행렬은 정사각행렬 중에서 행 번호와 열 번호가 같은 위치의 값은 1이고, 나머지는 0을 가지는 행렬을 말한다. 이 행렬은 곱셈에 대한 항등원이다. 역행렬이란 어떤 행렬의 곱셈에 대한 역원이다. 요리 요리(料理, )는 먹기 좋게 가공한 음식 혹은 그 가공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크게 나누어 지역별로, 시대별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터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들고 시식 후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요리는 여러 조리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그 음식을 말하며 주로 가열한 것을 말한다. 조리(調理)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나 그 방법, 과정 등을 말한다. 음식의 조리법을 뜻하는 레서피(레시피)()는 조리법으로 순화어를 쓰도록 되었다. 문명이 출현하면서 사회집단 또는 부족에 따라서 전통적인 요리법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기후, 토양, 동물 분포와 같은 지역적인 요인에 따라서 서로 다른 전통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가와 자신들의 사회구조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금기를 지키는가에 따라서 요리법이 달라지기도 했다. 전통 음식은 국가,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중국 요리 중국 요리(中國料理), 중화요리(中華料理), 또는 청요리(淸料理)는 흔히 중국의 음식을 말한다. 중국의 화교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세계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바꾼 요리를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중궈차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국토가 아주 넓어 각 지방의 기후, 풍토, 산물 등에 각기 다른 특색이 있다. 그에 따라 경제, 지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하여 4대 요리를 형성하였다. 중국 요리 대부분은 적당한 크기로 손질되어 바로 집어 먹을 수 있게 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중국 문화는 식탁에서 칼과 포크를 이용하는 것을 야만스럽게 본다. 이는 이런 도구들이 무기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손님이 직접 음식을 자르는 것도 무례한 것으로 여긴다. 생선 요리는 보통 완전히 요리되어 나오며 젓가락으로 살코기 덩어리를 집어 먹는다. 다른 종류의 요리는 보통 발라내서 먹는데 이와 대조된다. 가능한 신선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는 문화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머리와 꼬리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수많은 식당에서 두 개의 숟가락을 이용하여 고기를 나눠 식탁에 올려 놓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닭고기 또한 중국 요리에 있어 자주 사용되는 재료이다. 닭의 살코기를 여러 갈래로 찢어 놓아 벼슬까지 대접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완전함을 상징한다. 베이징 요리와 난징 요리와 쓰촨 요리와 광둥 요리가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산둥 요리, 후난 요리, 푸젠 요리, 회족들의 음식에서 유래한 칭전 요리가 있다. 중국에서는 사대 요리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화이양 요리 대신 저장 요리(江浙菜)가 손꼽히기도 한다. 중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구분법은 중국 8대 요리이다. 식재를 다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중화 요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를 한다. 채식주의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흔하지 않다. 중국 채식주의자들은 두부를 많이 먹는다. 중국의 채식주의자들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며 고통을 줄이는 불교적 가르침을 따른다. 중국의 채식주의적 요리는 커다랗고 다양한 야채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기를 모방한 음식도 몇 가지 넣는다. 고기 모방 요리는 대부분 콩 단백질과 글루텐으로 만들어 오리, 닭, 돼지와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낸다. 콘작을 이용한 해산물 모방 요리도 존재한다. 전통 중국 문화에서, 차가운 음료는 뜨거운 음식을 잘 소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차가운 물이나 청량 음료와 같은 액체는 전통적으로 식사 시간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죽이 나오면, 뜨거운 차나 뜨거운 물 등의 음료가 식탁에 오른다. 차는 기름진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맥주와 청량 음료를 중화 음식과 함께 널리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지방의 조그마한 식당의 많은 수가 찬 맥주에 핫 팟을 둔 렁단베이(冷淡杯)라는 음료를 취급하며 이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에서 차는 아주 널리 사랑받고 있다. 북방지역에서는 화차, 상해와 절강성 등 중부지방에서는 녹차, 남부지방에서는 우롱차를 즐겨마신다. 이외에도 중국내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는 홍차와 백차 등도 있다. 손님이 오면 주인은 거듭 석 잔을 권하는데, 처음 두 잔은 자유롭게 마셔도 되지만 마지막 잔은 한 번에 마시는 것이 예절이다. 황주는 3~4천 년의 역사가 있는 술로 곡식으로 제조하는 발효주이며 종류가 다양한데 홍여주가 유명하다. 백주는 천 년의 역사가 있는 곡주로 40도 이상의 증류주로 무색투명하며 특이한 향이 난다. 우량이에, 마오타이가 유명하다. 포도주도 2천 년의 역사가 있으며 장백산 포도주, 통화 포도주 등이 있다. 중국의 맥주 생산량은 세계 3위를 차지한 적도 있는데, 청도맥주, 오성맥주가 유명하다. 보통 식사가 나오기전에 건배를 하며,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면 즉시 따라 주는데, 비우지 않았는데도 첨잔하며 계속 권한다. 술잔은 술을 마신 후 밑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주인이 손님에게 권한다. 보통 만찬을 위한 식당에 가면 요리가 나오는 순서가 있는데, 보통 차가운 요리를 먼저 내온 후 더운 요리를 내온다. 더운 요리도 흔히 먹는 볶음요리(热炒)가 먼저 나오고, 가장 중요한 주요리는 그 다음에 나온다. 주요리는 해삼, 전복, 샥스핀, 제비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 또는 오리나 돼지를 재료로 만든 요리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요리 중간 중간에 디옌신(딤섬)이 나오는데 보통 식욕을 돋우기 위하여 짠맛의 디옌신이 올라오고, 단맛의 디옌신은 디저트로 먹는다. 주요리가 끝나면 밥이나 면으로 식사를 하는데, 요리가 충분하면 건너뛰고 탕을 마신다. 그 다음 단맛이 나는 디저트와 과일을 먹는다. 주문을 할 때에는 이 순서를 고려해서 냉채, 볶음요리, 주요리, 디예신을 각각 선택을 하되, 보통 사람 수 만큼의 주요리를 시키면 적당하다. 초대를 받았을 때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한다. 원형 테이블이 놓인 자리에서는 안쪽의 중앙이 주인석이다. 일반적으로 식단은 전채 2~4종, 탕 6~8종, 디저트 2종 등 짝수로 나오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긴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내어 먹는다. 보통 손님이 먼저 덜고 주인이 나중에 덜어 낸다. 요리는 한 접시에 한 가지씩만 먹고 여러 요리를 한꺼번에 가져다 먹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 섞이지 않도록 접시를 바꾸어 먹는데, 접시를 들고 먹거나 국수를 소리내어 먹거나 죽 종류는 그릇을 입에 대고 먹지는 않는다. 생선을 먹을 때에는 뒤집어서 먹지 않는데, 이는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리가 나올 때 주인이 권하면 주빈부터 사양하지 말고 먹도록 한다. 찰기가 없는 중 국쌀의 특성으로 인해 국그릇과 접시는 식탁에 올려둔 채로 먹고 밥그릇은 들고 먹어야 한다. ​밥그릇을 들고 먹는 이유는 중국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마치 동물이 먹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릇에 입을 대는 것은 금물이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대화 때문에 음식을 식어버리게 하거나, 자기 앞에 고정시키면 안된다. 중국에서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이다.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다 먹으면 준비한 음식이 부족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주인이 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개인의 앞접시에 담은 음식은 모두 먹는 것이 예의이다. 디저트는 주로 단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조금씩 덜어서 먹도록 한다. 짜장면 짜장면() 또는 자장면은 양파, 등 채소와 돼지고기에 춘장을 넣어 식용유와 함께 볶은 양념을 굵은 국수에 비벼서 먹는 한국식 중국 요리이다. 굵은 국수에 검은 색에 가까운 양념을 얹어 비벼 먹는다. 짜장면 1인분의 열량은 대략 700kcal 정도로, 이는 한국 성인 기준 남자 1일 섭취량의 28%, 여자의 35%이다. 종류는 다양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짜장면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인스턴트 식품으로 가공되어 짜장라면(짜파게티, 짜짜로니 등)이 판매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반 짜장면에 다양한 토핑을 얹어서 먹는 종류의 짜장면도 있다. 짜장면은 중국의 산둥 반도 지역의 가정식이었던 작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하여 만들어진 음식이다. 지금도 베이징에서는 라오베이징자쟝몐다왕(老北京炸醬麵大王)등 전문점이 산동식 자쟝몐을 판다. 1890년대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 온 부두 근로자인 쿠리(苦力·하역 인부)들이 인천항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던 음식이 짜장면의 시작이었다. 이후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중식음식점이 많이 생겼는데, 흔히 '원조 짜장면 집'으로 알려진 공화춘은 1905년에 문을 열었다. 1948년 영화장유가 창업하여 짜장면용 면장을 만들어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영화장유의 사장 왕송산은 춘장에 캐러멜을 넣어 단맛이 나도록 하고 사자표 춘장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짜장면은 여러모로 중국의 자쟝몐과는 다른 음식이 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펼친 분식장려운동과 조리 시간이 비교적 짧은 점이 산업화 시대와 맞아 떨어지면서 짜장면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짜장면은 저렴한 가격에 어디서나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북극해 횡단을 3개월 만에 마친 등산가 허영호씨는 인터뷰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짜장면을 꼽기도 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인 1980년대 이전에는 서민들이 외식할 때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 받았으며, 특히 입학·졸업·생일을 축하할 때, 이사를 가는 날 등에 가족들이 같이 즐겨 먹었다. god의 1집에 수록된 《어머님께》에서도 짜장면을 통해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뿐만 아니라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살인의 추억》과 드라마 《환상의 커플》 등 많은 작품에서 짜장면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서는 중화요리의 대를 이어온 화교 삼부자 이야기에 등장했다. 문교부(현 교육부)가 1986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자장면만이 표준어이고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려 있었다. 국립국어원 박용찬의 설명에 따르면, 자장면은 짬뽕과는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과 한자어인 면(麵)이 결합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002년에 발행된 표준 발음 실태 조사(최혜원,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서울·경기 지방 사람 210명 중, 72%가 자장면 대신 짜장면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시인 안도현은 그의 작품 《짜장면》의 제목과 관련해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썼다. 그 밖에도 짜장면은 자장면으로 쓰면서 짬뽕은 왜 잠봉이 아닌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면서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비판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편, 2009년 5월 17일, SBS TV의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인 SBS 스페셜의 164회 자장면의 진실에서 짜장면이란 표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해당 프로그램에서 자체적으로 자장면과 짜장면의 표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당시 응답자 중 91.8%가 짜장면으로 부르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은 아나운서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는 자장면에 비해 짜장면이 실생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현실을 수용해 짜장면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1963년 무렵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은 20 - 30 원 정도였다. 2010년 가격을 100으로 하였을 때 짜장면의 물가 지수 변화는 아래의 표와 같다. 블랙데이 블랙데이(Black Day)는 매년 4월 14일,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대중 문화에서 매월 14일째 되는 날 일정한 의미를 담아 특별한 행동을 하는 비공식 기념일의 일종이다. 2월 14일인 발렌타인데이와 3월 14일인 화이트데이 바로 다음에 돌아오는 14일이라는 점에서 그 두 기념일의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블랙데이 다음에 돌아오는 5월 14일은 로즈데이이다.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90년대 신문 기사들로, 어느 신문은 블랙데이에 대해 “애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짜장면과 블랙 커피, 아메리카노등 검은색 계통의 음식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는 날”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청소년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이 2000년대 들어 2-30대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아니냐 하는 해석도 있다. '블랙데이'라는 명칭은 화이트데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커플들의 기념일인 3월 14일 화이트데이와는 정 반대로, 한달 뒤 솔로들의 날인 4월 14일을 화이트의 반대인 블랙으로 비튼 것이다. 한편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여느 '데이'와 마찬가지로, 빼빼로데이처럼 마케팅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으나, 특정회사의 독점 상품이 아닌 일반적인 짜장면이기 때문에 비판의 근거는 약한 편이다. 실제로 중국집()들이 블랙데이 기념으로 특별히 짜장면을 판촉하지도 않으며, 이날에 한해 매출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성당과 시장 에릭 레이먼드가 쓴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자유 소프트웨어 철학을 대변하는 유명한 글이다. 레이먼드는 이 글에서 리눅스 커널 개발과정과 패치메일이라는 오픈 소스 프로젝트를 개발한 경험을 들어 오픈 소스 개발 방식의 유효성을 설명한다. 1997년 5월 27일 리눅스 회의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1999년 같은 이름의 책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글에서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의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 모델을 대조한다. 글의 주제는 그가 리누스 법칙이라고 이름붙인 "보는 눈만 많다면, 어떤 버그라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이 테스트하고 훑어보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 코드가 공개되어 있으면 버그는 빨리 잡힐 것이란 뜻이다. 이에 대해 성당 모델에서는 소스 코드를 여러 명의 개발자들만 볼 수 있으므로 버그를 잡는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 글로 인해 GNU 이맥스와 GCC를 포함한 많은 오픈 소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이 시장식의 열린 개발 모델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넷스케이프가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를 공개한 것과 모질라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성당 모델은 상용 소프트웨어의 전형적인 개발 방식이다. 더욱이 상용 소프트웨어는 보통 출시 때 소스가 같이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과 성당"이라는 구문은 종종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와 상용 소프트웨어를 비유하는 데에 쓰인다. 그러나 원래 글에서는 자유 소프트웨어들 중에 두 종류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상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성당과 시장의 예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키백과는 시장식의 프로젝트이고, 누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당형의 프로젝트이다. 에릭 레이먼드 에릭 레이먼드(Eric Steven Raymond, ESR , 1957년 12월 4일 ~ )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해커이며 자신을 인터넷과 해커 문화의 "참여 관찰 인류학자 (observer-participant anthropologist)"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오픈 소스의 형태로 개발되고 발전된 패치 메일의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오픈 소스 철학을 대변하는 문서인성당과 시장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반복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해커들이 쓰는 용어를 설명한 자곤 파일("신 해커사전")을 편집했으며, 넷스케이프의 소스 코드 공개, 모질라의 설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현재 태권도 검은 띠의 소유자이다. 온라인 게임 온라인 게임(online game, )은 각종 네트워크로 하는 멀티 플레이 게임이며, 컴퓨터, 휴대전화, 휴대용 게임기 등 다양한 기기에서 각자 다양한 장르의 온라인 게임을 지원한다. 사람들이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과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꾸미기 위해서(35%)이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32%), 빠른 성장(18%), 경쟁심(15%)의 이유도 있다. 과금하면 만족한다고 답한 사용자는 39%였고 아니라고 답한 사용자는 20%였다. 과금하지 않는 사용자들은 돈이 아깝거나(33%)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26%) 과금 없이도 게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19%)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다. 한편 과금이 지나친 경우 피로감을 느낀 이용자가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게임을 찾는 경우도 있다. 송두율 송두율 (宋斗律, 독문명 Song Du-yul, 1944년 10월 12일 ~ )은 한국계 독일인 사회학자, 철학자로, 현재 독일 뮌스터 대학의 사회학, 철학 교수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독일식 이름은 Du-yul Song(두율 송)이다. 1944년 10월 12일 일본 도쿄도 아라카와 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제주도 출신이다. 아버지 송계범은 일본 도쿄 물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경성제국대학 물리학부에서 근무하였다. 송계범이 한국 전쟁 이후 전남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송두율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광주에 거주하며 광주 중앙초등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서울로 이주해,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동고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훗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된 최재석이었다. 교사 송찬식(후에 국민대 사학과교수)의 권유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학 시절 59학번이던 김지하와 알게 된다. 1967년 독일로 유학해 19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뮌스터대학의 사회학과에서 조교수로 채용되어 정치경제학, 사회학방법론, 후진국사회학을 강의했으며, 뮌스터에서 정정희와 결혼하여 준과 린 두 아들을 낳았다. 1973년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이후 총 18회 북한을 방문하였다. 독일에서 한국 학술원을 운영하며 북한에서 지원금을 받았다.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본에서 벌어진 유신 독재 반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1977년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81년 공산주의에 대해 내재적 방법으로 비판적인 분석을 한 논문 '소련과 중국'을 발표하였고, 1982년 1월 사회학교수자격논문을 마무리하여 교수자격을 받았다.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의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김일성과 대면하였다. 1994년부터 베를린 홈볼트대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1997년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북한을 방문하였다. 2003년 한국에 귀국했으나,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서울지방법원 최완주 부장판사는 2003년 10월22일 "범죄사실이 소명되나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해 증거인멸 우려가 있고 높은 처단형이 예상돼 도주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아 기소되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는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은 살아온 과정 등을 볼 때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나도 존경한다'고 진술하였다. 2004년 7월 21일 2심 재판부(서울고법, 재판장 김용균 부장판사)는 기소된 사건 내용중 방북사실을 제외한 간첨혐의 등 대부분을 무죄로 판정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석방됐고, 2004년 8월 초에 부인과 함께 독일로 출국했다. 2004년 7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은 "2003년 10월24일~11월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포승줄과 수갑에 묶인 채 검찰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는 등 부당한 계구 사용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는 등의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12단독 최지수 판사는 2005년 1월 7일 "당시 정황상 송두율이 도주하거나 폭행할 우려가 없었는데도 계구를 사용한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국가는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해 배상할 책임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의자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 계구 사용은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최소범위에서 허용돼야 한다 무리한 계구 사용은 피의자의 심리를 위축시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는 송두율에게 1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88단독 김래니 판사는 조사과정의 변호인 입회를 불허한 검사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구속상태에 처한 피의자에게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은 인권보장과 방어준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권리이다"라고 하면서“국가는 500만원, 관련 검사 4명은 각각 100만원씩 모두 9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송두율 측 변호인단은 2003년 10월 송두율이 구속수감된 이후 검찰이 보안을 이유로 변호인 입회를 허용하지 않자 "입회불허 결정을 취소하라"는 준항고를 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변호인 입회불허 취소를 결정했다. 2008년 4월 17일 상고심(2004도4899)에서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다가 북한에 간것은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일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2008년 8월 24일 서울고법은 확정 판결을 내렸다. 2009년 여름 학기를 끝으로 뮌스터 대학에서 퇴임했다. 60년대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시도한 유신 체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혔다. 이후 독일에 머물며, 남한과 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일련의 저서를 썼다. 그 안에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론을 내세우며 한국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5년부터 베이징에서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 학술적인 교류를 갖는 남한/북한 학술 회의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기상청 기상청(氣象廳, , 약칭: KMA)은 기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1990년 12월 27일 중앙기상대를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여의대방로16길 61에 위치하고 있다. 청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차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대한제국 농상공부 산하에 설치한 관측소가 기상청의 전신이다. 당시 관측소는 러일 전쟁 때 일본의 필요로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인천광역시에 설치된 것이 중앙관상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2년에는 내무부 학무국 소관이 되었다가 해방 후 학무국이 문교부로 독립하면서 문교부 소관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며, 인천에 위치한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한 것은 1948년 3월 1일의 일이다. 다만, 근거 법령은 1949년 8월 18일에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관상대라고 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관상감'(觀象監)이라는 직책에서 유래했다.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을 관장한 기관으로 천체 현상을 관찰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1956년 3월 16일에는 미국 국무부의 도움을 받아 세계기상기구에 정식 가입했다. 1962년에는 교통부 소속으로,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로 이관되었다. 1982년에는 중앙기상대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0년에 지금과 같은 기상청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기상업무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상청을 기상기후청으로 개편하는 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기상관측만이 아니라 기후변화 예측·감시 업무까지 수행하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깊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새 정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기상청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총수입·총지출 기준 2019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 2004년 11월, 기상청은 기상용 슈퍼컴퓨터 2호기로 1천억여원을 들여 CRAY X1을 도입했다. 3호기는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가 완공되는 2009년에 도입할 예정이다. 기상용 슈퍼컴퓨터 2호기는 2007년 2월 13일 기준 유럽 연합,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의 슈퍼컴퓨터(연산 처리 속도인 테라플롭스 기준)이다. 그러나 수치예보 모델(기상예측용 방정식)의 품질은 최하위인 러시아에 이어 10위로 평가되었다. 날씨ON은 기상청에서 국민에게 기상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2007년 5월 10일부터 시험운영하는 인터넷 기상방송으로 2007년 8월 4일부터 정식 개국하였다. 기상청은 2015년 6월 말 애플리케이션을 폐지하였다. 2016년 여름철에 장마와 폭염에 대해 오보를 계속 내어 비판을 샀다. 7월에는 소나기 예보를 내린 날에는 해가 뜨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소나기가 내려 '양치기 기상청'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폭염이 절정에 달할 것'이라고 예보했으나 19일이 되어도 폭염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후에도 폭염이 꺾이는 시점에 대한 보도를 16일, 22일, 24일로 계속해서 미루었는데 이에 대해 기상청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공기 흐름이 정체되어 있어 폭염이 끝날 줄 알았으나 계속 이어진다는 등 대기 예측이 매우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한편, 기상청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슈퍼컴퓨터를 통한 자료를 예보관들이 분석함으로써 알려주는 것인데 오보가 나올 때마다 예보관을 교체해서 해당 분야에 유능한 인재가 머물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열대 저기압 열대 저기압(熱帶低氣壓, 열대성 저기압, tropical cyclone)은 지구의 열대 지역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이다. 이들은 발생 지역에 따라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 으로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 부근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을 '윌리윌리'로 불렀으나, 현재는 '사이클론'으로 통용되고 있다. 열대 저기압은 여러날 동안 지속될 수 있고, 예보에서 올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붙는다. 주변 관계국들이 이름을 붙이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한다.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최대 풍속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RSMC) 등 대부분의 기관에서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0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미터 상공의 풍속을 1분간 측정한 평균값을 사용하고 있다. 기압은 헥토파스칼(hPa), 강수량은 밀리미터(mm)를 표준 단위로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등급(SSHS)이라는 등급을 이용하여, 5등급을 가장 강력한 열 강타한 태풍 매미는 5등급 태풍이었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은 2008년 를 제주도에 설립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가태풍센터는 전 세계의 열대 저기압을 감시 하지 않으며, 일본 도쿄 지역특별기상센터처럼 북서태평양의 태풍만 감시하고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의 넓은 해상에서 발생하고 발달하기 때문에 그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주로 남태평양에 있는 몇몇 섬에서 관측이 행해졌고, 그 외에는 때때로 그 해역을 지나가는 배에서 전해 주는 기상통보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존재를 알 뿐이었다. 따라서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고, 강도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때때로 섬을 통과할 때나 배가 태풍 중심에 휘말려 들어갈 때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면 미군의 비행기가 그 중심까지 날아가 관측하게 되어 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이 관측지 근처에 가까이 오면 각지에 있는 레이다에 의해 저기압을 연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열대성 저기압 주위에 있는 특유한 구름 분포가 찍히는데, 이것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위치를 정할 수 있다. 또한 1977년부터 쏘아올린 기상위성에서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구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재는 일기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정황을 알 수 있게 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갑작스럽게 열대성 저기압이 엄습하여 피해를 입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할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하루에 두세 번 미군 비행기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까지 들어가 레이다나 드롭 존데를 이용하여 열대성 저기압을 자세히 관측한다. 열대성 저기압의 등압선은 거의 원형이므로 비행기가 언제라도 왼쪽으로 바람을 받아 날아가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다가갈 수 있다. 중심에 가까이 가면 레이다로 중심의 위치를 잡아 더욱 중심에 가까이 접근한다. 격렬한 동요와 강한 비가 내리는 지역을 뚫고 나가 열대성 저기압의 눈 안에 들어간 다음 그 안에서 8자를 그리듯이 비행한다. 그러면 정확한 중심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드롭 존데를 떨어뜨려 비행 고도에서 해면까지 사이의 기온과 습도를 측정하고, 또 해면에서 중심 기압을 구한다. 그리고 파도의 상태로 해면 부근의 풍속을 추정한다. 열대성 저기압이 200 ~300km 거리까지 다가오 레이다로 열대성 저기압을 관측할 있다. 레이다로 찍은 열대성 저기압을 보면 중심 주위를 나선형 름이 몇 줄 에워싸고 있는 레이다의 경우는 비가 내리고 있는 구름밖에 찍을 수 없지만 위성에서 본 경우에는 상층의 구름 등 비가 내리고 있지 않은 곳도 찍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진에 의해 열대성 저기압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연속 사진으로 열대성 저기압의 진로나 강도의 변화 등도 추정할 수 있다. 미국의 극궤도 기상위성 NOAA는 하루에 두 차례 대한민국 상공을 통과한다. 이러한 기상위성의 관측 데이터는 기상위성센터에서 처리하는데, 구름 화상 사진으로 작성하여 태풍감시나 기상예보에 이용되고 있다. 열대성 저기압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과는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은 그 중심부에 눈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열대성 저기압의 구조도 눈의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열대성 저기압을 레이다로 관측하면 고도 십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적란운이 중심 주 있다. 이 고리 모양의 구름을 벽운(壁雲)이라 하며 그 안쪽을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눈의 크기는 평균 15 ~ 20km 정도이지만 열대성 저기압에 따라 다르며, 같은 열대성 저기압이라도 시간적으로 매우 다르다. 눈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나 타원형, 길다란 띠 모양으로 연결된 적란운이 주위에서 모여들어 벽운을 형성하고 있다. 레이다에 찍히는 것은 굵은 빗방울을 내리게 하는 구름뿐이며, 찍히지 않는 검은 부분이라도 실제로는 구름이 있다. 또한 비행기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에 들어가 보면 태풍의 눈 이 구름은 벽운처럼 길다란 것이 아니라 틈 해가 비치거나 별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일기도상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주위에 동심원 모양을 한 등압선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 간격은 좁아진다. 또한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이 지나간 관측소의 기압이나 풍속의 변화를 보면, 기압은 중심에 가까우면 급격히 낮아지고 바람도 급격히 강해지지만, 태풍의 눈 안에서는 갑자기 약해진다.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의 주위에서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바람이 등압선과 20 ~ 30°각도로 열대성 저기압 안으로 불어들고 있는데,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고 있는 상공의 바람을 비행기에서 보면 중심에서 극히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중심에서 바깥쪽을 향해 불어나오고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열대 지역에 있는 동안은 지표의 열대성 저기압 지역 내의 기온에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온대성 저기압의 경우에는 난역과 한역(寒域) 사이에 커다란 온도차가 있으므로 열대성 저기압과 상당히 다르다. 열대성 저기압 주위의 상공의 기온은 매우 특징있는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비행기에서 관측해 보면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는 온도가 매우 높고, 주위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진다. 그리고 그 도중에는 온도가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서로 교대로 나타난다. 온도가 높은 띠 모양의 구역은 열대성 저기압의 중심 부근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띠 모양의 구름과 일치한다. 태풍의 눈 내부가 기온이 매우 높은 것은 이곳이 하강기류 영역이기 때문이며, 중심 부근에서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것은 구름 속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潛熱)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곳은 편동풍 골의 끝부분이나 중위도에서 뻗어 있는 기압골 위쪽 등 상승 기류가 있는 곳이다. 열대의 해면은 수온이 높고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증발이 활발하여 대기는 충분히 습해져 있다. 또한 라디오 존데 관측 결과에 의하면 열대의 대기는 조건부 불안정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가 어느 정도 상승하여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점점 상승하려는 성질이 있어서 적란운이 형성된다. 적란운 안에는 다량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잠열이 방출되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진다. 한편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는 것은 상공에서 커다란 기류의 발산이 있을 때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해면의 적란운 주위에서 수렴하여 상승한 기류가 상공에서 발산하여 그것이 하층의 수렴을 웃돌게 되면 기압이 내려간다. 또한, 적란운으로 에워싸인 눈 안에서는 강한 하강 기류가 있기 때문에 공기는 단열적으로 온도가 상승하여 기온이 한층 높아진다. 기온이 높아지면 밀도가 감소하기 때문에 중심부의 기압은 눈 주위보다 더욱 낮아진다. 계산에 따르면, 태풍의 중심부에서는 온도의 상승에 의해 밀도가 감소한 것만큼 기압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기압이 내려가면 주위에서 기류가 수렴하여 적란운을 더 한층 발달시킴에 따라 열대성 저기압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면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하여 대기가 충분한 습기를 가지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태풍이 발달하려면 표면 수온이 26 ~ 27℃ 이상이어야 한다. 열대의 해양에서도 남동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수온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북서 태평양에서 강한 태풍이 된 것은 모두 수온이 28℃ 이상인 곳에서 급속히 발달한 것이다. 지금까지 비행기 관측으로 얻은 열대 저기압의 중심 기압의 최저치는 870hPa로, 열대에서의 평상시 기압보다도 135hPa나 낮은 수치이다. 열대성 저기압은 해면의 수온이 높고 상승 기류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상공에서 큰 발산이 있는 경우에 발달한다. 실제로 태풍의 발달 상황을 조사해 보면 발생하고 나서 2, 3일 후에 급속히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한 차례만 기상 통보를 수신하던 배가 갑자기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여 당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넓은 해면에서는 수온이나 기류의 상태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있다. 열대성 저기압이 이와 같은 곳으로 오면 발달이 멈추고 쇠퇴한다. 그러나 일단 발달한 열대성 저기압은 열대 해상에서 금방 소멸하지는 않는다. 열대성 저기압은 육지에 오르면 해면에서 수증기의 보급이 없어져 표면 마찰이 커지기 때문에 급속도로 쇠퇴한다. 가을에 중위도까지 와서 일단 주춤한 열대성 저기압이 온대성 저기압 성질을 갖기 시작하여 다시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진행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를 필요로 한다. 자유민주당 (일본) 자유민주당(, ), 약칭 자민당()은 1955년에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이 합쳐져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2019년 현재 총재는 아베 신조, 간사장은 니카이 도시히로이다. 1955년의 창당 이후 중의원 내에서 지속적으로 여당 자리를 지켜오면서 야당인 일본사회당과 55년 체제라 불리는 양대정당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후 1993년에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정당들이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일당 우위 정당제가 처음으로 붕괴하였다. 그러나 익년인 1994년 다시 내각을 이룬 이후로도 2009~2012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제1당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으며, 계속적으로 총리를 배출해내고 있는 등 일본국내의 정치계에서의 그 영향력은 거대하다. 소속 의원들은 당내의 특정 파벌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총리나 내각 인사의 선출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55년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으로 창당된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을 기원으로 하며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핵심을 담당한 익찬의원연맹, 익찬정치회, 대일본정치회 및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동교회, 호국동지회, 일본자유당, 일본진보당, 일본협동당이 자민당의 기원으로 꼽힌다. 이렇게 자민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주도했거나 이를 계승하는 세력과, 제국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친미, 반공주의 성향을 띄는 보수적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으로 출발했다. 자민당은 창당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당 지도부의 힘이 약했고, 대신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각각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을 형성해 각 파벌 간의 대립과 합종연횡을 통해 당이 운영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는 한 정당이 한 선거구에 여러 명의 후보를 내야만 하는 중선거구제를 선거 제도로 채택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같은 선거구에 출마한 자민당 후보들은 서로가 같은 당에 소속된 동지임과 동시에 당선을 다투는 라이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한 선거구에 입후보자가 여러 명이어서 한 후보자가 중앙당의 선거 지원을 독차지할 수 없었기에 각 후보자는 선거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 후원회를 조직하거나, 영향력이 강한 정치인의 파벌에 들어가 그 정치인의 뜻에 따르면서 선거 때마다 파벌의 지원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형성된 파벌 정치는 서로가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선거에 이용하는 금권 정치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자민당은 보수, 우익 정당이지만, 55년 체제 하에서는 서방의 보수 정권과 비교해 사회, 경제 전반에 있어 정부의 개입이 심했고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자민당 정권은 정부가 국가 경제 정책을 모두 관리하면서 여러 산업 분야 중 경쟁력이 부족한 분야의 기업들이 낙오되지 않도록 행정 절차상 인허가 권한 등을 이용해 이들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농업 종사자에게 보조금을 교부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여러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이렇게 강력한 정부 개입으로 추진된 일련의 정책들이 "소득 격차 해소" 및 "리스크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평가와 함께 "일본의 전후 자민당 체제는 그들의 이념과는 모순되게도 성공한 사회주의 체제였다"라는 비아냥마저 나오기도 했다. 자민당은 일본의 여러 유명 정치인을 배출했다. 1990년대 이후 정계계편을 통해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된 사람들도 그 뿌리를 따져보면 자민당 출신이 꽤 많다. 자민당 출신으로서 야권에 자리를 잡은 인사로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오카다 가쓰야, 오자와 이치로, 가메이 시즈카 등이 있다. 1955년 11월 창당에 즈음하여 신당 창당 준비회가 "당명 위원회"를 따로 구성해 당명을 공모했다. 전국에서 총 2,191건의 공모가 있었는데, 많은 수를 얻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일본보수당"이 546건으로 1위, "민주자유당"과 "보수당"이 각각 187건으로 공동 2위, "일본국민당"이 159건으로 4위였다. 이렇게 "일본보수당"이 1위를 차지했지만 "이런 당명을 써서는 선거에서 불리하다"는 등의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어 결국 채택되지 못했고, 이후 당내에서 논의한 결과 신당이 추구하는 핵심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이유로 "자유민주당"이 당명으로 결정되었다. 창당 이후 언론 매체 등에서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과 약칭인 "자민당"을 자유롭게 혼용해 왔으나, 1990년대에 간 나오토 및 하토야마 유키오가 민주당을, 오자와 이치로가 자유당을 창당하고 나서부터는 혼동을 막기 위해 자유민주당을 언급할 때는 본 명칭인 "자유민주당"은 잘 쓰이지 않고 약칭인 "자민당"이 더 자주 쓰인다. 같은 이유로 당의 기관지 이름도 "자유신보"에서 "자유민주"로 바꾸었다. 제45회 총선거 패배로 야당이 된 직후인 2009년 9월에 열린 자민당의 "집권 구상 회의"에서는 "자유민주당"이라는 당명에 여론의 거부 반응이 있다며 당명 변경론이 나왔다. 새 당명으로는 "화혼당()", "자유신당()" 등이 제안되었지만, "당의 체질 개선이 먼저인데 당명을 바꾸자는 건 본말전도인 것 같다"는 등 당 내부의 비판이 나오자 결국 무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정치 구도는 좌익과 우익 모두 분열된 상태에 있었다. 전후 일본의 우익 세력은 전쟁 전의 입헌정우회나 입헌민정당의 계보를 잇는 여러 정당으로 나뉘어졌고, 이들의 통합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55년 10월 13일, 4년 간 온건 세력 및 급진 세력으로 갈라져 있던 좌익 세력이 일본사회당에 재통합되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재계 및 각계 인사들이 우익 세력의 통합을 요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시각차 및 일본국 헌법의 정당성 및 개헌 문제, 미국 등 서방 세력에 대한 시각차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던 우익 세력들이 통합되는 계기가 마련, "보수합동"이 이루어지며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초기에는 요시다 시게루를 지지하는 요시다파 및 이에 반대하는 반(反)요시다파와 함께 당인파, 관료 세력, 전전파(戰前派), 전후파(戰後派) 등 내부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보수합동을 주도했던 미키 부키치를 비롯해 당내에서 "10년만이라도 통합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창당 후 첫 총선거인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무소속 입당자를 포함해 총 298석을 확보했다. 일본사회당 역시 167석을 획득하여, 자민·사회 양당이 전체 의석의 99%를 차지하는 양당 체제가 성립되었다(55년 체제). 또한 자민당이 창당 직전인 1954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백악관 및 국무부의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았던 사실이 훗날 밝혀지기도 했다. CIA는 일본에서 사회당 정권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민당에 금전을 지원하고 나아가 선거 승리를 위한 조언까지 해주는 등 일본 내 우익 세력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을 펼쳤다. 훗날 이러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공개되자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자민당은 부정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 기간인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미일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둘러싼 "안보투쟁"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대규모 시민·학생 운동이 벌어지고, 여야 갈등이 심화되는 등 정국 불안이 이어졌지만, 1960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과 민사당의 분열을 틈타 의석을 오히려 늘렸다. 시민 주도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자민당 정권은 국가 운영의 우선 순위를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어, 정부 주도의 장기 경제 발전 계획인 "국민 소득 배증 계획"을 실시하고, 여기에 한국 전쟁 기간 동안의 특수 효과까지 겹치면서 급속도로 경제를 재건한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18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고도경제성장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렇게 일본에서 고도경제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감소하면서 사실상 안보투쟁 이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퇴조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자민당은 "대화의 정치"를 내세우며 일본사회당 등 야당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정국 또한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1963년 10월, 자민당 조직조사회장이었던 미키 다케오가 당의 현대화에 관한 자문 보고서를 정리해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당시 자민당을 지배하고 있던 파벌의 폐해에 대한 내용이 담겼고, 더 이상의 당내 갈등을 막기 위해 파벌을 없애야 할 필요성과 함께 각 파벌 수뇌부에 몰리는 정치 자금을 모두 당 집행부가 관리하는 것으로 일원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담겼다. 그러나 총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미키 보고서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저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비공식 회견에서 말하는 등 각 파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이후 보고서 내용에 따라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파벌이 해산됐지만, 이미 나뉘어진 당내 세력의 갈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4년, 이케다 하야토는 질병을 이유로 총리대신 및 자민당 총재직에서 사퇴할 뜻을 표명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다. 같은 해 오노 반보쿠가 사망했고, 다음 해인 1965년 7월에는 고노 이치로가 사망하고 뒤이어 8월에는 이케다 하야토가 사망하면서 사토 에이사쿠를 위협하는 당내 라이벌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1966년에는 "검은 안개 사건"으로 불리는 정치 스캔들이 발생하여 여러 거물급 정치인들이 낙마하는 일이 속출했고, 이에 자민당은 당내외의 비판에 시달리며 여론이 악화, 1967년에 실시된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전이 예상됐지만, 무소속 당선자를 영입하여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자신에 우호적인 인사를 전면에 포진시켜 당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 당 총재 4선을 하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내고, 공해 대책 및 오키나와 반환을 실현하며 7년 8개월간 장기 집권하였다. 이렇게 자민당은 창당 때부터 1960년대까지 선거를 치를 때마다 입후보자가 감소하고 득표율도 조금씩 감소해 갔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기였다. 한편 자민당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유입 인구가 많은 대도시나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비교적 열세를 보였으며,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사회당이나 일본공산당 등 진보 성향 정당이 강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당이 분열되어 민주사회당이 창당되고, 공명당 등 중도 성향 정당이 약진하며 진보 성향 정당이 도시 지역의 기반을 상당 부분 잃은데 비해, 자민당은 지지 기반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사토 에이사쿠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며 열린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의 중진들로 이른바 "삼각 찹쌀떡"이라 불린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등 4명이 출마하였고, 선거 결과 "일본 열도 개조론"과 중일 국교 정상화를 내세운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다나카 내각은 1972년 9월에 중일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중일 수교가 결정되자 자민당 내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들이 정책 기구를 만들고 중일 수교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다나카 내각은 "일본 열도 개조론"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과 신칸센의 정비 등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비를 증액한 1973년도 예산을 편성했다. 그러나 직후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였고, "광란 물가"로 불릴 만큼 비정상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일본 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다나카는 본인의 경쟁자이면서 균형 재정을 지향했던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에 임명하며 총력 대응을 주문했다. 후쿠다는 정부 예산의 감축, 금융 긴축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다나카 내각은 소비 환기 정책에서 소비 억제 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해 나갔다. 1974년 일본은 전후 처음으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익년인 1975년 다시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경제 성장률이 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1974년 7월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과반수 의석을 유지했지만, 여야 의석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자금 문제가 불거져 다나카가 총리 및 당 총재직에서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나카의 후임이 될 자민당 총재는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았고, 대신 부총재였던 시나 에쓰사부로의 지명에 따라 양원 의원총회에서 승인을 받은 미키 다케오가 신임 총재로 취임했다. 미키는 당의 현대화와 정치 불신 해소, 경기 침체의 극복을 내걸었다. 1976년 2월에는 록히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6월 자민당 소속인 고노 요헤이와 야마구치 도시오 등 6명의 국회의원이 당의 부패를 이유로 탈당하여 "부패와의 결별"을 모토로 신자유클럽을 결성했다. 같은 해 7월, 도쿄 지방 검찰청 특수부가 다나카 가쿠에이를 구속하였고, 이에 다나카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사태가 전직 총리대신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이르자 국내외의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8월, 다나카는 뇌물죄와 외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키 다케오 총리 및 이나바 오사무 법무대신은 록히드 사건의 진상규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이에 당내에서 일부 세력의 반발이 이어지고 미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러한 당내 움직임에 대해 미키는 대응 차원에서 록히드 사건 검찰 수사에 반발하던 각료를 파면하고, 중의원을 해산할 방침까지 내세웠지만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던 만큼 해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 실시된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에 못 미치는 의석을 획득하게 되었다(이후 무소속 의원의 입당으로 과반수를 간신히 확보). 미키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후 국회에서는 여야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며 정국이 불안정해졌다. 1976년 12월, 후쿠다 다케오가 자민당 집행부의 추천과 양원 의원총회의 승인을 얻어 새 총재에 취임했다. 당초 후쿠다는 2년간만 재임한 뒤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총재직을 넘긴다는 이른바 "찹쌀떡 밀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쿠다 내각은 출범 당시 지지율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와 외교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여야 대립 구도가 지속되고 있던 상황에서 지도부가 일부 야당에 대해 부분 협력을 호소하는 등 대야 관계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여야 갈등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자민당은 1977년, 총재 선거에 당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당칙을 개정하기로 결정했으며, 당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참여하는 "자유국민회의"도 결성했다. 더욱이 자민당 내부의 통합을 막고 있던 파벌 갈등의 해소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각 파벌은 또다시 형식적으로나마 해산되었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다케오가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찹쌀떡 밀약"을 무시하고 총재 재선을 위해 입후보했으나, 당내 유력 파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히라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오히라는 1979년 10월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비세의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자민당은 직전 총선거에 이어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에 당내에서 오히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었으나 오히라는 사퇴 요구를 일축했으며, 이후 자민당은 차기 총리대신 지명을 둘러싸고 극심한 당내 갈등에 빠졌다. 선거 결과에 따라 열린 임시 국회에서의 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오히라가 승리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의 출범으로 당내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이 기간의 혼란은 이후 "40일 항쟁"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자민당 역사상 최악의 당내 갈등 사례로 꼽히고 있다. 1980년 5월 16일, 일본사회당이 중의원에 오히라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던 미키파와 후쿠다파 등의 국회의원 69명은 불신임 투표에 불참했으며, 결국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오히라 내각은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자 곧바로 중의원의 해산을 선언했다. 이후 조기 총선 일정이 확정된 5월 30일, 오히라는 심근 경색 발작 증상을 일으키며 입원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인 6월 12일에 급사했다. 오히라는 사망했지만 자민당은 6월 22일에 실시된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및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모두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다. 오히라의 후임으로는 오히라에 우호적이었던 스즈키 젠코가 취임했다. 스즈키는 "화해의 정치"를 내걸며 당내 화합에 주력하고 행정·재정 개혁에도 앞장섰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 등 진보 정당 소속의 지방자치단체장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과거 진보 정당이 강세를 보였던 대도시 지역에서도 자민당이 우위를 회복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82년 11월 실시된 총재 선거에 현직인 스즈키 젠코는 입후보하지 않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모토 도시오, 아베 신타로, 나카가와 이치로 등 4명이 입후보했다. 결과는 나카소네의 당선이었다. 그러나 나카소네는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의 힘을 빌려 총재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결국 내각 및 당직 인선에서도 다나카파가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우대를 받았기 때문에 제1차 나카소네 내각 기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강했고, 이 때문에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다나카소네 내각"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카소네는 정권의 슬로건으로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었다. 구체적으로는 행정 개혁, 공기업의 민영화, 산업 규제 완화, 민간 분야 활용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교육 개혁, 국방 정책의 재검토,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의 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외교 면에서는 1983년 1월 방미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일 양국은 태평양을 끼고 있는 운명 공동체"라고 발언하는 등 미일 관계 강화를 강조하고, 냉전 체제에서 서방 국가에 우호적인 나라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1983년 10월 12일, 도쿄 지방 재판소(법원)은 록히드 사건에 관한 다나카 가쿠에이의 재판에서 다나카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야당은 다나카에게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지만 다나카는 이를 거부했고, 국회에서 여야간 충돌이 벌어졌다. 야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자"며 중의원 해산을 요구했다. 결국 중참 양원 의장의 권유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다(다나카 판결 해산). 이렇게 실시된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으나 무소속 당선자의 영입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나카소네는 "이제부터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 정치 윤리를 고양하고, 당 체질의 근본적 쇄신에 힘쓰며, 청결한 당 문화를 확립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2월 27일에 자민당은 분당되었던 신자유클럽과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연립 정권을 이루어 국회 안정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1986년 6월, 나카소네 총리의 주도 아래 중의원을 해산하여 참의원 선거와 동시에 실시했다. 자민당은 중의원 304석, 참의원 74석(개선 의석)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선거 후에는 선거 승리에 대한 특례로 나카소네의 당 총재 임기 1년 연장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8월에는 신자유클럽이 해산되어 대부분의 당원이 자민당에 재합류했다. 나카소네 내각은 일본전신전화공사 및 일본전매공사의 민영화와 국철분할민영화를 성사시키고, 1987년도 예산에서 방위 예산 1% 한도를 철폐하는 등의 정책을 실현하며 4년 11개월간의 집권을 마쳤다. 나카소네의 후임을 선출하는 1987년 10월의 당 총재 선거에서는 "뉴 리더"로 불렸던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등 이른바 "안치쿠미야" 3인방이 모두 입후보했다. 과거처럼 상대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 3명은 토론을 벌인 결과 후보 단일화 문제를 나카소네에 맡겼다. 결과적으로 다케시타를 후보로 한다는 나카소네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등 불상사도 일어났다. 1988년 7월 임시 국회에서 다케시타 내각은 소비세 법안을 포함한 세제 개혁에 관련된 6개 법안을 제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리쿠르트 홀딩스 관계 회사인 리쿠르트 코스모스사의 비상장 주식이 정관계 및 재계의 유력 인사와 그들의 비서, 가족들에게 뇌물로 제공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리크루트 사건이 터졌다. 야당은 세제 개혁 관련 법안의 심의보다 리쿠르트 스캔들의 해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면서 법안 심의를 일체 거부하고, 사건 관련자를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시킬 것을 요구하며 국회는 공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야당은 법안 표결을 위한 본회의 때 회의를 지연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였고, 12월 9일에는 부총리 겸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이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채용 비리 문제로 사임했다. 그러나 세제 개혁 관련 6개 법안은 12월 24일 국회를 통과했다. 1989년 1월 7일에는 쇼와 천황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아들인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이 천황에 즉위하였다.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오부치 게이조가 새 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에는 소비세가 도입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소비세 도입 직후 총리직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5월 22일 도쿄 지검 특수부는 나카소네파 소속인 후지나미 다카오를 리쿠르트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뇌물죄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하였고, 후지나미는 자민당을 탈당하였다. 5월 2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증인으로 출석해 리쿠르트 사건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으며, 심문 직후 나카소네 역시 자민당을 탈당했다. 다케시타의 후임으로는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외무대신을 지내고 있던 우노 소스케가 추천되었다. 6월 2일 우노는 자민당 양원 의원총회에서 기립 투표를 거쳐 총재에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6월 3일에 다케시타 내각은 총사직했다. 그런데 우노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여성 스캔들이 발각되었다. 우노는 이를 명확하게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후 7월에 열린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이 스캔들을 비롯해 리쿠르트 사건, 소비세 도입 문제, 농산물 수입 자유화 문제 등 "3종 세트"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자민당이 역풍을 맞아 겨우 36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편,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이끄는 일본사회당은 여성 후보자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46석을 얻어 약진했다. 자민당은 참의원 제1당을 유지하긴 했으나 여야의 의석 구도가 역전되었다. 우노는 선거 직후 총리 및 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약 2개월만에 다시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가이후 도시키, 하야시 요시로, 이시하라 신타로 등 3명이 출마했다. 여기서 다케시타파, 옛 나카소네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가이후 도시키가 과반수 득표로 총재에 당선되었다. 가이후 내각은 가이후가 당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당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 회장인 가네마루 신과 역시 같은 다케시타파 소속이자 자민당 간사장이던 오자와 이치로가 사실상 배후에서 조종하는 구조였으며, 이를 "이중 권력"이라 지칭한다. 1991년 9월, 가이후 내각은 당대에 주요 정치 이슈가 되고 있던 "정치 개혁" 문제를 이른 시일 내에 매듭지을 수 있도록 임시 국회 기간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적용되고 있던 중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치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9월 30일에 돌연 중의원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이사회에서 이 법안의 폐기가 결정됐다. 법안 폐기가 결정되자 가이후는 "중대한 결의로 임한다"며 중의원을 해산할 방침을 보였지만, 당내 반발과 가이후를 지지하던 다케시타파의 해산 반대 기류도 있어 실제로 해산을 하지는 않았다. 이후 가이후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같은 해 10월에 열리는 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고 퇴진했다. 1991년 10월 27일에 열린 총재 선거에서 미야자와 기이치가 승리하여 72세에 총리직에 취임했다. 그런데 1992년 가네마루 신의 불법 정치자금 수령 문제로 국민들의 자민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자민당 장기 집권에 따른 금권 정치의 폐해가 자주 거론되었다. 또 가네마루가 실각함에 따라 다케시타파 후계자 싸움에서 패한 오자와 이치로와 하타 쓰토무는 다케시타파가 이름을 바꾼 오부치파와 정치적으로 갈라져 하네다파를 결성했다. 가이후 내각 시절 폐안되었던 정치 개혁 법안을 다시 추진한 미야자와 내각은 법안 성립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로 폐안되고 말았다. 이후 이에 반발한 미쓰즈카파 회장이었던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하네다파 등 일부 세력이 대거 자민당을 탈당했다.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며 이루어진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해산 당시의 의석을 획득하며 중의원 제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고, 대신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만든 신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편 자민당과 함께 전후 일본 정치를 좌우해 온 55년 체제의 한 축이었던 일본사회당 역시 참패했다. 그 결과,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이 최초로 성립되어 창당 이래 줄곧 집권 여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자민당을 야당으로 전락시켰다. 미야자와 기이치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와타나베 미치오를 꺾고 고노 요헤이가 당선되었다. 한편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자 자민당 내부에서 연립 여당으로 이적하는 의원도 생겨났다. 선거 결과에 따라 출범한 호소카와 내각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병립제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치 개혁 법안의 성립을 목표로 하였고, 법안 심의 과정에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되 석패율제를 도입하자는 자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1994년 1월 29일에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수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바뀐 선거 제도는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 적용되었다. 연립 정권은 호소카와 내각을 지나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총리직을 이어받으면서 계속되었지만, 모두 오래가지 못했고 오히려 정책을 둘러싼 의견차로 연립 정권 내의 불협화음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민당은 55년 체제 하에서 대립 구도에 있었던 일본사회당과 함께 새로운 연립 정권을 구성하기로 하였고,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총리로 하고 여기에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는 형태로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정이 출범하였다. 이로써 자민당은 약 1년만에 연립 여당으로서 정권에 복귀했다. 1996년 1월 11일에는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총리로 하여 다시 한번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 내각이 출범하였다. 동년의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과반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239석으로 의석을 크게 회복했다. 같은 해 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등의 개혁파 인사들이 창당한 민주당이 사회 개혁을 내세우며 자민당과 대립각을 세우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하시모토 내각이 당내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1993~1994년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담당했던 인사들의 대부분은 신진당에 포진해 있었지만, 자민당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의해 신진당에서 자민당으로 이적하는 의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민당은 1997년에 총선거를 거치지 않고 중의원 과반수 의석을 회복했다. 소속 의원들의 이탈로 당세가 크게 위축된 신진당은 결국 해산되었고, 과반을 회복했기 때문에 성향이 다른 정당과의 연립 정권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자민당은 1998년에 일본사회당에서 개편된 사회민주당 및 신당 사키가케와의 연립 정권을 종료하고 자민당 단독 정권을 구성했다. 하시모토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로 자민당은 1998년 제18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하는 참패를 기록하며 하시모토 내각이 총사직했다. 후임은 오부치 게이조가 되어 오부치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1999년 1월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자유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 "자자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공명당이 연정에 합류하여 "자자공 연립 정권"으로 바뀌었다. 2000년에는 자유당이 연정에서 이탈하고 대신 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보수당이 연정에 들어와 "자공보 연립 정권"으로 또다시 바뀌었다. 이 시기부터 자민당과 공명당의 본격적인 공조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 오부치가 질병으로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모리 요시로를 새 총리로 하는 모리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모리의 계속되는 실언에 자민당의 정치 공작 의혹까지 더해지며 내각 지지율은 침체 상태에 빠졌고, 이에 당내 일부 세력이 모리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자 코너에 몰린 모리 내각은 총사직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이른바 "YKK"가 고이즈미 내각을 수립했다. 1991년, 일본의 버블 경기가 종말을 맞았다. 이 시기 냉전이 종결되고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기존의 정부 주도형 경제 운영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러한 국제 질서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경제 정책 전환에 실패하였다. 정부는 경기 부양 효과가 크지 않다고 여겨지던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을 비롯해 비효율적인 여러 국책 사업을 밀어붙이며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했는데,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업에서 손실이 발생하면서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모두 막대한 재정 적자를 떠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일본은 부동산 투기 광풍으로 부동산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매우 부풀려진 상태에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야마이치 증권, 산요 증권, 홋카이도 척식 은행,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 등 주요 금융 기관들이 경영 실패로 파산에 이름과 동시에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의 수출 경쟁력 또한 약화되어 해외 투자가 감소하여 주식 및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게 일본의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에 빠지면서 기존에 정부가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이 유지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추진해 온 경제 정책이 전환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2001년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면서 재정 적자의 원인이 된 비효율적인 국책 사업을 중단시켜 정부 예산의 낭비를 억제하고, 강력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민간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으며, 기존에 정부 주도로 각 지방에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보했던 자민당의 관습을 폐지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달리 사자 모양의 헤어 스타일을 가지는 등 차별화를 꾀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고이즈미 돌풍"으로 불릴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이즈미 내각 출범 직후인 2001년 4월에 실시된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역대 내각 지지율 중 최고 수치인 87.1%를 기록했으며, 동기간에 실시된 여론조사 중 가장 낮은 수치인 아사히 신문 조사에서도 78%를 기록했다. 고이즈미 내각은 내각관방 산하 내각공보실이 발행하는 인터넷 잡지인 "고이즈미 내각 메일 매거진"을 발행하였는데, 구독자가 2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이즈미의 인기에 힘입어 자민당은 같은 해 7월의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고이즈미는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사상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3년 10월,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고이즈미는 비례대표 의원에 73세 정년제를 적용할 방침을 발표했다. 이에 83세의 미야자와 기이치는 정계 은퇴를 선언한 반면 85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완강히 저항하며 용퇴를 거부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 집행부의 강한 의지로 결국 나카소네는 용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실시된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신보수당의 연립 여당은 절대 안정 다수를 유지했지만, 자민당은 10석이 줄어들었고 여권 전체로는 12석이 줄어들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에 자민당이 신보수당을 흡수 합당하고부터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양당 연립 정권으로 개편되었다(자공 연립 정권). 2004년 7월, 제2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는 연금 제도 개혁이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 고이즈미 내각은 선거 직전인 6월에 연금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선거 결과 자민당은 49석을 얻는 데 그쳐 50석을 얻은 민주당에 1석 뒤졌다. 2005년 8월에 열린 통상 국회에서는 고이즈미 내각의 핵심 공약이었던 우정 민영화 법안이 중의원에서는 가결된 반면에 참의원에서 부결되었고, 법안 표결 직전 "우정 민영화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다면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고이즈미의 예고에 따라 중의원이 해산되었다. 이렇게 열린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는 다른 모든 이슈를 "우정 민영화" 단 하나만으로 덮어버리는 선거 전술을 사용하여 자민당 정권에 반대하는 여론을 최소화시켰다. 결국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고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의석을 합해 전체 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327석을 확보하는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우정 민영화에 반대했던 당내 일부 의원들이 제명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부분이 낙선하는 타격을 입으면서,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 세력 내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기류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가 되었다. 고이즈미 정권 후반기인 2005년부터는 "포스트 고이즈미"로 불리며 고이즈미를 이을 차기 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는 "포스트 고이즈미"의 대표 4인방으로 꼽혔다. 2006년 9월 20일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선거 전부터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어 왔고 고이즈미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한 아베 신조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후 9월 21일 고이즈미의 자민당 총재 임기가 만료되었고, 9월 26일 고이즈미 내각이 총사직하며 아베 내각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아베 내각은 사회보험청의 연금 가입자 기록 문제가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으며, 연이어 각료들의 스캔들이 터지는 등 위기에 직면하여 2007년 7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37석을 얻는 데 그쳐 60석을 얻은 민주당에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자민당은 창당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 제2당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해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파가 서로 다른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네지레 국회). 이로 인해 안건을 통과시키려는 여당과 어떻게든 참의원에서 안을 부결시키려는 야당의 대립이 격화되어 국정 운영의 효율성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민당 정권의 레임덕도 가속화되었으며, 총리도 1년마다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로 바뀌는 등 총리의 지도력도 약화되었다. 2009년 7월 12일, 도쿄도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중의원의 4년 임기 만료에 따른 총선거가 늦어도 2009년 10월까지는 실시되어야 했기에 이 선거는 "총선거의 전초전" 으로 불렸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총 127석의 도쿄도의회 의석 중 38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하였고, 야당인 민주당은 54석을 얻어 의회 제1당을 차지했다. 총선거만큼 자민당이 공을 들였던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과가 나오자,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기자회견을 열고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스모(패배)를 당했다. 대단히 귀찮은 결과"라고 말하며 아소 다로 등 당 지도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선거 후 자민당 내에서는 당 총재이자 내각총리대신인 아소 다로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아소 다로는 자신에 대한 퇴진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선거 다음 날인 7월 13일 오후에 기자회견을 통해 "7월 21일에 중의원을 해산해 8월 30일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며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였고, 일각에서 제기된 당 총재직 사퇴 요구는 일축하였다. 아울러 민주당 등 야권은 선거 결과를 기회로 삼아 중의원에는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참의원에는 총리 문책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며, 이후 불신임 결의는 중의원(자민당이 제1당)에서 부결, 총리 문책 결의안은 참의원(민주당이 제1당)에서 가결되었다. 이후에도 자민당 내에서는 불협화음이 계속되었고 일부 중진들도 "아소 총재 체제로 총선거를 치르면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라며 지도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아소의 예고대로 2009년 7월 21일 중의원이 해산되었고,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119석을 얻는 데 그쳐 308석을 얻은 민주당에 대참패를 기록했다. 전직 총리와 유력 파벌의 수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민주당의 신인 후보에 패하였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중의원 제2당이 되어 야당으로 전락했다. 직전인 1993~1994년의 야당 기간에는 그래도 중의원 제1당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이번에는 완벽한 패배였다. 자민당이 선거 패배의 충격으로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자 각료 경험자를 비롯한 현직 국회의원의 탈당자가 속출했으며, 2010년 6월까지 약 7개월동안 탈당자가 15명에 달했다. 아소 다로 총재는 선거 다음 날 아침,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아소 내각이 총사직하였고, 아소에 사임에 따라 9월 28일 열린 2009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차기 총재에 당선되었다. 야당이 된 후 처음 치른 전국 단위 선거인 2010년 7월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민주당 정권의 핵심 인사인 오자와 이치로가 소비세율 인상을 주장하여 여론의 반발을 불렀고, 여기에 오자와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 오키나와현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싼 정권 내부 갈등이 겹치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하였으며, 이를 틈타 자민당은 개선 의석 기준으로 51석을 획득하여 44석을 획득한 민주당을 누르고 연립 여당의 참의원 과반 의석 확보를 저지했다. 이후 2012년 12월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절대 안정 의석인 294석을 획득(하토야마 구니오의 복당으로 선거 직후 295석으로 증가)하며 중의원 제1당에 올라섰다. 이후 12월 26일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며 자민당은 공명당과 함께 약 3년 3개월 만에 집권 여당에 복귀했다. 2013년 7월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공명당과 의석을 합하여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2014년 12월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291석을 획득해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2016년 7월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한 명을 선출하는 32개의 소선거구에서 자민당은 21승 11패를 기록하는 등 지역구 37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6석을 획득했다(전체 121석). 이 선거를 통해 일본국 헌법의 개정에 찬성하는 이른바 "개헌 세력"(자민당 + 공명당 + 일본유신회 +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 + 기타 개헌에 적극적인 정당 및 무소속 의원 포함)이 중참 양원에서 모두 3분의 2를 넘어 개헌 발의 요건을 충족했다. 선거 직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히라노 다쓰오가 자민당에 입당하면서 27년 만에 참의원에서 단독 과반수 의석(122석)을 확보했다. 2017년 1월 16일,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이후 "일본의 마음"으로 당명 변경)과 참의원에서 통일 회파(교섭단체)를 구성했다. 회파명은 "자유민주당·마음"이다. 2017년 10월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218석, 비례대표 66석으로 총 284석을 획득했다. 자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야당인 민진당이 분열되어 희망의 당과 입헌민주당으로 나뉘어져 표가 분산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야권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최대 63개의 지역구에서 당선자가 뒤바뀐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018년 11월, 일본의 마음을 흡수 합병했다. 이에 앞서 참의원에서의 회파명을 "자유민주당·국민의 목소리"로 바꾸었다. 2019년 7월 제2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한 명을 선출하는 32개의 소선거구에서 22승 10패를 기록하며 지역구 38석, 비례대표 19석으로 총 57석을 획득했다. 이는 직전 제24회 참의원 선거의 56석에서 1석이 증가한 것으로, 이 선거에서 개선 대상이 된 66석에는 못 미쳤다. 자민당, 공명당의 연립 여당은 전체 개선 의석인 121석의 과반수인 63석을 넘는 71석을 획득했지만 개선 대상인 77석에서는 6석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자민당은 참의원 단독 과반수 의석 유지에 실패했다. 비개선(비선출) 의석을 포함한 참의원 전체로는 자민, 공명 연립 여당을 포함해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와 일부 무소속 의원을 포함한 이른바 "개헌 세력"의 비개선 의석은 79석이므로 개헌이 가능한 전체 의석의 3분의 2인 164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에서 85석 이상을 얻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81석을 얻는데 그치면서 3분의 2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아베 신조 총재는 국민민주당의 일부 개헌 찬성 세력 등의 협력을 얻어 조기에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경우 개헌 자체에 부정적인 인사들도 많아 실제로 개헌이 이뤄질지의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다. 자유민주당의 당수이며, 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당을 지휘하는 직책이다. 임기는 3년으로, "연속 3기"에 한정하여 재임할 수 있다. 제1당의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직을 맡게 되는 관례에 따라 일반적으로 자유민주당의 총재는 총리직을 겸하게 된다. 현재 총재는 제90·96·97·98대 총리대신인 아베 신조이다. 농업 종사자에 보조금을 교부하고, 전국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하는 사회 간접 자본(SOC)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 등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경제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이래 답습해 온 자민당은 농어촌 및 지방 소도시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고, 반대로 대도시 및 베드타운 지역에서는 열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등의 자유 무역 협정을 추진하여 농수산물 수출입의 전면 개방이 이뤄지면서 농어촌 지역의 지지율이 빠지는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이후 언론 홍보 및 당의 이미지 개선에 공을 들이면서 종래의 자민당 지지층 외에 대도시 지역 무당층과 정치에 무관심했던 층으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결과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당수의 이미지를 보고 자민당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B층"이 생겨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구 밀도가 낮은 지자체에서는 자민당의 득표율이 높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으로 갈수록 득표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자민당이 농업협동조합(농협)을 매개로 한 두터운 기반을 지방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자민당은 현직 내각총리대신이자 당 총재인 아베 신조가 지역구를 두고 있는 야마구치현과 호쿠리쿠 지방 3현(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그 밖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과거 10년 간의 자민당 지지율 추이를 가구 소득별로 보면 2005년에는 부유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지지율이 비슷했던 반면, 2015년에는 상대적으로 부유층의 자민당 지지가 상승하고 빈곤층의 지지는 하락했다(아래 표 참조).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가구당 연 소득이 300만 엔 미만인 경우 자민당 지지층에서 이탈하여 무당층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총무성 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의 도쿄도 선거구에서 자민당 후보자의 득표율(나카가와 마사하루 및 아사히 겐타로의 합)은 가구당 평균 소득이 높은 지자체에서는 높았던 반면, 평균 소득이 낮은 지자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다(오른쪽 그래프 참조). 연령별로는 20대와 70대 이상에서 많은 표를 얻는 추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자민당이 70대 이상의 고령층 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다만,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듯 20대 등 젊은 층에서는 "지지 정당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비율이 자민당 지지율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고, 이들 무당층의 대부분이 투표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젊은 층에서 자민당의 득표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한 여론조사에서 연령별 자민당 지지율을 보면 70대 이상이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60대, 50대, 40대 순이었으며 30대 이하의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했다. 한편, 무당층의 비율은 30대 이하에서 가장 높았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2013년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 후보자를 지원한 종교 단체는 다음과 같다. 옴의 법칙 옴의 법칙()은 도체의 두 지점사이에 나타나는 전위차(전압)에 의해 흐르는 전류가 일정한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두 지점 사이의 도체에 일정한 전위차가 존재할 때, 도체의 저항(resistance)의 크기와 전류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formula_1는 도선에 흐르는 전류로 단위는 암페어(A,ampere), formula_2는 도체에 양단에 걸리는 전위차로 단위는 볼트(V,volt), 그리고 formula_3는 도체의 전기저항(resistance)으로 단위는 옴(Ω, ohm)이다. 특히, 옴의 법칙에서 저항 R는 상수이고, 전류와 독립적이다. 회로망에서 저항은 두 노드(node) 사이에 존재한다. 옴의 법칙은 다른 회로 법칙과 함께 회로 해석에 중요한 요소이다. 저항은 물리적으로 특정 형태를 갖는 일정한 길이의 물체로 존재하므로, 전체 전위차가 저항체의 길이 전체에 나누어 분포한다. 그러나 회로망 해석에서는 두 노드 사이에 존재하는 한 점으로 모델링하여 전체 저항값(상수값)을 저항의 대표값으로 취급하여 해석한다. 옴의 법칙은 전자기학의 법칙 중 하나이다. 이름은 독일의 과학자 게오르크 옴의 이름을 딴 것이다.그러나 후에 저항이 없는 물질이 발견됨에 따라 옴의 법칙이 모순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옴의 법칙은 미시적으로 다음과 같다. J는 전류 밀도이며, σ 는 전기전도율 (비등방성 물질에서 텐서일 수도 있음)이고, E는 전기장이다. 이 방정식은 오직 전도체의 기준계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물체가 자기장 B에 대해 v의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이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이 식은 로런츠 힘과 관계를 가지는데, 이로써 옴의 법칙을 로런츠 힘과 (전하 운반체의 속력에 비례하는) 항력이 있다는 가정 아래 유도할 수 있다. 옴의 법칙의 미시적인 형태에서 "전기장과 도선의 전압, 도선의 길이간에 상관관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옴의 법칙의 거시적인 형태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1는 전류 밀도를 적분한 전류이고, formula_3은 비저항 formula_9을 적분하여 얻은 저항이고, formula_2는 전기장을 적분하여 얻은 전압이다.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 1928년 11월 3일~1989년 2월 9일)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오사카 대학을 졸업한 의사이기도 하다. 본명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다. 《우주소년 아톰》과 《밀림의 왕자 레오》의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다작 성향, 선구적 테크닉, 장르의 혁신적인 정립으로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가신 데즈카 미쓰모리(手塚光盛)이며, 고조, 증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에도 시대의 난학자였다.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 부속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 재학 중이던 1946년 1월 1일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 『소국민신문』(少国民新聞) 연재)으로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1947년 사카이 시치마(酒井七馬)가 원안을 그린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新寶島)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오사카에서 아카혼(赤本) 붐을 일으켰다. 1950년부터 만화잡지에 등장,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 『정글대제』(ジャングル大帝),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등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한다. 1963년、자신의 작품을 토대로 일본 최초의 30분짜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 이후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0년대에는 『블랙잭』(ブラック・ジャック), 『삼목동자』(三つ目がとおる), 『붓다』(ブッダ) 등의 히트작을 발표하였다. 또한 만년에도 『양지의 나무』(陽だまりの樹), 『아돌프에게 고한다』(アドルフに告ぐ) 등 청년만화에 있어서도 걸작을 남겼다. 데뷔 때부터 사망(1989년)할때까지 일선에서 작품을 발표해 나갔고, 생전부터 일본 만화계에서 「만화의 신」(マンガの神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후지코 후지오(藤子不二雄, 藤子・F・不二雄、藤子不二雄A)、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접촉이 있었던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데즈카 오사무(본명 오사무治)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 부(大阪府) 도요노 군(豊能郡) 도요나카 정(豊中町, 지금의 도요나카 시豊中市)에서 데즈카 유타카(手塚粲, 1900년 - 1986년 5월 14일)와 어머니 후미코(文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1933년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에 그의 집안은 1년 전에 타계한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 현(兵庫県) 가와베 군(川辺郡)의 오하마 촌(小浜村, 지금의 다카라즈카 시宝塚市) 가와모(川面)로 이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다카라즈카에는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가 미노오아리마 전기궤도(箕面有馬電気軌道)의 승객 증가를 노리고 전원 풍경 가운데 개발한 신흥 주택지가 산재해 있었고,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宝塚少女歌劇団, 훗날의 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의 전신)의 본거지였던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다카라즈카 패밀리 랜드(宝塚ファミリーランド)의 전신인 다카라즈카 신온천(宝塚新温泉)이나 다카라즈카 루나파크(宝塚ルナパーク) 등 행락시설이 차례로 세워져 일종의 별천지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다카라즈카의 인공적인 근대도시 풍경은 데즈카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오사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宝塚ホテル) 안에서 세워진 다카라즈카 구락부(宝塚倶楽部)의 회원이었고 때때로 오사무는 아버지를 따라 다카라즈카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또 데즈카 집안의 옆집에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남자배역 톱스타였던 아마쓰 오토메(天津乙女, 본명 도리이 에이코鳥居榮子)와 구모노 가요코(雲野かよ子, 본명 도리이 카코鳥居華子)와 이케노베 쓰루코(池邊鶴子, 본명 도리이 히사요鳥居久代) 세 자매가 살고 있어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들이 그 보호자와 함께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 등,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여성들과 접할 기회도 많았다. 훗날 데즈카는 자신의 첫사랑 상대도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생도였다는 것, 다카라즈카 생도를 보려고 다카라즈카 대극장에 다녔다는 것, 쓰키오카 유메지(月丘夢路)나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 같은 당찬 여성을 좋아했었다는 것, 1942년작 쓰키오카 주연의 영화 『신설』(新雪)을 스무 번이나 보았다는 것 등을 회고하고 있다. 1935년,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池田師範附属小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소학교大阪教育大学附属池田小学校)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도쿄 출신이었던 탓에 긴키 방언을 잘 하지 못했던 그는 학교에서 맴도는 존재였고 2학년때에는 「안경잽이 꼬마」(ガヂャボイ)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본 것을 그린 만화 그림이 오사무를 구원해 주게 되는데, 소학교 3학년 때 최초의 만화 「핑핑 세이쨩」(ピンピン生チャン)을 완성했고, 그 뒤 만화 연습을 이어나갔으며 소학교 5학년 때에는 장편만화 「지나의 밤」(支那の夜)을 완성하였다. 그 작품은 급우들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 사이에도 화제가 되는 등 이후 교사들로부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을 묵인받았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학급 내에서 일약 주목받으며 만화가 계기가 되어 처음에는 그를 괴롭히던 급우가 데즈카의 집에 놀러올 정도가 되는 등 차츰 따돌림에서 벗어나게 된다. 데즈카의 생일에는 그의 집에 스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친구들이 집에 올 때는 당시에는 진기한 것이었던 홍차와 과자도 가져왔고 오사무의 생일에는 모듬초밥(五目寿司)이며 계란찜 요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만화의 일부는 이후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에 소장 보존되어 있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石原実, 오사카 요도야바시淀屋橋 이시하라 시계점石原時計店 사장)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데즈카 집안의 넓은 정원에는 곤충 창고가 있었고、또 주위의 전원지대에서도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곤충 채집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해 주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빌린 히라야마 슈지로(平山修次郎)의 『원색천종곤충도보』(原色千種昆蟲図譜)를 읽으며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1941년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大阪府立北野中学校, 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립 기타노 고등학교大阪府立北野高等学校)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 전국은 전쟁 중으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학교에까지 물들어 있었고 소학교 시절과는 달리 만화를 그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학교의 교련 교관에게 그가 만화를 그리는 것이 눈에 띄어서 교관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 시기 그는 급우들 사이에서 제작한 동호회 회지(会誌) 등을 통해 만화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데즈카판(手塚版) 「원색 딱정벌레 도보」(原色甲蟲圖譜) 등 일러스트가 곁들여진 도감을 자체 제작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 여름에는 체력이 약한 자가 들어 가는 강제수련소에 보내졌다. 9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데즈카는 격납고 지붕을 덮는 슬레이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에 따라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하고 6월에 근로봉사로 감시초를 서고 있을 때 오사카 대공습이 벌어졌는데, 오사무의 머리 바로 위로 소이탄이 투하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 공습은 데즈카 자신의 체험담으로써 훗날 그가 1974년에 그린 만화 『종이상자』(紙の砦)나 1979년부터 1년 간 그린 『세게 때리기』(どついたれ) 등 자전적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 이 체험 이후 데즈카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1945년 3월에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舊制浪速高等学校)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패전 한 달 전인 7월에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제국대학(大阪帝国大学)의 의학전문부(医学専門部)에 응시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의학전문부는 전쟁의 장기화로 군의관을 속성으로 길러내기 위해 임시로 오사카 제국대학 내에 부설된 것으로 학제상으로는 구제 의학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구제중학교에서 입학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사카 대학(大阪大学, 옛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전문부는 1951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한창 《정글대제》와 《우주소년 아톰》을 연재하던 와중이었다. 데즈카는 서양에서 수입된 영화와 소설에서 서양 문학을 일본적인 양식으로 도입한 것과 창의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며, 초기 작품은 《밤비》와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을 포함하고 있다. 데즈카가 어린 시절에 읽은 밀트 그로스의 초기 그래픽 노블인 《히 던 허 롱》("He Done Her Wrong")의 영향을 받은 데즈카의 영화적인 컷 배치는 후에 데즈카의 족적을 따르는 만화가들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자, 만화가로서 데즈카가 세운 업적을 전면 긍정하였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애니메이션 작가로서의 데즈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사에서 차지한 역할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TV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데즈카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무시 프로덕션) 제작 프로그램을 원가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팔아치운 것이, 현재까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극도로 낮게 책정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발언은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우주소년 아톰 《우주소년 아톰》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쇼넨》(少年)지에 연재한 SF만화이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21세기의 미래를 무대로 소년 로봇 아톰의 활약상을 그렸다. 원제는 철완 아톰() 이다. 고단샤에서 2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여러 차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계의 대표적 작가로, "일본의 만화는 오사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오사무는 1951년 발표한 〈아톰대사〉(アトム大使)에서 아톰 캐릭터를 선보였고 이 캐릭터를 살려 1952년 《쇼넨》에 철완 아톰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톰을 알아본 오차노미즈 박사에 의해 구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후 도쿄를 위협하는 악당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1982년 판 2003년 판 1959년 3월 7일부터 1960년 5월 28일까지 마이니치 방송에서 제작·방송된 드라마이다. 1957년에는 KRTV(현:TBS)에서 '모험만화인형극 철완 아톰'을 방영하였고 실사판은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마이니치 방송제작, 후지 TV계열로 방영하였지만 1963년부터 1966년까지 후지 TV에서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방영되었다. 흑백 화면으로 총 193화가 제작되어 평균 3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컬러로 총 52화가 제작되면서 니혼TV에서 방영하였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는 후지 TV, 한국에서는 SBS에서 1995년 2월 27일부터 1995년 6월 7일까지 총 50화로 방영했고, 이후 2003년 11월 19일부터 2004년 6월 9일까지 재방영되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며 높은 시청률을 과시했다. 또한 2010년 1월에는 이 헐리우드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1980년대 TV 시리즈로 제작된 내용과 관련성은 확신할 수 없으나, 일본 국내 영화 방송이었던 "수요 로드쇼"에서 극장판의 형식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아톰에서 보기 드문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주제로한 내용이었으며 배경은 하와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일행이 과거로 갔을때 유적에 직접 새겨둔 문양을 현대에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유식한 박사의 시간 여행이 사실임을 확인하며 웃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2003년 4월 6일부터 2004년 3월 28일까지 후지 TV에서 제작·방송된 애니메이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SBS를 통해 1995년 2월 27일부터 1995년 6월 7일까지 방영했고, 이후 2003년 11월 19일부터 2004년 6월 9일까지 재방영되었다. 2010년 1월 13일 개봉된 . 가까운 미래,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람들은 큰 산을 떼어내어 구름의 윗부분으로 올려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메트로시티는 로봇과함께 번성한다. 메트로 시티의 로봇문명을 탄생시킨 텐마 박사는 정부의 압력으로 전투로봇인 '피스키퍼'를 만들게 되고, 이것을 보고 싶어한 텐마 박사의 아들 '토비'는 실험을 보다가 호기심에 실험현장에 너무 가까이 가서 폭주한 '피스키퍼'에 흡수당해 죽는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텐마 박사는 아들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게 되고, '토비'의 DNA와 블루 코어를 넣어 로봇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로봇이 '토비'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텐마 박사는 로봇을 버린다. 가출한 로봇은 블루 코어 에너지를 노린 '스톤 총리'의 추격 때문에 '서페이스'로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대부인 헴에그와 코라를 만나게 된다. 코라 일행과 함께 살던 '아스트로' 로봇 혁명단을 만나고, 토목공사용 로봇인 '조그'를 되살리게 된다. 그러나 '조그'를 끌고오는 과정에서 아스트로가 로봇임을 안 '헴에그'는 로봇 격투장에서 아스트로를 계략에 빠뜨린 후 격투대회에 참가시킨다. 그러나 '아스트로'는 나오는 로봇을 족족 부숴버리고, 화가 난 '헴에그'는 '아스트로'를 공격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메트로 시티 전함이 나와 아스트로를 끌고 간다. 다시 '텐마 박사'와 대면한 아스토로는 블루 코어가 빠져 작동 정지 되고, 블루 코어는 '스톤 총리'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총리가 '아스트로'를 장난감이라고 한 것에 대해 화가 난 '텐마 박사'는 블루 코어를 빼돌려 '아스트로'를 부활시킨다. 부활한 아스트로는 과학청을 탈출하고, 분노한 스톤 총리는 레드코어를 '피스키퍼'에 장착, '아스트로'를 잡고 블루 코어를 되찾아 오게 한다. 그러나 폭주한 '피스키퍼'는 오히려 '스톤 총리'를 흡수하고, 도시를 공격한다. 한편 도시를 탈출한 '아스트로'는'피스키퍼'가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유리 청소 로봇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돌아가 '피스키퍼'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서페이스'에서는 아이들이 헴에그를 붙잡아 에어카를 탈취하고 메트로 시티로 향한 후 위기에 빠진 '아스트로'를 구하지만 쫓아온 '피스키퍼'가 발전소를 파괴해 메트로 시티가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 '아스트로'는 코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트로 시티를 위기에서 구한 후 다시 '피스키퍼'와 대결하지만 '피스키퍼'의 로봇팔에 잡히고 중심부로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블루 코어와 레드 코어의 충돌로 둘은 튕겨진다. 이후 텐마 박사한테서 레드 코어와 블루 코어가 충돌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낸 아스트로는 '피스키퍼'의 중심부로 돌진하여 동반자살한다. 이후 살아난 스톤 총리는 경찰에 잡혀가고 아스트로는 에너지를 '조그'한테서 받아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이때 외계인이(?) 메트로 시티를 공격하고 아스트로는 '외계인'에게 펀치를 날린다. 2019년 10월 3일부터 TV 도쿄 계열에서 방송될 예정인 애니메이션이다. 소거법 소거법(消去法, )은 연립방정식(특히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간단한 기법이다. 미지수의 개수를 줄여나가는 것은 소거법의 관건이며, 아래와 같은 서로 비슷한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소거법을 통해 연립방정식의 해가 만족해야 할 일련의 필요조건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들 중 어떤 조건이, 연립방정식의 해가 될 충분조건이기도 하면, 그 조건이 곧 연립방정식의 정확한 해이다. 만약 필요조건들이 모순이라면, 연립방정식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임의의 연립일차방정식은 소거법만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 불능 여부 등에 대한 판단 없이는 다소 맹목적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의 실질을 추상화하여 얻어진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법이다. 소거법은 일반적인 연립방정식의 해법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소거법만으로 풀이되는 특별한 연립방정식은 연립일차방정식 이외에도 존재한다.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을 가감법으로 풀이할 것이다. 두 방정식을 더해서(즉 ) formula_2를 소거하면 이를 첫번째 방정식에 대입하면 따라서 이다. 당연히 이므로, 튜플 이 바로 (유일한) 해이다. 다르게는, 만약 대입법과 등치법에 의해 formula_2를 소거한다면, 그 과정은 각각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삼원일차 연립방정식 은, 그리고 을 통해 얻은 이원일차 연립방정식 에서 formula_16를 구해서 에 대입하면 해 formula_17를 구할 수 있다. 다음 예시는 앞선 것들과 조금 다르다. 반대로 따라서 정확한 해는, 임의의 formula_20 꼴의 튜플이다. 해일 수 있는 튜플에 대한 반대 방향으로의 검증은, 해의 구조를 미리 알면 어느 정도 생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지수와 방정식의 개수가 같은 연립일차방정식에 대해서는, 만약 계수행렬의 행렬식이 0이 아니면, 해가 유일하다는 결론이 있다. 자유낙하 시의 속도-시간, 변위-시간 관계식 으로부터, formula_22를 소거하여, 속도-변위 관계식 를 얻을 수 있다. 가우스 소거법은, 소거법을 구체화, 정형화하여 얻는,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이다. 소거법은 엄밀히는 연립일차방정식이 성립할 필요조건만을 제시하므로, 정확한 해집합을 구하기 위해선 해의 후보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하지만, 가우스 소거법은 원래와 동일한 해집합을 갖는 연립일차방정식으로 전환시키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 가우스 소거법 선형대수학에서, 가우스 소거법(Gauß消去法, )은 연립일차방정식을 풀이하는 알고리즘이다. 풀이 과정에서, 일부 미지수가 차츰 소거되어 결국 남은 미지수에 대한 선형 결합으로 표현되면서 풀이가 완성된다. 가우스 소거법은 보통 행렬을 사용하며, 첨가 행렬을 그와 풀이가 같은 더 간단한 행렬로 변환하여 풀이를 완성한다. 가우스 소거법은 행렬식과 역행렬의 계산에도 응용된다. 체 formula_1에 대하여, formula_2개의 미지수에 대한 formula_3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연립일차방정식 이 주어졌다고 하자. 여기서 은 주어진 formula_6 행렬이고, 은 formula_2개의 미지수를 포함하는 열벡터이다. 즉, 이는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이 경우, 이 연립방정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산을 가할 수 있다. 이들을 기본 행 연산(基本行演算, )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다리꼴행렬(Echelon matrix,에쉴론 메트릭스, 또는 행사다리꼴행렬)은, formula_6 행렬 formula_13에 대하여, formula_27이라고 하면, formula_28를 formula_14번째 행의 선행 계수(先行係數, )라고 한다. 선행 계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formula_6 행렬 formula_13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13을 행사다리꼴행렬(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formula_6 행렬 formula_13이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13을 기약행사다리꼴행렬(旣約行사다리꼴行列, )이라고 한다. 즉, 행사다리꼴행렬은 행렬의 항들이 대략 위에는 사다리꼴, 밑에는 0인 형태의 행렬이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 조건은 행사다리꼴행렬 조건보다 더 강한 조건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행렬은 행사다리꼴행렬이다. 다음과 같은 행렬은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이다. 가우스 소거법은 formula_49 행렬 formula_13을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행사다리꼴행렬로 만드는 알고리즘이며, 다음과 같다. 먼저 첫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그 뒤, 두번째 행을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뒤에 오는 다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한다. 일반적으로, formula_66번째 행은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만약 어떤 formula_77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formula_78번째 행에서 멈춘다. 만약 항상 formula_68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formula_80번째 행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위와 같이 처리하며, formula_81으로 둔다. 기약행사다리꼴행렬을 원한다면, 찾았던 모든 formula_82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추가로 거친다. 여기서 formula_90이며 formula_91인 데 주의하자. 사실, 이는 행렬의 계수이다.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모두 가역 연산이다. 두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이 하나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행동치라고 한다. 첨가 행렬이 행동치라면, 연립방정식의 풀이는 서로 같다. 기본 행렬은 단위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한 번 가하여 얻는 행렬이다. 이에 따라, 세 가지 기본행연산은 기본 행렬 곱셈과 같다. 가우스 소거법 알고리즘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연립일차방정식의 첨가 행렬은 그와 같은 해를 갖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행렬로 변환할 수 있다. 따라서, 연립일차방정식의 풀이는 행사다리꼴행렬 및 기약행사다리꼴에 대한 풀이로 귀결된다. formula_6 행사다리꼴행렬 formula_93에 대한 연립일차방정식 formula_94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해가 존재하는 formula_94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달리 말해, 해가 존재하는 formula_94의 경우,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을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정사각행렬에 대하여 다음 사실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정사각행렬의 역행렬을 계산할 수 있다. formula_100 행렬 formula_13의 역행렬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formula_13에 formula_100 단위행렬을 추가하여 formula_104 행렬로 만든다. 이 행렬에 기본행연산을 가하여 로 만든다면, 행렬 formula_107은 formula_108과 같다. 가우스 소거법을 사용하여 행렬의 계수를 계산할 수 있다. formula_49 행렬 formula_13의 계수는 가우스 소거법을 가하여 얻는 행사다리꼴행렬에서 0이 아닌 행의 계수(즉, 선행 계수의 개수) formula_78이다. 다음과 같은 선형 방정식이 주어졌다고 하자. 첫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열을 사다리꼴로 놓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행연산을 가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다. 이제 행렬이 사다리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미지수들을 가장 밑의 행으로부터 순서대로 대입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을 후방대입(back substitution)이라 한다. (식 2와 3을 바꾸어 해결한다) (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다음과 같은 행렬 formula_13의 역행렬을 계산한다고 하자. 기본행연산을 가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formula_108은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인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1816년 1월 22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천문대 관찰사가 되며 천문학과 특별교수가 되었다. 1844년 엔 고등 역학, 고등 천문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플라이센부르크에서 고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이승엽 이승엽(李承燁, 1976년 10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야구 선수로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지명타자이다. 본관은 광주이다. 이승엽 선수는 야구선수 중에 최고다. [국민타자] 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오오~ 오 이승엽 삼성의 이승엽 전설이 되어라 ×3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해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됐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했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 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제팬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했다. 2005년 시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3번과 6번 타자로 출전했다. 2005년 시즌 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며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2006년 1월 19일에 이적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2006년 시즌 후 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여기에서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이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16홈런, 2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2루타 두 방을 날리며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팀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됐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시즌후 2010년 11월 16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2년에는 3할대 타율,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2013 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맛봤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를 달성했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이다.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돼 7경기에서 타율 1할4푼8리(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2013년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1타점도 기록하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그 해 골든 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에게 내 줬다. 2014년에는 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 30홈런 -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였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2015년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승민을 상대로 장외 홈런이자 시즌 10호 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 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했다.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타율 4할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리그 최초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시즌 후 FA 선언을 해 2년 36억원에 잔류했다. 2016년 8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KBO 리그 통산 1390타점을 기록했고, KBO 리그 통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웠다. 그 후 9월 1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시즌 시작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2017년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호 홈런을 기록했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로 4000루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그 여정이 끝난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경기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KBO 홍보대사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SBS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타자’,‘라이언 킹’ 등으로 불린다.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이다.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 WBC와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이 추가됐다. 또한, 국제 대회나 중요한 경기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특히 8회에 결정적 역할을 해 '8회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제 2구장인 포항야구장의 성적도 뛰어나 '포항의 사나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야구위원회 KBO(Korea Baseball Organization)/KBO 사무국(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은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 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KBO는 이 기구의 영문 약자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별명으로는 크보(KBO를 그대로 읽어서)가 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KBO 총재는 KBO 리그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언어학 일반적으로 언어학(言語學, )은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언어학은 인간의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음성과 문잘롭붙계뜻까지 위계적으로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과 문법론은 언어의 의미와 구조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 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 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적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국정보올림피아드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 KOI)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했다. 국가적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다. 대통령 산하에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는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4월 22일,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지금과 같이 전국에서 선발된 초·중·고 학생들이 300명이 참가하여, 3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다. 개회식은 오전 9시에 열렸고 실제 대회는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참가 대상이 국민학생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교사부가 있었다. 공모부문도 1회부터 있었는데, 참가 대상에 제한이 없어서 단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용기종은 8비트 컴퓨터, 사용언어는 베이직과 어셈블리어였다. 역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같은 날 개최되었다. 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 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 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 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 2014년에는 이전과 달리 배열 크기가 제한되었으며 각 교육청은 이를 학생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본선(대구시정보올림피아드)이 치러질 당시 대구시교육청 산하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수험생에게 이를 안내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재채점을 진행하였다. 이 채점에서 5명이 구제되면서 대구시에서 전국 본선에 진출하는 고등부 수험생은 기존 7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났다. 2015년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문제풀이 형식을 파일 입출력에서 표준 입출력으로 변경하였다. 몇몇 학생과 학부모는 시험 방식이 변경된 사실이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대회에 응시한 일부 학생은 파일 입출력을 사용한 코드를 작성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응시자 주의사항과 감독관을 통하여 충분히 강조했을 뿐더러 기존 방식대로 푼 학생을 구제하면 문제를 제대로 읽고 풀이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면서, 구제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파일 입출력에 맞춘 코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결국 0점 처리가 되었다. 2018년 4월에 개최된 지역대회에서는 총 일곱 문항이 '정답없음', '복수정답' 처리되었다. 보기로 제시된 코드에 오타나 정의되지 않은 행동(Undefined behavior)이 포함된 데다가 컴파일러가 비주얼 스튜디오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등, 상당히 많은 문제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에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과 한국정보과학회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출제 오류로 피해를 본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존에 합격점을 받은 600명에 구제된 147명을 더해 도합 747명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그 해 6월 정보올림피아드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주최하였다. 공청회에서 대책위는 영재교육 위주 대회에 공교육 취지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문제 난이도 등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은 것, 출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뽑지 못한 것, 기존 영재교육 전문가와 새로 들어온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전문가가 제대로 협업하지 못한 것을 출제 오류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 2018년 7월 개최된 전국대회에서는 고등부 채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보올림피아드 본선에서는 답안을 서버에 제출하면 프로그램이 채점하여 즉시 결과를 돌려주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도 채점 결과가 나오지 않아 참가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주관 측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의 채점 지연 시 대응 규정을 준용하여 경시 시간을 30분 연장하였고, 대회가 종료된 뒤 채점 결과를 참가자들에게 따로 통보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예비소집 때 실시한 채점 환경 점검과 대회를 마친 후 진행한 원인 분석에서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데이터가 대량으로 몰리는 경시 시간 동안에만 일어나는 문제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채점위원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연되었으므로 기존 채점 기준대로 채점하였다고 밝혔다. 베이직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 약자 베이직(BASIC, )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하나이다. 절차형 언어로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 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 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 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 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 인터프리터 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 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과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라이프 게임 라이프 게임() 또는 생명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 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 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 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 ‘block’과 ‘boat’는 정물이고, ‘blinker’와 ‘toad’는 진동자, 그리고 ‘글라이더(glider)’와 ‘경량급 우주선(lightweight spaceship — LWSS)’은 우주선에 속한다.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 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 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 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 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 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1941년 10월 18일부터 1944년 7월 18일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육군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 등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으로 손꼽힌다. 1884년 도쿄 부 고지 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토세(千歳)이며 본적지는 이와테현으로, 그의 두 형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9년에 (伊藤勝子)와 결혼하여 3님 4녀를 낳았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9년 스위스에 주재 무관으로 급파되었고, 1920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21년에는 다시 해외로 파견돼 독일에서 주재하였다. 도조는 1922년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9년 중좌로 승진되었다. 1920년대,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본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하였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해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준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기도 하였다. 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대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교수형 후, 도조 히데키 등 전범들의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는 일 없이, 요코하마 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부상해 1960년 아이치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가 축조되어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 ) 또는 한국철도(KORAIL)은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다. 자료는 2010년 한국철도공사/철도시설공단 연보이다. 승하차 승객수 순위 50위 이상인 곳을 정리하였다. 통근열차 역시 여객사업본부 소속 열차지만 그 기본적 역할이 광역도시권의 승객 수송이므로 제외하였다. 참고자료는 코레일/철도시설공단 철도통계연보기준이다. 일반열차(새마을호·무궁화호)는 감소추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KTX는 이용객이 소폭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료는 2006년 한국철도공사/철도시설공단 연보이다. 승하차 승객수 순위 50위 이상인 곳을 정리하였다. 통근열차 역시 여객사업본부 소속 열차지만 그 기본적 역할이 광역도시권의 승객 수송이므로 제외하였다. 05년에 비해 KTX 승객량은 소폭 증가했으나 기존선 열차의 승객량은 대부분 역에서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2006년 12월 착공한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는 2009년 8월 완공되었으며, 쌍둥이 빌딩 형식으로 서관에 한국철도공사, 동관에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입주하였다. 본사는 연면적 23,507m이며,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이다. 대한민국의 교통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에 대해 서술한다.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 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 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2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5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존 맥스웰 쿳시 존 맥스웰 쿳시(,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존 마이클 쿠체(John Michael Coetzee)이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 버펄로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등단한 이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야만스러운 서구 문명에 그 근본 원인을 찾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83년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영어권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의 유명 문학상인 맨 부커 상을 받았다. 1999년 《추락(Disgrace)》으로 다시 부커상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부커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 활동을 한 이래 거의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두 차례 모두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커먼웰스상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상, 프랑스의 페미나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 수도권 수도권(首都圈, ) 또는 수도 지역(首都 地域), 수도 지구(首都 地區)란 수도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주변 도시권 지역을 하나로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각국의 주요 기능(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권은 어느 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가까운 지역이 수도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수도에는 법정구역이 대부분 있다. 의 경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지방의 전역을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의 경우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남포시, 순천시, 평성시, 황해북도 중화군, 상원군 일대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특별시 특별시(特別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 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시와 남포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인구 백만명이 넘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톈진, 칭다오, 충칭, 시안, 광저우, 한커우(현재 우한 시의 일부), 선양, 하얼빈 시의 11개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했다. 이후 "원할시"로 개칭하면서 특별시라는 이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2017년 4월 27일 오전 이경희 한국국민당 대선후보가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를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와 국회,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을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서 대전을 특별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충청의 중심 대전이 충청의 중심으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이 돼서 충청의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2017년 3월 22일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전라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안희정 후보는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하고 전주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전통의 도시로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하겠다며,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 5월 1일 오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전주시 전동성당 인근에서 거점유세를 열고 "전국의 모든 첨단산업을 새만금으로 모아보자"며 "새만금특별법을 통과시켜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새만금 개발 추진에 조건이 있다며 "전북에서 20% 이상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새만금을 홍콩 식으로 개발을 해보겠다"며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난 뒤에 1국2체제 형식으로 운영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서 모든 규제를 싹 없애버리고 환경, 경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1국2체제로 개발하자는 것"이라며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끌어내서 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2003년 2월 17일 부산의 6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옛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가 올해 ´부산의 특별시 승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2003년 전개할 시민경제운동 10대 사업을 발표하면서 ´특별시 승격운동을 신규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새 정부가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분권적 차원에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세계경쟁력을 강화하는 국가전략 투자도시로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부산발전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또 ´부산특별시´승격을 전제로 한 경상남도 양산시 및 진해시 웅동지역의 발전적 통합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6월 23일 홍성철 진해문화원 이사는 창원대학교 국제홀에서 지방분권운동경남본부(상임대표 안홍준) 주최로 열린 ‘부산광역시의 대도시 패권주의 대응 토론회’에서 ‘진해신항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 분석’을 주제 발표하고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진해는 물론 김해·양산까지 부산에 편입시켜 서울에 버금가는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은 진해 용원동 일대에 건설되는 진해신항의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남과 부산이 함께 발전하려면 경남 땅의 부산 편입 논리에 벗어나 양산·김해를 지켜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해시민과 전체 경상남도민이 힘을 모아 부산의 진해 신항 편입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 이사는 “현재 부산항은 컨테이너 선석 21개만으로도 항만관련 매출액이 연간 20조원을 웃돈다”며 “신항만은 부산항의 1.5배인 30선석으로 어느 자치단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이익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항의 20조원 매출은 부산 부가가치의 40%며 항만의 고용효과도 전체의 27%”라며 “신항의 30선석 가운데 18선석만 소속돼도 개당 1만5000원인 컨테이너세가 도세 수입으로 연간 724억원”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산은 이처럼 항만의 가치를 잘 알고 신항만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끈질기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양산·김해·진해를 부산에 집어넣어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도 핵심은 진해 땅에 있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26일 YTN은 부산광역시청이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양 관련 산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중앙정부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양특별시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해양특별시가 되면 항만시설을 비롯해 해양자원개발사업 시행자와 관련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은 물론 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 2004년 12월 3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해양수도로서 부산특별시를 설치하며 국가가 부산시를 국제해양수도로 개발하기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추진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특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특별시로 승격되는 부산시가 항만시설과 해양자원, 해양산업의 개발사업자 등에 대해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 부산 여행객이 지정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면세와 환급특례를 부여하고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에 특례를 두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16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부산 국제신문사 대강당에서 ‘부산해양특별시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김인세 부산대학교 총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박경문 전 경성대학교 총장, 신정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 범어사 주지 정여스님, 정홍섭 신라대학교 총장, 조규향 동아대학교 총장 등 지역 내 유력인사들이 추진위 상임고문을 맡고, 조 의원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조 의원은 국회에서 <폴리뉴스>와 만나 “정치권의 이념적, 정략적 접근을 떠나 해양특별시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양특별시로 부산의 차세대 성장 동력인 해양물류와 해양관광을 적극 육성하고, 장기적으론 우리나라의 경제수도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미국, 호주,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정치수도와 경제수도로 이원화돼 있는데,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 전문가 15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에서 부산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구체적 실무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약 1년6개월 후엔 특별법 발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2012년 7월 27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부산을 해양거점도시로 만들고, 부산특별시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울산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 같이 밝히며 "세종시도 특별시, 제주도도 특별자치도다. 가능하냐고 물어보겠지만 확실히 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의 그린벨트도 지금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시가 직접 관리하도록 바꾸고, 도시계획과 여러 규제도 시로 위임하겠다"며 "부산을 좀 더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2007년 2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가칭 동북아 부산포럼(대표 조관홍 동아대학교 교수) 초청특강에서 "국토 동남지역 광역경제권을 수도권에 상응하는 규모로 활성화하고 해양물류도시로서 상해, 천진 등 인근 항만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산·울산·거제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특별시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측 관계자도 "100만과 400만의 도시 규모로는 국제적인 경제에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해양특별시를 염원하는 부산과 산업특별시를 추구하는 울산을 통합하여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수도권 중심의 1극체제가 아닌 양극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권을 편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과 울산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보완적 성격으로 통합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이며, 수도권·중부권·호남권·동남권의 4대 경제권과 강원도와 제주도의 2개 경제권을 부르짖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4+2체제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2011년 6월 28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창조도시 전략세미나에서 배덕광 해운대구청장은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을 민선 5기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청장은 "지난 7년 동안 3선 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운영해오면서 지방재정에서부터 인사 등 모든 권한이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어 지방분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해운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와 역량을 이용해 관광 특별시를 조성한다면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내부적으로 T/F팀을 구성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지난 2006년 제주도청이 제주특별자치도청으로 지정된 것처럼 해운대를 영상과 컨벤션, 관광산업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해운대구청은 해운대특별자치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2012년도에 계획된 지방행정체제 개편 방안에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8월 15일 경주신문은 문화재보호에 따른 경주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주발전 전략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던 '경주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자'는 운동이 지역의 한 민간단체에 의해 본격 추진된다고 보도하였다.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 전 국회의원)는 최근 경주 특별시 승격추진 계획 건의서를 한나라당을 비롯한 각 정당과 경주시청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특별시 승격 추진 논의는 1990년대 후반 지역내 일부 교수들에 의해 처음제기됐으나 그동안 경주시청과 경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주지역출신 국회의원 등이 주로 고도보존특별법 제정운동에 주력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2002년 11월 2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시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중앙정부 주도로 경주의 문화재를 종합정비하고 예산의 집중배정 등으로 외국인 유치에 노력하고 시민들의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11월 4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의 국무총리 산하 문화특별시 지정을 골자로 성타(性陀) 불국사 회주스님, 백상승 경주시장,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을 비롯해 경주시의원 18명 등이 연대서명한 ‘경주 문화특별시 승격 건의서’를 각 정당 16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개 지구를 비롯 2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가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도굴과 훼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라며 “이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시 지정과 함께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고도보존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각국은 문화재 관리로 인해 시민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 하는 법률을 제정해 문화재 보호와 사유재산권 행사를 조화롭게 해결해 오고 있는 추세”라며 “지금까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시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지금 시민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경주발전협의회는 밝혔다. 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8년 11월 1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2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의 특별강연에서 경북대학교 문경현 명예교수는 ‘경주시의 문화특별시 지정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경주가 세계적 유물과 유적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이같은 고적보존과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발을 해야됨에도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으로는 재정감당이 안돼 수많은 유적지가 훼손일로에 있으므로 하루빨리 특별시로 승격시켜 국가가 특별예산지원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2013년 1월 10일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일각에서 망국적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신설되는 해양수산부 주도로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남해안해양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남해안해양특별시’는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계획으로 단순히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한나라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의원)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도시들 묶어 인구 130여만명의 ‘섬진광역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칭 ‘섬진광역시’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및 경상남도 남해군, 하동군, 사천시가 포함되며, 교육과 관광, 미래 첨단기술과 성장동력 산업을 결합시킨 미래 친환경 복지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팔도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 '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며,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팔도 아리랑'으로, 여러 지방의 김치가 '팔도 김치'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의 대표적인 도시의 이름의 첫 두 글자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충청'은 충주의 '충'과 청주의 '청'을 따서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이란 뜻으로 '기(畿)'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자치시, 1개의 특별자치도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군으로, 도는 자치시와 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자치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초지방자치단체를 구성한다. 특별자치도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둘 수 있으며, 행정시는 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6년 10월 기준으로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한 6개 광역시와 8개 도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군이 설치되어 있다. 특별·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시에는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행정리로, 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하위 행정구역으로 시·군·구의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자치단체이다. 경기도는 지리적으로 남북으로 나뉜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제주시·서귀포시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도 간주한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노벨 문학상 노벨 문학상( - 文學賞, , )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중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때때로 작가 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특정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에서 "기여"란 한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특정 년도에 상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며 수상자의 이름을 10월 초에 발표한다. 이 상은 다섯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895년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다. 다른 노벨상은 노벨 화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평화상, 노벨 의학상 그리고 노벨 경제학상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카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 시 기타 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 군(西成郡)의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 시 히가시요도가와구淀川区)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茨木 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豊里村)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浅草)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伊豆)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카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카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카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의 스톡홀름에서의 수상식에서 카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카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카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 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카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카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카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이 외 다수.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카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상이 카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보사노바 보사노바(,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 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리우 데 자네이루 ~ 1994년 12월 8일 뉴욕)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Bossa nova)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와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세르지우 멘데스(Sergio Mendes),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스탠 게츠(Stan Getz),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 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 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 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 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 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패럴림픽 마스코트인 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A A, a는 로마자의 첫 번째 글자이다. A는 소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에서부터 왔다. F F, f는 로마자의 여섯 번째 글자이다. 한국어에 없는 발음이며, 한글로는 보통 ㅍ으로 표기한다. F는 갈고리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 K K, k( )는 로마 문자의 열한 번째 글자이다. K는 손바닥을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유래했다. 블로그 블로그()는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을 모아 월드 와이드 웹상에 게시하는 웹사이트의 일종이다. 블로그라는 말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은 블로거 (bloger)라고 한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라 부른다.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의 저스틴 홀이 시작한 온라인 일기가 가장 초기의 블로그중 하나로 뉴욕 타임즈 등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웹페이지에는 새글(What's new)과 차례표(Index) 페이지가 있었으며 이때 차례표는 보통 가장 최신의 글이 위에서부터 게시되거나 순서대로 제목이 나열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자게시판 동호회의 것과 같다. 개인 블로그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다른 뉴스를 베껴 온다. 그러나 매트 드러지가 만든 드러지 리포트 사이트는 전문 뉴스 채널 못지 않는 속보와 특종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 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 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 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 구심력 구심력(求心力, centripetal force)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 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formula_2 는 구심 가속도 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ω"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공전주기 "T" 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γ는 이며 로런츠 인자라 불린다. 줄 끝에 묶여있는 물체가 수평면을 따라서 원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물체에 가해지는 구심력은 밧줄의 장력에 의해 가해진다. 이때 밧줄의 경우 끌어당기는 힘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벽의 수직항력에 의한 미는힘도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뉴턴이 생각했던 구심력은 현대의 중심력에 해당한다. 어떤 인공위성이 행성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때, 중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편심성 궤도의 경우 중력의 방향은 초점으로 향하지만, 구심력은 곡률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구심력의 다른 예로는 자기장 내에서 나선운동하는 하전입자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자기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원심력 원심력(遠心力)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 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되는 원심력’은, ‘비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하기 위한 가상적인 힘이고, 실존하는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지만,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는 아니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원심력만 관찰될 뿐, 구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구심력과 이에 대한 반작용만 존재할 뿐,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즉, 좌표계에 따라 구심력과 원심력 중 하나만 관찰된다. 따라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 하나의 좌표계에서 (혹은 좌표계를 명시하지 않고)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구심력은 실제 존재하는 힘이나, 원심력은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 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 유니코드 유니코드(Unicode)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며, 유니코드 협회(Unicode Consortium)가 제정한다.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 언어 언어(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 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 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된 언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된 언어로 분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일본어와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라틴어는 사어가 아닌 47억 기독교신도들의 종교언어이고, 지자체적 측면에서 보면 만주어는 사어가 아닌 둥베이, 프리몰, 하바롭의 공용어이다. 차가타이어란 차가타이(남서튀르크)어파의 공통조어로, 옛 대원제국의 차가타이汗국의 공용어였다. 지금은 사어로 판명. 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심리학 심리학(心理學, )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목으로서, 인문과학에서부터 자연과학, 공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그 중요성을 점점 더해갈 것이다. 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으로 나뉘며, 2014년 현재,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에 대한 과학” 이라고 정의되는 심리학은 다양한 접근방법만큼이나 조금씩 그 정의의 폭을 달리할수있겠으나 과학적인 절차를 수용하기 시작한 근대의 심리학 이후에서는 적어도 '행동에대한 과학'이라는 협의의 정의를 빼놓을수는 없겠다. 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심리학에 대한 생각은 쭉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의사 윌리스(1621년 - 1675년)는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심리학은 철학에서 완전히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79년, 흔히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분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실험실을 개설하였다. 그는 심리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 내성법'을 주장하였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을 출간하였다. 그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에빙하우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운동지각에 관한 실험연구>(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Carl Stumpf 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Stumpf는 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Koffka와 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Stumpf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Koffka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Kohler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Lewin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 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유명한 학자로는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과학적 엄밀성의 결여, 경험적 증거의 부족, 이론체계의 반증불가능성 등으로 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 포퍼에 의해 유사과학의 세 가지 사례들 중 하나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칼포퍼가 주장한 반증 가능성과 경험적 증거가 과학의 주요한 속성이라는 주장이 속속히 반박당하고 오류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수그러들었다.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어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단체들 중 가장 큰 단체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단체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기초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 1920년대를 전후해서 왓슨, 손다이크, 헐(C. Hull), 톨먼(E. Tolman), 스키너 등에 의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창되었다. 이들은 쥐, 비둘기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학습이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주장하였다. 이 자극 반응 이론(S-R 이론)으로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 여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학의 과학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 가능한 것'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검증 가능한 것'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이전의 큰 심리학적 흐름이었던 정신분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행동주의자들은 그러나 '검증가능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정작 심리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심적, 내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인지혁명 이후 주된 패러다임의 자리를 인지심리학 등 다른 분야에 내주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과장된 비유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원래 뜻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본능이 행동으로 직결되며 이 외의 요소나 우연 등의 예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이나 언어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로 얻은 정보와 연관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을 확신하여 규명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뜻이다. 1950년대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이 파급되었다. 주요 심리학자로는 욕구이론을 주창한 매슬로,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창한 로저스, 직관적이며 전체적 인지를 중시한 장 이론인 게슈탈트 심리학을 주창한 펄스(F. Perls)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인본주의 심리학은 같다.) 인지심리학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으로 거슬러올라갈수있겠으나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주의 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의 거장으로는 알버트 엘리스,아론 벡등이 거론된다.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지각 심리학, 발달심리학,사회심리학,생리심리학 등이 주로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연역적 사고을 사용한다. 실천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 심리학의 방법과 결과를 실제 생활이나 실제 문제에 응용하려는 학문.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산업 심리학, 임상 심리학, 교육 심리학, 범죄 심리학, 건강 심리학,여성심리학등이 이에 속한다. 임상 심리학은 정신건강에관한 정신적 이슈가 다루질 필요성에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상담 심리학은 정신적 이슈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거나 심리적 부담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장할수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약물 처방을 정신과 의사만 내려줄 수 있으므로, 상담심리사는 약물 처방을 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를 치료한다. 특정상황을 고려한 정신건강의 이슈에때라 이의 개선을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될수있다. 잠 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렘(REM,Rapid eye movement,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있는 역설수면이다. 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램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하다가 점차 줄어드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취침 시간, 수면 시간이 매일 달라지면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마약 마약(麻藥, )은 향정신성 의약품의 출물로서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즉 한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으로서 이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말하며.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일부 대한민국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이지만,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할 경우 신체에 손상을 주고 중독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을 유발할 수 있어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환자가 아닌 이상 전혀 효과가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 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 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 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 마약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Cannabis sativa L.")]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함. 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이다. 고전적 조건형성 고전적 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이에 관하여 잘 알려져 있다.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 (CS; 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 (CR; 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이 무조건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자극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이 되어 조건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Watson&Rayner 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와 큰소리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거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지 않는다면 조건반응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소거가 일어난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된다. 자발적 회복 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극일반화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이라고 한다. 변별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을 변별이라 한다. 즉,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학습 학습(學習) 또는 배움은 본능적인 변화인 성숙과는 달리, 직간접적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지속적으로 지각하고, 인지하며, 변화시키는 행동 변화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생체의 일반적 적응과 신체적인 피로, 손상 등 일시적인 동기 부여 등에서 초래된 행동의 변화와는 구별된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이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 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하다. 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발달 심리학 발달 심리학(發達 心理學, )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동안 연령 및 환경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개인의 일생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되는것과 함께 이러한 발달의 향상적인 기간뿐만아니라 이후 발달의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면까지도 발달과정으로보는 전생애적인 발달과정을 다루는것이 발달심리학의 관심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태아기·영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중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론에서 동화와 조절의 개념으로 적응을 설명하면서 발달의 중요한 면을 언급한바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있어서 동화는 자신에게 맞추어 환경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면 조절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은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한다. 1)신뢰감 대 불신감(영아기, 0-1세) 3)주도성 대 죄책감(유치기, 3-6세) 4)근면성 대 열등감(아동기, 6-11세) 5)정체감 대 정체감 혼란(청소년기, 11-18세) 6)친밀성 대 고립감(청년기, 18-40) 7)생산성 대 침체감(장년기, 40-65) 8)통합성 대 절망(노년기, 65세 이상) 반응의 범위 모형 반응의 범위 모형(reaction range concept)은 사람의 발달은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선천적으로 발달이 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환경 풍요도에 따라 발달의 수준이 변한다. 이 모형은 발달심리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피아제의 인지 발달론 인지 발달론(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알프레드 비네의 실험실에서 아동지능검사와 관련하여 일한바 있다고 알려져있다.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 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 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 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 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조절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 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 감각적 동작(의 시기 : 출생 직후 ~ 2세 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전조작기의 시기 : 2세 ~ 6, 7세 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concrete operational stage 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 보상,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 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 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 분류,서열 등 집합적 관계에서뿐만아니라 공간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Formal operational stage 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맥락의 연대기적인 개인 연령에서의 인지 발달론 유형과는 대조적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섬세하고 협동적이라고 할수있는 사회적 문화 전달 측면에서 인지 발달을 다루는 레프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이 언급되고있다. 피아제(Jean Piaget)와 비고츠키(Lev S. Vygotsky)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18권 제3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542663 (송지성, 이성애. (2012).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8(3), 215-227.) 생태계 생태계(生態系, )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비둘기,금붕어,개미등 생태계 파손) '생태계'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트랜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수 생태계로 나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유전자 유전자(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 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50년대 그레고어 멘델 그의 유명한 완두콩 실험을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다. 완두콩 시험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하나의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하지 않는 개체를 순종으로, 이 순종들의 교배를 통해 형질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를 잡종으로 불렀다. 잡종의 1세대에는 두 부모 개체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 가지만이 발현되었는데 이를 우성, 1세대에 발현되지 않는 특성은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잡종 교배 시험을 통해 1세대에 열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다시 발현한다는 것과 발현의 빈도가 통계적으로 분명한 법칙에 의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의 발견으로서 멘델은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Intracellular Pangenesis") 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1900년대에 이르러 멘델의 법칙은 다시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건은 특정한 유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1928년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제작하였다. 1928년 영국의 의사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페렴쌍구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피스 실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시험을 통해 그리피스는 유전형질이 세균 사이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끈한 균주를 형성하는 S형과 거친 균주를 형성하는 R형 두 종류의 폐렴쌍구균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다. S형을 생쥐에 주사하면 쥐는 하루 만에 죽지만 R형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피스는 폐렴 백신을 만들기 위해 S형 균을 열처리하여 죽인다음 생쥐에 주사하였다. 죽은 S형 균은 병을 유발하지 않아 생쥐는 생존하였다. 그다음 그는 죽은 S형 균과 살아있는 R형 균을 혼합하여 주사하였는데 생쥐는 폐렴으로 죽었다. 죽은 생쥐의 혈액을 관찰한 결과 모든 균이 S형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S형 균의 무엇인가가 R형 균을 S형 균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 현상을 형질변환이라 불렀다. 1941년 조지 웰스 비들과 에드워드 로리 테이툼은 돌연변이가 대사회로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를 보다 연구하여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여 생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 콜린 먼로 매클라우드, 매클라인 매카시는 DNA에 유전자 정보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피스가 관찰한 형질변환은 바로 이 DNA의 이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이로써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는 하나의 유전자는 사실상 DNA의 염기서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DNA의 염기서열이 RNA에 의해 전사되고 리보솜에 전달되면 그로부터 지정된 아미노산 서열의 결합이 이루어져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972년 월터 피어스의 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 MS2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서열을 판독하였다. 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DNA DNA(, 디옥시리보 핵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사이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는 독특한 핵염기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알프레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DNA의 X선 회절 사진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이었으며, 그녀와 앙숙이었던 동료 과학자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가능했기에 이후 그들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편 프랭클린은 암으로 1958년에 사망하여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였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 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Bacillus subtilis")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Yersinia") 박테리오파지 piR1-37 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 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레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OH)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DNA 이중나선은 대게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 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 인해서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 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DNA 회전효소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 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 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 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formula_1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 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 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 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 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 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 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 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 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애초에 초파리의 짧은 세대 주기를 이용해 진화를 재현할 생각으로 2년간 실험했지만 실패하였다. 초파리를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서 70세대 이상 사육하였으나 초파리의 눈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그는 정상인 붉은눈 초파리와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교배하여 2세대에서 모두 붉은눈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다음 3세대에서는 붉은눈과 흰눈이 섞여 나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른 우성/열성 유전형질 발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흰눈 초파리가 모두 수컷이었다. 그는 초파리의 눈을 희게 만든 열성인자가 초파리의 성염색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실험을 계속하여 여러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였다.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 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 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 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 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1970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해밀턴 O. 스미스는 DNA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는 제한 효소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제한 효소는 훗날 HindII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DNA 염기서열에서 GTYRAC 구간을 찾아내 절단한다. Y는 T또는 C, R은 A또는 G가 될 수 있다. 이 효소는 1세대 유전자 가위가 되어 분자생물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유전자 가위로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효소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쓰인다. 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 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건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황우석 사건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황우석은 복제된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획득하였다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실험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어 논문이 철회되었다. 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 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체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 RNA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 은 오탄당의 일종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뉴클레오타이드를 이루는 핵산의 한 종류이다. 하나의 나선이 길게 꼬여 있는 구조를 지니며 DNA의 일부가 전사되어 만들어진다. RNA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 작용하며 일부 바이러스는 DNA 대신 RNA를 유전물질로 갖기도 한다. 핵염기로 DNA와 달리 티민 대신 우라실을 갖는다. 최근 RNA 스스로 효소와 같은 기능을 가질 수도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리보자임(ribozyme)이라 한다. 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 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 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 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 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하므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단백질 형성 과정을 맡는다. 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DNA, RNA와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 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 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
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 mRNA 순열중 UAA, UAG, UGA 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 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 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 리보솜 리보솜()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 nm(200 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세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또한 효소로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때문에 리보자임이라 불리기도 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 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리보솜의 분자 구조와 기능이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다 요나스(이스라엘),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시난(미국)과 토머스 스타이츠(미국)는 리보솜의 기능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 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 는 GTP의 가수분해이다. 바이러스 바이러스(, , )는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생명활동을 하는 작은 감염원이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개 또는 세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평균적인 비리온은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는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 바이러스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퍼진다. 식물에 있는 바이러스는 진딧물과 같은 식물의 수액을 먹어 치우는 곤충에 의해 식물에서 식물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 동물의 바이러스는 흡혈 곤충에 의해 옮겨진다. 이러한 질병을 갖고 있는 유기체들은 벡터라고 알려져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 퍼진다. 바이러스성 위장염의 흔한 원인인 노로 바이러스와 로타 바이러스는 감염 경로를 통해 전달되며, 접촉을 통해 사람 간에 전달되고 . HIV는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 혈액에 노출되어 전염되는 여러 바이러스 중 하나이다. 바이러스가 감염시킬 수 있는 숙주 세포의 범위는 "숙주 범위"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바이러스가 소수 종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널리 퍼진다는 것은 바이러스를 수동으로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들에게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대개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면역 반응은 또한 특정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 인위적으로 획득한 면역성을 부여하는 백신에 의해서도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즈나 바이러스성 간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포함한 몇몇 바이러스는 이러한 면역 반응을 회피하고 만성 감염을 유발한다. 항생제는 바이러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몇몇 항 바이러스제가 개발되는 등 바이러스성 질병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 되고 있다.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virus")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후반 바이러스 발견 직후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세포로 진화하지 못한 원형질체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바이러스와 숙주세포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정되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바이러스의 복제 경로 또는 생활환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파지 요법이 연구가 중단되었지만, (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성수 (1891년)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전라도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전라도 부안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화순군수, 진안군수, 군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조부 김요협은 전북 고창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고, 김기중과 김경중 형제는 줄곧 그 곳에서 거주하였으며 김성수 역시 조부가 세운 집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중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를 일으켰지만 할아버지 김요협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맏손자인 인촌에게만큼은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9세 무렵 생부 김경중 내외에게 다섯째 아들이자 친동생인 김연수가 태어났다. 한편 백부 김기중의 소실인 공주김씨에게서도 서자이자 그의 서제인 김재수가 태어난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는 장흥 고씨로 전라도 창평군(현 담양)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그는 장학재단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발기인에 참여하여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정주는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인 송진우와 친분을 쌓은뒤 김성수는 이를 부모에게 보고하였다. 담양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양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송진우라는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 1907년 봄 김성수의 가족은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했다.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백관수는 내소사 남쪽 20리쯤에 위치한 부안군 덕흥 출신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교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송진우, 백관수와 더욱 우의를 두텁게 했고 이러한 우정은 평생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촌은 백관수에게서는 한문의 힘을 빌었고, 송진우에게서는 식견(識見)의 힘을 빌렸지만, 김성수 역시도 백관수에게는 신학문의 영향을 주었고, 송진우에게도 실천하는 힘의 영향을 깨우쳐 주었다.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 ~ 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1919년 10월 3.1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한 이아주(李娥珠)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이아주의 문병을 갔다. 이 인연으로 후일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다. 이아주는 용인이씨 이봉섭(李鳳涉)과 김해김씨의 딸로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아주는 후에 2005년 3월 7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 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송진우 출감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석농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추진한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을 주도하며 일경의 눈총을 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경성방직 50년>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닭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활란 등과 자주 만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의하곤 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인천까지의 배삯은 마련하였으나, 의지할 데가 없던 곽낙원은 차비 마련이 어려웠다. 곽낙원은 고심하다가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에 갈 차표와 차비를 구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송진우가 곽낙원과 손자의 차비를 지불해주었다. 곽낙원의 동아일보 인천지국 및 본사 방문 소식을 접한 김성수는 직접 찾아가 곽 여사에게 생활에 쓰시라며 봉투를 건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 (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정책으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루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 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 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1947년 우익정당의 통합 논의에서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 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 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 (대한민국, 1955)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9.28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친 자식처럼 보살피던 이인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이인수는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중앙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고려대 교수로 유능한 교육자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와서 강압적으로 반미 선전에 동원하여 마지못해 가담한 이력을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인촌은 이인수를 구명하려고 이승만을 찾아갔는데 얼른 재빨리 처형한 북한 앞잡이 신성모 국방 장관이 늦었다고 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다. 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 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공화구락부가 민국당에 합세하여 민국당의 부통령후보였던 그를 밀어준 결과였다. 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 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친구인 최두선의 회갑연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문하였다. 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 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김성수론> 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 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 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 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 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 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 공선사후(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좌우명도 있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 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 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 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인촌동상철거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 심근 경색 심근 경색(心筋梗塞, , )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心臟痲痺, )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 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요골 또는 대퇴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 대구광역시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는 한반도의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군위군, 칠곡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 팔공산과 비슬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도시이며, 대구 특수형 기후 지역으로 분류된다. 조선시대에는 경상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면서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일 달성군을 편입하였다.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이고, 행정구역은 7구 1군이다. 대구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도시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하여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하여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나타낸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 대구광역시는 대한민국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군위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 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대구의 기후는 습윤 대륙성 기후(Dwa)를 띄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7개 '구'와 1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8년 12월 31일 주민등록 인구는 1,021,266세대 2,489,802명이다.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군위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대구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 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http://dudeuriso.daegu.go.kr)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0달구벌콜센터는 대구시에 관한 민원이나 궁금한 사항을 상담해주는 콜센터이다. 전화, 문자상담, 온라인상담, 예약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외국어상담(영어,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외국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스마트시티 아시태평양 어워드 2018’에서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 된 뚜봇은 자가학습을 통해 자동 답변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자동상담시스템이다. 24시간 여권, 차량등록, 지역축제, 시정 등 다양한 분야의 민원을 채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에 해당하는 영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 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 아시아 고속도로 1호선이 대구를 관통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등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등 도시고속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3,3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1,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은 제주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대구공항에서는 국내선 제주․김포 2개 노선이 매주 215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싼야) 24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구마모토, 사가) 177편, 동남아(홍콩,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마카오, 하노이) 148편, 대양주(괌) 14편,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14편이 운항되고 있다. 2012년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38조7천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4%이다. 2013년 대구광역시의 1인당 개인소득은 16개 시도 중 6번째로 상위권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개인소득은 1천538만원으로 울산 1천916만원, 서울 1천869만원, 부산 1천618만원, 대전 1천576만원, 제주 1천564만원에 이어 16개 시ㆍ도중 6번째로 높았다. 시ㆍ도 전체 명목 개인소득은 796조원으로 1년 전보다 30조원(3.9%)이 늘었다. 실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경제성장률)도 3.8%로 전국 5위를 나타냈다. 이밖에 대구의 지역 총소득은 52조6천억원으로 전국의 3.7%를 차지했으며 지역 내 총생산 대비 지역 총소득 비율은 117.3 수준이었다. 2018년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50조 8,000억원으로 전국의 2.9%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개인소득은 2천60만원으로 증가했다. 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 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 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전역을 방송권역으로 하는 민영 방송사인 TBC, 공영 방송사인 KBS대구방송총국, 대구문화방송이 주요 방송사이다. 그 밖에 라디오 방송사는 대구교통방송, CBS 대구방송, 대구극동방송, 대구가톨릭평화방송, 대구불교방송, 대구원음방송, 대구국악방송 등이 있다. 케이블 방송사는 CMB 대구방송, HCN 금호방송, TCN 대구방송,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 등이 있다. 주요 신문사로는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신문, 대구일보 등이 있다.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와 2002년에 창단된 K리그1 대구 FC가 대구를 연고지로 한다.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제2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 광주광역시 관상동맥 관상동맥(冠狀動脈, )은 심장의 근육(심근)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들을 말한다. 심장 동맥이라고도 한다. 심장은 온몸에 피를 보내는 펌프로 인체에서 심장에 의해 피를 공급받지 않는 기관이나 조직은 없으며, 심장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관상동맥은 심장이 필요로 하는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그 가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상동맥은 대동맥의 기시부에서 좌우 두갈래로 분지하며 심장 전체를 둘러싸는데, 둘러싸는 모양이 관(冠)과 같다 하여 관상동맥이라 불린다. 관상동맥은 우(右)관상동맥(RCA)과 좌(左)관상동맥(LCA)이 둘로 나뉘어 이루어진 좌전하행지(LAD)와 좌선회관상동맥(LCx)의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관상동맥의 동맥경화는 관상동맥질환이라 불리며 협심증과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 선저우 5호 선저우 5호 (神舟五号)는 2003년 10월 15일,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 선저우 5호는 현지 시각 9시(UTC +8) 정각 간쑤 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어, 9시 10분에 궤도로 진입했다. 이 우주선에는 전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이 탑승했다. 이 발사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사람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발사 장면은 생중계되지는 않았고, 발사 직후 CCTV를 통해 짧게 소개되었다. 우주선은 지구 궤도를 14회 선회한 다음 발사된 지 21시간 만에 귀환했다. 나노미터 나노미터(, , 단위: nm)는 미터의 십억분의 일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이다. 1 나노미터는 10 m 이다. 미터 미터(, , , ; 기호 m)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 1790년,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할 당시, 거리의 기준을 지구로 삼았다. 이에 따라 지구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10,000km, 이 거리의 4배인 지구 전체 자오선 길이인 40,000km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었다. 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1797년 처음 영어에서의 활용이 보고되었다. 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며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인 청년 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 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 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 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그의 성은 하야시 즉, 하야시 가문 출신이었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 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쟁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 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다카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 및 콴청쯔()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 및 (다음 역인)하얼빈 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그의 나이 69살이었다.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 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뤘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太極旗)라 불린다. 태극기는 흰 바탕의 기 위에 짙은 적색과 남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고종이다.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이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직접 만들었고, 1882년 5월 22일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9월 박영효 등 일본 수신사 일행에 의해 사용되었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정식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은 국기가 없었으며, 조선국왕을 상징하는 어기는 있었다. 태극기는 조선국왕의 어기인 '태극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고종이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였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조선의 국기인 '청룡기'는 청의 국기인 ‘황룡기’의 도안에 착안하여 동쪽을 의미하는 색인 청색과 황룡기보다 적은 용의 발의 수를 제시함으로써, 마건충이 말한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고, 청의 속국임을 나타내게 하려 했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어기를 일부 변형하여 제작하였다. 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 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태극기는 광복 해방된 한국의 당연한 국기로 인식되어 1946년 1월 14일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교체하였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되어 통일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 정부가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안이 수렴되었으며, 여러 토론 끝에 최종적으로 '우리국기보양회'의 안이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로서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졌다. 1950년 깃봉제작법 제정계기로 태극기가 개정되었으나, 법으로 통합국기로 채택되었다. 1984년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국기법'이 제정되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다.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 해야한다.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2016년에 발생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를 비롯한 보수 단체들이 퇴진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탄핵 반대 시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가 특정 정치 세력의 상징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생기기 시작했다. 알고리즘 알고리즘(라틴어, 독일어: Algorithmus, , )은 수학과 컴퓨터 과학, 언어학 또는 관련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공식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진행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 산법(算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하마드 알콰리즈미(Muhammad al-Kwarizmi)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algorismus에서 따온 말이다. 영어로 algorithm의 발음 기호는 [ӕlgərɪðəm]이며 ð는 this [ðɪs]의 ð 발음이기 때문에, algorithm을 알고리즘으로 읽는 것은 this를 "지스"로, rhythm [rɪðəm]을 '리즘'으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정지 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이 정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없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 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 테이블, 유한 상태 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 과학의 방법, 을 이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 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 입력의 크기가 formula_1일 경우, 점근 표기법 formula_2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formula_17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 위키책 위키책(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 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위키주니어(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터키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MySQL MySQL(마이에스큐엘, )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형식의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 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 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 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는데,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Community Edition")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Standard Edition")이 존재한다.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 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 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노키아닷컴,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 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 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 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 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 95, 윈도 98, 윈도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 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 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 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 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 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 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현재,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 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 MS는 무료 지원과 중요 업데이트 제공을 끝으로 2005년 3월 말 VB6에 대한 표준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서비스 모두 앞으로 3년 동안은 유료 서비스로 남아있게 된다. MS는 2000년 VB.NET을 내놓았으며 그 후 VB6 이하 버전을 사용하는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감소해왔다. 비주얼 베이직을 등지고 떠난 많은 개발자들은 VB.NET으로 옮겨가지 않고, MS의 언어가 아닌 자바로 옮겨갔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현재, 북미 전체 개발자 중 비주얼 베이직 닷넷 개발자가 34%인데 비해 비주얼 베이직 개발자들은 45%다. 기존 VB6 응용 프로그램을 VB 닷넷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2008년 VB6 SP6에 대한 일부 취약한 보안 문제와 관련된 패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추후 공개할 윈도 8부터 비주얼 베이직 및 기반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 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 디버그 디버깅() 또는 디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정확성 또는 논리적인 오류(버그)를 검출하여 제거하는 과정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테스트 상의 체크,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 버그(bug)와 디버깅(debugging)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그레이스 호퍼가 기원이다. 그러나 "기술적 오류"라는 문맥에서의 "버그"는 적어도 1878년과 토머스 에디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웨어 버그 문서 참고) 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춘천시 춘천시(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지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301m)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곡구 시장 취락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현재의 도심을 이루었다. 소양호·춘천호·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 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신라에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춘천 유수군(留守郡)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춘천시는 강원도의 중서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시의 동 · 서 · 남쪽에는 넓은 춘천 분지가 전개되어 있다. 춘천은 북한강 침식 분지의 중심에 위치하며,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이다. 면적은 1,116.35 km²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²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철원군, 양구군을 춘천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유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유사한 득표율을 보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33,598표를 얻었고 이회창이 57,576표를 얻었으며 이인제가 38,011표를 얻어 이인제가 오히려 당선되었던 김대중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64,221표를 얻었고 노무현 54,187표를 얻었으며 권영길이 6,523표를 얻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66,113표를 얻었고 정동영이 22,632표를 얻었으며 문국현이 9,591표를 얻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 현 시장은 민선 7대로 당선된 제36대 이재수 시장이다. 현재 시의원 선거구는 총 8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1~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9년 현재 춘천시의회는 제10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 춘천시의회 정당별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경지 면적 7,015㏊ 중 논 2,222㏊, 밭 ,793㏊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 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 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 춘천은 의암호 · 춘천호 · 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 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 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 협업 소프트웨어 협업 소프트웨어, 혹은 그룹웨어(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 (slashdot)을 들 수 있다.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 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 그룹웨어는 클라우드 기반 협업 서비스 개념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해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Office 365와 구글의 G.Suite등이 서비스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Worksplace라는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차세대 그룹웨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의 경우 통신사형 그룹웨어, 호스팅형 그룹웨어, 개발형 그룹웨어가 있다. 인류학 인류학(人類學, )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 형질인류학 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 문화인류학 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고고학 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 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 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 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 19세기 중반에 학문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인간의 기원, 인종 분류, 비교해부학, 언어와 같은 주제가 유행했고,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 출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 개념을 언급함에 따라 인류발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문화 발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당대 유행하던 주제와 비교의 관점, 진화론·우생학 등 학문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은,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19세기 후반) 주류였던 인류학은 단선적인 역사개념을 토대로, 모든 인간집단은 문화적인 진화의 특정 단계들, 즉 '야만' 또는 '미개' 상태를 거쳐 '문명인'(예를 들면 서구 유럽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초기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강한 문화적인 편견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와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한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 입장은 모든 문화를 물리적인 환경, 문화적인 접촉,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의 독특한 산물로 파악했다. 이러한 견해에 뒤이어 경험적인 자료, 현지조사, 일정한 문화적·자연적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행한 가장 주요한 본보기가 된 사람은 문화사학파의 시조로 알려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였다. 1900년 초기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체질인류학) 의 기초를 닦았다. 보아스와 베네딕트, 미드, 사피어 등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 인류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화사학파는 문화적인 자료에 기능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 문화에 속한 여러 다양한 양식·특징·관습을 조화시켜 표현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파리대학교의 민족학연구소 설립자인 모스는 인간사회를 자기조절 할 뿐 아니라, 문화통합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총체적인 체계로 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 1930년대에 베네딕트가 행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화심리학이라는 문화인류학의 파생분야가 생겨났다. 베네딕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천천히 발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데, 구성원들은 환경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문화를 통해 정해진 방향을 따라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통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통합' 또는 가치체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와 인성(人性)의 상호관계는 폭넓은 연구주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인종이 분류되었으며, 고등 영장류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개괄이 이루어졌다. 1900년 멘델의 일반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ABO식 혈액형계가 처음 발견되면서 종(種)의 진화적인 변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형질인류학자들은 두개골 화석에서 나타난 증거를 바탕으로 약 50만 년 동안의 인류진화과정을 도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워드 커닝햄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위키의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중인 그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 카드(HyperCard)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또한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 시티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다. 자유 저작물 자유 저작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 쑹메이링 쑹메이링(,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여사는 세 명의 쑹 자매중에 한 명으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졌다. 상하이 출신으로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 원적지는 중화민국 광둥 성 광저우이다. 상하이에서 감리교 목사 출신의 사업가인 찰리 쑹의 여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 재학시절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기숙사 학교를 다녔다. 1917년 힐러리 클린턴 장관의 모교로 유명한 명문여대 웰즐리 대학교에서 영문학 전공, 철학 부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20년 장제스 총통을 처음 만났는데, 그가 그녀보다 10년 연상이고, 불교 신자였으며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어머니가 결혼에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원래 부인과 이혼하고,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으면서 결혼을 허락했다. 아버지인 찰리 쑹은 하이난 섬에서 태어난 객가 출신으로 추정되며, 쑹이라는 성은 그가 쿨리로서 미국에 있을 때 얻은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본래 성은 한 씨라고 한다. 쑹메이링은 신생활 운동을 시작하며 중국 정치에 활발하게 관여하게 된다. 장제스가 장군이 되고 중국 국민당의 총수가 되며 쑹메이링은 영어 번역가, 비서, 조언자로의 역할을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하던 쑹메이링은 중국과 서방의 문화에 모두 익숙해 양국 모두에서 개인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조지프 스틸웰은 그녀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예측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미국 방문 중에 3만 명의 인파를 모았고, "올해의 남편과 아내", "용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타임지의 표지를 두 차례 장식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중국인 최초로, 그리고 여자로서 두 번째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게 된다. 또한 카이로 회담에서는 남편의 통역으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했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남편인 장제스가 이끌던 중국 국민당의 패배가 사실상 확실해진 후, 그녀는 남편을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나 그녀의 큰 언니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아 중국 공산당을 지지했고,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고 지냈다. 분단 이후에도 쑹메이링은 중화민국의 국제적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국제 적십자사의 후원자, 대중국 영국 연합 원조 기금(British United Aid to China Fund)의 명예의장, 최초의 권리장전기념회원이었다. 1960년대 말에는 계속적으로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었다. 1975년 남편인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가 사망하자 1978년 타이완에서 미국 롱아일랜드의 가족 소유지로 이주해 왔다. 1995년에는 캐피톨 힐에서 마련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50주년과 그녀를 기념하는 자리에 오랜만에 나와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2000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 측에서 쑹메이링이 보냈다고 하는 자당의 후보 찬리엔을 무소속 후보 쑹추위보다 선호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공개하여, 그 편지의 진위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그녀는 2003년 3월 5일 자신의 106번째 생일을 맞았으며, 1998년 이래 거주해 오던 뉴욕의 맨해튼의 자신의 집에서 그해 10월에 향년 10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찰스 디킨스 찰스 존 허펌 디킨스(, ,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 소설가이다. 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 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위크 페이퍼스)을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갇히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 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 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 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였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오픈오피스 아파치 오픈오피스(, 이전 이름: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 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2000년 7월 19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스타오피스에 대한 오픈 소스 개발 커뮤니티를 형성할 의도로 LGPL과 SISSL에 따라 소스 코드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은 OpenOffice.org 이며, 2000년 10월 13일에 공식 웹 사이트가 열렸다. 2003년 초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로 버전 2.0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 확대, 성능 개선, 속도 향상과 메모리 사용량 감소, 폭넓은 스크립팅 지원, 그놈과의 향상된 통합, 보고서, 양식, 쿼리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론트엔드, 새로운 내장 SQL 데이터베이스, 향상된 사용성. 베타 버전은 2005년 4월에 출시되었다. 2005년 9월 2일, 썬은 SISSL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픈오피스 커뮤니티 협의회는 다시는 오픈오피스를 이중 라이선스로 제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버전은 LGPL만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2005년 10월 20일, 오픈오피스 2.0이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 버전 2.0이 출시된 지 8주 후에 업데이트 버전인 오픈오피스 2.0.1이 출시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버그 수정과 새로운 기능이 포함되었다. 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 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 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 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의한 직접적인 사용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빈 쉘(Bena Shell),자바 스크립트등도 연동시킬수있다. 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 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버전의 스타오피스의 전통을 유지하므로 여전히 API 참조에서도 스타오피스의 프레임을 찾아볼수있다. 탁상출판(DTP)용도를 완전히 지원한다. 다양한 출판물의 사이즈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며, 이미지 뿐만아니라 그래픽SVG등과 수학등의 수식을 삽입하는 출판물에 활용도가 높다. 오픈오피스는 ISO/IEC 표준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고유 형식으로 사용한다. 또한, 많은 예전 전용 형식들(예: 워드 퍼펙트, 로터스 소프트웨어, MS 웍스, 리치 텍스트 형식)을 읽을 수 있으며, 일부는 쓰기도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형식으로 일부 버전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보다 오히려 더 잘 읽어들인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 오픈 XML을 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응하여, 노벨은 오픈오피스를 위한 오피스 오픈 XML을 플러그인을 자유로운 BSD 라이선스 조건으로 내놓았는데(GNU GPL 그리고 LGPL 라이선스 라이브러리들과 병행하여), 이는 OpenOffice.org 프로젝트 안으로 포함되도록 제공될 것이다. 이는 오픈오피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만들어진 .docx 파일을 읽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오픈오피스 API는 유니버설 네트워크 오브젝트(UNO)로 알려진 컴포넌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CORBA와 같은 인터페이스 서술 언어에서 정의된 광범위한 인터페이스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되는 문서 파일 형식은 XML 형식과 여러 가지 내보내기/가져오기 필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픈오피스가 읽어들이는 모든 외부 형식들은 내부 XML 표현을 통해 서로 변환된다. XML을 디스크에 저장할 때에는 압축을 사용하여 똑같은 이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들보다 더 작다. 버전 1.0에서 문서 저장을 위해 쓰던 고유 파일 형식은 OASIS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 표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버전 2.0에서는 기본 파일 형식이 되었다. 제품군 개발 버전은 OpenOffice.org 웹 사이트의 개발자 존에서 몇 주마다 한 번씩 나오고 있다. 이 배포 버전들은 새로운 특징을 테스트해보고 싶거나 단순히 앞으로 있을 변경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실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오픈오피스 1.0은 운영되는 플랫폼을 위해서 고유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의 룩 앤드 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버전 2.0을 시작하면서, 오픈오피스는 고유 응용 프로그램들과 더 잘 어울리고 사용자들에게 더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플랫폼에 걸쳐 있는 고유 위젯 툴키트, 아이콘, 그리고 폰트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적용했다. 특히 GNOME과 KDE 양쪽과 통합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나 맥 OS X에서 뚜렷한데, 표준 유저 인터페이스가 윈도나 X-11 기반 데스크톱 환경 어느 쪽과는 눈에 보이게 많이 다르며, 대부분 오픈오피스 개발자와는 친숙하지 않은 프로그래밍 툴킷을 쓰라고 요구한다. 오에스 텐에서 오픈오피스를 쓸 수 있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공식 버전은 X11.app 또는 XDarwin을 설치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잘 테스트 된 유닉스 버전에 딱 들어맞는 포팅이다. 이는 기능으로는 유닉스 버전과는 동등하며,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 버전의 룩 앤드 필과 닮았다. 예를 들어 응용 프로그램은 화면 상단의 오에스 텐 메뉴 대신에 자체 메뉴를 사용한다. 이는 또한 오픈오피스를 위한 X11 형식의 시스템 글꼴이 필요한다(이는 응용 프로그램 설치 도중에 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아쿠아는 X11 오픈오피스를 대체하여 현재에는 정식 버전의 맥용 오픈오피스 지칭한다. 그러므로 오픈오피스 아쿠아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프로젝트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오피스와 네오오피스가 있고, 그룹웨어 솔루션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보완 프로그램도 있다. 이는 독자적인 포팅으로 OS X의 아쿠아 유저 인터페이스를 자바, 카본, 그리고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는 코코아 툴킷을 써서 통합을 구현하였다. 네오오피스는 OS X UI 표준에 꽤 가까우며, OS X에 설치된 글꼴과 프린터들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공식 오픈오피스 X11 릴리즈보다는 뒤처져서 발표되는데, 개발팀이 규모가 작고 유저 인터페이스를 포팅하는 데에 쓰는 기술 개발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OpenGroupware.org는 OpenOffice.org 문서, 캘렌더, 주소록,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그리고 블랙 보드를 공유할 수 있고 다른 그룹웨어 응용 프로그램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OOExtras에서는 문서 템플릿과 쓸모 있는 추가물들을 만들고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외부 프로그램에서 OpenOffice.org 문서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펄 확장기능들을 CPAN에서 구할 수 있다. 이들 라이브러리는 OpenOffice.org API를 쓰지 않는다. 이들은 펄 표준 압축/압축 풀기, XML 접근, 그리고 UTF-8 인코딩 모듈을 이용해서 OpenOffice.org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 “휴대용 OpenOffice.org”라고 부르는 OpenOffice.org 배포판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서 제품군을 돌리고자 설계되었다. OpenOffice.org보다 향상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옵션으로 다음이 제공되며, 개인과 업무용으로 무료로 쓸 수 있다. 버전 2.0.4부터, OpenOffice.org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기능을 지원한다. OpenOffice.org 서지 프로젝트는 강력한 참고문헌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 제품군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주요 추가물들은 2007년 후반이나 2008년 중반에 나올 표준 OpenOffice.org 릴리즈에 포함되기 위한 후보로 정해져 있으나, 프로그래머들의 선호도에 따라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 오픈오피스는 보안 팀을 따로 가동하고 있으며, 보안 사이트인 Secunia는 2007년 9월 현재까지 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패치 되지 않은 보안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카스퍼스키 연구소에서는 오픈오피스에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는 오픈오피스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는 없다. 프랑스 국방성의 비공개회의에서, 매크로에 관련된 보안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픈오피스 개발자들은 이 폭로에 가깝게 발표된 취약점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발표되지 않았으며, 국방부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추측되는 취약점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연구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오픈오피스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 미러 사이트, 피어투피어 네트워크, CD, 리눅스 배포판 등 다양한 경로로 배포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픈오피스 측에서는 표본 조사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전체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픈오피스와 스타오피스는 2004년에는 대형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14%를, 중소규모 비즈니스 시장에서는 2005년에 19%를 확보했다. 오픈오피스 웹 사이트는 2009년 10월 28일에 다운로드 수 1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 2005년 10월 4일, 선과 구글은 전략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합의 일부로써, 선은 구글 검색 바를 오픈오피스에 추가하고, 선과 구글은 공동 마케팅 활동은 물론 공동 연구 개발을 약속했으며, 구글은 오픈오피스 배포를 도울 것이다. 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 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 오피스 제품군 업무용 응용 소프트웨어 제품군()은 워드 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응용 소프트웨어의 모음이다. 리눅스 리눅스()는 리누스 토르발스가 커뮤니티 주체로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이다. 혹은 커널을 뜻하기도 한다. 리눅스는 자유 소프트웨어와 오픈 소스 개발의 가장 유명한 표본으로 들 수 있다. 리눅스는 다중 사용자, 다중 작업(멀티태스킹), 다중 스레드를 지원하는 네트워크 운영 체제(NOS)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 ‘리눅스’라는 용어는 리눅스 커널만을 뜻하지만,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라이브러리와 도구들이 포함된, 전체 운영 체제(GNU/리눅스라고도 알려진)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쓰인다. 리눅스 배포판은 핵심 시스템 외에 대다수 소프트웨어를 포함한다. 현재 200여 종류가 넘는 배포판이 존재한다. 초기 리눅스는 개개인의 애호자들이 광범위하게 개발하였다. 이후 리눅스는 IBM, HP와 같은 거대 IT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서버 분야에서 유닉스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 체제의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리눅스는 데스크톱 컴퓨터를 위한 운영 체제로서도 인기가 늘어가고 있다. 지지자와 분석자들은 이와 같은 성공을 벤더 독립성과 적은 개발비, 보안성과 안전성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리눅스는 처음에 인텔 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개발되었으나 현재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개인용 컴퓨터에서부터 슈퍼컴퓨터는 물론 휴대 전화, 스마트 TV, 개인용 비디오 레코더와 같은 임베디드 시스템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1983년 9월 리처드 스톨만은 GNU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GNU 프로젝트의 목적은 프리웨어로만 구성된 완전한 하나의 유닉스-유사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1989년, GNU는 시스템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텍스트 에디터, 셸 등의 커널을 제외한 시스템의 핵심적인 부분을 완성했다. 1990년 시작된 허드(Hurd) 커널은, 초기에는 BSD 4.4-Lite 커널을 기반으로 개발하려 했으나, 원래의 BSD 커널을 개발했던 버클리 프로그래머들과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했다. 1987년 리처드 스톨만은 허드를 마하(Mach)라는 마이크로 커널을 기반으로 개발하려 했다. 그러나 마하는 예상외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허드의 개발은 지체되었다. 그러던 중(1991년), 리눅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커널이 극적으로 등장하였다. 리눅스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대학원생인 리누스 토발즈가 취미 삼아 개발한 커널이었다. 토르발스는 원래 앤드루 스튜어트 타넨바움 교수가 운영 체제 디자인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육용 유닉스인 미닉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타넨바움이 미닉스를 다른 사람이 함부로 개조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자, 미닉스의 기능에 만족하지 못했던 토르발스는 새로운 운영 체제를 개발하고자 했다. 리눅스는 본래 운영 체제 위에서 실행되는 터미널 에뮬레이터였다. 초기에는 시리얼 포트를 이용한 간단한 신호를 주고 받는 작업밖에 할 수 없었지만, 토르발스는 디스크의 파일도 읽고, 쓰게 하고 싶었다. 이처럼 완전한 파일 제어가 가능해지자, 토르발스는 이것을 포직스(POSIX)에 호환되는 운영 체제 커널로 발전시키기로 마음먹고 이를 기반으로 리눅스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리눅스의 첫 번째 버전인 0.01은 1991년 9월 17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고, 첫 공식버전인 0.02는 같은해 10월에 발표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수천만의 개발자들이 리눅스 개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초창기 리눅스는 설치와 부팅을 하기 위해서는, 미닉스와 같은 다른 운영 체제가 필요했다. 그러나 리로(lilo)와 같은 부트로더가 개발되고, GNU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모든 유틸리티를 리눅스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리눅스는 빠른 속도로 미닉스를 능가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현재 리눅스는 X 윈도를 기반으로 한 GNOME이나 KDE와 같은 통합 데스크톱 환경과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있으며, 많은 기업과 단체의 후원을 받고 있다. 턱스(Tux)라는 이름의 펭귄은 1996년 래리 유윙이 창조한 리눅스의 마스코트이다.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발즈가 아닌, 아리 람케라는 사람이 지었다. 그는 ftp.funet.fi 사이트의 운영자였는데, 미리 리눅스라는 이름의 폴더를 ftp에 만들어, 토르발스가 커널을 올릴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토르발스는 원래 자신이 만든 커널의 이름을 프릭스(Freax)로 하려 했는데, 아리 람케의 주장으로 결국 리눅스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되었다. 리눅스라는 이름의 어원은 리누스의 미닉스(LINUs' miniX)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눅스는 현재 리누스 토르발스의 등록상표(trade mark)이다. 리눅스가 인기를 얻자, 개방형 소스(오픈 소스)의 특성에 힘입어 다양한 리눅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쏟아져 나왔다. 페도라, 우분투 등의 획기적인 운영 체제가 등장하였고, 구글에서 배포하는 모바일 운영 체제인 안드로이드도 리눅스 기반의 오픈소스 운영 체제이다. 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 리눅스 커널과 대부분 GNU 소프트웨어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라이선스를 따른다. GNU GPL의 조항에 따르면, 수정이 가능한 소스코드를 배포해야 하며 수정된 소스코드는 반드시 같은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한다. 때로 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라고 불린다. 1997년에 리누스 토르발스는 리눅스를 GPL로 만든 것이 완벽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라이선스보다 제약이 덜 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많은 라이브러리가 GNU LGPL(Lesser General Public License)과 같이 제약이 더 줄어든 라이선스를 사용하며 X 윈도 시스템의 경우에는 MIT 라이선스를 사용한다. 미국의 경우 리눅스는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이다. 1997년에 일부 개인이 상표를 등록하고 리눅스 배포자에게 상표권 사용료를 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토르발스 쪽에서도 상표권을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상표권 침해를 막기 위해서 등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현재 200여 종류가 넘는 배포판이 존재한다. 한국형 리눅스 배포판 MK OS http://mkosjkahn.blogspot.com 리눅스의 원형이 되는 UNIX가 애초부터 통신 네트워크를 지향하여 설계된것처럼 리눅스 역시 서버로 작동하는데 최적화되어있다. 리눅스 데스크탑환경은 이러한 서버기능에 기초가 되는 멀티 태스킹과 다중 사용자시스템에 GUI환경인 X 윈도 시스템을 올려놓은것이므로 대부분의 데스크팝 리눅스 배포판이라도 아파치 HTTP 서버등의 설치로 서버환경의 구축이 동시에 가능하다. 한편 리눅스 서버 배포판들은 GUI환경인 X 윈도 시스템이 빠져있고 서버기능 최적화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이 그자리를 메우고 있다. 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것을 지원하다. 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아니라 콘솔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환경인 GUI모드와 상호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 카카오뱅크는 2017년에 대한민국 금융권 중 최초로 전산 시스템에 리눅스를 도입하였다. 국민은행은 2020년도의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메인프레임과 함께 리눅스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는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유닉스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증권(주식) 거래소인 한국거래소(KRX)는 대한민국 자본 시장 거래 시스템 최초로 2014년에 리눅스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미국 미합중국(美合衆國, , 약자: US, USA), 약칭 합중국(合衆國, , U.S.) 또는 미국(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의 하와이주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에 있으며, 북측으로는 캐나다와 남측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다.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주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합중국은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 번째로 넓은 나라이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 미국의 경제는 2018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0조 4128억 달러로, 세계 1위 최대 경제 규모로 현재 2위인 중국이 국내 총생산 14조 925억 달러로 세계 2위 수준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 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하는 강대국이다.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the USA', 'America'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와 'the States'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 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데모님으로 '아메리칸'(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수식어는 'United States of America'이지만, 'America'이나 'U.S.'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수식어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 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 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 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 섬의 뉴암스테르담 등 허드슨 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 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 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17년에는 도널드 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천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천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 주 면적은 1백6십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또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 4위인데,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 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 강-미주리 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 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 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 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 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 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생물 보호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과 산림 벌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 환경문제는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국가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비(非)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남부, 북부와 중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한 서부 지역에 많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 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이 주된 산업으로 하고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 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도 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 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톨릭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가톨릭교회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목사인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 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일부 감리교회와 극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가톨릭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미국 정교회는 3%다.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한편, 미국 가톨릭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가톨릭 신자 새뮤얼 얼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로마 가톨릭과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 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 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법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군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드물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 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있다. 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 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있고,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있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한다.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 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 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 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부문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않으나, 미국은 옥수수 와 콩 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 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 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있다.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 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편이다.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한다.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있다. 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이 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 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 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이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튼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1942년 10월 23일 ~ 2008년 11월 4일)은 미국의 과학소설가이자 텔레비전·영화 프로듀서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와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1991)이 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텔레비전 시리즈 《ER》의 책임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 외 유명한 작품으로 《스피어》(Sphere) (1987), 《프레이》(Prey) (2002), 《콩고》(Congo),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타임라인》(Timeline)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과학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일을 다룬 《Travel》이 있다. 빌 게이츠 윌리엄 헨리 "빌" 게이츠 3세(,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자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창립했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베이직을 개발했다.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와 어머니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 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수학 수업을 면제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시스템에서 동작하는 틱택토 (Tic Tac Toe)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그가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동안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응용수학을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아햏햏 아햏햏은 다양한 뜻을 지니는 대표적인 인터넷 유행어이다. 아햏햏은 2002년과 2003년에 유행하였으며 국립국어연구원에 의해 짤방과 같이 신조어로 정식 인정된 적도 있으나(2002년 신어 보고서에 수록), 2003년까지 쓰였으나 2004년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아햏햏이 만들어진 디시인사이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햏햏은 디씨인사이드 사용자들이 이 모호하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을 표현했던 글로 의성어로는 어리석다는 뜻과 혀과 꼬이면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한다. 한자로는 亞行杏(아행행)으로 표기하며, 로마자로는 ahehheh으로 표기한다. 재미로 '아헿헿', '아핳핳', '으흫흫'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햏햏은 현대 국어에 잘 쓰이지 않는 'ㅎ' 받침을 써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발음을 생각지 않고 태어난 유행어이니만큼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상관 없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러 의견 중에서 발음 가능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2년 4월 엽기갤러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같은 내용의 댓글만 다는 고정리플 유저들이 생겨났다. 홀맨, 피바다, 정신과전문의 표진인 등등 고정리플들을 다는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던 중 한 유저가 "아햏햏 소피티아"라는 고정 리플을 달면서 엽기 갤러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햏자[행자, 行者]는 아햏햏으로부터 파생된 말의 하나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이들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거나 라면을 주로 먹으며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에 "아햏햏"을 쓰는 등의 자신들의 특징을 "수햏"하는 활동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평소에 합성사진을 만들어 공유하거나 게시물에 답변을 먼저 달기 위해 경쟁하는 등수놀이, 성인물 감상 등을 즐겨하였다. 아햏햏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자신을 햏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다(다른 사람을 부를 땐 쓴다). 햏자의 다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혹은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파생어로 햏테(햏력 테스트=햏자 능력 테스트;짤방을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맞추는 테스트)가 있다. 리처드 스톨먼 리처드 매슈 스톨먼(, 1953년 3월 16일 ~)은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 인물이며, GNU 프로젝트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설립자이다. 그는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또한 탁월한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그는 문서 편집기인 Emacs, GNU 컴파일러 모음 컴파일러, GDB 디버거 등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이들 모두를 GNU 프로젝트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도덕적, 정치적, 법적인 기초를 세우는 데 본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며, 이는 독점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급에 대한 대안이 되었다. 스톨먼은 1953년 3월 16일, 엘리스 립맨과 대니얼 스톨먼의 아들로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그의 고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시내에 있던 연구소인 IBM 뉴욕 과학센터에서 일하면서, 스톨먼은 고등학교 졸업 후의 여름을 보냈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IBM 7064를 위한 전처리기(pre-processor)를 PL/I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했다. 다음과 같이 그는 회상했다. 1971년에 하버드 대학의 신입생으로 스톨먼은 MIT 인공지능 실험실의 해커가 되었다. 1980년대, 스톨먼의 삶이었던 해커 공동체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특히, 실험실 내의 다른 해커들은 심볼릭스(Symbolics)라는 회사를 차리고는, 기존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그들만의 독점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1983년에서 1985년 사이의 2년동안, 스톨먼은 연구실 내에서 혼자 힘으로 심볼릭스의 결과물들과 똑같은 기능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의 독점을 막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그는 그의 세대 중에서 마지막 해커였다. 그는 비밀 유지 합의서에 사인하기를 요구받았으며, 그의 원칙인 다른 이들과의 공유나 이웃을 돕는 것에 위배되는 작업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1985년, 스톨먼은 GNU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유닉스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와 동기를 역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비영리 기관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내에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허드(Hurd) 커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GNU 시스템이 거의 동시에 완성되었다. 1991년, 리누스 토르발스는 GPL로 리눅스 커널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완벽하게 기능하는 GNU 시스템인 GNU/리눅스 운영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리처드 스톨먼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동기는 그를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코드를 공유하자는 개념에 동의하는 프로그래머들 중 많은 수가 스톨먼의 도덕주의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의 한 결과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대안인 오픈 소스 운동이 생겨났다. 스톨먼은 그의 작업들로 인해 다음과 같이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해킹 해킹()은 전자 회로나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웹사이트 등 각종 정보 체계가 본래의 설계자나 관리자,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은 동작을 일으키도록 하거나 체계 내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열람, 복제, 변경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이르는 말이다. 크래킹과 개념이 다르다. 해킹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에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접근하거나 허용된 접근 권한의 범위를 초과하여 침입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면, 크래킹은 그러한 불법적 접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본래 거칠게 자르거나 헤집는다는 뜻의 해크()이라는 낱말에 지금의 의미를 부여한 것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한 동아리 회원들이 자신들을 해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해킹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는데 초기에는 '개인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의 바탕 위에 컴퓨터와 컴퓨터간의 네트워크를 탐험하는 행위'를 말했다. 이후 악의적인 행동이 늘어나면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침입할 때 파괴적인 계획을 갖고 침입하는 행위'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명 크래킹이라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해킹이란 의미는 대체적으로 '어떠한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컴퓨터에 침입하는 모든 행위'로서 전산망을 통하여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엑세스 권한 없이 무단 침입하여 부당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부당 행위란 불법적인 시스템 사용, 불법적인 자료 열람, 유출 및 변조 등을 뜻한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는 '각종 정보 체계의 보안 취약점을 미리 알아내고 보완하는 데에 필요한 행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해킹을 "침해사고"의 한 원인으로 나열하고 있다. 뉴욕 (동음이의) 뉴욕(New York)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사전 사전(辭典, )은 낱말의 뜻을 서술하는 것 내지는 도표와 함께 모아 놓은 것, 또는 어떤 낱말과 대응하는 다른 나라말의 낱말을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많은 사전들은 발음기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응용, 역사, 어원, 그림, 사용법, 예문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로된 문서 형식의 사전을 많이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발견된 가장 오랜 사전은 BC 2300년경 쓰인 아카드 제국의 쐐기문자 조각으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대역쌍 목록이다. 우라 후불루 용어집(Urra=hubullu glossary)이라 불리는 이 사전의 이름은 용어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자가 붙는 채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근대 유럽의 사전들은 이중언어 사전으로 시작했다. 1502년에 나온 언어학자이자 수사인 암브로조 깔레피노(Ambrogio Calepino)의 코르누코파이아(Cornucopia)가 그것인데 이중언어사전이라기 보다는 다국어사전이다. 라틴어를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 독어로 설명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은 영어사전의 역사에서 한 이정표였다. 이전까지의 사전은 대부분 유사 어휘들을 분류해서 기술하는, 기린 옆에 사자를 나열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존슨은 그 모든 어휘를 예외 없이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첫 번째 근대적인 사전을 완성했다. 사전은 해당 항목의 대표형을 보여주는 표제어 아래 크게보아 뜻풀이와 예문 그리고 기타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뜻풀이는 해당 의미를 대상언어로 해설한 것이고 예문은 그 의미로 사용된 문장의 사례이다. 기타정보에는 발음, 품사, 통사구조, 형태정보, 관련어 등 해당 항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문법적 해설이나 부가적인 해설을 말한다. 사전은 크게 어학사전(辭典, dictionary)과 백과사전(百科事典, encyclopedia)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에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담는 책이라는 공통점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차이점이 있다. 기존에 종이책으로만 출간이 가능했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으나 인터넷 사전의 경우 사람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찾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의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일본어의 코지엔과 같은 어학사전들은 백과사전다운 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어학사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뜻풀이 대상언어에 따라 일국어사전과 이중언어사전이 있다. 일국어사전은 한국어사전, 영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같은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것도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이 더 자상한 뜻풀이를 담고있다. 이중언어사전은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다른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국어사전이라고도 한다. 같은 영한사전이라고 해도 영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국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편집 체제가 많이 다르다. 사전의 기술 태도에 따라서 어휘를 규정(pr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고 기술(d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다. 규정하는 것은 정의를 적고 이후 해당 정의에 해당되는 예문을 찾거나 추가설명하는 방식이고 기술하는 것은 말뭉치 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당 어휘의 사용빈도와 사용분포를 살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구분은 상대적일 뿐 기술사전도 규정하는 면이 있고 또 규정사전도 기술하는 면이 있다. 범용 사전(general dictionary)은 흔히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라 부르는 언어사전을 말한다.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구분된 의미는 많이 사용되는 순서로 나열될 수도 있고, 오래된 용법 순서대로 나열될 수도 있다. 일상어를 대상으로 한다. 특수 사전(specialized dictionary)은 한정적인 분야를 다룬 사전이다. 제주어 사전이라거나 윤동주 시어사전 처럼 특정 범위를 가지고 특화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전이다. 좀 더 특화된 사전들도 있다. 유의어사전(thesaurus)은 유의어, 반의어 등을 모아놓은 사전으로 글쓰기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유사한 형태로 단어의 계통을 정리해놓은 사전인 갈래사전이 있다.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을 말하는데, 한자문명권에서는 개별 한자가 특별한 형태소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한자어 말고도 개별 한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형태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듣기, 읽기에 적합한 수동사전(passive dictionary)이 있고 말하기, 쓰기에 적합한 능동사전(active dictionary)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특수 사전이 나오고 있다. 연어사전, 구동사사전, 관용구사전 등이 그것이다. 용어사전(specialized dictionary 혹은 glossary)은 해당 분야의 전문용어만을 모아놓은 용어집이다. 용어사전이 많이 모이면 백과사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백과라는 말 자체가 수많은 분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백과사전은 인간 지식중에서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균형있게 골라 서술한 책이다. 백과사전이 넓고 평평한 범위를 다루는 사전이고 용어사전은 좁고 깊은 범위를 다룬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백과사전은 일상적인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개별 영역의 전문적인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어학사전이 기능어를 많이 다룬다면 백과사전은 고유명사를 주로 다룬다고 해도 된다. 자료 자료(資料, , 데이터, )는 수, 영상, 단어 등의 형태로 된 의미 단위이다. 보통 연구나 조사 등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말하며, 자료를 의미있게 정리하면 정보가 된다. 즉, 자료는 또한 "주어진" 자료의 정신에 반대하여 높은 해석상의 본질을 가진 인문학 (특히 발전되가는 digital humanities) 에 사용되어 오고있다. 가능성의 엄청난 수와 그 주의를 지향하게한 하위 집단간의 구별을 위해 Peter Checkland는 용어 "capta" ("~을 취하다" 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apere"로 부터온) 를 소개했다.‘Johanna Drucker’는 인문학이 지식의 생성이 "놓여있고, 불완전하고, 구성적인" 과 같다고 단언함과, "자료" 의 사용은 별개이거나 관찰자 독립적인 현상과 같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추정들을 소개하기 위해 주장했다. 구성요소와 같은 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인 "capta"는 인문학에서의 시각적 묘사들을 위한 "자료"의 대안으로 제공되었다. 자료는 질적 자료와 양적 자료로 구분된다. 질적 자료(qualitative data, 정성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료이다. 분류 자료 또는 범주형 자료(categorical data)라고도 한다. 양적 자료(quantitative data, 정량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 자료이다. 또는 수치적 자료(Numerical data)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 온도, 지능지수, 절대온도, 가격, 주가지수, 실업률, 매출액, 기업내 과장의 수 등. 양적자료는 풍부한 의미를 상실할 여지를 비롯해서 수치가 갖는 약점도 있다. Parsimony(간결성)의 문제를 갖는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개념을 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측정하는 데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의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의미들이 배제된다. 그렇기에 어떤 정교한 양적 측정도 이에 상응하는 질적 기술에 비해 의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운영 체제 운영 체제(運營 體制, ) 또는 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시스템 하드웨어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하드웨어 추상화 플랫폼과 공통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이다. 최근에는 가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제 하드웨어가 아닌 하이퍼바이저 위에서 실행되기도 한다. 입출력과 메모리 할당과 같은 하드웨어 기능의 경우 운영 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 프로그램 코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 체제는 휴대 전화, 게임기에서부터 슈퍼컴퓨터, 웹 서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볼 수 있다. 운영 체제는 한 면으로는 소비자를, 다른 한 면으로는 프로그램 개발자를 함께 하나의 시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양면 플랫폼이다. 잘 알려진 현대의 PC 운영 체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X, 리눅스가 있다. 이 밖에 BSD, 유닉스 등의 PC용 운영 체제도 존재한다. 운영 체제는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와 CPU,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이들을 추상화하여 파일 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경우, 여러 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운영 체제는 이러한 모든 프로세스들을 스케줄링하여 마치 그들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 운영 체제는 컴퓨터 과학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싱글 태스킹 운영 체제는 한번에 오직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으나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운영 체제의 작업 스케줄링 하부 시스템에 의해 제각기 반복적으로 인터럽트 처리되는 여러 프로세스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프로세서 시간을 쪼개는 시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 멀티태스킹의 경우 선점형과 협동형(비선점형)이 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경우 운영 체제는 CPU 시간을 쪼개어 프로그램들 각각에 슬롯을 할당해준다. 솔라리스, 리눅스, 아미가OS와 같은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들은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한다. 협동형 멀티태스킹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른 프로세스들에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각 프로세스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16비트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협동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32비트 버전의 윈도우 NT, 윈도우 9x의 경우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단일 사용자 운영 체제는 사용자 구별이 없으나 여러 프로그램이 나란히 실행하는 것은 허용한다. 다중 사용자 운영 체제는 디스크 공간과 같은 리소스와 프로세스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멀티태스킹의 기본 개념을 확장하며, 여러 사용자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시분할 운영 체제들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태스크를 스케줄링하며, 프로세서 시간, 기억 공간, 인쇄, 기타 자원을 여러 사용자에게 비용적으로 할당하기 위한 회계 소프트웨어를 포함할 수 있다. 분산 운영 체제는 구별된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이들이 마치 하나의 컴퓨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서로 연결되어 통신하는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이 개발되면서 분산 컴퓨팅이 활성화되었다. 분산되는 연산들은 하나 이상의 컴퓨터에서 수행된다.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컴퓨터들이 협업을 할 때 분산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운영 체제에서, 배포 형식 및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판형은 하나의 가상 머신 이미지를 게스트 운영 체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실행 중인 여러 개의 가상 머신을 위한 도구로 이를 저장한다. 이 기법은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관리에 둘 다 사용되며, 대형 서버 웨어하우스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임베디드 운영 체제는 임베디드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PDA처럼 조그마한 기계에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제한된 수의 자원으로 동작한다. 매우 크기가 작고 극히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임베디드 운영 체제의 예로 윈도우 CE와 미닉스 3이 있다. 실시간 운영 체제는 특정한 짧은 시간 내에 이벤트나 데이터의 처리를 보증하는 운영 체제이다. 실시간 운영 체제는 싱글태스킹일 수도 있고, 멀티태스킹일 수도 있으며 멀티태스킹의 경우 특수한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라이브러리 운영 체제는 네트워크 등 일반적인 운영 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운영 체제는 많은 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커널인데, 커널은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프로세스를 제어한다. 얼마나 메모리를 읽고 쓸 것인지, 어느 프로세스를 실행할 것인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인지,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제어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사용자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운영 체제의 기능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아이콘과 바탕 화면을 지닌 그래픽이나 명령 줄을 지닌 문자를 이룰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기능으로 API가 있는데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코드 라이브러리가 한데 모여 있으며 운영 체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운영 체제에 따라 이러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가 실질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윈도우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운영 체제의 일부로 여기는데 반해 수많은 버전의 리눅스는 그렇지 않다. 운영 체제의 중요한 목적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들을 제외한 컴퓨터 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 세 부분은 운영 체제, 셸, 그리고 (낮은 수준의) 필수 유틸리티들이다. 셸은 사용자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본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런 셸의 행동들은 결국 운영 체제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 된다. bash 등의 이러한 셸은 그러나 엄밀히 운영 체제의 일부가 아니며 운영 체제 입장에서는 셸이나 필수 유틸리티들이나 모두 응용 프로그램일뿐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수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하드웨어 ↔ 운영 체제 ↔ 셸 / 응용 프로그램 ↔ 사용자 초기의 컴퓨터들은 계산기처럼 일련의 단일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속으로 자동 실행하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레지던트 모니터와 같이, 1950년대에는 기본적인 운영 체제의 기능들이 개발되었다. 운영 체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현대의 운영 체제와 같이 더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드웨어 기능에 런타임 라이브러리, 인터럽트, 병렬 처리가 추가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애플, 아타리, IBM, 아미가와 같은 기업 덕택에 1980년대에 유명해졌다. 이 업체들은 한때 메인프레임과 미니 컴퓨터에 널리 쓰였던 운영 체제 기능을 추가하였다. 나중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같은 수많은 기능들이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를 위해 개별적으로 개발되었다. 1950년대 초에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각 사용자는 컴퓨터만을 사용하여 예약된 시간에 천공 카드와 테이프의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접근하여야 했다.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적재되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 동작하였다. 토글 스위치와 패널 불빛을 이용하여 앞면 패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온 컴퓨터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셈블리어로부터의 기계어 발생이나 입출력과 같은 기능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용자 프로그램을 연결해 놓은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때가 바로 현대 운영 체제의 탄생 시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었다. 1950년대를 통해 일괄 처리, 입출력 인터럽트, 버퍼링, 멀티태스킹, 스풀링, 런타임 라이브러리, 파일 정렬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한 수많은 주요 기능들이 운영 체제 분야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은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응용 소프트웨어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 1959년에 IBM 704, 709, 7090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한 셰어 운영 체제(SHARE)가 통합 유틸리티로 출시되었다.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는 메인프레임과 미니컴퓨터를 위해 개발해 둔 운영 체제에 대한 필요성도 그만한 용량도 없었다. 모니터스("Monitors")라는 이름의 매우 작은 운영 체제가 개발되었으며 롬에서 불러들였다. 눈에 띄는 초기의 디스크 기반 운영 체제로 CP/M이 있었는데 수많은 초기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지원되었으며 IBM PC에 널리 쓰였던 MS-DOS(IBM 버전의 것은 IBM DOS, 곧 PC-DOS로 불렸다)와 매우 비슷하였다. 1980년대에 애플 컴퓨터사(지금의 애플사)가 애플 II 시리즈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버리고, 혁신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맥 OS 운영 체제에 갖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도입하였다. 32비트 아키텍처에 페이징 기능을 갖춘 인텔 80386 CPU 칩이 도입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초기의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실행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EC용 VMS 운영 체제를 개발하였던 데이비드 커틀러를 해고함으로써 이러한 진행에 응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 체제 기반을 다룰 윈도우 NT 운영 체제 개발을 이끌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NeXT 컴퓨터사를 차렸고 유닉스 계열 넥스트스텝 운영 체제를 개발하였다. 넥스트스텝은 훗날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FreeBSD 코드가 맥 OS X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이 사유 유닉스 운영 체제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유닉스 여러 곳의 기능을 복제하는 데 큰 성공을 이루자 GNU 허드 커널 개발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1991년 핀란드 컴퓨터 과학부 학생인 리누스 토르발스는 최초의 리눅스 커널 버전을 출시하였다. 곧 GNU 유저랜드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병합되면서 컴퓨터 운영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BSD는 유닉스 계열로서 1970년대에 시작하여 수많은 미니컴퓨터에 포팅되었으며 마침내 FreeBSD, NetBSD, OpenBSD와 같이 개인용 컴퓨터에도 쓰이게 되었다. 유닉스는 처음에는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다. 켄 톰프슨은 BCPL에 기반을 둔 B를 작성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닉스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멀틱스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C는 B를 대체하였으며 유닉스는 현대의 모든 운영 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크고 복잡한 계열의 상호 관련 운영 체제로 발전하였다. (역사 참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는 유닉스에서 파생한 계열이며 시스템 V, BSD, GNU/리눅스,와 같은 주된 하부 분류가 몇 가지 있다. 유닉스라는 이름은 어느 운영 체제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표명한 오픈 그룹의 상표이다. 유닉스 계열은 원래의 유닉스를 닮은 커다란 집합의 운영 체제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인다.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의 서버와 학술 및 공학 환경에서의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쓰인다. GNU/리눅스와 BSD와 같은 자유 유닉스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HP의 HP-UX와 IBM의 AIX는 제조업체의 하드웨어에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솔라리스와 같은 것들은 x86 서버와 PC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넥스트스텝, 마하, FreeBSD에서 파생한 하이브리드 커널 기반의 BSD류인 애플의 맥 OS X은 유닉스 계열이 아니었던 애플의 초기 맥 OS를 대체하였다. 유닉스의 정보 처리 상호 운용성은 POSIX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드러난다. POSIX 표준은 이것이 비록 다양한 유닉스 계열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어떠한 운영 체제에라도 적용할 수 있다. 유닉스 계열의 하부 집합 가운데 하나로 BSD 계열이 있다. 여기에는 FreeBSD, NetBSD, OpenBSD를 포함한다. 이러한 운영 체제들은 웹 서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로의 역할도 한다. 인터넷은 BSD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데 흔히 쓰이는 현재의 프로토콜들 가운데 다수가 BSD에서 정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또, 월드 와이드 웹은 넥스트스텝이라는 BSD 기반 운영 체제를 실행하는 수많은 컴퓨터에서 처음 입증되었다. BSD는 유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는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 과학부의 학생들과 직원들은 그곳에서 문서 편집기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러한 것들에 일찍이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 대학교가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이 설치된 새로운 VAX 컴퓨터를 1978년에 도입하였을 때 대학생들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하여 유닉스를 수정하였다. 미국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이에 관심을 가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교와 회사, 정부 단체들은 이를 알아채고 AT&T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닌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스텝이라 불리는 BSD류를 실행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제조하였던 기업 NeXT사를 세웠다. 이러한 컴퓨터들 가운데 하나는 팀 버너스 리가 최초의 웹 서버로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맥 OS X은 매킨토시 컴퓨터에 미리 최신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애플이 개발하여 판매한 사유 그래픽 운영 체제이다. 맥 OS X은 1984년 이후로 애플의 사유 운영 체제였던 원래의 맥 OS의 뒤를 잇는 것이다. 전작과 달리 맥 OS X은 1980년대 2/4 분기부터 애플이 1987년 초에 이 회사를 사들일 때까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로 만든 유닉스 운영 체제이다. 이 운영 체제는 1999년에 맥 OS X 서버 1.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하였으며 그 뒤 2001년 3월에 데스크톱 지향 버전인 맥 OS X v10.0을 출시하였다. 그 뒤로 맥 OS X의 "클라이언트", "서버" 에디션 여섯 가지가 공개되었으며, 최신 제품은 2014년에 출시된 OS X 요세미티이다. 서버 에디션인 맥 OS X 서버는 구조적으로 데스크톱의 것과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서버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맥 OS X은 메일 전송 에이전트, 삼바, LDAP 서버, DNS 등을 비롯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워크 그룹 관리 및 관리 소프트웨어 도구를 포함하고 있다.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라스 맥길로이는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운영 체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벨 연구소의 프로그래머들은 현대의 배포 환경을 위해 계획된, 플랜 9와 인페르노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플랜 9는 네트워킹 운영 체제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래픽이 제공되지 않았던 유닉스와 달리 그래픽을 내장하였다. 하에 출시되었다. 인페르노는 Vita Nuova Holdings에 팔려 GPL/MIT 라이선스로 배포되고 있다. 리눅스는 BSD 및 그 변종과 달리 실제 유닉스 코드 없이 개발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슈퍼컴퓨터에서부터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에 쓰인다. 리눅스 커널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배포되므로 누구나 코드를 읽고 수정할 수 있다. 리눅스는 다양한 전자 기기에서 동작하도록 수정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는 완전한 원래의 코드를 제외하고 유닉스와 비슷하게 완전하게 자유롭고 열려 있는 운영 체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그래머들의 협동적인 노고 그 자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리눅스의 수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 까닭에 리눅스는 GNU/리눅스로 불리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 체제를 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에 배포된다. 이 가운데 리눅스 커널은 핀란드의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의 부차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1년에 토르발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학생과 프로그래머를 위한 뉴스그룹에 게시하였다. 크롬은 구글이 리눅스 커널을 기반으로 설계한 운영 체제이다. 크롬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으로 보내는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도 없는 웹 브라우저만을 이용하며 문서 작성이나 미디어 보기와 같은 작업을 위해 웹 브라우저에 쓰이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개인용 컴퓨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사유 운영 체제 계열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가장 흔한 운영 체제이며 약 9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신 버전은 개인용 컴퓨터의 경우 윈도우 10이, 서버의 경우 윈도우 서버 2012 R2이다. 1981년에 IBM PC용의 오래된 MS-DOS 운영 체제에 추가 기능으로 나온 것이 기원이다. 198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의 비즈니스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산업 표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XP를 시작으로 현대의 모든 윈도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나오는 윈도우 버전은 IA-32와 x86-64 프로세서에서 동작하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버전들은 다른 아키텍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틈새 시장에 존재하는 오래된 운영 체제로는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애플 맥 OS X의 유닉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전작 맥 OS, 또 BeOS와 XTS-300이 있다. RISC OS, MorphOS, 아미가OS 4도 열성적인 커뮤니티와 전문 분야를 위한 소수 플랫폼으로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DEC의 OpenVMS도 휴렛 패커드가 계속 개발하고 있다. 도스 등의 운영 체제도 FreeDOS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의 운영 체제는 운영 체제 교육용이나 학술용, 또는 운영 체제 개념의 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쓰인다. 학술과 연구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 미닉스가 있다. 반면 순수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는 싱귤래리티가 있다. 운영 체제를 이루는 요소는 컴퓨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 금융 데이터베이스부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는 모두 소프트웨어에 쓰이는 하드웨어가 단순히 마우스나 키보드만 이용하든지 아니면 인터넷 연결같이 복잡한 방식을 이용하든지 상관 없이 하드웨어를 이용하기 위하여 운영 체제로 말미암아 실행해야 한다. 펌웨어와 장치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커널은 모든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에 대한 가장 기초 수준의 제어권을 제공한다. 커널은 램을 통해 프로그램을 위한 메모리 접근을 관리하며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할지를 결정하며 CPU의 동작 상태를 늘 최적으로 설정 및 초기화하고 디스크, 테이프, 플래시 메모리와 같은 매체의 파일 시스템을 갖춘 장시간 비휘발성 기억 장치를 위한 데이터를 정리한다. 운영 체제 내에서의 커널의 영역과 그 구성에 따라 모노리딕 커널(monolithic kernel), 마이크로 커널(micro kernel) 등으로 분류한다. 운영 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 운영 체제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단순하게 하는 서비스의 집합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운영 체제가 프로세스를 만든다. 커널은 메모리와 다른 자원을 할당하여 프로세스를 만들며, 이로써 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메모리에 프로그램 코드를 적재하며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 뒤 프로그램은 사용자 및 장치와 상호작용한 다음 원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운영 체제는 프로세스들을 생성하거나 삭제하고, 중단시키거나 재개시킨다. 프로세스 간의 동기화와 통신, 교착상태 처리에 관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인터럽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법을 운영 체제에 제공하므로 운영 체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작을 요구하는 이벤트(폴링)를 위한 다양한 소스의 입력을 운영 체제가 감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스택이 매우 작은 구형 운영 체제에서 볼 수 있으나 스택이 큰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는 드문 편이다. 인터럽트 기반의 프로그래밍은 현대의 대부분의 CPU에서 직접적으로 지원된다. 인터럽트는 자동으로 로컬 레지스터 컨텍스트를 저장하고 이벤트에 반응하는 특정 코드를 실행하는 방법을 컴퓨터에 제공한다. 매우 기초적인 컴퓨터들은 모두 하드웨어 인터럽트들을 지원하며 이벤트가 발생할 때 실행될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지정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운영 체제에 인터럽트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운영 체제의 커널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어권을 커널에 넘겨준다. 그 뒤 커널은 요청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 메모리(또는 공유 자원)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하면 커널이 집중할 수 있게 인터럽트를 발생시킨다. 현대의 CPU는 여러 모드의 명령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CPU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보호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는 메모리의 기록 및 삭제 방식을 제어하는 것과 그래픽 카드와 같은 장치와 통신하는 것과 같이 운영 체제의 커널이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액세스해야 하는 낮은 수준의 태스크를 위해 사용한다. 반대로 보호 모드는 그 밖의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된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보호 모드 안에서 동작하며, 수퍼바이저 모드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커널과 통신해야만 하드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CPU는 오래된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모드와 같이 보호 모드와 비슷한 다른 모드들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32비트에서 16비트 프로세서를, 아니면 64비트에서 32비트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할 때) 컴퓨터가 처음 시동할 때 자동으로 수퍼바이저 모드에서 실행된다. 컴퓨터를 켜자마다 먼저 실행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바이오스와 부트로더이며 운영 체제는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접근한다. 그리고 운영 체제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제어권을 보낼 때 CPU를 보호 모드에 놓을 수 있다. 멀티프로그래밍 운영 체제 커널은 현재 프로그램이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메모리를 관리해야 한다. 이로써 어느 특정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메모리와 상호 작용하지 않게 한다. 프로그램이 시분할하므로 각 프로그램은 메모리에 독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페이징이나 세그먼테이션과 같은 가상 메모리 어드레싱을 이용하면 커널은 어느 메모리를 각 프로그램이 주어진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영 체제가 여러 개의 태스크에 같은 메모리 위치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 범위에 없는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할당되면 커널은 프로그램이 마치 할당된 메모리를 초과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터럽트 처리한다. 유닉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터럽트를 페이지 실패라고 부른다. 커널이 페이지 실패를 감지하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프로그램의 가상 메모리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써 요청된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 자주 접근하지 않는 메모리는 일시적으로 디스크나 다른 매체에 저장하여 다른 프로그램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이를 스왑 처리(swapping)라고 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특정한 메모리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나의 컴퓨터에 실행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태스크들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 준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한 번에 최대 한 두개를 수행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시분할을 통해 수행된다. 다시 말해 각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실행 시간의 일부를 사용한다. 운영 체제 커널은 스케줄러라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각 프로그램이 실행에 소비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서 실행 제어권이 프로그램에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제어권은 프로그램이 CPU와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커널로 말미암아 프로세스로 넘어간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어권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하여 커널로 반환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 간의 제어권 이동을 이른바 문맥 교환이라고 부른다.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것은 모든 운영 체제의 기본 기능이다. 컴퓨터는 더 빠른 접근, 더 높은 신뢰성을 위해, 또 드라이브의 남은 공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파일을 이용하여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파일을 디스크에 저장하는 이러한 방식을 파일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파일이 이름과 특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또, 이러한 파일들을 디렉터리 트리로 정렬되는 특정 계급의 디렉터리와 폴더에 저장하게 한다. 초기의 운영 체제는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디스크 드라이브와 한 종류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였다. 초기의 파일 시스템들은 용량, 속도, 또 파일 이름과 디렉터리 구조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제한은 설계된 운영 체제의 제한에 반영되므로 특정한 운영 체제가 하나 이상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더 단순한 수많은 운영 체제들은 기억 장치의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제한된 옵션들을 지원하였는데, 유닉스와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 체제들은 가상 파일 시스템(VFS)이라는 기술을 지원한다. 유닉스와 같은 운영 체제는 공통 API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이나 디자인에 관계 없이 다양한 기억 장치를 지원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장치 접근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VFS는 다양한 파일 시스템에,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와 파일 시스템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프로그램들이 무제한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운영 체제에 제공한다. 연결된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기억 장치들은 장치 드라이버를 통해 접근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드라이브의 특정한 언어를 이해하고 이 언어를 운영 체제가 모든 디스크 드라이브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유닉스에서 이를 블록 장치의 언어라고 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하드웨어 장치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특정한 종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장치 드라이버의 주된 설계 목적은 추상화이다. 하드웨어의 모델은, 특히 같은 종류의 장치라 하더라도 각기 다르다. 제조업체들은 더 신뢰할만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더 새로운 모델들을 출시하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은 다르게 동작하기도 한다. 컴퓨터들과 운영 체제들은 현재든 앞으로든 모든 장치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 체제들은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장치가 제어될 것인지를 지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장치 드라이버의 기능이 이러한 운영 체제의 함수 호출을 장치 특유의 호출로 번역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제어되는 새로운 장치는 적절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동작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는 운영 체제의 관점에서 장치가 평소처럼 동작하과 있음을 보증하게 된다. 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2.6 미만의 리눅스 버전에서는 모든 드라이버 실행이 협동적이어서, 드라이버가 무한 루프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더 최근에 나온 운영 체제들은 커널 선점을 사용한다. 이 경우 태스크 제공을 위해 커널이 드라이버를 간섭하며 장치 드라이버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프로세스로부터 분리시키며 더 많은 태스크를 부여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다양한 통신 프로토콜, 하드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서로 비슷하지 않은 운영 체제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자원(유무선 연결을 이용한 연산, 파일, 프린터, 스캐너)을 공유하기 위해 같은 망에 참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컴퓨터의 운영 체제가 원격 컴퓨터의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치 리소스가 로컬 컴퓨터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컴퓨터의 그래픽, 사운드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네트워킹 파일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통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부 네트워크 서비스는 컴퓨터의 자원을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SSH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용자들이 컴퓨터의 명령 줄 인터페이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컴퓨터의 보안은 수많은 기술이 올바르게 동작하고 있는 지에 달려 있다. 또, 운영 체제는 보안을 위하여 특정 환경에 대한 권한을 사용자나 프로그램에 개별적으로 설정하고 인증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보안은 특히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절하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사용자는 개인 파일을 다른 사용자가 읽을 수 없게 할 수 있다. 어떠한 종류의 입력을 받는 모든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이를 위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컴퓨터 명령어를 한 줄씩 입력해 나가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와 일반적으로 창, 단추, 아이콘을 이루는 시각 환경이 존재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나뉜다. 현대의 대부분의 컴퓨터 운영 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맥 OS와 같은 일부 컴퓨터 시스템에서 GUI는 커널에 통합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운영 체제의 서비스가 아니지만 운영 체제 커널에 통합하면 GUI가 출력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문맥 교환을 없앰으로써 GUI를 더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운영 체제로는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커널과 운영 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듈성이 있다. 1980년대 유닉스에서 VMS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운영 체제였다. GNU/리눅스 및 맥 OS X 또한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윈도우 비스타와 같은 현대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거의 사용자 공간에 위치한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지만 윈도 NT 4.0과 윈도우 서버 2003 버전 사이의 그래픽 구현 루틴은 거의 커널 공간에 존재한다. 윈도우 9x는 인터페이스와 커널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 수많은 컴퓨터 운영 체제는 사용자가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설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X 윈도 시스템을 GNOME이나 KDE와 함께 쓰면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시스템에서 이러한 설정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윈도우 셸 치환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윈도우 셸을 교체하는 방식을 쓰지만 윈도우로부터 셸 자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실시간 운영 체제 (RTOS)는 정해진 기간 안에 수행이 끝나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하여 만들어진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이다. (실시간 연산) 이러한 응용 프로그램들에는 조그마한 임베디드 시스템,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산업 로봇, 우주선, 산업 제어 장치, 일부 대형 컴퓨터 시스템 등이 있다. 초기의 대형 실시간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아메리칸 항공과 IBM이 사브레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하여 개발한 트랜잭션 프로세싱 퍼실리티(TPF)가 있다. 일부 임베디드 시스템은 실시간 연산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심비안 OS, 팜 OS, BSD,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 체제를 이용한다. 운영 체제 개발은 컴퓨팅에 취미를 둔 사람들이 관여하는 가장 복잡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취미로 만드는 운영 체제는 기존의 운영 체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코드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들과 활동 개발자들의 수는 적은 편이다. 취미 활동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의 예로는 ReactOS와 Syllable 등이 있다.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운영 체제는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가지므로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 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음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요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에 너무 많은 기능을 포함시켜 응용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한글날 한글날 한글날() 또는 조선글날(朝鮮--)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인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으로 쓰여 있다. 이를 근거로 1926년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당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지고, 이 날을 ‘가갸글’이라는 그때 한글의 이름에 따라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뒤인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인 그레고리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에 율리우스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여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하였다. 이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 상순에 책으로 펴냈다고 되어 있는데,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된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 2005년, 2011년에는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되면서, 제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별표]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별표]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픽 소프트웨어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람이 이미지나 모델을 시각적으로(visually)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또는 프로그램 모음을 의미한다. 화상 편집 소프트웨어라고도 한다. 크게 공간에 따라 3차원(입체)과 2차원(평면)으로 나뉘며, 좌표 설정 방식에 따라 벡터방식과 래스터(픽셀) 방식으로 나뉜다. 슈퍼페인트(, 1973년 4월)가 최초의 그래픽 응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이다. Fauve Matisse(이후 매크로미디어 xRes로 명칭 변경)는 1990년대 초에 선구적인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객 소프트웨어 내에 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였다. 현재 미국에서는 어도비 포토샵이 가장 흔히 사용되고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픽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코렐드로는 유럽에서 어도비 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GIMP는 어도비 포토샵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튜링 기계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formula_1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formula_9를 formula_10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등이 있다.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 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컴퓨터 글꼴 글꼴은 컴퓨터로 보는 글자들의 모양새 또는 그 전자적 데이터 파일을 뜻한다. 크게 비트맵 방식과 벡터, 그리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운영 체제에서 사용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글꼴은 벡터 방식에 비트맵 글꼴을 임베딩(추가)하여 넣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비트맵 글꼴만으로는 축소, 확대, 출력에 문제가 있어(일반적으로는 확대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글꼴 규격에는 확대, 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벡터 방식을 같이 이용하는 것이다. 비트맵 방식은 화면에서 해당 비트맵 그대로 보이는 반면, 벡터 방식은 아웃라인이 화면에 표현되면서 왜곡이 발생하게 되고 원치 않는 형태로 깨져보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특정 크기에 맞추어 비트맵 디자인을 한 후, 벡터 방식에 임베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글꼴을 글자들의 너비 변화에 따라 고정폭 글꼴과 가변폭 글꼴로 나눌 수 있다. 좀 더 세밀하게 모습을 조정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를테면 'VA'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커닝(자간 여백)이 많은 경우 폰트 자체에 커닝 문자 쌍의 정보가 있거나 수동으로 커닝을 직접 지정해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문자들에 따라서 가변폭 글꼴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예 쓰기 힘든 경우도 자주 있다. 이를테면, 한자는 가변폭 글꼴을 만들기 힘들며, 그 영향으로 가나나 한글 글꼴도 고정폭인 경우가 많다. 글꼴은 컴퓨터에서 표시될때에 여러가지 속성 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타입 1, 타입 3 글꼴은 어도비사가 전문 디지털 타이프세팅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입방 베지에 곡선의 외곽선 글꼴이 된다. 타입 1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부분집합에 제한을 받으며 어도비의 힌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타입 3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무제한적 사용을 허용하지만 힌팅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저해상도의 기기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 컴퓨터 화면)에서 깨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오픈타입은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설계한 스마트폰트 시스템이다. 오픈타입 글꼴은 넓은 범위의 메타데이터를 곁들여 트루타입이나 타입 1 (실제로 CFF) 포맷의 외곽선을 포함하고 있다. 트루타입은 애플이 개발한 글꼴 체제이다. 타입 1 글꼴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타입 1 글꼴과 달리 트루타입은 베지에 곡선으로 그려진다. 현재에 이르러 널리 쓰이고 있으며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 메타폰트(METAFONT)는 다른 종류의 글꼴이다. 트루타입과 달리 벡터 글꼴의 체제를 갖추었다. 웹 폰트는 동적 폰트(dynamic fo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동적 폰트는 글꼴이 사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도 볼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된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웹 폰트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웹 폰트의 포맷은 비트스트림의 .pfr 형식과 마이크로소프트의 .eot 형식, 이렇게 2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pfr은 넷스케이프와 모질라까지 지원하고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반면, .eo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특정 버전 이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지원되고 파일 형식은 공개되지 않아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eot 형식은 MS의 WEFT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으며, 웹폰트가 사용될 사이트의 URL(인터넷 주소)을 넣을 수 있어 해당 URL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불법 사용 또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웹 폰트가 사용된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웹 브라우저에서 웹폰트를 접속자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내려받아 해당 웹페이지를 웹폰트로 보여준다. 따라서 웹폰트의 파일 용량이 크면 클수록 내려 받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고, 실제 웹페이지가 웹 폰트로 대체되어 표시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웹 폰트를 쓰는 일부 포털에서는 해당 글꼴이 비트맵 방식이면 출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eot와 pfr 말고도 GlyphGate에서 개발한 웹 폰트 형태가 있다. 앤티에일리어싱은 높은 해상도의 신호를 낮은 해상도에서 나타낼 때 생기는 에일리어싱(깨진 패턴)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운영 체제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이 기술을 기본 지원하고 있다. 클리어타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기술로, 액정 화면에서 더욱 깨끗하게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액정 화면의 한 개 픽셀은 RGB(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3개의 서브픽셀(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클리어타입은 가로방향으로만 RGB의 서브픽셀을 이용한 안티에일리어싱 효과가 나기 때문에, 세로방향에 대해서는 계단 현상의 느낌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어타입에 세로방향으로 안티알리아싱 효과를 더한 래스터라이징 기술을 개발하여 발표하였고, 그로 인해, 외곽선의 계단현상이 최소화되어 보다 나은 래스터라이징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정확한 래스터라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힌팅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거의 모든 상용 한글 글꼴에는 제대로 된 힌팅 정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클리어타입의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선명성에서 큰 향상은 없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비스타, 윈도 7에 기본 글꼴로 사용되는 한글 글꼴 ‘맑은 고딕’은 한글 글꼴의 힌팅 정보를 포함하여 클리어타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이다. 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일당 독재 체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공산당 가운데 하나이다. 약칭은 중공()이다. 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 마오쩌둥, 리다자오, 리다, 마오둔, 덩중샤, 장궈타오, 리한쥔, 위슈쑹 등이 초기 멤버였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천두슈 등이 공산주의 소조를 만들었고, 1920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등이 공산주의 소조를 만들었으며,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회로부터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그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해가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을 거쳐 1949년까지 중화민국에 맞서 도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마오쩌둥 진영에 유입시켰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인민민주독재를 여러 방면으로 파급해갔으며, 두 번째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를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계급 투쟁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중국공산당은 2014년 기준으로 86,700,000명의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이다. 중국은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로 베이징 대학 대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는 독재적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 정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다. 덩샤오핑 의 개혁개방 정책과 현대화 이후 상대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공산당 이외의 인물과 조직의 공식적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 및 그 산하 위원회가 모든 중요한 정부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에 대해 정치적인 지침을 내리고 있으므로 비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의 규율에 도전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정부 조직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은 굉장히 강력하며 노동조합도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하위의 당 기구들은 아래와 같다. 당 권력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이다. 중앙 정치국 위원과 마찬가지로, 상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은 전국대회와 함께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발표된다. 상임위원회원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전에 비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2년 16대 전국 대표대회 때 위원회의 인원은 9명으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정치 권력 중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 두 가지 주요기관이 더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중국공산당은 당원을 받아들일 때 능력이 검증된 사람만 뽑도록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중국공산당은 입당을 희망하는 자에 대해 3년 동안의 헌신과 직장에서의 능력, 타인과의 관계 등을 관찰하며 공산당 당원과 비공산당 당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입당 여부를 검토한다.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난 1년 동안의 실적을 판단하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2002년 11월에 열린 제16대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주석 겸 비서장이 대표적인 정책 변화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인민의 민주 독재" 상태이지만, 기업가와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이 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2008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는 농촌경제 성장을 위한 토지 경작권의 매매허용(토지유동화정책), 통화와 재정정책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한 거시 경제정책마련 등의 변화가 있었다. 워싱턴 워싱턴(, )은 다음을 가리킨다. 문희준 문희준(文熙俊, 1978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보이 그룹 H.O.T. (High-five Of Teenagers) 의 리더를 맡았으며, 팀이 해체된 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곡으로〈Alone〉, 〈Red & White〉, 〈아낌없이 주는 나무〉, 〈G선상의 아리아〉, 〈전설〉, 〈기억이란 작은 마을〉 등이 있다. 2018년 2월 15일 완전체 전원 재결합을 했다. 문희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정동(현재는 송파구 관할)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송파구에서 주로 노란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가, 1996년 H.O.T.의 멤버로 데뷔한다. 한편, H.O.T.로 데뷔하기 전 남성 2인조 그룹 녹색지대 멤버가 될 뻔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불발되었다. 2005년 11월 21일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2006년에 연예병사에 지원하여 발탁되었으며 2007년 국군방송(KFN) FM 〈문희준의 Music Talk Show〉의 DJ로 진행을 맡은 바가 있다. 그의 입대는 당시 여러 남성 연예인들이 군복무 기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쳤다. 2007년 11월 20일에 전역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동년 12월 1일에 결혼하였다. H.O.T.에서 솔로 데뷔때 부터 남성들을 중심으로한 안티 세력이 생겼다.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에는 문희준의 음악 실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나 와전된 발언을 비하하는 인신 공격 수준의 단순한 비난이었다. 그들은 은어로 10대 열성 소녀팬들을 비하하기 위해 속칭 빠순이라 지칭하였으며, 문희준을 무뇌충(無腦蟲)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빠순이라는 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디시인사이드나 웃긴대학과 같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속칭 필수요소가 된 문희준을 희화화한 합성사진과 유행어들이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노래 가사 중의 일부를 따온, 뷁과 같은 부정적인 속어도 유행하였다. 한 웹사이트에서 주최한 《2003 최악의 딴따라 워스트 어워드》에서 “최악의 가수 부문” 및 무려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는 특히 2002년 무렵부터 집요해졌다. 안티들의 기세에 힘입어 김구라는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문희준에게 인신공격이 포함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의 발언들은 이른바 ‘문희준 어록’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하지만, 그 내용중 대부분은 문희준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사실이 대부분이며 안티들이 지적하는 이른바 ‘건방진’ 언행들은 대부분 신문 기사나 네티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팬들의 웹상에서의 말 실수를 문희준의 말 실수로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무려 100만 여건의 악플이 달린 네이버 뉴스의 댓글은 국내 뉴스 댓글중 기네스에 오르며 안티계의 최고봉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안티들의 행동은 문희준이 2007년 11월 20일에 현역 만기 제대한 이후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후에, 김구라는 '문희준은 보살'이란 말과 함께 문희준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퍼부었던 인신공격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혔다. 제대후 MBC의 토크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문희준 어록'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어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레드 제플린을 모른다”라는 부분은 문희준이 방송 DJ이던 시절, DJ의 입장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해 소개해 달라”라는 취지의 질문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오이 3개만 먹고 연습했다”라는 발언은 인디 아티스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때 몸이 많이 불어나는 바람에 다이어트 차원에서 오이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오인용 플래시에 나온 내용과 달리 문희준은 군 면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문희준의 소속사는 한때 안티팬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후에 오히려 본인이 고소를 취하했다. H.O.T. 때의 앨범은 해당 페이지 참고. 댓글 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보통 인터넷 게시물 밑에는 댓글란이 있어 그 게시물과 관련하여 독자는 의견을 표할 수 있다. 덧글, 코멘트(),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댓글을 통해 다양한 대화와 논리적인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감정적인 반대 표현이나 지극히 단순한 맞장구와 같은 일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 인터넷 초창기 시절 유즈넷(USENET)에서는 인터넷 활성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때 영문으로 되어 있는 인터넷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이다. 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를 '리플라이',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인터넷 용어 한글화를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자리에서 '리플라이', '덧글', '댓글' 등이 거론되었다. '리플라이'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내용까지 길어져서 지지도가 약하였다. '덧글'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댓글'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로 두 단어가 혼용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하여 사용이 줄어들었고 뉴스그룹 댓글 모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어 '댓글'로 통일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댓글'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었다. 댓글이 네티즌들의 토론과 지식 공유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댓글 저널리즘'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특히 '양방향적 속성'을 갖고 있는 댓글은 특정 이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스 기사 등 원문을 읽고 나서 독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작성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독자들에게 원문에서 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012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이은주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언론학 학술지 에 소개됐다고 밝혔다. 이 학술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면서 이은주의 연구를 주요 논거로 상세히 소개했다. 소개된 연구는 2012년 10월호에 실린 이은주의 단독 논문이었다. 논문 내용은 독자의 뉴스 기사에 대한 인식이 댓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사의 이슈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댓글을 접했을 경우 미디어가 왜곡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논문을 통해 이은주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의 뉴스 공정성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기사 자체 뿐 아니라 댓글에도 영향을 받고 댓글이 매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줬다. 댓글은 기존의 답글과 기술적으로 비슷하지만, 즉각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인하여 답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댓글은 그 웹사이트의 성격이나 유행어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논리적인 반박글이나 동의하는 글보다는 짧은 감상평 위주이다. 댓글이 없는 상태를 '무플'(無플←無리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무플에 댓글을 다는 '무플 방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1빠', '1등' 등과 같이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 겨루는 '등수 놀이'를 하기도 한다. 댓글에 일부 인터넷 사이트나 기업이 광고를 달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유해 웹사이트 링크를 걸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회원들 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행위에 대해 그 목적이 의심될 경우 '상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댓글 문화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댓글이 끼치는 영향을 이익과 연결하려는 현상이 발생하여 댓글 알바라는 신종 직업도 발생하였고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댓글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댓글 문화인 '악플문화'가 발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악플'은 '악성 리플'의 줄임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악성 댓글은 언어 폭력인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 더 악랄한 댓글이 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인터넷에 비방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게재해 명예훼손을 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악플도 형법상 모욕죄·협박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명예 훼손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스칼라곱 선형대수학에서, 스칼라곱(scalar곱, ) 또는 점곱()은 유클리드 공간의 두 벡터로부터 실수 스칼라를 얻는 연산이다. 스칼라곱이 유클리드 공간의 내적을 이루므로, 이를 단순히 '내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칼라곱의 개념의 물리학 배경은 주어진 힘이 주어진 변위의 물체에 가한 일을 구하는 문제이다. 차원이 formula_1인 유클리드 공간 formula_2의 두 벡터 formula_3의 스칼라곱 formula_4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스칼라곱의 기호에는 가운뎃점 '⋅'을 사용하며, 수의 곱셈 기호와는 다르게 생략할 수 없다. 두 벡터의 좌표가 각각 formula_5와 formula_6라면, 이 둘의 스칼라곱은 같은 위치의 성분을 곱한 뒤 모두 합하여 얻는 값이다. 예를 들어, 두 3차원 벡터 formula_8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다. 이 경우 스칼라곱의 정의는 벡터의 좌표에 의존하여 정의하지만, formula_2에 기존의 좌표계가 아닌 새로운 좌표계를 주더라도, 이 좌표계가 정규 직교 좌표계라면, 스칼라곱을 나타내는 공식은 바뀌지 않는다. 즉, 임의의 정규 직교 좌표계 아래 스칼라곱은 위치가 같은 두 좌표의 곱을 합한 것과 같다. 유클리드 공간의 벡터는 종종 열벡터로 간주되며, 이 경우 두 벡터 formula_11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우변의 formula_13는 formula_14의 전치 행렬이며, 곱셈 기호가 생략된 곱셈은 행렬 곱셈이다. 이 경우 앞선 예시에서의 내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스칼라곱은 기하학적 성질인 '길이'와 '각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예를 들어, 만약 두 벡터의 길이가 모두 2이며, 둘 사이의 각도의 코사인 값이 1/2이라면, 이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2 × 2 × 1/2 = 2이다. 이 정의에서 스칼라곱은 두 벡터의 길이와 위치 관계에만 의존하므로, 스칼라곱이 좌표계와 무관함이 더욱 뚜렷하다. 반대로 두 벡터를 똑같은 등거리 변환에 의하여 변환시켰을 때,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정의로부터 자명하다. 몇 가지 특수한 각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또한, 이 정의로부터 두 벡터 사이의 각도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임의의 벡터 formula_38 및 스칼라 formula_39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반면 스칼라곱이 만족시키지 않는 성질에는 다음이 있다. 벡터 formula_14의 벡터 formula_35 위의 스칼라 사영() formula_68은 formula_14를 formula_35로 수직 사영하여 얻는 벡터의 길이이다. 스칼라 사영은 다음과 같이 단위 벡터와의 스칼라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반대로,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스칼라 사영과 벡터의 길이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 formula_74와 formula_75가 마주보는 각 formula_76에 대한 코사인 법칙은 스칼라곱의 성질을 통해 유도할 수 있다. 벡터 formula_77가 그림과 같다고 하면,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3차원 유클리드 공간 formula_79 속 벡터에 대한 곱셈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두 벡터 formula_80의 벡터곱 formula_81은 스칼라곱과 달리 두 벡터로부터 또 다른 벡터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3차원이 아닌 유클리드 공간에서 의미를 잃는다. 스칼라 삼중곱은 formula_79에서 스칼라곱과 벡터곱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세 벡터 formula_83의 스칼라 삼중곱은 formula_84로 정의된다. 벡터 삼중곱은 formula_79에서 두 번의 벡터 곱으로 정의된다. 세 벡터 formula_83의 벡터 삼중곱은 스칼라곱을 계수로 하는 선형 결합 전개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은 스칼라곱을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일은 힘과 변위의 스칼라곱이며, 자기 선속은 자기 선속 밀도와 면적 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물론 변하는 힘이나 일정하지 않은 자기 선속의 경우 적분을 사용한다. 차원이 formula_1인 복소수 곱공간 formula_89 속의 벡터 formula_90에 대하여 스칼라곱과 비슷한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92는 formula_93의 (열벡터로서의) 켤레 전치이며, formula_94는 formula_95의 켤레 복소수이다. 이러한 함수는 양의 정부호성을 만족시킨다. 즉, 영벡터가 아닌 복소수 벡터와 자기 자신의 스칼라곱은 항상 실수이며 0보다 크다. 그러나 실수 벡터의 스칼라곱과 달리 쌍선형성을 만족시키지 않으며, 대신 다음과 같은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임의의 formula_96 및 formula_97에 대하여, 또한 대칭성(교환 법칙) 대신 다음과 같은 켤레 대칭성을 만족시킨다. 이 경우, 영벡터가 아닌 두 복소수 벡터의 사잇각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02는 복소수 formula_103의 실수부이다. 만약 이 함수의 정의에서 켤레 복소수를 생략한다면, 이는 쌍선형성과 대칭성을 유지하지만 양의 정부호성을 잃는다. 이는 대략 formula_104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105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함수의 존재가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두 실숫값 함수 formula_116의 내적 formula_117은 급수 대신 적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숫값 함수 formula_119의 내적 formula_120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사이즈가 같은 두 실수 행렬 formula_122의 프로베니우스 내적() formula_123은 위치가 같은 두 성분의 곱들을 합한 결과이며, 대각합과 행렬 곱셈을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다음과 같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수 행렬 formula_122의 프로베니우스 내적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27는 formula_128의 켤레 전치이다. 마이애미 말린스 마이애미 말린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함께 후발주자로 1993년에 창단하였고, 1997년, 2003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 팀이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제외하고 가장 단시간 안에 2번째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도 하다. 또한 이 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로만 두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두 번 다 우승한 팀으로, 지구우승이 없지만 리그 우승이 두 번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미술수집상인 제프리 로리아가 현재 구단주로 있으며, 감독으로는 프레디 곤잘레스, 단장으로는 마이클 힐이 있으며 야구운영팀장으로는 래리 바인페스트가 있다. (직책상의 단장은 마이클 힐이지만, 실제 단장 역할은 바인페스트가 모두 하고 있다.) 콜로라도가 지난 95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 자극을 받아 말린스는 97년에 마이애미 출신의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 내야수 보비 보니아, 외야수 모이스 알루 등 내로라 하는 자유계약선수들을 돈으로 끌어 모았다. 흔히 '말린스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우승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97년과 2003년 둘다 당시 와일드 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루키계약을 맺고 있던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우승했다는 것이다. 97년의 말린스 팀의 주축이 베테랑 위주였다면, 2003년에는 신예들이 위주였으며, 특히 이 차이는 투수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또한 특이한 점은 97년의 겨울에 있었던 이른바 '대방출' 사건으로, 이는 말린스 주력 선수들의 재계약들이 (재계약과 메이저 리그 계약)이 이 겨울에 몰려있었던 것으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두려워한 구단주에 의해 대부분의 주력선수들이 유망주와 맞트레이드되는 조건으로 다른 구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이 현상은 2003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이 '대방출'은 2008년 초에 이루어진 돈트렐 윌리스와 미겔 카브레라, 이 두 선수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유망주 6명을 받고 트레이드한 것으로 다시금 마무리되었다. 2008년 3월 31일 말린스 팀 연봉은 뉴욕 양키스 선수들인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제이슨 지암비 선수의 개인 연봉보다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는 한국인 1호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전 KIA 타이거즈)과 김병현(전 KIA 타이거즈)가 뛰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시즌부터 팀명을 마이애미 말린스로 변경하고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2011년 11월 11일에 개장한다.)로 옮겼다. 한식 한식 전자기학 전자기학(電磁氣學, electromagnetism)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장을 이룬다. 자기 현상은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문헌에 등장하며, 전기 역시 기원전 7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기가 전자기력이라는 동일한 기본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이라는 점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양털로 만든 옷감에 플라스틱 빗을 여러 번 문지른 후 머리카락에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가 전기를 띄게 되는 것을 대전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탈레스는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 붙는 것을 관찰하였다. 전기를 뜻하는 는 호박을 뜻하는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든 예와 같이 두 물체를 마찰하여 대전된 전기를 정전기라고 하는데, 정전기가 대전되는 까닭은 물체를 이루는 원자가 지니는 전자 가운데 일부가 적은 에너지로도 쉽게 원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자로부터 벗어나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 전자라고 한다. 금속과 같이 자유 전자를 많이 지닌 물질은 언제나 전자들이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대전되었더라도 다른 물체와 닿게 되면 전기가 쉽게 전달되어 버린다. 이런 물체를 도체라고 한다. 반면에 고무나 유리와 같은 물질은 자유전자가 매우 적어서 한 번 대전되면 전하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런 물체를 부도체라고 한다. 물질 가운데에는 상태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물질들은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도체는 최근 여러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하가 있어서 같은 것은 밀쳐내고 다른 것과는 끌어당긴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두 전하를 한 쪽은 양 전하, 다른 쪽은 음 전하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척력과 인력의 크기는 물체가 갖고 있는 전하의 양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관계된다. 이렇게 정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쿨롱의 법칙으로 계산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대전된 한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이 물체 근처로 지나가는 다른 대전된 물체는 쿨롱의 법칙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더 강한 힘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두 전하 사이의 힘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하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세기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물체가 단위 전하당 얼마만큼의 힘을 받는지로 계산한다. 국제단위계로 나타내면 쿨롱당 뉴턴, 즉 formula_1로 나타낸다. 물체에 고여있는 정전기와 달리 전류는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흐르는 전기의 흐름이다.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황산 수용액에 구리막대와 아연막대를 담은 후, 두 막대를 금속선으로 이어 전지를 발명하였다. 볼타 전지는 최초로 전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자석에 철이달라붙는 다는 사실과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침반은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항해에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 자석은 전하와 같이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관례적으로 자석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N극, 반대편을 S극이라고 한다. 물질이 자기를 띄게 되는 것은 원자가 스스로 전류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자전과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공전과 자전때문에 원자에 전류 고리가 생기고 이 때문에 원자 자체에 N극과 S극의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쌍극자가 형성된다. 전기의 기본 단위인 전하가 음전하 또는 양전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는 자기쌍극자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기때문에, 기초 단위에서부터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석에 철과 같은 물질이 달라붙는 현상을 자기라고 하고,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을 자성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자성체로는 철 이외에 니켈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은 비자성체라고 하며, 이 외에 자석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늄, 크롬과 같은 물질은 상자성체, 구리, 금, 은과 같이 자석이 가까이 가면 약하게 반발하는 물질은 반자성체라고 한다. 대부분의 물질은 원자단위의 자기쌍극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기때문에 서로간의 자기가 상충되어 자성을 띄지 않지만, 철이나 니켈같은 물질들은 원자의 배열이 자기가 한 쪽 방향으로 정렬되기 쉽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자성을 띄게 되고 한 번 자석이 되면 계속하여 자성을 유지하게 된다. 자성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는 자석을 영구 자석이라고 한다. 철 막대를 자석의 한 극으로 내려 치면 철 원자의 자기쌍극자가 한 쪽으로 정렬되어 영구 자석이 된다. 한편, 영구 자석이 된 철이라고 하더라도 약 770℃ 가 되면 자성을 잃는데, 열에 의해 원자가 무질서하게 운동하기 때문이다. 전기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미치는 공간을 자기장이라고 한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의 단위 자극인 자하는 전하와 달리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쌍극자로 존재하므로 N극에서 나와 S극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자기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되는 자기 흐름을 자기력선이라고 하는데, 자기장은 일정 공간에 자기력선이 얼마나 많이 모여있는지와 그렇게 모인 자기력선이 얼마나 센 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자기력선이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는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束密度)라고 하며, 관례적으로 formula_2로 나타낸다. 한편, 특정 위치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formula_3로 나타내는데, 그곳에 놓인 자하가 받는 힘을 뜻한다. 국제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의 단위로 테슬라(T)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우스(G)가 더 많이 쓰인다. 자기장의 경우에 자기 선속 밀도와 자기장의 세기가 다른 까닭은 자기장이 통과하는 매질마다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 자화되어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을 투자율(透磁率)이라고 하고 그리스 문자 μ로 나타낸다. 투자율은 물질마다 고유의 값이 있는데 투자율이 수백에 근접하는 강자성 물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1에 가까운 투자율을 가지고 있다. 진공 또는 자유공간의 투자율은 특히 μ 로 나타내며, 그 값은 formula_4이다. 자기장의 자기 선속 밀도 formula_2 는 자기장의 세기formula_3에 투자율 μ 를 곱한 것과 같은 값을 갖는다. 즉,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전기와 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이었지만, 이 둘이 사실은 같은 상호 작용이란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1820년 덴마크의 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 나침반을 두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류와 자기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논문을 읽고 자신도 같은 실험을 하여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생기는 자기장의 방향을 관찰하였다. 앙페르는 전류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흐를때 자기장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말아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오른손 엄지를 위로 치켜 든다면 나머지 말아 쥔 네손가락은 반시계방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앙페르의 오른나사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수리 모형이 만들어져 앙페르의 회로 법칙이 수립되었다. 182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스터전은 전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스터전이 처음 만든 전자석은 말굽 모양의 철심을 자기 코어로 이용한 것이었다. 스터전은 자기 코어에 굵은 구리 전선을 18 번 감아 전자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절연체가 없었기 때문에 스터전은 구리 도선에 바니시를 발라 절연체로 사용하였다.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장에서도 전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석을 도선 가까이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구 자석이든, 전자석이든 자기장을 형성하는 것이기만 하면 도선가까이에서 움직이면(즉, 자기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정리하여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표하였다. 자기에서 전기가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교류 발전기를 발명하였다. 186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존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이론의 수리 모형들을 약 20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맥스웰은 나중에 의미가 같은 방정식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본질적인 네 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전자기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맥스웰은 전자기학에 대한 법칙들의 수리 모형을 정리하면서 로런츠 힘은 다루지 않았다. 로렌츠 힘은 전하를 띈 물체가 전기장 안에서 받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전자기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한 후, 자계가 사인파와 같은 파동을 보이며 변화한다면 전계 역시 그에 따라 사인파 파동을 만들어 내게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므로, 전기와 자기의 성질을 모두 갖는 파동, 즉 전자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파는 1888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후, 전기 회로에서 생성된 전자파를 안테나를 통해 방출하거나 수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이나 방송과 같은 전자파를 이용한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전기 전기(電氣, )란 전하의 존재 및 흐름과 관련된 물리현상들의 총체이다. 전기는 번개, 정전기, 전자기 유도, 전류 등 일상적인 효과들의 원인이다. 또한 전기는 전파 따위의 전자기 복사를 발산하고 또한 수집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전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기공학에서는 전기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전기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기물고기의 전기충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750년의 고대 이집트 문헌에는 이 물고기들을 "나일 강의 뇌신"이라 부르며 다른 모든 물고기의 "수호자"라고 했다. 이후 1천년기가 지난 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박물학자들과 의사들도 전기물고기의 존재를 기록했다. 대 플리니우스나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 같은 고대 사람들은 전기메기 및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 효과 및 그 충격이 충격을 전달(오늘날 용어로 전도)할 수 있는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풍이나 두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어 치료가 되라고 전기물고기를 만지게 하는 처방도 이루어졌다. 번개와 여타 출처의 전기가 같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아랍인들일 것이다. 15세기 이전부터 아랍어에서는 전기가오리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화에서는 특정한 물체. 예컨대 호박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경 정전기에 관한 다양한 관찰을 남겼다. 그는 마찰이 호박을 자성을 띠게 하며, 이는 자철석과 같은 문지르지 않아도 자성을 가지는 광물과 대조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마찰된 호박의 인력 작용이 자성의 효과라고 생각한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훗날의 과학자들은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논란이 많은 학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이 전기도금의 원리를 알고 있었지도 모른다. 1936년 발견된 바그다드 전지가 그 증거로 제시되는데, 이 유물은 마치 갈바니 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유물이 전기적 성질을 정말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전기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호기심 대상에 불과했다. 1600년 잉글랜드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수행하여 자철석 효과와 정전기 효과는 서로 다른 것임을 구분해냈다. 길버트는 문지른 호박이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라틴어로 "엘렉트리쿠스( < )"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영어 낱말 "electric" 과 "electricity"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 두 낱말은 토머스 브라운의 《프세우도독시아 에피데미카》(1646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오토 폰 게르니케, 로버트 보일, 스티븐 그레이, 샤를 프랑수아 드 시스테르네 등이 전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재를 팔아가면서 전기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52년 6월 물에 적신 연줄 끝에 금속 열쇠를 매달고 천둥치는 날 연을 띄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다만 프랭클린이 이 실험을 정말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쇠를 통해 그의 손등으로 전달된 스파크는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음전하와 양전하라는 개념을 내놓아 전하 저장 장치인 라이덴병의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질이 사실 역설이 아님을 설명해냈다. 1791년 루이지 갈바니가 생물전기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가 뉴런을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겹쳐 만든 볼타 전지를 개발하여 과학자들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전기 기계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19년-182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와 앙드레마리 앙페르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발견했다.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동기를 발명했고, 1827년에는 게오르크 옴이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해냈다. 그리고 1861년-1862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명한 논문 〈물리적 역선에 관하여〉에서 전기와 자기(와 빛)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렇듯 19세기 초가 전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시대였다면,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블라시 오토, 토머스 에디슨, 갈릴레오 페라리스, 올리버 헤비사이드, 예디크 아노이시, 켈빈 남작, 찰스 앨저넌 파슨스, 베르너 폰 지멘스, 조지프 스완, 니콜라 테슬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기를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부터 근대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전환시켰고, 이는 제2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자외선을 쬔 전극이 전기 스파크를 더 잘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이산적인 양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빛의 에너지가 전자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광전효과로 인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양자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광전효과는 태양광판을 비롯한 광검출기에 이용되는 원리로서 오늘날 상업적 전기 생산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전하(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으로,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전기의 양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 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10의 18제곱 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10-1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전기의 흐름 전류는 물분자가 전하와 함께 이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기는 물분자가 가지는 전하의 상태를 의미하고, 물분자의 수소원자의 전하가 양전하 상태를 갖고 물분자의 산소원자가 음전하의 상태를 가지며 물분자 크기 180pm이내에서 갖는 전하는 한국과학으로 직류전기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므로 전류와 전기의 구분은 물분자가 전기도체인 구리선과 함께 움직이느냐와 물분자의 수소원자 전하와 산소원자의 전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기와 전류가 한국과학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기를 띤 물체 주위의 전기 작용이 존재하는 공간. 전계(電界). 전장(電場). 전기적인 위치에너지 전압과 비슷한 개념이다. 철심에 코일을 감고 코일에 전류를 흘리게 되면 철심이 자성을 띄게 되는데 이것을 전자석이라고 한다. 전기화학은 물질간의 전자의 이동과 그것들에 의한 여러 현상을 취급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화학, 분석화학, 화학공학 등과의 연관이 깊다. 전기 회로는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원과 함께 설치된 닫힌 회로다. 회로에는 저항기, 축전기, 코일 등 다양한 전기적 소자가 전기 전도체인 전선에 의해 연결된다. 전기에너지의 힘 직류에서의 전력 공식은 P=VI 교류에선 전력이 세가지로 피상전력,무효전력,유효전력이 있다. 전자공학은 구동력으로서 전력을 이용하는 구성장치, 시스템 또는 여러 장비들을 개발하기 위하여 전자들의 운동에 대한 영향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이다. 전자기파는 특정 전자기적인 과정에 의해 복사되는 에너지이다. 가시광선도 전자기파에 속하며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같은 전자기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전 역학에서 전자기복사는 동시에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구성된 전자기파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은 진공에서 빛의 속력으로 전달된다. 두 장의 진동은 서로 수직이며 진행방향에 수직이고 횡파이다.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크거나 작은 순서대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포함된다. 전하 전하(電荷, )는 전자기장내에서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Q)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단위는 쿨롱이며, 단위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량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또한,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호박을 문지르면 옷자락이나 먼지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언어들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들(, , )은 호박을 뜻하는 에서 기원하였다. 18세기 중엽 벤저민 프랭클린은 뇌우 속으로 연을 날리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 번개가 호박에 의해 발생되는 것과 동일한 전기임을 입증하였다. 같은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척력이 작용하고 다른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한다. 이 두 종류의 전하를 양전하와 음전하라고 한다. 물체가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 입자의 전하 때문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띄고 두 개의 위 쿼크와 하나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 양성자는 양전하를 띈다. 기본 입자를 고려하지 않는 원자 단위 이상에서 전하량은 모두 전자 한 개의 전하량인 1.6021773349 에 대한 정수배로 존재한다. 즉, 일반적인 경우 전자 한 개가 갖는 전하량이 전하량의 최소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의 수가 균형을 이루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원자의 가장 바깥 껍질에 위치한 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쉽게 원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자들이 이동하게 되면 전자를 잃은 쪽 물질은 양전하를 띄게 되고 반대편의 물질은 음전하를 띄게 된다. 마찰과 같은 것에 의해 축적되어 흐르지 않는 전기를 정전기라고 한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가 마찰하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겨울철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마찰로 인해 우리 몸에 정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정전기는 자동차 문 손잡이와 같은 금속을 만나면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0t 트럭 1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의 전자가 갖는 전하량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전하량을 측정하는 SI 단위인 쿨롱은 6.24150962915265개의 전자가 한꺼번에 수송하는 전하량을 사용한다. 이 때 전류의 단위 암페어는 1초 동안 1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쿨롱 법칙 쿨롱 법칙() 또는 쿨롱 힘 법칙()은 두 대전된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전기적 인력이 두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두 입자 사이의 거리(formula_1)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역제곱 법칙의 하나다. 샤를 드 쿨롱이 발견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밀어내고, 다르면 끌어당긴다.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formula_9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t 트럭 10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쿨롱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 법칙, 즉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가해지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공간이 3차원일 때 일정한 밀도로 퍼져나가는 전기장이 어떤 거리에서 2차원 면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 전기장 전기장(電氣場, electric field)은 관찰 대상인 전하를 띤 물체가 공간 상의 어느 점 P에 있는 시험 전하에 가해주는 단위 전하량 당 전기력을 뜻한다. 즉, 시험 전하가 느끼는 전기력을 시험 전하의 전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전기장은, 어느 전하가 다른 전하에 전기력을 가할 때, 순간적인 원격 작용이 아니라 이러한 전기력을 매개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다. 즉, 전기력이 갖고 있는 원격력의 성질을 설명하기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전하가 주위에게 전기력을 행사하기위해 주위공간을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 전기장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기장은 공간상에 전하가 존재할 때, 그 전하에 의해 생기는 공간상 각 지점의 전위의 기울기를 말한다. 전위의 기울기이기 때문에, 단위는 /가 된다. 또한 일반적으론, 공간상의 한 점의 전기장의 크기는 그 지점에 단위전하(+1 C)을 놓았을 때 그 전하가 받는 전기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단위는 / 이며, 단위는 위와 동일하게 /이다. formula_1 formula_1 formula_5 formula_6 formula_9 : 단위 전하가 갖는 에너지 = 전위 formula_10 formula_11가 두 전하 사이의 중점으로부터 특정 위치까지의 거리이고, formula_12는 전기 쌍극자모멘트 라고 할 때, 다음 공식이 성립한다. formula_13 가우스 법칙 가우스 법칙()은 폐곡면을 통과하는 전기 선속이 폐곡면 속의 알짜 전하량과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맥스웰 방정식 가운데 하나다. 가우스 법칙은 미분 형태와 적분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발산정리 에 대등하다. 가우스 법칙의 적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는 변위장(전속밀도), formula_3 는 표면 "A" 위의 미소 면적을 나타내는 벡터 (그 지점의 접평면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법선 벡터), formula_4는 폐곡면 속의 알짜 자유 전하량이다. formula_5 는 표면 "A"전체에 대한 면적분이다. 가우스 법칙의 미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7 는 발산 연산자, formula_2는 변위장(전속밀도), formula_9는 자유 전하 밀도다. 위 공식은 자유 전하에 대한 가우스 법칙이다. 즉, formula_4와 formula_9는 매질 속의 분극 전하를 포함하지 않는다. 분극 전하를 포함한 모든 전하에 대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14는 알짜 전하 (분극 전하 포함), formula_15는 전하 밀도 (분극 전하 포함)다. formula_16는 전기장이다. formula_17는 진공의 유전율로, 기본 상수다. formula_18 formula_19 formula_20 (면) formula_21 (구 껍질 또는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표면) formula_22 (구 껍질에서, r 전감(前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해(갑오년) 일청전쟁을 논하더라도 그때 조선의 좀도둑떼와 같은 동학당의 소요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멸망 원인에 대해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민영익을 비롯한 고위 층의 무책임한 처사, 일제의 강도짓 등을 거론한다. 그러면서도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실정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동학군을 '좀도둑떼'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돌린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안중근은 조선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근왕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2019년 KBS 탐사보도부가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적'이었던 밀정을 추적했다. 지난 8개월 동안의 추적이었다.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취재진은 김좌진 장군의 참모 이정을 포함해 지금까지 모두 895명의 실명을 확인했다. 밀정 혐의자들이다. 8월 13일과 20일 방송되는 <밀정 2부작>(밤 10시, KBS1TV)에서 나눠 공개한다. 여기에 안중근의 거사 동지 우덕순이 밀정이었음이 드러났다. 1920년대 들어 우덕순은 이상 행적을 보인다.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 등을 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주요 간부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민회는 일제가 당시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다. 정보 수집이 주요 역할이었다. 일반 한국인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끌어모았다. 취재진은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 등을 입수했다. 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우덕순도 현재 독립유공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유덕화 유덕화(, , , , 1961년 9월 27일 ~ )는 홍콩의 영화배우, 영화제작자, 영화연출가, 가수이다. 별명은 유복영(劉福榮,)이며, 필명은 자혜(紫慧), 불교식 법명은 혜과(慧果)이다. 애칭은 華仔, 華哥, 劉天王, 華Dee, 劉華, 華神, 民間特首이 있다. 영국령 홍콩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성 장먼 시 신후이 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신장은 174cm이고, 혈액형은 AB형이다. 물리학자 물리학자(物理學者)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직업으로서는 연구소의 연구원, 대학의 교수 등이 전형적이며, 분야에 따라 응용분과의 경우 다양한 기업체와 개발직등의 직종에 포진되어 있다. 특이한 경우로, 금융권을 비록한 증권 분석가, 컨설턴트 등의 분야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야 하나, 현대 물리학의 전문성 때문에 대개는 대학원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분야에 따라 수학에 관해서도 전문성이 어느정도 있어야 한다. 연구소의 연구원은 크게 분야가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으로 나뉘게 되며 대학 산하 연구소, 기업체 연구소 등 다양한 연구직종에서 일하게 된다. 대표적인 물리학자는 영국의 아이작 뉴턴,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독일의 가우스,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에드워드 위튼 등이있다. 오에 겐자부로 오에 겐자부로(, 1935년 1월 31일 ~ )는 일본의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한다. 시코쿠 에히메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8세의 나이 때에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학생 시절이었던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쿄 대학 불문과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으며 <사육(飼育)>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결혼 후 장애가 있는 아들이 태어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 어렵게 키운 경험을 소재로 개인적인 체험을 써서 전후세대의 인권 문제를 파헤쳤다는 찬사를 들었다. 이 외에도 핵 시대의 지구와 우주와의 관계를 그린 미래소설도 썼다. 그는 1994년 12월 8일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수상) 이후 26년 만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기념 연설문, 《애매한 일본의 나》를 통해 그는 스웨덴의 아동문학작품 《닐스의 모험》을 읽으며 꿈꿨던 어린 시절 196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회의, 전자공학이나 자동차 생산 기술로 유명한 조국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한국의 김지하나 중국 작가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 와타나베 가즈오에게서 배운 휴머니즘 정신을 말하였다. 이 연설문은 노벨상 위원회가 책으로 출판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이자 장애인 음악가인 오에 히카리와 부인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아들 히카리를 작곡가로 키운 이야기는 문화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재연극으로 소개된 바 있다. 그는 에히메현 우치코의 오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7형제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할머니에게 예술을 배웠다. 그의 할머니는 1944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 다음해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오에를 가르치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 같은 책을 사주었는데, 그는 그 책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말하였다. 고향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그는 마츠야마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18세가 되는 해에 처음 동경에 다녀와서 그 이듬해 동경대학교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스승은 가주오 와타나베로 프랑수아 라블레에 대한 전문가였다. 그는 1957년 학생의 신분으로 있을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글은 프랑스와 미국의 현대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데뷔한 다음 해인 1958년, 자신의 첫 장편소설 <아이 싹 훑기(芽むしり仔撃ち)>를 발표했다. 같은 해에 <사육(飼育)>으로 제 39회 아쿠타가와상을 23세의 나이에 수상하였다. 1956년에 수상한 이시하라 신타로에 이어 당시 최연소 타이 수상자가 되었다. 전형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오에 겐자부로는 시대도, 재능도, 작풍도 다르지만, 스물 서 너 살짜리 학생이 기묘한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썼다는 점이 아쿠타가와와 닮은 꼴로 보여 그에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이 걸린 상을 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한편, 후나하시 세이치는 이전 회 아쿠타가와상 전형에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사육>보다는 <죽은 자의 사치(死者の奢り)>야말로 상을 받았어야 했다며 비판한 바 있다. 또한, 같은 해인 1958년에 이시하라 신타로, 에토 준, 다니카와 슌타로, 데라야마 슈지, 아사리 게이타, 에이 로쿠스케, 마유즈미 도시로, 후쿠다 요시유키 등 젊은 문화인들과 ‘젊은 일본 모임(若い日本の会)’을 결성하여 60년 안보(안보투쟁)에 반대하였다. 1959년에는 도쿄대를 졸업하였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사르트르 소설의 이미지에 대하여>. 같은 해에 새로운 장편 《우리들의 시대(われらの時代)》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청년으로서 느끼는 우울함과 허무감, 괴상하고 폐쇄적인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전면에 내세워 통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으로 작품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해 작곡가인 다케미쓰 토오루를 알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60년, 이타미 유카리(이타미 주죠의 누이동생)와 결혼했다. 1961년, <정치와 성(政治と性)>의 주제를 집대성한 작품인 <세븐틴(セヴンティーン)>을 《문학계(文學界)》 1월호에, <정치소년 죽다(政治少年死す)-세븐틴 제 2부>를 익월호에 발표하였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 촉발되어 범인인 야마구치 오토야를 모델로 ‘성을 탐닉하고, 정치에 도취한 우익소년’ (문고본 뒷면 소개글에서)을 그렸으나, 풍류몽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둘러싸고 문예춘추 등이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정치소년 죽다>는 그 이후 어떠한 단행본으로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단, 《오에 겐자부로 전작품 1》에 수록된 자필연보에 따르면, 본 작품이 “현재까지 단편집에 실리지 않은 것은 작가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1963년, 두개골에 이상이 있어 지적장애를 안은 장남 오에 히카리가 태어났다. 무거운 장애를 안은 아이의 탄생은 전후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청년과 그 사회에 맞선 절망적 반항과 저주를 독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64년, 히카리의 탄생을 기점으로 쓴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個人的な体験)》으로 제 11회 신초샤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아버지 '버드(Bird)'가 온갖 정신편력을 겪은 끝에 상상력에 의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원래 사르트르의 영향으로 그 의식이 깊어진 '상상력'이라는 개념은 이후 오에 겐자부로에게 상당히 큰 주제/수법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에 히로시마를 수차례 방문했던 경험과 세계원수폭금지대회에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한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은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 체험'과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 고유의 비극'을 대응시켜 자신의 주제로써 심화시켜나가고 있다. 1967년, 30대 초반에 장편소설 《만연원년의 풋볼》을 발표하고, 최연소(2010년 현재까지도 기록으로 남아있음)로 제3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만연원년(1860년)에서는 시코쿠의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과 100년후의 안보투쟁을 결합시켜 폐쇄적 정황에 대한 혁신적인 반항을 그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당시 현저했던 오에 특유의 문체는 틀이나 주석,수식,피수식의 관계가 혼탁했기 때문에 여러차례 난해한 문장이라고 지적을 받았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출되었을 당시의 수상이유로 현재의 표준어인 도쿄방언에 대항하는(산문) 시적인 문체를 들었다(단지, 그 후부터는 작품에 어울리는 문체를 적절히 조절하여 쓰는 방법으로도 사용하고 있다).현재는 오에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전에 오에를 평가 한 에토 준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오랜 기간동안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일본사회와 공존하는 비정상적이고 작은 세상들을 그려낸 단편집《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1969년)를 출판하고, 1971년에 발표된 중편<스스로 눈물을 닦는 아픈 날>,<달의 남자(Moon Man)>에서는 그 전년도의 이쓰시마 사건을 토대로 천황관을 개혁할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 후에 《내 영혼에 이르러》(1973년, 노마문예상수상),《핀치러너 조서》(1976년)에서는 천황제나 핵문제 대해 고민하고, 리얼리즘을 초월한 세계관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에의 후기작에서는 <영혼의 문제>,《기도,허락》같은 종교적인 사상에 깊이있게 접근하고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40대부터는 야마구치 마사오의 문화인 수학에 영향을 받아, 1979년에 발표된 《동시대 게임》에서 <마을=국가=우주>의 역사를 쓰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썼지만, 문화평론가로부터 명성을 얻은 후의 사치스런 것이라고 비판 받았다. 다만, 오에 자신은 우주의 창조자인 <망가뜨리는 자>나 영혼의 문제를 작품속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82년, 연작집 《레인트리(Rain Tree)를 듣는 여자들》을 발표하고 다음해에 제34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다케미쓰 토오루는 연작집의 첫 번째 이야기인 <머리 좋은 <레인트리»에 영감을 얻어 <비의 수목>(Rain Tree)를 작곡했다. 연작집의 두 번째 이야기 《레인트리를 듣는 여자들》은 이 곡의 연주를 처음 들으며 집필했으며 소설속에 콘서트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1983년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여 그의 문헌이나 관련 연구를 반복해서 읽는 것으로 깨달은 사상을 오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며, 세심한 필체로 자서체 소설로 사생활을 그려내어 제10회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연합적군 사건을 사상적으로 총괄해 낸 《하마에게 물리다》,1986년에는 《동시대 게임》의 세계관을 현실세계로 비추어 낸 《M/T와 숲의 이상한 이야기》,1987년에는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자신의 반생,사상의 편력, 주역의 변천등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그리운 날들로의 편지》를 발표 했다. 1989년에 《인생의 친척》에서는 장편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아이를 잃은 여자의 비극과 재기하기까지를 그려 내 제1회 이토세이 문학상을 수상했다.1989-1990년에 발표 된 연작 《치료탑》 과 그 연속편인 《치료탑혹성》에서는 넓은 의미로의 SF형식을 사용하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빌려 핵과 인류구제의 주제를 그리고 있다. 1993년 9월부터 《신조》에 있어서 가장 긴 장편소설 3부작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중이었던 1994년 10월 13일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 26년만에 일본인으로써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기념 강연으로 가와바타의 <아름다운 일본과 나>를 풍자한 <애매한 일본과 나>를 주제로 삼았다. 11월부터 《타오르는 푸른 나무》간행을 시작했다. 시코쿠의 마을을 무대로 한 <구세주>에 의한 전통 계승과 부활, 교회의 <구세주> 일파로의 공격, 시민과 교회의 격한 대립을 줄거리로 하여 아우구스티누스나 예이츠를 인용 <영혼의 구제>를 주제로 집필하여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1995년 1월, 1994년도에 조일상을 수상하였다. 오에는 1995년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완성했지만, 1996년 다케미쯔 토오루의 영결식에서 그를 위해 신작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1999년 《공중회전》에서 집필을 다시 시작했다.테러를 막기 위해 <탈교>한 교주 <의사(성인)>의 파란과 살인속에서 교단의 재건을 삼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전환작이 되었다. 이후의 창작활동은 오에 자신의 말을 빌려 <후기의 작품활동(Late Work)>이라고 불린다. 이타미 쥬죠의 죽음을 위해 쓴 작품 《뒤바뀐 아이(체인지링)》(2000년), 《우울한 얼굴의 아이》(2002년), 《안녕,나의 책이여!》(2005년)은 전부 <스워드커플(이상한 2인조)>가 등장한 3부작이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안녕,나의 책이여!》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문제를 자신의 인생에 투영시켜 데뷔작 《기묘한 일들》로 회귀하는 듯한 복잡한 구성을 택했다.3부작을 집필하고 있던 2002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동화 《200년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그 후 2007년에는 수장되었던 영화를 재구성하여 <이상한 노인>들의 늘그막의 모험담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 가 신조사, 2009년에는 익사한 아버지의 죽음을 그려내려고 한 작가의 행동을 다양하게 표현해 낸 《익사》가 강담사에 각각 실렸다. 《타오르는 푸른 나무》의 총괄편이라고도 불리는 《공중제비》이외의 <후기의 작품>들 모두가 자신을 투영시킨 소설가나 옛의인을 둘러싼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허구를 섞어 자신의 생각을 고쳐 말하는 것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형식에서는 오에 자신도 자각적으로 《익사》속에서 <노작가의 사랑도 변하지 않는 자기모순이다>라는 등의 도회하는 듯한 표현을 썼다).또한, 모든 작품에 있어서 선행되었던 문학,예술 등에 자유로운 인용을 덧붙여 과거 자신의 인용이나 옛 이야기를 현대의 언어로 해석, 환골탈태, 재구성을 하였다. 창작활동 이외에는 2006년에 오에 겐자부로상이 설립되어 다음세대의 젊은 작가들을 응원하는 움직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전후 민주주의자임을 자인하며 국가주의, 특히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입장으로 핵무기나 헌법 제 9조(일본 헌법 삼대원칙 중 하나인 평화주의를 규정하고 있음)에 대해 에세이나 강연에서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자위대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1994년 노벨상 기념 강연회를 가졌을 때에는 덴마크 문법학자 크리스토프 니로프의 ‘(전쟁에) 항의하지 않는 인간은 공모자나 다름없다’라는 발언을 빌려 ‘항의하는 것’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거나 문화훈장을 받는 문학가의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국민이 주는 상으로 여기겠다”라고 하며 상을 받았으나, 그 직후에 천황이 손수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함께 수여하려 하자,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이므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수상을 거부했다. 한편, 2002년에는 공화국인 프랑스의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03년에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을 때에는 “이라크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제공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전쟁 후 반세기 남짓한 가운데서도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없다”라고 하며 분노를 표명했다. 2004년에는 헌법 9조 ‘전쟁 포기’의 이념 수호를 목적으로 가토 슈이치, 쓰루미 슌스케 등과 함께 9조회를 결성하여 전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중국으로 가서 난징대학살기념관 등을 방문하였다. 베이징대 부속중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 젊은 세대의 장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2009년 6월 2일, 강연에서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사이의 신뢰관계가 없으면 핵무기 폐기가 시작될 수 없다.우리들이 싸우지 않는 태도를 일관한다면, 북한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조건이 되지 않을까" 라는 뜻의 발언을 했다. 때마침 이 발언은 5월 25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나온 발언이여서 많은 물의를 빚었다. 안톤 브루크너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1824년 9월 4일 ~ 1896년 10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향곡과, 종교음악, 모테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유도동기, 긴 연주시간으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의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교사 보조로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고, 결국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러 스승에게 작곡이나 대위법 등을 배워나갔으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 등에서도 교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11개의 교향곡과 3개의 미사,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생전의 그의 음악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는 그가 바그너의 추종자로 알려져 브람스를 신봉하는 많은 비평가의 무조건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조차도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제프 샬크 형제 등은 항상 그의 곡을 청중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브루크너의 곡을 개작하도록 압박했고, 이런 압박이 브루크너 자신의 유약함 내지 꼼꼼함이 덧붙여져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수많은 개정 원고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의 7번 교향곡, 8번 교향곡, 테 데움의 공연에서 성공을 맛볼 수 있었으나 너무나 늦은 성공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도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밑에 안장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실내악 작품이나 피아노 독주곡 등을 음반으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서양고전음악에서 브루크너 작품들의 위치는 슈만, 브람스가 계승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조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개성화된 내용의 결합이며 이러한 경향은 구스타프 말러로 계승된다. 한편,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였기에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이후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종교음악은 대규모 합창과 교향악의 결합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엄미사의 맥을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크너의 작품목록" 작품 번호"WAB"는 음악 학자 레나토 글라스베르거(Renate Grasberger)가 편찬한 "브루크너 작품 목록"(Werkverzeichnis Anton Bruckner)의 번호이다. 번호는 149번까지 한다. 바단조 교향곡(00번)은 브루크너가 습작용으로 작곡해 첫번째로 시작되는 일련 번호를 붙이지 않은 곡이다. 교향곡 0번은 후년에 애정을 느껴 파기할 수 없다고 느낀 작곡자가 고의로 제0번으로 한 것이지 실제로는 첫 작곡 후에 다룰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마지막 교향곡 제9번은 미완성 작품이다. (실질적은 반쪽 완성) 자세한 내용은 각 교향곡의 문서로 다룬다. 이상 외에 1869년에 착수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교향곡 내림나장조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스케치의 단편만 남아 있다. 브루크너가 바그너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그가 31세 때인 린츠에 옮겨서부터이다. 그 무렵 그는 지몰 제히터에게 대위법을 배우기 위해 때때로 빈으로 갔었는데, 그 때에 바그너가 지휘하는 연주회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고 그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863년에는 당시 작곡 스승이었던 오토 키츨러의 권유로 [탄호이저]의 스코어를 연구하여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고, 게다가 그 해 안에 린츠에서 [탄호이저]의 실제 상연을 접하여 전격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키츨러 자신이 지휘하는 로엔그린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브루크너는 여태까지 그가 접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음악에 강한 감명을 받았다. 2년 후인 1865년에는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열리게 되었는데, 브루크너는 이 악극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의 호텔 피아 야레스차이덴(4계 호텔)에는 유명한 음악가들이 숙박하고 있었는데 브루크너는 거기에 가서 안톤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에게 자신이 만든 교향곡 1번의 악보를 보이기도 했다. 뷜로가 바그너에게 이 젊은 작곡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바그너도 흥미를 갖게 되어 두 사람의 첫 회견이 실현되었다. 브루크너는 처음에는 대선생님을 만날 용기가 없었으나 권유를 받아 바그너를 찾아갔다. 그 때 어떠한 화제가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브루크너에 의하면 바그너는 매우 친절했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브루크너는 일단 린츠로 돌아왔으나 6월 19일에는 다시 뮌헨으로 나가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3회 공연을 보고 '감격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린츠에서 브루크너는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외에도 프로진이라는 남성 합창단 지휘자를 맡고 있었는데, 1868년 이 합창단의 기념 축하공연에 노래하는 합창단을 위하여 바그너에게, 이전에 작곡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지 한 곡 빌려줄 수 없는가 하고 부탁했다. 바그너는 기쁜 마음으로 최근 작곡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5막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한스 작스의 연설에서 이어서 나오는 '환희의 합창'이었다. 4월 4일에 이것을 지휘한 브루크너의 감격은 매우 컸었다. 1872년 5월, 그 무렵 빈에 살았던 브루크너는 바그너가 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역으로 마중하러 나갔다. 거기에는 빈 음악계의 면면들이 즐비하였는데 열차에서 내린 바그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브루크너 쪽으로 달려와서 "오, 오! 브루크너 이리 와요. 자네는 내 동료이다."고 말했다. 이미 그 무렵에 브루크너는 빈 음악원과 대학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명강사, 교수였다. 그 이듬해 브루크너는 바이로이트에 가서 바그너를 방문하고 자작인 2번과 3번을 보여준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브루크너 자신이, 보르초겐에게 보낸 편지로 이 회견에 대해 상세히 말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그는 바그너가 교향곡 3번의 [제1부]를 다 훑어보았다고 썼다. 이 때 제4악장은 아직 스케치뿐이었기 때문에 바그너에게는 그것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쨋든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헌정하였는데 그 때문에 뒤에 이 곡은 [바그너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다음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75년 바그너가 또 다시 빈에 나타났을 때이며 브루크너가 그를 찾아갔을 때, "자네 교향곡을 연주해야 한다!"고 외쳤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만날 때마다 "자네 교향곡을 연주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한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것은 헛소리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이나 빈 필하모닉에게 연주해 주도록 권했었지만 악단 쪽에서는 비평가 한슬리크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채택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82년 7월 파르지팔 초연 직전에 바이로이트에서였다. 브루크너는 검은 예복을 입고 바그너 집 앞에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또 "내가 자네 교향곡과 모든 작품을 상연하겠다."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오, 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숭배합니다."라고 감격에 차서 말할 뿐이었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정말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얼마만큼이나 숭배하고 있었을까? 프리드리히 브루메는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숭배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순수하게 존중하기에는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이었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분명히 브루크너를 종종 칭찬했지만, 바그너 쪽에서 접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브루크너의 모든 작품을 상연하겠다고 말해 놓고는 교향곡 3번 '바그너' 이외의 작품을 알려고 하는 관심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바그너가 종종 교향곡 3번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고, 브루크너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베르너 볼프에 따르면,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는 그 뒤에 말하기를 "아버지가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을 자신이 연주하겠다고 말한 것은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진상에 가까울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바그너'를 높이 평가하여, 실제로 상연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하여 상연한다는 것이나 상연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힘을 쓴다는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을 세상에 인정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것이 특별히 자기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이상) 하지 않았었고, 게다가 자기 작품의 창작과 자작의 상연을 위한 일 때문에 시간을 뺐겨서 그럴 틈 조차 없었던 것이다.브루크너 자신도 바그너에 의해 자작이 상연될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그 자신이 너무나도 강하게 바그너 당에 끌어들여지는 것을 회피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루크너 자신은 순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말 뿐인 약속만 하는 바그너에 대해서는 약간 좋지 않은 기분을 가졌을 것이다. 뒤에 친구에게 "바그너는 주의하는 것이 좋겠다. 자기 이익이 될 때에는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전혀 무관심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니벨룽의 반지도 파르지팔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서 보았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의 바그너 오페라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작곡가 바그너에 바친 커다란 숭배의 마음은 끝내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브루크너의 바그너 악극에 대한 감탄의 마음은 전적으로 음악에만 한정되었었다. 이 선배의 악극 사상이나 그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브루메에 따르면, 브루크너는 트리스탄의 피아노 스코어를 열심히 사보하였으나 거기에 붙여진 텍스트를 베끼기는 커녕 읽지도 않았다고 하며 발퀴레를 보았을 때 그 끝막에서 '브륀힐데는 왜 화형에 처해지는가'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브루크너가 최초의 교향곡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바그너 음악을 접했었고 또한 키츨러로부터 바그너 작품을 연구하도록 권유를 받기도 했었다. 브루크너보다 10살 아래인 이 린츠의 악장은 제히터처럼 대위법 이론에만 집중하지 않고 베토벤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작품, 분석을 브루크너에게 하도록 시켰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에게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크로마틱(반음계)와 엔하모닉(딴 이름 한 소리)의 넓은 이용법이었다. 키츨러 지도 아래 작곡된 교향곡 0번과 그 뒤의 1번에는 이와 같은 바그너의 새로운 수법이 발견된다. 악기 사용법에 있어서도 1번 1악장의 트롬본은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접한 바그너 작품인 탄호이저를 생각나게 한다. 교향곡 2번에서는 1악장에 바그너의 리엔치 중의 '리엔치의 기도'에 나오는 동기가 거의 그대로 오보에에 나타난다. 그러나 브루크너가 의식적으로 바그너에게 기울어짐을 나타낸 것은 교향곡 3번 '바그너'인데, 거장에게 헌정된 곡인 만큼 화성이나 악기법에 바그너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발퀴레에서 인용한 것도 몇 몇 보이지만, 이러한 인용은 나중에 작곡가 자신이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그너적 색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특히 제2악장 전체에는 발퀴레의 안정된 낭만적 분위기가 짙게 나타난다. 주부인 제2주제인 졸림의 동기에 흡사하다. 제4악장 조차도 반음계적 화성의 활용이나 현의 세밀한 음형, 그리고 끝맺음에 이르는 장대한 금관악기의 부르짖음등 탄호이저 이후의 바그너 세계를 방불케 한다. 1878년 작곡된 현악5중주 F장조에 관하여, 가이링거는 "그 화성이나 조바꿈에 있어서 '지크프리트'의 방랑자 장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이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 곡의 끝악장에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베크메이서의 동기와 흡사한 선율도 나타난다. 브루크너는 마지막 세 개의 교향곡에 있어서 바그너 튜바를 사용함으로써 바그너에게 대한 숭배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제7교향곡 제2악장의 스케치가 1883년 1월 22일에 완성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죽음을 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3월 13일 바그너는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다음날 14일 브루크너는 그 통보를 받았다. 이 때 브루크너는 음악원에서 이 제2악장 아다지오의 마지막 부분을 작곡 중이었는데 장송의 뜻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아다지오의 코다로 35마디를 덧붙여 썼다고 한다. 이 부분의 처음과 끝에 오는 무거운 금관 합주에서는 바그너 튜바의 울림은 물론이고 전체가 [반지]와 [파르지팔]을 방불케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브루크너는 성플로리안에서 이 코다의 음악과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 장송 음악을 결부시켜서 즉흥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그는 간혹 바그너의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의 즉흥연주를 하였다. 7번, 8번, 9번이라고 하는 3곡의 교향곡에서는 모두 느린 악장이 특히 바그너 수법에 대한 접근을 보여준다. 8번의 제3악장 아다지오는 터치가 부드럽고 깊숙한 음향에 있어서 트리스탄과 공통된다. 기분을 풀 길이 없는 불안한 주제의 반음계적인 움직임, 특히 그 반주의 당김음에 의한 셋잇단음표의 흔들림, 무한선율, 그리고 반음계 화음의 상승 등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세계이다. 초기의 브루크너에 관해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인 섬세한 미가 바그너를 통해서 꽃피었다. 한슬리크가 말했듯이 여기서 하프를 사용한 것도 바그너에 대한 접근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교향곡 9번의 첫머리는 파르지팔을 상기시킨다. '제1주제는 바그너의 파르지팔 제3막의 전주곡, 성 금요일의 음악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위로 받지 못하는 기분 속에서 개시되지만, 곧 '창의 동기'의 연상을 거치면서 '그랄(성배)'적인 상승을 이룬다. 다만 이 브루크너의 백조의 노래가 바그너의 백조의 노래와 다른 점은 후자가 드라마의 객관성이 갖는 기분을 전하려고 하는데 비해 전자는 절대음악이며 그 배후에 아무 것도 없는 청결함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주 기분 나쁠 정도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을 듣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을텐데 말이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함께 전용(專用)되었으며 그의 교향곡은 나치 독일 시절 철처하게 나치의 선전용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나치와의 과거 문제에 때문에 큰 오명을 얻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게르만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자가 아닌게 밝혀졌고 유대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친한 사제관계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별다른 외부 저항없이 레퍼토리로 이용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음악은 연주금지가 되지 않았고 자주 연주된다. 1937년, 레겐스부르크의 잊을 수 없는 악명높은 사진에서 나치의 군복을 차려 입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브루크너의 대리석 흉상을 존경스러운듯이 바라보며 서 있다. 국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아돌프 로덴베르거가 만들어낸 이 흉상은 철십자를 잡아채고 있는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나치 문양과 그 곁에는 금으로 둘러싸인 제단 위에 올려져 있다. 브루크너는, 1841년에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세의 지시 아래, 파르테논 신전을 본 따 만들어진 레겐스부르크의 신전, 즉 과거 독일의 문화적 영웅들로 가득찬 이 신전에 독일 문화의 또다른 선각자로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브루크너의 경우는 제3제국 속으로 충분히 들어올 자격이 있는 독일 작곡가들 속으로 브루크너를 충분히 우상화시켜 합류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실제로 이것은 8개월 후의 독일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합병의 징조였다. 피터 가블, 막스 아우어(국제 브루크너 협회 회장), 괴벨스,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에 의한 연설 등을 포괄하는 이러한 레겐스부르크의 행사는 일련의 음악회,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행사, 그리고 독일 나치 당의 모임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음악 정치적 행사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브루크네리안의 편협한 시각으로 이 행사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단지 지난해의 브루크너 사망 40주년 기념 행사를 마무리하는 행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 후반의 나치의 정치적 전략의 더욱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합병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었다. 1936년은 이러한 브루크너 사망 40주기를 포함하여, 괴벨스에 의하면, 모든 베르사유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해였다. 독일은 다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1936년이야말로 오스트리아, 체코, 그리고 폴란드로 영토를 넓혀가기 위해 전진하는 해였다. 이제 괴벨스가 스스로 '위험 지대'라고 명명했던 동원의 시기인 1936년 시기에 동시에 이루어졌던 복잡한 국내 선전 캠페인 속에 이 작곡가의 이미지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문화적 우상으로서의 브루크너의 중요성은 단순히 대리석 흉상부터 출발하여, 깃발, 철십자에 이르기까지 부각되었으며, 심지어는 게르만의 문화적 애국주의로까지 확대되었다. 브루크너를 제3제국의 문화적, 정치적 목적에 연결시려는 행사들은 시시한 것에서 예술적으로 매우 모호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고, 지금 현대 사람들의 귀에는 매우 순수하게 들리는 그의 음악도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대중들의 귀에는 매우 다른 의미로 각인되었다. 만약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브루크너를 한 인간으로서, 작곡가로서, 그리고 북 오스트리아의 같은 형제로서 브루크너를 생각하고, 관심갖지 않았다면 브루크너를 미화하는 나치의 선전 캠페인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유년 시절,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매우 감동되었다. 히틀러의 예술가로서의 젊은 시절의 투쟁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브라나우에서 온 이 평범하고 젊은 예술가는 빈의 미술계에 들어가려고 하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러한 그의 신세를 초기에 빈의 예술계로부터 촌사람으로서 아웃사이더나 다름없었던 브루크너와 동일시하게 된다. 괴벨스의 1941년 3월 13일의 일기를 보면, 또한 히틀러가 빈과 관련해서 크게 상처받았고, 이는 결국 직접적으로 브루크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플로리안으로 가라! 브루크너가 작곡하던 수도원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바로크 건물인가! 우리는 이곳으로부터 나온 성직자에게 관심을 돌려 그 음악동료와 브루크너 협회를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내었다. 얼마나 장대한 계획인가! 그의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한 시골 청년! 오늘날 이 구역이 얼마나 문화, 역사, 심지어 예술적 힘에 있어서 풍요로운가! 위대한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여기에 문화의 중심지를 세우려고 한다. 빈과 평형을 이루는 평형추로서, 그리고 빈은 서서히 철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린츠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순전히 그의 비용으로 성 플로리안에 그 대안을 만들려고 한다." 한스 크레크치의 탁월한 논문은 종전까지의 히틀러의 브루크너에 대한 집착, 특히 그의 개인적 보호 아래 성 플로리안을 바이로이트처럼 만들려는 계획을 비롯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소위 '브루크네리안 바이로이트'는 세가지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성 플로리안은 '브루크너의 불멸의 작품을 위한 성스러운 전당'(브루크너의 전통을 유지하고 촉진하기 위해)이 되어야한다. 둘째, 바이로이트와 같이 브루크너 페스티발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 플로리안은 음악 협회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별도로, 브루크너의 음악(교향곡)은 라이브 음악회와 라디오 방송에서 공식적인 의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알버트 스피어는 뉘른베르크에서의 대규모 당 행사에서의 그의 문화에 대한 연설에 앞서 매번 브루크너 교향곡의 한 악장이 연주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37년 6월 30일의 악명높은 '건강한' 독일 예술을 찬양하는 나치 주최의 퍼레이드는 브루크너 3번 교향곡의 팡파레로 시작되었다. 지타가 공인하듯, 브루크너의 멜로디는 어떠한 장엄하고, 의례적인(ceremonial) 면이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은 바로 바이로이트의 대 작곡가에게 헌정된 3번 교향곡과 관련하여 바그너 자신이 언급한 바로 그 주제였다는 점이다. 바그너와 바이로이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지 첫 해에 이미 새로운 체제에 의해 정치화되었다. 그리고 나치는 이제 브루크너의 상투성을 '바그너-심포니스트'로서 강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더욱 많은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1934년에 있었던 'Die Musik'에 드러난 나치의 친위대 음악회 비판에 의해 더욱 확장된다, 그 논평자는 베토벤을 제3제국의 선구자로서 포함시킨다. "바이로이트의 거장, 즉 독일 변혁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제3제국의 가장 대담한 제사장인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서곡에 의해 묘사되었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기념비적인, '에로이카(영웅)'로 불릴 수 있는 7번 교향곡은 영웅적으로 전체 작품의 음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느린 악장의 장송행진곡에 있어서도 베토벤의 영웅교향곡과 연결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그 느린 악장은 또한 어떤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와도 같은데, 그 영웅은 바로 바그너와 관련이 있다." 1945년 4월, 7번 교향곡의 아다지오가 독일 라디오의 히틀러의 죽음 소식에 이어 흘러나올 때, 그 브루크너의 음악은 또다른 '영웅'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었을 것이다. 초기, 나치와 바이로이트와의 긴밀한 관계는, 그들의 우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사회주의자들과 국제 브루크너 협회 간의 사소한 마찰을 유발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에, 이 협회의 목적은 매우 단순했다. 즉 그들의 목적은 안톤 브루크너의 작품을 널리 퍼뜨리고, 작품들의 진정한 에디션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공식적인 두개의 목적이 또한 있었다. 브루크너를 널리 유포되어 있는 브람스 파의 패러다임과 어울리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작곡가로서 소개하는 것이었고, '바그너-심포니스트'로서의 브루크너의 판에 박힌 이미지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국제 브루크너 협회는 나치의 재정적 지원에는 매우 기뻐했으나(괴벨스는 그의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진정한 브루크너 에디션을 위한 자금의 지원을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이러한 상호 만족 뒤에는 브루크너와 바그너에 관계된 풀 수 없는 긴장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긴장은 1937년 5월, 레겐스부르크 연설이 있기 한 달전에 아우어가 두 작곡가 사이의 확연한 스타일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자, 표면화되었다. 아우어의 목적은 극음악의 세계에 있어서의 바그너의 뿌리를 브루크너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그것과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중요한 차이점은 오케스트레이션과 관계되었다. 브루크너의 언어는 오르간주자로서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그 사운드는 바그너의 영향을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기 교향곡에서는 바그너 튜바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우어의 논문에서 이상한 점은 자신과 협회는 반 바그너주의를 '주장하거나 주장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석을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더블 스페이스로 매우 강조한 상태로 말이다. 이러한 거부의 정치적 함축의 의미는, 특히 체제 그 자체와의 충돌을 무릅썼던, 제3제국 시대의 바그너를 비판하는 음악 해설자에게는 그 의미가 확실한 것이다. 아우어 자신은 명백히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분리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에서 주요 흐름을 거스르기는 했지만, 그의 노력은 그가 바이로이트 음악축제가, 오페라가 연주되지 않는 날,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함으로써 브루크너 음악축제과 잘 통합될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 보고서에 의해 똑같은 이유로 평가절하되었다. 괴벨스는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즉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행사의 공동 스폰서인 협회를 모욕하고 싶지도, 두 작곡가를 연결시키려는 널리 보급된 국가 사회주의 문화 관점을 훼손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두번 그의 연설에서 바그너를 암시하였다. 초기에 그의 연설에서 그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바그너 예술의 교향악적 왜곡'이라고 본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브루크너의 '오르가니스트-교향곡 작곡가 패러다임'의 지지자인 아우어는 괴벨스가 다음과 같이 언급했을 때,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것이다. "브루크너의 바그너에 대한 경험은 그의 음악적 언어의 공명에 있어서 거의 혁명에 가까운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만이 그것을 우리가 진정한 브루크너의 스타일로서 인식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앞으로, 그 교회 음악가는 동시에 거의 완전하게 후퇴하여, 그로부터 나와 특유한 교향곡 작곡가가 된다." 괴벨스가 언급한 것은, 바그너에 의해 자극된 변형(metamorphosis)이다, 즉 교회음악가로부터 교향곡 작곡가로의. 더욱 고고한 세속적 영역에로의 브루크너 격상의 이미지는 괴벨스의 1936년 이후의 국내 선전 캠페인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히틀러의 개인적 관심과 바그너와의 관련성 외에, 나치에게 있어서 브루크너 음악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에 있어서의 '독일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제3제국 동안 음악 비평가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문제였다. 그것은 독일 문화에서 중요한 역사와 관련된, 인종적인 숨겨진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있었던 반 멘델스존 캠페인과 그 세기 후반에 있었던 브람스-브루크너 논쟁 등에 대한 탐구였다. 그러한 이슈는 제1차대전이 끝난 후에 조금은 다른 형태로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국가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학자들과 언론가들 사이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위한 탐구를 촉진하던 때였다. 이러한 탐구들 중 초기 1차 대전 후의 내셔널리즘의 몇가지 예는 가볍고, 별로 심사숙고한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대부분은 1930년에 이르러서는 매우 강력하게 이데올로기화되고,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적으로 되었다. 그때까지 얻은 결론은 매우 간단했다. 즉 아리안의 음악은 영웅적이고, 고상하고, 체계적이고, 숭고하며, 철학적이고, 그리고 영적이다. 반면, 비아리안의 음악은 매우 시시하고, 피상적이고, 열등하고(특히 유태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짐), 내용없이 장식적이며, 절충주의적이고, 그리고 뿌리없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W. 헤르조그는 게르만 패러다임에 적합한 특별한 예를 제시하였다. 바흐의 평균율, 푸가의 기법,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레오노레 서곡 3번,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브루크너의 5번과 9번 교향곡 등이 그것이다. 그는 특별히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 5번의 푸가적인 피날레와 9번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을 예로 들었다. 헤르조그의 글은 특히 푸가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귀족적인 독일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나, 1차 대전 후, 그것의 '영웅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푸가와 코랄, 즉 성스러운 독일 예술의 두개의 축은 '황금의 20세기' 동안 타락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들은 예를 들어 쿠르크 바일의 작품, 'Die Dreigroschenoper' 등에서 심지어 희화화되어 왔다. 바이마르 시대의 비관주의, 냉소주의 등의 인지된 배경에 반대하여, 즉 도시의 문화적 가치가 시골의 그것에 비해 널리 유포되고, 그리고 실내 교향곡이 새로운 교향악적 패러다임으로 된 그곳에서 브루크너의 음악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다. 북 오스트리아의 교사였던 브루크너는 질풍노도의 이상적인 상징으로서 대접받았고, 푸가와 코랄은 그의 음악적 표현에 있어서 핵심이었으며, 그의 서사적인 교향악적 설계는 그 스케일에 있어서 심지어 그 당대에도 전무후무한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어필하였던 것은 바로 장엄함과 화려함, 그리고 영적인 면을 지닌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이 지닌 기념비적인 스케일이었다. 히틀러 자신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피날레를 감상하였고, 특별히 그는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의 당 행사에 이 음악을 엔딩 음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브루크너만이 19세기에 깊고, 중후한, 그리고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푸가를 작곡했었는가? 브람스도 역시 그의 4번 교향곡의 피날레에서 장엄하고, 중후한 푸가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브람스는 나치의 모델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연관이 없는 부르주아 빈 음악계의 주류에 속해 있었다. 그는 질풍노도의 이미지에 맞기에는 너무나도 인텔리적이었고, 도시적이었다. 그럼 대규모 관현악곡을 즐겨하던 그 당시 생존했던 위대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는 나치의 선전에 어울렸을까? 잘 알려진, 불편했던 1930년대 중반의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아 있는 작곡가들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예증시켜주었다. 그들은 너무도 독립적이었고, 이기주의적이었고, 너무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내셔널리스트였던 한스 피프츠너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궁극적으로는 제3제국의 정치적 목적에 비우호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 오직 죽은 작곡가만이 나치의 문화부 선전 목적에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으며, 바로 브루크너가 이상적이었다. 그에 관한 많은 일화, 편지, 그리고 출판된 많은 인쇄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는 항상 음악 뒤의 인간에 대해서는 그의 일대기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이상적이었다. 리하르트 타루스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아마도 공허함을 싫어하며, 역사적 대중작가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브루크너의 대중작가는 아마도 괴벨스였고, 그의 레겐스부르크에서의 17분간의 연설은 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를 재창조하는 캠페인에 있어서의 정초를 제공하였다. 히틀러 자신은 이 날 아침, 의식에서 연설을 하지 않기로 했다. 브루크너를 재창조하는 임무는 선전 담당 장관인, 괴벨스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매우 탁월하게 간결하고, 효율적인 연설로 그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연설은 3개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첫번째 부분은 브루크너의 시골 출신으로서의 뿌리를 낭만적으로 언급하였고, 두번째는 그에 대한 음악 비평가들의 비난에 있어서는 그가 희생양이었음을 강조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브루크너를 그의 천재성과 영적인 면이 '교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한 작곡가로서 규정하였다. 이 마지막 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1936년의 나치와 바티칸간의 관계의 붕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그가 언급하는 이 작곡가의 감상적인 초상화 속에서 다양한 상투 어구를 나열한다. 그는 그의 지적인 호기심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 같음이 여전히 남아 있던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작곡가로서, 그의 '초라한 사무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일 음악의 창조성'의 위력을 통해 성공하고, 유명하게 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또한 브루크너의 촌부로서의 일대기를 강조하고, 그의 대지와의 연관성, 그의 '자연과의 신비로운 친화성', 그리고 그의 손상되지 않은 촌부로서의, 즉 히틀러와 나누어 갖고 있는 그러한 뿌리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시골 천재의 역설은 오직 혈통과 인종의 요소적인 힘을 이해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브루크너의 '검소한 사무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괴벨스에 의해 강조된 부분인 그의 교사로서의 그의 작품이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인지하였고, 제3제국의 천년왕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나치의 교화 정책의 선봉은 교육이 되어야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치 주의에 동조하는 교사들은 그들이 상승된 책임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였으나, 그들의 임무는 바이마르 시대 동안 지속되어오던 그것과는 너무도 관련이 없었다. 지적인 발달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나치의 교육자들은 아리안의 인종적 교화를 포함하는 개인의 인격을 형성해야만 했다. 교육 잡지들은 인종적·정치적 도그마를 강화하는데 봉사하였다. 실제로, 'Der Deutsche Erzieher'(독일 교육가)의 전체적인 이슈는 브루크너에게 바쳐졌다. 그 속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의 브루크너 축제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출판된 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에세이의 대부분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즉 그것은 브루크너를 슈베르트와 막스 레거의 좋은 동료로 인식되게 하는 직업인 그 자신의 교사와 교사의 아들로서의 브루크너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교육가로서, 브루크너는 인종적으로 순수하였고, 북 오스트리아 토양과 그의 관계는 세대에까지 미쳤다. 사악한 빈 비평의 희생양으로서의 브루크너를 강조한 괴벨스의 연설의 두번째 부분은, 더욱 광범위한 문화적 목적을 충족하였다. 한슬리크과 그 일파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은 괴벨스로 하여금 최근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적인 교의, 즉 음악 비평의 견딜 수 없음(또는 더욱 일반적으로는 예술비평)에 대해 선언하도록 하였다. 1936년의 가을에, 괴벨스는 음악, 예술, 그리고 영화 등의 저널에 널리 유포된 신조인 '예술 비평(Kunstkritik)'에 반대하는 공적인 선언을 하게 이른다. 예술 비평은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을 따를 때에만 적절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예술에 대한 주석과 설명'만이 저널리즘에서 허용될 수 있는 형태라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브루크너를 이러한 새로운 신조의 형성과 관련하여 인정한다. "만약 예술에 대한 주석과 설명의 공개적인 실천이 '새로운' 독일 안에서의 공식적인 채널에만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법에 의해 제한되어 왔다면, 우리는 또한 그를 괴롭히는 비평가들에 의해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던, 고독 속에서 투쟁했던 브루크너의 은혜를 갚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언급은, 그것이 오늘날에는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청중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언급은 유대인을 비생산적이고, 심지어는 기생한다고 비난하는 나치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과 막스 칼벡은 작곡할 수 없었고, 그들은 작곡을 했던 창조적이고, 정직한 예술가들에 대해서 쓰거나 어쩌면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괴벨스의 연설이 브루크너, 비평과 국제적인 반유대주의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모호하다고 할지라도 프리츠 스코르체니의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러한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있다. "브루크너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국제적인 반유대주의 유럽 자유주의란 탈을 쓴, 이미 독일의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투쟁을 착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술에 있어서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왜곡된 유대인에 대한 인식, 즉 한몫 보려 돌아다니는 떠돌이로서의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은 괴벨스에 의해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인 'Der ewige Jude'라는 선전용 영화 속에서 그 후 가장 첨예하게 나타났다. 이 영화는 공장 속에서 분투하는 건강한 아리안의 노동자의 솜씨있는 장면을 조심스럽게 의심할 것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아리안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을 놓고 승강이를 벌이는 게토의 천박하고 수염을 기른 유대인과 나란히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벨스는 브루크너 수정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지막 연설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것은 브루크너가 바그너와 알게 된 후, 교회 음악가로서의 역할으로부터 후퇴하고, 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온 후에 어떻게 독보적인 교향곡 작곡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교묘한 전기 서술이었다. 바그너의 세계와 관련을 맺은 후에 브루크너는, 예배식에 대한 의무적인 위치를 넘어서, 교향악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로 상승하였다. "여기서 그의 천재성은 교회에 속박된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형식을 만든다는 의기양양한 도취감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자유에 대한 한없는 열망이 그의 영혼 내부에서 울부짖었다." 물론 테데움과 시편 150편과 같은 후반부의 성스런 작품들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게르만 음악 학자들과 비평가들 모두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실수였다. 브루크너가 로마 가톨릭에 헌신했다는 사실이나 심지어는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었다는 사실조차 레겐스부르크의 연설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간단히 "신에 대한 믿음"(Gottglaubig)이라고 묘사되었는데, 이는 나치의 빈틈없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담은 정치적인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신앙심(Gottglaubigkeit)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3년부터 36년까지 교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간략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6년에는 단지 브루크너의 기념일을 정하고 예술 비평 금지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중대한 사안을 담고 있었던 1936년 7월의 회칙과, 그로부터 겨우 4개월 후에 공식적이면서 대안적인 종교 고백으로서의 'Gottglaubig'의 성립에 의해 더욱 증폭된 국가 사회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 간의 관계가 심각하게 냉각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치와 교회의 관계는 히틀러의 공적으로 문제를 피하려고 한 히틀러 개인의 욕망에 의해 더욱 복잡하고 거대한 주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나의 투쟁'(Mein Kampf)은 이 이슈를 더욱 피해갔다. 그러나 히틀러의 반 교권적인 신념은 내부에서는 전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종교의 문제는 총통과의 협상 과정에서 다시금 문제화된 것이었다. 헤르만 라우스칭(Hermann Rausching)은 히틀러가 "게르만의 기독교는 하나의 왜곡이며, 게르만인이 되거나 아니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둘 다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음 속에서 신을 믿고 느끼는 자유로운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고 개인적으로 언급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무익할 뿐 아니라, 나약함의 표시라는 점이라는것이었다. 조직화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적개심은 고대 그리스가 현대 독일의 중요한 모델이라는 관점과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특히 니체와 바그너를 포함하는 독일 예술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지지된 확신이었다. 히틀러는 조직화된 종교에 대해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사용하였고, 그는 황제의 퇴위 직후에, 정치적 방향이 없었던 개신교도들에 관해서는 일찍이 성공적이었다. 이 독일 개신교도들에게 있어 반유대주의는 그다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는 그다지 크게 가톨릭 교회를 방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공식적인 관계에 심각한 방해물은 나치의 소문에 들리는 '공산주의적' 성격이었다. 게다가 바티칸은 볼셰비즘을 히틀러의 1933년 전체주의의 원형이 되었던 그들의 무솔리니와의 1929년의 라테란 협정에 의해 예시된 것과 같은 전체주의보다 더욱 중대한 국제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독일의 11월 혁명 이후에 교황청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공식적인 협정 조인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은 히틀러를 이길 수 없었다. 1933년의 이 국가적 협정은 로마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하였다.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 성직자의 법적 지위 보장,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일이나 바티칸에 대한 직접 연관 등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나치의 서약, 그러나 높은 세금이 부과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수준에서 국가 정치의 하나로서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나치가 가톨릭의 일에 대해 방관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해졌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협박을 위한 능숙한 전략을 세웠고 그것에 의해 설교는 감시받고, 신부들은 괴롭힘을 당했으며, 물론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선전활동도 나치의 청소년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1936년까지 독일과 바티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정점은, 젊은이들에게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주의를 정치적으로 주입하고 시민의 자유를 침범했을 뿐 아니라 총통(Fuehrer)을 신격화한 나치를 비난하는 교황의 회칙(Mit brenner Sorge)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교회에 대한 정책, 특별히 바티칸에 대한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치즘을 하나의 종교 그 자체로 인식하고, Gottglaubig를 공식적인 용어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용어는"게르만의 본성에 맞는 종족적이고 적절한 신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교도적인 것도 아닌 이러한 비 기독교적인 지향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믿게끔 만들었으나, 그것은 또한 그들의 신앙을 버린 유대인들이 독일인에게 포함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교회 밖에서의 영적인 본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은 물질적이고 무신론적인 볼셰비즘에 대한 반대가 나치 교의의 불변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제3제국은 그들이 믿는 모든 것, 즉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은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훨씬 더 정신적인 것이라는 그 무언가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독일 예술은 점차 성스런 예술이 되어 갔으며, 음악은 나치의 가장 성스런 현시였다. 성스런 예술로서의 음악에 대한 관점이 나치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19세기 후반 독일 전반에 퍼져 있었던 의식이었고, 작곡가들과 철학가들에 의해서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철학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성스런 예술로서의 음악은 1903년대에 불안한 정치적 소용돌이와 함께 곧 소생되었다. 1937년 레겐스부르크 기념식은 브루크너를 성 발할라(Valhalla) 사원의 하나의 신으로 지정했다. 그의 음악은 성스런 언어와 나치즘의 신화적 종교가 될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의 브루크너 기념식과 3제국의 새로운 종교 전략간의 연결은 바로 그날 오후 군중의 대 집회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레겐스부르크에 모인 약 200,000명의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을 통해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이라는 용어를 공식 사용했다.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이 민족을 다시 흩어지게 만들거나 종교적 입장 차이로 인한 싸움으로 우리를 어렵게 만들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앞으로 대대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치는 늘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민족과 영광, 자유,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실천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에 대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을 가지고 미래로 정진해 갈 것입니다. 신이 우리를 돕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독실한 브루크너는 그 '신성한 신'의 메신저가 될 것이었다. 그의 교향곡, 특히 슈베르트의 "천상의 범위(Heavenly Length)"를 능가하는 영혼적인 느릿한 진행은 하나의 종교적인 체험으로 간주될 만했고, 혈연과 지연을 나눈 이들만이 완전히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0년대 초반, 빈의 음악축제(Dunkelkonzerte)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두운 빈의 콘서트하우스가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 브루크너의 음악을 듣는 성스런 곳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작곡가들도 그런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브루크너의 교향곡이었다. 그러한 한 프로그램 안내서의 사본은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중간휴식 전에는 모짜르트의 레지나 챌리가, 직후에는 브루크너가 유일하게 신 자체에게 헌정했던 제9번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작곡가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신의 메신저'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독교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교회 음악가로서의 브루크너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레겐스부르크에서의 기념식과 동시에, 1937년의 한 기사의 작성자는 브루크너의 가톨릭주의에 대해 비난을 하려는 시도를 했다. 피터 라베(Peter Raabe)는 물질 세계에 대한 브루크너의 "초연함(deafness)"을 강조했다. "신성함은 마음의 순수함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선언하면서 그는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라베는 "신과 대화하는" 교향곡 작곡자를 묘사하면서, 그러나 그가 중요하지도 않은 교회 음악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신앙심(Gottglaubigkeit)의 맥락 이외에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베르너 코르테(Werner Korte)는 한슬르크(Hanslick)의 맹렬한 비난에 대한 근거로 브루크너의 가톨릭적인 뿌리를 인용했으나, 브루크너를 "가톨릭 정신의 순교자"로 보거나 그의 음악을 "기독교를 위한 사죄 행위"로서 인식하는데에는 반대를 했다. 라인홀드 짐머만(Reinhold Zimmermann)은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했는데, 즉 "가톨릭적인 것"과 "아리안"적인 것은 모순된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브루크너를 완전히, 심지어는 원천적으로 가톨릭적이라고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인성과 업적을 평가하는데 있어 의심할 바 없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나 인생의 인종 지향적인 인식이다." 짐머만의 생각은 모든 사람은 게르만인이던가, 아니면 기독교인이라는, 히틀러가 헤르만 라우스칭(Hermann Rausching)에게 보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논평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괴벨스의 레겐스부르크 연설은 장엄하고 의식적인 그 순간을 오스트리아 합병의 필연성과 연관시키면서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의 전략은 이를 하나의 교조적인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는 보다 광범위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었다. 1940년대의 성 플로리안에 대한 잘 짜여진 히틀러의 계획은 좀더 나아가 전쟁을 통해 어떻게 브루크너를 나치의 문화적 우상으로 남길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다. 비록 브루크너의 그러한 상승이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린츠 제국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Linzer Reichs Bruckner Orchestra)와 브루크너 합창단은 1942년 독일 라디오와 인연을 맺었고 일반 공연과 방송을 통해 1945년 봄까지 공연을 계속했다. 브루크너 교향곡(음악)에 대한 나치의 전용은 전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까? 아니면 이것은 어떻게 남용된 것일까? 혹자는 아마도 특히 원작이 없거나 덜 실용적인 음악이 시대를 불문하고 그러한 남용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그저 자전적인 수정주의의 복잡한 그물 속의 한 가닥 줄이었고, 그 안에서 브루크너의 인생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지지하고, 'Kunskritik에 대한 공격을 유효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정치적 신화를 위해 종교적 우상을 만드는데 다시 쓰였다. 동시대의 독일 관객들이 나치의 선전을 믿었든 안 믿었든 간에, 또 그들이 아다지오에선 신과 소통하고 푸가의 피날레에서는 튜턴족(게르만)의 영웅주의를 느끼게 하는 전원적인 스케르초에서 그들 공동의 나라(영토)를 느꼈던 안 느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이다. 경우가 어떠하든 간에 나치의 브루크너 캠페인에 대한 전후의 즉각적인 국내의 영향은 오래 가지 않은 것 같았다.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는 연합국 지배하에 있던 1945년 5월에 필하모닉 브로드캐스팅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의 브루크너에 대한 지향은 겨우 한달 후 눈깜짝할 새에 그 이름을 브루크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바꾸게 했다. 틀림없이 이 작고 단독적인 사건은 전후 브루크너의 평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나치와의 과거 문제 때문에 큰 오명을 얻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별다른 외부 저항없이 레퍼토리로 이용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음악은 보이콧되지 않았다. 그러나 추축국 외에서의 브루크너에 대한 대접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특히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지역에서 특히 1940년에서 50년대에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필연적으로 독일 점령을 상기시킬 만하였다. 전후 미국에서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울려 퍼질 수 없었다. 그의 음악은 나치의 문화적 캠페인에 대해서도 역시 모르고 있던 대부분의 콘서트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사실 4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브루크너 르네상스의 일말의 징조가 보이는 듯도 하였다. 그것은 1948년에 미국 브루크너 협회가 협회지 코드 앤 디스타드(Chord and Dischord)를 재발간했을 때를 전후해서였다. 그 회지는 발간 공백에도 불구하고 1969년까지 잘 운영되었으며, 그 때에는 더는 브루크너의 공연이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이겐 요훔(Eugen Jochum)과 후에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클라우스 텐슈테트(Klaus Tennstedt), 그리고 기타 여러 음악가가 브루크너 교향곡을 음반화하는데 열정을 보였다. 좀 더 최근에는 CD의 발달과 함께, 그런 작업은 그의 제2번, 제3번, 제4번, 제8번 교향곡의 오리지날 버전과 같은 진품들도 만들어 냈다. 브루크너에 관한 기사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잡지에서도 계속 나타났다. 물론 나치의 캠페인이 벌어지던 시기의 규모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전후의 학문은 보다 실증적인 논조를 띠었다. 인종과 민족에 대한 연구는 사설이나 분석적인 문제들에서나 볼 수 있었다. 독일 학자들은 열렬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고 판명된 브루크너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 잡지들과 편집장들은 나치 지배 기간 동안 바로 그들 잡지에 게재된, 인종과 종교와 브루크너에 관련된 왜곡들에 대해서 억지로 부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문제는 대부분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회상보다는 재건이 중요하다는 노판트(Nullpunkt) 정책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은 전후를 넘는 기간까지 확장되었는데, 레오폴트 노바크(Leopold Nowak)의 브루크너 전기인 뉴 그로브(New Grove)는 그 좋은 예가 된다. 나치의 그 엄청난 이데올로기적이고 선동적인 기사들은 노바크의 참고 자료에서 제외되었다. 그러한 그가 이용한 얼마 되지 않는 나치의 케케묵은 저작들은 대부분 그 어떤 정치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2차대전 종전 이듬해는 브루크너 사망 50주기가 되는 해였고, 린츠에서는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기념 행사가 있었다. 1946년 7월 27일에는 명망 있는 협회의 의장이었던 막스 아우어(Max Auer)가 지난 12년간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했다. "우리는 안톤 브루크너 사망 50주기에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 그의 삶과 새로운 부활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언 아래에서 뭉칠 것입니다. 왕은 죽었지만, 그 왕은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브루크너는 왕입니다. 절대 음악의 왕입니다." 비록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와 바그너의 환영(幻影)은 아우어의 말들에 나타났다. 표면적으로 아우어는 브루크너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으며, 다시 브루크너를 연구하고 대접하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유령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왕이 죽고, 즉 총통의 죽음에 잇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브루크너는 나치 선동의 잿더미로부터 부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음악의 왕"은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음악적, 정치적 연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아우어의 숨겨진 또 다른 언급은 1937년, 그가 총통에게 브루크너 메달을 수여했던 그 해에 있었다. 그 언급은 겨우 1년 전에 그가 발표한 내용을 다시 되풀이했던 것일까? 그 때 괼러리히-아우어(Gollerich-Auer) 자서전의 최종판의 서문에서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물질주의(즉물주의)에 대한 공격을 서서히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바로 "예술적인 볼셰비즘이 극단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때였고, 브루크너의 "신을 신성시하는 예술"은 (총통을) 보다 나은 세상 1936년의 세계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10년 뒤에 아우어의 린츠 연설은 브루크너의 오스트리아 혈통과,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과 나치 교리를 분명히 부인하는 그의 주장 모두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연설이 성공적으로 아우어 자신의 이전 발언들을 상쇄시켰던 것일까? 그가 과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도 모호하게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브루크너 협회를 재건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더 많은 공연을 위해 또 더 많은 관객 층의 확보를 위해서 누가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꺼내고 싶어했겠는가? 브루크너와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결코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이나, 혹은 전후에도 코드 앤 디스타드지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미국에서 브루크너는 미국내의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곡 스타일이 그 당시 미국 학계에 만연되어 있던 논리나 균형, 규모를 중시하는 브람스적인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주류에서 벗어났다. 그의 음악은 오히려 최근에 콘서트의 레퍼토리나 음반 목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브루크너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미국의 음악적 담론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 현재의 브루크너 작품집은 그저 그러한 경향에 약간의 동요를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비록 사설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분석적 문제와 같은 중요한 이슈들이 여기서 처음으로 혹은 새로운 관점으로 논의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브루크너에 대한 이미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얼마나 나치의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구해야 할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전후 브루크너에 대한 중요한 해석(느린 템포들이나 풍부한 하모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이 나치의 종교적 우상으로서의 브루크너의 성향을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교향곡 무대나 녹음 스튜디오에 옮겨다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날 "솔직함", "순수성", "유기체" 등과 같은 말들이 나치 시대의 브루크너에 대한 담론들과 함께 명백하게 정치적으로 기호화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브루크너를 분석하고 수정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러한 질문들은 이 에세이가 다룬 영역 외에서도 광범위하게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궁극적으로는 해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브루크너 연구는 과거사실에 대한, 특히 제3제국 시대 동안의 브루크너에 대한 어두운 평가를 외면한 채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에 깊이 매진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관념론과 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혹은 칸트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 등에 반대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보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뢰켄(Röcken)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어있었다(니체는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1813-1849)는 루터교회 목사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죽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두 하녀들과 함께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세상을 하직하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 185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는 모두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배웠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신앙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s")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하여 1867년 10월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 해 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가슴을 심하게 다쳤고 후송되었으나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의 관심을 다시 그의 학업에 둘 수 있었고, 1868년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에 우연히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였고 이에 깊이 감동하였다.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학업을 끝낸 후 그 다음 해에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났다.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그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 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여러 강연회에 연사로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게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젤에 있을 당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후 바그너의 뛰어난 제자의 한사람으로도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점차 기독교화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기독교적인 도덕주의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뉜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비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비관주의를 해소시킨,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다.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1879년 이후 건강상의 악화와 자유로운 철학의 정립을 위해 35세에 바젤대학교를 퇴직하고,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가 요양과 집필에 전념했다. 35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후 그는 강연도 그만두고,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 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고,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다. 니체는 말년에 정신적인 붕괴를 겪고 10년 동안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었다. 그의 정신 착란이 매독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뜬소문에 불과하다. 니체가 매독에 걸렸다는 설을 반박하는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기존의 도덕적 세계관이 삶을 옥죄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에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래의 도덕적 사상들을 데카당(퇴폐적인 것)이라 칭하며 비판한다. 플라톤 연구자이기도 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신의 죽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이란, 종교 혹은 이상주의 등의 신앙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달리말해, "신의 죽음이란 허무주의(니힐리즘)의 도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최고가치의 상실과 허무주의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삶의 최고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책에서 니체는 일견 불교에 대해 호평을 내리지만 이내 기독교와 불교 양자를 퇴폐적인(데카당트) 종교로 규정짓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며, 불교는 삶에 지친 노인들을 위한 종교이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소개한다.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그리스 비극'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해석 탓인지, 니체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 비극 정신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드러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 비극 정신이란, 니힐리즘을 근본으로 하는 고통을 힘의지로 승화시키는 태도이다. 니체는 탈아의 도덕을 뛰어넘는 인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버멘쉬라 부를 수 있다. 위버멘쉬는 또한 종래의 안일한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유형이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종래의 성(聖)과 속(俗)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니체는 《유고》에서 허무주의(Nihilismus)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수동적 허무주의'은 약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쇠퇴한 니힐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회피하고 찰나적인 향락주의나 무관심한 이기주의 등 퇴폐적 삶에 의해 공허감을 채워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허무주의는 잠재적인 형태로 예감될 뿐이며 그 참된 극복은 무한히 연기된다. 이에 대해 소모적인 현실 도피의 삶을 거부하고 니힐의 병근(病根) 한가운데로 적극 개입함으로써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것이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이러한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현존하는 가치나 질서가 뽐내는 절대적 권위를 파괴해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튼다. 우상(偶像)의 가면을 벗기는 이기(利器)로서 무(無)를 내세움으로써 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 원리(消耗原理)로부터 생의 적극적인 창조 원리로 전환시켜 나가는 '능동적 허무주의'야말로 허무주의의 지배 밑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당연한 생활 방식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위버멘쉬는 어원적으로 '뛰어넘는(Über) 인간(mensch)'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극복하는 인간이며, 극복함으로써 창조하는 인간이다. 위버멘쉬는 근대적 가치와 도덕 및 신앙을 뛰어넘는 인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종래의 규범들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위버멘쉬는 탈아의 도덕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다. 이를테면 극기복례 혹은 순교자 개념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며, 그럼으로서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위버멘쉬 개념은 '풍습의 도덕'과 대립될 뿐 아니라,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과도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형 혹은 권력욕에 물든 인간을 가리킨다. 위버멘쉬는 초월적,신적인 힘을 갖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탈아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 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 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란 자기 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주창한 생에의 의지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개념. 찰스 다윈이 주장한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과도 대립된다. 니체는 '생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에서 도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개념의 족보를 다루며, 도덕과 그 부대개념들이 역사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인지를 기술한다. 주인도덕은 좋음과 나쁨을 가려 물으며 이를 가치평가의 잣대로 삼는다. 노예도덕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과 악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주인도덕은 개인의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하고, 노예도덕은 사회적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한다. 주인에게 '좋음'이란, 자신과 타자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주인에게 '나쁨'이란,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대립된다. 주인은 자신을 기준으로 '선'을 상정하지만, 노예는 먼저 '악'을 떠올린다. 노예도덕에서는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자발적 용서'로 둔갑한다. 노예도덕에서는 노예가 느끼는 무력감이 미덕으로 위장한다. 주인의 미덕이 약자의 눈에는 악덕으로 비쳐진다. 도덕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도덕의 계보》 이외에도 니체가 쓴 《아침놀》이나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아침놀》에서 니체는 '관습의 도덕'이라는 개념을 거론하며 이를 비판한다. 《고르기아스》를 읽다보면 중간 즈음부터 칼리클레스가 등장하여 자연과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칼리클레스는 '규범'이 약자 패거리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며, 규범이란 소수에 불과한 강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입장은 칼리클레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니체 윤리학에서 지칭하는 '주인' 혹은 '강자'라는 개념은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는 상인계급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영원 회귀"라는 생각은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생각이고 니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이다. 영원한 회귀는 오직 이 순간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목표 없는 시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 삶의 본래의 임무를 경험한다. 영원한 회귀의 신적인 순간은 미학적, 즉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순간이다. 이 상태는 현존재에 대한 긍정(Amor Fati)이 이루어지는 최상의 상태이고, 그 상태 속에서 허무주의가 극복되고 인간과 모든 현존재의 빈곤이나 과잉은 긍정된다.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는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것의 회귀일지라도 영원 회귀에 대한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이다. 최상의 세계 완성의 순간, 세상이 완벽하게 되는 "갑작스런 영원"의 신적 순간, 웃는 신 디오니소스가 춤을 추면서 우리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디오니소스적 순간은 세상을 미학적 현상으로 영원히 정당화하는 순간이다. 니체는 이런 경험, "위대한 정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일어나는 완벽한 밝은 대낮의 직관으로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생각이기도 한 자신의 철학하기의 원래 목적과 기본 경험을 분명하게 말한다. 미학적 현현으로서의 영원회귀. 아름다움 속에서 모순들은 억제되고 영원 회귀의 순간인 미의 디오니소스적 순간 속에서 과거의 지나간 것과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서 공존의 경험은 영원한 현재의 이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영원이 시간이 되고, 시간이 영원이 된다. 이 순간에 시간은 갑작스런 영원의 정오-순간으로 지향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지위에서부터 회귀를 가르친다. 위버멘쉬는 "위대한 회귀"에 있어 자신의 심연을 보고 견디어내며 자신을 넘어서고,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 자아를 잊어버리는 초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이다. 위버멘쉬는 "영원의 샘물" 속으로 던져지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에 영원 회귀의 "정오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번갯불이다. 영원 회귀의 순간은 힘의 충일로서의 디오니소스, 즉 비도덕적인 예술가 신 디오니소스가 삶을 영원히 긍정하는 순간이다. 니체의 예술가 복음을 따르자면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 삶의 "형이상학적 활동"이다. 예술, 가장 "커다란 삶의 자극"이 영원 회귀 철학의 구상이다. 니체의 영원 회귀의 기본 이론은 예술의 형이상학이고, 반(反)그리스도적 예술-종교이고, 삶의 최고도의 충만이다. 니체 미학의 고대적 발판.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의 결정적 새로움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인들에게서 발견되는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탄생"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죽음"에 니체의 마음이 쏠렸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기독교 종교의 예비자를 구현하고 있었으며,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반(反)그리스도"이고 "예술가 신"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선악을 넘어선" 염세주의와 비도덕적인 디오니소스 신의 "예술-종교"를 통해서, 간단하게 말해서 현존재가 예술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어서 나타나는 "예술가-형이상학"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구현된 현존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로적 명징성과 유쾌함, "지식의 빛"과 자아 인식의 인간적 구현이다.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바쿠스적 소동과 춤"의 "어두운 심연", "사랑의 도취에서 생긴 자아망각"을 대표한다.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니체 미학의 두 가지 근본적 범주이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조화롭게 대립된 두 예술 충동의 "접합"의 결과물이 니체에게는 단지 아테네 비극의 탄생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의 탄생이다. 첫 작품에서도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인 "미학적 상태"의 특징과 아폴로적인 것이 지닌 소크라테스주의와의 친근성은 이미 후기 니체의 저서에서 점점 강하게 드러나는 아폴로적인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우세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점과 연관된 디오니소스적 특성이 니체 미학이 지닌 독특한 새로움이다. 그것은 대립된 개념이고, 그것을 통해서 초기 니체는 반 고전주의적 미학의 전령이 되고 후기 니체는 영원 회귀의 반(反)기독교적 예술-종교의 선생님이 된다. 니체에게는 예술 신의 전형이 된 "아폴로적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이다. 그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이 탄생했다. 그는 비극의 탄생 속에서만이 아니라 비극적 후기 철학의 핵심 인물이다. 거인족에 의해서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가 아폴로에 의해서 다시 맞추어지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르페우스교의 자그레우스 신화는 니체에게는 비극의 신비적 가르침이다. 그는 비극적 신화 그 자체이다. 이런 토양 속에서만 니체의 미래 미학이 성장하고, 젊은 니체의 예술가-형이상학이 자라난 것은 아니다. 신들의 황혼을 쓰는 후기 니체,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도 결국 이 토대 위에 다시 서게 된다. 니체는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 크로이처와 라살을 통해서 오르페우스교 자그레우스 신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폴로적-디오니소스적"이라는 유명한 대립 쌍이 결코 니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니체는 크로이처, 라살, 미슐레 그리고 포이어바흐 등등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미학 이론을 만들어냈다.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이라는 환영 속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술가, 예술 수용자 그리고 예술 작품의 분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화해한 축제를 기리는"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모습 속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혹은 생산자와 생산품의 분리가 들어설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음악극의 탄생 시기에 대한 중요한 근본 경험으로부터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니체는 하나의 발전을 미리 보게 된다. 그러한 발전은 전래의 "예술 작품의 예술", 즉 개인적 예술가들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바그너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종합예술"인 "축제극"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바그너에 대해서 점점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종적 단계에서 세상을 보편적 예술 작품으로 보는 미학적 관찰로 이끈다.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에서 진정한 종합 예술작품인 "세계극"이 생겨난다. 더 이상 예술 작품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관찰된다. "모든 것이 유희다", "모든 것이 예술이다". "정오", 아폴로적 디오니소스가 현현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드러난다. 완벽하게 되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된 세계는 스스로를 잉태하는 예술작품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힘의지"라는 마술적 공식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애를 쓴지도 이미 100년이 훨씬 더 지났다. 1901년 부분적으로는 어제도 규범적인, 세기적인 니체 유고의 편집 본이 권력 의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오랫동안 니체의 주요 저작으로 잘못 간주했다. 오래전에 표어가 되어버린 그리고 정치적으로 잘못 해석된 권력(쟁취) 의지 이론은 실제로는 결코 실행되지 못했던 니체의 계획을 표시한다. 그 계획은 니체의 미학 이론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와는 대조적으로 니체는 자유 의지를 "파국적인 철학자들의 고안물"로 비판하고 여러 번 "어떤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권력 의지를 "세상의 정수",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고찰한다. 그것은 권력 의지가 욕구가 없는 의지, 즉 원하는 자아가 없는 의지일 경우에만 서로 일치한다. 니체는 권력 의지라는 생각으로 분명 "나는 원한다."라는 문장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처럼 (힘이 넘치는 위버멘쉬)의 개인적 의지라는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특별히 차라투스트라의 첫 연설("세 가지 변신에 대해서")에서 분명해진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난 다음에, "너는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낙타에게 내려진다. 정신이 사자가 되었을 때, 사자의 정신은 말한다. "나는 원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신은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정신의 세 번째이고 가장 심오한 변화이다, 그 변화 속에서 기독교적 도덕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나는 원한다."는 말도 아이의 순진함, 창조의 유희 속에서 "자기긍정"을 얻기 위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위버멘쉬는 "금발의 야수"가 아니라, 사자의 정신과 "나는 원한다."는 것을 극복하는 인간이다, 그의 정신은 아이가 된다. 3번째 정신의 변화 후에 생기는 욕구 없는 의지를 지니고, 자아를 잊어버린 주체의 고대적 모범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B52에 나오는 유희하는 아이다. 이 단편에서 삶의 유희 혹은 세계-시간, 즉 아이온Aion은 유희하는 아이로 묘사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유희하는 아이는 신의 세 번째 변화 후에 생기는 니체의 유희하는 아이의 선행 인물이다. 즉 그 아이는 위버멘쉬의 선행 인물인 것이다. 이 단편과 니체가 자신의 생각 속에 재해석한 것은 접합점으로 드러나고, 그 속에서 비극의 탄생을 쓴 초기 니체로부터 차라투스트라를 쓴 후기 니체로 이끌고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라는 두 개의 어려운 생각을 결합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여러 개의 결합선이 모여 있다.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해석한 것 속에 나타나는 세계-시간의 “위대한 년도”인 아이온은 영원 회귀가 신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계-아이인 아이온이 벌이는 세계-놀이가 지닌 이름이 권력 의지이다. 아이온의 목적 없는 유희 속에서는 욕구 없는 의지가 지배하며, 아이온은 권력 의지의 신적 의인화이다. 권력 의지와 영원 회귀는 동일한 아이온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한 편으로는 아폴로적 디오니소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우스의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아이온이 니체의 비극적 후기 철학에서 예술로서의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의 예술가-형이상학을 주관하는 신으로 합쳐진다. 미학 이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실, 니체가 고전 문헌 학자였다는 사실은 고대의 밑바닥에서부터 그가 신랄하게 비판한 현대의 꼭대기로 곧장 도약을 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도약은 특히 니체의 미학적 성찰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니체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먼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모든 예술이 내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을 "우리 문하의 최고의 스승"으로 칭찬한다. 기독교 신은 죽었고 그와 함께 형이상학도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형이상학 이전의 시대에서, 즉 비극적 그리스인들의 시대에 있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니체의 철학적 고생물학은 고대 토양의 점진적 재획득,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산재된 사유들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서 그보다 앞서 살았던 헤겔처럼 단순하게 임시적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니체보다 나중에 살았던 하이데거처럼 모범적인 것을 보았다. 니체의 퇴행은 다름아니라 진보이다. 니체는 플라톤 이전-형이상학 이전의 철학으로 자신이 되돌아간 것을 미래 미학으로 도약을 하기 위한 도움닫기로 이해를 한다("미래의 시간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비극 책이 쓰이던 시기에 미래의 미학이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 미리 구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나중에 자신이 꿈꾸었던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사산(死産)으로 인식을 해야만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신전을 발굴한 것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비극적 철학의 재생을 위한 니체의 의지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이론의 서곡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별히 초기 형이상학 시기의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학적 "세계-유희"로서의 "삶의 유희", 대립되는 것의 조화와 추한 것 속에도 존재하는 미의 편재성에 대해서 느낀 경험을 통해서 니체는 후기형이상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대한 선조가 되었다. 그것으로써 니체가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특징Nachvorsokratismus은 동시에 존재하는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의 특징Vorpostmodernismus이기도 하다.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성 비방과 음해에 시달렸으나, 사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에는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 니체의 사상은 그 전복적 성향으로 인해 자주 오해되고 비판받았다. 이런 니체의 성향은 온갖 권위에 불복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평은 극으로 갈릴 때가 많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인들에게서는 혹평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에게서는 호평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등과 함께 근대철학을 전복시킨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니체는 가끔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시초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는 나치정권과 니체의 여동생이 공동으로 니체의 사상을 왜곡한 결과 확산된 인식에 불과하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저서를 짜집기해서 나치정권에 유리하게 아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후일 연구자들의 노고로 '비평판 니체 전집'이 출간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저서들을 모아 일종의 보관소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에게 '니체의 위버멘쉬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니체에게 붙어다니는 해괴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실제 니체는 개인주의자였으며 반(反)국가주의자였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1961년 《니체》를 출간한 이후 달리 평가되어 오늘날 니체에 대한 이상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실제 니체는 자국인 독일을 매우 싫어했고 민족주의 또한 매우 혐오했다. 니체 본인은 자신의 저서에 대한 반응을 갈망했지만 허사였다. 그가 정신을 잃기 몇 년 전에서야 그의 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니체는 철학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삶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과 문체 그리고 삶의 양식을 통해서, 니체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샤르트르 그리고 카뮈 같은 작가들,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심리학자, 슈펭글러와 슈타이너와 같은 비밀스런 종교의 스승, 벤, 게오르게, 지드, 헤세, 호프만슈탈, 말로,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모르겐슈타인, 무질, 오닐, 릴케, 쇼, 예이츠 등등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예를 들면 조형 예술에서 "발견한 대상"(뒤샹)의 경우에 드러나는 "작품의 부재"와 같은 현상으로 특징지어지는-가 시작되기 직전에 니체는 현재의 대부분의 미학 이론보다 20세기 예술 정신을 생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것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위버멘쉬”와 “힘에의 의지”라는 핵심 개념과 도발적인 문장 때문에 보이믈러의 해석에 나타나는 것처럼 최초의 나치로 쉽게 오해받았던 니체가 특별히 동구권에서는 오랫동안 파시즘의 예비자와 "파시즘 미학의 선구자"로 오해되고 왜곡되고 모함을 당한 이후에, 그는 현재 그 곳에서,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니체의 전 저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편집한 콜리와 몬티나리의 대단한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현 시대에도 지속되는 지적 반향의 표시이다. "세계의 유희에 대한 미학적 기본 지각"을 지닌 니체의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예술가-형이상학"의 수용은 프랑스에서는 오늘날까지 중단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카우프만의 니체 연구 이후로 미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연구는 강화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더불어 동아시아에 많이 알려졌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를 산책하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이후 간헐적으로 제정신을 회복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상 죽기 전까지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니체()는 1888 ~ 89년 해가 바뀔 무렵 정신적 암흑에 빠졌다. 그의 저작들은 정본이라 할 만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분적으로 예전 저작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저작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지적한 가운데 — 인쇄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아울러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양한 마무리 수준 상태로 존재했다. 이 인쇄되지 않은 자료는 프란츠 오버베크()가 하인리히 쾨젤리츠()(페터 가스트())와 협의하여 처음으로 수집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최종 출판업자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과 함께 계속적인 출판작업을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말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가족을 대표하여 논의에 참견했다. 그간에 니체 저술의 판매고가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1892년 초에 처음으로 전집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전집판은 나우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담당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도덕주의, 국가주의, 종교, 실체론,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사후 게오르크 헤겔과 함께 파시즘의 상징적 존재로 왜곡되고 악용되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그의 사후 그의 누이 엘리자베드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드는 광적인 국가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엘리자베드는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하려 했다. 이무렵의 니체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기에 여동생의 멍청한 짓거리에 대처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드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니체의 저작에 관심을 보이고, 시중에서 니체의 사상이 유행하게 되자 탐욕에 사로잡혔던 그의 누이는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짜집기해서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간했다. 엘리자베드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는데, 히틀러의 니체 추종 보다는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히틀러와 연결짓게 되었다. 1930년, 니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다. 니체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13세 무렵부터 20세 무렵에 걸쳐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그 후 작곡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바그너와의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고, 바젤 시절에 몇 개의 곡을 남겼다. 작풍은 전기 낭만파적으로, 슈베르트나 슈만을 연상케 한다. 그가 후에 전혀 작곡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본업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하는 이유 외에, 자신의 작품인 《만프레드 명상곡》을 한스 폰 뷜로에게 혹평 받은 것이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작곡가로서 인식되는 일은 전무하지만, 저명한 철학자가 작곡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부 연주가가 녹음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작곡도 하는 철학자'로서의 측면이 밝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가곡이나 피아노곡이지만, 2인 연탄곡 작품 중에는 《맨프레드 명상곡(Manfred-Meditation)》 교향시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등,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작품도 있다. 또, 오페라의 스케치를 남기고 있는데, 2007년에 지크프리트 마트스가 그의 스케치를 골자로 한 오페라 《코지마(Cosima)》를 작곡했다. 투아타라 투아타라(tuatara)는 옛도마뱀목에 속하는 파충류로 뉴질랜드에 2종이 분포한다. ‘투아타라’라는 이름은 마오리어로 ‘가시돋힌 등’이라는 뜻을 가졌다. 2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체는 길이 24cm, 몸무게 500g정도까지 자란다. 다른 파충류들과 구분되는 특징으로는 치아가 턱뼈에 유착되어 있으며, 낮은 온도(16-21℃)에서 잘 견디고, 오히려 27℃이상의 온도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걸리며, 4년에 한번씩 알을 낳기 때문에 번식이 더디다. 이들의 수명은 매우 길어서 보통 60년정도이고, 심지어 100년을 넘게 살기도 하는데, 뉴질랜드 자연박물관의 투아타라가 111살의 나이로 새끼를 낳은 일도 있다. 개체수가 적고, 서식지가 제한되어 있어 1895년부터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endangered species)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뱀목 뱀목 또는 유린목(有鱗目, , scaled reptiles)은 파충강의 한 목이다. 도마뱀과 뱀을 포함한다. 분류학적으로, 뱀목은 3개의 아목으로 분류된다. 이들 중, 도마뱀은 다계통군을 형성한다. 도마뱀아목(Sauria)이라는 좀더 최근의 분류명은 일반적으로 파충류와 조류 등에 사용되며, 뱀목(Squamata)은 다르게 나뉜다. 이들 아목 사이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뱀목(Squamate)의 거의 대부분(60%)을 포괄하는 하나의 잠정적인 독을 지닌 분류군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분류명 Toxicofera는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분류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2013년 피론(Pyron, R.A.) 등의 연구에 기초한 계통 분류이다. 악어 악어(鰐魚)는 악어목(鰐魚目, )에 속하는 파충류의 총칭으로, 약 2억 2천만 년 전에 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룡이나 새와 친연관계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23종이 알려져 있다. 악어는 물을 수는 있어도 씹지는 못하기 때문에 잡은 동물들을 빙글 돌리면서 몸통을 잘라 통째로 먹는다. 주로 물가에 매복하였다가 물 마시는 누, 얼룩말 등을 잡아 먹는다. 악어는 동족포식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영역에 침범한 작은 개체에 대해선 거침없는 공격성을 표출한다. 야생 상태는 물론이거니와 좁은 공간에 여러 개체를 한데 모아 전시하는 동물원에서 자주 동족포식 현상을 발견된다. 악어는 알을 수십개 낳고 땅에 묻어 몇 개월을 지키지만 주변에 있는 왕도마뱀이나 개코원숭이들이 훔쳐가기 때문에 몇개가 남지않고 부화되지만 물속에서 살아남는 최후의 새끼는 소수이다. 악어목은 크게 가비알과, 앨리게이터과, 크로커다일과의 세 과로 분류한다. 파충류 파충류(, 爬蟲類)는 용궁류() 파충강에 속하는 척추동물이다. 린네식 분류법으로 파충류로 분류 되는 동물들을 뜻하며, 공기로 호흡하고, "냉혈(Cold-Blooded)" 물질대사를 하고, 딱딱한 껍질을 갖고 양막(羊膜, amnion, a kind of membrane)을 지닌 알을 낳는다.{태생을 할 경우에도 유사한 막(membrane)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피부는 비늘과 껍질로 이루어져있다. 네개의 다리를 지니거나 네발을 지닌 선조에서 유래한 네발동물(영어: Tetrapod)이며, 배(胚, embryo)가 양막이란 막(membrae)에 의해 둘러쌓인 구조인 양막형 알(amniotic eggs)을 낳는다. 현재의 파충류들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분포하며, 네 개의 목(order)으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조강과 함께 용궁류의 분기군("Clade")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의 파충류는 조강을 제외하고, 거북목을 포함한다. 파충류는 양서류와 달리 물속에서 살아가는 유생 단계(예, 개구리의 올챙이, 도롱뇽의 올챙이 시기)를 거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파충류는 알을 낳으며(oviparous (egg-laying)) 비늘을 가진 몇몇 종은 새끼를 낳는다. 새끼를 낳는 경우는 난태생 (ovoviviparity ,알이 만들어지지만 어미 몸 속에서 오래 머물면서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 몸 밖으로 배출됨)과 태생(viviparity, 석회질의 껍질을 만들지 않고 새끼를 출산함) 둘 중 하나이다. 태생(viviparous)을 하는 파충류들은 포유류의 태반과 닮은 다양한 형태의 태반을 이용하여 태아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며, 난태생하는 종의 경우에는 초기에 많은 영양분을 알 속에 넣어주고 알이 깨어날 때까지 돌봐준다. 현존하는 파충류들은 성체의 크기가 1.7 cm(0.6 in)인 작은 도마뱀붙이(게코 도마뱀, "Sphaerodactylus ariasae")에서부터 길이가 6m, 몸무게가 1,000kg에 달하는 바다악어("Crocodylus porosus")까지 다양한 크기로 존재한다. 파충류를 연구하는 과학을 양서파충류학(両棲爬虫類学, Herpetology)이라 한다. 파충류들은 양서류들과 함께 분류되어 있던 부류에서 떨어져 나왔다. 보통의 살무사나 풀뱀 등이 물에서 사냥하는게 종종 보고되는 등, 종의 다양성이 적었던 스웨덴에서 연구를 했던 칼 폰 린네는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에서 모든 파충류와 양서류를 "III-양서류"라는 하나의 강(class)으로 분류하였다. 파충류의 계통수는 아래와 같다. 이 중 현존하는 종 가운데 조강을 제외하여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동물학 동물학(動物學, )은 생물학의 한 갈래로써 동물을 대상으로 생명 현상(生命現象)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물의 분류, 발생, 생태, 형태, 유전, 진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동물학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왕국의 연구를 추적한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분야로서 동물학의 개념이 훨씬 나중에 발생하였지만, 동물학은 박물학으로부터 병합되며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노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고대의 노고는 중세시대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등의 이슬람 물리학자들과 학자들에 의해 더 발전되었다. 식물학 식물학(植物學, )은 생물학의 한 갈래로서, 식물의 삶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식물학의 범위는 식물, 조류 새 조류 아님!!!!, 곰팡이 등의 구조, 성장, 생식, 물질대사, 진화, 질병, 화학적 특성, 그리고 다른 식물들과의 진화적인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포함한다. 가장 오래된 과학 분야의 하나인 식물학의 첫 걸음은 식용, 약초, 그리고 독초()를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식물에 대한 이러한 오랜 관심으로 식물은 현재 약 550,000여 종으로 분류된다. 유전 부호 유전 부호(genetic code) 또는 유전 암호는 각 코돈(codon)이 어떤 아미노산을 부호화(encoding)할지를 정해놓은 규칙이다. 해석할 수 없게 암호화(encryption)시켜놓은 게 아니기 때문에 사실 유전 암호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유전 부호(genetic code)는 모스 부호(Morse code), 아스키 코드(ASCII code), 유니코드(Unicode)처럼 부호(code)화 시스템이지, AES나 RSA같은 암호화 시스템(cryptosystem)이 아니다. 유전 부호에 속하는 하나 하나의 부호(code)를 코돈(codon)이라고 부른다. 코돈(codon)은 유전자 발현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전령 RNA의 유전 정보이다. 어떻게 단백질이 부호화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은 DNA 구조가 1953년에 발견된 이후로 시작되었다. 유전자 발현에서 새로운 단백질의 형성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다. DNA 사슬을 구성하는 특정한 염기 서열이 전사를 지시하는데 전사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억제자 효소가 부착되어 있어 전사를 막는다. 특정한 단백질의 생산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받으면 억제자는 DNA 사슬에서 떨어져 나가고 RNA 중합효소에 의해 전사가 시작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지점에 있는 프로모터의 염기서열에 의해 전사의 방향과 전사할 DNA 사슬을 선택하고 오퍼레이터에 결합되어 DNA 사슬을 풀어낸 후 전사를 시작된다. RNA 중합효소는 주형이 되는 DNA 사슬과 상보적인 리보뉴클레오타이드를 이용하여 전령 RNA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령 RNA의 염기서열은 세개씩 짝을 이뤄 코돈을 형성한다. 한편 RNA 중합효소는 전사 종결을 지시하는 DNA 염기서열을 만나면 전사를 중단하고 DNA에서 떨어져 나간다. 안티코돈은 운반 RNA의 RNA 사슬을 이루는 특정 구간의 염기서열이다. 전령 RNA의 코돈은 리보솜에서 번역되어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운반 RNA의 안티코돈과 상보적으로 결합한다. 그런데 이렇게 상보적으로 결합을 하는 안티코돈이지만 그 개수는 64개가 아니라 45개가 존재한다. 운반 RNA는 RNA 사슬의 일부 구간이 안티코돈으로 작용하고 사슬의 끝에는 해당 아미노산을 결합시킨다. 이렇게 충전된 운반 RNA는 리보솜으로 들어가 전령 RNA의 코돈과 결합하고 리보솜은 운반 RNA의 끝에 달린 아미노산을 떼내어 폴리펩타이드 결합을 만든다. 아미노산이 떨어져 나간 운반 RNA는 리보솜 밖으로 나와 다시 아미노산을 전한다. 한편, 리보솜에서 만들어진 폴리펩타이드는 적당한 3차원 구조로 접혀서 단백질이 된다. 생화학 생화학(生化學, )은 살아있는 생물체 내에서 그리고 생물체와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생물화학(生物化學, )이라고도 하지만, 보통 줄여서 생화학이라고 한다. 생화학적 과정들은 생명의 복잡성을 야기한다. 생물학과 화학의 하위 분야인 생화학은 분자유전학, 단백질 과학, 물질대사의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20세기의 지난 수 십년 동안 생화학은 이들 세 가지 분야를 통해 생명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생명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들이 생화학적 방법론과 연구에 의해 밝혀지고 발전하고 있다. 생화학은 생체분자들이 어떻게 살아있는 세포 내에서 그리고 세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발생시키는지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는 차례로 조직, 기관, 개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와 이해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 생화학은 DNA에 암호화되어 있는 유전 정보가 생명의 과정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자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인 분자생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생화학의 대부분은 단백질, 핵산, 탄수화물, 지질과 같은 생물학적 고분자의 구조, 기능, 상호작용 등에 대해 다루며, 이들 생체분자들은 세포의 구조를 형성하고 생명활동과 관련된 많은 기능들을 수행한다. 세포의 화학작용은 더 작은 분자들과 이온들에 달려있다. 이것들은 물, 금속 이온과 같은 무기 화합물이거나 단백질 합성에 사용되는 아미노산과 같은 유기 화합물일 수 있다. 세포가 화학 반응을 통해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이용하는 메커니즘은 물질대사로 알려져 있다. 생화학에서의 발견은 주로 의학, 영양학, 농업에 적용된다. 의학에서 생화학자들은 질병의 원인과 질병의 치료 방법 및 의약품에 대해 연구한다. 영양학에서 생화학자들은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과 영양소 결핍의 영향에 대해 연구한다. 농업에서 생화학작들은 토양과 비료를 조사하고, 작물 재배, 작물의 저장 및 해충 방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생화학을 가장 넓은 정의로 보면 생물체의 구성 요소와 구성 체제,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생물체가 되는가에 대한 연구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생화학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특정 과학 분야로서의 생화학은 생화학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19세기 또는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어떤 이들은 생화학의 시작이 앙셀름 파얜이 1833년에 최초로 효소인 다이아스테이스(오늘날 아밀레이스라 불리는)를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 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에두아르트 부흐너가 세포 추출물에서 복잡한 생화학적 과정인 알코올 발효를 최초로 증명한 것을 생화학의 탄생으로 여기기도 한다. 일부는 1842년에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생리학 및 병리학에서 물질대사에 대한 화학적 이론을 제시한 유기화학에서의 영향력 있는 연구를 생화학의 시작이라 꼽기도 하며, 또는 보다 이른 시기인 18세기에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발효 및 세포 호흡에 대한 연구를 생화학의 시작이라 보기도 한다.. 생화학의 복잡성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준 이 분야의 많은 개척자들도 현대 생화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에밀 피셔는 단백질 화학에 대한 연구를,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는 효소와 생화학의 역동적인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생화학(biochemistry)"이라는 용어 자체는 "생물학(biology)"과 "화학(chemistry)"의 결합으로부터 유래하였다. 1877년에 펠릭스 호페 자일러(Felix Hoppe-Seyler)는 《생리화학 저널》(Zeitschrift für Physiologische Chemie) 제1호의 서문에서 생화학이란 용어를 생리화학의 동의어로 사용하였고, 생화학 여구 기관의 설립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독일의 화학자 칼 노이베르크(Carl Neuberg)가 1903년에 생화학이란 용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이들은 프란츠 호프마이스터(Franz Hofmeister)가 생화학이란 용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때는 생명체와 생명체의 물질들이 무생물과 구별되는 어떤 본질적인 특성이나 물질(흔히 "생기론"으로 일컬어짐)을 가지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졌고, 오직 생명체만이 생명의 분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828년에 프리드리히 뵐러는 요소 합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유기 화합물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 이후 생화학은 특히 20세기 중반부터 크로마토그래피, X선 결정학, 이중 분극 간섭계, 핵자기 공명분광법,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법, 전자현미경, 분자동역학 시뮬레이션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발달하면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은 해당과정 및 시트르산 회로와 같은 세포의 많은 분자들과 대사 경로의 발견과 상세한 분석을 가능하게 했으며, 분자 수준에서 생화학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필립 랜들(Philip Randle)은 1963년에 발견한 랜들 회로(포도당-지방산 회로) 및 당뇨병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랜들은 지방산이 근육에 의한 포도당의 산화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지방 산화가 인슐린 저항성의 원인이었다. 생화학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유전자와 세포에서 정보 전달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역할의 발견이었다. 생화학에서 이러한 부분을 흔히 분자생물학이라고 부른다. 1950년대에 제임스 D. 왓슨, 프랜시스 크릭, 로절린드 프랭클린, 모리스 윌킨스는 DNA 구조를 밝혀내고, 유전 정보의 전달 관계를 제안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지 비들과 에드워드 테이텀은 균류에서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생성한다는 것을 보여준 공로로 1958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콜린 피치포크(Colin Pitchfork)는 1988년에 DNA 증거로 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사람으로, 이것은 법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앤드루 파이어와 크레이그 멜로는 유전자 발현의 침묵에서 RNA 간섭(RNAi)의 역할을 발견한 공로로 2006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92가지의 화학 원소들 중 약 24가지는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에 필수적이다. 지구 상의 희토류 원소는(셀레늄과 아이오딘을 제외하고는) 생명체에서 사용되지 않고, 몇 가지 흔한 원소들(알루미늄과 티타늄)도 생명체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생물체들은 필요로 하는 원소들의 종류가 공통적이지만, 식물과 동물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바다 조류는 브로민을 사용하지만, 육상 식물과 동물은 브로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동물은 나트륨을 필요로 하지만, 일부 식물은 나트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식물은 붕소와 규소가 필요하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또는 극소량이 필요할 수도) 있다.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칼슘, 인의 6가지 원소들은 사람의 세포를 포함한 살아있는 세포 질량의 약 99%를 차지한다. 인체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6가지 주요 원소 외에도, 사람은 18가지 이상의 미량 원소들을 필요로 한다. 생체분자의 4가지 주요 부류는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 핵산이다. 많은 생물학적 분자(생체분자)들은 중합체이다. 단위체는 중합체로 알려진 큰 고분자를 생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자들이다. 단량체가 서로 연결되어 생체고분자를 합성할 때 탈수 반응을 거치게 된다. 서로 다른 고분자들은 더 큰 복합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복합체들은 종종 생물활성에 필요하다. 탄수화물의 주요 기능 중 두 가지는 에너지의 저장과 구조의 형성이다. 당(糖)은 탄수화물이지만, 모든 탄수화물이 당인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탄수화물들이 존재한다. 탄수화물은 에너지 저장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세포와 세포 사이의 상호작용 및 세포 신호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탄수화물은 단당류이며, 대부분 탄소, 수소, 산소가 1:2:1의 비율로(일반적인 화학식은 CHO,여기서 n은 3이상) 포함되어 있다. 포도당(CHO)은 가장 중요한 탄수화물이다. 과당(CHO)은 과일의 단맛과 관련있는 단당류이며, 디옥시리보스(CHO)는 DNA의 구성 성분이다. 단당류는 선형 또는 고리형으로 존재할 수 있다. 선형의 단당류는 카보닐기와 하이드록시기의 반응으로 산소 원자가 고리에 포함된 탄소 고리의 형태를 형성할 수 있다. 고리형 분자는 알도스이면 헤미아세탈, 케토스이면 헤미케탈이다. 이들 고리형에서, 고리는 보통 5개 또는 6개의 원자를 갖는다. 5원자 고리형은 5원자 고리 화합물인 푸란을 닮아서 푸라노스라고 하며, 6원자 고리형은 6원자 고리 화합물인 피란을 닮아서 피라노스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알도헥소스인 글루코스(포도당)은 1번 탄소의 카보닐기와 4번 탄소의 하이드록시기 사이에 결합이 만들어져 헤미아세탈이 형성되면, 글루코푸라노스라고 불리는 5원자 고리 구조를 생성할 수 있다. 같은 반응이 글루코스의 1번 탄소의 카보닐기와 5번 탄소의 하이드록시기 사이에 일어나면, 글루코피라노스라고 불리는 6원자 고리 구조를 생성할 수 있다. 두 개의 단당류는 물 분자가 방출되는 탈수 반응을 통해 글리코사이드 결합을 형성하여 이당류를 생성할 수 있다. 이당류는 가수분해 반응으로 글리코사이드 결합이 분해되어 2개의 단당류를 생성할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당류는 포도당 1분자와 과당 1분자로 구성된 수크로스(설탕)이다. 또 다른 주요 이당류는 포도당 1분자와 갈락토스 1분자로 구성된 우유에서 발견되는 젖당이다. 젖당(락토스)는 락테이스에 의해 가수분해될 수 있으며, 락테이스의 결핍은 젖당불내증을 초래한다. 몇 개(약 3~6개)의 단당류들이 결합하면, 올리고당("올리고(oligo-)"는 "소수(few)"를 의미)을 형성한다. 올리고당은 표지 및 세포 신호 뿐만 아니라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수 많은 단당류들이 중합되면 다당류를 형성한다. 단당류들은 긴 선형 사슬의 형태로 결합되거나, 분지(가지 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다당류로 셀룰로스, 녹말, 글리코젠이 있는데, 이들 세 가지 다당류들은 포도당 단위체들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셀룰로스는 식물의 세포벽의 중요한 구조적 구성 성분이며, 녹말은 식물의 에너지 저장 형태로, 글리코젠은 동물의 에너지 저장 형태로 사용된다. 탄수화물은 환원 말단 또는 비환원 말단을 가질 수 있다. 탄수화물의 환원 말단은 선형의 알데하이드(알도스) 또는 케톤(케토스) 형태와 평형을 이룰 수 있는 탄소 원자이다. 이러한 환원 말단의 탄소 원자에서 단위체의 결합이 일어나는 경우, 피라노스 또는 푸라노스 형태의 자유 하이드록시기는 다른 당의 하이드록시기 측쇄와 교환되어, 완전한 아세탈을 생성한다. 이것은 알데하이드 또는 케톤의 형태로 사슬이 열리는 것을 방지하고, 수정된 잔기를 비환원성으로 만든다. 젖당에서 포도당 잔기는 환원 말단을 가지고 있고, 갈락토스 잔기는 포도당의 4번 탄소의 하이드록시기(-OH)와 완전한 아세탈을 형성한다. 수크로스는 포도당의 1번 탄소의 알데하이드와 과당의 2번 탄소의 케톤 사이에 완전한 아세탈의 형성으로 인해 환원 말단을 가지지 않는다. 지질은 다양한 종류의 분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왁스, 지방산, 인지질, 스핑고지질, 당지질 및 테르페노이드(예: 레티노이드와 스테로이드)를 포함한 생물로부터 기원한 비교적 물에 불용성이고, 비극성 화합물들을 포괄하는 화합물들이다. 일부 지질들은 선형의 지방족 화합물이며, 다른 지질들은 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부 지질들은 방향족 화합물(고리형의 평명 구조를 가진)인 반면, 다른 지질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지질들은 유연한 반면, 다른 지질들은 경직된 것도 있다. 지질은 보통 글리세롤 1분자에 다른 분자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트라이글리세라이드는 1분자의 글리세롤과 3분자의 지방산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에 지방산은 포화(탄소 사슬에 이중 결합이 없음)되거나 불포화(탄소 사슬에 하나 이상의 이중 결합이 있음)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질들은 전체적으로 비극성이지만, 일부분이 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질 구조의 대부분은 물과 같은 극성 용매와 상호 작용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극성 또는 소수성이다. 지질 구조의 또 다른 부분은 극성 또는 친수성이며, 물과 같은 극성 용매와 상호작용을 잘하는 경형이 있다. 소수성 부분과 친수성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는 분자를 양친매성 분자라고 한다. 콜레스테롤의 경우 극성 부위는 하이드록시기(-OH)이다. 인지질의 경우 극성 부위는 인산을 포함하는 머리 부분이다. 지질은 사람의 일상 식단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사람들이 주로 섭취하는 대부분의 기름들과 버터, 치즈, 기와 같은 유제품들은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성 기름은 다양한 다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하다. 지방 함유 식품은 체내에서 소화 과정을 거치며, 지방의 최종 분해 산물인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분해된다. 또한 지질, 특히 인지질은 다양한 의약품에서 사용되는데, 공동가용화제(예: 비경구 투입) 또는 약물 운반체의 성분(예: 리포솜 또는 트랜스퍼솜)으로 사용된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고 불리는 단위체로 만들어진 매우 큰 고분자 중합체이다. 아미노산은 알파(α) 탄소라고 불리는 키랄 탄소에 아미노기(–NH), 카복시기(–COOH), 수소 원자(–H), 곁사슬(R기, –R)이 결합되어 있는 화합물이다. 아미노기와 카복시기는 생리적인 조건 하에서는 –NH 와 –COO 로 존재한다. 곁사슬(R기)는 각각의 아미노산의 종류마다 다르며, R기의 특성은 단백질의 전체적인 3차원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떤 아미노산은 그 자체로 또는 변형된 형태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글루탐산은 중요한 신경전달물질로 기능을 한다. 아미노산들은 펩타이드 결합을 통해 서로 결합될 수 있다. 이러한 탈수 반응으로 물 분자가 제거되고, 하나의 아미노산의 아미노기의 질소와 다른 하나의 아미노산의 카복실기의 탄소가 펩타이드 결합에 의해 연결된다. 두 개의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으로 연결된 분자를 다이펩타이드라고 하며, 짧은 길이의 아미노산(보통 30개 이하)이 연결된 분자를 펩타이드 또는 폴리펩타이드라고 한다. 단백질은 많은 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혈장 단백질인 알부민은 585개의 아미노산 잔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백질은 구조적,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백질인 액틴과 마이오신의 움직임은 궁극적으로 골격근의 수축을 일으킨다. 많은 단백질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 중 하나는 특정 분자나 특정 분자들의 유형에 특이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결합은 매우 선택적일 수 있다. 항체는 특정 유형의 분자와 결합하는 단백질의 한 예이다. 항체는 중쇄와 경쇄로 구성된다. 2개의 중쇄는 아미노산들 사이의 다이설파이드 결합을 통해 2개의 경쇄와 연결된다. 항체는 N-말단 도메인의 차이에 기초한 변형을 통해 특이적이게 된다. 실제로 항체를 사용하는 효소결합면역흡착검사(ELISA)은 현대 의학에서 다양한 생체분자를 검출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민감한 검사 중 하나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단백질은 효소이다. 살아있는 세포의 거의 모든 반응에는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기 위한 효소가 필요하다. 효소는 기질이라고 불리는 특정 반응물 분자를 인식한 다음 반응을 촉매한다. 활성화 에너지를 낮춤으로써 효소는 반응 속도를 10배 이상으로 증가시킨다. 자발적으로 반응이 완료되는데 3,000년이 걸릴 반응은 효소 반응으로 1초도 채 걸리지 않을 수 있다. 효소 자체는 반응에서 소모되지 않으며, 다음 반응에서 재사용된다. 다양한 작용기를 사용하여 효소의 활성을 조절하고, 세포 전체의 생화학적 조절을 가능하게 한다. 단백질의 구조는 전통적으로 4가지 단계의 계층 구조로 설명된다. 단백질의 1차 구조는 아미노산의 선형적인 배열 순서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알라닌-글리신-트립토판-세린-글루탐산-아스파라긴-글리신-리신-…"과 같은 배열 순서이다. 2차 구조는 국지적인 형태와 관련이 있다. 아미노산들의 일부 조합은 α-나선이라고 불리는 코일 형태 또는 β-시트라고 불리는 시트 형태를 형성한다. 위의 헤모글로빈을 나타낸 그림에서도 일부 α-나선들을 볼 수 있다. 3차 구조는 단백질의 전체적인 3차원 입체 구조 형태이다. 이러한 단백질의 3차 구조는 아미노산의 배열 순서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로 아미노산 1개가 바뀌어도 전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헤모글로빈의 β 소단위체는 146개의 아미노산 잔기로 구성되어 있다. 헤모글로빈의 β 소단위체의 6번째 아미노산인 글루탐산 잔기가 발린 잔기로 치환되면 헤모글로빈의 입체 구조가 바뀌어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을 일으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4차 구조는 4개의 소단위체를 가지고 있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여러 개의 폴리펩타이드 소단위체를 가지고 있는 단백질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모든 단백질이 두 개 이상의 소단위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섭취된 단백질은 일반적으로 소장에서 단일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된다. 그리고 나서 아미노산들은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결합될 수 있다.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 오탄당 인산 경로의 중간생성물들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20가지 아미노산들을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세균과 식물은 아미노산 합성에 필요한 모든 효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 및 다른 포유류들은 단백질 합성에 사용되는 20가지 아미노산들 중 절반 정도만 합성할 수 있다. 이들은 아이소류신, 류신, 리신, 메싸이오닌, 페닐알라닌, 트레오닌, 트립토판, 발린을 합성할 수 없다. 이들은 필수 아미노산이기 때문에 섭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포유류는 알라닌, 아스파라긴, 아스파르트산, 시스테인, 글루탐산, 글루타민, 글리신, 프롤린, 세린, 티로신과 같은 비필수 아미노산들은 합성하는 효소들을 합성하는 효소들을 가지고 있다. 포유류는 아르지닌과 히스티딘을 합성할 수 있지만, 어리고 생장 중인 동물은 충분한 양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아르지닌과 히스티딘은 종종 필수 아미노산으로 간주된다. 아미노산에서 아미노기가 제거되면, α-케토산이라고 불리는 탄소 골격이 남는다. 아미노기 전이효소는 아미노산의 아미노기를 다른 α-케토산으로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아미노산의 생합성에서 중요한데, 많은 생화학적 경로의 중간생성물들이 α-케토산 골격으로 전환된 다음, 아미노기 전이반응을 통해 아미노기가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아미노산들은 서로 결합하여 단백질을 생성할 수 있다. 비슷한 과정이 단백질 분해에 사용된다. 단백질은 먼저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으로 가수분해된다. 혈액 중에 암모늄 이온(NH)으로 존재하는 유리 암모니아(NH)는 생명체에 독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질소 노폐물을 배설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존재해야 한다. 동물들의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배설 방법들이 진화해 왔다. 단세포 생물은 간단하게 암모니아를 환경으로 방출한다. 마찬가지로 경골어류는 암모니아를 물 속으로 방출한다. 일반적으로 포유류는 요소 회로를 통해 암모니아를 요소로 전환시킨 다음, 요소를 배설한다. 서로 다른 두 단백질이 관련이 있는지, 즉 그들이 동종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서열 비교 방법을 사용한다. 서열 정렬 및 구조 정렬과 같은 방법은 과학자들이 관련 분자들 사이의 상동성을 식별하는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도구들이다. 단백질 간의 상동성을 발견하고,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은 단백질족의 진화적인 패턴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두 단백질 서열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발견함으로써, 단백질의 구조와 그에 따른 기능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핵산은 세포핵에서 주로 발견되는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생체고분자이다. 핵산은 모든 살아있는 세포와 바이러스에서 유전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복잡한 고분자량의 생화학적 거대 분자이다. 핵산은 뉴클레오타이드를 단위체로 하는 중합체이다. 뉴클레오타이드는 핵염기(퓨린 계열 염기 또는 피리미딘 계열 염기), 5탄당, 인산의 세 가지 성분으로 구성된다. 가장 일반적인 핵산은 디옥시리보핵산(DNA)과 리보핵산(RNA)이다. 각 뉴클레오타이드의 당과 인산은 서로 결합하여 핵산의 골격을 형성하고, 핵염기의 서열은 정보를 저장한다. 가장 일반적인 핵염기는 아데닌, 사이토신, 구아닌, 티민, 유라실이다. 핵산의 각 가닥의 핵염기들 사이에서 상보적인 염기쌍이 형성된다. 아데닌은 티민, 유라실과 수소 결합을 형성하고, 구아닌은 사이토신과 수소 결합을 형성한다. 세포의 유전 물질을 형성하는 것 외에도, 뉴클레오타이드는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주요 에너지 운반 분자인 아데노신 삼인산(ATP)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2차 전달자 역할을 한다. DNA와 RNA에서 발견되는 핵염기는 서로 다른데, 아데닌, 사이토신, 구아닌은 DNA와 RNA에서 모두 발견되는 반면, 티민은 DNA에서만 발견되고, 유라실은 RNA에서만 발견된다. 포도당은 대부분의 생명체에서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다당류는 효소에 의해 단량체로 분해된다. 글리코젠 포스포릴레이스는 다당류인 글리코젠으로부터 포도당 잔기를 분해한다. 젖당이나 수크로스(설탕)과 같은 이당류는 두 개의 단당류로 분해된다. 포도당은 해당과정이라고 불리는 10단계 과정으로 대사되며, 그 결과로 포도당 1분자가 피루브산 2분자로 분해된다. 해당과정은 또한 2분자의 NAD(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의 산화형)을 2분자의 NADH(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의 환원형)으로 전환시키고, 세포의 에너지 화폐인 ATP 2분자를 순생성한다. 해당과정은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포가 산소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 피루브산을 젖산(예: 사람에서)으로 전환시키거나, 피루브산을 이산화 탄소와 에탄올(예: 효모)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NADH를 NAD로 산화시켜서 NAD를 해당과정에 공급한다. 갈락토스 및 과당과 같은 다른 단당류들은 해당과정의 중간생성물로 전환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 세포에서와 같이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는 세포에서 피루브산은 더 대사될 수 있다. 피루브산은 아세틸-CoA로 비가역적으로 전환되고, 이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가 방출되고, NAD가 NADH로 환원된다. 1분자의 포도당으로부터 생성된 2분자의 아세틸-CoA는 시트르산 회로로 들어가서 4CO로 완전 분해되고, 이 과정에서 6NADH, 2FADH, 2ATP를 생성한다. 생성된 NADH와 FADH는 전자전달계로 전달되는데, 전자전달계는 궁극적으로 전자를 산소(O)로 전달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로 막(진핵세포의 경우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를 형성한다. 따라서 산소(O)는 물(HO)로 환원되고, 원래의 전자수용체인 NAD와 FAD는 재생된다. 이것이 사람이 산소(O)를 들이마시고, 이산화 탄소(CO)를 내뿜는 이유이다. NADH와 FADH의 고에너지 전자는 전자전달계를 전달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는 막을 경계로 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로 보존된 다음, ATP 생성효소를 통해 ATP로 전환된다. 포도당 1분자가 세포 호흡에 사용되면, 해당과정에서 기질수준 인산화로 2ATP, 시트르산 회로에서 기질수준 인산화로 2ATP, 산화적 인산화에서 28ATP(NADH당 2.5ATP, FADH당 1.5ATP)가 합성되므로, 총 32ATP가 생성된다. 포도당을 완전히 산화시키기 위해 산소를 사용하는 것은 산소를 사용하지 않는 어떤 대사 과정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생물체에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이 지구의 대기에 많은 양의 산소가 축적되고 나서야 복잡한 생명체가 출현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된다. 척추동물에서 격렬하게 수축하는 골격근(예를 들어, 역도 또는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동안)은 에너지 요구량을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혐기성 대사 과정으로 전환되어 피루브산을 젖산으로 전환시킨다. 간은 포도당신생합성이라는 과정을 사용하여 포도당을 재생성한다. 포도당신생합성은 해당과정과 반대되는 과정이 아니며, 실제로 해당과정에서 얻은 에너지양의 3배를 필요로 한다(해당과정에서 얻은 2ATP와 비교하여 포도당신생합성은 6ATP를 필요로 함). 위와 같은 반응으로 생성된 포도당은 에너지가 필요한 조직에서 해당과정으로 들어가거나, 글리코젠(식물에서는 녹말)으로 저장되거나, 다른 단당류로 전환되거나, 이당류 또는 올리고당류로 결합될 수 있다. 운동 중의 근육세포의 해당과정, 근육세포의 피루브산이 젖산으로 전환된 다음 혈액으로 방출되고, 간세포에서 젖산이 피루브산으로 전환된 다음 포도당신생합성을 통해 포도당을 합성하고 포도당을 혈액으로 방출하는 순환을 코리 회로라고 한다. 생화학 연구자들은 생화학 고유의 특정 기술들을 사용하지만, 유전학, 분자생물학, 생물리학 분야에서 개발된 기술, 아이디어를 점점 더 결합시켜 사용하고 있다. 이들 분야 중에서 내용과 기술의 측면에서 강경한 적은 없었다. 오늘날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이라는 용어는 서로 교환이 가능하다. 다음의 그림은 각 분야들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a. 과당은 과일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당은 아니다. 포도당과 수크로스는 다양한 과일에서 다양한 양으로 발견되며, 때때로 과당보다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추의 식용 부분의 32%는 포도당인데 비해, 과당은 24%, 수크로스는 8%이다. 그러나 복숭아는 과당(0.93%)이나 포도당(1.47%)보다 수크로스(6.66%)가 더 많다. Poirot, Marc; Soules, Regis; Mallinger, Arnaud; Dalenc, Florence; Silvente-Poirot, Sandrine. Biochimie. Oct2018, Vol. 153, pp. 139–149 Afify, Heba M. American Journal of Biomedical Sciences. 2016, Vol. 8 Issue 3, pp. 200–207 단백질 단백질(蛋白質, )은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고분자 유기 물질이다. 흰자질이라고도 한다. 단백질 영어명 프로틴()은 그리스어의 proteios(중요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단백질의 한자 표기에서 단(蛋)이 새알을 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단백질은 달걀 등의 새알의 흰자위를 이루는 주요 성분이다. 수많은 아미노산의 연결체로 20가지의 서로 다른 아미노산들이 펩타이드 결합이라고 하는 화학 결합으로 길게 연결된 것을 폴리펩타이드라고 한다. 여러가지의 폴리펩타이드 사슬이 4차 구조를 이루어 고유한 기능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단백질이라고 불리며 단백질과 폴리펩타이드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분자이지만 경우에 따라 구분 없이 쓰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분자량이 비교적 작으면 폴리펩타이드라고 하며, 분자량이 매우 크면 단백질이라고 한다. 단백질은 생물체 내의 구성 성분, 세포 안의 각종 화학반응의 촉매 역할(효소), 항체를 형성하여 면역을 담당하는 등 여러가지 형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화학식은 (NHCHRCOOH)이다. 단백질은 트립신이라는 단백질 분해효소의 작용에 의해 소화된다. 그런데 콩에는 트립신의 활동을 방해하는 콩트립신 저해제라는 단백질이 들어있어 콩을 날로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콩을 가열할 경우 이 단백질 성분이 변성되어 저해기능을 잃는다. 결국 트립신이 활성화되어 소화효소의 침입이 용이해지는 것이다. 단백질의 변성은 천연단백질이 물리적인 요인(가열, 건조, 교반, 압력, X선, 초음파, 진동, 동결)이나 화학적인 요인(산, 염기, 요소, 유기용매, 중금속, 계면활성제) 혹은 효소의 작용 등으로 원래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현상이다. 단백질은 고유한 3차원 구조로 접히는(Folding) 폴리펩타이드 사슬을 말한다. 단백질이 자연 상태에서 접히는 구조는 단백질의 이 폴리펩타이드를 이루는 아미노산들의 서열(sequence)에 의해 결정된다. 생화학자들은 단백질의 구조를 4개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미노산 서열이 복잡한 3차 구조를 이루는 과정을 단백질 접힘(Protein Folding)이라고 한다. 보통은 각자 단백질의 고유한 3차 구조는 그 아미노산 서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유 에너지가 낮은 상태이다. 또한 자유 에너지가 낮은 상태가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활성 상태이다. 하지만 단백질은 이 보다 높은 에너지 상태에도 존재할 수가 있다. 단지 그 에너지가 높기에, 자연 상태에서 높은 에너지 상태에 존재하는 단백질의 양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가장 안정한 상태에서 단백질의 구조가 완전히 풀리는 상태(2, 3, 4차 구조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단백질의 열역학적인 안정성을 결정한다. 아미노산 서열의 양끝단을 N-말단과 C-말단이라고 한다. 이는 단백질의 한쪽 끝이 아미노기(-NH₂)를 가지고, 다른 쪽은 카복실기(-COOH)를 갖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용액 내의 단백질 검출 방법은 뷰렛 반응 또는 크산토프로테인 반응을 이용하는 것이다. 단백질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은 X선 회절법이다. 단백질의 결정에 X선을 쬐어, 그 X선이 휘는 모양을 관측하여 구조에 대해 연구한다. 또한 고해상도의 원자간력 현미경(AFM; Atomic Force Microscope)을 이용하여 단백질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관찰하기도 한다. 또한 단백질의 서열을 알기 위해서는 에드만 분해(Edman Degradation), 질량 분석법(Mass Spectrometry)등을 사용한다. 요즘에는 시간이 오래걸리는 에드만 분해보다는 질량 분석법을 주로 사용한다. 단백질 서열 분석에 질량 분석법을 사용하는 연구에 2002년 노벨 화학상이 시상되었다. 그 외에 전기영동(Electrophoresis), 분석(Assay)등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단백질을 연구한다. 단백질은 18세기 앙투안 푸르크루아 등에 의해 독립적인 생물학적 분자들로 인식되었으며, 열기나 산(acid)을 이용한 치료를 통해 응고, 응집을 할 수 있는 분자의 능력으로 식별되었다. 단백질은 네덜란드의 화학자 헤라르뒤스 요하네스 멀더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으며 1838년 스웨덴의 화학자 야코브 베르셀리우스에 의해 명명되었다. 식물분류학 식물분류학(植物分類學)은 식물계를 구성하는 모든 식물을 명명하고 기재하며 무리로 나누어 계통체계를 세우고, 계통 간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이다. 식물 분류학에는 알파 분류학, 베타 분류학, 감마 분류학이 있다. 알파 분류학의 경우 이름을 붙이고 그 종에 대한 설명에 기반을 둔 방법이다. 생물 종마다 독특한 외형이나 생화학적 특징에 기초해 분류한다. 베타 분류학은 계층을 만들어 구분하는 것인데 종속과목강문계의 계층으로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Individuals(식물 개개인), Populations(한 곳에 사는 같은 종의 식물), Species(종, 種), Genus(속, 屬), Family(과, 科), Order(목, 目), Class(강, 鋼), Phylum(문, 門), Kingdom(계, 系), Domain(역, 域) 등의 분류를 말한다. 감마 분류학은 같은 종(Species)내의 생물들의 변화나 그 진화과정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식물 분류학의 두 가지 목적은 식물의 동정(identification)과 분류(classification)이다. 이 두 가지 목적의 구분은 중요하며 종종 간과된다. 식물의 동정은, 기존에 수집된 표본이나 분류 도감과 비교하여 알려지지 않은 식물의 정체를 결정하는 것이다. 동정의 과정은 식물 표본을 기존 식물 분류군과 연결한다. 한번 식물 표본이 동정되면, 그 이름과 속성은 알려진 것으로 된다. 식물의 분류는 알려진 식물을 어떤 관계를 알 수 있도록 특정 그룹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생물의 분류는 결과를 표준화시키는 규칙을 따라 이루어지며, 다수의 생물 범주(category)를 하나의 계통으로 묶는다. 개양귀비 개양귀비(-楊貴妃)는 양귀비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30~80 cm 정도 자라는 한해살이풀로, 보통 붉은색 내지 주황색 꽃이 피지만 흰색 꽃이 피는 것도 있다. 꽃은 3~4장의 단엽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농작물로 재배해 왔으며, 풍년을 상징하는 꽃으로 오랫동안 여겨 왔다. 씨는 빵에 넣어서 먹거나 기름을 짜서 쓰며, 줄기는 채소로, 빨간 꽃잎은 시럽이나 술을 담는 데에 쓴다. 동양의학에서는 복통, 설사 등에 처방한다. 관상용으로는 개양귀비를 개량한 셜리양귀비()를 많이 심는다. ‘양귀비’라는 이름 때문에 아편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개양귀비로는 마약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양귀비와는 달리 재배를 규제받지 않는다. 하지만 관상용으로 심은 개양귀비가 아편양귀비로 오해를 받아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장터에서 캐나다군 중령 존 맥크래가 쓴 시 〈개양귀비 들판에서〉가 유명해 지면서 영연방 국가에서는 영령 기념일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꽃으로 개양귀비를 쓴다. 중국에서는 개양귀비를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하는데, 항우의 애첩 우미인의 무덤에 개양귀비가 피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우미인초 《우미인초》(虞美人草)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다. 우미인초는 개양귀비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1907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 양귀비과 양귀비과(楊貴妃科, )는 미나리아재비목의 과이다. 주로 북반구의 온대·아열대에 분포하며, 약 30속의 500종 정도이 알려져 있는데, 한반도에는 자주괴불주머니·흰양귀비·개양귀비·두메양귀비 등의 6속 16종이 분포하고 있다. 거의가 초본이며, 보통 기름이나 색깔이 있는 즙을 가지고 있다. 리보솜 RNA 리보솜 RNA(ribosomal RNA), 줄여서 rRNA는 리보솜을 구성하는 RNA이며, 세포 내 RNA의 약 80%를 차지한다. rRNA는 세포핵 속의 핵소체에서 전사된 후 단백질과 결합하여 리보솜으로 합성된다. rRNA은 세포핵의 핵공을 통해 세포질로 빠져나오며, 이후 단백질과 결합하여 리보솜으로 합성된 뒤, 단백질 합성에 참여한다. 카탄의 개척자 카탄의 개척자(, )은 다양한 요소를 지닌 보드게임으로, 클라우스 토이버(Klaus Teuber)에 의해 제작되었다. 1995년 발매 당시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독일 보드 게임쇼에서 연거푸 상을 받았으며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카탄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유럽까지 유행하게 된 게임으로도 유명하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헝가리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기본판에 추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확장팩들도 이미 시중에 나와 있다. 게임의 배경은 카탄이라는 무인도 섬에 여러 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각 부족들이 자신의 세력을 넓혀서, 카탄의 진정한 정착자가 되려 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이다. 카탄에는 여러 가지 맵이 있다. 그림의 순서대로 맵을 정리 하자면 다음과 같다. 게임 방법은 정착한 무인도 섬에서 자원을 얻어 그 자원을 이용해 길, 집, 도시, 배(바다가 나오는 맵에서만)를 만들어 점수를 먼저 내는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각각의 섬에는 숫자칩이 놓이는데 주사위를 돌려 그 숫자에 놓인 자원을 얻게 된다. 물론 그 무인도에 집이나 도시가 정착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원을 받게 된다. 집과 도시는 각각 1 VP, 2 VP(이점수를 합산하여 점수를 낸다.) 이며 집과 도시 이외에도 Development카드중 1 VP를 얻을 수 있는 카드도 점수를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주사위 숫자는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집과 도시 또는 발전카드를 얻기위한 자원과 숫자의 조합을 잘 선택하여 게임을 좀 더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워야 한다. 카탄 게임은 37개의 정육각형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탄에서의 거의 모든 자원은 은행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그것은 특정 자원의 자원판주위에 집(자원1개)이나 도시(자원2개)를 지었을 때에 가능하다. 예를 들어, 숫자카드 8이 놓인 철광석 자원판에 집이 지어져 있다면 주사위를 돌려 8이 나왔을때 철광석 1개를 은행으로부터 받게 된다. 만약 집 대신 도시라면 철광석 2장을 받게 된다. 숫자카드들은 각각 자원카드위에 놓이게 되는데(사막제외), 숫자 밑에 있는 점의 개수가 주사위를 돌려 나오는 경우의 수로 6과 8은 7을 제외한 숫자 중 가장 확률이 높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3~4인용 게임에는 각각 자원마다 19장의 카드를 은행이 갖고 있으며, 5~6인용 게임에서는 각각 24장의 카드를 은행이 갖고 시작한다. 은행에 놓인 카드들의 숫자를 보고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똑같은 자원 4장이 모이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자원 1장과 4:1로 바꿀 수 있게 된다. 만약 3:1항구나 특정자원 2:1항구에 집이 지어져 있다면 3:1은 어떤자원이든 3:1로 바꿀 수 있고, 특정자원2:1 포트는 그 자원2장과 원하는 자원 1장으로 은행과 트레이드 가능하다. 돌아오는 매 턴마다 다른사람들과 트레이드를 할 수 있는데, 단, 턴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과만 트레이드 할 수 있고 턴이 아닌 두 사람이 트레이드 할 수는 없다. 카탄의 최종 목표는 그 맵에 설정되어있는 VP(빅토리포인트)에 다른사람보다 먼저 도달하는 것이다. VP는 각각 집 1VP,도시 2VP를 받게 되며 그 외에도 발전카드에 있는 VP카드나 LR(longest road) 2VP, LA(largest army) 2VP를 모아서 합한 VP를 계산하게 된다. 이렇게 VP를 받기 위한 길, 집, 도시, 발전카드를 자원카드를 이용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각각에 사용되는 자원은 다음과 같다. 발전카드(Development cards)에는 총 5가지 종류가 있는데 VP카드(1VP), 기사카드(Soldiers), 발견(the Year of Plenty), 독점카드(Monopoly), 길 건설(Road Building)가 있으며 각각의 용도는 다음과 같으며 각각의 카드들은 다른 사용자가 안 보이게 갖고 있다가 자신의 턴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단 한 번 쓴 카드는 다시 쓸 수 없다. (자신의 턴에서 어느 때나 사용할 수 있다.다른 카드와 중복 허용) (자신의 턴에서 도둑을 옮길 수 있는 권한이 생기며, 도둑이 옮겨진 곳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부터 카드를 뺏어 올 수도 있다. 다른 카드와 중복 안 됨. 3장이 모이면 LA를 받게 된다.그러나 다른 사람이 솔져카드 4장을 모았을 경우 LA를 빼앗기게 된다.) (은행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자원카드 2장을 가져와 쓸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자원 한 가지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두 뺏어 올 수 있다.) (길을 내는 데 필요한 나무와 벽돌 없이도 원하는 곳 두 군데에 길을 낼 수 있다. 단 자신의 집이나 도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스핀 (물리학) 스핀()은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운동과 무관한 고유 각운동량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스핀 양자수 -1/2, 광자는 스핀 양자수 1 을 갖는다. 어원과는 달리, 실제로 입자는 어떤 축을 중심으로 고전적으로 회전하지 않는다. 드 하스 아인슈타인 실험에서 외부 자기장으로 스핀을 정렬시키자 전체 각운동량의 보존 때문에 시스템이 회전하는 현상이 보고되었다. 흔히 공간의 양자화로 부르는 양자화된 입자의 스핀의 양은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으로 밝혀낼 수 있게 되었으며, 비균일 자기장에 대해 불연속적인 반응을 주는 내부 인자를 가리킨다. 1924년에 볼프강 파울리는 알칼리 금속의 방출 스펙트럼의 제이만 효과를 연구하던 도중 파울리 배타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 원리에 따르면 두 전자는 같은 양자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양자수가 같은 두 개의 전자가 존재했으므로, 파울리는 기존에 알려진 양자수 이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와 −의 값을 가지는 또다른 양자수의 존재를 예측하였다. 1925년에 조지 윌렌벅()과 사뮈엘 하우드스밋()이 파울리가 가정한 미지의 양자수를 전자의 기본 각운동량으로 해석하였다. 파울리는 처음에 입자의 스핀과 자기장 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항을 해밀토니안에 도입하였다. formula_2는 파울리 행렬을 성분으로 갖는 파울리 벡터를 의미한다. 이 항을 유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formula_3와 함께, 감마 행렬 대신 파울리 행렬을 사용하여 디락 방정식과 유사한 형태로 해밀토니안을 세우면, 이 된다. 파울리 행렬과 관련된 공식 formula_5을 이용해서 해밀토니안의 식을 풀면, 을 얻는다. 브레인퍽 브레인퍽()은 우어반 뮐러(Urban Müller)가 1993년 경에 만든 최소주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이름에 포함된 fuck이 욕설이기 때문에, 정중한 표현을 위해서 때때로 Brainf*ck, Brainf***, 혹은 단순히 BF라고 부르기도 한다. 뮐러는 가장 작은 컴파일러로 구현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튜링 완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언어는 여덟 개의 명령어로 구성되어 있다. 아미가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원래 컴파일러의 둘째 판은 크기가 240 바이트 밖에 안 된다. 그는 다른 난해한 프로그래밍 언어이자, 컴파일러 크기가 1024바이트인 False의 영향을 받았다. 이름이 말해 주듯이, 브레인퍽 프로그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하지만 튜링 기계는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고, 브레인퍽이 튜링 완전하기 때문에 브레인퍽 또한 복잡하기는 해도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다. 이 언어는 프로그램 외에, 0으로 초기화된 바이트 단위의 배열과, 처음에 배열의 맨 첫 바이트를 가리키는 포인터, 그리고 입출력 스트림으로 구성된 간단한 기계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덟 개의 명령어들은 각각 한 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 위의 정의 대신에, codice_1에 ‘짝이 되는 앞쪽의 codice_2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사용할 수 있다. 이는 간단하지만 대칭적이지 못 하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 두 정의는 모든 브레인퍽 프로그램에 대해서 동일한 행동을 보인다.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동일한 또 다른 정의로는, codice_2가 ‘짝이 되는 뒤쪽의 codice_1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codice_1가 ‘포인터가 가리키는 바이트의 값이 0이 아니면 짝이 되는 앞쪽의 codice_2 다음 명령어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있다. 브레인퍽 프로그램들은 codice_7이 codice_8 형이라 가정할 때 다음과 같은 치환을 사용해서 C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는 배열의 각각의 원소들을 바이트로 서술했기 때문에, - 명령은 필요가 없으며 255개의 + 명령으로 고칠 수 있다. 비슷하게, 만약 배열이 유한하고 환형이면, < 명령은 (배열 크기 - 1)개의 > 명령으로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언어가 튜링 완전하려면 배열의 크기와 각각의 원소들의 크기가 모두 제한이 없어야 한다. (이는 엄밀히 말할 때 현대의 PC가 튜링 완전하지 않은 이유와 동일하다.) 명령어에 쓰이는 8개의 문자(+-<>[].)만 사용한 코드는 다음과 같다. 브레인퍽은 이 8개의 문자외에는 모두 무시하므로, 가독성을 위해 공백과 줄바꿈을 넣고 주석을 추가하여 다시 쓴 코드는 다음과 같다. 비슷한 언어들의 목록: 9.11 테러 9.11 테러(, )는 약칭 9/11으로도 불리며,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에서 발생했던 항공기 납치 동시다발 자살 테러이다. 이로 인해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고 버지니아주 알링턴 군의 미국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받아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약 2,996명의 사람이 사망하고 최소 6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2002년 조지 W. 부시가 발의한 국토안보법에 의거, 미국 국토안보부 개설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은 4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 테러는 테러범을 포함하여 2,996명의 사망자와 최소 6,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은 전원 사망하였고,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이 125명, 세계무역센터에서는 약 2,500명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미국 전역은 하루만에 일어난 큰 테러사건으로 인해 비상사태에 빠지게 되었고, 세계 경제의 중심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인 뉴욕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테러 발생 직후 CNN 방송망을 시작으로 사건의 상황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9·11 테러는 순식간에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경제적인 피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가치 11억 달러(1조 4300억 원),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약 52조 원),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약 12조 원), 이외에도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테러에 이용된 각 항공기마다 4~5명의 납치범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조사 결과 범인들은 모하메드 아타 등 19명의 알 카에다 조직원들로 알려졌다. 물론 이들은 비행기 충돌과 동시에 전부 사망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카에다를 주요 용의자로 지적했으며, 그 밖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산하의 무장조직인 하마스(HAMAS), 이슬람 원리주의 기구인 지하드,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다른 이슬람 테러조직들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았다.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09시 29분,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 테러사건을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고, 이어 전국의 정부 건물에 대피령을 내리는 한편, 국제연합(UN), 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 디즈니랜드 등 주요 건물을 폐쇄하였다. 같은 날 금융시장 폐장 결정을 내린 뒤, 뉴욕과 워싱턴에 해군의 구축함 등 장비를 파견하였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테러 단체, 국가에 맞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01년 10월 7일, 미국·영국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주변에 350여 기의 항공 전력을 배치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에서 자유로운 전투·폭격기를 이용한 공습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하였다. 이어 다음달 22일 연합군은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탈레반과의 전쟁을 종결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던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카에다를 뿌리뽑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후 미국은 2003년 3월 20일에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이라크 정부를 20일 만에 함락시키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대 테러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후 2011년 5월 제로니모 작전의 일환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 후 수장하였다. 9.11 테러 자작극 음모론이란 부시 정권이 유태 세력과 공동으로 9.11 테러를 실시했다는 자작극 혐의를 말한다. '진보연구학회'를 이끄는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9.11사건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그룹이 초기에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의혹을 다룬 영화 'JFK'를 감독한 올리버 스톤은 9.11사건을 다룬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개봉하면서 "음모론이 자꾸 나오는 이유는 미국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9.11이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밝혔다. 국내에 잘못 들어온 소식으로는 "하지만 급작스러운 테러상황에서 유대인이 장악한 언론이 실시간으로 그 장면을 촬영했으며, 쌍둥이 빌딩의 20%를 렌트하고 있는 유대인은 한 명도 죽지 않았는데다가 부시 정권이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한 것을 비추어 보아 유대인과 부시 정부의 합작 테러사건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는 소문이 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막상 실제로의 통계 조사 결과는 이들 주장의 오류를 훤히 드러내고 있다. 알카에다가 컴퓨터로 테러 정보를 서로 교환했다는 음모론이다. 당시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비행기 편명인 'Q33NY'를 워드에 입력한 후, 이를 윙딩스(wingdings) 글씨체로 바꾸어서 보면 테러를 암시하는 문양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테러에 이용된 비행기 4대 중 'Q33NY'라는 편명의 비행기는 없으며, 전문가들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큰 이야기라고 지적하였다. 처치-튜링 논제 처치-튜링 논제(Church-Turing thesi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논제(thesis)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어떤 함수는 튜링 기계가 계산할 수 있으면, 그리고 그 때만 알고리즘으로 계산 가능하다는 명제이다. 알론조 처치와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튜링 기계는 모든 범용 프로그래밍 언어로 번역될 수 있으므로, 이것은 어떤 컴퓨터에게든 충분한 시간과 메모리가 주어진다면 존재하는 모든 알고리즘의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는 명제와 동치이다. 처음 이 명제가 나왔을 때에는 "효과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effectively computable) 함수"와 같이 비형식적인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 명제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후 수학자들은 모호한 말 대신 계산 가능한 함수를 사용한다. 실제로 증명되거나 반증된 적은 없으며, 영원히 증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다만 현재까지 인간이 발명한 모든 종류의 계산법(양자 컴퓨터를 포함하여)이 적절한 형태의 튜링 기계로 표현될 수 있음이 알려져 있다. 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인공어이다. "에스페란토"라는 이름은 1887년 발표한 국제어 문법 제1서에 쓰였던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의 필명인 "D-ro Esperanto(에스페란토 박사)"에서 유래하였다.(Esperanto는 본래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해, 배우기 쉽고 중립적인 언어를 목표로 하여 만들어졌다. 원래는 국제어()라고 불리었다. 현재 에스페란토는 여행, 의사교환, 문화 교류, 편지, 언어교육 등 많은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전 세계 200만 명의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로 대화할 수 있다. 그중에서 약 2,000~3,000명은 에스페란토를 말할 줄 아는 부모 사이에서 에스페란토를 모어로 습득하였다. 에스페란토는 말이 서로 다른 민족 간 의사 소통과 상호 이해, 나아가서 인류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우면서 모든 표현이 가능한 언어로서, 국제적으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끔 고안되었다. 그러나 '정말 배우기 쉬운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견이 많다. 지금까지 몇몇의 개선안(이도(Ido), 에스페란토 센 플리코)들이 제안되었으나, 세계에스페란토협회(UEA)에서 거부당하였으며, 자멘호프가 만든 문법을 수정없이 고수하고 있다.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을 에스페란티스토라고 한다. 에스페란티스토는 국제어를 쓰는 사람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대한민국에도 에스페란토 협회인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존재한다. 전 세계 에스페란티스토는 라 에스페로를 언어가(歌)로 사용하고 있으며, 언어기(旗)도 라 에스페로라고 부른다. 폴란드의 안과 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지역의 언어 문제가 곧 주민들 사이에 불화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만 있으면 적어도 그러한 분쟁은 종식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에스페란토를 창안하게 되었다. 처음에 자멘호프는 라틴어의 복구가 언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라틴어를 배우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영어를 배우면서 그 문법이 간단하다는 것과 동사의 인칭변화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길을 걸으며 우연히 러시아어로 된 두 개의 간판을 보고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두 개의 간판 (경비실), (과자가게)에는 공통적으로 (장소라는 뜻)라는 접미사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어근만 외우면 접미사를 써서 다양한 단어를 파생해 낼 수 있도록 구상하였다. 어휘는 다양한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단어를 채용하기로 하였다. 1878년, 현재 에스페란토의 시험판인 링그베 우니베르살라를 만들어 고등학교 동급생에게 가르쳤다. 그 후 6년간, 우선 각 민족어로 된 문학작품과 시를 번역하며, 언어를 발전시켜 갔다. 그는 1895년 러시아 에스페란티스토 보로프코(N. Borovko)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이 언어는 1878년에 이미 완전히 완성된 듯 했지만, 나는 이 언어가 완벽해지도록 6년을 더 소비하였다.’라고 적었다. 그는 완성된 언어를 발표하려 하였지만,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 정부의 검열에 의해 출판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성서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하고, 언어를 개량하였다. 1887년 제1서로 에스페란토를 최초로 발표하였다. 에스페란토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인공어이다. 이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유럽과 동아시아에 가장 많은데, 특히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에스페란토는 에스페란토어는 유럽의 북부와 중부 국가에서 특히 유행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에스페란토 클럽을 만든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에스페란토 구사자들의 수를 예측한 사람은 은퇴한 심리학 교수인 Sidney S. Culbert이다. 이 교수는 워싱턴 대학에서 활동했으며 오랫동안 에스페란토를 사용했다. 그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십 개의 국가에서 에스페란토 구사자들에 대해 조사했다. Culbert는 백만 명에서 이백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Foreign Service Level 3 수준인, ‘전문적으로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안다는 결론을 내렸다. (Foreign Service Level 3는 Foreign Service Level language ability measures 등급 중 하나로 복잡한 생각들을 망설임 없이 표현할 수 있고 연설과 라디오 방송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뜻한다.) 연감에서 그는 언어 구사자들의 수를 백만의 자리에서 반올림 하였다. 따라서 에스페란토 구사자들의 수는 이백만 명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이 최종 수치는 에스놀로그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 수치가 정확하다면, 세계 인구의 0.03 %가 이 언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멘호프가 꿈꾸던 보편적 언어의 목표는 아니지만, 이는 다른 어떤 인공어도 도달하지 못한 수치로 에스페란토의 유명한 정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핀란드의 언어학자이자 에스페란토어의 모국어 사용자 전문가인, Jouko Lindstedt은 에스페란토 사용 지역의 전체적인 언어 사용 능력 비율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추정안을 내놓았다. Culbert 박사의 구체적인 샘플 데이터 또는 인구 통계 데이터가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에, 언어 구사자의 정확한 수치를 알기는 불가능하다. 2009년도에 Lu Wunsch-Rolshoven는 헝가리와 리투아니아의 2001년도 인구 통계 데이터를 사용하여 160,000에서 300,000명의 사람들이 이 언어를 능숙하거나 활발하게 사용한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이 중 80,000에서 150,000명은 유럽 연합 국가의 국민들이라고 추정했다. 에스페란토의 모국어 사용자인, 에스페란토 원어민()은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 언어를 배웠다. 이런 현상은 다문화 가정 내에서 에스페란토어가 제1언어 또는 유일한 공통 언어일 경우에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가끔 열렬한 에스페란토 사용 가족 내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에스놀로그의 15번째 에디션에서는 1996년도에 200에서 2,000명 사이의 에스페란토 모국어 사용자들이 있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수치들은 16, 17번째 에디션에서 삭제되었다. 발음체계는 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았으나, 어휘는 주로 로망스어(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약 75%), 게르만어(독일어, 영어 등; 약 20%)로부터 채용하였다. 자멘호프가 정의하지 않은 문법상의 언어 사용은 초기 사용자의 모어였던 러시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다. 라틴어나 그리스어처럼 비교적 어순이 자유로우나, 관습적으로 영어와 동일한 SVO형 구조가 대부분이며, 형용사가 명사 앞에 오는 경우가 많다. 전치사를 사용하며, 교착어적 성질도 가지고 있다. 에스페란토는 성이 없고, 규칙적으로 동사가 변화하는 교착어이다. 명사와 형용사는 주격과 대격, 즉 2개의 격을 가진다. 수는 단수와 복수가 있고, 형용사의 복수형이 존재한다. 동사의 인칭변화는 없고, 대격어미(-n)는 이동을 나타내거나, 전치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대격이 있으므로 러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일본어, 한국어와 같이 비교적 어순이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에스페란토의 어휘는 대부분 유럽 언어에서 왔지만, 최근에 생긴 어휘는 비유럽어권에서 온 경우도 있다.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등이다. 다국어주의에 의해 대부분의 어휘는 서로 유사한 다양한 언어의 공통적인 부분에서 가져왔다. 에스페란토는 라틴 문자에 6글자를 더하고 q, w, x, y 4글자를 빼 총 28자의 문자를 쓴다. 에스페란토에서 쓰는 라틴 문자를 알파베토()라고 한다. "" 6글자 위에 붙어 있는 발음 구별 기호를 수페르시그노(, 윗기호) 또는 차펠로()라고 한다. 한국어 화자는 흔히 삿갓이라고도 부른다. 에스페란토의 알파벳중에 자판에 존재하지 않는 6개의 라틴 문자를 어떻게 입력할 것인가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그중 '에스페란토 기초'에서 제시한 방법이 H 체계()이다. H 체계는 친숙해 보일 수 있으나, 컴퓨터에서 일괄 변환하는 데 무리가 있으며, 읽는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래서 현재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X 체계()이다. 에스페란토가 발표된 이후, 수십 가지의 개선안과 에스페란토에서 파생된 인공어가 만들어졌다. 이를 에스페란티도라고 한다. 에스페란토에서 기본적인 단어는 남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성의 경우 접미사 -in-를 붙여 나타낸다. 즉, 남성의 경우에는 그냥 나타내고, 여성일 경우에는 접미사 -in-을 사용하여 특별히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는 에스페란토가 발표된 1887년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 유래한 남성우월주의이며, 에스페란토 주의에서 강조하는 사상 중 하나인 '평등'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있다. 최근에는 가족에 관한 단어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인 단어는 성을 나타내지 않고, 남성을 나타낼 때는 vir-를 붙이는게 일반적이다. 또한 일부 에스페란티스토는 남성을 나타내는 접미사 를 추가 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를 "라 한다. 참고로, 에스페란토의 성과 관련한 문제로, 성을 나타내지 않는 대명사 'ri'를 추가하여, 일반적인 상황에서 'ri'의 사용을 주장하는 리이스모(riismo)도 있다. 이는 에스페란토는 다른 언어에 비해 학습을 위해 1/10 가량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장점을 말하기도 하지만, 유럽인들에 비해 동아시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힘들다는 단점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에스페란토의 대부분의 어휘가 유럽에서 기원하였으므로 그 언어와 관계없는 언어의 사용자는 에스페란토어 어휘의 의미와 정확한 쓰임을 외우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고 볼 수 있다. 에스페란토는 대격(또는 목적격)을 나타내기 위해 접미사 -n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어의 경우 대격(또는 목적격) 조사 '-을/를'을 사용하여,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대격의 존재로 인해 에스페란토의 어순이 더 자유로워지고, 의미가 분명히 전달되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많은 유럽어의 경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유럽인들이 -n의 사용법을 배우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에스페란토의 개선안 중 하나인 이도(Ido)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격 어미 -n을 제외하였다. 에스페란토는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데 일정한 규칙이 없으며, 필요에 의해 누군가가 만든 단어가 일정 수준 이상 널리 알려지면, 그런 새로운 단어를 모아서 발표하는, 소극적 방식으로 어휘를 늘려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같은 뜻을 가진 두 단어 이상이 널리 사용할 경우, 동일하게 쓰이는 단어임에도 배우는 이의 입장에서는 둘다 외우는 수밖에 없다. 유럽 사용자의 경우,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에스페란토화 하는 것을, 비유럽권에서는 기존 단어를 사용하여 합성어를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기 때문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두개 이상 동시에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합성어의 경우에도 사람마다 합성어를 만드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뜻을 가진 여러 개의 합성어가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다. 또한, 원래 하나였던 단어가 여러 개로 분화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에스페란토에는 자연어만큼은 아니나 동의어가 많으며, 에스페란토 학회가 동의어 정리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학습자가 동의어를 모두 외워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학습자의 모어에 따라 일부 발음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올 수 있다. 한국어 화자가 자주 하는 실수는 다음과 같다. 사원수 수학에서, 사원수(四元數, ) 또는 해밀턴 수()는 복소수를 확장해 만든 수 체계이다. 네 개의 실수 성분을 가지며, 덧셈과 곱셈의 결합법칙 및 덧셈의 교환법칙을 만족시키지만 곱셈의 교환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가환대수이다. 사원수의 집합 formula_1는 집합으로서 formula_2이다. 이 위에 다음과 같은 덧셈과 곱셈 연산을 정의하여, 환으로 만들 수 있다. 덧셈은 각 성분의 합이다. 곱셈은 겹선형 연산이며, 기저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사원수의 기저 formula_4는 이 곱셈에 대하여 유한군을 이루며, 이를 사원수군 formula_6라고 한다. 즉, 사원수환은 군환 formula_7의 몫 과 같다. (군환 formula_7는 8차원 실수 단위 결합 대수이며, 위 아이디얼로 몫을 취하면 4차원 실수 대수를 얻는다.) 이렇게 덧셈과 곱셈을 정의하면, 사원수의 환 formula_1는 나눗셈환을 이룬다. 그러나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는 체를 이루지 않는다. 사원수 formula_11에 대하여, "w" 를 q 의 실수부 또는 스칼라부 formula_12, formula_13를 q 의 허수부 또는 벡터부 formula_14라고 한다. 사원수 formula_11의 켤레 사원수() formula_16는 그 허수부의 부호를 뒤집은 사원수이다. 즉 사원수 "q" 의 노름 또는 절댓값 |"q"| 는 이다. 사원수환 formula_1는 노름을 갖춘 나눗셈환이자 formula_20-대수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사원수 formula_21에 대하여, 사원수의 실수부는 스칼라로, 허수부는 3차원 벡터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사원수는 스칼라와 3차원 벡터의 순서쌍 formula_28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원수의 합과 곱은 다음과 같다. 사원수는 2×2 복소 행렬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32는 파울리 행렬이다. 그렇다면 다음이 성립한다. 임의의 사원수 formula_33에 대하여, 마지막 식에서, 우변은 행렬 지수 함수이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748년 5월 4일 크리스티안 골드바흐에게 보낸 편지 에서,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을 발표하였다. 이는 두 사원수 formula_40, formula_41에 대하여 formula_42인 것과 같다. 올랭드 로드리그()는 1840년에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을 강체의 회전에 응용하였다. 해밀턴은 복소수가 2차원 평면상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3차원 공간에서 점을 표현하는 같은 방법을 찾으려 하였다. 3차원 공간에서의 정점은 3개의 수로 이루어지며, 해밀턴은 그 3개의 수들을 어떻게 더하고 곱할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는 두개의 정점간의 나누기를 어떻게 정의할지 알지 못했고,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1843년 10월 16일, 해밀턴은 그의 아내와 더블린의 로열 운하(, )을 걷고 있었다. 브로엄 다리(, 현재는 브룸 다리 )를 걷고 있을 때, 나누기에 관한 해답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3개의 성분을 가진 값은 나눗셈을 정의할 수 없지만, 4개의 성분을 가진 값은 나눗셈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4개의 성분 가운데 세 개를 사용하여 3차원 공간의 직교좌표를 표현할 수 있다. 해밀턴은 이 수체계의 기본 규칙을 다리에 새겨놓았다. 해밀턴은 위의 기본적인 규칙을 적용한 4개의 요소를 "사원수"()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넷, 넷으로 구성된 것)에서 유래한다. 다음날 해밀턴은 이 발견에 대하여 친구 수학자인 존 그레이브스()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 이 편지는 저널에 출판되었으며, 편지에서 해밀턴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해밀턴은 이 발견을 1844년에 〈사원수에 대하여: 또는 대수학에서의 새로운 허수 체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출판하였다. 이후 해밀턴은 이 논문의 속편을 17편 더 같은 저널에 수록하였다. 그 후 그는 사원수를 연구하고 알리는데 그의 여생을 바쳤다. 그는 "사원수론자"()라는 학파를 창시하고, 1853년에는 《사원수 강해》() 를 출판하였다. 해밀턴 사후, 해밀턴의 아들 윌리엄 에드윈 해밀턴()은 아버지의 마지막 책인 800여 쪽의 《사원수 원론》()을 편집하여 1866년에 출판하였다. 해밀턴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인 피터 거스리 테이트는 사원수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당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사원수가 의무 수강 과목의 하나였다. 현재는 공간 운동학, 맥스웰 방정식 등의 벡터를 이용하여 설명하는 물리와 기하학의 논제들은 그 당시에는 모두 사원수를 이용하여 설명되었다. 1899년에 국제 사원수 학회()가 설립되었고, 1900년~1913년 동안 《사원수 학회 저널》()을 출판하였다. 전성기 동안 60여 명의 회원을 가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라졌다. 1880년대 중반부터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와 올리버 헤비사이드가 제안한 벡터 해석학이 사원수 표현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벡터는 사원수와 같은 현상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고전 사원수 연구에서 많은 아이디어와 용어 등을 빌려왔다. 그러나 벡터 해석이 보다 간결한 개념과 표기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원수는 수학과 물리에서 비주류가 되었다. 이는 해밀턴의 사원수가 이해하기 난해하고, 표기가 친숙하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물에 길고 불분명한 표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원수는 20세기 말에 공간상에서의 회전에 관한 사원수의 유용성에 의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원수를 이용한 회전의 표현은 행렬을 사용하는 표현에 비해 더욱 간결했고 계산이 빨랐다. 이런 이유로, 사원수는 컴퓨터 그래픽, 제어이론, 신호처리, 자세제어(attitude control), 물리학, 생물정보학, 분자동역학, 컴퓨터 시뮬레이션, 궤도역학(orbital mechanics) 등에 사용되고 있다. GW 베이직 GW 베이직(GW-BASIC)은 원래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팩을 위해 개발한 베이직의 일종이다. 이름의 GW는 초기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이었던 그렉 위튼(Greg Whitten, 별명은 'gee-whiz')의 이름 첫글자를 딴 것이다. GW-BASIC는 마이크로소프트/IBM BASICA와 호환성이 있으며, 디스크 기반으로 실행에 IBM PC에 포함된 ROM 베이직의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GW-BASIC을 IBM PC의 운영 체제 MS-DOS에 기본 포함시켜서 제공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좀 더 빠른 프로그램을 위해 BASCOM이라는 베이직 전용 컴파일러를 판매하기도 했다. 초기 마이크로컴퓨터 버전의 베이직 언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GW-BASIC도 구조화 프로그래밍에 필요한 지역 변수 등의 구조가 없고, 인터프리터형 언어의 특성상 실행 속도가 비교적 느렸으나, 그 뒤로 수많은 그래픽 관련 명령어가 추가되었고, 레코드형 디스크 입출력 부분이 추가·보완되었다. MS-DOS 5.0 버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GW 베이직을 번들로 제공하지 않고, 대신 큐베이직(QBasic)으로 대체했다. J. R. R. 톨킨 존 로널드 로얼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J. R. R. 톨킨, CBE, 1892년 1월 3일 ~ 1973년 9월 2일)은 영국의 영어학 교수이자 작가이다. (톨킨의 가족들은 'Reuel'을 '루엘(ROO-el)'이라고 발음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펨브룩 칼리지에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고대영어학 교수로, 1945년에서 1959년 사이에는 같은 대학 머튼 칼리지의 영어영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평생 써 온 소설을 통해 인생 후반에 큰 명성을 얻었다. 톨킨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과 관련한 일을 하기도 했으며, 언어학 교수이기도 했다. 그는 언어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그의 작품 내에 인공적인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톨킨의 대표적인 인공어로는 꿰냐와 신다린이 있다. 톨킨은 인간 세계와는 다른 세계와 다른 종족을 만들어 내었고, 이로써 현대 판타지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크게 발전시킨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반지의 제왕》 삼부작과 《호빗》 등이 있으며, 이러한 가운데땅에 대한 작품들의 지속적인 인기와 영향력은 그의 명성을 끌어올려 그를 현대 판타지(혹은 하이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게 하였다. 또한 그는 베오울프 나 가웨인 경과 녹기사 등에 대한 많은 비평도 남겼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내의 문학 토론 모임인 잉클링스의 멤버였으며, 같은 잉클링스 멤버였던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 S. 루이스와는 절친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톨킨은 1972년 신년서훈명단에 올라 3등급 대영 제국 훈장(CBE)을 받았다. 톨킨은 1973년 9월 2일 죽었으며,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아버지 톨킨의 집필을 정리하여 《실마릴리온》을 비롯해 많은 책을 출간하였다. 톨킨은 18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블룸폰테인에서 태어났고 네 살때 영국 버밍엄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톨킨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외가 모두가 열성적인 성공회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심하였다. 톨킨의 어머니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자 성공회(Anglican) 신자였던 친척들은 톨킨 일족에게 등을 돌리고 경제적 지원을 끊음에 따라 톨킨 모자는 가난하게 생활하게 된다. 톨킨의 어머니는 톨킨이 12살 때 당뇨 합병증으로 죽었지만, 톨킨은 그의 나머지 생애 동안 그의 어머니가 믿음으로 인해 순교했다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톨킨의 독실한 신앙은 성공회 신자인 C.S.루이스와의 대화에도 깊이 베어 있으며, 그의 작품 속에도 다양한 상징과 가치로 나타난다. 10대 시절 톨킨은 킹 에드워드 스쿨과 성 필립 문법학교를 다녔다. 1911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 칼리지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고전을 공부했지만 중간에 전공을 바꾸어 영어언어학 학사로 1915년 졸업한다. 톨킨이 에디스 브렛을 만나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은 그가 16세일 때였으며 당시 에디스는 톨킨보다 3살 많았다. 에디스는 개신교였기에 이를 좋지 않게 생각한 당시 톨킨의 후견인 모건 신부는 톨킨이 21살이 되기 전까지 그들이 만나는 것을 금지하였고 톨킨은 이에 따랐다. 톨킨은 21세가 되던 생일날 톨킨은 에디스에게 청혼하는 편지를 쓰고 결국 둘은 1916년 3월 22일 결혼하게 된다. 톨킨은 제1차 세계 대전 시작 후 1916년 영국군에 지원하여 참전한다. 이제 막 결혼한 대학졸업생이었던 톨킨은 1차대전의 최전선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가장 친한 친구들이 죽는 슬픔을 겪게 된다. 또한 톨킨도 전장에서 얻은 열병으로 인해 1916년 11월 후방으로 후송되고 18개월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으며 병을 회복하는 기간 동안 북유럽의 신화와 민간 전승에 기반한 우화의 시리즈인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The Book of Lost Tales)을 쓴다. 요양중인 이무렵 톨킨은 에디스와 함께 독미나리 숲을 거닐다가 에디스가 톨킨을 위로하는 춤을 추었고 아내의 귀여운 행동에 영감을 얻어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 반영하여 설정하였고, 그것은 베렌과 루시엔이다. 톨킨은 그의 아내를 종종 "나의 루시엔"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톨킨은 잠시 동안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에 관련한 일을 했다. 그가 주로 담당한 것은 알파벳 'W'로 시작하는 언어의 기원과 재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1920년에 리즈 대학에서 영어 언어학 조교로 강의하다가 1924년 리즈 대학에서 정교수가 된다. 1925년에는 톨킨은 다시 옥스퍼드 대학교로 가서 교수직을 맡게 된다.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들이 모여 출판된 책이 《호빗》이었다. 호빗은 어른들에게까지 인기를 얻게 되고 호빗의 출판사는 톨킨에게 후속작을 요청한다. 이에 톨킨은 작가 토론모임인 잉클링스와 C.S.루이스의 조언을 받으며 《반지의 제왕》을 10여년에 걸쳐 저술한다. 톨킨의 절친한 친구이자 톨킨과 마찬가지로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C.S. 루이스는 톨킨과 함께 독서 모임인 잉클링스의 회원이었다. 둘은 잉클링스에서 문학, 역사, 종교, 신화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루이스는 톨킨이 생각하고 저술했던 가운데 땅 이야기를 경청하고 격려해 주었다. 톨킨과 루이스는 말년에는 소원해 지기도 하였지만 둘은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다. 톨킨은 1963년 루이스가 죽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우리들을 맺어준 깊은 우정은 지금도 그대로이다"라고 하였다. 톨킨의 아내가 1971년 11월 29일 죽었을 때 톨킨은 아내의 묘지 비석에 루시엔(Lúthien)이라고 아내의 이름 아래에 새겼다. 21개월 뒤인 1973년 9월 2일 톨킨 81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같은 곳에 뭍혔으며 비석에 베렌(Beren)이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베렌과 루시엔은 《실마릴리온》의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비석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톨킨은 그의 소설과 함께 대학 문학 비평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1936년 강의내용이 나중에 기사로 출판되게 되고,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 베오울프를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그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논문은 고전 영문학 공부하는데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 톨킨은 그의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판타지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매해 크리스마스 편지를 산타할아버지가 보내는 형식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썼고 그 편지에는 짧은 이야기 시리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모아져 《산타할아버지의 편지》로 출판된다. 한국에서는 《북극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다른 이야기로는 《미스터 블리스》와 《로버랜덤》,《니글의 나뭇잎》《톰 봄바딜의 모험》,《요정 이야기에 관하여》,《큰 우튼의 대장장이》,《햄의 농부 가일스》 등이 있다. 톨킨은 자신의 허구적인 이야기들이 인기를 얻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호빗》은 톨킨의 자녀들을 위해 쓴 소설이었다. 1936년 우연한 기회에 호빗을 읽게 된 런던의 조지 알렌 & 언윈(George Allen & Unwin) 출판사 여직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호빗》을 출판하였다. 출판 이후 《호빗》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까지 인기를 끌게 되고 출판사는 톨킨에게 속편을 요청하게 된다. 톨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반지의 제왕》은 출판사의 요청에 의해 시작하였고 10여 년에 걸쳐 반지의 제왕을 쓰게 된다. 처음 출판은 1954년부터 1955년에 3권으로 출판되었다.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는 동안 그는 잉클링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특히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톨킨은 처음 《반지의 제왕》을 《호빗》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로 쓰려 했다. 그러나 소설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심각해지게 되면서 성인 독자들에게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집필전에 그가 구상하고 집필한 벨레리안드(Beleriand) 배경 이야기는 그의 사후에 《실마릴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소설의 성공은 판타지 장르 소설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반지의 제왕은 1960년대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판매와 독자평 둘다에서 20세기에 가장 인기있는 소설 중에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2003년 BBC에서 개최한 "대단한 책"(Big Read) 조사에서 반지의 제왕은 "영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책"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톨킨은 베렌과 루시엔의 이야기가 포함된 '신화의 초안'(Sketch of the Mythology)을 간략하게 썼다. 그 내용은 나중에 퀜타 실마릴리온에 포함되게 된다. 톨킨은 실마릴리온 이야기가 반지의 제왕과 함께 출판 되기를 바랬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하는 바람에 생전에 출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인쇄비가 너무 높았던 것도 그 이유였으며 반지의 제왕도 3부로 나누어 출판하게 된다. 톨킨은 그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에게 그의 사후에 작품 발표에 대한 저작권을 위임하였고 크리스토퍼는 그의 아버지의 미출판 원고들을 정리, 편집하여 책 《실마릴리온》으로 1977년 출판하게 된다. 이는 톨킨이 죽은 후 4년 뒤의 출판이었다. 《실마릴리온》은 가운데땅에서의 신화와 역사를 기록한 소설로서 작가가 《호빗》과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기 전에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이라고 적힌 노트에 1937년부터 쓰기 시작해 죽기전까지 집필한 것으로서 《반지의 제왕》 앞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도 동명의 제목(실마릴리온)으로 출판되었다. 1980년 크리스토퍼 톨킨은 톨킨의 유작 원고 자료들을 모아 《누메노르와 가운데땅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출간한다. 1983년부터 1996년까지 톨킨의 저서를 모아 《잃어버린 이야기들의 책》 1부와 2부와 《벨레리안드의 노래》를 비롯한 12권의 책을 출간하고, 나중에 학문적으로 설명한 해설과 각주를 달아 이를 《가운데땅 역사서》라는 이름의 12권으로 재정리한다. 2007년 《후린의 아이들》이 하퍼 콜린스(Harper Collins)와 휴튼 미플린(Houghton Mifflin)에 의해 출판되었다. 《후린의 아이들》은 톨킨이 1918년에 집필을 시작했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작품으로, 내용은 톨킨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이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 《가운데땅 이야기》 등에서 원고를 모은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중간계이며 《반지의 제왕》의 시대 배경 제3시대보다 6500년 앞선 제1시대의 영웅 투린의 비극적인 투쟁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한국에서도 2008년 7월 출간되었다. 2009년 5월 휴튼 미플린 하코트(Houghton Mifflin Harcourt) 출판사와 하퍼 콜린스에서 톨킨의 미발행 작품을 지구르드와 구드룬의 전설(The Legend of Sigurd and Gudrú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톨킨이 편집하고 소개를 덧붙였다. 내용은 노르웨이의 전설에 관한 책으로 1930년대 톨킨이 옥스퍼드 대학에 교수로 있을 무렵에 썼던 서사시이다.       은 가운데땅과 관련있는 책이다. 다음은 톨킨과 그의 세계에 대한 수많은 책들 중에 중요한 것들을 추린 것이다. 저자는 톨킨이 아니며 톨킨 문학을 연구한 사람들의 책이다. 물고기 물고기 또는 어류(魚類)는 척추동물아문에 속하는 동물의 하나이다. 척추동물 중에서 네발동물은 제외된다. 대체적으로 물 속에 살며 아가미로 호흡하며 지느러미로 움직이고 몸 표면이 비늘로 덮여 있으며 냉혈동물로 주위 온도에 영향을 받는다. 물고기는 지구상의 여러 수생 환경에서 분포하며, 그 서식지는 열대지방에서 극권, 내륙의 담수 지역에서 해수 지역, 또한 해양의 표층에서 깊은 바다에까지 이르는 등 다양하다. 어류 전체의 종 수는 25,000~31,000 정도이며, 이는 척추동물 전체의 과반수에 해당한다. 한국에서는 생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보통 음식으로 분류된 이름이다. 상업적이고 자급자족을 하는 어부들은 생선을 야생에서 직접 잡든지, 아니면 호수나 바다의 우리에서 길러낸다. 오락으로 낚시광들에게 많이 잡히며, 물고기 애호가들은 잡아서 키우기도 한다. 여러 세기에 걸쳐 물고기는 문화적인 역할도 담당해 왔다. 신이나 종교적 기호로서 추앙 받기도 하였고 예술, 책, 영화의 주제로도 쓰였다. 물고기라는 용어는 정확하게 말하면 사지동물이 아니면서 두개골이 있고, 평생에 걸쳐서 아가미가 있고, 만약 다리가 있다면 지느러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호칭한다. 조류나 포유류와는 달리 어류는 단 하나의 분기군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측계통군으로 이루어진 계통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먹장어, 칠성장어, 상어 및 가오리, 조기어류, 실러캔스, 폐어가 포함된다. 전형적인 물고기들은 변온 냉혈동물이다. 이들은 빠르게 헤엄쳐 나가기 위한 유선형의 몸체를 지녔으며, 아가미를 통해 물에서 산소를 추출해 내든지, 대기의 산소를 이용하기 위한 부수적인 호흡기관을 사용한다. 또한 이들은 두쌍의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고, 한두 개(드물게는 세 개도 있다)의 등지느러미,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가 있으며, 턱이 있고 보통 비늘로 덮인 피부가 있으며 알을 낳는다. 모든 기준에는 예외가 있다. 참치, 황새치, 또 상어의 몇몇 종들은 어느 정도의 온혈 적응을 나타낸다. 이들은 주위 수온보다 확실하게 체온을 높일 수 있다. 물고기마다 유선형의 정도와 수영능력의 효율은 각기 다른데, 참치, 연어 그리고 전갱이는 자신의 몸 길이의 10배에서 20배까지도 초당 수영이 가능한 반면, 뱀장어나 가오리등과 같이 초당 자신의 몸 길이의 반 정도도 못가는 종류들도 있다. 수많은 민물고기류는 물에서처럼 다양한 구조들을 이용하여 공기에서부터도 산소를 추출해 내는데, 폐어들은 사지동물들의 그것과 비슷한 한 쌍의 허파를 지니고 있고, 구라미들은 코리도라스등의 메기들에서 많이 보이는, 내장기관이나 장을 이용한 산소 추출 과정과 비슷한 작용을 해 주는 미로기관이라 불리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몸체의 형태와 그 지느러미들의 배열은 매우 다양한데, 해마, 복어, 아구 또는 심해어인 풍선장어에서 보이는 전혀 물고기 같지 않은 형태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과 비슷하게 "피부의 표면"도, 벗겨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판금모양으로 분류되는(보통의 상어와 가오리)것들, 코스모이드(cosmoid)로 분류되는 것들(멸종된 폐어와 실러캔스에서 볼 수 있음), 경린어로 분류되는 것들(다양한 멸종어류에서 보이지만 가아와 폴립테루스에서는 아직도 발견된다), 원린어로 분류되는 것들, 즐린류로 분류되는 것들 등(마지막의 두 가지는 경골어류이다)의 많은 종류의 다양한 비늘로 덮인 것들이 있다. 육지에서 대부분 살아가는 물고기들도 있다. 말뚝망둥어들은 개펄에서 먹이도 먹고, 다른 망둥어들과 교류를 하다가 동굴에 숨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간다. 메기, "Phreatobius cisternarum"는 땅속에서 사는데, 지하거주라 불리고, 상대적으로 물에 흠뻑 젖은 낙엽 더미 안에서 산다. 물고기들의 크기는 16 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고래상어에서부터, 8 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스타우트 인펀트피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개, 오징어, 불가사리, 가재, 해파리와 같이 미국에서 보통 물고기(fish)라 부르는 많은 종류의 수생동물들은 사실 위의 기준으로 분류하면 "물고기"가 아니다. 과거에는 생물학자들조차 제대로 된 구분을 하지 못했었다. 16세기의 자연 역사학자들은 수생 무척추동물들은 물론, 바다표범, 고래, 양서류, 악어, 거기다가 하마까지도 물고기로 분류했었다. 어떤 문헌들에서는 수산양식을 위한 것들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기 위해 진정한 물고기들을 "지느러미 물고기(fin fish)"라고 부른다. 모든 물고기는 물 속에서 서식한다. 수중에 포함되어 있는 염분의 환경에 따라, 바다 및 염분이 포함된 호수 등에서 생활하는 해수어와 강, 냇가와 습지 등의 민물 지역에서 생활하는 담수어로 편의상 나눈다. 물론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섞이는 강의 어귀 등의 지역에서 생활하는 물고기나, 바닷물과 민물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는 물고기도 있어, 바닷물에 사는 물고기와 민물에 사는 물고기를 엄밀하게 나누지는 않는다. 그 밖에, 수심 200미터 이하의 심해 지역에서 생식하는 심해어나, 지하수 등지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도 있다. 한편 물고기는 대부분 아가미로 호흡하지만, 예외적으로 허파, 피부 등으로 호흡하며, 갯벌이나 습지와 같은 지역에서 생활하는 물고기도 있다. (예: 망둥이) 그러나 이러한 물고기도 육지에 있는 시간이 긴 경우에도 피부가 건조해지는 경우 살아가지 못하며, 번식이나 치어 등의 생활환경은 물 속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전엔 어류를 어상강(魚上綱)이라는 하나의 상강으로 묶어 놓고 분류하였으나, 최근에는 어상강이란 분류를 없애고 다시 나누어서 뼈가 연골인 어류는 상강의 분류가 없는 연골어강 또는 판피어강으로, 뼈가 경질인 어류는 경골어상강으로 분류한다. 어류는 측계통군이다. 이는 모든 어류를 포함하고 있는 어떤 분기군이든지, 그 분기군안에는 어류가 아닌 네발동물들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래된 참고문헌 등에서 보이는 "어강(魚綱, Pisces)"과 같은 분류는 더 이상 공식적인 분류로 사용하지 않는다. 어류는 다음과 같은 주요 그룹으로 분류한다. 일부 고생물학자들은 코노돈트가 척색동물이기에 초기 어류라고 주장한다. 더 많은 자료를 위해서는 척추동물 부분을 보라. 다양한 종류의 어류 집단들은 반 이상이 척추동물이라고 간주된다. 현존하는 종은 28,000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27,000개가 딱딱한 뼈가 있는 생선들이고, 970개가 상어, 가오리, 그리고 은상어 등의 연골어류이다. 108개 정도는 먹장어와 칠성장어의 종이다. 이러한 종들의 3분의 1은 9개의 거대한 과(family)에 포함된다. 가장 큰 과부터 가장 작은 과까지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잉어과, 망둑어과, 키클리과, 카라신과, 로리카리아과, 종개과, 농어과, 놀래기과, 그리고 볼락과가 그것들이다. 64개의 과들이 하나의 종(Species)만을 가진 단형종이다. 생존하는 모든 종의 숫자는 32,500개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다양한 기능을 하는데, 가슴지느러미는 물고기의 좌우 균형을 잡으며, 배 지느러미는 알을 옮기는 등의 기능을 한다. 뒷지느러미는 몸의 흔들림을 방지하고 전진운동을 도우며, 꼬리지느러미는 추진력을 낸다. 등지느러미는 몸을 지지하고 전진운동을 도우며, 극조와 연조로 나눌 수 있다. 옆줄(측선)은 물의 온도, 흐름, 수압, 진동을 감지한다. 대부분의 어류는 인두의 양 옆에 달려있는 아가미를 이용해서 기체를 교환한다. 아가미는 필라멘트라 불리는 실 같은 구조를 지닌다. 각각의 필라멘트는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교환하기 위한 넓은 면적을 제공하는 모세혈관의 망상조직을 지니고 있다. 어류는 산소가 풍부한 물을 입을 통해서 빨아들여, 아가미를 통해 내뿜으로써 기체를 교환한다. 어떤 어류는 물과는 반대 반향으로 모세관을 흐르는 혈액이 역흐름교환을 만들어 내면서 흐른다. 아가미는 인두 양 옆의 열리는 부분을 이용해서 산소가 없어진 물을 뱉어낸다. 상어나 칠성장어류는 여러 개의 아가미 입구를 가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류는 양옆에 한쌍의 아가미입구가 있다. 이 입구는 삭개(영어: operculum)로 불리는 단단한 뼈 아래 숨어 있다. 어린 비처허파고기는 아가미가 바깥에 달려 있다. 이는 양서류의 유충에서도 볼 수 있는 매우 원초적인 형태이다. 많은 어류는 다양한 절차를 이용해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 뱀장어과어류는 피부를 통해 산소를 빨아들인다고 알려져 있다. 전기뱀장어의 움푹 파인 볼의 기관은 공기를 흡입하는 기관이라 여겨진다. 로리카리아과, 칼리크티스과, 그리고 스콜로플레이시드과의 메기들은 소화관을 통해 산소를 빨아들인다. 폐어와 폴립테루스들은 네발동물들과 비슷한 한쌍의 폐를 갖고있다. 이들은 신선한 공기를 입으로 들이마시고, 아가미로 뱉어내기위해 떠올라야만 한다. 가아와 보우핀은 똑같은 작용을 하도록 혈관이 발달된 부레를 갖고있다. 미꾸라지, 울프피쉬, 그리고 많은 메기들은 공기를 내장에 통과시킴으로써 숨을 쉰다. 망둥어들은 피부로 산소를 빨아들이는데, 이는 개구리와 비슷하다. 꽤 많은 어류가 숨쉬는 부속기관이라 불리는 기관들을 지니도록 진화했다. 구라미와 베타같은 물고기들은 아가미 위에 이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미로기관을 지니고 있다. 다른 몇몇 어류는 미로기관과 형태와 기능에서 비교되는 구조들을 갖는다. 가장 많이 알려진것은 가물치, 그리고 공기호흡메기과에 속하는 메기들이다.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원래 계절마다 물의 수위가 달라짐으로써 그 물에 녹아 있는 산소량 또한 계절별로 줄어드는 늪지대에 서식하는 어류들을 위한 적응이다. 진흙보다 약간 더 젖어있다고 여겨질만한 물에서는, 공기 호흡이 가능한 물고기들은 훨씬 오래 생존하는 반면, 파치나 시클리드와 같은 순전히 용해된 산소에만 의존하는 물고기들은 쉽게 질식사한다.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몇몇 종의 폐어들은 습기가 많은 굴 안에서 다시 물이 돌아올 때까지 여름잠(aestivation)라 불리는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몇 주에 걸쳐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어류는 "불가피한 공기 호흡어"와 "임의적인 공기호흡어"로 분류할 수 있다. 아프리카 폐어같은 불가피한 공기호흡어는 주기적으로 공기를 호흡해야"만"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질식사한다. 플레코 같은 임의적인 공기 호흡어들은 그들이 원할때만 호흡하고, 그 밖에는 아가미를 이용해 산소를 호흡한다. 대부분의 공기호흡어들은 지상에서 서는데 사용되는 에너지 비용이나, 지상의 포식동물에게 노출되는데 따른 체력적 비용을 피하는 "임의적인 공기호흡어"들이다. 어류는 폐쇄순환회로를 지니고 있다. 심장은 하나의 경로를 통해 신체에 혈액을 공급한다. 대부분의 어류에서 심장은 두 개의 방과 입구, 출구의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얇은 벽을 지닌 주머니인 정맥동이다. 이것은 어류의 두 번째 부분인, 거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방인 심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맥으로부터 혈액을 모은다. 심방은 결방으로써 혈액을 일방통행시키는 역할과 세 번째 부분인 심실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심실은 또다른 근육으로 이루어진 방인데, 첫 번째 부분부터 네 번째 부분인 동맥구로 혈액을 뿜어준다. 동맥구는 큰 관인데 이를 통해 심장 바깥으로 나간다. 동맥구는 산소를 얻기위해 혈액이 아가미로 흐르는 대동맥으로 연결된다. 어류의 턱뼈는 식물에서부터 다른 기관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해준다. 어류는 음식을 입으로 섭취하고, 식도로 부셔서 내려보낸다. 내장에서 음식은 더욱 소화되어 많은 어류에서 손가락 모양의 유문수라 불리는 주머니 안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에 의해 영양분으로 흡수된다. 간이나 췌장같은 기관들은 음식이 소화기관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화효소와 다양한 화학물질들을 더한다. 장에서는 소화의 과정과 영양분의 흡수를 끝낸다. 다른 많은 해양 동물들처럼 대부분의 어류는 질소 폐기물들을 암모니아의 형태로 배출한다. 어떤 폐기물들은 아가미를 통해 확산된다. 혈액의 폐기물들은 신장에서 걸러진다. 해수어들은 삼투(영어:osmosis)로 인해 물을 잃게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신장은 물을 다시 신체로 되돌려준다. 반대의 작용이 담수어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삼투압으로 인해 물을 흡수하게 된다. 이들의 신장은 배설을 위해 묽은 소변을 만든다. 어떤 어류는 민물, 즉 담수에서 해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적응된 신장을 지닌다. 어류의 비늘은 피부를 이루는 중배엽(영어: mesoderm)에서 기원한다. 보통 이빨과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고 본다. 비늘에는 식물의 나이테와 같은 원 모양의 테두리가 있는데, 이 테두리가 곧 나이라는 설이 있다. 어류는 다른 척추동물과 몸크기와의 상대적 비율로 비교해볼때, 전형적으로 작은 뇌를 지닌다. 이는 다른 비슷한 크기의 조류나 포유류의 뇌의 용적의 1/15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어류는 상대적으로 큰 뇌를 지니는데, 엘레펀트 피쉬나 상어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뇌는 거의 조류나 주머니쥐의 몸 크기 당 뇌 용적과 비슷하다. 어류의 뇌는 몇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앞쪽이 한쌍의 구조를 지니고, 두개의 후신경으로부터 신호를 받고 처리하는, 뇌의 후엽이다. 먹장어, 상어 그리고 메기등의 사냥을 위해 냄새를 주로 사용하는 물고기들에게서 이 후엽은 매우 크다. 이 후엽은 고등 척추동물에서의 대뇌와 같은 구조적 위상을 지닌, 두개의 둥글게 말린 종뇌로 이어진다. 어류에서 종뇌는 대개 후각에 관계된다. 이 두개의 구조가 "전뇌"를 구성한다. 간뇌는 이 "전뇌"와 "중뇌"를 연결한다. (그림에서 이 구조는 시엽(영어: optic lobes)에 위치함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간뇌는 호르몬과 항상성과 관련된 작용을 수행한다. 송과체는 이 간뇌의 바로 위에 놓여있다. 이 구조는 빛을 감지하고 일주기성의 리듬을 유지시켜준다. 또한 색의 변화에도 관여한다. 중뇌는 두개의 시엽을 포함하고 있다. 무지개송어나 시클리드와 같은 시각에 의존하여 사냥하는 종들에서는 이 시엽이 상당히 크다. 후뇌는 특히 수영과 균형에 관여하는 부분이다. 소뇌는 하나의 둥글게 말린 구조체이며 일반적으로 뇌에서 가장 큰 부분이다.엘레펀트 피쉬의 소뇌가 거대하고 명백하게 그들의 전기감각에 관여하고 있는 반면, 막장어와 칠성장어는 비교적 작은 소뇌를 가졌다. 뇌간은 뇌의 끝부분이다. 몇몇 근육과 신체기관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적어도 경골어류에서는 이 뇌간이 호흡과 삼투조절을 관리한다. 대부분의 어류는 매우 발달된 감각 기관을 지닌다. 거의 모든 낮에 활동하는 물고기들은 인간에 필적하거나 더 좋은 시각을 지닌다. 또한 많은 물고기들은 특기할만큼 맛과 냄새에 반응하는 화학수용기관을 지닌다. 그러나 귀를 갖고는 있어도, 많은 물고기들은 소리를 잘 듣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물고기들은 미세한 물의 흐름과 진동을 감지하고, 옆의 물고기와 먹이의 움직임을 느끼는 측선기관(영어:lateral line system)을 형성하는 감각 수용기를 지닌다. 메기나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낮은 수준의 전류를 감지하는 기관을 가진다. 전기뱀장어같은 다른 어류는 전류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고기들은 경계표를 이용해 방향을 잡으며, 아마도 여러개의 경계표나 상징들을 기반으로 한 심리적 지도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윌리엄 타볼가에 의해 수행된 실험들은 물고기가 고통을 느끼고 공포에 반응한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타볼가의 실험에서 복어는 전기적으로 충격을 받을때나, 계속된 실험후에는 전기봉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꿀꿀거리는 소리를 냈다. 2003년 에딘버러 대학의 스코틀랜드의 과학자들과 로즐린 협회는 무지개송어의 탐구 행동들은 종종 다른 동물들간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고통과 연관된다고 결론내렸다. 입술 안에 투여된 벌침에 있는 독과아세트산은 물고기로 하여금 몸을 뒤흔들게 하고, 그들의 입술을 수조벽과 바닥 주변에 문지르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와이오밍 대학의 제임스 D. 로즈 교수는 위의 실험이 물고기가 "인지적 자각, 특히 우리 인간과 의미가 있을만큼 비슷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자각"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지 않았기에 그 연구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로즈교수는 "어류의 뇌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자각"이 없다라고 볼만큼 인간의 뇌와는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그것과 비슷해보이는 고통에 대한 반응도 사실은 다른 이유를 가졌다"라고 논쟁한다. 그러나 동물학자인 템플 그랜딘은 어류는 "다른 종(영어:species)들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뇌의 구조와 시스템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뇌의 신피질이 없이도 어류는 여전히 자각을 갖는다."라고 논쟁한다. 동물복지옹호론자들은 낚시질로 인해 어류에게 가해질 수 있는 고통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높이고 있다. 독일과 같은 어떤 국가들은 특정 종류의 낚시를 금지했다. 또한 영국의 RSPCA는 현재 공식적으로 물고기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기소중에 있다. 대부분의 어류는 대안적 방법인 등뼈 양옆에 위치하는 쌍으로 존재하는 근육들을 수축함으로써 움직인다. 이러한 근육의 수축은 몸을 따라 내러가는 S자 모양의 곡선들을 형성한다. 각각의 곡선이 꼬리 지느러미에 닿으면서, 뒤로 향하는 힘이 물에 작용한다. 그리고 꼬리 지느러미와 함께 물고기는 앞으로 나아간다. 어류의 지느러미들은 비행기의 보조익처럼 작용한다. 또한 이들은 꼬리의 표면적을 넓힘으로써 속도를 증가시켜준다. 유선형의 몸체는 물에서부터 오는 마찰의 양을 줄여준다. 몸체를 구성하는 조직들이 물보다 밀도가 높기에 어류들은 그 차이를 보상해내지 못하는한 가라앉을 수 밖에 없다. 많은 경골어류들은 기체의 조절을 통해 그들의 부력을 조절해주는 부레라는 내부기관을 지닌다. 대부분의 어류가 거의 수생, 변온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두가지 상황 모두에 예외가 존재한다. 몇몇 분류군에 속하는 어류들은 장기간에 걸친 기간동안 물 바깥에서도 살 수 있다. 망둥어 같은 수륙양용물고기(영어:Amphibious fish)들은 몇일간 육지에서 살면서 이동도 할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종의 어류는 높은 체온을 유지한다. 온혈 경골어류(영어:teleost, bony fish라고도 불림)들은 모두 고등어아목에 속하고, 새치들과 참치들, 한 종류의 "원시" 고등어를 포함한다. 짧은 지느러미 청상아리, 긴 지느러미 청상아리, 백상아리, 악상어, 연어상어등의 악상어과의 모든 상어들도 온혈이다. 또한 환도상어과(영어:Alopiidae)의 종들도 온혈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발견된다. 내부열(영어:endothermy)의 온도는 눈과 뇌만을 따듯하게 만드는 새치들로부터 체온을 주변의 수온보다 20도 정도 높게 유지하는 참치(참다랑어)와 악상어까지 각기 다르다. "거대온혈항목을 참조하라." 온혈은 대사적으로는 높은 비용이 들어감에도, 향상된 근육의 힘, 중앙신경계의 빠른 속도, 그리고 고효율의 소화 등의 이점을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어류의 생식기관에는 정소와 난소가 있다. 대부분의 종에서 이와같은 생식소들은 부분적으로나 완전하게 융합될 수 있는 비슷한 크기의 대응되는 한 쌍으로 되어있다. 생식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이차기관들이 있는 종도 있다. 정원세포(영어: spermatogonia)의 분배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골어류의 정소는 두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세관(영어: seminiferous tubule)의 모든 부분에서 정원세포가 발생하는 가장 흔한 케이스이고, 두 번째는 "아테리노몰프 물고기"에 보이는 이러한 구조들의 말단에서만 국한되어 정소가 발생하는 케이스이다. 물고기들은 포낭안에서 정세관의 안쪽면을 향해 생식세포를 놓아주는 상태에 따라 포낭형 혹은 반 포낭형의 정자발생(영어:spermatogenesis)을 나타낼 수 있다. 물고기의 난소(영어:ovary)는 세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짐오베리안, 이차짐오베리안 혹은 시스트오베리안이 그것들이다. 첫 번째 분류에서는 난모세포(영어:oocyte)들은 체강(영어:coelom)의 공동으로 직접적으로 방출된 후, 구멍으로 들어가 수란관(영어:oviduct)을 지난 후 제거된다. 이차짐오베리안 형태의 난소는 난자(영어:ova)를,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수란관(영어:oviduct)으로 가는 체강(영어:coelom)안에 흘린다. 세 번째 부류에서는 난모세포(영어:oocyte)들은 수란관(영어:oviduct)를 통해 외부로 이동된다. 짐오베리는 폐어, 철갑상어, 그리고 보우핀등에서 발견되는 원시적 형태이다. 시스트오베리는 난소 안쪽 벽이 수란관과 연결된 경골어류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차짐오베리는 연어과와 약간의 다른 경골어류에서 발견된다. 경골어류에서의 난조세포(영어:Oogonia)의 발전은 군에 따라 다르다. 또한 난자발생의 역학을 결정하는 것은 성숙분열(영어:maturation)과 수태(영어:fertilization)의 과정의 이해를 가능케 한다. 핵, 난형질(영어:ooplasm), 그리고 감싸는 층들의 변화는 난모세포(영어:oocyte)의 성숙분열(영어:maturation) 과정을 특징짓는다. 배란후의 여포들은 난모세포의 방출에 뒤이어 형성된 구조이다. 이들은 내분비기능이 없고, 넓고 불규칙한 내부공간을 가지며, 여포세포들의 세포사멸을 포함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재흡수된다. 여포의 폐쇄과정(영어:follicular atresia)이라고 불리는 퇴화 과정은 낳지 않은 난황형성 난모세포를 재흡수한다. 이 과정은 또한 빈번하지는 않지만 다른 발전단계의 난모세포안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물고기들은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가진 자웅동체이다. 이는 크게 그들의 생활환상에서 다른 상태에서만 발생하거나, 아니면 햄릿에 볼 수 있듯이 동시에 정소와 난소 두가지 모두 갖고 있는 종류로 나뉜다. 모든 알려진 어류의 97% 이상은 난생이다. 즉, 난자가 모체의 바깥에서 생성된다. 난생의 어류의 예에는 연어, 금붕어, 시클리드, 참치 그리고 뱀장어등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종들의 대부분에서 암컷과 수컷은 그들의 생식세포들을 주변의 물에 흩뿌리면서, 모체의 바깥에서 수정을 한다. 그러나, 몇몇 난생 어류는, 수컷이 정자를 암컷의 성기의 입구에 전달하기 위해 특정한 삽입기관을 이용하여 내부 수정의 형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같은 수정을 하는 종으로는 뿔상어와 같은 난생 상어들과, 홍어와 같은 난생 가오리가 유명하다. 이러한 예들에서 수컷들은 클레스퍼라고 알려져있는 변형된 한쌍의 배지느러미를 갖고있다. 해양 어류들은 종종 트인 물의 기둥(영어: water column)속으로 방출되는 많은 수의 난자들을 생산할 수 있다. 난자들은 평균 1mm의 직경을 지닌다. 새롭게 부화한 어린 난생 어류는 유생(영어:larva)이라고 불린다. 이 유생들은 보통 불완전한 형태이며, 영양공급을 위해 큰 난황난(영어:yolk sac)을 지니고 초생(영어:juvenile)이나 성체 표본들과는 매우 다른 외양을 지닌다. 난생 어류의 유생의 시기는 몇 주 정도로 상대적으로 짧고, 유생은 빨리 자라나 초생이 되기위해 외양과 구조를 바꾼다. (이 과정을 변태(영어:metamorphosis)라고 한다) 이 변화의 기간동안 유생들은 그들의 영양 공급원을 얻는 과정을 난황난에서 동물성플랑크톤의 사냥으로 바꾸어야만한다. 이러한 과정은 전형적으로 동물성 플랑크톤의 밀도나 유생들의 배고픔등에 따라 달라진다. 난태생 어류에게서 난자는 내부의 수정 후에 모체 안에서 개발된다. 그러나 모체로부터 영양은 난황의 크기에 따라 조금만 받거나 아예 못 받는다. 각각의 태아는 그들만의 난자안에서 자라난다. 난태생에 속하는 과(영어:family)에 해당하는 예로는 구피, 전자리상어 그리고 실러캔스등이 있다. 어떤 어류 종들은 태생(영어:viviparous)이다.이러한 종들에서는 모체가 난황과 태아로의 영양공급을 유지한다. 전형적으로 태생어류들은 포유류에게서 보이는, 모체의 혈액을 배아의 혈액과 연결해주는, 태반(영어:placenta)과 비슷한 구조를 갖는 기관을 갖고있다. 태생어류의 예로는 망성어(영어:surf-perches), 구데아과, 그리고 레몬상어가 있다. 어떤 태생 어류들은 난식(영어:oophagy)이라는 행태를 보이는데, 이는 자라나는 배아가 모체가 생산한 다른 난자들을 먹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청상아리와 악상어와 같은 상어들 중에서 처음으로 관찰되었지만, 학공치중의 하나인 "노멀햄푸스 에브라드티"와 같은 몇몇 경골어류에서 역시 알려져있다. 가장 큰 태아가 약하거나 작은 형제,자매들을 먹어버리는 카니발리즘은 태생의 더욱 희한한 상태이다. 이러한 행동또한 보통 그레이 너스 샤크와 같은 상어중에서 대부분 발견되는데, "노멀햄푸스 에브라드티"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사육가들은 난태생과 태생 어류를 보통 태생어(영어:livebearer)라고 언급한다. 면역체계는 물고기들에 따라 다 다르다. 칠성장어와 먹장어같은 무악어(영어: jawless fish)들 중에는 진정한 임파기관이 없다. 이러한 물고기들은 면역 세포들을 생산하기 위한 다른 기관의 임파조직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적혈구와 대식세포(영어:macrophage), 그리고 원형질세포들은 신장전엽에서 (혹은 앞콩팥) 그리고 내장의 일부분(과립성 백혈구가 성숙하는 곳)에서 생산된다. 이들은 먹장어의 원시적 골수와 비슷하다. 상어와 가오리같은 연골어류는 더욱 발달된 형태의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연골어류에 세 개의 특화된 기관을 지닌다. 생식선을 둘러싸는 포유류의 뼈와 비슷한 임파조직인 조혈기관, 연골어류의 식도의 벽들 안에 있는 레이딕스 기관, 그리고 창자의 나선형 판막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관들은 와 과립성 백혈구, 임파구, 그리고 원형질 세포와 같은 전형적인 면역세포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 이들은 확실한 흉선(영어: thymus)과 이들의 가장 중요한 면역기관인 잘 발달된 비장(영어: spleen)을 갖고 있다. 이 비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임파구들과, 원형질 세포, 그리고 대식세포(영어: macrophage)들이 개발되고 저장된다. 철갑상어와 주걱 철갑상어, 그리고 폴립테루스와 같은 조기어류(영어: Chondrostean)들은 중앙신경조직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인 뇌막들과 관련된 거대한 덩어리 안에 과립성 백혈구의 생산을 위한 주된 부위를 갖고 있다. 이들의 심장은 자주 임파구, 세망세포(영어: reticular cell), 그리고 약간의 대식세포를 가진 조직으로 둘러쌓인다. 조기어류의 신장은 중요한 조혈(영어: hemopoietic)기관이다. 이 신장에서 적혈구(영어: erythrocyte), 과립성 백혈구(영어: granulocyte), 임파구(영어: lymphocyte), 그리고 대식세포(영어: macrophage)가 발달한다. 조기어류처럼, 경골어류의 주된 면역 조직은 신장, 특히 많은 다른 면역 세포들을 포함하는 신장전엽(영어: anterior kidney)을 포함한다. 더하여 경골어류는 흉선(영어: thymus), 비장(영어: spleen) 그리고 피부와 아가미, 내장, 그리고 생식선과 같은 점액질의 조직 안에 산재된 면역부를 갖는다. 보다 포유류의 면역체계와 비슷하게 경골어류의 적혈구(영어: erythrocyte), 호중성 백혈구(영어: neutrophil) 그리고 과립성 백혈구(영어: granulocyte)들은, 흉선안에서 발견되는 임파구가 주된 세포형태인, 비장 안의 어디에든 존재한다고 믿어진다. 2006년, 포유류안의 임파 조직과 비슷한 임파조직이 경골어류의 종들 중 하나인 제브라 다니오에서 발견되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은 항원을 기다리는 동안 아직 알려지지 않은, 즉 아직 자극 받지 않은 T 세포들이 축적되는 장소일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동물들 처럼 어류 역시 질병들과 기생충들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질병을 막기위해 어류들은 다양한 방어체계를 갖고있다. 표피에 의해 보호되는, 미생물(영어: microorganism)들을 잡거나 그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점액층(영어: mucus layer)을 비롯한, 피부와 비늘이 "평상적"인 방어체계들이다. 병원균(영어: pathogen)들이 이러한 방어체계를 뚫고 침투하면, 물고기들은 , 감염된 곳을 향해 혈류를 증가시킴으로써 병원균을 상대하기 위한 백혈구를 전달하는, 염증반응을 시작할 수 있다. 특정한 방어체계는 물고기의 신체에 의해 판별된 특정한 병원균에 반응한다. 예로, 면역반응이 있다. 최근에, 백신이 수산양식(영어: aguaculture)과 관상용 물고기 사육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로는 잉어에게 발병하는 잉어포진 바이러스와, 양식된 연어에서 사용되는 절종증(영어: furunculosis)백신이 있다. 어떤 종들은 외부의 기생충을 없애기 위해 청소어(영어: cleaner fish)를 사용한다. 이러한 예들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인도양과 태평양의 산호초(영어: coral reef)에서 발견되는 "레보리데스"속(영어: genus)을 청소해주는 청줄청소놀래기이다. 이러한 작은 어류는, 다른 어류들이 모여서, 청소어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특정한 움직임을 보이는, 소위 "청소지역"을 유지한다. 이러한 청소 행위는, 같은 속의 두 시클리드들이, 청소를 하는 쪽인 "에트로플러스 매큘래터스"와 그에 비해 훨씬 큰 "에트로플러스 수러텐시스"로 나뉘는 흥미로운 예를 포함하는, 몇개의 어류군(영어: group)에서 관찰되어왔다. 어류는 하나의 단일계통적(영어:monophyletic)인 군을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어류의 진화"란 하나의 사건으로 연구되지 못한다. 어류의 확산은 명백히 관절이 있는턱의 출현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무악어들은 아주 적은 후손들만을 남겼기 때문이다.칠성장어(영어:lamprey)들은 턱이 있기 전의 어류와 가깝다고 추측된다. 첫 번째로 진화된 턱뼈가 있는 어류는 판피어강(영어: placodermi)의 화석에서 발견되었다. 관절이 있는 턱이 가진 이익이 더 큰 악력, 개선된 호흡, 혹은 그 둘 모두를 주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어류는 아마도 산호처럼 보이는 멍게(영어: sea squirt)와 비슷한 생명체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유충이 원시어류와 중요한 여러 방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류의 첫 번째 조상들은,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약간의 현존하는 멍게들이 지금도 하고 있는 유형성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크로마뇽인들은 뼈로 낚시 바늘과 작살을 만들었다. 이로써 이들은 새로운 식량인 물고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06년도 국제 자연 보전 연맹의 적색 목록은 1,173종의 어류를 멸종 위기 목록에 등재하였다. 포함된 종은 대서양대구(영어: Atlantic Cod), 데빌의 구멍 홉피쉬(영어:Devil's Hole Pupfish), 실러캔스(영어: coelacanth), 그리고 백상아리와 같다. 어류들이 물 아래에서 살기 때문에, 이들은 육지동물들이나 식물들보다 연구하기가 더 어렵고, 어류의 개체수에 대한 정보들도 보통 부족하다. 그러나 민물고기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용적의 물 안에 살기 때문에, 확실히 위기에 처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데빌의 구멍 홉피쉬는 오직 하나의 3*6(m)의 웅덩이에서만 살고있을 뿐이다. 남획은 대구(영어: cod)와 참치(영어: tuna)와 같은 식용 생선들에게 주된 위험이다. 남획은 살아남은 물고기들이 잡힌 물고기들을 대체할만한 어린 새끼들을 충분히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스탁(영어: stock)이라고 알려져 있는 양식 개체군 동태론에서의 붕괴의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업적 멸절이 종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양식업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의 양식업 붕괴의 잘 연구된 사례는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이루어지는 학명 "Sadinops sagax caerulues"인 태평양 정어리의 양식업이다. 이 물고기의 어획량은 1937년도에 나타났던 790,000톤의 최고치로부터 1968년에는 24,000톤으로까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지 못하게 되었다. 양식학(영어: fisheries science)과 양식업(영어: fishing industry)사이의 주된 갈등은 두 집단이 집중어획을 위한 양식업의 복원력(영어: resiliency)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들과 자원보호론자(영어: conservationist)들이, 많은 스탁들이 50년안에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긴급한 보호를 위한 압력을 가한다. 민물에서 그리고 바다의 생태계에 압박을 주는 중요 요인들은 수질오염, 댐의 건설, 인간이 쓰기위한 물의 제거 그리고 새로운 종들의 소개등을 포함한 서식지의 붕괴이다. 서식지 붕괴 때문에 위험에 처한 물고기의 하나의 예는 철갑상어(영어: pallid sturgeon)이다. 이 물고기는 북아메리카의 민물에 사는데 인간활동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강들에 서식한다. 외래종은 수많은 서식지로부터 들어왔다. 가장 잘 연구된 본보기 가운데 하나는 1960년에 빅토리아 호수에 방류된 나일파치(영어: Nile perch)이다. 나일 퍼치는 점진적으로 그 호수에 살고 있던 500마리 정도의 토종 시클리드들을 근절시켰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 인공 사육 프로그램에 의해 생존해 있지만, 다른 종들은 아마도 멸종한것으로 보인다. 잉어, 가물치과, 틸라피아, 유럽농어, 브라운 송어, 무지개 송어, 그리고 바다 칠성장어들은 선취특권환경들에 들어감으로써 문제를 일으킨 물고기들의 다른 예이다. 요나의 책(영어: Book of Jonah)에서는 한 "거대한 물고기"가 예언자인 요나를 집어삼킨다. 반인 반어의 전설들은 한스 크리스티안 앤더슨의 이야기들에서, 또 스플래시와 같은 영화의 스토리들에서 나타났다. (인어를 참조하라) 물고기의 모습을 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신들에는 폴리네시아의 이카-로아, 다양한 고대의 셈족에게서 전해져오는 다곤, 하와이의 상어-신들, 그리고 인도의 드라비다에 나오는 메스야(영어: Matsya)가 있다. 어류는 다양한 다른 방법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자면 익투스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벵갈인 사이에서 비옥함의 상징인 물고기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물고기는 "니모를 찾아서"와 같은 영화들에서, 혹은 "노인과 바다"와 같은 책들을 통해서 예술과 문학분야에서 눈에 띄게 보인다. 특히 상어와 같은 거대한 물고기들은 자주 공포영화와 스릴러물의 주제가 되어왔다. 가장 유명한 것은 소설 죠스인데 이것은 뒤이어, "상어이야기", "가물치의 공포(영어: Snakehead Terror)", 그리고 1978년도 영화 "피라냐"와 같은 '비슷한 영화와 패러디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영화 죠스와 같은 후속작들로 이어졌다. 불교의 기호인 애쉬타망갈라(영어: Ashtamangala)의 기호속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메스야라고 불리는 금붕어는 윤회(영어: samsara)안에서 해로움이 없는 대양으로 인지되며, '부처의 눈들' 혹은 '자각의 눈'으로 일컬어지는, 공포가 없는 부유 상태를 의미한다. 물고기는 고통의 윤회의 바다에서 빠져죽을 위험이 없는, 즉 공포가 없는 상태안에서, 또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듯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이 가르침에서 저 가르침으로 이주할 수 있는 상태로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길조로 상징화된다. 캐나다의 도시명인 코퀴틀람, 영국 콜럼비아는 "조그만 빨간 물고기"를 뜻하는 해안 샐리쉬어군(영어: Salish)에서 왔다고 보이는 "kwikwetlem"이란 단어에서부터 유래한다. 영어 낱말 물고기에는 물고기("Fish")와 물고기들("Fishes")이 있다. 영어에서 자주 상호 보환되게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Fish"와 "Fishes"는 서로 다른 의미들을 가졌다. "Fish"는 하나의 단수 명사나 한 종에서부터 추출한 개체군들을 뜻하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Fishes"는 다른 어류 종들의 군을 뜻한다. 단지 식량이나 둥지의 장소들 같은 어떤 일정지역에 국한한 자원들을 사용하는 한무리의 어류의 집단은 간단하게 집합체(영어: aggregation)라고 알려져 있다. 물고기들이 서로 모여서 상호작용을 하고, 사회적인 군을 형성한다면, 그때에 그들은 그 유기적 구조의 정도에 따라서 떼(영어: "shoal" or "school")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shoal이란 각각의 물고기들이 서로 개별적으로 헤엄치고, 음식을 찾아다니는 등의 서로 약하긴 하지만, 군(영어: group)내의 다른 개체들에게 끌리고, 수영속도같은 이들의 움직임의 조정하는 구조를 가진 군(영어: group)이다. 물고기의 Schools 이란 수영에 있어서 훨씬 더 강한 구조를 지니게 되고, 동기화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물고기들이 같은 속도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떼를 이루는 행동은 다양한 이점들을 제공한다는 믿음이 있다. 예시: 강한떼나 약한떼들이 생물학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반면, 영국영어에서는 어떤 물고기의 떼이던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약한떼"(영어: shoal)'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반면, 미국 영어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자주 "강한떼"(영어: school)라는 용어를 느슨하게 사용했듯이, 비 전공자들에게는 종종 유의어로 취급된다. 경골어류 전통적인 분류법에서 경골어상강(硬骨魚上綱)은 척삭동물문의 강이며, 통틀어서 경골어류(硬骨魚類)라 부른다. 아강으로 조기어류와 폐어류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별도의 강으로 나뉘었다. 뼈의 일부 또는 전체가 딱딱한 뼈로 되어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물에서 육지로 이동한 최초의 척추동물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현재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고기들의 조상이다. 내비공(內鼻孔)이 있는 폐어류와 내비공이 없는 조기어류(條鰭魚類, Actinopterygii) 및 완기어류(腕鰭魚類, Cladistia)로 구분된다. 어류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전 세계의 담수역과 해수역에 고루 분포한다. 일반적으로 몸은 비늘에 싸였고 옆줄(측선)이 있다. 몸은 전체적으로 날씬한 유선형이며 앞쪽 새공까지의 머리부분, 새공에서 항문까지의 허리부분, 항문에서 꼬리까지의 꼬리부분 등 3부분으로 구분된다. 머리 끝에서 눈까지를 문(吻)이라 하며 그 끝에 입이 있다. 연골어류에는 없는 신경분비물을 저장 또는 방출하는 기관인 미부하수체를 가지고 있다. 연골어류 연골어류(軟骨魚類)는 연골어강(軟骨魚綱, Chondrichthyes)에 속하는 물고기로 딱딱한 뼈 대신에 질긴 피부와 가벼운 물렁뼈를 가지고 있다. 뼈가 단단한 경골어류는 기체로 채워진 부레(풍선모양의 주머니)로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가라앉거나 하지만, 연골어류는 부레가 없다. 때문에 연골어류는 가벼운 지방을 축적하여 약간의 부력을 얻고, 계속 물에 떠 있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농어목 농어목 또는 페르카목(Perciformes)은 조기어강에 속하는 목의 하나로, 물고기 전체 종의 40%를 차지하며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큰 목이다. 등지느러미·뒷지느러미·배지느러미에 가시줄이 발달되어 있다. 대부분 빗비늘을 가지며 부레와 식도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고등어과 고등어과(Scombridae)는 고등어목에 속하는 조기어류 과의 하나이다. 이전에는 농어목 고등어아목으로 분류하였다. 2개 아과에 15속 51종을 포함하고 있다. 가다랑어 가다랑어(---魚, )는 고등어목 고등어과의 물고기로, 가다랭이, 가다리, 에다대, 여다랭이, 강고등어(경남), 소용치, 목맨둥이, 다랭이(포항) 라고도 한다. 세계의 어로 활동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 어종 가운데 하나이다. 몸 빛깔은 등쪽은 짙은 청자색이며, 배 부분은 은백색 바탕에 4~6개의 검은 색 세로띠가 있다. 몸은 방추형으로 통통하며, 몸통의 횡단면은 거의 원형에 가깝다. 주둥이 끝은 뾰쪽하며, 꼬리자루는 가늘고 단단하다. 눈 뒷부분, 가슴지느러미 주위, 옆 줄에만 비늘이 있다. 첫 등지느러미의 기저는 길고, 두 번째 등지느러미와 겨우 분리되어 있다. 양 턱에는 융털 모양의 이빨이 있다. 기대 수명은 8-12년이다. 적도 해역에서는 산란이 일 년 내내 이루어지고, 아열대 해역에서는 봄부터 가을초까지 이루어지며 포란수는 체장 41~87cm 이며 약8만~200만개의 알을 낳는다. 부화 후 만 1년이면 가랑이체장 16cm, 2년이면 34cm, 3년이면 43cm, 4년이면 54cm 전후로 자라며, 다 자라면 전장 100cm 가량 자란다. 전갱이, 정어리, 멸치 등 작은 어류와 연체동물, 오징어류, 작은 갑각류 등을 잡아 먹는다.(반면에 다른 원양 어류와 상어의 주된 먹이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남.동해, 일본 근해, 세계의 온대, 열대 해역(북위 40도~남위40도)에 분포한다. 표층 외양성 어류로서 낮에는 표층에서 수심 260m까지, 밤에는 표층 가까이에서 주로 서식한다. 유영능력이 강하며, 최대 5만마리까지 무리지어 다닌다. 봄~여름에 한반도 주변 해역까지 회유해 오고 가을~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한다. 몰디브, 프랑스, 스페인,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에서 특히 많이 어획된다. 가다랑어는 칼륨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국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가다랑어의 살코기를 건조시켜 건어물로 만든 것이 가쓰오부시이며, 회 및 구이로 먹기도 한다. 지리학 지리학(地理學, )은 지표 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및 인문 현상을 지역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이다. 공간 및 자연과 경제, 사회와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분야로, 공간이나 자연 환경이라고 하는 물리적 존재를 대상 안에 포함하는 점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양면의 성격이 있다. 원래는 농경이나 전쟁, 통치를 위해 각지의 정보를 조사해 정리하기 위한 연구 영역으로서 성립했다. 그러나 현재는 자연과학 내지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지역마다 다른 공간적 이질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게 되었다. 지리학의 관심 대상은 불규칙한 분포이다. 지구에서 발견되는 사물에는 다중성이 존재한다. 사물의 다중성은 공간적으로 불규칙하게 분포한다. 불규칙한 분포가 사물이 지리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한다. 다른 관심 대상은 상호관련성이다. 예를 들어, 농업 현상의 경우 농업과 연관된 기후, 토양, 인구, 경제적 조건, 기술력과 다른 조건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해당 농업의 지리적인 특성을 파악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미루어 볼 때, 지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왜, 그곳에, 무엇이 있으며, 그래서 그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영어에서 지리를 뜻하는 단어(geography)은 고대 그리스어의 에서 유래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땅을 뜻하는 "η γη" (hê gê)와 기술(記述)을 뜻하는 "γραφειν" (graphein)를 합친 용어다. 지리(地理)라는 용어는 주역에서는 산천의 환경과 형세를 나타내는 말이었고, 구당서, 원사에서는 오늘날의 지리학과 유사한 용례로 쓰였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세계지도는 기원전 9세기 고대 바빌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낙시만드로스 (기원전 610년 경 -기원전 545년 경)는 후대 그리스 작가들이 지리학의 진정한 창시자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후대 학자들의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초로 예술과 과학 의 방식으로 지리학을 바라보았던 그리스인들은 지도학, 철학, 문학, 수학을 통해서 지리학을 탐구했다. 파르메니데스나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낙사고라스는 식을 설명하면서 지구의 윤곽이 둥글다는 것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는 지구는 편평한 원반이라고 믿었다. 고대에 지구의 반지름을 구한 사람에는 에라토스테네스가 꼽힌다. 히파르코스는 최초로 엄밀하게 위선과 경선 체계를 도입한 사람이었다. 중세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붕괴에 의해 유럽보다는 이슬람 세계에서 지리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와 같은 무슬림 지리학자는 상세한 세계지도(예: Tabula Rogeriana)를 제작하였다. 16~17세기 동안 지속된 유럽의 대항해시대에는 많은 신대륙이 발견되었다. 이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마르코 폴로, 제임스 쿡 같은 탐험가의 발견이 이어졌다. 이들의 발견에 따라 유럽에서는 정확한 지리적 사실을 아는 것과 지리학적 이론의 기반이 필요해졌다. 경도를 찾는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존 해리슨은 크로노미터를 고안하여 경도 문제를 해결했다. 18세기와 19세기는 지리학이 분리된 학문의 분과로서 인식되었던 시대였고, 유럽의 대표적인 대학의 교과과정(특히 파리와 베를린)의 부분이 된 시대였다. 많은 지리 학회의 발전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1821년의 프랑스 지리학회, 1830년의 왕립지리학회, 1851년의 미국 지리학회, 1888년의 내셔널지오그래픽 학회가 이 당시에 창설되었다. 임마누엘 칸트, 알렉산더 폰 훔볼트, 칼 리터, 폴 비달 드 라 블라슈 는 지리학이 철학에서 학문상의 과목으로 인식되게 하였다. 3세기 이후로 지리학적 연구와 지리학적 문헌 집필에 대한 중국의 이론은 13세기까지 동시대의 유럽에 비해 훨씬 정교했다.. 유안, 배수, 가탐, 심괄, 범성대, 주달관, 서하객과 같은 중국인 지리학자는 중요한 문헌을 남겼다. 그렇지만 17세기에는 서양식 지리학적 이론이 중국에서 채용되었다. 한국에서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지리학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토대로 당시의 지리관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 말기에 선종 승려들이 중국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고려시대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처럼 지리에 대한 문헌이 남아있다. 이 시대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한 시기였다.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의 추진 근거로 풍수지리가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지리지와 지도가 편찬되었다. 이는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태종 때에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세계 지도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조선방역지도가 현존하고 있다. 세종, 성종 때에는 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보충하여 편찬했다. 실학이 발달하면서, 민족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한국의 전통지리도 이에 따라 발달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같은 역사 지리서, 이중환의 택리지와 같은 인문 지리서가 편찬되었다.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같은 정밀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지리학이 도입되었다. 지난 2세기 동안,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지리정보학이 발전하게 하였다. 참여자의 관찰과 지리 통계학은 지리학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20세기 서구에서는 지리학은 주요 네가지 과정을 가쳤다. 환경결정론, 지역지리학, 계량혁명, 비판적 지리학이다. 지질학, 식물학, 경제학, 인구학과 같은 학문과의 연계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세계를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지구 시스템 과학의 연구로 인해 연계가 늘어났다. 현대 지리학은 주로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지리학자는 지도학자, 지명이나 수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많은 지리학자가 지명을 다루는 학문이나 지도학을 아는 사람이었어도 이 분야는 지리학자의 주된 연구 분야가 아니다. 지리학자는 현상, 과정, 사물의 시공간적 분포를 다룬다. 여기에 인간과 그들이 사는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공간과 장소는 다양한 주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리학은 다른 학문과의 연관성이 크다. 지리학적 접근의 이러한 특성은 현상과 그것의 공간적 패탄 사이의 상관관계를 얼마나 깊게 따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지리교육학회와 미국지리학회는 1984년에 지리학의 기본 주제를 다음 다섯 가지로 선정하였다. 지리학을 분류할 때 여러가지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분류방법으로 접근 방법 혹은 연구 방법에 따른 분류가 사용된다. 이를 통해 지리학을 분류하면 계통지리학과 지역지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계통지리학은 특정 주제에 대해 지리적으로 접근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도출하는 연구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계통지리학은 그 주제의 성격에 따라 인문지리학과 자연지리학으로 분류한다. 지역지리학은 특정 지역을 지리적으로 접근하여 내용을 서술하고 연구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 활동의 공간적 조직, 인간과 환경간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분야이다. 인간에 의하여 공간조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탐구하고, 어떤 형태인지를 탐구한다.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하는 분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분야도 생겨났다. 자연지리학은 말 그대로 자연에 대한 지리적 내용을 다루는 분야이다. 지구과학의 성격이 강한 분야이다. 자연과 환경의 구성요소, 상호작용, 공간적 분포에 대해 탐구하는 분야이다. 지역지리학, 또는 지지(地誌)는 지역을 종합적으로 보는 분야이다. 규모에 상관없이 지구 상의 지역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역지리학의 목표는 자연적, 인문적 요소를 이루는 지역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이다. 지리적 과학의 한 방식으로 여겨지지도 한다. 지역구분(Regionalisation)도 지역지리학의 관심분야이다. 대표적인 분야에는 한국지리, 유럽지리 등이 있다. 지리정보학은 1950년대 중반의 계량 혁명이후에 새롭게 떠오른 분야이다. 지도학, 지형학에서 쓰인 공간과 연관된 기술과 컴퓨터에 대한 응용을 포함한다. 지리정보학은 GIS와 원격 탐사를 쓰면서 다른 학문과도 연관된 폭넓은 학문이 되었다. 지리학과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특히 1950년대 이후로 침체기를 겪었던 북미의 지리학과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지리정보학은 공간분석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를 포함한다. 이 분야에는 지도학, 원격탐사, GIS, GPS가 있다. 통시적인 특성을 띤 과학인 지리학은 공간적인 상호연관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지도는 지리학의 중요한 도구이다. 고전적인 지도학에 지리적 분석의 현대적인 방식인, 컴퓨터를 기반으로한 지리 정보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지리학에서는 지리학자가 쓰는 서로 연관된 네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지도학은 지구의 표면을 추상적인 기호로 표현하는 방법을 다루는 학문이다. 지리학의 다른 분과가 연구에서 얻은 분석 결과를 나타내는 데 지도를 사용하고 있어서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지도를 만드는 것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 지도학은 지도를 작성하는 기술에서 실제 과학으로 발전했다. 지도학자는 인지심리학과 인체 공학을 알아야 한다. 어떤 기호가 지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내야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는 사람들이 정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행동심리학도 알아야 한다. 지구의 모양이 보기 위한 평평한 표면 위에서 어떻게 왜곡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측지학과 고급의 수학을 알아야 한다. 지도학은 지리학의 넓은 영역이 자라나는 씨앗이라고 볼 수 있다. 지리학자 중에서는 어린 시절의 지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지리학의 길로 이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농업 농업(農業, )은 농경(農耕)이라고도 하며, 흙이나 토지를 이용하여 인간에게 유익(유용)한 식물(곡물, 채소, 과일, 화훼, 약재, 섬유 등)의 재배와 생산 그리고 가축들의 생산 및 품질 관리에 관계되는 온갖 활동과 연구를 일컫는다. 가축이나 농작물 등 생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며, 경제적 잉여 개념을 창출하면서 인류가 부락을 이루는 정착생활을 시작하는 데에 막중한 역할을 한 산업으로, 수렵과 어로, 열매 채집과 함께 가장 먼저 발달된 생산 활동이기도 하다. 최소 105,000년 전부터 야생 곡물을 수확한 흔적이 있으며, 11,500년 전 초기 농부들이 나타나 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초기 농경은 세계 11곳에서 따로따로 일어났다. 돼지, 양, 소 등의 가축은 약 10,000년 전에 가축화되었다. 20세기를 기하여 대규모 단작과 기계화를 바탕으로 한 집약농업이 주로 이루어지지만 많은 농가들이 현재까지도 자급농업을 생업으로 삼는다. 농업 생산과 경영 방식, 효과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농학이라고 따로 일컫는다. 발달된 농학과 품종 개량, 농약·살충제·제초제·비료와 같은 농화학물로 인하여 전세계 수확량이 지난 시대에 비하여 크게 증가하고 있으나, 동시에 크나큰 자연 파괴와 토양 오염을 초래하고 있다. 농업은 전 세계 여러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으며 다양한 분류군을 포함하였다. 구대륙과 신대륙, 적어도 11개의 지역에서 독립적인 기원지로 발생하였다. 적어도 105,000년 전에 곡물을 수집하여 섭취하였다. 돼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15,000년 전 즈음에 가축화되었다. 쌀은 13,500~8,200년 전 중국에서 경작되었고, 녹두, 콩, 팥으로 이어졌다. 양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13,000~11,000년 전에 가축화되었다. 농업의 영향으로 인류가 먹은 음식의 종류가 줄어들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통계에 따른 전 세계 농업 산출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이라는 옛 말에 따라 농업을 인간 생활의 기반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천하지대본"에서 도외시 되어 왔다. 특히 현대의 기계, 물질 문명의 발달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세계적인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농업의 생산면에서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관련된 여러 식생활 분야에 적지않은 문제점들이 대두되고 있다. 농업과 관련된 분야로는 생물학, 유전학, 화학, 지리학, 지질학, 기상학, 정치학, 경제학, 식품영양학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벼농사의 경우, 충북 청원에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인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었지만, 재배벼이전의 순화벼라고 이융조(충북대학교 교수)가 발표하였다. 대천리에서 출토된 볍씨를 들어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한창균 외 발굴조사팀이 대천리발굴조사보고서에 기록하였지만, 방사선탄소연대측정결과 후대 유입으로 밝혀졌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잡곡류의 농사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농업시설 기반이 미약한데다 김일성의 죽음 이후 북한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하여, 농업 의존도를 대부분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 일본, 미국, EU 등에 거의 의존하게 되어 북한 지역 주민들의 생계가 더 나빠지는 요인이 있다. 북한의 농업 체계가 거의 붕괴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일본에서는 농업 방식이 대한민국과 거의 비슷한 환경을 두고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농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사실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후쿠시마 일대를 중심으로 원전 사고의 여파에 따라 먹거리 안전 문제가 부각되어 농사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공화국(아르헨티나 共和國, , ) 줄여서 아르헨티나(, )는 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23개의 주와 자치시 1개로 구성된 연방 공화국이다. 주요 도시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코르도바, 바이아블랑카, 마르델플라타, 라플라타 등이 있다. 동쪽의 대서양과 서쪽의 안데스 산맥 사이에 2,766,890 km²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넓으며,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나라이다. 또한 스페인어 사용국가 중 가장 큰 나라이며, 백인 인구가 국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로,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다. 아르헨티나는 북쪽으로 파라과이와 볼리비아가, 북동쪽으로는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서쪽과 남쪽으로는 칠레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극에서 아르헨티나령 남극이라는 969,464 평방 킬로미터의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일부는 칠레(칠레령 남극)와 영국(영국령 남극)의 영유권 주장 지역과 겹친다. 그러나 이 주장은 1961년 체결된 남극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예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인정되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구매력 대비 1인당 GDP가 3위이며, 인간개발지수는 두 번째로 높았다. 아르헨티나의 명목 GDP는 세계 30위이나 구매력을 고려하면 총 GDP는 세계에서 23위이다. 세계은행에서 이 나라를 국민총소득 중상 수준의 국가 혹은 신흥 시장으로 분류했다.아르헨티나는 메르코수르, 남미 국가 연합, 세계은행 그룹, G-15, G-20에 속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속되고 있는 경제적 위기로 인해 경제적 악화가 반복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부에 위치하며, 브라질에 버금가는 넓은 국토를 가진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러시아, 미국, 브라질, 캐나다, 중화인민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다음 8위의 넓은 면적을 가진 나라이다. 북쪽은 볼리비아, 동북쪽은 우루과이·브라질·파라과이, 서쪽은 칠레에 접하고, 동남쪽은 대서양에 잇닿아 있다. 남쪽의 최장 거리는 3,700km, 동서의 최대 거리는 1,700km라는 넓은 국토의 서부를 안데스 산맥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조인빌 섬을 포함하여 남극의 일부도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 아르헨티나는 고원 지대와 사막을 포함하여 열대 우림에서부터 한랭 지대까지 전지구상에 있는 모든 기후 지역을 갖고 있다. 남미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콩카과 산 역시 아르헨티나에 있다. 팜파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쪽과 남쪽에 펼쳐진 중앙의 대평원이다. 습한 팜파라고도 하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주와 코르도바 주의 대부분과 산타페주, 라팜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라팜파 주의 서쪽 부분과 산루이스주도 대체로 평야(건조한 팜파)인데, 건조해서 주로 초지로 쓰인다. 이름이 같은 코르도바 주 지역의 시에라데코르도바 산맥은 팜파스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두드러지는 지형이다. 이 지역과 우루과이 사이에는 길이 약 4,700km의 라플라타 강이 흐른다. '은(銀)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귀의 강폭은 약 220km 가량이다. 팜파스는 농업에 적절한 비옥한 땅으로 쇠고기·양모·밀·옥수수 등을 많이 산출하며, 이 나라의 중요 경제 지역이다. 제조 공업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북부의 아열대 평원 그란차코 지역은 계절에 따라 건조하거나 습해진다. 주로 목화를 재배하고 가축을 방목한다. 이 지역에는 차코주, 포르모사주가 있다. 간간히 아열대 우림, 관목림, 습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서식지이다. 산티아고델에스테로주는 그란차코에서도 건조한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 강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이 지역에는 코리엔테스주와 엔트레리오스주가 있다. 목축과 식물 재배에 적합한 평야 지역으로, 코리엔테스 중부에는 이베라 습지가 있다. 미시오네스 주는 더 더운 지역으로, 브라질 고원의 지형적 영향을 받는다. 아열대 우림과 이과수 폭포가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의 네그로 강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파타고니아의 스텝 초원에는 네우켄주, 리오네그로 주, 추부트주, 산타크루스 주가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북쪽으로는 반건조 기후에 추우며, 남쪽으로는 건조하다. 그러나 서쪽 경계에는 숲이 자라며 여러 호수가 있다. 그리고 대륙의 돌출부 끝에는 칠레와 절반씩 영유하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가 있으며, 바다의 영향으로 서늘하고 습하며, 온화하다. 파타고니아 북부(네그로 강 남쪽, 네우켄)은 코마우에 지역이라고도 한다. 파타고니아는 목양지로서 유명하며, 석유 자원 지대로서도 중요하다. 쿠요 (Cuyo) 아르헨티나 중서부는 안데스 산맥의 영향권이다. 산맥 동쪽의 건조한 지역을 쿠요라고 한다. 고산 지대에서 녹은 물은 저지대에 있는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한다. 이 지역은 멘도사주와 산후안 주의 과실과 포도주 생산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라리오하 주의 더 덥고 건조한 기후를 만난다. 산루이스 주 북쪽의 시에라팜페아나스 산맥이라는 세 곳의 낮은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이곳 최동단 경계를 이룬다. 칠레 국경 지역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콩카과 산이 있다. 안데스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일 뿐 아니라 남반구와 서반구에서도 최고봉이다. 높이는 약 7,000m이다. 아르헨티나 북서부 (NOA) 이 지역은 아르헨티나에서 평균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산맥이 뻗어 있으며, 어떤 봉우리는 6,000m에 이르기도 한다. 이 산지는 북쪽으로 갈수록 더 넓어진다. 산맥은 비옥한 강가 계곡에서 끊기는데, 가장 중요한 곳은 카타마르카주, 투쿠만주, 살타주의 칼차키 계곡이다. 더 북쪽으로 볼리비아와 가까운 후후이주는 주로 중부 안데스의 고원에 있다. 남회귀선이 이 곳 북부를 지난다. 기후는 국토가 남북으로 뻗고 넓기 때문에 지역차가 크지만, 대체로 온화하다. 북부와 동북부는 아열대성으로, 우계(10∼3월)와 건계(4∼9월)로 나뉘며, 여름이 길고 덥고, 겨울철은 짧고 온화하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부는 온대 기후에 속하며, 강수량은 여름철에 많으나 대체로 연중 고른 편이다. 그리고 중앙부의 여름은 더우며 뇌우를 동반한다(때때로 세계에서 가장 큰 우박이 내리기도 한다.). 남부의 겨울, 즉 4∼9월은 혹독하다. 남아메리카에서 기록된 가장 높은 온도와 가장 낮은 온도가 아르헨티나에서 기록되었다. 1920년 1월 2일, 코르도바 주에서 49.1 °C가 기록되었다. 가장 낮은 온도로는 1972년 7월 17일, 산후안 주에서 기록된 −39 °C이다. 남반구에 있으므로 4계(四季)의 시기는 북반부와 정반대여서 1년의 시작인 1월 1일은 여름이 된다. 북쪽의 그란차코 지역은 Dalbergia속의 브라질리안 로즈우드나 퀘브라쵸, 카로브 나무 등의 아열대식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데스 근처의 더 메마른 곳에는 사바나와 비슷한 지역이 존재한다. 수생식물들은 아르헨티나의 습지에 잘 자란다. 아르헨티나의 중부에 있는 습윤팜파스는 톨그래스 초원이다. 원래의 팜파스에는 사실상 나무가 없으나 양버즘나무와 유칼립투스 등과 같은 수입종들이 길이나 마을, 시골의 사유지(에스탄시아) 등에 자란다. 유일한 팜파스 원산지의 나무는 피토라카이다. 팜파스 토양의 표면은 진한 검은색으로 주로 흔히 부엽토로 알려진 몰리솔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농업지로 만들었지만 또한 상업적 농업으로 인해 이 지역의 본래 생태계를 심하게 훼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비가 적게 오는 서쪽의 팜파스는 건조팜파스로서 짧은 풀이 자라는 평원이거나 스텝지역이다. 29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대부분의 파타고니아는 안데스 산맥에 의한 비그늘이 형성되어 건조한 지역에 맞는 식물군들이 존재한다. 이 지역의 토양은 딱딱하고 바위가 많아 강이나 계곡 근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파타고니아의 서쪽과 티에라델푸에고 섬에는 침엽수림과 활엽수림 등이 있다. 쿠요에는 가시가 있는 식물이나 다른 건조지역에 사는 식물들이 풍부하다. 강을 따라서는 몇몇 종의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이 지역의 조건은 포도가 자라기 적합한 조건이다. 아르헨티나의 북서쪽은 다양한 종의 선인장이 존재한다. 약 4000m의 고도의 지역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의 아열대 지역에는 많은 종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재규어, 퓨마, 오셀롯 등의 고양이과 동물들, 고함원숭이와 같은 영장류, 악어와 같은 거대한 파충류 등이 서식한다. 맥, 페커리, 카피바라, 들개 등과 다양한 종의 거북 등도 서식하고 있다. 다양한 종의 조류 역시 서식하고 있는데, 특히 벌새, 홍학, 큰부리새, 제비 등을 꼽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의 초원에는 큰개미핥기, 아르마딜로, 팜파스 고양이, 갈기늑대, 마라, 기니피그 등의 포유류와 레아가 서식한다. 매와 왜가리과의 새, 그리고 티나무 역시 이 지역에 서식하고 있다. 팜파스 사슴, 팜파스 여우 등도 서식한다. 이들 중 몇몇 종들은 파타고니아에도 서식하고 있다. 서쪽의 산지에는 다른 동물들이 산다. 라마나 구아나코, 비쿠냐 등의 남미의 특징적인 종들이 서식한다. 또한 여우나 비스카차, 안데스 고양이, 그리고 아메리카의 날 수 있는 새중에서 가장 큰 안데스콘도르 등 역시 서식한다. 아르헨티나 남부는 퓨마, 안데스 사슴, 푸두(세계에서 가장 작은 사슴), 그리고 도입종인 멧돼지 등의 서식지이다. 파타고니아의 해안가에는 코끼리물범, 물개, 바다사자, 그리고 다양한 종의 펭귄 등이 서식한다. 조금 더 남쪽은 가마우지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영해에는 돌고래, 범고래, 그리고 남방참고래와 같은 고래 등 다양한 바다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정어리, 만새기, 연어, 그리고 상어 등의 바다물고기가 서식하고 또한 티에라델푸에고 섬에는 오징어와 같은 것도 서식한다. 아르헨티나의 강과 개울에는 다양한 종의 송어 역시 서식한다. 보아나 매우 독성이 강한 살모사 등도 서식한다. 1928년 조사 이후 호르네로가 아르헨티나의 국조로 선정되었다.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인간이 정주한 증거는 파타고니아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11,000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는 국가 없이 인디오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파차쿠텍 왕이 통치하던 잉카 제국은 1480년에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해서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다. 과라니족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다. 중부와 남부 지역(팜파스와 파타고니아)은 유목민들이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시켰다. 1516년 이 땅에 유럽인들이 들어왔다. 스페인은 1542년,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아우르는 페루 부왕령을 설립했다. 그들이 현재 아르헨티나 지역에 처음 정착한 것은 1527년 파라나 강 근처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15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처음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다시 건설하였다. 이 지역은 주로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과 메스티소,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나머지 지방에는 원주민들이 살았고, 파타고니아와 그란차코의 대부분 지역은 원주민 지배하에 남았다. 1776년, 전의 페루 부왕령의 영토였던 지역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여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고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요한 종교이다.) 영국이 1806~1807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 침공했으나 후에 대중적 지지를 얻어 총독이 되는 프랑스 장교 산티아고 리니에르에 의해 두번 다 저지당했다. 1810년 5월 25일 페르디난도 7세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쫓겨났단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1차 의회(First Government Junta, 5월 혁명)을 조직했다. 현재의 아르헨티나를 이루게 되는 두 나라가 생겼는데, 남아메리카 합주국(1810년)과 자유 연맹(1815년)이었다. 다른 주들은 자치론자와 중앙집권론자들의 견해 차로 통합 국가에 귀속되는데 시간이 걸렸다. 파라과이는 1811년 독립을 선언하며 분리했다. 호세 데 산 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1817년 안데스를 넘어 칠레와 페루의 왕당파를 무찔러 독립을 공고하게 다졌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1820년 자유 연맹(Liga Federal)은 남아메리카 통합주 군대와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이 주는 남아메리카 통합주로 귀속되었다. 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1826년에 아르헨티나는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시스플라티나 주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결과 당시 브라질의 속주였던 시스플라티나 주의 독립을 막으려는 브라질과 무력으로 충돌하여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었다. 1828년에는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정전을 맺고 그 결과 시스플라티나 주가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이 정전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총독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상했는데, 연방주의자인 그는 공포 정치를 펴고 불안한 연맹을 계속 유지했다. 1852년 로사스 총독이 축출되자 중앙집권당(Unitarios)과 연방주의자(Federales)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미래의 내분을 미리 막게 된다. 1853년 헌법이 통과된다. 이것은 법학자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가 초안을 썼으며, 프란체스코회 수사 마메르토 에르키우가 설교를 통해 헌법과 국가 통합을 변호했으며, 처음 몇 년간 어려운 시기를 맞았으나, 1865년 전쟁으로 국가 통합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신 그 전쟁으로 파라과이를 멸망 위기까지 몰고 갔다. 1870년대부터 해외 투자와 이민자들이 밀려 들어오며 농업 등이 근대적으로 발전했고 아르헨티나 사회와 경제 새롭게 재편되어 국가 통합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 "사막의 정복" 남부 팜파스와 파타고니아의 토착 부족들을 탄압하여 1,300여명의 토착민이 죽었다. 1880년과 1929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부유한 10개국 중 한 곳이었으며 농업 수출 경제로 이익을 보았다. 이민자들이 늘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로 늘었고, 경제는 15배로 확대되었다. 국민자치당은 비민주적으로 아르헨티나 정치를 지배했으나 1912년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이 남성 보통 선거와 비밀 선거를 법제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전통적인 정적인 중앙집권론자 급진 시민 연맹이 1916년 아르헨티나 첫 자유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사회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가족농과 소상인 지원을 확대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 군부는 그를 축출했다. 그리하여 십 여년간 보수주의자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경제 정책을 보호주의로 선회했다. 아르헨티나는 제1차 세계대전때 중립을 지켰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대체로 그런 태도를 보였으며, 연합국의 식량 공급처가 되었다.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회 및 교육 정책을 폈으며, 노동조합에 가입한 조합원의 수가 늘어나서 노동자 계급이 성장하였다. 그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로 잘 알려졌다.)은 페론의 두 번째 임기까지 영부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페론의 성공으로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거물이었다.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를 실시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 최초로 정부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었으며, 기존의 과두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비타는 무뚝뚝한 페론과 그의 지지자 사이의 "사랑의 다리"로 여겨졌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얻어냈으며,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페론의 두 번째 임기까지 그의 경제학자들은 산업과 도시 발전을 장려했다. 1952년 에비타가 33살의 나이로 죽자 페론 행정부는 점차 아르헨티나의 주요한 종교인 로마 가톨릭교회와 자신의 정치운동 사이의 갈등으로 곤란에 처했다. 1955년 쿠데타가 일어나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1963년 아르투로 일리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가 페론주의자들을 정계에 끌어들이려 하자 군부는 1966년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했다. 억압적인 군부독재정권은 국내 개발과 공공 사업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다. 1975년에 경제는 매우 발전했고 빈곤은 7%나 떨어져 낮은 수준이었다. 부분적으로 군부 독재정권의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써 정치적 소요가 확대되자 망명지에서 페론은 능란하게 학생과 지식인으로 구성된 시위대를 동원해서 결국 군사 정권은 1973년 자유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페론은 스페인에서 다시 돌아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페론은 1974년 7월에 죽고, 그의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 이사벨 페론은 남편의 뒤를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은 페론주의자 파벌 사이의 타협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좌우익 극단주의자 사이의 폭력 사태와 재정위기가 일어나자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축출됐다. 군사정권은 스스로를 국가 재건 과정이라고 불렀는데, 군사정권은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탄압(일명 더러운 전쟁)했다. 군부독재정권 당시 아르헨티나 비밀정보국은 칠레 비밀경찰 및 미국 중앙정보국과 협조하여 콘도르 작전을 수행해 수천명의 반체제 "행방불명자"가 생겼다.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일명 국가 재건 과정)은 여러 복잡한 경제 문제를 남기고 물러났다. 1976년 군사정권이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성급하게 자본 및 수입자유화를 실시하여 외채가 1975년 78억달러에서 외채가 1983년에는 450억달러로 늘어났다. 외채 상환을 위해 다시 외채를 끌어들이는 악순환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군사정권은 노동법 개정, 노조탄압, 최저임금 폐지를 통해 해고를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하고 임금을 대폭 하락시켰다. 1970년을 기준으로 실질 임금을 100이라고 하면, 1975년에는 124로 상승했지만, 1976년에는 1년만에 30년 이래 최저 수준인 79까지 떨어졌다. 이로 인해 국민의 생활 수준이 하락하여 군사정권 말기에 빈곤율이 40%, 실질실업률은 18%까지 치솟았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에 저항했고 1982년 군사 정부가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다 패하자 신뢰를 잃고 1983년 민정 이양이 이뤄지고 선거를 치르게 된다. 라울 알폰신 정부는 "행방불명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군대에 대한 민간의 통제 및 민주적인 통합 조직을 세웠다. 군사독재정권 출신자들은 고발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 정권이 떠안은 외채는 그대로 남아 국제통화기금과 개인 채권자들은 아르헨티나 경제에 몇몇 조건을 내렸으며, 국가는 우선 공공 사업과 국내 신용을 희생하고 외채를 갚아야 했다. 알폰신은 경제 악화를 해결하지 못하여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뒤이어 갑자기 닥친 1989년 통화 위기로 물가는 15배나 껑충 뛰었으며, 그는 5개월 일찍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새로 대통령에 선출된 카를로스 메넴은 사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으며, 1990년에 두 번째 하이퍼인플레이션 이후 경제학자 도밍고 카바요를 기용하여 1991년 페소화 환율을 달러화에 고정시켰으며, 시장 기반의 정책을 추진해 사유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무역 장벽과 기업 규제를 철폐했다. 이런 개혁 덕분에 1990년대 거의 내내 물가 안정을 이루면서 투자와 성장 확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페소화는 시장에 달러화가 밀려들어와 제 가치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외채가 다시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1998년 일련의 국제 금융 위기가 닥치고 고정 페소화가 지나치게 고평가되면서 점차 경제 위기로 빠져들었다. 경제 안정에 대한 기대는 갑자기 무너졌으며, 그의 임기말인 1999년 누적된 문제들과 부패 보고로 메넴은 인기를 잃었다. 후임 대통령 페르난도 데 라 루아는 카를로스 메넴정권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악화된 수출 경쟁력을 물려받았다. 정치 연합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카바요가 다시 경제 장관으로 돌아오자 이는 금융 파생상품 시장에 의한 위기로 해석되었다. 이에 맞불로 카바요는 결국 자본 이탈 흐름을 막고 긴급한 채무 위기를 막을 수밖에(은행 계좌를 동결하며 정점을 이루었다) 없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계속되었고 2001년 12월 20일 아르헨티나는 1890년 대불황 이래 최악의 사회 및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거리에선 폭력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과 충돌하여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 군중 사이로 점차 "모두 꺼져라"라고 외쳤으며, 결국 데 라 루아 대통령도 사임하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2주 동안 세 명의 대통령을 갈아치웠으며, 2002년 1월 2일 입법 의회가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면서 극에 달했다. 아르헨티나는 해외 채무에 대해 채무 불이행(default)를 선언했으며, 11년간 지속된 페소화의 달러화 연동은 폐지되었고, 이로써 페소화가 크게 절하되고 인플레이션을 막았다. 중도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 두알데는 2002년 말까지 실업률이 25%에 이르고 실질 임금이 지난 60년간 최저치를 보이면서 금융 및 사회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이 위기로 대중은 정치인과 제도를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이듬해 시위가 득세했고, 경제는 2002년 말부터 안정되기 시작했으며 그해 12월 은행 인출 제한이 해제되었다. 2003년 5월 자유사회주의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산타크루스 주지사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환율의 평가절하 정책 덕택에 정부는 산업 부흥했으며,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와 수출 증가에 기반을 둔 새 정책을 실행했고, 재정과 무역 면에서 안정적으로 흑자를 보였다. 키르츠네르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채권에 높은 할인율(약 66%)로 채무 재조정을 했다. 또한 2005년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모든 외채를 갚았다. 공익 사업을 재조정하고 90년대 민영화된 기업 중 일부를 국유화했다. 그의 경제부 장관인 로베르토 라바냐는 강력한 소득 증진 정책과 공공 사업 투자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경제 성장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리고 추후 아르헨티나는 G20회원국이 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츠네르가 200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상원의원이 출마하여 당선됐다. 페르난데스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직접 선거로 뽑힌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됐다. 여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은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에 승리해서 의회를 다수를 차지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농업 수출세 인상 계획을 펴려고 하자, 2008년 3월부터 7월까지 농업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직장폐쇄로 반발했다. 2008년 7월 16일 부통령 훌리오 코보스는 의회의 가부 동수(同數) 결과에서 상원의장으로서 여당에 반대표를 던져서 대통령의 정책을 좌절시켰다. 2008년 10월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남편의 정책대로 국가가 직접 경제에 개입했다. 2009년 6월 총선에서 집권연합 승리를 위한 전선이 패해 과반수를 잃었다. 2009년 10월 아르헨티나 상하원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개 업체가 소유할 수 있는 방송 면허의 수를 제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디어 개편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미디어 개편법안에 대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온 클라린을 겨냥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르헨티나 통계 및 인구조사국(INDEC)의 2001년 인구조사를 보면 아르헨티나의 총 인구는36,260,130명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3위이며, 전 세계로는 30위에 해당한다. 전 세계적으로 8위의 면적을 자랑하는 국토를 보유한 나라 치고는 인구가 너무나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 2008년에는 40,482,000으로 늘었다. 이 나라의 인구밀도는 1평방킬로미터당 15명으로 전 세계 평균 50명보다 낮다. 인구 분포는 편중되어 있으며,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 밀도는 1평방킬로미터당 14,000명이 넘는데 비해 산타 크루스 주는 1평방킬로미터당 1명도 채 안된다. 1930년대 이래 적정한 출산율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순 이민율이 양수(+)인 나라로 해마다 +0.4%로 순수 이민자가 들어온다. "이민자 축제"("Fiesta del Inmigrante")에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오베라 시의 아르헨티나 이민을 기념한다. 하지만 이민자 축제 개최와는 무색하게 아르헨티나는 인종 차별이 심한 편이다. 인구 절대 다수가 백인이다 보니 인종에 대한 월등감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방문객들, 특히 흑인 계통이나 동남아시아 국가 사람들이 방문하면 인종 차별적인 모욕을 당하기도하며 심지어 마트 등 생필품 가계에서 물건을 계산을 안 해주는 등의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영원한 우방 국가인 우루과이조차도 이러한 인종 차별 때문에 아르헨티나에 핀잔을 줄 정도이며 앙숙 관계인 브라질은 아르헨티나를 이러한 문제점을 들어 인종 차별밖에 할 줄 모르는 나라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더불어 이민자들의 나라이다. 대부분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유럽에서 온 식민시대 정착민과 19~20세기 이주민들의 후손이며, 아르헨티나 인구의 90%는 유럽계 백인이다. 이들 유럽 이민자 대다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이다. 쿠오레(사랑의 학교)에 나오는 마르코 소년이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이야기는 19세기와 20세기에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민이 많았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인구의 6%는 메스티소이다. 또 4%는 아랍인이나 동아시아인 후손이다. 초근 국가 인구조사에 따르면 600,000여명 (1.6%)만이 원주민이다. 스페인 식민자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이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620만 여명의 유럽 이주민 이 나라로 들어왔다. 주요 출신지로는 이탈리아(피에몬테, 롬바르드, 나중에는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스페인(주로 갈리시아와 바스크), 프랑스이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스, 포르투갈 등이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이나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등 중부 유럽에서도 이민자가 왔다. 마케도니아나 몬테네그로 등 발칸 국가에서도 상당수가 왔다. 아르메니아인도 있으며, 추부트 계곡에는 웨일스인들이 큰 집단을 이루고 있다. 러시아인, 폴란드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에스파냐인 등은 인종적으로도 서로 섞이고 이들 중에 혼혈이 존재하기도 하는 편이다. 아직 적지만 동아시아에서 온 이주자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살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계 아르헨티나인은 일본인의 후손으로 이후 한국인, 중국인, 베트남인 등이 뒤 따라서 현재 60,000명이 넘었다. 특히 한국계의 경우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이민장려정책에 따라 대거 유입되어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서 한국계가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집단은 대개 아슈케나짐 유대인으로 15~20%는 스파라딤으로 주로 시리아 유대인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집단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 파타고니아에는 1902년 끝난 보어 전쟁 이후 이곳으로 이주안 남아프리카 보어인의 집단이 있다. 이들은 100~120명으로 추산되며, 훌리오 로카 장군이 그들에게 할당한 땅에 아직도 살고 있다. 그들은 주로 농촌에 살고 있다. 아랍 출신의 집단도 많은데, 레바논이나 시리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동방 정교나 마론파 신도로 유대인이나 무슬림도 있다. 상당수는 재계나 정계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령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은 라리오하 주의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이다. 수적으로 적긴 하지만 영국 이주민들도 현대 아르헨티나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전통적으로 철도, 공업, 농업 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위치에 올랐다. 1940년대 후안 페론이 수많은 영국인 소유 회사를 국유화하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말비나스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계 아르헨티나인들이 이렇게 성공한 연유는 복잡하다. 2004~05년 "원주민 보충 조사"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아르헨티나 원주민 인구는 600,000여명으로, 대다수는 마푸체인들이다. 아르헨티나의 인구조사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이 자료는 역사적으로 인종보다는 국적 기원의 범주로 조사를 해와서 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이나 메스티소를 빠뜨렸다는 것이다. 1887년 국가 인구조사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독립 범주로 설정했는데, 이전에는 정부에서 무시한 것이었다. 불법 이민은 아르헨티나 인구 현황에서 최근에 생긴 요소이다. 대부분의 불법 이민은 아르헨티나 국경 북쪽의 볼리비아나 파라과이에서 오는 경우이다. 페루나 에콰도르, 우루과이에서도 불법 이민자가 들어온다. 심지어는 징병제에 크게 불만을 갖고 있는 브라질 사람들이 불법 이민자로 들어오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징병제를 증오한 나머지 아르헨티나로 국적을 변경한 브라질인도 상당수 존재한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750,000여명이 공적인 등록 기록이 없는 것으로 추산했고, 그리하여 "위대한 조국"("Patria Grande") 계획을 시행하여 불법 이주민을 공적 신분을 부여하여 670,000여명의 신청자가 이 사업으로 양성화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처우가 매우 관대하며 아르헨티나로 여행온 사람들이 아예 그 곳에 터를 잡고 죽을 때까지 사는 경우도 빈번하다. 한국의 경우 상호비자면제 협정이 이루어져 있으며 비자없이 최장 90일까지 아르헨티나에 체류할 수 있으나 90일이 지나도 관광비자를 갱신하지 않을 경우 벌금이 한화로 약 2만원에 해당되는데 이 마저도 실질적으로는 흐지부지 상태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이나 일본 등 상호 비자면제협정을 맺은 국가와 남미 대륙의 타국가 국적을 갖고 있을 경우 불법체류자로서 2년이 경과하면 아르헨티나 국적이 자동으로 취득된다. 아르헨티나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 중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가 90%를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수의 개신교도 있다. 그 밖에 유대교나 이슬람교 등도 있으나 이 역시 소수이다. 아르헨티나는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나, 대통령과 부통령은 반드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만 선출하도록 헌법으로 정해져 있다. 2013년 3월 14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가톨릭 대교구의 교구장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대주교가 아메리카 최초의 교황인 프란치스코로 선출되었다... 아르헨티나는 대단히 도시화된 나라이며, 국내 10개 대도시 지역에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으며, 시골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인구의 1/10 이하이다. 약 3백만명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자치시에 살고 있으며,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역권의 인구는 총 1,280만명이다.(2008년) 그리하여 이 지역은 세계에서 인구가 많은 대도시권 중에 한 곳이다.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와 로사리오 광역시도 인구가 각각 130만, 120만에 이르며, 나머지 다섯 광역 도시들도 각기 50만 정도 인구가 살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 이주민들은 도시에 정착해서 직장을 얻고 교육 등 더 많은 기회를 얻어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었다. 또 철도망이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방 소도시에도 정착했으며, 1930년대부터 시골 노동자들이 대도시로 이주했다. 1990년대 철도가 끊기고 지역 소규모 제조업이 대규모 저가 수입품에 밀려 몰락하면서 많은 시골 소읍들이 유령도시가 되었다. 동시에 아르헨티나의 대도시 외곽에는 슬럼("villas miserias")이 확산되어 슬럼 인구가 750,000 가구(약 4백만 명)에 육박했다. 슬럼에는 도시 하류층 빈민, 내륙(특히 북부)에서 올라온 시골 사람들, 1960~90년대 사이 이웃나라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2001~2년에 경제 위기로 상당수 이민자들이 떠나기도 했지만, 경제가 회복되자 다시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여러 도시 지역들은 유럽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유럽 도시처럼 보인다. 대개 도시는 스페인식으로 플라사"plaza"라 하는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당과 정부 건물이 둘러싼 격자 모양의 도시 구조이다. 이런 도시의 일반적인 배치를 "체커판"("damero")이라고 하는데, 사각형 블록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데, 현대에는 이런 방식을 벗어나기도 한다. 19세기 말에 건설된 라 플라타 시는 체커판 모양에 일정한 간격으로 대각선 도로가 나있다. (이 도시는 남아메리카 최초로 전기 가로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정치는 공화제를 채용하고 삼권분립이며, 국민 투표에 의한 4년 임기의 대통령 중심제를 택하고 있다. 정·부 대통령의 자격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로 제한된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상·하 양원제로서, 1912년부터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총선은 후보 개인이 아닌 정당 또는 정당연합에 투표하는 비례대표 선출제 형식으로 실시된다. 전국은 23개의 주와 1연방구로 이루어지는데, 각 주는 주의회를 가지며, 주지사를 선거한다. 총 병력은 약 6만 7,300명이며,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근대화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 이후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택하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자국민으로 하여금 국적포기를 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 출신인 네덜란드의 왕비 막시마 조레귀에타는 국왕 빌럼알렉산더르와 결혼한 뒤 네덜란드의 국적을 취득하여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국적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배우 마르코의 대한민국 귀화 시도는 계속 실패로 돌아갔다. 최초의 비유럽국가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국적포기가 불가능하다. 아르헨티나의 산업의 근간(根幹)은 농업과 목축업이며, 국가의 경제는 이들 제1차 산업 위에 성립되어 있다. 농산물과 축산물이 GNP의 14%, 총수출의 50% 이상을 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아르헨티나 경제가 갖고 있던 저성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도입되었으나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은 아르헨티나 산업생산의 위축과 외채의 증가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 2001년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연간 1.5%의 누적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외채의 경우 92억 7800만 달러에서 1397억 83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에서 해외로 유출된 자본의 액수는 약 13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낮은 성장률과 산업구조의 붕괴, 외채 및 자본도피의 증가는 고용률의 감소로 이어졌다. 또한 실질임금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에 평균 25%가 감소하였다. 특히 1998년부터 2002년 중반까지 아르헨티나 경제는 가장 강력한 경기침체를 경험했고 실업률은 18.3%, 빈곤율은 전체 인구의 60%에 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공업화를 추진하여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는 반면 공업의 생산 경비가 높아 경쟁력은 낮은 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비스업도 시장점유율이 높으며, 그 밖에 운수, 상 등을 포함하면 아르헨티나는 제3차 산업이 발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1900년대에 들어 농산물 가공에서 출현한 아르헨티나의 공업은 제1차 페론 정권시기인 1940년대부터 막강한 정부의 보호 아래 급속히 발전을 이뤘다. 역대 정부가 공업화 정책을 계속 추진한 결과 현재는 대부분의 소비재, 내구소비재와 함께 중공업 부문에서 철강, 선박, 항공기, 자동차를 국내에서 제조하고 있다. 목축업은 극히 왕성하여, 국토의 40% 이상이 목장과 방목지(放牧地), 10%가 사료 작물과 목초의 농지로 되어 있다. 소·돼지·양고기·원피(原皮)·양모 등이 산출되며, 육류(肉類)가 풍부하므로 국민 1인당 식육 소비량이 세계 제1위이다. 주요 농산물은 밀·옥수수·아마(亞麻)·면화·목초류·고구마 등인데, 이곳의 곡물은 북반구의 단경기(端境期)에 출하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주요 수출품목은 콩·육류·밀 등으로 미국·영국·네덜란드·이탈리아·러시아·브라질·일본·독일이 주요 수출 대상국이다. 이에 대하여 기계류·철강·화학약품·원유 등을 수입하는데, 미국·일본·이탈리아·독일·브라질 등이 주요 수입 대상국이다. 광업은 총생산의 4%에 불과하며, 파타고니아 지방의 석유 자원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매장량은 풍부하나 개발이 뒤져 있다. 근대공업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났는데, 축산물의 가공업, 삼유·피혁 공업이 중심이다. 제철업은 소미자 제철소가 산니콜라스에 선강(銑鋼) 일관 공장을 건설한 후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탱고와 목축으로 유명하며 교육과 문화 수준은 남아메리카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따라서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의 문화 수준과 대학을 비롯한 교육 시설은 상당히 충실하다. 다만 문화는 이 지역의 원주민 인디오가 볼 만한 문화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이식된 유럽 문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상류 계층에서는 프랑스 풍이 유행했다. 반면 중·하류계 층에서는 국민의 최대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계 이민과 그 자손을 통해 전파된 이탈리아 문화가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렸다. 또한 식민지시대 이후 스페인 문화의 토대 위에 생활양식, 관습, 특히 식생활, 언어,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최근에는 미국과의 정치, 경제관계가 긴밀해짐에 따라 미국 문명도 침투되고 있으나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가장 교육이 진보한 나라이며 문맹률은 3%에 불과하다. 교육제도는 7년제의 초등 교육, 5년제의 중등 교육과 4∼6년제의 대학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등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7년간 무료이며 중등 교육(5년), 대학 교육(5∼6년)도 무료이다. 대학의 경우 입학은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 아르헨티나의 교통 인프라는 비교적 우수한 편이다. 넓은 국토를 가진 아르헨티나는 교통도 필연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23만 km의 도로 중 72,000km는 포장 도로이며, 1,575km는 고속도로이다. 철도는 연장거리 4만 5,000km 에 달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핵(中核)으로 하여 남아메리카에서는 가장 잘 정비되어 있으며 세계에서도 유수한 철도망으로 손꼽힌다. 항공 또한 발달하여,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민속춤은 '까르나발리또(carnavalito)' '삼바(zamba)' '가또(gato)' 등이 있는데 특히 '탱고(tango)'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다. 아르헨티나는 FIFA 월드컵이 처음 생길때부터 이미 세계적인 축구강국이였으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첫 FIFA 월드컵인 1930년 월드컵에서는 이미 당대 최강인 우루과이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의 강호였다. 하지만 극심한 선수유출 속에서 193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적인 쇠락의 길을 걸어왔으나 FIFA에서 두 개 이상의 국가대표팀에서 뛸 수 없도록 규정을 변경한 이후가 되어서야 1978년 FIFA 월드컵에서 제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로부터 선수를 빼돌려서 자국 팀으로 주로 사용한 나라로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이 있다. 특히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로부터 루이스 몬티, 엔리케 과이타, 라이문도 오르시등의 스타플레이어급 선수들을 뭉텅이로 빼가서 193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가 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1978년과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하였고, 1978년엔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FIFA 월드컵 결승전에 5번 진출했는데 FIFA 월드컵 결승전에 5번 이상 진출한 팀으로는 브라질(7전 5승 2패), 독일(8전 4승 4패), 이탈리아(6전 4승 2패), 아르헨티나(5전 2승 3패) 등 4개국밖에 없다. 하계올림픽에서 역시 발군의 성적을 보여줬는데 특히 2004년 하계 올림픽과 200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우승한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거기에 그냥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축구 선수의 인적자원 수준이 세계최고이며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등 인류 역사상 더 이상 찾기 힘들 불세출의 축구영웅들을 많이 배출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을 초대 월드컵 개최국인 우루과이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나라의 본격적인 문학은 독립 후의 혼란기에 낭만주의가 대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탄압 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묘사한 소설 <아말리아>로 유명한 호세 마르몰(1817-1871), 문화사의 고전 <파쿤도, 문명이냐 야만이냐>의 저자인 도밍고 파스티노 사르미엔토(1811-1888)도 있으나, 이 시기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가우초(gaucho)의 시(詩)로 초원에 사는 소치기(飼牛)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에스타니슬라오 캄포(1834-1880)는 소박한 소치기의 상징<파우스토>를, 호세 에르난데스(1834-1886)는 국민적 서사시 <마르틴 피에르>를 남겼다. 현대시는 근대파의 레오폴도 루고네스(1874-1938)에서 비롯되는데 보다 대담한 전위시, 특히 초현실주의로 이행되어갔다. 산문으로는 가우초에 대한 향수(鄕愁)를 선명한 이미지로 묘사한 소설 <돈 세군도 솜브라>의 저자 리카르도 구이랄데스(1886-1927), 자연주의적 소설로 이름이 난 마누엘갈베스(1882-1962), 현대 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고립을 테마로 하는 에세이스트 에두아르도 마예아(1903-1982), 환상적 단편소설의 명수(名手)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1976년 발표한 <거미여인의 키스>가 대표작인 마누엘 푸익(1932-1990), 역사소설 <돈 마리오의 영광>의 작자 엔리케 라레타(1875-1961)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아르헨티나를 찾는 관광객들은 자연스러운 경관과 지리적 특질, 문화적 특성에 대해 크게 매료된다. 더욱이 2001년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약세로 환율이 외국인 관광객들에 유리해지면서 남미 중에 아르헨티나를 여행지로 찾는 사람들도 많다. 자국의 통계국에 따르면 2005년도의 관광객 수는 전년 대비 12% 성장하였으며 전체 서비스업 관련 총액의 8.1%, 국가 전체 생산 중 세 번째로 높은 산업을 관광이 차지하였다. 당시 방문객은 37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통계상 최초로 외국인들의 아르헨티나 방문객이 해외에 여행을 떠난 아르헨티나 사람보다 많아졌다. 2006년 1/4분기에는 전년 동일 분기에서 22%나 상승한 560,265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31%는 유럽, 19.2%가 미국과 캐나다, 14.2%는 브라질, 9.1%는 칠레, 14.1%가 이웃 국가 출신의 관광객이었다. 스포츠 스포츠()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겨루기 위한 활동으로 신체 활동을 비롯하여 도구 혹은 동물의 힘을 빌려 하는 여러 운동과 게임이 포함된다. 스포츠는 영어에서 온 외래어로 본래 여가를 뜻하는 옛 프랑스어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운동경기(運動競技)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포츠는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와 형태에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개인 운동과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단체 운동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스포츠는 개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단체 운동의 경우에는 경쟁심을 고취하여 구성원의 협동 정신을 높이는 좋은 효과를 갖고 있다. 스포츠는 또한 뛰어난 운동 선수들의 경쟁과 보다 나은 기록을 추구함으로써 사람이 가진 신체적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활동은 스포츠를 몸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흥미를 일깨움으로써 스포츠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며, 경기라는 형태로 대중 생활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스포츠는 여러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스포츠 종목에는 육상, 체조, 수영, 구기, 투기 등이 있다. 이러한 스포츠 각각의 특성과 기본적 이론을 참조하면 올바른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육상 경기 종목은 각각 달리기, 뜀뛰기, 던지기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모든 운동과 스포츠의 기본이 된다. 또한, 대표적인 기록 경기 가운데 하나로 기록 단축에 의한 인간 능력의 한계 도전이 관심이 되기도 한다. 트랙 경기는 달리기 경기를 의미하며, 단거리달리기, 중ㆍ장거리달리기, 장애물달리기, 이어달리기가 포함된다. 단거리달리기는 100m, 200m, 400m 종목이 있으며, 지정된 자신의 코스에서만 달려야 한다. 또한, 단거리 종목에 적합한 체격 조건과 함께 스피드를 위한 다리의 강한 근력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중ㆍ장거리달리기는 800m, 1,500m, 5,000m, 10,000m 종목이 있으며, 중거리달리기는 단거리의 스피드 능력과 함께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동시에 필요하고, 장거리달리기는 강한 심폐 지구력과 근 지구력이 필요하며, 장거리 경기일 수록 페이스 조절이 중요하다. 장애물달리기는 크게 허들 경기[100m 허들(여), 110m 허들(남), 400m 허들]와 장애물 경기(3,000m 장애물)로 구분할 수 있는데, 3,000m 장애물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경기는 각 코스에 설치된 10개의 허들을 넘어야 하고, 3,000m 장애물 경기는 총 28개의 장애물과 7개의 물웅덩이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어달리기는 육상 경기 중 유일한 단체 종목으로, 올림픽 경기에서는 400m(4×100m)와 1,600m(4×400m) 종목이 실시된다. 필드 경기는 트랙 이외의 곳에서 실시되는 경기를 의미하며, 크게 뜀뛰기 경기와 던지기 경기로 구분된다. 뜀뛰기 경기에는 높이뛰기, 장대높이뛰기, 멀리뛰기, 세단뛰기 경기가 있다. 높이뛰기는 도움닫기에서 발생한 수평 방향의 속도를 수직 속도로 전환하여 크로스바를 넘는 경기고, 도움닫기 → 발구르기 → 공중 동작 → 착지의 4단계로 구분된다. 높이뛰기 기술로는 가위뛰기와 배면뛰기(포스베리 플롭)가 있으며, 키가 크고 몸의 중심이 높은 선수일수록 배면뛰기가 유리하다. 장대높이뛰기는 장대를 사용하여 바를 넘는 경기로, 육상 경기 중에서 가장 복잡한 운동 구조(장대 운반 → 도움닫기 → 장대꽂기와 발구르기 → 끌어올리기와 다리감기 → 비틀어 올리기 → 바넘기 및 착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피드, 순발력, 근력, 균형성, 유연성 등의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멀리뛰기는 도움닫기 속도를 이용하여 보다 멀리 뛰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도움닫기 → 발구르기 → 공중동작 → 착지의 4단계로 이루어진다. 공중동작의 자세에 따라 가위뛰기와 젖혀뛰기로 구분된다. 세단뛰기는 세 번의 도약(홉, 스텝, 점프)을 통하여 보다 멀리 뛰는 경기로, 빠른 도움닫기 속도와 다리의 근력이 필요하며, 동작의 연속성과 리듬, 도약 거리의 배분 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던지기 경기에는 포환던지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해머던지기의 4가지 종목이 있으며, 올림픽 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이 네 가지 종목을 실시하고 있다. 모든 던지기 경기는 경기자가 8명 이하일 때에는 각자 6명씩 던지고, 8명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3회를 던져 8명을 선발한 다음, 다시 3회를 던져 총 6시기 중 최고의 기록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또한, 던지기 경기는 형태와 중량이 다른 각각의 도구를 던져야 하기 때문에 체격이 크고 순발력이 뛰어난 선수가 유리하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 순위를 겨루는 최장 달리기 도로 경기이다. 기원전 고대 아테네에서 유래되었으며,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부터 육상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마라톤은 인간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가장 상징적인 종목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종목이다. 또한, 엄청난 체력 소모 때문에 경기 중 음식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 마라톤 기록은 코스마다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세계 신기록 대신에 세계 최고 기록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최근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는 애호가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어, 5km, 10km, 하프마라톤 대회들이 전 세계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체조'라는 용어는 운동의 목적, 형식, 방법 등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기 종목화된 체조는 기계체조, 리듬체조, 스포츠 에어로빅스를 예로 들 수 있으며, 이 외에도 맨손체조, 유연체조, 보강체조 등이 있다. 기계 체조 경기는 남자 6종목(마루 운동, 안마, 링, 도마, 평행봉, 철봉), 여자 4종목(마루 운동, 도마, 이단 평행봉, 평균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도의 숙련된 기술의 미적 아름다움과 역동성이 뛰어난 스포츠 경기 중 하나이다. 또한, 강한 근력과 유연성, 순발력, 조정력, 균형성 등이 요구되는 운동으로 특히 자신감과 용기,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종목이다. 마루 운동은 구획된 사방 12m의 탄성 마루 위에서 공중돌기 동작, 힘과 균형, 유연성, 물구나무서기 그리고 조화로운 리듬 동작을 조합하여 구성한다. 동작들은 선수의 개성과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며, 최대 70초 동안 연기할 수 있다. 여자 선수는 음악에 맞추어 연기하고, 남자 선수는 음악 없이 연기한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가치점이 높은 고난도의 기술을 연속적으로 수차례 시도해야 하며, 감점을 최소화해야 한다. 감점 요소는 몸 자세의 위반, 기술 실행의 실수, 버티기의 폭과 정지 시간 유지, 착지의 균형 등이 있다. 안마 종목은 말(높이 105cm, 길이 160cm, 폭 35cm)위에 고정된 두 개의 손잡이를 주로 이용하여 팔로 버티는 동작을 기본으로 여러 종류의 선회 및 진자 운동 기술들을 실행하는 경기이다. 안마 경기에서는 말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야 하며 위치 이동, 방향 전환과 엇걸기, 물구나무서기 등의 기술을 선수의 능력에 따라 구성하게 된다. 모든 동작은 방드시 스윙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경기 도중 아주 경미한 정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링 운동은 높이 550cm로부터 2개의 링줄과, 줄에 연결된 링(지름 18cm)에 매달려 흔들기, 힘을 중심으로 한 버티기 등의 기술로 구성된다. 기본 동작들을 버티기 자세 또는 물구나머서기 자세로 연결되는 매달리기 자세로 실행되며, 연기 중 링이 흔들리거나 꼬여서는 아니된다. 실시 할 때도 양 팔은 반드시 펴야 하며, 힘 버티기에서는 올바른 자세와 각도를 유지해야 한다. 횡측 방향으로 설치된 말(높이 135cm)을 양 손으로 동시에 짚고 뛰어 넘는 경기이다. 도움닫기 거리는 25m 이내로 제한되며, 2번의 상이한 기술을 사용하는 종목별 결승 경기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뜀틀 연기를 실시한다. 각 뜀틀 시기에서는 뛰어서(도움닫기) 두 다리를 모아 발구름으로 몸을 띄워 비행 동작, 착지로 이어진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가치점이 높은 기술을 시도해야 하며, 높은 비행과 비행 거리, 정확한 착지가 중요하다. 평행한 계란 모양의 두 개의 봉(높이 175cm, 길이 350cm, 직경 5cm)을 사용하여 매달리기, 버티기 자세를 기본으로, 흔들거나 봉 위나 아래에서 양 손을 동시에 놓았다 다시 잡는 등의 기술로 연기한다. 높으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양 손을 놓았다 잡기에서 외봉잡기, 겹공중돌기, 크게 매달려돌기 등 고난도 기술이 포함되어야 한다. 낮은 비행, 위치 이탈, 물구나무서기에서 여분의 흔들기, 손움직임 등은 감점이 된다. 철봉(높이 225cm, 직경 2.8cm)에 매달려 정지 동작 없이 흔들기를 중심으로 기술을 연기하는 종목이다. 비행 요소의 연속 동작과 다양성 있는 연속적인 기술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스릴 넘치는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 때 가치점이 높게 평가된다. 이단 평행봉(높은 봉 225cm, 낮은 봉 145cm)은 위, 아래에서 흔들기를 중심으로 정지함이 없이 매달리기, 돌기, 버티기, 틀기 등의 기술로 양 봉 사이를 이동하며 연기한다. 어려운 요소들을 직접 연결하면서 크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평균대(높이 105cm, 길이 500cm, 폭 10cm) 위에서 70~90초 동안 연기를 하며 평균대 앞, 옆, 뒤를 활용한 비행 요소와 턴, 점프, 걷기, 몸 웨이브, 평균잡기, 서거나 앉기 등의 기술로 구성된다. 숙련된 점프 동작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줄, 후프, 공, 곤봉, 리본 등의 기구를 이용하여 신체 율동을 표현하는 체조 종목의 하나이다. 예술적 가치가 상대적을 높은 스포츠로 여성 경기만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어 있다. 역사고대 그리스의 짐노스(Gymnos)에서 발생한 체조는 모든 체조 운동의 기원이자 리듬체조의 기원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와 같은 짐노스의 체조 운동 체계를 바로 잡고 스포츠로서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는데, 바제도우(Basedow,J., 1723∼1890)의 범애학교, 잘츠만(Salzmann,C., 1744∼1811)의 슈렙텐달(Schreptenthal) 교육연구소에서 실시한 자연체조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에어로빅체조는 전통적인 에어로빅스운동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높은 강도의 복합적 동작들을 음악에 맞춰서 지속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능력을 뜻 한다. 루틴을 연기 할 때에는 지속적인 동작 , 유연성, 근력을 보여 주어야 하며, 7가지 에어로빅스 기본 스탭을 사용하고 난도를 완벽하게 실시하여야 한다(Federation Internationale de Gymnastique:FIG, Aerobic Gymnastics Code of Points 2013-2016, 문미희, 2013). 경기종목은 개인전(IM, IW), 혼성2인조(MP), 3인조(TR), 5인조(GR) 부분이며 모든 경기는 1분 25초(±5초)를 기준으로 연기를 실시하며 국제 체조 연맹(Federation International de Gymnasticque: F.I.G)의 규정에 의해 경기를 실시한다. 심판구성은 주심 1명, 난이도 심판 2명, 예술심판 4명, 실시심판 4명, 라인심판 2명, 타임심판 1명 등 총 14명으로 구성되어있다(Aerobic Gymnastics Code of Points 2013-2016, 문미희, 2013). 정의신체 이외의 다른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실시하도록 고안된 체조. 내용보통체조·자유체조·도수체조(徒手體操)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별·연령·시간·장소·인원수 등에 관계없이 실시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운동량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신운동이므로 신체의 기능적·형태적 발달을 도모하고, 근육의 탄력성과 관절의 가동성을 높여 스포츠의 기술향상과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또한 모든 운동의 준비·정리·보강운동에 적합하며, 작업의 능률향상을 위한 피로회복운동으로도 적합하다. -종류 자유형(Freestyle stroke/Crawl stroke) 배영(Back crawl stroke) 평영(Breast stroke) 접영(Butterfly stroke) 개요손과 발을 사용하여 물 위나 물속을 자유롭게 이동 또는 정지하는 운동, 즉 헤엄치는 것을 말한다. 현대인들의 생활체육에 적합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스포츠 종목 중에서 비교적 운동으로서의 숙달 방법이 단순한 편이다. 전신적 운동이고, 큰 호흡운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심폐의 발달에 좋으며 여름철의 레크리에이션으로 좋다. 스포츠의 한 분야로 볼을 사용하는 종목의 총칭. 네트(net)형, 베이스볼(baseball)형, 골(goal)형의 3가지로 구별된다. 네트형은 네트를 사이에 두고 하는 경기로서 배구·테니스·탁구·배드민턴 등이 포함된다. 또 베이스볼형은 야구·크리켓·소프트볼이 해당되며, 골형은 공을 때리거나 차거나 함으로써 상대방의 골에 넣는 것으로 축구·농구·럭비·하키·미식축구 등이 포함된다. 축구 축구(蹴球, , 일부 국가에서는 Soccer)는 11명의 선수들이 각각 한 팀을 이루어 두 팀이 겨루는 구기 스포츠로, 세계적으로 최고 인기를 누리는 스포츠이다. 경기장은 직사각형이며, 바닥은 천연잔디나 인조잔디, 흙 등으로 이뤄져 있다. 경기장 양 끝에 놓인 상대방 골대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면 득점이 된다. 선수 중 골키퍼만 팔과 손으로도 공을 건드릴 수 있으며, 나머지 선수는 팔과 손을 제외한 신체 부위로만 공을 다룰 수 있다. 골키퍼 외의 선수가 경기장 안에서 팔이나 손으로 공을 고의로 다루면 핸드볼 반칙 이 된다. 주로 발을 사용하여 공을 차며, 공이 공중에 떠있을 때에는 몸과 머리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경기 종료 시점까지 더 많은 득점을 올린 팀이 승리하며, 동점일 때는 대회 규칙에 따라 무승부로 처리하거나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 짓는다. 경기 방식이 리그일 경우에는 연장전 없이 무승부로 처리가 되며 토너먼트일 경우에도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채택할 경우에는 무승부로 처리되어 원정 다득점 원칙을 따르지만, 단판의 토너먼트일 때는 무승부가 되면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현대적 의미의 축구는 1863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축구협회가 창설되면서 시작되었고, 1863년 만들어진 규칙을 기본으로 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국제 축구 연맹(FIFA)이 주관해 4년마다 국제 대회인 FIFA 월드컵이 개최되고 있다. 이 대회는 하계 올림픽의 두 배나 되는, 가장 많은 인구가 TV로 시청하는 스포츠 행사이다. 옐로카드는 반칙을 위반 했을때 받는 카드이고, 래드카드는 위험한 반칙을 했을때 받는카드이다. 옐로카드를 2번 받을때 래드카드를 받는다. 축구()는‘공을 발로 찬다.’라는 뜻을 지닌 한자어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영어 단어 Soccer를 음차한 사커()를 사용하지만, 당시엔 일본에서 축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축구가 처음 한반도에 전래할 당시에 한국(당시 조선)에 영국 해군이 제물포항에 입항하여 편을 갈라 축구 경기를 하였고, 경기가 끝난 뒤 구경을 나온 한국 사람과 공을 가지고 놀았는데, 운동 경기의 이름을 몰라서 척구(躑球 또는 踢球)나 경구(競球)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에서는 족구()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말하는 족구는 다른 스포츠이다. 오늘날 영어에서 축구를 의미하는 단어는 풋볼()이다. 몇몇 영어권 나라에서는 사커라고도 한다. 1863년 잉글랜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가 처음 창설 되었을때는, 다른 풋볼 방식인 Rugby football과 구분되기 위해 Association football 이라고 불리다가, 그것이 현재에는 간단히 풋볼(Football)로 불리게 되었다. Soccer는 Association football을 줄여서 1800년대에 별명으로 부른것이 기원이다.(참고로 럭비 축구는 영어를 공식 언어로 쓰는 대부분의 나라 즉 축구의 종주국인 잉글랜드를 포함, 스코틀랜드, 웨일스, 카리브해 국가(트리니다드토바고, 자메이카 그리고 이밖의 나라들 포함), 몰타, 인도, 나이지리아, 카메룬, 푸에르토리코, 파키스탄, 홍콩, 라이베리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해 그리고 중미에 걸친 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Football로 쓰인다. 한편 '사커'로만 명명하는 국가는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일랜드, 일본, 짐바브웨, 대한민국 등으로 제한적이며, 이외 유럽 등 대다수의 국가는 여러 자국어 호칭이 있기는 하지만 ‘풋볼’이 일반적이다.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가 된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사커’보다 풋볼을 더 흔히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발을 이용한 다른 유사 스포츠들─럭비, 미식축구, 오지풋볼, 갤릭풋볼 등─이 인기를 끄는 몇몇 나라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풋볼보다 ‘사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여러 스포츠가 동시에 치러지는 올림픽에선, 이 경기 종목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풋볼이라 부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다른 유사 축구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식축구’(←Association式蹴球)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 있다. 공을 차며 돌아다니는 형식의 게임 방식은 오래 전부터 많은 나라에서 행해져 왔다. FIFA에 따르면, 게임의 가장 이른 형태는 기원전 2, 3세기경 중국에서 행해진 현재의 축구와 비슷한 형태인 축국 ()이라고 한다. 한편, 고대 그리스에는 기원전 7∼6세기 무렵에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에피스키로스()라는 공을 차고 던지는 간단한 형식의 놀이가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 행하진 공놀이의 한 형태인 하르파스툼은 축구의 먼 친척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축구는 중세 유럽 곳곳에서 행해졌다. 현대적 규칙의 축구는 잉글랜드 사립학교(Public school)들에서 행해지던 광범위하고 다양한 형태의 풋볼을 표준화하려 한 19세기 중반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1848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처음 작성된 케임브리지 규칙은 뒤에 현대 축구를 포함한 규칙의 발전을 이루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케임브리지 규칙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4개 단과대학 중 하나인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여러 학교(이튼, 해로, 럭비, 윈체스터, 슈루즈버리 등)의 대표자가 참석한 회의에서 작성되었다. 이 규칙은 현대 축구의 규칙과 거의 유사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처음엔 보편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1850년대에 이르러, 여러 학교 또는 대학교에서 분리되어 다양한 형태의 축구를 하는 많은 클럽이 영어권 국가 곳곳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857년에는 세계 최초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인 셰필드 FC를 사립학교의 졸업생이 창단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셰필드 FC 창단을 발판으로 셰필드 FA가 1867년에 창립되었다. 셰필드의 창단은 원시적이던 당시의 축구를 현대 축구로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1862년에는 어핑엄 스쿨의 존 찰스 스링이 영향력 있는 규칙 한 벌을 고안해 냈다. 1862년 노팅엄에서 세계 최초의 프로 축구 팀인 노츠카운티 FC가 창단되었다. 노츠카운티의 창단은 축구 협회와 규칙이 그 다음 해에 세워지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의의가 있다. 1863년 10월 26일 런던에 있는 학교들과 스포츠 클럽들은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 선술집(Pub)에서 축구 규칙의 통합을 위해 모였다. 처음에는 제각기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해 12월까지 5번 정도 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점점 하나의 이견으로 좁혀졌고, 여기에서 현대 축구의 첫 번째 공식 규칙이 만들어졌다. 또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의 설립에도 합의하였다. 그러나 규칙의 최종본에서 ‘공을 들고 뛸 수 있다’와 ‘뛰는 상대를 막을 수 있다’(상대의 정강이 차기, 발 걸기, 잡기 등) 등의 두 가지 규칙이 제외되면서 이에 반발한 블랙히스를 포함한 몇몇 팀은 FA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때 FA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거나, 그 뒤에 FA를 탈퇴한 클럽들이 모여 1871년 런던에서 럭비협회(Rugby Football Union)를 만들었고,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스포츠는 오늘날의 럭비(럭비 유니온)로 이어진다. 11개의 남은 팀들은 에브니저 코브 몰리(Ebenezer Cobb Morley)의 주관으로, 게임의 원래 13개 규칙을 비준하는 일을 계속했다. 당시의 규칙은 손으로 공을 직접 다루는 것을 허용하고 크로스바도 없는 형태였는데, 그 규칙은 당시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달하던 빅토리안 풋볼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한편, 셰필드 FA는 FA가 그들의 규칙을 흡수하기도 하면서 경기 규칙 간에 차이가 별로 없던 1870년대까지, 독자적인 규칙에 따라 경기를 진행했다. 축구는 손을 사용해도 되느냐 마느냐로 또다시 나뉘게 되는데 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 오늘날의 축구로 발전한 종목이며, 이에 반발하여 축구에서 손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오늘날의 럭비로 발전한 종목이 되었다. 오늘날 축구 경기 규칙은 국제 축구 평의회(IFAB)에서 규정하고 있다. 평의회는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와 웨일스 축구 협회, 아일랜드 축구 협회가 참여한 가운데 맨체스터에서 1886년 설립됐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축구 대회는 FA컵으로, C.W. 얼콕이 세워 187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팀이 참여하여 자웅을 겨루는 대회이다. 첫 공식 국가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는 1872년에 글래스고에서 벌어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이며, 이 또한 얼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잉글랜드는 세계 최초 축구 리그인 풋볼 리그(Football League)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이 리그는 당시 애스턴 빌라의 중역이었던 윌리엄 맥그레고에 의해 1888년 설립되었다. 초기의 시스템은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12개의 클럽이 참여하는 식이었다. 축구에 관한 일체의 국제 행사를 관장하는 국제 축구 연맹(FIFA)은 190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기본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축구 국제 경기가 대중적으로 변해 감에 따라 국제 축구 연맹은 1913년에 국제 축구 평의회(IFAB)의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국제 축구 평의회는 현재 4명의 국제 축구 연맹 의원과 영 4개국 축구 협회에서 각각 한 명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30년에는 제1회 FIFA 월드컵이 시행되었다. 오늘날 축구는 프로축구의 형태로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축구 경기장을 찾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고, 수십억의 인구가 텔레비전으로 축구를 시청한다. 수많은 사람 또한 아마추어 레벨에서 축구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국제 축구 연맹이 주관한 조사에 따르면, 2억 4천 명 이상의 인구가 200여 국가에 걸쳐 정기적으로 축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축구의 간단한 규칙과 적은 경기 필수품이 축구의 확산과 대중화에 기여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축구는 많은 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특정 지방 혹은 전 국가적인 사랑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고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주 언급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선 축구경기를 열고자 잠시 휴전했다. 또, ESPN의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 중계로 2005년에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이 휴전된 적도 있다. 또한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남부 아시아에서는 희한하게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인기가 매우 높다. 그리고 코소보와 카불에서는 전쟁이 종식되고 나서 사회가 정상화되는 첫 번째 신호가 축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축구가 전쟁의 원인이 된 적도 있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축구 전쟁이 바로 축구가 발단이 된 전쟁이었다. 축구는 또한 NK 디나모 자그레브와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경기가 폭동으로 번짐에 따라 199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격화하기도 했다. 축구는 경기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축구 양 팀 선수 열한 명이 상대 팀의 골대 안으로 축구공을 넣어 득점을 올리기 위해 경쟁하는 경기이다. 공은 단 한 개만 사용되며, 주전 선수가 부상이나 기타 여러 사유로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후보 선수 열세 명을 따로 두기 때문에 한 팀당 선수 구성은 스물네 명이 된다. 경기가 종료됐을 때 더 많은 득점을 올린 팀이 승리하며, 양 팀이 동점일 경우는 무승부가 된다. 축구의 기본적인 규칙에 따라,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선수는 공을 팔이나 손으로 건드려선 안 되며(스로인 상황 예외), 그 외의 모든 신체 부위로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발의 사용도가 가장 높다. 일반적인 경기에서, 선수들은 드리블, 패스, 슛 등을 통하여 득점을 올리기 위한 시도를 하며, 이에 골키퍼는 상대편의 슛을 막아냄으로써 득점을 저지한다. 공의 점유권을 상대 팀에게 빼앗겼을 경우엔 그 공을 다시 되찾기 위해 상대 팀의 패스를 차단하거나 태클 등을 시도한다. 축구는 공이 경기장 라인 밖으로 나가거나 심판이 멈추지 않는 이상 정지되지 않는다. 경기가 정지되었을 경우, 상황에 따른 특정한 방법을 통해 재개된다. 프로축구 경기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은 골이 나오지 않는다. 예로서 프리미어리그 2005-06에서는 경기당 평균 2.48 골이 나왔다. 규칙상으로는 골키퍼 외에 포지션을 규제하지 않지만, 선수 별로 포지션을 나누어 특정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포지션은 크게 스트라이커(또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로 나눌 수 있다. 스트라이커와 공격수는 직접 득점을 올리는 것이 주 목적이며, 미드필더는 공의 점유와 상대편의 공 소유권 탈환 및 공격수와 수비수의 연결, 수비수는 상대편의 득점을 저지하는 역할이다. 이 세 포지션 내에 있는 선수는 골키퍼와의 분별을 위해 아웃필드 선수(Outfield players)로 분류하며, 각 포지션은 다시 위치별로 나뉘고 해당 선수는 그 위치에서 경기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예로서, 미드필더는 위치별로 중앙, 왼쪽, 오른쪽으로 나뉘며, 이 또한 성질에 따라 공격형과 수비형으로 나뉜다. 10명의 아웃필드 선수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득점과 방어에서 조화를 이루게끔 구성된다. 각 포지션별의 선수의 수는 팀의 경기 성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많은 공격수와 적은 수비수를 둔 팀은 빠르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는 느리고, 수비적인 플레이를 할 가능성이 높다. 선수들은 주어진 포지션에서 경기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기 때문에, 작전 여하에 따라 움직임에 제한이 있는 경우가 있고, 감독이나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경기 중 언제든지 포지션을 바꿀 수 있다. 선수들의 포지션 배치도는 ‘포메이션’이라고 하며, 이는 감독의 특권이자 감독이 의도하는 전술과 성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축구 선수들과 감독들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다양한 기술과 전술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 비록 축구가 상대편보다 더 많은 득점을 올리는 것이 승리 요건인 단순한 규칙을 기반으로 시작된 스포츠이지만, 단체 종목인 축구의 특성 상 선수 개개인의 기량을 극대화하여 보다 탄탄한 전술로 잘 조직된 팀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크다. 여러 개인 기술과 팀 전술의 발전은 축구를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보다 흥미롭고 세련된 스포츠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프로화된 축구에서 기술과 기본기는 개인의 역량과 기량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며, 전술은 선수 개개인을 조합하여 경기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짜이는 큰 틀로써 설명된다. 개인 기량이 반드시 전체 팀의 경기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전술 또한 개인 기술 없이는 이론일 뿐이기 때문에, 기술과 전술은 밀접하고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내용과 사용 여부에 따라서 서로 보완할 수도, 또는 서로 얽맬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축구를 할 때 몇 가지의 필요한 기본기가 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패스로 축구를 패싱 게임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는 선수들에게 볼 컨트롤 능력과 함께 선수에게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패스는 모든 팀 전술의 기초가 되는 기술이며, 그 때문에 패스는 최소한 보내는 사람(Passer)과 받는 사람(Receiver)의 움직임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패스의 정확성과 상호 협조는 경기를 리드하는 데 매우 필수적이다. 패스의 종류는 크게 인사이드 패스, 아웃사이드 패스, 인스텝 패스, 힐 패스 등으로 나뉜다. 드리블도 축구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인데, 드리블은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볼을 컨트롤하며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드리블의 속도와 상대방을 속일 수 있는가의 여부가 드리블의 성공에서 매우 중요하다. 드리블링은 개인이 단독적으로 구사가 가능한 부분이므로 드리블은 선수별로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드리블이 팀 전술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토탈 풋볼과 같은 빠른 공수 전환이 이루어지는 축구, 그리고 패스 위주의 경기가 진행되며 드리블의 중요성이 줄어든 경향이 있다. 하지만 축구 선수들의 현란한 드리블은 여전히 축구팬들에게 경탄의 대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유명한 드리블 기술로는 마르세유 턴, 크루이프 턴, 일명 사포라고 불리는 힐숏, 백숏, 플립플랩, 일명 팬텀 드리블이라 불리는 라 크로케타, 물개턴(헤딩으로만 드리블하는것), 헛다리짚기 등이 있다. 트래핑은 발 이외의 전신(단, 손과 팔 부분 제외)을 사용하여 공을 받는 기술을 말한다. 흔히 볼 처리 능력이라고도 하며 공을 받은 뒤 다음 동작으로 나아가는 데 대한 사전 동작이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방법 자체보다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기술이다. 슈팅은 축구 경기의 승패를 가르는 득점을 하기 위한 최종 기술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슈팅의 중요성은 매우 큰데, 그렇기 때문에 찬스가 왔을 때 잘 성공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찬스를 잘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평소 슈팅 감각에 대한 연습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슈팅 동작은 킥이나 패스의 동작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킥은 공을 발로 차는 기술을 가리키며, 킥은 차는 발의 부위에 따라서 인사이드 킥, 아웃사이드 킥, 인프런트 킥, 아웃프런트 킥, 인스텝 킥, 힐 킥, 토 킥 등으로 나뉘고, 그밖에 차는 순간의 자세에 따라 발리 킥, 오버헤드 킥, 시저스 킥 등으로도 구분한다. 헤딩 은 머리(혹은 이마)를 사용하여 공을 처리하는 기술로, 축구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기술이다. 패스, 슛, 수비를 위한 클리어링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기술이다. 스탠딩 헤딩, 점프 헤딩, 다이빙 헤딩 등이 있다. 태클은 상대방의 공을 뺏는 모든 기술을 의미한다. 축구 선수들에게 이 기술은 가히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태클의 종류로는 인터셉트, 어깨 차징, 스탠딩 태클링, 슬라이딩 태클링 등이 있다. 태클을 잘못하면 상대가 넘어져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유용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기술이기도 하다. 축구에서, 각 팀 열한 명의 선수들은 경기 시에 특별한 위치에서 경기를 하게 되는데, 이를 포지션이라고 한다. 한 팀은 골키퍼 한 명과 열 명의 아웃필드 선수로 구성된다. 아웃필드 선수 열 명은 다시 크게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나뉜다. 각각의 포지션도 전술적인 역할에 따라 다시 여러 종류로 나뉠 수 있으며, 선수들에게 각기 다른 역할을 요구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골키퍼는 일반적으로 큰 키에 순발력과 적절한 상황 판단력 등이 매우 중시된다. 반면 중앙 수비수는 골키퍼 마찬가지로 큰 키를 요하면서도 몸싸움에 능해야 하지만 측면 수비수의 경우에는 뛰어난 스피드와 체력, 기본적인 볼 컨트롤이 요구된다. 미드필더는 세부적인 포지션별로 요구 사항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드리블과 패스가 중시되며, 또한 중원을 경기 내내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좋은 체력이 요구된다. 공격수는 일반적으로 우수한 개인기와 골 결정력을 요하며, 그밖의 세부적인 영역에 따라 추가로 요구되는 사항이 다를 수 있다. 이렇게 선수들에게 포지션 별로 요구되는 신체 조건과 그에 걸맞은 역할 수행은 한 팀이 경기를 수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선수 개개인의 포지션을 위치를 숫자로 나타낸 것을 포메이션이라고 한다. 포메이션은 보다 조직적인 플레이로 상대 팀보다 더 많은 득점과 더 적은 실점을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축구 초창기에는 포메이션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전략과 전술로 경기를 이기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구체적인 포메이션이 등장하게 되었다. 최초의 포메이션은 1890년대에 일반화된 피라미드 포메이션(2-3-5)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W-M(3-2-2-3) 시스템이 일반화되었는데, 이 포메이션은 공격수와 수비수들의 구분을 명확하게 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전까지 공격수와 수비수로 단순히 구분되던 것이 발전하여 중원에서 플레이하는 미드필더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브라질 대표팀이 즐겨 사용했던 4-2-4 포메이션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포메이션은 공격수와 수비수를 강조한 포메이션이었다. 브라질은 이후 이를 변형한 4-3-3 포메이션도 선보인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빗장수비, 일명 카테나치오라는 전술이 사용되었다. 이 전술은 수비의 강화에 일조를 했지만 반면에 축구 경기를 단조롭게 만들었다는 비난도 받았다. 한편, 축구 종가라고 일컬어지는 잉글랜드 대표팀은 브라질의 4-2-4에서 공격수 2명을 중원으로 끌어내린 4-4-2 포메이션을 선보였다. 그리고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은 토털 풋볼을 선보이게 된다. 이 전술은 전원 공격과 전원 수비를 추구하며 공간을 폭넓게 사용하므로 체력이 매우 강조되는 전술로 당시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포메이션은 더욱 분화되면서 5-3-2, 3-4-3, 3-5-2, 4-3-3 포메이션 등이 등장했으며, 여기에 몇 가지 옵션을 활용하는 더 세부적으로 분화된 4-2-3-1, 4-3-1-2, 4-1-4-1 등의 4열 계열 전술도 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오늘날 각 축구팀이 선보이는 포메이션은 제각기 다양하다. 포메이션은 4-4-2, 3-5-2 같은 숫자의 형태로 나타내는데, 여기서 골키퍼는 제외되며 10명의 아웃필드 선수들만 나타낸다. 앞의 숫자부터 차례대로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의 숫자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4-4-2 같은 경우는 수비수 4명, 미드필더 4명, 공격수 2명의 형태이며, 3-5-2 같은 경우는 수비수 3명, 미드필더 5명, 공격수 2명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포메이션의 형태에 따라서 이 팀이 공격적인 성향을 갖는지, 수비적인 성향을 갖는지도 판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포메이션의 숫자들만으로는 이 팀이 추구하는 축구 전술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포메이션의 숫자들은 단순히 해당 포지션의 선수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기 운용 시에는 포지션의 숫자에 연연하여 경기를 운영하기보다는 이를 유연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감독의 재량에 따라 등번호는 포지션과 상관없이 달라질 수는 있으나 일반적인 포지션에 따르는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한 팀 열한 명이며, 두 팀이 공 한 개를 사용한다. 공을 상대팀의 골에 넣으면 점수를 얻으며, 정해진 시간 내에 더 많은 점수를 얻은 팀이 이긴다. 공은 신체의 거의 모든 부위로 다룰 수 있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손이나 팔로 공을 다룰 수 없다. 만약 골키퍼 이외의 선수가 손이나 팔로 공을 다루면, 반칙이 선언되고 옐로카드를 받는다. 고의성이 심할 경우 레드카드를 받는 경우도 있다. (2010년 남아공 올림픽 8강전에서 수아레즈가 골대안으로 들어가는 공을 손으로 쳐내서 레드카드를 받은적이 있다.) 축구의 규칙은 IFAB에서 정한다. 축구가 하나의 놀이로서 처음 생겼을 때 사용된 공 혹은 발로 차기 위한 도구로 아마 천이나 짚으로 뭉친 덩어리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구와 유사한 운동이 존재한 몇몇 나라에서는 돼지의 오줌보 등도 사용되었다. 축구가 공식적으로 경기의 모습을 갖추고 인간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바람을 넣어 둥근 모양으로 만든 축구공이 고안되었다. 오랫동안 공의 껍질의 재료로는 가죽이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수중 경기에도 일정한 공의 무게 유지에 적합한 합성 재료가 쓰이고 있다. 골대를 가로지르는 경기장 양쪽 끝의 선을 골라인이라 하고, 두 골라인의 끝을 잇는 선을 터치라인이라 한다. 양쪽 터치라인의 중간지점을 잇는 센터라인이 있으며, 센터라인의 중앙에 센터서클이 있다. 또, 각 진영마다 골라인으로부터 16.5미터의 페널티 에어리어(길이 40.3미터)와 5.5미터 떨어진 골키퍼 에어리어(18.3미터)가 있다. 실제 축구 경기가 이루어지는 부분을 피치라고 하는데, 국제 경기를 치르려면 반드시 피치가 천연 또는 인조 잔디로 덮여 있어야 한다. 위와 같은 규격을 만족하는 잔디밭이라면 어디서든 축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축구 경기는 육상 경기 등을 같이 치르기 위해 세워진 다목적의 종합경기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축구가 많은 인기를 누리는 나라에는 축구 경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축구 전용 경기장도 여럿 존재하고, 경기 관전의 편의성 때문에 전용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것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경기장 내에는 총 4명의 심판이 있다. 경기장 안에서 총괄하는 주심과 양쪽 터치라인에서 오프사이드나 주심이 보지 못한 파울 등을 지켜보는 부심이 두 명 있다. 또한 주심이 정한 추가 시간이나 벤치의 교체 신호를 알리는 대기심이 있다. 주심은 파울 등에 휘슬을 불어 파울이나 오프사이드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최종적으로 심판을 내릴 수 있다. 그에 반해 부심은 오로지 주심에게 어떤 파울이나 오프사이드를 주심에게 “권유”할 수 있는 자격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주심은 마치 ‘땅’과 같기 때문에 공이 주심에 맞더라도, 경기는 공이 주심에 맞지 않았을 때와 완전히 동일하게 진행된다. 부심에게는 깃발이 주어지며 깃발을 통해 주심에게 파울이나 오프사이드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축구에서 많은 오심이 일어나자, 다른 스포츠처럼 비디오 판정을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 바 있으나, FIFA는 오심도 축구의 한 부분이며 아직 기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비디오 판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골에어리어 안에서 발생하는 반칙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 양쪽 골대 옆에 추가 심판을 투입하는 방식이 검토되기도 했다. 축구 경기는 일반적으로 전반전, 후반전으로 각각 45분씩 총 90분으로 치른다. 하프타임은 15분이다. 경기 도중 반칙 등의 상황이 있어도 축구 경기의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간다(다만 이 손실 시간을 어림잡아 주심이 추가 시간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전반전과 후반전 45분이 경과한 후에는 추가 시간이 주어지며, 보통 1~5분 범위에서 주심이 결정하며, 최대10분까지 추가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 심판은 경기 상황에 따라 추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주심은 경기 진행에서 시간 관리를 주관하며, 선수 교체나 부상 선수 등에 따르는 경기 중단과 재개의 권한이 있다. 추가 시간은 연장 시간(injury time), 로스타임(loss time), 스토피지 타임(stoppage) 등으로도 불리며, 전적으로 주심의 판단에 따른다. 주심만이 경기 종료를 선언할 수 있으며, 전후반 종반에 대기심이 주심의 추가 시간 사인을 받아 번호판을 올려 선수와 관객에게 알린다. 이렇게 미리 공개된 추가 시간은 상황과 주심의 의도에 따라 더 길어질 수 있다. 친선 경기나 평가전,리그경기 등의 경우에는 후반전 종료와 함께 경기가 끝나지만, 월드컵과 같이 반드시 승부를 내야 하는 토너먼트 경기일 경우에는 연장전을 치른다. 연장전은 전후반 각각 15분, 총 30분의 경기 시간이 주어진다. 연장전을 해도 승부가 안 나면 승부차기로 돌입하는데(연장전을 치르지 않고 승부차기로 돌입하는 경우도 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재경기에 돌입했으나, 이 제도가 채택되면서 거의 모든 축구 대회에서 이 방법을 택한다. 진행 방식은 돌아가면서 5명의 키커가 번갈아 가면서 차는데, 모든 선수가 다 차기 전에는 찼던 선수는 찰 수 없으며, 5:5로 무승부가 되면 계속 승부를 겨루고, 그 전에 승부가 나는 경우도 있다(4:2의 경우). 연장전에서 기록된 득점은 최종 스코어에 반영되지만, 승부차기는 단지 진출자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최종 스코어에 반영되지는 않는다(단, 경기 결과로서 기록은 되며, FA컵이나 풋볼 리그컵에서는 첫 번째 무승부일 시 재시합으로 돌입). 1990년대 후반에는 IFAB(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에서 골든골 제도를 시범 실시했다. 골든골은 연장전 동점 상황에서 어느 한 팀이 골을 넣게 되면 경기가 바로 끝나는 방법으로, 1998년 FIFA 월드컵과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실시되었다. 골든골 제도는 연장전에서 선수들이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임하게 만든다는 비판으로 2004년에 폐지되었고, 대신에 실버골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연장 전반까지는 일단 경기를 다 치른 후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연장 후반을 모두 치르는 제도이다. 하지만 실버골 제도의 실효성도 의심되어 현재는 폐지되었다. 최근에는 연장전을 없애고 바로 승부차기로 넘기는 제도가 논의되기도 했다. 청소년 경기의 경기 시간은 전후반 각각 40분씩 총 80분으로, 성인 경기에 비해 10분이 짧다. 연장전도 전후반 각각 10분씩 총 20분의 경기 시간이 주어져 성인 경기의 연장전보다 10분이 짧다. 축구 경기를 토너먼트로 진행할 경우에 홈과 원정 경기를 한 번씩 갖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1차전과 2차전의 점수를 합산한 뒤, 더 많은 골을 넣은 쪽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게 된다. 두 팀이 넣은 골의 숫자가 같은 경우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이 적용되어, 원정 경기 득점이 더 많은 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다. 두 팀의 골 숫자가 같고 원정 경기에서의 골 숫자에도 차이가 없는 경우, 연장전을 진행하거나 승부차기로 승패를 가늠한다. 축구에서 반칙한 선수에게 옐로카드 또는 레드카드가 주어진다. 경고로 충분한 경우는 옐로카드를, 선수가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생각될 때는 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든다. 옐로카드가 2장이 누적되면 레드카드를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퇴장된다. 옐로카드가 2장 누적되었거나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된 선수에 대해서는 교체가 허용되지 않으며, 해당 팀은 필드에서 뛰는 인원이 줄어든 상태에서 그대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 퇴장은 각 팀 당 4명까지 허용되며, 5명째 퇴장된 선수가 발생하는 순간 경기는 중단되고 해당 팀의 몰수패가 선언된다. 반칙에 대한 벌칙으로 반칙을 당한 상대 팀에게 직접 프리킥이나 간접 프리킥 기회를 주게 되는데, 모든 프리킥은 차는 순간 인플레이가 성립되며 오프사이드도 적용된다. 킥을 하기 전에 공은 반드시 정지 상태여야 한다. 상대편 선수는 공으로부터 최소한 9.15미터(10야드)를 떨어져야 한다. 한편, 축구에서 가장 복잡한 규칙이 오프사이드 반칙이다. 공격 측 선수가 일반적인 플레이 상황에서 수비 측 진영에서 골키퍼를 포함하는 상대 팀 2명 앞에 있는 선수에게 볼을 전달하면 오프사이드가 성립한다. 만약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를 의도하지 않더라도 공이 선수 몸에 맞는 굴절 등의 이유로 그 선수에게 향했다면 오프사이드가 선언된다. 그러나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선수가 플레이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오프사이드는 선언되지 않는다. 오프사이드 성립 시 간접 프리킥이 주어진다. 골킥 및 스로인에서는 오프사이드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프라인 이전의 필드에서도 오프사이드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손 또는 팔을 공에 대는 경우에 범하는 반칙을 핸드볼 반칙이라 부르며, 영어로는 핸드볼(handball)이라고 한다. 골키퍼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손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일반 선수들은 스로인(throw in)을 제외하고는 손을 사용할 수 없다. 이를 어기게 되면 핸들링이 되어 상대편에게 직접 프리킥이 주어진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는 페널티킥이 주어짐.) 핸들링 반칙도 상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주심이 판단하기 때문에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공이 팔에 닿았다 하더라도 주심이 선수의 의도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반칙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경기는 그대로 진행된다. 만약 명백하게 의도적으로 핸들링 반칙을 범한 것이라면, 주심은 옐로카드를 선수에게 주어야 한다. 축구의 규칙은 경기 중 상황을 ‘볼의 인 플레이’(ball in play)와 ‘볼의 아웃 오브 플레이’(ball out of play) 두 가지로 구분한다. 전반과 후반의 시작은 킥오프(kick-off)로 개시되며, 볼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거나 심판이 경기를 멈추지 않는 한 볼은 항상 인 플레이이다. 볼이 아웃되었을 때는, 어떻게 아웃되었는지에 따라 경기는 아래의 여덟 가지 방법으로 재개된다. 공식경기 개최 거부 또는 속행 거부 등 어느 한 팀의 귀책사유로 인하여 개최 불능 또는 중지(중단)되었을 경우, 해당 귀책사유가 있는 팀이 0:2로 패배(몰수패)한 것으로 한다. 다만 기권 승으로 인한 점수는 골득실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 공식 축구대회 경기에서 선수, 감독, 관중 중에서 규정에 어긋난 정도가 심할 경우 FIFA에서 해당팀에게 다음과 같은 징계를 내릴 수 있다. 축구를 비롯한 풋살, 비치사커 등 관련 종목에 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기관은 국제 축구 연맹(FIFA)이며,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두고 있다. FIFA 산하에는 여섯 개 대륙 연맹이 소속되어 있으며, 각 대륙별 연맹은 해당 대륙의 모든 축구 대회 및 선수, 규정 등을 관장한다. FIFA가 주관해 4년마다 열리는 FIFA 월드 컵은 전 세계의 모든 축구 대회 중 가장 중요한 대회로 꼽힌다. 그밖에 각급 연맹에서 주관하는 여자부 대회 및 연령 제한이 있는 각 청소년 대회(U-20, U-17 월드 컵 등)가 있다. 또한, 각 대륙 연맹 산하에는 각국 축구 협회가 소속되어 해당 협회의 축구 행정 및 대회를 총괄하고 있다. 그밖에 올림픽 축구 역시 중요한 대회 중 하나이다. 축구는 1932년 하계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1900년 하계 올림픽부터 꾸준히 올림픽 종목 중 하나로 채택되어 왔다. 1930년 제1회 월드 컵이 열리기 전까지 사실상 올림픽은 가장 중요한 축구 대회로써 지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순수 아마추어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올림픽의 특성상, 급속하게 프로화가 진행된 축구 종목에서 점차 월드 컵보다 중요도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1984년 하계 올림픽부터 프로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FIFA는 월드컵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는 선수들을 만 23세 이하(U-23)로 제한하고 있다(단, 본선에서는 아직까지 23세 이상의 선수를 각 대표팀당 세 명까지 와일드카드로 포함시킬 수 있다.). 한편, 여자 축구의 경우에는 올림픽에서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올림픽 축구도 FIFA 여자 월드컵처럼 국가대표(A)팀이 참가하는 중요한 대회이다. 또한 국제 경기는 월드컵, 올림픽 축구 종목, U-20, U-17등의 국제 대회에서는 1경기를 출전할 때마다 일정 금액의 출전료가 각 팀에 지불된다. 물론 승리한 팀에게 더 많은 액수가 지급된다. 과거 1954년 FIFA 월드컵 당시 이 사실을 몰랐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체류 비용을 아끼려고 2패의 초라한 전적이 되자 일찌감치 귀국했으나 FIFA 측은 오히려 헝가리전과 터키전 두 경기의 출전료 9천 달러를 찾아가라는 독촉장을 보냈다. 물론 이 돈은 다음 월드컵인 1958년 FIFA 월드컵이 개최되었을때 대한축구협회에서 서류를 분실하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자 벌금으로 징수했다. 각국 축구 협회는 그 나라 실정에 맞는 리그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리그에 따라서 디비전 시스템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리그를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축구가 발전한 나라의 경우 디비전 시스템에 기초에 리그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리그에서는 정규 시즌 동안 리그에 소속된 각 클럽이 리그전 방식에 홈 어웨이 방식을 덧붙인 방식으로 경기를 갖고, 시즌 결과에 따라 우승 팀을 결정하게 된다. 일본의 J리그,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와 같이 몇몇 상위 팀은 상부 리그로 승격하고 하위 팀들은 하부 리그로 강등되는 승강제가 운영되는 것이 보편적인 리그 운영 방식이다. 대한민국의 K리그에서는 2013년부터 승강제를 도입했다. 각국의 최상위 리그(1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클럽은 각 대륙 연맹 등에서 개최하는 국제 대회에 진출할 자격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대회는 해당 클럽에 경제적 이득과 명예를 안겨주기 때문에 각 클럽의 발전과 축구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몇몇 리그는 정규 시즌을 전기와 후기, 또는 아페르투라와 클라우수라로 나누어 진행하기도 하는데, 리그 특성에 따라 한 시즌에 두 개의 우승 팀을 가리는 경우도 있고 플레이오프와 같은 방식을 거쳐 통합 챔피언을 가리기도 있다. 또한 많은 나라에서는 해당 축구 협회에서 주관하는 토너먼트 방식의 컵 대회(FA컵)를 운영하고 있으며, 정규 리그 우승 팀과 컵 대회 우승 팀 간에 슈퍼컵 대회를 열기도 한다. 많은 축구 선수는 높은 연봉을 보장해 주는 각국의 유명 클럽에 소속되기를 희망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5대 리그로 불리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와 프랑스 리그 앙은 연봉 수준이 높고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리그로 꼽히기 때문에 세계의 많은 선수가 그곳에 진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대한민국 등 100개 이상의 국가에서 이들 리그에 실제로 진출한 선수들도 배출되고 있다.) 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IFFHS)에서는 이들 유럽 5대 리그와 함께 남미의 브라질 세리에 A,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등을 주요 리그로 꼽고 있다. 과거에는 프로그래밍 기술이 열악하여 축구의 게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기술의 한계가 극복되면서 다양한 축구 게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축구 게임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80년대에 나온 그 축구 게임들도 2차원 그래픽스로 된 형태였기 때문에 축구의 현실성을 따질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나온 축구 게임들은 《인도어 사커》, 《파워 플레이》 등이 있다. 19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조금씩 축구 게임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나온 게임들은 《킥오프》, 《캡틴 츠바사》, 《월드 컵 90》 등이 있다.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축구 게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첫 시작은 1992년에 아케이드에 등장한 《세이부 축구》로 이때부터 축구 게임의 인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 분야에서는 EA 스포츠가 《FIFA 시리즈》의 첫 번째 버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FIFA 시리즈를 능가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게임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코나미 사가 발매한 《위닝 일레븐》이다. J리그를 바탕으로 한 《위닝 일레븐》의 첫 버전이 1995년에 판매되었다. 이 게임들은 2000년을 전후로 하여 경쟁적으로 각기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각자 특화된 부분, 이를테면 FIFA 시리즈는 FIFA로부터 받은 공식 라이선스 등을 강조하는 반면에, 위닝 일레븐은 그 대신에 축구 게임 자체의 현실성을 내세워 사람들을 축구 게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한편, 양대 산맥을 이루는 두 게임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는 게임도 있는데, 바로 풋볼 매니저이다. 이 게임은 FIFA 시리즈와 위닝 일레븐과는 달리 축구 경기 자체를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직접 감독이 되어 팀과 선수들 전반에 관하여 컨트롤하는 색다른 방식을 취한다. 이 게임들은 매년 신버전을 출시하고 있다. 그리스 그리스()는 남유럽 발칸 반도 남쪽 끝에 있는 나라이다. 정식 명칭은 그리스 공화국()이다. 역사적으로는 헬라 또는 헬라스(Hellas, )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 음차 표기를 따라 한문으로 희랍(希臘)이라고도 일컫는다. 수도는 아테네이며,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 요안니나, 카발라, 로도스, 세레스, 코린트 등이 있다. 남유럽의 발칸반도를 바탕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 국가로, 알바니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터키와 접한다. 그리스 본토의 동쪽과 남쪽으로는 지중해의 일부인 에게 해, 서쪽은 이오니아 해가 위치하며 1,400여 개에 달하는 섬과 바위가 흩어져 있다. 대표적으로 크레타섬, 로도스섬, 산토리니섬이 위치한 키클라데스 제도 등이 있으며 해안선 길이는 세계에서 11번째로 길다. 그리스는 냉전시기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하였고, 가상적국이던 터키의 영향으로 인하여 발칸 반도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편으로, 그리스군은 유럽에서도 강한 편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1973년 그리스 군사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연평균 7%의 고속 성장을 이루어 그리스의 경제 기적이라 불린다. 그 뒤 성장세는 꺾였으나 경제 성장률은 남유럽에서 높은 편에 속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도 1949년에는 프랑스의 40%밖에 되지 않았으나 2008년에는 98%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실제 국민의 소득은 크게 진보된 점이 없어 현재 최저 임금은 시간당 3.5유로로 프랑스의 8.9유로의 절반도 되지 않고 평균 소득도 절반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다. 1인당 GDP는 만달러를 넘어서 17,000달러 수준이다. 현대 그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비잔티움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후손이다. 근대까지는 그리스인 대신 로마인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에도 그리스에서 로마인들이라 함은 자기 자신들을 가리킨다. 민주주의와 서양 철학, 올림픽, 서양 문학, 역사학, 정치학, 수많은 과학적ㆍ수학적 원리, 희극이나 비극 같은 서양 희곡 등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다. 그리스라는 국호는 세계 국가와 문화마다 칭하는 이름이 서로 다르다.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어들은 라틴어로 그리스 땅을 뜻하는 '그라이키아'(Graecia)에서 유래한 그리스(Greece), 그레시아(Grecia) 등으로 부르는 반면,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서아시아 계열 언어에서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그리스를 일컫던 단어인 이오니아()에서 따온 유나니스탄(), 알류난() 등으로 칭한다. 고대 그리스의 문명은 에게 문명, 미노스 문명과 그 뒤를 이은 미케네 문명에서 시작되었다.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인한 암흑 시대를 거친 이후 아테나이, 스파르타 등 일종의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폴리스 중 하나인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는 민주 정치를 발전시켰으며 경제적으로는 상업과 해상무역에 주력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폴리스 스파르타는 군국주의적 정치 체제를 취했으며 상업보다는 농업에 치중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페르시아 전쟁 때였다. 기원전 5세기 초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낸 뒤 전쟁 승리의 주역인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렸다.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스파르타는 역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은 뒤 아테네와 대립했다. 마침내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여 기원전 404년까지 약 30여 년 간 이어졌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스파르타는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쇠약해진 후였다. 스파르타는 결국 테바이에 패권을 내주었고 이후 오랜 전쟁으로 쇠퇴하게 된 그리스는 북방의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폴리스들을 완전히 진압한 뒤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더스강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뒤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휘하 장군들이 세운 왕조들은 모두가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이 그리스를 통치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오스만의 지배 직전에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서유럽으로 이주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전해주면서 서유럽 르네상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교 개종은 원칙적으로 자유였으며, 개종을 거부한 그리스도 교도들은 비잔티움 시대의 농민이나 봉건제하의 농노보다 조금 나은 생활을 감수해야 하였다.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 덕분에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본토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타지 사람과 섞이지 않고 결속을 유지하며 이후 현대 그리스의 정체성을 창출할 수 있었다. 1453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그리스는 역사에서 개별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다.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그리스 독립 전쟁의 결과, 런던 의정서에 의해 신생 그리스가 독립을 인정받았다. 1827년에 이오니아 제도의 그리스 귀족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새 공화국의 통치자로 선출되었으나 그가 암살당하자, 강대국들은 1832년에 왕정을 세우고 바이에른 왕국의 오톤을 국왕으로 옹립하였다. 1843년에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오톤은 헌법과 대의제 의회를 승인했으나, 영국 등 열강에 기댄 나약한 권위주의 통치자로서 결국 1862년 10월에 폐위되었다. 1863년에 덴마크 왕국의 빌헬름 공이 요르요스 1세로 왕위에 올랐으며, 영국은 그의 즉위 선물로 1864년에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할양하였다. 1877년, 그리스의 경제 발전에 공헌한 그리스 정계의 거물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는 왕권을 억누르고 의회 과반의 지지를 획득한 사람이 총리가 되는 원칙(dedilomeni)을 확립하였다. 독립 당시의 그리스의 영토는 아테네 일대와 펠로폰네소스반도 등에 국한되었으나, 1881년에 그 북쪽의 테살리아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그리스는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치른 발칸 전쟁의 결과로 마케도니아와 이피로스, 크레타섬 등을 차지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불가리아로부터 1919년에 서트라키아를 할양받아 현재의 국경을 거의 완성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탈리아로부터 1947년에 로도스섬 등 도데카니사 제도를 할양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외교 정책을 놓고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와 카리스마적인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사이의 갈등으로 그리스 정계는 양분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에 그리스는 무스타파 케말의 터키 민족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고, 로잔 조약에 의한 두 나라 사이의 인구 교환으로 약 150만 명의 그리스 피난민이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밀려들어 왔다. 한편, 약 50만 명의 무슬림이 그리스에서 추방당했다. 1923년부터 12년간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40년 10월 28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그리스의 독재자 요안니스 메탁사스가 거부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스는 이탈리아군을 알바니아로 몰아내어 추축국에 대한 첫 지상전 승리를 연합국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전쟁 직후 이탈리아와 연합한 나치 독일이 재침공하여 1941년 4월 말에 그리스 영토의 대부분이 독일군에게 점령되었다. 독일 점령군에 대한 그리스 저항군의 저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2년 후인 1947년 그리스 북부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게릴라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2년 만에 진압되었다. 그리스는 마셜 계획으로 전후 복구를 이루고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까지 좌파 세력이 전반적인 열세에 있었음에도, 30여 년간 군부세력의 쿠데타 등 정정 불안과 전쟁,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좌우파 간 심각한 사회 갈등을 겪었다. 1963년부터 파리로 망명했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전 총리가 돌아온 것이 메타폴리테프시의 시작이었다. 1967년 4월 21일,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등장한 사회주의 정권을 두려워한 우파 세력을 등에 업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73년 스스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73년 아테네 종합기술학교 시위로 정권은 타격을 입었다. 1974년 7월 20일 디미트리오스 요안니디스 장군이 역(逆)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었지만 터키가 키프로스 섬을 침공하자 정권은 붕괴되었다. 1974년 8월 14일, 그리스군은 터키의 북키프로스 점령에 항의하고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통합 군사 기지에서 철수했다. 1974년 그리스 국민 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고 1975년에 민주적인 공화국 헌법이 발효되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폐위되었다. 그러는 사이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신민주주의당에 맞서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하여 이후 그리스의 양당 정치 구도를 이루었다. 그리스는 1980년에 다시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했다. 1999년 여름에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를 강타한 지진 이후로 지난 십여 년간 양국 관계도 상당히 호전되었다. 오늘날 그리스 정부는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리스는 1981년 1월 1일 유럽 연합에 10번째로 가입했고, 그때부터 경제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 연합의 기금과 늘어나는 관광 수입, 해운업과 성장하는 서비스 부문 덕분에 기업과 인프라에 광범위한 투자가 이루어져 그리스의 생활 수준은 전례없이 높아졌다. 2001년 유로화가 도입되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2008년에는 경찰의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스는 발칸반도의 남단에 위치해있다. 그리스 본토 남쪽에는 펠로폰네소스반도가 있으며 그 사이에 코린토스 지협으로 운하가 있다. 해안에는 에게해의 크레타, 에비아, 레스보스섬, 히오스섬, 도데카니사 제도, 키클라데스 제도, 스포라데스 제도가 있으며 이오니아해에도 섬이 많다. 그리스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해안선(14,880km)이 긴 나라이다. 육지 국경선은 1,160km이다. 그리스의 4/5는 산지나 구릉으로 되어있어 유럽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나라이다. 유사 이래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장소였던 올림포스산에서 가장 높은 미티카스봉은 높이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2,917m에 이른다. 한때 신들의 옥좌로 여겨지던 이 산은 오늘날 등산가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서부 그리스 지역에는 호수와 습지가 많으며 핀도스산맥이 있다. 핀도스산맥은 발칸의 디나르알프스산맥의 연장으로, 가장 높은 스몰리카스봉은 높이가 2,637m이다. 비코스 아오스 협곡은 장대한 모습으로, 스포츠 매니아들의 인기있는 행락지이다. 산계는 중앙펠로폰네소스를 지나 에게해 남서쪽의 키티라섬과 안티키티라섬으로 이어져서 크레타섬에서 끝난다. 에게 해의 섬들은 과거 그리스 본토에 속했던 지금의 해저 산맥의 봉우리들이다. 핀도스산맥는 높고 가파른 봉우리로 유명하며, 협곡과 다양한 카르스트 지형을 보인다. 특히 정교 수도원이 많은 메테오라에는 높고 경사가 급한 바위 지형으로,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다. 그리스의 강들은 대부분 얕고 계절에 따라 말라서 항해에 부적합하다. 가장 긴 강은 북부의 할리아몬강이다 그리스 북동부에도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의 접경으로 로도피산맥이 있다. 이 지역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다디아 숲은 그리스의 북동부 멀리 에브로스에 있다. 테살리아, 중앙마케도니아, 서트라키아에는 넓은 평야가 있다. 이곳은 그리스의 얼마 안되는 경작하기 좋은 농지일 뿐 아니라 중요한 경제 지역이 입지하고 있다. 그리스의 기후로는 세 가지가 있다. (지중해성, 고산, 온대) 핀도스산맥 때문에 그리스 서부 지역은 동부보다 평균적으로 더 침윤(浸潤)하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엔 온난 다습하고 여름엔 고온 건조하다. 키클라데스, 도데카니사, 크리티, 펠로폰네소스 동부, 중부 그리스 일부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스는 산지가 많은 데다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지만 해안 지역에서 기온이 극단적으로 오르내리지 않는다. 도데카니사나 키클라데스제도에서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리스 북서부 지역(이피로스주, 중앙그리스, 테살리아, 서마케도니아주)에는 고산 기온이 지배적이다. 핀도스 산맥이 지나는 아하이아, 아르카디아, 일부 라코니아 등 펠로폰네소스 중부 지역도 마찬가지 기후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온대 기후는 중앙마케도니아주,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에 영향을 주는데, 겨울엔 춥고 다습하며 여름엔 덥고 건조하다. 아테네는 지중해성 기후와 온대 기후 사이에 있다. 이 도시 북부 교외 지역에는 온대 기후를 보이지만, 시가지나 남쪽 교외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이다. 아테네는 낮에는 찌는 듯이 더운 반면 저녁은 시원해서 야외생활과 야간생활이 발달되어 있다. 수도는 아테네이다. 주요 도시로는 테살로니키, 라리사, 파로스, 요안니나, 이라클리오 등이다. 행정 구역상 그리스에는 13개의 주가 있으며, 총 51개의 현으로 나뉜다. 또 중앙마케도니아주와 접한 아토스산은 자치 구역이다. 1980년 이래 그리스의 도로망과 철도망은 매우 현대화되었다. 중요한 사업 중에는 에그나티아 고속도로(Εγνατία Οδός,)가 있는데 이 도로는 북서부 그리스의 이구메니차항에서 그리스-터키 국경이 있는 키피를 잇고 있다. 리오-안티리오 다리(유럽에서 가장 긴 사장교. 2,250m)는 펠로폰네소스 서부의 리오(파트라에서 7 km)와 그리스 중부 본토의 안티리오을 연결한다. 그리고 파트라-아테네간 국도를 2014년까지 펠로폰네소스 서부 피르고스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있다. 그리스에서 테살로니키로 가는 고속도로는 이미 완성되었다. 수도 아테네의 도시 구역에는 2001년 새 국제 공항이 들어섰고, 같은 해 민간이 운영하는 교외 국도인 아티키 도로도 개설되었으며, 2000년부터 지하철망이 확대되었다. 그리스 대부분의 섬과 그리스의 주요 도시는 항공편으로 연결되며, 올림픽 항공과 에게 항공 두 주요 항공사가 있다. 해운 분야에서는 수중익선이나 쌍동선(catamaran) 등 현대적인 고속 선박이 발달했다. 철도의 역할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부족한 편인데, 그러나 아테네 주변 새로운 교외 지역 연결이나 아테네-테살로니키간 철도망은 계속 확대되고 있으며, 2,500km의 철도망 중 많은 곳에서 복선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간 철도는 그리스 도시와 발칸, 터키를 이어준다. 그리스는 대통령제를 채택한 공화국이다.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의회에서 선출된다. 현행 헌법은 제5차 그리스 개헌 의회에서 채택한 것으로, 7년간의 군부 독재(1967-1974)가 무너지고 1975년에 발효되었다. 그 후 1986년과 2001년에 두 번 개정된 바 있다. 120개의 조항으로 된 헌법은 삼권 분립, 시민 자유와 사회권의 광범위한 보장(2001년에 더욱 강화되었다.)을 담고 있다. 입법권은 300명으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 행사한다. 의회에서 통과한 법령은 대통령이 반포한다. 의회 선거는 4년마다 실시되나, 특별히 중요한 국가적인 문제 때문에 내각의 제안이 있으면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게 되어 있다. 야당이 불신임 결의를 통과하려 할 때 대통령은 그 전에 의회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여성 투표권은 1952년 헌법 개정때 보장되었다. 사법권은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독립되어 세 개의 최고 법원이 있다. 사법부는 3심제도로서 대법원, 고등법원, 하급법원으로 구성되며, 행정부의 위헌 여부 및 행정권 남용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따로 있다. 군부 독재가 종식된 민정 이양 이후 그리스 정치는 자유주의 보수정당 신민주주의당(ND)과 사회민주주의 정당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PASOK)이 양당제를 이루고 있었다. 경제 위기 이후 PASOK은 선거에 참패하면서 몰락했고 좌익대중주의 성향의 급진 좌파 연합(SYRIZA)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른 정당으로는 그리스 공산당(KKE), 대중 정교회 연대(LAOS), 황금새벽당(XA) 등이 있다. 그리스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195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61), 유럽 연합(EU, 1981년), 서유럽 연합(WEU, 1995), 유럽경제통화동맹(2001), 유럽 우주국(ESA, 2005) 가입국이고, 흑해 경제 협력 기구의 창립 회원국이다. 그리스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는 키프로스와 에게해를 두고 터키와 갈등을 빚고 있다. 19세기까지 수백 년간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리스는 터키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영향으로 키프로스 공화국 내부에서 터키계(북키프로스)와 그리스계가 대립하고 있다. 또한 북마케도니아의 국호 변경 전까지 마케도니아 국호 분쟁이 있었다. 그리스는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여 지원하였다. 1961년에 대한민국과 공식 수교하였다. 그리스는 발칸반도에서 제일 강력한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상비군의 수는 약 177,600명이며, 예비군의 수는 약 280,000명 정도이다. 그리스군은 구 냉전 시절부터 공산주의 국가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상의 적국인 터키가 옆에 자리잡고 있어 발칸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포병 화력은 EU 국가 중 수준급으로 꼽힌다. 그리스 육군의 공식적인 명칭은 엘리니쿠스 스트라토스 (Ελληνικός Στρατός, Hellenic Army) 이며, 병력은 3.5세대 전차를 353대, 2세대 전차를 520대, 1세대 전차를 390대 정도 보유하고 있으며 장갑차는 2,671대, 박격포는 4,065문, 수송 차량은 11,331대 정도를 보유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공군은 4세대 전투기를 200기, 3세대 전투기를 57기, 2세대 공격기를 51기, 조기경보관제기를 4기, 헬리콥터를 254기 정도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 해군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 4,000톤급 호위함을 13척, 초계함과 고속정을 33척, 잠수함을 8척 정도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통계 부서는 그리스 국립 통계국(NSSG)이다. 국립 통계국에 따르면 2001년 그리스의 총 인구는 10,964,020명이었다. 여기서 남성은 5,427,682명, 여성은 5,536,338명이다. 1971년, 1981년, 2001년 통계를 살펴보면 그리스의 인구는 지난 수십여 년간 점차 늙어가고 있다. 그리스의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4년 현재 (유럽 통계청 추정) 1.29명으로 유럽연합 내에서도 낮은 편이다. (1981년에는 1,000명당 14.5명이었으며, 2003년 출산율은 1,000명당 9.5명이었다.) 또 사망률도 1981년 1,000명당 8.9명에서 2003년 1,000명당 9.6로 약간 올랐다. 2005년 현재 1,000명당 출산율은 9.4명, 1,000명당 사망율은 9.2명으로, 간신히 자연증가 상태에 있다. 2001년 인구의 16.71%가 65세 이상이었으며, 68.12%는 15세에서 64세 사이였고, 15.18%는 14세 이하였다. 그리스 사회는 시간에 따라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혼인율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1,000명당 71명으로 계속 떨어지다가 2003년에 1,000명당 61명으로 약간 늘었다가 2004년에 다시 51명으로 떨어졌다. 이혼율은 계속 늘었는데, 1991년 결혼 1,000건당 191.2건이었다가 2004년에는 1,000건당 239.5건으로 집계되었다. 그리스 인구의 거의 2/3은 도시 지역에 산다. 2001년 그리스의 큰 도시로는 아테네, 피레아스, 파트라, 이라클리오, 라리사, 볼로스가 있다. 20세기에 수백명의 그리스인들이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로 이민 가서 그리스 디아스포라 인구는 오늘날 거의 6백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80년대부터 그리스 경제가 발전하자 오히려 외부에서 이민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스 이민 정책과 실행, 데이터 수집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이민자 인구를 완벽하게 수합하기 곤란하며 상당부분 추측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지중해 이민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 국립 통계국의 2001년 인구조사에서 그리스 시민권 없이 그리스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가 762,19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약 7%이다. 또 이들 중 48,560명은 유럽연합이나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에서 왔으며, 특별 자격으로 키프로스인 17,426명이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이들 발칸 국가에서 온인구가 전체 외국인의 2/3을 차지한다. 구 소련(조지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 출신 이주자도 총 외국인 중 10%를 차지한다. 非유럽연합 이주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아테네 지역이다. 약 132,000명에 이르며 지역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테살로니키는 두 번째로 외국인이 많은 곳으로 지역 주민의 7%인 27,000여명이 산다. 그 다음으로는 대도시 근교나 농업 지대가 있다. 또 알바니아인은 전체 이민자의 56% 정도 되며, 불가리아인(5%), 조지아인(3%), 루마니아인(3%), 기타(터키인, 아랍인 등)도 있다. 미국, 키프로스, 영국, 독일은 총 외국인 인구에서 각각 2% 정도이다. 나머지 690,000여 명은 非유럽연합 이민족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에 거주하는 외국 인구(기록과 추정을 합해)는 그리스 혈통의 이민자까지 포함해서 사실상 8.5% 혹은 10.3%로 집계되며, 대략 1,150,000여 명에 달한다. 오늘날 그리스는 언어상 비교적 동질적인 사회이다. 토착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 문자를 쓰는 그리스어를 구사한다. 트라키아에는 터키어, 불가리아어(포막), 루마니아어를 쓰는 소수의 무슬림들이 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0.95%에 불과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집시어도 쓰인다. 그리스 여러 지역에서 더욱 소수인 언어도 분포한다. 20세기에 그리스어 사용인구와 동화되면서 이들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수도 아테네 근교 시골 지역에 주로 사는 알바니아어를 쓰는 집단 아르바니테스 그리고 알바니아어와 밀접히 연관된 언어를 쓰며 중부 그리스의 산지 곳곳에 살고 있는 블라크(Vlach)라고도 하는 아로마니아인과 모글레니테스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런 집단은 인종적으로 그리스인과 동일시되며 오늘날 모두 모국어와 더불어 그리스어를 함께 구사한다. 이제 많은 지역에서 이들의 전통 언어는 늙은 세대가 겨우 유지하고 있으며 사멸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스 북쪽 접경에는 슬라브어를 쓰는 집단이 있는데, 인종적으로는 대개 그리스인에 속한다. 이들의 방언은 언어학적으로 (지역에 따라 "슬라보마케도니아어" 혹은 "슬라브어"라고 하는) 마케도니아어 혹은 불가리아어(트라키아의 불가리아어계 무슬림이 쓰는 "포막"과는 다르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스의 유대인 집단은 에스파냐계 유대어인 라디노어를 쓰며, 오늘날 겨우 수천 명만 남아있다. 그리스어 사용 인구 중에는 폰토스 그리스어를 쓰는 집단도 있는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박해를 받고 소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꽤 큰 집단을 이룬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는 관광지와 호텔에서 통용된다. 그리스는 2004년에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준회원국이 되었고, 2006년에는 정회원국이 되었다. 그리스 헌법에서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이 나라의 "우세한"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동방 정교회는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 시절 그리스인들의 의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독교는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종교에 대해 통계를 작성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 국무부에 따르면 97%의 그리스 시민이 자신을 그리스 정교회 신자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 위원회의 통계 부서인 유럽 통계국(Eurostat)에 따르면 2005년 유로바로미터 설문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한 그리스 시민은 81%였는데, 몰타, 키프로스와 함께 유럽연합 국가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소속된 그리스인은 50,000여명이며, 이민자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는 200,000여명이다. 성공회 와 개신교 신자도 소수 있다. 주로 트라키아에 거주하는 소수 이슬람교 공동체의 경우 대략 98,000명에서 140,000명 정도로 나왔는데, 이민자 출신 무슬림의 수는 200,000에서 300,000여명 정도였다. 알바니아 이민자는 대부분 세속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보통 무슬림 신앙과 연관된다. 그리스에서 유대교는 신약성서인 사도행전의 성 바울의 선교이야기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 넘게 존재했다. 스파라드 유대인들은 테살로니키(데살로니가, 데살로니카)에 상당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그리스인 집단은 대략 5,500명 정도로 집계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는 그리스 경제 기적을 이룬다. 1950년에서 1973년 사이 GDP는 평균 7%로 성장했다.그리스는 유럽 연합의 기금을 지원 받는 동안 수많은 구조/재무 개혁을 시행했다. 2001년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그리스의 GDP 연간 성장률은 유럽 연합내 대부분의 국가 수준을 상회한다. 오늘날 서비스업은 그리스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중요 산업이며 다음으로 기타 산업과 농업이 있다. 관광업은 외화 수입의 주요 원천이며, 그리스 총 GDP의 15%를 차지하는데다 총 노동 인구의 16.5%가 직간접적으로 여기에 종사한다. 그리스는 발칸 반도 국가 중 선도적인 투자국으로, 2006년 국립 그리스 은행은 터키 피난스뱅크의 46%, 세르비아 Vojvođanska 은행의 99.44%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제조업은 GDP의 13%이며, 이 중 음식 산업이 주도적이다. 공공 부문은 GDP의 40%인데, 정부에서는 이 비중을 더 줄이고 있다. 첨단 기술 장비 생산(특히 텔레커뮤니케이션)도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이다. 다른 주요 산업으로는 섬유, 건축 자재, 기계, 운송 장비, 전자 제품 등이 있다. 건설업은 GDP의 10%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으로 건설붐이 일어났으며, 이 나라 경제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GDP 7%의 농업 부문도 중요하다. 그리스의 노동 인구는 총 490만 명으로, OECD 국가 중 대한민국 다음으로 많다. 그로닝엔 성장 개발 센터는 1995~2005년새 그리스는 유럽 국가 중 시간 대비 노동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스 노동자는 연간 평균 1,900 시간을 일한다. 그 다음은 에스파냐가 있다. (연간 평균 1,800 시간) 2007년 노동시간당 GDP는 20$로 에스파냐와 비슷하며, 미국의 시간당 평균 임금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치이다. 이민자들은 노동력의 거의 1/5을 차지하며 농업과 건설업에 주로 종사한다. 그리스의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는 세계 28위이다. 1인당 gdp는 아직 낮은 17.890달러이다 2006년 그리스는 인간개발지수 18위를 차지했으며, 2005년 이코노미스트지의 세계 삶의 질 지수에서 22위를 차지했다.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 따르면 아테네의 생활비는 뉴욕의 비용에 90%에 근접하며, 시골 지역은 이보다 더 낮았다.하지만 낮은 1인당 gdp로 높은 물가에 허덕인다. 해운업은 예로부터 그리스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해운업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GDP의 4.5%를 이루며, 160,000여명을 고용하고 있고(전체 노동력의 4%), 이 나라 무역 적자액의 1/3에 해당한다. 1960년대 그리스 선박의 규모는 거의 두 배로 늘었는데, 주로 해운 재벌 오나시스와 니아르코스의 투자 때문이었다. 현대 그리스 해운 산업의 기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형성되었는데, 이때 그리스 해운업자들은 1940년대 미국의 선박 판매법에 따라 미국 정부가 이들에게 판매한 잉여 선박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미국 교통부 교통통계국(BTS)에 따르면, 그리스 소유의 해운 선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세계 선박 용량(총 141,931,000 dwt)의 18%인 3,079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선박 종류로 보면, 그리스는 유조선이나 드라이 벌크선에서 1위이고, 컨테이너선은 4위, 다른 배 종류도 4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박 수는 1970년대 말 최대 5,000척에서 줄어든 것이다. 그리스에서 광대역 인터넷은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일반 인구의 약 13.4%가 광대역으로 인터넷(주로 ADSL2)에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 접속, 사무, 멀티플레이 게임이 가능한 인터넷 카페도 그리스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휴대전화 네트워크상의 모바일 인터넷이나 와이파이 핫스팟도 있으나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그리스의 전략적 위치, 우수한 노동력, 정치적/경제적 안정 덕분에 에릭슨, 지멘스, SAP, 모토롤라, 코카콜라 등 여러 다국적 회사가 지역 연구개발(R&D) 본부를 그리스에 두고 있다. 그리스 개발부의 연구기술일반과에서는 국가 연구 기술 정책을 설계, 시행,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2003년 연구 개발에 45,637만 유로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이는 2002년보다 12.6% 증가한 것이다) 공공과 민간 부문 모두 아울러 GDP 대비 총 연구개발 지출은 1989년에 0.38%에서 2001년에는 0.65%로 지난 십 여년간 눈에 띄게 늘었다. 그리스의 연구개발 지출은 아직 유럽 연합 평균치인 1.93%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OECD와 유로스탓 자료에 따르면 1990년에서 1998년 사이 그리스의 총 연구개발 지출은 핀란드와 아일랜드 다음으로 유럽에서 3위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인큐베이터 시설을 갖춘 그리스의 기술 단지로는 크리티 과학기술 단지(이라클리오), 테살로니키 기술 단지, 라브리오 기술 단지, 파트라 과학 단지 등이 있다. 그리스는 2005년부터 유럽우주국(ESA)의 회원국이다. 그리스 국가 우주 위원회는 1990년대 초부터 유럽우주국과 협력을 시작했다. 1994년 그리스와 유럽우주국은 첫 제휴 협약을 맺었다. 2003년 공식적으로 정식 회원에 신청하여, 그리스는 2005년 3월 16일 유럽 우주국의 16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유럽우주국 회원국으로서 그리스는 우주국의 통신, 기술 활동, 세계 환경 및 안보 모니터링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초등학교(Δημοτικό Σχολείο, Dimotikó Scholeio)와 김나지움(Γυμνάσιο)은 의무 교육이다. 탁아소(Παιδικός σταθμός, Paidikós Stathmós)는 의무는 아니지만 많이 이용한다. 유치원은 현재 4세 이상 유아에게 의무가 되었다. 아이들은 6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6년간 다닌다. 김나지움은 12살에 들어가며 여기서 3년간 공부한다. 그리스의 의무 중등 교육 이후에는 두 가지 학교 유형으로 진로를 정할 수 있다. 상급 중학교(Ενιαίο Λύκειο, Eniaia Lykeia)와 기술 직업교육 학교(Τεχνικά και Επαγγελματικά Εκπαιδευτήρια, "TEE")이다. 여기에는 직업 교육 기관(Ινστιτούτα Επαγγελματικής Κατάρτισης, "IEK")도 있는데, 하급 중학교(Gymnasio)와 상급 중학교(Lykeio)를 졸업한 학생들이 여기에 오면 정해진 특정한 교육 단계로 구분되지 않는 교육 방식으로 가르친다. 공공 고등 교육으로는 "최고 교육 기관"(Ανώτατα Εκπαιδευτικά Ιδρύματα, Anótata Ekpaideytiká Idrýmata, "ΑΕΙ")과 "최고 기술 교육 기관"(Ανώτατα Τεχνολογικά Εκπαιδευτικά Ιδρύματα, Anótata Technologiká Ekpaideytiká Idrýmata, "ATEI") 이 두 가지 대학교 유형이 있다. 학생들은 상급 중학교(lykeio) 3학년 과정을 수료하고 국가 시험을 쳐서 대학에 입학한다. 22세 이상의 학생들은 추첨 형식으로 그리스 개방 대학교에 입학한다. 아테네 대학교는 동지중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그리스의 교육 제도는 학습 장애나 다른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 유치원, 초중등 학교도 둔다. 음악, 신학, 체육 분야의 전문 김나지움이나 고등학교도 있다. 관광업은 그리스의 소득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2004년 그리스는 1,650만 여명의 관광객을 맞아들였다. 2005년 중국의 조사에 따르면 그리스는 중국인이 선호하는 관광지로 뽑혔으며, 수도 아테네에만 6,088,287명이 방문했다. 2006년 11월 중국과 비슷하게 오스트리아도 그리스를 선호 관광지로 발표했다. 2007년 그리스는 1,9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와 세계 관광지 중 상위 10위에 들었다. 로도스섬은 유럽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로 선정되었다. 다른 유명한 명승지로는 아테네, 북부 할키디키반도, 이오니아 제도의 케르키라, 미코노스, 산토리니, 파로스, 크리티 등이 있다. 그리스는 올림픽의 발상지로서 오랜 스포츠의 전통을 지닌 나라이다. 이 때문에 올림픽 개막식의 선수단 입장 과정에서는 그리스 선수단이 가장 먼저 입장하며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그리스의 국기 게양과 함께 그리스의 국가가 연주된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는 1896년 하계 올림픽과 2004년 하계 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올림피아 유적은 고대 올림픽 개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올림픽 성화 채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2007년 5월 FIFA 랭킹 20위를 기록하였으며, 축구 역사상 UEFA 유로 2004에서 놀라운 우승을 거두었다. 수페르 리가 엘라다는 16개 구단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최고의 프로 축구 리그이다. 이 가운데 강력한 구단으로는 올림피아코스 FC, 파나시나이코스 FC, AEK 아테네 FC, PAOK FC, 아리스 테살로니키 FC가 있다.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0년간 축구에서 우위를 지켜왔다. 2008년 8월 기준으로 세계 4위에 랭크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호주 연방(, ), 줄여서 오스트레일리아(, ) 또는 호주(濠洲)는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나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와 태즈메이니아 섬, 그리고 인도양과 태평양의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6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이다.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에는 솔로몬 제도와 바누아투, 누벨칼레도니, 그리고 남동쪽에는 뉴질랜드가 있다. 수도는 캔버라이고, 주요 도시로는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퍼스, 골드코스트, 애들레이드, 다윈 등이 있다. 18세기 말 유럽인들의 이주 이전에 최소 40,000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606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이후 1770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으며, 1788년 1월 26일부터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식민지로 죄인들을 수송해 정착시키기 시작하면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인구는 차츰 늘기 시작했고, 대륙은 계속 탐험되어 다섯 개의 자치 식민지가 추가적으로 건설되었다. 1901년 1월 1일, 여섯개의 식민지가 연합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설립하였다. 모국인 영국과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42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행정적으로 모국과 분리되었으며, 1948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영국 국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 법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 의회의 오스트레일리아 내 입법권이 정지되었으며, 사법권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으로 옮겨짐으로서 영국과의 남은 법적 종속관계를 단절하여 자주국가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과 캐나다,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표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며,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연방 성립 이후부터 대의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6개의 주와 2개의 준주, 6개의 특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약 2,290만의 인구는 대부분 동쪽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도시화 비율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오스트레일리아는 GDP가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높고, 1인당 GDP은 6번째로 높은 대표적 선진국이다. 군비지출은 12번째로 많으며, 인간 개발 지수에서 2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는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보호 등 다양한 국가간 비교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G20, OECD, WTO, APEC, 국제 연합, 영국 연방, 앤저스(ANZUS), 태평양 제도 포럼에 가입되어 있다. 한편, 2012년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나타났다. 정식 국호는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며 한국어권에서 공식적으로 일컫는 국호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이다. 그러나 이름이 너무 길고 비슷한 이름의 오스트리아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대한민국에서는 한자 음역인 '호사태랄리아(濠斯太剌利亞)'를 줄인 호주(濠洲)라는 이름이 더 많이 통용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주재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에서도 주한 호주 대사관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국명은 라틴어로 "남쪽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가상의 대륙인 테라 아우스트랄리스(Terra Australis)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국 잉글랜드의 항해사 겸 지도 제작자인 매슈 플린더스(Matthew Flinders)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817년에는 래클런 매쿼리 뉴사우스웨일스 총독이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지명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824년에는 영국 왕립해군이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대륙 이름을 승인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는 몇만 년 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애버리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고대 인류와 DNA가 가장 비슷한 종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된 이 나라의 역사는 17세기경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이 나라를 목격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1770년에 영국의 선장 제임스 쿡이 본격적으로 이곳을 탐험한 이래, 1901년 1월 1일에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얼마 후에 군대가 창설되었다. 1931년 12월 11일부터 웨스터민스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의 접촉, 그리고 최초의 영국인 정착자들에 관한 문제들 등은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애버리진은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부터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도착하였다. 그 후 2~4만 년 간 간빙기가 오면서 다른 대륙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하게 된다. 처음 17세기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새로운 네덜란드'라는 뜻의 뉴홀랜드(New Holland)로 명명했다.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을 때 약 100만 명의 원주민(애버리진)들이 30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사용되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부족들은 각자 고유한 토템을 갖고 있었으나, 드림타임에 대한 전승은 대개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인의 탐험 활동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업의 일환으로서 실시되었는데 경비가 가중되고 이익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1699년 영국의 해적 윌리엄 댐피어가 뉴홀랜드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보고는 비관적인 것이어서 탐험 열기는 냉각되었다.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 등의 탐험가가 그 일부를 바라본 데에 그치기도 하였다. 1769년 태평양에서의 금성 관측에 참가했던 제임스 쿡에 의해서 타히티, 뉴질랜드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탐험이 실시되어, 그곳의 일대를 ‘국왕의 이름과 국왕의 깃발 아래’ 점령하고, 뉴사우스웨일스(영국 웨일스에서 연유)라고 명명했다. 쿡은 그 보고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업 개발에 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때부터 이 땅이 하나의 대륙으로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뉴사우스웨일스는 얼마 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남쪽 대륙인 테라 아우스트랄리스에서 유래된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국의 죄수 폭증과 미국 독립 혁명(1776년)으로 인해 영국은 뉴사우스웨일즈 주에 새로운 유형(流刑)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식량의 자급 태세를 갖추는 일이 당초의 급선무였으나, 미지의 풍토에서 농업 경험자가 적었던 관계로 개발은 진척되지 않았다.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당시 영국의 왕은 조지 3세였다. 이와는 별개로, 179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유 정착민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개발이 진척되자, 시드니 서쪽에 급사면을 맞대고 솟아 있는 동부 고지의 일부를 이루는 산들이 식민지의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산들을 넘어가는 길이 발견되고, 산지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농목의 적지에 개발의 손이 뻗쳤다. 즉 1850년대에 골드 러시의 시대가 됐다. 배서스트, 벤디고, 밸러랫 등에서 발견된 금을 찾아서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빅토리아주와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시작된 금광 시대는 중국부터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850년의 40만 인구는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으로까지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장사꾼도 모여들어 이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영국 식민지 총독은 가혹한 세금 및 결정을 내리고, 결국 1854년 유레카 감옥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유혈 봉기가 일어난다. 이를 유레카 봉기라고 한다. 현재 멜버른에 있는 유레카 타워는 이 유레카 봉기를 기념한 것이다. 1880년대 시드니와 멜버른의 세련된 현재적인 모습은 이 금광 시대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1901년 1월 1일에 뉴질랜드를 제외한 6개의 식민지 연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독립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1901년, 20세기의 첫날을 기하여 각 식민지는 각 주로 재출발함으로써, 이 땅에 영연방(英聯邦)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였다. 1942년 10월 9일에는 외교권과 국방권을 얻은 자치령에서 독립국으로 발전하였다. 1986년 3월 3일에는 독자적인 헌법도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국민들 약 40만 명 정도가 참전하였고 그중 약 6만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다. 현재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 앤잭, Australia & New Zealand Army Corp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제1차 세계 대전(61,928명 전사), 제2차 세계 대전(39,400명 전사), 한국 전쟁(339명 전사), 베트남 전쟁(520명 전사)에 참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웬만한 동네에는 앤잭 언덕(Anzac Hill)이 있을 정도로 일상에 파고 들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매년 4월 25일을 앤잭 데이(Anzac Day)로 정하고 있다. 이 나라는 영연방 소속국가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보장한 1942년 웨스트민스터 법(Statute of Westminster Adoption Act 1942)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가원수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 추천을 받아 그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헌법은 1986년 3월 3일에 제정되었다. 영국식 의회제도를 채택하여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는 연방의회가 있다. 도시의 산업가 층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당, 지방의 농목업자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당이 3대 정당을 이룬다.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최초로 내각을 조직한 일도 있다. 1996년 3월 총선에서는 야당인 자유·국민당연합이 압승했다. 현 총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의 케빈 러드 제26대 연방 총리로서, 2007년 11월 24일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존 하워드가 이끌던 오스트레일리아 보수연립에 승리하여 총리로 정식으로 취임하였고, 부총리 겸 교육노동장관 줄리아 길라드가 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리더십 투표에서 승리, 총리직을 잠시 이끌었다. 2013년 6월 26일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2차 리더십 투표에서 케빈 러드가 재차 승리하여, 다시 총리직과 노동당 당수직에 재취임하였다. 2013년 9월 7일에 있었던 연방 총선에서는 야당인 자유국민당연합이 큰 차이로 승리함으로 야당 당수인 토니 애벗이 제28대 연방 총리로 취임하였다. 2015년 9월, 2년간 집권 중이던 토니 애벗 총리를 55 대 44로 누르고 맬컴 턴불이 제29대 신임 총리가 되었으나, 2018년 8월 24일 자유당 대표가 스캇 머리슨으로 교체되어 총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주 정부에 한정된 권한은 교육제도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크지만, 연방 전체에 관여하는 외교·국방·무역·금융 등은 연방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외교·군사면에서 전반적으로 모국인 영국의 영향이 후퇴하고 미국과의 유대가 강화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가맹했고, 베트남에 파병한 바도 있다. 미국·뉴질랜드와의 사이에 공동 방위체제를 갖는 앤저스(ANZUS)조약을 맺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가(國歌)인 Advance Australia Fair(오스트레일리아여, 힘차게 전진하라!)는 1984년에 제정되었다. 1999년, 폴 키팅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영연방 완전독립 지지자들의 요청으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이 나라의 군주제 폐지 및 체제 전환이 논의되었으나, 과반수(약 54%)가 전환에 반대하였다. "영국과의 우호" 및 (독립시 도입할) 정치체제간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2007년 1월의 여론조사(Newspoll 조사)에서는 45% 대 36%(19%는 무응답)로 공화국 전환에 찬성, 전세가 역전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상원(The Australian Senate)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상위입법기관으로, 정식으로 연방에 가입한 6개 주에 12명씩, 그리고 준주지역에 2명씩 대표의석을 할당하는데, 각 주를 선거구로 놓고 경쟁하는 대선거구제 방식을 취하며, 정당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하므로 군소정당에 다소 유리하다. 2007년 기준의 총의석수는 76명이다. 임기는 6년이며, 총선거마다 과반수(2009년 37석, 2007년 40석)가량의 의석을 교체한다. 현재 구성(정당별, 2011년까지 임기 기준)은 다음과 같다. 호주연방하원(The Australian House of Representative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하위입법기관이다. 그러나, 상원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으며, 영국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다수당 지도자, 즉 연방총리가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연방하원의 소수당 지도자는 '범야권의 지도자'(Leader of the opposition)로서 총리와 상호간 정책토론을 하며 주로 대립각을 세우나, 간혹 중요 국가적 정책사안에서는 긴밀히 협력한다. 전체 의석수(2007년 현재 150석, 정부구성을 위한 과반수는 76석)를 각 지역별 인구에 비례하여 배분한다. 영국과 유사한 소선거구제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1번, 그 후 차선으로 지지하는 후보들에 번호(등급)을 매겨 모든 후보들에게 기표하는 '선호투표(제)'에서, 최초투표에서 과반이 넘는 지지를 획득했거나, 과반 이상 득표자가 없을 경우 최다득표를 기록한 '최후의 2인' 중 가장 많은 지지(1차투표에서 과반이상 득표-하면 그대로 당선-자가 없으면 2차선호, 3차선호 등을 거쳐 가장 많은 선호를 차지하는 경우)를 얻은 후보가 당선된다. 양당제 정치문화의 발전과 전체 유권자들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군소정당들에게는 매우 불리하다. 2007년 11월 24일에 열린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1년간의 야당생활을 끝내고 케빈 러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새 연방하원의회는 2008년 2월 12일에 업무를 공식 개시하였다.(그 최종 구성은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회의원 총선거를 참조할것)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2010년 경쟁 및 소비자 법()에서 광고에 대한 규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2010년 경쟁 및 소비자 법 은 오스트레일리아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다. 2011년 1월 1일 이전에는, 1974년 거래관행법 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 법은 경쟁법으로서, 경쟁과 공정한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과 소비자 보호의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경쟁 및 소비자 위원회 (ACCC)가 동 법에 대한 행정기관이다. 동법은 사인들에게 소권(訴權)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동법의 제2장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소비자 법(ACL)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법원이 이 법의 위반에 관한 민사소송 및 행정소송에 관한 관할권을 가진다. 오스트레일리아는 6개의 주와 2개의 준주, 6개의 특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괄호는 약칭으로, 우편번호 등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많이 쓰인다. 1901년에 창립된 군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ustralian Defence Force, 약칭 ADF)'으로서 해군(Royal Australian Navy, 약칭 RAN), 육군(Australian Army), 공군(Royal Australian Air Force, 약칭 RAAF)을 아우르고 전체 병력은 약 51,000 여명에 이른다. 이 나라의 군사는 지원병제로 선발된다. 군병력의 거의 대부분은 국제연합의 평화유지 임무, 재난 구호, 국제적 무력 분쟁에 관여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동티모르와 솔로몬 제도 그리고 수단에 파병된 것을 들 수 있다.징집 가능연령 (16~49세) : 남자 499만여명,여자 417만여명이다. 적도 남쪽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동서 약 4,000km, 남북 약 3,200km에 이르며, 총 면적은 7,686,850km로 세계에서 6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78배) 기복이 많지 않은 단조로운 평면형을 보이고 있다. 지형·지질상으로 보아 이 대륙은 동부 고지·중앙 저지·서부 고원(西部高原)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 그리고 태즈메이니아 섬,그 외의 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7,617,930km에 달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는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 위에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평균 고도가 340 미터로 전대륙 중 가장 낮다. 고도별 빈도 분포에서는 200~500 미터에 해당하는 면적이 42%에 이른다. 즉, 호주 대륙은 낮은 대지가 넓게 퍼져, 기복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동남쪽에는 남북 방향으로 고기 조산대의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이 뻗어 있다. 최고봉은 수도 캔버라의 남남서 120 km 지점에 우뚝 솟은 코지어스코 산(2,230m)이다. 이 근처는 호주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지형으로 겨울에 눈이 오는 유일한 지형이기도 하다. 더욱 동쪽은 온난 습윤기후, 서안해양성 기후인 데다가 물을 찾기 쉬워 인구 밀도가 높다.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과 같은 대도시는 모두 이 지역에 분포해 있다. 대분수산맥의 서쪽은 건조한 스텝 기후의 대찬정 분지이지만,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므로, 소, 낙타 그리고 양을 방목하고 있다. 대찬정 분지보다 더욱 서쪽은 그레이트샌디 사막,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깁슨 사막 등의 사막이 퍼져있어, 인구 밀도가 매우 낮다. 노던 테러토리 준주 지역이다. 대륙의 서해안에는 퍼스가 있는 정도이다. 대륙의 북부는 열대우림 기후 또는 열대 계절풍 기후에 속하며, 카카두 국립공원으로 유명하다. 다윈이 중심이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그레이트배리어리프가 관광지로 유명하다. 케언즈가 이 지역의 관광 거점이다. 노던 준주에 있는 에어즈 락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된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에서는 석탄이, 대륙의 북서부에서는 철광석이, 서부에서는 금이 산출한다. 대륙 북부에서는 보크사이트나 우라늄이 나온다. 동부 고지는 대륙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초승달 모양의 지역을 차지하며, 대륙의 속도(屬島)인 태즈메이니아 섬도 같은 성상(性狀)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은 고기 조산대(古期造山帶)에 속하는 오래된 습곡산맥이 중평원 작용으로 완만한 지형을 보이는 파상지(波狀地)화하고, 그 후 제3기의 단층·요곡(撓曲) 등의 지각운동으로 융기한 곳이다. 고지라 해도 고도는 비교적 낮아 300∼1,000m 정도 되는 곳이 많으며, 앞서 말한 토지의 성격을 반영하여 정상부는 융기 준평원으로서 기복이 작은 고원상의 토지를 보인다. 그러나 가장자리, 특히 동쪽 가장자리에는 토지의 융기에 따라 회춘한 하천이 깊은 계곡을 파는 일이 많으며, 가파른 산곡 사면과 완만한 산정부를 갖는다.이 동부 고지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보면 현저하게 동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그 일련의 고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남태평양 방향으로 유입하는 것과 서쪽의 중앙저지 방면으로 흐르는 것으로 나뉘므로, 그레이트디바이딩산맥이라고도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알프스 산맥이라고 불리는 산지는 대륙의 남동부에 동부고지의 일각을 차지하며, 지루산지(地壘山地)로서 주변의 산지보다 한결 높아서 대륙의 최고부를 형성한다. 주봉 코지어스코 산은 해발 2,234m이며, 주변엔 빙하시대에 형성된 권곡(圈谷)이 존재하나. 알프스라는 이름에서 받는 고산형 인상과는 아주 먼 완만한 산형(山形)이 탁월하다. 이 부근은 일명 스노이 산맥(Snowy山脈)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설이 많고 한여름에도 잔설이 있으며, 대규모의 수자원 개발이 진척되고 있다. 중앙 저지(中央低地)는 동서로 긴 대륙 전체에서 보면 동쪽으로 좀 치우친 위치에, 대륙의 북쪽 해안에 크게 만입하는 카펀테리아 만의 깊은 곳으로부터 대륙의 남쪽 해안에 완만한 호를 그리며 얕게 만입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만의 동쪽 가장자리 방면에 걸쳐서 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일대 저지대이다. 해발고도는 200m 이하로 100m가 못되는 지역이 넓고, 에어 호(Lake Eyre) 주변에는 해수면 아래의 지역도 있다. 중앙 저지의 동남부·남부는 이 대륙에서 가장 큰 강인 머리 강(Murray), 달링 강(Darling) 수계의 유역이고, 북부는 카펀테리아 만으로 흐르는 여러 강의 유역인데, 중앙부에는 낮은 산맥에 의해서 달링 강 유역과 격리된 대규모의 내륙 유역이 있다. 대찬정분지: 중앙저지의 중앙부는 내륙유역으로서, 에어호에 구심적으로 유입하는 여러 강의 유역이 최대이며, 그 남쪽에는 프루움호 유역·토렌즈호 유역이 접해 있다. 내부유역의 하천은 말할 것도 없고 달링강과 같이 큰 하천까지도 유수를 보기가 드문 간헐천이 되고 있다. 지질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심한 지각운동을 받는 일이 없고, 고생대 말 이래의 지층이 퇴적되어 분지상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동부고지 방면에서 지표에 노출하는 다공질 지층은 중앙 저지의 중앙부에서는 지표하 수백m의 깊이에 존재하나, 동부고지 방면의 강수의 일부는 그 지층에 삼투(渗透)하여 중앙 저지대 방면에서 피압지하수(被壓地下水)로서 깊은 곳에 부존(賦存)하고 있다. 그래서 불투수층을 관통하여 대수층에 이르는 굴착우물에 의해서 지하수의 분출을 보게 된다. 서부고원은 중앙 저지의 서쪽에 펼쳐진다. 면적상으로는 대륙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인데, 해발고도는 300∼700m이고, 전체적으로 기복이 거의 없다. 지질적으로는 선캄브리아 시대의 기저 암반으로 이루어지며, 오랜 지질시대를 거쳐 준평원화되어, 방패를 엎어 놓은 듯한 형태를 전체적으로 보이는 데서 오스트레일리아 순상지(楯狀地)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완전히 한결같다는 것이 아니라, 중앙부에서는 맥도넬 산맥이 돌출하고 해머슬리, 킴벌리, 바클리 등 대지(臺地)를 싣고 있다. 지역의 태반은 건조기후 아래 있으며, 북부지역·서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유로도 없고, 중앙저지에는 심프슨 사막, 중앙부엔 그레이트샌디 사막,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이 펼쳐져 있다. 기후의 특색은 그 건조성에 있다. 내륙부는 물론 서쪽 가장자리에서 남쪽 가장자리의 바다에 접한 부분까지 반사막의 식생이다. 한편, 남회귀선이 국토의 중앙을 동서로 종단하고 있어, 위도상으로는 국토의 39%가 열대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지역이 많다. 대륙의 동북 연안부는 무역풍의 영향으로 강우량이 많고 열대우림을 이룬다. 동남부는 온대 해양성 기후하에 있어 인류에게 쾌적한 기후환경을 보이며, 이 대륙에서의 인구분포의 중심지대를 이룬다. 대륙 남쪽 가장자리의 애들레이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대륙의 서남지역은 온대 겨울비의 지중해성 기후이다.열대에 속하는 대륙의 북쪽 지역에는 우계와 건계의 교체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가 탁월하며, 내륙으로 감에 따라 사막을 둘러싸는 스텝기후(초원기후) 지역으로 변해 간다. 기후의 특성에 따라 식생에 특징있는 변화가 보이는데, 유카라와 아카시아는 가장 탁월한 수종(樹種)이다. 동물로는 캥거루, 코알라, 오리너구리, 가시두더지 등의 특이한 동물의 분포를 보이며, 이 오랫동안 격리되었던 대륙의 한 특성을 보여준다. 선사시대부터 오래도록 다른 대륙과 격리되어 오면서 호주의 동물계는 세계의 다른 동물과는 다른 계통을 따라 진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대륙에서는 유대류가 태반에서 태아를 키우는 포유동물을 대신하여 번성하게 되었다.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흔한 유대류인 캥거루는 약 90종이 있는데, 크기가 2.5미터나 되는 붉은캥거루로부터 불과 20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쥐캥거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호주 고유의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캥거루도 초식동물이며, 성질이 온순한 코알라는 유칼립터스 나무 위에서만 산다. 예외적으로 ‘태즈메이니아 데블’이라고 하는 개처럼 생긴 육식동물이 있는데, 이 동물은 호주 본토에는 없고 섬에만 살고 있다. 오리 부리를 한 오리너구리는 알을 낳는 수생 포유동물로서 독특한 유대동물이다. 역시 호주에만 생존하는 이 동물은 두 종류의 바늘두더지(spiny anterater)와 더불어 다른 곳에서는 멸종된 포유동물의 한 목(目)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토가 넓고 기후가 다양하여 천연 자원이 많다. 이 자원들을 그대로 해외에 수출하거나, 또는 이를 가공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광 산업 또한 발전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곧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양·밀 및 원야(原野)에서 뛰어다니는 캥거루 등이다. 이것은 아무리 자원의 개발이나 공업화가 진척되어도 아직도 농목업이 이 나라 경제의 기반이 되어 있고, 경제활동의 분포는 인구분포와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대륙의 동남 지역에 편재하며, 원야인 채로 남겨진 공백의 토지로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 일이다. 그러나 농목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최근 급격히 변해 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아르카링카 베이즌에 최대 2330억 배럴의 유전을 발견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유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 유전의 가치는 약 20조 호주달러이며 한화로는 무려 2경300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아직 수익성 석유가 개발될지는 미지수지만 원유 추출에 성공한다면 원유는 호주 전체가 자급자족하고 수출까지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양이다. 발견된 호주 유전이 고대기에 형성됐으며, 석유와 천연가스를 머금은 화석화된 물질, 케로겐이 풍부한 것으로 조사됐다. 배럴당 100달러 선으로 움직이는 원유 1000억 배럴만 뽑아내도 엄청난 숫자임에 틀림없고 발견된 유전에서 최소 35억 배럴에 달하는 셰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목축업은 이 나라 산업의 중심이다. 목양은 식민 당초부터 도입된 메리노종을 중심으로 하여 대륙 북부의 열대기후 지역과 중앙부의 극단적인 건조 지역을 제외하고 널리 행하여지고, 양모의 산출액은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넘어 세계 제1위이다. 육우는 양보다도 고온인 대륙 북부지역이나 내륙에도 방목되며, 또한 연안부의 다습지역에도 분포한다. 젖소는 동부·남부의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인구 집중지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분포를 한다. 방목에 적합한 자연을 가진 넓은 국토, 과소한 인구로 하는 개발, 개발 초기 단계에서의 본국의 왕성한 양모의 수요, 대찬정분지의 지하수 개발, 냉동선의 발명 등에 의해서 오늘날의 이 나라의 목축은 발전해 왔다. 국토의 약 66%가 농목지인데 그중에 90%가 방목지이다. 농업은 밀을 중심으로 하여 매우 왕성하다. 신식민지의 식량 자급을 목표로 하여 시작되었던 밀의 경작도 오늘날에는 세계 유수의 생산국으로서 알려져 있다. 총생산량은 27,410,100 톤(2011년, 세계 6위, 3.89%)이다. 밀 지대는 최적의 자연적 조건을 갖는 지역에 합치하여 출현하였는데, 대륙 동남부·동부 고지의 내륙쪽을 따라서 분포하며, 또한 내륙 서남부의 일각도 차지하고 있다. 광업에 관해 보면, 국토엔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각지에서의 금광 발견이 이 나라 경제 발전의 일대 계기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밖에 납·아연·철·보크사이트·석탄·갈탄 등도 산출되며, 납은 세계 제3의 산출량이 있다. 광산자원 중에서 과거에 산출되지 않던 석유와 천연가스도 개발이 진척되어 채굴되고 있다. 공업은 전반적으로 침체하고 있다. 1차산품을 수출하여 필요한 완성품을 수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식민지에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더욱 공업화가 촉진되어, 외부에서 보는 이 나라의 인상과는 반대로 공업생산액은 제1차산업의 생산액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기간산업으로서의 철강업과 급속히 발달한 자동차공업 등 중공업의 발전도 눈부시다. 그러나 자원의 편재·높은 임금·좁은 국내시장 등이 문제점으로 되어 있다. 20세기 초기까지 수출의 70%는 영국 본국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대영 의존도는 감소하여 1970년대에는 4%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입국에 있어서도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수입 총액의 40∼50%를 차지하였으나 1970년대에 23%로 떨어졌고, 최근에는 3% 이하로 그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 이에 대신하여 미국, 일본, 독일로부터의 수입이 증가하였고 EU 국가와 캐나다로부터의 수입도 늘었다. 이후로는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하여 2009년에는 중국, 일본, 대한민국이 가장 중요한 수출 상대국이었고, 수입에서도 중국으로부터의 금액이 가장 많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대상국은 중국이 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미국(13.29%), 중국(8.26%), 독일(6.26%), 영국(4.17%)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중국(14.08%), 미국(8.76%), 독일(7.77%), 일본(4.49%), 프랑스(3.31%)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30,163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228,44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철광석(48,344백만 달러), 석탄(43,296백만 달러), 천연 가스(19,669백만 달러), 금(13,003백만 달러), 보크사이트(5,617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15,101백만 달러), 엔진과 자동차(8,988백만 달러), 석유(7,495백만 달러), 통신 장치(7,325백만 달러), 잠수정(6,191백만 달러)이다. 넓은 국토 중에서 인구가 집중하고 경제활동이 왕성한 지역이 현저하게 편재하므로, 교통 사정도 이를 반영하여 지방에 따라서 교통로의 소밀(疏密)이 현저하다. 그리고 국토의 개발이 구식민지 이래의 전통에 따라서 독자적으로 행하여졌으므로, 철도 궤도의 폭이 각주마다 달라서, 주 경계에서 갈아타는 데 불편하다. 시드니-멜버른 간에 직통열차가 다니게 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자동차의 보유율이 높아서 자동차 교통이 매우 왕성하고, 국내 항공로도 현저하게 발달하여 국민 1인당의 항공기 이용률은 세계 제1위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석기시대와 똑같은 수렵생활을 영위한 데 지나지 않았으며, 식민지 당국은 그 노력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원주민 인구는 크게 감소하여 순혈종의 원주민 약 4만 명이 특별보호구에서 보호 생활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주민 구성을 생각할 때 원주민은 현실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이 나라의 주민은 모두 최초의 선대 이래 도래한 사람들이며, 현재 총인구 약 1,973만 중 96%가 유럽계 백인으로 구성되어 명실공히 ‘백인의 천하’라 해도 좋겠다. 그중 영국계가 압도적으로 많아 90%를 차지한다. 오랫동안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를 꾀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급속한 자원 개발,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고, 또한 1930년대의 낮은 출생률에 기인하는 인구 구성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 이민 수용정책이 채용되었다. 이탈리아·그리스·네덜란드·독일 등지로부터의 이민이 많다. 한편 골드러시 때의 중국인 채광부와의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의 덤핑·생활 정도의 저하 등의 문제가 얽혀서 발생한 백호주의 정책이 최근까지 채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 여론과 아시아로 눈길을 돌린 이 나라의 입장 등으로 백호주의 정책이 파기되었다. 국어는 영어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된 복지국가이다. 사회보장제도는 고령자·신체장애자 등에 대한 연금과, 실업자·병약자·자녀가 있는 가정에 대한 수당 등이 있다. 그 밖에 여러 복지단체에 대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 주택정책이 잘 되어 있어 2008년 기준으로 호주의 주택 보급률은 70%를 조금 웃돌아 세대의 약 25%의 정도는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영국계 주민이 많고, 영연방의 하나인 탓에 생활양식이 영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대다수의 호주인들은 퇴근 후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을 하루 중 가장 큰 낙으로 생각한다. 크리켓·론 볼링·럭비 등의 스포츠가 활발하다. 이 외에도 골프나 경마, 수상 스포츠, 캠핑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는 지역적으로 있는 ‘아르보(오후라는 뜻)’라는 정원 맥주파티에서 서로 어울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흔히 예고없이 친구와 친척집을 ‘잡담하러’ 방문하는 관습이 있고, 시골에서는 남녀가 따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느긋한 옥외생활의 분위기는 먹는 일과 그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이곳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 바비큐라는 요리를 항시 즐기게 되었다. 많은 공원이나 해변가에서는, 점심때나 저녁식사시간이면 불에 굽는 스테이크와 갈비 소시지의 냄새가 환담소리와 맥주 깡통 비우는 소리와 어울려 은은히 새어 나온다. 야외식사의 풍습은 굴·게·바닷가재, ‘야비’라고 하는 민물가재 등을 파는 거리의 노점에서도 성행되고 있다. 도박도 널리 행해져 대규모 사교클럽이 인기가 있고, 행락을 위하여 해외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조건을 몇 가지 갖고 있다. 그들은 일년에 4∼5주의 휴가와 연중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다수의 공휴일을 확보하고 있다. 또,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외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농업전시회, 여왕의 생일, 그리고 멜버른 사람인 경우에는 이 나라 최대의 경마행사인 ‘멜버른 컵’ 경기 때도 근무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일찍 근무를 시작하여 오후 5시면 끝마침으로써, 몰려오는 파도 옆의 백사장에서 본격적으로 일광욕을 하는 등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의 하나는, 태양에 바랜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십대의 젊은이들이 풍요와 넘치는 영양, 그리고 야외생활로 다져진 건강한 피부빛의 육체들을 가지고 서프보드와 윈드서핑 장비가 꽂힌 캠프용 자동차 주위에 모여 있는 모습이다. 영국계가 주류이지만 다양한 민족이 존재하며, 원주민 보호 구역에는 예전부터 거주하던 어보리진도 분포한다. 태즈메이니아지역의 애버리진은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백인들의 '인간사냥'으로 전멸당하고 말았으며, 호주의 애버리진들도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40년간의 호주정부의 원주민 말살정책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하거나 강제수용당했다. 원주민들의 인권을 짓밟은 호주정부의 원주민 탄압정책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어판에 강제수용당한 원주민 소년이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이야기가 실릴 만큼 지식인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애버리진들도 불행한 자신들의 과거를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를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강제 입양이나 수용당한 원주민 어린이들은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데, 일부는 법정투쟁을 하여,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졌다.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정부의 민족말살정책이 이전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버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2007년 12월에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는 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적극적인 사죄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호주정부가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는 정부주도의 토착민 가정및 사회 파괴행위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힘으로써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보였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1973년까지 백호주의를 고수하여 흑인의 이민을 제한하였으나, 노동력 부족 등의 문제가 나타나자 1973년에 백호주의를 전면 폐지하였고, 그 뒤로 인종 차별은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영어를 쓰고 있는데, 호주 영어 (오지 잉글리시)는 미국 영어나 영국 영어와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80%는 가정에서 영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가정에서 많이 쓰이는 언어는 중국어(2.1%), 이탈리아어(1.9%), 그리스어(1.4%) 순이다. 이민 1세대나 2세대의 상당수는 두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트남계 이주민은 베트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영어 구사자도 있다. 일례로 동남아시아에 온 주민은 베트남에서 온 주민처럼 고향 언어를 사용하는 점이랑 영어를 같이 구사하는 점도 있는 편이다. 처음 유럽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약 200에서 300 개의 토착 언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약 70개 정도만 살아남아 있으며, 그중에 20 개는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 이들 토착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인구는 약 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02%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다. 호주 헌법 제 116조에는 어떤 종교를 확립을 위해 종교의식 강요,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을 금지하고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서 호주인의 61.1 %가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었다, 로마 가톨릭25.3 %와 호주성공회 17.1 %를 포함하여; 인구의 22.3 %가 종교가 없는 무종교인 이었고, 7.2 %는 비 기독교 종교와 이슬람교 (2.2 %), 힌두교 (1.3 %), 유대교 (0.5 %), 불교 (2.5 %)순이었다. 인구의 9.4 %, 나머지는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수백 개의 국립공원만큼이나 다채로운 축제와 행사가 벌어지는데 마디그라 축제, 패션축제, 애들레이드 예술축제, 캔버라 꽃축제, 포도축제를 비롯하여 요트경기·자동차 경주·경마경기 등이 사랑을 받고 있다. 오팔과 진주가 유명하며 독특한 호주 원주민 예술로 관광들에게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얻어내고 있다. 시드니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는 전 세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가 종교가 없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헌법 조항 166조는 "호주 연방정부가 그 어떤 종교를 수립하고, 그 어떤 종교적 의식을 시행하는 것 또는 그 어떤 종교의 자유적인 활동을 금지"한다. 호주의 주요 종교는 기독교 교파인 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이며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 실례로 2006년 호주 노동당에서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학교내 종교 교육을 허용하는 법안을 제시했다가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또한 정신과 의사출신의 작가인 콜린 매컬로의 소설 가시나무새들도 로마 가톨릭을 일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연방 국가인 호주의 정규 대학 학사 과정은 일반적으로 영국과 같이 3년제를 유지하고 있다. 석사 과정의 수료는 1~2년이, 박사 과정은 4~5년이 요구되는 것이 보통이다. 호주식 축구와 럭비 리그, 크리켓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2004년엔 8개 팀으로 프로 축구 리그인 A-리그가 창설되었다. (현재 현대 A-리그에는 10개 팀 (그 중 하나는 뉴질랜드에 연고를 두고 있다.)이 있다.) 올림픽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2번 연 적이 있었다. 크리켓 월드컵 4회 우승이라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카보베르데 카보베르데 공화국(카보베르데共和國, , ), 줄여서 카보베르데(, )는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있는 국가이다. 영어로 케이프베르데()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에는 무인도였지만, 고대로부터 페니키아인, 아랍인, 무어인 및 인근 서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이 섬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후 열대 지방으로는 드물게 포르투갈인의 이주가 시작되어,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16세기경에는 노예 무역이 번성하였으나, 때때로 해적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노예 무역의 결과,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카보베르데로 끌려왔으며, 이들이 오늘날 카보베르데인의 조상이다. 노예 무역의 쇠퇴 이후에는 대서양 항로의 중간 거점항, 보급항으로서 번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지면서 기니-카보베르데 독립 아프리카당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 이후에는 이들의 독립이 가시화되었다. 1975년 7월 5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다. 2007년 9월 현재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을 신청하였다. 카보베르데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에 위치한 나라로서 10개의 큰 섬과 약 8개의 작은 섬으로 군도를 이루고 있다. 크게 북쪽의 바를라벤투 제도(Barlaventos)와 남쪽의 소타벤투 제도(Sotaventos)로 나뉜다. 수도 프라이아는 소타벤투 제도의 산티아구 섬(Santiago)에 위치한다. 15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카보베르데는 바를라벤투 제도와 소타벤투 제도로 불리는 두 군도로 나뉜다. 이 가운데 5개의 섬은 무인도이다. 몇 개의 섬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화산활동과 침식에 의하여 생성된 섬으로 암석산지이고, 포구섬의 피코화산은 해발고도 2,829m로 최고봉을 이룬다. 대부분의 섬들은 대륙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와 고온건조한 기후이며 5∼10월의 우기를 제외하면 비가 적다. 연평균 강수량은 해안에서 200mm 내외, 산지에서 1,000mm 정도이다. 연평균 기온은 24℃인데다가 화산재가 표층을 덮고 있기 때문에 토양도 비옥하지 않아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 카보베르데 주민들은 유럽인 100%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공용어가 포르투갈어이며, 크레올어도 비공식적으로 사용된다. 카보베르데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1999년 11월 23일자 헌법 9조 1항에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98%로 그 밖에 개신교이다. 1988년부터 대한민국과 수교했다. 캐나다 캐나다(, , )는 북아메리카 북부의 연방 국가이다. 수도는 오타와이며, 최대도시는 토론토이다. 동쪽에는 대서양, 서쪽에는 태평양, 북쪽에는 북극해가 접해있다. 전 세계 국가 중 러시아에 이어 국토 면적이 두 번째로 크며, 미국과의 국경은 두 나라간 국경 중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이다. 10개의 주와 100개의 준주로 구성되어 있다. 수 천 년 간 캐나다 원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16세기 후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캐나다 탐험을 시작하였고 17세기 중반 캐나다의 대서양 해안에 정착하였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누벨프랑스를 영국에 양도하고 캐나다에서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1867년, 영국령 캐나다가 연합하여 캐나다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영토의 증가가 가속화되었고, 지리적 영향과 이민국가로의 특성을 띄어 영국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대영제국 내 자치령이 되어 행정적으로 본국과 분리되었으며, 1947년부터 캐나다 자치령에 거주하고 있는 대영제국 신민들은 캐나다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법권은 1949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캐나다 대법원으로 옮겨짐으로 독립하였다. 1951년 12월 정식 국명을 캐나다 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였다. 캐나다는 정치적으로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10개의 주와 3개의 준주로 이뤄진 연방 국가이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다. 국가원수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엘리자베스 2세는 16개국의 국왕이다)이며, 캐나다 총독은 엘리자베스 2세의 대리인이다.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캐나다는 G7, G8, G20, 북대서양 조약 기구, OECD, WTO, 영국 연방, 프랑코포니, 미주 기구, APEC, 개발 원조 위원회, UN의 회원국이다. 한편, 2012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캐나다가 오스트레일리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살기 좋은나라 2위로 선정되었다. 캐나다(Canada)라는 명칭은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아 부족 단어로 "마을" 또는 "정착"이라는 뜻의 카나타(Kanata)에서 유래되었으며, K가 C로, T가 D로 유성음화되었다. 1535년 오늘날 퀘벡 지역의 토착민인 스타다코나 마을에서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이 단어를 직접 사용했다. 이후 카르티에는 캐나다라는 단어는 특정한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도나코나(스타다코나의 족장)가 지배하는 지역 전체를 아울러 사용했다. 1545년부터 유럽인들은 지도와 책에 현재 캐나다 지역을 캐나다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프랑스에서 자크 카르티에와 영국에서 존 캐벗이 캐나다 동부 해안을 탐험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인들의 이민 및 교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의 백인들은 미국과는 달리,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인권을 군대를 동원한 폭력과 인디언 보호구역으로의 강제이주로 짓밟지는 않았으며, 평화적으로 공존하였다. 중서부에서는 초기 프랑스인들의 모피무역이 성행했는데 지역 원주민들과 프랑스계 모피 산업 관련자들이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다. 그들 사이의 혼혈 공동체가 생겨났고 이들을 메티스라고 부른다. 메티스는 후에 루이 리엘의 반란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고 오늘날도 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발전한 나라이지만, 본국에 대하여 독립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자치(自治)에서 독립으로 점진적인 길을 걸어 왔다. 식민지 시대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의 지배를 둘러싸고 다투었다. 그리고 영국의 통치가 확립된 7년 전쟁(1763년) 이후 캐나다에서는 주도권을 쥔 영국계 주민과 전통을 고수(固守)하는 프랑스계 주민이 영국의 분할 통치 밑에서 대립하였으며, 이것은 현재도 정치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옛 프랑스 식민 지역이던 퀘벡주는 영연방으로 편입이 되지만, 영국 식민 정부는 퀘벡의 문화 정체성을 보장하는 정책을 수립한다. 이후 정치적 독립은 허락하지 않지만, 퀘벡주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로 삼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역시 그들의 언어인 프랑스어 사용 등이 같은 지역 내에서 보장된다. 이를 명시한 것이 캐나다 지역 최초의 헌법으로 여겨지는 대영 북아메리카 조약(BNA Acts, British North America Acts)이다. 그 뒤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많은 이민이 유입되고,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자치를 요구하는 소리도 높아졌다. 그리하여 1867년에는 온타리오주, 퀘벡주, 뉴브런즈윅주·노바스코샤주의 4개주(州)가 대영 북아메리카 조약에 따라 자치령을 결성하고, 여기에 연방 정부가 탄생하였다. 이어서 다른 5개 주가 차차 연방에 가입하여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영토가 확립되었으며, 1949년에는 뉴펀들랜드 주가 가입하여 현재의 10주, 3준주의 캐나다 연방이 확립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이후에는 영국 왕 지지자, 성공회 성직자, 신도들이 탄압을 피해서 캐나다로 이주해 왔다. 1812년의 전쟁에서 캐나다군은 영국군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남북 전쟁 중에는 미국 남부에서 도망쳐오는 노예들을 받아들이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래서 헤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흑인 노예 톰의 아내 엘리자가 퀘이커교도의 도움으로 아들 조지를 데리고 도망치는 곳이 캐나다였다. 그 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인 입국에 대한 규제를 만들어서 적용시켰다. 그 이유는 일자리를 찾아 먼 북미 땅 까지 온 중국인들의 수가 점점 많아져 그때까지 백인 중심이었던 사회가 중국인 중심 사회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다시 이민자에 대한 규제를 풀어 현재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에 못지않은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어 있다. 연방 단위 행정은 연방 정부(, ), 입법은 연방 의회(, ), 사법은 연방 법원(, )에서 처리하는 3권 분립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캐나다 연방 정부는 캐나다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연방하원(, ),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며, 내각의 수장은 총리(, )로 연방 하원 내 다수당 대표가 연임하게 된다. 차관급 미만 연방 공무원은 비정치적, 비선출직 공무 분야 전문인으로 구성되어 정치색을 띠지 않는다. 지방자치제가 발달해 각 주에는 주 정부(, )가 총리(, )의 영도 아래에 연방정부 고유 권한인 외교권과 군통수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정 영역을 관할한다. 주 단위에서도 삼권 분립이 이뤄져 사법부인 주 법원(, )과 입법부인 주 의회(, )가 활동하고 있다. 수도인 오타와에 의회와 총독부가 있다. 캐나다 총독부는 공식적으로 국가 원수인 영국의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대리한다. 캐나다 주는 모두 10개로 다음과 같다: 준주는 노스웨스트 준주(주도 옐로나이프), 누나붓 준주(주도 이칼루잇), 유콘 준주(주도 화이트호스)가 있다. 캐나다는 1949년 4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한국 전쟁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서 약 2만 7천명 병사가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과 공식 수교하면서 여러 무역 협정과 기술 협력 협정, 비자 면제 협정 등 체결하였다. 2009년 현재 캐나다는 대한민국의 14번째 중요 교역 대상국으로, 대한민국은 캐나다의 8번째 중요 교역 대상국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관계도 아주 중요하며, 미국은 캐나다를 긴밀한 우호적인 파트너로 꼽는다. 다른 각 서방 국가와 관계도 좋다. 캐나다는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서울특별시로 선수단과 임원진을 파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이 나라 출신은 많은 공군을 배출하였다. 현재 캐나다군의 병력은 6만 4000여 명에 이른다. 연합 캐나다군(The Unified Canadian Forces)은 육군, 해군, 공군을 아우른다. 장비로는 1,400여 대의 군용기와, 34척의 군용선박 그리고 16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캐나다는 194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국제 연합의 군사 작전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 해외로 자국군을 파병한 바 있고,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때는 한국 전쟁 때였다. 캐나다 국기는 단풍잎기(영어로 Maple Leaf '메이플 리프', 프랑스어로 l'Unifolié)로 알려져 있다. 빨강 바탕에 가운데 흰색 정사각형이 있고 여기에 붉은 단풍잎을 그렸다. 1964년 국민 공모로 제정되어, 1965년 2월 15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채택했었다. 1965년 이전에는 왼쪽 위에 영국의 국기가 삽입되고, 오른쪽에 캐나다 각 주의 상징을 넣은 상선기(Civil Ensign)을 사용했다. 상선기와 형태는 같으나 빨강색 배경 부분이 파랑색으로 그려진 기는 정부기(Government Ensign) 및 해군기(Naval Ensign)로 사용했다. 캐나다는 유럽 전체보다 땅이 넓어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그러나 국토의 북쪽 절반은 메마른 툰드라 지대이고, 실제로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은 동서 약 6,000km에 걸쳐 뻗쳐 있으며, 미국과의 국경에서 200∼300km 사이에 있는 지대에 한정된다. 약 200만 개의 호수가 있다. 캐나다는 여섯 지형구로 나뉜다. 먼저 동부 대서양 연안의 애팔래치아산계, 서부 태평양 연안의 코르딜레라 산계, 국토의 중앙의 북쪽에서 허드슨 만이 파고들어 이루어진 허드스만 저지, 이것을 둘러싸고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캐나다 순상지, 동쪽의 세인트로렌스강 연안 저지, 서쪽의 내륙평원인 프레이리 등이다. 이들 대지형의 배열은 대규모의 지각 변동에 따라 형성되어 제각기 다른 지형을 구성하였으나, 캐나다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빙하의 영향을 받은 점이 전체적으로 공통된 점이다. 또한 나무가 우거진 곳이 많고, 매연이 심하지 않다. 남쪽과 서쪽으로 미국과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의 대서양부터 서쪽의 태평양까지 뻗쳐 있으며, 북쪽으로는 북극해에 접한다. 공식적으로 캐나다의 영토는 북극까지 뻗어 있다. 캐나다의 기후를 결정하는 인자(因子)는 대륙에서의 캐나다의 위치와 대지형(大地形)과의 관계이다. 태평양 연안에는 해안산맥이 뻗어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대기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습하고 따뜻한 태평양의 기단은 내륙으로 진출하지 못한다. 내륙 평원은 지형적으로 회랑(回廊)을 이루어, 겨울에는 북극지방의 찬 공기가 남하하고, 여름에는 열대성의 기단이 북상한다. 한편, 동부의 대서양 연안에서는 대기가 내륙부로부터 계속 흘러오므로 바다의 영향이 적으며, 같은 위도인 유럽에 비하면 겨울에는 추위가 심하다. 서쪽(브리티시컬럼비아주 등)은 온난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나,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 동쪽(온타리오주, 퀘벡주, 매니토바주 등)은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추운 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봄과 가을이 약간 짧은 편이다. 여름에는 장마가 없으나 서부 밴쿠버 지역은 겨울에 강수량이 높아 '겨울 장마'라 불릴 정도다. 여름철은 캐나다 여러 지역이 매우 기온이 높은 편이나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날에도 습도가 낮기 때문에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참고로 리자이나는 온도가 50도 가까이 된 적도 있다. 북부의 옐로나이프와 화이트호스는 겨울이 매우 춥고 여름이 쾌적하다. 겨울이 길고 대도시라도 기온이 섭씨로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도 있다. 북부는 너무 추워 겨울이면 오후 2시만 되어도 일몰하고 남부라도 오전 8시 이후에 일출하는 날도 있다. 캐나다는 11월에 겨울이 시작되어 한국보다 일찍 겨울이 찾아오며, 반 년이나 지속되어 다음 해 4월에야 겨울이 끝난다. 캐나다는 지리 위치상(접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경제에 상당히 의존하는 편으로 미국과 많은 교역을 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규모이며 나라 면적이 세계 2위인 캐나다는 각 주마다 특성을 이용한 산업이 활발한 편으로, 각 주마다 주요 산업이 다르다. 특히 2007년 시점에서는 앨버타주의 오일 샌드에서 원유가 채굴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매장량을 지닌 산유국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주요 산업은 항공 산업, 우주 산업, 자동차 부품 제조, 제지, 철강, 기계 ·기기, 에너지 산업, 광업, 화석연료 채굴, 임산, 농업, 어업, 관광업, 영화 산업, 멀티미디어 산업, 하이테크 산업, 컴퓨터 산업, 소프트웨어 제작, 게임 제작, CG, 애니메이션이다. 임업과 그 관련 사업은 캐나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높으며, 전수출액의 3할 가까이를 제공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펄프, 제지업은 생산액, 취업자수, 수출액에 있어서 캐나다 최대의 산업이며, 신문 용지는 세계 수용의 1/2을 공급하고 있다. 수산업은 캐나다 최초의 산업이며, 새우,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서양 연안에서는 청어, 정어리 등을 중심으로 35%를 차지하며, 오대호에서는 10%에 불과하다. 광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한 산업으로서, 특히 서드베리 부근의 니켈, 퀘벡주 남부의 석면(石綿)은 독점적인 지위에 있다. 그 밖에 백금, 금, 우라늄, 은, 구리, 아연 등 세계 유수의 광산물 수출국이다. 또 수력 발전은 미국 다음 가는 세계 제2위의 발전 능력을 지니며, 보크사이트를 수입하여 정련하는 알루미늄 생산국이기도 하다. 금속 자원의 경우 우라늄(1만 톤, 1위, 세계 시장 점유율 29.2%), 염화 칼륨(820만 톤, 1위, 세계 시장 점유율 30.9%), 유황(903만 톤, 2위), 철광석(1980만 톤, 3위), 은(1309톤, 3위), 텅스텐(2750톤, 3위), 니켈(16만 톤, 3위), 아연(100만 톤, 4위), 코발트(4304톤, 5위), 염화 나트륨(1335만 톤, 5위), 납(15만 톤, 5위), 금(141톤, 7위), 안티몬(143톤, 8위), 구리(56만 톤, 8위)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마그네슘, 인 등도 채굴되고 있다. 캐나다는 광물 자원을 타고나서 세계 10위에 들어가는 광물이 17종류가 있다. 이하 수치는 2003년 시점의 통계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다. 유기 광물 자원은 천연가스(6565천조 줄, 3위), 연료가 되는 갈탄(3695만 톤, 9위)외에 석탄(2954만 톤)과 원유(9111만 톤)의 산출량을 가지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산출량도 1120만 캐럿에 이르러 세계 제6위이다. 주로 보유한 천연자원으로는 천연가스, 석유, 석탄, 금, 은, 구리, 다이아몬드, 철광석, 니켈, 우라늄, 아연 등이 있다. 석유(오일샌드 포함)는 세계 2위의 부존량을 자랑한다. 그러나, 캐나다는 대량으로 원유를 수입한다. 중동뿐 아니라 베네수엘라와 북해에서도 들여온다. 2006년 기준 하루 평균 27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했고 85만 배럴을 수입했다. 캐나다의 원유 조달 구조가 이처럼 기이한 것은 이 나라 원유 자원의 자연적 특징 때문이다. 원유는 보통 지하의 유정(油井)에서 뽑아내는 방식으로 생산되지만, 이 나라 원유는 오일샌드(oil sand) 형태로 부존하기 때문에 생산 방식이 전혀 다르다. 캐나다의 농업은 취업 인구의 3.4%(1999년)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노동생산성은 급속히 상승하고 있다. 곡류, 감자 등의 농산물 중에서도, 평원의 3주에서 생산되는 경질(硬質) 밀은 단백질의 함유량도 많아 질이 좋으며, 생산량의 3분의 2를 수출하고 있다. 밀 총생산량은 25,261,400톤(2011년, 세계 7위, 3.59%)이다. 또한 낙농과 가축 사육도 왕성하다. 온타리오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는 온실(green house) 농업이 발전하는 추세에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캐나다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75.85%), 중국(4.32%), 영국(3.24&), 일본(2.17%), 멕시코(1.44%)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영국(51.33%), 중국(12.64%), 멕시코(6.33%), 독일(3.20%), 일본(3.12%)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20,632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32,405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54,037,754백만 달러), 자동차(16,216,430백만 달러), 금 광석(13,112,868백만 달러), 석유 등(11,337,52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자동차(24,734,528백만 달러), 석유(12,768,537백만 달러), 석유 등(12,297,755백만 달러), 트럭(10,646,055백만 달러)이다. 캐나다는 넓은 땅이 지형적으로 군데군데 끊겨 있고, 3,000만에 가까운 인구가 미국과의 국경과 가까운 남부 (북위 49~50도 사이)에 몰려있는 실정으로, 교통망도 이러한 토대 아래 형성되었다. 현재의 주 교통망은 1885년에 개통한 대륙 횡단철도에서 파생한 철도망, 넓은 국토를 덮는 항공망, 각 가정에 보급된 자동차와 거주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망, 오대호로부터 센트로렌스 물길을 거쳐 대서양에 이르는 선박수송에서 석유, 가스의 파이프라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통 수단이 이용되고 있다. 1962년에 개통된 길이 8,000km에 이르는 캐나다 횡단 고속도로의 구실도 매우 크다. 국토가 너무 넓어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 차로는 시속 100km의 속도 기준으로 한번도 쉬지 않고 운전을 할 경우에 약 45시간 걸리기 때문에 미국과 같이 도시와 도시를 잇는 주요 교통 수단은 항공기이다. 캐나다는 에어 캐나다와 웨스트제트 등의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대한민국과는 대한항공과 에어 캐나다 2개의 항공사가 연결하고 있다. 캐나다의 총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35,939,927명이다. 인구 증가율은 1.04%(2010~2015년)로 1955년부터 점점 증가하고있다. 인구밀도는 4.0명/km²이며 세계 평균인 56.5명/km²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81.8%(2015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40.6세이며 2015년 노인인구비율이 16.14로 고령화 사회이다. 캐나다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0만 명 이상인 민족만 해도 34개 민족이 있다. 캐나다인의 다수(2001년 현재 86.9%)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민온 유럽(잉글랜드 19.2%, 프랑스 15.7%, 스코틀랜드 14%, 아일랜드 12.9%, 독일 9.0%, 이탈리아 4.3%) 출신의 백인의 자손이다. 아시아계 캐나다인은 전체 인구의 9%이며, 온타리오주 남부와 밴쿠버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3.3%이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2.88%를 차지하는데, 서인도 제도에서 온 이민들이 대부분이다. 영어를 쓰는 섬나라들에서 온 이민들은 주로 토론토 지역에, 프랑스어를 쓰는 아이티 이민들은 주로 몬트리올, 퀘벡 지역에 정착하였다. 미국과는 달리 심한 인디언 박해는 없었으며 1982년의 헌법은 캐나다의 원주민 세 집단을 인정한다. 이들은 인디언, 이누이트, 메티스이다. 법 제정 당시에는 '인디언(Indians)'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현재는 선주민을 의미하는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들 원주민은 2001년 인구 조사에서 전체 인구의 3.3%인 976,305명이 집계되었는데, 그 가운데 62%가 퍼스트네이션, 30%가 메티스, 5%가 이누이트이다. 가장 최근의 인구 조사 에 따르면, 캐나다인의 77.1%가 기독교 신자라고 밝혔으며, 교파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장 많다(캐나다인의 43.6%). 캐나다인의 17%는 어느 종교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고 밝혔고, 나머지 6.3%는 힌두교, 시크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에 속했다. 그외 캐나다 성공회, 캐나다 연합 교회(장로교, 감리교 등이 연합한 교단) 등도 존재한다. 캐나다의 공용어는 영어 와 프랑스어이다. 2007년 12월 4일 발표한 200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모어는 영어 57.8%, 프랑스어 22.1%, 가정어로 영어는 67.55%, 프랑스어는 21.70%, 인지도를 보면 영어 85.08%, 프랑스어 30.70%로 나타났다. 캐나다는 1969년 7월 7일 공용어법(Official Languages Act)을 통해 프랑스어의 지위가 연방 정부를 통틀어 영어의 지위와 맞먹게 되었고 프랑스어를 모어로 하고 있는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그리하여 캐나다가 이중 언어 다문화주의 국가로 스스로 재정의하게 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연방 법원과 의회, 모든 연방 기구에서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캐나다인의 98%가 영어나 프랑스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구사한다. 캐나다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영어가 필수 이수 과목이고, 제2외국어로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의 언어가 개설되어 있다. 프랑스어는 퀘벡주 전체를 비롯하여 뉴브런즈윅주, 온타리오주의 동부와 북부, 새스캐추언 주, 노바스코샤주 남쪽 해안과 북쪽 섬, 프린스애드워드아일랜드 주 서남쪽 해안, 매니토바주 남부 등 여러 군데에 흩어진 지역에서 쓰인다.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캐나다인 가운데 85%가 퀘벡주에 거주한다. 노스웨스트 준주에서는 여러 원주민 언어들이 공식 지위를 가진다. 누나붓 준주에서는 이누이트어가 다수 언어로 공식 지위를 가진다. 누나붓 준주의 초등학교에서는 6학년까지 영어 대신 이누이트어를 가르친다. 또 2006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6,147,840(20.1%)나 차지했다. 그중에서 여러 개의 중국어(1,034,090), 이탈리아어(476,905명), 독일어(466,650명), 펀자브어(382,585명), 스페인어(362,120명), 아랍어(286,785명), 타갈로그어(260,440명)등이 포함된다. 캐나다는 영연방의 주요 구성원이자,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이다. 과거에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현재 국제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와 영 연방 모두 정회원 소속이다. 여러 인종이 이민들과 함께 모여 사는 다인종 국가이다. 하지만 퀘벡주가 분리 독립을 시도(이후 부결되었음)한 역사가 있어서 캐나다 연방 존속에 대한 갈등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캐나다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는 아이스하키이다. 주요 아이스 하키 팀들은 캘거리 플레임스, 몬트리올 캐내디언스,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밴쿠버 커넉스, 에드먼턴 오일러스, 오타와 세너터스, 위니펙 제츠 등이 있다. 1976년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시에라리온 시에라리온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 대서양 해안에 위치한 나라이다. 기니, 라이베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작은 나라의 하나로 71,740 km의 면적이며 인구는 약 6,296,803 명이다.사바나 기후에서 우림까지 범위를 갖는 다양한 환경의 열대 기후를 지니고 있어, 우계에는 고온 다습하다. 프리타운은 수도, 정부의 소재지이자 가장 큰 도시이며, 보는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도시이다. 인구 10만을 넘는 다른 주요 도시들은 케네마, 코이두, 마케니이다. 시에라리온은 1827년에 설립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포라 베이 컬리지 (Fourah Bay College)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천연 항구 엘리자베스 2세 부두 (Queen Elizabeth II Quay,QE II Quay,Deep Water Quay)가 있다. 이로 인해 ‘서아프리카의 아테네’라고 불린다. 시에라리온의 초기 거주자들은 셰르브로인, 템네인, 림바인, 타이라인, 나중에 로마롱인으로 시에라리온에 알려진 멘데인, 시에라리온의 동쪽에 정착했었던 코노인을 포함한다. 1462년, 지금의 시에라리온을 '사자 산'을 뜻하는 Serra de Leão이라 이름지었던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도 다 신트랄이 방문했다. 1833년 영국에서는 성공회 신자인 윌리엄 윌버포스등의 인도주의자들의 노예 제도 반대 운동으로 노예제도가 금지됨으로써 해방 노예를 식민시켰는데, 그 명분은 해방 노예의 자치국을 만든다는 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해방 노예들을 이주시킨 식민지를 특허 회사의 식민지 경영에 이용하고 흑인과 백인을 분리시킨다는 의도가 있었다. 해방노예의 자치령의 이념은 수도 프리타운(Freetown)에 그 면목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시에라리온은 이전에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집으로서 프리타운이 시에라리온 회사에 의해 설립되었을 때인 1792년까지 대서양 무역의 중요한 중심이 되었다. 1808년, 프리타운은 영국 국왕 식민지 (Crown Colony)가 되었고, 1896년 시에라리온의 내부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고 1961년에 영연방국으로 독립을 하였고, 1971년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7년간 집권한 시아카 스티븐스의 후계자로 1981년 군사령관 조세프 모모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비동맹외교노선을 추구하고 영국과 밀접하다. 산업은 원래 코코야자와 기름야자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나, 근년 다이아몬드, 보크사이트, 철광 등의 산출로 광업국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 다이아몬드는 산출고가 33만 9,000캐럿으로 수출의 45%. 무역은 주로 영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프리타운은 천연의 양항이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푸라 베이대학이 있어 ‘서아프리카의 아테네’라고 불린다. 종교는 부족종교가 성행한다. 1961년 4월 27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97년 민주 대통령이던 아흐마드 테잔 카바가 독재자 포데이 산코라의 쿠데타로 쫓겨났다가 주변 국가들의 도움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산코라를 지지하는 반군 간의 시에라리온 내전이 일어나 고통을 겪은 적도 있었다.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 서해안에 접하는데 적도에서 북쪽으로 벗어나 있다. 전체 면적은 71,740 km이며 기니와 라이베리아에 접한다. 대서양을 끼고 있기도 하다. 서쪽에서부터 시에라리온은 400km에 달하는 해안선이 있고 해양 자원과 아름다운 광경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을 벗어나면 낮은 늪지대가 나타나며 열대우림 평원과 농경지가 나타난다. 열대기후에 속하며 농업 주기에 적합한 두 절기가 나타난다. 우기는 5월~11월이고 건기는 12월에서 5월이다. 건기 때는 사하라 열풍이 불기도 한다. 수도인 프리타운은 해안 지방에 있는데 시에라 리온 항구에 접해 있으면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자연 항구이다. 시에라리온은 1930년에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이래, 다이아몬드 채굴을 기반으로 한 다이아몬드 수출국이다. 시에라리온 특별기업합동은 25년간 다이아몬드의 탐사권을 독점하여 이익의 다수를 정부에 상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부분의 다이아몬드는 밀수출도 되고 있다. 남서부가 가장 다이아몬드의 매장량이 많은 지역이고, 이것과 관련하여 과거에 내전도 발생하였다. 1991~2002년 내전에 시달린 시에라리온에서는 반군조직 ‘혁명연합전선’이 주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연 평균 1억2,500만달러 어치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해 무기 구입자금으로 사용했다. 이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로도 널리 알려졌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참조.) 시에라리온의 기아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시에라리온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35.0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봐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11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상당한 기아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헌법 90조에 "국회의 업무는 영어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 그리고 부족 신앙이 공존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배경이 된 나라이다. 남북한 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6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 수교하였다. 한국은 이 나라에 공관을 설치했으나 현재는 주(駐)나이지리아 공관이 겸직하고 있다. 호주 (동음이의) 호주는 다음을 가리킨다. 날짜 목록 이 페이지는 날짜 페이지로 가는 링크를 모아놓은 페이지이다. 모든 달이 1번째 요일에 시작한다는 기준으로 만들었으며, 기준 년도는 없다. 12월 31일 12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5번째(윤년일 경우 366번째) 날에 해당하며,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12월 30일 12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4번째(윤년일 경우 365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일 1월 1일은 양력(그레고리력)으로 첫 번째 날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날인 양력설로써 기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날을 음력 1월 1일인 설날과 구분하여 '양력설' 또는 '신정(新正)'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정부 때는 이중과세(二重過歲) 문제를 없앤다는 구실로 양력설만을 연휴(1월 1일 ~ 1월 3일)로 지정하고,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강제하여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양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가정도 있었다. 그러나, 음력설은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이 되었고, 1989년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3일 연휴가 되었다. 이후 양력설은 연휴가 순차적으로 폐지되고, 1월 1일 하루만 공휴일이 되었다. 1월 2일 1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번째 날에 해당한다. 스코틀랜드의 설날이다. 1월 3일 1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4일 1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7일 1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번째(윤년일 경우도 7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5일 1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6일 1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8일 1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번째(윤년일 경우도 8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5일 1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번째(윤년일 경우도 15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0일 1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번째(윤년일 경우도 10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9일 1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번째(윤년일 경우도 9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1일 1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번째(윤년일 경우도 11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2일 1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번째(윤년일 경우도 12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3일 1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번째(윤년일 경우도 13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4일 1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번째(윤년일 경우도 14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14일 -경북상주출신 안선호생일 1월 16일 1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번째(윤년일 경우도 16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7일 1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번째(윤년일 경우도 17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18일 1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번째(윤년일 경우도 18번째) 날에 해당한다. 자방 총회 1월 19일 1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번째(윤년일 경우도 19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일 3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0번째(윤년일 경우 61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8일 2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9번째(윤년일 경우도 59번째) 날에 해당한다. 윤년이 아닌 경우, 이 날은 2월의 마지막날이다. 7월 1일 7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2번째(윤년일 경우 183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일 8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3번째(윤년일 경우 214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일 9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4번째(윤년일 경우 245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아닌 경우, 대한민국의 대학교의 2학기 개강은 대부분 이 날 시작한다. 10월 1일 10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4번째(윤년일 경우 275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일 11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5번째(윤년일 경우 306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일 12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5번째(윤년일 경우 336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일 4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1번째(윤년일 경우 92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일 5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1번째(윤년일 경우 122번째), 뒤에서부터는 245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일 2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번째(윤년일 경우도 32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일 6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2번째(윤년일 경우 153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일 3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1번째(윤년일 경우 62번째) 날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의 전국의 학교는 전날이 삼일절인 탓에 이 날이 주말 및 공휴일, 개교기념일이 아닌 이상 이 날 새학년을 시작한다. 대학에서도 이 날 봄학기 첫 강의를 시작한다. 주말 공휴일인 경우 3월 3일 또는 3월 4일날 신학기가 시작이 될수도 있다. 8월 14일 8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6번째(윤년일 경우 227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31일 1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번째(윤년일 경우도 31번째) 날에 해당한다.B형간염백신3차 1월 30일 1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번째(윤년일 경우도 30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9일 1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번째(윤년일 경우도 29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8일 1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번째(윤년일 경우도 28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7일 1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번째(윤년일 경우도 27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6일 1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번째(윤년일 경우도 26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5일 1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번째(윤년일 경우도 25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0일 1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번째(윤년일 경우도 20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4일 1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번째(윤년일 경우도 24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3일 1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번째(윤년일 경우도 23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2일 1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번째(윤년일 경우도 22번째) 날에 해당한다. 1월 21일 1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번째(윤년일 경우도 21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0일 12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4번째(윤년일 경우 355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1일 12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5번째(윤년일 경우 356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2일 12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6번째(윤년일 경우 357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3일 12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7번째(윤년일 경우 358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4일 12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8번째(윤년일 경우 359번째) 날에 해당한다. 400년 동안 이 날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58번, 화요일과 수요일에 57번, 일요일과 금요일에는 56번 온다. 12월 25일 12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9번째(윤년일 경우 360번째) 날에 해당한다. 400년 동안 이 날은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에 58번, 수요일과 목요일에 57번,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56번 온다. 12월 26일 12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0번째(윤년일 경우 361번째) 날에 해당한다. 400년 동안 이 날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과 금요일에 57번, 화요일과 일요일에는 56번 온다. 12월 27일 12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1번째(윤년일 경우 362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8일 12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2번째(윤년일 경우 363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9일 12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3번째(윤년일 경우 364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8일 12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2번째(윤년일 경우 353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7일 12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1번째(윤년일 경우 352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6일 12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0번째(윤년일 경우 351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5일 12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9번째(윤년일 경우 350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4일 12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8번째(윤년일 경우 349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3일 12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7번째(윤년일 경우 348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2일 12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6번째(윤년일 경우 347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1일 12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5번째(윤년일 경우 346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10일 12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4번째(윤년일 경우 345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9일 12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3번째(윤년일 경우 344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8일 12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2번째(윤년일 경우 343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7일 12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1번째(윤년일 경우 342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6일 12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0번째(윤년일 경우 341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5일 12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9번째(윤년일 경우 340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4일 12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8번째(윤년일 경우 349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3일 12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7번째(윤년일 경우 348번째) 날에 해당한다. 12월 2일 12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6번째(윤년일 경우 337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3일 3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2번째(윤년일 경우 63번째) 날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 3월 2일이 일요일인 2003년이나 2008년 등에는 초·중·고등학교, 대학의 시업식이나 입학식을 치른다. 3월 4일 3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3번째(윤년일 경우 64번째) 날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 3월 2일이 토요일과 3월 3일이 일요일인 2013년이나 2019년 등에는 초·중·고등학교, 대학의 시업식이나 입학식을 치른다. 3월 5일 3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4번째(윤년일 경우 65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6일 3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5번째(윤년일 경우 66번째) 날에 해당한다. 치과 2월 2일 2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번째(윤년일 경우도 33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3일 2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4번째(윤년일 경우도 34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4일 2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5번째(윤년일 경우도 35번째) 날에 해당한다. 한자 문화권의 24절기 중에선 입춘에 해당하며, 절월력의 새해 첫날이기도 하다. 2월 5일 2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6번째(윤년일 경우도 36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6일 2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7번째(윤년일 경우도 37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7일 2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8번째(윤년일 경우도 38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8일 2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9번째(윤년일 경우도 39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9일 2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0번째(윤년일 경우도 40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6일 2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7번째(윤년일 경우도 47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3일 2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4번째(윤년일 경우도 54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4일 2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5번째(윤년일 경우도 55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5일 2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6번째(윤년일 경우도 56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6일 2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7번째(윤년일 경우도 57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7일 2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8번째(윤년일 경우도 58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9일 2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0번째(윤년일 경우만 존재) 날이다. 윤일(閏日) 혹은 leap-year day, 줄여서 leap day라고도 한다. 이 날은 윤년에만 존재하는데, 윤년은 보통 서기의 해가 4의 배수인 해에 해당된다. 그러나 400의 배수인 경우를 제외하면 100의 배수에는 이 날이 없다. 따라서, 이 날이 생일이거나 제삿날이면 원칙적으로는 4년마다 생일을 쇠거나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등 태음력을 사용하던 국가에서는 음력으로 생일을 정하거나, 2월 28일 또는 3월 1일에 생일이나 제사를 지내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2월 29일이 있는 해는 무조건 쥐띠, 용띠, 원숭이띠의 해이고 2월 29일이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인 해가 400년에 13번 나타나고, 금요일, 토요일인 해가 400년에 14번, 월요일, 수요일인 해가 400년에 15번 나타난다. 또한 경자, 경진, 경신년 중에는 2월 29일이 없는 경우도 있으며, 임자, 갑자, 병자, 무자, 임진, 갑진, 병진, 무진, 임신, 갑신, 병신, 무신년은 무조건 2월 29일이 있다. 또한 2월 29일은 4년마다 한번 돌아오므로 400으로 나뉘지 않는 100의 배수인 해가 중간에 낀 경우를 제외하면 그 해의 2월 29일과 다음 2월 29일은 5요일의 차이가 난다. 순서는 1904년부터 2096년까지 월요일, 토요일, 목요일, 화요일, 일요일, 금요일, 수요일의 순으로, 2104년부터 2196년까지는 금요일, 수요일, 월요일, 토요일, 목요일, 화요일, 일요일의 순으로, 2204년부터 2296년까지는 수요일, 월요일, 토요일, 목요일, 화요일, 일요일, 금요일의 순으로 순환한다. 또한 400으로 나뉘지 않는 100의 배수인 해가 중간에 낀 경우를 제외하면 28년마다 2월 29일의 요일은 같다. 이 날이 토요일(예 : 1992년, 2020년, 2048년, 2076년 등)인 경우에는 공휴일 중 최소 4일이 사라지고, 일요일(예 : 2004년, 2032년, 2060년, 2088년 등)인 경우에는 가장 공휴일이 적으며, 월요일(예 : 1988년, 2016년, 2044년, 2072년 등)인 경우에는 3일 연휴가 많이 출현하며, 대신 최소 이틀이 날아간다. 2월 10일 2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1번째(윤년일 경우도 41번째)날에 해당한다. 2월 11일 2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2번째(윤년일 경우도 42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2일 2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3번째(윤년일 경우도 43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3일 2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4번째(윤년일 경우도 44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4일 2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5번째(윤년일 경우도 45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5일 2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6번째(윤년일 경우도 46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7일 2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8번째(윤년일 경우도 48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8일 2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9번째(윤년일 경우도 49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19일 2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0번째(윤년일 경우도 50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0일 2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1번째(윤년일 경우도 51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1일 2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2번째(윤년일 경우도 52번째) 날에 해당한다. 2월 22일 2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53번째(윤년일 경우도 53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7일 3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6번째(윤년일 경우 67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8일 3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7번째(윤년일 경우 68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9일 3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8번째(윤년일 경우 69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인애의 생일 3월 10일 3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69번째(윤년일 경우 70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1일 3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0번째(윤년일 경우 71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2일 3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1번째(윤년일 경우 72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3일 3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2번째(윤년일 경우 73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4일 3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3번째(윤년일 경우 74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5일 3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4번째(윤년일 경우 75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31일 3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0번째(윤년일 경우 91번째) 날에 해당한다. 자판 자판(字板)은 글자를 풀어 배치하여 글자, 숫자, 기호 등을 입력하기 위한 판형태의 도구이다. 주로 기계적으로, 전자적으로 문자를 기록/입력하기 위하여 쓰인다. 3월 16일 3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5번째(윤년일 경우 76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7일 3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6번째(윤년일 경우 77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8일 3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7번째(윤년일 경우 78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19일 3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8번째(윤년일 경우 79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0일 3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79번째(윤년일 경우 80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1일 3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0번째(윤년일 경우 81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2일 3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1번째(윤년일 경우 82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3일 3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2번째(윤년일 경우 83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4일 3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3번째(윤년일 경우 84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5일 3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4번째(윤년일 경우 85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6일 3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5번째(윤년일 경우 86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7일 3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6번째(윤년일 경우 87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8일 3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7번째(윤년일 경우 88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29일 3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8번째(윤년일 경우 89번째) 날에 해당한다. 3월 30일 3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89번째(윤년일 경우 90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일 4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2번째(윤년일 경우 93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일 5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2번째(윤년일 경우 123번째), 뒤에서부터는 244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일 8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4번째(윤년일 경우 215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6일 8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8번째(윤년일 경우 219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3일 4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3번째(윤년일 경우 94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일 11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6번째(윤년일 경우 307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3일 11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7번째(윤년일 경우 308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4일 11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8번째(윤년일 경우 309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5일 9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9번째(윤년일 경우 310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6일 11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0번째(윤년일 경우 311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7일 11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1번째(윤년일 경우 312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8일 11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2번째(윤년일 경우 313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9일 11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3번째(윤년일 경우 314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상열형님생신 11월 10일 11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4번째(윤년일 경우 315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1일 11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5번째(윤년일 경우 316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2일 11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6번째(윤년일 경우 317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3일 11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7번째(윤년일 경우 318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4일 11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8번째(윤년일 경우 319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5일 11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9번째(윤년일 경우 320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6일 11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0번째(윤년일 경우 321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7일 11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1번째(윤년일 경우 322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8일 11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2번째(윤년일 경우 323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19일 11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3번째(윤년일 경우 324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0일 11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4번째(윤년일 경우 325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1일 11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5번째(윤년일 경우 326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2일 11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6번째(윤년일 경우 327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3일 11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7번째(윤년일 경우 328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4일 11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8번째(윤년일 경우 329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5일 11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29번째(윤년일 경우 330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6일 11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0번째(윤년일 경우 331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7일 11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1번째(윤년일 경우 332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28일 11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2번째(윤년일 경우 333번째) 날에 해당한다. 11월 30일 11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34번째(윤년일 경우 335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4월 4일 4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4번째(윤년일 경우 95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5일 4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5번째(윤년일 경우 96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6일 4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6번째(윤년일 경우 97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7일 4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7번째(윤년일 경우 98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8일 4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8번째(윤년일 경우 99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9일 4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99번째(윤년일 경우 100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0일 4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0번째(윤년일 경우 101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1일 4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1번째(윤년일 경우 102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2일 4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2번째(윤년일 경우 103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3일 4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3번째(윤년일 경우 104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4일 4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4번째(윤년일 경우 105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5일 4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5번째(윤년일 경우 106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6일 4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6번째(윤년일 경우 107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7일 4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7번째(윤년일 경우 108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8일 4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8번째(윤년일 경우 109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19일 4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9번째(윤년일 경우 110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0일 4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0번째(윤년일 경우 111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1일 4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1번째(윤년일 경우 112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2일 4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2번째(윤년일 경우 113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3일 4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3번째(윤년일 경우 114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4일 4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4번째(윤년일 경우 115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5일 4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5번째(윤년일 경우 116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6일 4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6번째(윤년일 경우 117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7일 4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7번째(윤년일 경우 118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8일 4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8번째(윤년일 경우 119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29일 4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19번째(윤년일 경우 120번째) 날에 해당한다. 4월 30일 4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0번째(윤년일 경우 121번째) 날에 해당하며, 4월의 마지막 날이다. 8월 3일 8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5번째(윤년일 경우 216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4일 8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6번째(윤년일 경우 217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5일 8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7번째(윤년일 경우 218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7일 8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9번째(윤년일 경우 220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8일 8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0번째(윤년일 경우 221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9일 8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1번째(윤년일 경우 222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0일 8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2번째(윤년일 경우 223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1일 8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3번째(윤년일 경우 224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2일 8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4번째(윤년일 경우 225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6일 7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7번째(윤년일 경우 188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일 7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3번째(윤년일 경우 184번째) 날에 해당한다. 따라서 평년의 7월 2일 정오(윤년일 경우 자정)는 그 해의 정확한 중간점이다. 7월 3일 7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4번째(윤년일 경우 185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4일 7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5번째(윤년일 경우 186번째) 날에 해당한다. 지구의 원일점은 이 날 부근에 있다. 7월 7일 7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8번째(윤년일 경우 189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5일 7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6번째(윤년일 경우 187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7일 8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9번째(윤년일 경우 230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8일 8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0번째(윤년일 경우 231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19일 8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1번째(윤년일 경우 232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0일 8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2번째(윤년일 경우 233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1일 8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3번째(윤년일 경우 234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2일 8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4번째(윤년일 경우 235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3일 8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5번째(윤년일 경우 236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4일 8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6번째(윤년일 경우 237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5일 8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7번째(윤년일 경우 238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6일 8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8번째(윤년일 경우 239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7일 8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9번째(윤년일 경우 240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8일 8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0번째(윤년일 경우 241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29일 8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1번째(윤년일 경우 242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30일 8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2번째(윤년일 경우 243번째) 날에 해당한다. 8월 31일 8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3번째(윤년일 경우 244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8월의 마지막 날이다. 9월 2일 9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5번째(윤년일 경우 246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일이 일요일인 경우, 대한민국의 대학교 2학기 개강은 대부분 이 날 시작한다. 9월 3일 9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6번째(윤년일 경우 247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일이 토요일이고 9월 2일이 일요일인 경우 대한민국의 대학교 2학기 개강은 대부분 이 날 시작한다. 9월 4일 9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7번째(윤년일 경우 248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5일 9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8번째(윤년일 경우 249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6일 9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49번째(윤년일 경우 250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7일 9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0번째(윤년일 경우 251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8일 9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1번째(윤년일 경우 252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9일 9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2번째(윤년일 경우 253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0일 9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3번째(윤년일 경우 254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1일 9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4번째(윤년일 경우 255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2일 9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5번째(윤년일 경우 256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3일 9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6번째(윤년일 경우 257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4일 9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7번째(윤년일 경우 258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5일 9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8번째(윤년일 경우 259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6일 9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59번째(윤년일 경우 260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7일 9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0번째(윤년일 경우 261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8일 9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1번째(윤년일 경우 262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19일 9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2번째(윤년일 경우 263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0일 9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3번째(윤년일 경우 264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1일 9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4번째(윤년일 경우 265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2일 9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5번째(윤년일 경우 266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3일 9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6번째(윤년일 경우 267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4일 9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7번째(윤년일 경우 268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5일 9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8번째(윤년일 경우 269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6일 9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69번째(윤년일 경우 270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7일 9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0번째(윤년일 경우 271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8일 9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1번째(윤년일 경우 272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29일 9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2번째(윤년일 경우 273번째) 날에 해당한다. 9월 30일 9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3번째(윤년일 경우 274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9월의 마지막 날이다. 10월 2일 10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5번째(윤년일 경우 276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3일 10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6번째(윤년일 경우 277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4일 10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7번째(윤년일 경우 278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5일 10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8번째(윤년일 경우 279번째) 날에 해당한다. 그레고리력에서는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 6일 10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9번째(윤년일 경우 280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7일 10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0번째(윤년일 경우 281번째) 날에 해당한다. 그레고리력에서는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 8일 10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1번째(윤년일 경우 282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9일 10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2번째(윤년일 경우 283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한글날이다. 10월 10일 10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3번째(윤년일 경우 284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1일 10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4번째(윤년일 경우 285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2일 10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5번째(윤년일 경우 286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3일 10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6번째(윤년일 경우 287번째) 날에 해당한다. 그레고리력에서는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 14일 10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7번째(윤년일 경우 288번째) 날에 해당한다. 그레고리력에서는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 15일 10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8번째(윤년일 경우 289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6일 10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89번째(윤년일 경우 290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7일 10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0번째(윤년일 경우 291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8일 10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1번째(윤년일 경우 292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19일 10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2번째(윤년일 경우 293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0일 10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3번째(윤년일 경우 294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1일 10월 22일 10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5번째(윤년일 경우 296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3일 10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6번째(윤년일 경우 297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4일 10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7번째(윤년일 경우 298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5일 10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8번째(윤년일 경우 299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6일 10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9번(윤년일 경우 300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7일 10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0번째(윤년일 경우 301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8일 10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1번째(윤년일 경우 302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29일 10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2번째(윤년일 경우 303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30일 10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3번째(윤년일 경우 304번째) 날에 해당한다. 10월 31일 10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4번째(윤년일 경우 305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7월 8일 7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9번째(윤년일 경우 190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9일 7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0번째(윤년일 경우 191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0일 7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1번째(윤년일 경우 192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1일 7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2번째(윤년일 경우 193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2일 7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3번째(윤년일 경우 194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3일 7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4번째(윤년일 경우 195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4일 7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5번째(윤년일 경우 196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5일 7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6번째(윤년일 경우 197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6일 7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7번째(윤년일 경우 198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7일 7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8번째(윤년일 경우 199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18일 7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9번째(윤년일 경우 200번째) 날에 해당한다. 400년 동안 이 날은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58번, 목요일과 금요일에 57번, 화요일과 일요일에 56번씩 온다. 7월 19일 7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0번째(윤년일 경우 201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0일 7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1번째(윤년일 경우 202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1일 7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2번째(윤년일 경우 203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2일 7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3번째(윤년일 경우 204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3일 7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4번째(윤년일 경우 205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4일 7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5번째(윤년일 경우 206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5일 7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6번째(윤년일 경우 207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6일 7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7번째(윤년일 경우 208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7일 7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8번째(윤년일 경우 209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8일 7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9번째(윤년일 경우 210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29일 7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0번째(윤년일 경우 211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30일 7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1번째(윤년일 경우 212번째) 날에 해당한다. 7월 31일 7월 3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2번째(윤년일 경우 213번째) 날에 해당한다. 이 날은 7월의 마지막 날이다. 5월 3일 5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3번째(윤년일 경우 124번째), 뒤에서부터는 243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4일 5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4번째(윤년일 경우 125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5일 5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5번째(윤년일 경우 126번째), 뒤에서부터는 241번째 날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의 어린이날이며 법정 공휴일이다. 5월 6일 5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6번째(윤년일 경우 127번째), 뒤에서부터는 240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7일 5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7번째(윤년일 경우 128번째), 뒤에서부터는 239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8일 5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8번째(윤년일 경우 129번째), 뒤에서부터는 238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9일 5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9번째(윤년일 경우 130번째), 뒤에서부터는 237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0일 5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0번째(윤년일 경우 131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1일 5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1번째(윤년일 경우 132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2일 5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2번째(윤년일 경우 133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3일 5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3번째(윤년일 경우 134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4일 5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4번째(윤년일 경우 135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5일 5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5번째(윤년일 경우 136번째) 날에 해당한다. 세종대왕 탄신일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 탄신일을 바탕으로만듦. 1에서 5까지 도합 1+2+3+4+5=15 5월 15일 5월 16일 5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6번째(윤년일 경우 137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7일 5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7번째(윤년일 경우 138번째) 날에 해당한다.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이기도 하다. 5월 18일 5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8번째(윤년일 경우 139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19일 5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39번째(윤년일 경우 140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0일 5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0번째(윤년일 경우 141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1일 5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1번째(윤년일 경우 142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2일 5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2번째(윤년일 경우 143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3일 5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3번째(윤년일 경우 144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4일 5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4번째(윤년일 경우 145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5일 5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5번째(윤년일 경우 146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6일 5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6번째(윤년일 경우 147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7일 5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7번째(윤년일 경우 148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8일 5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8번째(윤년일 경우 149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29일 5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49번째(윤년일 경우 150번째) 날에 해당한다. 5월 30일 5월 3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0번째(윤년일 경우 151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일 6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3번째(윤년일 경우 154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3일 6월 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4번째(윤년일 경우 155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4일 6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5번째(윤년일 경우 156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5일 6월 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6번째(윤년일 경우 157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6일 6월 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7번째(윤년일 경우 158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7일 6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8번째(윤년일 경우 159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8일 6월 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59번째(윤년일 경우 160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9일 6월 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0번째(윤년일 경우 161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0일 6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1번째(윤년일 경우 162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1일 6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2번째(윤년일 경우 163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2일 6월 1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3번째(윤년일 경우 164번째) 날에 해당한다. 커플간 최초의 결혼이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 미국 6월 13일 6월 1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4번째(윤년일 경우 165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4일 6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5번째(윤년일 경우 166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5일 6월 1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6번째(윤년일 경우 167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6일 6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7번째(윤년일 경우 168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7일 6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8번째(윤년일 경우 169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8일 6월 1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9번째(윤년일 경우 170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19일 6월 1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0번째(윤년일 경우 171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0일 6월 2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1번째(윤년일 경우 172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1일 6월 2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2번째(윤년일 경우 173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2일 6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3번째(윤년일 경우 174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3일 6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4번째(윤년일 경우 175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4일 6월 2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5번째(윤년일 경우 176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6일 6월 2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7번째(윤년일 경우 178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7일 6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8번째(윤년일 경우 179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8일 6월 28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9번째(윤년일 경우 180번째) 날에 해당한다. 6월 29일 6월 29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0번째(윤년일 경우 181번째) 날에 해당한다. 조용기 조용기(趙鏞基, 1936년 2월 14일 ~ )는 대한민국의 종교인이다.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하였고 현재 원로목사이다. 본관은 함안이며, 울산 출신이다. 조용기는 1936년 2월 14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울산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아버지 조두천과 어머니 김복선의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7세이던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인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다가 고향 울산 진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며 부산으로 통원 치료를 받았다.1956년 서울로 올라와서 순복음 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같은 학교에서 만난 최자실 목사의 딸 김성혜와 1965년 3월 1일 결혼하였고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조용기 목사는 20세에 대조동 천막촌에서 최자실 전도사와 공동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교인 약 78만 명에 이르는, 세계 개신교 최대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당회장 목사로 목회했다. 일본어, 영어에 능숙하며, 해외에서의 오순절교회 선교활동을 통해 개신교 선교에 공헌했다. 2008년 5월, 당회장 목사로서의 임기를 마쳤고,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 목사로서 활동하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제2대 당회장에 이영훈 목사를 압도적인 지지율로 선출했다. 2011년 9월 19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29명은 조용기 원로목사와 조 목사의 장남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들은 "조 목사가 당회장 시절 교회 돈을 가져다 장남 조희준씨의 주식 투자에 200억원 넘게 사용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조용기가 '조용기의 내연녀였다가 배신당했다'는 내용의 소설인 '빠리의 나비부인'의 출판을 방해하기 위해 교회돈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 이영훈목사측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겠으며, 사생활의 영역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2014년 1월 20일 교회에 150억원대 손해를 입힌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에 대해 검찰이 징역 5년을 구형했다.지난 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조용기 원로목사에게는 징역 5년과 벌금 72억 원을, 아들인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구형했다. 2014년 1월 21일, 5년 징역과 75억 과징금이 구형되었다. 대한민국 목사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이며, 2004년 시사저널은 조용기 목사의 비리, 사생활, 베데스다 대학 세금 횡령 의혹을 제기했다. 시사저널은 수 조원대에 이르는 순복음교회 재산과 한해 1천 7백억 원에 달하는 헌금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MBC는 뉴스후 프로그램을 통하여 조용기 목사의 장남 조희준의 횡령 및 탈세 후 일본 도피 중인 사실을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2014년 2월 20일에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고, 장남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계명대 조직신학박사인 정용섭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의 축복을 받으며 영혼이 잘 된다는 소위 삼박자축복론은 신학적, 성서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프랑스 소르본대 역사신학박사인 김삼환은 이러한 복의 해석이 신학적, 성서적 근거가 있으며, 성서의 전반적으로 흐르는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에 근거한 사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유대인이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으로 스위스와 미국에서 활동한 이론물리학자이다.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1년 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인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동안 300개 이상의 과학 논문을 포함하여 다양한 업적과 활동으로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현대에도 천재적 인물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독일제국 울름에서 전기 회사 사장이었던 유대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마야(Maja)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브리네는 매주 교회에 나가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집안에도 청동으로 만든 십자고상이 있었다. 한 살 때 아버지와 숙부의 전기 회사 설립으로 대대로 살던 울름을 떠나, 뮌헨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은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가 다닌 초등학교는 로마 가톨릭 학교였는데, 교사가 수업 시간에 대못을 보여 주며,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아인슈타인이 존경 받는 과학자가 된 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백부와 숙부의 영향으로 일찍이 수학과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과 수학 성적은 매우 좋았으나 학교에서는 대체로 군대식 전체주의 교육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반항적인 학생이라 여겨졌다. 1894년에는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가족 전체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건너가게 된다. 그는 이후 홀로 독일의 김나지움에 진학했으나, 학생의 개성을 무시하는 군대식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결국 신경쇠약으로 공부를 쉬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17세의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라며 학교를 떠났다. 이후 독학으로 공부하여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1년간 아라우에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서 결국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중상위권을 맴도는 수준으로 특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연방 공과대학교 교수였던 저명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와의 마찰 때문에 수학에 대한 흥미를 상실한 상태에서 물리학에 더욱 심취하여 출석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학과 물리학 시험에서는 1등을 하기도 했으나 졸업 시험 때는 만점 6점에 평점 4.91점을 받아 전체 6명 중 4등을 했다. 그러나 대학 동기이자 후일 아내가 되는 밀레바 마리치는 졸업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서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한다. 밀레바는 특히 수학 성적이 부족했는데, 추후 재수를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이는 후술하게 되는, 밀레바 마리치가 초기 아인슈타인 논문의 조력자인가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는 한 근거가 된다. 1900년 봄, 아인슈타인은 연방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시민권 문제와 유대인에 대한 배척으로 취직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가정교사, 임시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다행히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대학 친구였던 수학자 마르첼 그로스만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의 심사관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특허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1905년,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일련의 중요한 논문들을 다섯 편 연달아 발표한다. 우선 5월 한 달 동안 차례대로 브라운 운동에 관한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들의 운동에 대하여', 빛의 광전 효과를 설명하여 고전 양자론을 태동시킨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 그리고 특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1905년 8월에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설을 제창한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 를 발표하였다. 1905년에 발표한 이 네 편의 논문들은 최초로 원자의 존재와 통계적 요동을 바탕으로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한편, 현대물리학에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라는 두 축을 등장시키게 되는 혁명적인 논문들이었다. 또한 도중에 같은 해 7월에는 '분자의 크기에 관한 새로운 규정' 을 발표한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으로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 논문은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후 특수 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도입하여 중력을 포함한 이론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특허 사무소를 떠나서 학계로 입성한 그는 스위스에서 그리고 프라하와 독일의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년 겨울에 모교인 ETH 취리히의 교수로 돌아왔다. 1914년에는 독일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베를린에 머무르게 된다. 1914년에 드디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측지선 공식에 대한 최초의 형식화인 '일반 상대성 이론의 형식적 기초' 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시행 착오 끝에 1915년에 발표한 4편의 논문 중 마지막인 '중력의 장방정식' 에서 마침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완결된 장방정식을 최초로 구현해 내었다. 1919년 런던 왕립 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관측에서 그해 5월 29일의 일식을 촬영하였는데, 일반 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이 검증되었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고전역학적 세계관을 마감한 인물로서 범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는 광전 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광양자설을 통해 양자역학의 초기 기반을 닦는 주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양자역학을 온전한 이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해 제창된 코펜하겐 해석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수 년에 걸친 보어와의 논쟁을 통해 EPR 역설 등의 사고 실험을 제기하며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을 폐기하려 노력하였으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두 석학의 논쟁을 통해 다른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의 개념적 기반을 공고히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말년에는 양자역학과 거리를 두고 홀로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였다.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 특히 1905년 소위 '기적의 해'에 씌여진 광양자설과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들에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한 동안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05년에 발표된 논문의 저자에 "아인슈타인-마리치"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것이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역사가들과 물리학자들의 조사를 통해 그녀가 과학적 연구에 기여하였다는 특별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인슈타인의 초기 논문에 잠깐 등장한, 이름을 이어 붙인 저자 명은 밀레바가 아인슈타인과의 첫 아이 리제를(나중에 사생아 혹은 결혼 직전에 입양해버림)을 임신한 전후 시기에 힘들었을 때, 당시 스위스에서 관습적으로 서명하던 방식(뒤에 아내의 성을 붙여 적음)을 결혼 전에 미리 사용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와 1914년 이혼한 이후에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지속적으로 왕성한 과학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녀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졸업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과학적 결과물을 출판했던 적이 없다. 마리치는 두 번의 도전 끝에, 특히 수학 성적의 부족으로 졸업 시험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또한 마리치 본인은 그녀의 친구와 (아인슈타인 본인이 수없이 많은 연구 아이디어를 공유했던) 그의 동료에게 그녀 본인이 그의 연구에 관여되었다는 언급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헬레네 사비치(Helene Savić)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서도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연구에 관여하였다는 힌트는 보이지 않는다. 부부의 첫 번째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결혼과 동시에 과학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33년 미국 방문 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같은 해 5월에 잠시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독일 영사관을 방문하여 독일 시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미 그의 재산은 나치 독일에 의해 압류된 뒤였으며, 시집간 그의 두 딸도 독일을 벗어나 인근 국가에서 살아야 했다. 194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이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교수로 지냈다.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나치 독일에서 핵무기 개발하는것에 상대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을 키워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여러 사람의 설득과 고심 끝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 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1955년 4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 자택 근처의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반유대주의를 느꼈으며 그의 상대성이론이 점차 전 유럽으로 확산될 때 학계에서 반유대주의의 방해를 받기도 했다. 또한 나치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자이자 유대인 국가 건립을 지지한 시온주의자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내 일부 반공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미국 하원 내 반공 정치인들은 "아인슈타인은 수년 전부터 공산주의자로 활약해 왔다.", "지금 그가 퍼뜨리고 있는 허튼 소리는 공산당 노선의 이행일 뿐이다."라며 비난했으며, 에드거 후버 FBI 국장(1924년부터 1972년까지 FBI 국장직 역임)은 아인슈타인의 사상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아인슈타인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34개 공산주의 단체와 연관된 골수 공산주의자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1923년부터 1929년까지도 아인슈타인의 집은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이자 회합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불가지론자였다. 특히 확률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인격신, 유대교와 기독교 세계관의 야훼를 부정하였으며, 자유의지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지 않았고, 생명체의 사고는 주로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생전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또한 1954년에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Eric Gutkind)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관점에서의 창조주에 대한것은 다음과 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아인슈타인이 직접 적인 견해와 달리, 주변에서 본 아인슈타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은 같이 연구를 하는 동료 과학자들과의 입장과는 달리, 비록 성경에서 기록된 창조주는 아니라도,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라고 휴 로스(Hugh Ross, 점진론적 창조론자) 박사는 책에 기록하였다. 아인슈타인은 평생을 통틀어 수많은 책과 논문을 출판하였다.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한 내용이며 몇 가지는 정치와 세상에 대한 견해를 담은 내용도 있다. 학술적인 내용 이외의 그의 견해를 밝힌 책 혹은 연설의 모음집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 프로그래밍 언어는 컴퓨터 시스템을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한 형식언어이다. 고급 언어일수록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에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 곧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를 가리키는 때가 많고, 이때에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하지 않고 소프트웨어를 프로그래밍 언어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델파이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오브젝트 파스칼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작성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일 뿐이지만, 델파이를 별개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보는 때가 더 많다. 최초의 컴퓨터는 종종 프로그래밍 언어의 도움 없이 프로그래밍되었는데, 이는 프로그램들을 절대적인 기계어로 작성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0진이나 이진 형태의 프로그램들은 천공 카드나 자기 테이프로부터 읽거나 컴퓨터 프론트 패널의 스위치를 켜고 끔으로써 불러들였다. 절대적인 기계어는 나중에 1 세대 프로그래밍 언어(1GL)로 명칭이 정해졌다. 다음 단계로 이른바 2세대 프로그래밍 언어(2GL), 곧 어셈블리어가 개발되었으며 여전히 특정 컴퓨터의 명령어 집합 구조와 밀접하게 관계되었다. 프로그램을 훨씬 더 인간이 읽기 쉽게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주소 계산 시 따분하고 오류가 발생할 경향이 있는 프로그래머를 안심시켜 주었다.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즉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3GL)는 1950년대에 작성되었다. 컴퓨터용으로 설계될 초기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는 Plankalkül였으며, 콘라트 추제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Z3용으로 개발될 것이었다. 그러나 1998년, 2000년까지 구현되지 않았다. 4세대 프로그래밍 언어(4GL)는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보다 내부 컴퓨터 하드웨어의 상세한 부분을 더 고급적으로 추상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5세대 프로그래밍 언어(5GL)는 프로그래머가 작성한 알고리즘을 이용하지 않고, 프로그램에 주어지는 제약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언어이다. C언어의 C는 약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역사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통상 A언어부터 B언어, C언어 순으로 발전해 왔다고 일컬어진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데이터(data)와 명령어(instruction),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데이터는 일련의 바이트 형식으로 저장된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이런 바이트들을 유용한 형태로 정리한다. 사용자는 필요에 따라 데이터를 다음과 같이 선언(declaration)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언하면, 컴퓨터 메모리의 한 영역을 'MyData'라는 이름의 정수(integer) 타입으로 저장한다. 메모리의 어느 영역에 데이터를 저장할 것인가는 컴파일러가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사용자는 컴파일러의 내부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몰라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MyData'는 간단한 변수(variable)이고, 한 개의 정수만 변수에 담을 수 있다. 여러 개의 변수를 만들고 싶으면 아주 간단하게 배열(array)을 만들 수 있다. 소프트웨어 공학의 발달로 보다 복잡한 자료형들이 필요해졌다. 예를 들어, 사각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형을 정의한다고 하자. 한 사각형을 정의하려면 너비, 높이, 색과 같은 여러 정보가 동시에 필요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변수나 배열의 선언만으로는 이런 정보들을 잘 정의하기가 어렵다. C 언어와 같은 고급 언어(high-level language)는 보다 정교한 자료형의 선언을 지원하여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의 데이터 선언들을 한데 엮은 새로운 자료형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에게 지시를 내려야 한다. 컴퓨터는 현재 실행하고 있는 지시의 내용과 다음에 실행할 지시의 위치만 알고 있다. 컴퓨터 언어는 컴퓨터의 하드웨어를 직접 제어하는 초기의 어셈블리와 같은 언어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는 C 언어와 같은 고급 언어(high-level language)로 발전되어 왔다. 프로그램 언어가 상위 레벨로 발전될수록 프로그램은 좀 더 인간의 언어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 이에 따라 프로그램 언어의 학습과 프로그램의 구현이 보다 수월해진다. 프로그래머는 상위 레벨의 지시문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하면 컴파일러가 이 지시문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기계어로 번역한다. 지시문들을 한데 묶어 놓은 것들을 함수(function)이라 한다. 함수는 특정한 동작을 일반적인 형태로 정의해 놓은 지시문의 집합이다. 똑같은 동작이 필요하면 지시문을 다시 작성할 필요없이 함수의 매개변수를 이용하여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C 언어는 검색, 정렬, 입출력에 관련된 다양하고 풍부한 표준 함수(standard functions)들을 제공한다. 이런 표준 함수가 제공되는 덕분에 사용자는 해당 함수를 만드는 데 드는 노력을 절약할 수 있다. 연결된 함수들을 한데 묶어 놓은 것은 모듈(module)이라 하고, 모듈들의 상호 연결로 하나의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듈들을 재사용할 수 있게 모아둔 것을 라이브러리라 한다. 한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언어(OOP)인 자바스크립트에서 사용되는 기초적인 문법의 개념으로는 속성과 메쏘드를 같는 객체(오브젝트) 개념이 있으며, 변수 선언, 함수 정의, 연산자 그리고 제어문등을 주요하게 들수 있다. 유럽 유럽(, , , )은 대륙 중 하나로, 우랄산맥과 캅카스산맥, 우랄강, 카스피해, 흑해와 에게해의 물길을 분수령으로 하여 아시아와 구분한 지역을 일컫는다. 북쪽으로는 북극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지중해, 동남쪽으로는 흑해와 그와 비롯한 물길과 마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과거의 고전 고대 시대의 개념으로서 이해하기에는 모호하므로, 자연지리학으로서의 유럽은 문화와 정치적 요소를 포함하여 정의한다. 유럽은 10,180,000 km² 또는 지구 표면의 2%, 육지의 약 6.8% 지역으로 표현된다. 유럽은 약 50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과 인구로서 러시아가 가장 크고, 바티칸 시국이 가장 작다. 인구가 많은 편이며, 아시아의 각 지역들과 아프리카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다. 세계 인구의 약 11% 인 7억 3천 9백만 명이다. 유럽은 서구 문화의 기원이며,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서 비롯하고 있다. 15세기 이후부터 세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펼쳤으며, 식민주의를 시작하였다. 16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아메리카, 대부분의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였다. 대영 제국은 산업혁명을 시작하여 경제, 문화, 사회의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에우로페() 매혹적인 하얀 황소로 둔갑한 제우스에게 유괴당한 페니키아의 공주로 나온다. 제우스는 에우로페를 크레타섬으로 데려가 미노스, 라다만튀스, 사르페돈을 낳았다. 호메로스가 쓴 문헌에서 에우로페는 크레테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왕으로 나오지, 지명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후대에 '에우로페'는 그리스 중북부를 일컫게 되며, 기원전 500년경에 그 의미는 북쪽 땅으로 확대된다. 유럽의 어원은 에우로페의 이름으로부터 왔으며, 일설에 따르면 이 말은 그리스어로 넓다를 뜻하는 eur-와 눈을 뜻하는 op- 또는 opt-가 결합하여 넓게 보는, 시각의 넓음을 뜻하는 Eurṓpē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넓다는 말은 재구성된 원형 인도-유럽 종교에서 지구를 이르는 별칭적인 형용사이다. 다른 설에서는 이 말이 사실 아카드어 낱말 erubu(내려가다, 해 지다)나 그 동계어인 페니키아어 낱말 ereb(저녁, 서쪽), 아랍 마그레브, 히브리어 낱말 ma'ariv 등 셈어 낱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음운론적으로 에우로페라는 이름과 다른 셈어 형태의 낱말 사이에 연관성이 적다는 주장도 있다. 대부분의 세계 주요 언어에서도 이 지역을 일컬을 때 에우로페에서 파생된 말을 쓰고 있다. 가령 중국어에서는 음차어 歐羅巴洲()의 축약어인 歐洲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일부 튀르크어족에서는 Avrupa 또는 Evropa라는 공식 명칭이 있으나 Frengistan(프랑크인의 땅)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 유럽에서 최초로 거주한 사람과는 기원전 180만 년에 조지아에 거주했던 호모 에렉투스이다. 기원전 15만 년에 등장하여 기원전 2만 8천 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 또한 유럽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과로 여겨진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가축을 기르고 농작물을 재배했으며 도구를 만들 정도로 진화했다. 특히 기원전 7,000년경부터는 발칸반도, 지중해 연안, 도나우강 유역, 라인강 유역에 사람이 거주했고 기원전 4,500년경부터 기원전 3,000년경 사이에 신석기 문명이 서유럽과 북유럽 등으로 확산되었다. 기원전 3,200년경부터 유럽에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그리스 크레타에서 일어난 미노아 문명은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여겨진다. 미노아 문명은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고 기원전 1,200년경부터는 철기 시대를 맞게 된다. 고대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철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역사 분야에서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서사시 분야에서는 호메로스, 희곡 분야에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의학 분야에서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과학 분야에서는 피타고라스,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가 유럽의 문화에 기여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라고 부르는 도시 국가가 설립되었는데 아테네는 세계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국가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뒤를 이어 등장한 고대 로마는 법률, 정치, 언어, 기술, 건축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룩했다. 기원전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로마 제국은 기원후 180년까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는 유럽의 평화, 번영, 정치적 안정을 맞았다.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330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꿈)으로 옮겼다. 392년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해졌고 395년에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다. 476년에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만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고트인, 반달족, 훈족, 프랑크인, 앵글인, 색슨인, 슬라브족, 아바르족, 불가르인, 바이킹, 페체네그인, 쿠만인, 헝가리인과 같은 수많은 민족들의 전쟁과 이주가 진행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 옛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는 국가임을 표명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유럽의 법률에 큰 영향을 끼친 로마법 대전을 제정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아야 소피아를 건립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옛 서로마 제국의 영역을 지배했는데 프랑크인의 왕이었던 클로도베쿠스 1세는 프랑크인을 하나로 통일했다.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 국왕은 서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800년에는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843년에 체결된 베르됭 조약, 879년에 체결된 메르센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3개 왕국으로 분할되었고 96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했다. 동유럽, 중앙유럽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국가들, 슬라브족 국가들이 등장했는데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키예프 공국, 불가리아 제1제국,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054년에 일어난 동서 교회의 분열을 계기로 기독교는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 정교회, 옛 서로마 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로 분열되었다. 1066년에는 노르만인이 프랑스를 정복했다. 1095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명령에 따라 이슬람교 세력이 장악한 예루살렘, 거룩한 땅을 탈환하기 위한 차원에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침공하면서 크게 파괴되었다. 14세기에는 극심한 대기근, 흑사병의 확산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봉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서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차원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났고 1378년부터 1417년까지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 사이에서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문화 분야에서는 고전 문화의 부흥을 의미하는 르네상스가 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예술가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다. 종교 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전개하면서 교회의 힘이 약화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15세기에는 포르투갈, 스페인이 신대륙을 탐험하면서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1492년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동양으로 가는 해양 항로를 발견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 또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에 나서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과학 분야에서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사회는 계몽주의 사상의 등장을 계기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귀족정, 성직자들의 권력 독점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민들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절대주의의 종식과 자유주의의 등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세력을 확장하고 프랑스 혁명의 사상을 전파했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몰락하고 만다. 1815년에는 유럽의 5대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빈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유럽 내에서의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한편 유럽의 정치 질서를 반동주의, 보수주의 체제로 회귀하는 성격을 가졌다. 유럽 내에서 반동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반감은 1848년 혁명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유럽 내에서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도시의 빠른 성장, 생산량 증가, 인구 증가, 일자리 증가, 경제·사회 분야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삼국 협상(프랑스, 러시아, 영국) 진영과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진영 사이에 일어난 치열한 전쟁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차르 체제가 종식되었고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중대한 제재 조치를 부과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 독립한 국가들이 형성되면서 유럽 국가 간의 경계선도 새로 확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럽에서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919년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22년 이탈리아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경제 위기를 겪게 되었고 1933년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치열한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에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1989년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유럽의 일반적 정의는 지리 또는 정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때때로 와 가 포함되기도 한다. 유럽은 유라시아 서쪽의 1/5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유라시아 전체 면적의 19.2%에 달한다. 유럽은 다른 대륙에 비해 대륙과 접하고 있는 해안선의 비율이 더 높은 편이다. 유럽의 해상 경계선은 북쪽으로는 북극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의 지형은 비교적 작은 지역 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남쪽 지역은 산악 지대가 많은 반면 북쪽 지역은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카르파티아산맥을 거쳐 언덕이 많은 고지대를 지나 넓고 낮은 북쪽 평원으로 내려간다. 동쪽에 위치한 넓은 저지대는 유럽 대평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심에는 북독일 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고지대는 영국과 아일랜드섬의 서부 지역에서 노르웨이의 피오르 지대까지 뻗어 있다. 이베리아반도와 이탈리아반도와 같은 하위 지역은 중앙유럽 본토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복잡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고원, 강, 계곡과 같은 지형이 분포하고 있다. 다수의 분지는 일반적인 경향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지만 아이슬란드, 영국, 아일랜드와 같은 지역은 특별한 경우이다. 전자는 그 자체로 유럽의 일부로 간주되는 북쪽 바다에 있는 육지이고 후자는 해수면이 상승하여 그들을 고립시킬 때까지 한때 본토와 결합되었던 고지대 지역이다. 유럽은 주로 온대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인해 같은 위도에 위치한 전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온화하다. 멕시코 만류는 유럽의 중앙 난방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이는 유럽의 기후를 다른 곳보다 더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멕시코 만류는 유럽 해안에 따뜻한 물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대서양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부는 편서풍을 따뜻하게 한다. 유럽의 기후는 크게 건조 기후, 온대 기후, 냉대 기후, 한대 기후로 나뉜다. 북서유럽은 서안 해양성 기후, 중앙유럽, 동유럽은 대륙성 기후, 남유럽은 지중해성 기후를 띠고 있다. 그 외에 이베리아반도 내륙 일부 지방은 스텝 기후, 스칸디나비아반도는 타이가 기후,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 해안은 툰드라 기후, 알프스 산맥 지대는 고산 기후를 띤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까지는 지중해에서 북극해에 이를 정도로 유럽의 약 80~90%가 삼림으로 뒤덮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곳곳에서 삼림 벌채와 목초지의 확장이 진행되었고 인류가 거주하면서 유럽의 식생 또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유럽의 식생은 기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기후대마다 서로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서안 해양성 기후 지대에는 느릅나무, 너도밤나무, 갈참나무, 박달나무와 같은 낙엽 활엽수가 많은 편이며 지중해성 기후 지대에는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코르크나무와 같은 상록 활엽수가 많은 편이다. 유럽 내륙 지대에는 활엽수와 침엽수의 혼합림이 분포하고 있고 타이가, 툰드라 지대에는 전나무, 소나무, 참나무, 가문비나무와 같은 상록 침엽수가 분포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유럽은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여러 분야에서 동서 진영으로 갈라졌다. 1947년에는 미국이 마셜 플랜에 따른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시행했고 1949년에는 소련이 미국의 마셜 플랜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함께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를 결성했다. 1949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이 소련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결성했고 1955년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는 1948년에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이후부터 비동맹 운동의 맹주 역할을 했다. 1952년에는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이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를 결성했고 1958년에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를 결성했다. 이들 기구는 1967년을 기해 단일 기구로 통합되었고 1993년에 출범한 유럽 연합(EU)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9년 혁명을 계기로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1991년 냉전 종식을 계기로 경제 경제상호원조회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해체되었다. 유럽 연합은 유럽 28개국이 가입한 국가 연합으로서 정치·경제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외에 유럽 연합에 가입한 19개국은 유로존에 소속되어 있으며 유럽 26개국은 국경 통행이 자유로운 솅겐 지역에 소속되어 있다. 그 외에 유럽에는 유럽 평의회, 독립 국가 연합, 유럽 안보 협력 기구, 발트 의회, 북유럽 이사회, 비셰그라드 그룹과 같은 기구가 존재한다. 유럽에서는 주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군, 스칸디나비아 남부에서 사용되던 언어에서 파생된 게르만어군, 슬라브족이 사용하던 언어에서 파생된 슬라브어파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슬라브어파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원어민이 분포하는 어파로서 중앙유럽, 동유럽, 동남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로망스어군은 남유럽, 서유럽, 동유럽에 위치한 루마니아, 몰도바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게르만어군은 브리튼 제도(영국, 아일랜드), 북유럽에서 널리 사용된다. 그 외에 발트어파(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 켈트어파(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웨일스어, 콘월어, 맨어, 브르타뉴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알바니아어가 존재한다. 튀르크어족(터키어, 아제르바이잔어, 타타르어, 크림 타타르어, 바시키르어, 추바시어 등)은 동유럽, 동남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랄어족(핀란드어, 헝가리어, 에스토니아어, 우드무르트어, 마리어, 에르자어, 코미어 등)은 핀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카르트벨리어족(조지아어 등)은 조지아에서 널리 사용된다. 몰타어는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이고 바스크어는 유럽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에서 드물게 고립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유럽의 문화는 세계의 음악, 미술, 건축, 문학, 영화, 과학, 철학, 종교, 패션, 요리, 스포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문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유럽에서 종교는 역사적으로 예술, 문화, 철학, 법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는 기독교인데 유럽에 거주하는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76.2%에 달한다. 유럽의 기독교는 종파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으로 나뉜다. 기독교 문화는 4세기 초반에 로마 제국에서 공인되면서부터 서양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럽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는 이슬람교로 유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신자의 비율은 6%에 달한다. 유럽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신자는 터키,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아제르바이잔, 러시아와 같이 발칸 반도, 동유럽에 분포하고 있다. 유럽에 분포하고 있는 소수 종교로는 유대교, 불교, 힌두교, 현대 이교 등이 있다. 유럽은 세속주의 영향이 비교적 강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불가지론, 무신론을 표방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과테말라 (도시) 과테말라(, )는 과테말라의 수도로 과테말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완전한 이름은 누에바과테말라데라아순시온()이며 줄여서 갸떼(Guate)라고도 불린다. 종교 종교(宗敎)란 규정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나 문화적 체계(cultural system)를 말한다. 종교는 인간과 관련된 존재의 우주적 질서(a cosmic order of existence)이다. 종교의 뜻을 풀이하자면, 조상신(示)을 모시고 제사하는 종갓집(宀)에 사용되는 '으뜸 종(宗)'에 '가르칠 교(敎)'를 사용한다. 즉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종교인들은 주로 초월적인 대상,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진실, 사람은 어떠한 도덕을 지키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종교는 세계관에 의해 형성되고 또한 종교는 문화의 뿌리이다. 이들의 상호관계는 결과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宗敎)는 본래 산스크리트어를 한역한 불교용어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능가경에서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Siddhanta Desana를 종교로 한역한 용어였다. 한편, '신과 인간을 잇는다.'를 의미하는 Religion이 종교로 해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종교(宗教)에서 앞에 있는 종(宗)을 풀어서 설명하면 宗자는 모든 것의 가장 ‘으뜸’이라는 의미이며, 갓머리 집 면(宀)과 보일 시(示)의 합성어이다. 宀자는 ‘집’이나 ‘갓머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宀자는 지붕을 본떠 그린 것이다. 시(示, 보일 시)는 ‘보이다’나 ‘알리다’, ‘지시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示자는 신에게 제를 지낼 때 사용하던 제단을 그린 것이다. 제단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던 단(壇)을 말하는 것으로 示자는 바로 그것을 그린 것이다. 示자는 신에게 제를 지내면 길흉이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보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示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신’이나 ‘귀신’, ‘제사’, ‘길흉’과 관계된 의미를 전달한다(네이버 한자사전 참고). 이를 미루어보아 종(宗)은 신을 알려주는 보여주는 으뜸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敎자는 ‘가르치다’나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敎자는 爻(효 효)자와 子(아들 자)자,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爻자는 ‘배움’이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敎자는 이렇게 ‘배우다’라는 뜻을 가진 爻자에 子자와 攵자를 결합한 것으로 ‘아이가(子) 공부를(爻) 하도록 하다(攵)’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敎자는 회초리를 들어 아이를 가르친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이것을 ‘가르침’이라 했다(네이버 한자사전 참고). 따라서 종교(宗教)는 으뜸되는 신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종교(religion)라는 라틴어 어원 릴리지오(religio)는 2개의 어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씨세로(Cicero, De Deorum Natura, 2, 28,72)와 연결하여 라틴어 리레게(relego, 숭배하다)에서 왔다고 한다. re(다시)가 레고(lego, 읽다, read)와 합하여 ‘다시 읽다’, ‘반복 음미하다’, ‘주의깊이 관찰하다’(go over again, consider carefully)의 의미로 신에게 예배하는 것과 관계된 것들을 지속적으로 살피는 것이다. 즉 신을 혹은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Divinae Institutiones, 4, 28)와 연결하여 re(다시)가 리가레(ligare, to bind, 묶다)와 합해 ‘다시 묶다’가 되었다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은 이 견해를 따랐다. 즉 하나님께로 다시 결합하여(to reconnect) 하나님께 대한 경외(reverence for God, the fear of God)가 되었다. 종교와 관련하여 그 종교에 귀의하여 우러나오는 경건한 마음은 종교심(宗敎心)신심(信心)신앙(信仰)불심(佛心)이라 하며, 종교적 신앙에 따르는 마음가짐은 종교의식(宗敎意識)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전례 또는 예전이라고 부르는 종교 의례(宗敎儀禮)는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을 예배하기 위한 여러 예식(Ceremonial: 의식에서의 성직자와 청중의 상징적인 행동과 시각적, 청각적인 상징)순서(Order: 고정된 순서)의식(Ritual: 말이나 노래같은 음성을 표현되는 문서화된 의식과 기도문)을 가리키며 종교 의식(宗敎儀式)이라고도 한다. 고대로부터 종교는 신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 와서 종교는 신과의 관점보다는 인간의 내재적 요소 속에서 종교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 학자들은 종교를 인간의 지, 정, 의, 도덕, 이성 등 각각 하나를 강조하며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아래와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단과 같은 분파적 집단들은 다음의 요소들을 결여하고 왜곡시키고 있다. 인류의 종교적 발전은 평행하게 시대를 따라 흘러왔다. 아직도 고등문화 속에 남아 있는 자연민족의 신앙은 그 후에 일어난 보다 높은 종교의 막연한 근저가 되었다. 마적 외포(魔的畏怖), 무격적(巫覡的)인 신빙(神憑), 마적 열광과 황홀한 춤과 원시적 신비, 그리고 주술적이고 신성한 행사 등의 감정을 비롯하여 거기에서 일어나는 정령신앙(精靈信仰)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儀禮), 영혼숭배와 토테미즘(totemism), 요술사와 주술사, 복술·점술, 청정(淸淨)과 부정(不淨), 유치한 행위나 신성한 행위, 원시적 금욕, 공희(供犧)의 신비, 주물숭배(呪物崇拜) 등의 표상, 그리고 자연주술과 모든 자연의 주적 영화(呪的靈化) 등의 표상은 종교 이전의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서서히 나타난 것에는 숭고한 신성, 신들의 숭배, 제사제도, 의례와 신전과 제사, 신성한 집단과 풍습 등의 표상이 있고, 또, 이런 표상에 속한 것으로서 신화, 우주에 관한 계도적(系圖的)인 의례의 우화(寓話), 신화적인 원시적 사변(思辨) 등이 보여주는 넓은 상상의 활동세계가 전개된다. 이런 모든 요소는 서로 매우 다르나 전혀 개별적으로 연락 없이 집합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관련하고 집결하여 하나의 그물을 이룩하고 있기도 하여, 어떤 기후나 토지에도 놀랄 만큼 서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유사성이 참으로 그 근본에는 통일적이고 합일적인 인간심리 일반의 기능이 있음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자연적 신앙의 뒤를 이어 선종교(先宗敎)라고 부를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으로의 전이과정이 있다. 이 전이는 서양 및 그것을 규정하는 그리스 문화에 나타났다. 기원전 800년부터 500년에 이르는 중요한 기간에 신학이 신화학(神話學)으로부터, 그리고 로고스(logos)가 신화(mythos)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신들에 관한 지식을 뜻했던 신학은 점차로 신에 관한 지식이 되는 동시에 형이상학의 최고점이 되기도 했다. 신앙은 신을 마적 외포의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켜 물리학과 신비사상의 요소를 결합시킨 우주론이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크세노파네스, 아낙사고라스 등의 물리학은 모두 우주론적인 신학이었다. 이 신학은 점점 신화적인 요소를 극복 내지 배제하고 나아가서는 신들의 세계를 신적인 것의 이념(Theion)에 종합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와 신성(神性)의 이념이 되었다. 따라서 신들은 그리스 비극작가(悲劇作家)들에게는 세계와 습관을 지배하는 통일적인 힘이었으며, 본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생각에서만 의의를 갖고 있던 신이란 표현은 절대적 신성이란 이념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과 동시대적인 평행은 극동의 문화인 속에 있다. 피타고라스가 교단(敎團)을 창시한 것이 기원전 약 530년이었는데, 중국의 공자는 약 470년에 죽었고 공자와 동시대의 선배에 노자(老子)가 있었다. 중국의 고대사 시대는 이들보다 이전에 3세기가 지나고 있었다. 동양의 발전이 서양의 그것과 다른 독자성과 개별성을 보여주나 그 차이는 동일한 종속(種屬) 내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얕은 신화적 단계의 극복이나 종교의 확연한 도덕화나 절대자에로의 정진(精進)이 있었다. 공자가 합리주의로 흐른 데 비해서 노자는 '도덕'으로 기울어졌다. 서양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유신론이 공자의 이론에 필적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노자의 도(道) 사상과 맞먹는다. 노자나 공자는 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플라톤에서 인정되는 내적 신비의 빛을 말했다. 이스라엘도 이 세기에 여호와의 자연신화를 깨고 유일신을 찾았다. 엘리야(Elijah)로부터 제이 이사야(Isaiah)와 에스겔(Ezekiel)에 이르는 동안 종족적 종교로부터 개인적인 주관적 종교에로의 전이(轉移)가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종교개혁 준비와 그 성과는 기원전 약 800년부터 큐로스왕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악마신앙과 다신교의 안개를 걷고 예언자적 신신앙(神信仰)과 도덕적 상반의 별견(瞥見)과 역사의 조만간의 종말에 관한 순수한 종교가 출현했다. 이 시대에 평행해서 고대인도는 혼돈된 공희(供犧)에서 바루나(Varuna) 신앙을 성립시켰다. 더욱이 우파니샤드 경전의 내용은 그리스 신학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 불타(佛陀) 시대에 일어난, 일체의 잡다(雜多)는 감각의 가상(假象)이며 무지(無知)에 지나지 않지만, 진지(眞智)는 운동·변화·성질(性質) 없이 시공(時空) 이외에 '제2자가 없는 유일자(唯一者)' 위에 나타난다는 사변(思辨)은 크세노파네스나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적 직관에 의한 신비적 몰아(神秘的沒我)의 특유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의 바라문(婆羅門) 세계에서 그 사변(思辨)과 함께 실천적 종교생활이 발전하였다. 높은 관념의 발전보다 높은 종교에 한걸음 다가섰다. 구제(救濟)·해방(解放)·해탈(解脫)의 깊은 종교적 삼매(三昧)와 금욕적 실천과 생활태도에서의 세간(世間)과 자연적 존재양식을 멸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사이비 종교란 일반적인 종교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전통적인 기존의 종교적 내용을 교주나 특정한 교리를 과장하여 주관적으로 변형시킨 형태이다. 기존 종교와 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이유는 가정과 사회에 도움이 되지않고 그 단체에 속한 신자들에게 해를 많이 끼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의 피해로 생명을 잃기도 하고 많은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법의 의한 엄격한 처벌이 요구된다. 이는 종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자신의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이끄는 곳은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사이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로는 아주 다른 것으로 공자의 말에서 유래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이단이 있다. 이단(異端)은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道)를 말한다. 종교에 명시된 종교적 교훈들은 윤리적 교훈과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종교적 교훈은 반드시 윤리적 교훈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는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적 교훈은 오히려 폭력적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교훈을 윤리적 교훈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본래의 정의(定義)를 모른 채 내린 일반화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예수의 언행을 예로 든 것이다. 이 논리는 그리스도교의 '서로 사랑하라'는 유명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종교는 기득권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즉, 권력은 종교인의 신앙심을 이용하므로, 종교라는 전체주의 하에서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물화(物化)되고 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중세 그리스도교의 십자군이 그러했으며, 현대의 이슬람의 IS가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 내에서의 교인의 물화현상 또한 마찬가지다. 개인이란 없으며, 교회라는 전체 하에 목사라는 기득권을 위하여 개별 신자 일반은 기득권자들의 도구로 전락한다. 본인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본인을 희생한 채, 본인을 지키지도 못한 채 본인만 피해를 입는것은 옳지 않다. 니체는 인간이 만든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신은 종교에서 믿는 신이나 인간을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칸트는 3대 비판서에서 신이란 도덕률 혹은 도덕원리일뿐이라고 일축한다. 니체는 원래 존재하던 절대 법칙들, 규범들을 비판하며 부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며, 전통적인 규범들은 생의 활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겸손, 순종, 섬김, 봉사와 같은 가치들은 단지 노예 도덕인 것이다. 종교의 폭력성 혹은 베타성은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체로 그리스도교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의 문화인류학자 프레이저는 그리스도교가 어떤 신화적 발전 단계를 거치며 성장해왔는지 설명한다. 그의 《황금가지》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인 '살해되는 신'은 전세계 어디에나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주제라고 주장한다. 그뿐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가진 성찬, 세례, 예배 개념 등도 여러 문화와 종교에서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종교라도 전체에 주체가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무신론의 입장에서, 종교는 단지 발전된 신화일 뿐이며, 거기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길로 보인다. 그래서 현대의 무신론 혹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는, 인간 자신이 그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힘든 순간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다시 그 주체성을 회복하는 정도에서만 종교의 역할은 머물러야 한다고 보며, 더 나아가 종교적 교훈은 없으며, 그것은 인간 주체가 판단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여견이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카리스마를 가진자였으며 중세는 종교권을 가진자였으며,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을 가진자였으며, 현대 과학문명 시대는 과학이 진리라고 말한다. 성경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워싱턴 D.C. 워싱턴 D.C.((District of Columbia), )는 미국의 수도이다. 정식 명칭은 컬럼비아 특별구(, )이다. 조지 워싱턴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부터 이름을 지었다. 미국의 어느 50개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 구역이다. 좁지만, 국제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세계 도시이며 금융 센터로서도 높은 중요성을 가진다. 수도로서의 기능을 완수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계획도시이다. 워싱턴 D.C.는 포토맥 강 북쪽 유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서쪽으로 버지니아주와 다른 쪽으로는 메릴랜드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1790년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프랑스의 피에르 샤를 랑팡을 초청하여 새 수도의 설계를 의뢰하였다. 현재의 도로는 잘 정비되어 시원한 거리는 피에르 랑팡의 설계를 골격으로 하여 이어받은 것이다. 이 구역의 인구는 693,972명인데, 주변 교외 지역에서 드나드는 통근자를 고려하면 주중 인구는 백만이 넘는다. 컬럼비아 구역을 포괄하는 워싱턴 대도시권의 인구는 613만 명으로, 미국의 대도시권 가운데 6번째로 큰 규모이다. 미합중국 헌법 제1조에서 주와 다른 연방 구역을 규정하여 이곳을 영속적인 국가 수도로 삼고 있다. 수많은 국가 기념물과 박물관과 더불어 미국 연방 정부의 3부의 중심 관청이 모두 이 곳에 있다. 워싱턴 D.C에는 174개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은행, 국제 통화 기금, 미주 기구, 아메리카간 개발 은행, 범아메리카 의료 기구의 본부가 있다. 무역 협회, 로비 단체, 직능 단체 등 여러 기관의 본부도 이곳에 있다. 워싱턴 D.C는 원래 컬럼비아 영역의 개별 지자체였는데 1871년 의회법으로 도시와 이 영토를 컬럼비아 구역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합병하였다. 이 도시의 법적 명칭이 '컬럼비아 구역'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이전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도시의 이름은 미국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워싱턴 기념탑(555피트, 약 169.3m)의 높이 이상으로 건축물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여, 뉴욕와 달리 초고층 건물이 드물다. 백악관, 펜타곤, 연방 의사당 등 미국의 주요 정부 기관이 있다. 정식 연방주가 아니므로 상원 의석은 없으나, 표결권이 없는 미국 하원 파견대표 1명 (2019년 현재 민주당의 Eleanor Holmes Norton의원)과 대통령선거인단 3표를 확보하고 있다. 최초의 유럽인들이 17세기에 도착했을 때, 알곤킨 족이 현재 워싱턴에 흐르는 애너코스티어 강 주변 지역에 거주 하고 있었다. 워싱턴 D.C.는 계획 도시이다. 워싱턴 도시 계획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라파예트 장군의 군사 공학자로 식민지에 최초로 도착한 프랑스 태생의 건축가, 공학자, 도시 계획가 피에르 샤를 랑팡이 주로 맡았다. 1791년 워싱턴 대통령은 랑팡에게 새 수도 배치 설계를 의뢰한다. 랑팡의 계획은 바로크식 도시 계획을 본보기로 삼아 사각형과 원형을 중심으로 넓은 가로 뻗어나가 개방 공간과 탁트인 경관을 보이는 방식이었다. 랑팡은 도시 계획에 세세한 일까지 고집스레 간섭하여 수도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워싱턴이 임명한 세 위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1792년 3월 워싱턴 대통령은 랑팡을 해임하였다. 그리하여 랑팡과 함께 도시 측량 작업을 함께 하던 앤드루 엘리컷이 도시 계획을 완성하였다. 엘리컷은 가로 형태 등 당초 계획에 수정을 가하기는 하였지만, 랑팡은 워싱턴 시의 전체 설계를 맡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워싱턴 시는 오늘날 북쪽 플로리다 가와 서쪽 록 크릭(Rock Creek), 동쪽 애너코스티아 강(Anacostia River)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들어 랑팡이 의도한 수도의 탁트인 공원과 장대한 국가 기념물의 경관은 빈민가나 아무렇게나 들어선 건물, 내셔널 몰(National Mall)의 기차역 때문에 어지러워졌다. 1900년 의회는 상원의원 제임스 맥밀런이 이끄는 합동 위원회를 꾸려 워싱턴의 국가 의식 핵심부를 꾸미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맥밀런 계획은 1901년에 완성되었다. 이 계획에는 의사당 마당과 내셔널 몰의 경관을 새로이 바꾸고, 새로운 연방 관청 건물과 기념물을 건설하며, 빈민가를 철거하고 새로운 공원 체제를 세우는 것 등이 있었다. 위원회의 건축가들은 도시의 원래 배치를 보존하였고, 이들의 작업은 랑팡이 의도한 설계를 장대하게 완성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899년 12층짜리 카이로 아파트 건물(Cairo Apartment Building)이 들어서자 의회는 건물 고도 제한법(Heights of Buildings Act)을 통과하여 어느 건물도 의사당보다 높게 짓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은 1910년에 개정되어 건물 고도를 인접 가로의 폭에서 6.1m를 더한 높이 이상으로 건설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오늘날 워싱턴 시의 건물 윤곽선(skyline)은 낮고 넓게 퍼진 모양새를 갖추어, 워싱턴 시가 "복잡하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거리에 "낮고 편리한" 건물들이 있는 "미국의 파리"가 되길 바라던 토머스 제퍼슨의 뜻을 따르고 있다. 그러하여 워싱턴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는 구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그러나 도시의 확산 현상으로 교통 및 주택 문제를 이유로 워싱턴의 고도 제한은 비난을 받았다. 구역의 고도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해 시내와 가까운 곳의 높은 건물은 포토맥 강에서 버지니아주의 로슬린쪽에 건설되곤 한다. 컬럼비아 구역은 넓이가 제각각인 4개의 지구(quadrant)로 나뉘는데, 북서 지구(Northwest), 북동 지구(Northeast), 남동 지구(Southeast), 남서 지구(Southwest)가 바로 그것이다. 네 지구의 경계선은 미국 의회 의사당이 기준이다. 모든 도로 이름에는 지구 이름의 약자가 붙어 그 도로가 속한 지구를 표시한다. 워싱턴 시에서는 대부분 모든 거리가 격자 모양으로 뻗어있으며, 동서 방향 거리 이름에는 글자가 붙고, (가령 C Street SW) 남북 방향 거리 이름에는 숫자가 붙는다. (가령 4th Street NW)). 또 원형 교차점에서 대각선으로 뻗어나가는 도로 이름은 우선 미국의 주 이름을 따서 붙이는데, 미국의 50개 주 모든 이름으로 도로명이 있으며, 푸에르토 리코와 컬럼비아 구역의 이름을 지닌 대로도 있다. 워싱턴의 어떤 가로는 특히 눈에 띄는데, 가령 펜실베이니아 거리(Pennsylvania Avenue)는 백악관과 미국 의회의사당을 이어주며, K 거리(K Street)는 여러 로비 단체의 건물을 잇고 있다. 워싱턴에는 174개국 외국 대사관이 있으며, 이 가운데 59개는 매사추세츠 거리(Massachusetts Avenue)에 있는데 이 거리는 비공식적으로 대사관길(Embassy Row)이라 부르기도 한다. 시가지는 포토맥강에 접하여 대서양과 수상 유통이 편리하나 주요 교통은 철도와 비행기를 이용한다. 이 도시는 전형적인 정치도시로서, 취업인구의 태반은 정부기관 또는 그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3차산업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인종차별이 없는 연방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흑인이 증가하여, 시민의 과반수는 흑인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자치제와는 달리, 연방직할이기 때문에 시장(市長)이 없었고, 시민은 종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에서도 선거권이 없었으나, 1962년부터 대통령 선거권을 얻게 되었으며(실제로 1964년부터 행사), 또한 1967년부터 정부가 임명하는 시장을 갖게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후 연방정부의 역할이 늘어남에 따라 워싱턴도 확대되어, 20세기 초에는 30만 명 정도였던 것이 1975년에는 72만이 되었다. 워싱턴의 건축은 대단히 다양하다. 2007년 미국 건축학회(American Institute of Architects)가 선정한 "미국인이 좋아하는 건축" 순위에서 상위 10위 건물 가운데 여섯 곳이 컬럼비아 구역에 있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여섯 건물과 워싱턴의 여러 유명한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조지 왕 시대 풍(Georgian Architecture), 고딕, 현대 양식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 제2제국 양식의 옛 행정부 청사나 미국 의회 도서관과 같은 예외적인 건물도 있다. 워싱턴 시내에서 바깥으로 가면 건축 양식은 더욱 다양해진다. 오래된 건물에는 앤 여왕 시대 건축 양식, 샤토 양식, 리차드슨식 로마네스크, 조지 왕 시대 재현 양식, 보자르, 또 여러 가지 빅토리아 양식 등이 나타난다. 줄지어 선 미국식 집합 주택(Rowhouse)도 이 지역에서 특히 눈에 띄는데, 이런 건물은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발달하여 전형적으로 연방 건축 양식과 후기 빅토리아풍을 따른 것이다. 조지타운은 워싱턴 시를 건설하기 전에 생긴 곳으로, 컬럼비아 구역의 가장 오래된 건축을 보인다. 조지타운의 옛 석조 주택(Old Stone House)는 1765년에 건설되어 이 도시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근처의 가옥 대부분은 1870년대 이후에 건설된 것으로, 당대 후기 빅토리아 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789년에 개교한 조지타운 대학교는 주변 건축보다 더욱 특별하며, 로마네스크풍과 고딕 재현 양식이 섞인 특징을 보인다. 로널드 레이건 건물은 컬럼비아 구역에서 가장 큰 건물로, 총면적이 약 288,000 제곱미터에 이른다.워싱턴 DC는 뉴욕보다 건물들이 낮은데 그 이유는 워싱턴 기념탑보다 더 높은 탑을 세우지 못하도록 미국법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대통령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공화당이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다. 2016년 대선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이 지역에서 92.8%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1789년에 창립한 예수회 사립 대학인 조지타운 대학교와 1821년에 창립한 사립대학 조지워싱턴 대학교와 연합감리회교회에서 설립한 아메리칸 대학교가 있다. 워싱턴 대학이 워싱턴 DC에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워싱턴 주와 다른 특별 자치구이다. 워싱턴 D.C. 를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메이저 리그 야구의 워싱턴 내셔널스, NBA 농구의 워싱턴 위저즈, NFL 풋볼의 워싱턴 레드스킨스, NHL 아이스하키의 워싱턴 캐피털스, 메이저 리그 사커의 D.C. 유나이티드, WNBA 여자농구의 워싱턴 미스틱스가 있다. 워싱턴 D.C.에는 12개의 자매 도시가 있다. 파리는 코뮌의 자매 도시 정책에 따라 파트너 도시로 인정된다. 연극 연극(演劇) 또는 극(劇)은 배우가 무대 장치조명음악 등의 도움을 받아, 연출자의 지도 아래 각본에 의해서 연기를 하여 관객에게 보이는 종합예술이다. 연기의 내용은 액션(인물에 의해서 연기되는 사건)으로서 통일되며, 액션은 몇 개의 막(幕)으로 구분되고, 막은 다시 몇 개의 장(場)으로 세분되어 하나의 극을 형성하고 있다. 구성으로서는 발단상승부정점하강부종결(또는 파국)의 5부로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데, 옛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일치의 설이 취해져서 시간장소플롯의 통일이 필수조건으로 되어 있었다. 극은 비극희극으로 대별되고, 이와는 달리 비희극(悲喜劇)사극(史劇)시극(詩劇)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비극은 후에 표현형식은 변했으나 항상 영원적인 것, 즉 생사자유필연죄신 등을 테마로 하고 있다. 희극은 비극의 영원적근원적인 것에 대해서 일시적현세(現世)적인 것, 즉 인간의 성정(性情)이나 행위의 모순약점 또는 사회의 병폐 등을 테마로 하고, 전체적으로 명랑 경쾌한 기분이 충만하고 있다. 희극 중 단순한 것은 보드빌(대중연극)이나 파르스(笑劇)라 불린다. 연극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태어나서 인류멸망과 함께 죽어갈 공동운명을 지니고 있다. 연극이란 인간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숨쉬고 있는 동안 연극은 밤낮에 따라 죽음과 부활을 반복할 것이다. '자정에 죽은 연극은 솟아오르는 태양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함은 인류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연극도 계속된다는 뜻 이외에, 일단 끝난 공연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되 다시 상연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태어난 연극은 전날 자정에 죽은 연극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다만 내용이 같을 따름이다. 연극은 육안으로 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함은 연극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시나 소설이 활자화되어 그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연극은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사라져 버리고 오직 상연대본과 프로그램, 무대사진, 평론 그리고 그 공연을 본 관객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연극이 순간적인 시간예술임에도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음은 살아 있는 인간, 즉 배우가 인간의 체험을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모방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어떠한 과거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현재'시간에서 진행되게 마련이며, 관객은 과거를 현재에서 체험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서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들)의 행위를 모방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없다. 햄릿의 이 말은 연극이 인간의 행위를 모방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많은 석학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모방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또 다를 수밖에 없으나, 모든 예술에 있어서 그렇듯이 고전적 해석은 타당한 바탕을 이룬다고 하겠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결국 연극이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본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모방한다는 뜻이다. 원래 드라마는 희랍어의 행위·행동에 해당하는 말로서, 행동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가 인간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이 바로 연극의 이념이다. 이와 같은 모방론은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의 예술관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역시 프랑스의 보마르셰도 졸라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연극이란 한낱 인생의 축도(縮圖)에 불과하다. 이들은 '미러 오브 네이처(Mirror of nature)'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무릇 예술가는 많은 소재 가운데서 어떤 특수한 부분을 선택한다. 따라서 선택은 기계적이 아닌, 작가의 예술적 창조력을 필요로 한다. 선택은 기교로서의 '아트(art)'와 예술가로서의 '아트'가 합쳐진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극은 소재의 선택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물대사 속에 무한한 의미를 암시할 수 있는 전달력을 작가가 지닐 일이다. 극작가는 아티스트(artist)여야 한다. 한 걸음 나아가 모방론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해석이 있어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원칙은, 예술은 모방이라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모방설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다. 가령 <크롬웰>의 서문에서 말한 위고의 견해로는, 거울이 편편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출 수가 있는 포커싱 미러(focusing mirror)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약한 빛이 강해지고 불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연극이란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술 구실을 하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사르세이(Sarcey)나 에델린(Hedelin)의 이론 역시 위고(Hugo)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발전적인 견해이다. 에델린의 "연극이란 있었던 사건 그대로를 상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상연해야 한다"는 이론은 극작가의 사상과 철학에까지 언급한 것이 된다. 사실 고전적 이론으로, 과거를 다루는 것이 역사라면 문학은 당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전제는 모방설에 대한 졸라나 보마르셰의 해석에 대해서 수정을 가하게 만든다. 당위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는 이론을 부연하는 또 하나의 이론을 브륀티에르의 연극론에서도 볼 수 있으니, 연극은 어떤 목표를 향해 애쓰는 인간의 의지를 그려야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 의지란 당위의 세계를 이룩하려고 노력하는 의지임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고전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연극은 제 나름의 길을 걸어오고, 또 걸어갈 것이지만, 그들의 연극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건 간에 인류역사가 변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 역시 많은 변화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 막이 내려, 죽어버린 연극이 내일 다시 되살아날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연극은 인간의 기다림 속에서 영원히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보통 연극의 3요소를 희곡, 배우, 관객, 그리고 연극의 4요소라 할 때는 무대, 배우, 관객, 희곡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연극의 요소를 이런 식으로 구분짓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연극은 배우, 관객, 희곡 이외에도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1. 희곡 연기(演技)를 위하여 쓰인 작품. 2. 배우 희곡에 나오는 인물의 역을 맡아 무대에서 표정 몸짓 등의 동작과 대사로 극적 행위를 해 보이는 사람. 3. 관객 흥행물을 구경하는 사람. 드라마에는 보충 설명이 있을 수 없으므로 드라마의 대사는 간결, 명료하면서도 그 대사 중에 시간, 장소, 상황, 인물 들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다 모아야하는 부담이 있다. 드라마의 대사는 자연스럽게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태도, 견해, 성격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극작가는 토론, 논쟁, 물음 등의 대사형식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행동을 추측하고 예견케 하며 그에 대한 복선을 까는 역할도 해야 한다. 소설작가는 소설 속의 내러이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지만 극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고 다만 서로 맞물려 짜여진 대사를 통해 이야기의 결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행동이란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액션(상단 참조)들의 그 실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특정행동을 명시하기도 하나 많은 부분은 연출자와 배우에게 담당되어있다. 희곡을 '읽을 때'에는 관객(독자)가 스스로 연출자가 되어 상상의 무대 위에서 배우를 움직이고 그들에게 대사에 맞는 제스쳐를 부여해야 하지만, 배우들이 직접 연기를 하는 극 중에서는 대사와 행동에 유의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기반으로 극을 올바르게 즐기면 된다. 소설의 기법이 드라마에 차용되기 이전인 19세기 전반 이전에 쓰여진 희곡의 경우 희곡에 무대지시사항이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대사 속에 암시되어있는 행동에 유념하며 작품을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가는 주요한 이유는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름다운 대사나 고상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재미'이다. 드라마에도 간혹 회상의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축으로 한다. 극적 행동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만 그저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극작가에 의해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외에 플롯의 역동적 구성을 위해서는 ‘왜 어떤 일이 일어날까’하는 점이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문학에서 느끼는 흥미는 그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 관한 것이다. 드라마는 살아있는 배우들에 의해 작품 속의 인물들이 표현되는 점에서 인물들은 관객들의 주요한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다. 등장인물에는 주인공과 주인공과 맞서는 인물이 있다. 주요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을 구별하는 손쉬운 방법은 대사의 길이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차이는 주인공의 경우 복잡한 동기와 과거를 지닌, 충분히 개성화된 인물임에 반해 그렇지 않은 인물들은 이렇다할 개성이 부여되지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의 성격이 간단명료하게 정의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예는 거의 없다. 주인공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비록 믿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름과 외모이다. 예컨대 「오셀로」에서 이야고를 부르거나 그에 대해 언급할 때면 ‘정직한’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성격부여의 또 다른 방법은 한 개인의 행동양식이다. 어떤 인물이 자신의 성격과 행동동기를 방백이나 독백을 통하여 밝혀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사 중에 사투리, 어휘의 선택, 문법 등 모든 것이 합해져서 한 인물의 과거와 지성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인물이 다른 인물들에게 보이는 반응이나 다른 인물들이 그 인물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에서도 성격이 드러난다.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 지나칠 정도로 일관성 있는 인물은 일반적으로 사실성이 희박해 보인다. 아마도 문학 작품 속에서 훌륭한 성격설정이라 함은 수긍은 가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그들의 동기는 복잡 미묘하고 일견 모순되는 듯이 보이기조차 한다. 연극을 쉬는 것을 '휴극'이라고 한다. 휴극일은 연극에 따라서는 다른 요일에 휴극하는 것도 있지만, 보통 연극은 월요일에 쉰다. 제우스 제우스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신(主神)이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막내아들이며 포세이돈, 하데스 등과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번개와 독수리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긴 수염이 나 있는 강인하고 위엄있는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상체는 나신이며, 한쪽 손에는 번개 혹은 홀(笏)을 들고 있다. 제우스는 번개나 비 같은 기상 현상을 주재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질서와 정의를 유지하며, 왕권 및 사회적 위계질서를 보장하기도 한다. 또한 호색한이기도 한 그는 헤라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여신이나 인간 여성 그리고 님프들과 차례대로 어울리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제우스의 이러한 호색한적 측면은 우주 만물은 주신(主神)의 힘과 질서와 정의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우주에 주신(主神)의 힘과 질서와 정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화에 나오는 이름난 영웅들은 대부분 제우스의 후손들(또는 사생아들)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제우스와 헤라 사이의 적자들보다 제우스의 사생아들이 그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것이다. 한 예로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인 헤파이스토스는 손재주는 모든 신들 중 가장 뛰어나며 착하였던 반면 못생긴데다가 절름발이였으며, 아레스는 전쟁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성급하였다. 이에 비해 헤라클레스는 모든 신들 중 가장 힘에 세었으며, 아폴론은 멋지고 지혜가 많았던 데다가 예술과 예언에 능하였으며, 아프로디테는 미모가 뛰어났으며, 헤르메스와 아테나는 지혜가 있었다. 제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불길한 예언을 들었다.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크로노스 자신도 아들에 의해 쫓겨난다는 것이었다.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크로노스는 아내인 레아에게서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족족 삼켜버렸다. 자식을 잃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레아는 한 명이라도 구하고자 여섯 번째 아이를 출산할 때 아이 대신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 돌덩이의 이름이 바로 이다. 그리고 진짜 제우스는 아말테이아에게 맡겼다. 그렇게 제우스는 남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레아는 제우스를 숨기기 위해 가이아의 조언에 따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아이가이온산의 깊은 숲 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쿠레테스라 불리는 정령들이 아기를 안전하게 지키게 했다. 정령들은 칼을 부딪치고 청동 방패들을 요란하게 두드리면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감추었다. 이런 식으로 레아는 제우스가 성장해 어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아말테이아라는 암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나중에 제우스는 아말테이아가 죽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녀를 하늘로 올려보내 염소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어른이 된 제우스는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 크로노스를 폐위하고 신들의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우선 동료를 모으기 위해 아버지가 삼킨 형제들과 누이들을 되찾고자 그는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로부터 구토제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레아는 제우스로부터 구토제를 받고 남편인 크로노스에게 자신이 직접 담근 술이라며 속이고, 레아에게서 받은 구토제를 마신 크로노스는 예전에 삼킨 모든 자식과 돌을 토해냈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이 그들이었다. 구출된 그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 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식들인 퀴클로페스 형제와 헤카톤케이르 형제의 도움까지 받고 막판에 자신의 아들인 헤파이스토스가 자신의 삼촌들인 퀴클로페스들과 같이 벼락을 발명하여 이 벼락이라는 무기까지 얻게 된 올림포스 신들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어 티탄 신들을 대지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독일의 국기 독일의 국기()는 독일의 국가색인 흑색, 적색, 금색()이 가로 세 줄, 같은 비율로 배치된 삼색기이다. 이 기는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처음 국기로 지정되었다. 별칭은 연방기()라 한다. 흑-적-금의 삼색기는 19세기 초 처음 나타나 1848년 독일 혁명 당시 유명해졌다. 1848년 ~ 1850년 2년간 단명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이 삼색기를 민주적 통일 독일 국가의 기로 제안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연방기는 독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방기는 서독과 동독 쌍방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양측의 국기는 1959년까지 동일하였으나, 1959년에 동독에서 국기에 문장을 추가하여 달라졌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재통일됨으로써 흑적금 삼색 연방기는 재통일된 독일의 국기가 되었다. 독일의 국기가 항상 흑적금 삼색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에 프로이센이 맹주였던 북독일 연방은 흑색, 백색, 적색 삼색기를 사용했다. 이 기는 나중에 1871년 독일의 통일로 성립된 독일 제국의 국기가 되었으며, 1918년까지 사용되었다. 흑백적 삼색은 1933년 나치 독일이 성립되면서 다시 국가색으로 지정되었으며, 즉슨 공화독일의 삼색을 제국독일의 삼색이 대체한 꼴이 되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유지되었다. 흑적금과 흑백적 삼색 도식은 독일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 사용되는 흑적금 삼색기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민주공화제과 관련이 있으며 독일의 단결과 자유를 상징한다. 이 자유란 독일이라는 국가의 자유 뿐 아니라 독일 국민의 개인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흑적금 삼색은 극우와 극좌에 대하여 민주주의, 중도주의, 공화주의를 표방한 정당의 색깔이었다. 사민당, 중앙당, 민주당의 당원들이 좌익과 우익의 극단분자들로부터 공화국을 보위하기 위해 결성한 준군사조직 흑적금 국기단(Reichsbanner Schwarz-Rot-Gold)은 그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 사람들에게 공화국과 그 국기, 그리고 헌법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려 했다. 독일과 흑적금 삼색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흑적금 삼색기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후 성립된 반동적 질서에 대항하는 운동의 상징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흑적금 삼색을 독일 연방의 공식 색으로 선언했다. 아마도 적색은 한자 동맹을, 금색과 흑색은 당시 남부 독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의 일부로 간주됨)을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1848년 제정된 기의 색깔 도식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일설에는 카를스바트 결의에서 메테르니히에 의해 추방된 급진 대학생 단체인 부르셴샤프트의 색이라고도 하고, 또다른 주장으로는 나폴레옹 정복군에게 맞서 저항한 대학생 단체 뤼트초프 자유군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한다. 이 해석들 중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흑적금 삼색은 이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의 국가색으로 받아들여졌고,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당시 재도입되어 대체로 사회적 자유주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독일의 국기인 연방기는 흑색, 적색, 금색의 삼색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1949년 서독 헌정 당시 제정된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서 지정되었다. 이후 지방정부의 기와 군기가 새로 생기면서, 민짜 삼색기는 현재 독일의 민간기와 상선기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비연방 당국이 연방정부와의 연결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일의 주들은 국기와 주기를 함께 사용한다. 독일의 정부기는 연방당국 직무기() 또는 줄여서 연방직무기()라 한다. 1950년대에 도입된 정부기는 민간기에 연방방패()가 추가된 변형이다. 정부기의 연방방패는 흑색과 금색의 5분의 1 너비를 차지하고 있다. 연방방패은 독일의 국장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국장과 비교하여 차이점은 그림에 그려진 독수리와 방패의 모양이 다르다. 연방방패는 가장자리가 둥글둥글하지만, 국장의 방패는 가장자리가 뾰족하다. 연방직무기는 연방 정부 당국에 의해서만 사용될 수 있으며, 그외의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불법으로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연방직무기와 비슷하게만 생긴 기(연방방패 대신 국장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것)의 개인적 사용은 눈감아 주고 있다. 그러한 기는 국제 스포츠 경기와 같은 때 종종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가로기에 더하여, 독일의 많은 공공건물들은 세로기를 사용하고 있다. 많은 소도시 공회당에서 도시의 기(독일의 소도시들 대부분은 세로기만 도시기로 갖고 있다)와 함께 국기를 세로로 게양하고 있다. 이러한 세로기의 비율은 명확하지 않다. 1996년, 정부기의 세로게양 형태 배치가 제정되었다. 정부기를 세로게양 할 때는 연방문이 기의 중앙에 위치하고, 흑색과 금색 띠의 너비의 5분의 1 가량을 덮는다. 현수막처럼 걸 때는 우측 그림에 보이는 것처럼 흑색 띠가 왼쪽으로 오게 걸어야 한다. 세로깃대에 게양할 때는 흑색 띠가 깃대와 접해야 한다. 독일 연방군()은 연방정부 측 조직인 고로, 육전에서는 연방직무기가 사용된다. 1956년, 해군 함미기인 연방군 해군력 직무기()가 도입되었다. 이 기는 연방직무기의 오른쪽 끝이 제비꼬리 모양으로 갈라진 형태이다. 이 함미기는 함수기로도 사용된다. 독일의 헌법인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22조에 따르면, 1950년 서독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연방기는 너비가 동일한 막대 세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적인 세로-가로 비율은 3:5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때 사용된 삼색기의 비율은 2:3이었다. 독일의 국기에 사용되는 색깔이 색체계상 정확히 어떤 색인지는 국기 제정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1999년 6월 2일, 연방내각은 다음의 색깔을 사용한다는 공식 디자인을 내놓았고, 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기학에서는 금색과 황색을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문장학에서도 둘을 싸잡아 오르(Or, 프랑스어로 "금"이라는 뜻)라 한다. 하지만 독일의 국기에서는 금색과 황색의 구분이 이루어져 있다. 독일의 국기에 사용되는 색은 금색이지, 황색이 아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흑적금 삼색기를 국기로 사용하기로 했을때, 보수파, 왕당파, 극우파들은 이 색깔을 "흑색-적색-누렁색"()라거나 "흑색-적색-겨자색"()이라거나 "흑색-적색-똥색"()이라고 부르면서 공격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1918년 이전 제국 시절의 흑백적 삼색이 재도입되었고, 나치는 과거 왕당파들이 했던 레토릭을 그대로 사용하여 흑적금 삼색을 비하하였다. 1959년 11월 16일, 독일 연방사법재판소()가 국기의 색깔을 "흑색-적색-황색"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치 시절 이루어진 민주주의의 상징에 대한 악의적 비방과 상당하는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금색이 아닌 황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 되었다. 1968년 문장학자 아르놀트 라보우(Arnold Rabbow)는 "독일의 국가색은 흑색-적색-황색이지만 독일인들은 흑색-적색-금색이라고 부른다"고 썼다. 2005년 3월 22일 독일 연방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날짜에 공공 건물에서 반드시 기를 계양해야 한다. 이날 모두가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다른 주별 기념일 뿐 아니라 독일 연방하원 및 유럽 의회 선거일에는 일부 지역에서 기를 계양하기도 한다. 독일의 대통령이나 다른 유명 정치인이 사망한 날 같은 경우에도 공공장소에서 반기 형태로 기를 계양하며, 이는 독일 연방내무부의 재량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반기를 계양해야 할 때는 수직 길이를 낮추지 않는다. 대신, 기 꼭대기나(기둥에 걸려 있는 경우) 기가 교차하는 양 끝(배너처럼 걸려 있는 경우)에 검은 리본을 달아서 애도를 표한다. 신성 로마 제국은 국기가 없었지만 흑색과 금색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색깔로 사용되었으며 황제기에도 금색 배경과 검은색 수리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13세기 말기 ~ 14세기 초기 이후 수리의 발톱과 부리가 적색으로 칠해졌다. 15세기 초부터는 쌍두 수리가 사용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1제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여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사유영지(합스부르크 군주국)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선포하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기는 신성 로마 황제의 기에서 색깔을 따와 흑색과 금색 줄무늬를 칠했다. 나폴레옹이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킴으로써 프란츠 2세는 최후의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 뒤로도 흑색과 금색은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국기에 사용되었다. 이 시기 적색과 백색 역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이 십자군에 참여했을 당시, 흑색-금색의 황제기와 함께 군기가 사용되었다. 이 군기는 "성 조지 기"(saint george flag)라고 하며, 적색 바탕에 백색 십자가가 그려진 기였다. 성 조지 기의 색깔은 덴마크의 국기와 유사하며, 이 색깔을 뒤집은 것이 잉글랜드의 국기이다. 적색과 백색은 한자 동맹(13세기 ~ 17세기)의 색깔이기도 하다. 한자 동맹의 교역선들은 적백 삼각기를 달아 구분했으며, 한자 동맹 가맹 도시국가들은 적색과 백색을 도시 색상으로 선택했다(한자 동맹의 기 참조). 과거 한자 동맹 가맹도시였던 함부르크나 브레멘은 오늘날의 시기에도 적색과 백색을 사용하고 있다. 구엘프와 기벨린의 분쟁이 일어나던 12세기 ~ 14세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기벨린(신성로마황제 지지파)의 군대는 신성 로마 황제의 군기(적색 바탕에 백색 십자)를 채택하였으며, 구엘프(황제 반대파)는 색깔을 뒤집은 기(백색 바탕에 적색 십자)를 사용했다. 이 두가지 도식은 현대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문장에 남아 그 과거 파벌 성향을 짐작케 한다. 대표적인 기벨린 도시였던 파비아, 노바라, 코모, 아스티는 지금까지 문장에 기벨린 십자를 사용하고 있다. 구엘프 십자는 제노바, 밀라노, 베르첼리, 알레산드리아, 레지오, 볼로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에 붕괴하고, 그 예하 공국들과 대공국들은 나폴레옹의 괴뢰국들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에 가맹했다. 라인 동맹에 가맹한 여러 제후국들은 자기들 각자 깃발을 쓰기를 선호했고, 동맹은 자체 깃발은 없었다. 대신 프랑스의 청백적 삼색기와 보호자인 황제 나폴레옹의 황제기를 사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침략군에 대한 독일의 저항은 흑색, 적색, 금색의 삼색으로 상징되었다. 이것은 대개 프로이센 육군의 의용군인 뤼트초프 자유군단의 제복 색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부대의 제복은 흑색에 그 끝동은 적색이었고 단추는 금색이었다. 흑적금 삼색은 신성로마제국 시절에도 사용되긴 했지만, 군복에 이 색깔을 차용한 것은 다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 자유군단의 구성원들은 자기 옷을 각자 조달해야 했는데, 이것을 하나의 통일된 복식으로 맞추자니 몽땅 시커멓게 물들여 버리는 것이 가장 편했던 것이다. 금색 단추들은 널리 사용되고 있었고, 부대의 창기병들이 사용한 깃이 적색과 흑색이었다. 이때 이 삼색이 상징하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 전역에서 모인 뤼트초프 자유군단 구성원들은 주로 대학생들과 식자들이었고, 뤼트초프 자유군단과 그 삼색은 독일 국민들 사이에 상당한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1815년에서 1816년에 걸쳐 열린 빈 회의의 결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잔존한 모든 독일계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인 독일 연방이 탄생했다. 연방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으며, 최후의 신성 로마 황제였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가 연방 의장이 되었다. 연방은 자체적인 기는 없었는데, 종종 흑적금 삼색기가 독일 연방의 기로 혼동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뤼트초프 자유군단의 재향군인들은 1815년 6월에 예나에서 우어부르셴샤프트(; "원조 학우회") 조합을 결성했다. 예나 우어부르셴샤프트는 자유군단의 제복 색깔을 그대로 따서 적색, 흑색, 적색 가로줄무늬에 금색 테두리를 친 기를 사용했다. 검은색 띠 위에는 금색 나무가지가 그려졌다. 뤼트초프 자유군단에 복무했던 대학생들이 여러 독일계 국가에서 모였었기 때문에, 우어부르셴사프트를 비롯하여 이와 유사한 부르셴샤프트(; "학우회")들 사이에서 통일 독일 국가에 대한 구상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817년 10월 18일, 라이프치히 전투 4회 기념일 당시, 연방국가들 전역에서 모인 학우회 조합원들과 대학생들이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현재의 튀링겐 자유주)의 바르트부르크에 모여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 국가를 요구하였다. 이 바르트부르크 축제 당시 예나 우어부르셴샤프트의 금-적-흑 삼색기가 특히 눈에 띄었고, 이후 흑색, 적색, 금색 조합은 통일 독일 국가에 대한 열망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현상유지를 원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를 통해 모든 학생조직을 금지시켰고, 부르셴사프트들의 시대는 끝이 났다. 1832년 5월, 약 30,000 명의 사람들이 함바흐 축제에서 자유, 통일, 공민권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다. 바르트부르크 축제 이후 흑색, 적색, 금색 색조합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정착해 있었고, 함바흐 축제에서 이 색깔의 깃발들이 일제히 휘날렸다. 축제를 묘사한 현대의 그림들은 주로 금-적-흑 삼색기(현대 독일의 국기가 뒤집힌 형태)를 묘사하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깃발들은 흑-적-금 삼색기들이다. 당시 함바흐 성에 내걸렸던 깃발을 "최초의 깃발"()이라 하여 현재 함바흐 성에 영구보존되어 있는데, 이 깃발은 흑-적-금 삼색기에 적색 띠 부분에는 "독일의 재탄생"()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다. 1848년 독일 혁명이 일어나고, 거리 곳곳의 민중들은 삼색기를 휘날렸다.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고, 오랜 숙고 끝에 국가 의회가 형성되었다. 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흑색-적색-금색을 독일의 공식 색상으로 선언하고, 흑적금 삼색기가 독일의 상선기라는 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해군기 역시 동일한 색상을 사용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1850년에 붕괴하고, 오스트리아가 의장국 노릇을 하는 독일 연방이 복고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삼색기를 포함하여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움직임들을 억압하였다. 이후 다민족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미래의 독일 국가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맹주로 하여 거대제국을 만들자는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게르만 민족이 살고 있는 땅끼리만 통합하자는 소독일주의()가 대립하였다. 독일 연방 내의 양강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이원대립구도는 결국 1866년 보오전쟁으로 폭발했다. 보오전쟁 와중 오스트리아 편에 붙은 남독일 국가들은 흑적금 삼색기를 사용하였다. 전쟁 결과 프로이센 왕국이 맹주가 된 북독일 연합이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몇년 뒤 소독일주의에 따른 독일 통일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독일 연방이 해산됨에 따라, 프로이센은 1866년 8월에 북독일 연방 조약을 맺고 1867년에 북독일 연방 헌법을 추인함으로써 독일 연방의 비공식적인 계승자인 북독일 연방을 성립시켰다. 이 연립체는 맹주 프로이센을 비롯하여 21개의 북독일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국제적인 인식표를 갖고 싶었던 해운업계에서 새로운 연방의 기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 의문을 가장 먼저 제기하였다. 북독일 연방의 국제 해운 활동은 프로이센과 과거 한자 도시국가였던 브레멘, 함부르크, 뤼베크가 사실상 전담하고 있었다. 함부르크 상공회의소 서기였던 아돌프 쇠트비어(Adolf Soetbeer)가 이 점에 착안하여 1866년에 프로이센의 색상인 흑색과 백색에 한자 동맹의 색상인 적색과 백색을 더한 기를 제안했다. 이듬해 북독일 연방 헌법은 흑백적 가로 삼색기를 상선기와 해군기로 채택하였다. 빌헬름 1세는 이 색상 선택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적색과 백색은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상징색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금색이 사라진 것 역시 이 새로운 독일 국가가 흑색과 금색을 상징색으로 하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냈다. 보불전쟁 이후 남독일 국가들이 북독일 연방에 합쳐져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1871년 독일 황제의 위에 올랐다. 독일 제국 헌법은 흑색, 백색, 적색을 국가색으로 정했으며, 북독일 연방에서 사용하던 삼색기가 1892년에 정식으로 제국 국기로 지정되었다. 흑백적 삼색기는 독일 제국이 붕괴한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날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1918년 독일 공화국의 선언과 뒤이은 혁명기를 거쳐 1919년 8월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세기의 반독재 운동과 신생 민주공화국 사이의 연결점을 만들기 위해, 옛날의 흑적금 삼색기가 1919년 바이마르 헌법에 따라 국기로 지정되었다.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로이스게라 후국, 발데크 후국 등 자그마한 독일계 제후국들과, 발데크 후국을 계승한 공화국인 발데크 자유주 역시 국기 비율과 색 배치 순서는 달라도 흑적금의 삼색을 유지한 바 있다. 상선기에는 제국 시절 국기인 흑백적 삼색기가 유지되었으나, 왼쪽 구석에 새로운 흑적금 삼색기가 칸톤으로 추가되었다. 그러나 국기의 변화는 많은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은 국기의 변화를 1차대전에서 패배한 결과에 따른, 수치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였다. 독일 국가방위군()은 예전 삼색기를 계속 사용했으며, 보수주의자들은 예전 색상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했다. 왕당파와 극우분자들은 새로운 국기를 갖은 멸칭(전술한 #금색? 황색? 참조)으로 비하하면서 더욱 강경하게 반발했다. 결국 타협안으로서 1922년, 해외 외교관 공관용으로 흑백적 삼색기가 재도입되었다. 제정 독일의 상징은 곧 왕당파와 국가주의자들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선병사동맹 철모단 따위 왕당파 국가주의자 단체에서 사용되었다. 독일 제국 시절의 군기인 독일 제국전쟁기() 역시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국가인민당(좌측 포스터를 볼 것)과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나치당) 등 바이마르 시기 활동한 많은 국가주의 정당들은 제국 색상을 상징색으로 사용했으며, 이것은 현대 독일의 극우민족주의 정당인 독일 민족민주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1924년 2월 24일, 바이마르 대연정을 구성한 3개 정당(중앙당, 민주당, 사민당)의 당원들과 노동조합원들이 마그데부르크에 모여 흑적금 국기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의 목적은 극좌와 극우 양쪽에서 끊임없는 압박을 받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취약한 민주주의를 보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단체를 통하여 흑적금 삼색기는 독일 민주주의의 상징일 뿐 아니라,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이것은 국기단의 초대 주석인 오토 회슬링의 말로 대표된다. 그는 국기단의 임무를 “스바스티카와 소비에트의 별에 대한 투쟁”이라 묘사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국가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분쟁의 폭력성이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극심한 경제 불황과 무지막지한 하이퍼인플레이션, 공화국의 부패로 독일인들 사이의 양극화는 계속하여 심화되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에 붕괴하였고,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제국총리()가 되었다. 1933년 1월 30일, 나치 정권이 수립되었고, 흑적금 삼색기는 걸레짝이 되었다. 동년 3월 12일, 법으로 두 가지 기를 국기로 정했는데, 하나는 제국 시절 삼색기를 재도입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치당 당기였다. 독일 제국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고 1년 뒤인 1935년 9월 15일, 히틀러는 대통령과 총리를 합친 총통()이 되었다. 이후 국기를 두 개 쓰던 것은 끝났고, 나치 당기만이 독일의 유일한 국기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1935년 7월 25일에 발생한 "브레멘 사건"이 거론되고 있다. 이때 한 무리의 시위자들이 뉴욕에 정박중이던 독일 배 SS 브레멘("SS Bremen")에 난입하여 이물 깃대에 걸려 있던 나치 당기를 내려서 찢어버린 뒤 허드슨 강에다 처박아 버렸다. 독일 대사관이 항의하자 미국 공무원들은 독일 국기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손상된 것은 일개 정당의 상징일 뿐이라고 대꾸했다. 새로운 국기법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연례 당대회에서 발표되었고, 이 자리에서 헤르만 괴링은 흑백적 삼색기는 지나간 시절의 상징이며 "반동분자들"이 사용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 기의 디자인은 1920년대 중반에 히틀러가 제안했으며, 처음에 당기로 사용되었다. 적색 배경에 백색 원반과 흑색 하켄크로이츠가 중앙에 위치한 모양이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나치 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제국 시절의 깃발과 같은 색상을 사용해야 한다. 히틀러의 의견에 따르면 그 색상들은 "영광스러운 과거와 독일 민족의 영광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존경받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운 기는 … 거대한 포스터와 같은 효율성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수백 수천 가지 경우에서 매우 눈에 띄는 엠블렘이야말로 운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제1요인”이기 때문이다. 나치 프로파간다는 기가 상징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색은 사회를, 백색은 운동의 국가적 사고를, 하켄크로이츠는 유대인에 대한 아리안 민족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의 디자인이 제안되었지만,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히틀러가 직접 만든 디자인이었다. 백색 원반이 중앙에서 벗어난 하켄크로이츠 기는 독일 선적의 민간 선박의 상선기로 사용되다가, 독일 전쟁해군() 군함의 해군기로 사용되었다. 해상에서 사용된 하켄크로이츠 기는 "왼쪽을 바라보는" 것과 "오른쪽을 바라보는" 것이 따로 있어 좌현과 우현에 각각 게양되었다. 한편 국기로 사용된 것은 어느 쪽에 게양되든 모두 오른쪽을 바라보는 기가 사용되었다. 1933년부터 일러도 1938년까지, 나치는 하켄크로이츠 기들을 피의 기()로 건드림으로써 기를 "정화"하였다. 피의 기란 나치 패거리가 1923년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을 때 사용한 하켄크로이츠 기이다. 이 행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때마다 행해졌다. 1938년 최후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이후에도 이 짓을 계속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난 후 금기시되면서 하켄크로이츠가 나치즘을 선전하거나 광고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후, 점령된 독일 지역은 연합군이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이 당시 독일 정부 및 독일 국기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제법 상 독일 함선은 국기를 달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연합국 점령위원회는 국제 신호기에서 스왈로테일 끝에 C를 상징하는 C-삼각기()로 알려진 기를 지정했다. 위원회는 "이 기에 대해 모든 국적의 군함이나 상선에 대한 경례를 표하기 위해 기를 올렸다가 내리는 식을 할 수 없다"라고 정했다. 마찬가지로, 점령된 일본 지역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왈로테일 끝에 E를 상징하는 신호기를 사용했다. 오데르-나이세선 서부의 독일 주들은 점령 지역을 따라 재편되었으며 새로운 주 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 점령 지역 내에서 옛 뷔르템베르크 자유주 및 바덴 공화국의 북부 절반이 1946년 뷔르템베르크바덴 주로 통합되었다. 이 주의 주기는 검정-빨강-황금색 삼색기로 선정했다. 이러한 색상 선색은 삼색기의 역사적 사용 방식에 근거하진 않았지만, 빨강-검정으로 이루어진 뷔르템베르크 주기에 황금색을 추가한 간단한 방식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덴 주의 주기는 빨강-노랑으로 색상 선택이 두 주기의 조합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1952년 뷔르텐베르크바덴 주는 현대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일부가 되었으며, 주기는 검정-황금으로 선정했다. 전후 만들어진 2개의 다른 주인 라인란트팔츠주(프랑스 점령 지역) 및 니더작센주(영국 점령 지역)은 주기에 휘장을 덧붙인 검정-빨강-황금색의 삼색기를 공통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두 주는 다른 주의 일부분에서 떼어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주였으며, 이전 주에서 가져올 색상 조합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새로운 주기를 받아들였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로 검정-빨강-황금색의 삼색기를 이용했다. 이 색상은 이전 주의 어느 하나와 특별하게 관련이 있지 않았으며,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사용한 국기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면서 1948년 3월 영국, 프랑스, 미국 3개 연합국은 회담을 가져 3개 연합국 점령지역을 하나로 합치고 흔히 서독으로 알려진 독일연방공화국 창설을 승인했다. 한편 동쪽의 소련 점령 지역도 흔히 동독으로 알려진 독일민주공화국이 되었다. 서독이 새 헌법을 만들 준비를 하는 동안, 1948년 8월 헤렌킴제에서 국가 상징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동독과 재통일 하기 전까지는 국기를 만들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국기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움직임은 1946년 11월 동독의 독일 통일사회당(SED, 통사당)이 헌법을 제안하면서 가속화되었으며, 여기서 흑적금의 독일 공화국을 나타내는 색상을 국기로 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서독 국기에 대해 많은 제안이 올라왔지만, 최종 경선에는 둘 다 흑적금 색을 사용한 다른 형태의 국기 2개로 좁혀졌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사민당)은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기를 재도입하자고 주장했고, 반대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DU, 기민련/CSU, 기사련) 및 독일당 등 보수정당은 의회 위원회(Parlamentarischer Rat)의 위원이자 독일의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미래 고문이었던 어니스트 비르머가 제안한 디자인을 지지했다. 비르머는 그의 형제이자 7월 20일 음모에 관여했던 조시프 비르머가 만들었던, 흑적금 색깔에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진 1944년 "저항기" 디자인을 변형한 형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새로운 서독 정부 사이의 연속성을 주창하기 위해 최종적으로는 삼색기가 결정되었다. 1949년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을 제정하면서 흑적금 삼색기가 서독의 공식적인 국기가 되었다. 1955년에는 프랑스가 장악했던 자르 보호령이 서독에 합병할지에 대한 투표를 열었다. 1947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분리되어 독립한 이래, 자르 보호령은 청적 배경의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진 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르가 서독의 한 주로 병합되면서 1956년 7월 9일 자를란트에 흑적금 국기에 이날 새로 만들어진 자를란트의 문장이 그려진 기를 주기로 채택했다. 이 기는 1957년 1월 1일 서독의 자를란트주로 편입되면서 공식적인 주기가 되었다. 1946년, 소련 점령 지역에서 흑적금 국기의 사용을 제안했으나 1948년 2차 인민 대표 회의에서는 동독의 국기로 구 독일 제국의 흑백적 국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국기는 전쟁 말기 2년간 소련 측에서 운영했던 독일의 반나치즘 조직인 자유 독일을 위한 국가위원회가 사용했던 색을 기반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1949년에는 동베를린의 시장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1949년 10월 7일 개국한 독일 민주 공화국의 국기로 흑적금 국기를 제안했으며 이를 채택했다. 1949년부터 1959년까지 서독과 동독의 국기는 동일했다. 1959년 10월 1일 동독 정부는 흑적금 국기 가운데에 동독의 국장을 더한 국기로 바꾸었다. 서독에서는 이러한 국기 변화를 두 독일 국가를 분리시킬려는 의도로 보았다. 서독과 서베를린에 이 바뀐 동독 국기를 보이는 것은 "국기분리"()라고 하여 헌법 위반으로 간주하였고, 1960년대 말까지 이러한 행위를 금지했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서독과 동독은 올림픽 독일 연합 선수단이라는 단일팀으로 동계 올림픽과 하계 올림픽에 참여했다. 1959년 동독의 국기가 바뀐 이후 어느 쪽도 상대방 국가의 국기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타협하여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흑적금 국기에, 빨강 줄에 흰색 올림픽 상징을 덧댄 새로운 기를 사용했다. 1968년 독일 국가 선수단은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출전했으나 두 팀 모두 같은 올림픽 깃발을 사용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독과 동독이 서로 각각의 국기를 사용하였다. 1989년 11월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에 동독 국민들은 1956년 헝가리 혁명에 가담한 헝가리 국민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처형 당시의 루마니아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국기에 그려져 있던 국장을 제거했다. 국장을 제거한 형태의 검정-빨강-노랑의 순수한 삼색기는 통일되고 민주적인 독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90년 10월 3일을 기해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소멸되었고 검정-빨강-노랑 삼색기는 재통일된 독일의 국기가 되었다. 1998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의 재평가를 위한 재단이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옛 동독 체제의 결과를 조사하는 것에 대한 연방 정부의 직접적인 책임을 목적으로 했다. 이 단체의 로고는 동독의 국기에서 국장을 제거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독일 제국 시대에 쓰인 옛 검정-하양-빨강 삼색기는 독일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적인 군주제 국가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군주주의자, 독일 귀족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옛 국기는 일반적으로 극우주의 진영에서 널리 사용되어 완전히 퇴색되었다. 독일에서는 만자문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나치당이 1935년에 금지시켰던 옛 삼색기를 대신 사용하고 있다. 나치와 관련된 상징은 독일과 그 외의 국가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독일에서 출시되는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컴퓨터 게임에서는 나치와 관련된 깃발이 1933년 이전의 바이마르 시대에 사용된 국기 또는 현재의 삼색기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나치당과 나치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일에서는 국기나 그 외의 국가 상징이 사용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국기는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에 참가하는 시민, 특별한 행사를 주최하는 공식 당국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바이에른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와 같은 일부 주 또는 바덴, 프랑켄과 같은 역사적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국기 대신 지역의 기를 널리 사용한다. 독일에서 열린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국기를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현상이 급격히 증가했다. 국기가 인기를 끌었을 때에 독일 국민들은 처음에는 놀라움과 불안의 혼합물, 수십년 전의 공포로 여겼지만 대회가 끝난 이후에는 독일의 국기를 흔드는 행동이 국가의 자긍심으로 여겨졌다.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는 중앙유럽과 남유럽에 있는 나라로 알프스 산맥 끝부분과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서남쪽으로는 아드리아 해, 남동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북동쪽으로는 헝가리,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류블랴나이다. 슬로베니아는 게르만, 라틴, 슬라브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천년 가까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주변 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슬로베니아 영토의 40% 가량은 산지나 고원 등 고지대로 국토 내륙 지방에 자리 잡고 있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트리글라브 산이다. 인구 대다수는 공용어인 슬로베니아어를 쓰며, 그 밖 지역 공용어로 헝가리어와 이탈리아어가 있다. 슬로베니아는 유럽 연합, 유로존, 솅겐 조약,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유럽 평의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유네스코, 세계 무역 기구,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유엔 가입국이다. 슬로베니아는 크로아티아 등 주변 국가들과 함께 발칸반도라는 삼각형 모양의 반도에 속해있다. 발칸반도를 여행할 때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나라들을 투어로 함께 여행할 수 있다. 서기 1000년경부터 아드리아 해 연안을 통제해온 베네치아 공화국에 저항하기 위해 주변의 크로아티아·달마티아와 함께 1102년 헝가리 왕을 군주로 받아들였다. 18세기 말,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계속 영유하였고 1919년,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였다. 예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영토였으나 1992년에 독립했다. 2004년 3월 29일에는 NATO에 가입했으며 2004년 5월 1일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2007년 1월 1일에는 유로를 공식 통화로 지정했다. 현재는 정치가 안정되어 있다. 2008년 9월 22일에 슬로베니아는 총선에서 중도좌파 야당인 사회민주당이 승리했다. 슬로베니아는 알프스 산맥, 판노니아 평원이 있으며, 가장 높은 산은 트리글라브 산으로 높이는 2,864m이다. 일부 지역이 아드리아 해에 접해 있으나, 이 지역을 제외하면 내륙국이나 다름없다. 국토 전체의 보통 해발 고도는 해발 557m 이상이다. 거의 국가 절반 이상이 숲이다. 이 때문에 슬로베니아는 유럽 대륙에서 핀란드, 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가장 많은 숲을 보유한 국가이다. 해안가는 지중해성기후가 어느 정도 나타나고 대륙 내부와 알프스 인근 지역에서는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추운 양상을 보인다. 평균 기온은 1월에 -2도, 7월에 영상 21도이다. 해안가의 평균 강수량은 1,000mm이고 알프스 인근에는 3,500mm 이상의 비가 내린다. 수도는 류블랴나이다. 슬로베니아는 193개의 시(자치체)가 있다. 그중에서 특히 인구가 많은 11개의 시는, 특별시에 속해있다. 주민은 슬로베니아인이 89%, 남슬라브계(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마케도니아인 등)이 10%, 기타(헝가리인이나 이탈리아인, 체코인, 알바니아인, 독일인, 기타)는 0.5%이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4년 현재 (Eurostat 추정) 1.22명으로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적다. 2005년 현재 천명당출산율은 8.8명, 천명당사망율은 9.2명이다. 언어는 슬로베니아어가 공용어이다. 제 2 언어로 영어가 보급되어 있다.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도 쓰인다. 한편, 슬로베니아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거의 대부분이다. 약간의 개신교, 세르비아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도교, 힌두교 등도 있다. 가톨릭의 비율은 2002년 센서스에 따르면 57.8%이다. 가장 최근의 2005년 Eurobarometer Poll에 따르면 37%의 슬로베니아인이 "신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으며, 46%는 "일종의 영혼이나 생명력이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16%는 "영혼이나 신, 생명력과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한민국은 1992년 슬로베니아를 승인했으며 동년 11월에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으며 슬로베니아는 대한민국 공관을 주일본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수도인 류블라냐에 코트라사무소가 상주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2년에 수교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 때 슬로베니아는 B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표팀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하였다. (A, B, C, D조는 대한민국, E, F, G, H조는 일본) 이 나라는 아직 한국과의 직항편을 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제 3국을 경유해서 슬로베니아에 가야 한다. 1102년에 슬로베니아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와 함께 헝가리의 왕을 자신들의 군주로 받아들였다. 예전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안좋은 관계도 있지만,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예전엔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던 공화국의 하나였지만,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에 10일 전쟁이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분쟁과 10일 전쟁의 영향으로 세르비아와는 안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에 러시아와 수교를 했다. 미국과 유럽 연합과의 관계가 강하지만,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슬로베니아는 미국, 유럽 연합과의 관계가 매우 강하며, 2004년에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그리고 공식 통화도 이후 유로로 바꿨다. 슬로베니아의 국기는 슬로바키아의 국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중 나선 이중 나선(二重螺線)은 두 개의 서로 대칭인 나선이 같은 축 방향으로 놓여있는 모양이다. DNA가 이중 나선 구조라는 것은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처음으로 발견했다. 리니지 리니지(lineage)는 영어로 “혈통” 또는 “계보”란 뜻이다. RSS RSS()는 뉴스나 블로그 사이트에서 주로 사용하는 콘텐츠 표현 방식이다. 웹 사이트 관리자는 RSS 형식으로 웹 사이트 내용을 보여 준다. 이 정보를 받는 사람은 다른 형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RSS 리더에는 웹기반형과 설치형이 있다. 웹기반형 리더는 간단한 계정등록으로 어디에서든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RSS가 등장하기 전에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해당 사이트를 직접 방문하여야 했으나, RSS 관련 프로그램(혹은 서비스)을 이용하여 자동 수집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사용자는 각각의 사이트 방문 없이 최신 정보들만 골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또한 RSS는 팟캐스팅과 같은 미디어 배포의 용도로도 사용된다. RSS 2.0 의 〈enclosure〉태그 내에 MP3 나 MOV 등의 미디어 파일을 첨부하여 배포하면, 팟캐스팅 클라이언트를 이용해 파일을 내려 받아 감상할 수 있다. RSS 2.0은 공식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선언되었으며, 하버드 대학교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다. RSS는 XML 기반의 표준이며, 여러 표준들이 존재한다. 표준들은 크게 RDF (또는 RSS 1.*)과 RSS 2.* 로 나뉜다. RSS와 아톰 모두 모든 주요 피드리더들에게 널리 지원된다. 아톰보다 더 일찍 피드리더 기능이 도입되면서 RSS가 널리 이용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러나 아톰은 라이선스가 덜 제한적이고 IANA 등록 MIME 타입, XML 이름공간, 상대 URI 지원, RELAX NG 지원과 같이 RSS에 비해 몇 가지 이점이 있다. 기술적으로 아톰은 이 둘 사이에서 더 진보화된 신디케이션으로 간주된다. 아래의 표는 아톰과 동일한 RSS 요소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21세기 21세기(21世紀, )는 2001년 1월 1일부터 2100년 12월 31일까지를 말하고, 제3천년기의 첫 번째 세기이기도 하며, 이 해부터 밀레니엄 베이비가 시작되었다. 21세기 초에는 세계경제와 제3세계 소비주의, 정부에 대한 불신, 테러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 등이 부상하는 시기로 대표된다. 2010년대 초 아랍의 봄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의 물결로 아랍 세계에는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를 빚었기도 하였다. 또한 지난 세기말에 비롯된 '디지털 혁명'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시기 언저리에 태어난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자라면서 세기초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반면 종교의 경우 2010년 기준으로 무종교 인구가 11억 명에 도달하면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사적인 관점에서 21세기의 근본적인 시작점을 1991년으로 보기도 한다. 이 해는 단기 20세기의 끝으로,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이 초강대국에 등극하는 한편, 중국이 성장기에 돌입하고, 브릭스 국가들이 국제정치와 경제스펙트럼에서 균형 확대를 목표로 하던 해였다. 디지털 통신기술이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과다사용을 비롯한 우려도 확산되었다. 2013년 기준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인구 비중은 전세계 인구의 80%에 달하며, 2010년에는 개인용 컴퓨터를 소지한 사람이 33%, 2016년에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46%로 추산됐다. 대한민국의 철도역 목록 대한민국의 철도역 목록은 대한민국의 철도역 및 도시철도역을 정리한 목록이다. 오봉역 오봉역(五峯驛)은 경기도 의왕시 이동에 있는 남부화물기지선의 철도역이다. 근처에 있는 오봉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2면 20선의 구조로, 역사로부터 9개의 측선, 2개의 상부본선, 상본선, 하본선, 2개의 하부본선, 5개의 측선이 있으며 상본선과 하본선의 양쪽으로 쌍섬식 승강장이 있다. 그 외에 제1컨테이너기지에 8개선, 제2컨테이너기지에 3개선, 양회기지에 12개선, 2개의 인상선(역 구내에서 환차를 위해 쓰이는 선로), 2개의 수차선(수리 대상 열차용 선로) 등이 있다. 트랙백 트랙백()은 블로그에서 사용하는 주요 기능 중 한 가지로서, 간단히 역방향 연결 고리를 자동적으로 생성해 주는 기능을 말한다. 즉, 이 기능을 사용하며 A포스트에서 B포스트로 정보를 보내면 B포스트에 A포스트로 연결되는 고리가 자동으로 생기는데, 이런 과정을 트랙백이라고 부른다. 트랙백 기능은 블로그 이외에 위키위키나 뉴스 사이트에서 제공하기도 한다. 트랙백은 철저한 1인 미디어를 지향하는 블로그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어 네트워크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의 블로그를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자신의 블로그에 써 넣은 후 트랙백을 주고 받으면 원래의 글 아래 자신의 블로그에 쓴 해당 글로 가는 연결 고리가 붙게 된다. 트랙백 표준은 2002년 Movable Type 블로깅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식스 어파트(Six Apart)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후 대부분의 다른 블로깅 도구들도 이를 구현해 왔다. 식스 어파트는 2006년 2월에 트랙백 프로토콜을 향상시키기 위해 워킹 그룹을 출범하였으며, IETF는 이를 표준으로 등록하였다. 일부 개인이나 회사들은 트랙백을 사용하여 스팸 링크를 넣을 수 있는 특성에 대해 지적해 왔다. 댓글 스팸과는 달리 트랙백 스팸 필터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늦었다. 현재의 블로그 도구들은 트랙백 스팸도 처리할 수 있지만 일부 블로거들은 트랙백 스팸 때문에 트랙백 기능을 막아 두기도 한다. 베트남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 )은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약칭은 베트남이다. 주요 도시로는 하노이, 호찌민시, 다낭, 하이퐁, 호이안, 후에 등이 있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동해에 면해 있다. 면적은 약33만 341km²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최근 인구 통계에서는 9,649만 명으로 조사되어, 세계에서 13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나라의 명칭인 비엣남()은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하였던 옛 베트남 왕조인 남월()의 명칭을 거꾸로 쓴 것이다. 수도는 하노이이며, 최대 도시는 호찌민시이다.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시장경제체제를 가진 명목상 공산주의 국가다. 고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베트남의 왕조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국경을 넓혀갔으며, 이러한 영토 확장은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86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베트남의 국명 비엣남(Việt Nam 越南, 월남)은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렀던 기원전 2세기의 고대 국가 남비엣에서 유래하였다. 비엣(Việt, 越)은 백월(Bách Việt, 百越)족을 뜻하는 말이다. 비엣남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베트남의 시인 응우옌 빈 키엠의 시 삼짱찐(Sấm Trạng Trình, 讖狀程, 섬상정)이다. 이후 비엣남은 점차 베트남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어, 1905년 베트남의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월남의 식민지화에 대해 나눈 대담은 《월남망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비엣남은 194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이후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다. 비엣남이 맞는 명칭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베트남"을 국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베트남에는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가 살아왔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네시아 제도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석기 문화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베트남의 건국신화인 락롱꿘, 어우꺼 신화는 약 4,000년 전 락롱꾸언()과 어우꺼()가 결혼하여 많은 베트남 부족들의 선조가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베트남에 세워진 최초의 문명은 동손 문화이다. 동손 문화는 기원전 300년 경 청동기 문명으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으며 베트남 북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여러 곳을 지배하였다. 마강()과 홍강 유역에서 기원전 1200년 경의 습식 벼농사와 정교하게 만든 북과 같은 청동 주물들이 발견되었다. 동손 문화의 청동 무기, 도구, 북과 같은 유물들을 만든 청동 주물 기술은 동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동손 문화는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고, 홍방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문랑, , 文郎)을 세웠다. 기원전 257년 홍방 왕조가 무너지고 툭판 왕조가 세워졌으며, 툭판 왕조는 다시 기원전 208년 남비엣에게 멸망당하였다.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의 무제는 남비엣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111년부터 1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베트남은 중국 왕조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쯩 자매와 바찌에우(Bà Triệu)와 같은 산발적인 독립운동은 짧은 기간 성공하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무력에 곧 진압되었다.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 吳權)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그러나 응오 왕조는 오래 가지못하였고, 딘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베트남에서는 전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 호 왕조와 같은 왕조들이 그 뒤를 이었다. 호 왕조는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이어진 명나라의 침공을 막지 못하였고, 베트남은 역사상 네 번째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418년 농민들을 규합하여 독립 전쟁을 벌인 레러이는 명나라를 축출하고 1428년 다이비엣(Đại Việt)의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후 레 왕조는 잠시 막 왕조에게 멸망하기도 하였으나 부흥 운동에 성공하여 1778년까지 베트남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부흥 운동 이후의 후 레 왕조는 사실상 독립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두 가문인 찐 주와 응우옌 주의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었다. 1777년 격화되는 농민 항쟁을 막지 못한 후 레 왕조는 결국 멸망하고 떠이선 왕조가 세워졌다. 후 레 왕조가 멸망한 후 남부 실권자였던 응우옌 주는 떠이선 왕조를 격파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의 2대 황제 민망제가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키자, 영국과 경쟁하여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통치하였다.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화민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비엣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5년 베트남의 전 지역을 점령하므로써 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계획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86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시장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동단에 남북으로 약 1,600km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해에 연해 있으며 최대 너비는 약 650km로 이 길이는 라오스와 맞닿은 북부 국경에서 통킹 만에 이르는 거리이다. 국토는 크게 북부 고원 지대, 홍강 삼각주, 안남산맥, 해안 저지대, 메콩강 삼각주의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열대 계절풍으로 5월부터 10월까지는 많은 비를 몰고 오며, 11월부터 4월까지는 동북 건조기간이 된다. 북부 일부 지역은 사계절이 나타나고 습도가 90%의 비중을 차지한다. 남부 지방은 일년 내내 건조하고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중부 지방에는 베트남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과 가장 습한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산악 지방은 삼각주나 해안 저지대보다 대체로 기온이 낮고 비가 더 많이 온다. 옛 월맹은 1969년 호찌민이 세상을 떠난 뒤 쯔엉찐 국민의회 상임위 주석, 레주언 베트남 공산당 제1서기, 팜반동 총리 등 3인을 중심으로 집단지도 체제를 채택했다. 구 월맹은 월남이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월남 임시혁명정부와 함께 1여 년간의 남북통일 준비작업을 끝내고 1976년 4월 25일 30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최고 권력기구인 492석의 남북단일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로 인구 10만 명당 1석을 기준으로 하는 배분원칙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249석, 남베트남에서 243석을 선출했다. 남북 베트남의 18세 이상의 유권자들이 참가한 총선은 남북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전국의 노동자·농민·여성·산악부족 및 그 밖의 소수인종에서 선정한 후보자 중에서 국민의회 대표들을 선출했으며 야당후보는 없었다.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남북 베트남 단일 국민의회는 1976년 7월 역사적인 통일 베트남 수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였다. 수도는 하노이로 정하는 한편 초대 주석으로 구 월맹의 마지막 주석 똔득탕을, 그리고 2명의 부주석으로는 응우옌르엉방 및 응우옌흐우토를 선출하였다. 또한 옛 월남 수도 사이공을 호찌민시로 개칭하고 국기는 종래의 월맹기였던 〈금성홍기〉(金星紅旗)를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국민의회는 통일 베트남의 새 헌법을 마련할 36명의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는 동시 새 헌법이 공포될 때까지 1959년도 월맹 헌법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입법기관으로 국민의회가 있고 각 성(省)에 각급 인민회의가 있다. 단원제이며 임기는 5년, 매년 2회 소집된다. 주석, 부주석과 간부의원 15명으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가 실질적인 입법기능을 행사한다. 1991년 6월 제7차 당대회에서 도이모이 추진에 중심 역할을 해온 도므어이가 총서기로 선출됐으며, 동 8월의 내각개편에서 개혁파인 보반끼엣 총리로 선출됐다. 1996년 6월의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도 ‘도이모이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 했다. 2001년 4월 농득마잉 서기장이 취임했다. 베트남의 행정 구역은 63개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인 하노이를 포함하여 껀터, 다낭, 하이퐁, 호치민은 성과 같은 급의 직할시이다. 베트남 정부는 가끔씩 지방을 8개의 지역으로 구분짓는다. 이러한 지방 구분은 항상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대체 분류로 가능하다. 베트남 사법부의 최정점에는 상소심과 사법심사를 담당하는 최고인민법원 ()이 있다. 최고인민법원은 베트남 의회에 보고를 하는데, 의회는 사법부의 예산을 통제하고 대통령이 제안한 최고인민법원 판사 후보와 대검찰청 검사 후보를 확정한다. 대검찰청은 체포영장을 발부하는데, 때로는 소급적용을 하기도 한다. 최고인민법원 산하에, 지방법원과 군사법원, 행정, 경제, 노동법원이 있다. 지방법원은 제1심을 관할하는 법원이다. 국방부는 군사법원을 관할하는데, 일반법원과 같은 절차를 적용한다. 군 판사와 담당 직원들은 국방부와 최고인민법원이 선출하는데 감독책임은 최고인민법원에게만 있다. 헌법에는 판사와 담당 직원(행정 능력이 떨어짐)들의 독립성을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 국무부는 베트남의 사법부의 독립성이 부족하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베트남 공산당이 판사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공산당은 국가나 당의 지배적인 지위를 위협할 만한 판결의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모색한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향상할 목적으로, 정부는 지방법원을 법무부에서 최고인민법원으로 2002년 9월에 이관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앞서 말한 목적이 실제로 이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베트남 사법부는 또한 법조인의 부족과 초보적인 재판절차로 인하여 방해받고 있다. 사형 집행은 부패 또는 마약밀매 사건의 경우 자주 집행되고 있다. 베트남의 형법은 전통적인 유교 사상, 나폴레옹 법전 그리고 호치민 사상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일본이 베트남과 협력하여 베트남의 법제를 정비하고 법률가 양성시스템을 선진국형으로 구축하여 지원한 사업은 현재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2007년 12월 기준, 베트남은 172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있었다. 미국과는 1975년 이후 계속되어 왔던 대 베트남 금수조치가 1994년 2월 해제되고, 1995년 1월 양국간에 상호연락사무소가 개설된 데 이어 동 7월 11일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또 1995년 1월 독일과 정치·경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동 4월에는 오스트리아와 4개 경제협정을 체결했다. 대한민국과는 1992년 수교했다. 수단과는 1969년 8월 26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편 유엔 등 국제기구들에 대한 외교도 활발히하여 1976년 9월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에 가입했으며 1995년 7월에는 아세안(ASEAN)의 7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베트남의 군사조직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국경 수비대로 구성되어 있다. 1950년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열강에 승리를 거두었고, 캄보디아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군사력을 증명하였다.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지만 국방비가 없어서 힘든 상황이다. 베트남 해군은 킬로급 잠수함 등을 운용 중이다. UAV 연구제작 프로젝트에서 5종의 UAV를 개발하였고 대량 양산에 들어갈 것이다. 베트남은 정부개발원조와 외국투자가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공산화 이후 경제 기반이 무너져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1986년 "도이 머이"라는 슬로건 하에 실용주의적 경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말부터, 외국인의 재산 투자를 보호하는 여러 법이 개정되었고, 1990년대에는 ASEAN 등 국제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개혁 기간동안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률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침체기가 되었다. 세계금융위기로 일시적으로 추락하였던 GDP의 성장율은 2009년 5.3%, 2010년 6%(예상)로 안정적인 성장이 지속되고 있다. 베트남의 GDP는 1446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1700달러이다. 중국의 인건비가 상승기조에 있는 점 때문에, 새로운 투자대상국으로서 근년에 주목되고 있다. 이리하여, WTO가입이 정부에 의하여 중요한 목표가 되어 2007년 1월에, 마침내 WTO에 가입하였다. NEXT11과 VISTA의 일원으로서도 손꼽히고 지금 이후부터 한층 경제의 발전이 예상되고 있다. 노동인구의 66%가 농업 등 제1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근년에는 제2차, 제3차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관광업의 신장세가 특히 현저하여, 중요한 외화획득원이 되고 있다. 베트남은 쌀, 후추, 커피의 세계 3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대한민국과의 무역도 활발하다. 베트남은 중화인민공화국, 태국 등과 더불어 미래에 매우 유망한 나라 중 하나이다. 1975년에 공산화 통일된 베트남은 오랜 전쟁 탓에 국토는 황폐하고 공산주의 이식 실패에 따라 경제 기반이 무너져 베트남 국민들의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북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석탄·목재·해산물·차 등이었고, 석탄·철광석·인회석·크롬·주석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남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쌀·고무·새우·차 등이었다. 1980년에는 태풍으로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가 발생해 베트남 경제가 타격을 받았다. 이후 1980년대부터 베트남 정부는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계획경제 작업을 중지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 《도이 머이》 를 채택하여 실시하였다. 1986년 12월 베트남 공산당 제6회 전당대회에서, 부분적인 혼합경제제도를 도입하는 실용주의 경제정책 《도이 머이》 를 채택하여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혁, 개방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제4차 5개년 계획 (1986년~1990년) 의 골간으로 1990년까지 2,300만 톤의 식량 생산, 5년간 70%의 수출증대를 선정하는 등 경제의 개방화를 적극 추진했다. 1987년 12월 《외국인 투자법》 이 공표되었고, 1993년에는 《토지법》이 개정되어 토지상속권과 담보권, 사용권이 인정되었다. 다만 토지의 소유권은 공적인 의미에서 계속 국가가 보유하는 것으로 하였다. 1994년에는 《파산법》 이 발효되었고, 2000년 1월에는 기업법이 발효되었다. 1996년의 베트남 공산당 제8회 대회에서는 2020년까지는 공업국으로 진입한다는 목표로, "공업화와 현대화"를 2대 전략으로 하는 정치보고를 채택하였다. 또한 1995년 ASEAN 및 AFTA 가입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APEC에 가입하였고, 2000년 7월에는 베트남-미국 무역협정에 서명하였다. 2000년 7월에는 호치민시에 최초로 〈증권거래센터〉가 개설되었으며, 2005년에 하노이로 확대 개설되었다. 2007년 1월에는 WTO에 정식으로 가입되었고, 2008년 12월에는 베트남-일본 경제연대협정(EPA)에 공식 서명을 하였다. 《도이 머이 정책》 이후 베트남 경제는 1989년 이래 연평균 8%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1995년, 1996년에도 9% 이상의 고속성장을 지속했다. 2008년의 GDP 성장률은 6.23%로 최저 성장을 기록하였고, 2009년은 5%로 하향조정하였으나,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해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현재는 옛날의 가난에서 크게 벗어났으며 빠르게 경제 발전을 하고 있지만 빠른 경제 발전의 후유증도 같이 겪고 있다. 2004년부터 빠르게 물가가 상승하여, 2008년에는 22.97%로 최고의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더욱이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베트남 동화의 평가절하 등으로 인플레이션율이 2008년 25%를 초과할 정도로 상승하면서 위기의 상황이 오기도 하였다. 토지의 사유화 및 농지의 전용이 가능해 진 이후 골프장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이 크게 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2010년 기준 베트남의 골프장 개발 허가 수는 140여 곳에 달한다. 경작지 감소와 그에 따른 고용 감소를 우려한 베트남 정부는 2008년 이후 농지 전용 억제 정책을 펴고 있다. 베트남의 주요 산업은 2008년 GDP 기준으로 39.91%를 차지하는 제조, 건설업 즉, 2차 산업이며, 농림, 수산업의 1차 산업은 21.99%에 이른다.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은 38.10%로 높은 성장률을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노동인구의 53.9%가 농림, 수산업에 종사를 하며 이들은 쌀, 고무, 사탕수수, 커피, 열대 과일 등과 새우 등의 수산물 등을 생산하고 있다. 메콩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쌀이 국민의 주식인 동시에 수출품목의 대종을 이루었다. 1989년 자급을 달성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을 이어 3대 쌀 생산국이다. 남부에서는 2년7모작이 이뤄지며, 세계 2위 쌀 수출국이기도 하다. 그 외에 커피와 차, 향신료도 유명하다. 커피는 현재 브라질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생산량(99만톤, 2003년)에 달하고 있다. 대부분이 인스탄트 커피, 캔과 펫트병에 들어가는 청량음료, 제과 용도로 사용되는 값이 싼 로브스타 종(카네포라 종)인데, 레귤러 커피에 사용되는 고급품인 아라비카 종의 재배도 시작되고 있다. 또한 현지에서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아 프랑스의 방식을 따른 베트남 커피가 음용되고 있다. 베트남은 석탄, 석유를 중심으로 한 동력자원, 주석을 중심으로 한 광물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다. 북부 하롱(홍게이)에서 산출되는 석탄은 상질의 무연탄으로, 19세기말부터 홍게이탄으로서 채굴이 시작되었다. 2003년 시점의 채굴량은 1670만톤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서방 세계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석유개발을 통해 산유국이 되어 1660만톤의 원유를 생산한다. 천연가스의 채취량은 126천조 줄이다. 광물자원은, 북부 삼각주 주위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생산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제4위의 주석(4000톤, 세계 점유율 1.5%, 2005년)이다. 아연, 금, 크롬, 철, 납, 인도 산출된다. 주요한 수출품목은 원유, 의류, 농수산물이다. 수출품목의 제1위는 석유로서, 2002년 시점에는 수출총액의 19.6%를 차지하였다. 쌀은 450만톤(2008년)을 수출함으로써 타이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수출국이었으나, 현재는 수출제한조치를 하고 있다. 커피는 2008년 2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한 세계 제2위의 수출국이며, 후추는 2008년을 기준으로 115만톤을 수출하여 세계 1위의 수출국이기도 하다. 베트남 유통업태는 특히 도시지역에서 과거 몇 년 동안 전통적인 재래시장으로부터 현대화된 수퍼마켓과 쇼핑센터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수입상품의 취급확대를 촉진하고 있다. 1999년 2개의 대형수퍼마켓에서 2004년에는 전국적으로 85개가 넘는 현대화된 수퍼마켓이 운영되고 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한국은 2008년을 기준으로 9위의 수출국이며, 5위의 수입국이자, 6위의 교역국이기도 하다. 2008년을 기준으로 투자국 순위로는 4대 투자국이며, 베트남에 투자건수는 총 9,494건이며, 총 등록액은 1,320억 달러였다. 2009년말 현재 베트남의 전화 가입자수는 모두 1억3천40만여명으로 이 가운데 85%가 휴대전화 서비스 가입자로 집계됐으며, 비엣텔 등 일부 선도 회사들은 매년 30% 이상의 높은 신장세를 보여왔다. 정보통신부는 2009년 8월, 8번째 서비스업체로 인도차이나 텔레콤에 대해 사업허가를 승인했고, 2010년 6월에는 VTC가 정부로부터 이통 서비스 허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베트남 이동통신 시장은 비나폰, 모비폰, 비엣텔, S-Fone 등 선발 4개업체들과 EVN텔레콤, 베트남모빌, 비라인, 인도차이나텔레콤, VTC 등 후발 5개사들 간에 치열한 고객확보 경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베트남의 현대적 교통 체계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수확한 농산물울 운송할 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 전쟁의 결과 파괴된 교통 체계를 재건하고 현대화하였다. 가장 일반적인 교통 수단은 도로 운송이며, 도시 간 이동에 일반 시외버스와 오픈 투어 버스(Open tour bus)를 이용할 수 있다. 2,654km의 단선 철도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연결이 되며 하노이와 호찌민시 간을 연결하는 철로가 중요하다. 베트남의 차량은 우측통행을 하며 2륜차가 매우 많다. 베트남은 2006년 '5대 부정부패'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교통부 고위 관리들이 외국의 자금을 지원받아 도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PMU18)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700만달러를 사적으로 유용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교통부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했다. 베트남 교통경찰과 토지 등록 사무소, 세관 및 세무서에서도 흔히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베트남의 인구는 약 8,162만(2003년)으로, 그 90%가 베트남인이다. 그 밖에 타이인·중국인·크메르인 등이 있으며 산악지대에는 미오·랭이·몬타냐 등 많은 부족이 살고 있다.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서 베트남 정부가 공인하는 민족의 수가 54개에 이른다. 최대 민족은 킨족(京族) 또는 비엣족(越族)으로 보통 베트남인이라고 할 때 다수종족인 이 킨족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킨족은 베트남 전체의 86.2%를 차지한다. 므엉족과 같은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킨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국토의 2/3를 덮고 있는 산악지대에서 발견된다. 킨족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정체(政體)를 거친 북부인과 남부인은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치, 경제적 대립의식을 갖고 있다. 각각의 소수민족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참족과 같이 역사상 독립국가였다가 베트남에 흡수된 민족도 있고,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산간지역에서 생활을 하는 민족도 있다. 호아족과 크메르 크롬은 저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킨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은 몽족, 다오족, 따이족, 그리고 눙족이 있다. 1978년에서 1979년에 45만명의 중국계 소수 민족이 베트남을 떠났다. 아울러, 근래 대한민국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서 한인동포의 수도 비례적으로 급증하여 베트남 정부가 2012년 기준으로 추산한 자료에 따르면 13만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다.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에 6성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 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꾸옥 응으()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어는 민난어처럼 동아시아의 언어들 중에서 중국어와 유사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로 변경한 흔치 않은 언어 중 하나이다. 이 로마자 표기법은 현지인들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45년 이후 베트남이 독립한 뒤 공식 표기법이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15세기 말에 한자와 비슷한 문자인 쯔놈이 발생하였지만, 그 사용은 한문에 익숙한 일부 지식인층에 국한되었고,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사용이 끊어졌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꾸옥 응으를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자에 거부감을 표시하던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근대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문이나 쯔놈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여 로마자의 편의성을 인정하고, 이후 로마자를 베트남어의 새 문자로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한자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였다. 베트남은 55종에 달하는 언어의 다양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다시 6, 7개 정도의 언어 집단으로 나뉜다. 외국어로는 영어를 가장 많이 선호하며, 일부 엘리트 층들은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한다. 현재 프랑스어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 및 프랑스어의 쇠퇴 등으로 인해 거의 감소 추세에 있지만,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초등교육은 5년제의 의무교육이다. 중등교육은 전기 4년제, 후기 3년제이다. 베트남의 대학에는 국가대학(총리 직할 학교), 국립대학(지방종합대학), 전문대학(교육훈련성, 후생성, 문과정보성, 인민위원회 등의 소관), 민립 대학이 있으며, 교육비는 대학 과정까지 무료이다. 중국 남부 지방과의 오랜 교류로 인하여, 베트남 문화를 특징짓는 한 가지 요소는 재정적 책임이다. 베트남에서 교육과 자수성가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베트남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베트남이 오늘날의 영역으로 통합된 것은 근대의 일로, 그 전에는 유교 및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부와 베트남의 주 종족인 킨 족외에 인종적으로 말레이계에 속하는 참파인의 국가였던 참파가 있었던 중부문화권,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남부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북부, 중부, 남부의 차이는 언어 및 풍속,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중국의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베트남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개념은 없고, 서로 스스럼없이 대한다. 공산주의 시대에 베트남의 문화적 삶은 정부가 통제하는 미디어와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십 년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은 차단되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의 문화를 음미하고 공유하는 것이 강조되었었다. 1990년대 이래로, 베트남은 일본, 유럽, 미국의 문화와 미디어에 대폭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에는 1945년 9월 2일에 하노이에서 설립된 국영방송국인 베트남의 소리가 있다. 베트남인의 이름은 성, 가운데 이름, 그리고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씨 제도는 중국에서 도입된 것이다. 한자가 폐지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 베트남인은 소수이지만, 이름 뒤에는 한자의 의미가 숨어 있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18세기의 작가 응우옌 주에 의해 저술된 대서사시 쭈엔 끼에우는 베트남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6.8조의 연서체로 분량은 총 3,254행에 달한다. 특히 이 작품은 쯔놈으로 쓰여진 자료중의 최대의 것으로 베트남의 국민문학으로 불린다. 베트남의 민속 의상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여성들이 입는 아오 자이이다. 아오 자이는 현재에는 명절이나 결혼 등 행사, 일상의상 등으로 입는다. 흰색 아오 자이는 베트남 전역에서 여학생의 교복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고 학생이외에는 다양한 색상의 원단으로 아오자이를 만들어 입는다. 예전에는 성별 구분없이 아오 자이를 입었으나 현재에는 여성용 의복으로 한정된다. 단, 전통 문화 행사에서는 남성이 입는 경우도 있다. 주 요리의 재료는 대개 쌀과 간장, 생선 소스 등이다. 대체적으로 음식의 맛은 달거나 맵거나 시거나 감칠맛이 나며 향채 풀로 인한 민트향과 바질향이 나도 한다. 유명한 음식은 베트남쌀국수이다. 베트남의 음악은 세 지역, 북부, 중부, 남부 지방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북부 지방의 전통 음악은 베트남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음악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엄격한 형식을 가진다. 베트남의 전통 음악은 몽골의 침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경극 극단을 붙잡아 두었다. 중부 지방의 전통 음악은 우울한 멜로디 등 참파 문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남부 지역의 음악에서는 자유방임적인 삶의 태도가 묻어난다. 베트남의 전통 현악기인 단 짜인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현은 철제이고, 각각의 V자 모양으로 된 다리에 의해 지지되어 있다.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등이다. 베트남은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그 외에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신흥 종교도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혼합된 유일신 사상이며,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법이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대승 불교권인데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4월 15일이다.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개인 별 소득 차가 크지 않다. 남녀 평등 사상이 확산되고, 보통 자녀 수가 많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급속한 이농 현상).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활발하고 여성 노동자의 고용을 장려하고 있다(소득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가사 노동을 부부가 분담하며 유교 전통이 드러난다(장손을 중시하고 아들에게 유산 등을 상속하는 행위). 연애 결혼이 증가 추세에 있다. 베트남에는 1월 말~2월 초에 뗏이라 해서 최장 7일 간의 연휴가 있으며 음력 공휴일은 음력 3월 10일에 있는 훙왕 기일 하나뿐이고 1년의 마지막 공휴일은 9월 2일 독립기념일이다. 즉, 10월부터 12월까지 공휴일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포세이돈 포세이돈()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지진·돌풍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넵투누스()에 해당한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 태어났으며, 제우스 및 하데스 등과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돌고래, 물고기, 말, 소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주로 삼지창(트리아이나)을 들고 물고기나 돌고래 떼와 함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리며 파도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성미가 급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툭하면 다른 신들이나 인간들과 다투었다. 아내는 가이아, 데메테르, 암피트리테이며 자식애가 강해서 영웅들과 갈등이 많은 신으로 유명하다. 특히, 제우스의 아들과 많은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자주 싸우면서 숙부를 언제나 남편으로 삼고 싶었던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구애를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였다. 아내와 자식애가 유독 엄청나게 많은 신으로 매우 유명하다고 한다. 포세이돈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어느 날 불길한 예언을 들었다. 아버지 우라노스처럼 크로노스 자신도 아들에 의해 쫓겨난다는 것이었다.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크로노스는 아내인 레아에게서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족족 삼켜버렸다. 그중에는 포세이돈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식을 잃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던 그의 어머니 레아는 한 명이라도 구하고자 여섯 번째 아이인 제우스를 출산할 때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남편에게 건넸다. 그리고 진짜 제우스는 아말테이아에게 맡겼다. 그렇게 제우스는 남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제우스는 나중에 장성해서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삼킨 형제들과 누이들을 되찾고자 메티스로부터 구토제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레아에게서 받은 구토제를 마신 크로노스는 예전에 삼긴 모든 자식과 돌을 토해냈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이 그들이었다. 구출된 그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 신들과 전쟁을 벌였다.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식들인 퀴클롭스 형제와 헤카톤케이레스 형제의 도움까지 받은 올림포스 신들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어 티탄 신들을 대지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봉인하였다. 포세이돈은 자신의 형제인 제우스와 맞먹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였는데, 아내는 무려 셋을 두었다. 첫 번째 아내는 자신의 할머니인 가이아였고 두 번째 아내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가 똑같이 티탄족과 싸우면서 그렇게 아내로 취한 데메테르였고 세 번째 아내는 트리톤을 낳은 돌고래자리의 주인인 암피트리테였다.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여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들을 낳았는데, 포세이돈과 관련하여 유명한 여자들은 아테나의 신전에서 포세이돈과 동침한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 아테나와 아름다웠지만 아테나에 의해서 참혹하게 변한 메두사 등이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자식들이 영웅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그 영웅들을 해일과 지진을 일으켜서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오디세우스. 포세이돈은 아내와 자식애가 누구보다 강한 신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까닭이 자녀들이 못생기고 추하다고 질타를 받을까봐 우려를 해서 그런거라고 전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와 정말 맞먹을정도로 여자욕심이 대단한 남성신으로 나타나있다. 자식들이 제우스에 비해서 흉측하고 항상 괴물들만 생산하자 불안해진 포세이돈은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고자 결심하였다. 어느 날 유명한 안드로메다 공주의 어머니인 [[카시오페이아] 왕비가 포세이돈의 아내와 자식들이 안드로메다 공주에 비해서 별볼일 없다고 세 치 혀를 내밀면서 자신과 딸자랑을 하자 몹시 기분이 나빠진 포세이돈이 그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끔찍한 바다괴물한테 시집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결국에 어머니의 어리석음에 딸만 애꿎은 희생을 치루게 되었는데 [[메두사]]를 처리하고 온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해내자 그녀의 부모를 별자리로 만들었으나 거꾸로 매달아서 형벌을 줬다고 한다. 포세이돈은 페르세우스한테 매우 안 좋은 감정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유명한 일대기로 그가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을 무사히 치루고 외딴섬에 쉬러 잠시 배를 섬에 안착시키고 이상한 동굴속에 음식들이 가득한걸 보고 가져고자 하였지만 그곳에는 포세이돈의 아들인 [[폴리페모스]]가 있었다. 신탁에서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적이 될 암시를 하였고 신탁의 예상대로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하자 엄청나게 분노하여 해일을 일으켜서 오디세우스의 귀화를 아주 심하게 늦추기도 하여서 오디세우스를 지지하던 올림포스 신들한테 있어서는 커다란 장애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편,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아들인 [[안타이오스]]를 죽이자 제우스와 헤라클레스한테 몹시 안 좋은 감정으로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한테는 소중한 딸인 바다의 여신이기도 한 식탐의 여왕인 [[카리브디스]]의 목숨을 구제를 해줬던 제우스 못지않은 어쩌면 제우스보다 뛰어난 부성애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에 남겨졌다. 포세이돈과 아테나는 하나의 도시를 놓고 겨룬 적이 있다. 심판은 그 도시의 주민들이 결정하기로 하고 겨루는 내용은 주민들에게 얼마나 더 필요한 물건을 선물로 주느냐였는데 포세이돈은 말(馬)을 너무나 좋아하는 신답게 여기에서도 말을 꺼냈다.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꺼냈는데 이 도시 사람들은 올리브가 말보다 훨씬 쓸모있다고 판단하여 아테나의 승리로 판정해줬다. 이 도시는 아테나에게 봉헌되었고 도시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라 불리게 되었다. 포세이돈은 인간인 [[메두사]]와 서로 연인이었는데 [[아테네]]의 신전까지 [[메두사]]를 데리고 가서 사랑을 나눴다. 이에 분노한 [[아테나]]는 [[메두사]]를 흉칙한 괴물로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테나는 [[페르세우스]]를 이용하여 [[메두사]]를 죽여버린다. 이에 대해 포세이돈은 메두사를 그렇게 만들어버린것도 있지만 아테나와 페르세우스한테 심한 악감정이 있었던걸로 보인다. [[분류:포세이돈| ]] [[분류:그리스 신화의 남신]] [[분류:물의 신]] [[분류:바다의 신]] [[분류:바람의 신]] [[분류:창조신]] [[분류:동물의 남신]] [[분류:재난의 신]] [[분류:올림포스 12신]] [[분류:가이아의 배우자]] [[분류:신화의 강간범]] [[분류:가공의 해양생명체]] 누피디아 누피디아()는 월드 와이드 웹을 기반으로 하고, 전문가의 검증을 통해 문서가 작성되는 자유 콘텐츠 백과사전이었다. 2000년 3월에 시작되어 2003년 9월까지 운영되었고, 현재 위키를 기반으로 하는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위키백과와는 달리, 누피디아는 위키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대신 광범위한 규모의 동료평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특징이며, 다른 전문적인 백과사전에 필적하는 수준의 문서를 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누피디아는 전문가들의 자유 콘텐츠 지원을 통해 운영되었다. CNET은 2008년 6월, 누피디아를 현존하지 않는 웹사이트 중 인터넷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위키백과보다도 훨씬 뛰어난 웹사이트라고 했다. 사마천 사마 천(, 기원전 145년경 - 기원전 86년경)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다. 산시 성 용문(龍門)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후에 이릉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릉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진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게 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의 한 명으로 꼽히어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실제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를 사가가 해석한 글로 존중받는다. 주나라의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에서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오디세이아 《오디세이아》(, )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로서 저자는 일반적으로 일리아스의 저자인 호메로스로 전해지고 있다. 시의 주제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귀향 모험담이다. 때문에 서양 문학사에서는 모험담의 원형으로 주목된다. 일리아스와 마찬가지로 시는 총 24편으로 나뉘며, 6각운(Hexametre)로 작곡되었다. 트로이가 멸망한 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나, 이타케 군주인 오디세우스는 바다 위를 떠다니며 아직도 귀국 허가가 없어 칼립소의 섬에 억류당한 채이다. 여러 신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제우스의 명령으로 헤르메스를 님프 칼립소에게로 보내어 그를 놓아 줄 것을 허락하는 한편, 고향 이타케 섬으로 아테나 여신이 몸소 찾아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부친의 행방을 찾으러 그리스 본토로 갈 것을 권고한다. 그 이타케 섬, 그의 성에서는 주인이 오랫동안 행방 불명된 동안에 이웃 여러 섬과 이타케에서 구혼자들이 몰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며 그 아들의 나이 어림을 기회로 매일같이 향연을 계속해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다. 그 용사의 이야기를 해 다오. 뮤즈 여신이여. 지모(智謀)가 뛰어나며, 트로이의 거룩한 성시(城市)를 함락시킨 뒤, 참으로 숱한 섬과 나라들을 방황해 온 그 사나이의 이야기를, 자신의 생명을 건지고, 동료들의 귀국 길도 열어 놓으려 애쓰는 동안 숱한 종족이 살고 있는 나라들과 그 기질들에 맞서 분별 있게 행동하고, 해상(海上)에서 무수한 고뇌를 가슴 깊이 되씹기도 여러 번이 있었지. 허나, 무척이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부하들을 구원하지는 못했었다. 어쩔 수 없는 자업 자득이었으니, 그들은 신의 노여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이라,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태양신의 소유물인 소를 마구 잡아먹고 있었으니, 태양신이 그들로부터 귀국의 날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한 내력을, 어느 대목부터라도 좋으니 제우스의 따님이신 뮤즈 여신이여, 우리한테도 이야기해 다오. 다른 대장들로서 준엄한 죽음의 운명을 벗어난 용사들은 이미 모두 다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전쟁에서도, 험한 바닷길에서도 운수 좋게 벗어나서, 그런데 오디세우스만은, 고국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도, 여신들 사이에서도 세력 있는 님프 칼립소가, 주위에 텅빈 동굴 속에서 그와 결혼하기를 갈망하여 붙잡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세월이 흘러, 여러 신들이 정해 놓은 이타케 섬으로 돌아갈 그의 귀국 날이 돌아왔으나, 그 때에도 아직 온갖 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지, 다시 관의 길이 시작되었다. 즉 다른 신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으나, 포세이돈은 아직도 노여움을 풀지 못해 신이나 다름없는 오디세우스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이즈음 포세이돈은, 먼 곳에 살고 있는 아이티옵스 족들에게로 떠나고 없었다. 이 아이티옵스(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인간 세계의 맨 끝에 살고 있었다.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은 해가 저무는 서쪽 끝에, 또 다른 한쪽은 해가 솟는 동쪽 끝에. 그 나라로, 황소와 새끼양의 제물을 바치는 제사에 참여하려고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세이돈이 잔치에 앉아서 즐거워하는 동안, 다른 신들은 올림푸스에 있는 제우스 대신(大神)의 궁전에 모여 있었는데, 인간들과 신들의 어버이 신인 제우스가 맨 먼저 좌중에 의논의 말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슴 속에 용맹했던 아이기스토스가 떠올랐으므로 (그를 아가멤논의 아들이며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친 오레스테스가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서 불사의 신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허 참, 정말 무슨 까닭으로 인간들은 우리 신들한테 죄를 뒤집어씌운단 말인가. 재앙이란 재앙은 모두 우리한테서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인간 자신들의 분수를 벗어난 행동 때문에 타고난 운명보다도 더한 쓰라린 꼴을 당하는 것을. 이번 일만 하더라도, 아이기스토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정실(正室)인 클뤼타임네스트레와 밀통해서는, 아가멤논이 트로이에서 귀국하자 살해하기에 이르렀지. 그것도 이내 자신의 파멸을 부르는 것인 줄 알면서도 말이지, 우리가 미리 저 훌륭한 파수꾼, 아르고스의 살해자인 헤르메스를 사절로 보내어 경계하라고 했는데도 말이야. 아가멤논을 살해하면 안 된다, 또 그 아내를 탐내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도. 왜냐 하면 그런 짓을 하면, 곧장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 의해 복수를 받을 것은 뻔한 일이니까. 지금은 나이가 어리고 타국에 가 있지만, 얼마 뒤면 어른이 되어 제 나라가 그리워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헤르메스를 시켜 말했는데도, 내가 애써 잘 하라고 걱정해서 말해 주었는데도, 아이기스토스의 얼빠진 마음을 설득하지는 못했던 게야. 그래서 그는 이제 만사를 오직 한 번의 행동으로 앙갚음 당하고 만 셈이란 말이지." (후략) 텔레마코스는 다음 날 아침 시민회의를 열어 구혼자들이 이타케 성을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구혼자들의 두목 노릇을 하는 안티노오스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텔레마코스는 또한 이타케 주민들에게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확인을 위한 여행에 필요로 하는 배 한 척을 마련해 주기를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실망한 텔레마코스에게 아테나가 오디세우스의 옛 친구인 멘테스의 모습으로 나타나 여행에 필요로 하는 배와 식량 등을 마련해 주리라 약속한다. 저녁이 되어 그는 아테나가 변신한 멘토르와 함께 어머니 페넬로페 몰래 스파르타로 떠난다. 필로스에 도착하여 텔레마코스는 해안에서 네스토르를 만난다. 네스토르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에게 트로이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건네준 뒤, 오디세우스의 안부는 스파르타의 군주 메넬라오스에게 알아보라고 텔레마코스에게 조언한다. 메넬라오스의 성에서 텔레마코스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환영을 받는다. 헬레네는 텔레마코스에서 겉모습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임을 알아차린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메넬라오스는 트로이전쟁에서 오디세우스의 활약을 높이 칭찬한다. 다음날 아침 메넬라오스는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물어보기 위해 방문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집트의 바다신 프로테우스에게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오기기아 섬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준다. 한편 이타케에서는 안티노오스와 구혼자들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암살할 음모를 꾸민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의 전령으로부터 이 음모를 전해 듣고는 구원해 줄 것을 아테나에게 기도한다. 오디세우스의 장래에 대해 신들이 회의한 끝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칼립소의 섬으로 보낼것으로 결정했다. 오디세우스를 남편으로 삼기 위하여 수많은 구혼을 오디세우스에게 하는 칼립소에게 헤르메스는 오디세우스를 귀향시키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한다. 칼립소는 엄한 명령에 복종을 하여 오디세우스에게 귀향 채비를 갖추라고 하며 도끼를 주었다. 얼마 후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만든 뗏목을 타고 귀향 길에 오르지만, 그를 저주하는 포세이돈이 일으킨 풍랑에 휩쓸려 온갖 죽을 고생을 한 끝에 바다의 요정 로이코테아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전설적인 섬 파이아케스에 이른다. 허기와 피로로 기진 맥진한 오디세우스는 해안에서 숲덩굴을 찾아 몸을 가린 후 풀숲에서 깊은 잠에 빠진다. 알키노오스가 지배하는 파이아케스족의 섬으로 풍랑에서 목숨을 건진 후 오디세우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아테나는 알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아의 꿈에 나타나 날이 밝으면 시녀들을 거느리고 해변으로 나가 밀린 빨래를 하라고 충고한다. 여신의 뜻대로 공주는 바로 오디세우스가 잠을 자고 있는 해변에 이르러 빨래를 마친 후 시녀들과 공놀이를 했는데, 공이 잠자는 오디세우스에게 떨어져 그가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다른 처녀들은 발가벗은 낯선 남자를 보자 모두 달아나지만 나우시카아 공주는 그대로 대면하여 이야기를 듣는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처한 딱한 상황을 공주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한다. 공주는 오디세우스가 평범한 남자가 아님을 직감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내어 주고 길을 알려 준 후 먼저 가라고 말한다. 나우시카아를 뒤따라 그녀의 아버지의 궁전에 다다른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도움으로 안개에 쌓여 궁전에 스며들어 알키노오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왕실에 모여 있던 여러 신하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을 보고 어수선 해 하는 틈을 타 오디세우스는 왕비 아레테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도와줄 것을 청한다. 알키노오스는 오디세우스를 술자리에 초대하여 환영을 한다. 아레테는 오디세우스가 입고 있는 옷을 눈여겨 보고는 어디서 옷을 얻었는가 묻자, 오디세우스 나우시카아를 해변에서 만난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밤이 늦어 모두들 잠자리를 찾는다. 고대 그리스 문학 고대 그리스 문학은 초창기부터 비잔티움 제국 시절까지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문학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졸기 그리스 초기 미케네 시대에 쓰인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이 두 서사시와 ‘호메로스풍 찬가’, 헤시오도스의 두 시집 ‘신들의 계보’와 ‘일과 날’은 고전기부터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까지를 관통하는 그리스 문예 전통의 중요한 기초를 이룬다. 서정시인 사포, 알카에우스, 핀다로스는 초창기 그리스 시 전통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작품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그리스 비극작가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에 관해 그가 쓴 비극들, 특히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로 유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 양식의 경계를 확장한 희곡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 희극’ 양식으로 작품을 쓴 반면, 이후의 극작가 메난드로스는 ‘신 희극’의 선구자였다. 기원전 5세기를 살았던 사학자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는 그들 생애와 그 전의 사건들을 다룬 역사책을 썼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여러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대화편을 쓴 반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수많은 논문들을 저술했다. 중요한 후대 작가들에는 아르고나우타이의 항해기를 다룬 서사시인 아르고나우티카를 쓴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수학의 새 지평을 연 논문을 저술한 아르키메데스, 전기와 수필을 주로 흔 플루타르코스가 있다. 기원후 2세기의 작가 사모사타의 루키아누스는 주로 풍자 작품을 쓴 그리스화된 시리아인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이후의 그리스 문학과 더불어 서구 문학에 있어 풍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많은 고대 로마 작가들은 그리스의 선배들로부터 영감을 얻어냈다. 르네상스 이후로도 단테 알리기에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유럽 작가 태반은 고전적 주제와 동기에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리스 문학의 시발점에는 호메로스의 기념비적인 두 작품,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자리잡고 있다. 호메로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불명이다. 일리아스는 10년간의 트로이 전쟁 말미의 10일간을 다루는 담화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리스 영웅의 이상을 구체화한 아킬레우스가 서있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전사 중 하나였던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10년간의 전쟁 이후, 그는 또 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을 아내와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항해하는데 쓰게된다. 페넬로페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지며, 호메로스는 그녀를 서약, 겸양, 순결과 오디세우스와의 결혼동안 보인 존경을 바탕으로 그녀를 이상적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10년간의 항해에서 오디세우스는 동료들 모두와 배를 잃고 거지로 가장하여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작품 모두 고대의 전설을 기초로 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말해진다. 호메로스의 언어는 이오니아 방언을 기초로 하여 아에올리스와 아티카의 방언이 조금 섞인 고어체이다. 아티카 방언이 섞인 이유는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의 호메로스 서사시 판본 때문이다. 서사시의 운문은 6보격이다. 고졸기의 다른 위대한 시인은 바로 헤시오도스이다. 호메로스와 다르게 헤시오도스는 자기 자신을 시 속에서 언급한다. 하지만 그밖의 어떤 자료도 그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는 중앙 그리스의 보에오티아 주민이였고, 기원전 700년 경에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헤시오도스의 두 장편인 일과 날과 신통기이다. 일과 날은 그가 잘 알고있던, 가난에 고통받는 시골 생활의 충실한 묘사이다. 이 시는 또한 농부들을 위한 규칙들을 설명하고있다. 신통기는 창조와 신에 관한 체계적인 담화이다. 이 시는 생생하게 먼 옛날 황금기부터 시작한 인류사를 묘사하고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작품은 고전 전반에 걸쳐 찬사를 받고있으며 고대 그리스 신화의 창립자적인 글로 많은 고대 독자들에게 읽혔다. 호메로스는 영웅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말했으며, 헤시오도스는 신화 창조 담화와 동시대 일상의 현실적인 면을 포괄했다. 서정시라는 말은 리라(λύρα)라는 악기와 함께 합창단이나 개인이 부른 곡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그 어원과는 달리 여기서 말하는 서정시는 4개의 장르로 나눠지는데 그 중 2개는 키타라가 아닌 플루트가 반주되는 장르이다. 이 두 장르는 만가와 단장격 시이다. 두 장르 모두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였다. 만가는 만가 대구법로 쓰였고 약강격 시는 약강 삼보격으로 쓰였다. 첫 서정시인은 기원전 7세기경의 중요한 약강격 시인인 파로스의 아르킬로코스로 추정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의 고전시인의 경우처럼 조각들로로만 남아있다. 몇몇 단편들은 그가 매우 험난한 인생을 산 것을 전해준다. 많은 서정시들은 아이올리스 방언으로 쓰여졌다. 각 서정시마다 매우 다양한 시 보격이 사용되었다. 서정시인들중 가장 유명한 이들은 “9명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린다. 그중에서 레스보스의 사포 (기원전 630년 경 - 기원전 570년 경)은 가장 널리 찬송되는 시인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그녀의 시는 호메로스의 시만큼의 존경을 받았다. 그중 “아프로디테의 송가”만이 현대에까지 원형 그대로의 완결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포와 더불어 그녀의 동시대인인 레스보스의 알카에우스 역시 서정시 만가로 유명하다. 알크만이 쓴 시는 듣기 불쾌하다고 여겨진 도리아 방언으로 쓰였음에도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후대의 시인인 테베의 핀다로스는 제창 서정시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모든 고대 그리스 희곡은 아테나이 출신의 극작가들이 썼으며 오로지 아티카 방언만이 사용되었다. 합창공연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통이었다. 아테나이인은 테스피스라는 이름의 남자를 합창단장과 상호작용하기 위해서 연기자를 첫번째로 도입한 희곡의 창시자로 여긴다. 훗날 극작가들은 스토리텔링을 더 자유롭게 하고자 연기자의 수를 3명으로 늘렸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따른 아테나이의 깨어난 국가정신은 과거의 영웅적 전설적 주제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비극작품에서 표현되었다. 완전히 남아있는 모든 그리스 비극은 대체로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으로 추정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레수스」를 쓴 작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퀼로스의 아들인 에우포리온의 작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이스퀼로스가 썼다고 여겨지는 남아있는 비극은 일곱 작품이 있다. 이 희곡들 중 세 작품,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코이포로이)》, 《자비로운 여신들(에우메니데스)》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으로 묶인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총 일곱 작품이 현존하는데, 그중 가장 호평받은 작품에는 오이디푸스와 그의 자식들의 이야기를 다룬 테바이 3부작이 있다. 테바이 3부작은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로 구성된다. 이 희곡들은 보통 “3부작”으로 불리지만 순차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내용적으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초기 활동시기인 기원전 441년 작성되어 연대상으로는 처음 쓰였다. 셋 중 가장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은 그의 활동시기 중반부인 기원전 429년경 쓰였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내용상으로 2번째이나 사실은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작품이며 소포클레스 사후, 기원전 401년에야 공연되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희곡은 모두 열아홉 작품이다. 그중 잘 알려진 희곡에는 메데아, 히폴뤼투스와 바카애가 있다. 레수스는 가끔씩 에우리피데스의 아들의 작품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사후 복제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 문학의 경계선을 늘렸으며 그의 작품 내의 많은 요소들은 비극적이라기보다 희극적이다. 그의 작품인 알케스티스를 예로 들자면, 이 작품은 문제극으로 분류되며 희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점 등을 들어 진정한 비극보다는 희비극으로 특징을 더 갖고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고전기에 활동한 유명한 두 역사가는 바로 헬리카르나소스의 헤스도토스와 투퀴디데스이다. 헤로도토스는 흔히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저서 역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문 문학중 하나이다. 투퀴디데스의 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사도행전의 저술가와 비잔티움의 역사가 카에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같은 후대 작가들과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의 세번째 역사가, 아테네의 크세노폰은 투퀴디데스기원전 41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다 썼을 무렵 헬레니카의 저술을 시을했으며 기원전 362년까지 다루고 있다. 크세노폰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나바시스인데, 세밀한 이 작품은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도와 키루스의 형을 황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전쟁에서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했던 본인의 1차사료를 바탕으로 쓰였다.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많은 철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에 살았다. 그리츠 초기의 철학자들 중 밀레토스의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들을 묶어 "밀레토스 철학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철학자들의 글은 킬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가 보존한 아낙시만드로스의 단편조각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다. 철학자 사모스의 피타고라스의 삶에 관해서는 매우 적은 것만이 알려졌으며 현재까지 그가 쓴 글 중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그의 제자 아크라가스의 엠페도클레스의 인상적인 시 전집이 남아있다. 에페수스의 헤라클리토스와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의 많은 단편 조각들 역시 남아있다. 이 시대는 테오클리토스가 시작한 <목가>라는 전원생활을 묘사한 짧은 시형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문학 양식은 탄생하지 않았고 전시대의 문학 양식을 연구 모방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의고(擬古)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특색은 시가 비근한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성과 세부적 표현기교가 뛰어나다는 점에 있다. 산문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이 다수 출현하고 있으나 문체의 면에서는 한때의 풍부한 맛이나 건강한 맛은 없으며 고르기아스(그리스 변론가, 기원전 483-기원전 376)의 형식을 추종하는 관능적(官能的)인 것으로 과장이 많은 아시아니즘에서 얼마간 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제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의 동방 정벌에서 비롯되는 헬레니즘 시대는 아프리카·소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계 제국시대였다. 문화의 중심도 아테네보다는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안티오크 등으로 옮겨져 그리스 문화는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화했다. 문학의 무대도 국제적 성격을 띠어 세계 시민적 일상생활에서 생겨난 보편적 감정이 서술되기에 이른다. 종래의 그리스 문화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를 낳은 민족 통일의식에 바탕을 두고, 폴리스(도시국가)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에 비해 그리스 문화의 세계화·보편화라는 헬레니즘의 적극적인 면은 그와 같은 창조의 기반을 잃고 세계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표면상 그리스적인 것이긴 하나, 전 시대의 그리스 문학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으로 전 시대 문학의 모방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학이 다음 시대의 그리스 문학 및 로마 문학 형성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이 컸던 것은 절대적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고전기 그리스 문학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등 각 지역은 도서관이 건립되어 방대한 양의 고전작가 작품들이 수집, 보존되었다. 이와 병행해서 이들 작품의 사본을 분류 교정 및 진본 여부를 구별하는 문헌학이 발달했다. 또한 아폴로도로스(아테네의 문법가, 기원전 2세기?)의 신화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옛 문물을 고증하는 학문도 생겨났다. 이들 학문은 모두 당시의 문학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현학적(衒學的) 냄새를 덧붙이기조차 했다. 칼리마코스의 <아이티아>나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가>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서사시는 자연과학 등 본래의 서사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제재를 취급한 것이 많이 출현했는데 아라토스(Aratos)의 <파이노메나(Phainomena)> 등이 바로 그것이다. 비극에서는 별로 취할 점이 없는 것에 반해 희극에서는 이 시대에 '신희극'이라 불리는 단계에 접어들어 에우리피데스의 영향을 크게 받아 아티카의 '고희극'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풍속희극'이 완성되었다. 필레몬, 디피로스(기원전 340?-기원전 289?), 메난드로스 등이 대표적 작가들이다. 당시의 과학적 지리학의 발달과 병행해서 헤카타이오스(그리스의 역사가, 기원전 550?-기원전 475?) 이래의 지지(地誌)의 전통은 이 시대에도 계승되어 스큐락스 및 스큐무노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세계 여행기(世界旅行記)·항해기(航海記) 등이 저술되었다. 역사 서술은 티마이오스(기원전 356?-기원전 260?)의 <시칠리아사(史)>에 의해 대표되는 고증 취미에서 무비판적으로 과거의 역사를 나열한 것이나, 두리스(기원전 340?-기원전 280?)의 <사모스섬 연대기>, 그리고 퓨라르코스와 같이 역사적 진실보다는 극적(劇的)인 효과를 노린 것 등 비과학적인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히에로니무스나 폴리비오스(기원전 201?-기원전 120?)와 같은 뛰어난 역사가도 있었다. 특히 폴리비오스는 로마를 이 시대의 역사의 중심으로 잡고 세계적 시야에 서서 비판적·과학적 역사를 서술하여 그리스·로마를 가릴 것 없이 후세 사가(史家)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가 헬레니즘 문학의 최전성기였으며 그 후 시들기 시작하여 기원전 30년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최대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가 로마에게 함락당하는 것과 함께 헬레니즘 시대는 끝이 났다. 에픽테토스 (55년 - 135년경)은 스토아 학파의 도덕철학자이다. 그의 강의는 제자 아리안에 의해 '강연'과 '엔케이디온'으로 정리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또는 치체로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라티움의 아르피눔(Arpinum) 지방기사(Eques)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아들의 출세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료가 되기 위한 수사학, 웅변술을 스카이볼라 밑에서 익히면서 전설적인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세계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철학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이드로스에서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까지 군복무를 했다. 기원전 88년에서 82년에 걸쳐 키케로와 같은 고향 출신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당시의 원로원의 후원을 받던 술라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 동안 키케로는 아카데미학파의 필론 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히게 된다. 26세에 아버지 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함으로써 로마의 정계에 알려진다. 79년에서 77년 사이에 아테네,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고 로도스 섬을 두루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다.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에 선출된다. 5년 뒤 안찰관에 선출되어 재임 기간 동안 유명한 베레스 반박문을 쓰고, 기원전 66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당시 정계의 실권자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변론을 쓴다. 43세의 나이로 (기원전 63년) 이른바 지방 신출내기("homo novus")로서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재임시 카틸리나 역모 사건을 적발하고 원로원 최종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선포한 뒤, 일당 5명을 붙잡으면서 로마를 위기에서 건졌지만, 이때 재판도 없이 혐의자를 처형한 문제로 나중에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 원로원 체제의 문제점을 공격하는 도구로 그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가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하게 되자 공화국 체제를 고수하는 키케로는 이들 실권자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더군다나 키케로에게 개인적으로 유감이 있는 클로디우스는 이 기회를 틈타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시 카틸리나의 모반 가담자 5명을 불법으로 처형한 사실을 들추어내어 고소를 함으로써 키케로를 약 1년 6개월 동안 (기원전 58년 3월 - 57년 8월) 로마에서 추방시킨다. 귀향 허가를 받아 로마로 돌아와 정계에 거리를 두면서 주로 저작활동을 한다. 이 시기(기원전 55년 - 51년)에 키케로는《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 《법론》("De legibus")등을 썼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하는 갈등 끝에 결국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함으로써 내전이 끝나자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된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한 후 키케로를 사면해 주면서 심지어 로마를 위해 계속 정치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점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일인 독재 정치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면서 주로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낸다. 정치적 불만과 함께 기원전 45년에는 사랑하던 딸 툴리아가 사망함으로써 키케로는 삶의 보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키케로는 공화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으로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필리피카이(philippicae)를 발표하여 일인 독재와 폭력 정치를 규탄한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법적 상속자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과소 평가하여 정치적으로 기만하지만, 곧 제2차 삼두정치에서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실감한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에서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머리와 두 손이 잘려 죽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을 로마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잃지 않고, 글로써 안토니우스를 규탄한 키케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키케로와 공화정에 반발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으나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상당한 친분이 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키케로는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에게 친구와 친지들의 인사 청탁(人事請託) 편지를 자주 쓰곤 했고, 카이사르는 기꺼이 응했다.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자, 카이사르에게 동생을 청탁했다. 그리하여 퀸티우스 시세로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종사하며 갈리아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치가로서 키케로는 역사의 거센 흐름에 좌절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문학자로서 그의 이름은 라틴어 문학사에 길이 남아있다. 이른바 고전 라틴어는 키케로에 의해서 비로소 그 틀이 잡혀졌으며 그의 라틴어 문체는 곧 고전 라틴어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이 4세기 중엽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 밑에 있는 동안 라틴어는 이들 지역에서 이른바 관용어로서 쓰이게 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멸망 후 중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는 계속 문어로서 두루 쓰여졌다. 여기에서 라틴어 문어를 올바로 쓰고 배우는 첫과정에서 언제나 키케로의 변론문을 라틴어의 표본으로 삼았으며 이와 같은 전통은 오늘날까지 라틴어를 배우는 데에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변호문 수사학 철학저서 서한 1983년 1983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함부르크 함부르크( , , )는 독일 북부에 있는 주이며 도시이다. 독일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제2의 대도시이다. 정식 이름은 함부르크 자유 한자 시(; )이다. 알스터 강, 빌레 강과 엘베 강이 흐른다. 북쪽으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남쪽으로는 니더작센주와 접한다. 도시의 기원은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950년 즈음에 엘베 강 유역에 함마부르크(Hammaburg)가 건립되고, 중세에는 한자 동맹(Hansa-Städtebund)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독일 연방 정부 조직 형태상 함부르크는 지방 자치주에 해당한다. 시민은 개신교가 많고, 정치적으로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세력이 강하다. 면적은 755km. 인구는 2004년 현재 174만 명. 실질적 외국인은 적지만, 항구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많다. 기원전과 로마 시대에 켈트 족과 색슨 족(게르만 족의 일파)이 살고 있었으며, 825년 하마부르크 성이 함부르크 지방에 건설된 뒤 번창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또는 프리드리히 1세)는 독일의 왕으로 선출된 뒤 1189년 이 도시에게 무역특권과 사용료 면제, 운항 특권을 인정했다. 중세가 지나고 르네상스 까지, 에스파냐,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빛나는 황금기를 맞이해, 뤼베크 다음으로 한자 동맹에서 중요한 항구 자리를 차지해, 특권을 맘껏 누렸다. 그 후 20세기에는 서독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라는 명예를 얻었고, 21세기 초에도 꾸준히 증권거래소, 은행 등으로 붐비는 도시이다. 함부르크는 때때로 '독일 스포츠의 중심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지역에서 1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축구팀인 함부르크 SV이 있고, 지역 라이벌팀인 FC 장크트 파울리가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는 프랑스의 작가이다. 그는 1871년 7월 10일 파리에서 태어나서 1922년 11월 1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가 쓴 주요 작품으로는 1913년부터 1927년까지 출판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라는 제목의 연작 소설이 있다. 교양있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 허약한 아이였고, 천식으로 인한 심각한 호흡기 문제로 전 생애에 걸쳐 고통받았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귀족들의 살롱에 드나들었고 거기서 예술가들과 작가들을 만나며 사교계의 딜레탕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집안의 재산덕에 프루스트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작가 사후인 1952년에 ≪장 상퇴유≫ (Jean Santeuil)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끝내 미완으로 남은 소설을 1895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1900년 프루스트는 존 러스킨의 발자취를 따라 예술 작품들을 알아가고자 계획하던 소설 집필을 중단하고, 그 대신 베네치아와 파도바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 관한 글을 썼으며 러스킨이 저술한 두 권의 책, ≪아미엥의 성서≫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했다. 1907년부터 프루스트는 1913년부터 사후 1927년까지 7권으로 출판된 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시작했으며 2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1919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922년 11월 18일 기관지염을 치료받지 못한 나머지 사망했다. 프루스트는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매장되었고 거장에게 경의를 표한 많은 이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뒤이은 세대의 작가들은 프루스트를 최정상 작가 반열에 올리며 그를 진정한 문학의 신화로 만들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작품은 작가의 고유한 세계를 그려야 하는 예술의 역할처럼 당시의 시대상과 감성적인 기억의 주된 성찰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작품은 동성애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프루스트적 묘사로 흐릿하게 그려낸, 실패라는 감정과 존재의 허무에 관한, 사랑과 질투의 성찰이기도 하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0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광대한 "인간 희곡"이다. 프루스트는 신랄한 문체로 경이롭고 때로는 냉소적으로 다뤄지는 세계, 유년시절 레오니 숙모의 집에서부터 콩브레, 그리고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대조되는 파리의 살롱들처럼 작품내에서 보여지는 장소들을 재창조했다. 이러한 사회적 무대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익살극의 주인공처럼 묘사한 각양각색의 등장 인물들에 의해 생동감있게 그려진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실존 인물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를 그린 회화이자 "모델 소설"로 탄생했다. 프루스트의 특색은 형성(se faire)의 과정에서 창조의 나선을 따라, 항상 잡을 수 없는 "실재의 전체성"에 도달하기를 추구한, 문장을 길게 늘린 그의 문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외종조부 루이 베유 ()의 집, 파리 16구역 오퇴유 구 라 퐁텐가 96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 집은 팔렸고 헐린 다음 다른 건물이 지어졌으나 지어진 건물도 모차르트 대로 건설로 인해 헐리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장 클레망스 베유()는 부유한 로렌 메츠 출신 유대계 알자스인의 딸이었고, 아들에게 화려하고 심오한 문화를 접하게 해줬다. 그녀는 아들에게 때로는 귀찮게까지 애정을 쏟았다. 그의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 박사()는 외르 에 루아르 일리예 출신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파리 대학 의대 교수였으며 전염병 대책에서 정부에게 자문을 한 대단한 위생학자였다. 마르셀은 1873년 5월 24일 태어난 남동생 로베르가 있었다. 로베르는 후에 외과 의사가 된다. 프루스트의 대부는 예술품 수집가 외젠 뮈티외였다. 1870년 공성과 1871년 파리 코뮌 시절 그를 임신한 어머니가 처했던 궁핍한 생활 탓에 그가 허약하게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파리 코뮌의 혼란으로부터 프루스트의 부모는 오퇴유로 피난간다. 프루스트는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지만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와 유대인인 어머니에게서 결합이라는 가정환경에서 프루스트는 파리 생 루이 당탱 교회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나 종교와 관련하여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자 했다. 그는 허약했고 봄은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아름다운 봄날에 분비되는 꽃가루는 그의 천식을 더 악화시켰다. 아홉 살 때 부모님과 불로뉴 숲을 산책하면서 그는 천식 발작 증세를 호소했고 그의 호흡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최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봄이 올 때 마다 그가 산책할 때 그 어느 때라도 천식 발작이 심하게 일어난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이 프루스트의 전 생애에 걸쳐 도사렸다. 그는 파프 카르팡티에에게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아들인 자크 비제와 훗날 비제의 아내가 되는 제네비에브 알레비가 여기서의 동창생이었다. 카르팡티에는 그녀의 삼촌 집에서 살롱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모였다. 1886년 그녀는 변호사 에밀 스트라우스와 재혼하고 자신의 살롱을 열었는데 프루스트가 그곳의 단골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882년 리세 콩도르세에 입학해서 공부를 계속 해나갔다. 그는 5학년 때 유급했으나 1884년 12월에는 처음으로 우등생 명부에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종종 건강상을 이유로 결석했지만, 소설 장 상티유에서 서술한 것 처럼 빅토르 위고와 뮈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철학 수업에서 알퐁스 다를뤼의 제자였고, 이 무렵 자크 비제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학교에서 문학 잡지를 함께 만들던 페르낭 그레그, 자크 베녜르와 다니엘 알레비 (자크 비제의 사촌)와 교우관계를 쌓기도 했다. 그의 첫사랑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인 외교관의 딸 마리 드 베나르다키였다. 목요일 오후마다 둘은 후에 대통령이 되는 펠릭스 포르의 두 딸, 앙투아네트와 뤼시 펠릭스 포르 고요와 레옹 브륀슈비크, 폴 베나제, 모리스 에르베트와 함께 샹젤리제 공원에서 놀았다. 프루스트는 1887년 마리 드 베나르다키와 절교하게 되고 그의 첫 애정, 어머니를 제외한 타인에게 사랑받고 사랑을 한 첫사랑은 고로 실패했다. 베나르다키는 프루스트가 이후 찾고자 했던 그가 잃어버린 첫 "소녀"(jeune fille)였다. 프루스트의 첫 문학 활동은 리세 고학년 때에 이뤄졌다. 시간이 지나 1892년, 그레그는 콩도르세 동창들과 함께 소규모의 잡지 "향연"(Le Banquet)을 창간했고 프루스트는 이 잡지에 글을 썼다. 그 후 파리의 여러 살롱들을 드나들며 사교계 출세를 하려던 그는 스노비즘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들었다. 이후 그는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인 6살 연상의 뤼시엥 도데와 친분을 쌓았다. 젊음은 훗날의 작가 프루스트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1895년 수업에서 만났다. 서로에게 적어도 애정을 보인 그들의 관계는 장 로렌의 신문 기사에서 밝혀졌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오를레앙의 76 보병연대에서 복무하였고, 거기서 좋은 추억을 쌓았다. 그는 로베르 드 빌리와 친구가 되었다. 파리에서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된 가스통 아르망 드 케야베와 프루스트가 반한 그의 약혼녀 잔 푸케를 알게 된 것도 이 시절이었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 로베르 드 생루와 질베르트를 이들을 모델로 창작했다. 그는 마담 아르망 드 카야베의 살롱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는 끝까지 이 살롱의 단골이었고,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였던 아나톨 프랑스 (베르고트의 모델)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전역 후 사회에 나와서 그는 사립정치학교(École libre des sciences politiques)에서 그가 '박식하다'고 평가한 알베르 소렐과 아나톨 르루아 보리외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외무고시나 국립고문서학교 (École des chartes)에 합격하겠다고 나섰다. 후자에 더 관심을 들인 그는 국회도서관 사서 샤를 그랑장에게 글을 썼고, 먼저 소르본에서 학위를 따기로 결정한다. 소르본에서 프루스트는 사촌의 남편인 앙리 베르그송의 수업을 들었다. 그는 베르그송의 결혼식에서 참석하기도 했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베르그송의 영향은 종종 중요하게 생각되며 프루스트는 그것을 옹호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895년 3월 문학사 학위를 받는다. 1896년 그는 세기말 문체의 시와 산문, 단편 모음집, "즐거움과 나날들"(Les Plaisirs et les Jours)을 출판한다. 이 모음집에는 프루스트와 작곡가 친구 레이날도 안과 함께 살롱에 드나들던 마들렌 르메르의 삽화가 수록되었다. 그는 1894년 봄에 샹송 그리스를 부른 쥘 마스네의 제자이자 레이날도 안의 부인인 르메르와 만났다. 23살의 프루스트와 20살의 레이날도 안은 1894년 여름 샤토 드 레베이옹에서 열린 파티에서 보았다. 책 즐거움과 나날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비평가들은 책에 대해 호된 비판을 가했다. 특히 작가 장 로렌은 가차없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새벽에 총을 들고 결투하겠다고 말했다. 그에 맞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입회자인 화가 장 베로와 함께 똑같이 총 들고 그를 만나러 갔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끝났지만, 어느 누구도 막 등단한 이 작가를 보고 슬퍼하지 않았다. 이 책은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권이 나온 뒤에도 그가 사교계 딜레탕트라는 평을 듣게 했다. 집안의 부는 그에게 쉬운 삶을 보장해줬으며 그를 부르주아와 포부르 생 제르맹과 포부르 생 오노레의 귀족 사회로 구성된 살롱을 자주 드나들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친구 기슈 공작 아르망 드 그라몽의 장모이자 시인의 사촌인 그레퓔레 백작부인, 엘렌 스탕디슈 부인 (결혼 전 성은 페뤼스 데 카르), 바그람 공주 (결혼 전 성은 로트쉴드), 오송빌 백작부인와의 만남처럼 1894년부터 1900년 초 사이에는 그가 귀족적인 살롱에서 소개받은 유명한 로베르 드 몽테스퀴외와의 만남이 있었다. 1895년부터 1899년에 걸쳐서 3인칭 형식의 자서전적인 장편소설 《장 상퇴유(Jean Santeuil, 1952)》를 시도하였으나 미완으로 그쳤다.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하였다(1904, 1906). 후에 《모작과 잡록》(Pastiches et mélanges, 1919)과 《시평집》(1927)에 수록될 평론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활동은 모두 '유일하고 참다운 글'을 쓰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1906년 양친을 여읜 정신적 타격을 넘어서 《생트뵈브에 반하여》(Contre Sainte-Beuve, 1954)을 쓰기 시작하며,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집필로까지 이어진다. 이후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몰두하였고, 총 일곱 권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1913년부터 1927년에 걸쳐 출판된다. 대전 이후 출간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로 1919년 공쿠르상을 받아 일약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걸작으로 20세기 최대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 널리, 그리고 깊이 영향을 끼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Du Côté de chez Swann"), Grasset, 1913년 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서〉("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NRF, 1918년, 공쿠르상 수상작 3권 〈게르망트 쪽〉("Du côté de Guermantes"), NRF, 4권 〈소돔과 고모라〉("Sodome et Gomorrhe"), NRF, 5권 〈갇힌 여자〉("La Prisonnière"), NRF, 1923년 6권 〈사라진 알베르틴〉("Albertine disparue"), NRF, 1925년 7권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 NRF, 1927년 오디세우스 오디세우스(; )는 그리스 신화상의 영웅으로, 이타카(Ithaca)의 영주, 트로이 전쟁의 영웅, 트로이 목마의 고안자이다. 그의 이름을 딴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다. 20년 간의 파란만장한 유랑 끝에 고향에 돌아와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그의 정실한 아내 페넬로페를 넘보던 도당들에게 복수. 오디세우스는 유랑자, 간계와 변장의 화신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성이 보존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영웅 중의 한명이었다. 아테나는 그에게 지혜로운 호의를 베푸는데, 그가 오디세이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절제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배가 난파되어 오기기아 섬의 칼립소와 7년 동안 있게 되자 보다 못한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게 오디세우스의 친구로 변신하여 필로스의 네스토르에게 찾아가는 여행을 도와주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는 변장을 하여 그를 시험한다. 트로이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죽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오디세우스와 장사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가 물망에 올랐다.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사람들은 지혜와 용기를 같이 갖춘 오디세우스가 용맹은 있으나 지혜는 거의 없는 아이아스보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고 아킬레우스의 갑옷은 오디세우스에게 상으로 지급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아이아스는 분개하여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가 짜고 자기를 놀렸다고 생각하고 그 둘을 암살하려 했으나 아테나가 미치게 해 버려서 가축들을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인 줄 알게 해 그 가축들을 죽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더니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함. 그 후 오디세우스가 갑옷을 차지하게됨. 협주곡 협주곡(協奏曲) 또는 콘체르토()는 관현악단이 협주 악기 독주자(soloist)와 함께 연주하는 서양 고전 음악으로, 악곡의 한 형식이다. 오늘날 의미하는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에 합주 협주곡과 함께 발생하였다. 합주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에 국한되지만, 협주곡은 오늘날에도 음악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3악장 형식으로 구성된다. 협주곡의 이탈리아어 표현인 concerto는 중세 라틴어 (; 합동 참여하다, 경연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음악가의 집합 ()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협주곡을 라틴어 concertare에 준거하여 해석한다면, 여러 음성 간의 경연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 뜻이 16세기 이후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 사용된 이래 현대의 협주곡의 일반적 의미로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지칭하는 음성의 개념은 인간의 육성을 포함한 악기의 소리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영어에서는 협주곡을 concerto, 연주회를 concert 라 한다. 독어에서는 둘다 Konzert라 부르지만, 혼동을 굳이 피하려면 협주곡은 Instrumentalkonzert 또는 Solokonzert 라 한다. 협주곡은 대부분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나타 형식을 취한다. 반면 3악장의 소나타 형식을 취하지 않고, 환상곡, 교향곡의 형식을 취하는 곡들도 많다. 바로크 시대에는 두 대 이상의 악기가 동시에 협연을 하는 합주 협주곡이 많이 등장하였다. 합주 협주곡은 같은 악기 또는 종류가 다른 두 개 이상의 악기가 오케스트라나 앙상블과 협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악곡의 형식 면에서 보면 협주곡은 독주악기(또는 독주악기군)와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이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3악장으로 되어 있고,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 제2악장은 리트 형식, 제3악장은 론도 형식을 취하는 것이 상례이다. 한편, 협주곡의 제1악장에서는 처음에 관현악이 2개의 주제를 으뜸조로 제시하고, 계속하여 독주악기가 이것을 반복하나, 그 때에 제2주제는 소나타 형식의 정형에 따라 딸림조 또는 병행조를 취하는 것이 고전적 협주곡의 원칙이다(예외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이 있다). 또 제1악장, 또는 끝악장의 코다 직전에 독주자만이 혼자 연주하는 카덴차가 있다. 이런 것은 독주자의 기교를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화려한 주구(走句)를 많이 써서 자유롭고 즉흥적 스타일로 쓰였다. 이전에는 카덴차는 연주자의 즉흥에 맡겨져 있었으나 베토벤 이후로는 작곡가가 미리 쓴 것에 따라 연주하게 되었다. 시대별로 발전한 협주곡의 양식은 다음과 같다. 바로크 시대는 협주곡이란 양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합주협주곡의 형식을 띠었다. 협주곡의 명칭이 붙은 곡은 16세기 전반 이탈리아에서 맨 처음 나타났으나, 17세기 중엽까지는 일정한 악곡 형식을 갖지 않았으며, 주로 이 말은 기악의 반주가 있는 성악곡을 뜻하였다. 이러한 것으로는 교회에서 연주하는 교회협주곡과 궁정에서 연주되는 실내협주곡이 있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경에 기악만으로 된 협주곡이 생겼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합주협주곡'(콘체르토 그로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현악이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콘체르티노라고 하는 독주자의 그룹(보통 바이올린 2, 첼로 1, 쳄발로 1)과, 리피에노 또는 그로소라고 하는 관현악의 그룹이 서로 협주한다는 형식이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인 코렐리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가운데 가장 먼저 합주 협주곡의 양식을 도입했고, 비발디는 기악 합주 협주곡의 작곡에 능숙해서, 독주 파트의 기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이 양식은 후에 헨델, 바흐가 계승한다).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들은 대부분 쳄발로와 오르간을 위해 쓰인 협주곡이 많고,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협주곡에도 오르간이나 쳄발로가 쓰일 정도로 이 두 악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 시대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독주 협주곡이 발달하게 된 시대이다. 고전파 시대의 협주곡은 보편적으로 오케스트라가 동기를 제시하며 시작하였으나, 이것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처음으로 독주자가 곡의 서두를 맡음으로서 새로운 형식이 탄생되었다. 독주악기로는 피아노, 첼로가 가장 많이 쓰이나, 그 밖에 비올라,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파곳, 오보에, 트럼펫 등도 많이 쓰인다. 이후 이 형식은 리스트, 슈만, 차이콥스키 등이 계승하게 된다. 또한 고전파 시대에 들어 새로 도입된 개념은 카덴차가 있다. 카덴차는 협주곡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독주악기의 즉흥적이고 기교적인 부분을 말한다. 대부분의 카덴차는 악장의 동기를 발전시키면서 진행된다. 고전파 시대의 카덴차는 주로 독주자 자신의 즉흥성에 의지했다고 한다.또한 고전파 음악의 카덴차는 연주자에 따라 생략하기도 한다. 고전파의 협주곡 양식과 형식은 모차르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악기를 독주악기로 써서 50여의 협주곡을 썼다. 그것의 약 반수는 피아노 협주곡이며, 그 밖에는 바이올린 7곡, 호른 4곡, 플루트, 파곳, 오보에, 클라리넷 등의 협주곡이다. 베토벤은 유명한 제5번 협주곡 《황제》를 비롯하여 5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1곡, 바이올린과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3중 협주곡이 하나 있다. 낭만파 시대의 협주곡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조화를 이룬다. 오케스트라가 주제를 연주하면 독주악기는 그 주제를 발전시켜서 연주하는 식이다. 또한 낭만파 시대에 들어와서 발전된 새로운 협주곡의 형식은 연속된 악장을 가진 협주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협주곡은 1악장부터 마지막 악장까지 쉬는 부분없이 계속 이어지는 형식이다. 낭만파의 협주곡은 리스트, 파가니니, 루빈스타인, 차이콥스키에게서 볼 수 있는 독주자로서의 명인적인 기교를 과시하는 경향과 브람스와 같은 교향곡적 경향으로 나뉘었다. 그 밖에 멘델스존, 슈만, 쇼팽, 그리고 세사르 프랑크, 스크랴빈, 거쉰, 에런 코플런드 등에 의한 많은 걸작이 있다. 한편 콘체르티노라든가 콘체르토 시튀크라는 것은 어느 것이나 자유로운 1악장 형식의 소규모의 곡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베버의 《클라리넷과 호른을 위한 콘체르티노》,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토 시튀크》 등이다. 이 시대 에는 협주곡의 형식이 고도로 발전된 시기이다. 이 시대에는 이전의 음악의 양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형식들을 취하는 곡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대표적으로는 협주곡의 소나타 형식을 벗어나 교향곡,환상곡,광시곡 의 형식을 취한 곡들 이 몇몇 있었다는것이다 현대의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의 편성이 기존의 편성과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곡의 경우 독주 바이올린의 음을 돋보이고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파트를 모두 없애버린 곡도 있는가 하면, 어떤 곡은 불협화음의 조화로 듣는이에게 불안한 느낌을 주는 곡들도 많다. 동양의 작곡가들은 동양의 전통적인 음을 서양의 악기로 표현함 으로서 묘한 조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야구 야구(, )는 9~10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방망이와 공을 사용해 겨루는 구기 종목이다. 야구의 목표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타자가 방망이(배트)로 타격해서, 내야의 각 꼭짓점에 놓여 있는 루(壘, Base)를 모두 밟은 뒤 마지막으로 홈, 즉 본루(本壘, Home Plate)를 밟아서 득점하는 것이다. 공격 팀은 9명의 타자가 순서대로 나와서 수비 팀의 투수가 던지는 공을 타격해 다이아몬드의 각 루를 밟은 뒤 홈에 들어와야 하며, 동시에 수비 팀은 공격 팀의 타자, 주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아웃시켜 실점을 막아야 한다. 공격 팀의 타자들은 안타를 쳤을 경우 원하는 루에 멈추거나 홈으로 들어와 득점할 수 있다. 공격 팀이 아웃 세 번을 기록할 경우 수비 팀은 공격 팀으로, 공격 팀은 수비 팀으로 교대된다. 이때 양 팀이 공격과 수비를 한 번씩 끝내는 것을 이닝(Inning, 회)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한 경기는 9개 이닝동안 진행된다. 이닝은 초와 말로 구성되며, 홈 팀이 말에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더 많은 득점을 한 팀이 이기게 된다. 공격과 수비가 완전히 분리된 스포츠이다. 프로 야구, 아마추어 야구, 청소년 야구는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카리브 제도의 여러 국가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열리긴 하지만 북아메리카의 미국이나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나 쿠바 정도를 제외하면 각 나라의 대중들에게 인기가 떨어진다. 야구의 근대적인 틀은 19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만들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야구의 원형이 북미 대륙에 건너 온 영국,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크리켓이나 라운더스와 같이 공과 방망이를 사용하는 구기 경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함께한다. 19세기 후반 야구는 미국의 국기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야구의 명칭의 유래는 1871년 미국에서 일본으로 방문하여 일본 제일고등중학교(現 도쿄 대학 교양학부, 지바 대학 의학부, 지바 대학 약학부)의 외국인 교사로 활동하는 호레이스 윌슨이 'baseball'이라는 운동 종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1894년 제일고등중학교에서 재학 중이던 주만 가나에가 'baseball'을 일본어 '야큐' ()로 번역하였고 이 말이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1890년 (당시 4년 전에 주만 가나에가 야구라고 번역하기 이전) 일본의 문학가 마사오카 시키가 '배터(batter)', '러너(runner)',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 '스트레이트(straight)', '플라이 볼(fly ball)', '쇼트스톱(shortstop)' 등의 미국식 야구 용어를 '타자', '주자', '사구 (四球, 대한민국에선 사구 대신 볼넷으로 사용)', '직구'(대한민국에서는 포심 패스트볼, 속구, 컷 패스트볼로 또 다르게 부름), '플라이'(대한민국에서는 뜬공으로 부름), '단차'(短遮, 이후에는 주만 가나에의 교육에 따라 유격수로 번역함)로 번역하였다. 때때로 야구를 비슷한 경기인 소프트볼(softball)에 대비하여 하드볼(hardball)로 부르기도 한다. 야구의 기원은 확실하게 짚어내기가 힘들다. 1344년에 출간된 프랑스의 한 책에 성직자들이 야구와 흡사한 라 술(La soule)이라는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삽화가 실려있다. 원래 야구는 미국의 애브너 더블데이라는 군인 출신의 인물이 1839년에 쿠퍼스타운에서 창안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직접 야구를 창안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광산 기술자 출신의 애브너 그레이브스의 증언이 있었으나 별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구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한 경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리디아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에 의해 의식이나 오락으로 행해졌다. 이런 경기들은 정해진 규칙없이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다. 이런 여러가지 배트와 공을 이용하는 경기를 통해서 야구는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발전을 통해서 1774년에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구츠무츠가 존 뉴베리에서 출간한 《작고 귀여운 포켓북》(A Little Pretty Pocket-book)이라는 시집에서는 최초로 'Base-ball'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도 했다. 방망이와 공을 이용해 하는 경기는 영국에서 여러 가지 종류로 발전하는데, 영국 동남부에서는 크리켓으로, 남서부에서는 원홀 캣(또는 원 오캣)의 이름으로 발전했으며, 야구와 흡사한 경기인 라운더스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경기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와 두가지 형태로 진화했는데, 뉴욕 주변에서 행해진 타운볼은 각각 9명의 선수로 이루어진 두 팀이 하는 경기로 정비되었다. 루셔스 애덤스등은 야구의 기본적인 규칙을 확립했다. 특히 1845년에는, 미국 뉴욕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규칙을 만들었으며, 이 규칙은 오늘날 현대 야구의 규칙으로 진화하게 된다. 그는 또한 라운더스에서 사용되었던 말랑말랑한 공을 더 작지만 딱딱한 공으로 교체했다. 1953년 6월 3일,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카트라이트가 근대 야구의 발명가임을 인정했다. 카트라이트가 소속된 구단인 뉴욕 니커보커스 팀이 1845년에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역사상 공식적인 첫 경기로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1846년 6월 19일 뉴저지주의 '호보켄'에서, '뉴욕 나인' 이 '니커보커스' 팀을 4이닝 동안 23 대 1로 이긴 경기이다. 1860년대 이미 미국에서는 야구가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으며 선수들은 연봉을 받고 생활하는 프로 선수였으나 아마추어 선수처럼 생활해야 했다. 아마추어 시대는 1871년 3월 17일, 전미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9년, 최초의 프로 야구 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Cincinnati Red Stockings)가 창단되었으며 1875년에는 내셔널 리그(연봉 상한제 있음)가 창설되었다. 1882년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American Association)이 창설되었고 1901년에는 이를 전신으로 하는 아메리칸 리그(연봉이 무제한임)가 창설되어 양대 리그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03년에는 양 리그의 우승 팀간의 승자를 겨루는 월드 시리즈(여기에서 월드(World)는 "월드신문사"의 이름으로써 신문사에서 스폰서를 해주기 때문에 월드시리즈라는 이름이 쓰인다고 한다)가 처음으로 치러졌으며, 1933년에는 올스타전이 처음으로 치러졌다. 이후 많은 제도의 발전이 있었다. 브랜치 리키는 1920년에 대규모의 팜 시스템(Farm System)을 도입했다. 1975년에는 커드 플러드 등 여러 선수들의 희생으로 자유 계약 제도가 도입되었다. 1980년에는 선수협 위원들의 노력으로 연봉 상한선이 폐지되는 등 선수들의 권익이 향상되었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1947년 이전까지 흑인이 선수로 활동하지 못했다. 그 대신 흑인들은 1920년에 설립된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에서 선수로 뛰었고, 1924년에는 최초의 니그로 월드 시리즈가 치러졌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 흑인이 최초로 선수로 뛴 것은 1947년으로, 재키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해 10년 동안 팀에 몸담았으며, 1962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다. 투수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경기에서 타석에 섰다. 1970년대 초반,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 DH) 규칙이 고안되었으며,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1973년부터 이 규칙이 적용되었다. 지명타자 규칙에 따르면 투수가 타석에 서지 않게 되며 지명타자는 타석에만 서면서 수비는 하지 않는다. 내셔널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고, 지금도 투수가 타석에 선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1980년대 초반까지 불법이었던 약물 복용이 흔했고, 이 시기가 되어서야 알려졌다. 또한 여러 선수들이 약물로 인해 사망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선수들이 근육강화제를 사용했으며, 이 때문에 2005년 3월 17일, 미국 의회는 스테로이드 사용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다. 이 때문에 메이저 리그 야구는 2006년부터 약물 복용이 처음 발각되었을 때에는 50경기, 두 번째에는 100경기, 세 번째로 발각이 되면 영구 제명이 된다는 '삼진 아웃' 제도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메이저 리그 야구는 점점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 팀이 미국 동부에서 우주로 많이 옮겨갔으며, 캐나다에서도 1969년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197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리그에 참가했다. 현재는 내셔널 리그 15팀, 아메리칸 리그 15팀으로 팀 수 (목표는 모든 리그 16팀씩 32팀)가 유지가 되고 있으며, 경기 수는 한 시즌 당 162경기로 치러진다. 야구는 미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중 하나이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팬들의 지지에 기반한 야구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 캐나다 야구의 역사는 미국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1877년 프로 리그와 국제 협회에서 두 나라로 이루어진 특색 있는 팀을 만들기도 했었다. 세계적으로 미국과 캐나다가 아닌 다른 공식적인 최초의 야구 리그는 쿠바의 야구 리그이다. 쿠바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 국제 경기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쿠바의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후 야구 리그가 생긴 국가는 다음과 같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국가는 1922년 네덜란드, 1934년 오스트레일리아, 1936년 일본, 1938년 푸에르토리코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야구 리그가 만들어진 국가는 1948년 이탈리아, 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 중 가장 두드러진 나라, 1945년 베네수엘라, 1945년 멕시코, 1951년 도미니카 공화국과 1982년 대한민국, 1990년 중화민국,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순으로 만들어졌다. 2019년 기준으로 세계 야구 소프트볼 연맹에 총 127개국이 가입하고 있다. 현재 야구는 미국, 일본, 대한민국 등의 국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MLB의 겨울 리그 프로그램으로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에 겨울 리그가 존재하고, 멕시코는 MLB 하위 트리플 A에서 리그 참여를 하고있다. MLB 는 푸에르토 리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멕시코 가 참여하는 캐러비언 시리즈를 4년에 한번씩 개최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니카라과 에도 대회가 존재한다. 공식적 첫 야구 리그 였던 쿠바의 야구 리그는 1961년 쿠바 혁명으로 폐지되었다. 한편 2000년 하계 올림픽 이후 야구 종목에서 알루미늄 배트의 사용이 금지된 데다가, 2005년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에 관한 117번째 회의에서 야구, 소프트볼 종목 삭제에 관한 투표가 진행되어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야구, 소프트볼 종목을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2009년 8월 회의에서 2016년 하계 올림픽에도 야구 종목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빅스타 선수가 참여하는 8팀, 짧은 5일 간의 경기 방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1999년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공동 출간한 "한국야구사"에서는 한국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5년으로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P. L. Gillett)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라고 나와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차후 1905년에서 1년 빠른 1904년으로 정정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반도에서 열렸던 최초의 야구 경기는 1896년 4월 23일 경성(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친선경기로 알려져 있다. 그 같은 사실은 서재필이 창간했던 「독립신문」의 영자판인 「THE INDEPENDENT(인디펜던트)」 제9호 1896년 4월 25일치 기사로 확인됐다. 「THE INDEPENDENT(인디펜던트)」 제35호 1896년 6월 25일치 기사에는 그해 6월 23일 오후 3시에 훈련원에서 경기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경기에 미국으로 귀화했던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이름으로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장 2득점을 한 기록도 남아 있다.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터에서 YMCA팀 대 덕어(독일어)학교팀 사이에 경기를 진행했는데 한국인들이 팀을 이루어 최초로 진행한 경기였다.《황성신문》1909년 3월 21일자엔 이러한 〈야구단 운동가〉라는 노래가 소개돼 있을 정도로 야구는 큰 인기를 누렸다: "무쇠 골격 돌 근육 소년 남아야/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나라에/소년의 활동 시대 다달았네 /(후렴) 만인 대적(對敵)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절세 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이 아닌가" 야구 경기는 두 팀이 서로 겨루는데,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두 팀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진행한다. 그리고 공격 팀이 공격을 진행하면서 세 번의 아웃을 기록하면 공격 팀은 수비 팀으로, 수비 팀은 공격 팀으로 바뀐다. 그리고 공수교대가 2번 이루어지는 것을 이닝(inning, 회)이라고 하며, 일반적인 경기는 9이닝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그리고 한 이닝은 초(初, 선공)와 말(末, 후공)로 구성된다. 한 이닝에 두 팀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면서 경기를 진행하는데, 주로 홈팀이 말에 공격하며, 원정팀이 초에 공격한다. 야구 경기의 목표는 경기를 치르면서 상대 팀보다 더 많은 점수(득점)를 얻어 승리하는 것이다. 공격하는 팀의 선수들은 사각형 형태의 내야 다이아몬드 꼭짓점에 있는 네 개의 베이스를 돌면 득점을 할 수 있다. 타자는 홈플레이트옆에서 타격을 하며 누상에 출루하면 반드시 시계반대방향으로 1루, 2루, 3루, 그리고 홈플레이트를 거쳐야 하며, 홈을 밟으면 득점이 된다. 반면 필드에서 수비를 보는 다른 팀은 아웃을 잡고 공격 팀이 점수를 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아웃을 잡힌 선수는 배팅 오더에 따라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공격을 할 수 없다. 세 개의 아웃카운트가 채워지면, 양 팀은 공격과 수비 역할을 교대하는 공수교대를 하며, 경기는 초에서 말로, 말에서 초로 바뀌게 된다. 9이닝동안 경기가 진행되다가 9회가 다 끝나도 점수가 같을 경우에는 연장전을 치러 승부를 내며, 연장전은 주로 12회까지 치러진다. 어린이 야구에서는 9이닝보다 적은 이닝으로 경기가 이루어지는게 보통이다. 야구를 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방망이, 야구공, 글러브, 야구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야구장이 필요하다. 이닝에서, 수비를 할 때 9명의 수비수들은 각자의 수비 위치에 선다. 다이아몬드의 중심의 투수판에 서 있는 선수를 투수라고 하며, 그리고 홈 플레이트 뒤에 앉아 있는 선수를 포수라고 하는데 이 둘을 배터리라고 부른다. 나머지 수비수들은 야수라고 부르는데 야수는 위치에 따라 내야수와 외야수로 분류되며 내야 안에 있는 4명의 수비수들을 내야수라고 한다. 내야수 중 3명은 1, 2, 3루에 서 있는데 이들은 각각 1루수, 2루수, 3루수라고 말하며 각 루와 그 주변을 수비하는 역할을 한다. 나머지 한 명은 유격수로, 2루와 3루 사이를 서면서 그 사이를 수비한다. 이때 유격수와 2루수의 조합을 키스톤 콤비 혹은 키스톤 콤비네이션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의 선수는 외야에 서는데, 이들을 외야수라고 하며, 위치에 따라 좌익수(왼쪽), 중견수(가운데), 우익수(오른쪽)로 구분해서 부른다. 지명타자는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는데, 이는 투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으로 지명타자는 투수 대신 공격을 한다. 경기에서 홈플레이트 옆에 있는 타석에 서 공격을 하려는 선수를 '타자'라고 부르며, 타자는 배트를 잡고 있으며, 투수가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 쪽으로 공을 던지면 타자는 배트로 공을 쳐서 점수를 내려고 한다. 타자가 공을 치고 난 후에 타자는 배트를 놓고 1루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2, 3루, 홈까지 갈 수 있다. 아웃이 된 경우에는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투수는 타자가 베이스에 나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 투수판에서 공을 던지는데, 공을 어디에 던지느냐에 따라 '스트라이크'(strike)와 '볼'(ball)로 구별된다. 타자는 스트라이크가 3개가 되면 아웃되고, 볼이 4개가 되면 1루로 나갈 수 있다. 스트라이크가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타자 또는 주자가 자신의 다음 베이스 (타자의 경우에는 1루) 또는 그 이상에 진루하는 것을 실패할 때, 이를 아웃이라고 한다. 타자 또는 주자가 자신의 다음 베이스 (타자의 경우에는 1루) 또는 그 이상에서 세이프되는 것을 진루라고 한다. 최대 선수 명단 수는 리그 또는 수준에 따라 다르다. 메이저 리그 야구 팀은 선수 명단을 시즌 중 25명까지 등록할 수 있으며 시즌 후반 9월부터 확장 로스터를 통해 40명까지 등록이 가능하고 포스트 시즌 기간에는 다시 25명으로 축소가 된다. 팀의 감독 또는 수석 코치는 선수 명단, 타순, 선발 투수를 정하고, 특히 구원 투수의 경기 중의 등판 시점과 같은 선수교체 등과 같은 팀의 중요한 전술을 구상한다. 감독은 2명 또는 그 이상의 코치들의 도움을 받는다. 코치들은 타격 코치, 야수 코치, 투수 코치, 트레이닝 코치로 전문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기에선 팀이 공격을 할 때 1루 코치와 3루 코치가 경기장에 서 있는데 그들은 파울선의 밖에 정해진 장소에 서서 경기 중에 주자의 방향에 조언하고 경기 중단시에 감독의 지시를 타자와 주자에게 전달한다. 야구 경기에서 심판은 4명인데, 주심, 1루심, 2루심, 3루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주심은 포수 뒤에 서 있는데, 스트라이크 존을 통해서 스트라이크와 볼을 판정한다. 주심은 본루에서 아웃인지 세이프인지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1루심, 2루심, 3루심은 루 근처에서 서 있으며, 아웃인지 세이프인지 판정한다. 또한 타자가 하프 스윙 시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선고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감독 또는 포수는 누심에게 조언을 받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좌우측 선심이 없는 경우 1, 3루심은 타자가 친 공이 외야에서 파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도 한다. 보크나 타임의 선언은 4심이 모두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보통 4명의 심판을 두는데, 올스타전이나 포스트 시즌 경기와 같이 중요한 시합의 경우 외야에 좌측 선심과 우측 선심을 추가하여 6명의 심판을 둔다. 그리고 2008년 8월부터는 비디오 판독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야구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기인데, 공을 처리하는 것은 투구, 타격, 주루, 포구, 생각과 같은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따른 신체의 동작도 손(어깨), 발(다리), 눈, 입, 귀, 머리를 통해서 행해진다. 손과 발은 투구, 타격, 주루, 포구에 필요한 수단이며, 눈은 잘볼 수 있는 수단이다. 또한 야구는 단체스포츠이기 때문에 서로의 기분을 이해하고 동료의 플레이가 쉽게 되도록 서로 협조하는 팀워크가 필요하다. 투구는 투수가 투수판을 밟고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행위를 뜻한다. 투수는 좋은 투구를 위해서는 스피드와 제구가 좋은 공을 던져야 하고, 기본적인 속구 이외에도 커브, 포크볼과 같은 변화구를 던질줄 알아야 한다. 또한 투수는 일반적인 와인드업 포지션과 주자 견제를 위한 세트 포지션을 사용한다. 타격은 타자가 투수가 던진 공을 쳐내는 행위를 뜻한다. 스윙의 각도에 따라서 다운 스윙, 레벨 스윙, 어퍼 스윙으로 나뉜다. 다운 스윙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치는 타법이며, 레벨 스윙은 수평으로 휘두르는 타법으로 가장 이상적이며, 어퍼 스윙은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타법으로 가장 비효율적이다. 주루는 루 상에 나간 주자의 플레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주루는 득점을 위해 홈으로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주루를 위해서는 주루 감각과 도루, 투수의 견제시 대비가 중요하다. 야구 경기에서 팀은 승리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전술을 사용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타자는 좌완 투수에게 강하며, 좌타자는 우완 투수에게 강하다. 만약 상대 팀의 선발 투수가 좌완 투수일 때, 보통 좌타자 대신 우타자를 많이 기용하며, 좌타자는 기용되지 않거나 하위타선에 배치된다. 이런 점 때문에 우완 투수일 때는 좌타석, 좌완 투수일 때는 우타석에 서서 양손을 사용하는 스위치 히터가 생겨났다. 희생 번트는 루 상에 나가 있는 주자의 진루를 목표로 하는 전술으로, 주로 아웃 카운트가 유리한 무사 1루, 무사 2루, 무사 1·2루일 때 시도한다. 스퀴즈 플레이는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번트를 대서 3루 주자가 득점하기 위한 전술이다. 희생 플라이(일명 태그업)은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타자가 뜬공을 쳐 내면, 야수가 뜬공을 잡았을 때 3루주자는 득점하는 전술이다. 도루는 투수가 투구를 하는 사이에 주자가 다음 루로 가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주로 발이 빠른 주자가 시도한다. 히트 앤 런(Hit and run)은 투수가 투구를 하는 사이 주자는 다음 루로 주루하며, 타자는 투수가 던진 공을 무조건 쳐서 최대한 많이 진루하려는 것이다. 런 앤 히트(Run and hit)는 투수가 투구를 하는 사이 주자가 다음 루로 주루하는 것은 같지만, 타자는 투수가 던진 공을 원하면 타격하는 전술이다. 런 앤 히트 작전이 시도됐을 때 타자가 타격하지 않았을 경우 주자의 도루 시도가 된다. 고의사구는 경기의 승부처(클러치)일 때, 잘 치는 타자가 나왔을 경우 그 타자를 볼넷으로 거르고 다음 타자와 상대해 더 큰 실점을 막으려는 전술이다. 루 상에 발이 빠르고 도루 가능성이 높은 주자가 나가있을 경우에는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하나 완전히 빼서 투구를 하는데, 도루를 대비해 주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피치 아웃). 투수가 투구 전 또는 포수가 투구 후에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서 주자가 있는 루의 야수에게 견제구를 던지기도 한다.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내야 땅볼을 홈에 송구하기 위해서, 또는 타자가 번트한 공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야수들이 홈플레이트 쪽으로 이동해 수비를 한다. 수비 위치는 타자의 타격 성향의 따라서 이동될 수 있다. 타자가 장타를 쳤을 때, 외야수는 잡은 공을 베이스에 있는 야수에게 송구하지 않고 보통 2루수 또는 유격수에게 송구를 하는데, 이를 중계 플레이라고 하며, 주자의 득점이나 진루를 방지하는 플레이이다. 전술의 지시는 보통 감독, 코칭스태프, 또는 선수간의 사인으로 전달되는데, 대부분 손짓으로 이루어진다. 사인의 종류에는 플래시 사인, 블록 사인, 키 사인 등이 있다.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9이닝을 기준으로 한 경기에 오가는 사인이 평균 1000여건 정도이다. 경기는 모두 전술대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며, 선수가 혼자서 독단적으로 플레이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발이 빠른 주자들은 덕아웃 에서의 사인 지시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도루를 시도하는데, 이를 '그린라이트'(green light)라고 한다. 야구는 미국의 스포츠 중에서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갖는 스포츠이다. 이러한 독특함이 오랜기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매력이자 미국인의 정신에 강한 연대감을 갖게 하는 큰 요인이다. 또한 많은 미국인들은 야구가 기술과 타이밍 그리고 열정, 전략의 최상의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였던 모리스 라파엘 코언은 야구를 국민적 종교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 점에서, 야구는 그의 사촌격인 크리켓과 유사한데, 많은 영연방 국가에서 크리켓과 그것과 관련된 문화는 미국 문화에서의 야구의 역할과 비슷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다. 농구, 아이스하키, 미식축구, 그리고 축구는 모두 경기 시간이 정해져 있고, 보통 상대 팀에 직접적으로 저항해서 경쟁하는 것보다 정해져 있는 시간에서 공격에서 많은 시간을 차지한 팀에 의해 끝난다. 이와 반대로 야구는 경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팀은 마지막 타자가 나가기 전까지는 이길 수 없고 반격은 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다. 비록 단체 종목과 반대되는 개인 종목들 중에서 경기 시간제한이 없어서 미국의 전문직들에게 인기가 많은 다른 스포츠로는 테니스와 골프가 있다. 최근 수십 년간, 관찰자들은 매년 야구 경기를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꾸준히 증가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들어 프로 야구의 게임 길이를 비판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게임 시간은 전형적으로 1시간 반 정도였다(1시간 반으로 정해졌다). 1920년대에는 평균 2시간 미만으로 변한 것이 1960년대에는 결국 2시간 38분으로 늘어났다. 1975년에는 평균 2시간 25분으로 줄어 들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2003년 시즌 종료 직후 조사한 결과 평균 2시간 46분대가 되는 것으로 밝혀져 경기 시간이 더욱 길어지게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경기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하프 이닝(half inning; 공수교대시간) 사이의 TV 광고, 늘어나는 반칙과 투구 인터벌, 그리고 느린 경기 흐름 때문이었다. 결국 메이저 리그는 하프 이닝 사이의 쉬는 시간의 최대 시간을 정하는 반면 심판이 더욱 엄격하게 스트라이크 존과 시간 규칙을 선수들이 지키게 강요하도록 교육했다. 2008년, 일본의 프로 야구는 2007년부터 과거 10년간의 평균 경기 시간이었던 3시간 18분의 6%(교토 의정서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에서 따온 것이다)인 12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제한 시간이 없는 특징 때문에 야구계 일각에서는 승부가 연장으로 이어질 시에 빠르게 승부를 낼 수 있는 규칙으로서 이른바 승부치기를 도입하는 것이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승부치기 제도가 실시된 바 있으나, 승부치기 제도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프로 야구 리그에서는 아직 승부치기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공식적인 규칙에 명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루(Base) 상에 주자가 없을 경우 투수는 12초 안에 투구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그 투구는 '볼(Ball)'로 판정이 된다는 경기 촉진룰의 적용은 매우 드물고 아주 만약의 상황에만 시행 된다. 그러나 2010년도 프로야구에서는 이 12초룰을 적용키로 하여 투수에 유리한 룰이 아니냐며 타자들이 반발하고 있는 추세다. 심판은 또한 주자가 있을 경우에도 투수의 투구 지연 행위를 볼(Ball)로 판정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는데 이 규칙 또한 매우 드물고 만약의 상황에만 시행된다. 공식 규칙 중에는 또한 주심이 타자에게 타격행위가 끝나지 않았을 경우 타자석을 벗어나지 않도록 요청할 수 있는 규칙이 있다. 그 이외의 다른 규칙으로는 '규칙위반을 하는지 주시하라'가 있다. 야구는 근본적으로 팀 스포츠이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가졌으며 높은 연봉을 받는 두, 세 명 정도의 선수를 보유할 정도로 재정이 좋은 지역 연고 구단이라 하더라도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이 반드시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여전히 선수 개인들은 강한 압박과 시험에 놓이게 된다. 투수는 반드시 훌륭한 투구를 해야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시합에 질 위험이 크고, 타자는 극히 짧은 순간에 어떤 구질인지, 스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감독과 코치가 어떤 작전을 수행할지를 선수들에게 사인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투수가 투구하는 것을, 타자가 타격하는 것을 도와 줄 수는 없다. 타자가 직선타구를 치게 되면, 최종 수비자인 외야수들은 볼을 잡아야 할지, 바운드 볼로 처리해야 할지를 혼자서 결정한다. 야구의 역사에서는 영웅적 대접을 받는 선수와 비난을 받는 선수들이 많다 - 시합의 승부처(클러치)에서 한 선수가 적시 안타를 치거나 또는 공을 잡아 플라이 아웃 시킬 수도 있지만, 또는 그 반대로 예상치 못한 삼진 아웃을 당하거나 수비에서 실책을 해서 모두에게 뚜렷이 각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야구에서 모든 선수들이 주자로 뛸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야구에서는 단거리 달리기가 매우 중요하다. 굳이 주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포지션에서 뛰어난 단거리 달리기 능력이 요구된다. 단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능력이야말로 야구의 기본기이다. 야구 규칙에 따르면 경기장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많은 스포츠 중에서 혹은 그보다 휠씬 더, 야구에서의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야구 기록은 미국 프로 야구인 메이저 리그의 태동과 함께 유지되어 왔으며 생각컨대 이전보다 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단장, 스카우터, 감독 그리고 선수들은 자신이 속한 팀의 승리를 위한 다양한 전략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록을 연구한다. 야구에서의 기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스포츠들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운동 경기들에서의 플레이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결과를 보여주지만, 야구에서의 플레이는 제한된 결과만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세대의 야구팬은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야구 기록에 대해 알고 있으며 또한 그 내용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다. 이 외에 다른 기록으로는 장타율, 출루율 등이 있다. 이 외에 투구 기록으로는 WHIP와 승리/패배 등이 있다. 미국 야구 연구 협회(The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SABR)는 야구 선수의 성과와 팀 기여도를 보다 더 잘 측정하고 상대적 가치에 관한 좀 더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 혁신적인 통계 수치를 개발해왔다('세이버매트릭스'란 용어는 학문의 분야와 고안된 특정 통계수치를 의미한다). 몇몇 세이버매트릭스 신봉자들이 야구계의 주류로 편입함에 따라 '세이버매트릭스'의 통계기록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특정 상황에서 좀 더 세밀한 통계수치는 더욱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좌완 투수의 공을 잘 치는 타자의 경우 감독은 왼손 투수를 상대하기 위해 그 선수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득점상황에서 더 잘 치는 타자들이 나왔을 경우 상대팀 감독은 득점권 타율이 낮은 타자와 승부하기 위해 그 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려고 할 것이다. 다른 통계 기록들도 있는데, 타자의 경우 타수, 안타수, 장타수 그리고 타점이 있고, 투수의 경우는 투구 이닝수, 9이닝 당 삼진수, 볼넷, 투구 수 등이 있다. 국제 야구 경기를 주관하는 세계 야구 소프트볼 연맹은 2013년 국제 야구 연맹과 국제 소프트볼 연맹의 통합으로 출범되었으며, 127개국이 가맹하고 있다. 그리고 대륙 별로도 연맹이 조직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소속되어 있다. 세계의 주요 야구 대회에는 야구 월드컵, 대륙간컵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대회들은 아마추어 선수들만 참가하고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는 참여하지 않는다. 올림픽 야구 또한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들은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축구 잔치인 월드컵과 달리 마땅한 국제대항전 야구대회가 없는 실정이다. 유니버시아드 야구,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유스 베이스볼 월드 챔피언십은 대학, 청소년을 위한 대회이다. 여자 야구 대회로는 여자 야구 월드컵이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은 야구의 열기 확대를 위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들도 참가하는 프로 야구 대회인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2006년에 개최했지만 메이저 리그의 스타 선수들은 대체로 참가하지 않으면서 대회의 권위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2008년에 열린 후 그 이후로는 4년마다 열릴 예정이다. 각 대륙별 대회는 다음과 같다. 야구가 대중화되면서, 야구인과 야구 팀의 숫자도 함께 늘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야구 팀간 경기인 리그 경기도 대중화되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프로 리그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세계 야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프로 야구 리그는 미국의 메이저 리그로, 내셔널 리그 15팀, 아메리칸 리그 15팀, 총 30개의 팀으로 각각 서부, 중부, 동부 지구로 나뉘어 있다. 메이저 리그 밑으로는 마이너 리그에 트리플 A, 독립 트리플 A, 더블 A, 클래스 A 어드밴스드, 클래스 A, 클래스 A 쇼트 시즌, 루키 어드밴스드, 루키등의 하위 리그들이 각 연고지마다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메이저 리그와는 별개로 독립리그들이 북중미권에 여럿 있다. 일본 프로 야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출범한 리그로, 현재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양대 리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센트럴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고 퍼시픽 리그에는 지명타자 제도가 있다. 미국의 마이너 리그처럼, 일본도 2군 리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여러 독립 리그도 존재한다. 1982년 세계에서 3번째로 프로 리그가 출범했으며, 2015년 시즌부터는 KBO 리그라는 명칭이 공식 제정되었다. 주관 기구는 KBO이다. 2019년 현재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두산 베어스, KIA 타이거즈, 키움 히어로즈,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 NC 다이노스, kt 위즈의 10개 팀으로 리그가 진행 중이다. KBO 리그도 미국의 마이너 리그처럼 KBO 퓨처스리그라는 명칭으로 2군 리그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으며, 퓨처스 리그에는 상무 야구단과 경찰 야구단 2개 팀이 추가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 두 팀은 군 입대 선수들만 소속되어 있다. 또한 KBO 리그의 키움 히어로즈는 고양 히어로즈로, NC 다이노스는 창원 다이노스라는 별도의 팀 명칭을 퓨처스리그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별도의 독립리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고양 원더스가 있었고, 현재는 연천 미라클이 있다. 대만 프로 야구는 중화 직업봉구 대연맹의 주관으로 개최되며, 1990년부터 리그 경기가 시작되었다. 대만 리그의 경우, 잇달은 승부 조작 사건과 모기업의 경영난 문제로 참가 팀 수가 자주 변화하였으며, 2015년 현재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중신슝디 엘리펀츠, EDA 라이노스, Lamigo 몽키스 4개 팀이 참여하고 있다. 한동안 타이완 메이저 리그도 함께 개최되었으나, 현재는 중화 직업봉구 대연맹에 흡수되었다. 1986년 중국야구연맹이 창설되었고 2002년 4팀이 참가한 중국야구리그가 탄생되었다. 2005년, 2009년에 각각 한 팀씩 늘어나기 시작 해 확장을 이어갔으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 당하고 2009년 일본이 스폰서에서 철수하면서 위기를 맞게되어 결국 2012년부터 2년동안 리그가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부동산 재벌 헝다그룹이 스폰서로 참여하면서 리그가 재개 되었고 상금규모도 확대되었다. 또한 중국정부는 2025년까지 지도자 6000명, 심판 등 야구관련 전문인력 1만 명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또한 지금 야구장 규모는 3000~4000석정도인데 3년 내에 여러 곳에 1만2000석 규모 구장을 건설 하며 구단 수는 20개까지 늘릴 예정이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체코, 스페인, 오스트리아등 이러한 국가들은 세미프로리그 이며 그 외에도 아마리그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들이 존재한다. 오스트레일리아,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캐나다 등에도 세미 프로리그가 있다. 쿠바는 공산 국가 특유상 프로 리그는 없지만 아마추어 국제대회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보인다. 야구 리그는 난이도에 따라, 예를 들어서 아마추어, 프로에 따라서, 또는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서 리그가 다르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야구 규칙에 보다 더 쉬운 규칙을 적용하고 더 작은 구장에서 경기를 치르며, 코치나 기계로부터 보다 더 쉬운 투구를 한다. 또한 아마추어, 논-프로도 공식 야구 규칙에서 변형된 규칙을 사용한다. 대한민국, 일본 등지에서는 전문 선수가 아니더라도 동호인들이 취미로 자체적인 야구 리그를 조직하여 주말 등을 이용하여 소규모 야구장 등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야구 경기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것을 동호인 야구 또는 사회인 야구라고 부른다. 동호인 야구단과 리그가 형성되는 구심점은 지역, 직업, 직장, 공유하는 야구 이외의 관심사 등이 있다.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는 영문으로 표현되는 웹 브라우저의 주소창에 키워드를 입력하여 해당 웹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이다. 인터넷 키워드는 도메인 주소에 비해 짧고 편리하며 기억하기 쉬운 장점이 있으나 국제 표준이 정해지지 않아 다수의 민간 기업들에 의해 사설 서비스 방식으로 운영되는 단점이 있다. 인터넷 키워드를 한글로 표시한 것을 한글 인터넷 주소라고 한다. 인터넷은 4자리 숫자로 구성된 IP 주소로 운영된다. 그러나 사람은 숫자를 기억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보다 편하고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제정한 것이 도메인이다. 도메인은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하므로 전 세계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다. 이 도메인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생겨난 서비스이다. 현재 표준으로 인정받은 다국어 도메인이 나오기 전 통용되던 방식이다. 현재 표준으로 지정된 다국어 도메인과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점(.)으로 구분되는 계층구조가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위키백과'를 들어 표현한다면 다국어 도메인으로는 '위키백과.org' 또는 '위키백과.한국'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로는 '위키백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는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운영된다. 일반적으로 DNS에 주소 대신 이러한 키워드가 전송될 경우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브라우저는 "없는 사이트"라는 오류를 보여주거나 자신들이 운영하는 검색 사이트의 검색 결과(인터넷 익스플로러 6의 경우 msn) 등을 보여준다. 이때 DNS 서비스 업체와 제휴를 맺어 "없는 사이트"라는 오류를 일으키지 않고 자신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키워드와 매칭된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한다. 주소창에 일반적인 도메인 형식이 아닌 키워드 형식의 단어가 입력된 경우 자동으로 플러그인이 자신들의 도메인 키워드 서비스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서비스는 표준화된 서비스가 아니므로 브라우저와 ISP, DNS 환경, 플러그인 설치 여부 등에 의하여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사이트 운영자가 이러한 인터넷 키워드를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이용자의 접속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6까지는 DNS 후킹 방식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익스플로러 7부터는 다국어 도메인을 제외하고 이러한 키워드 형식이 주소창에 입력되었을 때 DNS에 키워드를 보내지 않고 사용자가 지정한 검색 사이트로 키워드를 보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터넷 키워드 서비스 업체는 플러그인을 추가 배포하는 것으로 해결하였으나 이는 DNS 후킹 방식에 비해 이용자 수를 대폭 하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위에서 밝힌 인터넷 익스플로러 사례와 같이 다국어 도메인을 제외하고 이러한 키워드 형식이 주소창에 입력되었을 때 DNS에 키워드를 보내지 않고 사용자가 지정한 검색 사이트로 키워드를 보낸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키워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 중 가장 큰 업체는 넷피아와 디지털네임즈가 있고, 그외 다수의 플러그인 후킹 방식의 업체들이 난립하고 있다. 넷피아는 플러그인 배포와 별도로 ISP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티브로드, 온세텔레콤과 제휴를 맺어 DNS 후킹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디지털네임즈는 플러그인 후킹 방식을 주력으로 KT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 두 업체는 특허와 ISP 계약에 관해 상호 비방과 소송전을 다수 벌인 바 있다. 속담 속담(俗談)은 예로부터 한 민족 혹은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말하여져서 굳어진 어구로 전해지는 말이다. 격언(格言)이나 잠언(箴言)과 유사하다. 속담은 그 속담이 통용되는 공동체의 의식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에 언어학이나 문화인류학 등에서 연구 대상으로 많이 삼고 있다. 문학 작품에도 많이 등장한다. 바이오스 바이오스()는 운영 체제 중 가장 기본적인 컴퓨터의 입출력을 처리하는 소프트웨어이다. 사용자가 컴퓨터를 켜면 시작되는 프로그램으로 주변 장치와 컴퓨터 운영 체제 사이의 데이터의 흐름을 관리한다. 펌웨어(firmware)의 한 종류로서 IBM호환 컴퓨터의 경우에 전원이 공급되면 시작되는 부팅 절차에서 하드웨어 초기화를 수행하고, 운영체제나 응용 프로그램에게 런타임 서비스(컴퓨터 프로그램의 실행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바이오스 펌웨어는 PC에 내장되어 있어서 전원이 인가되면 실행이 시작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다. 바이오스라는 이름은 1975년도에 사용된 CP/M 운영체제의 Basic Input/Output System 에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IBM의 소유였으나 많은 회사들이 원본 프로그램을 분석(리버스 엔지니어링)하여 호환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현대 PC에서 바이오스는 하드웨어 부품을 초기화하고 검사하는 역할, 부트로더 또는 대용량 저장장치에 저장된 운영체제를 RAM으로 읽어오는 기능을 수행한다. 넓은 의미로 컴퓨터에 탑재된 프로그램 중에서 하드웨어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입출력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정의에선 IBM-PC 호환 기종에 탑재된 것을 말하며, 보통 이 뜻으로 쓰인다. 바이오스는 컴퓨터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중간 형태를 가지는 펌웨어의 일종으로, 대부분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제어하고 하드웨어에 의해 변경되거나 생성된 정보를 소프트웨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등 인간의 신경망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바이오스(BIOS, Basic Input/Output System)라는 용어는 게리 킬달이 발명하였으며, 1975년 CP/M 운영 체제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하드웨어와 직접 연결되는 부팅 시간 동안 불러들이는, 기기에 특화된 CP/M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CP/M 기기는 일반적으로 ROM에 하나의 부트 로더만 있었다.) 바이오스를 저장하는 매체로 초기에는 롬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정보화의 발전 속도가 증가되고 새로운 기기나 매체의 발매 주기가 짧아짐에 따라 현재의 플래시 메모리가 바이오스의 주된 저장 매체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를 이용한 편리함은 1990년대 후반에 바이오스를 손상시키는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수많은 컴퓨터를 무력화시키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CIH 바이러스를 들 수 있다. (다만 이 바이러스는 윈도 NT 계열 이후의 운영 체제에서는 동작하지 않으므로 현대에는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전까지 바이오스는 롬에 담겨 컴퓨터에 미리 맞춰진 형태로 제공되었다. 롬 라이터(ROM Writer)라고 불리는 기록 장치 없이는 바이오스의 내용을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바이오스의 저장매체로 기존의 마스크 롬이나 이피롬이 아닌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한 제품이 일반화되었는데, 이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새로운 장치나 기기를 지원하기 위해 별도의 기록 장치 없이 PC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해 바이오스의 내용을 간편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오스의 내용을 갱신할 때 정전 등을 비롯하여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기록이 정상적으로 되지 못하면, 그 컴퓨터는 시동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바이오스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이어주는 신경망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그 내용이 손상되면 BIOS 설정 화면을 띄울 수도 없다. 이렇게 손상된 바이오스를 복구하는 방법은 바이오스가 탑재된 플래시 메모리를 교환하는 방법 밖에 없다. 어댑터 카드의 펌웨어를 시동 과정에서 실행하기 위해 BIOS 는 POST 과정 중에 메모리를 검사해서 실행할 펌웨어를 찾는다. 0xC0000h ~ 0xF0000h 의 메모리 영역을 2킬로바이트 단위로 나누어서 각각의 첫 2바이트를 읽는데, 만약 2바이트의 값이 0xAA55h 일 경우 실행해야 하는 펌웨어이므로 4번째 바이트로 넘어가서 펌웨어의 코드를 실행한다. 이전에는 응용 소프트웨어가 주변 기기를 제어할 때 입출력 포트를 직접 만질 것 없이 바이오스가 제공하는 서브루틴을 불러 제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역할을 운영 체제가 대신 수행하여 응용 프로그램은 바이오스를 사용하지 않고, 운영 체제가 준비한 API 등을 거쳐 바이오스가 제공하는 기능을 사용하게 되었다. BIOS (=메인보드의 펌웨어)는 컴퓨터의 기본적인 하드웨어 장치들 (키보드, 플로피 디스크, 하드디스크) 에 접근해서 제어할 수 있다. 다만 여러가지 제약사항이 있으며, 일부 플러그인 어댑터들(SCSI, NIC, 비디오 등)의 경우 BIOS 대신 독자적인 펌웨어를 장치에 포함시켜 그 장치용 펌웨어가 해당 장치를 제어하도록 한다. 이렇게 BIOS 에서 호출하는 펌웨어를 옵션 롬 이라고 부른다. 신학 신학(神學, )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신, The Divine, The God) 그 자체를 정경이나 이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연구하거나 신과 관련된 교리와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서방 기독교에서 쓰이는 신학이라는 낱말은 테오스(, )에 로고스 (, )가 결합된 단어이다. 한국어에서 특별한 수식어 없이 신학이라는 낱말을 쓸 때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을 가리킨다. 단어 의미로는 종교적 초월자로서 신 개념이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서 다루는 신에 관한 학문을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종교로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시크교, 바하이교 등이 있다. 신학은 신을 뜻하는 "神(theo)"와 학문을 뜻하는 "學(logy)"의 합성어로서 용어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연구이며, 좁은 의미로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연구이며 경외이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2-3세기부터 학문으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하여, 중세시대에 유럽인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신과 관련된 일체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기독교 신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나, 대개 기독교 신학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학문체계에서의 신학 역시 흔히 기독교 신학을 가리킨다. 교파에 따라 개신교 신학, 로마 가톨릭 신학, 정교회 신학, 성공회 신학 등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은 좀더 세밀하게 분류가 된다.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기독교 상담학 등으로 나뉜다. 유대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전문 학문 기관보다는 유대교 공동체 중심으로 유대교 신학의 발달이 이루어져 왔다. 유대교 신학이 기독교 신학이나 이슬람 신학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 대응될 만한 유대교 신학은 주로 할라카와 미드라쉬에 대한 랍비들의 논의와 주석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 기독교의 신학에 견줄 만한 학문적 논의를 가리키는 용어는 "칼람"(Kalam)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 칼람은 기독교에서 신학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그 역할이 작은 편이다. 일부 이슬람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발달에 특기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신학자 (기독교) 도메인 네임 도메인 네임(, )은 넓은 의미로는 네트워크상에서 컴퓨터를 식별하는 호스트명을 가리키며, 좁은 의미에서는 도메인 레지스트리에게서 등록된 이름을 의미한다. 이를 통틀어서 ‘웹 주소’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를 서술한다. 등록된 도메인 네임은 보통 호스트명의 일부분으로, DNS 상에서 해당 호스트명 및 그 하위의 호스트명들은 일반적으로 해당 등록자에게 권한이 주어진다. 도메인 레지스트리는 도메인 네임의 종류에 따라 국제 인터넷 주소자원 관리기관(ICANN)과 해당 국가 기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일반 사용자들의 도메인 등록을 위임받는 역할을 한다. 이런 도메인 네임은 숫자로 된 IP 주소에 비해 외우기 쉬우며, 여러 개의 IP 주소가 한 도메인에 대응되거나 (서브 도메인) 여러 도메인이 하나의 IP 주소로 대응되는 (가상 호스트) 것도 가능하다. 도메인 네임이 항상 호스트명인 것은 아니지만, 호스트명이 아닌 도메인 네임은 대부분 아무 곳에도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메인 레지스트리들은 호스트명과 같이 도메인 네임에 들어갈 수 있는 문자를 ASCII에서 0부터 9까지, a부터 z까지, 그리고 하이픈으로 등록을 제한하고 있다. 국제화 도메인(IDN)은 임의의 유니코드 문자열을 올바른 호스트명으로 변환하여 이 제한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제한적으로 밑줄(_)로 시작하는 도메인은 SRV 레코드와 같이 올바른 호스트명이 아니어야 하는 도메인 네임을 위해서 쓰이기도 한다. 도메인 네임은 그 최상위 도메인이 암시하는 관리 기관 및 등록 요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gTLD의 등록, 관리, 분쟁 및 법적인 문제 등 도메인 네임에 관한 모든 행정적인 절차 및 기술적인 관리는 ICANN에서 결정 및 시행한다. gTLD 중 가장 잘 알려진 .com, .net, .org는 본래 네트워크 솔루션즈에서 독점하고 있었으나 1999년 이후로는 경쟁체제로 전환되었다. .int는 본래 IANA가 인터넷의 하부 구조를 위해 사용하던 gTLD였으나, .arpa로 대체되고 현재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등의 국제 조약 기구 및 비정부조직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악상어목 악상어목은 상어의 한 목으로 백상아리와 청상아리가 이 목에 속한다. 돌묵상어 돌묵상어("Cetorhinus maximus")는 고래상어 다음으로 큰 상어로 동중국해 · 일본 · 캘리포니아 등지에 분포하는 상어이다. 갑각류와 플랑크톤을 먹으며 4km/h로 순항 할 수 있다. 몸길이는 보통 10m가 넘는 길이로 자라며 몸무게는 20 t에 육박한다. 사람에게 확인된 최대 크기의 돌묵상어의 길이는 15m였다. 온순한 성질로 사람에게 전혀 해를 주지 않는다. 가끔 일광욕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돌묵상어를 basking shark(일광욕하는 상어)라고 부른다. 돌묵상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플랑크톤을 새파라는 빗 모양 기관으로 걸러서 먹는데 새파는 겨울이 되면 떨어져 돌묵상어가 겨울잠을 잔다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상어의 간에는 풍부한 기름이 들어있기 때문에, 상어기름을 얻기 위해 남획되고 있다. 이러한 남획과 낮은 번식률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돌묵상어는 입을 벌려 들어오는 동물성플랑크톤, 작은 물고기, 갑각류등을 먹는데, 시간당 들어오는 물의 양은 2,000톤에 달한다. 큰입상어나 고래상어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먹이를 찾아 나서지는 않지만 후각을 이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로지 아가미를 통해 물을 빼낼 뿐이며, 먹이를 빨아들이지는 않는다. 헤라 헤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여신으로 주신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이다. 결혼과 가정의 여신으로 숭배받았다. 로마 신화에서는 유피테르의 반려자인 유노에 해당된다. 헤라는 올림포스 신화가 자리잡기 전부터 모신(母神)으로 숭배받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달리 헤라라는 이름의 어원은 그리스어나 인도유럽어에 속하지 않는 고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모스 섬과 아르고스에는 기원전 8세기경에 지어진 헤라의 신전이 있다. 이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 헤라는 종종 공작이 끄는 수레에 타거나 손에 여성과 풍요의 상징인 석류나 양귀비 씨앗을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헤라의 아버지는 크로노스이며 어머니는 레아이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전쟁 신 아레스, 청춘의 여신 헤베,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튀이아를 낳았으며, 제우스가 여성과의 동침 없이 혼자서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낳자 자신도 남성과의 동침 없이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낳았다. 문제는 제우스와 헤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보다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자녀들이 훨씬 우수하다는 점에 있다. 전쟁 신 아레스는 매양 아테나에게 당하고 살기만 하며, 청춘의 여신 헤베는 헤라클레스에게 제우스의 민며느리가 되는 방식으로 시집갔다. 반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와 디오니소스, 아프로디테는 올림포스 12신으로서 헤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 특히 이 중에서 아프로디테는 헤라나 아테네보다도 더한 미모를 인정받았다. 더군다나 올림포스 12신 중 과반수가 제우스의 내연녀(데메테르)이거나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헤라클레스는 전무후무한 역사(力士)로 후에 신이 되었으며, 페르세우스 역시 메두사를 처치하는 무훈을 세웠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는 헤라의 질투를 즐겨 다루었다. 제우스는 여러 인간 여인들이나 님프와 관계를 맺었고, 그 때마다 헤라는 남편의 애인들에게 복수를 했다. 헤라는 제우스와 그의 애인들 사이에 난 사생아들에게도 강한 증오심을 보였다. 디오뉘소스의 어머니 세멜레, 큰곰자리 전설의 칼리스토, 에우로페, 그리고 영웅 헤라클레스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술 기술(技術)은 과학, 공학, 기능과 관련하여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나 산업에서 다루는 '기술'의 의미는 사전의 첫 번째 의미를 말하며, 이는 영어의 테크놀로지에 대응한다. 두 번째 의미는 영어의 'technique' (기법)에 대응한다. 첫 번째 의미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가리키고자 할 때는 '과학기술', 또는 '과기'(科技)라는 용어를 쓴다. 과학은 자연의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공학은 물건 등을 만들기 위해 과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연구 학문이다. 과학기술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도구나 기계, 재료 등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과정 등에 대한 일련의 지식 체계나 학문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각종 산업 발달의 토대가 된다. 18세기 이전에는 기술(technique)은 과학의 도움보다도, 장인들의 경험에 의하여 느릿느릿 진화했다.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을 기술혁신이라고 하며 기술혁신은 산업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된 결과 산업혁명이 촉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 들어 급격한 정보화의 진행으로 정보 통신 산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으며 통신, 인터넷 등을 주요 과학기술로 취급한다. 경제학에서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연구하며 다음과 같은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생활과 환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사회에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현대 철학과 사회학, 생태학, 정치학, 환경운동 등에서는 기술에 의한 여러 영향을 다루고 있다. 아래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주요 이념이나 논점이다. 철학이란, 대상을 다시 한번 더 문제삼아 되돌아 보는 '반성적 사고'를 이른다. 기술은 본래, '어떠한 목적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화와 함께 기술(technique)과 과학이 결합함으로써 과학기술(technology)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대해 사람들은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소리가 모여 기술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형성하였으며, 이는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 드디어 기술철학회가 창립되었고,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적 사고( 기술철학 )가 철학의 분과 학문으로 독립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우, 에서 기술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기술이란 「특허법」 등 관련 법률에 따라 등록 또는 출원(出願)된 특허, 실용신안(實用新案), 디자인, 반도체집적회로의 배치설계 및 소프트웨어 등 지식재산, 이들이 집적된 자본재, 또한 이에 관한 정보, 이전 및 사업화가 가능한 기술적ㆍ과학적 또는 산업적 노하우를 말한다. 미적분학 미적분학(微積分學, )은 수학의 한 분야로 극한, 함수, 미분, 적분, 무한급수를 다루는 학문이다. 다른 명칭은 "무한소 해석학"이다. 미적분학은 속도, 가속도 같은 일정하게 변하는 양들의 값을 구한다. 그 값들은 곡선의 기울기로 해석한다. 또 넓이, 부피, 길이 등은 곡선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곡선"은 직선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극한을 구하는 과정을 유도하는 무한 과정 또는 궁극점(일반적으로 구하는 값)에 접근해 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2가지 방법은 수학적 해석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기하학이 모양(Shape)에 중심을 둔 학문이고 대수학이 연산과 그 활용에 대한 학문이라면, 미적분학은 변화에 중점을 둔 학문이다. 미적분학은 크게 2개의 분야로 분류되는데, 미분과 적분이 바로 그것이다. 미분은 국소적인 변화를 다루는 분야이고, 적분은 국소적인 양의 집적을 다루는 분야이다. 미분은 특정 함수의 어떤 지점에서의 접선, 혹은 접평면을 구하는 연산이다. 다시 말하면, 미분은 원래는 복잡한 함수를 선형근사해서 다루기 쉬운 형태로 바꾸어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분은 선형사상이 된다.(단, 다변수 함수의 미분을 선형사상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 확립됐다.) 미분방정식은 이런 사고의 자연스러운 연장 선상에 있다. 적분은 기하학적으로 보면, 곡선 또는 곡면과 좌표축으로 둘러싸인 영역의 면적을 구하는 것에 해당된다.(단, 이때는 절댓값 기호를 씌워서 곡선 또는 곡면을 x축위로 꺾어올렸을때의 상태이다.)(실제 적분의 기하학적인 의미는 y좌표, 즉 길이들의 합이다.) 그러나 적분의 의미는 오랫동안 확실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적분의 확실한 정의를 내린 사람은 베른하르트 리만이 최초이다. 리만이 생각한 적분을 정식화한 것을 리만 적분이라고 한다. 미분과 적분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지만,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변수가 하나인 경우, 하나가 나머지의 역연산이 된다. 이를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라고 부른다. 적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고대에서부터 시작됐지만 이 시대의 방법들은 수학적으로 엄밀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수학 파피루스(Moscow mathematical papyrus)에서 적분의 목표 중 하나인 부피계산법들이 나와있으나 이것들은 방법으로서 설명이 부족하고 몇 가지는 틀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가 극한의 개념과 비슷한 문제의 철저 검토법을 사용했고 아르키메데스는 이 방법을 발전시킨 발견적 교수법이라는 적분과 비슷한 방법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유휘가 3세기에 원의 넓이를 구하기 위해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와 같은 방법을 발명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인도에서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졌다. 14세기 인도 수학자 마다바(Mādhava of Sañgamāgrama)와 케랄라 학파(Kerala school of astronomy and mathematics)가 테일러 급수, 무한급수의 근사법, 수렴에 대한 적분판정법, 미분의 초기형태, 비선형 방정식 풀이를 위한 방법, 곡선 아래부분이 차지하는 넓이가 적분값과 같다는 이론 등 미적분을 위한 많은 요소들을 기술하였다. 페르마는 무한소 오차항이 있어도 등호가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adequality 개념을 소개했다. 무한소 미적분과 유한차 미적분의 결합은 두 번째 미적분학 기본정리가 증명되고 2년이 지나서 존 월리스(John Wallis), 아이작 배로(Issac Barrow)와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에 의해 1670년경에 완성됐다. 아이작 뉴턴은 그가 수리물리학 문제를 풀 때 사용했던 이상한 형태의 곱의 미분법, 연쇄법칙, 고계도 미분계수의 개념, 테일러 급수와 해석함수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가 출판물로 낼 때는 그 시대의 수학적 표현방법에 맞게 그의 아이디어와 동등한 의미를 지니는 기하적 표현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적어냈다. 뉴턴은 그의 책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거론한 행성의 운동, 회전하는 유체 표면의 모양, 지구의 편평도, 사이클로이드에서 미끄러지는 물체의 운동 같은 문제들을 푸는 데 미적분을 사용했다. 뉴턴은 미적분과 함께 함수의 급수를 실수의 범위로 확장했고 테일러 급수의 원칙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뤄낸 모든 발견을 출판하지는 않았고 이 시대에 무한소를 이용한 방법은 여전히 평이 좋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뉴턴이 자신을 표절했다고 고소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참된 무한소 미적분으로 체계화됐다. 뉴턴은 그를 표절자로 여겼지만, 현재는 그도 독립적인 미적분의 발명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무한소를 다루는 규칙들을 명확하게 정리했고 2계도 이상의 미분을 가능하도록 해줬으며 곱의 미분법과 연계법칙을 미분 적분 형태로 모두 만들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모두 미적분의 발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둘의 미적분의 성격은 다르다. 뉴턴은 미적분을 물리학에서 활용한 첫 번째 사람으로,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사용하는 미적분 표기법의 대부분을 만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또 라이프니츠는 뉴턴과는 달리 형식을 중시해서 알맞은 표현법을 만들어내는데 며칠을 쓰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미적분에서 규정한 기본적인 사항들로는 미분과 적분의 법칙들, 2계도 이상에서의 미분, 다항 함수 급수의 근사에 대한 개념들이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그의 결과를 발표하고 뉴턴이 그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자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사람을 미적분학의 발명가로 인정을 해야 하느냐는 주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뉴턴이 최초로 결과를 이끌어 낸 사람이지만 출판을 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출판하지 않고 왕립학회에서 공유한 노트들에서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 논란 때문에 영국 수학자들과 유럽 대륙의 수학자들이 오랫동안 갈라지게 되고 이는 영국 수학에 큰 손실을 초래했다. 현재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논문에 대한 면밀한 조사 덕분에 그들이 독립적으로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 밝혀졌다. 라이프니츠는 적분에서부터 뉴턴은 미분에서부터 시작해서 결과를 도출해냈다. 이 시대 이후에 수많은 수학자들이 미적분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첫 번째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업적 중 하나로 마리아 아녜시가 1748년에 쓴 무한과 유한 분석이 있다. 미적분학에서 기초(foundations)는 정확하고 엄밀한 공리와 정의들의 발전을 말한다. 초기 미적분학에서 사용한 무한소는 엄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많은 작가들에게 특히 미셸 롤과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에게 맹렬하게 비난 받았다. 버클리는 그가 1734년에 출판한 《해석학자》()라는 책에서 무한소를 ‘사라진 값들의 유령’()이라고 묘사했다. 미적분학의 엄밀한 기초를 도출해내는 일은 그 세기 동안 뉴턴과 라이프니츠를 따르는 수학자들이 제공했고 오늘날까지도 연구활동이 있는 분야다. 콜린 매클로린(Colin Maclaurin)을 포함한 다수의 수학자들이 무한소의 사용이 정당하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150년이 지나서야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에 의해서 증명됐고 무한소의 의미가 극히 작은 값이라는 관념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 이것이 미분과 적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코시의 필기에서 무한소의 형태로 적혀진 연속의 정의와 극한의 (ε-δ) 정의의 원형 등의 기초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코시의 업적에서 바이어슈트라스는 극한의 정의를 공식화 시키고 무한소의 개념을 없애버린다. 바이어슈트라스의 작업에 따라서 미적분학은 무한소가 아닌 극한에 기초하는 것이 일반적이게 됐다. 베른하르트 리만은 바이어슈트라스의 개념을 사용해서 적분의 정확한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발견의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아이디어들은 유클리드 공간과 복소평면에서 일반화됐다. 현대 수학에서 미적분학의 기초는 미적분학의 정리에 대한 완전한 정의와 증명들을 포함하는 실해석 분야에 포함되어 있고 미적분학의 범위는 엄청나게 확대됐다. 앙리 르베그는 측도론을 만들어서 거의 모든Pathological function에서 적분을 가능하게 했다. 로랑 슈바르츠는 어떤 함수도 미분시킬 수 있는 분포 이론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극한의 개념을 미적분학의 기초로 두지만 극한이 미적분학의 기초에 대한 유일한 접근법은 아니다. 에이브러햄 로빈슨(Abraham Robinson)의 비표준해석학이 대안책이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로빈슨의 접근법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사용했던 개념인 무한소와 무한수로 실수체계를 늘린 체계를 사용한다. 그 결과로 나온 수를 초실수라고 부른다. 초실수는 미적분학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라이프니츠의 방식처럼 이끌어 낼 수 있다. 함수 formula_1(x) 란 집합 formula_2안에 있는 원소 formula_3가 집합 formula_4에 있는 정확히 한 원소, formula_5에 대응되는 규칙을 말한다. 여기서 집합 formula_2는 정의역이라하고 formula_4는 공역이라고 한다. 또한 정의역에 있는 임의의 수를 나타내는 기호를 독립변수, 공역에 있는 원소를 나타내는 기호를 종속변수라고 한다. 함수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말로 설명하는 방법, 표를 이용하는 방법, 그래프를 이용하는 방법, 대수학적 식으로 표현하는 방법 등이 있다. formula_8는 formula_3가 formula_10로 다가갈 때 formula_11가 formula_12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극한에는 좌극한과 우극한이 존재하는데 좌극한이란 formula_13가 formula_10보다 작은 곳에서 formula_10로 다가갈 때 formula_11가 다가가는 값을 의미하고 우극한은 반대로 formula_17가 formula_18보다 큰 곳에서 다가간다. 좌극한과 우극한은 기호로 각각 formula_19, formula_20라고 표시한다. 극한값이 formula_12라는 것과 좌극한과 우극한 모두 formula_12라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이다.formula_23는 formula_3가 formula_10로 다가갈 때 formula_26는 무한히 커진다는 것이고 formula_27는 무한히 작아진다는 것이다. 극한의 더 정확한 수학적 정의는 입실론-델타 논법이다. formula_8는 모든 양수 formula_29에 대해 만약 formula_30 면 formula_31인 formula_32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기호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극한들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46가 상수이고 formula_47 와 formula_48가 존재할 때 다음 성질들을 만족한다. formula_69에서 정의된 함수 formula_26가 다음의 조건을 만족할 때 formula_26는 formula_68인 점에서 연속이라고 한다. (formula_73) 함수 formula_26가 정의역에 존재하는 모든 formula_3에서 연속일 때, formula_26는 연속함수라고 한다. 정의역 이외의 formula_3에 대해서 불연속이더라도, 함수의 연속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formula_84은 formula_85 이외의 모든 점에서 연속이다. formula_85에서는 함숫값이 정의되지 않아 불연속이지만, formula_87은 정의역에 있지 않는 수이므로 함수 formula_26는 연속함수이다. 함수 f(x)가 모든 정의역에서 연속이면, 정의역의 모든점 formula_89에 대해서 ε-δ 논법에 의해 모든 ε>0에 대해 0<|formula_90|<δ를 만족하는 x가 |formula_91|<ε가 되게하는 δ>0이 존재한다. 만약 모든 formula_89에 대해서 δ가 같다면, 즉, δ가 formula_89에 변화에 따르지 않고 오직 ε의 변화에만 따른다면, 이 함수 f(x)가 균등연속(Uniformly continuous)이라고 한다. 함수 f(x)가 formula_94에서 불연속이지만 formula_95를 적절히 정했을 때 연속이 될 수 있다면, formula_26는 formula_94에서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formula_98라면, formula_85인 점에서 함숫값이 정의되지 않아 불연속이다. 그러나 formula_100로 극한값이 존재하므로 만약 formula_101로 함숫값을 정하면 불연속성이 제거될 수 있다. 따라서 함수 formula_26는 x=0인 점에서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다. 그래프 formula_103에서 점formula_104을 통과하는 접선은 기울기 formula_105를 가진다. 여기서 formula_106라고 하면 formula_107가 된다. 함수 formula_5의 도함수 formula_109란 formula_110를 의미한다. 도함수 표현법에는 formula_111 등이 있다. 도함수를 한번 더 미분한 것을 이계도함수라고 한다. 이계도함수의 표현법에는 formula_112 등이 있다.이계도함수를 또 한번 더 미분한 것을 삼차도함수라고 하고 이것은 formula_113 등으로 표현한다. formula_114를 formula_115번 미분한 것은 formula_116 등으로 표현한다. 함수 formula_1가 formula_18에서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formula_119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간formula_120에서 미분가능하다는 말은 구간 내의 모든점에서 미분가능하다는 것이다. 함수 formula_114가 점 formula_18에서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formula_18에서 연속하다는 것이다. 미분 불가능한 경우에는 좌미분계수formula_124와 우미분계수formula_125값이 다르거나 불연속하거나 수직 접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직접선이란 formula_126일 때 formula_10에서 수직 접선을 가진다. formula_46는 상수이고 formula_58는 미분 가능할 때 다음을 만족한다. formula_137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삼각함수의 미분을 할 수 있다. 삼각함수들의 미분은 다음과 같다. formula_144가 formula_3에서 미분가능하고 formula_1가 formula_147에서 미분가능하면 formula_148는 formula_13에서 미분가능하고 formula_150로 표현된다. 이것을 다른방식으로 표현하면 formula_151와 formula_152가 미분가능한 함수면 formula_153이다. 일반적으로 함수는 formula_154로 표현된다. 하지만 formula_155 나 formula_156와 같이 표현되는 음함수도 존재한다. 이런 함수를 미분할 때는 이 함수를 formula_103형태로 바꿀 필요 없이 음함수 미분법을 사용하면 된다. 이 방법은 양변을 모두 formula_3에 대하여 미분을 한 뒤, formula_159에 대한 방정식을 풀면 된다. 예를 들어 formula_155는 양변을 formula_3로 미분하면 formula_162가 돼서 formula_163가 된다. 지수함수 formula_164를 정의를 이용해 미분하면 formula_165이다. 이때 formula_166이므로 formula_167이다. 이때 formula_168이 되는 formula_18를 formula_170라고 한다. 즉, formula_171이고 formula_172이다.formula_173일 때, formula_174라고 정의한다. 이때 formula_10를 밑이라고 하는데 밑이 formula_170 인 로그를 자연로그라고하고 formula_177라고 표현한다. 즉, formula_178이다. formula_179를 formula_180임을 이용하여 미분하면 formula_181임을 알 수 있다. 이 자연로그의 미분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밑을 가지는 지수, 로그 함수의 미분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formula_184에 대하여 formula_185일 때 함수 formula_186를 구간 formula_187에서의 formula_1의 역도함수(부정적분)라고 한다. 여기서 F가 f의 부정적분이면 일반적으로 F+C도 f의 부정적분이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함수 f가 구간 [a,b]에서 정의된 연속함수 일 때, 구간 [a,b]를 동일한 n개의 폭 formula_189으로 분할하여, 이 n개의 부분구간들의 끝점들을 formula_190이라하자. formula_191에 속하도록 표본점 formula_192을 잡자. 이 때 formula_193가 존재하면, 그 값을 a로부터 b까지의 f의 정적분formula_194이라고 하고, 함수 f는 구간 [a,b]에서 적분 가능하다고 한다. 이 때 표본점은 각구간의 끝점 또는 중점으로 잡는다. 일반적으로 함수f가 구간 [a,b]에서 유한개의 불연속점을 가지면 f가 구간[a,b]에서 적분 가능하다. 1. formula_1952. formula_196 (단, formula_46는 임의의 실수)3. formula_1984. formula_199 5. formula_200인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02이면 formula_203이다. 6. formula_200인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06이면 formula_207이다. 7. formula_200인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10이면 formula_211이다. 8. formula_212이면 formula_213 함수 formula_1가 구간 formula_215에서 연속이면, formula_216, formula_200로 정의된 함수 formula_218는 formula_215에서 연속이고 formula_220에서 미분가능하며, formula_221이다. 함수 formula_1가 닫힌 구간 formula_215에서 연속이면, formula_224이다. 여기에서 formula_186는 formula_1의 임의의 역도함수, 즉 formula_227이다. 함수 formula_152가 미분 가능하고, 그 치역이 구간 I이며 함수 f가 구간 I에서 연속이면, formula_229이다. 정적분에 대해 변형시키면, 함수 g'이 [a,b]에서 연속이고, 함수 f가 formula_152의 치역에서 연속이면, formula_231이다. 두 미분가능한 연속 함수 formula_26와 formula_147에 대해서, 적분 구간이 formula_234 일 때, 부분적분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우변의 첫째 항은 다음을 나타낸다. 이 법칙은 다음과 같이 미분의 곱셈 법칙과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로 증명할 수 있다. 부정적분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또는, 짧게 줄여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formula_239이고, formula_240이다. [a,b]안의 모든 x에 대하여 f,g가 연속이고, formula_26≥formula_147일 때, 곡선formula_154,formula_244와 직선 formula_68,formula_246로 둘러싸인 영역의 넓이 A는 formula_247로 정의된다. S를 formula_68와 formula_246에 놓인 입체도형이라 하자. x를 지나고 x축에 수직인 평면 P에 있는 S의 절단면의 넓이가 A(x)이고, A가 연속이라면 S의 부피(V)는 formula_250이다. 회전체의 경우, 위의 방법으로는 부피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회전체의 부피의 경우, 아래와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곡선 formula_154와 formula_68및 formula_246로 둘러싸인 영역을 formula_254축을 둘레로 회전시킬때 생기는 회전체의 부피는 다음과 같다. 급수(級數)란 수학에서 수열들의 각 항의 합을 의미한다. 즉, 급수란 여러 수들의 합연산으로 표현된다. 급수의 예로는 아래와 같은 등차수열의 합이 있다. 1 + 2 + 3 + 4 + 5 + ... + 99 + 100 급수에 더해지는 각 항들이 어떤 공식이나 알고리즘에 의해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난수들로 이루어진 급수도 생각할 수 있다. 급수는 유한 급수와 무한급수로 나눌 수 있다. 유한 급수의 경우 기초적인 대수학의 법칙들만 사용하여도 그 값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무한급수는 그 정확한 합을 구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의 여러 정리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등차수열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급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formula_256 등비수열의 합으로 이루어진 급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formula_257 formula_258 무한급수는 위의 formula_259, 즉 급수의 부분합으로 이루어지는 수열의 극한값으로 생각한다. formula_115이 무한대로 갈 때, 그 극한이 유한한 값을 갖는다면 이 급수가 수렴한다고 한다. 만약 이 값이 무한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급수는 발산한다고 한다. 무한급수의 수렴을 판정하는데는 비교판정법, 적분판정법, 일반항판정법, 멱근판정법, 비율판정법등이있다. 주어진 수열 formula_261와 변수 formula_3에 대해서 formula_263를 수열 a로부터 얻은 멱급수라고 부른다. formula_264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때, 이 수열의 멱급수는 formula_265일 때 수렴한다. 원점 formula_87을 포함하는 구간I에 대해서 정의된 n번 미분가능한 함수 f:I→R 에 대하여formula_267 formula_1의 formula_115차 근사 다항식이라하고,formula_270 를 formula_115차 테일러 나머지 항이라고 하자.그리고 원점 근방에서 정의된 무한번 미분 가능한 함수 formula_26에 대하여 멱급수 formula_273 를 formula_1의 테일러 급수라고 한다. 테일러 급수가 원래 함수에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formula_275 이다. 임학 임학(林學, Forestry)은 우리가 어떻게 산을 가꾸고 산에서 나는 여러 물자들을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연구하는 실용학문의 하나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산림에 관해 연구가 시작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가 않는다. 19세기의 산업혁명 이후 인구의 증가와 도시문명의 발달에 따라 집을 짓고 종이의 대량 생산에 따른 목재 수요의 급격한 증가는 산림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새로운 시각에서 평가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산림의 보호와 육성은 국가적 관심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중엽 이후에는 특히 메마른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 숲과 전원에서 휴양을 하고 여가를 보내고자 하는 도시인들의 관심은 잘 가꾸어진 산림의 또다른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푸른 산을 가꾸는 일을 범국민적 운동으로서 삼고 있다. 이와 밀접한 혹은 산림학의 토대가 되는 분야로는 생물학의 여러 분과, 생물환경학, 동물학, 식물학 등을 우선으로 하여 지리학, 지질학, 기상학, 경영학, 재정학, 법학 (산림법) 등을 손꼽을 수 있겠다. 미술 '미술'(美術)은 시각적(視覺的) 방법 또는 조형적(造形的)인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종류라고 말할 수가 있다. 미술이라는 용어는 미(美)를 재현 또는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러 재주, 또는 기예를 뜻한다. 미술은 주로 사용하는 도구와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장르를 나눈다. 판화를 포함한 회화, 조각이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미술의 장르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그 영역이 한층 넓어져, 물리적인 재료를 특정장소에 설치하여 미술가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설치 예술, 백남준 등 다양한 작가들이 새로운 뉴미디어 매체를 통해 선보이는 비디오 아트, 마르쉘 뒤샹 이후 등장한, 개념자체가 결과물이 되는 개념미술, 특정 풍경이나 장소를 대상으로 하는 장소특정적 대지미술 등이 새로이 이 영역에 추가되었다. 이 외에도 새로운 매체와 소재가 발견됨에 따라 미술의 영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미술이란 무엇이냐는 것을 알기 위하여 기초 지식인 여러 가지 사항이 다음에 이야기되어야만 된다. 기초 지식이란 미술 작품의 성립, 표현과 환경, 표현과 사람, 표현과 연령, 표현의 태도·양식 등에 걸친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것을 미술이라는 말로 표현했으나 용어 자체는 그때그때마다 달리 사용되었다. 우선 중국 당(唐)시대에는 공예(工藝)라고 불렀고, 명·청(明·淸) 시대에는 서화(書畵)라는 말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미술이라는 말이 들어오기까지는 역시 서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서예와 그림 외의 미술 즉 공예(工藝)나 건축이나 조각 같은 것은 지금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미술이 아니고 단순한 공예품·건축물·조각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1960년 전후로 해서 서양의 미학 사상(美學思想)이 들어와 미술의 영토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800년대에 서양 사람이 생각해 낸 미술을 둘로 구분, 순수 미술(純粹美術)과 응용 미술(應用美術)로 하여 그림·조각은 순수 미술, 공예·건축은 응용 미술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전후해서 미술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자 미술이라는 말이 새로 생긴 미술적 현상을 가리키기에는 너무나 좁고 구식이기에 새로운 용어가 요구되어, 시각 예술(視覺藝術)·공간 예술(空間藝術) 또는 조형 미술(造形美術)과 같은 말이 생기고 사용되게 되었다. 시각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이 사람의 시각 작용을 매개로 하는 예술이기에 그렇게 불렀고 공간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의 성립이 그 공간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 예술(時間藝術:음악·문학 등)과 대치되는 예술로 규정되었고, 조형 예술은 미술이 유형적(有形的)인 조형성을 기본 방법으로 하고 있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 새로운 용어들은 과학(科學)의 발달과 생활의 변모에 따라 생기는 새로운 미술현상, 예를 들면 사진(寫眞)이라든가 디자인이라든가, 꽃꽂이 같은 것도 아울러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미 미술이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오늘의 유형 예술의 전부를 가리키기에는 좁은 의미의 내용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술의 표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표현을 중심으로 표현 이전의 사상과 표현 이후의 작품이 있어 셋이 올바르게 갖추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가령 풍경화(風景畵)를 그릴 때 늘 자기가 좋다고 보아 온 어느 자연 풍경이 있어 그것을 한번 그려보려는 마음이 우선 있어야 하고, 다음 어떻게 그리겠다는 표현의 방법이 마련되어 구체적으로 캔버스에다 유채로 그려 풍경화 작품을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표현 이전의 아이디어냐,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능력 즉 표현이냐는 것은 늘 예술상의 문제이지만, 모든 예술의 성립이 표현에서 비롯하므로 미술에서도 역시 표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이 표현인 것과 같이 미술도 표현이다. 미술 표현에 있어서는 재료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미술 재료는 미술 표현의 매개체일 뿐더러 그 존립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미술 발전의 밑바닥에는 늘 재료의 발달이 뒤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술은 본질적인 미학적 근거도 갖고 있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적응하는 시대성도 또한 중요하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미술은 리얼리티의 구현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모든 문화적 성과를 종합해서 미술이 성립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미술은 자연 과학과 별개의 것이라고 하지만 어느 시대이건 가장 위대한 미술은 그 시대의 미술과 자연 과학의 일치에서 오는 종합적인 존재라는 것을 미술사(美術史)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행동에는 그 행동을 일으키는 어떤 동인(動因)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미적 조형 활동(美的造形活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화가가 풍경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그 감동을 캔버스 위에 표현한다고 하는 것도 동인일 것이며, 또한 건축가가 건축 의뢰를 받고 그 설계를 시작한다는 것도 하나의 동인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작가에게 있어서 극히 행복한 경우일지 모르나 그것만이 순수한 동인으로서 예술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것이라고 조급하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작가가 그 주제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정열을 쏟을 수 있었는가, 또한 표현의 기술을 통해서 얼마만큼 자신의 미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주문을 받은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예술상의 타락은 작가가 자신의 예술적 양심에 반해서 대중이나 주문자나 혹은 비평가 등에 영합하려고 표현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렘브란트는 단체 초상화를 평판적(平板的)인 기념 촬영으로 만들지 않았다. 야경(夜警)은 그의 예술적 의도에서 인물들을 광선의 교착 속에 두어 생활상의 분위기를 살렸는데, 이것은 주문자의 불평을 샀으나 지금은 네덜란드의 국보가 되어 있다. 우선 표현의 주제가 결정되면 작가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미지를 갖는다. 이미지라는 말은 심상(心像), 즉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상(像)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미지가 풍부하면 표현도 풍부한 것이 되어, 조형(造形) 표현으로서는 극히 중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 이미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를 조사해 보거나 몇 가지 시작(試作)을 만들어 본다. 이 단계에 있어서 아이디어(idea)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이디어라는 말은 고안이라든가 착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작가의 창조력과 아이디어에 의해서 이미지를 구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안이 나온다. 이 구체적인 안을 드림 디자인(dream design)이라고 한다.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연 과학이나 물리학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 맹렬한 창조 정신에 의해서 건축 설계를 하거나 비행기의 고안을 하거나 기타 여러 가지 기계를 고안했다. 우선 몇 가지 안이 나오면 그 가운데 무엇이 가장 좋은가가 결정되어 설계도라든가 밑그림이 만들어진다. 디자이너나 건축 설계사의 일은 대체적으로 거기까지로서 다음은 시공자에게 넘어가는데 인쇄되는 것은 인쇄상의, 또 건축가는 시공의 재료나 시공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며, 또한 시행 중에도 계획대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가 어떤가 감독된다.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밀리는 주문의 뒤를 댈 수가 없어서 많은 제자들을 두어, 자신의 데생 위에 분담하여 그리도록 하고 최후로 자기 자신이 손을 대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방대한 시스티나 성당의 대벽화를 거의 혼자서 목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까지 그려댔다. 이처럼 건축이나 대량 생산되는 공예품 따위의 특별한 것 이외는 대체적으로 마지막까지 작자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림 같은 것은 그림물감을 칠하는 방법이나 붓 하나하나에 작자의 마음이 담기고 제작 의도가 충분히 살려져서 작품과 작자 사이에 한 치의 간격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마음속에 그려진 이미지가 이렇게 해서 하나의 창작품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많은 고생이 거듭되고 또한 제작에의 정열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산 피에트로 성당의 조영은 1세기 반에 걸쳐 전개된 대사업으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이었다. 브라만테, 라파엘로, 페루치에 이어 72세의 미켈란젤로가 그 설계를 인계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 대궁륭이 완성되고 베르니니가 내진의 대천개와 광장을 설계해서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형성된 미술 작품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작자의 의도나 작품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는 작자의 마음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통하기 때문이리라. 에스프리라는 말은 그 표현에 작자의 신경이 통하고 있어 개성적(個性的)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시혼(詩魂)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고 혹은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성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A라는 어느 한 인간을 생각해 보자. A에게는 머리도 있고 몸뚱이도 있으며 손발도 있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없어지면 A도 물론 소멸해 버리긴 한다. 그러나 A는 단지 머리와 몸뚱이·손발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무엇인가가 머리나 몸뚱이나 손발을 움직이게 해서 A다운 행동을 시킴으로써 머리나 몸뚱이나 손발을 특징지어 A라는 사람의 인상을 그와 접촉하는 사람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인간이 머리나 몸뚱이나 손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조형작품(造形作品)도 제각기 모양을 갖고 빛깔을 가지며, 재료를 갖고 또한 제각기 구성을 갖는다. 그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작품을 밖에서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양상을 특징지어주고 작품을 안에서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시대에, 어떤 지방에 살고 있던 어느 인간(작자)의 개성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작자의 인격이라고 해도 좋고, 또 인간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품은 그 가운데 작자의 피가 맥박치며 흐르고 있어서 모양이나 색깔 따위를 특징지어 주고 있는 생명체이다. 따라서 조형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은 안에서 지탱하고 있는 작자 자신의 인간성을 이해함과 동시에 작품을 밖에서 지탱하고 있는 조형성(造形性)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만으로써는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좋거나 싫거나 관계 없이 자기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조형표현이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도 유형 무형의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작품으로 이루어져 생겨나온 것이다. 표현에 영향을 미친 환경은 우선 시대의 차이이며, 다음에 작품을 낳은 풍토(風土)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인류 문화의 발달 정도가 달라지고, 정치나 종교나 생활양식 등이 달라지게 되므로 그들이 조형표현에도 영향을 끼쳐서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조형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시대와 미술이 어떻게 관계해서 변화하였는지의 개략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인류 최초의 회화(繪畵) 유품은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라고 하는데 아직 농경의 기술을 모르고 동굴 속에서 살면서 수렵으로 생활하던 인류는 손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동굴 벽에, 마치 어린이가 돌이나 나뭇조각을 가지고 지면(地面)이나 벽에 낙서를 하듯이 자기들 생활에 가장 가까운 동물의 가지가지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처럼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표현은 동물을 사랑하기도 하고 동물을 두려워하기도 하여, 동물의 생태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조형은 매우 솔직한 표현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강한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강조되었고 어린이의 표현처럼 심리적인 밸런스가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지나치다고 생각되리만큼 장식이 많은 것은 인간이 가진 장식본능의 발로이기도 하겠다. 이윽고 농경이 시작됨에 따라 살기 위한 집이 세워지게 되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옹기그릇 따위가 만들어지게 되어 여러 가지 조형활동이 성하게 된다. 집들이 모여서 마을이 생기고, 마을이 커지면 마을이 나뉘어 민족의 이동이 일어나고, 또한 지구의 지배자가 나와 나라와 통치자가 생긴다. 그리되면 풍토나 산물이나 또는 왕의 지배 면적의 대소 등에 따라서 문화의 발달에도 지속(遲速)의 차가 생겨 조형 활동에도 다양성을 띠게 된다. 가령 이집트왕은 태양의 아들(파라오)이라 불렸듯이, 산·강·새 따위 자연물이나 자연현상이 신격화되어, 왕이나 귀족의 궁전이나 분묘(墳墓)가 중심이 된 여러 가지 조형활동이 이룩된다. 이집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믿어서 왕이 죽으면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아름답게 장식된 관(棺)에 넣고, 분묘 벽에는 왕 생전의 공적을 표시하는 그림이 그려졌고, 왕의 상(像)을 문앞에 세웠으며, 실내에는 왕의 일용품이 놓였고 종자(從者)의 상 등이 만들어졌다. 자연신의 신앙은 마침내 신화(神話)를 낳았고 전설이나 신화가 사람들의 생활감정까지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우수한 대리석의 산출과 그 민족이 지닌 고유한 성이라 할 자유와 미를 사랑하는 심정에서, 신(神)을 인간이 가장 이상(理想)으로 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眞)과 미가 일치되어 여러 가지 학문이 발전하였으며, 먼 후세까지의 규범이 될 만한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자연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교나 불교 등의 종교가 생기자, 이윽고 그들 종교를 중심으로 한 조형미술이 발달한다. 우상 숭배를 부정하는 회교에서는 여기저기에 특징 있는 교회를 세워, 그것을 이른바 아라비아 무늬로 장식하였으나 그림이나 조각은 그곳에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의 건조와 함께 그리스도나 성모, 또는 사도들에 관한 많은 조각(그림)이 만들어졌다. 또한 비잔틴 사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창문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붙여졌다. 종교개혁과 함께 일어난 르네상스는 유럽 미술의 가장 화려한 황금시대의 한 시기를 만들어 내었다.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각지에 불교미술을 남기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종교에 의하여 발달한 조형미술은 각지의 왕조나 권역자의 위엄을 나타내는 듯한 미술로 발전하거나, 또는 네덜란드 등과 같이 서민생활이나 생활주변의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하여 점차 근대화(近代化)가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는 왕·왕자·왕비·공주 등의 초상(肖像)이 걸리거나 하였고, 또한 18세기가 되면 바티칸 궁전에는 장식 과잉이라고도 생각될 그러한 가구 등이 놓였다. 19세기로 접어들어 과학이 장족의 진보를 보이게 되자 조형미술도 급속하게 근대화로의 징조를 보인다. 빛의 과학적인 리얼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상파(印象派)에서 후기인상파로, 더욱이 파리파(派)에 이르러 더욱 더 표현은 개성적인 성격이 짙어지고, 또한 표현을 위한 데포르메(變形)가 행해진다. 그리고 종래의 종교나 문학적인 정조(情操)에 예속된 느낌이 있었던 조형활동은 그 조형성이 존중되어 추상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이 시대와 더불어 조형미술도 변천해 왔으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속담처럼, 그 진전 도상에서 이따금 과거로의 복귀(復歸)현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것 그대로는 아니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의하여 순화(醇化)된 새로운 것의 탄생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술은 전통의 계승과 함께 항상 새로운 것으로의 창조를 계속한다. 시대의 진전에 따라 표현의 양상이 다르듯이, 기후나 산물이나 민족이나 종교나 또는 생활양식 등이 다른 풍토의 차이에 의해서도 표현의 재료나 방법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 한 예로서 유럽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자. 우선 유럽은 대륙의 일부로서 공기는 건조하고 투명하며,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에서는 양질의 대리석 따위가 산출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였다. 이들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서양인의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은 합리적이어서, 사물을 대함에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짙다. 이에 비하여 한국은 대륙에 이어진 반도 국가로서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인지 한국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게 되었다. 고려자기나 조선백자는 한국의 풍토와 한국의 기호(嗜好)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회화표현으로서는 유화(油畵)와 수묵화(水墨畵)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유화의 도구는 즉흥적으로 그리기보다는 견고하게 캔버스 위에 그림물감을 덧칠해 나가는 데 적합한 재료이고, 또한 사실적인 표현에 적합한 재료이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의 형상과 빛깔을 표현할 수도 있고, 또한 대상의 재질감(材質感)을 그림물감의 채색 방법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으로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하여 수묵화는 심상적(心想的)인 풍경이나 인물을 오히려 즉흥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선 빛깔이 부정된다. 부정된다고는 하지만 먹의 농담(濃淡)에 의하여 빛깔의 느낌을 낼 수는 있는데, 묵색(墨色)이 중시되는 것은 현실의 빛깔과는 차원이 다른 빛깔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명암(明暗)·음영(陰影)에 의한 양감(量感)의 표현을 부정한다. 묘선(描線)이나 먹에 의하여 두께나 무게의 느낌을 내려고 한다. 표현은 풍토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또한 생각지도 않았던 상사(相似)를 다른 풍토의 조형 속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이나 민족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대 역사에 있어서 문화상의 커다란 변혁의 하나는 중국 남북조로부터의 불교 전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교의(敎義)만으로서의 전래가 아니라 철학에서, 문학에서, 그리고 건축을 비롯한 모든 조형문화의 전래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국제 국가였던 당(唐)나라는 조형미술에서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인도와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고, 또한 인도의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로마 조각의 영향을 받아서 극히 그리스식(式)이었다. 실크로드는 동서문화를 연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중앙 아시아의 여러 가지 집기(什器)들이 고대한국에도 전래되어, 이것들이 당시 한국의 조형활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만하다. 또한 20세기 초의 유럽 화가들은 동양회화에 흥미를 느꼈고 고갱은 색면(色面)으로써 대상을 파악하여 동양화가 특징으로 하는 그림물감의 평면도(平面塗)를 시도했다. 또한 선묘(線描)의 아름다움은 마티스 등의 그림에서도 살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세계를 휩쓴 앵포르멜의 회화기법도 동양화의 몰골법(沒骨法)과 깊은 유대를 가졌다. 교통기관이나 보도기관의 발달에 따라 문화교류는 더욱 왕성하게 되어 조형표현도 구역의 차이를 줄였다고는 하나 결국 그들이 지역의 전통 속에 흡수 융화되어 항상 새로운 문화가 계속하여 생겨나게 된다. 아이들이 친구들의 얼굴을 그리면 그 작품은 친구의 얼굴을 닮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도 본인의 얼굴과도 닮은 데가 있다. 이와 같이 아이들 작품에는 남녀의 성별, 체격이 큰가 작은가, 강한가 약한가 등의 차이나, 마음이 대담한가 약한가, 또는 침착한가 거친가 하는 따위의 기질의 차이에서 지능의 정도 등이 화면에 그려지는 물체의 크기, 선(線)의 굵기, 또는 강약, 형상을 잡는 방법, 사용하는 빛깔, 또는 붓의 사용 방법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어른, 더군다나 그것이 전문가가 되면 여러 가지 경험이나 수업방법, 특히 본인의 의지 등에 따라서 갖가지 보상작용(補償作用)이 생겨, 어린이의 경우만큼 단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으나 성격이나 경험의 차이가 작품상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은 개성적으로 되고 또한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하겠다. 각인각색(各人各色)이란 말이 있는데 참으로 예술적 작품은 각인각색이다. 이 원인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성장과정이 다르고, 가지고 태어난 기질이 다르며, 지도자가 다르고, 이때까지의 경험이 다르며……요컨대 '사람' 그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같은 지방에서 살던,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종류의 작품을 비교하여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르네상스 최성기(最盛期)의 3인의 대표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고찰하여 보자. 다 빈치는 구식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학이나 기타 학문을 즐기는 한편, 음악에 뛰어나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그의 신통한 재간을 발휘하였는데, 15세기풍의 사실주의를 발전시켜 명암(明暗)에 의한 입체감(立體感)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고, 나아가서 그의 회화론에서 '훌륭한 화가는 두개의 주요 사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람과 그리고 그 혼(魂)의 의향(意向)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대상의 정신내용의 표출에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이법(理法)을 추구하여 그 속에 숨겨진 참에 대한 추구가 <모나리자>에도, <암굴(岩窟)의 성모>에도 드러나 있다. 미켈란젤로도 조각가·화가·건축가·해부학자이자 동시에 시인이기도 하였으며, 이 점에서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가 요구하는 '초인(超人)'이었으나, 다 빈치가 속에 있는 진실을 탐구하려 한 데 반해서, 미켈란젤로는 건강하고 바위와 같이 굳게, 하늘과 같이 넓게, 분방(奔放)하면서도 사려깊이 르네상스를 연소시켜 불꽃을 드높였다. 그러한 정열이 29세로 <다비드>를 만든 뛰어난 조형 능력과 서로 어울려 시스티나 성당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비계를 걸어 놓고, 그곳에서 짐승처럼 돌아다니면서, 6년이 걸려서 저 대천장화(大天障畵)를 그리게 했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와 같은 발명적인 창조정신도, 그리고 미켈란젤로와 같은 초인적인 조형적 에너지도 갖지 않았으나, 그는 각 유파의 특질을 교묘하게 흡수하여, 멋진 조화 속에서 그것들을 통일하고 빼어난 기술과 어울려 부드럽고 아름다운 많은 성모상을 남기고 요절하였다. 표현이 작자의 경험이나 성격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동시에 개인에게 있어서도 연령에 따라 그 표현이 달라진다고 하겠다. 표현과 개인의 연령과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차가 많아서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적인 경향으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노년기는 이른바 원숙한 시기로서 거기에서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자신의 취향을 제마음대로 발휘하는 시대이다. 개중에는 고령이 된 다음 더욱더 진가(眞價)를 발휘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매너리즘에 빠져 버리는 사람도 있다. 렘브란트는 청년기에서 만년기에 걸쳐 약 백 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데, 청년기·장년기의 표현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알아보자. 렘브란트의 27세∼28세의 작품에서는 초상화가로서 호평을 받아 우쭐거리는 자세가 몸가짐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아직도 렘브란트의 특질을 충분하게는 발휘하고 있지 않다. 그의 57세∼58세 작품에서는 인생에 대한 체관(諦觀)이 지극히 사람이 좋은, 그리고 보는 견지에 따라서는 대범한 웃음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림물감이 두껍게 칠하여졌고 빛(光)과 빛깔이 완전히 융화되어 작품은 더욱더 심각성과 처절함을 덧붙이고 있다. 모든 것이 성장하여 나아갈 때 거기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시피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힘의 발달에도 대체적인 순서와 단계가 있다. 그것이 그림의 발달단계이다. 이 발달단계 연구자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로웬페르드(미국)의 연구를 기저(基底)로 한 다음의 6단계설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연대(年代)의 진전에 따라 발달의 진보도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성의 있는 가정교육, 미술연구소나 아름다운 복제화(複製畵)의 보급,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하는 매스컴의 영향 등이 그 원인이라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나눌 수가 있다.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어떤 단계에 넣어야 좋을지 확실치 않은 것도 있으며, 또한 성격이나 능력의 차이, 환경의 차이 등에 따라서 발달이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개중에는 표현이 후퇴하는 그런 어린이조차 나오게 된다. 이러한 특례가 있으나 대체적인 발달의 자태는 역시 비슷한 단계를 밟아간다. 이처럼 어린이의 그림은 심신의 성장과 함께 자라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이의 작품에는, 어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예술성은 없다고 생각하여야 된다. 이 척서기는 유아가 신경이나 근육 에너지의 과잉(過剩)을 자발적으로 소비하려고 하는, 무의식 속에서 나온 팔의 반복 운동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림으로서는 아무 뜻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과정이다. 이 척서기에도 대체적인 발달 순서가 있다. 우선 처음으로 크레용을 잡은 유아는 점을 찍는다. 종이를 두들기듯이 점을 찍는다. 다음에 볼 수 있는 현상은 손목을 좌우로 흔들어서 그리는 횡선착화(橫線錯畵)이다. 이윽고 종선착화(縱線錯畵)에로 발달하여 간다. 이것은 손의 컨트롤이 팔꿈치까지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팔의 활동이 숙달됨에 따라 선도 뚜렷해지고 마침내 원형착화(圓形錯畵)로 발전하여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것이 파상(波狀)과 원형의 혼합으로 되어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 간다. 2세 전후가 되면 그린 형상에 명명(命名)하는 어린이가 생겨난다. 그것이 상징기이다. 어른이 보기엔 단순히 선을 긁적거린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것을 어린이는 <기찻길> <버스> <멍멍> 따위로 이름을 붙이고 우쭐거리며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이는 유아가 운동만으로 느끼고 있던 흥미에 시각적(視覺的)인 것이 곁들여져, 그린 것을 의미화(意味化)하는 단계이다. 단순한 운동적인 것에서 상상적인 것으로 발전했다는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는 척서기에 상상성(想像性)의 발달이 합쳐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른이 성급하게 이 시기 어린이의 표현에서 시각적인 의미를 강제로 끌어 내려고 하거나 형상을 그리도록 강요하거나 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른은 곁에서 어린이가 그리면서 지껄이는 그 말을 들어주고 그 표현을 격려하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시기의 그림은 성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표현은 설명 없이 대충 그것이로구나 하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어린이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초목·기물 등을 조금씩 지식으로서 파악하여 그것 비슷하게 그려서 표시하게 된다. 표현은 물론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의 특징을 그려 표시하는 데서 진보가 보인다. 산·태양, 그리고 사람도 일정한 도식(圖式)으로 표시하고, 또는 부분을 그렸을 뿐인데 그 대상 전부를 표시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상징기와 동일하게 생각되는 경향이 있으나, 상징기는 그려진 것이 무엇인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데 반해서, 전도식기의 표현은 하여튼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는 방법으로서는 예를 들면 인간의 경우에 얼굴은 동그라미, 눈은 점, 발은 한 쌍의 선으로 표시한다. 제재(題材)는 인물이 압도적으로 자기 자신과 어머니·아버지·동생 등의 순으로 많이 그려진다. 요컨대 일상 생활에서 자기자신과 관련성이 깊은 것일수록 자주 취급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의 표현은 그림답게 되어 마침내 안정감을 갖추게 된다. 물론 실재(實在) 사물의 관계나 양(量)·형(形)을 베끼는 것은 아니고 기억에 의하여 도식으로 외워 그린다. 한편 형식에 대한 모방이 많아서 다른 데서 영향을 받기도 쉽다. 또한 이 시기의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그리면서 표시하여 온 과거의 연대와 비교하면 이 시기는 그리는 방법이 세밀하게 되어 한층 더 한 장의 그림 제작에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이 연대가 동료의식이 싹트는 시기로서 비판적·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게 되기 때문에 공간관계라든가 사물의 형상·빛깔 등을 점점 실물에 가깝게 그리려고 하는 데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데 실망을 느껴서 그림 그리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아이가 적지 않다. 반면으로, 어른들의 흉내가 아니라 어린이다운 연구에서 묘미 있는 아동화를 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기에 이르기까지에는 대상을 보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마음내키는 대로 그리고 있었으나, 14세쯤 되면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비슷하게 그리려고 하는 욕구가 강해진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발달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形)이나 색채는 대상에 충실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지나치면 개념적·형식적인 그림을 그려 버리고, 더욱이 창조적인 표현이 차단되어 그림을 그리는 데 흥미를 잃는 자가 더욱 많아진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인간으로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하는 데 반해서 그림을 그리는 힘이 그에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하였던 대로 느꼈던 대로의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만큼 이 시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연령상으로나 작품상으로 확실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대개 연령적으로는 생후 1년 내지 1년 반에서 12세에 이르기까지의 어린이가 그린 그림을 아동화라 부르고 있다. 또한 15세까지의 중학생의 그림도 포함시켜 아동화라고 할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생각하는 방식으로서는 6세까지의 그림을 유아화, 12세까지의 그림을 아동화로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작품으로 그것을 구분하기는 거의 곤란하다. 그런데 유아의 그림은 성장의 기록이라 생각하는 게 좋다. 이 사실은 전술한 바 발전단계, 더욱이 착화기가 그를 가장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동화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를 바 없다. 역시 생활의 기록이며 자기 주장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유아화나 아동화를 화가가 그린 예술작품과 같은 견지에서 본다는 것은 잘못이다. 어린이가 그림을 그리는 일과 어른이 그림을 그리는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대학생·고교생은 물론 중학교 2∼3년생의 그림도 광의(廣義)로는 청년의 미술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회화에는 예술적인 가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미의 독창(獨創)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남이 이미 한 것, 써서 헌 것이 되어 버린 것의 재현(再現)을 기피한다. 백합꽃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예술작품이기 위해서는 일상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백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미가 있어야 된다. 과연 백합에는 이러한 아름다움도 있었구나 하는,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빠뜨리고 보지 못하였던 미를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의 발견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색채에서, 구성에서, 기법에 있어서, 그들 전체에 관계되어 있는 심정(心情)에 있어서 '싱싱하고 신선한 것'이 요구된다. '싱싱하고 신선한 것'은 그 작품의 표현이 지금까지 본 일이 없으며, 또한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본 일이 없다고는 하나 변태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새롭다'고 하는 것과 '변태'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술작품은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서 가지가지 다른 양식(style)을 가지고 있다. 같은 종류의 표현양식이 모이면 유파(流派)가 생기고, 그것이 형식적으로 계승되면 양식이 생긴다. 미술표현의 양식 중 중요한 것을 살펴보자. 원시적(原始的, Primitive) 양식은 구석기시대나 중석기시대의 인류와, 문화의 세계를 접하지 않은 민족의 조형미술의 양식으로서, 유아의 조형표현에도 공통되는 점이 많다.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과장(誇張)되어 표현이 지극히 직절적(直截的)이다. 소박하고 치졸(稚拙)하기는 하나 힘과 매력이 넘친다. 아르카이크(Archaique) 양식은 미술 발전의 초기 단계에 나타난 양식으로서 표현은 생경(生梗)하지만 신비성(神秘性)이 풍부하다. 그리스 조각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를 아르카이크시대라 부르는데 고졸적(古拙的)인 표현양식을 갖고 직선적·정지적(靜止的)인 정면성(正面性)을 갖는다. 입에는 이른바 아르카이크 스마일(古拙的微笑)을 지니고 있다. 고전적(古典的, Classic) 양식은 주제나 표현의 양식·수법이 그리스·로마 예술을 모범으로 하는 경향의 예술을 말한다. 잘 정돈된 엄격한 형식으로서 냉정성과 명쾌성을 가지고 있다. 17세기의 푸생은 바로크 예술의 반동으로서 목가적(牧歌的)·고전적인 작품을 그렸다. 19세기에는 18세기의 장식성이 많은 루이 왕조의 예술의 반동으로서, 다비드와 그 제자 앵그르가 고전주의의 작품을 그렸다. 또한 피카소에서도 그리스 조각에서 배운 신고전주의 시대가 있었다. 아카데미(Academic) 양식은 플라톤이 아카데모스 신원(神苑)에서 플라톤 학파를 세웠고, 아카데미라는 말은 상원·학회·학교 등에 쓰이게 되었다. 관학풍(官學風) 등으로 번역되어, 미술적으로는 전통적이고 형식을 존중하며, 기초 기술을 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독창성이 결여되어 무기력한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서 일정한 기술을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사용할 경우도 있다. 전통적(傳統的, Orthodox) 양식은 정통(正統)이나 본도(本道)의 뜻을 갖는 말로서 전통적·정통파적인 기법을 가리켜 사용되는 말이다. 사실적(寫實的, Realism) 양식은 공상을 배격하고 가능한 한 현실에 즉응(卽應)하여 실재의 진실을 추구하려 하는 태도를 말한다. 사실적인 경향은 이집트 미술에서도, 그리스 미술에도 볼 수 있었는데 르네상스 미술은 사실(寫實)의 하나의 정점(頂點)에 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적인 경향은 17세기에도 계승되어, 근대 쿠르베가 사실주의를 표방하였다. 구소련에서는 레빈 등이 사회적인 사상(事象)을 사실적으로 그려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선구가 되었고, 멕시코 회화에서도 특이한 사실주의가 눈에 띈다. 중국의 화조화(花鳥畵) 등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는 유럽과 다소 달라서 장식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는 사실주의와 함께 서양미술의 커다란 저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 표현은 동적(動的)이어서 감정의 격렬한 여파(餘波)가 느껴진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도, 대비(對比)를 살린 배색(配色) 등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동적인 구도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틴토레토의 작품에도, 그리고 17세기에는 루벤스 등의 작품에도 보이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제리코나 들라크루아 등이 고전파에 대항하여 낭만파를 세웠다. 낭만파는 현실 회피의 경향에서 그 주제도 주로 이야기, 사회적인 사변이나 전쟁 따위의 극적인 장면에서 구했다. 환상적(幻想的, Fantastic) 양식에서 상상력이나 환상력은 창조표현의 크나큰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블레이크, 고야, 모로, 앙리 루소, 샤갈, 폴 클레 등의 작품에는 환상적인 장면이 그려졌고 또한 키리코 등의 초현실파 작품에는 심상적(心象的)인 환영(幻影)이 표현되어 신비성이 느껴진다. 상징적(象徵的, Symbolic) 양식은 형상이나 빛깔이 갖는 의미를 단적으로 표시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가문(家紋)이나 마크 따위의 기호는 집이나 단체나 물품이나 그 밖의 의지(意志)를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르동은 꽃이나 나비 등과 같이 어느 순간에 없어지는 것 속에서 영원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호소하려고 즐겨 꽃이나 나비를 그렸다. 장식적(裝飾的, Decorative) 양식은 사물을 꾸미는 태도이다. 즐문토기(櫛紋土器) 등에도 그로테스크라고까지도 생각되리만큼 곡선의 무늬가 붙여져 있다. 사물을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장식본능은 조형 본능의 커다란 기반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장식성은 조형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고는 있으나 모자이크·스테인드글라스·벽화 등은 건축에 적응하는 것이다. 장식성이 그 자체, 혹은 그 영역의 기능보다 선행하면 장식 과잉이 된다.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에 따르면 인간도 자연물의 하나이므로 자연 속에 둘러싸여서 생활하여 나가는 이상, 항상 자연에 순응하려고 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란 말이 반복되게 된다. 기물이나 건축장식 등에 동식물의 무늬를 붙이거나 또는 기물 따위의 형태 그것 자체를 동물 모양으로 모방하여 만드는 경우가 있는 것도 이러한 마음의 한 표현이다. 자연 현상으로서의 풍경이 독립하여 회화의 주제로서 취급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로, 터너는 자연현상으로서의 대기(大氣)를 표현의 주제로서 취급하였고, 19세기 후반의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등에 의하여 일어난 인상파(impressionism)는 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표정을 포착하려고 하였다. 사실파 사람들이 자연이나 인생의 현실적인 진실을 파헤쳐 뽑아내려고 한 데 반하여, 인상파는 솔직하게 자연현상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세잔 등의 후기인상파는 인상파를 수정하여 사실파와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의 본질에 접근했다.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는 20세기 전반에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예술운동으로 고흐나 뭉크 등의 강렬한 개성표현에서 영향을 받아 자연묘사에 대응하여서 감정표현을 주안(主眼)으로 하고, 주관의 표현을 강조하였다. 개성표현의 강조는 현대미술의 커다란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기에 프랑스에서 생긴 야수파(fauvisme)도 주관주의 미술이며, 마티스, 루오, 뒤피 등은 야수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거친 터치의 대담한 표현으로서 단순화(單純化)나 데포르메(變形)를 볼 수 있다. 동양에서도 주관적인 경향이 짙은 작품이 지극히 많다. 추상주의(抽象主義, Abstractism)에는 입체파가 대표적이다. 20세기 초 세잔의 영향으로 피카소나 브라크는 자연의 형체를 해체하여, 그것을 화면 위에 새로운 질서에 의해서 재구성(再構成)하려는 이른바 입체파(cubisme)를 일으켰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연의 형체를 해체하는 데에 시간의 요소를 받아들여 '미래파'를 일으켰다. 칸딘스키는 자연의 대상과는 관계 없이 형상이나 빛깔이 갖는 성질을 살려서 이것들을 화면에 조립시켜, 음색(音色)이 다른 악기를 모아 교향곡을 만들듯이 새로운 질서와 통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지적·합리적인 화면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가장 자유롭게, 부정형(不定形)을 가지고 자기 감정을 분방하게 표현하거나, 또는 완성된 결과 등을 문제 삼지 않고 그림물감을 마구 던져 칠하거나, 뿜어 칠하거나 하는 행동을 취할 때의 정신적인 긴장을 소중히 여기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따위도 생겼다. 기능주의(機能主義, Functionalism)는 인간생활과 조형표현과의 사이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수한 질서를 확립코자 하는 것인데, 기능적인 조형표현의 가장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음과 동시에, 합리적인 추상주의와 연결된다. 설리번의 '형식은 기능에 따른다'고 하는 말은 기능주의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HTTP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 )는 WWW 상에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프로토콜이다. 주로 HTML 문서를 주고받는 데에 쓰인다. TCP와 UDP를 사용하며, 80번 포트를 사용한다. 1996년 버전 1.0, 그리고 1999년 1.1이 각각 발표되었다. HTTP는 클라이언트와 서버 사이에 이루어지는 요청/응답(request/response) 프로토콜이다. 예를 들면, 클라이언트인 웹 브라우저가 HTTP를 통하여 서버로부터 웹페이지나 그림 정보를 요청하면, 서버는 이 요청에 응답하여 필요한 정보를 해당 사용자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 정보가 모니터와 같은 출력 장치를 통해 사용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HTTP를 통해 전달되는 자료는 http:로 시작하는 URL(인터넷 주소)로 조회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1965년 제너두 프로젝트에서 테드 넬슨이 만들었으며, 제너두 프로젝트는 《As We May Think》(1945년)라는 수필에서 마이크로필름 기반 정보 수신 및 관리 "메멕스" 시스템을 기술한 버니바 부시의 비전(1930년대)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팀 버너스 리와 그의 팀은 CERN에서 HTML뿐 아니라 웹 브라우저 및 텍스트 기반 웹 브라우저 관련 기술과 더불어 오리지널 HTTP을 발명하였다. 버너스 리는 최초로 "월드와이드웹" 프로젝트를 1989년에 제안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의 월드 와이드 웹이다. 이 프로토콜의 최초 버전은 서버로부터 페이지를 요청하는 GET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메소드만 있었다. 서버로부터의 응답은 무조건 HTML 문서였다. 문서화된 최초의 HTTP 버전은 HTTP V0.9(1991년)이다. 데이브 레겟은 1995년 HTTP 워킹 그룹(HTTP WG)을 이끌었으며 확장된 조작, 확장된 협상, 더 보강된 메타 정보, 또 추가 메소드와 헤더 필드를 통한 더 효율적인 보안 프로토콜을 갖춘 프로토콜을 확장하기를 바랐다. RFC 1945는 공식적으로 1996년 HTTP v1.0을 도입하였다. HTTP WG는 1995년 12월 새로운 표준을 출간하기로 계획하였으며 당시 개발 중인 RFC 2068(이른바 HTTP-NG)에 기반한 이전 표준 HTTP/1.1에 대한 지원이 1996년 초에 주요 브라우저 개발자들에 의해 빠르게 채택되었다. 1996년 3월, 이전 표준 HTTP/1.1을 지원한 웹 브라우저로 아레나, 넷스케이프 2.0,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골드 2.01, 모자이크 2.7, 링크스 2.5, 인터넷 익스플로러 2.0이 있다. 새로운 브라우저의 최종 사용자 채택 속도를 빨랐다. 1996년 3월, 한 웹 호스팅 회사의 보고에 따르면 인터넷 상에서 사용 중인 브라우저 중 40% 이상이 HTTP 1.1과 호환되었다. 같은 웹 호스팅 회사는 1996년 6월 기준으로 서버에 접근하는 모든 브라우저들 가운데 65%가 HTTP/1.1 호환이라고 보고하였다. RFC 2068에 정의된 HTTP/1.1 표준은 공식적으로 1997년 1월에 출시되었다. HTTP/1.1 표준에 대한 개선과 업데이트는 1999년 6월 RFC 2616으로 출시되었다. 2007년에 부분적으로 HTTP/1.1 사양을 개정하고 분명히 하기 위해 HTTPbis 워킹 그룹이 창설되었다. 2014년 6월, WG는 RFC 2616를 obsolete 처리하는, 업데이트된 6 파트 사양을 출시하였다: HTTP/2는 2015년 5월 RFC 7540로 출판되었다. 클라이언트와 서버 사이의 소통은 평문(ASCII) 메시지로 이루어진다. 클라이언트는 서버로 요청메시지를 전달하며 서버는 응답메시지를 보낸다. 클라이언트가 서버에게 보내는 요청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요청 내용과 헤더 필드는 로 끝나야 한다. 즉, 캐리지 리턴(Carriage Return) 다음에 라인 피드(Line Feed)가 와야 한다. 빈 줄(empty line)은 로 구성되며 그 외 다른 화이트스페이스(whitespace)가 있어서는 안된다. 응답 메시지는 다음으로 구성된다. 아래는 포트 80의 www.example.com에서 실행 중인 HTTP 클라이언트와 HTTP 서버 간의 샘플 변환이다. 모든 데이터는 줄 끝마다 2바이트 CR LF ('\r\n')를 사용하여 플레인 텍스트(ASCII) 인코딩을 통해 송신된다. 클라이언트가 서버에 접속하여 어떠한 요청을 하면, 서버는 세 자리 수로 된 응답 코드와 함께 응답한다. HTTP의 응답 코드는 다음과 같다. W3C W3C(, 축약형은 )는 월드 와이드 웹을 위한 표준을 개발하고 장려하는 조직으로 팀 버너스 리를 중심으로 1994년 10월에 설립되었다. W3C는 회원기구, 정직원, 공공기관이 협력하여 웹 표준을 개발하는 국제 컨소시엄이다. W3C의 설립취지는 웹의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프로토콜과 가이드라인을 개발하여 월드 와이드 웹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W3C는 설립목적인 웹 표준과 가이드라인 개발을 수행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결과로 지난 10년간 80여개의 W3C 권고안을 발표하였다. W3C는 또한 교육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여해 왔고, 그리고 웹에 관하여 토론할 수 있는 열린 포럼을 개최해 왔다. 웹의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웹 기술은 상호 간의 호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서도 웹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W3C의 이러한 목표를 "웹 상호운용성 (Web Interoperability)" 이라고 한다. W3C는 웹 언어와 프로토콜에 대한 공개(반독점적인) 표준을 제정하여 시장 분열과 웹의 분열을 피하고자 한다.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와 운영진은 W3C를 웹 기술에 대한 컨센서스를 이끌어내는 산업 컨소시엄으로 발전시켜왔다. 유럽 핵물리 연구기관(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CERN)에서 근무하던 1989년에 월드 와이드 웹을 개발한 팀 버너스리는 W3C가 창립된 1994년부터 현재까지 W3C Director 직책을 맡고 있다. W3C는 2004년 12월에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웹과 W3C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심포지엄을 보스턴에서 개최했다. 전 세계 곳곳에 위치한 다양한 분야의 기관들은 웹 표준화를 위해 벤더에 중립적인 기구인 W3C에 참여한다. 웹 표준 제정에 큰 공헌을 한 W3C의 기술전문직원과 회원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점점 다양해지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면서, 웹이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W3C의 회원(테스티모니알 샘플), 직원, 초청전문가들은 함께 힘을 모아 기술을 설계해 나가고 있다. W3C의 국제적인 활동은 또한 세계적으로 40여개가 넘는 국가, 지역, 국제 기관과의 관계 (liaison)를 활성화 하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W3C의 월드 와이드 웹 개발의 국제적인 참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은 W3C가 제정한 WWW 관련 표준 목록이다. ASCII 미국정보교환표준부호(), 또는 줄여서 ASCII(, 아스키)는 영문 알파벳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문자 인코딩이다. 아스키는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비롯한 문자를 사용하는 많은 장치에서 사용되며, 대부분의 문자 인코딩이 아스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스키는 7비트 인코딩으로, 33개의 출력 불가능한 제어 문자들과 공백을 비롯한 95개의 출력 가능한 문자들로 총128개로 이루어진다. 제어 문자들은 역사적인 이유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출력 가능한 문자들은 52개의 영문 알파벳 대소문자와, 10개의 숫자, 32개의 특수 문자, 그리고 하나의 공백 문자로 이루어진다. 아스키가 널리 사용되면서 다양한 아스키 기반의 확장 인코딩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을 묶어서 아스키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7비트 인코딩을 유지한 ISO/IEC 646과, 원래 아스키 코드 앞에 비트 0을 넣어 8비트 인코딩을 만든 IBM 코드 페이지와 ISO 8859가 있다. 이 인코딩들은 언어군에 따라 같은 숫자에 서로 다른 문자가 배당된 경우가 많다. 아스키 코드는 지금의 미국 국가표준 협회(ANSI)의 전신인 미국 표준 협회(ASA)가 주도한 X3 위원회가 개발했다. 그 아래의 X3.2 소위원회는 1960년 10월 6일 아스키 표준화 작업을 시작하여, 1963년 표준화 초판을 발간했고, 1967년 개정했으며, 가장 최근의 업데이트는 1986년에 있었다. 제어할 때 쓰는 코드이다. 아직도 Serial 통신(RS-232, UART, USART...)이 적용된 곳에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1960년대 1960년대는 1960년에서 1969년까지를 가리킨다. 1970년대 1970년대는 1970년부터 1979년을 가리킨다. JPEG 제이펙(, )은 정지 화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손실 압축 방법 표준이다. 이 표준은 ISO와 ITU-T에서 제정하였다. JPEG을 사용하는 파일 형식들도 보통 JPEG 이미지라 불리며, .jpg, .jpeg, .jpe 등의 확장자를 사용한다. 1677만 7216색과 256색 그레이로 저장 할 수 있다. JPEG 표준은 이미지가 어떻게 연속된 바이트로 바뀌는지만을 규정한다. 독립 JPEG 그룹(Independent JPEG Group; IJG)에서 만든 JPEG의 확장인 JFIF(JPEG File Interchange Format)는 JPEG 스트림을 저장과 전송에 적합한 형태로 담는 이미지 파일 형식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 저장 방식으로는 다른 확장인 EXIF JPEG 형식이 더 자주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JPEG 파일이라고 할 때는 JFIF 형식이거나 EXIF JPEG 형식을 가리키지만, JNG와 같은 JPEG 기반의 다른 파일 형식도 존재한다. 손실 압축 형식이지만 파일 크기가 작기 때문에 웹에서 널리 쓰인다. 압축률을 높이면 파일 크기는 작아지지만 이미지 품질은 더욱 떨어진다. JPEG/JFIF는 웹 상에서 사진 등의 화상을 보관하고 전송하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파일 형식이다. 하지만 이 압축 방법은 문자, 선, 세밀한 격자 등 고주파 성분이 많은 이미지의 변환에서는 GIF나 PNG에 비해 불리하며, 나쁜 품질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JPEG 표준에도 비손실 압축 방법이 정의되어 있지만 특허 문제와 압축률 등의 이유로 잘 사용되지는 않으며, PNG 등의 비손실 압축을 지원하는 포맷을 많이 사용한다. JPEG 표준 안에는 많은 선택사항들이 있지만, 그중 대부분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아래 설명은 픽셀당 24비트 (빨강, 초록, 파랑 각 8비트씩)의 색상정보를 가진 데이터를 변환하는 일반적인 방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아래 설명한 방식에선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각 픽셀의 RGB 데이터를 YCbCr이라는 다른 색공간 데이터로 변환한다. 이 색공간은 NTSC나 PAL 방식의 컬러 텔레비전 전송에 쓰이는 색공간과 유사하다. Y 성분은 픽셀의 루마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Cb와 Cr 성분은 색차 정보(chroma components)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눈이 색상 성분보다 휘도 성분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색상 정보를 더 많이 압축하기 위해서 YCbCr 색공간으로 변환한다. 색공간 변환 시 제한된 정밀도 (채널당 8 비트) 때문에 정보가 완전히 보전되지 않는다. 따라서 뒤에서 양자화를 전혀하지 않더라도 원본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즉, JPEG 저장시 화질을 100%으로 하더라도 원본과 차이가 있게 된다. 때로는 Cb와 Cr 성분의 수를 줄인다. (이를 "다운 샘플링", 혹은 "크로마 서브샘플링"이라 한다.) 이어지는 설명은 각 성분에 대한 것으로, 성분별로 같은 절차가 진행된다. 사람의 눈은 명도에 대해 비교적 넓은 영역에서 작은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고주파의 명도 변화에서는 그 구별 능력이 떨어진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고주파 성분의 정보의 많은 부분은 버릴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주파수 영역의 각 성분에 대해 특정 상수로 나누고 정수 몫만을 취함으로써 수행된다. 이 작업이 전체 압축 과정에서 가장 손실이 큰 부분이다. 이 방법으로 고주파 성분들은 거의 0이나 0에 근접한 양수, 혹은 음수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주파수는 전자기파의 주파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격자 상에 늘어 놓았을 때의 공간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에 주의한다.) 그런데 정지 영상의 특성상 평균적으로 픽셀값이 확 변하는 곳이 적다(에너지 집중 현상으로 인해 대부분 저주파수에 모여있다. 그래서 양자화를 할 때 가중치 양자화를 적용함으로써 에너지가 큰 저주파는 많이 살려내고, 에너지가 거의 없어서 잘라내도 총합 에너지엔 거의 차이가 없는 고주파를 많이 제거한다.). 이 과정은 비손실 압축 방식으로서, 8×8 격자의 성분들을 저주파부터 지그재그로 일렬로 세운 뒤. 반복된 0에만 RLE를 적용하고, 그 결과들에 대해 허프만 부호화를 한다. 표준은 허프만 부호화 대신에 더 압축률이 좋은 산술 부호화도 가능하다고 기술하지만 산술 코딩은 인코딩, 디코딩시의 지연, 경제성 등의 이유를 들어 잘 쓰이지 않는다. 압축 해제된 JPEG 데이터를 얻는 과정은 압축 과정을 역으로 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규격은 합동 그룹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ISO와 ITU-T 양측에서 나오고 있다. 독도 독도(獨島)는 동해의 남서부, 울릉도와 오키 제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동도와 서도를 포함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독도의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자리 잡고 있고, 서도는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에 위치해 있다. 일본정부에서는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제3국에서는 1849년 서양권에서 독도를 최초로 발견한 프랑스 선박인 '리앙쿠르 호'의 이름을 딴 리앙쿠르 암초(, ) 등으로 중립적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으나, 일본정부에서는 이 섬을 대한민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항의하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최종덕이 1965년 3월부터 최초 거주한 이래로 김성도 부부 및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 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명 등 약 40명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동도에 대한 입도 신고제 도입 이후 현재까지 약 200만 명이 방문하였고, 1일 평균 660명이 입도하고 있다. 돌로 된 섬이란 뜻의 '돌섬'의 경상도 사투리 독섬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쓰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 홀로 있는 섬에서 독도가 아니다. 독도(獨島)라는 명칭은 한국어와 중국어 화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며, 과거에는 우산도(于山島)라고 불렸다. 인도유럽어권에서는 리앙쿠르 암초(, )라는 중립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막말 이전의 명칭은 마쓰시마()였다. 이 섬은 동해의 해저 지형 중 울릉분지의 북쪽 경계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균 수심 2,000m의 해양 평원에 솟아 있는 화산섬이다. 두 개의 큰 섬인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중심으로 총 91개의 크고 작은 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도와 서도 사이의 거리는 151m이다. 일본에서는 동도를 오시마(男島), 서도를 메시마(女島)라고 부른다. 독도의 총 면적은 187,554m²로, 서도(西島)가 88,740m², 동도(東島)가 73,297m², 그 밖의 부속도서가 25,517m²이다. 서도의 최고 높이는 168.5m이고, 동도의 최고 높이는 98.6m이다. 2012년 11월부터 대한민국 정부 고시에 의거하여 서도의 최고봉은 '대한봉'(大韓峰), 동도의 최고봉은 '우산봉'(于山峰)으로 부른다. 동도의 최고봉은 1950년대에는 '성걸봉'으로 불렸으며, 2005년부터 고시 이전까지는 '일출봉'(日出峰)이라 불렸다. 동도와 서도 및 부속 도서는 대부분 수심 10m 미만의 얕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다. 독도의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섬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약 87.4 km 떨어져 있으며, 일본 시마네 현 오키 제도에서는 약 157.5 km 떨어져 있다. 한반도에서의 거리는 약 216.8km이며, 일본 혼슈에서의 거리는 약 211km이다. 날씨가 좋으면 울릉도 동쪽 해안에서 육안으로 이 섬을 볼 수 있다. 독도는 약 460~250만 년 전에 형성된 해양섬 기원의 화산체로서, 섬 주변에 분포하는 지층들을 아래에서부터 괴상 응회각력암, 조면안산암 I, 층상 라필리응회암, 층상응회암, 조면안산암 II, 스코리아성 층상 라릴리응회암, 조면안산암III, 각력암, 조면암, 염기섬 암맥 등 총 9개의 화산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오랜 세월동안 침식되어 화산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독도(특히 동도)의 지반은 불안정한데, 이것은 단층과 절리, 균열, 그리고 불완전한 공사 등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독도는 지질학적으로 울릉도의 화산암류와 비슷한 전암 화학조성을 갖는 알칼리 현무암, 조면 현무암, 조면 안산암 및 조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96번지에 속하며 우편번호는 40240이다. 대한민국은 이 섬을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울릉군은 국민 공모를 통해 도로명 주소법에 따른 이 섬의 도로명 주소를 '독도안용복길'(서도)과 '독도이사부길'(동도)로 정하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행정 구역에서는 시마네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정에 속해 있다.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간 평균강수량은 1,240mm 정도, 연평균 기온 약 12℃, 1월 평균기온 1℃, 8월 평균기온 23℃로 온난한 편이다. 연평균 풍속은 4.3m/s로 겨울과 봄에는 북서풍이 빈번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남서풍이 빈번하여 계절에 따른 주풍향이 뚜렷하다. 안개가 잦고 연중 날씨 중 흐린 날은 160일 이상이며 비 또는 눈 오는 날은 150일 정도로, 겨울철 강수량이 많다. 즉, 일 년 중 맑은 날은 45일 정도밖에 없다. 두 섬과 주변 섬들은 서로 분리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저 2천여 미터로부터 바다 위로 솟은 해산(海山)의 봉우리 부분에 해당된다. 대한민국은 독도 섬 주변의 바다에 다양한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섬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이 섬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982년에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獨島海鳥類-繁殖地)"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했고, 1999년에 천연보호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어 동식물 전체의 식생을 관리하게 되었다. 2005년 독도의 기존 토지 및 부속도서를 측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지적공부를 정정하여 독도의 지적현황이 전체적으로 변경됨에 따라 2006년 9월 14일 문화재청장은 문화재보호법 제6조에 의거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된 《독도 천연보호구역》의 문화재구역을 당초 고시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37필지 180,902평미터(보호구역)"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01필지 187,554평방미터(지정구역)으로 정정고시하였다. 2002년 경상북도는 환경부에 '울릉도·독도 해상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으나, 이는 울릉군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울릉군 독도리 30번지에 있는 독도 사철나무는 독도를 구성하는 2개 섬인 동도와 서도 중 동도의 천장굴 급경사 지역 위쪽 끝 부분에서 자라고 있으며, 강한 해풍과 극히 열악한 토양조건 등에서 자란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하는 몇 안 되는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2012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은 독도가 독특한 자연환경이 유지되고 있고, 해양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여 에 의거 특정도서로 지정하였다. 2012년 12월 27일 환경부장관은 자연공원법 제36조의3의 규정에 의거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을 인증 고시하였다. 2005년과 2006년에 이루어진 실태조사를 통해 독도에서 관찰된 조류는 126종이다. 개체수가 가장 많은 종은 괭이갈매기이었고, 약 7,0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제비, 슴새, 참새가 서식하고 있는데, 최근 슴새의 수는 감소하고 있는 반면 바다제비 수는 증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섬은 남북으로 왕래하는 철새들이 쉬어가는 주요 휴식처이다. 조류는 여러 가지의 천연 기념물이 있다. 짐승은 1973년 경비대에서 토끼를 방목하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도 서식하지 않는다. 곤충은 7목 26과 37종이 서식하고 있다. 인근 해양에는 파랑돔, 가막베도라치, 일곱줄얼게비늘, 넙치, 미역치, 주홍감펭 등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또한 대구지방환경청은 지난 2007년 5월부터 6개월 동안 경북대학교 울릉도·독도연구소와 공동으로 네 차례에 걸쳐 이 섬의 생태계를 조사한 결과 이 섬에 무척추동물 26종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2007년 12월 11일에 발표했다. 2013년에는 시베리아의 텃새인 솔양진이 수컷 한 개체가 남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동도에서 발견되었다. 바다사자(독도강치)는 동해 연안에 서식하던 강치의 아종이다. 현재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동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들을 "가제" 또는 "가지"로 불렀으며 이 섬을 중심으로 동해에 수만 마리가 서식했다고 한다. 이들이 머물렀다는 가제바위가 독도에 남아 있다. 러일 전쟁 전후로 가죽을 얻기 위해 시작된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바다사자는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었으며 1974년 홋카이도에서 새끼 강치가 확인된 이후로 목격되지 않는다.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이 이 섬을 무단으로 편입한 이후 일본인들의 어획이 시작되었지만, 1905년 이전에 울릉도에 살던 한국인들이 1904년과 1905년에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 매년 가죽 800관(600엔)씩 일본에 수출한 기록이 1907년 시마네현 다케시마 섬 조사단의 오쿠하라 헤키운이 쓴 책 '죽도 및 울릉도'에 나온다. 박선주 등이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실행한 독도의 식물상 및 식생 조사에서는 독도의 식물은 29과 48속 49종, 1아종 3변종 총 53종류로 조사되었다. 이 중 특산식물은 섬기린초와 섬초롱꽃 2종류이고, 귀화식물은 갓, 방가지똥, 큰이삭풀, 콩다닥냉이, 흰명아주, 둥근입나팔꽃 6종류가 있다. 식생형은 주로 해국-땅채송화, 해국-갯제비쑥, 왕호장근-도깨비쇠고비, 돌피, 물피군락 등으로 구분된다. 경사가 급하여 토양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비는 내리는 대로 배수되어 수분이 부족하여 자생하는 식물이 적으나 울릉도에서 씨앗이 날아와 50~60종의 풀과 나무가 있다. 이 섬에 사는 식물은 키가 작아 강한 바람에 적응하고 잎이 두껍고 잔털이 많다. 물론 가뭄과 추위에도 잘 견딘다. 2007년 12월, 외부에서 들여와 직접 심은 나무 가운데 무궁화, 후박나무, 곰솔, 향나무 등이 대부분 말라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얕은 바다에는 모자반, 대황 등의 해양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독도 사철나무는 독도에서 현존하는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로 독도에서 생육할 수 있는 수종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토의 동쪽 끝 독도를 100년 이상 지켜왔다는 영토적·상징적 가치가 큰 점을 감안하여 2012년 10월 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 섬 일대는 '박테리아의 보고'로 불릴 만큼 다양한 종의 박테리아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5년 5종, 2006년 13종, 2007년 16종, 2008년 4종 등 2008년 기준으로 이 섬에서 발견된 신종 박테리아는 38종에 이른다. 발견된 신종 박테리아들의 학명에는 독도넬라 코린시스(Dokdonella koreensis), 동해아나 독도넨시스(Donghaeana dokdonensis) 등과 같이 '독도'나 '동해'의 명칭이 포함되었다. 독도에서 발견된 박테리아들로 인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이 3년 연속으로 신종 세균 발표 건수 1위를 차지했다. KAIST 생명공학과의 조사에 따르면, 섬 근해 해저에 이른바 '불타는 얼음'으로 불리는 메탄 하이드레이트(methane hydrate, 고체 천연가스 또는 메탄 수화물)가 확인된 양만 약 6억 톤가량 매장되어 있다고 밝혀졌다.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녹으면서 물과 메탄 가스를 발생시켜 효용가치가 큰 미래 청정자원으로 주요 선진국의 개발·연구 대상으로 주목받는 자원이다. 독도 주변은 쿠로시오 지류인 따뜻한 대만남류와 찬 북한 해류가 만나는 지역으로, 영양염류가 풍부하며, 이로 인한 동·식물 플랑크톤이 다양하고, 경제적 가치가 높은 회유성 어족이 다량 분포하고 있다. 독도는 지형적으로 수심 2,068 m 정도 되는 동해 새중에서 분출한 화산성해산으로, 물위로 솟아있는 독도의 면적은 비록 작지만(0.186km), 수면아래 독도의 면적을 합하면 울릉도의 2배 이상되는 거대한 해산이며, 동도와 서도를 중심으로 주변에 물개바위를 비롯한 크고 작은 32개 이상의 바위섬과 암초가 있어 단단한 바닥에 부착하여 생활하는 해양 저서생물에게 좋은 서식지를 마련하고 있다. 독도의 바다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으로 생물종이 다양하고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섬 주변에는 감태, 대황, 모자반 등 해조류를 비롯하여 게류, 고둥류가 넓게 서식하고 있고, 어류로서는 볼락, 자리돔, 도화돔 등의 냉온대성, 온대성 및 아열대성 생물종이 집합하여 서식하고 있다. 또한 독도의 섬효과를 통해 깊은 바다의 영양염류가 표층으로 용승되어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동해의 회유성 및 독도 정착성 어종의 치어와 유어들이 모여 사는 산란장 내지 성육장의 기능으로서도 중요한 어장이다. 국립수산과학원에서 동도와 서도 주변연안 및 수중생태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해양·자포동물 22종, 고둥류 30종, 극피동물 23종, 갑각류 22종, 갈조식물류 17종과 어류 17종 등 총 169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도 주변연안에서 서식하고 있는 갑각류 중에서 도화새우, 물렁가시붉은새우, 가시배새우를 통틀어 '독도새우'라고 부르고 있다. 동도에 선착장과 접안 시설(1997년 11월 완공, 1998년 8월 지적공부에 등록) 80미터로 500톤급 선박 접안이 가능하며, 유인 등대 1기가 설치되어 있다. 대저해운에서 포항~울릉도~독도 구간을 1일 2회 운항한다. 단 풍랑 등 기상특보가 발생시 결항될 수 있다. 동도에 있는 독도 헬기장(ICAO:RKDD)은 경찰청이 관할하는 헬리콥터 이착륙장이다. 동도에 있기 때문에 '동도 헬기장'으로도 불린다. 2008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로부터 지명약어 RKDD를 부여받았다. 2013년 6월 12일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KCA) 경북본부와 대구·경북 소재의 이통3사 및 협력사 공동 주관으로 독도에 입도해 독도의 전파환경을 측정한 결과 독도는 방송, 통신뿐 아니라 아마추어 무선 주파수까지 모두 양호하게 도달되며, 최신 초고속 광대역 통신인 롱텀에볼루션(LTE)까지 끊김없이 전달된 것으로 조사됐다. 문화재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독도 대포(大砲)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좌절됐다. 당시 국무총리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과 엄승용 전 문화재청 사적명승국장, 독도단체 및 문화재계 관계자들이 독도 대포의 영토주권 수호 상징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문화재 지정 재추진을 주장(서울신문 2014년 8월 15일자 8면)했으나 지금까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독도에 하수처리시설이 설치된 이후, 그 오작동으로 인해 독도 경비대나 등대 관리자와 같은 거주자들로부터 발생한 오수가 바다에 그대로 쏟아지는 일이 반복돼 독도 부근은 심각한 바다 오염의 우려가 높다. 독도 부근 바다에서는 바닷물이 우윳빛으로 변하거나, 해초들이 죽고 산호초가 석회화되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오염을 줄이기 위한 공공 단체와 시민 조직에 의한 노력이 진행중이다. 1997년 10월11일 제6차 어업실무자회담에서 독도와 그 주변수역을 한일어업협상에서 제외할 경우 일본으로부터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점을 인정받지못하지만 현재 실효지배하고있는 기득권을 인정받게되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상황을 두고 1997년 11월 7일에 한국정부는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하여 독도에 대한 입지를 확고히 하자 하시모토 류타로일본총리까지 나서서 이를 비난했고 일본정계가 당황한바있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간에 독도를 두고 갈등은 심화되었고 1965년의 1차 한일간 어업협상은 한국이 1997년12월3일 이후 IMF사태를 격는 동안에 일본측의 파기로 해제되었으며, IMF사태라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한국은 상황이 매우 난처했다는 일부여론과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국제정세는 한국의 자국내 불행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인접국가들에게는 각국의 실리를 위해 그 상황을 이용할 여지가 될수 있다는 점이 언론에 보도된바 있었다. 독도와 관련되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여러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구멍바위' 형성에 관한 전설이다. 전설에 따르면, 먼 옛날 힘센 노인 하나가 노인의 집 앞을 가리고 있던 바위를 묶어 배를 타고 옮기던 중에 다른 바위를 던져 바위에 구멍을 내고 난 후 독도에서 좌초되어 지금의 자리에 구멍바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는 잔태평기()의 권7에 전하는 죄인원도유형평정지사() 조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섬에 대나무 옷을 잎은 검은 색 외눈의 거인이 산다는 내용이다. 1954년 9월 15일 대한민국은 3종의 독도 우표 3000만 장을 발행했는데 2환권과 5환권은 각각 500만 장, 10환권은 2000만 장이 팔렸다. 일본 외무성에서 독도 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만국우편연합(UPU) 규정중 '우편물 중계의 자유보장' 조항에 따라 허용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항의의 표시로 독도 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에 먹칠을 해서 배달을 하였다. 대한민국은 이 섬을 도안으로 한 우표를 2002년과 2004년 1월 두 차례 더 발행했다. 2002년 8월 1일 내고향 특별우표 시리즈(32종)중 경북편에도 독도우표가 포함, 90만장이 발행되었으나 당시 일본의 항의는 없었다. 2004년 1월 대한민국이 독도 우표 4종 224만장을 발행하자 가와구치 일본 외상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과 한국의 우표발행이 만국우편연합헌장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주일 한국대사에게 항의하였다. 2004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이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보여주고 있는 고지도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하였으며 2006년 8월에는 도안이 약간 수정되어 대한민국에서 판매되기도 하였다. 대한결핵협회는 2006년 크리스마스 실로 독도의 자연을 그린 '아이러브 독도'(I ♡ Dokdo)를 발행하였다. 1982년에 한국방송의 PD였던 박문영은 이 섬을 주제로 한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만들어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 일번지》를 통해 발표했는데, 시기적절한 곡이라는 평가를 받아 곧 정광태의 정식 음반이 출시되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밖에도 박명수의 〈We Love 독도〉 등 수많은 연예인과 가수들이 독도에 관한 노래를 발표해 왔다. 본래 이 섬은 대한민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서 입도가 제한되었으나 2005년 3월 24일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입도 허가제를 신고제로 변경함으로써 동도 선착장에 한해서 하루 1,800명씩 일반인의 관광을 허용했다. 학술 조사와 같이 관광 이외의 목적으로 이 섬을 방문할 경우에는 14일 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독도의 날은 고종이 대한제국칙령 제41호 1900년 10월 25일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제정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2009년 12월 일본 교직원 조합의 산하 기관인 홋카이도 교직원 조합이 독도에 대해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맞다"라고 명기한 자료를 각 학교에 배포하였다. 미국 지명위원회(BGN)의 GNS Search에서는 독도의 별칭인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로 검색을 했을 때 주권(Country Code)을 대한민국(South Korea)으로 표기하였다. 공식 명칭인 "리앙쿠르 암초"의 별명 가운데 '독도'(Tok-to)를 '다케시마 섬'(Take-shima)보다 앞에 표기하였으며, 또한 다케시마 섬을 클릭한 경우에도 주권을 대한민국으로 표기하고 있다. 2007년에는 엑스박스 라이브에 지역을 등록할 때 다케시마(")와 다케시마의 한자 표기인 '竹島'라는 지명은 등록이 불가능한 단어인 데 비해 독도('独島')는 등록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았다. 2004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모바일 게임인 〈독도를 지켜라〉를 개발하여 대한민국으로 수출했다. 이 게임은 통일부로부터 외교적인 문제를 피할 것을 요청받아 〈섬을 지켜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네티즌의 항의로 다시 〈독도를 지켜라〉로 바뀌었다. 독도함(獨島艦, LPH-6111)은 대한민국 해군의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첫 번째 함이다. 독도의 이름을 함명으로 정하였다. 실제로는 LHD(다목적 강습상륙함)의 기능을 갖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LPH(강습상륙함)라고 불리고 있다. 2002년 10월 말에 한진중공업이 대한민국 해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건조를 시작한 뒤, 2005년 7월 12일 진수하였고 2006년 5월 22일부터 시운전을 시작하여 2007년 7월 3일 취역하였다.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고 수색구조 작전에 투입되었다. 한국복지사이버대학에 2012년 독도학과가 개설되어 2014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지리·환경·역사학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학문적 기반 구축을 위해 전국 최초로 개설되었으며, 울릉군수와 독도경비대장 등 독도와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인사들뿐만 아니라, 교육계 전문가, 독도 관련 시민사회단체 대표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인사들이 재학 중이거나 졸업하였다. 영어 영어(英語, )는 영국의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서게르만어군 언어이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주요 언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공식 언어로서뿐만 아니라 제2언어로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영어는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의 대영 제국의 군사적, 경제적, 과학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영향과 20세기 중반 이래의 미국의 영향으로 , 전 세계에서 가장 폭넓게 가르쳐지고 이해되는 언어로서 때때로 링구아 프랑카에 비유된다. 영어는 서게르만어군의 방언이었던 앵글로색슨족의 언어가 여러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변화하면서 형성되었다. 5세기 무렵 브리튼 제도에 앵글로색슨족이 이주하면서 시작된 고대 영어는 이후 바이킹의 침입과 함께 전파된 고대 노르드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고대 영어는 단어와 철자법 등에서 노르만어의 영향을 받으며 중세 영어로 발전하였다. 영어()라는 단어의 어원은 12세기 고대 영어인 "Angles"의 복수형 "Ænglisc" 또는 "Engle"에서 파생된 것이다. 근대 영어는 15세기 잉글랜드에서 있었던 대모음 추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이 무렵 여러 나라에서 유래한 외래어와 신조어가 크게 늘었다. 특히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는 기술 용어들이 크게 늘었다. 또한, 각국 국민들의 모국어 액센트가 영어에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는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와 마찬가지로 로마자로 표기하고 있다. 근대 영어는 종종 최초의 지구적 링구아 프랑카로서 언급된다. 영어는 통신, 과학, 무역, 비행, 오락, 방송, 외교 등의 분야에서 국제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영어의 사용은 종종 언어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영어는 대영제국의 팽창과 함께 브리튼 제도의 밖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무렵에는 글자 그대로 전지구적 언어가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과 캐나다 역시 영어 사용의 확대에 기여하였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국이 된 미국으로 인해 영어 사용의 세계화는 더욱 확산되었다. 의료나 컴퓨터 사용과 같은 여러 분야는 기초적인 영어 사용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를 위해 수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어를 배운다. 영어는 유엔의 여섯 공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전 지구적인 영어 사용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다른 언어가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지구 곳곳에서 영어 사용이 일반화됨으로써 각 지역의 자연어가 갖고 있던 언어 다양성이 감소하고 심지어 더이상 쓰는 사람이 없는 사어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영어의 영향은 역사언어학의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언어 공동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사용되고 있는 영어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언어 변화를 가져왔다. 크리올과 피진은 이러한 영어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어족이다. 영어는 앵글로프리지아어와 저지 게르만어 를 기원으로 하는 서게르만어군의 하나이다. 이 언어들은 로마 속주시기 이후 5세기까지 오늘날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의 지역에 해당하는 유럽 북서부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브리튼 섬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브리튼 섬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하나가 앵글족으로 이들의 이름 앵글()은 이들의 원래 거주하였던 곳의 지명 앵글른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늘날의 슐레스비히 인근 지역이다. 브리튼이라는 이름은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잉글랜드 교회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브리튼 섬에 이주해 온 앵글족은 새 정착지를 자신들의 땅이라는 의미의 잉글랜드()로 불렀다. 영어()역시 앵글족의 말이란 뜻이다. 앵글로색슨족은 덴마크와 윌란 반도로부터 449년에 브리튼 섬을 침공하였다.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언어는 켈트어파에 속한 브리소닉어와 고이델어였다. 브리튼 섬에 있었던 두 번의 침입은 영어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나는 8~9세기에 있었던 바이킹의 침입으로 이로 인해 영어는 북게르만어군의 영향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1066년 있었던 노르만 정복으로 이로 인해 프랑스어와 노르만어가 유입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의 영향을 받으며 고대 영어가 형성되었다. 브리튼 섬에 세워진 앵글로-색슨의 고대 왕국들에서는 저마다 고대 영어의 다양한 사투리가 쓰였다. 후기에는 색슨족이 들어와 저지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았다. 영어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파였다. 530년의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부터 1536년의 수도원 해체까지 브리튼 섬에는 많은 가톨릭 수도원이 세워졌다. 초대 주교였던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이후 가톨릭 성직자들은 수도원을 통해서 문자와 문학을 전파하는 학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중세기간 동안 수도원은 브리튼 제도에서 지식의 보고였고 이들의 활동은 영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톨릭 수사들은 중세 유럽의 링구아 프랑카였던 라틴어를 사용하였고 영어 역시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런던에서 쓰인 영어를 초기 근대 영어라 한다. 이 시기 영어는 철자법이 고정되고 어순이 확립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달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어근을 바탕으로한 막대한 과학어휘가 새로 만들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성립으로 영어는 브리튼 섬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대영제국 시기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세계 곳곳에 영국의 식민지가 확장되자 영어 역시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 영어가 전파된 주요 국가로는 오늘날의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있다. 또한 영어는 영국이나 미국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파키스탄, 가나, 인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케냐, 우간다, 필리핀 등 많은 나라에서 공용어로 사용된다. 1945년 유엔의 설립 이래 영어는 유엔의 공식 언어들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영어는 게르만어파의 언어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이며, 사실상 전 세계 언어 중에서 가장 폭넓게 쓰이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영제국의 대외 팽창으로 인해 전 세계로 영어가 확산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이 증가한 데에 기인한다. 특히 근대에 들어 통신기술의 발달로 영어는 다른 문화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영어는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의 앵글로프리지아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현존하는 가장 가까운 관계의 언어로는 스코틀랜드 저지대와 북아일랜드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스코트어와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주와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프리지아어가 있다. 스코트어는 별개의 언어가 아닌 영어의 방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스코트어와 프리지아어 외에 영어와 연관이 있는 언어로는 서게르만어군 중에서 비(非)앵글로프리지아어에 해당하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아프리칸스어와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등이 있다. 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 영어와 유사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오래전 서로 다른 언어로 분기되었고 영어와 스코트어는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고립되어 발달하여 어휘, 구문, 어의, 음운 등이 달라 서로 통용되지 않는다. 독일인, 더치(네덜란드, 벨기에 일부), 북유럽(핀란드 제외) 사람들은 어순이나 언어가 영어와 상당히 유사하여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아도 영어로 의사소통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데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아서 자연스레 영어를 잘 한다. 이와 같은 관련 언어 가운데 굳이 친소를 가린다면 네덜란드어가 보다 영어와 유사한 편이다. 영어는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어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지리적 고립으로 인한 구문의 변화로 관련된 게르만어들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실제로 라틴어는 영어의 15%에서 30%에 달하는 어휘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exit" 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uitgang"이 보다 원래의 뜻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uitgang은 "나가다"는 뜻의 "uit"과 "통로"를 뜻하는 "gang" 의 합성어로 글자그대로 통로에서 나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영어로 나타낸다면 "out-gangway"가 될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movement" 역시 이 보다는 독일어 Bewegung이 글자그대로 "be-way-ing" 즉 "길을 따라 움직이는" 또는 "방도에 맞추어 가는"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현대의 영어 사용자들도 많은 프랑스 단어를 읽을 수 있는데 이 역시 노르만 침공 이후 영어에 미친 노르만어와 프랑스어의 영향을 보여준다. 영어의 어순은 다른 게르만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중세 이후 노르웨이어, 스웨덴어와 같은 북게르만어군의 어순이 영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은 영어와 북게르만어군 사이에서 보이는 어순의 유사성을 나타낸 예문이다. 맨 아래의 독일어와 에 해당하는 단어의 어순을 비교해 보라. 한편, 네덜란드어의 어순은 영어와 독일어의 중간 형태를 보인다. 위의 예에서 네덜란드어는 다른 게르만어군에 비해 영어와 보다 유사한 형태를 띠는데 이는 동사의 시제 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어와 다른 연관 언어 사이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단어가 비슷한 음운을 갖는 거짓짝이 많이 있다. 일례로 과 을 들 수 있다.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니는 낱말이 서로 다른 발음으로 변화한 것도 있는데 와 , 그리고 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영어는 다른 언어군들에 비해 게르만어파와 확연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영어와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많은 언어에서는 "‑hood", "-ship", "-dom", "-ness"와 같은 접미사들이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다만 접미사의 활용 방식은 조금씩 다른데 예를 들어 에 해당하는 에 쓰인 접미사 "-heit"는 영어의 "-hood"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편 영어의 "-dom"에 해당하는 접미사에 독일어에서는 종종 "-tum"이 사용된다. 이러한 접미사의 사용은 아이슬란드어, 페로어와 같은 다른 도서 게르만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영어와 같이 여타의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방식으로 접미사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약 3억 7천 5백만 명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어의 관화, 스페인어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공용어와 제1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의 수를 합산하면 영어 사용인구는 중국어 다음으로 많다. 다음의 표는 영어를 사용하는 주요 나라의 영어 사용 인구수를 나타내고 있다. 다음은 북아메리카 영어를 기준으로 한 모음의 표기이다. 다음은 국제 음성 기호 체계에 따른 영어 자음을 나타낸 것이다. 영어의 파열음이 유성음이나 유기음으로 발음되는데에는 뚜렷한 일반적인 규칙이 없으며 화자나 문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만, 다음과 같이 규칙적으로 적용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영어에는 독특한 억양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영어에서는 목소리의 높이가 구문을 이루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의문문, 감탄문, 반어법 등과 같은 특정 구문에는 이에 따르는 독특한 억양이 있다. 영어에서는 군을 이루는 단어가 하나의 억양 패턴을 형성하는데 이를 성조군이라 한다. 성조군은 단번에 발음되기 때문에 길이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보통 성조군을 이루는 단어의 수는 다섯 단어를 넘지 않으며 단숨에 발음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초 정도이다. 다음은 대표적인 성조군의 예이다. 영어에서는 문장의 특정한 음절이나 단어, 성조군에 강세가 실린다. 이렇게 강세가 실린 음절을 핵심 음절이라 한다. 예를 들어, 위 문장에서 강세가 놓이는 "best" 와 "do" 가 핵심 음절이 된다. 문장의 나머지 부분은 약하게 발음된다. 영어에서는 핵심 음절을 강하게 발음함으로써 화자의 의도를 들어낸다. 어디에 강세를 두는 가에 따라 의도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예를 들면 핵심 강세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핵심 음절은 문장의 다른 부분에 비해 강하고 높게 발음된다. 또한 영어에는 문장 끝의 소리 높이가 올라가는 상승 성조와 내려가는 하강 성조가 있다. 두 성조를 합쳐 상승-하강 성조나 하강-상승 성조로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성조의 사용으로는 의문문에서 쓰이는 상승 성조이다. 영어에서 상승 성조는 화자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예문을 보면, 영문법은 다른 인도유럽어족에 비해 어형 변화가 간결한 편이다. 예를 들면, 현대 영어에서는 독일어, 네덜란드어와 같은 다른 서게르만어군나 로망스어군과는 달리 문법상의 성(性) 구분이 거의 없다. 또한 수·격·인칭·성에 따른 동사의 조화도 드문 편이다. 격은 거의 사라져 대명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게르만어파 특유의 동사변화 규칙도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강한 동사변화(예:speak/spoke/spoken)와 약한 동사변화(예:love/loved/loved)는 이전 시기의 영어에 비해 엄격하지 않다.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영어는 고립어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어 양상 동사와 어순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편, 영어는 의문문, 부정문, 수동태와 같은 태의 표현, 상황의 설명을 위한 상 등을 나타내기 위해 조동사를 사용한다. 영어의 품사는 총 8개이며, 이들을 가리켜 "8품사" (8 Parts of Speech)라고 부른다. 영어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 변화를 겪어왔다. 다른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역시 많은 단어가 원 인도유럽어에서 유래하였다. 현대 영어에서도 대명사, 전치사, 접속사, 양상 동사 등은 대부분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영어 구문과 문법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다. 고대 영어나 고대 노르드어와 같은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이러한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라틴어와 같은 언어에서 유래한 단어보다 짧다. 이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우선 단어의 축약 현상이 있었다. 고대 영어의 hēafod가 현대 영어의 head로 고대 영어의 sāwol이 soul로 변한 것이나, 끝 소리가 강세를 잃어 gamen이 game으로 ǣrende가 errand로 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이유는 노르만 정복이후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정치, 학문, 예술의 전 분야에서 사용되면서 음절이 긴 토박이말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같은 뜻을 나타내는 데 토박이말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교양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조지 오웰은 《정치와 영어》라는 수필을 통해 이러한 단어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현대 영어에서도 여전히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단어와 동의어인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come과 arrive, sight와 vision, freedom과 liberty 등이 그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여기에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동의어가 추가된다. 예를 들어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oversee 대신 라틴어에서 유래한 supervise나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survey를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영어에는 다양한 출처에서 들여온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warranty는 앵글로노르만어에서 온 것이고 guarantee는 페르시아계 프랑스어에서 온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이렇게 여러 곳에서 유래한 동의어들이 두루 쓰이기도 하는데 고대 영어에서부터 사용된 sick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한 ill,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infirm, 라틴어에서 유래한 afflicted와 같은 단어들과 동의어군을 이루고 있다. 영어의 사용에서 이러한 동의어의 선택은 뉘앙스와 같은 것을 함께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든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것이든 이제는 영어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들도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하여 영어에서만 사용되는 것들로는 mountain, valley, river, aunt, uncle, move, use, push, stay 같은 단어들이 있고 게르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는 , abandonment, debutant, feudalism, seizure, guarantee, disregard, wardrobe, disenfranchise, disarray, bandolier, bourgeoisie, debauchery, performance, furniture, gallantry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앵글로-색슨어에서 나온 단어들로는 acknowledge, meaningful, understanding, mindful, behaviour, forbearance, behoove, forestall, allay, rhyme, starvation, embodiment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한편, 유래를 밝히기 어려운 단어들 역시 많이 있다. 영어 단어를 가장 많이 만든 사람 중에는 셰익스피어 가 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단어에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영어 단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단어가 cookie(쿠키)나 URL과 같은 과학 기술 용어이다. 또한 속어 와슬랭의 사용으로 인해 단어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뜻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때때로 사건으로 인해서 신문 등이 단어를 만들기도 한다. Chaebol(재벌), Panmunjom(판문점)과 같은 한국어 기원의 영어 단어, Kancho(윤하), Tonkatsu(돈가스),Tofu(두부)와 같은 일본어 기원의 영어 단어와 같이 여러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외래어가 더해지고 있다. 영어 단어의 수를 명확히 산출할 수 없는 이유를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광대한 영어 단어의 수를 산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우선 영어는 프랑스어(아카데미 프랑세즈), 스페인어(스페인 왕립 학술원)등과 달리 공식적인 어문기구가 없다. 또한 의료, 과학, 기술 분야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신조어가 계속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속어의 사용으로 인한 단어의 의미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끝으로 외국어 역시 다수의 영어 화자가 이를 사용할 경우 넓은 의미에서 영어로 취급된다. 1933년 옥스포드 영어 사전 제2판은 60만 단어 이상을 등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7만 5천여 중심 단어를 수록하고 있는 웹스터 사전은 매해 2만5천여 단어를 추가로 등재하고 있다.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에 따르면 2009년 6월 10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영어 단어의 수는 약 1백만 개에 이른다. 대한민국에서 영어가 처음으로 교육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인 1883년 동문학이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이후 1886년 육영공원에서 영국인 교사들이 영어로만 영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최초의 영어몰입교육 (물론 직접식 교수법)이 시작되고 배재학당 (현재의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 이화학당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영어 교육이 중시되고 1895년 설립된 관립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 전공 학생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다른 언어 전공 학생을 제치는 등 1910년까지 활발하게 교육되다가 1910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에서의 영어 교육을 대폭 축소해 암흑기에 빠졌다. 그 시기에 강사는 일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법 때문에 영어 강사들도 발음이 좋지 않은 일본인 강사로 채워졌다. 영어 교습법도 이 시기부터 직접식 교수법 에서 문법 번역식 교수법 으로 바뀌었다. 이후 1920년~1941년까지는 영어가 다른 외국어에 비해 충실하게 교육되다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영어 교육이 다시 억압되었다. 1946년 서울대학교의 설립으로 영어영문학과가 설립되어 영문학 (영미 시, 영미 소설, 영미 희곡) 연구가 시작되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부터 영어는 미국식 영어로만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교육되었다. 1960년대 이후 최초의 공인 영어 시험으로 TOEFL과 TOEIC이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1980년대에는 일제 시대식 문법 중심 교육 (문법 번역식 교수법)에서 독해/회화/듣기 중심 교육 (청각 구두식 교수법)으로 바뀌었다. 1983년에는 중, 고등학교 시험에 영어 듣기평가가 도입되고 1984년에는 학력고사에도 듣기 평가가 도입되어 수능으로까지 이어졌다. 1997년부터는 기존 중학교 1학년부터 배우던 영어 교과 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우도록 확대하였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영어몰입교육과 영어 공용화 논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TEPS는 물론 토종 영어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TOSEL까지 개발하였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 대학에서는 영문학이나 영어 교육 전공이 아닌 교수들도 영어로 강의하게 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대학에서 영어를 교양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최소 2학기에서 최대 8학기까지 이수하게 하고 있다. 카투사나 영어 통역병과 같이 지원 시 영어 공인 점수를 요구하는 병과도 있다. 교수법은 조선 시대에는 직접식 교수법으로, 일제 때는 문법 번역식 교수법으로, 현대에는 일부가 문법 번역식 교수법을 따르고 일부는 청각 구두식 교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고등 학교의 경우 영어 관련 교과목 수는 6개이다. (영어 I, 영어 II, 실용 영어 회화, 심화 영어 회화, 영어 독해와 작문, 심화 영어 독해와 작문) 현재 일부 학교에서는 원어민 교사 를 채용하여 청각 구두식 교수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이 구사하는 영어의 억양은 대개 캘리포니아 억양 혹은 이에 기반한 한국식이고, 그 다음이 표준 미국식 억양이다. 영국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다만 워킹홀리데이에 미국이 동참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가까운 미래에 한국인이 구사하는 영어는 영국식 영어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국 영어만을 교육하며, 교육 방식도 대한민국과는 달리 영국의 교과서를 사용한다. 교육 시기도 늦어서 대개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운다. 유치원 과정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 대한민국과의 큰 차이점이다. 또한 교과서에서도 김씨 일가 우상화 내용이 담겨 있고 남한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색 공간 색 공간(色空間, )은 색 표시계(color system)를 3차원으로 표현한 공간 개념이다. 색 표시계의 모든 색들은 이 색 공간에서 3차원 좌표로 나타낸다. 여기서 색 표시계(color system)란 CIERGB, CIEXYZ, CIELAB, CIELUV 등의 색 체계를 말한다. 최근 디자인 학계나 산업계에서 색채 디자인 또는 시각 디자인을 연구하거나, 카메라, 스캐너, 모니터, 컬러 프린터 등의 컬러 영상 장비 개발 및 응용 단계에서 색 공간은 정확한 색을 재현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색 디자인이나 디지털 색 처리에 기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색 공간인 CIELAB 색 공간은 먼셀 색 표시계의 기본 원리인 색의 3속성(색상, 명도, 채도)을 살림과 동시에 CIEXYZ 색 표시계의 불균등한 색 공간을 개선하기 위하여 개발된 것이다. 이 색 공간은 색상(hue), 명도(lightness), 채도(chroma)를 3차원 공간의 각각의 기본 축으로 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CIELAB은 CIE 1976 L*a*b*의 약식 명칭이고, CIE 1976 L*a*b*은 공식 명칭이다. 색의 3속성인 색상(hue), 명도(lightness), 채도(chroma)를 3차원 공간의 각각의 축으로 형성된 색 공간은 컬러 디자인이나 컬러 공학 등의 학문 또는 산업분야에서 컬러를 다루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개념이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등으로 구분되는 색을 나타내는 색상(hue)은 색 공간을 지구로 비유할 경우 적도 상에서 경도 즉, 색상각(hue angle)으로 표현, 0도~360도의 범위를 가지며, 시계 방향으로 변화된다. 또한 이 색 공간은 대응색(opponent color) 관계를 쉽게 나타낸다. 대응색 관계란 명도 축을 기준으로 대칭의 위치에 있는 두 색의 관계를 말하며 서로 보색 관계에 있을 나타낸다. 모든 색들의 밝고 어둠을 나타내는 명도(lightness)는 색 공간을 지구로 비유할 경우 남극과 북극을 연결하는 축으로서 남극을 검정색, 북극을 흰색으로 하며 그 사이에는 회색들로 배열된다. 모든 색들의 깨끗한 정도를 나타내는 채도(chroma, saturation)는 색 공간의 명도축을 0으로 하고 적도에 가까이 갈수록 커진다. 색 공간의 중요한 용도 가운데 하나는 색차 계산(color difference)이다. 이는 색 공간에 존재하는 두 점 즉, 두 색들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여 공학적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면 컬러 영상 분할(color image segmentation)은 CIELAB 색 공간에서 색차 계산 결과를 이용하여 CIELAB 색 공간에서 영상 분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간혹 컬러 영상 분할에 관한 연구 논문들 중에는 RGB 데이터를 바탕으로 색차 계산한 결과를 가지고 RGB 데이터로 영상분할을 한 논문들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는 치명적인 오류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컬러 영상 장비에서 다루는 RGB는 시각의 RGB가 아니고 단지 코드에 불과할 뿐 아니라 균등색 공간(uniform color space)도 아니기 때문에 공학적인 계산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색 공간의 응용에는 색감에 따른 색의 배열이나 배치(grouping)가 있다. 각종 산업 디자인에 흔히 쓰이고 있는 색감 즉, 따뜻한 색, 차가운 색 등의 배열이나 배치는 CIELAB 색 공간에서 좌표로 다룰 경우 개념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정확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CIELAB 색 공간은 CIEXYZ 색 공간으로 변환한 다음 다시 RGB나 CMY 데이터로 변환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색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RGB 색 공간은 색을 혼합하면 명도가 올라가는 가산 혼합 방식으로 색을 표현한다. RGB 가산혼합의 삼원색은 빨강(Red), 녹색(Green), 파랑(Blue)을 뜻한다. RGBA은 RGB와 동일하며, 알파(Alpha)라는 투과도를 덧붙인 것이다. RGB 색 공간은 삼원색에 해당하는 세 가지 채널의 밝기를 기준으로 색을 지정한다. RGB 색 공간은 웹 색상 표현의 기본 원리이다. CMYK 색 공간은 인쇄과정에서 쓰이는 감산 혼합 방식으로, 흰 바탕에 네 가지 잉크의 조합으로 색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색을 혼합하면 명도가 낮아지기에 감산 혼합이라고 한다. CMYK는 인쇄에 쓰이는 4가지 색은 옥색(Cyan), 자청색(Magenta), 노랑(Yellow), 검정(Black)을 뜻한다. HSV 색 공간은 색상(Hue), 채도(Saturation), 명도(value)를 기준으로 색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감산 혼합이나 가산 혼합보다 색상의 지정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시각 예술에서 자주 쓰인다. CIE는 국제 조명 위원회()를 프랑스어식으로 표기한 준말이며, CIE 색 공간이란 컬러 매칭 실험을 통하여 생성된 R, G, B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CIEXYZ 색 공간과 CIELAB 색 공간, 그리고 CIELUV 색 공간이 대표적인 색 공간이다. 여기서 CIEXYZ 색 공간은 '균등 색 공간'이 아니어서, 이를 수식적으로 변환하여 만들어진 것이 CIELAB 색 공간과 CIELUV 색 공간이며, 이 두 색 공간은 색차를 계산할 때 비교적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균등 색 공간'이란 '불균등 색 공간'의 대립 개념이며, 불균등 공간에서는 색상들을 나타내는 선, 채도들을 나타내는 선들이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배열되기 때문에 색 공간에서 두 점의 거리 즉, 색의 차이를 계산하면 정확하지 않다. 초기 색 공간은 두 개의 성분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청색광을 무시했다. 19세기 19세기(19世紀, )는 1801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이다. 19세기 동안 세계는 제국주의가 팽배하여 여러 서구 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전 시기부터 진행되어 온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19세기에 전 세계로 확대되었는데, 1884년 벨기에의 국왕이 주최한 베를린 회의에서 아프리카의 각지를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로 삼기로 결정한 아프리카 분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9세기 세계적인 제국으로는 대영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등이 있었으며, 공화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 역시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프랑스는 188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워 지금의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지역을 식민 지배하였다. 미국은 1898년 필리핀-미국 전쟁을 벌이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워털루 전쟁 종전 직후 유럽을 중심으로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확대에 따라 세계 각지의 전통적인 국가들은 몰락하였다. 아프리카에 있던 이페, 에티오피아, 만딩고 제국, 송가이 제국, 다호메이, 콩고 왕국, 모노모타바 왕국, 보르누 왕국과 같은 여러 나라들은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점차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아편 전쟁 이후 반식민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은 1853년에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매슈 페리가 이끈 미국 해군 함대인 흑선의 등장 이후 미국과 불평등 조약인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된 이후 스스로 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일본 제국을 수립하였다. 한국의 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의 순조부터 대한제국의 고종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조의 사망으로 1800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황후는 노론 벽파에 속하였으며,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당시 남인 사이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를 박해하여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순조는 1804년부터 친정을 하였으며 정순왕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노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이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비변사를 장악하여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이후 헌종, 철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19세기 조선은 지역 차별과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해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이 주요 원인이었고, 이 외에도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산으로 숨어 화전민이 되거나, 심할 경우 명화적이나 수적이 되는 일이 많았다. 조선 후기 민란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1862년 삼남지방의 임술농민항쟁은 매우 큰 사회적 충격을 가져왔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인조의 후손인 고종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의 대정봉환에 따른 국교 수립 요청과 운요호 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 채결을 즈음하여 친정을 하였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한편, 19세기는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진화의 원인으로 자연 선택을 제시하였다. 루이 파스퇴르는 1861년 《자연발생설 비판》을 출간하여 발효와 부패는 미생물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였고, 백신을 통한 전염병 예방법을 확립하였다. 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서양의 의학역시 발전하여 사망률이 감소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였다. 유럽의 인구는 19세기 동안 2억여 명에서 4억여 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맥스웰 방정식을 수립하여 전기와 자기가 동일한 현상임을 입증하고 전자기 복사를 예견하였다.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는 열역학의 여러 법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가 도입한 기브스 자유 에너지 개념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기초 과학 법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19세기에는 여러 새로운 사상이 출현하였다. 허버트 스펜서 등의 사회진화론 주장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을 왜곡하여 사회에 도입하는 적자생존 논리로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 적극 옹호하는 이론으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러디어드 키플링은 백인의 짐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서구의 제국주의가 인류 역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한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 과 《자본론》 을 출간하여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그의 사상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사회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19세기에는 오늘날에도 주목 받고 있는 많은 철학자들이 독특한 사상을 발표하였다.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이 대표적이다. 영국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 ), 약칭 브리튼() 또는 연합 왕국(聯合 王國, , U.K.) 혹은 영국(英國)은 유럽 북서부 해안의 브리튼 제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북해, 영국 해협, 아일랜드해 및 대서양에 접하여 있으며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및 아일랜드섬 북부의 북아일랜드로 네 개의 구성국이 연합해 형성한 단일 국가이다. 수도는 런던이고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수도는 각각 에든버러, 카디프, 벨파스트이다. 아일랜드섬의 영국령인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 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해외 영토까지 포함 시 스페인(영국령 지브롤터), 키프로스(아크로티리 데켈리아)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케이맨 제도, 버뮤다와 같이 해외 본토의 일부는 아니나 영국의 군주의 지배 하에 있는 영토들도 있다. 해외 영토 거주민들과 영국 본토를 비롯한 유럽 연합의 국민들은 서로의 지역에 거주할 권리가 없으며 상호간의 이민도 자유롭지 않다.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기본으로 하여 근대적 의회제도와 의원내각제를 전 세계로 전파시킨 국가이며 산업혁명의 발원지로 제일 먼저 산업화가 된 나라이자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세계 인구와 영토의 1/4을 차지한 유일의 초강대국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에 경제, 문화, 군사, 과학, 정치적인 영향을 끼치는 강대국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특히 대중 음악은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퀸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세계에 막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핵무기 보유국이고 2018년 기준으로 군사비 지출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크다. 2018년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5위였으며,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중 로열 더치 쉘, BHP 빌리튼, 보다폰, HSBC, BP,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유니레버가 영국 기업이었다. 대졸자 초임 연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5000파운드(한화 약 3,767만원)에 달한다.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며, 약칭으로 브리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영국이라 부르는 것은 연합왕국의 구성국인 잉글랜드의 한자 표기에서 나온 것으로 다른 한자 문화권에서도 수용된다. 영(英){중국어발음은 잉(병음: Yīng)}은 잉글랜드(England)의 잉(Eng-)을 음역(音譯)한 것이고, 국(國)은 랜드(-land)를 의역한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이 이름은 연합왕국 전체를 통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문맥에 따라서 여전히 잉글랜드만을 뜻하기도 하여 중의적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는 잉글랜드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잉글레스()의 음역인 이기리스( 또는 )로도 쓰인다. 잉글랜드 왕국 및 스코틀랜드 왕국은 따로 나뉜 주권자와 독립한 나라로서 그들 자신의 군주와 정치적인 구조를 가지며 9세기부터 존재해 왔다. 일단 웨일스 공국이 1284년에 러들랜 법(Statute of Rhuddlan)에 따라 잉글랜드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03년부터 왕국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는 동군연합 상태였던 잉글랜드(웨일스를 포함한)는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 1707)에서 스코틀랜드와 합병하였다. 이로써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형태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1800년 연합법(Act of Union 1800)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아일랜드 왕국을 병합시켰다. 당시 아일랜드는 리머릭 조약(Treaty of Limerick)에 따라 1541년부터 1691년까지 점차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아 가던 상태였다. 그에 따라 1801년에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성립하였다.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은 2년 전에 아일랜드 섬의 분할에 따른 결과며, 얼스터 지방(province)의 9개 주(county) 가운데 6개 주가, 1927년에 현재 이름으로 바뀐 영국령으로 남겨졌다. 영국은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정보 및 유력한 문학과 연극의 전통을 가진 계몽시대의 중요한 국가였다. 그 다음 세기 내내 영국은 문학, 예술 및 과학에 획기적으로 공헌한 의회 민주주의와 같은 서양 사상의 발전에서 주역이 되었다. 초기 대영 제국의 부는 다른 강국처럼 역시 1750년 이후에 있었던 노예무역의 산업화를 포함한 식민 착취에 의해 그 일부는 생성되었다. 18세기 영국의 노예 매매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영국 함대가 아프리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는 악명 높은 삼각무역의 일부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영국은 노예무역법을 만들어, 영원히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영국은 미국의 시카고,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뉴욕, 볼티모어, 보스턴, 워싱턴 D.C., 애틀랜타 등을 차지했다가 18세기 말에 독립시켰다. 산업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뒤에, 19세기 영국은 세계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대영 제국이 전성기일 때 영국의 영토는 지구의 약 4분의 1(1/4)까지 커졌었고, 인구도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1/4)이었다. 이는 역사에서 가장 큰 인구와 영토였다. 당시 대영 제국은 그 영토가 지구 널리 퍼져있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컬어졌다. 1910년대 후반에는 이라크까지 점령하였다. 19세기 내내 영국은 다당제의 출현과 투표권의 확장을 통해 부분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과 예술의 발달은 18세기에 이루어진 아이작 뉴턴 등의 업적을 계승하거나 부분적으로 더 오래된 문학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영국은 탁월한 강대국으로 남았고, 1921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뒤에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이 되었던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를 획득하여 최대로 넓어졌다. 전쟁에서 벗어난 뒤에 세계 최초로 거대한 국제 방송망인 BBC가 생겨났다. 영국의 노동 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확장해 왔고, 1924년에 제1차 노동당 내각이 집권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를 포함한 영국 연방과 연합하여, 그리고 나중에는 연합국과 연합하여 나치 독일과 싸웠다. 전시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그의 후임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tlee)는 3대 강국의 한 축으로 전후 세계를 계획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에 재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경제적으로 비싼 전시 대부금, 미국과 캐나다에서 1945년에 빌려준 대부금이 전후에 미국의 마셜 플랜 원조와 합쳐져서 영국은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에 영국은 세계 최초면서 가장 광범위한 의료 제도를 포함한 복지국가의 출현을 알렸고, 정부 정책의 변화는 영국 연방 도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전후 영국의 정치적 역할의 한계가 1956년 수에즈 사태에서 보여졌지만, 영어의 국제적 통용과 1960년대 영국 대중 문화의 해외 전파는 영문학이나 영국 문화가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의미했다. 1970년대의 국제 경제의 하향세와 산업 쟁의의 시대에 뒤이어 1980년대는 북해 유전의 수익과 경제발전이 있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의 지도력은 전후 정치적, 경제적 합의의 전환을 이끌었다. 이러한 경향이 1997년 부터 토니 블레어 수상의 지도 아래 계속되었다. 영국은 1973년 이후로 유럽 경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고, 1992년에는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서명하여 12개국으로 이루어진 유럽 연합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오늘날 보수당 내각의 태도는 EU에서의 몇몇권리와 자격반환으로, 노동당은 EU와의 통합으로 그리고 자유민주당은 현재 정책의 지지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였으나 현재는 브릭시트 투표로 인하여 탈퇴하였다. 북대서양과 북해 사이에 위치하며,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섬의 북동부에 자리잡은 북아일랜드로 이뤄진 섬나라이다. 서쪽으로 대서양이, 동쪽으로는 북해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의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와 인접해 있다. 남북으로는 북위 49도에서 52도(세틀랜드 제도은 62도)에 이르며 동서로는 동경 2도에서 서경 8도사이에 놓여 있다. 국토는 그레이트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의 1/6을 차지하는 북아일랜드 및 그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 몇 개의 속도군(屬島群)과 해외령을 포함한다. 맨섬과 채널 제도는 왕실속령으로서 영국 정부의 국방 및 외교 관할을 받는다.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남부 저지대로 면적은 섬 전체의 약 56.7%인 130,410km이다. 스코틀랜드는 북부 고지대로 78,789km이며, 서부 고지대인 웨일스는 20,758km, 북아일랜드는 14,160km이다. 지형적으로는 동남부의 저지와 북서부의 고지로 크게 나뉜다. 이 둘의 경계는 동부 해안 중앙부의 티스강 하구와 남부 해안의 라임만을 연결하는 선이다. 고지라고 해도 대부분은 고도 1,000m 이하의 낮은 산맥 및 구릉으로서 영국의 최고봉 벤네비스 산도 1,343m에 지나지 않는다. 고지는 지형과 지질이 다른 다음과 같은 지괴(地塊)로 나뉜다. 스코틀랜드 고지와 북아일랜드는 주로 캄브리아계의 가장 오랜 변성암으로 되어 있으며, 스코틀랜드 남부 산지, 캄브리아 산지(호수 지방) 및 웨일스는 주로 고생대 실루리아계의 변성암으로 되어 있다. 페나인 산맥과 스코틀랜드 중앙 지구대는 고생대의 석탄계와 중생대 삼첩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 석탄층이 있어 영국의 탄전(炭田)을 형성한다. 웨일스 남부와 데번 코른월 지괴는 고생대 데본계로 되어 있다.한편 저지는 잉글랜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해발 300m 이하의 낮은 구릉과 평야로 되어 있다. 구릉은 백악계와 제3계의 느리게 주름잡힌 새 지층으로 이뤄져 각지에 케스타 지형이 보인다. 영국은 제4기 홍적세에 유럽 대륙에서 뻗친 대륙 빙하에 덮여 있었으므로 산지에는 빙식(氷蝕) 지형이 많으며, 황토에 뒤덮인 황무지와 습지가 많다. 더구나 북쪽의 스코틀랜드 제도에는 피오르드 해안이 발달해 있다. 템스 강(전체길이 350km)을 비롯하여 이 나라의 하천은 모두 짧으며 또 산지도 낮으므로 하천의 충적(沖積)작용은 크지 않다. 그래서 템스강 하구부, 브리스틀 해협, 포스만 등처럼 묻혀 버린 삼각강이 많으며, 해안선은 굴곡이 많고 하천의 경사가 완만하므로 향항과 가항하천(可航河川)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위도 대륙 서해안의 해양성 기후로서 멕시코 만류(灣流)와 편서풍 때문에 위도에 비해서는 따뜻하다(1월의 기온 6∼3 °C). 그러나 겨울에는 간혹 섭씨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기도 하며 여름에는 섭씨 35도까지 오르기도 한다. 비는 서해안에는 많으나 동해안에는 적다. 또 습기가 많기 때문에 안개가 많으며 런던에서는 스모그가 1년에 90일간 생겨서 ‘안개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서부와 북부의 산간 지방에서는 1600mm 이상이지만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는 800mm 미만이다. 비는 연중 고루 내리는 편이지만 평균적으로 3월부터 6월까지가 비가 가장 적고 9월부터 1월까지가 가장 많은 시기이다. 영국의 행정 구역은 꽤 복잡하다. 우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구성 국가들로 나뉜다. 각 구성 국가마다 자체적인 행정 구역 체제가 나뉜다. 그 밖에 해외 영토(overseas territory)들과 왕실령(crown dependency)들이 존재하나, 이 지역들은 형식적으로는 영국 영토로 간주되지 않는다. 근대 의회민주주의의 발상지이며 오래간 모범적인 양당 정치를 구현해온 나라로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나라이다.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로,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의해, 군주의 권한 행사는 내각의 조언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다. 성문(成文)화된 헌법은 없으며, 정치의 기본은 전통·관례·약간의 기본법(대헌장, 인권선언, 의회법 등)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의회는 상원(The House of Lords)과 하원(The House of Commons)의 양원제로 되어 있고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상원은 약 1,190명의 의원으로, 하원은 651명의 의원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다. 상원은 최근까지 '귀족들을 위한 의회'였으나 1997년 토니 블레어 총리 집권 이후 이탈리아와 같이 직능 대표 단체로 만들기 위해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특징으로선 3대 정당제를 들 수 있다. 과거에는 보수당과 자유당이 양당 체제를 이루었으나, 1900년에 노동당이 등장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유당의 세력이 줄어들면서 대신 노동당이 크게 성장하여 3당체제가 성립되었다. 현대에는 극우 정당인 영국 국민당, 우익 정당인 영국 독립당 등이 등장했으나 기본적인 3당체제의 틀은 아직 유지되고 있다. 현재 국가원수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이다. 한편 영국은 정치학적으로 연방 국가가 아니라 단일 국가이다. 지방자치가 잘 발달되어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독자적인 의회와 행정부를 가지고 있으나, 의회주권의 원칙에 따라 최종적인 주권은 웨스트민스터의 영국 의회가 가지며 각 지방정부들은 헌법적 사항을 단독 결정할 수 없다. 2017년 6월의 영국 국회의원(하원) 총선거에서 10석 이상 확보한 정당을 순서대로 정렬했다. 영국은 의원 내각제, 즉 의회가 곧 내각이 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만 채택하여 각 선거구마다 1명만을 뽑는 'First-past-the-post'방식으로 모든 의원을 선출한다. 법상 최장 5년마다 열리는 선거에서 의석수의 과반 이상을 확보한 당이 집권당이 되며, 이들이 내각(Cabinet)을 구성한다. 야당은 예비 내각(Shadow Cabinet)을 구성하여 집권시 어떤 정책을 실시할 것인가를 국민이 미리 알 수 있어 정치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고 있다. 테리사 메이는 총선 패배 이후 여성 영국 총리로써 3년 만에 처음으로 다우닝가 10번지를 떠나게 되었다. 브렉시트 협상의 실패로 인하여 퇴임을 했으며 현재 보리스 존슨이 총리이다. 영국의 군주제(君主制)는 적어도 1,100년 전에 시작되었다.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829년 잉글랜드를 통일한 에그버트 왕의 직계 후손이다. 군주제의 역할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변화되었다. 초기 군주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는 의회와 사법부의 발달로 축소되었다. 왕과 의회의 권력 투쟁으로 1689년 제한된 입헌 군주제가 확립되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확립과 함께 19세기 말에는 정치면에서 군주의 능동적 역할이 최소화되었다. 오늘날의 군주로서 현재 왕은 국가 원수의 역할을 한다. 법적으로 왕은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반, 전군 최고 사령관, 영국 성공회(말 그대로 Church of England 곧 영국 성공회임. 그 외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교회임)의 수장(명예상의 수장으로 의회에서 제출한 성직자 후보명단에 근거하여 성직자 임명권한이 있음.)이다. 그러나 정치적 결정은 각료들이 내린다. 영국은 왕의 이름하에 왕국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이다. 왕은 상징적 중요성을 지닌 정부의 몇가지 역할을 아직 수행하고 있다. 왕은 의회를 소집, 해산하며 법안을 재가한다. 또 총리와 각료들을 포함한 주요 관리들을 공식적으로 임명한다. 왕의 임무 수행 불가능시를 대비하여 섭정을 임명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섭정은 왕의 영국의 왕세자 격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가 되며 그 다음 순위는 왕위 계승 서열에 따르지만 18세 이상이어야 한다. 왕이 부분적으로 임무 수행이 불가능해지거나 해외 여행으로 부재 중인 경우에는 왕의 어떤 임무를 임시 섭정들(국왕의 배우자-현재는 여왕의 남편인 에딘버러 공-, 그 다음 왕위 계승 서열이 되는 4명의 성인(成人)들, 국왕의 모후)에게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 섭정들은 의회를 해산시키거나 작위를 수여할 수 없다. 군주제의 한가지 특징은 공식적인 면과 비공식적인 면이 결합된다는 점이다. 전통적 의식은 아직도 중요한 일부이다.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은 국가 행사이다. 6월에 공식적으로 열리는 여왕 탄신 기념식 때 여왕 근위병의 열병식인 군기 분열식이 행해진다. 외국의 국왕이나 국가 원수가 영국을 방문하면 공식 연회가 베풀어지며 작위나 훈장 수여식은 버킹엄 궁전과 스코틀랜드 홀리루드 궁전에서 열린다. 군주제는 TV를 통해 또는 국민들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더 친근해졌으며 왕족들이 일반인들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걷는 것도 왕실의 중요한 특징이다. 매년 왕과 왕가의 구성원들은 영국 곳곳을 방문한다. 그들은 또한 많은 자선 단체들의 사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중소기업과 도시 빈민가의 자영업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프린시스 트러스트(Prince's Trust)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왕은 에딘버러 공과 함께 외국 정부를 공식 방문하며 영연방 국가들을 순시하기도 한다. 왕가의 다른 구성원들도 외국을 방문하며 이때 왕을 대신하여 방문하는 경우도 있다. 영연방은 느슨한 국가 연합이다. 53개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영국 여왕을 영연방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회원국들 중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하마, 바베이도스 등 다수 국가들의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은 2년마다 열리는 영연방 정부 수반 회의에 참석하며 각국의 국가 수반으로 총독과 사적인 대화를 갖는다. 224,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차 420대, 전술기 1,663대, 군함 99척 등을 보유하여 세계 5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핵 보유 국가이기도 하다. 영국은 세계 3위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또한 항공모함 1척, 이지스함 3척 등을 보유하여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 잠수함들도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함께 유일하게 토마호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영국은 육군 전력이 많이 약한 상태이다. 또한 해군 전력도 추가로 항공모함을 건조 중이다. 헌법에 의하여 1960년부터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2차 대전 후부터 1960년까지 평시 징병제가 시행된 적이 있었는데, 영국인들은 이를 'National Service'로 부르고 있다. 영국은 예로부터 해군이 강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공군인 Royal Air Force와 해군인 Royal Navy가 잘 알려져 있다. 근대국가의 출현과 동시에 징병제를 도입한 유럽 대륙과 다르게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트라팔가 해전 당시 영국 해군은 모집군이었지만 프랑스군은 징집병으로 구성되었었다. 이와 같은 경험 때문에 영국의 부속령 국가 및 옛 식민지 상당수는 징병제를 실시한 적이 없거나 그 경험이 상대적으로 일천한 편이다. 최근 '범죄자를 이라크로 보내자(send criminals to Iraq)' 등 일부에서 징병제 부활을 논의하고는 있지만(가끔은 유희적으로) 범죄자 등에 대한 훈육차원에서 논의될 뿐이며, 이 징병제 관련 논의가 진지하게 정치적으로 문제제기된 바는 없다. 세계 5위의 군사력이며 전략 원자력 잠수함들을 보유하고 있다. 핵 전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스키점프대 형태의 HMS 일러스트리어스 한척을 운용중이다. 함재기로 수직이착륙 기능의 시 해리어를 운용했으나 지금은 모두 퇴역시키고 각종 헬기위주의 항공단이 구성됐다. 또 차기 항공모함 2척을 건조 중이다. 무인항공기 항공모함 UXV가 2020년에 실전배치된다. 영국군은 국방개혁, SDSR (전략적 국방안보 검토서)에 의해, 조직개편을 하고 있다. 영국 신속대응군의 핵심전력인 영국 해병대는 현 영국 국방개혁을 통해 조직편성과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 소폭으로 병력이 증가했으며, 장비와 편성이 개편되고 있다. 냉전체계 이후 안보환경 변화와 국가 재정 위기에 직면한 영국은 국방비 삭감을 결정한다. 이를 위해 현 국방력과 미래 안보환경 등을 전면 재검토하여 삭감, 퇴역 장비, 도입 장비 등을 새로 결정하게 된다. 이에 총리실 주재하, 5개월간의 검토기간으로 2010월 10월, SDSR(전략적 국방 안보 검토서 : Strategic Defence Security Review)이 발표된다. SDSR은 신안보 위협을 등급별로 분류하고, 사이버전, 테러 등과 같은 우선순위 위협에 대한 자원을 더 배분하는 대신 대규모 재래전에 소요되는 장비(기갑, 전투기, 함정, 대형장비 등) 등을 퇴역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SDSR을 바탕으로하는 현 영국군 국방개혁은 영국군 장군들의 반발과 국민 찬반 논란 속에 진행되고 있다. 현재 영국은 부분 징병제 국가이다. 버뮤다 지역 시민을 징집하며, 영국 왕실과 이에 속한 귀족들인 왕실의 친.외가 친인척들의 남.여들은 영국군 장교로 복무하도록 영국 병역법에 규정되어 있다. 영국은 UN 안보리의 상임 이사국이며, G8과 나토, EU의 회원국이다. 2016년 6월 24일 영국은 국민투표를 실시해 EU를 탈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다른 유럽 나라들과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영국은 1973년 유럽 경제 공동체 회원국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에 있다. 미국과 유럽 외 영국은 영국 연방, 아일랜드 그 밖에 영어 사용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 영국의 세계적인 존재와 영향력은 무역관계와 군사력 때문에 더 증폭되는데, 전 세계에 80여개의 군사 기지와 기타 파견군을 유지하고 있다. 중세 이후로,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국인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프랑스가 앙탕트 코르디알() 정책을 펴면서, 러일 전쟁 이후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영국과 미국의 관계는 대략 400년 정도 소급된다. 1607년 영국은 "제임스타운"이라고 명명된 북미 대륙 최초의 상주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오늘날 영국과 미국은 가까운 군사적 동맹체다. 양국은 문화적으로 유사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연구와 정보 기구를 공유한다.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트라이던트 미사일과 같은 무기를 구입했고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해리어(Harrier)와 같은 장비를 구매했다. 또한 영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총리와 미국의 대통령은 매우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령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 및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 간의 관계, 1980년대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등의 관계가 그러하다. 현재 영국의 정책은 혈맹 미국과의 관계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2자간 관계"임을 표명한다. 영국은 1883년 처음으로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후, 한국 전쟁에 임하여 참전 16개국 중의 하나로서 군사·경제지원 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공헌이 지대했을 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기타 많은 국제기구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한국의 지위향상·보전 및 우호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계속한 나라다. 한국에 있어서 영국은 프랑스와 더불어 한국의 대서구제국 관계사에서 중추적인 존재이며, 적어도 전통적으로 대서구 외교전개의 2대 거점국이자 우방국이다. 1883년 우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영국과 조선에 각각 영사 또는 공사를 파견하였다가, 일본에 의하여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1949년에 양국은 재수교하였다. 한편 영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외교관계가 있다. 1999년 4월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영 수교 116년 만에 국가 원수로써 최초로 방한하였으며, 2004년 1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영국을 최초로 국빈 방문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영국에서 선수로 뛰는 축구 선수들이 많은데, 박지성을 시작으로 이청용, 기성용, 손흥민 등의 축구 선수들이 영국의 프로 축구 팀에서 뛰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이 매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논스톱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 영국항공도 인천국제공항과 런던 히드로 공항을 연결하는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영국의 일부 학교에서는 한국어 수업이 개설되었다. 영국은 1715년, 청나라로부터 상관 설치를 허락받으며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청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영국에 차,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영국은 청나라에 인도산 상아, 모직물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1840년, 청나라가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해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고, 1860년에는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북경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 중국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군과 함께 싸워 승전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화민국과 연합국측에서 같이 싸웠으며, 국교가 수립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1950년 중화민국과 단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그리고 1997년, 영국은 난징 조약에서 떼어간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였다. 태국은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라마 5세 출라롱콘대왕(재위: 1868년~1910년)은 쇄국제도를 풀고 개국하여 1855년 영국과 통상우호조약을 맺었다. 태국은 영국에게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말레이 반도의 크다(Kedah), 프를리스(Perlis), 트렝가누(Terengganu), 클란탄(Kelantan) 을 할양하여야 했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크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 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뚠(Satun) 주가 태국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된 적이 있으나, 종전 후 원상복귀되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오울드 얼라이언스(Auld Alliance)를 통해 중세 말에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중세 이후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국인 경우가 많았으나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17세기말,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5대 강국에 속했고 이들 5대 강국이 유지하고 있었던 세력균형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유럽 전체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유럽에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 정책을 펴면서, 러일 전쟁 이후 프랑스는 영국 및 러시아와 동맹(삼국 협상)을 맺게 된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버렸다는 인식도 있으나, 양국은 현재까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관계에서는 보조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유럽 연합의 미래에 대한 것은 양국간의 해묵은 논쟁 거리이다. 샤를 드 골 대통령 치세의 프랑스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여러 번 반대하였다. 드 골은 영국이 유럽 이외의 지역 특히 미국과 지나친 동맹 관계라는 점을 내세웠다.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한 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유럽 경제 공동체의 분담금을 줄이는 데 노력하고 이를 얻어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프랑스의 경제 정책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낸 바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식스 네이션스에 참가하고 있다. 크림 반도에서 일어난 크림 전쟁 때에는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현재에는 조금씩 양호적으로 풀리고 있으며, 수교는 1992년경에 실시하였다. 영국과 폴란드는 15세기부터 교류가 시작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때 주요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현재 영국에는 많은 폴란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영국은 19세기 중반, 인도의 무굴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게 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여왕 직위와 인도 황제의 직위에 앉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에 소금채취 금지법 등 부당한 법제도를 제정하여 인도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오늘날 인도의 영웅이라고 추상되는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이다. 그 결과 인도는 1947년, 독립하였고 영국과 우호 조약을 맺어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흔히 이베리아족으로 지칭되는 대서양 연안 구석기 인들이 최초로 영국에 정착한 제민족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대륙으로부터 선진 기술을 지닌 켈트족이 정착하며 선주민과의 혼혈이 이뤄졌고 그레이트브리튼섬의 켈트화가 진행되었다. 로마 제국의 브리튼 정복 이후 소수의 로마인들이 건너왔다. 로마의 행정과 군사 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한 5~6세기 경부터 라인 강 하류, 플랑드르, 윌란반도에서 게르만 민족의 일파(一派)인 앵글인, 색슨인, 유트인 등이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침략했다. 초기 이들 민족은 선주민과의 혼혈을 엄격히 금지했던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 혼혈이 진행되어 오늘날 영국인이 형성되었다. 바이킹이 선주민을 거의 대체했다는 주장이 오랫 동안 믿어져 왔지만 근래 분자생물학적,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바이킹 이주민의 숫자가 선주민을 대체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근래에는 구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시아 (인도, 파키스탄)와 카리브해, 아프리카 (특히 가나, 나이지리아 등 서부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에서 온 주민도 소수로 존재한다. 영어가 쓰이고 있다. 그 외에 웨일스어, 스코트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얼스터 스코트어, 아일랜드어, 콘월어가 소수에 의해 쓰이고 있다. 종교를 가진 국민의 대다수가 기독교도이고, 국교는 잉글랜드 성공회이다. 종교별 분포도는 다음과 같다. 1936년 11월 2일 BBC 텔레비전 서비스 (現 BBC One)이 개국하고, 이후 1955년에 ITV가 개국함으로써 경쟁 체제로 돌입했고, 이후 BBC Two에서 1967년 유럽최초의 컬러 방송 실시를 거쳐서 현재 영국 방송은 공영 방송인 BBC와 ITV, 채널 4, 채널 5 등의 지상파 방송국, BskyB의 위성 방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BBC는 국민으로부터 시청료를 받는 대신 광고를 보내지 않고 있다. 그 외 방송국에서는 광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영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스포츠는 축구, 럭비, 크리켓, 골프, 테니스 등이다. 영국은 "축구 종가"라는 별칭 그대로 축구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영국은 월드컵 예선이나 본선, 국가대표 경기, 청소년대표 경기 때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나눠 출전한다. 현재 영국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를 포함해 2부 리그인 잉글랜드 챔피언쉽 리그 등 7부의 실업 축구 승강제를 택하고 있으며 구단을 제외하지 않은 아마추어 축구회까지 도합 24부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영국에서 농구는 인기있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12개의 프로 팀이 영국 프로 농구인 BBL에 참가하고 있다. 중세시대부터 전통을 가진 옥스퍼드 대학교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의무교육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11년이며(1972년 이후) 한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12, 13학년의 경우는 의무는 아니지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매주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게 된다. 대학 교육은 스코틀랜드는 전액 무상이나 잉글랜드를 포함한 나머지 국가들은 연간 9000파운드에 달한다. 다만 무이자 대출을 받을 수 있으며 연봉이 21000파운드 이하일 경우 갚게 될 의무가 없고, 이상일 경우 소득의 9%를 매년 납부하게 된다. 대학과정은 대부분 3년 과정이며 대학원 석사 과정은 2종류로 학습 과정과 연구 과정으로 각 1년씩이다. 박사과정은 대체로 3년 과정이나 실제 박사취득은 4년-5년이 걸린다. 일부 대학은 경영학 석사 과정과 같은 특성화 과정을 2년제로 운영하기도 한다. 대학의 학기는 우리나라의 연간 2학기제와 달리 연간 3학기제로 운영된다. 옥스퍼드 대학교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같은 대학교는 대체적으로 대학 즉 단과대학의 연합체이다. 대학교를 대표하는 총장이 있으나 실제 대학교의 운영은 단과대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단과대학들은 각자 독자적인 학생 모집과 학과목을 운영하며, 같은 학과가 여러 단과대학에 있기도 하다. 단과대학의 연합으로 운영해야 하는 과정에 대해서만 공동과정을 진행한다. 일례로 옥스퍼드 대학교는 "경영대학원"이 있으나 이는 공동 과정으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단과대학에서 일종의 파견으로 와서 서로 다른 단과대학 소속이다. 이 나라는 다른 여러 나라에 앞서서 산업혁명을 성취하여 오랫동안 세계 경제에 군림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의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1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에 있어서의 지위는 차차 저하했다. 해외 투자로부터의 수입으로 경제의 안정을 꾀했으나 2차대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고 재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비롯한 계획경제의 도입으로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여 복지 국가의 실현을 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경제 체제이다. 그러나 높은 고용수준을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국제 수지의 악화, 대내적으로는 코스트 인플레이션에 의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1961년부터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신청했으나 프랑스의 거부로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1971년 6월 마침내 수출입정책 및 파운드화(貨) 문제에 매듭을 짓고 영·불 양국간에 최종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1973년 1월부터 정식 가입(경과기간 5년을 계산하면 실질적인 가입은 1978년부터가 됨)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농산물을 자급자족했으나 신대륙에서 수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축산과 원예 작물에 중점을 두게 되어 식량의 절반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수확량(收穫量)으로는 감자·사탕무·귀리 등이 많으나 금액으로는 축산물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비율이 높은 지방은 동부의 앵글리아·켄트·링컨셔 등이고, 잉글랜드 중앙부와 북부,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는 목초지의 비율이 크다.수산업은 북해와 아이리시해(海)를 중심으로 한 근해 어업과 아일랜드, 그린란드, 노르웨이 북해안 등지의 원양어업으로 나뉜다. 1995년의 어획고는 242만 2,000 t에 달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주요 산업의 하나로 되어 어업 종사자는 2만 2,000명이며, 이 밖에 계절적으로 약 6,000명이 종사하고 있다. 2차대전 후 기계공업과 화학공업이 발전하여 전통을 지닌 목면공업이 저하했다. 1955년에 철광생산은 449만 t, 선철 1,213만 t, 조강 2,150만 t 등이다. 대표적인 공업지역인 런던의 남동부지역은 기계(機械)·금속·보석·고무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랭커셔 지역은 면업 대신에 기계공업이 발달하였고, 요크셔 지역은 현재도 양모공업의 중심지이다. 남웨일스, 잉글랜드 북동, 스코틀랜드 중앙 지역은 철강·금속·조선 등이 발달했다. 석탄업이나 전력사업, 가스사업 등 에너지관리는 국유화되어 있다. 석유는 1990년 정제량이 6억7,900만 배럴이었다. 1967년 발견된 북해유전은 1975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개시하였는데, 매장량은 약 30억t 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천연가스의 매장량도 무시할 수 없어 자원이 부족한 영국의 에너지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 자원은 결핍되었으나 생활수준이 높으므로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종래 영연방 국가와의 교역이 많았으나, 1973년 EC 가입 후 유럽 국가와의 무역 비중이 높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은 미국 다음 가는 수출국이었으나 전쟁 후 서독 등의 부상으로 영국이 세계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줄어들어 EU 국가 내에서도 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에 이어 5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2009년에는 수출액이 세계 9위로까지 추락하였고, 계속해서 영국의 수출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저하되고 있다. 주요 수입품목은 기계·자동차·항공기이다. 수입액은 수출액을 훨씬 초과하여 무역적자가 계속되고 있으며, 금액에서 식료와 원료가 70%를 차지하고 밀·설탕·옥수수·육류·석유·알루미늄·목재·양모·면화 등이 중요한 수입품목이다. 파운드화는 과거에 기축통화였지만 대영제국의 쇠퇴와 함께 그 지위는 미국에게 물려주었다. 현재 미국 달러와 유로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외환 보유액을 자랑한다. 1파운드는 100펜스이다. 영국의 고소득자 소득세율은 약 50%다. 한국 돈으로 연간 2억원 이상인 소득자부터 적용된다. 해운국으로서의 지위는 대전 전에 비하면 크게 후퇴했으나 보유 선박은 3,292만 t(1976)으로서 세계 제3위를 차지하며 세계 해운 시장의 일대 중심지로 되어 있다. 런던을 비롯하여 사우댐프턴·리버풀·맨체스터·글래스고 등이 대표적인 항구이며, 템스강 하구, 클라이드 강구, 맨체스터 운하에는 10만 t급 탱커를 넣는 터미널이 완성되어 있다. 철도의 총연장은 약 2만km로서 세계 제2의 밀도(密度)이다. 1947년 이후 국유화했으나, 철도 발상지인 만큼 낡은 시설이 많은 데다가 자동차의 보급으로 큰 결손이 누적되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화 계획을 실시하였으나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다. 도로 연장은 약 36만 6,000km로서 거의 포장이 되어 있다. 간선도로는 운수성(運輸省) 직할로 운영되며, 그 밖의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고 있다. 항공은 원월드의 주축 항공사 영국항공과, 저비용 항공사의 대표주자인 이지젯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버진 애틀랜틱 항공 등 유수의 항공사가 존재한다.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은 세계 3위이자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이기도 하다. 우편물의 항공수송 서비스도 발달되어 있다. 한편 다년간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던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유러터널(영국해협터널)은 1994년 5월 개통되었다. 영국의 국가는 《하느님 여왕을 지켜주소서》이다. 이외에 비 공식 국가로 《룰 브리타니아》 등이 있다. 영국의 군주 목록 영국의 군주 목록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부터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의 군주들을 다루고 있다. 1603년 잉글랜드 왕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아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때부터 1707년까지 잉글랜드의 군주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군주를 겸직했다. 그러다가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801년 연합법에 의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1922년 12월 6일 아일랜드 자유국이 독립함에 따라, 1927년 4월 12일 나라 이름을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개정하였다. 앤 여왕은 1702년 3월 8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707년 연합법이 제정됨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즉 영국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에서 1701년 왕위 결정 법이 통과되면서, 하노버 왕가가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지만, 가톨릭 신자는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170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도 하노버 왕가의 왕위 계승권을 비준하였다. 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제임스 1세(6세)의 증손녀인 팔츠의 조피의 아들인 데다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조지 1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에드워드 7세는 빅토리아의 아들이자 후계자이긴 하지만, 부친의 가문 이름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가 즉위하면서 왕가의 이름이 바뀌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영국에 반독일 감정이 커지자 1917년 왕가의 이름을 윈저로 개명하였다. 2004년 ઍઍ 한국의 산 목록 한국은 지형학상 산지가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저의 차가 심하다. 대한민국의 영토인 한반도에 위치한 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이며, 남한에서는 한라산이 가장 높다(남한 내륙에서는 지리산이 가장 높다). 산의 고도는 90% 이상이 2000미터 미만이다. KOSIS의 국가통계포털 국토지리정보현황 자료에 의하면 남한의 산은 8751개이다. 다음은 한국의 산에 관한 목록이다. 한반도는 산지 면적이 전국토의 약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높은 편은 아니다. 대부분의 산지의 높이는 2,000m 이하이며, 가장 높은 백두산이 2,750m,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도 1,950m에 불과하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는 국토의 약 10%이며, 200 ~ 500m의 저산성 산지가 약 40% 이상을 차지한다. 남한 본토(내륙)에서 가장 높은 산은 지리산 천왕봉으로 높이가 1,915m 이다. 산지의 높이는 북쪽과 동쪽으로 감에 따라 높아지고 험하다. 따라서 한반도의 산지는 북쪽과 동쪽의 높은 산지와 서쪽과 남쪽의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지로 구분되며, 남서쪽으로 완만히 기울어지는 '경동성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 전반적으로 낮고 편평했으나, 단층 요곡 운동과 함께 융기 운동을 받아 현재와 같은 지형이 형성되었다. 특히 북동쪽은 융기가 크게 나타나 높고 험한 산지를 이루었다. 비교적 높은 곳에 융기 이전의 평탄한 면인 '고위 평탄면'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산이 깎이고 쌓여서 준평원이 다시 지각 운동으로 인하여 몇 차례 솟아오르며, 단단한 부분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으로 개마고원 지대에 가장 넓게 분포한다. 그리고 태백산맥의 대관령 부근과 삼척 부근을 비롯한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묘향산 유달산 · 유명산 · 유현덕산 · 유학산 · 육백산 월미산 · 월봉산 · 월아산 · 월악산 · 월여산 · 월출산 ·월경산 (장수/함양) 응복산 · 응봉산 (삼척) · 응봉산 (서울) · 응봉산 (홍천) 팔용산 한국의 산맥 한국의 산맥(韓國-山脈)은 주향에 따라서 한국 방향·중국 방향·랴오둥 방향의 산계로 나눈다. 다음은 고토 분지로에 의한 분류이다. 한국의 동굴 한국은 지형학적으로 산이 국토에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큰 까닭으로 산악 지형의 한 특징인 동굴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산맥 형성이 북쪽과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굴은 남한에서는 강원도에 밀집하여 있다. 그리고 화산에 의해 생긴 제주도에 역시 긴 동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몇몇 동굴들에서는 오늘날 한국의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아래 목록은 한국의 동굴들을 지역별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목록에 기재되지 않은 동굴도 많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한국의 강 한국의 하천은 분수령이 동해안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은 짧고 급류가 많으나, 서쪽 또는 서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완만하고 길다. 대개 하천은 노년곡과 준평원상을 흘러 경사가 극도로 완만한 평형 하천을 이루며, 오랫동안의 침식으로 중류와 하류에 침식 분지와 범람원·자연제방 등이 발달하고, 상류에는 하안단구를 이루는 곳이 많다. 계절에 따른 강수량 분포가 고르지 못하여 우량의 변화가 매우 커서 하천의 개발 이용이 곤란하며 특히 하기의 집중적인 호우로 화강암 산지에서 풍화된 토사의 유출이 많아 이것이 하저에 퇴적되어 하상을 높여 잦은 홍수를 유발한다. 대한민국에서 하천은 하천법에 의한 국가하천과 지방하천, 그리고 소하천정비법에 의한 소하천으로 구분하고 있다. 국가하천은 국토보전상 또는 대한민국 국민 경제상 중요한 하천으로, 국토교통부장관이 아래 사항 중 하나에 해당하면 국가하천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하천법 7조 2항 4호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하천은 다음 각 호의 사항을 고려하여 국토교통부 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하천이다. 지방하천은 지방의 공공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천으로서 시장 또는 도지사가 그 명칭과 구간을 지정하는 하천을 말하며, 시장 또는 도지사가 하천을 관리한다. 지방하천을 지정할 때는 국가하천과 연결될 경우 국가하천의 종점과 지방하천의 기점이 일치해야 하며, 지방하천이 다른 지방하천과 연접할 경우 연접하는 다른 지방하천의 기점과 종점이 일치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하천을 2개 이상의 명칭으로 지정할 수 없으며, 공유수면의 매립 등으로 해안선이 변경될 경우 하천의 종점이 변경된다. 만약 기존 지방하천이 국가하천으로 지정될 경우 지방하천의 효력을 잃게 된다. 소하천은 국가하천 또는 지방하천으로 지정되지 않은 하천으로, 일시적이 아닌 유수(流水)가 있거나 또는 있을 것이 예상되는 구역으로서 평균 하천 폭이 2m 이상이고 시점에서 종점까지 전체길이가 500m 이상인 하천을 말한다. 소하천은 국가하천과 지방하천과 달리 하천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소하천 만을 다루는 소하천정비법을 따른다. 소하천의 지정은 특별자치도지사, 시장, 군수 또는 자치구 구청장이 할 수 있으며, 만약 기존 소하천을 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가 지방하천으로 지정할 경우 소하천의 효력을 잃게 된다. 한국의 섬 목록 한국의 섬 목록은 대한민국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섬의 목록이다. 한국의 고적지 다음은 한국의 고적지 목록이다. 한국의 명절 한국의 명절은,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베트남·일본의 명절과 겹치는 날이 많다. 한자 문화권의 다른 명절처럼 중양(重陽)에 드는 때가 많다. 양(陽)이란 수(數)에서 홀수를 가리키며, 중(重)은 수가 겹칩을 뜻한다. 이에 따라 중양(重陽)은 1월 1일 및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가리키며, 특히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이라 한다. 또한 보름달이 뜨는 날을 명절도 삼은 때도 역시 많아서 1월, 6월, 7월, 8월, 10월의 보름이 명절이다. 이와 같은 명절은 대개 보름마다 한 번씩 있는 절기(節氣)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계절에 따라 뜻깊은 날을 정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음력 1월의 설과 대보름, 음력 8월의 추석 외에는 대부분 명절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옴에 따라 생겨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한국의 명절 목록이다. 세시(歲時)가 명절과 관련을 가지기도 한다. 또한 설날과 복날, 납일을 아울러 “세시복랍”(歲時伏臘)이라고도 부른다. 명절증후군은 며느리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한다. 명절증후군의 대표적인 신체 증상으로는 소화불량, 구역감, 식욕 저하와 두통·어지러움 등의 신경계 증상 및 불안, 두근거림, 답답함, 불면, 초조, 걱정, 무기력감 등이 있다. 명절 이후에 이혼이 급증하는 현상이 있다. 가족 내의 재산 분배나 경제적 문제가 이슈가 되면 첨예한 갈등이 표출될 수도 있다. ‘결혼 언제하니?’, ‘취직은 했니?’등 친지가 무심코 던진 말도 상처가 된다. 취업난, 실직 등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더욱 과민해지고 가족 간 갈등이 증가하고 있어 명절증후군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 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 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셔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철학·기하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를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일종의 귀신에 포함됨)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한 개인윤리 타락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 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론은 그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후 '스토아학파'에 의해 계승됐으며, 기독교의 윤리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기독교 윤리관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만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 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기에 이는 진의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知)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 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적어도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은 동아시아에 있는 공화국이다. 줄여서 중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베이징(北京)이고, 최대 도시는 상하이(上海)이다. 주요 도시로는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난징, 시안, 푸저우, 칭다오, 톈진, 옌타이, 항저우, 란저우, 쑤저우 등이 있다. 1949년 10월 1일 국공 내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중심인 마오쩌둥이 승리하여 건국되었고 초대 국가주석이 되었다,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의 일당제로 통치되고 있으며, 건국 이후 크게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과 수많은 국가적 피해와 민간인 피해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 문화대혁명 등이 벌어지고,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중국이었으나, 덩샤오핑의 지도로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현재 국내 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2위 규모이다. 국명의 약칭은 중국()이고 미화해서 중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밖에도 국외에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공은 본래 중국 공산당의 약칭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서 중국 공산당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건국 초기에는 1949년 이전의 시대를 구중국(舊中國),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를 신중국(新中國)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하였다.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분단국가로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의 합법 정부는 자국임을 표방하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황하 문명 이래 중국 대륙에서는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그리고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반복해 왔다. 그리고 북방 이민족에 침략되어 지배받는 역사도 매우 길었다. 한나라 때 중국인인 한족의 기틀을 세웠지만 선비족이 북조를 세우면서 외국 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선비족들이 중국 각지를 지배하면서 이주하면서 지배층이던 선비족과 피지배층의 중국인 한족들이 혼혈화가 진행되었다.송나라 때에는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많은 몽골인들이 지배층으로서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명나라를 건국하지만 만주족이 중국인들을 유린하고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의 중국인들의 혼혈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 제1차 아편 전쟁과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대영 제국에 패배하였고 서양 열강과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조계지를 설치하였고 중국 대륙은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홍콩은 대영 제국에 넘어갔으며 마카오는 포르투갈에 넘어갔다. 청나라의 무능에 반발하여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피지배층이던 한족의 농민들과 노비들이 양무 운동과 변법 자강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으나 청나라와 열강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한편 서태후 등 보수파의 사주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그 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국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각지의 군벌에 의한 내전으로 중화민국은 분열되었다. 또한 1930년대에는 국공 내전(중국에서는 보통 “해방 전쟁”이라 칭함)과 중일 전쟁(중국에서는 보통 “항일전쟁”이라 칭함)이 발발하여 중국 각지가 전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 정부가 2개 이상인 때에도 있었다. 그 후 중일 전쟁 중에 세력을 늘려 온 중국 공산당이 1945년의 일본(日本) 패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매년 10월 1일을 국경절(건국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한편 내전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의 총통 장제스정권은 타이완섬으로 도피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2년 8월 24일에는 중화민국이 대한민국과 단교되면서 아시아계 수교국을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기고 완전히 고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는 국가 지도자의 지도 이론이나 정책 등에 따라 마오쩌둥 시대(1949년~1978년), 화궈펑 시대(1978년~1979년), 덩샤오핑 시대(1979년~1997년)와 같이 3개 시대로 분류할 수 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의 천안문(톈안먼, 天安門) 광장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 날을 궈칭제라고 한다. 그해 마오쩌둥(모택동)는 “5억 중국 인민이 분연히 일어나 혁명을 이룬 만큼 국가 건설의 과제를 달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은 이른 시일 내에 온전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된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추진하면서 인민공사(人民公社)와 전국적인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을 실시했다. 그러나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행된 급진적이고 무모한 정책 운용은, 농촌부의 황폐화로 인해 식량난과 대량의 아사자를 발생시키며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경제를 재건할 방법으로 마오쩌둥과 류샤오치가 대립하였고, 마오쩌둥은 권력 탈환을 위해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켰다. 혁명 중 마오쩌둥으로부터 “반혁명파”라고 규정된 많은 사람이 탄압당하거나 학살당하여, 국내는 일시 내란 상태가 되었다. 또 불상 등의 중국 각지의 귀중한 전통 문화재도 “반혁명”적인 존재로서 파괴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고, 일단 화궈펑(華國鋒)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실권을 잡았다. 한편 당시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는 문화 대혁명의 반 전통적인 면을 비판하였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의 문맹률은 80%에 달하였다. 즉 5명 중 글을 아는 사람은 1명밖에 없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중국의 문맹률이 높은 이유를 어려운 한자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한자를 간략화한 간체자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후부터 당시 초강대국이였던 소련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영향력에서부터 자유롭게 미국과 서방 세력에 개방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를 견지함과 동시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진행했다. 실제로 덩샤오핑은 프랑스 유학 시절 르노자동차에서 근무함으로써 서유럽의 시장 경제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할 만큼 경제가 급발전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급격한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의 확대와 환경 파괴가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중국은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위협하는 활동이나 중국의 분열을 촉진할 수 있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이는 1989년 톈안먼 사건 진압과 2005년 반분열국가법 성립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2009년 건국 60주년, 2011년 신해혁명 100주년을 맞으면서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을 중국의 민족 지도자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2010년에는 중국의 류샤오보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1 km²이며 2015년 11월4일 러시아로부터 아편전쟁 시기 러시아에 할양했던 4.7km의 영토를 반환받아 중화인민공화국의 면적은 9596.965.7 km²로 확장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 있다. 국경은 총 22,117km로, 국경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이다. 북동쪽으로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 북한), 북쪽으로 러시아, 몽골,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남아시아의 네팔, 부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파키스탄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의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과 접한다. 해상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 동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과 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상당히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므로 지방마다 기후 등 지리 특색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지형은 서고동저(西高東低)로 동쪽에는 화베이 평원()과 둥베이 평원() 등의 평지가 있고, 서쪽에는 티베트 고원(), 톈산 산맥() 등의 험준한 산지가 많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곳은 티베트 자치구에 위치한 에베레스트 산(주무랑마 봉)으로 높이는 8,850m이다. 가장 낮은 곳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위치한 투르판 분지()로 높이는 -154m이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에는 정당·정파·인민해방군·기타 개인 등으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탄생시킨 모체로서 국가권력기관의 핵심을 이루었으나 사실상 공산당의 절대우위가 인정되었고 1954년 이후에는 공산당이 정치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949년 '공동강령'(임시 헌법)의 채택 이래 1982년까지 4차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국가권력기관·인민해방군에 대한 권력구조 조정작업이 수반되었다. 헌법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이고, 현재 국가주석은 시진핑이다.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이나 국가주석은 군통수권도 없고 요직을 겸할 수도 없는 의전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으며 전인대 역시 공산당이 우위에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총서기·정치국·군사위원회 주석)에 정치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3권 분립을 특징으로 하는 서구의 정치와 달리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사법과 행정을 감독하도록 하는 민주집중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에 의한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이다(혹은 일당 집권, 다당 협상 체제라 일컫는다). 그 외에 8개의 정당(‘민주제당파(民主諸黨派)’라 부름)이 존재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따르고 있으므로 사실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한다. 다만 2017년 민주주의 지수 기준으로 공산당원 추천하에는 선거의무가 마지막으로 생겼다(기존0에서 0.07상승) 형식적으로는 최고 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에 권력이 집중되는 민주집중제를 취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서구의 의회에 상당하는 기구로 32개의 성, 자치구, 직할시, 홍콩 특구 및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되는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의 개정과 헌법 실시, 감독 및 기본 법률을 제정, 개정하며 국가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하고, 국가 경제, 사회 발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심의, 비준한다. 산하의 상무위원회가 소집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중국의 인민대표는 18세 이상의 중국 공민에 의하여 선출되는데, 향과 현2급의 인민대표는 직접선거를 거쳐 선출되지만, 그 상위의 대표들은 간접으로 선출된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들은 성급인민대표들의 선거로 선출된다. 국가 주석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으로 2회를 초과하여 연임할 수 없다. 국가주석은 국내외에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며, 법률을 공포하고,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부장, 각 위원회 주임, 국무원 비서장을 임명한다. 하지만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헌법에 국가주석 임기를 폐지하고 개헌하게 되면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장기집권하게 된다 총리가 수장인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회의의 집행기관으로 법률에 근거한 행정법규 및 명령을 제정, 공포한다. 인민 경제, 사회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한다. 인민검찰원은 중국 최고 검찰기관으로 지방의 각급 인민검찰원과 전국인민검찰원의 활동을 지도한다.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상무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실제로 국정을 움직이는 것은 ‘당(黨)’이며, 당의 최고 지도집단인 정치국이 있고 정치국안에 상설집행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政治局常務委員會)가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이다. 중국공산당은 중앙뿐만 아니라 말단 행정기구까지 장악한다. 말단행정기구 역시 중앙과 같은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각급 지방 행정기구는 해당 지역 공산당 서기가 실력자이며 공산당 부서기인 장이 행정을 관리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민주화 요구도 확대되어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거의 없지만, 국외에서는 미국의 화교 매체인 대기원시보가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사설 ‘구평공산당(九評共産黨)’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2010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7년 영국에서 반환받은 홍콩과 1999년 포르투갈에서 반환받은 마카오는 고도의 자치권을 가진다. 입법부의 일부 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이 자치권은 일국양제라 불리는데 홍콩인들과 마카오인들은 리보실종사건 등의 발생을 보며 지켜지지 않는 일국양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현재 홍콩같은 경우는 독립을 주장하는 본토주의가 유행할 정도이다. 타이완은 청나라 때 중국의 영토였다가, 일본과 청·일전쟁에서 진 후, 센카쿠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와 타이완반도를 일본에 넘겨줬다가 나중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패망하자, 중국영토에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49년까지 중국 공산당을 이끄는 모택동(마오쩌둥)과 중국 국민당을 이끄는 장제스(한국명:장개석)두 세력이 국공내전을 하다가 국민당을 이끄는 장제스가 패하여 타이완반도로 내려와 중화민국인 대만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1949년 10월 건국하여 정식국가로 인정받았으나, 세계 여러나라들과 중국, 한국 등은 장제스가 타이완 섬에 세운 중화민국을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타이완도 원래 중국영토라고 중국정부는 하나의 중국, 중화사상을 내세워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독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본토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하면서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의 각각의 정부는 여전히 분쟁 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행정기관은 국무원으로 즉 중앙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내정, 외교, 재정, 경제, 문화, 교육, 위생, 공공사업 등 행정사무를 조직하고 관리하여 행정결정과 명령을 반포하고, 전국 지방 각급 국가행정기관의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국무원은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위원회 주임, 각부부장, 심계서 계장, 비서장으로 구성된다. 현재 28의 부서로 조직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22개의 성(省),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3개의 특별행정구()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홍콩, 마카오,타이완를 제외한 지역을 중국 대륙(; 중국 본토)으로 칭한다. 아래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통치하에 있는 지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사법 절차에서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영장 없는 자의적인 체포 등의 인권 유린이 발생하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법은 1949년 당시 초강대국이던 소련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소련 법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고, 1979년 이후 경제 현대화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 등지의 투자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되고 있다.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지배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유 경제 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이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것은 분단국가인 중화민국에 대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스스로를 "중국의 정통한 정부"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구조 하에서, 건국 당초에는 완전히 동측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의 중소 대립을 거쳐, 1964년 1월에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1979년 1월 1일부터 미국과 수교하는 등 서방 측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고, 동시에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냉전 하에 있어서 서방측 여러나라와 소련과의 대립 관계의 미묘한 밸런스의 중간에서 , "중국을 대표하는 정당한 정부는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다"라는 기정 사실을 서방측의 다수 국가로부터 확인받아 하나의 중국 정책도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원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 이후부터 경제 면에서의 민주주의인 여러 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도 가맹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92년경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한 것으로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타이완을 실효적으로 통치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UN 회원국 중 22개국(바티칸은 준회원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있고, 부탄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모두와 외교관계가 없다. 폴란드는 1949년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양국은 10월 7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중국은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天安門 廣場)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1949년 10월 1일 건국 및 선포를 하고,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때,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일에 단독으로 38선으로 돌파하여 북진통일을 할 수 있던 순간에 10월 25일, 중국 공산군(중공군)의 60만 대군이 밀고 들어오면서 인해전술과 각가지의 전술로 한국군과 UN군에게 막대한 인명, 물자 피해를 남겨주면서 전쟁의 양상이 새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이후, 중국과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방을 추진하면서, 단절되었던 민주·자본주의 국가들과 다시 수교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1992년 8월 24일자로 국교를 수교하면서 물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2015년 최근들어 일본의 아베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우익세력들이 역사교과서를 왜곡과 편찬, 과거사에 대한 부정·왜곡과 영유권 억지 주장으로 인해 중국과 한국이 서로 상호 협력하는 단계로 발전되고 있다. 북방 정책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에 비하여 그다지 매력적인 시장은 아니였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적 관계를 맺기 이전의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사람과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디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과 미국간, 북한과 일본간의 중재, 북한, 대한민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1980년대 중공민항기 사건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민간 계약은 더욱 활발해졌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명에 가까운 한민족(조선족)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조선족)들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소동이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상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억압적인 조치를 도왔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은 더욱 침묵했으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부추긴 것도 그렇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교역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서울에는 중국인 (요우커)들이 많이 오는데,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은 명동,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롯데월드 등이다.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1991년 12월 26일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소련의 막대한 영향력에서 아래에서 벋어난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서방세력 외에도 대한민국과 수교하기 이른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8월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수교와 동시에 많은 문화교류를 통해서 한류 및 중류(中流)가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2008년 4월 27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재한 중국인 및 중국인 유학생들의 폭력 사태로 인해 한국인 및 외국인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2008년 중국인 성화봉송 폭력시위 사건) 이 때문에 각국 사이에 반한·반중 감정이 생겨나는 등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중화인민공화국 수출은 1168억3783만USD, 중화인민공화국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715억7360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1의 수출, 수입국이다. 한편, 대한민국의 대(對)홍콩 수출은 252억9434만USD, 홍콩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9억4593USD(각 2010년)에 달하여, 홍콩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4위의 수출국, 제32위의 수입국이다. 양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국제결혼을 아내의 출신지 별로 볼 때,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여자가 가장 많다. 2000년 3,566건 (전체 6,945건 중 51%)에서 2008년 13,203건(전체 28,163 건 중 46.8%)으로 증가하였다. 2016년 9월 북한이 5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탄도 미사일 탑재용 소형 핵탄두를 최초로 핵폭발 실험을 하면서, 한반도 사드 배치(THAAD)가 가속화 되었다. 2016년 12월 방한한 천하이 중국 외교부 부국장은 한국 외교부의 연기 요청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입국한 뒤,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냐"며 한국의 위상을 폄훼했고, 또 "너희 정부가 사드 배치를 하면 단교 수준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2017년 1월 9일, 중국 폭격기 등 군용기 10여대가 사전 통보 없이 대한민국 제주도 남방 이어도 인근 동해상에 진입하자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가 급출격해 맞불 대응에 나섰다. 중국 군용기들이 대한민국 제주도 남방 이어도 인근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대거 기습 침범하며 동해에 진출한 것에 대해 중국 관영 매체가 중국군이 커져서 활동 영역의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반도 사드 배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중국이 러시아판 사드를 도입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북한 핵도발 대응책인 한국 사드에 보복하고 있다. 러시아가 개발한 사드 S-400은 미국의 사드와 매우 유사한 러시아판 사드이다. 대한민국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레이다망에 항공기와 탄도미사일은 물론, 스텔스 전투기까지 요격할 수 있다. 중국은 러시아판 사드 2개 포대를 도입해 2017년부터 실전 배치한다. 레이다망 사거리가 400km로 미국판 사드보다 길어서 한반도와 대만 인근에서 작전을 하는 미국 스텔스 전투기를 위협한다. 러시아판 사드가 중국 산둥반도에 배치 된다면 유사시 한반도 지역에서의 한미 군용기 활동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한반도 사드 배치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중국이 국가의 주권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판 사드를 실전 배치 한 것이다. 중국은 러시아판 사드 S-400을 1포대를 2017년에 도입할 예정이고 S-400의 중국판인 HQ-19도 자국의 기술로 개발 중이다. 중국이 대한민국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러시아판 사드를 실전 배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 핵도발 대응책인 한반도 사드 배치를 중국이 반대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인해 소원하였으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위해 서로 협력을 꾀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과거사 문제와 체제 문제 때문에 정상 수교를 맺는데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의 접근에 자극을 받은 일본 국내에서는 일-중 국교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기본적으로 대중 자세를 바꾸지 않았으나, 이윽고 자민당의 총재 선출에서 일·중 국교정상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승리하였다. 다나카 총리는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함께 1972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과 회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는 것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타이완의 중화민국과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국교 정상화에 즈음하여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는데, 일본측은 "전쟁을 통하여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서술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의 포기를 선언하였다. 2006년 10월의 아베 총리의 방중 때에, 일-중 간에는, "전략적 호혜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합의되었다. 공통의 전략적 이익에 기준을 둔 호혜관계가 그것이다. 종래, 일-중 간의 관계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전략"이라고 하는 표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하다. 양국이 "전략"이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합의한 배경에는 일-중 관계를 2국간관계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 대국적인 관점에서 구축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중 양국이 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 함께 건설적인 공헌을 할 것을 통하여, 공통 이익을 확대시키고,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다. "전략적 호혜관계"는 2007년의 원자바오 총리의 방일, 후쿠다 총리의 방중, 2008년의 후진타오 방일에서도 이어지고 있어, 중일관계의 기본축이 되고 있다. 2009년 4월에 중국 전역에서 개봉한 《난징!난징!》과 《라베일기》두 편의 전쟁영화가 극장가 흥행열풍을 주도하면서 중·일 양국의 외교관계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두 영화는 모두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삼고 있다. 1970년대 이전, 국제사회가 공산주의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놓여있다고 인식하고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오쩌둥 중심의 대외정책이 그런 상황에서 우방인 소련과의 전쟁을 막기위한 동맹정책이었다면, 마오쩌둥 사망부터 1991년 소련 붕괴 전 덩샤오핑와 장쩌민 중심의 대외정책은 국제사회가 평화의 발전 단계에 놓여있으며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독립자주 비동맹정책을 고수하는 대신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소련 붕괴 이후 기존의 군사적 위협보다 정치, 경제, 사회적 위협이 증가하자 장쩌민은 전통적 안보위협요인에만 주목하는 기존의 안보관이 아닌 신안보관을 주요 안보정책의 기조로 활용하게 되었다. 헌법상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는 국가(정부)의 군대가 아닌 당의 군대이다. 따라서 군대의 정식 명칭은 ‘중국군’이 아닌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과거에는 징병제였으나, 현재는 경제발전과 인력의 고급화로 인하여 실질적인 모병제로 운용하고 있다. 현역병이 2,285,000명이다. 전차 7,470대, 전투기 4,092대, 전함 562척을 보유하고 있다. 조만간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군사력 순위 2위의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국은 러시아의 T-72를 개량한 '99식'전차를 주전차로 사용하며, IL-28이라는 구형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다. 숫자만 많고 약하다고 무시당하던 중국인민해방군은 현대화로 해군·공군 및 사이버·위성 전력을 크게 확대하고 러시아의 쿠즈네초프 항공모함을 사들여 강력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 필리핀, 베트남 등은 국가안보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대생산국으로 특히 1949년 정부수립 후 각종 산업의 생산고가 점차 증가일로를 걸어왔다. 제2차세계대전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경제의 발전단계는 을 착수했으나 결함이 노출되어, 1979~81년의 경제조정기를 거쳐 1986~90년의 제7차 5개년계획에 이어 2010년까지 제9차 5개년계획에 들어갔다. 이들 각 시기의 특징은, 경제부흥기에는 1952년에 이미 전전의 최고생산고에 도달하여 문자 그대로 경제재건에 성공했고, 제1차 5개년 계획기(1953~57년)에는 소련의 원조로 중공업의 확충이 단행되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말기에는 (a) 중공업의 중시와 농업의 경시, (b) 중공업 편중, 경공업 경시, (c) 대규모화·기계화의 무리한 목표설정에서 오는 자금의 낭비와 국내기술의 부실, (d) 공업의 내륙편중 등의 결함이 노정되었다. 1958년에 시작된 제2차 5개년계획(대약진운동)에서, 마오쩌둥 전 주석의 정책으로 계획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경제부흥기의 미해결문제의 해결을 위해 (a) 농업과 지방공업, (b) 경공업과 중공업, (c) 중앙공업과 지방공업, (d) 대규모 공업과 소규모 공업, (e) 재래식 생산과 외래식 생산의 조화를 지향했고, 이 기간중 공업생산 증가율은 40%에 달했다. 그러나 공업발전은 내용적으로 극히 불건전하여 (a) 생산품이 품질조악으로 사용가치가 적었고, (b) 재래식 생산 방식은 원료, 노동력, 연료의 낭비를 초래했고, (c) 기술문제가 등한시되었기 때문에 사고의 발생률이 높았으며, (d) 공업부문의 균형적 발전이 저해되었다. 농촌을 현대화시키기 위해 1958년부터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소위 대약진기라는 이 시기에 이어 1959~61년에 걸친 연속적인 자연재해로 인민공사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어 농업생산은 크게 줄고 공업원료는 부족하여 경공업생산도 그 파급으로 타격을 입는 등 농·공 사이의 균형이 크게 문제가 되고 게다가 1960년 7월 국경 분쟁으로 인한 중·소대립의 악화로 소련의 공업전문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소련의 무상원조, 자재지원도 중단되어 심각한 경제위기가 찾아들었다. 그래서 1961년부터는 경제조정기가 시작되어 농업재해, 대약진의 실패, 소련의 원조중단 등에서 온 위기를 극복하는 데 노력이 집중되었다. 1961년에는 조정·공고화·충실·생산제고 등의 목표로 정책이 전환되어 공업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다. 1962년부터 농업생산이 호전하여 경제 전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순차적인 발전이 도모되어 공업의 위치가 2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공업구조 내부의 조정이 중시되었고, 농업 지원도의 재고로 공업의 내적 충실화가 모색되었다. 3차 5개년계획(1966~70년) 실시 이후 독립되고 거의 완전한 근대공업체제의 건설단계에 들어갔다. 1967년 이후 홍위병 난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종 산업, 특히 광공업 부문에서 생산이 상당히 저하했다. 중국의 산업건설의 기본방향은 농업을 기초로 하고 광공업에 선도구실을 시키려는 것인데, 1968년 이후 홍위병 난동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 생산도 다시 호전의 기미를 보였다. 결국, 국가 성립 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경제는 대약진정책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뒤떨어져 있었다. 1978년에는 경제발전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4개 현대화에 착수했으나 각종 누적된 결함이 노출되어, 1979년 조정방향이 설정되면서 본격적인 개방과 개혁정책이 추진되었다. 1980년초에는 기업의 자율화, 외국기업의 투자 보강, 금융의 자율화, 세제 도입 등의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한 후, 1984년 대규모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1985년 인플레와 과열경기현상이 나타났고, 1986년 4월 안정과 균형에 기저를 둔 지속적 성장을 목표로 한 제7차 5개년계획(1986~90년)을 채택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중화인민공화국(中)의 요청에 오랫동안 중국 경제 원조를 하였다. 이를 경제원조(援助)라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오랜 시기동안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경제원조를 받으며 경제성장을 해왔다. 덩샤오핑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제도 도입 등의 개혁 개방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여 ‘세계의 공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세계무역기구(WTO)의 발표로는, 2003년의 대 중국 직접투자는 535억 달러가 되어 미국을 제치고 실질적으로 세계 최대의 직접투자 수입국이 되었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강한 경제력 덕분에 중국 경제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 국내 노동자들은 연안부나 대도시 근교를 제외하면 지방 인민의 대다수가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동일한 정도의 빈민층이며, 농업을 할 수 없는 계절에 도시 지역에 유입되어 객지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들은 매우 저렴한 임금으로 도시 지역에서 일하기 때문에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값싼 노동력을 목적으로 미국, 서구나 대한민국·일본의 기업 진출도 번성하여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도 대한민국에 무역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경제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8.5%로 예상하였다. 다른 나라인 인도 역시 경제성장률을 6.3%로 큰 폭으로 예상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토는 신석기(新石器) 시대에 이미 경작되어 있었고, 경지도 널리 분포해 있어 각지의 토지 이용이나 농업 경영방식은 지역별 자연조건이라든가 사회환경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중국인 학자들과 함께 치밀한 현지조사를 한 로싱백은 화이허(淮河)와 친링(秦嶺)선에서 수도(水稻)지역과 소맥(小麥) 지역으로 크게 둘로 나누고, 나아가서 다시 소맥지역을 창장(長江)수도 소맥구, 쓰촨(四川)수도구, 수도·차(茶)구, 서남수도구, 수도 2기작구(二期作區)로 세분하고, 한편 북부의 소맥지대를 겨울보리·수수구, 겨울보리·조구, 봄보리구로 구분했다. 이러한 지역구분은 주변 지대로의 확대도 가능하여 동북지구를 콩·수수구로 보고 내몽골 지방과 티베트 및 칭하이(靑海) 지방을 목축구로, 타이완과 하이난섬(海南島)을 2기작구로 볼 수도 있다.종래 중화인민공화국의 농가는 주로 자급용기의 곡물과 콩 종류를 재배하고, 여력이 있으면 판매용 작물을 길렀다. 수도(벼)는 기온이 높고 강우량이 많은 화이허 이남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특히 광둥·푸젠(廣東·福建) 양성(兩省) 연해 지방은 이모작(二毛作)이 가능하다. 쌀의 총생산량은 17,825만t(1994년 기준)으로 방글라데시에 이어 세계 제2위이지만 국내소비가 많기 때문에 수출은 소량이다. 소맥(밀)은 중국본토 북부와 동부지구 북부를 중심으로 하며 화이허와 양쯔강에 연하여 평야지대에서도 제2기작으로서 재배된다. 산시(陜西), 산시(山西) 북부에서 옌산(燕山)산지 북서에 걸치는 지방에서는 기후가 한랭한 관계로 춘경보리가 재배된다. 총생산 3,200만t(1994년 기준)으로 만주, 바오즈 등을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된다. 고구마는 산둥(山東), 허베이(河北), 허난(河南)에서 재배되고 조, 수수 등은 동북과 화북의 평야 및 쓰촨(四川) 분지에서 많이 산출된다. 옥수수는 랴오둥반도, 황하 이북의 후베이(湖北)평야, 산시·산시의 남부에서 쓰촨에 걸치는 지대에서 많이 나는데 식량과 사료로 쓰인다. 콩은 둥베이 평원과 산둥 반도에서 많이 나오는데 총생산고는 약 1,212만 t이다.면화는 랴오허(遼河) 하류의 평야에서부터 후난(湖南), 쓰촨, 구이저우(貴州)의 각 성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해 있으며 허베이 평야지대, 산시·산시의 남부, 후난,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의 제성이 그 생산 중심이 되어 있다. 면화는 관개작물로 결실기의 건조한 기후가 양질의 작물을 낳는다. 가축은 돼지, 닭, 오리 외에 노력과 배료원으로서 나귀, 노새(밭농사지대), 소, 물소(수전지대), 말(초원지대) 등이 많으며 양은 식육 및 모(毛) 자원으로서 동북지구, 내몽골 지방, 신장·위구르 지방, 티베트 등 변경 지대에서 많이 사육된다. 중화인민공화국에는 고도 경제 성장의 이면에, 농업의 저생산성, 농촌의 황폐, 농민의 저소득이라는 3농 문제가 심각하여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도시와 농촌의 수입격차가 계속 확대하면서 토지 수용에 과한 쟁의도 빈발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농업생산진흥책과 농업세의 폐지 등에 열의를 보여서, 2007년 3월의 제10기 전인대 제3회 회의에서는, 물권법을 제정하여 토지사용권의 물권화를 인정하고 농촌대책비를 긴급 증편하여, 농촌의 의료와 교육에 대한 보조금의 증액을 결정하였다. 2차대전 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업 분포는 일본이 지배했던 동북지구와 함포(艦砲) 외교 아래 열강이 투자한 연해 지역·대하천 유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이 1937년에 발발하면서 국방상의 배려로 공업이 내륙지방으로 소개되고, 또 전후에는 공업의 적정재배치가 단행되어 종래의 공업 편재상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전전 동북지구의 안산 벤시후를 비롯해 허베이, 산시, 쓰촨, 후베이 등지가 중심이 되었던 제철·제강업은 전후 기간산업으로서 중요성을 더하여 우한(武漢), 바오터우(包頭) 등지에 거대한 철강공업 기지가 신설되었다. 중기계공업을 보면, 광산·야금기계가 타이위안(太原), 선양(瀋陽), 치치하얼(齊齊哈爾) 등지에서, 발전기가 상하이(上海), 하얼빈(哈爾賓) 등지에서, 그리고 정유기계가 란저우(蘭州)에서 제조되고 있다. 중형 기계공업으로는 방직기계가 유위츠(楡次), 상하이, 칭다오(靑島) 등지에서, 조선(造船)이 뤼다(旅大), 상하이 등지에서, 철도 차량이 뤼다, 치치하얼, 칭다오 등지에서 자동차가 장춘(長春), 뤄양(洛陽), 정밀기계가 상하이, 하얼빈, 샤먼(廈門), 염료·의약품이 상하이에서, 비료가 난징(南京)에서 생산되고 있다.전전(戰前)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업은 경공업 위주였는데 특히 방적업이 성한 톈진(天津), 칭다오와 면방직이 성한 상하이, 우시(無錫), 난퉁(南通) 등 양쯔강 연안의 여러 도시가 그 중심이 되어 있었다. 전후(戰後) 상하이의 면방직공장이 확충되고 면화지대인 스자좡(石家莊), 한단(邯鄲), 정저우(鄭州), 시안(西安), 셴양(咸陽), 우한(武漢), 우루무치(烏魯本齊) 등지에 대공장이 건설되는 등 내륙의 원료 산지로의 공업 진출이 활발하다.식품공업은 전전 상하이, 칭다오 등지가 중심이 되어 연초가공, 제분, 육류가공, 양조 등이 성했는데 전후에는 유류(乳類)를 가공하는 대공장이 하이라얼(海拉爾), 시닝(西寧)에, 육류가공공장이 우한(武漢)·청두(成都)에 건설되고 또 상하이로부터 이전한 방푸(蚌埠)의 일용품공업이나 뤄양(洛陽)의 제분·착유공업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동북지구는 유지·제당, 본토 북·동부는 제분·연초·유지·남부는 제당으로 각각 알려져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중국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미국 (19.01%), 홍콩(12.34%), 일본(6.06%), 한국(4.54%), 베트남(3.16%)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한국(9.63%), 일본(8.99%), 아시아(8.46%), 미국(8.38%), 중국(7.18%)으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모두 인접 아시아 국가들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263,37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843,793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변속기 장치(165,991,555.66달러), 저장 장치(89,690,331천 달러), 전자 부품(74,102,011천 달러), 반도체(68,167,379천 달러), 전화기 부품(51,057,293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반도체(260,920,122천 달러), 석유(163,820,666천 달러), 철광석,604,641천 달러), 금광석(48,740,696천 달러), 전화기 부품(41,293,629천 달러)이다. 개혁 개방 이후의 활발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농민과 도시 지역 사람들과의 소득 격차 문제가 있으며, 이는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산주의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이 빈부 격차 문제는 향후의 중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이며, 새로 출범한 후진타오 정권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농촌과 도시 지역 간의 빈부 격차 문제 해소를 논의하는 등 긴급하게 대응하고 있다. 2005년 3월의 전인대 이후, 후진타오 지도부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경제성장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 치안, 실업, 부패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생활고 및 토지수용이나 독직 등 당국에의 불만으로부터 중국 각지에서 데모와 폭동이 빈발하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의 악화를 염려하며,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중요과제로서 제기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을 확립하고, 빈부의 격차의 해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이해에도 저촉하기 때문에, 그 실현에는 곤란이 뒤따르고 있다. 1990년 빈곤율은 50%이나, 최근 많이 줄었다. 또한, 열악한 노동 환경도 개선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교통은 1949년부터, 특히 1980년대 초반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공항, 도로, 철도 건설은 2010년대에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운송 수단으로서 중요한 철도는 20세기 중반이래 2배의 길이로 늘어났고, 전국을 잇고 있다. 주요 대도시들은 전철 시스템을 운영 또는 건설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다. 고속도로와 도로 체계도 급속히 성장하였고 그 결과 중국 전역에서 자동차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중국의 교통 체계는 방대한 국토에 걸쳐 넓은 교통 교차점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나, 교차점들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발달한 해안 지대와 주요 강을 따라 발달한 도시들에 집중되어 있다. 중국 교통 기반시설의 물적 상황과 그 이용 실태는 지리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골 지역에서는 아직도 비기계적인 운송 수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반면, 상하이와 푸동 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자기부상열차도 건설되었다. 티베트의 말과 중국의 녹차를 주로 교환한 것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차마고도 (윈난 성 ~ 티베트)도 지금은 국도와 고속도로, 티베트 철도로 대체되어, 이제는 관광객들이 일부 이용할 뿐이다. 현재 중국의 교통 체계의 상당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은 현재 교통 인프라의 업그레이드를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까지, 중국의 경제는 인프라 개발 부족에 불구하고, 교통 인프라를 개발할 여력이 부족했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 정부는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물자를 수송하고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세계 은행의 1990년대 중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로 인하여 손실되는 물류량이 중국 GDP의 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물류 비용은 생산 원가의 20%로서 미국의 10%, 기타 선진국의 5%와 크게 대비된다. 중국의 항구는 수로의 이용을 위해 크게 개선되고 있으며 공항 설비도 향상되고 있다. 건설 장비, 엔지니어링, 콘테이너 보안, 전자산업, 안전 도구와 같은 교통 관련 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철도는 동북지구와 북부에 편재해 있다. 철도는 중국에 있어서 현대 운수의 근간을 이룬다. 중국 철도의 총 길이는 2009년에 86,000km로 연장되었다. 철도 밀도는 89.6km/10,000km로, 이웃한 대한민국에 비하여 0.29배에 불과하다. 여객 수송은 연간 215억명/km, 철도선은 60여개를 헤아리고, 수송량은 전수송량의 85%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도로의 적극적인 건설로 1978년에는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한 도로의 총연장이 89만km에 이르렀다. 항공 교통이 1990년대 말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철도 교통은 여전히 가장 이용객이 많은 교통 수단이다. 1990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노력으로 중국의 고속도로는 2009년 기준으로 65,000km를 넘는다. 이것은 길이 기준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자랑하는 수치이다. 1,200여개의 하천은 예로부터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고 경제적 동맥이 되어 왔으며, 특히 창 강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부터 중국에서 남선북마(南船北馬)라 일컬은 것은 창 강 수계가 차지하는 경제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수나라 때부터 화중의 농산물을 화북으로 운송할 목적으로 건설된 대운하는 현재는 국부적으로 이용될 뿐이고, 남북간의 물자 수송은 경한선·진포선 등의 철도로 하고 있다. 주 강, 쑹화 강도 주요한 하천이다. 1956년 중국의 민간항공로의 총 연장은 1만7,194km 였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평양, 하노이, 양곤, 울란바타르 등지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고 국내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항공망도 정비되어 있다. 영토가 광대한 중국에서는 항공 발전은 큰 의미를 가진다. 예컨대 철도편으로 10~15일이 소요되는 베이징 우루무치간의 거리는 항공로로 8~10시간이면 갈 수 있다. 중국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 설날, 청명, 노동절, 단오, 추석, 국경절 등에 연휴가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노는 것도 아닌 게 바로 전이나 그 다음 주말에 출근하는 대체평일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이 영토가 매우 넓은 대신 비행기 등을 이용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 적어서 연휴를 짧게 하면 고향 방문이나 여행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에 연휴를 길게 하는 대신 주말근무로 때우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거주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한족(漢族)들이다. 한족(漢族)이 중국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55개의 소수 민족들이 8%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의 특이성은 혼혈 종족이며 그 이유는 한족(漢族)들이 원주민으로서 살던 베이징, 난징, 상하이 등 한족의 도시에 수 많은 튀르크계, 몽골계 민족들이 침략해 와서 한족(漢族)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선비족, 몽골인, 만주인들의 오랜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족(漢族, 중국인)들은 사실상 몽골-만주인들의 혼혈들이다. 중국 전체의 인구는 2015년 말에 13억 5569만 명이다. 인구의 55.6%(2015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인구증가율은 0.52%(2010년~2015년)이며 199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1979년부터 인구 억제책으로서 한 부부에 한 자녀라고 하는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1자녀 가정에는 장려금, 학교에의 우선 입학 등의 혜택이 주어지나, 위반한 자에게는 반대로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다(多)자녀의 전통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강하여, 정책이 형해화된 지역도 많다. 중위 연령은 37.0세이며 2015년 노인 인구 비율이 9.55%로 고령화 사회에 해당한다.2040년경에는 65세 이상의 노령 인구가 20%에 달하고,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부는 2002년 9월 1일에 "인구와 계획 출산법"을 시행하여, 조건부로 1자녀 정책을 완화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성(省)은 서남부의 윈난 성(雲南省)으로 35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부계 중심의 가족, 확대 가족이며 조상 숭배를 강조한다. 아들의 출산을 통해 가족의 혈통을 계승하려 한다. 효도를 중시하며, 결혼은 가문의 관심사이자 대(代)를 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핵가족화 추세이나 농촌은 대가족 제도를 계속 유지한다. 연애 결혼과 중매 결혼이 공존하며, 가족 중심적이고 이혼율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보다는 낮은 편이다. 공용어는 표준 중국어(普通話)로, 중국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다. 표준 중국어는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타이완이나 국외에서 거주하는 화인(華人)들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사용자가 많은 언어가 되었다. 중국어는 여러 가지 방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북방방언(北方方言), 오어(吳語, 상하이어 등), 광둥어(廣東語), 푸젠어(福建語), 객가어(客家語)의 5개로 대별되며 그 방언들 간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중국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표준 중국어는 베이징화(北京話)의 발음을 표준음으로 하고 북방어를 기초로 하여 현대백화(現代白話, 구어)의 문장을 문법 규범으로 하고 있다. 중국어를 표기하는 한자는 총 6만 자 가량으로, 그 중 2,500자가 상용한자로 선정되어 있다. 한자 간략화 정책 때문에 중국 대륙에서는 대한민국의 한국어 한자(정자; 正字)와 다른 간체자(簡體字)가 통상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56개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나 98%는 중국인 한족(漢族)으로 소수민족의 인구는 매우 적다. 한족(漢族)의 비율이 98%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한족(漢族) 단일 민족으로 봐도 무관하나 신분증 표기에 소수민족과 한족(漢族)의 구분이 되게 표기되어 있으며 중국은 사실상 외국인의 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소수민족이 될 수 없으며 원래 살고 있던 매우 적은 인구의 소수민족들이 신분증에 표기되어 있다. 소수민족은 대부분 각 민족 언어와 북경어(표준 중국어)를 병용하지만 인구가 적어 북경어를 사용한다. 소수 민족 언어로는 좡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이 널리 쓰인다. 그중에는 극 소수의 인구인 나시족(納西族)의 동파 문자(東巴文)와 같은 표의 문자도 있다. 외국어로는 영어, 러시아어, 한국어, 일본어 등이 널리 사용되며, 1990년대 말에 반환된 홍콩, 마카오에서는 중국 대륙의 공용어인 표준 중국어뿐만 아니라 광둥어와 영어(홍콩), 포르투갈어(마카오)도 공용어로 지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국가 전체의 문맹률은 미국 CIA 조사를 따르면 약 9.1%로, 중간 이하이다. 도시 지역에서는 문맹률이 많이 낮아졌으나 티베트 자치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등 서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문맹률이 높다.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국민들의 의무 교육 기간을 초등학교 까지의 6년에서 9년(중학교까지)으로 확대하였다. 학년은 9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7월쯤 끝난다. 중국에서는 고등학교 수학에서 미적분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는 대신 복소평면과 역삼각함수를 다루고 있다. 또한 중국의 대학 입시는 가오카오라고 부르며, 고급중학(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 3학년 말인 6월 7일과 6월 8일에 치른다. 과목은 어문, 수학, 문과종합, 이과종합, 외국어. 미국 프리덤하우스는 중국의 언론 지수에 0점을 주었다. 즉 언론의 자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히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국영통신으로는 신화통신이 있다. 신화통신은 1931년에 장시 성 루이진에서 '홍색중앙통신사'로 처음 발족했고, 1934년에는 대장정에 마오쩌둥과 함께 올랐으며 1937년에는 옌안에서 '신화통신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에 이른다. 이곳은 《인민일보》, 중국중앙방송의 기사를 보내고 있다. 또 이 통신사에서 발간하는 간행물로는 《신화매일전신》, 《참고신문》, 중국신화방송 등이 있는데, 《참고신문》은 주로 공산당원이 많이 읽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신문은 《인민일보》로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이다. 이 신문은 1948년에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당보인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입장, 정책설명, 당의 공보 등을 발표하고 있으며, 영어판과 한국어 서비스를 비롯해 7개의 외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다. 이 외에 《해방군보》, 《광명일보》, 《공인일보》를 발행하며, 《중국일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일간지이다. 외국어판 신문인 《베이징타임스》는 재미있는 기사와 강렬한 천연색 사진을 편집하여 외국인과 중국인에게 많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방송은 국영방송인 중국중앙방송(CCTV)과 북경TV방송, 홍콩스타TV방송 등이 있으며, 중국중앙전시대는 원래 광고편성을 하지 않았으나, 1980년대에 광고를 시작했다. 중국정부에서는 언론을 검열하므로 BBC를 들을 수 없다. 중국 각지에서 대기오염, 수질오염, 고형 폐기물, 소음, 사막화, 산성비, 물부족 등의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1973년에 제1회 전국환경보호회의가 개최된 이래, 환경보전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시작되어, 1979년의 환경보호법(시행) 채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983년에는 환경보전을 기본 국책으로 위상을 높였다. 1988년에 환경보호법이 수정되어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업에게 벌칙이 강화된 이외에, 1997년의 형법 개정으로 자원환경파괴죄가 신설되었다. 또한 1998년의 국무원 개혁으로 1984년에 설치되었던 국가환경보호국이 국가환경보호총국으로 격상되었고, 2008년 3월에는 환경보호성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는 의연히 악화경향에 있다. 이것은 환경개선에의 기술적, 자금적인 문제도 있으나, 환경보호단체를 비영리단체로서 조직하는 것이 규제되고 있는 등, 일반시민에게 환경보전의식이 침투하기 어렵다고 하는 정치체제에 기원하는 것도 크다. 한국인 남성과 즐기기위해“명문대 여대생, 모델, 여자 공무원, 외자기업 직원 등 다양한 직업과 10대 연령대 여성들까지 제발로 매춘을 하러 온다" 라고 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은 매춘이 중국인 여성 전계층에 확산되자 섹스 산업을 근절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의 중국 여자(中国女性)들은 한국인남자(韓國人男性)사업가들에게 원조(援助)를 받으며 원조교제(援助交際)를 해왔다. 또한 한국남성(韓國男性)과 원조교제(援助交際)를 하려고 중국여성(中国女性)들이 카라오케 등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을 抗贫乏援助中国女交際战争이라고 부른다.중국에서는 한국인 남성이 VIP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한 1992년부터 많은 한국인 남성 사업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등 각지에서 사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들은 한국인 남성 전용 KTV(카라오케)에서 한국인 남성들의 접대부로서 성매매(賣春)을 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다다랐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들이 골프를 빙자로 많은 한국인 남성들과 기생관광매춘을 즐기고 있으며 상하이의 KTV에서는 한국인 남성 고객을 위해 인근 골프장까지 부킹까지 서비스를 하고 있다.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문화재가 중국 영토 곳곳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 1982년 제정된 〈공산주의 종교법〉에서 중국 정부는 인민들과의 협조를 위한 공산당원의 종교 활동을 인정하는 등 종교 활동에 대한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만 18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선교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 등 5개 제도성 종교(制度性宗教)는 각각 중국불교협회(中国佛教协会), 중국도교협회(中国道教协会), 중국이사란교협회(中国伊斯兰教协会), 중국천주교애국회(中国天主教爱国会),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中国天主教教务委员会), 중국천주교주교단(中国天主教主教团),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国基督教三自爱国运动委员会), 중국기독교협회(中国基督教协会) 등 8개 관방 종교 단체로 통합되어 있다. 중국 정부의 종교 정책은 자치(自治, 스스로 다스림), 자양(自養, 스스로 키움), 자전(自傳, 스스로 전파시킴)을 중점으로 하는 삼자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는 외세를 배격하는 자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다. 로마 교황청과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다. 2006년에는 쉬저우 교구장인 천위룽 주교가 로마 교황청과의 협의없이 천주교 주교 서품을 집전하여 교황청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 인정하는 천주교 단체는 다음 3개이다.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 인정하는 개신교 단체는 다음 2개이다. 삼자애국운동과 중국기독교협회를 중국기독교양회(中国基督教兩会)로 통칭하기도 한다. 주요 정책 발표 등이 공동의 명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양회에 속하지 않은 가정교회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가정교회는 비공인된 것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기독교양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발전한 토착적인 교리를 중요시하며, 반외세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최근엔 정부에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중국 공안부가 사교(邪教)로 지정해 탄압하는 기독교 계열 종교들이 있다. 널리 알려진 단체로는 호함파(지방교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동방번개) 등이 있다. 일부 단체는 중국내에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한민국으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법률은 외국 개신교 단체의 중국 내 선교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의 선교 단체에서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 중국 중국(, )은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서부 연안의 도서 지방을 포괄하는 지명이다. 1949년에 국공내전에서 승패가 갈리면서 두 국가로 된 이래 현재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즉 두 개의 중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엔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만을 합법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사람들마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중화민국을 지칭하는 경우보다 훨씬 많아졌고, 문맥에 따라서는 둘을 포괄하여 지칭되기도 한다. 때로는 중화권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숱하게 외국 민족들의 지배를 받았다. 한민족(韓民族)인 고구려인들은 만주 지역을 정복하여 중국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일부였었다. 몽골인과 여진족들은 중국인들에게 땅 한 푼 남겨주지 않고 중국인들을 지배하였다. 중국은 "아시아의 병자"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만큼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소련은 중국을 직접 지배하는 것 보다 소련 정부의 강력한 통제력과 지배력에 좌지우지되는 공산당을 중국에 만들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노비, 소작농 등 농민들로 이루어진 중국 공산당원들은 소련의 지지 아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된다. 미국 국무부 조사에 따르면 중국은 최악의 인신매매국가이며 중국 여성[대만 여성포함]들의 해외 성매매율은 전세계 국가중 1위의 최악의 매춘대국이다. 1990년대부터 1인당 GDP 900달러 수준의 최빈국이였던 중국은 다른 국가보단 늦었던 경제 개방으로 인해 빠른 경제 성장을 했지만 극심한 빈부격차와 물질 만능주의로 인한 중국 여성들의 매춘과 얼나이 문제 등이 중국에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내에서는 한국인 남성과 즐기기위해 중국인“명문대 여대생, 모델, 여자 공무원, 외자기업 직원 등 다양한 직업과 10대 연령대 여성들까지 제발로 매춘을 하러 온다" 라고 말한다.한국 남자들은 중국 ktv에서 술도 먹고 중국 여자도 먹고 성매매를 하고 있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에 국제결혼을 하러 온 중국 한족 여성[대만한족여성포함]들이 결혼 생활을 하며 남편 몰래 성매매를 하고 이를 중국 가족에게 송금하는 일이 있으며 한국 남자와 결혼한 중국여성들과 중국타이완 여성들이 3천명이 한 도시에서 조직적으로 매춘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중국 여자 매춘부의 인구는 4천만명에 달하며 홍콩의 여성 민간 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중국인 성매매 종사 여성은 1억명에서 4억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가난과 별개로 물질 만능주의가 퍼져 일반인 중국 여성들이 외국인 남자들의 얼나이를 자처하며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돈을 벌며 화장품과 명품등을 구입하며 외국에 유학생 또는 일을 핑계로 해외에 나아가 매춘을 하며 적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유학하는 중국 여학생들과 대만 여학생들이 노래방등에서 매춘을 하다가 적발되었는데 그 이유가 "화장품을 구입하기 위해 매춘을 한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는 차 위에 페트병을 올려 놓는 매춘 방법도 생기고 있다. 또한 중국 각지에 매춘업이 성행하고 있으며 외국인 전용 카라오케 등도 매우 많이 생겨 중국 여자들의 매춘이 성행하고 있으며 많은 중국 여성들이 해외로 나가 매춘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중국의 GDP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여러 가지 정치상 문제로 말미암아 완벽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다수의 정부가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대륙에서 타이완섬으로 건너와 세운 정권인 중화민국 모두 하나의 중국(One China) 정책을 강하게 천명하여{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이전부터 타이완에서 살던 타이완인들은 중국과의 영원한 결별을 원한다. 타이완 공화국 참고}, 자국과 수교하는 모든 국가는 중국의 다른 정부와 수교하는 것을 원칙상으로 금지한다. 예컨대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해야 했다. 유엔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승인받은 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정책을 내세워 중화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주권국을 암시하는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나 타이완의 독립을 암시하는 ‘타이완 (대만)’(Taiwan)이라는 두 가지 명칭 모두 사용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해서 중화민국은 비공식 명칭으로 국제사회에서 ‘타이완’으로 불리고거나 스스로 그렇게 부르더라도, 국제 기구에서는 반드시 묵시로 합의된 국가명인 중화 타이베이 (中華臺北)를 사용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의 국기, 중화민국의 국가를 위시한 중화민국의 상징물 사용은 하나의 중국 정책 위반이고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불법성을 띤 사용은 반분열국가법에 제재받는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타이완 지구를 자국의 영토로 간주하듯이, 제한되게 승인받았지만 국가 대부분에 ‘사실상 독립국’ (sovereign de facto) 으로 ‘간주’되는 중화민국 정부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공식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일컫는 말로 ‘중국 대륙’ 혹은 ‘본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일컫는 말로 중국 공산당 정부라는 뜻의 ‘중공정부’를 쓰는데도 양안 관계가 호전되어 본토인들이 타이완을 ‘타이완’이라고 부르며 타이완인들이 본토를 ‘중국’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자연스러워지기도 하였다. 중화민국은 1992년부터 양안 컨센서스(92共識)에 의거해 3불(三不)정책(不統, 不獨, 不武. 통일이나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한편 마카오는 세계무역기구에 중국 마카오 (Macao, China, )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국제올림픽위원회,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아시아 개발은행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소수 민족의 숫자가 50 몇 가지이지만 98%가 중국인 한족(漢族)으로 소수 민족들의 숫자는 매우 적다. 중국에 소수 민족들이 있는 이유는 여진족들이 중국인 한족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혔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허베이 성에서 쓰이는 표준 중국어인 푸퉁화(普通話) 혹은 궈위(國語)가 사용되나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도 있다. 중국어의 경우 같은 표준 중국어(푸퉁화)와 상호의사소통성이 없는 방언이 여러 가지 있다. 소수민족의 언어로는 몽골어, 좡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후이어 등이 있다. 실시간 운영 체제 실시간 운영 체제() 또는 RTOS(←) 는 실시간 응용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된 운영 체제이다. 운영 체제의 기능 중 CPU 시간 관리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되었다. 실시간 운영 체제는 프로그래머가 프로세스 우선 순위에 더 많은 제어를 할 수 있게 한다. 응용 프로그램의 우선 순위가 시스템 프로그램의 우선 순위를 넘어설 수도 있다. 시스템 코드의 임계 구역을 최소화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응용 프로그램의 처리 요청을 정해진 시간 안에 처리해 줄 수 있다. 실시간 운영체제의 핵심은 응용 프로그램 테스크 처리에 걸리는 시간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정도에 있다. 처리 시간의 변동폭은 지터("jitter")(실제 신호와 기준점과의 시간 편차)라 부른다. 경성("hard") 실시간 운영 체제와 연성("soft") 실시간 운영 체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전자가 후자에 비해 지터가 적다. RTOS의 주된 설계 목표는 높은 처리율(throughput)이 아니라, 실시간 성능 보장에 있다. 실시간 시스템의 데드라인을 "대체로" 맞추는 RTOS를 연성 실시간 운영체제라 하고, 데드라인을 결정론적 알고리즘(deterministic algorithm)에 의해 만족하는 경우를 경성 실시간 운영체제라 한다. 규모가 큰 실시간 운영 체제의 초기 예는 "제어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는 아메리칸 항공(American Airlines)과 IBM이 세이버(Sabre)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해서 개발한 것이었다. 두 가지 기본적인 설계 방식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해, 시분할 스케줄링 방식은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자주 태스크 전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러한점 덕분에 좀 더 자연스럽고, 예측하기 쉬운 멀티태스킹을 제공하며, 하나의 프로세스나 한명의 사용자가 장치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제공한다. 때문에 이 방식이 좀 더 나은 멀티태스킹 방식처럼 보일 수 있다... 전통적인 설계 방식에서, 태스크는 수행(running), 대기(ready), 블록(blocked)의 세 가지 상태(state) 중 한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태스크가 블록상태이고, 오직 1개의 태스크만 수행상태이다. 간단한 시스템 일수록 대기 상태의 태스크 목록이 짧으며, 많은 경우도 2~3개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스케줄러 대기 태스크 목록의 데이터 구조는 스케줄러의 임계 구역 (CPU의 선점이 금지되며, 어떠한 경우에는 모든 인터럽트가 비활성화된다.) 에서 소비되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게 설계 한다. 하지만, 데이터 구조의 선택은 대기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태스크의 숫자에도 좌우된다. 만약 대기 목록에 2~3개 정도에 적은 수의 태스크만 존재하는 구조라면, 단순히 이중 연결 리스트 구조로 대기 목록을 구현 하는 것도 효율적이다. 반면, 통상 적은 수에 태스크만 존재하지만 가끔 그보다 많은 수가 존재하는 경우라면, 태스크를 실행할 때마다 전체 목록을 뒤져 우선 순위가 높은 태스크를 찾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도록 우선 순위를 기준으로 미리 정렬하거나 높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낮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보다 먼저 대기 리스트에 추가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즉, 대기 목록을 검색하는 동안 CPU의 선점을 금지하지 않거나 긴 임계 구역을 작게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낮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리스트에 추가하는 동안이라도, 높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대기 상태로 만드는 인터럽트가 발생하면, 높은 우선 순위의 태스크를 먼저 대기 목록에 추가하고 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태스크가 생성되면 이 태스크는 일단 대기 상태가 된다. 스케줄러는 현재 수행중인 태스크 역시 대기 상태로 변경하고, 두 개의 태스크를 대기 상태 태스크 목록에 집어 넣는다. 그 후, 가장 우선 순위가 높은 태스크를 다시 수행하는데 이 전체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중요 응답 시간(critical response time) 혹은 플라이백 타임 (flyback time) 이라고 부른다. 잘 설계된 실시간 운영 체제의 경우, 새로운 태스크를 대기 상태로 만드는 데 3-20개의 명령어를 사용한다. 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가진 대기 태스크를 수행 상태로 변경하는데 5-30개의 명령어를 사용한다. 고급 실시간 운영 체제에서는 실시간으로 동작하는 태스크들이 실시간으로 동작하지 않는 태스크들과 컴퓨터 자원을 공유한다. 따라서 대기 리스트는 상당히 길어질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스케줄러 대기 리스트를 간단한 연결 리스트(linked list)로 구현하는 것은 알맞지 않다. 일반적으로 RTOS에서 사용되는 스케줄링 알고리즘에는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멀티태스킹 시스템은 여러 개의 태스크 사이에 공유되는 데이터와 하드웨어 자원을 관리해 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두 개 이상의 태스크가 동시에 같은 데이터나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위험"하다는 것은 한 태스크가 복수의 데이터를 갱신하는 중일 경우, 결과가 일관성이 없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른 태스크가 이 데이터들에 접근해도 되는 시점은 갱신이 시작하기 전이나 완전히 종료된 후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사용되는 3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범용 운영 체제에서는 사용자가 인터럽트를 마스크(비활성화)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용자의 프로그램이 운영 체제의 핵심 자원인 CPU를 너무 긴 시간동안 점유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 사용되는 대다수의 CPU들은 사용자 모드 코드가 인터럽트를 비활성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임베디드 시스템과 실시간 운영 체제들은 응용 프로그램이 운영 체제의 간섭 없이 시스템 콜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커널 모드에서도 동작할 수 있도록 한다. 단일 프로세서 시스템에서, 만약 응용 프로그램이 현재 커널 모드로 동작하고, 인터럽트를 비활성화할 수 있다면, 대개 인터럽트 비활성화야말로 두 개 이상의 태스크가 동시에 공유자원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는 최고의 기법이다. 인터럽트가 비활성화되어 있는 경우, 현재 돌고 있는 태스크는 다른 태스크나 인터럽트가 CPU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성"을 띠며, 따라서 임계 구역은 보호 받는다. 태스크가 임계 구역에서 벗어나게 되면, 대기중인 인터럽트가 있다면 실행되도록 인터럽트를 다시 활성화시켜야 한다. 일시적으로 인터럽트를 비활성화하는 것은 임계 구역의 가장 긴 경로가 인터럽트 대기 시간보다 짧은 경우 유효한 전략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방법을 통하여 시스템의 최대 인터럽트 대기 시간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임계 구역이 단지 몇 개의 명령어로 이루어졌거나, 반복구문을 포함하지 않은 경우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세마포어는 잠기거나 풀려있다. 잠겨 있을 때 작업들의 대기는 세마포어(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세마포어 디자인들이 가지는 문제점들은 잘 알려져 있다: 과 교착 상태이다. 우선 순위 역전은 높은 순위의 작업이 낮은 순위의 세마포어를 가지는 작업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해결법은 세마포어를 가지는 작업이 최우선 순위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착에서는 두 개의 작업이 두 개의 세마포어를 역순으로 잠근다. 이것은 대개 대기열을 구현할 때 면밀하게 설계하거나 또는 floored semaphores(정해진 상황에서 세마포어의 제어권을 높은 순위의 작업에 넘기는)를 추가함으로써 해결된다. 다른 해결책은 작업들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똑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작업이 낮은 우선 순위의 메시지를 수행하느라 in-box에 있는 더 높은 순위의 메시지를 무시할 때 우선 순위 역전이 일어난다. 두 개의 작업이 서로 상대방의 응답을 기다릴 때 교착이 일어난다. 실시간 동작은 세마포어 시스템의 경우보다는 덜 분명하지만, 메시지 기반 시스템들은 자체적으로는 고정적이지 않아 일반적으로 세마포어 시스템들보다는 더 잘 동작한다. 인터럽트 핸들러는 실행중인 가장 높은 우선의 태스크 조차도 중단 시킬 수 있으며, 실시간 운영 체제는 스레드 대기시간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인터럽트 핸들러의 기능은 가능한 최소화되기 마련이다. 실시간 운영 체제의 동적 메모리 할당은 일반 운영 체제보다 엄격한 조건이 요구된다. 먼저, 할당 속도가 중요하다. 표준 메모리 할당 방식은 알맞은 크기의 사용되지 않는 메모리 블록을 찾기 위해서 연결 리스트를 검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정해진 시간 안에 메모리 할당이 일어나야 하는 실시간 운영 체제에는 맞지 않는다. 또한, 메모리의 공간을 분할하여 사용하 보면 단편화(Fragment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메모리 자체는 충분하더라도 메모리를 확보할 수 없어, 프로그램이 멈추는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데스크톱 컴퓨터에서는 자주 다시 시동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단편화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임베디드 시스템은 몇 년 동안 다시 시동하지 않고 동작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단편화가 허용될 수 없다. 간단한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는 단순한 고정 크기 블록 알고리즘도 잘 동작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메모리 할당을 참조. 몇몇의 RTOS(임베디드 운영 체제)는 "XIP" (즉석에서 실행)를 지원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들이 코드를 RAM으로 먼저 전송하지 않고 ROM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 체제의 필요한 RAM 크기와 ROM 크기 사이의 교환을 제공한다. 많은 회사들이 리눅스에 실시간 기능을 가미한 버전을 판매하고 있다. 2004년 10월 8일 몬타비스타는 리눅스 커널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리눅스에 실시간 성능을 향상하기 위한 실시간 패치를 공개했다. 자연보호 자연보호(自然保護)는 20세기 중반부터 점차로 비중을 가지고 토론되고 제기 된 사회문제의 하나이다. 현대문명이 공업 기계화 됨과 함께 인간생존의 필수적 요건인 자연과 주변환경의 오염은 급속한 현대 문명발달이 가져온 커다란 해악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자연환경의 보호 문제는 이제 어느 개별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한 마음로 진지하게 토론하고, 또한 현대의 문명이 가진 문제점과 관련하여 생각해야할 인류의 공동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환경 오염 문제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지구의 온난화, 오존층 파괴, 산성비, 지구 사막화, 중국의 황사, 해수면 상승, 열대 우림의 감소, 생태계 파괴 등이다. 산성비는 수소이온 농도 5.6 이하일 때를 말하며 화석연료가 연소할 때 나오는 황산화물이나 질소산화물이 빗물에 섞여 강산성을 띠게 된다. 산성비는 눈을 자극하고 식물체를 고사시키거나 문화재를 부식시켜 수명을 단축시키고 전철의 전선을 부식시켜 대형사고를 유발시킬수도 있다. 지구온난화는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CO₂) 메탄(CH₄), 오존(O₃), 이산화질소(N₂O), 수증기(H₂O) 등의 농도가 높아지면서 지구온도가 서서히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면 지구전역의 강수량의 변화가 일어나며 해면 기압과 토양수분의 변화가 일어나며 이로 인한 각종 기상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지구온도가 상승하면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게 되면 0.5미터 ~ 2미터 정도 상승하여 10억명의 환경난민이 발생하게 되고 농업생태계의 변화로 재배 작물 생육이 불가능하게 된다. 환경호르몬에 의한 식품오염물질과 장염비브리오균, 살모넬라균, 리스테리아균, 캄필로박토균, 황색포도상구균, 장관출혈성대장균, 보툴리누스균 등에 의한 식중독, 알레르기는 환경오염으로 비롯된다. 엔트로피 부호화 엔트로피 인코딩 혹은 엔트로피 부호화()는 심볼이 나올 확률에 따라 심볼을 나타내는 코드의 길이를 달리하는 부호화 방법이다. 보통 엔트로피 인코더는 모든 심볼에 대해 같은 길이를 갖는 코드를 심볼이 나올 확률값의 음의 로그에 비례하는 서로 다른 길이의 코드로 바꾸어 부호화한다. 즉 가장 자주 나오는 심볼에 대한 코드가 가장 짧다. 새넌 정리(Shannon's source coding theorem)에 따르면, 가장 좋은 코드 길이는 "b"를 부호화할 진수(2진수로 부호화 할 경우에는 b=2가 된다), "P"를 심볼이 나올 확률이라고 할 때 −log"P" 라고 한다. 엔트로피 코딩 중에 가장 자주 쓰이는 세 가지는 허프만 부호화, 범위 부호화와 산술 부호화이다. 이 부호화 기술들은 입력 데이터의 값 분포에 따라 할당 방법이 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별도로 분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보내 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데이터 스트림의 대략적인 엔트로피 성질을 미리 알고 있을 때에는(특히 신호 압축에서) 범용 부호 기술로서 단항 부호, 엘리어스 감마 부호, 피보나치 부호, 골롬 부호, 라이스 부호등을 쓰기도 한다. 유리 가가린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1934년 3월 9일 - 1968년 3월 27일)은 소비에트 연방의 우주비행사, 군인으로, 1961년 4월 12일에 인류로서는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비행을 하였으며, 6번이나 우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가가린은 그 공적으로 각국으로부터 메달을 수상하였다. 1968년 3월 27일, 7번째 우주비행 훈련 중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가가린은 1934년 3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스몰렌스크의 집단 농장에서 출생하였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은 독일군 치하의 소련에서 살았고 독소전쟁시기 가가린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20살이 되던 해 가가린은 비행클럽에 가입했고 이후에 전투기 조종사로 훈련을 받았다. 유리 가가린은 1959년 공군 소속으로 우주비행사에 도전했다. 1961년 4월 12일 인공 위성 보스토크 1호로 무중력 상태의 우주권에 돌입하여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한 뒤 예정지에 귀착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지구는 푸른 빛깔이었다"고 한 그의 말은 유명하다. 그 후에도 5번(총6번)이나 우주비행에 성공하였다. 가가린은 우주 비행 뒤 중위에서 소령으로 2계급 특진하였으나 이후 1968년 3월 27일 미코얀구레비치 MiG-15의 시험 비행 훈련 중에 연습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보스토크 3KA-2 (보스토크 1) 안에서 우주를 비행하고 돌아온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비행시 그의 호출부호(콜사인)는 'Kedr(히말라야 삼목)'이었다. 비행하는 동안 가가린은 '조국은 듣고, 조국은 안다(러시아어:Родина слышит, Родина знает)'라는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패션 패션(Fashion)은 현재의 (끊임없이 변하는) 유행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이유보다는 사소한 취향에 따라서 변한다. 종종 옷이나 모습에 쓰이곤 하지만, 패션의 개념은 음악, 예술, 정치 그리고 심지어는 수학과 프로그래밍 기술의 선택까지도 포함한다. 주로 의복의 유행을 가리켜 쓰이곤 하지만 가구, 공예, 건축, 인테리어, 액세서리등 광범위한 범위에 적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패션은 미학과 혁신의 틈에 있는 것이다. 패션(Fashion)은 행위나 활동하는 것(doing) 또는 만드는 것(making)을 뜻하는 라틴어의 팩티오(fac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전적 의미는 '양식, 방식, 형, 유행, 관습, 습관' 등 다양하며, 실제로 모든 생활양식 그 자체가 패션이라 할 수 있다. 패션 산업은 현대의 산물이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대부분의 옷은 주문 제작 되었다. 즉, 옷은 개인에 의해 또는 재봉사와 재단사로부터 주문에 의해 수작업 되었다. 20세기가 시작하면서 재봉틀과 같이 새로운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 세계적 자본주의와 공장제도가 발달하면서 백화점 아울렛이 급증하였고 옷은 점점 더 표준치에서 대량생산되고 고정된 가격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패션산업은 유럽과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15년 현재에 국제적이고 매우 세계화된 산업이 되었다. 한나라에서 디자인되어 다른 나라에서 제조되고 또 전 세계로 팔렸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패션 회사는 중국에서 천은 얻어 베트남에서 제조된 옷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팔았고 이 옷들은 국제적인 소매 판매점에 분배하기 위해 다시 미국의 창고로 옮겨졌다. 패션산업은 오랫동안 미국의 가장 거대한 고용주들 중 하나가 되어왔고 21세기 또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고용은 생산이 점점 해외로 특히 중국으로 옮겨짐에 따라 상당하게 감소하였다. 패션산업의 자료는 전형적으로 국제적 경제에 의해 보고되고 산업의 많은 세분화된 분야에 관해 표현되기 때문에 직물과 옷의 세계적인 생산에 관한 총계수치는 얻기 어렵다. 하지만 틀림없이 의류 산업은 세계 경제 산출에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패션 산업은 네 개로 구성된다: 이 단계들은 많이 세분화 되어있지만 상호의존적이다. 이 분야들은 직물 디자인과 생산, 패션 디자인과 생산, 패션 소매업, 마케팅과 상업, 패션쇼, 그리고 매체와 마케팅으로 나뉜다. 각각의 분야는 이익에 맞게 운용되는 산업에서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하에 옷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헌신한다. 국가 인민군 국가인민군(國家人民軍, )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군대다. 국가인민군(이하 NVA)은 1956년 3월 1일에 창설되었다. NVA의 뿌리는 1952년에 창설된 "병영화된 인민경찰(KVP)"이다. NVA는 직업군인으로 일하는 모병제가 1962년 1월 24일, 징병제 발표 이전까지까지 시행되었다. 징병은 18세에서 26세의 성인 남성을 위주로 징병했으며, 최소 복무기간은 18개월이었다. 과감히 구 나치독일이나 귀족들의 잔제를 청산하면서도 나치독일의 군복과 철모를 조금 변환해서 사용하는 등 구 독일군의 문화를 많이 유지했다. 창설 첫해에 동독군 장교의 27%가 구 독일 국방군 출신이였고 6년동안은 모병제를 유지해오다가 징병제를 통해서 1962년에 17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60년대에 2차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던 병력들은 퇴역하게되었다. 동독군은 공산권과 관련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 바르샤바 조약군의 진압 임무를 지원했으며 아프리카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였다. 프라하의 봄당시 동독은 7전차사단과 11차량화소총사단을 파견해 소련군을 지원할 계획을 세웠지만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 군대가 타국을 침공했다는 국제적 비난이 우려되어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신 소련군의 병참을 지원하였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동독군은 전투 준비(Gefechtsbereitschaft)에 들어갔는데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잠수함발사 탄도유도탄과 같은 막강한 병기들을 잇달아 전개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독군의 85%는 끊임없는 경보에 시달리며 25~30분 안에 그들의 주둔지에서 5~7km를 벗어나는 훈련을 했다.동원령은 이틀안에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1970년대 초에 주동독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시 동독군의 서베를린 점령에 할당했다.'작전명 도심'으로 명명된 작전에서는 두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32000여명의 병력들이 주동독 소련군 6독립근위차량화소총여단과 함께 서베를린을 장악하자는 내용이였다. 390여대의 전차,400여대의 장갑차,400여기의 대전차화기,450여문의 포병전력이 동원될 것으로 짜였으며 해당 작계는 1988년까지 갱신되었다. 1980년부터 벌여진 폴란드의 노동운동으로 1981년에 동독군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시 소련군을 지원할 계획을 했지만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수상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동독군이 비상 전투태세를 발령했을 때는 1961년 베를린 장벽건설,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그리고 1989년이였다. 동독에서는 종교적 이유 이외에는 군복무를 대체할 만한 근무는 없었으나, 1964년 "바우졸다텐" (건설단)이 대체근무를 할 수 있도록 창설되었다. 건설단은 주로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되었고, 몇몇은 병원이나 기타 사회 봉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건설단으로 군복무 하게 되면, 일하는 동안은 물론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불이익이 많았다.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 또한 불법이었고, 군복무 기간만큼 복역해야 했다. 때로 그들은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서독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1990년, NVA는 서독의 독일연방군 (Bundeswehr)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1:1 통합은 아니어서 대다수의 현역 장교들은 그들의 임무를 중단해야 했고, 설사 편입된다 하더라도 대부분 1 계급 강등과 함께 임금도 삭감되는 불이익을 받았다. 대부분의 막사는 폐쇄되었고, 많은 동독군의 장비는 다른 국가의 군대로 수출되었다. 1990년 당시 구 동독군의 장비와 수량은 다음과 같다. 동독군은 4개의 주요 편제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나치스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등의 휘장이 폐지되고, 간부용 정모 크라운의 디자인이 소련식을 참고한 디자인으로 변경된 것 외에는 대체로 나치스 시대 독일 국방군 군복 디자인을 유지하였다. 독특한 형태로 유명한 철모 또한 2차대전 말기에 독일 국방군이 시험적으로 일부 도입했던 철모 디자인을 사용한 것이다. 독일 통일 이후 중고품으로 방출된 동독 군복이 나치스 시대 군복으로 개조되어 군사 매니아들에게 팔리는 일이 종종 있다. 중부에서 동독군이 소련군과 함께 루르 지역과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까지를 목표로 진격하기로 했다.동독군은 보고서에 의하면 타 바르샤바 조약 가맹군에 비해서 나토 가맹국들을 상대할 때 상대적으로 전투의지가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독군을 상대할 때는 사기가 매우 저하된다고 예측되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사용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입출력 등의 기능을 알기 쉬운 아이콘 따위의 그래픽으로 나타낸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화면 위의 물체나 틀, 색상과 같은 그래픽 요소들을 어떠한 기능과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사용자를 위한 컴퓨터 인터페이스이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어떤 요소를 제어하려면 그 요소에 해당하는 그래픽을 직접 조작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2차원의 공간에서 그 기능을 은유적 혹은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래픽으로 요소를 꾸미고 이를 선택, 이동, 복사하여 작동한다. 이를테면, X자와 같은 형태의 그래픽 요소는 이를 선택하면 삭제하거나 취소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며 어떤 파일을 나타내는 아이콘을 어느 위치에서 다른 하드 디스크의 장소를 나타내는 공간으로 이동하면 복사가 된다. 컴퓨터 자판의 명령어 입력이 요구되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의 가파른 학습 곡선에 대응하여 GUI가 도입되었다. GUI의 동작은 일반적으로 그래픽 요소의 직접 조작을 통해 수행된다. 컴퓨터를 넘어 GUI는 MP3 플레이어 등,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게이밍 장치, 스마트폰, 소형 가전, 사무 및 산업 제어 등 수많은 휴대용 모바일 장치에 사용된다. 윈도와 리눅스, OS X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운영 체제들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지원한다. 리눅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에서는 X 윈도 시스템을 주로 사용하며, 모티프, Qt, GTK+ 등의 툴킷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아이디어는 1960년대에 제안되었다. 이반 서덜랜드가 1963년에 개발한 스케치패드는 컴퓨터 지원 설계(CAD) 소프트웨어의 조상이자 최초로 완전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구현한 것이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더글라스 엥겔바트를 비롯한 SRI 인터내셔널의 연구자들은 하이퍼링크를 기반으로 마우스를 사용하는 NLS(On-line System)를 개발하였다. NLS의 하이퍼링크 개념은 제록스 파크에서 그래픽으로 확장되었으며, 1973년에 개발된 제록스 알토 컴퓨터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기본적으로 이 인터페이스로부터 유래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파크 사용자 인터페이스(PUI)’라 부르기도 한다. 파크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윈도, 메뉴, 아이콘, 라디오 단추, 체크 상자 등의 그래픽 요소들을 사용하며, 마우스와 같은 포인팅 장치를 키보드와 함께 사용한다. 이후 애플 컴퓨터는 제록스 파크에서 만든 이러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보고 당시 비상장이었던 애플의 주식 액면가 100만 달러 어치를 지불하고 기본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다. 1981년에 개인용 컴퓨터인 1983년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기반한 컴퓨터 리사(LISA)를 출시했지만 값이 너무 비싼 탓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1984년에 나온 애플의 매킨토시는 상업적인 성공을 이뤘다. 한편 매킨토시가 이러한 성공을 거두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개발하였다. 이는 매킨토시의 아이디어를 다시 모방한 것이었으며 이후 법정소송을 거치기도 하였다.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 95를 출시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본격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대중화를 이루었다. 한편 CUI(character user interface, 위키백과:명령 줄 인터페이스) OS인 유닉스(UNIX)와 그 계열의 리눅스에서는, X 윈도 시스템을 통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있다. 음정 음정(音程, interval)은 음악이론에서 두 음의 높이 차이, 즉 두 음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두 음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울리는 것을 선율적 음정, 동시에 울리는 것을 화성적 음정이라고 한다. 음이름에 준하여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서 도수가 결정되고, 같은 도수 안에서도 실제 음과 음의 간격에 따라서 도수 앞에 성질을 표기한다. 즉, 완벽한 음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 성질 + 도수 " 로 표기되어야 하며, 한글로는 완전5도, 장3도, 증4도, 단2도 와 같이 표기, 영어로는 Perfect 5th, Major 3rd, Augmented 4th, minor 2nd 와 같이 표기한다. (영문의 앞글자를 따서 P5, M3, A4, m2 등으로 축약하여 쓰기도 한다.) 보통 음악가들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이는 음악이론의 기초이며, 대개 화성학에서 초반부에 다룬다. 음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 사이의 간격에 대한 도수 는 음이름 에 따라 결정되는데, C D E F G A B C, G A B C D E F G, D E F G A B C D, A B C D E F G A, E F G A B C D E 의 순번에 준한다. 이렇게 음과 음 사이의 도수가 정해졌을 때, 그 정해진 도수를 기반으로 정확한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도수 앞에 성질을 표시해야 하는데, 장음계의 계이름을 기준으로 두 음 모두 샾(#)이나 플렛(b)이 붙지 않았을 경우, 2, 3, 6, 7도 간격의 경우에는 장(Major) 성질을 붙여서 표기하며, 1, 4, 5, 8도 간격의 경우에는 완전(Perfect) 성질을 붙여서 표기한다. 여기서 기준음, 혹은 비교대상으로 하는 음에 샾(#) 이나 플렛(b) 이 붙게되어 음 사이의 간격이 더 넓어지거나 좁아지면, 도수는 변하지 않으나, 장(Major) 성질이었던 음정은 단(minor), 감(diminished), 증(Augmented) 과 같은 성질로 변화하게 되고, 완전(Perfect) 성질이었던 음정은 감(diminished), 증(Augmented) 과 같은 성질로 변화하게 된다. 이와같은 음정의 성질변화는, 위와같은 그림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명하곤 한다. 음정을 계산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3가지 계산법이 많이 사용되며, 계산하는 사람이 상대음감이냐, 절대음감이냐에 따라 어떤 계산법을 선호하는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상대음감의 경우 음정을 계산할 때 계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C', 'G', 'D', 'A', 'E' 음과 어떤 다른 음의 음정을 계산해야 한다면, 기준음 'C', 'G', 'D', 'A', 'E' 음을 '도', '미' 로 보고 음정을 계산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준음을 '도' 로 보고 음정을 계산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음이름 기준 C - D - C, G - A - G, D - E - D, A - B - A, E - F♯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미 - 파♯ - 미' 보다 '도 - 레 - 도' 가, 음이름 기준 C - A - C, G - E - G, D - B - D, A - F♯ - A, E - C♯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미 - 도♯ - 미' 보다 '도 - 라 - 도' 가, 음이름 기준 C - E - C, G - B - G, D - F♯ - D, A - C♯ - A, E - G♯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미 - 솔♯ - 미' 보다 '도 - 미 - 도' 가, 음이름 기준 C - B - C, G - F♯ - G, D - C♯ - D, A - G♯ - A, E - D♯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미 - 레♯ - 미' 보다 '도 - 시 - 도' 가 계산하기 더 편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이는 피아노의 검은건반보다 흰건반 위주로 생각하는 것을 더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준음을 '미' 로 보고 음정을 계산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음이름 기준 C - B♭ - C, G - F - G, D - C - D, A - G - A, E - D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도 - 시♭ - 도' 보다 '미 - 레 - 미' 가, 음이름 기준 C - E♭ - C, G - B♭ - G, D - F - D, A - C - A, E - G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도 - 미♭ - 도' 보다 '미 - 솔 - 미' 가, 음이름 기준 C - A♭ - C, G - E♭ - G, D - B♭ - D, A - F - A, E - C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도 - 라♭ - 도' 보다 '미 - 도 - 미' 가, 음이름 기준 C - D♭ - C, G - A♭ - G, D - E♭ - D, A - B♭ - A, E - F - E 의 음정을 계산할 때는 계이름 '도 - 레♭ - 도' 보다 '미 - 파 - 미' 가 계산하기 더 편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이는 피아노의 검은건반보다 흰건반 위주로 생각하는 것을 더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음 관계일 경우, 기준음을 장음계 으뜸음인 '도' 로 생각해놓고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음 관계일 경우, 기준음을 장음계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린 음계 으뜸음인 '미' 로 생각해놓고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절대음감의 경우 음정을 계산할 때 음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로 C, G, D, A, E 음을 치면서 "도~", "솔~", "레~", "라~", "미~" 라고 노래하면, 귀에서는 '도', '솔', '레', '라', '미' 가 들리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도", "미" 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들은 음정을 계산할 때도 기준음을 계이름 '도', '미' 로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보다 음이름 C, G, D, A, E 그대로 계산한다. 장음계의 계이름을 떠올리는 것, 또는 기준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Diatonic Scale (Major Scale) 을 떠올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암기능력과 속셈에 자신있는 사람들은 음정을 계산할 때 기준음과 비교대상으로 하는 음 사이에 반음이 몇개 들어있는지를 계산해서 암기해놓은 음정을 도출해내는 계산법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계산해 낸 것이 꼭 정확한 값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아노 건반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C♯ - D♯ 은 반음 개수가 2개이므로 장2도가 맞지만, 만약 악보(오선지) 에 표기되어있는 음들을 비교할 때 C♯ 과 E♭ 이라고 적혀있는 경우에는 장2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C♯ 과 E♭ 을 피아노로 쳐보면 반음 개수가 2개이므로 장2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C♯ 과 E♭ 은 도수를 3도로 해석해야하기 때문에 장2도가 아니라 감3도가 맞다. 때문에 반음 개수 계산법이 사실 정확한 계산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음정을 공부하는 목적이 문제풀이에서 정답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가들끼리 음정단위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언어학적 목적인 경우에는 이런 계산법을 사용하는 것이 꼭 틀렸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1cm 와 10mm 는 표기법이 다르지만 같은 간격을 나타내듯이 장2도와 감3도는 표기법이 다르지만 사실 같은 음을 지칭하므로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피아노 건반에서 E-F, B-C 사이에는 검은검반이 없으므로 반음이다. 계이름 계산법이나 음이름 계산법으로 계산할 때 계이름과 음이름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음정을 계산하면, 음정의 성질을 잘못 계산할 수 있다. 계이름이라는 것은 원래 조성에 따라 음이름이 달라진다. F Major Key (바장조) 에서 계이름 '도' 와 F Major Key (바장조) 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린 음계에서 계이름 '미' 는 실제 음이름이 F 이고, B Major Key (나장조) 에서 계이름 '도' 와 B Major Key (나장조) 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린 음계에서 계이름 '미' 는 실제 음이름이 B 이다. 예를 들어, F Major Key (바장조) 에서의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F G A B♭ C D E F 가 되므로 F Major Key (바장조) 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린 음계의 계이름인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F G♭ A♭ B♭ C D♭ E♭ F 가 되며 B Major Key (나장조) 에서의 계이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B C♯ D♯ E F♯ G♯ A♯ B 가 되므로 B Major Key (나장조) 에서 2, 3, 6, 7음을 반음 내린 음계의 계이름인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미 는 실제 음이름으로 봤을 때 B C D E F♯ G A B 가 된다. 따라서 F - B 가 도수만 놓고 봤을 때는 4도 - 5도가 맞지만, 완전4도는 아니다. 실제로 F - B 가 완전4도 이려면 B 가 B♭ 로 바뀌어야만 F - B♭ 가 되어 완전4도가 되며 B - F 가 도수만 놓고 봤을 때 5도가 맞지만, 완전5도는 아니다. 실제로 B - F 가 완전5도 이려면 F 가 F♯ 로 바뀌어야만 B - F♯ 가 되어 완전5도가 된다. 1, 4, 5, 8도 음정의 경우에는 "장/단" 표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2, 3, 6, 7도 음정의 경우에는 "완전" 표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음 과 음 사이의 조화로운 울림에 영향을 끼치는 배음 과 관계가 있다. 사인파 를 제외한 모든 음(音)은, 실제로 하나의 음이 아닌 여러개의 음이 같이 울리는데, 이와 같이 함께 울리는 음들을 배음이라고 부르며, 인간은 그 배음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잘 들리는 1배음을 주로 듣기 때문에 음을 하나로 느끼는 것이다. 이 배음들을 근음인 1배음 부터 12배음까지 나열해봤을 때, 각각의 배음들의 음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음정에는 센트 (음악) 라는 단위가 있는데, 이것은 음정에서 유니즌을 제외한 가장 낮은 음정단위인 단2도 보다 더 좁은 간격, 즉 12음계를 벗어난 그 사이사이의 미세한 간격을 측정할 때 쓰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5센트까지의 차이는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4배음까지의 울림에서는 부조화를 느끼지 못해서 완전한 울림이라고 불리었고, 5배음부터는 울림의 부조화를 느꼈기 때문에 완전 대신 장/단 을 쓰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몇가지 음정의 경우에는 " 성질 + 도수 " 의 표기법을 벗어나 하나의 단어로 바꿔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5가지 경우가 있다. 다음의 음악은 해당 음정으로 시작한다. 점근 표기법 점근 표기법(asymptotic notation)은 어떤 함수의 증가 양상을 다른 함수와의 비교로 표현하는 수론과 해석학의 방법이다. 알고리즘의 복잡도를 단순화할 때나 무한급수의 뒷부분을 간소화할 때 쓰인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 표기법이 있다. 이 중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대문자 O 표기법으로, 란다우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특히,알고리즘의 복잡도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계산 복잡도 이론" 또는 "시간복잡도"로 대문자 O 표기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함수 "formula_1", "formula_2"에 대해 "formula_1"가 "formula_4"라는 것은 상한 점근에 관한 다음의 동치인 정의와 같다. 이를 formula_16 혹은 formula_17로 표기하기도 한다. 두 다항식 formula_18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때 formula_21이 된다. 증명은 다음과 같다. formula_16라는 표현에서, 등호는 원래의 등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예를 들어, 어떤 함수가 formula_29이면 formula_30이므로 formula_31로 표기할 수는 있지만, formula_32와 같이 쓰는 것은 잘못된 표기이다. 이 때, 등호 표기는 일반적인 표기법과 다르게 사용된 기호의 남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formula_4를 원래 정의에서 해당하는 함수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경우도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경우 formula_17과 같이 표기할 수 있고, 이것은 기호의 원래 정의와 잘 맞아 떨어진다. 대문자 O 표기법과 비슷하게, 다음의 표기법들이 사용된다. 또한 Õ 표기법은 대문자 O 표기법의 일종으로, formula_35는 formula_36(formula_37는 임의의 상수)를 의미한다. 이 표기법은 함수의 로그 증가 비율을 무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ISO (동음이의) ISO는 다음을 뜻한다. 도메인 네임 시스템 도메인 네임 시스템(Domain Name System, DNS)은 호스트의 도메인 이름을 호스트의 네트워크 주소로 바꾸거나 그 반대의 변환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특정 컴퓨터(또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임의의 장치)의 주소를 찾기 위해,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도메인 이름을 숫자로 된 식별 번호(IP 주소)로 변환해 준다. 도메인 네임 시스템은 흔히 "전화번호부"에 비유된다. 인터넷 도메인 주소 체계로서 TCP/IP의 응용에서, www.example.com과 같은 주 컴퓨터의 도메인 이름을 192.168.1.0과 같은 IP 주소로 변환하고 라우팅 정보를 제공하는 분산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다. 인터넷은 2개의 주요 이름공간을 관리하는데, 하나는 도메인 네임 계층, 다른 하나는 인터넷 프로토콜(IP) 주소 공간이다. 도메인 네임 시스템은 도메인 네임 계층을 관리하며 해당 네임 계층과 주소 공간 간의 변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네임 서버와 통신 프로토콜은 도메인 네임 시스템을 구현한다. DNS 네임 서버는 도메인을 위한 DNS 레코드를 저장하는 서버이다. DNS 네임 서버는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쿼리의 응답 정보와 함께 응답한다. 호스트의 숫자 주소 대신 더 단순한, 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사용하는 일은 ARPANET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탠퍼드 연구소(현재의 SRI 인터내셔널)는 ARPANET의 컴퓨터들의 숫자 주소와 호스트 이름을 매핑하는 HOSTS.TXT라는 이름의 텍스트 파일을 관리하였다. 할당 번호 목록(Assigned Numbers List)이라 불리던 숫자 주소들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정보과학연구소 소속(소속팀은 SRI와 함께 밀접하게 일했음) 존 포스텔에 의해 관리되었다. 도메인 이름 공간은 도메인 이름을 트리 형태로 구성한 것이다. 트리의 각 노드는 0개 이상의 "리소스 레코드(resource record)"를 가진다. 트리는 루트 존(root zone)에서 시작하여 여러 개의 하위 존으로 나뉜다. 각 DNS 존은 하나의 권한 있는 "네임 서버(authoritative name server)"에 의해 관리되는 노드들의 집합이다. (하나의 네임 서버가 여러 개의 존을 관리할 수도 있다.) 관리 권한은 분할되어서 새로운 존을 형성할 수 있다. 이때, 기존의 도메인 이름 공간의 일부분이 서브도메인 형태로 다른 네임 서버에 권한이 "위임"된다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존은 새로운 존에 대한 권한을 잃게 된다. 도메인 이름 형성에 관한 규칙은 RFC 1035, RFC 1123, RFC 2181에 정의되어 있다. 도메인 이름은 한 개 이상의 부분(레이블)로 이루어지고, 점으로 구분하여 붙여 쓴다.(예: codice_1) DNS를 잘못 설정할 경우 인터넷 이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신뢰할 수 없는 DNS는 해킹, 파싱 등에 노출되므로, 신뢰할 수 있는 DNS 서버만 이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기본적으로 통신사가 제공하는 DNS는 서버가 한국에 소재하여 빠른 응답 속도를 보여준다. 구글과 시만텍의 DNS는 한국에 서버가 소재하진 않지만, 인접국인 일본에 서버가 소재하고 있어, 40ms 미만의 응답 속도를 보여준다. 새 새 또는 조류(鳥類)는 크게 발달된 수각류 공룡을 의미하며, 보통 비행이 가능하다. 계통적으로는 석형강 공룡상목 조강(鳥綱)에 속한다. 새는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2심방 2심실이며, 허파로 호흡하는 항온동물이다. 날짐승이라고도 한다. 분류에 따라 8,800 ~ 10,200 종이 분포한다. 가장 작은 종은 벌새이며, 가장 큰 종은 타조이다. 보통 공룡의 멸종기인 6천600만년전 이후 조류가 생겨났다고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나, 1877년에 독일 졸로호펜에서 발굴된 시조새와 중국에서 발견된 안키오르니스의 화석을 통해 수각류 공룡이 약 1억 5,000만 년 전부터 조류의 형태로 진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현재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수각류에 속한다. 각질의 깍지로 덮여 있는 부리와 비늘이 있는 다리, 날개 이외의 뼈대 구조 등은 파충류와 유사하나 체표가 깃털에 싸여 있는 점과, 앞다리가 날개로 변화해 있는 점은 현생하는 다른 동물 무리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조류는 대체로 머리에 비해 눈알이 크고, 망막의 시신경이 발달해 있어 시력이 예민하다. 부엉이 등의 야행성 종에서는 시세포가 간상세포만으로 되어 있으나, 주행성 종에서는 원추세포가 발달해 사람이 느끼는 색상을 대부분 감지할 수 있다. 귀는 머리 부분의 좌우에 한 쌍이 열려 있는데, 모두 깃털로 싸여 있기 때문에, 겉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청각도 잘 발달해, 시각과 함께 조류가 생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반면 후각은 타조목·슴새목 외에는 예민하지 않으며, 미각도 그리 발달해 있지 않다. 철새같은 경우는 이동을 해야하는데 이 넓은 지구를 길한번 잃지 않고 간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새는 낮에 활동하지만, 올빼미 등 맹금류는 야행성이다. 먹이는 종류에 따라 꿀, 나무 열매, 곤충, 쥐, 물고기, 작은 새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모든 종류가 비교적 적은 수의 알을 낳는데, 대부분 어미새가 몸의 열로 알을 데워 부화시킨다. 알은 다량의 난황을 포함하는 단황란으로, 미수정란의 난황 부분은 하나의 세포로는 동물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한다. 많은 종은 계절에 따라 이주하며, 이러한 새들을 철새라 부른다. 언제, 어느 곳에서 이주하느냐에 따라 여름철새, 겨울철새로 나뉜다. 또, 한 곳에 머무르며 서식하는 새를 텃새라고 하며, 먼 길을 가기 위해 한 곳에 잠시 머무르는 새를 나그네새라고 한다. 서식지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새들은 미조나, 길잃은새라고 한다. 새의 성염색체는 ZZ-ZW형으로, 성염색체가 ZZ이면 수컷, ZW이면 암컷이다. 따라서, 새의 정자와 난자 중 성을 결정하는 것은 난자이다. 조강이 석형류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의 하위 분류와 조강에 속하는 목은 다음과 같다. 위지위그 위지위그(, "보는 대로 얻는다")는 문서 편집 과정에서 화면에 포맷된 낱말, 문장이 출력물과 동일하게 나오는 방식을 말한다. 이는 편집 명령어를 입력하여 글꼴이나 문장 형태를 바꾸는 방식과 구별된다. 현재 대부분의 워드 프로세서는 위지위그 방식을 쓰고 있으나 HTML이나 TeX는 편집 명령어를 통해 편집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문서의 호환성, 범용성 때문이다. 위지위그 기법이 채택되기 전에, 레이아웃(여백, 공백 등)에 거의 관계 없이 시스템 표준 글꼴과 스타일을 사용하여 텍스트가 편집기들에 나타났다. 사용자들은 일부 텍스트가 굵게, 기울임을 써야 하는지, 또 어떠한 크기나 글꼴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지시하기 위해 특수한 비인쇄 제어 코드(현재는 마크업 코드 태그라고 함)를 입력해야 했다. 이 환경에서는 문서 편집기와 워드 프로세서 간 차이가 거의 없었다. 1974년 제록스 PARC에서 버틀러 램슨, 찰스 시모니 및 동료들이 개발한 알토용 문서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브라보가 일반적으로 위지위그 기술을 통합한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간주되며 글꼴, 자간과 같은 형식으로 텍스트를 보여주었다. 현대의 소프트웨어는 특정한 종류의 출력을 위해 화면 디스플레이를 최적화한다. 이를테면, 워드 프로세서는 일반 프린터의 출력물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프린터의 해상도를 가상으로 구현하고 위지위그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그저 사용자가 작업한 것을 보여준다는 능력 자체가 위지위그의 주된 매력 포인트는 아니다. 여러 상황에서,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이라는 표현이 중요하지 않을 만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다른 수준의 "현실주의"와 더불어 여러 개의 위지위그 모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위지위그 응용 프로그램들의 디자이너들이 보통 저마다 다른 기능을 갖춘 다양한 출력 장치를 고려하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비롯될 수 있다. 여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여러 해결책을 포함한 응용 프로그램들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 위지위그 응용 프로그램의 설계 목표: 위의 모든 목표를 한 번에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주된 문제는 출력 해상도가 다양하다는 점에 있다. 2007년 쯤, 모니터들은 보통 한 인치에 92, 125 화소를 가지고 있다. 프린터는 한 인치에 보통 240에서 1440 화소를 가지고 있다. 일부 프린터의 수직 해상도는 저마다 다르다. 레이아웃 텍스트를 출력하려고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출력 기술이 문자열들 사이에 공간(스페이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다음을 포함한다: 화면에 보여 줄 때 품질을 떨어트리고, 문서가 다른 프린터에 출력된다면 레이아웃이 변경될 수도 있다. (높은 해상도의 프린터에서는 라운딩 문제가 더 적어지므로 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보통의 가입형 블로그 가입자는 HTML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므로 글을 쓰기가 힘들다. 따라서 글을 쓸때에 위지위그 방식을 많이 이용한다. 국내의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블로그, 이글루스 블로그, 티스토리 블로그 등은 모두 지원하며, 또한 HTML로 바로 쓸수도 있다. "'보는 것'은 사용자가 입력한 것, '얻는 것'은 출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S는 ㅅ으로 풀이하였으며 ㅈ로도 읽힐수 있습니다." 플라톤 플라톤(, "Plátōn", "넓은, 어깨 폭이 넓은";, ; 기원전 428년/기원전 427년 또는 기원전 424년/기원전 424년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다양한 서양 학문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고,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에 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전해지지만, 플라톤이 쓴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I과 ‘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은 의심스러우며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I’ 등과 같은 대화편은 대개 위조되었다고 판단한다. 대개 편지는 거의 모두 위조되었다고 여기며, 예외로 일곱 번째 편지만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가운데 무엇이 소크라테스의 것이고 플라톤의 것인지에 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남긴 저술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다. 따라서 수많은 플라톤의 아이디어,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가져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라케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 〈대(大)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퀴레네 사람 덕분에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돈〉, 〈국가〉,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원전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켈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플라톤은 ⟪파이돈⟫부터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설을 제창하였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상기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성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적 부분의 덕을 절제,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dikaiosyne, 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Politeia)'다.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교육을 5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는 출생부터 17세까지로서, 이 시기는 기초적인 도야(陶冶)의 단계로 보아, 문예·음악·조형미술 등 비교적 수준이 낮은 지적 도야 및 일반적으로 정서적 방면에 해당되는 학예와 체육을 주로 하였다. 체육도 단지 육체의 단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정신적 도야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과목은 유희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게 하였고, 이런 자유로운 학습활동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이 발견되게 하였다. 둘째 단계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이 시기의 교육은 군사훈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어떤 곤경에도 참아낼 수 있는 강인한 심신을 기르기 위하여 체육만을 전수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남게 했다. 셋째 단계는 20세에서 30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철학의 예비교과로써 수학·기하·천문·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이 시기에 성적이 불량한 자는 군인으로 남게 했다. 넷째 단계는 30세에서 36세까지로서, 이때에는 전적으로 협의(狹義)의 변증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감각적인 것을 떠나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취급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35세에서 50세까지로서, 이 시기를 플라톤은 '동굴에 들어가는 시기'로 비유하였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속세에 나와 군사와 정치를 실습·연구하고, 풍부한 경험과 견문을 쌓는다. 50세 이후에는 평생토록 변증법의 초보적인 대상인 선(善)의 이데아를 연구하고, 교대로 정치를 맡으며 후진을 교육한다. 플라톤이 주장했고 또한 '아카데미아'에서 실행한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적 방법이었다. 그것은 소피스트들의 논쟁술·궤변술에 빠지는 대화법이 아닌,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이며, 생명이 없고 또 문자에 의한 교육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존중하는 대화법이었다.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에서 인간발달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는데, 그것은 욕망, 정신, 그리고 신성이라고 하였다. 가장 낮은 수준의 욕망(desire)은 오늘날 본능, 욕구, 충동으로도 표현되며, Freud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말하는 원초아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욕망은 주로 신체적 욕구만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 다음 수준인 정신은 용기, 확신, 절제, 인내, 대담과 같은 개념이며, 최고의 수준인 신성은 초자연적이고 영원하며 우주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신으로서 오늘날 이성으로 표현된다. 플라톤은 이미 그 시대에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낮은 수준이 높은 수준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발달이라는 생각을 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3세까지 유아는 공포나 고통, 슬픔의 감정을 경험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유아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습관에 의해 성격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Platon, 1953)면서 유아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것은 아이를 버려놓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성격형성에 있어서 초기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 인간의 성격이 수정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하였다. 아동기에는 이성이 성숙되지 않기 때문에 아동교육은 주로 음악이나 스포츠 등에 중점을 두고 같은 또래와 어울림으로써 사회성발달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6세가 되면 “남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놀게 하라”고 하면서 성의 분리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 아동교육에서의 ‘남녀칠세부동석’ 개념과 유사하다. 청년기가 되면 최고의 국면인 이성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는 이성적,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과정을 과학이나 수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교육철학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교육을 환경의 영향을 받는 정신의 발달이라고 해석하였다. 플라톤은 이미 그 때 개인차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각기 적성에 알맞은 일에 종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Muuss, 1996). 철인 정치론을 전개한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정은 평등사회가 아닌 신분사회를 옹호하는 데, 플라톤 또한 신분사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귀족정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실현 양태는 일반적인 귀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귀족정에서의 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높은 신분으로써의 도덕적 의무를 중시해야 하는 데, 그 실현은 한가지 예를 들면 왕의 사유재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플라톤은 왕의 사유재산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만 쓰여야한다(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밑의 귀족들까지도 사유재산을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의 상징인 왕이라면 그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 일선을 담당한 일선 ‘귀족’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 계급에 기반한 귀족 또는 세습에 의한 귀족이 아니라, 철학 지식이 충만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독재’를 줄곧 주장해왔으며, 시민 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 정치’라고 비판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의 ‘네가지 주된 덕’("cardinal virtues")에서는 ‘조화’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데, ‘네가지 주된 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만을 해야하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일을 한다거나 서민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용기를 보이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선 ‘사회적 부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하면 일컬어지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은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될 수 없는 개인이며, 더 나은 정치·, 사회 체제를 만드려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진리라고 설파했다. 또한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존재라는 목적론적 인간관이란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 관념적 사회주의 기조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계승이 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대화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요 해설자로 한다. 35편의 《대화편》과 13편의 서간은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대 학자들은 최소한 일부 저작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플라톤의 저작은 여러 방식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그에 따라 플라톤의 글을 명명하고 배열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되었다. 플라톤의 글을 분류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16세기 앙리 에티엔(헨리쿠스 스테파누스)의 플라톤 판본에서 비롯되었다. 또 플라톤의 글을 배열하는 방식으로 4부극에 따르는 전통이 있었는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 방식이 고대의 학자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정 점성가였던 트라쉬불로스의 것이라고 여겼다. 아래 플라톤의 저작 목록에서 학자간에 플라톤이 쓴 글인지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은 (1) 표시를, 그리고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책은 (2) 표시를 달았다. 표시가 없는 저작은 플라톤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 저작은 플라톤의 이름을 빌었으나 상당수는 고대에 이미 위작으로 여겨졌으며, 트라쉴로스는 자신의 4부극식 저작 배열에서 이런 류를 넣지 않았다. 아래 작품은 "위작"(Notheuomenoi) 또는 "위서"(Apocrypha)라 불린다. ISO 639 ISO 639는 전 세계의 언어 명칭에 고유 부호를 부여하는 국제 표준이다. ISO 639 표준은 몇 개의 세부 표준으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두 가지가 현재 발표되어 있고 나머지는 아직 작업 중이다. 세부 표준은 다음과 같다. 언어의 한국어 명칭에 따라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진주만 공격 진주만 공격(, )은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 섬의 미국 해군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주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 되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유류 보관소와 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격은 진주만 폭격, 진주만 전투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주만 공격 또는 단순히 진주만이라고 더 자주 불린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중일전쟁).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년 11월 26일의 헐 노트를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을 선택하였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이었다. 11월 26일은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아무도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 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1941년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었지만, 진주만 북쪽 200마일에서는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는 항모 위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고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흘러 나오는 달콤한 음악이 들려 오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서 공격 목표물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고 그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제국 해군 소좌 미쯔오 후지다(Mitsuo Fuchida)는 회고했다. 심지어, 레이다에 일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당일 아침녘에 오기로 한 B-17 폭격편대로 오인하게 된다. 다만 당시 일본군 함재기는 항공모함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해 진주만의 북동쪽 방향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오인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 이후 군사재판에서도 당시 근무자들에 대한 태만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그로부터 3일 뒤 미국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으며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인들은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에게 반감을 사게된 미국의 생각을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줄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휴스 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으며 이에 나이가 18세부터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 되었다. 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소위 “음모론”이 떠돌고 있고, 그중 하나가 진주만 공격 당시 미 해군이 일부러 격침되어도 상관없는 구식 전함들만을 배치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애리조나호 등 정박 중이던 미군 전함들은 1941년 기준으로 취역한 지 30년 가까이 된 전함이었다. 가장 젊은 편인 애리조나호도 취역 연도가 191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는 오해에 불과하다. 미군은 1922년 워싱턴 군축 조약에 따라 1920년대 이후에 신형 전함을 한 척도 건조하지 못했다. 워싱턴 군축 조약 결과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일정한 비율의 전함만을 보유할 수 있었을뿐더러 신형함 건조는 제한되었다. 이미 건조 중이던 전함 및 대형 중순양함은 1920년대에 항공모함으로 용도 변경되었다(1920년대와 30년대에 각국이 항공모함을 취역시킨 원인은 항공모함의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군축 조약에서 탈퇴한 일본은 신형함 건조를 1930년대 초부터 진행해 왔으나, 미국은 1937년 이후부터 서둘러 신형함 건조를 시작했고, 1941년 12월까지 신규 건조된 최신형 전함은 단 2척이었다. 위의 피해 현황에도 나오지만, 전쟁 초기 군함이 부족했던 미국은 가능한 한 인양하여 수리한 후에 재투입했다. 문제가 된 구식 전함 가운데 애리조나호와 연습 표적함이던 유타호를 제외한 나머지 전함은 모두 일선에 복귀하였다. 뒤늦게 신형함 건조를 시작한 탓에 가용 가능한 군함은 구식함뿐이었던 미군이었지만, 일본군은 그 함대가 두려워 조기에 기습했던 것이다. 참고로 신형함 건조 시작 이후에도 미군은 전함이 모자라 진주만 공격 당시 파손된 구식 전함을 수리해서 다시 전투에 투입했다. 특히, 만약 미군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게 둘 필요도 없이 차라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간 해역에서 요격하여 참전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훨씬 적은 피해로 일본을 무력화할 수 있었을 것이나, 실제로는 진주만이 궤멸만 간신히 면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도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수용소를 만들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다. 당시 미국 내에 거주하던 한국인들도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강제수용되었다.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은 진주만 공격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의 이름을따서 만들었다. 애리조나호는 그 당시 공격을 받은 지 불과 9분만에 침몰하였고, 총 인명피해 2403명중 1177명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선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그 위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 기념관을 설계한 사람은 알프레드 프레이스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1958년에 기념관 창설을 허용해서 그로부터 3년 후에 완공되었다. "The Attack on Pearl Harbor: An Illustrated History" by Larry Kimmett and Margaret Regis is a careful recreation of the "Day of Infamy" using maps, photos, unique illustrations, and an animated CD. From the early stages of Japanese planning, through the attack on Battleship Row, to the salvage of the U.S. Pacific fleet, this book provides a detailed overview of the attack. X11 색 이름 X11 색 이름은 X 윈도 시스템에서 RGB 색에 대응하는 이름을 말한다. 아래 표는 CSS에서 사용되는 색상 이름 목록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특히 목판화, 동판화 및 수채화 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년 부활절부터 1494년 오순절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오버라인 각지를 편력했다. 살아생전 했던 세 번의 장기 여행 가운데 첫 번째였던 이 여행의 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중부 라인 지역에 머물렀다가, 1492년에 엘사스 지역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커다란 인상을 준 작품을 만든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를 방문하기 위해서 콜마르(Colmar)를 찾아갔지만, 숀가우어가 이미 1419년 2월 2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뒤러는 바젤에서 활동했는데, 그곳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의 책〈바보배Narrenschiff〉(1494년 초판 인쇄)에 실린 유명한 목판화를 제작했다. 여행에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1494년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오래되고 명망이 있는 뉘른베르크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녀 사이 자식은 없었다. 그와 그의 두 형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뒤러 가문은 대가 끊기고 사라졌다. 결혼하고서 약 3개월이 지난 1494년 10월 초순에 그는 신혼인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베네치아로 여행, 이듬해인 1495년에 귀국하였다. 이 제1차 이탈리아 여행에서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을 가까이 한 게 뒤러 자신에게서나, 또 후의 독일 회화 전체를 위해서도 커다란 의의 있는 일이었다. 그때 구체적인 성과는 그가 여행 도중 틈틈이 그린 몇 점의 수채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자연을 접할 때 느끼는 화가의 신선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자연 관조를 바탕으로 하여 훌륭하게 표현했으며, 이른바 도나우 파의 작품과 더불어 그 후 유럽 풍경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7년부터 독립을 했고, 1503년부터는 한스 쇼이펠라인(Hans Schäufelein), 한스 폰 쿨름바흐(Hans von Kulmbach), 한스 발둥 그리엔(Hans Baldung Grien)과 함께 작업장을 운영했다. 그는 뉘른베르크 알트슈타드에 있던 그의 작업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이 시기 주로 초상화와 몇 점의 자화상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초상화〉(149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자화상〉(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린다우의 상인〈오스볼트의 초상화〉(1499년 바이어른 국립 회화 수집소 소장), 〈자화상〉(1500년 뮌헨 미술관 소장) 등 이 시기 그린 그림들이었다. 당시 이미 작가로서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게 오히려 판화였다. 특히 1498년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1498년)은 뒤러의 삶 뿐만 아니라 유럽 목판화 역사에서도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을 이루는 16점 작품은 한 점씩마다 고도의 기술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보여 주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사람의 기사>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와 뒤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콘라트 첼티(Conrad Celtis)의 책 〈지형학으로서의 사랑 quatuor libri amorum〉(1502년)을 위해서 뒤러가 제작한 삽화에 잘 드러나 있다. 첼티는 뒤러를 제2의 아펠레스(Apelles)라고 칭찬했다. 1505년 뒤러는 베네치아를 향해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조르조네, 팔마 일 베키오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조반니 벨리니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 편지에서 뒤러는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을 하기도 했다. 진지한 학구열, 근면함, 통찰력을 통해서 뒤러는 고향 도시 뉘른베르크에서도 정확한 소묘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과 진실된 자연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그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발견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독일의 상인들은 바르톨로메우스 교회를 위해서 커다란 크기의 그림 〈묵주〉를 주문했다. 후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구입해서 프라하로 옮기도록 해서, 지금은 프라하의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그림에는 두 명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황제에게, 아기 예수가 교황에게, 성 도미니크와 여러 천사들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묵주를 건네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고, 베네치아 시 위원회가 만약 그가 영구히 베네치아에 거주한다면 200두카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그는 1506년 늦가을 고향 도시로 되돌아오는 여행길에 올랐다. 1509년부터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위원회에 의해서 임명된 미술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예술 계획을 입안하는데 뒤러가 상당부분 관여를 했다고 가정을 한다. 이 시기 동안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이외에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다. 그 당시 뒤러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해서 〈성녀 베로니카〉(1510년), 〈고통을 겪는 구세주〉(1512년),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1512년)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뒤러의 작품에서는 목판화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었고, 뒤러가 그린 회화는 점점 드물게 보게 되었다. 1512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유화가 있다. 작은 크기의 동판화 연작의 상당 부분이 이 해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뒤러는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복제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얻었다. 뒤러는 여러 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주문을 받아서 일을 했다. 늦어도 1510/1511년 이후부터는 관계가 이루어졌다. 뒤러의 친구인 빌리발트 피리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가 그 관계를 중재했다. 모든 작품은 간접적으로나마 황제의 결혼과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동판화 〈기사, 죽음과 악마〉,〈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I〉이 제작되었다. 또한 〈파움가르트너 제단화〉도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달 전에 뒤러는 목판화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죽을 정도로 병약해진 인간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였다. 이 시기에 뒤러는 집중적으로 비례학과 같은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1518년 뉘른베르크 시의 대표자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회의에 참석했으며, 그곳에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1520년 6월 12일부터 뒤러는 아내와 함께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쾰른을 거쳐서 안트베르펜과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로 여행을 갔다. 네덜란드로의 여행은 진짜 개선행진과도 같았다. 도처에서 뒤러는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다. 안트페르펜의 시행정당국은 정착을 하도록 뒤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300굴덴의 연금, 아름다운 저택, 무료 숙식과 공공 작업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시행정당국의 제안은 허사였다. 영주들, 각국의 대사들,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그를 열렬하게 찬양했고, 그를 자신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이전의 특권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특권을 재확인받으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다. 네덜란드의 보물같은 예술품을 보고, 그곳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수 많은 영주, 고위 성직자, 예술가들의 그림도 이번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521년 7월 2일 그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뒤러는 다시금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1520/1521년에 그는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장식을 책임졌다. 그 장식은 오늘날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1530년에 제작된 모조품이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하는 두 점의 거대한 목판화가 1526년에 제작되었다. 이 목판화는 바오로, 베드로, 마르코 복음 저자, 요한 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뒤러는 원래 이 목판화를 뉘른베르크 시에 선사했고, 시청사에 세워져 전시되었다. 뒤러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뉘른베르크의 상인〈히에로니무스 홀츠슈우어〉라는 유화가 1526년에 그려졌다. 같은 해에 〈요한 클레베르거〉의 그림이 제작되었는데, 그림이 뒤러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여행 이후로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던 뒤러는 1528년 4월 6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 》은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 대화록이 아닌 유일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는 이미 제목이 예시하듯이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당시의 일반적인 인간 생활에서 관찰하게 되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점에 대한 토론이다. 플라톤의 4복음서(《소크라테스의 변론》, 《프로타고라스》, 《파이돈》, 《향연》) 중의 하나로 그의 초기 대화편(對話篇)이다.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상으로 피소된 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 변론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이었다. 즉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고 하는 델포이의 신탁(神託)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에 좇는다고 생각하여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사람의 억단(臆斷)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이것이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알게 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은 신의 지(知)에 대해서는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그러면 그러할수록 진지(眞知)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지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하였다.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고 애지(愛知)에 대한 각오가 언급되고 있다.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시종일관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가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 이것이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서(書)이며 제자인 플라톤이 심혈을 기울여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같은 세대의 사람이나 후세에 전해 주려고 한 불후의 명저이다. 2004년 9월 프랜시스 크릭 프랜시스 크릭(, 1916년 6월 8일 ~ 2004년 7월 2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이다. 노샘프턴셔주에서 태어났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는 생물학의 연구에 집중한다. 때마침 195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 유학 중이던 미국의 젊은 생물학자 제임스 D. 왓슨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두 과학자는 서로의 중점 연구분야에 동의, 1953년 4월 25일 DNA의 이중 나선의 구조에 관한 논문을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발표 당시 학계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으나, 생물학이 점차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이 논문에서 제시된 DNA 구조의 중요성과 타당성이 인정되어 1962년 두 사람과 모리스 윌킨스는 노벨상을 수상한다. 지구 생명의 외계기원설(우주기원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의식에 대한 그의 책으로는 《놀라운 가설》이 번역되어 있다. 크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은 그의 오랜 과학 경력의 절정이었지만, 곤빌 앤드 카이우스 칼리지 학장직을 고사하고 1977년 30년간 몸담았던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제임스 D. 왓슨은 2003년 DNA 구조 발견 50주년을 기념하는 한 케임브리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겉으로 "꽤 잘 유지된 비밀"은 200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소라야 드 샤다레비앙의 《생명의 설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분자생물학》에 이미 기록되었다. 케임브리지에서 분자생물학에 미친 그의 중요한 공로는 199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된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 제4권(1870년 - 1990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유전학과의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 교수직 선거인단이 합의에 도달할 수 없어서 당시 대학 부총장 로드 아드리언의 절충을 요구했다. 로드 아드리언은 그 교수직을 먼저 대안 후보 귀도 폰테코르보에게 제안하자, 그는 고사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크릭에게 교수직을 제안하자, 그도 고사했다는 것이다. 크릭은 1976년에 캘리포니아 라 호이아의 소크 연구소()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크릭은 1960년부터 이 연구소의 비상근 연구원이었다. "나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고 크릭은 썼다. 안식년이 끝나자 크릭은 소크 연구소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의 교수를 겸했다. 그는 신경해부학을 독학하고 신경과학의 다른 여러 분야를 공부했다. 그는 분자생물학에서 빠져 나오는 데 몇 년 걸렸다. 그는 마침내 1980년대에는 그의 새 관심사였던 의식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자서전적 저서 《얼마나 미친 추구인가》는 왜 그가 분자생물학을 떠나 신경과학으로 돌아섰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크릭이 이론적 신경과학분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다음 몇가지는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크릭은 자기가 의식에 관련된 여러 하위분야 전문가들 사이의 건설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함으로써 신경과학의 발달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퍼트리샤 처칠랜드 같은 관련 철학자들과도 협력했다. 크릭은 크리스토프 코흐와 협력관계를 맺고 1990년부터 2005년 사이에 의식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크릭은 의식에 관한 자신의 이론적 연구를 우리가 사물을 보는 수백 밀리초 동안에 뇌가 어떻게 시각적 인식을 일으키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전략적인 결정을 내렸다. 의식은 아직껏 잘 알려지지 않은 단기 메모리 과정을 포함하는 만큼 매우 신비한 것 같다고 크릭과 코흐는 인정했다. 크릭은 신경생물학이 어떻게 해서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의식을 분자적, 세포적, 행동과학적 차원에서 연구하면서 하나의 통합된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음을 밝히는 책도 출판했다. 크릭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신경과학은 이제 뇌가 어떻게 의식이라는 경험을 일으키는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크릭은 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상세한 정보 위에 세워지지 않은 인공지능형 정신기능 모형의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그리고 소쉬르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회학에서도 구조주의 사회학이 발생하게 된다.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중요 개념 중 공시 언어학(synchronic linguistics)과 통시 언어학(diachronic linguistics)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소쉬르의 제자들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그의 사후(1916년)에 출판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가 있다. 젊은이 문법학파의 제자였으나 그들의 이성과 존재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언어 현상을 전체로서 체계 속에서 고찰하였다. 드 소쉬르의 최초의 논문이자 가장 중요한 저작인 1878년의 "Mémoire sur le système primitif des voyelles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인도유럽어족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도유럽어족의 음성체계에는 이미 알려진 음 이외에 소멸한, 음가를 알 수 없는 한 ㅇ음이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헨드릭센(Hendriksen)이 히타이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 소쉬르가 언급한 바로 그 위치에서 어떤 후두음을 발견함에 따라 드 소쉬르의 이론의 정당성은 확고해졌다.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파롤은 개인적인 언어 사용, 개인적인 언어 스타일을 의미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말하는 스타일이나 각 지방의 사투리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발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추상적 체계를 랑그라고 했다. 예를들어 장미라고 한다면 장미라는 단어 그 자체는 랑그이며, 붉은색을 띄며 정열을 의미하는 것은 파롤인 것이다. 기호의 자의성(arbitrary)이란 기표와 기의 간 연결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라는 말이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기표인 음성의 연속과 그것이 나타내는 개념과 아무런 자연적·내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므로 자의적이다. 또한 기표는 시간의 선상에서 전개된다. 기표는 청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음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이 음의 길이는 시간의 선이란 차원에서 헤아릴 수 있다. 언어 기호는 언어 연쇄의 선상에 놓이는 순서와 위치에 따라 변별적 단위가 되고 의미 변화를 가져온다. 이와 같은 언어 기호의 성질을 선조성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기호의 특성은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의 제1의 원리와 제2의 원리로 설명된다(소두영, 1991). 기호의 의미는 그 자체의 고유한 어떤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속에서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의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는 관계에 의해 부정적으로(negatively) 규정된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표의 차이로 인해 기의가 구성된다. 고전역학 고전역학(古典力學, )은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운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물리학이다. 뉴턴의 운동법칙을 만든 뉴턴의 이름을 따 "뉴턴 역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전역학은 다시 크게 두 분야로 나뉜다. 하나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 움직이지 않는 물체들을 다루는 정역학이며 다른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를 다루는 동역학이다. (역학 참조) 고전역학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매우 정확하게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계에서는 상대성이론, 원자단위와 같은 극히 미세한 스케일의 계에서는 양자 역학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그리고 그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계에서는 양자 마당 이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전역학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여전히 아주 유용하다. 첫째, 다른 이론들에 비해 비교적 수학적으로 간단하여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둘째, 대략적으로 옳은 결과를 주는 범위가 아주 넓다. 실제로 고전 역학은 다음과 같은 물체들의 운동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고전역학은 따로 발전된 고전 전자기학, 그리고 고전 열역학과 거의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 더 심각한 모순점들이 드러나 현대 물리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별히, 고전 비상대론 전기역학은 에테르 매질에 대해 빛의 속도가 일정하리라고 예측하였다. 이 예측은 고전 역학과 융화될 수 없었고 그러한 사실이 특수상대론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고전 열역학과는 엔트로피가 잘 정의될 수 없는 양이 되는 깁스 역설과 흑체복사의 자외선 영역에서의 무한한 에너지의 예측 등의 모순을 빚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양자 역학이 성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고전 역학의 기본개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해하기 쉽게 점입자 - 즉 무시할 만큼 작은 크기를 가지는 물체 - 만 다루고자 한다. 적은 수의 맺음변수(parameter)를 가지고 "점입자"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 그 몇몇 맺음변수는 위치, 질량, 그리고 점입자에 가해지는 힘이다. 맺음변수들 하나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고전 역학으로 기술할 수 있는 물체 중에서 어떠한 것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 진짜 점입자들(ex:전자)은 양자 역학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다. 크기를 가지고 있는 물체들은 점입자라고 가정한 물체보다 훨씬 복잡한 운동 형태를 가진다. 왜냐하면 내부 구조 또한 다른 운동의 형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수가 회전을 걸어 던진 야구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야구공과 같은 물체를 서로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입자의 집합체로 생각하여 점입자에 대해 얻은 결과를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합체 속 입자 간의 거리가 다른 물체와의 거리보다 충분히 작다면 이 집합체가 점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야구공 같은 집합체를 점입자로 취급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점입자의 "위치"는 공간 내의 임의의 고정된 한 점, 때때로 이것을 "원점" 즉 O, 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지며, O에서 입자까지의 벡터 r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점입자는 움직이거나 변화하기 때문에 r은 "t"의 함수이다. 여기서 시간은 임의의 초기시간 이후로 지나간 시간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알려져 있기로는 갈릴레이의 상대성)에서는 시간은 모든 기준틀에서 절대적이다. "속도", 즉 시간에 따른 위치의 변화율, 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상대성에서는 속도는 직접 더하고 빼기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만약 자동차 A가 60 km/h의 속도로 50 km/h의 속도로 달리는 다른 자동차B 옆을 지나간다고 하자. 이럴 때 60 km/h로 달리는 자동차A의 관점에서 보면 자동차 A는 속도60-50=10 km/h로 달리고 있는 다른 자동차 B의 옆을 지나가는 것이다. 간단한 수식을 사용해보자. 앞에서 논의한 자동차 B의 기준좌표계의 속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면 벡터 u = "u"x (x는 x 방향의 단위벡터), 자동차A가 바라보는 자동차B의 속도는 다음과 같다. "가속도"(속도의 변화율) 는 가속도 벡터 는 속도의 크기가 변할 때, 방향이 변할 때 혹은 둘 다 변할 때 변한다. 만약 v의 크기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때때로 감속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감속을 포함해서 속도의 어떤 변화라도 간단히 가속도라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속도가 영(0)보다 작은 경우이다. 그렇다면 가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가속도가 영(0)보다 큰 경우가 된다. 두 개의 기준틀(Frames of Reference) S와 S'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S'는 S에 대해 상대속도 u로 움직이고 있다. S와 S'에서 각각 바라보는 하나의 사건(event)이 있다. 두 기준틀에서 바라보는 그 사건에 대한 연관성은 다음과 같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먼저 질량 m을 가지는 물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S에 있고, 당신의 친구는 S'에 있으며 당신의 친구가 속도 u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바라보는 물체의 속도는 v이며, 당신의 친구가 바라보는 속도는 v'이다. 이런 경우에 v와 v'의 연관성은 다음의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뉴턴의 제2법칙은 한 입자의 질량과 속도와 힘(벡터양)의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서 "m"은 입자의 질량 F는 그 입자에 가해지는 모든 힘들의 벡터합(외부에서 가해진 "알짜"힘)이다. 그래서 뉴턴의 제2법칙은 다음{수식(1)}과 같다. 로 바뀐다. 여기서 a는 위에서 정의한 것처럼 가속도이다. 항상 질량("m")이 시간("t")에 대해 일정한 것은 아니다. 질량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예도 있다. 먼 달로 쏘아 올린 로켓을 생각해 보자. 로켓의 질량은 로켓이 멀리 날아갈수록 줄어든다. 연료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위와 같은 간단한 형태{수식 (2)}는 틀린 것이 되며 뉴턴의 제2법칙의 완전한 형태{수식(1)}를 사용해야만 한다. 뉴턴의 두 번째 법칙만으로 한 입자의 운동을 모두 기술할 수는 없다. F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식은 그 입자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물리적인 상황을 고려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항력을 다음과 같이 입자의 속도에 대한 함수로 모형화할 수 있다. 여기에서 λ는 양의 상수라고 하자. 일단 입자에 작용하는 각 힘을 구하고 나면 그 식을 뉴턴의 두 번째 법칙에 대입하여 "운동 방정식"이라고 부르는 상미분 방정식을 만들 수 있다. 앞에서 든 예를 계속 써서, 그 입자에 작용하는 힘이 마찰력뿐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운동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위 식을 적분하면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v는 초기 속도를 뜻한다. 즉 이 입자의 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 이 식을 다시 한 번 적분하면 입자의 위치 r을 시간의 함수로 구할 수 있다. 대표적인 힘의 예로 중력과 전자기학에서 나오는 로렌츠 힘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 뉴턴의 셋째 법칙을 써서 입자에 작용하는 힘을 유도할 수도 있다. 어떤 입자 A가 다른 입자 B에 F라는 힘을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B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력" -F를 A에 대해 작용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힘 F를 한 입자에 주게되면 입자는 변위 δr만큼 움직이며 이 힘에 의해 "행하여진 일"은 스칼라양으로 다음과 같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하다고 하고 그 입자에 행하여진 총 일은 δ"W" 이라고 한다면, 뉴턴의 두 번째 법칙에 의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T"를 운동 에너지라고 부른다. 점입자의 경우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여러개의 입자로 구성된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각각의 입자들의 운동에너지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특별한 힘의 종류인 보존력은 퍼텐셜 에너지의 스칼라 함수 V의 그라디언트 로 나타낼 수 있다. 입자에 작용하는 모든 힘이 보존력이라 하고 V를 총 퍼텐셜 에너지라하면, 총 퍼텐셜 에너지는 입자에 작용하는 각 힘에 대응하는 퍼텐셜 에너지 의 합으로 얻어낼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이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그리고 총 에너지 formula_18 는 시간에 대해서 상수이다. 우리가 보통 다루는 힘이 보존력 이기 때문에 이 법칙은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입자계에 대한 유용한 결과를 얻게 해준다. 참고 각운동량. 고전역학에 대응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체계가 있다. 라그랑지안 역학과 해밀토니안 역학이 그것이다. 이 둘은 뉴턴 역학과 동등하나 문제를 풀 때 더 유용한 경우가 있다. 이 둘과 현대 물리학 체계들은 보통, 힘이라는 개념을 우회해 에너지 같은 다른 물리량을 사용하여 역학계를 다룬다. 두 개의 기준틀을 생각하자,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기준틀에 대해서 상대적인 속력 u로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면, 차 한 대가 다른 차 한대에 대해서 10 km/h로 지나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u는 10 km/h가 될 것이다. 두 기준틀 "S" 와 "S 이며, "S은 "S"에 대해서 u의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사건이 "S"기준틀에서는 시-공간 좌표로 ("x","y","z","t") 로 표시되고, "S에서는 ("x,"y,"z,"t"') 로 표시된다. 갈릴레이-뉴턴 상대론에서 어떤 사건의 시-공간 좌표는 갈릴레이 변환으로 알려진 군변환에 의해서 규정된다. 시간이 어떤 기준틀에서도 절대적이라고 가정하면, x방향으로 상대속도가 u만큼 차이나는 기준틀간의 시-공간 좌표는 다음의 관계를 갖는다. 이 방정식 4개가 갈릴레이 변환으로 알려진 군변환을 정의한다. 자연을 지배하는 추상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그리스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추상적인 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한 과학자 중 한 명인데 그는 피사의 사탑에서 대포알 두 개를 떨어뜨리는 유명한 실험을 수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실험에서 그는 두 개의 무게가 다른 물체가 땅에 동시에 떨어진다는 이론을 검증했다.) 아이작 뉴턴경은 프린키피아에서 3개의 운동법칙을 처음으로 제안했으며 또한 이들 세 법칙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체나 천체의 움직임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뉴턴은 또한 고전역학에서 사용되는 수학계산에 필요한 미적분학을 개발하기도 했다. 뉴턴 이후에 고전역학 분야는 더욱 수학적이며 추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 ,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 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1400년 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초대교회의 신프라톤tonism)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가톨릭 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그리스 북부 칼키디케 반도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전 367)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쓰여졌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자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 융합 정책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문헌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편집 간행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서 <자연학(Physics)>의 뒤(Meta)에 놓였기 때문에 <자연학의 뒤의 서(Meta-Physics)>라고 불리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후세의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내용을 '프로테 필로소피아(Prote Philosophia)'(제1의 철학) 또는 '테올로기케(Theologike, 신학)'라 하였으며, 존재 내지 실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은 의사 가문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 특히 생물학 영역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주의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데아론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불식(拂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리한 4원인론에서부터 그 이전의 학설은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밀어버렸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재성(離在性)·초월성으로 인하여 감각물의 존재와 해명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고 거부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의 감각물로의 내재화(內在化)가 그의 생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2권의 신학에서 목적론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의 원인인 신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서 사유(思惟)의 사유, 자기 사유라고 역설하였다. Hoi ik ben Henk de vries 최고의 지혜는 오로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인식한다고 하는 특권을 가지며, 무릇 모든 제1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學), 모든 학의 왕자, 최고선을 알며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학, 가장 신적(神的)이어서 외경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원인의 하나이며 어떤 종류의 원리(始動因)라고 생각되며, 또 이와 같은 학은 신만이 소유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 원리 원인의 학, 즉 제1 철학은 동시에 신학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를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한편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正義)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5권 정의론에서 정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평등'(equal)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분석론 전서》("Prior Analytics")의 편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그가 창안한 개념은 19세기에 수리논리학 분야에서의 발전이 있기까지 서양 논리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관한 이론이 의 핵심적인 부분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조금 더 설명을 추가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삼단 논법’이다. 삼단 논법은 연역적 추론에 바탕한 논증이다. 삼단 논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론적 방법이다.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보편성을 향해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이 보편성은 특정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이와 같은 보편성은 그들의 원형(原型) 또는 전형으로써 주장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특정한 것에서 보편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사물들의 본질(essence of things)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적인 방법이란 특정한 현상에 대한 연구로부터 본질에 관한 지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포괄하며,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형상(form)이라 불린 것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이들과 유사한 형태로의 관상(contemplation), 다시 말해 인식하는 양식에 이르기까지의 하향적인 과정을 취한 플라톤의 방법과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되어 있다. 플라톤의 방법이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의 연역 추론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방법은 귀납적이면서 연역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말은 자연계의 현상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부분이며, 이는 현대의 물리학, 생물학 등의 분야를 포괄한다. 현대에 들어서 철학("philosophy")은 윤리학이라든지 논리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과 같은 보다 더 포괄적이고(generic) 모호한 분야에 한정되었다. 현대의 철학은 자연계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를 과학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활동 분야는 지적 탐구(intellectual inquiry)의 모든 분야를 넘나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 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는게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흙도 여러 분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운동하고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4가지 원인을 들었다(四因論). 그는 , , , 그리고 에서 그 원인을 답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휠레)와 형상(形相, 에이도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질료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소재로서 이것이 형상에 의해서 형태가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관찰이나 경험을 플라톤과는 달리 중요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모든 분야에 이르고 있지만,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 기록하고 분류하였다. 《동물지(動物誌)》 9권, 《동물 부분론》 4권, 《동물 발생론》 5권 등을 저술하고, 형상과 질료의 철학으로 설명하였다. 암컷은 재료 즉 질료를,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을 제공하고, 생물의 성장에 따라서 형상이 완성하고 더욱이 그것은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라 하는 관점에 입각한 해부학적 구조, 발생학적인 기관 발달의 연구를 했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은, 고래나 평활(平滑), 상어의 태생(胎生)을 발견하였고, 꿀벌의 생태나 닭의 부화 등의 정밀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에 입각하여 생물의 분류를 하였고, 또 생물의 종(種)은 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완전도를 늘린다고 하고 생물의 11개의 계급을 만들었다. 이것이 '자연의 계단'이라는 생각이며, 완전도는 발생학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생물학에 이어서 그는 물리학, 천문학으로 고찰을 진행시켰는데, 경험·관찰 혹은 생산 기술과의 관련은 생물학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역시 생물학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파급시킨 영향은 매우 크며,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학문의 부정(否定)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물질은 연속적이며, 허공(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反)데모크리토스적 입장을 취하고, 모든 땅 위의 물질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되었으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참된 원소인 제1질료가 열냉·건·습의 4개 기본적인 형상 2개씩을 얻어서 생성된 것이다. 제1질료가 열·습을 얻어서 기(氣)로, 건·열로 불, 건·냉으로 흙, 습·냉으로 물이 된다. 이 4원소는 그에 의하면 단일체이며, 4성질은 분리시킬 수 있으므로 상호의 변환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이 연금술을 장기에 걸쳐서 밑받침하였던 것이다. 천계(天界)를 만드는 원소는 아이테르로서, 땅 위와는 다르듯이 지상과 천체의 운동도 서로 다르다. 항성과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해서 등속 원운동을 하고 있다.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물체가 갖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승이거나 낙하, 즉 직선운동이라고 보고, 천체와 지구의 운동을 마주 놓았다. 지상의 물리학을 천계에 적용시킬 순 없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결국 17세기 뉴턴에 의해 뒤집힐 때까지는 정통적(正統的) 학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또 그의 역학에서는 자유 낙하의 속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공기의 저항에 반비례하는, 즉 무거운 것일수록 빨리 낙하한다는 견해를 취하지만,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부정된 사실은 유명하다.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몇몇 광학에 관한 뛰어난 이론의 소유자였다. 기원전 350년에 쓰여진 그의 저서 '난제들'("Problemata")에 초창기의 카메라에 해당하는 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이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생활의 영위에 교육목적을 두었다. 그는 개인이 타인과 접촉할 때 이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하도록 하는 교육체계를 요망했다. 인간의 최고기능은 사고와 행위를 이성적으로 하는 데 있다고 보고, 과학과 철학을 통한 이성의 훈련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이룩하는 데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그는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보고, 이 행복은 중용(中庸)이란 덕과 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육은 이성을 통해서 중용의 덕을 가진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국민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성원(成員)으로 교육할 수 있는가를 중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교육을 통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국가에 유능한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교육을 중요시하였다. 자유교육은 직업적(생산적) 교육이 아니고 여가를 이용하여 자유인으로서의 교양을 함양토록 하는 교육인데, 이를 위한 교육으로 읽기·쓰기·셈하기·음악·체육 등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은 문화인의 교양을 쌓는 것이며, 음악은 한가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기 위한 것이고, 체육은 건전한 신체를 갖게 하여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교육은 신체의 노동보다 정신의 활동을 더 중요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육의 조직이나 내용은 아동의 성장형태에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유아에게는 동물놀이·신체적 활동·이야기 등으로 교육시키며, 14세 이전의 아동들에게는 도덕적·신체적 교육을 중시하여 체육·음악·독서·쓰기 등을 가르치되 이론이나 법칙의 교설(敎說)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동을 통한 안정된 습관을 확립케 하기 위해서만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21세가 될 때까지의 청년들은 수학·문학·천문·음악·문법·시·수사학·윤리학·정치학 등 지적인 학습을 시켜야 하며, 21세 이상의 대상자들에게 과학과 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방법은 자연발달에 의하여 불합리한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지향하는 것이었다. 처음의 불합리한 신체적 교육에서 점차로 합리적인 정신적 교육을 지향하며, 정신교육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욕망에서 합리적인 이성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체적 교육에서 습관으로 향상하고, 다시 마지막으로 이성의 교육에 도달하게 하는 방법이 진정한 교육방법이라고 했다. 즉 체육(體育)·훈육(訓育)·교수(敎授)의 3분야로 나누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은 중세 말기까지 그를 절대 권위로 신봉한 서양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로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소나타 서양 고전 음악에서 소나타(Sonata)는 기악을 위한 음악 형식의 하나로, 주로 노래가 동반되는 칸타타(cantata)에 대비되어 '연주'만 되는 작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소나타는 원래 16세기 초 프랑스의 세계적 성악곡인 샹송이 이탈리아에 전해져 악기로 연주된 데서 탄생하였다. 이 샹송 형식으로 된 오르간이나 기악합주용의 곡은 17세기 중엽부터 한창 작곡되어, 당시는 칸초네 또는 '칸초니 다 소나레'(악기로 연주되는 노래의 뜻)라 하였으나, 이것은 몇 개의 짧은 부분으로 된 1악장 형식의 것이었다. 이후 소나타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성악을 위한 칸타타와 구분하는 용어로 시작되었다. 17세기 후반, 비탈리 부자(父子)와 아르칸젤로 코렐리 등에 의하여 교회 소나타가, 그리고 프랑스나 독일을 중심으로 실내 소나타가 생겼다. 두 소나타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대위법적인 스타일을 가졌고, 후자는 일종의 모음곡(組曲)풍인 것으로 양쪽 다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 의 4악장으로 되었다. 그 후 이 두 가지 소나타는 서로 영향을 받다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바로크 시대 소나타의 대부분은 트리오 소나타라는 양식으로 쓰였다. 이것은 화음반주의 낮은음부를 포함하는 독립된 3성부로 된 소나타로, 보통 높은 2성부를 2개의 바이올린으로 하고, 낮은 1성부를 첼로와 하프시코드(또는 오르간)로 연주하였다. 이 시대의 중요한 소나타 작곡가에는 영국의 퍼셀, 프랑스의 쿠프랭, 이탈리아의 비발디, 스카를라티, 독일의 쿠나우, 텔레만, 헨델, 바흐 등이 있다. 특히 바흐는 소나타를 진정 예술적인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의 소나타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표하는 빈 고전파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낭만파에 계승된 다악장형식의 기악곡을 말한다. 소나타는 보통 빠르기나 성격을 달리하는 3~4악장으로 구성된다. 이상은 소나타의 전형적인 악장 구성이다. 그러나 고전파의 피아노 소나타나 협주곡의 대부분은 3악장제(보통 미뉴에트 악장을 생략)를 쓰며, 기타 2악장, 드물게는 1악장 또는 5악장 이상의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월광 소나타는 느린 악장으로 시작하여 2악장으로 미뉴에트를 거쳐서 소나타 형식의 3악장으로 마친다. 이 같은 형식으로 쓴 피아노곡을 피아노 소나타라 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등의 경우는 보통 피아노 반주를 가진다. 3중주곡, 4중주곡 등도 각기 3개, 4개의 악기로 하는 기악합주를 위한 소나타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협주곡은 독주악기(또는 독주악기군)와 관현악을 위한 소나타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파의 소나타는 이탈리아의 스카를라티, 클레멘티, 만하임의 시타미츠 부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들 엠마누엘 바흐, 크리스티안 바흐 들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하이든, 모차르트의 손을 거쳐 베토벤에 의하여 형식과 내용이 모두 절정에 이르렀다. 유명한 《열정 소나타》를 비롯한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 음악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데 대하여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리고 있다. 낭만파 이후의 소나타에서는 형식의 발전은 없으나 독자의 개성적인 소나타가 많이 생겼다. 중요한 소나타 작곡가에는 베버, 슈베르트, 슈만, 쇼팽, 리스트, 브람스, 드보르자크, 프랑크, 생상스, 포레 등이고 현대에서는 스크랴빈, 드뷔시, 레거,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힌데미트,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등이 있다. 소나타의 대표적 악장 주기 3중주 소나타 악기구성 소피스트 소피스트(, , )는 고대 그리스의 특정 종류의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 '현자(賢者)', '알고 있는 사람', '지식을 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詭辯家)'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소피스트는 종래의 시인들에게 이어받은 교육 문화의 전통을 깨는 일이 없이 신화를 인용하여 개성을 존중하면서 고등 교육의 촉진에 기여하였으나 기원전 4세기 이후 에우티데모스 형제처럼 아류가 되어 언론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에리스티케(문답 경기)에 열중함으로써 악명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소피스트들은 궤변론자(詭辯論者)등으로 치부되어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일부 나와 부분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이다. 소피스트의 출현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소피스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 학파는 각자의 주장만을 고집했고, 자연 철학자들은 알맞은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런 주장은 자연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난점을 제공했으며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를 초래했다. 회의주의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인간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두 번째는 아테나의사회의 변화이다. 페르시아 전쟁(B.C 490~480)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게 되어 아테네 사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소위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 후 선생으로서 소피스트가 출현(대부분 아테네 출신이 아닌 타 지역인)하게 되었고 그들은 노예 국가에 예속된 소피스트들이었으므로 아테네의 관습과 문화를 바꾸는 데 주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피스트는 주로 떠돌이 교사로서 혹은 외교관의 자격으로 아테네에 왔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중 대략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네에 출현했던 소피스트들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아테네인의 사고 방식과 관습을 참신하게 여겼고, 그것들에 대해 탐구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프로타고라스는 개인을 위주로 한 지식의 상대성과 전진성을 강조하였고, 덕의 교사로서는 종래의 귀족적인 덕에 대신하여 욕지(辱知)와 정의와 우애를, 민중 일반이 가르침을 받아 공유(共有)해야 할 폴리스의 덕이라고 역설하였다. 고르기아스는 존재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동시에 언어가 감정에 미치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여 기만과 설득에 의하여 사람들을 시의적(時宜的)인 행동으로 유도해 가는 일에 노력하였다. 이처럼 긴장한 비극성을 아류(亞流)인 카리쿠레스와 프라시마코스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배덕적인 것으로 타락시켜 힘이 즉 정의라는 논법을 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케오스의 프로디코스가 아테네를 방문하여 변론의 공연(公演)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자연에서 출발하여 언어·지식을 전달한 문명의 인위적인 발전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란 덕론(德論)이 유명하다. 백과전서적인 관심을 보였던 엘리스의 히피아스는 전반적인 지식 위에 웅변가와 정치가의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또 자연의 법과 인위의 법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수학을 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하였다. 통합 자원 식별자 통합 자원 식별자(, URI)는 인터넷에 있는 자원을 나타내는 유일한 주소이다. URI의 존재는 인터넷에서 요구되는 기본조건으로서 인터넷 프로토콜에 항상 붙어 다닌다. URI의 하위개념으로 URL, URN 이 있다. 일반 URI와 절대 URI 참조 문법은 RFC 2396에 처음 정의되었으며, 1998년 8월 출판되었으며, RFC 3986로 완성되어, 2005년 1월 출판되었다. 일반 URI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나타낸다: 다음은 2개의 예시 URI와 구성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URI와 URL은 역사를 함께 공유한다. 1994년 팀 버너스 리가 하이퍼텍스트를 제안하면서 하이퍼링크의 대상이 되는 자원을 대표하는 짧은 문자열로 URL의 개념을 암묵적으로 도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하이퍼텍스트 이름" 또는 "문서 이름"으로 불렀다. 그레고리력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은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양력(陽曆)으로,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이 역법을 시행했기 때문에 그레고리력이라고 부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한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었는데, 율리우스력의 1년 길이는 365.25일이므로 천문학의 회귀년 365.2422일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났다. 그레고리력은 율리우스력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역법으로, 1582년 10월 4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없애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했다. 그레고리력의 1년 길이는 365.2425일이므로, 천문학의 회귀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고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그레고리력의 채택 동기는 부활절을 언제 지켜야 할 지에 대한 초대교회의 의견 차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 후 4세기 초에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에 위치한 도시 에페소스의 주교인 폴리크라테스는 부활절의 날짜를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날짜와 달리 정함으로써 의견 충돌을 빚었다. 폴리크라테스 주교 역시 부활절의 날짜를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요한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한 날은 니산 14일(춘분 즈음 시작하는 달의 보름: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과월절 또는 유월절) 이후 첫 안식일의 다음날이었는데, 부활절을 히브리력(태음력)의 유월절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기독교 공동체들과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 공동체들 간의 대립이 생겼다.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을 모든 기독교인들의 교회력 시기로 통일하기 위해 춘분 이후 첫 보름 다음의 일요일로 정하였고, 춘분을 그 해 율리우스력에 따라 3월 21일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율리우스력은 실질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 햇수와 날의 계산에서 작은 편차가 있었다. 즉, 율리우스력의 한 해의 길이는 정확히 365일 6시간이며, 이는 천문학적으로 계산한 1년의 길이보다 약 11분 14초가 길다. 이 편차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1,250여 년 동안 누적된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춘분일이 325년 당시보다 열흘이 빨라진 3월 11일 즈음이 되어 달력에 큰 오차가 생겼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교황에게 역법 개정에 대한 권한이 부여되고 이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1582년 10월 4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였고, 개정한 달력은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력으로 부르게 되었다. 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리력은 1년을 365.2425일로 보아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을 빼야 했고, 이를 위해 400년에서 3번의 윤년을 제외시키는 방법을 썼다. 즉, 율리우스력의 윤년 중에서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하되, 그 중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두었다(예: 1700년, 1800년, 1900년, 2100년, 2200년, 2300년은 윤년에 해당되지 않지만, 1600년, 2000년, 2400년은 윤년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레고리력이 통용되고 있지만, 천주교회 국가들이 그레고리력 제정 후 1년 만에 대부분 이 역법을 시행한 것에 비해, 종교적 이유 때문에 개신교회 국가들은 18세기 전반까지, 정교회 국가들은 20세기 초까지도 기존의 율리우스력을 고수했다. 영국은 1752년 9월 2일 다음날을 9월 14일로,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 직후 1918년 1월 31일 다음날을 2월 14일로 하여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다. 이렇게 나라마다 역법이 달랐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예로서 안톤 체호프가 독일의 바덴바일러에서 사망했을 때 그곳 경찰이 기록한 사망 날짜는 그레고리력에 따른 1904년 7월 15일이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쓰이던 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2일이며 체호프 연구학회에서는 지금도 체호프의 사망일을 7월 2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895년 10월 26일(음력 9월 9일)에 조선 정부(을미개혁, 김홍집 내각)가 같은 해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하였고,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도 그레고리력을 쓰고 있다. 완전수 수론에서 완전수(完全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양의 약수를 더했을 때 자기 자신이 되는 양의 정수를 말한다. 최초 네 개의 완전수는 6, 28, 496, 8128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들 네 개의 완전수밖에는 알지 못했다. 유클리드는 이들을 formula_1 에 알맞은 수를 대입해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formula_2은 언제나 소수이지만 formula_2이 소수라고 2 − 1도 꼭 소수가 되지는 않는다. 2 − 1이 소수일 때는 이를 메르센 소수라고 부른다. 마랭 메르센은 17세기에 정수론과 완전수를 연구한 수도승이었다. 모든 짝수 완전수가 formula_1 꼴이므로, 모든 짝수 완전수는 연속된 자연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메르센 수가 소수가 아닌 경우에는 해당 숫자는 과잉수가 된다. 그와 동시에 모두 반완전수이기도 하다. 그러한 예는 120, 2016, 32640, 130816 등이 있다. 15, 63, 255, 511 등은 모두 매르샌 수들 중에서 소수가 아닌 합성수이기 때문이다. 메르센 소수의 수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짝수 완전수의 수가 무한한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홀수 완전수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홀수 완전수가 존재한다면 그 수는 다음 조건을 만족한다. 피아노 소나타 14번 (베토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작품번호 27-2)는 흔히 《월광(月光, Moonlight) 소나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올림다단조이다. 작품27로 1801년에 작곡되었다. 작품27에는 2곡의 ‘환상곡풍 소나타’가 있는데, 그 2번째 곡을 보통 ‘월광’이라 한다. 이는 작곡자 자신이 붙인 제명은 아니며, 당시의 문필가 레일시타프(Ludwig Rellstab)가 붙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곡의 아다지오 악장은 베토벤이, 조이메라 하는 2류시인의 〈기도하는 소녀〉라는 제목의 시에 감격하여 작곡하였다고 한다. 또는, 베토벤의 애인이었던 줄리에타 기차르디 백작 영양에게 바쳐진 것으로, 이 곡은 그 연애시대의 정열로써 작곡했다고도 추측되기도 한다. 중국어 중국어() 또는 한어(, ㄏㄢˋㄩˇ)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화어(), 중문() 등으로도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용자를 가진 언어로, 전 세계 인구 중 15억 명 가량이 모국어로 사용한다. 그 발상지인 중국 대륙에 가장 많은 사용자가 있으며, 세계 각지의 중국계 이주민들도 쓴다. 중국어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에서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UN의 6개 공용어 중 하나이다. 중국어는 단일의 언어라기보다는 방언연속체로 이루어진 제어(諸語)이며, 학자에 따라 다르나 방언은 크게 10개 내외의 범주로 나뉜다. 대표적으로 베이징 등지의 방언이며 중국의 표준어인 관화(官話; Mandarin), 상하이 등지에서 쓰이는 우어(吳語), 남부의 민어(閩語), 광동어 등을 포함하는 월어(粵語) 따위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자(漢字)라는 문자로 표기되는데, 이는 고대의 상형문자 갑골문을 기반으로 한 표어문자로서 그 수가 매우 많으며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발음을 표기할 때에는 로마자를 이용한 한어 병음이 사용된다. 가장 큰 특징으로 성조가 존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성조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 문법적으로는 일반적으로 SVO 어순을 따르며, 형태소가 굴절없이 단어를 이루어 어순에 따라 문법적 역할이 결정되는 문법적 고립어이다. 인접한 언어인 한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에게 어휘는 물론 음운이나 문법 등 다양한 면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어를 역사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어 제(諸) 방언의 특징은 중국어를 모어로 하면서 방언을 쓰는 집단 간에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각 언어변이형을 방언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면 개별의 언어로 취급하느냐 하는 데에는 논란이 있다. 다만, 한자 및 한문이라는 공통된 문어의 기반 위에서는 중국어 제방언을 아우르는 상호의사소통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중국어 제방언을 공통된 언어로 묶는 역할을 한다. 중국어는 성조어이다. 음절소리의 고저의 차이가 자음이나 모음과 같이 의미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을 성조라고 한다. 예를 들면 표준중국어에는 {ma}라고 하는 형태소는 경성도 포함해서 19개나 있다. 하지만 음평성(陰平聲), 양평성(陽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의 4개의 성조와 경성이 있어서 모든 것이 같은 발음은 되지 않는다. 어형변화(활용)가 일어나지 않고, 어순이 의미를 해석할 때의 중요한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고립어이다. 고립적인 특징을 가진 언어로서는 그 밖에 영어 등이 있다. 기본어순은 주어-서술어-목적어형이다. 하지만, 현대북방어나 문어에서는 나 , 에 의한 목적격 표시 등이 있으며, 주어-서술어-목적어→주어-목적어-서술어 형의 문장을 만들 수가 있으며, 게다가 교착어에 가까워져 있다. 예 현대중국어에서는 일본어처럼 동사의 전후나 문말에 조사, 조동사가 온다. 예를 들면 了는 동사에 붙으면 상(완료)를 나타내며, 문말에 붙으면 모댈리티를 나타낸다. 중국어에는 시제를 나타내는 문법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상은 존재하며, 동사에 (완료), 過(경험), 著(진행)을 붙이는 것에 의해서 나타내어진다. 또, 격에 의한 어형변화는 없는 것이 고립어의 특징이다. 따라서 중국어에도 명사나 형용사에 격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격은 어순에 의해서 나타내어진다. 예 1인칭단수의 인칭대명사 我 중국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는 문자인 한자는 표의 문자로 한국어의 표기 문자인 한글 같은 표음 문자처럼 발음 그대로 표기하는데 제약이 있다. 그래서 웨인 루니, 요르기오스 사마라스 등의 외국 인명이나,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외국 지명, 필립스나 롯데 등 기업명은 그 지역의 원래 발음과 비슷한 한자를 가차(假借) 하여 쓰거나, 컴퓨터와 같은 것은 그 용도와 특징을 한자어로 번역하여 電腦(전뇌, '전기와 전자에 의한 뇌'라는 뜻)와 같이 쓰기도 한다. 쿠바 쿠바 공화국(República de Cuba 레뿌블리까 데 꾸바), 줄여서 쿠바(Cuba 꾸바, )는 카리브 해의 카리브 제도에 있는 가장 큰 섬과 인근 섬들로 이루어진 아메리카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이며, 수도는 아바나, 공용어는 에스파냐어이다. 윈드워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히스파니올라 섬에 있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케이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케이만 제도와 자메이카가,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미국 플로리다주가 있다. 수도는 아바나이다.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포함되지만, 광의의 중앙아메리카에도 포함된다.「아메리카 합중국의 뒷마당」이라고 일반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뒷마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요로에 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성립한 공산주의 정권을 기념하여 「카리브에 떠오르는 붉은 섬」이라고 형용되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참여한 쿠바 혁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한 이래 현재까지 공산주의 국가로서 미국의 경제 봉쇄로 경제의 어려움을 자립 경제 체제로 버티면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2014년 12월 18일 국교정상화 선언을 했다. 1961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산주의 체제로 바뀌었으며, 냉전 시기인 1991년 까지 중남미의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 지원 국가였다. 쿠바 섬은 카리브해의 진주라고 불리면서 세계인들에게 동경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 쿠바에는 수천 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 17∼18세기에는 흑인들이 여러 차례 해방투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으로 끝을 맺었다. 쿠바와 미국 간의 긴밀성은 쿠바의 역사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쳐 미국은 끊임없이 쿠바를 지배하려고 넘보았다. 19세기에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는 각각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스페인은 쿠바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아바나 항에서 정박 중에 폭발한 사고(메인호 사건)(후에 미국의 자작극으로 확인되었다.)를 구실로 미국이 일으킨 미서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 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쿠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으로서, 명목상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실제 전투에 참가는 거의 없었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로, 10여 년간 계속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1940년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는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빈부 격차도 극심해졌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얻어냈고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1959년 카스트로가 정권을 장악하여 쿠바는 공산화되었다. (이 때 쿠바는 프로 야구인 큐반 리그를 없애 버렸다.) 이후,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쿠바 공산화 때부터 1993년까지 쿠바의 독재정권을 피하고자 120만 명의 쿠바인이 쿠바를 탈출하였다. 1970년대 쿠바는 볼리비아, 앙골라 등의 공산당 군벌들을 원조했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해당 국가의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쿠바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에는 일부 민간차원의 미국과의 교류를 허용하였으나 미국은 금수 조치로 쿠바에 제재를 가했다. 카스트로정권에 반대하여 수감된 양심수가 500명에 이른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침해로 비난받아 왔다. 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새로운 국가평의회장직을 계승했다. 2014년 12월 18일, 쿠바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했다. 2016년 11월 28일에 마침내 피델 카스트로는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쿠바는 카리브 해 북쪽에 있으며 주변으로 카리브 해, 멕시코 만, 대서양에 둘러싸여 있다. 쿠바 북쪽으론 미합중국 플로리다주와 바하마, 동쪽으로는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와 아이티, 서쪽에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남쪽으로는 케이맨 제도와 자메이카와 이웃하고 있다. 쿠바는 카리브 해의 군도로, 쿠바는 주요 섬이다. 주변의 섬들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콜로라도스 제도, 사바나 카마구에이 제도, 하르디네스 데 라 레이나 제도, 카나레오스 제도이다. 쿠바 본섬은 면적이 105,006 제곱킬로미터로 국토의 대부분을 이루며, 길이는 1,233km에 이르는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섬이다.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은 남서쪽의 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젊음의 섬)으로 그 면적은 3,056 제곱킬로미터이다. 쿠바의 총 면적은 110,860 제곱킬로미터이다. 쿠바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2050년이 되면 국토의 6%가 바다에 잠긴다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본섬은 대부분 평탄하거나 구릉이 있는 평야이다. 섬 남동쪽 끝에는 가파른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은 피코 레알 델 투르키노 산(높이 1,975m)이다. 이 곳의 기후는 열대에 속하지만, 연중 부는 북동쪽의 무역풍으로 온화하다. 일반적으로(지역차가 있지만) 11월에서 4월까지는 건기이며,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평균 기온은 1월에는 21 °C, 7월에는 27 °C이다. 카리브 해는 기온이 따뜻한 데다 쿠바 섬이 멕시코 만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허리케인 이 지나갈 때가 많다. 허리케인은 9월과 10월에 자주 일어난다. 쿠바의 가장 중요한 광물 자원은 니켈이다. 쿠바는 러시아 다음으로 니켈 매장량이 많다. 캐나다의 에너지 기업인 쉐리트 인터내셔널(Sherritt International) 사는 모아에 거대한 니켈 광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주요 자원으로는 니켈 채굴로 나오는 부산물인 코발트가 있다. 쿠바는 세계에서 정제한 코발트 생산량이 다섯 번째로 많은 나라이다. 최근 석유 탐사로 북부 쿠바 분지에서 약 46억~93억 배럴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쿠바는 이곳에 시험 시추를 시작하였다. 쿠바의 정치 체제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국가원수는 국가평의회 의장과 국무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현재 라울 카스트로(임기 5년)이다. 국가평의회는 인민 주권 민족 회의가 폐회 중일 때 입법 기능을 수행하고, 국무위원회는 행정을 담당한다. 국가평의회와 국무위원회의 구성원은 인민 주권 민족 회의(Asamblea Nacional del Poder Popular)에서 선출한다. 입법권은 5년 임기인 609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인민 주권 민족 회의가 행사한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의 기관은 쿠바 최고 인민 법원(Tribunal Supremo Popular)이다. 쿠바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존재하지만, 후보를 지명하거나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된 정당은 "쿠바 공산당"(PCC) 이외에는 없다. 쿠바의 수도는 아바나이며, 쿠바에는 14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역의 행정구역이 있다. 쿠바는 대단히 군사화 된 국가이며 국가 자원의 큰 부분을 군대의 설립과 유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할애하였다. 쿠바는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전쟁을 지원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미국과는 2014년 12월 18일 1961년 국교가 단절된 이후 53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미국은 수개월 내에 쿠바의 아바나에 대사관을 재개관하기로 하고 여행, 송금 제한 완화와 미국 금융기관이 쿠바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제재 수위를 낮추기로 했다. 대한민국과는 아직 수교를 맺고 있지 않았으나 현재 주 멕시코 대사관이 쿠바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2005년 KOTRA 무역관이 개관하였고, 현재 연간 5000여 명이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민간차원에서는 차질 없는 교류를 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60년에 수교하였다. 쿠바의 행정 구역 쿠바에는 15개 주(provincia)와 특별구역(이슬라 데 라 후벤투드)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는 여섯 지방으로 피나르 델 리오(Pinar del Río), 아바나(Habana), 마탄사스(Matanzas), 라스 비야스(Las Villas), 카마궤이(Camagüey), 오리엔테(Oriente)로 나누었다. 현재 행정 구역은 쿠바 독립 전쟁 당시 에스파냐의 군사 지역과 매우 유사하다. 쿠바의 주는 여러 시군(municipio)으로 세분된다. 쿠바 정부는 정부가 대규모로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조직하는 데에 공산주의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생산수단의 대부분은 정부가 소유·운영하며, 정부가 대부분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기업의 인력 분담율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1981년 공공부분이 91.8%, 사기업이 8.2%의 인력을 고용한 것에 비하여, 2006년에는 공공부분이 78%, 사기업이 22%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자본 투자는 제한적이며 정부가 승인하여야 가능하다. 게다가, 쿠바 사람을 고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쿠바 정부에 임금을 지급하고, 쿠바 정부가 다시 해당 근로자에게 쿠바 페소로 임금을 지급한다. 쿠바 정부는 이론적으로는 계급 특권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공산당원 또는 정부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우대가 존재한다. 교통, 직업, 주거, 대학 교육 그리고 보다 우수한 보건 혜택을 받는 것은 정부나 또는 공산당 내에서 신분을 가져야 가능하다. 1980년대 말부터 쿠바의 국가 운영 경제에 대한 소련의 보조금이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쿠바에게 소련은 수출의 보호무역 시장이었고 많은 경제 원조의 주역이었다. 소련은 쿠바산 사탕수수를 시장보다 높은 가격에 사 주었고 석유를 시장보다 낮은 가격에 쿠바에 공급해 주었다. 한때 쿠바가 소련으로부터 받는 보조금은 60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 보조금이 사라지자 쿠바의 경제는 "페리오도 에스페시알 엔 티엠포 데 파즈"(Período especial en tiempo de paz)라 불리는 급속한 경기불황에 직면하였다. 1992년에는 미국이 쿠바에 대한 엠바고를 더욱 강화하였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쿠바 사람들의 삶의 질을 1년 내에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는 데에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쿠바는 1인당 실질 GDP가 약 2만 달러에 달하지만, 엄청난 고환율 정책으로 인해 쿠바 페소화가 비정상적으로 자국내에선 고평가되어 있고, 국제 화폐 기준에서는 매우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수치이다. 전문가들은 쿠바의 1인당 명목 GDP를 약 7천 달러로 예상하며, 쿠바 내에서 생산되는 품목의 경우는 싼값에 거래되지만 수입 물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 상태이다.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주의·후(後)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쿠바는 소련의 원조의 종결을 벌충하여 식량, 소비재, 서비스 산업의 부족을 완화시킬 제한적인 자유 시장 수단을 취하였다. 이러한 수단들은 일부 소매와 경공업 분야에서의 자체적인 고용과 기업계에서 미국 달러 사용의 합법화, 그리고 관광 산업의 육성을 포함한다. 1996년, 관광산업은 사탕수수 산업을 제치고, 쿠바가 경화(硬貨)를 벌어들이는 가장 큰 자원이 되었다. 쿠바는 최근 10년간 카리브해 지역의 관광산업에 있어서 시장점유율을 3배나 올려놓았다. 이것은 관광산업의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이며, 이러한 성장율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쿠바의 경제에서 기본은 사탕수수 생산이다.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부침땅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사탕수수는 수출총액의 80~85%를 차지한다. 설탕 수출량의 4분의 3이 미국에 수출되고 있다. 사탕수수의 생산은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한다. 아바나 시가는 세계 최고품 담배로 주요 수출품이다. 그밖에 벼, 옥수수, 콩, 땅콩, 감자, 귤, 커피, 레몬, 코코아, 파인애플, 목화, 채소류 등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농업협동화와 저수지건설이 힘차게 추진되고 있다. 축산물은 이 나라 농업의 2대 부문의 하나이다. 혁명 전의 플랜테이션이나 대지주 경작지는 전부 공산주의 혁명이후 정부에 의해 토지개혁이 시행되어 국유농장이나 소농(小農)의 경작지가 되었다. 1990년대 소련의 몰락과 미국의 봉쇄 정책으로 유기농업이 시작되었다. 쿠바는 사탕수수를 위주로 한 대량생산 시스템을 포기하고 소와 유기질 비료를 이용한 협동농장 중심의 친환경 농업으로 전환하였다. 주요 짐승은 닭, 소, 돼지 등이다. 수산업에서는 왕새우잡이가 유명하여 생산량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 공업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탕공업이며 기타 채취, 전력, 야금, 세멘트, 화학, 원유가공 등 중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주요지하자원은 니켈, 코발트, 철, 망간, 동, 크로뮴, 보크사이트 등이다. 주요수출품은 사탕수수, 니켈을 비롯한 광물류, 잎담배(시가)와 그 가공제품, 커피, 물고기 제품 등이며 주요수입품은 기계, 식료, 원유, 강재, 화학제품 등이다. 철도 및 자동차, 해상 운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6년 기준으로 쿠바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베네수엘라(13.39%), 스페인(7.66%), 독일(5.66%), 미국(4.46%)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베네수엘라(12.82%), 스페인(4.14%), 러시아(3.17%), 볼리비아(1.59%)이다. 2006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2,98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10,174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시가 제품(213,218천 달러), 기타 의약품(178,905천 달러), 무인 항공기(88,625천 달러), 페니실린 등 의약품(38,131천 달러), 금속(38,016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디젤유(450.232천 달러), 냉장고(281,446천 달러), 형광등(169,650천 달러), 쌀가루(152,997천 달러), 냉동 닭고기(105,213천 달러)이다. 국내 총생산의 10%를 투자하는 무상교육과 7%를 투자하는 무상의료 시스템은 오직 공공선의 목적으로 굴러간다. 쿠바에는 학생이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여 개에 달하고, 의사들의 수준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쿠바 국민은 전체가 배급 수첩을 소지하고 있으며, 매일 배급을 받는다. 과거에는 외국의 초청이 없는 한 해외로 출국할 수 없었으나 최근 여권만 있으면 출국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이 나라는 500여 년 전에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인디오를 학살했기 때문에 백인 정착자와 흑인 이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주민의 인종 구성은 물라토가 37%, 유럽계 백인이 51% (주로 스페인계), 흑인 11%, 중국계 1% 인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에도 메스티소가 있다. 쿠바 정부는 인종별 통계는 인종차별로 연결된다는 이유로 인종별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추계 값은 점차 혼혈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2002년 쿠바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쿠바의 총인구는 1117만7743명 이고 이 중 남성이 559만7233명, 여성이 558만0510명이었다. 인종별로 보면, 백인이 727만1926명, 메스티소 및 물라토가 277만8923명, 흑인이 112만6894명이었다. 인구 통계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이애미 대학교의 쿠바와 쿠바-미국 연구소(The Institute for Cuban and Cuban-American Studies)는 62%가 흑인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2002년 인구 조사에서는 백인이 65.05%로 나타났었다. 국제 소수자 인권 연대(The Minority Rights Group International)는 아프리카-쿠바 혼혈인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혁명 전후의 빈약한 자료와 체계적인 연구의 결핍으로 인하여 여전히 의문인 상태라고 말한다. 쿠바의 인구에서 아프리카 출신의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33.9%에서 62%로 매우 다양하다. 쿠바의 주민은 매우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점점 흑인계의 인구증가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백인과 메스티소가 사회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는 다양한 종족간의 결혼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종족의 통합을 지향하는 추세다. 백인의 선조들은 스페인 사람과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다.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카나리아 사람, 카탈란 사람, 안달루시아 사람, 갈리시아 사람 그 밖에 다른 스페인 사람들은 쿠바 이주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 러시아인, 전쟁 전 이민 온 일본계 등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쿠바에서 살고 있다. 아프리카-쿠바 혼혈인들의 선조는 주로 콩고에서 건너왔다. 20세기 동안 있었던 이민은 쿠바의 인구 특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3년에서 1933 년 사이에 72만 명의 스페인 사람, 19만 명의 아이티 사람, 12만 명의 자메이카 사람, 기타 약간의 미국 사람, 중국 사람 등의 이민이 있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통해 이뤄진 현 정부의 정책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 국가별,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류에 기반 전통적 계급 사회는 파괴되고 많은 백인 유산 계층과 중산층이 미국 플로리다와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쿠바는 또한 비 쿠바인의 피신처이기도 한데,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천 명의 북부 아프리카 출신의 10대 및 소아 난민들도 존재한다. 쿠바의 출산율(2006년, 1천명 당 9.88명)은 서반구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쿠바 전체의 인구는 1961년의 약 7백만 명에서 현재의 1100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증가율은 지난 수십 년간 둔화되었다. 그리고 2006년부터는 증가율이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2006년의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43명이다. 이러한 출산율의 하락은 서반구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쿠바에서 이혼은 자유로우며 1996년에 1천명당 58.6명이 이혼하였다. (캐리비안 지역 평균 35명, 라틴 아메리카 평균 27명, 유럽 평균 48명과 비교된다.) 피임율은 약 79%인데, 이 수치는 서반구의 상위 1/3에 속한다. 현재 공용어는 스페인어(쿠바 방식의 스페인어)이다. 하지만 관광 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 본토에 가까운 곳, 그리고 공교육의 보급률이 높다는 점 때문에, 호텔, 레스토랑, 그리고 도심 등에서는 영어(보통 자메이카에서 넘어온 사람도 사용한다.)가 통한다. 구 소련 해체 전에는 러시아어도 공용어로 추가되었다. 러시아어는 쿠바의 대도시에서 사용된다. 또한, 아이티에서 이주한 주민은 아이티어(아이티식의 독특한 크레올 언어.)를 사용하며,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인구도 있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로 통하며, 영어, 아이티어는 소수가 사용하기 따름이다. 카스트로는 쿠바가 미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던 것은 미국의 선전을 국민들이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력을 교육에 집중하였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 정권은 교육 사회 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 비율을 강화하고 관련 예산이 국가 예산의 16%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의 문맹률이 크게 하락하였고 대학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무료로 제공한다. 유치원을 거쳐 예비학교 1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은 의무교육(obligatorio)이며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진다. 초등학교에서는 학급을 20명으로 하거나, 서브티쳐(sub-teacher)를 도입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은 크게 직업교육을 목적으로 한 실업계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한 인문계고등학교, 예술고, 체육고로 나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교복을 입으며, 학년에 따라, 기숙사 여부에 따라, 전공에 따라 교복의 색과 무늬가 달라진다. 특히 농촌에서 높았던 문맹률 일소 운동을 전개하여 문맹률이 낮아졌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문자해독률은 99.8%이며 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최고 수준이다. 또 국민의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 1728년에 개교한 아바나 대학 등이 꼽힌다. 2001~2002년 기준으로 19만 1262명의 학생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 또한 쿠바는 학교 교육에서 스포츠에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야구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필수 과목으로 도입했고 쿠바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쿠바 정부는 고문, 자의적인 구금, 불공정한 재판 그리고,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처형 {일명, 엘 파레돈("El Paredón")} 등을 포함한 수많은 인권 유린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이 정권이 거의 모든 정치적인 반대를 탄압하고 표현·회합·사생활·정치적 운동의 자유와 적법절차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앰네스티나 휴먼 라이트 워치 같은 인권 단체는 쿠바 양심수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2008년의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쿠바를 최하위권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국경 없는 기자회는 쿠바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공동으로 "세계에서 첫 번째로 언론인을 많이 투옥하는 나라"라고 간주한다. 쿠바 반정부 단체 하얀 옷의 여자들은 2005년 유럽 의회에서 사하로프상을 수상했다. 쿠바는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하였다. 유명 인사로는 페드로 루이스 보이텔(Pedro Luis Boitel), 마르타 베아트리즈 로케(Marta Beatriz Roque), 라울 리베로(Raúl Rivero), 마누엘 바즈케즈 포르탈(Manuel Vázquez Portal), 엑토르 마세다 구티에레즈(Héctor Maseda Gutiérrez), 호세 루이즈 가르시아 페레즈(Jorge Luis García Pérez), 기에르모 파리냐스(Guillermo Fariñas)가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투옥된 정치범의 숫자가 매우 축소되어 발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휴먼 라이트 워치에 따르면, 정치범들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수준 이하이며 비위생적인 조건의 감옥에 투옥되고 있다. 그 밖에도 블로그를 통해서 쿠바 소식을 생생히 전하는 요아니 산체스(Yoani Sánchez)와 같은 경우는 매우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다. 쿠바 국민들은 정부 허가(하지만 극히 드물다) 없이는 쿠바를 떠나거나 돌아올 수 없다. 쿠바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슷한 광범위한 검열 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08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최하위 순위를 보였다. 검열은 쿠바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을 제한한다. 언론매체는 정부에 의해 통제된다. 쿠바의 매체는 공산당의 혁명 지도부에서 관할하며, "선전 전략을 발전시키고 협조 한다.". 당국은 인터넷을 "21세기의 큰 질병"이라 부른다. 컴퓨터 소유가 금지되어 컴퓨터 보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인터넷을 이용할 권리는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가되며, 이들도 감시받는다. 불법적인 인터넷 연결은 징역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쿠바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의료를 시행하였다. 일차의료기관(Primary Health Care)을 중시하는 의료 제도를 채택하여 독특한 사회 복지 정책과 함께 "쿠바 모델"로 유명하다. 쿠바에는 '가정의 제도'가 있어 지역 주민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등 예방진료를 담당한다. 가정 의사는 의사가 환자를 방문하여 돌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종합의료기관(폴리클리닉)은 1차 진료기관으로 모든 진료과목과 전문의를 보유하고 있다. 최종 진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이 있고 이는 종합수술 및 입원이 가능한 병실 등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쿠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는 미국인을 포함하여 유학생을 무료로 받는다. 의사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에서 수년간 의료 봉사활동을 한다. 쿠바는 재해가 발생한 해외에 의사를 파견하고 있다. 이것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베네수엘라와 의사-석유 교환 협정으로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 미션에 의료인력과 설비를 제공하고 석유를 받고 있다. 쿠바 국민의 대부분이 스페인이나 아프리카로부터 이민을 왔기 때문에, 쿠바의 문화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특히 요루바(현재의 나이지리아)의 전통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국민의 영화 감상이 번성한 나라이기도 하다. 쿠바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쿠바정부는 종교를 탄압했으나, 현재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무교가 인구의 55%에 달한다. 스페인 식민의 영향으로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고 쿠바 혁명 이전에 인구의 7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1957년) 그러나 카스트로 정권 아래 신자 수는 약 40%까지 감소하고, 종교 활동이 반혁명 활동으로 간주되지 않을 필요성 때문에 현재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교는 정부의 제한을 받고 있다. 다른 종교로는 장로교등의 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와 아프리카 요루바족의 전통종교가 섞인 혼합 종교인 산테리아(Santería)도 민중 종교로 존재한다. 동부 지역에서는 아이티에서 온 이민자의 영향으로 부두교 신자도 있다.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특별하게도, 일본에서 발상된 창가학회도 존재한다. 쿠바의 국교는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이지만, 개신교도 소수 존재한다. 정부에서 허가하면 야외에서 종교 집회를 열 수 있으며, 개신교인과 가톨릭교회 신자 모두 사실상 쿠바 공산당(1961년 결성)에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하는 등 종교정책은 혁명초기에 비해 많이 온건화 되었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회선교에 따른 것이다. 그 증거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1982년 발행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의 소식지《"In-Touch"》와의 인터뷰에서 쿠바의 공산당원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사회선교를 실천하는 가톨릭교회 수녀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교회와 일반적인 개신교들을 제외한 교파로는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소속 쿠바 성공회(,)가 있다. 쿠바 음악은 스페인계와 아프리카계의 음악이 융합해 태어난 것을 기반으로 여러 요소가 서로 섞여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라틴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이다. 미국의 재즈 등과 함께 20세기의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쿠바 음악은 스페인의 기타와 아프리카의 북을 조합한 요루바계 문화의 영향이 강한 룸바(Rumba)나 손(Son)이 있다. 그 외에도, 대중음악으로서, 트로바나 댄 손과 같이 유럽 음악의 요소가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음악은 유로쿠바 음악, 아바네라(Habanera)와 아프로쿠바 음악인 룸바, 볼레로, 맘보, 차차차 등이 있다. 19 세기에 프랑스의 비제가 아바네라 리듬을 받아들인 때부터 쿠바 음악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쿠바 음악은 먼저 1930년에 송(son)이 미국에 소개되었고, 193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로 확산되었다. 1959년 쿠바 혁명 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되고, 또한 경제봉쇄 때문에 쿠바 음악이 세계로 확장되는 경로가 좁아졌다. 그러나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영향력이 지속되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는 혁명 이후 쿠바에서 젊은 세대의 운동으로 일어난 누에바 토로바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 현상이라고 할 정도의 인기와 영향력을 얻었다. 또한 아프리카풍 리듬 감각과 소련과의 연계에 의하여 고전적인 기술 체계가 반영된 재즈 연주자의 수준은 아주 높았고 1970 년대 후반에 그래미상을 받은 이라케레(Irakere), 199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곤사로 루발카바, 추초 발데스(Chucho Valdés, 이라케레의 리더)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뮤지션을 낳고 있다. 냉전 후 1990년대가 되면서, 로스 반 반(Los Van Van), 아달베르토 알바레즈 이 수 손(Adalberto Alvarez y su Son) 등 뉴욕 살사의 감각도 받아들인 그룹이 속속 등장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유럽 등에서 강연하는 연주가도 증가하였다. 1990년대 말에는 노년의 뮤지션을 다루었던 영화(1998년의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작품,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경제봉쇄가 계속되던 중에도, 미국계 대형 레코드 회사가 차례로 쿠바의 음악가와 계약하고, 일본에 와서 하는 공연도 증가하는 등, 쿠바 붐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활황을 보이고 있다. 쿠바의 국가는 바야모 행진곡(La Bayamesa)이다.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작곡하였으며, 공식 국가로 제정된 해는 1902년이다.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 대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에 비해 제작 편수는 적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혁명 정부가 1959년 세운 ICAIC(쿠바 예술, 영화 위원회)의 지원, 기획하에 영화가 제작되어 왔다. 유명한 영화인으로는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rollo, 1968년), 《딸기와 초콜릿》(Fresa y Chocolate, 1993년)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 감독, 움베르토 솔라스(Humberto Solas), 《인생은 휘파람을 부는 것》(La vida es silbar, 1998년),《아바나 조곡》(Suite Habana, 2003년)의 페르난도 페레스(Fernando Pérez)를 들 수 있다. 카리브해에 떠 있는 붉은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쿠바는 에스파냐와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은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혁명 박물관(Museo de la Revol cion)은 1920∼1960년에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현재 혁명관련 사진자료와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박물관 광장에는 카스트로가 반혁명파의 배를 침몰시킨 전차 Memorial Granma가 전시되어 있다. 쿠바 요리는 스페인, 카리브해, 아프리카 영향을 다양하게 받아서 섞였다. 또한, 스페인과 미국의 영향이 강하여, 쌀, 콩, 돼지고기를 많이 사용한다. 쿠바 요리는 특이하게도 스페인과 아프리카식 요리법을 자국에 도입한 한편 타국과는 다른 독특한 향이 많이 나타나서 자국의 향취를 풍긴다. 적기는 하지만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중국 요리의 영향이 나타난다. 역사적 이유로 오래전부터 쿠바 본섬을 비롯해 지역적으로 인구 분포는 상당히 불균형적이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상당 부분 기용됐지만 지금도 도시 내부에서는 소수 인구를 차지한다. 담배 플랜테이션과 땅콩 재배 인구도 많다. 쿠바요리는 멕시코 요리와 상당한 연관이 있으며 미국과 유럽 관광객이 많아서 특히 더 다양하다. 라틴 아메리카 요리와 미국 요리가 지니던 특색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고들 한다.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일하던 한국 농민들이 쿠바로 이주해 에네켄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쿠바의 경제 원조를 지원받기도 하였으나,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멕시코 주재 대사관에서 비공식적으로 쿠바와의 교류를 담당하고 있다. 반면, 비슷한 이념을 가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수교하였다. BSD 허가서 BSD 허가서는 자유 소프트웨어 저작권의 한 가지이다. BSD 계열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많은 프로그램에서 사용한다. BSD (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 라이선스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여, 해당 소프트웨어는 아무나 개작할 수 있고, 수정한 것을 제한 없이 배포할 수 있다. 다만 수정본의 재배포는 의무적인 사항이 아니므로 BSD 라이선스를 갖는 프로그램은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상용 소프트웨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GNU GPL과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GPL은 파생된 소프트웨어도 GPL과 같은 라이선스를 갖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즉 파생물의 경우에도 소스 코드가 반드시 배포되도록 하는 것인데, 이것은 GPL을 만들어낸 리처드 스톨먼의 의지에 따른 결과이다. BSD 라이선스의 경우에는 BSD 자체가 공공기관에서 만들어낸 것이므로 공공의 몫으로 돌려주자는 의미가 강하므로 라이선스 자체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누구나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GPL의 경우에는 자유 소프트웨어의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BSD 라이선스는 라이선스 자체에는 소프트웨어에 국한되지않고 하드웨어등에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누구나 자신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하는대신 사용자의 사용으로인해 발생하는 모든 발생가능한 경우의 리스크와 손해에대해 사전인식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사용자 본인에게 책임지우고 있다는 점도 이 라이선스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있다. BSD 3-Clause License 쑨원 쑨원(,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의 창립자이다. 호(號)는 이시엔(, ), 본자(本字)는 더밍(), 별명은 쫑샨() 또는 나카야마()다. 광둥 성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쑨원의 묘는 난징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청나라와 일본 제국,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이며 아명(兒名)은 쑨디샹()이다. 쑨원()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이다. 그리고 호(號)는 일신()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이라는 또다른 자(字)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광동성 향산현() 부근의 취형촌(翠亨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쑨다청(孫達成, )은 일찍이 마카오에서 재봉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그 사치함을 더럽게 여겨 농촌으로 되돌아 왔다. 큰 형은 손미()이고 자는 덕창(德彰)이다. 그의 집안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영국·프랑스 등 열강이 무너져 가는 청조를 침략하여 이권을 차지하려는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하며 청나라의 타도를 꿈꾸었다. 집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채 13세때 1879년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그는 하와이 화교 자본가였던 큰형 쑨메이(孫眉) 의 도움으로 유학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몸소 배우고 느꼈다. 그리고 홍콩으로 돌아온 이후 1892년 홍콩 서양 의학원에서 의학을 배웠다. 이 시기에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큰 영향을 받았다. 의대를 졸업한 후 쑨원은 병원을 개업하고 잠시 개업의로 생활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나라가 더욱 어려워지자 쑨원은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이 편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쑨원은 189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서도 흥중회 지부를 결성했으나,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흥중회는 청나라 조정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갈수록 그 무능함을 드러내자 '오직 혁명만이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는 신념 아래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봉기는 가담자의 밀고로 허무하게 무산되고, 쑨원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우선 일본으로 탈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1896년으로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고만다. 그러나, 다행히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해외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중국 혁명의 지도자급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지낸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경제학자들인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했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이듬해 1897년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우익들의 도움을 받으며 망명생활을 지내게 되는데, 이 시기 쑨원은 나카야마 쇼우라는 가명을 쓰며 다시 혁명세력을 결집하고 다녔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청나라 정국이 더욱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쑨원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2차 무장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몇 년간 쑨원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다. 1905년 8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후 중국동맹회는 총재 쑨원의 지휘를 받으며 수십여차례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봉기는 빈번이 실패로 끝나고 쑨원에게는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뒤따랐다. 쑨원은 중국동맹회의 활동을 다른 동지에게 맡기고 출국하여 1911년 무렵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국혁명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혁명자금과 군자금을 마련하여 동맹회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혁명의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민간이 스스로 주식을 발행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철도 부설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11년, 청조에서는 우전부대신 성선회의 건의에 따라 이들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사전 협의도 없이 철도건설을 국유화시켜 버렸다. 이러한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쓰촨 성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고, 각지에서 보로운동이 전개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우창에 있던 군인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우창에서는 중국동맹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동맹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일으키고 총독관청을 일시에 장악해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각지에서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17개 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을 함락하고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동맹회와 혁명군의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때문에 청조로부터 요청을 받은 위안 스카이 군대에 의해 진압당할 형편이 되었다. 한편, 혁명이 일어났을 때, 쑨원은 중국 밖에 있었다. 그는 그때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구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창 봉기 당시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 체류중이었다. 그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쑨원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서구 열강의 간섭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즉 외교의 성패에 따라 혁명의 성공이 좌우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6개국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공화정을 실시하려는 중국을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그 반대로 독일과 러시아는 혁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일본의 재야는 중국의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그 반대였고, 영국의 경우는 재야가 동정적이었으나 정부는 미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쑨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영국이라 보고 급히 영국으로 달려가 교섭을 벌였다. 그는 영국 외무성과 회담하고 영국정부에 대하여 청조에 대한 일체의 차관을 중지할 것과 일본에게 청조의 지원을 중지하도록 해주고, 영국 각 속지에서 '쑨원 추방령'을 취소하도록 요구하여 영국정부로부터 확약 받는 대신에 혁명정부는 청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프랑스로 가 똑같은 약속을 받아내고, 12월 16일 싱가포르에서 체류하다 12월 21일에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호한민과 요중개를 만나 전후의 사정을 듣고 '광둥지역을 기반으로 삼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거절한 채 12월 25일 상하이로 와 진기미,쑹자오런을 만나 정부조직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여기에서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를 주장했고, 쑨원은 '미국식 대천황중심제'를 주장하였다. 12월 29일에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17성의 45명, 화교 2명)는 총통 선거회를 열었는데, 쑨원이 16표를 얻어 초대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쑨원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1912년 1월 1일에 손문은 난징에서 영접 온 이들과 함께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 날 오후 5시에 난징에 도착하여 밤 11시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하였다. 이어 쑨원은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록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청조는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무너뜨리기에 그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쑨원은 여기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청조의 요청으로 혁명군 진압을 지휘하고 있던 위안 스카이와의 협상과 연합이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그들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이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위안 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로 하여금 2월 12일 퇴위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청조는 1912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혁명정부는 청조와 위안 스카이 사이에 퇴위협약이 진행되는 동안 위안 스카이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3월, 대통령중심제였던 '임시정부 조직대강'을 수정하여 내각 중심제를 기본 틀로 한 '임시약법'을 제정,발표하였다. 그리고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 스카이에게 1912년 4월에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쑨원과 쑹자오런은 중국 동맹회를 1912년 12월에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쑹자오런이 이사장 대리으로서 당수가 되었고, 쑨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위안 스카이의 야심은 제약할 길이 없었다. 위안 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함으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서구 열강세력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등 '매국'행위와 '독재'정치를 일삼았다. 아울러 그의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의 이사장 대리였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쑨원은 위안 스카이를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의 전횡에 반대하는 이열균(李烈均) 등이 토원군(討遠軍)을 조직하여 대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쑨원은 1913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제2차 혁명) 위안 스카이의 독재정치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용단체를 조직하고 여론을 선동하여 '황제'로의 등극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舊)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이 중화혁명당은 뒷날 중국 국민당의 모태가 된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 스카이에게 반대하는 무리들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였다.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가운데 운남 성 도독이었던 당계요가 토원군에 가담하여 이름을 호국군(護國軍)이라 개칭했다.(제3차 혁명)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위안 스카이의 심복이었던 돤치루이도 위안 스카이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고, 서구 열강들도 위안 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위안 스카이는 황제 등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에 호국군은 더욱 압박을 가해 위안 스카이의 퇴임을 요구했으나 1916년 6월, 위안 스카이가 병사함으로써 이 일은 자연스럽게 일단락되었다. 1916년 위안 스카이의 사망과 때를 같이하여 쑨원은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17년 위안 스카이 사후 북양 정권은 돤치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돤치루이의 탄압을 피해 광둥 성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비상국회를 열어 서남군벌 세력과 연합하여 광저우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호법 정부) 쑨원은 1917년 9월, '광둥 군정부'의 대원수로 임명되어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첫 번째 호법 정부) 그러나, 그 조직도 실권을 잡지 못했고 같이 손잡은 군벌들의 본질을 보고 이들 군벌들과는 '호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다음 해 1918년에 대원수 직책을 사임하고 5월에 상하이로 망명가야했다. 이 기간동안 쑨원은 얼마간은 상황이 유리할 때는 광저우로 돌아갔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다시 상하이로 도망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고 지냈는데, 상하이에서 《쑨원학설》,《건국대강》등 중요한 저술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뒷날 국민 정부의 지도이념이며 국정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또, 쑨원은 상하이에 있는 동안에 《건설》잡지를 창간하고, '민지서국'(民智書局)을 세워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여름무렵에 레닌과 소련 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쑨원에게 있어서 커다란 자극을 주었는데, 이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쑨원은 5.4 운동을 계기로 기존에 구상했던 '위로부터의 혁명'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에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다. 중국 국민당은 조직상에 있어서 중화혁명당과 달랐는데, 비밀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한 점과 중화 혁명당 시기에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고 당원의 등급을 폐지시킨 것 등이었다. 한편, 쑨원이 대원수 직책 사임한 이후 1918년 5월~1920년 6월까지의 광둥 정부(호법 정부)는 '7인 총재정부'로 존재했다. 1920년 6월에 쑨원은 상하이에서 당소의, 오정방, 당계요 등과 함께 합작을 성명하고, '광둥 정부의 계계 군벌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나쁜 일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복건 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광둥 성 군벌 진형명에게 광둥에 자리잡고 있는 광서 성(계계) 군벌을 타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진형명은 '광둥인이 광둥을 다스려야 한다'며 광둥 정부를 타도하였다. 진형명은 쑨원이 광저우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쑨원은 그를 광둥 성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안심시켰다. 그리고 11월 말에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와 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정부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21년 4월 광둥 성 국회에서 '중화민국 정부조직 대강'이 결정되었다. 다음달 5월에는 쑨원이 광둥에서 '중화민국 정식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은 북쪽에서는 북양 정부, 남쪽에서는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두 번째 호법 정부)로 양분되었다. 호법 정부가 성립된 후 쑨원은 호법(護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북양 정부와 대항하고자 국회에 '북벌안'(北伐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호법 정부는 구이린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쑨원은 안휘파와 봉천파와 함께 '반(反) 직예파 삼각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형명은 직예파의 오패부와 결탁하여 북벌을 반대하고, 쑨원과 가까운 광둥군 참모장 겸 제2사단장을 암살하였다. 이에 쑨원도 1922년 봄에 구이린에서 긴급 군사회의를 열어 북벌 계호기를 변경, 광둥으로 돌아와 진형명이 가지고 있던 광둥 성 성장 등의 직책을 취소하였다. 또 5월 4일에 북벌령을 내려 소관(韶關)에 대본영을 설치, 강서 성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한편 진형명은 쑨원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1922년 6월에 총통부를 포위하였다. 이 때, 장제스가 황푸에서 영풍함(永豊艦)을 타고 광저우로 와 쑨원을 구하였으며, 호법 정부는 북벌군을 불러들여 진형명을 토벌하였다. 결국 호법을 위한 두 번째의 북벌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쑨원도 상하이로 갔다가 1923년 초순 주변군벌의 압력에 의해 '진형명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세 번째 호법 정부를 조직하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쑨원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의 코뮌테른이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에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중국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국 안에서 협조자를 물색하였는데, 오패부와 같은 군벌도 고려되었지만 그 동안 혁명을 이끌어 온 쑨원을 지목해 관심을 가졌다. 때문에 보이틴스키는 상하이에 와서 쑨원을 만났고, 쑨원도 소련의 혁명 사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다. 1921년 7월, 레닌의 비서인 마링도 중국에 오자마자 쑨원과 만나 중국 국민당 개조를 촉구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혁명을 위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때 쑨원은 소련이 실시하고 있는 신경제정책(NEP)과 자신의 실업 계획이 별차이가 없음을 밝히고, 처음에는 중국 공산당이나 코민테른과의 합작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쑨원은 북벌을 준비하고 있어 양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어서 그 방해를 받을까 우려되었고, 당시 '반(反)직예파 삼각 동맹'의 안휘파나 봉천파는 모두 일본과 가까운 관계여서 소련과의 합작은 곤란하였으며, 또한 중국 공산당의 힘이 당시로서는 너무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쑨원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이들의 주도 아래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모습을 목격하며, 만일 중국공산당 당원이 개인적으로 가입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고, 소련은 외교가인 요페(Adolf Abramovich Joffe)를 파견하여 북양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하면서 베이징으로 왔다가 다시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쑨원을 만나 중국 국민당의 개조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 등을 협의하여 1923년 1월 16일 이른바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쑨원은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23년 1월 1일에 쑨원은 '중국 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따라서,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또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단원은 단체로 중국 국민당 프랑스 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초청으로 8월 16일에 장제스를 단장으로 '쑨원(일선) 박사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 조직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동안 소련의 각 도시를 돌면서 소비에트 조직과 군사학교 등을 시찰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소련 정부도 쑨원에게 재정 원조와 고문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여 정치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군사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1924년 1월에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저우에서 소집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다.(제1차 국공합작)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소련과의 연합, 2.공산당과의 연합, 3.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하고, 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였다.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이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해 쑨원은 제국주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직예파 군벌인 펑위샹이 연합하여 차오쿤을 대표로 하는 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베이징 정변) 이후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이 쑨원에게 전문을 보내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쑨원은 정치교섭이 필요함을 느껴 이 요청을 받아들여 1924년 11월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는 광저우->상하이->일본 고베->톈진->베이징 순으로 시찰하고 다녔는데, 이때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이같이 물었다. 이듬해 1925년 초 돤치루이의 주선으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베이징에서 소집되었다. 쑨원은 동지들을 인솔하여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에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해 2월 24일 아들 손과와 송자문, 공상희, 다이지타오 등을 증인으로 한 가운데 유언을 남겼다. 이는 왕징웨이가 쑨원의 구술을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그의 첫 유언에는 부인 쑹칭링과 자식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는 한달 뒤 다시 첫 유언을 남길 때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두 번째 유언을 했다. 그는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 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가 제창한 삼민주의 정신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중국 대륙 및 타이완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인 국경절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중화민국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칭송받으며,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부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삼민주의는 쑨원에 의해 제창된 지도이론으로 중국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6년~1897년 쑨원이 영국 런던에서 망명하던 중에 구상된 것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에 입각한 민족주의, 수천년에 내려운 군주전제 정체의 변혁을 목표로 한 민권주의, 사회·경제의 조직 개혁을 지향하는 민생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혁명 이론이다. 1905년 쑨원이 일본 도쿄에 망명하던 중 중국 혁명동맹회를 결성했는데, 동맹회 결성 후에는 삼민주의가 곧 지도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신해혁명 후 혁명운동의 진전에 따라 그 내용도 점점 변화되어가고 발전하게 되었다. 중요한 참고로, 삼민주의의 원형과 현대 중국 본토의 역사관은 사뭇 다름을 인지하여야 한다. 즉, 1905년 혁명동맹회에서 제시된 초기 삼민주의와 대비하여 현재의 삼민주의와 정치사상은 확인이 다름을 이해하고 인지하여야 한다. 초기의 삼민주의와 현재의 삼민주의는 같지 아니하며, 이의 변화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로서, 초기 삼민주의와 연관된 1905년 당시의 동맹회 구호는 구제달로(驅除撻虜 ; 달로(오랑캐)를 박멸한다), 회복중화(恢復中華), 창립민국(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의 4대 강령이었는데, 이 중 --- 현재로서는 그 표현이 다소 과격하기도 하고, 현대의 정치사상과 배척되는 --- '구제달로'의 민족주의 강령은 중국 통일 후 소수민족 수용을 위한 민족주의로서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정치적 필요를 고려하여 현대화 수용되었으며, 현재의 민족주의는 중국내부의 한족, 만주족, 몽고족, 회족, 장족 등 여러 소수민족과 한족이 상호 평등 및 대외적으로 '하나의 중국 민족'으로 본다고 중국 내부에서는 교육되고 있다. 즉, 초기 삼민주의에서 제시된 구제달로 등 과격한 구호는 현재 마땅히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민권주의는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해 국민이 선거, 파면, 창제, 복결의 4대 권리를 가짐으로써 인민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현대화된 사상을 교육하고 있다. 민생주의는 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사회주의적 성격의 주장으로서 자본의 억제와 지권의 평균을 제시하였으며 최종목적은 대동세계의 실현에 있다고 하는 현대적 해석이 주로 교육되고 있으며, 초기 삼민주의에 대해서는 애써 그 내용과 변화를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고 있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1924년 국공합작 후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 강령에서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로 민권주의는 '기본적 인권옹호'와 '인민 민주 독재'로, 민생주의는 '토지와 경작자에게'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현대의 변화에 의미의 중심을 두고 삼민주의를 교육한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897년경부터 일본에 망명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정계인사들하고 상당히 친분이 두터웠으며 일본에 망명해 머문 기간은 총 10년에 이른다. 1924년 11월이 마지막 일본 방문이 되었다. 1924년 11월 24일에 일본 고베에 도착, 11월 30일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고베에서 11월 28일 고베여자고등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은 쑨원의 일생에서 최후의 공식적인 강연이자,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쑨원은 '중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연합 주장'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기본적인 목표가 있어서 일본의 그것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일본의 팽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 것이었던 반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그 출발점을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항에 두고 있었다. 다만, 쑨원의 초기 대아시아주의는 유럽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황인종들의 단결을 주장했던 것으로, 열강의 침략을 백인종의 침략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반제국주의 인식을 가지지 못한 채 황인종인 아시아인들의 단결만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설명한 고베 강연에서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패권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지적하고,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 고 경고하였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동양사 교수인 박선영은 쑨원의 고베 강연에 대해 “쑨원이 주창한 아시아 연대는 서양의 반식민지를 경험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한제국이 이미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일본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모순된 것이었다. 한·중·일이 각기 주창했던 ‘아시아주의’는 지향하는 목적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시아 제국과의 연대를 통해 구체적이고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정립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존재했다.” 고 평가하고 있다. 마오둔 마오둔(茅盾, 모순, 1896년 7월 4일 - 1981년 3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소설가, 평론가, 공산주의 문학 공작자이다. 자는 안빙(雁氷)으로, 본명은 심덕홍(沈德鴻), 별명은 심안빙(沈雁氷), 필명은 마오둔(茅盾)이다. 마오쩌둥 집권 기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신문학 작가이자 항미원조 혁명 문예 작가였다. 1896년 청나라 저장성 가흥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중화민국 시기에 북경대학교 문과(文科) 예과반에 들어간 뒤 소설과 비평을 발표했고, 1920년 5월 천두슈 전 북경대학교 문과 학장의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거쳐 1921년에 중국 공산당에 공식 입당하였다. 1925년 '프롤레타리아트 예술론'이라는 평론을 내놓았다. 1921년부터 '공산당', '소설월보', '신청년' 등 문예 전선에서 첫 당원으로 공산 혁명 문학 진지 확보에 나섰고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원으로 일하면서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직원 파업을 지도했다. 덩중샤, 취추바이, 궈모뤄 등의 당 조직 간부가 일하던 상하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26년에는 선전 공작의 주축으로 마오쩌둥의 비서를 맡았다. 1927년 중국 공산당의 난창봉기와 추수봉기가 실패된 후는 검거를 피하여 1928년 7월 일본 제국으로 피신했다가 1930년 4월 상하이로 귀국하였다. 랑손(郞損), 현주(玄珠), 방벽(方璧), 지경(止敬), 미명(微明), 심명보(沈明甫) 등의 여러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주로 국민당 통치 지역과 조계지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코민테른의 좌익작가 연맹에서는 취추바이의 밑에서 집행 서기를 맡았으며, 이른바 '국방문학(國防文學) 논전'에서는 '민족 혁명 전쟁의 대중 문예'를 주장하여 중일 전쟁에 즈음해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을 병진해 나가자고 하였다. 좌익 작가 연맹의 해산이 강압된 후에는 상하이, 창사, 우한, 광저우 등지의 혁명 지도 일선에서 공산당 요원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에는 소비에트주의 공작을 위해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방문하였으며 1940년에는 옌안에 세워진 루쉰 예술학원을 방문해 문학 공작을 지도했다. 그후 충칭, 홍콩 등지에서도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소련 공산당의 대외 문화 공작자 교류의 일환으로 아내 겸 공산당원이었던 쿵더즈(孔德沚)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였고 1947년 4월 상하이로 귀국했으며 1949년 1월 공산 혁명 전쟁의 승리를 맞아 베이핑으로 이동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에는, 마오쩌둥의 비서 직을 다시 맡았고, 저우양, 궈모뤄, 쉬광핑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문학공작 노선의 주요 지도부의 구성 부분이 되어, 중국 공산당의 초기 항미원조 운동, 삼반오반 운동, 반우파 운동, 대약진 운동 등을 지도하였다.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1949년 ~ 1965년), 초대 중국작가협회 주석(1949년 ~ 1981년) 등에 있었다. 1957년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연방 방문을 직접 수행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마오쩌둥의 홍위병과 사인방의 탄압 간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사인방의 정치적 보호를 받았다. 사망 직전에 후야오방 등에게 당적 회복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덩샤오핑의 당시 업무 지침에 따라, 1921년 이후 문화대혁명 전까지의 공산당 간부로서의 경력과 활동 등이 참작되어 공산당원 당적을 회복하였다. 혁명 인민들에게서 거둔 거액의 인세 수입을 중공 문화부에 기탁하였다.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초창기 소설 작품으로 1927년의 '환멸' 등이 있으며, 좌익 작가 연맹 시기인 1932년 코민테른 농촌 혁명의 지도일환으로 쓰여진 '농촌 삼부작', 1933년에 내놓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혁명 소설 '자야' 등이 알려졌다. 1948년에는 소련 방문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소련견문록'을 출판하였다. 중공 정부 성립 후로는 중공 혁명 문학 운동의 지도 공작에 집중하였으며, 남긴 평론으로는 1950년 '재북경 문학공작자 선언', 1958년 '약진 중의 동북', 1960년 '사회주의 약진의 시대를 반영해 사회주의 시대의 약진을 추진하라' 등이 있다. 마오둔 문학상은 그의 유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궈펑 이후의 정권에 의해 1977년부터의 소설을 대상으로 하여 1982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장편 소설 문학상 수상이 이뤄지며 초기에 선정된 장편 소설에는 그가 마오쩌둥과 함께 매진한 '항미원조(抗美援朝)'운동에 관한 주제가 담긴 작품이 포함된다. 모순 모순(矛盾)은 명제끼리 서로 맞지 않아 논리적인 이치에 어긋남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전 논리에서는, 어느 한쪽은 참을 결론으로 내어놓고 다른 쪽은 거짓을 결론으로 내어놓는 식으로 진리값이 맞지 않는 경우, 곧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여러 명제가 동시에 제시된 경우를 가리킨다. 다음은 한자 문화권에서 ‘모순’이라는 말이 유래된 중국의 고사이다. 초나라에서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 상인은 자신의 창을 들어 보이며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선전했고, 또 자신의 방패를 들어 보이며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선전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명나라왕 신하중 한 명이 상인에게 “당신이 그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창으로 그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상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 고사의 창과 방패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대당 사각형에서 말하는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다."는 문장과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다."는 명제는 동시에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당 사각형에서 모순은 동시에 참일 수도 없고 동시에 거짓일 수도 없다. 본래 고전 논리에서는 진리값이 맞지 않는, 곧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여러 명제가 동시에 제시된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수리 논리학에서는 술어 p가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것을 formula_1인 경우, 즉 p로부터 거짓을 도출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정의한다. 귀류법은 어떠한 주장이 모순이기 때문에 그 주장의 부정이 참임을 논증하는 증명법이다. 한편 의미론에서는 어떠한 명제가 '충족불가능'한 경우로 정의한다. 이러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 이론을 무모순적(일관적)이라 하며, 이는 수학기초론의 중요한 개념이다. 만우절 만우절(萬愚節)은 4월 1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장난을 쳐도 나무라지 않는다는 풍습이 있는 날이다. 절이나 공휴일은 아니지만 서양의 여러 지역에서 일종의 기념일로 여긴다. 전통적으로 몇몇 나라에서는 만우절 장난은 정오 이전에만 행하여지며 이후에는 장난임을 알린다. 이 때에 오후에도 만우절 장난을 하는 사람을 '에이프릴 풀(April Fool)'이라 부른다. 다른 곳에서는 농담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한다. 만우절에 관한 초기의 언급은 15세기에 제프리 초우서가 쓴 이야기인 〈수녀와 수도사의 이야기〉에 나온다. 만우절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3월 25일에서 4월 2일의 이 시기가 봄의 춘분과 관련이 깊고, 이 때가 고대로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날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택국엣것으로 보고 있다. 1508년부터 1539년 사이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자료들 중 만우절 농담에 대한 이야기나 사월의 첫째날을 기념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레고리력(양력)을 받아들이기 전인 1564년까지 사람들은 4월 1일을 새해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샤를 9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금의 4월 1일에서 1월 1일로 새해의 첫날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4월 1일에 축제를 벌였는데 이런 사람들을 '사월의 물고기'()라고 불렀으며 친구가 자는 머릿맡에 천궁좌의 하나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놓는 등의 장난을 치며 조롱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다른 이유로 이 날을 기념한다. 1572년 스페인의 왕 필립 2세에 의해 네덜란드가 통치되고 있었을 때 네덜란드인 반란군들이 1572년 4월 1일 덴 브리엘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후에 다른 네덜란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 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에 이 날을 유머로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만우절의 유래에 대한 다른 설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만우절에는 대한민국에서 주로 소방서, 경찰서나 114콜센터 등에 장난전화를 거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만우절 장난전화는 범죄 행위'라고 규정하고 최대 2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하게 조치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만우절(4월 1일)에 112나 119에 장난전화를 걸거나 허위신고를 하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 부산소방안전본부 등의 집계를 보면 만우절 장난전화는 2010년 19건이던 것이 2011년 7건으로 감소했고, 2012년부터는 아예 없거나 1건에 그쳤다. 2016년 만우절에는 단 한 통의 장난전화도 없었다. 부산 112에 접수된 만우절 허위신고는 2014년부터 이듬해까지 매년 1건뿐이었다.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가짜로 범죄나 재해 신고를 하면 6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에 처한다. 또 정도가 심하거나 상습적으로 허위신고를 하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가적용돼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시 (문학) 시(詩, poetry)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다. 시는 한자어로 詩이며 이는 言(언)과 寺(사)가 합쳐진 형성자이다. 여기서 言이 의미기호, 寺가 소리기호이다. 즉 시는 言, 언어가 그 의미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이름이며,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시언지(詩言志, 언어로 나타낸 뜻이 곧 시)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란, 울림, 운율, 조화를 가진 운문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시작품을 성립시키는 각 시구를 가리킨다.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한국의 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의 한국어시는 향찰이나 이두로 기록되었다. 고대 한민족은 제천 의식과 가무를 통해 시가 문학을 만들어 냈다. 서정 양식은 서정시로 대표된다. 고대 한민족은 제천 의식과 가무를 통해 문학의 창조적 싹을 틔워 왔다. 시가의 기원은 원시 고대적 공동체 사회의 제의(祭儀)에서 발생하였다. 제천 의식 때 제주(祭主)가 되는 기도사(祈禱詞)나 송축사(頌祝詞), 민족적 시조신(始祖神)이나 영웅을 칭송하는 제사(祭詞) 같은 것은 신악(神樂)이나 율동적인 무용과 아울러 종합 예술의 분위기를 형성했고, 또 이것이 민족 문학의 모체가 되어 주었다. 예컨대,《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고구려 민족은 가무를 좋아하며 10월 제천시 국중에 대회를 갖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다 한다. (→고구려의 제천 행사 참조) 이러한 제의에서 불린 노래가 곧 삼국 초기의 시가 문학이다. 시가는 분화되어 악기를 연주하는 노래로 발전하고, 지금은 음악으로부터 유리된 가사만이 변천의 과정을 겪고 문자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된 가야 건국 신화 속에 낀 원시 시가의 유편인 〈구지가〉, 〈황조가〉, 〈공후인〉 등이 신화·전설 속에 묻혀 오늘날까지 그 가사의 내용이 한역(漢譯)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중, 〈황조가〉는 연애 감정을 표현한 서정적인 내용의 작품으로서 집단적인 원시 문학으로부터 개인적인 고대 서정 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은 각기 부족 연맹으로부터 세력을 키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체의 문학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이 초창기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제의와 밀접히 관련된 원시의 치졸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집단적·제의적 성격을 탈피하여 개인적인 문학예술이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향가는 세련된 개인 창작시로서 남북국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신라 유리왕 연대에 지어진 〈도솔가〉, 〈회소곡〉 등은 농업 국가를 형성한 신라 민족의 제신적인 성격에서 벗어난 비종교적인 시가이다.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이다. 이것은 특히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화랑·승려 등 신라의 중앙 귀족층에 의해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의적·민요적인 것과는 달리 개인 창작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귀족 문학인 것이다. 이 향가의 완성형은 10구체이며, 그 과도기적인 형태로서 4구체와 8구체가 있다. 내용 면에서 보면, 주로 생사(生死) 등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높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우아한 언어로 표현한 고상한 서정시이다. 현재 전통적인 신라 향가 14수와 균여의 불교찬가로 지어진 11수가 전하고 있다. 신라 말기에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 향가집 〈삼대목〉이 편찬되었다고는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아테나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전쟁·직물·요리·도기·문명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투구, 갑옷, 창, 메두사의 머리가 달린 방패(아이기스), 올빼미, 뱀이 대표적 상징물이다. 언제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든 무장한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는 달리 총명하고, 이성적이고, 순결하여 사람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며 영웅들을 수호한다. 그녀의 신전으로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이며 ‘아테네’라는 명칭의 어원이다. 로마 신화의 미네르바에 해당한다. 아테나 문화는 사람들이 아테나를 아테네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었던 신화가 여러 시대를 넘어 다시 기록되는 것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아테나를 이집트인들의 고대 왕조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리비아의 전쟁의 신이자 여성 사냥꾼 신인 네이트에서 왔다고 여기었다. 아테나는 또한 철학적인 지혜의 여신으로 알려지게 되어 5세기 후와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적용되었다. 그녀는 특히 방직, 그리고 여러 기술의 수호자("Athena Ergane")이기도 하고, 전쟁에서의 전략을 맡아 지휘("Athena Promachos")하기도 한다. 무기의 제작과 관련된 금속 가공도 그녀의 가호 아래에 있기도 하다. 아테나의 지혜는 오디세우스에서 묘사된 모습처럼 메티스에게서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교활한 지성도 포함하고 있다. 아테나의 주위에서는 올빼미가 그녀의 시중을 들며,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그녀와 종종 동행하기도 하는데, 아테나의 조각상의 손바닥 위에 종종 작은 니케의 형상이 있기도 하다. 염소가죽, 혹은 뱀가죽으로 만든 흉갑 아이기스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른 문화적 정황에 연관되어 있었는데 후기의 신화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제우스가 주었다고 전해온다. 아테나는 종종 투구를 쓰고 고르곤의 머리로 장식된 방패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조각상은 그리스 초기의 여신 문화로, 파르테논의 앞부분 앞 정점에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 그녀의 방패는 후에 페르세우스의 축원의 선물이 된다. 뱀은 종종 아테나와 함께 동행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창 막대기로도 자주 묘사된다. 바다와 배, 말과 전차도 그녀와 연관되지만, 밀접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아테나는 무기를 든 전쟁의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 이아손, 헤라클레스와 같이 많은 영웅들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그녀의 유명한 신전도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참고로,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후 , 스틱스강에 처녀신으로 있을것임을 맹세하였다. 한번은 헤파이스토스에게 겁탈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치마에 묻은 정액을 닦아서 땅에 버렸다. 이로 인해 땅의 여신 가이아가 헤파이스토스의 정액으로 수태하고, 에리크토니오스가 태어난다. 그녀의 역할이 도시의 수호자였기에, 그녀는 그리스 전역에서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로서 숭배 받았다. 그녀는 아테네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데, 여신과 도시의 이름은 어원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제우스는 자신이 아버지인 크로노스나 할아버지인 우라노스처럼 자신도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아들에게 지위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던 차에 장차 자신과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이 올림포스의 주신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가이아의 신탁을 듣자 몹시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은 개구리로 변신하고 메티스는 파리로 변신시킨 다음, 크로노스가 자신과 자신의 남매를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당시 임신한 상태였던 메티스를 꿀꺽 삼켜버린다. 몇달 후, 제우스에게 갑자기 격한 두통이 몰려왔다. 두통이 갈수록 심해지자 헤파이스토스가 두통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갰다. 그러자 그 속에서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완전한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아테나가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왔다. 이때 하늘과 땅, 바다가 아테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대하게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아테나는 늘 아버지 제우스의 총애를 받았다. 또 메티스는 이후로도 계속 제우스의 뱃속에 남겨져 임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제우스는 계속 권좌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티카 지역의 도시 아테네를 두고 아테나는 포세이돈과 누가 인간에게 더 유용한 선물을 줄 것인가로 겨룬 적이 있다. 포세이돈은 그의 삼지창으로 땅을 때려 말과 샘을 만들어 주고 아테나는 올리브 나무를 만들어 주었는데, 말이 투쟁과 슬픔을 상징하는 반면, 올리브 나무는 평화와 풍요를 상징하기에 인간들의 결정으로 아테나가 승부에서 이기게 되었다. 이로써 아테나는 그 도시를 갖게 되고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된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나 여신이 거주하는 장소로 알려진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아테나 여신상과 함께 수호신을 놓고 겨루는 승부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승부에서 진 포세이돈이 인간들에게 보복하고자 홍수를 불러오자 인간들은 아테나에 다음 가는 지배권을 그에게 맡겨 화를 풀도록 하였다 한다. 헤파이스토스는 아테나가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대장간을 찾아오자 아테나에게 반해 강간하려고 했다. 아테나는 헤파이스토스를 뿌리치고 허벅지에 뭍은 정액을 닦아 땅에 버렸는데, 이로 인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수태해 에릭토니우스를 낳고만다. 아테나는 에릭토니우스를 거둔다. 아테네 왕 케크롭스의 딸인 공주 아글라우로스와 자매들에게,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맡기며 절대 열어보지 말라 하였다. 하지만 아글라우로스와 자매들은 호기심으로 인해서 바구니를 열어 보고, 두 마리 뱀에게 감긴 에릭토니우스를 보자 실성하여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에서 자살하였다. 아테나는 에릭토니우스를 바구니에서 꺼내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기어 길렀고, 후에 에릭토니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리디아의 염색의 명인 이드몬의 딸인 아라크네는 베짜기와 자수를 잘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솜씨가 아테나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실력을 뽐내며, 아테나에게 도전한다. 아라크네의 자만심에 화가 난 아테나는 할머니로 변신하여 신을 모독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라고 충고했는데, 아라크네가 그녀를 무시하고 쫓아내려 하자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와 시합을 벌인다. 아테나는 자신과 포세이돈이 아테네를 두고 겨룬 승부의 광경과, 신에게 대항한 인간들이 욕을 보는 장면과, 자신의 신목이자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를 수놓아 아라크네에게 경쟁을 포기하라는 경고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크네는 자신의 직물에, 제우스와 여러 신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뛰어난 솜씨로 수놓는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뛰어난 솜씨에는 감탄했지만, 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수내용에 모욕과 분노를 느껴 북으로 직물을 찢는다. 아테나는 이 행동으로 인해 '신이 인간에게 패배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만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아라크네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북으로 아라크네의 이마를 때리며 자신의 죄와 치욕을 느끼게 하였고, 아라크네는 치욕을 참지 못하여 목을 맨다. 아라크네를 불쌍히 여긴 아테나는 그녀가 영원히 실을 잣도록 하게 만들고자 아코니트 즙을 뿌려 그녀를 거미로 만들고, 그녀의 목에 매어있던 밧줄은 거미줄이 된다. 고르곤 세 자매 중 한 명인 메두사는 다른 자매들과는 다르게 본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처녀신 아테나의 신전에서 메두사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에 모욕을 느낀 아테나가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린다. 저주로 인해 메두사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하체를 가진 흉칙한 괴물이 되었고, 그녀의 눈 또는 머리를 본 사람은 모두 돌이 되었다. 세리포스 섬의 왕 폴리데크데스의 명령으로 메두사의 목을 가져와야 하는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를 통해 메두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접근하여 그녀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후에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에게 바쳐져 그녀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그러나 메두사는 두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게 크리사오르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말 페가소스였다. 원래 굉장한 미모를 갖고 태어난 메두사가 아테나에게 저주를 받아 흉칙한 괴물이 되고 나서 페르세우스에 의해 토벌당한 반면 페가소스는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았으며 일생이 다하는 순간 포세이돈에 의해 별자리에 올라갔다. 기간테스 알키오네우스는 기간테스가 태어난 플레그라이 안에서는 죽지 않았다. 플레그라이에서 헤라클레스가 기간테스 알키오네우스와의 싸움에서 고전하자 아테나는 알키오네우스를 어깨에 메어 플레그라이 밖으로 끌어내라고 충고하였다. 플레그라이를 벗어난 알키오네우스는 헤라클레스의 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아 죽는다. 아테나는 헤라클레스가 조국 테베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때 그의 옆에서 함께 싸워주었으며 스튐팔로스 숲의 새를 쫓을 때는 청동으로 된 딱따기를 빌려 주었고 케르베로스를 데려오는 임무에서 케르베로스가 있는 지하 세계의 길을 안내해주기도 하였다. 카리클로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님프로, 에베레스와의 사이에서 티레시아스를 낳았다. 사냥을 하던 티레시아스는 우연히 카리클로의 도움을 받으며 목욕을 하는 아테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분노한 아테나에 의해 눈이 멀게 되었다. 아들이 맹인이 된 것을 슬퍼하는 카리클로를 보자 아테나는 그것을 위로하고자 뱀이 티레시아스의 귀를 핥도록 하여 새의 말을 듣고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 7세대를 살 수 있는 생명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의 총애를 받던 영웅 중의 한명이었다. 아테나는 그에게 지혜로운 호의를 베푸는데, 그가 트로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절제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배가 난파되어 오기기아섬의 칼립소와 7년 동안 있게 되자 보다 못한 아테나는 제우스에게 간청하여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도록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도록 오디세우스의 친구로 변신하여 필로스의 네스토르에게 찾아가는 여행을 도와주기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는 변장을 하여 그를 시험해본다. 포세이돈이 자신의 신전에서 메두사와 정을 통하자 메두사를 저주해 못생긴 괴물로 만들었고 그 외에도 아테네의 지배권을 두고 다툰 적도 있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귀환하는 오디세우스를 포세이돈이 방해한 반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도와주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자신만 하객으로 초대받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이 황금사과를 바칩니다.'라는 글을 써서 던졌다. 그러자 이때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후보로 나서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심판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로 결정되었다. 이에 헤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테나는 끝없는 지혜를 각각 조건으로 제시하며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줬다. 아테나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부터 있던 여신으로, 뒤에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이전의 미노아와 달리 그리스에서는 군사 경제가 발달하였기에 아테나는 초기에 알려진 직물·요리·도기에 이어 전쟁 또한 주관한다고 생각되었다. 미케네 시대 이후 아테나의 영역은 궁궐에서 도시로 확대되었는데, 아테네의 수호신이 된 것은 고대의 도시 국가가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바뀜에 따라 설정된 것이었다. 도시를 위한 아테나의 활동은 식물과도 연관이 있었다. 아테나의 탄생 축제인 판아테나이나는 식물의 성장과 결부되었으며, 프로카리스테리아는 봄을 맞아 여신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에 금과 상아로 된 아테나 파르테노스를 비롯하여 3개의 아테나 상을 조각하였으며,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는 재판의 피고가 된 오레스테테이아에게 표결이 동수일 때는 무죄라는 선례를 남긴 것으로 묘사된다. 박정희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던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하자 이재복의 권유로 복수심에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조국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후진국 탈피와 경제자립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제2공화국과 울프 박사의 합작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위로 하락하였다. 1917년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훗날 입학하는 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 한편 그의 담임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 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 반 학생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하여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소년 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 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1936년 4월 1일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 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고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가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만주에 있었던 것을 빼면 확인된 것은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에 따르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한다.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 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이 판결은 무죄가 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임을 확증할 근거가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 3부에서는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를 친일행위증거로 내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국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국군에 들어가려고 했다. 박정희가 쓴 혈서에 대해 보도한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혈서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 혈서를 작성했다는 만주신문 기사도 사전 발간 직전에 알게 돼 다시 거론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교사생활을 한 유증선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 평전: 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이나 그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에 장교로 임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해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두둔하였다.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징 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되었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이 있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복무하던 시절 독립군이 만주에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는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하였다. 하지만 좌파 계열 독립군 단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는걸 거부하고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박정희가 복무한 1944년대에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이에 대해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는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성신여대 김명호 교수 또한 독립군이 "팔로군과 신사군의 지도 아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신사군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고 주장하였다.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국군 제8단에서 복무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에 따르면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초임 소위 시절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한건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2-3개월후 단장 부관으로 승진햇기 때문에 일선부대에서 빠지게 된다. 부관이 된 이후 박정희와 같이 복무하게 된 신현준, 방원철 등은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직접 전투보다는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高木正雄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도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시완 기자는 2012년 12월 5일 인터넷 매체 '빅뉴스'에 올린 글에서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 이며 "이 사전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 고 지적했다. 또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 했다. 그는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 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오마이뉴스의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배속된 23사단 72연대 연대장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는 김병태 교수의 주장은 허구성이 있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배속된 곳은 열하성 흥륭현 소재 만주국군 보병 8단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이었으며, 그의 계급은 상교, 우리로 치면 대령이었다. 당시 보병 8단에는 박정희를 포함해 이주일, 방원철, 신현준 등 한국인 장교가 4명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일제강점 35년간 창씨개명을 2번한 사람은 '일본인이 되지 못하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극렬 친일파 이영근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박정희가 일본 냄새가 짙은 이름으로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이라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또, 이때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일본인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박정희는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는데 만주국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비밀 선전문은 전 광복회장 김우전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에 연관된 듯 알려진 ‘원전(原典)’은 1967년 박영만이 쓴 소설 ‘광복군’이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라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5·16 이후 반혁명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정희를 지하독립운동 리더로 묘사한 책을 쓰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1967년 박영만은 자신의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 커녕 호통을 들었다 는 설도 있다.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 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보는 앞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자원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한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과 동거를 했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였다.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 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그 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라며 항의하였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었던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그날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 정부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다. 박정희 등을 비롯한 군인들은 4·19 혁명 1주년 기념식 때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준비할 때,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준비하였다. 당일 학생들이 데모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 박정희 등은 당황한다. 군부 쿠데타 모임인 혁명 요원들은 4·19 1주년 되는 날로 거사일을 정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시국 정화 운동 본부에서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데모를 못 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박정희의 계획대로라면 그날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해야 했고, 군중 폭동에 자연스럽게 군부가 침투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4·19 1주년은 아무 일이 없었고, 쿠데타를 기도하려던 군부는 일시적인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편 당시 시국정화단에서 학생운동권들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의혹, 금액과 내용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오며 하야를 선언하였다. 대통령인 윤보선은 군사 정변을 추인하였고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 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 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혁명을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정변이 발생하자마자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최무룡, 김지미 등 연예인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려왔던 폭력배 임화수, 꿀돼지라는 이름으로 폭력배들의 세계에서 유명한 신정식,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 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을 두둔한 책임을 지게 된 최인규, 그리고 경찰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가장 죄질이 무거운 데다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못된 짓을 저지르며 특히 4·19 혁명 때 민간인에게 발포 명령을 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사살한 곽영주 등을 사형에 처했는데 박정희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구악 일소, 즉 과거의 잘못된 점을 모두 없앤다는 명분으로 조리돌림을 실시한 후 이들의 사형을 집행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변 한 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쿠데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 쿠데타는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했다.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키고 돌봐주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지어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해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에게는 50만 환, 의친왕비(妃) 김 씨에게는 30만 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 씨와 삼축당 귀인 김 씨에게는 각각 10만 환 등 모두 100만 환을 지급하였다.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영친왕)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961년 11월에는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 한편 12월 학사 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 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했다. 그해 3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舊)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반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 수반으로도 활동했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개인재산을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 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근혜) 전 대표만 (정수장학회 반환과 관련한)결단을 내린다면 ‘자명(김지태의 호)·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1962년 12월 말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하나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 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일축했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해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 축재자들의 자금 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연이은 연계 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돈을 일정 비율에 따라 증권으로 강제 전환함에 따라 중공업 육성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화교 5,000여 명이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 명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금융 상업적 경제 구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통화 개혁 정책은 예금 동결 조치를 불러왔고, 전체 공장의 45%는 가동을 중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검은 돈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은 미국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철회를 강요받았으며, 자금 융통이 제약을 받아 중소기업 가동률이 50%로 떨어지는 등 경제난까지 야기하여 거두어 들이고 실패하게 된다.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했다.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 김희덕(金熙德)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柳陽洙)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 같은 해 4월 8일에는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했다.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군탄리에 위치한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과 허정, 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 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한 바 있다. 선거 유세 당시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李萬燮)을 비롯하여 민관식(閔寬植), 백남억 등이 참여하였다. 대구 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고 하였다. 1963년 여름 김준연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여 파문을 던졌다. 윤치영 등이 박정희의 전향은 확실하며 내가 내무장관 때 사상을 보증했다고 했지만 그가 다시 박정희의 사상 의혹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그는 박정희에게 사상 검증을 한 바 있었다.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그는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9월 28일 윤보선의 지지 유세를 하던 김사만(金思萬)은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공산주의자였다'는 발언을 인용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몰라도, 우리의 주적인 공산당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투표할 것이냐"라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 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10월 자유민주당의 김준연은 송요찬의 녹음 연설회를 열기 위해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온 그는 10월 2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발표한다. 이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 의혹을 제기한다. 윤보선, 김준연 등의 사상 공세에 수세로 밀린 그는 한민당은 부패한 부자들과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의연한 집단이라며 맹비난을 가한다. 그는 두 사람이 한민당 출신임을 강조하고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당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론으로 대응했다. 강원룡은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사상공세를 하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원용덕은 윤보선, 송요찬, 자민당계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공격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그는 송요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송장군은 제주도 지방공비토벌을 맡고 있을 당시 박정희에 대해서는 나보다 아는바가 적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박정희가 여순사건 관련자로 몬 장본인은 김창룡이었으며 그가 자기에게 순복하지 않은 장교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숙청한 사실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또 원용덕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당시 지리산 밑 문주리 토벌작전에서 김지회의 반란군을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이어 "송요찬 씨도 한때 김창룡 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실이 있다."고 말하며 "박정희의 과거 군역은 백선엽 장군이나 김점곤 장군 등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 12월 6일 비행기편으로 서독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독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이 있었는데 박정희는 이 때 아우토반을 보고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게 된다. 1963년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 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여촌야도)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 (→한월 관계)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을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두 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 배의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다음날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다.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은“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 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춘 것으로 나타났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 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 독도밀약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나 사실이 밝혀진 바는 없다. 이것을 추적 조사한 노대니얼 박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전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있다. 월간중앙이 주장한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 1967년 9월 20일 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1971년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농업을 보다 큰 규모로 확대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규모의 땅을 구매하였는데 이 땅에 신원 조사 등 갖가지 심사를 거쳐 엄선한 농민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의 여름이 아르헨티나에서는 겨울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전혀 맞지 않는 데다가 박정희가 구매한 땅 중에는 소금기가 많은 땅이 있는가 하면 여러 종류의 황무지가 많았다. 결국 박정희의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으며 박정희가 구입한 땅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지만 해마다 관리비 명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정부에 세금을 내는 형국이 되거나 아르헨티나 정부에 반환하거나 현지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강창성 당시 보안사령관은 19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 원'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 원과 비교할 때,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호전성이 드러나고 반공의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폐지되었다.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다.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2년-1967년),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7~1971년) 등을 수립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세웠다. 그런가 하면 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일반 영세 기업체들이 산집해 있는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 참석하여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였다. 그러나 관객을 가장하여 앉아있던 문세광이 난입,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격하였고 대통령 박정희를 쏘려 하였다.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연설대 아래로 피했던 박정희는 다시 나타나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계속하였다. 범인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문세광의 대한민국 입국과 총기 입수를 도운 일본인 전직 경찰관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1967년 12월 1일에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 원, 72년 33억 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원, 1974년 308억 원, 1979년에는 4252억 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 원에서 1979년 2032억 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비슷한 것으로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도 있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새마을 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은 미신타파를 명분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탄압도 자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이용해 농촌 가옥을 개량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받는다.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으며,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에게 지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덕우 전 총리에게는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시(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와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 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 정부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 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 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정희가 미국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8월 11일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시기 박 전대통령은 활동성 간염 진단을 받아 치료를 시작하였다.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며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61세로 사망하였다(10.26 사건).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 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재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 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 문제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설가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 권력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 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 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장 당시 추도사를 작성하였다.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과 CIA가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미국 등의 개입에 대해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희는 미국의 경고에도 1978년 이후로도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고, 미국에 의한 암살 의혹은 계속 증폭되었고, 이는 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0월 27일 새벽 국무총리 최규하는 긴급히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 유고 문제를 물었고 27일 아침에야 박정희가 서거하였다는 사실이 공식 보도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장례식은 9일장으로 결정되었고 국장으로 치러졌다. 국장 장례식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최규하에 의해 진행되고 11월 3일까지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시신은 석관에 안치되어 운구차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육영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 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 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金翰壽)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있었지만 시장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 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1979~1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先) 개발 후(後)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 사이에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괌(Guam)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 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WEC)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초 닉슨 대통령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광둥 성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 정부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북한의 침략 위협으로 고정하였다. 1975년 베트남 공화국이 멸망의 길을 걷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박정희 정부가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 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 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 1975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함병춘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 각서를 써주었다.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와 스웨덴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자주 국방이 나중에 민족 자주권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 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 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 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박정희 정부는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 당국자들이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핵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는 그해 10월에 암살당하였다. 한편 그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여 벌어들인 돈이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의 배경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의하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케네디 대통령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을 3200명으로 확대하면서 이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베트남전 파병이 이루어졌다. 이후 1964년부터 파견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향후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가속화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시켰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국가기록원의 박정희의 공식 종교는 불교이다. 하지만 일부에선 주장하기를, 박정희는 종교가 없으며, 외부에 불교로 알려진 것은 불교신도인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 행보를 보여서라는 주장도 있다. 1970년대에 일부 기독교 교회가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자 박정희는 서구적인 가치관을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 기독교계를 비판하며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번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를 불교 신도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1974년 12월 11일 박정희는 청와대 참모들 앞에서 천주교계에 대해서 불평을 털어놓은 뒤에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라는 농담을 했다.(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계기로 천주교 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후 신부들을 연행과 구속이 되는 일이 있었다.)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 목사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정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 당시 5·16 정변이 일어날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 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에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직급을 박탈당하였다가 복귀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하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했다.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개발독재'라는 표현도 쓰이고 있다. 국가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 등으로 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발제한구역 제도개선방안'이라는 명칭으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시민의 권익증진을 우선하는 정책이 경쟁적으로 나오면서 환경보전 정책은 더욱 후퇴되었고 무분별한 개발로 농촌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육군 소장인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박정희와 차별을 두었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 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비판도 있다. 구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중 일부는 부정축재혐의로 제거되었으나, 일부 정치금지법에 제한되지 않은 구 공화당과 유정회 인사들은 1981년 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정치적 유산으로 삼아 명맥을 이어갔다.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한 국민당은 몰락했으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였던 일부 공화당계 인사들이 풀려나면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한 인사들은,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은‘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고 일부는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여,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서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이후 친박연대를 창당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박정희의 셋째 딸인 박서영 역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8년부터 한나라당 충북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직선거법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2009년 7월 출소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행정수도 이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7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이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다”고 발언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가 충돌했다. 친이계와 김영삼은 연일 영남지역주의와 박정희 집권기를 비판하며 친박계를 공격했고, 대구경북을 비롯한 한나라당 지역 정치권과 친박계는 반발했다. 박근혜가 세종시 원안 고수를 강력히 주창하는 데는 행정수도 이전과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선친의 유훈(遺訓)’의 영향이 있을것이며, 세종시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돌이라는 평가도 있다.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고건 고건(髙建, 1938년 1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고건은 1938년 1월 2일에 서울에서 아버지 고형곤과 어머니 장정자 사이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형곤은 학술원 회원을 역임한 철학자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탓에 내사와 탄압을 받기도 했다. 큰형 고석윤은 행시와 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이후 상공부 상역국장을 지내다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아버지가 검찰의 내사를 받자 공직을 사퇴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작은 형 고경윤은 일찍 사망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지는 전라북도 군산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학창 시절 내내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전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한다. 대학 재학 중 1959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서울대를 졸업하고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고시에 합격한 아들에게 아버지 고형곤은 공무원으로 지켜야 할 3계명을 줬다.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는 소문을 내지 마라."이다. 후일 고건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버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지방행정사무관에 임용된 뒤 1962년 내무부 수습사무관, 이후 여러 보직을 거쳐 1965년 내무부 행정과 기획계장, 1968년 서기관으로 승진, 전라북도청 식산국장과 내무국장을 거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내무부 지방국 지역개발담당관, 새마을담당관 등을 지냈다. 행정관리관으로 승진, 1973년 강원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국장, 1975년 전남지사를 거쳐 1979년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80년 국토개발연구원 고문에 선임되었으나,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리자 5.17을 군정으로 간주하고, 군정하에서 일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사표를 냈다.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고건은 교통부 장관과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내무부 장관에서 하야한 뒤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하나 열고 칩거하던 중 1988년 민정당 군산지구당 위원장, 민정당 전라북도 지부장에 임명되고,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시 관선 시장을 지내고 뒤이어 1991년부터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명지대학교 총장직에 있다가 1995년 한국그린크로스 공동의장,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거쳐,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1998년 3월 3일 퇴임 다음날 대통령 취임일 각료제청권을 재청하고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김종필 총리 서리가 인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4년간 시정을 이끌었다. 1998년 4월 그는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에 특별 임용되었다. 고건은 2001년 한국상하수도협회 초대회장, 2002년 국제투명성기구 대한민국지부 회장에 선출되었다. 2003년 다시 입각제의를 받고 입각, 고건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던 중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193대 2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의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고건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자 외신, 특히 미국계 외신은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고 총리가 과거 군사정권과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면서 보수와 진보 성향의 정권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아왔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한국에서 국무총리는 통상 의전적인 역할만을 맡아왔지만 고총리가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고비에 직면했다면서 탄핵안을 주도한 야당조차도 "고총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고 총리가 지난 97~98년 외환위기 당시 총리를 지냈던 경험을 살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결정을 내리기까지 임시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면서 정치 분석가들은 고총리의 풍부한 행정 경험, 격동의 시기에 안정적인 스타일의 리더쉽을 발휘해온 점을 평가하고 있다 고 발표했다. 영국 BBC는 고 총리를 한국의 안정적인 리더(South Korea"s "steady" leader)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비교적 자세히 논평을 실었다. 요지는 세 번의 장관, 두 번의 서울 시장에 이어 국무총리도 두 번째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잘 해 온 인물이었다는 것. BBC 역시 고 총리를 "미스터 안정(Mr.stability)" "행정의 달인(Master Administrator)"으로 지칭했다. BBC는 고 총리가 핵심 요직에 있을 때마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대형 사건이 많았다면서 그가 특히 보수파들에게 어필하면서 노대통령을 잘 보좌해 왔다고 평가했다. BBC는 대미관계에 있어 비굴한 아부는 하지 않겠다며 대선 당시부터 마찰을 빚어왔던 노대통령과 달리 고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언론의 관심 이후 외신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고건은 2개월 동안 이라크 파병문제나 경제문제, 특히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정한 관리라는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했다는 평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후 자동으로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종료하고 5월 24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노무현의 대통령 탄핵기간 중 고건은 민심과 여의도 국회의 분노를 수습하는 등 무난한 수습 노력을 보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복귀한 노무현은 그를 총리로 기용한 것은 인사실패라고 비판하여 설전을 벌였다. 2006년 12월 15일 광주 전남방문에서 그는 "정부가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남의 탓만 하고 있다"든가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는 무책임한 충격 발언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며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비판했다. 노무현은 12월 21일 민주평통 상임위원회 에서 고 전 총리 기용에 대해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 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했다"며 "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 고 하여 노무현은 고건의 기용을 인사 실패라고 규정했다. 고건 측에서는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고 즉각 반박했다. 고건의 한 측근은 그 날 "(그가)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맞아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로서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고 전총리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인사실패 발언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고건은 12월 22일 언론에 성명을 발표했다 22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며 자신의 총리 기용을 `인사 실패'로 규정한 노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정면 비판했다. 이어 그는 노무현 대통령 등의 고립에 대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탓"이라고 정면 반박했다. 고건은 또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라며 반박했다. 덧붙여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가르기, 민생문제도 챙기지 못한 무능력,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당이 원내 제1당이었음에도 국정운영은 난맥을 거듭했다"면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내가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은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의석이 46석에 불과한 여소야대 정국이었다"며 "총리 주재로 4당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국정협의회를 정례화해 국가적 현안과제들을 정치권과 조율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 나감으로써 큰 차질없이 국정을 운영한 바 있다"고 말했다. 고건은 또 "참여정부 초대 총리직을 제의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고, 또 고뇌했다"며 "그러나 안정속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권유와 종용에 따라 이를 수락했다"며 억울함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권한대행으로서 국민의 협조를 얻어 국가적 위기를 원만하게 수습한 데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이라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언행은 신중하고, 절제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비판 성명 발표 이후 '성명 내용이 강경하다.'는 한 언론의 질문에 대해 고건은“그런 것 아니다. 내가 늘 해오던 얘기 중에서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모은 것 뿐이다.”라고 응답했다.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와의 인연을 완전하게끊는 계기로 삼을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되었었다. 이후 그의 한 측근은 "참여정부 초대 총리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며 "노 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이제 부담없이 `이혼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대선주자와 대선 후보로 거론됐으며 통합민주신당 영입설, 민주당 영입설, 한나라당 영입설 등이 나타났으나 2007년 1월 16일 언론에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발표했다. 2009년 대통령 소속의 사회통합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는데, 고건이 초대 위원장으로 위촉됐다. 고건은 행정의 달인, 유능한 관료,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아는 현명한 관료라는 평가가 있다. '사실상 새마을운동을 기획한 주무책임자로서 농촌부흥운동을 진두지휘했다. 새마을운동 성공이 그를 최연소 도지사(전남·37)로 만든 것이다. 세계 5대 지하철 교통망 구축, 난지도 생태공원 조성, 서울 도시고속도로건설, 한옥마을 복원' 등이 업적으로 거론된다. “청렴은 사명감 이전에 나의 생존법칙이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그의 청렴성은 브랜드화됐다. 그는 오랜 공직생활 속에서도 스캔들이나 부정부패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일이 없다. 그가 행정의 달인이 된 배경에도 청렴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1990년 2월 초 한보 수서택지분양 때 도덕성과 자리를 바꿨다. 청와대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수서택지분양 수의계약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이 서울시장(관선) 자리에서 물러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게 고 전 총리의 설명이다. 당시 수서특혜분양수사 결과 많은 사람이 구속됐으나 서울시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연루되지 않았다. 이로써 ‘클린 서울’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청렴성은 국제적으로 공인받기도 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1998년 그에게 세계청렴인상을 주었다. 일부에선 고 총리가 "예스맨"이란 닉네임으로 불릴 만큼 근성이나 열정이 없다 는 비판도 있다.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고건은 생맥주를 즐겨 마시지만 가까운 사람과는 맥주에 소주와 토마토주스, 후춧가루 등을 혼합한 독특한 칵테일을 돌려 마신다. 고건은 인맥 관리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인맥은 오랜 관료생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부임하는 곳, 만나는 사람마다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관료모임, 자문 교수모임은 물론 심지어 부임하는 부처의 출입기자와도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한다. YS정권 말기 DJ와 갈등을 빚을 때도 두 세력에 동시에 인맥을 구축할 정도로 고 전 총리는 인맥관리의 달인이다. 그리고 공직에서 퇴임 후에도 대학총장은 물론 각종 시민단체 등으로 넘나들며 인맥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본인 특유의 부지런함도 작용했다. 한편 격동의 순간마다 잠적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의혹이 있다. 고건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피습 서거 당시 3일 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확대 조치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1주일 간 잠적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특히 이 부분은 2003년 2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집중적으로 의혹이 부각됐다. 그 의혹의 제기의 속내는 “당시 국가위기 때 처신은 국가지도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국가표준 협회 미국 국가표준 협회(, ANSI)는 미국에서 제품, 서비스, 과정, 시스템, 인력관리 분야에서 표준을 개발하는 것을 감독하는 비영리 민간 기구로서, 미국을 대표하여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가입하였다. 이 협회는 미국의 제품이 전세계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미국의 표준을 국제표준에 맞추는 활동도 한다. 이 협회는 다른 표준화 기구나 정부 기관, 소비자 단체, 회사 등이 개발한 표준을 승인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용어를 통일하고, 제품의 특성, 성능, 테스트 방법 등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 협회는 제품이나 인력의 인증 기구가 국제표준에서 정의된 기준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승인하기도 한다. 이 협회가 제정한 표준을 "ANSI"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국 내 표준이지만, 국제 표준화 기구의 ISO 표준보다 먼저 제정되는 경우도 많으며, ANSI 표준이 ISO 표준이 되기도 한다. 1918년 이전에 다음의 5개 학회는 공학 학회 연합(United Engineering Society, UES)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 5개 학회는 1918년 전쟁부, 해군, 상무부라는 3개 정부기관과 함께 국가표준 기구 설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 미국 공학표준 위원회(American Engineering Standards Committee, AESC)가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1928년 미국 표준 협회(American Standards Association, ASA)가 되었고, 1931년 국제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의 미국 위원회와 제휴를 맺었다. 그 후 명칭과 조직에서 몇번의 변화를 거치는데, 1966년 미합중국 표준 협회(United States of America Standards Institute, USASI)가 되었으며, 1969년에 지금의 미국 국가표준 협회(American National Standards Institute, ANSI)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협회는 정부 기관, 각종 기구와 회사, 학회, 국제 조직, 개인 등을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고, 27만개가 넘는 회사, 3천만명이 넘는 전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이 협회 자체가 표준을 개발하지는 않지만, 이 협회는 표준을 개발하는 기구들의 절차를 인증함으로써 표준의 개발과 사용을 감독한다. 표준을 개발하는 기구들이 사용하는 절차가 이 협회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개방성, 균형, 합의, 그리고 적절한 절차라는 요구사항에 부합해야 한다. 이 협회는 어떤 표준이 개발된 환경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공평하고, 그들이 접근할 수 있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고 판단할 때, 그것을 미국 국가표준(American National Standards, ANS)으로 지정한다. 만약 자발적인 합의로 표준이 되었다면, 그 제품이 소비자 보호를 위한 안전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확인됨으로써 시장이 급속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 협회가 미국 국가표준으로 지정한 것은 대략 9,500개 정도이다. 미국 국가표준으로 지정되는 과정은 다음의 원칙을 준수한다. 이 협회는 산업계에 소속된 기술자 그룹들과 함께 일하며, 국제 표준화 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 등의 일원이다. 이 협회가 제정한 컴퓨터 관련 표준 중 대표적인 것으로 ASCII 코드가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大韓民國 大統領, )은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서 임기는 5년이며 연임과 중임이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국회와 더불어 국민의 대표기관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는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고, 다른 나라의 수상에 해당하는 국무총리도 직접 임명할 수 있다. 단, 국무총리 임명은 국회로부터의 임명동의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 있다. 이를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원수라 함은 국내법상 국가의 통일성과 항구성을 상징하며, 국내에서는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진 국가기관을 말한다. 대통령이 헌법에 의하여 조약을 체결·비준하고 외교사절을 신임·접수 또는 파견하며,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외교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 국가 원수로서의 지위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은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에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 제4항에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수반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정부가 그에 의하여 조직되고 영도되는 것을 말한다. 대통령은 정부조직권과 행정각부 장의 임명권, 감사원의 조직과 통할권을 가진 기관인 동시에, 국무회의의 의장으로서의 지위 및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행정의 최고지휘자의 지위 등을 갖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일정한 직무를 행하는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과 영전수여권, 등을 가진다. 그리고 국군통수권은 국방부가 행정부에 속해있기 때문에 행정부의 수반으로써 가지는 권한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66조 제2항과 제3항에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대통령의 국가와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지위와 한반도 통일 책무자로서의 지위를 명시하고 있다.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자는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있고, 선거일 현재 40살에 달하여야 한다. 대통령의 선거 시기는 임기가 만료된 때와 궐위된 때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만료 70일 내지 40일 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통해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사람으로 정하며, 선거에서 최고득표자가 두 명 이상일 때에는 국회의 재적인원 과반수가 출석한 공개회의에서 다수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 따라서 득표율의 제한 없이 최다수득표자가 당선자가 된다. 대통령 후보자가 한 사람일 때에는 그 득표자가 총 선거권자의 3분의 1 이상을 득표하지 않으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없고 단임제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중임으로 변경하는 개헌은 그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 이는 과거의 정권이 그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헌을 추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대통령은 임기 개시일 0시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시간적 의미에서 업무가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취임식은 대개 임기 개시 이후에 진행하게 되므로, 취임식은 취임의 요건이 아니다.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은 0시에 상징적인 의미로 업무를 시작한 바 있다. 1987년 헌법 개정으로 1988년 이후부터 임기가 5년 단임으로 고정되어 재직 일수는 1826일 또는 1827일(5년)이 되었다. 이외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 선서를 한다. 대통령의 직무상 의무는 아래와 같다. 대통령은 형사상 특권을 갖고 있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헌법상 지위에 따르는 권위를 유지하면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재직 중에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재직 중에는 형사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지 않는다. 다만 이는 재직 중의 민사·행정상의 임과 퇴직 이후의 형사상의 소추까지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통령이 민·형사상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신문하는 것과 이를 거부하는 경우에 법원이 강제 구인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에 소추되는 것은, 이러한 행위가 헌법수호자의 지위를 스스로 부정하여 헌법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 시점은 취임 이전이나 이후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죄 이외에는 법원의 재판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법원은 공소기각의 판결(형사소송법 제327조 제1호)을 한다. 다만 재직시에 기소되지 않더라도, 퇴임시까지는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수사기관이 수사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주장과 현실적으로 기소도 할 수 없는데 수사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면서 행하는 적법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판단 오류 등으로 인한 정책집행의 오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위법한 행위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법적인 책임을 진다. 전직 대통령의 신분과 예우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는 헌법 제85조의 규정에 따라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있다. 동법에 따라 전직 대통령이 재직 중에 탄핵 결정을 받아 퇴임하거나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형사처분을 회피할 목적으로 외국 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 대한민국의 국적을 상실한 경우 등에는 경호 이외의 예우는 하지 않는다. 헌법 제90조 제2항에 따라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두는 경우에는 전직대통령 가운데 직전 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이 된다. 1989년 3월 의장을 위해 국회의장에 준하는 예우를 규정한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이 폐되었고, 1995년 12월 전직 대통령들을 원로위원으로 모신 전직 대통령 예우법 해당 규정은 폐기되었다. 이후 법으로는 국가원로자문회의 규정은 존재하나, 설치되지 않고 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총 4명이지만, 이명박을 빼고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박탈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한 경호 기간이 끝나 경찰권직무집행법에 의한 경호를 받고 있으며, 박근혜는 경호 기간 내 이긴 하나 구속되어 실질적으로 예우를 받고 있지 않다. 대통령은 국가장법에 따라 서거한 경우에는 유족 등의 의견을 고려하여 행정자치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으로 할 수 있다. 또,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자가 된다. 또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더라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존묘지로 지정될 수 있다. 대통령은 그 지위에 따라 일정한 권한을 갖는다.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로서의 조약을 체결·비준한다(헌법 제73조). 또한 대통령은 외교사절의 신임·접수·파견권(헌법 제73조), 선전포고와 강화에 관한 권한(헌법 제73조), 국군을 외국에 파견하는 권한(헌법 제60조 제2항)을 가진다. 다만 외교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며(헌법 제89조 제2호~제6호),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써 하여야 한다(헌법 제82조). 또한 일정한 조약을 체결·비준하거나 외국 군대를 대한민국에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헌법 제60조 제1항 및 제2항). 대통령은 국가의 대표로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훈장 기타의 영전을 수여한다(헌법 제80조).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헌법 제74조). 다만 군사에 관한 중요사항의 경우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자문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문서로 하여야 하며(헌법 제91조, 제89조 제6호, 제82조), 선전포고나 국군의 외국 파견 등에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필요로 한다(헌법 제60조 제2항). “대통령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교전상태에 있어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가 불가능한 때에 한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긴급명령을 발할 수 있다”(헌법 제76조 제2항). “대통령은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헌법 제76조 제1항)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헌법 제77조 제1항) 대통령은 국가와 헌법의 수호자로서 위헌정당해산제소권을 갖는다(헌법 제8조 제4항). 대통령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헌법 제89조 제3호) 헌법개정안을 발안할 수 있다(헌법 제128조 제1항).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헌법 제72조). 이는 대한민국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간접민주제의 예외인 직접민주제에 대한 규정이며,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필수적인 것과 달리 임의적 국민투표이다. 특히 헌법개정안의 경우 국회의 의결을 통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30조 제2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제72조의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헌법개정안을 확정하려고 하는 시도는 헌법에 명백히 위배된다. 뿐만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는 내용의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회를 해산한 후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하는 것에 대하여는 일부 긍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러한 견해는 유신헌법의 이론적 구성에 기초한 것으로 현재의 권력분립과 민주적 법치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현행 헌법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만 이러한 국민투표의 효력에 대해서는 법적 구속력을 긍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법적 구속력은 없으며 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매우 강한 정치적이고도 사실적인 효과를 가진다는 견해가 다수설이다. 헌법 제79조 제1항은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감형 또는 복권을 명할 수 있다”고 하여 대통령의 사면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면법이 정해져 있다. 사면은 좁은 의미로 형사소송법이나 그 밖의 형사법규의 절차에 의하지 않고 형의 선고의 효과나 공소권을 소멸시키거나, 형의 집행을 면제시키는 국가 원수의 행위를 말한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사면권은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면과 함께 감형 및 복권에 대한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면권에 대하여 한계를 규정한 조문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다음 사항을 사면권의 한계로 들고 있다. 대통령은 헌법기관 구성자로서의 지위에서 헌법기관을 구성할 권한을 갖는다. 구체적으로는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의 임명권(헌법 제98조 제2항 및 제3항), 대법원장 및 대법관의 임명권(헌법 제104조 제1항 및 제2항),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권(헌법 제111조 제2항 및 제4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가운데 3인에 대한 임명권(헌법 제114조 제2항)을 갖는다. 이 가운데 감사원장과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의 임명에 대하여는 국회의 동의를 요한다. 행정부의 수반이라 함은 행정부의 조직자로서 집행에 관한 최고 결정권과 지휘감독권을 행사함을 의미한다. 대통령은 탄핵소추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국회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법률안 거부권이란 국회에서 의결하여 정부로 이송된 법률안에 대해서 대통령이 이의가 있을 때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미국 대통령제 헌법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대복지국가 사회국가에 있어서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사항이 증대되고 이에 대한 신속한 대처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회가 권리의무에 관한 모든 사항을 법률로 규정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법률로 구체적인 범위를 정하여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부에 의하여 만들어진 법을 행정입법이라 한다.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시행령)을 발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행정부의 각 부서와 기관을 조직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부서나 기관을 만들 수 있고 또는 폐지할수도 있다. 그리고 각 부서와 기관을 책임질 장인 장관이나 기관장을 임명 할 수 있다. 또한, 청와대 내부의 인사나 조직들도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국무총리, 대법원장, 감사원장, 헌법재판소장, 대법관, 국회에서 선출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은 국회로부터의 동의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무원을 임면한다.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조치 사건(2007헌마700)은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등 조치 취소에 대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판례이다. 현직 대통령인 청구인이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강연, 특강, 기념사, 대담 등에서 공직선거법상의 선거중립을 해치는 내용의 발언을 거듭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준수’ 조치를 취하자 청구인은 위 조치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제9조 (공무원의 중립의무 등) (1)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 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위 법률조항은 선거영역에서의 특별법으로서 일반법인 국가공무원법 조항에 우선하여 적용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법률조항의 행위는 공직자가 공직상 부여되는 정치적 비중과 영향력을 국민 모두에 대하여 봉사하고 책임을 지는 그의 과제와 부합하지 않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선거에서의 득표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말한다.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는 입법목적과 입법경위, 수범자의 범위 및 선거과정의 특징을 고려할 때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지 않으며, 공명선거의 책무는 우선적으로 국정츼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의 지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선거활동에 관하여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 사건 법률조항은 단지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만을 제한적으로 금하고 있으므로 과잉금지원칙에 위반되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大韓民國 大統領 權限代行)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 직위가 유고 시에 부통령이나 국무총리 및 총리 서리 겸 내각수반 혹은 국회의장이 대통령 자리를 대신한 직위를 뜻한다. 이 직위는 대한민국 헌법 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권한을 대행한다."에 규정되어 있다.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나 유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1차적으로 국무총리가 그 권한을 대행하고, 2차적으로는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위에 따라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와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순으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제71조). 이때 궐위란 대통령의 사망, 탄핵결정에 의한 파면, 피선거자격의 상실, 사임 등으로 대통령이 없게 된 경우를 말하고, 사고란 대통령이 재임하면서도 신병·해외여행/순방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탄핵소추의결로 탄핵결정이 있을 때까지 권한행사가 정지된 경우 등이다. 모질라 파이어폭스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모질라 재단과 모질라 코퍼레이션이 개발하는 자유 소프트웨어 웹 브라우저로 윈도우, 리눅스, OS X 그리고 안드로이드에서 실행할 수 있다. 이 브라우저는 2014년 2월 기준,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약 12%~22%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두 번째나 세 번째로 가장 많이 쓰이는 웹 브라우저이다. 모질라에 따르면 전 세계 4억 5천만명 이상의 사용자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이란, 독일, 폴란드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웹 브라우저로 각각 55%, 46%, 43%, 41%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웹 페이지를 표시하기 위해 게코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며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다운로드 관리자 등이 있다. 그리고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엔진(대부분 지역에선 구글이 기본)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안드로이드 기준. 검색바를 길게 누르면 검색 엔진을 직접 추가 할 수 있다.) 제3자가 만든 부가 기능으로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다. 데이브 하얏트와 블레이크 로스는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를 모질라 프로젝트의 실험적인 분파로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넷스케이프의 후원에서 비롯된 상업적인 요구와 개발자들의 무분별한 기능 추가가 모질라 브라우저의 효용성을 저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모질라 스위트를 비대한 소프트웨어로 보았으며, 모질라 스위트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이 정제된 브라우저를 만들었다. 모질라 재단은 2003년 4월 3일에 개발의 초점을 모질라 스위트에서 파이어폭스(당시 피닉스)와 선더버드로 전환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0년 3월 22일, 윈도우 모바일 버전의 개발이 잠정 중단되었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네이티브 프로그램 불허 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여러 번 이름 변경을 겪었다. 원래는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피닉스 테크놀로지(Phoenix Technologies)와 상표권 문제가 발생하여 이름을 변경하였다. 변경된 이름인 파이어버드(Firebird)는 파이어버드 자유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모질라 재단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브라우저의 이름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언제나 모질라 파이어버드라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 서버 개발자 커뮤니티 측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결국 2004년 2월 9일 모질라 파이어폭스(줄여서 파이어폭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파이어폭스 프로젝트는 2004년 11월 9일 파이어폭스 1이 나오기까지 여러 버전이 발표되었다. 모질라 재단은 안정성과 보안 관련 문제점을 수정하여 2005년 11월 29일 첫 번째 주요 업데이트 버전인 파이어폭스 1.5를 출시하였으며, 파이어폭스 1.5.0.12를 끝으로 윈도우 95에 대한 공식 버전 지원이 중단되었다. 2006년 10월 24일에 파이어폭스 2를 발표하였다. 이 버전은 개선된 탭 브라우징 환경과 부가 기능 관리자, 개선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찾기 및 검색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엔진, 세션 복구 기능, 인라인 맞춤법 검사, 최초에 구글이 제공하는 확장 기능에 의해 기능이 제공되었고 나중에 프로그램 자체에 기능이 통합된 피싱 방지 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2007년 겨울에는 파이어폭스 라이브 챗이 론칭되었다. 이는 작동 보증시간과 근무시간 이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자이브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스템을 이용해 사용자가 자원봉사자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파이어폭스 2.0.0.20은 윈도우 NT 4.0, 윈도우 98과 윈도우 ME에서 수정없이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버전이다. 2008년 6월 17일에는 34개월의 작업을 끝마치고 수천가지 기능이 개선된 파이어폭스 3을 출시했다. 파이어폭스 3은 웹 페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모질라 게코 레이아웃 엔진 버전 1.9를 사용한다. 이 버전은 많은 버그를 수정하고, 표준 준수성을 향상시켰으며 새로운 웹 API들을 적용했다. 그 밖에 새로 디자인된 다운로드 관리자, 북마크와 방문 기록을 저장하는 새 "Places" 시스템과 각 운영 체제별로 독립된 테마가 새로운 기능으로 포함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마지막 버전은 3.0.19이다. 파이어폭스 3의 첫 번째 베타 버전은 개발 일정이 늘어지는 중에도 몇 개월 이른 2007년 11월 19일에 나왔고, 이어지는 2008년 봄에 몇 번의 베타 버전이 공개되는 끝에 6월에 최종 버전이 출시되었다. 파이어폭스 3의 코드네임은 그랜 파라디소(Gran Paradiso)이다. 파이어폭스 3은 출시 직후 24시간 동안 800만이 넘는 고유 다운로드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 11월 전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 점유율 20%를 돌파했다. 이후 출시된 버전의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2010년 1월 28일에는 노키아의 마에모 운영 체제로서 모바일용인 코드네임 페넥(Fennec)이 나왔다. 모바일 파이어폭스 1.0은 파이어폭스 3.6의 게코 레이아웃과 동일한 것을 사용한다. 2011년 4월 13일에 새로운 공개형 테스트 채널이 개설되었다. 명칭은 ‘오로라(Aurora)’로, 기존의 비공개형 테스트 채널(나이틀리, Nightly)과 공개형 테스트 채널(베타, Beta)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파이어폭스에서는 탭 브라우징, 맞춤법 검사, 통합 검색, 라이브 북마크, 통합된 다운로드 관리자, 단축키,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 엔진을 사용할 수 있는 통합 검색 시스템이 있다. 파이어폭스에서 사용자가 확장 기능 및 테마를 맞출 수도 있다. 2010년 5월 기준 모질라는 1억 5000만 개 이상의 부가 기능을 addons.mozilla.org(AMO)를 통해 관리하고 있다. 파이어폭스는 웹 개발자들을 위한 에러 콘솔 또는 DCM 검사 또는 파이어버그 부가 기능같은 개발 도구들을 제공한다. 모질라 파이어폭스는 HTML, XML, XHTML, SVG 1.1 (일부), CSS3 (확장 포함, 일부), ECMAScript (자바스크립트), DOM, MathML, DTD, XSLT, XPath, PNG, APNG 이미지 등을 포함한 많은 웹 표준을 구현하고 있다. 또한 클라이언트 쪽의 저장소와 같은 WHATWG 그리고 캔버스 요소를 만드는 것을 제안했다. 모질라의 새 로고를 보면 본래의 회사명 'mozilla'를 일종의 도메인처럼 'moz://a'라 써 놓은 동태인데('i'는 ':'로, 'l' 2개는 '/'로 바꿔었다), 이를 실제 모질라 파이어폭스 도메인 창에 써 보면 최신버전의 Mozilla 선언문으로 이동된다. 2005년 12월, '인터넷 위크'(Internet Week) 지는 기사에서 많은 독자들이 파이어폭스 1.5의 메모리 사용량이 높다고 보고했다. 모질라 개발자들은 파이어폭스 1.5의 많은 메모리 사용량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새로 도입된 빠른 앞뒤로 기능 (FastBack) 때문이라고 밝혔다. 메모리 문제의 다른 알려진 문제는 구글 툴바와 애드블록 구버전 같이 잘못 동작하는 확장 기능, 구버전의 어도비 아크로뱃 리더같이 잘못 작동하는 플러그인 때문이다. PC 매거진이 파이어폭스 2, 오페라 9,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의 메모리 사용량을 비교했을 때, 그들은 파이어폭스가 나머지 두 브라우저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메모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Softpedia는 파이어폭스 1.5다 다른 브라우저보다 시작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는데, 이후의 속도 테스트에서 확인된다. IE6은 윈도우 XP에서 파이어폭스 1.5보다 더 부드럽게 실행되었는데 이는 많은 구성요소가 시스템 시작시에 이미 로드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하는 것과 비슷하게 시스템 시작시에 파이어폭스의 구성 요소를 불러오는 프리로더가 만들어졌다. PC world와 Zimba가 2006에, 파이어폭스 2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한다고 했다. 파이어폭스 3은 모질라, Cybernet, Browser world가 수행한 실험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 오페라 9.50 베타, 사파리 3.1 베타, 파이어폭스 2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했다. 2009년 중반, Betnews는 파이어폭스 3.5를 벤치마킹했고 이 때 파이어폭스는 윈도우 XP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 7보다 거의 10배 더 빠르게 작동했다. 2010년 1월 Lifehacker는 파이어폭스 3.5, 3.6, 구글 크롬 4(안정 버전, 개발 버전), 사파라 4, 오페라(10.1 안정, 10.5 프리알파)의 성능을 비교했다. Lifehacker는 브라우저들이 페이지 로딩을 시작해서 마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시스템 시작 직후 및 한번 구동된 이후 둘 다) 측정을 했고, 탭 9개를 한번에 띄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모질라의 Dromaeo 온라인 수트(애플의 SunSpider와 구글의 V8 테스트를 수행한 수트)를 이용해 자바스크립트 속도를 시험했고, 윈도우 7의 프로세스 매니저를 이용해 메모리 사용량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 3.5와 3.6은 시스템 시작 시에 각각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빠른 브라우저이고, 탭 9개를 여는 데에는 3.5가 세번째, 3.6이 여섯번 째로 빠른 브라우저, 3.5는 여섯 번째, 3.6은 다섯 번 째로 자바스크립트 테스트에서 빠른 브라우저라고 결론내렸다. 그들은 또한 파이어폭스 3.5가 메모리 사용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은 파이어폭스 3.5라고 밝혔다. 2012년 2월, 톰의 하드웨어는 윈도우 7에서 크롬 17, 파이어폭스 10, 인터넷 익스플로러 9, 오페라 11.61, 사파리 5.1.2의 성능을 시험했다. 톰의 하드웨어는 테스트를 성능, 효율성, 안정성, 적합성의 네 범주로 요약했다. 성능 범주에서 그들은 HTML5, Java, 자바스크립트, DOM, CSS3, 플래시, 실버라이트, WebGL, 시작 시간과 로드 시간을 테스트했다. 성능 테스트에서 대부분의 범주에서 받아들일 만 하고 강력하다고 보여졌고, HTML5, HTML5 하드웨어 가속, 자바 부분에서 승리했으며 단지 CSS 성능에서만 약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효율성 테스트에서, Tom's Hardware는 메모리 관리와 사용량을 테스트했다. 이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은 메모리 사용으로 동작하는 데에 있어서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브라우저였다. 안정성 범주에서 파이어폭스는 적절한 페이지 로드에서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범주인 적합성에서, 파이어폭스는 자바스크립트와 HTML5에 강력한 적합성을 가지고 있음이 판별되었다. 결론적으로, Tom's Hardware는 파이어폭스를 윈도우 7을 위한 최고의 브라우저로 꼽았는데, 구글 크롬에 비해서 조금 더 좋은 것이다. 2013년 6월, Tom's Hardware는 다시 파이어폭스 22, 크롬 27, 오페라 12, 인터넷 익스플로러 10의 성능을 측정했다. 파이어폭스는 대기시간, 자바스크립트 수행 시간, HTML5/CSS3 랜더링, 하드웨어 가속 성능을 측정하는 성능 분야에서 다른 브라우저에 비해서 조금 성능이 좋았다. 파이어폭스는 메모리 효율성, 안정성, 보안, 표준 적합성과 같은 비성능 분야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Toms's Hardware는 성능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를 안전한 승자로 결론지었다.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 파이어폭스의 소스 코드는 자유 소프트웨어이고 대부분의 소스는 모질라 공용 라이선스(MPL)로 배포된다. 이 라이선스는 소스 코드를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결과적으로 파이어폭스로부터 몇몇 대중적인 프로그램, 넷츠케이프, Flock, Miro, Iceweasel, Songbird와 같은 프로그램이 파생되었다. 과거에는 파이어폭스는 단지 MPL 버전 1.1로만 배포되었다. 그래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라이선스가 허가한 약한 카피래프르에 대해 비판했다. 게다가 MPL 1.1로만 라이선스된 코드는 법적으로 GNU 일반 공용 허가서(GPL)과 호환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모질라는 파이어폭스 대부분을 MPL 1.1, GPL 2.0, LGPL 2.1로 삼중 라이선스로 배포하게 된다. 이 재라이선싱 때문에 개발자들은 용도에 따라 라이선스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 cluding the possibility of proprietary derivative works) if they chose the MPL. However, on January 3, 2012, Mozilla released the GPL-compatible MPL 2.0, and with the release of Firefox 13 on June 5, 2012, Mozilla used it to replace the tri-licensing scheme. 대부분 파이어폭스가 구글 크롬이나 오페라보다 최초 로딩(Cold Start) 시간, 재 시작(Warm Start) 시간이 느리다는 지적을 한다. 다른 게코 기반 레이아웃 엔진을 사용하는 K-멜레온 같은 브라우저는 플랫폼에 종속적인 코드를 사용하여 파이어폭스보다 빠르게 불러들인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5에서 악화되었으며 파이어폭스 3.6에서 많이 개선이 되었다. 2006년 이전까지는 파이어폭스가 빠른 앞으로/뒤로 기능, 잘못 동작하는 부가 기능과 플러그인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의 특성인 하나의 프로세서가 많은 페이지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있음에 따른 문제도 있다. 파이어폭스를 포함한 전통적인 멀티 탭 브라우저는 프로세서 하나가 탭을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메모리 사용량이 아주 많은 프로세서가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존에 여러 개의 프로세서로 관리되던 것이 하나의 프로세서로 합쳐짐에 따른 착시적인 현상으로, 멀티 탭 브라우징과 메모리 사용량은 관계가 없다. 단적인 예로 멀티 탭 브라우저라도 구글 크롬과 같이 탭마다 개별 프로세서를 생성하는 경우 그런 메모리가 비대한 프로세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점차적인 개선으로 인해 파이어폭스 5에서 메모리 관리 기능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특히 다중 탭을 사용하는 경우 뛰어난 메모리 관리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1월, 파이어폭스 29, 구글 크롬 34, 인터넷 익스플로러 11의 메모리 사용량을 시험하는 벤치마크에서 파이어폭스는 상당한 탭이 열렸을 때 가장 적은 메모리 사용량을 기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먼저 확산된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맞추어 웹 페이지가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 ActiveX를 사용한 부가 서비스(보안, 저작권보호, 게임 런처 등)를 이용하기 힘들다. 모질라 한국커뮤니티에서는 2004년 웹 표준 포럼을 개설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토론 및 홍보 활동을 지속하였다. 운영자인 윤석찬의 주도로 반 액티브X 캠페인을 진행하며, 매년 웹 표준 가이드를 무료 제공하고, 김기창 교수와 함께 오픈 웹 소송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9년 12월 알라딘, 2010년 1월 YES24 등 대한민국 내 유명 웹 기반 북스토어에서 오픈 웹을 기반으로 하는 파이어폭스 및 사파리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에 결제 가능한 서비스를 출시하였다. 하지만 2010년 2월 YES24에서는 전자지불(PG)사의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이러한 호환성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렌더링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IE Tab 2, Coral IE Tab과 같은 부가 기능이 등장했고, 이 부가 기능을 설치하면 ActiveX나 전자 결제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위에서 제시한 부가 기능들이 파이어폭스의 창 안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어 있는 운영 체제에서만 작동하고 리눅스, 매킨토시 등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설치되지 않은 운영 체제를 사용할 경우 위의 부가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영구적인 해결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편, 모질라한국커뮤니티에서는 웹 표준 기반 HTML5 암호화 및 인증서 기능을 탑재하기 위해 W3C 웹 크립토그래피 API를 제안하여, 표준 활동이 시작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 유니코드 지원 문제가 원활하지 않으므로 초기의 한국어 위키백과의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미디어위키 소프트웨어의 개선으로 문제가 해결되어 많은 윈도우 운영 체제 기반의 사용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이어폭스는 일부 위키백과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브라우저로 Locationbar² 애드온은 주소창에서 유니코드가 글자로 보이지 않고 코드로 보이는 단점을 제거하여 위키백과 편집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는 이와 같은 확장 기능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코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문제는 파이어폭스 3에서 개선되어 유니코드를 글자 그대로 표현한다. 입력기에 의존한 파이어폭스는 사용하는 한글에 대한 키 입력 이벤트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MS 윈도우 사용자는 한글 입력이 무시된다. 일례로 위키백과에서는 검색의 자동완성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렵다. 질의어로 "위키백과"를 입력하는 동안 반응이 없으며 "위키백과 "와 같이 인식가능한 빈 공간이나 알파벳 등이 입력될 때 반응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웹 개발자는 다른 트릭을 써서 해결하고 있다. 파이어폭스의 동기화 서비스는 저장시킨 동기화 데이터가 아무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등 안정성이 극히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북마크 데이터를 동기화 기능으로 저장해둬도 시간이 지나면 동기화 로그인을 했을 때 데이터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본 암호를 정하지 않는 이상, 설정에서 어떤 보안장치도 없이 저장된 암호를 볼 수 있다. 모질라 재단은 'Beta', 'Developer'(전 aurora), 'Nightly' 채널 등의 파이어폭스 개발자 빌드를 지원한다. 2015년 11월 현재, 파이어폭스 43이 Beta 채널에, 파이어폭스 44이 Developer 채널에, 파이어폭스 45가 Nightly 채널에 있다. USB 플래시 드라이브같은 휴대용 기기에서 설치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휴대용 버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PortableApps.com에서는 파이어폭스의 휴대용 버전을 제공한다. 확장 지원 버전(Extended Support Release, ESR)은 대량으로 설치하는 기업 등을 위한 버전으로, 일반 정기 출시 버전과 달리 일 년 단위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고 성능 향상을 하면서 그 일 년 동안에는 정기적으로 보안 갱신을 한다. 위키백과 베타 중 시각편집기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브라우저이다. 파이어폭스 3의 인터페이스는 운영 체제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래에 보이는 네 개의 스크린샷이 각 운영 체제에서의 기본 인터페이스이다. 파이이폭스 로고 디자인 리소스 록 밴드 (비디오 게임) 록 밴드(Rock Band)은 하모닉스 뮤직 시스템이 개발해, EA 및 MTV Games 가 출판하는 음악 게임이다. 베이스 기타 베이스 기타(), 또는 일렉 베이스는 현악기의 하나로, 보통 4개의 줄을 가지고 있으나, 5현, 6현, 그 이상도 있다. 전기 기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줄이 굵고 낮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다. 종류에 따라 프레시전 베이스, 재즈 베이스, 스타인버거 타입, 프렛레스 타입, 어쿠스틱 베이스 등이 있다. 취향에 따라 손가락, 또는 피크로 친다. 베이스는 크게 헤드와 넥, 바디로 나뉘어 있다. 헤드는 줄이 감기는 줄감개와, 넥 부분의 너트와 줄감개 사이에서 줄을 고정시켜주는 스트링가이드로 이루어져 있다. 줄감개는 줄의 팽팽함을 조절하는 헤드머신과 연결되어있어 튜닝시에 이용된다. 스트링 가이드는 종류에 따라 없는 경우도 있다. 넥은 헤드와 보디 사이에 위치한 부분으로 운지하는 부분이다. 줄들 사이사이에 운지할 수 있도록 줄과 닿는 프렛이 위치하고 있다. 일부 프렛과 프렛 사이에는 포지션마크가 있어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다. 너트는 헤드에서 넥으로 넘어오는 부분에 위치하는데 줄 간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디의 경우 줄에 관계되는 부분으로 브릿지와 픽업이 있고, 출력을 조절하는 볼륨노브와 톤노브가 있다. 볼륨 노브가 2개인 경우 위치에 따라 프론트볼륨 노브와 리어볼륨 노브로 나뉘는 경우도 있다. 액티브와 패시브 전환이 가능한 기타의 경우 패시브/액티브 전환 스위치도 같이 존재한다. 브릿지는 뒤쪽에서 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픽업의 경우 현의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부분인데, 핑거링 주법을 사용할 시에는 엄지 손가락을 올려놓게된다. 재즈 베이스와 같이 픽업이 두개로 나뉜 경우 헤드에 가까운쪽부터 프론트 픽업, 리어 픽업이라한다. 그밖에 어깨끈(스트랩)을 고정하는 스트랩핀과 케이블을 연결하는 아웃풋잭, 줄의 끝부분이 고정되는 테일피스가 있다. 피크로부터 보디가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피크가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가 박자 맞추기를 담당하는 것처럼 밴드악기에서 박자를 담당하는 악기이다. 또한 베이스 기타는 음의 고저를 운지할 수 있음에도 합주할 때에는 드럼의 박자를 이끄는 리듬악기에 가깝기 때문에 박자감이 매우 중요하다. 음의 위치는 통기타와 일렉기타의 위쪽 4현과 동일하다. 픽업의 배열에 따라 나뉘는데 프레시전 베이스는 험버커 픽업, 즉 1,2번/3,4번줄의 픽업이 앞뒤로 바로 붙어있다. 때문에 볼륨 노브가 하나뿐이며 재즈베이스에 비해 다소 두껍고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재즈 베이스는 이와 달리 픽업이 프런트 픽업과 리어 픽업으로 나뉘어 있으며 따라서 볼륨 노브 또한 2개이다. 두개의 픽업이 있기에 다양한 톤이 연출가능하다. 스타인버거 타입이란 스타인버거사에서 나온 베이스를 가리키는 말로 헤드가 없는 특징을 가진다. 작고 가벼워서 휴대성이 몹시 뛰어나다. 튜닝은 브릿지쪽에서 하는데 튜닝할때 힘이 적게 들어간다는 장점이있다. 말그대로 프렛이 없는 베이스를 일컫는다. 프렛이 없기 때문에 사용자의 어느정도 숙련을 필요로하며 슬라이딩을 할 때에 몹시 부드럽다. 하지만 프렛이 없기에 명확한 음을 내기 힘들다는 단점을 지닌다. 일반적인 베이스가 4현만을 사용하는 반면, 5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역시 일반 기타에서 위로부터 5줄까지의 음과 동일하다. 4현베이스 튜닝은 4현부터 E - A - D - G 인 반면 5현베이스 튜닝은 (5현기준으로) B - E - A - D - G 이며 솔로를 지향하는 베이시스트들은 로우 B현 대신 E - A - D - G - C 처럼 하이 C 현을 넣어 튜닝하기도 한다. 혹은 둘 모두를 넣기도 하는데, 이를 6현 베이스라 한다. 핑거 피킹 주법이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연주하는 방법이다. 지문 부분을 이용해 누르는 느낌으로 연주하며 중지가 약지보다 길기에 오른손 잡이의 경우 오른손을 왼쪽으로 약간 기울여 자세를 잡는다. 피크를 이용하는 주법으로 베이스 피크의 경우 기타 피크와는 달리 상당히 두께있는 피크를 사용한다. 위아래로 현에 닿게 연주하며 안정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리고 핑거피킹보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서 주로 록이나 메탈같은 음악에 많이 쓰인다. 베이스 연주의 화룡점정인 주법.엄지와 검지를 이용한 주법으로 엄지의 경우 반동적으로 튕기듯하고 검지는 줄을 흡사 뜯는 느낌으로 연주한다. 빠른 속주가 가능하고 독특한 음색을 낸다. 그루브있는 음악을 연주하기 용이하다. 난이도가 비교적 높아 초보자들은 쉽게 따라하기 힘든 주법이다. 왼손만으로 소리를 낼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해머링, 폴링오프가 있다. 해머링은 넥부분의 현에 손가락을 찍듯이 눌러 음을 내는 방법으로 특정음을 낸 후에 해머링을 이용하여 낮은 음을 곧바로 낼수있다. 폴링 오프는 이와 반대로, 가한 손가락으로 줄을 잡아당기듯 연주한다. 록 음악 록 음악()은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생겨난 대중음악의 한 형식이다. 록은 일반적으로 보컬, 리드 전기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의 넷으로 구성되며, 강렬한 기타 혹은 드럼 소리가 특징이다. 대개 보컬, 전기 기타, 그리고 강한 백비트(록음악 특유의 강한비트)로 구성되며, 백비트는 색소폰과 같은 여러 종류의 악기들에 의한 스타일이 일반적이다. 록 음악은 젊음의 기쁨을 찬양하거나 때로는 젊은층이 가진 욕구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록은 1950년대 로큰롤(Rock and Roll)에서 비롯되었다. 록이라는 용어는 정의하기 모호하다. 이 단어는 때때로 여러 장르들이 모호하게 섞여있는 것, 이를테면 소울, 헤비메탈 심지어는 힙합을 포함하는 것까지,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넓게 보자면 로큰롤과 같은 의미를 지니며 좁게 보면 로큰롤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록 음악의 사운드는 전통적으로 전기 기타를 중심으로 하며,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과 심벌이 포함된 드럼 킷을 사용한다. 피아노나 해몬드 오르간, 신시사이저와 같은 건반악기도 역시 자주 사용한다. 록 밴드는 일반적으로 보컬리스트, 리드 기타리스트, 리듬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 등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둘에서 다섯 정도의 멤버로 구성된다. 이 일반적인 형태는 버디 홀리가 고안해냈고 비틀즈가 확립했다. 록 음악은 전통적으로는 백비트가 있는 4/4 박자의 반복적인 리듬을 자주 사용한다. 록 음악은 스타일적으로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역사와 다른 장르의 요소의 잦은 유입 등의 이유로 록이란 무엇인가를 음악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힘들다. 록 음악은 처음 시작된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전 세계 젊은 세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록음악이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생겼을 때는 로큰롤이라고 불렀는데, 기성 세대들은 로큰롤을 한 때의 유행으로 받아들여 무시하거나 사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기성 세대는 이전에는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 그렇지만 1960년대 중반, 로큰롤이 음악 형식의 하나로 자리잡으면서 폭넓은 관심을 끌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록음악의 뿌리였던 블루스에서 벗어나 간단히 록음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록음악은 음반사업뿐만 아니라 영화, 패션, 정치 풍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음악과 결합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히피 무브먼트, 모드 사조, 비트 사조 등이 있다. 1940년대 재즈가 점점 어려워짐에 따라 대중에 멀어졌다. 재즈의 쇠퇴와 록의 도래 사이의 과도기 시절인 1950년 대 초반에는 스탠다드 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가수로서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팻 분, 냇 킹 콜 등이 있었다.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기성 세대들이 스탠다드 팝을 즐겼다면 비주류 계층인 흑인들은 블루스 음악을 즐겼으며 농촌의 백인들은 컨트리 송을 즐겼다. 블루스 음악은 스윙 재즈의 영향을 받아 곧 리듬 앤 블루스로 진화했다. 그리고 컨트리 송은 여러가지 형태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는 달리 보통의 리듬 앤 블루스는 초기 로큰롤의 형태이다. 로큰롤은 백인 청소년에게 점점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가수는 주로 흑인이었다. 대표적으로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있었다. 이에 음반 제작자들은 틈새 시장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흑인의 음색을 낼 수 있는 백인 가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숨겨진 리듬 앤 블루스 명곡을 백인이 커버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들이 가수로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제리 리 루이스, 빌 헤일리, 버디 홀리 등이 있었다. 이들의 장르를 로커빌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로큰롤과 컨트리 송의 진화 형태인 힐빌리를 합친 말이다. 이런 음악들은 미국 주류 사회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리버풀 등 항구 도시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로큰롤은 재즈와 결합하여 스키플 사운드를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가 있었다. 주류가 로큰롤을 하였다면 언더그라운드 비주류는 블루스와 재즈 음악을 하였다. 기존의 블루스 음악은 미국에서 탄생했는데 처음에는 통기타와 하모니카 등으로 이뤄진 컨트리 블루스와 델타 블루스 등이 있었다. 곧 미국이 발전을 하게 되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블루스에도 전기 악기가 접목되어 일렉트릭 블루스가 되었는데 특히 시카고에서 인기를 끌어 시카고 블루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음악은 로큰롤이 도래하기 이전 영국으로 전해져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백인)들은 브리티시 블루스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아티스트로는 알렉시스 코너와 존 메이올이 있었다. 로큰롤을 하지 않았던 영국 가수 중 클리프 리차드는 미국 공연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하고 말았다. 비틀즈가 그 다음 공격을 하여 성공을 했는데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한다. 뒤이어 애니멀스, 데이브 클락 5, 무디 블루스 등이 진출을 하였다. 이런 가수들은 모드 사조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음악 이외에도 브리티시 블루스를 하던 사람들도 미국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가수가 롤링스톤즈였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는데 기성 세대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비트 사조에 빠져들었고 곧 히피 무브먼트로 진화하였다. 이들은 마약을 하였는데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록이 등장하였다. 사이키델릭 록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언급을 하는 포크 송도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피트 시거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이 있었다. 한편 이런 식으로 미국식 사이키델릭 록이 마냥 외쳐대는 밴드였다면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은 예술적, 음악적인 실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밥 딜런이 포크 송과 로큰롤 사운드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포크 록을 만들어냈다. 영국식 사이키델릭 록의 발전으로 곧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게 되었고 브리티시 블루스의 영향으로 블루스 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블루스 록을 하던 밴드였던 크림은 하드 록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결합시켜 하드 록을 더욱 발전시켰다. 록 음악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흑인 음악의 영향도 중요하다. 락의 시초는 블루스이며 1930년대 로버트존슨이 개발한 리듬이 시초가 된다. 하지만 로버트 존슨이 약혼녀에게 독살 당하고 그가 개발한 리듬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그에게 영향을 받은 50년대 척베리 등과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의 리듬을 발전시켜 락앤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동시대의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같은 락앤롤 뮤지션들의 노래는 젊은 이들을 크게 열광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기성 세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관습적으로 락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대표적으로 락 이전에 존재했던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었다. 그 이유는 흑인들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불허하여 그들이 하는 모든것은 매도되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음악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었기 때문에 블루스는 '악마의 음악'이라고 매도되었다. 이때문에 재즈같은 경우는 어느정도 즐기는 백인들이 적잖게 있었지만 흑인들의 한이 담긴 블루스를 즐기고 연주하는 백인들은 찾기 힘들었다. 또한 앞서 소개한 로버트 존슨의 일화중 미시시피 십자로에서 악마를 만나 음악을 배웠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렇게 와전된 전설 역시 블루스가 악마의 음악으로 불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블루스에서 발전한 락앤롤을 백인들이 공연장에서 열렬히 부르자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열광을 한다. 클래식, 재즈, 스탠다드 팝 등 기존의 음악을 뒤로하고 락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 전까지는 없었으며, 음악을 들을 때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은 금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기성세대들에겐 젊은이들이 미친것으로 보였으며, 이러한 락은 기성세대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다. 락앤롤은 젊은이들을 악마의 유혹에 빠뜨리는 주적이 된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조장하는 대표적인 세력으론 기독교가 있었다. 1950년대 락앤롤 뮤지션인 제리 리 루이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 『Great Balls of Fire』을 보면 기독교가 락앤롤을 얼마나 매도하였는지 알 수 있다. 제리는 마지막에 "락앤롤이 악마의 음악이라면 나는 지옥에서도 피아노를 치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초기 락앤롤은 기독교 관습으로 인해 '악마의 음악'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흑인에 대한 차별이 줄고 젊은이들의 열광도 익숙해지며, 락은 성장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락에 대한 매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갈수록 퇴폐적인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 락앤롤 밴드 비틀즈는 발라드 명곡 Yesterday 를 발표해서 기성세대에게도 락앤롤을 한다고해서 다 천덕꾸러지는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악동으로 유명한 롤링스톤즈는 온갖 성적인 발언과 추악한 행동으로 기성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준다. 또한 1960년대 후반 샤이키델릭이 성행할 때, 샤이키델릭의 음악 성향상 마약의 복용은 흔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락은 매우 퇴폐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등이 이런 약물에 의해 사망한다. 또한 락은 대중음악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저항을 상징하는 포크 뮤지션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회에 대한 저항만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고 성적인 문제도 자주 일으켰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샤이키델릭, 포크등에 의해 히피문화가 발전하고 약물, 퇴폐성, 폭령성 등의 어두운 부분이 극에 다다른다. 기독교 계열에서 비판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락 뮤지션들중에 반-기독교 성향을 보이는 무신론자도 많을 뿐더러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욕을 잦게 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도 있다. 컵라면 컵라면()은 컵 형태의 작은 용기에 포장된 국수 식품이다. 원래 일본 닛신식품(Nissin Foods)에서 발명된 것이지만 현재는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다.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은 용기에 라면 스프와 뜨거운 물을 붓고 3~4분가량 기다리면 조리가 된다. 조리법이 간단하고 오래 끓이지 않아도 되므로 일반 라면만큼이나 많이 소비된다. 1971년 닛신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개발하였다. 최초의 컵라면은 닛신 식품의 컵누들이었다.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 내 라면시장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기 위해 새로운 재품을 고민하던 중, 1971년 컵누들을 발명하게 되었다. 당시 해외 시장또한 겨냥하기 위해 라면 용기 안쪽에 포크를 함께 포장해서 팔던 것이 특징이었으며 일본 라면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당시 광고 내용은 ‘끓인 물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였으며 지금 현재에도 일본 컵라면계 1위를 지키고 있다. 1972년 3월 삼양식품에서 국내 첫 컵라면을 출시했고 이후 1976년 컵라면 무인 판매기 5대를 명동 코스코스 백화점, 경희대입구, 삼양식품 체인점, 그랜드 제과, 이대 입구에 설치했다. 이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등에도 컵라면 자판기를 추가했다. 1982년, 농심도 본격적으로 컵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했고 이에 삼양은 쇠고기, 유부맛 컵라면 65g짜리와 쇠고기맛 대접면 86g짜리를 출시해 맞섰다. 1981년 후 일본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미니 컵라면을 출시했는데 일반 컵라면이 75g, 130엔 인데 비해 이 컵라면은 37g에 60엔으로 절반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당시에1400 이르는 일본 컵라면 시장에서 10퍼센트에 가까운 매출을 차지했다. 1988년 봉지면에 비해 컵라면의 소금섭취량이 많다는 의견의 기사가 올라와 소비자 건강에 대한 우려를 내비추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컵라면은 이후에도 꾸준히 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1989년 일본의 닛산식품회사는 캔속에 물을 붓기만 하면 물이 자동으로 끓는 라면을 개발하였다. 1989년에는 봉지면과 컵라면에 들어가는 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겼다는 일명 '우지논란' 이 일어났다. 1990년대에는 한강공원 등지에서 컵라면을 판매 허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한강 공원에서의 라면을 즐기게 되었다. 1996년부터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에서 컵라면을 먹을수 있게되면서 컵라면 소비량이 크게 늘었다. 1998년 컵라면 용기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당시 기업에서는 끓는 물을 붓고 30분이 지나서부터 환경호르몬이 검출되는데 이 시간을 넘겨서 컵라면을 섭취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삼양식품에서 1972년 3월에 국내최초 용기면인 ‘컵라면’ 생산하였고, 농심사가 1981년 11월 국내 최초로 사발형태의 ‘사발면’을 개발하였다. 그 이후로 여러 종류의 컵라면이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컵라면에는 농심의 '신라면', 오뚜기의 '참깨라면', 팔도의 '도시락'이 있다. 2012년 부터 삼양에서 불닭볶음면이 출시되면서 한국에서는 매운 라면의 인기가 SNS를 통해 퍼졌다. 이에 컵라면으로도 출시되어 소비자들은 보다 편리한 컵라면을 소비하는 등 "큰컵불닭볶음면"이 유행하였다. 또한 매운맛에 도전하기 위해 삼각김밥, 치즈를 함께 먹는 레시피가 인터넷과 SNS 등에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라면들을 "섞어"먹는 새로운 방식이 시도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섞어먹기 편한 컵라면의 판매량이 증가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컵라면과 컵라면 내에서의 국물없는 비빔면 종류의 판매가 증가했다. 한국에서의 매운 컵라면이 유행하자 유투브 등에서는 외국인의 한국 컵라면 체험 후기 등의 영상이 유행하였다. 10분 내외의 짧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국 매운 컵라면의 인기는 해외에서도 드러나는데 2017년 사드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중국 및 동남아 지역에서의 불닭볶음면의 매출이 올라갔다. 중국 컵라면은 한국과 달리 일회용 젓가락이나 포크가 들어가 있고, 대부분 액상 스프를 사용하고, 향신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맛의 컵라면이 있다. 매운맛의 라면도 있지만 매운 맛이 아닌 구수한 맛이 나는 컵라면도 있다. 중국에서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라면인 '캉스푸 홍샤오니우로우미엔"은 중국 소비자 10명 중 5명이 먹는 라면회사라는 수식이 붙은 캉스푸에서 만든것이며 우리나라 온라인 매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닛신 돈베이 우동이 있다. 이 컵라면은 1971년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개발한 ‘닛신푸드’의 제품이다. 이 컵라면의 맛은 소고기와 유부 2가지 맛이 있는데 두 제품 모두 면발이 마치 우리나라의 칼국수처럼 굵고 납작하다. 일본의 컵라면에는 우리나라의 컵라면에 들어있는 건더기 양에 비해 풍부한 양의 건더기가 있다. 일본에는 컵라면 박물관이 있는데,이곳에서는 세계최초 치킨라면을 발명한 안도 모모후쿠의 생애를 영화로 상영하는 '모모후쿠 극장'과 치킨라면을 손수 만들어 볼 수 있는 '치킨라면 팩토리' 등 인스턴트 라면을 토대로한 다양한 전시와 활동들을 진행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 엔화약세 등의 이유로 젊은층에서의 일본여행이 유행하면서 일본 라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그 중 닛신의 컵누들의 경우 세계 최장수 라면으로 독특한 광고로 유명세를 탔다. 태국은 라면에서 신 맛이 난다. 또한, 태국에는 컵라면을 살 때 용기 안에 플라스틱 포크가 들어있기 때문에 따로 나무젓가락을 챙길 필요가 없다. 태국 라면의 가장 큰 특징은 향미유(향신료)가 있어 기호에 맞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며 분말 스프는 약간의 신 맛이 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태국의 대표적인 컵라면으로는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가 있으며, 이 라면은 톰얌쿵의 맛을 끓여 먹는 라면으로 만든 것인데, 여기서 ‘톰얌쿵’이란 ‘세계 3대 수프’ 중에 하나이다. 태국어로 ‘톰’은 끓임, ‘얌’은 시큼한 맛, ‘쿵’은 새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마 인스턴트 누들 쉬림프 크리미 톰얌 플레이버는 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살린 라면이다. 실제로 수프의 색도 빨간색이 아니라 흰 우유를 부은듯한 오렌지색이다. 맛은 일반 라면 스프에 신 맛을 더하면 된다고 한다. 2013년 세계 라면 협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한 명당 일 년에 평균 74.1개의 라면을, 인도네시아는 60.3개를 먹는다고 한다. 이런 열풍이 가능한 이유는 세계 1위의 라면 생산 업체 인도미(Indo mie)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라면은 우리나라에 비해 양이 적고 칼로리가 낮다. 수치로 비교해보면, 125g정도 하는 우리나라의 라면에 비해 인도네시아 라면의 무게는 67g~68g정도로 매우 작다. 1봉지를 섭취했을 때의 칼로리는 우리나라는 500kcal, 인도네시아는 340kcal로 현저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라면의 면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두껍지 않고 얇다. 소스에는 카피르라임 잎이 들어 있는데, 이 향신료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남아의 음식에 들어가 음식 맛의 풍미를 살려준다. 라면의 제조 공정과 비슷하며 마지막 포장단계에서 봉지가 아닌 용기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용기는 Polystyrene (폴리스티렌) 원료를 10~30배로 고발포하여 시트 내부에 공기층을 형성시킨 것으로 단층구조가 아닌 여러겹이 쌓여있는 구조이다. 액체나 기체에서의 열의 전도는 고체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열의 절연체인 공기가 사이에 존재하게 함으로서 최대한의 열손실을 방해하고자 한 것이다. 열손실이 적어야 용기안의 면이 익을 만한 열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PSP 용기의 특성은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하여 여타 이물질이 묻어있는지를 쉽게 구분 할 수 있으며 국물이 배거나 주위 환경으로부터 어떠한 이물질의 혼입을 막아주는등 위생성이 양호하다. 단열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뜨거운 국물이 있는 라면 용기등에 매우 적합하며 선도유지성이 우수하고 수분증발 방지 등의 효과가 뛰어나다. 또한 충격에 강하여 상품의 운반 보관에 매우 유익하다. 경량성이 뛰어난것도 특징이다. PSP용기는 PS 수지를 5-15배 발포시킨 것으로 크기에 비해 매우 가볍다. 다른 용기보다 가벼우면서 내용물을 동일하게 담을 수 있어 운반이나 취급시 용이한 것이다. 또한 내용물이 용기의 표면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판매와 취급이 편리하며 회수 상태에 따라 원료나 연료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PSP 용기가 환경호르몬의 발생 원인이라고 하여 친환경적이라고 주목받는 종이용기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종이용기는 PSP용기보다 개발시 용기 가격이 비싸지만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재활용이 가능하며 2중용기로서 단열효과가 좋아 취식시 안전성이 양호하다. 쉽게 파손되지 않고 내용물 보호에 유리하며 겉면 인쇄도 유리하다. 1998년 6월 일본 국립의약품 위생 연구소에서 기존에 쓰이던 PSP (Polystyrene paper)의 재질로 만들어진 용기에서의 내분비계장애(환경호르몬) 의심 물질인 다이머(dimmer), 트리머(trimer) 용출 시험 결과를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 인용 보도하면서 환경호르몬 논란이 대두되었다. 1998년 4월 26일 동아일보에서 "컵라면 등 용기 생식기능 저하 물질 함유", 1998년 4월 26일 서울경제의 "라면 등 1회용 식기에 생식기능장애 환경호르몬 함유", 1998년 4월 26일 중앙일보의 "컵라면 용기에 환경호르몬 함유... 생식기능 저하될수도"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기사가 보도된 이후 주 소비층인 주부와 청소년층에서 불신감이 팽배해 졌다. 그러나 지속적인 연구결과 PSP 용기 제조 시 다이머(dimer)와 트리머(trimer) 같은 물질은 환경호르몬 작용 즉, 내분비계 장애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또한 라면 용기의 안전성에 대해 많은 연구발표가 되어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을 보면 미국 산업화학독성연구소 로저맥클레란 대표는 컵라면 용기와 관련하여 환경호르몬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금물이고, 스틸렌다이머와 트리머에 대한 환경 호르몬 연구결과는 없으며, 자신도 전자레인지에 가열해 먹는다고(전자레인지용 용기로)하면서 안전한 물질임을 피력 한 바 있다. 나아가 일본 환경청은 폴리스틸렌을 내분비교란물질 목록 SPEED 98 개정판에서 삭제하였고, 유럽 아시아를 비롯 세계각국의 정부기관들에서도 사용을 승인한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번 감소세로 이어진 판매량은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라면 업체에서는 용기의 변화를 꾀하게 되었으며 PSP 용기에서 PP용기나 종이용기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한펄프(주)는 컵라면 용기를 라면업체 빙그레와 현진제업와 공동으로 개발하였으며 2000년도 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PSP 용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2005년 농심의 경우 라면용기를 PSP 용기에서 전분발포용기로 교체하였다. 오뚜기의 경우, 독자 기술을 통해 발명한 친환경 용기를 활용, 전자레인지에서 조리해도 안전한 컵라면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2017년 기준, 오뚜기는 진라면 2종을 시작으로 참깨라면, 진짬뽕까지 전자레인지용 용기를 확대 적용했으며, 나머지 컵라면의 용기도 전부 친환경 용기로 교체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라볶이 라볶이는 떡볶이에 라면 면발을 얹은 음식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 또는 라면 분말소스를 적당히 넣을 수도 있다. 일부 식당에서는 라면의 면발 대신 쫄면의 면이나 사리를 넣기도 한다. 누리꾼 네티즌(, )은 인터넷 통신망에 형성된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인터넷 망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통신망을 뜻하는 'net'과 시민을 뜻하는 'citizen'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시민(citizen)은 자립성, 공공성, 능동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네티즌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마이클 하우번(Michael Hauben)은 네티즌이란 용어가 단순히 통신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모두 통칭하는 개념이 아닌 통신망에서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가꾸어가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네티즌이라는 용어가 영어권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영어권보다는 중국이나 대한민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 영향으로 영어권에서는 주로 아시아지역 누리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영어권에서는 사이버시티즌(cybercitizen)이라고도 하며, 인터넛(internaut: internet + astronaut)이라는 은어가 쓰이기도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누리꾼을 네티즌(ネチズン, netizen)이라 하지 않고, 넷 유저(ネットユ一ザ一, net user)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한민국 대형 신문사들이 일본어 서비스로 제공한 기사에서 "네티즌(ネチズン)"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서 일본에서는 '네티즌'이라 하면 흔히 '대한민국의 누리꾼'을 떠올리게 되었다. 2004년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에서 네티즌을 순화한 단어로서, 세상을 뜻하는 '누리'와 전문인을 뜻하는 '꾼'의 파생어이다. 초기에는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순화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으나, 현재는 두 단어 모두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은 '누리망'으로, 홈페이지는 '누리집'으로 순화되었으나, '누리꾼'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며 공식 매체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의견교환과 정보교환을 장점으로 본다. 그러나 익명을 사용하여 토론상대나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미성숙함도 이따금씩 지적받는다. 떡볶이 떡볶이()는 떡을 주재료로 하는 한국 요리이다. 일반적인 떡볶이는 떡볶이떡 또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가래떡에 여러 가지 채소와 매운 고추장 등의 양념을 넣어 볶은 음식으로, 한국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다. 매운 고추장이나 매운 간장을 기본으로 양념할 수 있는데, 전자가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한글 맞춤법에 의하면 "떡볶이"가 표준어이다. 현대 한국에서 즐겨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한국 전쟁 직후에 개발된 음식이다. 이전에 궁중에서 먹던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어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다른 찜과 같은 방법으로 조리한다. 흰떡을 탕무처럼 썰어 잠깐 볶는다. 다른 찜과 같은 재료가 모두 들어가지만 가루즙은 넣지 않는다"라는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으며, '주식시의(酒食是儀)'에서는 떡을 잘라 기름을 많이 두르고 쇠고기를 가늘게 썬 것과 함께 넣어 볶는다고 나와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궁중 떡볶이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현대의 고추장 떡볶이는 1953년에 마복림(1921~2011)이 광희문 밖 개천을 복개한 서울 신당동 공터에서 길거리식당 음식으로 팔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음식점에서 가래떡을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떨어뜨렸는데 그 떡을 먹고 보니 맛이 좋아서 고추장떡볶이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연탄불 위에 고추장, 춘장을 섞은 양념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MBC 라디오의 "임국희의 여성살롱"이란 프로그램에서 신당동 떡볶이골목이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떡볶이는 고추장을 사용해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떡볶이와 간장을 사용하는 궁중 떡볶이로 그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원래 궁중에서 발달한 떡볶이는 간장 양념에 재어둔 쇠고기를 떡과 같이 볶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운 맛이 아니었으며, ‘궁중 떡볶이’로 불린다. 보통 떡볶이 하면 연상되는 고추장 떡볶이는 대개 고추장과 설탕을 써서 매운 맛과 단 맛을 내는데, 보통 매운 맛을 내는 고추장 등의 양념과 단 맛을 내는 설탕이나 물엿 등을 섞은 양념장에 떡을 섞은 뒤 졸여서 볶아낸다. 지역에 따라 여기에 케첩이나 후추, 겨자 등의 재료를 첨가하여 독특한 맛을 내기도 한다. 또한, 고추장 떡볶이 소스의 감칠맛을 내기 위하여 짜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고, 또는 카레와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떡은 떡면(떡볶이떡) 또는 가래떡을 사용하며 떡의 주재료가 쌀가루로 만들었냐 밀가루로 만들었냐에 따라 '밀떡볶이'와 '쌀떡볶이'로 나뉘기도 한다. 떡볶이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흔해진 밀가루로 만든 떡을 사용하였다. 이후 쌀가루로 만든 쌀떡볶이가 나온 이후에도 사용되는 곳이 많다. 밀떡볶이는 떡볶이 국물의 점도가 매우 높아지고, 쌀떡볶이는 오래 끓여도 탄력성이 유지되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밀떡과 쌀떡을 섞어 판매하는 곳도 많다. 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만든 떡으로 만든 떡볶이도 있으며 더 쫄깃하고 잘 퍼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색깔은 노란색인데 익히면 흰색에 가까워진다. 추가하는 양념의 종류에 따라서 치즈 떡볶이, 까르보나라 떡볶이, 짜장 떡볶이, 카레 떡볶이 등의 다양한 떡볶이가 있으며 추가할 수 있는 양념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흔한 고추장 떡볶이 역시 배합과 양념에 따라 맛의 차이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분식점과 노점상에서 많이 판매하며 보통 떡볶이와 함께 다른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경우가 흔하다. 일반적으로 튀김류에 떡볶이 국물을 묻혀 먹기도 하며, 김밥 또는 순대와 곁들이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요즘에는 한식 세계화 과정에서 고급화, 다양화되고 조리법의 노하우 등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화도 이루어지고 있다. NFL 휴스턴 텍선스의 홈구장에서 미식축구구장 최초로 한국식 고추장 떡볶이를 판매하는 등 세계 각국에서도 떡볶이를 직접 판매하는 매장이 늘고 있다. 떡볶이 국물과 함께 미리 데쳐놓은 라면 사리를 넣어 조리한 음식. 떡볶이를 먹고 남은 국물을 쓰거나, 떡볶이 국물을 처음부터 만들고 조리하기도 한다. 라면 사리 대신 우동 및 쫄면 사리를 넣어 조리하기도 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공원 옆의 통인시장에서 팔고 있는 기름떡볶이는 기름과 떡을 중심으로 국물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고추기름과 다진 마늘을 볶아놓은 후 고춧가루와 굴소스(또는 간장), 맛술을 배합한 양념과 미리 살짝 대쳐 놓은 떡볶이 떡을 넣어 볶는다. 처음 등장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70년대 초 통인동 부근의 옥인동 시장에서 통인시장보다 먼저 기름떡볶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간장과 고추장을 적게 넣으면서 오랜 시간 동안 철판에서 볶아 먹는 방식이었다. 현재 통인시장에서 팔고 있는 기름떡볶이는 이전 방식에 비해 양념을 많이 넣는 편이다. 2014년 2월 한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통인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시식한 바 있다. 떡볶이와 카레 소스의 결합으로, 떡볶이의 변형 카레떡볶이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카레 소스로 만든 것으로, 카레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어묵을 넣는 경우도 있고, 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카레떡볶이의 카레 소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떡볶이와 짜장 소스의 결합으로, 떡볶이의 변형 짜장떡볶이는 떡볶이 특유의 고추장 소스를 대신하여 짜장 소스로 만든 것으로, 짜장 특유의 맛이 난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어묵을 넣는 경우도 있고, 또는 넣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당근, 양파, 양배추,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 등을 넣고 만든다. 짜장떡볶이의 짜장 소스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고추장과 혼합하여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짜장떡볶이의 칼로리는 1인분에 250칼로리이다. 떡볶이의 변형인 치즈떡볶이는 완성된 떡볶이 위에 치즈를 얹히거나 떡 속에 치즈가 들어 있는 음식을 말한다. 이는 씹을 때 떡과 치즈가 어우러져 강한 쫀득함을 느낄 수 있다. 분식집에서 판매되며,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는 까다롭지 않은 쉬운 음식이다.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위에 녹차가루, 허브가루, 깨, 파슬리 등을 뿌려 먹기도 한다. 치즈떡볶이의 칼로리는 1인분에 486칼로리이다. 즉석떡볶이는 테이블에 재료를 갖추고 손님이 직접 조리하여 먹는 떡볶이로, 기본 재료인 양념, 떡과 어묵 외에 여러가지 야채 및 달걀, 튀김류를 손님이 원하는대로 추가 및 배합할 수 있다. "떡볶이 뷔페"라고 하는 손님이 직접 재료를 골라 가져와 조리하는 곳도 있다. 떡꼬치는 떡볶이떡을 꼬치에 끼워서 기름에 튀긴 후 양념 소스를 발라먹는 음식이다. 떡 외에 채소나 해산물, 고기 등을 같이 끼워넣는 변형도 있다. 떡꼬치가 등장한 시기는 80년대 중후반 즈음으로 보고 있었으며, 현재에는 노점상을 중심으로 간혹 팔리고 있다. 떡꼬치의 전신으로는 15세기 요리책에 나오는 "떡산적"이란 요리로 추측되고 있다. 일명 크림떡볶이라고도 하는 까르보나라 떡볶이는 크림파스타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졌다. 기존의 떡볶이 특유의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대신하여 크림파스타에서 사용하는 크림소스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리고 어묵 대신 베이컨을 넣는다. 분식 분식(粉食)은 원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뜻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라면, 국수, 빵 등이 분식에 해당되었으나, 현재는 떡볶이, 김밥, 순대, 어묵, 라면, 닭강정과 같이 단가가 싸서 분식점 등에서 많이 조리·판매되는 음식들을 지칭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1960년대에 정부에서 쌀부족을 해결하려고 혼식(쌀과 잡곡을 섞어먹는 것)과 분식(밀가루 음식)을 장려하면서 발전했다. 분식점의 효시는 1961년 동성로에서 문을 연 미성당이고, 뒤이어 1963년 같은 상호의 미성당이 남산초등학교 맞은편에 나타난다. 이 두 미성당이 마침내 지역의 분식 문화 전파자가 되었다. 순대 순대()는 한국의 음식으로, 돼지의 곱창에 채소나 당면을 비롯한 각종 속을 채우고 선지로 맛과 색깔을 낸 후 수증기에 쪄내어 만든다. 남북한 모두에서 인기 있는 길거리 음식이다. 춘추 시대 쓰인 《시경》의 〈대아〉 편에는 ‘갹(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송 대의 운서 《집운(集韻)》에 의하면 이것은 양의 창자에 고기와 내장을 채운 뒤 구운 음식이다. 또 500년대 북위의 농서 《제민요술》에는 양의 선지, 기름, 밀가루, 쌀밥을 섞은 뒤 갖은 양념을 하여 양의 대창에 넣고 삶아서 썰어 먹는 ‘양반장자해(羊盤腸雌解)’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순대가 한국에 전파된 유래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는 삼국 시대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양반장자해’가 전파되었고, 이를 먹었다는 설이다. 둘째로는 고려 말기에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피순대가 한국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일각에서는 순대는 돼지 창자에 채소와 쌀 따위를 넣어 먹는 칭기즈 칸 시대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인 ‘게데스(гэдэс)’가 전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게데스는 그러한 음식이 아니라 단지 몽골의 내장 요리의 총칭이며, 실제 원나라 군대의 전투식량은 동물의 내장을 말려 만든 주머니에 건조시킨 고기를 가루 내어 최대 2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이 음식은 ‘보르츠(борц)’라고 하는 순대와 무관한 음식이다. 순대라는 말은 만주어로 순대를 뜻하는 ‘성기 두하(senggi-duha)’에서 유래하였는데, ‘성기’는 피를 뜻하며, ‘두하’는 창자를 뜻한다. 1800년대 후반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슌ᄃᆡ’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며, 이는 ‘성기 두하’가 축약된 말이다. 순대의 껍질은 돼지고기 창자를 소금과 밀가루로 문질러 잡내를 없애서 만든다. 손질한 돼지 창자를 뒤집으면 깨끗한 면이 바깥으로 노출된다. 이 안에 두부, 숙주나물, 찹쌀과 각종 향신료와 함께 돼지피를 넣는다. 이렇게 만든 순대를 가마솥에 쪄낸다. 부산, 울산 및 경상남도 일부지역에서는 막장에,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양념 소금에 찍어먹으며, 돼지 간이나 허파 등의 부산물과 함께 팔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는다. 재료에 따라 오징어순대, 찹쌀순대 등이 있으며, 만든 지역에 따라 병천 순대, 아바이 순대 등이 있다. 1830년의 《농정회요(農政會要)》에는 ‘도저장(饀猪腸)’이라 하여 돼지의 창자에 선지, 참기름, 콩나물, 후추 등을 섞은 것을 넣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으며, 이때 설탕[砂糖]으로 창자를 씻으면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를 다룬 조선 시대 최초의 기록이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도야지슌ᄃᆡ’라 하여 숙주, 미나리, 무, 배추김치, 두부, 생강, 마늘, 깨소금, 기름, 고춧가루, 후추 등을 돼지 선지와 섞은 것을 창자에 넣어 삶은 뒤 식혀 썰어 먹는 음식이 등장하였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순대는 돼지 내장에 속을 채워 만들며, 주로 소창을 사용하지만 지역에 따라 대창을 사용하기도 한다. 1600년대 말의 《주방문(酒方文)》에는 ‘팽우육법(烹牛肉法)’이라 하여 소의 대창에 선지, 밀가루, 매운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삶아 썰어 먹는 음식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우장증방(牛腸蒸方)’이라 하여 소의 창자에 소고기, 갖은 양념, 유장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히고 썰어서 초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 나와 있다. 1809년의 《규합총서》에는 소의 곱창에 소고기, 닭고기, 꿩고기, 갖은 양념을 섞어 채운 뒤 솥에 삶아 식힌 뒤 마찬가지 방법으로 먹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중반의 《역주방문(曆酒方文)》에는 ‘우장증(牛腸蒸)’이라 하여 갖은 양념을 한 소의 살코기를 창자에 넣어 솥에 삶은 뒤 생강을 넣은 초장에 찍어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 1800년대 중반의 《임원경제지》에는 ‘관장방’이라 하여 양의 창자에 양념과 유장을 섞은 선지를 넣어 찐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1670년경의 《음식디미방》에는 개의 창자에 개의 살코기,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장을 섞어 채운 뒤 시루에 삶아서 초와 겨자를 곁들여 먹는 요리가 적혀 있다. 1700년대의 《소문사설(謏聞事說)》에는 ‘어장증(魚腸蒸)’이라 하여 대구의 창자에 대구살을 넣고 찐 뒤 썰어 먹는 요리가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에는 ‘어교슌ᄃᆡ’라 하여 삶은 숙주와 미나리를 소고기와 함께 다진 뒤 두부를 섞어 갖은 양념을 하고, 이것을 잘 씻은 민어의 부레에 넣고 삶은 뒤 썰어 먹는 요리가 나와 있다. 함경도의 명태순대가 유명하다. 당면순대는 당면이 주 재료인 순대이다. 해방 이후 순대는 고가의 음식이었으나, 1960년대 초반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양돈 사업을 육성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돼지 부속물과 창자의 가격이 많이 내렸고, 여기에 저렴한 당면을 주 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1970년대 초반부터 당면순대가 대중화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내장을 제거한 돼지고기의 일본 수출이 본격화하면서 돼지 부속물이 많이 유통되었고, 이에 당면순대의 보급이 뒤따랐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당면순대의 90% 가량은 공장에서 제조되고 있다. 찹쌀순대는 찰순대라고도 한다. 찹쌀로 만든 당면을 사용한 순대, 또는 찹쌀밥을 속으로 사용한 순대를 뜻한다. 피순대는 선지가 주 재료인 순대이다. 당면은 넣지 않으며, 선지, 채소, 다진 고기 등이 들어간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피순대가 유명하다. 백암순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내장에 두부, 숙주와 콩나물 등의 채소를 넣어 만들며, 조선 시대에는 죽산군에서 주로 먹던 것이 우시장이 유명하던 백암 5일장으로 옮겨왔다. 병천순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소창에 선지, 들깨, 배추, 파, 고추, 찹쌀 등을 넣어 만들며, 1960년대 초반 병천 일대에 햄 공장이 생기면서 육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돼지 부산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순대를 파는 가게가 들어선 것이 시초이다. 아바이순대는 함경도식 순대를 변형하여 돼지의 대창에 선지, 찹쌀, 우거지, 숙주, 배춧잎 등이 들어가는 순대로,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의 특산물이다. 청호동은 본래 모래 해변에 불과하였으나, 한국 전쟁 중 1.4 후퇴 이후 함경남도의 실향민들이 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흔히 1960년대 초반부터 아바이순대가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 시기를 1990년대 초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암뽕순대는 돼지 막창으로 만든 순대와 새끼보(자궁, 암뽕)를 함께 내놓는 음식이다. 암뽕순대라는 말은 담양에서 순댓집을 운영하는 배서운이 암퇘지의 자궁이 봉우리와 모양이 유사한 점에서 착안하여 ‘암퇘지 봉우리’의 두문자어인 ‘암봉’으로 부르던 것이 경음화로 ‘암뽕’이 되었고, 1990년대 초반 〈고향의 아침〉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암뽕과 순대’가 ‘암뽕순대’로 소개되면서 전국에 퍼지게 된 이름이다. 용궁순대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일대의 순대이다. 돼지의 막창으로 만들며, 5일장인 용궁시장 인근에 많이 있던 돼지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이용하여 탄생하였다. 수애(수웨) 또는 돗수애(돝수웨)는 제주도의 순대이다. 선지에 메밀가루를 섞어 만들며, 원나라의 고려 침략기 때 몽골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지에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섞은 뒤 양의 내장에 채워 만드는 몽골식 피순대인 게데스 초스(гэдэс цус)와 유사하다. 관혼상제를 치르기 위하여 만드는 특별한 음식으로서, 퍽퍽하고 건조한 맛이 특징이다. 창자는 70~80 cm 길이로 잘라 장 속의 내용물을 훑어 제거하고, 안팎을 뒤집은 뒤 굵은소금으로 주물럭거리고 흐르는 물에 씻어 준비한다. 소는 돼지 피에 메밀가루 또는 명아주 가루나 보리가루를 넣고, 부추(겨울철에는 잔파), 빻은 마늘, 생강, 소금 등과 함께 섞어 만든다. 이때 수애에 넣는 소는 창자 한 근에 돼지피 두 사발, 메밀가루 한 사발 정도의 비율로 하여 집었을 때 흘러내릴 정도로 섞어 준비하고, 3분의 2 정도만 채우고 양 끝부분을 묶는다. 꼬챙이로 찌르면 핏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삶아서 식혀서 잘라 먹는다. 예식을 치르는 집의 남자 친척 중 돼지를 잡은 사람들이 소를 준비하여 내장의 속을 채우며, 삶는 것은 나머지 집안 남자들이 담당하였다. 수애는 창자의 부위에 따라 ᄌᆞᆫ배설수애, 훌근배설수애, 막창(창도름)수애로 나뉘는데, 두께가 두꺼우며 지방층이 있어 씹는 맛이 좋은 막창수애가 가장 고급이라고 한다. 오뎅 오뎅()은 여러 가지 어묵을 무, 곤약 등과 함께 국물에 삶아낸 요리이다.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일본어 ‘오뎅’은 요리 자체를 부르는 말이지만 한국어권에서는 ‘오뎅’을 탕에 쓰이는 낱개의 어묵을 부르는 말로 쓰고, 탕 전체는 ‘오뎅탕’으로 부른다. 어묵 어묵(, )은 생선의 살을 으깨어 소금과 밀가루, 전분 등 부재료를 넣고 뭉친 후 익혀서 묵처럼 만든 음식이다. 찌거나 굽거나 튀겨 먹는다. 세계 각지에 여러가지 어묵이 있는데, 한국식 어묵은 일본식 어묵에서 유래했다. 오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분식집에서 파는 어묵을 속어로 오뎅으로도 부르기도 하지만, 일본어의 오뎅은 어묵, 무, 곤약 등을 넣고 끓인 탕을 말하며, 이들은 어묵과 오뎅을 구별한다. 한국에서 먹는 한국식 어묵과 일본의 가마보코는 차이가 있다. 어묵은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18세기 역관 이표가 쓴 요리책 《소문사설》에 可麻甫串(가마보곶)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러나 소문사설에 나오는 가마보곶의 제작 방법은 어묵과 달라, 이것이 어묵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한편 숙종 45년(1719년)의 《진연의궤》에 보면 "생선숙편"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를 한국식의 어묵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국의 어묵은 본래 일제 강점기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어묵공장은 부평동시장에서 시작한 동광식품(창업주 이상조)이다. 1953년에는 일본에서 어묵제조 기술을 배워 온 박재덕 씨가 영도 봉래시장 입구에 삼진어묵을 설립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어묵 공장이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난민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되자 어묵 생산은 호황을 맞기 시작한다. 이즈음 동광식품과 삼진어묵의 공장장 출신이 합작해 영주동시장에 환공어묵을 설립하게 된다. 1950년~1960년대에 미도, 환공, 삼진, 동광, 대원, 영진 등의 어묵 제조 공장이 생겨나며 어묵업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대기업 제품으로는 1985년 삼호 F&G에서 만들었다. 이 때 "어묵"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단, 어묵이라는 이름 자체는 신문 상으로는 1969년에 처음 등장한다. 1990년대 초에 소위 "부산어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마차에서 먹는 어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부산어묵은 앞의 부산어묵과는 달리 길쭉한 모양의 어묵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자바 자바(Java, )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한국정보통신대학교 한국정보통신대학교(韓國情報通信大學校,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내에 설립된 IT계열 특성화 대학이다. 정보통신부 및 다수의 IT관련업체, ETRI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왔으나 2007년 10월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2009년 3월 1일, KAIST와 통합되면서 KAIST-ICC가 설립되었다. 본래는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교로, 대학원 과정만 존재하였으나, 2002년에 공학부와 IT경영학부 등 학부 과정을 설립하여 한국정보통신대학교로 교명을 개정하였다. 학부생은 매년 120명 정도를 받아들였다.(공학부 90명, IT경영학부 30명) 대학원 외국인 비율은 10%를 훨씬 상회하며, 학부는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이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정시모집의 경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개 영역 이상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에게 지원자격이 주어졌다(초기에는 전체등급 1등급이 지원 최소 자격이었다). 전공 전과목은 영어로 진행되며, 1년 3학기제를 도입, 3년 조기졸업이 가능하다. 연차 이내의 학생에 한하여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6년 당시 학부생, 대학원생 총 학생수는 약 1500명 정도였다. 2004년에 감사원은 정보통신부의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 사업’에 대한 감사에서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는 사립학교를 설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통부가 규정을 어기고 사립학교 형태의 ICU를 세워 기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지원하는 불합리성을 보였다'며 사립대인 ICU가 국가 기금인 정보화근로사업 및 정보화촉진기금에 의존해 설립되었다는 점이 형평성에 어긋나며 불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에 한나라당 김영선의원은 국회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였다. 2007년도 예산안에는 KAIST와의 통합을 전제로 ICU에 대한 예산지원을 국회에서 승인하였으나 2008년도 예산안의 ICU 국비 지원안은 기획예산처에서 전액삭감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인수희망자 등의 후원자를 구하거나,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특별법 제정은 국회에서 반대로 힘든 형편이고, 인수희망자도 없는 실정이라, 한국과학기술원과의 통합방안이 유일한 해결책의 하나로 떠올랐다. 당시 이사회에서는 거듭 결정을 연기하고 있었고 일부 이사진과 총장이 통합에 반발하였다. 허 총장은 양교 통합과 관련, ICU 학부생의 96%가 KAIST와의 하향식 통합에 반대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설문조사 결과를 이사회에 제출했다. 또한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 개편안은 양 대학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통합 논의가 중단되었으나, 2008년 4월에 정부가 KAIST-ICU 통합이 이뤄진다면 그간 ICU에 지원해오던 매년 75억의 예산을 3년간 지원하기로 약속하여 논의가 재개되었다. 2008년 5월 22일, 통합에 관한 MOU가 교환되어 통합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2009년 1월 16일에는 한국과학기술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통합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ICU는 KAIST와 합병하여 KAIST ICC(IT Convergence Campus.KAIST 문지캠퍼스)로 바뀌었다. 통합 이후 기존 ICU 공학부는 KAIST 정보과학기술대학 정보통신공학과로 변경되었으며, 기존 ICU 공학부 재학생은 희망에 따라 KAIST 전산학과 또는 전기및전자공학과로 전과가 가능했다. 국제단위계 국제단위계(國際單位系, , 약칭 SI)는 도량형의 하나로, MKS 단위계(Mètre-Kilogramme-Seconde)이라고도 불린다. 국제단위계는 각 국가별로 상이하게 적용하는 단위를 미터법을 기준으로 현재 세계적으로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널리 쓰이는 도량형이다. 전 세계적으로 단일화된 국제 단위계를 만드려는 노력으로 1960년 10월 제 11차 국제 도량형 총회(Conférence générale des poids et mesures)에서 SI 가 결정되었다. SI단위는 국제단위계를 의미하는 프랑스어(Le Système International d'Unités)의 약자이다. 이 당시 국제 단위계의 체계를 접두어, 유도 단위 및 추가 단위에 대해 확립하였다. SI단위는 7개의 기본 단위(미터(m), 킬로그램(kg), 초(s), 암페어(A), 켈빈(K), 몰(mol), 칸델라(cd)), 2개의 보조 단위(라디안(rad), 스테라디안(sr))와 이들로부터 유도되는 조합단위(19개)를 요소로 하는 일관성이 있는 단위의 집단이다. 이들 단위에 SI접두어(16개)를 붙여서 구성한다. 또한 SI라는 말 자체에 '국제단위계'라는 뜻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SI단위계라고는 하지 않는다. 국제단위계에서는 7개의 기본 단위가 정해져 있다. 이것을 SI 기본 단위(국제단위계 기본 단위)라고 한다. 기본량이 아닌 물리량을 유도량이라고 하며 정의식(定義式)이나 실험식같이 물리량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식을 이용하여 기본량이나 이미 있는 유도량으로부터 유도된다. 이 유도량의 단위를 유도단위라고 한다. 유도단위는 대응하는 물리량 사이의 관계식에 따라 기본단위나 이미 정해진 유도단위에서 유도된다. 국제단위계의 유도 단위의 크기는 유도단위를 이끌어 낸 물리관계식에 관계없이 하나의 양에 관해 일치한다. 다만 단위의 명칭은 유도한 관계식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단위로 표시된 SI유도단위를 제외한 유도단위는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특별한 명칭과 기호」를 부여한다. 이 중에서 라디안과 스테라디안은 기하학적으로 정의된 단위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약칭 SI)에서 각 단위의 양의 크기를 쉽게 나타내기 위해 각 단위의 앞에 붙여 쓰는 접두어를 말한다. SI접두어는 각각 10의 거듭제곱(10 또는 10)의 크기(인자)의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원래는 엑사 페타 테라 기가 메가 킬로 헥토 데카 데시 센티 밀리 마이크로 나노 피코 펨토 아토 등 16가지였으나, 1991년 10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제타, 요타, 젭토, 욕토 4가지를 추가하기로 결의하여 모두 20가지가 되었다. 1942년 1942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1년 1991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제16대 대한민국 국회는 21세기 첫 대한민국 국회이며 6월 민주항쟁 이후 사상 첫 양당체제으로 2000년 6월 5일에 개원하였다. 4년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이다. 애플이 개인용 컴퓨터에 처음으로 도입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운영 체제인 맥 OS에 대항하여, 당시 널리 쓰이던 MS-DOS에서 멀티태스킹과 GUI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응용 프로그램으로 처음 출시되었다. 현재 전 세계 90%의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고 있으며, 서버용 운영 체제로도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윈도우 운영 체제의 경우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일반 사용자들에게 매우 익숙할뿐 아니라 호환되는 유명한 응용 프로그램이 많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보안 문제에서는 취약한 부분이 많은 운영 체제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보안문제에선 취약한 부분이 다른 운영체제와 차이날 정도로 독보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다. 영어 표기는 Windows이지만 한글로는 여러 가지 표기가 쓰이고 있다. 한국어권에서는 윈도, 윈도스, 윈도즈, 윈도우, 윈도우즈, 윈도우스 등 여러 가지 표기가 사용되고 있다. 1995년 대한민국 국립국어원은 컴퓨터 운영 체제 이름인 'Windows 95'를 '윈도 95'로 정하면서 'Windows'의 한글 표기를 윈도로 확정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제품 이름을 한글로 옮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한국어 홈페이지에 있는 제품명은 모두 영문 이름 Window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필요에 따라 윈도우라는 한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출하된 제품의 포장에는 "한글 윈도우"로 표기되어 있으며, 공식 기술자료(KB)와 보도자료(Press) 등에도 "윈도우"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현재 국어사전에 표기된 공식 표준어는 "윈도즈"이다. 윈도우 1.0부터 3.1x에 이르는 버전들은 운영 체제가 아닌, MS-DOS 하에서 동작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 간주된다. 윈도우 3.0은 애플의 맥 OS와 UI가 매우 흡사하였다. 윈도우 95가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255자까지의 긴 파일 이름 지원, 플러그 앤 플레이를 통한 하드웨어 자동 설치 및 구성 등을 채용하면서 1995년 8월에 출시하였다. 순수 32비트 응용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고 윈도우 3.1에 비해 안정성을 높이고 몇 가지 기술을 향상시켰다. 윈도우 95의 OEM 서비스 릴리즈 (OSR) 버전이 몇 가지가 있으며 각기 서비스 팩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윈도우 98이 1998년 6월에 출시되었으며 SE 버전이 1999년 5월에 출시되었다. 최초의 NT 계열 운영 체제는 1993년에 나온 윈도우 NT 3.1이며 여기서 3.1이라는 숫자는 소비자용 윈도우 버전을 가리키며 뒤를 이어 1994년에 윈도우 NT 3.5, 1995년에 윈도우 NT 3.51, 1996년에 윈도우 NT 4.0, 2000년에 윈도우 2000이 출시되었다. 윈도우 2000은 마이크로소프트 제품 활성화를 포함하지 않는 마지막 NT 기반 윈도우이다. NT 4.0은 윈도우 95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처음 도입하였으며 윈도우 95의 내장 32비트 런타임을 처음으로 포함하였다. 과거 윈도우 ME로 인해 쓴맛을 본 MS가 윈도우 9x 커널의 한계를 깨달고 기업용 커널인 NT커널로 윈도우 XP를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출시하였다.과거 윈도우 9x보다 훨씬더 안정적인데다 향상된 시스템 복원 기능등 여러가지 기능을 향상시켜 출시하였다.(틈새 시장에서는 태블릿 PC, 미디어 센터용으로 출시) 그 뒤에 윈도우 XP를 출시한지 1년 반이 지나 서버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서버 2003이 나왔다. 장기간의 개발 후 윈도우 비스타가 2006년 말에 출시되었으며 서버 제품으로 윈도우 서버 2008이 2008년 초에 출시되었다. 그 뒤에 2009년 7월 22일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 R2의 RTM 버전이 공개되었다. 윈도우 7은 2009년 10월 22일에 공식 출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미국 현지시각) 윈도우 8.1이 공식 출시 되었다. 윈도우 8.1은 윈도우 8 사용자들은 무료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현재 윈도우 10이 정식출시 하였으며 2015년 7월29일에 전세계에서 출시되었다. 윈도우 NT에는 x86 기반 개인용 컴퓨터가 전문적인 세계를 차지하기 이전에 여러 플랫폼의 지원을 포함하였다. 당시 일부 제품이 64비트 프로세서였던 NT 3.1부터 4.0까지 파워PC, DEC 알파, MIPS R4000을 지원하였으나 운영 체제는 이들을 32비트 프로세서로 취급하였다. 인텔 아이테니엄 (IA-64)이 도입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지원하는 새로운 버전의 윈도우를 출시하였다.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와 윈도우 서버 2003이 x86 (32비트)가 주류인 시대에 출시되었다. 2005년 4월 25일에 마이크로소프트는 x86-64 아키텍처를 위한 윈도우 XP 프로페셔널 x64 에디션과 윈도우 서버 2003 x64 에디션을 공개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이테니엄 버전의 윈도우 XP의 지원을 2005년에 중단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종 사용자 버전을 위한 x86, x64 에디션으로 처음 출시한 것이다. 윈도우 비스타는 아이테니엄 아키텍처를 지원하지 않는다. 현대의 64비트 윈도우 계열은 AMD64/IA-64 버전의 윈도우 7과 윈도우 서버 2008을 이루며 아이테니엄과 x64 에디션도 존재한다. 윈도우 서버 2008 R2에는 32비트 버전이 없지만 윈도우 7에는 존재한다. 윈도우 CE(윈도우 임베디드 콤팩트)는 위성 내비게이션과 일부 휴대 전화와 같은 소형 컴퓨터에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윈도우 에디션이다. 윈도우 CE는 드림캐스트에서 세가의 사유 운영 체제와 더불어 채용되기도 하였다. 윈도우 CE는 윈도우 NT 커널 기반을 하는 소형 에디션인 윈도우 XP 임베디드나 윈도우 NT 4.0 임베디드와는 다른 것이다. 윈도우 XP는 윈도우 2000의 뒤를 잇는 제품이며,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최초의 소비자 지향 운영 체제이다. 'XP'라는 말은 "eXPerience" 중 "XP"를 따와서 만들었다. 2001년 8월 24일 출시되어 2014년 4월 8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XP의 후속작으로, 개인용 버전은 2007년 1월 30일에, 기업용 버전은 2006년 11월 30일에 발매되었다. 이때부터 에어로 테마가 시작되었다. 2017년 4월 11일, 지원이 종료되었다. 윈도우 비스타의 후속작으로, 2009년 10월 22일에 6가지 에디션의 소매 버전으로 대중에게 출시되었다. 윈도우 7은 윈도우 비스타에서 이루어 놓은 응용 프로그램 및 하드웨어 호환성을 개선함과 더불어 윈도우 계열의 중심적이고 점층적인 업그레이드에 집중하였다. 윈도우 비스타는 원래 에어로 효과가 있었지만 윈도우 7은 홈 프리미엄부터 시작됐다. 2020년 1월 14일, 지원이 종료될 예정이다. 윈도우 7의 뒤를 이어 윈도우 8이 공개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0년 10월 22일에 네덜란드의 블로그 엔트리에 "2년 뒤에 윈도우 8이 공개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2012년 6월 1일에 윈도우 8 릴리즈 프리뷰가 배포 되었고, 2012년 8월 1일에 윈도우 8 RTM이 MSDN, 테크넷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한국시간 기준으로 2012년 10월 26일 윈도우 8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버그가 많아 8.1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메트로 테마를 적용하였다. 또한 Windows 8부터는 Windows To Go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13년 10월 17일 출시되었으며 윈도우 8의 기능 추가 및 핫픽스 롤업 통합 버전. 그 밖에 여러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윈도우 8 사용자들은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2014년 9월 30일에 윈도우 10 테크니컬 프리뷰가 공식 발표되었다. 윈도우 9를 건너뛰고 윈도우 10을 개발했던 것이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명칭을 윈도우 원(Windows One)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윈도우 1.0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윈도우 원(1)이 아닌 10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 Windows 8.1 이후에 Windows 9가 출시되어야 하지만 Windows 98 등의 이전 버전의 Windows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Windows 10으로 즉시 업데이트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에 따라 Windows 8.1까지는 버전 코드가 NT 6.3이였던 것을 갑작스럽게 NT 10.0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많은 프로그램에서 혼란이 있었다. ISS(Windows Server)에서 PHP 관련 소스 설정에서 이 때문에 설치에 약간의 트릭이 필요하다.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차세대 윈도우의 이름을 '윈도우 10'이라고 지은 이유는 "윈도우 10이 많은 혁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5년 7월 29일 공식 발매를 시작하며 윈도우 7과 윈도우 8.1를 사용하는 모든 이용자에 한해서(비정품 이용자도 포함) 1년 간 무료로 윈도우 10으로 업데이트를 1년 후인 2016년 7월 29일까지 지원하였다. (추가 기능을 사용하는 윈도우에 한해 업그레이드 중이다.) 그리고 2017년 12월 31일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의 마지막 버전이다. Windows 8 Enterprise 버전 또는 Windows 8 이상의 Enterprise 버전에서는 Windows To Go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가 설치되지 않은 PC에 즉시 USB로 부팅할 수 있는 윈도우의 프리뷰와 비슷한 기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모든 UWP(Windows 유니버셜 앱. Windows 10부터는 개선된 Windows Store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한다. )를 제외한 게임 및 다른 모든 Executable ( *.exe ) 파일을 실행할 수 있고 NX 실행비트를 지원한다. Windows To Go는 윈도우 설치 디스크 이미지 내부에 있으며 윈도우 설치의 핵심 파일 및 시스템을 담고 있는 파일인 install.wim을 해석하고 확장하는 방식을 USB에 덮어쓰며 진행된다. Windows 설치 과정과 동일하지만 하드디스크와 달리 포터블이므로 운영체제의 가벼움과 쉽게 액세스 등의 기능이 필요해졌다. 물론 Windows 7 또는 다른 운영체재에서도 일부 Windows To Go를 만들어 주는 일부 프로그램이 있다. 단, install.wim 파일이 필요하며 Windows의 정품 제품키가 필요하다. 먼저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에서 운영체제가 Windows To Go를 지원하는지 정보 파일을 확장하여 install.wim이 담고 있는 Windows의 정보를 가져온다. install.wim의 운영체제가 Windows 8 이하일 경우는 계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일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다음으로 Windows의 파일 확장이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에서 install.wim의 내부 파일을 해석하면서 USB에 파일을 확장(배치)해 나가는 구조이다. 완료되면 약 17GB 정도가 필요해지기 때문에 최소 32GB의 USB에 설치해야 한다. 또한 Windows To Go의 경우 다른 리눅스 계열의 운영체제와 달리 커널이 없어 모든 작업은 USB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USB가 3.1 또는 3.0 이상을 지원하지 않는 이상은 부팅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2.0으로 해본 결과 하루가 지났음에도 부팅이 완료되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초기에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의 윈도우를 출시하였으며 이는 운영 체제가 아니었다. 1993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윈도우 NT를 운영 체제로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운영 체제로서의 윈도우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하나는 가정 사용자, 다른 하나는 기업과 전문 IT 사용자용이다. 이 두 운영 체제는 가정용 버전의 경우 게임이나 시각 효과가 더 많이 지원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 등의 기능을 빼는 한편, 전문가용 버전에서는 시각 효과를 제외하고 네트워킹이나 보안을 강화하였다. 첫 독립된 버전 윈도우 1.0은 도스의 확장 소프트웨어로서 1985년 11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은 1987년 12월에 출시되었다. 윈도우 2.03에서는 서로 겹치는 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걸기도 했다. 윈도우 3.0은 1990년에 출시되자 첫 6개월 만에 2백만 부가 팔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UI 및 멀티태스킹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후 발표된 윈도우 3.1은 트루타입 글꼴을 지원하였는데, 영문 윈도우 3.0과 3.1 사이에 발표된 한글 윈도우 3.0의 경우 영문 윈도우 3.1에 앞서 트루타입 글꼴이 적용되었다. 1993년 7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NT를 내놓았다. 윈도우 NT는 전문가용 운영 체제로 인정되었고 실제로 네트워크용이었으며, 후에 출시된 윈도우 XP의 초석이 되었다. 1995년 8월 윈도우 95가 출시되었다. 표면적으로 윈도우 95는 도스를 포함하지만 도스 상에서 실행되지 않는 완전한 운영 체제가 되었으며, UI가 많이 변경되고 멀티태스킹 기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윈도우 95는 기본적으로 32비트 운영 체제였지만 16비트 하위 호환성을 유지하였다. 3.1과의 호환성을 맞추기 위해 GUI API 등에서 16비트 코드를 수용한 까닭에 성능과 안정성이 떨어졌다. 1998년 6월 윈도우 98이 출시되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4.0을 탑재하는 등 크기가 커지면서 윈도우 95에 비해 느리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1999년 윈도우 98 SE를 내놓으면서 많은 문제를 개선했다. 하지만 윈도우 98 SE는 자잘한 업데이트를 패치 받고는 2006년에 윈도우 98과 함께 지원 종료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전문가용 운영 체제인 윈도우 2000을 2000년 2월에 내놓았다. 하지만 윈도우 98의 후속작은 윈도우 ME였고 이는 2000년 9월에 나왔다. 윈도우 ME는 유니버설 플러그 앤 플레이와 시스템 복원 등의 기능을 새로 추가했지만, 출시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윈도우 XP가 출시되어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호환성이 부족했고 메모리 관리가 미흡하여 리소스 부족 문제를 자주 발생시켰다. 2001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XP를 출시하였다. 이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면서 윈도우 95 및 그 후계작의 사용자 편의성을 살렸다. "홈 에디션"과 "프로페셔널"으로 나뉘어 출시되는데, 두 에디션은 완전하게 동일하며 단지 두 가지 기능만 다르다. 도메인에 가입하는 기능과 MUI를 지원하는 기능 이 두 가지 기능이 "홈 에디션"엔 빠져 있다. 윈도우 XP 서비스 팩 3은 2008년 4월 21일 발표되었다. "윈도우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이 2003년, 2004년, 2005년에 출시되었는데, 이는 DVD/TV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고, 프로그램 녹화 및 원격 조정을 지원한다. 업데이트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매년 새 버전이 출시되다가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면서 단종되었다. 2003년 4월, 윈도우 서버 2003이 출시되었다. 이는 윈도우 2000 서버 제품군에 비해서 새로운 기능과 강력한 보안을 내세우고 있다. 후속작으로 2005년 12월 윈도우 서버 2003 R2 버전을 출시했다. 윈도우 2003 서비스 팩 2는 2007년 3월에 발표되었다. 2007년 1월 윈도우 비스타가 (코드네임 "롱혼") 출시되었다. 윈도우 비스타는 UAC 기능을 포함하여 윈도우 XP보다 보안이 더욱 강화되었고 미디어센터 기능 등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호환성 문제로 일부 국가에서 XP 기반의 프로그램이 비스타에서 작동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일부 사용자들이 XP로 다운그레이드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2008년 3월 윈도우 서버 2008은 윈도우 서버 2003의 후계작으로 개발이 완료되었으며 2008년 3월 20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10월 마이크로소프트가 2009년 10월, 비스타의 호환성 문제와 일부 기능을 개선하여, 윈도우 7을 출시했다. 2012년 10월, 윈도우 8이 공개되었다. 2013년 10월 17일(한국 시각), 윈도우 8.1이 공개되었다. 공개 이후부터 기존 윈도우 8 정품 사용자는 윈도우 스토어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윈도우 8.1에서는 Sound Recorder, Scan 등의 기본 앱이 추가되었고, 타일의 크기를 4가지 중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본래 윈도우 8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업 표시줄의 시작 버튼이 다시 생겨났다. 2014년 9월 30일 공개 되었으며 10월 2일(한국 시각 새벽 1시), 윈도우 10프리뷰가 배포되기 시작했다. 윈도우 95, 98등과 이름에러(프로그램이 윈도우 95,98을 윈도우 9까지만 인식을 하는게 대부분이기 때문임)를 줄이기 위해 9을 건너 뛰고 10이 되었다. 2015년 7월 29일, 윈도우 10 정식판이 출시되었다. 1년 간 무료 업그레이드를 제공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윈도우 10 이 무료 업데이트 제공이 종료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사용하지 않고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에뮬레이션으로는 다음과 같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Microsoft Office)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윈도우, 맥용 사무용 소프트웨어의 묶음이다. 1989년에 맥용으로, 1990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몇 가지 버전을 예로 들면 2007년 1월 30일에 윈도우 비스타와 동시에 출시된 윈도우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과 2008년 1월 15일에 출시된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8이 있다. 이 버전들은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오피스 오픈 XML 포맷(.docx, .xlsx, .pptx 등)을 사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호환성 패키지를 설치하면 윈도우용 오피스 2000-오피스 2003, 맥용 오피스 2004 에서도 이 문서들을 보고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서비스 팩과 더불어 새로운 버전들이 업데이트되었으며 워드,엑셀,파워포인트는 대부분의 오피스 에디션에 기본으로 내장되어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첫 버전은 1989년에 맥용으로 출시되었다. 또한 윈도우용은 1990년에 출시되었다. 오피스를 만들기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1.0을 1984년에 출시하고. 엑셀 1.0을 1985년에, 파워포인트 1.0을 1987년에 출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를 맥용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포함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터가 커뮤니케이션스 서버 R2로 합쳐졌다 2002년부터 마이크로소프트는 지원 수명(Support LifeCycles) 정책을 지원한다. 맥 OS 맥 OS(맥 오에스, Mac OS)는 애플이 매킨토시 용으로 개발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운영 체제이다. 처음에 이 운영 체제는 매킨토시에 포함된 이름 없는 운영 체제로 간단히 시스템 소프트웨어라고 불렸으나, 1997년 맥 OS 7.6의 출시와 함께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옛날 버전의 맥 OS는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에서만 호환되었다. 그 후 애플이 파워PC 기반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맥 OS는 파워PC용으로도 포팅되었다. 맥 OS 8.1은 모토로라 68000 기반 매킨토시(모토로라 68040)에서 호환되는 마지막 버전이었으며, 맥 OS X는 파워PC만을 지원하다가 인텔 맥을 출시하면서 10.4.4 버전부터 인텔 프로세서용으로 포팅되었다. 10.6 스노 레퍼드부터는 파워PC 프로세서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크게 나누어 전통적인 클래식(Classic) 시리즈(시스템 1.0 ~ 맥 OS 9)와 새로운 맥 OS X 이후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옛날의 매킨토시 시스템은 "시스템"과 "파인더"라는 두 가지 종류의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었고. 두 소프트웨어는 버전 번호도 달랐다. 시스템 7.5.3은 맥 OS 로고를 포함한 첫 버전이고, 맥 OS 7.6부터는 이름이 맥 OS로 바뀌었다. 파워PC G3 이전의 시스템은 중요한 부분을 모두 ROM에 저장했다. 원래는 하드 디스크가 없던 옛날의 매킨토시가 플로피 디스크의 한정된 저장 공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ROM에 저장했으나, 이 아키텍처는 완전한 그래픽 OS를 명령 줄 인터페이스나 텍스트 콘솔 없이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시동 오류도 사용자에게 그래픽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이 부분은 당시의 PC와는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장점을 낮은 수준에서도 구현하기 위해 맥 OS는 코어 시스템을 ROM에 의존했으며, 이것은 나중에 애플 컴퓨터나 (저작권으로 보호된 애플의 ROM을 포함한) 라이선스된 클론만이 맥 OS를 구동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맥 OS는 다음 두 분류로 구별할 수 있다. 클래식 맥 OS는 완전히 그래픽으로 구성되었으며, 명령 줄이 전혀 없는 운영 체제로, 쉬운 사용법과 협력형 멀티태스킹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주 제한된 메모리 관리와 보호된 메모리. 그리고 불안정한 운영 체제 확장 기능으로 비판을 받았다. 원래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파일 시스템(MFS)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파일 시스템은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지 못하며, 1985년에 바로 계층형 파일 시스템(HFS)로 대체되었다. HFS는 하위 디렉터리를 생성하여 디렉터리 트리를 만들 수 있다. 두 파일 시스템은 서로 호환된다. 파워PC 버전의 맥 OS X는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클래식 맥 OS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한 호환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 이 버전은 맥 OS 9#맥 OS 9.1 이후 버전을 돌릴 수 있다. 대부분의 클래식 응용 프로그램은 이 호환 모드에서 잘 돌아가지만 실제 하드웨어에 대해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클래식 환경은 맥 OS 9가 x86 프로세서를 지원하지 않아 인텔 맥에서는 구동할 수 없다. 또한 맥 OS X 레퍼드부터는 지원이 중단되어 클래식 모드를 사용할 수 없다. 현재 수많은 클래식 맥 OS 사용자들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고 사용자에게 덜 친숙하다는 이유로 비판하였다. 또한 새로운 OS로 다시 포함되지 않은 몇 가지 기능, 같은 하드웨어에서도 클래식 맥 OS보다 느려졌다는 점, 드라이버와 응용 프로그램이 거의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 옛날 매킨토시로의 지원 중단도 비판을 받았다. 때문에 출시 초기에는 많은 사용자들이 클래식 맥 OS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2005년 경에는 거의 모든 사용자가 맥 OS X로 업그레이드했다. 2005년 6월, 스티브 잡스는 WWDC 2005에서 애플 컴퓨터는 파워PC 칩셋에서 인텔 프로세서로 이동할 것이며, 새로운 기기에 맥 OS 클래식의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또 같은 콘퍼런스에서 잡스는 개발자 변환 키트를 제공하여 개발자들이 자신의 응용 프로그램이 인텔 맥에서 잘 돌아가는지 테스트 할 수 있게 했다. 2006년 1월에 애플은 첫 인텔 기반 매킨토시인 아이맥과 맥북 프로를 출시했다. 2006년 2월엔 맥 미니를 출시했으며, 2006년 5월에 맥북, 2006년 8월에 맥 프로로 모든 매킨토시를 인텔 프로세서 기반으로 바꿨다. macOS(맥 OS)는 애플의 가장 최신인 맥 OS 운영 체제다. 이전 이름은 OS X (오에스 텐)이었다. 이 버전은 공식적으로는 단순히 맥 OS의 버전 10이지만, 기존 맥 OS와는 아주 많은 변화를 띄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맥 OS 9와 클래식 맥 OS의 다음 버전으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애플이 넥스트 사를 인수하면서 가져온 NEXTSTEP과 마하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macOS는 BSD 코드 베이스를 사용한다. mac은 그동안 데스크톱용 릴리즈로 9번 출시되었다. 2016년 9월 20일에 공개한 macOS 10.12로 , macOS 시에라로 불리며 2017년에 WWDC에서 발표한 macOS 10.13로, macOS 하이시에라로 불린다(macOS 버전 대의 경우, 고양이 과의 펫 네임을 별명으로 붙여 친숙함을 높이려 했는데, OS 10.8 마운틴 라이언을 마지막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데스크톱용 버전과 같이 macOS은 8번의 서버용 릴리즈가 있었다. 첫 번째 릴리즈는 OS X 서버 1.0으로, 서버 버전은 당시의 데스크톱용 맥 OS(클래식 맥 OS)와 아키텍처가 완전히 달랐으며, 많은 서버 관리 도구를 탑재하고 있었다. macOS는 Xserve의 기본 운영 체제이다. 그리고 데스크톱용 버전과 다르게 패러럴즈 데스크톱과 같은 가상 머신에서도 돌아간다. macOS는 아이폰, 아이팟 터치, 아이패드, 애플 TV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iOS의 기초이다. vMac, Basilisk II. Executer 등의 서드 파티 68000 에뮬레이터는 인텔 기반 PC에서 맥 OS를 로드할 수 있게 했다. 이 에뮬레이터들은 모토로라 68000 칩셋을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때문에 맥 OS 8.1 이상의 버전은 파워PC 프로세서를 필요로 하기에 에뮬레이트할 수 없었다. 또한 대부분이 맥 ROM 이미지나 실제 맥 ROM 칩을 필요로 했다. 맥 ROM 이미지를 사용하는 에뮬레이터는 거의 100% 맥 OS 호환성을 유지하며 x86 프로세서에서도 아주 빠른 맥 OS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해 준다. PearPC라는 파워PC 에뮬레이터는 파워PC 프로세서를 에뮬레이트할 수 있으며, 맥 OS X를 에뮬레이트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은 아직도 초기 개발 상태이고, 네이티브 파워PC 칩보다 속도가 아주 느리다. 맥을 파워PC에서 인텔 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애플은 사용자들이 파워PC 기반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돌려야 할 필요를 느끼고, 에뮬레이터 "로제타"를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로제타가 PearPC처럼 아주 느린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퍼포먼스는 예상외로 상당히 빨랐다. 또다른 파워PC 에뮬레이터로는 SheepShaver가 있으며, 원래는 BeOS를 파워PC 플랫폼에서 돌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 이 에뮬레이터는 실제 파워PC 프로세서가 필요했으나, 후에 오픈 소스화 되면서 x86 프로세서용으로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에뮬레이터는 메모리 관리 장치를 에뮬레이트하지 않기 때문에 맥 OS 9.0.4 이후 버전은 에뮬레이트할 수 없다. 몇몇 컴퓨터 제조사들은 맥 OS를 구동할 수 있는 클론 컴퓨터를 만들어왔다. 대표적이 예로 파워 컴퓨팅, UMAX, 모토로라가 그래왔다. 이 버전은 클래식 맥 OS를 정상적으로 구동할 수 있다. 하지만 1997년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가 곧 클론 라이선싱 프로그램을 끝냈다. 2008년, 사이스타사가 499달러의 베어본 컴퓨터를 내놓았는데, 이 컴퓨터는 맥 OS X 10.5 레퍼드를 돌릴 수 있다. 사이스타는 이 컴퓨터를 오픈 맥이라 부르며, 애플은 현재 이 회사에 소송을 걸고, 판매한 모든 클론을 리콜한 후, 애플에 배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1988년에 애플은 첫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인 A/UX를 출시했다. 이 운영 체제는 당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가 아니었던 맥 OS를 기본 운영 체제로 사용하지 못했던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맥 OS X를 개발할때 A/UX의 코드가 약간 쓰였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애플 컴퓨터가 유닉스 계열 워크스테이션에서 애플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만든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다. 이 프로그램은 X 윈도 시스템을 이용하여 파인더 스타일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에뮬레이트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 3.0은 맥 시스템 7.5.3과 호환된다. 매킨토시 응용 프로그램 환경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SPARCstation과 HP의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98년 5월 14일 단종되었다. OSF와 애플 컴퓨터가 1996년 2월 리눅스를 파워PC 플랫폼으로 포팅하기 위해 시작한 오픈 소스 컴퓨터 운영 체제로, 1996년 WWDC에서 공개되었으며, 1998년 여름에 커뮤니티 중심의 MkLinux 개발자 단체가 개발을 맡기 시작하였다. 마이크로커널 리눅스 (MicroKernel Linux)의 줄임말이며, 마하 커널 3.0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애플의 EULA를 어기는 행동이지만, 애플 컴퓨터가 아닌 x86 컴퓨터에서 맥 OS X를 구동하는 것은 커널 수정, 커뮤니티 드라이버, 에뮬레이션 등으로 가능하다. 예로, PC-EFI는 애플 컴퓨터에 기본으로 있는 EFI를 에뮬레이트해서 비 애플 컴퓨터에 맥 OS X를 설치할 수 있게 한다. MacOS macOS(맥오에스, 이전 이름: OS X, 맥 OS X / Mac OS X)는 기업 애플이 제작한 운영 체제이다. 2002년 4월부터 모든 매킨토시 컴퓨터에 적용되고 있다. 이 운영 체제는 1984년 1월부터 애플 컴퓨터를 이끌어 왔던 맥 OS의 마지막 고전 버전인 맥 오에스 9의 뒤를 잇는다. OS X이라는 이 운영 체제의 예전 이름에 들어있는 "X"라는 글자는 알파벳 "X"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킨토시의 10번째 운영 체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로마 숫자 "10"을 뜻하는 것이다. 이 운영 체제는 애플이 1996년 12월에 인수한 NeXT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유닉스에 기반을 하고 있다. 2011년 7월 20일에 OS X 라이언이 출시되었다. 기존에도 줄여서 OS X이라고 많이 표현했으나, OS X 마운틴 라이언 공개와 함께 기존 맥 OS X (Mac OS X)에서 맥 (Mac)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제거되었다. 2016년 6월 13일에 macOS 시에라 공개와 함께 제품명이 OS X에서 macOS로 변경되었다. 마하커널과 BSD를 기반으로 한 맥 OS이다. macOS는 다윈 운영 체제 위에 아쿠아 그래픽 레이어와 응용 프로그램 레이어를 올렸고, 이를 위해 쿼츠, 코코아, 카본, 로제타등과 같은 기술을 활용하였다. macOS의 아쿠아 인터페이스는 화제를 모았고, 여러 컴퓨터 산업 부문에서 모방되었다. macOS는 전통적으로 매킨토시가 많이 사용되는 전자출판, 디자인, 멀티미디어 부문 등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macOS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한/글 등의 윈도용 프로그램이 포팅되어 있고, Qt등을 이용하면 macOS로의 포팅을 지원하는 경우에 한해 리눅스용 프로그램도 컴파일하여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3월 24일 나온 맥 OS X 10.0 치타(Cheetah)는 최초로 나온 맥 OS X이다. 상용 프로그램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실행 속도가 매우 느렸다. 베타 버전에 가까운 매우 불안정한 운영 체제로 10.1 (Puma)가 나오자 사용자들의 대부분이 업그레이드를 하였다. 2001년 11월 25일 나온 맥 OS X 10.1 퓨마(Puma)는 치타의 무상 업그레이드 판이다. 퓨마는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거나 애플 스토어에서 무상으로 구입할 수 있었고 유상으로 주문할 수 있었다. 퓨마는 치타보다 응용 프로그램이 많이 포함되었으며, 3D 그래픽 성능이 향상되었고, DVD 재생 프로그램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프린터, 카메라, 저장장치 등의 드라이버 지원이 확대되었고, 애플 스크립트가 강화되었다. 2002년 7월 24일 나온 맥 OS X 10.2 재규어(Jaguar)는 쿼츠 익스트림 기술과, 랑데뷰 네트워킹 기술(2005년 봉쥬르로 이름이 바뀜)을 지원했으며, iChat 인터넷 메신저와, 스팸메일 필터가 추가되었다. 또 코드네임을 마케팅과 광고에도 사용하였다. 2003년 10월 24일 나온 맥 OS X 10.3 팬더(Panther)는 기존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메탈룩 인터페이스를 채용했다. 팬더에서는 파인더가 개선되어 전반적인 실행 속도가 재규어에 비해 매우 빨라졌다. 재규어에서 사라졌던 꼬리표가 다시 부활했으며, 새로 추가된 엑스포제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과 창의 전환을 빠르고 직관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밖에도 사용자 계정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기능과 사파리 웹 브라우저, 개발 도구인 Xcode가 추가되었고, 재규어부터 지원된 쿼츠 익스트림 기술은 팬서의 비주얼적인 면을 보다 향상시켰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3.9이다. 2004년 6월 28일에는 WWDC 2004를 통해 맥 OS X 10.4 타이거(Tiger)가 처음 모습을 공개하였다. 타이거에는 문서 파일의 내용과 메타데이터를 검색하는 스팟라이트, 주가 검색 등 간단한 작업을 백그라운드로 실행하는 대시보드, 일련의 작업 흐름을 간단하게 작성할 수 있는 오토메이터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코어 이미지(Core Image), 코어 비디오(Core Video), 코어 오디오(Core Audio) 기능이 추가되었고 64비트 지원이 강화되었다. 그 외에 iChat AV 3.0으로 4자간 화상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사파리 2.0에 RSS 리더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퀵타임이 업그레이드되어 H.264 코덱을 지원하게 되었다. 한편 2005년 WWD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전 계획과 인텔 프로세서용 맥 OS X이 발표되었다. 이후 2006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을 모두 지원하는 맥 OS X 10.4.4가 발표되었다. 10.4.4에서는 사파리나 메일 등 기본 포함된 프로그램들이 파워피씨 맥과 인텔 맥에서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유니버설 바이너리로 작성되었고, 파워피씨용으로 작성된 응용 프로그램을 인텔 맥에서 실행시켜주는 로제타가 추가되었다. 최종 업그레이드 버전은 10.4.11이다. 2006년 8월 7일 WWDC 06에서 공개되었고, 2007년 10월 26일부터 판매를 시작한 맥 오에스 텐의 버전이다. 레퍼드(Leopard)에서는 채팅 프로그램인 iChat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자동 백업 프로그램인 타임 머신, 가상 데스크톱인 스페이스, 오픈GL기반의 새로운 그래픽 기술인 코어 애니메이션의 탑재, 인텔 맥에서 윈도를 돌릴 수 있게 해주는 부트 캠프의 정식 버전인 부트 캠프 2.0이 포함되었고, 파워피씨/인텔 프로세서, 32/64비트를 모두 지원한다.(완전한 유니버설 바이너리의 이주가 목적이었다.) 2007년 6월 11일 개최된 WWDC 07에서 새로워진 데스크톱, 개선된 파인더, 파일을 열지 않고도 내용을 보여주는 퀵룩 등 레퍼드의 주요 신기술이 발표되었다. 최종 버전은 10.5.8 이며 OS X10.5는 단일 유닉스 규격(Single UNIX Specification)에 인증되었다. 2008년 6월 9일 WWDC 08에서 맥 OS X 의 차기 버전인 맥 OS X 10.6 스노 레퍼드(Snow Leopard)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전 까지의 맥 OS X 의 판올림에서는 새로운 기능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진 것에 반해 이번 버전에는 성능 향상과 안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빠르고 안정적인 64bit 환경으로의 이주가 주 목적이다.) 참석한 개발자들에게 개발자 미리보기 버전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지막 DVD OS X다, 인텔 프로세서가 장착된 맥에 설치가 가능하다. GPGPU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인 OpenCL, 다중 프로세서에서 병렬 프로그래밍을 위한 '그랜드 센트럴', 퀵타임 X, 16 TiB의 램 지원, 마이크로소프트 익스체인지 2007 완벽 지원과 같은 기능 및 OS X의 거의 모든 응용 프로그램, 커널, 서브 시스템 및 드라이버(kext) 환경이 64비트로 전환되었다. 2010년 10월 20일 'Back to the Mac' 이벤트에서 맥 OS X 라이언(Lion)의 프리뷰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판올림에서는 아이패드에 사용된 iOS의 여러 장점을 흡수하였다. 맥 앱 스토어가 지원되어 애플이 직접 응용 프로그램 유통을 맡게 되었다. '런치패드'와 풀 스크린 애플리케이션, '미션 컨트롤' 등의 향상된 인터페이스가 지원된다. 페이스타임을 지원하여, 페이스타임을 지원하는 디바이스와 영상통화가 가능하게 된다. 또한 OS X 10.7 버전부터 별도의 서버판 OS X은 없어지며 소비자용 리테일버전에 서버기능이 통합된다. 2011년 7월 20일에 발매되었다. 2012년 2월 16일 발표된 OS X 마운틴 라이언(Mountain Lion)은 iOS 5의 일부 기능을 통합하였다. 아이클라우드를 바탕으로 한 공유 기능 확산, 메시지, 미리알림(reminder), 노트, 알림센터, 게임센터, 에어플레이 미러링, 게이트키퍼가 도입되었다. 2012년 7월 16일에 발매되었다. 애플은 2013년 6월 10일 WWDC 2013에서 OS X 10.9 매버릭스(Mavericks)를 공개했다. 새 지도 앱, 개선된 알림센터, 새 아이북스 앱을 포함한다. 또한 Finder의 Tag기능과 Multiple Display 기능을 지원하며, 2013년 10월 23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같은 날에 공개된 것은 맥 프로, iOS 7, 맥북 에어 등이다. 애플은 2014년 6월 2일 WWDC 2014에서 OS X 10.10 요세미티(Yosemite)를 공개했다. 기존의 OS X의 유저 인터페이스였던 아쿠아를 제거하고 iOS 7에서 선보인 플랫한 디자인의 아이콘과 그 외의 구성요소를 포함한 인터페이스를 선보였다. 그 외에도 인터페이스 하단부의 독(Dock)이 맥 OS X Panther의 독처럼 입체적인 모양을 버리고 평면적인 사각형이되었다. 또한 메뉴 막대와 독의 색을 어둡게 하고 글자를 하얗게 한 반전 색상을 가진 다크 모드(Dark Mode)를 설정할 수 있게 하였다. 2014년 10월 16일에 정식 버전이 출시되었다. 2015년 6월 9일 WWDC 2015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30일에 발매되었다. Mac의 성능 향상, 보안 스택 강화, 풀 스크린에서 앱을 동시에 두 개 표시 할 수 있는 스크린 스플릿 기능, 시스템 폰트 추가 등이 포함되었다. Spotlight가 보다 구어체 검색에 대해서도 결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6월 30일 WWDC 2016 기조 강연에서 발표, 같은 해 9월 20일에 발매되었다. HFS 포맷 대신 APFS가 실험적으로 도입되었으며, Late 2009 모델(Mac mini를 빼고)보다 이전의 Macintosh에서의 직접 인스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Siri 도입과 iOS, watchOS와의 보다 많은 연계 기능의 도입이 진행되었다. 또, 이 버전부터 iOS와 watchOS, tvOS 등의 애플 OS와의 이름 친화성을 목적으로 종래의 OS X로 부터 macOS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7년 6월 5일 WWDC 2017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다. HFS+ 대신 APFS를 쓰도록 되어 있으며, 메탈 2와 더불어 고효율 비디오 코딩을 OS단에서 지원한다. iMac (Late 2009, 27 or 21.5-inch) 모델까지는 'macOS 하이 시에라'로 업그레이드가 지원되나, 그 이전 모델 iMac(Early 2009, 24 or 21.5-inch)은 업그레이드를 지원하지 않는다. 2018년 6월 4일 WWDC 2018 기조 강연에서 발표되었다. 보안향상 및 FaceTime 최대 100명 영상통화 등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버전이다. iMac 2012년 이전모델은 'macOS 모하비'로의 업그레이드가 지원되지 않으며, 2018년 9월 24일(현지시각) 정식 배포를 시작했다. 2019년 6월 4일 WWDC 2019에서 공개되었다. Sidecar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iPad를 Mac의 보조 디스플레이로 활용해서 작업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당 기능은 동일한 행사에서 새롭게 공개된 iPadOS 이상에서 지원한다. 스크린 타임 기능이 추가되었다. 사용 시간을 모니터링하고, 다운타임 일정을 잡고, 앱과 웹사이트 사용 시간 제한을 모든 기기에 걸쳐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맥 앱스토어는 iOS의 앱스토어랑 비슷한 개념이다.하지만 iOS의 앱스토어에는 있는 앱이 맥 앱스토어에는 없을 수도 있다. 맥 앱스토어에 올라오는 앱들은 모두 애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macOS의 보안기능인 게이트키퍼에 걸리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맥 앱스토어는 게임 카테고리가 빠져있는 상태이다. macOS는 다음 언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쿼츠 (그래픽스 계층) 쿼츠(Quartz)는 OS X에 쓰이는 그래픽 기술의 일부로서, 코어 그래픽스 프레임워크인 쿼츠 2D, 쿼츠 컴포지터의 일부이다. 코어 그래픽스와 합성 엔진에서 2차원 렌더링을 지원하며 명령을 그래픽 카드로 보낸다. 쿼츠는 "코어 그래픽스"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일반적인 용어로서 "쿼츠", "쿼츠 기술"이라는 용어는 거의 모든 부분의 OS X 그래픽 모델에서 컴포지터의 렌더링 계층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용도에서 이 용어는 코어 이미지와 코어 비디오도 아우르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애플이 제공하는 다양한 그래픽 기술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쿼츠 2D는 주로 2차원 텍스트와 그래픽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가리킨다. 실행 중에 렌더링 및 앤티에일리어싱을 거쳐 2차원 그래픽스를 표현하여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냄으로써 아쿠아를 직접적으로 지원한다. 쿼츠는 하부 픽셀 정밀도로 문자열을 렌더링한다. 그래픽은 기본 동작 모드인, 더 전통적인 앤티에일리어싱에 제한되지만 이 기능을 끌 수 있다. OS X v10.4에서 애플은 쿼츠 2D 익스트림을 도입하였는데, 쿼츠 2D가 지원 GPU를 렌더링할 수 있게 한다. OS X 10.4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기본으로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비디오 다시 그리기나 커널 패닉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OS X v10.5에서 쿼츠 2D 익스트림은 쿼츠GL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기능은 여전히 비활성화되어 있는데 일부 상황에서 성능 저하를 일으키거나 비주얼 글리치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원하면 이 기능은 응용 프로그램 별도 켜고 끌 수 있다. 쿼츠 컴포지터는 쿼츠 2D 및 기타 렌더러(오픈GL, 코어 이미지, 퀵타임 따위)가 사용하는 합성 엔진이다. OS X v10.2 이후로 쿼츠 컴포지터는 지원 그래픽 카드의 프로세서(GPU)를 이용하여 합성 성능을 개선한다. 이 기술은 쿼츠 익스트림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원 그래픽 카드와 함께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활성화된다. 쿼츠의 초기 개발자 문서에 따르면 쿼츠는 PDF를 이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쿼츠의 내부 이미징 모델은 PDF 오브젝트 그래프와 관련하여 PDF를 여러 장치에 쉽게 출력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매킨토시 매킨토시(, ) 혹은 줄여서 맥()은 애플이 디자인, 개발, 판매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제품 이름이다. 1984년 1월 24일 처음 출시된 매킨토시는 당시 유행하던 명령 줄 인터페이스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를 채용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였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IBM PC 호환기종(Microsoft사의 'Windows'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PC)을 쓰고 있다. 매킨토시는 값이 비쌌으며 내부를 공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애플은 1980년대의 MS-DOS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사용하던 IBM 호환 PC 시장 점유율을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애플은 1998년 성공적인 판매와 더불어 매킨토시 상표의 부활을 보여준 아이맥 데스크톱 모델로 다양한 수준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의 맥 시스템은 주로 가정과 교육, 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그것들이 바로 앞서 설명한 일반 사용자용 모델인 아이맥과 맥 미니, 맥북 레티나와 맥북 에어 모델,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인 맥 프로, 맥북 프로 등이있다. 맥 제품들은 하드웨어와 맥에 설치되는 모든 운영 체제를 함께 생산함으로써 사용이 쉽고 용이하게 수직적으로 통합되어있다. 이것은 다양한 제조사가 하드웨어를 만들고 또 각기 다른 제조사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IBM 호환 PC와의 큰 차이점이다. 애플은 자사가 모두 맥 하드웨어를 생산하며 내부 시스템과 디자인, 가격을 모두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애플도 다른 회사의 구성품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현재 매킨토시의 CPU는 인텔사의 x86 아키텍처이고 그 이전에는 AIM 연합의 PowerPC를 썼고, 그 이전에는 모토로라의 68k를 사용했다. 애플은 또한 맥에서 사용되는 운영 체제를 개발하는데 현재 최신 맥 운영 체제는 macOS 10.14이다. 현재의 맥은 다른 PC 같이 리눅스, FreeBSD, 윈도 같은 운영 체제를 선택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컴퓨터에서는 맥 OS를 사용할 수 없다.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1970년대 후반, 일반 소비자에게 사용이 쉽고 가격이 낮은 컴퓨터를 보급하고자 했던 애플 직원 제프 래스킨(Jef Raskin)이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 종류인 '매킨토시(Mcintosh)'로 이름을 짓고자 했으나 이미 그 이름을 쓰고 있던 오디오기기 회사 '매킨토시 래버러토리'와의 법률상 문제 때문에 철자를 'Macintosh'로 바꾸었다. 1979년 9월 래스킨은 프로젝트를 위해 팀을 구성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견본을 만들 엔지니어들을 찾기 시작했다. 애플 리사팀(애플 리사 컴퓨터는 매킨토시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고급 사양으로 개발되고 있었다)의 멤버였던 빌 앳킨슨(Bill Atkinson)이 더 이전에 입사했던 서비스 기술자인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를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몇년 뒤, 래스킨은 최초의 매킨토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게 될 큰 규모의 개발팀을 모으게 된다. 구성원은 래스킨, 빌 앳킨슨(Bill Atkinson),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 크리스 에스피노사(Chris Espinosa), 조애나 호프먼(Joanna Hoffman), 조지 크로(George Crow), 브루스 혼(Bruce Horn), 제리 매넉(Jerry Manock), 수잔 케어, 앤디 허츠필드(Andy Hertzfeld) 그리고 대니얼 콧키(Daniel Kottke) 등이었다. 스미스의 첫 번째 매킨토시 보드는 래스킨이 디자인한 64 킬로바이트(KB) 램, 모토로라 6809E 마이크로프로세서, 256x256 해상도가 지원되는 흑백화면의 사양으로 설계되었다. 매킨토시 프로그래머인 버드 트리블(Bud Tribble)은 리사의 그래픽 프로그램을 매킨토시에서 돌리는 데 관심이 있어, 프로젝트의 지원 자금이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서도 스미스에게 애플 리사의 모토로라 680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맥에 장착할 수 있는지 의뢰했다. 1980년 12월 스미스는 68000 프로세서를 장착할 뿐 아니라 속도도 5에서 8MHz로 끌어올린 기판 설계에 성공하였다. 이 보드는 또한 384x256 픽셀의 해상도를 지원했다. 스미스의 디자인은 리사보다 적은 개수의 램을 사용하여 생산단가 문제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맥의 최종 디자인은 자체 내장형이었는데 다른 컴퓨터들과는 상당히 차이가 큰 64Kb 롬에 퀵드로 그래픽 언어를 내장했고, 16개의 64Kb 램 칩을 연결한 128KB RAM을 장착했다. 메모리 슬롯이 없더라도 맥의 RAM은 공장에서 조립시 16개의 칩 슬롯을 256KB로 바꿔 납땜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512KB로 확장이 가능했다. 최종 생산품은 위의 견본 제품에서 9인치 화면과 512x342의 흑백 해상도로 수정되었다. 매킨토시의 구성은 애플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잡스의 관심을 끌었다. 리사보다 시장성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달은 스티브 잡스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래스킨은 1981년 잡스와의 마찰로 프로젝트를 떠났고 마지막 매킨토시의 디자인은 래스킨보다 잡스의 요구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이때 잡스는 래스킨이 지은 매킨토시(macintosh)라는 이름까지 바이씨클(bicycle)로 바꾸려 하였으나 이는 취소되었다). 제록스 PARC사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잡스는 제록스 알토 컴퓨터를 관전하고 스몰토크 개발도구를 애플 주식옵션과 교환하는 협상을 위해 제록스 PARC사를 방문한다. 제록스는 세가지 기술을 시연했는데 결국 잡스는 액면가 100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양도하고 GUI 기술을 가져왔다. 리사와 매킨토시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제록스 PARC사가 선보인 기술에 영향을 받아 매킨토시 개발진들의 자체 의견과 조합된 결과이다. 또한 잡스는 산업 디자이너인 하르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에게 매킨토시 개발에 참여하길 권고했고 결과적으로 디자인 언어인 스노 화이트(Snow White)가 탄생하였다. 초기 맥에는 너무 늦은 완료 시기였지만, 1980년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거의 모든 맥에 적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 프로젝트에서의 잡스의 리더십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CEO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와의 격렬한 대립 후, 1985년 분노를 머금고 사퇴한다. 컴퓨터 회사인 넥스트(NeXT)를 설립한 잡스는 1997년까지 애플로 복귀하지 않았다. 매킨토시 128K는 1983년 10월에 언론에 소개됐고, 12월에 18쪽짜리 소책자와 함께 여러 잡지에 소개되었다. 매킨토시는 1984년에, 지금은 15,000,000달러의 거물이 된 리들리 스콧의 TV 광고인 “1984”에 소개되었다. 광고는 1984년 1월 거의 모든 미국인이 시청했던 슈퍼볼 VXIII의 3쿼터에 방송에 나갔는데, 지금은 “획기적 사건”과 “걸작”으로 불린다. 1984 광고에는 “동조”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매킨토시의 등장 (여자의 흰 상의에 피카소 풍의 그림으로 애플사의 매킨토시라고 그려져 있다)을 상징하기 위해 무명의 여자가 출연했다. 이 그림은 빅 브라더(Big Brother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커다란 화면에 얼굴만 보이는 독재자)에게 지배되는 미래를 그린 소설 1984를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1984 광고가 전파를 탄 이틀 뒤 매킨토시는 판매를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인터페이스의 화려함을 자랑하기 위해 맥라이트(MacWrite)와 맥페인트(MacPaint) 두 가지의 응용 프로그램을 꾸러미로 제공했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맥 키노트 연설에서 매킨토시는 “매킨토시, 미칠듯이 대단해!(Macintosh, Insanely great!)”라는 명언을 화면에 그리며 합성된 목소리로 소리까지 시연했다. 매킨토시는 단숨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겐 너무 단순한 “장난감”으로 치부되었다. 그 까닭은 기계 전체가 GUI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은 프로그래머들에겐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 모드와 명령 방식으로 된 코드의 재작업을 의미했고, 이미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에겐 큰 도전이므로 소극적인 움직임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소프트웨어 부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84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멀티플랜(MultiPlan, MS사의 초기 사무용 문서 프로그램)이 MS-DOS에서 독립했고 뒤따라 1985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출시되었다. 1985년에는 로터스 소프트웨어가 로터스 1-2-3의 성공을 잇는 IBM PC용 로터스 재즈(Lotus Jazz)를 출시하지만 큰 실패를 한다. 같은 해 애플은 매킨토시 오피스(Macintosh Office)를 레밍즈(Lemmings) 광고와 함께 출시하지만 매킨토시의 잠재적인 고객에게는 상당한 불명예를 안기며 성공하지 못했다. 1984년 11월 뉴스위크 경선 특별판에서 애플은 2,500,000달러를 들여 39쪽의 모든 광고란을 사들여 화제가 되었다. 애플은 또한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잠재적인 고객들에게는 24시간 동안 대여했다가 후에 매장에 돌려주는 매킨토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2.000,000명의 고객들이 참여하자 판매사들은 프로모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주문에 의한 매킨토시의 공급이 부족했고, 반납된 많은 제품들이 다시 팔지 못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 판매행사는 CEO인 John Sculley가 가격을 미화 1,995달러에서 2,495달러로 올리는 이유가 되었다. (인플레이션을 위한 조정, 2007년엔 약 5,000달러로 조정.) 1985년, 맥과 애플의 레이저 프린터, 보스턴 소프트웨어(Boston Software)의 맥퍼블리셔(MacPublisher)와 앨더스 페이지메이커(Aldus PageMaker) 같은 맥에 특화된 제품들은 사용자로 하여금 문자와 그림을 배열하여 디자인, 미리 보기, 출력 등을 가능케 했다. - 이런 활동은 전자출판으로 알려지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 전자출판은 유일하게 맥에서만 가능했으나, 결국 후에는 IBM PC 사용자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매크로미디어 프리핸드(Macromeida FreeHand), 쿼크익스프레스, 어도비 포토샵, 그리고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들은 그래픽 전문 컴퓨터로서의 맥의 입지를 더욱 튼튼히 했고 전자출판 시장의 확장과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초기의 맥이 마주친 한계는 곧 사라졌다: 초기의 맥은 1984년의 다른 컴퓨터들과 비교해도 적은 메모리 용량이었고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도 부족하거나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1985년 10월, 애플은 맥의 메모리를 512kb로 늘렸지만, 128kb(매킨토시 128K)인 맥에서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부품의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애플은 1986년 1월 10일 미화 2,600달러의 매킨토시 플러스를 발표했다. 4메가까지 확장 가능한 1메가바이트의 램을 장착했고, 하드 드라이브나 스캐너 등 최대 7개의 주변 장치까지 제어할 수 있는 가히 혁명적인 병렬 SCSI 인터페이스를 제공했다. 플로피 드라이브는 800kb까지 용량이 늘어났다. 맥 플러스(Mac Plus)는 순식간에 성공을 거두었고 1990년 10월 15일까지 생산되었다. 4년하고도 10개월 동안 판매된 셈인데, 이것은 애플 역사상 가장 긴 생명력이었다. 또 다른 사건도 남겼는데, 특히 느린 프로세서 속도와 그래픽 능력의 한계는 업무용 컴퓨터 시장에 맥의 진입을 막는 장애였다. 진화된 모토로라의 CPU는 좀 더 빠른 컴퓨터를 가능케 했고 1987년 애플은 모토로라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모토로라의 68020 16MHZ를 사용한 매킨토시 2를 소개했다. 매킨토시 2의 가장 큰 발전은 ROM에 내장돼 있는, 매킨토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퀵드로(QuickDraw) 언어로 표시되는 색채였다. 특히나 어떤 화면 크기라도 소화할 수 있고 어떤 색 깊이도 소화할 수 있으며 다중 화면을 지원하는 것은 퀵드로의 많은 혁신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매킨토시 2는 지금까지 그리고 처음으로 여러 확장 슬롯과 컬러 그래픽, 공개 아키텍처를 채용했고 애플의 다른 제품들과 확장 가능한 애플 2계열에 영향을 받은, IBM PC와는 다른 디자인은 매킨토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매킨토시 2는 하드 드라이브와 함께 꽤 시끄러웠던 송풍기(fan)이 달린 전원공급장치를 내장하고 있었다. 한 외부 개발사에서 냉각기의 온도를 인식해 송풍기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를 팔긴 했지만 소비자는 애플의 보증을 받을 수 없었다. 후에 매킨토시 컴퓨터는 좀 더 조용한 하드 드라이브와 전원공급장치를 채용했다. 1986년 9월 애플은 MPW라고도 불리는 매킨토시 프로그래머 웍샵에서 맥용 프로그램을 리사를 통한 개발 대신에 맥에서 개발하는 법을 소개했다. 1987년 애플은 HyperCard를 공개했고, 매킨토시에서 동시 다중작업을 가능케 하는 MultiFinder를 소개했다. 가을에는 모든 애플에 위 두 가지 제품이 꾸러미로 제공되었다. 매킨토시 2를 바로 뒤이어, 매킨토시 SE(Second Edition)가 출시됐는데 최초의 20MB 내장 하드 드라이브와 하나의 확장슬롯이 장착된 맥이었다. SE는 또한 제리 매넉과 테리 오야마의 최초 디자인을 향상시켰고 매킨토시 2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와 몇 개월 후 애플 IIGS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애플 데스크탑 박스 B) 마우스와 키보드를 공유했다. 1987년 애플은 자사의 소프트웨어 사업을 클라리스(Claris)로 분리한다. 클라리스는 애플에 쓰였던 몇몇 응용 프로그램의 코드와 법적 권리를 인수했다. 주요 제품은 MacWrite, MacPaint와 MacProject 등이다. 1980년대 후반에 클라리스는 몇몇 수정판 응용 프로그램을 출시하는데 MacPaint Pro, MacDraw Pro, MacWrite Pro 그리고 FileMaker Pro 같은 “프로(Pro)” 계열이었다. 완벽한 사무용 프로그램 한 벌을 만들고자 클라리스는 맥에 있던 Informix Wingz(업무용 문서 프로그램 )를 사들여 이름을 Claris Resolve로 바꾸고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Claris Impact를 추가했다. 1990년 초기에 오면서, 클라리스 프로그램들은 일반인 사용자들에게 판매되는 맥의 주요품목이 되었고,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91년, 클라리스는 곧 두 번째 인기상품이 되는 ClarisWorks를 출시한다. ClarisWorks는 버전 5.0이 나오면서 AppleWorks로 이름이 바뀐다. 매킨토시 포터블(Macintosh Portable )은 애플의 첫 번째 휴대용 맥이다.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생산했고 시스템 6과 시스템 7을 돌릴 수 있었다. 1988년, 애플은 애플에 저작권이 있는 GUI, 사각형의 창 모양, 화면 겹침 기능(Overlapping), 창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기능 등을 무단 사용한 혐의로 마이크로스프트사와 휴렛 패커드사를 고소했다. 4년 후 애플의 패배로 판결이 나고 후에 애플은 다시 항소했다. 애플은 이러한 행동때문에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자유소프트웨어 재단(FSF)을 비롯한 일부 단체로부터 치명타를 맞게 되는데,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은 애플이 GUI 기술을 독점하려 한다고 여겼고 7년 동안 매킨토시 환경에서 돌아가는 GUI 프로그램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1988년 새로운 모토로라 68030 프로세서와 함께 매인 보드에 MMU 내장을 포함해 내부가 향상된 매킨토시 IIx가 출시되었다. 1989년에 슬롯 개수를 줄인 버전으로 매킨토시 IIcx와 16 MHz 69030을 장착한 Mac SE가 뒤따라 출시되었다.(이름 짓는 규칙대로 가면 “SEx”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킨토시 SE/30라고 지었다.) 그해 후반에 25MHz의 속도로 동작하고 8MB 이상의 램을 지원하지만, 그 프로세서와는 다르게 “32-bit 비호환” ROM(32 bit 중의 8 bit만이 OS 레벨의 주소할당이 가능했다.)을 장착한 매킨토시 IIci는 “32-bit 호환”이 되는 최초의 맥이었다. 시스템 7은 32-bit 주소할당이 가능한 최초의 Mac OS였다. 애플은 또한 매킨토시 포터블도 소개했는데 16 MHz 68000 모델에 능동행렬평판화면(active matrix flat panel display)을 채용했고 어떤 모델은 역광화면(backlit)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다음해에 가격이 미화 9,900달러부터 시작된 매킨토시 IIfx가 베일을 벗었다. 이 제품은 40 MHZ의 빠른 68030 프로세서와는 별개로 더 빠른 메모리, I/O 연산에 할당되는 애플 2 에라 CPU(Apple II-era CPU) 같은 내부적으로 아주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1990년 5월에 성능과 기능면에서 매킨토시 운영 체제에 버금가면서 가격은 더 싼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3.0(Microsoft Windows 3.0)이 출시되었다. 1990년 10월에 애플은 이전보다 가격을 낮춘 제품들을 출시하며 대응했다. 매킨토시 플러스(Macintosh Plus)의 주요 기능만으로 가격을 낮춘 매킨토시 클래식은 미화 999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2001년 초까지 결국 맥의 가격대는 올라갔다. 68020 CPU를 장착하고서 피자 상자 같이 특이한 가방에 들어가는 매킨토시 LC는 미화 1,800달러에 살 수 있었다. 이 제품은 컬러 그래픽과 512 x 384 픽셀을 지원하면서 저렴한 가격의 새로운 모니터를 채용했다. 20 MHz IIci 제품에서 하나의 확장 슬롯만 넣은 매킨토시 IIsi는 미화 2,500달러였다. 이들 세 가지 제품은 모두 잘 팔렸지만, 애플의 순수익은 이전의 매킨토시 제품들보다 낮았다. 시스템 세븐(System 7)은 최초의 주요 판 올림이 이뤄진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1991년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시된 시스템 세븐은 32비트 코드로 재작성되어 나옴으로써, 컬러 그래픽 조작성과 메모리 주소 할당, 네트위킹이 강화되었고 협력적 다중작업(co-operative multitasking) 구현과 가상 메모리 기술까지 적용되어 나온 매킨토시 운영 체제였다. 그해 후반에 애플은 속도가 더 향상된 모토로라 68040 프로세서를 최초로 채용한 매킨토시 쿼드라 700(Quadra 700)과 900을 선보였다. 이 제품들은 16 MHz 68030 CPU를 사용해 전년도 최고 인기 상품이기도 했던 매킨토시 클래식 2(Classic II)와 매킨토시 LC II의 개선판으로서 시장에 나왔다. 또한 이때에 매킨토시는 프락디자인(Frogdesign) 사에 비싼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며 사용하던 디자인 언어인 “Snow White”를 버리고, Apple Industrial Desing Group을 설립하여 새 운영 체제에 사용될 언어를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에 휴대용 매킨토시(Macintosh Portable) 제품군은 소형화된 포터블 개념으로 나온 최초의 세 가지 파워북(PowerBook)-- 파워북 100과 16 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40, 25 MHz 68030 CPU를 채용한 파워북 170으로 대체된다. 이 제품들은 키보드 아래쪽에 손바닥을 놓일 공간을 마련되고, 포인팅 장치(트랙볼)가 내장된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였다. 애플 매장에는 매킨토시 센트리스(Macintosh Centris)라 불린 쿼드라(Quadra) 계열의 중간쯤 되는 모델이 있었는데, 소비자들이 클래식 계열, LC 계열, II계열, Quadra 계열, 펄포마 계열, 센트리스 계열로 혼란스러워 해서 곧 쿼드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애플은 파워북 듀오 계열의 축소판 제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 제품은 사무실 등의 작업장에 쓰이는 기능성 도구 같은 제품이었는데 데스크톱용 기지국(Base Station)에 연결되는 용도였다. 이 제품은 1997년 초반까지 판매되었다. 1994년 5월, 차세대 파워북 계열인 파워북 500을 출시하는데 트랙패드(trackpad)라는 기발한 장치를 최초로 장착한 제품이다. 또한 1994년 애플은 AIM 연합, IBM, 모토로라가 개발했던 RISC 파워피씨(RISC PowerPC) 아키텍처에서 모토로라 CPU를 버렸다. 파워 매킨토시 계열은 새로운 칩을 사용한 첫 번째 제품으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데 9개월 만에 100만 개가 넘게 팔렸다. 이런 기술과 상업적인 성공에도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은 윈도 95 운영 체제와 펜티엄(Pentium) 프로세서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하락시켰다. 이 두 제품은 IBM 호환 PC의 멀티미디어 기능과 동작 속도를 획기적으로 상승시켰지만 윈도 운영 체제의 GUI는 여전히 맥과 닮아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애플은 "매킨토시 호환 프로그램(Macintosh clone program)"을 시행했는데, 이 호환 제품들은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본체)에 애플의 시스템 7 운영 체제를 장착한 제품들이었다. 이 전략은 애플의 시장 점유율을 다소 높여주고 고객들에게는 더욱 싼 하드웨어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애플에게는 경제적인 타격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는 1997년 애플로 돌아오면서 버전 7.7로 알려진 다음 운영 체제의 이름을 맥 OS 8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애플이 다른 회사에 허용했던 저작권은 오직 시스템 7만 해당했으므로 결국 매킨토시 호환 제품의 생산은 막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은 맥 호환 하드웨어 생산에 상당한 투자를 했던 모토로라사나 파워 컴퓨딩 사(Power Computing Corporation)에게는 치명적인 재정적 손실을 입혔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다음 해인 1998년 애플은 모든 구성품이 하나로 통합된 아이맥(iMac)을 선보인다. 반투명한 아이맥 케이스는 청록색에서 시작해 나중엔 여러 색깔로 생산됐는데, 1990년대 후반에 제품 디자이너인 홀마크(hallmark)가 고안한 것이다. 아이맥은 이전까지 애플의 표준 연결 방식인(그리고 거의 독자 기술이었던) SCSI나 ADB 같은 장치를 버리고 두 개의 USB 단자를 장착했다. 또한 아이맥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앴는데, 그 대신 CD-ROM을 장착했다. 아이맥은 139일 만에 80만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고, 그해 애플의 연간 매출은 미화 3억 9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를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던 1995년 이래 처음으로 순수익이 난 해였다.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은 파워 매킨토시(Power Macintosh)에도 적용됐고 연이어 나온 새로운 제품인 아이북(iBook)에도 적용되었다. 1999년 7월에 소개된 아이북은 애플의 첫 번째 일반인용 노트북 컴퓨터였다. 9월에 판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14만대의 선주문이 있었고 10월이 되면서는 아이맥과 비슷한 판매량을 보이면서 인기를 끌었다. 애플은 연이어 큐브(Cube)나 교육 시장용 이맥(eMac), 전문가를 위한 파워북 G4(PowerBook G4) 랩탑 등의 새로운 제품을 생산한다. 최초의 아이맥은 G3 프로세서를 썼으나 G4를 거쳐 G5로 넘어가면서 제품 디자인도 흰색 플라스틱으로 새롭게 바뀌었다. 현재의 아이맥은 알루미늄 케이스다. 2005년 1월 11일, 애플은 미화 499달러로 책정된 맥 미니(Mac Mini)를 출시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가장 값이 싼 맥이다. 맥 OS는 9.2.2판까지 개선되어 나왔지만, 그것의 구식 아키텍처-- 몇 번 갱신이 되긴 했다. 예를 들면 파워 피씨 포트 중의 하나로 나노커널(nanokernel)이 추가됐고 Mac OS 8.6은 멀티프로세싱 서비스 2.0(Multiprocessing Services 2.0)을 지원하도록 수정되었다.-- 는 교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애플은 맥 OS 9을 완전히 재정비한 유닉스 계열 기반의 맥 OS X(Mac OS X)을 소개하는데 다윈(Darwin) 커널과 XNU를 사용하는 넥스트스텝(NEXTSTEP)을 토대로 하였다. 맥 OS X은 2000년 9월에 아쿠아 인터페이스와 함께 퍼블릭 베타로 공개되었다. 원하는 고객들은 미화 29.99달러에 애플의 이 새로운 운영 체제를 미리 체험하고 정품이 발매되기 전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 2001년 3월 24일 Mac OS X의 첫 번째 버전인 10.0(별명은 치타)이 출시되었다. Mac OS X의 초기 버전에서는 이전의 OS에서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들을 클래식이라는 구성을 이용하여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애플은 Mac OS X의 10.5 버전인 레퍼드(Leopard)부터 클래식을 빼버렸다.] Mac OS X의 다음 버전들은 2001년 9월 25일 출시된 10.1 버전 "푸마"(Puma), 2002년 8월 24일 출시된 10.2 버전 "재규어"(Jaguar), 2003년 10월 24일 출시된 10.3 버전 "팬서"(Panther), 2005년 4월 29일에 출시된 "타이거"(Tiger), 2007년 10월 26일에 출시된 "레퍼드"(Leopard), 2009년 2월 28일에 출시된 "스노우 레오파드"(Snow Leopard), 2011년 7월 20일에 출시된 "라이온"(Lion)이다. 인텔 버전의 레퍼드는 오픈 그룹으로부터 유닉스 규격 인증을 받았다. 1991년에 CPU를 파워피씨 프로세서로 변경하면서 파워 매킨토시, 파워맥 G3, 파워맥 G4, 파워맥 G5가 출시되었고, 1998년에는 아이맥이 큰 성공을 거두며 애플의 부흥을 이끌었다. 2006년부터는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이 판매되고 있다. 매킨토시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역사를 두 번 바꾸었다. 매킨토시 128부터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탑재하고 과감하게 5.25인치 드라이브를 버렸다. 또한 아이맥부터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없애고 CD롬 드라이브만 탑재함으로써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매킨토시가 발표되었을 때 운영 체제는 '시스템'(System)으로 불렸다. 최초의 시스템은 GUI와 위지위그 등 당시 상황에서는 혁신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없었다. 1987년 시스템 5.0으로 버전이 올라가면서 멀티파인더를 통해 협력형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다. 1991년에는 가상 메모리, 파일 공유를 지원하고 멀티미디어와 그래픽 지원이 강화된 시스템 7이 출시되었다. 시스템이라는 이름은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처음으로 지원한 7.5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1997년 맥 OS 7.6이 발표되면서 명칭이 '맥 OS'(Mac OS)로 변경되었다. 곧이어 멀티스레드 파인더와 새로운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맥 OS 8이 발표되었다. 1999년 맥 OS의 마지막 메이저 버전인 맥 OS 9가 발표되었다. 2001년 초에 발표된 맥 OS X에는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맥 OS X으로 전환하는 동안 기존에 사용하던 응용 프로그램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맥 OS 9는 2001년 12월에 발표된 9.2.2를 마지막으로 개발과 지원이 중단되었다. 현재 매킨토시의 운영 체제는 macOS이다. 이것은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사를 인수하여 BSD 유닉스 계열 기반인 NeXTSTEP을 바탕으로 새로 개발한 것이며, 이때의 이름은 OS X(오에스 텐)이었다. OS X은 더이상 버전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운영 체제의 이름으로 사용하며, 메이저 버전을 내놓을 때 소숫점 밑의 버전만을 올리며, 코드명을 이용하여 이름붙인다. 치타, 퓨마, 재규어, 팬서, 타이거 등 고양이과 동물들의 이름으로 각 버전의 코드명을 지정하였고 10.9 매버릭스 이후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지명을 사용하여 코드명을 지정하며, 재규어(10.2) 이후로는 코드명을 이용하여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10.12 버전의 시에라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macOS로 바꾸었으며, 현재 가장 최신의 운영 체제는 10.14 버전의 모하비이다. 대한민국에서 매킨토시는 전통적으로 북디자인, 음악, 영상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지금은 X86용으로도 나와 있지만, 초기에는 쿼크익스프레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레이저 프린터, 고품질 서체를 매킨토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출력을 쉽게 할 수 있어서 북디자인을 비롯한 디자인계에서는 맥이 널리 사용된다. 음악 분야에서도 로직 프로 등의 주요 스튜디오 레코딩 프로그램을 통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영상 분야에서는 애플의 멀티미디어 기술인 퀵타임을 기반으로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방송이나 영화 업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크로스 플랫폼 프로그램 개발 노력으로 제한점들이 많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인텔 매킨토시가 등장하면서 매킨토시의 판매가 증가하였다. 매킨토시는 가격이 비싸다는 선입관이 널리 퍼져있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매킨토시의 가격이 동일 사양의 PC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OS X과 윈도를 함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국의 각종 포탈이나 커뮤니티 사이트, 온라인 게임 사이트, 인터넷 뱅킹이나 공공기관 등 공인 인증서를 사용하거나 액티브 엑스를 사용하는 사이트는 매킨토시에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가 국내 운영 체제 시장을 거의 독점하는 상황에서 인터넷 사용이 확산되면서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이 윈도-인터넷익스플로러 환경만을 감안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이를 방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액티브 엑스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 윈도 비스타가 출시되고 웹에서의 평등한 접근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웹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반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윈도우10이 출시된지 1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복귀한 후 매킨토시는 크게 대상 사용자 유형에 따라 일반 사용자용과 전문 사용자용, 제품 유형에 따라 데스크톱과 노트북으로 분류되어 크게 네 가지 제품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맥 미니, 맥북 에어와 서버인 XServe가 추가된다. 한국어 한국어(韓國語)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로,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어 또는 한국말이라고 부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어 또는 조선말이라고 부른다.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도 공용어로 사용된다. 해외 이주에 의해 일본, 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베트남 등 세계 여러 지역에 한민족 인구가 거주하게 되면서 이들에게서도 한국어가 사용되고 있다. 2016년 1월 초 기준으로 한국어 사용 인구는 대부분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모여 있으며 약 772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어의 계통에 관해서는 옛부터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하는 학설이 힘을 얻었다. 현재 언어학계에서는 주변 언어와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고립어, 또는 제주어를 포함하는 독자적인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반면에 한국의 주류 학계는 몽골어, 터키어, 카자흐어와 같은 알타이어족 / 알타이제어를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고립어 역시 다른 고립어와는 궤가 조금 다르고 한국어족도 제주어를 방언으로 포함시킬지 언어로 포함시킬지에 대한 의견이 갈라져 논거가 부족하며 한국어의 계통은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주제로, 역사언어학계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어'는 대한민국에서 쓰는 명칭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만드는 사전의 이름은 《겨레말 큰사전》이다. 1994년부터 열리는 남북한 간의 한글과 한국어 컴퓨터 처리를 표준화하려는 학회명은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어를 '쵸센고(조선어)'라고 불렀으나, 근래에는 '칸코쿠고(한국어)'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 내의 교포 사회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로 갈라져 각각 표준어와 문화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NHK는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한국어 회화 명칭을 '칸코쿠고(한국어)', '쵸센고(조선어)' 대신 '한구루 고자'(, 한글 강좌)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중립성을 고려하여 칸코쿠ㆍ조센고(韓国・朝鮮語, 한국ㆍ조선어)'고리아고'(, 코리아어)나 '가라노쿠니노코토바'(, からのくにのことば, 한나라말) 등의 명칭을 쓰기도 한다. '코리아고(코리아어)'는 1977년 조치 대학이 처음으로 전공 학과를 개설한 이후 일부 대학교에서 쓴다. 또한 학계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이는 것을 조선어,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것을 한국어로 구별하여 둘 다 포함하는 말로 (광의의) 조선어라고 한다.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朝鮮語(조선어)가 주로 사용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韓國語(한국어)로 부르는 경향이 훨씬 많아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밀접한 관계에 따라 한국어를 주로 챠오셴위(, 조선어)'라고 부른다. 1992년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 양국이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면서 '한궈위(, 한국어)' 또는 '한위'(韓語, 한어) 등의 명칭이 쓰이기도 하나, 학술상으로는 여전히 문화어 계열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 중화민국(타이완)은 한국어를 '한궈위(, 한국어)'나 '한위(, 한어)'로 부른다. 베트남에서의 용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거의 비슷하다. 현재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 한자도 어느 정도 사용하던 베트남은 한국을 '쩨우띠엔'(, 朝鮮)이라고 불렀고, 대한민국은 '남쩨우띠엔'(, 南朝鮮), 한국어는 '띠엥쩨우띠엔'(, 朝鮮語)으로 불렀다. 한국에 관련된 일반 어휘는 문화어 계열의 어휘가 더 많이 쓰인다. 대한민국의 표준어는 '띠엥한'(, 韓語)이라고 부른다. 베트남어 위키백과에는 한국어 문서의 제목이 '한국어'를 뜻하는 '띠엥한꾸억'(=(, 韓國語)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한국어는 영어로 'Korean', 프랑스어로 'Coréen', 스페인어로는 'Coreano'로 불린다. 한국어의 계통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설이 성립하여 있지 않다. 근대에 핀란드의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f John Ramstedt)가 대어족 가설인 알타이어족설을 제시할 때 한국어를 포함한 것을 시작으로 예프게니 폴리바노프, 로이 앤드류 밀러 등 20세기 중반 많은 언어학자들에게서 해당 가설이 지지받았다. 또한 다양한 언어학자들에 의해 부여어족 가설로서 한국어와 일본어의 동계설도 주장되었다. 한국어는 언어유형학적으로 어형변화가 많은 교착어이며 어형변화가 없고 문법적 관계가 어순에 의해 표시되는 고립어와 다르다. 한국어의 유래와 함께 그 발달 과정도 베일에 싸여 있는데, 중세 한국어 이전의 기록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고대 한국어의 기록이 한자로 되어 있어 그 해석에 따라 음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등이 연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때문에 고대 한반도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지명학적 흔적은 크게 유의미하다. 한국어가 만주 등 북방 지역에서 유래하였다는 학설은 퉁구스어족에서 고대 한국어의 흔적이 나타나고 역으로 한국어 음운에서도 고시베리아제어와의 접촉 흔적이 개연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력하다. 한편 하위 계통으로서는 이기문 등이 정립한 한-부여 분류가 국내외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한-부여 분류는 고대 한반도 지역에서 사용된 언어의 분류로, 고구려어, 백제어를 포함하는 부여계 제어와 신라어를 포함하는 한계 제어로 이루어진다. 다만 학자에 따라 그 차이가 방언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며, 이런 경우 이 분류는 편의상의 구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한편 크리스토퍼 벡위스는 부여계 언어가 신라어와 완전히 달랐으며 일본어와 연관되어 있다는 부여어족 가설을 주장하였으나 여러 오류가 지적되어 보통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국어가 몽골어, 퉁구스어, 터키어 등과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역사적으로 유력설로 지지 받는다. 현대에는 형태, 음운의 유사성 때문에 편의상 '알타이 제어'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근거는 음운론에서 모음조화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형태론에서 교착어이며 수와 격이 일치하는 통사론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한 것은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가 최초이자 대표적으로,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 학계에서도 한동안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의 하나로 보는 입장에서는 한국어의 다음과 같은 속성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이 가지는 전형적인 특성 외에 다른 특성을 공유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어가 조기에 알타이조어에서 분리되었다는 가설을 성립하게 하였다. 한국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임을 부정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중등교육에서는 알타이어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인은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마르티너 로베이츠 등 일부 학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우선적으로 묶고, 몽골어족, 퉁구스어족, 튀르크어족의 조사나 기초 어휘에서 서로 간의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며 대어족의 '극동아시아어족'이 성립한다는 가설을 새로이 주창하고 있다. 또한 마셜 엉거(J. Marshall Unger)는 한국어-일본어-퉁구스어의 공통 조어를 예측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는 알타이어족 가설의 재주장과 무관하지 않다. 몇몇 학자들은 한국어족을 고립어(language isolate)로 분류한다. 대표적으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알렉스 버라타 교수,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스테판 게오르크, 유타 대학교의 마우리시오 믹스코 교수가 고립어설을 지지한다. 한국어를 고립어로 분류하는 언어학자들은 알타이어족과 한국어의 공통 어휘가 적거나 재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립어는 외부 접촉이 적은 고립된 곳에서 매우 적은 화자들이 사용하는데, 한국어는 8천만 명 가까이 모국어로 사용하기에 고립어로 분류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한 한국어가 알타이어족과 공통 어휘가 적다는 것은 현재 한국어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부여어족의 기록이 적기 때문이므로, 기록이 더 발견되면 주장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이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논쟁이 존재한다. 한편, 유네스코 등 일부 단체나 학회에서는 한국어가 다른 고립어와는 특성이 다른 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립어로 보지 않고 제주 방언을 제주어로 분리하여 한국어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어와의 연관은 과거부터 여러 학자에 의해 지적된 것으로, 특히 문법이나 어휘의 유사성에서 창안된 설이다. 다만 고대 한국어 자료가 부족하여 둘 간의 실제 연관은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노우에 키요시()는 언어에서 중요한 1인칭에 주목했다. 일본 고어에서 1인칭은 汝라는 한자를 사용하며 な(나)라고 읽었는데 일본의 1인칭 고어가 한국어의 1인칭인 "나"와 동일하다. 일본어의 1인칭이 동일한 곳은 중국 남부나 북부가 아닌 한국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예를 들면 나라 시대의 波多広足(하타노히로타리)에서 다리를 뜻하는 足(타리)가 한국어의 "다리"와 동일하다는 식의 대응이 어휘 일치의 근거로 거론된다. 이노우에 키요시는 일본어가 친족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국어뿐이며, 만일 그렇다면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시기를 언어연대학으로 조몬시대 중기 이전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에 유사성이 있는 이유는 한국인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I. Beckwith)는 고구려어의 어휘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점이 보인다며 신라어를 포함하지 않는 부여어족의 성립을 주장하였으나 주류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재 소수설로 머물러 있다. 알렉산더 보빈은 부여어족의 근거로 들리는 지명 어휘의 일치는 한국어족 어휘가 아니며 고구려어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 남부에 잔존한 일본어족 언어의 흔적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소수 가설 중 하나로 대한민국의 언어학자 김방한은 비알타이어 기층설을 주장한다. 김방한은 한국어 기층에 원시 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비알타이어 기층이 있고, 그 위에 알타이어계 요소가 덮인 것이거나, 그 반대로 비알타이어가 알타이 기층에 덮여서 한국어의 뼈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원시 한반도어와 계통적 친연성이 있는 언어로 편의상 고시베리아어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니브히어(길랴크어)를 지목하였다. 이후 유하 얀후넨은 한국어와 니브흐어 간의 파열음 일치를 들어 고대에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19세기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일부 언어학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주된 논거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산스크리트어와 한국어가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어순과 어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대부분 부정되었다. 다음은 대한민국 표준어를 기준으로 한 모음의 표기이다. 조사의 형태는 앞의 소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은/는, 이/가, 을/를과 같이 음절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에서/서, 으로/로와 같이 음절이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은/는, 이/가, 을/를의 경우, 모음이 연쇄되는 것을 피하고자 자음이 삽입되는 규칙적인 경우이나, 와/과, 으로/로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으로/로는 ㄹ 뒤에서 독특한 분포를 보인다. 와/과 역시 중세 한국어에서는 으로/로와 마찬가지로 ㄹ뒤에서 '와'가 쓰이는 독특한 분포를 보였으나 현대한국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와/과의 경우 이중모음/ㅘ/가 모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음 연쇄 환경이 아니고 사용빈도에 따라 분포가 설명된다. 형태 음소론적 차이는 일부 동사에서도 관찰된다. 한국어는 어근과 접사 등 특정 표지가 붙음에 따라 단어의 기능이 결정되는 교착어로 분류된다. 특히 조사에 따라 문법적 격이 정해지며 이 때문에 고립어에 비해 어순이 비교적 유동적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SOV형 어순, 곧 주어-목적어-동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반적인 경우 서술어는 반드시 문장의 끝에 위치하여야 한다. 조사는 문법적 격을 나타내는 격조사, 단어끼리 이어주는 접속조사, 특별한 의미를 가하는 보조사로 나뉘며, 조사가 붙는 체언이 개음절인지 폐음절인지에 따라 다른 조사가 붙기도 한다. 일례로, '사람'의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이'이나, '머리' 뒤에 붙는 주격 조사는 '가'이다. 어미가 다양한 것이 특징적으로, 문장 내에서 기능이나 수식은 물론 미묘한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특히 주로 종결 어미나 선어말 어미에 따라 드러나는 낮춤말과 평어, 높임말의 복잡한 존비어 체계가 특징적으로, 화자 간에 존댓말(높임말)과 반말(낮춤말, 평어)에 대한 합의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어색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언어와 호칭선택 문제 때문에 갈등과 권위적 상황이 유발되기도 한다는 분석도 있다. 용언은 동사와 형용사를 포함하는데, 둘의 어미 변화가 거의 동일하다는 특징이 있다. 용언의 기본형은 모두 종결어미의 일종인 '-다'로 끝나는 것으로 취급되며, 그 기능에 따라 조금씩 변하나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다'로 끝나 문장의 끝을 암시하게 된다. 그 시제는 현재, 과거, 미래형으로 나뉘며, 이 또한 동사의 종류나 기능에 따라 다양한 어미로 나타난다. 한국어의 어휘는 크게 고유어 ("순우리말"), 한자어, 외래어로 분류된다. 고유어는 한국어의 기층을 형성하는 고유의 어휘로, 사용 빈도가 높은 일상어는 대부분 고유어에 속한다. 음운적으로 ㄹ 소리로 시작되는 토착 어휘는 거의 없으며, 이는 알타이 제어의 음운론적 특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어에 한자의 비율은 일반적으로 한자의 비율이 50%라고 하는 잘못된 설이 세간에 퍼져 있으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가능한 한 많은 영어와 독일어인 현대어 낱말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예를 들어 Society=사회)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국어사전이 수록하는 한자어의 상당수는 한문 문장에만 용례가 있고, 한국어에서는 용례가 발견되지 않는 단어들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현대 국어 사용 빈도 조사'를 보면 우리말의 낱말 사용 비율은 토박이말이 54%, 한자어 35%, 외래어가 2%였다. 외래어라 하면 일반적으로 한자외의 외국어에서 유래한 어휘를 가리킨다. 근대 이전에는 불경을 통하여 간접 차용된 산스크리트어(한자어 형태)를 비롯하여 몽골어에서 두 개의 단어가 차용어로 쓰였으며 (예를 들어 송골매), 일제강점기에는 영어와 독일어의 현대어를 한자로 차용하여 사용한 것들이 있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등 소수의 인도유럽어족의 어휘가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으나 현재 사용 빈도는 매우 적다. 예를 들어 "Part time job"이라는 말을 일본에서 쓰던 독일어인 "아르바이트(Arbeit)"라고 부르며 원래의 아르바이트의 의미와 다르게 쓰인 말들이 있다. 현대에는 영어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영어로부터의 많은 차용어들이 쓰이고 있다. 한반도에서 처음 사용된 문자체계는 한자이다. 한문 유입 이후, 고유명사 표기 등 한국어 표기의 필요성이 대두하였으며, 1934년 경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어순이 한문 어순이 아닌 한국어 어순에 따라 배열되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여러 고안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임신서기석에 사용된 변칙한문체를 서기체(誓記體) 또는 의국체(擬國體)라고 한다. 단음절어이며 고립어인 한자는 다음절어이면서 교착어인 한국어의 표기에 적합하지 않아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법 중에서 이두, 구결이 있었으며 향찰은 소멸하였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국어를 표기하기보다는 문어체의 한문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구어(한국어)와 문어(한문)의 이중체계가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현재 한국어 표기에 쓰이는 문자인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1446년에 반포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대한 설이 여러 가지 있었으나, 1940년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발견되면서 발성 기관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반포 서문에서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비로소 정음 28자를 창제하시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적고 있다. 한글을 이후 조선에서 소설이나 편지등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국한문혼용)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 공식문자이고, 일부 한자어는 한자를 괄호에 넣어 병기(竝記)하기도 하지만 한자의 사용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구 소련 지역에서는 한자를 거의 쓰지 않고 가급적 순한글로 한국어를 표기한다. 1930년대 초반 소련에서는 여러 소수 민족 언어를 대상으로 한 로마자 표기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안을 승인했지만, 실제 로마자 표기안이 마련되어 생활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어 문자생활에서 로마자로 한글·한자를 대체하려던 방안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고유명사의 표기에 쓰는 현재의 로마자 표기 규범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로마자 두문자어 표기와 일부 고유 명사 표기에 로마자를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어의 방언은 경기 방언, 영동 방언, 서북 방언, 충청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동북 방언, 재미 한국어, 재중 한국어, 재일 한국어 등으로 나눈다. 경기 방언과 충청 방언을 중부 말로 합쳐 일컫기도 한다. 모든 방언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대한민국의 표준어는 경기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표준어인 문화어는 서북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등 영어 사용 국가로의 이민이 늘어나면서 이민 2세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계 외국인들이 영어를 번역한 듯한 한국어(번역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약 80년 가까이 분단된 만큼 언어상의 특징도 소수의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서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는 없으며 소수의 단어를 빼고서는 모든 언어와 문법이 일치한다. 가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건데기나 지팽이와 같이 'ㅣ'의 모음 역행 동화를 인정하는 경향이 크며,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두음 법칙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여자, 염원, 노동 대신 녀자, 념원, 로동과 같은 낱말을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문체나 구어체를 활용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어감이 강한 표현을 많이 쓴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찔리우다'와 같이 대한민국보다 보조용언을 겹쳐 쓰는 경우가 많으며, 접미사 '들'을 많이 쓰는 경향도 있다. 어휘 면에서는 특히 많은 차이를 보이며, 외래어 수용에 큰 거리낌이 없는 대한민국에 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말다듬기로 순수 한글을 많이 사용하지만 과거 아이스크림을 순수 한글로 변형시킨 '얼음보숭이'를 쓰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 대부분 '아이스크림'이라고 쓰는 것을 볼 때, 외래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추세다.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폴란드,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지에서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국제적 위상의 확대와 한류 등의 문화적 영향력의 전파에 힘입은 바가 크다. 과거에는 영어, 일본어 등 유럽, 미주 및 일본을 중심으로만 한국어 학습용 교재가 발간되었으나, 근래에는 한국어 학습 동기의 다변화와 국내 외국인 수의 증가로 중국어, 타이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로 한국어 교재가 발간되고 있다. 미국 정부회계감사원이 발표한 '미국 국무부 외국어 직무수행 평가서'에 따르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와 더불어 한국어를 미국인이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superhard language)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 한국어의 여러 상이점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대부분의 외국인은 한국어를 학문으로서 배운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한국어 능력을 검정하기 위한 시험이 몇 가지 있다. 한국어능력시험(Test Of Proficiency in Korean ; TOPIK), 국어능력인증시험(Test of Korean Language;TOKL), KBS 한국어능력시험(Korean Language Test) 등이 있다. 일본의 네 가지 한국어 시험 가운데 일본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험은 한글능력검정시험과 한국어능력시험이다. 한글능력검정시험을 뺀 나머지 모든 시험은 대한민국 표준어 시험이기 때문에 표준어가 기준이며, 이와 다른 문화어의 맞춤법이나 어법은 오답으로 처리된다. 이외 일본의 대학 입시 센터 시험에는 2002년부터 한국어가 포함되었다. 한국어 문서가 전 세계 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에 4.1%로, 이는 영어(35.8%), 중국어(14.1%), 일본어(9.6%), 스페인어(9%), 독일어(7%)에 이어 전 세계 6위이다. 웹상에서의 한국어 사용 인구는 전 세계 75억여 명의 인구 중 약 1% 에 해당한다. 국립국어원은 지속적으로 사용빈도가 높은 한국어 기초 어휘 관련 자료들을 연구 및 제공해 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국어 낱말 단어를 수록한 "한국어 학습용 어휘" 6,000 낱말을 2004년 12월에 발표한바 있으며 이후 이러한 자료를 세계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어기초사전을 통해 어휘 데이타베이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어의 어휘에 대한 사용 빈도 자료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학습 및 교육 등에 있어 매우 중요한 근거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다. 한자 한자(漢字)는 표어 문자의 하나로, 중국 대륙에서 발원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일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이다. 한자의 기원을 유추할 근거는 3,000년 전 사용된 금문과 3,300년 전 사용된 갑골문, 그리고 6,800년 전 사용된 도문인데, 일반으로 갑골문(甲骨文)을 한자의 기원인 글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한비자나 여씨춘추와 같은 책을 보면, 한자는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창힐은 상고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황제라는 설도 있고 황제의 사관이라는 설도 있다. 그 사람이 사물의 모양이나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 한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자는 한 사람이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시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글자도 아니라는 견해가 통설이다. 실존하는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문자는 1903년 은허에서 출토된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있다. 기원전 14세기 ~ 기원전 11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자는 당시 중대사를 거북의 복갑(腹甲)이나 짐승의 견갑골에 새겨 놓은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 후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사주(史籒)가 주문(籒文:大篆)을 만들었고 춘추 전국 시대에는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글자체가 쓰이다가 진나라의 승상 이사(李斯)가 주문을 개량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하였다. 또한, 진의 옥리(獄吏) 정막(程邈)은 실무에 편리한 예서(隸書)를 지었고 한나라 때에는 이것을 계승한 한예(漢隸)가 문자로서 통용됐다. 춘추 전국 시대에 죽간(竹簡)에 쓰인 과두문자(蝌蚪文字)나 종(鐘)·정(鼎) 등에 쓰인 금석문자(金石文字)를 고문(古文)이라고 한다. 후한(後漢)에 이르러 왕차중(王次仲)은 한예를 간략화하여 해서(楷書)를 만들었고 이후 이것을 정서(正書)라 하여 표준 자체로 삼았다. 즉, 이사가 소전을 제정하여 문자 대혁신을 이룩한 후 300여 년이 경과하여 한자는 해서(楷書)로서 정립된 것이다. 목간과 죽간을 대체하여 필기구가 붓·먹·종이가 중심인 시대가 되자 해서가 중용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모필(毛筆)로 쓰기에 편리한 초서(草書)와 행서(行書)가 나타났으며, 육조(六朝)와 당나라 때에는 서도(書道)가 문예의 일부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자의 역사, 특히 양식의 변천을 자형(字形)에 따라 고찰하면 갑골문자·금석문자·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 등 다섯 시대로 구분할 수 있고, 해서 이후로는 오랜 시대에 걸쳐 변화한 흔적이 없다. 다만 서체(書體)로서 조형예술 성격을 띤 다양한 작풍이 나타났을 뿐이다. 한자의 형성 과정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 육서(六書)라고 한다. 후한의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한자를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등 여섯으로 나누어 한 설명이 현재 육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기초가 되었다. 한국,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은 2천년 이상 중국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도 1948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력한 한글 전용 정책을 펴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한글만을 쓰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성명(姓名), 학술용어,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나 축약어 등 한자어의 뜻을 특별히 강조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글을 쓴다. 현재는 중국과 중화권 국가(타이완, 싱가포르 등)를 빼면 일본만이 일상에서 한자를 자국의 문자처럼 사용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주로 한글을 쓰지만, 한국어의 단어 중 57% 정도가 한자어이며, 성명과 지명(地名)은 거의 한자어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교육부에서는 자주 쓰는 한자 1,800자를 지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의 90% 정도는 이들 한자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학술 용어, 고문(古文) 해독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한자를 쓸 때는 거의 정체자로 쓴다. 일본어에서는 일본의 음절 문자인 가나와 함께 쓰인다. 일본어 한자는 음독(音讀, 일본식 한자음)과 훈독(訓讀, 한자를 같은 뜻의 일본 고유어로 읽는 것)이 함께 쓰이므로 고유어도 한자로 나타낸다. 이 방식은 고유어를 보존하면서 음절 길이를 줄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한자 읽기가 복잡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 때문에 인명 등 고유명사나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한자 위에는 읽는 법을 다는 후리가나가 있다. 일본어에서 한자는 명사, 동사와 형용사의 어간 및 일부 부사에 쓰이고, 가나는 문법 기능을 나타내는 토씨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표기할 때에 주로 쓰인다. 중화민국에서는 한국에서 쓰는 것과 같은 정체자를 써서 중국어를 표기한다. 중국 대륙에서 중국어는 거의 간체자로 표기한다. 이는 외래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보통 정체자를 쓴다. 베트남에서는 꾸옥응으라고 하는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사용하므로, 일상에서 한자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어의 단어에는 한국의 한자어와 비슷한 한월어(漢越語)가 있다. 다른 문자로 된 문헌을 한자로 번역하는 것을 한역(漢譯)이라고 한다. "한역"이라는 말은, 특히, 고대에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의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 실제로 한자는 제자 원리에 따라 무한히 복잡하게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된 기록이 있는 문자 중에서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기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니코드 5.0에 포함된 가장 복잡한 한자는 (수다스러울 절, U+2A6A5)로, 龍(용 룡)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고 16 × 4 = 64획이다. 이 한자는 조엘 벨라센(Joël Bellassen)(1989) 등에 따르면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어 한자 중 가장 복잡하며, 5세기 이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똑같은 64획으로 (뜻 미상, 음은 정,八부 62획, U+2053B)이 있으나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자는 興(일어날 흥)을 네 번 써서 이루어진 한자이다. 현재까지 중국어에서 쓰이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산시 성(섬서성)에서 유명한 면 음식인 뱡뱡몐을 가리키는 57획짜리 한자이지만 방언에서만 사용되는 문자로 취급되어 자전에는 나오지 않고, 유니코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대 한자 자전에 나오는 한자 중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는 (코 막힐,코를 킁킁거릴 낭)으로 36획이다. 이 밖에 일부 한자의 ‘고자’(古字)는 상당히 복잡한 경우가 있다. 그 예로 우레 뢰(雷)의 고자는 밭 전(田)이 가로로 4자, 그 밑으로 돌아올 회(回)가 가로로 4자 다시 밭 전이 4자로 된 것이 상하로 2개 있는 모양, 도합 128획이다. 그 이외에도 한국에서 만든 한자인 한국제 한자도 있다.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 국회(大韓民國 國會, )는 대한민국의 의회이며 대한민국 입법부의 주축이다. 헌법상 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본래는 제헌 헌법에서는 단원제, 1952년 발췌 개헌으로 제정된 제2호 헌법에서는 민의원·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도록 제정되었으나 참의원의 구성이 늦어져 제2공화국 때에 비로소 양원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1년 뒤인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다. 1963년부터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국회가 부활하였으나 현재와 같이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뀌어 구성되었다. 매년 9월 1일 정기 국회가 열리고 정기회·임시회의 100일 이내의 회기가 열린다. 이 기간에는 정치적 이슈가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경향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제2공화국 때에는 양원제를 채택하기도 하였는데, 민의원과 참의원을 두고 있었다. 각 상임위원회별로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있으며 수석전문위원은 차관보급으로 전문위원을 대표한다. 한국의 국회는 1년 동안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열리는 미국, 영국 등의 의회와는 달리, 정기회·임시회의 회기로 열린다. 유신헌법 시절에는 국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1년 중 최고 150일까지만 열릴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제82조). 현행 제도로는 연간 회기 일수 제한을 폐지하여 매일 국회가 열릴 수 있도록 하였지만, 제16대 국회의 경우, 본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임시국회가 5차례나 있었다. 즉 5달 동안 한 번도 본회의를 열지 않았다. 반면 미국 의회는 2년을 하나의 임기로 하여 전반 1년을 제1회기, 후반 1년을 제2회기라고 한다. 정기회 임시회의 구분이 없다. 대통령이 임시회 집회를 요구하는 일도 없다. 2년의 임기가 지나면, 하원은 전원, 상원은 1/3씩 단계적으로 선거를 하여 교체한다. 1년 내내 회기에 있고, 회기중에는 불체포특권이 있으므로, 사실상 의원은 임기 내내 불체포특권이 있다.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등이 연중회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헌법 제47조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고 있으므로(제40조), 법률 제·개정권은 국회의 가장 본질적인 권한에 속한다.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고(제128조 제1항), 대통령안과 국회의원안 모두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이를 의결하며(제130조 제1항),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인다(제130조 제2항).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제6조 제1항). 따라서 헌법은 중요조약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을 인정하고 있다(제60조 제1항).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존속을 위하여 필요한 국가경비의 세입·세출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국회의 의결을 기초로 하여 행사해야 한다는 재정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조세의 부과는 반드시 법률에 의거해야 함을 원칙으로 하여 조세의 종목과 세율은 법률로 정한다(제59조). 정부는 회계년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년도 개시 90일 전에 국회에 제출하여야 하며, 국회는 회계년도 개시 30일 전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제54조 제2항). 국회는 예산안의 심의에 있어서 정부예산안의 수정권은 가지고 있으나, 이 수정권은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전액의 삭감 또는 비목의 삭제에 그치는 것이 원칙이고, 지출예산 각 항에 대하여 금액의 증액 또는 새 비목의 설치는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이를 행할 수 있다(제57조). 예비비는 총액으로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하며, 그 지출은 차기 국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한다(제55조 제2항). 정부는 국채를 모집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국채에 대한 국회의 동의는 기채할 때마다 동의를 얻지 아니하고 연간의 예산총액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동의를 얻어도 된다.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미리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제58조).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이라 함은 국가가 1회계년도를 지나는 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채무를 부담하는 계약을 말한다. 감사원은 세입·세출의 결산을 매년 검사하여 대통령과 다음 연도 국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제99조). 국회에서 의결을 거친 예산의 집행 결과인 결산을 심사함으로써 국회의 재정에 관한 권한을 실효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국회는 일반국정에 관하여 정부를 감시·비판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며, 이를 대정부 견제권 또는 정부통제에 관한 권한이라 한다. 국회의 일반국정에 관한 권한으로는 국무총리를 임명할 때 동의할 수 있는 임명동의권(제86조 제1항), 국무총리·국무위원출석요구권과 질문권(제62조 제2항),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권(제63조 제1항·제2항), 긴급재정경제처분명령과 긴급명령사후승인권(제76조 제3항), 계엄해제요구권(제77조 제5항), 선전포고와 국군해외파견·외국군 주류에 대한 동의권(제60조 제2항), 국정감사·조사권(제61조), 탄핵소추권(제65조) 등이다. 국회에 20명 이상의 소속의원을 가진 정당은 하나의 교섭단체가 된다. 교섭단체 제도의 목적은, 국회에서 일정한 정당에 소속하는 의원들의 의사를 사전(事前)에 통합·조정하여 정파간 교섭의 창구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 정당의 의사 개진을 막는다는 단점도 상존한다. 1963년 6대 국회에서 13석의 민주당과 9석의 자유민주당과 2석의 국민의당이 연합하여 삼민회라는 이름의 공동 교섭단체(도합 24석)를 구성했으며, 2008년에는 18석의 자유선진당과 3석의 창조한국당이 공동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하였으나, 곧 해산되었다. 이후 2018년 국민의당에서 갈라져나온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공동 교섭단체인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을 구성하여 제4교섭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2018년 7월 23일, 정의당의 노회찬 의원의 자살로 공석이 되었다. 정의당은 5석으로 감소되었고 민주평화당이 14석임에 따라 20석에 달하지 못하여 교섭단체는 해산되었다. 16대 국회에서는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이 교섭단체 구성 기준인 20석에서 3석이 부족한 17석밖에 얻지 못하자 그 기준을 10석 이상으로 완화하는 개정안이 나왔다가 통과되지 못해 새천년민주당의 현역 의원 중 일부가 자민련으로 당적을 이동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 교섭단체의 요건을 의원 10명 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이 아직도 논의 중이다. 1948년 이후 국회는 무궁화를 상징화한 꽃무늬 안에 한자 國(국)을 형상화해 삽입한 것을 휘장으로 사용해왔으나 한글이 아닌 한자를 국가 중요 기관의 휘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과, 동그란 테두리가 글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 國(국)이 아닌 或(혹)자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양원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참의원은 휘장으로 한자 대신 한글 "국"을 삽입한 것을 채택한 바가 있었지만 5·16 쿠데타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어 왔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2014년 한자를 삭제하고 한글 "국회"를 삽입하는 새 휘장을 채택하는 안이 가결되었고, 현재 새로운 휘장을 사용하고 있다. 국민과 함께하는 스마트 국회를 목표로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의정환경을 조성하고 투명한 입법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국민에게 국회의 현황과 의정활동을 신속하고 투명하게 제공하며, 입법과정에 국민의 편리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하여 아래의 정보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여 내 손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국회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효율적인 의정활동과 국회 직원의 편리한 업무수행을 지원하기 위하여 디지털본회의장시스템, 입안지원시스템, 의정자료전자유통시스템, e-의안시스템, 영상회의 시스템 등을 운영하고 있다. 과거 대한민국 국회의 고질적 문제로 파행에 따른 몸싸움이 꼽혔다. 주요 법안들에서 여야가 갈등을 빚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러한 대립이 대화로 해결되지 못하고 강행 처리하려는 원내 다수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소수 정당과 충돌로 몸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몸싸움은 1년에 수차례 벌어지기도 했으며, 각종 장비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물리적 충돌 방지와 관련한 법안이 추진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여야간의 갈등으로 인해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가 2012년 5월 제18대 국회 마지막 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면서 몸싸움은 사라졌다. 허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법안과 선거제개편 패스트트랙 안건에 국회 선진화법이 있어도 국회에서는 다시 몸싸움이 일어났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워드 프로세서다.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주요 제품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83년 10월 25일 "Multi-Tool Word for Xenix systems"라는 이름으로 첫 출시되었다. 1983년에 MS-DOS용으로 워드1이라는 버전으로, 1985년에는 매킨토시용으로, 1989년에 윈도우용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rand()이라 치고 엔터 키를 누르면 도움말이 나온다. 워드의 파일 포맷은 오피스 오픈 XML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doc, .docx라는 확장자를 사용한다. OS X용으로 2004년에 출시되었다. 파워PC(PowerPC) 중앙 처리 장치에서 작동하도록 개발되었고, 인텔사의 중앙 처리 장치에서는 OS X의 로제타 기술로 워드 2004를 에뮬레이팅해 사용할 수 있다. 2008년 1월에 로제타(Rosetta) 기술을 이용해 에뮬레이팅하지 않고도 인텔 중앙 처리 장치든 파워PC(PowerPC) 장치든 상관 없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유니버설 바이너리 버전으로 출시했다. 워드 2007에 새로 나온 기능은 다음과 같다. MS-DOS용 버전: 매킨토시용 버전: 윈도우용 버전: SCO UNIX용 버전: OS/2용 버전: 2014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 프로세서이다. 전세계적으로는 90%대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는 2004년 3월 12일에 국회에서 노무현의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의 주도하에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을 대상으로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때 노무현의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4일 헌재에서 탄핵소추안이 기각되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탄핵 소추 64일만에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2004년 3월 12일에 국회는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이에 동조하였으며,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소추안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직무는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뤄진 탄핵소추안 가결이었다. 탄핵 소추안 통과는 그 타당성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70% 정도의 국민이 탄핵소추안 통과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KBS, MBC, SBS 등 여러 방송사들은 탄핵 투표 당시 국회의 혼란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방영하였다.한편 전국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모여 광화문 일대 등에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를 벌였다. 2004년 5월 14일에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에서 기각 결정을 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판정이 내려지는 동안, 헌재 앞에서는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모여 탄핵 반대 촛불 집회를 하며 지속적으로 충돌을 빚었다. 탄핵안이 발의된 3월 9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탄핵반대는 65.2% 찬성은 30.9%였지만 노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6%,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견은 30.1%로 엇갈렸다. 국회는 탄핵소추 사유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라고 밝혔다. 많은 국민이 당시 탄핵에 반발한 이른바 탄핵 역풍에 힙입어, 2004년 4월 15일에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사실상의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국회 과반수를 획득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최초로 원내 과반을 차지하였다.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의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고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려 제4당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야당 내 탄핵을 주도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때 선봉자 역할을 한 '탄핵 5인방'이라 불리는 박관용 국회의장,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홍사덕 총무,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총무는 정계에서 물러났다. 총선 때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삼보일배를 한 새천년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도 총선에서 낙마하고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3김 가운데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도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그러나 추미애, 조순형과 친박연대로 복귀한 홍사덕은 차기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에 성공했으며 이를 근거로 탄핵에 대한 국민의 재평가가 내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조 전 대표의 당선으로 '탄핵 주역'이라는 멍에를 벗었다고 자평했다.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서 1명이 자살하고 1명은 분신하여 부상을 입었다. 2004년 3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대통령(노무현) 탄핵소추안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유사이래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심판을 시작했다. 소추위원 측과 피청구인 측 변호사, 그리고 그들이 요청한 증인들을 출석시켜 모두 7차례 변론을 진행하였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일부 위반했으나 그 위반 정도가 탄핵의 사유가 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판단하고 소추안을 기각 결정하였다. 다수당에 대해 대통령이 정치적 편향성을 보임으로써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 등 다양하다. 이 사태는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못하고 국민을 볼모로 잡고 정치게임을 벌였다며 정치불안과 국내 경제계의 충격과 국가 대외신인도 하락, 그에 따른 경제위기 등 파장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촛불 집회 촛불 집회( - 集會, )는 시민들이 광장 등에서 촛불을 들고 벌이는 집회이다. 주로 야간에 이루어진다. 세계 각 곳의 촛불 집회는 보통 비폭력 평화 시위의 상징이며, 침묵 시위의 형태를 띤다. 대표적인 것으로 1988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촛불 시위가 있다. 촛불시위는 시각적 효과가 크고, 일과를 끝낸 시민들의 참여가 용이하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점이 있다. 대한민국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상 일몰 후에는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어 있음 문화행사 등을 예외로 하는 것을 이용해 문화제 등의 명목으로 촛불시위가 진행되었다. 문화제는 노래 등에 대한 대중공연의 형식이 가능하며 구호를 외치거나 피켓을 드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이후 야간 집회 금지 사건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과 자정까지의 야간 시위 금지 위헌 결정에 의해 합법적으로 야간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응구기 와 티옹오 응구기 와 티옹오( , 1938년 1월 5일 ~ )는 케냐의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이다. 응구기는 1938년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당시 "백인 고지()"로 불리는 고지대의 리무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비옥한 고지대의 원래 주인이었다가 땅을 백인에게 빼앗긴 키쿠유 족 출신이며 기독교 신자로 자라났다. (나중에 그는 영어와 기독교를 배척하고 이름도 본명인 제임스 응구기에서 응구기 와 티옹오로 바꾼다) 캄팔라(현 우간다의 수도)의 마케레레 대학과 영국의 리즈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아이야 울지마라()', 사이의 강()', 한 알의 밀()'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주로 식민지에서의 문화 충돌과 기독교의 역할, 영국의 키쿠유 족 등 아프리카인들 탄압, 식민 지배에 대항한 마우마우 반란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케냐 독립 이후로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강력히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77년에는 나는 원할 때 결혼하겠다()'라는 희곡의 정치권 풍자가 정권의 미움을 사 응구기는 대니얼 아랍 모이 당시 대통령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수감 중에 그는 소설 피의 꽃잎()'를 집필하였다. 석방 후 1982년 케냐를 떠나 런던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1987년에는 대표작 마티가리(Matigari)'를 발표하였다. 후에 나이로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키쿠유어를 사용한 소설 집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0년에 발표된 '십자가의 악마(키쿠유어 : Caitaani muthara-Ini)'는 사상 최초의 키쿠유어 소설이다. 응구기는 참된 아프리카 문학은 아프리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92년부터는 뉴욕 대학(NYU)에서 비교문학과 공연학 교수로 있다. 율리시스 율리시스(Ulyss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다.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민국에서 2004년 5월 30일부터 4년 임기의 제17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이다. 2004년 4월 15일 목요일에 실시하였고 총 299명을 선출하였다. 3김시대의 종식과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당적 이탈과 열린우리당 창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김대중 전 대통령의 4천억 불법 대북 송금,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를 시점으로부터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변경하여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도입했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초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에 뒤처지던 지지도가 역전되어 2위로 올라섰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과 경합 내지는 근소한 차이로 1위로 올라서는 선전을 펼쳤다. 이에 일각에서는 17대 총선에서 과반수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제1당은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이 나왔는데, 2004년 3월 12일에 터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에 힘입어 당의 지지도가 급상승하였고,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선거운동이 효력을 발휘하고 여기에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정동영은 이에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 사퇴 및 비례대표 후보 사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총선 결과 원내 152석을 확보하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당은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지지도가 결정적으로 하락하였다. 이후 전당 대회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한 홍사덕 의원을 제치고 총선에서의 승리를 공약한 박근혜 의원이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근혜 대표는 차떼기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죄와 함께 거여 견제론에 바탕하여 선거 운동을 펼쳤고, 영남 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원내 121석을 확보하여 선거 운동 기간 초기에 예상되었던 참패를 면할 수 있었다. 원내 의석수 121석(지역구 100석/비례 21석) 중 지역구 100석 가운데 60석 정도는 영남권 지역이며 나머지 40석은 비영남권(서울 강남권, 강원, 경기 동남부)이다. 만약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 100석에 미달했다면 한나라당은 위기를 맞게 된다. 민주노동당은 사상 최초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權永吉) 대표의 지역구를 포함, 두 곳의 지역구에서 승리하였고, 13.0% 정당투표 득표율로 무려 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공동으로 통과시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반발로 지지도가 급락하는 타격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있는 호남 지역에서의 약세가 두드러졌고, 이어진 당내 내분의 결과 추미애가 새천년민주당의 선대 위원장을 맡았다. 추미애는 광주광역시에서 삼보일배를 하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지지세 회복을 도모했지만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에서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전라남도에서 5석, 비례대표 4석을 얻어 원내 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충청권 에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권에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하고 이를 실현에 옮기려는 상황에서 자민련이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공조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데 대해 충청권의 민심은 냉랭했고 그 결과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의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충청남도에서 겨우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민련 총재 김종필은 비례대표 순위 1번으로 등록하여 국회의원선거 10선 달성을 목표로 했지만 지역구 의석이 4석에 그치고 비례대표 득표 역시 2.8%로, "비례대표 득표율 3% 이상 또는 지역구 5석 이상"인 비례대표 의석 배분 규칙에 미달하여 원내 입성이 좌절되어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회의원 정당명부 비례대표 56석의 의석 배분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지역별 득표 열린우리당은 당초 170석, 많게는 200석까지 차지할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동영 의장의 노인발언으로 턱걸이하는데에 그쳤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 박근혜의 지도 아래 기사회생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데에 성공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중에선 최초로 원내에 입성한 정당이 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의 경우, 4석을 얻는데 그쳤고 봉쇄조항을 넘기지 못함으로써 비례 1번이었던 김종필이 낙선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교향곡 3번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 내림 마장조(작품 번호 55)는 1803년에 처음 작성되어 1804년에 완성된 교향곡이다. 처음에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기리며 이 곡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을 하려고 했으나, 1804년 5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름을 지워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1805년 4월 7일에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직접 지휘로 초연되었다. 헤이그 헤이그(, )는 네덜란드의 정부 소재지이다. ‘헤이그’는 영어식 이름이다. 네덜란드어로는 덴하흐( )라고 하며, 정식 명칭은 ‘백작가의 사유지’라는 뜻의 스흐라벤하허( )이다. 네덜란드 서쪽 북해 연안에 있으며 자위트홀란트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백작 플로리스 4세가 사냥하는 곳을 건설하기 위해 (지금의 Hofvijver) 연못 쪽에 땅을 구입했을 때인 1230년경 시작했다. 1248년 네덜란드의 백작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것으로 예상한 윌리엄 2세가 사냥 터를 궁전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궁전이 완성되기 전인 1256년 죽었지만 그곳의 여러 부분이 그의 아들 플로리스 5세에 의해 마무리 되었고 그중 아직도 남아있는 '기사의 홀'을 뜻하는 Ridderzaal은 가장 두드러지는 건물이다. 아직도 군주가 하는 연례 및 연설 등의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사용 중이다. 네덜란드의 모든 정부 부서와 대법원, 그리고 네덜란드에 주재하는 각국 공관이 헤이그에 있다. 헤이그에는 또 다음과 같은 여러 유엔 기구가 있다.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열린우리黨, 약칭 우리당)은 개혁국민정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내 정당 개혁, 정치 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 세력들이 2003년 11월 11일에 결성, 창당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은 개방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당의 4대 강령은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로서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 시대적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전국 정당’을 표방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수도 이전을 주장했으며, 2004년 주류정당들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2004년 총선을 통해 1988년 이래 최초로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되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야당과의 충돌이 일었고, 2005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의 거부로 대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한길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호남기반의 민주당과 합당하자는 수많은 대통합파 의원들의 집단탈당으로 과반이 붕괴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에 이어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에 흡수 · 합당되었다. 2003년 7월 7일에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등 개혁파 의원 5명과 9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강봉균, 김근태, 김덕배, 김명섭, 김성호, 김원기, 김태홍, 김택기, 김희선, 남궁석, 문석호, 박병석, 원혜영, 설송웅, 송석찬, 송영길, 송영진, 신계륜, 신기남, 유재건, 이강래, 이상수, 이원성, 이창복, 이해찬, 임종석,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정동채, 정세균, 천용택, 홍재형, 이종걸, 천정배 총 35명, 9월 23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김덕규, 배기선, 10월 23일에 유선호, 오영식, 우상호, 채상현이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하고, 11월 1일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최용규, 11월 3일에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 유시민 2명의 의원을 주축으로 하여 당원들의 주체적 참여 속에 2003년 11월 11일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2004년 3월 8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승국과 3월 30일에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조성준이 3월 30일에 입당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초 민주당을 깨서는 안 된다며 신당 창당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대부분의 민주당 내 친노 및 개혁파 세력이 탈당을 결심하자 결국 열린우리당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2004년 1월 11일 임시 전당 대회를 통해 정동영 의원이 첫 당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김근태 의원이 첫 원내대표가 되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밀려 3위를 기록하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하여 1위가 되었다. 한편, 같은 해 3월 9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제출되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표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3월 12일 한나라당 소속의 박관용 국회의장이 국회경비대를 동원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표결을 진행시킴으로써 탄핵소추안은 통과되었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수행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연합하여 통과시킨 탄핵소추안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부정적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을 비판하고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안 기각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리기까지 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같은 해 4월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그 해 5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9명 중 3명만이 인용 의견을 내고, 5명이 기각, 1명이 각하 의견을 냄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한다고 판결하였다. 한때 정동영 당 의장의 "60대 이상의 노인들은 투표 하면 안된다"는 노인 폄하발언 논란으로 제1당 달성이 어렵게 보이기도 하였으나,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의장의 비례대표 후보 사퇴 등 최선의 대응을 통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2석을 차지, 의회 과반수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어 헌법재판소는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가결안을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권한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이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수석 당원 자격으로 입당하였고, 한나라당의 ‘도덕성’ 문제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우리당은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총선 이후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사퇴로 신기남 의원, 이부영 전 의원이 차례로 의장직을 승계하였으며 천정배 의원이 5월에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04년 열린우리당은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121석의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에 완강하게 맞섰다. 결국 2004년 말,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내에 4대 개혁 입법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2005년 1월초, 당의장을 맡게 된 임채정 의원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선진사회협약 체결>을 제시하였으며 1월에 정세균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열린우리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2005년 4월 2일의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당선된 문희상 의원은 양극화해소와 동반성장, 그리고 당의 리더쉽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장 취임직후 실시되었던 4월 재보궐선거와 10월에 실시된 두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임중앙위원들과 함께 사퇴하였다. 이후 우리당은 비상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정세균 의원을 당의장에 겸임 선출하였다.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국회 통과시킴으로써 여야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한나라당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개혁 진영 내부의 자중지란만 초래하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8월 1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대연정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 데 대하여 "지역주의 집착당임을 재확인해준 것"이라고 성토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에 대한 당내 호남권 일부 의원들의 반발과 관련해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설득에 나섰다. 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이날 상임중앙위원회의 직후 브리핑을 통해 "박 대표 회견은 대단히 실망스럽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2006년 1월 2일 정세균 의원이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내정되어 당의장을 사퇴함으로써 1월 8일 유재건 의원이 임시 당의장을 승계했고, 1월 23일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우리당은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2월 18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국민적 지지회복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원들은 어려운 당상황을 극복하고 5.31 지방선거를 이끌어나갈 당의장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최고위원으로 김근태,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의원을 선출하였다. 2006년 1월 당시, 한나라당은‘사학법개정’을 반대하며 국회앞에서 끊임 없는 시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당은 국회정상화 노력을 통하여 2006년 2월 임시국회가 개최되도록 하였으며 지방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개선을 추진하였다. 우리당은 결국 2006년 5월 31일에 열린 지방선거에서 전북 한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이에 정동영 의장이 물러나고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직을 승계하였다. 김근태 의장은 <서민경제회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민경제회복과 기업의 투자활성화, 일자리창출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과 10월의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당은 연패했으며, 정당의 지지도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우리당은 지지자와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하였다. 우리당은 새로운 정치,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정치를 위한 최우선과제가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단결, 대통합신당의 건설이라는데 뜻을 같이 하고 2006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민주당과의 재통합, 시민사회 등 다양한 연대 등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대통합신당 건설을 앞당기고자 하는 고민속에 당의 일부는 탈당을 선언하였다. 2007년 1월 22일 임종인 의원을 시작으로 1월 23일 최재천, 이계안, 1월 28일 천정배, 1월 30일 염동연, 2월 3일 정성호 의원이 연이어 탈당하였다. 2월 6일에는 소속 국회의원 23명 집단 탈당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은 의회 제2당으로 변모하였으며 2007년 6월 에는 추가적으로 16명이 탈당하면서 2004년 4월 15일 총선때 152석 이었던 의석수는 73석으로 줄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대통합과 2007년 대선승리를 위한 전 당원의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하여 2월 14일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정세균 당의장을 선출하였다. 아직 낮은 국민지지도와 일부 의원들의 집단탈당등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속에서 전당대회가 자칫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우리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모인 약 72%의 당원들이 참석하여 <대통합을 통한 2007년 대선승리>를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원내대표 장영달 의원을 비롯한 최고위원들을 전당대회에서 선출하였으며, 이들에게 대통합신당의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2007년 8월 18일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공식 의결하였는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 중도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시민단체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2007년 8월 5일에 창당된 정당이다. 2007년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이 합당하였다. 2007년 8월 21일 열린우리당 사수파 당원들로 구성된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중앙선관위를 상대로 합당수리 무효확인 가처분 및 본안소송을 서울 행정법원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장에서 "우리당 당규에 따르면 전당대회 5일 전인 8월13일까지 대의원 명부를 확정하도록 돼있다"며 "그러나 당 지도부는 8월15일에 가서 재적 대의원 5천347명을 확정했고 다시 전대 당일인 18일 재적 대의원을 5천200명으로 임의 보고해 합당을 결의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당 지도부가 우리당 당헌.당규를 명백하게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불법과 반칙으로 얼룩진 8.18 전대는 원천무효"라고 덧붙였다. 2007년 8월 30일 `열린우리당 지킴이연대'는 "열린우리당이 추구한 정치.정당 개혁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 당의 법통과 정통성을 온전히 승계하기 위해 중앙선관위에 열린우리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를 등록했다"고 밝혔다. 주로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친노와 비노 실용파 친정,영진 성향의 친김근태, 중도보수 성향의 친고건계와 중진인 광장파 등이 있다. 2007년 들어 통합신당 움직임이 보이면서 대통합파와 당사수파로 분열하였다. 2003년 11월 11일, 우리당 창당대회는 모든 공직후보를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뽑고 지도부도 당원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당헌을 채택한 뒤, 김원기, 이경숙, 이태일 창당준비위원장들을 공동 임시의장으로 추대했다. 2004년 1월 11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2005년 4월 2일, 우리당 전당대회는 의장인 문희상 의원을 비롯한 상임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다. 2006년 2월 18일, 우리당 전당대회에서는 대의원 70%, 당원 여론조사 30% 예비경선을 통해 8명으로 압축한 후보들에 대해 선거인단이 1인 3표로 투표한 결과, 정동영 전 의장을 비롯한 5명을 상임중앙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07년 2월 14일, 2/3에 가까운 소속 의원들의 탈당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당 전당대회는 정세균 전 원내대표를 새 의장으로 추대하고, 추대된 지도부에 대통합신당 추진권을 위임하였다. 2007년 8월 20일, 통합신당과 우리당 합당수임기관 합동회의는 열린우리당의 대통합민주신당 흡수합당을 결의하였다. 자유한국당 자유한국당(自由韓國黨)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제20대 국회 원내 제2당이다. 상징색은 빨간색이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와 민주당 조순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을 때 두 정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출범하였다. 이후 잠깐 동안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하였으나, 이회창이 같은 해 대선에서 낙선함으로써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2002년 대선에서도 패배해 계속해서 야당 생활을 했으며 노무현 탄핵 소추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2006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하였고, 이후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자리잡았으며, 2008년 총선 때 압승을 거두어 여대야소 정국을 형성하였다. 이후 촛불 시위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등 잇따라 당이 존폐위기에 놓였으나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승리하여 여당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근혜가 대통령직으로부터 탄핵되어 새누리당은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이에 따라 상당수 지지자들이 이탈하면서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2018년에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에 패배하였다. 본래 한나라당 내에는 전신인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3개의 계파, 곧 민주정의계(민정), 통일민주계(민주), 신민주공화계(공화)가 존재했고, 그 외에도 소장파들이 여러 개 존재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보수 계열과 민주 계열이 있었으나, 이 중 민주 계열은 2003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이어 200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친 박근혜 계열이 친박연대로, 또한 보수 계열의 의원들이 자유선진당으로 이동하여 분열이 계속되었다. 한편 당의 주요 축이던 친이계, 친박계 간의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후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친박계가 당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도 이제까지의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꾸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진통일당을 흡수하면서 보수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고 제도권 보수정당중에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현재 원내 최장수 정당으로, 한나라당의 명칭을 쓰던 1997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20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와 비박계의 갈등이 깊어지고,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원내 제1당의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주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비박계의 동조로 가결된 이후 갈등이 커지면서, 비박계 29명이 이탈하여 바른정당을 창당하였다. 2017년 2월 13일에 당명을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변경하였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 당초 합당을 주도한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가 당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성향을 띠고 있었던 통일민주당은 합당 전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던 야당이었고, 경쟁 상대인 평화민주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이 운동권 영입을 하면서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김영삼도 재야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의 대립도 심화시킬 수 있는 철저한 4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정부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경쟁은 계속 되었고, 김영삼 자신의 차기 집권 가능성도 낮았다. 이리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목 하에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합당 직후 의석수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초거대 여당이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후 양심수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및 학교 경찰 투입 등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세를 몰아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첫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허나 이것은 계파 갈등만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열릴 대선의 후보자를 두고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지명하려 했으나, 김영삼을 축으로 한 민주계(통일민주당 출신)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은 탈당 후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출마했고, 한때 우호적이었던 민정계와 공화계(신민주공화당 출신)간의 갈등마저 심해지면서 공화계마저 민주계 지지를 선언한다. 차츰 당권이 민주계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는 총재로 선출되었지만, 민주계의 계속되는 반발과 '정치적 중립'을 명목으로 탈당한다. 이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민주자유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만, 당권은 이미 민주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당권이 넘어간 후에도 민주자유당은 여전히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로 분류되었다. 민정계는 여전히 강경보수색을 띄고 있었는데 반해, 민주계와 공화계는 온건보수색을 띄고 있었다. 새로 당권을 쥔 민주계 외에 나머지 두 세력은 군부 세력이었지만, 그래도 공화계는 민주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주도로 한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면서 공화계의 일선 후퇴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민주계와 공화계간의 갈등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계가 1995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3월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면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민주자유당은 민정계와 민주계로만 분류되었다. 같은 해 열린 지방 선거에서 탈당파들이 만든 자민련이 바람을 타면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노태우가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었고, 이어 과거사 청산이 시작되면서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의 원흉'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되면서 민정계마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민정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민주자유당'은 당권이 넘어가고도 '민정계가 만들었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1995년 11월 이름을 가칭 신한국당으로 개명했고, 이후 전면 물갈이를 단행하면서 민주자유당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강재섭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민정계와, 자유민주연합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잔류 공화계가 당에서 추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은 민주계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나 김문수, 이재오 등과 같은 민중당 인사 등 자신의 반대파들까지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은 5,6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신한국당은 19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획득하여 원내1당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약세가 두드러졌던 호남에서조차 1명이 당선되는 등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1988년, 1992년과 마찬가지로 여소야대 국회가 이어지자 정치공작을 펼쳐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을 영입시키는 수단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도를 추락시켰고, 동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 등 민주계조차 반민주적 성격을 보이면서 국민과 재야의 지지도는 한 층 더 추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파였던 이회창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계 입문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여당 내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경제 위기가 겹치고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이회창의 지지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선에서 패한 민주계의 이인제가 독자 출마를 하면서, 이회창과 김영삼 간의 갈등이 촉발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민주계 강삼재가 이회창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김영삼이 몰래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하루만에 중단 결정을 내려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계파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적용했다. 결국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가운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을 추방시키려고 했다. 이회창은 차츰 자신의 YS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어 11월 김영삼을 전격 추방시켰다. 결국 민주계마저 사실상 몰락하였고,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모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3일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도출해내 21일 양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를 이루었다. 이로써 신한국당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 조순을 총재로 한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1997년 11월, 과거 대법관 시절부터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취지로서 소수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는이회창이 이끄는 신한국당이 조순이 이끄는 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기존의 신한국당처럼 민주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총재도 민주당계인 조순(통합민주당 출신)을 총재로 추대했지만 실절적인 당권은 이회창이 쥐고 있었다. 이후 이회창은 15대 대선에서 활약을 보여 이인제를 누르고 2위 자리를 차지했고 대선 직전에는 오정은 전 청와대 행정관 등 이른바 '총풍 3인방'이 북한 인사와 접촉하여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총풍까지 동원하려 했지만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게 패하여 낙선,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총풍 사건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음). 그러나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과 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가 아닌, 한나라당의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둘 다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을 들춰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약 4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게다가 김영삼과의 갈등도 심해 민주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과 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게다가, 공동여당의 의석수를 누르고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주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정계 입문 전부터 유명세를 떨친 것은 물론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 사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대선 중 이회창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분당이 있었으나, 얼마 뒤 다시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 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결국 이회창은 또다시 낙선하였고, 이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회창도 이를 기점으로 모든 당권을 내놓았다.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당권을 쥐지 않게 되었다. 대선 직후 민정계인 박희태가 새 총재로 선출되었으나, 얼마 뒤 같은 민정계인 최병렬이 새 총재로 선출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국민들에 대한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노무현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노무현의 새천년민주당도 그를 압박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5명과 기타 진보/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하면서, 분당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2004년에 접어들어, 민주당은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노무현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동조하였고,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던 가운데 3월 12일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1987년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다. 여기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크게 실망했고, 지지도는 더욱 더 추락했다. 게다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 최초로 여성 대표가 되었다. 박근혜는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거여 견제론' 등으로 열린우리당을 견제했고, 영남에서 전폭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탄핵'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결국 제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내기는 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152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에게 참패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원내 1당의 지위는 빼앗겼고,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사실상의 여당 정도로, 명목상 야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 정책을 '국론 분열'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들은 결국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대연정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 4월 7일 자유민주연합(2004년 이후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졌다)을 흡수했으며, 여세를 몰아 동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대대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이미 박근혜는 모든 당권을 장악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랫동안 총재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잠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특별시 시장을 하면서 지지를 얻은 이명박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어 친이계가 당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친박계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계파 갈등이 심화된다. 박근혜는 경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명박에게 패했다. 일단 박근혜는 승복했지만, 계파 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명 생활을 하던 이회창이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여 지지도가 추락했지만, 이미지가 실추된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의 결과가 이미 예상된 상태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게 된다. 이어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다. 이명박의 취임으로 한나라당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었고, 취임 초반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게 적용하면서 2008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획득하여, 특히 서울에서 48석 가운데 40석를 차지했지만 충청지역에서 야권에게 패배했지만 일단 친여 성향 무소속 의원를 영입해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4개월 후 미국산 소고기 등에 관한 논란으로 시위가 터졌고, 이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은 7.4%까지 추락했고,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그에 못지 않게 추락했다. 2008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전 대표 박희태가 정몽준을 제치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지지율 추락의 결과로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했다. 이어 이듬해 치러진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선거 3개월전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안보 이슈에 상당한 호재를 받았지만 수도권과 영남 지역 등에서만 승리하였다. 지방 선거 참패로 인해 정몽준 대표가 사임했고, 이후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안상수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시기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갈등이 심해진 끝에 급기야 분당설까지 나왔다.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홍준표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최구식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수행비서관이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에서 선관위를 디도스로 공격한 데다가 야권연대 등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고, 12월 홍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었다.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2017년 1월 바른정당이 출범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탈당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탈당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음으로서 1987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당적을 버리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새누리당 시절부터 박근혜는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되었고, 이어 2012년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박근혜 취임 이후 새누리당은 계속해서 재보궐선거에서 연승했지만 2014년 4월 16일에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면서 위기에 몰렸고, 결국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에게 패배했다. 다만 기초단체장 선거는 117곳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15명를 뽑는 다음 달 7.30 재보궐선거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에서 사상 처음 전남 곡성-순천 지역구에서 이정현 의원이 당선되었다, 11명 당선되어 의석수 157석으로 국정운영의 동력이 강화되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내 공천권 문제와 계파간의 갈등,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정치·정책 방식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오히려 여당·대통령의 지지율는 정체되어 가고 심지어 공천을 받지 못한 이재오, 유승민, 주호영, 윤상현, 권은희, 류성걸, 강길부, 김태환 의원 등은 상향식 공천을 문제삼아 대거 탈당하고 심지어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서울 용산구의 진영 의원도 역시 새누리당에서 탈당하며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송광호, 박상은, 조현룡, 심학봉 의원마저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의석수도 감소되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한 조경태 의원은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원내 의석수도 146석으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언론들의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은 120~140석 정도 획득한다는 전망과 함께 수도권에서 야권에게 대참패할 것이 예상되었고 심지어 영남권도 야당, 무소속 후보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대참패를 예상했다. 결과는 그대로 충격적인 대참패였다. 122석를 얻어 원내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전국 유권자가 과반이 넘는 수도권에서 1여다야 구도 속에서 완패했으며 특히 서울에는 1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는 13대 총선 민주정의당이 세운 10석보다 못한 것으로, 최악의 성적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전통적 강세 지역인 강남3구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7석을 모두 차지했는데 20대 총선에서는 3곳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내주고 경기도에서 60석 가운데 19석만을 차지하고 인천에서도 4석만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영남지역에서 전통 텃밭 대구·경북에서 대구에서 3곳에서 패배하고 부산에서 6곳에서 더민주, 무소속 후보에게 헌납하고 경남에서는 4곳과 울산 3곳에서도 야권·무소속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호남권에서는 전남 순천시에서 이정현, 전북 전주시 을에서 정운천 후보가 당선되면서 새누리당은 호남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반면 제주도에서 야당 후보에게 완패하며 3회 연속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논란 끝에 지도부가 사퇴하고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친박계는 탈당파의 복당에 반대했지만 개원 이후 6월 16일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2016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소속 정당에서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던 강길부·유승민·안상수·윤상현의 복당을 승인했고 주호영·장제원·이철규의원에 대한 복당은 6월 23일에 승인했다. 그러나 조해진·류성걸·권은희 전 의원등 친유승민계 낙선자에 대한 복당은 승인되지 않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탈당자가 생기는 등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비박계와 일부 친박계는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거대야당과 동조했고, 국회에서 이들의 동조로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이후 친박계인 이정현 대표가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지 않았고, 이후 치뤄진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친박계 정우택 의원이 선출되면서 비박계 의원 30여명이 2016년 12월 말 대거 탈당하여 보수 정당 사상 최초로 분당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12월 16일 의원총회에서 119표 중 62표를 얻은 친박계의 정우택, 55표를 얻은 나경원을 누르고 원내대표가 되고, 이정현 대표가 사의를 밝혀 대표대행이 되었다. 이후 윤리위원 문제는 추가 인선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해결되었으나 비상대책위원장 인선 문제로 비박계와 친박계가 대립하였다. 비박계는 유승민을 비대위 위원장으로 선임할 것을 요구했으나 친박계가 거부하였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35명은 12월 27일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21일 발표하였다. 2016년 12월 27일 비박계 29명이 탈당해 또 다른 보수 정당인 바른정당을 결성한다.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파면으로 명목상 여당 지위를 잃었다. 3월 31일 홍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밀릴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에게 적지 않은 격차로 2위 자리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19대 대선 직전, 홍준표 대통령 후보의 당무 우선권 발동에 따라 옛 새누리당에서 탈당했던 바른정당 국회의원 12명과 2017년 1월에 탈당했던 정갑윤 의원까지 의원 13명이 다시 한국당에 복당하면서 일단 개헌저지선 100석을 회복했고 보수층이 막판에 결집하는데 불구하고 결국 2위를 기록했다. 세부적으로는 대경권에서 1위를 기록했으나 부울경에서 2위, 수도권에서 3위를 기록하는 등 처음 추세에 비해 선전하긴 했지만 호남권에서도 문재인 후보에게 2백만표 차이로 대참패를 당했다.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558만표 차이로 패배하면서 지난 17대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집권여당 생활은 9년 5개월만에 제1야당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개표 초반쯤 한국당 당사 찾아가서 기자회견를 통해 홍준표는 이번 대선 패배를 승복했고 한국당 복원하고 보수우파의 잃어버린 자존심를 일으키는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홍준표가 대선후보 자격으로 당헌 104조의 당무우선권에 따라 복당을 승인한 것과 친박의원 3인(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여 사면한 것에 대한 합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박계는 복당 승인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5월 12일 복당 조치와 친박 3인 사면을 추인했다.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19대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2017년 말에는 홍준표 대표의 주도로 보수통합을 계속 추진해 11월 초 박근혜를 제명했고 11월 6일 바른정당 통합파 9명의 의원이 자유한국당 복당 계획을 밝혔다. 이중 8명의 의원은 11월 8일에 탈당을 하였고 11월 9일 자유한국당 당원자격심사회의의 결정으로 국회의원 8인과 지역위원장 그리고 지방의원등 기타 복당신청자들의 복당을 승인했다. 자유한국당은 남은 1명인 주호영의원의 복당도 승인할 예정이지만, 나머지 바른정당 국회의원들은 탈당 후 복당 신청을 해도 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친박계는 홍준표 대표가 이들의 복당을 받아들인 것에 반발하였다. 이후 홍준표의 성완종 리스트 재판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친홍준표계 바른정당 복당파 김성태가 결선투표 없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친홍계 바른정당 복당파가 완전히 당권을 잡았다. 한편 홍 대표는 복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바른정당을 탈당한 김세연 의원과 박인숙 의원을 받아들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 5곳과 경기·인천지역를 사수하고 서울를 탈환한다는 전력를 세워서 승리한다고 각오했지만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드루킹 게이트과 안희정 충남지사의 성추행 스캔들으로 인해 악재가 발생되어 역전를 할수 있는 기대를 걸었지만 그러나 대구 북구 갑 정태옥 의원의 특정 지역 비하 발언으로 악재가 발생하여 선거판세에 상당한 영향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수도권 광역·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정태옥 의원는 한국당에서 탈당를 시키고 사태를 수습했지만 결국에는 대구·경북권를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역시 226명 중 53명만 배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수도권 66곳 지역 가운데 4곳에서만 승리하여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기록하고 만다. 특히 수도권 빅3 가운데 완패하여 경기·인천를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심지어 부울경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23년만에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고 또한 동시에 치러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도 12곳 중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던 경북 김천에서 한국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후보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겨우 방어하는 성공했지만 경북 김천를 제외한 11곳에서 모두 패배했다. 자유한국당의 역사상 최대 참패로 끝나면서 홍준표 대표는 사퇴하였고, 김성태 원내대표가 대표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7월 11일에는 여의도에서 영등포동으로 당사를 옮겼다. 김성태 대행은 "여의도 당사의 15%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기존의 기득권과 잘못된 인식, 사고를 전부 여의도에 버려두고 여기서는 오로지 국민의 삶만 생각하는 진정한 서민 정당으로 태어나겠다"고 밝혔다. 한편 당 체제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기로 하였으나, 이회창, 김용옥, 이국종, 최장집 등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모두 비대위원장직을 고사하였다. 그러나 7월 16일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가 비대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김 비대위원장은 인적청산보다 가치와 비전 정립이 먼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기획주의에 입각해 기업을 간섭하는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당에)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면서 시장자유 확대를 강조하였고,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국가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임명한 김대준 비대위원의 더불어민주당 당적 및 전과 논란이 발생했고, 김대준 비대위원은 사퇴하였다. 또한 인적청산 등에서도 소극적이고, 가치와 정책 재정립도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론조사상으로도 지지율은 횡보 상태이며 원내 5당인 정의당에게 지지율을 추월당했다. 2018년 10월 1일, 전원책 변호사가 자유한국당 내 인적쇄신을 책임질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 위원이 되었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조강특위에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전 변호사는 대규모 인적청산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당대회 개최 시기 등의 현안을 두고 전 위원과 당 비대위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결국 11월 9일 당 비대위는 전 위원에게 문자로 해촉을 통보했다. 2018년 말로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부의 연이은 악재로 인하여 반대 급부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2019년 초 리얼미터 조사 결과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20% 후반을 기록했으며,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한 자리수까지 좁혔다. 그러나 친박계 김진태,김순례,이종명의원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망언으로 인해 큰 악재가 발생되어 지지율이 큰폭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지지율이 상승하기 시작했고, 황교안 대표가 취임한 뒤에는 30%대의 지지율도 회복하였다. 그리고 201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서 통영 고성 지역구에서 정점식 후보가 여유롭게 승리하고, 창원 성산에서 강기윤 후보가 정의당의 여영국 후보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선전했다. 자유한국당은 과거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였으나 2016년 총선 참패 이후 지도체제를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 선출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 지명직 최고위원, 당연직 최고위원(원내대표,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한다. 당 대표와 선출직 최고위원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득표순으로 선출되며, 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협의를 거쳐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대변인 등의 당직을 임명한다. 자유한국당 의원 총회는 자유한국당의 원내단체로 두 개의 산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원내대책위원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현재 원내대표는 나경원 의원이다. 정책위원회는 당 강령 및 전국규모 선거의 정책공약 등 주요정책을 수립한다. 현재 정용기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다. 최고위원회의의 하부 기구로 사무처는 당무집행기구, 원내대책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의 지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이 관할하는 중앙사무처는 당의 조직관리, 재정, 행정지원, 인사를 총괄하며, 시, 도당 사무처를 관장한다. 현재 박맹우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에는 대표최고위원이 통솔하는 전략기획본부가 있어 주요정치현안 및 전략을 관장한다. 홍보기획본부는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및 당 활동 등의 홍보를 관장한다.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 한양빌딩에 있다.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최병렬 대표가 2003년 6·26 전당 대회에서 ‘포스트 이회창’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전성기를 맞았으나 '차떼기'논란과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한나라당은 제17대 총선 참패 위기에 처하였으나 박근혜 신임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박근혜 대표는 16대 대선 이후 불거진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 당사를 세우고 당을 쇄신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2005년 7월 28일 불법 대선 자금과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이후 참여정부의 4대 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대연정을 거부했다. 2003년 11월 30일 최병렬 대표는 '신행정수도 이전' 통과를 약속했고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2004년 6월 지자체 재보선 승리 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로 돌아섰고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이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합의하여 가결시켰다. 당의 경선중 박근혜 측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친이(親李, 친이명박) 진영과 친박(親朴, 친박근혜)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측은 결과에 승복해 갈등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단탈당사태가 일어난건 공천파동에서였다. 이후 친박연대가 창당되면서 미디어법 등 몇 가지 정책들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있어왔으나,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사수안을 번복하고 제안한 세종시 수정안 방침에 대해 친박연대를 비롯한 당의 주요 친박계 의원들이 반발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박근혜는 원안 추진을 재차 강조하여 화합의 가능성이 낮아진 데 이어 심지어 분당 가능성까지 나왔다. 이전에 홍준표는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추진론 발언에 대해 '탈당'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이었고, 정몽준이 당론을 변경해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책임지실 문제"라며 정몽준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며,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까지 박근혜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야당들이 추진했던 정운찬 총리 해임안을 여당 내 친박계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친이계 의원들은 "총리 해임안에 찬성하는 것은 분당하자는 것" 이라며 계파간의 대립이 극화되었다. 6월 29일 세종시와 관련해서 친박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야당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친이, 친박간의 갈등이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였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민주당 합동 전당대회는 양당의 합당과 한나라당의 출범을 의결하고, 9개항의 강령과 62개항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겸 명예 총재로, 민주당 조순 총재를 총재로 선출했다. 이어 조순 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를 대표위원으로 지명했다. 1998년 4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표직을 폐지하고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조순 총재와 이회창 명예총재를 각각 총재와 명예총재로 재추대했다. 정권교체와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 패배 이후 4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해 여당으로 향함으로써 한 때 과반을 차지했던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조순 총재는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1998년 8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명예총재를 조순 총재를 대신할 신임 총재로 선출했다. 2000년 5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총재를 총재로 재선출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전국순회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 후보가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것에 자극을 받은 한나라당 역시 당원 50%, 국민 50% 총 50000명의 선거인단을 모집해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순회경선을 실시했으나 이회창 후보의 독주로 인해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5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경선 결과에 따라 이회창 전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그에 따라 최고위원 경선을 실시해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3일 뒤 제1차 최고위원회의는 최고위원 최다득표자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한나라당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재검표 결과 선거 결과에 거의 변동이 없음에 따라 서청원 대표는 대선 패배와 대선 불복에 책임을 지고 박희태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한 뒤 사퇴한다. 그 뒤, 2번의 대선 패배를 겪은 한나라당은 당 정치개혁특위의 개혁안에 따라 당 대표와 지역운영위원 체제를 택하고, 경선을 위해 일반당원 50%, 국민 50%로 구성된 22만 227446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2003년 6월 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따라 최병렬 전 서울시장을 대표로 선출했다. 2004년 2월 22일, 불법대선자금사건으로 구속된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역풍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최병렬 대표가 퇴진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인한 역풍으로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3월 18일에서 3월 23일로 연기하고, 국민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상 최초로 대표 경선에 여론조사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3월 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부총재를 과도기 대표로 선출한다. 2004년 5월 19일 한나라당 당선자총회는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 지도체제를 도입하고, 대의원 50%, 여론조사 30%, 인터넷 선거인단 20%가 1인2표로 각각 대표,최고위원을 뽑아 1~5위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고 1위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7월 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당헌당규를 개정한 뒤 투표에 들어가, 여론조사, 인터넷투표와 합산해 박근혜 전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한편 소장파인 원희룡 의원과 김영선 의원이 여론조사와 인터넷투표에서의 강세로 중진인 이강두, 이규택 의원을 꺾고 최고위원직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박근혜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권을 장악하려는 친이계의 이재오 전 원내총무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박계가 지원한 강재섭 전 원내대표의 대결이 되었다. 7월 11일, 1인 2표제로 대의원 70% 여론조사 30%를 반영한 최고위원 경선 결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강재섭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후보자 선출 선거.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오히려 2년간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에서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내고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를 압승으로 이끈 박근혜 전 대표가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 측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후보 측은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3월 18일 결정된 경선룰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었고, 전당대회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경선룰에 반발해 곧바로 탈당한 뒤, 후에 창당되는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였다. 6월 13일 후보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이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중 고진화 후보는 7월 20일 사퇴한다. 여권에는 지지율이 높은 후보도 없었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은 지리멸렬한 반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를 상회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졌고, 달아오른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측에는 BBK 문제가, 박근혜 후보 측에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붉어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어지며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타 후보들은 1985년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형 이상은 씨가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기고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을 문제 삼았다. 전당대회를 6일 전인 8월 14일 검찰은 형 이상은 씨의 몫 일부가 이명박 후보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하면서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다음날 대검찰청 정동기 차장이 곧바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 8월 20일, 여론조사에서 크게 격차를 벌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8년 7월 3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친박계의 지원을 받는 허태열 전 충북지사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을 추인하고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 국민 여론조사 30%를 합산한 투표 결과, 안상수 전 원내대표가 홍준표 전 원내대표와 나경원 전 원내부대표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5월 8일, 안상수 지도부가 4.27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한나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황우여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을 맡도록 했다. 6월 7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지도부 선출 경선에 70% 반영되는 선거인단을 대의원, 당원, 청년선거인단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7월 4일, 경선 결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홍준표 전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친박계 핵심 유승민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12월 7일, 10.26 재보선 패배와 뒤이은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으로 당 지지율이 추락하자,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최고위원이 동반사퇴했고, 이틀 뒤인 12월 9일 버티던 홍준표 대표마저 사퇴하자 지도부가 붕괴되어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지도부 사퇴로 대표 권한대행을 맡았던 나경원 최고위원마저 12월 11일 사퇴하자 12월 19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박근혜 전 대표를 만장일치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개정을 의결했다.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황우여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은 경선을 통해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2012년 11월 6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16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정진석 대표권한대행의 추천으로 김용태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되었으나 친박계의 반발로 5월 17일 전국위원회가 무산되면서 김용태 내정자는 사퇴하였다. 이후 6월 2일 다시 열린 전국위원회가 김희옥 동국대학교 총장을 혁신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고 들어선 새누리 혁신비상대책위원회는 7월 14일 5차 전국위원회를 통해 대표 권한을 강화하고 최고위원과 분리 선출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친박계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는 대표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비박계에서는 이에 맞서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판론이 나왔으나 6월 28일,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불출마를 결정하자 7월 6일, 최경환 전 부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친박계는 서청원 전 대표를 추대하려 했고, 이에 나경원 전 최고위원이 출마를 고심하기도 했으나 7월 19일 서청원 전 대표 역시 불출마를 선언하자 다음날 나경원 전 최고위원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친박계는 홍문종 전 사무총장에게 출마를 권유했으나 7월 27일 홍문종 전 사무총장 역시 불출마를 선언했고, 막판에 출마를 고심하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역시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대표 경선에는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 정병국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용태 전 혁신위원장 내정자와 한선교 의원 등이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된 친박계 측이 오히려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당내 조직력이 강화되면서, 비박계에서는 단일화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고, 7월 29일, 정병국 의원과 김용태 의원이 여론조사를 통해 정병국 의원만이 후보로 등록했고, 8월 5일, 주호영 후보와 정병국 후보 간 여론조사를 통해 주호영 후보가 비박계 단일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비박계 대권주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에 친박계 역시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적 멀어진 이주영 후보나 한선교 후보 대신 이정현 후보를 지원하면서, '오더 투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2016년 8월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이정현 전 최고위원을 당대표으로 선출하였다.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비대위원장에 인명진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2017년 2월 13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자유한국당으로의 당명개정을 의결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3월 12일 자유한국당은 31일 전당대회를 개최해 여론조사 50%, 책임당원투표 50%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까지 진행된 후보 등록에는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김진태 의원,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안상수 의원, 원유철 전 원내대표, 조경태 의원,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용한 청년위원장이 등록했다. 2017년 3월 18일에 실시된 1차 컷오프에서는 김진, 신용한, 조경태 후보가 탈락했다. 2017년 3월 20일에 실시된 2차 컷오프에서는 안상수, 원유철 후보가 탈락했다. 2017년 3월 31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책임당원투표 50%, 여론조사 50%를 통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홍준표 후보를 선출하였다. 2017년 7월 3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홍준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2018년 6월 14일,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하자 김성태 대표권한대행은 6월 24일 안상수 전 인천광역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비대위원장을 물색하였고, 김병준 전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정되었다. 7월 17일 자유한국당 전국위원회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2018년 11월 29일,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이 입당한 데 이어 2019년 1월 15일, 야권 차기 대권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입당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유력한 차기 대표로 대세론을 형성하자 1월 30일에는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홍준표 전 대표가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다. 2월 27일로 예정된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는 황교안 전 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홍준표 전 대표를 비롯해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특임장관, 김진태 의원 등이 출마를 선언했다. 2월 7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2월 27일부터로 발표되자 황교안 전 총리와 김진태 의원을 제외한 오세훈 전 시장, 홍준표 전 대표, 심재철 전 부의장, 안상수 전 시장, 정우택 전 원내대표, 주호영 전 장관 등은 전당대회를 2주 이상 연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비대위와 선관위가 27일 개최를 강행하자 결국 해당 후보 6명은 2월 10일 전당대회 보이콧을 선언한다. 결국 2월 12일 황교안 전 총리, 김진태 의원과 입장을 번복한 오세훈 전 시장만이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다. 2월 8일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의원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및 폄하 논란이 확산되자 윤리위원회는 2월 14일 이종명 의원을 제명하고 당대표 후보로 등록한 김진태 의원과 최고위원 후보로 등록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는 유보해 다시 한 번 논란을 일으켰다.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김진태 후보의 막말에 이어 압도적인 지지율의 황교안 후보까지 '태블릿 PC 조작설'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 등 김진태 후보의 극우적인 주장에 동참하며 당이 극우화되어간다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논란들 속에 중도층이 이탈하는 대신 김진태 후보의 선동 속에 극우세력들이 연설회장에서 소란을 피워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9년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는 황교안 전 총리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 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 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 이런 집권당에서의 사면 논의에 대해 1997년 8월 31일,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간담회에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중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여 동서화합의 길이 열리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이어 "그들(전두환 노태우)이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총재는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용서론을 강조했다. 이렇게 김대중후보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내세우자 경향신문은 "화해의 정치인'부각 영남 끌어 안기6共(공)세력들도 포용 색깔론 차단 효과까지 ‘용서’광주여론도 한몫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김대중))총재가 정치권의「뜨거운 감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10월 23일,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국회 본회의 연설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김대중후보가 당선되면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김대중 후보를 대신해 대표 연설에 나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수 부총재는 집권 정치 보복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대중후보의 약속을 거듭 강조하고 아무런 전제 조건을 달지 않은 채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다. 그에 대응하여 9월 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은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곧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회창과 김대중이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 공약을 내세운 것에 대해 이인제도 경쟁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12월 21일, 김대중당선자가 김영삼대통령과 협의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한 것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평가했다. 뉴욕타임스지는 김대중 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동의한 것은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묻어둘 의사가 있음을 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고 미국의 ABC방송은 김대중 당선자가 40년간에 걸친 고난의 정치역정을 용서로써 마무리 짓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ABC방송은 이어 김 당선자의 용서는 경제회생이라는 어려운 임무를 떠안게 된 새 지도자로서 정치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김 당선자의 이번 조치가 국가 화합과 지역감정 해소, 그리고 경제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화합책의 하나로 김대중대통령당선자는 두 명의 전임 독재자들에 대한 사면에 동의했다. 김영삼대통령 측 대변인은 김대중당선자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동의했다고 밝혔으나 김대중 당선자측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우리가 그들(김영삼,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 전두환, 노태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뿐"이라고 밝혀 사면에 대한 둘의 미묘한 신경전을 보도했다. 당시 사면에 대해 1997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도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유력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 후 사면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새누리당의 공약이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당은 무상급식을 야당의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비난해 왔으나 2010년 6월 2일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자 제한적 무상급식 확대 방침을 밝혀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제기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해서 당은 오세훈이 추진하는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2011년 8월 0세 무상보육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무상정책은 추진하는 정책적 모순점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3조원이 필요한 4세까지의 영유아 보육에 대한 무상보육은 세금폭탄이 아니고, 서울시에서 부담해야하는 700억원의 초중학교 무상급식 비용은 세금폭탄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민주당이 내놓은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반대해왔던 당시 한나라당은 황우여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로 긍정적인 쪽으로 급격히 정책을 선회한것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9년 7월 21일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당시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수정안 내용과 관련, “한나라당은 정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LG로부터 150여억 원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트럭째 받은 것을 비롯, 대통령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 때문에 당에 '차떼기정당'이라는 명칭이 씌워졌다. 2006년 지방선거에는 공천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공천 뇌물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004년 2월 4일 최병렬 당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당사와 천안 연수원 등 당의 재산을 팔아서 국민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이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발언을 해 국회 파행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당의 공천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지도부가 뇌물을 받고 비례대표를 공천해 해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7년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학생을 고용해 특정 후보에 유리한 댓글을 작성하도록 한 한나라당 당원 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2018년 6월에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이 10년 넘게 매크로를 이용한 인터넷 여론조작을 해왔다는 폭로가 나왔다. 지난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한나라당 의원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직원에 따르면 2006년 지방 선거 때부터 한나라당에서 매크로를 이용한 댓글과 공감 수 조작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매크로를 활용한 여론 조작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활동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변경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2014년 지방 선거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SNS 소통본부 상황실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매크로를 활용해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가짜 뉴스를 확산시켰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 사건을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으며 드루킹 특검에도 이 사건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요구하기로 했다. 당시 한나라당 측에서 댓글 알바를 고용해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아고라의 일부 IP를 조사해 보니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아고라에서 욕설댓글을 집단적으로 작성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이 의원은 지적했다. 한나라당과 국민소통위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바라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2007년 1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중앙일간지의 원색적인 연재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최연희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들은 개인 의원들의 실수이지만, 한나라당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터지면서 '성나라당', '성희롱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언급되며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2014년 9월 전 국회의장이자 새누리당 상임고문이던 박희태 씨가 골프장에서 여성 캐디의 가슴을 찌르는 등의 성추행으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 항소하였으나 2심 재판부에서 기각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의 원심이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2017년 1월, 당내 윤리위원 새누리당은 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명박의 당선으로 집권여당이 되었다.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은 통과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새누리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등과 관련되어 야당이 반대하였던 법안 등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는 정상적인 검토,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새해 예산안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3년 연속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야당과의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되었고 미디어법과 재협상한 한미FTA,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새누리당에 의해 날치기되었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새누리당이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비판했다. 2011년 예산안은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처리되었다. 날치기는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처리된것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12월 28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들은 집회를 갖고 날치기 7적을 규정하며 사퇴를 요구했다. 2012년 총선 다가오자 이명박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할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것인지 문제였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던 중 칼럼에서 돈봉투와 줄세우기가 난무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지 말고 박근혜 의원에게 당권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가 건네진 사실을 칼럼에서 언급하면서 이런 폐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로 생긴 종편 채널들이 시청률 경쟁을 하면서 한 종편에서 고승덕 의원을 출연시켜 대담을 하는 중에 위 칼럼을 근거로 돈봉투 사건을 흥미위주로 다시 꺼내면서 이를 뉴스로 확대 재생산하여 국가적으로 큰 논란이 생겼다. 위기가 커진 새누리당에서는 전당대회 개최 없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게 되었고, 고승덕 의원이 언론에 누가 돈봉투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자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위 사건에 대한 수사의뢰를 하게 되어,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서 박희태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한 사실을 진술하게 되었다. 돈봉투는 고승덕 의원 외에도 다른 의원들에게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으며, 박희태 국회의장 전 비서 고명진씨가 당시 캠프 상황실장인 김효재 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돈봉투를 진술하였다는 논란이 거듭되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부인하던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수석비서관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수석비서관에서 결국 사퇴하였고,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수사는 축소되어 고승덕 의원 외에 돈봉투가 건네졌다는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박희태 위원만 벌금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승덕 의원이 친박계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고승덕은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박희태는 이명박에 의하여 특별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고승덕 의원이 당시 관행처럼 행해지던 전당대회 돈봉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도개선 차원에서 썼던 칼럼에서 시작했다가 특정인에 대한 흥미 위주 형사사건으로 변질되어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건네진 사건으로 축소되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9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법 개정을 하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차량 등 실비용을 당원협의회나 지역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일부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정당이 아닌 전당대회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돈봉투를 건네는 행위는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로 남게 되었다. 2012년 12월 13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 여러대로 여론 조작 작업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해당 오피스텔 입구에는 선거 6일 전을 알리는 문구와 ‘President War Room(대통령 선거 상황실)’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으며, 박근혜 대선 후보가 발행한 임명장과 SNS 미디어본부장 직함으로 된 명함이 다량 발견됐다. 선관위 등에 따르면 이 사무실 대표 윤정훈은 2012년 대선 기간 새누리당‘국정홍보대책위원회’ 총괄팀장 겸 국민편익위원회 SNS미디어본부장을 맡았으며,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미등록 선거운동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 7명을 고용해 인터넷, SNS에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혀 졌다. 이들은 박근혜 대선 후보에게 유리하고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글을 트위터에 게시하고 리트윗(공유)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은 이와 관련해 당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당에서 돈을 들여 사무실을 차려주거나 지원한 사실이 없다. 개인적으로 사무실을 차려놓고 활동한 것으로, 새누리당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2012년 12월 14일 선거관리위원회는 ‘SNS 불법 선거운동’이 이뤄진 여의도 오피스텔의 임차 비용을 박근혜 대선 후보 선대위 권아무개 새누리당 국정홍보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김아무개 새누리당 수석부위원장이 지급했다고 밝혔고, 특히 “직원들의 리트윗 활동 실적을 ‘박근혜 후보를 위한 가계부채특별위원회 SNS 활동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 새누리당 가계부채특위 안상수 위원장 에게 수시로 보고한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윤정훈은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새누리당의 뿌리가 3당 합당에 있는 만큼 군사정권에서의 폐해, 친일파 청산 등 과거사 정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박근혜는 5.16 쿠데타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해 비판을 받았으며, 김무성 의원 등 다수의 인사들이 5.16 쿠데타는 군사혁명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빚었다. 박근혜 정부들어 주요 인사청문회 대상 후보자들이 5.16 쿠데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는 것 또한 비판 받는다. 이와 같이 상식에서 벗어난 과거사 인식 문제의 원인이, 군사정권에서 정작 책임을 져야 했던 민정당 인사 거의 대부분이 3당 합당을 거치며 보수 정당에 그대로 흡수되었던 데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문재인은 "군부독재,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인권을 유린했던 정치세력이 그 과거에 대해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내가 볼 때 살아있는 노인들 99% 이상이 친일한 사람들”이라며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친일 안 하고 배겼겠는가"라고 발언하여 친일논란을 불렀고, 박정희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과거 친일파의 후손, 재벌과 친인척 관계를 맺어 카르텔을 형성하였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여론의 친북종북몰이와 각종 비리를 묵과한다는 비판도 있다. PDF PDF(Portable Document Format, 이동가능 문서형식);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전자 문서 형식으로, 일반 문서 및 문자, 도형, 그림, 글꼴을 포함할 수 있다. PDF는 컴퓨터 환경에 관계없이 같은 표현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장치 독립성 및 해상도 독립성을 가진다. PDF는 2008년에 ISO 32000 오픈 포맷으로 표준화되었으며 구현을 위해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는다. 1993년 어도비사 PDF 1.0버전과 어크로뱃 1.0 버전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초기 도입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도비사가 어도비 어크로뱃을 무료로 배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PDF의 초기 버전은 기능적으로 당시 환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외부로의 하이퍼링크가 지원되지 않았고, 파일 사이즈가 너무 커서 당시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다운로드하거나 파일을 렌더링(rendering)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특히 당시에는 이미 경쟁 파일 포맷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면, Envoy, Common Ground Digital Paper, Farallon Replica가 있다. 심지어 어도비사의 포스트스크립트(.ps)는 같은 회사의 PDF에 비해 우수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1995년에는 AT&T Lab에서는 도서관의 도서나 각종 문서의 보관을 위해 새로운 파일 포맷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후 DuVu 프로젝트로 발전하여 .djv/.djvu 포맷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이 포맷은 e북이나 온라인 카탈로그, 이미지 파일 교환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어도비사는 어크로뱃 리더(현재의 어도비 리더)를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하였으며 PDF 포맷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PDF는 온라인 상의 인쇄용 문서의 실질적 산업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서 형식이나 제작 기술에 독점적인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서 형식이 공개되어 어도비 시스템즈에서 개발한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In-Design 뿐 아니라 다양한 상용 프로그램 및 무료 프로그램에서 PDF를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서가 표현 가능하고, 암호화 및 압축 기술을 통해 내용의 변조가 어려우며, 사용권을 다양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지원 가능하다는 점이 다른 문서 형식과 비교될 수 있는 장점이다. 또한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서 실용적인 가상 프린터로 사용되기도 한다. 어도비 시스템즈에서는 PDF를 읽을 수 있는 어도비 리더 프로그램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를 통해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맥 OS, 리눅스 등에서 읽는 것이 가능하다. 어도비사에서는 PDF 제작을 위한 어도비 어크로벳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램 역시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PDF를 읽거나 또는 읽고 쓰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드롭박스, 원드라이브 등의 많은 클라우드 스토리지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PDF 보기를 지원한다. 워드 프로세서 워드 프로세서()는 각종 전자 문서를 읽고 고치거나 작성할 수 있는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뜻한다. 또,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인기있던 독립형 사무 기기의 일종을 뜻하기도 하는데, 문서 편집을 위한 타자기에 자판 입력과 인쇄 기능을 더한 것이 특징이었다. 워드 프로세서는 2개의 천공 테이프 스테이션이 있고 하나의 테이프를 다른 테이프로 교체하는 것(한 테이프는 이름과 주소가 포함 되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송신할 본문를 포함함)을 허용하는 Friden Flexowriter에서 파생되었다. 줄 바꿈 기능은 없었으나, 이 기능은 IBM의 Magnetic Tape Selectric Typewriter에 의해 시작되었다. 단순한 문서 편집기와는 달리 문서의 문단 모양, 글꼴 모양, 표 편집, 그림 삽입 등을 외양에 집중하여 문서를 작성할 수 있으므로 사무실이나 학교 등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주로 쓴다. 초기에는 한글, 영문 등 단어나 문장 입력과 간단한 편집에 집중되었으나 고급 사용자들이 워드프로세서를 전자출판에 응용하면서 교회 주보, 수학 문제지 등의 간단한 전자출판도 가능하게 되었다. 아래아한글의 경우 도스용 시절부터 일부 고급 사용자들이 한글과 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 선전을 위해 발행하던 월간지였던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 자신들이 개발한 전자출판 노하우를 투고할 만큼 일부 사용자들에 의해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애용되었다. 하지만 워드 프로세서의 전자출판 기능은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전문적인 전자출판 프로그램에 비해 출력 기능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쿼크익스프레스의 경우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다양한 인쇄에 맞춘 망점 조절이 가능하지만, 워드 프로세서는 망점 조절 기능이 없다. 워드 프로세서 파일은 그림이 들어갈 경우 상대적으로 문서의 용량이 커지고, 워드 프로세서별 확장자나 형식이 달라 같은 제품임에도 버전별로 호환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는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로 흑백 액정, 워드프로세서, 전열 방식의 프린터, 충전용 배터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1983년 개발된 큐닉스 글마당이며, 그 뒤를 이어 고려시스템의 명필, 금성사의 장원 등이 개발되었다. 그외 대우전자에서 개발된 르모도 사용되었다. 기존의 타자기에 비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는 문서의 수정과 편집이 용이하고 별도의 출력도 가능하여 수동식 타자기를 대체할 사무용품으로 큰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전자식 타자기도 보급되었고, 곧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장착된 개인용 컴퓨터와 프린터가 급격히 보급되면서 그 경제성이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까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를 워드프로세서 실기시험 수검기종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 폐지되었고 워드프로세서 전용기도 전자식 타자기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현재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는 다음과 같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워드프로세서 점유율은 한/글이 2 정도를, MS 워드가 8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는 MS 워드가 90% 넘는 점유율을, 한/글은 0.4% 정도의 점유율을 보인다. 문서 편집기 문서 편집기(文書編輯機) 또는 텍스트 에디터()는 단순한 문서 파일을 편집하기 위해 쓰이는 소프트웨어이다. 이진 형식이 아닌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형식의 파일을 읽고 간단한 조작으로 편집하여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 중의 하나이다. 텍스트 에디터로 생성된 일반 텍스트 파일과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워드퍼펙트, 또는 OpenOffice.org와 같은 워드 프로세서로 생성된 문서파일에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일반 텍스트 파일은 파일에서 표현된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편집하고 나타낼 수 있다. '표시'할 수 없는 유일한 문자는 사용된 문자 집합의 제어문자이다; 실질적으로 줄바꿈, 탭 그리고 폼 피드(formfeed)를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요즘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자집합은 ASCII로 일반 텍스트 파일은 과거에 문서작성을 할 때(예를 들면 구체적인 사용설명, 혹은 사용 안내)보다, 프로그래밍과 구성을 하는데 더 자주 사용된다. 문서는 일반적으로 문자 집합을 정의하는 것 이외에도 구체적인 파일 포맷 "제어 문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굵게, 기울임꼴, 글꼴, 열, 표 등의 기능을 활성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일반 페이지 포맷 기호들이 일단 바탕화면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가장 간단한 워드 프로세서의 기본화면에서 볼 수 있다.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일반 텍스트 파일을 편집하며 기본 텍스트 파일 형식으로 저장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작성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작성해야 한다. 저장 형식을 지정할 때에, 특히 소스 코드, HTML, 그리고 구성, 제어 파일과 같이 특히 더 중요한 파일에는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프로그램을 초기값으로 그대로 둘경우, 파일은 "특수 문자"를 포함하게 될 것이며 파일이 의도하고자 했던 유틸리티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한/글 글은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된 워드 프로세서이다. 제품 이름은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ᆞ를 쓴 글로 표기하고, ‘HWP(Hangul Word Processor의 준말)’ 또는 ‘아래아 한글' 또는 '한/글'로 불린다. 2014년 기준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이다. 도스용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는 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유닉스, 리눅스, 매킨토시와 안드로이드 및 아이폰용으로도 제작되고 있다. 한/글로 작성된 문서 파일은 파일 확장자로 .hwp를 갖고 있으며, .hwt로 저장하여 양식(Form) 문서로 저장할 수 있다. 2010년부터 HWP의 개방형문서포맷인 OWPML은 KS X 6101로 등록되어 있으며, 확장자로 .hwpx 또는 .owpml 을 지원한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이찬진은 1988년 가을 서울대 컴퓨터연구회에서 만난 김형집, 우원식, 김택진과 함께 아래아한글 이라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해 베타 버전인 0.9판을 1989년 3월에 발표하였다. 베타버전인 0.9판은 5.25인치 360kb 디스켓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린터로 출력할 수는 없었다. 최초의 상용버전인 1.0판이 1989년 4월 24일 출시되었다. 5.25인치 2D (360KB) 플로피 디스크 3장의 용량으로 만들어진 한/글 1.0판은 종로 전기/전자 상가인 세운상가의 소규모 유통업체 러브리컴퓨터 라는 회사를 통해 4만 7천 원의 가격으로 출시되었다. 1.0 판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주) 베타버전과 같이 3장으로 이루어진 1.0 버전에서 프린터로 출력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4,5번 디스켓이 추가된 형태에서 프린터 출력이 가능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1989년 6월에는 주석 처리 기능, 금칙 처리 기능과 9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에서의 인쇄 품질이 향상된 1.1판이 출시됐다. 또한 1.0판에서는 설명서 대신 몇 장의 안내문만을 제공했던 것에 비해 1.1판 후반 부터는 정식 설명서를 링 파일에 묶어 제공했다. (책자 형태로 되어 있는 정식 설명서의 날짜는 1989년 11월 27일로 되어 있다.) 한글과컴퓨터가 설립되기 전인, 1990년 1월 한/글의 1.20판이 출시되었다. 1.20판이 출시되기 전에도 1.11판등 버전업이 수시로 있었다 1.2판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다. 1990년 6월 300 DPI 레이저 프린터 해상도를 지원하는 한/글 1.2L이 출시되었다. 한/글 1.2판 이후로 한/글은 출력할 수 있는 해상도의 조건에 따라 레이저판, 도트판이 따로 나뉘었으며 30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레이저판은 14만 원, 180 DPI의 출력물을 찍어낼 수 있는 도트판은 5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레이저판에는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프린터 포트에 꽂아야만 프로그램이 동작하는 하드웨어 키(lock)가 들어 있었는데 후에 한/글 2.5가 출시되면서 제거되었다. 1990년 9월에는 글꼴 다운로드 인쇄 방식을 사용해 레이저 프린터에서의 인쇄 속도를 향상시키고, 그림 인쇄, SVGA 모니터 지원 기능이 추가된 한/글 1.3L이 출시되었다. 1990년 10월 이찬진이 한글과컴퓨터사를 열었으며, 한글문화원 사무실 내부에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정내권, 박흥호 등 외부 직원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1990년 12월 20일에 1.5판이 도트판과 레이저판의 두 종류로 나뉘어 발매되었다. 도트판의 경우 5.25인치 2D(360KB) 플로피 디스크 다섯 장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당시 컴퓨터의 대부분이 하드 디스크가 없는 XT나 AT 기종이었기 때문에, 한자 사전을 쓰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고, 인쇄하기 위해 디스켓을 바꿔 끼우는 식으로 오늘날보다 훨씬 불편하게 제품을 사용해야 했다. 이 외에도 다음의 기능들이 추가되었다. 몇 가지 버그를 수정한 1.51판이 1991년 1월 출시되었다. 1991년 11월 18일 텍스트 파일을 문단 단위로 읽는 기능과 플로터 파일을 인쇄하는 기능을 추가한 한/글 1.52판이 출시되었으며, 한/글 1.53D도 출시되었다. 이들 제품을 통해 한/글은 완성형보다 한글을 많이 쓸 수 있는 조합형 한글,다양한 글꼴, 인쇄기를 이용한 깔끔한 인쇄를 쓸 수 있는터라 한국인이 널리 사용하는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자리를 잡았다. 물론 표 기능이 없어서 선 그리기로 표를 그려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1992년 한/글 2.0이 개발되면서 기존 버전의 문제점들이 개선되었다. 아래아한글 1.53을 비롯한 1.5버전의 한/글을 어떤 누리꾼들은 윈도용 문서작성기보다 못하다고 낮추어보기도 하지만,이는 시대의 특징을 생각하지 못한 짦은 생각이다. 책만드는 일을 하는 김진섭은 책만들기를 가르쳐주는 책인《책 잘만드는 책》에서 1990년대에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 실례로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에서는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와 손글씨로 학급신문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글 워드 프로세서는 첨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는 윈도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에 익숙한 세대들이 볼 때에는 모자른 것이지만,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부터 써온 세대에게는 글을 깔끔하게 쓴다는 사실만으로도,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에게는 숙제를 깔끔하게 써서 낸다는 자부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가장 좋은 문서작성 도구였다. 1992년 7월 27일 한/글 2.0 전문용이, 9월 21일에 일반용이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레이저판과 도트판의 구분을 버리고, 일반용과 전문가용이라는 구분을 달고 출시되었다. 한/글 2.0은 문서 작성 기능만 갖추고 있던 한/글 1.52와는 달리 워드 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자 출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기능들을 추가시켰다. 이 기능들은 IBM PC에서 한글을 지원하는 워드프로세서로서는 한/글 2.0이 최초로 구현한 기능들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기능을 추가한 2.0버전의 출시로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의 최고의 스타로서 한글과컴퓨터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의 추가로 인해 디스켓의 장수도 이전 버전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물론 하드 디스크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었고, 전문가용 버전은 XT 컴퓨터에서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업그레이드 수요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묵향 등 한/글용 외부 글꼴 패키지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한/글이 인기를 끌면서 IBM PC용 한글 글꼴 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타자기 출력물과 별 차이 없는 품질로 전자 출판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한/글 옛 버전과 달리, 수식 편집, 인화지 출력, 편집 가능 쪽수 확대, 윤곽선 글꼴, 다단 편집 등으로 기능을 강화한 한/글 2.0의 등장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간이 전자 출판이 IBM PC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수식 기능은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한 수학 교재 편집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993년 9월 한/글 2.1 버전이 출시되었으며, 전문가용, 일반용, 수검용, 꼬마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외에도 세세한 개선점들이 많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992년 4월 개발된 윈도 3.1을 다음해인 1993년 6월 한글 윈도 3.1로 내놓으면서 멀티미디어 PC/홈 PC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멀티미디어 PC의 등장, 그리고 그에 따른 윈도 3.1의 대대적인 보급이 한/글의 미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글이 갓 2.1판을 출시하고 도스용 2.5판 개발에 들어갔을 즈음, 한글 윈도 3.1에서 동작하는 즉, 윈도의 장점을 살린 여러 가지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메소프트의 파피루스, 금성소프트의 윈워드,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 5.0,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핸디소프트의 아리랑, 휴먼컴퓨터의 글사랑 등이 등장하면서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3.0b 윈도용이 등장하기까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업체들은 이미 윈도 3.1용 워드프로세서를 내놓고, 한/글에서 불가능한 멀티태스킹(다중 작업), OLE(다른 프로그램에서 만든 개체의 삽입 수정), 3차원 글꼴 다듬기(글맵시/워드아트), 윈도용 트루타입 글꼴(화면의 글꼴 모양과 인쇄한 글꼴 모양이 동일한 서체) 호환, 9개까지의 다중 문서 편집(한/글은 그때까지 2개의 문서만 동시에 열 수 있었음)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며 나름대로의 시장을 차지하고 있을 즈음, 한글과컴퓨터는 여전히 도스용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5를 개발하면서 시간을 천천히 끌어갔다. 물론 윈도용 한/글도 동시에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속도나 안정성 측면에서 부족했던 윈도 3.1용 워드프로세서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1994년 SEK 전시회에서 한/글 2.5가 발표됐다. 2.5판부터는 전문용/일반용 구분이 없어진 대신 2.1 전문용을 업그레이드 한 2.5 기본판이 12만원에 판매되면서 가격을 50% 정도 인하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로의 업그레이드를 고려하는 사용자를 위해 한/글 2.5 구입자들에게는 윈도용 한/글 3.0 무료 교환쿠폰이 제공되었다. 또한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한/글 2.5가 포함되었다. 한/글은 2.0 버전 이후부터 미국의 워드퍼펙트라는 워드프로세서를 많이 참조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능의 구현이나, 조판 방식 등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출시 전까지 미국에서 최고의 시장 점유율을 가졌던 워드프로세서인 워드퍼펙트와의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윈도용 한/글 3.0이 몇 달 뒤 출시되었다. 한/글 3.0판 윈도용이 1995년 3월 출시되었다. 윈도용 한/글의 첫 출시는 윈도 95 출시와 함께 그 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윈도용 한/글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른 윈도용 한글 워드프로세서와는 달리, 운영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 인터페이스, 독립 입출력 방식을 채택하였다. 윈도용 한/글 3.0은 윈도 3.1의 기본 프로그램 모양을 따르지 않고, 넥스트스텝과 윈도 95의 인터페이스를 혼합한 형태의 프로그램 모양을 선보였다. 또한 완성형 한글 코드만을 지원하는 윈도 3.1의 입력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도스용 한/글의 입력 체계, 즉 조합형 한글 코드를 변형한 한컴 2바이트 코드를 사용으로써, 11,172자 현대 한글은 물론 옛 한글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부터 조합형 한글 체계를 통한 한글의 완전한 표현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한/글이니만큼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 도스용 한/글의 글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단축키도 도스용 한/글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도스용 한/글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손쉽게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기존 도스용 한/글의 문서를 아무런 손상없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렇게 기존 도스용 한/글의 커널을 그대로 윈도용으로 컨버전한 한/글 3.0은 도스용 한/글의 장점 위에 멀티태스킹, OLE 기능, 윈도용 글꼴 및 프린터 드라이버 지원, 글맵시 기능 등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서 꼭 필요한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도스용 한/글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글 3.0에는 버그가 굉장히 많았다. 이는 32비트 코드로 작성된 한/글 3.0이 16비트 운영체제인 윈도 3.1에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Win32s 런타임이 불안정했기 때문으로, 패치 버전인 한/글 3.0a에서는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윈도 95가 출시되기 이전까지는 많은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가격은 기본팩이 12만원으로 책정되어 2.5와 동일했으며, 2.5의 확장팩 내용을 담은 추가 CD가 4만원의 가격으로 추가 인하되었다. 그리고 도스용 한/글의 마지막 버전인 한/글 3.0이 1995년 6월 출시되었다. 한/글 3.0 도스용에서 추가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가격은 기본팩 + CD-ROM이 12만 원의 가격으로 판매되었으며, 개정판인 한글 3.01 도스용은 한/글 오피스 96에 포함되었다. 1995년 8월 윈도 95가 출시된 뒤 1995년 11월 한글 윈도 95가 출시된 직후, 도스용 한/글 3.0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최초의 윈도 버전인 3.0b가 출시되었다. 기본 내용은 도스용 한/글 3.0과 동일하지만 윈도 95에서도 실행이 가능해졌고, 여러 가지 버그가 수정되었으며,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이 추가되었다. 윈도 3.1에서의 한/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윈도 95에서는 대부분 해결됨으로써 이 때를 기점으로 한/글이 윈도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글 3.0b가 대중적인 성공을 얻고 난 후, 한/글은 윈도용 워드프로세서로 완전히 성격을 탈바꿈했다. 한글과컴퓨터는 1996년 출시할 예정이었던 한/글 4.0(가칭) 도스용 개발을 취소하고, 더 이상의 도스용 버전 개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윈도 95 출시이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국내 기업체 공략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널리 쓰였던 로터스 1-2-3와 워드퍼펙트를 1990년부터 이겨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는 95 버전까지만 해도 한글판의 불완전한 번역과 잦은 버그, 한/글 문서와의 비호환 문제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97 버전에서부터 VBA를 이용한 특유의 확장성, 네트워크를 통한 다중 사용자의 작업 공유 기능, 강화된 도움말, 다량의 클립아트와 글꼴 번들, 여러가지 사용자 편의 기능, 온페이지 드로잉 기능의 강화, 전 세계 문서 호환, 엑셀, 파워포인트와의 통합 등을 앞세워 점차 기업체를 중심으로 사용자 수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그 뿐 아니라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훈민정음 등도 워드프로세서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미처 기업 시장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던 한글과컴퓨터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한글과컴퓨터도 한/글을 기반으로 한컴 오피스 스위트(Haancom Office Suite)를 출시했는데, 이 첫 주자는 한/글 3.0b의 초기판에 저가로 번들(한/글 3.0b 구입자에 한해 3만원의 가격에 판매)된 윈도용 로터스 1-2-3(스프레드시트)와 프리랜스 그래픽스(프레젠테이션 소프트웨어)였다. 물론 서로 다른 회사의 제품을 패키지만 통합한 것인 만큼, 호환성에 약간에 문제가 있었고, 로터스 1-2-3, 프리랜스 그래픽스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버린 제품들이라 그 파급력이 덜했지만 한컴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경쟁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6년 7월에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와의 통합패키지로 선보인 한/글 프로 96과 한/글 오피스 96이 출시되었다. 한/글 프로 96은 기본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인터넷문서 편집,문서모음집인 문서마당 등 다양한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96을 기반으로, 주소록, 타자연습, 폼프로세서 틀마름이, 팩스 프로그램, 메일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틸리티를 추가한 종합 패키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한/글 오피스 96에는 이전에 선보였던 로터스 1-2-3와 프리랜스 그래픽스의 업그레이드 판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과는 달리 기업체 판매를 목적으로 출시된 한/글 오피스 96은 포함된 로터스 1-2-3 5.0과 프리랜스 그래픽스 프로그램의 기능 미비로 인해, MS 오피스에 비해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로터스에서 제작한 프로그램과 한/글 96간의 인터페이스 차이도 이용자의 불만을 샀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한/글 프로 96도 개인용 시장의 포화와 심각한 불법 복제 등의 영향으로 이전 수준의 성공을 거뒀을 뿐 더 이상의 성장이 정체되었다. 한/글을 제외하면 한/그림(그림 그리기), 한/아름, 한/맥 등 출시한 여러 제품이 모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진출한 인터넷 시장에서도 검색 엔진인 심마니를 빼고 별다른 실적을 낳지 못했다. 1996년 11월에는 한/글 96을 기반으로 중국어, 일본어 인터페이스 및 다국어 입력기를 채용한 한/글 국제판과 일본 시장을 목표로 한 한/글 일본판이 출시되었고, 1997년에는 한/글 97을 탑재한 한컴홈 97과 한컴 오피스 97이 출시되었으나,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한컴에서는 한컴오피스 97을 대학생들을 위한 아카데믹 버전으로도 출시하는 등 사용자의 구매력에 맞추는 방식의 영업을 사용하였다. 1998년 6월에는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한/글 소스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기고, 더 이상의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하는 양해 각서를 마이크로소프트와 체결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사용자의 반대 여론에 부딪친 한글과컴퓨터는 이 계약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한글지키기운동본부로부터 100억원 투자 유치를 받아 한/소프트 회원유치운동과 함께 한/글 815버전을 출시했다.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사장은 회사 실적 악화의 책임을 지고 한글과컴퓨터의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지오이월드 대표이사였던 전하진이 신임 대표 이사로 선임되었다. 한/글 97은 '실행 취소' 기능이 매우 취약했지만 역대 윈도용 한/글 시리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았으며, 가장 높은 보급율을 보여준 제품이었다. 또한 매킨토시용으로도 개발되어 맥사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자 출판 종사자가 PC에서 작성된 원고 내용을 한/글 97로 작업했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글 97은 출판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그 예로 출판기획자 모민원씨는 《너희가 한/글 97을 아느냐?》(혜지원)을 초보자편과 활용편으로 출판하였다. 활용편에서는 편지지,단행본,생활정보지,일기예보(한/글 97의 도형기능 사용), 잡지 만들기 등을 소개했다. 후속 제품인 워디안이 출시되었는데도 한/글 97과의 호환성 문제와 커다란 인터페이스의 변화로 인해 한/글이 가지고 있던 독창적인 요소들을 상당수 잃게 되어 사용자로 하여금 한/글 97에서 신버전으로 교체를 꺼리게 하였고, 한/글 97 사용자들이 상위 버전인 워디안의 문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보급되어 있는 한/글 97 사용자를 위해 상위 버전의 사용을 꺼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러한 인터페이스의 무리한 변화와 호환 불능은 그 이전의 한/글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한/글 2.1과 한/글 2.5는 그리고 한/글 2.5과 한/글 3.0(도스용)는 인터페이스가 바뀌지 않아서 새로운 버전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윈도용 한/글 96문서를 글맵시등의 윈도 고유의 기능을 빼고는 한/글 3.0에서 읽었으므로 정보를 쉽게 주고받았다. 한/글 국제판을 통합한 한/글 97 기능 강화판도 출시되었고 한/글 815 버전 구입자들에게는 정가 19,800원, 처음 사용자에게는 60,000원에 판매되었다. 또한 리눅스 개발 업체인 미지리서치에서는 한/글 96을 리눅스용으로 포팅한 한/글 for X R4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한/글 97에서 제공된 기능은 다음과 같았다. 2000년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1 이후, 한/글 97까지는 커널 기반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파일의 호환성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사용법에도 큰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한/글 워디안은 모든 소스 코드를 새로 작성함으로써 이전 버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이는 마이크로소프트 측에서 한/글 97의 소스 코드를 갖고 있다는 점이 한글과컴퓨터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글 워디안은 256단계의 다단계 되돌리기/반복(실행 취소) 기능을 지원하고, 변형 다단 편집, 표 서식 기능 강화, 엣센스 영한사전과 표준 국어 대사전을 삽입하는 등 커다란 개선 사항이 있었지만, 워디안에서 작성한 문서를 이전 버전에서 읽을 수 없는 문제, 이전 버전의 문서를 워디안에서 본래대로 읽을 수 없는 문제, 프로그램의 안정성 문제가 지적되었고, 바뀐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지 못한 사용자들이 여전히 한/글 97을 계속 사용하면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한글과컴퓨터사에서는 한/글 워디안의 패치파일을 1개월에 1번씩 제공하는 등의 강행군으로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1729 빌드의 서비스 팩을 발표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잠복해 있었다. 2001년에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워디안을 기반으로 이전 버전 파일과의 호환성 문제 및 안정성 문제를 해결한 제품으로 나중에 프로그램의 안정성을 향상시킨 한/글 2002 SE로 무상 업그레이드되었다. 한/글 2002판은 한/글 워디안 사용자들을 위해 업데이트 다운로드와 정품 CD가 무상 배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외국계 펀드와 당시 경영진과의 한글과컴퓨터사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한글과컴퓨터는 프라임산업개발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 XML 문서 원과 공개 키 기반 암호화, 스킨, 작업창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다. 한/글 2004와 함께 출시된 한컴오피스 2004는 국산 스프레드시트인 넥셀과 자체 개발한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한컴 슬라이드 2004를 포함함으로써 토종 오피스 스위트로의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능 면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 비해 아직 부족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엑셀, 파워포인트와 사용법이 비슷하며, 파일 호환도 가능해 주목을 받았다. 협동 작업을 위한 버전 관리 기능, 메모 기능의 추가. XML로 작성된 한/글 서식과 ODBC의 연동, 표의 가로 세로 대칭 뒤집기, 아랍어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 한/글 2005는 itq 워드와 같은 컴퓨터 문서에 관한자격증 시험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윈도용과 리눅스용이 함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컴퓨터 공간 용량 문제 때문에 2000년도부터 2011년도 당시에는 2002,2004,"2005",2007버전은 컴퓨터 실기 자격증 표준 소프트웨어로 잘 알려져 있다. 한/글 2006 for 맥: 애플컴퓨터코리아의 기술 지원으로 OS X용이 2005년 출시되었다. 기존의 한/글이 가진 기능을 Mac OS X 환경에서 구현하였다. 트루타입과 한/글 전용 글꼴을 지원하며 지원 사양은 OS X 10.3/10.4 이상, 파워PC G4와 G5 (인텔은 로제타 기술로 실행되나, 속도가 느리고 512 MB 이상 메모리가 필요하다. 한/글 2014 for 맥: 2013년 12월 19일 OS X(10.4) 인텔CPU용으로 출시하였다. 한/글 2010 프로그램을 기본으로 만들어지고, MAC UI를 충실히 따랐다. 선과 도형에 앤티에일리어스가 적용되었고, 반투명한 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이 향상되었고, 워터마크, 암호화 기능, 세로쓰기, 공인 인증서 암호화 기능, 개체 연결선, 개체 그림자 삽입 등 보안성이 향상되었다. 또한 추가로 ValuePack를 설치하면 다양한 기능과 더불어 PDF 문서를 쉽게 생성할 수 있는 무료 Haansoft PDF 문서 변환 드라이버를 설치할 수 있어 편리한 문서 변환 기능을 제공한다. 한/글 2007을 기반으로 리눅스 사용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운영체제 특성의 차이로 인해 일부 동작이나 기능이 지원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응용 프로그램 간 복사 및 붙이기나 ActiveX 및 윈도용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기능은 제한된다. 게다가 문서 인쇄시 인쇄기의 드라이버에 따라 인쇄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해당 인쇄기의 드라이버가 리눅스용 드라이버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일의 형태가 .rpm로 되어있기 때문에 rpm군의 패키지를 사용하지 않는 리눅스 배포판(특히 우분투)은 몇 가지 설정을 해야 했다. 2010년 3월 3일 출시된 제품으로 한/글 2010은 한/글 2007의 차기작으로 리본 메뉴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도입하였다. ODF문서를 읽어올수 있으며, 저장할 수 있고, MetaBlog API를 한글자체에서 적용하여 한글로 작성한 문서를 블로그로 업로드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정보 유출 방지를 위한 기능도 추가되어 있다. 또한 한/글 2007에서 제공하던 Haansoft PDF의 명칭이 회사 이름의 영문 표기법이 바뀜에 따라 Hancom PDF로 바뀌었다. 2010년 6월 29일 HWP 문서의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다. 이로써 ISO 국제 표준 문서 형식인 ODF와 OOXML을 지원과 함께 표준화와 개방성 강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2010년 7월 29일에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2010 기반의 한컴오피스를 볼 수 있는 한컴오피스 뷰어를 출시하였으며,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다. 또한 옛 한글 표현 방식으로 2008까지 써 오던 한양 PUA 코드를 버리고, 유니코드 표준인 첫가끝 코드를 사용한다. 시스템 내용 구성이 이전 2000 시리즈하고는 완전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으로 구성을 했다.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었는데 차트에다가 복잡한 선을 그리는 이전 버전 하위호환 기능이 삭제되어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시험 공부 학생들한테 많은 비난을 샀다. 다만, 그림에 복잡한 선을 집어넣는 기능은 남아 있다. 2013년 10월 10일에 한컴 오피스 2014가 출시됐다. 윈도 8용 터치 인터페이스 지원이 특징적이다. 2016년 1월 26일에 한컴 오피스 NEO가 출시됐다. 지원하는 파일 형식이 많아졌다는게 특징적이다. 2017년 11월 2일에 한컴오피스 2018이 출시되었다. 한글과컴퓨터(한컴)에서는 2010년도를 전후해 이후 지속적으로 꾸준히 윈도우,맥,리눅스(페도라,우분투),안드로이드,아이폰등 다양한 컴퓨터및 스마트폰등의 운영체제에서 한글을 열어볼수있는 한글뷰어를 무료로 제공해오고 있다. 8·15광복을 기념하여 출시된 제품이다. 한/글 97에 기반한(R4) 제품으로, 제품이 담긴 CD와 함께 1년간의 사용권을 판매하였다. 이 제품에 포함된 한/글 97은 표 아이콘을 제공하는 등의 개선점이 있고 한/글 96 기반의 국제판도 함께 포함되었다. 매달 사용료(개인 월 2,500원)를 내고 인터넷에서 인증을 받아 사용하는 한/글 제품이다. 한/글 2002 SE의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전, 클립아트, 일부 글꼴 데이터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이용할 수 있고, 원격 저장소(10MB)도 제공하였다.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 작은 한/글 프로그램을 내장하여 USB를 연결할 수 있는 어느 PC에서나 한/글 작업이 가능하게 만든 제품이다. 넥스소프트 사가 개발한 스프레드시트 제품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비슷한 인터페이스와 사용법을 가지고 있으며, 한글과컴퓨터에 넥셀을 매각하였다. 엑셀의 일부 고급기능이 없는 대신 저가로 공급되어, 중소기업 등을 대상으로 인기를 끈 제품으로 현재 한컴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판매되고 있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넥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는 한/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한/쇼는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한 기능을 지닌 프레젠테이션 제품으로 한컴오피스 제품군의 하나이다. 한컴오피스 2007 버전까지는 한컴 슬라이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한컴오피스 2010 버전부터는 한/쇼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다른 한글과컴퓨터 제품처럼 한/글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같은 외국 소프트웨어의 훌륭한 대체품이 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한/글로 워드 프로세싱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부 출판 기획자는 미적 감각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텍스트 위주의 전자 출판이나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 교재 편집 등에 활용하고 있다. 그 실례로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은 모민원 씨, 위형복 씨등의 고급 사용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한컴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월간 한글과 컴퓨터에는 한/글 2.1을 이용한 악보 만들기,문서 클리닉등의 한/글을 이용한 전자 출판 노하우들이 독자 기고등으로 실려서 출판 기획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글은 일본어, 노르웨이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그리스어(헬라어),독일어등의 외래어를 쓸 수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한자인 정체자, 중국어 간체 및 번체, 일본 한자 및 가나 (일본어를 읽고 쓸 수 있다면, 로마자로 가나를 입력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구결 및 옛 한글(한양 사용자 정의) 지원 글꼴과 같이 배포한다. 또한 한/글에서는 신약성서 저자들이 사용한 말인 헬라어를 로마자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 연구를 위해 헬라어를 사용해야 하는 성서학자, 신학생, 기독교 성직자, 신학서적 기획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한/글은 사용자가 원하는 문서를 정확하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급 사용자들은 한/글을 이용하여 단순한 전자 출판을 하기도 한다. 한/글을 이용하면 적절한 전자출판 항목으로는 1. 수식이 많이 들어가는 수학교재 2. 각주와 표가 많이 들어가는 논문 3. 교회 주보, 소식지처럼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고 표와 텍스트가 많이 들어가는 문서 4. 일본어 가나, 헬라어등을 빠르게 입력해야 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외국어나 성서 교재등이 있다. 한/글은 스타일 기능 제공, 반복되는 글자나 그림을 넣을 수 있는 바탕쪽, 간단한 도형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는 쿼크익스프레스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의 바탕쪽 기능은 한 개의 파일 내에서 페이지마다 들어가는 글자와 그림을 각 페이지마다 다르게 넣을 수 있는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에 비하면 미흡하지만, 페이지마다 들어가야 하는 글자나 그림을 한 번에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이아웃 소프트웨어의 마스터 기능과 거의 비슷하다. 그외 자간, 행간 조절, 그림 위치 조정, 한글, 로마자, 숫자와 특수 문자에 맞춘 다른 글꼴 사용 및 자간 조절 등 간이 전자 출판에 필요한 기능들을 한/글에서는 세심하게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글은 한글글꼴인 윤명조, 영문은 영문서체인 Garamond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글의 맞춤법 기능은 교정/교열의 수고를 일부 덜어준다. 물론 한/글의 맞춤법은 오자(誤字)를 고치는 수준의 기계적 맞춤법 기능이므로, 편집자는 원고를 인쇄하여 여러 번에 걸친 교정교열을 보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글은 문서 작성을 위해 개발된 워드프로세서이기 때문에, 북 디자인, 카드, 달력, 편지지 등의 팬시(Fancy) 디자인에는 쿼크 익스프레스, 인디자인 등의 레이아웃 소프트웨어가 더 적합하다. 한/글은 공공기관에서 널리 쓰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인 우체국에서 문서작성과 표계산을 할 때에 한/글과 한/셀을 사용한다 . 비록 HWP 형식이 한국 내부에서는 DOC, PDF, RTF 파일 대신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편이지만, 이 프로그램이 한국 밖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대다수 프로그램에서 HWP 형식의 문서를 읽어들이지 못하며, 여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문서의 내용이 완벽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글과컴퓨터 뷰어'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또 2010년 06월 29일 한/글 문서 파일형식(hwp)을 공개하였고, 개방형 문서포맷인 OWPML은 KS에 등록하여 지원하고 있다. 최근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네이버오피스나 MS-WORD에서 HWP파일을 지원한다. 한 때 파일 이름에 컴퓨터의 고유 코드 페이지(한국어 윈도의 경우 KS X 1001)에 없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으면 오류를 표시하고 파일을 읽고 쓸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약자나 속자로 된 한자 이름이 포함된 파일). 이 문제는 한/글 2010 이상에선 나타나지 않는다. 클립보드를 이용한 작업에서 사용하는 데이터를 다른 응용 프로그램에서 인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근래에 들어 아래아 한글의 클립보드 데이터 호환성 문제에 많은 진전이 있었고, 아래아 한글 마크업 언어 체계의 정비 등을 통하여 호환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한/글은 전자출판 소프트웨어에서 비한다면 인쇄에서 미흡한 부분이 많다.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에서 제공되는 CMYK 색조합 기능, 마스터 인쇄, 오프셋 인쇄 등 인쇄 방식에 따라 망점의 개수를 다르게 조정해 주는 망점 조정 기능 등이 한/글에서는 제공되지 않는다. 한/글은 새로운 판이 출시될 수록 프로그램이 차지하는 용량이 증가하고 있다. ASV는 Auto Save File(자동 저장 파일)의 준말로, 한글 문서 작업 도중에 컴퓨터(혹은 프로그램이)가 갑자기 잘못된 종료가 되었을 경우에 자동으로 저장(백업)이 되는 파일이다. ASV형식의 파일은 잘못된 종료 이후 한/글 최초실행시에 자동으로 로드되며, 로드 즉시 삭제된다. 2014년 기준 대한민국 내 점유율은 20%정도이다. 전세계 점유율은 0.4%이다. 일본에도 수출한 적 있으나 매출이 좋지 않아 철수했다. 케냐 케냐 공화국(, ) 또는 케냐(Kenya, )는 동아프리카의 공화국이다. 인도양에 면해 있으며 북동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남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수도는 나이로비이며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다. 케냐의 주요 종족은 키쿠유족, 루히아족, 루오족, 칼렌진족, 캄바족, 키시족,메루족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백인, 인도인, 아랍인 등 비아프리카계 민족은 전체 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한다. 인구는 5,221만 4,791명(세계 27위)이다.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 따르면 조상이 2백만 년 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투르카나 호 근처에서의 최근 발굴에 따르면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같은 호미니드인(hominid)이 260만 년 전 이 나라 땅에 있었다. 케냐의 식민 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888년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가 들어왔다. 독일이 해안 영토를 1890년에 영국에게 넘겨줘 두 열강 사이의 분쟁도 적지 않았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마우마우 반란)으로 비상 사태하에 있었다.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다. 그러면서 좀 더 온건한 세력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이끄는 케냐 아프리카 국민연맹(KANU, 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이 독립 정부 조직을 주도하게 되었다.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독립을 선포했다. 1년 후 케냐타는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 인민연맹(KPU, Kenya People's Union)이 정당 활동이 금지된 1969년 이후로는 KANU가 유일한 정당이었다. 1978년 케냐타 사망 이후 부통령이었던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가 예상을 깨고 권력 암투에서 승리해 케냐의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6월 개헌으로 케냐는 공식적으로 일당 체제가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 국민들의 요구로 일당 체제를 폐기하고 1992년 다당(多黨) 선거가 치러졌다. KANU가 과반수의 표를 획득하고 모이가 재선되었지만 야당도 의회석의 45%를 차지했다. 더 자유화 된 1997년 선거에서도 모이가 야당의 분열해 힘입어 재선되고 KANU도 간신히 과반수의 표를 획들했다. 그러나 헌법상 모이가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된 2002년 대선에서는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 무지개 연립(National Rainbow Coalition, NARC)을 결성, 므와이 키바키를 대표로 내세워 당선시켜 독립 후 계속되었던 KANU의 독주에 종지를 찍었다. 그 후 개헌 문제가 케냐 정치의 최대 현안이 되었는데 이 문제로 국민 무지개 연립은 분열되었고 2005년에는 므와이 키바키가 지지한 개헌안이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억제하지 않는다는 논란 속에 국민투표 끝에 부결되었다. 면적은 224,961 제곱마일, 혹은 582,646 제곱킬로미터이며, 케냐는 마다카스카르 다음으로 세계에서 47위로 면적이 넓다. 인도양 해변측은 낮은 평지가 있으며 내륙에는 고지대 산맥과 고원이 있다. 내륙에 위치한 고지대는 거대한 단층 계곡에 의해 양분되어 있다; 서쪽에는 기름진 고원이 있다. 케냐 고지는 아프리카에서 하나의 가장 성공적인 농업지대이다. 고지에는 케냐의 가장 높은 지대가 있다(또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가장 높음) : 또한, 5,199미터인 케냐 산맥은, 빙하적 지형이다. 기후는 지역마다 확연히 다르다. 인도양의 해안을 끼고 있으며 중앙 고원 지대 사이에 저평원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원 지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로 나뉘며 서부에는 비옥한 토양이 나타난다. 케냐의 고원 지대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가장 생산력이 뛰어난 토질로 손꼽힌다. 케냐 산(Mount Kenya)은 고도 5,199 m에 이르며 빙하가 있기도 하다. 적도를 걸치고 있어 해안은 무더운 열대 기후이며 내륙 지방은 고지대로 건조한 기후이다. 내부일수록 건조하고 해안에는 열대성 기후가 나타난다. 케냐-탄자니아 국경 지방에 킬리만자로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일대는 서늘하다. 케냐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북반구 나라들과 여름과 겨울의 날씨가 바뀌어서 나타난다. 6-8월은 겨울이다. 그러나 케냐의 겨울은 동북아시아의 겨울과 매우 다른 풍경이다. 눈이 내리지 않으며 날씨 또한 영하로 거의 떨어지는 일이 없다. 단지 일교차가 매우 심해 새벽과 밤에는 매우 쌀쌀하게 느껴지며, 낮에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정도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겨울 햇살은 뜨겁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차가워서 땀이 금세 마르고 겨울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모기도 많이 없다. 그만큼 날씨가 상대적으로 더 쌀쌀하다는 것이다. 케냐는 적도에 있지만 연평균 기온이 16도이다. 케냐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다.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직접 선거를 통해 뽑는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는 것은 물론 케냐의 7개 주 중 적어도 5개 주에서 표의 25% 이상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2010년 개정된 케냐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효투표의 과반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47개 카운티의 절반 이상에서 최소 25%의 득표를 해야 한다. 부통령과 내각도 대통령에 의해 임명한다. 국회를 붕게(Bunge)라고 부르며 단원제를 실시한다. 총 의석 수는 224석이다. 2009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키쿠유족(17.15), 루햐족(13.83), 칼렌진족(12.87), 루오족(10.48), 캄바족(10.08), 케냐의 소말리족(6.18), 키시족(5.71), 미지켄다족(5.08), 메루족(4.29) 순으로 나타났다. 이외 백만명 이하인 민족들은 10.98%를 차지했다. 2010년 헌법 7조[국민어, 공식어, 기타 언어]는 “(1) 공화국의 국민어는 스와힐리어다. (2) 공화국의 공식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다. (3) 국가는 (a) 케냐 인민의 언어의 다양성을 증진, 보호하며 (b) 토착어, 케냐의 수화, 점자 및 장애인에게 접근가능한 다른 의사소통의 형식과 기술의 발전과 사용을 증진한다.”고 했다. 국민어는 영어(national language)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암암리에 국가어(State language)라는 인상을 풍기므로 주의를 요한다. 하지만 이것은 헌법상의 규정이고, 모든 영역에서 하위단계는 스와힐리어, 고위단계에서는 영어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법정의 경우 대법원에서는 영어를 전용한다. 교육의 경우 중학교부터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 스와힐리어가 영어를 누르고 상층부를 차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논자들이 말하는 아프리카비관주의의 일면이다. 케냐는 독립 이후 영연방의 정회원국이다. 2009년 인구조사(2010년 08월 발간)에 따르면 기독교는 82.99%-그중 개신교(47.66), 로마 가톨릭(23.46), 기타(11.87)-, 이슬람교는 11.21%로 나타났다. 이외 극소수의 힌두교도와 정령신앙도 있다. 15세 이상 문자 해독률은 85.1%(남자 90.6%, 여자 79.7%)이다(2003년). 문맹률도 높다.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인근 국가들과 달리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서방 자본을 유치해 독립 이래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가 부패와 일부 수출품에 대한 의존 때문에 대니얼 아랍 모이 정부 시절에 경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 경제 개혁의 실패로 IMF 원조가 몇 번 중단되기도 하였다. 2002년 새로 들어선 정부는 부패척결과 외국 원조의 확보에 노력을 치중하고 있으며, 케냐의 경제는 농업과 관광업에 의존한다. 가장 큰 소득원은 마시는 차와 커피다 한 해 3000억 원 이상이 관광업 수입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케냐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21.9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볼 때,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72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아주 심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목할만한 수준이다. 많은 케냐인은 직접 조각상을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 장신구 등도 직접 만든다. 또한 모든 작품이나 생활용품에 대한 재료를 자연에서 채취한다. 케냐는 육상 경기의 강국으로, 중/장거리 달리기, 마라톤에서 강세를 보인다. 대한민국과 1964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같은 해 나이로비에 주케냐 한국대사관이 설립되었는데 동아프리카에 세워진 대한민국 대사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다. 현재 한국과 케냐는 대한항공직항편이 운항 중단으로 폐선되어 주로 중동지역을 경유해서 출입국을 한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으나 사실상 남한의 우방국인 이 나라는 지금까지도 북한의 상주공관 설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88 서울 올림픽 때 케냐는 선수단과 임원을 서울로 파견하였다. 한글 맞춤법 한글 맞춤법( - 法)은 한국어의 맞춤법으로,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한국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연철이라 하여 글을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 예를 들면 '잡히다'를 '자피다'로 썼다.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면서 말의 원형을 밝혀 쓰는 (잡-히-다) 방식이 표준으로 정해졌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분단 직후에도 계속 쓰이다가 도전을 받았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안의 표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며 극단적인 형태주의의 조선어 신철자법을 만들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완화되었지만, 아직 북측의 철자법은 남한보다는 형태주의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1953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기법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학계의 반대로 그러지 못한 것이다. 1980년 한글학회에서 《한글맞춤법》을 내었고, 현재는 문교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에서 1988년 1월 19일 고시하여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는 규정을 따른다. 1988년 개정의 주요 내용으로는, 한자어에서는 사이시옷을 붙이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였고(다만 두 음절로 된 6개 한자어만 예외로 사이시옷을 붙이기로 함), "가정란/가정난" 등으로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두음법칙 규정을 구체화하면서 "가정란"으로 적도록 하였다. 띄어쓰기 규정에서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씀도 허용하였고, 성과 이름은 붙여 쓰도록 하였다. 수를 표기할 때도 종전에는 십진법 단위로 띄어 쓰던 것을 만 단위로 띄어 쓰도록 하였다. 따라서 123456은 '십이만 삼천사백오십육'이다(종전에는 '십 이만 삼천 사백 오십 육'이라고 썼음). 한글 맞춤법은 6개의 장, 15개의 절, 57개의 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문장 부호)도 있다. 주기함수 수학에서, 주기 함수(週期函數, )는 함숫값이 일정 주기마다 되풀이되는 함수이다. 일상적인 예로, 시계 시간은 시간에 대한 함수로서 주기 함수이다. 즉, 시계의 행동은 날마다 똑같다. 0이 아닌 실수 formula_1 및 실수 부분 집합 formula_2 및 실수 함수 formula_3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4를 주기 함수라고 하고, 실수 formula_5를 formula_4의 주기(週期, )라고 한다. 이에 따라, 다음이 성립한다. 실수 주기 함수 formula_3 및 실수 formula_21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며, 이를 만족시키는 실수 formula_22를 formula_4의 기본 주기(基本週期, )라고 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실수 주기 함수 formula_3의 주기와 0의 집합을 formula_29로 적자. 즉, 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는 덧셈에 대하여 닫혀있다. 다시 말해, 따라서 formula_29는 덧셈에 대한 아벨 군을 이룬다. 실수 주기 함수 formula_37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만약 주기 함수 formula_37가 기본 주기를 갖지 않는다면, 상수 함수이거나, 아니면 모든 곳에서 불연속이다. 실수를 그 소수 부분으로 대응시키는 함수 formula_4는 과 같이, 주기 함수이며, 그 기본 주기는 1이다. 삼각 함수는 모두 주기 함수이다. 사인 · 코사인 함수는 formula_45, 탄젠트 함수는 formula_46를 기본 주기로 한다. 상수 함수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실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디리클레 함수 는 주기 함수이며, 모든 유리수를 주기로 갖는다. 따라서, 기본 주기가 없다. 나이로비 나이로비(Nairobi)는 케냐의 수도이다. '시원한 물'을 뜻하는 마사이어 '에와소 니이로비(Ewaso Nyirobi)' 또는 '엥카레나이로비(Enkarenairobi)' 에서 현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이로비의 인구는 2백5십만에서 3백만 정도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해발 1700m로 이 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1899년 몸바사와 캄팔라를 잇는 우간다 철도 건설을 위한 조달 기지로 세워진 것이 유래가 되어 20세기 초 전염병과 화재 이후 완전히 재건되어 오늘날의 대도시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영국령 동아프리카 보호령의 수도가 되었고 1963년 케냐의 독립과 함께 케냐의 수도가 되었다. 1998년 8월 7일에는 나이로비와 탄자니아의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 나이로비에서만 213명(미국인 12명 포함)이 사망했다. 미국 대사관이 나이로비 중심지에 있어 인명 피해가 특히 심했다. 1999년 2월 17일에는 터키의 쿠르드인 반군 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주 나이로비 그리스 대사관에서 체포되어 터키로 추방되었다. 나이로비에는 두 개의 유엔 기구가 소재해 있다. 대한민국 주케냐대사관은 1964년 나이로비에 설립되었으며 아프리카 주재 공관 중 가장 역사가 깊다. 나이로비의 공항은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이다. 예전에 주 공항이었던 윌슨 공항은 오늘날에는 주로 국내선용으로 쓰인다. 고속도로로는 대표적으로 티카와 나이로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인 티카 도로가 있다. 나이로비 시 안에는 특이하게도 야생동물 보호지인 나이로비 국립공원(Nairobi National Park)이 있어서 맹수들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2014년 5월 5일 급조폭발물이 티카 도로의 버스 안에서 터지면서 3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 사고의 영향으로 버스에 큰 구멍이 난 후 전소되었다. 찰스 다윈 찰스 로버트 다윈(, , FRS,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기여가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종의 기원》 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진화가 관찰되는 현대와 진화의 명백한 증거들이 관찰되었던 과거에도 과학계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전혀 없으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설자들에 의해 이러한 논쟁은 심화되었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어머니 수잔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창시자이며,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시아 웨지우드였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다윈 가족과 웨지우드 가족은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더불어 몇 쌍의 겹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잔이 다윈이 8세 때 생을 마감하고, 누나인 캐롤라인 등 3명의 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윈을 길렀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 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양가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反) 삼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가는 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로버트는 관례에 따라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는 화학 실험에 몰두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했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했다. 그는 할아버지 에라스무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육을 지식전수로 잘못 이해하여 학생만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여, 교사에게서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는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 1818년, 다윈은 슈루즈버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 다윈은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함께 학교 정원에 화학 실험실까지 마련했다.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청소년기 때부터 곤충 채집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16세 때인 1825년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19세기 유럽 의학의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과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1827년에 에딘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당시 남미의 탐험 여행에 동행한 경험이 있는 흑인 해방노예(영국에서는 1833년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노예무역이 없어졌음)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 다윈은 존을 매우 느낌이 좋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워 했다. 존 에드먼스턴이 가르쳐준 박제만들기는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리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의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드몬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날, 그랜트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의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수집을 자랑한 에딘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신부(Episcopal Reverend)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본인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 헨슬로와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1831년에 졸업했다.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버지는 다윈을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넣어 신학,고전, 수학을 배우게 했다. 다윈은 성공회 신부가 되면 성공회 미사 집전, 성서와 신학연구등의 교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학에 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지만 찰스 다윈의 관심은 신학이 아닌 박물학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도 육촌 윌리엄 다윈 폭스와 함께 필수는 아니었던 박물학이나 곤충 채집에 심취했다. 폭스의 소개로 성직자이자, 박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다윈은 학내에서 헨슬로가 만든 정원을 둘이서 자주 산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헨슬로와의 만남에 대해서, 자신의 연구에 가장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성직자이면서 지질학자였던 아담 세지윅에게 배워, 층서학에 평범하지 않는 재능을 발휘했다. 동시에 당시 다윈은 신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읽었고, 모든 생물은 하느님이 천지창조의 시점에서 완벽한 형태로 창조했다고 하는 설을 납득하고 믿었다. 자연철학의 목적은 관찰을 기반으로 한 귀납적 추론에 의해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기술한 존 허쉘의 새로운 책이나, 알렉산더 훔볼트의 과학적 탐험 여행 등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불타는 열의에 자극되어 열대 지방에서 박물학을 배우기 위해서 졸업한 뒤 동년배들과 테네리페 섬에 여행할 계획을 세우며, 그 준비 단계로 세지윅의 웨일스 지질 조사에 참가했다. 이때의 그의 취미는 음악이나 후에 잔인하다며 그만둔 사냥이었다. 입학을 했던 1827년 여름에는 조시아 2세와 그 딸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엠마 웨지우드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 몇 주간 머물렀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륙 여행이었다. 1831년에서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 역사는 이 두 대학교 시절을 다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학문으로서 대학교도 (에딘버러 대학교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세계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 로버트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 로버트는 아들의 세계일주를 허용하였고, 이는 훗날 그의 생애는 물론 생물학계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는 비글호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윈은 성공회 교회에서의 목회보다는 생물학과 지질학에 관심이 많아 세지위크 교수를 따라 북웨일스에 지질학 연구를 위해 여행했다. 헨슬로의 추천으로 1831년 12월 27일 로버트 피츠로이 선장이 이끄는 〈비글〉이라는 이름의 탐험선에 박물학자로서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원하는 선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 선실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다윈은 피츠로이의 함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1831년 12월 27일 시작한 〈비글호〉의 항해는 피츠로이가 의도한대로 거의 5년이나 지속되었고, 다윈은 그 시간 대부분을 육지에서 지질학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자연사 수집물을 수집하면서 보냈다. 그동안 비글호는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그렸다. 그는 관찰한 것, 이론적 고찰을 꼼꼼히 기록했고, 가끔씩 견본들을 편지와 함께 가족들을 위해 잡지 사본을 캠브리지로 보냈다. 그는 지질학, 딱정벌레 수집, 해양 무척추동물에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초보였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위해 열심히 견본을 수집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 겪게되는 반복적인 뱃멀미로 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물학 노트는 조용한 휴식기간에 수집한 플랑크톤으로부터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의 각 섬, 그리고 섬의 해변과 내지에 사는 거북과 새들이 동일한 과에 속하는 종임에도 환경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그를 깊이 매료시켰다. 세인트 줄리안 항구의 첫 번째 정박에서, 다윈은 높은 화산바위 절벽의 흰띠가 조개껍질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피츠로이는 그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의 1권을 선물했는데,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융기와 침강을 한다는 육지의 균일적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윈은 라이엘이 주장한 것을 목격하고, 지질학에 대해 이론화하고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된다. 브라질에서 다윈은 열대우림을 보고 기뻐했지만, 노예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대하는 노예제도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파타고니아에 있는 푼타아틀라에서는 절벽의 오래되지 않은 조개껍질 옆에서 멸종한 거대 포유류의 화석뼈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날씨나 재해로 인한 변화의 징조없이 최근에 멸종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였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메가테리움(Megatherium) 곧 땅에서 나무뿌리를 먹으며 사는 늘보의 화석을 치아와 뼈장갑의 연관관계를 이용해서 밝혀냈는데, 처음에는 그 지역에 있는 아르마딜로가 가지고 있는 장갑의 거대한 확장판처럼 보였다. 그 최초의 발견은 영국에 귀국했을 때 큰 흥미를 불러일어켰다. 그는 가우초(목동)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내륙으로 지질학을 탐사하며 화석을 더 수집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혁명의 시기에 원주민이나 식민지 사람 모두를 바라보는 사회적, 정치적, 인류학적 통찰을 가지게 했으며, 두가지 종류의 레아(남미 타조)가 분리되긴 했지만, 겹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그는 계단 모양의 널빤지 같은 평원과 해안에서 길러진 조개껍질을 목격했는데, 이것은 일련의 융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엘의 두 번째 권을 읽고, 종의 창조의 중심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발견과 라이엘의 부드러운 연속과 종의 멸종에 관한 개념에 도전하는 이론을 받아들였다. 비글호에는 세 명의 파타고니아 원주민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비글호의 항해에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이들이었다. 첫해에는 잉글랜드에서 보냈고, 이번 여행에서는 선교사로 참여하였다. 다윈은 이들이 정감있고, 문명화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들의 친척들은 야생에서 길들인 동물들처럼 거칠고, 비참하고, 저급한 야만인들처럼 보았다. 다윈에게는 이들의 차이가 문명의 진보의 차이이지, 인종적 저능함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잉글랜드 사람과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전통이 다른 것 뿐이지, 인종이 우열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반(反)진화론 기독교인들이 다윈이 원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하여 인간과 유인원사이의 중간진화단계가 있었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보고 철회했다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과학자 친구들과는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수 없는 다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속되었고, 선교는 포기를 하고 만다. 지미 버튼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아내를 얻어 다른 원주민들처럼 살았으며,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윈은 칠레에서 지진을 경험했고, 높은 파고에 휩쓸린 홍합층을 포함한 육지가 막 솟아올랐던 징후를 보았다. 높은 안데스 산맥에서 조개껍질과 모래 해변에 자라는 여러 화식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육지의 융기와 바다 섬의 침강 그리고 산호 보초 그들을 둘러싸 산호섬이 되었다고 이론화했다. 지리적으로 새로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은 더 오래된 “창조의 중심”에 덧붙여진 야생에서 증거를 찾았고, 흉내지빠귀(mockingbird)가 칠레의 그것과 연관은 있지만, 섬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그는 그들이 왔던 섬마다 약간씩 변종된 거북이 껍질 형태가 있다는 것을 총독에게 들었지만, 식용으로 잡은 거북이를 잡아먹은 후에도 그것들을 수집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유대류 쥐캥거루와 오리너구리가 너무 특이해 보여 이 두가지가 원래부터 있어왔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 원주민(에보리진)들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이지만, 유럽 정착민들에 의해 감소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글호는 코코스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사를 했으며, 그 조사는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피츠로이는 비글호 항해의 공식적인 보고서를 쓰고 있었는데, 다윈의 일기를 보고서는 한권의 평가서로 합치자고 제안을 한다. 다윈의 저널은 결국 자연사에 대해 분리된 세 번째 권으로 다시 쓰여진다. 케이프타운에서 다윈과 피츠로이는 존 허셀을 만났다. 그는 그 당시에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에 대한 찬사를 썼는데, “기적의 진행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자연”을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여는 대담한 숙고이자, 다른 것에 의해 멸종된 종의 대체”라고 찬사를 했다. 배가 고향을 향해 갈 때 다윈은 노트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흉내지빠귀, 거북, 포크랜드 제도의 여우가 옳다면, "종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그런 사실들”(such facts undermine the stability of Species)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would를 undermine 앞에 덧붙였다. (‘종의 안정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그런 사실들’로 번역된다.) 그는 이후 그런 사실들이 “종의 기원에 빛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 1836년까지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지질과 동식물에 대하여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나온 화석과 현생 생물과의 비교,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동물의 지리적 변이에서 특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한다. 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콘월주의 팰머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윈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우가 1835년 그의 학생이었던 다윈의 편지를 모아 다윈의 지리학 편지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배포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스러우스베리에 있는 고향집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났고, 이후 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박물학자로 비글호에 소개를 해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캠브릿지로 서둘러 갔다. 헨슬로 교수와 함께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표본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윈의 항해 기록도 정리하여 1839년에 «비글 호 항해기»로 출판했다. 다윈의 부친은 투자를 종용하여 그의 아들을 자선 모금을 할 수 있는 과학자로 만들었다. 흥분한 다윈은 그가 수집한 표본과 수집품을 설명해줄 과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물학자들은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고에 넣어둔 표본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10월 29일 찰스 라이엘은 그를 열렬히 맞았고, 곧 유망한 해부학자, 리처드 오웬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는 왕립외과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웬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두개골 등을 보고 놀랐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다윈은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그의 저널을 다시 쓰기 위해 캠브릿지에서 숙박을 했다. 그는 최초의 논문을 썼는데, 남미 대륙이 조금씩 융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년 1월 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다. 같은 날, 그는 동물학회에 그의 포유류와 조류의 표본에 대한 발표를 했다. 조류학자 존 굴드는 곧 다윈이 검은새 그로스-비크와 핀치의 혼합 종이라고 생각했던 갈라파고스 새가 사실은 핀치의 12개의 분리된 종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2월 17일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웬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를 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초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을 했다. 새로운 종의 “미스테리 중 미스테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다. 다윈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형 해라즈머스 다윈과 함께 휘그당의 일원으로 머물렀다. 또한 인구과밀과 가난으로 복지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논쟁적인 휘그당의 〈신빈민법〉(Poor Law reforms)의 근원이 되는 맬더스의 주장을 선동했던 절친한 작가 해리엇 마티노도 그의 신념의 동반자였다. 유니테리언으로서 그녀는 종의 변이를 뜻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반겼다. 당시 이러한 설은 그랜트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영향을 받은 외과의사들이 신봉하던 것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방어적인 성공회 사회 질서의 아나테마(anathema, 저주)였던 것이다. 굴드는 다윈을 만나서 각각 다른 섬에서 채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흉내지빠귀가 변종이 아니라, 분리된 종이라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다윈이 굴뚝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핀치류라고 알려줬다. 다윈은 섬마다 구별하여 핀치에 분류표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글호에 탑승한 로버트 피츠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노트에서 자료를 찾아 섬마다 종을 분리했다. 그 두 마리 레아는 또한 다른 종이었고, 3월 14일 다윈은 그들의 분포가 남쪽으로 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발표했다. 3월 중순경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에 7월 중순 경 적게 되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842년에는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머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년 6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연필로 썼다. 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머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기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놀랐으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에 린네 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다.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선택'을 수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발언 중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부분은 당시 유럽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었고 다윈의 견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다. 이 토론회에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헉슬리 등이 나왔고, 기독교 측으로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가 나왔다.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진화론 지지 진영을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쪽 선조가 원숭이냐 라는 질문을 던졌고, 헉슬리는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진화론의 찬반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그의 발표는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확고한 기반을 닦게 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차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현대 생물학은 변이에 관한 그의 견해의 대부분을 부정하고 있으나, 생존 경쟁설은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동물학·식물학 및 인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 <가축과 재배 식물의 변이>와 사람의 진화에 대해 다루는 <인간의 유래>(1871) 등이 있다.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 있어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백인들의 흑인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 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당시 비글호 선장과 노예제도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선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고문하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한편 그의 종의 기원 발표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856년 독일의 라인란트 주 뒤셀도르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다윈이 죽기 전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윈이 친구에게 히브리 성서의 창조설을 진리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존재하나 이는 거짓이다. 다윈의 유언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이라는 말을 남기고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Charles Darwin bibliography 영국일간지 더 타임스는 2009년 2월 18일자 기사에서 진화론을 창시한 다윈의 뛰어난 창의력은 자폐증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는 보도를 하였다. 더 타임스는 "다윈은 아마도 자폐증의 한 종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던 것 같다. 다윈의 독창성은 이 자폐증 증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교의 마이클 피츠제럴드 정신의학 교수의 견해를 인용하였다. 피츠제럴드 교수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으로 다윈은 놀라운 집중력, 보통 사람 이상의 집요함,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미세한 부분을 보는 엄청난 능력, 한 과제에 평생 매달리는 끝없는 열정, 독창적 연구를 하는 독립적인 정신 등을 보유했다."고 설명했다. 2010년 후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IBM이 후원하는 계통학 추적 프로젝트 따라 다윈의 고손자인 크리스 다윈의 DNA 추출하여 Y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다윈의 조상은 4만5천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으로 이주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스페인 남부에 살다가 1만2천년 무렵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다윈의 유전자는 ’R1b’라는 집단으로 분류됐는데, 크로마뇽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다윈은 비글호에 탑승해 여행하던 중, 남미에서 흡혈곤충에게 물려 샤가스병에 걸렸다고 한다. 다윈이 말년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한 편지가 무려 19만 7천 달러에 낙찰되었다. 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이다.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06년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1907년 프라하의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문학창작에 있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하였다. 카프카는 사후 그의 모든 서류를 소각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등을 출판하여 현대 문학사에 카프카의 이름을 남겼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독일어를 쓰는 중간계급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콘골드(1972)에 따르면 '거대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업가'로 그려져 있고, 카프카 자신에 따르면 '강하고 건강하고 먹성 좋으며 목소리가 크고 자기 만족감에 충만한, 우세하고 끈기있고 인간 본성과 지식을 갖춘 진짜 카프카'로 그려진다. 헤르만 카프카는 야콥 카프카의 넷째 아들로 남부의 피세크(Pisek) 가까운 곳의 유대인 마을인 오섹(Osek)에서 프라하로 이주해, 외판원으로 몇 년간 일한 후 악세사리를 파는 소매점을 열었다. 사업상 상표는 jackdaw(카프카의 체코어)로, 소매점은 곧 15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성장한다. 그곳에서 헤르만 카프카는 포데브라디(Poděbrady)의 양조업자 야콥 뢰비(Jakob Löwy)의 딸 율리(1856-1943)와 결혼하였다.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아버지 헤르만에게 아들 카프카는 헛소리나 해대는 몽상가에 불과했고,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더구나 어머니 율리도 남편의 사업을 도와 하루 12시간씩 일하느라 평일에는 부모 모두 집에 없었고, 카프카와 그의 형제들은 보모와 하인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카프카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만다. 여섯 살 때인 1889년에는 여동생 가브리엘레(엘리,1889-1941)가, 또 1년 뒤에는 발레리(발리,1890-1942)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리(오틀라, 1892-1943)가 태어났지만, 세 여동생은 폴란드 우치의 게토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흩어져 그곳에서 죽었다. 그 중 오틀라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뒤 다시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억세고 독선적이었던 헤르만은 틈만 나면 아들 카프카에게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큼 해냈는데, 부족한 게 없는 너는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며 몰아 붙였고 카프카는 수모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상인의 기질이 보이지 않자 독일계 인문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킨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휴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오스카 폴락 등 평생을 두고 교유하게 될 몇 사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1901년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카렐 대학교)에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에 흥미를 보였으나, 아버지의 요구대로 법학을 택한다. 카프카는 독일어를 제1언어로 배웠으나 체코어도 유창했다. 나중에 카프카는 프랑스어와 그 문화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는 플로베르였다. 1889년에서 1893년 그는 정육시장에 있는 도이체 크나벤슐레(Deutsche Knabenschule)라는 남자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곳은 지금 프라하의 Masná 거리이다. 유태교육은 13세 때의 Bar Mitzvah 축제와 아버지와 1년에 4번 유태교 교회를 가는 것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엄격한 고전 지향적인 주립 김나지움(Altstädter Deutsches Gymnasium)에 입학한다. 이곳은 구시가지 광장(Stare Mesto)의 킨스키(Kinský) 궁전에 있다. 1901년 졸업시험(Matura exam)을 끝냈다. 1907년 11월 1일 그는 제네랄리(Assicurazioni Generali)라는 공격적인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거의 9개월 정도 일했다. 이 시기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8시~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 때문에 글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1908년 7월 15일 관두고 2주 후 보다 마음에 드는 보헤미안 왕국의 노동자 사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보험 담당관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밥벌이(Brotberuf, 브로트베루프)라고 불렀다. 1908년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 보험 회사로 자리를 옮긴 후로는 죽기 2년 전인 1922년까지 그곳에서 법률고문으로 근무하는 한편, 오후 2시에 퇴근하여 밤늦도록 글을 썼다. 그러나 그는 일에 무관심 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 동안 몇 번의 승진이 그가 열심히 일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 그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는 안전헬멧을 발명했다. 1912년 이 일로 메달을 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강철 밀 기계(steel mill) 사망률을 1000명당 25명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그는 연례 보고서를 직접 편집, 작성하는 일도 맡았으며, 그 사본을 친구들에게 보낼 만큼 자부심이 있었다. 병행하여 카프카는 문학작업도 해나갔다. 가까운 친구인 막스 브로드, 펠릭스 웰치 등이 속한 그룹을 '친밀한 프라하 동아리(Der enge Prager Kreis)'로 부르기도 했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배우자인 카를 헤르만이 카프카에게 석면공장(프라하 석면 헤르만 회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카프카는 처음에는 많은 자유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그는 이디시 극장(Yiddish theatre)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는 이디시 극장에 대해 카프카를 염려했다. 그는 그 밖의 카프카의 모든 일에 지지를 보냈었다. 이 공연은 카프카가 유다이즘과 관계를 키워 가게 된 시작점이었다. 이 무렵 유럽의 노동 환경은 무척 열악했다. 카프카는 공무 출장과 노동자들과의 접촉 등 이곳에서의 업무를 통해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와 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에서 개인의 소외와 무력감에 대해 보여주는 깊은 통찰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12년 그의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났다. 펠리체는 베를린에 있는 속기용 구술 녹음기 회사를 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그 후 5년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종종 만났다. 두 번이나 약혼하기도 했지만 1917년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1917년부터 카프카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회복을 위해 쉬는 게 필요했고 가족들, 특히 그의 셋째 누이 오틀라가 그를 돌보았다. 그 자신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남들에게 혐오스럽게 인식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소년 같고 깔끔하고 꾸미지 않은 외모, 조용하고 멋진 태도, 꽤 지적이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1920년대 초반 그는 체코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á)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23년 그는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잠깐 가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정통 유태교 집안 출신으로 유치원 교사였다. 그녀는 게토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독립적이었다. 도라는 그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줬다. 카프카가 임상적인 우울증과 사회불안증을 앓았음은 정설로 이해된다. 또 편두통, 불면증, 변비, 부스럼과 불안정증도 있었는데 보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세들이 나타났다. 그는 채식이나 멸균되지 않은 우유(이 우유는 아마 결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의 대량 음용 등 자연요법 처방을 통해 여러 병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결핵은 악화되었다. 그는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 다음 비엔나에서 가까운 결핵요양소에 갔고 그곳에서 1924년 6월 3일 사망했다. 굶주림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목은 음식을 먹으면 너무 아픈 상태였다. 정맥영양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때라 영양공급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단식광대의 주인공과 닮은 운명이다) 그의 유해는 프라하로 보내졌고 1924년 6월 11일 지즈코프(Žižkov) 구역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는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생전에 카프카는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발표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를 꺼렸으며, 발표된 작품들도 대중의 몰이해 속에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줄 것을 부탁했을 만큼 쓰는 것 외의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타계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카프카는 공식적인 종교에 대해 전생애에 걸쳐 무관심했다. 그의 글에서 유대인으로서의 특성을 결코 나타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대인 뿌리를 당황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지적으로 하시디즘(유대교 신비주의의 하나)이 그의 맘을 강하게 끌었다. 특히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경험 같은 면 때문에 그랬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판결', '화부', '단식광대', '시골 의사' 등에 나타난 윤리적 절차적 진퇴양난의 상황은 법과 정의 같은 것에 관련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한 카프카의 관심을 담고 있다. '가수 요제핀'에서의 논쟁적 해설자의 웃길 만큼 세심한 스타일은 랍비들의 수사적 관습을 은근히 나타낸다. 카프카는 생전에 몇 편의 단편만을 발표하였으며, 발표된 작품은 그가 작성한 작품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미완성으로 마감되었으며(예외는 《변신》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죽기전 그의 친구이자 문학적 유산 관리 집행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파기시켜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그는 카프카의 유언을 어기고 보유하고 있던 많은 작품을 출간하게 감독하였다. 출간된 작품은 곧 주목받기 시작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연인 도라 디아만트 또한 카프카의 유언대로 부분적으로 원고를 파기하였으나, 비밀리에 20편의 노트와 35편의 편지를 숨겨 가지고 있다가 1933년에 게슈타포에 의해서 압수당했다. 이 유실된 원고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변신』 외에 대표작으로 『심판』 『성(城)』 『실종자』 『유형지에서』 『시골의사』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등이 있다. 카프카의 모든 출판된 작품은,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체코어로 쓴 몇편의 편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독일어로 쓰였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어에 유창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 독일어로 저술했는데, 보헤미아의 수도인 그곳의 유태인과 비주류인 기독교인들이 쓰는 언어였다. 그는 프라하 독일어가 고지 독일어 (High German) 보다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라하 독일어를 잘 사용함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완전히 그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아주 긴 문장을 쓸 수도 있었다. 카프카는 마침표 바로 앞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문장의 박력을 종종 주기도 했다. 그런 박력은 의미와 강조점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번역자가 직면하는 또 다른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가 "를 "판결" 마지막 문장에 쓴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문장은 "그 순간 끝없는 교통행렬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와 같이 번역될 수 있다. 이런 명백히 이중 의미를 지닌 'Verkehr'란 단어를 쓴 이유는 카프카의 고백에 따르면 이렇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한 고백에 따르면 그는 "격렬한 사정'을 생각하며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에서는 '교통'이란 번역밖에 다른게 뭐가 있겠는가? 한 작가의 삶이 물론 그의 문학 창작에 경우에 따라서는 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카프카의 길지 않은 삶의 여정은 그의 문학 세계의 섬세한 면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의 문학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을 대충 간추려 본다면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상, 그의 약혼녀 펠리스 바우어, 유대인의 주체의식 등을 들 수 있겠다. 문학비평의 측면에서는 자주 거론된 "삶의 의미 추구"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짧게 손꼽을 수 있겠다. 카프카는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이렇게 강력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친구에게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첫대면 (1912년 8월 13일)을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펠리체 바우어가 이 짧은 기록에서 마치 카프카 소설의 한 인물처럼 묘사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가 카프카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아마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첫대면 후 카프카는 그야말로 억제할 수 없는 창작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약 한달 후 그는 하루밤 사이에 (9월 23일)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수도 없이 써 보낸 편지는 훌륭한 서한문학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오늘날 카프카의 섬세한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으로서 카프카를 알게 된 당시 독일의 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무여직원이었다. 안니카 소렌스탐 안니카 소렌스탐( , 1970년 10월 9일 ~ )은 스웨덴의 여자 골프 선수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록들을 남긴 골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스톡홀름 출생으로, 12세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 유학 중이던 1992년에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우승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93년에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1994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신인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인 1995년에는 3승을 거둬 상금왕에 올랐다. 2003년 5월에는 여성 선수로는 58년 만에 미국 프로 골프(PGA) 투어에 초대받았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뱅크 오브 아메리칸 콜러니얼 (총상금 500만 달러)에 출전한 그녀는 2라운드 합계 5오버파 145타 96위에 머물러 컷 오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해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마리아는 원래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셋째 카를과 넷째 요한을 낳은 후에 낳은 자녀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1787년 마리아가 죽은 후 살림을 맡아 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부양은 베토벤의 몫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를(Anton Karl Beethoven :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Thayer)는 바가텔집 작품33과 가곡 작품52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 카를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스 요한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으로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게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문학과 고전문학을 접하였으며,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평생 친구이자 재정지원자가 되는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된다.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han)은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87년 베토벤의 첫 빈 여행에 관하여 확실하게 단정짓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모차르트를 만났는지, 만났다면 어느정도 대화를 나누었는지, 또는 모차르트에게서 레슨을 받았는지의 여부도 확인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토 얀이 주장한 것과 같이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만났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근거 또한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당시의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사소한 방문객은 잘 만나주지도 않았던 터라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은 시골청년 베토벤에게 관심을 보였을리 없고, 모든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리라는 것이 근래의 통설이며 국제음악계에서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것을 증명해줄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빈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이 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자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젋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둘이 서로 잘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서 뛰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짜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793년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C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떠나자 베토벤은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신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 1794년 하이든이 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 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와 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과 2번과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 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7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지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무치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륀스비크(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 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에서는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겪은 이유를 납중독일 것으로 헤아렸다. 백만불 미스터리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 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 때 이 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납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가수 카롤리네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고,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한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력상실은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수첩에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고,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Anton Schindler)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베토벤 이전까지의 음악가와 귀족간의 관계는 종속관계였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든도 에스테르하지 가문 소속의 음악가였지만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후계자가 워낙 음악에 관심이 없던 탓에 말년이 돼서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모차르트도 귀족과의 종속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코 백작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은 끝에 결국 종속관계에서 벗어났지만, 그 때문에 후원을 받지 못하여 가난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들이 더 성숙했던 이유는 귀족과의 종속관계에서 귀족의 요구대로 작곡했던 틀을 벗어나 좀더 자신의 감정이 반영된 영향이 큰 이유였다. 베토벤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베토벤은 역대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가장 많은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이 워낙 평이 좋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이름의 붙여진 '판(van)'이라는 호칭이었다. Van이라는 호칭은 그 당시에는 네덜란드 출신 귀족에게만 붙는 표시였고, 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가 17살 때 독일로 이주한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게르만계의 독일,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베토벤에게만큼은 같은 동급으로 대우를 해주었다. 베토벤의 이름에 붙여진 Van 칭호 덕분에 그의 초창기 빈 데뷔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쉬운 편이었다. 베토벤은 귀족들로부터 동급 지원을 받았었을 뿐더러, 음악가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게 되어 나중에는 베토벤 스스로도 귀족들의 존경과 인사를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베토벤》(계몽사)에 따르면, 1812년 베토벤과 그가 존중하는 시인인 괴테가 테플리츠(Teplitz) 온천에서 처음으로 만나 같이 산책을 하던 중에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가는 왕후들의 행렬을 보고 괴테는 먼저 인사를 했지만, 베토벤은 그들이 먼저 인사를 하기를 기다렸으며 기어코 왕후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로 인하여 괴테와 베토벤은 친분을 깊게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중에 베토벤이 베티나 브렌타노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아 전해지게 된다. 이렇게 괴테와 헤어진 뒤에 좋아하는 시인들로 호우머, 실러, 클롭슈토크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괴테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이런 사고방식은 후대 음악가 및 예술가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베토벤 사후에 여러 음악가들이 귀족의 종속관계가 아닌 음악가, 즉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받을 길을 가는 발판을 마련해주게 되어 후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했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베토벤의 후원으로 돌아와서, 그의 데뷔 초창기에는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면서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피아노 3중주 7번(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불과 2km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이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못해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 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 후 슈베르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검에 따르면 머리카락에 수은이 치사량 이상 함유되어 있어서 독살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1802년 정도까지를 초기로, 그 이후부터 1814년 정도까지를 중기로,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를 후기로 본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들 수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 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는 장엄 미사, 마지막 다섯 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 등)이다.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와 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와 E. T. A. 호프만의 민속적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으로 알려졌던 “예나” 교향곡(C 장조)은 프리드리히 비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미완성 교향곡으로 알려진 10번 교향곡은 베리 쿠퍼에 의해 단악장 교향곡으로 재구성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89년에 초연되었다. (감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x9SlluALSw ) 빈 빈(, , , , , , )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도나우강이 도시 내부를 흐르며 인구는 약 182만 명이다. (2013년 기준) 원시 시대부터 빈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기원전 15년에 로마군이 경계선을 세워 “빈드보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게르만족이 거기를 차지할 때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800년대 후반에는 마자르족이 빈을 통치하였다. 독일 황제군이 900년대 후반에 빈을 정복하였고, 1150년에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주요 관저가 되었다. 1273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리로서 번영하였다. 교통의 요지여서 11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서 융성하였고, 15세기 이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전성기 시절엔 인구 200만을 넘나드는 대도시였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 빈 문턱 앞까지 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이 두 번이나 빈을 공략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빈에서 《꿈의 해석》을 출간한 1900년경, 빈은 다소 고색창연하기는 하지만 우아한 대도시로 비쳐졌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대성당의 고딕식 첨탑은 바로크 스타일의 여러 교회를 보듬고 있었다. 법원 건물은 화려와 우울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접시 오른쪽에 은제 식기를 놓고 스페인 식으로 식사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군이 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 소련군의 공세로 벌어진 빈 공세는 베를린 공방전 다음으로 치열하였다. 1955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점령 아래 있었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인이 대부분이며, 소수의 체코인, 헝가리인도 살고 있다. 시내에는 슈테판 대성당 등 각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이는 교회와 쇤브룬궁,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벨베데레궁, 호프부르크 등 문화 시설이 많다. 이처럼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인 동시에, 도나우 강변에는 오스트리아 유수의 공업지대가 펼쳐져 있다. 또한 음악의 도시로도 알려졌으며, 베토벤을 비롯한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그리고 말러 등의 음악가들이 여기서 활약을 하였다.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빈 소년 합창단이 유명하다. 2011년에는 빈 카페하우스 문화가 유네스코(UNESCO)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6년, "쇤브룬궁과 정원 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었다. 2001년에 시내 중심시 및 그 이 등록대상에 추가되어, 에는 이 "빈 역사 지구"로 명명되었다. 그것은 몇 가지 역사적인 건물, 성 슈테판 성당 및 문화 기관을 포함한다. 유엔 빈 사무국을 비롯하여 빈에 본부가 있는 국제 기구는 다음과 같다. 도나우강 도나우강(, , , )은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루마니아 동쪽 해안을 통해 흑해로 흘러가는 길이 2,860km의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도나우강은 독일 남부의 브레게강과 브리가흐강이 합류하면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평원을 지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이른다. 여기서 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철문(鐵門, Iron Gates)이라고 불리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하류에 이르면 저지대인 루마니아 남부의 왈라키아 평원을 지나게 된다. 흑해에 가까워지면서 도나우강은 도브루자 구릉지대를 만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비로소 흑해로 유입한다. 강 하구에서는 세 개의 주요 분류로 나뉘면서 삼각주를 형성하는데 그 면적은 약 5,000km이다. 강이 흐르는 지역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독일의 라인 마인 도나우 운하가 1992년 건설된 이후 도나우강은 북해의 로테르담으로부터 흑해의 술리나까지 전 유럽을 가로지르는 3500km 수로의 일부가 되었다. 도나우강으로 운송된 화물량은 1987년에 1950년 수준의 13.3배인 9천 180만 톤으로 집계되었다. 1999년 코소보 전쟁 시기에 있었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과정에서 세르비아 교량 3곳이 파괴되어 도나우강 운행이 한동안 힘들어졌다가 2002년 그 잔해가 모두 치워졌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명한 왈츠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가 있다. 도나우강의 또다른 명칭 다뉴브강은 원시 인도 유럽어 "다누" (*dānu)에서 유래한, 원시 유럽 강의 이름이다. 동일한 어근에서 만들어진 다른 강에는 두나이강, 치비나/다우가바강, 돈강, 도네츠강, 드네프르강, 드네스트르강, 지스나강, 타나강/데아트누강, 투오니강이 있다. 베다어에서, "다누"는 "흐르는, 떨어지다"를 뜻하며, 아베스타어에서는 같은 단어가 "강"을 의미한다. 리그베다에서 다누는 “강의 수로를 막는 용”인 브리트라의 어머니로 한번 등장하기도 했다. 핀란드어로 도나우강을 뜻하는 토나바는 스웨덴어, 독일어 명칭인 도나우강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사미어 명칭인 데아트누는 “거대한 강”을 뜻한다. 아베스타어의 경우처럼, 스키타이어의 다누가 “강”에 대한 총칭어일 가능성이 있다. 다나프리스(Danapris)와 다나스티우스(Danastius)에서 전래한 드네프르강과 드네스트르강은 각각 스키타이어 다누 아파라 (*dānu apara, "먼 강")과 다누 나즈디야 (*dānu nazdya, "가까운 강")에서 지속된 것으로 가정한다. 도나우강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스트로스" ()로 알려졌다. 망델브로 집합 망델브로 집합()은 브누아 망델브로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망델브로 집합은 다음 점화식으로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c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이를 복소수를 사용하지 않고 정의하려면 모든 복소수를 실수부와 허수부로 나누면 된다. 만약 z을 (x,y)로, c를 (a,b)로 바꾸면 위 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가 된다. 이 집합의 이름은 이를 고안한 프랑스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의 이름을 따라서 만들었졌는데, 원래 독일어(또는 이디시어) 이름대로 '만델브로트' 집합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망델브로 집합 표기로 f(z) = z + c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함수로 표현하면 f(z) = z + c가 된다. 망델브로 집합을 실제로 그릴 때에는 점화식에 따라 z을 계산하면서 수열이 발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대수적으로 검사하게 된다. z의 절댓값이 2보다 크다면(즉, x+y>2이라면) z은 발산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때의 c는 망델브로 집합에 속해 있지 않는다. 이 때의 2라는 값은 발산하는 수열의 계산을 미리 막아 주는 역할을 하며, 경계값이라고 부른다. 반면 망델브로 집합 안에 속해 있는 점의 경우 z은 발산하지 않으므로 무한히 계산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적절한 n값 이후에 계산을 멈추어야만 한다. 무한히 계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론적인 망델브로 집합이 아닌 이에 근사한 집합만 얻을 수밖에 없다. 수학적인 의미에서 망델브로 집합을 그린다면 집합 안의 부분과 밖의 부분 두 가지만 의미가 있으며 단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져도 충분하다. 하지만 많은 프랙탈 생성 소프트웨어에서는 처음으로 경계값을 벗어난 z의 n값에 따라 망델브로 집합 바깥의 영역을 다른 색으로 칠한다. 예를들어 가장 빨리 발산하는 점은 어두운 녹색으로, 그리고 발산속도가 느려질수록 더욱더 밝은 녹색으로 칠하면 이론적으로 발산속도가 늦어질수록 그 c값은 망델브로 집합에 가깝다는 뜻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망델브로 집합에 색을 입히는 방법에 따라서 예술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한 프랙탈 예술도 있다. 망델브로 집합은 통계적인 자기 유사성을 지닌다. 망델브로 집합의 경계의 하우스도르프 차원은 2차원이다. (망델브로 집합 자체도 물론 2차원이다.)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Julia set)의 일종의 "지도"가 된다. 망델브로가 그려지는 복소 평면의 각 점이 쥘리아 집합의 초기값과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있는데, 망델브로 집합 내부의 점에 대응하는 쥘리아 집합은 연결 공간인 반면, 바깥의 점들은 연결 공간이 아닌 쥘리아 집합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복소수의 다른 점화식으로 정의되는 다른 프랙탈의 경우도 망델브로 집합에 대응되는 것과 쥘리아 집합에 대응되는 것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도 종종 해당되는 프랙탈의 망델브로 집합과 쥘리아 집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으로 정의되고 "피닉스 집합(phoenix set)"이라고 불리는 프랙탈의 경우, 우리는 x와 y의 초기치를 (x,y)=(x,y)=(0,0)으로 놓고 "피닉스의 망델브로 집합Mandel-type phoenix"을 그릴 수 있고 임의의 c값에 대해서 "피닉스의 쥘리아 집합Julia-type phoenix"을 그릴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합에서도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지도"가 되며 망델브로 집합의 안의 점에 대응되는 쥘리아 집합은 connected이며 바깥의 점에 대응되는 것은 disconnected인 성질이 보존된다. 한 개의 변수 c 대신 여러 개의 변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 때의 망델브로 집합은 쥘리아 집합의 완전한 지도가 되기 위해서 2차원 이상의 차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쥘리아 집합 쥘리아 집합()은 가스통 쥘리아가 고안한 프랙탈의 일종이다. 쥘리아 집합은 주어진 복소수 c에 대해서 다음 점화식에 따라 정의된 수열이 발산하지 않는 성질을 갖도록 하는 복소수 z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위의 점화식은 만델브로 집합의 것과 같지만, 만델브로 집합은 z=0+0i일 때 z를 발산하지 않게 하는 c의 집합이라는 점이 다르다. 즉, z와 c의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쥘리아 집합은 만델브로 집합과 동일하게 자기유사성을 가지며 가까운 두 점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초기 조건의 민감성도 가진다. 사람 목록 이 문서는 사람에 대한 목록 문서를 나열한 것이다. 수도 수도(首都) 또는 서울은 한 국가의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말한다. 수도에는 대부분 중앙 정부가 소재해, 국가원수 등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거점으로 두는 도시이다. 다만 중앙 정부의 소재와는 별도로 그 나라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되고 있는 도시가 수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국가에 따라서는 여러 개의 수도가 있기도 하며, 수도에 실제 행정부가 위치하지 않거나, 주요 국가 기관이 여러 도시에 나뉘어 위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부는 프리토리아에, 입법부는 케이프타운에, 사법부는 블룸폰테인에 있다. 네덜란드의 헌법은 암스테르담을 수도로서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정부와 대법원은 헤이그에 위치해 있다. 무조건 최대도시라고 수도는 아니다. 최대도시가 수도가 아닌 나라는 다음과 같다. 1.중화인민공화국 수도=베이징 최대도시=상하이 2.베트남 수도=하노이 최대도시=호치민 3.미국 수도=워싱턴 최대도시=뉴욕 4.오스트레일리아 수도=캔버라 최대도시=시드니 5.스위스 수도=베른 최대도시=취리히 현재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서울이 수도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세종(당시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였으나,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 후로도 행정 수도 이전 계획은 계속 추진되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헤이그처럼 행정 수도 이전을 계획하고 있다. 수도에 대한 고유어 표현은 '서울'이다. 그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어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은 '쇠[鐵]-벌[源]'이나 '설[새: 新, 金]-벌[땅: 羅, 城]'의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이를 '셔ㅸㅡㄹ(shovl)'이라고 읽게 되었고, 그 외에도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에서 서울을 '徐蔚'으로 음차해 사용했다. 쿠마라지바 쿠마라지바() 구마라습, 구마라십, 구마라집, : 344~413)는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의 불교 사상가다.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중국 후진(後秦) 시대 장안(長安)에 와서 약 300권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게 유명하며, 그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 삼장법사(三蔵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 많은 삼장이 등장하였다. 쿠마라지바는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는다.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써 취급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쿠마라지바는 번역에 대해 "이미 입에서 한 번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 원래의 맛을 잃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역질까지 느끼게 한다"고 했으며, 한역에 대해서도 "천축의 풍습은 문채를 몹시 사랑하여 그 찬불가는 지극히 아름답다. 지금 이것을 한문으로 옮겨 번역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전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조선 중기의 문인 서포 김만중은 쿠마라지바의 말을 인용해, 문학의 가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음성언어)에서 시작해 글과 노래(즉 시각언어)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한글로 쓰여진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칠언고시 같은 중국식으로 번역하려는 것에 대해 자기(조선)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중국)의 말을 배워서 표현해 봤자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고 당시의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적지 않은 순수한 모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동물행동학 동물행동학(動物行動學, ethology)은 20세기 초엽에 동물학의 한 연구 분야로 시작되었다. 동물의 행동, 행태, 습성 뿐 아니라 진화, 유전, 학습, 환경 등의 관찰을 통하여 동물행동에 대해 이해하려 하는 학문이다. 일반 대중 및 학계에 동물행동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한 대표적 학자로는 1973년 동물 행동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네덜란드 생물학자 니콜라스 틴베르헌(Nikolaas Tinbergen)과 오스트리아 생물학자들인 카를 폰 프리슈(Karl von Frisch)와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를 들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고 행동의 인과관계 분석, 행동의 생존값, 행동의 개체발생 및 계통 발생 검토, 네 가지의 큰 과제로 나뉜다. 유전학, 생리학, 신경생물학 등의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동물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최첨단 장비와 수학적 통계 분석이 수반되어야 하는 정밀 학문이다. 동물행동학에서는 행동의 정밀한 관찰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개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관찰은 충분치 않다. '우리 개는 초당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걷고 있다. 머리는 어깨 관절 높이와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이 풀린 듯 귀가 옆으로 40도 각도로 쳐져 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뒤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와 같이 구체적이고 정확한 관찰을 해야한다. 동물은 아주 짧은 동안에도 많은 수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이러한 많은 수의 행동들을 관찰해야 하는 학문이 동물행동학이다.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철학자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가 주아브 보병 연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1913년 알제리의 몬도비(Mondovi)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842년생의 노동자였고 아버지는 1885년 생이다. 뤼시앵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 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리에서 가난하게 지냈다.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들과 살았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 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1935년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니아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결과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940년 이혼한다.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 비록 그는 프랑시느를 사랑했지만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는 비끄덕 거렸다. 심지어 프랑시느가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으며 그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프랑신에게 더 고통을 주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대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파리스와(Paris-Soir)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1월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독일육군)가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저항을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보르도로 이동하여 그 근교에서 파리스와의 활동을 끝냈다. 이 해, 그의 첫 책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저술하였다. 그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카뮈는 보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기 시작했다.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당시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의 기분도 상하게 했다. 이러한 반응은 카뮈를 화나게 했고 그는 연극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귤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이 있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여전히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던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 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카뮈는 상스(sens)에서의 차 사고로 Villeblevin의 작은 마을에 있는 Le Grand Fossard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1960년 1월 4일에 사망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전철 티켓이 발견되었다. 카뮈가 전철로 여행을 떠나려 했음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전철 대신에 자동차로 떠났다. 동시에 카뮈는 젊은 시절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포셀 베가 차의 운전자, 미첼 갈리마르, 카뮈 책의 출판자이자 친한 친구, 역시 사고에 대해 곤란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카뮈는 the Lourmarin Cemetery, Lourmarin, Vaucluse, Provence-Alpes-Côte d'Azur, France에 매장되었다. 카뮈 사후, 그의 두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Meursault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지은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5년에 출판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독자에게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독자에게 발표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적이지 않고 삶과 행복의 위대한 진가를 반영하면서 이 분석을 행하고 있다. 신화(Le Mythe)에서 이 이원성은 페러독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나는 나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페러독스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나는 나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의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신화에서 카뮈는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를 경험하고 어떻게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 가치를 두는 데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무가치하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칼리쿨라는 끝내 자신의 부조리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고의로 야기한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카뮈가 아마 칼리쿨라의 부조리적 이성이 틀렸다고 제안하는 할지라도 이 연극의 반 영웅은 작가가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시켰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하였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그리고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의 이적자들에게 카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다.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김화영이 번역하고 책세상에서 출간된 카뮈의 전집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Sérgio Vieira de Mello, 1948년 3월 15일 - 2003년 8월 19일)는 브라질 외교관으로, 30년 이상 유엔에서 활동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태생인 지 멜루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면, 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캄보디아, 동티모르, 보스니아 등에서 근무하며, 분쟁조정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특별대사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중 2003년 8월 19일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차랑 폭탄테러에 희생되었다. 테러에 희생되기 전 그는 일부에 의해 코피 아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미하엘 엔데 미하엘 안드레아스 헬무트 엔데(, 1929년 11월 12일 ~ 1995년 8월 28일)는 독일의 작가이다. 바이에른주의 최남단인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 근처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판타지 문학으로 유명하다. 뮌헨의 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배우, 극작가, 연출가, 비평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1960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1973년 동화소설 《모모》를 발표하여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엔데의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3,000만 부 이상의 재고가 판매되고 약 40종류 언어로 번역되었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시에 사로잡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전세계에 수천만의 독자를 가진 엔데에 대해 세계의 언론들은 동화와 환상소설을 통해 금전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고발한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작품으로는 <기관차 대여행>, <모모>, <끝없는 이야기>, <마법의 설탕 두 조각>, <마법학교>, <냄비와 국자 전쟁> 등이 있다. 《Lirum Larum Willi Warum: Eine lustige Unsinngeschichte für kleine Warumfrager》 《Die Schattennähmaschine》 《Das Gauklermärchen (The Juggler's Tale)》 《Written with Erhard Eppler and Hanne Tächl - Phantasie/Kultur/Politik: Protokoll eines Gesprächs (Fantasy/Culture/Politics: transcript of a conversation)》 《Die Ballade von Norbert Nackendick; oder das nackte Nashom》 《Der Spiegel im Spiegel (1986) (Translated into English by J. Maxwell Brownjohn as Mirror in the Mirror: a labyrinth in 1986)》 《Filemon Faltenreich》 《Der Goggolori (1984)》 《Wrote the libretto for Die Jagd nach dem Schlarg》 《Die Vollmondlegende (1989) (The Legend of the Full Moon)》 《Der lange Weg nach Santa Cruz (The Long Road to Santa Cruz)》 《Der Rattenfänger)》 외 다수 파울 파이어아벤트 파울 카를 파이어아벤트(, 1924년 1월 23일 ~ 1994년 2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이다. UC 버클리에서 철학 교수를 역임하며 현대 과학철학에 크게 공헌했다. 과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방법론을 거부하였으며, 과학적 지식을 다른 종류의 지식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폴 파이어아벤트는 1924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에서 초등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43년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군 복무 기간 중 그는 동부 전선에서 척추에 유탄을 맞았고, 남은 생애 동안 다리를 절어야 했다. 1947년에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학, 역사, 사회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951년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가서 칼 포퍼 아래에서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관을 존경하였지만 뒤에 포퍼의 과학관을 철저히 비판하게 된다. 1955년 이후 1990년 까지 UC 버클리, 오클랜드 대학교, 서섹스 대학교, 예일 대학교, 런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ETH 취리히 등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마지막엔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의 두 군데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 이후 1990년에 UC 버클리와 ETH 취리히에서 명예교수직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스스로 아나키즘적, 다다이즘적이라고 평가했다. 파이어아벤트는 런던 정치경제대학의 러커토시 임레와 함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을 주제로 책을 쓰려 했다. 이 계획은 1974년 러커토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맡은 부분을 《방법에 반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1989년 UC 버클리를 떠난 파이어아벤트는 1991년 학계에서 은퇴한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자들이 항상 사용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정해진 방법론이야말로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함으로써 과학적 진보를 막는다고 생각했다. 파이어아벤트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한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이성적 요소가 아닌 미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갈릴레오 등의 과학사적 사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노력하였다. 파이어아벤트는 귀납을 강조하는 논리실증주의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 부각된 칼 포퍼의 반증주의 양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관찰이나 반증주의적 논박 모두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경계 조건을 설정하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로 보았다. 라카토쉬 임레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에 대해서는 이론 자체의 모호함이 자신이 주창한 아나키즘적 과학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파이어아벤트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중세 기독교,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교조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과학의 억압으로부터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의 발전을 인문사회적 결과로 해석하는 스트롱 프로그램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과학지식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며, 이러한 지식의 확보는 과학의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과학주의에 반대한다. 즉, 과학주의가 권력과 손을 잡고 행정과 교육과 정치 등 인간 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다양성이 허용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받는 ‘민주적 상대주의’이다. 그는 ‘자유를 증대하고 풍요로운 삶과 보람된 삶을 살려고 하는 노력’을 옹호하고 ‘전인적으로 발전된 인간을 길러내고 또 길러낼 수 있는 개성의 함양’을 지지한다. 그리고 조상들이 유일하게 참되다고 생각 한 종교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듯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된 과학의 속박에서 이 사회를 해방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어아벤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사회'이다. 만약 과학에 어떤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포퍼 등 기존의 과학철학자들로부터 급진적인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책은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의 근대 이후 서구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이며, 과학이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는 상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과학이나 신화나 미신, 점성술과 비교해서 결코 우월한 지식일 수 없다는 파이어아벤트의 결론은 고유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은 논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지닌 지식이기 때문에 몇가지 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방법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이다. 올림포스 12신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12신, 또는 도데카테온 (, dōdeka, "열둘" + θεοί, theoi, "신들")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 판테온의 주역 열두 신을 말한다. 숫자 12는 고대 바빌론에서 통용되던 12 천문성좌도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포스 12신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 신화에 정착되었으며,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최초로 이 열두 신을 신전에 봉정하였다. 이들에 대한 종교 의식이 처음으로 언급된 고대 문헌은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호메로스 찬가이다. 예술과 시에 표현된 고전적인 구성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헤스티아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는 별개로 로마 신화의 구성은 유피테르, 유노, 넵투누스, 케레스, 마르스, 메르쿠리우스, 불카누스, 베누스, 미네르바, 아폴로, 디아나, 베스타로 이루어져 있다. 장피에르 베르낭에 따르면, 올림포스 12신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이 숫자에 누가 포함되느냐에 따라서 그 구성이 쉽게 바뀌는 유동성을 띄었다. 기원전 400년 경 헤로도토스는 도데카테온을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테나, 헤르메스, 아폴로, 알페이오스, 크로노스, 레아, 카리테스로 구성하였다. 근대 문헌학자 빌라모비츠는 헤로도로스의 열두 신을 따랐다. 헤로도토스는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헤라클레스를 포함시켰다. 루키아노스 또한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는데,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한 두 신은 설명하지 않았다. 코스 섬에서는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를 열두 신에 포함시켰으며,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는 제외하였다. 그러나 핀다로스, 아폴로도로스, 헤로도로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헤라클레스를 열두 신이 아닌 숭배의 대상 중 한 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올림포스 열두 신을 일 년의 열두 달과 연관지으며, 마지막 달에는 하데스와 죽음의 영혼의 영광을 기리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가 하데스를 열두 신 중 한 명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데스는 지하 세계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구성에는 점차 제외되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열두 신을 황도 12궁과 함께 나열하였으며, 이 구성에서 헤스티아는 제외하였다. 헤스티아를 대신하여 디오니소스가 열두 신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헤베, 헬리오스,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다른 신들이 열두 신에 포함되기도 한다. 에로스는 다른 열두 신, 특히 그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와 나란히 묘사되어 있기도 하는데, 올림포스 열두 신 중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가 형제들과 함께 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헤스티아, 하데스는 모두 한 형제이며, 아레스,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아폴로, 아르테미스, 카리테스,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헤베,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의 자녀이다. 일부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토스를 헤라 혼자서 낳은 것으로,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설명한다. 이 밖에 제우스로부터 태어났지만 다른 신을 수행하거나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신들은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데스 플루토 지하세계, 사자(死者), 부자, 광물의 신 첫번째 부친:크로노스 모친:레아 다음은 고전 올림포스 12신 목록에 포함되지 않지만 위에서 설명한 다른 목록에 포함될 수 있는 신들이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판 성경 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과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경기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가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여,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의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시의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1807년 1807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40년 1940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유대인 유대인() 또는 유태인(猶太人), 유다인은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기원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집단이다. 히브리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의 가계는 기원전 18세기경에 가나안과 그 주변 지역에 살았던 성서 속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그 부인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 라헬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이자 당시 이집트의 고관이었던 요셉과 고센 지역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파라오가 초청하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이들 족장들의 후손들은 나중에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했으며 이후 모세의 지도 하에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보통 이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탈출 시기를 기원전 13세기로 본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주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후손이며 부분적으로는 베냐민 지파와 레위 지파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들 지파는 고대 유다 왕국을 형성했었으며 이 중 유다 지파가 주류였고 베냐민과 레위 지파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에도 속했었다. 유대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사마리아인인데, 이들은 연합 왕국 분열 이후 형성된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이며 그들의 전승에 따르면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이들의 조상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 민족성과 종교는 매우 밀접한 관계인데 이는 유대교가 유대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로의 개종자들은 보통 유대인 사회 내에서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주류 유대교에서 개종은 권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려운 일로 여겨지며 주로 유대인과 비유대인과의 결혼이 이에 해당된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 수립되었으며 기본법에서 스스로를 유대 국가로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귀환법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요구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국적 취득을 승인한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에 두 번 정치적으로 독립을 달성했었다. 첫번째 시기는 판관 시대와 이후 이어지는 연합 왕국 시대였으며 연합 왕국의 몰락 이후 그 영토는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된다.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로마 시대의 유다의 지명이었던 유대아(Judea)에서 유래되었으며 남유다 왕국 출신의 사람을 의미한다. 기원전 587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기원전 586년엔 유다가 신바빌로니아의 일부가 되었으며 유다에 남은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게 되었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끝났다. 제2차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건설이 끝났다. 페르시아령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멸망하는 기원전 333년까지 제국에서 평화로운 지역에 속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다시 기원전 140년에서 36년까지 하스모니안 왕조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한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명에 따라, 영원하고 고대 이스라엘인과 고대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로서 가나안 땅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고대 히브리 왕국을 세웠다. 2대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왕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사울 왕가와 필리시테인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하느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다윗왕이 그 뒤를 이었다. 그의 아들 3대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 신(新)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 멸망하였다. 그 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비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서의 외경 중 '마카비 상,하'에 나와 있다. 마카비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 약 100년간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하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스파라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이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의 4대 분파는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아슈케나짐은 전통적으로 이디시어를, 스파라딤은 라디노어(유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거의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스파라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과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범 스파라딤계이다.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조지아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러시아 유대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 유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일본의 아시아 유대인도 있다. 한편 헝가리계 유대인 역사학자 아서 쾨슬러와 일본 학자 우노 마사미 등은 아슈케나짐이 인종적으로 셈족이 아닌 백인계 투르크족 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낸 폴리악도 1944년에 <하자르 왕국과 유대교 개종>이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이 하자르 멸망 후 동유럽·중앙유럽으로 흩어져 아슈케나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셈족 유대인들에게는 금발이나 푸른 눈이 없으나 아슈케나짐 중에는 백인과 유사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한다. 2005년 유럽 유전체 학술지에 따르면 최근 인류학과 유전학 연구의 성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을 비롯한 기타 유대인의 인종학적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이 밝혀져 아서 쾨슬러 등이 주장한 아슈케나짐의 하자르 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 스파라딤과 아슈케나짐 사이엔 갈등이 많은데, 세력으로나 영향면에서 아슈케나짐이 압도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약 1천 8백만 명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약 1천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약 1천 4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약 580만 명, 이스라엘에 약 6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각각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친 유대인의 후손이며 소련의 경우 자국으로 피해서 들어온 유대인들을 거의 한반도 근처까지 도피시켰는데 그 일대에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되었다. 훗날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유대인 자치주에 살던 유대인 대부분이 독일로 되돌아갔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40만 명, 라틴 아메리카는 약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건국된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프랑스로, 그 다음이 영국이다. 그 외, 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등이며,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많이 이주해 온다고 한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리(李), 장(张), 안(俺), 진(金)씨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가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북송의 카이펑(开封)에 거주하여 카이펑유대인(开封犹大人) 또는 이츠러예(一赐乐业, 일사락업)인(人)으로 불렸다. 이츠러예(一赐乐业)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교의 무슬림처럼 유대인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신앙으로 인해,북송시대의 중국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를 고교(古教), 남모회회(藍帽回回) 등으로 불렀으며, 유대인을 죽흘(竹忽), 주오(主吾), 주호득(朱乎得), 축호(祝虎), 주혁(珠赫) 등으로 불렀다. 북송 카이펑의 이츠러예인들은 한족과 같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으며, 명(明)나라가 건국되자,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人)은 본족내 통혼(本族内通婚)을 불허함을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시스템 소프트웨어 시스템 소프트웨어(system software, )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컴퓨터 하드웨어를 동작,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컴퓨터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모든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대한 일반 용어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응용 소프트웨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메모리에서 하드 디스크로 데이터를 전송한다든지 문자열을 디스플레이 장치로 출력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한다. 시스템 소프트웨어에는 로더, 운영 체제, 장치 드라이버, 프로그래밍 도구, 컴파일러, 어셈블러, 링커, 유틸리티 등이 포함한다.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는 시스템 소프트웨어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C 런타임 라이브러리는 보통 시스템의 일부로 여기지만, 오픈GL이나 데이터베이스 라이브러리의 경우는 명확하지 않다.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집적 회로의 비휘발성 기억 장소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보통 펌웨어로 부른다. 앙투안 라부아지에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1743년 8월 26일 ~ 1794년 5월 8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뛰어난 실험자였으며, 화학 이외의 다른 방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공직을 맡기도 하였다. 연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면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산화 과정에서 산소의 작용, 산화나 호흡 간의 정량적인 유사점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으며 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근대 화합물 명명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 고등법원의 법률 고문으로 일하던 장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인 에밀리에 라부아지에 사이의 첫째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에밀리에 라부아지에는 딸을 한 명 더 낳은 뒤 1794년 3월 24일 사망하였다. 1748년 라부아지에의 가족은 장 앙투안의 장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바람으로, 1754년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760년 여동생이 사망한 후,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라부아지에 역시 그들에 기대에 부응하여 배우는 데에 상당한 열정을 가졌다.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배웠는데, 라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1년 6월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하였고, 가문의 전통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을 두었고, 라카유의 조언을 따라 기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라카유와의 관계는 1762년 3월 라카유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라부아지에는 왕의 정원에서 베르나르 데 쥐시외 등의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수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엘은 지질학을 처음으로 가르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험적인 방법을 매우 중시하는 등 앞서 나가는 면도 있었으나, 연금술과 사원소설(四元素說)에 큰 관심을 가지는 등의 구시대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장에티엔 게타르를 만나 1763년 광물학적·지질학적 조사를 위해 발루아 지방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게타르는 이후로도 계속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4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연 과학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176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서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8월 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 1765년 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게타르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광물학·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1767년 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 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6월 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당시에 물을 계속해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과학자들은 식물이 물만으로도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물이 흙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버트 보일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물을 계속해서 증류하면 고체가 남으며, 이것이 물이 변화하여 생긴 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반증으로 인해서 라부아지에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 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하였고 그 결과 고체가 남음을 알게 되었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는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 1772년 11월 1일에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할 경우 공기를 잃으며 금속이 생성되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는 공기 중 어느 성분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와 화학 소론》("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이라는 책으로 1774년에 출판하였다. 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하였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탈플로지스톤 공기”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1774년 9월 30일 편지로 보냈으나, 정작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일부 과학사 학자, 특히 스웨덴의 과학사 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셸레의 편지를 무시한 일이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이산화 탄소가 생성된다는 사실은 이전의 실험을 통해서 알려졌다. 1775년 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때 발생하는 기체가 이산화 탄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계속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회를 숯을 사용하지 않고 가열하면 금속 형태의 수은과 대기 중의 공기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는 기체가 생성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금속회가 포함하고 있던 기체와 숯이 반응하여 이산화 탄소가 발생하고, 따라서 금속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가 일반 공기와 성질이 유사하나 더 오랫동안 촛불을 태울 수 있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체에서 산소를 추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1775년 3월 24일에 발표하였다. 4월 26일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의 결과를 토대로 금속회를 가열할 경우의 질량 변화는 공기의 출입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공기는 대기 중의 공기보다 더 순수하다고 설명하였다. 이 실험의 결과와 산소의 발견은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연소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이후 라부아지에가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1768년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 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담배 생산과 판매를 관장하는 담배 위원회의 지역 감찰관이 되었다. 그의 상관은 세금 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기도 한 자크 폴즈였다. 라부아지에는 주로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받았다. 당시 담배는 많은 양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밀수되곤 하였으며, 소매상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서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하곤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당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1771년 12월 4일 자크 폴즈의 외동딸인 마리안 피에레테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안은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라부아지에는 많은 돈을 벌어 최고의 과학 장비를 사들일 수 있었다. 1772년에 라부아지에의 아버지인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의 칭호를 매수해주었다. 이는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관습이었다.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 징수 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튀르고의 자유주의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많이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담배·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775년 5월 26일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 공기는 산소로, 셸레와 프리스틀리에 의해서 이미 발견되어있었다.) 1777년에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에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은 공기 내의 특정 성분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principe oxyg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산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산소의 어원이 되었다. (principe oxygine 역시 산소와 같은 물질이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설탕과 principe oxygine이 반응하면 옥살산이 생성되는 등 여러 물질과 반응하여 산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이론은 염화 수소 등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산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으나, 산소산을 설명하기 적합하다.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는 principe oxygine과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세 가지 기체는 모두 산소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년 11월 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1783년 6월 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년 6월 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했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년 1월 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과학자 30명 이상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에 대비되는 많은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갔으나, 여전히 많은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1785년에 제출한 논문인 "Les Réfelxtions des le phlogistique"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정확히 규명되어있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는 이론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연소가 일어날 때 '생명의 공기'를 이루고 있는 principe oxygine과 화소(火素) 중 화소가 물체와 결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로지스톤설과 그의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소와 관련된 물질의 이동방향이다. 플로지스톤설에서는 연소가 일어나면서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에서 빠져나간다고 보았고,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와 결합한다고 본 것이다. 현대의 연소 이론과 이를 비교해 보면, 라부아지에가 생각하였던 '생명의 공기', principe oxygine, 그리고 화소는 모두 산소이다. 그러나 연소반응에서 산소의 변화는 라부아지에가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을 대변하는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을 비판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아일랜드의 리처드 커원에 의해서 1787년 출판된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nstitution of Acids"이 있다. 커완은 이 책에서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이며,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는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 라부아지에와 기통 드 모르보 등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커완의 주장에 관해서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 플로지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며, 수소 역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통해서 물체를 연소시킬 때 일어나는 질량의 변화를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체에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하여도 이것이 연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산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거쳐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많은 과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년 1월 17일 《화학 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제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 이론은 단순히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하였다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산소와 연관된 여러 가지 반응에 적용되었으며 호흡·발효·부패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도입되었다. 또한,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수많은 새로운 산·염기·염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화합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곧 화학적 명명법 정리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원소의 개념 역시 확장되어 재정립되었다. 이러한 체계의 확립은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화학 혁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화합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기준이 제각각이라, 이름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부아지에·클로드 루이 베르톨레·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등이 주축이 되어 화학적 명명법을 개정하였고, 이를 1787년에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화학 물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이름은 그 물질의 성질을 잘 드러내며, 이름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근간을 둔다는 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화학 물질들을 새롭게 명명하였다. 이후 마르틴 하인리히 클라프로트를 주축으로 한 독일의 화학자, 그리고 자신의 관측을 더 중시했던 헨리 캐번디시와 예전의 이론에 집착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의 화학자도 프랑스 화학자의 움직임에 동참하였다.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독일·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화학적 명명법 개정은 통일된 화학적 언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라부아지에는 1782년경부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의 협력하에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는 열에 따른 물질의 팽창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하기도 하고, 조지프 블랙의 얼음 열량계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어떤 물질이 상태 변화를 일으킬 때 출입하는 열은 상태 변화를 역으로 진행할 경우 열 출입 역시 반대로 되고 그 양은 같다는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제시하였다. 1783년에 라플라스와 함께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라부아지에는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물질 입자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열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체를 온도와 압력을 조절함으로써 액체 또는 고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발효와 호흡에 관해서도 연구하였고, 이에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5년 10월 13일의 실험을 통해서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수록 동물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는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1783년 6월 28일 제출한 열(熱)에 관한 논문인 〈열에 관한 보고서〉("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생체 내에서 발생하는 열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생명체가 들이마신 산소는 일종의 느린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소 반응이 허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고, 발생한 열은 혈액을 통해서 몸 전체로 공급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체내에서 일어나는 소화는 연소 반응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라부아지에는 반응이 일어나는 위치를 잘못 파악하였다. 반응은 허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몸에 존재하는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체내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물질 대사를 통해서 생명체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초적인 인식은 옳았다.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능력과 과학적·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가 튀르고가 해임하고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 1778년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샀다. 그는 자기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져 센 강의 수질에 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하였다.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 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기사를 《프랑스 신보》("Gazette de France")를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씨를 분배해 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 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 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788년 4월 16일 라부아지에는 할인 은행()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1776년에 튀르고가 설립한 이 은행은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배타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지폐를 발행하는 것 역시 주 업무였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하어 있어서 자크 네케르가 복직한 8월 말에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네케르는 할인 은행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사들은 이를 승낙하였다. 라부아지에도 또한, 재정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은행을 국영화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의회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했지만, 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여전히 국가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하여 갔으며, 의회는 은행이 지나치게 큰 힘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영화에 비협조적이었고, 이와 함께 프랑스의 경제 역시 심하게 악화하여 갔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간에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788년 여름, 그는 네케르에게 보내는 논문을 통해서 삼부회를 개최할 때 그 대표를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역에서부터 전국에 걸친 4단계의 회의를 개설하여 각각의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1789년 7월에 라부아지에의 경력은 최고에 달했다. 그는 학문과 공직 양쪽 모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의 활동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될 당시 라부아지에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8월 6일에 그는 코뮌의 대표자로서 화난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생루이에 있는 화약고를 찾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프랑스 혁명은 점점 진행되어 갔다. 1790년 5월 8일 국회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하였다. 비록 국제적인 협조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비서와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고,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일의 진행을 보고하는 일 역시 그가 맡았다. 1793년 1월에는 질량의 단위를 정하는 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라부아지에는 많이 활약하여 1791년 12월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관이 되었고, 1792년 1월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에서 조직한 기술 및 교역 고문 위원회에 참석하였으며, 리세 기술학교(Lycèe des Arts)의 경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1791년 3월 20일 헌법제정국민의회는 라부아지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봉직해온 세금 징수 조합을 해체하였으며, 그 대신 국가에서 관장하는 징세 기관이 도입되었다. 라부아지에는 기관의 장으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선정되지 못하였다. 1790년 말, 라부아지에는 모든 정치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의회의 재정 고문의 자리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학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는 호흡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호흡은 혈액을 식히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호흡은 탄소와 수소를 연소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발한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여, 열이 호흡때문에 발생하면 발생한 열을 땀의 증발을 통해서 방출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당한 양의 수분이 호흡을 통해서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발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물의 양 측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양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1792년에는 동물의 유기 합성에 양분이 사용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혁명 중에도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입지는 점점 위협받게 되었다. 1792년 8월 15일 그는 화약국장에서 물러나면서 병기창에 있는 자신의 집과 연구소도 옮겨야 했다. 게다가 1793년 8월 8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비롯한 수많은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1793년 9월, 세금 징수 조합의 청산이 빠르게 진행되기를 원했던 국민 공회는 전직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인이었던 앙투안 뒤팽에게 전직 세금 징수원들의 처리를 맡겼다. 1793년 11월 24일, 국민 공회의 의원인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은 전직 세금 징수원의 체포를 발의하였고, 이는 국민 공회를 통과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1월 28일 그의 장인인 자크 폴즈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 1794년 5월 2일, 뒤팽이 제안한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처분안이 혁명법원으로 넘겨졌으며, 라부아지에는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5월 5일 뒤팽의 전직 세금 징수원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으며, 결국 5월 8일 기소된 32명 중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28명이 유죄로 결론지어져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저녁 라부아지에는 자크 폴즈와 함께 혁명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라부아지에의 사형 직후, 집행관이 라부아지에의 집과 연구실의 모든 책, 기자재 등의 목록을 작성해 갔고, 5월 30일 이를 몰수하였다. 거의 모든 라부아지에의 재산이 몰수된 상황에서 라부아지에의 부인인 마리안 라부아지에 역시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녀는 피신하지 않고 집을 지켰다. 결국 6월 14일 그녀는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으나 남편과는 달리 사형은 면하고 8월 17일에 풀려났다. 12월 10일, 전직 세금 징수원의 사형 이후 매우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의 이야기가 담긴 "Le cri dis familles"가 출판되자 사형을 주도한 앙투안 뒤팽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795년 마리안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몇몇 유족이 뒤팽에게 전직 세무 징수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그 결과 1796년 4월 그녀는 공식적으로 라부아지에의 유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1805년 마리안은 럼포드 백작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하였고, 1836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처형이 완전히 그릇되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는 1795년 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라부아지에에 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관한 업적을 기술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796년 8월 2일 두 번째 장례식이 치러졌고 이는 매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3,000명이 장례식에 참여하였으며, 라부아지에에 관한 수많은 찬사와 애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라부아지에의 사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따라서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테일은 프랑스혁명을 피해 미국에 이민하여 듀폰사를 설립했다. 언론 언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언론사 목록 다음은 언론사(言論社) 목록이다. 그리스 문자 그리스 문자() 또는 희랍 문자(希臘文字)는 그리스어를 쓰는 데 사용되는 자모 문자이다. 현대 서유럽과 동유럽의 대부분 국가 문자에 영향을 끼친 문자이다. 자음과 모음이 따로 있는 자모 문자 중 가장 오래된 문자로, 자모 문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알파벳(alphabet)’은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파와 베타에서 왔다. 기원전 9세기경 발달하여 현재까지 그리스어 표기에 사용된다. 그밖에 그리스 숫자를 비롯, 원주율 등의 여러 수학 기호, 물리학의 여러 입자 이름, 항성의 이름 등 다양한 용도로도 쓰인다.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마 문자와 키릴 문자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익히 알려진 그리스 문자 형태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사용되던 형태로 아테네와 그 연맹 도시들이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헬레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이오니아 지방, 특히 아티카 변형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와 아프리카 북부까지 널리 쓰이게 되었다. 로마 문자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확히는 서부 그리스 문자 변형을 받아들인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온 것이다. 키릴 문자는 사실상 포교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스 문자와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슬라브 토착 문자를 혼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 문자와 그 기원은 아래와 같다. 아래 문자는 표준 그리스 문자는 아니지만, 예전, 혹은 일부 방언에서 사용되었던 문자이다. 와우, 코파, 삼피는 그리스 숫자에서도 사용된다. 시시포스 시시포스 또는 시지푸스(, )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코린토스 왕국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왕 헬렌의 아들, 혹은 후손이었던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도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에피라(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아가 라에르테스와 혼인하기 전).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시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오디세이아",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한편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사후에 하늘로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는데, 그중 신과 연애했던 6명은 빛을 발하였으나 인간 시지포스의 아내였던 메로페만이 부끄러워서 빛이 약하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시시포스의 아들인 글라우코스는 벌로 불임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말에게 잡아먹혔다는 전승도 있다. 알베르 카뮈는 그가 바위를 굴러 올렸으나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리는 것과 밀어 올린 바위가 굴러떨어졌을때 다시 바위를 올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승리라고 평가했다. 카뮈는 이러한 행위를 부조리라고 평가했다. 러셀의 역설 논리학에서, 러셀의 역설(-逆說, )은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에 발견한 역설이다.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술의 기본 법칙》과 게오르크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 따위의 논리 체계가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칸토어의 집합론에서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을 정의하고 이 집합이 자기 자신의 원소인지 여부를 물으면,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정하더라도 모순이 유도된다. 형 이론과 공리적 집합론이 도입되면서 해결되었다. 러셀의 역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전 대부분의 논리 체계가 함의한 모순이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칸토어의 집합론이나 주세페 페아노의 집합론을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집합을 생각하자. 즉, 임의의 formula_2에 대하여, 이다. 특히, formula_4인 경우 이며, 이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만약 formula_6라고 가정하면, formula_7의 정의에 따라 formula_8이므로 가정에 모순되며, 반대로 만약 formula_8라고 가정하여도 formula_7의 정의에 따라 formula_6이므로 가정과 모순이다. 프레게가 저술한 《산술의 기본 법칙》의 논리 체계를 가정하자. 이 논리 체계에서 논리식의 변수는 논리식으로 직접 치환될 수 없으나, 논리식의 값렬(-列, )로는 치환될 수 있으므로,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 구체적으로, 1개의 자유 변수를 갖는 논리식 formula_12의 값렬 formula_13는 다음과 같은 공리로 정의된다. 《산술의 기본 법칙》의 논리 체계에서, 1개의 자유 변수를 갖는 논리식 formula_12, formula_16에 대하여, formula_17는 논리식이 아니지만, formula_18는 새로운 논리식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논리식 formula_16를 생각하자. 이는 1개의 자유 변수 formula_2를 갖는 논리식이다. 그러면 이며, 이는 모순이다. 다시 말해, 만약 formula_23라고 가정하면, formula_16의 정의에 따라 이며, 특히 formula_26이므로 formula_27이다. 이는 가정 formula_23과 모순이다. 반대로, 만약 formula_27라고 가정하면, 값렬의 정의에 따라 이며, 다시 formula_16의 정의에 따라 formula_23이다. 이는 가정 formula_27과 모순이다. 논리식의 변수를 논리식으로 치환할 수 있는 논리 체계의 경우, 단순히 1개의 자유 변수 formula_12를 갖는 논리식 을 생각하면 모순 을 얻는다. 러셀은 1901년 5월이나 6월에 칸토어의 논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역설을 발견하였다. 러셀은 1902년에 프레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프레게의 《개념 표기법》의 논리 체계에서 “자기 자신을 술어로 가할 수 없다는 술어”를 정의할 경우 모순이 유도된다고 지적하였다. 러셀에게 보낸 회신에서 프레게는 그 역설이 《개념 표기법》에 적용될 수 없다고 정정하면서도, (《개념 표기법》을 확장한) 《산술의 기본 법칙》 속의 역설로 수정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개념 표기법》에는 “변수를 함수로 치환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짧은 주해가 있으며, 이와 관련된 자세한 설명은 프레게의 1891년 논문 《함수와 개념》()에 등장한다.) 에른스트 체르멜로도 비슷한 시기에 이 역설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 칸토어가 세상에 내어 놓은 집합론은 러셀의 역설과 같은 서술이 논리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강력한 수학이론이다. 이러한 소박한 집합론에서 아무 원소를 포함하지 않는 공집합을, ψ = { } 로 표시하는데, 이러한 공집합을 표현할 수 있는 서술 방법은 무한히 많다. 예를 들어 { x | x=1 and x≠1 } = ψ, 러셀의 역설에서 가정하는 집합은 수학적 대상은 아니지만, 소박한 집합론에서 공집합의 원소는 될 수 있다. 공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ψ, {ψ}, {ψ, {ψ}},….  되고, 자연수가 도출된다. 다른 수학이론의 기초가 되고,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면, 또한 무한한 대상들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래서, 수학자 힐버트는 칸토어의 집합론이 이끄는 세계를 수학자의 낙원이라고 묘사했다. 소박한 집합론에서 ‘소박한’은 후대 수학자들이 칸토어가 발견한 집합론을 공리 집합론과 구분 짓기 위해 붙인 것이다. ‘naïve’ 란 단어를 ‘소박한’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덜 성숙된’, ‘생각이 얕은’ 이런 느낌의 단어이다. 칸토어의 집합론에 그런 단어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다. 천재 칸토어는 집합론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논의 역설 이후 금기 시 되어온 무한의 개념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무한한 집합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시 수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년배인 수학자 푸앙카레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무한 수를 심각한 수학 질병이라고 불렀고, 칸토어에게 중요했던 선배 수학자 크로네커는 그를 과학 사기군, 배교자, 젊은이를 지적 타락으로 이끄는 자라고 매도했다. 철학자들도 이러한 비난에 가세했고, 성직자들은 그의 시도를 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러셀의 역설과 베른의 역설과 같은 역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한편, 그의 당대 일부 수학자들은 칸토어 집합론의 공리화를 시작한다.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 에 나오는 그 공리화 방법론을 집합론에 도입한 것이다. 집합론을 체계화 시킨 측면도 있지만, 러셀의 역설을 비롯한 역설들이 주장하는 칸토어 집합론이 지닌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도 있다. 오직 이러한 역설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계급의 공리(Axiom of class)는 그 필요성이 의문일 뿐만 아니라, 칸토어의 집합론에 심각한 제약을 가한다. 토요일 토요일(土曜日)은 금요일 뒤의 날, 일요일 앞의 날이다. 월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ISO 8601의 권고에 따라 한 주의 일곱 번째 날이다. 일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한 주의 일곱 번째 날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토요일은 주말에 속한다. 새우리말 큰사전에서 토요일을 찾아 보면 칠요일의 제일 끝날. 곧 일요일로부터 일곱째 되는 날. [ 토요 -> 주말 (週末) ] Merri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영어사전)에서도 토요일을 찾아보면 "the seventh day of the week"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부 게르만어파 언어에서 토요일은 '사투르누스의 날'(, )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데, 사투르누스는 토성을 상징하는 신이므로,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는 '토요일'로 불린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 북게르만어 즉 노르만어 위주로는 lördag이라고 한다. 그러나 게르만 어의 중심인 독일어는 또 Samstag이라고 다르게 부른다. 잠Sam이라는 위인/신이 있는가 혹은 아래 라틴 어파sabato 특히 불어를 접해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 남부 유럽 언어 및 동남아 언어에서 '토요일'이란 낱말은 안식일(샤밭)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 예로는 그리스어 , 이탈리아어 , 인도네시아어 등이 있다. 동중국해 동중국해(東中國海)는 제주도 남쪽부터 타이완에 걸쳐있는 서태평양의 연해이다. 일본에서는 동지나해(東支那海, )라고 부르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른다. 타이완 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대한해협과 제주도 북동쪽 해역을 통해 동해와, 제주도 서쪽 해역을 통해 황해와 이어져 있다. 국제 수로 기구에서 1953년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제3판에 따르면, 동중국해는 동쪽의 규슈와 난세이 제도를 따라 그은 곡선을 경계로 필리핀 해와 나뉜다. 북동쪽은 제주도 동쪽 끝부터 일본의 후쿠에 섬 남쪽 끝과 규슈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동해와 접한다. 북서쪽은 제주도 서쪽(북위 33°17')부터 중국 대륙의 양쯔강 하구까지 이은 직선을 경계로 황해와 접한다. 남서쪽은 타이완 섬 북쪽 끝과 푸젠 성의 동쪽 해안(북위 25°24')을 이은 선을 경계로 남중국해와 접한다. 해역의 크기는 약 1,249,000 km²이다. 동중국해 해역의 천연 가스 개발을 둘러싸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 대한민국, 중화민국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동중국해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의 경계로 중일 중간선을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오키나와 해구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중일 중간선 서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서 천연가스 채굴시설 준샹, )를 건설하자 일본은 중간선 동쪽의 천연가스까지 흡수될 수 있다며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양국은 2008년 6월 중간선을 포함한 해역의 공동 개발에 합의했고, 춘샤오 개발에 일본 기업이 투자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교섭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비드쿤 크비슬링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 1887년 7월 18일 ~ 1945년 10월 24일)은 노르웨이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텔레마르크주 출생이며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냈다. 종전 후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퓌러(Führer, 총통; 히틀러의 칭호)로 불렸다. 그는 오슬로의 뷔그되위(Bygdøy)에 있는 별장에서 살았는데, 북유럽 신화에서 딴 기믈레(Giml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군사사관학교 생도 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노르웨이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소련에서 1920년대 기근 당시 그곳에서 난민 구제 사업을 하던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농민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노르웨이의 헌법 기념일인 1933년 5월 17일 크비슬링은 지방 검사 요한 베른하르드 요르트와 함께 민족협동당(Nasjonal Samling)을 창당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당을 본따서 반(半)민주주의 노선을 취한 지도자 중심의 정당이었다. 크비슬링이 당에서 히틀러가 나치당에서 맡은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족 단일당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으나 1935년을 전후하여 노골적인 친독 반유대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자 지지는 줄어들어 독일의 침공 당시 당원수는 2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독일이 1940년 4월 9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정부가 북쪽으로 피난간 혼란을 틈타 크비슬링은 세계 최초로 라디오 뉴스 시간에 쿠데타를 선언한 이가 되었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전해에 면담한 바 있어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지배하기를 원하여 크비슬링이 수립한 정부는 닷새 만에 해체되고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을 노르웨이의 통치자(Reichskommissar)로 앉혔다. 테르보펜과 크비슬링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테르보펜은 높은 자리에 노르웨이인을 앉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는지 1942년 크비슬링을 정부수반(총리에 해당)으로 임명, 1943년 2월 1일부터 직책을 맡게 했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가 독일 점령하에서 벗어난 뒤 다른 두 명의 민족단일당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다. 망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 동안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종전 후 재판을 대비해 사형 제도를 부활시켰었다. 이 때문에 후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크비슬링"이 반역자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이미 크비슬링 생전에도 사용되었다. 일례로 당시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크비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 만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크비슬링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는 반역자입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풍자이다. 트롬쇠 트롬쇠(Tromsø)는 노르웨이 북부 트롬스(Troms) 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2012년 현재 72,066 명의 주민이 있다. 트롬쇠 시의 면적은 도심 바깥의 넓은 지역까지 포함해서 2558 km²이다. 트롬쇠는 노르웨이에서 일곱 번째로 큰 도시로 북극권 트롬쇠위아 섬(Tromsøy)에 위치해 있다(북위 69° 40' 33", 동경 18° 55' 10"). 세계에서 최북단에 있는 대학교인 트롬쇠 대학교가 있어 세계 최북단의 대학 도시로 알려져 있다. 트롬쇠는 1250년 세워져 1794년 도시 헌장을 받았다. 19세기 후반에는 북극해의 주요 무역 기지가 되어 많은 북극 탐험대가 이곳으로부터 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노르웨이 정부가 대피해 와 잠시 정부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트롬쇠는 의료산업 관련 소프트웨어와 원격치료 관련 프로그램의 분야에서 국제적인 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노르웨이 리그에 참가하는 축구 구단으로 트롬쇠 I.L.과 트롬쇠 U.I.L.이 있다. 수많은 북극 탐험대들이 트롬쇠를 출발지로 삼아 '북극의 관문'이라고도 한다. 트롬쇠 주민들이 터득한 북극의 조건에 대한 실제 지식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움베르토 노빌레(Umberto Nobile),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 등 여러 탐험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이들은 대원들을 트롬쇠에서 모집하기도 했다. 북극권에 위치한 관계로 5월 21일부터 7월 23일까지는 해가 지지 않는다(백야 현상). 매년 6월에 백야 마라톤을 개최한다. 최근에는 1월에 북극야 하프 마라톤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트롬쇠에서 발행되는 신문으로는 '블라데 트롬쇠(Bladet Tromsø)'와 '노르뤼스(Nordlys)'가 있다. 하지 때에 이곳 트롬쇠 지역에서도 백야 관측이 가능하다. 저녁 무렵 태양이 서쪽으로 점점 높이가 낮아지다가 자정 때에는 태양이 북쪽의 낮은 하늘을 거쳐서 북동쪽으로 떠오른다. 트롬쇠 출신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레네 말린 레네 말린 페데르센(Lene Marlin Pedersen, 1980년 8월 17일 태어남)은 레네 말린(Lene Marl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르웨이의 가수이다. 노르웨이 북부의 트롬쇠 출신이다. 1998년 〈언포기버블 시너(Unforgivable Sinner)〉라는 곡을 싱글로 내 데뷔한데 이어 1집 《플레잉 마이 게임(Playing My Game)》을 냈다. 1999년 MTV 유럽 시상식에서 북유럽 최고 그룹/가수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2집 《어나더 데이(Another Day)》를, 2005년에는 3집 《로스트 인 어 모먼트(Lost in a Moment)》를 냈다. 레프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 , , ,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은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였으며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쟁과 평화》(1869년), 《안나 카레니나》(1877년)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에 러시아 남부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카잔 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압하는 대학교 교육 방식에 실망을 느껴서라고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으로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장편 소설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등의 중편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하여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냈다. 이 작가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적확(的確)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그의 문학과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톨스토이가 1894년에 저술한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고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또한 그는 죽기 전 며칠 전인 1910년 11월 1일 자신의 딸 사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God is the limitless All of which man realises himself to be a limited part. The truth exists only in God…”) 또한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라는 단편소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투르게네프나 오스트로프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기독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게오르크 칸토어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루트비히 필리프 칸토어( , 1845년 3월 3일~1918년 1월 6일)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수학자이다. 무한 집합에 대한 연구로 현대 수학의 기반이 되는 기초적 집합론을 창시하였다. 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일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칸토어는 6명의 자녀 가운데 맏이었다. 아버지는 주식 투자가였고, 외할아버지 프란츠 뵘()은 러시아 제국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다. 칸토어 가족은 1856년 칸토어가 11세 되었을 때 아버지의 병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독일 비스바덴으로 이사하였고, 그 뒤 곧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하였다. 칸토어는 1860년 다름슈타트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862년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63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하여 레오폴트 크로네커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에른스트 쿠머 등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1866년 여름은 괴팅겐 대학교에서 보냈다. 1867년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69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수여받았고, 연구원()이 되었다. 1872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1874년에 발리 구트만(Vally Guttmann)과 결혼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879년에 34세의 나이에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칸토어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이전하려 하였으나, 베를린의 레오폴트 크로네커는 칸토어를 매우 싫어하였으므로 이는 무산되었다. 크로네커는 수학의 구성주의를 지향하였는데, 칸토어의 집합론은 구성주의와 철학적으로 정반대되었기 때문이었다. 1881년에 칸토어는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을 리하르트 데데킨트에게 수여하려 하였으나 데데킨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칸토어와 데데킨트는 1882년에 모든 서신을 중단하게 되었다. 칸토어는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와도 서신을 교환하였으나, 미타그레플레르는 1885년에 칸토어의 논문의 철학적 함의에 반감을 표의하였고, 이 때문에 칸토어와 미타그레플레르와의 관계 또한 중단되었다. 칸토어는 1884년에 여러 수학자들과 비판을 주고받다가 깊은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퇴원한 뒤 칸토어는 수학을 기피하고 철학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에 광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라는 가설에 매우 집착하였으며 수시로 관련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회복한 칸토어는 1891년에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신경증은 계속하여 재발하였고 1899년과 1903년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할레 대학교는 칸토어가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의 병은 특히 말년에 심해져 여러 망상적인 주제에 집착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스스로를 신성한 임무를 가진 자로 여기고 (실제로 크로네커에게 공격받은 전력이 있지만) 다른 학자들이 자신을 중상모략하고 있다며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1904년 쾨니그 줄러에 의해 칸토어의 집합론의 핵심 개념이었던 정렬 정리의 "반증"을 발표되자 (이후 오류가 발견되었지만) 칸토어는 큰 충격을 받아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칸토어는 이후 매 2~3년마다 입원을 반복하였다. 결국 1913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한 칸토어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시기 동안 궁핍과 영양 부족에 시달렸다. 1917년에 마지막으로 할레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칸토어는 계속해서 아내에게 퇴원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가 1918년 1월 6일 심장마비로 병원 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수학의 본질은 그것이 갖는 자유로움에 있다(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는 그의 유명한 어록이 쓰여 있다.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집합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끼리도 그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 또한 칸토어의 정리는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무한의 무한성"의 존재를 암시한다. 초한수에 관한 칸토어의 이론은 당대 유명한 수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현대의 대다수 수학자들은 그의 초한수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칸토어의 이론은 현대의 수학기초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연속체 가설을 고안하여 직관적으로 참이라 믿고 수년 간 그 증명에 힘을 쏟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연속체가설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체계에서 반증과 증명이 불가능하여 독립적임이 각각 쿠르트 괴델과 폴 코언에 의해 증명되었다. 고틀로프 프레게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고틀로프 프레게( , 1848년 11월 8일 ~ 1925년 7월 26일)는 독일의 수리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근대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848년 11월 8일에, 당시 공식적으로 스웨덴-노르웨이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독일 통치 아래 있던 도시 비스마르()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는 1908년에 공식적으로 메클렌부르크에 반환되었다.) 비스마르의 김나지움을 1869년에 졸업하였고, 김나지움의 교사 구스타프 아돌프 레오 작세()는 프레게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예나 대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고하였다. 프레게는 1869년에 예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4학기를 공부하였고, 1871년에 괴팅겐 대학교로 전학하여 1873년 12월에 사영기하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74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하빌리타치온을 마치고, 예나에서 수학 개인 강사로 일했다. 1887년 3월 14일에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소피아 아나 리제베르크(, 1856년 2월 15일 ~ 1904년 6월 25일)와 결혼하였다. 1879년에 예나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879년에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을 출판하였고, 이 책에서 술어 논리를 최초로 도입하였다. 1884년에는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를 출판하여 수의 개념의 심리주의적 정의를 비판하였다. 1893년에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을 출판하였고, 1896년에 예나 대학교의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1903년에 《산술의 기본 법칙》2권을 출판하였다. 1917년 또는 1918년에 예나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말년에 들어 수학에 관한 활동을 거부하고 의회민주주의, 자유주의, 가톨릭교, 외국인 등을 비판하는 극단적인 글들을 저술하였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외국인 동료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다고도 전해진다. 1925년 7월 26일에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작은 마을 바트클라이넨()에서 사망하였다. 1879년에 출판된 책 《개념 표기법: 순수 사고의 산술적 형식 언어의 모형》()에서 프레게는 기존에 알려진 명제 논리를 술어 논리로 확장하였고,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를 표현하는 형식적 언어를 고안하였다. 프레게의 표기법은 다음과 같다.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과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의 중요한 핵심이 되는 양화(quantification)가 바로 술어논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안한 프레게의 개념이다. 그의 업적은 당시에는 거의 인정받지 않았으나, 그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주세페 페아노, 버트런드 러셀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에드문트 후설도 프레게의 영향을 받았다. 프레게는 수학이 논리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의 초기 주창자 중에 하나였다. 프레게는 1884년에 출판된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의 수리논리학적 탐구》()에서 기존의 심리주의적 수의 개념을 비판하였고, 수의 개념이 종합적() 개념이 아니라 해석적()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개념 표기법으로부터 유도된 산술의 기본 법칙》(, 1권 1893년, 2권 1903년)에서 프레게는 논리학으로부터 산술을 유도하려고 시도하였다. 1판이 출판된 뒤, 버트런드 러셀은 프레게의 공리계가 러셀의 역설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프레게는 이미 완성된 2권에 이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부록을 추가하였다. 프레게는 언어철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특히 고유명사의 뜻과 지시체() 사이의 차이에 관해 논의하였다. 마지막 3편의 논문은 합쳐 《논리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계획이었으나, 프레게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알프레드 히치콕 알프레드 히치콕 경(, , 1899년 8월 13일 ~ 1980년 4월 29일)은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이다. ‘서스펜스의 대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으며, 그의 영화는 공포 영화 장르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으며, 이런 영화는 사소한 실수가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깨우게 한다. 그는 감독 외에도 제작, 각본, 편집, 미술에 능하였다. 최초의 스타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현기증》, 《싸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오명》 등이 있다. 대부분의 그의 대표작들은 아카데미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으며 그의 작품들 중에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레베카》가 유일하다. 히치콕은 1899년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의 막내아들로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William)은 어부 출신의 야채상인 조지프(Joseph)와 일용직 노동자의 딸 앤 머호니(Anne Mahoney)의 9남매의 자식들 중 한 명이었고 어머니 에마(Emma)는 경찰관 존 웰런(John Whelan)의 딸이었다. 히치콕은 1910년부터 스탬퍼드힐()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체벌은 10대 시절의 히치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13년 학교를 마친 히치콕이 아직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윌리엄이 1914년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히치콕은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으나 이 직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상관의 도움으로 광고부로 이직한 히치콕은 영화와 문학에 심취했다. 주로 영국 탐정소설을 읽었지만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되어, 훗날 자신이 공포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포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히치콕은 영화사에서 자막을 도안하는 일을 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곳에서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다. 1922년 히치콕은 시모어 힉스(Seymour Hicks)와 함께 공동으로 영화 《항상 부인에게 얘기하세요》(Always Tell Your Wife)를 감독했고,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첫 작품 《기쁨의 정원》(The Pleasure Garden)과 두 번째 영화 《마운틴 이글》(The Mountain Eagle)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평범한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악이 침투한다는 히치콕 특유의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세 번째 영화 《하숙인》(The Lodger)에 이르러서 히치콕은 자신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영국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자리잡은 히치콕은 1926년 1월 2일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과 결혼했고,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British International Pictures)에 스카웃되었다. 이 회사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링》(The Ring)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히치콕과 엘리엇 스태너드()가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실험적인 기법이 도입되었다. 《링》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히치콕은 연극 대본을 원작으로 하는 자신의 영화 《협박》(Blackmail)에서 부분적으로 소리를 집어넣었고,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히치콕은 영화제작사 측의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연극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경향'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 앨머와 밸 밸런타인()이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부자와 이방인》(Rich and Strange)과 히치콕 본인이 제작한 영화 《캠버 경의 여인들》(Lord Camber's Ladies)의 연이은 실패로 히치콕은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와 결별했다. 고먼트 브리티시(Gaumont-British) 사와 재계약한 히치콕은 자신이 바라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범죄 스릴러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 《39계단》, 《비밀 첩보원》(Secret Agent), 《사보타주》(Sabotage), 《젊음과 순수》(Young And Innocent) 등 히치콕의 영국에서 만든 영화 중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30년대 후반 히치콕은 미국 진출을 결정지었고, 1938년 7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미국의 제작자 마이런 셀즈닉(Myron Selznick)의 동생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했다. 감독들에게 일일이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는 셀즈닉과의 공동 작업은 곧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레베카》는 아카데미상 작품상, 촬영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히치콕은 자신의 장기인 서스펜스 영화 《의혹》(Suspicion), 《의혹의 그림자》 외에도 코미디 《스미스 부부》(Mr. & Mrs. Smith), 첩보 영화 《파괴 공작원》(Saboteur) 등 제작자 측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영화를 만들었다. 《패러딘 부인의 사랑》(The Paradine Case)을 끝으로 히치콕은 셀즈윅을 떠났다. 제작자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영화 제작사 트랜스애틀랜틱 픽처스(Transatlantic Pictures)를 세운 히치콕은 첫 컬러 영화 《로프》(Rope)를 발표했고, 이어서 《염소자리 아래서》(Under Capricorn)를 만들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영화사는 문을 닫았고 인기 배우를 기용하여 제작한 다음 작품 《무대 공포증》(Stage Fright)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히치콕은 주식과 부동산 투자, 각종 방송과 강의에 출연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히치콕은 신인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즈음부터 히치콕은 《다이얼 M을 돌려라》, 《이창》,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새》 등 그의 대표작들을 발표했다. 이후에 발표한 《찢어진 커튼》(Torn Curtain), 《토파즈》(Topaz)는 이전만큼의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히치콕은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다시 메가폰을 잡고 1972년 《프렌지》(Frenzy)를 발표해 흥행했다. 평소 과체중에 음주가 잦았던 히치콕은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신의 마지막 영화 《가족 음모》(Family Plot)를 발표했다. 그는 차기작을 준비할 생각이었으나 더 이상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영화일에서 은퇴했다. 1980년 4월 16일 미국 영화연구소 시상식에서 한 연설이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같은 해 4월 29일 히치콕은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히치콕의 영화에는 맥거핀이라는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 맥거핀이란 영화의 플롯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내용이나 인물에 관해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용상 무언가 중요한것임을 암시하지만 실상은 플롯의 진행에 있어 아무런 관련성도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히치콕은 맥거핀을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트뤼포는 히치콕에서 맥거핀에 대해 질문했고 이에 대해 히치콕이 든 예는 오명에서의 와인병이었다. 히치콕은 맥거핀이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관심을 끄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레이터인 감독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와인병에 든 우라늄 가루’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맥거핀에 대한 일화로 히치콕은 트뤼포에게 《오명》(Notorious)의 일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히치콕은 제작자들을 상대로 맥거핀이 되는 우라늄 가루에 대해 설득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프로듀서들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물질이 왜 사랑이야기에 들어가야 하는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오명》의 시나리오는 대부분의 프로듀서들로부터 거절됐고 히치콕은 이 영화의 제작과 맥거핀을 고집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제작비를 충원했다. 맥거핀에 대한 히치콕의 신념은 확고했다. 맥거핀은 관객이 중심이 되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관객을 통제하는 장치였다. 따라서 극의 서스펜스를 위해서 맥거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첩보활동을 위해 나치 비밀조직의 수장 알렉스 세바스찬과 결혼까지 불사한 알리시아는 안주인으로서 세바스찬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녀는 저택의 거실 장식장에 있던 와인병 하나를 두고 나치 조직원들끼리 냉랭한 기류가 형성되는 것을 눈치챈다. 이 와인병은 그들 사이에서도 일급비밀인 중대한 것으로 보인다.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함께 와인창고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는 알리시아에게 세바스찬이 결혼 축하파티를 열도록 청하라고 종용한다. 파티 당일, 세바스찬의 결혼기념 파티에 초대되어 온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함께 지하창고에 잠입해 와인병을 찾는다. 그는 실수로 와인병 하나를 깨뜨리고 안에 들어있던 검은 색 모래입자들은 바닥에 쏟아진다. 숨막힐 듯 조여오는 서스펜스의 순간. 두 사람이 우라늄 가루와 병조각의 흔적을 치우는 동안 세바스찬은 하인을 데리고 파티에 쓸 술을 가지러 지하창고로 내려간다. 이 일로 세바스찬은 알리시아가 나치조직의 비밀을 캐기 위해 위장 결혼한 미국의스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어머니에게 아내의 처분을 두고 의논하고 결국 두 사람은 작당해서 알리시아를 독살하기로 한다. 이렇게 검정색 가루가 든 와인병은 사건이 진행되는 모터의 역할을 한다. 관객에게 관심사는 데블린과 알리시아의 불가능해보이는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있다. 관객은 와인병에 호기심을 기울이게 되고 나중에 와인병이 깨져 버리면서 사건은 더 발전하지만, 중요한 점은 관객은 더 이상 와인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와인병은 깨어져 관심을 끈 순간, 그것으로 본래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꼭 필요한 우라늄 입자가 든 와인병’ 은 나치의 구체적인 계획과 미국의 첩보활동이라는 서브 테마에 관심을 두게 유도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와인병은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중간에 사라져버리는 맥거핀이라 할 수 있다. 1958년에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 작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맥거핀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들은 관객과 등장인물들의 주의를 끄는 사람과 사물로 나타난다. 주인공 로저 O. 쏜힐(캐리 그란트)은 악당들로부터 아무 잘못없이 캐플란으로 오인이 되어버린다. 쏜힐은 캐플란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유엔빌딩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인누명까지 쓰게 되고 도주자 신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미국을 횡단하며 갖은 모험을 겪게 된다. 그런데 쏜힐의 도주라는 사건의 발단이 되는 ‘캐플란’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조직내에서 일명 ‘교수’라 불리는 CIA 요원은 회의중 반담이라는 악당의 조직에 잠입시킨 요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지어낸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캐플란이 맥거핀이었다는 사실은 영화 시작 45분이 경과한 후 간단하게 밝혀진다. 관객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쏜힐이 캐플란을 만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서스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만난 이브 캔달이라는 묘령의 여인의 도움을 받아 경찰과 반담무리들의 눈을 속인다. 이브는 쏜힐에게 캐플란의 전언이라면서 황야 한 가운데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면 캐플란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캐플란을 쏜힐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맥거핀은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고대 조각상이다. 이것은 이브가 반담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빼앗아서 도주하는 물건으로 나온다. 하지만 반담이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고가의 유물로만 나올 뿐, 구체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러쉬모어산으로 도주한 이브와 쏜힐은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까지도 조각상을 악당들에게 넘겨 주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조각상이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 관객은 그 안에 마이크로 필름조각이 들어있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잠시 화면에 잡힐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이 기밀정보를 담은 것이라는 암시에 그칠 뿐 그 내용에 대해서 히치콕은 영화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다. 쏜힐은 이브를, 이브는 이 조각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사실 자체는 서스펜스를 낚는 미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또한 감독 자신이 영화 속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것을 찾는 것 또한 한 재미가 된다. 영화의 등장방법은 지나가는 행인등이나 때로는 영화속 신문기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히치콕 감독은 《히치콕 극장》시리즈(, 1955년-1961년)의 사회,작품의 원작과 주제선정,감수를 맡았는데, 이 프로그램은 1958년 그 해의 최고 방송 시리즈로서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다. 후에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자 1961년부터 방영 시간이 30분에서 한시간으로 늘어났다. 제목도 《Alfred Hitchcock Hour》로 바뀌었다. 영화업계가 새로운 매체인 TV와의 경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히치콕은 TV시리즈에 출연함으로써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 이름을 알렸다. 히치콕 감독은 1956년 12월 추리소설 잡지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를 창간했다(실제로 히치콕 감독은 잡지의 편집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순히 이름과 초상권을 대여해준 것 뿐이었지만 이 잡지로 인해 그는 연간 1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초기에는 콘텐츠가 평범해서 금방 사라질 것으로 보았으나, 우수작가들의 참여로 콘텐츠의 수준이 높아지고, 대중들에게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1997년에는 코지(Cozy)장르(한정된 공간에서 범죄가 벌어지는 설정의 미국 추리소설장르, 하드보일드에 상대되는 용어)의 《누가 머피 부인의 차우더에 독을 넣었는가?》()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 ,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년 4월 3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년 5월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년 7월 1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년 6월 27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자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이며, 소소()는 그의 초명인 동시에 애칭이었다.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의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에카테리네 겔라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1938년 소련에서 출판 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애를 1879년 12월 21일로 표기해 놓고 있으나, 그가 그루지야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출생일은 1978년 12월 18일이라고 한다. 알콜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 베사리온을 두었던 그는 어린 시절 무자비한 구타, 폭행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 베사리온은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였다. 베사리온은 구두 장사가 잘되지 않자 알콜중독에 걸려 계속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 에카테리네는 아버지 베사리온에게 수시로 폭행당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이후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 겁을 먹었던 스탈린은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 7살(1886)에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천연두를 손과 바늘로 짠 탓에 그의 얼굴은 곰보가 되었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 삭제하였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체력이 강했다 하나 약체에 발육부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청난 의지력을 가졌던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피의 복수를 하는 캅카스인의 전통대로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10살(1889) 때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스탈린은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1888년(9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구두 공장에 찾아가 아들을 되찾아왔다. 어머니의 기대와 노력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들은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하였다. 스탈린은 교육 과정과 수업 내용에 대해 강한 반발과 교사들,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12살(1891)에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스탈린은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발육부진으로 키는 160cm를 약간 넘었다. 스탈린은 고리 시내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외부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약간 불완전하여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조지아어만을 사용하였다. 1894년(15살) 초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였다. 1894년 15살에 그는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소재한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 1학년 재학 중 스탈린은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는데,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았다. 그가 시에서 다룬 주제는 대지와 자연, 민족정신 등이었다. 신학교 2학년 이후 그는 조지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러시아인을 만드는 교육을 강요하는 스승들과 마찰이 잦았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 서적을 접하면서 종교와 민족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중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가정 환경이 어려웠음에도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았다. 신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재학 중 그는 국제 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쓴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비밀리에 탐독하다가 신학교에서 그는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비밀 결사조직인 '메사메 다시()'에 가담하기도 했다. 신학교 졸업 전 해인 1899년 말 스탈린은 기말고사 시험을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신학교의 문서에는 그가 수업료를 낼 수 없어서 퇴학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하여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였으나,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렸다. 신학교를 떠난 직후 스탈린은 레닌의 저작과 관련 서적들을 폭넓게 읽었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99년 12월 스탈린은 트빌리시 천문대에 채용되어 천문대 서기로 수개월간 근무했다. 트빌리시 천문대의 공무원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업이라 한다. 그가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 는 주장도 있다. 조지아의 유대인 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가 소유한 정유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900년(21세)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0년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그는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다. 스탈린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이러한 비난은 조직 내부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그가 존경하고 탐독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게 되자, 스탈린은 보다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2년 4월(23세)부터 1903년 3월(24세)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2년에서 1903년 무렵 연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를 만났는데, 스바니제는 러시아 육군 군복제조사 미싱공으로 일하였다. 시짓기와 작문 재주가 탁월했던 스탈린은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래를 부르고 시도 읊었다고 한다. 1903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곧 차르의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1903년말 스탈린은 캅카스 지역 볼셰비키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전업혁명가로서 여러 비합법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활동에는 파업 선동, 정부 비판, 사회 부조리 지적, 민병 조직, 민중 선동뿐 아니라 자금확보를 위한 은행강도, 반대파 요인 암살, 테러, 몸값 납치 같은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했지만 회의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5년 무렵 스탈린은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각종 시민사회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05년 그는 동료에게 은신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거기에서 첫사랑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애칭은 카토)를 다시 만났다. 1906년 스톡홀름 회의에 참석했다. 스바니제와의 꾸준한 교제 결과 스바니제의 마음을 움직여 1906년 7월 스탈린은 스바니제와 결혼하였고, 후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신혼여행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마냥 행복했다. 스탈린의 한 혁명 동료는 신혼 초기의 스탈린에 대해 “혁명에만 몰두하던 그가 아내에게만은 부드럽고 세심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으로 고생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했다. 아내 카토가 고생하며 늘 그가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만 기도한 것을 전해들은 그는 크게 상심하였다. 그는 "첫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1907년 스탈린은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볼셰비키 조직 확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쇄물과 홍보 팜플렛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도심에 뿌리고, 각지를 다니며 홍보와 연설, 강연 등을 통해 볼셰비키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집단임을 선전했다. 이는 비가 오거나, 대량 폭설로 교통이 막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각지를 순행하는 것으로 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선전, 홍보 등으로 인력과 조직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07년 6월 25일(음력으로는 6월 12일)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1903년부터 그가 시베리아로 망명하던 1913년까지 스탈린은 볼셰비키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전국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강도 행각도 서슴치 않았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성공적으로 탈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체포되었는데,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해 전제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호송 차량에서 뛰어내려 도망치기도 했고, 경찰과 격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도주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현상금을 내걸은 포스터가 걸리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체포되지 않고 각처를 은신해 다녔다. 첫 아내 스바니제와의 비극적인 사별은 스탈린의 냉혹하고 난폭한 성격을 한층 더 강화시켰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정치 자금 확보를 위한 은행 강도를 금지하자, 스탈린은 이에 항의하여 잠시 사임하였다. 이후 현금수송차에 대한 대규모 강탈을 지휘하였는데, 이때 4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스탈린은 다시 바쿠로 도피했는데, 여기서 1908년 12월 부인 스바니제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냉혹한 혁명가가 되기 전 그는 매력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에게 잘 보이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시도 읊었다. 바보 연기로 주변을 웃기기도 했다. 결혼한 지 16개월 만에 아내 스바니제가 트빌리시에서 발진티푸스로 숨지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급히 아내에게 달려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스탈린은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결국 실신했다. 그는 직접 관을 준비해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 겔라제의 일기에는 스탈린은 아내의 장례식이 있던 날 그 자리에서 오열하다 실신했다고 한다. 첫 아내인 스바니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스탈린은 술에 취하면 곧잘 병중인 스바니제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동료들에게 곧잘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가 죽자 스탈린은 심히 오열했는데 어머니 겔라제 역시 그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두기도 했다. 스바니제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야코프는 1920년대 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였다. 스바니제를 잃고, 바쿠에서 체류하며 스탈린은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인 무슬림, 수백명의 흑인들까지 포섭,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여 파르티잔 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자 파업과 각종 집회, 선전 선동을 기획하였으며 많은 수의 러시아 차르의 지지자들을 살해하는 등 파르티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몸값 납치, 강도, '보호료' 뜯기, 위조 화폐 제작 등의 범죄적인 활동으로 자금을 확보하였다. 스탈린은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7번이나 추방되지만 마지막 세 번을 제외하면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량 선고가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은신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동료 공산주의혁명가들로부터 '제국경찰의 보수를 받는 프락치'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제1차 중앙위원회에 그를 신입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볼셰비키당 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1912년 4월 스탈린은 풀려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잡지 프라우다를 창간하였다. 평소 과묵하고 그다지 말주변이 없는 스탈린은 당의 공식 신문인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인 "스탈린" {스탈(стал)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한다.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반격 암호로 쓰이기도 했다.}이라는 가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이름으로 당의 출판물에 기고하고, 언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기민한 피신과 체포 뒤에도 성공적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한 당내 첩자 의혹, 제국 비밀경찰 의혹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 속에서도 레닌은 1912년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도록 승격시켰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후광 덕에 스탈린에 대한 각종 의혹은 해소되거나 서서히 묻혀져갔다. 그러나 뒤에 레닌은 임종 직전 자신의 스탈린 후원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스탈린은 프라우다를 간행하면서 각종 학술 용어 보다는 지역과 하층민들이 두루 읽을수 있도록 비전문 용어와 지역지부에서 간행되는 신문에는 지역 방언의 활용 등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의 마케팅 효과는 성공을 거두어 프라우다의 구독, 배달은 타타르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징병대상자가 되지만, 12세 때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왼쪽 팔의 장애 때문에 병역 면제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각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황실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워나갔다.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가 제위에서 퇴위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벌어져 제정이 무너지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당시 스탈린은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의 가족은 물론 황족들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차르와 그 가족의 처형에는 일부 공감하였으나, 귀족과 황족까지 처형하는 것을 놓고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그리고 볼셰비키에서 조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며 주저하였다. 3월 초 스탈린은 처음에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를 프라우다의 편집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곧 4월의 당 회의에서 레닌의 견해를 듣고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입장을 바꾸어 임시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볼셰비키 당원 중 앞장서서 혁명으로서 임시정부를 접수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서서히 장악하자며 만류하였다. 1917년 4월에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린 레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돕기도 하고,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포위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시키고 스탈린은 혁명의 혼란기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었다. 1917년 3월 25일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스탈린은 레닌이 없는 볼셰비키 당을 지도하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으며,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적 의사를 번복,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편 스탈린은 제정의 압력을 피해 핀란드에 출국중이었던 레닌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돌아오게 하였다. 한편 10월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자 체포되었던 볼셰비키 당원을 석방시켜 방위전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할 혁명을 꾸몄다. 레닌, 레프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스모르니 학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를 가결하였고 11월 7일(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 케렌스키가 전선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실행에 옮겼다. (10월 혁명)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성공했고, 11월 8일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17년 11월 당시,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레프 트로츠키의 역할만큼 눈에 띄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이후 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했다.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한 직후, 스탈린은 인민위원회 내무인민위원(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17년 인민위원회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인종문제담당 장관)을 겸임하였다. 곧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하얀 군대)이 일어나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었다. 레닌은 5명으로 구성된 볼셰비키당 정치국을 신설하였으며, 여기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은 스탈린을 볼가 강변의 차리친 시의 수비를 위해 보냈고, 1918년 5월 차리친에 도착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유력 지휘관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세묜 부됸니와 친구가 되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당시 국방인민위원을 맡아 붉은 군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의 정책에 자주 반대했다. 내전 중 스탈린을 포함한 붉은 군대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작농을 협박하여 식량을 강탈하는가 하면 식량징발에 반발하는 마을을 불태우도록 했고, 서부 전선에서의 대량 탈영을 막기 위해 탈영자들을 공개처형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1919년 스탈린은 국가정보통제담당 인민위원(보안담당 장관)에 임명되어, 인종 문제 담당 인민위원과 국가 정보 통제 담당 인민위원을 겸임하였다. 그해 스탈린은 옛 공산당 동료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Nadezhda Alliluyeva)와 재혼했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던 그는 평소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으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연애하면서 갑자기 낭만주의자, 낙천주의자로 변신하여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스탈린은 크렘린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소련 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볼세비키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과 트로츠키는 더 북쪽에 있는 바르샤바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트로츠키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지휘관 부아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군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리보프에 있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후퇴하여 리보프와 바르샤바는 모두 점령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스탈린은 1920년 8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신을 변호하고 군사지휘를 사임하였다. 9월 22일 제9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23년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직과 국가통제인민위원직을 사퇴했다. 후에 스탈린은 1920년의 실패를 가져온 이들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그리하여 후에 자신을 비판한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1939년 나치와의 협정을 통한 폴란드 침공으로 르보프를 소련영토로 만들고 그때 포로로 잡은 폴란드 군 장교들을 대규모로 처형하였다. (카틴 숲의 학살). 후에 연합국의 수뇌부가 모인 얄타 회담에서도 리보프는 전후에도 반드시 소련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위대를 잘 조직했던 그는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 사적인 조직 업무에 관심이 없는 라이벌들의 헛점을 공격하며 당내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21년부터 소련의 국가 원수인 레닌이 병석에 누워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였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언'을 썼는데, 이는 레닌 사망 직후와 스탈린 자신의 사망 직후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한 자료로 널리 선전되었다.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는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일국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스탈린주의 참조)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한편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는 강화되어 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28년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를 공산당에서 출당하고 5년 뒤에는 투옥시켰다. 집권 직후 스탈린이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연방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우파 자본주의 세력은 레닌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공산주의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정보원들을 통해 자본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우파 인사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체포, 숙청한다. 또한 1924년부터 레닌의 유지 계승, 트로츠키파 지지자에 의한 스탈린 암살 비밀조직들이 비밀리에 조직됐다가 적발되면서 스탈린의 의심과 분노는 한층 극에 달하게 된다. 1925년 이후부터 반대파 인사에 대한 가혹한 숙청이 계속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그의 반대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소련군 내부의 장군급 인사를 단행한 뒤, 군 장군을 숙청한다. 특히 1937년 6월까지 비밀재판을 통해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스탈린 체제에 위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숙청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의 군사전략가들이었는데, 이들의 숙청과 동시에 스탈린은 작전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켰다. 이들 소련군 초기 군사연구가들의 작전술은 스탈린이 죽고난 뒤에야 재개된다. 장군들을 숙청, 처형시킨 후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장교들을 장군으로 승진 발탁한다.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와 그의 동료들 등 소련군 초기 핵심 군사이론가들에 대한 처형과 숙청, 장군들에 대한 숙청 등은 그들이 만들고 연구했던 보고서와 군사이론서들까지도 반민중적 불온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서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론들은 토론과 적용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침공작전의 실패와 2차 대전 초기의 독일의 기습공격과 모스크바까지 패퇴하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이들의 이론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 패퇴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나타나면서 기갑, 기계화 부대를 통한 작전술 이론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스탈린의 연구 금지와 의심으로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언급하지 못했다. 그는 중견 장교들과도 꾸준히 면담했는데, 이는 그들을 통해 장군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까지 대략 2백만 명 정도를 숙청했고, 이 중 20만 명 정도는 해외 유학파, 당 중앙위원과 현역, 예비역 군 장군, 기술관리들을 포함한 고급인력들이었다. 이후 그는 내부에서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하고 측근과 군부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1928년 스탈린은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했던 레닌의 준 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국가가 직접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 하여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추진했다. 기간 산업을 국영화함과 동시에 경제 정책을 국가 주도로 통제하는 형태로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도시로 떠나지 않던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내로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에 필사적으로 반발 저항하던 농민들은 소련군과 비밀경찰로부터 공격을 받고 체포, 사살되었다. '쿨라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들,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농민들은 집회·시위를 벌였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도시로 강제추방되거나 총살당하였으며, 일부는 수감자의 폭증으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닌의 신경제 정책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으로 대체해 산업화와 특히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후에 공산주의의 한 취약점으로 꼽히게 되는 강제 노동 생산 즉, 생산성 없는 경제 활동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나 강제 산업화와 노동 생산은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과 억압을 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옛 소련의 산업화를 통한 부강한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1932년 혁명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로 공개 석상의 여러 사람 앞에서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모멸감을 느낀 나데즈다는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스탈린의 인간적인 결점과 정치적 실패를 비판하는 서신을 남기고 자살했다. 두 번째 아내의 자살 이후 스탈린은 신혼 살림을 차렸던 아파트를 떠나, 크렘린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나데즈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정치국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만류로 번복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화되고 격무에 시달리자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성들을 가까이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의 딸 스베틀라나에게는 아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편애를 하게 된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그는 당시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유도하였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산업 육성과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 힘썼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엄청난 실패와 기계 고장 등의 부작용들도 수반되었으며, 이는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각종 시위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반발을 무마하고자 강경 진압을 하는 한편, 회사 간부·산업 관리인들을 비판, 규탄하고 그들의 경영 잘못으로 몰아 여론재판에 계속 회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고들은 겁에 질려 허위자백을 하고 희생됨으로써 그의 경제실책으로 야기된 재앙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어 수출력과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1928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철은 5배, 전력은 8배, 시멘트는 2배,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생산고가 늘어났고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즉, 스탈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은 농업 중심의 후진국을 급속도로 근대화·산업화·도시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며, 그는 소련 국내외에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스탈린의 잠재적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 조지 버나드 쇼 등 유명 작가들과 예술인, 당대의 열광적인 외국인 목격자들에게도 널리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경제정책과 동시에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90% 이상이나 되던 소련의 문맹률이 교육 정책을 통하여 1%까지 감소하였고, 또 다른 지식층을 양성하였다. 한편 스탈린은 예술 공연에도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1934년 1월 <레이디 맥베스>가 소련에 상륙, 초연과 함께 흥행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1936년 <레이디 맥베스>를 직접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레이디 맥베스 관람 중 극중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치정 살인 부분이 나오자 이를 불쾌히 여겨 1막이 끝나자 역정을 내면서 자리를 떴다. 며칠 뒤 소련의 최대 일간언론이자 당의 충실한 기관지인 <프라우다>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렸고, <레이디 맥베스>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상영금지조치되었다. 그러나 성급한 산업화는 농업과 환경을 파괴하여 홀로도모르와 같은 재앙을 불렀고, 집단농장화로 성과 없는 농업생산에 회의적이던 농민들의 생산물 수는 감소했고, 우크라이나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식량사정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야 할 식량을 계속 수출했다. 이 때문에 당과 군대 내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많아졌다. 이때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그라드시 지구당의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이를 트로츠키의 음모로 선전하였고,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를 뿌리뽑는다는 명목하에 스탈린에게 도전했거나 도전할만한 자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이 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이 숙청 작업을 담당한 곳은 내무인민위원회(NKVD) 였으며, 당내는 물론 군부나 심지어는 내무인민위원회 내부에서도 숙청작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군부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여러명의 장군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34년 12월 1일 스탈린에 맞먹을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했는데, 키로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권력과 인기가 높아짐을 두려워한 스탈린의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되자 이에 연루된 암살자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옛 혁명 주역이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뽑힌 중앙 위원과 후보 위원 139명 중 98명을 처형했고 17명을 강제 수용소로 쫓아냈으며 제17차 당 대회 대의원 1961명 중 무려 1108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1937년 1월과 1938년 3월 또다시 대규모의 마녀재판을 감행했는데 트로츠키를 따르던 31명의 사람을 처형하고 심지어 1936년과 1938년에는 이전에 숙청을 지휘했던 전직 내무인민위원장인 겐리흐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가 도리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자신을 암살하면 회고록을 폭로하겠다고 꾸준히 협박하여 스탈린의 정적숙청의 칼날을 피해갔다. 1937년 6월 한 달에만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해 8명의 장군을 간첩 혐의로 처형한 것을 비롯해 육군 원수, 군 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 등 1500명을 처형했는데 이 수가 붉은 군대 간부 최고 군사회의 멤버의 75%에 달했으며 원수 5명 중 4명, 군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급 85명 중 62명, 사단장급 195명 중 110명, 여단장급 406명 중 220명, 연대장급 고급 장교 중 70% 이상이 숙청당했다. 대숙청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 1938년 바실리 블류헤르과 니콜라이 부하린, 야코프 페테르스, 1939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카를 라데크, 1940년 알리 쇼겐추코프와 니콜라이 예조프, 1950년 그리고리 쿨리크 등까지 강타했다. 특히 스탈린의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니콜라이 부하린(Nikolaj Bukharin)의 경우 130개 항목의 죄명으로 법정에 기소당했는데, 이는 고문에 의한 자백들이었다. 부하린은 '고난받는 인민대중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자본주의적, 퇴폐적인 생활을 향유한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이외에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초기 작품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으로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란 비판을 받고 활동을 거의 중단당했다.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던 레프 란다우는 UPTI 사건으로 조사받은 뒤 모스크바를 탈출했으나 1938년 5월 27일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에 유형당했다. 이후 1939년 5월 29일 동료 표트르 카피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39년 열린 제18차 당대회에 참석,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팽창하면서 위협을 느낀 그는 서방국가들과 반(反) 히틀러 동맹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히틀러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유럽 대륙을 전전하다가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한 레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독재성과 레닌의 유언을 들어 그를 비판했는데, 이것이 국제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신의 반대 여론으로 확장될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계획했다. 트로츠키 암살 계획은 성공하여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 시티 남부 코요아칸의 자택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는 스탈린 사후 1972년 트로츠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39년 8월 스탈린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용기를 얻은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새로 동맹국이 되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국가였던 독일이 서방국가들과 교전하고 있는 동안 소련 내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나갔다. 이후 폴란드 동부와 발트3국, 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시켰다. 한편으로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승리하면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1년 5월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1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스탈린은 연방의 총리를 겸했다. 이 해에 동방으로 팽창하려던 독일의 히틀러와 전쟁하게 되었다. 1940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북유럽 3국이 소비에트연방 편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그런데 투표 하루 전에 만장일치라는 투표 결과였다. 이는 분명한 조작이었지만,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소련 국내에서는 이를 '전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발트 3국의 소련 합병은 얄타 회담 이후 더욱 분명하게 정해졌으며, 이후 1991년 무너질 때까지 소련의 영토로써 인정된다. 현재 발트 3국은 소련의 합병이 분명한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속해있던 시기를 '강제 점령기'로 규정하고 있다. 1941년 4월 13일 스탈린은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이후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대략 1200대 이상이나 되는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수십만명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독-소 불가침 조약에 입각하여 영국을 굴복하기 전에는 소련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습공격에 충격을 받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흐루쇼프는 그가 한동안 무력증에 빠졌음을 증언했으나, 스탈린은 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깊숙히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그는 피신권고를 물리치고 수도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일대 반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지시했다. 1941년 7월 19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 인민위원에 취임했다. 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을 틈타 체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反)소련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1941년 11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고,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크렘린을 끝까지 사수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대량생산해냈다.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개)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승리 이후 소련군은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은 독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쿠르스크 전투 이후의 독일군은 반격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1943년 12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처칠 등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1944년 여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스탈린이 총 지휘하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라 하여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격퇴시켰다. 체첸의 반발이 가라앉자, 스탈린은 체첸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44년 봄, 비밀리에 체첸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서 반발하는 자는 사살했고, 체첸인구의 10%가 강제 이주 당시 사망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몇번의 쿠테타 이후 동료들을 믿지 못했고, 특히 군대를 불신하여 장군을 다수 죽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초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처럼 군사 업무에 수시로 관여하고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군사업무에 간섭하다가,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1945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협상했는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을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 이든이 칭찬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연합군 측의 승리로 독소 전쟁의 최종 승리는 당연 스탈린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전 8월 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도움 요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도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10여 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고, 스탈린은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몫을 요구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군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천 명임을 들어 대가를 요구하였다.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에 재선출되었다. 1945년 6월 27일에는 소련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여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 파병에 동참을 제안받자 그는 수락하였다. 뒤에 미국 내부에서는 그를 끌어들인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고, 8월 15일 일본 항복 직후, 미국은 소련군이 2차 대전 종결에 끼친 영향이 없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7월과 8월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2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예로 들며 소련군 역시 2차 대전 해결에 기여했음을 강변했다. 1946년 2월 25일 소련 인민위원회 국방담당위원직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고, 1947년 3월 3일에는 자신이 겸하던 국방부장관직에 니콜라이 불가닌을 임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외국의 국가 원수와 및 내빈에게 수여했다. 1946년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다. 최종 결론은 김일성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이 무렵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숨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1950년까지 히틀러를 잡아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하고 없었지만, 스탈린의 이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NKVD는 히틀러를 찾아내 죽이기 위해 아르헨티나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1945년과 1948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확정된 일도 있었다. 1947년 북유럽 3국에서 개최된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스탈린은 140%의 득표율을 얻었다. 민망했던 선거당국은 선거 다음 날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려고 이웃 선거구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 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계속 간섭거부를 추진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를 표방하며 소련 진영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스탈린이 주도하는 단일체로서의 세계공산주의, 일국공산주의 정책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내 다른 14개의 피지배 국가들이 티토주의의 선례에 따라 분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염려한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 내 각국(각공화국)에서 여론 재판이 일어나도록 배후 조종하고,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 때와 같은 조작을 하여 공산 위성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티토주의자임을 자백하게 만들어 다수의 위성국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시켰다. 경공업의 생산력 증대 외에 그는 물리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과학원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수립 계획하고 적극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으나, 우주선의 발사는 그의 생전에는 볼 수 없었다. 비록 스탈린의 생전에는 우주 탐사를 볼 수 없었으나,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반공주의자이며 그를 심히 경멸하였던 비오 12세는 친서를 써서 특사편에 보내 핵 전쟁만은 중단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독소전쟁 기간 동안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만 2000개의 공장, 6만 5000km의 철도, 약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깨졌고, 그들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전후재건을 돕지 않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소련은 전후 재건에 나섰다. 제4차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배급제 폐지에 있어서 소련은 영국보다 7년이나 더 앞섰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1949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 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리고 별장에 도착한 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월 5일 숨졌다. 3월 4일에는 별장의 비밀 방에서 식사를 시켰으나, 그 날의 식사는 먹지 않고 첫 번째 비밀 방에 방치해두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간은 알 수 없다. 집권기간 동안 사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다. 비교적 청렴한 생활과 종교를 부정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정적들로부터 그에 대한 비판을 신중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죽기 직전, 스탈린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폭로하거나 암살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주치의들을 숙청하였다. 이 때문에 주치의들이 체포, 고문 등으로 끌려가면서 스탈린 자신이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식 발표된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일설에는 목이 졸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사망 장소는 자신의 관저였는데, 그곳의 위치는 자신을 암살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이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고 복잡한 곳에 위치한 숲속에 별장을 지은데다가 주택도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되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병원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사망 후 3일이 지난 3월 8일에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김일성은 장문의 애도문을 소련에 보냈다. 사후 시신은 미이라화 되어 레닌 묘 옆에서 보존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시에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묻혔다. 스탈린은 사후 1956년 초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에 의해 비판받은 뒤 격하당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동상, 흉상, 초상화, 비석 등 각종 기념물들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스탈린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가 됐던 차리친 시는 1962년 이후 볼고그라드(Volgogra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과 소련-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실각하면서 스탈린 격하논쟁은 주춤해지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영웅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 독립국가 연합 14개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달성한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였다. 2008년 8월 러-조지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 진입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의 생가와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소련 내 기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0년대 이후 소련사 연구자들 중 스탈린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독살설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2003년 3월 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미국 예일대학의 소련연구가인 조나단 브렌트는 공동저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에서 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나우모프와 브렌트에 의하면 스탈린 독살의 용의자로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탈린 사망 후 베리야는 "내가 그를 해치우고 모든 사람을 구했다"며 자랑한 내용을 니키타 흐루쇼프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 책은 정치국원 4명이 모두 공모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당시 의료진의 보고서 초안에는 스탈린이 숨지기 전 광범위한 위장 출혈을 보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3개월 뒤 공개된 공식 보고서에는 병명에 관련된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크렘린에서 근무하던 경비병 한 명도 베리야로부터 병세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스탈린의 음식에 과다 복용할 경우 장기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응혈제 '와파린'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독살설 외에 침실에서 목졸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흐루쇼프는 베리야가 그를 암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스탈린의 치하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농업국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탈바꿈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소련이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모스크바 사수 및 연합국 지위 획득 역시 그의 치적으로 기록된다. 또한 독소 전쟁에서 초반의 패배에 큰 책임이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소련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방 연합국과의 흥정을 통해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인함으로써 전후 미국과 함께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통제 경제와 중소 수공업을 양성하면서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련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된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레닌주의를 더욱 구체화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리적인 혁명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소련은 물론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적 해석을 학습하였고, 이를 혁명의 전략전술로 논리로 삼았다. 스탈린의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장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문서임과 함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한편 무모하게 추진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기간산업의 국영화로 소련 국내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산업화 정책으로 농업이 주류이던 소련을 산업화했으며 소련의 산업화를 완성시켜 독일에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부정적 평가보다 높으며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국가적, 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된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일부 러시아 국민들 중에는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힘, 무사무욕, 국가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 또한 러시아의 청년 층 중 일부는 스탈린을 나치를 물리친 강력한 군주로도 기억된다. 1990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르바초프나 보리스 옐친 등은 당초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제재하였으나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 여론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한 전쟁 영웅, 산업화를 통해 소련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재평가를 놓고 그의 인권 탄압과 정적 숙청에 관련된 비판과 잡음이 일고 있다. 2019년 러시아에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2008년 5월의 한 온라인 투표에서 '위대한 러시아인' 3위에 올랐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러시아 국영 TV채널 '로시아' 방송은 2008년 5월 러시아 역사연구소와 함께 '이미아 로시아'(러시아의 이름)라는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영국 BBC 방송의 ‘위대한 영국인’이란 프로그램을 본뜬 것으로 러시아인들의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제작됐다. 경제 사정의 악화와 중산층 붕괴 등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잡고자 로시아 방송과 역사문제연구소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며, 다양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인물을 찾는 이 프로젝트의 첫 단계에서 인터넷과 문자메시지, 전화 투표로 다양한 시대의 인물 500명이 선정됐다. 두 번째 투표 단계에서 50명으로 대상의 폭이 한층 좁아졌다. 9월 최종 결선 진출자 12명이 선정되면서 인기투표와 토론은 한층 치열해졌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12명의 심사위원단이 구성됐고 각 심사위원은 12명의 인물 중 1명을 맡아 해당 인물을 대변했다. 프로그램은 12월 28일 최종 결과 발표와 함께 막을 내렸다. 1위는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왕자, 2위는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 3위는 스탈린이 차지했다. 역사학자 엘레나 얌폴스카이아는 스탈린이 러시아인의 3대 영웅의 하나로 꼽힌 것은 "민주주의의 이름하에 자행돼 온 자본가들의 독재와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정신적 피폐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불만과 회의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 무사무욕, 민족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스탈린 이후 민주주의 정부는 국민들에게 만족감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계속되고 국민 영웅으로 여겨질 정도까지 불만을 가중시켜온 셈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러시아인들의 스탈린에 대한 존경심은 지난해 8월 러-조지아 전쟁에서도 증명됐다.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를 침략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나오미 울프는 스탈린이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하였다. 스탈린은 생전에도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을 관료국가로 만들었다"면서 강도높게 비판받았으며, 사후에는 생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숙청들로 거세게 비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공범이라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의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지난달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 비정상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트였고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비판도 있다. 성적으로 롤리타 콤플렉스 취향으로 어린이를 좋아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가 남긴 회고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들, 소녀들의 사진을 수집했다고 한다. 한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급사하자 암살 배후로 지목,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에게 독이 든 차를 먹였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마리아 유디나라는 피아니스트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유디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유디나는 레닌 이후 정권을 잡은 독재자 스탈린의 예술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동료 예술인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는 등 마리아 유디나의 이런 태도를 스탈린이 가만 두고 있을 리가 없지만 유디나에겐 극히, 정말 극히 예외적으로 강제수용소에는 보내지 않고 그가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유디나의 연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디나가 연주하는 모차르트(확실히 모르겠지만 피아노 협주곡 23번일 것이다.)의 방송실황을 듣고 있던 스탈린이 그의 연주에 매우 감동하여 당장 녹음 테이프를 구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스탈린이 유디나를 좋아했고 존경하였기에 유디나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유디나는 스탈린에게 정면도전도 불사했던 몇 안 되는 용감했던 예술가 중의 하나였으며 이에 국립 음악원 교수직에서도 해직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그만큼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치고는 지나치게 적은 수의 음반만을 남긴 것으로 보아, 그의 연주와 녹음 활동에 정치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 는 시각이 있다. 스탈린이 유디나를 배려한 것에 대해서도 볼세비키 혁명 당시부터 있었던 유디나의 혁명 과정에서의 업적들과 그의 대중적인 인기, 위치 등을 모두 고려했을 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더 큰 반발이 있을 것이란 점을 인식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 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우상화를 추진해 나갔다. 스스로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 찬양받았다. 스탈린의 초상화나 동상이 소련 내 곳곳에 걸리거나 세워졌고,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가 만연했다. 한편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고위 정치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각지에 세워진 스탈린의 동상과 휘호, 상징물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재임기간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재임기간 중 철거되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모든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자신을 포함한 소련 인민들의 대다수가 비공식적으로 믿고 있던 정교회를 이용해,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정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리하여 정교회의 총주교가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25년 이래 선출되지 않았던 모스크바 총주교직이 스탈린의 제안으로 다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교회력도 부활되었고, 혁명 후 폐쇄되었던 수많은 정교회 성당이나 수도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 때문에 어떤 러시아 정교회는 스탈린을 정교회를 부활시킨 은혜로운 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 정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자였던 스탈린을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파가 반발하고 있다. 소련은 일본의 국력이 강해지자 일본 민족과 비슷해 보이는 황인종을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이 독립하자 본래 만주 민족의 땅인 연해주에 대한 영토 반환 분쟁을 대비해 1937년부터 시베리아, 연해주 등에 살고 있던 모든 황인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강제 이주로 수많은 동양인들이 희생되었으나, 소련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하여 중국, 일본, 한국과의 영토 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 1953년 3월 6일,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신호탄을 하늘에 올렸으며 각 병사는 스탈린에 대한 고별인사로 동시에 공중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하였다. 스탈린의 사망은 동서해빙과 외부 세계에 대한 소련 지도층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태도 변화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에서 미국이 손을 떼고 일본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진심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전황을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종결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자 지원을 감소시켰다. 또한 김일성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확신하여 경계하게 된다. 1953년 3월 19일 스탈린은 소련 각료회의에서 한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은 소련과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이른 시일 내에 정전협상을 마무리지을 것을 결정했다. 1940년에 발생한 폴란드 카틴 숲의 학살의 배후는 스탈린이 지시했지만, 스탈린을 영웅시하는 기류가 확산됨에 따라 학살에 스탈린은 연관이 없다는 견해가 러시아의 좌파계열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2009년 러시아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이 학살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다. 2009년 4월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스탈린이 폴란드 장교 수천 명의 학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스탈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러시아 검찰에 고소, 기사 철회와 함께 천만 루블, 우리 돈으로 4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러시아의 우익 성향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2009년 4월 기밀해제된 서류 중에서 자료들을 발췌, 4월 22일 “최근 기밀해제된 서류에서 스탈린이 소련 자국민과 외국인 수천명에 대한 살생부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스탈린이 민간인 처형을 직접 지시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고, 스탈린의 개인 서명이 담긴 처형허가증을 발견해 기사화했다. 주가슈빌리의 변호인인 유리 무킨은 이날 법정에서 “스탈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공정한 지도자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주가슈빌리 본인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노바야 가제타 측 변호인인 젠리 레즈니크는 “스탈린이 수만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스탈린 명예훼손 재판은 러시아 및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법정은 관객들로 가득찼고, 법정 밖에는 스탈린의 지지하는 진보성향의 사람들 모여들었다 모스크바 법정 밖에서 스탈린 지지 집회를 벌이던 한 여성은 “스탈린 시대에 이 나라는 존경받았다”면서 “지금 우리는 가난뱅이지만 당시에는 다른 국가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내 우익성향 단체들은 이번 소송을 공산주의의 향수에 젖은 좌익들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자를 호의적으로 그려내려는 섬뜩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2008년의 구 소련 내 한 초등학교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이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이뤄냈다면서 그를 “유능한 지도자”라고 기술했다. 모스크바의 한 지하철 역에 스탈린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판이 등장했다. BBC는 러시아가 소련 시절의 공포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인권운동단체 '메모리얼'의 역사학자인 니키타 페트로프는 “스탈린의 손자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스탈린에 대한 명예회복 시도”라며 “이는 과거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하겠다는 것”이라며 스탈린 명예훼손 소송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이 문서 자체가 거짓”이라며 날조 의혹을 제기하였고, “스탈린은 직접적으로 누구에 대해서도 처형을 명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9년 10월 모스크바 법원은 스탈린의 폴란드 장교 학살설을 보도한 노바야 가제타의 무죄판결을 내렸고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패소하였다. 레닌이나 트로츠키 등의 주변에 자신의 정보원을 심고 이들로부터 정보를 빼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1917년 12월에 창설된 체카(Cheka, 반혁명 태업단속 비상위원회)를 개조하여 특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Komitet Gosudarstvennoy Bezopasnosti)를 조직했다. 그는 국가보안위원회(KGB)를 특무기관이자 친위조직으로 활용했다. 고소 공포증이 있던 그는 비행기나 헬리콥터 탑승을 꺼렸다. 추락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염려한 그는 고층 건물에 오르기도 꺼렸고, 장거리 여행도 주로 열차를 이용했다. 그의 총리 관저에는 비슷한 모양의 방을 3, 4개 이상 더 만들고, 내부에서 리모콘으로 작동하게 되는 자동문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업무 평가에 있어서 그는 치밀하고 꼼꼼하여 그는 수많은 인민위원회 위원들과 장관들로부터 수많은 서류를 일일이 직접 보고받았다. 각부 장관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결재하고 계산하며 업무를 추진했다. 작고 왜소하고 약한 체구에도 과중한 격무를 무난히 소화하였으며 새벽 3시~4시까지 정무를 보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무를 주관했다. 일설에는 그가 오전 10시~11시 무렵에 늦게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은 독서를 좋아하여 업무가 없는 때는 독서로 소일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헤겔 등의 유물론과 자본론, 변증법은 물론 찰스 다윈과 헉슬리의 적자 생존론,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등의 내용을 거의 대부분 이해, 암기하고 있었고, 베른슈타인을 개량주의 타협론이라 비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붉은 군대의 중전차 IS-2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 호라고 지어졌다. 후에 그는 바트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성격이 치밀하여 꼼꼼하고 메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억력이 비상하였다. 자아도취에 빠졌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 1945년 5월 7일 독소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뒤에 스탈린 우상화가 만연하였고, 공공기관이나 광장, 거리 등에 그를 찬양하는 기념물과 작품이 조성되었다. 1949년에는 그가 베를린을 정벌한 뒤 세계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비행기로 베를린에 도착하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남녀 어린이의 사진을 유난히 좋아하였고, 딸 스베틀라나는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생전의 스탈린은 구세주와 영웅으로 묘사됐는데 사후에는 의심 많고 잔인한 독재자로서 많이 표현된다. 소련 시기에 씐 소설에서 스탈린은 대부분 간접으로 묘사된다.(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 스탈린의 사망 이후 그는 독재자, 특히 공산주의 독재자로서 묘사되었고 소련을 다루는 많은 소설에서 그려졌다. 1949년에 발표된, 그의 독소전쟁 승리를 과장해 확대한 선전영화 〈베를린 함락〉(Падение Берлина)에서 그는 베를린을 함락하고서 비행기로 베를린에 도착해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인민들에게 환영받는다는 설정으로 막을 내린다. 2009년 스탈린이 인민군 특수부대를 구성하여 화성에서 온 외계인을 대적한다는 게임 〈스탈린 대 화성인〉(Stalin VS martians)이 출시되기도 했다. 그 밖에 게임 〈커맨드 앤 컨커〉(Command & Conquer)에도 등장한다. 그의 아들 중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던 야코브 주가슈빌리가 독일군에 붙잡혔고,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포로교환을 추진했으나, 스탈린은 "원수와 대위를 어떻게 교환하느냐"며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야코프는 처형당했다. 한편 파울루스 원수는 "원수는 보잘 것 없는 사병(아돌프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 민족을 위해 일개 사병으로 자원 입대함)을 위해 죽을 수 없다"라며 조국을 배신했다. 관련 이념 텍스트 역사 사건 인물 골드바흐의 추측 골드바흐의 추측(Goldbach's conjecture)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정수론의 미해결 문제로,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Prime number)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하나의 소수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은 허용한다. 1742년 6월 7일에 프로이센 수학자 크리스티안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은 추측을 제안하였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추측을 했다. 그는 1을 소수로 취급했지만 후에 이 개념은 폐기되었다. 이 두 추측은 동치이지만 당시에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골드바흐의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오일러는 1742년 6월 30일에 답장을 보내 골드바흐와 한 예전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골드바흐의 원래 추측을 포함한다.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면, 홀수의 경우 3을 더하면 되고, 짝수의 경우는 2를 더하면 세 소수의 합으로도 표현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위 추측을 강한 골드바흐의 추측(strong Goldbach conjecture)이라고 부르고 최초에 골드바흐가 제시했던 '5보다 큰 모든 정수는 세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 는 주장은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weak Goldbach conjecture)이라고 불린다. 강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이라면, 약한 골드바흐의 추측은 당연히 참이 된다. 강한 골든바흐의 추측을 짝수 골드바흐 추측(even Goldbach conjecture), 약한 골든바흐의 추측을 홀수 골드바흐 추측(odd Goldbach conjecture)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50까지의 짝수는 위와 같이,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짝수에서 가능한지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로 직접 계산하여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인지 확인하는 시도가 예전부터 있었다. T. Oliveirae Silva는 formula_1 이하에서 골드바흐의 추측이 참임을 확인했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반드시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 한 쌍의 합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고, 같은 두 수를 쓸 수도 있다. 쌍둥이 소수 추측 (twin prime conjecture)과 골드바흐의 추측은 구조적으로 유사성이 있다. 쌍둥이 소수 추측은 formula_4와 formula_5가 모두 소수인 수가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formula_6가 정확히 두 개의 소인수를 가지는 수가 무한히 많다는 추측이다. 골드바흐 추측은 4이상의 모든 짝수에 대해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모든 4 이상의 짝수 formula_7에 대해 formula_8가 두 개의 소인수를 가지는 1과 formula_9 사이의 k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추측이다.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 때문에 두 추측은 같이 다루어져 왔으며, 지금까지 검증된 수치적 자료들도 이를 뒷받침 하는 듯 보인다. 칸 영화제 칸 영화제(, )는 세계 3대 국제 영화제 중 하나로서 국제 영화계의 '메카'로 통한다. 1946년 9월 20일 ~ 10월 5일 처음으로 개최된 이래, 프랑스 남부 칸에서 보통 매년 5월에 열린다. 수상 부문은 황금종려상, 감독상, 각본상, 남·여자배우상 등이 있다. 영화제의 작품의 특성은 영화감독의 재능과 실험성에 초점을 두어 대중성과 작품성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2014년 7월 1일, 프랑스의 유로 TV 방송국 카날 플러스의 공동설립자이자 전 회장인 피에르 레스퀴르가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 이사회는 질 제이콥스를 명예 집행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칸 영화제는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 중의 하나이다. 병설되어 있는 국제 전시장도 MIFED, American Film Market와 대등한 세계 3대 시장으로 손꼽힌다. 전시장에는 800개사, 수천명의 영화 제작자(프로듀서), 바이어, 배우 등이 모여, 세계 각국에서 모이는 영화배급사에 신작 영화를 파는 프로모션의 장소가 되고 있다. 특히, 세계 3대 영화제와 세계 3대 시장이 동시에 개최되는 것은 칸느 뿐이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매체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매회 전 세계에서 수많은 배우, 영화 제작자가 참석한다. 개최 기간 동안 주전시장을 시작으로 각 영화관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전시회는 각 제작사의 부스에 설명회 파티가 열린다. 앞으로 개봉되는 영화는 물론, 예고편 밖에 할 수 없는 영화와 아직 대본조차 할 수 없는 기획 단계의 영화까지 판매된다. 이 시장은 앞으로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예측하고 구매를 결정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1930년대 후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개입으로 정치색을 강화했던 《베니스 영화제》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최된 것이 이 칸 영화제의 시작이다. 1939년 개최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종전 후 1946년 정식으로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예산 문제로 개최되지 않았고, 1951년에 다시 개최되었다. 이때부터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이 대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8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마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베리, 진 가브리엘 아루비콧코, 클로드 를루슈, 로만 폴란스키, 장뤼크 고다르의 요청으로 영화제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작품으로는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1999년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02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감독상, 2003년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그랑프리와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 2010년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와 2011년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이 비경쟁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을 수상한 바 있다. 칸 영화제에는 여러 섹션이 존재한다. 최고상은 《황금 종려상》(Palme d'Or, Golden Palm)라고 하며, 20개 내외의 후보작 중에서 선정된다. 두 개 이상의 작품이 선정된 해도 있다. 처음에는 최고상을 "GP"(Grand Prix du Festival International du Film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라고 했었는데, 1955년에 트로피 모양을 딴 "황금 종려"를 정식 명칭으로 "그랑프리" 상으로 삼았다. 1965년 최고 상품의 정식 명칭을 "GP"로 변경했다가, 1975년 다시 "황금 종려"라고 변경했다. 오랫동안 칸느에서 "그랑프리"는 최고상의 정식 명칭 또는 별칭이었지만, 1990년 심사위원 특별상(Grand Prix Spécial du Jury)에 "그랑프리"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혼란을 초래했다. 심사 위원은 유명 영화인과 문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문별로 심사 위원들이 다르다. 인터내셔널가 인터내셔널가(, , )는 노동자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담고있는 민중가요이다. 프랑스어 원 가사는 외젠 포티에(Eugène Pottier, 1816년 - 1887년)에 의해 1871년 파리코뮌이 한창이였을적에 쓰여졌고 피에르 드제테(Pierre Degeyter, 1848년-1932년)가 1888년에 곡을 붙였다. 참고로 작사자인 외젠 포티에는 철도 노동자였고, 피에르 드제이터는 가구세공인으로, 작사자와 작곡자 모두 노동 계급 출신이다. 프랑스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가 '프랑스 혁명' 이후 면면히 계승되어온 '자코뱅식 애국주의' 전통을 상징한다면, 인터내셔널가는 자코뱅주의와 더불어 프랑스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쳐온 '사회주의 전통을 상징하는 노래'로 애창된다. 애초에 인터내셔널가가 처음 유래되어 만들어진 파리 코뮌 자체가 급진성향의 자코뱅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정치 운동이었다. 이 노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노래 중 하나이며, 러시아어판은 한때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로 채택되어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쓰였다. 그러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코민테른을 해체하면서 새 국가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1944년 이후에는 인터내셔널가 대신에 소련 찬가로 대체된다. 여기서 '인터내셔널'은 단순히 '국제적'이라는 뜻이 아닌, 사회주의자들의 국제기구인 제1인터내셔널을 의미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으면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갈라선 이후로는 '인터내셔널'이라는 조직 자체가 무의미해졌으나, 오늘날에도 불리고 있다. 원곡은 프랑스어이지만,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언어별로 다양한 가사가 존재한다. 한국에는 일제 강점기 1920년대때 조선공산당이 인터내셔널가를 일역한 일본의 '국제가'를 조선어로 직역, 번역되어 불린 것이 시초다. 이 가사는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국제가’또는‘국제공산당가’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으며, 주로 의전용으로 사용된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좌익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금기시되어 인터내셔널가 또한 잊혀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민중음악 활동가들이 외국에서 악보를 다시 들여오며 복원되었다. 그 뒤에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시기 노동운동 노래패를 통해 현재 대한민국에서 부르는 인터내셔널가 가사가 확립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터내셔널가 가사는 서로 다르다. 톨스토이 (동음이의) 톨스토이(Толсто́й, Tolstoy/Tolstoi)는 러시아의 성씨이다. 에르되시 팔 에르되시 팔(, , (책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에선 폴 에어디쉬라고 발음하기도 했다.), 1913년 3월 26일~1996년 9월 20일)은 헝가리의 수학자이다. 수백 명의 다른 수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조합론, 그래프 이론, 정수론 등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레온하르트 오일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르되시는 1913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에르되시의 아버지 에르되시 러요시()와 어머니 어너() 둘 다 수학 교사였다. 아버지의 성은 원래 엥글렌데르()였는데, "에르되시"로 개명하였다. 에르되시는 누나가 둘 있었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성홍열로 죽어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1914년에 아버지 에르되시 러요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공격해 온 러시아 제국 군대에 포로로 잡혀가 6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전쟁 포로로 있었다. 에르되시의 어머니는 남편과 두 딸을 잃은 후 에르되시에 극도로 집착해, 에르되시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교육을 받았다. 에르되시는 4살 때에 이미 혼자서 이미 알려져 있던 소수의 몇몇 성질을 발견했다고 한다. 1920년에 아버지가 풀려나 돌아오고, 아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헝가리의 유대인 대학 입학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에르되시는 국가 시험 수상을 이유로 1930년에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에 21세의 나이에 페예르 리포트() 아래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4년에 에르되시는 헝가리의 반유대주의를 피하여 영국 맨체스터로 망명하였다. (에르되시의 아버지와 두 명의 삼촌은 홀로코스트 동안 처형당했다.)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지만, 종신 재직권을 수여받지 못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그의 삶을 특징짓는 떠돌이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에르되시는 대한 기록은 그가 순진하고, 아이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일례로, 1941년 그는 다른 수학자와 열띤 토론을 하다가, 미국 롱아일랜드의 군사 통신 시설을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들은 스파이 혐의로 붙잡히고, 이 사건은 연방수사국의 기록 파일에 올려졌다. 또한, 에르되시는 명성과 천재성으로 어느 대학에서도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누구든지 그의 마음에 드는 주제를 가지고 온 수학자라면 함께 논문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는 거의 1500개의 공동 논문을 쓴, 역사상 공동연구를 가장 많이 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와 공동연구를 했던 수학자들은 에르되시 수란 말까지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이 에르되시는 혼자서는 논문을 거의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수학을 ‘사회적 활동’으로 만든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에르되시는 죽음을 표현할 때 "떠난다"는 말을 썼고 "죽는다"란 말은 수학을 그만두는 것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아이들을 엡실론(epsilon, 수론에서 무한소를 의미함)이라고 불렀고 아이들을 좋아했다. 1950년대 초, 에르되시의 연방수사국 기록은 그가 매카시 수사의 주목을 받게 하였다. 이 때문에 에르되시는 갑자기 미국행 귀국 비자를 거부당했다. 그 결과, 그는 이후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이스라엘에서 지냈다. 1960년대 초, 그는 다시 미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수차례 청원을 내서, 1963년 11월에 다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30년간, 에르되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 영국의 몇 대학에 자리를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는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대학들을 전전한 방랑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암페타민을 다량 복용하며, 하루 최대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극도로 오랜 시간 연구를 계속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9년에 에르되시의 친구 로널드 그레이엄은 그에게 한 달 동안 약을 먹지 않고 버티면, 500 미국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에르되시는 이 내기를 이겼지만 약물을 복용하지 않는 동안 연구를 할 수가 없었고, 이 바보같은 내기 때문에 인류의 수학 발전이 한 달 늦춰졌다고 불평했다. 에르되시는 1983년/1984년 5만 미국 달러 상금의 울프상 수학 부문 등 많은 상들을 받았다. 그는 단촐하게 살았으며,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학생들을 돕거나, 문제 풀이 상금으로 내거는 것으로 썼다. 에르되시는 말년까지 활발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6년 9월 20일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학회가 끝난 몇 시간 후 심근 경색으로 인하여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에르되시는 평생 독신이었으며 자녀를 두지 않았다. 에르되시는 부다페스트의 코즈머 가(街) 유대인 공동 묘지()에서 부모 옆에 매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적혀 있다. 에르되시의 수학적 업적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으며 그 양도 많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론이나 틀을 짜는 수학자가 아닌, 특별히 어렵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의 해결사였다. 그는 특히 조합론, 그래프 이론, 수론 분야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단지 문제를 푸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답고 기초적인 풀이를 얻고자 했다. 증명은 결과가 왜 참인지에 대한 직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수순으로 이루어져 통찰력에 도움이 되지 않은 증명은 의미가 적다고 생각했다. 에르되시의 증명의 특징은 복잡한 문제를 아름답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푼다는 점이다. 그는 1951년 수론 분야의 여러 논문으로 미국 수학회에서 수여하는 콜 상()을 수상했다. 에르되시는 항상 재치있는 어구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에르되시는 수학적으로 아름다운 증명을 볼 때마다 “그 책에 있는 증명이군!(This one's from "The Book"!)”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책’이란 신이 수학 정리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최적인 증명을 써 둔 상상 속의 책이다. (에르되시의 전기의 번역본에서 ‘신의 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985년에 그는 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저위붕 작전 베저위붕 작전() 또는 베저 작전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이다. 암호명 "베저위붕"은 독일어로 "베저 강 훈련"을 뜻한다.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략하였다. 나치는 프랑스와 영국이 이들 국가와 손을 잡거나 점령하여 독일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을 계획(이는 실제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을 세우는 것에 대한 대비라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두 나라 주재 독일 대사들이 양국 정부에 독일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양국의 중립을 보호하기위해 왔다고 통보했다. 덴마크는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노르웨이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징검다리였으며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얼마만큼 관리가 필요했다는 것뿐이었다. 덴마크는 작고 평지로 이루어져 독일군의 작전 수행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새벽 초 덴마크군 몇몇 연대가 독일군에 대해 저항을 하여 열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덴마크 정부는 순식간에 내정에 간섭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사실 독일 대사가 덴마크 정부를 찾아와 독일군의 진주를 허락하라고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독일군은 국경을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덴마크가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항복한 관계로, 1943년 여름까지는 독일 점령은 매우 관대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도 지연이 되어 그들은 거의 모두 스웨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덴마크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수는 500명을 넘지 않고 50명 미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당시 덴마크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 10세는 매일 코펜하겐을 국왕의 정복을 입고 산책하면서 침묵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케냐의 국기 케냐의 국기는 1963년 12월 12일 독립과 동시에 지정되었다. 국기의 디자인은 케냐의 독립 운동을 주도한 케냐의 정치 단체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의 기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다. 검정색, 빨강색, 초록색 가로 줄무늬 사이에 얇은 하얀색 가로 줄무늬 2개가 그려져 있으며 국기 가운데에는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이 그려져 있다. 검정, 빨강, 녹색은 각각 흑인, 피, 자연을 상징하는 범아프리카색이다. 흰색은 평화를 뜻하며, 마사이족의 방패와 창은 자유의 수호를 나타낸다. 케냐의 국기 규격과 색상은 다음과 같다. 밀도범함수 이론 밀도범함수 이론(Density functional theory, DFT)은 물질, 분자 내부에 전자가 들어있는 모양과 그 에너지를 양자역학으로 계산하기 위한 이론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어떤 분자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특정 분자의 모양과 성질 등등을 예측할 수 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과학 계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양자역학 계산 분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상사 구조를 갖는 다체 문제에 어디든 적용할 수 있으므로, 최근 전자구조와 별 상관 없는 많은 통계물리학에 사용되기도 하다. 엔리코 페르미가 기본적인 이론을 도입하였다. 월터 콘() 등이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켰다. 콘은 이 공로로 199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물질의 성질을 공부하려면 {많은 원자핵}+{많은 전자}문제, 즉 다체 물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원자가 아닌 복잡한 분자(혹은 고체 등)에 대한 문제를 풀기는 이론상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몇 개의 근사 방법이 필요하다. 첫 번째 근사는 보른-오펜하이머 근사(Born-Oppenheimer approximation)로 전자보다 수천배 이상 무거운 핵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핵에 의한 전기장 안에서 전자의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많은 전자로 이루어진 시스템 문제를 푼다는 것이다. 밀도범함수이론에서는 많은 전자 문제를 단순히 전자들의 파동함수들대신 전자 밀도함수로 대체함으로 손쉽게 계산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공간상의 어떤 점에 전자가 있을 때 이 전자가 느끼는 퍼텐셜은 다른 모든 곳에서 오는 것을 밀도함수를 통한 평균장으로 볼 수 있다.(Mean Field Theory/Approximation). 이때 전자의 밀도 함수는 전자의 파동 함수들을 절댓을 구해 제곱해서 채워진 준위까지 더해준 것으로 정의된다. 밀도범함수의 출발은 원자핵+전자 시스템을 풀기위해 시작됐지만 이론상 많은 동일한 형태의 입자/장 상호작용을 하는 다체 문제면 적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시스템의 퍼텐셜은 으로 나타난다. 이 중 마지막에 교환-상관 퍼텐셜은 아무도 정확히 어떤형태를 가지는지 모르고 보통의 경우 양자몬테카를로 계산값과 장론의 결과를 근사적으로 잘 맞추는 형태로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국소 전자 밀도에만 의존하는 교환-상관 퍼텐셜 범함수를 사용하게 되면 국소 밀도 근사(local density approximation)라고 하고, 선형 근사를 쓰게 되면 일반화된 기울기 근사(generalized gradient approximation)이라고 한다. 많은 경우 국소 밀도 근사만으로 계를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전하 이동이 큰 계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공간상의 어떤 점에서 함수 값을 구할때 모든공간의 정보를 필요로한 경우 이를 "논로컬(non-local)"하다고 말하고 해당점의 정보만 필요한 경우를 국소적()이라고 한다. 위의 퍼텐셜에서는 외부요인에 의한 퍼텐셜은 local혹은 non-local할 수 있고, 하트리 퍼텐셜은 확실히 non-local하며, local density approximation을 사용했을때는 교환-상관 퍼텐셜은 local하고 generalized gradient approximation을 사용했을 경우, 즉, 1차미분 기여도를 포함했을 때에는 semi-local하다고 한다. 호헨버그(Hohenberg) 와 콘(Kohn)의 정리: 콘-샴(Kohn-Sham) 정리: 정확한 바닥 상태 밀도 함수는 콘-샴 방정식이라고 하는 슈뢰딩거 방정식과 흡사한 방정식을 풀면 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해밀토니언 formula_6는 여기서 formula_8은 전자 질량이다. 정리하면 보통 계산을 위해서는 처음에 밀접 결합 근사 등으로 "적당히" 파동 함수를 근사하고 1, 2, 3의 과정을 거치면 처음에 대입한 파동 함수보다 더 나은 파동 함수를 얻는다. 다시 이것을 초기 예상값으로 하여 재계산을 거듭한다. 실제에서는 적당히 (상당히 보수적으로) 이전 단계의 초기 예상값과 계산 결과값을 잘 섞어서 초기 예상값으로 사용한다. 즉 self-consistent 방법으로 풀이한다. 전자들이 돌아 다니는 분자들에서 전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빨리 돌아다니고 있는지 그 에너지를 구하려면 양자 역학적으로 묘사해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 이해하고 계산하려고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양자 역학 계산을 수십 개 수백 개 전자에 대해 하려 한다면(아주 단순한 분자인 부탄 가스 분자 2개만 있어도 전자 숫자가 백개에 이른다.) 그것은 너무나 긴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 중 하나는 전자 하나 하나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말고 전자 무더기를 한 덩어리로 따져 보는 것이다. 전자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는 덩어리가 많이 쏠려 있고, 전자가 덜 출몰하는 지역에는 덩어리가 조금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도넛의 모양으로 전자들을 그려본다. 전자 하나 하나를 따지지 않고, 도넛으로 된 전자 덩어리만 생각해도 에너지를 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도넛으로 된 전자 덩어리의 모양과 에너지와의 관계를 표시하는 수식이 KS 방정식이다. 이 전자 덩어리의 모양을 구하는 방법인 Hartree-Fock의 자체-일관성 장(SCF; self-consistent field) 방법은 다음과 같다. 아무렇게 도넛을 만들어 놓고 방정식(전자들이 만족해야 할 조건식)을 얼마나 만족시키는지 계산해 본다. 실제 전자의 식과 많이 다른 값이 나온다면 도넛의 어떤 부분을 수정하여 모양을 조금씩 바꾼다. 잘 바꾸었다면, 이전보다는 더 실제와 근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건식이 상당히 잘 맞을 때까지 바꾸어 나가면, 우리가 원하는 전자 덩어리 모양과 제법 비슷한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밀도범함수론에서 가장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교환 에너지(exchange energy)를 구하는 범함수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왼쪽에 있는 전자 하나가 발에 땀나게 오른쪽으로 뛰어가고, 오른쪽에 있는 전자 하나가 열심히 뛰어서 왼쪽으로 가서 두 전자가 자리를 살짝 바꾼 경우를 따져 보자. 두 전자는 열심히 뛰어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두 전자가 정확히 자리를 바꾸기만 한 경우에는, 전자가 분명히 많이 움직여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고, 이것은 양자 역학에서는 전자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과 다를바 없게(!) 평가되어야 한다. 즉 이런 "자리만 바꾸기"가 많이 일어난다면, 움직였다고 한들 움직이지 않은 것이나 다를바 없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실제 에너지는 더 낮아져야만 한다. (양자 역학적으로, 그런 것은 움직인 것이 아니다.) 밀도범함수 이론은 전자들이 선풍기의 날개나 헬리콥터 날개처럼 매우 빨리 돌아다녀서 멀리서 보면 마치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전자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끼리 자리만 바꾼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치는 것을 따로 계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자리만 바꾼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를 도넛의 모양을 대강 보고 짐작해 주어야 하며, 이 짐작을 하는 방법이 바로, "교환 에너지 범함수"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코릴레이션(상관성) 에너지 라는 것도 동시에 고려해 주므로, 교환 코릴레이션(상관성) (exchange correlation) 범함수라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좋은 교환 코릴레이션 범함수를 구하는 방법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대강 만들어내는 것이고, 기존의 방법들에서 나온 결과를 참조시켜 작동하도록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B3LYP라는 범함수가 대체로 모든 경우에 큰 오류가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 보는 게 좋다는 말이 있듯이 밀도범함수이론을 컴퓨터에서 돌려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혼자서 또는 팀을 짜서 구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남이 짜 놓은 것을 가져다가 잘 쓰면 된다. 후자의 경우를 먼저 살펴 보면 ElectronicStructure.org/software 에 자유 소프트웨어를 구할 수 있는 다수의 링크가 있다. (화학쪽 소프트웨어로는 NWChem 과 GAMESS 가 있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기본적으로 운영 체제는 유닉스나 리눅스로 가정하고 있고, 다른 많은 과학 소프트웨어 배포본이 그렇듯이 포트란 소스가 있고 이걸 컴파일해서 쓰는 형태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상용 포트란 컴파일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BLAS나 LAPACK 같은 수학 라이브러리가 필요할텐데 netlib 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컴파일된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서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면 슈퍼 컴퓨터나 리눅스 클러스터가 필요하다. 이는 다란 메모리가 필요하고 따라서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N 순의 알고리즘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면 O(N^3)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스 코드를 수정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읽는 것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다음에 전자의 경우를 살펴 보겠다.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기저를 결정하는 일이다. (기저는 힐베르트 공간을 생성하는 완전한 세트이기 때문에 기저가 바뀌면 representation, 쉽게 말해서 수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흔히 쓰이는 기저집합은 평면파(plane wave)와 local orbital (가우시안을 사용한다 해서 가우시안-Gaussian-이라고 하는 유명한 소프트웨어가 있음.)가 있다. 그 다음 결정할 일은 all electron을 할 건지 pseudopotential을 쓸 것인지 또 교환상관 퍼텐셜은 어떤 것을 쓸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제 굵은 가지는 결정되었고 세부 사항으로 어떤 플랫폼에서 돌릴 것인지 어떤 수학 라이브러리를 쓸 것인지 결정하고 코드를 쓰면 되겠다. (숙련된 프로그래머라면 대략 몇 달 만에 겨우 돌아가는 코드를 짤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코드가 쓸만하게 될 때까지는 수년~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이소룡 이소룡(, 1940년 11월 27일 ~ 1973년 7월 20일), 영어명 브루스 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활동한 중국계 미국인 무술 배우이자 철학가, 무술가이며,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무술가이자 문화적 아이콘으로 평가된다. 그는 영화배우인 브랜든 리와 섀넌 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의 본명은 이진번()으로 생전 체격은 173cm, 62kg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하였으며 홍콩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홍콩과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는 기존 홍콩의 무술 영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제작한 영화의 특성과 분위기는 이후 홍콩뿐 아니라 세계의 무술계와 무술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소룡은 특히 그가 제작한 영화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자존심과 민족주의로 인해 홍콩 내에서 우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1940년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의 중국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하이취안(李海泉,이해천)은 중국인이었으며, 신자였던 어머니 그레이스 호(何愛瑜,하애유)는 중국인과 독일계 백인의 혼혈인이다. 이소룡이 생후 3개월이었을 때 부모와 홍콩으로 돌아갔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무용을 떨치던 그의 스승인 엽문을 사사(師事)하여 영춘권을 배웠고, 공력권, 홍가권, 권투, 펜싱 등을 배웠다. 아울러 한국인 태권도 고수 이준구 사범과 교류하면서 태권도의 발차기를 배워 자신의 절권도를 정립하는데 이용하였다. 이소룡은 엽문의 추천으로 영춘권에 복싱을 배웠는데 이후 1959년에 격투기 대회를 출전 하게 된다.1.2라운드에서 실력자들을 5분만에 ko시킴으로 결승전 까지 가게 되었으나 결승전때 상대방의 발차기에 전신 마비가 된다.하지만 이후 격투 실력으로 영화 《그린 호넷》(1968년)에 캐스팅된다. 이소룡의 신변을 걱정하던 부모는 이소룡를 미국으로 보내 자신들의 오랜 친구와 지내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소룡은 단돈 $100을 지니고 미국으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지낸 후 이소룡은 시애틀로 옮겨 역시 아버지의 친구였던 루비 초우(Ruby Chow) 밑에서 일하게 된다. 1959년 이소룡은 시애틀에서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Edison Technical School)를 졸업했다. 그는 워싱턴 대학교 (University of Washington)에 진학하여 철학, 연극, 심리학 등을 공부한다.. 1964년에 결혼하게 되는 미래의 배우자 린다 에머리를 만난 것도 바로 워싱턴 대학에서다. 그는 린다 사이에 브랜든 리(1965년~1993년)와 섀넌 리(1969년~) 두 자녀를 두었다. 영화 배우가 되었던 브랜든 리는 1993년 영화 《크로우》를 촬영 도중 총기오발사고로 사망했으며, 섀넌 리는 1990년대에 몇몇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소룡이 출생했을 때 붙여진 광동식 이름은 진번(振藩)이었다. 그가 태어나자 메리 글러버 박사가 '브루스(Bruce)'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당시 그의 어머니는 영어 이름을 준비해 놓지 않은 상태여서 그 이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소룡의 영어 이름은 그가 라사이 칼리지(La Salle College)에 입학하기까지는 가족들 사이에서 불리지 않았다. 이소룡이 19살이던 1959년에 싸움에 휘말려, 상대방을 크게 다치게 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소룡의 아버지는 유명한 광둥 경극 배우였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생후 3개월에 《금문녀》라는 영화로 데뷔하였다.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스무 편의 영화에 출연한 상태였다.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인 1958년에서 1964년까지 그는 오직 무술만을 연마하며 영화계와는 떨어져 지낸다. 하지만 1964년 롱비치 가라데 토너먼트에서 이소룡이 보인 고도의 무술 시범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술가였던 윌리엄 도저(William Dozier)의 눈에 띄게 된다. 도지어는 곧 이소룡을 불러 오디션을 치르는데 그의 전광석화 같은 동작은 제작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결국 TV 시리즈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에서 밴 윌리엄스(Van Williams)와 더불어 가토(Kato) 역을 맡게 된다. 이 시리즈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 한 시즌만을 상영하고 종료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처음으로 미국 영화《말로우》("Marlowe")에 출연하였다. 그는 폭력배로 출연하여 사립 탐정인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말로우를 걷어 차려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역을 연기했다. 1971년 이소룡은 TV 드라마 《롱스트리트》("Longstreet")에 4개의 에피소드에 걸쳐 무술 선생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후 이소룡은 자신의 아이디어로 《"The Warrior"》라는 시리즈를 제안하게 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소룡의 이 아이디어는 《쿵후》("Kung Fu")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워너 브러더스는 이소룡의 노력에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소림사 무술가의 역할은 무술가가 아닌 데이비드 캐러딘에게 주어진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인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작품은 미국 대중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상영물에서 자신의 조연적 역할에 만족하지 못한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가는데, 골든 하베스트 (Golden Harvest) 대표 추문회(鄒文懷; Raymond Chow)로부터 영화 출연 계약을 제시 받게 된다. 이소룡은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에서 첫 주연을 맡는데, 이 영화는 전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순식간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는다. 이후 그는 다시 두 개의 성공작을 찍게 되는데, 바로 《정무문》과 《맹룡과강》이 그것이다. 특히 《맹룡과강》에서는 그가 극작가, 감독, 주연, 그리고 무술 안무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의 시범을 통해 그는 가라데 챔피언이었던 척 노리스를 만났었다. 이 인연을 계기로 《맹룡과강》에서 로마, 콜로세움의 최후 결투 씬으로 그를 출연시키게 된다. 1973년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와 워너 브러더스사의 최초의 공동 제작 작품인 《용쟁호투》의 주연을 맡게 된다. 이 영화로 인해 이소룡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소룡은 이 때 알게 된 당시 엑스트라 배우인 청룽(성룡)을 후원해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촬영이 종료되고 몇 달 후, 그리고 불과 개봉 3주 전에 이소룡은 갑작스레 사망하고 만다. 《용쟁호투》는 그해 최고 수입을 올린 영화가 되었고 이소룡이 무술의 전설로 남기게 된다. 《용쟁호투》의 제작비는 1973년 당시 US$ 850,000였다.. 지금까지 《용쟁호투》는 전 세계에서 2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더군다나 《용쟁호투》라는 영화를 모티브로 해서 《더블 드래곤》이라는 비디오 게임도 만들어졌다. 《용쟁호투》의 감독인 로버트 클라우스(Robert Clouse)는 이소룡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려다 못다 끝낸 《사망유희》를 완성시키려 시도했다. 이소룡은 이미 《사망유희》를 위해 40분 이상의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로버트 클라우스는 1978년 새로운 줄거리와 캐스팅을 가지고 대역과 이소룡의 다른 영화 장면을 사용하여 완성시킨다. 하지만 이 짜깁기 영화는 이소룡이 찍은 40분 중 15분만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역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빠진 나머지 촬영분은 22년 후 발견되어 다큐멘터리 《""》에서 공개되었다. 196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롱비치에서 있었던 무술 시범을 관람하기 위해 이소룡이 나타났는데 그 곳에서 무술 시범을 하는 척 노리스를 만났다. 이소룡은 노리스의 무술 시범에 감탄하여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에 같이 출연하자는 제의를 했고 노리스는 이를 흔쾌히 응했다. 이 후 두사람은 절친이 되었으며 노리스는 이소룡의 영화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40년 생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잘 통했다. 때문에 영화를 촬영할 때 호흡을 맞추기도 매우 쉬웠다. 영화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은 많은 적들을 차례로 때려눕히게 되어 있었다. 당시 성룡은 엑스트라였으며 영화 용쟁호투가 액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턴트맨을 별로 사용하지 않아 엑스트라가 스턴트까지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성룡은 이소룡에게 맨 마지막으로 매를 맞고 쓰러지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소룡은 성룡을 잘못 때려 크게 다치게 했다. 너무나 미안해 했던 이소룡은 성룡에게 여러 번에 걸쳐 사과를 되풀이했다. 그 이후 이소룡은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성룡을 연기자로서 대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 일화로 성룡은 이소룡을 죽을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 중의 은인이라 회고했다. 이소룡의 죽음은 1970년 5월 10일의 사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 스튜디오에서 《용쟁호투》 더빙 작업 도중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 전신 발작과 뇌부종으로 그는 긴급히 홍콩 침례교회 병원 (Hong Kong Baptist Hostpital)에 실려가는데 의사들은 마니톨(Mannitol)을 투여하여 그를 살릴 수 있었다. 이 증상들은 이후 그가 사망한 날 다시 나타나게 된다. 1973년 7월 20일 홍콩, 이소룡은 제임스 본드였던 조지 라젠비 와의 저녁 약속을 앞두고 있었다. 이소룡은 그와 이후에 영화를 제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소룡의 배우자인 린다에 의하면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 제작자인 레이먼드 초우와 2시에 만나 《사망유희》 제작에 대해 의논하였다. 레이먼드 초우와 이소룡은 4시까지 함께 있다가, 이소룡의 친구이자 대만 여배우였던 베티 팅 페이(Betty Ting Pei)의 아파트로 운전하여 갔으며, 세 사람은 페이의 집에서 극본을 검토했다. 초우는 저녁 식사 약속을 위해 떠났다. 잠시 후, 이소룡은 두통을 호소했고, 팅 페이는 아스피린과 근이완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쿠아제식(Equagesic)이라는 진통제를 건네줬다. 오후 7시 30분 경, 이소룡은 잠이 들었다. 이소룡이 약속된 저녁 식사에 나타나지 않자, 초우는 팅 페이의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의사를 불러 10분간 소생을 시도한 후 실패하자 이소룡은 구급차에 실려 퀸 엘리자베스 병원(Queen Elizabeth Hospital)로 후송된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외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뇌는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1400에서 1575그램으로). 이소룡은 겨우 향년 33세였다. 부검 결과 체내에 이쿠아제식과 미량의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었다. 2005년 10월 15일 인터뷰에서 초우는 이소룡이 Equagesic의 근육 이완제 - 진통제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성분인 - 에 예민 반응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소룡의 공식 사인은 '과실사(death by misadventure)'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소룡이 처음 쓰러졌을 때 그를 치료한 랭퍼드(Langford)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0만건 이상의 부검의 경력을 가진 R. D. 티어(R. D. Teare) 교수는 이소룡의 죽음 건에 배치된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대마 성분의 검출은 우연에 불과하며 그것이 이소룡의 죽음을 야기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결론은 성분에 대한 과민 반응에 의한 뇌부종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피터 우 박사(Dr. Peter Wu)의 초기 소견은 이소룡의 사인은 대마와 이쿠아제식 둘 다에 의해서라는 것이었지만, 이후 그는 대마에 의한 사망이라는 소견에는 무리가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결론적으로 이소룡의 사인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이소룡 사후 그의 아내 린다는 시애틀로 돌아와 레이크 뷰 공원묘지(Lakeview Cemetery) 276번에 안장했다.. 스티브 맥퀸, 척 노리스 등이 운구를 맡았다. 이소룡의 전설적인 위치, 젊은 나이에 괴이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의 사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삼합회에 의한 살해,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저주를 받았다는 저주론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저주론"은 20년후 그의 아들 브랜든 리 마저 28세의 나이에 영화 《크로우》 촬영 도중 총기오발사고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크로우는 그의 아버지 이소룡의 마지막 영화였던 《사망유희》와 마찬가지로 브랜든 리의 사후에 개봉되었고 컬트의 지위를 얻게 된다. 브랜든 리는 그의 아버지 곁에 묻히게 된다. 성룡, 홍금보 등과 함께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 소속 배우 중 하나인 그가 찍은 작품으로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이 있다. 《사망유희》는 제작 도중 이소룡이 사망하여 한국출신인 김태정을 대역으로 하여 완성되었다. 이소룡의 마지막 기획 작품은 후에 왕우가 타이틀롤을 맡은 《직도황룡(直搗黃龍;The Man from Hong Kong/ 한국개봉명: 스카이하이)》이다. 골든 하베스트와 호주의 합작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사망유희 제작 후 이소룡의 차기작으로 예정되었었다. 이소룡의 죽음으로 왕우가 대신 주연을 하였으며 제임스 본드 배우로 당시 유명했던 조지 레이전비가 출연한다. 미국의 연예 전문 잡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인터넷 판에서 보도한 '탁월한 액션 배우 25명'에서 11위를 차지했다. 이소룡의 근육은 극단적으로 싸움에 특화되어 있는 근육으로 보디빌더처럼 우람하지 않으면서도 근육의 밀도가 매우 높다. 깡마른 체격에 지방이 거의 없어서 몸이 극단적으로 단단했다. 나트륨 나트륨(, ) 또는 소듐(← 미국식: [soʊdiəm], 영국식: [səʊdiəm])은 알칼리 금속에 속하는 화학 원소로 기호는 Na(←)이고 원자 번호는 11, 원자량은 22.9898 g/mol이다. 자연상태로는 생성되지 않으며, 화합물로부터 추출이 가능하다. 독일어식 표기인 나트륨으로 불리다가 IUPAC 공식 표기인 소듐()을 따라서 대한화학회에서는 공식 명칭을 소듐으로 개정하되 당분간은 나트륨도 혼용 가능하도록 결정하였다. 2014년부터 대한화학회에서 나트륨과 소듐 복수 표준에서 소듐만 인정하기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국립국어원 지정 표준어는 나트륨이다. 문화어에서는 나트륨을 사용하다가 1970년경 나트리움으로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트륨"이란 이름은 이집트의 소다 광산이 있는 나트론(Natron)에서 유래했다. "소듐"이란 이름은 아라비아어의 소다(Soda)에서 유래하였으며 1807년에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가 수산화나트륨을 전기분해하여 발견하였다. 무르고 금속 광택이 있는 금속으로 노란 불꽃을 내며 탄다. 반응성이 강하여 공기중에 보관할 수 없고 좌측 그림과 같이 보관하여야 한다. 3주기 1족의 알칼리 금속으로 1개의 원자가 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가 양이온이 되기 쉽다. 지구 지각 내 원소 함량에서 6번째에 속하지만 강한 반응성으로 인하여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화학식으로 나타낼수 있으며, 홑원소 물질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장석이나 염화나트륨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세계 각지의 암염이나 소다회, 또는 바닷물에서 전기분해로 얻는다. 생명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성분인 소금(염화나트륨, NaCl)의 구성 요소로서 주로 바닷물 속에 용해되어 있으며 일부는 암염 등의 형태로 육지 및 지하에도 존재한다. 해수의 염류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탄산나트륨(NaCO)은 화합물의 한 종류로, 탄산과 수산화나트륨의 염이다. 유리에 주로 포함되어 있어 빛의 통과시, 자외선을 차단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NaOH(수산화나트륨, 가성소다), NaNO(질산 나트륨), NaS(황화 나트륨), NaSO(황산 나트륨) 등이 있다. 이들 나트륨 이온(Na)이 포함된 염들은 물에 잘 녹는다. 액체나 세포의 삼투압을 일정하게 보존하고, 나트륨 이온은 칼륨 이온과 함께 신경 내부에서 신호의 전달에 사용된다. 이러한 생리적인 메카니즘의 조절에 관여하는 세포내에서의 나트륨-칼륨 펌프는 물질대사에 매우 중요하다. 디지털 텔레비전 디지털 텔레비전(Digital Television, DTV)은 기존의 텔레비전에서 아날로그 신호를 사용했던 것에 반해, 디지털 신호를 이용하여 동영상과 소리를 방송 및 수신할 수 있는 방송 시스템을 말한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디지털 방식으로 압축되고 변조된 데이터를 이용하므로, 디지털 텔레비전용으로 설계된 텔레비전 수상기나 셋톱박스를 통해서만 시청할 수 있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기존의 텔레비전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채널이 차지하는 대역폭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멀티캐스팅(한 채널에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방송하는 기능), 전자 프로그램 가이드, 대화형 텔레비전 등의 특수한 서비스들도 가능하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아날로그 텔레비전보다 나은 수준의 화질과 음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디지털 텔레비전의 영상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이므로 아날로그 텔레비전이나 영화 필름에서 나타나지 않는 화질상의 문제점들을 개선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대역폭 및 (MPEG-2와 같은) 압축 알고리즘의 제한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지만, 16/35mm 필름과 같은 원본 영상과 세밀하게 비교해 보지 않는 이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정도는 아니다. 디지털 TV는 아날로그 TV와 같은 대역폭 (6 MHz 혹은 7 MHz) 에서 더 많은 채널을 수신하고 HD 급 방송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신호는 아날로그 신호가 가지고 있던 "고스트 현상" 이나 "스노우 노이즈", 그리고 오디오의 고정 노이즈와 같은 증상을 제거하여 깨끗한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신율이 낮은 곳에서는 MPEG 압축 방식에 의해 "블로킹" 과 같은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거나, 아날로그 TV에서는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시청이 가능했던 방송들을 전혀 시청할 수 없거나 하는 경우가 발생된다. 방송사에서 결정한 기술적인 표준에 정의된 철학과 오류 정정 수준에 따라 디지털 TV는 완벽하게 동작하거나 전혀 동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HD급 디지털 TV로의 전환 과정에서 화면의 가로세로비 형식을 4:3 에서 16:9 로 전환하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TV 화면의 형식이 영화나 사람의 시각에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기존의 화면에서는 "레터박스" 라고 하여 4:3 형식의 화면의 위아래에 검은 띠를 넣어서 화면의 가로세로비를 16:9 로 맞추었다. 디지털 지상파 텔레비전은 각개국에서 개발 단계에 있다. 디지털 텔레비전은 이미 가능한 대역폭 내에서 수많은 채널을 서비스하고 있는 위성파 텔레비전 시장에서 살아 남았다. 미국과 영국의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의 사업 모델은 케이블 TV와 비슷하다. 디지털 위성파 텔레비전 사업자들은 pay-TV 와 같이 많은 수의 채널들을 패키지로 묶어 서비스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성 방송은 지상파 방송에 비해 더 넓은 RF 대역폭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채널의 수와 고화질의 방송을 제공할 수 있다. 이미 기존의 아날로그 케이블 셋톱박스가 공급된 곳에서는 디지털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셋톱박스의 교체가 필요하다. 사용자 입장에서 주된 이점으로는 단순히 화질이 좋아진 것과 채널이 늘어난 것이지만, (케이블 사업자가 셋톱박스 하드웨어와 미들웨어 소프트웨어를 선택하는 것에 따라) 아날로그 방송에 비해 더 많은 기능이 추가될 수도 있다. 종종 부가 정보가 포함된 (일주일 단위의) TV 가이드를 보거나, 특정 프로그램을 예약한 뒤 시간을 알려 주거나, 부모가 아이들이 볼 방송의 등급을 제한하는 등의 기능이 포함되기도 한다. 케이블 사업자들은 또한 디지털로 방송되는 영상물을 DES 와 같은 방식으로 암호화하여 더 나은 등급 제한 기능을 제공하거나 불법적인 접근을 방지하기도 한다. 더 진보된 케이블 네트워크에서는 상호대화형 기술을 사용하여 디지털 TV 용 셋톱박스에서 사업자 측에게 사용자의 정보를 넘겨주는 양방향 데이터 통신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웹 형식의 상호대화형 서비스(VOD (Video-on-Demand), 게임, 투표 ...)를 제공할 수 있다. 모든 디지털 방송은 표준 해상도 텔레비전(SDTV)과 고해상도 텔레비전(HDTV) 화면을 전송할 수 있다. 초기의 SDTV 텔레비전 방송 표준은 아날로그였으며, 디지털 SDTV 텔레비전 방송은 아날로그 방송과의 호환성을 위해 그 구조를 사용한다. 디지털 위성 방송으로는 대한민국의 유일 유료 위성 방송사인 KT스카이라이프가 서비스를 하고 있다. H.264방식을 이용해 여러 개의 채널에서 HD급 화질로 방송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SD로 방송되고 있다. 난시청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무궁화 위성 3호와 무궁화 위성 5호의 무료수신일 경우 KBS1을 제외한 전 채널이 SD로 공급되고 있으며 일부 채널에 대한 HD전환은 현재 논의중 이긴 하나 결정된 바가 없다. 케이블 사업자도 OpenCable기술을 사용하여 디지털 케이블 방송을 하고 있다. 디지털 케이블 방송사업자로는 CJ헬로비전, (옛Qrix), HCN, 딜라이브 (구:C&M), CMB, 티브로드, 딜라이브 (구:GS)등이 있다. 이 역시도 소수의 채널을 HD로 방송하나 대다수의 채널은 SD로 방송된다. 참고로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2012년 12월 31일에 종료돼도 케이블의 아날로그 방송은 2015년부터 기존 아날로그 방식에서, 8VSB 방식의 디지털 대역으로 전환되었다. IPTV로는 KT의 올레 TV, SK브로드밴드의 B TV, LG유플러스의 U+ TV 사업자 방송들이 있으며 이들 모두 디지털로 방송 중이며 각 셋톱박스를 이용해 해상도를 정할 수 있다. (ATV: 480i, SDTV: 480p, HDTV: 720p, Full HDTV: 1080i를 권장한다.)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을 줄여서 '지데지'(地デジ)라고 부르는 일본에서는 2011년 7월 24일, 지상파아날로그TV방송이 완전 종료되고 ISDB방식의 지상파디지털TV방송 체제로 완전 전환되었다. 일본 최초의 디지털 TV 방송으로 기록된 1996년에 CS방송 스카이 퍼펙TV와 2000년에 BS 디지털 방송에 뒤이은 쾌거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일본은 1989년에 NHK가 BS방송을 활용한 아날로그 하이비전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미국나 유럽의 디지털 HD방송에게 시장을 선점당하는 시행착오를 경험한 바 있다. 먼저 1단계는 NHK가 BS 방송 중 일부를 활용하여 하루에 1시간 정도의 실험적인 하이비전 방송을 시도하였다. 2단계에는 NHK와 6개 민방이 연합하여, 하루에 8시간 동안 하이비전 프로그램을 제공하였고, 이후 17시간으로 1일 방송시간이 확대하였다. 3단계에는 NHK와 6개 민방이 중심이 되어 디지털 BS방송을 시작하였고, 2003년 12월부터 지상파 디지털 방송이 서비스를 개시하였지만, 프로그램의 경우 프라임 타임에 NHK는 90% 이상이 HD로 제작되었고, 민영 방송사들의 약 50%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2006년말까지 전국 디지털 TV 방송이 서비스를 완성하였으며, 그 뒤에 2011년 7월 24일에 디지털 TV 방송을 전환하였다. 단, 도호쿠 지방 3개 현(이와테현·미야기현·후쿠시마현 등)의 경우 지진 해일의 여파로, 아날로그 송출 중단 시기가 2012년 3월 31일로 순연되었다. 영국엔 세가지 형태의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이 있다.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스카이 UK(Sky UK)로 불리는 영국 Sky 방송이 제공하는 위성방송, 버진 미디어(Virgin Media; 예전의 텔레웨스트와 NTL)가 제공하는 디지털 케이블 방송, 프리뷰(Freeview)로 불리는 무료 공중파 지상파 방송서비스이다. 최초로 출범한 디지털 지상파 방송인 ONdigital (후엔 ITV Digital로 불림)은 실패하고 방송사는 파산했다. 2002년 프리뷰(Freeview)가 ITV Digital을 대체했다. 프리뷰는 동일한 DVB-T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오류 정정 수준을 크게 높여서 전 사업자를 파산으로 몰고간 수신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또한 유료 방송서비스를 기조로 하는 대신, 프리뷰는 기존의 5개 아날로그 무료 공중파와 새로운 20개 디지털 채널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모든 서비스는 SD급으로 전송되고 있다. 정부는 2010년까지 아날로그 방송을 중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9년 6월 12일부터 전국에서 소출력 방송사를 제외한 모든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되었으며 미국 국민들은 디지털 방송 수신기와 같은 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을 받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첫 번째로 디지털 전환을 완료한 국가로 기존의 아날로그 브라운관 텔레비전 보유자들의 대한 처우도 원만하게 해결되며 이러한 과정은 대한민국의 디지털 전환의 모델이기도 하다. 캐나다 방송통신위원회(CRTC)는 미국과 동일한 디지털 표준을 채택했으나,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 일자를 정하지 않고, 시장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2009년 9월 현재 캐나다 방송사들이 디지털 방송 송출을 확대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큰 도시들에서는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으나, 그 외에서는 디지털 방송이 되지 않는 이유는 가 바로 그 이유다. 미국 방송 대체란, 캐나다 방송국이 동시간대의 미국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재송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1년 8월 11일에 (극한 지역 제외)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끝낸다. 2009년 1월 현재 토론토에서는 아날로그로 방송하는 모든 방송사들(TV Ontario 제외, 하지만 디지털 방송이 예정됨)이 디지털로도 방송하고 있다. 밴쿠버에서는 거의 모든 방송사들이 디지털로 방송하고 있다. 그 외 몬트리올, 오타와 등에서는 CBC가 디지털로 방송하고 있다. 캘거리에서는 과 가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에드먼턴에서는 이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2009년 9월 현재 전체적으로 밴쿠버, 토론토, 캘거리에서만 대형 방송사들이 디지털 방송을 하고 있다. 또한 토론토, 밴쿠버와 같은 미국 국경과 가까운 도시에서는 미국에서 송출되는 디지털이나 아날로그 방송도 수신할 수 있다. 그리고 2012년 5월 31일까지 극한 지역과 모든 지역의 방송사들이 아날로그 방송 송출을 완전히 종료 후 완전 디지털화를 완료화였다. 모든 대도시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지역 방송국은 현재 아날로그 PAL G/K방식과 디지털 DVB-T 방식으로 동시송출하고 있다. SD급이 가장 일반적인 해상도이다. 법적으로 모든 방송은 100% SD급으로 송출되어야 하며, 이 중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은 HD 해상도로 동시 송출하여야 한다. 상업방송의 다채널 방송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예를 들어 스포츠 중계방송이 시간관계상 계속될 수 없으면, 부가채널로 중계되며, 원 채널은 정규방송을 내보낸다.)중지되면, 금지되어 있다. 스페셜 방송 서비스사(SBS)는 부가채널(월드 뉴스 채널)을 갖고 있으며, 호주 방송 회사(ABC)도 2003년까지 ABC 키즈와 Fly TV 채널을 갖고 있었다. 정보방송을 하기 위해선 방송사는 해당 허가를 받아야 한다. 2003년 12월 호주 최초의 디지털 전용 방송사가 탄생했다. 태스매니아 디지털 텔레비전국은 네트워크 텐의 태스매니아 지부로 시작되었다. 이 채널의 도입으로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은 여타지역과는 달리 호버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8년(이 시한은 재고될 것이다.)까지 모든 방송사가 디지털 방송만 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 아날로그 텔레비전 주파수는 다른 목적으로 쓰이도록 비워질 것이다. 2007년까지는 더 이상의 무료 공중파 방송은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시한은 2005년 재고될 예정이다. 현재,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은 아냘란코스키(Anjalankoski) 등의 모든 지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가시청권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바사(Vaasa) 지역의 방송국은 핀란드 방송 회사(YLE) 채널을 방송하고 있다. 또한 대도시에 위치한 다수의 케이블 회사가 기본방송과 유로방송을 디지털로 서비스하고 있다. YLE TV1, YLE TV2, MTV3, Neolonen으로 구성된 기본 채널에 더하여, 24시간 뉴스 채널, 스포츠 채널을 시청할 수 있다. 이 모든 채널을 무료다. 그러나 새로 생기는 채널 중에 유료채널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2007년 9월 1일, 아날로그 방송 송출은 중지되었다. 2003년 두 단계를 거쳐서 베를린과 그 주변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완전히 DVB-T 형식의 디지털 방송으로 바뀌었으며 2008년 11월 25일 디지털 전환이 완료되었다. 2000년대 초부터 독일의 30여개 이상의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위성신호를 아날로그와 디지털(DVB-S 방식)로 송출했다. 2003년에 디지털로만 송출하는 방송은 독일 유일의 유료방송인 프리미어(Premiere)였으며, 프리미어 방송은 너무 이르게 디지털 방송에 암호를 걸어 소유권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심각한 금전적 위기를 겪었다. 케이블 방송은 아직도 프리미어(DVB-C 방식)와 아날로그 밴드를 얻지 못한 몇 군소업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아날로그 형태이다. 이런 상황은 이전까지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도이체 텔레콤이 기반시설을 매우 천천히 매각하였으며, 매입사가 케이블 방송에 새로운 투자를 거의 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1999년 1999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살상무기(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大量破壞兵器,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국제 문제로 대두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통 북핵 문제(北核問題)라고 약칭한다. 넓은 범위에서 핵무기 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한 생화학 무기도 이 문제에 포함된다.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에 1985년에 가입했으나 완전한 사찰을 막아 핵개발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황장엽 조선노동당 전 비서는 "북한은 96년에 파키스탄과 협정을 맺고 우라늄235로 핵무기를 만드는 제조기술을 넘겨받은 뒤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면서 "북한은 1993년께 연료봉 1800개 중 절반을 재처리했다"고 말했다. 지하 핵실험 준비가 1993년 당시에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1992년 4월 24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방연구소의 겐나디 추프린 부소장은 시사주간지 모스크바 뉴스 최신호에 기고한 글에서, 최근 기밀해제된 KGB 보고서에서, 소련은 1990년대 초에 북한이 핵폭탄을 개발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이를 묵인해왔다고 한다. 황장엽은 1997년 망명 직후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조선노동당에서 이를 묵살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해,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음을 밝혔다. 1994년 7월 27일, 북한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북한을 탈북한 북한 정무원 교원 강명도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북한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북한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북한권력 3위인 강성산 정무원총리의 사위인 강명도씨는 김정일 체제에 대한 학자적인 반감이 귀순동기라고 밝혔다.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다, 북한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개~2개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 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클린턴은 "북한이 핵을 개발해 사용하려 한다면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다"라며 강력 경고했다. 1993년,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을 탈퇴할 것이라 공언하는데, 이를 1차 북핵 위기라고 부른다. 이 위기는 1994년 북미 간에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의 북한에 핵무기를 이용한 공격을 하지 않는 공식적인 평화 협정 을 체결하며,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핵발전소의 대체수단인 경수로 발전소 제공 하며, 핵발전소를 중지하는 조건으로 대체 에너지인 중유를 제공 한다는 조건의 제네바 합의로 잠정 해소 되었다. 그러나, 미국 공화당은 북한과의 합의는 공산국가와의 회의책이라며 반대하여,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 지원을 위한 자금 지원을 미국 의회 는 불허하였다. 제네바 합의의 핵심 이행 사항인 경수로 발전소 걸설 지연에 대해서 북한은 지속 항의를 하였다. 당시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낸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경수로 프로젝트가 마쳐 지기 전에 붕괴 될것을 예상하여, 북한의 정권이 붕괴전까지 핵 개발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하여, 북한과 합의를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미국이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지 않았지만, 북한의 원자로 가동을 8년 간을 중지할 수 있었으며, 2002년 영변 원자로 재가동과 다음 해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되고 2차 북핵 위기를 맞는다. 이후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에도 독자적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2006년 10월 9일 풍계리 핵 실험장에서의 핵 실험이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 지질조사국과 일본 지진 당국은 리히터 규모 4.2의 지진을 검출하여 북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7년 2월 13일 6자회담이 진행되어 '2.13합의'가 맺어졌다. 합의 주요 내용은 북한의 핵시설 폐쇄, 핵 불능화, 핵사찰 수용, 및 중유 100만톤 상당의 에너지 지원 등이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영변의 원자력 발전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13 합의사항은 이행 시한을 넘기고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북한은 여러차례 핵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명박 정부 시기,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이 진행될 당시 1차례, 박근혜 정부 시기,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인 2013년에 1차례, 이어서 2016년에 무려 2차례나 진행하였다. 특히, 2016년에는 수소탄 실험 성공 발표에 이어서, 관측하는 기관에 따라 20kt ~ 30Kt까지 추정되는 강력한 핵 실험을 진행하였다. 또한, 북한은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핵탄두를 탑재할 가능성을 내비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2015년 부터는 북한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SLBM)에 핵탄두가 탑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를 경제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 대미 수교 협상용으로 보는 시각, 또는 미국을 위협하여 한미동맹을 폐기하게 만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는 시각이 있다. 1992년 4월 2일,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 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방사능물질 전문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 러시아 해외정보국은 북한이 1992년에 옛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60개를 생산할 수 있는 56∼200 kg의 플루토늄을 밀반입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94년 8월 26일, 독일 수사당국이 지난 5월 플루토늄-239를 숨겨 갖고있다 붙잡힌 무기밀매상 아돌프 예클레에 대한 집중수사를 통해 북한과의 연계를 보여주는 위임장 등 관련 증거서류를 찾아냈다. 예클레는 북한으로부터 무기급 핵물질 구입을 위해 1억 달러까지 처리할 수 있는 전권 위임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1994년 현재, 플루토늄 1 kg 당 암시장 거래가가 25만∼30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다. 1억 달러면 플루토늄 400 kg을 살 수 있다. 1995년 북한의 플루토늄 밀반입 계획은 당시 북한 대성은행이 유럽의 한 은행계좌를 통해 독일의 중개상에게 보내는 5000만 달러 송금 명세서가 미국 정보당국에 확인됨으로써 밝혀졌다. 2005년 3월에 김명철이라는 조총련 출신의 사람이 북한 관계자가 80년대에 북한이 플루토늄을 300kg정도 보유하였다고 주장했으나, 그 말을 듣게 된 일시,장소,경위를 말해주지 않았고, 북한 관계자의 인적사항을 말해주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조총련 출신의 사람은 북한에서는 버림을 받고, 배척당하기 때문에, 근거없는 주장이다. 2017년 당시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50kg 정도로 밝혀졌다. 북한이 무기급 플루토늄 또는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 및 추후 예상되는 시설은 다음과 같다. 2013년 기준으로 서방의 전문가들이 고려하는 핵물질 생산시설은 위의 6기이다. 모두 완공되었을 경우, 북한은 매년 274 kg의 플루토늄과 80 kg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20kt급 원폭 1기를 생산하는데 드는 핵물질의 양은 플루토늄 3-6kg, 고농축 우라늄 5-16kg정도이다. 2014년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백서는 자체 생산한 플루토늄 40여 kg을 보유했다고 추정한다. 현재는 50kg으로 늘었다고 추정된다.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매년 플루토늄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론보도가 자주 바뀌었다. 초기에는 매우 대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하다가, 2016년에는 고작 5 kg을 생산할 수 있다는 보도의 흐름이다. 그러나 어떤 보도에서 핵전문가는, 1년간 원전을 가동해 폐연료봉 8천개를 재처리하면,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핵폭탄 하나는 분명히 만든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핵폭탄 하나에 5-7 kg 정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보도들의 5 kg 추출론은 이 보도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하여 추측한 "최대" 생산량이 아니라, 아무리 적어도 최소한 핵폭탄 한발은 만들지 않겠느냐는 전문가의 말을 와전하여, 최대한 5 kg 추출이 가능하다고 보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NRDC는 고급기술일 경우 플루토늄 1 kg이면 핵출력 1 kt인 핵분열탄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AGM-69 SRAM의 W69 핵탄두는 핵분열탄시 17 kt, 핵융합탄시 210 kt으로 12.35배 핵출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즉, 고급기술일 경우 플루토늄 1 kg이면 핵출력 1 kt인 핵분열탄을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해 핵출력 12.35 kt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위협감소국(DTRA)에서는, 북한이 10kt급 핵폭탄을 서울에 투하할 경우 최소 18만 명의 사망자와 16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1992년 4월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는 북한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핵미사일 분해 작업을 하는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방사능 물질을 kg당 5만 루블에 밀매하고 있으며, 밀수출업자들은 이를 해외에서 kg당 75만달러에 되판다. 고철을 실은 차량과 철도편으로 수송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최근 2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국경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간 플루토늄은 56kg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5년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은 지난 2003년에 4600여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20~24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8000개 재처리시 41kg라는 의미이다. 2006년 국정원은 북한이 폐연료봉 2500개를 재처리했을 경우 추출가능한 플루토늄 량이 25∼30㎏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2003년 합참 전략기획본부의 신재곤 전략분석과장(육군 대령)은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을 가동해 제네바 합의 이후 보관중인 폐연료봉 8000개(50t)를 재처리한다면 4∼5개월 안에 핵무기 3∼5개 제조분량의 고순도 플루토늄 24∼32kg을 추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16년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가 완전히 가동되면 해마다 6 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2016년 김동엽 경남대 교수는 "통상 5MW 원자로에 연료봉 8000개가 들어가니까 많이 처리하면 (매년) 플루토늄을 10 kg까지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6년 8월 22일, 미국 ISIS는 IAEA 보고서 등을 인용해 북한이 2016년 올해 재처리를 통해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을 5.5∼8㎏으로 추정했다. 2001년 8월 북한은 카자흐스탄 우스티 카메노고르스크의 우브 공장과 세미팔라틴스크의 아크좌일라우 공장 등지에서 제조한 고농축우라늄 32㎏을 수입했다. 1994년 이후 매년마다, 북한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로부터 핵물질과 핵기술을 수입했으며, 2002년까지 핵무기 10개 분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수입했다. 세계일보가 카자흐스탄 고위 관계자로부터 러시아어로 된 A4용지 4쪽의 극비 보고서를 단독 입수했으며,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에도 전달되었다. 당시에는 HEU 25 kg이 20 kt 핵폭탄 한발로 계산했기 때문에, HEU 250 kg으로 추정된다. 2017년 7월, 미국 국방정보국(DIA)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758 kg과 플루토늄 54 kg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 국방정보국(DIA) 국장은, 핵 무기를 500㎏ 이하로 소형화하여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에 핵 탄두를 탑재할 능력을 갖춰 미국 본토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리비아가 비핵화를 선언하면서, 중국어로 된 소형 핵탄두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북한은 이 중국산 소형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리비아 관리들은 미국 조사관들에게 국제 핵무기 암시장의 일원인 중개상으로부터 5,000만 달러를 주고 이 중국어로 된 소형 핵탄두 설계도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핵탄두 소형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소형 핵탄두를 만든 상태라는 의견도 있다. 핵 개발 초기 단계에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0mm 장사정포(사정거리 53km), FROG-5/7 지대지 로켓(사정거리 55-70km), SCUD-B/C형 미사일(사정거리 300-500km), 노동,대포동 미사일(사정거리 1300km 이상)과 각종 폭격기 등의 다양한 잠재적 핵 투발수단을 보유한 상태였다. 이에 더 나아가 수 차례의 인공위성 발사 시험을 통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KN-08(화성 12호)의 성능 개량을 추진해왔다. Mars-12는 2017 년 5 월 14 일 시험되었으며, 2111.5km의 정점을 가지며 787km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2017 년 9 월 15 일 시험에서 3700km의 비행 거리를 보였습니다. 잠수함은 발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극성 1 호는 2016 년 8 월 24 일 높은 각도로 550km 떨어진 곳에서 착륙했다. 2017년 7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 화성-14형 발사에 성공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날 시험 발사는 최대 고각발사 체제로 진행되었고, 미사일은 정점고도 2,802km를 찍고 933km를 비행하였다고 알려졌다.또 다른 미사일 시험은 2017 년 7 월 28 일에 수행되었다.이 미사일은 3700km의 최고점을 갖고 998km에 상륙했다. 이 북한의 미사일은 북아메리카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 그리고 2017년 11월 29일 새벽, 북한은 사정거리 13000km에 달하는 화성 15호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2018년 2월 9일, 북한은 건군절 열병식에서 화성 14호과 화성 15호 미사일을 등장시켜 미국에 대한 타격 위협능력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미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대규모의 화학 무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화학 무기 국가이며, . 살상 무기인 신경 작용제 VX 를 포함하여 최소한 2500 ~ 5000 톤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은 탄저균,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페스트, 브루셀라증, 야토병, 발진티푸스, 천연두, 유행성출혈열, 황열병, 보툴리눔 독소, 황우 독소 등 13종의 균체를 10여개 시설에서 최대 5,000톤 가량 보유하고 있다. 탄저균 100 kg을 대도시 상공 위로 저공비행하면서 살포하면 100~300만 명이 사망할 수 있으며, 이는 1메가톤(Mt)의 수소폭탄에 맞먹는 살상 규모이다. 북한은 1954년부터 미생물연구소를 설립운영하면서 탄저균, 천연두, 페스트, 콜레라, 보툴리늄 독소는 무기화가 완료되었으며, 실제 사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생물학무기는 탄저병과 천연두로 알려졌다. 미국 랜드연구소 브루스 베넷 박사는 "맑은 밤 30km 면적인 서울 지역에 탄저균 10kg을 살포했을 경우 최고 9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는 중국이 매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1991년 7월 북조선이 중국 감숙성 은천 미사일 기지에서 사정거리 800km의 중거리 다탄두(MIRV) 탄도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의 원조로 개발한 것으로서, 발사시설은 중국이 대여했다. 북조선은 1988년 이후 90명의 과학자를 은천 핵로켓기지에 파견, 중국으로 부터 핵실험 기술 및 미사일발사 기술을 배웠다. 미사일 실험을 성공한 것으로 보아 핵실험 기술 습득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해 230명의 육해공군 무기 전문가들을 중국 요동반도 다롄에 있는 다롄 해군 기지에 파견해 연수중이라고 일본 월간 센타쿠지가 1991년 12월 6일 보도했다. 1992년 4월 러시아 시사주간지 코메트산트는 북한이 CIS에서 핵개발에 사용되는 56kg의 플루토늄을 밀반출해갔다는 정보를 밀매업자로부터 직접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핵미사일 분해 작업을 하는 일부 러시아 장교들이 방사능 물질을 kg당 5만 루블에 밀매하고 있으며, 밀수출업자들은 이를 해외에서 kg당 75만달러에 되판다. 고철을 실은 차량과 철도편으로 수송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최근 2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국경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간 플루토늄은 56kg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조선은 그동안 리비아에서 발견된 중국 DF-2 핵미사일의 핵탄두 설계도를 입수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니 B. 스틸먼은 저서 The Nuclear Express에서, ‘중국의 친구들’이 북조선은 중국의 CHIC-4 설계도를 개량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고 소개하였다. 중국 DF-2 핵미사일의 CHIC-4 핵탄두는 폭발력 12 kT, 무게 1,500 kg이다. 신의주와 단둥은 압록강 철교로 이어져 있는데, 이 다리를 통해 트럭으로 수많은 미사일 부품, 핵무기 부품이 수출입 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리팡웨이는 1972년생 중국인 비밀무기상이다. FBI 홈페이지에 500만 달러의 현상수배범으로 올라와 있다. 미국은 중국에 리팡웨이 신병인도를 요청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 이란국방산업기구(DIO), 방산기업인 샤히드 헤마트 산업그룹(SHIG), 샤히드 바게리 산업그룹(SBIG)에 첨단 무기 부품을 수출했다. 단순한 무기중개상이 아니라 광섬유 자이로스코프 같은 첨단 미사일 부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다롄에 본사를 둔 림트(LIMMT)라는 회사가 12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이란에 최첨단 미사일 부품과 핵개발 부품을 판매중인데,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차관보가 "칸 박사 다음가는 거물"이라고 말한다.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1990년대 이란과 북한에 핵개발 부품을 판매했다. 리팡웨이는 이란에만 최첨단 미사일 부품과 핵개발 부품을 판매하고 있어서,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상당히 의심받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북한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은 2012년 6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북한의 불법 화물이 중국 다롄항으로 운반돼 다른 배에 옮겨 실린 뒤 이란으로 이동한다고 지적했다. 다롄은 리팡웨이의 본거지이다. 리팡웨이의 조부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해방군 대령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고위 장교의 자손들이 계속 관련 공직에 채용되는게 전세계의 일반적인 관행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리팡웨이가 중국 국가안전부의 비밀요원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런 리팡웨이의 장기간의 대규모 무기 밀매와, 미국 정부의 신병인도 요청 거부 등은, 중국 정부가 이란과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 지원과 관련되있다는 의심을 하기에 가능한 정황 증거들로 여겨진다. 북한이 무수단 미사일 19발을 다렌항에서 이란 화물선으로 환적하는 방식으로, 이란에 수출했다. 2018년 5월, 북미 정상회담 직전에, 김정은이 다롄을 방문,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은이 리팡웨이를 직접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무기밀매 계약을 하러 갔다는 것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2017년 9월 9일, 독일 앙겔라 메르켈 수상은 북한 핵문제 해결에 이란식의 타결을 제안하며 유럽의 국가중 독일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헨리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2017년 10월 10일 백악관에서 중국과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책을 논의하였으며, 제임스 메티스 미국 국방장관과 항공모함 준비 상태 확인과 휴전선 인근의 서울 시민의 인명살상을 최소화 하는 군사적 옵션도 논의하였다. 핵확산방지조약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核武器-非擴散-關-條約,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약칭 핵확산방지조약(核擴散防止條約, Non-Proliferation Treaty - NPT, (核武器 傳播 防止 條約))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핵무기를 갖는 것과 핵무기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약으로, 핵확산 금지 조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66년 후반부터 미·소의 타협이 진전되어 1967년 초에는 미·소 간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소 초안의 심의를 맡았던 제네바 군축위원회에서는 비핵보유국이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문제점으로 핵의 평화적 이용도 금지된다는 것, 핵보유국의 핵군축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내정간섭 수준이라는 것, 비핵보유국은 아무런 안전보장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기한이 너무 길다는 것 등을 지적하였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비핵보유국가의 논쟁은 1968년 6월 19일 미, 영, 소 3국이 '적극적 안전보장'을 유엔안보리에 제출, 발표함으로써 NPT의 구성이 완료가 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약자인 이들 비핵보유국에게 조약을 강요한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1969년 6월 12일 유엔 총회는 95:4, 기권 13으로 이 조약의 지지결의를 채택하였다. 핵무기 보유국인 서명국 전부와 나머지 40개국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이 조약의 발효는 미·소의 비준서 기탁이 끝난 1970년 3월 5일 이루어졌다. 2010년 6월 현재 가맹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핵보유국을 비롯한 189개국이다. 조약은 매 5년마다 핵확산금지조약의 평가회의를 통해 재검토된다. 본디, 핵 확산 금지 조약은 25년 기한이었으나 1995년 5월 11일, 뉴욕에서의 평가회의에서 서명국이 합의하여 조약을 조건없이 무기한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NPT는 서문과 1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1. 핵의 비확산 2. 핵무기 군비 축소 3. 핵 기술의 평화적 사용 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NPT의 조약의 목적은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의 핵 보유를 막고, 핵 보유국 내에서는 핵무기 증가, 핵무기 기술발전, 핵실험 등을 방지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진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1975년 4월 23일 86번째 정식 비준국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5년 12월 12일에 가입을 했으나, 1993년 3월 12일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규약에 따라 탈퇴 선언 발효에 필요한 3개월이 지나기 직전인 1993년 6월 11일 조미공동성명에 따라 탈퇴를 일방적으로 유보하였다. 이후 2차 북핵위기가 가열되던 2003년 1월 10일에 유보하였던 탈퇴 선언을 재발효하여 NPT에서 탈퇴하였다. NPT는 조약당사국을 핵국가와 비핵국가로 구분하며, 비핵국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를 제조, 획득, 관리하거나 이양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는 반면, 핵국가에 대해서는 핵무기 이양이나 개발지원만을 금지할 뿐이다. 핵군축에 관한 조치나 조약에 대해서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며, 핵확산금지나 핵무기의 완전한 부재도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NPT는 핵보유 국가가 비핵국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한 정책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불평등조약이라는 것은 모든 가입국에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것은 어떤 경우에든 핵확산을 막음으로써 인류와 지구의 공멸을 피해야 한다는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을 이용해 핵 강대국들이 억지로 조약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핵국가들 사이에서는 핵보유국들이 핵무기 감축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잠재되어 있다. 게다가 조약의 비당사국들은 오히려 NPT의 틈새를 이용하여 핵국가와 비핵국가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해왔으며 핵개발에 앞장서 왔다. 인도와 파키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어떠한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핵실험을 하여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이스라엘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이란, 태국, 브라질, 독일 등은 핵개발 의혹을 받고 있다. NPT는 핵국가와 비핵국가 간의 차별적 구도 위에 세워진 조약이다. 핵확산을 막기 위해 비핵국가들은 핵무기 개발이나 획득이 절대 금지되고 안전조치제도에 의한 사찰을 받아야 하는 반면, 핵국가들은 단지 점진적인 핵무기 감축에 노력하는 것만이 요구되고 있다. 대다수 비핵국가들은 이 조약에서 요구하는 대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평화적 핵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으나 핵국가들은 안전조치라는 명목으로 비핵국가들의 모든 연구 활동을 감시하는 한편, 자국들이 보유한 핵 무기의 감축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조약의 제 10조 1항을 보면, '각 당사국은 당사국의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지상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결정하는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각 당사국은 동 탈퇴 통고를 3개월 전에 모든 조약 당사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행한다. 동 통고에는 동 국가의 지상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으로 그 국가가 간주하는 비상사태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가입돼 있으나 핵보유국인 프랑스와 중국은 미·소 위주의 성격에 반발해 최초에는 가입하지 않았다가 1992년이 돼서야 가입했으며,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쿠바 등이 미가입국으로 남아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93년 3월과 2003년 1월 탈퇴를 선언하였다. 국제 원자력 기구 (IAEA)는 이 조약에 가입된 비핵무장 국가만을 대상으로 원자력시설 감시를 정기 및 수시로 실시하고 있다. 분류학 분류학(分類學, ) 또는 생물 분류학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물의 계통과 종속을 특정 기준에 따라 나누어 정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분류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크게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오늘날 알려지고 남겨진 문헌을 근거로 할 때 생물 분류학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의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둘로 나누기 방법"(Dihairesis)을 처음으로 동물의 분류에 사용하였는데 이를테면 동물을 온혈 - 냉혈동물로 나누고 여기서 온혈동물을 다시 깃털을 가진 동물과 깃털이 없는 동물 등으로 나누어 동물학을 미흡하나마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이와 같은 분류 방법을 식물계에 확장 응용하였으며, 이 분류방법은 그가 이끄는 페리파테토스학파에 의해 계속 연구 발전되었다. 약 2300년 전에 세워진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놀랍게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쓰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생물분류법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에 의해서 비로소 커다란 혁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몇몇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린네에 의해 체계화되고 정의된 분류법을 바탕으로 오늘날 국제 학술상 통일적으로 쓰이고 있는 생물분류법이 정립되었다. 린네가 착안한 분류법의 핵심은 생물의 종과 속을 구분함과 더불어 이들의 소속관계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데에 있으며, 형식상 다음과 같은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임베디드 오픈타입 임베디드 오픈타입(Embedded OpenType, EOT) 글꼴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웹 페이지에 임베디드 글꼴로 사용할 목적으로 설계한 오픈타입 글꼴의 축소형이다. 확장자는 ".eot"이다. 웹 임베디드 폰트 툴(Web Embedded Fonts Tool, WEFT)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동적 웹 글꼴 유틸리티이다. WEFT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웹 페이지와 연결된 동적 글꼴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대부분의 글꼴을 WEFT를 사용해서 첨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글꼴들은 디자이너에 의해서 첨부할 수 없음으로 디자인되기도 한다. 또한 문제가 있는 글꼴들은 사용할 수 없다. 비영어권 웹 사이트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술이고, 한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 익스플로러 이외의 브라우저를 사용하면 글꼴을 볼 수 없다. 수영 수영(水泳)은 팔다리를 움직여 수면 또는 수중을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헤엄()이라고도 한다. 스포츠 경기 종목뿐만 아니라 물놀이나 다이빙 등의 행위를 총칭하는 말로서 흔히 사용된다. 수영의 목적은 레크리에이션, 건강, 경영, 직업(군사, 프로스포츠), 여행 등이 있다. 고대 로마 고대 로마(古代 - , , , )는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다. 고대 로마의 문화, 법, 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법,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였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뤘다. 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기원전 272년 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150여 년 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씨를 뿌리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된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라틴어 문학 등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로마 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까지,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현재 미국 면적의 2/3에 달하고 인구도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안되는 정도로 추산된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 동로마로 분할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서기 5세기 경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타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발전했으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다.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 족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인도-유럽어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분명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손으로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거의 대부분 비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기원전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에트루리아가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기원전 509~507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 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지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농장이 발달했다.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2세기 말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또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기원전 91~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가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기원전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 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을 가장했다. 이때의 통치체제를 원수정이라 하며(사실상 제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제1의 시민)라 칭한다(이렇게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을 거부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때문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본격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었고,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사후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거쳐 기원후 68년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1년간 로마는 내전상태에 돌입하면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즉위한다. 후에 시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 입성하여 비텔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대를 개창한다.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AD 69 - AD 96)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이후에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콤모두스)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누스 재위시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만km²에 이르렀다. 트라야누스 사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을 순찰하면서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데 힘쓴다.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황제시대)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사두 체제를 도입했다.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 4세기가 넘도록 서부 지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 4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고트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 401년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 시를 약탈했다. 반달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476년 9월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 비잔티움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잠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비잔티움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비잔티움은 또한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8세기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세기 초에는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기원후 1000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 그러나 이 정복 이후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년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여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한다. 수십년이 흘러 파견된 제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제국내의 물품을 약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잠시동안 분열되어 몇몇 후계 국가들(니케아 제국, 라틴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공국)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케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은 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아무도 제국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 수도 로마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이는 19세기에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먹는다) 최대 추정치는 140만, 최소 추정치는 45만 명이다. 로마의 공공 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성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 바 있다)로 시끄러웠다.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 20% 정도가 도심지에 살았으며(로마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전체로는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25–40%이다), 1만 명 이상이 군사 정착촌에 거주하여 전근대 기준으로 매우 높은 도시화율을 보였다. 대부분의 도심지에는 포룸과 신전과 비슷한 양식의 더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로마 사회는 대단히 위계적이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다. 최하층은 노예(servi), 그 위로는 피해방인(해방노예, liberti), 그리고 위에는 자유 시민(cives)이 있었다. 자유 시민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로마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공화정 시대에 이 구분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는데,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져 정계에 진출했으며, 귀족 계급이 몰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귀족(nobilis, 新貴族)으로 인정받았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키케로는 이런 유형의 신인(新人, novus homo)으로 이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혈통 귀족인 경우 지속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으며, 여러 종교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자는 공화정 말기까지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계층 구분은 원래 군역 할당에 기반을 두었는데, 감찰관이 정기적으로 재산에 따라 각 시민을 특정 계층으로 분류했다. 가장 부유한 집단은 원로원 계급으로, 정계와 군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기사 계급(equites)으로 원래 이들은 군마(軍馬)를 부담할 수 있는 집단을 일컬었으며, 나중에는 유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하위 계급은 원래 군사 장비 구입 수준에 따라 정해졌으며, 최하로는 군에 입대시킬 아들외에는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proletarii,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이 말에 뿌리를 두고 있음)가 있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전에 이들은 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부나 사회의 인식 면에서 피해방인보다 약간 높은 집단으로 정도로 기록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투표권의 비중은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시민들은 선거 지역구격인 "트리부스(tribus)"에 등록되어 있었다. 부유한 계층의 트리부스는 재산 수준이 낮은 트리부스보다 인원 수가 적었으며, 무산자 계층 전체에는 트리부스가 겨우 하나밖에 할당되지 않았다. 투표는 계급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전체 트리부스의 과반에 이르면 투표가 종결되었으므로, 가난한 계급은 아예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는 일부 동맹국에는 라티움인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이 권리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외국인(peregrini)의 중간 수준의 신분을 의미했으며 로마법이 이 지위를 성문적으로 보장했고, 이들 나라의 최고 정무관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라틴인의 권리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주된 구분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권"(cum suffragio, 로마의 트리부스에 등록되어 트리부스 민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와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sine suffragio, 로마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은 기원전 91~88년의 동맹국 전쟁 이후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기원후 212년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제국내의 모든 자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은 남성 배우자와 어느 정도 동등한 기본권이 있었으나,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투표를 하거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가구)였다. 가족의 개념에는 가부장(pater familias)과 아내, 자녀, 다른 친척이 포함되었다. 상류층에서는 노예와 하인도 가족의 일부를 이루었다. 가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절대권(patria potestas, 가부장권)을 행사했다. 가부장은 결혼(보통 돈 때문에)과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손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생사 여탈권까지 있었다(그러나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이 생사여탈권이 금지된다). 가부장권은 성인 아들과 그 가족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그 아들은 가부장으로 인정받지도, 자신의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로마 역사 초기에 딸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부장 수권(手權, manus)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이런 관습은 낡은 것이 되어, 여성이 친정을 자신의 진정한 가족으로 계속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 계통을 기준으로 혈통을 인정했으므로, 모든 자녀는 남편의 가족에 속했다. 서로 혈연관계가 있는 여러 가족의 집단을 씨족(gens)라고 했다. 가족은 혈통이나 양자 입적으로 구성되었으나 정치적ㆍ경제적 연대이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시대에 일부 유력 가문(gentes maiores)은 정계를 지배했다. 고대 로마에서 결혼은 특히 상류층 사이에서는 낭만적인 결합이기보다는 경제적·정치적 결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가부장은 보통 딸이 12살에서 14살 사이 나이일때 사위를 구했다. 신랑은 대개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상류층에서는 여자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 반해, 하류층 여성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한다.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paedagogi, 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이다)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이 시대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젊은이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ㆍ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회 생활을 다양하게 익혔다. 귀족 자제는 16세 나이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했다(이런 관습은 제정 시대에도 일부 귀족 가문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다고 한다.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의 사립 학교(ludus)로 보냈다. 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교사(litterator 또는 magister ludi)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론 그리스어까지 가르쳤다. 12살부터 학생은 중등 학교에 가서 교사(grammaticus)에게서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배웠다. 16세 나이가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갔다(이곳 교사(rhetor)는 대개 그리스인 출신이었다). 이 정도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의 법을 암기해야 했다.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원래 로마는 각 부족에서 서로 돌아가며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권의 정확한 속성은 확실하지 않다.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있는 상징은 왕이었다. 다만 군사 분야에서는 왕은 절대적인 명령권(imperium)을 행사했다. 또 국가 종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 원로원은 왕을 위한 자문 기구였으며, 쿠리아회는 임금이 입안한 법을 정하고 비준할 수 있는 민회였다. 공화정기의 신분 투쟁으로 로마는 로마 특유의 민주정과 과두정이 혼합되었다. "의 어원이 된 "는 '공공의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로마법은 전통적으로 민회에서만 표결로 투표할 수 있었다.(트리부스회) 마찬가지로 공직 출마자도 인민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하는 과두적인 정치 기구였다. 공화정에서 원로원에는 강력한 권위(auctoritas)가 있었으나 기능상 자문 기구이므로 입법권은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원로원의 집단적인 의지에 맞서기는 힘들었다. 원로원 의원은 감찰관이 명문 귀족 중에서 임명했는데, 감찰관은 "부도덕한" 행실을 한 의원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가령 뇌물을 받는다거나 혹은 소 카토가 감찰관이던 시절에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와 포옹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독재관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에는 엄격한 관료제가 없었으며, 세금도 징세 청부를 통해 거두었다. 재무관, 조영관, 혹은 장관(praefectus) 등 정무관은 본인 돈으로 공무를 처리했다. 시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무관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정무관과 권력을 분할하도록 하였다. 가령 평상시에는 최고 권력은 집정관 두 사람이 함께 보유했다. 비상시에는 임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행정 체제는 필요할 때마다 수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로마가 크게 팽창하면서 공화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정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정 초기는 정부는 공화정의 형태를 가장하였다. 로마 황제는 그저 "제1시민"(priceps)일 뿐이었으며, 원로원은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점차 전제 권력으로 발전했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시대의 행정 체제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공화정에는 원로원 외에 영속적인 행정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최고위 행정가와 원로원 의원, 자신의 친구, 전문 법률가 등을 모아 조언을 구하였으며, 원로원 의원, 기사, 피해방인, 심지어 노예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기용하여 곡물, 수도, 치안, 법, 재정 등 일종의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 고대 로마의 법리와 사법은 12표법(기원전 449년)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대전으로 이어진다. 로마법은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존속했으며, 서유럽 법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볼 때 로마법은 17세기 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적용되었다. 고대 로마법의 주된 구분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된대로 시민법(Ius Civile), 만민법(Ius Gentium), 자연법(Ius Naturale)이다. 시민법은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은 시민들의 송사에 대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만민법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에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 외국 법무관(Praetor Peregrinus)은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의 송사에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법(Ius Naturale)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법을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이었다. 그러던 것이 국가 로마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원제로 바뀌었고(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마침 고도성장기의 로마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실업자의 구제책으로 환영받았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뀌면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엄청나게 커져 있던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던 방식을 바꿔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국경 바깥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일곱 언덕이 자리잡은 로마 시는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포룸, 판테온 등 아치를 활용한 장대한 건물이 많았다. 분수에서는 수백 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운반되어 온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극장, 체육관, 그리고 도서관과 가게, 시장, 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지배 영역 널리 전원 별장(villa)와 같은 가옥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수도 로마 시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하층 평민이나 중류 기사 계급은 도심지의 아파트(insulae)에 살았다. 이런 곳은 상류층 지주들이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기도 했는데, 콜레기움(collegium)이나 선술집(taberna)이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료 곡물 배급을 받으며, 검투사 경기를 즐겼으며, 상류 귀족의 피호민으로 필요할 때 도와주고 지켜주는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며 문법상 낱말 배열이 상당히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나왔다. 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부터 쓰인 매우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로 고전 라틴어와는 문법과 어휘가 다르며 심지어는 발음까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주요 언어였지만, 로마인이 공부한 대부분의 문학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교양있는 상류층은 그리스어도 구사했다. 또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후대 비잔티움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어가 라틴어 대신 제1언어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은 뒤 그리스어는 비잔티움 제국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도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가 여러 지역에서 방언으로 갈라져, 수많은 로망스어로 발전하였다. 초기 로마 종교는 최소한 신에 대해서는 글로 쓰여진 이야기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념 체계라기보다는 숭배의례이며 의식(儀式)에 가까웠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의식을 통해 신을 불러내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보답을 약속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그리스 신화와 달리 로마의 신은 인격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 경계, 꽃, 곡물 등에 서린 정령(numen)을 숭배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나 장소, 사물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고 믿었다. 공화정 시대에 로마 종교는 사제직을 갖춘 엄격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사제들은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다.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제문을 보관하고 종교 의식을 감독하였으며, 가장 높은 성직자는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국가 종교의 수장이었다. 사제(flamen)는 여러 신의 의식을 치렀으며, 복점관(augur)은 점을 쳤다.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은 왕이 축출된 뒤 왕 대신 종교 권한을 얻었다. 그리스 문화를 점점 접하게 되면서 옛 로마의 신은 점차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되었다 그리하여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또 로마의 신은 각자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이어받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정복당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외국신을 모시는 신전 옆에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이 있는 경우도 생겼다.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기원후 64년 네로 시대에 로마 대화재의 주범으로 그리스도 교도를 수색하면서 잔인한 고문과 태형을 가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기독교 박해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기원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으로 제국 내에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의 영향이 보이며, 남아있는 작품은 대개 시골 별장의 천장과 벽을 꾸미는 프레스코화이며, 라틴 문학 이야기를 다룬 나무나 상아 등에 그린 그림도 있다. 폼페이에서 로마의 그림 몇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예술사가들은 로마의 회화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 로마 회화의 첫 번째 양식은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전 1세기 초중반까지 유행했다. 이 양식은 주로 대리석이나 쌓은 돌을 모방한 것으로,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한 것도 있다. 두 번째 양식은 기원전 1세기 초로, 건축물이나 풍경을 3차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세 번째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에 있었으며, 이전의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단순한 장식을 선호했다. 작은 건물 모습, 풍경, 추상적인 디자인을 단색 배경 가운데에 놓았다. 네 번째 양식은 기원후 1세기에 시작했는데, 신화의 장면을 묘사하며, 건축물 모습이나 추상적인 문양도 남아 있다. 젊고 고전적인 비례를 쓰던 시기에 흉상 조각은 나중에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으로 발전했다. 안토니누스 황조와 세베루스 황조 시대에 더욱 화려해진 머리와 수염이 유행하였다. 부조 조각도 발전했는데, 보통 로마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라틴 문학은 그 기원부터 그리스 작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존하는 몇몇 초기 작품을 보면 초기 로마의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 서사시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공화정기 로마가 팽창하면서 저자들은 시, 희극, 역사, 비극도 쓰게 되었다. 폼페이와 헤라클라네움에서 찾은 낙서, 유곽, 회화, 조각을 보면 로마 사람들은 대단히 성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음악은 주로 그리스의 음악에서 나왔으며, 로마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추수나 베짜기, 결혼식이나 장례식, 사랑이나 풍자 등 일상 생활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노래가 있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때 음악이 연주되곤 하였다. 로마 군대에서는 투바(tuba, 긴 트럼펫)나 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비슷하다)같은 악기를 써서 여러가지 명령을 전달했으며, 부키나(bucina, 호른이나 트럼펫으로 추정)나 리투스(lituus) 는 의전 행사에 쓰였다. 투바와 코르누를 비롯하여 물 오르간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막간에 쓰여 전차 경주와 검투의 흥분을 고조하였으며, 극장에서도 물 오르간과 티비아이(tibiae, 로마식 아울로스에 해당하는 더블 파이프)이 쓰였다. 무언극도 로마의 인기있는 오락이었으며, 합창, 기악, 무용과 함께 정기적으로 협연하였다. 제사나 축제 음악 등 종교 의식에도 대부분 음악을 이용하였는데, 희생 의식에는 도살되는 동물의 울부짖음을 숨기기 위하여 티비아이를, 주신(酒神) 바쿠스 제의에는 심벌즈와 탬버린을 썼으며, 여러 의식에서 방울을 쓰거나 성가를 불렀다. 고대 저술가들은 유명한 대연주가, 큰 합창단, 오케스트라 및 웅대한 음악 축제와 경연 대회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로마의 직업 음악가들은 협회를 만들어 공적인 행사와 사적인 연회에 연주자를 보냈으며, 인기있는 연주자에게 엄청난 연주비가 지불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여러 황제들이 음악을 지원하고 육성하였는데, 심지어 네로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자 하였으며 경연 대회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어떤 음악사가는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 쓰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음악은 오락 및 교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키케로나 퀸틸리아누스와 같은 저술가들은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음악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3~4세기에 걸쳐 제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이전의 큰 규모의 음악 활동은 중단되었다. 현재 고대 로마의 음악에 대해 그리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여러 그림, 일부 악기, 수천 건의 문헌이 남아있지만, 로마 시대의 라틴어 악보는 남아있지 않다. 음악사가들은 로마의 음악가가 음악 연주나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로마의 젊은이는 뛰기, 레슬링, 권투, 경주 등 여러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 시골에서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다.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경기장에 물을 채워 가상 해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가지 행사가 많았다. 이 경기장은 38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므로, 로마 시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대경기장의 경주로 한가운데에는 각각 일곱 개의 커다란 달걀과 일곱 개의 돌고래가 있는 신전이 둘 있었는데, 선수가 한 바퀴 돌때마다 일곱 중 하나씩 없애서 횟수를 표시했다. 스포츠 말고도 대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고위 인사, 기사, 그 밖에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의 예약석에 앉았다. 황제가 특정 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적절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에 생겼으며,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다 기원후 549년에 마지막 경마 경기가 치러진 후 문을 닫았다.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남겼으나 그 성과는 중세 시대에 잊혀지고 말았다. 로마의 여러 실용적인 기술 혁신은 이전의 그리스의 것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의 공학 기술은 군사 관련 기술과 더불어 로마의 우수한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야이며, 도로, 교량, 수도관, 목욕탕, 극장,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 등 여러 유적이 아직도 로마의 공학과 문화의 증거로 남아있다. 로마는 건축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건축은 그리스 건축과 더불어 고전 건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로마 건축은 그리스와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로마는 그리스의 엄밀하고 정격적인 설계와 비례를 차용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둥과 주두의 배열 방식(오더)인 복합식(composite order)과 토스카나식(Tuscan order) 그리고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배워온 돔 외에는 공화정 말기까지 별다른 건축적 성과가 없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콘크리트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이것은 화산회로 만든 강력한 시멘트로, 대리석을 밀어내고 로마의 주요 건축 자재가 되었으며, 여러 건축 방식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기원전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축 저작인 건축론을 썼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는 기원전 40년경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취관(glassblowing) 를 이용하게 되었다.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당시 견본을 가져오면서 전래되었다. 콘크리트 덕분에 튼튼한 포장도로인 로마 도로를 깔 수 있게 되었는데, 상당수 로마 도로는 로마가 멸망한지 천 년 뒤에도 계속 쓰였다. 광대하고 효율적인 제국 전역의 도로망은 로마의 패권과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로마 도로는 전체적으로 5만 마일에 달하였고, 변방의 도로는 군사공병 기술자가 축조하였는데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비트루비우스 저서 12권 1장에 있는 공법을 보면, 맨 아래 기초로 큰 돌층과 부스러기층을 번갈아 깔고, 그 위에 모래층을 펴고, 맨 위에는 다각형 큰 돌의 상부를 갈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덮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로마 도로는 로마 군단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건설한 도로였다. 그러나 이 대로는 로마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교역의 중심지인 로마의 위상을 굳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마 정부는 역참 제도를 운영하여, 도로 일정한 간격마다 여행자들이 쉴 곳을 제공했으며 필요한 지역에 다리를 건설하여 24시간에 800km를 이동할 수 있는 파발 체제를 마련했다. 로마는 수많은 수도관을 건설하여 도시와 산업 지역,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로마 시에는 총 길이가 3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관이 있었다.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로마인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위생과 사교 목적의 공공 목욕탕(termae)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여러 가옥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도시에 대하수도("cloaca maxima")가 있어 늪지를 배수하고 티베리스 강으로 폐수를 처리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상하수도의 납으로 된 수도관 때문에 납 중독이 퍼져 출산율이 저하되고 로마 사회가 쇠퇴하면서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추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납 함유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수도관은 폐쇄되지 않아 계속 물이 흘러 각 가정과 공공 시설의 배수구로 빠져나갔으며, 수도 꼭지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결식하거나 결식할 위험이 있는 식량빈곤층들에게 식량배급권을 지급하였다. 진화생물학 진화생물학(進化生物學)은 문자 그대로 지구 상의 생물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현대 생물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분과중의 하나이다. 진화란 생물의 다양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뜻하며, 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진화생물학의 핵심이다. 진화학이란 생명의 역사에 관한 학문으로, 그 시작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진화가 관찰되는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이며, 진화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진화는 생물의 역사만을 다루므로 생명의 기원은 화학진화라는 다른 분야에서 다루고 있다. 진화생물학은 화학진화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는 종종 오해를 낳지만, 화학진화는 생화학의 분야로서 진화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진화(evolution)는 포괄적으로는 생명의 변화를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생명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하고 왜 달라졌는가를 설명하는 분야가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유전적 정보증가, 즉 다양성의 증가와 군체 형성 등으로 이미 해결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생물의 진화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시간 단위 안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급격한 외부 요인은 진화를 가속한다는 것이 화석을 통해 알려져 있다. (캄브리아기 생물 대폭발 (cambrian explosion), 페름기 및 백악기 대멸종 등) 다양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유전자 집단에서는 특정한 환경 아래에서 유리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유전자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유리한 유전자'가 그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생존 및 번식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다음 세대의 유전자 집단에는 '유리한 유전자'의 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때 '유리한 유전자'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유리한 유전자'란, 단순히 자손을 많이 남기는 데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비록 개체에는 해를 끼치는 유전자일지라도 자손을 남기는 데 유리하다면 그것은 자연 선택에 유리한 유전자이다. 이 개념은 멘델의 우열 개념과 함께 자주 오용되어 왔으므로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유전자는 바뀔 수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방사선, 화학물질, 단순한 복사과정의 실수 등에 의해 유전자가 바뀔 수 있으며, 이러한 유전적 변이는 외부의 압력 - 선택압 - 이 가해지지 않는 한 유전자 집단 안에 계속 축적된다. 돌연변이는 해로울 수 있으며, 생명체는 이러한 돌연변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세포 내 복구장치 및 발생 과정에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는 있으나, 확률적인 문제로 돌연변이는 계속 축적된다. 돌연변이로 축적되는 유전자 집단 내의 유전적 다양성은 자연선택의 도움으로 세대가 지날수록 앞 세대와는 다르게 바뀐다. 또한 이러한 유전자 집단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서로 섞이지 못할 수 있으며 이런 경우 한 유전자 집단과 다른 유전자 집단 안의 유전적 변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다른 선택압이 가해진 두 유전자집단은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유전적으로 섞일 수 없게 되며, 이렇게 된 경우를 '종의 분화'라고 표현한다. 조지프 매카시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1908년 11월 15일 ~ 1957년 5월 2일)는 미국의 정치가이다. 위스콘신주의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단적인 반공 활동과 공산주의 색채를 의심받은 미국 유명 인사에 대한 청문, 고소 및 추방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프 매카시는 위스콘신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고학으로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 마켓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마켓 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지방 판사가 되었다. 지방 판사 재직 시절 위스콘신 주의 낙농업을 하는 농부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어 낙농업이 발달한 위스콘신 주에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위스콘신 주에서 판사로 재직하였다. 전쟁 참전 전에 낙농업 관련 판결로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으므로 정계 입문 권유를 받게 되어, 1946년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케네디 가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상원의원 재직 초기 매카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선 의원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7일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들로부터 귀가 번쩍 뜨일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반공'이었다. 1949년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등장, 소비에트 연방의 원자 폭탄 실험과 중앙유럽·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영향력 증대, 그리고 당시 미국을 휩쓸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등은 반공의 가치를 크게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행한 반공주의 연설에서 이른바 매카시즘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의 연설로 미국 전국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미국 군인들이 전쟁에서 희생되면서 국민들은 두려움과 괴로움에 사로잡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매카시는 상원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청문회도 열게되었지만 ,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매카시 시대"로 불릴 정도로 반공주의의 바람이 몰아쳤다. 또한 매카시의 반공주의 발언에서 유래한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는 극단적인 반공사상을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자리잡았다. 1952년 재선된 그는 계속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도하였다. 그의 공격적 발언은 갈수록 심해져서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지도부, 육군 장군들까지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나, 1954년 국회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판명되었다. 청문회 당시 육군측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추궁했는데, 이에 대해 매카시는 흥분하며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 이 모습을 36일간의 텔레비전 생중계로 본 미국 국민들은 더 이상 매카시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1954년 12월 상원은 그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의제로 올려, 67대 22로 그에 대한 비난을 의결하였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를 제외한 의원 전원이 찬성하였다. 케네디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불참하였는데, 실제로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참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한편 매카시 의원의 소속 정당이었던 미국 공화당에서도 상당수 의원들이 찬성하여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상원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매카시는 미치광이 혹은 간신모리배 등에 비유되었다. 이에 크게 상심한 그는 이전부터 앓아오던 두통과 조증을 해소하고자 더욱 술에 의존하게 되면서 알코올 중독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다. 상원의원의 직위는 유지했으나, 거의 활동은 할 수 없었고, 공화당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건강을 잃어 1957년 만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식에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양당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매카시 시대에 적극 동조한 유명인으로는 유명한 반공주의자들인 로널드 레이건, 엘리아 카잔, 월트 디즈니를 꼽을 수 있으며, 반대로 피해자로는 영화인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및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을 들 수 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 , , 1834년 2월 8일 - 1907년 1월 20일)는 러시아의 화학자이다. 주기율표를 최초로 작성한 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토볼스크(Tobolsk)인근 Verkhnie Aremzyani에서 11, 13, 혹은 17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그 수는 출처마다 다르며, 정확한 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Ivan Pavlovich Mendeleev)가 시력을 상실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나(Maria Dmitrievna Mendeleeva)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녀는 그녀 가족의 유리공장을 다시 세워 살림을 꾸려나간다. 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공장이 화재로 파괴되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는다. 멘델레예프가 15세이던 1849년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남은 두 자녀(멘델레예프와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건너가 정착했다. 멘델레예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Main Pedagogical Institute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이 기관에 들어간지 10주가 안되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후 그는 결핵진단과 함께 단지 수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869년 3월 6일, 러시아화학회에서 그는 주기율표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하여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원소들의 성질과 실제 원소의 성질이 맞아떨어진 사례가 몇 개 존재한다. 로타르 마이어도 거의 같은 시기 거의 유사한 주기율표를 생각해 내었으나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을 예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레븀이라 불린다. 멘델레예프는 1906년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그 상은 프랑스의 무아상이 수상했고 멘델레예프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1907년 생을 마감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00년 7월 12일-기원전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코그노멘(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도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인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크게 4가지 설이 있다. 대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사람이 있어서 ‘자궁에서 잘라온(ab utero caeso)’이란 뜻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주장했다.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이나 밝은 회색 눈()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 "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한편 카이사르 자신이 제왕 절개 수술로 태어났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적어도 서기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에도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시대에 제왕 절개 수술은 오직 죽은 여자에게만 실시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는 그를 낳고도 장수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선거구 개혁과 미트라다테스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폭동이 일어났고 로마에서 탈출한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술피키우스를 처형하고 마리우스파를 축출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킨나를 중심으로 한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 1일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되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다.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틸리니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에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를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 에게 해를 지나던 중,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 그는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된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 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경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 집정관에 취임하자 카이사르는 현대의 신문격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광장에 붙였다. 악타 디우르나로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이 그대로 민중에 공개됨으로써 민중파인 카이사르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또한 공직자가 1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율리우스 레페르토리(공직자 윤리에 관한 율리우스 판례법)을 제정하여 공직 생활의 정화를 도모하였다.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lex iulia de agraria)을 제안하였는데, 그라쿠스 형제가 제출하려했던 농지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카이사르는 그라쿠스 형제와는 달리 기존체제에서 개혁을 실시하려 했기 때문에 보수파를 회유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보수파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삼두의 강력한 힘을 이용했다. 삼두의 일파인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하였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삼두 정치가 입법시킨 '바티니우스 법'에 따라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 카이사르는 푸블리카누스의 속주세 예납제도를 폐지하여 속주세의 공정성을 실현하였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정복한로마세계의 동방을 재편성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socius e amicus populi romani)로 임명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집트에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하인 가비니우스를 파견하여 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3천 탈렌트를 받았으나 크라수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이 돈의 절반을 써야했다.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 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하이두이족(Haedui)은 전에 하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프로빈키아 통과를 요청한 헬베티족의 요구를 거절했다.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의 승인을 얻고 그들의 영토를 통과하려 했으나 다툼이 벌어졌고 이에 하이두이족은 헬베티족을 적대하며 동맹국인 로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하이두이족의 족장 둠노릭스는 헬베티족과 연락을 취하다 카이사르에게 발각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형이자 하이두이족의 족장 디비키아쿠스가 동생을 대신해 용서를 바라자 둠노릭스를 용서했다. 카이사르는 손 강에서 헬베티족을 기습공격했고 큰 손실을 입은 헬베티족은 디비코라는 강화사절을 보냈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요구한 인질제공을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와 헬베티족은 비브락테 전투에서 맞붙었다. 헬베티족은 밀집대형으로 진격하였지만 로마군이 투창공격을 퍼붓자 방패에 창이 박혀 방패를 버리고 싸워 크게 손실을 입었다. 보이족과 툴링기족이 곧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제1열을 헬베티족과 싸우게 하고 제2열은 보이족과 툴링기족과 대적하게 했다. 이렇게 한바탕 치열한 전투에 이루어지고 결국 카이사르가 헬배티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에게 헬베티아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갈리아인들의 요청에 따라 게르만족과 대적하게 되자 수에비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그때 로마군에서 게르만인에 대한 공포가 퍼졌으나 카이사르는 몸소 연설로 로마군의 전투 의지를 되찾게 했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을 이끌고 아리오비스투스와 브장송에서 직접 만나 회담을 했고 그 협상은 게르만인들의 도발행위로 인해 결렬되었다. 이후 카이사르는 사절을 보냈으나 그들이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로잡히자 그와 전투를 벌였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전투에서 질것이라는 게르만 여인의 점에 따라 전투를 바라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적군포로를 심문하여 이 사실을 알아내었고 게르만인들의 전투의욕이 적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더 과감하게 공격했고 아리오비스투스는 어쩔수없이 로마군과의 회전을 준비했다. 게르만족은 배후에 아녀자가 탄 마차를 포진시켰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로마군 우익은 적군의 공격을 버텨냈으나 좌익은 적군의 수적우세에 밀리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아끼는 부하이자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전투에 동원되지 않는 제3열 군사를 이끌고 좌익을 지원했다. 힘을 얻은 로마군의 공격에 게르만족은 다수가 죽고 아리오비스투스는 게르마니아으로 달아났다. 게르만인들의 배후에 강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게르만족이 죽거나 아리오비스투스를 비롯한 소수의 요인들만이 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한 딸은 죽고 다른 딸들은 사로잡혔다. 이 해의 모든 전투를 끝내고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와중에 레미족은 반군들을 배신하고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다. 수에시오네스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 29만명은 레미족의 영토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와 레미족을 향해 귀갑대형을 이루고 진격해왔다. 로마군 진영 근처에 비브락스(Bibrax)라는 이름의 레미족 도시가 있어 벨가이군은 이 도시를 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브락스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인과 크레타인으로 구성된 궁수들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비브락스에 구원병으로 보냈다. 벨가이군은 이들의 구원에 힘을 얻은 레미족의 거센 반격에 공성을 중단하고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다. 로마군 진영은 강을 끼고 두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벨가이인의 공격을 받는 쪽은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했고 강 건너편의 지휘는 사비누스가 맡았다. 벨가이군은 강을 건너 사비누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는 진지 안에 있던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접근해오는 적과 싸웠다. 로마군은 물속에서 움직임이 둔해진 벨가이군을 무찔렀다. 벨가이인들은 패전소식과 식량부족에 통합된 벨가이 병력을 각 부족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각 부족으로의 귀환은 소란스러운 것이 패주에 가까워 벨가이인들은 카이사르가 보낸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크게 전사자를 내었다. 카이사르는 적군 연합부대를 크게 격파하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우선 수에시오네스족을 격퇴하고 벨로바키족과 암바니아족과 강화를 맺었다. 벨로바키족은 부족내의 반로마파가 모두 브리타니아에 도망쳐 버렸다고 주장했다. 로마군은 이어 벨가이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을 가진 네르비족과 싸우게 되었다. 그들은 매복해 있었으며 로마군의 군량수송부대에 첩자를 두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영토에 도착하자 기습공격을 하여 로마군의 허를 찔렀다. 로마 기병대는 이미 격파되었고 카이사르도 한번에 여러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전투를 시작했다. 로마군의 제9군단과 제10군단은 좌익에 포진해 있다가 아트레바테스족을 쳐부수었고 제11군단과 제8군단은 우익에서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했지만 로마군 중앙의 제12군단과 제7군단은 좌우익이 빠져나가 노출된 곳에서 보두오그나투스가 이끄는 네르비족의 공격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중앙의 병사들 간의 대열이 좁아 전투에 방해가 됨을 알아차리고 대열을 넓힐 것을 명령했다. 방진을 짤것을 지시했고 로마군은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제10군단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러 오자 네르비족은 열세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네르비족의 전투력은 궤멸되었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제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어 아투아투키족의 수도인 아투아투카를 공격했고 로마군의 공성기에 놀란 아투아투키족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했고 아투아투카의 전체 무기 중 삼분의 일 가량만 버려졌다. 아투아투키족은 남은 무기를 들고 로마군을 기습했으나 4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였다. 카이사르는 5만명이나 되는 아투아투카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넘겼다. 카이사르의 공적에 로마 원로원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15일 감사제를 올렸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임기를 5년으로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의 부하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최강의 부족 수에비족에게 밀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 문제를 교섭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우비족(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게르만 부족)의 영토를 제공할 것이니 갈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두 게르만 부족은 그 제안을 고려할 것이니 사흘간의 여유를 줄것을 간청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이 게르만인의 기병대가 아직 갈리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물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조금만 전진시키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대로 카이사르는 로마군 기병대를 전진시켜 그들에게 게르만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오게 했다. 게르만 기병의 급습을 받아 기병을 74기나 잃었다. 게다가 이 희생자 중에 피소라는 이름의 카이사르의 갈리아인 친구가 있었다. 교섭이 깨졌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을 공격했고, 병력이 43만명이나 되는 두 부족은 전의를 잃고 대부분이 죽거나 일부가 게르마니아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 전투가 로마에 전해지자 카토는 카이사르가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게르만인을 기습한 것은 부당한 처사이고 따라서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기원전 57년에 벨로바키의 반로마파가 브리타니아에 달아났으며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어 어렵게 브리타니아인을 격파하였으나 기병대가 도착하지 못하여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또한 배가 파손되어 이를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 다만 브리타니아인들을 다시 격파하고 강화를 맺은 다음, 인질을 요구하여 이들을 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여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명분을 명확히 했다.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이자 브리타니아 연합군 총사령관인 카시벨라우누스와 전투를 벌였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부족간의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자로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자 게릴라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것과 다르게 기병을 먼저 보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진격시키게 하여 브리타니아인의 기습공격을 막아내고 곧 반격해 그들을 격파했다. 카이사르가 카시벨라우누스의 본거지를 공격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로마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결국 브리타니아인들은 본거지에서 로마군에게 패하였고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로마군의 군량이 부족해져 카이사르는 군대를 분할하여 갈리아의 여러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그 중 군단장 사비누스와 코타가 이끄는 9천명의 로마군은 에부로네스족의 땅에 배치되었다. 에부로네스족장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로마군을 공격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고 지금 갈리아 각지에서 크게 반란이 일어났으며 자신들이 로마군을 호위할테니 진영지를 떠나고 카이사르와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그전까지 로마에 우호적이던 암비오릭스의 속임수에 두 군단장은 속고 말았다. 사비누스는 진영지를 떠날 것을 주장했고 코타는 진영지를 지키며 버티는 것이 낫다고 했으나, 결국 사비누스의 뜻대로 진영지를 떠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진영으로 향했다. 행군 도중에 그들은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라비에누스의 진영지에 도착했다. 암비오릭스의 선동으로 네르비족과 아투아투카족은 퀸투스 키케로의 진영을 공격했고 그 수가 6만면에 달했다. 당시 병이 든 키케로는 적의 십분의 일 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력으로 분전했고 키케로의 구원요청을 받은 카이사르는 7천명의 군대를 급조하여 키케로의 진영지에 도착한 뒤,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다. 많은 수의 갈리아인이 죽었으나 로마군의 손실은 없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병사들 중에 다치지 않은 자가 전체의 10분의 1 정도였다. 한편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인두티오마루스를 격파하고 죽이는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로 다시 진격하고 암비오릭스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반란음모를 꾸민 카르누테스(Carnutes) 족장 아코를 사형시켰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 기원전 52년, 족장을 잃은 카르누테스족은 본거지인 케나붐에서 로마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갈리아 중부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북이탈리아의 카이사르가 중부 갈리아에 있는 그의 군단과 합류하였고, 비투리게스족의 수도인 아바리쿰이 카이사르에게 점령되었지만 반로마군의 총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수도인 게르고비아로 향했고 이즈음에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아르베르니족의 근거지인 게르고비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게르고비아를 한 차례 습격하고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습격한 뒤 퇴각하는 과정에서 선발대에게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들을 공격하여 700명을 전사시켰다. 그중 로마군 백인대장은 46명이나 죽었다. 게르고비아 공략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퇴각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하여 한 차례 회전이 벌어졌다. 갈리아 기병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격했으나 카이사르는 방진을 이루어 이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들어갔다. 카이사르는 이를 알고 즉시 알레시아를 포위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전역에 지원군을 요구하였고 이에 26만에 달하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였다. 알레시아의 농성군은 7만명으로, 갈리아전력은 총 33만이었다. 반면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12개 군단 5만명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포위전 알레시아 전투가 기원전 52년 9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양쪽의 갈리아군은 완전히 차단되어 농성하는 갈리아인들은 지원군이 도착한 줄도 몰랐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고, 카이사르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에 갈리아 기병은 퇴각했다. 기병전에서 패한 후, 갈리아인들은 공성기를 이용하여 로마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재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이끄는 6만명의 갈리아 정예병이 다 완성되지 않은 로마군의 북쪽 포위망을 공격해왔지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보내 이들을 막게하면서 포위망 여기저기에 지원군을 보냈다. 북부에서 적이 강하게 공격해오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북부 전선에 도착했다. 카이사르와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치열하게 싸웠고 카이사르는 기병대를 갈리아군 배후로 보내 그들을 격파하였다.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고 부관은 전사하였다. 6만명의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나머지 갈리아인들도 각자의 부족으로 패주하였다. 이를 안 베르킨게토릭스는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와 형제인 마르쿠스, 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 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 갈리아 전쟁은 서유럽에 로마문화를 전파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갈리아 전쟁 이후, 갈리아는 빠르게 속주화되었고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정복한 전 지역을 "갈리아 코마타(Gallia comata)"라는 하나의 속주로 두었다. 결국 갈리아 일대는 카이사르의 세력기반이 되어 그가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일조했다.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켰고, 그 전권을 위임받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내전기」에서는 루비콘 도하가 단순히 '아리미눔 도착'으로만 적혀있으며, 이때 카이사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휘하의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아리미눔에 입성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5개 대대를 떼어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티움을 공격하고 쿠리오에게는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 해를 따라 피사우룸, 파눔, 안코나를 공격하게 했다. 1월 12일 쿠리오는 피사우룸, 1월 13일 파눔, 1월 14일에는 안코나까지 함락시키고 1월 15일 안토니우스도 아레티움에 입성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현직 법무관 로시우스와 카이사르의 친척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최종 권고를 전했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임명해 2개 군단이 주둔한 카푸아로 떠났다. 카이사르는 로시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통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양자 회담을 벌이고 동시에 군단 해산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냈다. 그리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수도 로마를 버린 채 200명에 달하는 상당 수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종 개인 재산과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 카토 등과 함께 노예, 하인들을 데리고 남하했으나 국고에 들어 있는 재산은 채 옮기지 못하고 도주했다. 이 때문에 국고 재산은 고스란히 남았고 1월 20일 쿠리오는 아구비움에 입성해 플라마니아 가도의 요충지를 얻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이때 폼페이우스의 답장을 받았으나 그가 제안한 양자 회담을 묵살시키고 자신에게만 군단해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떠나는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은 그가 계속 본국에 군사력을 가지고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폼페이우스 진영에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낸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와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백인대장을 지내고 오리엔트 원정에도 참전한 루키우스 푸피우스가 아욱시뭄에서 군사를 이끌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에 실패하고 카이사르는 아욱시뭄 근처 킹쿨룸에서 보급을 해 2월 3일 아욱시뭄에 입성했다. 2월 5일 카이사르는 피르뭄에 입성하고 제12군단도 참여했으며 아스쿨라네움으로 행군했다. 이에 기원전 57년의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10개 대대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오자 도망쳐버려 2월 15일 아스쿨라네움도 쉽게 함락되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가 급파한 비불리우스 루푸스가 13개 대대가 되는 병력을 모아 코르피니움에 주둔했고 곧이어 아헤노바르부스가 20개 대대를 이끌고 행군해 3.3개 군단에 달하는 33개 대대가 모일 예정이었다. 이에 루푸스는 폼페이우스가 있는 루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더 남쪽인 카노사로 남하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 근처의 술모나 주민들의 호응도 얻고 남프랑스 속주에서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22개 대대도 합류해 결국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아헤노바르부스는 붙잡혔다가 카이사르의 배려로 석방되고 2월 21일 카이사르는 코르피니움에도 입성했다.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키케로는 "아군을 버리는 폼페이우스와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는 얼마나 다른가" 라며 카이사르에게도 편지를 보내 카이사르의 관용을 칭찬했다. 카이사르는 답변했다.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브룬디시움으로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일행을 이끌고 2월 25일 항구 도시인 브린디시움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에게 양자 회담을 통한 강화를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이들을 배신하는 짓을 벌일 수 없다며 강화를 거부했다. 6개 군단 60개 대대로 불어난 카이사르 군단이 오는 가운데 잦은 탈영으로 50개 대대로 줄어든 폼페이우스는 3월 17일 카이사르의 저지선을 뚫고 그리스로 본국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무혈제패했지만 폼페이우스를 놓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고,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이 주둔한 이베리아 반도는 평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파비우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하여 히스피니아로 진격했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진채를 공격하였다. 카이사르군은 적의 유인책에 빠져 위기에 빠졌으나 특유의 용맹을 발휘하여 위급에서 벗어났다. 카이사르군은 200명 가량의 적을 전사시켰으나 진채를 빼앗지 못하고 그들도 80명의 카이사르군을 전사시켰다. 갑자기 카이사르의 6개 군단은 세그레 강의 홍수로 고립되었고 군량보급도 차단되었다. 이런 상태로 한달을 버틴 카이사르는 운하를 파서 물길을 바꾸어 고립에서 벗어났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가 이끄는 9만명의 폼페이우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식량부족에 빠트리게 했다. 폼페이우스군의 군량이 부족해지자 현지병력의 탈영이 심해졌고 아프라니우스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군의 도주는 카이사르에게 계속 저지되었으며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폼페이우스군의 일개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바랬고 아프라니우스의 아들마저 카이사르군과의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페트레이우스는 화해를 거부하며 병사들의 전의를 다시 일깨웠고, 폼페이우스군 진영에 들어온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식량부족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 병사들의 군대해산을 명하고 모두 석방시켰다. 또 다른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히스파니아 전쟁이 끝나고 카이사르는 법무관 레피두스를 시켜 독재관에 취임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그는 술라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살생부에 올라 망명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형을 폐지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카이사르 함대가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 - 마실리아 연합함대를 격파하였고 폼페이우스의 편을 든 마실리아는 결국 카이사르군에 항복하였다. 한편, 아티우스 바루스는 아욱시뭄에서 아프리카로 도망쳐 스스로 총독을 자칭한 다음, 정식 총독으로 임명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았다. 심지어 투베로의 병든 아들도 아프리카 땅에 상륙하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의 부장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 점령을 완수한 뒤 아프리카에서 아티우스 바루스가 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다. 바루스군은 패했고 쿠리오는 카이사르군의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고 불리었다. 쿠리오의 군대에 아프리카인들이 퍼트린 역병이 퍼지고 탈영병도 몇 있었지만 쿠리오는 연설로 병사들을 단결시키고 코르넬리우스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누미디아왕 유바를 우습게 본 쿠리오는 유바가 렙티스 사람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회군하였고, 유바왕의 부하 사부라가 소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바그라다스 강 전투에서 4개 군단과 함께 포위당하고 말았다. 쿠리오는 도주를 권하는 장교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렇게 외쳤다. "카이사르의 군대를 잃고 카이사르에게 돌아갈 수 없소" 이 말을 외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보병들도 모조리 몰살당했다. 바루스는 유바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살려주기를 요구했으나 유바는 몇명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려 갈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군과 맞섰으나 노련한 폼페이우스의 해군장수 리보에게 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후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기원전 48년 1월 4일에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직접 이끄는 제1진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으로 나누어 아드리아 해를 건너기로 했다. 제1진은 먼저 출발하여 폼페이우스 해군의 방해를 피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들은 1월 5일에 오리쿰을, 1월 7일에 아폴로니아를 점령했다. 폼페이우스 해군 총사령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군 제1진의 무사통과에 격분하여 해안경비체제를 강화했다. 심지어 총사령관인 비불루스가 배 위에서 자는 등 임전태세를 편 까닭에 카이사르군 제2진은 출항도 하지 못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지상군와 대치했으나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동시에 자신의 진영에 머무르던 비불리우스 루푸스를 폼페이우스에게 보내 강화를 제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수뇌진과의 타협이 실패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과 타협해 볼 생각으로 휘하 장수인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보냈다. 바티니우스의 제안에 폼페이우스군 병사들은 이에 반응하였으나 곧이어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나온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바티니우스를 비난하자 병사들은 화가 나 창을 회담장에 던졌다. 이에 몇명의 카이사르의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선언했다. "카이사르의 목을 가져오기 전에는 강화란 없다." 카이사르는 비불루스와 만나 회담을 벌이려 했으나 카이사르를 매우 싫어하는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만나기를 거절하고 리보가 카이사르와 회담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리보와의 회담으로 강화성사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것도 실패했다. 비불루스는 무리하게 해상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나빠져 병사했다. 그가 병사한 후로는 폼페이우스 해군의 감시도 느슨해져서 안토니우스의 제2진도 브룬디시움을 습격한 리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떠나 3월 26일에 에피루스 북부의 항구 닌페움에 상륙하여 리수스를 점령한 뒤 4월 3일에 제1진과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과 500기를 주고 마케도니아로 보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1개 군단과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도 5개 대대와 약간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그런다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진인 디라키움과 페트라를 포위했다. 군사의 수가 적음에도 폼페이우스의 진영보다 보루의 수가 많고 더 긴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렇게 몇 달간 대치한 뒤에 폼페이우스군은 말먹이가 부족해지자 카이사르의 포위망을 공격하였다. 당시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으로 떠나 카이사르의 진영에는 총사령관이 없는 상태였다. 원래 카이사르가 직접 포위망 북부를, 안토니우스가 남쪽 포위망을 맡았는데 사령관이 없는 북부전선을 루키우스 술라의 조카이지만 카이사르파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지휘했다. 총 여섯군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카이사르군의 뛰어난 분전으로 단 하나의 포위망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백인대장 스카이바는 200명으로 폼페이우스군 25000명의 공격을 4시간이나 버텨냈으며 스카이바 자신의 방패에는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있었다. 결국 푸블리우스 술라의 구원을 받아 폼페이우스군을 격퇴했으나 술라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술라가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으나 술라는 총사령관이 없는 이상 그가 지시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카이사르 진영에 로우킬루스와 에구스라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알로브로게스족 귀족 출신 기병 장교가 있었는데, 그들은 휘하 기병들의 급료와 전리품을 강탈하여 부하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기병들이 카이사르에게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자 카이사르는 형제를 불러 그들을 나무랐다. 전투가 끝나고 벌을 받을 것 같자 이 형제는 폼페이우스에게로 달아났다. 카이사르군의 첫 탈영병이었다. 기원전 48년 7월 10일 폼페이우스는 이들로부터 카이사르군의 정보를 듣고 방어설비가 약한 카이사르의 포위망 남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서 포위망을 함락시키며 카이사르군 장교인 마르켈리누스가 이끄는 제9군단을 격파하였다. 제9군단의 제1대대에서는 백인대장 6명 중 5명이 죽을 정도로 위기에 빠졌고,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12개 대대의 구원을 받아 간신히 궤멸을 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진영을 공격함으로써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이 만든 측벽을 방벽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공격하였고 이로인해 폼페이우스가 구원병력을 데려올 수 있게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의 증강된 병력에 두려움과 공황상태에 빠진 카이사르군은 1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달아났다. 전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 포로를 조롱하고 모조리 죽였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가 승리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본거지인 디라키움 일대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그리스 동부에 위치한 테살리아로 유인하면서 7월 24일 도미티우스와 합류했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도시인 곤피스와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자 라리사를 제외한 모든 도시가 카이사르를 지지하였다. 카이사르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다시 강화를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망설이다가 파보니우스의 혹독한 비난을 받고 제안을 거절했다. 폼페이우스는 테살리아에서 스키피오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승리에 도취되어 전투에 관한 논의보다는 승리 후에 얻을 보상이나 직위, 카이사르파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렌툴루스 스핀테르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가 취임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에 자신이 더 적임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렌툴루스는 자신이 가장 고령임을, 스키피오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의 장인임을, 아헤노바르부스는 수도에서의 명망을 들며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했다. 아티우스 루푸스는 아프라니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와 싸울때 휘하 병사들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라비에누스는 결전을 망설이는 폼페이우스에게 결전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저들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했던 군대였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때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정예병사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자들이 건강을 잃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본토에 남겨졌습니다. 게다가 적군이 보유한 최고의 병사들은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습니다." 양군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만났고 이때 카이사르군은 군단병이 22000명, 기병이 1000기였던 반면에 폼페이우스군은 군단병이 47000명, 기병이 7000기였다. 카이사르는 고지대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평원으로 이끌고 결전 준비를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잠시 행군을 멈추어라. 그리고 그대들이 매일같이 바라던 적과의 전투를 생각하라!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때가 찾아왔다. 그대들의 마음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은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기병력으로 카이사르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나의 작전에 귀를 기울이면 더욱 확고한 신념을 품고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오. 본인은 아군기병에게 양쪽 군대의 간격이 좁아지면 카이사르군의 우익으로 돌아 노출된 측면을 공격하고 후방의 제 3열을 포위하여 카이사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라고 명령하였소. 그렇게 되면 적은 우리군이 무기를 투척하기도 전에 패주하고 말것이오. 이 작전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 군은 군단의 피해도 없고 사상자도 거의 없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우리의 기병이 우세하므로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이오."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전술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전투에서 진다면 진영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이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장수들은 이에 따랐다. 폼페이우스의 속셈을 간파한 카이사르는 고참 군단병 2000명으로 제4열 별동대를 편성하여 카이사르군 우익 뒷편에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대들에게 전투의 승패가 달려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카이사르의 제10군단 수석 백인대장 크라스티누스는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의 부대에 있던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대들이 총사령관 앞에서 약속한 성실함과 용맹함을 보여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전투가 될것이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들의 총사령관은 지위를 되찾을 것이고, 우리는 자유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을것이다." 그런 다음 카이사르를 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이시여, 나는 오늘 전장에서 쓰러지든 살아남든 장군의 치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크라스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을 전진시키지 않음으로써 카이사르군이 두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그들의 체력을 떨어트리고 전열을 흩어놓으려 하였다. 폼페이우스의 부장 트라아리우스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이는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으면 카이사르군은 무기를 들고 갑절의 거리를 달려가야하고, 따라서 폼페이우스군 앞에 도달하였을때 지쳐서 대열이 흩뜨려질테니깐 그때 맞아 싸우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의 갈리아 전쟁 7년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들이 폼페이우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그들은 중간지점에서 잠시 진격을 멈춰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돌격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단병은 이 돌격을 그럭저럭 버텨냈다. 곧 폼페이우스는 기병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수적에서 열세인 카이사르 기병은 못 당해내는 것처럼 후퇴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이 카이사르군 배후로 돌아가는 순간 카이사르는 제4열 창병 부대를 출격시켰다. 카이사르의 창병 부대는 정면에서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막아섰고 후퇴했던 카이사르 기병도 적군 기병의 배후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 기병은 곧 격파되었고 이것을 안 폼페이우스는 전투를 단념하고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은 이때까지 카이사르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새 병력을 교체 투입하는 카이사르의 전술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패잔병들은 진영이 있는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카이사르는 즉시 이 언덕을 포위하였다. 폼페이우스 패잔병들은 곧 항복했으며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이들의 귀가를 선선하게 허락했다. 폼페이우스군의 전사자는 6000명에서 15000명, 포로는 총 24000명에 달했으나 카이사르군의 손실은 고작 200명에 불과했다. 다만 카이사르군 백인대장은 30명이나 전사하였다. 이것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최종 결전,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적군 사령부에 도달했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렌툴루스를 비롯한 정적들의 탐욕과 사치에 경악하여 이렇게 외쳤다. "모두 그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런 다음 바로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한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뗏목에 불을 붙인 역청과 황을 실어 여러차례 카이사르군에게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폼페이우스군은 그때까지 파르살루스 전투 결과가 카이사르군이 퍼트린 거짓소식인줄 알았다고 한다.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사령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을 조종하는 궁중관료들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때 그는 그의 배에 불을 붙였는데 그 불이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버렸다. 그 와중에 폼페이우스 암살 주모자이자 이집트의 실권자인 포티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부하이자 군권을 장악한 아킬라스도 공주 아르시노에에게 지휘권을 빼앗기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카이사르와 아르시노에의 부하 가니메데스는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그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아르시노에군과 합류하였다. 전장은 시내를 벗어나 나일 강의 삼각주(델타)로 옮겨졌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테베레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적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이사르의 숙적 소 카토, 아프라니우스, 라비에누스 등의 폼페이우스 잔당이 쿠리오를 격파한 누미디아왕 유바와 연합하여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상륙하여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와 싸웠다. 이때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누미디아군의 맹공에 큰 위기에 처했다. 이 공격에 카이사르 기병은 반격하지 못하고 적의 포위를 막으려 버티고 있었다. 카이사르 보병과 라비에누스군이 곧 맞붙었고 누미디아군은 투척무기를 던졌고 카이사르 쪽에서도 필룸을 던져 응수했다. 카이사르군이 전투에서 불리해지며 원형진을 이루었다. 이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군을 향해 '어린 새내기' 군대라고 놀렸다. 이 조롱에 격분한 카이사르 제10군단의 한 백인대장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라비에누스에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한 다음 카이사르의 정예인 제10군단의 힘을 보여주겠다면서 그에게 창을 던졌다. 라비에누스는 말에 창이 맞자 굴러 떨어졌으며 누미디아군의 엄호를 받으며 퇴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몇몇 카이사르군은 두려움에 달아났고 카이사르는 한 기병을 붙잡으며 외쳤다. "적들은 저기에 있단 말이다!" 결국 카이사르는 최대한 길게 진형을 늘어트리며 적을 공격했고 라비에누스의 누미디아군을 흩어놓았다. 페트레이우스가 1500명의 누미디아 기병으로 카이사르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루스피나 전투에서 힘들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마우레타니아와 연합하여 유바가 없는 누미디아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마우레타니아에는 시티우스라는 로마인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그를 회유했다. 카이사르는 탑수스를 공격하였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군은 군대를 양분하여 카이사르를 봉쇄했다.(탑수스는 바다에 면한 곶 끝에 위치하면서도 육지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는데 2킬로미터의 가늘고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탈출을 막으려면 군대를 양분해야 했다.) 기원전 46년에 카이사르는 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의 군대를 상대하였는데 스키피오군은 중앙에 보병, 좌우익에 기병, 극좌우익에는 코끼리를 배치하였다. 카이사르는 중앙에 기병을 배치했고, 좌우익에는 보병, 극좌우익에는 제5군단 병사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코끼리들은 제5군단 병사들의 투창에 전선에서 이탈했고 카이사르 기병은 적군 보병을 뚫고 적군 좌우익의 배후를 포위하였다. 전방에는 카이사르 보병이 배후에는 카이사르 기병이 폼페이우스군을 포위하였고 신속히 그들은 궤멸되었다. 이후 유바왕은 도주했고 자마에서 쫓겨나자 동행한 페트레이우스와 동반자살했다. 총사령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배를 타고 도망치다가 사로잡히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자살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술라는 카이사르군에게 잡혀 죽었고 라비에누스와 아티우스 바루스는 그와중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우티카에 있던 카토는 자결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했다. 이에 키케로는 「카토」를 저술하여 카토의 행위를 찬양하였고 카이사르는 「안티 카토」를 저술하여 이를 반박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시찰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크게 개선식을 치르고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일레르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평정된 히스파니아는 카이사르파 총독 카시우스의 실정으로 폼페이우스파로 돌아섰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고자 파비우스와 페디우스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히스파니아에 직접 다시 출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군을 유인하기 위해 기병을 이끌고 뒤로간 것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기병대가 붕괴된 것으로 잘못 보아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 패인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전사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도주하다가 카이사르군에 잡혀 죽었다. 폼페이우스의 둘째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만이 히스파니아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동료 집정관, 그해말 파비우스가 병사하여 이후 보궐집정관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로마 건국 기념일인 4월 21일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 이어 그는 기원전 46년 임기 6개월이었던 독재관 임기 규정을 변경,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카이사르는 2년 동안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유언장 작성-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미리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이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복지 정책- 카이사르는 국가에서 곡물의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 달력 개정-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 수도 재개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다. 포룸 로마눔의 내부에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바실리카 율리아가 지어졌다. 카이사르는 사이프타 율리아, 마르켈루스 극장(훗날,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은 조카를 기리기 위해 극장의 이름에 조카의 이름을 붙였다.)도 건설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도심을 확장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완공하지 못한 건축물은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했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황제들은 그를 따라 포룸을 건설 및 발전시켰다.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로마의 교육과 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재건- 카이사르는 로마세계의 도시개발을 꾀하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재건 및 건설하였다. 이후, 제정시대에 카르타고는 크게 발전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금융 개혁- 카이사르는 금융 개혁도 실시하였다. 이자율의 제한을 연리 12% 이하로 정하였고 물가가 폭등한 내전 이전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원로원 체제 약화-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는 개혁도 진행시켰다. 갈리아를 비롯한 속주의 유력자들에게 원로원의석을 제공하여 원로원의 정원을 900명으로 늘였다. 이는 키케로나 마르쿠스 브루투스 같이 속주민과의 융합을 싫어하는 보수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관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던 원로원 최종권고를 완전히 폐지해 버려, 원로원의 강권을 박탈했다. 사법 개혁- 카이사르는 사법 개혁도 실시하였다. 앞서 말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하여 재판도 받지 않고 로마 시민이 처형당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을 부활시켰다. 배심원의 자격조건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배심원 구성비율을 둘러싼 다툼을 종식시켰다. 카이사르는 재판이 나온 뒤의 항소를 민회가 아닌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에게 제기하도록 바꾸었다. 그리고 정치범에 대한 최고형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규정했다. 교통 규제- 카이사르는 혼잡한 로마의 교통을 규제했다. 낮에 수레가 다닐 수 없게 함으로써 교통의 혼잡함을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밤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법률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을 들으며 잠을 자야했다. 갈리아 키살피나 주민에게 시민권 지급-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의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이것은 갈리아전쟁 당시 카이사르에게 후방지원을 아끼지 않은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각한 본국의 경계는 북이탈리아를 포함한 것임을 보여준다. 치안 대책- 카이사르는 기존에는 없었던 치안대를 만들어 치안대책을 강구했다. 카이사르 이전에 치안대가 없던 까닭에 로마에 정치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치안대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였다. 그 밖의 개혁-그 밖에 늪지를 개척하는 사업과 오스티아 항만 개조, 해방노예 등용을 추진했다. 종신 독재관 취임- 기원전 44년 2월 15일 그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었고, 성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암살자들이 칼을 들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인데,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연회장에서 도망쳐나온 의원들이 이미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소리쳐 말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절대권력자의 죽음에 기쁨을 터뜨렸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고참병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유증을 통해 그에게 유산의 2/3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유서에는 포로로마노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에서 한명당 300세르테르티우스를 지급하라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유산의 2/3은 그리 많지않은 돈이였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암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 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카이사르에게는 무덤이 없다. 그의 유해는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는데, 불길이 꺼져갈 무렵 내린 세찬 비에 유해를 태운재가 씻겨갔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 간혹 카이사르가 뇌전증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뇌전증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뇌전증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대표작인 갈리아 전쟁기가 "알몸과 같고 순수하며 의복과 같은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 던져버렸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있다"며 이어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는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라고 평가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전량 회수 및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리아 전기(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기(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기(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지롤라모 카르다노 지롤라모 카르다노 (Girolamo Cardano, 1501년 9월 24일 - 1576년 9월 21일) 이탈리아 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죽었다. 수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본업은 의사였다. 점성술사, 도박사, 철학자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친구였고, 수학적 재능이 있던 변호사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카르다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가 그를 사산시키려 했다고 쓰여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외에 3명의 자식을 전염병으로 잃고, 그를 낳은 직후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이주했다. 1520년 파비아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후에 파도바로 학교를 옮겨 약학을 공부한다. 그는 성격이 특이하고 배타적이어서 친구가 거의 없었고, 졸업 후 직업을 찾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당시 그는 의학을 전공해 의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결혼 후 그는 수학교사가 돼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시골에서 의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1544년에는 밀라노 대학의 기하학 교수가 됐다. 카르다노는 재판관을 치료해 줌으로써 망명있는 의사가 되고, 돈을 많이 번다. 또한, 그의 소견은 재판장에서 신뢰를 얻는다. 그는 발진 티프스(typhoid fever)를 처음 발견한 의사이기도 하다. -수학적 업적 -역학 분야의 업적 : ‘천체를 제외하고는 영속적인 운동은 없다’는 주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의사로서의 명성 : 천식 치료, 탈장 수술법 개발, 발진티푸스에 대한 최초의 임상 기록을 남김. 카르다노가 살던 시대에는 수학경기가 있었는데 주어진 문제를 가장 빨리 푸는 사람에게 상금이 주어졌다고 한다. 카르다노는 상금을 혼자서 많이 갖기도 했다. 1570년에는 종교재판을 받고 몇달간 수감되기도 했다. 점성술을 퍼뜨린 죄였다. 카르다노는 점성술사이기도 해서 자신이 1576년 9월 21일에 죽는다고 하였고, 자신이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날 로마에서 자살을 하였다. 또 카르다노는 영예를 누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카르다노의 말년 또한 행복하진 못했다. 아내를 잃고 사랑하는 아들이 처형을 당하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수학자 카르다노는 말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들의 파멸을 지켜보며 나는 결국 노름을 끊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학문보다 위대하다!" 장쩌민 장쩌민(, 1926년 8월 17일 ~ )은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삼개대표사상을 발표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제3대 주석(1993 ~ 2003)이다. 1993년 3월 국가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공산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한 적이 있다. 당시 중화민국 장쑤 성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자신들의 친삼촌들 중 하나가 그 당시 불법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하여 투쟁에서 사망한 후, 그의 부친은 어린 장쩌민에게 신칭 구의 혈통을 지속적으로 상속을 가지려 한 생존 가족원들로 채택을 위하여 제공하였다. 장쩌민은 194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듬해 상하이 자오퉁 대학에서 전기공학과를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에 권력을 차지한 후,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몇몇의 직위들을 취하였는 데 중국공산당 위원회의 서기장, 식품 공장, 비누 공장, 기계 공장의 공장장을 지냈다. 195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 연수생으로 보내졌다. 이듬해 귀국 후, 1966년까지 창춘, 우한, 상하이 등지를 옮겨가며 공장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로 일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곧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어 10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다가, 1976년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 책임자로 복귀하였다. 1980년 국가 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 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상하이 시장이 되고, 1987년 상하이 시의 당 서기장직도 겸직,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천안문 광장 시위를 묵인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같은 달에 개최된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총서기에 선출되었다. 톈안먼 사건에 이어 장쩌민은 망신을 당한 자오쯔양의 뒤를 이으는 데 중국공산당의 총서기로서 덩샤오핑에 의하여 연장 정치인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그는 그해 11월 덩샤오핑이 물러날 때 중앙 군사 위원회의 의장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덩샤오핑처럼 장쩌민은 경제적 개혁을 주창하였으나 한편으론 정치적 개혁을 염려하면서 보수적이도 하였다. 상하이의 시장으로서 그는 경제 개혁 시리즈를 일으켜 시행하였다. 예들 들어, 상하이는 공산당의 교리에 명확하게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토지 사용 권리 경매를 허용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도시였다. 장쩌민은 외국인 투자인들의 근심들에 대개 책임적이었고, 그 일은 그들로부터 칭찬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경제와 정치적 상태는 물론 정권의 정책들의 솔직한 비판으로 잘 알려진 상하이의 발간 신문 월드 헤럴드의 편집장 친번리를 면직하였으며, 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선으로부터 일탈한 장기적 기사를 쓴 신문이었다. 몇몇 학생들이 사망한 상하이에서 벌어진 학생 항의들에 장쩌민의 활동과 실력있는 조종은 그의 정치적 경력을 강화하였다. 공산당 총서기가 된 후, 그는 믿음적으로 새로운 당의 전선을 따랐다. 예를 들어,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 정치적 소란에 적개심의 외부 권력에 핑계를 대었다. 1989년 국경일 연설에서 국제적 반동의 힘들이 "사회주의 국가들을 잠입하고 영향을 주는 데 정치, 경제와 문화적 의미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일시적 어려움과 개혁들을 개척한다. 그들은 서방 세계의 안 보이는 숭배를 육성한 이들을 통하여 이른바 반체제자들을 후원하고, 서방의 자본주의 세계의 정치와 경제적 모범들, 가격의 분별, 퇴폐적인 아이디어와 생활 방식을 보급시킨다.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사고들을 일으키고, 소란의 음모를 짜고, 파괴시키는 활동들에 종사하고 있다."라고 역설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당의 공무원들을 고르고 진급시키는 데 전문적 지식들에 "사회주의"에 관한 새롭게 강조를 놓았다. 1990년 인민일보의 앞면 논평에 "사람을 선택하고, 신임하고, 교육을 시키는 데 우리는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이 마르크스주의로 충성하는 모든 수준으로 필수로서 혁명적 전망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두드러지게 인용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 지도자로서 그를 증진시키는 데 덩샤오핑이 발휘한 노력들 중 악의에서 장쩌민은 자신 이전의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같은 또다른 과도적인 지도력 인물로서 끝났을 것이다. 1989년 덩샤오핑은 정식으로 물러났다. 장쩌민은 당 혹은 군대 안에서 후원의 기초를 두지 않았고, 1980년대 이래 착수된 자본주의적 모험들은 경제 계급의 불균형을 강조하였다. 장은 일단 1991년 3월 3일을 기하여 중공 반혁명당 집단 사인방 사건으로 무기징역형 복역 중이던 장칭(江靑) 前 중공 국가원수 영부인을 형집행정지 석방한 동시에 가택연금 조치 처분하였고 장칭은 가택연금에 있던 도중 1991년 5월 14일, 향년 77세로 자살하였다. 한편 도쿄 비지니스 투데이는 사회적 체제의 생활비를 위한 정통 대책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농촌들에서 1.67 백만의 소란들을 기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소란들은 농부와 정부 사이에 8천명 이상의 사망과 반감의 결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도시 지역들은 늘어난 범죄를 경험하고, 혁명적 단체들이 나타났다. 1994년 가을에 투쟁 단체가 철도에 폭발물을 놓아 중화인민공화국 육군 13사단으로부터 군인들을 태운 열차를 탈선시켰다. 이 폭발 사건으로 170명이 사망하고, 190명이 부상을 입었다. 더욱 나가 중화인민공화국은 교도소 노동과 정치적 감금을 포함한 인권 학대들의 넓게 퍼진 보고들과 함께 세계의 나머지와 함께 관계가 증가적으로 긴장되었다. 1996년 4월 법률과 체제를 재설립하는 시도에서 장쩌민은 "얀다"(강타)로 알려진 범죄 반대 추진력을 발포하였다. 6달 안의 얀다 운동은 16만명 이상의 구속과 1천번 이상의 사형들에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이들은 의안 제출권의 비판적이었어도 정부는 늘어나는 범죄 통계에 의하여 경보가 전달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에 의하여 잘 받아졌다고 주장하였다. 장쩌민은 또한 홍콩을 개선하고, 자신을 따르는 데 타이완을 납득시키는 시도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외교 부문에서는 미국과 유럽과의 친선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1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지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장쩌민 주석이 시베리아 범 한 쌍을 기증하였다. 2002년 후진타오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긴 뒤에도 국가주석직과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2003년 3월 국가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긴 뒤 1년 정도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2004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1912년 1912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23년 1923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야생동물·처녀성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디아나()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폴론과는 남매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곰과 사슴, 활과 화살, 초승달, 토끼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몸종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사냥을 하며 돌아다니는 야생적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달이 비칠 때 그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때는 산짐승과 초목이 춤을 춘다고 한다. 아폴론과 마찬가지로 활을 무기로 들고다니며 그의 화살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므로 희생물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성격이 거칠고 복수심이 강해서 그의 진노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허다하다. 헤라는 레토가 임신한 쌍둥이들이 아버지인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큰 뱀 피톤에게 레토를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햇빛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그의 해산을 어떻게든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산이 임박하자 레토는 곤경에 처했다. 헤라의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어느 곳도 레토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토는 해산할 장소를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오르티기아 섬에 당도하였다. 레토가 발을 디디자마자 포세이돈이 섬 위로 파도를 솟구치게 하여 햇빛을 막아주었다. 헤라의 출산 금지령에 어긋나지 않자 레토는 아르테미스를 낳을 수 있었다. 남매 중 먼저 태어난 아르테미스는 생후 9일째 되던 날 레토가 남동생 아폴론을 낳는 것을 곁에서 도왔다. 아르테미스는 3살이 되자 아버지 제우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졸랐는데, 그 선물은 다름아닌 영원한 처녀성이었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평생 자신이 처녀로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밖에도 아르테미스는 크레타 섬에서 9살 된 시녀들을 골랐으며, 또 퀴를롭스를 찾아가 활과 화살을 받았다. 아르테미스는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화살을 쏘아보았는데,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은 나무에 맞았고, 세 번째 화살은 짐승에 맞았으며, 네 번째 화살은 부정한 자들의 도시에 떨어졌다고 한다.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겸손함이 없었던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레토는 훌륭한 자식을 2명밖에 낳지 못했지만 자신은 훌륭한 자식을 14명이나 낳았다고 뽐내고 다녔다. 이에 진노한 레토는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에게 니오베에게 벌을 내리라고 말했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은 각각 그녀의 딸 7명과 아들 7명을 모두 활로 쏘아 죽였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남편 암피온은 자살하였고, 니오베는 계속 한 곳에서 흐느끼다 바위로 변해버렸다.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칼리스토에게 눈독을 들인 제우스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 아르테미스로 변신하여 그와 동침하였다. 얼마 후 칼리스토는 임신하여 배가 볼록해졌고, 이를 눈치챈 아르테미스는 처녀성을 지키겠다는 자신과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곰으로 모습을 바꾸는 벌을 내렸다. 곰이 된 칼리스토는 아르카스라는 아들을 낳은 후 숲에서 홀로 지냈는데, 어느 날 장성한 아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한눈에 아들을 알아본 그가 아들한테 다가갔지만, 어머니를 몰라본 아들은 겁에 잔뜩 질려 화살을 쏘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본 제우스는 동정심을 느껴 아들을 곰으로 변하게 한 다음 어머니와 아들을 함께 우주로 올려보내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로 만들어주었다. 악타이온이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숲 속에서 한창 사냥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근처의 개울가에서 아르테미스가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에게 물을 뿌려 사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자 악타이온이 데리고 온 사냥개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냥감인 줄 착각하고 달려들었다. 계속 사냥개들을 피해 달아나다 지친 악타이온은 결국 사냥개들에게 붙잡혀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르테미스는 자기 못지않은 뛰어난 사냥꾼인 포세이돈의 아들 오리온과 함께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 보던 아폴론은 아르테미스가 오리온에게 반하여 처녀로 살겠다는 맹세를 저버릴지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던 중 멀리서 오리온이 머리만 내민 채 수영하는 것을 보고, 아르테미스에게 저 멀리 파도에 떠다니는 저것을 한번 쏘아 맞추어보라고 말했다. 그것이 오리온인지 몰랐던 아르테미스는 활을 겨누어 오리온을 쏘아 죽여버렸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아르테미스는 아폴론의 아들이자 후에 의학의 신으로 숭배받게 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오리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제우스가 이를 가로막았다. 그래서 아르테미스는 오리온의 시신을 우주로 올려보내 오리온자리로 만들어주었다. 고대 에베소 주민들은 아르테미스를 유방이 가득한 여신으로 묘사할 정도로 풍요의 신으로 숭배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가 아르테미스 신앙을 이용하여 아르테미스 신전모형을 만들어 팔았는데,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성 바울의 설교를 들은 주민들은 더이상 신전모형을 사지 않았다.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은장이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제자들을 끌고 극장안에 들어갔으며,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이들은 모임을 2시간이나 계속하였다. 성 바울은 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제자들과 소아시아의 고관들이 말려서 극장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시청 서기관은 은장이들에게 "여러분의 모임이 소요죄로 처벌될 수 있으므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법원과 로마제국의 총독들에게 고소하십시오.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것도 아니고, 신전 물건을 절도한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을 끌고온 것은 경솔한 행동입니다."라고 설득해서 해산시켰다.(사도행전 19장 23절에서 41절,새번역을 인용함) 한글성서의 새번역성서와 개역개정판 성서에서는 아데미라고 음역했다. 아레스 아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마르스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헤파이스토스와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제우스의 차남>에 속한다. 창, 칼, 방패, 놋쇠 갑옷, 전차, 독수리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같은 전쟁신이자 여동생인 아테나가 전략과 방어를 중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쟁의 광란과 학살, 파괴적인 측면을 상징하였는데, 호전적인 성격과 사나운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네 마리의 군마가 끄는 전차를 타며 나타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러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아레스는 체구가 크고 전쟁을 좋아하지만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대부분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헥토르의 편에 서서 그리스군과 싸울 때 디오메데스에게 상처를 입고 쓰러지기도 하였고, 알로아다이에 의해 13개월 동안 항아리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그와 관련한 신화와 활약이 많지 않은 이유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테나와 달리 호전적인 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레스의 패배는 전투의 승패는 본능적인 파괴와 호전성보다는 지략과 전술이 좌우함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아레스도 신들과 기간테스간의 전쟁에서는 활약하여 이긴 적이 있다. 아레스는 거대한 산을 번쩍 들어 기간테스를 깔아뭉개 죽였다. 아레스는 본래 트라키아 지방에서 숭배되었던 신으로 전해지며, 그리스의 일부 북부 지역에서만 숭배되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중요한 주신으로 숭배되어 초기에는 전쟁 포로를 아레스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으며, 라코니아의 게론트라이에서 열린 그의 축제 기간에는 여자들이 신성한 숲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와 반면에 테게아의 여자들은 그를 기나이코토이나스(Gynaikothoinas)라 칭하여 제물을 바치고 찬양하였다. 아테네에서는 아레오파고스 기슭에 아레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다. = 특징 및 애정 = 모든 신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 영웅 헤라클레스(헤베의 남편) 역시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애인이었던 아프로디테와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 그의 숙부이자 지하세계의 황제 하데스는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호전적인 성격임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 함께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피해 자주 밀회를 즐겼다. 한번은 사랑을 나누던 중 헤파이스토스가 미리 설치한 그물에 걸려 다른 신들로부터 망신을 당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계속 교제를 하였다. 서로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였는데,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에게 반하자 아레스는 멧돼지로 변하여 그를 받아 죽이고, 아프로디테는 에오스가 아레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인간은 모두 죽는 저주를 내린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와 두려움을 뜻하는 데이모스, 에로스,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형제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며 살육을 할 때마다 적군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와 그녀의 자식들, 그라이아이 중의 한 명인 싸움의 여신 에니오도 이들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 다녔다. 아레스는 아테네의 왕 케크로프스의 딸 아글라우로스 사이에서 낳은 딸 알키페를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가 겁탈하자 그를 때려 죽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고소하여 이해당사자들을 제외한 올림포스 신들로 구성된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논의 결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아레스에게 무죄가 선포되었다. 그 뒤 이 재판을 기념하기 위해 재판이 열린 언덕을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와 살인에 관한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법정을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최고 법원을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동료 신들과 심지어 부모조차도 아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하며 그를 미치광이, 악의 화신, 파괴자, 피투성이의 살인마로 묘사한다. 서사시에서 수록된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개별적으로 전투에 개입하였는데, 아레스는 정의와 명분, 특별히 정해진 진영이 없이 잔인한 전투를 즐기며 많은 살육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트로이의 편에 서게 된 아레스에게 그리스군이 고전하자, 그리스의 편에 서있던 아테나는 역시 같은 편인 헤라의 명령으로 디오메데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어 그가 창으로 아레스의 복부에 상처를 입히도록 한다. 제우스는 아레스가 부상을 당한 채 큰 소리로 울며 돌아오자 이렇게 호통을 친다. "이 변절자야, 나는 올림포스의 신 중 네가 가장 밉다. 너는 전쟁과 싸움 밖에는 모르는구나." 더구나 아테나 역시 이복오빠인 아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는 포악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오라버니의의 아우님이신 헤파이스토스 오라버니께서 모든 면에서 차라리 낫습니다." 서울특별시장 서울특별시장(서울特別市長)은 서울특별시의 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이다. 다른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은 차관급이지만, 특별시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다만 윤치영 전 시장 대에는 특별히 총리급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특별시장은 정부 지휘 없이 독자적 예산 편성과 일부 세금 조달 등 행정 명령 독자 행사 권한이 있다. 현 재임자는 제37대 박원순 시장이다. 서울특별시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 시기의 초대 시장, 즉 김형민 전 서울특별자유시장을 초대 시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리듬 게임 리듬 게임이란 음악에 맞춰서 손, 혹은 몸을 사용해 조작하는 게임을 총칭하는 말이다. 리듬 액션 게임이라고도 한다. 1996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사의 파라파 더 래퍼를 시작으로 다양한 리듬 게임이 출시되었는데, 특히 1998년 코나미사에서 아케이드 게임장용으로 출시한 비트매니아를 시작으로 리듬 게임 열풍이 불기 시작해 다양한 리듬 게임 시리즈가 출시되었다. 리듬 게임 혹은 리듬 액션 게임은 플레이어의 리듬 감각을 사용하는 액션 게임을 총칭한다. 이 게임은 정확한 타이밍에 지정된 조작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며, 화면에는 보통 행해야 하는 조작의 종류와 행한 조작의 정확성을 표시한다. 리듬 게임의 인기는 기타, 드럼이나 마라카스와 같은 악기를 모방한 컨트롤러와 댄스 게임에 사용하기 위한 댄스 매트 등의 시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컨트롤 패드와 같은 기존의 입력 장치 또한 쓰이고 있다. 한용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년 자신에게 최남선을 언급한 김홍규에게는 "아직도 최남선이 살아 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최남선이 자신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계속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었소."라면서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만해는 고종 16년인 1879년 8월 29일에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溫陽 方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때의 이름은 유천(貞玉)이며 용운은 출가 했을때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만해의 호적상 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그의 형제로는 형 한윤경이 있었다 본관은 청주이며,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明溍)의 후손이었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했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출가하였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때 그는 외면하였다 한다. 1894년에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뒤 한동안 설악산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1896년 하산하여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모면하고 1897년에 귀향하였으나 거처가 없던 그는 1901년 처가에서 2년간 은신하다가 가출한 후 나중에 다시 재출가를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하여 재입산,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김연곡(金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8년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한 뒤 1909년 5월부터 6개월간 원종종무원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문명을 시찰하고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여행 하던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1909년 12월에 귀국한 뒤 1910년 이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10월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몽골, 시베리아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여 1910년 초에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앙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09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5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을 청원서 형식으로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진정서로 올렸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1월에 한용운은 다시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청하는 탄원 올렸으나 두 번째 탄원 역시 묵살당하고 만다. 한일합방 직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내지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 1910년 12월 그는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지사(志士)들을 만나서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한편 1913년 회동서간에서 다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행하였다. 1913년 불교학원과 명진학교의 교사로 초대되어 교편을 잡았다. 1913년 말 범어사에 들어가 범어사의 대장경을 열람하고서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3년 석전 박한영 등과 함께 조선 불교 종무원을 창설하는데 참여했고 그는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였다. 1915년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菜根譚)》의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출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의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해외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 중국 등지에 해외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미국 국민들은 대다수가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처럼 인식하던 당대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의 해외 포교 주장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취급했다.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인도 산스크리트어로서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8년 11월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 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체포되기 전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퍼부었다."고 한다. 그는 피신하지 못하고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체포된 만해는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 그가 출옥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대성질타하였다. 1922년 5월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극도로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한편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은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지만 그는 형의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종손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다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선임되었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 (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인위적으로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 1927년 2월에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또한 주량 조절만 가능하다면 승려들도 음주를 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 잡지《불교(佛敎)》의 필진이 되었다. 1931년 6월 잡지《불교(佛敎)》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만공·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6월부터 2년 남짓 동안은 친일파로 전락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를 발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33년 9월 결국 권상로에게 재인수하고 만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 그간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한편 조선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만해."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만해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남선이 전향을 선언하던 날 한용운은 그의 제사상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31년 53세의 나이에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21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다음 해에 딸 영숙이 태어나고 1933년에 심우장을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1935년 장편소설《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7년에 독립군 전쟁 중 사망한 김동삼의 시신이 조선으로 도착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였다. 석방 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 그는〈님의 침묵〉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와 중편소설 죽음 등을 발표하였다.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만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였지만 병원 진료를 거부하다가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열반에 들었다.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 만해의 불교 사상은 흔히 불교사회혁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역사 이래로 지배자들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해왔음을 인식하고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민중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그는 불교혁신론을 주장,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 간부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의 해석서, 해석 칼럼과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의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잡지인 《유심》, 《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며 불교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생활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승려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이 편견이라 주장하고,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의 입장을 이해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승려의 결혼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원효 등 대처승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한편 그의 대처승 허용 운동, 승려의 결혼 허가 주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해방 직후에도 조계종단에서는 만해가 승려의 결혼 자유화를 주장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였기에 더욱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다만 일부 불교개혁을 추구하였던 운동권 승려의 그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하는 재가불교청년단체에서 만해를 찾았을 뿐이다. 사원운영에 있어서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와 도시에 사찰 건립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근본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편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특히 법당은 산사라는 개념에 반대하였다. 사찰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 한용운의 지적이었다. 기존의 염불당 등과 교리에 얽매이는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도시로 나와서 여러 국민들과 직접 만나고 직접 면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승려들도 노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최소한 사찰 주변에 땅을 마련하여 자기가 먹을 쌀과 곡식은 스스로 만들며 불자들의 시주에만 의존하는 그릇된 사상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그는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역사를 끊임없는 변전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 참여하고 뛰어들라고 촉구했다. 한용운은 곧 중생의 삶과 일상에서 정토를 구하고, 정토로 인도하자고 역설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 발표에 반대하였다. 총독부는 사찰들이 무분별하게 운영된다는 것을 핑계로 조선사찰령의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의 직속 관리하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규약, 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과 간섭 의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되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에서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비록, 당시 승려들의 개혁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대와 비방에 시달리렸지만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1910년말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 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1911년 한용운은 석전 박한영, 백용성 등과 이회광 규탄 및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 임제종 창립을 통해 그전까지는 다소 불분명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사상이 뚜렷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정교분립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교를 정부 혹은 체제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녀는 첫 번째 아내 전정숙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한보국과 두 번째 아내 유숙원 사이에서 얻은 딸 한영숙이 있다. 한보국은 고향인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하였다.14세에 조혼 풍습에 따라 결혼한 전정숙과는 이혼하고 후에 승려 생활 도중인 1931년 53세에 21세 연하의 유숙원과 결혼하여 대처승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한보국은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 1명은 어려서 요절하였다. 한보국의 다른 부인은 1960년대 무렵 인천에 거주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 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 중식 중식은 여러 뜻이 있다. 킬로그램 킬로그램(, )은 SI 단위계에서 사용하는 질량의 기본 단위이다. 기호는 kg이다. 국제 단위계의 기본단위 가운데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만이 역사적인 이유로 그 명칭이 접두어를 포함하고 있다. 질량단위의 십진 배수 및 분수에 대한 명칭 및 기호는 단위 명칭 “그램”에 접두어 명칭을 붙이고 단위기호 “g”에 접두어 기호를 붙여서 사용한다. 킬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킬로그램 원기로 정의되는 단위이다. 백금-이리듐으로 만들어진 국제원기는 1889년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정한 상태 하에 국제도량형국(BIPM)에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국제도량형총회는 국제원기를 인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질량의 크기를 결정하는 표준물체로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정된 킬로그램원기(백금 90%, 이리듐 10%)가 사용되며, 이 원기의 질량을 1kg으로 정하여 질량을 비교하는 질량의 표준단위로 사용한다. 현재 킬로그램의 정의는 1901년 3차 국제도량형총회(CGPM)가 정한 "kg은 질량의 기본 단위이며 그 질량은 국제 킬로그램원기의 질량과 같다"는 정의에 따른다. 이에 따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 국제도량형국(BIPM) 금고에는 가로·세로 각 39mm 크기의 1kg 원기 원통이 보관되어 있다. 종전에는 7개의 SI 기본 단위 가운데 시간(s)·길이(m)·전류(A)·온도(K)·물질량(mol)·광도(cd) 등 6개 단위는 모두 물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반하여, 질량(kg)만이 유일하게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을 경우 인공 원기의 물리적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1kg의 기준이 바뀌면 질량과 관련된 물리량의 정의도 덩달아 바뀌게 된다. 실제로 국제도량형국(BIPM)은 2007년 "kg 원기의 질량이 50㎍(마이크로그램) 줄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과학자들이 kg의 정의를 재정립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든 인공 원기를 대체하여 kg 표준을 재정립하기 위해 국가간에도 '1kg 표준 정의'를 두고 치열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kg의 정의를 재정립하려는 국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첫째, 1kg짜리 실리콘 구를 만든 뒤 그 안에 있는 원자 수를 세어 이를 질량으로 환산하는 일명 '아보가드로 프로젝트(Avogadro project)' 방식과 둘째, 플랑크 상수를 사용하여 전기력을 중력으로 환산하는 소위 '와트 저울(Watt balance)' 방식으로 kg을 재정의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한국은 미국, 프랑스 등이 연구하고 있는 '와트 저울' 방식을 지지하였다. 2011년 10월 21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열린 제24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는 120년 이상 킬로그램의 정의로 사용된 '국제 킬로그램 원기(原器)'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의를 도입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2018년 11월 16일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아래와 같이 재정의 되었다. 새로운 정의는 세계 측정의 날인 2019년 5월 20일부터 발효되었다. 새 정의는 질량-에너지 등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물질적인 표준 원기 없이 kg의 정의가 가능하다. SI 접두어는 두 개 이상이 연속해서 붙여질 수 없기 때문에, 접두어 사용시에는 이미 접두어가 붙은 단어인 ‘킬로그램’ 대신 ‘그램’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킬로그램의 백만분의 일은 1 µkg (마이크로킬로그램)이 아닌 1 mg (밀리그램)이다. 뉴턴 뉴턴(newton)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경(,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인 formula_1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표시가능함을 증명하고, 뉴턴은 그것을 증명했다.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아이작 뉴턴은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뉴턴은 뉴턴의 아버지의 별세 3달 후에 태어났다. 조산아였던 그는 몸집이 매우 작았다. 뉴턴이 3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그는 외가에 맡겨지게 되었다. 뉴턴은 재혼한 양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보였고, 이는 뉴턴 자신이 지은 "19살까지의 죄 목록"에도 적혀 있다. 뉴턴의 어머니는 재혼 후 아이를 3명 더 낳았으나, 뉴턴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8년 후, 두 번째 남편이 죽고 나서야 돌아왔다. 1661년 6월 뉴턴은 선생님의 제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 대학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뉴턴은 이를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현대 철학자의 철학으로 바꾸고, 천문학 역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천문학자의 이론으로 대신하였다. 1665년 그는 이항정리를 일반화하였고, 이는 훗날 미적분학의 기초가 되었다.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폐교하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된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수학의 발견에 대해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는 새 망원경을 만들어 왕립 학회에 제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왕립 학회는 그것에 감명받아 1672년에 뉴턴을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1672년에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무지개 색과 똑같았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색광으로 변했다.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색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또,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의 빛은 각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인 뉴턴 환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단,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을 인정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 전부터 싹이 터 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사람들은 흔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낸 뉴턴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어떤 사람들은 뉴턴의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할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수학의 왕자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1717년,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밀봉된 두 유리 용기에 온도계를 넣었더니. 진공 속에 넣은 온도계가 다른 온도계만큼 빠른 속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뉴턴은 이것을 공기보다 더 적게 존재하는 미묘한 에테르를 통해 열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턴은 국회의원(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이사(1696년) 등의 사회 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훅이 죽은 뒤,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1703년)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1705년에 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공중으로 던져진 볼이 만드는 궤적 곡선 또는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행성들의 궤도 곡선은 수학자들에게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대수 체계를 다루는 것은 중세의 이슬람 학자에 의해 발전되었다. 데카르트는 대수 용어(x,y)를 활용하여 기하학적 모양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을 보여주었고, 데카르트 좌표라고 알려진 것과 그들이 x,y와 그래프를 이용하여 그린 방법을 보여주었다. 직선의 그래프는 계산하기 쉬운 특성을 가졌다. 바빌로니아 시대 때부터 알려진 공식은 직선 아래의 면적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 기울기(직선의 경사에 의해 나타나는 변화율)는 y좌표의 값을 관련된 x좌표의 변화로 나눈 값이다. 그러나 곡선에서는 이러한 값들을 계산하기가 더욱 어렵다. 뉴턴 이전의 수학자들은 이것을 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근사치를 계산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곡선을 연속되는 직선들로, 그리고 곡선 아래의 면적은 연속된 사각형들과 삼각형으로 계산한다. 많거나 작은 사각형들과 삼각형들을 사용하여 더 정확한 근사값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근사값일 뿐이다. 뉴턴은 울즈소프에 도착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하여 도전을 시작하였다. 1665년 2월에 그는 여전히 대학교 3학년이였다.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와 그의 스승 베로, 둘 다 특정 곡선을 위한 공식을 설명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것들을 모든 곡선에 일반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페르마의 접선을 그리는 방법으로부터 이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고 이것을 일반화 시켰다.”라고 그는 나중에 밝혔다. 이 문제에 대한 열쇠는 무한 급수를 사용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었다. 뉴턴은 이것을 깨달았다. 무한대까지 더하기 대신에 무한 급수와 관련된 합이 유한의 목표나 한계값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하여 곡선을 사각형으로 구할 수 있었다. 효과적으로 무한수를 사용하고 작은 사각형들을 곡선 아래 면적에 주어서 구했다. 이것이 '적분' 이다 뉴턴의 운동법칙(Newton의運動法則)은 물리학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기본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고전 역학의 기초인 뉴턴의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르는데, 제일 법칙은 관성의 법칙이고 제이 법칙은 가속도의 법칙이며 제삼 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뉴턴의 과학적 발견은 정밀하며 중력의 힘을 수학적 물리량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의 시대에 그는 중력의 역자승 법칙을 밝힌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력의 역자승 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중력 인력은 힘을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따라 다르다. 사과가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이 달을 계속 그 접선 방향으로부터 지구를 향해 떨어지도록 하는것이 분명하다. 갈릴레오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실험들을 수행하면서 뉴턴은 지표면에서의 중력의 힘이 사과를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그의 책 1권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을 공식화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달을 이용하여 중력을 연구할수 있는지 설명했다. 만약 이 힘이 매우 작다면 달을 직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무 세다면 달의 경로를 너무 많이 휘게 하여 달이 자신의 궤도로 부터 지구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만류인력의 법칙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중력은 물체가 무겁든, 가볍든 크든, 작든 모든 낙하 하는 물체를 똑같이 가속시키기 때문이다. 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된 전제들을 가지고 천체현상으로부터 물체를 태양이나 몇몇 행성으로 향하게 하는 중력을 유도해 낸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에서 자연 철학의 두 개의 주류의 통합을 달성했다. 뉴턴은 프리즘을 연구했었는데, 프리즘으로 하는 초기 실험에서 뉴턴은 다른 색들은 꺾이거나 다른 각도로 굴절된다는 "굴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즘과 벽 사이에 바늘 구멍이 있는 다른 카드를 놓고 완전 적색 또는 청색의 광선이 분리되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프리즘은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굴절시켜 다른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는 청색 빛이 적색 빛보다 더 굴절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프리즘이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뉴턴은 "빛은 다른 굴절성의 광선들의 집합이다"라고 정리했다. 뉴턴은 새로운 빛과 색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두개 더 독창적인 실험들을 고안해냈다. 첫번째는 프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스펙트럼의 경로에 렌즈를 놓는 것이다. 렌즈를 이용해 다른 색 광선들을 합성시키면 원래의 흰색 빛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톱니바퀴를 렌즈와 벽 사이에 놓고, 그 톱니가 렌즈로부터 나오는 다른 색 빛의 광선들이 초점에 도달하기 전에 방해하도록 했다. 결과는 벽에 있는 점은 흰 빛이 차단되면서 통과되는 다른 색 광선들에 따라서 변하였다. 에우클레이데스 에우클레이데스(, 기원전 300년경) 또는 영어식 이름으로 유클리드(, 또는 )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고대 이집트의 수학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어느 나라 수학자인지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재위 기간(기원전 323년~기원전 283년)동안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부탁으로 최초의 대학이자 도서관,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활동하였고(하지만 이 대학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정확한 위치도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알려진 정수론 및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집대성한 업적을 가장 높게 평가받고 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이름은 (잘, 좋게)+(알려짐, 평판)의 합성어이며, "평판이 좋음, 유명함"이라는 뜻이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삶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많지 않고, 그에 관한 소량의 언급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에 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언급마저도 그가 살았던 세기 후에야 프로클로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파포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5세기에 쓰여진 그의 저서 《주석이 달린 원론》을 통해서 에우클레이데스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에우클레이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사이의 기하학의 왕도에 대한 일화는 후세의 창작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다른 고대 그리스 수학자인 메나이크모스와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사이의 일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다. 기하학 원본이라고도 불린다.(원본은 그리스어로 문자라는 뜻이다.) 에우클레이데스 자신의 독창적인 내용들은 별로 없지만, 그 형태가 단순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당시까지 밝혀진 기하학과 정수론의 내용들을 다뤘는데, 10개밖에는 되지 않는 공리들에서 465개나 되는 명제들을 유도해냈다. 내용들 중 많은 부분들이 그 이전의 수학자들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 수학사의 고전이 된 이유는 일정한 공리에서부터 결과를 이끌어내는 논리적인 전개였다. 공리 체계에 바탕을 둔 근대 수학은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 근원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수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의 하나로, 출판된 뒤부터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까지 수학, 특히 기하학을 가르치는데 중요한 교과서로 쓰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리는 기하학의 정리들이 작은 공리로부터 출발해서 연역된다.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은 수백 년동안 순수한 기하학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지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린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 나오는 2개의 정수의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은 지금도 유클리드 호제법이라고 불리며, 소수의 무한성에 대한 정리 역시 오늘날에도 유클리드의 정리로 불린다. 또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독창적 증명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원론》 말고도 현존하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이 밖에도, 문헌에는 에우클레이데스가 집필했다고 수록되어 있는 여러 책들이 전해 오지만, 이들은 짧은 인용을 제외하고는 현존하지 않는다. 위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에우클레이데스의 강연 도중에 한 제자가 "교수님, 수학은 너무 지루합니다. 도대체 그걸 배워서 어디다가 써먹을 수 있죠?"라고 묻자, 에우클레이데스는 하인을 불러서 "여봐라, 배운 것으로 반드시 이득을 얻으려고만 하는 저 친구에게는 동전 세 닢만 주고 강의실 밖으로 쫓아내라."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볼 때, 에우클레이데스는 배우는 그 자체를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칭기즈 칸 칭기즈 칸(, : 1162년 4월 16일-1227년 8월 25일)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칸이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이다. 본명은 테무진(, )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다. 칭기즈칸의 출생년도는 역사서마다 달리서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 칭기즈 칸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 우게가 이끄는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했는데. 예수게이는 이 테무친 우게의 이름을 따서 태어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칭기즈 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 (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하는 배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기마인들이 살던 지역)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이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 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은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본 칭기스칸은 1223년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몽골군은 1260년 봄, 훌라구 칸의 부관인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로,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서하군과의 유격전에서는 연전 연승을 거두어 여러 차례(1205년-1207년, 1209년) 서하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 부대와 장창 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댐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한편 양종 이안전은 농성 기간 동안 금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고,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이러한 일이 몇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1219년,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칭기즈 칸의 분노를 샀다. 칭기스 칸이 호라즘 원정에 앞서 서하에 사신을 보내 출정을 명령하자 아샤 감부라는 탕구트 고관은 이렇게 답했다. 이는 만약 칭기스 칸에게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그는 최고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서하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다. 그러나 호라즘이 몽골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이러한 서하의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임이 드러났다. 1224년, 칭기스 칸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 고원으로 귀환했다. 1225년 봄에 그는 몽골 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 1226년 가을, 칭기스 칸은 서하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칭기스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 칸은 남하하여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 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 칸이 남송이었다고 적었다. 그때 서하는 칭기스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 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칭기스 칸은 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1227년 8월 18일 또는 8월 25일, 칭기스 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칭기즈 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명령하고 죽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 거부가 칭기즈 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섬태멸진 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 사람들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이들 중 살아남은 서하인은 원나라가 세워졌을 때 지배계급인 색목인으로 편성되었다.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의 마달갈(장종, 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장종의 신하였으며,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종증조부 안바가이 칸이 금나라로 끌려가 목마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은 것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은 칭기즈 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 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거란인 출신 장수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도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해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탈취하여 몽골군의 기병력을 대폭 증강하는데 기여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폐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에 의하여 1234년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과 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이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포위해 5일만에 함락했다. 샤 알라 웃딘은 함락 전 성에서 빠져나와 달아났고, 칭기즈 칸은 도망친 샤를 잡기 위해 제베와 수부데이 두 장수에게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할 것을 명했다. 이에 쫓긴 알라 웃딘은 나라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그가 도중 머문 성이나 마을은 몽골군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살던 마잔다란마저 함락당하고 황태후는 몽골군에게 농락당해야 했다.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샤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 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고,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 칸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한편 호라즘 정벌을 떠나기 전 칭기즈 칸은 서하에 참전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이후 몽골이 서하를 재침략하여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호라즘 정벌은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까지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라즘 정벌전 때 호라즘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을 이용하려던 아바스 왕조는 이후 그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이 몽골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무함마드 샤가 몽골의 대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해 많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요인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샤는 뛰어난 통치술로 단기간에 넓은 땅을 차지했으나, 어리석게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자신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해 이슬람 형제의 반감을 샀고, 안정되지 않은 국내 사정을 무시하고 몽골을 도발하여 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 후세에 시대착오적인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원조비사 元朝秘史〉(1240년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반론 - 원의 붕괴는 강력한 전염성 질환에 의한 유라시아의 붕괴가 직접 원인이다. 이로 인한 국제무역이 축소되어 통치자금의 부족을 초래하고 몽골족은 중안아시아의 초원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 원의 소멸이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징기스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스타니스와프 울람 스타니스와프 마르친 울람(, 1909년 4월 13일 리비우 ~ 1984년 5월 13일 뉴멕시코주 산타페)은 폴란드계 미국인 수학자이다. 수소폭탄의 개발자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도시 렘베르크(Lemberg, 현재의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수학 선생은 르부프 학파의 유명한 폴란드 수학자 스테판 바나흐였다. 1938년 미국에 하버드 대학교 주니어 장학생으로 왔다가 장학금을 계속 받지 못하자 위스콘신 대학의 강사진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에서 도피해 온 동생 울람도 부양하였다. 그때 그의 친구 존 폰 노이만이 뉴멕시코에서 추진되는 비밀 계획에 초청했다. 울람이 궁금히 여겨 도서관에서 뉴멕시코에 관한 책을 대출하고 보니 그동안 위스콘신 대학에서 사라졌던 이들의 이름이 책을 먼저 빌려갔던 이들의 목록에 다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울람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울람은 그 후에도 수소폭탄 개발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에드워드 텔러가 제시했던 수소폭탄의 모형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더 나은 방법을 개발했다. 말년에는 핵 펄스 추진(nuclear pulse propulsion)을 발명했다. 그는 이를 그의 발명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밝혔다. 1975년 1975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55년 1955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5년 1995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87년 1987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80년 1980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64년 1964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에페소스 에페소스(, , ,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게오르크 옴 게오르크 시몬 옴(Georg Simon Ohm, 1789년 3월 16일 ~ 1854년 7월 6일)은 독일 물리학자이다. 독일 에를랑겐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아버지로부터 대장장이 기술을 배웠다. 만 16세인 1805년부터 에얼랑엔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 철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1년 후에 학업을 쉬고 스위스의 사립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일한다. 22세에 에얼랑엔 대학으로 돌아와 1811년 빛과 색에 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자격도 통과한다. 이후 3학기 동안 모교에서 수학강사로 일한다. 1813년에는 밤베르크의 직업학교(Realschule)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17년부턴 쾰른의 예수회 김나지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고, 1826년에는 베를린의 사관학교(Kriegsschule)에서 교관을 지냈다. 당시부터 옴의 주된 관심사는 전기현상이었다. 1833년 뉜른베르크의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839년부터는 학장을 지냈다. 1849년엔 뮌헨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54년 7월 6일, 옴은 뮌헨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뮌헨 구시가지 남부 공동묘지(Südfriedhof)에 묻혀있다. 피에르 드 페르마 피에르 드 페르마(, , 1607년 ~1665년 1월 12일)는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수학자이다. 페르마는 미적분학에서 이용되는 여러 방법을 창안하는 등 많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또 현대 정수론의 창시자로 알려졌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카테시안 좌표를 도입하였다.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정리를 증명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formula_1보다 큰 정수 formula_2에 대하여 식 formula_3을 만족하는 formula_4이 아닌 정수해 formula_5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르마가 증명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수학자들은 그가 증명했다는 소문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성품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증명했다고 믿고 있다. 1607년 프랑스 타른에가론주 보몽 드 로마뉴()에서 보몽의 부영사이며, 피혁상을 하던 도미니크 페르마()와 법의학자 가문의 딸이었던 클레르 드 롱()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르마의 가족은 2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평범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페르마는 1623년 오를레앙 대학교에 입학해서, 1626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페르마는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오크어에 능통하였다. 이후 보르도로 이사하였고, 여기에서 아폴로니오스의 논문을 접한 뒤, 취미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증명을 해도, "언론의 각광을 받으니까 피곤하다"라는 이유로 절대 증명을 발표하지 않는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페르마의 친한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허세가 심한 성격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그랬다고 한다. 실제 페르마가 증명했다고 알려진 정리들 중, 페르마가 직관으로 발견하였지만, 증명하지 못한 정리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책의 여백에다가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1630년 툴루즈 지방의 청원위원으로 취임했으며, 그 해에 외사촌 누이인 루이제 드 롱과 결혼해서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귀족 지위의 표시로, 성에 "드"()를 추가하였다. 그는 생애의 34년을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다가, 1665년 1월 12일 타른주 카스트로()에서 한 사건을 처리한 이틀 뒤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페르마의 수학에 대한 기여는 지인들과의 서신 교환(서로 내기 문제를 주고 받았던), 디오판토스의 산술을 읽으면서 써넣은 짧은 글 등으로 한정된다. 그럼에도 그는 르네 데카르트와 함께 17세기 전반기의 두 주요 수학자로 불리고 있다. 데카르트의 발견과 독립적으로 페르마도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확률론을 확립시킨 블레즈 파스칼과 서신 교환을 통해서 이 분야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페르마의 이름이 붙은 개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노름 공간 선형대수학 및 함수해석학에서, 노름 공간(norm空間, )은 원소들에 일종의 ‘길이’ 또는 ‘크기’가 부여된 벡터 공간이다. 이러한 크기는 노름()이라고 하며, 삼각 부등식을 따라 거리 함수를 정의한다. 노름 공간의 정의에서, 하우스도르프 조건을 생각하면 반노름 공간(半norm空間, )의 개념을 얻는다. 즉, 노름이 0인 벡터는 영벡터 밖에 없지만, 반노름(半norm, )이 0인 벡터는 영벡터가 아닐 수 있다. 삼각 부등식을 아래 부등식으로 변형하면 양의 실수 K에 대한 준노름이 된다. formula_1 formula_2가 실수체 또는 복소수체라고 하자. formula_3-벡터 공간 formula_4 위의 반노름은 다음 두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반노름이 주어진 formula_12-벡터 공간 formula_13을 formula_3-반노름 공간이라고 한다. formula_4 위의 노름은 다음 조건을 추가로 만족시키는 반노름 formula_16이다. 노름이 주어진 formula_12-벡터 공간 formula_13을 formula_3-노름 공간이라고 한다. formula_3-노름 공간들의 (유한 또는 무한) 족 formula_24과 실수 formula_25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직합 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formula_28 역시 노름 공간을 이룬다.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의 formula_12-부분 벡터 공간 formula_32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33에 formula_4의 노름을 제한한 것을 부여하면, formula_33 역시 formula_3-노름 공간을 이룬다.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의 닫힌 formula_12-부분 벡터 공간 formula_32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몫공간 formula_41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formula_41 역시 formula_3-노름 공간을 이룬다.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6의 연속 쌍대 공간 formula_47 위에는 쌍대 노름 을 부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formula_49 역시 formula_3-노름 공간을 이룬다. 임의의 formula_3-반노름 공간 formula_52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formula_12-부분 벡터 공간을 정의하자. 그렇다면, 몫공간 formula_55 위에는 반노름이 잘 정의되며, 이 경우 반노름은 노름이 된다. 이러한 구성은 예를 들어 르베그 공간의 정의에 등장한다.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6의 (거리 공간으로서의) 완비화 formula_58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정의하자. 여기서 formula_60는 formula_61로 수렴하는 코시 열이다. 이를 부여하면 formula_62는 formula_3-바나흐 공간을 이룬다. 이 경우, 자연스러운 단사 formula_3-선형 등거리 변환 가 존재하여, formula_4를 formula_62의 부분 공간으로 여길 수 있다. 만약 formula_4가 이미 formula_3-바나흐 공간이라면, 위 함수는 전단사 함수이다. formula_3-반노름 공간 formula_4 위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 거리 함수를 부여하여 유사 거리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만약 formula_4가 노름 공간이라면, 이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유사 거리 공간 구조에 의하여, formula_3-반노름 공간은 항상 formula_3-위상 벡터 공간을 이룬다. 두 formula_3-반노름 공간 사이의 formula_3-선형 변환의 경우, 유계 작용소인 것과 연속 함수인 것이 서로 동치이다. 다음과 같은 함의 관계가 성립한다. 즉, formula_3-노름 공간 formula_46가 주어졌을 때, 모든 벡터 공간에서 자명 반노름() formula_18은 반노름을 이루지만, 이는 (formula_4가 0차원이 아니라면) 노름을 이루지 못한다. 체 formula_2는 스스로에 대한 1차원 벡터 공간을 이룬다. 이 경우 절댓값 formula_94은 노름을 이룬다. 임의의 formula_95에 대하여, 유클리드 공간 formula_96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 formula_97을 정의할 수 있으며, 이를 ℓ 노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formula_99인 경우는 표준적인 유클리드 노름 이다. 만약 formula_101일 경우는 상한 노름() 이 된다. formula_103인 경우는 맨해튼 노름 이 된다. formula_105 노름 말고도 유클리드 공간 위에 수많은 노름들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formula_106 위에는 다음과 같은 노름이 존재한다. 4.15 총선 4.15 총선은 다음을 가리킨다. 1761년 1761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9년 1969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70년 1970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392년 1960년 1960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마라도나교의 교리상 1960년이 원년에 해당된다. 1902년 1902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53년 1953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4년 1994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3년 1993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0년 1930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3년 1933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0년 1990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소련이 붕괴되는 냉전이 종식된 해이기도 하여 마침 독일과 예멘이 모두 통일된 해이다. 디자인 패턴 (책) 《디자인 패턴》(Design Patterns, )은 소프트웨어 설계에 있어 공통된 문제들에 대한 표준적인 해법과 작명법을 제안한 책이다. 이 분야의 사인방(Gang of Four, 줄여 GoF)으로 불리는 에리히 감마(Erich Gamma), 리처드 헬름(Richard Helm), 랄프 존슨(Ralph Johnson), 존 블리시데스(John Vlissides)가 같이 썼고, 한국어 판은 김정아의 번역으로 피어슨 에듀케이션 코리아를 통해 출판되었다. 책의 첫 번째 반절은 다양한 디자인 패턴의 정의에 할애하고 있고, 나머지 반절은 실제적으로 유용한 디자인 패턴들을 나열하고 있다. 책의 예제들은 객체지향적인 언어인 C++과 스몰토크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패턴의 리스트이다. 1925년 1925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살만 루슈디 아흐메드 살만 루슈디 기사(, 1947년 6월 19일 ~ )은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의 소설가 · 수필가이다. 그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태어나 자라났으며, 14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부커상을 세차례 수상한 《한밤의 아이들》과 1988년에 발표되어 격렬한 비판을 받은 《악마의 시》로 유명하다. 그의 서사 스타일은 신화와 환상과 현실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환상적인 이야기이자 과학 소설의 면모도 일부 보이는 《》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독서 대중과 비평가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소설인 《한밤의 아이들》은 그에게 문학적인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고, 현재까지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이 작품은 그 후로 지금까지도 인도 및 탈식민지 현실의 글쓰기 형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광고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소설은 이후 1993년에 부커 중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에는 최고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한밤의 아이들의 큰 성공 이후, 루슈디는 《수치》()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이 두 작품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이민자로서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루슈디는 《아라비안 나이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동양 고전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문학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한밤의 아이들》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 북》과 같은 소설들에서 주제를 빌려 왔으며, 루슈디 자신도 그러한 소설에 영감을 얻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악마의 시》는 명백히 미하일 불가코프의 고전 러시아 소설인 《거장과 마르가리타》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 본인도 작품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한밤의 아이들》과 《수치》()의 주제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그의 후기작에서, 루슈디는 《무어의 마지막 한숨》()라는 작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작품의 무대를 확장했고, 인도와 이베리아 반도간의 상업/문화적인 연결을 탐구했으며, 《그녀 발아래 땅》()에서는 인도 사회와 미국 록앤롤의 상호 영향과 국경을 넘나드는 사랑에 대해 다루었다. 《한밤의 아이들은 루슈디의 작품으로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작품들은 《악마의 시》와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루슈디는 그의 작품들로 인해 부커상, 유럽 연합 문학상 등 수많은 다른 상들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왕립문학협회와 의 회원이기도 하다. 1988년 《악마의 시》의 출판은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스러운 묘사로 원리주의 이슬람 세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1989년 2월 14일 이슬람 시아파 루홀라 호메이니가 그의 책을 "이슬람에 불손한" 것으로 규정하며 루슈디의 처형을 명령하는 격문인 파트와(fatwa)를 내걸었다. 더 나아가 호메이니는 그를 이슬람을 떠나길 시도하는 배교자로 선고하고 코란에 의해 죽음으로 처벌 받아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이는 루슈디가 소설에서 이슬람교를 희화화하고 무함마드의 부인들을 창녀로 묘사한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모든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공개적으로 루슈디 뿐 아니라 책을 출판한 이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나서 2월 24일 호메이니는 루슈디의 목에 3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루슈디는 그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이집트에서의 폭동으로 인해 여러 명이 죽었다. 1990년 루슈디는 수필집인 《》를 내어 그에게 향한 비난을 진정시키고, 이슬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며 사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의한 본인 이외에는 철회할 수 없는 파트와의 특성상, 이때는 이미 파트와를 내건 호메이니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란 성직자들은 기존의 선고를 철회하지 못했다. 1989년에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 이란 정부는 공개적으로 루슈디에 대한 사형 선고를 "집행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는 이란과 영국 간의 관계 정상화라는 더 큰 명분으로 동의가 가능했다. 그 후 루슈디는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몇몇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들은 그에 대한 응징 의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 예로 1999년 이란의 한 단체는 루슈디의 머리에 28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악마의 시》는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영국의 몇몇 아시아인 거주지에서는 거리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가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노르웨이 쪽 출판사 사장도 공격을 받아 부상당했다. 벨라루스 벨라루스 공화국(, ), 줄여서 벨라루스(, , )는 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민스크이며, 민족 구성은 동슬라브족에 속하는 벨라루스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도 있다. 이 나라는 러시아와 가장 유사한 민족이며,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수도는 민스크이다.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이다. 1922년부터 1991년까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1922년 소련에 편입됐다. 1990년 주권을 선언하고 1991년 독립을 선언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주도했다. 빙하 작용을 받은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서양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다. 주민은 벨라루스인이 78%, 러시아인이 13%, 폴란드인 4%, 우크라이나인 3% 등이다. 산업이 특히 발달했으며 기계공업이 전체 공업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 트랙터, 농기계, 공작기계, 전기·무선기기 및 전자계산기 등이 유명하다. 반면에 석유, 가스 화학 공업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1992년 가격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벨라루스 사람들은 흰 옷을 즐겨입는 풍습이 있으며 전통 무늬가 새겨진 옷은 전통 의상이다. 또한, 가옥도 흰 색으로 칠하는 문화도 있다. 이 나라에서는 흰색은 상징색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벨라루스라는 국명은 하얀 루스()라는 표현에서 왔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러시아어로 벨로루시야(Белоруссия, Belorussia)라고 불렀다. 또, 대한민국에서는 이로 인해 한때 백러시아(白러시아)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실제 벨라루스는 White Ruthenia 를 의미한다. 1991년 9월 19일 당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러시아어 국명을 Республика Беларусь (Respublika Belarus'), 줄여서 Беларусь (Belarus')로 표기하며 다른 언어로 표기할 때에도 이 발음을 따르도록 한다는 내용의 법을 고시하였다. 이에 따라 영어 국명도 Belorussia에서 Belarus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91년 12월 10일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이 국명을 벨로루시로 표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벨라루스 정부의 요청에 따라 2008년 12월 11일 제82차 회의에서 표기를 벨라루스로 수정하였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에는 현 벨라루스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하얀 러시아'라는 뜻으로 백러시아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벨라루스를 이를 때 '하얀 러시아'라고 직역되는 명칭을 흔히 사용하는 경우로는 독일어의 바이스루슬란트(Weißrussland), 네덜란드어의 빗뤼슬란트(Wit-Rusland), 그리스어의 레프코로시아(Λευκορωσία) 등이 있다. 벨라루스는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접국인 우크라이나와 다르게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며, 폴란드와는 비아워비에자 삼림을 공동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이 삼림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드네프르 강이 국토 일부에서 조금 흐르고 있다. 6세기부터 슬라브족이 벨라루스 땅에 들어오면서 키예프 공국에 속하였다. 1240년 몽골의 침략으로 벨라루스 땅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폴란드 분할 때인 18세기 때 벨라루스 땅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이 벨라루스 땅을 차지하게 된 후인 1918년 3월 25일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는 실질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1919년 1월 5일 붉은 군대가 민스크에 들어오면서 해체되었다. 벨라루스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략하면서 벨라루스 땅은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벨라루스 중앙 라다라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가 세워졌다. 벨라루스인들의 게릴라식 저항은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벨라루스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독일의 패전 후 벨라루스는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벨라루스는 1990년 7월 27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91년 12월 벨라루스는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초대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센카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97년부터 러시아와 국가 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2001년에 루카셴카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4년에 루카셴카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다. 2007년에 러시아와 에너지 분쟁이 있었다. 2008년 9월 28일에 벨라루스는 총선을 시작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2010년 8월 3일에 루카셴카 대통령은 독립국가연합 정상들 앞에서 압하스 공화국과 남오세티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했다. 2010년 12월 19일에 있었던 선거에서 루카셴코가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야당 지도자와 벨라루스 국민 수만명은 항의 시위를 하다 경찰에 체포되었고, 미국과 EU는 벨라루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2011년 1월 21일 벨라루스에서는 루카셴코의 4번째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지만, EU는 취임식을 보이콧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 조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12년 9월 23일에 하원의원을 뽑는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야당이 전면보이콧하면서 반쪽짜리 선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선거에서 여당후보자들이 전부 당선되면서 야당후보는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벨라루스의 총선을 지지했다. EU는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2013년 10월말까지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1986년 4월 26일 인접국인 우크라이나의 프리피야티에 소재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바람의 방향으로 인하여 낙진의 거의 대부분이 벨라루스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 전 국토의 4분의 1이 방사능 오염지역이 되었으며 수 많은 벨라루스 국민들이 피폭당했다. 2011년 4월 11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15명이 사망했고, 204명이 부상당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 의상으로 햐안 바탕에 빨강색이 합쳐진 옷을 즐겨입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벨라루스 사람들은 가옥을 흰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 무늬가 들어간 옷은 벨라루스의 전통 적인 의상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의 지배 영향을 받아서 국민이 러시아인과 비슷하기도 하다.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이다. 1995년의 국민투표에 의해 러시아어가 정식으로 공용에서 추가되었다. 민스크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주민도 있다.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60%가 벨라루스어가 모국어였지만, 주민의 대부분(70%)는 집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일부는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등 소수 민족어도 사용한다. 종교는 벨라루스 정교회가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구 소련의 영향으로 무종교인도 많다. 그 외 가톨릭교,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을 믿고 있다(1997년 추계).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이다. 1991년 당시에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가 벨라루스 SSR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 있으나, 3년 만에 대통령직에서 1994년에 물러난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는 1994년 7월 20일부터 대통령으로 취임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에게 자리를 넘겼다. 벨라루스는 이중 국적을 인정하는 국가이며, 벨라루스 국적자가 타 국적을 보유 할 경우 이중국적이 된다. 벨라루스 국적 획득 자격은 상대적으로 쉬운편이다. 벨라루스 헌법에 따르면, 징병제를 실시한다. 육군은 기갑 위주로 편성되어있다. 공군은 육군보다 전투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주민은 벨라루스인이 81.2%, 러시아인이 11.4%, 그 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이 7.4%, 유대인과 기타가 0.3%이다(1999년). 벨라루스는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철도역이 있으며, 민스크 시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버스, 택시, 항공도 잘 정비되어 있다. 피아노 피아노(piano)는 대표적인 건반악기로서 피아노포르테(pianoforte)의 준말이다. 나무로 된 작은 망치가 강철 프레임에 고정된 피아노줄을 때려서 소리낸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Christofori, B.)가 고안하여 독일에서 완성하였다. 오늘날 널리 보급되고 있는 일반적인 유건타현(有鍵打絃)악기이다. 피아노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쳄발로와 클라비코드가 가장 많이 보급된 건반악기였으나, 1709년에 이탈리아 사람인 쳄발로 제작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meo Crist­ofori 1655-1731)가 쳄발로의 몸통(胴)을 써서 ‘피아노 포르테’라고 이름붙인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피아노의 효과적인 최초의 고안이어서, 그가 피아노의 발명자로 되어 있다. 쳄발로나 클라비코드는 음이 작아 실내연주용 외는 쓰이지 않던 것이었으나 이 발명은 현을 펠트로 된 해머로 쳐서 음을 내고, 댐퍼(펠트세로 음향을 정지시키는 것)를 붙인 것으로 거의 오늘날의 피아노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써 음은 힘차고 크게 되어 넓은 스테이지의 연주나 그 밖의 악기와 조화를 이루는 합주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제조기술의 연구가 종종 있었고 18세기의 중엽(바흐나 헨델이 일생을 마칠 무렵)부터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 뒤 많은 개량이 가해졌고 특히 현이 굵어졌으며 액션(손가락의 누른 키가 현을 칠 때까지의 장치)이나 댐퍼 등의 정교한 것 등이 나오게 되어 현재의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다. 피아노에는 그랜드형(Grand piano)과 업라이트형(Upright piano)의 두 가지 형태가 있고, 각각 소형에서 대형까지 여러 가지 크기가 있다. 그랜드형이 피아노 본래의 형태이며 이 형태는 쳄발로의 형태에서 생긴 것으로 음량도 크다. 피아노는 철골틀에 현을 매었고 그 틀의 뒷면에 울림판이 있어 해머로 친 현의 진동을 울림판으로 확대한다. 현은 피아노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강철선으로서 낮은음부의 현은 그 선의 둘레를 구리선(銅線)으로 감아 낮은 음현일수록 굵고 높은 음현일수록 가늘다. 페달은 보통 3개가 있고 악기를 향해서 오른쪽은 보통 댐퍼 페달이라 하여 밟으면 전체 댐퍼가 일시에 현에서 떨어져서 두드린 음은 긴 여운을 가지게 된다. 왼쪽 페달은 그랜드와 업라이트와는 조금 구조가 다르나 음량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쓰인다. 피아노의 키의 수효는 52, 64, 76, 88 등 크기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88건이며 그 음역은 가2음에서 다5음까지로 7옥타브 이상이나 된다. 피아노의 주법은 19세기에 극도로 발달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베토벤 이후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을 거쳐서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의 대작곡가가 피아노 음악의 알차고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작품구성엔 우수하나 피아노라는 악기의 독특한 장점을 완전히 살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에 비하여 쇼팽이나 리스트의 음악은 피아노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히 살리고 있으며 또 양손의 손가락의 운동이나 페달의 효과를 극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C (프로그래밍 언어) C는 1972년 켄 톰슨과 데니스 리치가 벨 연구소에서 일할 당시 새로 개발된 유닉스 운영 체제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켄 톰슨은 BCPL언어를 필요에 맞추어 개조해서 "B"언어(언어를 개발한 벨 연구소의 B를 따서)라 명명했고, 데니스 리치가 이것을 개선하여 C 언어가 탄생했다. 유닉스 시스템의 바탕 프로그램은 모두 C로 작성되었고, 수많은 운영 체제의 커널 또한 C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많이 쓰이는 C++는 C에서 객체 지향형 언어로 발전된 것이다. 또 다른 다양한 최신 언어들도 그 뿌리를 C에 두고 있다. C는 실질적으로 모든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예를 들어 BASIC 등과는 달리 다양한 플랫폼에서 ANSI C의 정의에 따르는 비교적 동일한 구현이 가능하다. 모든 C 시스템에는 정규화된 표준 C 라이브러리가 존재한다. 이런 이유와 생성된 프로그램의 높은 성능이 아직까지도 C 언어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는 반면 오늘날의 널리 쓰이는 거의 모든 운영 체제 커널이 C를 이용해 구현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C는 시스템 프로그램 개발에 매우 적합하지만,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도 많이 쓰이기도 한다. C 언어의 초기 개발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에 걸쳐 AT&T 벨 연구소에서 이루어 졌으며, 데니스 리치의 말에 따르면, 가장 창의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기간은 1972년이었다. 언어의 이름이 "C"인 이유는 그 특징이 "B" 언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며, 켄 톰슨에 의하면, B 언어는 BCPL 언어의 기본만 남긴 버전이다. 리치와 톰슨에 의해 초기에 PDP-7의 어셈블리 언어로 구현되었던 유닉스 운영체제의 개발과 C 언어의 기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결국 그들은 유닉스 운영체제를 PDP-11로 포팅하기로 결정하였다. PDP-11의 기능의 일부, 특히 바이트 접근기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B 언어의 부족함이 C 언어의 초기 버전의 개발을 이끌었다. 유닉스의 초기 PDP-11 버전은 어셈블리로 개발되었다. 1973년에 codice_1 자료형의 추가로, C 언어는 유닉스의 대부분을 C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졌다. 유닉스는 어셈블리가 아닌 언어로 구현된 최초의 운영체제 커널 중의 하나였다.(더 빠른 사례는 PL/I로 쓰인 Multics 시스템, ALGOL로 쓰인 Burroughs B5000을 위한 MCP(Master Control Program)가 있다.) 1977년 경, 리치와 스티븐 C. 존슨이 유닉스 운영체제의 이식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C 언어를 추가적으로 변경하였다. 존슨의 Portable C Compiler는 새로운 플랫폼에서의 C의 구현의 기초가 되었다. 1978년에 브라이언 커니핸과 데니스 리치가 "The C Programming Language"라는 책의 초판을 출간했다. 커니핸과 리치의 앞 글자만 따서 C 프로그래머들에게는 "K&R"로 불리는 이 책은, 비공식적이지만 오랫동안 C의 규격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서술하는 C의 판이 "K&R C"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책의 2판에서는 후의 ANSI C 표준을 다루게 되었다. K&R에서 다음과 같은 기능이 등장한다. C 언어 표준이 상대적으로 정적으로 남아 있었던 동안, C++는 표준화를 위하여 계속 진화하고 있었다. 1995년에 1990년의 C 표준에 대한 규약 수정안 1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약간의 세부 사항을 교정하고 국제적 문자 세트에 대한 보다 확장된 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C 표준은 1990년대 후반에 더 개정되어, 1999년 ISO/IEC 9899:1999가 출간되었고, 여기서 명시한 규범을 흔히 C99라 부른다. 이는 기술적 교정에 의하여 현재까지 3번의 수정이 있었다. 국제 C 표준은 실무 그룹 ISO/IEC JTC1/SC22/WG14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2011년 ISO/IEC 9899:2011이 출간되었고, 간단하게 C11라고 부른다. C11 나오기 전까지 개발 버전을C1X라고 부른다. 최종 개발 버전은 2011년도 4월 N1570이었다. C는 C 표준에 의해 규정되는 형식 문법을 갖고 있다. 포트란 77과 같은 언어와 달리, C 소스코드는 free-form 언어로써 형식 코드에 공백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다. OS에서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CPU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여러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메모리를 할당하고 이를 메모리에 올려 실행 한다. C 언어로 개발된 프로그램은 메모리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할당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CPU을 사용하여 개발하여 장치에 넣어 코드를 실행할 때, 힙 영역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필요 없다면 메모리 공간을 할당할 필요도 없고 힙관리 프로그램 코드(함수를 개발툴에서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도 필요하지 않는다. 만약 malloc 등의 함수를 사용하면, 힙 영역을 사용하겠다는 의미 이기 때문에 힙 영역을 개발자가 선언하여 관리 해야 한다. 이 때 힙관리 프로그램 코드는 자동으로 링크 된다. 물론 저 사양의 CPU 경우, 이 함수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는 컴파일러도 있을 수 있다. C 언어 작성된 코드는 컴파일 과정과 링크 과정을 거치면 실행 파일이 만들어진다. 변수는 여러가지 특성이 있다. 이 프로그램 예에서 변수 별로 분리하면 다음과 같은 특성의 변수로 나눌 수 있다. Notes: 각 특성별로 나누어 그룹을 지어 메모리에 배치 하는데, 이것을 링커가 한다. 이렇게 그룹은 나누는 것을 세그먼트(SEGMENT) 또는 섹션(SE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위의 그룹은 가장 기본적인 내용만을 표시 한것이다. CPU와 컴파일 마다 다르다. 어떤 컴파일러는 더욱 세밀히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각 세그먼트 이름도 다르다. Visual Studio의 맵 이름 예 컴파일마다 각 세그먼트 이름과 구조가 다르지만, 예를 들어 중요한 세그먼트 만 표시 하였다, TEXT와 CONST는 ROM/FLASH에 배치해도 되는 변하지 않는 세그먼트이므로 같은 부류이고, CPU를 설계하고 코드를 직접 쓰는 경우 ROM/FLASH을 이용한다. 거의 모든 툴에서 이 맵을 파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옵션으로 설정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구조를 얻을 수 있다. 함수와 변수의 위치와 이름 등을 확인할 수 있고, 각각의 세그먼트 크기 등의 데이터를 알 수 있다. 실제 CPU을 다루는 C 언어에서 이런 정보는 중요하다. 내가 사용하는 MCU의 메모리는 얼마나 사용하는지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C 언어 함수는 표준함수가 있고, 개발 툴에서 제공하는 함수가 있다. 여러가지 부류가 있고 특성 별로 나누어 lib 파일로 코드를 제공하고 헤더파일로 선언을 알 수 있다. C 표준 라이브러리는 함수 형태와 기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발툴별 같다는 특징이 있다. 유닉스 계열(리눅스)의 시스템에서 주로 사용하는 C/C++ 언어 개발 도구이다. 리눅스의 OS을 제 컴파일하거나, 각종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 사용한다. 또한 X-Windows의 개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전자 장치의 개발 시 임베디드 OS 포팅에서, 리눅스 커널이나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하는 OS 커널 자체를 개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리눅스 커널 기반 임베디드에서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 역시 gcc을 많이 사용한다. 여러 파일들끼리의 의존성과 각 파일에 필요한 명령을 정의함으로써 프로그램을 컴파일할 수 있으며 최종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는 표준적인 문법을 가지고 있고, 구조로 기술된 파일(주로 Makefile이라는 파일명)을 [make]가 해석하여 프로그램 빌드를 수행하게 된다. gcc을 윈도에서 실행 할 수 있도록 재 포팅한 것이다. Cygwin에서 분화 된 gcc 기반 개발 라이브러리 이다. 이클립스는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OS에서 실행되는 IDE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상황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C/C++언어를 제공하는 IDE으로 리눅스의 경우 기존의 gcc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결 설정만 하면 된다. 윈도에서 gcc와 연결하여 C/C++ 언어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 할 수 있다. MinGW는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므로 다른 언어로도 이클립스와 연결하여 개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 판매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환경에서 작동하는 개발도구이다. 현재는 C 뿐만 아니라 C++, 자바, C# 등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고 있지만 초기의 마이크로소프트 개발 도구는 C 언어로 부터 출발 하였다. 비주얼 스튜디오로는 윈도우 API를 이용한 GUI 프로그램, 명령 줄 인터페이스 환경으로 실행되는 Windows Console Application, 윈도우 서비스, 동적 링크 라이브러리 등의 형태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고, 최근 버전에서는 모바일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도 지원한다. 비주얼 스튜디오에서 사용 가능한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와 라이브러리는 다음과 같다. 표준 C에서 정의하는 라이브러리 함수를 거의 대부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윈도우 운영체제의 API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툴킷이다. 응용프로그램에서 사용 가능한 윈도우 운영체제의 기능은 Windows SDK를 통해 제공된다. 초기에는 C가 기본 언어였으나, 최근에는 C#, C++ 등의 언어 툴킷도 제공한다. 예전에는 Win32 SDK라고 불리었다. 윈도우 개발에 필요한 Windows API를 클래스로 래핑한 C++ 라이브러리이다. 윈도우에서 주로 게임 등을 개발할 때 사용하는 툴킷 이다. 고속의 화면 제어, 음성지원, 3D 등을 지원한다. 보통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디버깅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두가지 이다. GCC을 기반으로 하는 디버깅 도구이다. 따라서 유닉스 계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실행된다. GCC 옵션을 디버깅이 되도록 설정하면 디버깅 테이블을 만든다. gdb 실행 중에 이것을 사용한다. GDB을 실행하여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break, 변수, 함수 등의 디버깅을 할 수 있다. GCC에서 gdb는 서버 구조를 사용할 수 있다. gdb-server을 설치하면 네트워크를 통해 디버깅 환경을 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베디드 개발 시 리눅스 커널을 포팅하고, 해당 리눅스 시스템에 gdb-server를 설치하면 다른 환경에서 이를 통해 응용 프로그램을 디버깅 할 수 있다. 임베디드의 많은 경우 자신의 시스템에서는 디버깅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원격으로 gdb의 실행 결과를 전송 할 수 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클립스와 같은 IDE와 연동할 수 있다. 보통 리눅스 기반의 임베디드 개발 환경은 이클립스 C++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과 결합할 수 있다. 원격 디버깅 모드는 리눅스 커널에 사용되는 소스 수준의 디버거인 KGDB에서도 사용된다. KGDB를 사용하면 커널 개발자는 일반 응용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커널을 디버깅할 수 있다. 비주얼 스튜디오나 이클립스 등의 도구 들은 기본적으로 디버깅 방법을 제시 한다. 이클립스 디버깅은 GDB와 연동해서 구성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표준출력(stdout)으로 codice_9를 출력한다. 김종필 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2018년 6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를 일으킬 당시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쿠테타에 참여했다. 1951년 2월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으며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9선 국회의원으로 최다선 국회의원 출신이며, 1971년 박정희 정권기 제11대, 김대중정부기 31대 DJP 연정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다. 민주공화당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총재를 거쳐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지낸 그의 주요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중심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현국정원)를 창설해 부장에 취임해 활약했지만,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후 5년6개월간 최장수 총리를 지내며, 대덕연구단지, 민속촌등을 기획했다. 1979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1981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1990년 3당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95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2004년에 제17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제2인자였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박정희의 후계자 또는 잠재적 대안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1971년 6월 4일부터 1975년 12월 18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를, 1998년 3월 3일부터 2000년 1월 12일까지 제31대 DJP 연정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8년 6월 23일에 숙환으로 인해 향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필은 1926년 1월 7일에 충청남도 부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72대손이자 안경공파(安敬公派) 김영정의 22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충남 갑부로 성장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김현택이 갑부로 성장하여 가세를 일으킨 것이며, 김현택은 부지런해 생전에 쌀 2000섬 지기가 됐다. 3대 독자였던 아버지 김상배는 토지측량사를 지냈다. 토지등록 분규 등을 잘 해결해 신망을 얻은 후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으로 지역사회의 유지가 됐으며, 어머니 이정훈은 전주 이씨로 아버지보다 12살 연하였다. 아버지 김상배는 일제 강점기 당시 부여군 규암면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집안에 숨겨주고 돌봐줬다. 의열단 단원인 유석현 등은 1921년 일본 경찰에 쫓기다가 김상배의 집에 피신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아들만 7명을 두었다. 위로 4명의 형과 아래로 2명의 동생이 있는데 큰형 종호는 40대의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거쳐 서울 종로구청 주사로 근무했고,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중앙곡물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둘째 형 종익은 민주공화당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막내동생 종식은 중학생 무렵 한국 전쟁 중에 실종됐다. 그 뒤 김종필은 실종된 막내동생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의 측근인 보좌관 김석야는 2000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리께서 수십년 동안 막내동생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근엄한 한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김상배는 그를 직접 야단치는 법이 없었고, 특히 그의 칭찬을 주변에 얘기해서 간접적으로 듣게 했다고 한다. 소년기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붓글씨를 배웠다. 그러나 글을 쓰다 싫증이 나서 도망쳤다가 밤늦게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인 뒤 나머지 글쓰기를 마치게 했다 한다.1945년 3월에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정식 교육을 받지는 않았고 중학교 때 수채화를 그려본 기초 뿐이었다. 그러나 뒤에 40세가 넘어 유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본격 화가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주오대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고 동년에 졸업하였다.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인 8월 15일 광복을 맞고 아버지가 경성부에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여 재력을 쌓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8월 경성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 1948년 서울대 사범대학 3학년이었던 김종필은 부친이 작고한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공원 앞 모병소에 원서를 내고 군에 입대하여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하는 육군 제13연대에 배속된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하였다. 이후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극장에 영화관람을 갔다가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되어 자수하고 기간병으로 재입대하였다가 육사 제8기생으로 입학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로 있었다.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에 임명,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했으며, 1계급 특별승진해 육군 대위가 됐다. 한국 전쟁 후반에는 6사단 19연대로 배속되어 수색중대장 등으로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1951년 1월에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하였고 그해 육군 대위로 지내면서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 150인 중 한 사람에 선발돼 조지아 포트베닝의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수료하였다. 1952년 다시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 반장이 되었다. 김종필은 정보 계통에 근무하면서 야전부대에서 근무한 장교들과는 달리 시간과 활동에서 상대적으로 제약을 덜 받았기 때문에 동기생들과 언제든지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으로 보직되었다.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소령을 거쳐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했다. 기획과장 재직 중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다른 기수보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됐다. 어쨌건 그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지 몇달 지나면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에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이 되고, 이후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다. 장면 내각은 숙군을 단행하려 했고, 이때 그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하는 것으로 파동을 마무리지었다. 예편 이후 별다른 직업이 없던 그는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4월 19일 당일은 조용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5월 다시 거사일을 정한다. 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가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라고 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면서 중앙정보부가 신설, 그는 제1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6월 5일 오후 그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5.16 군사 정변은 낡은 구세대의 정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거사 라고 발표한다. 군사 정변 직후 그는 장인 박상희의 경력과 관련하여 사상 공세에 시달렸고, 황태성이 남하한 후에는 한일회담 직전까지 야당인사들로부터 수시로 의혹을 받게 된다.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직후 그는 즉시 시국정화단 등을 개편하여 정보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한다. 초대 중정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중정청사 터를 조선 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릉을 모신 의릉 사적지 주변으로 정하였다. 이후 의릉 입구에 세워진 중앙정보부 건물은 속칭 안가 로 불렸다.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1961년 7월에는 잡지 《사상계》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인 장준하를 불러 취조했다. 1961년 7월호의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 비판 칼럼을 문제삼아 장준하를 소환했다. 사상계 7월호가 나가고 4, 5일 뒤, 퇴근시간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사에 군인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혁명군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사장과 편집 책임자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용건을 전했다. 다음날 장준하는 편집 책임자인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지정한 시각인 아침 7시에 회사로 나갔다. 검정 지프차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군인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싣고 가 남산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층 집의 한 방에다 내려놓았다. 20분뒤 김종필 이 나타났고 김종필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을 문제삼았다. 장준하는 말을 계속했다. 장준하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책을 급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문제의 글과 권두언을 펴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충고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장준하는 항의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그가 장도영과 같은 고향이라는 점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장도영과의 관련을 부인했다. 장준하의 대답에 김종필은 흥미를 느껴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고, 장준하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자신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대한 추억을 진술했다. 장준하에 의하면 '장준하와 장도영은 중국 서주에서 같이 있었다. 그 곳에서 한인 탈영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학도병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했다. 그때 장도영은 일본도를 빼들고 탈주하는 자는 자기가 먼저 처단하겠다고 설치다가 장준하와 충돌했다. 그리고 탈출이 어려운 쓰카다 부대로 같이 옮겨가서 둘은 장준하가 벌인 '잔반 거부 운동'으로 반목한다.' 성이 같고 고향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호흡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서북인 출신이라 하지만 장준하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당으로 모니 참을 수가 없었다. 김종필이 장준하와 장도영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사상문고 100권 출간 기념 리셉션을 창경궁(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당시 사상계의 국제적인 명성 때문에 그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도 미국 대사가 직접 참석하고 내외 귀빈이 수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군부에서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이하 그 일파가 모두 왕림했다. 그때 박정희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 5일 장도영 일파는 모두 체포됐다. 1962년 1월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5.16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인 1961년 8월에 김종필은 민정인수 구상의 하나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 사전조직은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의 새 정당 창당구상 연구팀으로, 책임자는 예비역 육군중장 최영두이고, 윤천계(고려대), 김성희(서울대), 강상운(중앙대) 교수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유호선, 김정렴,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62년 1월 이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어 김종필은 재건당을 조직하여, 민정에 군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기 위한 정식 정당 창당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미국 방문 길에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육군 원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면담에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또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한국에서의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네시아 사태가 발전된 것"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이승만 박사에 대한 감정을 완화하여 그를 고국 땅에 귀국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1963년 1월에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했고 중앙정보부장에서 사퇴했다. 이어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했고, 직접 윤일선, 임영신, 여운홍, 임병직, 윤치영, 정구영 등을 찾아다니며 설득, 신당 창당에 적극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평소 장면 내각을 미워하던 윤치영, 여운홍 등은 그의 도움 요청을 적극 수용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정구영,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1971년 ~ 1975년, 1998년 ~ 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1963년 6대 국회 때부터 의정활동을 해 총 9번 임기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 기록이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핵심 브레인으로 일명 혁명공약을 기초했으며, 5월 20일에는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62년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부터 한일협정의 실질적인 교섭을 담당했다. 1963년 1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육군준장으로 예편(군번 13517)했고, 재건당이라는 가칭 조직을 창당했다가, 2월부터 정구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했다. 한편 꾸준히 육사 5기생, 6기생들의 견제를 받던 그는 그해 2월 25일,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사퇴하고 순회대사의 자격으로 동남아시아와 구라파(유럽) 여러 곳을 역방하고저 출국했다가 귀국하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63년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됐다. 1964년 8월에는 하버드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수료하였다. 1965년 6월,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버려 이 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문제점과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박정희의 협조 요청에 따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 한국에 입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종필과 오히라의 회동 이후에도 1962년 케네디와 요시다의 회담, 1963년 11월 존슨과 박정희의 회담 등을 통하여 한일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회담 타결이 막바지에 이른 1964년 미국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극동문제담당차관 등이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과 한국의 조속한 수교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64년 1월부터 한국에서는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월에는 5·16 이후 없었던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하여 1965년 2월에는 기본조약이,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8월 14일 대한민국에서는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하였다. 1965년 12월 18일 상오10시반 한국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으나 극심한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가 3선 후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면서 그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차기 유력주자로 떠올랐다. 이는 박정희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는 원인이 됐다. 박정희의 견제를 받자 그는 당원직을 사퇴하고 일시적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편 민주공화당 내에는 그를 지지하는 파벌이 나타났고 박정희가 3선에서 물러나고 그가 후임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를 알게 된 박정희는 그를 경계하였다. 삼선 개헌안이 나오자 이를 지지하였다.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다. 박정희의 견제와 반대 세력의 움직임으로 한때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삼선개헌과 10월 유신에 협조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1972년 5월엔 PTP 명예 총재에 선출되기도 했다. 1973년 6월에는 서독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1974년 일요화가회 명예회장, 1974년 5월 5·16민족상 이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을 지냈다. 유신정권의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실권을 유지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에 취임했고, 1977년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에 선출됐다. 1973년 1월 해리 트루먼의 추도식에 참석차 비행기편으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5월 28일 다시 출국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심흥선(沈興善) 주스페인 대사를 만난 뒤 알프레도 산체스 공보, 관광부 장관,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스페인 부총통을 면담하고 6월 5일에는 프랑스를 방문 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정희와 갈등했고, 1975년 12월 18일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된다. 박정희는 그 대신 그의 둘째 형 종익을 대신 충남 부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내보냈다. 이후 김종익은 7, 8, 9대 의원을 지내게 됐다. 김종필이 박정희와의 갈등 때문에 파란을 겪고 있을 당시 정권측에서 부여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동생 대신 억지로 부여지역구에 출마시킨 것이었다. 1977년 2월부터 3월까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남미를 순방한다. 그해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장징궈, 옌자진과 면담한 뒤 일본을 방문하여 후쿠다 수상, 오히라 자민당 간사장 등을 면담한 뒤 모로코 등을 방문했다. 그해 3월에는 브라질 등을 방문한 뒤 4월 11일 귀국하였다. 1979년 3월 제10대 국회의원에 재선하였다. 그해 6월에는 유럽 특사로 파견되어 독일과 프랑스 등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사망한 후 1979년 11월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고, 1979년 11월에는 5·16 민족상 재단 총재이 됐다. 박정희 사후 공화당계 정당의 유력자로 부상하면서 재야 운동가들은 그에게 민주적인 선거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에 협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총재로서,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각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보안사에 체포돼 감금당했다. 5월 18일 아침 신군부는 관제보도를 통해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신군부에 의해 모욕적인 대우와 감금을 당하면서, 그는 전두환을 증오하게 됐다. 수경사령관 노태우 소장은 김종필이 감금된 지하감옥을 방문하고,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예우했다. 김종필은 신군부 인사 중 유일하게 노태우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알려 주었다. 자신의 고사와 이승만, 박정희 시절의 2인자들의 몰락과 비참한 최후를 설명하며 절대 1인자(당시 1인자란 전두환을 지칭)에게 밉보이지 말 것, 전두환이 서운하게 하더라도 절대 서운한 표현을 해서는 안되며 서운함을 드러냈을 경우 아랫사람과 주변의 이간질하는 세력이 나타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것 등 2인자로서의 처세술을 노태우에게 일러주었다. 1980년 9월 그는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구 민주공화당, 유정회계 인사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금지가 해제되면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구 공화당, 유정회 인사들은 그를 총재로 받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신군부에 의해 정계를 강제 은퇴당한 그는 이후 운정재단을 운영하면서 사회사업에 종사하였다.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가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친인척에게도 불이익이 가해졌다. 그의 여섯째 동생 김종관은 육군중위로 제대, 1962년 건설부 산하 직원이 되어 주택공사 과장, 한남동 외인주택 관리소장 등으로 일했으나 제5공화국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김종관의 부인이었던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부인 신홍자 역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교에서 해직됐다. 1987년 정계에 복귀해 10월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됐으며 신민주공화당의 출범 직후 구 민주공화당과 유정회의 후신인 국민당을 흡수했다. 87년 8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어 그는 1980년 무렵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된 공무원과 공직자들의 복직을 공약의 하나로 내세우기도 했다. 12월의 대통령 선거 결과 4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과 권위주의 철폐 등에 비호감을 느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듬해인 1988년 4월에는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3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했다. 1990년 초 3당합당을 통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하고,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해 다시 집권여당의 정치인이 되고, 19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 대표위원, 김영삼 정부 초기에 다시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으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그의 견해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김영삼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하게 됐다. 한편 차기 대선유력주자로 거론됐으나 노태우는 박철언을 선택하려 했고, 이후 김영삼 계열이 집단 탈당조짐을 보이자 노태우는 김영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선 예비주자로서의 기회를 얻지도 못했다. 1992년 8월에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 재선임되었다. 그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는데 김영삼과 13대 대권을 놓고 경쟁하게 됐다. 1993년 2월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군부, 하나회 등 전두환 계열의 군부 숙청 이후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민주계는 그의 퇴진을 이끌어낸다. 1995년 그는 민자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이후 일부 영남권 인사들을 포섭하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 출신 인사들과 지지층의 표심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1995년 3월에 자민련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 차이가 있는 김대중과 손을 잡아 DJP연합으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1997년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가 김대중과 손을 잡자 보수주의 세력에서는 그의 연합을 놓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간 지낸 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DJP연합 정권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등을 행사하였고 '국민연금' 등의 주요 정책에서도 그 권한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했고, 2001년 결국 DJP연합은 붕괴된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한 뒤 박태준이 후임자가 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됐다. 1999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인도를 방문했다. 김종필은 한국이 파트너 국가로 참가한 인도 엔지니어링 무역 박람회《IETF'99》의 개막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99년 6월 12일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미술인 지원에 공로)을 받았고, 1998년 7월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됐으며 1998년 5월의 홍콩 아시아위크지 앙케이트 조사에 아시아 유력인사 50인 35위에 선정됐다. 1999년 미국 마르퀴즈 후즈 후사의 1999년판 후즈 후 인 더 월드에 등재됐다.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는 광폭행보 끝에 내각제를 공약으로 1월 31일 출마를 선언했으나 이후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민주당, 한나라당에서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자 그는 노무현 탄핵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은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했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으로 10선에 실패하는 바람에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았다. 이에 김종필은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하여, 사실상 그의 정치 생명은 종결되었다. 이후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자신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2007년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지했다. 2008년 3월 26일, 김종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을 강력히 성토했다. 2000년대 이후 한성디지털대학교의 명예 석좌교수에 위촉되기도 했다. 2008년 12월 15일 무렵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이후 초인적인 재활운동을 통해 2010년 무렵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 정계를 은퇴 한 뒤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치료와 재활을 반복해오던 김종필은 2018년 5월 무렵부터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2018년 6월 23일에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순천향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으며,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5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6월 27일 영결식 및 발인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강원도 춘천시 안보리에 있는 경춘공원에 안장되었다. 김종필은 3김 중 하나인 대한민국의 2인자로써 막대한 정치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5.16군사정변의 시스템을 설계하여 비록 헌정을 붕괴시킨 사건이지만 안정적으로 관리하였고 훗날 국가정보원이 되는 중앙정보부를 설립하여 공안정보기관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수립에도 도움을 주었고, 이런 김종필의 시스템으로 독재정권이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을 안정시켜 안정적 경제발전을 기여하기도 하였으며 박정희정권 이후에도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군사 정권 출신이며 5.16 군사 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이라는 점과 박정희 정권에 부역하였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 진영에서는 그가 1998년 DJP연합으로 정권교체에 기여한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밖에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며 충청권의 맹주로 자임하며 지역갈등, 지역정치를 조장했다는 점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아들 김진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타 대학교에 유학을 하던 중 그곳에서 만난 과테말라 여성 리디아와 결혼했다. 당시 그의 반응에 대한 측근의 진술로는 "김 총리가 미처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김진씨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다음이라 김 총리도 속수무책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였다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총 9선 국회의원으로 불린다. 1926년 1926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3년 1963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3년은 계묘(癸卯)년 이며, 각각의 음력 월은 아래 도표를 참조 한다. 1950년 1950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8년 1998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UN이 지정한 바다의 해기도 하다. 1946년 1946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7년 1997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41년 1941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96년 1996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92년 1992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862년 1862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루이 파스퇴르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년 12월 27일 - 1895년 9월 28일)는 프랑스의 생화학자이며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분자의 광학 이성질체를 발견했으며, 저온 살균법, 광견병, 닭 콜레라의 백신을 발명했다. 파스퇴르는 1822년 12월 27일, 가죽 가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미술에 소질을 보였지만 1843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1846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처음은 재능을 보이지 못하고 지도한 교수의 한 명은 그를 "평범하다"라고 평가했다. 초기 화학자 시절의 업적으로는 주석산의 성질을 해명(1849년)한 것이 있다. 천연물, 특히 포도주의 침전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이 화합물의 용액은 통과하는 빛의 편광면을 회전시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공적으로 합성된 주석산은 화학반응이나 분자식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효과를 갖지 않는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의 미세한 결정을 조사하고서 결정에는 비대칭인 2 종류가 있어, 각각이 서로의 거울상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끈질기게 분류 작업을 한 결과 2 종류의 주석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종류의 용액은 편광면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데 반해, 한편은 반시계회전으로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 종류를 반반씩 혼합한 것은 편광에 대해서 어떤 효과도 미치지 않았다. 이것으로부터 파스퇴르는 주석산의 분자는 비대칭인 형태를 하고 있고 왼손용 장갑과 오른손용 장갑과 같이 서로 거울상 관계에 있는 2종류의 형태가 있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추론했다. 처음으로 키랄 분자를 실증한 것도 큰 실적이었지만, 이후 파스퇴르는 한층 더 유명한 실적을 완수하는 생물학·의학의 분야로 나아가고 있었다. 파스퇴르는 결정학에 관한 박사 논문에 힘입어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화학의 교수의 지위를 얻었다. 1854년엔 릴의 새로운 이과 대학의 학장으로 지명되고, 1857년에는 고등사범학교의 사무국장 겸 이학부장이 되었다. 1861년의 저작 《자연발생설 비판》에서 발효가 미생물의 증식 때문이란 사실을 보였고, 동시에 영양분을 포함한 고깃국물에서 미생물이 증식하는 것은 자연발생에 의한 것이라는 종래의 설을 뒤집어 보였다. 먼지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필터를 통해 바깥 공기를 접촉할 수 있는 용기에 새로 끓인 고깃국물을 놔 두거나, 필터는 없지만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플라스크를 사용해 티끌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 공기를 접촉하게 하면, 고깃국물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했다. 따라서, 고깃국물에 발생하는 미생물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티끌에 붙은 포자 등 미생물에 의한 것이며, 고깃국물중에서 자연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여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비판했다.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세균설은 벌써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 프리드리히 헨레 등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한 것은 세균설(생물 속생설)의 올바름을 실험으로 명백하게 보여줘서, 유럽 사람에게 납득시킨 것이다. 파스퇴르의 연구는 발효 음료를 오염하는 미생물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로부터 파스퇴르는 우유 등의 액체를 가열해 그중에 포함되어 있는 박테리아나 곰팡이를 모두 죽이는 방법을 발명했다. 파스퇴르와 클로드 베르나르는 1862년 4월 20일에 최초의 실험을 실시했다. 이 방법은 곧바로 가열살균법 (파스퇴라이제이션)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음료 오염으로부터 미생물이 동물이나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결론을 내린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인체에의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스코틀랜드의 외과의사 죠제프 리스터가 외과 수술 소독법을 개발하는 데에 이르렀다. 1865년 파스퇴르는 양잠업의 구제에 착수했다. 그 무렵 미립자병으로 불리는 병에 의해 많은 누에가 죽고 있었다. 이 도중인 1867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수년에 걸치는 조사의 결과 병의 원인은 누에의 알에 세균의 감염인 것을 증명해 치잠사육소로부터 이 세균을 구제하는 것으로 미립자병을 막을 수 있는 것을 나타냈다. 파스퇴르는 혐기성균, 즉 공기 없이 증식 하는 미생물을 발견했다. 1895년 미생물학으로 최고의 영예인 레이웬훅크메달(Leeuwenhoek medal)을 수상했다. 1895년, 1868년부터 일련의 발작에 의한 합병증이 원인이 되어, 파리 근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프랑스 정부의 주도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매장되었지만, 곧 유해는 파스퇴르 연구소의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일부 유사과학을 주장하는 집단에서는 파스퇴르가 진화 혹은 화학진화를 반대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파스퇴르가 부정한 것은 자연발생설이며, 이는 현재와 같은 환경에서 계속 새로운 생명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현재와 같지 않은 환경에서의 원시 생명체 형성을 연구하는 화학진화와는 전혀 다른 것에 해당한다. 이는 생물이 변이와 선택을 통해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현상(진화)과도 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자연 발생설의 부정은 생명의 변이와 선택에 의한 다양성을 지지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파스퇴르는 사실상 진화를 지지했음이 알려진 상황이며, 파스퇴르는 무작위적인 발생을 부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마리 퀴리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이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이고,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 퀴리()이다.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이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노벨상 2관왕에 등극한 인물로 유명하다. 마리 퀴리는 1867년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브로니스와바는 중학교 교사,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Władysław Skłodowski)는 바르샤바 교육청 장학사였다. 형제로는 오빠 유제프(Józef, 1863년생)와 조피아(Zofia, 1862년생), 브로니스와바(Bronisława, 1865년생), 헬레나(Helena, 1866년생) 언니 셋이 있었다. 10세 때 폐결핵을 앓던 어머니와 사별하였고, 장학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실직하기도 했으며, 큰 언니 조피아가 요절하기도 하여 혼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폴란드의 전통인 폴란드어, 역사를 공부하는 것조차 억압받았다. 둘째 딸인 이브 퀴리가 쓴 전기가 1990년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인용되었는데, 전기에 따르면 마리퀴리는 여학교에서 폴란드어와 역사를 공부하다가 장학사가 오면 실과수업을 받는 것처럼 숨겨야 했다. 러시아 장학사들은 폴란드 학생들이 러시아어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함으로써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민족말살에 악용했다. 심지어는 "너희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냐?"라고 물어서 식민지배에 순응하도록 했으니 마리퀴리의 청소년 시절은 억압이었다. 여학교를 졸업한 마리는 남학생만 뽑는 바르샤바 대학교와는 달리, 성 차별이 없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어했으나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3년간 시골의 부유한 농가의 가정교사로 직접고용되어 사용자의 딸과 아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는 폴란드 민족문제를 고민하던 사용자의 허락을 받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했다.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할 때,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갈 결심을 하였다. 다행히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취직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마리는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형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 부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언니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유학하였다. 브로니스와바와 마리가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폴란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계몽주의자였다면, 형부 카지미에시는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없이는 민중 해방이 없다는 냉철한 현실 이해를 주장한 사회주의자였다.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J. H. 푸앵카레, G. 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며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학위를 취득한 후 1895년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였고 피에르 퀴리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 피에르 퀴리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도왔던 마리가 뛰어난 과학자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마리의 학업을 적극 지원해온 지지자였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는 1898년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 pitchblende, 역청우라늄석 )에서 염화바륨에 소량 섞여있는 형태로 염화라듐을 처음 분리∙발견하였고 1902년 8톤의 폐우라늄 광석을 처리하여 0.1g의 순수한 염화라듐을 얻었다. 1910년에는 마리 퀴리가 염화라듐을 전기분해시켜 금속 라듐을 얻었다. 마리 퀴리가 살던 시대에는 방사능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방사능 물질 라듐은 미용은 물론 정신장애 치료에까지 효과가 있다는 위험한 선전이 아무런 근거없이 주장되었음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느 화장품에 라듐이 들어간다고 쓰어져 있기만 했다면 모두 팔리고 있던 제품이었다.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가 근무하던 소르본 대학교에서 1906년 11월 5일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마리 퀴리는 미리 강의 내용을 확인하는 준비를 하여 남편이 가르친 내용을 이어서 강의하는 꼼꼼함을 보여주었다. 이 일로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는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거부했다. 라듐의 위험성이 제기된 것은, 영화관에서 영화 상영작 포스터에 페인트칠(페인트 안에 라듐 성분이 들어가 있음)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죽어가면서였다. 마리 퀴리도 1934년에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 입원하여 그 해 7월 4일 과도한 방사선 노출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이 겹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인물로서는 최다 기록이다. 결혼 직후 1896년 마리는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염에서 일어나는 베크렐선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계에 베크렐선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우라늄 외에도 더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 물질들을 찾아 연구하기로 한다. 마리는 '피치블렌드(역청우라늄광)'라는 광물이 순수한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능을 배출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러한 광물을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 관해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후 퀴리 부부는 아예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하고, 지루하고 긴 실험을 반복하며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여 1898년 마침내 베크렐이 연구했던 우라늄보다 감광작용이 4배나 강한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이 미지의 물질이 두 가지 원소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그중 하나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새로운 원소는 우라늄염보다 400배나 감광작용이 강했다. 퀴리 부부는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이라고 명명했다. 마리는 우라늄이나 폴로늄처럼 자연계에서 감광작용과 전리작용 및 형광작용을 나타내는 물질들에 대해 처음으로 방사능(또는 방사성물질)이라고 불렀고, 이들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감광작용 능력이 우라늄보다 무려 250만 배나 강한 원소를 발견하고, 강력한 빛을 ‘방사’한다는 뜻으로 원소의 이름을 ‘라듐’이라고 지었다. 퀴리 부부가 라듐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그 방사능은 어떤 화학작용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라듐의 양에 비례해 방출되는 방사선이 강해지고, 감광작용과 전리작용도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방사선 방출과정에서 상당한 열이 나온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계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화학반응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마리는 이러한 현상이 물질의 기본적인 구성단위인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인 원자 수준에서 연구해야 하는 현상임을 밝혀냄으로써 과학 연구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 1903년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였다.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었다. 마리 퀴리의 딸 부부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이다. 프랑스의 보수성,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공세,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문제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다. 피에르 퀴리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년 5월 15일 ~ 1906년 4월 19일) 는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결정학, 자기, 압전효과, 방사선 분야의 선구자이다.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1903년 부인 마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1906년 직장인 소르본대학교에 가던 중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유닉스 유닉스()는 교육 및 연구 기관에서 즐겨 사용되는 범용 다중 사용자 방식의 시분할 운영 체제이다. 1970년대 초반 벨 연구소 직원인 켄 톰슨, 데니스 리치 등이 처음 개발하였다. 오늘날의 유닉스 시스템은 여러 회사들과 비영리 단체들이 이 커널로 활용하여 다양한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있다. 유닉스는 처음부터 다양한 시스템 사이에서 서로 이식할 수 있고, 멀티 태스킹과 다중 사용자를 지원하도록 설계되었다. 유닉스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유닉스(UNIX) 상표권은 오픈 그룹이 갖고 있으며, 유닉스 소스 코드에 대한 저작권은 노벨이 소유하고 있다. SCO 그룹은 SCOsourc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유닉스 시스템 V Release 4 (및 자체 릴리즈인 UNIX 시스템 V, Release 5)에 기반한 코드로 된 운영 체제를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기업 및 개인들에게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닷컴 버블로 유닉스 사업자들에게도 합병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1980년대에 태어난 많은 상업 유닉스 업체들 중에서 휴렛 패커드의 HP-UX, IBM의 IBM AIX, NeXT의 NEXTSTEP (나중에 오픈스텝이 되었다가 이제 맥 OS X가 됨) 및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솔라리스 운영 체제들만이 아직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DEC), 데이터 센트럴(Data General), 산타 쿠르즈 오퍼레이션 (현재는 Tarantella) 등은 다른 업체에 합병되거나 사업을 접었다. 또한, 리눅스와 오픈 소스 BSD의 사용이 증가됨에 따라 기존의 상업 유닉스 시장이 침식되어 갔다. 유닉스의 기원은 1960년대 중순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벨 연구소, 제네럴 일렉트릭이 GE-645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해 시분할 운영 체제의 하나인 멀틱스를 개발하고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 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로 잘 알려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작곡법 및 지휘를 배웠다. 35년의 생애 동안 그는 수많은 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를 작곡했으며,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 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널리 존경받고 있다.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에 가톨릭의 성당에서 받은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성명인 아마데우스()는 세례명에 있는 중간성명인 그리스어 어원의 테오필루스()를 라틴어 어원의 같은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나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다. 전해지는 바로는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알아보았고, 볼프강에게 직접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나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으며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린 나이의 모차르트가 작곡을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아버지 레오폴트가 모차르트에게 곡을 써주었다 여겨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 그를 시험해보기도 하였으나,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열은 대단하였는데 특히 6세의 나이에 뮌헨으로 데려간 것을 시작으로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나보내 여러 작곡가들과 만나 교류하고 배우게 하였다. 1763-1766까지 독일 여러 도시는 물론 파리, 런던 등을 돌며 많은 작곡가들과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던 서유럽 일주는 모차르트에게 부담과 동시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764년에서 1765년 사이 영국 런던에서 만나 작곡기예 등을 가르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모차르트는 수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마르티니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운 것을 비롯해 다양한 교향곡과 오페라를 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와 함께 한 여행에서 만하임, 파리 등을 다니며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여러 대도시와 궁정에서 연주를 보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궁정음악가로 활동하였었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궁정과 여러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대주교와의 불화를 계기로 1781년 빈으로 떠나 이후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른다. 그곳에서 콘스탄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 모차르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2년 결혼을 성사시켰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 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 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한 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오스트리아 빈에 찾아온 것은 1792년의 일로 그 때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므로, 오늘날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만났다는 일화에 대한 신뢰성은 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들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아내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했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흔하나, 그에게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예컨대 모차르트는 체코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의뢰를 받기도 했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던 근거로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들리기도 하지만 또 통설에 의하면 이는 단순히 수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차르트의 방탕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들로 치장된 화려한 의상이었으며 도박으로 돈을 낭비하기도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죽은 후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이는 가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시 빈의 중산층의 일반적 장례 풍습대로였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 빈 중산층의 흔한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당시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동 출처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다. 아내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의 외교관이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여러 장르의 많은 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특히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그리고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 작품들이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또 피아노 솔로와, 여러 형태의 실내악, 미사곡 및 여러 종교 음악, 무곡들, 디베르티멘토 등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1764년부터 1788년까지 24년의 기간 동안 여러 교향곡을 작곡했다. 가장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41개보다 훨씬 많은 총 68곡의 완전한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마지막 세 교향곡이라고 하면 교향곡 번호 39번, 40번과 41번을 지칭한다. 일부 교향곡(K. 297, 385, 550)은 초판 이후 모차르트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세악장:알레그로-안단테-알레그로) 일부만 미뉴에트 포함 이 교향곡들은 보통 "초기"(1772년-1773년)나 "후기"(1773년-1775년)교향곡으로 나뉘거나, 가끔은 "독일식"(미뉴에트를 포함) 또는 "이탈리아식"(미뉴에트 없음)으로 나뉜다. 이 곡들은 모차르트의 생전에 출판된 적이 없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의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 디베르티멘토 세 작품(K. 136-138)들은 비록 "교향곡"은 아니지만 "잘츠부르크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여러 악기들을 위한 많은 협주곡들을 작곡했다. 멜로디의 아름다움과, 비록 모차르트가 후대의 다른 음악가들(베토벤이나 브람스 등)만큼 바이올린의 가능성을 모두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악기의 표현적이고 기교적인 특성을 기술적으로 잘 사용한 점이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들의 특징이다. 다섯 곡 모두 모차르트가 아버지를 따라서 유럽을 여행하던 십대 후반 시절에 작곡한 것들이다. (알프레드 아인스타인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이름붙은 작품들보다도 세레나데의 바이올린 협주곡같은 부분들이 더 뛰어나다고 이야기한다.) 호른 협주곡은 호른 주자와 오케스트라간의 세련되고 유머스러운 대화가 특징이다. 많은 호른 협주곡의 서명에는 헌정 대상에 대한 농담이 들어 있다. 모차르트의 초년 시기의 작곡 시도는 피아노 소나타와 그 밖의 피아노 곡들로 시작되는데, 이는 그가 음악을 배우면서 사용한 악기가 피아노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피아노 곡들은 모차르트 스스로(또는 능숙한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의 누나)가 연주하기 위해 작곡하였다. 1782년부터 1786년까지 그는 소나타, 변주곡, 환상곡, 모음곡, 푸가, 론도 등을 포함해 20곡의 솔로 및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곡들(16곡의 소나타와 여러 단편곡, 그리고 두 개의 변주곡 모음)도 작곡했는데, 특히 성년 시기에 작곡한 곡들에서 피아노는 그저 다른 독주 악기의 보조에 머무르지 않고 대화를 만들어 간다. 두 대의 바이올린, 두 대의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위한 모차르트의 현악 오중주 곡들(K. 174, 406, 515, 516, 593, 614)은 그 수는 비록 사중주보다 적지만 그 가운데에는 사중주곡보다 더욱 뛰어난 평가를 받는 곡들도 있다. 기악 앙상블을 위한 작품에는 "디베르티멘토", "노투르나", "세레나데", "카사치오네", "행진곡", "무곡"과 "교향곡" 등이 포함된다. 모차르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에는 현악 앙상블을 위한 것들(초기의 디베르티멘토 K.136-138 등)과 관악 앙상블을 위한 것들, 그리고 현악과 관악의 여러 조합을 위한 것들이 있다. "그랑 파르티타 (세레나타) K.361"는 가장 대표적인 관악기를 위한 모차르트의 곡이다. 두 대의 오보에, 두 대의 클라리넷, 두 대의 바셋 호른, 네 대의 헌팅 호른, 두 대의 바순과 더블 베이스로 연주된다. 모차르트는 "미뉴에토", "콩트르당스"와 "알망드" 등 오케스트라를 위한 많은 무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의 성악곡 모차르트의 성악곡인 미사, 오라토리오, 칸타타, 레퀴엠, 아리아, 아리에타 등을 모은 명단 모차르트의 유년기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으로 클라비어에 숙달하여 유럽 각지를 일찍부터 순회연주하였다. 당시 유럽의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적 시도가 있었으므로 모차르트의 여행은 그러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직접 접할 기회를 부여받고 그의 창작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일찍부터 부친의 천재교육과 유럽의 연주여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또한 받은 중요한 영향을 살펴보면 대강 아래와 같다. 그는 감정과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여 당시의 각종 음악 양식을 부드러운 태도로 흡수, 여기에 개성의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여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표현함으로써 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향곡은 그 개성적인 창작이 베토벤에게 이어졌고, 가극은 베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에 의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에 의해서였다. 쾨헬은 쾨헬 번호에 따라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했다. 모차르트는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인데, 많은 작가들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제로 다뤄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로 만들어져 여덟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섀퍼의 연극에서 모차르트가 천박하고 촌스럽게 그려졌다 하여 이를 거짓 과장이라 비난하였다. 다른 전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다. 또한 영화《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영감을 받아 머릿속에서 음악을 완성한 다음 한 번도 고치지 않고 써내려갔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한번에 거침없이 작곡하는 것이 아닌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 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써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그는 젊은 시절에 당대 내려오던 작품들을 분석하지 않은 게 거의 없었다 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했으며, 한 편에서는 '표절의 천재'라는 비아냥과 오명에 대해 평생을 싸워야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784년에 12월 14일에 프리메이슨 '자선' 지회에 가입하였고, 후에는 장인, 마스터 메이슨까지 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는 것이 가입자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과시의 의미가 컸으므로, 친목 단체인 프리메이슨의 특성상 그리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외계 행성 외계 행성(外界行星) 또는 계외 행성(系外行星)은 태양계 밖의 행성으로, 태양이 아닌 다른 항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행성이다. 지금까지 3800여 개의 외계 행성이 발견되었으며(2018년 6월 23일 기준: 행성계 2840개에서 행성 3796개. 이 중 다중행성계는 632개) 모두 우리 은하 내에 있다. 우리 은하에만 수십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대부분 항성을 돌고 있으나 일부는 홀로 우주 공간을 움직이는 떠돌이 행성이기도 하다.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 지구와 가장 비슷한 것은 프록시마 b이다.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외계 행성이 있으리라고 추측해 왔으나 이들이 얼마나 흔하게 있는지 또는 우리 태양계와 외계 행성계가 얼마나 비슷한지 알 방법이 없었다. 19세기부터 외계 행성을 찾았다는 발표가 여러 번 있었으나 천문학자들의 검증 결과 이 모든 주장들은 기각되었다. 1992년 펄서 PSR B1257+12 주위를 도는 암석 행성들의 존재가 최초로 검증, 발표되었다. 주계열성을 도는 행성 중 최초로 확인된 행성은 페가수스자리 51을 4일에 한 바퀴 도는 가스 행성 페가수스자리 51 b이다. 관측 기술의 향상 덕분에 이후 외계 행성의 발견 속도는 상승했다. 몇몇 외계 행성은 망원경으로 직접 사진을 찍었으나 대다수는 시선 속도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발견되었다. 확인된 외계 행성 대부분은 목성 또는 해왕성 정도 덩치의 가스 행성으로 추측되나 가스 행성이 외계 행성들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무거운 행성들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며 선택 편향의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지구질량 수 배 정도의 외계 행성들도 많이 발견되었으며 통계적 연구결과 이들 암석형 외계 행성의 수는 가스 행성보다 많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지구와 비슷하거나 작은 질량의 행성들도 발견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질량 외의 여러 속성이 지구와 비슷한 것도 있다. 갈색 왜성을 도는 외계 행성들도 있으며 어떤 항성에도 속박되지 않고 우주를 떠도는 행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천체들에 '행성' 명칭이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행성은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 내를 돌고 있어 표면에 액체 물(또는 생명체)이 존재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이런 행성들의 발견으로 외계 생명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고 있다. 외계 행성이 생명체를 품기에 적합한지의 폭넓은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을 행성 거주 가능성 연구라고 하며 이는 외계 행성 탐사에 포함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조르다노 부르노(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음)는 붙박이별들은 태양과 비슷하며 그 주위는 우리 태양계처럼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600년 종교 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말뚝에 묶여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의 천문학적 관점이 유죄판결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18세기에 영국의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 부르노와 비슷한 주장을 적어 놓았다. 태양계 행성들과의 비교를 통해 뉴턴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고 만약 붙박이별들이 각각 태양처럼 계(系)의 중심이라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며 ‘절대자’의 다스림 아래 있을 것이다.” 외계 행성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19세기부터 있었다. 대표적으로 쌍성 뱀주인자리 70에 행성이 있다는 주장을 꼽을 수 있다. 1855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마드라스 천문대에 근무하던 제이콥은 쌍성 궤도의 불규칙함이 행성 존재로부터 나오는 결과라고 주장했다. 1890년대에는 시카고 대학교 및 미국 해군 천문대 소속인 토머스 시는 뱀주인자리 70의 공전궤도의 변칙성은 항성을 36년 주기로 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레스트 레이 몰턴은 세 개 천체로 이루어진 계는 매우 불안정하다는, 토머스 시의 주장을 공격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스와스모어 대학교의 페터 반 데 캄프는 바너드 별 주위에 행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내놓았다. 현재 천문학자들은 초기 외계 행성을 발견했다는 주장 모두를 관측자들의 착오로 간주하고 있다. 1991년에 앤드루 린, 베일스, 셰머는 펄서 타이밍 기법을 사용하여 PSR 1829-10 주위를 도는 펄서 행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는데, 펄서의 주기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이 지구 공전궤도의 이심률을 반영하지 않아 생긴 착오로 판명되었으며 린 및 동료들은 곧장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1988년에 캐나다의 천문학자인 브루스 캠벨과 G. A. H. 워커, 스티븐슨 양은 항성 세페우스자리 감마 주위를 도는 행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발견은 추가 검증을 통해 그 존재가 논문으로 출판된 최초 사례였다. 캠벨 일행은 행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발표했으나 이들의 시선속도 관측자료는 감마별을 행성 한 개가 돌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캠벨의 관측 자료 일부는 당시 관측장비 성능의 한계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이후 수 년 동안 이 발견 및 다른 비슷한 관측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행성이 분명한 천체 몇몇도 갈색 왜성(항성과 행성 중간 정도 질량을 지닌 천체)으로 여겨졌다. 1990년 세페우스자리 감마를 도는 행성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추가 논문들이 발표되었으나 1992년 추가로 발표된 논문은 다시금 심각한 논란을 불러왔다. 결국 2003년 개선된 관측 장비의 성능 및 기술에 힘입어 세페우스자리 감마를 도는 행성의 존재는 검증되었다. 1992년 4월 21일에 전파천문학자인 알렉산데르 볼시찬과 데일 프레일은 펄서 PSR 1257+12을 도는 행성 두 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견은 추가연구를 통해 검증되었고, 외계 행성의 존재가 입증된 최초의 발견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의 탄생 과정에 대해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 초신성 폭발로 펄서가 태어났으며 폭발 잔해로부터 제2의 행성 생성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학설과 둘째, 폭발로 가스 행성의 가스층이 쓸려나간 뒤 남은 암석핵이 어찌하여 살아남아 지금의 궤도를 돌고 있다는 학설이다. 1995년 10월 6일에 제네바 대학교의 미헬 마이어, 디디에 클로는 태양과 비슷한 G형 주계열성 페가수스자리 51을 도는 외계 행성 하나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프로방스 주 천문대에서 관측된 이 발견은 행성 탐사 역사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했다. 기술적 진보(고해상도 분광기의 기여가 대부분임)로 이후 외계 행성들의 발견 속도는 크게 빨라졌다. 천문학자들은 외계 행성이 어머니 별을 중력적으로 흔드는 효과를 관찰하여 간접적으로 행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부 항성들이 거느린 행성들은 우리 시선과 항성 사이를 지나가면서 별의 밝기를 감소시키며, 이러한 방법으로 발견된 행성도 많다. 초창기 발견된 외계 행성들은 어머니 별 바로 옆을 도는 매우 무거운 행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뜨거운 목성의 존재에 놀랐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행성 탄생 이론은 우리 태양계의 목성, 토성처럼 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거운 천체가 태어난다고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비슷한 뜨거운 목성들이 계속 발견되었으며 지금 이런 뜨거운 목성들은 외계 행성 중 적은 수가 아님이 확실해졌다. 1999년에 안드로메다자리 웁실론은 두 개 이상의 행성을 거느린 항성에 그 이름을 최초로 올렸다. 다른 다행성계가 이후 계속 발견되었다. 2012년 12월 1일 기준으로 외계행성 백과사전에 등재된 태양계 이외 행성의 수는 853개이다. 이 중 일부는 1980년대 후반 그 존재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행성들도 있다. 이들 외계 행성은 672개의 항성계 구성원이며 항성계 중 126개는 다중행성계이다. 케플러-16은 쌍성계를 도는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 2012년 2월에 실시된 NASA의 케플러 계획(현재 작동 중지)에서는 우주선에 부착된 망원경으로부터 발사 후 16주간 우주를 관측하여 2,321개의 외계행성 후보를 발견했다(이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이들은 1,790개 항성계의 구성원이다. 2012년 10월 17일에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계인 센타우루스자리 알파를 도는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Bb의 발견이 공표되었다. 이 행성의 질량은 지구와 비슷하나 생물권 내에 있지 않아 액체 물이 표면에 존재할 수 없다. 어머니 항성에 비하면 행성들은 너무 어둡다. 가시광선 파장에서 이들이 내는 빛은 항성의 백만 분의 일 이하이다. 이렇게 흐릿한 빛을 잡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어머니 별에서 나오는 빛이 이를 가려버린다. 따라서 어머니 별의 강한 빛을 가리지만 행성에서 나오는 빛은 남겨놓아야 하는데, 이는 현재 기술적으로 큰 도전거리이다. 앞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현재 기술 수준에서 망원경을 이용하여 외계 행성의 상을 찍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상을 찍을 수 있는 경우라도, 행성의 질량이 크고(목성보다 훨씬 더 커야 함), 어머니 항성에서 제법 떨어져 있으며, 적외선 영역에서 많은 빛을 낼 정도로 내부열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발견했다. 몇몇을 빼고 거의 대부분의 외계 행성은 지상에서 관측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지구 대기의 떨림에 영향받지 않는 관측 기구를 우주로 쏘아 보내는 계획들이 진행되고 있다. COROT은 2006년 12월 발사되었으며 현재 우주 공간에서 외계 행성 탐사 임무를 맡고 있는 유일한 우주 탐사 계획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도 여러 개의 행성을 찾아냈다. 앞으로 실행 예정에 있는 외계 행성 탐사 계획으로 케플러 계획, 뉴 월드 계획, 다윈, 우주 간섭계 계획, PEGASE 등이 있다. 알려진 대부분의 외계 행성들은 우리 태양과 비슷한 별(분광형으로는 F, G, K형 주계열성)을 돌고 있다. 이처럼 태양과 비슷한 별들 주위에서 행성들이 많이 발견된 이유는, 행성 탐사 계획들이 이런 별들을 집중적으로 관측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통계적 분석에 따르면 질량이 작은 별들(적색 왜성이 대표적이다)은 행성을 가질 확률이 작거나, 거느리고 있더라도 질량이 작기 때문에 발견하기 힘든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스피처 우주 망원경의 관측 결과에 따르면 태양보다 훨씬 더 뜨거운 분광형 O 항성은 광증발효과를 발생시켜 행성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항성들은 대부분 수소나 헬륨 같은 가벼운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적은 양이기는 하나 철과 같이 무거운 물질도 갖고 있다. 이처럼 무거운 물질이 얼만큼 있느냐를 중원소 함량으로 표시한다. 중원소 함량이 큰 별들은 행성을 거느릴 확률이 높으며, 중원소 함량이 작은 별들보다 행성들의 질량이 보다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발견된 외계 행성 후보 대부분은 간접적 방법을 이용하여 발견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물리적 수치 및 궤도요소만을 알 수 있다. 발견 방법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도플러 분광법인데, 이 방법을 쓸 경우 공전 주기, 궤도 평균 거리, 궤도 이심률, 각거리, 근일점, 반진폭 등을 알 수 있다. 다만 궤도경사각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천체의 최소 질량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사각이 실제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행성으로 알고 있었던 천체가 실제는 갈색 왜성이나 적색 왜성 등 훨씬 더 무거운 천체로 밝혀진 경우도 있다. 다만 흔치 않게 행성의 궤도경사각이 밤하늘에 대해 거의 수직(90도에 가까움)일 경우 행성은 별 앞을 지나가며 이 경우 행성의 실제 질량과 반지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행성 여러 개가 있는 계(系)의 경우 위치천문학적 관측과 동역학적 연구를 통해 한 행성의 질량 오차값을 줄여나갈 수 있다. 항성 앞을 행성이 지나갈 때 분광기를 이용하여 관측, 행성 대기의 조성물을 분석할 수 있다. 2차 통과(행성이 항성 뒤로 돌아갈 때 일어남)를 통해 행성에서 방출되는 적외선 복사를 감지할 수 있다. 적외선 관측으로 항성에 매우 가깝게 붙어 있는 행성의 표면 온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 대부분은 목성 또는 그 이상으로 매우 무거운 질량을 지녔다. 2008년 8월 기준으로 지구 질량 10배 미만 행성의 숫자는 12개에 불과하다. 적지 않은 행성들은 목성보다도 훨씬 무겁다. 그러나 이는 선택 편향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개발된 발견 방법으로는 작고 가벼운 행성보다는 무겁고 덩치 큰 행성들을 발견하기가 훨씬 쉽다. 이처럼 쏠린 결과는 통계적 분석을 어렵게 만드나 실제 지구처럼 가벼운 행성들은 무거운 가스 행성들보다 흔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관측 기술이 아직 정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지구질량 수 배 수준 행성들이 여럿 발견되었음을 고려하면, 작은 행성들은 매우 흔하게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칠레 소재 라 실라 천문대 HARPS 스펙트럼 사진기 2008년 자료에 따르면 항성 14개 중 하나 꼴로 가스 행성이 있으며, 다시 가스 행성이 있는 별 셋 중 하나 꼴로 지구질량 30배 이하의 암석 행성을 거느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많은 외계 행성들은 어머니 항성을 우리 태양계 수성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돌고 있다. 이 사실은 관측적인 선택편향으로 해석 가능하다. 시선속도법은 작은 궤도를 도는 행성들을 보다 잘 찾아낸다. 천문학자들은 처음에는 이런 “뜨거운 목성”의 존재에 충격을 받았으나 현 시점에서 대부분의 외계 행성들은(혹은 적어도 대부분의 무거운 외계 가스 행성들은) 항성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음이 확실하다. 그 중 일부는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 가능한 생물권 내를 도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외계 행성계에는 목성이나 토성과 비슷한 덩치의 가스 행성이 적어도 한 개 또는 두 개씩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공전 이심률은 행성이 어머니 항성을 얼마나 찌그러진 궤도를 그리면서 도는지를 보여준다. 발견된 행성들 대부분의 궤도는 크게 찌그러져 있다. 이는 관측적 선택편향이 ‘아닌’, 외계 행성들이 보여주는 보편적 모습이다. 그 이유로 궤도 이심률은 행성 발견 감지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원 궤도가 흔하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에게 있어 중대한 수수께끼인데, 현재 행성 탄생 이론에 따르면 행성의 궤도는 원에 가깝게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로 T 왜성(메탄이 포함된 갈색 왜성)과 같은 작은 동반 천체가 행성계에 숨겨져 있어 행성의 궤도를 뒤틀리게 만든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우리 태양계가 흔치 않은 사례일 것임을 암시해 주는데, 그 이유는 수성을 뺀 모든 행성들이 원에 가까운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현재 1800개가 넘는 외계 행성들이 발견되었으며 꾸준히 계속 발견되고 있다. 카네기 과학 재단의 앨런 보스 박사는 우리 은하 안에만 수천억 개의 암석 행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이들 중 많은 곳에 간단한 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하며 수천 개의 문명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태양과 비슷한 항성 주위에는 평균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하나씩은 있다고 추측했다. 최근 에든버러 대학교 천문학 연구팀은 외계 지적문명의 수가 최소 361개, 최대 37,964개에 이른다는 연구 발표를 내놓았다. 외계 행성이 한 개만 있는 행성계의 시선 속도 곡선은 대부분 궤도이심률이 0.1 이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의 실험 결과 행성이 2개 있을 경우 궤도가 원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항성 주위 1개만 있다고 보고된, 이심률이 비교적 작은 행성들 중 약 15퍼센트가 숨겨진 형제 행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외계 행성의 여러 속성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의문점들 - 구체적인 행성 조성물이나 위성이 있는지의 여부 등 - 이 남아 있다. 최근 여러 외계 행성 대기를 조사한 결과 물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가 외계 행성들의 속성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음을 시사해 주었다. 또다른 의문점으로 외계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있다. 여러 개의 행성들은 어머니 항성의 생물권 내를 공전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지구보다는 목성과 비슷한 가스 덩어리이다. 만약 이들 주위에 거대한 위성들이 있다면 이 위성 표면은 생명체가 살기에 적당한 환경일 것이다. 그러나 별과 별 사이 거리를 뛰어넘어 외계 행성에서 생명체의 존재(혹은 문명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은, 비록 외계 생명이 흔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기술적으로 매우 힘든 도전 과제가 될 것이다. 국제천문연맹(IAU)이 제정한 행성의 정의에 따르면, 행성은 일단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한다. 그러나 현 IAU의 행성에 대한 정의는 우리 태양계 내에만 적용될 뿐 외계 행성들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다. '실효성 있는' 외계 행성에 대한 정의는 2001년 제정되었고 2003년 마지막으로 개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행성급 천체들(별을 돌지 않으며, 떠돌이 행성 또는 성간 행성으로 불릴 때도 있음)의 존재가 보고되어 있다. 이런 천체들은 외계 행성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본 문서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항성 주위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나(즉 '외계 행성'으로 부를 수 있었으나), 이후 어떤 이유 때문에 항성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외계 행성의 이름을 짓는 방법은 쌍성계의 항성 구성원들 이름을 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항성의 경우 대문자를 붙이지만 행성은 소문자를 붙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보통 처음으로 행성이 발견될 경우 그 행성의 어머니 항성 이름 바로 뒤에 소문자 'b'를 붙인다(예: 페가수스자리 51 b). 어머니 항성이 A이기 때문에 'a'는 쓰지 않는다. 같은 행성계 내에서 첫 번째 행성이 발견된 뒤 추가로 형제 행성들이 발견될 경우, b 다음의 c, d, e... 순서대로 이름을 얻는다. 동시에 두 개의 행성이 함께 발견될 때도 있는데, 이 경우 항성에 가까운 쪽이 빠른 기호를 받는다. 행성들은 반드시 항성으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항성으로부터의 순서대로 늘어놓을 경우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글리제 876 행성계의 경우 글리제 876 d는 이전에 발견되었던 글리제 876 b, c보다 항성에 가깝기 때문에 거리 순서로 정렬하면 d, c, b가 된다. 2009년 6월 기준으로 가장 뒤쪽 기호를 받은 행성은 게자리 55 f로, 게자리 55의 다섯 번째 행성이다. 때로는 쌍성계 구성원들 중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어머니 항성 기호와 함께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백조자리 16은 A와 B 두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B 주위에서 첫 번째 행성이 발견되었고, 이 행성은 A가 아닌 B 옆에 있기 때문에 '백조자리 Bb'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Bb도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받은 것이다. 다만 위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1995년 페가수스자리 51 b가 발견되기 전 펄서 타이밍법을 이용 펄서 주위를 도는 행성 두 개(PSR B1257+12 B, PSR B1257+12 C)가 발견되어 있었다. 당시 외계 행성 이름을 붙이는 방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행성은 "B" 와 "C"로 불렸다(이는 현재 외계 행성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이름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소문자 대신 당시에는 대문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항성급 천체들을 부르는 방법이었다. 이후 발견된 세 번째 행성은 PSR B1257+12 A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는 단순히 셋째 행성이 나머지 둘보다 항성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과학 소설 등 일부 명명법은 항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순서에 따라 로마 숫자를 사용하여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태양계 외행성의 위성들을 표기하는 옛날 방법(예를 들면 칼리스토를 '목성 IV'로 쓰는 것)에 따른 것인데,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아니다. 이를 우리 태양계의 경우에 대입하면, 외계 문명이 우리 태양 주위 행성을 찾으려 할 경우 목성과 토성을 가장 먼저 발견할 것이고 그 이름은 각각 '태양 I'과 '태양 II'가 될 것이다. 이후 관측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태양에 가까운 작은 행성 네 개를 다 발견하면 목성과 토성의 이름은 최종적으로 '태양 V'와 '태양 VI'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외계 행성 명명법에 따르면 목성과 토성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태양 b'와 '태양 c'라는 이름을 받을 것이며, 이후 나머지 행성들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고쳐질 일은 없다. 만약 어떤 행성이 쌍성계 내에 있더라도 어머니 항성 둘이 붙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어머니 항성 대문자 기호가 행성 소문자 앞에 붙는다. 그 행성이 주성(主星)을 돌고 있으며 짝별은 주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혹은 행성이 발견된 뒤 짝별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어머니 항성의 대문자 기호는 생략된다. 예를 들어 목동자리 타우 b는 목동자리 타우 항성계의 주성 A 주위를 돌고 있으며 따라서 정확한 이름은 목동자리 타우 Ab가 되어야 하나, 목동자리 타우의 짝별은 행성 존재가 확인된 뒤 발견되었으며 주성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문자를 생략하여 간단히 표기하는 것이다. 다만 백조자리 16 Bb나 사자자리 83 Bb처럼 행성이 주성이 아닌 짝별 주위를 돌 경우 항상 짝별 대문자를 앞에 붙여줘야 한다. 몇몇 행성들은 태양계 행성들처럼 별도의 애칭을 얻은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시리스'로 불리는 HD 209458 b, '벨레로폰'으로 불리는 페가수스자리 51 b, '므두셀라'로 불리는 PSR B1620-26 b이다. 국제천문연맹은 현재 외계 행성 이름을 붙이는 공식적 지침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이다. 외계 행성 발견사에 있어 첫 번째 중대한 사건은 1992년에 있었다. 볼시찬과 프레일은 네이처에 기고한 저널에서, PSR B1257+12 주위를 행성이 공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행성은 존재가 최초로 확인된 외계 행성들이었으며, 펄서 주위를 돌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매우 특이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항성 주위를 도는 사례 중 최초는 페가수스자리 51 b였다. 이 행성은 메이어와 퀠로즈가 1995년 10월 6일자 네이처 지에 발견 사실을 기고했다. 천문학자들은 당시 이 행성이 '뜨거운 목성'이라는 사실에 당혹해 했지만, 이후 비슷한 사례가 추가로 계속 발견되면서, 어머니 항성 바로 옆을 붙어 도는 사례는 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외계행성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수록, 어떤 조건의 행성에서 외계 생명체들이 존재할지에 대한 의문도 커져 왔다. 관측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가스행성 뿐 아니라 보다 작은 질량의 행성들을 탐지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보통의 별 주위를 도는 행성들 중 지구의 수 배 질량 정도의 행성까지 찾아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가능하게 해 준다. 2007년 발견된 글리제 581 d의 경우 항성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바다가 존재할 수 없을것으로 생각했으나, 2009년 프랑스 그르노블 천문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생물권 범위 내에서 공전하고 있는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685년 거리의 악사(바이올린 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1695)의 막내아들로서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3월 23일에 그 곳의 성(聖)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2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자활할 필요에 쫓겨,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북독일의 뤼베크를 찾아가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이 시기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아른슈타트 시대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인데, 그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여,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독일의 도시 뮐하우젠으로 갔다.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교회 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들여 제71번,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말려들어 겨우 1년 만에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바흐를 맞이한 것은 바이마르 궁정이었다. 한때는 한낱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온 것이다. 1708년 7월 23세 때의 일이다. 이 바이마르 시대(1708-1717)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으며, 비할 데 없을 만큼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의 이름은 독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되어, 매달 1곡씩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당시의 가장 새로운 음악이었던 비발디 등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이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異例的)인 후대를 베풀었다. 쾨텐의 궁정은 깔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을 비롯하여 그의 세속적 기악곡의 대다수가 이 시대에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뮐하우젠 시대인 1707년, 바흐는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쾨텐 시대인 1720년에 이 부인이 병사했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합계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약 반수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쾨텐 시대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정때문에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독일 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의 창작중심은 <마태오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성악곡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 한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의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간 것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수요가 줄고, 그 대신에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고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적 헌정>(BWV1079)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도 잃어 <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한채, 1750년 7월 28일, 사망한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국방 국방(國防) 또는 안전보장(安全保障), 안보(安保)는 국가가 국민과 국제적으로 인정된 자국의 영역(영토, 영해, 영공)을 외부 또는 내부에서 발생되는 위협으로부터 사전에 예방하고 지키며, 경우에 따라서 이들의 보존과 안정을 위하여 국가가 지닌 모든 권력과 수단을 동원하는 행위 및 제도를 일컫는다. 대한민국은 국방등 현안을 다루기 위한 법률로서 국가보안법등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러시아,중국등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와 유사한 법적 시스템을 채택 또는 보유하고 있다.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모병제, 징병제등이 실시된다. 유전학 유전학(遺傳學, )은 생물의 유전과 유전자 다양성 등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선사 시대부터 인간은 생물의 특징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는 것을 이용한 품종 개량을 해왔다. 그러나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유전을 연구한 것은 그레고어 멘델이 유전 법칙을 발견한 19세기 중반부터이다. 그는 오늘날 유전자라 부르는 물질을 유전 대립쌍이라 불렀다. 현대 유전학의 핵심 개념은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전체 게놈 서열 가운데 DNA의 일정 구간을 이루는 염기서열의 배열이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들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DNA 복제를 통하여 유전형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또한 세포에서 DNA의 역할은 단백질을 형성하여 생물이 생장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의 코돈은 각각 하나의 아미노산과 대응하며, 이렇게 전사된 RNA에 의해 결합된 아미노산에 의해 단백질이 형성된다. 단백질은 효소, 근육, 세포질 등 생물을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개괄하면, 현대의 유전학은 생물의 발생과 생장, 그리고 진화에서 차지하는 유전자의 역할을 규명하고 DNA의 재조합 실험을 통해 유전체와 생물 정보를 탐구하는 폭넓은 영역의 과학이다. 매우 넓은 연구분야를 이루고 있기때문에 현대의 유전학은 집단유전학, 유전체학, 진화유전학 등의 하위 학문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또한 유전학의 지식은 여러 학문에 파급되어 의학, 농업 등에서 유전학은 필수적인 기반 지식이 되었다. 유전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유전공학은 유전자의 조작을 통한 약품의 개발과 품종개량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발표된 멘델의 유전 법칙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의 유전에 대한 개념은 부모 양쪽의 특징이 자식에게 섞여 나타난다는 혼합 유전이었다. 예를 들면 붉은 꽃과 흰 꽃의 자식은 분홍 꽃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흰 꽃과 붉은 꽃 사이에 수정된 자식 세대가 분홍 꽃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식 세대가 흰 꽃 또는 붉은 꽃만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혼합 유전 이론은 답을 줄 수 없었다. 멘델은 우성 인자와 열성 인자의 조합이라는 설명을 통해 자식 세대가 한 가지 색으로만 나타나는 이유를 밝혔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한편, 라마르크는 자신의 용불용설에 따른 진화 이론을 설명하면서 생물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형질 변화가 유전되는 것으로 보았다. 유명한 일례로는 기린의 목이 길어진 원인에 대한 용불용설의 설명이 있다. 기린이 살아가는 동안 높은 가지에 있는 잎을 따먹기 위해 목을 뽑아 늘리기를 계속한 결과, 기린의 자식은 더 긴 목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 법칙이 발견되기 전까지 라마르크의 이론은 가장 적합한 진화 이론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다윈 역시 진화가 일어나는 유전적 기제로 라마르크의 이론 이상의 것을 알 수는 없었으며 라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종에 나타나는 새로운 특성은 개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1905년 베이트슨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유전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베이트슨은 1906년 런던에서 열린〈제3차 국제 식물 잡종 연구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재발견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표하였고 이와 관련한 학문에 유전학이란 이름을 붙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된 후 과학자들은 유전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 세포 내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1910년 모건은 눈이 흰 돌연변이가 발현한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에서 생물의 유전 물질이 염색체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1913년 스터티번트는 멘델의 유전법칙의 제3법칙인 독립의 법칙이 실제에서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원인을 밝혀내고 이를 유전자 연관이라 하였다. 유전자 연관이란 하나의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데 다수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현상이다. 염색체는 DNA와 단백질이 엉켜 있는 구조다. 유전과 관련한 물질이 염색체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도 과학자들은 정확히 염색체의 어떤 성분이 유전에 관여하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1928년 그리피스는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박테리아의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그의 실험은 유독한 폐렴쌍구균(S형)에 열을 가하여 파괴하면 독성이 사라지지만, 무해한 폐렴쌍구균(R형)에 이미 열처리하여 독성이 사라진 S형 균을 넣자 모두 독성을 지니게 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피스는 S형 균의 어떤 성분이 R형에 영향을 주어 형질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으나 무엇이 그러한 변환을 일으키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1944년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 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1952년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허시-체이스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을 밝혔다.허시는 이 실험의 공로로 196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은 X선 회절로 DNA의 구조를 밝혔다. 이들이 밝힌 DNA의 구조는 두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사슬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꼬여 있는 모습이었다. DNA의 이러한 구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서열이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과 DNA의 복제가 유전형질의 전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생어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덕에 생애에 두 번의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았다. 생어는 1955년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을 완벽하게 분석하였다. 이 공로로 195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생어는 그의 연구 기술을 발전시켜 DNA의 염기서열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로써 게놈의 염기서열을 밝힐 수 있었다. 생어는 이 공로로 1980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생어는 이 과정에서 DNA의 세 염기쌍이 코돈을 이루며 이 코돈이 전령 RNA를 전사하고 이를 통해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규명하였다. 1983년 미국의 생화학자 멀리스는 폴리메라아제 연쇄 반응을 개발하여 DNA의 염기서열의 확인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이 방법은 DNA의 특정 구간을 신속하게 복제하여 동일한 DNA의 양을 실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DNA의 염기서열 확인이 쉽게 되자 곧바로 범죄 용의자의 DNA 인식과 같은 분야에 사용되게 되었다. 멀리스는 이 공로로 1993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러한 DNA 염기서열 확인 기술의 발달로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지도가 완성되었다. 멘델은 완두콩의 독립적인 유전자가 갖는 대립 형질이 우성과 열성으로 나뉘어 발현하는 유전 법칙을 발견하였다. 오른쪽의 그림과 같이 열성인 흰색 꽃은 부모로부터 열성인자만을 유전하였을 때 발현하며, 두 부모가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를 보유하고 있는 잡종일 경우 우성과 열성의 발현 비율은 3:1이 된다. 멘델은 수 년간을 실험하여 이것이 실제 통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멘델이 완두콩의 교배 시험을 최초로 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200여년 전인 1790여년 무렵 영국의 농부 T. A. 나이트는 멘델과 동일한 실험을 하여 같은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고 그 까닭도 밝히지 못했다. 멘델은 나이트의 실험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오른쪽 그림의 예에서 보이는 꽃의 색의 경우 실제 나타난 "표현형"과 이것이 나타나게 하는 "유전자형"을 구분함으로써 과학적인 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 멘델은 수 세대 동안 완두콩을 자가 수분하여 단일한 유전형질을 가진 순종(P 세대)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붉은 꽃의 순종과 흰 꽃의 순종을 교배하여 잡종 1세대(F1)를 얻었다. 잡종 1세대의 발현 형질을 조사한 멘델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잡종 1세대를 교배하여 잡종 2세대(F2)와 3세대(F3)를 얻고 발현 형질을 기록하였다. F1은 모두 붉은 꽃이었다. 그러나 F2에서 붉은 꽃과 흰 꽃은 3:1의 비율을 보였고, F3에서는 열성 순종인 흰 꽃만이 다시 흰 꽃이 되었고 나머지는 붉은 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다음의 세 법칙을 확인하였다. 붉은 꽃의 유전인자를 B, 흰 꽃의 유전인자를 b라 하면, 위에서 예를 든 완두콩의 우성과 열성의 발현은 "멘델의 제1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멘델의 실험이 알려지자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여 DNA의 서열인 유전자가 이에 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모든 생물에서 발견되며 사람의 가계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한 유전질환을 앓고 있는 가계도의 경우 우성 유전 또는 열성 유전을 판별할 수 있다. 인류유전학자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특정 지역에 모여사는 아만파 신도들과 같이 고립 생활을 하는 집단을 대상으로 열성 유전을 연구한다. 한편, 어떤 꽃은 흰색과 붉은 색을 교배할 경우 F1은 분홍색으로 F2는 붉은 색, 분홍색, 흰 색의 비율이 1:2:1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한 쪽도 완전한 우성을 보이지 못하는 이러한 경우를 불완전 우성이라 한다. 불완전 우성 역시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른다.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완두콩 꽃의 색과 열매의 색은 서로 독립적인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즉, 꽃의 색과 열매의 색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서로 별도의 우열 관계가 있다. 생물은 수천 개가 넘는 유전자가 있고, 이들 대부분은 이와 같은 "독립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어떤 유전형질은 독립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예가 최초로 관찰된 것은 지치과의 의 꽃 색이다. 이 꽃의 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셋인데 그중 열성인 흰색과 서로 대립하는 우성인 파랑, 마젠타의 인자가 조합하여 꽃의 색이 만들어진다. 마젠타 또는 파란 색의 인자가 흰색인자와 짝을 이룰 경우 꽃은 우성인자인 이 둘 중 하나의 색을 띄고 열성인 흰색 인자로만 짝지워질 때 흰색 꽃이 된다. 이와 같이 우성 인자가 다수인 경우 나타나는 발현형질을 상위성이라 한다. 오늘날 독립의 법칙을 따르는 대립형질만큼이나 많은 유전 형질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사람의 키, 피부색과 같은 유전형질은 많은 유전자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이와 같은 현상을 양적 형질 위치라 한다. 현대의 분자생물학에 기반을 둔 유전학은 DNA부터 개체의 발생에 이르는 유전 기제를 설명하고 있다. 앞서 유전학의 역사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그리피스의 실험과 에이버리의 확인으로 생물의 유전 정보는 DNA에 있음이 밝혀졌다. 유전의 과정은 결국 DNA 복제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개체의 출현에 이르는 기제로서 설명된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가 사슬처럼 연결된 중합체이다. 유전 정보의 전달은 이 DNA가 복제됨으로써 일어난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수소 결합에 의지하고 있어 분리와 결합에 비교적 적은 에너지가 투입된다. 특정 효소가 DNA 사슬의 분리를 담당하며, 이렇게 분리된 DNA 사슬은 각자 상대되는 DNA 사슬을 만드는 주형이 된다. 자유롭게 존재하는 네 종류의 디옥시뉴클레오타이드 삼인산, 즉 dATP, dGTP, dCTP, dTTP 가 주형이 되는 DNA사슬에 다가가 상보적인 결합을 이루게 되면 새로운 이중나선이 형성된다.(그림 참조) DNA의 복제는 매우 안정적인 반응이지만 완전하진 않다. DNA 복제에 이상이 생겨 이전의 DNA와 다른 DNA가 생성되는 것을 돌연변이라 한다. 자연발생적 변이는 100만 번의 DNA복제 중에서 한 번 정도로 일어나며, 방사선이나 약품을 처리하면 이보다 높은 빈도로 일어난다. 노랑초파리를 이용한 인위적인 돌연변이 실험의 결과 돌연변이의 약 70 %는 개체에게 해로운 방향으로 진행되며, 나머지 돌연변이는 중립적이거나 유리한 성향을 보인다. 생물이 부모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재생산되는 것을 생식이라 한다. 개체의 분열과 같은 무성생식에서는 DNA 복제만으로 유전 기제가 완성된다. 그러나 암·수가 구분되는 유성생식에서는 더 복잡한 기제를 거친다. 유성생식에서는 먼저 암·수의 부모 각자가 감수분열을 통해 난자와 정자를 만들고 이를 수정하여 자식 세대가 발생하게 된다. 감수 분열의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난다. 이는 한 쌍의 유전자가 여러 구간에 걸쳐 서로 뒤섞이는 현상이다. 이를 통해 생물은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한다. 또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 유전형질에 여러 유전자가 관여할 수 있는데 이 때에는 멘델의 유전법칙 중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이는 유전자 재조합 과정에서 교체된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유전자 연관이라 한다. 유전자의 대립형질의 발현은 순전히 통계적인 것으로, 실제 대립형질 발현빈도는 무작위 행보를 보인다. 이를 유전자부동이라 한다. 유전자부동은 자연선택과 함께 진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분자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유전자의 정보에 의해 단백질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유전자의 정보는 전령 RNA의 코돈에 의해 전사된 후 운반 RNA의 안티코돈에 의해 번역되어 아미노산을 지정하며 리보솜에서 이를 연결하여 단백질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발생생물학에서 유전자의 발현은 배아의 발생 결과 새로운 개체가 형성되는 것이며, 개체의 발생에는 유전형질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의 영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생물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의 발현에는 오페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정 기능에 관련된 유전자들이 나란히 염색체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오페론은 염색체에서 하나의 군집을 이루어 유전자 섬을 형성한다. 병원미생물학에서는 질병의 특징을 파악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병원성 세균의 유전자 섬을 연구하고 있다.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단백질을 생산함으로써 형질이 발현된다.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이 복잡하게 얽힌 고분자이다. 유전자는 각각의 아미노산의 연결 순서를 지정함으로써 단백질의 생성을 관할한다. DNA에서 단백질 형성까지를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생물의 유전자에는 모든 유전 형질이 들어있어 자식 세대로 전달된다. 그러나, 실제 생물 개체의 발생과 생장에서 나타나는 발현형질은 유전형질과 함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일례로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샴 고양이의 온도 민감성 돌연변이와 같은 것이 있다. 발생과정에서 높은 온도에 노출된 샴고양이의 배아는 털색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켜 일반적인 샴 고양이의 흰색이 아닌 어두운 색 털이 만들어진다. 성 유전자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포유류와는 달리 많은 파충류는 별도의 성 유전자가 없어 발생시의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대부분의 거북은 따뜻한 곳의 알은 암컷이 되고 응달의 알은 수컷이 된다. 반면 미국산 악어는 응달의 알이 암컷이 된다. 이와 같이 유전자가 생물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환경이 생물체의 발생과 생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생물의 게놈에는 수천 개의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전자가 생물체의 발생과 생장에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직 전령 RNA를 통해 단백질을 형성할 수 있는 유전자만 이러한 생명 활동에 관여하며 나머지 유전자는 비활성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특정한 단백질을 생성하려면 DNA의 일부 구간만 활성화하여야 한다. 전사의 시작점과 끝점을 정하는 것은 전사인자와 같은 효소들이다. 전사인자는 부적 되먹임에 따라 작동한다. 즉, 전사인자에는 특정한 단백질의 농도를 감지할 수 있는 수용기가 달려있는데, 특정 단백질의 농도가 낮아져 이 수용기에 감지되지 않으면 전사인자는 DNA를 열고 전사를 시작한다. 유전자에는 구조부위와 조절부위가 있다. 구조부위는 생물체를 형성하는 단백질의 생산을 지시하기 위한 정보가 들어있고, 조절부위에는 위에서 설명한 전사인자와 효소들과 같은 조절작용을 담당하는 단백질의 생산을 위한 정보가 들어있다. 실제 생물의 단백질 생성 조절은 단백질이 생산되는 양 자체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생산을 지시하는 RNA의 조절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DNA의 복제는 매우 안정적인 반응이나 간혹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이 DNA 복제의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로 인하여 유전형질이 변한 것을 돌연변이라 한다. DNA 중합효소에 의해 복제에 오류가 발생할 확률은 약 100만 회 당 1번 꼴이다. 외부의 돌연변이원의 자극을 받으면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 일상적인 자외선도 돌연변이원의 일종으로 과도한 자외선 노출은 DNA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다. 일례로 강한 자외선에 노출된 피부가 피부암을 일으키는 것을 들 수 있다. 유성생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재조합 가운데 염색체 교차의 과정에서도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 있다. 염색체 교차 과정중에 일부 염색체가 덧붙거나 잘려나가는 등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돌연변이는 DNA의 일부가 누락되는 것과 같은 단순한 돌연변이에 비해 생물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면 유전자 중복, 유전자 결실, 염색체 역위와 같은 염색체 단위의 돌연변이들이 있다. 돌연변이로 인한 유전자 변화는 유전형질의 변화로 나타나며 자손에게 유전된다. 자연환경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대부분 전체 게놈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변화시킬 뿐이다. 노랑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인위적인 돌연변이 실험에서 나타난 돌연변이의 70%는 개체에 해롭게 작용하였고 나머지 돌연변이는 중립적이거나 유리하였다. 집단유전학에서는 집단에서 나타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가 세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하여 일정 세대가 되면 하나의 형질만이 살아남는 고착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집단유전학은 이러한 고착의 원인을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압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다양한 대립 형질 가운데 보다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길 것이고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집단 내에서 하나의 형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유전자 부동, 유전자 이동, 인위적 선택 등이 생물 집단의 대립형질 빈도 변화에 영향을 준다. 자연선택이 일어나는 가운데 세대가 거듭되어 많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질을 갖는 집단으로 변화하는 적응이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같은 생물종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격리되어 다른 방식으로 적응된다면 결국 다른 종으로 분화될 것이다. 진화는 이와 같이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분화하는 현상이다. 최근에는 서로 다른 종들 사이의 유전형질 전달로 인해 유전자가 변화하는 수평적 유전자 이동역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전학은 매우 다양한 생물을 다룬다.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들은 자신의 실험 목적에 알맞은 모델 생물을 주로 활용한다. 모델 생물은 과학계가 집중적인 연구를 위하여 선정한 종으로, 이러한 모델 생물을 선정한 이유는 이를 자세히 연구하면 다수의 종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기본 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세포성 점균인 딕티오스텔리움 디스코이데움 등이 널리 사용되는 모델 생물이다. 딕티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이 점균에 대한 연구 결과는 딕티베이스에 정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노랑초파리는 20세기 초부터 모델 생물로 활용되었고 유전공학에서는 대장균이 모델 생물로 널리 활용된다. 실험실에서 직접 DNA를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실험 기술들이 사용되고 있다. 인위적인 DNA의 제작, 표적 유전자의 부착, 제한효소를 사용한 DNA의 절단과 접합 및 복제와 같은 기술들이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의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대 유전학에서는 실험을 위해 다양한 유전자 조작 기술을 개발하였다. DNA와 RNA는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합성될 수 있다. 최초의 인위적인 유전자 합성은 마샬 니렌버그와 하인리히 마타헤이가 1961년 코돈과 아미노산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이들은 인위적인 코돈배열인 우라실연속체(U-U-U-U-……)와 같은 인위적인 유전자를 리보솜에 집어 넣어 그 결과를 확인함으로써 코돈과 아미노산의 관계를 증명하였다. 특정 유전자의 표적 형질을 추적하는 방법은 유전자의 발현과정을 이해하는데 기여하였다. 해파리와 말미잘에게서 얻은 형광 유전자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 유전자를 다른 생물의 유전자들 사이에 끼워넣음으로써 유전자가 발현되는 기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형광유전자를 이용하여 수백종의 DNA를 하나의 칩 위에 올려놓은 DNA 칩은 암 진단에 유용하게 쓰인다. 제한효소를 사용하여 DNA의 특정 부분을 잘라낼 수 있게 되면서 실험실에서 DNA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겔 전기 영동법을 사용하면 잘라진 DNA의 조각들을 그 길이에 따라 구분하여 관찰할 수 있다. DNA 연결효소는 잘라진 DNA를 다시 접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접합된 DNA 조각은 대장균과 같은 박테리아에 심어져 대량으로 복제될 수도 있다. 유전공학은 이러한 복제 기술을 사용하여 유전자 조작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인슐린의 대량 복제를 위해 대장균을 이용한다. 의학 유전학은 유전자와 인간의 질병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암과 같은 유전적 변형에 의한 질병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혈우병, 다운 증후군과 같은 유전성 질환은 19세기에 이미 보고되었으나 질병의 원인이 염색체 이상에 있다는 것은 유전학이 발달한 20세기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다운 증후군은 1862년 영국의 의사 존 랭던 다운이 최초로 발견하여 1866년 학계에 보고하였으며 1956년 감수 분열과정에서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아 정상적인 경우와 다르게 인간 염색체 21번이 3개 존재하는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후 다양한 유전성 질환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유전학의 성과와 연구 방법을 의학에 접목시킨 의학 유전학이 성립되게 되었다. 최근에는 유전자 중복, 유전자 결실, 염색체 역위와 같은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성 질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유전자 중복이 원인인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에 대한 연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은 중요 신경 질환의 하나로 100,000명당 발병률은 36명이다. 오늘날의 유전학은 많은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다양한 학문과 학제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00년 이후 각광을 받고 있는 연구 분야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관련한 유전체 연구와 후성유전학이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완성된 인간 유전체 지도는 사람의 모든 유전자 서열을 밝혀 내었다. 또한, 유전형질에 의한 발생 과정이 끝난 이후에도 일어나는 유전체의 변동과 유전자 발현의 조절을 연구하는 후성유전학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후성유전학에서는 암의 발현과 같은 후생적 유전자에 의한 유전자 발현을 연구하고 있다. 발생유전학을 비롯한 여러 하위 학문의 학제간 연구인 줄기 세포연구는 다양한 유전성 질환의 치료 방법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10년에 발표된 예일 대학교의 연구 논문에서는 자궁 내막을 이용한 성체 줄기 세포로 파킨슨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노화에 대한 연구도 최근 유전학 연구의 주요 동향이다. 2009년 노벨상위원회는 노화의 진행과 관련된 세포의 수명 시계인 텔로미어를 발견한 엘리자베스 블랙번 등에게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여하였다. 진화와 관련된 연구는 유전학과 조합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이를 진화유전학이라고 한다. 진화 현상 자체가 직접 관찰되었기에, 명백한 사실로 밝혀진 진화를, 각 유전체와 유전자에서 어떤 속도로 다르게 이루어지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21세기 들어 가장 활발히 연구되는 연구과제인 진화의 속도와 방향 연구가 있다. 생물학 용어 다음은 생물학 용어 목록이다. 현대 쏘나타 현대 쏘나타(Hyundai Sonata)는 1985년에 출시되어 현재까지 판매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중형차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형차이다. 현재 현대자동차의 승용차 중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차명인 쏘나타는 고도의 연주 기술이 요구되는 4악장 형식의 악곡인 소나타에서 따온 것으로, 혁신적인 성능, 기술, 가격을 지닌 종합 예술 승용차라는 의미이다. 본 항목에서의 판매 기간은 자가용 기준이다. 1985년 11월 4일에 출시되었다. 큰 인기를 모은 대우 로얄 시리즈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존의 스텔라에 미쓰비시자동차공업제 1.8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과 2.0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을 얹었다. 여기에 크루즈 컨트롤, 파워 시트, 헤드 램프 워셔, 크롬 범퍼, 전동 조절식 아웃 사이드 미러 등 고급 사양을 적용하여 판매한 것이 쏘나타의 시초이다. VIP를 위한 고급 승용차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수요층에게 어필하려고 하였으며, 인기 배우 故 신성일이 첫 번째로 계약하여 화제를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중형차라는 이미지의 스텔라와의 큰 차별화가 없어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이에 경쟁 회사인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로부터 '소나 타는 차'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여 1986년 2월부터 신문 광고 등을 통하여 이미지 쇄신과 고급화를 위하여 소나타에서 쏘나타로 개명하였다. 1987년 2월 2일에 투톤 외장 색상과 트립 컴퓨터 등을 달았으나, 별다른 효과를 못 봐 같은 해 12월에 단종되었다. 1988년 6월 1일에 전륜구동 방식의 수출 전략형으로 탈바꿈한 2세대 쏘나타가 출시되어 한동안 현대자동차는 1세대 쏘나타를 쏘나타의 계보에서 제외하였다. 하지만 2003년 3월에 쏘나타 250만 대 생산 돌파 시점부터 1세대로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등록된 1세대 쏘나타는 극소수이다. 2014년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B2홀에 개최되었던 쏘나타 모터쇼와 2015년 8월부터 9월까지 열린 전국 순회형 쏘나타 모터쇼, 2015년 11월부터 12월까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열린 쏘나타 헤리티지 전시회에서 현대자동차가 전라북도 전주시에 거주하는 오너로부터 빌려서 복원한 1세대 쏘나타를 전시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8년 6월 1일에 출시되었다. 스텔라와는 성격이 다른 전륜구동 방식의 수출 전략형 중형차로 개발되어 대한민국에서 이미 실패한 차종임에도 여러 최종 차명 후보 중에서 제일 부르기 쉽다는 미국 딜러들의 의견에 따라 결국 차명이 쏘나타로 결정되었다. 1세대 그랜저(L)의 전륜구동 메커니즘을 채용하였고, 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이 적용되어 공기 저항 계수(Cd)가 0.32를 기록하는 등 스텔라 베이스의 1세대와는 달리,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은 최고 출력 120마력과 최고 시속 174.5km의 성능을 내었다. 8인치와 9인치 부스터 2개를 조합해 제동 성능을 높인 탠덤 부스터를 대한민국산 자동차 최초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서스펜션은 앞 맥퍼슨 스트럿, 뒤 3 링크를 사용해 북아메리카 시장에 맞게 세팅된 부드러운 승차감이 특징이었고, 파워&틸트 스티어링 휠과 크루즈 컨트롤 등 각종 편의 사양도 적용되었다. 출시 당시 가격은 1.8i 트림이 906만 원(5단 수동변속기 기준), 2.0i 트림이 1,206만 원(4단 자동변속기 기준)이었다. 대우 로얄 프린스와 기아 콩코드 등 경쟁 차종에 비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여 1989년에는 대한민국 전 차종 연간 판매 3위를 기록하였다. 1989년 7월 24일에는 새 라디에이터 그릴 형상, 범퍼 몰딩과 사이드 몰딩의 색상 변경, 시트 벨트 착용 차임 벨, 키 홀 조명, 계기판 조명 조절 장치 등이 적용된 1990년형이 나왔다. 1990년 7월 12일에는 수출용에만 적용되던 2.4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과 LCD 계기판, 가죽 시트 등으로 고급스럽게 꾸민 최고급 트림인 2.4i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의 판매 대수는 미미하였다. 수출용에는 V6 3.0ℓ 사이클론 가솔린 엔진도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1989년에 현지 공장을 세워 캐나다 퀘벡주 브로몽에서도 생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 개발된 승용차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이외의 국가에서 생산되는 승용차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자동차 시장의 과잉 공급으로 인해 판매량이 저조하여 1993년을 기점으로 가동을 무기한 중단하였고, 결국 현대자동차의 캐나다 현지 법인인 현대 모터 캐나다가 청산되어 이 현지 공장은 폐쇄되었다. 1991년 2월 20일에 출시되었다.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기존 쏘나타의 디자인에 둥근 요소가 가미된 디자인으로 변경되었고, 윤거를 앞은 25mm, 뒤는 20mm 더 넓혀 주행 안정성을 높였다. 최소 회전 반경을 줄여 기동성을 높였고, 이 시점부터 현대자동차 CI가 변경되어 새로운 엠블럼이 적용되었다. 중형 택시 시장의 확대에 발맞추어 뉴 쏘나타부터는 LPG 택시도 판매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최초로 월간 판매 1위를 기록하였고, 6월 24일에는 2.0ℓ 시리우스 DOHC 엔진을 얹어 대한민국산 중형차 최초로 DOHC 엔진의 시대를 열었으며, 최고 시속 185km와 제로백(0→100km) 가속 10.6초의 성능을 보였다. 역대 쏘나타 중에서 ABS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이후 선보인 최고급 트림인 골드는 가죽 시트와 LCD 계기판, 7밴드 그래픽 이퀄라이저 2단 오디오(CD 플레이어는 옵션), 전동식 선루프가 적용되었다. 1993년 5월 14일에 출시되었다. 뛰어난 디자인으로 큰 인기를 모아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60만 대 가까이 판매되었다. 출시 당시 파격적인 디자인이 큰 인기를 끌어 오래된 차종임에도 최고의 디자인으로 손에 꼽히는 차종이다. 역대 쏘나타 중에서 접이식 사이드 미러와 운전석 에어백이(이후 조수석 에어백도 적용) 최초로 적용되어 편의성과 안전성을 높였다. 그 외에도 전자 제어 서스펜션과 전자식 EQ 내장 오디오(골드 트림은 CD 플레이어 기본) 등이 적용되었고, 오디오 도난 방지를 위하여 오디오에 비밀 번호 입력 기능이 있었다. 환경 보호 차원에서 신냉매 에어컨을 장착하는 한편 자원 재활용을 위한 리사이클링 시스템도 채용되었다. 1995년 8월 22일에는 출시 초기에 있다가 사라진 골든 팩 트림이 금장 엠블럼, 세련된 디자인의 15인치 알루미늄 휠, 205mm 광폭 타이어, ABS 등을 적용하여 새롭게 추가되었다. 1996년 2월 6일에 출시되었다. 쏘나타 Ⅱ의 페이스 리프트 차종으로, 역대 쏘나타 중에서 TCS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쏘나타 Ⅲ의 경우 출시 되고 나서 한동안 헤드 램프 디자인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미쓰비시자동차공업에서 공급 받는 4단 자동변속기(KM175-5)는 3세대 쏘나타까지 장착되었다. 쏘나타 Ⅲ가 출시되어 판매 중이던 1996년에 쏘나타의 누적 판매량이 대한민국에서만 100만 대를 돌파하였고, 같은 해 8월에 개최된 모스크바 모터쇼에서는 최우수 자동차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대자동차 아산 공장이 1996년에 완공되어 같은 해 11월 11일부터는 아산 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4월 9일에는 투톤 외장 색상과 베이지 내장 색상, 현대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트림의 추가, 가로 방향의 라디에이터 그릴 등의 변화를 갖춘 1998년형이 출시되었다. 한때 S자 엠블럼을 갖고 있으면 명문대(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고, Ⅲ자를 갖고 있으면 수능 점수 300점을 받을 수 있다는 루머 때문에 당시 수험생들이 몰래 쏘나타 Ⅲ의 엠블럼을 떼는 오나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엠블럼에서 S자와 Ⅲ자가 떨어진 쏘나타 Ⅲ가 많았고,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엠블럼 무상 교체 서비스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자가용은 1998년 7월에 단종되었으나, 영업용은 2000년 12월에 단종되었다. 1998년 3월 17일에 출시되었다. 서브 네임인 EF는 단지 프로젝트명이었으나, 마케팅 차원에서 Elegant Feeling(우아한 느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였다. 파격적인 유선형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고, 뒷 번호판의 위치가 역대 쏘나타 중에서 처음으로 테일 게이트가 아닌 범퍼에 있었다. CD 체인저 오디오 외에 AV 시스템, 전동 접이식 사이드 미러, 운전석 파워 시트, 시트 내장형 유아 안전 시트,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 진주색 외장 색상 등 최신 편의 사양이 적용되었다. 1.8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과 2.0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은 미쓰비시자동차공업제 그대로였으나, 엔진의 위치를 바꿔 무게 균형과 동력 성능을 개선시켰다. 이 외에 새로 장착된 V6 2.5ℓ 델타 가솔린 엔진은 현대자동차가 자체 개발하였다. 여기에 현대자동차만의 독자적인 트랜스미션인 HIVEC(Hyundai Intelligent Vehicle Electronic Control) 4단 자동변속기(1.8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과 2.0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은 F4A42-1, V6 2.5ℓ 델타 가솔린 엔진은 F4A42-2)도 적용되었는데, TCU(Transmission Control Unit) 칩도 함께 적용되었다. 프론트 서스펜션은 더블 위시본 식 서스펜션이 적용되어 승차감을 향상시켰다. 출시 초기에는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인한 경제 여파 때문에 판매 대수가 많지 않았으나, 훗날 인기를 되찾아 베스트 셀링 카의 명성을 이어갔다. 2000년 9월 25일부터 무단변속기가 추가되었다. 이와 동시에 옵티마와 같은 대시보드를 적용한 2001년형이 선보였다. 2001년 1월 9일에 출시되었다.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전장을 35mm 늘렸고, 윈도 바깥 부분에 크롬 몰딩을 둘러 고급스러운 느낌이 가미되었다. 운전석 에어백과 ABS가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되었다. 전동식 테일 게이트 및 연료 주입구 열림 장치가 적용되어 버튼의 위치가 운전석 시트 밑에서 도어 트림으로 옮겨졌다. 1.8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은 1.8ℓ 베타 가솔린 엔진으로 대체되었다. 미쓰비시자동차공업제 기반의 2.0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도 4세대 쏘나타까지 장착되었다. 2.0ℓ 시리우스 LPG 엔진은 같은 해 6월 21일에 2.0ℓ 베타 LPG 엔진으로 대체 되었다. 2002년 9월 2일에는 리어 스포일러와 새로운 형상의 알루미늄 휠 등이 적용된 2003년형이 출시되었다. 이 외에도 라디에이터 그릴이 세로 방향에서 가로 방향으로 바뀌고, 후드 엠블럼이 적용되어 고급화를 꾀하였다. 또한 조수석 에어백이 자가용에 한하여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되어 안전성을 높였다.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중국 베이징 시의 공장에서 현지 생산되었다. 2003년 3월 6일에는 쏘나타의 누적 생산량이 250만 대를 돌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엘레강스 스페셜 트림이 라인업에 추가되었다. 엘레강스 스페셜 트림은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이 기본 적용되었고, 내장 색상으로는 퀸즈 베이지가 적용되는 등 여성 고객을 타겟으로 하였다. 자가용은 2004년 8월에 단종되었지만, 영업용은 꾸준히 이어져 2006년 3월까지 생산되었다. 중국에서는 2009년 8월 10일에 현지 취향에 맞게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현재까지 생산 중이다. 2004년 9월 1일에 출시되었다. 프로젝트명인 NF는 마케팅 차원에서 Neverending Fame/Faith(영원 불멸의 명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였으나, 서브 네임 없이 원래의 본 차명인 쏘나타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다른 세대의 쏘나타와 혼동할 수 있어 NF 쏘나타로 불리기도 한다. 토요타 캠리, 닛산 알티마, 혼다 어코드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위하여 개발되었으며, 품질과 성능 등 여러 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에 공식 수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혼다 어코드(7세대 북아메리카 사양)와 테일 램프가 비슷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새롭게 장착된 2.0ℓ 세타 가솔린 엔진, 2.0ℓ 세타 LPI 엔진, 2.4ℓ 세타 가솔린 엔진은 현대자동차가 독자 개발한 것이다.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을 비롯하여 역대 쏘나타 중에서 최초로 커튼 에어백과 차량 자세 제어 장치가 적용되어 안전성을 높였다. MP3를 직접 재생시킬 수 있는 오디오가 장착되었다. 미국에 앨라배마 공장이 준공됨에 따라 2005년 5월부터 현지에서 생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V6 3.3ℓ 람다 가솔린 엔진이 추가되었으나, 대한민국 시장 특성상 판매 대수는 미미하였다. 9월에는 일본에도 판매가 시작되었고, 광고 모델로는 배용준이 발탁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산업 디자인 진흥회로부터 수입 승용차 부문 굿 디자인상을 받았다. 2006년 1월 5일에는 2.0ℓ D 디젤 엔진이 적용되어 역대 쏘나타 중에서 최초로 디젤 엔진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마케팅 실패로 판매 대수는 신통치 않았다. 같은 해 8월 7일에 선보인 2007년형은 라디에이터 그릴의 형상이 가로 한 줄에서 두 줄로 바뀌고, 헤드 램프는 블랙 베젤에서 실버 베젤로 바뀌었다. 2007년 5월 10일에는 F24S 트림에만 적용되던 블랙 내장 색상, 레드 스티치 적용 가죽시트, 스마트 키, 17인치 알루미늄 휠 등 고객 선호 사양이 적용된 N20 블랙 프리미엄 트림이 추가되었다. 동시에 차량 내부의 컴퓨터가 차량의 속도와 스티어링 휠 조향 각도를 판단하여 급선회 시의 위험 발생을 방지해주는 주행 안전성 제어 시스템이 일부 트림에 옵션으로 적용되었다. 2007년 11월 6일에 출시되었다.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헤드 램프가 13mm 두꺼워졌고, 인테리어가 크게 개선돼 호평을 받아 미국의 자동차 전문지인 워즈 오토 월드가 뽑은 올해의 인테리어 베스트 리디자인 차종으로 선정되었다. 2008년 10월 1일부터는 블루투스 핸즈프리, USB&i-Pod 단자, 사이드 리피터 내장 아웃사이드 미러, 버튼 시동 스마트 키 등이 적용된 2009년형이 선보였다. 2009년 4월 1일에는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4단 자동변속기, 블랙 내장 색상 및 가죽 시트, 버튼 시동 장치 및 스마트 키가 적용된 N20 스마트 블랙 팩 트림이 추가되었다. 자가용은 2009년 9월에 단종되었으나, 영업용은 꾸준한 수요가 이어져 2013년 11월까지 생산되었다. 중국에서는 2008년 12월에 현지 취향에 맞게 페이스 리프트를 거쳤으나, 2011년에 단종되었다. 2009년 9월 17일에 출시되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미국 디자인 센터의 안드레 허드슨 선임 디자이너가 주도하였으며,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철학인 플루이딕 스컬프처가 적용되어 과감함과 스포티함이 느껴지는 디자인으로 완성되었다. 본넷까지 이어지는 크롬 벨트 라인 등 독특한 디자인 요소가 돋보였다. 3 피스 타입 파노라마 선루프, 가솔린 직접 분사 방식 엔진, 후석 에어 벤트, 풋 파킹 브레이크 등이 적용되었고, 자가용 모든 트림에는 차체 자세 제어 장치가 기본 적용되었다. 2010년 1월 18일에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이 추가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부터 자가용 모든 트림에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과 커튼 에어백이 기본 적용되었다. 이어 6월 15일에는 NVH와 연비가 개선되고, 통풍 시트와 컴포트 헤드 레스트 등이 적용된 2011년형이 출시되었다. 또한 전 세계 누적 판매량이 500만 대를 돌파하였다. 2011년 5월에는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인하여 토요타와 혼다의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미국 중형차 시장에서 월간 판매 1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에는 2.0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이 추가되어 기존의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을 대체하였다. 이어 7월 13일에는 2.0ℓ 세타 Ⅱ LPI 엔진을 대체하는 2.0ℓ 누우 LPI 엔진, 글로브 박스 쿨링 기능, 사이드 미러 퍼들 램프, 자외선 차단 전면 유리, 천연 항균 시트, 크롬을 줄여 간결해진 라디에이터 그릴 및 부츠 타입의 변속기 레버 등이 적용된 2012년형이 출시되었다. 미국 앨라배마주 현지 공장에서 쏘나타의 누적 생산량이 100만 대를 돌파한 것도 이 시기였다. 오랫동안 쭉 효자 차종으로 기록되었던 쏘나타이나, 6세대 쏘나타는 과한 크롬이 적용된 라디에이터 그릴에 호불호가 뚜렷히 나뉘었다. 더욱이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는 기아 K5의 높은 판매량로 인하여 2011년에 대한민국 전 차종 연간 판매 4위로 추락하였다. 2012년 2월 6일에는 2.0ℓ 누우 가솔린 엔진이 기존의 2.0ℓ 세타 Ⅱ 가솔린 엔진을 대체함과 동시에 ISG 시스템이 적용된 블루 세이버 트림이 추가되었다. 2012년 7월 5일에는 2013년형이 출시되며, 더 브릴리언트라는 서브 네임이 더해졌다. 페이스 리프트가 아닌 이어 모델이지만, 새로운 형상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LED 포지셔닝 램프가 적용되어 고급화를 꾀하였다. 이 외에도 급제동 경보 시스템, 오토 크루즈 컨트롤, 전방 주차 보조 시스템, 열선 스티어링 휠, 뒷좌석 센터 3점식 시트 벨트, 현대자동차의 텔레매틱스 서비스인 블루 링크 등이 적용되어 상품성을 높였다. 2013년 6월 9일에는 어트랙션 트림이 추가되고, 2.0ℓ 세타 Ⅱ 가솔린 터보 엔진에 가격을 낮춘 스마트 트림이 추가되는 등의 변화가 생긴 2014년형이 선보였다. 자가용은 2014년 3월에 단종되었으나, 영업용은 2016년 1월에 단종되었다. 2011년 5월 2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7월에 출시된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는 대한민국에서만 판매되는 LPG 하이브리드 차량이기에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대한민국산 최초의 가솔린 하이브리드 차량이며, 최초로 수출되는 하이브리드 차량이다. 2010년 4월에 개최된 뉴욕 국제 오토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2011년 4월에 개최된 서울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에어 스커트 및 에어댐, 헥사고날 타입의 라디에이터 그릴, 세계 최초로 리플렉션 발광 기술이 적용된 LED 테일 램프 등을 적용되어 기존 쏘나타와 디자인이 차별화되었다. 전기차 모드 주행 시에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아 보행자가 차량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 가상 엔진 사운드 시스템을 적용하여 보행자 안전성을 향상시켰다. 대한민국에서 팔리는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2.0ℓ 누우 가솔린 엔진이 장착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팔리는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2.4ℓ 세타 Ⅱ 가솔린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 5세대 그랜저 하이브리드(HG)와 기아 K7 하이브리드 700h에 장착된다. 2012년 2월 1일부터 가격을 낮추어 부담을 줄인 스마트 트림이 추가됨과 동시에 광고 모델로 원빈, 이적, 이정아가 선정되었다. 2013년 1월 30일에는 8인치 내비게이션(블루 링크)과 뒷좌석 센터 3점식 시트 벨트 적용, 40ℓ 늘어난 총 344ℓ의 트렁크 공간 확보, 아웃 사이드 미러 사이즈 확대, 레밍턴 레드 외장 색상 추가 등의 변화를 갖춘 2013년형이 선보였다.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신규 LED 테일 램프, 퍼들 램프 내장 아웃사이드 미러, LED 독서등 및 룸 램프가 신규 적용된 2014년형이 선보였다. 2014년 3월 24일에 출시되었다. 출시에 앞서 미디어 사전 설명회를 가졌고, 렌더링이 공개되었다. 2세대 제네시스(DH)에 이어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철학인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이 두 번째로 반영된 디자인은 한층 절제된 선과 조형을 지녔고, 여기에 7세대를 거치는 동안 축척된 완성도와 자신감을 뜻하는 이너 포스로 명명된 디자인 미학을 더하였다. 당초 복합 연비가 12.6km/ℓ(2.0ℓ 누우 가솔린 엔진, 6단 자동변속기 기준)로 알려졌으나, 정부 인증 절차를 거쳐 12.1km/ℓ로 하향 조정되었다. 실내 공간은 안전성, 직관성, 간결성 등 3대 원칙 기반의 인체 공학적 설계를 통해 운전자가 각종 기능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구현하였다. 초고장력 강판 비율을 51%로, 차체 구조용 접착제를 119m로 확대하여 안전성과 차체 강성을 향상시켰다. 아울러 운전석 무릎 에어백과 타이어 공기압 경보 장치가 기본으로 적용되었다. 차간 거리 자동 조절과 자동 정지 및 재출발 기능을 지원하는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차량 충돌 예상시 운전자에게 경보해 긴급 상황에서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전방 추돌 경보 시스템이 대한민국산 중형차 최초로 적용되었다. 2015년 2월 11일에는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보다 최고 출력은 27%, 최대 토크는 43% 높은 2.0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이 추가되었다. 최대 토크 영역은 1350rpm으로 낮추었으며, 복합 연비는 이전보다 5% 향상된 10.8km/ℓ이다. 전용 라디에이터 그릴과 하단 매쉬 타입 범퍼, 리어 스포일러, 듀얼 머플러, D컷 스티어링 휠, 패들 쉬프트 등으로 차별화를 꾀하였다. 같은 해 7월 2일에 선보인 2016년형은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과 유로 6 기준을 충족시키는 1.7ℓ U Ⅱ 디젤 엔진이 더해지고, LED 주간 주행등 신규 적용, 서스펜션에 알루미늄 재질 적용, 패키지 옵션 최소화, 편의 사양 개선 등의 변화를 이뤘다. 아울러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은 삭제되었고, 앞좌석 어드밴스드 에어백이 모든 트림에 신규 적용되었다. 같은 해 8월 23일에는 해외 판매용과 내수 판매용의 안전성에 차이가 있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미국 판매 사양(앨라배마 공장 생산분)과 대한민국 판매 사양(아산 공장 생산분)의 정면 충돌 테스트가 이루어졌다. 2016년 4월 20일에 선보인 2017년형은 영 패밀리 고객이 선호하는 편의 사양이 적용된 케어 플러스 트림이 신설되었고,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 장착 사양에는 튜닝 서스펜션과 듀얼 머플러 등으로 구성된 스포츠 패키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해 7월 1일에는 앞좌석 통풍 시트, 듀얼 풀 오토 에어컨, 오토 디포깅 시스템, 클러스터 이오나이저, 전면 자외선 차단 유리 등이 적용된 썸머 스페셜 트림이 선보였다. 썸머 스페셜 트림은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 동안만 판매되었다. 11월 1일에는 열선 스티어링 휠과 뒷좌석 열선 시트, 김 서림을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오토 디포깅 시스템 등이 적용된 윈터 스페셜 트림이 추가되었다. 택시는 2019년 1월에 단종되었다. 2015년 11월 4일에는 출시 3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와일드 버건디 트림이 300대 한정 판매에 들어갔다. 와일드 버건디 트림은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을 달고, 30주년 엠블럼과 전용 18인치 알루미늄 휠, 도어 스커프에 각인된 일렬 번호 등으로 특별함을 더했다. 외장 색상은 아이스 화이트, 내장 색상은 버건디와 코퍼로 판매된다. 2014년 12월 16일에 출시되었다. 2.0ℓ 누우 가솔린 직분사 엔진에 38kw급 하드 타입 전기 모터가 결합되었고, 실용 영역 rpm대에서 출력과 토크가 개선되었다. 스포츠 주행 모드가 추가되었고, 동력 배분과 회생 제돔 시스템의 효율 개선을 통해 복합 연비 18.2km/ℓ(16인치 타이어 기준)를 달성하였다. 변속기에 고전압 단독 구동형 전동식 오일 펌프가 적용되어 기존 기계식 오일 펌프 사용으로 발생된 기계적 동력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이 적용된 디자인에 새로운 형상의 헤드 램프와 입체감 넘치는 테일 램프, 휠 아치에 있는 에어 커튼과 지능형 공기 유입 제어 장치 등이 적용되어 기존 쏘나타와 차별화함과 동시에 공력 성능과 연비 효율을 높였다. 아울러 공기 저항 계수(Cd)는 0.24를 기록하여 공기 저항을 대폭 낮추었다. 배터리 위치를 기존의 스페어 타이어 공간으로 옮겨 트렁크 공간을 넓혔다. 2016년 4월 20일에 선보인 2017년형은 HID 헤드 램프와 스마트 후측방 경보 시스템이 적용된 모던 스페셜 트림과 프리미엄 스페셜 트림이 신설되었고, 앞좌석 어드밴스드 에어백이 모든 트림에 신규 적용되었다. 2015년 7월 2일에 출시되었다. 대한민국산 자동차 최초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전기차 기능을 더한 점이 특징이다. 가정용 전기 콘센트로 부족한 전기를 충전할 수 있고, 1회 충전을 통해 최대 44km의 거리를 전기로만 주행할 수 있다. 스마트폰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하여 원격으로 예약 및 즉시 충전이 가능하고, 충전이 완료되면 통보하는 등 특화 서비스도 제공된다. 2017년 3월 8일에 출시되었다. 출시에 앞서 렌더링이 공개되었고, 뉴 라이즈라는 서브 네임이 더해졌다. 단조롭다는 기존 디자인에 대한 평가와 르노삼성 SM6 등 새로운 경쟁 차종의 출시에 따라 상품성 강화를 위하여 페이스 리프트를 단행하였다. 현대자동차의 패밀리 룩인 대형 캐스캐이딩 라디에이터 그릴이 적용되었고, 공력 성능 향상을 위한 에어 커튼을 세로로 배치된 주간 주행등 옆에 달았다. 뒷 번호판의 위치가 테일 게이트에서 범퍼로 옮겨졌다. 주행 조향 보조 시스템, 부주의 운전 경보 시스템, 다이나믹 벤딩 라이트,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자동 긴급 제동 시스템 등을 하나로 묶은 현대 스마트 센스가 새로 적용되었다. 이 외에도 주행 중 후방 영상 디스플레이와 공기 청정 모드도 새로 적용되어 편의성을 높였다. 같은 해 12월 1일에는 12월에만 한정 판매되는 커스텀 핏이 선보였는데, 현대자동차의 대표 고객 참여형 소통 프로그램인 H-옴부즈맨을 통하여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고객이 직접 차량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해당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실제로 판매되기까지의 과정으로는 첫 시도이다. 2018년 8월에 판매 부진과 각종 환경 규제로 인하여 1.7ℓ U Ⅱ 디젤 엔진이 단종되었다. 8세대 쏘나타는 택시로 선보일 예정이 없는 대신 택시 전용 차종이 개발되고 있는 이상 현재로서는 역대 쏘나타 중 마지막으로 택시가 판매되던 차종이자 마지막 수동변속기가 장착된 차종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2017년 5월 18일에 출시되었다. 기존과 비교하여 디자인 차별화 요소가 줄어들었으나, 블루 베젤 헤드 램프와 클리어 렌즈 타입 LED 테일 램프 등이 적용되어 친환경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리튬 이온 폴리머 배터리 용량이 기존 1.62kWh에서 1.76kWh로 늘어나 연료 소비 없이 전기로만 운행이 가능한 전기차 모드의 효율이 개선되었고, 운전석만 부분적으로 냉난방을 실시하는 운전석 개별 공조 시스템이 적용되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였다. 고효율의 리튬 이온 폴리머 배터리가 장착되어 1회 충전 시 전기 모드만으로 최대 45km를 주행할 수 있고, 하이브리드 모드 주행 약 940km를 포함하여 총 985km의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다. 여기에 고효율 영구 자석형 모터 시스템이 적용된다. 지능형 안전 기술인 현대 스마트 센스를 비롯하여 원터치 공기 청정 모드, 스마트폰 미러링크, 애플 카플레이 등이 적용되어 상품성을 높였다. 2019년 3월 21일에 출시되었다. 현대자동차의 새 디자인 철학인 센슈어스 스포트니스(감성적인 스포티함)가 최초로 도입되어 보다 날렵한 인상을 주며, 6세대 쏘나타부터 시작된 본넷까지 이어지는 크롬 벨트 라인에 히든 라이팅 램프라고 불리는 주간 주행등이 더해져 평소에는 크롬 재질로 보이지만 점등 시에는 램프로 변환된다. 도어 잠금 및 해제에서 시동 및 주행 기능까지 작동할 수 있는 스마트 폰 기반의 디지털 키가 적용되었고, 최대 4명까지 공유할 수 있다. 6단 자동변속기는 버튼 타입으로 설계되어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였고, 내장형 주행 영상 기록 장치인 빌트 인 캠이라고 불리는 블랙 박스가 순정(옵션) 사양으로는 최초로 적용되었다. 이 외에도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보급형), 동승석 릴렉션 컴포트 시트, 내비게이션 자동 무선 업데이트, 12.3인치 클러스터, 헤드 업 디스플레이 등이 적용되었다. 9 에어백을 비롯하여 전방 충돌 방지 보조, 차로 이탈 방지 보조, 차로 유지 보조, 운전자 주의 경고, 하이빔 보조, 전방 차량 출발 알림 등이 기본 적용되었다. 9월 20일에는 1.6ℓ 감마 Ⅱ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에 8단 자동변속기가 조합된 센슈어스가 출시되었다. 2019년 7월 22일에 출시되었다. 내연 기관 사양과의 디자인 차별화를 없앴다. 새롭게 적용된 솔라 루프 시스템은 태양광으로 배터리를 충전하여 주행 가능 거리를 늘리고, 배터리 방전을 막아준다. 야외에서 하루 6시간 충전 시 연간 전체 1,300km가 넘는 거리를 더 주행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가 독자 개발한 제어 로직을 통하여 기존 하이브리드 차량 대비 30% 빠른 변속을 가능하게 하는 능동 변속 제어 기술이 적용되었다. 이는 하이브리드 모터로 자동변속기를 초당 500회씩 초정밀 제어하는 기술로, 주행 성능은 물론 연비와 변속기 내구성을 동시에 높여준다. 서예 서예(書藝, )란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을 말한다. 중국에서 발생한 예술형식의 하나로서 한국 및 일본에 전래되어 한자뿐만 아니라 해당 나라의 글씨체 (한글, 가나)를 예술적으로 종이 위에 표현하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예컨대 문인화) 인정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도(書道)라고도 한다. 표의문자인 한자를 문자와 글씨로 일단 구별한다면 문자는 언어의 부호로서 그 목적이 어느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고, 서(書)는 그 문자의 표현에 있어서 미의식의 활동을 보기 위한 글씨로서 아름다운 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는 어디까지나 문자를 떠나 또는 붓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글씨를 쓰는 용구로서 붓의 성격은 변화하여도 아름답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펜으로 쓴 글씨, 또는 등사·인쇄로 된 문자는 서예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서예가가 쓴 글씨가 타인에게는 읽지 못하는 제멋대로의 자의적인 자태일지 모르나 그 서예가에게는 읽는 문자로서 미의식 표현의 서사인 것이다. 서의 조형적 요소로서 형태와 선질(線質) 따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표현에 있어서 깊은 관련이 있다. 그 형태는 서체(書體) 또는 서풍(書風)에 의한 정도로서 제약을 받는 것이고, 서의 선질은 서예가의 주관을 어느 정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서예는 선의 예술이다. 그래서 서의 선은 회화의 선과 같이 어느 물체의 형상을 표현하는 윤곽선이 아니고 비구상적인 선이다. 물론 사출(寫出)된 선에 의해서 문자의 자형(字形)이 표시되나 그것이 서선(書線)의 본질은 아니다. 서선은 부호로서 읽는 형(形)의 선이 아니고 내용 있는 선, 미의 선, 인간의 생명이 통하는 선이다. 이는 구상성을 떠난 선으로 붓의 압력과 속도로서 사출된 서예가를 상징하는 선이다. 즉 물체의 형태 또는 대상의 연관성을 그리는 선이 아니고, 인간성과 연관성이 깊은 선이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서를 심화(心畵,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라고 한 것은 이 특질 있는 선질 표현의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의 형태미 이상으로 서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다. 서예의 심오한 뜻은 기법의 연습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법과 병행해서 정신수련을 중요시한다. 중국에서 서는 육예(六藝), 즉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중의 일부분으로 인간의 선행 수련이다. 고상한 사군자 수업의 도(道)로서 많은 위인들이 생애를 바쳐서 서로 이어서 발전시켜 왔다. 서예는 실용적인 요구와 서예적 만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도(道)로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열렬히 요구되어 있다. 그래서 서예의 근본정신이 동양 일반의 예도(藝道)에 통하는 자연관을 기조로 한 것이다. 서의 표현 내용은 그 서의 소재·어구(語句) 시문(詩文)·문학적인 요소를 의미하고 있으나 독립된 시각성 예술로 향상되는 한, 서의 내용은 소재로서 문자보다 그 작품에 포함된 서미(書美)의 문제점이 생긴다. 즉 하나의 완성된 작품에는 전체를 구성하는 문자의 대소(크고 작음)·포치(布置, 넓게 늘어놓음), 먹의 윤갈(潤渴, 윤택하고 마름), 낙관(落款)의 위치 즉 장법(章法, 經營位置, 화면을 살리기 위한 배치법)이 중요하다. 그 작품에 구성된 문자의 형태미로서 동양문자는 회화문자에서 발달된 상형문자며 표의문자다. 한글은 표음문자로서 한 자 한 구를 형태미로 응물상형(應物象形, 물체의 모양이나 특성을 잘 알아 표현하는 것) 결합체로 표현한다. 유럽인도 상형문자로서 인간 본질을 순화시키는 서예정신을 배울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서예는 신라시대와같이 구양순(歐陽詢)의 이른바 구법(歐法)이 주류를 이루어 규각(圭角)이 있으면서 정제준경(整齊遵勁)한 서체이며 이러한 특색있는 서체가 비문, 사경에 사용하면서 한편 판각에서는 변화된 서체를 이루어 대장경(大藏經)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고려체(高麗體)를 이룬다. 말기의 사경에는 당사경체(唐寫經體)의 여운을 가진 예도 있고 후에 조선시대의 서체가 되는 원(元)의 조맹부체도 있다. 조선시대의 서체(書體)는 안진경체(顔眞卿體)의 고려와는 달리 왕희지(王羲之)에서 출발하는 원나라 말기의 조맹부의 서체로서 시종하였는데 조맹부의 규각(圭角)이 없는 세련된 서체는 명나라 초기의 문인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여 이른바, 한림원체(翰林院體)라 하여 판본(板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조선에도 자극을 주어 [[조선 세종|세종] 때에 간행된 [[훈민정음]], [[삼강행실도]] 등의 서적은 명초의 서체와 사경(寫經)에서 느낄 수 있듯이 힘이 들어 있었는데, 초기의 서예를 대표하는 서예가는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서 그의 서풍은 조법(趙法)을 잘 체득하여 그 연미(軟美)하고 넉넉한 품(品)이 당시에 따를 이가 없어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자 전국에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서체는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새로운 자극과 범본(範本)이 중국으로부터 끊어짐에 따라 그저 외형(外形)만 정비하고 균형미만을 찾는 무기력한 서체로 정형화(定型化)되어 갔다. [[조선 중종|중종]] 때에는 [[김구]](金絿)가 종왕(鍾王)의 서체를 배워 인수체(仁壽體)를 개창(開創)했고 [[조선 명종|명종]] 때의 [[양사언]](楊士彦)은 큰 글씨(大字)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조선 선조|선조]] 때의 [[한호]](韓濩)는 진체(晉體)의 대가로서 뛰어났고, 또 [[이광사]](李匡師) 같은 우수한 서예가도 있었으나 한결같이 이들의 서체는 그저 말쑥하고 미끈한 전형적인 조선서체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에 가서 [[김정희]](金正喜)의 독창적인 서체가 등장하여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나 그의 [[추사체]](秋史體)는 더 발전이나 계승을 보지 못하고 그 한 사람대(代)로서 끝났다. 한편 한글 서체로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있어서 의식적(儀式的)인 등서체(謄書體)와 장식적인 서간체(書翰體)로 구별되는데 이 서체도 사각상의 미 이상의 글씨로서의 골(骨)을 갖지 못한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서체임을 면치 못했다. [[청나라|청조]](淸朝)로 들어서면 진첩(晋帖)이나 당비(唐碑)의 연구가 성하게 되고, [[건륭]](乾隆) 가경기(嘉慶期)가 되자 교묘한 구조와 풍부한 정신을 가진 고전주의가 성립되었다. 이른바 첩합(帖學)의 개화로 유용(劉鏞)·양동서(梁同書)·왕문치(王文治)·성친왕(成親王) 등은 법첩을 본으로 삼은 첩학파(帖學派)의 사람들이다. 한편 금석학(金石學)의 연구가 진전되자 종래의 첩학과 같이 몇 번이나 번각(飜刻)을 거듭한 법첩보다도 진적(眞跡)에 가까운 비(碑)의 탁본(拓本)을 배워야 된다는 비학(碑學)이 생겼다. 등석여(鄧石如)·이병수(伊秉綏)·진홍수(陳鴻壽)·오양지(吳讓之)·조지겸(趙之謙) 등이 비학파에 속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진한(秦漢)의 고비(古碑)를 연구하여 전서·예서(隸書)에 새로운 업적을 세웠다. 아울러 학서(學書)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첩학파는 행서(行書)·초서(草書), 비학파는 전서·예서·해서를 주제로 한 표현이 많다. 조선이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칭한 후, 시기적으로 보아 청(淸)의 영향력이 컸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에서 유행했던 고증학(考證學)이나 금석학(金石學)에서 유래된 서풍(書風)을 받아들여 이것을 주류로 삼았으며 한편 재래(在來)의 서(書)를 답습하는 경향도 보인다.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서풍(書風)을 좇으려는 경향은 옹동화와 오대징(吳大徵) 등의 내한(來韓)을 계기로 표면화되었으며 여기에 전기(前期)의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옹방강]](翁方綱), 성친왕(成親王), 철보(鐵保), 하소기(何紹基) 등의 서풍을 들 수 있으며, 한편 동기창(董其昌), 미불, 소식(蘇軾) 등의 송(宋). 명(明)의 서풍과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을 배우는 경향도 보인다. 특히 안법(顔法)의 유행은 전대에 볼 수 없던 현상이며 이것은 모두 청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한말 서예의 한 경향이다. 재래 서풍을 답습하는 것은 한말 서예의 한 경향,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한 현상이다. 특히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여파는 서체에까지 영향을 미쳐 노론(老論)을 주축으로 하는 일부에서는 추사체와 청(淸)의 서풍에 관심을 두었고 소론(小論)측에서는 주로 신위(申緯)의 체를 숭상하여 신위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송(宋)의 소식(蘇軾)과 통한다 하여 소체(蘇體)를 숭상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후대에도 여세를 미쳤다. 고문(古文)은, 전서가 성립된 이전의 서체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인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을 위시하여 은·주 고동기(古銅器)의 명문(銘文) 등을 총칭하여 부르고 있다. 허진(許塡)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서(序)의 설면에서는 공자의 벽중(壁中)에서 나온 문자를 가리키고 있다. 신(新)나라 왕망(王莽) 때에는 대전(大篆)까지도 고문이라 하였다.전서 篆書 고문의 자체와 서풍이 정리된 것으로서 전·소전의 2종이 있다. 대전은 주문이라고도 불리고 주의 사주가 만들었다고도 전해진다. 소전은 대전의 체세(體勢)를 길게, 점획(點劃)을 방정하게 하여 서사(書寫)를 편리하게 한 것으로서 진시황제의 문자통일 때에 승상 이사(李斯)가 창시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전을 직선적으로 간략화한 것으로서 하급관리인 도례(徒隷) 사이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서(隸書)라 부르고 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해행초(楷行草)의 삼체(三體)가 전개된다. 초서(草書)는 문자를 흘려서 쓴 서체이다. 서역(西域)에서 출토된 전한(前漢)의 목간(木簡)에 팔부의 파세와 리듬을 가진 속필의 문자(章草라고도 한다)가 있으며, 이로부터 지금의 초서로 진전되었다고 알려진다. 읽는 게 곤란하므로 일반화 되지 않았지만 변화가 풍부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많이 쓰이고 있다. 행서(行書)는 행압서(行押書)라고도 하고 해서와 초서의 중간 서체이다. 한대의 목간에는 오랜 예가 있고 역시 예서의 속필로서 발생한 것이다. 행압서란 교환하는 문서란 의미인데 행서는 빨리 써지고 읽기 쉽다는 잇점이 있다. 해서(楷書)는 예서에서 변이(變移)된 것으로서 필획(筆劃)에 생략이 없는 서체이다. 다른 서체보다 발생단계로서는 가장 뒤늦게 성립되었다. 실용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정제(整齊)함을 요구해서 생긴 것이라 하겠다. 정서(正書) 진서(眞書)라고도 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쓰고 있어 활자체에도 활용되고 있다. 비백(飛白)은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좌관(左官)이 솔로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고안했다고 한다. 따라서 본래 예서에서 필획속에 스치듯이 비치는 수법을 많이 내쓰는 기교를 특색으로 한다. 당시는 궁전의 액자에 사용되고 있었다. 예서체는 아니지만 당비(唐碑)나 공해(空海)의 글씨에 비백의 유례(遺例)가 있다. 집필법(執筆法)은 붓을 쥐는 방법을 말한다. 붓의 크기, 쓰는 문자의 대소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완법(腕法)은 문자를 쓸 때의 팔을 놓은 방법으로서 기호에 따라 또는 목적에 따라 몇몇 형이 있다. 문자를 쓸 때에 필요한 8종의 용필법(用筆法)으로서 그것이 영(永)자의 8개의 점획에 맞기 때문에 [[영자팔법]](永字八法)이라 부르고 있다. <서원청화(書苑靑華)>에 "팔법은 예자(隸字)로부터 생긴다……"하였으며, 오래전부터 그렇게 말해진 듯한데 당시대에 해서의 전형이 확립된 것에 곁들여 영자팔법을 습득하면 모든 문자에 응용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림과 같이 첫째 점을 측(側), 둘째의 횡획(橫劃)을 늑(勒), 셋째의 종획(縱劃)을 노(努), 그 날개를 적, 다섯째의 바른쪽 위로 긋는 선을 책(策), 왼쪽 밑으로 긋는 선을 약(掠), 일곱째의 바른쪽에서 왼쪽으로의 선을 탁(啄), 바른쪽 밑으로 터는 선을 책이라 한다. 초학자를 상대로 하나 그다지 가치있는 기법은 아니다. 간가결구법(間架結構法)은 점획 사이의 띠는 방법(間架), 짜맞추는 방법(結構)을 생각해서 밸런스 있게 문자를 조형(造型)함을 말한다.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갖는 해서를 주체로 한 조형이론이다. 장봉(藏鋒)이란 붓의 수(穗) 끝을 필획 속에서 감싸고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서 직필(直筆)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붓수 끝을 획의 외측에 대어 외면에 봉(鋒)이 드러나는 것을 노봉(露鋒) 또는 측필(側筆)이라 한다. 부앙법(俯仰法)은 문자를 쓸 때 선의 방향에 거슬리지 않고 붓을 쥔 손이 위를 보게 하거나 밑을 보게 하거나 하여 심하게 움직여서 쓰는 방법이다. 즉 왼쪽으로 운필(運筆)할 경우에는 손바닥은 밑을 보게 되고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에는 위를 보게 된다. 역입평출(逆入平出)은 청시대의 포세신(包世臣)이 제창한 운필법의 일종으로서 글자를 쓸 경우 붓의 봉(鋒:끝)을 역으로 눌러서 운필해 나가는 방법이다. 기(氣)가 넘치는 글씨를 쓰자면 역입평출의 방법이어야 된다고 한다. 문방구(文房具)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물건이다. 줄여서 문구라고도 한다. 좁은 의미로는 '[[문방사우]]'라고 해서, [[종이]], [[붓]], [[먹]], [[벼루]]를 가리키기도 하나, 넓은 의미로는 글자의 뜻 그대로 여러가지 용구를 포함하여 말한다. [[파일:Han Ho-Jeungryu yeojang seochep.jpg|200px|섬네일|한호의 증류여장서첩]] [[파일:Chusa-Gyesan musin.jpg|262*120px|섬네일|추사 김정희의 계산무진. 추사체로 쓰여 있다.]] [[분류:서예| ]] [[분류:동아시아의 문화]] 유럽 연합 유럽 연합() 약칭 EU는 주로 유럽에 위치한 28개의 회원국 간의 정치 및 경제 통합체이다. 유럽 연합의 인구수는 5억 1,300만 명으로, 영토는 4,475,757 km이다. 유럽 연합은 회원국 전체에 적용되는 표준화된 법을 통해 유럽 단일 시장을 발전시키고 있다. 유럽 연합의 정책은 사람, 상품, 자본, 그리고 서비스가 국내 시장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국내 문제와 정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농업, 어업 그리고 지역 개발에서 공동 정책을 채택한다. 솅겐 지역에서의 여행에서, 유럽 연합은 출입국관리를 폐지했다. 1999년 유로존이 설립되어 2002년 발효되었으며, 유로를 통화로 사용하는 19개의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 연합과 유럽 시민권은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설립되었다. 유럽 연합의 기원은 1951년 파리 조약으로 창설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와 1957년 로마 조약으로 창설된 유럽 경제 공동체이다. 유럽의 공동체를 창립한 것으로 알려진 회원국은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서독 6개국으로, 이들을 합쳐 이너 식스라고 부른다. 위원회와 그들의 계승자들은 새로운 회원국이 가입하면서 확장되었다. 유럽 연합의 헌법적 기초에 대한 마지막 주요 합의사항은 2009년 리스본 조약에서 체결되었다. 아직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국가는 없지만, 영국이 2016년 6월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는 것을 결정했고, 2019년 3월 29일을 목표로 브렉시트 협상을 개시 중이다. 전 세계 인구의 7.3%을 차지하는 유럽 연합의 2017년 기준 국내총생산은 19조 6700억 달러로, 전세계 GDP의 24.6%를 차지한다. 또한 유럽 연합 회원국 모두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높은 수치를 보유하고 있다. 2012년 유럽 연합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동 외교 및 보안 정책을 통해 유럽 연합은 외국과의 무역 및 영토 방어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유럽 연합은 세계 곳곳에 정치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유엔, 세계 무역 기구, G7, G20 등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한다. 유럽 연합의 세계적 영향력 때문에, 유럽 연합은 종종 신흥 강대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유럽 연합의 언어는 가입국 각각의 공용어로 정해져 있어서 2013년 7월 1일 이후에는 총 공용어 수가 24개나 된다. 따라서 유럽 연합 이사회의 정식 명칭도 공용어와 같은 수만큼 있다. 유럽 연합의 기원은 1946년 9월 19일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한 유명한 유럽에 관한 연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연설에서 윈스턴 처칠은 유럽에 유엔과 유사한 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1950년 5월 9일 장 모네가 구상한 석탄 및 철광석 채굴을 위한 프랑스-서독 간의 공동 사무소 설치에 관한 계획을 당시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로베르 쉬망이 쉬망 선언(Déclaration Schuman)을 통해 공식적으로 건의함으로써 최초로 유럽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중앙 유럽 국가 간에 토론되기 시작하였다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월 9일은 유럽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1951년 4월 18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은 석탄 및 철광석 채굴에 관한 조약을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ECSC) 체결함으로써 유럽 내의 시장권을 거의 장악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기존 회원국인 서유럽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중앙유럽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저렴한 중앙유럽의 노동력이 서유럽으로 몰려오면서 서유럽 국가들은 실업난을 겪고 있으며, 중앙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서유럽으로 빠져나가 국가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 연합은 경제 통합을 넘어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2009년 12월 1일 발효된 리스본 조약에 의해, 순번의장 제도가 폐지되고 상임의장인 유럽 이사회 의장 자리가 신설되어, 2009년 11월 1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특별정상회의에서 27개국 정상이 만장일치로 헤르만 반 롬푀이 총리를 초대 상임의장에 선출되어, 2009년 12월 1일부터 헤르만 반 롬푀이가 의장을 맡고 있다. 2012년에 독일과 프랑스 등 EU의 주요국들이 유럽연방의 직전 단계에 해당되는 새로운 EU 통합안의 골격을 내놓았다. 하지만 권고안이 되었고 EU 통합에 부정적인 영국은 처음부터 논의에서 빠졌다. 유럽​​ 연합(EU)은 유럽 연합 회원국 내에서 사용되는 많은 언어와 방언 중에서 24개의 언어를 공식 언어 및 실무 언어로 정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언어는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독일어, 라트비아어, 루마니아어, 리투아니아어, 몰타어, 불가리아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슬로바키아어, 슬로베니아어, 아일랜드어, 에스토니아어, 영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크로아티아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 프랑스어, 핀란드어, 헝가리어이다. 유럽 의회는 문서와 본회의 관련 자료등을 모든 언어로 번역한다. 일부 기관 내부 실무 언어와 같은 경우 소수 언어(갈리시아어, 게일어, 바스크어, 웨일스어, 카탈루냐어)를 사용하지만 이들 언어는 공식 언어가 아니다. 유럽 연합(EU)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국어 비율을 계산하면 영어가 인구의 38%로 가장 많고 독일어가 12% 프랑스어가 11%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로 바로미터(Eurobarometer)에 의해 실시된 2012년 유럽 연합의 종교성에 대한 새로운 여론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유럽 연합 시민의 72%를 차지하는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종교이다. 개신교는 12%를 차지하는 반면 천주교는 48%의 EU 시민을 차지,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파였다. 그리고 동방 정교회는 8%를 구성하고, 다른 기독교인들은 유럽 연합 인구의 4%를 차지한다. 비 신자로는 불가지론 16%, 무신론자 7%, 이슬람교 2%이다. 1957년 창립 회원국은 네덜란드, 서독(현재의 독일), 룩셈부르크,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총 여섯 국가이다. 이후 1973년에는 그린란드를 제외한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1981년에는 그리스가, 1986년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1990년에는 동서독 통일로 인해 옛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면서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1995년에는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2004년 5월 1일에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체코, 키프로스, 폴란드, 헝가리가 가입했으며, 2007년 1월 1일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가입했다.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28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2016년 6월 23일 영국이 탈퇴를 신청하였다. 또한 유럽은 아니지만 몇몇 유럽 연합 회원국의 속령도 유럽 연합의 일부이다. 2016년 2월 20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영국의 유럽 연합 회원국 지위를 두고 2016년 6월 23일 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이 날 영국은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연합의 탈퇴는 영국 독립당에 의해 적극 추진되었다. 국민투표 결과, 2016년 6월 24일에 4%p 차로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가 결정되었다. 이 사건을 브렉시트(Brexit)라고 한다. 이후 유럽 연합은 영국의 회원국 자격을 심사하게 된다. 유럽 이사회(European Council) 또는 EU 정상 회의는 유럽 연합 회원국의 국가 원수 또는 정부 장관(각료)과 유럽 이사회 의장,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되고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규정이 있는 기관이다. 이사회 회의에는 EU 외교·안보 정책 대표도 참석하며, 이사회 의장이 의사 진행을 한다. 입법 권한은 주어지지 않지만 유럽 이사회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기관이며, 또한 여기서 이루어진 결정은 EU의 일반적인 정치 지침을 정하는 기본이 된다. 이사회는 반년 동안 적어도 2회 정도 회의를 가지며, 주 회의 장소는 브뤼셀의 유스투스 립시우스 빌딩이다. 유럽 연합 이사회(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또는 EU 각료 회의는 유럽 연합의 입법·정책 결정 기관이다. 이사회 회원국들의 각료 1명씩으로 구성된 집단체로서, 회원 각국의 국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대변하는 정부간 기구이다. 그 구성은 다루는 주제(외무,농무,재무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일반적 사항을 다룰 때는 보통 각국의 외무 장관으로 구성되고, 전문적 사항을 다룰 때만 소관업무의 담당 장관들로 구성된다. 유럽 연합본부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다. 하지만 4월, 6월 및 11월에 개최되는 각료급 회담은 룩셈부르크의 수도인 룩셈부르크시에서 열린다.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는 유럽 연합의 입법 기관이다. 27개 유럽 연합 회원국의 시민들에 의해 5년에 한 번씩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본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주요한 입법기능은 각료 이사회가 주로 행사하지만, 마스트리흐트 조약 이후로는 입법기능과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유럽 의회는 주도적으로 입법을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정책 영역에서 수정 요구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특정 정책에 대해서 조언만 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유럽 의회는 또한 유럽 집행 위원회를 감독하며 집행 위원 임명 동의를 하며 불신임 투표를 통해 해임할 수 있다. 또한 유럽 연합의 예산 감독권을 가진다. 이전의 유럽 안보 협력 기구나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 등도 의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회원국의 의회에 의해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럽 의회는 1979년 이래 유일하게 시민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있다. 국가별 연합 의회 의원 수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메이지 천황의 통치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후 1912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죽을 때까지 44년간이다. (메이지 천황의 즉위는 메이지 유신 1년 전인 1867년 2월이다.) 일본 제국의 전반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며, 메이지 유신부터 신해 혁명 종결까지의 시기하고 일치한다. 메이지(明治)는 《역경》(易經) (說卦傳 4장)의 성인남면이청천하, 향명이치(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성인은 남쪽을 향해 천하의 의견을 듣고, 밝은 것을 향하여 다스린다.)에서 따온 글자이다. 메이지 년간의 정치 체제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메이지 정부의 시기 (1868년 ~ 1890년), 두개는 일본제국 헌법 시행 이후 (1890년 ~ 1912년)이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 제국의 초기 정부이다. 메이지 시대의 대외 관계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불평등 조약의 철폐에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외교의 시작은 메이지 유신의 일본제국의 성립이다. 1868년부터 1911년까지 (즉 메이지 시대)은 도쿠가와 막부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상속했다. 또한 불평등 조약이 전폐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발발한 해이기도했지만, 쑨원과 장제스 등 대륙시기 중화민국의 지도자들은 메이지 년간의 일본제국에 유학 하고 있었다. 불평등 조약의 철폐를 지향하는 정부의 활동은 1880년대의 "녹명관을 외교"가 상징적이다. 또, 메이지 정부는 국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외국인 초빙사"을 초청하였고, 그들은 서양 문명의 보급에 의한 일본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일본의 산업 혁명 이 메이지 시대에 일어났다. "외국인 초빙사"의 초빙을 비롯해 서양식 산업이 대량 신속하게 수입되어 일본화되어 갔다. 산업 혁명 시대의 일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본 최초의 철도 개업 (1872년), 토미오카 제사장, 국내 권업 박람회 (1877년), 일본에서 전화 개통 (1900년), 야하타 제철소 (1901년 개관) 등이 대표적이다. (주의) 메이지 5년까지는 구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서력(그레고리력)의 연도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법 (불교) 법(法)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의 번역으로서 "지키는 것지지하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 법은 교법, 최고의 진리, 법칙, 도리, 존재, 실체, 모든 존재(일체법) 등 다양한 뜻이 있다. 불교의 불법승(佛法僧) 3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라고 할 때 법은 교법(敎法)이법(理法)행법(行法)과법(果法)의 4법을 뜻한다. 이 가운데 교법(敎法)은 좁은 의미에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뜻하고, 넓은 의미에서 3세제불(三世諸佛)의 가르침 즉 모든 부처 즉 깨달은 자의 가르침 또는 불교 경전들에 나타난 가르침 전체를 뜻한다. 이법(理法)은 교법이 가리키고 해설하고 있는 진리를 뜻하며, 행법(行法)은 이법 즉 진리를 성취하게 하는 계(戒)정(定)혜(慧) 등의 방편 또는 수행을 뜻하며, 과법(果法)은 행법이 원만해졌을 때 증득되는 이법 즉 진리 즉 열반을 뜻한다. 따라서, 법보(法寶)의 법은 불교의 교의(가르침)수행(도리, 방편)진리를 모두 뜻한다.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유식학과 불교 일반에서 일체법(一切法), 법상(法相) 또는 제법분별(諸法分別)이라고 할 때의 법은 존재 또는 실체를 뜻하며, 주로 현상 세계의 존재 즉 유위법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 또는 실체 즉 법의 본질적 성질을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이라 한다. 이에 비해 법성(法性)이라고 할 때의 법은 진리 즉 무위법의 진여(眞如)를 뜻하며 법성을 다른 말로는 진성(眞性)이라고도 한다. 법의 인도에 있어서의 기원은 오래된 것으로서 베다에서는 신적 의지(神的意志)에 대해 인간 편에 서서 인간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최고의 진리, 혹은 종교적 규범, 사회 규범(법률제도관습), 행위적 규범(윤리도덕) 등 넓은 범위에 걸친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도 법은 그 뜻이 매우 복잡하며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체법(一切法)만법(萬法) 또는 제법(諸法)은 모든 법 즉 '일체(一切)의 존재[法]' 즉 '모든 존재[法]'를 뜻하는 낱말이다. 줄여서 일체(一切)라고도 한다. 법(法)이라는 낱말은 모든 존재(일체법)를 뜻하는 경우로도 사용되는데, 이와 같이 법을 일체의 존재 또는 모든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인도사상(印度思想) 일반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독자의 것이며 법에 관한 다방면의 연구가 불교의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 특히, 원시불교에 이은 부파불교의 시대에서는 모든 존재(일체법)를 분석하여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뚜렷히 밝히는 작업이 크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분석법은 후대의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파의 유식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법(法)에는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또는 존재라는 의미가 있는데, 임지자성 궤생물해(任持自性 軌生物解)는 이러한 의미의 법을 정의할 때 흔히 사용되는 문구이다. 중국 법상종의 규기(窺基)는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법(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는데, 이 진술을 더 간단히 요약하여 "임지자성 궤생물해(任持自性 軌生物解)"라고 한다. 이 정의는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법(法)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임지자성(任持自性)은 자신만의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 즉 본질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고, 궤생물해(軌生物解)는 해당 사물에 대한 앎[解, 인식, 요해, 요별, 지식]을 낳게 하는 궤범이라는 뜻이다. 궤범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규범, 즉 법칙적 관계를 뜻하는데, '궤생물해'는 해당 사물(법)이 다른 사물(법)들에 대해 가지는 법칙적 관계, 즉 본질적 작용이 해당 사물(법)을 앎[解]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5온 중의 하나인 수온, 즉 마음작용 중의 하나인 수(受)는 고수(苦受)낙수(樂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로 나뉘는데, 3수는 다음과 같이 다른 마음작용인 촉(觸)과 욕(欲)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때 아주 명료하게 이해된다. 즉, 법을 '임지자성 궤생물해(任持自性 軌生物解)'라고 정의하는 것은, 법은 자기만의 자성 또는 자상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자성 또는 자상은 해당 법에 대한 앎[解, 인식, 요해, 요별, 지식]의 궤범이 되어 해당 법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물 또는 존재를 법(法)이라 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 이래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諸法 또는 一切)를 분석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5온(五蘊), 12처(十二處) 또는 18계(十八界)의 세 분류법으로 분석하였다. 아비달마에 의하면, 모든 존재를 분석함에 있어 이러한 세 가지 분류법이 있는 이유는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상근기중근기하근기의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상근기에게는 5온을, 중근기에게는 12처를, 하근기에게는 18계를 설하였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이러한 5온12처18계의 분류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모든 존재를 색법(色法, 11가지), 심법(心法, 1가지), 심소법(心所法, 46가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14가지), 무위법(無爲法, 3가지)의 5그룹의 75가지 법으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5위 75법(五位七十五法)이라 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중국의 법상종에서는, 마찬가지로 5온12처18계의 분류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모든 존재를 심법(心法, 8가지)심소법(心所法, 51가지)색법(色法, 11가지)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가지)무위법(無爲法, 6가지)의 5그룹의 100가지 법으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5위 100법(五位百法)이라 한다. 녹턴 녹턴(,), 또는 야상곡(夜想曲)은 주로 밤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밤의 성질을 띄는 악곡의 장르이다. 역사적으로, 녹턴은 중세시대 아침예배나 정시과 (결혼식을 거행하는 시간)때 쓰여왔던 오래된 단어이다. 녹턴이라는 명칭은 18세기때 저녁파티에 주로 연주되던 곡을 일컫는 것이었다. 가끔은 모짜르트의 quadraphonic Notturno in D, K.286에서 볼 수 있듯 이태리어 Notturno 를 일컫기도 했다. 당시에는 밤과의 연관성은 크게 없었지만,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주로 밤에 연주되었던 세레나데같은 곡이였다. 녹턴은 19세기때 주로 피아노 독주용 음악으로 번창하였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곡가 존 필드가 최초로 야상곡을 작곡했다. 존 필드는 주로 아르페지오와 칸타빌레식의 멜로디, 그리고 기타같은 반주 스타일을 반영한 야상곡을 작곡하였고, 최초의 야상곡 작곡가이기 때문에 '녹턴의 아버지’ 라고 불리기도 한다. 야상곡 작곡의 선구자는 존 필드이지만, 가장 유명하고 널리알려진 야상곡 작곡가는 21개의 야상곡을 작성한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이그나 레이바흐는 “다섯번째 녹턴” 이라는 19세기때 제일 유명했었던 야상곡을 작곡했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 작곡가이다. 훗날에 야상곡 작곡가들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들은 가브리엘 포레,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에릭 사티 (1919), 프랜시스 풀랑크 (1989), 피터 스쿨트롭 등이다. 벨라 바르토크는 '밤의 악장' 이라는 피아노 야상곡에서 자연의 소리를 흉내내었다. 예를들자면, 새의 지저귀는 소리나 다른 숲의 곤충들의 소리 외에도,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고독한 느낌까지 드는 멜로디로 곡을 형성하였다. 미국 작곡가인 로웰 리버만은 11개의 야상곡을 작곡하였다. 20세기에 작곡된 야상곡 중 대표적인 것들을 더 꼽자면 마이클 글렌 윌리엄스, 새뮤얼 바버, 그리고 로버트 헬프스가 작곡한 야상곡들이 있다. 또 다른 야상곡의 예문은 펠릭스 멘델슨이 작곡한 오케스트라용 [한여름 밤의 꿈] (1848) 의 연주음악, 클라데 데부시가 작곡한 오케스트라와 합창용 야상곡과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바이올린용 야상곡 (Violin Concerto No.1, 1948) 이 있다. 여기서 알수있듯이, 야상곡은 피아노 독주용 외에도 다양하게 작곡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야상곡을 들어보면 쇼팽과 존 필드가 작곡한 야상곡과의 느낌이 아예 다르다는것을 알수있다. 야상곡은 종종 평온하고, 표현력이 풍부하고 서정적이고, 간혹 우울하거나 음침한 느낌이라는 인상을 주로 주지만, 많은 야상곡들을 보자면 이 외에도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 있다. 데부시의 두번째 오케스트라용 야상곡 "페테스" 와 카롤 시마노우스키의 "Nocturne and Tarantella" (1915), 그리고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의 "Symphonic Nocturne for Piano Alone" (1977-78)같은 경우는 매우 활기차고 흥이 돋는 느낌을 준다. 녹턴이라는 단어는 후에 미술분야에서도 쓰이기도했다. 제임스 아봇 맥닐 휘슬러는 자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타일의 그림을 "녹턴 페인팅 painting" 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드뷔시의 야상곡들은 휘슬러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것이라고 한다. 프레데리크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 (1810년 3월 1일~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 )이다.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던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 크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쇼팽 자신과 가족은 쇼팽이 1810년 3월 1일에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 기록을 보면 2월 22일에 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을 근거로 쇼팽을 연구하는 사람의 3분의 2는 그의 생일이 2월 22일이 맞다고 보고 있다. 쇼팽의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그것이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였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8세 때에 공연을 가졌다.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보도되면서 귀족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자선공연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피아노 레슨은 1816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받게 되었는데,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è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ę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환상 즉흥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é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프레데리크 쇼팽을 기념하기 위해서 5년마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바르샤바에서 열린다. 다음은 작곡가를 기념해 이름이 붙은 것들이다. http://www.armoredpenguin.com/crossword/Data/2017.06/0719/07190733.889.html 대위법 대위법(對位法)은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이다. 흔히 서양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 이후에 한해 쓰이며 그 전 시대 음악을 논할 때는 다성음악(polyphony)이라 부른다.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대위법을 사용하는 작곡 방식으로 가장 고난도 기법은 푸가이며 이외에도 카논, 돌림노래 등이 대위법을 사용한다. 대위법은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적당한 악기가 없던 시대에 단선율만 낼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독립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 발달하였다. 음악적 특성상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각각의 성부는 독립적인 선율을 노래하게 되었으며, 독립적인 선율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화음의 발전에 기여했다. 대위법이란 단어는 영어의 Counterpoint, 독일어의 Kontra-punkt, 프랑스어의 Contrepoint 등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서, 모두 라틴어의 Punctus contra punctum이 어원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점 대 점'이라는 뜻이지만, 점 즉 음표에서 '음표에 대한 음표', 나아가서 '멜로디에 대한 멜로디'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라 하겠다. 즉, 2개 이상의 각 독립한 생명을 가지는 가락이 동시에 어울려 있는 것 같은 음악은 대위법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위법이라는 말은 복수(複數)이며 서로 다른 가락을 모아 꾸미는 작곡상의 한 기법임을 의미하며, 한 작품이 대위법적으로 씌어졌을 경우에는 작품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도 쓰인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나 무반주로 노래되는 민요와 같이 다만 하나의 가락으로 된 음악, 즉 '단선음악(單旋音樂)'에는 물론 대위법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수인 다른 성부(聲部)로 된 음악에서는 각 성부의 수직(세로)의 관계와 수평(가로)의 관계가 마치 천의 날실과 씨실 같은 관계를 가지면서 음악을 구성한다. 이와 같은 음악의 구성을 영어로는 텍스처(Texture, 織物·組織)라 하며, 한글로는 쓰기(書法)라고 하는데, 천의 씨실에 상당하는 것이 대위법이고, 날실에 상당하는 것이 화성법(和聲法)이다. 따라서 음이 옆으로 흐르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는 음악은 폴리포닉(polyphonic, 多聲的)한 음악이며 대위법적 음악이고, 가령 성부의 수는 많을지라도 세로의 관계에 중점이 있는 음악은 호모포닉(homophonic, 화성적)한 음악이라고 불리는 것이 관습이다. 음악사를 보면 대위법의 역사는 양식상의 특징에 따라 대략 다음 네 시기로 크게 구분된다. 물론 이 구분은 대체적인 것이며, 각 시기의 경계는 서로 얽혀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의 양식상의 변화는 극히 서서히 일어나고,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거친 뒤에도 그 이전의 양식적 특징은 잔존해서 차차로 새로운 양식과 바뀌어 결국에 가서는 소멸한다. 이 네 시기의 주된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개 이상의 성부가 서로 다른 가락을 동시에 노래하거나 켜는 시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다성음악(多聲音樂, Polyphony)의 실례가 처음으로 기록에 나오는 것은 9세기 후반 이후부터이다. 9세기 중엽부터 말기까지의 사이에 쓴 것으로 믿어지는 음악이론서 <무지카 엔키리아디스> 에는 오르가눔이라 불리는 다성음악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 다성음악에 관한 가장 오래된 보표의 예이다. 오르가눔이라 함은 그레고리오 성가에 1 또는 그 이상의 대성부(對聲部)를 부가한 다성음악이다. 이 시기를 통하여 대위법은 실제면에서도 이론면에서도 차례로 정리되어 양식적 통일을 얻고, 결국은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Palestrina style)'이라 불리는 양식에서 유례가 없는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3화음의 체계가 점차 확립되어 대위법도 그 영향을 크게 받게 된 과정과, 각 성부의 독립성을 크게 보아야 한다. 12-13세기 노트르담 악파의 모테토에서는 3도는 안어울림음정(불협화음정)으로 생각하여 3화음의 형태가 나타나는 일은 아주 희박하였다. 그러나 다음 14세기 알스 노바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3도는 어울림음으로 처리되었고, 따라서 3화음도 극히 자주 나타났다. 이와 같은 음감각의 변천은 매우 흥미 깊은 것이어서 사회적 환경, 기후 풍토 등의 조건 여하에 따라서 인간의 감각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실례이다. 대체로 북쪽지방에서는 논리적이며 대위법적 구성에 중점을 두었고, 남쪽지방에서는 세로의 울림에 중점을 둔 화성적 양식을 애용하였음이 일반적 경향으로 인정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흥미깊다. 15-16세기의 이른바 플랑드르 악파, 부르고뉴 악파의 시대를 통하여 대위법적 기법은 점차로 세련되고 3화음 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화성음과 화음 밖의음(비화성음)의 관념도 명료하게 인식되었다. 그 결과 걸림음(괘류음)이나 지남음(경과음) 등과 같은 이른바 화음밖의음이 일으키는 안어울림음정과 그 해결이라는 화성상의 흥미가 울림에 있어서도 표현력을 증가한 가락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모방의 기법이 대위법적인 흥미마저 곁들여서 만족시키게 되었다. 즉, 성부의 대위법적 독립성과 화음적 융화성이라고 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면이 훌륭한 조화를 지니면서 융합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되어, 대위법의 역사는 이로써 황금기를 맞이한다. 다만 이 3화음 체계는 장·단 두 조(調)의 기능화성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능화성에서는 화음이 각기 일정한 기능을 가지며, 각 화음은 그 자신의 가치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개의 기능에 따라 연결된 마침꼴 안에서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에 반하여 15-16세기의 교회선법에 따른 3화음 체계에서는 화음 상호간의 기능관계는 존재하지 않든가, 있다 하더라도 극히 약하여 겨우 악구(樂句)의 단락점(段落點)에 Ⅵ-Ⅴ-Ⅰ과 같은 마침꼴(終止形)이 인정되는 정도이다. 여기서는 화음은 가로의 흐름인 멜로디선이 집적(集積)한 결과 생긴 것이며, 앞뒤 화음과의 기능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울림으로 존재하며, 화음끼리는 가락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든 자유로이 연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위법의 양식을 다음 시대의 '화성적 대위법'과 대비시켜서 '선적 대위법'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장·단 두 조(調)에 따른 기능화성이 음악을 지배한 시대이다. 악식·화성·멜로디·리듬 등 음악의 모든 요소가 기능화음의 영향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었다. 대위법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이 시기까지의 교회선법에 의한 선적(線的) 대위법에 있어서는 현상(現象)으로서 3화음 체계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멜로디선이 집적한 결과로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텍스처상으로는 가로의 흐름이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이 시기의 대위법에서는 우선 각개의 기능에 따라 화음의 연결이 상정되어 멜로디는 그 화음의 도식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대위법은 항상 화음의 굴레를 쓰고 있게 된다. 이 화성적 대위법시대 최대 거장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이다. 그를 정점으로 그 후 음악은 점차 화성적 양식으로 기울게 되고, 낭만파의 음악에서 그 경향이 더욱 강한 것으로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음악이 많든 적든 간에 무조화(無調和)하는 경향에 따라 다시 선적 대위법이 부활하게 되었다. 즉, 조성(調性)에서 해방된 음악은 기능화성의 틀에서 벗어났으며, 멜로디는 그 자신의 조형적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교회선법에 따른 선적 대위법에서는 멜로디나 화성은 어느 한 선법(旋法)에 포함되는 음만으로 되는 것이지만, 무조음악(無調音樂)에서는 반음계의 12음이 모두 자유롭게 쓰인다. 따라서 멜로디나 그 멜로디가 몇 개 겹쳐서 우발적으로 생기는 화음은 지금까지 존재한 어떠한 체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긴장과 이완의 교묘한 교체에 의한 독자적인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 쇤베르크가 창안한 '12음기법'은 이와 같은 방향의 한 궁극점이며 12음으로 되는 '세리'의 철저한 대위법적 변주로 음악 전체가 구성된다. 오늘날까지 이론적으로 정비되고 실제의 학습에 제공되고 있는 대위법의 교과서는 크게 대략 2개의 범주로 나뉜다. 하나는 이른바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규범으로 하는 선적 대위법에 따른 '순수 대위법'이라고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바흐를 최고의 규범으로 하여 장·단 양조에 따라 주로 기악양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대위법이다. 이 밖에도 양자를 절충한 것 같은 것이나, 무조음악 또는 12음기법의 영역에 이론적 정리를 시도하는 대위법 이론도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일정한 원칙에 따르면서 단순한 것에서부터 고도의 것으로 학습을 거듭하도록 배려되어 있다. 대위법 학습의 역사에는 기묘한 에피소드도 있다. 작곡가 케루비니의 스승이며 18세기에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렸던 사르티는, 제자에게 대위법의 비결을 전수할 때 방을 캄캄하게 한 다음 장미빛 등불을 밝혀 박명(薄明) 속에서 전수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대위법 이론의 자세한 부분은 생략하지만, 대위법의 중요 기법의 하나인 '모방'에 대하여 말한다. '모방'이라 함은 어떤 성부의 멜로디를 다른 성부가 뒤에서 그대로 따라하게 하는 기법이다. 모방에는 선행성부(先行聲部)를 충실히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선행성부의 주요 특징만을 모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단계가 있다. 선행하는 성부와 같은 음에서 후속의 모방성부가 시작되는 것 외에도 다른 음에서 모방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성부간의 모방은 인간의 청각에 지적 기쁨을 준다. 따라서 모방이라는 기법은 모든 시대에 여러 방법으로 쓰여 왔다. '카논', '푸가'는 모방을 철저하게 응용한 곡종이다. 화성 (동음이의) 화성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주한 미군 주한 미군(駐韓美軍, )은 대한민국에 주둔하는 미국의 군대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지위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내에서 합법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통솔하는 조직은 한미연합사령부로, 사령관은 미군 대장이며, 부사령관은 대한민국 육군 대장이다. 2016년 2월 19일에 주한 미해군 사령부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부산광역시 부산 해군기지로 옮겼고, 대한민국 전역에 분포하는 50여 개 미군 부대의 90% 이상이 2018년 말까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미군의 세계 최대 해외기지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2017년 7월에 미국 제8군사령부가 이전하였고, 2018년 6월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하였다. 한편, 주한 미군 전역 군인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고 남은 다량의 고엽제를 1978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의 캐럴 기지에 매립하였다고 폭로하는 등 주한 미군 기지는 각종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주한미군이 행사하는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은 2012년 4월 17일부터 대한민국 국군이 환수해 행사하기로 합의되었으나, 2010년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2015년 12월로 연기하였고, 2014년 10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대한민국과 미국 국방부 장관은 전작권 전환 시기를 정하지 않고 2020년대 중반에 전환 여부를 검토한다고 합의하여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주일미군은 사령관이 중장인데 비해, 주한미군 사령관은 대장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전작권을 환수하면 현재 4성 장군인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일미군과 같은 3성 장군으로 바뀌고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일미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아 독도문제 등 한일관계에서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근거 없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미 양국은 전작권 전환에 따라 한미연합사가 폐지될 경우, 그와 함께 미군의 한국전투사령부(KORCOM)를 창설하도록 합의했었다. 즉,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환수는 한미연합사의 기능이 각각 대한민국 국군과 미국의 한국전투사령부(KORCOM)로 나뉘어 이관되는 것 뿐이다. 또한, 전작권이 전환되더라도 대한민국 해군과 대한민국 공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미군이 갖게 된다. 주한미군은 단지 유사시에 빨리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주일미군은 해군의 비중이 크지만, 주한 미군은 상대적으로 미국 육군의 비중이 훨씬 크다. 유사시 대한민국 방위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는 미군 증원전력은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포함하여 병력 약 69만명, 함정 약 160 척, 항공기 약 2,000 대의 규모이다. 전시에 미국 육군은 미국 8군예하의 현 미국 2 보병사단 외에도 4개 사단이 추가로 증원되며, 미국 제7함대와 미국 7 공군이 지원된다. 미국 육군인 미국 8군 미국 2 보병사단은 여단전투단 5개가 사단 1개, 사단 5개가 미국 8군을 구성하는 5각 편제를 따르고 있다. 현재 한반도 내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육군은 미국 2 보병사단 뿐이지만, 평택 육해공 통합기지가 완공되면 유사시에 증원되는 4개 사단이 이곳으로 전개하게 된다. 추가로 주한 미국 8군에 있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인 카투사 2,609명과 군무원은 제외한 것이다. ※ 2009년 2월 미 극동공병단 회의록 원문에는 '12~17+' 로 표기하였다. Northern Presence South West Hub South East Hub 2006년 대한민국 국적자인 미국 시민권자(이중국적자)와 영주권자가 대한민국의 징집을 기피하고 미군에 입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주독일 미군으로 배치된 이중국적자는 휴가 차 한국을 방문하면서 병역법 위반이 들통나 출국금지 조치되었으며, 미국 영주권자인 다른 한 명은 병무청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나 미군으로 입대한 후 주한 미군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에 대해 국방부와 병무청은 '미군 복무는 개인적 취업활동으로 의무로서의 병역과는 다르다'면서 '법과 원칙대로 반드시 병역의무를 이행토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실제로는 주한 미군 지위 협정(SOFA) 등을 핑계대다가 결국 수 개월 만에 이들의 한국국적 포기신청을 법무부가 받아들여 대한민국 병적에서 제적시키는 형식으로 병역 이행 없이 마무리됐다. 이와 관련해 주한미군 지휘부는 자국 당국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입대한 미군을 주한미군으로 배치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약 7만 명 정도가 일정기간 유지되었다. =>이부분이 사실과 다릅니다 편집자는 수정하길 닉슨독트린이 유신헌법보다 먼저발표 닉슨은 유신 비난한적이 없습니다 카터가 비난함 아래 명기한 모든 사항은 2010년 부로 공개되었습니다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는 1993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NCSA 연구소의 대학생이었던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과 에릭 비나(Eric Bina)가 공동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팀 버너스리가 만든 기존의 WorldWideWeb 브라우저가 텍스트 위주였던 것과 달리, 모자이크는 이미지를 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그래픽 웹 브라우저였다. 출시 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개발 책임자였던 마크 앤드리슨이 동료들을 데리고 1994년 넷스케이프 회사를 설립하고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웹 브라우저를 개발함에 따라 사실상 개발이 중단되었다. 1994년 모자이크는 스파이글래스(Spyglass) 회사에 인수되었다.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파이글래스 회사에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기존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의 소스 코드를 활용하여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개발했다. 모자이크는 1997년 1월 7일자로 공식적인 지원과 개발이 중단되었지만, NCSA FTP 서버에서 계속 다운로드할 수 있다. NCSA 모자이크는 NCSA의 마크 앤드리슨과 에릭 비나가 본래 유닉스의 X 윈도 시스템을 위해 설계/개발했다. 모자이크의 개발은 1992년 12월 시작됐다. 1.0 버전이 1993년 4월 22일 출시되고, 이후 1993년 여름 동안 두 개의 보완 버전이 나왔다. 1993년 12월에는 2.0 버전 출시와 함께 애플 매킨토시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 1.0 버전이 출시되었다. 에이콘 아르키메데스용 포팅을 1994년 5월에 추진하기도 했다. 모자이크는 인터넷이 교육 기관이나 대규모 산업 연구소 밖으로 급속도로 팽창하던 때, 제한된 정보 서비스(당시는 대개 FTP, 유즈넷, 고퍼 정도)만이 존재하던 인터넷 환경에 매끄러운 멀티미디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NCSA 모자이크는 상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서는 관대한 라이선스를 채택했다. 모든 버전에서 비상업적 목적의 사용은 일정한 제한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웠다. 게다가 유닉스 X 윈도 시스템 버전의 소스 코드는 공개 배포되었다(다른 버전의 소스 코드는 동의 아래 이용 가능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모자이크가 주요 브라우저로서 군림하던 시기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로서 출시된 적은 없으며, 구입하지 않은 경우에는 언제나 사용에 제약이 있었다. 그 뒤에 모자이크 개발팀의 지휘자였던 마크 앤드리슨은 실리콘 그래픽스(SGI)의 창립자들 가운데 한 명인 짐 클락과 함께 NCSA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의 전 학생과 교원을 데리고 나중에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를 출시하는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스 코퍼레이션이 될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즈 코퍼레이션을 창립했다. 스파이글래스에서 자신들의 독자 웹 브라우저의 출시를 위해 기술과 상표를 라이선스했지만, NCSA 모자이크의 소스 코드는 사용하지는 않았다.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는 이후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라이선스되어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모자이크의 인기는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출시 이후 시들해가다가 1998년에는 사용자가 거의 사라졌다. 헨리 8세 헨리 8세(,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년 4월 22일~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이며, 청년 시절은 르네상스 군주로 알려졌으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형수인 왕비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지 20년만에 별거하였다. 그리고 1520년대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혼인 무효화를 허락하지 않아 로마 교황청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1536년과 1539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소령(所領)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두 명 왕비를 처형하고 두 명 왕비와 이혼했으며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등 시종과 공신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였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세기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었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잉글랜드교회에서의 왕위지상령을 갖게 하였다. 헨리 8세가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 당했지만, 임종때까지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다.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헨리 8세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형 아서 튜더가 있었다. 본래 헨리에게는 여섯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겨우 세 명 - 아서 (웨일스 공), 마거릿, 메리 -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았다. 1493년, 아직 젖도 못 뗀 헨리는 드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1494년에 그는 요크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그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문장원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헨리는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당시 관례상 맏이였던 아서 왕태자가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정되었던 탓에 헨리는 교회의 직분을 맡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형 아서가 1502년에 죽자 헨리는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으나 훗날 앤 불린과의 연애 문제와 첫 왕비와의 이혼 문제 등으로 교황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독실한 신앙이기도 했던 그는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한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1502년에 아서가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리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헨리 7세의 노력이 잠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죽은 아서 대신에 그의 동생 헨리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부왕 헨리 7세는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운 웨일스 공과 그의 형제인 미망인, 즉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허용해줄 것이 요청되었다. 캐서린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이자 후아나 1세 (카스티야)후아나의 언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이모였다. 부왕 헨리 7세는 스페인과 영국 양국 간의 명예와 동맹을 위해 정략 결혼을 감행했다. 당시 캐서린은 아서 왕태자와 결혼은 했으나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맹세하였다. 결국, 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자신의 젊은 남편이 죽은 지 14개월 만에 캐서린은 새로운 웨일스 공이자 죽은 남편의 형제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1505년까지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 젊었던 헨리는 자신의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치러진다고 여겼다. 두 사람의 결혼은 1509년 헨리 7세의 임종 때까지 늦추어지다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6월 11일에서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09년 6월 24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헨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2일 후, 헨리 8세는 선왕의 중신 가운데 평판이 좋지 않은 장관들인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가장 죄질이 나쁜 반역죄로 고발되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1510년에 왕명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는 장차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헨리 8세의 주요한 책략이 된다. 이후 어린 시절 헨리의 개인교사였던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헨리 8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으며, 그의 궁정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작가, 시인이었다. 그가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 악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합창곡 "Pastime with Good Company" 또는 "The Kynges Ballade"이다. 또한, 그는 욕심 많은 노름꾼이었으며 주사위 선수였다. 특히 그는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무예와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신앙심이 투철하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의 칭찬을 받아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였다. 덧붙여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반대하는 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동맹에는 수많은 나라가 신속히 참가하였는데,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까지 포함되었다. 헨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진짜 이유는 프랑스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1511년 11월에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으며 캉브레 동맹 전쟁에 말려들 경우를 대비하였다. 1513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스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헨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1513년 9월 9일에 플로든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때 전사한 스코틀랜드 병사 가운데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1520년대 초 시녀였다가 가면무도회에서 본 앤 불린을 보고 그의 한 눈에 들게 되었다. 앤은 바로 임신하였고 이는 그로 하여금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함과 더불어 헨리 8세의 조급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던 중 1525년, 헨리 8세는 당시 캐서린 왕비의 젊은 시녀이자 한때 자신의 애인이었던 메리 불린의 언니인 앤 불린에게 눈독을 들여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갖게 되었다. 앤 불린은 예전의 메리 불린처럼 그늘의 왕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그의 시도에 저항하였다. 그녀의 매몰찬 거절을 받은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그녀에 끌리게 되면서 집요하게 그녀를 유혹하였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계속된 유혹에도 앤 불린은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헨리 8세에게 혼인을 무효화시키라는 제안을 했을 것이며, 그것이 아들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소원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있다. 과거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잉글랜드 왕국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은 전례가 있었다(장미 전쟁). 그러한 일을 잘 알던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탄탄히 하고 싶어했다. 그와 캐서린 사이에는 딸 메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얼마 못 가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헨리의 사정을 파악한 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캐서린을 대신해 왕비로 등극하고자 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헨리 8세의 소망을 이용하여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헨리 8세는 대리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으로부터 독립하여 앤과 관련된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맨 처음 전하지도 않고 성좌에 호소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왕의 비서인 윌리엄 나이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켜 줄 것을 청원하고자 보내졌다. 혼인이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는 캐서린은 아서와의 이전 결혼에서 순결을 잃었으며, 따라서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에 레위기(20:21)에 어긋나는 비(非) 성경적인 결혼이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은 효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명기(25:5)에는 이와 상반된 구절이 있다) 또한, 혼인이 무효 될 경우에는 헨리 8세가 새로운 여성과 새로 결혼식을 해도 허락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여성은 사실상 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나이트는 교황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의 사절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헨리 8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받는 교황이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의 혼인 무효를 거부할 것은 명백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직접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헨리 8세가 새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울지 추기경이 배신했을 거라고 확신한 앤 불린은 그가 1529년에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헨리 8세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였다. 1527년 헨리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했다. 당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울지는 1515년부터 1527년까지 영국 국왕의 자문관을 겸하며 헨리의 조력자로서 완벽하게 국정을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헨리의 이혼 문제를 놓고 교황청과 헨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해임되었다. 쫓겨난 울지는 앤에게 자신의 정권 복귀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러자 울지는 앤을 국외 추방하려는 책략을 비밀리에 꾸몄으며 캐서린 왕비와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취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헨리 8세는 울지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며, 1530년에 결국 붙잡혀 참수당했다. 울지를 대신해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새로운 정책에 협력하여 의회에서 울지를 탄핵하였고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불법이라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공포하였다.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반감을 품기 시작하면서 모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1년 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캐서린 왕비는 궁전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녀의 방의 새 주인은 앤이 되었다. 예전의 울지처럼 앤은 각료 임명 등 정치적 문제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앤은 윌리엄 워햄이 죽은 후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자기 가족의 개인 예배당 사제인 토머스 크랜머를 앉혔다. 이 결정은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부터 인정받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팔리움을 하사받았다. 새로 대법원장이 된 토머스 크롬웰은 1532년 영국 교회와 로마의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1533년 헨리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락했다. 날이 갈수록 잉글랜드 내에서 로마의 힘은 조금씩 약해져 갔다. 1532년, 새로운 대법원장이 되고 임시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앤의 지지자였던 법률가 토머스 크롬웰은 일찍이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비서장관과 주교 총대리의 지위를 제수받았다. 이후 토머스 모어가 다시 대법관에 임명되자 대법관직을 사임함에 따라 헨리는 그를 장관들 우두머리의 지위에까지 올렸다. 이 일로 헨리는 결국 바티칸의 눈밖에 났고, 결국 로마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과 회담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 칼레에서의 회의는 프랑스 왕국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지원해주었던 이래 정치적 승리였다. 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와 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곧바로 임신하였고, 왕실 관습에 따라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행사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1533년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1533년 6월 1일에는 앤의 이름이 왕의 배우자 목록에 오름에 따라 캐서린의 왕비 칭호는 박탈되었다. 1533년 9월 7일, 앤은 예상보다 일찍 출산하였다. 앤은 헨리 8세의 모후(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낳았다. 교황의 판단을 거절한 의회는 1533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합법적인 왕비는 앤 볼린이라고 확정하였다. 그에 따라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서출로 신분이 격하되었으며, 왕위 계승 순서에서 엘리자베스 다음이 되었다. 특히 이 법안에는 ‘그 어떤 외국의 왕자 또는 유력자’도 거절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왕국의 모든 백성은 이 법안을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만약 이를 거부할 땐 즉시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특히 헨리와 앤의 결혼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반역죄로 다스려 사형으로 처벌받았다. 1531년 헨리는 빈민 구제를 위한 법령인 헨리 8세 칙령을 선포한다. 그는 특별히 시장이나 치안판사로 하여금 교구에 머물러 노동 불능의 노인이나 빈민의 구호신청을 조사하도게 하고 이를 1531년에 발표한 칙령에도 명시하였다. 그는 각 지의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걸인을 등록케 하여 지정된 지역에서만 구걸하도록 하였다. 또한 목적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지방관리에게 빈민을 보호할 책임 의무를 부과하고, 지방 행정 기관에서 빈민과 걸인의 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관리하게 하는 등 빈민을 위한 공적책임을 갖도록 지시하였다. 공식적인 명칭은 '건장한 부랑인과 거지의 처벌을 위한 법률'로 헨리 8세의 칙령 또는 헨리 구빈법이라 한다. 헨리는 각 지방과들에게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장애인들의 구걸도 제한, 금지하게 하였다. 이는 주요 목적은 국가가 신체 건강한 빈민을 다루는 방법을 조직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빈민들에게는 지나친 통제를, 걸인이나 부랑자에게는 잔인한 처벌을 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1536년 헨리 8세는 다시 1536년 빈민 법령(The Statute of 1536)을 제정하여 성공회의 각 교구단위로 노동 불능의 빈민과 장애인들의 수를 파악하고 이들을 구제토록 하고, 노동가능한 자에게는 취업, 취업지원을 하게 하며, 무차별 혜택과 생활비 지급을 금지하고, 노동력이 있는데도 취직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빈민, 걸인이나 부랑자에게는 처벌, 투옥하게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구걸에 대한 처벌은 낙인을 찍고 투옥시키거나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자녀를 떼어 놓으며 자녀는 지방 행정 기관에서 마련한 탁아소로 보내진다. 그 뒤에도 반복적인 위반 시에는 그 빈민, 걸인은 사형에 처해지고 자녀들에 대한 권리 역시 박탈되었다. 1534년 왕위지상령으로써 '잉글랜드교회를 치리하는 자'는 왕임을 선포한다. 1534년 11월에 통과된 수장령은 잉글랜드교회의 수장은 군주임을 밝혔다. 동시에 영국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많은 성직자들은 국왕도 속인이라 보고 아무래도 속인이 교회 통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헨리 8세는 교황이 상징했던 권력이 머물 곳은 단 한 군데라고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잉글랜드교회의 상징적인 지도자는 영국 국왕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헨리는 수장령을 발표하여 그는 왕이 '정당하고 적법하게' 교회의 수장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마지막으로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자 잉글랜드에서는 몇몇 법률이 더 통과되었다. 1534년 성직임명법을 반포하여 국왕에 의해 지명된 후보만이 주교로 착좌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1534년에 국왕지상법(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단언하였으며, 위 법 조항을 거부하는 이는 1534년 반역법에 따라 왕에 대한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승인하였다. 잉글랜드 신민들은 왕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높으신 폐하”를 의무적으로 말하게 하고 교황의 왕관 수여식을 “부당하고 무자비한 권리 침해이자 강요”라고 주장해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파문에 응대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한 채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종교정책 이외에도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반왕실, 반체제적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는 한편 울지,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의 공신(功臣)들과 왕실의 시종들을 공개 처형하였으며 왕실과 왕의 왕권강화, 전쟁, 이혼, 종교 문제를 비판하는 문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지배와 방비를 강화하고, 성곽의 개보수와 병력 확충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몇 차례나 대륙에 출병하였다. 절대왕정을 더욱 강화하였고 지방과 조정의 대소사를 왕이 직접 결재, 관장하였다. 1536년과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소령(所領, 영유하고 있는 땅)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로써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다. 그는 성격적인 결함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종교개혁을 하고 군주정치를 구현한 것, 빈민과 실직자를 구제한 것 등은 그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날들을 즐겁게 보냈지만, 헨리 8세의 바람기와 빈번한 불신 때문에 앤 불린은 눈물과 격노를 함께 느끼며 힘겨워하였다. 반면에 헨리 8세는 앤의 끊임없는 성급함과 과격함을 싫어했다. 1534년 앤은 상상 임신 혹은 유산을 하게 되었고, 헨리 8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아들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1534년 성탄절 이전, 헨리는 비밀리에 크랜머와 크롬웰을 만나 캐서린의 복귀 없이 앤을 내쫓아 왕비를 교체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한편, 헨리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은 잉글랜드 내에서 빠르게 진압되어갔고 1535년 토머스 모어가 결국 참수당한 것을 포함해 헨리 8세에게 항거한 무수히 많은 로마 가톨릭교도가 고문당한 다음 처형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띈 사람은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와 헨리 8세의 전직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그들은 둘 다 수장령에 대해 서약하는 것을 거부한 일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티번에서 참수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는 잉글랜드 백성 사이에 더 큰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전복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모어와 피셔가 처형된 날 같은 해 10월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은총의 순례이다. 헨리 8세는 봉기의 지도자 로버트 애스크를 왕실 연회에 초대하여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반역을 용서할뿐더러 평화적으로 해산한다면 그들의 요구 사항을 경청해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왕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을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헨리는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에 왕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애스크는 다음해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그들의 힘은 예전만 못했기 때문에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애스크를 포함한 지도자들 전원은 체포당한 후, 반역죄로 다스려 처형되었다. 이후 많은 수도원이 1539년 5월 의회의 승인에 따라 잇달아 강제로 해산되었다. 1536년 1월 8일 헨리 8세와 앤 불린에게 아라곤의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와 앤은 밝은 노란색 옷을 차려입었다고 한다. 헨리는 캐서린의 죽음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기쁨을 드러내었다. 앤은 다시 아이를 뱄으며, 만일 그녀가 이번에도 아들을 낳지 못할 시 어떻게 될지는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헨리 8세는 경기에서 그만 낙마하여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한때 헨리 8세의 생명이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앤은 그 충격으로 15주간 잉태하였던 사내아이를 유산하였다. 그날이 1536년 1월 29일로 마침 캐서린의 장례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본다. 앤의 연이은 임신은 필사적으로 아들을 몹시 바라는 헨리의 관심을 끌었다. 저술가 마이크 애슐리는 앤은 엘리자베스를 낳고 1536년 사내아이를 유산한 후 두 명의 사산아를 더 낳았다고 적고 있다. 대부분 1533년 9월 엘리자베스의 탄생이 유일하며 1534년 여름의 유산과 1536년 1월의 거의 4개월간 잉태한 사내아이를 유산한 것으로 볼 때 있을 법한 증거가 된다. 앤이 마지막 유산에서 회복할 즈음, 헨리는 자신의 혼인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헨리의 새로운 정부인 제인 시무어가 급격히 대두하였다. 앤의 형제에겐 거부된 가터훈장이 제인의 형제에게는 허락되었다. 앤은 자기 오빠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남자와 근친상간을 하고 반역을 조장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남자들도 모두 고소당했다. 1536년 5월 2일에 앤은 포박당한 채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녀는 간통, 근친상간, 반역의 죄로 고발당했다. 비록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는 불확실했지만, 법원에서는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죽음을 선고하였다. 조지 불린과 다른 피고인들은 1536년 5월 17일에 처형되었다. 같은 해 5월 19일 아침, 피의 탑으로 끌려간 앤은 그곳에서 도끼를 한 번 내려치면서 신속하게 처형되었다. 1536년 헨리는 앤을 처형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모시던 시녀 제인 시무어를 총애하여 약혼하였으며, 10일 후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세 번째 결혼과 동시에 헨리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합병시키는 문서에 승인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강력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그 후 1536년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제인이 낳은 헨리의 아이들이 일차적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며,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들은 서출로 선언되었다. 제인은 훗날 1537년에 에드워드 6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출산은 위험했으며 제인은 출산 후유증으로 1537년 10월 24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죽고 만다. 제인의 죽음 후, 헨리와 전 왕실은 장기간 동안 애도하였다. 헨리는 제인만을 자신의 ‘참된’ 아내로 생각하였으며, 그 이유는 그녀만이 그에게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훗날 헨리가 죽은 후 그 시신은 제인의 옆에 묻혔다. 1540년 헨리 8세는 성인의 유골과 유물을 모신 성소의 파괴를 인가하였다. 이번에 헨리 8세는 계승을 더 확실하게 하려고 다시 한번 결혼하기로 하였다. 에식스 백작으로 승진한 토머스 크롬웰은 로마 교황청이 잉글랜드를 향해 공격해올 경우 중요한 동맹자가 되어 줄 개신교도인 클레페 백작의 누이인 앤을 권하였다. 궁정화가 한스 홀베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가 헨리 8세에게 보내졌다. 초상화를 본 헨리는 만족해하며 앤과의 결혼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도착한 앤을 본 헨리는 그림과 다른 그녀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플랑드르산 암말”이라고 부르며 멀리 하였다. 헨리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고 또다시 혼인을 무효로 하고 싶어했다. 싸움을 원치 않았던 헨리와 함께 클레페 공작은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한 항쟁에 종사하고 있었다. 클레페의 앤은 충분히 총명하여 헨리의 탐구를 방해하지 않았음에도 혼인 무효를 당하였다. 결혼 후 성생활에 관한 물음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헨리는 단지 밤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 이마에 입맞춤만 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혼인을 무효로 하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는 사라졌다. 그 후 결혼은 종료되었으며 앤은 ‘왕의 누이’라는 칭호를 받고 메리 불린의 가족들이 이전에 거주하였던 히버 성에 들어가 살았다. 동시에 헨리의 총애를 잃은 크롬웰은 그 뒤 그에게서 사권을 박탈당하고 참수되었다. 그가 창설한 교회 부섭정이란 독특한 자리도 사라졌다. 1540년 7월 28일, 헨리는 토머스 크롬웰까지 참수한 뒤 헨리 8세는 외사촌이자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조카 젊은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의 새 왕비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 후 큰 사건을 겪게 되었다. 이전에 그녀는 프란시스 더햄과 비공식적으로 약혼하여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왕비가 된 후에는 왕의 시종 토머스 컬페퍼를 총애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던 하워드가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에게 캐서린의 헤픈 몸가짐에 대해 밀고하였다. 처음에 헨리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크랜머가 캐서린과 관련된 문제를 조사하도록 허락했다. 심문 때 캐서린이 더햄과 이전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인정할 경우 그다음 헨리와의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더햄이 자신에게 강제로 불륜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더햄은 토머스 컬페퍼와 캐서린 왕비의 관계를 폭로하였다. 앤 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혼인이 공식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처음부터 무효하다는 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1542년 2월 13일에 처형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같은 해, 잉글랜드의 나머지 수도원들도 모두 폐쇄되었으며 수도원의 자산은 모두 왕실에 양도되었다. 대수도원장과 수도원 부원장은 상원에서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오직 대주교와 주교들만이 교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성직자로 구성된 상원의 고위 성직 의원은 귀족 의원과 더불어 잉글랜드 상원을 장악하였다. 헨리는 1543년에 유복한 미망인 캐서린 파와 마지막으로 결혼하였다. 그녀는 헨리와 종교를 주제로 논쟁하였다. 종교적으로 개혁자였던 캐서린 파에 비해 헨리는 보수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자칫 그녀의 파멸이 멀지 않았다고 여겨졌지만 그녀는 헨리에게 순종을 표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구하였다. 그녀는 헨리와 그의 첫 번째 두 명의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화해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녀들은 아직도 서출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지만, 1544년 의회법에 따라 에드워드 다음으로 왕위계승자에 포함되었다. 헨리는 왕권을 강화시키며 강력한 전제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크롬웰, 모어 등과 같은 친구이자 공신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형하면서 민심을 잃어갔다. 또한 빈민구제법으로 빈민과 노숙자들에게도 엄격한 법이 집행되자 시민들은 이를 지지, 찬성하면서도 속으로는 비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534년 수장령을 발표하여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고, 로마 교회에서 이탈하여 가톨릭 계열의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여기에 반발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서 직접 형문을 가하기도 했다. 헨리 8세는 말년에 몸집이 매우 비대해져 움직이려면 특별히 발명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의 몸은 곪은 종기로 뒤덮였으며 통풍까지 앓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1536년 마상 경기 도중에 입은 다리 상처를 그대로 둔 까닭에 더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뿐더러 점차 상처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의 죽음이 앞당겨졌으며, 결국 부왕의 제90회 생일날인 1547년 1월 28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서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수도사들! 수도사들! 수도사들!”이라는 말을 남긴 다음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은 후 10년 이내에 그의 상속인 세 명이 연달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세 명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543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헨리의 유일한 적자인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6세가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는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열여덟 명의 수행자들을 동반한 섭정 정치를 펼치게 된다. 후일 에드워드는 그의 수장령을 계승하여 영국을 공식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삼았다. 헨리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나 영국 국교와 로마를 분리한 그의 행동은 확실히 종교개혁가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치세기간 중 '개혁 의회'라는 말을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했으며, 그의 종교개혁은 영국 정치학이나 프로테스탄트의 역사에서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1554년 메리 여왕은 수장령을 철회하였으나 스튜어트 왕조가 다시 부활하였다. 왕비를 여섯 명이나 바꾸고, 이유 없는 이혼과 두 명의 왕비를 처형했으며 조정 대신과 측근의 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행했다는 비판이 있다. 헨리 8세의 별장이자 그가 오래도록 머무르던 런던 남서부 햄튼궁은 20세기 이후 영국 왕실이 공개하면서 관광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이 곳은 유령의 출몰지로 유명하였다. 관광지로 개방된 뒤에도 햄튼궁 내부와 주변에서 유령을 보았다는 관계자와 관광객들이 나타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헨리 8세의 유령, 제인 시무어의 유령, 캐서린 하워드의 유령, 그 밖에 그의 시종신과 왕족들의 유령을 봤다는 목격담이 계속 나타났다. 햄튼궁은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무어가 아이를 낳다가 숨진 곳이자 다섯 번째 아내인 캐서린 하워드가 간통으로 붙잡혀 그가 참형 선고를 내린 곳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캐서린 하워드의 유령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햄튼궁의 한 구역은 아예 `유령의 회랑'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을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블런트와 메리 불린 이 두 사람을 헨리의 정부(애인)로 확신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헨리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 이 소년은 어린 나이임에도 1525년 6월 리치먼드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1533년에 그는 메리 하워드(앤 불린의 사촌)과 결혼하였으나, 3년 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피츠로이가 죽었을 무렵 헨리는 사생아에게도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매우 노력하였다. 메리 불린은 앤 불린의 누이로 여겨지며, 1519년과 1526년 동안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리 불린의 두 아이, 즉 캐서린 캐리와 헨리 캐리가 사실은 헨리 8세가 진짜 아버지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은 그에 대한 증거가 없다. 일설에는 스코틀랜드의 민요였던 그린슬리브즈(Green Sleeves, 푸른 옷소매의 아가씨)가 악곡으로 정착된 것이 헨리 8세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애간장을 녹이던 푸른 옷소매의 아가씨의 존재도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보통 앤 불린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교통 교통(交通)이란 사람, 화물(화폐 포함)등의 장소적 이동 즉 수송 및 전달과 관련된 직접·간접적인 모든 행위와 조직 체계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인간과 재화에 관한 사고(思考)·정보(情報) 등이 전달행위도 포함시키나, 이 후자는 흔히 통신(通信)이라고 하여 협의(狹義)의 교통, 즉 교통·운송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생산의 기본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이지만, 생산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회적 생산력이 발달, 단순한 생존 이상의 여러 가지 문화적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생산물도 물적(物的)재화의 형태를 넘어서 무형의 용역(service)생산 영역이 발달해왔다. 서비스부문이라고 불리는 용역의 생산은 흔히 혼동되고 있는데, 재화의 매매, 금전대차 등의 유통행위는 아니며, 본질적으로 생산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업·농업·건설업 등의 물질적 재화생산이나 교통·서비스 부문도 모두 생산인 한 ① 인간의 노동, ② 노동의 대상, ③ 노동수단을 생산과정의 계기로 삼게 된다. 교통의 생산물은 보통의 유형재(有形財)와는 달리 그 행위의 성과로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에 교통용역 또는 교통서비스라는 특수한 즉시재(卽時財)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생산이 유형(有形)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원재료'라는 것이 없고, 저장이 불가능하며,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성립됨으로써 장소적 거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교통·운수용역이다. 교통·운수용역의 생산에 사용되는 물적 수단을 교통수단(수송수단) 또는 교통기관(수송기관)이라고 하는바, 교통수단은 도로·운반기기(運搬機器)·동력(動力)의 3대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교통의 발달은 교통수단의 기술 진보에 의하여 실현되는데, 오늘날의 주요 교통수단은 기계적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교통수단의 기술적 성질의 차이에 따라 교통은 철도수송·자동차수송·해운수송 및 항공수송 등으로 구별된다. 교통·운수용역의 질적수준은 신속성·안정성·규칙성·쾌적성 및 대량수송에 의한 경비절감 등의 지표로 측정한다. 따라서 교통용역의 질적 수준을 개선하려면 교통수단의 3대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기술적 특성과 그 효과를 향상시키도록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인간이 군집 생활을 하면서 주거 지역을 점차 넓혀 감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지리적 거리감의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효과적이고 편리한 교통 수단을 찾게 되었다. 예로부터 교통 수단의 발전은 한 사회적 집단이 거주하는 지역의 조건에 따라 좌우되었다. 즉 해안 지방에서는 바다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주요한 생활 터전이기에 해상 교통 수단이 빨리 발전되었으며, 평지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역 환경에 적합한 자연적 혹은 인위적 교통 수단을 개발, 발전시켰다. 교통 수단의 혁신적 변화는 아마 지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생활 전반에 변화를 가져온 기계 문명과 깊은 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비행기의 발명은 전통적 교통 수단의 공간 범위를 확장했다. 이와 같은 기계 문명에 따른 첫 번째 교통 혁신 이후,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두 번째 커다란 교통 혁신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고 있다. 교통이라는 개념은 이제 정보의 교환과 눈에 보이지 않는 동산 재산의 거래(예컨대, 국제적 증권 거래)에까지 넓혀서 이해되고 있다. 현대 교통 수단의 발전이 지역과 국가 사이의 문화, 기술, 상품 및 정보 교환에 결정적인 구실을 함으로써 인류의 전반적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반면,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도 가져왔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동차, 항공기, 초대형 선박이 빚어내는 많은 문제점은 현대 사회가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예컨대 교통에 따른 공해, 소음, 환경 오염, 온실 효과, 에너지 자원 고갈 등은 개별 국가 차원을 벗어나 국제적 차원에서 토론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자연환경 보호). 교통·운수업이란 이와 같은 교통용역을 영리(營利)를 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경영행위를 말하며, 이때 경영행위의 주체를 교통운수기업이라고 한다. 인적·물적 장소이동을 본질로 하는 교통업은 생산과정, 즉 노동과정에서 일반적 재화생산·서비스 생산과는 다른 독자적 성격을 지닌다. 공업·농업 등의 물적 재화생산이나 교통에서는 노동과정에서 노동대상의 물적 변화를 낳지만, 노동과정이 어떤 직접적·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서비스부문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대상의 물적 변화를 낳지 않는다. 따라서 물재(物財) 생산에서의 노동대상은 생산물의 질료적(質料的) 기본이라고 하는 의미의 원재료 형태를 취하는 데 비해 교통은 노동대상, 즉 이동대상이 되는 사람·물(物)은 노동과정의 계기일 뿐 원재료가 되지는 않는다. 그 필연적 결과로서 물재생산에서의 생산물은 생산 과정의 완료 후에 그것이 자립된 존재로서 생기며, 유통과정에 들어가 소비된다. 반면에 교통에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운수업이 파는 것은 장소변경이다. 생기는 유용효과는 운수과정, 즉 운수업의 생산과정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유용효과는 생산과정에서만 소비된다. 그것은 이 생산과정과 별도의 사용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물은 생산과정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생산과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소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교통에서의 생산물은 대상화된 물재(物財)가 아니라 무형의 용역이며, 저장·전환이 되지 않는 즉시재(卽時財)라고 불리는 점에서 교통서비스부문에 속한다. 즉 교통은 물재생산과 서비스부문의 속성을 지닌 그 중간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교통의 진보가 인간의 경제생활에 중요한 이유로는, 우리의 경제생활이 육·해·공에 걸친 생활공간에서 이루어지며, 그 발달은 생활공간의 극복, 즉 교통의 진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거리의 극복은 교통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바, 이 수단에 따라 교통업은 육상교통·수상(水上) 교통·공중교통으로 대별(大別) 할 수 있으며, 산업의 분화에 따라 육·해·공의 교통업에 분화적으로 도로·파이프라인·철도·해운·항공 등의 여러 교통 운수업이 발달한다. 운수업은 용역제공수단의 종류에 따라 ① 철도업, ② 자동차업, ③ 해운업, ④ 항공업, ⑤ 송유관업(pipe line industry) 등으로 구별한다. 교통·운수업은 일반 생산기업과 같이 생산요소의 조달·생산·판매·재무 등 4개 부문에 걸친 경제활동을 행하는 바, 그 경제활동의 특수성은 이들 각 부문이 타산업과 구별되는 특수성으로 나타남과 동시에, 교통수단의 기술진보나 교통시장 상태의 변화도 각각의 부문에 있어서의 경제활동내용에 따라 특수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따라서 특수경영학으로서의 교통·운수경영론의 과제는 이러한 교통기업의 경제활동이나 그 변화과정에서 보이는 특수성을 해명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교통기업이 발생, 영리를 목적으로 교통의 주역을 맡아 교통용역이라는 상품을 생산·판매하는 활동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까지는 역사가 그렇게 긴 것이 못된다. 즉, 그것은 서양에서의 산업혁명 이후에 교통업의 선구자로서 해운기업이 성행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고대에는 교통의 수요자가 자기 스스로 교통수단을 보유, 그 수요를 충족시키는 이른바 교통용역의 자기생산이 일반적인 형태였으나,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면서 교통용역의 수요와 생산 양자가 분리되고 각각 독립된 경제활동 주체에 의하여 교통수급이 이루어짐으로써 교통업이란 독립된 산업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에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① 산업혁명에 의한 교통수요의 증대와, ② 교통기술의 발전에 의한 대형교통수단의 출현이다. 다시 말하면 교통수요의 증대가 교통기업을 성립시킨 경제적 기초가 되는 한편, 증대된 교통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투자단위가 큰 대형교통수단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를 교통수요자 자신이 직접 투자함으로써 교통수단을 보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제의 운수 수요량에 비추어 불필요한 낭비적 손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교통공급자가 수요자로부터 분리되어 투자하고, 나아가 교통공급을 전담하는 기업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교통·운수업은 철도와 같이 교통수단에 대한 대단위투자·대규모경영의 경제가 현저한 부문에 있어서는 그 실용화의 첫 단계에서부터 대기업화하는 성격을 지니고 출발하게 되었고, 반대로 교통수단의 기술적 성질상 투자단위가 적은 자동차 운수업 같은 부문은 교통수요자 자신이 동시에 교통수단을 보유하고, 또 경영하기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투자를 겸행할 수 있을 만큼 교통용역의 자기생산영역이 상대적으로 넓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생산기업이 대규모화하고, 제품이나 원료에 대한 수송수요가 대량으로 되는데 따라 비록 거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교통수단이라도 수요자 자신이 직접 보유함으로써 훨씬 유리할 때도 있다. 대규모 생산기업은 종단적 통합(縱斷的統合)의 과정에 있어서 수송을 그 지배하에 흡수한다. 그 현저한 예가 해상수송에 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래 '탱커(tanker)'나 광석용 전용선(ore carrier) 등의 특수선에 대하여 석유회사나 철강회사 같은 생산회사가 보유하는 이른바 자기선박 보유량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생산기업이 자기선박에 의한 해상수송을 행하는 것을 인더스트리얼 캐리어(industrial carrier)라고 한다. 탱커에 의한 스탠더드 오일회사(Standard Oil Co.). 냉동선(reefer)을 사용하는 유나이티드 프루이트사(United Fruit Co.), 원광선(原鑛船;ore carrier)에 의한 유 에스 스틸사(U.S.Steel Corp.) 같은 것이 그 대표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해상운송품 생산자를 코먼 캐리어(common carrier) 또는 퍼블릭 캐리어(public carrier)라고 하며, 인더스트리얼 캐리어와 본질은 같지만 상업하는 사람이 운송업을 겸하는 경우를 머천트 캐리어(merchant carrier)라고 한다. 교통·운수기업의 경제활동은 교통용역의 생산이라고 하지만, 이 생산물은 저장성이 없고, 수요의 발생장소 및 그 시간이 바로 교통용역의 생산장소 및 시기와 일치해야 한다는 데 특성이 있다. 교통용역은 형태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 생산에 있어서는 유형재의 생산인 경우와는 달리 교통·운수기업의 자본구성에 있어서 유동자본의 비중을 저하시킨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는 기계적 교통수단에 의존하는 근대적 교통·운수기업에 있어서는 교통수단에 투하하는 고정자본의 비중이 높아진다. 특히 이런 경향은 기술적 이유에서 교통·운수기업이 애당초 통로를 보유해야 하는 철도업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 결과 고정자본의 이용은 가능한 생산 목적에 충당하는 이른바 조업도(操業度)·가동률(稼動率)을 높여야 하고, 교통용역 1단위 당 비용을 저하시키는 것이 교통·운수기업의 이윤획득을 위한 제1의 전제가 된다. 또한 교통용역은 즉시재(卽時財)로서 그 성질상 저장성이 없기 때문에 판매량(수요량) 이상으로 생산된 교통용역은 그 즉시 소멸된다. 즉, 경영면에서 손비요인(損費要因)이 된다. 따라서 이 손비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교통·운수기업의 이윤획득을 위한 제2의 조건이 된다. 철도기업의 승차효율(승차인원÷승차인원)이나 적재효율(화물적재량 적재능력), 해운기업의 선박가행률〔화물적재량÷(선박적재톤수×항해거리)〕, 항공기업의 유상비행거리(有償飛行距離) 등이 각각 경영능률을 측정하는 주요지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교통시장의 지역적 범위는 수요가 발생하는 곳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교통생산의 성질상 운반기구의 이동 가능범위에 의하여 한정된다. 교통 통로가 철도와 같이 기술적으로 일정노선의 운송이 불가피할 때에는 시장은 비교적 한정되고 고정되어 있으나, 통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도로·해운·항공 등의 경우에서는 시장의 지역적 범위도 유동적이다. 따라서 그 때문에 교통시장의 형태는 완전경쟁상태와 독점상태로 양분되는 바, 시장의 지역적 범위가 넓고 그 경영을 행하는 기업이 소규모일 때에는 시장은 경쟁적이고, 반면 시장이 비교적 한정되어 있고 기업규모가 클 때에는 시장상태는 독점적인 경우가 많다. 전자의 예로는 부정기 항공이나 택시·트럭운수업 등의 면허제 가입제한이 없는 경우이며, 후자는 철도업·정기선박업·정기항공업 등이 있다. 교통독점은 대개 불완전독점이다. 이는 하나의 교통·운수기업은 한편으로는 지역적 또는 교통수요의 종류에 따라 독점적인 영역을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동종 교통·운수기업과 경쟁을 하여야 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 독점과 경쟁의 영역한계는 각각의 개별기업이 설정하는 운임 및 제공되는 교통용역의 질적 수준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통·운수기업은 독점적 영역에서 얻은 이윤을 원천으로 하여 운임의 절하, 교통수단의 기술적 개량을 비롯한 교통용역의 질을 개선하려는 경영상의 노력으로써 독점영역의 유지 내지 그 확대가 가능하다. 이러한 관계는 상이한 교통·운수기업 상호간에도 존재하는 바, 가령 철도와 자동차·항공, 또는 여객수송에 있어서의 해운과 항공, 석유운반에 있어서의 해운과 파이프 라인(송유관) 등의 관계가 그것으로, 각각의 교통부문은 교통수단의 기술적 특성에 입각하여 독점적인 영역을 갖는 반면, 그 밖의 영역에 있어서는 경쟁관계에 있다. 국가정책으로서의 교통·운수업에 대한 원조나 규제는 근본적으로 교통산업에 대한 정책목적의 달성과 경영의 능률화를 가능한 한 병존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이를 위하여 경영수단의 소유가 그 경영에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국유 교통·운수업의 경영방식으로서 공공기업체의 형태를 채택하는 경향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국유사업의 경영에 독립채산제(獨立採算制)를 실시, 민간기업의 그것과 근접시키고 경영능률 향상에 자극을 주기도 한다. 교통·운수업에 있어 국영과 민영간의 경영능률상의 득실 비교는 많은 논쟁을 수반하여 왔다. 그러나 민간기업도 거대화하고, 한편에서는 국영기업의 경영도 민간 기업방식과 접근하게 되면서 근래에는 크게 문제삼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졌고, 오히려 공공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국제시장에 있어서 경쟁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적인 힘의 배경이 필요함을 인식, 극히 한정된 부문을 제외하고는 국영사업의 영역을 점차 확대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근래에 획기적인 전환을 보인 것은 미국과 함께 육상운송의 전통적 민영국이었던 영국에서의 국유화조치(1947년)라고 할 수 있는 바, 그 후 일부는 민영으로 환원되기도 하였지만, 철도·자동차 등 육상운송의 전체 분야에 걸쳐서 국영체제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그 경영은 공공기업체에 해당하는 영국운수위원회(British Transportation Commission:BTC)에서 맡고 있다. 선로를 이용한 교통 수단: 철도, 궤도, 삭도, 도시 철도, 경전철, 철도차량 도로를 이용한 교통 수단: 자동차, 버스, 오토바이, 트럭 도로를 선로처럼 이용하는 교통 수단: 노면전차, 간선급행버스체계 기타: 자전거, 도보 오늘날의 항공운송산업은 한마디로 시장경쟁의 심화와 불확실성의 증대, 공급과잉과 이로 인한 저수익성, 다양한 전략적 제휴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환율 및 금리의 급격한 변동, 감가상각비의 증가, 항공기 도입가격의 상승, 공항사용료의 인상, 보안의 강화 및 공해문제의 해결을 위한 비용의 증가 등이 오늘날 운송상품의 생산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생산비용의 상승은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에 제약요인이 되고 있다. 아시아 각지의 근대교통은 육·해상 모두가 후진지역 개발을 위한 수단으로, 유럽·아메리카의 선진국에 의하여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유럽의 교통근대화 과정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유럽의 교통기관은 유럽인 전체를 위하여 발달하였지만, 아시아의 근대교통 수단은 아시아인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그곳에 세력을 잡은 선진 열강의 자본에 의해 그들을 위한 것으로 발달하였다. 전후에는 열강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이들 국가가 교통기관을 경제개발에 연결시켜 발전시킴으로써 주체적인 급속도의 발달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도 육상교통의 경우에 한한 것이며, 해상 교통은 아직도 유럽·아메리카 선진국 선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오래된 방법인 눈 속에서 신는 짚신에서부터 최신식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몇 백 종류에 이르는 교통방법이 현재의 아시아에는 공존하고 있다. 아시아의 지형적 격리성은 여러 지역간의 교통 발달을 저해하여 왔다. 아시아의 큰 산맥은 대부분 동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므로, 특히 남북간의 교통이 불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동서 교통로는 일찍부터 열려, 한나라 때부터 비단길이라고 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서간의 동맥로 역할을 하였다. 아시아에서는 또 지역간의 교통이 발달치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내부의 교통도 충분히 발달하지는 못하였다. 그 원인은 아시아의 경제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근대교통기관의 발달이 빨랐다. 우선 대륙을 가로질러 자동차교통이 성행하게 되었다. 세계 철도연장의 15%는 아시아에 있다. 철도는 어느 정도 인구밀도에 비례하여 발달했으며, 자바, 인도의 갠지스평야나 데칸반도도 동유럽 정도로 보급되고 있다. 뒤떨어진 아시아 교통에도 발달의 징조가 보여 일본·인도는 철도교통이 싱당히 발달하였고, 중국에서도 내륙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철도가 건설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교통 체계는 식민지시대에 식민국의 전략적 의도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광산·농업·임산자원의 개발·반출에 적합하도록 정비되었다. 각국의 식민지정부는 개별적으로 자국 식민지에 철도망을 건설하였으나, 이웃 여러 나라와의 연관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 교통은 화물수송을 위주로 하며 현재에도 총수송량의 약 3/4은 수출용 화물이다. 아프리카의 철도 총연장은 약 7만5,000km 로 약 30%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철도수입의 절반 이상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외 지역의 철도는 각 영역마다 궤도가 다르고 정합성(整合性)이나 제휴성이 약했지만, 독립 뒤에는 일부 지역에서 기존 노선의 연장과 새로운 노선이 건설되었다. 특히 내륙국인 잠비아와 탄자니아의 다레스살람을 연결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는 중국의 원조와 기술협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편, 철도와 수운의 이용이 한정된 아프리카에서는 도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산품의 집하·운송과 소비물자 및 승객의 수송에 편리한 소형 트럭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도로포장률이 낮고 도로의 유지·보수 등이 완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 연합의 아프리카 경제 위원회는 몸바사와 라고스를 잇는 사하라 횡단 고속도로와 서아프리카의 라고스에서 다카르를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도시 간의 교통은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으나, 지역간 운반 교통으로는 북부지방에서는 낙타, 중부지방에서는 흑인, 남부에서는 소를 많이 이용한다. 도로망의 발달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치적·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으며, 경제 산업상의 목적은 그 다음이었다. 따라서 독립이 된 지금은 도로가 크게 부족하다. 수운은 콩고 강, 나일 강, 나이저 강, 잠베지 강 등이 하천 교통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안지방의 도시인들은 국제적인 무역항이 많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지름길 역할을 한다. 남아메리카의 교통기관은 종합적인 체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지역간의 연결이 매우 부족하다.철도의 건설은 원래 지역간의 연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산품과 광물 및 임산자원의 수출을 위해 항구에서 내륙으로 뻗어 있다. 철도의 밀집지역은 대항구를 중심으로 동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및 페루 지역이며, 내륙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브라질의 철도 총연장은 3만 3,484km이고 이르헨티나는 4만 4,246km이나 대부분 단선철도이다.도로는 인구가 조밀한 해안지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내륙과의 연결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지방간의 도로는 거의 포장되어 있지 않다. 도로 연장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각각 131만 2,700km, 30만 9,000km이다.철도와 도로가 주로 해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반면, 대륙의 내부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수단은 하천이 담당한다. 특히 아마존과 그 지류는 내륙의 교통 소통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한편, 항공교통은 남아메리카에서 많이 보급되어 있다. 철도와 도로망의 불비로 지역간의 연결은 주로 항공 교통이 담당하고 있는 점이 타대륙과 다른 점이다. 주어진 도로조건에서 15분 동안 최대로 통과할 수 있는 승용차 교통량을 1시간 단위로 환산한 값. 도로의 한 지점을 일정시간에 통과한 차량의 수. 교통혼잡은 반복적혼잡과 비반복적적혼잡(돌발상황에 의한)으로 구분 가능 승가 승가(僧迦)는 산스크리트어의 상가(संघ, saṃgha)의 음역으로서 중(衆)화합중(和合衆)으로 번역된다. 승가는 교단 생활을 하는 화합한 대중을 가리킨다. 최소한 4인 이상의 승려가 모여 화합(和合)해서 수행하는 단체 또는 공동체로, 줄여서 승(僧)이라고도 한다. 승가가 곧 불교 교단(敎團)이다. 승가는 본래 가나(gana)라고도 하며, 집단이라는 뜻으로 고타마 붓다 당시에는 동업조합(同業組合)으로서의 길드(guild)와 경제 단체나 어떤 종류의 종교 단체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카스트처럼 태생에 의해 규정된 집단이 아니라 동일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 성원은 평등하며 동일한 규범에 복종하고 그 가맹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다. 불교의 승가가 성립된 것은 보리수 밑에서 정각(正覺)을 얻은 고타마 붓다가 비나레스에서 처음으로 5명의 비구들에게 설법을 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때이며, 거기에서 고타마 붓다를 합친 6명의 승가가 성립된 셈이다. 그 후 불교 승가의 성원수는 증가되어 갔으나, 승가의 성원으로서는 고타마 붓다와 다른 비구들이 모두 평등하며, 모두 동일한 규율에 복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규율도 승가의 확장에 따라 여러 종류로 차차 증가되어 후일 율장(律藏)으로 통일되었다. 지평좌표계 지평 좌표(地平座標)는 천체 관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좌표 체계로, 지평선이 기준선, 남점(南點) 또는 북점(北點)이 기준점이 되는데, 현재는 북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지평 좌표계에서는 천체의 위치를 고도와 방위각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고도는 지평선으로부터 그 천체까지 수직으로 잰 각, 방위각은 기준점(북점 또는 남점)으로부터 그 천체의 위치로부터 지평선에 내린 수직선과 지평선의 교점까지 시계 방향으로 잰 각으로 나타낸다. 또한 고도 대신 천정거리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는데, 천정거리는 천정과 그 천체 사이의 각도로서, 90도에서 고도를 뺀 값과 동일하다. 지평 좌표는 천체가 어느 방향으로 보이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 편리하지만, 천구의 일주운동에 의해 고도와 방위가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각 외에는 사용할 수 없고, 지구상의 다른 장소에서 관측하게 되면 같은 시각이라도 서로 다르게 측정되는 단점이 있다. 정해진 시각에 특정 천체의 고도와 방위각을 알아 그 방향으로 바르게 향하게 할 수 있는 망원경, 또는 그 반대로 어떤 방향의 천체를 관측하여 그때의 고도와 방위각을 측정할 수 있는 망원경을 경위대식 망원경이라고 한다.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 )는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산업·상업·교통·문화의 중심지다. 인구는 180만을 상회하는데 1980년대 중반의 207만보다는 낮은 수치이다. 현재 중앙유럽 최대의 도시이다. 1873년에 도나우 강 서편의 부더(Buda)와 오부더('古부더'; Óbuda), 동편의 페슈트(Pest)가 합쳐져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 따라서, 부다와 페스트의 두 지역으로 대별된다. 부더와 페스트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경치가 다르다. 역사적 전통이 남아 있는 부다의 사적들과 장려한 의사당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도 유명하다. 부다페스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도시 중심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어 "도나우의 진주", "도나우의 장미"라고 불린다. 구릉지대인 부더는 기복이 심하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 도나우 강과 이어지는 언덕에는 변화의 역사를 겪어온 왕궁이 장엄하게 서있고, 서쪽에는 야노슈 산이 우뚝 서있다. 그 산자락에 한적한 주택가가 펼쳐지며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양안의 지구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다리가 세체니 다리이다. 북위 47도 29분 57초, 동경 19도 2분 38초에 위치한다. 부다페스트의 기록된 역사는 서기 89년경에 건설된 로마 제국의 아쿠인쿰(Aquincum) 성에서 시작된다. 이 성은 훗날의 오부더의 터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던 켈트족의 거주지역에 세워졌으며 106년부터 4세기말까지는 로마 제국의 저(低) 판노니아(Lower Pannonia) 주의 주도였다. 훗날의 페슈트 자리에는 '아쿠인쿰 반대편'의 뜻인 콘트라 아쿠인쿰(Contra Aquincum) (또는 트란스 아쿠인쿰 Trans Aquincum)이 세워졌다. 900년경 이 지역에는 오늘날 헝가리인들의 조상인 마자르(Magyar)인들이 아르파드의 인솔하에 들어왔다. 이들은 판노니아와 도시를 점령하고, 1세기 후 헝가리 왕국을 세웠다. 이때 이미 중요한 성이었던 페슈트는 1241년 몽골제국의 바투가 이끄는 정서군(征西軍)의 침략을 받았다. 벨라 4세의 통치하에, 곧 피해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247년부터 왕궁 소재지였던 부더가 페슈트를 대체하여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1361년)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거의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수도의 자리를 잃게 된 이들 도시의 성장이 지체되었다. 페슈트는 모하치 전투에 의해 헝가리 왕국이 거의 붕괴된 1526년에 오스만제국에 의해 침략당했다. 1541년에는 부더가 점령되고 헝가리중앙부를 지배하는 오스만제국 속령으로서 부더주(州)가 설치되어 부더는 오스만 총독의 주류지가 되었다. 한편, 페슈토지구는 그 시기에 대부분 버려진 상태였다. 1526년 이후, 명복 뿐이긴 하였으나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왕을 겸하게 되었다(헝가리 영토 거의 대부분은 잃었지만). 합스부르크가는 1686녕 왕국령을 탈환하였다. 1686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다시 점령될 때까지 페슈트는 상당히 낙후되었다. 1723년부터 왕국의 행정 기관 소재지였던 페슈트는 18세기와 19세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게 되었다. 1873년 부더, 오부더와 합쳐진 후에도 부다페스트의 성장은 페슈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800년에 이미 부더와 오부더를 합친 인구보다 많은 인구가 페슈트에서 살았으며 그 후 백년동안 20배로 증가하여 60만이 되었다. 같은 기간 부더와 오부더의 인구는 5배 증가에 그쳤다. 부더와 오부더, 페슈트의 행정 통합은 1849년 헝가리의 혁명 정부가 처음 추진했지만 합스부르크 지배가 돌아오면서 철회되었다. 하지만 1867년 합스부르크와 헝가리의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의 자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드디어 현재의 부다페스트로 합쳐졌다(오스트리아-헝가리 참조). 부다페스트의 총 인구는 1840년에서 1900년 사이 7배로 증가해 73만이 되었다. 1896년에는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이 개통됐다. 20세기 부다페스트의 인구 성장은 주로 외곽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헝가리의 산업이 수도에 집중되면서 우이페슈트(Újpest) 지역의 인구는 1890년-1910년간 2배 이상 증가했으며 키슈페슈트(Kispest) 인구는 1900년-1920년 사이에 5배 이상 증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인명 피해와 1920년 헝가리 왕국이 원래 영토의 반 이상을 잃은 것도 부다페스트의 성장을 일시적으로 밖에 막지 못하였다. 헝가리의 영토가 축소된 뒤에도 부다페스트가 독립한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에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백만이었으며 그 외곽 지역에는 40만이 더 살았다.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던 20만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제2차 세계 대전 때인 나치 독일 점령하에 행해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희생되었다. 곧이어 1944년 겨울에는 소련의 포위 공격으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 후 부다페스트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재건되면서 헝가리의 공산 정부(1947년-1989년)가 1960년부터 추진한 실용주의 노선의 선전에 어느 정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난 이민 증가와 자연적 인구 감소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다. 부다페스트는 세계화 및 세계 도시 리서치 네트워크(GaWC, Globalization and World Cities Research Network)에서 '알파 세계 도시'(주요 세계 도시)로 분류됐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종주도시로 헝가리의 국민 소득의 39%가 부다페스트에서 나온다. 부다페스트의 GMP는 2012년 1천억 달러였으며 이는 유럽연합 국가 도시 중 가장 높은 수치 중 하나였다. 부다페스트의 시내 공공교통기관은 BKV(부다페스트교통공사)에 의해 일원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런던, 이스탄불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영업을 개시한 부다페스트 지하철과 트램, 트롤리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4호선 및 6호선의 트램은 트램 노선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이용자 수를 나타내고, 54m의 차량편성은 세계 최장이다. 48시간·72시간의 2종류가 있는 부다페스트카드를 구입한 경우, 무제한 승차할 수 있다. 헝가리국철(MÁV)은 시내의 주요 3개역(부다페스트 동역(Keleti, 페스트 쪽)· 부다페스트 서역(Nyugati, 페스트 쪽)·부다페스트 남역(Déli, 부더 쪽))을 시발점으로 하여 헝가리 국내와 유럽 각지에 열차를 운영하고 있다. HÉV(Budapest commuter rail)에 의해 교외전차도 운행되고 있다. 그 밖에, 부다페스트 어린이 철도, 왕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인 푸니쿨라(funicular) 등도 유명하다. 부다페스트의 항공 교통의 관문,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Budapest Liszt Ferenc Nemzetközi Repülőtér)은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16km인 페슈트뢰린츠에 위치해 있다. 네브리게드 장거리국제선 버스 터미널도 있다. 도나우 강을 이용하여 브라티슬라바를 경유하여 빈으로 가는 국제항로도 MAHART Passnave에 의해 운항되고 있다. 선착장은 시내 중심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1987년, "부다페스트, 도나우강안과 부다성"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2002년에 안드라시 거리 및 그 지하 (부다페스트 지하철)이 등록대상에 추가되어, 2003년에는 등록명칭이 "도나우강안, 부다성 지구, 안드레시 거리를 포함한 부다페스트"로 변경되었다. 리스트의 조국인 헝가리는 다뉴브 강변의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뚜렷한 사계절 속에 아름다운 문화·관광지가 빛나는 곳이다. 부다 성은 부다 지구의 남쪽에 있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성이다. 13세기 후반 벨러 4세의 명으로 방어를 목적으로 처음 건설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져 1905년 바로크와 네오바로크양식으로 완성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1950년대에 복구하였다. 지금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과 국립박물관, 국립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 곳곳에서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고대에서부터 세계 2차대전까지 무기류 및 미술품, 노동운동의 역사에 관한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어부의 성채()는 부다의 구릉 뒤에 위치한 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의 탑이 마치 동화 속의 성을 연상케 한다. 일곱 개의 탑은 수천년 전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성채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역방위를 위하여 18세기에 어부들이 축조하여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날에 어시장이 있던 장소 때문이라는 설이다. 이곳에서는 도나우 강변의 아름다운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시인 김춘수는 시(詩),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서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묘사하고 있다. 네오 고딕 스타일의 헝가리 국회의사당 건물은 헝가리에서 가장 큰 건물(길이 268m)로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이 전시되어 있다. 헝가리 헝가리( , , )는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이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세르비아, 남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와 함께 비셰그라드 그룹의 일원이자,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이다. 헝가리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훈족과 머저르인들의 후예들이다. 헝가리의 국토는 헝가리 평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예부터 다양한 민족이 침입하여 정착하여 왔다. 고대에는 판노니아라 불리고, 판노니아족 등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속주 일리리쿰에 편입되었다가, 1세기 중엽 속주 판노니아로 분리되었다. 헝가리인이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14세기부터 15세기경에는 주변의 여러 왕국과 동군 연합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는 중앙 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헝가리는 15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526년에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패배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1541년에 부다가 함락되어, 그 결과 동남부와 중부의 3분의 2를 오스만 제국(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북서부의 3분의 1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 지배되어(왕령 헝가리), 양 제국이 충돌하여 만나는 최전선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후퇴하자,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 따라 헝가리 및 헝가리 국왕령의 크로아티아와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다. 헝가리 측에서는 지배자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변한 것일 뿐, 꾸준히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반복되었다. 1848년 3월 혁명에서는 코슈트 러요시가 지도한 독립운동은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 민족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타협을 결단케하여, 1867년에 아우스글라이히(화협)가 맺어졌다. 이렇게 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왕국에서 이중군주로서 군림하였으나, 양국은 외교 등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정부를 가지고 연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헝가리는 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1918년)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1918년에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국가인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카로이 미하이(Károlyi Mihály)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20년에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의 왕국령 가운데, 면적의 72%, 인구의 64%를 잃고, 헝가리인의 전인구 중 반수 가량이 헝가리 국외로 남겨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1920년 3월 1일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나,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후원하에 1930년대 말, 뮌헨 협정과 빈 중재,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등으로 일부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였으나, 전쟁의 국면은 서서히 열세가 되어, 1944년에는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나치 독일군의 판처파우스트 작전,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로 저지되어,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렀다. 1945년 5월 8일의 패전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에 점령된 헝가리에서는 공산화가 추진되었다. 1946년 2월 1일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헝가리 왕국은 명실공히 붕괴하였다. 소비에트연방 점령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89년 10월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사회자유주의로 선회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35년부터 기원전 9년 사이에 도나우 강 서안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9년부터 4세기 말엽까지, 로마 제국의 속주 판노니아가 훗날 헝가리의 영토가 되는 지역을 포함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는 훈족이 침입, 서기 433년에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판노니아의 지배를 인정받고, 훈족에 의하여 판노니아를 주요영토(일부는 현재의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포함)로 하는 독립국가가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헝가리는 896년, 현재의 체코 및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대모라바 왕국(Great Moravia)을 멸망시키고 판노니아 평원(헝가리 분지)를 차지한 마자르인들과 이들을 이끌고 들어온 아르파드에 의해 건국되었다.(→그 이전의 역사는 헝가리인 참조). 그 후로는 지금의 스위스나 북이탈리아, 발칸 반도를 원정하면서 약탈을 계속했지만 955년 아우구스부르크 부근에서 독일 황제 오토 군대에 패해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인들은 보다 평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바꿔 게저 대공의 통치가 시작됐다. 마자르 대공 게저의 아들이었던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인 내부의 이교도인 부족장과의 싸움에서 이겨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이고 행정 조직을 정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오토 2세의 후원으로 헝가리 왕국을 건국(1000년)하고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가톨릭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102년에는 크로아티아와의 동군연합(同君聯合, 크로아티아-헝가리 동군연합)을 이루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12세기 후반 농업, 공업(수공업), 상업의 발전으로 세속 영주층의 권력이 커졌다. 토커이, 에게르 등의 와인 산지는 이 무렵 개척지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에게 의해 확립된 것이다. 벨러 4세의 치하(1235년~70년)이던 1241년~1242년,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몽골군이 갑작스럽게 물러간 후 벨러 4세는 방위를 위해 봉건영주에게 석조 성을 쌓는 것을 허용했다. 벨러 4세 자신이 왕궁지 에스테르곰을 대주교에게 양도하고, 부더 남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성벽을 쌓아 왕궁(부다 성)을 짓고 이 곳을 부더라고 명명했다. 그때까지 부더는 오부더(구(舊) 부더)였다. 1301년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하자 아르파드 왕가는 단절되었고, 여러 가문들이 헝가리의 왕위를 소유하려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야노시 왕가의 마차시 1세의 절대주의 통치 하(1458년~90년)에서 헝가리는 영토를 확장하고 르네상스 문화를 도입해 영화를 누리는 헝가리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그 영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도자 죄르지의 농민 전쟁(1514년), 중간 귀족과 대 귀족의 항쟁 등이 이어지며 나라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서방으로의 팽창 정책을 추진하던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지휘하던 헝가리 왕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완패하고, 국왕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헝가리는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하였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진격하여 빈을 공격했고, 1541년에는 부더를 점령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약 150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직접 통치하는 도나우 강 서쪽의 로열 헝가리(합스부르크 헝가리)와 오스만 왕가가 직접 통치하는 부다를 포함한 구 헝가리 왕국의 중앙부인 오스만 헝가리, 오스만 아래서 큰 자치를 누리는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한 터키 보호령의 헝가리 왕국(1570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3분된다. 헝가리의 황금기는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고 16세기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의 나머지 땅마저 지배하게 되어 끝이 났다. 17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국토의 3분할로 헝가리의 모든 도시는 각기 다른 발전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일례로, 도나우 강 서쪽의 쇼프론이나 케세그는 경제, 상업 면에서 오스트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터키 보호령 하에 있었지만 헝가리인의 통치국가로 발전해 갔다. 콜로주바르(현 루마니아 령, 클루즈 또는 나포카)는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3분할 시 베트렌, 라코츠, 그 후 테케리의 "클루츠" 군과 대 터키, 대 합스부르크 전쟁에 나서 조국통일을 이루는 중심지였다. 야노시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투었지만, 합스부르크의 혼인 정책으로 야노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흡수당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헝가리의 왕을 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83년 대튀르크 전쟁의 결과,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최전성기 때의 영토를 모두 회복한다. 1703년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대하여 트란실바니아 대공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주동한 민족 반란이 일어나지만 결국 실패한다. 1848년에 코슈트의 주도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으나,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보오전쟁에서 패배하고 헝가리에 호의적인 시씨 황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선 대타협이 이루어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있던 헝가리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자치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헝가리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엄청난 자치를 보장받으면서, 헝가리의 경제와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종전 직전인 1918년 10월 31일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하고,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 국가인 헝가리 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19년에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루마니아가 침공해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미클로시 호르티를 집권시키는 등, 1919년 8월~11월 중순까지 루마니아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였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고, 전쟁의 책임을 마무리하는 교섭이 진행되어, 연합국과 헝가리간의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4일)에 따라 전쟁 전의 영토(슬로바키아, 보이보디나,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와 인구의 대부분을 중앙 유럽의 신생 독립국들에게 할양할 수 밖에 없는 손실을 입었다. 이는 나중에 헝가리가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왕정을 유지할지 공화정을 선포할 지 엄청난 논쟁에 있었다. 결국 헝가리 귀족들은 왕정을 우선 유지하고 서서히 공화정으로 나아가자고 합의했으며, 호르티 미클로시를 섭정왕으로 선출(1920년 3월 1일)하고, 그가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섭정왕 미클로시 호르티는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히틀러는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하여 호르티를 나치 합작자로 대체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나치 독일은 호르티는 물론 아들까지도 감금했고, 소련군이 풀어주게 된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 주도의 추축국에 가담하면서, 뮌헨 협정(1938년), 빈 중재(1938년 및 1940년)를 통해 루마니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북서부를 할양받았고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1939년) 등으로 슬로바키아와의 국경 지역 일부를 합병하였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해 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부 지역과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합병,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을 받은 살러시 페렌츠가 이끄는 화살십자당이 헝가리를 장악{나치 독일군과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판처파우스트 작전)}함으로써, 이탈은 저지되었다. 결국 헝가리는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르고 부다페스트 포위전으로 연합국으로 돌아서게 된다. 종전 후, 1946년 2월 1일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헝가리왕국은 명실공히 붕괴되었다. 헝가리는 파리 조약(1947년)에 따라, 전쟁으로 얻은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소련에 의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점령 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헝가리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56년 10월 23일 발발한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10월 24일 수상으로 임명된 임레 너지는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소련군이 개입, 독자노선 추구를 이끈 임레 너지를 사형시키고, 반공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이후 헝가리는 중앙유럽의 민주화를 주도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공산당(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독재의 한계가 드러났다. 1980년대 후반의 헝가리 민주화운동 결과, 1989년 5월, 헝가리는 서방측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의 "철의 장막"을 구성하던 철조망을 철거하고 국경을 개방하였다. 1989년 8월에는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하야하고, 1989년 10월 23일에는 신헌법(헝가리공화국헌법)의 시행으로,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호를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헝가리 인민 공화국은 명실 공히 붕괴되었다. 헝가리는 1980년대 말 바르샤바 조약 폐지도 주도하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헝가리는 서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며 1996년에는 OECD, 199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2004년 5월 1일에는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헝가리 제3공화국의 국기와 국장에는, 공산당 시대의 붉은 별의 문장이 제거되었다. 또한 나치 독일, 화살십자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한 압제의 반발로서 하켄크로이츠, 화살십자, 낫과 망치, 붉은 별의 사용이 1993년 개정 형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헝가리는 지금까지도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2007년에 반정부 폭동이 일어난 바 있다. 2009년 3월 15일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선 혁명기념일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1년 4월 18일 헝가리 의회에서 새 헌법인 《헝가리 기본법》이 통과되었다. 새 헌법은 2012년 1월 1일을 기해 효력이 발생했으며 정식 국호도 "헝가리 공화국"에서 "헝가리"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이러한 헌법 개정은 국체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헝가리 공화국의 체제와 민주주의를 계승한다. 또한 헝가리는 헝가리 공화국과 동일한 명칭임을 의미한다. 2002년 사회당 출신의 주르차니 페렌츠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8년 뒤인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가 압승함에 따라 피데스의 당수 오르반 빅토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93,030km의 면적을 지니고 있는 헝가리는 동남유럽에 있다. 남북 길이는 250km, 동서 길이는 524km이다. 2,258km의 국경을 이루며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남서부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에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다. 국토의 중앙부는 해발 고도 약 100m 전후의 헝가리 분지가 차지하고, 도나우 강 중앙 유역에 위치하는 내륙국이다. 서부에는 중앙유럽 최대의 벌러톤 호(湖)가 있어, 그 남쪽에는 옛 사구열(砂丘列)과 넓은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사구간에는 푸스타라고 불리는 스텝이 펼쳐져 있고, 관개로 비옥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티서 강(Tisza 江) 동쪽에는 비사지(飛砂地)나 저습지가 많다. 헝가리의 현재 국경은 처음 1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것으로 1920년 트리아농 조약 이후 헝가리 제국은 원래 영토의 71%를 잃었고 인구의 58.5%도 사라졌다. 나치군과 연합하여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맞닿고 있는 일부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영토를 모두 잃었다. 바다는 없으며, 내륙국이다. 헝가리 국토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기슭에 넓게 펼쳐진 카르파티아 분지의 가운데 평야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헝가리 평원 또는 헝가리 분지라고도 불리는 국토의 중심은 중앙을 흐르는 도나우 강에 의해 거의 양분되어 있다. 동쪽에는 큰 지류인 티사강도 흐르고 있다. 국토의 서부에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큰 호수인 발라톤호가 있다. 또한 각지에 온천이 용출되어 공중 욕탕이 오래 전부터 건설, 이용되어 왔다. 유럽 유수의 온천 대국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온천을 목적으로 몰려든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에 속하여 비교적 온화하고 사계절도 있다. 중부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러시아 남부의 스텝기후와의 접점(接點)에 있다. 위도가 비교적 높고, 겨울은 춥지만 지중해로부터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습윤하고 흐린 경향이 있다. 최저 기온인 1월은 평균 영하 1℃ 이며 심한 경우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경우가 있으며, 최고인 7월은 22℃이다. 연간 평균 기온은 10℃ 전후이다. 연강수량은 500∼700mm로 서부에 약간 많고, 활엽수가 무성한데, 동부에는 초지가 많다. 헝가리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병행한다. 대통령은 임기 5년으로 의회에 의해 선출되며, 수상을 임명하는 등 의례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국가 원수이다. 자신이 각료를 선택해서 행정을 행한다. 총리는 4년에 한번씩 총선을 통해 뽑으며 헝가리의 실질적 국정을 운영한다. 가장 최근의 선거는 2018년 치뤄졌으며, 현재 총리는 오르반 빅토르이다. 폴란드와 달리 점진적 개혁정책을 수행, 중앙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민주화과정을 밟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의회가 5년마다 선출한다.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 선거의 날짜를 잡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다. 입법부인 국민의회(Országgyűlés)는 일원제이며, 민선이고 임기 4년이다. 정원은 386명이다. 국민의회는 국가의 최고권위기관이고, 모든 법은 국민의회를 거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순수한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와는 별도로 헌법재판소가 존재하여, 법률의 합헌성을 심사하고 있다. 2002년 4월 총선에서는 사회당-자유민주연합 중심의 중도좌파정당이 청년민주동맹-민주포럼 중심의 중도우파정당에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가 압승을 거둔 뒤 쭉 오르반 빅토르가 집권해왔다. 2018년 총선에서 피데스-기독교민주인민당 연합이 199석 중 138석을, 요비크가 26석을 차지해 EU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헝가리는 43개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19개는 주(州)로 번역될 수 있는 메제(megye)고 23개는 메제와 동격의 도시주(都市州, megyei város)다. 또한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부더페슈트)는 시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수도다. 부다페스트는 1873년에 부다(Buda, 부더)와 페스트(Pest, 페슈트)가 합병되면서 정해진 이름이다. 농업 지역에 위치하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과 19세기 독립 혁명에 연유하는 교회가 있는 데브레첸(Debrecen)에도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북부의 미슈콜츠(Miskolc)는 제철·금속공업으로 알려져 있고, 남부의 세게드(Seged)과 터키적 영향이 강한 소도시 페치(Pécs)도 공업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다. 메제 및 도시주(都市州, megyei város)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국군은, 육군 및 공군의 2군 체제이다. 1999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고, 서유럽 여러나라와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갖추었다. 군의 역사는 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서 동맹국 군의 일원이었다. 전후의 독립 헝가리는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병력을 제한 받게 된다. 그에 대한 반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다시 추축국으로 참전하여, 동부 전선에도 병력을 내보냈다. 1945년에는 소련군이 점령하여, 냉전시에는 공산권국가로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헝가리 경제는 농업과 소규모 공업을 위주로 하였으나, 전후 산업국으로 탈바꿈하였다. 1950년대 초 공산정부는 자급자족의 경제를 위해 산업화에 주력하였고, 주 관할의 공장과 농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중공업에 치중한 결과 경공업이 경시되어 소비재 부족이 심화되고,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경제의 불균형 현상이 심각해졌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1968년, 공산주의 시장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대폭적인 경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서방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시장에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는 새로운 경제 개혁을 전개하였고,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공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중앙유럽 공산국가 중에서는 소비재가 풍부한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외채가 급격히 증가하여, 1993년에는 150억달러에 이르렀다. 경제 성장률도 1970년대에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1980년대 들어 침체를 면치 못했다. 1982년 소규모 사기업 승인, 1986년 파산법 시행 등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며 1989년 사기업육성과 외국인에 대한 투자규제완화 등의 신회사법을 제정하였다. 이로 인해 외국 직접투자호조 및 관광수지 흑자를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에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 필요성도 커졌으며, 공식적으로 체제를 전환하였다. 헝가리는 의 체제전환 이래, 외국자본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경제 개방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97년 이후 연간 4% 이상의 고성장을 계속함과 함께, 2004년에는 경제의 민간부문이 국내총생산의 80%를 차지하고, "구 동구권의 우등생"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또한 2004년의 유럽연합 가입은 당시의 헝가리 경제에 순풍이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 도입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는 혼란과 인플레이션, 무역 구조의 변화 등으로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어었으며, 1996년에는 OECD에 가입하였다. 1996년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중소기업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2000년대 들어 헝가리 경제는 5%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2004년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유럽 연합 가입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어, 이후 연 1%대 성장에 머물고 있으며, 인플레이션도 심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의 증가로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이것은 일상화된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한 거액의 재정적자도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다소 침체기에 들었으나, 헝가리는 중앙유럽의 체제 전환국 중에서는 안정적인 성장을 나타냈으며, 국민소득도 높은 편이다. 현 정권이 목표로 하는 유로화 도입에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농업에서는 단고추가 명산품이고, 헝가리요리에도 흔히 사용된다. 거위의 사육도 번성하여, 도나우강 서안(두난툴(Dunántúl) 지방)이 주산지이다. 헝가리산 푸아그라도 많이 수출되고 있다. 헝가리의 광업은, 무연탄으로 이용가능한 아탄과 보크사이트가 중요 핵심이 되고 있다. 자원으로는 세계 시장 점유율 1.5%를 차지하는 아탄(1391만톤, 2002년), 석유(107만톤), 천연가스(11.5경줄)를 채굴한다. 유력한 탄전은 남동부 베치 근교,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50km에 위치한 타타바니아 근교의 2 곳에 펼쳐져 있다. 유전은 중앙남부의 세게드 근교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국경에 접하는 위치에 있다. 금속광물자원으로는 보크사이트(100만톤)가 유력하다. 벌러톤 호 북안부터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지를 따라서 채굴되고 있다. 그러나, 채굴량은 감소 경향에 있다. (1991년에는 203.7만 톤이 채굴되었다.) 그 밖에도, 소규모이긴 하나 망간과 우라늄도 채굴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헝가리는 비옥한 토양과 계획적인 관개시설비에 의한 농업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품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이 번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산주의의 계획경제에 의해 중공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차량 생산, 일반 기계가 우선되어 화학공업, 약품공업이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유기광물자원과 보크사이트를 제외하면, 공업원 재료 쪽은 혜택을 받지 못하여, 수입원재료를 가공하여, 수출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업을 중심으로 한 무역이 국민소득의 40%를 점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공산주의체제에서 민주주의체제로 전환 후, 1990년대 초에는 화학공업의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2003년 시점에는 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공업의 비율은 점차 높아져, 수출액의 86.8%를 공업제품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무역의존도는 수출 54.5%, 수입 59.2%까지 높아졌다. 품목별로는 기계공업이 다시 번성하게 되었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기기계 36.1%, 기계류 16.2%, 자동차 8.2%이다. 세계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공업제품은 와인 (1.7%, 49만톤), 질산(1.5%, 31만톤)이다. 전통적인 산업으로는 주류 제조업이 강하다. 특히 와인이 유명한데, 부르겐란트(), 쇼프론(Sopron), 비츠라니 등 유명한 산지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토커이(Tokaj)의 토커이 와인은 "와인의 왕"이라 불린다. 부다페스트는 서유럽에서 발칸방면으로 달리는 육상 국제선의 통과지로 도로 총연장은 8만 7,000km, 포장률이 97%이며 철도는 총연장 8,190km이다. 헝가리의 국제공항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옛 명칭: 페리헤지 국제공항)뿐이므로 항공편으로 헝가리에 입국할 때는 모두 이 공항에 도착한다.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제1터미널은 1998년에 화물운송기나 전세기편 전용터미널로 지정되어, 일반 여객은 이용하지 않는다. 여객용으로 사용하는 제2터미널은 부다페스트의 중심부에서 약 24 km 남동쪽에 위치한다. 제2터미널은 2A, 2B로 나뉘어 있으며, 2A는 말레브 헝가리 항공의 전용터미널, 2B는 그 이외의 모든 항공기가 이착륙한다. 터미널 2A와 2B는 인접한데다 내부도 연결되어 있어 만약 착오를 하더라도 간단히 이동할 수 있다. 헝가리의 통화는 포린트(Forint, Ft)이다. 예전에는 보조통화로 피렐(1Ft=100피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자 등 계산상으로만 사용하는 정도이다. 은행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8시부터 15시까지, 금요일은 8시부터 13시까지 연다. 우체국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8시부터 18시까지 연다. 주요 기차역에 있는 우체국은 24시간 영업한다. 이 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민족은 우랄족의 후예인 헝가리인이 거의 대부분이며, 언어도 슬라브어군나 게르만어군, 로망스어군도 아닌 우랄어족의 언어인, 헝가리어를 거의 대부분 사용한다. 또한, 집시라고 불리는 로마인이 5.3%를 차지한다. 기타 민족(독일인, 루마니아인, 터키인, 슬라브계의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로아티아인, 유대인)도 거주한다. 부다페스트에는 화교도 거주한다. 헝가리와 그 주변은, 매우 독특한 문화를 가졌던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19세기 이래 잘 알려져 있다. 2000년 현재 인구의 84.4%가 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헝가리공화국의 국민의 가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마자르인은 핀우그리아어파의 헝가리어를 모어로 하고, 우랄 산맥 방면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다. 마자르인의 인명은, 정식으로 표기하는 경우 성이 이름의 앞에 놓인다. 헝가리인은 구 헝가리 왕국령에 넒게 퍼져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크로아티아 북부, 슬로베니아 남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등에도 꽤 많은 헝가리인 인구가 남아있다. 또한 헝가리인 중에는 몰다비아의 찬고(Csángó),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Székely)인과, 헝가리공화국 영내의 야스(Jász)인, 마쵸, 쿤(Kun), 팔로츠(Palóc) 등의 개성적인 문화를 가진 서브 그룹이 알려져 있다. 야스인은 알라니족의 후예, 쿤인은 쿠만인의 후예라고 하는 것이 알려져 있고 이러한 다양한 출신을 가지고 헝가리 왕국에 이주하여 헝가리에 부분적으로 동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밖의 민족으로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구를 가지는 로마인(집시)과 독일인이 거주한다. 헝가리의 집시는 개성적인 민족문화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추계로는 인구 약 1천만명 중에서 약 60만명이 집시이다. 또한 독일인은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헝가리 왕국으로 이전해 온 사람들의 자손으로, 트란실바니아의 사스인(작센인)(→루마니아 독일인)과 슬로바키아의 칩스() 독일인과 같이 헝가리 왕국 가운데 독자적인 민족공동체를 이룩한 사람들도 있다. 그 밖에도, 루티니아인(우크라이나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등도 있으나, 모두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대인 인구도 상당히 많은 수에 이르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박해 등으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간 사람이 많다. 헝가리인이 황색 인종이라고 하는 설은 아시아 및 아시아인의 정의가 애매한 것과 또한 과거의 인종분류의 정의가 현재와는 다소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근년의 DNA 분석에 의하면 헝가리인은 코카소이드(Caucasoid, 백인)으로 분류되나, 아주 작게도 몽골로이드(황색 인종) 특유의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 효소 D형이 검출되고 있는 것은, 몽골로이드와의 혼혈에 의해 유전자의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적으로 보면, 마자르족은 아시아의 문화와 유럽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이 나라는 다른 중앙유럽 나라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2006년 Eurostat 추산에 따르면, 이 나라의 組(조)출산율은 천 명당 9.6명, 사망률은 천 명당 13.5명, 합계출산율은 2005년 현재 천 명당 1.28명이다. 현재 2014년 10월 22일 기준으로 헝가리 인구는 9,933,173명이다. 공용어는 헝가리어다. 소수민족의 대부분도 헝가리어를 말하여, 헝가리어 인구는 98%에 이른다. 지식인들은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공용어인 헝가리어를 사용한다. 독일어, 영어는 소수가 사용하며, 제2언어등으로 사용한다. 또 헝가리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다. 이것은 언어적으로는 영어로의, 경제적으로는 독일로의 급속한 편입을 막기 위한 측면도 있다. 영어는 상용어나 제2언어 등으로 구사자가 소수 사용한다. 20세기 헝가리에는 헝가리의 전통적 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한 거물들이 있었다. 죄르지 리게티, 코다이 졸탄, 버르토크 벨러 등이다. 이 사람들의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인 개발사상은 서로 연관을 갖는다. 2011년 기준으로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헝가리에서는 공휴일이 화요일이나 목요일이면 그 사이의 월요일이나 금요일도 휴일로 만들고 직전 주 토요일을 평일로 하는 일종의 대체평일제가 시행되고 있다. 헝가리는 세계적 음악가인 페렌츠 리스트(Ferenc Liszt)를 초대 교장으로 한 세계적 명성의 리스트 아카데미와 국립 오페라극장과 국립 필하모니아합창단 등 각종 대형공연장을 29개소나 지닌 음악적으로 뛰어난 국가다. 벨라 바르톡(Bela Bartok)과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 등 뛰어난 작곡가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헝가리 국민음악의 건설자다. 뛰어난 악기 연주자들도 많이 배출하였는데 바이올리니스트인 제노 후바이(Jeno Hubay), 피아니스트 E.도흐나니, L.크라우시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헝가리의 음악은 대개 집시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느림과 빠름, 슬픔과 기쁨, 열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삶의 애환을 모두 지녔다고 평가되고 있다. 차르다시(Csárdás)는 헝가리의 전통적, 민속적, 국민적인 음악과 무용을 나타내는 말이다. 19세기 초엽 쯤 생겨난 차르다시는 본래 집시들의 음악과 무용이였으며 경기병이 집시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반주로 춤을 춘 베르분코시(verbunkos)라는 무용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4분의 4박자 또는 4분의 2박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도입부인 라시(lassú)는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빠른 주부인 프리시(friss)는 속도가 빠르고 야성적이며 강렬한 동작들로 이루어진다. 특히 주부에서는 강렬한 당긴음과 리듬이 특징이다.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2번이 그 전형적인 예며, 들리브의 무용모음곡 《코펠리아》에도 차르다시가 도입되어 있다. 헝가리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음악상의 국민주의운동이 대두되어 이 운동과 더불어 차르다시는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비트리오 몬티(Vittrorio Monti)의 차르다시는 수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 사이에서 연주되고 있다. 2015년 4월 박근혜 대통령이 헝가리 야노쉬 아데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헝가리의 체제성공을 본받아야 한다." 라고 발언하자, 북한은 "동족을 모함하고 시기질투하는 궤변"이라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은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국가이다. 이중 제국(), 또는 제국이자 왕국()로도 불렸다. 공식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 )이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와 헝가리의 헝가리인 귀족들 사이의 대타협(, )으로 성립되었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의 사도왕(1867년 이전에는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지금은 체코) 왕을 겸임하였다. 이 타협으로 헝가리는 큰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헝가리인은 오스트리아인과 함께 지배 민족이 되었고, 헝가리어가 독일어와 함께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의 서부, 북부 지역과 헝가리의 공동 사안(국방, 외교, 경제 등)에는 각각 비례 대표를 통해 참여하였다.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된 이후 발칸 반도에서의 이권을 지키는데 큰 관심을 가졌으나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어 독일, 오스만 제국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탈리아(1915년 연합국으로 참전)에 의해 패배하였고, 1918년 11월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제국의 영토는 세르비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게 할양당하고 남은 영토마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각각 독립함으로써 제국은 완전 해체된다.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국이 선포된다(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이후 한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긴 침체기를 맞았다. 수도로는 빈과 부다페스트 두 곳이 있었다. 당시 주민은 게르만족의 혈통인 오스트리아인, 슬라브족의 혈통인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우크라이나인, 우랄족의 혈통인 헝가리인이 거주하였다. 다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통용되었던 언어들로 제국의 명칭을 표기한 목록이다. 이 나라는 예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계속 지탱하기 위한 헝가리의 귀족들과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대타협으로 세워졌다. 19세기는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싹이 텄던 시기로 당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 문제는 11개의 주 민족들 간의 분쟁이 주를 이루었다. 민족들 간의 분쟁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 50년 역사 동안 급속도의 경제 성장과 근대화 및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해체되었다. 일부 영토는 이탈리아, 루마니아를 비롯한 이웃을 접한 국가들에게 할양되는 등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에서 가장 많은 영토 손실을 입었다. 오스트리아령 부분을 흔히 시스라이타니아(, ‘라이타 강 안쪽(동쪽)’이라는 뜻)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영토 대부분이 라이타 강(, ) 안쪽(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동북부의 갈리치아도 오스트리아령).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본토 외에도 여러 딸린 영토로 이루어졌는데 1915년 이전에는 이를 아울러서 부르는 공식 명칭이 없었고 그때부터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이란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제국 회의()는 시스라이타니아의 의회 역할을 하였다. 시스라이타니아와 마찬가지로 트란스라이타니아(, ‘라이타 강 바깥쪽(서쪽)’이란 뜻), 즉 ‘헝가리령’ 부분은 헝가리 외에도 딸린 영토들이 많았고 공식적으로는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여기서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의 첫 기독교도 왕으로 성인으로 추대받은 성 이슈트반 대왕()을 가리킨다. 가나다 순이다. 시스라이타니아의 ‘왕국들과 영토들’: 트란스라이타니아(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영토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1908년 합병)은 제국의 독자적인 부분을 형성하였으며 양쪽이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1907년부터 보통 선거제가 시행되었다. 이렇게 다민족국가였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웠으며 여러 정치적 위인이 등장했었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병력의 90%가 손실을 입었으며(이 중 대부분이 포로), 이는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120만 명이 전사하였고, 36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당시 주력소총 만리허 m.95소총,권총류는 Frommer stop권총 과 Gasser1870리볼버,그리고 슈타이어M1912권총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비스마르크가 소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독일제국을 수립함에 따라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독일 제국에게 내줬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국경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기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것들이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 평가되어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당시 유럽의 주요국가(유럽 대륙에서 면적은 2위, 인구는 3위)이자 열강으로서 1867년 ~1918년 존속하면서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사상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문트 후설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신칸트학파에 대항하여 독일-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프란츠 브렌타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카를 멩거,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활동했다.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근대 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활동하였다. '입맞춤' 등이 대표작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나라 출신으로서, 빈 아르누보 운동을 이끌었다. 프란츠 카프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 출신이다.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ABO식 혈액형과 Rh인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193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체코인(보헤미아, 모라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에서 다수 민족)·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갈리치아), 슬로베니아인(카르니올라, 카린티아, 스티리아 남부),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이스트라의 슬로베니아인은 각각 시스라이타니아의 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트란스라이타니아에서의 헝가리인(머저르인) 지배는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동부의 루마니아인,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영토의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영토)·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도전을 받았다. 루마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또 새로 세워진 독립국 루마니아(1859년-1878년)와 세르비아의 동족들과의 합병을 원하였다.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사용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이며,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해군기는 패턴이 현재의 국기와 같으나 가운데에 문장이 들어있는 기를 사용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기 전까지의 조선은 서양과의 수교를 강경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1876년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서양 열강들과 수교하게 되었다. 1892년 6월 23일에는 오스트리아와도 조오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을 맺으면서 양국간의 정식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민영익이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900년 6월 이진범이 참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본 제국에 빼앗기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독일(당시 프로이센)과는 같은 민족이지만 경쟁 관계였다. 그래서 프로이센과 전쟁을 했지만 지고 말았고, 1914년에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과 삼국 동맹 (1882년)을 맺으며 관계가 회복됐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양호하여 1848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원군을 요청하여 헝가리군을 진압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1854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비우호적이었으며, 항구를 찾아 발칸 반도로 남하하려는 오스트리아와 범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든 러시아는 점차 대립하게 된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동맹국에 유린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합국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얻어냈다.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 )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살들의 경우, 학살 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 사항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 (Yehuda Bauer)는 고 주장한다.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는 것을 꼽았다.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 1895년, 옛 독일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치 지도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 나치정책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이다.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과 도덕적인 적으로는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상습범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의 목적은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성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월터 벤자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옹 페츠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월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월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램퍼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 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더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맥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 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 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쉘 그륀스판(Herschel Grünspan)은 파리에서 독일 나치의 외교관 에른스트 봄 레이스를 암살했다.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물리적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였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회당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부르크(Oranieburg),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 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 전쟁 이전 나치는 유럽으로부터 독일 유대인을 대량 강제추방하는 것을 고심하였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사흐트 계획이 필요 없어지질 때까지 수 천명의 유대인 강제추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국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이치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스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 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 달러를 수송했다. 제 3제국의 시작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감금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 50%에 육박하는 사망률을 보이긴 했지만, 그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곳으로 설계 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에 오직 많은 학살만을 위한 6개의 대규모 집단 처형장이 세워졌다.) 1939년 이후, 많은 수용소가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는 장소로 변했다. 15,000개의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독일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동부 유럽에 위치했다. 독일 내에도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공산당원 혹은 로마와 신티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수용소가 많이 세워졌다. 수감자들을 화물차에 태워 이송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도착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려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역을 통한 학살은 구조적인 학살정책이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일을 하거나, 체력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독가스에 의해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노역은 전쟁용품 생산에 사용되었다. 허락 하에 몇몇의 수용소는 수감자의 몸에 수감번호를 새겼다. 이것은 12시간에서 14시간을 교대로 일을 하게 하는데 편리했다. 노동 전후로 점호가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폴란드 침공이후, 나치는 편입된 영토에 유대인이 제한된 게토와 일반정부를 설립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이것들은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밝혀진 것처럼, 그러한 추방은 일어나지 않았고 게토의 주민들은 대신에 학살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인들은 각각의 게토에 유대인들의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Judenrat)에 의해 운영돼야 된다고 지시했고 그러한 위원회의 설립을 첫 번째 주문은 하이드리히(Heydrich)에서 특수행동부대(Einsatzgruppen)의 상부에 1939년 9월 29일 편지에 포함되었다. 게토는 다른 시간들과 다른 이유들로 형성되었고 외부세계로부터 베제되었다. 그 위원회들은 게토를 매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살 곳, 의료, 난방, 물, 음식의 배급문제들을 포함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위원회에 몰수시작, 강제 노동구성, 마지막으로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운영회의 기본적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치정권 또는 그 대행자이 주로 협력하였다. 점점 더 끔찍한 협정 뇌물수수와 청원을 받아들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한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위원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숨을 제공했다.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되어야 할 추방자들의 이름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주된 패턴은 이 마지막 과제를 준수하는 것이었지만, 몇몇 위원회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떤 한 사람도 넘겨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Lviv) 그리고 요제프 파르나스(Joseph Parnas)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 1942년 10월 14일에 부아로짜(Buaroza)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을 협력하는 대신에 자살했다. 1942년7월 23일에 바르샤바에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ow)는 마지막으로 게토가 청산되어 그가 다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자살했다. 차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와 같이 독재자에게 헌신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는 살 수 있는 유대인들은 살리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는 독일에서도 유지되었다. 한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권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지시를 복종하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인 전투기관이 위원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협력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인들은 통제를 잃게 됐다. 바르샤바 게토는 380,000명의 인원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0,000명의 인원으로 2번째로 컸다. 요컨대 느리고 수동적인 살인자인 미하엘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에 따르면 그곳은 거대하게 북적이는 감옥이었다.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그 곳은 폴란드 수도지역의 2.4% 만을 차지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43,000명 이상의 거주자들은 1941년에 그곳에서 죽었고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10분의 1이상이 죽었으며 1942년에는 그 거주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다.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의 시작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3일 후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300,000명에 사람들이 바르샤바로부터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수용소까지 화물기차로 수송되었다. 많은 다른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첫 번째 빈민가 폭동은 남동 폴란드 라크바(Łachwa)의 작은 마을에서 1942년 9월 발생했다. 1943년 무장저항 시도는 바르샤바 게토봉기와 비알리스토크(Białystok) 빈민가 반란과 같이 큰 게토들에 의해 발생했지만 모든 경우 그들은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지역의 인구에 의한 수많은 치명적인 학살은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는 자발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의 학살을 포함하는데 그 학살은 14,000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다. 또한 1941년 7월의 실크 프로그램(Jedwabne pogrom)을 포함하는데 이는 나치 질서경찰(Nazi Ordnungspolizei)가 있는 데서 300명 유대인이 불 난 헛간에 잠기게 되는 사건이다. 독일인에 의해 같은 곳에서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다. 이것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에 의해 조사된 두 개의 무덤에 있는 피해자의 숫자로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 의해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 최종 발견되었다. 소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1939년 12월의 시작과 함께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다중 살인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였다. 첫째로, 가스 실린더를 장착한 실험용 가스차(gas van)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는 T-4 작전(나치의 인종정책 일환으로 안락사를 이용한 장애인 학살 계획)의 일환으로써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선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가스차가 실린더 대신 엔진의 배기가스를 이용하면서 1941년 11월부터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들은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Chełmno extermination camp)에 소개되었고 그것 중 15대는 점령된 소련에서 대량살상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는 국가보안본부(SS-Reichssicherheitshauptamt)의 감독 아래에서 개발되었고 운영되었다. 또한 대략 50만명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가스차는 신중하게 감독받았고 한달 동안의 관찰 후의 한 기록에서는 “기계에 어떠한 결함도 나타나지 않고 세 대의 가스차를 이용하여 9만7천번이 진행되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새로운 다중 살인 기법의 필요성은 군사정부의 통치자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한스 프랑크는 다수의 사람들을 간단히 쏘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방법으로 설계된 단계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나치친위대(SS)가 독성 가스를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살인이 동반된 실험을 하게 만든 문제였다.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는 가스방을 발명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반제 회의는 반제의 베를린 교외에서 1942년 1월 20일에 라인 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유대인 문제 와 관련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국가 사무총장, 고위 관리, 파티의 리더, SS 장교와 정부 부처의 다른 지도자의 숫자를 포함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정책 회의의 초기 목적은 유럽안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방법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유럽내 유대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양한 점령 지역에서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을 위한 지식과 책임을 모두 공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에 의해 그려진 분의 사본은 살아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그것들은 "완곡 어법 언어"로서 쓰여졌다. 따라서 회의에서 사용 된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에 유대인 철수 정책에 의해 추방을 나타내는 회의는 대체되었다고 연설했다. 이는 독일에 의해서 통제 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나머지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에 사는 11만 유대인들을 포함하는 임시적인 해결방법에서 궁극적인 해결방법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최종 해결책'의 문구에 의해서 이해되도록 분명히 했다.” 최종해결책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이다. 관계자는이 200만은 여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230만 유대인은 일반정부, 850,000은 헝가리에, 다른 점령 국가에서 110만, USSR에서 안에 오백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 총 약 650만. 이들은 모두 거의 모두가 한번에 가스로 죽을 폴란드에 있는 학살 수용소 (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 될 것이다. 괴링의 대표, 박사 에리히 노이만은 산업 노동자들의 몇 가지 클래스에 대한 제한된 면제를 받았다. 그의 1983 책, 대중의 의견과 제 3제국의 정치적 반대에서, 이안 커쇼는 나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Alltagsgeschichte (일상 생활의 역사)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의 태도를 묘사하면서, 커쇼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이 쇼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에” 관한 전챙에 대해서는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이 증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관심에 의해 길이 닦였다"고 비유했다. 대부분의 바바리아, 그리고 함축적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쇼아에 무관심 있다는 커쇼의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Kulka, 나치 독일의 여론에 대한 전문가 및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 정도를 경시했다고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자연스러운" 반유대주의가 행해지고 있다고 인정할 지라도 이러한 작업은 독일의 상당한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단독으로 오는 것으로서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Kulka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커쇼가 그들을 대중의견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오히려 "무관심", "수동적인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더 나은 용어가 될 수 있다. 나치정권에 반대 하는 유대인들 또는 독일인들에 관한 관점으로만 연구를 집중 시키면, 나치 독일의 역사 학자 크리스토프 디퍼가 그의 1983년 에세이 "Der Deutsche Widerstand und die Juden" (영어로 번역하면 “독일인의 정황과 유대인들” Yad Vashem의 저서 16권, 1984)에서 반 나치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반유대주의라고 주장했다. 디퍼는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관료적인 것과 의사 법적 박탈이 1938년에 여전히 받아들여질때까지 행해졌다고” 썼다. 디퍼는 어떠한 독일 저항자들도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고 쓴 적이 없었지만 그는 또한 민족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에 의해 그들의 계획이 엎어지고 나서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회복시킬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디퍼가 정권의 상대방에 의해 세워진 관점에서 보면 독일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 문제는 존재했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베를린에 다양한 기능의 3,000개의 수용소가 있고 또 다른 1,300개가 함부르크에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것의 공동 연구원은 독일 인구는 그러한 유행을 고려하면 박해에 대해 알고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Gellately는 대부분의 독일 민간인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Gellately에 따르면, 정부는 언론과 민간인을 통한 음모는 가스 챔버의 사용을 제외한 모든 측면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어떤 역사적 증거는 홀로 코스트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전의 강제 수용소에 추방당했고, 그들을 기다려온 운명을 알지도 못했고 거부 할 수도 없었다. ;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이 다시 정착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어떠한 강압적인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 Buchheim은 범죄나 다름없는 그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다고 저술하며,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후일 Stanley Milgram은 Milgram Experiment를 통해서, 응집력이 강력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은 이에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이에 큰 영향을 받은 Browning은 위의 101부대의 사례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나 동류집단 압력(peer groop perssure)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 트라브니키 간수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 사학자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Kudryashov는 이들이 대개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는 관심도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트라브니키(Trawniki)는 물론이고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보프(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의 유대인 학살계획(Operation/Aktion Reinhard)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중 헤움노(Chełmno)와 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충실한 노동 및 전쟁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학살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의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는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Dachau)나 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집단학살 수용소는 SS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 가스실을 구비한 모든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모든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하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지고 여기서 모든 소유품들은 나치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압수되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과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쥐어주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공황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긴 여정으로 인해 갈증을 호소하는 인원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Rudolf Höss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번에 ‘처분’할수 있었다고 한다.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는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 가스실을 감독하던 SS군의관으로 근무했던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 잔여가스를 모두 제거하고 시신들을 모두 치우는 등 가스실의 사후처리 작업에는 최대 4시간이 걸렸으며, 화장하기 전 여성의 모발은 잘라내고 치과의사 포로를 이용해 금니들을 적출했다.비워진 가스실의 바닥을 청소하고 벽은 흰색으로 덧칠했다. 이 모든 작업은 유대인 포로 작업반인 Sonderkommando에 의해 수행되었다. 화장터 1과 2의 Sonderkommando는 화장시설의 다락에서 살았고 3과 4는 가스실에서 살았다. 이들에 의해 시신 처리작업이 끝나면 SS대원이 적출된 금니의 개수와 시신의 구강상흔 수를 맞춰보고, 만약 금이 누락된 것으로 간주된다면 해당 포로는 그 자리에서 소각로에 던져졌다. 초기에 시신들은 가스실에서 꺼내져 그대로 깊은 구덩이에 묻혀 석회로 덮혔지만, 1942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의해 다시 꺼내어져 소각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지어진 것들이다. Peter Longerich 역시 막대한 연구 끝에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지었다. Hilberg는 이러한 순응적인 태도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유대인들은 수세기동안 단순히 압제자들에게 애원하기만 할뿐, 명령에 복종하며 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 피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이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박해를 받는 시기에는 항상 수많은 피해를 받았지만, 마치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와 같이 다시 재기하곤 했으며 사실상 이들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반복되어온 순종의 역사가 각인시킨 타성 속에 갇혀버린 셈이다.' 하지만 Yehuda Bauer를 비롯한 동료 사학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물리적 항쟁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취한 모든 종류의 행동들까지 포함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Hilberg는 위에 인용된 Gilbert의 평가처럼 과잉되고 범위조차 명확치 않은 정의를 통해 유대인 저항을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흐름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무력저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 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4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이들은 각각 50만은 공산권의 붉은 군대에, 55만은 미군에, 10만은 폴란드군, 3만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면서 어수선해진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들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됐고, 6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중 40명만이 종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를 포함한 600여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버(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1명의 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되고 나서는 중화기까지 동원한 수용소 측의 공격으로 3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되었다. 그나마 탈출한 인원의 대다수도 수용소를 둘러싼 지뢰밭을 통과하진 못하고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이들 중 60여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년 뒤, 1944년 8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수감자들이 인근 공장에서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3명의 간수가 살해되었고 이중 하나는 오븐 속에 구겨진 채 발견되었다. Sonderkommando들은 이어서 바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전원 사살되었다. 사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저항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었지만, 그들 역시 강제이주라는 명분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탈출과 협상, 공무 방해와 때때로는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나치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이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노리고, 오히려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구성원들의 복종을 강제하게 유도했다. 이 계획의 대표적인 타겟조직이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였다. 나치는 이들에게 유대인 권익보호와 시오니스트에 대한 지원책 등 거짓 공약을 제시해, 이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하고 희생자를 더욱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어 SS소속 장성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RHSA(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감수 아래, 그는 최종 해결법(유대인 말살계획)을 착실히 전개해나가며 1943년부터 1년간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데 전념했다. 유대인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최종 해결법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히믈러가 얼마나 이 소명에 미쳐있었는지는 나치 고위당원들의 공식 집회에서 한 연설의 녹취록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최종 해결법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슈페어는 재판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라고 선언했다. 1944년 봄,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해서야 학살의 규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 문제로 마찰이 빈번하던 헝가리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일찌감치 배신의 기미를 파악하여 3월 19일에 선제공격했다. 공격 하루 전,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헝가리의 섭정이자 제독인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었다. 마침내 점령이 완료된 헝가리에서 80만의 유대인들이 대량학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세 달에 걸쳐 40만명 전부 살해되었다. 수용소장 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이후 전범재판에서 이 사실을 자백했다. -Blood for Goods 협상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작전은 나치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샀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냥 학살하느니 차라리 이들에게 평화로운 정착지를 제공해주는 대신 연합국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라는 제안까지 나왔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관리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100만명과 트럭 1만대 분의 물품을 교환하는 거래를 발의했고, 이에 대해 이스탄불에서 하인리히 힘러와 영국, 유대인 단체의 대리인들이 모여 비공식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 규모의 거래가 제대로 성사 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1944년 중순 쯤 되었을 때 “최종 해결법(Final Solution)"은 거의 실행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나치 정권에게 접근이 용이하였던 유태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말살 당하였는데, 프랑스는 약 25%가 제거된 반면 폴란드는 파괴된 공동체 비율이 약 90%에 달하였다. 나치 친위대장 하임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5월 5일 연설에서 ”독일과 독일 점령지 내의 유태인 문제는 전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 1944년에는 이 임무가 점차 어려워졌는데, 독일군이 러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전투에서도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 연합군은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의 공습과 게릴라 전투는 독일군의 철도 운영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기차의 일부를 죄수 운송에 쓰는 것에 할애하는 데에 대한 독일군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 소련군이 점점 진격해오자 폴란드 동쪽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생존해있던 수감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이후에는 실레지아(Silesia)에 있는 Gross Rosen으로-로 이송되었다. 마지막 13명의 죄수-모두 여성이었다-는 1944년 11월 25일 아우슈비츠 II에서 죽임을 당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전면적 죽음(unmittelbar getötet)"을 당하였다고 되어있어, 가스실에서 죽었는지 다른 방법으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암울한 전쟁 형세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가스실은 해체되었고, 화장터는 폭파되었으며, 집단 매장지를 뒤엎고 시체들은 화장시켰다. 또한 폴란드 농부들에게 그 자리에 식물 씨앗을 키우도록 강제하여 그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역 지휘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태인들을 죽이고 또 강제된 “죽음의 행군(Death March)"을 통해 수용소 간 이동을 시켰다. 수 년 간의 폭력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기차역까지 눈발을 뚫고 장거리를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고, 이후 며칠씩 음식 없이 화물열차 안에 갇혀서 운송되었고, 내린 후에 또다시 수용소로 행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즉시 총살되었다. 이 행군 중에 죽은 유태인은 약 2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러한 죽음의 행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행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9일 전이었는데, 수용소 경비대는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56km 떨어진 Wodzislaw(독일어: Loslau)까지 걸어가게 시켰다.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화물열차를 통해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는데, 여기까지의 행군 도중 약 15,000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첫 번째 주요 수용소였던 Majdanek 수용소는 진격하는 소련군에 의해 1944년 7월 23일에 발견되었다. Chelmno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0일에 해방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또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7일에 해방되었다. Buchenwald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11일, Bergen-Belsen 수용소는 영국군에 의해 4월 15일, Dachau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29일, Ravensbrück 수용소는 같은 날 소련군에 의해, Mauthausen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5월 5일, Theresienstadt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5월 8일에 해방되었다. Treblinka, Sobibor, Belzec 수용소는 해방되지 못하고 1943년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7군 William W. Quinn 대령은 Dachau 수용소에 대해 “우리 부대는 그 곳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 소리, 악취를 목격하였다. 도저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잔인함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소련군에 의해 발견된 수용소들의 대부분은 이미 죄수들을 이송하여 몇 천명만이 살아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되었던 180명의 아이들을 비롯해 7,6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발견되었다. Bergen-Belsen 수용소에서는 60,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영국군 11사단에 의해 발견 되었는데, 13,000여 구의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10,000여 명은 몇 주 후 티푸스나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영국군은 남아있던 수용소 경비대를 시켜 시체를 모아서 집단 묘지를 만들게 하였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통계치는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500만 명 유럽 유태인에 대한 큰 규모의 학살을 의미하며,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정확한 정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틴 길버트의 측정치에 따르면 총 피해자 인원수은 600만 명 이하이며, 당시 유럽 유태인의 78%를 차지하다고 말했다. 티모시 스나이더는 홀로코스트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나눠 보았다. 하나는 독일군이 전쟁했을 때 모든 학살행위이며 하나는 나치가 유태인에 행한 모든 압박행위이다 포괄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인원수는 소련 전쟁포로 200만~300만명, 폴란드인 200만명, 장애인 27만명, 집시 22만명, 프리메이슨 회원 22만명, 슬로베니아인 2만5천명, 동성애자 1만5천명, 여호와의 증인 신도 5천명, 스페인 공화주의자 5천명을 포함하여 총 1100만명이다. 더 넓은 통계범위로 600만 명의 소련 민간인을 포함하게 될 경우 총 사망인원수는 17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유태인학살기념관에서 전시된 수치에 따르면 1500~2000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루돌프 럼멜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된 사람 수를 2100만 명이라고 측정하였으며, 다른 학자의 측정치에 따르면 소련 민간인의 사망 수를 합쳐 26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1945년에서 지금까지 흔히 나온 학살을 당한 유태인사망인원수에 대한 측정치는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대학살기념관에 이런 말이 전시되어 있다. 살해를 당한 유태인은 정확하게 통계할 수 없고 문서에서 300만 명의 유태인의 이름을 찾았고 , 유객센터에서 전시되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중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600만 명의 숫자는 당위군 장관을 맡은 Adolf Eichmann가 말한 것이다. 당위군 장관 Wilhelm Höttl의 증사에 따르면 1944년 8월에 Adolf Eichmann가 그한테 6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을 당하고 ,4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나머지 200만 명이 총사나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1953년에 Gerald Reitlinger가 쓴 《최종해결방안》이 피해자인원수에 대해 측정했다. 인원수는 4,200,000-4,500,000 명의 사이이었다. 이외에도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하고 Jacob Lestschinsky측정한 5,950,000인 측정치가 있다. Yisrael Gutman와Robert Rozett가 쓴《유태인대학살백과전서》중에 측정한 사망 인원수는 5,590,000~ 5,860,000명의 사이였다. 베를린 공업대학의 교수 Wolfgang· lBenz 연구한 결과는 피해자인원수가 5,290,000-6,200,000명 사이인 것이다. 이스라엘유태인대학살기념관이 전시된 수치의 근거는 전쟁 전후의 인구통계대조하고 강제송환과 학살의 문서에서 온 것이다.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명의 피해자가 보수적인 측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Raul Hilberg가 찾을 수 있는 사망기록만 참조하면서 측정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유럽유태인의 멸망》제3판에서 800,000명이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임을 당하고, 1,400,000명이 총사로 사망하고 2,900,000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쓰인다. 그는 폴란드 유태인의 사망인수 300만 명에 달한다고 측정했다. Martin Gilbert가 최소 5750000 명의 유태인을 살해당한다고 측정하고, 그 중에 Oświęcim에서 독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죽은 200만 명도 포함이 된다. Lucy Dawidowicz 전쟁 이전의 통계수치를 통해 5,934,000명의 유태인이 사망되었다고 지적했다. 각 강제수용소의 사망인원수가 3800000명을 넘고 그중에 80~90% 모두 유태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유태인이 나치 대학살로 인한 총 유태인피해자인원수의 반에 달했다. 폴란드의 유태인 거의 이런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도 최소 50만 명의 유태인 기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그중에 독일의 몇 개의 주요한 수용소 포함된다. 많은 유태인을 징역하고, 특히 전쟁의 마지막 1년 동안 나치가 폴란드에서 철수한 후, 약 100만 명의 사람이 이런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중에 최소 50%가 유태인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알 수가 없다. 이외에도 80~100만 명의 유태인이 독일이 점령한 구역에서 살해를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영양불량으로 송환되기 전에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었다. 독일 간접 또는 직접 통제된 구역에서 약 800~1000만 명의 유태인이 있었다. 유태인대학살로 피해된 600만 명이 전부의 60%~75%를 차지했다. 폴란드에서 3300000명의 유태인 중에 90% 살해를 당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피해비율이 무려 90%에 달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의 유태인이 다행히 모두 안전하게 철수했다. 1933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는 750,000명 중에 1/4의 생존자만 있었다. 1939년 이전 많은 독일유태인 안전하게 독일을 떠나고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로 도망갔지만, 나중에 여전히 강제송환을 당하여 학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의 유태인 중에 70%가 피해를 받았다. 루마니아, 벨기에, 헝가리의 피해자 비율은 50%-70%에 달했다. 벨로루시하고 우크라이나에서 피해된 유태인 비율이 비슷하지만 정확한 사망자 인원수를 알 수 없다. 유태인피해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는 불가리아,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이었다. 알바니아는 1945년의 유태인인수가 1939년의 인수보다 많아지는 유일한 독일 점령국가다. 약 200명의 토종 유태인과 1000명 이상의 난민이 가짜 신분증을 통해 떠나거나 60%의 이슬람교도 중에서 숨어 있었다. 1990년대 동유럽정부문서가 개방된 이후 Hilberg, Dawidowicz, Gilbert가 사망인원수에 대한 통계수치를 다시 수정했다. Wolfgang Benz가 몇 년 간의 계속 피해자 수를 업데이트를 해 왔고 그는 1999년 이런 말을 했다. 대학살은 이디시어에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 대전이전, 약 1100~1300만 명의 사람들이 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대학살은 유태인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종교, 일상생활을 파괴하여 이디시어의 상용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피해자 중에 약 500만 명이(85%)이디시어를 쓰고 있었다. 이디시어를 쓰지 않은 사람들인 그리스하고 발칸지역에서 쓰는 언어도 파괴되었다. 이러한 ‘유태-스페인어’가 거의 사라졌다. 1942년 여름에,Heinrich Luitpold Himmler의 《동부전체계획》이(Generalplan Ost)히틀러의 허락을 받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슬라브인을 그들의 고토에서 소멸하거나 유방시키거나 노예로 시킨다는 것이다. 목적은 그 땅에서 독일인이 살도록 할 것이다. 원래 계획은 20–30년의 장기에 걸쳐 추진한 것이다. 작가이며 역사학자인 Doris·L·Bergen 이런 말을 쓰었다. “다른 나치문헌과 마찬가지로 《동부전체계획》이 사용한 어휘가 완곡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근본적인 의도는 분명하다'. 이 계획은 나치독일이 다민족정치관계에 대한 기본방침을 명확히 제기했다. 슬라브인에 대한 학살,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모두 같은 계획의 구성부분이다. 다른 역사학자Williams·W·Hagen 이런 말을 하였다. “《동부전체계획》는 동유럽 인구에 대해 소멸할 인원수까지 예측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폴란드인– 85%;벨라루스인 – 75%;우크라이나인 – 65%;체코인 – 50%, 이러한 거대한 감원하는 규모는 노예로 시키거나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출산통제 등 조치로 달성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Heinrich Luitpold Himmler“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잔인한 인종주의와 편견이고, 2000~3000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태인은 군사적인 조치나 식량부족위기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폴란드의 역사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한 고난의 역사였다. 특히 독일은 폴란드의 이웃으로서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넘보았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럽에서 폴란드의 지도를 없애고 독일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독일인들을 폴란드 땅에 재정착 시킨다는 생각이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폴란드의 유태인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90%이상이 죽임을 당하여 사라졌지만 폴란드의 기독교인들은 잔인한 독일 점령 하에서도 94%가 살아남았다. 1939년 11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인종청소 정책을 수립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폴란드인을 완전히 말살한다는 정책이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란드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서부지역의 정부(일반정부라고 부름)는 폴란드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계획에 의하면, 1952년까지 폴란드 서부지역에는 3-4백만 명의 폴란드인만을 남겨놓아 독일인들의 노예로 삼아 부려 먹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들 폴란드인들은 자녀를 갖지 못하도록 결혼을 금지하며 독일로부터 의료지원을 중지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폴란드인들이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1주일 앞두고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동부지역(폴란드를 말함)에서 폴란드 민족의 후손이거나 폴란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남자, 여자, 아이들을 구분하지 모두 제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군대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래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기간 중에 도합 1백80만에서 2백10만명에 이르는 비유태계 폴란드인이 독일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중 5분의 4가 폴란드 민족이었으며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의 소수민족이었다. 거의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이들 중 최소 20만 명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그중 14만 6천명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여러 경로로 집단 학살되었다. 예를 들면 바르샤바 봉기 때에 12만에서 20만의 폴란드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인을 자연소멸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하였다. 예를 들면 철저한 식량배급으로 많은 사람들을 굶주려 죽게 만들었으며 위생시설을 개선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전염병 등에 걸려 죽게 만들었고 의료서비스를 중단함으로써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 결과,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천 명당 13-18명이었다. 2차 대전의 희생자중 5백 60만 명이 폴란드인이었다. 이에는 물론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도 포함되지만 비유태인도 포함되어 있다. 폴란드는 2차 대전으로 인하여 16%의 인구를 잃었다. 전체 유태인 3백30만 명중 3백 10만 명이 희생되었고 비유태인의 민간인은 3천1백70만 명중 2백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 희생자 중 90%는 전쟁과는 관련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나치 독일도 폴란드인의 청소에 앞장섰지만 후방의 소련도 폴란드인의 제거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서부 슬라브인도 마찬가지로 살해를 당했다. 측정한 수치에 따르면 약 345,000명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인들을 살해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 나치 독일은 남김없이 리디체를 포함한 마을들을 파괴하고 16세가 넘은 남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치 수용소로 보내고, 여성과 아이들도 리디체를 떠났다. 소르브인도 무참히 학살했다. 나치는 히틀러의 의중에 따라 발칸에서 58만 1천명의 유고슬라브인을 학살했다. 이에는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동맹으로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자인 우스타세(Ustase)가 합세하였다. 히틀러는 발칸에서 유고슬라브인을 모두 학살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인간 이하(Untermensch)’라고 표명함으로써 간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나치의 동조자인 유스타세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점령지역 괴뢰정권으로서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하는데 앞장섰다.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도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주로 야세노바크(Jasenovac)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우스타세 당국은 1941년부터 45년 사이에 크로아티아에 여러 곳의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무슬림(보스니아인), 그리고 가톨릭교도가 아닌 소수민족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물론 크로아티아의 정치범들과 반종교인들도 희생되었다. 니아드 할릴베고비치(Nihad Halilbegovic)가 주도한 최근 연구인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의 보스니아인’(Bosniaks in Jasenovac Concentration Camp)에 의하면 약 10만 3천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슬라브인들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나치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운동인 우스타샤에 의해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집시라는 명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벨라루스 지역이 가장 큰 희생자였다. 나치는 벨라루스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온갖 만행을 자행토록 부추겼다. 결국 9천개의 마을에 불에 탔으며 38만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이송되었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Khatyn)과 같은 마을은 마을을 불태울 때에 주민들도 모두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런 마을이 벨라루스에 600개나 있었다. 동구에서 벨라루스로 이전한 슬라브인들이 만든 정착촌은 5,295개소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 정착촌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도합 1백 67만명의 민간인이 3년 동안의 독일 점령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24만 5천명은 유태인으로써 벨라루스 시민들로 구성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에 의해 살해되었다.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초기에 승승장구하여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았다. 독일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은 대략 2-3백만 명으로 보고 있다. 전체 포로들의 57%가 1941-45년간에 굶주림과 학대로, 또는 처형당하여 죽었다.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은 소련군 전쟁포로 중 2백 80만 명이 1941-42년간의 8개월 동안에 죽었으며 1944년 중반까지는 3백3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생명을 잃었다. 1943년에는 독일군에게 잡힌 소련군 포로들의 사망률이 감소하였다. 이는 상당수 소련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잡힌 소련군 전쟁포로는 도합 23만 1천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여러 사정으로 8천3백 명만이 죽었다. 로마니(Romani)와 신티(Sinti)라고도 불리는 집시들은 전통적으로 기록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나치는 집시들이 위생상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성적으로도 문란하다고 생각하여 혐오하였다. 집시들은 아우슈비츠에 끌려 와서도 불결하고 불건전한 생활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순수 아리안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청소키로 결정했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집시의 수는 약 1백만에 달했다. 그중 13만 명이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 희생되었다. 하지만 미국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의 역사학자였던 시빌 밀튼(Sybil Milton)은 희생당한 집시의 수가 22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는 유럽에 70만 명의 집시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수는 22만 명이 훨씬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집시에 대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에 과연 얼마나 많은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오스틴의 텍사스대학교 집시문제연구소장인 이안 핸코크(Ian Hancock)는 '모르면 몰라도 집시희생자의 수가 유태인희생자의 수와 맞먹을 것'이라고 보았다. 집시들은 집단으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오거나 요행으로 게토로 집어넣어 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인자츠그루펜(현지인 나치 동조자)들이 집시들의 야영지를 급습하여 현장에서 모조리 학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나치 점령지의 괴뢰정부들도 집시말살에 한몫을 거들었다. 예를 들면 크로아티아의 괴뢰정부인 우스타세는 집시들을 대거 야세노바크 강제수용소로 끌고 와서 집단 학살하였다. 1942년부터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동등한 법적 처우를 받았으며 동등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SS 책임자로서 나치 인종청소의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는 ‘집시 잡종(Mischlinge), 로마니(Romani: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집시), 독일 혈통이 아닌 발칸 출신의 종족들은 이들이 독일 국방군에 복무하지 않는한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에는 독일에 있는 모든 로마니를 색출하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이 발표되었다. 독일의 일부 학자들은 집시(로마니)들이 원래는 아리안족이었으나 비(非)아리안족들과의 교합으로 불순한 혈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나치시대에 독일 안에 사는 흑인 약 5000~25000명이 있다. 이 수치는 아시아 사람을 포함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국대학살기념관의 기술에 따르면 1945년 그 쪽의 흑인들이 격리, 살해, 생체실험, 징역, 폭력을 모두 겪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태인을 멸종시키는 것처럼 체계적인 학살을 안 했다. 이외에는 아프리카너, 베르베르인 ,이란인 , 인도인을 아리아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압박을 당하지 않았다. 돌궐족, 아라비아인, 남아메리카인에 대한 종족의식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부는 독일군을 위해 일을 시켰다. T-4 작전은 1939년부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독일의 유전자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강제로 불임하게 하거나 살해했다. 1939년 ~ 1941년 동안, 나치가 정신병원에서 총 80,000 ~ 100,000명의 정신장애인들을 죽였다. 그 중에 아동은 5,000명이고 유태인은 1,000명이다. 또 다른 측정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200,000명의 정신병자가 사망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숫자는 역사적으로 별로 중시를 받지 않았다. 많은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들이 실험도구로 사망했다. 독일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1941년 8월 24일 이 프로그램을 중지시켰다, 나치 독일에서는 실질적 범죄 행위보다 범행의 동기나 개개인의 자질 등을 문제시 삼았으며, ""gesundes Volksempfinden""(건강한 국민 정서)이 나치 독일의 새로운 규범적 원칙이 되었다. 1936년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을 설립하였다. 곧 동성애는 '건강한 국민 정서'에 반하며, 독일혈통을 더럽히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게슈타포는 게이바를 습격하였으며, 체포한 동성애자의 개인 연락처와 성소수자 신문 및 잡지 등을 이용하여 다른 동성애자들을 추적하였다. 또한 이웃에 동성애자나 동성애자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할 것을 대중에 종용하였다. 1933년에서 1944년 사이에 10만여명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었고, 이 중 약 5만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갱생'을 이유로 5천명에서 1만5천여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서 이들은 초기에 노란색 완장으로 구분되었으나, 성폭행 및 강간의 대상이 되어 나중에는 상의뿐만 아니라 바지에도 착용해야하는 분홍색의 역삼각형 낙인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수백명의 동성애자가 강제로 거세를 당하였다.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들은 성적 모욕과 고문, 생체 실험을 당하며 처형되었다. 홀로코스트에서의 동성애자 피해 연구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1994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형법상 동성애가 여전히 범죄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독일공산당원, 사회주의자 또한 공희주의자는 나치들이 독일국 내에서 최초의 적이었으며, 최초로 수용소로 옮긴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는 유태인의 학설(学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틀러는 그들이 "유태인의 볼셰비키"라고 언급했다. 1933년, 나치즘들이 반공산주의를 명분으로 전권위임법을 선포했다. 이 법안을 통해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나치들이 독일 공산당을 압박함으로써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독일 엘리트 계급 사람들이 나치즘하고 손을 잡았다. 독일 좌파의 많은 리더들이 유태인 출신이다. 유태인 출신 리더들이 1919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단 혁명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맑시스트하고 볼셰비키들이 “국제적 유태인”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이 ”종족의 순결성”과 북유럽사람의 생활을 파괴했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사회계급간에 모순되어 반정부세력들이 수용소에서 독일공산당이 유태인보다 많은 특권을 누렸다. 바로 공산당들이 유태인 종족보다 더 순결하기 때문이다. 나치즘이 점령한 지역에서 항상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먼저 구류를 받거나 처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위원은 독일이 점령한 모든 곳에서 처형한 적이 있다. 특별행동부대가 동부전선에서 이 명령을 실시하였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을 불법화했고, 많은 로지lodges들을 폐쇄했다. 많은 형제들Brethren이 체포되었고, 집중 캠프로 보내졌다. 로지에서 훔친 물건들은 그 동업자들을 향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일으킬 목적으로, 독일 전역에서 메이슨 반대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리메이슨들도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도 침략하고 점령한 나라(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그리스 등)에서 나치가 훔쳤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8 만 명의 메이슨들이 유럽 전역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미국대학살기념관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많은 잡힌 프리메이슨 맨버들이 유태인 신분이나 반대파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프리메이슨 신분을 갖고 있는 원인으로 나치수용소에 보내는 사람 수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약 12,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나치한테 선서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거절해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중 약 2500 ~ 5000명이 살해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 1942년 1월 8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12선)과 내각총리대신(제87·88·89대), 우정대신(제56대)과 후생대신(제73·74·86대), 자유민주당 총재(제20대)를 지냈으며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두번 째로 긴 장기 집권기간 (1,980일)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그의 첫 임무인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온전한 한일 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대한민국의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 내각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또한 고이즈미의 노선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등 200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퇴임 후 수년간 대중 앞에 나서지 않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13년 후쿠시마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포기 옹호론자로 복귀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 임기 중과 이후 모두 포함해서 자민당이 지지해 왔던 친 원자력 발전과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와 부친인 고이즈미 준야도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부친은 방위청 장관도 역임했다.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는 배우로 활동 중이며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2009년 7월 21일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준이치로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출마, 당선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3 대에 걸친 정치인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 (小泉純也)는 일본 방위청장(현재 방위대신)과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몸에 큰 문신을 하고 다녀 "문신 장관"이라고도 불렸는데, 하마구치 총리와 와카쓰키 총리 내각에서 우정성 장관을 지냈으며 우편 민영화의 초기 옹호자였다.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에서 태어난 고이즈미 총리는 요코스카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게이오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9년 8월 아버지의 부음으로 귀국할 때까지 University College London에 재학했다. 귀국 후 고이즈미는 자민당(LDP) 후보로 일본 하원 선거에 나갔으나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해 낙선했다. 1970년 당시 일본 재무부 장관이었던 후쿠다 다케오의 비서로 발탁되었는데, 후쿠다 다케오는 1976년 일본 수상이 된다. 1972년 12월 총선에서 고이즈미는 가나가와현 제11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자민당 내 후쿠다 파벌에 합류했다. 그 이후로, 그는 10번 재선되었다. 룡천 열차 폭발 사고 룡천 열차폭발 사고(龍川列車爆發事故)는 2004년 4월 22일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룡천군 룡천역에서 열차가 폭발한 사건이다. 사건은 낮 오후 12시에서 1시 사이에 가연성 물질을 싣고 가던 기차에 노후된 전선의 불꽃이 튀면서 폭발하여, 폭발현장에는 10여 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파이고, 주변 건물들이 충격으로 붕괴되어 54명이 사망하고, 1,249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북한은 이 지역에 국가 긴급 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이례적으로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했다. 사건이 일어난 당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기차로 귀국하는 날이어서, 김정일 위원장을 겨냥한 테러가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있었고,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김정일 스스로 룡천역 사건이 자신을 향한 암살시도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노르드 노르드 (Norse)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와 관련이 있다. 다음의 경우에 쓰인다. 같은 어원으로 노르딕 (Nordic)이 있다. 노르딕 스키는 스키경기 종류의 하나이다. 게임 마인크래프트 대규모 오픈필드형 MMORPG 서버인 Norde Online이라고 있다 참고 카페::http://cafe.naver.com/norde 스칸디나비아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문화·역사적 지역을 일컫는다. 대개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세 왕국을 말하며, 때에 따라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들 지역의 속령인 그린란드, 올란드 제도, 페로 제도를 스칸디나비아에 포함하기도 한다. 언급한 지역 전체를 말할 때 노르딕 국가라고도 한다. 언어학이나 문화 연구에서 고대 노르드어 사용했던 현재 북게르만어군 언어 사용권을 말한다. 이 정의에서는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및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핀란드 일부 지역도 해당한다. 문화적, 역사적 관점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오랜 기간 스웨덴의 일부였던 핀란드를 포함하기도 한다. (페노스칸디아 참조). 핀란드가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가깝기는 하지만, 핀란드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제어와는 달리 우랄어족의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1830년대의 범노르만 운동과 1830년대에서 1850년대까지의 정치적인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이후, 스칸디나비아에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를 포함하는 것은 의견이 갈라진다. 문맥에 따라서는 이들 나라도 스칸디나비아에 포함되긴 하지만, 노르딕 국가라는 단어가 표현의 모호함 없이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페로 제도와 그린란드), 핀란드(올란드 제도), 아이슬란드 전체를 가리킨다. 덴마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는 사용자들끼리 대부분 서로 알아들을 수 있어 한 언어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독립 국가에서 사용되는 까닭에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각각 다른 언어로 인정된다. 같은 북게르만어인 아이슬란드어와 페로어와 계통이 같지만 이들 언어와는 상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고대 노르드어에서 파생되었지만 중세 이후 덴마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는 저지 색슨어의 영향을 받아 섬나라에서 사용되어 변화가 적었던 아이슬란드어·페로어와 상당한 분화를 겪었다. 스칸디나비아 제어는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군에 속해 우랄어족 언어의 하나인 핀란드어와는 계통이 전혀 다르다. 이는 핀란드인들이 자신들을 스칸디나비아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선사시대 이후 두 개의 언어 그룹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공존해왔다. - 북게르만어군(스칸디나비나어)과 사미어. 이후의 이주로 인해 핀란드어, 이디시어, 로마니어는 수백년 넘게 동안 말해져 왔다. 덴마크는 또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사미어와 인접 지역의 소의언어의 변형으로 말하는 다른 소수 그룹의 언어와 별개로 다음의 스칸디나비아의 소언어는 유럽 지방 언어, 소 언어 헌장 아래에 보호받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지역학 용어 '스칸디나비아'는 19세기 중반 활발했던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에서 기인한다. 이 정치적 운동은 특히 제1차 슬레스비(독일명 슐레스비히) 전쟁(1848년-1850년)과 제2차 슬레스비 전쟁(1864년) 사이 활기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은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할 것을 주장했다. 그 역사적 배경은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스웨덴과 덴마크가 분할되는 시련을 겪은 것이다. 스웨덴에 속했던 핀란드는 1809년 제정 러시아령으로 넘어가 핀란드 대공국이 되었다. 또 1387년부터 명목상 덴마크와 연합 왕국을 이루었으나 사실상 덴마크에 속한 주에 불과했던 노르웨이는 1814년 독립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스웨덴과 인적 동군연합(人的 同君聯合, Personal Union)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령이 되었으므로 북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연합에 대한 계산에서 제외되었고 나머지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를 포괄하는 용어가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용어가 스칸디나비아였던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스칸디나비아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해당하지만 정치적인 용어로는 덴마크까지 포함한 3국을 일컫게 되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한 군주 아래 있는 인적동군연합 상태였고 덴마크는 대서양에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 등의 보호령을 두고 있었다. 이들 보호령은 역사적으로 노르웨이의 속령이었지만 킬(Kiel)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가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갈 때 포함되지 않아 덴마크령으로 남아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은 스웨덴-노르웨이가 슬레스비 공국을 합방시키려는 덴마크에게 군사 지원을 거부함으로써 끝이 났다. 슬레스비 공국은 인접한 독일의 홀슈타인 공국과 함께 덴마크와 인적동군연합 상태였다. 1864년 제2차 슬레스비 전쟁은 덴마크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프로이센을 상대로 싸운 전쟁으로 단기간에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제국을 세움으로써 발트 해 연안국들 사이에 새로운 힘의 균형이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정치적 통일을 목적으로 한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1873년에는 스칸디나비아 통화 통합이 이루어져 크로나(Krona)/크로네(Krone)가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단일 통화로 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간의 협력은 새로 독립한 핀란드도 포함하게 되어 정치적 의미에서의 스칸디나비아라는 용어는 북유럽(노르드)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1952년에는 북유럽 이사회(Nordic Council)가 출범하였다. 스칸디나비아의 극심히 추운 지방인 탓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보기에 편안하며 과장되지 않는 것이 특징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특징은 자연적인 것을 지향하며 전통적인 따스함과 현대적인 모던함을 동시에 포괄하는 디자인을 주로 추구한다. 이 디자인은 알바 알토에 의해 유명해졌다. 고대 노르드어 고대 노르드어(古代──語, , , , , , , )는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로서,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스칸디나비아 및 바이킹들의 해상거주지에서 사용된 언어이다. 8세기경 노르드 조어가 노르드어로 진화했고, 노르드어는 14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현대 북게르만어로 분화하면서 사멸했다. 다만 이 시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노르드어로 쓰인 문헌은 15세기에도 발견된다. 노르드어는 세 가지 방언으로 나뉜다. 동노르드어, 서노르드어, 고틀란드어가 그것이다. 동노르드어와 서노르드어는 방언연속체를 형성하여 명확한 지리적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동부 노르웨이에서 동노르드어의 흔적이 발견되고, 서부 스웨덴에서 서노르드어의 흔적이 발견되는 식이다. 고대 서노르드어 사용자들은 오늘날의 노르웨이에 많이 살았고, 동노르드어 사용자들은 오늘날의 덴마크, 스웨덴, 고틀란드에 많이 살았다. 12세기 아이슬란드의 《그라가스》는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데인인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언어를 데인어()라고 불렀다. 또 특히 서노르드어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으로는 노르딕 말()이 있었다. 오늘날 노르드어는 북게르만어로 분화하여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를 형성하였으며, 이 중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여전히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고대 아이슬란드어는 본래 고대 노르웨이어와 기본적으로 동일했으며, 함께 고대 서노르드어를 이루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 섬, 잉글랜드 북서부에 세워진 바이킹 정착지들과 노르망디의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이 서노르드어를 사용했다. 덴마크, 스웨덴과 키예프 루시 쪽으로 진출한 바이킹 정착지들과 잉글랜드 동부, 그리고 노르망디의 덴마크계 바이킹들이 동노르드어를 사용했다. 고틀란드 섬과 동유럽의 여러 정착지에서 고대 고틀란드어가 사용되었다. 11세기가 되면 노르드어는 서쪽으로는 빈란드에서 동쪽으로는 볼가 강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되었다. 키예프 루시에서는 노브고로드에서 노르드어가 가장 오래 살아남아 최소 13세기까지는 사용되었다. 서노르드어의 후계 언어는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노르웨이어, 그리고 사멸한 노른어 등의 서스칸디나비아어다. 한편 동노르드어의 후계 언어는 덴마크어, 스웨덴어로 이루어진 동스칸디나비아어다. 노르웨이어는 본래 서노르드어 계통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동노르드어의 영향을 심하게 받게 되었는데, 덴마크-노르웨이 동군연합 때 특히 그러했다. 이들 언어 중 아이슬란드어와 페로어가 1천여년 동안 노르드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언어로 꼽힌다. 덴마크가 페로 제도를 지배하기는 했으나 페로어가 역으로 덴마크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노르드어는 잉글랜드의 영어 및 저지 스코틀랜드의 스코트어에도 영향을 미쳐서, 영어와 스코트어에는 노르드어 왜래어가 많이 존재한다. 또 노르망디어의 형성과 현대 프랑스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르드어와 같은 계통은 아니지만 노르드어, 특히 노르망디어에 강한 영향을 받은 언어로 스코틀랜드 게일어, 아일랜드어, 우크라이나어, 벨로루시어, 리투아니아어, 핀란드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등이 있으며 이들은 상당한 수의 노르드어 외래어를 거지고 있다. 혹설에서는 "러시아"의 어원이 된 "루스" 자체가 노르드인의 일파인 루스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 오늘날 스웨덴을 가리키는 말이 각각 "루오트시(), "루트시()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상술했듯 현대에 남아있는 언어들 중 옛 노르드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아이슬란드어이다. 현대 아이슬란드어의 쓰기체계는 노르드어 음소체계에서 파생된 것이며, 현대 아이슬란드어 구사자들은 철자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노르드어를 대체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발음, 특히 홑소리 발음은 다른 북게르만어가 노르드어와 달라진 만큼 아이슬란드어도 많이 변화했다. 페로어도 노르드어와 유사한 점이 많이 남아 있지만 페로어는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고이델어(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어)에 영향을 받았다.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는 옛 노르드어에서 파생, 각자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그래도 비대칭적으로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현대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사용자들은 서로의 말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느리게 말하면 거의 알아듣는다. 이 언어들은 쓰기체계도 충분히 유사한데,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이 세 언어는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달했고, 중세 저지독일어에게도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 노르드어 홑소리 음소들은 대부분 장모음과 단모음의 짝을 이루고 있다. 표준 철자법은 장모음에 예음부호 ´를 찍어서 장모음임을 표시한다. 중세 문헌들에서는 이러한 표기가 잘 이루어져 있지 않지만 간혹 부호 표시나 중복표시로 표현하기도 한다. 노르드어는 9개 홑소리 위치가 모두 비음화될 수 있다. 홑소리의 이음이 앞에 비음 닿소리가 위치하면서, 근처 소리에 묻히지 않을 때 홑소리의 비음화가 일어난다. 홑소리에 실린 강세 때문에 비음이 묻혀 버릴 경우, 그 홑소리의 길이가 늘어진다. 이러한 비음화는 다른 게르만 계통 언어들에서도 나타나지만, 그렇게 길게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항들은 12세기에 쓰여진 《첫 번째 문법조약》에 나와 있기에 알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여기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면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첫 번째 문법조약》에서는 글자 위에 점 하나를 찍어서 비음화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시법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곧 무용지불이 되었다. 동노르드어에서는 11세기를 전후하여 비모음과 구모음이 대부분 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달라르나 방언에서는 아직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하 표에서는 점을 이용해 구모음과 비모음(문자 위에 틸다 부착)을 분리하고 있다. 비고: 저모음/중저모음은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13세기를 전후하여 고대 덴마크어를 제외한 모든 노르드어 방언들에서 Ǫ ()가 Ø 또는 O와 융합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모든 Ǫ가 Ø와 융합되었는데, 이는 12세기의 《첫 번째 문법조약》에서는 둘이 구분되고 있지만 13세기의 《고 에다》에서는 구분되고 있지 않음으로 증거된다. 또한 역시 《첫 번째 문법조약》에서는 명시된 비모음 구분도 13세기경에는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노르드어는 6개의 파열음이 있다. 이 중 는 단어 앞에 나오는 경우가 드물고, 와 는 홑소리들 사이에서 마찰 이음으로 발음되는데, 합성어에서는 예외이다(e.g. ). 이런 현상은 게르만 조어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다(e.g. 홑소리들 사이에 끼인 "*b" > [v]). 음소 는 "n" 또는 다른 "g" 뒤에서 로 발음되고, 와 앞에서는 로 발음된다. . 동노르드어의 /ʀ/ 음소는 그 발음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설첨음이었다가, 입천장 치찰음으로 재구축되었다. 이 음소는 게르만 조어의 음소 에서 파생된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음소 로 진화했다. 이 과정은 서노르드어에서는 진작 이루어졌다. 겹닿소리 , , 은 단어 맨 앞에만 발생한다. 이 음가들이 앞의 가 ㅎ( 또는 )으로 발음되면서 그 뒤의 닿소리들도 발음되어 흘, 흐ㄹ, 흔ㄴ 식으로 발음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각각 단일 무성 공명음 ㄹ, ㄹ, ㄴ으로 발음되는 것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고대 노르웨이어, 고대 덴마크어, 후기 고대 스웨덴어에서는 , , 이 홑닿소리 로 간략화되는데, 이를 근거로 노르드어에서도 단일 무성 공명음으로 발음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의 발음도 불확실하다. (게르만조어의 발음), 또는 나 였을 수도 있다. 상술한 과 달리 는 모든 방언에서 겹닿소리 형태를 보다 오래 유지했다. 아이슬란드어에서는 아예 오늘날까지 무성 공명음으로 결합되지 않고 있으며, 대신 파열음 으로 경음화되었다. 이는 이 음가가 무성 공명음이 아니고 보다 강한 협착기식음이었음을 시사한다. 조상 언어인 노르드 조어는 대 푸타르크(고대 룬 문자)로 쓰여진 반면, 노르드어는 소 푸타르크로 쓰여졌다. 소 푸타르크는 16개 문자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문자 수가 모자랐기 때문에 홑소리 에 해당하는 문자가 에도 사용되고 홑소리 에 해당하는 문자가 에도 사용되었다. 보다 시간이 지난 뒤에는 푸토르크(중세 룬 문자)가 사용되었다. 라틴 문자가 도입된 뒤에도 중세 당시에는 하나의 표준된 철자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룬 문자 윈(ᚹ)을 수정한 문자가 벤드(Ꝩ)라고 불리면서 음가 , , 를 나타내기 위해 잠깐 쓰였다. 장모음은 예음부호 ´ 를 찍어서 표시하기도 했지만, 해당 모음을 두 번 써서 장모음임을 표시하거나 아예 아무 표시도 하지 않기도 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표준화된 노르드어 철자법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노르드어의 어순 배열은 영어에 비해 널널하다. 노르드어의 나열 구조는 영어와 다소 달라서, 영어에서 "a, b, 그리고 c" 및 "a, b, 또는 c"라고 할 경우 노르드어는 각각 "a와 b와 c" 또는 "a와 b 또는 c"라고 하게 된다. 노르드어는 어형변화가 중간 정도의 굴절어로서 명사와 동사에서 상당한 수준의 변화가 일어난다. 대부분의 결합 형태소는 현대 아이슬란드어에서, 특히 명사 어형변화군에서 그대로 가지고 있다. 반면 현대 노르웨이어는 이에 비해 보다 분석적인 단어 구조로 이행했다. 가장 오래된 노르드어 문헌은 8세기경 룬 문자로 새겨진 각석들이다. 룬 문자는 15세기까지도 널리 쓰였으며, 스웨덴의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에도 사용된 바 있다. 노르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11세기 전후로 라틴 문자가 들어왔다. 라틴 문자로 쓰인 가장 오래된 노르드어 문헌은 12세기 중반의 물건이다. 그 뒤 노르드어는 중세 유럽 특유의 문헌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문헌들 중 아직까지 보존된 것은 대부분 아이슬란드에서 쓰여졌다. 가장 유명한 것들로는 아이슬란드 사가를 비롯한 사가들이 있으나, 그 외에도 기사 문학, 고전 신화, 구약성경 따위를 노르드어로 번역한 것도 존재한다. 교육용 자료도 노르드어로 쓰여져서, 상술한 《첫 번째 문법조약》이 그러한 예이다. 그 외에 많은 수의 서한이나 공문서가 노르드어로 쓰여졌다. 노르드어에서 발생한 혁신 대부분은 노르드어가 사용되는 지역 전체에 확산되었다. 그 결과 노르드어의 방언들은 서로 매우 닮았으며 같은 언어로 여겨졌다. 스노리 스툴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에서 발췌한 다음 두 문장에 나오다시피, 당대에 노르드어는 "데인어()"라고도 불리고 "노르드 말()"이라고도 불렸다. 로마자 로마자() 또는 라틴 문자()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이며, 음소 문자 체계이다. 영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언어를 기록하는 표준 문자이며 유럽인이 정착한 곳과 그 밖의 나라들에서도 쓰이고 있는 문자다. 일반적으로 로마자를 쓰지 않는 언어가 공용어인 나라에는 로마자 표기법이라는 어문 규정이 따로 있다. 로마자는 본래 라틴어의 문자였으며, 오래전부터 서유럽·중부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16세기 이후에 진행된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장에 따라서 현대에는 이것들 이외에도 사용 언어가 많다. 로마자는 음소문자(알파벳)의 일종이다. 보통 단순히 "알파벳"을 말하면 로마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래 알파벳의 뜻은 그리스 문자나 키릴 문자 등을 포함한 총칭이다. 현재, 라틴어의 23자에 J, U, W를 더한 26자를 기본으로 본다. 현대 영어에서 쓰이는 로마자는 다음과 같다. 영어에 쓰이는 글자라는 뜻에서 영자(英字)라고도 한다. 하지만 영어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므로 영자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일부 독일어, 아이슬란드어, 스웨덴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등에는 변형된 확장 문자를 사용한다. 로마자는 기원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 문자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에트루리아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원을 두었다. 에트루리아 문자의 26글자 중 로마인들은 21글자를 따왔다. 원래의 로마자에 사용된 글자는 A, B, C (/g/·/k/ 표시), D, E, F, Z (그리스 문자 Z/ze:ta/ 표기를 위함), H, I (/i/·/j/ 표시), K, L, M, N, O, P, Q, R (그리스 문자를 따라 오랫동안 P로 표기), S, T, V (/u/·/v/·/w/ 표시), X 이었다. 나중에 그리스어 Z(/ze:ta/)는 탈락되고 새 글자인 G가 그 자리에 추가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그리스를 정복한 후에는 그리스 문자에서 Y(/y/, 그리스 문자와 소리를 땀)와 Z를 따와 끝에 붙였다. 그리하여 로마자는 23글자가 되었다. 중세에는 두 소리를 가진 I를 구별해 쓰기 위해 J가 추가되고 세 소리를 가진 V를 구별하기 위해 U와 W가 추가되었다. 로마자는 중세 이후,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로망스어 뿐만 아니라 서유럽·중부 유럽의서방 기독교(천주교·개신교) 지역의 거의 모든 언어의 문자로 사용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언어로는 게르만어파, 슬라브어파의 일부, 발트어파, 켈트어파, 바스크어, 몰타어, 우랄어족의 일부 등이다. 서방 기독교 지역은 아니지만, 알바니아어와 루마니아어의 표기에서도 사용된다. 현대 이후 문자가 없는 언어가 새롭게 문자 표기법을 정하는 경우, 대부분은 로마자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구소련 지역의 소수 민족 언어 표기에는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다. 이미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로마자로 전환한 언어도 있다. 이것은 서양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와 천주교·개신교 선교사의 활동에 의한 것이 크다. 근대 이후 로마자로 전환한 언어로는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터키어 등이 있다. 구소련 해체 이후 아제리어, 우즈베크어와 투르크멘어 표기에도 사용되고 있다. 비교하기: 스칸디나비아반도 스칸디나비아반도 (Scandinavian Peninsula)는 유럽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발트해를 낀 반도이다. 북쪽의 러시아와 핀란드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덴마크에 거의 닿는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는 스칸디나비아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 노르웨이, 동쪽에 스웨덴이 있다.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유럽에서 가장 큰 반도이다. 길이는 약 1,850km이며, 폭은 약 370~805km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여러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노르웨이의 갈회피겐산이다. 유럽 최대의 빙하인 요스테달 빙하도 있다. 인구의 대부분은 반도의 남쪽 끝에 몰려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예테보리,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가장 큰 도시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기후는 매우 따뜻하다. 예를 들어 오슬로의 경우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5도 정도로 대한민국, 일본의 겨울 날씨와 비슷하다. 이는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중남미의 열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도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부 지역은 일본 도쿄보다도 겨울철 기후가 따뜻한 경우가 존재한다. 반면,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는 스발바르 제도, 스웨덴 북부, 핀란드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30~50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겨울에 영하 20도를 기록하거나 여름에 30도가 넘는 일이 많아졌다. 스칸디나비아산맥 스칸디나비아산맥 (, )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가로지르는 산맥이다. 이 산맥의 서쪽은 북해에까지 이르러 가파른 경사로 바다에 떨어져 유명한 노르웨이의 피오르 해안을 이룬다. 동쪽은 스웨덴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완만해지며 평지로 접어든다. 이 산맥의 북쪽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자연 국경 구실을 한다. 하지만 북쪽의 노르카프 가까이에서는 거의 언덕이나 구릉 수준으로 낮아진다. 이 산맥의 산은 그리 높지 않다. 노르웨이 남부의 갈회피겐산(Galdhøpiggen)이 스칸디나비아산맥의 최고봉으로 높이는 2,469 m 이다. 하지만 위도가 높고, 북대서양의 습기의 영향을 받음에 따라 빙원과 빙하가 많다. 스웨덴 쪽의 최고봉은 케브네카이세산(Kebnekaise)으로 높이는 2,111 m 이다. 지질학적으로 스칸디나비아산맥은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를 거쳐 대서양 건너의 북아메리카 애팔래치아산맥과 연결된다. 지질학자들은 고대의 판게아 초대륙이 나뉘기 전까지는 하나의 산맥이었으며, 현재의 산맥은 칼레도니아 조산 운동의 흔적이라 여긴다. 발트 3국 발트 3국() 또는 발트 국가는 발트해 동쪽의 세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발트해 연안국이라는 명칭이 좁은 의미에서 발트 3국에 한해 쓰이기도 한다. 발트 3국에 해당하는 나라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오늘날 독립국이지만 소련의 지배하에 있는 공화국이었던 시절에는 발트해 연안의 공화국(Baltic Republics)으로 불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핀란드도 때로 "발트 4국"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특히 소련의 입장에서). 예를 들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서 나치 독일은 핀란드를 발트해 연안국으로 거론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 핀란드는 발트해 연안국이 아니라 북유럽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핀란드의 입장이 점차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보통 발트 3국은 한데 묶여 거론되지만 이들이 한 집단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이 적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한다. 에스토니아는 노르딕 국가가 되고 싶어하며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동유럽과의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발트 3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반세기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흔히 동유럽의 일부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스웨덴·러시아·폴란드·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화·지리적으로 발트 3국은 북유럽에 속한다. 그래서 타협안으로 발트 3국을 이를 때 북동유럽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발트해 연안국은 넓은 의미에서는 발트 3국에 한정되지 않고 발트해에 접해 있는 모든 국가를 이룬다. 발트 3국 가까이에는 옛 동프로이센의 북쪽 부분에 해당하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가 있다. 발트 3국은 세 나라의 면적을 모두 합쳐도 러시아의 100분의 1 가량에 불과한 작은 나라들이며, 발트해 동부 연안의 저평한 지역을 차지한다. 지형은 대부분의 지역이 매우 평탄하며, 가장 높은 곳도 300m 가량에 불과하다. 기후는 냉대에 속하여 춥고 긴 겨울을 가지고 있으나, 대서양과 발트해의 영향도 강하므로 위도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화하여,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해서는 훨씬 따뜻하다. 발트 3국의 공동 역사는 13세기경 독일계 검의 형제 기사단(Sword Brethren)이 기독교와 봉건주의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덴마크·스웨덴·폴란드·러시아·독일이 발트 3국 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1582년에는 에스토니아 북부를 제외한 발트 3국 지역 거의 전체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에는 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독일인 제후들과 스웨덴인 지배층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자치권을 받아 독일 문화가 많이 퍼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발트 3국은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이 발트 3국 거의 모두를 합병하는 것에 동의했다. 단기간의 소련 통치 후 독일이 침공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다시 소련이 침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발트 3국은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다. 2차대전 종전 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발트 3국은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다. 이들은 1990년에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소련은 1991년 9월 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발트 3국은 신생국이 아니라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존재했던 독립국이 복원된 것이라고 자처했다. 이로써 그들은 냉전 시대 소련의 지배가 불법 점령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재차 강조하였다. 오늘날 발트 3국은 자유 민주주의 의회 공화국으로 시장 경제는 고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02년 발트 3국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 연합(EU)에 가입을 신청함으로써 오랜 정치적 숙원이자 소련 탈퇴 후 주된 목표이던 서유럽과의 통합 달성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리하여 2004년 3월 29일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2004년 5월 1일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발트 3국은 문화·역사적으로 공통점도 많지만 그들의 언어는 두개의 전혀 다른 어족에 속한다. 또 기독교의 서로 다른 교파에 속해있다. 중세 때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계속된 독일계와 19세기 이후의 러시아계에 의한 지배의 영향으로 나이든 세대의 많은 수가 아직도 제2언어로 독일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또 역사적으로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 또 소련에 병합된 이후로 이들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는 러시아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러시아인이 중요한 소수민족 집단이 되었다. 소련 지배의 이러한 유산으로 독립 후 민감한 민족문제의 불씨를 남겨두고 있다. 1992년에 발트 3국은 음악 문화 발전을 위한 국제 협력적 지원의 공로로 폴라음악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다. 게르만어파 게르만어파(-語派 Germanic languages)는 인도유럽어족의 한 어파이다. 로마 제국의 북쪽 변경에 정착한 게르만인들이 게르만 제어를 사용했다. 몇 가지 독특한 언어학적 특성을 지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림의 법칙으로 알려진 자음 추이이다. 일찍이 게르만어파의 몇몇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룬 문자를 개발했지만 그 사용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동게르만어군의 조어(祖語)는 울필라스(Ulfilas) 주교가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하려 고안한 고트 문자를 썼다. 그 후 모국어인 게르만어 외에도 라틴어를 구사하게 된 기독교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게르만어를 약간 수정된 로마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러 게르만 제어는 보통 쓰이는 로마 문자의 자모에 새 글자나 발음 구별 부호를 도입했다. 그 예로 움라우트, 에스체트 (ß), Ø, Æ, Å, Ð, ȝ, 룬 문자에서 따온 Þ·ƿ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어 인쇄에는 (Fraktur)라는 독특한 인쇄체가 사용되었다. 게르만어파의 고유한 특성은 다음과 같다. 게르만어파는 모두 가상의 게르만 조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보통 연속체를 이루어 가까운 방언은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반면, 멀리 떨어진 방언은 서로 알아듣기 힘든 경향이 있다. 이 가계도는 주요 언어와 특기할 만한 언어만이 표시되었다. 발칸반도 발칸반도()는 유럽의 남동부에 있는 반도이다.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에 둘러싸였다. 유럽과 확실하게 구분짓는 지협이 없기 때문에 발칸반도의 범위와 지형적 경계를 정하는 기준이 언제나 일정하지는 않지만 북쪽 경계로 도나우강을 삼기도 한다. 보통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터키의 유럽 부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나라들이 발칸반도에 포함된다. 루마니아가 포함되기도 한다. 고대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세력이 뒤섞이며 오늘날 민족, 언어, 종교, 문화, 정치적으로 복잡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발칸반도의 이름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친 발칸산맥에서 유래하였다. 발칸은 '산'을 뜻하는 터키어이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 이후로 산맥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반도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19세기 이후 확대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래 '유럽의 화약고'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고, 보다 최근에는 구유고슬라비아의 분열으로 발칸이라는 이름이 발칸화라는 용어를 낳았다. 이처럼 발칸이라는 용어는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발칸반도라는 이름 대신 '동남유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발칸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의 지역을 말한다.이에 따르면 발칸반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코소보를 전부 포함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을 포괄한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여기에 속한다. 터키의 동트라키아 지방, 루마니아의 북도브루자 지방, 슬로베니아의 프리모르스카 지방,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과 고리치아가 발칸반도에 속하는 영역이다. 영토의 작은 부분만이 발칸반도에 속하기 때문에, 보통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는 발칸 국가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유럽 대륙과 발칸반도를 구분하는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까지 포괄하여 발칸반도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때 발칸반도의 범위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우크라이나의 이남이 된다. 매우 드물게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를 잇는 직선의 이남으로 발칸반도를 정의하기도 한다. 남유럽을 이루는 세 반도 중 하나로서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가 둘러싸고 있다. 발칸반도의 대부분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디나르알프스산맥이 발칸 반도의 7개 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알바니아)을 지난다. 불가리아 중부와 세르비아 동부에 걸친 발칸산맥은 발칸반도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산맥이다. 발칸산맥 남쪽으로는 그리스에 인접한 로도피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루마니아를 가로지르는 트란실바니아알프스산맥이 있다. 발칸반도에서 루마니아를 제외하는 관점에서는 트란실바니아알프스산맥은 발칸반도에 포함되지 않는다. 산맥들은 주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사선으로 뻗어 있다. 발칸반도 최대의 호수인 슈코더르호는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있다. 람사르 협약이 지정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이며, 유럽 최대의 조류 보호 구역이기도 하다. 보통 발칸반도에 포함되는 국가는 다음과 같다. 와 도 때로 발칸반도 국가에 포함된다. 발칸반도 국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이웃하거나 발칸반도 지역에 지정학적·문화적·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다음과 같다. 발칸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으로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의 복잡한 민족, 문화, 영토 문제는 발칸반도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18세기 말에 발칸반도는 크게 세 개의 세력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계속 영유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내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몬테네그로와 라구사 공화국 같은 작은 나라와 오스만 제국의 속령인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정복활동은 발칸반도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1797년), 라구사 공화국(1808년)이 멸망하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발칸반도의 영토를 잃는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성립된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았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던 영역과 라구사 등을 새로 장악함으로써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시르미아 등을 얻는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817년 세르비아가 자치권을 얻고 1821년 그리스가 독립하는 등 발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었고, 왈라키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도 1861년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 루마니아 공국이 된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발칸반도 지역은 독립 국가가 되거나 자치령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한 이후 발칸반도로 관심을 돌려 발칸반도에서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고, 러시아도 범슬라브주의에 따라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1877년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승리한다. 그 결과(산스테파노 조약)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져 루마니아 공국은 루마니아 왕국이 되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완전 독립한다. 불가리아 역시 자치권을 얻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국, 독일 등의 유럽 열강들은 187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주재로 베를린 회의를 열어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한다. 이 회의의 결과 발칸 지역에서의 거대 슬라브 국가의 출현이 방지되고, 오스만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지방을 돌려 받음으로써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약받는다. 중재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얻고, 영국은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계속되어, 1881년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에게 테살리아를 양도한다. 1908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불가리아 왕국이 된다. 한편 같은 해 오스만 제국에서는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켜 압뒬하미트 2세가 퇴위하고 미드하트 헌법이 부활한다. 이에 따라 청년 튀르크당은 오스만 제국의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튀르크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발칸반도의 다른 민족들의 반발이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리비아를 얻기 위해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이 이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허약함이 드러났고, 이는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선전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는 발칸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제1차 발칸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바니아도 독립을 위해 발칸 동맹군 편에서 싸우게 된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 아프리카에 있었던 까닭에, 두 달만에 오스만 제국은 대패한다.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수도 이스탄불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으며, 알바니아도 독립국이 된다.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남은 영토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나누어 가지게 되는데, 영토 분배 과정에서 발칸 동맹 국가 간 불화가 생기게 되면서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난다. 제 1차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그리스는 크레타섬을, 불가리아는 남루멜리아와 동트라키아,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남은 일부를 차지한다. 불가리아의 지나친 팽창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와 함께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에 맞섰다. 1913년 불가리아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발발한 제2차 발칸 전쟁은 불가리아에 대항하여 알바니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모든 국가가 싸우는 양상이 되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이 영토 회복을 위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을 하게 된다. 불가리아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어 제 1차 발칸 전쟁으로 얻었던 모든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세르비아와 그리스, 루마니아는 영토를 확장한다. 오스만 제국도 조약을 통해 잃었던 영토를 일부 회복한다. 발칸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에 보스니아를 완전 병합하고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제 1, 2차 발칸 전쟁을 거쳐 세르비아가 신흥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슬라브계 왕국이었던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발칸반도 내의 슬라브 민족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려는 구상이 있었다. 이러한 범슬라브주의는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 슬라브 민족의 이탈을 선동하여 제국의 붕괴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세르비아를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고, 갖가지 조약과 동맹 관계가 작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원수 관계가 된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동맹국으로 참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발칸반도는 전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동맹국이 패배하게 되면서 발칸반도의 정치적 지도는 완전히 새로 그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신생 국가들이 새로 생겨났고, 세르비아는 이들 신생 국가 중 상당수를 흡수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함으로써 범슬라브주의를 실현한다. 그리스 역시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까지도 그리스에게 내어 준다. 그리스는 더 나아가 패전한 오스만 제국을 침략하여 대그리스주의를 실현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였으며, 1919년 그리스-터키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전함으로써 대그리스주의는 몰락하고, 오스만 제국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된 후 로잔 조약을 맺음으로써 세브르 조약을 폐기한다. 터키는 여기서 오늘날 발칸반도에서 가지고 있는 영토를 확보한다. 그리스와 터키의 불편한 관계는 여기서 비롯되어 뒤의 키프로스 분쟁으로 이어진다. 이탈리아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이스트라반도를 확보한다. 1939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병합한다. 1940년 11월 루마니아 왕국은 추축국에 가입하고 1941년 4월에 불가리아 왕국도 추축국에 가입한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국가가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한편 대전 발발 초, 추축국이 승전을 이어가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추축국의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발로 3일만에 탈퇴하였고, 이는 추축국에게 침략 구실을 주게 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4월 추축국의 점령으로 멸망한다. 그리스도 추축국의 침략을 받아 저항하였으나 그리스 공방전과 크레타 전투의 결과 추축국에 완전히 점령되었다. 이로써 발칸반도 전 지역이 추축국의 지배 하에 놓인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의 영토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에 의해 분할되고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추축국의 괴뢰국가가 된다.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규모의 인종 청소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같은 해 말 소련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침공한다. 소련 침공 직전 불가리아는 중립국으로 전환하지만, 소련에 점령당해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다. 루마니아도 연합국으로 전환한다.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로 진격하자 독일군은 점차 후퇴하게 되고,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게릴라도 가세해 나치 독일을 완전히 몰아낸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추축국이 패배하게 됨으로써 발칸반도의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은 소련의 위성국이 된다. 유고슬라비아도 티토의 지도 아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되었으나,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소련과 독립적인 티토주의를 펼치게 된다. 남슬라브어군, 그리스어, 알바니아어, 터키어, 동부 로망스어군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발칸반도는 역사적으로 비잔티움 제국(동방 정교회), 오스만 제국(이슬람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로마 가톨릭교회) 등 종교적으로 다양한 국가의 활동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종교 구성이 복잡하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 )은 1943년에서 1992년까지 발칸 반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유고슬라비아)과 대비해서 구유고슬라비아 연방, 줄여서 구유고슬라비아 또는 구유고 연방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고슬라비아로 가장 많이 불리고 있다. 1943년 11월 29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야이체에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 뒤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소련의 지원을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유고슬라비아)을 수립했다. 1946년에는 공산주의 신헌법을 제정했으며 1974년에는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를 연방직할 자치주로 승격시켰다. 국가원수에 취임한 티토는 1948년 민족주의를 주장, 소련의 지도권을 부인하다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후 "독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지향하였다. 비동맹 중립주의, 미국·소련의 권력 정치 배격으로 대표되는 티토주의는 동구권에서 서방권 측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 이단자로 규정되었으나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점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중앙유럽의 여타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경제상호원조회의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도 아래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그래서 티토의 자주적인 정치노선을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전개된 브레즈네프·코시긴 등 소련 수뇌부와 티토 간의 상호 교환 방문과 1977년 소련의 불간섭 원칙의 확인으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었으며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기업의 영리·이윤제 등 시장경제 구조를 도입, 독자적인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함으로써 197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남유럽의 가장 부유한 공산 국가로 발전했다. 1980년 5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과 함께 분열 조짐을 보이며 연방 간부 회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연방의회는 연방원과 공화국·자치주원의 양원제였다. 1987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촉발되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중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자 유고 연방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분리 독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치른 후 1992년 남은 공화국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유고슬라비아)을 결성하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영토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흔히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1992년 연방이 해체됨에 따라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6개 구성 공화국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2001년 일어났던 신 유고 연방의 알바니아계 UCPMB(프레셰보·메드베자·부야노바츠 해방군)의 봉기도 추가될 수 있다. 처음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 이탈을 선언한 후, 이를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점차 민족 분규의 성격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프라뇨 투지만 두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대결 양상을 띠었다. 보스니아에서는 이슬람교도인 보스니아인들이 이 틈새에 끼어 3파전이 되었다. 이는 민족청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되었다. 코소보와 북마케도니아에서는 슬라브계 정부와 자치 내지 독립을 추구한 알바니아계 소수 주민들의 인종·정치적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패배로 끝났으며 보스니아와 북마케도니아에서는 국제 협상으로 끝났다. UCPMB 봉기는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전,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혼재하고 있었다. 독립국이었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보이보디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유럽 영토였던 마케도니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는 19세기 말에서부터 확산된 슬라브주의 기치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결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추축국에게 점령되어 크로아티아계의 파시스트 우스타샤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우스타샤는 약 33-39만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하였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수립된 뒤 1980년대까지 이 지역은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공존하며 사는 지역이었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민족을 앞세우는 정치세력들을 원만히 중재하던 정치 지도력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새 대통령이 된 밀로셰비치는 1987년부터 공공연히 세르비아인의 우월을 강조하는 세르비아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전체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무슬림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밀로세비치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있었던 우스타냐의 학살을 교묘히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인을 탄압하였다. 세르비아주의의 팽배는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한 다른 민족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점차 상호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각 공화국들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에는 대량학살을 동반한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시작된 전쟁은 그 해 보스니아 전역으로 퍼졌으며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확산되었다. 특히 세르비아의 지도자들은 인종 분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다. 1992년 3월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대량 학살을 막지는 못했다. 국제 사회는 이러한 대량학살을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연방은 여전히 주권국가로서 인정되고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은 6개의 공화국을 대표한 국가원수의 지위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14차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위원들이 탈당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의 과정에 접어들었다. 1991년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첫 시작인 슬로베니아 전쟁(십일 전쟁)이 슬로베니아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지역의 진압을 목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슬로베니아 국경에 투입하였다. 이에 슬로베니아는 국경수비대와 슬로베니아 지역방위군으로 대항하였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도로를 차단하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수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으며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1년 7월 9일 브리유니 섬에서 정전 협상이 시작되자 양측은 교전을 중단하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3개월 간의 휴전을 선언하였다. 협상 결과 인민군은 10월 26일까지 슬로베니아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슬로베니아 전쟁에 이어 연달아 일어난 크로아티아 전쟁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반대하면서 발생하였다. 크로아티아 지역에서는 슬로베니아 전쟁 이전부터 세르비아인계의 독립 반대 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는 새롭게 제정된 크로아티아 헌법 때문이었다. 크로아티아 헌법은 세르비아계를 다른 국가 출신들과 동일하게 "자국민"으로 명시하였고 이는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내에서 "소수민족"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을 의미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성립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하여 소수민족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르비아계는 크로아티아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체에서 세르비아계는 다수민족이었고 연방정부 역시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연방정부의 통제하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개별 공화국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연방정부는 유엔의 묵인 아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역 방위군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였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한 군대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북부의 부코바르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인 남부의 두브로브니크를 파괴하였다. 크로아티아 전쟁 초기 세르비아계의 이러한 공격에 대해 서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방관하였는데, 영국의 언론인 존 V A 파인이 쓴 다음의 글은 당시 서유럽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서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방관아래 벌어진 크로아티아 전쟁은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측의 전쟁은 1995년 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계에게 승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91년 3월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해체 과정을 위한 카라도르데보 조약을 놓고 협상하였다. 그러나 두 대통령의 실제 관심은 보스니아의 분할을 어찌할 것인지에 쏠려있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는 스르프스카 크라예냐 공화국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와 교전하였다. 크로아티아 중부는 스릅스카 크라이나의 참모총장이 된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크로아티아의 여러 곳을 점령하고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부코바르 학살 과 스카브르냐 학살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당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밀로셰비치와 믈라디치를 기소하였다. 밀로셰비치는 형 확정 뒤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며, 믈라디치는 2011년 5월 체포되었다. 한편, 1992년 유엔은 민간인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내에 유엔 관할 구역을 설정하고 1995년까지 관리하였다. 1992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자그레브를 중심으로한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한 축이 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을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인이 다른 한 축이 된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점령지역에서 보스니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인종주의에 의한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1994년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선언하고 1995년 세르비아계의 주요 군사 거점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1995년 12월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합병됨으로써 보스니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1995년에서 2002년에 걸쳐 코소보에서는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정부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소수 민족이었던 알바니아인이 독립을 요구하였다. 1995년부터 제한적인 전투가 벌어져왔던 코소보 전쟁은 1998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001년에는 마케도니아 전쟁과 남 세르비아 전쟁이 발생하였다.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코소보에 개입하여 세르비아군을 격퇴시켰다. 한편 마케도니아와 남 세르비아의 무력 충돌은 다자간 협상을 통해 코소보 유엔 잠정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 아래 코소보군을 설립하여 해당 지역의 방위를 맞게 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코소보는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어 2004년 코소보 소요에서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무력충돌이 있었으며 2008년 코소보의 분리 독립 때에도 소요가 있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중, 마케도니아는 독립하고 유고슬라비아는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여 독립하였다. 코소보 전쟁이 진행되자 남 세르비아에 알바니아군이 침입하면서 남 세르비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2015년 2월 3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세르비아군이 내전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지만, 점령지에서 크로아티아 인의 '전체 또는 일부'를 학살할 의도가 있었음을 크로아티아가 입증하지 못했다며 세르비아의 학살 혐의가 없다고 판시했다.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는 일곱 나라로 분리됐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많은 인권 유린과 파괴 행위로 점철되면서 긴 시간 동안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국 전체를 몰락시켰다. 전쟁의 장기화로 피해가 커진 것에 대하여 서유럽 국가들에게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1991년 당시 진행되고 있던 동독의 붕괴, 걸프 전쟁 등으로 인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유지를 강력히 희망하였고, 이것이 오히려 전쟁을 장기화 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문명 충돌론자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서유럽에서는 2차세계 대전 이전에 이미 지나간 민족주의의 때늦은 발현으로 설명하였다. 즉, 과거의 해묵은 원한과 공산주의에 의해 지체된 역사 과정으로 인해 뒤늦게 나타난 민족주의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이 문명 충돌론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브 미쇼는 이러한 문명 충돌론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결과로 세워진 신생 국가들 역시 다민족 국가라는 점과 전쟁 시기 이들 국가의 지배세력은 여전히 구 공산당 출신의 관리였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분석에 반대한다. 이브 미쇼는 옥스퍼드 대학 러프닉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공산국가 체계가 무너지고 난 뒤에도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려는 관리들이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저지른 전쟁 범죄라 주장한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인터넷은 전쟁 지역의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중앙 권력의 부재로 인해 검열이 사라지자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주민들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주고 받았다. 세뮤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을 따르는 측에서는 인종 청소가 민족국가의 발현 과정에서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인종청소의 주된 원인은 정치 권력과 경제 자원을 둘러싼 이익 집단의 충돌이며 인종이란 구분짓기 편리한 구분선에 불과하였다고 지적한다.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을 종결한 데이턴 협약의 실무 담당자였던 리처드 홀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민족 청소 민족 청소(民族淸掃, ) 또는 인종 청소(人種淸掃)는 이방인 또는 적대적인 민족을 배제·말살함으로써 그 민족이나 인종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 용어에 해당하는 정책은 그 강도에 따라 긴 연속체를 이루는데 경미한 쪽은 강제 이민과 인구 이동 정책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데 반해 심한 쪽은 강제 이주와 대량 학살에 통한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구유고연방 방송·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던 세르비아어·크로아티아어의 ‘etničko čišćenje’를 영어로 ‘ethnic cleansing’이라 대략적으로 번역한데서 나온 신조어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민족 청소라 부르는 개념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 예가 많아 많은 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청소"라는 말을 악성 정책에 사용한다 하여 이 용어 사용을 꺼리는 이들도 많다. "청소"라는 말을 이런 용도로 처음 사용한 것은 나치 독일이었다. 이른바 "최종 해결"을 준비하면서 청소, 이주, 정화(淨化) 등의 용어를 직접적인 단어 대신에 사용했던 것이다. 노르드인 노르드인(, ) 또는 북게르만족(north Germanic tribes)은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고대 노르드어를 사용했던 게르만족 일파를 가리킨다. 이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의 북게르만어군의 갈래로, 현대 여러 스칸디나비아 어들의 초기 형태였다. "노르드인"이라는 이름은 ‘북방에서 온 사람들’(people from the North)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들은 핀란드를 비롯해 서쪽으로 캐나다와 그린란드,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에스토니아에 까지 진출하여 각지에서 ‘노르딕 국가’(Norse Countries)들을 만들었다. 노르드인은 정착 지역의 선주민족과 혼합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기도 했다. 예컨대 프랑스 해안에 정착한 이들은 노르만인이 되었고, 그들이 살았던 지역이 오늘날의 노르망디다. 노르드인은 북게르만어에 속하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를 사용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는 나중에 덴마크어와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 분기되었다. 고대 프랑크어(고대 서유럽의 언어)인 "Nortmann"(Northman이라는 의미)은 라틴어에서 "노르마니"("Normanni")로 변이되었고, 고대 프랑스어로 ‘"노흐망"’("Normands")이 되었다. 여기에서 ‘노르만인’이라는 이름과 ‘노르망디’라는 이름이 탄생했으며, 이것은 10세기 ‘노스멘’(Norsemen)의 정착으로 고착되었다. 고대 노르드 어에서, 용어 "norrœnir menn"("northern men")은 현대 영어의 이름인 "Norsemen"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스웨덴의, 덴마크의, 노르웨이의, 페로 제도의, 아이슬랜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현대 스칸디나비아 어군은 Norsmen에 대한 공통어를 가지고 있다. "nordbo"는 스웨덴어로 "nordborna", 덴마크어로 "nordboerne", 노르웨이어로 "nordboerne" 또는 "nordbuane"로 모두 복수형이다. 이 말은 노르딕 국가에 사는 고대 그리고 현대인들과 스칸디나비아의 독일계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현대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스칸디나버"("skandinaver", 영어로 Scandinavians라는 의미)로 칭한다.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로 "비킹에"("Vikinger") 그리고 스웨덴어로 "비킹에"("Vikingar")다. 이 말을 현지인은 ‘노스맨’(Norsemen)에 상응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는다. 바이킹은 특정 활동 / 점령(약탈)으로 사용되며,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바이킹족들은 단순히 약탈(‘바이킹 가기’로 알려진)에 참여하는 사람(민족, 또는 혈통)일 뿐이다. 때로는 핀란드도 ‘스칸디나비아 국가’("Scandinavian country")로 언급된다. 핀란드어는 독일어 또는 심지어 인도 유럽어도 아니지만, 핀란드는 약 6백년(12세기 말부터 1809년까지)동안 스웨덴의 일부였고, 약 핀란드 인구 중 6%가 여전히 제1 국어로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다. 올란드 제도에서는 스웨덴어가 여전히 다수 언어이지만, 핀란드 어디를 가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스웨덴어 화자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그리고 파로 제도도 지리적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떨어져 있다. "노르딕 국가"("Nordic countries")라는 용어는 그러므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파로 제도 그리고 핀란드)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바이킹 바이킹(; ; ; ; ; )은 노르드어 비킹그()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들은 게르만족 노르드인이고, 노르드어를 사용하며, 고향 땅인 스칸디나비아로부터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 북유럽과 중앙유럽까지 항해하며 교역하거나 약탈로 활보한 바닷사람을 가리켜 바이킹이라고 부른다. 바이킹이 활동한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한다. 노르드인들의 군사적 상업적 성장과 인구 팽창은 중세 스칸디나비아 뿐 아니라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 섬, 프랑스, 키예프 루시, 시칠리아 등 광범한 지역에 중요한 요소로 영향을 미쳤다. 롱쉽으로 대표되는 진보한 항해 기술로 인하여, 본거지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바이킹의 활동이 미친 적도 있었다. 바다와 강을 통한 탐험과 식민의 시기가 지난 뒤 바이킹들은 북서유럽, 우크라이나, 북대서양 도서, 멀리는 북아메리카 북동해안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동안 노르드 문화가 다른 지역에 폭넓게 보급됨은 물론 역으로 외래 문화도 스칸디나비아에 영향을 미쳤다.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작은 만"·"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의 "vík"에 접미사 "-ing"이 붙은 데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만 쪽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라는 뜻이다.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룬 문자로 새겨진 금석문에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은 6세기 또는 7세기의 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 시 "위드시스(Widsith)"이다. 때문에 또 하나의 설은 고대 영어의 "wíc" 즉 "무역도시"("마을"을 뜻하는 라틴어의 "vic"에서 유래)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떠나다."라는 뜻의 "av"vike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고향을 떠나 바다로 나간 이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작가 얀 기유(Jan Guillou)에 의하면 바이킹이라는 말을 긍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Erik Gustaf Geijer)가〈바이킹(The Viking)〉이라는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오늘날 바이킹을 용감하고 호전적인 해양 전사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와 관련이 깊다. 즉 1809년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600년간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자 이를 회복할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용감하고 영화로운 과거 역사를 창조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예이예르가 회원으로 있던 예타회(Geatish Society)라는 단체는 용맹스런 바이킹 역사 창조에 큰 역할을 했다. 역시 예타회 회원이었던 작가 에사이아스 텡네르(Esaias Tegnér)는 사가문학 작품〈프리티오프 사가(Frithiofs Saga)〉를 근대적으로 개작해 북유럽과 영국,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어 바이킹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이킹의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은 헤데뷔(Hedeby)와 같은 큰 무역 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헤데뷔는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1050년경 노르웨이인들 사이의 내분으로 파괴될 때까지 문화의 십자로 역할을 했다. 최초의 바이킹 약탈에 대한 기록은 앵글로색슨 전기에 나오는데 789년 포틀랜드(Portland)가 습격당했다는 기록이다. 좀 더 확실한 기록은 793년 잉글랜드 동쪽 해안의 린디스판(Lindisfarne)에 있는 수도원이 약탈당했다는 기록이다(보통 이를 최초의 바이킹 약탈 기록으로 거론한다.). 그 후 200년간 유럽사는 바이킹과 그들의 약탈에 대한 기록으로 점철되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안이 바이킹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잉글랜드 영토의 태반이 바이킹(데인족) 지배하에 들어갔다(데인로 참조). 바이킹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발트 해 연안,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을 장악하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대형 보트를 몰고 프랑스의 론 강이나 센 강을 비롯한 내륙 수로를 따라 공격을 감행했다. 샤를 3세(재위:898년 ~ 922년)의 통치 기간 동안에,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롤로와 덴마크 출신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파리로부터 흐르는 센 강 하류의 양안에 정착하였고, 그로 인해 그 지역의 이름이 노르망디가 되었다.(→중세 프랑스) 지중해와 동쪽 카스피 해에까지 바이킹 습격이 있었다.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로는 잉글랜드의 요르비크(현 요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이 있다.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 프랑스, 잉글랜드 남쪽에 진출했다. 1013년 - 1016년에는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있었다.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동쪽 발트족과 슬라브족의 땅(오늘날의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진출해 루리크가 최초의 슬라브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의 강을 따라 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은 주로 북서쪽과 서쪽으로 향해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아일랜드, 영국 북부와 아이슬란드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무인도거나 거주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노르웨이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다. 붉은 에이리크는 그린란드를 발견하여 정착이 이루어졌다. 1000년경에는 비아르니 헤리올프손(Bjarni Herjólfsson)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과 토르핀 칼세프니(Þórfinnur Karlsefni)가 그린란드로부터 정착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발견한 땅을 빈란드(Vinland)라고 불렀다. 뉴펀들랜드 섬 북쪽 반도에 있는 랑스 오 메도즈 근처에 소규모 정착촌이 시작되었지만 원주민들과의 마찰과 기후 변화로 몇 세대 이상은 지속되진 못하였다. 랑스 오 메도즈의 고고학 유적지는 현재 유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바이킹의 해외 진출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북반구가 수백 년 동안 유난히 추워지게 된 소(小)빙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린란드의 식민지는 몇백 년을 못가고 몰락했으며 바이킹의 서부 진출도 멈추었고 바이킹의 고향도 타격을 받았다. 에이리크 힌 라우디 에이리크 힌 라우디 토르발드손(, , 950년 ~ 1005년경)는 바이킹이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노르드인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960년경 에이리크의 아버지가 살인사건 때문에 노르웨이를 도주하게 되어 가족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였다. 982년에는 아들 에이리크 역시 살인사건 때문에 추방당할 처지에 처하자 서쪽으로 새로 정착할 땅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군비외른(Gunnbjörn)이라는 탐험가가 아이슬란드 서쪽에 있는 땅을 발견, 보고한 바 있어 이를 찾아나선 것이다. 에이리크는 이 땅에 "푸른 땅"이라는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붉은 에이리크 사가〉에 의하면 3년간의 추방기간동안 그린란드의 해안을 탐험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에 돌아와서는 그린란드를 대대로 선전해 985년 많은 수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그린란드에 들어갔다. 에이리크는 프레위디스(Freydís)라는 딸과 탐험가 레이프 에이릭손(Leifr Eiríksson), 토르발드(Þorvaldr), 토르스테인(Þorsteinn) 등 세 아들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 레이프와 달리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노르드 신화 노르드 신화( ── 神話, , , , , , ) 혹은 (협의의) 스칸디나비아 신화는 기독교 개종 이전 스칸디나비아와 북부 유럽(오늘날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그리고 그린란드 일부, 북부 독일 등지)에 살았던 게르만인의 일파인 노르드인들의 종교·신앙·전설 등을 일컫는다. 노르드 신화는 게르만 신화의 연속이며 유럽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옛 종교가 계속 버텨서 노르드 신화가 게르만 신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한국어권에서는 흔히 북유럽 신화라고도 한다. 노르드 신화의 문헌에는 온갖 다양한 신들이 등장한다. 묠니르를 들고 적들의 머리를 깨부수는 인류의 수호신 토르, 애꾸눈에 도래까마귀를 부리며 세계의 지식을 탐욕적으로 추구하는 오딘, 깃털 망토를 걸치고 세이드라는 주술을 부리는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 겨울의 늑대 울음소리를 좋아하는 잔인한 스키의 여신 스카디, 바다와 불 및 땅의 지력을 상징하는 강력한 신 뇨르드, 뇨르드의 아들이며 날씨와 농사와 관계되어 인류에게 기쁨을 주는 프레이, 영원한 젊음을 주는 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관리하는 여신 이둔, 아홉 명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금으로 된 이빨을 가졌다는 정체불명 괴상한 헤임달, 오딘의 아내 프리그와 그 아름다운 아들 발드르, 그리고 발드르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신들에게 파멸을 가져오는 요툰 출신의 로키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많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노르드 신화들의 내용은 대부분 신들이 다른 종족(인간, 요툰, 드베르그 등)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애인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되거나 원수가 되기도 한다. 노르드 신화의 세계관은 아홉 개의 세계가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매달려 있다고 하는데, 각 세계의 구성은 전승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또 시간, 천체, 물리현상을 비롯한 다양한 개념들이 의인화되어 신 또는 다른 존재로 나타난다. 또 다양한 형태의 창조신화들이 변주되는데, 세상은 맨 처음 태초의 존재 위미르의 몸을 찢어 그 시체로 만들어졌고, 최초의 인간 한 쌍 아스크와 엠블라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세계는 언젠가 라그나로크라는 말세가 오면 망하고 새로이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라그나로크 때 신들과 신들에 적대하는 모든 존재들은 건곤일척의 대전쟁을 벌이고, 세상은 불길에 휩싸인 뒤 물에 잠겨 멸망한다. 그 뒤 살아남은 소수의 신들이 다시 만나고, 푸르고 비옥한 새 땅이 솟아나며, 리프와 리프트라시르라는 한 쌍의 부부로부터 다시 세상에 인간들이 번성할 것이다. 노르드 신화는 17세기부터 학자적 관심의 주제가 되어 왔다. 비교신화학 및 역사언어학의 성과를 통하여 학자들은 노르드 신화 및 그 원류인 게르만 신화가 태고의 인도유럽조어 사용자들의 공통신화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낭만주의적 바이킹 부흥 문화의 결과 다양한 근현대 대중문화에 노르드 신화의 영향이 더해졌으며, 게르만 신이교주의와 같은 신흥종교에서는 고대의 종교적 맥락까지 부활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에 대해 현존하는 기록 대부분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공식적으로 북유럽이 기독교 사회가 되어버린 이후에도 2세기 이상 구전되며 보존되어 있었다. 13세기에 학자들은 이 구두로 남아 있었던 신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 이전의 신들이 실제 역사적 인물로 추적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학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을 통해 《신 에다》(산문 형식의 에다로 새로 지은 에다)나 《헤임스크링글라》가 쓰여졌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 개종 이후에 자료를 남겼지만 옛 신들을 악마로 매도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탐구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노르드 이외의 초기 게르만 사회의 신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는 《앵글로색슨 전기》, 《베오울프》,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데인인의 사적》 등이 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도 제한적으로나마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에다”라고 불리는 두 작품, 즉 스노리의《신 에다》와 《고 에다》가 노르드 신화 연구에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신 에다》(산문 에다)를 13세기 초기에 쓴 스노리 스투를루손이라는 인물은 뛰어난 시인이자, 지도자로 아이슬란드의 외교관이기도 했다. 이 ‘에다’는 본래 그 기법을 배우고자 하는 시인들을 위한 입문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케닝(완곡표현 기법)이나 시에 담긴 은유 표현을 산문 형식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산문체의 이야기가 북유럽의 신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체계적이고, 시작과 끝을 일관되게 한 것이다. 《고 에다》(운문 에다)는 산문 에다가 쓰여진 다음 대략 50년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 에다’는 29절의 긴 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1번 시는 게르만의 신들을 다룬 것으로, 나머지는 《볼숭 일족의 사가》의 시구르드(중세 독일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인공 지크프리트)와 같은 전설적인 영웅에 대해 쓴 것이다. 학자들은 이 ‘에다’를 다른 ‘에다’ 보다 이후의 시대에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야기의 언어와 시의 형식으로 비추어 볼 때 다른 에다가 쓰여진 시대보다 1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원전 외에도 9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북유럽에서 편찬된 《사가》나 《사트르》, 《스칼드》 등에도 북유럽의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들로부터 엿볼 수 있는 신화도 존재한다. 그 밖에도 스칸디나비아의 전승 등에도 남아 있는 전설이 있다. 그중 일부는 고대 영어로 쓰여진 ‘핀네스버그 단편’에 대한 이야기와 ‘데오르의 한탄’ 중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이야기에 대한 언급 등 오래된 옛 게르만 문학에 나타나는 전설들이 뒷받침되고 있다. 수많은 단편적 문헌이나 전설이 남아 있을 때 학자들이 시의 뒤에 숨어있는 의미와 표현을 추론할 수 있다. 더불어 스칸디나비아에는 신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지명들이 많이 존재한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는 게르만족의 기독교 이전 기록을 많이 수집했다고 하지만 이는 그의 사후 다른 이들이 없애 버렸다. 레이크 룬돌(Rök Runestone)과 크비네비 목걸이(Kvinneby amulet)처럼 표면에 새겨져 있는 극소수의 룬 문자의 비문에도 신화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 토르의 낚시 여행과 볼숭 사가의 장면, 오딘과 슬레이프니르와 펜리르에 삼켜지는 오딘 등 북유럽 신화의 장면을 그린 룬 비석이나 그림 비석도 있다. 현존하는 훈네스타트 비석(Hunnestad Monument) 중 하나에는 늑대에 걸터앉아 발드르의 장례식에 가는 히로킨이 그려져 있다. 덴마크에는 말린 콧수염이 나 있고, 입을 닫고 있는 로키의 그림이 그려진 이미지 스톤이 존재하며, 영국의 고스포스 십자가 비석에도 복잡하게 뒤얽힌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한 외눈박이 오딘과 망치를 든 토르, 직립한 남근의 프레이 등 신들을 그린 작은 입상도 존재한다. 가톨릭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도 게르만 민족의 신앙에 대한 기술을 남겼다.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데인인의 사적》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신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아담 폰 브레멘은 《함부르크 교회사》를 저술했다. 또한 이러한 북유럽에서 저술된 것 외에도, 1세기경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저술한 《게르마니아》와 이븐 파들란의 《볼가 불가르 여행기》 등에도 게르만 민족의 신앙 진술을 남겨 두었다. 북방 민족은 세상에 아홉 개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1) 아스가르드 - 아스의 세계를 일컫는다. 오딘의 거성 발할라가 위치한 그라즈헤임도 이 세계에 포함된다. 발할라 위대한 전사들의 영혼인 에인헤랴르가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사들은 오딘을 섬기는 여성체 사신 발키리에 의해 인도된다. 그들이 입고 있는 빛나는 갑옷이 밤하늘에 오로라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인헤랴르는 라그나로크에서 신들을 호위한다. 라그나로크는 사악한 적들과 신들의 큰 싸움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북유럽 신화의 마지막 전쟁이다. 선과 악의 극단으로 나뉜 싸움은 고대의 많은 신화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주제이다. 2) 바나헤임 - 반족의 세계 3) 미드가르드 -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땅 4) 무스펠스헤임 - 화염과 수르트의 세계. 수르트는 용암의 피부와 불의 머리를 가진 거인이다. 5) 니플헤임 - 얼음으로 뒤덮인 세상. 로키가 앙그르보다와 사이에서 낳은 반 거인인 딸 헬이 지배하고, 얼음 거인들이 사는 세계 6) 알프헤임 - 엘프의 세계 7) 스바르트알파헤임 - 다크 엘프 스바르트 아르발이 사는 세상 8) 니다벨리르 - 뛰어난 광부이자, 손재주가 뛰어난 대장장이인 드워프와 소인들의 세계. 그들은 토르의 망치와 프레이 기계로 만든 멧돼지 등 신들에게 마법의 힘에 의한 도구를 종종 만들어 냈다. 9) 요툰헤임 - 서리 거인 요툰을 포함한 거인들의 세계 이들의 세계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아스가르드가 최상에 위치한다. 그 최하층에 위치하는 니플헤임에서 뿌리를 씹는 것은 사나운 뱀(또는 용)인 니드호그 이다. 아스가르드는 헤임달이 지키고 있는 마법의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가 달려있다. 헤임달은 수천 마일 떨어진 곳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불침번을 서는 신이다. 북유럽 신화의 우주관은 강한 이원론적 요소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낮과 밤은 낮의 신 다그와 그가 타는 말 스킨팍시, 밤의 신 노트와 그가 타는 말 흐림팍시가 신화에서 상응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태양의 여신 솔을 쫓는 늑대 스콜과 달의 신 마니를 쫓는 늑대 하티도 역시 그러한 요소이다. 세계의 기원이 되는 니플헤임과 무스펠스헤임이 모든 면에서 상반되고 있는 점도 그러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창조의 대립에서 깊은 형이상학적 신앙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신으로는 아스, 반족, 요툰 세 종족이 있었다. 처음부터 서로 다투던 아스와 반족은 결국 오랜 전쟁을 통해 아스가 승리한 이후 화해를 하고 인질을 교환했으며, 이족 간의 결혼과 공동통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자는 상호교류를 하고 있었다. 일부 신들은 모든 가문에 속해 있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태고적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믿고 있었던 자연의 신들이 침략해 온 인도 - 유럽계 민족의 신들로 대체된 사실을 상징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연구자도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른 권위자(미르체아 엘리아데와 J. P. 말로리 등)들은 이러한 아스와 반신족의 구분은 인도 - 유럽계 민족에 의한 신들의 구분이 북유럽에서 표현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12신과 티탄의 구분이나, 마하바라타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고찰하였다. 아스와 반족은 전체적으로 요툰과 대립한다. 요툰은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티탄과 기가스와 같은 존재이며, 일반적으로 거인(giants)으로 번역되지만, 트롤(trolls)이나 악마(demons)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아스는 이 요툰의 후손이며, 아스와 반족 중에는 요툰과 이족 간의 결혼을 한 존재도 있다. 예를 들어, 로키는 두 거인의 자식이며, 헬은 반 거인이다. 물론 최초의 신들 오딘, 빌리와 베이는 암소 아우둠블라의 아버지가 기원이다. 에다에서는 일부의 거인이 언급되며 자연력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거인은 일반적으로 터스(Thurse)와 보통의 횡포거인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밖에도 바위 거인과 불의 거인이 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존재도 보인다. 그들의 역할은 모호한 점도 있지만 대체로 신들의 옆에 붙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영적인 존재가 있다. 먼저 거대한 늑대인 펜리르와 미드가르드 바다를 휘감는 바다뱀 요르문간드라는 괴물이 있다. 이 괴물들은 장난꾸러기 신 로키와 거인 앙그르보다의 자식으로 그려져 있다. (세 번째 자식은 헬이다). 절기 절기(이십사절기, 24절기, 二十四節氣)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년(太陽年)을 태양의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하여 계절을 자세히 나눈 것으로 절후(節候)·시령(時令)이라고도 한다. 황경이란 태양이 춘분점을 기점으로 황도를 움직인 각도로, 황경이 0°일 때를 춘분으로 하여 표와 같이 15°간격으로 24절기를 구분한다. 절기와 절기 사이는 대략 15일 간격이며, 양력 날짜는 거의 같지만 음력으로는 조금씩 달라지므로 가끔 윤달을 넣어 계절과 맞추고 있다. 24절기는 절(節)과 중(中)으로 분류되는데, 입춘 등 홀수번째 절기는 절, 우수 등 짝수번째 절기는 중이 된다. 사계절은 입춘·입하·입추·입동 등 4립(四立)의 날에서 시작된다. 태양이 황도상을 진행하는 속도는 일평균 0.9856°이며, 태양의 겉보기 지름은 약 32'이므로 하루에 지름의 두 배 가까이 움직이는 셈이 된다. 더욱이 이 속도는 일정하지 않으며, 1월 초가 가장 빠르고, 7월 초가 가장 느리며, 그 속도는 평균치에서 약 3% 정도 달라진다.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이유는 케플러 법칙 때문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춘분점에서 출발하여 황경 30°, 60°, ...와 같이 30도 간격으로 12개의 점을 생각하여 태양이 각 점을 통과하는 순간을 중(中)이라고 하였으며, 또 중간의 황경 15°, 45°, ...의 점을 태양이 통과하는 순간을 절(節)이라 하여 이 중과 절을 합쳐서 24절기로 불렀다. 그리고 각 계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 그것을 달력에 표시하였다. 사실 중국에서는 24절기 시각을 구하는 것이 그 당시에 달력을 만드는 데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국도 중국의 역법을 도입하였기 때문에 24절기를 달력에 표시하였는데, 계절을 나타내는 좋은 표시가 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달력에 표시하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에 중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 세종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군주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은 묘호이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존시를 합치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 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며,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훙서한 최초의 왕이다.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과학, 예술, 문화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퍼내었지만 글을 읽지 못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당뇨, 성병(이 시대에는 생식기와 관련된 병이면 성병이라고 불렀다.) 등을 이기지 못하고 1450년에 승하했다. 1418년 9월에서 1450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 9월에서 1422년 5월까지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태종이 훙서한 후 1422년 5월에서 6월까지 한 달 동안 영의정 류정현이 한 달 간 2차 대리청정을 하였고 그 후 1422년 6월에서 1442년 1월까지 친정을 하였으며 1442년 1월에서 1450년 3월 승하할 때까지 첫째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 민씨의 육남으로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 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祹)로 고쳤다. 1400년(정종 2) 2월 아버지 정안대군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그는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왕의 즉위 후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아 부왕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아서 숨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정몽주의 문하생인 성리학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부왕이 숨겨둔 책들을 찾아내어 독서를 계속하였다.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大匡輔國 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이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418년에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틀 뒤인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다. 또한 양녕대군의 폐립(廢立)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던 이조판서 황희는 1413년 초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1422년(세종 4년) 부왕 태종은 그를 소환하도록 권고,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즉시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郡)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3포를 개항(1426년)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통해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 1433)과 함길도의 6진(六鎭, 1437)을 개척하게 하였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정창손,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는 문자 연구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려 하였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을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을 만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마침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자 일행은 그를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 16세기 지방 하층민도 한글 사용, 암클, 언문 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언어학자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와 하위지가 있었는데, 최만리는 청백리로 인정받았음에도 세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폄하되었다.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소갈증 등을 앓던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풍질(風疾)·안질(眼疾) 등을 평생 앓았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다. 여비(女婢)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년) 87세로서 은퇴하였다. 세종대의 또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또한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중국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보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부왕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태종 때의 처녀 조공은 40명이었지만 세종 12년까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는 74명이었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사정하여 조공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금은광산에서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고 국가의 부가 빠져나갔으며 세종 즉위 후 1430년(세종 12년)까지 74명의 공녀가 명나라에 바쳐졌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그러나 세종 사후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다시 부활했고,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중종 때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진다.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와 김담 등에 명해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그리고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다.1431년과 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田稅制度)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을 한 명씩 내주어서 봉양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은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예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에게 1435년 벼슬을 준 일이 있다. 세종은 “지화가 국가의 미래를 점치는 일과 왕실 혼인에 자주 참여하여 점복을 잘 치니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고 정승 황희와 맹사성에게 물었다. 황희가 정4품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하여 시각장애인 점복가 지화와 이신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반대한 것을 세종은 사옹원의 벼슬은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정당하다고 신하들을 설득시킨 일이 있었다. 한편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명통시에서 활동했는데, 명통시는 시각장애인단체로 장애인에게 쌀, 황두를 지원했다. 어려서 그의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요절하였다.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을 하게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 이맹종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눠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 의령군 이맹종 등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후 계속 의령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려져 결국 1423년(세종 5)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2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446년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죽자 헌인릉 서쪽 구룡산에 안장했다. 뒤에 세종이 합장할 빈 관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세종은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소갈증 (당뇨병) 합병증과 중풍등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54세를 일기로 영응대군의 사택인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죽기 전 급하게 우찬성 김종서를 고명대신으로 삼고 임종 시 그가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세종의 승하후 일주일 남짓이 지나서 왔다. 참고로 다른 한자의 공정왕(恭靖王)은 태조의 2남(방과)이며, 태종의 형이었던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定宗 /'정종'이란 묘호는 숙종 7년, 1681년에 받았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대모산 근처인 구룡산에 안장되었다가 뒷날 이장하였다. 1450년 (문종 1) 4월 21일 (음력 3월 10일)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여 묘호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세종의 세(世)는 '번성'을 의미한다. 6월 30일 (음력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인 1469년(예종 1)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이때 비석과 석물은 구룡산의 것은 방치하고 새로이 조성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조선 세종대왕은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다. 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이 그의 묘호를 따 세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가 출범하였다. 1981년 구룡산 기슭에서 농사짓던 한 농부에 의해 상석, 석물, 석수, 장명등 등이 발견되고 초장지 1km 지점인 내곡동 산 13번지에서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초장지의 비석과 석물 등은 1974년 5월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졌다. 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 이 있었으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그린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金殷鎬)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비공식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세종은 아이를 많이 낳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거들어 두었고, 매우 정력가이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소갈증(消渴症, 당뇨병)·풍질(風疾) 등을 평생동안 앓았다고 한다. 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 (1441, 세종 23년) 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훙서) 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대왕은 이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github.com/eomseongsoo 음향학 음향학(音響學)은 소리, 초음파, 그리고 초저주파음파 (즉 기체, 액체, 고체내 모든 물리적 파동)을 연구하는, 여러 분야에 걸쳐 관련있는 과학이다. 음향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를 음향학자(또는 음향 물리학자)라고 한다. 기술 분야에서의 음향학 응용을 가리켜 음향 공학이라고 한다. 음향 물리학자와 음향 공학자들의 관심사 사이에 꽤 많은 공통점이나 상호 작용들이 존재한다. 듣는 것은 동물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말하기는 인류발전과 문화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음향학이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예를 들어 음악, 의학, 농업, 산업, 복지 등) 영향을 끼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니게 된다. 예술, 공예, 과학, 그리고 기술이, 수많은 다른 지식 분야처럼, 서로 다른 분야를 자극하여 전체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음향학을 나타내는 단어 “acoustic”은 “듣기의, 듣기 위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단어 "ακουστικός" ("akoustikos"), 그리고 “들리는”이라는 뜻의 "ακουστός" ("akoustos"), 그리고 “듣는다” 라는 뜻의 동사 "ακούω" ("akouo") 에서 유래되었다. 라틴어 동의어로 “sonic”이 있다. 음향학자들이 가청 주파수 바깥 쪽까지 연구 범위를 확장한 후에, 그것들을 각각 “초음파”, “초저주파”로 확인하게 되었고, “음향학”이란 말은 제한 없이 모든 주파수 영역을 다루는 말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음향학 학설은 '만물의 근원은 수'이다. 이것은 피타고라스의 음계의 이론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일현금으로 실험하여 일정한 비율로 현을 분할하여 음계를 형성하는 것을 알아냈다. 중국의 동주 시대에는 삼분손익법이라는 오래된 책관자에 있으나 음향에 대한 기술은 이것보다 훨씬 옛날에도 있었다. 음향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때는 17세기에서부터 18세기경이며 서양은 음률 이론과 악기를 제작하는 연구를 하였다. 19세기 때는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가 《음향이론》을 저술하고 헬름홀츠가 '음향학의 수학적 강의'를 만들어 음향생리와 음향심리에 대해 연구했다. 음향학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수천년동안의 예술로서 음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가 음 간격의 특성에 관심을 보이기 이전까지 과학적 방법으로 명확히 연구되지는 않았다. 피타고라스는 몇몇의 음의 간격이 다른 것들보다 더 아름답게 들리는 이유를 알고 싶어했고, 수학적 비율을 이용해 해답을 찾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는 소리가 공기의 압축과 팽창들로 구성되어있다고 이해했다. 그는 “도달해서 옆의 공기를 때린다…”라는 말로 파동 운동의 특성을 매우 잘 표현하였다. 기원전 20년경, 로마의 건축가이자 기술자인 비트루비우스는 건축 음향학의 시작으로서 간섭, 반향, 잔향에 대해 논의로써 극장에서의 음향학적 특성을 다루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과학혁명 시대와 이후에 걸쳐 음향의 물리학적인 이해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1642)와 메르센 (1588-1648) 들은 독립적으로 진동하는 현에 대한 완전한 법칙을 발견하였다.(이것은 2000년 전에 피타고라스가 시작한 작업이다.) 갈릴레오는 “파동은, 울리는 몸체의 진동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며, 공기를 통해 전파되고 귀의 고막에 도달하여 자극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소리로 해석한다.” 라는 주목할 만한 언급으로써 생리음향학, 심리음향학의 시작을 열었다. 공기 중의 소리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이 1630년과 1680년 사이에 메르센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 뉴턴 (1642-1727)은 고체에서의 파동 속도의 관계를 유도하여 물리음향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프린키피아, 1687) 18세기에, 파동 전파이론 기술(記述)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익힌 위대한 수학자들에 의해서 음향학이 큰 진전을 보인다. 19세기 음향학의 위대한 거장은 생리 음향학 영역을 정리한 독일의 헬름홀츠와 “The Theory of Sound” 란 기념비적인 작업에 많은 공헌을 하여 이전의 지식들을 결합시킨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이다. 또한 19세기에, 휘트스톤, 옴, 그리고 헨리 등이 전기와 음향학 사이의 유사성을 연구하였다. 20세기는 그때까지 제자리 걸음이던 전반적인 과학 지식에 대해, 기술적 적용들이 싹트던 시절이었다. 첫 번째 적용은 건축 음향학으로써 사빈 사람들의 기공(機工) 작업이고, 이로써 많은 다른 것들이 뒤따르게 된다. 수중 음향학은 1차 세계대전에서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녹음과 전화는 세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자기술과 컴퓨터의 사용으로 인하여 정밀하고 정교한 수준의 소리 측정과 분석이 가능해지고 초음파는 의학과 산업에서 전혀 새롭게 적용되었다. 또한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 변환기(음향 에너지를 생성하고 수용하는)가 발명되어 사용되었다. 소리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공기 또는 사물의 진동을 뜻한다. 또한 공기 중 전파 속도는 상온 20도의 상태에서 343.7m/s이다. 역법 역법(曆法, )은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이다. 시령은 흔히 절기라고도 부르며, 세시와 요일, 일식, 행사일 등을 아울러 이른다. 이러한 역법을 표기한 문서가 달력이다. 유의어로 기년법(紀年法)이 있으며 이는 천문학적 기년법을 가리키는 역법 외에 사회적 기년법, 종교적 기년법, 정치적 기년법 등으로도 사용된다. 달을 기준으로 한 것은 삭망월이라고 하고, 계절이 순환하는 주기(오늘날에는 태양이 일주하는 주기)를 태양년이라고 한다. 삭망월은 2이다. 그레고리력의 역법 개혁. 법학 법학(法學)은 법률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법학에서는 법의 개념을 정리하고 법률의 종류를 분류하며 법의 효력, 적용과 해석 등을 연구한다. 과거 대한민국의 경우, 법학이 사회문제와 법현실을 외면하고 오로지 법률학에만 치중한 결과 개념법학, 체제법학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사법시험을 합격을 위한 수험과목 정도로 전락했다는 수험법학이라는 오명이 제기되되기도 했으나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올바른 접근과 방법론에 따른 연구성과가 축적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학은 실제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실정법의 의미를 인식하고 체계화하는 실용법학과 법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지향하는 이론법학(기초법학)으로 나뉜다. 법해석학은 실용법학의 대표적인 부분으로, 실제로 제정된 법이나 관습법 등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에 비해 이론법학은 이러한 실정법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철학적인 고찰이나 일반이론의 탐구, 역사적인 흐름의 연구 등을 수행한다. 법해석학 세계 7대 불가사의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七大不可思議)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낸 가장 기적적인 건축물 일곱 가지를 일컫는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목록들이 작성되어 왔다. 가장 유명한 목록은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해 낸 세계의 불가사의이다. 다만 중국의 만리장성, 인도의 타지마할이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세계"라는 말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헬레니즘 문명권을 뜻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기원전 약 3세기를 전후로 하여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의 그리스인들이 보고 들어서 알던, 주변의 발달된 문명 국가들이 이룩한 웅대한 건축 및 예술 작품을 일컫는다.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지은 시에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언급된다. 그런데 일곱 개의 이른바 "기적물"은 시대에 혹은 작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퀴로스의 궁전, 바빌론의 바벨탑이 경우에 따라서 7대 기적물에 손꼽히기도 한다. 원래 파로스의 등대 대신 바빌론 성벽(이슈타르의 문)이 들어갔지만, 6세기에 교체되었다. 다음 목록은 전형적으로 꼽히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이다. 이들 중 대피라미드가 가장 오래 된 건조물인데, 유일하게 지금까지 건재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일부 작가들은 중세에 지어진 불가사의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래 목록의 건축물들 중 상당수는 중세에 지어진 것이 아니지만, 중세의 불가사의로 잘 알려진 것들이다. 전형적인 중세의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것들 외에 아래와 같은 것이 들어간다. 미국토목학회는 현대의 불가사의 목록들을 작성했다. 2007년 7월 7일 스위스의 영화제작자이자 탐험가인 베르나르드 베버의 '뉴 세븐 원더스(New 7 Wonders)’ 재단이 포르투갈 리스본의 경기장에서 ‘신(新) 세계 7대 기적’을 발표했다. 1999년부터 200여 개의 유적지를 접수받아 21개의 후보지를 선정한 뒤 인터넷과 휴대전화 메시지를 이용하여 여론조사를 통한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전화로는 복수 응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여론조사는 과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확실히 비과학적").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包括的 核實驗 禁止 條約, )은 모든 핵실험을 금지해 새로운 핵무기 개발과 기존 핵무기의 성능 개선을 막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다. 1996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조약안이 채택됐으며 5대 핵강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해 154개국이 서명했다. 유엔의 부속 기관인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기구(CTBTO)가 조약 가입 국가의 시찰과 감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조약은 '발전용 또는 실험용 원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지명한 전 세계 44개국 모두가 서명하고 비준해야 발효한다. 2004년 44개 중 영국과 프랑스 등 36개국이 비준했다. 5개국은 서명만 하고 비준은 하지 않았으며, 인도, 파키스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비준은 물론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서명과 비준을 모두 마쳤다. CTBT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핵무기 감축이 선행되지 않을 경우 핵보유국의 기득권만 보장한다며 조약을 비판하고 있다. 이 조약은 모든 공간(우주 공간, 대기권, 수중, 지하)의 핵실험 실시, 핵폭발을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에서 금지하고 있지 않은 지하 핵실험도 금지 대상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핵무기 보유 개발 경쟁이 전개되고, 다양한 핵 실험이 행해졌다. 그러나 핵무기의 위험과 잔인함이 서서히 드러나자, 민중의 반핵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1955년 8월 6일에는 처음 《원자수소폭탄 금지세계대회》가 개최되는 등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세계적으로 핵실험 반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핵보유국이 주체가 되어 《제네바 군축회의》의 전신인, 《10개국 군축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군축위원회의 성과로서 1963년 8월, 미국, 영국, 소련에 의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하 핵실험 금지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1994년 1월, 제네바 군축 회의는 지하 핵실험 금지를 포함한 본 계약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은 장기간 계속 되었으나, 인도 등의 반대에 의해 회의에서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에 대한 세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호주가 중심이 되어 이 조약 초안을 유엔 총회에 제출하고 1996년 9월, 압도적인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이 조약의 발효는 1996년 6월 시점에서 《제네바 군축회의》의 구성국이자 국제원자력기구의 '세계 에너지 원자로'와 '세계의 연구용 원자로'에 게재 되어있는 44개국 모두의 비준이 필요하다. 제 14조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미국(클린턴 행정부는 1996년 9월에 서명했지만, 당시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상원의 비준을 반대하였고, 이후 부시 행정부도 핵 폭발을 수반하지 않는 "임계 핵 폭발"을 실시하여 세계적인 비판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 비준을 권고 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이란, 인도, 이집트,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파키스탄 8개국이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발효되지 않고 있다. 조약 채택 이후 1998년 5월, 인도,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하여, 핵 보유를 선언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스라엘, 이란, 미얀마의 핵 보유 의혹 등이 조약 자체를 유명무실화시킬 우려되고 있다. 임계전 핵실험은 동 조약 채택 이후에도 미국과 러시아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슈퍼컴퓨터 모의 핵실험으로서, 미국은 오바마 정부에서도 4회나 실시했다. 동 조약의 핵실험 정의에 포함되지 않아서, 핵실험 자체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켈로그-브리앙 조약 켈로그-브리앙 조약 (Kellogg-Briand Pact)은 1928년 8월 27일 미국의 국방장관 프랭크 켈로그 (Frank Billings Kellogg)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Aristide Briand)의 발기에 의하여 파리에서 15 개국이 체결한 전쟁 규탄 조약으로서, 서문과 전문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 1 조에 따르면, 조약에 가담 비준한 국가는 자국 국민의 이름으로 국제 분쟁의 해결 수단이나 국제 외교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포기하는 것을 조약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훌륭한 도덕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조약 위반의 경우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의 가입국인 독일과 일본이 1940년대에 세계 대전의 주범으로 등장하였을 때, 이들 국가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다만 서류상 규탄만을 할 뿐이었다. 1939년에 이르기까지 63개국이 이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현재 이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을 상실하였다. 조약의 발기자인 켈로그는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2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적 복합체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 건물 (Bactria-Margiana Archaeological Complex; BMAC)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투르크메니스탄에 존재했던 청동기 시대의 문화이다.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Victor Sarianidi)가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1976년 발표). 박트리아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아무다리야 강 유역을 이르는 그리스어 지명이며, 마르기아나는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마르구시 주(주도는 메르브)의 그리스어 이름이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1970년대 후반 사리아니디가 당시 소련에서 주관한 발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델바르진(Delbarjin), 다실리 오아시스(Dashly Oasis), 토홀로크 21(Toholok 21), 고누르(Gonur), 켈렐리(Kelleli), 사펠리(Sapelli), 자르쿠탄(Djarkutan) 등 많은 발굴지에서 대형 건축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성벽과 성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에 대한 보고는 대부분 소련 학술지에 국한되어 소련 말기까지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 고고학)결과에 따라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문화는 기원전 약 3 천 년기의 마지막 세기(21세기)에서부터 2 천 년기의 초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기원에는 학계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또 그 쇠퇴 원인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독특한 유적과 유물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몇세기 후 자취를 감춘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문화의 지리적 범위는 꽤 넓어서 이란 남동부, 발루치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 유적이 발견된다. 고고학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발루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이 문화의 심장부일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Lamberg-Karlovsky 참조). 도장을 비롯한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물이 인더스 문명의 유적과 이란 고원, 페르시아 만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주민들은 밀과 보리를 수리 재배(irrigation farming)하는 정착인들이었다. 북쪽 스텝 지방의 안드로노보 문화의 유목민들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인상적인 거대 건축 기술, 청동기 도구, 도자기, 반보석 장신구 등은 당시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 세계 문명사). 2001년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유적지에서 조그만 석제 도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독특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이를 문자로 해석해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독특한 문자까지 발달시킨 명실상부한 문명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겨진 형상이 초기 그림 문자 단계인지 아니면 진짜 문자체계의 발달을 나타내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의 도장은 시리아-아나톨리아 지역,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만 지역, 인더스 문명의 도장과는 기조(基調)와 재료에서조차 구별되기 때문에 이들이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박트리아 마르기아나는 그 주민이 인도-이란인이었다는 가설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언어학에서 인도-이란어군은 인도-유럽어족의 큰 계열 중 하나로 현재 이란에서 사용되는 페르시아어, 인도에서 사용되는 힌디어 등 여러 언어 집단의 조상이다. 인도이란 조어를 사용한 인도-이란인들은 인도-유럽 조어를 사용하던 초기 인도-유럽인 집단에서 갈라나와 동쪽으로 갔다고 생각된다 (→ 비교 언어학). 사리아니디 자신도 박트리아 마르기아나인들이 인도-이란인들이라는 주장을 하며 많은 유적과 유물을 조로아스터교의 모체가 되는 종교 의례의 흔적으로 해석하기까지 하였다. 예를 들어 일부 건물들은 원(原)조로아스터교의 신전으로 해석하고 있다. Sarianidi, V. I. 1976. "Issledovanija pamjatnikov Dashlyiskogo Oazisa," in "Drevnii Baktria", vol. 1. Moscow: Akademia Nauk. Lamberg-Karlovsky, C. C. 2002. "Archaeology and Language: The Indo-Iranians," in "Current Anthropology", vol. 43, no. 1, Feb. Chicago: Univ. of Chicago 폴리크라테스 폴리크라테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 )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Nicaea",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 황제의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의 공의회이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이 논의되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의 정치적 외연이 확대되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의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국가통일을 위하여 기독교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으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니케아에 소집하였다. 당시 동방 교회의 주교가 1천명, 서방교회가 8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회의 내용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 즉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어떠냐는 것이었다. 의사내용(議事內容)은 아리우스파, 알렉산드로스파, 중간파(오리게네스 주의파)의 3파로 나뉘어 논의되었는데, 난항을 거듭한 결과 아버지와 아들을 동질(호모우시오스)로 보는 니케아 신조(오늘날의 니케아 신조와는 다소 다름)가 채택되어 아버지와 아들을 이질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삼아 일단 결말을 보았다. 그러나 이 회의로 교리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후에 더욱 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회의에 있어서 황제의 권력이 교회내 의 문제에 개입하는 악례(惡例)를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응집물질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凝集物質物理學, )은 물질의 응집된 상의 물리적인 특성을 다루는 물리학의 분야다. 응집물질물리학에서는 물리 법칙을 이용하여 이러한 상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자역학, 전자기학, 통계역학 법칙을 많이 이용한다.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응집된 상의 예로는 액체나 고체 같은 것을 들 수 있고, 조금 더 특이한 응집된 상으로는 일부 물질을 저온으로 냉각시켰을 때 볼 수 있는 초전도 상이나 원자 격자의 스핀이 이루는 상인 강자성, 반강자성 상, 초저온 원자계에서 볼 수 있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물 등이 있다. 응집물질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험적인 방법으로 물질의 특성을 측정하기도 하고, 이론물리학 기법을 이용하여 물리적인 성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학적인 모형을 개발하기도 한다. 응집물질물리학은 다양한 현상과 대상을 연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활발한 분야 중 하나다. 미국의 물리학자 중 약 3분의 1이 응집물질물리학자로 분류되며, 응집물질물리학 분과는 미국물리학회에서 가장 큰 분과이다. 이 분야는 화학, 재료과학, 나노기술과 겹쳐 있으며, 원자물리학, 생물리학하고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응집물질물리학은 고체 물리학에서 나왔는데, 고체 물리학은 물리학의 주요 하위분야로 간주되고 있다. 응집물질물리학이라는 용어는 필립 앤더슨이 1967년 기존에 "고체 이론" 이었던 그의 연구 그룹 이름을 바꿀 때 만들어 낸 것이다. 1978년 미국 물리학회의 고체 물리학 분과는 응집물질물리학 분과로 개명되었다. 이 분야를 응집물질물리학이라고 부르게 된 원인 중 하나는 고체 연구를 위해 개발된 개념과 기술 중 많은 부분이 유체계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기 도체내의 전도 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유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양자유체를 이룬다. 사실 전자들이 응축하여 흩어짐 없이 흐를 수 있는 새로운 유체가 되는 초전도 현상은 저온에서 He가 초유체로 되는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로물루스(Romulus)는 전설적 로마의 건립자이며 초대 왕이다. 전설에 의하면, 로물루스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전쟁의 한 영웅인 아이네아스(Aeneas)의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라티누스(Latinus)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물루스에 관한 전설은 로마의 고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Fabius Pictor)의 설에 의한 것이다. 파비우스의 설에 의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은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롱가("Alba longa")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누미토르("Numitor")와 아물리우스 ("Amulius")라는 형제는 씨족의 상속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장자권을 무시하고 무력을 써서 씨족의 우두머리가 된 후, 심지어 형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via", 혹은 일리아 "Ilia")를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으로 삼아 결혼을 못하게 함으로써 누미토르의 가계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다. 베스타 신전의 제사장은 성직자라는 종교적 위치덕분에 사회에서는 존경받았지만, 평생 동정과 신전의 불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에게 길러졌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가축을 치는 시종 파우스툴루스는 갓난아이들을 제거하라는 아물리우스의 명에 따라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테베레 강에 띄워 보냈다. 한편 비탄에 잠긴 실비아는 테베레 강에 투신자살 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을 실은 바구니는 얼마후 강가로 떠밀려가 멈추어 섰다. 때마침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늑대 어미는 칭얼거리는 아이들에게 젖을 물렸으며, 그리고 딱따구리가 다른 먹을 것을 날아 주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파우스툴루스는 그의 처 라렌티아와 함께 아물리우스의 명을 거역하고 몰래 자신의 집에서 쌍둥이를 양육하였다고도 한다. 하여간 무사히 성장한 이들은 카피톨이라는 일곱개의 언덕에 도시를 건설했고, 이 도시가 고대 로마이다. 아이네이스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의 제목이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의 유랑을 노래한 서사시로서 라틴어로 쓰인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서사시는 전 12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틴어 6각운으로 쓰여졌다.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의 주제와 신화적 많은 자료들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빌어 왔다. 특히 서사시의 구성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전반 6 편은 오디세이아(모험)를 그리고 후반 6 편은 일리아스(전쟁)를 전범으로 삼고 있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아이네이스가 담고 있는 역사적 요소로는 로마의 건립을 칭송하고 신화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작품이기에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후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 단테와 함께 3대 서사시 작가로 불리게 된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는 아이네아스, 디도, 투르누스, 알렉토, 라티누스 등등. 트로이의 영웅들과 그들이 이탈리아에 정착하기까지의 항해를 노래한다. 트로이에 적대심을 갖고 있는 유노는 트로이가 함락된 후 목숨을 건져, 아이네이스 지휘아래 시칠리아로 피신하는 트로이 함대를 파멸 시키려고 한다. 바람의 신 아이올루스는 유노의 명령으로 트로이 함대가 풍랑에 휩쓸리도록 하지만, 넵투누스의 개입으로 함대는 구출되어 카르타고항으로 피신을 한다. 유피테르는 베누스에게 트로이 유랑민이 라비니움에 정착한 후, 알바 롱가를 거쳐 로마를 건설하게 되리라 예언한다. 메르쿠리우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트로이 유랑민에게 호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편 아이네이스는 사냥군으로 변장한 어머니 비너스를 만나 카르타고와 디도에 관해 정보를 얻는다. 얼마 후 아이네이스와 그가 이끄는 유랑민은 디도로부터 환영을 받음과 동시에, 디도는 비너스의 영향으로 아이네이스에게 호감을 갖는다. 환영 만찬회에서 디도는 트로이의 최후와 아이네이스의 7년간에 걸친 유랑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 줄 것을 청한다. 아이네이스는 트로이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이른바 트로이 목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와 그리고 이와 관련된 라오콘의 비극에 대해서 언급된다. 시논이 목마를 열자 그속에 숨어 있던 아카이군이 쏟아져 나와 트로이군을 습격하여 결국 프리아모스의 성이 함락된다. 아수라장이 된 성에서 아이네아스는 베스타 신전에 틀어박힌 헬레나를 발견하고 그녀를 죽일까 망설이는 순간에 베누스가 나타나 이를 만류한다. 아이네이스는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성에서 피신한다. 성문에 이르러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 헤메는 가운데 아내의 화신이 나타나 이를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고 위로하며, 아이네이스의 앞날에 관해 작은 예언을 남긴 후 사라진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와 아이네이스는 그동안 까맣게 모인 피난민을 보고는 깜짝놀란다. 그러나 곧 이들을 이끌고 이다 산을 향해 유랑길에 오른다. 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이었으며,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으나 시나이 반도는 서남아시아에 있다. 이 나라는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남쪽으로는 수단, 그리고 동쪽으로는 가자 지방과 이스라엘을 마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뉜다. 나일 강은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북쪽을 향해 흐른다. 이집트의 인구는 대부분 나일 강을 둘러싸고 집중되어 있다. 이 강은 석기 시대와 나카다 문화 시대로부터 근근히 이어져온 이집트 문화의 동맥이다.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나일 계곡은 에티오피아(Ethiopia)의 고원에서부터 그 물줄기가 갈라져 내려온다. 나일 계곡 외곽의 사막 지대는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수단 중북부의 앗바라까지 펼쳐져 있는데, 대부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며, 간간이 생기는 오아시스 주변을 빼고는 식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 기자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쪽 연안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카프라·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지인 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아랍연합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 사카라는 카이로 남방 25 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을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 티(제5왕조)와 메렐카(제6왕조)의 마스타바 및 성우(聖牛)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巨像)이 있다. 아비도스(Abydos)는 카이로 남방 약 550 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 시대에는 오시리스 신(神)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 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聖地)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 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石碑)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 테베(Thebes)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 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아멘호테프 3세, 라메스 3세 등).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이고 룩소르가 부전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서쪽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은 신왕국 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하트솁수트 여왕)와 메디네트 하부(라메스 3세)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 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유물도 있다 누비아(Nubia)는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이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 성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 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을 받아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 아부심벨 신전은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 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岩窟神殿)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巨像)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 6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의 원주율 측정법 사도 바울로 바울로(공동번역), 바울(개신교), 바오로(가톨릭)( (기원후 5 ~ 64 또는 67)는,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바울로 서신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기술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였으나, 이후 개심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여, 이후 기독교의 초기 신앙에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 식의 이름은 '사울'()로 불렸다. 고대 로마의 속주였던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 출신이다. 로마 가톨릭 및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기리며,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가톨릭), 7월 12일(정교회)이다. 바울로는 초기 기독교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 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가운데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 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했었다. 그렇게 그는 유대교와 구분된 기독교를 확립했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바울은 지성 없이 열정만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었다. 바울로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로도 없었겠지만 바울로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평하기도 한다. 바울로는 그리스에서 사용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 해외에서 사는 유대인(그리스말로 흩어진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로와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했다. 따라서 한때 기독교인들이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주장은 사도 바울로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900년 완역한 신약성경 전서 음역을 따른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은 ‘바울’,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은 ‘바오로’라고 한다. 성공회는 바울로를 ‘바우로’라고 음역하는데, 그 실례로 1965년판 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 바울로를 바우로로 음역하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는 바우로를 신명(信名) 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 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이다.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1세기 이후 등장한 성화에서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바울로의 이름은,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이 인물의 이름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같이 옮긴 공동번역성서의 '바울로'를 공히 사용하려 했으나 양측의 입장차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공동번역성서를 따라 '바울로'라고 칭하며, 개신교(Protestant Church) 대부분은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를 따라 '바울'로, 천주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서는 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옮긴 성경에 따라 '바오로'로 칭한다. 성공회(聖公會, Episcopal Church, Anglican Church)에서는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에 따라 '바울로'라고 하는데, '바울', '바우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제국의 시민권이 있었다고 추측하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바울의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여하튼 바울로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게다가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 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로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오물에 빗댄다. 바울로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바울로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바울로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로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도 밝았는데, 사도행전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인을 인용하여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에는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의 이름을 자세히 적었다. 지식인들의 지성에 맞게 전도한 성 바울로의 전도는 지혜로운 전도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개종이라는 단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는 독립종교가 아닌 유대교세계안의 이단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 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나바/바르나바가 자신의 사촌 인 마르코 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바울로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파록쉬스모스()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말이다. 바울로와 바르나바간의 언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분쟁에 대해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신학자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줄만큼 성격이 유순한 바르나바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바울이 서로 원만하게 지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바울로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청교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던 존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사도(apostle)는 "의 음역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 사도 자격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바울로는 다마스커스에서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관적 주장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예수가 사도로 임명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1세기 교회에서 바울로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실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득중 은 고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단절을 주장하며, 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기독교 지도자 바울로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른 복음을 전한다느니, 거짓 형제 라느니 하는 격렬한 말로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공동체였던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바울로를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랐지만 바울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존중하였으며, 모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노동자였다. 정승우에 의하면 한글성서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로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포이오스는 가죽을 가공하는 모든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바울로는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하던 대다수의 순회 설교자들과는 달리, 육체노동자로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복음전도의 통로가 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그리스도 신앙과 삶이 일치되게 하였다. 김회권도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한 귀신들을 쫓아낸 바울로의 능력 은 노동자로서의 정직한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 바울 후 기독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훈련된 레기온(신약성서의 마르코복음서에서는 군대로 번역)의 정복전쟁으로 지중해 다른 민족들과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해간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문명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바울로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은 없으며,예수에게 복음을 전달받아서 전한다는 바울로 서신서속의 언급들도 도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예수전승)을 전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로 서신서도 예수 전승을 바울로가 자신의 신학으로 해석한 신학문서인 것이다. 물론 바울로가 고린도전서 11:23에서 언급한 성만찬(Holy Communion)설명도 교회를 통해 전승되던 예수의 성만찬 제정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 해석했으며 ,바울로의 제자들이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쓴 에페소서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며(에페소 2:20), 민족의 구분이 없는 보편교회 로 해석하고 있다. 이방기독교 지도자 바울로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를 주장했으며, 이러한 구원관은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와 갈등을 겪게 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바울로의 칭의교리가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성 바울이 생각하기에 성만찬은 사회통합을 위한 성례전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성만찬때마다 부유층 교인들이 빈곤층 교인들과 밥상을 나누지 않는 모습을 "주님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성 목요일)에 성만찬을 제정하시어 그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 가난한 교인들과 성만찬을 나누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가난한 교우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이라고 비판했다. 신약성서에서 실제 바울로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오로 서간은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 생태학 생태학(生態學, )이란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환경은 생물의 주변을 구성하는 생물적, 비생물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영어로 "ecology", 독일어로 "Ökologie"라 하는 생태학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사는 곳", "집안 살림"을 뜻하는 "oikos"와 "학문"을 의미하는 "logos"의 합성어이다. "집안 살림 관리"를 뜻하는 경제학과 어원이 같다. 생태학이 환경(environment)과 환경보호주의(environmentalism) 등의 용어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지만, 생태학은 둘 다 아니다. 생태학은 과학이고 행동주의적으로 규정된 목표가 없다. 생태학이란 낱말은 1866년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 "Generelle Morphologie der Organismen", 1866 Berlin). 1869년 헤켈은 예나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이 낱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헤켈이 내린 생태학의 정의는 오늘날까지 생물학자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찰스 엘튼의 동물생태학(Animal Ecology) (1927), 유진 오덤(Eugene Odum) (1963)을 거쳐 생태학의 정의는 다듬어져 왔다. 유진 오덤은 '자연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하였고, 이후 찰스 크랩스(Charles J. Krebs) 는 '생물의 분포(distribution)와 수도(abundance)를 결정하는 상호작용에 관한 과학적 연구'라 정의하였다. 나아가 산업 생태학은 '산업의'라는 말과 '생태학'을 융합한 새로운 학문 분야로, 자원이용을 극대화하고 효율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환경에 대한 나쁜 영향을 극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태학의 뿌리는 자연사부터 시작된다. 인류의 조상은 사냥감을 어디서, 언제 구할 수 있는지 알아야 했고, 농업 혁명 이후에는 가축이나 곡물을 어떻게 기를지 등 생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였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서 들쥐와 메뚜기떼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였다. 유해 동물을 없애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던 초기 그리스와 로마인의 생각에서 출발해서 수학과 자연사를 이용하여 현대적인 생태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1968년 레벤후크(Leeuwenhoek)는 수리적인 계산을 통해 딱정벌레의 증식률을 계산했고 한쌍의 파리가 3개월에 약 75만 마리의 파리를 생산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1798년 초기 인구통계학자 맬더스(Malthus)는 인구론(Essay on Population)을 출판하였고 이는 다윈의 자연 선택이론에 영향을 미쳐 진화론으로 발달하게 된다. 군집 연구는 식물생태학자 (J. E. B. Warming)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개체군과 군집(무리)의 광범위한 문제들의 인지와 함께 1900년경 생태학은 과학이 되는 길로 들어섰다. 일단, 첫 번째로 햇빛을 통하여 식물이 자란다.(또는 물) 두 번째로, 초식동물이 햇빛으로 자란 식물을 먹는다. 세 번째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다. (육식동물위에 더 큰 육식동물이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동물(육식, 초식, 잡식)의 시체가 썩어 식물이 자라는데 쓰인다. 그런 식으로 영원히 돌고도는 것이다(먹이사슬이 붕괴되는 경우도 있다.) 도도부현 도도부현(, Prefectures of Japan)은 일본의 광역 자치 단체인 도(, 도쿄도), 도(, 홋카이도), 부(, 오사카부와 교토부), 현(, 나머지 43개)을 묶어 이르는 말이다. 도도부현의 하부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시정촌(市町村)이 있으며, 일부 도시는 행정상 별도의 정령지정도시, 중핵시, 특례시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시정촌과 같이 지방자치단체의 일종이기에 포괄적 지방자치단체, 광역적 지방자치단체라고도 불린다. 겨울 전쟁 겨울 전쟁(, , )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이라고도 한다. 일명 '계속 전쟁' 인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스탈린은 1939년 말까지 핀란드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핀란드는 1940년 3월까지 버텼으며 이때 양자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맺고, 소비에트 연방에 카리알라 동부 지역(핀란드 영토의 10%, 산업능력의 20%에 해당)을 넘겨주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이 땅과 카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을 합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결국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겨울 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이 스칸디나비아 북쪽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논의를 공공연히 하여 나치 독일이 개전 1개월도 안되어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을 준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베저 작전). 또 소련군이 겨울 전쟁에서 보여준 부진이 아돌프 히틀러가 1941년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핀란드는 1581년부터 스웨덴 왕국의 일부였고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후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핀란드는 비록 당시 독일 정치를 거머쥔 나치당에 대한 호감은 거의 없었지만 독일과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핀란드에 대한 강압적인 러시아화 정책과 핀란드 내전으로 이어진 실패한 공산혁명 시도 때문에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는 긴장되고 냉각된 상태를 유지했다. 소련과 나치 독일 은 1939년 8월 23일 불가침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는 동유럽, 중앙유럽, 북유럽 여러 나라의 영토를 양국이 나눠 갖는다는 비밀 조항도 포함했다. 핀란드는 이때 소련의 '이해권'에 들어간다고 합의되었다. 독일이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은 동쪽으로부터 침공해 수 주 만에 폴란드는 양국이 합의한 대로 분할되었다. 이 같은 사태를 본 인접 국가들은 자신들도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을 깨달았으며 실제로 스탈린은 1939년 9월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상호 방위 조약'을 강요해 군사 주둔권을 획책하여 실질적으로 발트 3국을 완전히 잠식했다. 이러한 '이해권' 문제의 일환으로 1939년 10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핀란드를 방문해 다음과 같은 골자의 핀-소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퀴외스티 칼리오가 이를 거부하자, 핀란드 침공에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국경지대인 만네르헤임 선 부근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공격했다며 이를 이유로 침공을 시작했는데, 이를 이른바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 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었으며 11월 30일 46만 명으로 이루어진 23개 사단으로 핀란드를 공격해 순식간에 만네르헤임 선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1939년 10월부터 이와 같은 침공을 위해 소련은 이미 국경지대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이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은 핀란드 측에서는 오랫동안 추측해온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꾸며낸 주장이라는 것으로 분명히 판명되었다. 이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비밀리에 그리고리 쿠릭()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소련군에게 고의적으로 포격을 한 후 핀란드군의 공격이라고 꾸민 일이었는데, 당시 핀란드군 포병의 장사정 포는 마이닐라까지 사정거리가 못 미치는 즉 핀란드-소련 국경에서 약 20km에서 25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이러한 '핀란드군의 포격'에 의한 소련군의 '전사자'는 전혀 없었다. 마이닐라 발포사건 이후 스탈린과 그의 군부 지도자들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은 핀란드로부터 뜻밖의 반격을 당하게 되었다. 핀란드인들은 대항했고, 협상 테이블에서처럼 끈기 있게 싸웠다. 그들은 모든 인력과 빈약한 물자 그리고 전통적으로 기지(機智)가 풍부한 국민성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빙점 이하의 혹한 속에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아내가면서 거대한 소련군과 대결했다. 이 핀란드와 소련과의 싸움은 당시의 가혹한 기후 때문에 겨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 당시 소련군이 점령한 국경 지대의 마을인 테르요키(Terijoki) 에서는 1939년 12월 1일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이른바 '테르요키 정부'라는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다. 소련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는 정치 목적 과 군사 목적 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까지 존속되다가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새로 수립된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 정부는 1956년 해체되었으며 그 후 카렐리야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11월 말이 되자 소련군은 공격 개시 태세에 들어갔다.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7군 산하의 10개 사단 병력과 6개 전차 여단은, 24만명의 인원, 1,500대의 탱크, 야포 900문 그리고 항공기 300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카렐리안 지협에 구축된 핀란드 축성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완료했다. 일차 공격 목표는 핀란드 제2의 도시 비푸리를 점령하여 라도가 호의 북쪽 연안에 이르는 도로의 중요한 교차점을 단절시키는 데 있었다. 이 작전은 핀란드군을 분산시킨 다음 소련군이 수도 헬싱키에 진격하기 위한 것이였다. 한편, 소련 제8군 산하의 7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은 병력 15만, 탱크 545대, 포 520문 그리고 항공기 200대를 가지고 라도가호를 우회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곳에서 소련 제7군과 연결될 예정이었다. 좀더 북쪽으로는 소련 제9군 산하의 5개 보병사단이 9만 5천의 병력, 275대의 전차 및 포 360문을 가지고 보드니아만의 입구인 스웨덴과의 국경을 향해 진격했다. 목적은 핀란드와 스웨덴과의 육상 교신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북극권에서는 소련 제14군 산하의 3개 보병사단이 병력 5만 5천, 전차 165대, 포 220문의 전력으로 페차모 지역을 점령한 뒤, 유일한 길인 500km에 달하는 북극 하이웨이를 따라 로바니에미까지 남하한 다음, 스웨덴 국경을 향해 서진할 계획이었다. 11월 30일 오전 7시, 소련군은 600문의 포를 동원, 아무런 예고 없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30분 뒤, 소련군 전차와 보병이 진격을 개시했다. 같은 날 아침 소련군은 헬싱키, 비푸리, 투르쿠, 항코 등의 대도시를 포함해 21개 지역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9시 15분부터 개시된 수도 헬싱키의 폭격에서는 90명 가량의 시민이 사망하고 300명의 시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소련군은 남카렐리아와 콜라 반도, 라플란드에서 침공을 시작했는데, 당시 11월 30일만을 기준으로 핀란드군과 소련군의 비교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편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와 심도에 대해, 만네르하임 원수의 말을 빈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최악의 상태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만네르하임은 핀란드군이 소련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입히면서 지연작전을 수행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전선에 걸쳐 핀란드군은 엄청난 규모의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저녁 무렵, 소련군은 핀란드 영토 내로 8km깊이까지 침투했으며, 이제 그들의 진격을 막기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핀란드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소련 지도부는 전투가 수일 내에 끝나리라 믿고,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병력이 스웨덴 국경에 도착하더라도 국경선을 넘지 말도록 타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만네르하임은 반격을 중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심각한 시기에 만네르하임은 한 핀란드 사람으로부터 예견치 않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도움을 제의한 사람은 기업인이자 핀란드 군수물자 구매 위원회의 한 사람인 파아보 탈벨라였다. 예비역 대령인 그는 지난 수일 동안 핀란드군이 당하고 있는 패배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탈벨라는 핀란드 내각에서 만네르하임과 절친하게 지내던 자신의 친구 루돌프 발덴 장군을 설득해 만네르하임과 만날 약속을 했다. 헬싱키의 한 호텔에서 세 사람이 만나자 탈벨라는 호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핀란드군은 패주만 하고 있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탈벨라는 만네르하임에게, 소련군을 라도가호 북쪽 동부 전선에서 저지하지 않으면, 적은 그쪽으로 들어와 만네르하임선 후방을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발덴 장군은 놀라워했다. 그 누구도 오만한 만네르하임에게 그런 투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덴 장군은 닥쳐올 결과에 대해 두려워 했다. 그가 더욱 놀란 것은 만네르하임이 그의 발언을 끝까지 침착하게 듣고 난 후, 탈벨라가 요구한 대로 그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만네르하임은 탈벨라에게 급히 편성한 1개 연대와 3개 대대 병력을 주어, 톨바야르비호의 서쪽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톨바야르비 마을(페트로자보츠크 서북서쪽 약 160km, 레닌그라드 북쪽 약 270km)로 보냈다. 이곳은 소련군의 전초병이 있는 코티사리섬에서 1.6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파아보 탈벨라가 지휘를 맡기 이전의 그 지역 핀란드군은 적의 포화에 쫓겨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장병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벨라는 여기서 버티기로 결심했다. 12월 8일, 탈벨라는 자정 직전에 기습 공격을 명했다. 얼어붙은 호수를 소리없이 건너가, 잠이 든 소련군을 기습한 것이다. 핀란드군은 소총과 수오미 경기관포로 얼마간 공격한 뒤 숲 속으로 철수했다. 어리둥절한 소련군은 공중을 향해 총을 난사했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핀란드군은 톨바야르비의 진지로 안전하게 귀환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처음으로 게릴라 전법의 맛을 보게 되었다. 이 전법을 후일 핀란드군은 아주 치명적인 전술로 발전시키게 된다. 핀란드군은 이 전법을 되풀이 사용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으로 적군의 휴식을 빼앗았다. 핀란드 특공대들은 흰색의 위장복을 입어 눈덮인 숲속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고, 스키를 이용하여 유령처럼 소리없이 나타나 공격하고는 사라졌다. 전원이 스키에 능숙하고 숲속 생활에 익숙하여 마치 사냥을 하듯 소련군을 습격했다. 또한 그들의 사격술은 거의 완벽하여 소련군들은 이들을 하얀 주검이라 불렀다. 한 소련군 장교는, "그들은 700~800m 거리에서 목표물을 사격하며, 거의 실수가 없다."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핀란드가 동원한 병력은 33만 명에 불과하였지만 게릴라식 전투와 흰 보호색 군복을 입은 기동력이 좋은 스키부대, 현지 사정에 대한 지식에 힘입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주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기초해 만들어진 일종의 화염병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핀란드인들은 화염병을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불렀는데, 전쟁 개전 초기 헬싱키 도심에 가해진 무차별 소이탄 공격으로 쏟아진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에 “우리는 원조용 빵을 투하했다”고 주장했던 소련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핀란드인들이 “그렇다면 이 술이나 받아라” 하고 화염병을 던졌던 것이다. 1939-40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해 -40 °C 수준의 온도가 보통이었으며 이는 핀란드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 소련과 핀란드 양쪽의 당초 예상과 달리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자국민들과 나란히 소련군과 싸웠다. 다수의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대에 소련에 가서 "공산주의 건설" 작업에 참여하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희생된 바 있어 핀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정부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증오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겨울 전쟁은 1918년 핀란드 내전으로 표면화된 이념 갈등과 스웨덴어 사용자들과 핀란드어 사용자들 간의 언어 갈등 등 핀란드 내부의 분열을 상당 부분 치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핀란드 국민들이 보인 단합 정신은 아직도 "겨울 전쟁 정신"이라 불린다. 다만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사상으로 인해 이때 핀란드의 징병군으로 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언급되어야겠다. 한편 핀란드군은 지형을 이용, 또 다른 가공할 전술을 창안해냈다. 적의 부대를 함정에 빠뜨려 산산조각을 내는 전법이다. 그들이 먼저 얼어붙은 호수 뒤편의 작은 구릉 같은 은폐처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진격해오는 적군 종대에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눈이 뒤덮인 나무들의 허리에 철조망을 서로 연결하여 적의 보병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탱크를 잡는 방법은 호수의 얼음을 깨 구멍을 내고 위장을 해 놓는 것이다. 일단 소련군이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 틈에 핀란드군은 적군을 옆 또는 뒤에서 공격을 가해 부대와 부대 사이를 절단시키고, 점차 주력 부대로부터 고립시켜, 시간이 갈수록 인원수가 줄어든 작은 집단으로 변모해가도록 만들었다. 핀란드군은 이렇게 고립된 소련군 병사들의 집단을 '모티(motti)'라고 불렀다. 그들은 불쏘시개용으로 쪼개야 할 작은 통나무를 그렇게 불렀는데, 아마도 여기서 그 이름을 딴 것 같다. '모티'에 빠진 소련군은 거의가 파멸이었다. 함정에 걸린 소련병들은 급히 얼어붙은 땅을 파 참호를 만드는 등 필사적으로 응전했으나 총알 못지않게 추위와 허기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2월 12일, 톨자야르비를 떠나온 파아보 탈벨라는 모티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소련군 제139사단을 함정에 빠뜨렸다. 이것을 안 소련군은 제75사단을 투입하여 제139사단을 구출하려 했으나, 이들 역시 같은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12월 23일이 되면서 탈벨라는 소련군 2개 사단의 생존자들을 톨바야르비 동쪽 24km지점의 아이토요기 강변까지 몰아내고, 그곳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 기간중의 소련군 피해는 전사 4천명에 수많은 부상자를 냈고, 많은 병사들이 행방불명되었다. 반면 핀란드측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하여, 전사 630명, 부상 1,320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군 제163사단은 12월 7일 수오무살미(Suomussalmi, 로바니에미 남동쪽 약 232km) 마을을 점령했다. 이에 맞서 재편성을 끝낸 핀란드군은 마을 주변에 반격을 가해, 소련군으로 하여금 심각한 피해를 입게 만들었다. 전황을 살펴 보면, 소련군이 수오무살미에서 참호를 파고 응전 태세를 갖추는 동안, 하얄마르 실라스부오 대령이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적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고 이를 완전 포위한 채 아군 보충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핀란드군이 보유하고 있던 병력을 살펴보면, 새로 충원된 5개 대대의 인원, 2문의 대전차포, 8문의 76mm포가 있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곤경에 빠진 제163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44기갑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비노그라도프는 무능했다. 그는 전투 현장에 늦게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핀란드 저격병을 보자 겁에 질려버렸다. 자군보다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부하들에게 참호를 파고 응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그곳은 그가 구출해야 할 부대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겨우 6~8km 떨어진 곳이었다. 포위된 소련군 제163사단은 성탄 전야를 기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미 동상에 걸린 그들은 가슴까지 올라오는 눈을 헤치면서 탈출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핀란드 저격병의 총탄에 몰려 얼어붙은 참호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호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사살되거나 참호 밖으로 되몰려 나와야 했다. 실라스부오 대령은 뒷날 이렇게 회고했다. "수류탄, 권총, 총검 등 닥치는 대로 있는 무기를 총동원하여 적진을 유린했다. 그들의 탱크조차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탱크에 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해서 12월 28일, 소련군 제163사단은 괴멸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포로 500명과 탱크 11대를 노획했다. 이 전투 이후 핀란드군의 관심은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 제44기갑사단에 집중되었다. 이 기갑사단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전력 면에 있어서는 1만 8천의 병력과 4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한 여전히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다. 한편으로 핀란드군 척후대가 제44기갑사단의 방위선을 탐색하는 동안, 핀란드 공병대는 소련군 진지 남방 8km 자점에 위치한 여러 개의 호수와 나란히 지나는 '눈길(snow road)'을 만들었다. 그 다음, 이 눈길을 따라 집결지를 설치하고, 난방이 된 거처와 따뜻한 음식을 마련했다. 핀란드군은 이러한 집결지에서 잘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소련 방위선상 취약점을 골라 잠복했다가 적을 덮쳤다. 소련군은 번번히 참패였다. 1월 8일에 이르러 전투는 거의 끝났다. 모두 27,500명의 소련군이 전사했고, 1,300명은 핀란드군의 포로가 되었다.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핀란드의 다윗이 소련 골리앗을 무찌른 것을 찬양했다. 한편 스탈린은 분노하여 그의 부하 장군들에게 그들의 무능을 꾸짖었다. 필연적인 결과로서 숙청이 시작되었다. 재수없이 걸려든 비노그라도프는 겨우 살아남기는 했으나 스탈린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그가 처벌된 표면상의 이유는 "적에게 55개의 야전 주방을 탈취당한" 죄목이었으나, 실은 미숙한 전술로 소련 국가에 끼친 손해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핀란드 수뇌부는 실라스부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수오무살미 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전공을 포상했다. 실라스부오는 다음으로 소련 제54사단에 목표를 맞추고 쿠모(수오무살미 남쪽 약 88km) 근처에서 이를 급습했다. 소련군은 또다시 참호를 파고 항전했다. 포위된 소련군은 보급을 공중 투하에 의존했다. 그러나 핀란드군에게는 대공포가 거의 없어, 소련 공군이 식량과 탄약을 투하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소련 항공기의 비행음을 듣고서 신호탄을 쏘아 소련의 보급 항공기가 아군 지역에 보급품을 투하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은 제54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핀란드군이 장기(長技)로 하는 바로 그 전법을 사용하여 스키병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련군 사령부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바로 스키병에게 흰색의 위장복을 지급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결빙에 대처한 무기의 유지 관리법이 전무해서, 총신의 기름이 결빙되어 발포가 되지 않는 수가 많았다. 일부 소련 스키병은 핀란드군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들 부대는 전체가 전멸되다시피 했다. 이렇게 해서 구원부대를 섬멸시킨 실라스부오 준장은 소련군 제54사단을 분열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 작전을 계속, 제54사단은 결국 지리멸렬되었다. 핀란드 북부에 침입한 소련군이 핀란드의 끈기와 교묘한 술책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동안, 만네르하임 방어선에서 진격을 저지당한 키릴 메레츠코프 장군은 방위선 공략을 재개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방위선 동쪽 끝 지역에 대해 주공세를 펴기 위해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핀란드군의 예비 병력을 그쪽으로 끌어낸 다음, 서쪽 끝의 수모요기강과 물란야르비호 사이의 16km폭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공격 목표가 되는 이 지역은 비푸리주에 위치해 있었다. 메레츠코프는 12얼 17일 만네르하임선에 대한 주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전형적인 러시아식 공격 방식을 취해, 보병은 폭발하는 지뢰나 핀란드군의 연속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자의 시체를 넘어 진격해 갔다. 공격하는 소련군은 부대간의 협동이 전무하였다. 이때문에 만네르하임은 적군의 이 공세를 두고 "형편없이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불협화음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방위선 공방전에서나 다른 전선에서 핀란드는 병력 면에서 4대 1의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틈 없는 전술과 필사적 용기로서 소련군을 격파했다. 소련군 탱크가 핀란드군 방위선에 들어가면, 이들은 반드시 핀란드군의 "탱크 파괴조"와 만나게 되어 있다. 이 "탱크 파괴조"는 핀란드 병사 1~2명으로 된 결사대로서, 이들은 3~6kg의 고성능 폭약이나 몰로토프 칵테일을 적 탱크에 투척하는 것이었다. 폭발물이 없을 때는 커다란 나무를 탱크의 캐터필러 사이에 넣어 이를 저지시켰다. 이런 저런 방법을 합쳐 핀란드군은 이 지역에서 소련군 전차 239대를 격파하고 12대 이상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나포했다. 이리하여 12월 20일에 이르자 메레츠코프는 공세를 중지하였다. 그리고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이 전선은 대체로 평온을 유지했다. 한편 스탈린은 매우 분노하였다. 핀란드가 그런 결사적인 저항을 해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이 소련군의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이 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소련의 자만과 무능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군은 그리 큰 저항을 예상하진 않았으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관들이 80%가 평화시에 희생당했었다. 이들은 보통 무능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이들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1차 세계 대전 때 이미 구식이 된 작전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독창적인 작전을 구사하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교과서적인 작전만을 고집했다. 또 겨울에 벌이는 전쟁, 특히 삼림 지대에서 벌이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핀란드군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이들이 대량 사용한 군용 차량은 이같은 조건에 매우 취약했다. 소련군의 한 부대가 핀란드 복병들로 둘러싸인 곳에 제발로 진주해 전멸당한 라테 가 전투()는 지금도 군사학에서 절대 범하면 안될 중대한 실수의 예로 많이 쓰인다. 이 당시 소련군 편제는 2차대전 중에 확립된 편제와 크게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대숙청 이후 살아남아 고위 장성이 된 장군들은 숙청에 대한 두려움은 둘째치고, 대단위 야전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준장급 이상 장군의 70%가 숙청되었으니 그들의 빈 자리는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이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위로 중대를 지휘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단을 지휘하게 되고 상관이나 동료들도 대부분 그런 판국이었으니,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작전 지휘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당시만 해도 아직 항공기, 공병, 기갑병, 포병, 보병 간에 역할이 분명하면서도 잘 협조할 수 있는 전술교리를 갖지 못했다. 장교들의 지휘 능력 문제와 더불어 새로운 현대전에 어울리는 전술교리를 숙지못했다는 점도 소련군이 초전에 대패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당시 대부분 군사 강국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로, 19세기적 전쟁 방식과 전술 교리에서 전차와 비행기로 대표되는 현대 전술 교리로 전환되는 과도기여서 어느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진 않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현대적인 기동전과 전술교리를 개발해서 적용한 군대가 독일군이었지만, 그들의 전술교리도 1940년 서부 유럽 전역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아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술교리를 채택하고 있었고, 독일의 폴란드 및 서유럽 침공과 소련군의 겨울 전쟁 교훈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된 근대전 전술교리를 갖게 되었으니, 소련군을 무능하다고 할 일도 아니었다. 독일군이 서유럽에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과 영국군도 이 당시 소련군 못지않은 실수를 연발했고, 독일군에 호되게 당한 이후에야 겨우 새로운 전술교리를 채택하게 된다. 핀란드의 장비 부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쟁 초기에는 기초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만이 군복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옷에 적당히 표장을 하였으며 일부는 자신들의 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들쭉날쭉이 된 "군복"에는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의 이름을 따 "카얀데르 모델"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핀란드군은 적군에게서 탈취한 장비·무기·탄약으로 부족한 장비를 충당하려 노력하였다. 다행히도 핀란드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소총을 바꾸지 않아 소련군의 소총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핀란드제 수오미 기관단총도 사용되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소련이 PPSH41 기관단총을 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분노한 스탈린은 먼저 속죄양을 찾았고, 여기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걸려들었다. 1940년 1월 어느날 스탈린은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키릴 메레츠코프 장군, 니키타 흐루시초프 등을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저택으로 소환하였다. 이 모임은 그해 겨울이 유별났던 것만큼 이상한 성격의 회동(會同)이었다. 저녁 식사 도중 스탈린은 벌떡 일어나 보로실로프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지휘관으로서 부적합한 보로실로프가 핀란드 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이 놀란 것은 보로실로프가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당신(스탈린)은 오로지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바로 당신이 소련군의 수구파(守舊派)를 숙청하여 훌륭한 군인들을 모조리 처형하지 않았소..."(1937년 피의 대숙청)하고 외쳤다. 이어 보로실로프는 통돼지 구이가 담긴 쟁반을 집어들어 식탁에 내동댕이쳤다. "내 평생에 그런 폭발은 처음 보았다."흐루시초프는 뒷날 이렇게 회상했다. 더욱 놀란 것은 스탈린이 매우 차분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그를 직위 해제했으나 처형하지는 않았다. 한편 스탈린은 핀란드 진주군 사령관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다. 그는 메레츠코프가 수립한 기본적인 공격안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병이 겨울 전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다시는 패배를 맛보지 않도록 전선에 병력을 증강했다. 당초 소련은 54만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공격했으나 현재는 티모센코 휘하에 90만의 병력이 있었다. 소련군 전선 후방에서는 병사들에 대해 공격 전술에 관한 집중적인 훈련이 실시되었다. 또한 핀란드의 기를 꺽기 위해 추가로 2,800문의 각종 포를 전선에 반입, 화력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을 감행했다. 수주일에 걸친 목격은 방위선 후방을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핀란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2얼 1일, 소련군은 강력한 탱크 부대를 앞세워 척후 공격을 카렐리아 지협 전반에 걸쳐 개시, 본 공세에 앞서 핀란드군을 한풀 더 꺽었다. 공격은 조직적으로 행해져, 야포와 공중 지원을 받은 소련 공병들은 핀란드군이 대전차 장애물로 이용해온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한 뒤 그로 인해생긴 틈새로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 다음에는 탱크 부대가 진격하고 대규모 보병부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폭격기가 핀란드 진지를 폭격했다. 핀란드군이 한 공격 부대를 격퇴하면 또다른 부대가 공격을 가했다. 만네르하임은 "소련군이 이제는 서로 다른 부대와 협동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법을 터득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2월 11일, 새로 충원을 받은 티모센코 원수 휘하 부대는 총공격에 나섰다. 이때부터 2주 반 동안 소련은 강력한 공격을 되풀이해 핀란드 방위망을 뜷고 내륙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핀란드군은 기진맥진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절망적인 노력의 하나로 전에는 불합격시킨 자도 징집하고, 부상자를 재소집하였으며, 심지어 10대 학생으로 자원 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일이 많았다. 봄이 되자 만네르하임 휘하의 장병들은 아직도 국부적으로 반격을 가해 승리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포탄이 거의 동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남자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탈벨라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곳이 위기에 처했다." 핀란드의 방위가 어느 한 모퉁이만 무너지면, 핀란드 전체가 와해될 것이었다. 만네르하임도 이제는 패배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핀란드군의 피해는 증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만네르하임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건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세계의 여론은 핀란드 편이였다. 세계대전이 아직 전면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겨울 전쟁은 당시 진행되던 유일한 전쟁이었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침공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인정되었다. 외국의 여러 단체들은 핀란드에 의약품과 같은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핀란드계 이민 인구는 핀란드에 돌아갔으며 외국에서 많은 수가 핀란드에 가서 지원병으로 싸웠다. 스웨덴도 이때만큼은 중립을 지키지 않고 군수품과 현금, 신용, 인도주의에 근거한 지원을 핀란드에 해주었다. 8700명의 스웨덴인 지원병이 핀란드를 위해 싸웠다. 헬싱키의 외국 특파원들은 전투에 있어서 핀란드군의 독창력과 성공에 대해 때로는 크게 과장되게 보도를 하였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채 안되어 소련의 지도부는 작전 포기를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월말이 되어서야 핀란드 정부에게 스웨덴 정부를 통해 예비 평화 제의를 전달하였다. 그때까지 핀란드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었다. 이 평화 제의 소식이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 알려지자 핀란드에 대한 군사 지원의 동기는 크게 변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 주변 자국 영토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뿐이었다. 물론 핀란드와 외국의 일반 국민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핀란드는 아직도 자신의 존속을 놓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0년 2월 연합국들은 지원을 제의했다. 노르웨이의 항구 나르비크를 통해 10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스웨덴을 통해 핀란드를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실제 핀란드 지원에 들어가도록 계획된 병력은 그 일부뿐이었다. 이 계획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여 독일로 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실이며 그리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군의 통과를 거절했다. 실제로 전쟁 이후 연합군의 사령관은 소련군과 전투 상황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치지 않고 핀란드의 부동항 펫사모를 통해 연합군을 투입하자는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당초부터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장악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 총리의 스웨덴 정부는 무장군이 스웨덴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거절했다. 스웨덴은 겨울 전쟁에 대해서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영국과 독일·소련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 프랑스·영국군의 통과를 허용하는 것은 국제법상 중립국이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스웨덴 내각은 또 핀란드가 여러 차례 요청한 스웨덴 정규군의 지원을 거절했다. 결국에는 장비와 탄환 지원도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핀란드는 전쟁이 지속되기를 희망한 연합국들과 전쟁이 자국까지 퍼지는 것과 핀란드 패전의 경우 난민 발생을 우려해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희망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 외교적으로 입지가 좁았다. 독일 역시 협정에서 양보된 것은 나중에 충분히 다시 차지할 수 있다면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라는 권고를 했다. 2월말 핀란드의 총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군사 상황 전개가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여 정부가 2월 29일 평화 협상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날 소련군은 비푸리 공격을 시작하였다. 핀란드가 평화 협정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와 영국이 알게 되자 그들은 재차 지원을 제의했다. 이번에는 핀란드가 3월 12일 이전 지원을 요청한다는 조건하에 50만 병력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병력 중 6천명만이 핀란드에 투입될 계획이었으며 나머지는 스칸디나비아 북부 나르비크와 스웨덴의 철광 산지를 점령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겨울이 끝나면서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뗄 의향이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독일의 대표들은 핀란드에게 소련과 협정을 할 것을 권했다. 소련군은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냈으며 소련 정부에게 이는 큰 국제적 망신거리였다. 봄이 오면서 해동으로 소련군이 삼림 지대에서 자칫 수렁에 빠질 상황에 놓였다. 그리하여 2월 12일 평화 조항 초본이 핀란드에 전달되었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스웨덴도 핀란드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겨울 전쟁이 빨리 종전되기를 희망했다. 핀란드에 극히 불리한 조항을 받고 핀란드 내각이 망설이는 동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의 스웨덴 정규군 지원 요청을 거절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2월말이 되자 핀란드군의 탄환은 바닥이 났다. 소련군은 그때까지 많은 사상자만 내면서 넘지 못하던 만네르헤임 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소련 당국은 그들의 군대가 왜 이 방위선을 돌파하기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나 하는 이유를 자국민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대전차 장애물 같은 구조물의 규모와 강도를 과장해서 발표했다.) 결국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 1940년 3월 6일 양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4개월간의 전쟁 후 소련군에서는 최소 12만 7000명이 사망하였다. 핀란드군은 2만 7000명 정도의 사망자밖에 내지 않았지만, 핀란드는 많은 것을 잃었다.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통해 핀란드는 제2도시 비푸리(Viipuri)를 포함한 공업 중심지인 핀란드령 카렐리야(핀란드어로 카리알라) 영토를 소련에 넘겼다(협상 당시 많은 부분을 핀란드군이 점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이는 핀란드 영토의 10% 가까이 되었다. 핀란드 인구의 약 12%인 42만 2000명의 카렐리야인들은 거주지를 잃었다. 이 조약으로 소련 영토가 된 지역에 있던 핀란드군과 민간인들은 속히 대부분 핀란드로 대피되었다. 핀란드는 이외에도 살라(Salla) 지방과 바렌츠 해의 칼라스타얀사렌토 반도(Kalastajansaarento peninsula), 핀란드 만의 섬 4개를 소련에 넘겨야 했다. 항코(Hanko) 반도도 소련에 군사 기지로 30년간 임대되었다. 핀란드 국민들은 가혹한 평화 조약 조항에 당혹했다. 전쟁에서 잃은 영토보다 평화로 잃은 영토가 더 많은 듯했다. 국제 여론, 특히 스웨덴의 동정은 무의미했다. 그리하여 핀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소련에 대한 복수전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1년 후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이 발발, 전쟁은 재개되었다. 요하네스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는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이자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행성운동법칙으로 유명하며, 후대의 천문학자들은 그의 저작 《신천문학》, 《세계의 조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를 바탕으로 그 법칙을 성문화하였다. 또한 이 저작들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생애 동안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신학교의 수학 선생,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의 조수,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등 세 황제를 모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의 수학 선생, 발렌슈타인 장군의 점성술사라는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광학 연구 분야의 초석을 닦았으며, 굴절 망원경을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으며(케플러식 망원경), 동시대의 인물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데 공헌하였다.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천문학(자유 인문의 범위 내에 있는 수학의 한 가지)과 물리학(자연 철학의 한 가지) 사이에는 확고한 경계가 있었다. 그는 이성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빛을 통하여 이해가 가능한 (accessible through the natural light of reason) 지적 계획에 따라서 신은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념에 차 있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자신의 저술 속에 종교적 주장과 이성적 사고를 융합시켰다. 케플러는 천문학을 보편적 수리물리학의 한 갈래로 인식함으로써 고대의 물리학적 우주론의 전통을 바꾸었고, 자신의 새로운 천문학을 이른바 “천체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의 여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에 관하여》의 보충” 이라고 묘사했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 바일데어슈타트의 제국자유도시(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슈투트가르트에 속하고 슈튜트가르트 중심부에서 30 km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동네)에서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다. 케플러 본인이 어른이 되고 나서 계산한 바에 따르면, 부모가 결혼한 다음날 오전 4시 47분에 자신이 잉태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제발트는 그곳 읍의 장이었지만 케플러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보수가 불확실한 용병 일로 벌이를 했고, 케플러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가버렸는데, 80년 전쟁 당시 네덜란드 전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관집 딸이었던 어머니 카탈리나 굴덴만은 치료사이자 약재상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나중에 마녀로 몰리게 된다. 이르게 태어난 케플러는 병약하지만 영리한 아이였고, 외할아버지의 여관에 묵는 사람들을 자신의 굉장한 수학적 재능으로 놀라게 하곤 했다. 케플러는 여섯 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으며, 후에 그 일을 《여섯 살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에서 "나는 1577년의 혜성에 대해 많이 들었고,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라고 회고했다. 9살 때, 그는 또다른 천문학 현상인 1580년 월식을 관찰하였고, 후에 월식을 보기 위해 “밖으로 불려가서” 달이 “약간 붉은 색이 된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천문학을 알게 되었고, 평생에 걸쳐 천문학에 사랑을 쏟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에 천연두를 앓은 바람에 병약한 신체와 불구의 손을 가지게 되었고 시력도 악화되어 관측 능력에 결함이 생겼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의 지방 귀족들이 레온베르크에 세운 영재학교에 들어갔다. 케플러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고약한 성격 탓에 친구가 없었다. 훗날 케플러의 자서전에서 이 시절을 묘사한 대목은 끝도 없이 “누군가와 싸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했다”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케플러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고, 심기증 환자기도 했다. 1589년, 초등 학교, 라틴어 중등 학교, 뷔르템베르크의 국영 개신교 신학교를 거친 뒤,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에 신학 학생으로 들어가 비투스 뮐러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교과 과정 중에는 수학과 천문학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굉장한 실력의 수학도임을 증명했고 능숙한 점성술사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동년배 학생들에게 별점을 쳐주곤 했다.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미하엘 매스틀린의 지도를 받으며,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관하여 개신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설과 일부 제자들에게만 개인적으로 가르쳤던 코페르니쿠스설 양쪽을 모두 배웠다. 그는 이 시점부터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었다. 학생들 간에 토론이 벌어지면, 케플러는 이론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 모두에서 지동설을 옹호했고, 태양이 우주를 움직이는 주요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목사가 되겠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학업의 막바지에 이르러 케플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그라츠 대학의 전신)의 수학과 천문학 교사 자리로 천거되었다. 그는 1594년 4월, 나이 23세 때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케플러는 훌륭한 학자이긴 했어도 훌륭한 교육자는 되지 못했다. 목소리는 웅얼거렸고, 빈번히 강의 주제를 벗어나 옆길로 빠졌으며, 그라츠에서의 두 번째 해에는 수강생이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말 못하게 지루한 강의였다고 한다. 케플러의 첫 주요 천문학 연구 《우주구조의 신비》()는 코페르니쿠스 설을 옹호한 최초의 출판물이다. 케플러는 그라츠에서 선생을 하고 있을 때인 1595년 7월 19일에 토성과 목성의 궁도대에서의 주기적인 합을 증명해 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다각형들이 서로 안에 갇혀 우주의 기하학적 기반이라고 생각한 확실한 비율로 원에 내접하고 외접한다고 생각했다. 천문 관측 결과와 들어맞는 다각형들의 배열을 찾는 데 실패하자, 케플러는 입체 다면체로 실험을 시작했다. 케플러는 다섯 개의 플라톤의 다면체들이 구형의 천구 에 각각 내접하고 외접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입체들은 각각 다른 입체의 안에 있는 구 안에 있음으로,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여섯 개의 행성들―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그리고 토성에 상응되는 6개의 포개진 겹을 형성하는데, 이 입방체들은 안에서 밖으로 순서대로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이다. 케플러가 이렇게 정다면체와 행성을 연결해서 추측한 배경에는 정다면체의 종류도 유한하다는 사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케플러는 행성이 여섯 개 뿐(적어도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는)인 까닭이 정다면체가 다섯 개 뿐이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고, 정다면체에서 행성의 구들을 유지하는 투명 구조물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케플러는 이 이론을 ‘코스모스의 신비’라고 불렀다. 그는 정다면체와 행성 간 거리의 관계가 ‘신의 손’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었다. 제목에 나타냈듯이, 케플러는 자신이 우주에 대한 신의 기하학적인 계획상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케플러의 믿음의 대부분은 우주 자체가 신의 이미지이며, 태양이 성부, 항성 천구가 성자, 그리고 그 사이의 우주 공간이 성령이라는, 케플러의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주구조의 신비》의 첫 번째 원고는 지동설을 천동설에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의 구절들과 조화시키는 데 광범위한 장(章)을 할애했다.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성경 주해를 제거하고, 케플러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포함한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묘사를 추가한 원고 출판에 대한 튀빙겐 대학교 이사회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우주구조의 신비》는 1596년에 출판되었고, 케플러는 1597년에 그 사본을 저명한 천문학자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책이 널리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케플러는 고도로 숙련된 천문학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게 된다. 또한 후원을 받기 위해 그라츠에서 자신의 직위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물론, 강력한 후원자들을 향해 감정이 넘쳐 흐르는 헌정사를 쓰기도 했다. 이후 나중의 연구에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수정할 작정이었지만,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플라톤 다면체 우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케플러의 주요한 천문학 연구들은 보다 정밀한 내, 외부의 구의 크기를 알아내기 위해 행성 궤도의 이심률을 계산하는 등, 오직 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신비》의 초판 출간 이후 25년 동안 주석을 달아, 1621년에 확장된 두 번째 판을 출판했는데, 첫 번째 판의 한배 반 정도의 길이였다.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이 우주론의 모형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연구 제안서를 제출했다. 케플러는 은과 보석으로 모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도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고 여차하면 공작의 잔으로도 쓸 수 있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안서는 값싸게 종이로 먼저 만들어 보라는 충고와 함께 퇴짜를 맞았다. 1595년 12월, 케플러는 23살의 딸 딸린 과부 바바라 뮐러를 소개받고 연애하기 시작했다. 뮐러는 전남편의 재산들을 상속받게 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욥스트는 케플러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결혼을 반대했다. 케플러는 할아버지의 신분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의 가난은 신분과 어울리지 않았다. 욥스트는 케플러가 《우주구조의 신비》작업을 마치고 나자 마음이 누그러졌으나 케플러가 책 출판의 세세한 일에 신경을 쓰는 동안 약혼은 거의 파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약혼이 성사되도록 도왔던 교회 사람들이 뮐러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압력을 넣었고 뮐러와 케플러는 1597년 4월 27일 결혼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케플러는 두 아이(하인리히와 수잔나)를 얻었으나 둘 다 어렸을 때 죽고 말았다. 1602년 그들은 딸 수잔나를 낳았고, 1604년 아들 프리드리히를, 그리고 1607년 아들 루트비히를 낳았다. 《우주구조의 신비》의 출판과 그라츠 학교 장학사들의 찬성에 따라 케플러는 연구를 연장 및 부연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4개의 책을 더 쓰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고정된 우주의 외관(태양과 붙박이별들)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행성과 그 운동에 대한 것, 다른 것은 행성의 물리적 특성과 지리적 특징(특히 지구에 초점을 맞추어)의 구성에 대한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하늘(천국)이 지구에 미치는 대기광학적·기상학적·점성술적인 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많은 천문학자들에게 《우주구조의 신비》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마구잡이로 여러 곳으로 발송한 책들 중 두 권이 어찌어찌해서 이름 없는 수학 선생의 손에 들어갔다. 그 선생은 케플러에게 "나도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직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라는 답장을 보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책을 받은 과학자들 중에는 루돌프 2세의 제국 수학자이자 튀코 브라헤의 숙적인 라이마루스 우르소도 있었다. 1598년, 오래간만에 편지를 보낸 매스틀린 선생은 우르소의 책은 무가치한 표절품이라고 충고했는데도 우르소와 엮이고 말았다고 케플러를 심하게 꾸짖었다. 우르소는 당시 튀코 체계 를 누가 제창했느냐의 문제로 튀코와 싸우고 있었다. 우르소는 튀코와의 싸움에서 케플러를 인질 삼을 흑심을 품고 있었다. 케플러는 멋도 모르고 우르소에게 “가설이 마음에 듭니다”라는 편지를 보냈고, 우르소는 튀코와의 논쟁에서 자신의 우선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기 저서 《천문학적 가설에 대하여》에서 케플러의 알랑거리는 편지들을 재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우르소는 튀코를 근거없이 비난했고, 참다못한 튀코는 우르소의 책을 마구 찾아내 불태워버렸다. 그런 사정을 몰랐던 케플러는 순진하게 튀코에게 자신의 책을 보냈다. 튀코는 ‘남을 중상모략하는 범죄나 다름없는 책’에 자신의 편지가 이용당한 사실을 케플러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튀코는 튀코대로 우르소에 대한 소송에 케플러의 언질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튀코 또한 케플러의 이론에 대해 다소 신랄하지만 이치에 맞는 비판을 시작으로 케플러와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반대자들 중 한 명으로서 튀코는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부정확한 수치 자료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 편지들을 통해, 튀코와 케플러는 월면 현상에 대한 이야기 및 코페르니쿠스설과 그 신학적 생존 가능성 등 광범위한 천문학 문제들을 토론했다. 그러나 튀코의 데이터보다 정확한 자료가 없었기에 케플러는 이 많은 쟁점들을 제대로 다뤄 볼 방법이 없었다.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과 〈조화〉, 즉 음악과 수학과 물리학계의 수비학적 관계와 점성학적 중요성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지구가 영혼(후에 태양이 어떻게 행성운동의 원인이 되는지 설명하려고 했을 때 케플러가 사용한 도구)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여, 점성술적 에스펙트와 천문학적 거리를 날씨와 다른 지구의 현상들에 결합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1599년, 사용 가능한 자료들의 부정확함 때문에 케플러는 또다시 자기 연구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관측 결과와 자기 이론이 맞지 않자 가설의 거창함에 빠져 있던 케플러가 내린 결론은 코페르니쿠스의 관측값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누구보다 정확한 관측 자료를 자랑하던 튀코를 만날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 같은 시기 주변 환경이 종교적으로 불안해진 것도 그라츠에서 케플러가 계속 일하는 것을 위협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라츠를 지배하던 대공은 가톨릭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권력 밖으로 밀려났다. 가톨릭을 믿지 않으면 수입의 1할을 벌금으로 내거나 추방당해야 했다. 그 해 12월, 튀코가 케플러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1600년 1월 1일(초대장을 받기도 전에), 케플러는 튀코의 후원이 있다면 이 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케플러 자신의 사회적·경제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프라하로 출발했다. 이 즈음 튀코는 우르소와의 추한 싸움에서 승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가 되어 있었다. “우르소는 불명예인으로 낙인찍히고 참수될 것이다”라는 판결이 나왔고, 우르소는 프라하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1600년 10월 16일,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우르소는 처벌을 받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1600년 4월 4일, 케플러는 튀코의 새 관측소가 세워지던, 프라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 프란츠 텡나겔과 롱고몬타누스를 만났다. 케플러는 두 달 이상 손님으로 머물렀고, 튀코의 화성 관측 일부를 분석했다. 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철저히 극비에 부쳤지만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동을 받아 곧 자료 입수를 허락했다. 케플러는 자기 저서 《우주구조의 신비》의 이론을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에 기반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집에서 작업하기 위한 자료 복사본을 가져가는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는 이후 2년의 시간이 걸린다. 요하네스 예세니우스의 도움으로 케플러는 정규직을 얻기 위해 튀코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격한 싸움 끝에 깨지고, 4월 6일 케플러는 프라하로 가버렸다. 케플러와 튀코는 곧 화해하고 마침내 봉급과 주거 생활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6월, 케플러는 가족들을 데리러 그라츠의 집으로 돌아갔다. 케플러와 튀코는 가깝지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튀코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튀코의 주변에는 늘 조수들, 아첨꾼들, 식객들로 북적거렸고 이들은 시골에서 온 촌뜨기 학자인 케플러를 놀려댔다. 튀코 역시 잠재적 경쟁자인 케플러에게 조금씩 볼 수 있도록 해줬을 뿐 쉽게 자료 전체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튀코는 케플러가 우르소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라츠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이 튀코에게 바로 돌아가겠다는 케플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천문학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희망으로, 케플러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수학자로 임용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케플러는 달의 운동에 대한, 힘에 바탕한 이론을 제안한 소론(《지구 안에 달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In Terra inest virtus, quae Lunam ciet")을 써서 페르디난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페르디난트 본인이 개신교도들의 추방에 앞장섰고, 케플러는 총 61명의 추방자들 중 15번째로 추방당했다. 페르디난트 아래에서 일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이 소론은 월식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했다. 이 방법은 7월 10일 그라츠에서의 월식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관측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에서 완성한, 광학 법칙을 탐구하는 데에 기초를 형성했다. 1600년 8월 2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뒤 케플러 가족은 그라츠에서 추방당했다. 몇달 뒤 돌아온 케플러는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떠났다. 한편, 튀코의 연구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튀코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롱고몬타누스는 덴마크로 돌아갔고, 요하네스 뮐러도 떠났으며, 텡나겔은 튀코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뒤 홀란트(네덜란드)로 가버렸다. 결국 남은 연구원은 튀코와 케플러뿐이었다 1601년의 대부분 동안 케플러는 튀코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는데, 그 대가로 튀코는 케플러에게 행성의 관측 결과를 분석하고 (이제는 고인이 된) 경쟁자 우르소에게 불리한 내용의 논문을 쓰는 일을 시켰다. 케플러는 스승 매스틀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튀코는 좋은 사람이지만 유치하고 변덕스럽다”, “우르소를 반박하는 글을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당시 케플러가 쓰던 《우르수스에 대한 튀코의 방어》는 튀코가 죽자 미완성인 채로 방치되었고, 1858년에야 출판되었다. 9월, 튀코는 에라스무스 라인홀드의 《프로이센 목록》을 대체하기 위해 황제에게 제출한 새로운 프로젝트 《루돌프 표》의 공동 작업자로 케플러를 임명했다. 1601년 10월 13일, 케플러는 달과 토성, 화성을 관측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튀코는 로젠버그 남작이 베푼 만찬에 놀러 가 포도주를 과음했는데, 예의를 차리느라 화장실에 가지 않고 오랫동안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다. 하지만 음식과 음주를 자제하라는 충고를 듣지 않아 병이 악화되었고, 이내 정신을 잃고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졌다. 튀코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는 케플러를 불러 튀코 체계의 연구에 전념해 달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혼수상태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날 살려 줘, 날 살려 주게.” “내 삶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하는 독백을 되풀이하더니 결국 튀코는 1601년 10월 24일에 어이없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틀 뒤, 케플러는 튀코가 완성하지 못한 작업을 완성하는 책임을 지고 튀코의 후임으로 제국 수학자에 임명되었고, 튀코의 관측 자료가 없다고 완강하게 발뺌하는 튀코의 유족들에게 관측자료를 받아내는 일을 해야 했다. 한편, 이듬해 돌아온 텡나겔은 튀코 유족들을 대표해 유족들의 몫을 요구했다. 그 결과, 튀코의 자료들을 사용하기 위해 저작권을 협상하느라 작업물 두 가지의 출판이 4년 지체되었다. 케플러는 그 뒤 11년 동안 황실 수학자로서, 일생 중 가장 생산적으로 지냈다. 궁정 수학자로서 케플러의 주요 업무는 루돌프 황제에게 별점을 쳐주는 일이었다. 케플러는 당대의 점성술사들이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하거나 구체적인 사건을 예언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튀빙겐에서 공부할 시절부터 동료들이나 가족들, 후원자들에게 천궁도로 상세하게 점을 쳐주곤 했다. 또한 황제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도 케플러의 별점을 구했다. 하지만 케플러의 충고들은 별보다는 상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루돌프는 자신의 황궁에 소속된 학자들(셀 수 없이 많은 연금술사들도 포함해서)의 연구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고, 물론 케플러가 물리학, 천문학 연구를 지속하도록 도와 주었다. 프라하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우트라퀴스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였다. 하지만 황궁에서 일하던 케플러의 지위 덕분에 케플러의 루터교적 신념은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황제는 케플러 가족에게 ‘명목상으로는’ 충분한 보수를 제공했지만, 한도를 넘어버린 황실 금고의 어려움 때문에, 케플러는 재정적 의무를 위해 충분한 돈을 손에 넣으려면 계속해서 애를 써야 했다. 쉽게 말해, 프라하 황궁에서 황제가 준다는 돈은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수령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튀코의 후임으로 임명되면서 루돌프 황제에게 2만 플로린 의 하사금을 약속 받았지만, 실제로는 한 푼도 받지 못했으며, 연봉 500플로린을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케플러의 임금은 3명의 황제(루돌프, 마티아스, 페르디난트)를 거치면서 이런 식으로 꾸준히 체불되어, 페르디난트 2세 때는 밀린 봉급이 1만 2천 플로린에 달했다. 한편, 바바라와 함께한 가정 생활은 이러한 재정적 문제 때문에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둘은 종종 싸우기도 하였고, 바바라의 발작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바바라는 높은 계급 출신은 아니었지만, 시골의 상류층 집안의 딸이었던 만큼 남편의 가난한 직업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멸하기까지 했다. 케플러는 또 케플러 나름대로 “아내를 나무라기보다 내 손가락을 깨무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황궁 생활 덕분에 케플러는 요하네스 마태우스 바커 본 바켄펠스, 요스트 뷔르기, 데이비드 파브리시우스 등의 다른 저명한 학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천문학 연구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케플러는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 분석을 계속하면서 《루돌프 표》 목록화를 천천히 시작했다. 한편, 그는 1600년에 펴낸 달에 대한 논문에서 광학 법칙 연구 결과를 소개하였다. 그 당시 월식과 일식은 예상치 못한 그림자의 크기, 개기 월식때 붉게 물드는 달, 개기 일식 때 태양을 둘러싼 이상한 빛 등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대기 굴절과 관련된 이슈들은 〈모든〉 천문학적 관찰에 응용되었다. 케플러는 1603년 대부분의 시간을 광학적 이론에 쏟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연구들을 잠시 멈추었다. 연구 결과 나온 원고는 1604년 1월 1일에 황제에게 헌정되었고, 그 이름은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이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빛의 밝기를 좌우하는 역제곱 법칙, 평면 거울과 곡면 거울에서의 반사 현상,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그리고 시차나 육안상의 천체의 크기 같은 광학의 천문학적 의미를 설명했다. 또한 케플러는 자신의 광학 연구를 인간의 눈에까지 연장했고, 망막 위의 수정체 때문에 이미지들이 상하좌우 반전되어 투영된다는 것을 인지한 최초의 신경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케플러는 이미지가 반전된다는 사실을 광학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딜레마의 해결책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영혼의 어떤 작용으로 인해 이미지가 뇌 속에 들어가서 바로잡혀진다고 생각했다. 본래 케플러는 이것을 몇주동안 써서 간단한 논문으로 내려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450페이지에 이르는 대작이 되고 말았다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은 굴절의 법칙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현대 광학의 기초로 평가받고 있다. 1604년 10월, 새로운 밝은 항성(SN 1604)이 나타났지만 케플러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케플러는 그 항성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했다. 그 초신성은 밤 하늘에서 가장 밝은 금성보다 약간 덜 밝았으며, 일 년 이상이나 관측되었다. 점성술적으로, 1603년은 수상궁의 시작 및 약 800년 주기의 대회합(목성과 토성의 합) 기간의 시작으로 지정된 해였다. 점성가들은 앞에서 말한 두 기간을 샤를마뉴의 등장(약 8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약 1600년 전)과 관련시켰고, 이로부터 새로운 황제가 등장한다는 식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리라고 추측했다. 케플러가 2년 뒤에 이 새로운 항성을 자기 저서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에서 기술한 것은, 황제를 위한 황실 수학자이자 점성술사로서 이러한 정황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케플러 본인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점성술적인 역사적 순환 해석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대신 항성의 천문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 논문에 항성의 밝기가 점차 어두워지는 것, 항성의 기원에 대한 추측, 시차를 잴 수 없었다는 점이 이 천체가 항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 더 나아가 하늘(천국)은 영원불변한다는(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어져 온 천구가 완벽하고 불변하다는 생각) 교리에 대한 의심 등을 기록했다. 새로운 항성의 탄생은 곧 하늘(천국)이 변화하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두 행성운동법칙이 포함된 《신천문학》()에서 절정에 달한 심화된 연구는, 튀코의 지도하에 화성의 궤도에 관한 분석적 검토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기 이론에서 무시했던 수학적 요소인 상응점을 이용하여, 케플러는 화성 궤도의 여러 근사치를 계산하고 계산하고 또 계산하여 마침내 튀코의 관측 결과와 2분(평균적인 측정 오류) 범위 내에서 거의 일치하는 모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는 이 부정확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형이 특정 지점에서는 관측 결과와 8분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전통적인 수학적 천문학 방법의 광범한 배열을 따랐다가 실패하자 관측 결과에 타원 궤도를 대입하는 데 착수했다. 케플러는 우주를 종교적인 관점으로, 태양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징이며 태양계 기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케플러는 《자석에 관해서》(1600년)에 나온 지구의 자기적에 대한 윌리엄 길버트의 이론과 광학에 유추하여 자신의 연구를 이끌어 냈다. 케플러는 행성이 태양에 가깝고 멀리 갈수록 운동이 빨라지고 느려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힘(또는 움직이는 생명) 이 태양에 의해 퍼져나가며, 멀어질수록 약화된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은 천문학적 체계를 부활시킬 수학적 관계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원일점과 지구와 화성의 근일점 측정에 바탕하여 행성의 운동 비율은 태양까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알아냈다. 궤도 주기를 통해 이 관계를 입증했지만, 이는 대규모의 계산을 필요로 했다. 이 작업을 단순화하기 위해 1602년 말에 케플러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계산을 다음과 같이 재공식화했다.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행성과 태양 사이 거리에 관계없이 항상 같다.” 이것이 제2 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이었다. 그러고 나서 케플러는 기하학적 비율법을 사용하여 화성의 전체 궤도 계산에 착수했으며, 화성 궤도가 알 모양임을 확신했다. 거의 40여 번에 달하는 실패 끝에, 마침내 1605년 초에 케플러는 전대의 천문학자들이 못 보고 지나친, 해답이 되기에는 너무 간단하다고 여겨졌던 타원에 대한 생각을 우연히 떠올렸다. 타원형의 궤도가 화성 관측 자료에 들어맞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이것이 제1 법칙, 타원궤도의 법칙이었다. 케플러는 계산할 때 조수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화성 외의 천체에도 수학적 분석을 하지는 않았다. 그해 말경, 그는 《신천문학》의 원고를 완성했으나, 튀코의 관측 결과를 사용한 것에 대한 튀코의 유족들과의 법적 분쟁으로 인해 1611년까지 출판하지 않았다. 《신천문학》이 완성됨에 따라, 여러 해 동안 케플러의 연구 중 대부분은 《루돌프 표》의 준비와, 목록에 바탕한 추산 위치표(행성과 항성의 위치에 대한 예측)의 포괄적인 집합에 맞춰져 있었다(하지만 많은 해가 지나도 둘 다 완성되지 않았다). 또 케플러는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조반니 안토니오 마치니와 협력하려고 시도했는데, 이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케플러의 작업 중 몇은 연대학(특히 예수가 살던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의 날짜 기입)과 점성학(특히 대참사에 관한 연극 같은 예언을 하는 로슬린 등의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루어졌다. 한편, 케플러는 1608년에 한 무명의 귀족에게 별점을 쳐 줬다. 그의 사주는 “민첩하고, 명민하며, 근면하고, 평범한 일에 한눈팔지 않으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용맹 정진할 것이며, 영광에 대단히 목말라하고 현세의 명예와 권력을 탐식할 것이며 그 결과 스스로 공개적·비공개적 적들을 숱하게 만들 것이나, 그 모든 적들을 대부분 극복하고 정복할 것이다”라고 나왔다. 이 무명의 귀족은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이 사람이 바로 후일 케플러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었다. 케플러와 로슬린은 출판물을 통해 서로의 이론을 공격하거나 공격에 대해 반격했으며, 그 와중에 치료사 필리프 베살리우스는 점성술(그 중에서도 특히 로슬린의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저작을 출판했다. 케플러는 점성술을 지나치게 옹호하는 이론과, 다른 한편으로 점성술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현실을 목도했고, 여기에 응하여 《제삼자의 개입》("Tertius Interveniens")을 썼다. 이 작업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반목하는 학자들간을 중재하는 것이었으나, 이외에도 행성과 인간의 영혼간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과, 점성술의 가치에 대한 케플러의 총체적인 관점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케플러는 행성의 배열이 인간과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고 진지하게 믿기도 했지만, 점성술이 “어리석은 자들에게 미신을 조장하는” 위험한 것이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한 인물이었다. 1610년의 첫 번째 달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강력한 기능을 지닌 신형 망원경을 이용, 목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4개의 위성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오, 유로파를 발견하였다.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별세계의 사자〉라는 뜻)를 출판하면서 자기 관측 결과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해 케플러의 자문을 구하였다. 케플러는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를 통해 매우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그는 갈릴레오의 관측을 보증하였고, 갈릴레오의 발견이 뜻하고 암시하는 바와 망원경 이용의 추측 범위를 우주론과 점성술 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광학에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해가 지나고, 케플러는 달을 망원경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관측, 《목성의 위성에 대한 해설》("Narratio de Jovis Satellitibus")을 출판하여 갈릴레오의 이론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신천문학》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케플러는 실망하였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목성의 위성들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다.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보증으로 자신을 겨냥한 이런 비판들을 모두 꺾어 버릴 수 있었지만, 케플러는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무례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고, 갈릴레오는 천문학 이론의 개혁을 이룬 케플러의 업적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무례하게도 보이는 갈릴레오의 이런 반응에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1577년 대혜성에 대해 튀코는 혜성이 엄연한 천체라고 주장한 데 비해서 갈릴레오는 혜성이 시각적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케플러는 혜성에 관한 연구에서 튀코를 지지했는데, 매스틀린은 갈릴레오를 한방 먹였다면서 케플러를 축하해 주었다. 비판에 익숙하지 않았던 갈릴레오가 케플러의 이런 태도를 위협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 케플러도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하여 광학 망원경에 대한 이론상·실험상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1610년 9월에는 《굴절광학》(" Dioptrice")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1611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양면 볼록 렌즈로 된 수렴 렌즈와 양면 오목 렌즈로 된 발산 렌즈에 대한 이론적 근거, 또 이 렌즈들이 어떤 작용으로 갈릴레오식 망원경을 구성하는지의 원리, 실상과 허상의 개념은 물론이고, 정립상과 도립상, 그리고 확대 및 축소에 따른 초점 거리의 결과까지 설명했다. 또한 케플러는 볼록 렌즈 두 장을 사용하여 갈릴레오의 볼록 렌즈 - 오목 렌즈 결합보다 높은 배율을 낼 수 있는 향상된 성능의 망원경을 구상하였는데, 이것이 케플러식 망원경으로, 오늘날의 굴절식 천체 망원경의 모태이다. 1611년을 전후하여, 케플러는 《꿈》("Somnium")으로 (사후에) 출판될 원고를 배포하고 다녔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와중에 사라져 버린 이 원고는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우화였고, 부분적으로 자전적이었으며, 부분적으로 행성간 여행에 대한 논문이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과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일 소설 속 서술자의 어머니가 악마들과 어울려 지내다 우주 여행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부분으로 인한 왜곡된 해석은 케플러의 어머니가 마녀 재판에 끌려가는 결과를 낳았는데, 결국 무죄가 입증되고 나자 케플러는 이야기에 과학적 정보(특히 월면 지리학에 관한)는 물론, 이야기의 속뜻이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까지 설명하는 223개의 주석을 달았는데, 본문보다도 길었다. 1590년대 말경에 영국의 월터 롤리 경은 부하 토머스 해리엇에게 포탄 무더기가 쌓인 모양을 보고 포탄의 개수를 알아낼 수 있는 공식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해리엇은 거기서 더 나아가 포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해리엇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다가 당시 최고의 수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케플러에게 편지를 보냈다. 해리엇의 편지를 받은 케플러는 가장 밀도가 높게 구를 쌓는 방법은 시장 상인들이 과일을 쌓을 때처럼 육방 밀집 쌓기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611년 새해 선물로 케플러는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 마태우스 바커 폰 바켄펠스 남작을 위해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Strena Seu de Nive Sexangula")라는 제목의 짧은 소논문을 지었다. 이 소논문에서 케플러는 눈송이의 육방정계 구조를 연구하고, 그것을 원자론의 물리적 근거로 해석했으며, 구를 가장 촘촘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술했다. 마지막 것이 후에 케플러의 추측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함께 수백년 동안 수학적 난제로 남았다.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는 케플러의 다른 방대한 저작들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책은 결정체나 식물의 형태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최초의 시도였기에 충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오갈 데 없는 피난자 신세로 프라하를 찾은 지 11년 만에 케플러는 학계를 이끄는 정상급 과학자로 성장해 있었다. 튀코의 후계자라는 위상과 계속해서 묵직한 책들을 내놓은 이력은 케플러가 천문학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박학다식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케플러의 황금기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후원자 루돌프 황제가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편집증에 정신 착란까지 보였고, 황제의 무능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위기에 처했다. 1606년 4월부터 합스부르크 왕가 인사들은 황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동생 마티아스를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1611년, 프라하의 정치·종교적 불안은 곪아 터질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가던 후원자 루돌프 황제는 동생 마티아스의 강요에 의해 보헤미아 왕의 자리를 포기했다. 또한 그 해에 아내 바바라가 홍반열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바라가 회복되어 갈 즈음, 세 자식들이 모조리 천연두에 걸려,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아들이 죽자 케플러는 뷔르템베르크와 파도바의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뷔르템베르크의 튀빙겐 대학교에서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과 협화신조에 배치되는 케플러의 칼뱅주의적 반대론을 염려하여 케플러의 귀환을 방해했다. 파도바 대학교에서는 공석(空席)이 된 수학 교수직에 전임 갈릴레오의 추천으로 케플러를 임용하려 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가족들은 도이칠란트에 머무르게 하는 대신, 자신은 린츠에서 선생 자리 및 지역 수학자직을 알아보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케플러가 가족과 떨어진 사이 바바라의 병이 재발했고, 그녀는 케플러가 돌아온 직후 사망했다. 케플러는 정치적 대변동, 종교적 불안, 가정의 비극(아내의 유산에 대한 법적 분쟁) 등의 요인으로 더이상 연구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린츠로의 이사를 연기했고, 1612년 초에 루돌프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프라하에 잔류했다. 대신, 케플러는 연대학 원고 《전원시의 역사》를 초기의 연구와 조화되도록 결합했다. 마티아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물려받은 뒤 케플러의 궁정 수학자로서의 지위(급료도 포함된다)를 재차 보장하였으나, 그가 린츠로 옮겨 가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린츠에서 루돌프 표 외에 케플러에게 주어진 기본적 책무는 지역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점성술, 천문학적 용역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린츠에서의 초기 몇 년 동안 프라하에서의 시절에 비해 재정적 안전과 종교적 자유를 누렸지만,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소속된 정통주의적 루터교회에 의해 성만찬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당하였고, 이후 결국 루터교와 결별했다. 린츠에서의 첫 저서는 예수 탄생에 대한 보충 논문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De vero Anno, quo aeternus Dei Filius humanam naturam in Utero benedictae Virginis Mariae assumpsit")으로, 1613년에 출판했다. 또한 그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개량 달력을 도이칠란트의 개신교 국가들에서 받아들일지의 심의에도 참여했다. 또한 같은 해 그는 포도주 통과 같은 용기의 부피를 측정하는 수학 논문 《포도주통의 신계량법》을 썼으나 이 논문은 1615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케플러는 린츠에 도착한 즉시 튀빙겐 신학교 동창이었던 주목사 다니엘 히츨러에게 종교모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며칠간 모임을 가진 뒤, 케플러는 루터교의 엄격한 신앙고백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히츨러는 케플러를 쫓아내 버렸다. 케플러는 슈투트가르트의 종교의회에 이 사건을 청원했다. 그러나 종교의회는 히츨러를 두둔하는 모욕스러운 편지와 함께 케플러의 청원을 기각했다. 케플러는 기분이 나빴지만,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이 일을 더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두루 기독교적인 믿음을 형성해 주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이끌어 냈다. 다른 루터교도들은 이것을 근거로 케플러를 이단자로 지목하여 고소했다. 케플러는 “진리는 하나인데 세 종파로 찢겨 서로 비참하게 싸우는 게 가슴 아플 따름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신념은 의심, 비난, 협박으로 돌아왔다. 기독교인들끼리 교단의 차이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양상은 선교에 지장을 준다는 반성에 따라 교회 일치 운동이 시작된 현대에서야 그의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너무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1617년, 케플러는 튀빙겐의 신학 교수 마티아스 하펜레퍼를 방문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펜레퍼는 케플러와 교환한 편지를 신학교수회와 종교의회에 제출했다. 1619년 7월 31일에 “오류투성이 허상을 버리고 겸손한 믿음으로 신성한 진리를 받아들여라”는 공식 평결이 나왔다. 결국 케플러는 자신의 신학적인 신념으로 인해 루터교와 완전히 결별했다. 1613년 10월 30일, 41살의 케플러는 24살의 수잔나 로이팅어와 재혼하였는데, 청혼 과정이 상당히 독특했다. 연애에 서툴러 구혼 상대를 쉽게 찾지 못하던 케플러는 신부가 될만한 여성을 이름이 아닌 자신이 정한 후보 번호로 평가하였다. 후보는 1번에서 11번까지였으며,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케플러의 서툰 구혼 솜씨는 당시 린츠 시민들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케플러는 용기를 내어 가장 마음에 들어한 5번 후보, 로이팅어에게 청혼하여 결혼에 성공하였다. 케플러는 로이팅어를 “겸허한 성실, 살림 솜씨, 근면함, 그리고 의붓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를 이겨낸 여자”라고 표현하였다. 재혼 초에 얻은 세 아이들(마르가레타 레기나, 카탈리나, 세발트)은 모두 어렸을 때 죽고 말았지만, 이후에 낳은 세 아이들(1621년생 초르둘라, 1623년생 프리드마르, 1625년생 힐데베르트)은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부인 수잔나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케플러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린츠에서 케플러가 처음 쓴 책은 《포도주통의 신계량법》("Nova stereometria doliorum vinariorum")이다. 케플러는 마티아스 황제의 부름을 받아 도나우 강을 따라 레겐스부르크로 가던 도중, 강둑이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포도주통처럼 경계가 지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부피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케플러는 통의 표면이 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얇은 판을 무한히 겹쳐 놓은 것과 대략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물체의 부피를 계산하는 데 이 방법과 유사한 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구 결과 나온 책의 원제는 〈포도주통을 이용한 구적법과 부피 측정법〉이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었다. 책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출판업자들도 나서지 않아 케플러는 인쇄공 요하네스 플랑크를 직접 린츠로 데려와 1615년에 출판했다. 린츠의 대의원회는 이 책에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약서대로 《루돌프 표》과 지도 제작에나 집중하라고 충고했다. 케플러는 원추 곡선이 만들어 내는 원, 타원, 포물선 등의 도형에 이를 일반화시키려고 했다. 정밀성은 다소 떨어졌지만, 이 책은 17세기 적분학의 기초가 되었다. 《신천문학》의 완성 이후로, 케플러는 천문학 책을 만들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1615년, 그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처음 세 권을 완성했고, 이후 4권은 1620년에, 그리고 5 ~ 7권은 1621년에 출판하였다. 케플러의 이 책은 타원궤도의 법칙의 결정판으로, 지동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케플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업이 되었다. 이 책은 행성운동의 세 법칙의 모든 것을 품고 있었으며 천체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 책은 앞의 두 행성운동법칙을 노골적으로 달과 목성의 주요 위성들에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관측 자료로부터 타원형 궤도를 결론지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루돌프 표》과 관련된 추산 위치표의 속편으로 케플러는 점성술 달력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매우 인기가 있어 다른 연구를 하는 데의 비용까지 충당해 주었다(특히 황실 금고에서 받아야 할 봉급이 체불되었을 때 그러했다). 1617년에서 1624년까지의 6년간 케플러는 이 달력에서 행성의 위치와 날씨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건까지 예측하였다. 후자인 정치적 예측은 종종 정확하게 들어맞았는데, 이는 케플러가 당시의 정치적, 신학적 긴장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24년에 이르는 기간까지 주변의 긴장 상황은 그 정도가 심해져 갔고 예언 자체의 모호함 때문에 케플러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위치에 처했다. 그라츠에서는 케플러의 달력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1615년, 케플러의 동생 크리스토프와 금융적으로 분쟁 관계에 있던 우르술라 라인볼트라는 여자는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사악한 술수로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주장했다. 라인볼트는 임신한 아이를 지우기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가 탈이 났다. 그녀는 자기 병이 뷔르템베르크 궁정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인 자기 오빠의 엉터리 처방 때문이 아니라, 3년 반 전에 카타리나가 지어준 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8월, 카타리나는 작은아들 크리스토프와 마을 목사인 사위 게오르크의 도움으로 라인볼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때쯤 케플러의 《꿈》이 알려졌는데, 그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악령을 부리는 노파라는 설정이 화근이었다. 며칠 뒤에는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카타리나가 한 소녀와 좁은 길에서 마주쳤고, 카타리나는 소녀의 옷을 털어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부인이 내 팔을 쳤고, 그 다음부터 팔이 점점 더 아프더니 감각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소녀는 라인볼트 집안에 빚이 있던 할러 집안의 딸이었다. 라인볼트의 오빠의 친구였던 레온베르크 법원 집행관 아인호른은 소녀의 팔에 난 타박상을 “마녀의 손자국”이라고 밝히며 이 사건을 슈투트가르트 고등 종교 평의회로 올려 보냈다. 카타리나는 린츠의 아들 집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고, 케플러는 직접 재판에 개입하기로 했다. 1620년 7월, 라인볼트 일가는 공작을 통해 사건을 형사 사건화했다. 종교 평의회는 카타리나의 체포와 심문, 고문을 명령했다. 결국 카타리나는 한밤중에 빨래 통에 처박혀 끌려갔다. 이 당시 중부 유럽에서 마녀 재판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일이었다. 특히 카타리나는 심술궂은 노파였는데, 말참견으로 권력가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일쑤였는데다, 수면제와 환각제를 몰래 팔기까지 했다. 때문에 케플러는 어머니가 투옥된 것은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1620년 8월 초부터 카타리나는 14개월 동안 투옥당했다. 그러나 고발자들은 그녀가 케플러의 《꿈》에 나오는 약품을 혼합하고 악령을 사역하여 그 도움을 받는다는 잘못되고 헛된 소문 외에 어떤 확실한 물증도 없었다. 거기다 서둘러 뷔르템베르크로 달려온 케플러가 주민들이 걸린 질병 등의 과학적 이유를 찾으려 동분서주했다. 튀빙겐 대학교 법학부에 소속되어 있던 동창 베솔트도 케플러를 도왔다. 하지만 케플러와 베솔트가 아무리 노력해도 증거불충분 이상의 판결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카타리나는 구두(口頭) 고문에 처해졌다. 집행관 아울버는 카타리나에게 고문 기구들을 내보이며 이실직고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결백은 자신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실 것이라고 발악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몸을 수그려 주기도문을 외웠다. 고문의 위협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한 증언이 참고가 되어 마침내 혐의가 기각되었다. 1621년 10월 3일, 카타리나는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는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6개월 후 사망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케플러는 "조화 이론"에 대한 연구를 뒤로 미루었는데, 이 연구의 결과물이 1619년 출판된 《세계의 조화》이다. 케플러는 어머니가 마녀로 몰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던 도중 기분 전환용으로 빈센조 갈릴레이 의 《고대와 현대 음악과의 대화》라는 책을 들고 다녔다. 여기서 빈센조는 피타고라스의 조화에 대한 이론을 옹호했다. 케플러는 ‘조화’라고 하는 세계의 수학적 규칙을 찾으려 했고, 기하학에 감명을 받아 “기하학적 물체가 전 우주의 모형을 떠오르게 하였다”고 했다. 《세계의 조화》에서 케플러는 자연계, 특히 천문학적, 점성학적인 면에서의 자연계의 조화를 음악적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세계의 조화》의 중심 설정은 피타고라스, 프톨레미 등 많은 케플러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연구했던 〈천체의 음악〉이나 〈천상의 음악〉 이었는데, 《세계의 조화》의 출판 직후에 케플러는 비슷한 때에 독자적으로 조화 이론을 출판했던 로버트 플루드와 선취권 논쟁에 휩싸였다. 케플러는 케플러의 다면체라고 알려진 형태들까지 포함하여 정다각형와 정다면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케플러는 자신의 조화 분석을 음질에서 기인하는 조화가 천체의 영혼에 의해 만들어지며, 점성술의 경우에는 이 음질과 인간의 영혼이 상호작용한다고 음악, 기상학, 점성술에까지 확장했다. 연구의 마지막 부분(제5권)에서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대해 특히 궤도 진입 최저 속도와 태양에서의 궤도 거리의 관계를 다루었다. 비슷한 관계들은 다른 천문학자들도 사용한 바 있지만 케플러는 튀코의 관측 자료와 자신의 천문학 이론으로 훨씬 더 정밀하게 다루었으며 물리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다른 많은 조화 가운데 케플러는 오늘날 행성운동의 제3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것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는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라는 것을 (거의) 발견하기까지 많은 조합들을 시도했다. 그러나 천체역학의 넓은 의미에서 이 순수한 운동학적 법칙은 1660년대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원심력에 대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새로운 법칙이 결합되어, 이 법칙은 아이작 뉴턴, 에드먼드 핼리와 크리스토퍼 렌과 로버트 훅이(아마도) 태양과 그 행성들 간의 중력적 인력이 그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추측을 독립적으로 증명하도록 도와주었다. 여기서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근본 원인이 자기력과 비슷한 어떤 성격의 것이라고 제안했다. 물론 중력·만유인력과 자기력은 다르지만 케플러는 그 개념을 예견한 것이다. 한편, 케플러는 겸손한 사람은 아니라서, 자신의 발견을 “신의 환희”, “열광의 도가니”라는 식으로 자화자찬했다. 케플러는 1621년 12월에 린츠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1618년, 체코 프라하에서 성난 개신교도 대의원들이 프라하 황궁을 덮쳐 가톨릭 교도 집정관 두 명을 황궁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발생했다. 1619년에는 마티아스 황제가 서거하고 근본주의 성향의 가톨릭 교도 페르디난트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이어받았으며, 그 결과 1621년 6월 27일,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오랜 벗 예세니우스를 포함한 27명의 개신교도들이 페르디난트 2세황제에 의해 사형당했다. 예세니우스는 혀를 잘린 다음 사지가 찢겨 죽었다. 사형수들의 목은 경고의 의미로 썩어질 때까지 10년간 전시되었다. 이것이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이었던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케플러가 살던 린츠도 프라하만큼은 아니었지만, 유럽 전역을 뒤덮은 광신에 휩쓸렸다. 케플러를 루터교회에서 쫓아냈던 다니엘 히츨러도 감옥에 끌려갔다. 하지만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케플러는 루터교와 결별한 후 개신교도들에게 거부당하는 입장이었고, 제국 수학자라는 신분 덕분에 다른 개신교도들이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안전했다. 오히려 1621년 12월 30일에는 페르디난트 황제가 자신을 제국 수학자로 공식 임명하자 케플러는 깜짝 놀랐다. 마침내 1623년 케플러는 《루돌프 표》(전 후원자엿던 루돌프 2세의 이름을 딴 것임)를 완성했고, 이 표는 당대에 그 자신의 주저로 여겨졌다. 이것은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의 운동을 예측한 천문표였다. 그러나 황제의 출판 요구와 튀코 브라헤의 유족들과의 합의 때문에 1627년까지 인쇄되지 못했다. 또한 30년 전쟁의 근원이기도 했던 그동안의 종교적 긴장 상태는 다시 한번 케플러 가족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1625년, 가톨릭 개혁자들은 케플러의 장서들을 봉인해 버렸으며, 1626년에는 린츠 시가 공격당해 케플러는 그가 《루돌프 표》의 인쇄물을 자비로 편집하던 울름으로 옮겨갔다. 《루돌프 표》를 완성시켰으니, 이제 신교도인 자신은 쫓겨나겠다고 생각했던 케플러는 프라하 황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해 주자 깜짝 놀랐다. 황제는 케플러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케플러가 지난여름 황제의 칙령으로 자신이 이미 해직된 줄 알고 있었다고 하자 황제는 웃으면서 해직은커녕 25년간 연구에 힘쓴 대가로 4천 플로린 을 하사했다. 물론 케플러는 프라하 황궁에서의 돈은 상징적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지금껏 밀린 봉급만 1만 2천 플로린이었다. 전쟁통에 신성 로마 제국의 지급 명령서는 부도 수표나 다름 없었다. 더구나 페르디난트 황제는 케플러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케플러는 당시 출세가도를 달리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공작의 땅으로 가기로 했다. 전쟁 때문에 케플러는 후원자를 모두 잃었다. 비주류라는 이유로 루터교에서 쫓겨났던 케플러는 이번에는 루터교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가톨릭의 박해를 받았다. 1628년, 발렌슈타인 장군이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황제 군대가 승리하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싫었던 케플러는 발렌슈타인의 땅으로 갔다. 발렌슈타인은 어떤 종파든 기독교이기만 하면 모두 용인했다. 케플러는 종교 문제에서 자기 안전을 도모해야 했고, 발렌슈타인은 석학인 케플러를 휘하에 두어 자신이 학문과 과학을 아끼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전하려고 했다. 20년 전 프라하에서 별점을 봐 주었던 케플러를 다시 만난 발렌슈타인은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점을 봐 달라고 요구했는데, 새로 본 별점에서 1634년에 ‘무시무시한 흉조’가 들어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케플러의 점성술 자문을 듣고자 했지만, 케플러는 권력자의 점성술 자문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고, 발렌슈타인과 모종의 타협을 했다. 케플러는 행성의 위치 정보만 제공하고, 그 해석은 발렌슈타인의 개인 점성술사 기안바티스타 제노가 담당했다. 한편, 페르디난트 황제는 체불된 케플러의 봉급 1만 1817 플로린 문제를 발렌슈타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맡겨 버렸다. 말년, 케플러는 돈 독촉을 위한 여행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프라하에서부터 린츠로, 울름으로 사간(Sagan)으로 옮겨 다녔다. 이즈음 사간에서 반개혁 정책이 시작되어 케플러는 경제적인 문제에 정신적 충격까지 받아야 했다. 케플러는 고독감을 달래려고 스트라스부르의 친구 마티아스 베르게너와 서신을 왕래했다. 이 과정에서 베르게너는 케플러의 딸 수산나의 결혼 중매인으로 나섰고, 수산나는 1630년 3월 12일에 야콥 바르타쉬와 결혼했다. 바르타쉬는 《루돌프 표》을 기초로 천문력을 출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 케플러는 그해 4월 초에는 매우 긴 주석을 단 《꿈》 개정판의 출판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자금 사정이 또다시 악화되었다. 오스트리아 북부에서 투자하기로 한 3500 플로린이 1년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케플러에게 린츠로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 또한 발렌슈타인이 제국군 최고 사령관에서 해임되는 바람에, 밀린 제국 수학자 봉급 1만 2천 플로린의 수령이 불투명해졌다. 케플러는 1630년 10월 8일에 다시 여행을 떠났다. 린츠에 들러서 돈 독촉을 하고,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들러 재고 도서를 처리하고,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1630년 7선제후 회의에 직접 참석해 정치적 세태를 지켜보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케플러는 린츠,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를 거쳐 11월 2일에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하였지만, 차가운 가을 바람을 맞으며 여행한 것이 화근이 되어 병이 들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병인 줄 알았으나, 고열이 덮치고 섬망 상태에 빠지는 등 상태가 악화되었다. 죽기 직전, 케플러는 곁에 있던 목사에게 자신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목사는 그것은 예수와 사탄을 화해시키려는 발상이라고 대꾸했다.. 케플러는 1630년 11월 15일 사망하여 레겐스부르크 성벽 밖의 성 베드로 개신교 묘지에 묻혔고, 그날 저녁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유성우가 내렸다고도 한다). 선제후 회의를 위해 모인 신성 로마 제국의 명망가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케플러의 비문은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였다. 그러나 30년 전쟁 와중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 군대에 의해 묘지가 훼손되어 무덤마저 사라졌다. 케플러의 법칙은 바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갈릴레오나 르네 데카르트 같은 석학들마저 케플러의 《신천문학》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케플러의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을 포함한 천문학자들은 케플러가 물리학을 천문학에 대입하려던 시도를 마땅찮게 여겼다. 여러 천문학자들은 케플러의 이론 및 그 이론의 응용물들을 천체 관측을 통해 검증했다. 금성과 수성의 정상적으로 관측될 수 없는 상황 하에 이 두 행성의 두 번의 일면통과로 이론의 민감한 점을 시험할 수 있었다. 1631년 11월 7일의 수성 일면통과의 경우에 케플러는 수성에 대한 변수가 극단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일면통과 예정일보다 일찍 찾아보라고 관측자들에게 충고했다. 피에르 가상디는 예정된 날짜에 일면통과를 관측했으며, 이것은 케플러의 예측에 대한 확증이 되었다. 이 관측은 최초의 수성 일면통과 관측이었다. 그러나 금성 일면통과 관측 시도는 거의 한달 뒤였고, 《루돌프 표》의 부정확에 기인하여 실패했다. 가상디는 당시 금성 일면통과가 파리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639년 금성 일면통과를 관측한 제러마이아 호록스는 케플러의 모형의 변수를 조절하기 위해 자기의 관측 결과를 사용했으며, 일면통과 관측을 위한 기계장치를 만들었다. 그는 케플러의 학설을 옹호하는 단체를 남겼다. 한편, 케플러는 다른 16 ~ 17세기의 천문학자들처럼 근대에 비해 고대의 천문학이 조잡하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스티븐 샤핀은 이것이 고대의 진리가 수세기를 거치면서 모방자들과 주석자들에 의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인문주의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샤핀에 의하면 케플러의 이런 사상은 《루돌프 표》의 권두화로 사용된 유명한 판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판화에서 천문학의 여신의 신전의 뒤쪽에는 투박하고 구조적인 양식의 기둥이 고대 천문학의 조잡함을 드러내고 있고, 신전의 앞에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튀코는 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우아한 기둥 옆에 서 있다. 케플러는 인문주의자면서도 열광적인 플라톤주의자였는데, 그의 최초의 학설인 ‘코스모스의 신비’론에서 이런 점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케플러의 대표적 저서중 하나인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는 유럽 구석구석의 천문학자들에게 읽혀졌고, 케플러의 죽음 이후 케플러의 아이디어들을 확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1630년과 1650년 사이에, 이 책은 천문학 교본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천문학의 기반을 타원궤도로 전환시켰다. 과학사가 제임스 R. 뵐켈은 케플러의 업적이 갈릴레오의 업적보다 천문학적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케플러는 행성운동법칙 제3법칙을 연구할 당시 지구에 적용되는 측정 가능한 물리 법칙, 즉 정량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법칙들이 천체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을 간파했고, 이로써 인류사 최초로 천체 운동에서 신비주의가 배제되었다. 또한 케플러는 권력자와 권위자만이 지식을 안전하게 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 튀코와는 대조적으로 대학교에서 천문학을 강의했고, 천문학 서적을 출판했으며, SF 소설을 쓰는 등 과학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케플러는 《꿈》에서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지동설을 부정하는 대중들에게 지구 자전은 “가능한 일이고 멋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알리려고 애썼다. 물론 케플러는 세이건, 도킨스, 굴드 등 현대의 과학저술가들만큼 과학 대중화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이건은 튀코에서 케플러에 이르는 한 세대 사이에 과학자들의 대중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케플러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도 발휘했는데, 그는 미래의 하늘에 “천상의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돛단배”들이 날아아다니고 우주 공간이 “우주의 광막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들”로 그득할 것이며, “용기 있는 인간은 무한한 공간으로 진출할 것이다.”라고 했다. 막스 크루제는 이 말을 우주 여행에 대한 통찰로 해석했다. 케플러는 천문학과 자연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철학과 과학의 사학사에서 매우 중대한 인물이다. 케플러와 그의 운동 법칙은 장 몽투클라의 《수학의 역사》(1758년)와 장밥티스트조지프 들랑브르의 《근대 천문학의 역사》(1821년) 같은 초기 천문학 사학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계몽주의 사고방식으로 쓰여진 사서들은 무신론·불신자들과 케플러 사이에 펼쳐진 철학적, 종교적 논쟁을 다루었지만, 이후의 낭만적 자연철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케플러의 성공에 중심을 두고 생각했다. 윌리엄 휴얼은 자기 저서 《귀납적 과학의 역사》("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1837년)에서 케플러를 귀납적인 과학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휴얼은 이후 《귀납적 과학의 철학》("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1840년)에서는 가장 진보된 형태의 과학적 방법을 구현한 화신으로 케플러를 치켜올렸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케플러의 원고들(예카테리나 대제가 구입했었다)을 최초로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아펠트는 케플러를 '과학 혁명의 열쇠'라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케플러의 수학 연구와 그의 심미적인 감수성, 통합된 사고 시스템의 일부로서의 신학, 그리고 그의 물리학적 아이디어를 보고 케플러의 인생과 연구를 최초로 확장해 분석하였다. 현대로 접어든 19세기 후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케플러 저작들이 번역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케플러 전집의 조직적인 출판은 1937년에 시작되어 최근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며, 막스 카스파의 케플러 일대기는 1948년에 출판되었다. 한편,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케플러를 다룬 저작은 아펠트의 뒤에, 케플러의 우주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주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쿠아레를 비롯하여 많은 과학사 분야의 제1세대 전문가들은 〈과학 혁명〉이라는 개념을 과학사의 중심 사건으로, 케플러는 그 혁명의 중심 인물로 묘사하였다. 과학 혁명에서 케플러의 위치에 대한 논쟁으로, 철학적이고 대중적인 평가들은 매우 다양해졌다. 관련 서적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아서 쾨슬러의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 1959년)에서 케플러는 의심할 나위 없는 과학 혁명의 영웅(지성적인 면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신학적으로도)으로 그려진다. 찰스 샌더스 퍼스, 노우드 러셀 핸슨, 스티븐 툴민, 칼 포퍼 등의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들은 재삼재사 케플러를 연구하는데, 통약불가능성, 유추적 추론, 반증의 가능, 그 외에도 많은 철학적 개념들을 케플러의 연구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분석심리학과 과학 수사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에 케플러와 로버트 플러드 사이에 있던 선취권 분쟁을 이용했다. 존 반빌의 가공의 역사 소설 《케플러》("Kepler", 1981년)는 쾨슬러의 논픽션 내러티브의 자세한 기술과 과학철학의 많은 테마들을 답사하였는데, 이것보다 더욱 가공적인 것은 최근의 논픽션인 《하늘의 음모》("Heavenly Intrigue", 2004년)로, 케플러가 튀코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 튀코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많은 역사적 유산을 남긴 케플러는 가장 유명한 은제 기념주화 중 하나인 10유로 요하네스 케플러 은화의 모티프가 되었으며, 이 기념주화는 2002년 9월 10일에 주조되었다. 케플러는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에겐베르크 성의 축조에 관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화 앞면에는 이 에겐베르크 성이 그려져 있고, 은화의 뒷면에는 케플러의 초상화가 있다. 뒷면의 케플러 초상화 앞에는 《우주구조의 신비》에 나오는 구와 다면체가 겹쳐진 모형이 그려져 있다. 2009년, 미국 항공우주국은 케플러의 천문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우주 망원경에 케플러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케플러 계획이다. 뉴질랜드의 피오르랜드 국립 공원에는 케플러의 이름이 붙은 산맥이 있는데, 케플러 산맥이라고 불리며, 산맥을 관통하는 산책로 이름 역시 케플러 트랙이다. 이렇듯, 이제 케플러는 과학의 현대화와, 그 이전의 인물들의 아이콘이자, 대중적인 이미지로서 자리잡았다.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최후의 과학적 점성술사”라고 평가했다. 로마 황제 목록 다음 목록의 내용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의 연대표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부터 암살당한 기원전 44년까지 독재관으로 있었으나 로마 황제(Princeps)가 되지는 않았다. 오도아케르와 동고트 왕국으로 이어지다. 정치학 정치학(政治學) 또는 정치과학(政治科學, )은 주로 국가권력을 행사하거나 자원의 획득, 배분을 둘러싼 또는 권력의 행사에 영향을 미치려는 제(諸) 세력들 간의 갈등과 투쟁 및 타협으로 나타나는 국가현상을 중심으로 정치사상과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사회과학의 한 분야이다. 정치사상이나 정치이론은 인간이 정치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치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전통은 중세 말엽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부활된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의 정치학은 도시공동체나 세계적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며 윤리나 신앙의 입장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치학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근대적 의미의 정치학은 중세적 세계공동체가 해체되고 근대국가가 형성된 데서 비롯된다. 근대정치학은 근대의 주권국가를 대상을 한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정치학과 구별된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적인 선입감을 벗어난 객관적 방법을 통해서 세속군주의 통치기술을 논했고 보댕은 법률학적 입장에서 근대국가의 주권성과 아울러 군주의 절대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었다. 이와 같이 근세 초에 전개된 정치학은 교권에 대한 세속권의 절대성과 전제군주국가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정치학은 국가의 주권성과 군주권력의 만능성을 정당화하는 학문의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국가의 기반이 확립되고 전제군주정치에 대항하는 민권사상이 대두하게 됨에 따라 정치학은 국가권력의 소재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정치학은 국가주권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아울러 정치의 실태에 대한 실증주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게 된다. 국가주권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자연법 사상에 기초를 갖는 국가계약설에서 비롯된다. 국가나 사회의 생성을 계약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 말기에 있었다. 애당초 계약설은 국가나 사회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는 사상과 대립되어 생겨났으며, 16세기 후반기에 있어서는 군주와 국민간의 통치관계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변해 갔다. 이 이론에 의하면 군주의 지배권은 군주와 국민 간의 계약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며 군주가 계약을 어기고 법을 침범할 경우에는 국민의 저항을 받고 국민에 의해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폭군 토벌의 이론으로 등장했던 계약설은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국가형성 원리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국가계약설이 반드시 근대적 민권사상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17세기 영국의 민주혁명에 항의하고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대표적 이론가로는 홉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계약론자는 로크나 루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대적 민권사상을 주장하고 민주주의 이론에 이바지하고 있다. 계약론의 특색은 정치의 세속적 성격과 이성적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의 교권이론이나 신앙적 자유와 평등이론과는 다르다. 특히 로크로 비롯된 권력분립론은 몽테스키외에 의해서 3권분립론으로 체계화된다. 그리고 루소의 자유주의론은 독일의 관념적 정치이론으로 연결을 보게 된다. 국가계약설은 17세기의 영국 혁명, 18세기의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의 민주혁명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이 남긴 후유증은 자연법 사상과 국가계약설에 대한 반발을 야기시키게 된다. 국가계약설은 국가와 사회의 생성을 인간의 역사나 경험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할 도리가 없다. 에드먼드 버크는 역사적 입장에서 자연법과 사회계약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반박하고 민족의 관습과 전통과 그 역사적 발전의 가치를 강조하는 보수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들은 공리(utility)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경험주의 이론에 입각한 정치이론을 전개하였다. 공리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근거를 추상적 이성이나 권리에서 찾지 않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찾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의 시조인 벤담 및 그의 후계자 J. S. 밀은 입법·대의정부·선거제도 등의 대의민주정치에 있어서의 실제적 문제를 대상으로 연구했고, 현실정치에 대한 많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밀은 산업사회의 발전이 가져오는 정치적 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시했고 개인주의와 사회주의를 조정하는 자유주의의 수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발달된 정치학은 독일의 관념적 국가이론 형성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시민사회의 형성이 뒤늦게 이루어진 독일에 있어서는 법학적 정치학의 전통이 확립된다. 본래 군주의 주권성을 옹호하려고 등장했었던 주권 이론이 독일에 있어서는 국가주권 이론으로 변질된다. 독일의 국가론은 군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절충하여 국가주권론으로 발전하고 국가의 본질을 유기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독일에 있어서의 일반 국가론의 발전은 옐리네크(1851-1911)에 의해서 일단 집대성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학을 수립함에 있어 크게 공헌한 학자로는 블룬츨리(J. K. Bluntschli)를 들 수 있다. 그는 국가학을 국가론·국법학·정책학으로 3분한다. 국법학은 국가를 하나의 법규범 질서로 보고 그것을 범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국가론은 국가일반의 존재 그 자체를 사회법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정책학은 국가의 목적과 활동을 연구하는 실천과학이다. 독일에서 발달한 국가학적 전통은 20세기 전반기에 영국에서 주장된 국가다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국가다원론은 국가학에서 전제로 하는 국가주권론에 반대하여 주권의 소재가 다원적인 사회집단에 있음을 주장하는 이론이나 근본적으로는 주권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학에서 법학적 요소를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근대적 정치학은 자연법에서 비롯된 사회계약설·역사철학·실증주의 국가학을 기본으로 전개된다. 20세기까지의 정치학은 철학이나 법학 또는 역사학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공인을 받지 못했다. 정치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대학에다 정치학과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었으며, 미국에서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대부분의 대학에서 정치학과를 설치했다. 그 까닭으로 정치학 연구에 있어서 과학기술면에 있어서의 발달은 미국이 가장 앞서고 있다. 다른 모든 학문에 있어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1945년 이후 정치학은 유례없는 발달을 거듭하고 국제적으로도 공인된 학문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해방과 더불어 정치학과 또는 정치 외교학과가 각 대학에 설치되어 정치학을 독립된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정치학의 연구대상 및 방법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학 자체에 대한 국제적 인식도 2차대전을 전후해서 크게 달라진다. 우선 2차대전 이전의 정치학의 실태를 본다면 19세기까지의 국가학적인 전통과 20세기의 과학적 방법이 공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 있어서도 초기의 정치학의 발달은 독일의 학자와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다. 영국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주제는 통치의 원리를 따지는 철학이나 영국 헌정(憲政)의 실태를 설명하기 위한 헌정이론이었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정치학은 행정적인 효용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마키아벨리 이후 정치학의 전통은 단절되고, 정치학은 역사와 철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정치학을 하나의 독립된 과학으로 확립시키려는 움직임이 미국과 영국의 학계에서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정치학을 독립된 과학으로 확립함에 있어 콩트(1798-1857)의 실증주의 철학의 영향력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는 사회현상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미국에서 크게 환영받고 영국에서도 받아들여진다. 미국에 있어서는 메리엄(C. E. Merriam)의 과학주의적으로 정향된 『정치학의 새국면』 (1925) 이 그 후의 정치학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벤틀리(A. Bentley)의 『통치과정론』 (1908)은 국법학적 전통을 벗어난 동태적 정치학의 대상을 개척하였다. 영국의 배저트(W. Bagehot)도 『물리학과 정치학』 (1900)에서 정치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20세기 전반기의 정치학은 유럽과 미국에 국한된 학문이었으며 유럽 대륙의 제 국가에 있어서의 정치학이 일반적으로 국가학적 전통 가운데 남아 있었음에 반해서 영·미의 정치학은 정치학을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특히 미국에 있어서는 정치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었다. 2차대전 후의 정치학의 발달은 미국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미국에서 발달한 과학적인 방법과 정치의 실태를 해명하려는 비법학적(非法學的)인 연구의 전통은 거의 세계적으로 정치학의 연구와 교수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전통적 정치학 연구에 갇혀 있던 유럽의 정치학계에서도 미국의 정치학을 도입하게 되고, 과학적으로 정향된 정치학 연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한편 미국의 정치학계는 과학적 정치학의 새로운 분야를 크게 개척하게 된다. 미국이 처해 있는 국제적 위치를 배경으로 국제관계·지역연구 및 후진국 정치까지 포함하는 비교정치 분야에까지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미국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더욱 추상화된 과학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발달된 행동주의는 인간과 정치를 연구하는 과학적 방법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정치의 문제가 과학기술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동주의적 접근방법이 광범한 과학기술을 토대로 한다 하더라도 정치생활에 있어서의 가치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과학은 사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함에 적절할지는 몰라도 사실을 떠난 이념을 정립해 주는 것은 아니다. 행동주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스턴(D. Easton)이 1969년 미국 정치학회 회장 취임인사에서 밝혔듯이 현대의 정치학은 후기 행동주의시대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 정치학이 도입되고 대학에 정치학과 또는 정치외교학과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1950년까지의 정치학은 영·미에서 발달한 정치학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을 통해서 도입된 독일의 국가학적 전통이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영·미 특히 미국의 정치학의 영향이 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주정치론 또는 민주정부론은 우리 학계의 주요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정치학은 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적 또는 제도적 해설에 그쳤으며 미국에서 발달되고 있는 과학적 연구방법까지 도입한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전통적 학풍이 청산되고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학풍이 우리 정치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 정치에 대한 이념·제도의 해설은 점차 지양되고 정치동태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행동주의적 정치학이 도입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정치학의 정향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한편 대한민국 정치의 실태를 설명할 수 있는 토착적 정치학의 개척이 모색되기 시작하다. 그리고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러한 기운은 더욱 농후해졌다. 한국의 정치학은 이제 국제적 성격을 벗어나 독자적 정치학의 개척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정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서 지적되었듯이 정치권력을 누가 가지느냐, 그리고 그것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따라 일반적으로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대의 저자들은 대부분 이 정체들이 순환한다고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 있다. 이들 정체 가운데 긍정적인 정체의 장점을 활용하여 정부를 세운 혼합정체를 공화정이라 한다. 마키아벨리 및 그가 독해했던 고대 로마의 학자들은 특히 로마의 정체를 인간의 역량 또는 덕(virtus)이 가장 잘 드러난 정체라고 결론지었다. 영국의 명예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등을 통해 18세기~19세기의 서유럽에서부터 자유주의적 국가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이후 보통선거권의 확립을 통해 현재의 많은 나라들이 적용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가 탄생했다.근대에 들어와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로 인해 사회주의에 알맞은 정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게 된다. 그 가운데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현실공산주의체제를 성립시킨다. 국가를 비롯하여 인간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현상들은 모두 정치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시대 별로 이러한 탐구 및 실천을 벌였던 사람들을 나열한 것이다. 고생물학 고생물학(古生物學, Paleontology)이란 진화 생물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생물학의 특수 분과로서,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화석을 바탕으로 생물체의 발생과 진화과정 그리고 까마득히 먼 옛날의 생물체의 환경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생물학은 지구상에 예전에 살았던 동식물들이 진화해온 역사를 화석기록, 생흔화석 따위를 통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석에는 신체의 딱딱한 부분이 암석화된 화석과 기어다닌 흔적, 땅을 판 구멍, 신체의 일부가 암석에 찍혀 남은 흔적, 화석화된 피부, 화학적인 잔여물질 등이 포함된다. 현대의 고생물학과 지질학은 중세 후기부터 유럽의 귀족이나 성직자 사회에서 취미 형태로 땅에서 나온 화석등을 모으고 자신의 수집품을 비교대조 하면서 그 기원을 추론하는데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현상이 유독 유럽 문명권에서만 일어났던 까닭은 유럽의 지질이 주로 중생대의 퇴적암 지층이고 서유럽의 대부분이 습곡을 받지 않은 지층이라 그 구조를 이해하기 쉬웠다라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송나라의 심괄은 이미 화석의 기원과 더불어 지질학적 과정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적이 있다. 고생물학은 필연적으로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적이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연구이나, 이미 멸종된 생물에 대한 연구일 경우 어쩔 수 없이 화석 기록을 통해 연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석으로 남지 않은 생물에 관한 사항은 미지수로 남을 수밖에 없다. 화석으로 남은 종들 중에서도 특별히 대중적 관심을 끄는 대상은 공룡과 고인류이다. 고생물학에서 밝혀낸 생물의 번영과 멸종은 지질학적인 시간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대표적으로 공룡의 멸종을 경계로 하여 백악기와 제3기가 나뉘며, 삼엽충을 비롯한 많은 고생대형 생물의 대량멸종을 기준으로 하여 페름기와 트라이아스기가 구분된다.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정합을 통한 지질시대의 분류는 사실과 맞지 않다. 부정합 자체가 시간적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에, 연속적 시간에서 구분'점'을 찍어야하는 지질시대 분류에는 이용될 수 없다. 어느 지질학적 시기의 끝과 시작은 연속된 퇴적물에서 특정한 생물의 화석이 나오기 시작하는 층으로 정해지는데, 이러한 지점을 황금못(golden spike)이라고 한다. 못을 박아서 그 위치를 남기고 싶어 하는 지질학자들의 염원이 표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생물학 인간생물학(人間生物學)이란 의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의 신체 구조, 각종 신체기관, 감각, 신경조직의 기능을 연구함과 동시에 인간의 발달 과정(태아의 형성, 성장, 생식, 늙음)에서 빚어지는 문제점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생물학의 비교적 새로운 한 분야이다. 인간생물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야로는 해부학, 생리학, 세포생물학, 면역학, 유전학, 진화 생물학, 생물환경학, 고생물학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로제타석 로제타석() 또는 로제타 돌은 기원전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같은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이 돌이 있어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은 잘 알려진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대영박물관에서 로제타석을 비롯한 유물들을 3D 모델링했으며, 이곳에 가면 로제타석 3D 모델을 볼 수 있다. 로제타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때에 만들어진 검은색 비석이다. 1799년 7월 15일 베헤이라 주 로제타에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가 발견하였다. 이 돌은 가장 높은 곳까지의 높이가 114.4 cm (45.04 인치) 이며, 너비는 72.3 cm (28.5 인치), 두께는 27.3 cm (10.9 인치) 이다. 무게는 대략 760 kg (1,676 파운드)으로, 원래는 화강암 혹은 현무암일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현재는 화강섬록암으로 여겨진다. 핑크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이다. 1802년부터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세 가지 언어로 적었다. 내용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머지는 구체적인 선언문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사제들과 신전에 대한 여러가지 혜택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이어지며 여기에서 소개된 분량은 1/5정도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1814년 영국인 토마스 영이 이집트 민중문자의 해독을 끝냈고, 이집트 상형문자 해석을 시작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이 일을 확장하여, 로제타 돌을 해석하였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부터 해석하였고, 테두리가 둘러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냈다. 그것은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형문자쪽의 테두리가 둘러진 단어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후 그의 형제에게 가서 이를 해석했다고 알렸다. 185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프톨레마이오스 학회에서 로제타 스톤의 영어 번역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3명의 학부생 찰스 R. 헤일(Charles R. Hale), S. 헌팅턴 존스(S. Huntington Jones)와 헨리 모턴(Henry Morton)이 번역을 맡았다. 이 번역은 재판까지 금세 모두 팔렸지만, 학술적인 가치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출판을 중단했다. The Rosetta Stone 3D Model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는 다음을 가리킨다. 미사곡 키리에(kyrie)는 흔히 미사곡(missa곡), 예전곡, 예배곡으로 번역되는 노래로 고대 그리스어, 또는 헬라어 주님이 다스리신다 뜻을 가진 단어 "퀴리유오(κὐριεύω)"에서 유래한 용어의 음악이다. 이 곡의 원명칭인 헬라어 "퀴리에(κὐριη)"는 '주님'을 의미하는 "퀴리오스(κὐριοσ)"의 호격, 즉 "주님이시여"의 뜻을 지녔다. 4세기 교회 공인 이후 로마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헬라어로 작곡한 예전용 성가들과 예전 순서가 서방교회에 전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발전한 곡의 음악으로 동방교회의 예전을 바탕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을 형성한 예전/전례를 따르는 음악이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의 유럽언어에서 미사는 서방교회의 종교 예식을 의미하는 단어로, 서방교회인 로마가톨릭의 예전만이 아니라 서방교회인 개신교, 즉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개혁교 등에서도 예배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미사곡으로 지칭되는 곡은 서방교회 종교 예식 곡으로, 반드시 로마가톨릭의 음악만이 아니며, 개신교회의 음악만이 아니기도 하다. 서방교회 중에서 근래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연주되도록 작곡되거나 만들어진 선율이나 작품들이 있으며. 9세기에 집성된 단선율의 성가인 그레고리우스 성가 역시 이런 전례/예전의 전통을 따라 구성되었다. 미사곡은 서방교회의 종교 예식을 위한 음악으로 유럽언어에서는 서방교회인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전체의 음악을 통칭한다. 근래에 주의할 부분은 독일어권을 포함하는 유럼 종교음악 중에서 번역된 미사곡들이다. 독일어에서 미사는 서방교회의 종교 예식을 의미하여, 개신교의 예배와 천주교의 미사를 통칭하는 용어로 개신교 예배곡도 흔히 루터교 미사곡 또는 복음주의 미사곡으로 작곡되었다. 이는 유럽어에서는 의미의 혼동이 없지만, 한국어 번역시에 혼동하기 쉬우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구교와 신교 구분없이 이런 예배곡들을 미사곡으로 번역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작곡자의 의도와 달리 개신교 곡이나 천주교 곡이나 모두 미사곡으로 불린다. 물론 현재에 와서는 개신교, 천주교 구분없이 연주되기도 하며, 개신교를 위한 개신교 예배곡인 바흐의 곡들은 개신교회나 천주교회 구분 없이 연주된다. 보통 서방교회 전통의 예전/전례에서 미사곡은 키리에(Kyrie), 대영광송(gloria), 크레도(Credo), 상투스(San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의 통상문 노래로 이루어진다. 이 순서는 동방교회의 예배 순서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여전히 서방교회나 동방교회의 전통인 보편표회의 전통으로 존중된다. 이런 순서에 따라서 WCC에서 제정한 예전으로 서방교회의 신구교, 동방교회가 공히 인정한 리마예식서에는 다양한 곡들과 이러한 교회의 공통된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은 이 음악방식을 활용한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나 개신교회 중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국내의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회에서도 이런 순서에 따라 예배곡으로 예배를 드린다. 전통적 미사곡의 악곡형식은 일정한 가사로 된 다음과 같은 5개 내지 6개의 부분(악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들은 어떠한 종류의 미사에서도 항상 쓰이며, 통상문이라고 한다. 이상의 5개의 부분은 보통 더 많은 부분으로 나뉜다. 예를 들면 키리에는 때로는 '키리에 엘레이손-크리스테 엘레이손-키리에 엘레이손'의 3부분으로 되기도 하고, 상투스에서 베네딕투스가 독립하여 하나의 부분을 형성하기도 한다. 미사곡의 가사는 키리에의 부분만이 그리스어이고, 그 밖에는 모두 라틴어로 노래된다. 본래의 전례용(典禮用) 미사곡으로서 가장 오랜 것은 단선성가(plain song)이며, 후에 그레고리오 성가가 되었다. 13세기경부터 대위법의 발전에 따라 미사곡은 다성양식(폴리포니)으로 쓰게 된다. 기욤 드 마쇼의 《노트르담 미사곡》(1364년)은 초기 다성양식으로 된 걸작이다. 15-16세기 말에 걸쳐 미사곡은 뒤파이, 죠스캥 데 프레, 팔레스트리나 등에 의하여 그 때까지 없었던 큰 발전을 보았다. 특히 팔레스트리나는 100여 곡의 미사곡(《교황 마르켈스의 미사》는 특히 유명하다)을 썼는데, 그 대부분은 4-5성부로 된 아 카펠라(무반주 합창곡)의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17세기 이후 개신교회의 예배곡으로서 바흐 가문의 예비곡(미사곡)이 작곡되면서 이후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예식 곡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팔레스트리나 이후의 대표적인 미사곡(예배곡) 작곡가로는 개신교회의 바흐, 헨델, 천주교회의 모차르트, 베토벤, 브루크너 등이 있다. 이 작곡가들의 미사곡은 모두 관현악의 반주를 가지고 있다. 바흐의 《나단조 미사》는 베토벤의 《미사 솔렘니스》(장엄 미사)와 함께 오늘날 연주회에서도 많이 연주되는 작품이다. 가톨릭 교회의 미사 전례에서 사용하는 통상문인 미사곡들을 모아놓은 책들을 미사곡집(Kyriale)라고 부른다. 라틴어 Kyriale는 '미사곡' 자체를 가리킬 수도, '미사곡집'을 가리킬 수도 있다.역사적으로 성가대가 사용하도록 별도의 책으로 존재하기도 하였다(Kyriale, 1905년).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별도의 책으로 발행되지 않고 미사의 고유문 노래를 모아 놓은 로마 미사 성가집(Graduale Romanum)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로마 미사 성가집에는 첫째, 18개 조합의 미사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키리에, 글로리아, 상투스, 아뉴스 데이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글로리아를 노래하지 않는 때를 위한 미사곡에는 이 노래가 빠져 있다. 둘째로, 크레도가 6곡 실려 있다. 셋째로, 자유로이 할 수 있는 키리에 11곡, 글로리아 4곡, 상투스 3곡, 아뉴스 데이 2곡이 추가되어 있다. 한편 18개 조합의 미사곡에서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곡들이 덧붙여져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미사곡 1번에는 키리에가 2곡이다. 로마 미사 성가집 이후에 너무 어려운 선율을 정리하고 간략하게 만든 단순 미사 성가집(Graduale Simplex)가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역시 너무 어려운 선율을 정리한 미사곡이 실렸는데 이를 'Kyriale Simplex'('단순 미사곡', 또는 책이라는 관점에서는 '단순 미사곡집')이라 부른다. 레퀴엠 레퀴엠(Requiem)은 기독교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위령미사)’에 연주하는 전례 음악이다. 하느님께 죽은 이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 주시기를 청한다. 이 미사 전례(典禮)는 입당송(入祭唱, Introitus)이 라틴어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하므로 이 미사를 레퀴엠 미사 (Requiem Mass)라고 불렀으며, 그 미사에 사용한 곡을 레퀴엠이라고 하였다. 레퀴엠은 진혼곡(鎭魂曲)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15세기 작곡가 아담 폰 풀다(Adam von Fulda)는 이러한 종류 음악을 "죽음의 명상("meditatio mortis")"으로 불렀다고 한다. 레퀴엠 구성은 다음과 같다. 널리 알려진 레퀴엠으로는 빅토리아, 모차르트, 케루비니, 베를리오즈, 드보르자크, 브루크너, 베르디, 생상스, 가브리엘 포레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다음은 시대별 레퀴엠 작곡가 및 작품 이름이다.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Te decet hymnus, Deus, in Sion,
et tibi reddetur votum in Jerusalem.
Exaudi orationem meam,
ad te omnis caro veniet.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Christe eleison,
Christ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In memoria aeterna erit iustus
ab auditione mala non timebit. Absolve Domine
animas omnium fidelium defunctorum
ab omni vinculo delictorum
et gratia tua illis
succurente mereantur
evadere iudicium ultionis,
et lucis aeterne beatitudine perfrui. Dies irae, dies illa
Solvet saeclum in favilla:
Teste David cum Sibylla.
Quantus tremor est futurus,
Quando judex est venturus,
Cuncta stricte discussurus! Tuba, mirum spargens sonum
Per sepulcra regionum
Coget omnes ante thronum. Mors stupebit et natura,
Cum resurget creatura,
Judicanti responsura. Liber scriptus proferetur,
In quo totum continetur,
Unde mundus judicetur. Judex ergo cum sedebit,
Quidquid latet, apparebit:
Nil inultum remanebit. Quid sum miser tunc dicturus?
Quem patronum rogaturus,
Cum vix justus sit securus? Rex tremendae majestatis,
Qui salvandos salvas gratis,
Salva me, fons pietatis! Recordare, Jesu pie,
Quod sum causa tuae viae:
Ne me perdas illa die. Quaerens me, sedisti lassus,
Redemisti Crucem passus:
Tantus labor non sit cassus. Juste judex ultionis,
Donum fac remissionis
Ante diem rationis. Ingemisco, tamquam reus,
Culpa rubet vultus meus:
Supplicanti parce, Deus.
Qui Mariam absolvisti,
Et latronem exaudisti,
Mihi quoque spem dedisti. Preces meae non sunt dignae,
Sed tu bonus fac benigne,
Ne perenni cremer igne. Inter oves locum praesta,
Et ab haedis me sequestra,
Statuens in parte dextra. Confutatis maledictis,
Flammis acribus addictis,
Voca me cum benedictis. Oro supplex et acclinis,
Cor contritum quasi cinis:
Gere curam mei finis. Lacrimosa dies illa,
Qua resurget ex favilla
Judicandus homo reus.
Huic ergo parce, Deus:
Pie Jesu Domine,
Dona eis requiem. Amen. Domine Jesu Christe, Rex gloriae,
libera animas omnium fidelium defunctorum
de poenis inferni et de profundo lacu.
Libera eas de ore leonis,
ne absorbeat eas tartarus,
ne cadant in obscurum. Sed signifer sanctus Michael
repraesentet eas in lucem sanctam,
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 Hostias et preces tibi, Domine, laudi offerimus.
Tu suscipe pro animabus illis,
quarum hodie memoriam facimus:
fac eas, Domine, de morte transire ad vitam,
quam olim Abrahae promisisti et semini ejus. Sanctus, Sanctus, Sanctus
Dominus, Deus Sabaoth!
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
Osanna in excelsis.
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Osanna in excelsi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eis requiem sempiternam. Lux aeterna luceat eis, Domine:
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cum Sanctis tuis in aeternum, quia pius es. Libera me, Domine, de morte aeterna, in die illa tremenda:
Quando caeli movendi sunt et terra.
Dum veneris judicare saeculum per ignem.
Tremens factus sum ego, et timeo, dum discussio venerit, atque ventura ira.
Quando caeli movendi sunt et terra.
Dies illa, dies irae, calamitatis et miseriae, dies magna et amara valde.
Dum veneris judicare saeculum per ignem.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In paradisum deducant te Angeli:
in tuo adventu suscipiant te Martyres,
et perducant te in civitatem sanctam Jerusalem.
Chorus Angelorum te suscipiat,
et cum Lazaro quondam paupere aeternam habeas requiem. 기보법 기보법(記譜法)은 음악을 적는 방법이다. 오선보가 가장 널리 쓰인다. 서양 음악에서는 고대부터 문자로 음의 높이(高低)를 나타내는 문자보(文字譜)가 있었고, 중세에는 '네우마(neuma)' 악보가 있었으며, 12세기에는 5선에 음의 길이를 나타내는 유량악보(有量樂譜)가 나왔다. 17세기에는 오늘날에 쓰는 것과 거의 같은 5선악보가 정비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악보가 되었다. 동양에서도 문자보는 예로부터 쓰여왔고 또 그 종류도 많았다. 한국에서 쓰여온 악보는 기보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계 아악을 기록할 때 쓰던 율자보(律字譜), 당악에 쓰던 공척보(工尺譜), 세종 때 만든 정간보(井間譜), 세조 때 쓰던 오음약보(五音略譜), 악기의 소리에 따라 적는 육보(肉譜), 악기의 연주법에 따라 적는 합자보(合字譜), 성악곡의 사설에다 간단히 가락을 뜻하는 기호를 덧붙이는 연음표(連音標) 등이 있다. 고려 때 중국에서 악보와 지결도(指決圖)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율자보와 공척보는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와 쓰인 것이고, 육보는 고려 때에도 있었다고 하며, 정간보·합자보·오음약보는 근세 조선 전기부터 쓰여온 것이다. 일본의 역대 내각총리대신 이 문서는 일본의 역대 내각총리대신()에 관한 내용이다. 마술적 사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는 하나의 문학 기법으로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문학적 서사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20세기 미하일 불가코프, 에른스트 윙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의 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등장과 함께 유명해졌다.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예술 평론가 프랑크 로(Frank Roh)가 1920년대 종래의 사실 표현을 뒤엎는 화가들을 이르기 위해 처음 만들어냈다. 오늘날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해 쓰이는데 이 뜻으로는 비평가 우슬라르 피에트리(Uslar Pietri)가 처음 사용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가 자신의 소설들이 마술적 사실주의 양식을 사용한다고 정의한 후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전통적인 허구적 사실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별짓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픽션은 플롯이나 인물, 서술자가 완전히 사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마술적 사실주의의 이야기들은 리얼리티를 완전히 고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피의 흐름이 멀리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까지 흘러갔다든지 하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글 속의 인물들은 그러한 상황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마술적 사실주의가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며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표현이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리 법칙을 따르는 - 적어도 따르는 척이라도 하는 - SF 류의 문학이나, 작품 내에 일관된 규칙을 갖고 있는 판타지 문학과 달리, 마술적 사실주의는 예측 불허의 스토리로 구성되거나, 적어도 묘사하는 사회가 매우 특별하다. 의사 의사(醫師, medical doctor, physician, surgeon)는 현대의학의 전문가로서 인체의 질병, 손상, 각종 신체 혹은 정신의 이상을 연구하고 진단,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건강을 증진하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의료법에 의하면 의료진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助産師)·간호사(看護師)로 나누고 있으며, 이 중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에 종사함을 임무로 한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의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의학사학위 또는 의무 석사 학위를 받은 자로서 의사면허 취득을 위한 국가시험에 합격한 다음 보건복지부장관의 면허를 받아야 한다. 다만 외국에서 의사 면허를 받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영주권을 얻은 자는 소정의 시험을 거쳐 그 면허를 얻을 수 있다. 의과대학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면허시험을 통과하여 의사면허를 받은 의사직의 대다수는 크게 기초연구의사와 임상의사의 두가지 방향으로 경력을 쌓게 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외에도 보건행정가를 포함한 경력군이 존재한다. 기초의사는 기초의학 분야(생화학, 분자생물학, 해부학, 생리학, 기생충학, 미생물학, 면역학, 약리학, 예방의학 등)의 전문가로서 이 분야에 대한 교육과 연구에 종사한다. 거의 대부분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에 소속되어 있다. 임상의사는 임상의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환자 진료와 교육, 연구에 종사한다. 대한민국의 의료법에 따라 의사가 임상의사로서 진료를 하려면 의원, 병원, 종합병원 등의 의료기관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의사는 전반적인 의학분야에 걸쳐 연구와 진료를 수행할 수 있으나 특정 질환군이나 환자군, 혹은 특정 치료분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전자의 경우 일반의사, 후자의 경우 전문의사라 불린다. 일차 진료에 필요한 의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여러 환자에 대한 일차 진료를 주로 하게 된다. 특정 분야에 대해 추가적인 수련을 받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를 말한다. 현재 대한민국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에 규정된 임상의학의 전문과목은 다음과 같다.(ㄱㄴㄷ순) 위의 전문과목에 대한 수련을 받고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도 전문과목 내의 특정 분야에서 더 집중적으로 연구와 진료를 위한 수련{임상강사 혹은 펠로우(fellow) 과정}을 받는 경우가 있으며, 과정을 마치고 각 학회 주관의 인증 시험 등을 마치는 경우, 세부전문의 혹은 분과전문의로 인증을 받으나, 의료법에서 보호받는 인증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6년 과정으로 이루어진 대학을 졸업하고 의학사 학위를 취득하거나 4년 과정으로 이루어진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의무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국가시험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보건복지부장관이 발부하는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되며, 의사로서 진료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의사가 된 후에도 추가적인 수련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중 기초의학자가 되기 위한 수련과 전문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가장 활발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초의사의 경우 주로 대학의 기초의학교실에서 조교로서 수련을 받으며, 학부생 교육 및 교수 연구에 참여하며 수련을 받게 된다. 병리학교실, 약리학교실의 경우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기도 한다. 임상의사의 경우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이 대표적이다. 이 수련과정은 보건복지부령에 의해 지정된 수련병원 또는 수련기관에서 이루어진다. 공식적으로는 가정의학과를 제외한 전공의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1년간의 수련의 과정을 수료하여야 하나, 대부분의 경우 가정의학과도 수련의 과정을 마친 후 전공의 과정을 밟는다. 의사의 경우 가정의학과, 결핵과,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3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며, 그 외의 임상과들은 4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련의 과정은 임상과를 두루 순환하며 각 과에서 임상적 경험을 쌓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공의 과정을 수료하고 해당 학회가 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전문의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며, 전문의 시험을 통과하면 전문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전문의가 된 뒤에도 해당 임상과에서 더 좁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임상강사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이 과정은 1년 혹은 2년 단위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경우 특별히 정해진 기간은 없다 위의 과정 외에도 각 학회에서 제공하는 여러가지 교육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며, 때로는 수련병원 혹은 수련기관이 아닌 의료기관에서 다른 의사에게 개인적으로 수련을 받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수련을 마쳐도 특별한 자격이나 면허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미국에서는 의사를 MD또는 DO라고 부르며 직역을 하면 의학박사가 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통상적인 의미의 의학박사 즉 의학Ph.D와 많은 개념적 혼란을 일으킨다. 미국에서 4년제 일반학부 졸업후 메디컬 스쿨(의학전문대학원)에서 4년의 의학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자동으로 받는 학위가 MD나 DO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육받고 면허를 취득한 의사들도 스스로를 MD라고 지칭하는 것이 관행화돼있다. 대한민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한 병역 대상 남성은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수련을 받고 싶다면 의무사관후보생이 되며, 추후 몇가지 형태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게 된다. 하지만, 의과대학 졸업 후 반드시 의무사관 후보생이 되는 것은 아니며 수련을 받지 않는다면 일반병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의무사관 후보생중 군의관을 선발하고 남는 자원이 공중보건의가 되게 된다. 의사면허 취득 이 후 의사경력이 3년 이하 일 경우 중위로 임관하며, 2012년 현재 인턴 중도포기자, 인턴 수료 후 전공의 과정에 입문하지 못한자, 전공의 과정을 중도에 포기한자 등이 해당이 된다. 의사경력이 3년이상이거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는 대위로,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임상강사(펠로우) 과정을 수료한 의사는 대위로 임관하며 2개월의 군사훈련과 2주의 특기훈련 후 36개월간 복무하게 된다. 병의 신분으로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이등병으로 전역되며 이후 기존 4주훈련 포함 3년 간 공무원의 신분이 되어 공중보건의사로 대체 복무하게 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수련을 받지 아니하고 공중보건의에 지원한자, 의무사관후보생이나 군의관을 선발되지 않은 자 등이 해당이 된다. 비록 신분은 병이지만 급여는 육군 중위에 준하게 받는다. 어떠한 스포츠이든 국제규모의 대회에서는 경기장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의사가 반드시 대기하게 된다. 특히 이종격투기, 권투, 프로레슬링 등 매우 격렬한 투기종목의 경우 아예 '링 닥터(Ring Doctor)'라는 전속 의사를 둔다. 링 닥터는 선수의 몸상태를 파악하여 직권으로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는데 이를 닥터 스톱(Doctor Stop)이라 한다. 의사가 환자에 대해 지는 사법상의 의무는 의학상의 기준에 따라 진단과 치료를 행할 의무("진료상의 주의의무")와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함으로써 진단검사나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진료과정에서 피할 수 있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할 의무이다. 1인 2표제 1인 2표제는 유권자들이 서로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는 단일 의회에 대해 두 번의 개별 선거에 실제로 참여하며, 한 선거에서의 결과가 다른 시스템의 결과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혼합 선거 시스템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7대 총선부터 도입된 총선 투표 방식이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선출함에 있어 기존에는 단순 지역구 의석수를 기준으로 각 당에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여 왔으나, 17대 총선부터는 지역구 의원에 대한 표와 별도로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두 번째 표를 부여하여 그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게 되었다. 맥도널드 (동음이의) 맥도널드(Macdonald/MacDonald/McDonald)는 스코틀랜드의 도널드 가문과 관련있는 이름이다. 윤년 윤년(閏年)은 역법을 실제 태양년에 맞추기 위해 여분의 하루 또는 월(月)을 끼우는 해이다. 태양년은 정수의 하루로 나누어떨어지지 않고, 달의 공전주기와 지구의 공전주기는 다르기 때문에 태양력에서는 하루(윤일), 태음태양력에서는 한 달(윤달)을 적절한 시기에 끼워서 이를 보정한다. 태양력에서는 보통 윤일이 들어 있는 해를 말하는데, 이 경우 1년은 366일이 되며 이것이 바로 윤년이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걸리므로 365일을 제외한 시간들을 모아 태양력에서는 4년마다 한 번 2월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고, 태음력에서는 평년이 354일이므로 계절과 역월(曆月)을 조절하기 위하여 19년에 7번의 비율로 윤달을 끼워 1년을 13개월로 한다. 윤년이 아닌 해는 평년이라고 한다. 태양력의 윤년은 12지에서 쥐띠, 용띠, 원숭이띠에 해당하며, 육십간지 중 경자, 경진, 경신년의 경우 윤년이 아닌 경우도 있고 갑자, 갑신, 갑진, 병자, 병진, 병신, 무진, 무자, 무신, 임신, 임진, 임자년은 무조건 윤년이다. 이 해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선거 및 하계 올림픽이 열린다. 또한 2월 29일 이 낀 경우에는 윤년인 해의 3월 1일부터 그 다음 해 평년인 2월 28일까지 전년과 2요일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2019년 3월 1일과 2020년 2월 28일이 금요일이면 2월 29일로 인해 두 요일이 밀려 토요일은 건너뛰고 2020년 3월 1일과 2021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 된다. 1월은 2월 29일에 의해 4월, 7월과 요일이 동일하고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3월도 마찬가지로 전년 9월과 전년 12월에 동일하고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은 4년에 반드시 하루씩 윤날(2월 29일)을 추가하는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것으로, 태양년과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율리우스력의 400년에서 3일(세 번의 윤년)을 뺐다. 그레고리력의 정확한 윤년 규칙은 다음과 같다. 즉, 400년에 97년은 윤년이 되며, 1년은 평균 365.2425일이 된다. 이는 춘분점을 기준으로 한 태양년보다 0.0003일(26초)이 길기 때문에, 약 3,300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 그레고리력은 상당히 치밀한 역법으로 1582년에 만들어진 이래 아직까지 수정된 바가 없다. 그러나, 약 3천 년마다 1일의 편차가 발생할 수 있어서 몇 가지 수정안이 제시된 바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4,000년마다 1일씩 윤년을 추가로 빼자는 제안이다. 간혹 이 제안이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의 태양년과 그레고리력의 수적 차이, 율리우스력이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난다는 것만 고려하면 3,200년마다 1일씩 윤년에서 제외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수정안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천 년 이상의 주기로 일어나는 지구의 세차운동이나 조석의 감소로 인한 하루 길이의 증가를 계산에 넣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특히, 조석은 후빙기 반동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따라 꽤 변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료는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역법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다.그리고 2033년에는 윤년과 삭망월이 겹처져서 2033년 문제가 생긴다. 태음태양력에서는 태음력과 태양력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윤달을 두는데, 윤달이 든 해를 윤년(閏年)이라고 한다. 지구의 공전 주기는 365.2422일인 데 비해 1삭망월은 29.5306일로 1년을 만들면 약 354일이므로 3년만 지나면 3.3일 가량이 모자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오차를 보정하기 위하여 19년에 일곱 번가량 윤달을 두게 된다. 프랑스 문학 프랑스 문학(-文學)은 프랑스에서 창작된 문학 작품을 일컫는다. 원주민 골족(Gaulois)의 언어는 켈트어였고, 그들이 개명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기원전 100년) 로마의 문화와 혼합되면서부터이다. 로마 제국의 한 속주(屬州)로 5세기 동안 예속되면서 인종적 혼합인 갈로-로맹인(人)을 형성했고 기독교를 비롯하여 제도·관습·언어 등이 로마화(化)하여 갈로 로맹 문화로 미개한 상태를 벗어났다. 한편 언어는 프랑스 지방의 사투리처럼 된 구어(口語) 라틴어를 사용하여 이를 정통 라틴어에 대하여 로망스어라 한다. 당시 프랑스는 크게 북부는 오일어(langue d'oïl), 남부는 오크어(langue d'oc)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현대 불어는 오일어, 그중에서도 파리 방언에 기원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거의 유일한 문어였지만 차츰 지방의 로망스어, 즉 프랑스어로도 글을 쓰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가장 오래된 불문학의 흔적은 9세기의 스트라스부르 서약과 성녀 에울랄리아 찬가로 거슬러 올러간다. 중세 프랑스 문학은 신앙과 기사도정신(騎士道精神)을 고취하거나 귀부인과 기사들의 사랑과 무용(武勇)을 담은 귀족문학과 상류층·승려·지배자를 풍자하는 해학적인 서민문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최초의 서사시인 무훈시(武勳詩,기사도 로망)들, 장시 로망 등이 전자에 속하고 여우 이야기<파블리오=짤막한 소담(笑談)> 등이 후자에 속한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선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자극을 받고 이를 섭취·소화하는 과정에 두 가지 흐름이 발원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고전문예의 큰 장르(정형서정시, 극시)들을 프랑스어로 소화하여 부흥시키려는 시(詩) 운동이다. 마로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형식을 프랑스어로 시도했으며 고전 라틴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의 주제와 양식을 모방하고자 했으며, 이는 피에르 드 롱사르를 필두로 한 플레야드파(7성시인)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에서 신중히 단어를 선별하고 언어구조를 모방해 불어에 받아들여 불어를 고전언어 못지않게 고상한 문학언어로 만드는 것을 꾀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어는 고전 프랑스어(Français classique)로 발전하게 되고 중세 프랑스어와 상당한 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가다듬고 순화된 고전 프랑스어로 희극·비극 장르의 도입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의 터가 닦였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고전문예에 담긴 정신·사상을 되살리려는 산문문학의 흐름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금서지정을 받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로 유명한 라블레는 인간성과 현세적 삶의 해방을, 《수상록》으로 에세(essai)라는 1인칭 문학을 창조한 몽테뉴는 회의와 검증(檢證)·인간탐구의 정신을 일으켜 놓았다. 17세기는 프랑스에 있어서 대세기(大世記, le Grand Siècle)라 불린다. 종교갈등도 잦아든 전제군주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문학사에 있어서도 불어에게 '몰리에르의 언어'(la langue de Molière)라는 이칭을 선사한 몰리에르가 활약한 것도 이 때이다. 17세기의 문학사는 바로크와 고전주의라는 양대산맥의 대립·상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610년대 등장한 바로크는 문학적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어 프레시오지테, 뷔를레스크 등의 갈래를 낳았으며, 마들렌 드 스퀴데리를 위시한 살롱이라는 문학공간이 흥성하기도 하였다. 귀부인들이 주재하는 살롱이 속출 유행하면서 사회적 지식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민간의 세력권을 이루고, 사교·대화·시적 교류·관찰을 통해 살롱문학(인물·성격묘사, 회고록, 잠언집 등)이 발달한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1660년이 문학사의 구분점이 되어 고전주의 문학이 전성기를 만든다. 몰리에르를 비롯한 라신, 라퐁텐 등이 궁정의 비호를 받으며 고전주의 극시(劇詩)를 만들어냈다. 17세기 말 신앙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성이 중요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진다. 18세기는 계몽시대(siècle des Lumières)라 불리는데, 이전 세기의 르네상스 및 데카르트적 정신을 통해 이성의 승리를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계몽주의는 전 유럽의 현상이지만, 18세기 사상을 가장 잘 결집해낸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으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을 넘어 전 유럽 및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당시 프랑스 및 불어권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들로서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이 있다. 19세기 프랑스 문학 18세기 말부터 19세기는 프랑스의 사회 정치사에서 격동기이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비롯된 정치 사회적 변화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나아가서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 판도와 사회 문화적 가치 체계의 변모를 가져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7월혁명, 계몽주의 등의 낱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격동하는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이 반드시 정치 사회적 소용돌이의 산물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역사 정치적 배경을 미리 살펴 봄으로써 인간 문화 발전의 동기가 되는 여러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문화, 특히 문학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드니 디드로, 볼테르, 빅토르 위고, 장 자크 루소, 프랑수와 샤토브리앙 등은 바로 18세기 말을 전후로 프랑스의 정치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활동한 작가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정치와 문학세계가 - 넓게는 학문세계 -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 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경제학 경제학(經濟學)은 재화나 용역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와 같은 경제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이다. 'economics'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 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한다. 경제학은 복잡한 경제 활동에서 특정한 규칙성을 발견하여 경제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전제와 분석 대상을 설정한다. 그중에서도 현대 경제학에서의 주요 연구 대상은 세계의 경제 상태, 개개인과 기업이 노동, 소비, 투자, 고용, 가격 등을 어떻게 결정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경기의 침체와 호황, 개인이나 국가간에 나타나는 부의 불균형과 같은 것들도 경제학의 주요 관심 분야이다. 정치경제학의 한 영역으로 시작하였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은 매우 거시적이고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다른 외적 조건이 동일하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전제 하에서 모든 분석이 진행된다.(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배제를 추상(abstract)이라 부른다.) 그러나 경제학자마다 분석 대상과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주목하거나 과감히 배제해버리는 부분은 모두 각각 다르다. 이러한 전제와 분석대상의 차이로부터 각 경제학파들의 차이가 생겨난다.이중 몇몇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문제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부의 성격과 원천'(애덤 스미스), '대지에서 수확되는 생산물의 분배를 규율하는 법칙'(리카도), '삶의 일상사에서 인간이 하는 행동'(데번포트),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희소한 수단과 목적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인간의 행동'(로빈슨), '유효수요의 결정 요인 분석과 국민소득수준과 고용량'(케인스), '근대사회의 움직임에 관한 경제적 법칙을 규명하는 것'(마르크스) 경제학의 학파에는 고전학파, 케인즈주의, 제도학파, 통화주의, 신고전파, 행동경제학, 신제도주의등이 있다. 비주류 경제학으로는 대표적으로 포스트케인지언이 있으며 그 이외에도 신경경제학 등이 있다. 실증경제학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반면 규범경제학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연구한다. 현대 주류경제학은 자원 등 경제적 가치가 있는 대상이 희소하고 이를 선택할 때에는 기회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기와 같은 것마저 공짜가 아니다. 개인, 기업, 국가와 같은 경제 주체들은 시장에 참여하여 재화와 용역의 수요와 공급을 창출하고, 이 과정에서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은 각 경제 주체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게 되고 이때문에 일정한 규칙이 성립하게 된다. 경제학은 이러한 경제 활동의 규칙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경제를 예측한다. 경제학은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여 그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실증경제학과 가치 판단에 따라 경제 활동을 평가하는 규범경제학으로 나뉠 수 있다. 한편, 경제학은 시장에 참여한 경제 주체의 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미시경제학 과 국가 단위 규모의 경제 활동과 정책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거시경제학 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모든 과정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사용되는 최종적인 대상을 재화와 서비스라고 한다. 재화는 유형적인 대상, 서비스는 무형적인 대상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머리빗은 재화이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서비스이다. 재화와 서비스는 노동, 자본, 원자재 같은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생산된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머리빗은 노동력과 머리빗 만드는 기계(자본),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원자재)를 결합하여 생산된다.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는 경제 행위자들 사이에서 교환되어 분배된다. 분배된 재화와 서비스는 최종적으로 소비되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게 된다. 이 각각의 과정, 즉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등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생산, 교환, 분배, 소비 등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나 혹은 특정한 산업 역시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노동경제학, 농업이라는 산업에 특화된 농업경제학 등이 그 예이다. 산업 내의 구도를 연구하는 산업조직론, 국가 간 무역을 연구하는 국제무역론, 국가 간 금융 거래와 흐름을 연구하는 국제금융론 등도 있다. 장기적이고 경제 전체를 연구하는 분야로는 거시경제학이 있으며, 거시경제학에서는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률, 물가 등을 다룬다. 직접적으로 경제와 관련된 문제 이외에도 현대의 경제학은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불릴만큼 인접 학문의 주제들을 넓게 연구하고 있다. 법, 투표, 범죄, 정보, 교육 등이 대표적으로 인접 학문과 겹치는 분야들이다. 경제학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한 1776년 이후이다. 애덤 스미스 이전에 경제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를테면 경제에 대한 노동가치설의 효시가 되는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할 당시, 각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지금처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았다.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세금, 수출입 규제 등은 체계적인 이론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을 강조하며, 개인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였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가 개인의 경제 활동에 개입하지 않아도 시장에서의 가격 조정을 통해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장의 기능을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분업의 이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고, 노동가치설을 설명하기도 했다. 국부론 이후, 토마스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 등이 애덤 스미스를 계승하여 가치론, 분배 이론, 국제 무역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이 방법론 상의 큰 변화를 겪은 것은 한계 효용 학파의 등장 이후이다. 한계 효용 학파는 물리학의 프레임워크를 받아들여 미적분을 사용한 수학적인 모형을 개발했다. 일반 균형 모형이 연구된 것이 한계 효용 학파 시대이다. 경제학이 현대의 주류 경제학과 가까운 모습으로 정착한 것은 한계 효용 학파 이후다. 한계 효용 학파 이전의 경제학에는 수학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부분이 말로 설명되었다. 한계 효용 학파에 따르면, 합리적인 경제주체는 한계 효용이 한계 비용과 같아지는 지점을 선택한다. 이 원리는 현대에서도 다수의 경제 모형의 결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이다. 한계 효용 학파 시대에 경제학은 처음으로 대학에 독립된 학과로 개설되었다. 알프레드 마셜이 190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경제학과를 개설한 것이 최초이다. 알프레드 마셜의 제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국가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현대에 사용되는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 등의 경기 부양 정책의 기초적인 논리를 마련했다. 그는 거시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경기 불황시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했다. 1944년에 존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겐스턴은 게임의 이론과 경제 행위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는 게임 이론의 시초가 되는 저작으로 여겨진다. 게임 이론은 경제 행위자간 상호작용을 다루는 경제학의 분야이다. 현대의 경제학은 학문으로서 성공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의 정책 결정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초창기에는 도덕 철학이나 정치학의 일부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심리학과 더불어 사회과학 중 정말로 과학으로 분류되다시피 하는 영역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이들 경제학자들이 남겨 놓은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국가의 경제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여전히 많은 경제이론 등이 개발되거나 발전되고 있다. 경제는 연구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그 이유는 첫째, 경제라는 시스템은 절대적인 크기가 크며, 둘째, 인간이라는 변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셋째, 상호작용하는 요소가 다양하고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 이유들 때문에 경제는 실험을 통해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주류경제학은 독특한 연구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대부분의 경제학은 수학적 모형으로 경제를 표현하여 그 성질을 분석한다. 주류경제학에서 인간의 행동을 수학적으로 형식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대한 합리성 가정이 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합리성 가정은 인간의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수학적으로 형식화된 몇 개의 공리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의 현대 주류경제학 이론은 이 공리에 기초하고 있다.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그다지 강한 가정은 아니다. 경제학에서 선호에 순서가 주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두 개의 대상을 똑같이 좋아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순서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에게 세 명의 친구 영희, 철수, 민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면, 당신은 영희를 민희보다 더 좋아할 것이다. 이 경우 세 명의 친구에 대한 선호는 영희>철수>민희의 순서가 된다. 영희, 철수, 민희를 똑같이 좋아하는 경우에도 합리성 가정은 만족된다. 다만 합리성 가정이 배제하는 경우는 영희를 철수보다 더 좋아하고, 철수를 민희보다 더 좋아하는데, 민희를 영희보다 더 좋아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영희>철수이면서 철수>민희지만 영희>민희라고 쓸 수 없게 된다. 합리성 가정은 크게 무리있는 가정은 아니지만, 이 합리성 가정에 대해서는 신경경제학, 행동경제학 등 다른 경제학계에서 비판이 있었다. 실증적으로는 합리성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있으며 어린아이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경제학에서는 주로 실험 대신 통계적 방법으로 이론을 검증한다. 경제학 이론을 검증하는데 특화된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시뮬레이션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신경경제학 같은 비주류 경제학에서는 fMRI등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경제학은 크게 개인과 기업 등의 개별 경제 주체의 행동을 다루는 미시경제학과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 경제 전체의 움직임을 다루는 거시경제학, 그리고 일정기간의 경제활동 및 경제조직에 대한 역사와 변천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경제 외적 활동이나 제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경제발전론으로 나뉜다. 현대의 주류 경제학은 그 중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며 환경경제학, 교육경제학, 정보경제학,노동경제학 등 연구의 주제나 연구방법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기타 제도학파 경제학의 경우 경제발전론에 큰 비중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과 다르게 개별 경제주체 보다는 제도적인 차원인 생산관계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분석 대상이 주류경제학에서의 거시 경제학과 크게 겹친다고 볼 수 있으며, 경제발전론의 주요 분파중 하나인 종속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미시경제학은 개인과 기업 등 개별 경제 주체의 행동을 다룬다. 미시경제학은 개별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이 제약되어 있을 때, 개별 주체가 어떻게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대개의 경우 수학적으로는 제약하의 최적화로 모형화한다. 미시경제학의 하위 분야인 게임이론에서는 경제 주체 간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그 외의 미시경제학에 속하는 경제학 분야로는 산업조직론, 재정학 등이 있다. 거시경제학은 경제 전체의 움직임을 다룬다. 경제성장, 경기변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이 거시경제학의 주요 주제이다. 거시경제학의 하위 분야로는 국제금융론 등이 있다. 개념적으로 경제학을 크게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나누지만, 그 경계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경제의 거시적인 현상은 결국 미시적인 현상들의 상호작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거시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총수요 개념은 실제로는 각 가계의 수요가 종합된 개념이며, 각 가계의 수요는 미시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의 거시경제학에서는 미시경제학적 설명을 기초로 한 모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다만 사용하는 수학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학부 기초 수준의 과목에서는 미시경제학적 설명이 포함된 거시경제학 모형이 잘 다뤄지지는 않는다. 저개발 국민경제의 경제적 기본여건과 발전의 저해요인을 규명, 해결하여 실질국민소득의 양적 성장과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 복지경제 사회로 지향하는 보편적 경제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발도상국의 개념과 특징 및 저해요인, 경제발전의 기초조건, 경제발전의 역사, 중상주의, 고전학파, 신고전학파, 케인즈와 그의 후계자, 동태적 경제성장에 관한 이론 등의 전통적 경제발전이론과 중상주의, 역사학파, 마르크스, 슘페터, 로스토우 등의 비전통적 경제발전이론, 개발도상국의 사회학적 접근방법, 자원의 간접 및 직접배분, 균형,불균형 성장론, 농업개발론과 공업개발론, 노동집약적 기술과 자본집약적 기술, 자유주의 무역론과 보호주의 무역론 등을 포함한 개발도상국 경제의 이론 등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이론과 정책에 중점을 둔다. 통계학은 경제학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경제학은 실험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통계적인 방법으로 검증하는 경우가 많다. 통계학 중에서도 경제 데이터 특유의 난점에 집중하는 통계학을 계량경제학이라고 한다. 계량경제학을 사용한 이론 검증은 대부분의 경제학 분야에서 사용된다. 계량경제학 이외에 경제 과정을 확률 과정으로 모형화하는 경우에도 통계학적 기초가 필요하다. 고전 경제학(古典經濟學, classical economics)은 경제사상사에서 최초의 근대 경제 이론으로 지목하는 경제학의 한 부류이다. 고전경제학을 정립한 주요 학자로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토머스 멜더스,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있다. 이들 외에도 윌리엄 퍼티, 요한 하인리히 폰 튀넨,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 등도 고전경제학자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1776년 출간된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이 고전경제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고전경제학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제 이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1870년 시작된 영국의 신고전경제학 발현의 근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시초다. 케인즈 경제학(Keynesian economics)은 20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사상에 기초한 경제학 이론이다. 케인즈 경제학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혼합경제를 장려한다. 이는 시장과 민간 부문이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방임주의적 자유주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실제로 케인즈 경제학은 여러 경제학자들이 방임주의의 실패로 인한 것으로 여기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케인즈의 이론은 거시경제적 흐름이 각 개인들의 미시적 행동을 압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 과정을 잠재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보는 18세기 후반 이후 고전 경제학자들의 관점과는 달리, 케인즈는 (특히 불황기에) 경제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30년대의 높은 실업률과 디플레이션에 대해 거시적인 규모에서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논했다. 불황 시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보다 많은 돈이 유동되므로 시민들의 소비와 투자가 유도되어 경제가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주장이다. 이는 공급경제학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수요주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카고 학파 (경제학)는 시카고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연구와 관련된 신고전파 경제학 학파이다. 시카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케인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학의 거물들인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있다. 거시 경제학의 맥락에서, 시카고 학파는 연안 대학들에 기반을 둔 짠물 학파와 대조적으로, 거시 경제학의 "민물 학파"와 연결된다. 시카고 거시 경제 이론은 1970년대 중반까지 통화 주의를 지지하는 케인즈식을 거부해 왔는데, 그 때 그것은 합리적인 기대의 개념에 기초하여 주로 새로운 고전적인 거시 경제학으로 돌아섰다. 민물 학파와 짠물 학파의 구분은 두 전통이 서로 상당히 결합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구식이다. 구체적으로, 새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고전적인 경제학에 대한 반응으로 불완전한 경쟁과 끈적거리는 임금에 대한 전통적인 케인스 학파의 집중을 포기하지 않고 합리적인 기대치를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도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이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 이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미국과 영국의 경제 정책에 반영 시켰다. 또한 남미에서는 일명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리는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이 경제부 총리 같은 중요 직책들을 다루었다. 지난 6년간 4개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과 총 30개의 노벨 경제학상으로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부는 2, 3위이자 다른 세계적인 경제학부인 하버드나 MIT를 합친 것 보다도 노벨 경제학자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배출해 오고 있다. 현재 시카고대의 경제학부는 전통적인 시카고학파 출신 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교수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교수진 중에서 대표적으로 2017년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효율적 시장 가설(이 가설 또한 시카고학파 출신 교수이자 2013년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유진 파마 교수의 이론이다)을 반대하는 리처드 탈러 교수가 있다. 정책면에서는 전세계 경제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중앙은행 총재, 은행가, 지식인 30명으로 구성된 G30조직에서 5명이 시카고대 출신이다. 이 5명은 전 일본 중앙 은행 총재, 전 인도 중앙 은행 총재이자 IMF의 총괄 경제학자, 전 이스라엘 중앙 은행 총재이자 미국의 가장 큰 은행인 JP모간 체이스의 총괄 회장,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인 UBS 회장, 그리고 "중앙 은행의 중앙 은행"이라고 부리는 Bank of International Settlements (중앙 은행들을 관리하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 은행)의 총재가 포함 되어있다. 거시경제학 내의 학파다. 소위 신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보통 통화주의는 프리드먼이 창시하다시피 한 50~60년대의 학파고, 새고전주의는 루카스, 사전트, 프레스콧 등이 연관이 있는 70년대 이후의 학파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시초다. 신제도학파는 종류가 굉장히 많지만 가장 주류적 위치를 점하는 분야는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다. 합리적 선택 신제도주의는 통상 주어진 제도적 환경 하에서 합리적 인간의 행태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공공선택론, 게임이론, 로널드 코즈, 엘레너 오스트롬, 나아가 행동 경제학 등이 이와 관계가 있다. 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학이다. 신경경제학과도 관계가 있다. 기존 경제학은 합리적이고(rational),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에 기반한 학문인 반면,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제한적으로 합리적이며, 때론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미국 같은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주류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하나,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제대로 전파가 되지 못했다. 신경과학에 근거한 경제학이다. 니콜라스 조제스쿠-뢰겐을 시초로 하는 경제학 분야이다. 열역학 법칙을 경제학에 적용한다. 경제를 생태계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적용한 경제학 분야이다. 열역학 경제학과 관계가 깊다. 1970년대에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인류 사회와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함께 추구해야 한 다는 분야가 태동하였다. 이 분야가 바로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이다. 1960년대에 선진국에서 환경주의의 영향을 받아 환경문제를 경제학의 테두리에서 고민하는 분야가 태동하였다.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이다. 환경호르몬은 유독 폐기물, 온실효과 기체 등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질은 경제 활동의 결과 배출된다, 따라서 환경경제학은 경제 활동의 영역 안에서 환경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환경경제학에서는 시장실패, 곧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은 외부효과 때문에 발생하며, 외부효과는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환경경제학은 시장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 및 수질 오염, 유독 폐기물, 지구 온난화, 생물 다양성 보존 등에 관련된 환경정책에 대한 비용 및 편익 분석을 통해서 가장 효율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시장실패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환경오염의 원인 제공자가 환경 이용에 대해 응분의 가격을 치르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이를 실시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설정한 다음에 이러한 탄소 배출권을 자유롭게 사고팔게 하는 방법이 대표적 사례이다. 동양 미술사 동양 미술사(東洋美術史)는 아시아(동양) 지역 미술의 역사이다. 동양 미술은 그림의 표현 양식, 특히 쓰이는 기본재료에 따라 크게 묵화와 채색화로 나뉜다. 채색화는 그림의 대상에 따라 아래과 같이 구분한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화의 회화방법과 사용되는 재료의 부분적인 수용을 통하여 동양화는 그 표현양식 및 기법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양 미술사 서양 미술의 역사에 관하여 서술한다. 서양미술의 근원지는 현재의 유럽과 함께 중동지역, 서부와 남부 러시아를 기준으로 하며 이후에는 북 아메리카 지역까지 확장된다. 미술의 역사는 출토되거나 보존된 미술품을 기준으로 그 작품이 생겨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작가, 작가의 특성 등을 고려하고 있다.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며 따라서 미술의 역사를 말할 때 각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파장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미술의 발전은 동양미술과 극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서양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고대의 기원전 4만년까지 올라가며 조각품과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여러 문명과의 교류를 거쳐가며 미술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집트 문명 시절에는 왕과 신을 거대한 조각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와 같은 유명한 고대 건축물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양미술은 조각과 그림, 직물에서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미술은 극적인 발전과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위시한 근대미술이 발전하였으며, 인상주의는 모더니즘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20세기 이후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서양 미술의 역사의 시작은 분명치 않다. 기원전 4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인류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최초의 미술 형태를 이루는 돌 조각품을 만들게 된다. 기원전 3만년에서 2만 5천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프의 여인'(Woman from Willendorf)이라는 작은 조각품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최초의 미술작품 중 하나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정확한 제작년도를 추정하기 힘들며 작가는 물론 어떤 민족이 제작했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즉, 미술의 역사는 사실상 이미 역사가 시작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서야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의 미술 작품은 대다수가 유럽과 남부 러시아를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재료는 대부분 돌이나 짐승의 뼈를 조각한 작품이거나 동굴 벽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고대에 만들어진 미술 작품들은 그 용도가 관상용이 아닌 종교적이거나 교육적인 이유라고 추정되며 사람의 모습이나 들소, 야생말, 다른 야생동물 등 일상적이고 그들이 흔히 보는 모습들을 소재를 다루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창하기 시작한 이 초기 문명들은 아시아의 서부지역으로 오늘날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와 이란이 있는 지역이다. 이 시기의 미술 작품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많은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무늬와 문양을 패턴 형식으로 나타내는 등 디자인 적인 감각에서 많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술작품들은 토기나 도자기 등 생활에 밀접한 필수품 위에 나타나기도 하며 조각품들은 고대의 미술품보다 더욱 자세하게 소재를 재현해내고 있다.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천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번창한 수메르 문명은 농업 기술을 사용하여 불모지였던 땅을 농작지로 바꾼 후 그곳에 정착했다. 수메르 문명의 미술품으로는 토기의 겉면을 조각하여 부조의 형태를 만든 '우루크의 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세 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맨 위의 장면에는 보통 여인 혹은 그들이 믿었던 여신 이나나(Inanna) 혹은 여신의 사제로 여겨지는 여인에게 바구니를 건네는 남성의 모습과 남성의 뒤로 여러 개의 바구니, 항아리, 그리고 숫양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나체의 남성들이 바구니에 공물 등을 담아 걸어가고 있다. 당시에는 신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옷을 벗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아래 세 번째 장면에서는 가축들과 곡식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런 식으로 탄생된 미술품들은 가장 초기의 문자 형태를 형성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땅을 상징하는 가로 선의 활용과 조각과 조각 사이의 공간 등은 문자와 글의 초기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당시 수메르 문명은 나름대로의 형태의 문학 문화 또한 갖고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그것인데, 이 시는 인류 최초의 가장 위대한 시로 꼽히고 있다. 수메르의 신전에서는 그들이 섬기던 신과 여신을 조각한 것으로 보여지는 작은 조상들이 여럿 발견되곤 한다. 이들 조상들은 눈이 크게 과장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지만 보석이나 조개의 껍질이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들이 남긴 비문에 의하면 그들은 이러한 조상들이 단순히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조각한 상이 아니라 생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수메르 문명은 이후 기원전 2350년경 아카드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시기부터 실물 크기의 왕의 조각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동으로 만든 왕의 두상 조각품은 현재 바그다드에 있는 이라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두상 작품은 금속을 조각하는 기법에 있어 매우 높은 기술력과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품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석이나 조개 껍질을 장식하여 신과 같은 우상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초대 왕 이었던 사르곤의 손자 나람신은 전쟁에서 이긴 기념으로 자신의 전승비를 조각하여 남기기도 했다. 이 전승비 속에서 그는 마치 신처럼 다른 군사들보다 두 배는 더 크며 불사의 몸을 갖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전승비에는 나무와 언덕과 같은 경치 또한 조각되어 있으며 이것은 인류 최초의 풍경화의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언덕에 적혀진 비문은 훗날에 새겨진 것으로, 제작되었던 초기 시기에는 비문을 새겨넣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기원전 2180년 아카드 문명은 멸망하게 되었으며 단 하나의 도시 라가시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구데아의 평화로운 통치 아래 문학과 미술에 있어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구데아 역시 이전의 아카드의 왕들처럼 실물 크기의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긴 하였으나 그의 조각상은 이전의 조각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고 신 Ningirsu를 섬기는 종이며 자신을 '양치는 목자'라 칭하였다. 그의 조각상에서는 옛 왕들의 조각상과 다르게 수염을 깨끗이 깎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조각상들은 매우 단단한 돌로 조각되어 있고 신전 주변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 문명이 번창할 시기에 지어진 신전들은 지구라트(Ziggurats)라고 불리고 있다. 이 신전들은 진흙을 빚어 만든 벽돌로 지어졌으며 높은 사제들과 왕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성스러운 곳이었다. 이 신전들은 모세가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받았던 시나이 산(Mount Sinai)와 같이 성스러운 산(Holy mountains)으로 여겨졌다. 평지에서 살았던 수메르인들에게 있어 산은 흐르는 물과 생명력을 가진 식물 등을 상징했다. 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여신 Ninhursag를 '산의 여인'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서양의 산에 대한 상징문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천년 이후부터 번창하기 시작한 바빌론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함무랍비의 통치 아래 바빌론 제국은 마리(Mari)와 니네베(Nineveh)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확장되었다. 함무랍비는 인류 역사 최초의 법전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법전은 stele라 불리는 석판 위에 새겨넣어져 있으며 이 석판의 윗쪽 부분에는 성스러운 산, 혹은 지구라트 위에 서서 인간의 모습을 한 신에게 법전을 받는 함무랍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바빌론 문명의 조각품은 옛 수메르 문명이나 아카드 문명의 예술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에 전시된 통치자의 두상은 옛 아카드 인들의 동으로 만든 두상 조각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조각품 또한 눈동자가 비어 있는데, 보석이나 조개 껍질 따위를 채워넣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교적 부드러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머리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매우 인상적인 여왕 Napirasu의 조각상(루브르 박물관)이 수사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헤프트 테페(Haft Tepe) 부근에 위치한 Chogha Zanbil의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 근방에서 발견된 지구라트들보다 훨씬 더 큰 건축물이다. 이 지구라트는 푸른색과 초록색의 벽돌로 지어진 세 개의 신전과 합병되어 있으며 기원 전 1250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다. 이 건축물은 원래 5층 정도의 높이로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나, 현재는 심하게 훼손되었다. (→지구라트 참조) 오늘날의 파키스탄인 인더스 문명은 수메르 문명과 무역거래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無 초기의 이집트 문명은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나일 강을 따라 번성했다. 나일 강은 초기의 이집트 인들에게 농업을 위한 경작지, 나무, 풀, 돌, 식물, 그리고 운송 수단 등 여러가지를 제공했으며 고대 이집트 문명이 거대한 제국으로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집트 문명은 군주제로,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막화된 땅에 둘러싸여져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나일 강 주변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나일 강을 하피(Hapy) 신이 수호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신들의 신이었던 태양신 라(Ra 혹은 Re)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여기며 숭배했다. 나일 강의 북쪽 지대는 험준한 계곡이 많은 곳으로 이곳의 대다수의 주민들은 사하라의 신석기 시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유목민들이었으며, 이들이 살던 지역은 석기 시대의 돌 조각과 벽화의 흔적을 현재까지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메삭(Messak)에서 발견된 동물을 그린 벽화나 도기 등은 이집트의 북쪽 지방에서 발견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4천년에서 3천2백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도기에 그림을 그려넣는 것은 기원전 4천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점점 사라져가는 풍습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 시기에 발견된 그릇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돌을 조각하거나 구멍을 뚫고 윤이 나도록 다듬는 데에 숙련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례식 때에는 흙을 빚어 만든 작은 남성이나 여성 모양의 조상과 시신을 함께 묻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조상들이 죽은 이들의 시중을 들게 되며 이후 죽은 이들은 영생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이집트의 미술 문화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같은 시기에 무덤 안에서 그림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아마로 만든 옷 조각이나 벽에 그려졌던 그림 등은 현재 카이로에 주재한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두 그림은 모두 나일 강에서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마나 갑판 선실이 있는 배, 그리고 노를 젓는 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납작한 실루엣 형식으로 그려졌으며,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어떠한 기준이나 법칙이 없는 납작한 2차원의 공간 속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소재나 용도에 있어 이 작품은 선대의 어떤 미술 문화와도 구분된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미술 문화는 나르메르왕이 북 이집트와 남 이집트를 합병 통치하기 이전부터 이미 천천히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 특유의 평면적인 미술 풍조의 시작은 바로 이 작품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나르메르의 팔레트는 이집트 문명의 초대 왕이었던 나르메르의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부조 조각품으로, 이집트 문명의 독특한 예술 문화를 열었던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팔레트는 앞면과 뒷면으로 나뉘어 양면에 각각 조각과 문양을 새겨넣어 당시 이집트 문명의 문화와 풍습을 암시하고 있다. 팔레트의 앞면에는 목이 긴 두 마리의 괴수가 서로의 목을 둥글게 꼬아 동그란 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둥그렇게 패인 이 원은 다른 부분보다 훨씬 깊게 패인 것으로 보아 종교의식 혹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의식에 필요한 물감 따위를 담아두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괴수들은 지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가로선 위에 서 있으며 팔레트의 중앙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위에는 나르메르 왕이 남부 이집트의 통치자의 상징인 붉은 코브라 왕관을 쓰고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의 목을 참수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팔레트의 하단 부분에는 나약함을 상징하듯 벌거벗은 채 황소들에게 짓밟히는 적군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황소는 왕의 권력과 힘을 상징하기 위함으로, 적군의 성벽을 부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팔레트의 뒷면에는 나르메르가 서서 포로를 죽이려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나르메르는 다른 이들 보다 두 배 이상 큰 모습이며, 다른 이들과 분리된 지면을 밟고 서 있다. 또한 나르메르의 다리에는 근육의 모양새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선들이 패여있으며 이것은 그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오른편에 조각된 매는 하늘의 신 호루스(Horus)를 상징하며 북부 이집트의 신이기도 하다. 매는 남부 이집트를 상징하는 밧줄을 잡고 있으며 이 밧줄은 여섯 개의 파피루스로 이어지고 있다. 팔레트 위에 새겨진 모든 형태들은 각각 어떠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훗날 쓰임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 팔레트 위에는 나르메르와 포로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반면 초기 상형문자의 형태로 보이는 무늬 또한 조각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팔레트는 나르메르의 승리를 실제로 발표하기 위한 성명이나 문서로 해석된다. 고대 이집트의 문명은 오늘날 가장 신비하고 위대한 미술 문화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는 시기이다. 신왕국 시대 때 이집트의 미술은 다른 문명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이후 가장 크게 발전하게 되는 그리스 문명의 미술 문화의 기반을 다진 것도 또한 이집트의 미술이다. 세포생물학 세포생물학(細胞生物學, )은 생물체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세포의 구조를 연구하는 생물학의 전문 연구분야이다. 세포의 관찰과 연구는 분자 생물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세포학은 세포의 구조에서 비롯하여 세포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생물의 생성과 발전에 보다 상세한 지식을 얻음으로써 생물학 관련 분야, 생화학, 유전학, 진화 생물학 등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 아이네이아스 아이네이아스()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의 한 영웅으로서, 전설상 아프로디테와 트로이 사람 안키세스의 아들이라 한다. 트로이가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후, 그의 아버지와 아들 율루스(Iulus)와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피신하였다고 전해지며, 이 전설은 후에 로마의 국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혹은 아이네이드)에서 극적으로 노래 되었다. 이에 따르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카르타고에 닿아 그곳의 여왕 디도와 사랑을 나누는 등 7년 동안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상륙하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이후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로 묘사되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가 로마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조상이라는 로마 건국 신화도 있다.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증손이 영국으로 이주하여 최초의 영국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베르길리우스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 , 기원전 70년 10월 15일 - 기원전 19년 9월 21일)는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이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받게 되는 시인으로 단테가 저승의 안내자로 그를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이탈리아의 포 강 중류의 만투아(Mantua, 현재 만토바 Mantova) 근교의 안데스(Andes)에서 태어나다 (출생시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의 고향은 당시 로마의 행정구역인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갈리아 알프스 이쪽 지역, 즉 이탈리아 북부)로서 그의 부모는 서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농부이자 도자기굽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기아 폴라(Magia Polla)는 베르길리우스를 낳기 전에 월계수가 울창하게 자라는 해몽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 꿈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 "Vergilius"는 라틴어의 "virga" (어린나무)에서, 그리고 여기서 기원후 5세기를 전후로 "Virgilius"라는 명칭이 (현재 영어나 프랑스어의 표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59년에서 53년까지 베르길리우스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메디올라눔(Mediolanum, 현재 밀라노)로 가 웅변술과 여러 학문들을 배운다. 기원후 54년에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웅변술을 배운 후, 실지로 소송 사건의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을 하지만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실과, 워낙 수줍음이 많은 천성이었던 베르길리우스는 정계 데뷰를 포기하고 젊은 문학자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을 접하게 되고, 이후 문학에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기원후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가서 시로가 주도하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깊이 배우게 된다. 시를 써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알게 되어,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농경시》(Georgica)등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낭송하기도 한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건국을 다룬 작품을 써 보라고 권하자 그에 응하여 《아이네이스》(Aineis)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기 전의 11년 동안 썼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시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서사시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하였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집으로 《농경시》,《목가》,《아이네이스》 등이 있다. 참고서적 : 단테 클럽 미국의 단테협회의 전신이다. 같은 이름의 역사 추리 소설이 나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정치 정치(政治, politics)에 대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학문적인 정의는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내린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이다. 또는 정치를 국가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는 경향도 있는 바,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 라고 정의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정치를 국가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내재된 권력 관계로 정의하는 경향도 생겼다. 이와 같이 정치는 "배분",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권력 관계" 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 측면도 소홀히 여겨질 수는 없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정치의 정의는 아마도 해롤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이 말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Who gets what, when and how)"라는 것일 것이다. 라스웰 또한 정치를 '배분'의 측면에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학은 정치적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문이다. 관련된 분야로는 정치철학, 비교정치학, 국제정치학 등이 있다. 정치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가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한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다의 ‘正’(정)과 일을 하다 또는 회초리로 치다의 의미인 攵(등글월문 = 攴)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즉,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한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로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氵= 水)과 건축물(台 태)이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이것은 물(水)의 넘침에 의한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조화로운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로운 것,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정치(政治)는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자신의 부조화로운 것, 네거티브한 것, 즉, 천지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성인을 의미한다. 정부는 규칙이나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시킬 권위를 가진 조직체를 말한다. 철학자 플라톤은 정부를 군주정과 과두정, 금권정, 민주정으로 분류했다. 근대의 정부들은 대체로 위와 같이 간단히 분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정에서는 군주가 국가의 원수로서 존재하나, 실제의 권력은 국회를 비롯한 입법기관 등이 보유하고 있다. 공화정은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현대에는 민주정의 기준도 상당히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를 민주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나, 국외의 많은 이들은 이를 전체주의적 독재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독재정은 한 사람이나 집단이 법률적 제한을 받지 않고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정당성이 아닌 폭력에 기반해 행사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독재"라는 표현은 많은 경우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 주권은 정부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영토를 통치할 능력을 말한다. 주권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권리를 일컫는다. 나아가 국가의 정치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원리를 '국민 주권'이라 한다. 공산주의 공산주의(, , , )는 자본가 계급이 소멸되고, 노동자 계급이 주체가 된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무계급 사회 조직, 공동체 형성에 관한 이론, 또는 그러한 체제를 목표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정치 운동들을 일컫는다. 경제적으로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고,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경제 구조로 대변된다. 공산주의 정치 운동은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계급들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 해방된 주체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조직 형성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했지만, 이러한 코뮨주의적 주장은, 19세기 후반 근대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미해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분파중에 제일 큰 세력을 형성한 분파인 마르크스주의는 코뮨주의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 인식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정확히 알려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의 라틴어 "는 '함께하는'이라는 뜻이고, '공산(共産)'은 함께 소유하고 생산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는 주로 경제 체제라고 흔히 불리지만, 딱 경제 체제로만 구별되어있는 사상이 아니며, 정확히는 경제·정치·사회·철학·통치 체제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크게 네 가지 뜻으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로 제일 흔하게 쓰이는 의미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설적 이론을 통칭하여 부르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하나의 이론으로 구성된 체제의 가능성이며, 세 번째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실행하고 있는 국가의 정경체제를 부를 때 쓰인다. 네 번째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즉, 무계급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구분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첫글자가 소문자로 쓰여있는 'communism'은 사회주의 체제 국가의 정경체제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켰고, 첫글자가 대문자로 쓰이는 'Communism'은 공산주의를 가리켰다. 이론적으로 공산주의는 19세기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정치사상에 그 기원을 둔다. 인류의 초기 사회 조직은 "고대의 공산주의"라 정의될 수 있겠으나 정치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일반적으로 아직 형성 중인 미래의 사회 체계를 제시한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공동체들 사이에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와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주의)의 사상에 근접하다고 인식되는 일련의 분파들은 20세기 초 이후 국제 정치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계급 투쟁은 핵심적인 역할을 지닌다. 이를 따르면 공산주의 체제의 형성은 자본가 계급(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의 최정점이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서 공산주의 생산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라 불리는 과도기적 기간이 불가피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되는 공산 사회는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으므로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공산당 체제하에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를 일컫는 일에 흔히 사용된다. 흔히 공산주의의 반대를 민주주의라 칭하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으며, 공산주의의 정확한 반대어는 자본주의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서 공화파인 자코뱅 당과 지롱드 당이 프랑스 정치 권력을 공동 지배하였지만 프랑스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상 퀼로트(노동자 및 농민)가 자코뱅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보적인 자코뱅 당이 프랑스 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자코뱅의 지도자였던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의 특유 급진적 정책은 자코뱅의 적들을 자극, 단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자코뱅 혁명 정부는 붕괴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들에 의해 우경화가 된 상태로 진행됐다. 자코뱅의 평등주의 정책이 하나씩 소멸되면서 다시 다수 노동자, 농민의 삶은 추락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자코뱅의 혁명 분위기를 되살리려 했던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세력은 '급진적 자코뱅 당'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세력을 지도하던 인물은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였는데, 바뵈프는 오늘날 공산주의하면 생각나는 평등주의, 무상분배, 토지 균등분배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바뵈프는 프랑스 근대 정치 역사에서 최초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폭넓게 칭한 혁명가였다. 이 당시는 공산주의란 용어는 루소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이상을 혼합한 용어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정치 이론은 당시 기득권 세력을 자극시켰고, 그를 따르는 급진 자코뱅 세력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다. 또한 그도 1797년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19세기 중후반,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를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스스로 '공산주의자선언'이란 소책자를 내어 바뵈프 이후 금기시 되었던 공산주의란 용어를 다시 유럽 전역에 불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유럽 전역에서 사회당의 결성을 부채질했으나 이들 당의 정책은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이른바 "개량"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예외였다. 당내 분파인 볼셰비키가 레닌의 지도 아래에 1917년 혁명을 일으켜 임시 정부를 타도하고 국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1918년 당은 이름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바꾸었다. 그 후부터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는 각 국가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농민이 주류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오쩌둥주의라는 혁명 주도 세력을 농민으로 정의한 공산주의도 생기게 되며, 폴포트주의같은 친화교적이며, 주체사상 같은 유교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 큰 공산주의도 생기게 된다. 기본적으로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자립할 수 있는 무국가, 무자본 자치체 세상을 의미하는 어떠한 체제에 관련된 용어이며,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까지 이르는 모든 방법을 구체화한 사상이다. 공산주의란 용어는 역사적 사건마다 그 의미가 달라졌는데, 1차 대전이 종전되기 전인 1917년 이전에 공산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뜻으로 인식됐으나 1차 대전 종전 이후 인터내셔널이 여러 종파로 붕괴하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개량주의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켰고,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따르는 과학적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켰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혁명을 통한 사회변혁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사회주의는 빈부의 격차에 반대하여, 인간 평등과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로 이해되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이후 해외의 수많은 사회당은 공산당으로 변하고 소련 공산당과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맺었다. (국제 공산주의를 참고하라.)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막 후 스스로 공산주의라 칭하는 체제들이 중앙유럽에 들어섰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그 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기타 공산주의 정부 형태를 채택한 제3세계 나라 중에는 쿠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라오스가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전 세계의 2/5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살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처음으로 정립된 것이며, 기본적으로 투기 가능한 화폐, 돈인 '자본'이 양산되고, 그것으로 하여금 자본회전을 통하여 효율적인 잉여가치, 착취이윤 창출과 동시에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손안에 있고 그것들이 이윤생산을 목적으로 운용되며, 토지와 노동력을 사고팔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후에, 사유재산의 발생 원인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립했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단독으로 저작한 저서들에는 사유재산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자본주의 붕괴론'을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설명했는데,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축적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착취도가 심해지는 '궁핍화이론' 단계까지 오고, 그 결과 대중계급의 소비 의욕이 지나치게 낮아져, 결국 초과공급현상이 심해져 자본가 계급의 이윤의 증대되지 않는 것으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무산계급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강대국은 그러한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제국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초제국주의' 또는 '신제국주의'라는 경제적 침략 행위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윤을 채워나가게 되어있다. 마르크스는 원시 사회, 부족 사회 등은 단계적일지라도 사회 체제 상 비단계로 서술했으며, 1단계의 사회체제의 형태인 왕정이라는 체제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전복된다고 주장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2단계의 사회체제라고 주장했다. 신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마르크스주의에 3단계의 사회체제라고 정의해놓았다. 즉, 왕정이라는 일인독재의 전제군주제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 독재같은 사회 체제는 원시적인 체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가는 이행기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정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전될 수록 주기적인 공황에 매우 약하여, 이윤율 저하 경향이 초반 공황에 비해 매우 잦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어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건설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취지와는 다르게, 단순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 혁명이랑 비슷한 형태의 혁명으로 일어났다. 일부 정통 마르크스주의 성향 학자들은 오히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인 2단계에서 사회주의 체제인 3단계로 이어지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가 언급한 1단계의 왕정 체제에서 2단계의 자본주의 체제로 가는 자유주의 혁명과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에게 주는 부정적 영향은 특정 국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의 성격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 혁명계급이 노동자, 농민과 같은 무산계급이 주류이다. 부르주아 민주제(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를 이렇게 통칭함.)는 말 그대로 부르주아들만의 자유권과 참정권이 있는 시대였다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는 무산계급만이 자유권과 참정권을 가져야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기 기간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공산당선언에서는 자본가 및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층과의 화합이 없다는 전제로 폭력혁명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논점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와 다른데,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각 노동자가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여, 비집단적이고 분자적으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반면, 레닌주의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를 지휘하는 지휘 체계 정당인 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전위대가 노동자를 지휘하여, 더 전략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는 흔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체제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라고 정의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는 각자 계파마다 다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이므로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개조된 형태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사회민주주의자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에서 파생된 일종일 뿐이라고 정의한다. 이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와는 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처음으로 성공한 국가가 러시아 제국이었고 그 당시 혁명의 주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레닌주의를 방침으로 혁명을 이행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좀 다른데, 일단 사유재산에 대해 거의 큰 언급을 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와 다르게, 레닌주의에서는 공산주의에 도달하려면 확실하고 강제적인 당재산제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에 달성하면서 그 후 나타나는 문제까지 언급했다. 또한 공산주의의 핵심이었던 '유물사관'을 현실에 맞게 수정했다. 그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도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 묘사된 산업 노동자, 농민 계급이 주류를 이은 혁명 세력이 자본주의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다고 믿어,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위대 체계론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공산주의의 각 계파 내 큰 논쟁 거리를 낳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카를 마르크스와 다르게 국가를 절대화 했다. 그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경제적 제국주의 또는 구 제국주의와 같은 세력이 사회주의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여러가지 수법으로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이유를 들어 노동 계급은 하나로 결집된 단결 공산 국가를 조직하고 혁명 세력을 지원하여 세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 공산주의 세력끼리 국제적 화합을 도모하고 세계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전인민국가론을 주장했다. 또한 제국주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와 경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금융 그리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혀냈고 이것을 현재 흔히 '제국주의론'이라고 한다. 몇몇 학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제국이 혁명 대상에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 제국은 고도의 산업화가 되지 않은 1단계의 체제 즉, 왕정이었는데, 2단계의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부르주아 독재)가 없이 혁명이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대로라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엔 발전된 자본주의 형태여야하며 왕정이 타도된 자본주의 체제여야한다. 이 말대로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가 될 때 소련은 산업화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으며, 보편적인 민주주의 의식이 높지 않았다.(물론 2차 대전의 주요 승전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본질은 위에 언급된 유물사관에서 탈피된 개념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는 의견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시대에는 당재산제도를 따르며, 공동생산이 이루어진다. 최소한의 필요에 따른 소비가 이루어진다. 또한 자본가 계급은 사라지며 모든 기업은 당소유화되어 당의 재산이 된다. 계급 차이는 노사관계가 사라지고 인민(노동자, 지식인, 학생, 농민)과 지도자(위원, 주석)로 나뉜다. 공화제는 사회주의 공화제를 사용하며, 각 지도자(인민위원)은 각 지역의 임명제로 선출되고 주석이 선출되는 것도 철저한 임명제 방식으로 치루어지며, 공산당이라는 일당체제 하에 국정운영을 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당을 사유정치집단이 아닌 당주도의 서비스 기관으로 통칭한다. 철학적으로는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 소련의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의 모태가 되었을 때 적어도 1세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철학적 정책을 실질적으로 따르는 공산주의 국가는 없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전에 존재한 거의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회-철학적 관점을 따랐다.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이란, 모든 물질은 '의식'이 있다고 규정하며 인간을 세상에서 존재하는 제일 우수한 '물질'로 보는 유물론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불가지론과 어느정도 상반되며 신이라 절대적인 존재를 추종하는 종교를 부정한다. 소련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탄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개신교 탄압, 베트남에서의 천주교 탄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관점 말고도 공산주의의 반제국주의적 성격도 레닌주의의 철학관점이라고 해둘 수 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 진화형태는 제국주의'라고 언급하였다. 반제국주의적 성향 때문에 인간해방론적 사고방식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인간해방론'은 '노동해방론'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억압세력을 일소하고 노동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관점에서 '노동해방론'을 주창했고, 레닌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확장 과정을 통해 착취, 억압을 받는 모든 인민을 해방시켜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현재의 인간해방론은 더욱더 세분화 된 후자의 뜻을 담고있다. 후에 이 개념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김일성의 노동당 유일사상 10대 원칙에는 개신교 유일신 사상을 많이 이용하였고, 김일성이 개신교 가정 출신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반제국주의와 인간해방론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하며, 혁명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세계혁명론적 사고방식이라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이 세계혁명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혁명론적 사고방식은 꼭 요인들의 직접투쟁적 지원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일어나는 공산주의 혁명을 공산주의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방법도 포함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의 유동적인 계급 투쟁의 실현도 포함된다. 후에 이 세계혁명론은 트로츠키주의에서 발전되었다. 현대 시대에서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주의적 철학 관점을 따르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서는 폭력혁명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를 거치면 생산수단을 상품화할 수 있는 모든 공정 및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해체되고,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에게 주고 노동자가 자신을 위한 자체 생산수단을 얻을 수 있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한 세대마다 자신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얻어 자신의 몇 십배나 해당하는 세대가 쓸 수 있는량의 상품 및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종류에 대한 것은 각 학자들에 의해 의견이 다르지만, 보통 마르크스-레닌을 기점으로 파생된 사상을 공산주의의 종류로 간주한다.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는 공산주의에서 파생되었다기 보다는 공산주의를 현실화시킨 기반 사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공산주의에서 파생된 기타 사상의 상-하부 구조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데, 공산주의에 종류가 있다면 과연 소련의 공산주의는 무엇이였냐는 것이다.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종류와 상관없이, 평균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보통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따른다. 옆의 사진에서 특정 색으로 칠해진 국가는 한 때 공산주의를 경험한 국가인데, 적색으로 칠해진 국가는 소련의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거나, 친소련 정책을 구현시키는 국가를 의미한다. 현재까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쿠바, 라오스 역시 친소련 노선을 따랐었다. 황색의 경우 친중국적인 정책을 구현하는 국가이거나 마오쩌둥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이다. 대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민주 캄푸치아(캄보디아)가 있는데, 민주 캄푸치아의 경우 친화교주의적인 폴포트주의가 정식 이념이었고, 친중국 노선을 따랐다. 또한 알바니아의 경우는 1946년에서 1961년 사이 스탈린주의를 표방하였지만, 반스탈린 인사인 흐루쇼프가 소련의 대통령이 되면서, 1961년 친중노선으로 급선회한다. 흑색의 경우는 친중국도 아니고, 친소련도 아닌 외교 상태이며, 사상도 역시 전통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마오쩌둥주의가 아닌 자체 개발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통치한 국가를 의미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현재는 사실상 공산주의를 폐기한 것으로 간주됨)의 경우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주체사상이,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가 주요 이념이었기에 흑색으로 칠해졌다. 현재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는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로 분리 독립되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블라디미르 레닌이 계승하여 보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한 순간적으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쉽게 도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짧은 기간으로 묘사되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구현화 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국가의 존재 더불어 프롤레타리아로 이루어진 군대 및 경찰이 존재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혁명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전위당론'을 채택해 당의 수직적 구조를 본격화하고 국유화 체제를 강화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연관성 그리고 신식민지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했다. 그의 이론은 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따랐다. 스탈린주의는 스탈린 통치 시절 소련의 공식적인 정치-경제체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스탈린이 자신이 만든 사상을 '스탈린주의'라 명명하지 않고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불렀는데, 스탈린이 사실은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을 심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 받기도 한다. 주요 내용은 일국사회주의론을 기점으로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 하나만 있으면 된다."라는 일념 하에 만들어졌다. 당시 레닌 통치 시절 세계 혁명을 부흥시키는 쪽으로 사상을 발전시켜야한다는 트로츠키와 달리 스탈린은 세계 혁명보다는 일단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공산주의 혁명을 군사적 행동으로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스탈린 집권 이후에 이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 군사적 행동으로 전 세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의 전위조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야했고,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자발적 생산보다는, 국가 통제 양식에서의 생산방식을 선택하였고 그로 인해 빠른 집단산업화와 집단농업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착취는 더 늘어갔고, 자본가 대신 '공산당원'이라는 신분의 생산수단 장악은 기존의 껍데기만 다를 뿐 자본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동서구권 좌파 진영 및 다수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특히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닌 군국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주의가 횡행하던 시기에는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 간의 마찰이 심화되었었는데,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는 수정주의적이면서, 공산주의의 전통을 이으지 않은 사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는 국가를 개인숭배화시키는 국가주의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후에 다른 공산주의의 파생 사상에 큰 영향을 준다. 또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한 공산주의는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생산수단을 공동소유하고, 생산물의 공동소유 및 분배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는 본래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 급진적 풀뿌리 민주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 내전의 과정 이후, 레닌에 의해 실행되었던 노동자 계급의 생산수단 공동소유라는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가 스탈린 체제에 들어서 크게 퇴색되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병영국가적인 모습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대공황을 극복하고, 큰 폭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탈린식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전형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스탈린에 의해 권력에서 쫓겨난 트로츠키마저도 자신의 저서인 "배반당한 혁명"에서 1930년대 소련의 사회체제가 왜곡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소련은 노동자 계급의 공산주의 국가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 일부(국제 사회주의자 경향 등)는 소련에서 민주주의적 측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스탈린을 위시한 소련공산당 관료들이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면서 소련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스탈린주의를 군국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좌파 파시즘'의 일부일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트로츠키주의는 레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레닌주의를 세계 혁명 쪽으로 발전시켜 만든 공산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의 하부 이론인 세계혁명론을 영구혁명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국제 노동자 운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국제 공산주의의 시초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큰 반발심을 주기도 했지만, 제일 큰 반발심을 표출한 쪽은 바로 남미 쪽의 친미 정부였다. 당시 남아메리카의 기타 정부는 친미 정부하에 극단적 반공주의 체제를 실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은 항상 반미-공산주의 투쟁이 심한 지역이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해준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을 가진 트로츠키주의가 소련 사회를 휘어잡을 시, 남미의 친미 정부는 극심한 공산주의자들의 맹공을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 다툼에 밀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일생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며 살았는데 그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탈린주의 날조학》이라는 저서가 있다.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조하여, 만들어낸 중국식 공산주의이다. 아시아 일대의 공산당계에서는 마오쩌둥주의가 제일 영향력있는 공산주의로 평가되고 있다. 스탈린 사후 1960년대 소련이 흐루쇼프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탈스탈린화 되면서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대립한 사상이기도 하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업화는 유럽에 비해 훨씬 늦었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1차 산업에 의존하여, 공장과 같은 2차 산업의 생산라인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체는 산업 노동자가 되어야하는데, 산업이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산업 노동자 또한 없었다.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농민들로 인한 혁명을 주로하고 그에 관한 사상을 정립화시키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사정에 맞춰서 재개조하게 된다. 마오쩌둥주의의 하부 사상들은 민족주의, 대중주의(포퓰리즘), 신민주주의를 기초로 하였으며, 마오쩌둥주의와 레닌주의 주요 차이점은 혁명의 주체가 산업 노동자이냐, 농민이냐이며 마오쩌둥주의에서는 혁명의 주체가 농민이 되어야한다고 명시되어있는 것과,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와 달리 마오쩌둥주의는 관념론적 관점을 옹호한다. 마오쩌둥주의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사정에 따라 계승된 공산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 일각에서는 오히려 고도로 산업화 된 자본주의 체제를 공산화시킬 때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마오쩌둥주의보다는 개조되지 않은 레닌주의를 선호하기도 하였다. 이 사상의 하부 조직중 하나인 신민주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언급된 인민민주주의와도 같은 뜻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 문화에 맞춰진 민주주의라고 이름을 달리하였다. '신-민주주의'라고 불린 까닭은 분단국가로 견제할 상대인 중화민국의 삼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신민주주의는 삼민주의를 개조한 중국의 개조된 민주주의이며, 삼민주의는 구(舊)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현재 마오쩌둥주의는 인도 공산당, 네팔 공산당의 주요 이념이기도 하고, 주로 저개발 지역의 농업지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덩샤오핑 이론에 맞써는 중국 공산당 내 보수파의 주요 이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중국 내에서의 보수주의는 전 세계적 보수주의의 의미와 달리 마오쩌둥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티토주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개조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이며 기존의 공산주의에 비해 파격적인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에 파생된 사상이지만 일부 학자들에 의해 '사회주의의 일부'라고도 묘사된다. 유럽공산주의를 제외하고 모든 공산주의 분파에서 유일무이하게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레닌주의의 제일 기초적인 사회주의 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포기한 이론이며, 오히려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표현이 티토주의에서는 친소련파들을 향한 멸칭으로 등장한다. 주요 내용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모든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영향은 혹여나 그 국가가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보장받아야하며,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침범은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이다. 또한 이 티토주의는 냉전 당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의 대립 속에서 초월적 독립관을 지녔었는데, 티토주의에서도 자본주의 체제는 개조되지 않은 체제라 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복되어야할 체제로 보았지만, 사회주의 체제는 인민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체제이기 때문에, 냉전에 의한 공산주의 국가들 끼리의 단합적인 태도의 전제하에 공산주의 국가들 간의 외교적 격차는 모두 없어져야하며, 그것은 소련에게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티토주의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적인 민족주의 사상이라고도 불리며, 이 때문에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라이벌 공산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민주성이 보장된 사회를 저버렸고, 부르주아적 공산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레닌주의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룩셈부르크주의에서 구현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의회공산주의를 기초로하며, 완벽한 삼권분립을 주창한다. 197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공산당 등의 서구의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소련 특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이며 무조건적인 지지의 전통에서 분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은 프랑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일본도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0년대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기도 했었으나,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소련의 위성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의석 수가 줄어들며 위상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포함하며,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코뮌주의'적 양상과는 다른,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난 문제점을 기준으로 서술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분배를 강조하기 때문에 해당 행정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다수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는 총체적으로 관료주의가 팽배했다. 또한 일당독재체제이므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관련된 정책은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공산당에 의해 정해져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나 기타 민주주의와 달리 사회주의 공화제는 일당일파에 지배 하에 의한 사법, 행정, 입법 과정이 이루어졌으며, 삼권분립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때문에 정권을 가진 공산당의 일개파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른 정치양극화, 위계화도 심했다. 이러한 관료주의는 대다수 인민들의 반항심을 키웠고 결국 이는 총체적인 생산성 저하의 원인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노멘클라투라 현상이 있다. 토니 클리프를 포함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대표로 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포함한, 자유사회주의계 정치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영구적인 무산계급 정치혁명'의 포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중앙집권적 성향을 띤 민주주의 제도인 민주집중제라는 제도 자체가 스탈린주의와 결합하면서, 관료주의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구조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유물사관,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사회-철학적 정신을 기초로 하여 교육하고 지침하여 인간을 더욱 더 개조된 물질 상태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여러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을 "사회주의 소유 구조와 생산 체계를 대표로하는 경제적 물질로 하여금, 아직 의식이 개조되지 않은 해방되지못한 인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개조되지 않은 물질 상태의 인간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는 인간으로 비유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론과 같은 것들을 지침으로 한 인간의 사회-철학적 행동이 없이 개인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이렇듯이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무의식으로 사는 것은 인간(물질)의 방치된 형태이고 이 방치된 물질을 사상적으로 개조시켜 더 개조된 물질로 하여금 한마디로 '신형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기존의 일반 유물론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의 의지의 주관성과 관계없이, 오직 인간은 물질을 보고 뇌수의 이성으로 도출되는 특수한 또는 정해진 물질적 행동을 포함해,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해주는 특수한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기계론적 유물론과 달리,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오랜 시간 다른 구조의 생산 양식과, 수 많은 물질을 인식해, 그 자체로써 고차원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이 충분히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즉, 사회자본, 어떠한 부조리한 사회체제가 인간의 우위에 있어 인간의 생각과 그에 더불어 모든 물질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이 사회를 변증시키고 차이를 보아 변화시켜야 하며 그 주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계층안에 두었다. 그리고 그 신형인간을 만드는 단계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이라고 칭하였다. 이 기간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인간의 사상적 정신을 완벽하게 개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기라고 단언하였다. 또한 이렇게 굳혀진 사상적 정신이 후에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하여 무정부, 무군대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도 마르크스철학에 정통한 각 인민들의 자치체로 인해 자연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사상정신보다 사익에 대한 욕구가 더 강했으므로 이러한 철학 관점을 장기간 주입시키기는 어려웠으며 결국 마르크스 철학정신의 부재로 인해 '과학적 사회주의' 체제 하에 살고있는 모든 대다수의 국가는 정신은 마르크스가 흔히 말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시절과 다를 바 없었지만, 현실은 그들의 본능과 맞지 않은 사회주의 체제로써 여러가지 내부적 문제가 생기게 되는 원인이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 외,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등이 정립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채택하고,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하나의 견고한 사회주의 체제로 다져서, 제국주의 진영을 이긴다는 궁극적 목표가 있었지만, 이러한 공산주의 목표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기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기적으로 산업 발전이 느렸던 소련과 이를 포함한 수 많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사실상,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군비 경쟁에 부담감을 느꼈다고 평가되며, 서방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대다수의 민중들의 복지 수준도 하락했다. 이는 정부의 불신과 이념의 불신을 낳게된다. 그리고 그에 의한 결과는 전체적인 생산력, 의욕심 하락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산주의 경제 이론에서 주장하는 '필요생산'이 가능해지려면, 농축산물과 공산품을 위주로한 경공업이 발달되어야하며, 2차 산업 중에서는 생필품, 공산품 위주로 생산해야 한다. 고수익을 창출해내는 일부 2차 산업 부문은 식량, 생필품의 자급률을 원만하게 유지하는 한 늘리는 것도 고려해야한다. 특히 공산주의에서 금융 계열 3차 산업은 자본가들이 잉여가치 또는 자신들의 물질욕을 채우기 위해 인민을 착취(예를 들면 채권자소득률과 불로소득을 주요 소득으로하는)하면서 더욱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으로 규정하였으며 금융 산업이 비활성화 되어있다. 또한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고 인간의 필수적인 교육 및 의료 서비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모두 지원해주기 때문에 4차 산업역시 배제된다. 때문에 공산주의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식량의 자급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실공산주의 국가로 대표되는 소련의 경우는 군수산업과 항공·우주산업, 공장 기계부품 제조산업이 발달했지만, 그와 반대로 생필품의 생산력은 부진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주도의 기술진으로 여러 가지 신상품을 배출해냈는데, 이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일단 획기적인 상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개발해낸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이익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더더욱 확실한 이유는 자본가 계급은 경제 활동에 있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할만한 최적의 개체인데 자본가라는 계급을 생산력을 발생시키지 않고 잉여가치만 소모하는 비효율적이고 취약한 존재라고 여겨 자본가 계급을 모두 일소하였기 때문에 경제에 관해서 경쟁력있는 혁신적인 산업화의 아이디어가 더디어졌다. 즉, 사회주의의 분배제는 각 개체 간의 경쟁심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이 결과는 경제적 문제에서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경제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봉급의 격차와 한계효용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동기화를 부여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대부분의 국가는 고도로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2차 산업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1차 산업인 어업, 농업과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었다. 원래 산업 노동자들을 주요 기반으로 삼는 공산주의 노선은 중공에서 마오쩌둥주의라고 개조되어 농민들로 이루어진 혁명 활동이 일어났다. 러시아도 같은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는 고도로 산업화 된 근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제정 시대, 중상주의적 구조였다. 이로 인한 제일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브랜드의 가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여러가지 상품의 브랜드 가치는 브랜드의 가치가 낮은 상품보다 실효성이 낮아도 커버가 될 수 있다는 무궁무진한 경제적 장점이있다. 그러나 이러한 브랜드 가치가 없는 상태에서 바로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중국은 장기간 수출력침체기를 맞게 된다. 그 예로 고도의 산업가치가 활성화 된 상태에서 공산화 된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다른 서구권과 다를 바 없는 경제성장력을 보여주었다. 스탈린 시기 부터 소련은 지나친 식량난에 시달려야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중공업화에 있었는데, 당시 스탈린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의 무기제조, 전차제조에 들어갔고 그 도중 식량의 자급률이 낮아져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무리한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해 집단 농장화를 추진하다, 약 700만명의 아사자를 낸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다를 바 없었는데, 김일성의 일당일파 경제발전을 하면서 지나치게 중공업을 발전시켜 당시 대한민국에 비해 경제성장력이 높았지만, 결국 아사자가 30만명이 속출하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가 찾아온다. 물론 이 문제도 지나친 중공업화로 인한 식량의 자급률 문제였다. 수 많은 경제학 전문가들은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식량 외교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무역의 거래 상대국 역시 같은 이념으로하는 공산주의 국가와 타 중립국가 뿐이었다. 당시 자본주의의 맹주였던 미국과 서구권의 강대국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수입수출 및 경제활동을 제재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분배되는 자본에 비해 공산품, 기본식량의 물가가 심하게 오르면서 식량의 자급률에 문제가 생기고만다. 또한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집단 농장화를 하다가 아사자를 더욱더 발생시켰으며, 공산주의 국가에 큰 경제적 후유증을 남긴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의 평균 식량 자급률은 안정적인 자급률이라 평가되는 140%의 반인 70% 이상을 넘지 못하였으며, 당시 미국은 270%, 서구권인 스위스는 250%, 덴마크는 230%, 영국은 130%를 넘었으며 서구권의 평균 식량 자급률은 약 200%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는데 이 중 미국을 대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필리핀, 대한민국,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등지에는 미국의 전면적 후원을 등에 업은 강력한 국가주의 정부가 들어서 반공산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국내 진보사회운동 세력들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며 정치계에서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불리는 매카시즘 등으로 진보 진영 분열을 꾀했다. (자세한 것은 코인텔프로를 참고하라.) 이러한 반공주의는 미국에서도 극심하였다. 1950~60년대이후 미국의 공산주의 탄압은 겉으로는 공산주의자와 간첩 추방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뉴딜정책 관련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힘없게 하려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지적 반공주의 그러니까 반공주의 지식인들의 활동을 CIA에서 거액보조금으로 키우는 방법으로 정치와 외교문제에 대해 자유주의 견해를 주장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수를 급감시키기도 했다. 매카시 광풍이 1954년 막을 내린 이후에도 미국 내 공산주의 탄압은 계속되어 미국 지식인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미국 지식인사회에서 활약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이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출판사 편집자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진보적 작가들의 책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출판인들은 유럽 출판계와 협동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외면받은 작가들과 계약하는 등 공산주의 탄압으로 침체된 미국 지식인 사회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그 실례로 미국 랜덤하우스 계열사였던 판테온 출판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es"), 에릭 홉스봄, E. H. 카 등의 저서, 미국 노예제도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해석한 《노예제도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Slavery", 유진 제노비스 저) 등을 출판하였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경제, 정치,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공산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왜곡되고 적대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한국 전쟁 발생 20년 전후로 출생한 사람들(2010년 기준으로 60대이상의 노년층)이 남북한 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적대적인 것과 관련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철학적 이념, 정경체제가 아닌 절대적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축소돼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북한의 정치 경제 권력이 김일성, 김정일 일가에 독점되는 특유의 시스템과 결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들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기성세대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반의어인 것처럼 쓰였다. (ex: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며, 과거 공산주의 정부들이 민주적이지 않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댓말이 아니라 개념에 담긴 것으로 볼 때는 민주주의가 포함된 개념이며 인민민주주의 독재가 그것이다. 그 실례로 옛 동독의 정식국명은 독일민주공화국(DDR)였으며, 북한의 정식국명은 실제 민주주의의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라는 북한의 정치 시스템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대한민국의 군인 대통령 시대를 지나 사회가 선진국식 민주화와 전지구적 시장경제로 점차 진행되고 냉전이 종료된 뒤는 공산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는 상당히 없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보수나 진보를 떠나서 부족한 편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당재산제를 주장하지 않으며, 대신에 생산수단의 사회화 즉,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사회 체제를 주장하며, 국가 체제의 소멸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원하는 '공산주의' 사회란 현대 사회로 따지면 국가의 권력은 최소화되고 노동자 협동조합체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각자의 사유재산권은 보장된 사회이다. 좀더 강권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인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특정 작업장이 목표 생산량에 연속적으로 도달하지 못하면, 징계 처분을 내렸으며, 목표 생산량을 훨씬 넘는 생산력을 보여주었으면, 여러 소소한 특혜도 있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주장은 다소 왜곡된 주장이다. 즉 "일을 정해진 수준 만큼 하지 않을 경우 엄벌을 받으며 일을 정해진 수준 이상을 할 경우 자신이 초과 달성한 업무량에 비해서 거의 제대로 특혜를 받기 힘들었다."가 정확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포함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노동에 있어서는 강제성을 띄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 자체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내걸지만 개인의 잉여재산을 축적하는 행위는 금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한 만큼만 받을 수 있었고 항상 모든 자원이 집중되는 당에 기대어서 당에 자신의 자유를 종속당함으로써 개인적 차원에서 독립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화국() 약칭 이탈리아(, 약자: IT, ITA, , 이태리)는 남유럽의 이탈리아반도와 지중해의 두 섬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로 이루어진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북쪽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 주변 바다로는 동쪽의 아드리아해, 남쪽의 이오니아해, 서쪽의 티레니아해와 리구리아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탈리아 영토 안쪽에는 위요지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접하여 있으며, 스위스 영토 안쪽에 이탈리아의 월경지 영토인 캄피오네디탈리아가 있다. 국토 면적은 301,340 km²이며, 온대 기후대에 속한다. 인구는 60,200,000여 명으로,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고, 전 세계 기준으로는 23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로마를 비롯하여 밀라노, 나폴리, 제노바, 피렌체, 토리노, 베네치아 등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로 알려진 이 땅은 에트루리아나 고대 로마 등 유럽의 여러 문화와 민족의 요람이었다. 수도 로마는 옛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으며 수 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다. 로마가 몰락하자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과 동고트족 등 게르만족과 몽골족, 사라센 등 오랫동안 타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수 백년 뒤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유럽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르네상스가 탄생하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과 도시국가들(베네치아 공화국 등)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19세기 말부터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어 리비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에티오피아, 알바니아, 로도스섬, 도데카니사 제도, 중국 톈진까지 지배하였다. 원래 군주제 국가였으나(이탈리아 왕국) 1946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57년 유럽 공동체(EC)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1993년에 유럽 공동체는 유럽 연합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1999년에 유로화를 채택하였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민주 공화국이며, 이코노미스트지 조사에서 삶의 질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이 나라는 높은 생활 수준을 구가하며, 2010년 인간 개발 지수는 24위였다. G8과 G20 소속이며, 2011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은 세계 8위이다. 이탈리아는 오늘날 유럽 연합의 창립 회원국으로,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된 나라이기도 하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원년 회원국이다. 그 밖에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와 세계 무역 기구(WTO),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의 일원이다. 이탈리아의 군비 지출은 세계 8위이며,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핵 공유에 참여하고 있다. 이탈리아(특히 로마)는 정치와 문화 면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데, 식량 농업 기구(FAO), 국제농업개발기금(IFAD), 세계 식량 계획(WFP)의 본부가 이 곳에 위치한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와 더불어 유럽의 정치, 사회,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주요 지역 강국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 세계화된 나라이며, 2009년 국가 브랜드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기대 수명은 뉴질랜드와 버뮤다 다음 세계 19위로 길다. 또 관광 대국인 이탈리아는 해외에서 4,37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나라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데서(44곳) 보여주듯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대졸자 초봉은 2010년 기준으로 약 23,000유로이다. 이탈리아의 역사는 지중해 지역 전체의 문화·사회 발달에 끼친 영향을 볼 때 그 중요성이 크다. 이탈리아는 선사 시대에도 중요한 인간 활동의 무대여서 라치오주, 토스카나, 움브리아, 바실리카타 지역 등 곳곳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와 에트루리아 시대, 특히 여러 세기에 걸쳐 지중해 지역을 지배한 로마 제국은 세계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 후에는 중세의 인본주의와 르네상스(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등이 활동했다)가 유럽의 철학과 예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 이탈리아는 민족국가로의 발전이 늦어졌는데, 1861년 3월 17일에야 반도 본토의 나라들과 양(兩) 시칠리아 가 당시 피에몬테와 사르데냐 왕이던 사보이 왕가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지배 아래 통일되었다(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은 총리였던 카보우르였다. 로마는 그 후에도 교황령에 계속 남아 있다가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현재 바티칸 시국은 산마리노와 함께 이탈리아에 완전히 둘러싸인 독립 국가이다. 1883년에 아프리카에 진출, 에리트레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1896년에는 에티오피아와 교전하였으나 실패, 에티오피아의 주권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포했으나, 1915년에 연합국에 가담했다.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티롤지방을 비롯한 아주 일부지역만 얻었을뿐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싸움이 빈번하였으며, 이에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위한 계급투쟁을 벌였다. 실례로 1919년 3월에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 노동자의 공장 운영, 거리투쟁, 생산리 등의 강력한 행동이 개시되었는데, 이는 남부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노동자층의 계급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단결을 두려워한 지주, 군벌 등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며 국가주의를 내세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지지하였다. 1922년 집권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재정부는 1936년, 에티오피아와 교전하여 승리, 5년동안 이탈리아 영토로 편입했다. 나중에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독일과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나 이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에 패전했다. 1946년 6월 2일 국민 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첫 선거에서 루이지 에이나우디가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시 대한민국에 의료인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55년 조바니 그론키가 후임으로 선출되었고, 1962년 안토니오 세니가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세니는 병으로 인해 2년만에 사임,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그 해에 주세페 사라가트가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71년 조바니 레오네가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록히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레오네는 퇴임을 얼마 앞두고 조기 사임하였다. 1978년 산드로 페르티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첫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였고 7년 뒤 프란체스코 코시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페르티니 정권 시절 알도 모로 총리가 살해되고 바티칸 시국의 교황이 급사하는 등의 혼란이 일어났고, 코시가 정권 역시 공산당이 비난을 받는 등 혼란에 시달렸다. 그런가 하면 1992년 출범한 오스카르 루이지 스칼파로 정권은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주로 힘썼다. 이탈리아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의 원년 회원으로 서유럽의 정치·경제적 통일에 동참하였으며 1999년에는 유로를 통화로 도입하였다. 그 해에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06년 조르조 나폴리타노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 헌법 상 재임은 금지되어 있으나, 2013년 대선에는 후보자가 나오지 않아 나폴리타노가 자동으로 2번째 임기를 수행하게 되어, 이탈리아의 최장기 집권 대통령 및 유일하게 재선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2015년 1월 14일 사임하였고, 후에 대선에서 헌법재판관 출신의 세르조 마타렐라가 당선되었다. 2006년 이후 징병제를 없애고 모병제를 실시한다. 국방예산(국방비)이 감축되었다. 이탈리아는 20개의 주(regione)로 구성되어 있다. 이탈리아 영토의 대부분은 지중해에 뻗은 커다란 반도와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주변 바다를 몇 구역으로 나눈다. 북동쪽으로는 아드리아해, 남동쪽으로는 이오니아해, 남서쪽으로는 티레니아해, 북서쪽으로는 리구리아해를 형성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아펜니노산맥은 북서쪽에서 알프스산맥과 맞닿는다. 알프스 산맥은 곡선을 그리며 이탈리아의 북쪽 경계를 형성한다. 이 지역에는 충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포-베네치아 평원이 있어 물은 포강과 알프스산맥, 아펜니노산맥, 돌로미티산맥 등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지류로 흘러든다. 포 강 외에 잘 알려진 강에는 테베레강, 아디제강, 아르노강 등이 있다. 해발 4,810m의 몽블랑산(이탈리아어로 몬테 비앙코)이 가장 높은 지점이지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산은 나폴리 근처의 휴화산 베수비오산과 시칠리아의 활화산 에트나산 이 두 화산이다. 이탈리아의 경제는 다양화된 산업 경제로 프랑스, 영국과 총생산과 1인당 생산이 비슷하다. 지역에 따른 경제 격차가 큰 편으로, 산업화되고 사유 기업 중심인 북부와 농업 중심으로 발전이 덜 되고 실업률이 20%에 달하는 남부 사이의 불균형을 아직까지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서유럽의 인근 나라들과 비교할 때 중소 기업의 수가 많다. 산업에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와 에너지 필요량의 75%는 수입에 의존한다. 지난 10년간 이탈리아는 유럽경제통화연맹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긴축된 재정 정책을 편 결과 낮은 이율과 물가 상승률에 힘입어 1999년 유로화의 첫 도입 당시부터 이탈리아 역시 유로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 실적은 다른 EU 나라들에 비해 뒤떨어진다. 현 정부는 다수의 단기 개혁을 시도해 경쟁력을 높이고 장기 성장을 도모하려 하나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하는 구조적 개혁, 즉 높은 세율을 낮추는 것, 경직된 노동 시장과 높은 비용이 드는 연금 제도를 재정비하는 것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불경기와 노동 조합들의 반대 때문이다. 농업은 올리브, 포도, 토마토, 밀, 쌀 등의 생산으로 발달하였으며, 포도주의 생산은 프랑스와 맞붙는 편이다. 공업은 북부의 밀라노, 토리노, 제노바 등지를 중심으로 기계, 자동차,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가난하던 남부에서도 최근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포 강 유역에는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이다. 이탈리아 볼로냐와 에밀리아로마냐주(州)는 협동조합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기독공보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제일 발전이 더딘 도시였던 볼로냐와 에밀리아로마냐주(州)는 협동조합 운동으로써 주민들이 높은 소득을 얻고 있으며, 실업률이 낮다. 2013년 기준으로 에밀리아로마냐주(州)와 볼로냐의 협동조합은 8천여개, 4백여개이다. 노동자 임금이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4만 유로(원화로 약 6천만 원)이고, 볼로냐는 이탈리아 평균 임금의 2배에 가깝다. 실업률은 볼로냐는 3.1%인데, 사회복지학자들은 실업률이 2퍼센트 내외라면 완전고용이라고 생각하므로 협동조합이 발전된 지역은 고용이 매우 안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탈리아는 언어와 종교 면에서는 동질적인데 비해 문화·경제·정치 면에서는 다양하다. 이탈리아의 인구밀도는 1km당 196명으로 면적 10,000km2이상 국가중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 소수집단도 있는데 가장 큰 소수집단은 남티롤의 독일어 사용 인구(1991년 통계: 28만 7503명이 독일어 사용, 11만 6914명이 이탈리아어 사용)와 트리에스테와 그 근교의 슬로베니아어 사용 인구이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12년 현재 (세계은행 추정) 1.40명이다. 합계 출산율은 1995년 1.18로 바닥을 친 이래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라틴계인 이탈리아인이 주류를 형성하는 국가다. 하지만 북부, 중부, 남부에 따라 인종이 달라지는 편이다. 북부에 갈수록 장신, 금발, 푸른 눈동자의 인종이 많이 보이고, 남부로 갈수록 단신, 짙은 머리털에 검은 눈동자의 인종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남부에서 북부로 일거리를 찾으러 많은 이주민들이 늘어나 모두 섞인 편이다. 또 소수 민족으로 유대인과 국경지역에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살고 있다. 이탈리아는 문화 예술과 수많은 기념물들로 잘 알려져 있다. 피사의 사탑과 로마의 콜로세움 등의 역사적 건축물과 이탈리아 음식(피자, 파스타 등), 포도주, 생활 양식, 우아함, 디자인, 영화, 연극, 문학, 시, 미술, 음악(특히 오페라), 관광 등은 이탈리아를 세계적 문화국가로 만들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도시들이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페트라르카, 토르콰토 타소,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시와 조반니 보카치오, 니콜로 마키아벨리,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산문은 서양 문화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티, 산드로 보티첼리, 프라 안젤리코, 미켈란젤로 등의 거장들을 배출한 회화와 조각, 건축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미술가로는 조각가 톰마소 제라치가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몬테베르디, 팔레스트리나 비발디 등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19세기에는 조아키노 로시니, 주세페 베르디, 자코모 푸치니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오페라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현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과 작가, 영화감독, 건축가, 작곡가, 디자이너 등도 오늘날 서양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 종목은 단연 축구로 이탈리아인들의 축구에 대한 광적인 열정은 잘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전체 인구는 5,7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축구협회에 가입된 클럽은 대개 2만개 가량이 되고 선수는 무려 11만 명에 이른다. 이탈리아는 영국으로부터 대략 19세기 말쯤 축구를 받아들였는데 영국과 독일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 4대 축구 강국으로 불린다. 1934년, 1938년, 1982년, 그리고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또한 현재까지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단 한 번도 독일에게 패한 적이 없다. 이 나라는 월드컵에서 남·북한에게 모두 패배한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뽑힌 18개 팀이 맞붙은 세리에(Serie) A 경기가 열리는 날은 이탈리아 전체가 용광로처럼 들 끓게 된다. 이탈리아의 축구는 팬들에게 짜릿한 감동과 흥분, 즉 창조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고, 클럽과 시, 정부, 기업에게 막대한 재원을 안겨준다. 이탈리아의 진정 굴뚝 없는 산업은 축구로서 국민적인 비즈니스로 정착했다. 축구 이외에 전국적인 인기를 모으는 스포츠로는 자전거 경주가 있다. 유명한 자전거 경주인 '지로 디탈리아 (Giro d'Italia)' 나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따라 달리곤 한다. 이탈리아는 체육수업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수영이나 펜싱은 물론 조정과 사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챔피언과 올림픽 챔피언을 적지 않게 배출했으며, 선수들 모두 스포츠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이밖에 농구와 배구,핸드볼도 인기 있으며 이탈리아 북부와 지방 항구도시에서는 세계2차대전 당시 미군의 영향으로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이탈리아의 성악가 체칠리아 바르톨리, 안드레아 보첼리, 루치아노 파바로티, 레나타 테발디 등이 이탈리아를 빛내고 있다. 옛 로마 제국 때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지게 된 까닭에 수도인 로마 시를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압도적인 강세에 있으며, 이탈리아의 역사 자체도 교회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해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1929년부터 1978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인 국교였으며, 현재에도 국민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이다. 현재는 국교가 없고,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므로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믿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소수이지만 다른 기독교 종파인 개신교 등도 존재한다. 또한 이민자들에 의하여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종교도 존재한다.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 약칭 소비에트 연방() 또는 소련(蘇聯)은 1922년 12월 30일부터 1991년 12월 26일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하였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다.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스탈린이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치 억압을 통하여 거대한 규모의 산업화를 이루어 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인 대조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소련은 1945년 5월 9일 대조국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45년 8월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소련은 대일전에서도 승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과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은 서방 세계에 맞서 냉전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졌다. 1986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소련의 경제를 중흥시키려 하였다.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 국민들의 반발로 실패한 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소련이 기준에 따라 민주주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성립기와 말기를 제외하면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소련의 국기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1이다. 바탕의 색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였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하였다. 1955년에는 낫과 망치의 모양이 기존의 크기보다 조금 작아졌으며, 1980년에는 국기 배경색이 진홍색에서 조금 연한 진홍색으로 변했다. 소련의 국장은 1923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사용되었다.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빨간색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혁명 이후 성립한 임시 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특히 독일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랄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 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 하에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였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외국 열강이 볼셰비키를 공격해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백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프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적군으로 개편했다. 적군은 외국 열강과 백군을 쳐부수고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 집권한 스탈린은 세계 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하였고, 이후 멕시코에서 트로츠키를 살해하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 )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은 중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탈환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승리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미국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 및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외몽골과 사할린을 얻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사상이라고 평가했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소련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그리고 기존에 국교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를 국제공산당가인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면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을 깨뜨렸다.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또,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창설하여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였다. 또한, 1956년에 소련은 부다페스트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인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핵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의 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 1964년에 실각한 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후, 식료품이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다. 1968년 8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은 무력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다. 1979년 12월 27일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국가들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기 때문에 경제를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죽고 안드로포프를 승계한 콘스탄틴 체르넨코마저 1985년 3월에 죽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련의 경제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소련 공산당 1당 독재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 집권 후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들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 국가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한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대부분은 무혈 혁명이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유혈 혁명이 일어나 1989년 12월 25일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즉석 재판에서 총살당하였다.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89년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유럽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소련 영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1991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던 부시조차도 그에게 다시 폭력이 발생하면 경제 관계가 동결될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경고하였다.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소련 공산당을 해산하였지만 소련의 붕괴만은 막으려 하였으나 막지 못하였다. 소련은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소련은 유럽 대륙의 동부와 아시아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영토의 대부분은 북위 50도 이북에 있었다. 또한 소련은 22,402,200 km² 의 면적을 차지하여 세계 제1의 넓은 영토를 자랑했으며, 그 면적은 지구의 육지 면적의 1/6에 달하였다. 소련의 거대한 영토는 한대, 아한대로부터 아열대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었다. 면적의 11%는 경작지, 16%는 초원지대, 41%는 숲, 32%는 (툰드라를 포함한) "기타"로 분류되었다. 유럽 부분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였고, 이 부분은 소련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동쪽의 영토는 태평양에 닿고,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마주 하고 있었다. 아시아 부분의 인구는 유럽 부분 보다 적었다. 소련 서부의 그단스크 만의 칼리닌그라드로부터 동부의 베링 해협에 있는 라트마노바 섬 사이의 거리는 1만km가 넘었으며, 소련의 영토는 동서로 1만 킬로미터에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으며, 4개의 기후대(한대 기후, 냉대 기후, 온대 기후, 건조 기후)가 걸쳐 있었다. 1991년 당시, 소련은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몽골, 북한과 육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길어 약 6만 킬로미터에 달하였다. 국경선의 길이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접하였다. 해상 국경으로는 베링 해협으로 미국의 알래스카주와 마주보고 있었으며 소야 해협을 두고 일본의 홋카이도와 접해 있었으며, 북극해를 두고 덴마크의 그린란드 및 캐나다와 접했다. 소련은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헌법,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 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었다.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15개의 공화국은 소련의 붕괴 이후 모두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이루어졌다.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 민주집중제, 계획경제를 기초로 하는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불리는 체제는, 노동자, 농민 및 대중 계층이 지지하는 정당에 의한 독재 체제이며, 표현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가 주창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는 크게 동떨어져 일반 노동자·농민에게 있어서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의 차르를 공산당이 대신한 것뿐으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되지 않은 체제가 되었다는 평도 있다. 이 때문에 실질적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은 「적색 황제」라고도 불렸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스탈린주의 하의 공산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와 동일시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탈린 시대 이래 소련의 국가 원수는 소비에트 최고 간부 회의의 의장이었으나, 실권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이후의 서기장들은 최고 간부 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1991년 8월의 쿠데타가 3일 천하에 그친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여 막을 내렸다. 역대 소련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면서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역대 소련의 총리는 다음과 같다. 정치국(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정식 명칭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러시아어:Политбюро ЦК КПСС)은 소련 공산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통치체의 기능을 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주요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간부회라고 불렸다.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소련 공산당원만 출마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하향식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마지막 정치국원이 선출되었던 1990년 7월 14일에는 부로케비시우스, 굼바리아제, 고르바초프, 구렌코, 자소호프, 이바시코, 카리모프, 루신쉬, 마살리예프, 모프시샨, 무탈리보프, 나자르바예프, 니야조프, 폴로즈코프, 프로코피예프, 루비크스, 세묘노바, 실라리, 소콜로프, 스트로예프, 프롤로프, 셰닌, 야나예프 등이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소비에트 최고 회의(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법을 만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회의 간부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 회의(연방원)과 민족 회의(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소련은 세계 2위(1985년 GDP 2조 2천억 달러,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1990년 기준, 세계 31위)에 달했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 경제력에 관련해서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그 규모가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는 소련의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하였으나, 1965년 이후부터는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을 했다. 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소련 경제를 피폐화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자, 레닌이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가 안정된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거대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여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 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소련의 농민들을 수탈하여 인명을 대거 희생시켰고, 노동자들에게는 과도한 중노동 부담를 안겼다. 이러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 계획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에는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소련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소련은 1950년대에도 아주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의 초대 대통령)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군사에 투자되는 자금에 비해 국민 생활에 필요한 전자제품이나 소비재의 개발과 생산, 물류의 정비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서방의 전자제품이나 화장품, 의류 등의 소비재의 수입,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만 설치된 굼(GUM) 등의 외화 전용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간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소련의 서방 수출은, 농산물이나 어패류 등의 제1차 상품, 원유나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 자원이 대부분이었다. 통화인 루블 자체도 국외에서 통화로서의 가치가 낮았기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수지는 대개 적자였거나 매우 적었다. 그에 비해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국민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소련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 소련의 농업은 대부분 솝호스(Sovkhoz)와 콜호스(Kholkoz)를 통해 이루어졌다. 솝호스는 Sovetskoe khozyaistvo(소비에트 농장)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솝호스의 농작물 생산은 정부의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하는 농작물은 수매 가격까지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 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에 시작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정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 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집단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서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에 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현재까지 폭발한 가장 큰 폭탄이었던 차르 봄바 수소 폭탄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만들었고 많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러왔다. 또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과 같은 민간기 격추 사건을 일으키는 등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는 서방 여러 나라의 반발을 샀다. 또한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하여 자본주의 진영과 대립하였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하였다. 소련은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들과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쿠바와 북베트남 등 공산주의 국가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여,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나 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소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또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일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으며,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여 거대과학과 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소련은 항공기, 잠수함, 탱크 등의 병기공학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소련의 전투기로는 수호이, 미그를, 항공기로는 일류신, 투폴레프 등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탈린의 오르간」이라고 불리며 독일군이 두려워한 카츄샤 로켓도 개발하였다. 또한 스텔스에도 중요한 이론적 영향을 주었으며, 테트리스 등의 컴퓨터 게임도 개발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하여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일도 벌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소련은 아카뎀고로도크 같은 과학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외국으로 기술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여 과학 시설이 밀집한 일부 도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폐쇄된 도시가 되었으며, 이들 도시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소련은 공산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시기인 1989년 말 이후를 제외한 모든 시기 동안 자유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노조는 당에 소속이 된 상태로 운영이 되었다. 또한, 산업노동자들이 패권을 잡은 사회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능동적 노동운동보다는 정부의 생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용 노동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당은 해당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를 수여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목표초과달성과 노동생산성향상 노동운동이다. 소련의 헌법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검열에 의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제약되었고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는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 소속된 볼쇼이 발레단과 레닌그라드의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일찍 시작했지만, 법 조항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복지 수준이 매우 미비한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8시간 내지는 일 10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내전기에서 1950년대까지, 그리고 광부 등의 특정 직종에 대해서는 소련 몰락까지도 이러한 것들이 소련 내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 비로소 소련에도 서방과 같은 '주말'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1968년에는 주 36시간 근로제가 제안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고성장을 해온 소련 경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선 본격적인 복지 제도가 실시된 것이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엔 지식·문화·예술에 관련된 복지 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다. 각 공동체엔 문화예술 시설과 도서 시설이 들어섰다. 이 당시 소련은 서적 출판율이 높았으며, 독서량은 1960년대에 들어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빈부의 차 없이 거의 모든 계층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거나 또는 감상할 수 있었다. 소규모 교육 제도도 발달하여, 추가 교육을 받고싶은 노동계급은 여유 시간을 내서 학점을 이수해 추가적인 학력증진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명목상 무상이었으나 실제 기회는 제한되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0년까지 대부분 이어졌다. 총 소득 가운데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가지를 보장해주는 사회적 임금의 비중이 높은 편에 속했다. 주거 복지의 경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짓기 시작한 호당 평균 9평 짜리 5 ~ 7층(층당 평균 8호)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쇼프카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식량의 경우는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인 1918년부터 각 소행정단위마다 존재하는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 식량을 배급했다. 이러한 배급은 1921년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부터 다시 폐지되었고, 1929년에는 식량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1935년에는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소련은 1947년부터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내걸지 않았지만, 의류, 옥수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의 경우는 배급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러한 정책은 소련이 붕괴하는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1988년까지는 이러한 복지 시스템이 어느정도 유지가 되었지만,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은 시장경제 제도를 급진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여러가지 사회적 복지 혜택이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공산주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는 학교 교육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914년 어린이의 91%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1920년 24.9%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교육 수준은 퇴보했으며 당시 문자해독율은 56.6%였다. 1923년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의무교육이 시작되었고, 소련의 교육 위원회 초대 위원장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문맹 퇴치를 위하여 글을 아는 사람들을 채용하여 글을 가르쳤다. 1937년 센서스에 따르면 문자해독율은 75%로 상승했다. 1950년대에는 문맹률이 1% 미만으로 낮아졌다. 1970년대 소련의 의무교육은 11년제(초등학교 4년, 중학교 7년)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 ~ 6년제였다. 1981년부터 10학년(발트 국가들은 11학년)까지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고, 모든 학교는 정부가 관리하였다. 1986년 소련 인구 1만 명 당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의 비율은 181명에 그쳐, 미국(517명)의 1/3에 불과했다. 혁명 이후 1918년에 정부는 "의료는 국가의 관리 하에 둘 것이고, 의료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명 이후 소련의 평균 수명은 증가하였다. 그러나 1964년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이 64.89세의 정점에 도달한 이후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여 1984년 61.7세까지 떨어졌으며, 소련이 멸망할 때까지 정점의 수준을 끝내 회복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 시행되는 많은 의료 치료법과 진단법은 표준에 못 미쳤으며 (종종 어떤 의료 검사도 하지 않고 환자를 면담하기만 한 상태로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의료 서비스 제공자가 제공하는 치료 표준이 떨어져서 수술로 인한 감염의 위험이 높았다. 소련의 보건 의료 시스템은 의료 장비, 의약품 및 진단용 화학 물질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서구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의약품 및 의료 기술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 시설은 기술 수준이 낮았고 의료 요원은 보잘것 없는 교육을 받았다. 소련 멸망 직전까지도 소련 의료 시스템의 열악함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여 1989년 조사에서는 러시아 병원 중 20%에서 온수 공급이 되지 않고 3%는 냉수 공급조차 되지않았다. 7%는 전화기조차 갖추지 못했고 17%는 적절한 위생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 비록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를 위한 특수한 병원과 진료소는 더 높은 수준의 건강 관리를 제공했지만 여전히 서구 표준 이하였다. 소련의 스포츠는 모두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유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운동선수가 프로모터가 기획하는 운동 경기에서 나감으로써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윤을 얻는 상업적 스포츠(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자 했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소련의 운동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따라 국가가 후원하는 풀타임 아마추어 운동선수의 범람은 올림픽 대회가 과거에 가졌던 순수 아마추어 스포츠맨십의 이상을 쇠퇴시켰다. 소련은 축구, 농구, 배구, 하키, 아이스하키, 기계 체조 강국이었다. 소련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소련은 스포츠 강국 동독과 미국을 크게 앞서며 55개의 금메달로 압도적인 1위를 하였다. 1980년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였다(표면상의 불참사유는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198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핀란드 선수가 당시에는 금지되지 않았던 혈액 도핑을 하고 10000M와 5000M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소련은 월드컵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과 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고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2,000,000부가 넘는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은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었다. 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 관제를 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되었다.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게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하였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다. 그 국경 내에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소련의 인구는 1990년 291,000,000명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제3위였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조지아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차차 낮아져 갔다.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소련은 유엔의 원년(元年) 회원국이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이들 위성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1920년대부터 위성 국가가 된 몽골은 제외).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대한민국(남한)과 소련의 관계는 북한의 수립을 소련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것과 특히 한국 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한 소련의 역할 때문에 출발부터 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한국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고 중국과 함께 정전 회담에 참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누그러져 갔으나,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의 보잉 707기가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 착륙당한 사건과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해빙되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였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대한민국-소련 정상 회담이 열렸으며, 1990년 10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에로플로트가 대한민국에 취항하였다. 공산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과는 '냉전'이라고 하는 형태로 대립해, 1950년대의 한국 전쟁이나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쌍방의 억제력이 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나 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기의 노선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는, 「제재 조치」로서 민간기의 노선연장이 시한적으로 제한되거나 스파이 사건 등이 표면화되어, 한쪽의 외교관이 국외 추방되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다른 한쪽 국가의 외교관을 맞받아 국외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술책을 하고 있었다.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에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에 소련은 이것을 일방적 파기,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또한 일본인 포로를 오랫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 구류했다. 그 후, 1956년에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쿠릴 열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국공 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당초에는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국경 분쟁이나 사상적인 대립의 문제로 말미암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했다. 양국간의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그 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출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출국은 불가능했다. 또, 자유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위성국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다양한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 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신을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레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대다수는 기독교 및 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은 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가 다수이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도 존재했으며, 개신교는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교파들이 있었다. 소련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중범죄자에 대해 재판 과정없이 총살형을 시행하는 국가였으며, 범죄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보장정책이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소련 사회에서 자연인이 범죄인으로 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소련 사회는 범죄율이 매우 낮고, 치안이 강한 사회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1987년부터 고르바초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정부 통제력에 상당한 손실이 왔고, 그 결과 치안력이 약해져 범죄 문제에 시시각각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소련 말기에 일어난 범죄율 급증의 이유로 고르바초프의 개혁주의 정책으로 인한 범죄 통제력 약화와, 시장 경제 정책으로 인해 나타난 빈부격차, 사회 불안정을 든다. 1989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수목적대'를 설립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0년에 이르러서 소련 내의 범죄는 중앙정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 프로파간다는 소련이 국민들의 공산주의적 애국심을 키우기 위하여서 만든 일종의 이벤트다. 프로파간다를 위하여 소련은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을 이용했다. 소련의 프로파간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선구적인 것으로, 몽타주 이론이나 전위파 등이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김재규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전국구),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3년 부터 1973년 까지는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해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하면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주프랑스 공사 이상열(李相悅)을 매수하여 1979년 10월 7일 전(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을 유인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의 거사 전 행동과 미국의 기록을 볼 때 민주주의에 생각이 많은 자라 볼 수 있어 김재규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출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4월 4일 (일) 제 78 회 ▣ 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 “장준하-김재규 '거사' 밀약 했다” | 일요신문 ]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알려진 정설은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차지철 신임과, 그로 인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연수생 A는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갔고, 제3국인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낙옆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연수생 B는 제3국인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지급하였다. 관저에서 연수생 A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이상열은 증거를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귀국한 A는 19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결과를 보고 받은 김재규는 A를 중앙정보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하며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 충무무공훈장,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국선장·광복장·통일장과 킹압둘아지즈훈장(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받았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북대서양 조약 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 , , ) 또는 북대서양 동맹은 국제 군사 기구로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 조약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기구는 회원국이 어떤 비가입국의 공격에 대응하여 상호 방어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집단 방어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최고사령관 또한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다. 벨기에는 유럽 및 북아메리카의 회원국 중 한 곳이며, 2017년 6월 기준으로 29개국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21개국이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의 회원국이며 15개국이 개별적으로 제도화된 대화 및 회담의 가입국이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의 군사 지출비는 세계 전체 군사 지출비의 70%을 차지한다. 회원국의 방어 비용은 GDP의 2&를 차지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북대서양 조약 5조는 회원국이 무장 공격을 당한 회원국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9·11 테러 이후 처음이자 유일하게 이루어졌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주도하는 국제안보지원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것이었다.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추가적인 역할의 범위를 넓혀 작전을 수행했다. 이라크에 교관을 파견하고, 해양 방어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973호에 따라 2011년 리비아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여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다. 덜 잠재적인 4조는 회원국 간의 회담에 따라 결정되는데 총 5번 주최되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2003년 터키가 처음 발령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시리아 내전에 대하여 터키가 2번 주최했다. 2014년에는 러시아의 크림 공화국 합병을 문제로 폴란드가 주최했으며 터키가 2015년 ISIL의 위협에 맞서 다시 개최하였다. NATO는 이후 동서냉전 체제하에서 서방국가들의 집단적 안전보장체제 구축의 모델로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항하는 대표적 상징으로서의 위상을 지녀왔는데 그 본질은 군사동맹이었다. 북대서양 조약 체약국으로 구성되는 NATO는 회원국 간의 이해 관계가 맞물려 파동을 겪기도 했는데, 프랑스는 1966년 3월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하다가 통합 군사 조직에서 탈퇴하였고, 그리스는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과 관련된 NATO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1974년 4월에 통합 군사 조직에서 탈퇴하였다가 1980년 10월에 다시 복귀했다. 초기 NATO의 조직은 상설기관으로 최고기관인 각료이사회와 사무국, 그리고 그 아래의 전문·보좌 기관과 통합군사기구로 구성되었다. 각료이사회는 회원국 외무·재무·국방 장관 및 관계장관으로 구성되는 최고기관으로 연 2회 이상의 정례회합을 가지며, 각국의 대통령·총리·수상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산하에 핵방위문제위원회·방위계획위원회·핵기획 그룹 등의 전문기관이 설치되어 그 보좌를 받으며, 보조기관으로 대사급 상설이사회가 설치되었는데, 사무총장이 의장을 겸임하고, 회의방식은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였다. 전문기관 중 핵방위문제위원회는 프랑스·룩셈부르크·아이슬란드를 제외한 회원국 국방장관으로 구성되어 NATO의 핵전략을 결정하였고, 방위계획위원회는 회원국 국방장관으로 구성되는 최고군령기관으로 통합군사조직을 통할하며, 핵기획 그룹은 1966년 12월 방위계획위원회와 동시에 설치되었는데 프랑스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회원국방장관으로 구성되었다. 방위계획위원회는 통합군사조직의 최고통수기관이며 그 아래 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 대서양해군사령부(ACLANT), 해협연합군사령부, 3기구를 관할하였다. SHAPE는 북대서양 최고사령부라고도 칭하는데, 각료이사회의 결정에 의해 1951년 4월 발족하였다. 방위 범위는 영국·프랑스·포르투갈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과 영국영공이며, 전시에는 최고사령관이 유럽 지역의 육·해·공 3군이 작전권을 행사하였다. 산하에 북유럽군·중부유럽군·남부유럽군·영국반공군·기동부대·조기경계기동대 등 6개 사령부를 두었다. ACLANT는 상비병력은 없지만 훈련시·전시에는 회원국 해군이 전속되었다. 방위범위는 영국·프랑스 해협과 잉글랜드 연안을 제외한 미국 연합수역에서 유럽·아프리카 연안수역까지, 즉 위도상으로는 북극에서 적도까지였다. 해협연합사령부는 해협연합군 사령관과 해협연합군 항공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영국·프랑스 해협과 북해남부의 방위를 담당하였다. 설립 당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통합군사조직에서 탈퇴하자 브뤼셀로 이전하였다. NATO는 1990년대에 들어서 딜레마에 봉착하기도 했는데, 1991년에는 나토 회원국에 대해 즉각적으로 어떠한 군사적 위협도 없을 정도로 상황이 개선되어, 미래의 나토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그 해에 바르샤바조약국들은 동맹관계를 청산하는 데에 합의했고, 소련의 공산당은 정부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으며, 1991년 후반에 소련은 해체되었다. 바르샤바 조약 기국가 붕괴된 후, 나토는 나토 회원국뿐만 아니라 이전에 바르샤바조약을 체결한 나라들도 포함하는 북대서양협력회의를 결성했다. 이 기구는 두 개의 국가 집단 사이의 연대를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91년에 나토는 유럽에 대한 핵무기 공급을 80%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토는 1992년에 소속군이 유럽의 비회원국들에게 평화유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군사적인 역할이 커지도록 했다. 나토는 1994년 2월 소속 항공기가 유엔이 지정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비행 금지 구역을 침범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전투기 4대를 격추함으로써 처음으로 전투행위를 수행했다. 또한 1994년에는 대부분 과거에 공산국가였던 20개국이 평화를 위한 동반자라고 하는 나토와의 연대 기구에 가입하였고, 군사적으로도 참여하였다. 김정일 김정일(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이다. 본관은 전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1년(주체 30년) 소비에트 연방에서김성주와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장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들 김정일이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 Yuri Irsenovich Kim)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또 소련군 시절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며, 소련군 문서에는 해방 후 평양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따라서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도 평양에 온 이후에나 가능하고, 김정일의 정확한 출생지를 두고는 논란이 많으나 명백히 밝혀진다.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캠프)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캠프)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거기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밀영(백두산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것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이 밀영은 성역화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니와,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백두산 속에 밀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그가 한동안 백두산 인근 만주의 창바이 현(長白縣), 푸쑹 현(撫松縣), 안투 현(安圖縣)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량과 물자 조달이 어렵고, 겨울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백두산 깊숙한 곳에 밀영을 만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김정일을 낳았을 가능성은 더욱더 없다. 해방 후 김일성을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미지를 덧붙이기 위해 지어낸 말이며, 백두혈통이니 하는 말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레오니드 바신(1915~2006)도 후일 해방 직후 소련 군정 당시 일을 회상하며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우리는 그가 진짜이고 백두산의 호랑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를 보아도 백두산의 이미지는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 '김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식 이름을 버리고 김정일(金正一)이라 하였고, 1980년에는 한자 이름을 正日로 개명하였다. 북한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정일(正日)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김정숙(金正淑)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일'(日)을 합친 이름이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 김보현과 증조모 이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김정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 및 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과 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는 조직 및 선전 담당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죽을 떄까지 8, 9, 10, 11, 12기 대의원을 연임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를 거쳐, 1990년 5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91년 12월 24일 당 중앙위 5기 19차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이 40년간 맡고 있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승계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년 4월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의 국방위원회 위원장 겸임조항을 삭제하면서 국방위원장직도 넘겨받았다.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 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2001년에는 김일성과 주석궁 안마사의 사생아인 김현을 전격 처형하기도 했다.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의 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다시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김정일은 2008년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뒤 2009년 전후, 김정은을 '청년대장'으로 소개하였다. 이어 2010년 9월 김정은이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공개석상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김일성 주석을 빼닮은 외모로 큰 관심을 끌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2009년 4월 9일에는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2000년 이후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미국의 카터, 클린턴 등의 전직 대통령 역시 수시로 평양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활동의 목적으로 그는 자원 지원을 주로 중점적으로 하였다.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공산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한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다.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상당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 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 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 우렝이양식장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과 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을 전제로 대책을 세우는 것을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2009년 3월 19일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 이상설에 힘을 실었다. 한편 김정일은 2009년 3~4월경 김정은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해 자신을 대신해서 엘리트들을 감시하게 하고,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 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부부장이 김정은의 보위부를 통한 엘리트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직할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추모곡이 작곡되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12년 2월 16일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레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등이 있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명백한 배후이다. 북한은 군의 일반 지휘통제에 더해서 중앙에서 정치장교까지 따로 보내 2중으로 관리 통제하는 군지휘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통제력이 약한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 중 탄피분실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이 걸리 것을 대비해 본다면 최고지휘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저런 대규모의 도발을 실행할리 만무하다. 북한은 2009년부터 후계자에게 정권이양하는 과도기 과정이었고 2000년 이후부터 생겨난 장마당경제로 인해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우려해 화폐개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내부혼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대남도발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켜 내부단속을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지만 이건 북한당국의 일반적인 주장을 이해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남포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으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 겨우 완성하였다.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틈이 벌어지고 갑문이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다. 문제는 갑문공사로 생긴 간척지가 생겨났지만 오해려 갑문때문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덕홍 증언에 따르면 남포갑문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홍수피해를 막는 효과가 없으며 갑문으로 인한 간척지가 주는 편익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홍수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면 지천과 하천정비를 했어야 하지만 이 사업은 소규모 사업이 복수형이여서 정치적 선전에 불리하고 대규모 갑문사업은 정치적 선전에 유리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경제적 편익보다는 정치적인 선전을 우선에 둔 사업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팝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논리를 배제하고 정치적 선전이나 사상무장으로 계획된 사업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고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가동이 중지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포갑문과 순천비날론 공장에 투여한 자본은 150억 달러에 가까운데 북한이 가지고 있던 자본여력 대부분을 산업시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정치 선전물 건설에 쓴 것이다. 2004년 4월 22일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으로 인해 150여명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폭발사건은 김정일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해 김정일에 대한 암살기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북한의 김정일이 지난 2004년 4월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폭발사건은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였다고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 2009년 2월 26일 '현대그룹, 인내와 관용제안'이라는 제하의 비밀전문에서 2월 13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사장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1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 항목 가운데 '김정일과 인민군'이라는 항목에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지난 2004년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폭발사건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열차 통과 30분 전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탑승한 열차의 통과시간이 전해짐으로써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은 이사건이 자신에 대한 암살실패사건으로 믿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특이할만큼 늦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또 "김 위원장이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과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정일은 몇 개의 곡도 작곡하였다. 1952년 8월에는 가요 <조국의 품> 을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단군릉의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은 전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의 아내였으나 그와 이혼시켜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성혜림은 정식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슬하에 장남 김정남을 두었다. 1966년 혹은 1968년 아버지 김일성이 소개해준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숙과의 관계는 소원하여 딸 김설송과 김춘송만 있을 뿐 별다른 관계는 없다.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용희와의 사이에서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딸 김여정이 있다. 한때 고용희와 김정남 간의 갈등설이 돌았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때 비서 출신인 첩 김옥이 그를 수행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확인된 것은 없다. 국제 사회에 김정일의 가족관계로써 알려진 것은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고용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이다. 대한민국의 일각에서는 그가 변태성욕자이며 수시로 여러 여성들과 비정상적인 향락을 즐기는데 5명의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존재한다. 관련 내용은, 손희림은 김정일에게 강간을 당했고, 김정일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건강이 약화되었으며, 가수 윤혜영과 관계를 졌는데 윤혜영은 다른 남자를 좋아하였기에 김정일이 분개해 윤혜영을 총살하였다는 추측성 소문이다. 2004년에는 그의 통치방식과 사생활, 여성 편력 등을 소재로 한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 밖에 대한민국 언론사들은 그의 여인들 간의 권력암투에 관한 보도를 하였으나, 명확한 사실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0년 8월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김정은은 고용희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고용희가 아닌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 도 제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을 ‘내연의 처(concubine)’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라고 보도했다. 타임은 “김 위원장의 축첩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문제”라며 “심지어 남한에 특공대를 보내 유명 영화배우 등 여러 여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잡지는 또 “이 ‘친애하는 지도자’는 혼인을 거듭하며 자녀 5명을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9명의 사생아가 더 있다”고 보도했다. 노태우 노태우(盧泰愚, 1932년 8월 17일 - )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대장 예편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중국, 동구권,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자치제 부활을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였다. 1993년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1983년 서울 올림픽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였고, 86 아시안게임을 유치시킨 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다. 체육을 좋아하여 육사생도 시절에는 육상부와 럭비부 팀원으로 활약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선 당시 보통 사람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1994년 그가 정치 비자금을 챙긴 것이 당시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당시 국회의원 박계동 등에 의해 연이어 폭로되면서 풍자되었다. 노태우는 1932년 8월 17일(음력 7월 16일)에 대구(달성군) 공산면 신용동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서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결혼 후 9년만에 노태우를 낳았다. 노태우는 그 근본 자체는 삼국지의 오나라 참모인 노숙의 후손으로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의정부의 영의정을 지낸 문광공 노사신의 15대손이다. 4년 뒤 동생 노재우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노태우를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콩밭에 김을 매던중 밭에 큰 구렁이가 숨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집으로 도망 오는데 구렁이가 따라와서 부엌에 숨어있는 노태우 어머니의 발뒤꿈치를 물고 온 몸을 휘감아서 놀라서 깨었다 한다. 할아버지는 이 구렁이가 용이라 하여 원래 아이의 이름을 '태룡'(泰龍)이라고 지으려 했으나 일제 시대였으므로 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을 우'(遇)를 붙여 이름을 '태우'(泰遇)라고 지었다. 아버지 노병수는 소학교 학력이 전부였으나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으며, 189cm의 훤칠한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음악적 재질이 뛰어났으며 한문을 잘 하여 면서기를 지냈다. 아버지는 노태우와 노재우 두 형제를 무릎에 앉히고 특별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려서 들은 유성축음기 노래 덕에 그는 일찍부터 노래를 잘 불렀으며, '베사메무초'와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태우가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노래 실력이었다. 어머니 김태향은 학식은 없었으나 신앙심이 두터운 불교 신자로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1939년 아버지 노병수는 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盧秉祥)의 중학교 졸업식을 참석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노태우는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형이 죽었다는 부채의식을 가진 숙부는 아버지 이상으로 조카들을 키웠고 사촌 형제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즐겨 불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고 음악적 기량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노태우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피우며 자라기는 어려웠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며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그의 집은 팔공산 근처에 있었다. 1939년 3월 집근처에서 6km 떨어진 공산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직접 걸어서 통학하며 다녔다. 형편이 넉넉치 않아 그는 맨발로도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성격이 유순하였던 그는 화를 잘 내지 않았는데 학창시절의 별명은 스마일이었다고 한다. 화내는 것을 잘 볼 수 없고 언제나 싱글벙글이었다고 한다. 귀가 크고 듣기를 잘 했다고도 한다. 1945년에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소학교 동창 101명 중 중학교로 진학한 학생은 남학생 1명, 여학생 2명으로 그가 유일하게 중학교로 진학했던 것이다. 중학교 5학년 무렵에는 싸우는 친구를 설득하여 화해시키고 잘 조정하여 조선 세종때의 황희 정승에서 따서 "노(盧) 정승"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부친의 사후 그의 집안은 이렇다할 공직에 몸담던 인물이 없었으므로 그의 집안은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고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소학교 시절 노태우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으나 형편이 어려웠기에 그의 6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특별히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가르쳤으며, 그는 밤길에도 혼자 산을 넘어서 집에 도착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다. 그는 점차 말수가 적고 독서에만 흥미를 두게 되었다. 1945년 3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질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와 열병으로 고생했으나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그리고 대구고보 4학년 편입시험에 10대 1의 경쟁률에서 상위 성적을 얻고, 경북중에 편입학하였다. 재학 초기 학생들 중에는 정치 활동에 참여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학생은 학업에 전념해야 된다'며 거절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몸집도 작고 싸움을 싫어하였으며 정치 이념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덕에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였다. 당시 정치인들 중 그는 김구를 특별히 존경했다. 이후에도 대화 도중 김구가 한 발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4학년 당시 성적은 224명 중 102등이었으나 5학년 당시에는 218명 중 68등으로 올랐다. 대구고보 재학 중 그는 장래 희망을 의사로 정하였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하면서 의사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재학 중에는 학예회에 자주 나갔으며 직접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를 그의 동창인 경북의사회 회장을 지낸 윤건호는 5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경북고 시절의 담임인 이길우는 그가 과묵하고 착실한 모범생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다고 후일 회고하였다. 청소년기의 그는 성격이 매우 온순했다 하는데 대구공업중학교 동창인 이태원(후일 교사가 됨)은 공업중학 졸업후 대학에 가고 싶어서 노태우를 찾아가 그의 노트를 빌려다가 공부했는데도 한번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은 그는 대신 자녀들 교육에 힘써 후일 딸 노소영과 아들 노재헌을 서울대에 진학시키고, 특히 딸 노소영은 시카고 대학교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자녀 교육에 신경을 썼다. 1950년 한국 전쟁을 맞으면서 피난갔다가 바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투입됐고,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입학한다. 이로써 정식 이등병의 신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듬해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1년 10월 헌병학교 정규 1기생의 신분으로 첫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사관생도 재학 중 그는 전두환·정호용 등을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하였다. 전두환과는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된 상하관계가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으로 둘은 명백한 친구사이이다. 일찍부터 같은 대구 출신인 전두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후일 그는 인터뷰에서 '전두환에게는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육사 생도시절, 스포츠를 좋아한 그는 육상부와 럭비부원으로 활동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그는 럭비선수로 활동했다. 럭비선수 활동 초기에는 자주 다쳐서 아키생키(일본식 빨간 소독약)를 자주 바른다 하여 악까중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한 연습으로 럭비팀의 주전 멤버로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및 타 대학교와의 럭비 경기와 친선경기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때 이기백, 정호용, 김복동, 권익현 등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헤르만 헤세 등의 시집을 애독하였고 홍사용 시인의 시집 등을 즐겨 읽었다. 그 중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은 특별히 애장하기도 했다. 육사 재직 중 그는 대통령 이승만이 사열나온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를 둘러보다가 여기가 어디냐 라고 지목한 것을 훗날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사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이후 전방으로 투입되었다가 1956년 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그는 5사단장이던 박정희를 보고 특별한 인물이라고 예상했다. 5사단 소대장 시절 사단장이었던 박정희는 그에게 각별히 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의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쳐 육군정보학교로 배속되었다. 이후 육사 11기생 동기들과 함께 친목 모임인 북극성회(北極星會)에 가담했고 이어 하나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군대에서 금지되어 있는 군내 사조직을 결성한 그는 이를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운영해 나갔다. 육군 중위 재직 중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대구직할시 본가에 자주 출입하던 중 그의 누이인 김옥숙, 김정숙 자매를 보게 된다. 이어 김옥숙을 유심히 보게 되다가 정식으로 청혼하였고, 1959년 5월 31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1959년에 먼저 진급한 동기 전두환 대위 등 4인의 대한민국 장교들과 함께 6개월 동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와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 두 과정을 차례로 수료한 뒤 귀국했다. 1960년초에는 북극성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1960년 대위로 진급,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가 되었다. 1961년에 전두환 등과 함께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요원이 되었고 ROTC 교관이 되어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인 장교후보생을 교육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육군대위 재직 중 전두환 등의 장교들과 함께 군사혁명 지지를 선언하고, '군사혁명 지지 행진'에 참가하였다.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1966년 국군 방첩부대 방첩과장, 이후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하였으며, 1962년에는 육사 11기 이후 정규 육사출신들로 구성된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어 육사 졸업생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67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그 해 베트남 전쟁에는 맹호사단 재구대대(1연대 3대대)장으로 참전하였다. 이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 맹호사단 재구대대장으로 있을 때는 사이공과 하노이를 잇는 1번도로의 복구와 베트남 대민 지원을 적극 추진했다. 또한 1번도로 변 빈딩 성 푸카트 군 캇하트 면의 1번도로 주변에는 주택들을 건설하여 주민들의 거주지 복구를 주관했다. 그가 복구한 마을 이름은 그의 이름을 붙이려 했으나, 노태우는 강재구 소령을 추모하는 뜻에서 부대 이름이 재구대대라 했다며 재구촌으로 하라고 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 1968년 육군대학에 입교, 그해에 육군대학을 수료하고 수도경비사단 대대장으로 부임했으며, 1970년 육군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로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을 보좌하였다. 1971년 보병 연대장을 거쳐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등을 지냈다. 한편 음악적 소질을 지닌 그는 부대장으로 재직 시 직접 부대가를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1976년 박종규, 차지철 등에 의해 발탁되어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었고, 1978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 그 해 전두환이 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 등의 후원하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전격 발탁되었다.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다른 하나회 회원들과 함께 정치적 위기에 몰렸으나 1979년 3월 전두환이 재기에 성공하여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직된 뒤 그도 육군 제 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 당하자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 그해 12월초 서울에서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정승화·김재규 등을 군부에서 축출하고 정승화 체포작전을 진행하였다. 이때 노태우는 실패를 염려하여 박철언 등에게 부인과 가족을 부탁하였다.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 노태우는 즉시 9사단의 특전부대 병력을 서울로 급파하였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노태우는 9사단 특전대 병력을 청와대와 총리실, 관저 등에 보내 최규하 대통령 주변과 정부를 장악하였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오라' 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노태우는 9사단 예하 29연대를 중앙청으로 진주시킨다. 한편 노재현은 1공수특전여단에게 체포되어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연행된다.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노태우는 5월 17일 오전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단행과 군부의 정치 개입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해, 이날 24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이 전국 확대되는데 관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계획과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의 25인의 비상대책위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6월에는 국보위 상임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그는 국보위 상임위원직을 겸직했다. 1980년 야당 정치인 가택연금 당시 그는 김종필 등을 비롯한 육사 선배들과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에게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고문을 치욕으로 여기던 구 군사정권 출신 인사들은 그의 깍듯한 예우에 감동받았다. 이 중 김종필과의 계속된 만남 도중, 김종필은 신군부 세력 중 그에게 유일하게 깍듯이 대했던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가르쳤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것과 불쾌감을 드러내지 말라고 충고하였으며 이후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후 노태우는 1980년 8월 육군중장으로 진급, 8월 6일에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8월 23일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國軍保安司令部司令官)직을 역임하였다. 당시 그는 수경사령관이었는데,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강력 추천으로 전두환의 후임자로 내정되었다. 퇴역하기 전 7월 11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81년 7월 15일 예비역 대장으로 서부전선에서 전역식을 하고 예편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불같았던 전두환은 친구였던 노태우를 점점 하대하여 노태우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일설에는 노태우가 한강변에서 통곡하더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소문은 시중에 돌고 돌아서 그의 육사 동기들을 거쳐 전두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2인자가 불평불만을 드러낼 경우 1인자의 손에 숙청당할 우려가 있다는 김종필의 충고를 잊지 않고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김종필은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끝까지 선배님, 형님이라며 존대한 노태우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감시병력들을 내보낸 뒤, 이승만과 김구의 고사,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노태우에게 설명하였다. 전두환은 후에 자신의 재선 기도와 내각제 개헌이 실패하자 6.10 민중 항쟁 후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면 자신은 무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고 민정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게 만들었다.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에 의해 민주정의당 당무위원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민정당의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81년 7월 16일 정무 제2장관이 되고, 그 해 11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을 순방하였다. 11월 스페인,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등을 거쳐 12월 나이지리아, 오트볼타공화국, 서독, 네덜란드와 아프리카, 미국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이때 그가 중공에도 방문한다는 기사가 떴으나 오보로 드러났고, 바티칸 시국에 방문했을 때는 특별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에 방문해줄 것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귀국 후 1982년 통일원에서 북조선에 남북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자 그해 2월 25일부터 정무2장관으로 남북한고위회담 수석대표로 참여하였다. 정무2장관 당시 외교안보 담당 특보를 겸하며 올림픽을 유치를 확정시키기 위해 설득과 노력 끝에 1988년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한편 전두환은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해두고 있었고 노태우는 강력 반발하였다. 노태우는 자신이 크게 기여한 것을 강조했고, 전두환은 어디서 말대꾸를 하느냐며 자신이 발탁했음을 강조했다. 또한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도 잠재적 대통령 후계자로 점지되고 있었다. 전두환은 그를 하대하고 반말과 무시를 하기도 했지만 노태우는 김종필의 충고를 잊지 않고, 끝까지 불평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1982년 3월 20일 체육부 장관 과 그해 4월 28일 제41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 그는 무사명, 무책임, 무소견, 무기력을 추방하자는 구호를 내걸어 4무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각 행정기관에 퇴근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사나 동료직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미루는 눈치보기 퇴근, 일 미루기 행위를 일절 금지시켰다.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에 임명되었다. 무임소장관과 체육부장관 등 국무위원으로 겸임한 기간 외에도 그는 1987년 7월 9일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직을 보유하였다. 1981년 11월부터는 부총리라는 대외직명을 사용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에게 특별 배려를 목적으로 부총리급으로 대우하고 대외직명을 부총리로 하였다. 당시 예편은 노태우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내심 전두환의 후계자를 꿈꾸던 노태우는 가장 튼튼하게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군에 남아 참모총장의 길로 가려고 했다. 때문에 일순 모든 것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다. 측근들 중에는 눈물을 쏟으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고, 노태우 자신도 어느 선배를 찾아가 울먹이며 분을 토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무작정 노태우를 예편시킨 것은 아니었다. 내심 정무2장관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편 이틀만인 7월 16일 그 자리에 앉혔다. 노태우는 군복을 벗게 된 마당에 부총리자리를 노렸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처고종사촌 박철언을 통해 안보담당 부총리 겸 정무2장관을 교섭했다. 전두환은 당장에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노태우 정무장관이 해외 순방에 나선 그해 11월, 대외직명 부총리급을 주었다. 11월 9일 그는 해외 순방을 나가면서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83년에는 88올림픽이 서울특별시 유치가 확정되면서 서울올림픽대회 임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정식 구성되면서 위원장이 되어 1986년까지 3년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아시안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어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서울로 유치시키기 위해 각국의 정부 고위층과 아시안 게임 담당자들을 설득하였다. 1984년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KOC 위원장이 되고, 1984년 서울 아시안 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역시 정식 조직위원회가 발족하자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아시안 경기대회 준비와 진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입후보하였다. 1985년에 제12대 총선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곧바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총재인 전두환이 서울 서대문구 출마를 권하자 그것보다는 전국구 의원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박철언의 건의로 전국구 3번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의 후임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높은 번호를 얻으면 전두환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것으로 판단했다. 대표위원 취임 첫날 그는 '우리 당은 무엇보다도 자율과 개방을 내실화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 속에 당내의 언로는 가능한 한 넓혀나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하였다. 이후 야당과의 타협론을 내세웠는데 이는 군부 출신 내부의 강경파들과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된다. 이때 전두환은 그에게 당권을 전권 위임하였으나 그와 노신영 사이에서 후계자를 선택하려 했다. 그러나 노신영을 선택하려는 것을 군부 집단의 집단 반발로 노태우룰 낙점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신군부 출신 내에서도 그는 보복을 잘할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무렵 이민우 등 야당 일각에서 직선제를 주장하자 그는 전두환으로부터 직선제 개헌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가 여기에 호응하지 않음으로서 전두환과 갈등하게 된다. 1985년 12대 국회 개원협상의 민정당 측 대표자로 야당 인사들을 설득하여 국회 개원을 이끌어냈다. 그해 4월 초까지도 야당은 체포된 재야인사들의 선 사면과 후 개원을 강하게 밀고 나갔으나 그는 선 개원 입장을 내세웠고, 협상은 결렬되었으나 결국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등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야당을 국회로 등원시켰다. 여당 내 강경파들은 단독개원을 추진했지만 그는 반대하며 "국회의 개원을 위해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해 우리의 노력과 의지과 국민과 야당에 충실히 전달되도록 힘쓰자."며 강경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1985년에 예산안 파동이 발생했고 직접 나서서 겨우 파동을 수습하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 뒤 노신영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고 했으나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노태우를 후계자로 정했다. 1987년 6월에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다른 대안자로 지목되던 노신영과 정호용을 제치고 민주정의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되었다.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같은 날부터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6월 민주항쟁)가 일어났다.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4·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와 회사원들까지 가담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는 집회가 전국에 확산된 것이다. 당시 제5공화국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였는데, 이에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그의 6·29 선언은 고독한 결단이라고 선전되고 연출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였지만 전두환의 확고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노태우의 개별적 자율성은 없었다 고 평가된다. 한편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강경파 군부와의 차별 및 군사 정권 인사들의 지지를 동시에 획득하였다. 노태우는 민심이 이반되던 1987년 내내 그는 전두환 정권에 충성을 맹세한다. 8월 5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당일의 전당대회에서 민주정의당 제2대 총재에 피선되었다.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노태우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유세하였다. 그러나 야권은 하룻밤 사이에 별을 더 단 육군 대장 출신이 어떻게 보통사람이냐며 반박했고 그는 전역 후 민간인의 신분이니 보통사람이 맞다며 응수했다. 한편 당시 국회의장인 이재형 역시 "노총재는 평균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맞다. 생긴 것도 보통 이상이요 그가 앞으로도 할 일도 보통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평균 의지를 갖고 보통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평균 시민들 앞에서 이끌어 나갈수 있는 것 보통사람인 것은 맞다"며 그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의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발언은 보통 사람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이후 1994년 서석재·박계동 등의 폭로사건으로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드러나면서 이는 곧 비아냥의 용어로 바뀌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차별화 된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머리, 주걱턱 등 연예계의 금기용어도 이때 해금되었다고 한다. 그는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도 불구하고 광주직할시 지역 유세 당시 '광주 학살의 원흉' 또는 '방조자의 한 사람'이라는 항의 시위대가 나타나서 달걀과 밀가루, 오재미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의 양념'이라며 관련자들의 처벌을 반대하고 오히려 전두환에게 선처를 호소하면서 사건은 그냥 넘어가게 된다. 선거 유세 중 그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제창하였다. 그는 당시 인구 10만 미만의 중소도시들도 직접 찾아다니면서 선거 유세를 벌였다. 그의 유세에 자극받은 김종필 등도 성남, 의정부 등의 중소도시를 직접 찾아다니며 선거 유세를 하게 되었다. 초기 노태우는 패배를 예상하였고 전두환 역시 패배를 예상했다. 그러나 군 출신 인사 중에서도 김종필이 출마하며 민주공화당과 한국국민당의 법통을 주장했기에 군 출신 인사와 보수 인사들의 표심이 갈라지리라 예상, 노태우의 선거 캠프에서는 참신함과 대화와 타협론을 내세워 박정희, 전두환은 물론이고 박정희 계열인 김종필 등과도 차별성을 구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승리가 예상되던 양김의 분열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통일민주당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논란을 빚던 1987년 8월 11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9월 14일에는 김대중과 만났고,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 계속된 토론에도 김대중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9월 29일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다음날인 9월 30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를 촉구하던 재야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이라며 강도높게 질타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있을때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제2대 민정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한편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1987년 11월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28%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1987년 당시 노태우, 김영삼 대선 후보는 각각 광주 유세에 나섰다가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다. 당시 김대중이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젊은피 수혈이라는 정책을 펴서 학생운동권 중 민족 해방 계열 출신 청년 정치지망생들을 대량으로 영입하면서 언론 매체 등에서조차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그 역시 다른 재야 인사 및 운동권 계열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태우는 의정부시, 고양군, 성남시 등 중소도시에도 직접 유세를 다니기도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전국 득표율 36%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김종필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원활한 여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5월 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회담을 열어 구속자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대북관계를 포함하여 대외관계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자,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또한 그는 "중용(中庸)을 근간으로 화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층간ㆍ지역간의 반목을 해소하면서 새시대를 민주 발전과 민족 자본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정치 이념을 피력하였다. 그는 연설문 등의 초안을 검토 후 내용을 암기하여 그대로 자연스럽게 발표하였다. 노태우의 대통령직 취임 직후 5공 청산을 원하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을 주저했고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은둔하였다(이것은 국정감사 부활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가 내세운 대표적인 국정 방향 2가지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북방 정책" 특히 '북방 외교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힌다. 노태우는 집권 이후 제2세계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련과 국교를 맺었고, 이후 헝가리 등과 같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차례로 국교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 이후인 1992년에는 한국 전쟁의 적성국이었던 중국과도 국교를 맺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공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오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얻게 된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역시 대표적이다.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87년 국회연설에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시대는 권위체제로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다원의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나와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오지 않았고,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치적 선전으로 그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외교적으로는 이른바 "북방외교"를 천명하고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국제 연합 입성을 이끌어냈다. 그는 7·7 선언 이래의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보좌진을 파견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연결하여 한소 정상회담과 한러 관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천황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89년 3월 4일, 국회에서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북방정책, 다른 말로 '북방외교'라 불리는 외교정책을 통해 일단 양적인 면에서 한국 외교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국내외의 외교환경이 만들어준 개연성의 덕택이 컸다는 점에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한국의 대(對)공산권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던 기존의 이념지향적 외교 정책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제5공화국까지의 북방외교는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고 교역·통상분야도 간접·제3자 형식의 미미한 규모였던 것에 비하면, 제6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가속화된 북방정책은 지극히 바람직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공산권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거나 관계를 개선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국제 연합(UN)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1991년에는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는 남북한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0년 소련과 수교하였고, 소련의 해체 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였다. 199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에게 직접 만남을 제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 그 해에 몽골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베트남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으로 알려진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다. 동구권과도 공식 수교를 위한 접촉을 추진, 사절을 파견한 끝에 1989년 2월 1일 헝가리와 공식 수를 맺었다. 2월 27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조지 부시를 설득,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1990년 6월 초 미국 방문 중, 미국에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체류소식을 접한 뒤 밀사를 보내 비밀 회담을 하였다. 비밀 회담 결과로 6월 5일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고, 6월 6일 부시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때 고르바초프로부터 한국 방문을 약속받고 10월 1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10월 30일에는 서울에 주 소련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1년에는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게 되자, 북한과의 동시 가입은 있을 수 없다는 국내 보수단체들의 집단반발을 무릅쓰고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발표를 수락했다. 1992년 1월 노태우-부시 정상 회담이 있었고, 2월에 남북한은 나진-선봉 지구 개발 공동보조에 합의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8월)하였고 같은 해 몽골 및 베트남(12월)과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구 소련(舊 蘇聯)에서 독립한 신생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1991년 독립), 아르메니아, 조지아 및 또 다른 신생국인 몰도바(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그리고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도 이해에 수교하였다. 그 밖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등 1992년에만 모두 18개국과 수교하여 총 수교국 수가 170개국으로 늘어났고 정상회담이 12회, 외무장관회담이 41회에 이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외교를 벌였다. 특히 수교국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구 소련(舊 蘇聯)에서 독립한 나라들과 잇따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밖에도 주요 공산권 및 제3세계 국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노태우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북방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방외교의 성과는 1970년대 말 중국 공산당의 실용주의 노선 채택,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에 유발된 중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개혁 및 개방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발전(과장된 면이 많았다.)과 국민적 논의의 대두라는 국내 정세변화가 맞물린 결과이다. 다만, 급변하는 정세변화에 한국이 조금 더 빨리 진지하게 대응하고 그 주체가 정부나 정치권 일부에 그치지 않고 정보개방과 국민적 의사의 결집에 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라크(1989년), 몽골, 예멘(각 1990년)와도 수교하였다. 한편 국민 여론과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및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추진하였다. 1990년 5월 24일 비행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가이후 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로부터 사과 성명을 얻어내기도 했다. 한편 1989년 초부터 통일원 등에 지시하여 서울 올림픽과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로 일시 중단했던 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도 다시 추진하였다. 1989년 대북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9월 11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통일논의를 발표하였다. 1990년 1월 10일 신년 연두 회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고령이산가족 왕래 및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추진할 것을 제의했다. 그의 제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수락하였다. 1990년 6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다시 그에게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이 7월 3일로 예정되었다. 그 해 7월 3일의 남북고위급 회담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하였지만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자 7월 20일 남북한 민족대교류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작성, 발표하여 8월 13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 자유 방문, 안전귀환 상호 보장 등을 북측에 제의하였다. 이를 북한측이 수용하면서 9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총리 연형묵 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 90명 일행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에 일부 보수단체에서는 그들을 처형해야 된다고 시위를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화가 진전되어 1990년 9월 5일 남북총리회담이 개막되었다. 회담 2일차인 9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형묵 총리를 독대, 연형묵은 그에게 단독 면담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편 UN 가입 정책도 추진하여 1991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UN가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구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가입시켜야 한다고 하여 결국 동시에 가입하게 되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하여, 중국 건국 후 43년만에 수교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중화민국과의 단교 문제로 일부 보수단체에서 반발했고, 중화민국에서도 반발했다. 이에 중화민국 외교부는 노태우의 중국과의 수교를 항의한 뒤, 결국 단교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 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남북한간의 적극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관계 개선하는 일에 협조할 뜻을 선언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두 개의 주권국가의 연합을 과도기 단계로 인정한 점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북한은 민간교류를 원하는 당국자간의 교류를 회피해 왔지만,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남북화해가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남한의 교류제의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1990년 9월부터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는 동안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리고, 남북의 축구팀이 통일축구대회를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가졌으며, 1991년 4월에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5월에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했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非核化)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한 공동으로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1992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산 가족 상봉에 큰 기대를 걸고 8차 고위급 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키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대신 북한은 비전향 장기수인 리인모 노인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회담의 대변인 이동복은 이 때, 이른바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대한 대통령의 지침을 받기 위해, 평양의 상황실은 서울로 청훈(請訓)하였는데, 서울로부터 답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동복은 엉뚱한 훈령을 정원식 대표에게 보고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에서 남북간에 민족공동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 등 6개항 원칙을 선언하면서 공산주의권과의 관계개선의 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소련·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북방외교"(또는 "북방정책", Nordpolitik)는 곧 가시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 수립이 시작되었다. 1988년 8월에 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협정 체결(1988년 10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주(駐)헝가리 한국대표부가 개설)은 북방정책의 첫 결실로 평가된다. 1989년 동구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수교한데 이어, 같은 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도 수교하였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90년 1월 인위적 정계개편(삼당 합당)을 시발로 하여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1990년 초 공산권 국가들과 일거에 국교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몽골, 루마니아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이루고, 4월에는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드디어 9월 30일 한-소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수교의 정책 수단은 국내경제력이었다. 헝가리와 수교시 6억2500만 USD의 상업 차관을 약속하였고, 한-소 수교시에는 30억USD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1990년 11월 헝가리의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한국의 유엔 가입 등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공산권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이끌어 냈다. 1991년 소련 붕괴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성립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및 알바니아와 1991년에 수교하였다. 노태우의 경제 정책은 자유화와 개방화의 확대였다. 그의 정권 하에서 경제는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수출은 600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1986년 대한민국은 대외교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이래 그 폭이 매년 확대, 1989년 대한민국은 마침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반전하였다. 그러나 수출은 1990년대 초 경기침체로 부진을 겪게 되었다. 1988년 2월 25일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노태우는 초기 "6공 황태자" 라는 별명을 얻은 박철언 등을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 등의 반발과, 차기 대권을 보장하지 않을 때 정권퇴진도 불사하겠다는 구 민주계(김영삼 계열)의 저항에 굴복하여 차기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김영삼에게 양도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보수 세력으로부터 쉽게 허락하였다, 물렁하다며 비난받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5공 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5공 인사들을 대부분 정리, 자진 퇴임을 유도하였으나 5.18 관련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이에 따라 야당과 운동권에서는 5.5공화국이라며 반발했다. 한편 그는 6.29 선언으로 5공화국의 잔재를 털어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 했고 장기집권의 종식을 정치적 최대 목표 로 지명했다. 또한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고 민간인 출신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 출신 인사들을 기용했다. 이에 신군부 출신들은 집단 반발했으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고, 신군부 출신들은 노신영이나 정호용, 장세동 대신 노태우를 지지한 점을 언급하며 반발하였으나 노태우는 이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이후 일부 신군부 인사들과는 척을 지게 된다. 또한 노태우는 인적 쇄신을 목적으로 김종인 등 각 분야의 민간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한편, 박정희, 전두환 정권 치하에 저항하여 대쪽 판사로 이름났던 법관 이회창을 영입하여 정계로 발탁하였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취임 직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사에 대한 간섭, 감시요원 배치를 없애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김준엽의 제안은 거부하였다. 취임 직후부터 그는 공산권이 붕괴되리라 보고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외교 담당자들을 초빙하여 연구를 지시하게 했다. 1988년 7월 7일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항을 골자로 한 '7·7선언'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으며 8월 8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키로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으나, 각 언론과 문헌에 "중공" 대신 '중국'으로 사용하도록 지시, 추진하여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문헌 자료에서는 "중공" 대신 '중국'으로 쓰이게 되었다. 1989년 3월 보안사령부가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방해가 될 만한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고 이들을 개별적으로 사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D-데이 전후로 전원 검거한다는 명목 하에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노태우가 5공을 답습한 것 중 하나였으며, 일종의 정치적 개입이었다. 보안사 3처(우종일 처장·김용성 과장)는 1989년 4월 계엄에 대비해 각계 주요인사 923명의 인적사항·예상 도주로·예상 은신처·체포조 등이 기재된 청명카드를 작성하고 계엄시 이들을 검거·처벌하기 위한 청명계획을 수립했다. 보안사 3처 ‘청명 태스크포스’의 ‘청명’ 대상자 선정과 등급분류는 공안합수부 정책협의회에서 검찰·경찰의 좌익인사 자료와 보안사의 좌익인사 명단과 등급 등을 참조해 작성했다. 청명카드 작성작업을 완료한 뒤 1989년 8월 을지훈련기간에 8개 부대를 선정해 도상훈련까지 실시했다. 이어 보안사 3처 6과 분석반은 1990년 10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청수(동향파악)'대상자라는 가명칭으로 민간인 1300여명에 대해 공개 자료와 예하 보안부대의 '동향관찰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개인별 신상자료철을 작성·관리했다. 보안사가 A급으로 분류해 사찰한 민간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이해찬 전 국무총리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이강철 전 대통령 정무특보(당시 진보정치연합 공동대표), 임종석 전 의원(당시 전대협 의장), 고 문익환 목사, 이창복 전 의원(당시 전민련 상임공동의장), 유인태 전 의원(당시 진보정치연합 사무처장), 이태복 전 노동부 장관(당시 주간 < 노동자신문 > 편집실장), 정윤광 당시 지하철노조 위원장 등 총 109명이다. 보안사가 지목한 '청명 대상자' 중 하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파일에는, 1989년 당시 거주하던 부산 남구 남천동 S아파트 내부 도면까지 그려져 있다. 아파트 내부 방 구조, 화장실과 베란다 위치 등도 파악해둔 상태였다. 평소 몇 시에 집을 나서 몇 시에 귀가하는지, 타고 다니는 차량은 무엇인지, 자주 걸어 다니는 동선, 평상시 자주 만나는 친구와 연락처, 예상도주로와 예상은신처까지 모두 기록돼 있다. 1989년 5월 22일 전교조는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때 학교는 이미 전투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으며 창립식 직후 폭력적인 진압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다쳤다. 이날 참가하였던 교사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다. 5월 22일 저녁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 천명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하였다. 이어 문교부 장관 정원식 역시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인사들에 대한 구속과 해임, 불이익 조치를 취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후 전교조 가입 인사 및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계속하였다. 우선 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학생 운동권들은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처음에는 노태우와 정원식의 마네킹을 화형하는 수준이었던 학생운동권들의 시위는 점차 분신자살로 이어졌다. 한편 정원식 장관은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지시했다. 그 뒤 노태우는 정원식 등과 협의하여 특별 지시를 내려 조치를 완화,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격화되었고, 노태우는 전교조는 불법 조직이라는 뜻을 반복하였다. 노태우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은 1993년 10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1년차이던 이날까지 전교조 복직 신청을 받아서 95%가 복직되었다. 1490명 중 1424명이 복직을 신청하고, 66명이 복직 신청을 거부한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6개항으로 된 이 선언의 내용을 보면,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적극 추진, 남북교역 문호개방,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이다. 이 선언 후 우리 정부는 대북 비난 방송을 중단했으며, 남북 대학생 국토순례대행진을 북한측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원래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인류의 가슴에 화합과 전진을 심어주고 당당히 세계사의 주역으로 나선 것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를 개최한 것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2년 만의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자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와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의 참가를 막기 위한 로비 활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산 국가 중에서는 중국이 1984년 7월에, 동독이 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국의 경우 당시 중소 분쟁으로 인해 소련에 기대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걷고 있던 공산주의 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 하계 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 하계 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주의 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 측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냈고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라오스·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 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부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IOC 전 회원국 참가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서 끝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의 남북한 공동 개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회 참가를 거절하였다. 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공산주의 국가였던 쿠바, 에티오피아, 세이셸이 동참하면서 보이콧했다. 고립 성향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알바니아 역시 불참하면서 알바니아는 4회 연속으로 하계 올림픽에 불참했다. 니카라과는 대한민국의 수교국이었으나 선수단 구성과 재정 문제를 이유로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IOC 회원국 중 7개 국가가 불참하였다. 마다가스카르는 대회 참가를 선언했지만 재정 문제를 이유로 철회했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IOC에서 축출된 상태였으므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나미비아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IOC에 가입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캄보디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부룬디, 코모로, 상투메 프린시페,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세인트키츠 네비스, 도미니카 연방, 세인트루시아는 독립 국가였지만 당시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참가하지 못했다. 1988년 10월 2일, 서울 올림픽은 폐막되었다. 1989년 5월 동의대학교의 입시부정에 항의하던 동의대학교 학생들이 전투경찰 5명을 납치, 폭행하고 학내에 감금하여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숨지고 외부에 근무중이던 경찰관 등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91명의 대학생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9년 민주화 운동으로 최종 인정되었다. 1989년 7월 27일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을 이륙, 태국의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를 거쳐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할 예정이던 대한항공의 803편(맥도넬더글러스 DC-10 여객기)이 악천후와 시야 미확보, 안개 등의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 탑승객 7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객과 승무원 200명을 태운 대한항공 DC-10 여객기가 한국시간을 기준으로 이날 오후 2시 30분 경 추락하여 탑승객 72명이 사망하고 139명이 부상했다(리비아 현지주민도 포함). 탑승객 대부분은 중동 현지에서 근로하는 근로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동아건설 (공영토건 포함) 등 150명의 근로자들이 모두 탑승하였다. 사고의 원인은 시계 240m의 짙은 안개 속에서 조종사가 무리한 착륙시도를 하다 일어난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뒤를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은 최다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5석을 획득하여,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다. 이 때문에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이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고, 그는 결국 합당을 추진하기로 한다. 비슷한 시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원내 3당으로 밀려나게 된다. 평소 노태우를 멀리하던 김영삼은 "만약에 이대로 있다가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여당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얼마 뒤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무소속 후보를 매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합당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신민주공화당 역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김종필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온것은 물론이요, 김종필 자신조차도 정권을 잡기 위해 합당을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민주세력이었던 김영삼이 합당을 한다고 하자 민주당은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당시 '청문회스타'라고 불린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협조적이었으나, 합당을 한다고 하자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이기택, 김정길, 장성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1990년 1월 21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자리에 모여 합당하기로 합의하였고, 이튿날 3당 체제(물론 이는 전당 대회 전까지 행해졌다)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개헌선을 훨씬 초과한 218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권력을 쥐게 된 민자당은 날치기 통과 강행, 반대파 억압, 사회운동 탄압 등의 독재정치를 펼치게 되었고, 이에 자연히 민주인사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된다. 1988년 1월 1일의 신년사에서 그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제5공화국 시절 은근히 유행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1988년 여당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이에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 을 추진해 1990년 3월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한편 노태우는 언론 자유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는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한 것이 있다. 또한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였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장으로 함석헌을 위촉하여 서울평화선언을 채택하게 했고, 1991년에는 장준하 등을 복권시키고 그해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윤보선 대통령과 함석헌 등을 국가 원로로 예우하였다. 그러나 잇단 조치들로 보수 세력과 군출신 인사들의 반감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현재의 기무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목록에는 정계와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담겨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보안사는 이후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으며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윤석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으로 학생운동으로 4학년 2학기에 제적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됐다. 신병교육 뒤인 1990년 7월 3일, 윤석양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어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이하 혁노맹)에서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보안사의 협박에 못이긴 윤석양은 혁노맹 간부 1인의 소재지를 알려주었고, 이 후 혁노맹 수사에 홍대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등 조금씩 협조했다. 7월 19일,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변장시켜 홍대 앞이 보이는 2층 카페로 데려가 혁노맹 관계자를 지목하도록 했고, 윤석양의 도움으로 혁노맹 관련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이 후, 보안사 수사관들은 윤석양을 조금씩 신임하게 되었고, 보안사에서는 8월 22일, 현역군인 10명이 포함된 '혁노맹' 사건을 발표했다. 윤석양은 탈영 이후, 혁노맹은 1990년 3월에 자진해체했으며, 계속 활동했다는 보안사의 발표 내용은 조작이라고 밝혔다. 이후 윤석양은 보안사 분석반으로 옮겨져 혁노맹에 대한 수사 보고서 작성과 사노맹에 대한 자료 정리를 도왔다. 하지만 9월 22일, 말 지의 10월호에서 "보안사의 혁노맹 사건 조작 진상"이라는 기사를 내보내자 보안사의 한 계장이 윤석양에게 이중스파이가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윤석양은 9월 23일 새벽 2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관련 색인표와 디스켓을 가지고 보초 교대 시간을 틈타 보안사를 탈영,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에 은신했다. 한편 집권 직후부터 각종 살인 범죄와 강간 등의 범죄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1990년 10월 13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인 10.13 특별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각종 깡패와 폭력조직의 활보와 야당 경선 내에도 깡패조직인 용팔이 등이 출몰하자 그는 1990년초부터 특별선언을 준비하여 발표한다. 내용의 골자는 '첫째,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 둘째,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 셋째,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 등 이었다. 10월 14일 노태우는 각부 장관들을 소집하여 10.13 특별 선언의 후속 조치로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자정 이후 심야영업 단속과 통제,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 단속, 공중질서 위반 집중 단속, 학교 주변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불량 비위생 식품 단속, 가정파괴범, 유괴 납치범, 좌익사범 등 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반사회성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또한 그는 보복성 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학생운동권들은 공안당국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범죄와의 전쟁 선언 후 2년 뒤인 1992년 초 각종 극성 범죄율은 약 5% 정도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하였고, 그 결과로 평시 작전 통제권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환수했다.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핵포기 선언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1988년부터 노태우와 당시 문교부 장관 정원식은 전교조를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고 단속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학생운동권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가했다. 그 뒤 조치를 완화시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은 정원식 퇴진 데모와 반 정원식 시위, 정원식의 허수아비와 마네킹을 놓고 정원식 화형식 등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 뒤 정원식은 한국외국어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1년 덕망높은 교육자의 발탁을 이유로 노태우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었다. 한편 노태우 정권을 군부독재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1989년 이후 다시 분신자살과 투신자살 등을 감행하였다. 명지대학교의 총학생회장 박광철이 시위 참여 후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2일이 지난 후 1991년 4월 26일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위해 시위가 진행되었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폭력에 의해 사망했고, 이에 대하여 항의하는 시위 도중 성균관대생 김귀정까지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4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안응모 내무부 장관을 경질시켰다.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하였고 이어서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하여 이른바 '분신정국' 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해 민주화에 소극적이던 노태우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게 되자, 노태우 정권은 5월 8일에 노태우 정권을 비난하며 자살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필했다는 소위 유서대필사건까지 조작하면서 사건을 덮으려 하였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분신자살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학생들의 협박과 비난이 계속되었고, 정원식 사건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온 정원식에게 대학생들은 계란, 유리조각, 밀가루, 페인트 등을 투척했다. 6월 4일 노태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사건에 대한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며 특별 대책을 주문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서 정원식의 계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접한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바로 관계자를 소집한다. 이어 노태우는 학생들의 패륜을 질타하며 정원식, 김지하 등에 대한 폭력 사건에 대한 엄벌을 지시하였다. 노태우는 6월 4일 각부 장관과 경찰, 검찰, 문교부 인사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사회적 윤리와 도덕성, 인성을 회복하고 학원가에 만연한 그릇된 풍토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라고 지시했다. 당초 노태우 정부는 경찰 수사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으나 보수단체들의 시위로 검찰수사로 사건을 확대했다. 노태우는 바로 검찰총장 정구영을 불러 엄단을 지시했다. 검찰과 경찰의 합동 수사본부가 조직되고 6월 5일 오전 외국어대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시작, 교내 주변을 탐문수사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연행했다. 1991년 국제로터리클럽 폴해리스 명예회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장준하를 명예회복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노태우가 전격 수용,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러지면서 30여년만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이때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이 압승했지만 3당 합당을 계기로 국회에서 개헌선을 넘는 거대여당을 출범시켰으나 보수 진영의 반발과, 야당의 반발이 있었다. 그 해 서울 주변지역 개발정책 중 일산 신도시와 성남시에서 바다 모래로 지은 아파트들이 발견되어 책임자를 바로 문책하였다. 노태우는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후계자로는 박철언 등을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그에게 항의하며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긴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1992년 9월 18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 한편 대선 직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는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에 대한 악감정은 계속되었는데 후일 그는 김영삼을 가리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권력투사처럼 행동했고, 그의 국정운영 능력을 의심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어 후계자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그는 민주주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색맹환자였던 셈이며 역사와 국민앞에 죄송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편 김영삼에게 순순히 밀려난다고 봤던 그는 야당 인사들에게도 정치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하기도 했다. 김대중에게는 20억원 이상의 정치 자금을 지원했다. 1993년 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 2월 25일 김영삼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연희동 자택으로 퇴임하였다. 대통령 퇴임 직후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면서 증권가를 중심으로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이 나돌자 그는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설이 제기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반박하였다. 1995년 서석재 의원 등에 의해 그의 비자금 조성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같은 해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수설이 제기되어 수사에 들어가자, 해외 순방 출국 길에 언론,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비자금 수사 후 비자금 수수가 사실로 드러나자 굴복하였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망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노태우씨는 "중국은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고 말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국회의원 박계동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 원의 예금계좌 조회표 사본을 제시하며 '노태우 비자금 4천억원!'이라는 발언을 강조,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 원이 여러 시중 은행에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10월 20일 신한은행측에서 이 계좌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1995년 10월 20일부터 검찰이 그의 계좌를 수사, 추적한 끝에 노태우의 경호실장 이현우가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우일양행 명의 차명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돈은 노태우가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돈이며, 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이태진이 관리해 왔다"고 진술, 정치비자금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검찰의 수사결과 비자금 수수가 드러나자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 사실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 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원 가량이 남았다'고 밝혔다. 수사과정에서는 1995년 10월의 대국민 담화와는 달리 기업체로부터 3,400∼3,500억원을 받고,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위해 조성한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원 등을 합쳐서 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1995년,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이전에 대통령 재직시 조성한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 등의 죄목으로 전격 구속되었다. 그해, 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16일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노태우가 수감당할 때, 대법원은 노태우에게 대통령 재직 당시 뇌물을 준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40여 명을 뇌물 공여죄로 기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재벌기업인들에게는 전원 집행유예, 무죄 선고로 석방되었다. 한편 노태우는 옥중에서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이를 계기로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 여론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문민 정부는 5.18 정신을 계승한 정부임을 천명하고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1996년부터 12.12와 5.18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 1997년 4월 17일 12.12와 5.18 및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형, 추징금 2천 688억원의 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1997년 당시 2629억원을 추징금을 선고받고 6월말까지 2286억원을 납부하였다. 2008년 당시 남은 추징금은 387억여 원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 김대중은 동서화합을 이유로 그를 복권시켰다. 이후 각종 국가 행사에 국가 원로로 초청되었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노태우는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전두환과 나란히 앉아 행사를 참관하기도 했다. 사면 이후 노태우는 건강이 악화되어 특별한 정치적 행보와 언론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추징금을 꾸준히 납부하던 노태우는 2008년 들어 동생 노재우와 조카 노호준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2008년 4월에는 동생과 조카 명의의 회사가 자의 비자금으로 설립된 것이라며 소송을 벌였으며, 12월에는 동생과 조카의 주주권 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이후 가처분 신청에서 패소하였고 나머지 추징금 환수의 난항이 예상되었다. 노태우는 2천 628억원의 전체 추징금 가운데 2천 339억원을 환수한 상태다. 2008년 2월의 이명박 대통령 취임 행사에도 건강상태의 악화로 불참하였다. 한편 최근 노태우는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이다. 2011년 4월에는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한의사협회는 5월 11일 노태우의 몸에서 발견된 침과 침뜸사 김남수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침이 유사하다고 주장한 뒤 서울중앙지검에 침 시술자의 신원을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김남수는 1990년대 초 이후 노태우를 만난 적 없으며, 제자들의 침 수술 의혹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노태우는 2013년 6월 현재 23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다. 노태우 측은 자식 대신 동생, 사돈으로부터 남은 추징금을 추징해달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노태우는 동생과 사돈에게 제기한 재산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취하하고 사돈과 동생이 추징금을 납부하기로 합의하였다. 9월 3일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80억원을 납부하고 동생 노재우가 9월 4일 남은 150억 4천만원을 납부하여 남아있던 추징금을 모두 완납하였다. 6월 민주 항쟁 당시 시국수습방안(일명 6·29 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가 하면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처리를 단행하여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는 가 하면 5공 성립에 깊숙히 관여했다는 점, 비자금 문제 등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윤치영은 노태우 대표위원에 의한 민주화 선언은 무정부상태로까지 치달을 뻔한 대한민국을 쾌도난마를 끊는 솜씨와 같이 온국민에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 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노태우의 6.29 선언을 두고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니,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이니 하고 입방아를 찧는 일은 너무나도 정치적 선동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고 비판했다. 6·10 민중 항쟁의 뜻을 조건부 수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이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서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했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전두환 정권과는 차별화 전략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하여 진행하였고 이후 5공 청문회를 하는 등의 제5공화국의 비리를 근절·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노태우는 1972년 이후 15년만에 민간인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 또한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한러 국교회복과 한중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에 자주 거론되던 표현으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아시아의 용에서 지렁이로 전락하다", "소득 수준 5천 불에 소비 수준 2만 불의 과소비 망국" 등이 있었을 정도로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끝자락에서 재임 기간에 경제성장이 예전보다 침체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노태우 정부 집권 기간 동안 30여년간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고루 분배되고 중산층이 넓게 형성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자가용이 대중화되고 해외여행객 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연평균 7~8%에 달하는 고속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지니계수도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낮은 편이었고,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까지는 소득 분배가 양호했다.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쓰이는 지니계수는 낮을 수록 빈부격차가 낮은데, 노태우 정부 시기에 대한민국의 지니계수는 가장 낮았고 이외에 다른 계산 방법인 10분위 배율, 5분위 배율도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상대적 빈곤율도 가장 낮았다. 또한 연평균 최저임금 증가율은 17%로 87년 개헌 이후 들어선 5년 단임제 역대 정부 가운데 최대 수치다. 게다가 1989년 갤럽조사에서는 전체 국민의 75%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했고, 1992년에는 76.3%이 중산층으로 조사되어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진보적 성향의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강의에서 "역대 정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노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노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에 해당한다.참여정부의 경우, 진보적 이미지와는 달리 전반적인 경제정책은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라는 말처럼 갈팡질팡하며 재벌들에게 불확실성, 지지자들에게 배신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노태우는 조순 등 개혁적 인사들을 채용하고, 토지 공개념을 시행하려 애썼으며 최저임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요약하면 또한 국제 수지와 국가 재정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하는 등 장기 호황을 바탕으로 분배 정의가 강화되고 낮은 실업률 유지와 구매력 증가가 지속되었던 시기로 최근 강조되는 분배를 통한 소위 '소득 주도 성장'이 우리 경제 역사상 유일하게 이뤄졌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종합토지세, 택지소유상한제·토지초과세, 개발 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등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하여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은 90년대 중후반에 차례대로 헌재에게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민주화 이후 가장 진보적인 부동산 토지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50평 이상의 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5.8 조치를 통해 정부가 재벌과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 처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직접적 재벌 규제로 꼽혔다. 이 일로 재벌과 대기업은 소유하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약 4천만 평을 처분하게 됐다. 노태우 정부는 3저 호황의 여파로 투기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쏠리면서 이로 인한 문제점이 커지자 토지과다보유세 부과와 8.10부동산투기억제종합대책을 발표하였고, 주택 보급 확대와 주택 가격 안정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하여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를 적극적으로 기획 건설하였다. 〈공시지가제도〉(1989)를 도입하였고, 노후 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처음으로 승인하는 등의 일련의 정책으로 부동산 폭등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이 정책은 재임 초중반기에는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본격적으로 신도시 아파트가 대량 공급되기 시작한 1991년부터 부동산 가격의 상승세가 꺾이는 등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 기조 자체가 유지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등의 효과를 낳았다. 그동안 서울 명문대 출신 졸업자 위주로 신입사원을 채용해온 주요 대기업들에게 지방대 졸업자, 특히 지방거점국립대 졸업생을 중심으로 채용할 것을 권고, 기업인력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9년 정부투자기관경영평가위원회는 지방대 졸업생들의 취업 촉진을 위해 정부투자기관의 지방대생 채용 할당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본사가 지방에 있는 정부투자기관과 지방사무소 정원이 서울(본사)보다 많은 투자기관은 대졸 신규 채용 인력의 60% 이상을 지방대 졸업자로 뽑도록 했다. 나머지 투자기관과 4대 국책은행은 50% 이상 채용토록 했다. 채용 결과는 정부투자기관 평가 때 반영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의무화했다. 노태우는 재직 중 '북방 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를 맺기도 했다. 1990년대 초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하는 가 하면 탁구대회도 열었다. 한러 국교회복과 한중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7.7 선언 등은 미국에의 절대 의존적인 외교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 정치인이고, 일각에서는 군인 출신 정치인임을 들어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며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과 제5공화국 출신으로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 또한 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퇴임한 5공 비리의 핵심 인사인 전두환이 징역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라 백담사에서 은거한 점을 미뤄봐도 역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시각이 있다. 또한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 노력하였다는 점과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폐막,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노력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는 등의 노력을 두고 '물태우'라며 비판하거나 비아냥대기도 한다. 3당 합당으로 현재의 한나라당 계열 정당(당시 민주자유당)에 들어온 김영삼 이전을 군부정권으로 파악하여 군부정권 최후의 통치자로 보기도 한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에는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모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에 구속, 재판을 받는 등 대통령 재직시의 뇌물 수수에 관련하여 비판이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부각되었던 수천억원 규모의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또한 5공화국 청산을 주장하면서 5공 인사들을 비호한 것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공공부문의 지나친 확대로 대한민국 경제의 잠재성장성을 훼손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선된 이유는 야권의 분열과 중대사고 등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그가 당선된 것이 부정 선거라는 의혹이 존재한다. 실제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선거 직후 이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 투쟁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역시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임을 주장하였고, 투쟁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1987년 제13대 대선 당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을 비롯한 민주세력들은 지역감정을 "군부와 민주정의당의 정치공작이며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남출신의 군인중심인 하나회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1990년 1월 무렵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합당에 의한 민주자유당 창당으로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은 1990년 보안사령부(현재의 기무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이 담긴 디스크를 들고 탈영해 그 목록을 공개한 사건을 말한다. 이 목록에는 정계와 노동계, 종교계 등에 대한 사찰 기록이 담겨 있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전임자들은 기피인물이나 정적을 괴롭힐 때 주로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를 이용하였으나 노태우는 주로 국세청을 이용했다. 정보기관 이용은 국내외 인권문제를 야기시켰고 국민의 반감을 사기 때문이었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문화대혁명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망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노태우씨는 "중국은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고 말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당시 노태우의 망언에 정치권까지 듫끓게 되었고 집권당인 민자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망언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형식으로 수습하자고 대응했으나 국민들의 공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광주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한편 노태우는 2011년 5.18에 대해 다시 "5.18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라며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들은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게 된 것이라는 게 주요 내용"이라고 강변했다. 노태우의 별명은 '물' 또는 '물태우'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을 말할 때 우스개 삼아 '이, 윤, 박, 최, 돌, 물, 깡'이라 부른다 한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까지는 성을 그대로 부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별명이다. 즉 '전두환 = 돌', '노태우 = 물', '김영삼 = 깡'이다. 노태우의 대표적 별명. 흔히 수동적이고 미온적인 처신과 카리스마 없는 행동으로 물에 물탄듯 하다는 비꼼의 의미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듣고 있다. 노태우 자신도 재임시절 자신을 물태우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였다. 노태우는 2011년 8월 9일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 원을 지원했던 사실을 밝혔다. 198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풍자의 소재로 써도 된다라고 허용, 이때부터 대통령과 정치인에 대한 자유로운 풍자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당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고 소신있는 판결을 내리기로 유명했던 이회창을 법관직에 복직시키고, 그에게 정치 입문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철회하였다. 그는 강경론 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다. "갈등은 어느 경우에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대화하려는 자, 타협하려는 자는 비겁한 자가 아니다. 평화적으로 해결의 길을 찾는 사람이 위대한 개척자이다."라고 했다. 1987년 6월 29일 전두환 중심의 군부정권과 학생운동권 사이에 유혈극한투쟁으로 갈 때 그는 6ㆍ29선언으로 불리는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혼란한 정국을 화합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어머니 김태향이 사망했을 때는 야당 인사들이 직접 빈소에 찾아오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부음 소식 직후 바로 전화를 걸어 노태우를 위로하고,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했다. 군인 시절 차에서 금강경 테이프를 틀어 놓고 들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나 노년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지목하기도 했다. 물질대사 물질대사(物質代謝) 또는 단순히 대사(代謝) 또는 메터볼리즘(, : metabolismus, , )은 생물의 세포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화학 반응이다. 효소가 반응을 촉매하며, 대사를 통해 생물은 성장하고 번식하며, 구조를 유지하고 환경에 반응한다. 대사라는 단어는 소화와 세포 간에 물질 수송 등을 포함하여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반응의 일부를 중간 대사(, )라 한다. 대사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이화작용()은 세포 호흡을 통하여 유기 분자를 분해하고 에너지를 얻는 반응이다. 동화작용()은 에너지를 이용하여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세포의 구성 성분을 합성하는 반응이다. 대사의 화학 반응은 대사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사경로에서 한 화합물이 여러 단계의 반응을 거쳐 다른 화합물로 변화하고, 단계마다 다른 효소가 차례로 반응을 촉매한다. 효소는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을 에너지를 요구하는 반응과 짝지어 생명체가 필요로 하는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효소는 반응이 좀더 빠르게 일어나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또 세포 주위의 환경이나 세포에 오는 신호에 반응하기 위해 대사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생물의 대사 시스템에 따라 어떤 물질이 영양소인지 독인지가 정해진다. 예를 들어, 황화 수소는 몇몇 원핵생물에게는 양분이지만, 동물들에게는 독이다. 생물체의 대사 속도는 필요한 음식의 양과 음식을 얻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생물 종이 다를지라도 기본적인 대사경로와 그 구성 성분은 매우 유사하다. 시트르산 회로를 구성하는 중간체로 널리 알려진 카복실산들은 단세포 세균인 대장균에서부터 거대한 다세포 생물인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모든 생물에 존재한다. 대사경로는 진화 초기에 등장했으며, 그 효율성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과 식물, 미생물의 구조는 대부분 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종종 지방이라고 불림) 이렇게 세 가지 기본적인 분자로 이루어진다.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며, 대사는 이 분자들을 만들어 세포와 조직의 구성 성분으로 쓰거나, 분해하여 에너지로 쓰는 화학 반응이다. 주요 생화학 분자는 결합하여 DNA나 단백질 같은 고분자가 된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펩타이드 결합을 통해 결합한 선형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단백질 중 다수는 효소로 대사의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 기타 단백질은 세포 형태를 유지하는 세포골격과 같이 구조나 기계적 기능을 담당한다. 단백질은 또한 세포 신호, 면역 반응, 세포 부착, 막을 통한 능동수송, 세포 주기에 주요 역할을 한다. 아미노산은 또한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포도당이 부족하거나 세포가 대사적 스트레스 상태일 때 시트르산 회로에 진입하는 탄소원을 제공하여 세포의 에너지 대사에 관여하기도 한다. 지질은 생화학 분자들 중 가장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주요 역할로는 생체막 안팎을 구성하는 것과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이 있다. 지질은 소수성이나 양친매성 물질로 정의되지만 벤젠이나 클로로폼과 같은 유기 용매에 녹는다.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을 포함하는 큰 화합물 무리이다. 글리세롤이 지방산 세 분자에 결합한 에스터를 트라이글리세라이드라 한다. 트라이글리세라이드 구조에서 조금씩 변형된 화합물이 존재한다. 스핑고지질의 스핑고신, 인지질의 인산염과 같은 친수성 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 밖에 스테로이드도 주요 지질 유형으로, 콜레스테롤이 여기에 속한다. 탄수화물은 하이드록시기가 많은 알데하이드나 케톤으로 사슬이나 고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탄수화물은 생물계에서 가장 풍부한 분자이다. 기능도 다양해서 에너지를 저장하고 수송하는 역할(녹말, 글리코젠), 구조적 역할(식물의 셀룰로스, 동물의 키틴)을 한다. 기본적인 탄수화물 단위를 단당류라고 하며, 갈락토스, 과당,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도당이 있다. 단당류는 무한정에 가까운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하여 다당류를 형성할 수 있다. 핵산인 DNA와 RNA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이다. 각 뉴클레오타이드는 인산기와 리보스 당, 질소 염기로 이루어진다. 핵산은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데 사용되며, 전사와 번역 과정을 통해서 유전 정보를 발현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유전 정보는 DNA 수선 기작이 있어 보호되고, DNA 복제를 통해 분자 수를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HIV처럼 RNA 유전체를 가지면서 역전사를 통하여 바이러스 RNA 유전체로부터 DNA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스플라이소좀이나 리보솜과 같은 리보자임에 있는 RNA는 화학 반응을 촉매하는 효소로 작용한다. 각각의 뉴클레오사이드는 핵염기에 리보스 당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염기는 질소를 포함한 고리 구조로, 퓨린과 피리미딘으로 나뉜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또한 대사에서 작용기 전이 반응에 참여하는 조효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사는 거대한 화학 반응이지만 작용기의 전이와 관련된 몇 가지 기본적인 반응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공통적인 화학 반응 덕분에 세포는 서로 다른 반응에 참여하는 작용기를 운반하는 대사 중간체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조효소는 이렇게 작용기를 운반하는 중간체이다. 작용기 전이 반응은 특정한 한 조효소에 의하여 진행되며, 효소는 그 조효소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따라서 조효소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며, 재활용된다. 주요 조효소 중 하나가 세포 공동의 에너지 통화라 할 수 있는 아데노신 삼인산(ATP)이다. ATP는 서로 다른 화학 반응 간에 화학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세포에는 소량의 ATP만 존재하고, 에너지 요구량에 부합하기 위해 세포는 계속해서 ATP를 빠르게 재생성한다. ATP는 동화작용과 이화작용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이화작용은 분자를 분해하는 과정이고, 동화작용은 분자를 합성하는 과정이다. 이화작용을 통하여 ATP가 생산되고, 동화작용은 ATP를 소모한다. 그 밖에도 ATP는 인산화 반응에서 인산기를 운반하기도 한다. 비타민은 소량이 필요하지만 세포가 생산할 수 없는 유기 화합물이다. 사람의 영양 측면에서, 비타민은 체내에서 변화한 후 대개 조효소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수용성 비타민은 세포에서 이용될 때 인산화되거나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한다. 비타민 B(나이아신)의 유도체인 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NAD)는 전자수용체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조효소이다. 수백 가지 종류의 탈수소효소가 각자의 기질에서 전자를 제거하고 NAD를 NADH로 환원시킨다. 환원된 조효소 형태인 NADH는 수많은 환원효소의 기질이 되어 환원 반응에 참여한다. NAD와 NADP는 세포 내에서 두 가지 연관된 형태인 NADH와 NADPH로 존재한다. NAD/NADH 형은 이화작용에서, NADP/NADPH는 동화작용에서 각각 더 중요하게 사용된다. 무기 원소는 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트륨과 칼륨은 풍부한 반면, 다른 원소들은 소량 존재하면서 기능한다. 포유류 무게의 99%는 탄소, 질소, 칼슘, 나트륨, 염소, 칼륨, 수소, 인, 산소, 그리고 황이 차지한다. 유기 화합물(단백질, 지질, 탄수화물)이 대부분의 탄소와 질소를 포함하며, 산소와 수소는 물로서 존재한다. 풍부한 무기 원소는 이온성 전해질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이온은 나트륨과 칼륨, 칼슘, 마그네슘, 염화 이온, 인산염과 유기 이온인 탄산수소염이다. 막 안팎의 이온 기울기는 정확하게 조절되어 삼투압과 수소 이온 농도를 유지시킨다. 신경과 근육 조직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활동전위는 세포외액과 세포기질 사이에서 전해질이 교환되면서 만들어진다. 전해질은 세포막에 있는 이온 통로를 통하여 세포에 드나든다. 예를 들어 근육 수축은 이온 통로와 T-소관()을 통한 칼슘, 나트륨, 칼륨의 이동에 의존한다. 전이 금속은 미량 원소로 존재하며, 아연이나 철은 미량 원소 중에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금속 원소는 단백질의 보조 인자로 쓰이며, 카탈레이스같은 효소와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예를 들어 헤모글로빈)의 활성에 필수적이다. 금속 보조 인자는 단백질의 특이적인 자리에 결합한다. 효소 보조 인자는 촉매 반응 중에 변형될 수 있지만, 촉매 반응이 끝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금속 미량 영양소는 특이적인 수송체에 의해 생물체 내로 흡수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페리틴이나 메탈로티오네인()과 같은 저장 단백질과 결합한다. 이화작용은 큰 분자를 분해하는 대사 과정으로 음식을 분해하고 산화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화작용으로 동화작용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고 에너지를 얻는다. 이화작용의 정확한 특성은 생물마다 각기 다르며, 필요에 따라서는 생물을 에너지와 탄소를 얻는 원천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아래 표 참고). 에너지원으로 유기영양생물()은 유기물을, 무기영양생물()은 무기물을, 광영양생물()은 태양광을 사용한다. 대사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산화환원 반응에 의존하며, 전자를 유기물, 물, 암모니아, 황화 수소, 철 이온(Fe)과 같은 환원된 전자공여체에서 산소, 질산염, 황산염과 같은 전자수용체로 전달한다. 동물의 경우 이 반응은 복잡한 유기물을 이산화 탄소와 물과 같은 간단한 분자로 분해하는 형태이다. 식물이나 남세균 등 광합성 생명체는 전자 전달 반응이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고 태양광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 저장하는 용도로 쓰인다. 동물에게 가장 흔한 이화작용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단백질, 다당류, 지질 등의 큰 유기 분자를 세포 바깥에서 보다 작은 분자로 소화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작은 분자를 세포 내로 흡수하여 에너지를 일부 방출하는 더욱 작은 분자, 대개는 아세틸 조효소 A(아세틸-CoA)로 전환한다. 마지막으로 아세틸 조효소 A는 시트르산 회로와 전자전달계를 통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산화되고,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일부는 조효소 NAD를 NADH로 환원하면서 에너지를 저장한다. 녹말, 셀룰로스, 단백질 등의 고분자는 세포 내로 빠르게 흡수될 수 없고, 세포 대사에 이용되기 전에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효소 몇몇이 이러한 중합체를 소화한다. 소화 효소에는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는 단백질 가수분해 효소, 다당류를 단당류 같은 단순한 당으로 분해하는 글리코사이드 가수분해효소(글리코시데이스) 등이 있다. 미생물은 단순히 주변에 소화 효소를 분비하고, 동물만이 특수한 세포에서 장으로 효소를 분비한다. 세포 바깥에서 효소가 고분자를 분해하여 만들어낸 아미노산과 당은 능동수송 단백질을 통해 세포 내로 운반된다. 탄수화물 이화작용은 탄수화물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해하는 과정이다. 탄수화물은 대개 단당류로 소화된 후에 세포로 유입된다. 세포로 들어온 단당류(포도당이나 과당)는 해당과정을 거치면서 피루브산으로 전환되고 ATP가 만들어진다. 피루브산은 몇몇 대사 회로의 중간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세틸 조효소 A(아세틸-CoA)로 전환되어 시트르산 회로로 들어간다. 시트르산 회로에서 ATP가 더 많이 생산되기는 하지만, 이 회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물은 아세틸-CoA가 산화되면서 NAD에서 생산된 NADH이다. 무산소 조건에서는 젖산 탈수소효소의 작용으로 해당과정을 통해 젖산이 생산되고, NADH는 해당과정에서 재사용되기 위해서 NAD로 재산화된다. 포도당은 오탄당 인산 경로라는 다른 경로로 분해될 수도 있다. 오탄당 인산 경로는 조효소 NADPH를 환원하고, 핵산의 구성 성분인 리보스와 같은 오탄당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지방은 지방산과 글리세롤로 가수분해된다. 글리세롤은 해당과정으로 들어가고 지방산은 베타 산화 과정을 통하여 분해되어 아세틸-CoA를 방출하고, 시트르산 회로에 진입한다. 지방산이 산화되면 산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탄수화물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스테로이드 또한 베타 산화와 유사한 과정을 통해 몇몇 세균에 의해 분해되어 상당한 양의 아세틸-CoA, 프로피오닐-CoA, 피루브산으로 전환되고, 이들은 모두 세포가 에너지를 얻는 데에 쓸 수 있다. 결핵균("M. tuberculosis")은 탄소원으로 콜레스테롤만을 이용하여 증식할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 사용 경로와 관련된 유전자가 결핵균이 감염되는 생활사의 여러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이나 다른 생체분자를 합성하는데 이용되거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어 요소와 이산화 탄소로 산화된다. 아미노산의 산화 경로는 아미노기 전이효소에 의해 아미노기를 제거하면서 시작한다. 아미노기는 요소 회로로 들어가고, 아미노기가 제거된 탄소 골격은 케토산의 형태로 남는다. 이 케토산 중에 몇몇은 시트르산 회로의 중간체로, 예를 들어 글루탐산이 탈아미노화되면 α-케토글루타르산이 된다. 어떤 아미노산은 포도당신생합성 과정을 통해 포도당으로 전환될 수 있는데, 이를 당생성 아미노산이라 한다. 산화적 인산화 과정에서 전자는 유기 분자에서 제거되어 산소로 옮겨지고 방출된 에너지는 ATP를 만드는데 쓰인다. 이 과정은 진핵생물의 경우 미토콘드리아 막에 있는 단백질 복합체들, 즉 전자전달계에서 일어난다. 원핵생물에서는 세포의 내막에 있는 단백질들에서 일어난다. 이 단백질 복합체들은 환원된 분자(즉, NADH)에서 산소로 전자가 전달되면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막 바깥으로 양성자를 퍼낸다(pump). 미토콘드리아 기질에서 막 사이 공간으로 양성자를 퍼내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안팎으로 양성자의 농도 차가 생겨서 전기화학적 기울기를 형성한다. 이 힘에 의하여 양성자는 ATP 합성효소를 통하여 다시 미토콘드리아로 돌아간다. 양성자 흐름에 따라 ATP 합성효소의 기둥 소단위체(γ 소단위체)가 회전하고, ATP 합성효소 활성 자리의 구조가 변화하여 ADP을 ATP으로 인산화한다. 화학무기영양생물()은 원핵생물의 일종으로 무기 화합물을 산화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여기 속하는 생물은 수소, 환원형 황 화합물(황화물, 황화 수소, 티오황산염), 철 이온(Fe II), 암모니아 등의 환원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들 화합물을 산화하고 산소나 아질산염을 전자수용체로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무기 화합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미생물의 대사는 이산화 탄소에서 아세트산을 생산하거나(), 질화 작용(), 탈질소 작용() 등 전세계적인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토양비옥도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식물, 남세균, 녹색유황세균류와 몇몇 원생생물은 태양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 과정은 종종 광합성의 일부로서 이산화 탄소를 유기 화합물로 전환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자색 세균과 녹색황세균이 태양광을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듯이 원핵생물은 에너지 포착과 탄소 고정을 각각 따로 시행할 수 있으며, 동시에 대사 방향을 탄소 고정이나 유기 화합물의 발효로 전환할 수 있다. 태양광을 에너지로 저장하는 생물 역시 양성자 농도 기울기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저장하므로 원리상 산화적 인산화와 유사하다. 양성자 농도 기울기에 의한 힘이 ATP 합성을 유도한다. 전자전달계를 돌리기 위한 전자는 광합성 반응 중심 또는 로돕신이라는 빛을 모으는 단백질로부터 온다. 반응 중심은 그곳에 존재하는 광합성 색소의 종류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광합성 세균은 대개 한 종류의 반응 중심을 가지고, 식물과 남세균은 두 종류를 모두 가진다. 식물과 조류, 남세균은 광계 II 에서 빛 에너지를 받아 물에서 전자를 제거하고 부산물로 산소를 방출한다. 전자는 사이토크롬 bf 복합체로 전달되고, 그 에너지로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 안쪽으로 양성자를 퍼낸다. 양성자는 다시 막을 가로질러 확산되면서 ATP 합성효소를 작동시킨다. 전자는 광계 I 으로 전달되어 조효소 NADP를 환원시켜 NADPH가 캘빈 회로에서 사용되게 하거나, ATP 생성을 계속하기 위해 재활용된다.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에서 방출된 에너지로 복잡한 분자를 합성하는데 이용하는 대사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세포의 구조를 이루는 복잡한 분자는 작고 단순한 전구물질로부터 차례로 합성된다. 동화작용은 기본적으로 세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아미노산, 단당류, 아이소프레노이드, 뉴클레오타이드와 같은 전구물질을 생산하고, 그 다음에는 ATP에 저장된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구물질을 활성이 있는 형태로 바꾼다. 마지막으로 이 전구물질들을 조립하여 단백질, 다당류, 지질, 핵산 등의 복잡한 분자들을 생산한다. 생물에 따라 스스로 세포 내에서 만들 수 있는 분자들의 종류가 각기 다르다. 식물과 같은 자가영양생물은 이산화 탄소나 물처럼 간단한 분자에서 다당류나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다. 반면에 종속영양생물은 보다 복잡한 물질을 합성하기 위한 전구물질들, 예컨대 단당류나 아미노산을 필요로 한다. 생물은 궁극적인 에너지원에 따라 더 세분화된다. 광합성독립영양생물()과 광합성종속영양생물()은 빛에서 에너지를 얻고, 화학독립영양생물()과 화학종속영양생물()은 무기 산화 반응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광합성은 햇빛과 이산화 탄소(CO)를 이용하여 탄수화물을 합성하는 과정이다. 식물과 남세균, 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물을 분해하고 산소를 부산물로 생산한다. 이 과정은 광합성 반응 중심에서 생산된 ATP와 NADPH를 사용하여 CO를 3-포스포글리세르산으로 전환하고, 3-포스포글리세르산은 이후 포도당으로 전환된다. 탄소 고정 반응은 캘빈 회로의 일부로 루비스코(RuBisCO)라는 효소가 참여한다. 식물에서는 C 탄소 고정, C 탄소 고정, 그리고 CAM 광합성 이렇게 세 종류의 광합성이 일어나며, 이들은 CO가 캘빈 회로에 들어가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C 식물은 CO를 직접적으로 고정하고, C 식물과 CAM 식물은 CO를 먼저 다른 화합물의 일부로 포함시킨다. 이는 강렬한 햇빛과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이다. 광합성 원핵생물의 경우 탄소 고정 기작이 좀 더 다양하다. 캘빈 회로, 역방향 시트르산 회로(), 혹은 아세틸-CoA의 카복실화를 통해 이산화 탄소를 고정한다. 화학독립영양() 원핵생물 또한 캘빈 회로를 통해 이산화 탄소를 고정하지만, 반응을 진행하기 위한 에너지는 무기 화합물에서 얻는다. 단순한 유기산은 포도당과 같은 단당류로 전환될 수 있고, 그 후에 녹말 같은 다당류로 합성된다. 피루브산, 젖산, 글리세롤, 3-포스포글리세르산 및 아미노산 등에서 포도당을 생성하는 것을 포도당신생합성이라고 한다. 포도당신생합성은 해당과정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중간체들을 통해 피루브산을 포도당 6-인산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포도당신생합성 경로에 참여하는 효소들 중에는 해당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효소가 있으므로 포도당신생합성은 단순히 해당과정의 역반응은 아니다. 이로 인하여 포도당을 생성하고 분해하는 것이 각기 따로 조절될 수 있으며, 두 대사 경로가 에너지만 소모하는 무익 회로(futile cycle)로 동시에 작동하는 것을 방지한다. 에너지를 저장하는 일반적인 분자는 지방이지만, 척추동물의 경우 지방산은 포도당신생합성을 통하여 포도당으로 전환될 수 없다. 이는 식물과 달리 동물에게는 아세틸-CoA를 피루브산으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효소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간 기아 상태에서 척추동물은 지방산을 대사하지 못하는 조직(예를 들어 뇌)이 포도당 대신에 사용할 케톤체를 생산해야 한다. 식물과 세균 등 다른 생물은 시트르산 회로에서 탈카복실화 반응을 우회하여, 아세틸-CoA를 옥살아세트산으로 변환하고 포도당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하는 글리옥실산 회로를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당류와 글리칸은 유리딘 이인산 글루코스(UDP-glucose)와 같은 반응성 당인산을 중합되고 있는 다당류의 하이드록시기에 순차적으로 부가하는 글리코실전이효소()에 의해 생성된다. 기질 고리 구조에 있는 하이드록시기라면 당이 중합될 수 있기 때문에 다당류는 사슬 구조와 가지친 형태 모두가 될 수 있다. 생성된 다당류는 그 자체로 구조적 기능이나 대사적 기능을 하거나, 올리고당전이효소()에 의해 지질이나 단백질에 결합할 수도 있다. 지방산은 아세틸-CoA 단위체를 중합하고 환원하는 지방산 생성효소()에 의해 만들어진다. 지방산의 아실 사슬은 아실기를 더하고 알코올로 환원한 후, 알켄으로 탈수소화하고 다시 알케인으로 환원하는 일련의 반응에 의해 신장된다. 지방산 생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동물과 균류는 여러 기능을 가진 제1형 단백질 하나에 의해 지방산을 합성하고, 식물의 색소체와 세균은 제2형 단백질이 합성 경로의 각 단계에 관여한다. 테르펜과 아이소프레노이드는 카로티노이드를 포함하는 지질의 큰 부류로 식물에서 생산되는 천연물 중 가장 큰 집단이다. 이 화합물은 반응성 전구체인 아이소펜테닐 피로인산과 다이메틸알릴 피로인산에서 받은 아이소프렌 단위체의 중합과 변형을 통해 생산된다. 이러한 전구체들은 서로 다른 경로로 합성된다. 동물과 고세균은 아세틸-CoA에서 시작해서 메발론산 경로를 통해 전구체를 합성하고, 식물과 세균은 피루브산과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을 이용하여 합성한다. 활성화된 아이소프렌 공여체를 이용하는 주요 반응 중 하나가 스테로이드 생합성 경로이다. 스테로이드 합성 경로에서 아이소프렌 단위체는 결합하여 스쿠알렌이 되고, 고리를 형성하여 라노스테롤이 된다. 라노스테롤은 콜레스테롤과 에르고스테롤 등 다른 스테로이드로 전환된다. 생물에 따라 20가지의 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세균과 식물은 20가지 전부를 합성할 수 있지만, 포유류는 오직 열한 가지의 비필수 아미노산만을 합성할 수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의 필수 아미노산은 음식물에서 얻어야 한다. 마이코플라스마("Mycoplasma pneumoniae")과 같이 단순한 기생충은 모든 아미노산을 합성할 수 없고 숙주로부터 직접 아미노산을 탈취한다. 모든 아미노산은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 혹은 오탄당 인산 경로의 중간생성물로부터 합성된다. 질소는 글루탐산과 글루타민에서 공급된다. 아미노산은 적절한 α-케토산의 형성에 의존하여 합성되고, α-케토산은 아미노기 전달반응에 의하여 아미노산이 된다. 아미노산은 펩타이드 결합에 의해 사슬형으로 연결되고 단백질이 된다. 각각의 단백질은 특이적인 아미노산 서열로 이루어지며, 이를 일차 구조라 한다. 아미노산은 다양한 서열로 결합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단백질을 형성한다. 단백질이 형성될 때 아미노산은 에스터 결합으로 운반 RNA(tRNA)에 붙어서 활성화된다. 이 아미노아실-tRNA 전구체는 ATP를 이용하는 아미노아실 tRNA 합성효소에 의해 생산된다. 아미노아실-tRNA는 리보솜의 기질이 되고, 리보솜은 전령 RNA에 있는 서열 정보에 따라 아미노산을 신장하는 단백질 사슬에 결합시킨다. 뉴클레오타이드는 아미노산, 이산화 탄소, 폼산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대사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뉴클레오타이드를 효과적으로 회수하는 체계를 발달시켰다. 퓨린은 뉴클레오사이드(리보스에 결합한 염기) 형태로 합성된다. 아데닌과 구아닌은 뉴클레오사이드 전구체인 이노신 일인산에서 합성되며, 아미노산 글라이신, 글루타민, 아스파르트산 및 조효소 테트라하이드로엽산에서 전이된 폼산에서 원자를 이용한다. 피리미딘은 글루타민과 아스파르트산에서 형성된 오로트산으로부터 합성된다. 모든 생물은 영양분으로 사용할 수 없는 화합물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대사적 기능이 없는 이물질이 세포 내에 축적되면 해로울 수 있다. 이렇게 유해성을 가진 물질을 생체이물이라 한다. 합성 약물, 자연 독소, 항생제 같은 생체이물은 생체이물을 대사하는 효소에 의하여 해독된다. 사람의 해독 효소에는 사이토크롬 P450 산화효소, UDP-글루쿠로노실전이효소(), 글루타티온 S-전이효소 등이 있다. 이 효소계는 생체이물을 산화하고(1기), 생체이물 분자에 수용성 작용기를 부가한 후(2기), 세포 밖으로 퍼내거나 다세포 생물의 경우 계속해서 대사 과정을 거쳐 배출시킨다(3기). 생태학에서 이 반응은 특히 미생물의 오염 물질 생분해와 오염된 땅과 기름 유출에 대한 생물적 환경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생물의 반응은 많은 부분 다세포 생물의 반응과 유사하지만, 미생물은 특유의 엄청난 다양성으로 다세포 생물에 비하여 훨씬 많은 종류의 생체이물을 처리하며, 유기염소 화합물과 같이 잔류성 유기 오염 물질까지도 처리할 수 있다. 한편 호기성 생물에게는 산화적 스트레스 문제가 있다. 산화적 인산화와 이황 결합 등의 과정은 과산화수소 같은 활성산소를 생성한다. 유해 산화제는 글루타티온 같은 항산화 대사체나 카탈레이스 혹은 과산화효소 등에 의해 제거된다. 열과 일의 전달에 대한 열역학 법칙은 생물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어떤 닫힌계에서 전체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총량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생물은 놀라운 복잡성으로 이 법칙에 모순되는 것 같지만, 생물은 주변 환경과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는 열린계로 존재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계는 평형 상태가 아니며, 환경의 엔트로피를 높이면서 고도의 복잡성을 유지하는 흩어지기계()이다. 세포는 이화작용의 자발적 과정과 동화작용의 비자발적 과정을 짝지어 대사가 일어나도록 한다. 열역학적 용어로, 대사는 무질서를 창조하면서 질서를 유지한다. 생물이 있는 환경은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대사는 세포 내의 일정한 조건, 즉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섬세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대사 조절은 또한 생물이 신호에 반응하고 환경과 적절히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떻게 대사 경로가 통제되는지 이해하는데에는 아래의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효소의 활성이 크게 변화하더라도(매우 잘 조절됨) 이 변화로 인하여 대사 경로의 흐름에 큰 변화가 없다면, 이 효소는 해당 대사 경로의 통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대사 조절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 내인성 조절은 대사 회로가 기질이나 산물의 수준에 따라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물이 양이 감소하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그 경로로의 흐름이 증가한다. 이런 경우에는 종종 다른 자리 입체성 조절로 효소의 활성을 조절한다. 외인성 통제는 다세포 생물의 세포가 다른 세포로부터 온 신호에 반응하여 대사를 변경할 때 나타난다. 이 때 신호는 대개 호르몬이나 성장 인자 형태로, 세포 표면에 있는 특수한 수용체에 의해 감지된다. 신호는 단백질 인산화 연쇄 반응을 거쳐 이차 신호 전달계에 의해 세포 내로 전달된다. 외인성 조절의 예로 잘 알려진 것이 인슐린 호르몬에 의한 포도당 대사의 조절이다. 인슐린은 혈당량의 증가에 따라 생산된다. 인슐린이 수용체에 결합하면 단백질 인산화효소 연쇄반응을 활성화하여 세포로 하여금 포도당을 흡수하여 지방산이나 글리코겐 등 저장형 분자로 전환하게 한다. 포도당의 대사는 글리코겐을 분해하는 인산가수분해효소와 합성하는 글리코겐 합성효소의 활성에 따라 통제된다. 이 두 효소는 인산화를 통해 상호조절된다. 즉, 글리코겐 분해효소는 인산화되면 활성화되고, 합성효소는 저해된다. 인슐린은 단백질 인산분해효소를 활성화하고, 따라서 글리코겐 분해 및 합성효소의 인산화 정도를 감소시켜 글리코겐이 합성되도록 유도한다. 위에서 기술한 해당과정, 시트르산 회로와 같은 주요 대사 경로들은 모든 생물 도메인에 존재하며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에도 있었다. 공통 조상 세포는 원핵세포였으며 아마도 광범위한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탄수화물, 지질 대사를 갖춘 메테인 세균이었을 것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오래된 대사 경로를 계속 유지한 것은 그 대사가 특정한 대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당과정과 시트르산 회로의 경우 최소의 단계로 매우 효율적인 최종 산물을 생산한다. 비부호 DNA 단편에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는 대사 효율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효소를 이용한 대사 중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퓨린 뉴클레오타이드 대사의 일부이고, 이전의 대사 경로는 고대 RNA 세계의 일부였을 것이다. 새로운 대사 경로가 진화한 기작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 여럿 존재한다. 원형의 대사 경로에 이전부터 존재하던 효소가 새로운 반응 경로에 통합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효소가 차례로 더해지고 복제되어 전체 경로가 분지하였다는 모델이 있다. 각 기작의 상대적인 중요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유전체 연구를 통하여 대사 경로의 효소가 공동의 조상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따라서 이미 존재하던 경로에서 차례로 새로운 기능을 가진 경로로 진화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사 네트워크의 단백질 구조의 진화를 추적하는 연구에서 나온 대안적인 모델에 따르면, 효소는 서로 다른 대사 경로에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널리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효소의 진화적 모자이크가 나타나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대사의 일정 부분이 특정 단위()로서 서로 다른 경로에서 재활용되고 여러 분자에 대해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진화를 통해 새로운 대사 경로가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사 기능을 잃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몇몇 기생충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대사 과정이 퇴화하고 숙주로부터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탄수화물을 얻게 되었다. 세포내 공생하는 생물에서 이와 유사한 대사 능력 감소를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물질대사는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단일 대사 경로에 초점을 맞춘 연구 대상이었다. 특히 귀중한 연구 도구인 방사성 추적자를 사용하여 전구물질에서 최종 산물까지 경로를 생물 전체나 조직, 세포 수준에서 규명할 수 있다. 화학 반응을 촉진하는 효소를 정제하여 저해제에 대한 반응과 속도를 조사한다. 동시에 세포나 조직 안에 있는 작은 분자를 밝혀내고, 이 분자들의 총체적 집합을 대사체라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단순한 대사 경로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지만, 완전한 세포의 대사와 같은 더 복잡한 계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천 가지의 효소가 공존하는 세포 내 대사 네트워크의 복잡성이란 것이 어떤 개념인지는 불과 43개의 단백질과 40개의 대사산물 사이의 상호작용을 나타낸 오른쪽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유전체 서열에는 최대 45,000개에 이르는 유전자 목록이 있다. 이제는 유전체 자료를 이용하여 전체 생화학 반응의 네트워크를 재구성하고, 그 행동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전체적인 수학적 모델을 산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얻은 대사 경로와 대사산물 자료를 단백체학과 DNA 마이크로어레이 연구에서 얻은 유전자 발현 자료에 통합할 때 수학적 모델이 유용하다. 이러한 기술을 통하여 사람의 대사에 대한 모델이 정립되고, 의약품 개발이나 생화학 연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대사 모델은 같은 단백질이나 대사산물을 공유하는 질병을 분류하기 위한 네트워크 분석에 이용되고 있다. 세균의 대사 네트워크는 나비 넥타이 조직의 좋은 예이다. 나비 넥타이 구조는 광범위한 영양물질을 받아들여 상대적으로 적은 중간체를 통해 다양한 산물과 복잡한 고분자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이다. 대사 공학은 주요한 대사 정보 응용 기술이다. 효모, 식물 및 세균은 생명공학기술에 유용하게 유전적으로 변형되어 항생제나 의약품 혹은 1,3-프로판디올(1,3-propanediol), 시킴산 같은 산업용 화합물 생산에 이용된다. 유전자 변형은 대개 생산하는데 드는 에너지 양을 줄이고, 생산량을 증대시키며, 폐기물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질대사라는 용어는 변화 혹은 전복(顚覆, )을 뜻하는 에서 유래하였다. 1260년 이븐 알나피스(는 저서에서 "인체와 각 부분은 지속적인 소멸과 생성 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영구적인 변화를 겪는다"고 서술하면서 물질대사의 개념을 처음으로 문서화하였다. 물질대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역사는 몇 세기에 걸쳐 나타난다. 동물 전체를 연구하던 초기 시기에서 개인의 대사 반응을 연구하는 현대의 생화학으로 발전하였다. 사람의 대사에 대한 첫 통제 실험은 1614년 출판된 산토리오 산토리오의 저서 "Ars de statica medicina"에서 나타난다. 그는 일상에서 각종 활동을 하는 동안 스스로 무게 변화를 측정하고, 섭취한 음식 무게의 대부분은 잃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인식할 수 없는 호흡"이라 불렀다. 초기에 물질대사 기작은 밝혀지지 않았고 어떤 힘이 살아있는 조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생각하였다. 19세기에 효모에 의하여 설탕이 알코올로 발효되는 것을 관찰한 루이 파스퇴르는 발효가 효모 세포 안에 있는 물질이 발효를 촉매 작용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알코올성 발효는 효모 세포의 죽음이나 부패가 아니라 삶과 연관된 활동이다"고 기술하였다. 이 발견과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의 요소의 화학적 합성에 대한 논문은 전적으로 무기 전구체만으로 유기 화합물 합성을 논한 중요한 발견이다. 이로써 세포에서 발견된 유기 화합물이나 화학 반응이 일반적인 화학 반응의 원리와 다를 것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에두아르트 부흐너가 20세기 초 효소를 발견함에 따라 세포의 생물학적 연구에서 물질대사의 화학 반응을 분리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생화학의 시초가 되었다. 생화학의 지식은 20세기 초에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가장 많은 연구를 한 근대 생화학자 중 한 명은 크레브스()로, 물질대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요소 회로를 발견하였고, 후에 한스 콘버그(Hans Kornberg)와 함께 시트르산 회로와 글리옥실산 회로를 발견하였다. 현대 생화학은 크로마토그래피, X선 회절을 이용한 분광학, NMR 분광법, 방사성 동위원소 표지, 전자 현미경, 분자 역학 시뮬레이션 등 새로운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 세포에 있는 분자 및 물질대사 경로들을 발견하고 상세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레고어 멘델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 1822년 7월 22일~1884년 1월 6일)은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식물실험자이며 아우구스티노회의 수사이자 사제로서 이른바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유전학의 첫 장을 연 생물학자이다. 멘델은 1822년 7월 22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현재의 체코)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도왔던,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1834년부터 1840년까지는 트로파우(지금의 체코의 오파바)의 김나지움(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에 해당)과정을 다녔고, 1840년에서 1843년까지는 올뮈츠(지금의 체코의 올로모우츠)의 철학연구소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보충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커다란 애착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지주가 시키는 강제노동으로 허리를 다쳐 병이 나는 바람에 멘델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843년 고향 근처에 있는 소도시인 모라바의 브륀(지금의 체코 브르노)에 있는, 14세기에 건립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했으며,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수사로서의 생활은 멘델을 물질적 결핍에서 해방시켰으며,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847년에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수도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동안에 과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1849년에 멘델은 브륀 근처에 있는 즈나임(즈노이모) 중등학교의 보조교사가 되어 잠깐 그리스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이와 동시에 멘델은 이전의 못 이룬 대학교에서의 자연과학 공부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1850년 빈 대학교 자연과학부에 입학을 시도하지만, 시험에서 떨어졌고, 또한 정규교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역시 떨어졌다. 그 뒤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 대학교에 겨울학기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물리학·화학·수학·동물학·식물학 등의 자연과학 기초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다(1851~53). 1853년에는 견문과 학계와의 접촉을 넓히기 위해 빈의 동식물학회에 가입하게 되고, 1854년 완두콩의 해충에 관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한다. 1854년 그는 브륀으로 다시 돌아와 1868년까지 브륀 국립 실과 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으나 교원 자격증은 끝내 얻지 못했다. 그는 1856년부터는 수도원에 있는 조그마한 뜰에서 완두를 재료로 하여 유전에 대한 실험을 시작, 7년 후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1865년 브륀의 자연 과학 협회의 정례회에서 발표하고, 그 논문은 따로 인쇄하여 발표하였다. 그동안 식물에 대한 225회에 이르는 인공 교배를 하여 1만 2,000종의 잡종을 얻었으며, 계속 실험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인정받지 못하고 1900년대에 들어서야 재조명을 받게 된다. 식물학·양봉·기상학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구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1868년 아빠스가 되면서 과학은 그의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으며, 1872년 공포된 교회 과세법에 반대, 정부와 대립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지루한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그는 만성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멘델의 법칙이 학계에 받아들여졌다. 1910년 브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 곳은 '멘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856년부터 수도원의 작은 정원에서 실험을 시작하여 유전의 기본원리를 발견했으며 이러한 원리들은 나중에 유전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연구를 했으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운데 몇몇은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1862년 브륀에서 자연과학학회를 창립했으며 멘델은 이 모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수도원과 학교의 도서관에는 중요한 과학 서적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과수원과 농장에서 얻었던 경험들 때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농학·원예학·식물학에 관한 책을 많이 보았다. 멘델 자신도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책들이 나오면 곧 구입을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1860, 1870년대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 연구노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멘델은 다윈의 맨 처음 저서가 나오기 전에, 또한 유전이 진화의 원인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이미 실험을 시작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1865년 2월 8일과 3월 8일에 열린 브륀 자연과학학회에서 결과를 보고할 때에도 '식물의 교잡'에 대한 깊은 관심을 언급했으며, 이 분야에서 자기보다 먼저 발표한 사람들의 연구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면서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꿍하거나, 이들 사이의 통계적 상관도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 만큼 폭넓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하나도 없다." 유전 연구 실험에 반드시 필결할 수 있었다. 요한 조건에 대한 이러한 논술과 그 조건들을 만족시켜주는 예비 실험 자료들을 통해 그는 유전과 진화 및 일반적인 생물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면서 정원에서 길렀던 여러 가지 완두를 서로 교배했다. 이들 완두는 키가 큰 것과 작은 것, 잎겨드랑이에서 꽃이 피었을 때 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등과 같이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대립형질과, 씨의 색·모양, 줄기에 꽃이 피는 위치, 콩꼬투리의 모양 등 유사한 차이를 갖는 대립형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식물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립형질이 변종과 그들의 자손에 계속 나타나는 것은 유전의 기본단위 때문이라는 이론을 세웠는데, 이 유전단위가 지금은 유전자로 알려져 있다. 실험결과에 대한 멘델의 해석은 사람을 포함한 다른 생물들을 통해 계속 관찰되면서 충분히 증명되었는데, 이는 유전단위가 간단한 통계법칙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칙의 기본원리는 잡종의 생식세포 안에는 양친 중 어느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 절반과 다른 한쪽에서 온 유전물질이 절반씩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식세포 안에서 대립형질이 분리되는 것을 멘델의 제1법칙 또는 분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립형질들이 여러 쌍 있을 경우, 이러한 형질들은 모든 가능한 조합을 이루며 독립적으로 자손들에게 전해진다고 했다. 그가 뿌린 완두의 여러 변종들에서, 그는 독립유전의 법칙에 따라 무작위로 재조합된 7쌍의 대립형질들을 관찰했으며, 이러한 원리를 통계적으로 검증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현재 멘델의 제2법칙, 즉 독립의 법칙은 서로 다른 연관 그룹 또는 서로 다른 염색체 상에 있는 유전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멘델은 우성도 관찰했는데, 이것은 잡종이 대립형질 가운데 1가지 형질만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형질을 우성형질이라고 했으며, 관찰한 7쌍의 형질에 모두 나타난다고 보았으나 더욱 광범위한 실험을 통해서 이것이 모든 대립형질에 적용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들이 그가 처음 증명한 특별한 유전단위 또는 유전자에 의한 유전 체계가 기본적으로 틀렸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멘델의 유전법칙이라고 부르는 이 체계는 검증·확인되어 일반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생물학의 기본적인 원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험결과로부터 유추한 이러한 이론과 설명은 2편의 논문에 실려 있는데, 1865년초 자연과학학회에서 발표했으며 다음해 이를 좀더 자세하게 기록해 학회 회보에 게재했다.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이 붙은 이 논문은 유럽과 미국의 주요한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당시에는 브륀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생물학적인 견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뮌헨대학교의 유명한 식물학자 칼 빌헬름 폰 네겔리는 멘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학자지만 멘델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네겔리조차도 멘델의 논문에 실린 수학적 논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멘델은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 다른 식물에서도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려고 노력했다. 1869년 또다른 1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그가 조사한 식물은 네겔리가 멘델에게 실험재료로 추천한 조밥나물속으로, 이 식물의 배는 수정이 일어나지 않고 밑씨가 자라 만들어지는 체세포 단위생식을 하기 때문에 검증재료로는 본질적으로 적당하지 못했으며 멘델의 원리를 확인하기에도 부적합했다. 말년에 그는 "나의 시대는 반드시 온다."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그의 업적은 유전과 진화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대발견이었으며, 그에 의하여 유전학이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멘델의 연구는 ‘관찰→가설 설정→실험→법칙 수립’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랐다.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근거를 통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유전학적 법칙을 완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의 실험은 그 계획의 교묘함과 실험의 정확성, 자료 처리법이 탁월한 점, 논리가 명쾌한 점 등 생물학 사상 가장 뛰어난 실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는 동료 수도사들과 자기가 살던 도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나, 당시의 위대한 생물학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00년 유럽의 식물학자 칼 에리히 코렌스, 에리히 체르마크 폰 세이세네크, 휴고 드 브리스 등이 각각 멘델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고 34년 전에 발표된 실험결과와 개괄적인 원리를 문헌에서 찾아냄으로써 그는 죽은 뒤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은 멘델의 실험이 유전학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많은 나라의 생물학자들이 멘델의 학설을 확인하고 그 응용 범위를 넓히고 있으며, 진화학·발생학·생리학·생화학·의학·농학·사회과학 등을 이해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어 프랑스어( 또는 )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와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 등지의 공용어로서 국제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언어다. 유엔에서는 영어와 함께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는 한자로 음역 약칭으로 불어(佛語)라 부르기도 한다. 언어 분류학상 로망스어에 속하는 언어이다. 로망스어는 그 이름이 뜻하듯이 고대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에서, 또는 이의 방언에서 발생한 언어군을 일컫는다. 하지만 프랑스어는 고전 라틴어(Latin classique)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세속 라틴어(Latin vulgaire)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교적 간단한 통사구조와 굴절이 거의 상실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현재의 프랑스 지역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로마의 군인, 상인, 이주민 등의 잦은 왕래, 그리고 그들과 갈리아(프랑스의 라틴어 이름)의 원주민들과의 교섭을 통하여 프랑스어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언어 ‘갈리아 서민 라틴어(Latin populaire des Gaules)’가 생겨났다. 이 갈리아 서민 라틴어는 그 당시에 새겨진 또는 작성된 비문과 기록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문법, 발음, 어휘 등에서 라틴어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인류의 모든 활어와 마찬가지로 갈리아 서민 라틴어는 시간이 감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 언어가 현재의 프랑스어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라틴어 이외에 켈트어, 고대 그리스어, 그리고 이른바 게르만어, 영어, 이탈리아어로부터 많은 낱말을 받아들여 동화시켰다. 처음 기록된 불어 문헌은 8세기의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라틴어로부터의 분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의 고대 불어를 확인할 수 있다. 불어의 시대별 변천사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근대불어 중 17-18세기를 고전 프랑스어()로 별도로 나누기도 한다. 고대불어는 라틴어에서 분화한 여러 로망스어 방언 중 북부 프랑스의 오일어 방언, 특히 프랑시앵(francien) 방언을 일컫는 것이며, 중기 프랑스어는 고대와 근대의 과도기적 형태이며, 근대불어는 프랑스사에서 대세기()이라 불리는 17세기에 플레야드, 몰리에르 등의 고전주의 작가들이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의 문법과 어휘를 받아들여 완성한 것이기에 중기 프랑스어와는 확연한 차이가 나게 된다. 17세기 작가 장 드 라퐁텐의 우화집의 원문을 프랑스의 아동들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근대불어는 현대에 와서도 거의 변하지 않은 데 비하여 중기불어는 직해하기가 좀 더 어려워지고, 고대 프랑스어는 전문지식이 없으면 불어 원어민도 독해할 수 없다. 프랑스어는 29개 나라에서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고, 그 중 대부분의 나라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커뮤니티인 프랑코포니를 구성한다. 또한 국제 연합(UN)을 비롯한 많은 국제 기구의 공식 언어이다. 프랑스어는 유럽에서 네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모국어이며,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와 벨기에의 제국적 야망으로 인해 프랑스어는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폴리네시아 등에 전파되었다.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많은 국가는 프랑스, 캐나다(인구의 25%), 벨기에(인구의 45%), 스위스(인구의 20%), 룩셈부르크 순이다. 다음은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인 나라의 목록이다. 라틴어의 후예이나, 라틴어의 명사곡용은 대명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고정된 어순으로 명사의 문법적 위치를 나타내게 되었다. 반면에 동사의 굴절은 비교적 풍부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동사는 인칭과 복잡한 시제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단, 이러한 동사변화의 많은 부분은 대개 음운론적 변화에 비해 보수적인 정서법에 의해 표시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입말에 있어서는 많은 인칭과 시제의 동사변화가 사실상 많이 수렴 통합되었다. 예를 들면, 규칙동사 중 제1변화하는 동사(예: penser)는 1/3인칭 단수, 2인칭 단수, 3인칭 복수의 동사변화가 철자로는 구분되나(pense, penses, pensent) 발음상으로는 동일하다(/펑스/). 이러한 동사변화의 음운적 변별성의 결손에 인하여 불어에서의 인칭표시는 주어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로망스어로서는 특이하게 주어 대명사를 생략하지 않는다. 동사변화만으로 인칭을 알 수 있기에 주어 대명사를 일일이 표시하지 않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와는 대조적이다. 로마자를 사용한다. 프랑스어의 알파벳은 모두 26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k와 w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데에만 쓰인다. 프랑스어는 음운변화에 따른 정서법개혁이 적극적이지 않아, 철자법이 다른 로망스어에 비하면 비직관적인 편이이다. 일반적으로 어말의 글자는 묵음이다. 프랑스어의 시제는 12개나 된다. 프랑스어의 12시제는 현재, 전과거, 반과거, 복합 과거, 근접 미래, 전미래, 단순미래, 대과거, 조건현재, 조건과거, 접속과거, 접속현재이다. 프랑스어에서는 70은 60과 10(soixante-dix)으로, 80은 4개의 20(quatre-vingts)으로 90은 4개의 20과 10(quatre-vingt-dix)이다. 하지만, 지역(스위스,벨기에 등)에 따라 70을 septante, 80을 huitante 이나 octante, 90을 nonante와 같은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프랑스어의 ISO 639에 따른 언어코드는 fr, 고프랑스어 (842년 - 1400년)의 코드는 fro, 그리고 중기프랑스어 (1400년 - 1600년)의 코드는 frm이다. 턱스 턱스(Tux)는 리눅스 프로젝트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Larry Ewing)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1899년 7월 21일 ~ 1961년 7월 2일)는 미국 육군 상사 예편한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헤밍웨이의 실속 있고 절제된 표현 방식은 20세기 소설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모험적인 삶과 대중적인 이미지 역시 후대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헤밍웨이는 대다수의 작품을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하였고,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헤밍웨이는 7개의 소설, 6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2개의 논픽션 작품들을 출판하였다. 3개의 소설, 4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그리고 3개의 논픽션 작품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헤밍웨이의 대다수의 작품들은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헤밍웨이는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헤밍웨이는 고등학교를 마친 이후 이탈리아의 전방 군대에 입대하여 구급차 운전사가 되기 전에 《캔자스 시티 스타》에서 몇 달 동안 기사를 썼다. 1918년에 심하게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는 집으로 되돌아왔다. 헤밍웨이가 겪은 전쟁 경험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1921년, 헤밍웨이는 그의 4명의 아내 중 첫 번째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하였다. 부부는 헤밍웨이가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한 곳인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6년에는 그의 첫 소설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출판한다. 1927년 해들리 리처드슨과 이혼한 뒤, 헤밍웨이는 폴린 파이퍼와 재혼을 한다. 둘은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해외 특파원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이혼하게 되고, 헤밍웨이는 내전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를 쓴다. 1940년, 헤밍웨이는 세 번째 아내인 마사 겔혼을 만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런던에서 메리 웰시를 만난 후에 이혼을 했다. 헤밍웨이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파리 해방 전투에 참여한다.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고 난 이후에,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사파리로 떠난다. 그 곳에서 두 차례의 비행기 사고를 당한 그는 남은 생의 대부분을 병과 함께 지낸다. 헤밍웨이는 1930년도에는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거주했고,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쿠바에서 거주한다. 1959년에는 아이다호주 케첨에 위치한 집을 구입하였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그 곳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원래 성악가로 여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활동적인 인물로 낚시 및 사냥, 권투 등을 즐겼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17년 지방 신문에 "캔자스 시티 스타"지의 인턴 기자가 되었다가 그만두었고, 1918년 적십자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호사루타 전선에 엠뷸란스 기사로 자원하여 중상을 입게 된다. 전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토론토 스타"지의 프리랜스 기자를 지냈고, 특파원으로 파리로 건너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사귀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행동파 작가로 스페인 내전에 파시스트이자 후에 군사 독재자가 된 프랑코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참여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은 그러한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당시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의 소재를 제공하여 영화화되기 하였다. 단편은 짧은 문체의 작품이 많으며, 이들은 대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와 이후 계속되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원조가 되었다.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1952년에 발표된 《노인과 바다》가 좋은 평가를 받아 수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해에 두번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의 항공기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중상을 입고 시상식에는 나가지 못했다. 이후 그의 특징이었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말년에 사고의 후유증에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 활동도 점차 막히기 시작한다. 결국 1961년 아이다호주에서 엽총으로 62세의 나이에 자살했다. 남동생인 레스터 헤밍웨이는 작가로, 손녀 마고 헤밍웨이와 마리엘 헤밍웨이는 여배우가 되었다. 《해류 속의 섬들》("Islands in the Stream")의 무대가 된 바하마의 비미니에는 그가 머물렀던 호텔의 방을 개조하여 개장한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물관〉이 있어서, 유품 등이 전시되었었지만, 200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생애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상을 받았다. 헤밍웨이 박물관(Museo Momerial 'Ernest Hemingway')은 쿠바 아바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에 있다. 1928년 헤밍웨이가 쿠바를 방문한 후 줄곧 머물며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쓴 곳으로 내부는 당시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며 '노인과 바다'책이 있는 방, 타이프라이터, 동물박제, 9,000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리누스 토르발스 리누스 베네딕트 토르발스(, 1969년 12월 28일 ~)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스웨덴계 핀란드인으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리눅스 커널과 깃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후에 그는 리눅스 커널 개발 최고 설계자가 되었고, 현재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커널의 플랫폼 독립적인 부분과 인텔 IA-32 아키텍처로 구체화되는 핵심 커널의 컴포넌트들을 관리한다. 저명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리더들에게 부여되는 명예 타이틀직인 자비로운 종신독재자(BDFL, )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리누스는 닐스(Nils)와 안나(Anna) 토르발스의 아들이자, 시인 올레 토르발스(Ole Torvalds)의 손자로 태어났다. 리누스의 가족은 아이티 인구의 5.5%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 스웨덴어 사용자에 속한다. 리누스의 이름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던 미국인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에서 따온 것이지만, 리누스는 자신의 저서 《Rebel Code: Linux and the Open Source Revolution》라는 책에서 "나의 이름은 피너츠에 나오는 라이너스에나 어울린다"고 언급한 바 있다. 리누스는 1988년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해 다녔고, 1996년 컴퓨터 과학 석사로 졸업했다. 석사 논문 제목은 '리눅스: 이식 가능한 운영 체제'이다. 리누스는 대학교 1학년을 끝낸 후 포병 관측 장교로 핀란드 군에 입대하여 소위로서 11개월간 복무하여 병역을 마쳤다. 1990년에 복학한 후 최초로 DEC MicroVAX에서 운영하는 ULTRIX의 형태로 유닉스를 만나게 되었다. 리누스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코모도어 VIC-20와 함께 시작했다. 이후 싱클레어 QL를 구입하고 그 운영체제를 변형시키며 OS를 변형시키고 어셈블리어 프로그램과 텍스트 에디터를 만들거나 몇 가지 게임을 프로그램 하기도 하였다. 1991년 2월 2일, 그는 인텔 80386 기반의 IBM PC를 구입하였다. 한 달 정도 페르시아의 왕자 등의 게임을 하면서 MINIX의 사본을 기다렸는데, MINIX가 도착한 직후 그는 리눅스 커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2000년 6월에 헬싱키 대학교는 리누스 토르발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1971년 1971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72년 1972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74년 1974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장자 장자(莊子, 병음 Zhuāngzǐ,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는 중국 전국 시대 송(宋)나라 몽(蒙; 현재의 안휘성 몽성 또는 하남성 상구 추정) 출신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老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周)이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老莊)이라 부른다. 도교에서는 남화진인(南華眞人), 또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 부르기도 하며,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의 지도자 장각에게 도를 전수하는 선인이 바로 남화노선(장자)이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어느 날 장자는 자기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잠을 깨니 내가 꿈을 꾸고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고 지금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장자는 이처럼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문을 품고 유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르침 따위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노자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으로 돌아갈 것과 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일찍이 몽(蒙) 칠원(漆園)의 관리가 되었으나, 생활은 매우 가난했다. 《장자》 외편 〈추수(秋水)〉편에 따르면, 초나라 위왕(威王)이 사람을 보내 정치를 보좌해 주길 청했으나, 장자는 거절하였다. 혜자(惠子)와 교우했다. 장자의 인생론에서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ㆍ정신을 버리고 '허정'(虛靜), '염담'(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ㆍ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을 '진인'이라고 하며,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만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도'(道)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物)의 생사(生死)를 기(氣)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흔히 노자와 장자를 묶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노자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 대해, 장자는 개인의 안심입명에만 몰두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위자연에 처할 것을 가르쳤던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고자 했다. 즉 노자는 어느정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 반면 장자는 오직 개인에 대한 것을 강조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 전쟁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티케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전쟁의 첫 단계는 기원전 421년에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나 이내 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이 패배로 전쟁은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는데, 보통 ‘데켈레이아 전쟁’ 혹은 ‘이오니아 전쟁’으로 불린다. 이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였으며, 결국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았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역사가 투퀴디데스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미 잘 지적하였듯,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치, 역사 그리고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세를 뒤바꾸었다. 국제 관계 면에서 전쟁 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었다. 전쟁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 전역에 미쳐,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빈곤이 만연하였고,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또 이 전쟁으로 그리스 사회에는 앞서 말한 영향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와 과두정 국가인 스파르타의 전쟁으로 서로의 나라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 내전이 잦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 그리스의 전쟁은 원래 제한되고 정형적인 형태였으나, 나라 사이의 전면전으로 변화하였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도 등장하였다. 전쟁은 종교적, 문화적 금기를 훼손했으며,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내전으로 분류하기도 애매한 이 전쟁은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다른 폴리스는 엄연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제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델로스 섬에 위탁된 자금을 관리하던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이에 스파르타가 내심 불만을 가지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따라서 대립의 소지가 컸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스파르타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가 코린토스 및 메가라를 위협하면서 코린토스 지협을 장악하는 동시에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자 스파르타와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삼십년 평화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상업상 이해관계의 충돌에 있는 식민지 코르퀴라와 동맹을 하게 된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건재한 동안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으며,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28년간이나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투퀴디데스는 전쟁의 시작을 에피담노스에서 벌어진 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에피담노스는 이오니오스 만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시로 약간 특이한 역사를 가졌는데,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의 식민시였지만 식민시의 건설자는 코린토스인인 팔리오스였고 처음 정착민들중 코린토스 인도 몇몇 있었다. 때문에 코린토스인은 에피담노스를 자신들의 식민시로 여기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피담노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에 민중파와 귀족사이에 분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귀족을 추방하는 일이 벌어졌고 반대로 귀족이 에피담노스 주변에 비헬라스인과 연대하는 일이 발생했다.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케르퀴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냈으나 거절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때문에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이번에는 델포이 신탁(에피담노스를 창건한 코린토스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자, 코린토스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을 길잡이로 삼으라는 신탁을 받는다)을 명분으로 코린토스에게 도시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코린토스는 때마침 케르퀴라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에피담노스의 민중파의 요구를 수용해서 군대를 육로로 자신들의 식민시이자 케르퀴라와 에피담노스 사이에 있던 아폴로니아로 파병한다. 결국 양 국가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충돌하게된다.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에 2000명의 중무장보병을 태워서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이에 케르퀴라는 80척의 선단으로 맞서서 악티온 곶에서 싸우게된다. 이 해전에서 케르퀴라는 승리를 거둬서 15척의 코린토스 선박을 파괴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레우킴메 곶에 승전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케르퀴라는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코린토스의 식민시 레우카스와 동맹국인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를 공격한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중 코린토스가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하자 비록 이전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동맹국이 없던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코린토스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두 번의 민회 끝에 케르퀴라가 아테네가 침공을 당할 시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앞에 조건대로 활동할 10척의 아테네 함대를 파견한다. 이후 코린토스와 동맹국은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케르퀴라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에 케르퀴라도 140척의 함대로 대응해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코린토스가 70척의 함대를 파괴해서 매우 우위에 있었는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테네의 10+10척(나중에 증강된 함대)의 함대가 전투에 개입하고 갑작스러운 제3자의 개입에 코린토스는 후퇴한다. 이후 코린토스가 아테네 함대에 사절을 보내 개입한 이유를 묻자 민회에서 결정된 동맹을 설명해주었고 코린토스도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는지 퇴각 그렇게 승패가 정해지지 않고 해전은 끝이 난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이길 공산이 매우 컸었다. 그것은 해군에 대한 경험지식이 풍부한 데다가 스파르타 진영은 해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아티케를 선제공격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를 만나 전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군사적으로 큰 피해를 입어 해군력이 스파르타 해군과 엇비슷한 수준에 이른다. 결국 양측은 군사적으로 대치중에 있어 승패도 없이 10년간 전쟁을 계속하다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맺어져 양측은 휴전 조치를 내렸고 한동안의 평화가 계속된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계속된 전쟁으로 델로스 동맹 국가간의 분열이 계속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분열은 전쟁 중반에서부터 델로스 동맹간에 의견 차이로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 측에 먼저 휴전을 제안했던 이유이기도 했고 전쟁국력을 쏟아 부어야 한 상황이었는데 전쟁 처음부터 아테네 측이 전쟁을 강압한 탓에 델로스 동맹은 분열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동맹국가가 델로스 동맹 탈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경우 아테네로써는 군사적으로 약해질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해 들어오면 제국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파르타 측에 휴전협정을 요청하는 한편, 재차 공격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결국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아테네 측과 스파르타 측에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이내 니키아스 평화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아테네 측은 반격해오는 스파르타를 막기 위해 알키비아데스로 새로운 아테네군 지도자로 추천되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군사정보를 파악하는 한편 군사배치 등을 계획 중이었으나 전쟁 개시 전에 내분이 먼저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적들의 사소한 고발과 모함으로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아테네의 군사 상황을 모두 넘겨버린다. 이 사건이 아테네의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였고, 원정군 전체가 궤멸되었다. 스파르타는 이와 동시에 페르시아와 군사협정 체결을 받아 페르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 흑해의 차단에 나선다. 그리하여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과 군사력을 약화시켰으며. 뒤이어 기원전 404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켜 해상권을 빼앗았다. 이 해전을 끝으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스파르타는 도시의 성벽을 모두 파괴하도록 강요했으며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 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갔는데,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되었고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파르타가 테바이에 패하면서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그리스의 주도권이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으며, 로마 제국(다만 중세 시기 로마는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바뀌었고 라틴계보다는 그리스계가 우세했기에 그리스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결과 델로스 동맹은 해체 수순에 들어갔고, 아테네에서는 공화정이 붕괴하고 스파르타의 지도하에 과두파 정권(삼십인 정권)이 발족하여 공포정치를 하며 숙청을 지휘했다. 하지만 9개월 후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공화정 파 세력이 삼십인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공화정 정권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의 원인이 된 알키비아데스와 삼십인 정권의 지도자 크리티아스 등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에 의해 탄핵당하고, 공개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했다. 기원전 401년경에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2세와 작은 키루스 사이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며, 〈쿠나크사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 참가한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를 썼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지배자인 지위는 잃었지만 유력 폴리스로 계속 존재했다. 그리스 지방을 지배하려는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와 테바이 그리고 이후에는 코린토스 등의 스파르타와 적대적인 폴리스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여러 폴리스가 합종연횡을 반복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항하였다. (예를 들면 코린토스 전쟁,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기원전 379년에 마침내 스파르타가 그리스와 에게 해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해상 교역이 가져올 부가 시민들 사이에 빈부격차를 낳았고, 주로 자작농으로 구성된 병역을 지는 자유민이 700명 정도까지 감소했기 때문에 질높은 강병을 내세운 리쿠르고스 제도(, Lycurgus)는 타격을 받았다. 기원전 378년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대체하는 제2차 해상 동맹을 재결성했다. 그리스 세계는 보이오티아 전쟁으로 만성적인 전쟁 상태에 빠져 서서히 쇠퇴한 반면, 아테네는 기원전 375년의 낙소스 연안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해상의 제해권을 되찾았다 . 기원전 371년 스파르타 군은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군에 패배를 당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잃었다. 일시적으로 패권을 잡은 테바이도 기원전 362년에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메이논다스가 사망하면서 패권을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357년에 테바이와 아테네 사이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356년에는 테바이를 중심으로하는 암피크티온 동맹과 포키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 - 스파르타 연합군 사이에서 제3차 신성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355년에 동맹시 전쟁은 동맹 도시의 승리로 끝났고, 제2차 해상 동맹은 붕괴되었다. 기원전 346년에 제3차 신성 전쟁도 암피크티온 동맹이 승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기원전 347년에 플라톤이 사망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고향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귀국하여, 알렉산더 3세의 스승이 된 것도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테바이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패배를 당하고, 마케도니아의 패권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그리스 세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스파르타만 마케도니아가 주도하는 헬라스 동맹(코린토스 동맹)에 참가하였고, 나중에 아기스 3세가 마케도니아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지만, 기원전 331년 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패했다.) 기원전 336년에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자 일시적으로 헬라스 동맹은 혼란에 빠졌지만, 알렉산더가 권력을 장악했다.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천적 페르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마케도니아 군을 이끌고 동방원정에 나섰다. 오노레 드 발자크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1799년 5월 20일 (공화력 7년 목월 1일) 투르에서 오노레 발자크(Honoré Balzac)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850년 8월 18일에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작가이다.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저널리스트, 인쇄업자로서 발자크는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불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그는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하여 청년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미완성작 역시 창작한 바 있다. 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미지의 걸작≫같은 철학적인 소설, ≪나귀 가죽≫같은 환상소설, ≪골짜기의 백합≫같이 시처럼 아름다운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으나, 여기에서의 사실주의는 발자크 본인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초월한 "가공된" 사실주의이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를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들에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家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 (보들레르) 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인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자신이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지만, 발자크는 1840년과 1848년 당시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주창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생산했다. 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되어야만 했던 그는 저작권의 존중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이자,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은고로 그는 항상 인쇄업, 신문, 은광같은 기적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로 rue Fortunée 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속에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 전 유럽에서 인정받고 읽힌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감정교육≫은 ≪골짜기의 백합≫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고 ≪보바리 부인≫은 ≪서른 살의 여인≫에 영감을 받았다. 광대한 소설 연작속에서 변모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이 인간 희극 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은 에밀 졸라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발자크의 작품들은 여전히 재판되고 있다. ≪계모≫(La Marâtre)는 1906년 영화화되었다. 이후로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며 전 세계에서 만들어졌다. 오노레 드 발자크은 국왕 자문회(Conseil du roi)의 비서, 투르의 식품 장관, 시장 보좌이자 구제원장이었던 베르나르프랑수아 발사(Bernard-François Balssa)와 마레(Marais)구의 장식끈 제조업 가문의 안샤를로트로르 살람비에(Anne-Charlotte-Laure Sallambier)의 아들이다. 베르나르프랑수아 발사는 프랑스 혁명 전 1771년에서 1783년 사이의 파리에서 교섭을 통해 원래 성인 발사(Balssa)를 발자크(Balzac)로 바꾸었다. 베르나르프랑수아는 아내보다 32살 연상이었는데 1797년 결혼 당시에 아내는 18살밖에 안된 나이였다. 그는 무신론자이며 볼테르주의자였으며 아내는 일루미나티와 최면술에 관심을 보인 "사교계를 좋아하는 무도덕한 어머니"였다는 서술이 있다. 1799년 5월 20일에 태어난 오노레는 곧장 보모에게 맡겨졌고 1803년 초에야 집으로 돌아왔다.유년기의 이런 일로 그는 마치 골짜기의 백합에서 그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펠릭스 드 방드네스(Félix de Vandenesse)처럼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받았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형제자매 네 명 가운데서 장남이었다. (오노레, 로르, 로랭스, 앙리) 그는 그보다 16개월 늦게 태어난 누이 로르(Laure)를 가장 좋아했다. 둘 사이에는 결코 변치 않던 복잡하고 상호적인 애정이 있었다. 그녀는 오노레를 여러 차례 도와주었는데, 그와 함께 책을 썼으며 1858년에는 오빠의 전기를 썼다. 1807년 7월 22일부터 1813년까지, 오노레는 방돔의 오라토리오 수도회 중학교에서 기숙했다. 6년동안 방학 때는 물론이고 한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어린 발자크는 모든 장르의 책을 탐독했다. 독서는 그에게 있어 "어떤 걸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갈망의 한 종류 [...] 그의 눈은 일곱 여덟 줄을 한 번에 보았고 그의 정신은 자신의 정신같은 신속함을 지닌 의미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채워주고 상상력을 발달시킨 독서는 그에게 “"생각의 충혈"”에 의한 혼수 상태를 초래하는 결과를 주었다. 이 상황은 1813년 4월을 기점으로 더 악화되었는데, 학교는 그의 건강을 염려해 심각하게 야위어진 그를 가족 곁으로 돌려보냈다. 1814년 7월부터 11월까지 그는 콜레주 드 투르에 통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군 제 1사단의 식품 통솔로 임명되었고, 가족은 [파리]] 마레구 탕플로路 (rue de Temple) 40번가로 이사를 갔다. 청소년 시절 그는 파리 튀렌로 (rue fe Turenne)에 있는 레피트르 (Lepître) 하숙집에서 기숙했고, 그 후 1815년부터 토리니로 (rue de Thorigny)의 강세 신부 학원 (l’institution de l’abbé Ganser)에서 기숙했다. 이 두 하숙의 학생들은 리세 샤를마뉴의 교육과정을 따랐는데, 그보다 성적이 훨씩 뛰어났던 쥘 미슐레가 그의 동창이었다. 1816년 11월 4일, 젊은 발자크는 법학과에 지원했다. 그러면서 그는 개인 교습을 들으면서 소르본에서 강의를 들었다. 그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갔었고 그곳에서 퀴비에와 조프루아 생일레르의 학설에 관심을 갖었다. 이론과 실천은 땔 수 없다고 주장한 아버지로 인해 오노레는 공부를 하면서도, 문학에 관해 취미를 보인 교양있는 사람이자 가족과 친한 사이였던 장바티스트 기요에메르빌 (Jean-Baptiste Guillonnet-Merville) 변호사네 집에서 일해야만 했다. 쥘 자냉 (Jules Janin)이 이미 사환으로 있던 거기서 그는 공증인 사무소 서기의 전문 일을 견습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샤베르 대령≫에서 변호사 견습 생활 속 소란스런 분위기를 창작해내고 ≪인생 초년기≫의 스승 데르빌과 오스카 위송같은 인물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발자크는 그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상징이자 이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많은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요약하고 비교했다. 그는 1819년 1월 4일에 법학과 1차 졸업 시험을 성공리에 합격했으나 2차 졸업 시험은 응시파지 않고 자격증 역시 따지 않는다. 발자크의 아버지는 73세로 은퇴를 앞두고 있었는데, 이 당시 가족은 더 이상 파리에서 살아갈 재력이 부족해서 빌파리시로 이사갔다. 젊은 발자크는 파리를 떠나기 싫어했고, 문학에 몸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1819년 8월 그의 부모는 그를 레디기에르 가"rue de Lesdiguières" 9번지 다락방"mansarde"에 살도록 해줬고, 글을 쓸 수 있도록 2년동안 그를 자유롭게 해줬다. 발자크는 이 시기 그의 인생을 ≪잃어버린 환상≫에서 회상한다. 발자크는 <정신의 불멸에 관한 논문>을 계획하며 말브랑슈, 데카르트를 읽으며 스피노자를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들어 셰익스피어 희곡의 등장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얻으며, 알렉상드랭 시형 1,906행의 비극 ≪크롬웰≫(1820)을 집필했다. 그가 인척들에게 이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반응은 실망적이었다. 학자 프랑수아 앙드리외는 상담을 하며 그가 작가의 길을 계속 가는 것에 대해 낙담시켰다. 이 젊은이는 1820년 4월 출간되어 프랑스에서 크게 성공한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 번역본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역사소설 집필을 향해 나아갔다. ≪사보나티 주교의 작품≫"Œuvres de l'abbé Savonati"이란 작품에서 그는 "카노사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 가상인물인 사보나티 주교에게 헌사되었고, 초등교사 마트리캉트 씨가 이탈리아어로부터 번역했다"고 늘어놓으며, ≪아가티스≫"Agathise "(전체 소실되었음)와 ≪팔튀르느≫"Falthurne"라는 두 편의 글을 모았다. 다른 작품 코르시노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성에서 이탈리아인을 만나 형이상학에 관해 논의하는 네오로"Nehoro"(오노레"Honoré"의 아나그램)라는 젊은 프로방스인을 상상한다. 이 습작들은 머지 않아 버려졌고 그의 생전 출판되지 않았다. 그가 ≪신 엘로이즈≫의 영향을 받으며 1819년 초안을 구상한 서간체 소설 ≪스테니 혹은 철학적 오류≫("Sténie ou les Erreurs philosophiques")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1821년 발자크는 그 스스로 “작은 상업문학 일”이라고 칭한 것을 출판하고자 에티엔 아라고"Étienne Arago"와 르프와트뱅"Lepoitevin"과 협력했다. 스스로 “문학의 조악품”이라 칭한 작품이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릴까 염려한 그는 룬 경 ("Lord R’hoone") (오노레의 다른 아나그램)이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L'Héritière de Birague≫, ≪Clotilde de Lusignan≫, ≪Le Vicaire des Ardennes≫ (출간 금지 당했지만 이 시기 그가 상업적으로 실패하지 않은 유일한 소설이다.)와 ≪장루이≫"Jean-Louis"가 있다. 1822년 그는 앞서 언급된 필명을 버리고 오라스 드 생토뱅 (Horace de Saint-Aubin)으로 바꿨다. 이 이름은 그가 Le Centenaire ou les Deux Beringheld와 Le Vicaire des Ardennes에서 작가명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이 중 후자는 왕이 비난을 했고 출고을 금지당했다. 1823년 그는 ≪아네트와 범죄자≫ (Annette et le Criminel)와 La Dernière Fée ou La Nouvelle Lampe merveilleuse를 출간하나, 서기가 쓴 보드빌*(경가극, 가벼운 희극)과 모트랭 소설의 질 나쁜 모방작인 이 책은 “끔찍했다”. 그는 1824년 11월 7일 폐간될 문예지에 참여했으며 대중의 요구에 맞는 실용적인 다양한 작품들을 집필한다. ≪옷치장의 규범≫(Code de la toilette) (1824) 이후로 그는 냉소적으로, 사회 전체의 상황이 도둑질에 기초해있으며 정직한 이들은 그들 스스로 변호사, 소송 대리인, 공증인들의 속임수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고 단언한, ≪정직한 이들의 규범≫을 출간한다. 그는 <기도에 관한 논문>의 작업을 하며 ≪예수회의 불완전한 역사≫(Historie impartiale des Jésuites) (1824)를 출간한다. 그는 필명으로, 되풀이되는 주제의 Le Droit d’aînesse (1824)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익명의 브로셔를 손에 쥐던 구 체제의 지지자이자 논박을 감행하던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인지도 모른 채 “가명 뒤의 작가”에 대해 분개했다. 1824년이 끝나가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깊은 충돌의 희생양이 된 발자크는 상업문학을 그만 두고, Wann-Chlore의 발문에 삽입한 Jane la Pâle라는 오라스 드 생토뱅의 유작을 집필한다. 그는 훗날 이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를 비웃으며 이 시기 소설에서 보인 문체를 포기했고, <지방의 뮤즈≫(La Muse du département)의 긴 구절에서 그 문체와 줄거리를 우습게 흉내낸다. 이후 그는 1837년에야 출판될, 한 외국인이 이뤄낸 변화에 관한 소설 ≪파문자≫(L'Excommunié)의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간결한 문학과의 단절을 이뤄내며, 역사 소설 연작의 첫 걸음이 된다. 역사에 푹 빠진 발자크는 예컨데 훗날 ≪카트린 드 메디치> (Catherine de Médicis)를 쓴 것처럼, 소설 형식으로 프랑스사를 저술하려는 생각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헛되히 쓰고있단 것을 현저하게 의식하면서도, 어두운 멜로드라마, ≪흑인≫ (Le Nègre)라는 극을 쓰려고도 노력했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푀도라≫ (Fœdora)라는 운문 시를 쓸 계획을 세우려고도 했다. 1822년부터 1827년까지 그가 미숙함에 이를 갈며 출판한 젊은 시절 작품들은, 앙드레 모루아에 의하면, 훗날의 소설들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천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발자크는 자신의 젊은 시절 작품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1837년 벨루아 후작과 그라몽 백작같은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몇몇 작품들을 보충할 수 있었던 오라스 드 생토뱅 전집이란 이름으로 재출간될 떄까지 자신의 전집 출판을 금지했다. 발자크는 그의 필명과의 연을 끊고 그 흔적을 지우고자, 쥘 상도에게 오라스 드 생토뱅의 생애와 불운이란 제목의 작품의 저술을 부탁했다. 자신이 경멸하던 먹고 살고자 쓰는 문학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에 실망한 그는, 출판업자-편집자가 되기로 결정한다. 1825년 4월 19일 그는 몰리에르와 라 퐁텐의 삽화 삽입본을 출판하기 위해, 위르뱅 카넬(Urbain Canel)과 오귀스탱 드롱샹(Augustin Delongchamps)과 협력한다. 또한 그는 구舊 질레&피스 주조소 (fonderie Gillé & Fils)의 장비들을 얻어 인쇄소를 설립한다. 그렇지만 그가 팔고자 한 서적들은 팔리지 않은데다 파산이 그를 위협했다. 1826년 5월 1일, 협력자들에게서 풀려난 발자크는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었다. 납틀을 주조하는 대신, 그는 위계적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서 반대로 1827년 8월 15일 식자공 앙드레 바르비에(André Barbier)와 활자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 일 역시 재정적 실패를 안겨줬다. 1827년 4월 16일 그는 출처에 따라 당대 53,619 프랑에서 60,000프랑에 달하는 부채에 주저앉았다. 1829년 12월 출간된 ≪결혼의 생리학≫은 수많은 정보가 담긴 책 속 인물들을 알아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책은 그의 첫 성공이었다. 사생활 풍경과 ≪나귀가죽≫같은 소설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성공은 그의 숭배자들 특히 에벨리나 한스카로부터 그에게 수많은 편지들을 가져다줬다. 그는 이 영광의 성공을 지속해 나갔다. 해석적인 사상과 학설들에 열광한 발자크는 스베덴보리의 저술과, 마르티니즘과 오컬트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의지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갖던 그는 인간은 "인생에 있어 적절한 힘으로 행동할 수 있고 외부에 그것을 투사할 수 있으며 그의 어머니처럼, 손을 뻗는 것으로 가끔은 치유의 매력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경험을 통해 소설속에 숨겨진 힘을 알았지만, 이것을 사회 변화의 도구로 보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서문에다 이렇게 서술한다. "아, 만약 내가 국가의 의원이었다면, 왕에게 "전하, 모든 이에게 소설을 읽도록 엄명하는 칙령을 내리소서! ..."라고 정면에 대고 말할 것이다, 게다가 알키비아데스의 개의 꼬리같은, 마키아벨리적인 국회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정치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가 찬미해 마지않던, 훗날 1842년 서문에서 헌사를 바치게 된 월터 스콧의 한계를 이해했다. 후에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젊은 작가에게 경고한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월터 스콧의 모조품이 되고 싶다면,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할 거요.” 발자크가 자신의 모델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1822년 찾아낸 라바터 (Lavater)의 ≪관상학을 통한 인간 식별법≫덕이며, 그는 이것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육천 종류의 인간형을 조사하여 외면과 성격상의 특징을 “과학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고 자신한 관상학은 그에게 성경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이 학설은 “모든 사회 집단 연구의 개요”를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이 소설가는 가끔 소설속 등장인물을 대략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이 학설을 사용했다. 심술궂고 속이 좁은 늙은 여인에 관하여 그는 “그녀 이마의 평평한 형태는 그녀의 옹졸함을 드러냈다”며 저술했다. 범죄자에 대해서는 “그의 관상학의 특징은 살인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에 대한 라바터의 단언을 확증한다. 그의 앞니는 엇갈려 있었다.”고 썼다. 다른 데서는, 그는 은행가에 관해 “급하게 결정하는 버릇은 눈썹이 각 전두엽을 향하여 높아지는 것에서 보인다. 입술은 근엄하고 빽빽하지만, 업무로 인해 숨겨진, 아마도 억눌린, 하지만 여자와의 교제로 재생할 수 있는, 가려진 좋은 점을, 탁월한 정신을 나타낸다”고도 묘사한다. 그가 편집자로서 파산에 처하자, 발자크는 글 쓰는 일로 돌아온다. 1828년 11월, 정치-군대 소설 ≪올빼미당≫을 쓰기 위해 마음의 평온과 필요한 자료들을 찾으며, 푸제르 (Fougères)의 폼므뢰 (Pommereul) 장군네서 묶게된다. 그는 특히 이 작품을 다듬었는데 왜냐하면 독서 클럽에서 읽힐 목적으로 출판된 그의 전작들의 간행 판본인 12절판보다 더 품격있는 8절판으로 간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소설은 1829년, ≪마지막 올빼미 혹은 브르타뉴≫(Le Dernier Chouan ou la Bretagne)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된다. 이 책은 발자크의 작품 중 저자명이 오노레 발자크 (Honoré Balzac)인 첫번째 책이다. ≪나귀 가죽≫은 인간 희극의 대서사가 구상된 창조적인 시기의 시작을 알린다. 발자크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철학 연구≫는 이 작품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루이 랑베르≫ (1832), ≪세라피타≫ (1835)와 ≪절대의 탐구≫ (1834)가 ≪나귀 가죽≫의 뒤를 잇는다. ≪풍속 연구≫ 중 한 범주를 차지하는 ≪사생활 풍경≫은 ≪고브세크≫(1830)와 ≪서른 살의 여인≫(1831)으로 시작한다. 적어도 1832년 쯔음 발자크가 가족들에게 알린 이러한 "인간 희극"의 체계는 ≪샤베르 대령≫ 등으로 구성된 파리 생활 풍경으로 계속된다. 이와 동시에, 생시몽적인 경제 사회 체계를 표현하며 그는 ≪투르의 신부≫(1832)와 ≪외제니 그랑데≫(1833)으로 시골 생활 풍경을, ≪시골의사≫(1833)으로 전원 생활 풍경을 시작한다. 아포스테리오리하게 작품들을 간단히 엮는 것을 떠나, 본능적으로 발전된 그의 거대한 구상이 시작됐다. 발자크는 자신이 대성당과 비교한 거대한 작품의 계획을 구상했다. 인간 희곡은 한 시대 전체, 모든 사회 계층과 일생의 경과를 볼 수 있게끔 편성되어야만 한다. 퀴비에와 Geoffroy Saint-Hilaire의 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동물에 종種이 있듯이 사회적 종이 존재한다”고 단언했으며 후자가 전자보다 더 다양한데 그 이유는 “군주, 은행가, 예술가, 부르주아, 사제, 빈자의 관습, 의복, 말투와 사는 곳”이 전혀 다르고 문명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발자크는 그가 계획한 소설 전서에 반드시 세가지 형태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바로 남자, 여자, 물건, 즉 그들의 생각, 최종적으로 인간과 인생을 보여주는, 사람과 물질적인 것의 묘사를 지녀야 한다는 결론이다. 1834년부터 쓰인 ≪고리오 영감≫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구간을 나타내는데, 이 작품을 기점으로 발자크가 인간 희극의 주요 특징, 등장인물을 다른작품에서 등장시키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간 희곡은 한 등장인물이 여러 작품속에서 등장한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전체적인 윤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민중의 실제 모습’와 겨뤄야 한다는 인간 희극 소설 연작의 목표와도 연관이 된다. 그런 고로 실제 인생처럼, 우리가 알던 이들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하다가 다시 만나듯, 한 작품에서 주인공이였던 인물이 몇 년 후 다른 작품에 조연으로 다시끔 등장한다. 그 결과, 실제 인생속에서 어떤 것도 끝이 나지 않는 것처럼, 이 소설은 “일상 생활에서 모든 이들에게 남아있는 신비로운 무언가를 복구하는”데 있어서 두각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프리퀼”이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것을 노리며, ≪이브의 딸≫에서 중년으로 그려졌던 배우 플로린의 젊은 시절을 ≪잃어버린 환상≫에서 볼 수 있듯, 전작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만났던 이의 젊었을 적 모습을 다른 소설에서 보여준다. 인간 희극 계획이 진행되면서, 집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1835-36년 쓰인 ≪골짜기의 백합≫, 1837년의 ≪세자르 비로토의 영화와 몰락의 역사≫, 뒤이어 1838년에 ≪뉘싱겐 가≫, 1839년에 ≪시골의 신부≫와 ≪베아트리스≫, 1841년에 ≪위르쉴르 미루에≫와 ≪미지의 사건≫, 1842년에는 ≪가재잡이 여인≫이 쓰였다. ≪잃어버린 환상≫은 1837년부터 1843년에 걸쳐 쓰였는데, ≪창녀들의 영광과 몰락≫ 역시 1838년부터 1847년에 걸쳐 쓰였다. 이후 ≪종매 베트≫ (1846)과 ≪사촌 퐁스≫ (1847)이라는 두 권의 걸작이 등장했다. 작품의 전체적인 계획은 시간이 갈수록 새로 짜이고 증보되었는데, 1845년까지 145편이 예정됐었고 85편은 이미 쓰였다. 하지만 발자크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계획을 축소해야만 했다. 결국 작가 살아생전 인간 희극은 총 90편이 출판되었다. 천재적인 관찰력을 가진 발자크는 중요한 것들을 문서에 붙여놓았고 소설 속 줄거리에 나오는 장소들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분위기를 더 살리기 위해 그 장소에 가거나 이야기 속에 나올 마을의 사람들을 인터뷰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된 디테일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으며 작중 무언가를 묘사할 때의 그의 문체는 환희의 지경이었다. 이것은 발자크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왜 그렇게 작품 속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가, 로망푀유통을 쓰던 외젠 쉬가 왜 발자크와 겨룰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는 상세하게 도로를, 집의 외관을, 마을의 지형을, 인물들의 거동을, 목소리와 외모의 미세한 차이들을 묘사한다. 동시에 그는 무대 설계자이자 의상 제작자이며 연극 감독이다. “시공간에 대한 매우 특출난 관리로 발자크는 영상 (영화적이라는 뜻 역시 있음)cinématographique 문학을 발명했다.” 집 안의 가구와 골동품 모음, 디테일의 한계까지 묘사한 인물들의 의상ー가두리 장식, 천, 색깔같은ー의 세밀한 묘사는 마치 무대 설계자, 더 나아가 영화감독의 작업과도 같다. 인간 희극의 작가는 무대를 거의 광적인 정성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소설을 극장에 옮기는 연출가들의 열광을 설명해준다. (오노레 드 발자크 작품의 영화화 참고) 그는 감옥 기능, 행정 업무, 사법 체계, 주식 투기 기법, 독점으로 얻는 시세차익, 오페라 밤 공연과 음악의 효과 역시 동등하게 신경쓴다. 그가 쓴 소설과 단편 전체를 통해 발자크는 후대 세대를 위해 일람표를 작성하는 그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다른 고전 작가들이 무시한 일상생활의 실제성에 열중한다. 세밀함과 풍부한 관찰력덕에, 인간 희극은 오늘날 사회사적 증거의 가치를 갖고있으며 1815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 부르주아의 출세를 보여준다. 이같은 이유로, 우리는 그를 사실주의 작가로 본다. 하지만, 이런 발자크의 천재성이 도를 넘었다며 보들레르는 규탄한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발자크의 “모든 것을 보고, 보여주고, 분별하고자 하는 과도한 야망에서 출발한 세부묘사에 대한 대한 그의 경이로운 애정”을 인정한다. 많은 비평가들은 “넘칠듯한 상상과 끝없는 풍부함, 셰익스피어 이후로 존재하지 않은 가장 풍요롭고 촘촘한 창조의 상상”이라며 발자크에게 경의를 표했다. 극한까지 밀어붙인 세부 묘사의 정확성으로 발자크의 사실주의는 격렬해지며 시각 이미지로 바뀐다. 어떤 이야기들은 환상적인 영감의 소관이나 다른 이야기들은 신비롭고 난해한 영감에 둘러쌓여있다. 사회의 초상을 만들며 발자크는 동시대에 영향을 끼치고자 했는데, 1833년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는 유럽문학의 1류인 바이런, 괴테, 스콧, 호프만같은 위치에 서있고자 했다. 인간 희극 문서의 해당 란 참고. 발자크는 작중 인물들을 모아놓은 진열실에서 인물을 꺼내와 이야기 속에다가 넣고, 그에게 단편을 요구하던 출판사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거의 항상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업했다. 발자크의 작업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 앙드레 모루아는 ""양식장에 있는 송어들처럼, 필요할 때면 그는 그것을 집었다. 가끔 그는 바로 좋은 결과를 보지는 못했는데 [...] 책이 자기 마음에 안들면 그는 그것을 다시 양식장에다가 던져버렸다. 그는 다른 것을 잡으러 간다.""며 수백편의 소설들이 그의 생각속에서 흐르고 있음을 생각했다. 그는 소설의 제목을 바꾸거나 아니면 작중 인물의 이름을 바꾼다거나, 단편으로 먼저 출판된 글을 장편 소설 속에 합치며, 전작들을 개작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결정본에서 장 구분을 삭제하기도 했다. 자신이 설립하고자 했던 적발 협회를 통해 문학과 정치 세계의 거장이 되는 꿈을 가끔씩 꾸던 발자크는 언론에 사로잡혔는데 왜냐하면 언론이란 것이 바로 현실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동시에 언론인이라는 직업이 작가를 대표한다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대자면, 명령의 구속 아래 글쓰기를 강요받은 언론인들은 마치 “전쟁 속 병사처럼 전진하는 의견들”과 같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환상≫에서, 그는 뤼시앵 드 뤼방프레가 “언론계에 도전할 것”이라며 선언할 때 소모임의 현인들이 말하도록 한다. 쥘마 카로 (Zulma Carraud)는 발자크의 누이동생 로르의 어릴적 친구였다. 이 “고귀한 도덕적 가치의 여인, 강인한 금욕주의자”는 이수됭(Issoudun)에서 살고있었으며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다. 발자크는 그녀를 1818년부터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1824년에 발자크의 누이 로르가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둘의 만남을 주선해주기 전까지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시절부터 편지를 주고받았겠지만, 첫 해의 편지들은 소실되었다. 이 편지에서 쥘마는 작가의 가장 가깝고 지속적인 친구 중 한명이다. 그가 채권자들로부터 뒤쫓기고, 과로하고, 낙담하고, 아픈 시절 그녀의 집으로 도피했다. 그녀는 공화파 이념을 그에게 상기시켰고 사람들의 고통에 더 공감할 수 있도록 초대했다. 그녀는 엄청난 부자가 아니었지만, 쉬지 않고 그를 돕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발자크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 여인들 중 하나였다. 1825년, 발자크는 아브랑테스 공작부인의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발자크보다 15살 많았던 이 여성은 본인의 견문과 그와의 관계를 통해 그를 매료시켰다. 나폴레옹에 의해 공작 신분에 오른 쥐노 장군의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왕당파 사회에 드나들기 전, 제국의 호화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메테르니히 백작의 정부였다. 자신의 보석과 가구를 팔 수 밖에 없었던 그녀는 베르사유로 소박하게 이주한다. 발자크는 자기 여동생의 친구인, 베르사유에 살고 있던 여인을 통해 아브랑테스 공작부인과 만났다. 발자크는 그녀에게 홀렸다. 공작부인은 처음엔 그에게 우정만을 주었으나 나중가서 이 우정은 서로간의 사랑으로 바뀐다. 공작부인의 이름은 로르였지만, 발자크는 그녀를 오로지 마리라고만 불렀다. 그녀는 자신이 만난 인물들과 성 안의 삶에 대한 정보를 발자크에게 주었다. 한편으로 발자크는 그녀에게 회고록을 쓰는 것에 대해 조언하며 그녀가 쓴 글을 교정해주며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아브랑테스 공작부인은 발자크가 그녀에게 헌정한 소설 ≪버려진 여인≫에서 보세앙 자작부인의, ≪La Maison du chat-qui-pelote≫에서 카릴리아노 공작부인의, 페리시테 데 투슈의 몇몇 성격의 모델이 되었다. 발자크가 1829년 릴아담 근처의 마플리에에서 ≪La Maison du chat-qui-pelote≫을 집필하고 있을 때, 아브랑테스 공작부인은 탈레랑페리고르와 함께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831년 발자크는 남편을 멀리하는 오로르 뒤드방 (Aurore Dudevant)을 알게 되었고, 파리에서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녀에게 나귀가죽을 읽게 했는데, 그녀는 이 책에 열광을 보였다. 1838년 2월 발자크는 노앙 성 (château de Nohant)에서 “조르주 상드 동지”를 찾는다. 6일 동안 그들은 그 곳에 머물렀으며, “오후 5시부터 아침 5시까지” 잡담을 하며 밤을 보냈다. 그녀는 그에게 “물담배와 라타키 (터키의 향료담배)”를 피게 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담배가 “커피 마시는걸 그만두게 하고 일하는게 자극이 될만한 것을 늘려줄 것”이라고 희망했다. 발자크는 지속적으로 그녀가 파리에 머물며 쇼팽과 사귀고 있던 살롱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들은 소설 구조나 인물 심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고 그녀는 가끔가다 Les Galérienset Béatrix나 les Amours forcé처럼 그녀가 다룰 수 없던 줄거리를 그에게 주었다. 그녀 역시 한 모음집에 발자크가 쓴 이야기가 너무 길어 출판사가 받아들이지 않던 원고의 작가가 되기도 했다. 발자크는 그녀를 ≪두 젊은 유부녀에 관한 기억≫에 헌사했다. 작가의 동의로 그녀는 ≪베아트리스≫에서 그가 실제하고 동일하게 묘사한 몇 안되는 여성 등장인물인 페리시테 데 투슈 (Félicité des Touches)의 모델이 된다. 한스카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자크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우정 이외 다른 것이 있었음을 전면 부정한다. 1831년부터 발자크는 훗날 1847년 로시니와 결혼하기 전에 외젠 쉬의 약혼녀였던 “아름답고 지적인 화류계 여자 (courtisane)”, 올림프 펠리시에 (Olympe Pélissier)의 살롱에 자주 다녔다. 그는 그녀와 짧은 관계(brève liaison)를 가진다. 플로린(Florine)과 튈리아(Tullia)같은, 인간 희극을 관통하는 화류계(demi-mondaines) 인물들은 그녀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 ≪나귀 가죽≫의 방 안에서의 장면은 올림프네에서 발자크 자신이 행동했던 장면일 것이지만, 그녀는 푀도라 (Fœdora)와 연관있진 않는데, 그녀는 그와 항상 친밀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갖는다. 발자크는 계속 그녀의 살롱에 드나든다. 단편의 푀도라에 관해서 발자크는 편지에서 “나는 그들의 내면에 들어가보지 않은 채 그저 알고만 있던 두 명의 푀도라를 만들었다. 이 관찰은 자신감을 넘어 내게 충분했다.”며 명확히 말했다. 1832년이 시작할 무렵, 팬들이 그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들 가운데서 발자크는 문예 살롱을 주관하던 이마가 높은 적발의 미녀로 삼촌이 왕당파의 지도자였던 카스트리 공작부인 (duchesse de Castries)의 것을 읽었다. 바로 관심을 갖게 된 발자크는 그녀를 만나게 되고, 외모와 내면에서 그녀를 모델로 한 ≪서른 살의 여인≫의 자필 원고를 그녀에게 보여줬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라면 쩔쩔매던 발자크는 엑스레뱅 (Aix-les-Bains)에 있는 그녀의 성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는 며칠간 글을 쓰며, 나중에 지속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될 제임스 로스차일드 남작을 만나게 된다. 그 후 그는 같은 해 10월 제네바에 그녀와 동행하게 되지만, 그녀와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돌아오고 "dilecta사랑을 통해 위로받는다." 그는 랑제 공작부인에서 사랑으로부터 받은 실망을 증언한다. 그녀 또한 ≪디안 드 모프리뇌스≫Diane de Maufrigneuse의 등장인물로 재등장한다. 영국인 혈통을 가진 카스트리 부인은 ≪골짜기의 백합≫의 등장인물, 아라벨 두들리Arabelle Dudley 부인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발자크는 그녀가 자기 지위에 맞지 않는 익살극이라 평한 ≪유명한 고디사르≫를 그녀에게 헌정하는데, 그녀는 “포부르 생제르맹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가끔 만났으며, 그를 메테르니히와 인터뷰할 수 있게끔 주선해준 것은 바로 그녀이다. 1833년, 그는 "천국의 꽃이 떨어진 것만 같은 순진한 창조물, 조용히 내 집에 와서, 편지나 정성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일 년만 날 사랑해줘! 난 평생 너를 사랑할게”라고 말한 친절한 사람"과 비밀스레 정사를 나눴다. 이 여인은 바로 마리 뒤 프레스네 (Marie du Fresnay)였는데 별명은 마리아로 24살에 발자크의 딸 마로카롤린 뒤 프레스네(Marie-Caroline du Fresnay)를 임신 중이었다. 발자크는 1839년 이 젊은 여인에게 영감을 받은 히로인이 등장하는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그녀에게 헌사하였다. 그는 또한 유언에 자기 딸을 언급했다. 발자크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프러기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1846년 10월 13일 그는 에벨리나 한스카의 딸, 안나 한스카의 결혼을 도우려고 비스바덴으로 갔다. 하지만 파리와 프랑스 국내를 제외한다면 국외의 일부 지역만이 그에게 영감의 원천을 주었는데, 오직 이탈리아만이 그가 콩트와 철학 소설같은 그의 여러 글에서 표현한 정렬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오히려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영감을 주었다. 1836년 발자크는 그와 친분이 있던 귀도보니비스콘티 가의 대리인 자격으로서, 모호한 상속문제를 해결하고자 이탈리아 토리노로 갔다. 그는 젊은 남성으로 변장한 카롤린 마르부티와 동행했다. 여행은 짧게 끝났다. 1837년 2월 귀도보니비스콘티 가는 그에게 다른 임무를 위임했는데 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과 단편들은 크게 세 개로 묶을 수 있는데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로 묶을 수 있다. 풍속 연구는 다시 사생활 풍경, 지방 생활 풍경, 파리 생활 풍경, 정치 생활 풍경, 군대 생활 풍경과 전원 생활 풍경으로 나뉜다. 발자크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자기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남자와 사랑없는 결혼을 한 발자크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양육을 맡기는가 하면, 겨우 여덟살 때 기숙학교로 보내진 뒤 6년 만에 쇠약해진 심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이러한 ‘불행한 기혼녀’와 그 여성이 지닌 냉정한 모성은 발자크 소설의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파리에서 열여섯 살부터 법률 공부를 하면서 공증인 사무실의 서기로 일했으나 스무 살이 되던 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가족에게 1년의 유예기간을 얻어 레디기에르 가의 누추한 다락방에서 예비작가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발자크가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기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희곡작가가 되려던 처음의 의도를 포기하고 가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대 초반, 스물두 살 연상의 베르니 부인을 만나 연인인 동시에 문학적 조언자로서 오랫동안 그녀를 의지처로 삼게 된다. 이 이외에도 발자크는 쥘마 카로를 비롯하여 다브랑테스 공작 부인, 카스트리 후작 부인 등 많은 여인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많은 작품의 여주인공에게서 그 여인들의 단편적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십대 중반에 시도한 인쇄업의 실패로 많은 빚을 지게 된 발자크는 평생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은 ‘발자크의 집’이란 이름으로 박물관이 된, 당시 발자크가 기거했던 파시의 집 뒷문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오후 네시에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부터 다음날 낮까지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소설을 썼던 발자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하녀이자 정부였던 브뤼뇰 부인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포도주 박물관’으로 통하는 뒷골목으로 도망치곤 했던 것이다. 포도주 박물관의 한 켠을 이루고 있는 동굴에 등불을 든 발자크 상이 서 있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상하기 힘든 작업의 결과 발자크는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1830년 무렵부터 마지막 소설 ≪가난한 친척≫을 발표한 1848년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길 수 있었다. 프랑스 낭만주의가 꽃을 피운 시대에 사실주의의 문을 연 발자크는 1841년 그동안 자신이 써낸 모든 작품과 앞으로 써낼 작품의 목록을 가지고 {인간희극}이란 총서를 기획한다.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를 지닌 하나의 완전한 건축물을 꿈꾸었던 그는 뷔퐁의 박물학의 영향을 받아 여러 종의 동물들로 분화된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각자가 속한 활동 영역에 따라 여러가지 전형적인 인간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등장인물만 2천여 명이 넘는 ≪인간희극≫은 대혁명 직후부터 1848년 2월 혁명 직전까지 프랑스 사회의 파노라마를 정치, 경제, 사회적 영역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또한 파리 뿐만 아니라 지방과 시골까지 아우르면서 어느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 발자크적 야심의 산물이다. 비록 계획했던 작품들로 온전히 채워지진 못했지만 ≪인간희극≫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역작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외제니 그랑데≫를 포함하여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마법 가죽≫, ≪루이 랑베르≫, ≪사라진 환상≫, ≪샤베르 대령≫, ≪세라피타≫, ≪미지의 걸작≫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고리오 할아버지> <골짜기에 핀 백합> <사촌 누이 베트> 등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빚에 쫓기는 형편과는 별개로 스스로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발자크는 글을 쓰기 위해 하루에 40잔 가까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런 극단적인 과도함은 그에게 돌이키기 힘든 심장질환을 안겨준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열정적인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발자크의 삶은 작가적 재능을 위해서도, 또 어렵게 얻은 사랑을 위해서도 지나치게 빨리 소진되어 버린다. 익명의 여성독자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한스카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8년이나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를 넘어 발자크 문학세계의 세세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녀와 결혼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850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알바 롱가 알바 롱가(Alba Longa)는 고대 로마의 로물루스 신화에서 언급되는 지방의 명칭이다. 이 지방 이름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는가 라는 물음은 고고학계에서 한동안 토론되었으며, 오늘날 알바 롱가는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지방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리비우스의 건국사("Ab urbe condita" 1.1-1.3)에 따르면 트로이의 장군 아이네아스("Aeneas")는 트로이가 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의해 함락된 후 (→ 트로이 전쟁), 그를 따르는 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로 피신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트로이 부족이 정착한 곳에는 이미 이탈리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얼마안가 두 부족은 정복전쟁을 하였다. 라티누스("Latinus")를 족장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원주민은 트로이 부족에게 패배한 후 이들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아이네아스는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Lavinia")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트로이 부족의 새로운 도시 이름을 처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Lavinium")이라 불렀다. 아이네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라비니움을 떠나 로마의 남동쪽에 위치한 알바 산기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알바 롱가라 불렀다. 로마의 초기 건국사는 분분적으로 전설적 색체를 띠고 있다. 특히 트로이의 후손과 이탈리아 원주민의 융화와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로마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잘 그려져 있다. 호메로스 호메로스(, , 기원전 8세기경)는 고대 그리스 중 그리스 암흑기 말기에 활동했던 유랑시인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및 그밖에 여러 시의 작가이며, 맹인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정확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고,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어식 이름인 호머(Homer)로도 알려져 있다. 히오스 섬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의 후손이라 하나, 그의 가계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20세기 초반까지 호메로스는 교과서에 약 기원전 750년경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유랑시인으로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의 작품이라고 나왔었다. 그러나 고전문헌학계에서는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에 관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호메로스에 관해서는 예부터, 특히 18세기 이래 학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그 쟁점은 호메로스라고 하는 시인이 있어,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는가의 여부이다. 처음에는 실존을 인정했으나, 근대에 와서의 단서는 독일의 고전학자 볼프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가운데 모순이 굉장히 많다는 것(한 번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영웅이 후에 다시 전사하는 등)에 착안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논쟁이 극단으로 나가 드디어는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실재하지 않았다. 다만 짧은 시가 있었을 뿐으로 이것이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집대성되어 호메로스의 시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시 호메로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견해가 유력해고 있다. 《일리아스》로 하여금 세계 최대의 서사시가 되게끔 만들고 있는 예술적 통일은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논쟁은 호메로스의 정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 그리고 이 작품들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과 토론에 관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고전과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연구하는 호메로스학 학자는 17~20세기에 특히 많았다. 호메로스 논쟁의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이 실존인물 논쟁은 고대 그리스 시절인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 학자들도 제기한 바 있다. 이 논쟁은 아래와 같다. 이 질문들의 대답 여하에 따라 몇가지 고고학적 해답의 가능성이 더해진다. 일리아스 《일리아스》()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다. '일리아스'란 이름은 '일리온의 노래' 란 뜻이다. 오디세이아(Odysseia)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와 후대 서양의 문학예술과 문화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는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다. 주제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51일간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되어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관여하는 올륌포스의 신들, 장수들의 이야기 등을 위주로 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서 시는 24편으로 나뉘며, 그리스의 대표적 시운중의 하나인 6각운(Hexametre)으로 작곡되었다. 각 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리스 문학의 대부분이 운명론에 따른 체념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정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광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가 작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는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호메로스가 후대에 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밀먼 페리는 "호메로스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그의 서사시의 구조를 보면 구전이 되기 좋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 호메로스가 혼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문자화 했다고 본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모욕한 죄과로 아카이 진영(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전염병이 번진다. 총지휘관 아가멤논은 공개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의 애첩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음로써 또한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게 된다.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트로이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를 은밀히 찾아가 아카이아군이 패배하도록 요청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낸다. 아가멤논은 제우스가 보낸 꿈에서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것을 본다.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가멤논은 장군들과 토론 끝에, 전체 군사회의를 소집한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열띤 논쟁을 벌이며,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정복을 포기하고 귀향하자는 의견에 마음이 솔깃해지지만, 신들의 영향하에 있는 오뒷세우스의 강한 반대와 건의에 따라 트로이군과 빨리 결전을 치르자는 데에 합의를 본다. 시의 후반(484-877 이른바 전함 카탈로그)은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아군과 트로이아군의 지방, 도시 그리고 지휘관들을 노래하고 있다.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은 들판으로 나가 전투를 위해 진을 친다. 그러나 트로이아의 장군 파리스는 홀로 양 진영 사이에 나서서 자신과 단판을 할 아카이아 용사는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아카이아군 진영에서 마땅한 도전자를 찾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헬레나를 망루에 불러내어 아카이아의 장군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파리스는 헬레나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결투을 벌인 끝에 패배하며, 아프로디테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신의 강요로 파리스가 쉬고 있는 침소로 가 그를 약간은 핀잔을 주면서 위로한다. 제우스를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트로이전쟁의 앞날에 관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한다. 아카이아군의 편을 드는 헤라의 요구로 아테나는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힘으로서 이 전에 맺은 협약을 깨친다. 트로이아군의 간계에 분격한 아가멤논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아카이아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장군들이 이끄는 부대의 열병식을 끝마친 후 아카이아군은 드디어 트로이아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디오메데스의 무공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아카이아군은 트로이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디오메데스는 선두에 서서 만나는 졸개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메넬라오스를 부상시킨 판다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이네아스와 대결한다. 먼저 창을 던져 판다로스를 단숨에 꺼꾸러뜨린 다음 아이네아스에게는 바윗돌을 집어던져 기절을 시킨다. 죽을 지경에 놓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지만 성난 황소 같은 디오메데스에게 손에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아이네아스는 결국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며, 아폴론은 아테나가 잠시 전장을 비운 틈을 타 트로이아군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또한 아레스가 트로이군의 편을 듦으로써 아카이아군이 궁지에 몰린다. 이를 지켜본 헤라는 다시 아테나를 시켜 아카이아군을 돕도록 한다. 다시 디오메데스는 아테나의 힘을 등에 업고 아레스와 맞붙어 싸운다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틈에 헥토르는 동생 헬레노스의 간청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 아낙네들로 하여금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도록 권유한다. 이 사이에 전장에서는 트로이아 장군 글라우코스와 아카이아 장군 디오메데스는 서로 족보를 묻고는 서로의 조상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우정의 표시로 교환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성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동생 파리스를 만나 핀잔을 준 뒤,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헤메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성문 근처에서 만나 눈물어린 이별의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이다. 아테나와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아카이아의 가장 용맹한 장수와 일대 일로 싸우게 부추긴다. 텔라몬의 아들, 큰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일대 일로 결투를 벌인다. 밤이 되어 양쪽 군대가 갈라지고 네스토르가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휴전을 맺고 아카이아 인들의 선단 주위에 방벽을 쌓도록 권유한다. 제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들에게 이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에 다른 신들도 아카이아 군이나 트로이군을 도와주지 못한다. 제우스는 이데산으로 가서 아카이아인들에게 패배를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내린다.트로이군은 승리하고 밤이 되자 승리에 도취된 헥토르는 아카이아군의 진영앞에서 야영을 한다. 전세가 많이 불리해지자 아카이아 군은 전쟁을 접고 귀국하려고 한다. 아가멤논은 귀국을 하려고 하지만 디오메데스와 네스토르는 이에 반대한다. 아가멤논은 네스토르의 조언에 따라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킬레우스와 화해하려고 하였으나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장군들을 깨워 파수병들을 돌아보게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군의 정탐군인 돌론을 죽이고 트로이군의 진영에 몰래들어가 트로이군을 정탐한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우스는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라키아인들의 진영을 급습하고 말들을 빼앗아 돌아온다. 새로운 날이 밝자, 아가멤논은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는 용감히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디오메데스도 역시 부상을 입고 선단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오디세우스가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아이아스가 그를 구해준다. 역시 오디세우스도 부상을 당하고 아카온과 에우리필로스도 부상을 당해 선단으로 물러난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싣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보내 네스토르가 싣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아카이아군은 트로이군에 쫓겨 방벽안으로 밀려들어가고 헥토르는 방벽을 공격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이에 맞서서 항전을 독려한다. 리키아의 두 장군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방벽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당해 물러가고 사르페돈이 격국 방벽을 허물고 만다. 헥토르가 돌로 쳐서 방벽의 문을 부수자 트로이군은 방벽을 넘어 문을 지나 물밀듯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쳐들어 간다. 아카이아 군의 선단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 몰래 아카이아인들을 도와주며 격려한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헥토르를 맞아 두 아이아스가 무너진 방벽 근처에서 선전하고 전선의 왼쪽에서는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아이네이아스와 파리스 등을 맞아서 분투한다.헥토르는 풀리다마스의 조언에 따라 군사들을 한쪽으로 집결시켜서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대접한 다음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다가 부상당한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마주친다. 아가멤논은 철군을 주장하는데 오디세우스가 반대한다. 한편, 헤라는 잠의 신의 도움으로 제우스를 이데산에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이틈을 타서 포세이돈은 아카이아 인들을 도와주는데 큰 아이아스가 던진 돌에 헥토르가 맞고 부상당하여 물러나게 되고 이를 기회로 아카이아인들이 공세를 시작하여 트로이군이 후퇴한다. 작은 아이아스는 큰 공을 세운다. 제우스는 잠에서 깨어나자 헤라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보내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내어 그를 회복시키게 한다. 헥토르가 회복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아 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아카이안인들은 결국 맨 앞쪽의 선단으로 부터 후퇴하기 시작한다. 큰 아이아스는 해전(海戰)에 쓰는 긴 창을 들고 홀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트로이 군은 맨 앞쪽에 있던 프로테실라오스의 배애 불을 지른다.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출전하여 트로이 군을 선단에서 몰아낸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트로이군을 선단에서 몰아내기만 하고 돌아오라고 일렀으나 파트로클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도망하는 트로이군을 쫓아진격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추격전에서 사르페돈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 군과 트로이군과의 일전일퇴의 격전이 벌어진다.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에게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입고는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를 보내 파트로클로스의 전사소식을 아킬레우스에게 알리게 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분전하는 동안 메넬라오스와 메리오네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와 귀환한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분노한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주도록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한다. 헥토르가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다시 탈취하려고 공격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크게 고함을 지르자 트로이 군이 놀라서 도망친다. 밤이 되자 풀리다마스는 헥토르에게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성 안으로 철수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헥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아카이아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부탁한 아킬레우스의 새 무장을 만들어준다. 날이 밝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새로운 무장을 가져다 주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모든 아카이아 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한다. 오디세우스의 권고에 따라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아침을 먹고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출정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의 준마 크산토스가 헤라의 힘을 입어 인간의 음성으로 아킬레우스가 오늘은 승리하지만 결국 전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시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당장 트로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여러 신들이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아폴론이 아이네이스를 부추겨 아킬레우스에게 맞서게 한다.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들이 응원하는 측으로 갈라선다. 아이네이스가 위험해지자 포세이돈은 그를 구해준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싸움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헥토르는 이를 무시하고 동생 폴리도로스의 죽음에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에게 맞선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는데 아폴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아킬레우스는 도망치는 트로이군을 크게 무찌른다. 트로이 군의 일부가 스카만드로스 강에 빠져 헤어나오니 못하는데 아킬레우스가 칼을 빼들고 뒤쫓아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제물로 삼기위해 12명의 젊은 군인을 생포해 온다. 강의 신이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를 들판으로 추격하나 헤파이스토스가 불로 강의 신을 물리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군을 성안으로 모두 몰아넣는다. 헥토르는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문앞으로 나가 아킬레우스와 일전을 기다린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쫓고 쫓기다가 트로이 성을 세바퀴나 돈다. 제우스는 헥토르의 파멸을 결정하고 아폴론은 헥토르를 도와주지 못한다. 아테나가 데이포보스로 변하여 헥토르로 하여금 아킬레우스에게 대항하도록 유도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돌아간다. 헥토르의 부모와 아내는 성벽 위에서 통곡한다. 파트로클로스의 혼령이 밤에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나 자신의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청한다. 아침이 되자 아카이아 군은 나무를 해와서 파트로클로스를 화장한다. 그 다음날 화장터 위에 봉분을 만들고 아킬레우스 주최아래 장례 경기가 벌어진다. 아킬레우스가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나서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돈다. 제우스는 테티스를 보내어 헥토르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고 돌려주라고 명령하면서 이리스를 프리아모스에게 보내어 몸값을 내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프리아모스는 제우스가 보내준 메시지를 믿고 길을 떠나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한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인도하고 헥토르의 장례기간동안에는 휴전하겠다고 약속한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거둬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적도좌표계 적도 좌표계는 망원경을 통한 천체 관측에서 사용되는 좌표체계이다. 적도 좌표계에서는 측량되는 각도로는 적위와 적경 그리고 시간각이 있다. 적위는 지구의 위도와 비슷한 개념이다. 천구의 적도를 0º, 천구의 북극을 +90º, 천구의 남극을 -90º로 둔 각도로 천체를 지나는 시간권을 따라 그 천체까지 잰 각이다. 적경은 춘분점을 기준으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반시계방향으로 잰 각이다. 적경은 춘분점으로부터 동쪽으로 0~24시로 나타낸다. 시간각은 남중 자오선에서 천체가 속한 시간권까지 천구의 적도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잰 각을 말한다. 항성시를 구할 때 주로 사용하며 남중한 별의 시간각은 0시이다. 르네상스 르네상스(, , ) 또는 문예 부흥(文藝復興), 학예 부흥(學藝復興)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말한다.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국가, 즉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초 이 운동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의 원동력이 되어 교회 개혁과 학문적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어로 Il Rinascimento(Rinasimento)라는 어원을 가진 이 말은 프랑스 역사가인 미슐레가 프랑스어인 Renaissance라는 말로 확립시켰으며 이것이 영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원 의미는 “재생”(再生, rebirth)이라는 뜻으로 르네상스라는 개념에 포함된 재생이라는 의미는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전 텍스트의 재발견이며 또 하나는 유럽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 자체이다. 흔히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다 르네상스라는 명칭이 개념화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 1975년 이후 많은 학자들은 르네상스가 하나의 특정한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해스킨스등과 같은 역사가가 ‘12세기 르네상스’나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렀던 작업들 때문에 생긴 발상이다. 지금은 이런 관점이 학자들 사이에 많이 보편화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국 르네상스’ 등 다양한 용례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등장으로 요즘에는 ‘르네상스 시기’라는 말이 ‘근대 초기’라고 대치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르네상스라는 말의 조어력은 점차 커져서 어떤 시기의 전성기나 융성기를 할렘 르네상스나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 등과 같이 은유적으로 르네상스 시기라고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르네상스라는 말이 19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르네상스 시기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부르크하르트 시대에는 르네상스가 명백한 시대구분이라고 생각되었으나 게르만계 학자들의 중세 재평가 작업에 의해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즉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중심이 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된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아랍의 지식을 흡수하고, 경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이 확산될 토양을 확보하고, 예술에서 새로운 기법과 실험을 시도하게되는 등의 변화를 말한다. 이 관점은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이 암흑기에서 벗어나 대항해시대로 상징되는 경제성장 시기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종종 근대의 시작으로 간주되곤 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미술, 문학, 철학 등이 변화된 유사혁명 정도로 본다. 오직 극소수의 가진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세였다는 관점이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본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에 대해 적었던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민중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이징가는 르네상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였는가에는 의문을 품었다. 그는 르네상스는 중세 말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 시기에 파괴된 것이 더 많지는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예를 들어, 라틴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자연적인 변화를 겪으며 사용되던 살아있는 언어였는데, 고전 순수주의라는 강박관념으로 화석화시켜버린 것이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를 시간적, 지역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여러 곳에서 점진적으로 시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중세가 언제 어디서 끝나는지도 얘기할 수 없다. 보통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계, 비잔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여 서유럽과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11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활성화로 도시는 점차 도시국가 형태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13세기 말의 경제성장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가 심해져서 특유의 시민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도시국가는 그 특성상 고대의 도시국가와 유사한 점도 있어 로마법이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를 제현인물로 피렌체 출신의 '단테'가 있다. 그는 정적에 의해 추방당해 유랑생활을 하던 중 대표작인 '신곡'을 완성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지옥, 연옥의 안내인으로 등장시키는데, 영혼의 정화를 통해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고전문학과 가톨릭을 조화시켜 대 서사시를 그려내었다. 단테보다 후대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인간이 최고의 것을 성취했고 그 이후 점차 부패하여 중세 암흑시대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를 종교적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진보로 간주했으므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재발견하여 "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전문헌을 모으고 라틴어로 시와 책을 쓰다가 이런식으로 고전 교양을 모아 인간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사색하는 방식을 '인문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속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온고지신적인 태도는 이후의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최초의 인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화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조토'이다. 그는 시공간을 다룸에 있어 고대의 스타일을 원용하였다. 법률에 있어서는 '볼로냐 대학'을 중심으로 '로마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는데 그 체계화를 이룬 사람은 '바르톨루스'다. 이러한 움직임은 1348년의 흑사병과 각종 정치적인 격변으로 더이상 꽃피지 못했다. 이러한 인문주의가 다시 꽃피게 되는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 르네상스의 시작점을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1453년)에서 찾는 관점도 있다. 그것은 대포와 화약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고 비잔티움 제국, 그리스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헌들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쳤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으며 유럽의 오래된 종교적 질서가 붕괴되는 것에 일조하였다. 르네상스가 영국에 들어왔을 때는 엘리자베스 1세 때이며, 윌리엄 셰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토머스 모어 같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다. 14세기~16세기까지 이탈리아 도시들이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다.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같은 도시에서는 이러한 경제력으로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신도 인간처럼 표현하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기운을 르네상스라 한다. 특히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은 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곧 신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생각이 바뀌는 지적 흐름과 이탈리아 중북부가 도시주 형태의 자치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당시 피렌체는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하여 토스카나지방의 중심지였고 14세기경부터 교회, 이슬람 세계, 동로마 제국 등의 고전문화에 영향받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유물이 많았고 따라서 조각가, 건축가 등이 고대 로마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다.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르네상스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건축에 애를 먹고 있던 피렌체 대성당의 큰 돔을 올리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건축가 브라만테 등이 나타나 르네상스 건축을 이어나간다. 회화에서는 마사초가 그 서막을 열었다. 그의 자연주의적 태도는 이후 프란체스카, 베로키오등의 원근법, 해부학 등으로 이어진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인간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유명한데 그는 건축, 회화를 넘나드는 방대한 저술로 인문주의자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후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박식가들이 뒤이어 회화, 건축, 조각 등에서 다방면의 재능을 드러내었다. 15세기 초엽, 그 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 음악은 르네상스 시기의 강력한 교황들의 후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시스티나 성당의 성가대는 전 유럽의 음악가, 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프레와 팔레스트리나 등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개한 곳은 피렌체,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등의 도시가 있다. 학술과 예술가들을 키웠던 후원자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피렌체에서 상업과 은행업으로 성공해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면서 재력가문이 되었다. 15세기부터 300여년 간 르네상스 사상 예술 과학 등을 폭넓게 후원했다. 그 중 미켈란젤로는 15세 때부터 2년 간 메디치 가문의 궁전에서 지내면서 많은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자랐다. 하지만 15세기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이 쇠퇴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의해 밀라노의 스포르차가도 추방당했으나 로마에서는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1515년)이 추진되어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1527년 로마 약탈 이후 로마가 일시적으로 황폐해지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토스카나 대공국등에서 미술은 계속 꽃필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밝은 시대가 아니라 흑사병이 유행하거나 정치적 싸움, 전쟁이 계속된 시대였다.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궁정과 교황청 등 극히 일부에서 뿐이었고 일반적으로는 미신과 마술이 믿어지던 시대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의 근대를 이끈 역할을 했지만 그 시기 이탈리아 국내 정치는 엉망이었다.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로 갈라지고 외국으로부터 간섭받아 국가의 통일이 늦어져 정치, 사회적 근대화가 지연되는 결과가 초래된 시기였다. 1600년에 우주의 무한성을 말했던 조르다노 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로 종교재판을 받은 것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과학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려워졌다. 이미 16세기 후반, 미술에서도 형식주의의 매너리즘(manierismo)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 창조력은 북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17세기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심이 된 바로크 미술의 시대가 되었으니 문화적 불모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와 가까운 바이에른에서 시작이 되었다. 독일 르네상스는 르네상스적 요소와 후기 고딕적요소가 결합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다른지역보다 독일에 르네상스적 요소가 늦게 도달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 4명의 사도 등의 미술 작품을 완성한 알브레히트 뒤러가 선두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외에도 많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이 있다. 또한 지식인들이 라틴어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바탕이 만들어졌다. 폴란드에서는 15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의 화가, 상인, 사상가들이 폴란드에 들어오면서,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얀 코하노프스키 같은 시인들이 등장했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중요한 기념물은 다른 많은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예 : 포즈난, 그단스크, 헤움노). 슈체친의 슬라브 왕자 의 중세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다른나라와 같이 극심하지 않았다. 다른 유럽에 비해 중세의 문화가 혁파되지 않았고, 문학에서는 이탈리아의 혁신을 받아들였지만 서정시집과 이전의 전통을 잊지는 않고 제 3의 것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전기의 집대성으로서 대표적으로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있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가장 대표적인 스페인 르네상스 시인이자 작가로 스페인에 이탈리아로부터 처음으로 르네상스 시를 도입한 사람이다. 조형예술에서는 이탈리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현지 전통과 잘 융화하였다. 르네상스의 혁신은 스페인에 매우 늦게 전달되었는데, 거의 스페인 예술에서의 르네상스는 고딕풍에서 매너리즘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건축은 다음과 같이 16세기 금은 세공사에 의해 사용된 장식을 활용한 건축양식 플라테레스코(15세기에서-16세기의 1분기), 순수(정통)주의 및, 이탈리아풍 (16세기 전반기), 에레리아노; 엘에스꼬리알의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에서 연유한 건축용어(1559년부터 다음세기 중반) 크게 세 시대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중 첫 번째는 표면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데 전반적인 고딕양식을 유지하면서 파사드의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장식은 세밀하고 풍부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살라망카 대학 건물의 파사드의 장식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순수(정통)주의는 이탈리아의 가장 후반기의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데, 알람브라의 카를로스 5세 궁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스타일의 중심지는 안달루시아 지방으로서 우베다와 바에사의 안드레스 데 발데비에라, 디에고 데 실로에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에레리아노 양식은 길게 늘이는 특성을 지닌 매너리즘에 대한 수용에서 비롯되었으며 후안 데 에레라가 엘에스꼬리알에 건축한 수도원이 명실공히 스페인 르네상스의 야심작이라 칭할만 하다. 조각에서는 고딕양식의 전통 헤게모니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지된다. 새로운 스타일의 첫 번째 흔적으로서는 펠리페 비가르니와 도메니코 판셀리의 작품을 들 수 있다. 보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외형을 가진 스타일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독특한 매너리즘은 이후 바로크 조각의 기초가 되었다. 회화에서의 스페인의 르네상스는 고딕양식의 유산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탈리아로부터의 새로운 방식이 공존하는데 이러한 분열은 페드로 베루구에테가 우르비노에서 작업한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스페인 르네상스를 가장 크게 특징짓는 것은 매너리즘으로 명명된 엘 그레코로 대표되는 고유의 양식이다. 오늘날에 벨기에와 합쳐있던 네덜란드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교통의 관로였다. 거의 이탈리아와 같은 시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난 걸로 알려졌다.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와 같은 작가가 등장했고, 판 에이크 형제와 피터르 브뤼헐히에로니무스 보쉬 같은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130년간 지속되던 르네상스는 1530년경 끝이 났다. 그 이유는 우선 1492년 크리스토발 코론이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인도로 가는 해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사실은 아메리카로 가는 해로였다.) 그 후에는 북서부 유럽의 상인들이 무역상품을 리스본과 안트웨르펜을 통해 거래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1517년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사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로 분열되었다. 교회의 분열은 그동안 납부금과 세금의 형태로 이탈리아를 풍요롭게 했던 돈줄의 고갈을 의미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과 종교개혁으로 결국 이탈리아는 상업적 무역자본과 자본, 두가지를 동시에 잃었다 또 이탈리아는 그 당시 이탈리아 전쟁 등이 겹치며 정치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르네상스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어 국제어 또는 국제보조어 (國際補助語, International Auxiliary Language, (int.) auxlang, IAL)란 예술어와 함께 인공어의 한 종류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간 의사소통의 장벽을 낮추기 위해 만들어진 중립적이고 간단한 구조의 언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에스페란토, 인테르링구아, 이도, 볼라퓌크 등의 언어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세 유럽의 라틴어, 현대의 영어 등 비슷한 성격을 띤 자연어 역시 국제어라 이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종대학교에서 우니쉬를 만든 바가 있다. 유럽의 주요 언어를 섞은 듯한 유로판토는 언어 유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패러디 국제어이다. 갈리아 전기 갈리아 전기(, Gallia 戰記) 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9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책이다. 전체는 총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권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의 각 1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술했다. (단, 제3권은 57년과 56년을 모두 다루고 있다) 제1권부터 제7권은 카이사르가 직접 서술했고, 제8권은 카이사르의 비서였던 발부스의 요청으로 인해, 카이사르의 부장이었고 카이사르가 죽은 뒤 집정관까지 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특유의 간결하고 우아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로 기술하였고 "나는... 이러했다"라고 쓰지 않고 "카이사르는...했다"라고 제3인칭 시점으로 기술했다. 히르티우스가 쓴 제8권은 사실적인 필체로 전쟁기를 기록하고 있다. 각 권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레드 (컴퓨팅) 스레드(thread)는 어떠한 프로그램 내에서, 특히 프로세스 내에서 실행되는 흐름의 단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한 프로그램은 하나의 스레드를 가지고 있지만, 프로그램 환경에 따라 둘 이상의 스레드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이러한 실행 방식을 멀티스레드(multithread)라고 한다. 멀티프로세스와 멀티스레드는 양쪽 모두 여러 흐름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멀티프로세스에서 각 프로세스는 독립적으로 실행되며 각각 별개의 메모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멀티스레드는 프로세스 내의 메모리를 공유해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프로세스 간의 전환 속도보다 스레드 간의 전환 속도가 빠르다. 멀티스레드의 다른 장점은 CPU가 여러 개일 경우에 각각의 CPU가 스레드 하나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여러 스레드가 실제 시간상으로 동시에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멀티스레드의 단점에는 각각의 스레드 중 어떤 것이 먼저 실행될지 그 순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두 스레드가 특정 공유 변수 i의 값을 1 증가시키는 명령을 실행할 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때 두 스레드가 실행될 때 어떤 스레드가 먼저 실행될지는 보장되지 않으며, 만약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행된다면: 최종 결과로 i는 2가 증가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실행된다면: 최종 결과로 i는 1이 증가되고, 이것은 원래 프로그램의 의도(각각의 스레드가 i를 1씩 증가하는 동작)와 다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는 스레드의 실행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므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이러한 문제를 경쟁 조건이라고 하며, 문제를 막기 위해 세마포어와 같은 방법을 통해 공유 데이터에 접근하는 스레드의 개수를 한개 이하로 유지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스레드를 지원하는 주체에 따라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용자 스레드는 커널 영역의 상위에서 지원되며 일반적으로 사용자 레벨의 라이브러리를 통해 구현되며, 라이브러리는 스레드의 생성 및 스케줄링 등에 관한 관리 기능을 제공한다. 동일한 메모리 영역에서 스레드가 생성 및 관리되므로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는 반면, 여러 개의 사용자 스레드 중 하나의 스레드가 시스템 호출 등으로 중단되면 나머지 모든 스레드 역시 중단되는 단점이 있다. 이는 커널이 프로세스 내부의 스레드를 인식하지 못하며 해당 프로세스를 대기 상태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커널 스레드는 운영체제가 지원하는 스레드 기능으로 구현되며, 커널이 스레드의 생성 및 스케줄링 등을 관리한다. 스레드가 시스템 호출 등으로 중단되더라도, 커널은 프로세스 내의 다른 스레드를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실행시켜준다. 다중처리기 환경에서 커널은 여러 개의 스레드를 각각 다른 처리기에 할당할 수 있다. 다만, 사용자 스레드에 비해 생성 및 관리하는 것이 느리다. 스레드도 프로세스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행 흐름이므로 실행과 관련된 데이터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스레드는 자신만의 고유한 스레드 ID, 프로그램 카운터, 레지스터 집합, 스택을 가진다. 코드, 데이터, 파일 등 기타 자원은 프로세스 내의 다른 스레드와 공유한다. 위의 기본 데이터 외에도 하나의 스레드에만 연관된 데이터가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이런 데이터를 스레드 특정 데이터(Thread-Specific Data, 줄여서 TSD)라고 한다. 멀티스레드 프로그래밍 환경에서 모든 스레드는 프로세스의 데이터를 공유하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개별 스레드만의 자료 공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트랜잭션을 스레드로 처리할 경우, 각각의 트랜잭션 ID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때 TSD가 필요하다. TSD는 여러 스레드 라이브러리들이 지원하는 기능 중의 하나이다. 멀티스레드 환경이 확산됨에 따라 전통적인 프로세스 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예를 들어, fork 또는 exec와 같은 시스템 호출시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갈리아 갈리아() 또는 골()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전까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국 이탈리아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의 갈리아 키살피나 (알프스 이남 북부 이탈리아)도 포함되었다. 이 지방은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1세기에 이르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벨기카, 고지 게르마니아의 다섯 로마 속주로 나뉘었다. 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켈트족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Celtae)'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갈리아의 켈트족은 수십여 개의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갈리아인들은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에게 사로잡힌 이후 로마 제국에서 독립해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한 갈리아 제국을 건설했으나 273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다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갈리아를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알프스 산맥 이 쪽 지역의 갈리아 즉 포강 유역을 갈리아 키살피나라고 부르고, 알프스 산맥 너머의 갈리아 즉 유럽의 먼 나머지 지역을 갈리아 트란살피나라고 불렀다. 갈리아 지방은 포도주가 크게 발달하였으므로 로마산 포도주가 갈리아산 포도주에 밀릴 것을 우려한 로마 황제가 한때 포도 생산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벨가이족 벨가이(Belgae)는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프랑스의 일부를 합친 지역의 켈트족 원주민들을 일컫는 라틴어이다. 벨가이는 로마로부터 멀리 북쪽에 떨어져 있어 상인의 왕래조차 뜸한 지역이었으며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역사에 등장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갈리아 전체를 갈리아, 아퀴타니아, 벨가이의 셋으로 나누며 언어, 관습, 제도가 서로 다르며 벨가이가 게르만족과 인접해 있는 까닭에 가장 호전적이라 기록했다. 갈리아 전쟁 이후 벨가이는 다른 중북부 갈리아와 합쳐 갈리아 코마타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후에 벨기카로 나뉘었다. 갈리아 전쟁기에는 아트레바테족, 벨로바키족, 칼레티족, 모리니족, 네르비족, 아투아투키족, 메나피족, 레미족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이 중 레미족은 기원전 58년 다른 벨가이 부족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반로마 연합을 빠져나와 카이사르와 동맹, 후에 갈리아 전체의 유력 부족 중 하나로 떠올랐다. 아시아의 역사 아시아의 역사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등의 해안 지역과 이를 잇는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역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 지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강, 황하 등의 큰 강 유역에서 주요 고대 문명이 발생하였다. 이들 문명은 수학이나 바퀴 등의 기술을 교류하였다. 또 독자적으로 문자가 발명되었다. 고대 문명은 점차 도시, 국가,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스텝 지역은 오래전부터 기마 유목민족의 영역이었다. 이들은 스텝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북쪽의 시베리아는 울창한 숲과 툰드라 때문에 스텝의 기마민족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대륙의 중앙부는 해안과는 높은 산맥과 사막으로 나뉘어 있다. 카프카스 산맥, 히말라야 산맥, 카라쿰 사막, 고비 사막 등은 스텝 지역의 기마병들이 쉽게 건널 수 없는 장벽이었다. 해안 도시들이 보다 기술이나 문화는 앞서 있었으나, 스텝의 기마병들을 막아내기에는 군사력이 충분치 않았다. 이들은 중국, 인도, 중동의 도시를 정복한 기마민족은 곧 이들 문화에 동화되어갔다. 한국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이후 주로 한반도와 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 한국의 역사는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기원전 8000년 무렵의 것이며, 기원전 6000년 이전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청동기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중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 왕국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고 한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에 한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해 여러 국가로 나누어졌다. 공동기원(Common Era) 초기에, 삼국시대를 맞아 세 왕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다른 고조선의 후속 국가들을 정복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세 왕국은 경제와 군사 면에서 서로 경쟁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강력하였고, 특히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해 흉노 등 중앙아시아의 기마 민족과 수나라 등 중국 세력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부터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해상 교역과 육상 교역을 통해 중앙아시 아부터 시작해 아라비아와까지 교류하였다. 신라의 힘은 화랑도 를 바탕으로 서서히 커져서 결국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 하여 멸망시켰다. 한편 전직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건국하 였다.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연해주에 걸친 남북국시대 가 성립된다. 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다. 비슷한 시기,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고려 시대에는 국교로서 불교 문화가 번성하였다. 또한 고려는 남북국시대 부터 이어져 온 활발한 국제교역 활동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고려 말까지 벽란도 를 중심으로 이를 계속하였다. 993-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끝에 양 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개혁이 있기 전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 1392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발명도 이루어졌다. 또한 북방의 여진 과 남쪽의 왜구 를 토벌하였으며, 화차 와 같은 군사병기도 제작되었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장들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조직적인 저항,그리고 명나라의 조선으로의 파병 덕분에 결국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청나라와 사대를 맺게 되며 청은 왕의 나라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된다. 이후 영조, 정조의 치세를 겪으며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전래되었지만 유교와의 마찰로 뒤이은 왕들에 의해 탄압받았다. 1870년대 초반 일본은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중국과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의 낭인들에게 암살되었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의화단 운동 진압 당시 청국의 만주를 점거한 러시아가 조선에까지 영향력을 뻗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인은 일본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곳곳에서 3.1 운동을 1919년에 전개하였다. 뒤이어 이러한 독립운동을 총괄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직접 군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유엔은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그 계획은 미소공위에서 입장차이로 결렬되어 곧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분단 이후 양 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1950년에 북한이 남한을 선제공격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의 역사 일본의 역사(日本-歷史, )는 일본과 일본인이 현재까지 걸어온 모든 역사적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플라이스토세의 일본은 대륙과 이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동아시아대륙의 동단의 반도를 이루고 있었고, 대륙과 같은 구석기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플라이스토세 전기에서 중기에 걸쳐서 빙하기와 간빙기가 2번 반복하고 여기에 동반하여 간빙기에는 해수면이 상승하고 빙하기에는 하강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일본열도와 동아시아대륙의 지세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 2만년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졌던 일본 열도 는 플라이스토세 후기(12만6천년전~1만년전)가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대량의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약 1만 2천년 전에 대한해협(현해탄)과 쓰가루 해협 등 일본을 둘러싼 제해협이 형성되고 최종적으로는 홀로세 초인 1만년 전쯤 모든 해협이 확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 이어서 일본에서는 조몬 문화(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신석기문화로 이행했다. 그 뒤에도 해진 현상(海進現像)이 계속되어, 일본 열도는 현재의 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의 네 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분리되었다.몽골계, 중국계 인종과 시베리아 지역을 통해 왔다고 추정되는 아이누족, 남방 폴리네시아 지역에서 온 민족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람들을 다른 지역에서 건너 온 사람이라 하여 도래인(渡來人)이라고 한다. 도래인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규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중국을 비롯한 대륙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 야요이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래되던 시기에 규슈에서 시작된 벼농사 또한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 3세기 이후 도래인의 유입은 극히 드물어지다가, 3세기 후반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조정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이 축조되고, 중국에서 한자를 수입하여 고분문화가 성립되었다. 다시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도래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4세기 후반부터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가야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일본 열도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 왕실은 백제를 비롯하여 백제 등지에서 피난 오는 도래 기술자로부터 유용한 대륙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백제가 고구려에 대적할 수 있도록 전면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 왕실이 도래인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면서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도래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6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7세기 전반의 아스카 시대에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가 생겨났다. 특히 7세기에 이르러 도래인 계열 씨족 중 대표적인 씨족이었던 소가 씨()는 불교를 앞세워 모노노베 씨 등의 경쟁 씨족을 제압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어 5대에 걸쳐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치적으로 실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소가 씨를 비롯한 도래인 씨족이 일본 황실을 위협하자 나카노오에 황태자는 645년 정변으로 소가 씨를 멸문하였으며,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로 천도하고 이듬해 다이카 개신에 관한 조칙을 공포하였다. 이후 임신(壬申)의 난(, 672년)을 거쳐, 681년 덴무 천황이 최초로 율령 반포를 준비한 이래 8세기에 접어들어서 당나라의 율령을 기반으로 한 일본식 율령의 본격적인 편찬이 시작되고 701년 (다이호 원년)에 다이호 율령을 반포하여 첫 결실을 거둔다. 이리하여 천황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율령국가(律令國家)가 형성되었다. 다이호 율령은 이후에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에 의해 누차 손질되어오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최고 법전의 지위를 유지한다. 8~9세기의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의 문화는 대륙 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으나 헤이안 초기에는 여러 가지 가나가 만들어졌고 정치적으로도 율령국가가 변질하여 섭관정치, 이어 인세이가 장원(莊園)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한편 이전부터 율령 반포에 참여하는 등 일본 왕실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후지와라 씨는 9세기 초에 이르러 소가 씨처럼 황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하기 시작했다. 비록 간무(桓武)와 사가(嵯峨) 두 천황이 귀족을 누르고 절대 왕권을 행사한 적이 있었으나 사가 천황 이후에 후지와라 씨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조카이자 사위인 몬토쿠 천황이 사망하자 어린 외손자인 세이와 천황을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였다. 요시후사 이후에도 후지와라노 모토쓰네가 관백()이 되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처럼 후지와라 씨는 천황이 어리면 섭정직을, 천황이 성인이 되면 관백직을 번갈아가며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를 섭관정치라 하며, 11세기 후반 시라카와 천황의 인세이가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1세기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으나 지방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정도로 막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지역 주민 스스로가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다. 헤이안 시대 후반, 지방에서는 호족과 부농들이 자신들이 개간한 농지를 사유화하고 이를 지키려고 스스로 무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무사() 계층이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 호족들을 위해 움직이던 무사들은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황실에서 탈락되어 지방으로 내려온 방계 후손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한편 무사들의 성장과 더불어 11세기 후반 후지와라 씨와 무관한 고산조 천황이 대대적으로 장원을 정리하고, 1086년 시라카와 천황이 인세이를 통해 번잡한 법령을 무시하고 빠른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상황 측과 재위 중인 천황 측이 서로 권력 대결을 벌이는 상황도 일어났다. 그리고 한 세기에 달하는 원정 기간 동안 계속된 암투 속에서 절대적 세력으로 성장한 무사 계층들 간의 긴장은 결국 왕실과 귀족들이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를 앞세워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통하여 내란을 치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초래하였다. 두 차례의 난 끝에 미나모토 씨를 거의 절멸시킨 다이라 씨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권력을 잡았다가 오래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남은 다이라 씨 또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다이라 씨를 섬멸하고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2세기 말 가마쿠라()에 무사 계층이 정치를 하는 체제인 막부를 만들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나, 요리토모 사후 자손들의 대가 끊기면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창시한 가마쿠라 막부는 호조 씨의 싯켄 정치를 통해 명맥을 이어나갔다. 호조 씨의 싯켄 정치 체제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을 막아냄으로써 크게 고양되었으나, 얼마 못 가 포상 문제로 체제가 요동치다가 지방 무사(武士)의 파악에 실패하여 결국 지지 기반을 상실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해 오며 싯켄 정부를 배신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함께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어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다이고 천황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6년 7월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내고 반대파인 고묘 천황을 앞세워 도피한 고다이고 천황의 요시노 정부와 맞서게 된다. 이를 남북조 시대라 하며, 1392년 10월 남조의 천황이 북조의 천황에 양위하는 형식으로 흡수되기까지 57년간 지속되었다. 이에 앞서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하사받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4세기 중엽 겐무 식목 17조를 제정하고, 교토 교외의 무로마치에 쇼군의 저택을 두어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되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킨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 대에 이르러 명(明)과 국교를 회복하이 성행하면서 무로마치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 시대에는 구케(公家)와 부케(武家)의 문화가 융합하여 동산문화힉文化)가 번성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미쓰 사망 이후, 슈고(守護)가 영주화(領主化)하여 성장한 슈고 다이묘들이 차기 쇼군 계승 후보들을 앞세워 암투를 벌이면서 막부의 체제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1467년에 발발한 오닌의 난과 더불어 일본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난립하여 센고쿠 시대로 돌입하였다. 센고쿠 시대 초반에는 여전히 각 지역에서 유력자였던 슈고 다이묘가 위세를 떨쳤으나, 곧 슈고 다이묘들 대신 장원을 경영하며 실력을 키운 슈고다이와 고쿠닌들, 그리고 호조 소운이나 사이토 도산과 같이 미천한 신분이나 대중의 지지를 얻은 사람들도 슈고 다이묘들을 타도하고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였다.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린 이들은 오닌의 난 이후 5~60년 사이에 슈고 다이묘들을 거의 압도하여 센고쿠 다이묘들이 각지에 할거(割據)하는 센고쿠 시대가 오고, 고대 귀족은 몰락하여 막부의 권력이 쇠퇴했다. 16세기 중엽 기독교와 총이 전해졌는데,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포교로 침투되었고, 총은 센고쿠 다이묘의 전술·축성법(築城法)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16세기 후반부터 두각을 드러난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히데, 모리 모토나리 등이 크게 세력을 불려 경쟁하였으나, 결국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인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수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지배체제가 탄생함으로써 센고쿠 시대는 막을 내린다. 1590년 최종적으로 간토의 호조 씨를 패망시켜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대파 다이묘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명나라와 인도를 지배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몇 번의 도발을 거쳐 1592년 여러 다이묘들의 15만 8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초반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평양성까지 지배 관할에 둠으로써 조선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한반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몇몇 관군 부대의 저항, 명나라의 지원으로 점차 위기에 몰렸으며, 1598년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일본군의 철군에 따라 끝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문관 계층과 지방의 유력한 무장들이 모인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 세력이 각각 서군과 동군이 되어 후계 권력 장악을 두고 크게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은 1600년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하였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였다. 최후의 패자(覇者)로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을 처벌하고, 통일국가를 재건하여, 1603년에는 쇼군직에 올라 에도 막부를 개창한다. 또 1614년에서 1615년 사이에 걸친 오사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비롯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섬멸하고 도쿠가와 씨의 통치 체제를 확립시킨다. 에도 막부(1603–1868)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鎖國)을 행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敎化)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태평 무드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을 촉진시켰고,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를 번성케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은 《대일본사》(大日本史)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를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농민의 궁핍화와 거듭되는 재해는 농민폭동을 빈발하게 하여 바쿠한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겐로쿠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겐로쿠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쇼토쿠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겐로쿠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노부 대에 겐로쿠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기이 도쿠가와 씨 출신으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이에야스 시대의 정치 제도를 바탕으로 교호 개혁을 단행하였고,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에는 다누마 오키쓰구 등 다누마 씨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산케 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다누마 씨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19세기 중기 이후는 구미(歐美) 열강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일본에게 개국을 요구했고, 하급 무사에 의한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막부 타도 운동이 격화하여 결국 260여년에 걸친 에도 바쿠후는 쓰러지고 메이지 유신을 맞게 되었다. 다누마 씨의 뒤를 이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후다사시 등 고리대금업자로부터 차용한 빚을 모두 파기시키는 기연령을 발동하고, 당시의 풍속에 대하여 엄격한 규제 정책을 시행하는 등의 간세이 개혁을 시행하였지만, 이에시게의 뒤를 이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대립하다가 실각하였다. 이에나리는 분카와 분세이 시대에 걸쳐 오고쇼 자리에서 거의 50년 동안 실권을 잡으면서 쇼군 권위의 선양과 막부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나, 1833년부터 1839년까지 이어진 덴포의 기근을 거치면서 신뢰를 잃은 막부는 조슈, 사쓰마 등지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기 중국으로의 진출을 위해 태평양의 중간 기착지를 필요로 했던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 동인도 함대 사령관을 제독으로 일본에 파견해 개방을 강요하였다. 결국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막부는 쇄국 체제를 풀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한 조슈와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번들의 막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막부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막부에서는 조정과의 융화를 꾀하고자 고부갓타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노조이를 주장하던 조슈 출신 무사 세력은 천황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는 '조이'()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며 막부를 압박하였고, 결국 막부가 이를 수용하자 조슈에서는 일방적으로 외국선을 포격하고, 사쓰마에서는 체류 중이던 영국인이 사무라이에게 살해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양 4개국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사쓰마에서는 영국이 사쓰마와 무력 마찰을 일으키는 등 막말의 일본은 서구 열강에 의하여 계속 요동치는 상황에 처했다. 조슈 정벌과 사쓰에이 전쟁을 거치면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하급 무사들은 최종적으로 막부 자체를 없앨 것을 주장하며 '도바쿠'(討幕,토막) 운동을 전개하였다. 1866년에는 도사(土佐)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와 조슈 간의 비밀 군사 동맹이 성립하고, 막부에 우호적인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어 도바쿠 세력에 의해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막부를 크게 압박하자 결국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되돌리게 되어 메이지 천황은 같은 해 12월 9일 '친정'(親政)을 선포한다. 1868년 왕정 복고를 표방한 메이지 천황은 왕권 선양을 위한 혁신을 꾀했는데 교토조정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구케(公家)와 제후(諸侯), 그리고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구 바쿠후 세력을 타도하고1868년 7월 에도 막부가 위치한 에도(江戶)를 도쿄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교토의 고쇼에서 도쿄의 고쿄로 천도(遷都)했으며, 다양한 이유로 쉽게 연호가 바뀌던 것을 메이지 천황 대에 이르러서는 한 대에 한 연호만 쓸 수 있도록 한 일세일원제가 채택되는 등 모든 체제를 일신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정부는 부국강병책에 의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추진하고 군대·경찰을 비롯한 전신·철도·각종 공장 등 관영사업을 개시했다. 또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주도로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서남웅번(西南雄藩) 세력들이 우선 판적봉환을 단행하였고, 1869년 6월에는 전국의 번들이 판적을 봉환하게 되었다. 1871년에는 이에 대한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더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을 위해 서남웅번의 병력 약 1만 명을 중앙군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확보하고, 같은 해 7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행정 구역을 부현제()로 바꾸고 부지사와 현령(県領)은 중앙에서 임명해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신분제를 철폐하여 높은 왕족(상경), 다이묘, 사무라이 계층은 귀족층으로 통일되고, 그 이하 사농공상 순의 신분층은 평민()으로 삼는다고 발표하여 불완전한 사민평등() 조치를 단행하였다. 1877년의 서남전쟁(西南戰爭)을 최후로 종래의 불평 사족(不平士族)들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신분 개혁 이후에 일본에서는 입헌 정치에 대한 요구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애국공당을 결성해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는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같이 전래된 민주주의 정치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확산된 것과 너무 강력한 중앙 정부에 의해 자치권마저 부정당한 전통적인 향촌 사회의 반발심도 작용하였다. 1878년 정부는 삼신법()을 제정해 부분적으로 지방제를 개편하여 이들의 반발심을 잠시 무마시키고자 하였으나 같은 해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정부 요직자들이 사망함으로써 정치권의 중심이 공백에 빠지자 1881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서남웅번 출신의 무사들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국회의 개설과 독일식의 강력한 군주권을 골자로 한 헌법 제정 방침을 정하고 1890년까지 국회를 개설시킨다는 '국회 개설의 칙유'(勅諭)를 발표하여 민권파의 강력한 주장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에 초안을 몇 번 손질한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을 반포하여 근대기 일본은 비록 거의 형식적이었지만 입헌 국가로 도약하였다. 1890년에 의회 개설에 의해 천황제의 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국회 개설과 더불어 공업의 발흥으로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본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의 정치 · 경제적 침투를 통해 점차 제국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김으로써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그 배상금을 기초로 하여 금본위제(金本位制)를 수립,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이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확보한 일본은 조선 자체에 대한 종속화를 꾀했지만 번번이 조선의 대규모 민족 저항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조선에 진출하고자 했던 러시아와의 충돌로 인하여 실패했다. 또 조선 왕실도 박영효 등 친일 세력을 추방하는 등 일본의 일방적인 조선 침략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6년 경복궁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도록 하였는데 조선 의병(義兵)의 대규모 저항과 고종이 시위의 의미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환궁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조선에서 입지를 상실하며 국제적인 비난 속에 '경쟁국'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계기로 한국에서 입지를 굳힌 러시아는 만주(滿洲)의 러시아령에서 병력을 증강시켜 한반도에의 침투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와 한반도와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타협을 보지 못하자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 러일 전쟁을 치렀고,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미국의 지지와 쓰시마 해협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러시아를 축출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해 다시금 정치·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였다.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더욱 노골화하였고, 영국과 미국 간의 밀약으로 조선 지배를 강대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화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어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내정권을 박탈, 군대 또한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1910년 8월 23일 통감부를 '총독부'(總督府)로 바꾸고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국권을 강탈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대한제국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통감부를 일본 천황이 직접 임명한 총독이 관리하는 조선총독부로 바꾸었다. 또 친일파이거나 일본어에 능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관료들의 자리는 일본인들에게 배분되었다. 처음에 일본은 현역 군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인 출신인 헌병 계층에게 치안 임무를 위임하여 조선인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항일 투쟁을 강압적으로 짓밟는 무단 통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무단 통치에 대항하는 항일 투쟁은 계속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는 전국적인 단위로 3·1운동이 일어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3·1운동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가까쓰로 진압한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를 총독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문화 통치', '산미 증식' 등을 표방하며 처음에는 유화책을 펼치다가 곧 경찰의 병력을 4배 이상 늘리고,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였으며 친일파의 양성을 꾀하였다. 또한 산미 증식 정책을 통해 쌀을 대량으로 약탈해갔다. 그 과정에서 한민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등을 조직하며 계속 저항해나갔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와 같이 치안 유지법을 한반도에도 적용하여 한민족의 독립 운동, 특히 사회주의 독립 운동을 강하게 탄압하였고, 만주 사변 이후에는 '민족 말살 정책'을 내세워 한국어 등 한민족과 관련된 고유 교육 또한 금지시키고 징용과 징병, 위안부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이부분은 아직도 인정하고 있지않으며 여전히 쪽바리짓을 하고있다. 1911년에 성립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행정 및 재정의 정리와 감세를 추진하는 긴축(緊縮)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신해혁명에 위협을 느낀 제국 육군은 한반도에 주둔시킬 제국 육군 제2사단의 증설을 정부에 강하게 요구하였고, 정부는 내각회의를 거쳐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국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사표를 내는 사건이 벌어져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총사직하고, 뒤를 이은 제3차 가쓰라 내각은 일본 천황을 앞세워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의회를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미노베 다쓰키치, 입헌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입헌정우회의 오자키 유키오 등이 중심이 되어 족벌(族閥)의 타파와 헌정옹호를 내건 호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쓰라 다로와 이하 내각이 성립 50일만에 퇴진하는 다이쇼 정변이 발생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1918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과 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만을 파견하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5월)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1911~25년)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한편, 러시아 혁명(1917년)에 뒤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전(1917~22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백군을 도와 7만 2천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와 같이 다이쇼 시기의 중국과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침략 활동은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러한 침략 활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영국에 이은 강국으로 상승,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대전중 획득한 일본의 이권이 인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불황과 재정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값싼 공장제 상품을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하여 막대한 무역 이익을 취했지만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의 생산력 회복으로 인하여 수출이 축소되면서 무역이 적자로 전환하고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게이힌 지역의 상공업 지대가 초토화되면서 다시 불황이 찾아온다.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결함은 최대한으로 드러나는 등 불황이 한층 더 심화되자,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일례로 1930년 11월, 만주 침략에 반대 입장을 가졌던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무력침략이 시작되어, 1931년 9월에 관동군의 주도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의 제어를 무시하고 만주 전역을 점령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앞세워,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중화민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 일본은 사실 상 고립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16일)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32년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수상(1932년 5월 26일 ~ 1934년 7월 8일)이 되어 '군·정·관에 타협을 통한 거국일치'를 표방함으로써 정당내각은 단절되고,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이토 마코토 내각 이후에도 육군 내의 여러 계파의 도전은 계속되어 급기야 1936년 2월 26일 청년 장교들이 내대신, 대장대신 등을 암살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해져 히로타 고키 내각 때 군부대신의 현역제가 부활, 사실상 군부가 내각을 좌우하게 되었다. 1936년에는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또 히로타 고키 내각은 화북(hua2 bei2 )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그 구실로 중화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는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않고자 하였지만 곧 전쟁은 화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난징과 그 주변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전시 체제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일본 열도 내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식민지에서의 군부의 경제적 수탈에 기여하였다. 이렇게 중·일 전쟁이 장기화 될 무렵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일본과 추축 동맹을 체결하고, 1939년에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처음에 일본은 유럽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방하였으나, 프랑스·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던 1940년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군사동맹을 맺고, 1940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을 빼앗기로 하는 남진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영국·중화민국·네덜란드 등 4개국은 이에 대하여 이른바 ABCD 포위망(America·British·China·Dutch)을 형성하여 석유 등 중요한 전쟁물자에 대해 수출을 금지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은 처음에 미국과의 원만한 교섭을 통하여 이를 해결코자 하였으나 협상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자 고노에 후미마로의 제2차 내각은 퇴진하고 대신 통제파의 도조 히데키 내각이 조직되어 1941년엔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1941년 12월 1일 개전을 결의하고 같은 해 12월 8일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표방하며 처음에 말레이 반도, 버마와 타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필리핀 등을 점령하는 등 연합군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이 연패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반격에 성공한 미국은 일본의 점령 지역을 탈환하였으며 1944년 7월에는 사이판 섬을 점령하여 전초 기지로 삼고, 일본 열도의 주요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흐르자 도조 히데키 총리는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며, 그 뒤를 고이소 구니아키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협력 체제인 고이소 내각이 계승했지만 1945년 6월 오키나와 섬이 함락되었고, 7월에는 일본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어 전세는 계속 불리해져만 갔다. 하지만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였고, 결국 같은 해 8월 8일 소련이 참전하고 8월 6일과 9일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자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쇼와 천황이 직접 '항복 선언'을 발표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일본 열도에 진주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에서 결정한 "일본의 전후 처리"를 기초로 하여 점령 정치를 실시하였다. 1945년 9월 도쿄에 연합국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가 설치되었고,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은 모두 해방되거나 타이완이나 만주국 같은 경우는 원래대로 중국의 통치 하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점령 통치는 사실상 미국의 단독 점령의 가까운 형태로 전개되어 그 기본 방침은 민주화의 추진과 군국주의·일본식 제국주의의 배제가 있었다. 그러한 방침을 골자로 하여 같은 해 10월에 여성, 특히 부인(婦人)에 대한 해방과 노동 조합의 허가, 교육의 민주화, 압제적이고 전근대적인 제도의 폐지, 경제의 민주화에 관한 5대 개혁 지령을 발표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 전쟁을 지휘한 수뇌부의 체포, 치안유지법의 폐지와 정치범의 석방, 이른바 인간선언을 통한 일본 천황의 신격화의 부정, 전쟁을 지원한 대기업들의 해체 등이 이루어졌다. 이어 1946년 11월 3일에는 GHQ의 권고로 기존의 일본 제국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새 헌법이 발표되었다. 새 헌법은 주권재민, 평화주의에 따른 군대의 미보유, 인권의 보장, 국회 중심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민법과 형법 등과 같은 하위 법률들도 대폭 개정되어, 일본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했다. 또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일본은 미국의 병참 기지가 되었고, 대량의 군수 물자가 생산되는 등 일명 한국 전쟁 특수 경기(特需景氣)로 호황을 누리며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하고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와 함께 주권 또한 회복하여 1956년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력의 회복은 다수의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부흥과 세계로의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치르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군사적으로 일본의 대미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고 1960년 미일 안보 조약의 개정에 따른 불평등 주장이 나오면서 이른바 안보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한 때 집권 자민당 내각을 총사퇴 시키고 많은 국민들이 안보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할 만큼 크게 일어났으나 정부와 여당의 경제발전정책 수립과 1968년 벌어진 도쿄 대학에서의 극렬 학생운동과 그 정점이었던 야스다 사건이 터짐으로서 주춤하였으며, 1970년 요도호 사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일부 좌익 적군파에 의한 극렬 투쟁이 결정적으로 다수 국민들의 혐오를 삼에 따라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으로 1955년에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여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이 이루어져 사회당과 함께 55년 체제를 형성, 보수정당이 절대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근 40년간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져 특정 정당이 오랜 기간 집권함으로써 각종 부작용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이룬 경제의 고도 성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버블 경제'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경제를 크게 번성시켰다. 그러나 과도한 주가의 증가와 부동산 매입으로 인해 1990년부터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폭락이 진행되어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면서 10년 이상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불황 상태에 빠졌다. 그로 인하여 지지를 상실한 자유민주당은 한 때 10개월 정도 정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가 진보 정당과의 연정을 거쳐 계속 55년 체제의 집권 골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이래 보여준 민주당 내각의 대처와 경기 침체에 대한 반발로 인해 201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를 당하고, 자유민주당이 다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2012년 12월부터 2019년 현재까지, 자유민주당 소속의 아베 신조가 총리를 지내고 있다. MPEG MPEG(엠펙)는 영문 Moving Picture Experts Group의 약자이다. 국제표준화단체로서의 공식 명칭은 ISO/IEC JTC1/SC29/WG11이다. MPEG은 ISO 및 IEC 산하에서 비디오와 오디오 등 멀티미디어의 표준의 개발을 담당하는 소규모의 그룹이다. 1988년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첫 모임을 갖은 이래, 현재는 350여명의 다양한 산업계와 학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간 4회의 표준화 총회를 가지며, ITU 산하의 비디오 압축 표준화 단체인 VCEG과 함께 Joint Video Team (JVT) 를 구성해 H.264/AVC 표준을 공동 제정하고 있다. (이 표준은 이 공동 표준화를 통해 개발되어 ISO와 ITU 양 측 모두에서 공히 표준으로 인정된다.) MPEG은 다음과 같은 압축 포맷과 부가 표준을 만들었다. MPEG은 MPEG-21 이후 빈번히 창안되는 새로운 표준 기술들을 각 분류별로 통합하고자, 아래와 같은 기술 분류별 표준을 창안하여 현재 기술 표준화에 적용하고 있다. MPEG 영상 코덱은 변환 코덱을 이용하는 손실 압축 방식을 사용한다. 손실 변환 코덱에서, 그림과 소리의 샘플은 작은 조각으로 나뉘고, 주파수 공간으로 변환되어 양자화된다. 이렇게 조작된 값들은 다시 엔트로피 부호화된다. MPEG-1, MPEG-2, MPEG-4 등의 동영상 코딩 시스템에는 움직임 보상 등의 과정을 이용하여, 연속되는 두 그림 또는 근처의 그림들 사이의 차이를 경제적으로 전송함으로써 압축이 이루어진다. MPEG은 스트림 포맷과 디코더(복호기) 표준만을 정한다. 인코더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으며, 유효한 비트 스트림을 만들기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예가 제공된다. 다시 말하면, MPEG-4 디코더는 어떤 인코더로 만들어졌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MPEG-4 스트림을 디코딩할 수 있다. MPEG-2 MPEG-2(엠펙 투)는 MPEG(Moving Picture Expert Group)이 정한 오디오와 비디오 인코딩(부호화)에 관한 일련의 표준을 말하며, ISO 표준 13818(13818-1은 시스템, 13818-2는 비디오 부호화, 13818-3은 오디오...)로 공표되었다. MPEG-2는 일반적으로 디지털 위성방송, 디지털 유선방송 등의 디지털 방송을 위한 오디오와 비디오 정보 전송을 위해 쓰이고 있다. 또, MPEG-2의 표준을 약간 변형한 인코딩 포맷은 상업 DVD의 표준으로 돌비 디지털, DTS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MPEG-2 13818-2 비디오 표준은 MPEG-1과 비슷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에서 사용하는 비월주사 방식의 영상을 지원한다. MPEG-2 비디오(부분 2)는 저속 비트율(1 Mbit/s) 환경에는 부적합하지만, 초당 3 메가비트 이상을 요구하는 MPEG-1보다는 향상된 압축률을 보이고 있다. MPEG-2의 MPEG-1과 구별되는 특징으로는 데이터 유실이 많은 전송 환경에도 적합한 트랜스포트 스트림이 정의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는 현재 디지털 방송에 사용되고 있다. MPEG-2는 원래 MPEG-3로 개발하려던 HDTV(고선명 텔레비전) 전송의 표준 또한 포함한다. 또한 MPEG-1과도 호환성도 보장되어 표준을 따르는 MPEG-2 디코더는 MPEG-1 스트림도 재생할 수 있다. 이 부분의 표준은 ITU-T의 비디오 코딩 전문가 그룹(Video Coding Experts Group, VCEG)과 ISO/IEC의 동화상 전문가 그룹(Moving Picture Experts Group, MPEG)이 공동으로 표준화를 진행하였으며, 따라서 ITU-T의 H.262와 MPEG의 13818-2는 동일하다. MPEG-2 13818-3 오디오 표준은 MPEG-1 오디오 표준에서 발전되어 채널의 확장을 하는 MC (다중 채널)과 낮은 표본화 주파수를 제공하는 LSF (낮은 샘플링 주파수:Low Sampling Frequency)(24 kHz, 22.05 kHz, 16 kHz)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두가지 모두 MPEG-1 오디오를 복호화할 수 있는 하위 호환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알고리즘 측면에서는 추가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MPEG-1과 동일한 압축율을 가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MPEG-2에서는 압축율을 높이는 대신, 하위 호환성을 지원하지 않는 AAC (고급 오디오 코딩)를 13818-3이 표준화 된 후 13818-7로 표준화하고 있다. AAC에는 기존 MPEG 오디오에서 사용되지 않던, LTP, TNS, 예측 도구가 추가되었으며 레이어로 구분하던 MPEG-1,2와는 달리 도구의 집합인 프로파일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다. (덜 복잡함, 조절할 수 있는 샘플 속도) DVD / DVB 에서 사용되는 변경된 표준을 제외한 MPEG-2 비디오와 MPEG-2 오디오에 대한 일반 정보. MPEG-2는 "오디오 신호를 비롯한 동영상의 일반적인 인코딩(부호화)"을 위한 규약이다. 부호화된 비디오 스트림은 화면 내 예측(Intra), 전방 예측(Predictive), 양방향 예측(Bidirectional)의 세가지 프레임들의 배치를 규정한 GOP(Group of Pictures) 구조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부호화할 원본은 소리가 포함된 일정한 해상도의 영상이 초당 25(CCIR규정) 프레임 또는 초당 29.97(FCC규정) 프레임의 속도로 바뀌는 동영상이다. MPEG-2는 비월주사(interlaced scan)와 순차주사(progressive scan) 두 가지 방식의 비디오 스트림을 모두 지원한다. 순차주사 방식에선 부호화의 기본 유닛이 프레임(한 장의 영상)이 되고, 비월주사 방식에선 필드(한 장의 영상의 홀수줄, 혹은 짝수줄만으로 이루어짐)이다. 아래 설명에서 "픽처" 혹은 "정지 영상"이라고 말한 것은 각각의 기본 유닛(즉 필드나 프레임)을 가리킨다. MPEG-2 스트림은 단일 영상을 부호화한 데이터 프레임의 연속이다. 각 정지영상을 부호화하는 방법엔 화면 내 예측(I), 전방 예측(P), 양방향 예측(B) 세 가지가 있다. 각 비디오 이미지는 루미넌스(명도) 성분 Y 와 두 개의 크로미넌스(색차) U, V 채널로 우선 나뉜다. 각각에 대해 공간적으로 "매크로 블록(macroblock)"이라 불리는 16x16 크기의 격자로 나뉘며, 이 매크로 블록이 부호화의 기본적인 조각이 된다. 매크로 블록은 8x8 크기의 "블록" 4개가 합쳐진 것이다. 원본 이미지의 색상 샘플링 포맷에 따라 한 매크로 블록이 8x8 크기의 색차 정보 블록을 가질지, 아니면 16x16을 가질지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쓰이는 포맷에서는, 한 색상이 매크로 블록 하나(16x16)당 한 개의 크로미넌스 블록(8x8)만을 갖게 되어, 하나의 매크로 블록은 4개의 명도 정보(Luminance) 블록, 1개의 U블록, 1개의 V블록으로 총 6개의 블록을 갖게 된다. I 픽처의 경우 이미지 데이터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는 인코딩 절차를 바로 거치게 되며, P (혹은 B) 픽처의 경우엔 우선 "움직임 보상"(motion compensation)이라 불리는 과정을 거쳐 이전 영상(B의 경우엔 이전과 이후의 영상)과의 관련성을 검색하여 이용한 후 다음 인코딩을 진행하게 된다. 움직임 보상에선 P (혹은 B) 픽처로 만들어질 영상의 각 매크로 블록이 이전(B의 경우엔 이후도 포함) 영상의 어느 부분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가를 알아내어 그 부분과의 공간상의 변위인 "움직임 벡터"(motion vector)와 두 영상간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부호화 되어 전송되게 된다. 각 블록은 8x8 이산 코사인 변환(discrete cosine transformation)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변환으로 얻어진 각 계수들은 미리 정해진 값들로 나누어 양자화 되고, 지그재그로 재배열 된 후 영에 대한 RLC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허프만 코딩으로 부호화를 마친다. I 픽처 인코딩은 공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고, P 와 B 픽처는 시간적인 반복성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동영상을 이루는 이어지는 두개의 정지영상은 서로 상당히 비슷하며, 그래서 P 픽처는 보통 I 픽처의 10%, B 픽처는 2%의 크기로 부호화된다. 이 세 가지 프레임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프레임들은 GOP(Group of Pictures)라 불리는 구조를 이룬다. 다양한 구조의 GOP가 가능하지만 많이 쓰이는 것은 I_BB_P_BB_P_BB_P_BB_P_BB_ 의 순서로 15개의 프레임이 하나의 GOP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12개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GOP구조도 자주 쓰인다. GOP 구조의 I, P, B 프레임의 구성 비율은 비디오 스트림의 성격, 출력 스트림이 가져야 하는 대역폭(bandwidth)등에 따라 정해진다. 인코딩에 걸리는 시간도 비율을 결정하는 한 요소이다. 이를테면 실시간으로 전송해야 하는 생방송의 경우에 인코딩에 동원되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B 픽처가 많이 들어간 스트림은 I 픽처만으로 이루어진 스트림에 비해 인코딩에 3배 정도의 시간이 들 수 있다. MPEG-2 인코더의 출력 비트율은 일정해야 하거나, 정해진 최대 비트율을 갖고 변할 수 있다. 가변 비트율의 예로 10.4 Mbps를 최대 비트율로 갖는 DVD 영화를 들 수 있다. 일정한 비트율을 얻기 위해서 양자화의 수준을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양자화가 심하게 될 경우엔 전송된 스트림이 디코딩 된 화면에 격자모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현상은 비트율이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MPEG-2 는 또한 새로운 오디오 인코딩 방식을 도입한다. 이는 DVD 표준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 사항이 더해진다. DVB-MPEG에 더해진 제한 사항. 갈리아 전쟁 갈리아 전쟁( : Bellum Gallicum) 은 기원전 58년에 시작해 기원전 51년에 끝난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간의 전쟁이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로마는 당시 갈리아의 독립 켈트족 부족국가들과 교역 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 헬베티족,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대서양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속주를 지날 것을 카이사르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의 영토를 지나려 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전쟁 자체는 8년째, 기원전 5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알레시아 공방전의 결과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났으며, 기원전 51년은 전후처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갈리아 전쟁에 대한 1차 사료로는 카이사르의 저작 《갈리아 전쟁기》가 남아 있다. 기원전 58년 카이사르가 갈리아 키살피나, 프로빈키아, 일리리아의 3개 로마 속주의 총독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게르만족에게 밀려난 헬베티족은 스위스 레만호 동쪽연안에서 브르타뉴 지방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하이두이족에게 길을 내달라고 하고 카이사르에게 통과를 요청했으나 카이사르는 허가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의 12만 명정도가 라인강을 건너오자 하이두이족과 공동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손 강연안에서 헬베티족을 기습하고, 달아나는 헬베티족을 쫓아 비브락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강화를 맺었다. 헬베티족과 전투 이후 갈리아인들은 게르만부족중 하나인 수에비족을 물리쳐 달라고 카이사르에게 부탁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협상을 시작했으나 브장송에서 협상을 결렬되고 수에비족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브장송에 겨울 숙영지를 짓고 라인강을 로마의 방위선으로 결정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 사이의 내부부족의 투쟁에 개입했다. 로마군은 갈리아 북동부 경계선까지 진출하여 레미족과 동맹을 맺고 벨가이의 여러부족과 전투를 벌였다. 벨가이인(현재의 벨기에)은 약 30만 명으로 수에시오네스족의 족장 갈바를 중심으로 로마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센 강을 건너 벨가이인들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을 물리치고 벨로바키족, 암비아니족과 차례로 강화를 맺은 다음 지금의 벨기에 영토인 갈리아 북동부를 평정하였고 크라수스 "빛꾸러기"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대서양 연안의 부족을 평정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갈리아 전체가 평화로워 졌고 카이사르는 겨울 숙영지를 갈리아 중서부 (현재의 오를레앙)에 잡았다.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인공들인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차례로 만난 이른바 "루카회담"에서 다시한번 삼두정치의 방향을 정하였다. 그 사이 베네티족을 비롯한 갈리아 서부의 부족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카이사르는 브르타뉴 지방으로 이동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 선단이 베네티족의 함대 220척을 격파하여 베네티족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한편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들도 곳곳에서 카이사르대신 전과를 올렸다. 라인강에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노르망디는 사비누스, 아키텐에서는 청년 크라수스가 각각 승리하였다. 카이사르는 노르망디에서 겨울 숙영지를 설치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강으로 진격하여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쳐부수었다. 오늘날의 독일 본과 쾰른사이의 중간지점에서 다리를 놓아 처음으로 라인강을 넘어 수감부리족을 공격하고 우비족과 화평을 맺었다. 이후 서부로 방향을 돌려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나섰다. 그때까지 브리타니아는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로마에게 미지의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는데 해안가에서 브리타니아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격전을 치렀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왔다. 한편 카이사르는 아버지 크라수스를 따라 시리아로 원정을 떠나는 크라수스에게 기병 1,000을 주어 보내고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원정을 계획하였다. 그전에 트리베리족을 복속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게릴라 전술로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템즈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브리타니아의 카시벨라우누스와 강화를 맺고 가을에 갈리아로 돌아왔다. 한편 그 해, 갈리아에서는 밀의 수확이 예년에 훨씬 못미쳤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여덞개로 분산하여 겨울을 보내기로 하고 각각 부하장군들에게 나누어 월동했는데 그중의 한군데에서 15개 대대 9,000명의 병사가 에부로네스족의 족장, 암비오릭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몰살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네르비족과 아투아투키족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6만 명의 벨가이족 군대가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겨울 숙영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즉각 군단을 모아 키케로를 구하러 달려갔고 반란부족을 격파했다. 카이사르는 다시 아미앵에서 겨울을 보냈다.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네르비족을 제압한 후 파리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참석하지 않은 부족을 반란부족으로 간주하여 압박했고 결국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복종을 받았다. 이로써 배후를 강화한 카이사르는 역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트레베리족을 라비에누스에게 격파하게 하고 합류하였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만들어 두 번째로 라인강을 넘어갔으나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다.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진지를 짓고 6,000명을 라인강 서쪽에 에 주둔시켰다. 암비오릭스를 쫓아 북쪽으로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지는 못하고 돌아와 랭스에서 부족장 회의를 다시 주재하고 반란군 주동자를 처형하였다.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이 오를레앙의 로마인을 살해하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이된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 부족의 총궐기를 호소하여 갈리아 부족 대부분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프로빈키아에서 갈리아 중부로 달려가 모든 군단을 모아 반기에 맞섰다. 카이사르는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하지만 게르고비아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 틈을 타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전투를 걸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6만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였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구축하지만 갈리아 부족 연합의 20만이 넘는 대군이 포위망을 다시 포위하여 안팎의 적을 상대해야했다. 9월에 벌어진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격전을 치르고 갈리아부족 포위군을 격파하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 투항하였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다시 여덟 군데로 나누어 겨울을 나게하고 자신은 하이투이족의 영토에서 숙영했다. 이로써 사실상의 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겨울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 7권을 간행했다. 전쟁 8년째에는 알레시아 공방전이후 전후처리를 하여 모든 부족을 로마에 복속시켰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화하고 속주세를 정액제로 바꾸었다. 로마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km로 서울시의 2배정도이고, 2014년 인구는 290여만명이다. 로마 도시권의 인구는 430여만명이다. 로마 대도시현의 인구는 400만이 넘지만 밀라노나 나폴리 대도시현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현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 볼 수 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그 전부터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à Eterna")’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고대 로마의 기원 설화에 따르면, '로마'라는 이름은 도시의 첫 번째 왕이자 설립자인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학자들은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도시 로마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따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학설들이 존재한다. 로마에서 무려 14,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온 바 있다. 다만 이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유적들의 잔해들이 워낙 조밀하게 모여있기 때문에,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 연대 구분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다. 후대에 출토된 석기, 무기들은 인류가 이 곳에 약 10,000년 전부터 살고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당시에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 소규모의 마을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형태로 작은 부락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도시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사이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있었던 가장 큰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 소규모 부족들이 연합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갔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연합은 도시의 규모를 키워 농업, 수공업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들과의 무역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발견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신화에서 나온 것처럼 로물루스가 기원전 8세기에 도시 로마를 처음으로 세웠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아이네아스의 후예이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 강가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했다. 그러나 이후 형제 사이 불화로 싸움이 일어났고, 형인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 후 로물루스는 자기의 이름을 따서 도시 국가의 이름을 로마라고 했고, 로마의 건국 시조로 추대받고 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전설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빠르며, 기원전 8세기 혹은 9세기경, 북방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해 온 민족이 테베레 강 하구에 정착한 게 로마의 시초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는 철기 시대 유적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되었지만 전설과 사실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로마는 라틴족의 도시 국가 건설로 출발했다는 게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로물루스의 건국 이후 244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한 로마 왕정체제를 이뤘다. 기원전 509년에 마지막 왕이 폐위되었고, 이후 로마는 귀족들에 의해 주도되는 로마 공화정체제로 약 450년간 운영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2, 3세기에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146년)과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2년-기원전 168년)으로 지중해를 장악했고, 지중해의 가장 강력한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권력층 사이에 권력투쟁이 두드러지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사이에 내전(기원전 88년-기원전 80년)이 발발했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기원전 73-기원전 71)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59-기원전 54)가 뒤따르며 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원전 58년-기원전 51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내전(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의 승리를 통해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잡지만, 기원전 44년 공화정 지지파인 브루투스등에 의해 암살당한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기원전 43-33)가 뒤따랐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유일의 권력자가 되어 로마제국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68년까지 100여년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 황제의 자살로 막을 내리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 불린 서기 68년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서기 69-96)가 열린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 이후, 로마제국의 황금기인 오현제 시대(96년-169년) 또는 팍스로마나 시대라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뒤따랐다. 제국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트라야누스 황제시기(98년-117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된다. 이 시기 로마는 인구 수는 100여만명이 넘어가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192년, 콤모두스 황제의 암살이후 내전이 벌어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승리하면서 세베루스 왕조(193년-235년)를 열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암살 이후, 40여년간 20여명의 황제가 암살되고 바뀌는 혼란의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는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 정치를 창안하여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다. 50여년간의 사두 정치 체계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때 현 이스탄불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천도하였고, 395년에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로마제국의 수도는 사두 정치 체제때 로마시를 벗어나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올라눔, 현 터키지역의 니코메디아, 현 독일지역의 트리어, 현 세르비아지역의 시르미움 네 군데로 나눠 제국을 통치하였고, 이후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제국은 이후 라벤나로 천도하면서, 로마시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4, 5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약탈을 받으며 서로마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410년에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로마 약탈 (410년))되고, 455년에는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다시 함락(로마 약탈 (455년))된다. 476년, 게르만 용병 장군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6세기 이후 동고트 왕족을 정복한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등 몇몇 게르만족 왕국의 지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샤를마뉴의 기부장에 따르면 800년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청에 로마의 지배권을 주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서 다시 번창해진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치세에는 성벽 개수, 궁전 건설, 교회 수복 공사 등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유명한 예술가나 건축가들이 대거 로마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교황을 위해 예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면서(이른바 로마 약탈 사건) 르네상스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울러 가옥들이 어수선하고 밀집한 형태를 띤 중세의 도시가 근대화 되기 시작한 때는 16세기 말의 교황 식스토 5세의 시대로, 포폴로 광장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세 개의 도로를 닦았으며, 광장과 샘도 만들어 찬란했던 로마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끝난 때도 이 시대이다. 대응 종교 개혁 시대 로마의 특징인 바로크 양식은 17세기의 건축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에 베르니니나 보로미니와 같은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로마의 외관을 바꾸어갔다. 18세기에는 교황의 통치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페인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는 18세기 전반의 로코코 양식의 건물은 이윽고 신고전주의라는 독특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 다수의 귀중한 미술품을 약탈하였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로마는 다시 교황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의 발달 덕분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나 미국 등 비유럽 지역에서도 다수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파리나 런던, 마드리드 등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서 사랑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는 급격히 성장하여, 밀라노를 제치고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 행정적 기능이 집중된 행정수도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부격인 로마 교황청이 소재한 바티칸 시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국제기관의 관청이 다수 진출해 있는 등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베가 맨발로 뛴 것으로 유명한 1960년 하계 올림픽이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로마는 '로마 카피탈레 (Roma Capitale, 수도 로마)'란 이름으로 특별 코무네 지위에 올라 있으며, 이탈리아 전 코무네 8,101개 중에서 면적과 인구 모두 제일 큰 코무네이다. 로마 코무네 행정청은 역사상 로마 행정부의 소재지였던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나토리오 궁전에 자리해 있다. 흔히 로마의 지방 정부를 가리킬 때 이 언덕의 이탈리아어 이름인 '캄피돌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는 1972년부터 '무니치피오' (municipio, 복수형은 무니치피 (municipi), 2001년까지는 시르코시치오니 (circoscizioni))라는 이름의 행정 구역으로 세분화됐다. 무니치피오는 시내 분권화를 확대한다는 행정 근거를 이유로 설치됐다. 각 무니치피오는 주민이 뽑은 대표와 네 명의 의원이 5년씩 행정을 맡는다. 무니치피오들은 반대로 행정상에 적용되진 않으나 예로부터 전해오는 로마의 각 구역들의 경계와 겹치는 경우가 꽤 많다. 로마의 무니치피오는 처음엔 20개였다가 하나를 제해 19개로 줄었으며, 2013년에는 15개로 다시 축소됐다. 로마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각기 다른 형태의 비행정 구역으로도 나뉜다. 역사 중심부 지역은 22개 리오네로 세분되며, 프라티와 보르고만 제외하면 모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내에 자리해 있다. 리오네는 고대 로마의 각 지역에서 출발해 중세에 리오네로 발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 교황 식스토 5세 시기에는 다시 14개 지역에 이르렀고, 마침내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각 리오네의 경계를 획정했다. 나폴레옹 점령 시기에는 새로운 행정 구역이 잠깐 적용됐으며, 이후 체계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그러다 1870년 이탈리아의 세번째 수도로 로마가 되었고, 신수도의 필요성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팎의 도시화와 인구 폭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1874년에는 새롭게 도시화된 지구였던 몬티 리오네에서 15번째 리오네인 에스퀼리노가 갈라져 나왔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머지 리오네들도 속속 생겨났다 (마지막은 1921년 신설된 프라티 리오네로, 교황 우르바노 8세 성벽 외곽에 있는 유일한 리오네였다). 이후부터는 로마 시의 새로운 행정 구역명으로 '콰르티에레 (quartiere)'가 사용됐다. 오늘날 모든 리오네는 제1무니치피오의 일부로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제1무니치피오는 역사 중심부 (Centro Storico)의 범위와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는 2015년 1월 1일부로 로마 수도 광역시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 로마 수도 광역시는 로마 광역권에 북쪽으로 치비타베키아까지 뻗어나갔던 구 로마현을 대체했다. 로마 수도 광역시의 면적은 총 5,353제곱미터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며, 리구리아주에 맞먹는다. 이와 더불어 로마는 라치오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이탈리아 정부의 소재지이다.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과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의 공식 소재지, 이탈리아 의회의 양원 의사당 소재지, 그리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소재지는 모두 로마의 역사 중심부 내에 있다. 국가 행정기관들 역시 시내 전반에 걸쳐 있으며, 대표적으로 올림픽 스타디움 부근 파르네시나 광장에 자리한 이탈리아 외교부 청사를 들 수 있다. 축구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로마는 1934년과 1990년 FIFA 월드컵의 결승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두 결승전이 열렸던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로마의 스포츠 문화를 대변하는 경기장이자 세리에 A에 속한 AS 로마와 SS 라치오의 홈 경기장이다. AS 로마에서 프란세스코 토티 선수와 다니엘레 데 로시 선수는 모두 로마 태생이며 특별히 인기가 많다. 아틀레티코 로마는 레가 프로 프리마 디비시오네에서 마이너 팀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홈 경기장은 스타디오 플라미니오이다. 로마는 1960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빌라 보르게세나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고대 유적을 경기장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 올림픽 스타디움, 빌라지오 올림피코 등을 새로 만들었다. 현재 로마는 2020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 밀라노, 토론토, 브리즈번, 몬트리올 등과 유치 경쟁을 벌고 있는 중이다. 럭비 유니온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스타디오 플라미니오 경기장은 2000년부터 식스 네이션스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럭비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로마는 유니오네 럭비 카피톨리나, 럭비 로마, S.S. 라치오 같은 지방 럭비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매년 5월이 되면 로마는 포로 이탈리코 클레이 코트에서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의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한다. 사이클은 제 2차 세계 대전 기간까지만 해도 인기가 있었으나, 요즘에는 그 인기가 식은 상태이다. 로마는 1989년과 2000년에 지로 디탈리아 결승전을 두 번 개최한 적이 있다. 로마는 그 외의 스포츠 팀들, 예로 들어 농구 (비르투스 로마), 배구 (M. 로마 발리), 핸드볼, 워터 폴로 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로마 시는 1956년부터 파리 시와 독자적으로 파트너 도시 결연을 맺었다. 로마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 토머스 핀천 토머스 핀천(Thomas Ruggles Pynchon, Jr. 1937년 5월 8일 - )는 미국의 소설가이다. 1937년 5월 8일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코넬 대학에서 공학물리를 전공하다 잠시 해군에 복무한 후 인문대로 전공을 바꿨고 1959년 영어학으로 학교를 마침. 그 해, 그의 첫 단편 소설 '작은 비'가 출판되었고 이는 그 후 출판된 몇 편의 단편과 함께 '늦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단편모음으로 1984년 재출판되었다. 그는 시애틀의 보잉사에서 기술자료를 쓰는 일을 하면서 그의 첫 장편소설 '브이.'를 쓰기 시작했고 이는 1963년 출판되었다. 그는 두 번째 작품으로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1966년에 출판했고 그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그의 대작 '중력의 무지개'(1973)를 썼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율리시즈'라는 평을 받았고 1974년 퓰리처 상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집행위원회에서 "읽기 힘들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거부되었고 그 해 퓰리처 상은 수상작없이 넘어갔다. 그의 다른 소설로는 '바인랜드'(1990)와 '메이슨과 딕슨'(1997)이 있다.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그의 성향은 아주 유명하여 그의 실제 정체와 주거지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는데 음모론과 망상증이 근간을 이루는 그의 소설의 분위기가 이를 부추기는 데에 한 몫하기도 했다. 한글 번역이 이루어진 작품으로는 '브이.'가 '브이'(학원사)와 'V를 찾아서'(민음사)라는 이름으로 두 번 번역되었고 '제 49호 품목의 경매'가 벽호에서 나오는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중 한 권으로 번역되었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2007년 재발간되었다. 단편집 '늦게 배우는 사람'은 벽호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2013년에 중력의 무지개(새물결)가 번역되었다. V. 《V.》(브이.)는 토머스 핀천의 첫 장편 소설이다. 유럽 역사를 거쳐 등장하는 '브이.'라는 존재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허버트 스텐실의 노력을 그린 작품이다. 《V.》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테마의 축을 이루는 것은 20세기 초반의 '역사의 비인간화'를 상징하는 여러 역사적 사건과 이들 사건 속에 관찰자로서 계속 등장하는 '브이.'라는 여인(?)의 관계를 밝히려는 스텐실의 노력이다. 꽤 취약한 인과관계(브이. 라는 이니셜) 속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스텐실의 노력은 소설의 또 하나의 테마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역사 혹은 인간의 존재에 패턴 혹은 계획이 존재하는가 혹은 모든 사건이 서로 무관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텐실의 노력에 대비되는 것이 기계치인 베니 프로페인(프로페인은 '불경스런'이라는 의미)의 폐인과 같은 삶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의 비인간화를 경계하면서도, 그 치명적 영향을 두려워하여 인간적 접촉과 그에 수반한 감정을 거부한다. 특수 상대성이론 특수 상대성이론(特殊相對性理論, , ), 또는 특수상대론(特殊相對論, )은 빛의 속도에 견줄 만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들을 다루는 역학 이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고속의 물체에 대하여 기존의 뉴턴 역학의 갈릴레이 변환을 대체하고, 갈릴레이 변환과 달리 고전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과 일관적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채용한다. 이 이론에서는, 갈릴레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관성계가 동등하지만,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과 일관하게 광속이 모든 관성계에서 동등하다. 즉, 빛 (혹은 다른 질량이 없는 입자)의 속도는 이를 방출하는 물체와 관찰자 사이의 상대운동에 무관하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여러 가지 놀라운 예측을 하는데, 이 예측들은 전부 실험에 의해 검증되었다. 로런츠 변환을 도입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운동학적으로 더 이상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둘을 더하여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고, 이를 민코프스키 공간으로 나타낸다. 이에 따라, 시간과 공간 중 하나에만 의존하는 측정량 (예를 들어 길이, 시간 간격 등)은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 서로 다른 값을 가진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해당하는 값들을 합쳐서 4차원 벡터로 나타내면 다루기 쉽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어떤 일반적 속도 상수(광속)가 존재하므로, 이를 이용하여 질량과 에너지를 관계지을 수 있다. 이론에 따르면, 어떤 계의 질량은 그 계의 운동량 중심의 (순간적인) 관성계에서의 에너지와 같다 (E = mc). 이를 질량-에너지 등가성이라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뉴턴 역학과 같이) 상대성 원리를 오로지 관성계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즉, 가속계는 관성계와 실험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에 발견된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고려하면 가속계가 관성계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가속계와 관성계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강한 중력장이 없는 경우,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적 현상을 정확히 기술한다. 다루어지는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훨씬 작은 일상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예측은 뉴턴 역학의 예측과 일치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가정에서 시작한다고한다. 첫 번째 가정은 어느 관성계(속도가 일정한 계)에서든 물리 법칙은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뜻이다. 비록 땅에서 볼 때 시속 100 km로 가는 차가 같은 방향으로 시속 50 km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시속 50 km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체적인 값의 차이와는 달리 두 관성계 모두에서 물리 법칙, 즉 관성의 법칙, 운동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은 동등하게 적용된다. 이렇게 모든 관성계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같으므로 물리 법칙의 차이를 이용해서 두 관성계를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관성계는 동등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더 '진정한 기준관성계'에 가깝지 않다. 두 번째 가정은 어느 관성계에서 관측하든지 빛의 속도는 동일하게 관측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갈릴레오 변환에서는 관성계 A에 대해 "u"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 B에서 관측한 어느 물체의 속도가 "v"일 때 관성계 A에서 관측한 물체의 속도는 "u+v"이다. 하지만 이 변환은 빛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관성계 A에 대해 "u"의 속도로 움직이는 관성계 B에서 관측한 빛의 속력이 "c"일 때 관성계 A에서 관측한 빛의 속력은 "u+c"가 아닌 "c"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동시성은 좌표계에 따라 상대적이다. 즉 "동시"라는 것은 좌표계에 따라서 다르게 관측된다는 것이다. 한 좌표계에서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 관측되었더라도 다른 좌표계에서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관측될 수 있다. 이 현상의 가장 유명한 예는 다음과 같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버스가 있고 버스의 앞면과 뒷면의 정확한 중앙에 전등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전등이 꺼져 있다가 갑자기 켜진다고 하자. 이때 전등에서 나온 빛이 버스의 앞면에 도달하는 사건을 A, 뒷면에 도달하는 사건을 B라 하자. 그러면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A와 B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관측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등이 앞면과 뒷면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앞면과 뒷면으로 향한 빛의 진행 거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스 외부에서 보면 B가 A보다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서 보면 빛은 앞과 뒤를 향해 같은 속력으로 진행하지만 뒷면은 빛을 향해 가까워지고, 앞면은 빛에서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뒷면으로 향한 빛이 앞면으로 향한 빛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다. 즉 두 관찰자의 동시가 일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성질이 아니라 어떠한 두 사건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일반적인 법칙이다. 또한 이 성질은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을 설명하는 데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시간 팽창(Time dilation)은 어떤 관성계에서 상대속도를 가지는 다른 관성계를 관측할 때 시간이 팽창된 것으로 관측되는 것을 뜻한다. 즉 관성계 A에서 움직이는 다른 관성계 B를 보면 B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기 때문에 역으로 다른 관성계 B에서 관성계 A를 관측하면 A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히는 A에서 관측한 B의 시간이 다음과 같이 보인다. 여기서 이 두 관측 결과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관성계 A에서 B의 시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측정 시작 시각과 끝 시각을 각각 측정해서 두 차이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B는 움직이고 있으므로 측정 시작 시각의 B의 위치와 끝 시간의 위치 두 곳에 각각 시계를 놓아야 한다. 이때 측정 전에 두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이 같아야 한다. 이렇게 두 시계의 시각을 같게 조정하는 것을 동기화()라 한다. 그러나 A에서 두 시계를 동기화하였더라도 이것을 B가 관측했을 때는 동시성의 상대성에 의해 두 시계가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B가 관측하기에는 A가 잘못된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B의 시간이 A보다 느리게 간다는 A의 관측 결과는 B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B에서 A를 관측하는 경우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실험이 필요하다. A에서 B를 관측할 때는 A에 동기화된 2개의 시계와 B에 하나의 시계가 필요했지만 B에서 A를 관측하는 경우에는 B에 동기화된 2개의 시계와 A에 하나의 시계를 사용해 실험을 한다. 즉 A와 B는 서로 다른 실험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두 결과는 상호 모순적이지 않다. 길이 수축(Length contraction)은 어떤 관성계에서 상대속도를 가지는 다른 관성계를 관측할 때 길이가 수축된 것으로 관측되는 것을 뜻한다. 즉 관성계 A에서 움직이는 다른 관성계 B를 보면 B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모든 관성계는 동등하기 때문에 역으로 다른 관성계 B에서 관성계 A를 관측하면 A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진 것으로 관측된다. 정확히는 A에서 관측한 B의 길이가 다음과 같이 보인다. 여기서 이 두 관측 결과 역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물체의 양 끝 지점의 위치를 동시에 측정해서 그 차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A에서 두 지점을 동시에 측정하였더라도 이것을 B가 관측했을 때는 동시성의 상대성에 의해 양 끝을 다른 시각에 측정한 것으로 관측된다. 따라서 B가 관측하기에는 A가 잘못된 실험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B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A의 관측 결과는 B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시간 팽창과 길이 수축은 기존의 갈릴레이 변환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갈릴레이 변환 대신 로런츠 변환을 쓴다. 만일 어떤 사건이 formula_10계에서 formula_11의 시공간 좌표를 갖고, formula_10에 대해 formula_13의 상대속도를 가지는 formula_14계에서 formula_15의 좌표를 갖는다면, 이 두 좌표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변환의 특징은 변환 후에도 빛의 속도는 formula_5로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는 맥스웰 방정식에서 빛의 속도가 좌표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고 예측한 사실과 일치한다. 따라서 고전역학의 갈릴레오 변환과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을 모순 없이 결합시켜주는 변환으로 평가된다. 고전 역학에서의 운동량인 formula_21는 더이상 상대론적 속도에서 보존되지 않는다. 그 대신 상대론적 운동량이 보존되는데 그 크기는 다음과 같다. 이 식에서 formula_23라고 하면 고전적인 운동량인 formula_21이 된다. 또한 고전적인 운동에너지인 formula_25 역시 상대론적 속도에서는 성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의된다. 이 식 역시 formula_23일 때 고전적인 운동 에너지인 formula_25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보존되는 에너지는 운동에너지가 아닌 총에너지 formula_29이다. 이 중 운동에너지가 아닌 을 정지 에너지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질량과 에너지가 자유롭게 변환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질량과 에너지는 완전히 동등하다는 의미로 다시 말해 질량 formula_31의 정의에 가깝다. 이 때의 질량 formula_31을 정지 질량이라 한다. 보다 엄밀한 정지 질량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지 질량은 어느 관성계에서도 일정하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이라 하면 정지 질량을 일컫는다.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기파는 특정한 속도를 지닌다. 1905년 이전에는 학자들은 전자기파가 에테르라고 불리었던 매질 위에서 전파되며, 전자기파의 속도는 에테르에 대하여 상대적인 속도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1887년에 행해진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에테르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1889년에 조지 피츠제럴드()는 물체가 높은 속도로 움직일 때는 그 길이가 축소된다고 제안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헨드릭 로런츠 와 조지프 라모어 는 오늘날 로런츠 변환이라고 불리는 변환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효과들을 에테르에 의한 전기적 효과라고 취급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 에서 로런츠 변환 및 관련된 공식들이 시공간의 근본적인 성질임을 두 개의 기본 가정 아래 증명하였다. 같은 해에 아인슈타인은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대한 논문 〈물체의 관성이 그 에너지 함량에 관계있는가?〉 를 발표하였다. 이 두 논문은 오늘날 특수 상대성 이론의 시초로 평가된다. 태국의 역사 이 문서는 태국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한다. 동남아시아의 인류 거주사는 50만 년이 넘는다. 최근 이루어진 반치앙 유적(Ban Chiang)의 고고학 조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000년에 이미 오늘날의 태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벼농사의 발달은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이러한 발달이 이곳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타이족은 언어학적으로 중국 남부에 있는 여러 집단과 관련이 있다. 6세기와 7세기에 거쳐 중국 남부에서로부터 동남아시아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타이족이 남하하기 전에 이 지방에는 선주민인 말레이족, 몬족, 크메르족 등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타이인들은 13세기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크메르 제국 지배하에 있던 1238년 수코타이에서 타이 족장들이 크메르를 타도하고 타이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 시절 오늘날의 타이 지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다 1365년에 아유타야 왕국에 넘어갔다. 아유타야 왕국은 1700년대까지 타이 남부와 중부 지역을 지배한다. 수코타이 왕국이 쇠퇴하자 차오프라야 강가에 1350년 새로운 타이 왕국이 세워졌다. 수코타이 왕국 시절에도 타이 북부에는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타이 왕국이 융성했으며 독립 왕국으로 유지해오다, 1558년 버마와 아유타야와 번갈아 가며 식민통치를받으며, 오랜 기간 동안 존속되다 결국에는 아유타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유타야 왕국의 첫째 왕 라마티보디 1세는 타이 역사에 두가지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는 소승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고 융성하게 해 힌두교 왕국인 이웃 크메르 제국와 구별되게 한 것이고 둘째는 같은 이름의 힌두교 법률서와 타이의 전통 풍습에 기초해 다르마샤스트라(Dharmashastra)라는 법률을 제정한 것이다. 다르마샤스트라는 19세기까지 타이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을 시작으로 아유타야 왕국은 서양과 접촉을 조금 가졌지만 1800년대까지는 이웃하는 나라들과 인도, 중국 등과의 관계가 우선되었다. 4백 년 이상 계속된 아유타야 왕국은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수도가 불타고 6개 부분으로 분열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때 딱신(Taksin) 장군이 타이 왕국을 재통일하여 톤부리에 새로 수도를 정하고 1769년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전해진 바에 의하면 탁신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 톤부리 왕국은 1대로 끝나고 1782년 차크리(Chakri)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 차크리 왕조의 첫째 왕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톤부리에서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에 있는 방콕에 수도를 건설했다. 라마 1세를 이어 왕이 된 후계자들은 1826년 영국이 이웃 버마에서 승리한 일을 계기로 유럽 식민주의의 대두에 대응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았다. 타이는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1833년에는 미국과 시암(1939년 이전과 1945년-1949년에 사용되었던 타이의 옛이름) 간에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몽꿋(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꼰(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 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타이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력과 타이 정부의 근대화 개혁 때문에 타이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는 타이의 오늘날 국명인 프라텟 타이(1939년-1945년에는 비공식 국명으로 사용, 1949년 5월 11일 공식 국명으로 제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프라텟은 '나라', 타이는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 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툰(Satun) 주가 타이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입헌 군주국으로 발전하였다. 1932년 시암 쿠데타로 인해 타이의 정부는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었다. 쁘라자띠뽁(라마 7세)은 처음에는 이 변화를 수용했지만 후에 당시 10세였던 조카 아난다 마히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쁘라자띠뽁은 퇴위하면서 지배자의 의무는 특정 소수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을 위해 통치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난다 마히돌(라마 8세)는 1946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공식 견해는 자신의 총을 청소하다가 실수로 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는 타이 역사상 재위 기간이 최장인 군주이며 타이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타이는 명목상 입헌 군주국이나 1992년까지는 수차례 루앙 피분송크람과 사릿 타나라자타 등의 군사 정권의 지배를 거의 계속 받아왔으며 그 간간히 있던 민주 정부는 대개 단명해왔다. 1992년 선거 이후 타이는 명실공히 민주주의 국가이며 헌법에 따라 정권이 바뀌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모든 동남아시아는 일본군에 점령당하였으며, 타이 남부까지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타이에서 미국과 영국을 지지했던 이들인 '사리 타이(Saree Thai)'에 힘입어 타이는 미국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버마,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타이는 그 지역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지역 협력체인 아세안(ASEAN)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06년에는 2006년 타이 쿠데타가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고, 2008년에는 2008년 타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굴 굴은 바다에서 사는 굴과의 연체동물 가운데 먹는 것의 총칭이다. 바위에 붙어 살기 때문에 석화(石花)라고도 한다. 조개껍데기 속에는 부드러운 몸체가 있다. 아가미는 음식물을 모아 위에서 소화하도록 하며, 안쪽의 내전근으로 껍질을 여닫는다. 굴은 익혀서 먹기도 하지만 생으로도 먹는데, 중세 유럽에는 미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음식으로서 작용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책으로는 M. F. K. Fisher가 쓴 《Consider the Oyster》라는 책이 있다. 한편 굴은 미국 공익과학센터(CSPI)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자료를 토대로 열거한 가장 위험한 음식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굴이 노로바이러스나 비브리오에 쉽게 오염되기 때문이다. 굴은 영양가가 풍부해 '바다의 우유'라고도 불린다. 가을부터 겨울 동안에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다. 굴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타민A, B1, B2, B12, 철분, 동, 망간, 요오드, 인, 칼슘,아연 등이 많다. 참굴의 경우 먹을 수 있는 부분 기준 100g 당 인이 115mg, 철분이 75mg 이다. 굴의 당질의 대부분은 글리코겐인데, 이 성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어서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 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식품으로 권장된다. 옛날부터 빈혈과 간장병 후의 체력회복에 좋은 강장식품으로 여겨져 왔다. 한방에서는 땀을 흘리지 않게 하고 신경쇠약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기며, 뇌일혈과 불면증에 좋다고 한다. 굴껍질은 간장 및 장질환과 두통에 가루내어 달여 먹으면 특효가 있다고 한다. 식용에 이용되는 굴의 종류에는 참굴·아메리카굴·포르투갈굴·호주굴·봄베이굴·갓굴·토굴·유럽굴·올림피아굴 등이다. 굴양식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기원전 1세기에 나폴리에서 양식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숙한 굴은 내만의 수온이 2-5℃로 되는 5-8월이 산란기이다. 수중을 부유하고 있는 유생은 0.4mm 정도로 자라면 바위에 부착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를 보아 굴껍데기나 큰가리비의 조가비를 연결한 부착기를 바닷속에 넣어 치패(稚貝)를 부착시켜 채묘(採苗)한다. 부착된 치패는 4~5일 정도 경과하면 깨알 정도로 커지는데, 이것을 종(種)굴이라고 한다. 수하식 양식은 종굴이 언제나 바닷속에 잠겨 있으므로 간조시에 노출되는 바위의 굴보다 성장이 빠르다. 굴의 부착성을 이용하여 조개껍데기 등의 부착기에 붙인 다음, 이 부착기를 다시 긴 줄에 꿰어 뗏목·뜸에 매달아 수하시켜 양식한다. 양식생물을 부착시키기 위해 부착기를 꿴 줄을 수하련(垂下連)이라 하며, 현대식 양식은 대부분 이 방법을 쓴다. 수하식 양식에는 말목식·뗏목식·로프(밧줄)식 등이 있다. 말목식(또는 간이 수하식)은 물이 얕은 연안에 말목을 박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수하연을 매달아 양식하는 방법인데 시설이 간단하여 굴의 종묘생산에 많이 이용된다. 뗏목식은 대나무·쇠파이프 등으로 뗏목을 만들고 그 아래에 합성수지로 만든 뜸통을 달아서 부력을 크게 한 것에다 수하연을 매단 것인데, 이 방법은 시설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굴 양식이 시작된 초기에는 많이 쓰였으나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로프식은 연승식(連繩式)이라고도 하는데, 수면에 로프를 뻗쳐 뜸통을 달아 뜨게 하고, 양끝을 닻으로 고정시킨 다음, 이 로프에 수하연을 매단 것이다. 파도에 견디는 힘이 크기 때문에 내만(內灣)뿐 아니라 비교적 외해에도 설치할 수가 있다. 중국 대륙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통영굴이 대륙 수출의 길을 넓히고 있다. 아이스킬로스 아이스킬로스( 기원전 525년/524년 - 기원전 456년/455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 작가이다. 비극예술의 창조에 기본적인 형태를 부여한 8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7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 등이 있다. 기원전 525년/524년 아테나이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엘레우시스(오늘날의 엘레프시나)에서 귀족인 에우포리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기원전 471년에서 기원전 469년 사이에 히에론 왕의 초청으로 시켈리아 섬의 쉬라쿠사이로 여행하여 그 곳에서 비극 《페르시아인들》을 상연하였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56년 겔라에서 사망하기전 또 한 차례(기원전 458년?) 쉬라쿠사이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된다. 사튀로스극을 포함 약 90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하는 비극은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일곱 편 뿐이다.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99년 24세의 나이로 비극 경연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나, 나이 40세가 되던 기원전 484년에야 비로소 첫 승을 이룬다. 그는 평생 13회 우승하였다. 그는 아테나이를 떠나 시켈리아의 겔라에서 살다가 그 곳에서 70세로 기원전 456년/455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테나이를 떠난 까닭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비극 배우의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으며, 장식 회화와 도구를 무대장치로 사용하였다. 또한 가면·가발·신 등을 창안하였고, 비극의 3부작 제도를 완성하였다. 그의 주요 공헌을 보면, 비극에서의 합창시의 형식이나 배열을 정비하여 극의 악곡적 구성과 극적 리듬의 통합에 성공했다는 점과, 운율적인 극대화의 기본적 격조를 낳았다는 점, 그리고 비극의 테마로서 제신이나 기괴한 신령에 얽힌 얘기를 즐겨 다루어, 테마에 어울리는 장대하고 화려한 연출방법을 만들어냈다는 점 등일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의 합창대는 어떤 작품에서나, 중대한 위기나 불안에 떠는 군중으로서 극적으로 위치가 주어지고 있으며 합창가는 신을 부르거나 혹은 신을 칭송하는 종래의 제사적인 형태와 기능을 지니면서 동시에 극의 참가자로서의 합창대의 집단적 표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배우는 그러한 집단을 대표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그와 반대로 그 적대자가 되는 수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배우의 대화에서 운율형식이 일정하지 않아, 장면에 따라서는 이암보스 형식이거나 토로카이오스 형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작가의 실험단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극 구성의 그 자체에도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면이 은연 중에 병존한다. <페르시아인들>은 말하자면 보고극, 즉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조건이 갖춰진 페르시아 왕궁이란 곳에 중대사건이 보고되고, 그 보고의 서사성에 극적 긴박감이 주어진다는 구성과 망령극, 즉 망령 출현이라는 형태로 사실성을 버리고 초시간적인 수준으로 상상력을 비약시키는 구성이 1편 가운데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또한 마지막으로는 극이란 사건의 당사자가 패배의 슬픔을 서정적으로 노래한다는 취향으로 끝나고 있다. 하나의 극적 사건을 몇 개의 다른 시점(視点)의 수준에서 다뤄 입체적인 깊이를 주고 각각의 시점 사이에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리스 비극 특유의 드라마투르기는 아이스킬로스의 이와 같은 대담한 몇몇 실험이 모태가 되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비극예술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포부는 3부작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 드라마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시인의 의미 부여이며 또한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이상의 탐구이기도 하여, 이 시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연속 테마에 바탕을 둔 3편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구상을 훌륭히 구현시킨 <오레스테이아> 3부작(<아가멤논>·<코이포로이>·<에우메니데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아가멤논 그리스 신화에서 아가멤논()은 미케네의 군주이다. 그는 아트레우스 왕과 아이로페 왕비의 아들로 메넬라우스의 형제이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이며 이피게니아, 엘렉트라 또는 라오디케, 오레스테스와 크뤼소테미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역사상 실재했는지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이 처음으로 등장한 후 그를 둘러싼 일화와 전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즐겨 다룬 소재 가운데 하나다. 여러 전설들은 아가멤논을 미케네와 아르고스의 왕으로 만들었다. 아가멤논 둘러싼 많은 이야기는 그의 족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 장남이자 메넬라오스의 형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 특히 아르고스, 미케네, 코린토스 등 지배하는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동맹군의 총지휘관으로서 100척의 전함이 그의 지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메넬라우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의 파리스에 의해 납치되자, 아가멤논은 그 결과로 벌어진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의 연합군을 지휘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와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고 귀향하지만, 바로 그날 잔치에서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일에 원한 품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역으로 배반당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오뒷세이아 11. 409-11에 따르면, 트로이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은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정부, 아이기스투스에 의해 살해당한다. 오래된 이야기에서는 살해 장소가 특정되어 나온다면 보통 아가멤논의 궁전에서 거주하지 않은 아이기스투스의 저택으로 나오며, 아가멤논 추종자들의 사망과 매복 역시 언급된다.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직접 남편을 남편의 저택에서 살해했거나 아이기스투스와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고 나오기도 한다. 그리스어로 그의 이름은 Ἀγαμέμνων인데 이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ἄγαν, "매우"와 μέδομαι, "숙고하는"이라는 뜻으로 구성된 Ἀγαμέδμων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제우스 ㅜ 플루토 네티켓 네티켓(Netiquette) 또는 인터넷 예절 혹은 인터넷 예의는 인터넷 공간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다. 영어 네티켓은 네트워크(Network)와 에티켓(Etiquette)의 합성어이다. 네티켓은 법적 제재에 의존하는 타율적 해결보다는 네티즌 스스로 자율적으로 사이버공간의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터넷 공간은 절대로 가상의 익명 공간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네티켓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https://web.archive.org/web/20140319070422/http://www.i-museum.or.kr/sub04/04/netiquette_read2.jsp%3Creferences/%3E%3Cbr /> 1994년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의 버지니아 셰어 교수가 제시한 '네티켓의 핵심원칙(아래)`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기원전 55년 기원전 54년 기원전 53년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기 7권 완성 기원전 51년 기원전 50년 기원전 49년 전한 선제 기원전 48년 로마의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기원전 47년 기원전 46년 기원전 45년 로마의 군인, 티투스 라비에누스 기원전 44년 기원전 43년 기원전 42년 기원전 41년 기원전 40년 기원전 39년 기원전 38년 기원전 37년 기원전 36년 기원전 35년 기원전 34년 기원전 33년 기원전 32년 기원전 31년 기원전 30년 기원전 29년 기원전 28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6년 기원전 25년 일식 일식(日蝕/日食, , )은 달이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가리는 천문현상을 말한다. 지구 표면에서 볼 때의 태양과 달의 시직경이 비슷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면(황도)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면(백도)이 거의 일치하여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태양의 앞쪽으로 지나 태양을 가리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때를 일식이라고 한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리면 개기일식(皆旣日蝕), 일부만을 가리면 부분일식(部分日蝕), 해와 달이 겹쳐졌으나 달이 해를 전부 가리지 못해서 반지 모양으로 가려지면 금환식(金環蝕) 또는 금환일식이라 한다. 일식은 태양과 달이 합을 이루는 초하룻날에 볼 수 있지만, 매달 일어나지는 않는다. 달의 궤도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또는 지구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를 도는) 천구상의 궤도인 황도와 달이 지구를 도는 궤도인 백도는 5도 이상 기울어져 있어서, 달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종종 지구를 빗겨 간다. 또한, 달은 타원의 궤도를 돎으로 지구에서 멀어졌을 때 달의 시직경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할 정도로 작아질 수 있다. 일식은 매년 최소 2회에서 5회까지 발생하며, 그중 개기일식은 2회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상의 한 지역에서의 개기일식은 드문데, 이는 일식이 지표면 위로 달의 그림자 또는 본그림자가 지나는 좁은 길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식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일부 고대나 근대 문화에서는 초자연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거나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천문학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는 대낮에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기에 두려워할 수 있었다. 일식 때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일식 관측에는 특별한 보호 장비(태양 안경 등)나 간접적으로 관측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개기일식에서 완전히 가려진 태양만을 보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안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식의 상태를 식별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이 있다. 고정된 장소에서 그러한 상태는 2시간여의 총 시간 동안 최고 7.5분 동안만 지속된다. 먼 곳까지 예상된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에는 '일식 추적자'(eclipse chasers) 또는 '반그림자 애호가'(umbraphiles)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일식은 식이 최대로 진행되었을 때의 상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달의 궤도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궤도보다 약 5° 기울어져 있어서 일식과 월식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일식이나 월식은 지구와 태양과 달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었을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달이 지구에 가까울 때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태양을 완전히 숨기게 되어 이른바 개기일식(皆旣日蝕)이 된다. 그러나 달이 지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달은 태양을 다 가리지 못하여 주변이 반지처럼 남는 금환식(金環蝕)이 된다. 개기일식에서는 달그림자가 원뿔 모양으로 늘어나 그 꼭짓점이 지구 표면에 도달한다. 이 그림자를 본영(本影)이라 한다. 이 지점에서 보면 개기일식이 된다. 본영의 바깥쪽에 있는 넓은 반영(半影) 부분에서 보면 달의 중심이 태양의 중심에서 빗나가 있어 이른바 부분일식을 볼 수 있다. 달의 궤도 운동에 의해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지점은 지구 표면 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간다. 그림자의 중심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관측할 때, 달은 서쪽에서 태양을 뒤쫓아와 태양의 모양이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부분일식이 되며, 이 부분일식이 점차 깊어져 개기일식이 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태양이 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다시 부분을 가리게 된다. 개기일식이 이어지는 시간은 길어도 7분 30초 정도이다. 개기일식이 되면 눈부신 태양 반구가 달에 가려지기 때문에 태양의 상층 대기인 채층(彩層)이나 그 위쪽으로 확산되는 코로나를 관측할 수 있다. 금환식 때는 달 그림자 본영의 꼭짓점이 지구 표면에 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연장선상의 지점에서 보는 것이 되므로, 달이 태양보다 작아 보이는 금환식이 된다. 반영이 넓은 지역에서 부분 일식을 볼 수 있는 것은 개기일식의 경우와 같다. 금환식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감에 따라 달이 오른쪽(서쪽)에서 태양을 쫓아 추월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태양까지의 거리가 다소 가까워지면 달의 시지름이 태양의 시지름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지는데, 이때 달이 태양의 광구(光球)를 완전히 가리지 못하므로 본영(本影)이 지표에까지 닿지 못하여 금환식현상이 생긴다. 달그림자는 지표 표면을 서에서 동으로 이동해 간다. 본영이 지구 전체로 보면 최초로 상륙하는 것은 일출 지점이며, 이 지점에서는 달과 지표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영의 꼭짓점이 지표에 도달하지 않고 금환식이 된다. 그러나 본영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낮에 일식이 일어나는 지점에 접어들 무렵에는 지구의 반지름 정도 되는 달과 지표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게 되므로 본영의 꼭짓점이 지표에 도달하여 개기일식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영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지구 전체적으로 일식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이르면 일식은 그 지방의 일몰 전에 일어나 다시 금환식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일식이 지역에 따라 개기일식이 되거나 금환식이 되는 경우를 금환 개기식이라 한다. 또 달이 태양을 추월하여 일식이 일어날 때 달이 태양의 북쪽 또는 남쪽을 통과하면 개기일식이나 금환식은 일어나지 않고 부분 일식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도 있다. 개기 일식은 전지구적으로는 약 18개월에 한 번씩 일어나지만, 특정한 장소에서 개기 일식이 일어날 확률은 평균 370년에 한 번 꼴이다. 지상전체로 볼 때, 한 해를 기준으로, 일식은 적어도 2회, 많으면 5회까지 일어날 수 있다. 달은 태양보다 400배 더 작다. 그러나 태양은 달보다 400배 정도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달이 태양과 겹쳐지면 일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태양 - 달 - 지구'가 됐을 때에 신월(월령0일)이 뜨게 된다. 그러나 신월이 뜰 때마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구의 공전 궤도와 달의 공전 궤도가 약 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태양 - 달 - 지구'가 정확히 일직선이 됐을 때에 일식이 일어난다. 이는 월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월식의 경우,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이 되었을때.) 역 1919년 아서 에딩턴경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중력장에서의 빛의 굴절을 일식을 통하여 관측하였다. 오늘날에는 중력 이상이 일어난다는 주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경제학자 모리스 알레는 진자가 일식기간 이상하게 움직이는 사실을 관측하여 알레 효과(Allais effect)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중력을 달이 가리는 중력 가리움이 있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고 이것이 사실인지 연구하고 있다. 1999년 8월 11일,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과 관련, 유명 스페인 디자이너이자 점성술사로도 알려진 파코 라반은 일식이 시작되면 우주정거장 미르가 파리로 추락할 것이라고 했다. 예언이 빗나가자 사과했다. 독일의 주식시장 점성술사인 우베 크라우스는 "일반적으로 개기일식은 시장을 불안하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투자분석가인 아치 크로포드는 "세기말에 일어나는 개기일식으로 인해 주가가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전망했지만, 예언은 빗나갔다. 2009년 7월 22일, 중국과 인도의 개기일식과 관련, 뭄바이의 한 점성술사는 인도에서 카슈미르 지방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이슬람교 원리주의 무장세력이나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의한 공격이 발생해 명망있는 정치지도자가 암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는 힌두신화의 영향으로 인도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예정했던 임산부들의 수술날짜 변경 의뢰가 잇따랐다.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역사에 비춰보면 일식이 빈번하게 출현했던 시기에 폭동이나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가 발생할 확률은 95%"라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이 급속도로 퍼졌다. 2017년 8월 21일, 미국의 개기일식과 관련, 크로포드 퍼스펙티브의 편집자 아치 크로포드의 뉴스레터에 따르면 2008년 1월 러시아에서 일식이 있었고, 6일이 지나 러시아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조지아와 전쟁을 치렀다. 크래포드는 오는 21일 예정된 개기일식을 두고 "호전적인 반응이 즉각 나타날 것"이라며 "좋든 싫든 간에 역사적인 사건이 미국과 관련해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크로포드는 기술적 분석과 행성 주기 등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투자자문업자다. 월식 월식(月蝕/月食, , )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오는 현상이다. 월식은 태양 - 지구 - 달의 위치로 배열될 때 일어나게 되며 이때 달의 위상은 보름달인 망이 된다. 월식은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 속에 들어갈 때 관측되는 개기 월식()과 달이 지구의 본 그림자와 반 그림자 사이에 위치할 때 관측되는 부분 월식으로 나뉜다. 이 때,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간 달표면에서는 개기 일식이 일어난다. 월식은 일 년에 2번 이상은 일어난다. 월식은 지구의 밤인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월식이 자주 관측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이 일어날 때의 그림자가 지구의 그림자이며, 이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달이 붉게 보이는 것은 지구 대기에 의한 산란 때문인데, 태양에서 나온 빛 중 파장이 짧은 푸른 빛이 산란되고 결과적으로 파장이 긴 붉은 빛이 달에 도달한다. 그와 동시에 월식이 일어날 때 달의 위상이 이지러지는 방법은 보통 초승달이나 상현달과는 다른 모양이다. '태양 - 지구 - 달'이 됐을 때에 보름달이 뜨게 된다. 그러나 보름달이 뜰 때마다 월식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구의 공전 궤도와 달의 공전 궤도가 약 5도 정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태양 - 지구 - 달'이 정확히 일직선이 됐을 때에 월식이 일어난다. 이는 일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산 코사인 변환 이산 코사인 변환, DCT(discrete cosine transform)는 이산 푸리에 변환(DFT)과 유사한 변환이다. 이산여현변환(離散餘弦變換)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식적으로는 길이가 두 배이고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에 DFT 연산을 수행하는것과 동일하다.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의 푸리에 변환도 실수값을 가지는 짝함수이기 때문이다. 입력/출력 데이터를 반 샘플 정도 이동시키는 등 8가지의 변형이 있는데 그중에서 4가지가 널리 사용된다. 가장 널리 쓰이는 변형 DCT 알고리즘은 type-II DCT인데, 이것을 그냥 "DCT"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의 역변환이 type-III DCT인데 마찬가지로 단순히 "역DCT"혹은 "IDCT"라고 부른다. DCT와 연관된 변환은 두 가지가 있다. 이산 사인 변환 (DST)은 실수 값을 가지는 홀함수의 DFT와 동일하며, 변형 이산 코사인 변환 (MDCT)은 다른 하나는 겹치는 데이터를 사용한다. 실수 신호에 대하여, 변환 결과물이 복소수로 나오는 DFT와는 달리 실수로만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간편하여 신호처리 및 영상처리에 널리 사용한다. 특히 신호의 에너지 성분 대부분이 저주파 성분 일부에 집중되는 '에너지 집중 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실 압축에 널리 사용한다. 예를 들어, JPEG 영상 압축, MJPEG, MPEG, 디브이 동영상 압축등에서 DCT를 사용한다. "N" × "N" 블록에 2차원 DCT-II을 적용하고, 결과값을 양자화하고 엔트로피 부호화한다. 이때, "N"값은 보통 8이며 이 블록의 행과 열에 DCT-II 공식을 적용한다. 결과값은 8 × 8 변환 계수 행렬이며, (0,0) 원소는 (주파수가 0인) 직류 성분이고 나머지 성분은 점점 주파수가 커지는 순서로 배열된다. 변형 이산 코사인 변환 (modified discrete cosine transform, 줄여서 MDCT)는 AAC, Vorbis, MP3등의 오디오 압축에 사용한다. DCT는 편미분 방정식을 푸는데도 사용할 수 있다. 이산 코사인 변환은 역함수가 존재하는 선형함수 "F" : R codice_1 R이다. (R은 실수의 집합이다.) 또는 "N" × "N" 정사각행렬로 나타낼 수도 있다. DCT의 정의는 약간씩 다를 수 있다. 아래 공식 중 하나를 이용하여 "N"개의 실수 "x", ..., "x"가 "N"개의 실수 "f", ..., "f"로 변형한다. DCT-I의 역변환은 DCT-I에 2/("N"-1)을 곱한 것이다. DCT-IV의 역변환은 DCT-IV에 2/"N"을 곱한 것이다. DCT-II의 역변환은 DCT-III에 2/"N"을 곱한 것이며, DCT-III의 역변환은 DCT-II에 2/"N"을 곱한 것이다. DFT과 마찬가지로, 관습적으로 변환 공식 앞에 일정한 수를 곱해서 정규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역변환 공식 앞에 곱하는 수를 없애기 위해서 변환 공식 자체에 formula_1를 곱하기도 한다.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O("N")의 연산이 필요하지만, 고속 푸리에 변환(FFT)과 마찬가지로 계산 과정을 분해하여 O("N" log "N")만큼의 연산으로 계산할 수도 있다. O("N")만큼의 전처리 및 후처리 과정을 통해 DCT를 FFT로 변환하여 계산할 수도 있다. 탈레스 탈레스(, Thales, 기원전 6세기(대략 기원전 625년~기원전 624년 경~대략 기원전 547년~기원전 546년 경)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한테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고대 그리스 7대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탈레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운동 경기 관람 중에 탈수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음.)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믿을 만한 고대 저술가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과 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의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한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갖고 있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세워보기에는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바가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어받아, "가장 1차적인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탈레스가 직접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기 발생 실험을 최초로 행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이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나 투옥 이후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기도 하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으며,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 여성 해방과 동성애, 자유 연애론 긍정 등 진보적 주장을 펴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 쇠퇴의 원인이라며 비판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년 간 투옥되었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지원병 장행가」, 「지원병훈련소의 하루」 등을 발표하고,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과 연설을 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데, 그는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때에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에서 아버지는 전주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李鍾元)과 어머니 충주 김씨(忠州金氏)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 세명은 모두 요절하여 사실상의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종원은 42세였고 두 번 상처한 후 재혼한 상태였으며, 어머니 충주 김씨는 세 번째 부인이었다. 이광수의 가계는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 된다. 조선 건국 후 안원대군(安原大君)으로 추증된다. 그 뒤 21대조 사마 시(施)는 종정경 평해군(平海君), 20대조 행 원주병마만호(行原州兵馬萬戶) 희무(希武)는 종정경 윤산군(崙山君), 19대조 진사 춘흥(春興)은 종정경 동남군(潼南君)인데 이들은 모두 생전에 왕족을 지낸 것이 아니고, 조선 건국 후 한참 지난 1872년(고종 9)에 왕족의 예로서 군으로 추증된 벼슬들이다. 그의 가계는 이후 농민처럼 지내다가 6대조 때부터는 아들이 하나라서 4대 독자였고, 할아버지 이건규가 아버지 형제를 보았다. 어릴적 이름은 보경(寶鏡)이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종원은 꿈에 늙은 승려 한 사람이 거울을 주고 가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 하여 이름을 보경이라 하였다. 춘원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孤舟)·외배·올보리라는 별호도 있다. 할아버지 건규(建圭)는 증조부가 학행과 효자 정려를 받았으므로 음서로 통덕랑을 지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글씨와 술을 즐기다가 기생 한 명을 첩으로 들인 뒤 주막집을 차렸다. 아버지 이종원은 초시에는 합격했지만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실패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평안도 의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 후 집안의 가난과 세를 댈 돈이 없어 이광수가 유아기 중후반일 무렵 정주군 내에서만 9번 이사를 다녔다. 그위 위로 형이 세 명 있었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3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므로 유년기에 심한 기침과 발작을 한 것을 본 일가들은 그가 일찍 죽을 것이라 예상하였으나 한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5,6세가 되도록 잔병치레가 심하여 부모의 간호를 받거나 의원이 그의 집을 자주 출입하였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떼고 기억력이 남달리 좋아 신동 소리를 들었다. 처음 이름은 보경이라 하였다가 뒤에 광수로 개명하였다. 그에게는 이복형제들이 여러 명 있었고, 친형제로는 위로 친형 세 명이 요절하였고, 여동생 두 명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뒤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중 3년 연하인 애경은 만주 영구에 사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다가 1936년에 사망했고, 여동생 애란은 부모를 잃은 뒤 어떤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에 죽었다.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 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도둑질해서 키웠다 고도 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말수 적고 병약한 그는 혼자 사색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몇 안되는 친구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후일 시인이 된 백석(본명은 백기행), 근처 곽산면 출신 김소월 등이 있었다. 열 살에 담배장사를 시작했던 이광수는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을 들먹이면서 그를 무시하며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춘원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고아가 된 그는 재종조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동생들을 두고 재종조부 집을 나와,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다. 어려서 폐렴과 결핵을 얻었는데 병원에 가서 고칠 비용도 없고 치료시기를 놓치면서 평생 병약했다.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꼈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광수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심한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육체노동과 상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이 그를 위로하였고, 그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그 뒤 이광수는 우연히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도쿄와 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이 무렵 경성부에서 열린 이승훈과 안창호, 유길준의 초빙 강연을 듣고 감화된 그는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의 연설, 어록 등을 입수하여 탐독하곤 하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사표이자 민족의 사표로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을 손꼽기도 했다. 1904년(광무 8년) 일본 관헌이 천도교(동학)을 탄압하자 진남포에서 배편으로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바로 타이세이 중학교(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그에게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어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11월에 일시 귀국했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몸이 병약하여 고된 일을 하기 힘들었던 그는 경성부의 상점 종업원 등으로 일하면서 학비를 모았다. 1906년 2월 학비를 장만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그해 3월 복학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김성수와 송진우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 시내에 있던 개신교 목사의 집을 알려주었다. 이광수는 배편으로 일본에 건너간 뒤 개신교 목사댁에서 지냈다. 일본인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는 동안 일본인 목사는 매일 새벽과 저녁때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그는 하나님과 정의, 도덕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를 하나님이 구제하지 않는가, 과연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 타이세이 중학교 재학 중 그는 문일평,홍명희 등과 함께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와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이어 일본 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의 무신론과 불가지론, 에른스트 헤켈의 적자생존론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을 접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1907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이때 미국에서 귀국하던 안창호(安昌浩)가 도쿄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받고 독립, 계몽 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학을 고집하여 세운 메이지 학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나, 적응해감에 따라 청교도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서공부 시간에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황성신문에 정육론 (情育論)을 발표하였고, 1908년에는 국내에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 참여하여 작품과 시집을 발표하였으며, 그해 엉클 톰스 캐빈의 한글 번역본인 검둥의 설움을 신문관을 통해 간행하였다. 1909년에는 '방랑'이라는 소설을 썼다. 또한 홍명희(洪命熹), 문일평(文一平), 안재홍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1908년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1908년 11월 1일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년지와 소년회가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그는 유학생활 틈틈이 작품과 논설을 발표하곤 했다. 1909년 11월 7일에는 소설 〈노예 (奴隷)〉를 발표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존경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찍이 김옥균과 박영효와 같은 우리나라 개화파의 스승이었고,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려셨다”고 부러워했다. 춘원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라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 의병장 신돌석이 조선인의 밀고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민중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탐욕을 부린 것이라 판단, 교육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된다. 1909년 11월 18일에 일본어로 된 소설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뒤, 며칠을 밤새워서 또 다른 작품을 써서 11월 24일에는 소설 〈호 虎〉를 발표하였다. 1909년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지어 한국 국내의 《황성신문》에 송고, 발표하였다. 그의 일본어 시 사랑의 노래는 일본 잡지 '부의 일본'에 게재되어 일본유학생간에 그의 문명은 점차 높아갔다. 1910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이틀 동안 총 4회에 걸쳐 쓴 여행기 '여행의 잡감'(旅行의 雜感)을 발표하였다. 춘원은 당시 본명 대신 이보경(李寶境)이라는 이름과 고주(孤舟)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여기서 춘원은 일본과 조선의 풍경을 대비하면서 조선의 소년들에게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이라고 촉구한다. 춘원의 여행기를 실은 '신한자유종' 3호는 1910년 4월 1일 일본 도쿄에서 발간됐다. 여행기에는 일본을 떠나는 심정과 다시 보게 된 조선의 풍경에 대한 춘원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교차되어 있다. 일본 유학 직후 그는 신한소년회라는 유학생 소년 친목모임에도 가입하여 활동한다. '신한자유종'을 펴낸 것으로 알려진 신한소년회는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어린 소년들이 각자 손으로 쓴 원고를 서로 필기하며 돌려 있는 습작 모임이었다. 1910년 '나(余)의 자각한 인생'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고 하였다.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했다. 같은 해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 1910년 3월 다시 출국하려 했으나 남강 이승훈의 추천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그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김소월 등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오산학교에는 그 외에도 유영모, 1913년에 신규 교사가 된 조만식 등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가(校歌)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교사 활동을 하며 순 한글체 문장으로 된 단편소설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소설 《무정》은 예상하지 않았던 히트를 쳐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 무정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는 찬반의 시비가 분분했으나 그의 자유 연애 사상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1910년 계몽단체 광문회(光文會)의 회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광문회에는 박은식, 주시경, 김두봉, 장지연, 홍명희, 변영만, 정인보, 한용운, 오세창, 이광수, 안재홍, 현제명, 안창호 등 제제다사들이 모여 우국의 열정으로 시국담론·민족자결결의를 다진 한국근대정신 발원지이기도 하다. 1910년 시 옥중호걸을 발표하였다. 1910년 7월 중매로 만난 1년 연하의 수원 백씨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결혼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이후 그는 결혼할 자유와 이혼할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다녔다. 또한 이혼은 조선시대의 출처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은 서로간의 피로이자 무의미한 시간 낭비임을 강연과 칼럼을 통해 역설하였다. 한일 합방 후 망명 길에 평북 정주에 들른 단재 신채호를 오산학교 교사 이광수가 찾아갔다. 신채호는 허리를 구부리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은 채 세수를 하느라 옷이 다 젖고 있었다. 그가 의아스러워하면서 묻자“일본놈들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분한데 세숫대야에까지 고개를 숙이겠는가.”라고 답하였다. 1910년 10월 이광수는 한일합방에 좌절하여 모든것을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려고 오산학교 교사직을 사퇴하려 하였으나, 학생을 길러내어 국가의 대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이승훈의 만류로 남아 있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교감)으로 취임하여 임시 교장으로 온 로버트 목사와 함께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김기홍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불태운 오산학교 교사를 재건하여 학교를 부활시킨다. 1911년 백남훈(白南薰), 신익희, 김도연(金度演), 정노식(鄭魯湜), 전영택(田榮澤) 등과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투신하기로 맹세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물에 타 마신다. 그 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의 국어 교사와 문학 교사였는데, 학생들에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말하였고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을 수업시간에 설파하였다. 또한 톨스토이와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에른스트 헤겔을 언급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변증법, 유물론, 무신론, 적자 생존설 등을 가르치기도 하여 기독교계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일부 기독교선교사들은 오산학교에서 이광수를 해임시킬 것을 요청했으나 옥중에 수감 중인 이승훈의 반대로 해임을 면하였다. 1913년 미국의 여성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의 〈검둥이의 설움〉을 한글로 처음 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 등을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광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진화론과 프리드리히 니체, 에른스트 헤겔, 적자 생존론,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오산학교 임시 교장인 로버트 목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 싸우게 되었고, 결국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나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느 학생의 학부형이 교장인 로버트 목사에게 이를 항의했고 이것이 알려지면서 로버트 목사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13년 여름 웅천의 어떤 강연회에 연사로 초청되어 다녀오는 동안, 오산학교의 학생 몇 명이 이광수 배척운동을 했고, 학부형들이 동참하면서 확산되었다. 그가 톨스토이주의를 선전하는 이단자라는 점과, 니체와 헤겔 같은 위험한 사상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춘원 배척운동의 명분이었다. 1913년 11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가 상하이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11월 그는 만주와 상해,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상하이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송상순 등과 함께 지내다가 1914년 6월 출국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오산학교에 복직했다. 1914년 10월부터는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 (靑春)>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단편, 장편소설과 글, 칼럼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청춘지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8년에 폐간되고 만다. 이광수는 1914년 초 한 달간 안정근의 집에 머문 일이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출국을 준비한다. 안정근에게 여비를 받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14년 6월 신규식의 추천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기로 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향했으나 그해 8월 러시아 치타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단념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15년 김병로(金炳魯), 인촌 김성수(金性洙), 전영택(田榮澤),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는 한편,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9월 다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15년 9월 오산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여성 허영숙(許英肅)과 연애하였다. 그런데 허영숙과 연애하는 도중에 미술학교에 유학 중이던 나혜석과도 연애하게 된다. 두 여성과 연애하던 중 나혜석과의 결혼을 희망하였으나 자신의 친구이자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그가 고향에 부인 백혜순이 있는 유부남인데다가 다른 여자인 허영숙과 사귄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6년에는 평론 문학이란 하오를 발표했으며 소설과 시 외에도 자신과 타 작가의 작품을 평론하는 등의 문학평론작도 발표하였다. 1916년 9월 와세다 대학 본과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입학 초 그는 여가시간에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한편으로 계몽적 논설을 국내에 보내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명성을 쌓았고,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했다. 소설 무정(1917)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음해 1918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1만부가 팔렸다. 연이어 이어서 '소년의 비애', '윤광호', '방황' 등을 탈고하고 《청춘》지에 발표하였다. 1916년 도쿄미대 출신의 김관호가 졸업작품 해질녘으로 일본 문전(文展)에서 특선을 차지한 소식을 접하자 춘원 이광수는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다'는 글을 특별 기고해 이를 극찬했다. "'해질녘'은 대동강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그린 누드화이다. 보랏빛으로 물든 석양의 능라도 풍경은 인상파 화풍으로 아련하게 묘사하고 풍만한 두 나부(裸婦)의 뒷모습은 몽환적인 낭만파 화풍이다." 당시 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춘원 이광수의 흥분에 가득 찬 관람기를 게재했다.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 급제다… 장하도다 우리 김군!' 그러나 신문은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춘화를 그렸다며 폄하했고, 이광수가 그런 춘화를 격찬했다며 비방이 가해졌다. 이광수는 그림은 그림이며 그림을 보고 음란하다고 비판하고 반입은 커녕 보도도 못하게 할만큼 사회가 고루하다며 개탄하였다. 1917년 3월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급했으나 결핵을 앓아 고생했고, 격심한 과로 끝에 결핵과 폐질환이 심해졌다. 이때의 친구로는 안재홍, 송진우 등이 있었다. 그는 자유 연애론을 주장, 결혼할 자유, 연애할 자유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부모의 동의, 허락이 없더라도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17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 소설 무정은 청년층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화제가 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팬이라며 서명을 받아가는가 하면, 이광수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 근처에서 노숙을 하거나 여관에서 생활하며 난처한 이광수가 그들을 설득한 뒤 돈을 손에 쥐여서 되돌려보내기도 했다. 작품 무정에서도 그는 낭만주의적인 사랑과 자유 연애를 옹호하였다. 1917년 1월 1일∼6월 4일 매일신보에 연재될 당시에는 화제만큼이나 논란도 컸다. '부도덕한 작품'이라는 중장년 독자층의 비난을 반박하는 연설회가 열리기도 했다. 유림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 무정의 신문 연재를 중단시켜 달라는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새로운 시대사조를 반영해 청년남녀의 신연애관과 이에 따른 번민과 갈등을 옮겨놓은 장편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 자유연애를 다룬 '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동안 여학생들의 편지가 쏟아졌다. '영채가 불쌍하다', '형식이 영채를 버리면 안 된다'는 동정과 호소였다. 중추원 양반들은 '이광수란 어미 아비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이라며 연재를 중단하라는 진정서를 냈다. 가정 교육이 안된 상놈의 작품이 어린 자녀들의 도덕과 인륜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리학자들의 항의 전화와 규탄 집회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월 5원이던 춘원의 고료는 10원으로 뛰었다. 훗날 김동인이 동아일보에 소설 '젊은 그들'을 쓸 때 편집국장이던 이광수는 “작가의 자존심은 죄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자 본위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1910년대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연애소설이고 춘원의 출세작이었다. 이전에도 조선 사회에 장편 소설과 신문에 연재되는 장편 연재 소설은 존재하였지만, 그의 작품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로 평가된다. 매일신보의 연재를 마친 뒤 회동서관에서 무정을 정식 출간하였다. 문필 활동을 통해 이광수는 기존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렬한 비판자로 등장하여,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했으며, 그러한 주장은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사고에 토대를 두었다. 그는 초기의 작품과 칼럼, 강연을 통해 허위와 이름뿐인 유교의 허례허식과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조롱하였다. 장편 무정(1917)을 비롯하여, 장편 개척자 (1918), 단편 무정 (1910), 어린 벗에게(1917), 윤광호 (1918), 논설 자녀중심론(1918), 위선 수가 되고 연후에 인이 되라(1917) 등이 이 시기의 주요 저작들을 통해 사회 부조리를 지적하였다. 그는 작품과 강연을 통해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는 점과, 여자도 사람이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여자의 해방은 가정의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여자의 해방은 자유 연애로서 이룩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유교 사상가와 조선 선비들은 풍속을 해치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며 비난을 가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7백년간 조선 사회에서 허례허식과 위선, 이름 뿐인 도덕과 겉치레만 남겼고, 나만이 옳다는 관점은 당쟁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가 유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문제삼아 '상놈', '호로자식' 등의 극언을 퍼붓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평등하며, 사람이 귀중한 것이라는 견해를 설파하고 다녔다. 격심한 과로로 폐질환과 결핵이 악화되었으나 병원 진료비가 없어 휴학하고 1917년 말 요양차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 자격으로 한반도 남부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다녔다. 1917년 장편 소설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1918년 폐병이 재발하여 쓰러졌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인 간호로 건강을 되찾았다. 비록 폐병은 완쾌돼지 못하였지만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에 감격한 이광수는 그와 결혼을 약속한다. 그런데 가부장제도와 중매 결혼에 심각한 회의를 품던 이광수는 가부장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말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심의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발언권을 동등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과 애정 없는 결혼을 유지할 이유는 없으며 애정이 있는 결혼이라고 해도 애정이 사라진다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소문이 확산되면서 곤욕을 당했다. 또한, 그 해에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 《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가족 간의 평등한 발언권을 말하여 다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여성에게도 자유와 권리가 소중하다는 주장을 했고, 여자가 해방되는 길은 오직 가사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연애에 있음을 천명하여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베이징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이 애정도피 사건으로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세간의 질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許英肅)과 재혼하였다. 허영숙은 일본 유학 당시 만나 연애하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중순경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다. 출국 직전 그는 윤치호를 찾아가 대표자 파견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윤치호는 그에게 여비만 주고, 운동 참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몇몇 동지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 일본 체류 당시 그는 글을 잘 지어서 유명하였다. 당시 유학생의 한 사람인 최태영은 후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 '2.8 선언'은 이광수가 썼는데 춘원은 글을 잘 써서 당시 이미 유명했지요.'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부터 그는 2·8 독립 선언을 치밀하게 준비, 주도하였다. 상하이와 도쿄에 있던 유학생, 청년 독립운동가들과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白寬洙), 김상덕, 최팔용(崔八鏞), 김도연, 송계백(宋繼白)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在日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여러 선전 홍보물 등을 발간, 인쇄하여 양심적인 지식인 계층의 각성과 협력, 참여를 적극 호소하였다. 상하이에서 그는 김규식,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신익희, 윤보선 등의 청년 지사들을 만났다. 한편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김규식이 문법문제를 고집하다가 뜻만 알면 그만이 아니냐는 신채호와 심하게 싸운 뒤, 그가 대신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신채호는 영어를 읽을 때마다 한국어의 조사(助詞)를 꼭 넣었다. 'I는 am a boy'라고 하는 식이었다. 문장마다 '하여슬람'이라며 한문 읽듯 토도 달았다. 김규식은 매번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신채호에게 야단쳤다. 신채호는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까다롭게 군다"며 투덜댄 뒤 영어 선생을 소설가 이광수로 바꿨다. 상하이에서 만난 인사들 중 김규식과는 호형호제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같은 불우한 환경에 멸시와 고난을 받고 자란 점 등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꼈고 김규식은 더욱 그를 친동생처럼 각별하게 챙겨주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을 만나고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 하였다. 그는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과 독립운동 거사에 관한 모의를 하고 스스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인 신익희, 최팔용, 김도연, 김준연, 안재홍, 윤치영, 나혜석, 김상덕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발표한다. 학생 시위대는 춘원 이광수가 기초를 세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행진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막아섰고 양측 사이에는 격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팔용 등 시위 학생 60여 명이 체포됐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변장하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은 전체 조선민족의 의사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다. 중국에 도착하자 그는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미국계)와 데일리 뉴스(영국계)를 찾아가 동경 조선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운동을 알려 세계에 보도케 한다. 춘원은 그 두뇌의 뛰어남으로 해서 후일 임시정부에서도 큰 비중을 두게 된다. 다시 도쿄로 돌아온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조선반도 내에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의 발언에 적극 호응, 공감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칼럼과 전단지를 익명으로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한 이광수의 와세다 대학 학적부 이름은 검은 줄로 지워져 있었는데 퇴학사유란에는 “학비미납”이라는 내용의 일본 한자로 적혀 있었다. 이광수와 최팔용, 송계백 등 2.8 독립 선언 주동자 3인의 학적부는 1996년 케이블 TV Q채널의 취재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담당PD인 김권재는 '다니구치 구나오 와세다대학 교무과장이 학칙상 공개가 불가능하지만 이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이므로 특별히 공개한다며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3월 1일 국내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은신해 있다가 변장을 하고 중국인을 가장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임정 공보국장으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며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또한 겸임 《독립신문》 주필과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와서 그는 다시 홍명희를 만났다. 1919년 5월 안창호가 상하이로 오자, 다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주필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 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이광수는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1919년부터 그는 잡지 《독립》지를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이었고, 또한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실을 알렸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 《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그는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그는 국내에 보내는 선전 홍보물을 통해 국내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독립 운동 참여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무지한 자들만 못하다, 배움의 의미를 알 수없다며 분노하였다. 1920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소년 김산 등을 만났다. 그러나 김산은 곧 무정부주의자와 의열단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된다. 1920년 2월 김일엽, 나혜석 등이 여성잡지 신여자지를 창간하자, 이광수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정칠성, 박인덕 등과 함께 신여자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만다. 임정 일에 대해서 그는 많은 일에 적극적인 활동, 발언을 하여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9월 임정 통합 개편때는 공보국장직을 사직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의 한 사람으로 역사서 편수를 담당하였다. 1920년 7월 국내에서 간행된 잡지 《폐허 (廢墟)》지의 동인으로 참여, 원고를 국내로 송고, 택배로 부쳐서 발표하였으나 폐허지는 반일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곧 폐간당하고 만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인 대표들은 출입조차 거부당했다. 이광수가 기대한 것처럼 조선독립은 쉽사리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독립의 기회는 찾아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연합국의 한 나라요,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으며, 국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국제적 지위도 날로 높아져갔다. 그러한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일로 보였다. 이광수는 조선 사회에 만연한 요령과 술수, 위선, 속임수 등에 좌절, 절망하였다. 요령과 술수, 속임수를 걷어내지 않고는 독립을 할 수가 없으며, 독립한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독립은 오래 갈 수 없다며 절규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점점 지치기 시작하였다. 약 1년간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방을 얻어 자취생활도 하고 또 이리저리 생활의 방편을 찾아서 중국신문에 구직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생활고와 함께, 국내에 밀파되었던 비밀요원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민중들의 현실을 접하면서 실망하였다. 1920년에 이광수는 흥사단 상하이 조계의 임시 반장을 맡기도 하는데, 1920년 여름 방학 무렵 일본에서 허영숙이 이광수를 찾아왔다. 허영숙의 상하이 임시정부 방문은 당시 상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한다. 월탄 박종화는 그의 '일기' 에서 이광수가 이때 허영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매수당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허영숙이 이광수에게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언질 받고' 이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 박종화에 의하면 이 소문이 확산되면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은 충격을 받고 홧김에 일본 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과 함께 임정의 재정형편도 점차 어려워졌다. 1920년말 재정난으로 사료편찬위원회가 해산되고 독립신문도 속간이 어렵게 되었다. 이광수는 임정으로부터 제네바 주재 대표로 선임되었으나 여비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안창호의 적극 주선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이 무렵부터 이광수는 점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희망 없는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지에 관해 그는 점차 깊은 회의에 빠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 단체와 파벌 간의 이권다툼 등도 점차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을 강화시켰다. 이광수와 홍명희,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 지내왔는데, 2년 뒤인 1921년 3월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폐병의 악화와, 국민대표자대회 등 임정 요인과 독립운동가들간의 파벌다툼과 의욕 상실 등이 원인이었다. 1921년 2월 이광수가 안창호에게 귀국할 뜻을 보이자 안창호는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한다. 한편 국민대표자대회는 임정과는 다르다며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여하라는 설득들도 있었지만, 춘원은 모두 사양하고 귀국을 택한다. 안창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는 안창호와 신채호 만이 마중나와 그를 배웅하였다. 1921년 4월말 단신으로 상하이항을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해 4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뒤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던 이광수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3월까지 《개벽》에 논문 〈소년에게〉를 연재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22년 종학원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 윤리학, 심리학, 종교철학, 논리학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 〈가실 (嘉實)〉을 집필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 전쟁을 겪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할머니를 여의고 재종조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또한 동학당인 천도교도가 되면서 천도교의 일을 본 탓으로 일본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고 일본, 미국 유학의 꿈도 좌절되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중매로 만난 본부인 백혜순과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겪고 이혼을 결심, 합의하에 이혼하였지만 그에게 가해진 것은 조강지처를 버린 인간, 타락한 인간, 향락과 음란의 상징이라는 꼬리표였다. 또한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이혼할 자유도 있다는 그의 견해와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점 등을 들어 그를 멸시하였다. 그리고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씨가 세 번째 부인(3취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그는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다. 또한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 호소했지만 이 역시 무시되었다. 어려서부터 폐렴과 결핵, 손발 동상 등의 질병을 앓았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하였다. 후처가 된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위기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그러나 동료 문인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은 허영숙이 그를 타락시켰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춘원은 허영숙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봉근은 여덟 살 때 잃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은 대부분 요절하였고 아들 이영근, 딸 이정화 등만이 살아남았다. 춘원은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던 듯하다. 틈만 나면 허생전, 율곡선생, 원효대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끼어 노래를 부르고 윷놀이도 했다. 그래선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아이들은 늘 아버지 편이었다. 귀국 직후 폐질환으로 요양하였으나, 병세가 완화된 뒤에는 독립운동의 실패와 임시정부의 혼란, 협력해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 등을 보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다. 1921년말과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는 금강산을 방문하고 기행문인 금강산유기를 지었다. 여기에는 장안사, 유점사 등 한국전쟁 때 유실된 사찰과 사라진 기암괴석의 존재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1922년 1월 9일 박종화, 현진건, 이상화 등과 함께 잡지 《백조 (白潮)》지의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 1922년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문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을 찾아갔다. 그는 박한영의 지도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과 서예와 한시(漢詩) 짓는 법을 배웠고, 그의 불교전문강원에도 출입하며 설법을 들었다. 1926년 무렵 박한영은 서울 안암동 개운사 대원암에 개설한 불교전문강원에서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등을 지도했으며 3000수에 이르는 한시를 남겼다. 서정주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한밤중에 홀로 깨어 고민하는 때의 언저리쯤에는 반드시 다시 이 분의 깊은 도애(道愛)를 돌이켜 생각하곤 어머니의 품속에 파묻히는 아이처럼 파묻히어 새로 살 힘을 얻는다"고 회고했다. 이광수는 일시적으로 승려가 되려고 했지만 박한영은 그대는 중노릇 할 사람은 아니라며 설득해서 되돌려보낸다. 심리적 안정을 회복한 그는 이후 문필 활동과 사회 활동에 전념한다. 귀국 이후 그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 기사를 쓰거나 칼럼과 논설과 소설을 송고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2년 초부터 경신학교의 교사로 출강하며 영어를 가르쳤다. 1922년 흥사단의 측면 지원 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3월 잡지 《개벽》에 발표한 〈소년에게〉의 내용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되어 감시, 내사당했다. 그 뒤 1922년 9월 30일 밤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첫 면담을 가졌으며, 그때부터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 빈번히 접촉하였고, 그들의 주선으로 월수당 3백 엔을 받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그러나 얼마 뒤 퇴사한다. 1922년 흥사단의 국내 지부인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을 주관하였다. 1922년 주요한 등과 함께 안창호의 연락을 받고 경성부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평양에 동우구락부 (同友俱樂部)의 발족을 지시했다. 안창호는 단체의 기준과 회원 자격, 단체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이광수와 주요한 등에게 지시하고 거사자금을 보내 설립에 착수하게 하였다. 1923년 5월 김성수와 송진우의 권유로 다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광수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이 되었다. 5월 16일 동아일보 사회부 촉탁기자가 되었다. 그는 여자도 인간이며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자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혼과 가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는 유교학자들의 분노를 초래했다. 또한 1918년부터 그는 칼럼과 논설에서 동성애에 대한 것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동성애 역시 존중받아야 될 사랑이며, 사랑할 권리가 있고, 사랑할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동성애 옹호론을 작품에도 일부 반영하였다. 후일 2007년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의 한국문학자 미국 출신의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를 연구한 논문이 함께 게재됐다. 여기에서 실비안씨는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 코드에 대한 기존 이론을 재검토하며 “이광수야말로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중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대해, 동성애는 정신병이 아니라고 하였다. 동성애를 정신병이나 광증의 일부로 보던 조선 사람들에게 그의 동성애 옹호는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일찍이 나태하고 게으르며 무기력한 이 민족의 성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나약하며 공짜를 바라며, 허황되다, 요령과 술수에 능하다, 그리고 속임수와 눈가리기에 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습성으로는 서로간의 신뢰도 어렵지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일부 국민들의 의지만으로 독립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지 않고는 어느 나라도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 민족 개조론의 발표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사주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 또한 총독부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유랑했던 젊은 시절 동포들의 비참한 삶과 지도자들의 이전투구를 보고 착상한 것이며, 정신적 대부인 도산의 “점진적 개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는 조선 사회는 요령과 기만, 허위가 판치는 사회이며, 이런 사회, 이런 시민 의식으로는 백년이 지나도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는 공감 보다는 감정적인 반론과 공격이 계속되었다.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기자가 된다. 1923년 중반에는 도산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소설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송진우, 김성수 등이 소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결국 111회 중편완(中篇完) 부분에서 연재중단되었다. 1923년 가을, 실의에 빠진 그는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주지인 월하노사(月河老師)라는 늙은 불교승려의 인도로 《법화경 法華經》을 접한다. 이후 그는 《법화경 法華經》을 한글로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법화경에 널리 심취하게 되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국법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국법이 허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논설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후 이광수 주도의 타협적인 자치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광수가‘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 논설의 요지는‘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3대 정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사설 '민족적 경륜'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퇴사했다. 그러나 김성수와 송진우의 배려로 1924년 2월 동아일보의 기자로 다시 복귀했고 동아일보에 〈허생전〉을 연재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 장편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여기자인 최은희를 발탁하였다. 최은희가 기자로 발탁되게 된 데는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 그리고 기자 덕목으로서 차고 넘칠 무한한 배포가 작용했다. 최은희가 동경 일본여대 3학년 재학 중인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의 집을 찾았을 때 일이다. 최은희는 춘원의 부인이자 산부의과 의사인 허영숙과 가까운 사이였다. 허영숙은 한 부호로부터 진료비 85원 10전을 떼어 먹힐 처지였고, 최은희는 청부사를 자임했다. 최은희는 채무자 집에 찾아갔으나 그가 외출하고 없자 마루에 돗자리를 펴 낮잠을 자거나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최은희는“의료규정을 알아보시고 부당하거든 고소하세요.”라며 귀가한 부호에게 쏘아 부쳤고, 강짜를 부리다가 차츰 진료비를 깎는 쪽으로 타협하려던 이 악성 채무자에게 “내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전도 못 깎아 드리겠소”라며 결국 돈을 온전히 다 받고 일어섰다. 마침 그 때 조선일보가 ‘부인 기자’(여기자라는 의미)를 급구했고, 이광수는 이상협 편집고문에게 최은희의 진료비 추심 청부 일화를 들려주며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고 부인과 왕래 편지를 보니 문장도 신문기사보다 낫다”고 천거했다. 이후 1933년 8월 29일까지 사설과 횡설수설, 소설(13편),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했다. 안창호, 윤치호 등의 감화를 받은 그는 안창호를 찾아 가르침을 청했고, 이후 그를 도와 흥사단의 국내 조직과 1922년 수양동우회의 모태인 수양동맹회 등을 결성하였다. 그는 수양동맹회를 흥사단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자, 국내외 흥사단의 연락 기관 겸 흥사단 국내조직의 측면 지원 단체로 운영하였다. 이광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1922년 수양동맹회를 결성했는데, 그 전문(前文)에서 “정치 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주의(主義)”라고 발표하였다. 1923년과 1924년 그는 계몽 활동과 강연을 통해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며 기존의 조선 사회는 이러한 여자들의 권리와 권익을 심하게 무시하거나 착취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자들에게도 자유가 부여되어야 하며 여자의 자유는 결혼과 가정으로부터의 탈출이 선행되어야 하며, 자유 연애를 통해 여자의 해방,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이광수는 또 조선의 자녀는 오직 부모를 위한 꼭두각시 인형이라며 비판했다. 이광수는 "조선의 자녀는 오로지 부모(父母)를 위해서만 살았고, 또 부모를 위해 일했고 죽는, 부모 중심의 삶을 강요받았다. 한번도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 개인적 행복을 위한 교육의 자유와 혼인의 자유까지 부모에게 박탈당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며 지적했다. 그러자 유림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인데 부모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 옳다며 이광수를 공격했다. 도리어 이광수가 유년기에 고아가 된 것을 지적하며 호로자식의 궤변이라고 비방했다. 또한 그는 1920년대 경성부에 확산된 전화기를 보고 멀지 않은 미래에 전화기 역시 전국 각지로 확산될 것이며, 쉽게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전화기도 등장하리라 보았다. 그는 라디오가 보급된 뒤 텔레비전 역시 널리 보급될 것이고, 미래에는 일방적으로 시청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아니라 기계를 매개로 하여 직접 대화가 가능한 시대도 올 것이라 예상하였다. 1924년 초부터 문학잡지 발간을 계획한 그는 여러 부호들을 찾아다니다가 방인근과 경주 최부잣집 등의 지원으로 《조선문단》의 창립발기인이 되어 창립을 주재했으며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부여하자, 자녀는 부모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당시 사람들은 반감을 품었고, 후원자를 얻기 어려웠다. 〈재생〉연재를 끝낸 1925년초 다시 동아일보에 〈춘향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문학을 통해 사회를 계몽, 변화, 개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학을 통한 사회 계몽, 변화 시도에 대해 김우진은 이를 비판하였다. 작가 김우진은 다이쇼 시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시라카바(白樺)파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희곡 〈정오〉 〈이영녀〉 〈두데기 시인의 환멸〉 등에서 사회적 억압과 통제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습과 도덕을 극복한 초월적 개인을 형상화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이자 '공적 인격체'인 '시민'을 발견한다. 김우진은 1926년 쓴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진은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며 그의 계몽론을 비판했다. 동우구락부를 운영하면서 그는 미국에 있던 안창호,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과 연락하고 국민회 회보를 입수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동우구락부 회원의 자격에 여자도 가입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남자 회원과 여자 회원간에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남녀 모두 같은 한 사람의 회원이자 동지로 대우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1925년 다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복귀했다. 1925년 7월 대구의 언론인 김승묵이 잡지 《여명 (黎明)》을 창간하자, 《여명 (黎明)》지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여명》 지는 1927년 1월에 폐간되었다. 한편 1925년 동아일보는 춘향전의 개작을 신춘문예의 공모작으로 걸었는데 당선작이 없자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을 1925년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수십 편의 춘향전 개작 공모작 중에서 뚜렷한 작품이 없자 동아일보는 다음해 9월 24일 당선작이 없어 춘원 이광수에게 집필을 의뢰했음을 사고로 밝혔다. 1925년 봄부터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여 통합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 수양동우회로 발족시키는데 힘을 쏟은 끝에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수양동우회는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실질적인 모든 사업과 실천 내용은 흥사단의 국내 조직 역할 단체였다. 수양동맹회를 동우구락부와 합하여 동우회로 확대 개편한 직후인 2월에는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을 창간하여 주요한과 함께 잡지를 주재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수양동우회의 조직을 의심하고 안창호의 국내 대리인으로 의심하자 그는 동우회는 사회 계몽 단체임을 들어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고 변명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났다.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중퇴한 학력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했다. 이 때 재학번호(학번)가 1번으로, 경성제국대학 제1호 학생인 셈이다. 1927년 작품 《마의태자》를 발표하고 이어 1928년 《단종애사》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YMCA 근처에 생긴 멕시코 다방은 이광수와 복혜숙이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이후 해방때까지 그는 멕시코 다방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는 다방에서, 혹은 산사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곤 했다. 1920년대에 와서 그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역사 교육을 금지시키는 것에 반발, 단재 신채호의 저서와 문건을 입수하여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역사 관련 칼럼과 소설, 시, 희곡 등을 짓기로 결심한다. 1926년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야간반 학생으로 다녔지만 폐병이 심해지자 작업도 힘들어졌고, 1926년 9월 경성제대 1학년 2학기 초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이후 집에서 요양하며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28년 장편소설 〈마의태자〉를 발간했다. 바로 단종애사를 지었는데 이듬해 1929년 단종애사는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 이광수는 장편 '단종애사'에서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집권한 역사를 다뤘다. 그는 사육신(死六臣)이 처형당한 날 신숙주의 아내 윤씨가 목숨을 끊었다고 썼다. 변절한 남편이 부끄럽다며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맸다고 묘사했다. 이광수는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린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는 세조실록 2년 1월 23일자엔 신숙주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제학 신숙주의 처 윤씨의 상(喪)에 조효문을 보내 호상하게 하다.' 윤씨가 숨진 것은 사육신 사태가 일어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그때 신숙주는 세조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있었다. 신숙주 아내를 둘러싼 야사는 정사(正史)와 전혀 다른 허구였던 셈이다. 1928년 3월 다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복학하였다, 그러나 폐병과 과로 등으로 몸이 약해지면서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1930년 1월 경성제국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1930년 봄, 주요한, 정지용, 주요섭 등과 함께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지의 필진으로 참여한다. 1930년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소설 《혁명가의 아내》를 발표하였다. 1931년 6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소설 《이순신》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한편 이순신의 일대기를 발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작품을 검열하고 그의 집 주변을 내사하기 시작한다. 1932년 동아일보에 소설 《흙》을 연재하였다. 소설 《흙》은 계몽운동가 이종준(李鍾駿)의 맏딸을 모델 로 한 실화소설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흙》 역시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문에 연재됐던 이광수의 소설 '흙'의 주인공 허숭을 보면서 정주영은 한때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정주영은 두 번 연속 변호사 시험에 낙방하고 결국 열아홉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한다. 이광수의 작품들이 당대 청년층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본 조선총독부 당국은 그의 작품 내용을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발표한 단종애사는 무정 이후 작품들 중 무정, 흙 등과 함께 전국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 중의 하나이다. 같은 무렵 친구이자 경쟁자인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발표하여 경쟁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1928년 11월 17일 실린 '임꺽정' 연재 예고 기사에서 "세계적 명작 알렉산더(알렉상드르) 뒤마의 '암굴왕'보다도 더욱 그 구도가 크거니와 홍명희 선생의 필치는 오히려 뒤마류의 것보다도 훨씬 장대할 것을 미리 말씀합니다"라고 광고했다. '임꺽정'은 동아일보를 긴장시켰다. 동아일보는 '임꺽정' 연재 예고가 나간 직후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연재를 예고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양대 민간지에서 문단의 양 거두가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었다. 두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인기를 끌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임꺽정이 연재되는 동안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을 능가할 수 있었다"('한국언론인물지')고 회고했다. 단종애사를 통해 사람들은 단종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사육신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총독부에 협력한 중추원 고관들을 한명회, 신숙주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천황을 찬탈자 수양대군으로 해석하였다. 작품은 크게 공감대를 형성하여 많은 남녀노소가 애독하였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종애사가 막을 내린 다음날은 특별히 동아일보 신문 기사에 단종애사가 끝난 것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김동인은 수양대군의 관점에서 쓴 소설 대수양을 짓기도 했다. 후일 이광수 역시 세조의 입장에서 쓴 장편소설 세조대왕을 쓰기도 했다. 1930년초 경성부 홍지동에 별장 춘원헌을 구입하여 별장으로 활용하며 집과 별장을 오갔다.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은 후대에 세워진 영인미술관 근처에 있으며, 현진건의 집터와 박종화가 살던 가옥이 주변에 있다. 이곳에 체류하며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과 시사, 정치에 대한 담론을 하기도 했다. 박종화와의 오랜 대화 틈틈이 얻은 공통된 결론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었다. 1930년부터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도하였다. 경기도 양주의 어느 농촌을 방문했다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농촌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학생들에게 농촌 계몽운동에 나서줄 것을 권고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는 문인으로서 브나로드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1931년 춘원 이광수가 잡지 '동광' 대담에서 구한말 개화파 주역이던 박영효에게 개화사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물었다. 이에 박영효는 "신사상은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때 비로소 박규수의 사랑방 모임이 온 천하에 널리 알려진 순간이었다. 1931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겸임 국어국문학 강사로도 초빙되었으며, 각 학교의 문학 강연에도 출강하였고 방송과 개인 교습 등으로 문인을 길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그를 찾아온 소년 피천득에게도 문학인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 후에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 고 회상하였다. 또한 1924년 작가 채만식을 추천하여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시키기도 했다. 한편 10세에 모친을 여읜 뒤 삼촌 집을 전전하던 피천득을 잠시 받아주어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기도 했다. 브나로드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확산되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인 <흙>에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1932년 4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춘원 이광수는 장편소설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주인공 허숭의 입을 통해 젊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직접 자신의 작품 흙과 칼럼, 강연을 통해서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열정을 갖고 농촌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민중의 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계속되었다. 1930년부터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브나로드 운동과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장편·단편 소설과 시를 모집하였는데, 이중 대표작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沈熏)의 《상록수 (常綠樹)》였다. 그는 1931년 5월에 개최된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31년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주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을 뽑는 사진공모전에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 최정원(崔貞嫄) 등을 선발하였다. 당시 삼천리사(社)는 “구라파에 전 구라파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 있고 각국에도 그러한 모양으로, 우리 반도에도 전 조선을 대표할 려인 한 분을 찾아” 보자며 “고상전아(高尙典雅)하고 아름다운 미모에다가 균제된 체격, 만신(滿身)이 예지와 총명에 찬 듯한 근대적 려인”을 뽑겠다고 광고를 냈다(『삼천리』, 1931.5). 삼천리 지의 고정필진인 이광수 역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당시 삼천리지는“18세 이상의 조선 여성, 3년 이내의 사진일 것”을 응모자격 조건으로 걸고, 심사는 '심미계(審美界)의 권위'를 지닌 이광수, 염상섭, 김억, 안석주, 이승만(李承萬), 허영숙, 나혜석, 김원주, 최승희 등을 선정했다. 1931년 10월 그는 삼천리사 주최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 총 326명의 응모 사진 중 특선 1명 포함해 14명의 입상자를 선정해 발표하였다. 1931년 1월초 이광수는 우연히 이순신 가문의 후손에게 엄청난 양의 빚이 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이광수는 이순신 유적지 보존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1931년 아산 이순신 장군 묘역이 경매 처분될 위기에 이르자 동아일보는 사설과 기획기사를 연속 보도해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유적을 영구보존하자는 운동을 주도했다. 윤치호는 거금을 들여 이순신 묘역과 사당, 위토가 일본인 손에 매각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이광수는 경성과 평양, 대구, 부산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연설을 통해 이순신 유적지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에도 이를 반영, 충무공 유적지를 탐방하는 연재 기사를 직접 썼고,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또한 1931년 5월초, 이광수는 동아일보 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아산 이순신 묘소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위기에 처한 것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순신 유적지 보존기금 마련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직접 소설로 쓰기로 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1931년 5월 25일에 결성된 충무공 유적보존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광수는 1931년 5월 21일∼6월 10일 현지 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실었고, 6월 26일부터는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소설 이순신전에서 이광수는 이순신을 자기희생적이며 충성스러운 애국자로 묘사했다. 이를 두고 훗날 대한민국 국방대학 국가안전보장문제연구소 연구기획실장 노영구는 “영웅은 영웅이되 충의(忠義)를 강조하며, 인격의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으로 그려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과, 의도적으로 이순신과 조선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엮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931년부터 장편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인데도 군관에서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당연히 조선과 왜국의 대결이었는데, 이광수가 이를 ’이순신 대 원균 등 이순신을 모함한 장수와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김탁환 교수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투탄 사건을 애석히 실패했다 하고, 그해 4월의 윤봉길의 투탄 사건을 쾌거라고 주장했다가 헌병의 귀에 들어가 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당했다. 6월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에 도착하자, 자동차로 인천항에 가서 안창호의 호송 차량을 경성까지 따라갔다.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자 크게 낙심,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안창호를 자주 면회하였다. 안창호의 재판비용과 석방, 구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윤치호, 김성수 등을 찾아가 안창호의 출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안창호가 심장과 간장 등이 좋지 않음을 들어 병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안창호는 징역 4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등과 연락하며 수양동우회를 운영해 나갔다. 또한 당대의 화려한 자유 연애관으로 비판받던 나혜석, 박인덕과도 자주 만나 교류하였고, 만년에 나혜석이 병으로 고생할 때도 자주 문병을 가기도 했다. 그는 시중에서 나혜석과 박인덕을 비난, 비판하는 것을 위선이라며 조롱하였다. 자신은 불륜과 외도를 하면서 자기 남편과 부인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누이에게는 정결과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신들은 혼전, 혼후의 문란한 행위를 하면서도 가족들에게만 순결함과 지조를 요구한다며 위선과 기만이 만연한 사회라며 조소하였다. 기존의 유림과 기독교 등의 종교계에서는 그가 탈선과 타락을 부추긴다며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평등주의,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의 개화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 1932년 7월 30일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3년 열차로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1933년 8월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을 그만두고 같은 달 28일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와 경제부장 서춘 등 유능한 언론인을 스카우트해 조선일보 혁신에 나섰다. 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한 그는 방응모의 제의에 응한다. 1933년 7월 19일 조선일보의 제9대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方應謨)는 한 달 후 동아일보에서 이광수와 서춘(徐椿)을 스카우트해 각각 부사장과 주필(主筆)에 임명하였다. 9월 27일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 (有情)'을 연재하였다. 이광수는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겸 취체역(이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동시에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4년 5월에 조선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선일보의 이사직은 1950년까지 유지하였다. 1934년 이광수는 조선일보에 실은 글에서 "아랫목에 '뜻뜻이' 등을 굽고 있는 생활은 암만 해도 투쟁보다도 은둔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펼쳤다.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동광' 1931년 1월 1일자).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려와 조선 왕조시대 1천년의 지나친 엄숙주의는 민중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고 삭막한 사회를 만들었다며 억지로 엄숙한 사회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성기(축음기)와 라디오가 각지로 보급되었고, 유행가가 확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인기있는 곡은 유행가라 하여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노래들 뿐이었다. '장백산인(이광수)'은 이 범람하는 '유행가'를 '전염병'이라며, "근년에 조선에 유행되는 가요는…'부어라 먹자 두들겨라'식이 아니면 주색의 방종한 향락을, 검열관이 허하는 한에서 고취하는가 십흔 것들…"이라고 비판했다.(1934년 4월 19일자) 그는 유행가라는 노래들이 전부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곡들이 많지 다른 내용은 없다며 식상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대중가요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1934년 그가 참여하던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지가 경영난과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결국 123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만다. 1935년 안창호가 가출옥하자 두부를 사들고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영접하였다. 그해 조선일보에 <이차돈의 사>를 연재하였다. 그는 시와 작품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총독부를 가해자로, 한국인을 피해자로 역할을 상정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손녀 둘을 데리고 살던 할머니는 곱상의 손녀는 부잣집으로, 밉상의 손녀는 가난한 집으로 예웠다. 가까히 사는 곱상의 손녀가 할머니를 모셨는데 구박이 심하고 굶기다시피하여 밉상의 손녀를 찾아가다 고개 마루에서 기진하여 숨진다. 맘씨 고운 밉상의 손녀가 찾아와 보리밭가에 묻어드렸고 이듬해 그 무덤에서 피어났다는것이 할미꽃의 기원 설화였다. 춘원은 가난하고 무력한 이 피해 이미지를 보리밭가 찌그러진 무덤에 핀 할미꽃에 투영하였다. 역사란 가해·피해의 대결구도로 꾸려져 내렸는데 할미꽃은 한국인에게 있어 피해편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꽃이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신화, 민담을 시와 소설로 풀어냈고, 이순신은 조선의 독립운동가, 이순신을 모함하는 대신은 일제와 총독부에, 사육신을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신숙주와 한명회를 일제와 총독부에 비유하였다. 1930년대 초, 그의 작품의 뜻을 해석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그를 위험한 반체제 문인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게 된다.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사 초대사장이자 조선 언론정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아베 미쓰이에의 흉상 건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신사 참배에 협조를 부탁받았으나 거절하였다. 1937년 일본을 방문, 이때 일본의 유명한 기생집인 명월관을 방문했다. 춘원 이광수도 도쿄 명월관을 방문한 기록을 조광 1937년3월호의 ‘동경문인회견기’에 남겼다. 와세다대 은사였던 요시다 교수와 야마모토 개조사 사장 등 문인들과 일본식 고급요정에서 저녁을 함께한 춘원은 조선 요정에 가보고 싶다는 주위 권유에 따라 2차로 명월관을 찾는다. 그는 종종 명월관을 찾아 술과 노래를 즐기곤 했다. 황태자 이은 부부와 이광수는 도쿄 명월관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직후,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영어생활을 하였다.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이광수의 사상,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투영되었는데 1910년 데뷔 이후 초기에는 기독교적 경건함과 애국 계몽주의적인 경향을 띄었다.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 연애를 고취하고, 성인이 된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으며,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족보를 없애고 위선적인 문벌 사회와, 유교의 학통과 학풍 등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으로 그는 인륜을 어지럽히고 금수화를 획책하는 인간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무정에서는 서양의 교육을 불신하는 국내 사람들을 조롱하며 신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에 대한 불신을 버릴 것을 역설하였으며, 흙에서는 농민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시민윤리와 사회 계몽을 역설하였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본질에 갈등, 번뇌, 환멸감을 느끼면서 점차 현실지향적으로 변해갔다. 그 자신도 1930년대의 한 작품을 발표할 때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에 갈 수록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처음 사회 계몽과 개혁을 설파하였으나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낭만주의자나 공상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단지 소설과 역사 소설에만 관심을 갖는 민중들을 보고 점차 실망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종종 남녀간의 애정, 정사 관계 등의 단편작과 시를 발표했는데 1919년의 베이징 애정도피와 연관시켜서 그를 비방하곤 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국에서 총 181명이 체포돼 이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이광수, 조병옥 등 11명에게 징역이 선고됐다. 1938년 3월 10일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홍난파와 현제명의 이탈을 비판하면서 인간 사회의 신뢰와 의리라는 구호에 대한 회의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1910년 문단 등단 초반부터 이미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도덕, 정의 등의 존재를 의심하던 그는 정의와 가족간의 의리, 애정에 대해서도 심히 의심, 회의하게 되었다. 그는 죽은 안창호의 곁을 떠난 홍난파와 현제명 등을 비판하였지만 자신도 심적인 고통으로 방황하며 재판을 받던 중 불면증과 신경증이 심해지자 병보석을 신청한다. 그 해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병보석이 받아들여져 보석신청 후, 집행유예로 출감하였다. 출감 직후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1939년 1월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안창호와 유길준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확신하던 그는 윤치호와 자주 교류하며 실력 양성론에 대한 확신을 다져나갔다. 훗날 이광수는 윤치호에 대해 “8개 국어를 하는 어학의 천재로서 영어는 서양인보다 더 잘 한다”고 술회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는 사고방식과 의식의 계몽이 없이는 절대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크게 상심한 이광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당시 대처승이었던 청담(靑潭) 순호(淳浩)를 만났다가 그와 불교의 교리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된다. 순호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친 끝에 순호는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으로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강연을 한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섰다. 이어 이광수는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자'고 주장하면서 “의례 준칙의 일본화”와 “생활 방식의 일본화”를 역설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광수는 '이광수'(李狂獸)라는 빈축을 사게 되었다. 형식적이던 당시 사회의 도덕, 인륜의 구호에 염증을 느끼던 그는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친구, 가족 등의 인간 관계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시중의 비난 역시 속된 위선자들의 비판에 불과하다며 일축,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름뿐이고 실천하지 않는 헛된 도덕과 인륜의 구호만이 난무한다며 현실을 조소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에 구입한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에 한동안 칩거해 있기도 하였다. 그 해 1939년 3월 14일 '북지(北支)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을 맡는 등 문단사절 파견을 주도하였고, 7월 잡지 《삼천리》에 '문단사절의 의의'를 발표해 '조선민족이 일본국민이라는 견지와 감지(感地)에서 문예를 창작하거나 평론하려는 국민주의의 문인이나 문학은 조선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나사변을 계기로 조선민족의 황민화라는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번 문단사절은 실로 이 변혁을 문단의 입장에서 표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그에게는 수많은 협박 편지와 협박 전화가 쏟아졌고, 그의 주변에는 최남선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떨어져나갔다. 1939년 6월 30일 그는 조선총독부 도서과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로 1939년 11월 3일 발족한 문인단체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1월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협회 주최 전선(前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2월 3일 남대문통 금천대 회관에서 열린, 조선문인협회 결성 피로를 겸한 사업계획협의간담회를 주도했다.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 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창씨개명 지지 주장에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 이라고 답하였다. 39년 12월 20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공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일본인 측에서는 유가미, 매일신보의 이노우에, 그리고 몇몇 인사들이 참석했다. 조선인 측에서는 한상룡, 장덕수, 이광수와 윤치호가 참석했고, 최린이 사회를 보았다. 매일신보 주최 원탁회의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을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게 토론 주제였다. 이때 이광수는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상민이 재산을 모아 양반의 족보를 돈주고 사서 혈통을 위조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토론이 신문지면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광수는 다시한번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그는 총독의 은혜를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창씨개명의 취지에 적극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앞장서서 창씨개명하였다. 이후 그에게는 무수한 협박과 투서, 비난이 쏟아졌다. 윤치호는 그에게 창씨개명을 적극 지지한 것은 섣부른 행위라며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사설란에다가 이광수는 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라는 창씨개명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창씨개명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창씨개명을 합리화했다. 그가 창씨개명을 단행하다 다시 그의 집 앞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돌과 인분, 쓰레기 등을 던졌다. 하루는 벽초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가 “최린,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했답니다. 이런 ×자식들 때문에 민족적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입니까”라며 흥분했다. 그러자 한용운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자들을 과대평가하고 있소. 만약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있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의할 것이요.”창씨 사건 뒤로 한용운은 그와 절교하여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1940년 2월 2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로 지원병 훈련소에 1차로 1일 입영견학을 했다. 또한, 이 무렵 소설 〈무명〉으로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최하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8월 6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로 '내지'작가인 기쿠치 칸,고바야시 히데오,나카노 미노루 등이 중심이 돼 반도호텔에서 열린 문예좌담회에 참가했다. 9월 29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지원병행가〉가 방송되었다.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 '문사부대'로 지원병훈련소에 2차 1일 입영견학을 갔다왔다. 12월 25일 황도학회가 만들어질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0년 6월 3일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 윤치호는 그의 부인에게서 "자기 남편이 창씨개명한 후 1천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같이 욕설을 퍼붓거나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6월 무렵에도 그는 하루 평균 5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도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8000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충격에 빠진다. 1941년 양주군의 봉선사에 내려가 암자 관무헌에 거처, 외부 출입을 줄이며 4년간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1940년 맨 먼저 창씨개명을 한 이광수는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감된 뒤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총독부에 저항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에 협력하고 호의를 얻어낸 다음, 일본으로부터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을 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창씨개명에 가장 먼저 앞장서고 동료들에게도 창씨개명을 권고하는 것에 다른 동료 문인들은 못마땅히 여겼다. 이광수는 1940년 경성일보(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일본어로 발행된 신문) 창간을 주도한 도쿠토미 소호에게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1941년 중국 난징(南京) 대동아문학자대회에 함께 참석한 소설가 김팔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우리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생겨 조선 사람의 문부대신도 육군대신도 나오게 되는 날이면 그때 가서야 일본인이 깨닫고서 이러다가는 일본이 조선인의 나라가 되겠으니 안 되겠다 하고서 살림을 갈라가게 된단 말이오. ...(이하 중략)... 그제야 우리는 삼천리 강토를 되찾아가지고 독립한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는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일단 당국자들에게 신뢰감을 얻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당국으로부터 참정권을 얻어내고, 그 뒤에 자치권을 얻고,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각료와 인재들의 진출 등의 과정을 거쳐서 일본 스스로가 조선을 독립시키게끔 단계적으로 밟아나가자고 역설하였다. 1941년 1월 20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애국일의 노래〉가 방송되는 한편, 일문 산문집〈동포에 부침〉을 발표, 간행하였다. 1941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대해 경성고법이 전원무죄를 선고했으나 최윤세와 이기윤은 이미 감옥에서 숨지고 김성업은 불구가 된 뒤였다. 또한 그가 사표로 받들던 안창호도 이미 사망한 뒤였다. 또한 일부 동료들은 전향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총독부 고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청탁을 하기도 했다. 이 무죄판결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다. 1941년 5월 5일부터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는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에서 예술개론을 강의했다. 8월 25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12월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5세면 인생 끝'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다 죽고 나면 일본 땅에 조선인들이 모두 들어와 살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한다. 이때 이광수와 최남선은 하루 빨리 일본에 협조해 일본의 시민이 되는 게 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42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5월 경성일보 귀빈실에서 조병상,이숙종 등과 일본인 고관들이 모인 좌담회에 출석하여 황민화를 찬양했다. 5월 15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대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연재로 연설했다. 6월 10일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군인이 되는 마음 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11월 3일부터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12월 8일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다. 1943년부터 그는 여러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4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김용제(金龍濟)·최재서(崔載瑞)·김기진(金基鎭) 등과 같이 주도해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협회,조선센류협회, 국민시가연맹 네 단체가 통합해 결성한 조선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를 결성하여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에 선출되었다. 8월 18일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이광수가 작사한 노래 〈희망의 아침〉이 방송되었다. 8월 16일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문인보국회 제1회 이사회에 참석했다. 1943년 학생이던 시인 황금찬은 일본 도쿄에서 이광수를 만났다. 황금찬이“지금 우리말도, 우리 글자도 없는데, 그래도 문학을 해야 하냐”고 묻자, 이광수는 “문학은 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언어를 빼앗겼지만 사람까지 빼앗기진 않았다. 일본말로 글을 썼더라도 그 글을 쓴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가”라며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1944년 1월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덕망있는 인사를 앉히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결핵과 폐렴, 간염 등으로 고생하던 이광수는 1944년 3월 은둔생활을 위해 경성부의 집을 청산하고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 주변에 땅을 사고 진건면 사릉3리 520에 집을 지은 뒤 그곳으로 가서 짓고 농사를 시작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춘원을 친일파이기보다는 문인으로 존경했다. 또한 신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과 여성들은 그를 “춘원 선생님”이라며 존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말 경성부에서 아이들과 내려온 부인 허영숙은 “경성에서는 ‘친일파 이광수타도’라는 구호가 나붙고 험악하니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고 하였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 그는 1943년 12월에도 일본에 체류하며 도쿄에 파견되어 일본 유학생들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1944년 2월 26일 경성 종로서가 주도한 총후 황민등에서 실무위원을 맡았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이 됨과 동시에 같은 날 열린 결전태세즉용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고, 8월 17일 적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라는 제목 아래 문학도 결전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그 뒤 다시 양주군 진건으로 내려와 요양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한편 조선 총독부는 그에게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자신이 이 직책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명성은 사라질 것이라며 극구 사양하였다. 당시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그를 조선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서에 그에 대한 평을 남겼다. 1945년 1월 4일부터 17일까지 전쟁협력단체인 대화동맹大和同盟이 주도한 처우감사 총궐기 재성유지협의회 운동준비위원으로서 '처우감사총궐기전선대회'에 참여해 강연했다. 2월 11일 대화동맹(大和同盟) 준비위원 겸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2월경 일본 신태양사(구 일본모던사)가 주관하는 제6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불령선인들을 전부 체포해서 집결시킨 뒤 총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1945년 3월 잠시 은신해 있기도 했다. 그 해 4월 조선총독부에서 특별히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였지만 사양하였다.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6월 24일 정치깡패이자 제국의회 의원 박춘금이 당수인 대의당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태평양 전쟁 무렵 이광수는 시, 소설, 평론,좌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천황제와 황국신민화 찬양,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 정당화와 전시동원 독려, 그리고 문학을 통한 보국 등을 적극 선전하는데 주력했다. 작품으로는 1939년 2월호 동양지광 잡지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1940년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1940년 4월 조선일보에 <내선일체와 조선문학>을 발표했다. 1940년 11월에는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국민총력), 1942년 12월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국민문학) 등을 발표했고, 1943년 2월에는 춘추지에 <폐하의 성업에>를, 1945년 1월 18일에는 매일신보에 <모든 것을 바치리> 등 103편의 시,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1943년 3월 이후 은둔생활과 농사, 요양 등을 하며 가끔 강연회에 참석하였고 이후 광복 직전까지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전향 이후 이광수의 친일논설집은 1941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내용면에서는 중국과의 사대관계 단절 위에 일본과 유대강화를 필연적으로 보는 내선일체론, 후방에서 천황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총후봉공론, 후천개벽을 곧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로 파악하는 대동아 공영론 등 이광수 친일론의 골격을 담고 있다. 글 곳곳에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것을 내비치는 고민을 담고 있어 그 내용을 곧 이광수의 본심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소극적 친일론에서 적극적 친일론으로 돌아선 이광수의 논설을 듬뿍 담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이 정말 그의 본심이었는지의 의문이 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때 발간된 친일논설집은 1997년 작가 이경훈 등에 의해 현대어로 번역되어 재출간되기도 했다. 1945년 3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불령선인, 지도자들을 압송하여 처형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가려다가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양주군 진접면 초막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8월 양주 진접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 8월 15일 김동인과 함께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천황 유인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 때, 라디오 앞에 외배(이광수)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들었다. (김동인의 증언)” 그는 일제 식민지가 오래갈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광복은 그에게 충격이 되었다. 8월 15일 춘원은 광복 후 봉선사로 돌아와 차와 경전의 향기가 가득한 다경향실(茶經香室)에 머물렀다.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는데,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며“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라며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에도 일제하에 출간됐던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이광수의 《무정》 등은 재출간되었고, 여전히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1945년 9월부터 그는 일제 말의 전향 선언으로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남녀간의 연애, 정사에 대한 단편, 장편과 시들도 있어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유림의 비난을 받는 등의 수난을 당했다. 그는 서울 시내의 허름한 쪽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칼럼과 기사 외에 송진우와 김성수가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하였다. 불운한 생활 와중에 윤치호의 병문안을 다녔고, 병원에 입원과 통원진료를 반복하던 나혜석을 찾아 위문하였으며 그 해 12월에 윤치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한편 윤치호에 대한 투석, 규탄 시위 등을 이광수는 직접 지켜보았고, 병중에 외출을 나선 이광수를 향해 야유를 퍼붓고 돌과 휴지를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광수의 가족들에게도 비난과 멸시가 가해졌다. 1946년 9월 2일 월요일 새벽, 이광수는 6촌 동생이자 승려였던 이학수의 주선으로 봉선사로 숨었고(봉선사 주지였던 이학수는 당시 조선불교 경기교무원장으로 있었다) 이학수의 도움으로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국어, 작문 교사로 영어, 국어,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이광수는 현제명이 작곡한 광동중학교 교가에 가사를 붙였고, 1976년 5월 29일 봉선사와 광동중학교 입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부터 안창호의 평전 집필을 의뢰받고 《도산 안창호》(1947. 5)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당시 친일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므로 책에 “춘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1950년에 간행된 제3판부터였다). 이때부터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여 1947년 6월 《꿈》을 면학서포에서 간행했고, 그 해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였다 1948년 1월 이후 한반도의 정가에서는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제기되었는데, 이광수는 정부 수립론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이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47년 12월과 1948년 10월에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주로 여성체험과 관련하여 표현한 〈나-소년편〉과 〈나-스무살고개〉를 간행했다. 1948년 6월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자신의 생활세계와 내면세계를 면밀하게 기록한 글에 당시 좌익을 '상쟁(相爭)의 논리'라며 비판하는 《내 나라》 등 3편의 논문을 추가한 《돌베개》를 생활사에서 간행했다. 1948년부터 이광수는 장덕수를 추모한 전기문 '설산과 나'를 저술하였는데, 이광수는 장덕수를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 이라며 추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이광수, 최남선 같은 이데올로그형 협력자들은 배제됐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던 이광수는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춘추사)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나의 고백》에는 친일에 대한 변호 외에도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있는데, 〈홍제원 목욕〉, 〈삼학사〉,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 〈미국인의 친일파관〉, 〈대한민국과 친일파〉 등의 글에서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1949년 1월부터 이광수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고 반민특위의 2차 검거(문화계)가 시작된 첫날인 1949년 2월 7일에 전격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었다. 1차 심문이 끝난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다. 같은 날 같은 죄목으로 검거된 최남선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자열서》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자세를 그대로 견지했다. 자신이 태평양 전쟁 무렵 협력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광수는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 관헌이 작성한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바꾸려했다"고 항변하였다(다만 그 '살생부'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이광수의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비는 폐병 3기, 신장결핵 등으로 사선(死線)에서 방황한 적이 있습니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보석 신청과 함께 자신을 대신 수감해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투서하였고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의 사유로 특별히 병보석으로 출감되었고 석방 이후 다시 봉선사로 돌아와 틈틈이 글을 쓰며 생활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되어 칼럼을 송고하던 중 폐렴과 결핵 등의 악화로 양주군 진건면으로 내려와 요양하는 한편 칼럼, 강연 활동에 초빙되어 전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고, 8월 20일에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그는 여기서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1950년 1월 다시 장편소설 《서울》을 태양신문에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문제가 되어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7월 5일에 효자동 집이 차압당하고, 6일에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락을 얻어 강계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다시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이광수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오랜 친구인 홍명희, 안재홍, 평소 그의 작품을 애독하던 김원봉 등에 의해 장례식을 치루고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되었다. 6․25 전쟁 후 허영숙은 식솔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글을 쓴 점을 두고 비판이 가해졌고, 그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것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을 지지하여 오래도록 재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동료 문인들인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최남선 등에 의해 복권이 시도되었고,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춘원의 밤'이 개최되었다. 1959년 12월 '춘원선집'(광영사)가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 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열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광수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조명,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이 간행되었다. 북한에서도 1980년 이후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의 이름이 붙은 '평양 리광수고등중학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그가 한국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소련과 미국 등의 교포를 통해 한국 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그가 197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1991년에 그의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측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1950년에 사망한 것을 확인하였다.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된 이광수의 묘는 홍명희, 안재홍 등의 사후 버려졌다가, 1980년대 중반 주택 개발 문제로 그의 시신을 찾으라는 북한 당국의 지시로 인민군 병사들이 주택의 지반을 파헤친 끝에 시신을 찾아내 신미리 특설묘지로 이장하였다. 평양특별시 룡성구역 룡궁1동 산기슭의 특설묘역으로 다시 개장되었다. 그가 머무르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이광수의 작품《무정》 영문판이 그의 손녀 이성희에 의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소설, 전기, 시집, 평전, 수필 외에도 서예에 능하여 많은 서예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 사상을 접하면서 이광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했을 정도로 감동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는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같은 기독교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도 구현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1920년에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당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작품에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송영옥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어 있지만, 그는 기독교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광수의 작품 ‘만주에서’의 화자는 한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을 연달아 언급한다. 그런 화자의 시점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관찰하는 시점이 아니라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달리는 기차와 매개된 시점이다. 그 중 강(江)의 자연적 위치보다는 경의선 철도의 노선에 바탕을 둔 시점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은 재구성되고 정복된 존재다. 기차를 타고 누빌 수 있는 땅, 과학기술과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새롭게 재조직된 자연은 바로 인간이 정복한 식민지로서의 자연이다.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작품 흙에는 브나로드 운동의 활동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 허숭 등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스타일로 아침을 먹는 장면 등 서구식 생활을 소개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의 작품 '꿈'은 바로 낙산사에서 있었던 한 스님의 사랑을 관음상과 교감시킨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 '조신의 꿈' 설화에서도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의 작품 꿈은 무용가 김복희의 '꿈 탐욕이 그리는 그림'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1990년에는 영화감독 배창호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후대의 작가 김탁환은 이순신을 쓰면서 이순신의 적은 원균이 아니라 왜 수군 장수였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김탁환은 작가의 말에서 “임진왜란을 바라본 구도는 조선 조정의 당파싸움 및 수군 내부의 쟁공과 반목 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적이었던 왜군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두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김탁환은 “이것은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립 구도 대신 이순신 대 이순신을 모함하고 핍박한 장수와 대신들을 대립구도로 택한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구도에서는 조선과 왜군의 대립을 조선인 내부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는 민족개조론의 발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에서 남녀간의 사랑과 낭만을 다루었다. 이광수가 '무정'에서 힘주어 강조한 것은 정(情)이고, 그것은 후대에 김동리나 박완서에게, 심지어 최근 젊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져 변주되어 왔다. 20세기의 한국의 소설, 작품, 드라마, 영화 등에는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작품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은 그토록 그리워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나서 손만 잡고 잔다. 이는 20세기 초 이광수의 소설들에서부터 시작된 장면이다. 그는 식민 통치의 억압과 현실의 부조리, 구 사상과 새로운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의 갈등, 유교적 가치관과 기독교 사상의 대립, 혹은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구식 시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였으며, 넓게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억압과 폭력에서부터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에 의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권위와 관습이라는 이름 하의 폭력을 적극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를 방대한 양의 소설, 논문, 칼럼과 논설문, 시가, 수필류,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이광수는 늘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생각을 바꿔야만 독립의 첫 걸음을 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요령과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이 만연하다며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독립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그는 이렇듯 열등한 민족성을 지닌 조선인들이니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요,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신돌석을 밀고한 조선인부터 한일 합방 이후 다수의 조선인들이 일제 체제에 협력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점 등은 독립운동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또한 시기심과 술수와 요령, 거짓말이 만연한 것이야 말로 조선인의 가장 열등한 습성이라며 이러한 습성을 고치고 진실되고, 참될 것을 계속 호소하였다.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직후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 당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손해를 보는 지름길이라며 이를 한탄하였다. 이를 두고 언론인 김대중은 '춘원 이광수가 쓴 '민족개조론'을 읽으면 우리는 모두 슬퍼지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이 그렇게 비참하고 천박했었는가 하는 점이 슬프고,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 슬프고, 옳은 소리를 옳지 못한 시기에 내놓은 작가의 시대착오가 슬프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가리고, 또 그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민족을 '개조'하기보다 민족을 '개선'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고 평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그 논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극한의 비전을 제시했던 작가 이광수의 용기에 진정한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며 '그가 그 글을 쓴 시점과 상황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어도 그의 민족개조론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진실되고 참될 때만이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에 이광수는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론을 품게 되었다. 1930년대에 가서는 독립무용론을 주장했다. 이때의 이광수는 3·1 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남들이 하자 하니까) 따라서 한 것'이라 하고 식민지하에서의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낸 이후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 대한 평가나 한국인론, 한국사회론은 늘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는 강한 인화성을 보여왔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주정 잘하기로 첫째가 아라사(俄羅斯), 둘째가 일본, 셋째가 조선사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족의 정신 개조와 함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기틀이라 보았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발표한 ‘민족적 경륜(經綸)’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새로운 문화는 바로 정치, 산업, 문화의 근대화였다. 조선에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교육, 정치, 산업 운동이 연합해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 운동이라고 봤다. 그는 독립 이전에 실력 양성이 우선이라고 보았다. 실력이 없이 의지만 갖고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봉건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해주지 않았으며, 여자도 인간이고 따라서 여성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자가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가정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유로운 연애와 자유로운 성관계를 포함한 자유 연애는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그가 고아인 점을 언급하며 상놈이 주장하는 못된 사상이라며 비방하고, 각 언론에 그의 작품이 실리지 못하게 전화항의나 방문 등을 통해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무정 등은 이러한 여성해방론을 반영시킨 작품이었다. 이광수는 당시 전 조선 청년의 지적 표상이요, '전 조선 여성의 연인'이라 일컬어질 만큼 인기 정상에 올라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 중 접한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탄복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는 열등감과, 고아인 그에 대한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지속적인 냉대와 멸시, 어머니 김씨가 세 번째 부인으로 사실상의 서자 취급을 받은 점 등은 그로 하여금 조선 사회의 인습에 저항하거나, 조선 사회의 기성 가치관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여성이 가정에서 해방되고, 자유롭게 연애하여 여성이 해방되는 것과 조선 사회에 잔존하는 양반, 상민의 신분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봉건의 늪에서 민족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 열의가 너무나 강렬해서 분별지마저 상실했다 는 시각도 있다. 이광수는 늘 젊은이들에게 소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는 성실성을 인간의 최고의 미덕이라 예찬했다. 춘원 이광수는 수필 '우덕송(牛德頌)'을 썼을 만큼 소를 좋아했다.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이라 하여 소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예찬하였다. 또한 춘원 이광수는 '아이들에게도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이 예수와 닮아 거룩해 보이기도 하는' 소의 우직함을 칭찬한다. 그는 소의 성실성과 우직함을 예찬, 강조하였다. 소파 방정환을 만나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된 그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또한 자신보다 10세, 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형님, 아우님 하기도 했다. 그가 한때 사귀었던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에 그를 만났는데 그가 반말을 쓰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10세, 20세 이상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았고, 또한 젊은이들의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반박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를 줏대없다, 체신없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또한 이광수는 조선 사회가 지나치게 엄숙함만을 강조한다며 이것 역시 가식적인 조선의 한 모습으로 규정했다. 그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 외에도 소설과 작품을 통해 남녀간의 평등과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과 여자에게도 욕망과 애정, 성욕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비난 과 함께 1920년대, 30년대, 40년대 뭇 여성팬들의 인기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는 연애는 남녀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며 자유로운 연애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 주장했는데 이는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춘원은 조선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여성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학대해왔다 전제하고, 봉건 제도의 압제와 유교 이념의 억압 하에 수백년을 신음하고 시달려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로운 연애로서 완성시킬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혜석, 김일엽의 연인이었고,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1917년-1918년 무렵에는 잠시 나혜석의 연인이었고 1930년에는 김일엽과도 잠시 사귀기도 했다. 그는 나혜석이 정조 취미론과 이혼 고백장 등으로 지탄을 받을 때도 그를 도와주었고, 김일엽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적극 옹호하였다. 또한 김명순의 후견인으로 그를 문단에 발탁하였으며 이병도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해주었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이들의 자유연애를 비난할 때마다 이들의 자유 연애론을 인간 본연의 감정이며 솔직한 자기 표현이라며 옹호하였다. 이광수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자신이 김성수, 송진우 등과 중앙학회, 윤치호 등의 후원으로 유학 생활을 한 것을 늘 인식하고 있었고,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젊은 중고등학생 문인, 청년 문인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지도, 후원하였다. 시인 구보 박태원도 춘원(이광수)에 의해 여러 지면에 시를 발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소학교에 다니던 소년 피천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발굴하였다. 이광수는 그를 금아(琴兒), 즉 거문고소년으로 불렀다. 소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경기고)에 다니던 소년의 재능을 맨 먼저 알아본 이도 춘원이었다. 금아라는 호는 춘원 이광수가 가야금을 잘 탔다는 그의 어머니를 떠올려 지어줬다. 이후 피천득은 금아를 자신의 아호로 평생 사용하였다. 1930년대 열린 시 창작 대회에서 김영랑은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를 썼지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쓰레기통에 던지려 하자 춘원 이광수가 왜 그걸 버리느냐며 시를 낭송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여러 신진 문인과 작가, 시인들을 발굴했고, 형편이 어려운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 독려하였다. 1936년 연희전문을 수석으로 졸업한 송방용은 바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고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치고 싶어서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그의 책을 읽고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고 생각된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당시 종로 네거리에 있었던 화신상백화점 4층 서적부에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 <그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사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다 잊었지만 친구의 부인과 불륜의 사랑에 빠져 친구의 부인과 애정도피 생활을 하는 말하자면 평범한 애정소설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그들이 애정도피 생활을 하게 되는 만주 간도의 한국인 마을의 배경이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은 광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내 생명을 새털과 같이 바치는 일이야 말로 남아로서 가장 보람있는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충직한 황국신민이었던 홍안의 소년에게는 그 소설에 전개되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서 분명히 황국신민의 세계와는 어딘가 분명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든 나는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춘원의 소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덧 매주 담임선생에게 제출하는 일본어 일기 외에 한글의 일기장이 따로 생겼다.'고 하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실의에 빠진 채만식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도 이광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를 중퇴한 채만식은 1924년 단편 ‘세길로’가 이광수에 의해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는 채만식의 사람됨됨이를 높이 평가해 그를 동료 문인들에게 널리 소개해주었다. 자신의 작품 애욕의 피안 등을 읽고 작품평을 한 신인 박태원을 건방지다는 혹평 대신 문단에 추천하기도 했다. 3·1 운동에 참가해 모진 고초를 겪은 추계 최은희를 추천하여 조선일보에 입사, 최초의 여기자로 필명을 날리게 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인들과 중국인, 외국 교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안창호의 측근인 구익균은 그의 작품이 일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일본 사람들도 춘원을 숭배했어. 이광수 문학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사후에도 그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승려 법정은 자신의 사촌 동생에게 이광수의 책들을 추천하였다. 사촌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법정은“좋은 책을 많이 읽어라. 춘원(이광수)님 지은 것은 대개가 믿고 읽을 만하다. 내 책장에서 읽을 만한 것을 골라사 읽고 잘 보존하여라. 나플탈렌을 넣어두면 좀이 들지 않을 것이다.(1958년 5월 13일)”라고 하였다. 대학 시절 이광수의 집에 드나든 문학청년이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후일 소설 '교육가족', '청산곡'과 수필 '객설록' 등의 작품을 썼다. 기업인이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은 그의 작품 흙을 읽고 변호사가 될 꿈을 품기도 했다. 후대의 작가인 양귀자 역시 그의 작품 유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양귀자는 후일 '초등학생때 외삼촌 책꽂이에서 이광수 전집을 발견, '유정'을 읽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흐느껴 울었다. 너무 좋아서 말이다. 이런 세계도 있구나, 소설만 있다면 이 괴로운 세상(학교 가기가 끔찍히 싫었단다)도 얼마든지 살아나갈수 있겠구나'라고 했다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는 1948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다석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고 6년간 사사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논문 민족개조론과 1924년에 발표한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을 통해 그는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을 지적했다. 민족 개조론에 이어 민족적 경륜은 당시의 국민적 감정을 자극했고, 종교계까지 가세하여 그를 비난하자 물의를 일으켜 결국 동아일보를 일시적으로 퇴사하게 되었다.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에서 그는 나라 잃은 원인을 그는 당파 싸움과 한국인의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결여, 무질서, 잔꾀, 요행을 바라는 심리, 음험한 술수 등 국민성 자체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교육을 통해 계몽하고 민족운동을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독립이 어렵다면 치권이라도 획득하여야 된다며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 사회는 사기, 협잡, 위선이 만연한 사회라고 규정했다. 또한 신의가 없고, 이조 당쟁의 악습을 답습하여 끼리끼리 파벌 짓기를 좋아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는 독립이 불가하며 독립을 하더라도 유혈사태나 큰 갈등이 수시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정치적 독립 이전에 국민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서로간의 신뢰하는 사회로 거듭나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1930년대 초, 한국인은 단일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1933년에 쓴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의 일부에서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발표했다. 이전에도“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단일 혈통을 강조한 표현이 간간이 신문 등지에 보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종족으로 구성됐다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로 단일민족설은 드문 주장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동국민족(한국인)이 부여족을 주 종족으로 하는 6종족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했고, 박은식은 ’몽배금태조(꿈에 금나라 태조를 뵙다)’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이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신채호의 6종족론을 비판, 조선인은 다같이 단군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단일 민족이며 단일 인종으로 규정하였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한국학 교수 신기욱은 그를 한국형 파시즘과 권위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신기욱은 '1930년대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에는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 이광수 식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로 연결되면서 한국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였다. 1910년대에는 이광수 이해조 등에 의해 계몽주의 문학이 주도되었다. 그는 소설과 시 등 문학작품이 시대의 정신, 시대의 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유연애론, 자유주의, 개화, 계몽 등 소설과 시를 통해 계몽주의적인 가치관을 드러냈다. 그는 시와 소설, 희곡 등 문학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점과 문학작품의 대중화를 통해 계몽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1919년 김동인은 이광수 등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고 순수문학 운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김동인은 문학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일 뿐이며 정치성을 띄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문학 작품 역시 그 시대 문화의 하나이니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전혀 도입하지 않을수는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맞서 사실주의 수법을 썼으며,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 문학 운동을 벌였다. 김우진도 이광수의 문학 계몽론을 비판하고 자연주의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소설과 칼럼, 시 에는 당대 사회 문제를 반영하거나 언급하였다.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빠지기를 바라고 물건을 삿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아니 빠졌다.(동광 1932년 1월 25일자)" 이광수(李光洙)가 그린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들이는 아내 모습이다. 그는 이상도 좋지만 당대의 시대상, 현실 문제, 현실의 모순 등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당면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설이 구전과 민담으로 전해지는 소설과 시문, 풍경 등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작품에 현실이 반영되었음을 밝혔다. 무정에는 '노일전쟁과 새로운 사회상에 눈뜬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했고, 개척자는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재생은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은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이상형인 여성의 기준을 밝히면서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 (이하 중략)... 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며 얼굴 생김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사스럽고 음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다른 작가, 문인, 시인, 예술가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가 현진건은 “첫째로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며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광수의 공개발언 이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 여자, 이상형 남자에 대한 의견이 나타났다. 중추원의 귀족들과 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상스럽고 음란한 사상을 부추긴다면 비난하였다. 그는 조선 사회를 개선하려면 문명화,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화의 하나로 철도와 열차를 지목했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 그 나라는 잘 된다. 수레바퀴소리, 증기와 전기기관소리, 쇠마차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이광수 ‘무정’)"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장점을 취하고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에서 기차역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무대다. 그의 작품 무정을 두고 "철도가 작품의 한가운데를 횡단하고 있다. (작품에서)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작품 흙에서는 주인공들이 서양식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을 묘사하여 서구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1936년 '계명'이라는 잡지에 남긴 기고문을 통해 백두산 등반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습니다. 백두산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또 백두산이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산인 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한 걸음 나아가 백두산의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상 실제적 사정에 대하여 묻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이 너무 작고 부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까닭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알고자 하는 노력도 있을 까닭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을 우리가 이렇게 알아야 옳으며, 또 이렇게 알아도 그만이리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이광수‘계명’1936)” 금강산을 오른 뒤에는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며 그 절경을 칭찬하였다.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유기'를 통해 내금강의 빼어난 경관을 묘사하였다. 산을 좋아한 그는 여러 산을 등산하였지만 그는 백두산을 비롯한 일부 산에 대해서는 등산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광수는 등산을 좋아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찾아가 등산, 답사하였다. 2006년 소설가 한승원은 이광수가 전쟁 독려의 목적으로 작품을 지었다고 비판했다. 작가 한승원은“이광수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신라 젊은이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져라’라고 부르짖게 했다”며 “춘원의 '원효대사'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충동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원효의 삶과 사상을 오독(誤讀)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광수작 '원효대사'의 작품해설을 쓴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국문학자 이병주는 "일제가 춘원에게 '원효대사'의 집필을 허락한 것은 원효가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한 불요불굴의 정신을 비상체제하의 한인(韓人)에게 알려 이른바 '국가총동원'의 선정성을 노린 것이었다."면서도 "이광수는 이를 역이용해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2006년 4월 원효대사의 재출간 문제를 놓고 화남출판사 편집주간 이승철 시인과 한승원 작가 사이에 논쟁이 오갔다. 한승원 작가가 "원효의 사상을 오독한 것"이라며 이광수의 소설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승철 주간은 "어떤 이유로도 출판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효의 사상은 여러 작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김준태 시인은 “이광수가 문학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어 쓴 이 소설은 그가 작가로서 야심을 저버리지 않고 창작에 전력투구했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면서 “소설 ’원효대사’의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춘원 이광수의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 되어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이광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간을 친일로 살았다.”는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1909년 〈사랑인가〉를 탈고한 시점에서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48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 따르면, 이광수는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로 평가되었다. 한편 소설가 복거일은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2007년 10월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에서 “친일에 대한 이광수의 업보는 남들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며 “수십년 간에 걸친 그의 항일운동과 문학적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우선 해방 정국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광수를 친일혐의로 구속 투옥한 것에 대해 “친일인사 다수 중에서 특히 죄질이 나빴던 문인은 빠지고 이광수 등 선배 문인만 기소한 것은 잘못이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참작 없이 구속투옥에 의한 재판을 진행한 것은 결코 공정한 처사가 아니었다”며 “힘 없는 사람들만 처벌했다는 점에서 큰 과오가 있으며 법이 대중적 인기 논리에 편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민족개조론을 친일의 증거로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민족개조론은 하나의 텍스트로 접근하는 한 어떤 친일의 흔적도 찾아낼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광수 대신 도산 안창호 이름으로 출간됐다면 그 논문은 지금 다른 운명을 맞고 있을 것 이라며 이광수 비판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다른 문인들은 무책임하게 친일 의혹을 회피하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친일 문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광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누구도 주지 않는 면죄부를 강탈해 간 친일파 지성인들의 책동'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이중오는 “그가 ‘왜 친일을 했을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를 친일 인사의 대명사로 인식하는 흑백논리만 있을 뿐, ‘인간 이광수’에 대한 이해는 없는 것이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9년 단국대학교 김원모 교수는 "이광수의 친일은 민족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내면으로는 철저히 독립을 원했다."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춘원이 도쿠토미 소호에게 1940년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의 이유를 밝힌 편지를 1989년 발견했다. “처음엔 편지 내용에 수치심을 느꼈죠. 하지만 자료를 뒤져 연구를 계속하면서 친일과 관련된 이광수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게 됐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원모는 이광수 친일연구와 관련해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처럼 좁은 대롱으로 대상을 보듯 실증 연구 없이 일제강점기 인물의 한 면만 편협하게 부각해 매국노로 매도하는 학계의 분위기는 잘못됐다”고 밝혔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이광수의 삶을 볼 때 친일 행적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광수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조선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보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일본의 국민으로 동등하게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본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 하였다. 2007년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 중 일부는 친일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장선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때 문학계간지 《휴먼메신저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사랑하다 버린 선구자' 김우종은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광수가 친일 활동을 시작한 시점으로 간주되는 《개벽》에 발표된 ’민족개조론’에 대해 김씨는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며 “이것을 일제에게 식민 통치의 구실을 주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또한 “’민족개조론’이 발표되기 넉달 전 베이징에서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1923년에 함께 조직한 것이 수양동맹회였다”며 “민족개조론의 내용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교해보면 이 논문은 안창호의 독립운동노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우종은 이광수가 어린 시절 동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일본 유학생 시절 3.1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2.8 독립 선언문'을 주도적으로 작성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수십년 간에 걸친 항일투쟁의 노력과 문학적 업적은 친일행적을 상쇄하는 바가 있다”고 거듭 변호했다. 이에 대해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는 “1938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모두 일본국민이 될 것을 주장했다”며 “1940년에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그의 행적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이광수의 문학적 성과와 항일투쟁의 노력이 친일 행적을 상쇄한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이광수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홍명희는 일제의 종용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며 “공과(功過)를 다 같이 다뤄야지 공 때문에 과가 지워지거나 과 때문에 공이 지워지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부인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매수한 밀정이고 허영숙이 그를 포섭했다는 의혹은 소설가 박종화 등을 통해 제기되었다. 이후 부인 허정숙이 밀정, 조선총독부에 포섭되었느냐 여부 역시 논란 중에 있다. 한편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런 귀국도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광수는 일제 총독부의 밀사로 의심받던 아내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 변절자로 의심받았다. 김우종은 “이광수에게 있어 허영숙은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의사였던 허영숙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시 집필 중이던 ’무정’도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의 개인적 환경을 일체 무시하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해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은 자발적인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해방 후 1946년 이광수는 허영숙과 이혼을 하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그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축적한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한 위장이혼이었다고 비판한다. 또 일각에서는 친일파로 몰린 자신 때문에 가족이 피해 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일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백두진은 그의 두 번째 부인 허영숙의 친정 조카사위였다.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후반의 행적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미군은 그의 교육을 잘 받았다는 점과 소년 활동에 적극적이다 는 점을 주목했다. 미군은 그에게 '교육을 잘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언론인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이며,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다. 1930년대 붙잡혀 투옥된 바 있으며, 일제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 일제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며, 이로 인해 이전까지 쌓아 왔던 영향력을 잃게 됐다.'고 평가하였다.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현대 문학의 여명을 이룩한 공헌자로 높이 평가되며,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고리, 역사 소설의 대중화에 기여한 작가로로 평가된다.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현실주의, 인도주의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애국적인 작품, 역사 소설 외에도 가부장제, 조혼풍습 등을 비판하고 사회 계몽과 신교육, 과학 기술 문명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 점과 자유 연애론 등 다양한 사상과 신념을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다.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는 평가도 있다.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한승옥은 그의 작품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이광수는 문장을 쉽게 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분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도, 초등학교만 나와도, 읽을 수 있다. 역사 소설을 봐도 정사는 물론, 야사와 민담까지 아우르고 있다. 불교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쓰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가 요새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문호가 됐을 것이다. 요즘 작가들이 단명한 것은 공부를 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즘 학생들은 이광수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80년대에는 친일파라고 싫어했는데, 90년에 들어와서는 아예 읽을 생각조차 않는다. 대학 국문과에서도 문학사나 작가론에서 스쳐지나갈 뿐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한승옥은 "친일 여부를 앞에 놓지 말고 문학 자체를 봐야 한다. 이광수의 복합적인 면, 인간적인 점을 조명해야 한다. 이광수처럼 드라마틱한 사람도 없다. 그의 시대로 들어가서 장단점을 재평가해야 한다.‘무정’이 현대소설의 효시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춘원은 장편을 주로 썼는데, 작가는 본래 장편소설에서 역량이 드러나는 법이다. 기회가 닿으면 제대로 된 이광수 평전을 쓰고 싶다. 이제는 이광수 문학상이 나올 때도 된 것 아닌가."라며 맹목적인 비판을 비판하였다. 작가 이인화는 "이광수야말로 시대정신이 '근대의 초극'이 아니라 '근대의 재평가'로 돌아설 때마다 끊임없이 재론될 전형적인 근대인이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이광수가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대의 닦달을 겪으며 기어올라간 성취의 드라마는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에 각고면려를 쏟아부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근대의 자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이 가져온 그의 불행한 말년은 근대가 부여한 자유의 공포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였다. 국민대학교 교수 방민호는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인 깊이가 있다."고 평하였다. 기독교운동가인 함석헌은 '육당, 춘원의 밤은 지나가다'라는 글에서“육당, 춘원이 무엇인가?… 이 나라가 기울어지려 할 때, 이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불평을 잘 울라고 하늘이 세웠던 이들 아닌가? 그들은 참 잘 울었다. 그 소년 잡지, 그 역사, 그 단군론, 그 백두산 참관, 그 백팔번뇌, 그 무정, 그 개척자, 그 단종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춘원보다 10년 아래인 함석헌은 “그들을 위해 분해하고 아끼고 의아해 하는 것은 그렇게 울던 그들이 내처 힘있게 울지 않고 중도에 그 소리가 그만 막혀버렸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 하였다. 작가 겸 시인인 피천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다."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춘원 이광수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김용준은 그를 친일파로 볼 수만은 없다고 평하였다. '때론 춘원 이광수를 친일문인 운운하여 그를 매도하는 신문기사를 대할 때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글쎄,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그는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사람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미국의 한국학자 가브리엘 실비안은 "이광수야말로 한국 사회에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하기 이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뤄온 작가"라며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는 최남선ㆍ이광수 선생처럼 민족문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을 크게 이해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 행위로 한국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만든 사람 또한 이광수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에만 치중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그에 대한 호평은 시장성 거품이라 비판했다. 소비 지향성 경제의 거품에 들떠서 '이광수가 친일은 했어도 소설은 훌륭했다', '서정주가 역사적 과오는 범했지만 시는 좋다'는 식의 미학적 착시현상이 90년대 한국문학을 흐렸다는 것이다. 작가 공임순은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에 대해 '이순신은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과 나약하고 무기력한 백성과 대조적으로 외롭고 고독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런 순결 지상주의는 이순신을 단 하나의 민족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대신, 조선의 역사 전체를 오욕과 부정의 역사로 경계짓기 때문이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수주의와 파시즘, 역사 왜곡과 미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의 대중들을 길들이려 한 기득권층적인 논설이라는 비판도 있다. 소설가 김원일은 “일제 말기에 그가 보인 친일행각은 따지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의 흑백논리로 단칼에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평하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이광수를 양면적인 인물이라 보았다. 그에 의하면 춘원 이광수는 두 얼굴의 지식인이라 한다. 춘원은 간디에 대한 예찬을 통해 톨스토이의 화두인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했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은 인물이었다. 박노자는 이런 춘원의 두 얼굴이 민족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근본단체’로 본 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는 춘원이 근대를 배우면서 독립적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존 같은 부분을 거의 처음부터 제외했기 때문이라며 “’계급’을 아예 ’이기적 욕망의 결과물’로만 치부해 배제하고 ’개인을’ 개인 그 자체가 아닌 하나의 부속으로만 인식하는 거대 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는 거의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은 그를 민족주의자로 봤다. 춘원이 한결같이 국가주의 내지는 민족주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취사선택됐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허동현은 그 근거로 춘원이 1910년에 쓴 '나(余)의 자각한 인생' 중 한 구절을 제시한다. 그는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라는 구절을 통해 춘원이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기 훨씬 이전부터 관념적인 '민족'이나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허 교수는 춘원이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야누스적 존재라기보다는 ’민족’이라는 실에 자신이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작가 김현주는 “이광수의 미적 기획을 전체주의 정치학의 표현”이라 평하였다. 한신대학교 교수 서영채는 그와 염상섭을 비교하였다. 서영채는 '민족계몽주의를 지향했던 이광수의 문학이 공동체의 자기보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면, 염상섭의 문학은 자아의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형상화함으로써 근대성의 또다른 원천으로 존재한다.'며 차이점을 지적하였다. 김윤식은 루쉰의 사상을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란 주제에 몰두한 이광수의 사상형성과정과 비교하기도 했다. 바로크 바로크(, , , )는 서양 예술사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용어이자 예술 사조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의 프랑스 전사인 '에서 유래했다. barocco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는데, 뜻은 왜곡된 삼단논법, 혹은 불협화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소리를 의미한다. 바로크의 예술적 표현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서양의 미술, 음악, 건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의 변천에 따라 바로크의 시대는 전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뉜다. 예술적 경향에서 보면 후기 바로크 시대는 곧 로코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음악도 많이 있다.예를들어 미뉴에트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1. 반종교 개혁운동 종교개혁으로 인해 약화된 지상의 가치, 인간이 지닌 감정, 상상력 등에 대한 가치를 반종교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다. 2.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으로 인한 정치 체계의 변화 수공업과 상업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들이 과거 귀족들의 경제적 수준에 버금가는 부를 이루었고, 이들이 절대 군주를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바로크 예술 형태를 권력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흔히 바로크 미술의 시작 지점은 로마이고, 최초의 바로크 미술가는 카라바조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미술의 모든 장르와 하나의 시대를 한꺼번에 포함하는 마지막 양식이다. 바로크 이후로 미술사에서는 동시대에 여러 가지 미술 사조가 등장하며, 각각의 장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기도 한다. 조각에는 이탈리아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대표적인 작가로, 이들은 동적, 환각적인 표현으로 '성 테레사의 도취'나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장식과 광장의 콜레네이드를 완성하여 바로크 최대의 조각가로 군림하였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플레야드 말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의 시대를 ‘전(前)고전주의 시대’라 불러온 데에 대하여 이 시대에 고전주의로 향하는 경향을 이탈한 문학을 오히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바로크 문학’이라 하여 고전주의에 대치시키는 움직임이 근년 문학사가들 사이에 일어났다. 문학에 있어서 바로크의 특징은 ⑴ 안정보다 움직임의 중시, ⑵ 단념보다도 격한 감각의 존중, ⑶ 장식성의 우월, ⑷ 기발한 비유·대조·과장과 파격적 구문의 사용 등이다. 시에서는 도비네, 장 드 스퐁드(1557-1597), 초기의 말레르브, 극에서는 로베르 가르네(1544-1590)와 로트루(1609-1650), 초기의 코르네유 등에 이 경향이 있다고 한다. 순식간에 로맨틱한 정원에서 궁전으로 바뀌는 무대 장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플랏에서 처음 고안되었다. 이러한 무대 장치로 연극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표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브로드웨이 연극 등 상업적 연극에서 보이는 드라미틱한 무대 장치는 바로크 시대의 연극에서 기원하였다. 영화 바텔, 파리넬리와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상연된 오페라 오르페우스는 바로크 시대의 스타일을 잘 표현하고 있다. 지리산 지리산(智異山)은 대한민국의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과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의 뜻은, 智異에서 알 수 있다. 智異는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 그리고 그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또 백두대간의 맥에서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다. 7,500여종의 식물과 동물이 서식하여 있고 천왕봉을 주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있다. 1967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이에 따른 고찰이 많고 근·현대 문화재도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이다. 서산대사의 횡령암기에는 반야봉 좌우의 두 봉우리인 황령과 정령에 한나라 소제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고 고개의 이름을 두 장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지 않지만 달궁 계곡 근처에 이 기록을 뒷바침해 주는 지명들이 구전되어 내려온다. 지리산은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다.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항일빨치산,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다. 행정 구역 상으로 3도, 1시 4군, 15 면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과 하동군, 남원시, 구례군에 걸쳐 있다.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최고 높이는 1,916.77m (천왕봉)이다. 산이 차지하는 총면적은 483.022 km²(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이며, 둘레는 320 km에 달한다.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 등을 잇는 25.5km의 주능선 상에 토끼봉, 명선봉, 영신봉, 촛대봉 같은 1,000m를 넘는 준봉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한수골, 도장골, 목동골, 대성골 등의 계곡이 지리산에 안기워 있다. 이 계곡들의 물이 각각 남북으로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되어 함양과 산청으로 흐르고, 또 하나는 마이산에서 흘러온 물을 만나 섬진강이 된다. 뱀사골 계곡의 폭포가 있는 곳은 국내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리산의 산자락에는 화엄사, 연곡사, 구례 천은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칠불사, 벽송사와 같은 이름난 사찰이 있다. 지리산에는 대략 1500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있다.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식물로 지정해 보호되고 있는 가시오갈피나무, 깽깽이풀, 기생꽃, 세뿔투구꽃, 자주솜대, 천마, 히어리 등이 있다. 이처럼 풍부한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는 북방계 식물 또는 고산식물로 분류할 수 있는 구름병아리난초, 금강애기나리, 기생꽃, 너도바람꽃, 땃두릅나무, 만병초, 산오이풀, 자주솜대, 참바위취, 회목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지리산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로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곳이 이들의 분포의 남방한계선에 해당하므로 의미가 있다. 북방계 식물들이 지리산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은 빙하기 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북쪽 식물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산지역에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지리'또는 '지리산'이 붙은 식물들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도 '지리'또는 '지리산'이 붙지 않은 식물도 있다. 지리산에 다양한 식물이 살 수 있는 것은 독특한 조건을 갖춘 식물생육지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생육지는 고산능선으로서 해발 1500m 이상의 지역에 길게 형성된 능선에 특별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주릉 곳곳에 발달한 바위봉우리나 초원에는 귀한 식물이 많다. 왕등재 부근의 해발 1000m 지역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슾지 왕능재늪은 감자개발나물, 닭의난초, 동의나물, 방울새난, 세모부추, 숫잔대, 애기부들등 습지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가 1그루 발견된 이후 실시된 특별예찰 결과 추가 감염목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리산은 여러 동식물의 낙원으로서 지리산 국립공원의 야생동물의 종류는 89종으로 이중 텃새가 37종, 여름새가 33종, 겨울새가 12종, 통과새가 7종이다. 우점종은 어치이고 붉은머리오목눈이, 박새, 노랑턱멧새, 동고비, 쇠박새, 직박구리 순으로 우점도가 높다. 천연기념물로는 큰소쩍새, 소쩍새, 붉은배새매, 올빼미, 새매, 재두루미 등 7종이 관찰된 적이 있다. 희귀조류 중 나무발발이는 관찰 기록만 있고 바위종다리는 저지대에서 관찰된 적이 있다. 평지에서 번식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는 검은딱새, 붉은뺨멧새가 노고단 1,500m 고지에서 번식하고 있다. 지리산은 야생동물 서식에 알맞은 울창한 수림과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야생동물에게는 낙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 조사, 보고된 지리산 서식동물은 포유류가 15과 41종, 조류가 39과 165종, 곤충류가 215종 등 총 421종이다. 포유류의 경우에는 멧돼지나 고라니, 너구리, 청설모등 포유동물이 많이 서식한다. 대한민국의 여러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하는 장소이다. 하늘다람쥐, 삵, 담비, 수달, 반달가슴곰이나 아무르표범등이 서식한다. 이들은 대부분 촬영된 지리산북부사무소 야생동식물보호단이 서식지 인근에 10여대의 무인센서카메라를 설치, 2004년부터 2년여간 활동 장면을 찍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하늘다람쥐는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서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이 발견되는 것은 원시림, 계곡의 수질이 복구되고 있다는 증거라는 분석이 있다. 또한 지리산은 국립공원관리단이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지금까지 방사된 곰의 숫자는 28마리이며, 6마리는 폐사하고 4마리는 적응을 하지 못해 회수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겨울나기를 성공적으로 하고 번식을 하는 등 야생화 하고 있다는 조짐이 있다. 50마리 이상이 야생화에 성공했을 때 전국 각지에도 복원사업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옛날에는 지리산에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이나 시베리아호랑이(한국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나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목격담과 발자국 흔적으로 인해 적은 수나마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지리산은 주릉이 동서방향으로 25.5km를 뻗어있고, 1000m가 넘는 준봉들을 잇는 능선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고 샘이 많아 좋은 등산로이다. 또한 깊은 계곡이 있어 남북 방향으로는 계곡에서 시작하는 등산로가 많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을 직접 오르는 길은 동쪽의 중산리와 백무동을 거치는 길이다. 서쪽 지역은 계곡이 아름다운 뱀사골과 길이 뚫려 접근하기 쉬운 성삼재-노고단 코스이다. 주릉을 종주하는 코스는 고전적으로는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의 길인데, 근래에는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화엄사-대원사 산행길은 대략 2박 3일에서 3박 4일이 걸리는 길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7km까지는 힘든 편이나 노고단에서 화개재까지는 큰 어려움은 없다. 토끼봉의 가파른 비탈을 올라 연하천에서 1박을 하고, 벽소령과 세석을 지나 장터목에서 2박을 한다. 마지막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하산한다. 최근에는 인월 덕두산이나 바래봉에서 시작해 산청 웅석봉까지 4박 5일(혹은 5박 6일)에 걸쳐 종주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중산리를 시작해서 천왕봉에 이르는 산길은 천왕봉을 가장 빠르게 오르는 길로 가장 인기 있는 산행코스여서 봄, 가을 입산금지 기간에도 산행이 허용된다.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유암폭포 코스와 장터목을 거치지않는 법계사 코스가 있다. 칼바위까지는 경사가 급하다. 칼바위에서 장터목 코스와 법계사 코스가 갈라진다. 법계사 코스는 가깝기는 하지만 로타리 산장에서 천왕봉까지는 경사가 급하나, 일출을 보려면 이 길을 택해야 한다. 법계사 코스는 5.4km로 약 4시간이 걸린다. 그 외에도 백무동을 기점으로 하는 한신계곡 코스, 쌍계사를 기점으로 하는 삼신봉 코스, 뱀사골을 기점으로 하는 뱀사골계곡 코스, 피아골을 기점으로 하는 피아골 코스, 산동면을 기전으로 하여 만복대에 오르는 코스 등이 있다. 벽소령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산4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1996년에 지어진 대피소로 12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규모가 큰 편(449.0m²)에 속하나, 샘터가 500m가량 아래로 내려가야 있어 주릉에 있는 대피소 중에 가장 물을 구하기 어렵다. 연하천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72.00m²이고, 4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노고단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110-2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건축한 제1대피소(381.0m²/140명 수용) 외에 1994년 제2대피소(315.0m²/50명 수용)를 추가로 건축하였다. 피아골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368에 위치하고 있다. 1984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81.00m²이고, 5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뱀사골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20에 위치하고 있다. 1985년에 건축하였으며, 면적은 157.0m²이고, 80명을 수용할 수 있다. 2007년 3월 25일자로 폐쇄되었다. 2007년 12월말 현재 철거공사 중이다. 세석 대피소는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대피소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산325에 위치하고 있다. 종전에 있던 대피소를 1995년에 새로 지었는데, 최근에는190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지리산 국립공원내 대피소 중에 가장 크다(면적 653.0m²) 넓은 세석평전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릉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물을 구하기가 쉬워 찾는 사람이 많다. 세석평전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면 한신계곡이 시작되어 백무동이 있는 마천지구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남부능선이 시작된다. 불확정성 원리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양자상태에서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RMS)편차 (X의 표준편차)는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P의 표준편차)는 두 표준편차의 곱은 다음과 같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 양자역학의 물리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아래는 기본적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따라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를 서술한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아낼 수 없고, 두 측정값의 부정확도를 일정 이하로 줄일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이다. 고전역학의 예측과는 달리, 양자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확정적인 값을 가질 수 없으며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플랑크상수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이는 입자계로부터 동일한 측정의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통계에 대한 진술이지, 단순히 입자계를 한번 측정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다. 양자현상은 특정한 시도에 의해 그때그때 얻어지는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 아니며, 여러 번의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기댓값과 같은 통계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는 이러한 양자현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물리적인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관계에만 성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관측에 적용될 수 있다. 양자현상의 관측량들은 연산자에 의해 얻어지는데, 각 연산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두 연산자를 '교환(맞바꿈) 관계에 있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앞서 언급한 위치와 운동량은 교환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은 불확정적인 것이다. 반면 3차원 공간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할 경우엔, 다른 두 방향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은 서로 교환 가능한 관계이므로 그것들에 대해서는 불확정적이지 않게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교좌표계에서의 관측을 생각해보자. x축 상의 위치를 측정하는 행위는 x축상의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만, 이 관측은 y축과 z축 상의 위치와 운동량 관측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모든 관측에 불확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처음의 결과가 실험 오차에 의한 것이었다면 x축상의 위치와 y축상의 운동량의 측정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부분이 바로 기술적 한계와 불확정성 원리가 구별되는 부분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는 관측 행위의 순서가 관측하고자 하는 상태에 영향을 주는 양자현상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교환관계에 있지 않은 두 연산자에 의한 관측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즉 한번의 관측을 수행한 후 다른 관측을 수행할 때 두 관측 순서를 바꾸면 각각은 다른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 이것은 처음의 관측에 의해 상태가 변화하게 되어 다음 관측에서는 처음과 같지 않은 상태에 대해 측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게 초기 상태가 관측에 의해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을 파동 함수 붕괴 ()라고 말한다. 양자 현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로 표현되므로, 그 파동 함수가 변화했다는 것은 수학적 계산에 의해 전과 같은 관측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1924년부터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5월, 문제를 단순화시켜 복잡한 수소원자가 아닌 가상적인 조화 진동자를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그는 조화 진동자에서 고전적인 다주기 체계에 상응하는 위치 좌표를 푸리에 급수로 전개하여 이에 대한 수학적인 형식화를 추구한 결과, 그가 시도한 새로운 방법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5년 6월, 휴양지인 헬골란트 섬에서 최초로 양자 현상에 대한 새로운 역학을 정립해냈다.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현상 내에서는 물리량들과 연관시킨 수학적 대상 두 개를 함께 곱함으로써 얻어지는 답이 곱이 수행되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발견했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물리량과 연관된 수학적 대상은 연산자이며, 두 연산자 사이에는 교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수학적 특징은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하이젠베르크 자신 역시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때 막스 보른은 1925년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담긴 비교환적 양들이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행렬임을 인식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의 연구 내용을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행렬로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하이젠베르크가 정립한 새로운 역학은 행렬역학이라 명명되었다. 1926년 3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의 비교환적 성질이 불확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당시 닐스 보어는 '불확정성'을 '상호보완성'이라고 표현했다), 미시적인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한 결과, 1927년 3월에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였다. 후에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이란 현상과 그것에 관련된 자연법칙을 알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이론이다."라고 말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관점하에 새로운 현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결과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계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수학적인 논증을 완성한 하이젠베르크는 이후 사고 실험을 통하여 빛과 물질의 파동, 입자의 이중성이 불확정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의 1927년 논문은 formula_4와 formula_5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형태였다. 같은 해 7월에 미국의 얼 케너드()가 오늘날과 같이 formula_4와 formula_5를 관측가능량의 표준편차로 정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부등식 을 증명하였다. 현미경으로 입자를 관측하는 사고 실험인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사용했던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현미경에 사용하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상을 형성하는 해상도가 높다는 사실을 토대로, 원자 속 전자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관측에 사용되는 빛은 감마선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자 속의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감마선과 같이 짧은 파장(높은 진동수)의 광자를 쏠 경우, 감마선 광자가 가진 운동량은 매우 커서 원자가 전자를 잡아두는 에너지를 초과한다. 따라서 이 경우 전자의 위치는 정확히 관측되지만, 광자는 전자에 큰 임의의 운동량을 전달하므로 컴프턴 효과에 의해 전자의 운동량은 부정확하게 측정된다. 반대로 전자를 관측하기 위해 긴 파장(낮은 진동수)의 광자를 쏠 경우 광자의 충돌이 전자의 운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전자에 의해 크게 산란된 광자는 관측자에게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전달해 줄 수 없다. 위의 두 상황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은입자가 x축 방향으로 놓인 폭이 a인 슬릿을 통과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x축으로의 불확정성은 formula_10가 된다. 이 입자는 드브로이의 물질파에 해당되는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슬릿을 통과한 입자의 파동은 회절하게 되고, formula_11인 곳에서 첫 번째 간섭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 전자가 발견될 확률은 회절된 파동함수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입자의 확률적 분포가 절반각인 formula_12에 해당되는 영역 안으로 제한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다음과 같다. 이때 드브로이의 물질파 관계식으로부터 운동량 formula_14이므로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도는 다음과 같다. 이 과정은 일반적인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위치와 운동량 불확정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하는 발견적 논의(heuristic argument)이므로 그 결과는 정성적이다. 즉, 위 식의 우변인 h는 수학적으로 엄밀한 불확정도가 아니다. 임의의 관측량 A에 대한 분산은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관측량 B의 분산은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해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을 적용하면 다음의 식을 얻는다. 한편, 임의의 복소수 z는 복소수의 일반적인 성질에 의해 다음의 식이 항상 성립한다. 따라서 우변의 formula_20에 위의 관계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식 우변의 괄호 안의 내적을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부등식 괄호 안의 내적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위 계산결과는 다음과 같이 두 연산자에 대한 교환자 표기법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다음의 식을 얻게 된다. 이것이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이다. 여기서 formula_33는 임의의 연산자이므로 교환자가 0이 아닌 두 연산자에 대해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은 일반화된 불확정성의 특정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차원(x축) 공간 상에 존재하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양자역학에서 운동량을 측정하는 연산자는 다음과 같다. 위치와 운동량 연산자의 교환자는 다음의 과정을 통해 계산된다. 이것을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양변에 제곱근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며 양자역학의 기본 가정으로부터 유도되는 하나의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에 대한 보다 엄밀한 전개로써 2003년 1월에 나고야 대학교의 오자와 마사나오(小澤正直) 교수는 측정의 한계, 측정 행위에 의한 교란과 양자 자체의 성질에 의한 양자의 움직임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식을 제안했다. 본래의 하이젠베르크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은 물리량 formula_39와 그것을 측정하는 결과 연산자 formula_40와의 차이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을 의미하는 formula_41와 측정 도중의 formula_39의 변화량(요동)의 제곱평균제곱근을 의미하는 formula_43를 도입하면 와 같게 되는데, 오자와는 보다 일반적인 위치-운동량 불확정성 원리의 보완식으로써 두 개의 항이 추가되는 을 제시하였다. 이 식에 따르면 작은 양자에 대하여 기존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의 '측정의 한계'를 넘는 측정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빈 공과 대학교와 나고야 대학교의 공동 연구에 의하여 특정 조건에서 놓인 중성자의 두 종류 스핀 값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실험으로써 증명되었으며, 2012년 1월 15일 《네이쳐 피직스》에 개재되었다. 임의의 관측량 formula_46의 기댓값을 시간에 대해 미분하면 다음과 같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적용하면 이므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formula_50는 헤르미트이므로 , 따라서 임의의 관측량formula_52와 그것에 대한 연산자 formula_53, 해밀토니안 formula_54 사이에는 다음의 관계가 성립한다. 연산자formula_53가 시간에 무관하다고 가정하면 마지막 항은 0이 된다. 이제 위 식을 일반화된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 식의 양변에 제곱근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에너지와 시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의 관계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식이 바로 에너지-시간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당시 점차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닐스 보어가 반박한 사건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제5차(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슬릿'과 제6차(1930년) 솔베이 회의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의 박스'가 불확정성원리에 대한 대표적인 반론이다. 또한 양자역학의 측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정교한 사고실험인 'EPR 역설'(1935년)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슬릿'은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으로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보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에너지-시간 관계의 불확정성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닐스 보어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보어는 이 효과가 불확정성 관계에 정확하게 일치함을 보일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에 의해 반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모순성보다는 불완전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된 EPR 역설은 1935년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에 의해 발표되었다(EPR이란 명칭은 세명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물리계는 측정하기 전에 이미 물리적 성질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국소적 실재론 관점을 고수하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이를 입증하기 위한 정교한 가상실험을 설계했다. EPR측은 어떠한 물리적 영향력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다는 '국소성의 원리'를 근본 원리로 가정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르면 측정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는 거리에 관계없이 먼 곳에 순식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action-at-a-distance)이므로, 양자역학은 국소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역설적인 상황을 발생시키게 된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불완전 체계이며, 물리계의 상태를 완벽하게 알아내기 위해선 파동함수 이상의 '숨은 변수'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4년 존 벨은 EPR 역설을 검증할 수 있는 실제 실험을 고안했다. 벨은 실험의 결과가 '벨의 부등식'을 판별한다고 말했는데, 부등식이 성립한면 EPR측의 주장이 옳은 것이고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양자역학의 체계가 유지되며 어떠한 숨은 변수도 허용되지 않음이 밝혀지는 것이었다. 이후 벨부등식을 입증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결과,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져 양자역학의 비국소적 특징이 밝혀짐과 동시에 양자역학의 체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벨의 실험과는 별개의 방법으로 EPR이 주장한 나타난 양자역학의 비국소적 특징을 설명할 수도 있다. 만약 EPR측의 주장처럼 파동함수의 붕괴가 유한한 속도로 일어난다면 국소성의 원리보다 더 우선시되는 원리인 '각운동량 보존법칙'이 깨지게 된다.(이렇게 될 경우 물리학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파동함수의 붕괴는 순간적으로, 즉 비국소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질량 질량(質量, )은 물리학에서 물질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양을 일컫는 말이다. 질량의 SI 단위는 킬로그램(kg)이다. 질량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물질이나 물질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질량은 일반적으로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정의된다. 관성질량은 에른스트 마흐의 방식에 따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의된다. 뉴턴의 작용-반작용 법칙에 가속도의 법칙을 적용해 "두 물체를 작용시켰을 때, 두 물체의 가속도는 항상 반대 방향이며, 그 크기의 비는 두 물체에 고유한 양이 된다."라고 해석하고, 물체의 질량을 기준물체의 질량에 대한 배수로 정의한다. 즉 물체의 관성질량이 m이고 이 물체에 F의 힘이 작용하면, 가속도 a=F/m으로 주어진다. 맥스웰의 고전전자기학 이론에서부터 전자기적 질량과 상대론적 질량을 유도할 수 있다. 전자기적 질량에서는 전하를 띤 물체가 유전체를 통과할 때 발생하는 변위 전류에 의해 물체가 저항을 받아 물체가 질량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전자기적 질량은 전자기장의 운동량 보존의 한 표현으로, 관성질량에 해당한다. 막스 아브라함은 전자의 질량을 전자기적 질량으로 표현하였다. 카우프만은 실험을 통해 전자의 질량이 온전히 전자기적 질량으로 표현됨을 보였으나 반박되었다. 상대론적 질량은 기준계의 운동과 관계없이 맥스웰 방정식이 동일한 형태로 유지되도록 로런츠 변환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로런츠 변환을 적용할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하려면 물체의 질량이 속도에 의존하는 값이 된다. 운동량 보존 법칙에서 유도된 상대론적 질량 또한 관성질량이다. 상대론적 질량은 물체가 기준계에 대해 불변량이 정지해 있을 때의 질량으로 나타내지며, 이를 고유 질량 또는 정지 질량이라고 한다. 전자의 비전하에 대한 실험 결과 전자기적 질량이 틀린 이론이고 상대론적 질량이 옳은 이론임이 확인되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유도된다. 쌍생성, 쌍소멸의 경우와 같이 질량과 에너지는 남김없이 변환될 수 있다.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은 뉴턴의 중력법칙으로 질량을 정의한다. 전자는 물체가 주위에 만드는 중력장의 크기의 비로 질량을 정의하고, 후자는 중력장을 만드는 물체에서 같은 거리만큼 두 물체가 떨어져 있을 때, 두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의 비로 질량을 정의한다. 즉, 지구 표면에서 지구가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F, 중력가속도의 크기를 g라 하면,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은 F/g가 된다.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은 실험적으로 높은 정밀도로 확인되어 있으며,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서 유도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같은 것으로 가정되므로 세 가지 질량의 정의가 이론적으로 동등하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물질이나 물질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현재 국제단위계(SI 단위계)에 따르면 질량은 킬로그램이라는 단위로 측정된다. 킬로그램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 정의는 1901년 제 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정해진 것이다. 이 정의가 있기 전까지 킬로그램은 4℃의 물 1L의 질량이라고 정의되어 있었지만 물의 밀도의 불안정성 때문에 1889년 미터 조약에서 1kg에 해당하는 질량 원기를 만들게 되었다. 현재 7개의 SI단위 가운데 유일하게 질량만이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아 질량의 단위를 정의하고 있는데, 이 이유는 국제킬로그램원기를 통해 원자 하나가 측정될 때 수반되는 오차 수준의 정밀도보다 높은 정밀도로 측정하고자 하는 물체의 질량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당시에는 원자질량단위가 생각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현재 이 원기는 인공물이어서 물리적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2011년에 열린 제 24회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기존의 원기를 폐지하고 새로운 질량의 정의를 도입할 방침을 밝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새 대안은 플랑크 상수를 통해 질량을 정의하는 방안이다. 질량의 단위는 킬로그램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단위가 바로 원자질량단위이다. 원자질량단위는 1961년 IUPAC 회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수식으로 쓰면 이로써 주어지는 원자질량단위를 킬로그램으로 환산하면 대략 1.66×10kg 정도가 된다. 여기까지 언급하지 않은 질량의 단위로는 주로 영국에서 쓰는 파운드(lb), 입자물리학에서 볼 수 있는 플랑크 질량(m), 천문학에서 볼 수 있는 태양질량등이 있다. 질량은 물체가 가지는 고유한 양이며 고유하기 때문에 질량은 변화하지 않고 보존된다. 그런데, 무게는 지구상 에서는 질량과 중력가속도의 곱이므로 무게는 지구에서나 어디서나 다르다. 다시말해 지구에서 측정한 무게와 달에서 측정한 무게가 다른것이다. ‘질량’의 개념이 아이작 뉴턴에 의해 처음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었는데, 그 바탕에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어 뉴턴시대까지 이어지는 물질에 대한 이해의 역사적 발전의 성과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책들 《자연학》, 《형이상학》, 《》을 통해 고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있는 탐구의 시도를 볼 수 있다. 이후 위의 책들의 저술로서 파생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을 보완하기 위한 10~12세기의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이슬람의 자연철학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은 신학에서의 중요한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과 연관짓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에 대한 이븐 루시드의 저술은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지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마침내 아지디우스 로마누스는 질량과 근접한 개념인 '질료량'을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고대 문명에서 교역이 발달하고 상품의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상품들의 양을 측정할 방법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고대에도 역시 무게와 부피를 결정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아래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고대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저울을 통해 재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종교에서는 측정의 용도로 저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경에서도 무게를 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제 23장 16절에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를 통해 이 부분에서는 돈의 무게를 달았던 시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측정의 기준은 무게의 단위가 아니라 부피의 단위었다. 기원전 2800년경에 발견된 최초의 부피의 단위를 나타내는데 쓰였던 수메르 초기왕조시대의 라가슈에서 출토된 엔테메나라는 은제항아리는 10 실라(sila)(대략 5리터) 를 정의하는 데 쓰였다. 반면에 무게의 단위는 그 당시에는 장소마다 매우 다양했다. 아시리아왕국의 살마나사(Salmanassar)5세 때 미나(mina)(대략 1킬로그램)가 공식적인 무게의 단위로 쓰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른 상품의 양은 다른 단위를 통해 측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고대부터 무게 또는 상품의 양을 비교하기 위해 저울을 이용했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게는 현대에 우리가 이해는 것과 같이 물질의 양이나 질량에 비례하는 힘이나 다른 역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게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색깔, 냄새와 같은 특성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피에르 부트루(Pierre Boutroux)라는 학자는 이러한 현상이 바로 자유낙하는 물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결론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자연의 본성, 또는 자연의 현상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활발한 토론을 하였다. 그리스의 많은 자연철학자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에 대해 많이 탐구하였고, 《》("Physics"), 《》("Metaphysics")과 같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이 시기에 물질의 본성에 대해서 루크레티우스, 심플리치우스와 같은 자연철학자들, 그리고 스토아 학파, 플라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같은 여러 학파들 사이에 많은 토론이 오갔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여러 고대문헌들을 통해서 고대에는 정량적인 의미로서의 ‘물질의 양’,즉 질량과 연관성을 가지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은 고대를 거쳐 중세까지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세시대의 이슬람의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자연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론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생각들을 내놓았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애 동안 물리학, 형이상학, 시, 희극, 음악, 논리학, 정치학, 윤리학에 걸치는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서양 철학의 전반적인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후에 아이작 뉴턴에 의한 고전역학의 등장으로 사장되었지만, 그의 물리학에 대한 글은 이후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그의 이론을 후세 사람들이 보완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질량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자연운동의 경우에는 물체의 자연본성이 그 움직여주는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떤 물체가 자연운동을 수행해서 태어난 장소에 도달하면 그것의 운동은 종결된다. 중요한 부분은 강제운동을 다루는 대목인데, 강제운동의 경우에는 움직여주는것은 외부의 힘이다. 외부의 힘은 그 물체로 하여금 그 자연본성을 어기고 자신이 태어난 장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여기서 이 외부힘이 사라지면 운동은 중단된다. 힘만이 물체의 운동을 유일하게 결정하지는 않았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운동은 외부의 힘에 대한 저항력이 작용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저항력과 외부의 힘이 운동의 빠르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자연운동을 논의하는 가운데 《》와 《》에서 다른 무게를 가진 두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문장은 보통 '무게운 물체는 더 호잉이 잘 ㅊ니다. ㅏ제러드 호잉 그들의 무게에 비례하여 더욱 빨리 떨어진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르면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무게는 그 입자가 큰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인지 작은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입자가 작은 물체의 구성요소였다가 큰 물체의 구성요소가 된다면, 그 입자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이러한 생각들을 종합해 볼때, 고대에 있어서 무게는 크기성질이 아닌 세기성질에 더 가까웠다. 두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물질의 양(질량)과 무게 사이의 정비례관계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무게는 결코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애초부터 이러한 무게와 질량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물질관에서는 절대 고려될 수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불은 물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소였다. 그리고 불은 가벼운 성질을 가지는 원소였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상대적 의미에서의 가벼움이 아닌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가벼움이었고, 따라서 불은 가볍기 때문에 지상계의 외곽으로 상승한다고 하였다. 곧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무게(우주 중심으로 하강하려는 자연본성)를 가지지 않는 물질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자연운동으로서의 물체의 낙하운동이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한 강제운동에 있어서도 ‘물질의 양’, 즉 질량의 개념을 찾아 보기 힘들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강제운동에서는 외부의 힘 뿐만 아니라 매질의 저항 역시 작용한다. 즉, 모든 운동은 기동력(움직여 주는 힘)과 저항에 의존한다. 강제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저서 《물리학》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에서 언급한 강제운동에서의 두가지 운동의 요인인 무게와 매질의 저항을 제외하고는 다른 요인을 배제한다. 물체 자체의 내재적인 저항(관성질량)과 가속시키는 힘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 대한 암시를 그의 저서 《천체에 관해서》(라틴어:"De Caelo", 영문:"On the heaven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서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질량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그 어느 곳에서도 ‘물질의 양’ 과 관련된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물리학은 자연본성("physis")에 더 가까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질료'("hylē", 본래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목재를 의미했다)를 비롯한 여러 용어들은 사실 유기체와 유기체적 현상과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기물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불변적인 성질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변하지 않는 ‘물질의 양’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타고라스의 학파의 영향을 받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이후 그의 철학을 따랐던 사람들은 물질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공간이라고 했고, 물리학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려고 했다. 물리학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보는데 토대가 되었던 생각은 기하학적 크기는 어디서나 불변이고 항상 일정하다는 사실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공간은 모든 것들의 모체였고 영구적이기 때문에 기하학적 크기는 물질의 정량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신빙성있는 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플라톤 학파의 생각은 스토아 학파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스토아 학파는 공간과 물체의 구별을 강조했다. 스토아 학파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물체는 단지 수학적인 공간의 크기이상의 성질을 가지는 물리적 객체라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수학적인 기하학적 객체와 물리적 객체를 구분짓는 요소는 바로 물리적인 압력에 저항하는 물체의 저항성이었다. 이 성질은 물체가 완전히 구부러지거나 모든 원소들이 섞이는 것을 막는다. 이후 2세기경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다고 보고되는 엠피리쿠스는 물체는 크기, 모양, 저항, 무게를 갖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크기, 모양은 물체에게 공간적 크기를 부여하여 기하학적 객체를 획득하게 하는 요소들이고 저항과 무게는 그 기하학적 객체를 물리적 객체로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의 저항과 무게가 물질의 양을 나타낼 수 있는 척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질 자체는 절대 정량적인 값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크기, 모양, 저항, 무게는 모두 세기 성질과 관련지어 질량을 나타내는 척도로 이용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체의 성질들은 물질의 양과는 거리가 먼 물체의 부수적인 형상에 불과했다. 비록 고대 철학과 과학에서 ‘물질의 양’에 대한 개념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물질이 보존된다는 생각을 고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영구적, 불멸적인 성질의 개념에 대해 초석을 놓았다. 그의 형이상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를 서술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는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ings")라는 장편의 서사시를 남겼다. 이 서사시는 물질이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성질에 대해 논하는 매우 유명하고 대표적인 시 중 하나이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은 분명히 분해되지 않고 창조되지 않는 물질의 성질에 대해 거론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문장들은 루크레티우스는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체계와는 다른 사고체계를 가졌음이 틀림없음을 증명한다. 또한, 는 위의 문장들을 통해 루크레티우스가 물질의 양과 무게의 비례관계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무게는 물질의 양에 대한 척도의 기능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는 아르키메데스와 부력에 관한 일화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히에로 2세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신에게 바칠 왕관이 순금으로 되어있는지 의뢰했는데, 그는 이 문제를 고민한 끝에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가 저술한 책 《뜨는 물체에 관하여》에서는 자신이 발견한 지금 불리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일련의 아르키메데스와 부력의 원리와의 관련성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가 비중과 밀도의 개념을 통해 질량의 개념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종종 현대의 많은 과학서적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비중과 밀도의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라고 서술되어있다. 더불어, 많은 물리학의 교과서들이 역학에서의 질량의 개념을 도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대해 서술한다. 사실,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의 대중화에 공헌한 비트루비우스는 기원전 15년경 쓰인 그의 유명한 저서 《》(De architectura)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는 글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여기서 질량(Massa)은 이 문맥에서 덩어리(lump)를 의미하는데, 과학적인 용어의 질량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아르키메데스가 질량의 개념과 연관이 있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비록 그의 유체정역학에 대한 설명에서 비중의 개념이 암시되어 있지만, 이 용어는 아르키메데스가 정의하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신학서에 등장하는 창조, 죽음, 그리고 성변화(聖變化, transubstantiation)와 관련된 현상을 언급하는 문구들을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중세 신학자들의 여러 시도는 물질과 질량의 개념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한 설명들은 물질의 생성, 소멸, 그리고 변화의 자연철학과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물질의 보존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을 자연운동과 강제운동으로 구별하여 서술한다. 하지만 그의 운동이론은 강제운동의 특수한 사례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 사례는 바로 투척된 물체의 사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여 주는 요인이 없으면 운동도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투척된 물체의 경우 그 물체를 던지는 사람의 손(움직여 주는 요인)을 떠나는 순간 그 물체를 움직여 주는 요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손을 떠나도 투척된 물체의 지속되는 운동을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설명은 움직이는 물체가 통과해 가는 매질이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모호한 설명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물체가 처음 움직이면서 매질을 움직이게 되고, 그 움직임 때문에 매질이 다시 물체에 운동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강제운동의 원인을 전부 외부에 의한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결코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고대 말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강제운동의 원인을 외부의 매질에 의한 것이 아닌 비물질적 운동원인을 가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개념은 ‘임페투스(Impetus)’라 불리게 되었고 존 뷔리당(John Buridan)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는 그의 임페투스 이론을 다루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서술을 통해 임페투스는 물질의 양에 비례하는 양임을 알 수 있다. 임페투스의 속도와의 연관성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위의 두 서술을 종합해 볼 때, 임페투스는 아래와 같은 간단한 수식적 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다. formula_2 이 관계식은 고전역학에서의 운동량 개념과 일부 유사성을 띠고 있다. 더불어, 뷔리당과 그의 학파는 물체 속에 있는 물질의 양이 기동력에 저항하는 저항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고전역학과 임페투스 이론간의 유사성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뷔리당의 임페투스 이론을 근현대 역학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평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임페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고 뷔리당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개념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즉, 임페투스는 운동량이 아니고 여기서의 저항은 절대 관성이 아니다. 뷔리당 이외에도 색소니의 앨버트(Albert of Saxony)와 니콜 오렘의 저술에서 역시 물질의 양과 임페투스 이론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뷔리당을 비롯한 중세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에 대한 연구가들은 그의 역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임페투스'의 개념 도입 등 여러 방면에서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은 15, 16세기에 접어들어서 스콜라 학문의 일부를 이루게 되어 대학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여 중세 학자들이 해결하려 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의 문제에서 그의 탐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후에 근대 역학의 근간을 이루는ㅡ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관성의 개념, 운동의 상대성ㅡ개념과 원리들을 이끌어냈다. 비록 그의 관성에 대한 개념이 근대의 관성의 개념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개념이 익숙해진 후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보완되고 수정되어 관성질량의 개념의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관성에 관련한 언급은 <두 개의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를 옹호하는 살비아티는 지구가 움직이면 지구 위의 물체가 뒤로 뒤처지니 않냐는 심플리치오의 질문에 대해 배에서의 운동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여기서 물체의 관성적 운동에 대한 암시가 드러난다. 그는 1632년 교황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이후 역학에 연구에 몰두하여 1638년 <새로운 두 과학>("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갈릴레이의 관성에 대한 생각이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서 관성과 관련된 문장에 주목해보자. 위 두 문장을 통해서 갈릴레이의 관성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고전역학에서의 관성의 개념에 근접해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전역학에서의 관성은 수평한 평면위에서 운동해야 한다는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관성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위의 갈릴레이의 말에 따르면 물체는 속도를 유지하며 균질한 운동을 계속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 균질한 운동이 등속 직선운동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등속 원운동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갈릴레이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비록 그는 관성의 개념을 도입했지만, 이 개념을 질량과 연계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1623년 출판된 책 에서 물질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물질의 일차적인 특성들을 나열했지만, 물질의 비기하학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질량)을 고려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그의 저서 <두개의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에 대한 주석에서도 갈릴레오는 질량에 대해 정의를 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묘사된다.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케플러는 그의 스승 티코 브라헤로부터 얻은 당시로서는 아주 정확한 천문 관측 데이터를 통해 천체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기존의 이론이 들어맞지 않고 타원 궤도로 교체되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존에는 단순하고, 완벽하고, 연속성을 띠는 원의 성질 때문에 플라톤 때부터 행성의 원운동은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인식되었지만, 케플러는 행성이 타원 궤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 과연 이러한 타원궤도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여전히 '자연스러움' 이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인과적 원인을 밝혀주는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곧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동역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단순히 형이상학적 개념에 머물렀던 관성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케플러의 관성에 대한 생각은 뉴턴 이전의 관성개념의 구체화 단계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이후 뉴턴이 관성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실, 케플러의 관성에 대한 개념은 타원궤도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의 초기의 관성에 대한 생각을 그의 저서 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그는 그의 저서 <신천문학>에서 행성은 운동을 하지 않으려는 명백하고 내재적인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상호 끌어당김 현상을 통해 역학적 관점에서의 질량의 개념을 언급한다. 케플러가 제시한 위의 중요한 관계는 질량의 실험적 정의의 바탕이 되는 원리로서도 이용될 수 있다. 이 원리는 후에 마흐가 질량을 정의하는 데 쓰였던 방법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케플러는 이러한 가능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케플러는 마침내 형이상학적인 추측에 불과했던 관성의 개념을 물리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다음 문장에서 관성의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적인 논리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케플러에게 있어서 관성은 자기자신이 공간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의 성질인 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저항, 즉 관성의 정도는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케플러의 다른 저서에서도 관성의 세기와 다른 물리적 양과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 따른 관성의 세기와 물리적 양과의 관계는 후에 뉴턴이 질량을 정의하면서 제시했던 관계식과도 유사하다. 케플러는 관성질량의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케플러의 관성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자발적인 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관성의 개념에 있어서 운동상태를 유지하는 측면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관성질량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데카르트 역학은 17세기 초에 출현하여 ‘기계적 철학’체계의 일부로서 동시대의 인물인 보일, 가쌍디(Gassendi)와 더불어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학이 관성을 고려했는지 아니면 배제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역학에 따르면, 물질의 유일한 본질은 외연(外延), 즉 공간을 차지하는 성질이다. 물질의 양은 무게에 비례하는 양이 아닌 부피로서 주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무게는 물질의 부수적인 특징에 불과하고 물질의 양과 무게는 비례하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체계는 동시대의 다른 자연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저서 <철학원리>("Principia philosophiae")에서는 그는 다음과 같은 자연법칙을 서술했다. 위의 법칙들은 물체의 관성적 특성에 대해서 거의 정확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책에서 ’관성(inertia또는 natural inertia)‘이란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데카르트가 말한 이 자연법칙들은 뉴턴의 <프린시피아>에서 비슷한 형태로 재서술되어 있다. 사실 프린시피아의 ’공리들, 혹은 운동의 법칙‘의 제 1법칙에 서술되어 있는 관성의 법칙은 뉴턴이 데카르트의 <철학원리>의 위의 법칙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 체계가 후의 뉴턴의 개념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하위헌스는 물질의 동역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폭넓은 탐구를 했다. 그는 지금까지 정성적으로만 논의되었던 원심력에 대해서 처음으로 정량적인 논의를 제시했다. 또한, 그는 충돌현상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탐구하여 데카르트의 충돌이론을 반박하고 후에 뉴턴역학과도 일치하는 두 물체의 충돌시의 속도와 질량과의 관계를 정량적으로 얻어냈다. 하위헌스의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관성질량 개념의 성립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그의 저서 <원심력에 대하여>("De vi cetnrifuga")에서 원운동을 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물체의 변하지 않는 양(solid quantities)사이의 관계를 제시했다. 하지만 마흐의 이러한 정의는 이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아래는 마흐의 정의에 대한 반론과 이에 대한 해결방안들이다. 임을 유도하였다. 전자의 속도가 시간에 대해 일정하다면 전자기장의 운동량 또한 일정하며, 역학적 운동량과 장의 운동량의 합이 보존되므로 역학적 운동량 또한 일정하다. 아브라함은 이를 관성의 법칙의 전자기적 해석으로 보았다. w가 가속도이고 μ가 전자기적 질량일 때 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운동에 평행한 방향의 운동량과 운동에 수직한 방향의 운동량을 구분하여 운동에 평행한 방향의 질량과 운동에 수직한 방향의 질량을 각각 구한다. 작은 속도의 경우 두 방향의 질량이 같고 헤비사이드의 결과와 일치한다. 은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하는 실험을 통해 전자의 질량이 속도에 의존함을 확인하였으며, 특히 전자의 질량이 온전히 전자기적 질량임을 보였다. 전자기적 질량의 성공을 통해 일부 물리학자들은 전하와 자기장으로만 모든 물리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질량은 물질이 통과하는 매질에서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며, 이로써 질량과 물질의 양 사이의 관계가 사라졌다. 그러나 전자 이외의 다른 물질에 대해서 전자기적 질량을 일반화하는 데 실패하였고, 상대론적 질량과의 괴리로 인해 전자기적 질량에 대한 반론이 증가하였다. 갈릴레이 변환에서는 질량이 불변량이며, 운동량 보존 법칙이 유지된다. 그래서 질량은 속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모든 관성계에서 맥스웰 방정식에 의한 빛의 속력이 동등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로런츠 변환을 채택한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논문에서는 전하 e를 가진 질량 m의 물체의 운동을 생각한다. 물체의 위치가 x이고 전기장 E가 작용할 때 뉴턴의 운동 제2법칙에서 m(dx/dt)=eE"'이다. 여기에 로런츠 변환을 적용하고 질량을 힘을 가속도로 나눈 것으로 이해했을 때 질량이 로 정리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질량의 유도는 전자기 이론에서 유도된 것이므로 전하를 띠지 않는 물체의 상대론적 질량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1909년 길버트 루이스와 은 질량이 같은 두 물체의 비탄성 충돌을 생각해 운동량 보존 법칙과 로런츠 변환에 근거해서만 상대론적 질량을 유도한다. 은 충돌이 운동방향에 수직인 경우에 대해 상대론적 질량 식을 유도하였고, 외트너는 두 물체가 탄성충돌하는 경우에 대해서 식을 유도하였다. 이 연구들은 모두 운동량 보존 법칙이 로런츠 변환 후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로런츠 변환이 일어날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이 여전히 성립하면 질량은 속도에 의존한다. 운동량 보존 법칙이 로런츠 변환 후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하고 상대론적 질량 식을 간단히 유도해 보자. 두 물체 A, B의 정지 질량이 m로 같다고 하자. 두 물체의 질량 중심이 정지한 좌표계에서 물체 A가 물체 B를 향해 좌표계에 대해 속도 -u로 접근하면, 운동량 보존 법칙에 의해 물체 B는 물체 A의 방향으로 속도 u로 움직인다. 운동량이 보존에 의해 두 물체의 완전 비탄성 충돌이 일어난 후에는 합쳐진 물체가 질량 중심이 정지한 좌표계에 대해 정지해 있을 것이다. 충돌 전 물체 A에 대해 정지한 좌표계에서 바라보자. 충돌 전 물체 B의 속도 v를 계산하면 이다. 속도 v로 움직이는 물체 B의 질량이 m일 때 운동량 보존 법칙을 적용하면 이다. v에 대한 식을 변형하여 m에 대해 m, u로 정리하면 로 상대론적 질량의 식이 얻어진다.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3차원 운동량 벡터에 에너지와 관련된 성분을 추가한 4차원 에너지-운동량 벡터 P를 사용해 상대론적 역학을 정리하였다. 에너지-운동량 벡터는 4차원 속도벡터 U에 항상 평행해야 하고, 외력을 받지 않는 물체의 운동량-에너지 벡터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3차원 공간과 관련된 성분은 로 표현된다. 여기서 m는 물체의 고유 질량 또는 정지 질량이라고 하며, 물체의 속도와 상관 없이 변하지 않는 양이다. 물체의 고유 질량은 또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존 헨리 포인팅은 1884년 포인팅 벡터를 사용해 전자기장을 통해 전달되는 에너지를 계산하였다. 1900년에 푸앙카레는 빛의 운동량을 포인팅 벡터로 표현해 전자기파의 관성질량을 E/c으로 유도한다. 푸앙카레는 전자기 에너지를 공간에 분포하는 가상의 유체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 유체가 보존되는 존재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4년 하센뇌를은 전자기 에너지가 내부가 완벽한 거울로 되어 있는 질량이 없는 빈 상자 안에 갇혀 있으면, 그 상자가 움직일 때 전자기 에너지의 크기에 비례하는 관성질량을 가진 것처럼 운동한다는 것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질량-에너지 등가성은 1905년 아인슈타인이 유도한 것으로 인정된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으로부터 물체가 전자기 복사의 형태로 질량 E를 방출하면 물체의 질량이 E/c만큼 감소함을 보였다. 이로부터 아인슈타인은 물체의 질량은 물체가 가지는 에너지의 척도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에서는 유도 과정에서 질량-에너지 동등성과 관계된 가정이 포함되어 있어 순환 논리의 오류가 있다. 질량-에너지 동등성은 1907년 막스 플랑크에 의해 올바르게 유도되었다. 물체의 운동에너지에 대해서는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운동에너지는 로 정리된다. mc을 물체의 정지질량에너지라 한다. 만일 물체의 모든 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으면 정지질량에너지는 0이고,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한 물리적 존재의 다른 표현이 된다. 질량이 남김없이 에너지를 전환될 수 있음은 물질의 쌍생성과 쌍소멸에 대한 실험에 의해 확인되었다. 질량과 에너지가 남김없이 상호 전환될수 있지만 항상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 관점에서 물체를 질량과 에너지로 구분하는 기준은 반응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화학 반응에서는 최외곽 전자의 에너지만이 변화하며 물질의 핵력, 내부 전자껍질의 에너지 등의 나머지 부분은 질량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기본 입자의 반응에서는 입자의 모든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전환되기 때문에 입자의 변화하지 않는 질량은 존재하지 않는다. 질량-에너지 동등성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운동량 보존, 질량 보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각각 따로 존재하였다. 3차원 공간에서 운동량 보존 법칙은 세 성분이 존재하므로 모든 물리적 현상은 총 다섯 개의 등식을 만족해야 했다. 질량-에너지 동등성 이후에는 4차원 운동량-에너지 벡터의 보존 하나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질량 보존과 에너지 보존이 통합되어 물리적 현상 네 개의 등식만을 만족하면 된다. 더불어 질량-에너지 동등성에 의해 에너지의 단순한 차이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값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전자기적 질량이 전자기장의 에너지를 질량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β=v/c일 때 아브라함의 전자기적 질량을 급수로 전개하면 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질량을 전개하면 로 다르다. 전자기적 질량과 상대론적 질량 중 옳은 식을 실험을 통해 가려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1902년 카우프만은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하여 전자기적 질량이 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는 카우프만의 실험 결과를 통해 두 이론 중 참인 것을 가려낼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전자의 비전하를 측정한 이후의 실험들의 결과는 상대론적 질량 식을 지지하였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전자기적 질량과 상대론적 질량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전자기적 질량의 경우 formula_20formula_21formula_22이지만, 상대론적 질량의 경우 formula_23으로 두 개념의 질량-에너지 동등성 식에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기적 질량에 계수 4/3이 붙은 것은 아브라함의 전자기적 질량의 정의가 움직이는 입자의 부피 바깥에서만 전자기장의 에너지를 적분하였기 때문이다. 상대론적으로 올바른 전자기적 질량의 정의에서는 입자의 텐서를 포함하는 전체 에너지-운동량 텐서에 기반해야 한다. 능동적 중력질량은 물체 주위의 공간에 중력장을 만들어내는 물체의 성질이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행성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들의 궤도를 설명하는 법칙 세 가지를 발표하였다. 세 번째 법칙인 조화의 법칙은 태양계의 모든 행성의 공전 장반경의 세제곱과 공전 주기의 제곱의 비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 비율은 태양이 만드는 중력의 세기를 서술하므로 태양의 능동적 중력질량을 의미한다. 이 값을 표준 중력계수라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케플러가 조화의 법칙을 발표한 이듬해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 네 개를 발견한다. 갈릴레오는 위성들의 공전 주기와 공전 장반경을 측정한다. 여기서 목성의 능동적 중력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데, 그 값은 태양의 1000분의 1 정도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실험을 통해 낙하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갈릴레오는 물체의 운동이 물체의 무거운 정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두 개의 무게가 다른 물체가 실로 연결된 경우에 대한 사고 실험을 제안하였다. 고전적 사고방식에서는 두 물체의 무게의 총합이 더 커졌으므로 각각을 떨어뜨릴 때보다 더 빨리 떨어지는지, 가벼운 물체가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지는 것을 방해할 것인지 모순이 생긴다. 갈릴레오는 이에 대한 결론은 모든 물체가 같은 빠르기로 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1638년에 발간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서 기울어진 면을 내려오는 구의 가속도를 측정한 실험을 소개한다. 갈릴레이는 기울어진 면의 다양한 각도에서 실험한 결과 물체는 자유낙하에서 낙하한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는 길이만큼 낙하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갈릴레이는 지구의 중력장에 의한 중력 가속도는 낙하하는 물체의 질량과 관계 없음을 보였다. 그러나 케플러의 중력 질량과 갈릴레이의 중력장은 뉴턴에 의해서야 통합된다. 로버트 훅은 1674년에 모든 천체는 다른 천체에 자신의 중심으로 향하는 인력을 작용한다고 기술하였다. 훅은 이 인력이 다른 천체가 천체의 중심에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인력이 증가한다고 생각하였다. 훅은 중력이 두 천체의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함을 아이작 뉴턴에게 증명하게 하였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 중력의 역제곱 법칙을 서술하였다. 뉴턴은 케플러의 세 법칙으로부터 중력질량과 갈릴레오의 중력가속도를 연결하는 다음 관계를 증명하였다. g는 천체가 중력장에 의해 받는 가속도이고, μ는 중력을 생성하는 천체의 표준 중력 계수이며, r은 두 천체 사이의 거리이다. 이제 두 가지 방법으로 지구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달의 궤도를 분석해 케플러의 방법에 따라 지구의 질량을 계산할 수 있고, 지구 표면에서 중력가속도를 측정하여 지구 반지름의 제곱을 곱해 지구의 능동적 중력질량을 측정할 수도 있다. 두 방법으로 계산한 결과 지구의 질량은 태양 질량의 300만분의 1로 일치한다. 훅의 논의에서는 왜 천체만 중력장을 형성하는지와 왜 인력의 방향이 천체의 중심을 향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뉴턴은 천체에 대한 훅의 논의를 모든 물체로까지 보편화시켜 모든 물체가 능동적 중력질량을 가지고 따라서 중력장을 형성한다고 하였으며, 그 세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하였다. 뉴턴은 이를 바탕으로 큰 구형 물체가 여러 작은 질량 요소로 이루어져 있을 때 각각이 형성하는 중력장의 합을 구하여 천체가 만드는 중력장의 방향을 계산하였다. 이를 중첩원리라 한다. 계산 결과 같은 반지름에 해당하는 지점의 밀도가 모두 같을 경우 물체는 전체질량에 비례하고 물체 중심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중력장을 형성하여 훅의 이론의 문제점을 설명하였다. 왼쪽 그림에서 지구의 각 부분은 능동적 중력질량을 가지므로 각 부분마다 중력장을 형성한다. 각 부분의 영향을 모두 합성하면 마치 오른쪽 그림처럼 지구 전체가 지구 중심으로 향하는 중력장을 형성한 것과 같다. 수동적 중력질량은 중력장에 의해 영향을 받는 물체의 성질이다. 물체가 중력장 내에 있을 때, 중력가속도의 크기가 g이고 물체가 받는 중력의 크기가 F일 때,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은 로 주어진다. 무게는 중력장 내에서 물체가 정지하도록 가해 주어야 하는 힘의 크기이다. 따라서 물체의 무게는 물체의 수동적 중력질량과 비례한다. 그러나 무게는 실생활에서 흔히 질량과 혼용된다. 무게는 힘의 크기이므로 단위가 뉴턴(N)이며, 중력장의 세기가 바뀌면 무게도 바뀐다. 질량은 중력장의 세기와 무관하게 주어진 값이므로 어느 곳에서나 일정하다. 하지만 지구 표면에서는 중력장의 세기가 거의 바뀌지 않기 때문에 물체의 무게는 어디서나 똑같이 느껴지고,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무게가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 착각하였다. 능동적 중력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주어진다. 물체 1의 수동적 중력질량을 formula_27, 능동적 중력질량(표준 중력계수)을 formula_28라 하고, 물체 2의 수동적, 능동적 중력질량을 각각 formula_29, formula_30라 하자. 물체 1이 물체 2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와 이고 물체 2가 물체 1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각각 로 주어진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formula_33이므로 로 수동적 중력질량과 능동적 중력질량이 비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때 두 가지 중력질량의 비례계수를 1로 해주는 상수를 중력상수 G로 정의한다. 따라서 뉴턴의 중력법칙은 로 주어진다. 1797년 헨리 캐번디시가 처음으로 비틀림 저울을 사용해 중력상수를 측정했으며, 오늘날 중력상수의 값은 으로 알려져 있다. 뉴턴의 운동 제2법칙과 중력법칙을 이용하면 물체가 중력만을 받을 때 물체의 가속도는 로 주어진다. 여기서 m은 물체의 관성질량이고 M은 물체의 중력질량이다. 따라서 물체가 똑같은 중력장 내에서 항상 일정한 가속도를 가지는 것과 물체의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동치이다. 물체의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은 실험적인 사실이다. 뉴턴은 진자를 사용한 실험을 바탕으로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동등성을 주장하였다. 이후 프리드리히 베셀은 뉴턴의 실험을 더 정확하게 발전시켰다. 외트뵈시 로란드는 중력과 지구의 회전에 의한 힘을 철사의 비틀림을 사용해 비교하였다. 로버트 헨리 딕은 비틀림 저울을 사용해 정밀도를 향상시켰다. 계속적으로 정밀도가 향상된 실험이 진행되었고, 모두 관성질량이 중력질량에 비례함을 확인하였다. 현재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5×10의 정밀도로 일치함이 확인되어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서로 비례하는 것이 등가원리에 의해 당연하다. 일반상대론의 등가원리에서는 '균일한 중력장 아래서 기술되는 물리법칙은 그 중력장에 해당하는 등가속도 운동을 하는 기준계에서 기술되는 물리법칙과 동일하다.' 즉 중력장에 의해 물체가 느끼는 중력과 가속되는 물체가 느끼는 힘은 동일하며, 관성질량과 수동적 중력질량이 동등하다. 반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수동적 중력질량과 관성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을 바로 유도할 수 없다. 하지만 에너지-운동량 텐서를 통해 관성질량과 능동적 중력질량의 동등성을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세 가지 질량의 정의가 이론적으로 동등하다. 질량과 관련한 자연철학자, 물리학자 질량과 관련된 개념, 이론 골뱅이표 @은 아스키의 64번째 부호로, 현대에는 전자 우편 주소를 표기할 때 주로 쓰인다. 영어로는 at sign이라고 부르며 흔히 at(앳)이라고 읽는다. @의 모양 때문에 한국에서는 흔히 골뱅이라고 부른다. 전자우편 주소 표기에 널리 사용되기 이전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영어 단어 at과 뜻인 일반적인 상업부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과 15개가 2달러인 경우 장부에 간략하게 "apple 15 @ 2$"로 기입하였다. 2004년에 모스 부호에 포함되었고, 콤마트(commat)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모스 부호로는 A와 C의 연타(.--.-.)로 표시한다. 트위터 등에서는 누군가에게 답장을 쓸 때 "OO에게"라는 의미로 사용자이름 앞에 @를 쓴다. (예: @사용자이름) 모두(http://www.modoo.at) 에서는 홈페이지를 찾을때 홈페이지명 뒤에 @을 붙여서 검색한다.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의미는 같지만 성별을 나타내기 위해 a와 o로 끝나는 단어를 동시에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 extranjer@) 언어권마다 @을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los ˈaŋxeles], : 나성(羅城))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은 1290.6 평방 킬로미터이다. 2010년 미국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3,792,621 명의 인구 가 거주하고 있어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미국 전체에서는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다. 로스앤젤레스는 약 1,8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중심지로, 이 대도시권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며,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권 중 한 곳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군 중 한 곳인 로스앤젤레스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을 앤젤레노스(Angelenos)라고 부르기도한다. 로스앤젤레스는 1781년 9월 4일 스페인 총독 펠리페 데 네베에 의해 설립되었다. 1821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일어나면서 멕시코에 편입되었다. 이후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결과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맺으면서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게 양도했다. 로스앤젤레스는 1850년 4월 4일 지방자치제를 시작했고, 5달 후 캘리포니아 연방 자격을 획득했다.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로스앤젤레스는 사업, 국제 무역, 엔터테인먼트, 문화, 미디어, 패션, 과학, 스포츠, 기술, 교육의 중심 도시로, 세계 도시 순위 6위, 세계 파워 도시 순위 13위에 올랐다. 도시에는 문화, 경제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 기업 본사들이 밀집해 있어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경제 도시이다. 또한 할리우드는 텔레비전 제작, 비디오 게임, 음악 산업에 있어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영화 제작 산업으로 매우 유명하다. 1932년과 1984년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2028년에도 하계 올림픽을 열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해안 지역은 수 천년 전부터 북미 원주민 부족 통바(또는 가브리엘리노스)와 추마시가 거주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리노는 이 지역을 "옻나무가 많은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iyáangẚ(스페인어로 양나라고 부름)라고 불렀다.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로드리게스 카브리요는 1542년 스페인 제국 하에 캘리포니아 남부를 발견했다.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후안 크레스피는 1769년 8월 2일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이르렀다. 1771년 프린치스코회 수도사 후니페로 세라는 이 지역에 미션 샌 가브리엘 교회를 지었고, 이 지역에 처음으로 전도를 했다. 1781년 9월 4일, 44명으로 이루어진 정착민 집단은 "로스 포브레도레스"로 잘 알려진 정착촌을 설립했고, 정착민들은 이곳을 "엘 푸에블로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라 레이나 데 로스 안겔레스 데 포르시운쿨라"라고 불렀는데, 영어로 "로스앤젤레스 강에서 온 천사의 여왕 성모 마리아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천사의 여왕은 성모 마리아의 경칭이다. 정착민의 3분의 2는 아프리카계와 유럽계가 섞인 메스티소 또는 물라토였다. 정착촌은 수 십년동안 작은 목장 마을에 불과했지만, 1820년 거주자는 약 650명으로 증가했다. 오늘 날 이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오래 된 유적지 중 한 곳으로, 로스앤젤레스 플라자 역사 지구와 올베라 거리에 있는 역사지구로 기념되고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속해있던 이 지역은 1821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이후 멕시코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멕시코 법에따라 당시 멕시코의 통치자였던 피오 피코는 로스앤젤레스를 알타 캘리포니아 지역의 수도로 선포했다. 멕시코-미국 전쟁이 일어나던 중 멕시코의 법은 끝나면서 미국이 이 지역을 다스렸고, 1847년 1월 13일 카후엔가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에서 진 멕시코는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캘리포니아 지역을 미국에 양도했다. 1876년 서던퍼시픽은 로스앤젤레스에 철도 건설을 완료했다. 1892년부터 1923년까지는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세계 석유 생산량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고, 캘리포니아 지역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산유국으로 만드는데 한 몫했다. 1900년 인구는 102,000만 명 이상까지 늘었고, 도시의 수도 시설에 압력을 가했다. 1913년 윌리엄 멀홀랜드의 감독하에 로스앤젤레스 수로교가 완료되면서 도시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했다. 1910년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에 합병되었고, 도시에는 이미 적어도 10개의 영화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1921년 L.A.는 세계 영화 산업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후 대공황이 오면서 도시에 계속해서 돈을 공급했던 영화 산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시의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았다. 1930년 도시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겼다. 1932년에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이후에 로스앤젤레스는 샌퍼넌도밸리 쪽으로 스프롤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빨리 확산되었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는 인터넷의 발생지 중 한 곳으로, 멘로파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으로 아파넷을 개발했다. 1984년에 로스앤젤레스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당시 공산주의 14개 국가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1984년 하계 올림픽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상업적 성과를 거뒀다. 현대 신문지들의 분석에 따르면, 1932년 하계 올림픽 개최 경험과 로스앤젤레스의 도움이 두 번째 올림픽의 이윤까지 얻게해줬다고 발표했다. 1992년 4월 29일에는 인종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경찰청 경찰관의 로드니 킹의 구타 동영상 사건이 시미벨리 배심원단들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LA 폭동이 발생했다. 1994년 강도 6.7의 노스리지 지진으로 125억 달러의 재산피해와 72명이 죽었다. 세기 말에 일어난 램파드 스캔들은 미국 역사상 경찰의 위법 행위에 중 가장 광범위하게 문서화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2002년 샌퍼넌도밸리와 할리우드는 도시에서 독립하기 위해 선거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로스앤젤레스는 불규칙적인 모양으로 펼쳐져있고 총면적 502.7 제곱 마일(1,302km2)인데, 육지 면적은 468.7 제곱 마일(1,214km2), 수면 면적은 34.0 제곱 마일 (88km2)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시는 세로 44마일(71 km), 가로 29마일(47Km)로 뻗어있다. 도시의 총 둘레는 342마일(550Km)이다. 로스앤젤레스는 평평하고 언덕이 많은 두 지형을 갖추고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는 마운트 루켄스로, 5,074 피트 (1,547 m)이다. 이 곳은 샌퍼넌도밸리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다. 산타모니카산맥의 동쪽 끝 시작점은 태평양 쪽의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와 로스앤젤레스 반도의 샌퍼넌도밸리를 분리한다. 마운트 워싱턴을 포함한 다운타운의 북쪽 지역은 많은 땅이 언덕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보일하이츠 크렌쇼 지역 주변의 볼드윈 힐스, 샌피드로는 동부 지역의 일부분이다. 로스앤젤레스 강은 계절에 따라 수위가 크게 달라지며, L.A. 지역 배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육군 공병대는 콘크리트로 51마일에 걸쳐 방수로 공사를 했다. 강은 카노가 공원 지역에서 시작해 산타모니카산맥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샌퍼넌도밸리의 동쪽으로 흐르고, 이 곳을 지나고나서 남쪽의 다운타운, 그리고 태평양의 롱 비치 항구로 흘러간다. 발로나 크릭에서 산타 모니카 베이, 플라야 딜 레이 쪽으로도 작게 흐른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해변, 습지, 산지와 같은 다양한 서식지가 존재 해 토종 식물 종이 많다. 가장 흔하게 해안 세이지 관목류를 볼 수 있다. 이 외에 토종 식물로 금영화, 양귀비과 식물, 토이온, 코스트참나무, 자이언트갯보리 등이 있다. 로스앤젤레스해바라기와 같은 토착종의 대부분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간주 될 정도로 희귀하다. 이 지역의 토착종은 아니긴하지만 로스앤젤레스의 시목은 에리스리나 나무(에리스리나 카프라)이며, 시화는 극락조화이다. 멕시코팬팔름, 카나리아섬팔름, 캘리포니아팬팔름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몇 안되게 흔히 볼 수있는 토착종이다. 로스앤젤레스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지질의 불안정은 많은 단층을 만들어내고, 거의 매년 10,000번의 지진이 일어난다. 주요 단층 중 하나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다. 태평양 판과 북아메리카 판 사이 경계선이 있는 이 단층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큰 지진을 일으킬 원인으로 예상되고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일어난 주요 지진으로는 1994년 노스리지 지진을 포함해 1987년 휘티어내로스 지진, 1971년 샌퍼넌도밸리 지진, 1993년 롱비치 지진이 있다. 이렇게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약간의 진동이나 낮은 강도의 지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 주변과 광역권은 또한 맹목적 돌진 지진에서 오는 위험이 언제든지 있다. 일부 도시 지역은 쓰나미에 취약한데, 1960년 발디비아 지진 당시 항만 근처 지역은 파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아열대-지중해성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해안 지역은 "Csb", 육지 지역은 "Csa"로 구분)를 띠고 있고, 연강수량이 충분하기 때문에 쾨펜의 "BSh" 또는 "BSk" (스텝 기후)로 분류되지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는 거의 일년내내 맑기때문에 매년 강수량을 측정 할 수있는 날은 평균 35일뿐이다. 다운타운의 평균 온도는 66 °F (19 °C)으로, 낮에는 75 °F (24 °C), 밤에는 57 °F (14 °C)이다. 가장 추운 달은 1월달로, 낮에는 59에서 73 °F (15에서 23 °C), 밤에는 45에서 55 °F (7에서 13 °C)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더운 달은 8월로, 낮에는 79에서 90 °F (26에서 32 °C), 밤에는 64 °F (18 °C)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4월, 5월, 6월, 11월은 일년 중 기온이 90 °F (32 °C)가 넘는 날은 하루 정도이며, 7월, 8월, 10월은 3일, 9월은 5일이다. 기온의 변동폭은 상당한데, 내륙지역에서 하루에 기온이 가장 높을때와 낮을때 차이가 30 °F (17 °C)를 넘는 경우도 있다. 바다의 연평균 온도 중 1월에는 58 °F (14 °C)에서 63 °F (17 °C)이고, 8월에는 68 °F (20 °C)이다. 일조시간은 1년에 총 3,000시간 이상으로, 12월의 평균 일조시간은 7시간, 7월의 평균 일조시간은 12시간이다. 또 이 지역은 미기후 현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으로, 서로 다른 기온이 만나 극단적인 온도 변화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산타모니카 피어의 7월의 평균적인 최고기온은 75 °F (24 °C)인데 반해 카노가 공원은 95 °F (35 °C)이다. 남부캘리포니아 해안에 위치한 도시는 "June Gloom"이라고 부르는 늦봄, 초여름과 같은 날씨가 계속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아침에 흐린 날씨나 안개가 낀 날씨를 동반해서 이른 오후에나 태양이 뜬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평균 연강수량은 384.6 mm이다. 비는 겨울이나 봄(주로 11월, 4월)에 주로 내린다. 일반적으로 소나기 형태로 내리지만, 가끔 큰비와 겨울 폭풍 중 천둥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도한다. 산악 지역은 강수량이 약간 더 많고, 해안 지역은 대체로 적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의 샌퍼넌도밸리 지역은 연간 410mm에서 510mm까지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눈은 도시 지역에서는 극히 적지만, 도시 경계 내의 강설량은 대체로 산악 지대에서 온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기록된 가장 많이 내린 강설량은 1932년 당시 2인치(5cm)이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최고 기온은 2010년 9월 27일 기록한 113 °F (45 °C)이고, 가장 낮았던 기온은 1944년 12월 22일 기록된 24 °F (−4 °C)이다. 도시는 80개가 넘는 구역과 주변 지역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대부분의 지역은 도시의 비법인지구 또는 지역 사회로 통합되었다. 인근 지역사회와 내륙의 대부분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에 포함되었다. 도시는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 이스트 로스앤젤레스, 노스이스트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로스앤젤레스, 하버 지역, 그레이터 할리우드, 윌셔, 웨스트사이트, 산페르난도, 크레센타밸리. 로스앤젤레스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지역 사회도 포함한다: 웨스트 애덤스, 왓츠, 라이메르트 파크, 볼드윈 힐스, 베니스, 다운타운 파이낸셜디스트릭트, 할리우드, 실버레이크, 코리아타운, 웨스트우드 그리고 부유층이 많은 할리우드힐스, 벨에어, 베네딕트캐년, 로스 펠리스, 퍼스픽펠리세이즈, 센추리시티, 브렌트우드, 핸콕파크. 로스앤젤레스는 종종 "세계 창조의 수도"라고 불린다. USC스티븐스혁신기관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는 문명의 역사상 그 어떤 도시보다 예술가, 작가, 영화 제작자, 배우, 댄서, 음악가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는 할리우드의 고향으로, 세계적으로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영화산업의 중심지라는 증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고,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상이 매년 이 곳에서 열린다. 마지막으로 로스앤젤레스는 USC 영화예술학교가 있는 곳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학교이다. 공연예술은 로스앤젤레스의 문화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USC스티븐스혁신기관에 따르면 매년 1,100개 이상의 연극이 만들어지고 매주 21개의 연극이 열린다고한다. 로스앤젤레스 뮤직 센터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공연 예술 센터 중 한 곳으로, 연간 13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뮤직 센터로 유명한 곳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생겨난 곳이다. 센터시어터그룹, 로저 와그너 합창단,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과 같은 이름있는 단체 또한 음악 센터의 거주자 기업이다. 재능은 콜번 스쿨과 USC 손턴 음악 학교와 같은 최고의 기관에서 가르친다. 로스앤젤레스 군에는 841개가 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있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는 세계의 그 어떤 도시보다 1인당 박물관 수가 많다. 미국 서부에서 제일 큰 미술 박물관인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세계의 귀중한 물품이 많은 기관 J. 폴 게티 트러스트의 일부인 게티 센터,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은 유명한 박물관들이다. 주요 미술관들은 대부분 갤러리 로에 위치하고있으며, 한달간 열리는 다운타운 아트 워크에는 수 만명이 참석한다. 이 지역의 영어로된 주요 일간신문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이다. "La Opinión"은 스페인어로된 주요 일간신문, 《미주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The Korea Daily》와 《코리안 타임스》는 한국어로된 주요 일간신문이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센티널》은 미국 서부 가장 많은 흑인 독자 수를 자랑하고있는 로스앤젤레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주요 일간신문이다. 플라야델레이에 본사를 두고있는 《인베스터즈 비즈니스 데일리》는 L.A.의 기업 사무실에서 발행된다. 샌퍼넌도밸리 지역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뉴스》, 《LA 위클리》, 《로스앤젤레스 시티비트》,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음악계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L.A. 레코드》, 《로스앤젤레스 매거진》, 《로스앤젤레스 비지니스 저널》, 법률 산업과 관련된 신문 《로스앤젤레스 데일리 저널》, 《더 할리우드 리포트》, 엔터테인먼트 산업 관련 신문 《버라이어티》,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뉴스》는 수 많은 작은 지역신문들을 대안하는 주간지, 잡지들이다. 주요 신문들 이외에도 이민공동체들에게 에르메니아어,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히브리어, 아랍어, 페르시안어와 같은 자신의 모국어로된 많은 지역 정기 간행물을 발행한다. 로스앤젤레스에 인접한 많은 도시들은 로스앤젤레스 주변지역과 보도와 독자가 겹치는 일간지를 가지고있다. 사우스베이에서 발행되는 《데일리 브리즈》, 《더 롱비치 프레스-텔레그램》이 이와 같은 예이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은 일곱 개의 VHF를 할당받은 유일한 두 곳의 미디어 시장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세 개의 PBS 뿐만 아니라 주요 방송 채널이 있는 도시이다. 월드 TV로 두 개의 채널이 있고 몇개의 스페인어 텔레비전 네크워크도 있다. KTBN-TV 40은 미국 기독교 케이블 방송의 주요 네트워크국으로 샌타애나에 본사를 두고있다. 또한 다양한 독립 텔레비전 방송국이 운영되고있다. 로스앤젤레스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NFL 로스앤젤레스 램스와 로스앤젤레스 차저스, 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NBA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NHL 로스앤젤레스 킹스, MLS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WNBA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 등이 있다. 2000년에는 3,694,820명이었으며, 2006년에는 약 3,849,478명으로 늘어났다. 2005–2007년 미국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백인은 로스앤젤레스 인구의 48.7% 이고, 흑인은 9.9%, 인디언은 0.5%, 아시아계 미국인은 10.6%이었다. 그리고 히스패닉과의 혼혈이 인구의 48.5%를 차지했다. 약 380만 인구 가운데 ‘백만장자’만도 약 25만 명에 이른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만 노숙자가 10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 로스앤젤레스의 경제는 국제무역,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게임, 음악산업), 항공우주 산업, 기술, 석유, 패션, 섬유, 관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공업지역이다. 로스앤젤레스 주변 항구와 롱비치는 서반구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고, 세계 다섯 번째 항구이다. 또 환태평양 무역에 있어서 필수적인 항구이다. 이 외에 주요 산업으로 대중 매체, 금융, 통신, 법, 의료, 교통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롱비치-산타애나 대도시 통계 지구(MSA)의 대도시총생산(GMP)는 7,357억 달러(2010년 기준)로, 뉴욕-뉴어크-브리지포트 대도시권과 도쿄 수도권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 규모이다.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 해 명목 국내총생산을 따진다면 세계 15위이다. 영국의 러프버러대학교 연구 그룹이 2010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는 "알파 세계도시"로 분류되었다. 포춘 500 순위에 든 기업 중 여섯 개가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여섯 개의 기업은 자원 기업 옥시덴탈 페트롤리움, 건강보험 회사 헬스 넷, 금속 배급회사 릴라이언스 스틸 엔 알류미늄, 기술 컨설팅회사 AECOM, 부동산 회사 CBRE 그룹, 건설사 튜터페리니이다. 이 외에 캘리포니아 피자 키친, 캐피탈 그룹 컴퍼니스, 치즈케이크 팩토리, 커피빈 앤드 티리프, deviantART,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 게스, 도쿄팝 등 수 많은 기업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USC)는 매년 40억 달러를 기부해 도시의 가장 큰 민간 부문 고용과 기부를 하고 있다. 2010년 도시의 포괄적인 연차 재무보고에 따르면 2009년 가장 많은 고용을 한 기관 10위권에 로스앤젤레스 군,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세다스 시나이 의료센터, 카이저 퍼머넌트,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 파머스 인슈어런스 그룹, 팀원, 노스럽 그러먼이 포함되었다. 도시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은 광범위한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망으로 연결되어있다. 텍사스교통국은 연간 도시 교통량 조사에서 로스앤젤레스가 2005년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정체량이 최고라고 발표했는데, 미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 교통량을 보유하고있다. 연구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의 인구 1인 당 연간 교통 체증 경험 시간이 72시간으로, 각각 평균 60시간을 기록한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워싱턴 D.C., 애틀랜타에 이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도시의 교통 혼잡률에도 불구하고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와 같은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 통근 거리는 비교적 짧다. 로스앤젤레스의 평균 통근 시간은 26.2분으로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와 비슷한 수준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샌디에이고에서 멕시코 티후아나를 이어주고, 북쪽으로는 새크라멘토,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주는 주간고속도로 제5호선과 잭슨빌까지 이어지는 주간고속도로 제10호선 등이 있다. 또 캘리포니아 해안지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북해안지역, 오리건주, 워싱턴주를 이어주는 국도 제101호선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과 교통 기업은 광범위한 버스노선 뿐만 아니라 전철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를 가로지르는 모노레일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9월 버스와 전철, 모노레일을 합친 월간 대중교통 이용자는 3,88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3,050만 명이 버스 이용자들이였는데, 버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번째로 혼잡하다. 전철과 모노레일을 합친 월 평균 이용객은 820만 명이다. 2005년 로스앤젤레스의 통근자 10.2%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조사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을 담당하고 있는 공사는 로스앤젤레스 도시 교통국 (Los Angeles County Metro Transit Authority, LACMTA)다. 로스앤젤레스 전철은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이용자가 많고, 모노레일은 두 번째로 많다. 노선으로는 전철 노선인 파란선, 빨간선, 보라선, 초록선, 금선, 엑스포선이 있다. 오렌지 라인과 실버 라인은 간선급행버스체계 형식으로 지어졌다. 메트로링크의 통근철도는 로스앤젤레스와 주변 지역, 교외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메트로링크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도심 교통당국에서 운영하는 철도교통 이외에 도시간을 이어주는 암트랙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역은 다운타운 북쪽에 있는 유니온역이다.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공항으로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IATA: LAX, ICAO: KLAX)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은 2006년 6,100만 명의 이용객과 200만 톤 이상의 화물 처리를 했는데,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혼잡하며, 미국에서 세 번째로 혼잡한 공항이다. 또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즈의 허브 공항이다. 이 외에 주요 공항으로 다음과 같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밴 나이스 공항(IATA: VNY, ICAO: KVNY)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범용 공항 중 한 곳이다. 로스앤젤레스는 25군데의 자매 도시가 있다. 로널드 레이건 로널드 윌슨 레이건(, , 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의 40대(1981년 ~ 1989년) 대통령과 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화이트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탬피코에서 태어났고, 일리노이 주 리 컨트리에 있는 딕손에서 자랐으며, 일리노이 주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으로 문학사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 레이건은 처음으로 일리노이 주를 떠나 아이오와로 가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1937년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겼다. 1911년, 일리노이주 탬피코에서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 할리우드에 들어가 1964년까지 《Kings Row》(1942년) 등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했으나, 1950년대 초부터 차츰 보수적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1949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이혼했고 3년뒤인 1952년에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공군 기지의 부관으로 종군했고, 1962년, 공화당에 가입했고 경제적 자유주의자로 증세와 재정지출 확대에 매우 비판적이었다.1966년에는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어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축소, 고등교육정책에 힘을 쏟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바꿨다. 19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며 197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패했으나 1980년에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경제불황으로 인기가 추락했던 당시 민주당의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미국은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했는데 기존 케인스 경제학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기현상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당 내부에서도 상당한 세력의 반대가 있었지만 임기초부터 방만한 재정지출 축소와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또 가격과 경쟁을 정부에서 통제하고 관리감독하는 틀 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항공기 산업인데 당시 미국의 항공사는 민간 업체였지만 항공요금은 정부에서 가격을 통제했다. 항공사들은 가격경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인행사나 기내식 서비스로 서로 경쟁을 하려고 했지만 레이건 정부 이전까지만해도 이런 기내식 서비스나 할인권 발매 같은 경쟁도 금지시키고 동일하게 운영하게 늘 관리감독을 했다. 레이건 정부에서 산업부분에 경쟁체제를 도입한 후 항공사들끼리 가격경쟁이 일어나면서 항공권 가격은 일제히 하락했다. 이 저렴한 항공권 때문에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항공기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런 경쟁이라는 개념은 지금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지만 냉전시기였던 당시만해도 경쟁이라는 개념은 금기시하던 시대였다. 물론 레이건 정부의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났고 동시에 침체한 경기를 활성화해 엄청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됐다는 건 수치상으로 증명이 된다. 문제는 경쟁에서 밀려난 소수의 계층이 존재한다는 점인데 레이건 정부는 이런 계층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인식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1981년 3월 30일에는 힐튼 호텔에서 노동계 지도자들과 오찬을 마치고 떠나던 도중 정신질환자였던 (John Hinckley)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히 총알이 심장에서 12 cm 떨어진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테쿰세의 저주를 피해간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저격사건으로 인해 경호원이었던 (Tim McCarthy)도 몸으로 레이건을 막아 부상을 당했으나 회복되었다. 당시 존 힝클리는 범행 이유에 대해 '당시 유명 영화배우였던 조디 포스터(Alicia Christian Foster)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범행 이유를 자백하였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점과 대통령이 무사하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82년, 무죄 판결을 받고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보수적이고 강경한 국내 내치 정책과 국외 외교 정책을 펼쳐 19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을 억제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재정 및 무역 적자를 초래했고 대외정책에서 레바논 파병과 리비아 폭격, 냉전체제가 공산권의 사멸로 끝났으니 국방비를 복지비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비평을 억누르려는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지원 등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었고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우방국인 영국을 옹호했으며 아르헨티나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남미에서는 레이건이 마가렛 대처의 정부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등 레이건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1986년 '이란 - 콘트라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987년 12월에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중거리핵전력폐기조약'(INF Treaty)을 맺어 냉전을 종식시켰고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부통령이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도와 공화당 재집권에 성공했으며 1989년에 퇴임하였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재임시절 여러번 방한 한 적도 있었고 그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서 전두환은 취임 직후 한국 대통령 최초로 백악관 국빈방문을 성사해 냈고, 이후로도 찰떡같은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과도 절친했던 레이건은 한미일 삼각공조를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 그는 공화당을 더욱 강경한 보수주의로 이끌었던 미국 보수주의운동 진영에서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나이인 70세의 나이로 취임한 대통령이기도 했으며,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그 후, 1989년, 조지 H. W. 부시는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그는 퇴임하고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다시 돌아왔지만 빌 클린턴이 당선되고 조지 H. W. 부시는 결국 낙선되었다. 하지만 1993년, 조지 H. W. 부시는 퇴임을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1994년 11월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뇌의 퇴행성 질환의 하나로 의식의 혼탁과 기억 장애 등의 증상을 유발하는 이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를 바랬고, 이 병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1995년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과 국립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함께 로널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Ronald and Reagan Research Institute)를 창설했다. 1997년 10월에는 자신의 대통령 재직 사실도 모르고, 정신 혼미와 발작증상 등이 나타났으며, 1999년에는 신체기능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2004년 6월 5일10년간 투병해 온 그는 캘리포니아의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향년 93세의 일기로 끝내 별세했다. 2011년,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레이건이 19%를 득표하며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14%를 기록한 링컨이었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는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인,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레이건 대통령을 언급했다. 노사협력 제도를 창안해 정착시키고, 사회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증진하는 제도는 물론 상호신뢰를 높이는 각종 제도를 도입했던 선진국 지도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Every Little Thing Every Little Thing(에브리 리틀 씽)은 일본 에이벡스에 소속된 대중음악 그룹이다. 줄여서 ELT라고도 부른다. 일본 내에서 인기가 있고, 한국에도 상당한 팬층을 갖고 있다. 에이벡스 그룹의 에이벡스 트랙스에 소속되어 있다. 'Every Little Thing'이란 이름은 "우주에서 내려다 보면 작은 존재인 인간과 동물등 모든 것들에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덧붙여 "만물은 어차피 모두 조그맣다. 앞만 보고 가자!"란 메시지도 담고 있다고 한다. 1996년에 보컬, 작사 담당 모치다 카오리, 기타 · 작곡 · 편곡 담당 이토 이치로, 리더 사운드 프로듀스 · 키보드 · 작사 · 작곡 · 편곡 담당 이가라시 미츠루의 3명으로 첫 번째 싱글 "Feel My Heart"로 avex trax에서 데뷔했다. 이 싱글은 오리콘 최고 순위 24위를 기록하고 약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1997년에 세 번째 싱글 "Dear My Friend" 로 히트를 치고 첫 앨범 "everlasting"의 메가 히트, 1998년 여덟 번째 싱글 "Time goes by"가 싱글 최초의 밀리언 히트를 기록하는 등 이가라시 음악의 세계관, 신디사이저를 구사한 사운드와 모치다의 보컬, 패션이 10대~20대를 중심으로 지지를 받게 되고,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초창기 작사 · 작곡 · 편곡은 이가라시가 혼자서 맡아서 데뷔 이래 하이 페이스를 유지하며 싱글 릴리스를 계속해왔다. 1999년 제작을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이가라시의 생각에서 3월의 열한 번째 싱글 "Over and Over", 열두 번째 싱글 "Someday, Someplace"와 베스트 앨범 "Every Best Single +3"의 릴리스 후 릴리스와 투어 없이 휴식기를 보냈다. 2000년에 열세 번째 싱글 " Pray / Get Into A Groove"와 열네 번째 싱글 "sure", 세 번째 앨범 "eternity"발매 후 3월에 이가라시가 프로듀싱에 전념하기 위해 탈퇴하였다. "이가라시가 탈퇴 후 사운드 프로듀싱에 전념할 것"이라고 발표 이후부터 TV와 콘서트에 출연은 하지 않고 악곡 제공은 계속 이어갈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eternity"에서 싱글 컷 된 열다섯 번째 싱글 "Rescue me (Single Mix)"를 제외하고 나머지 ELT의 악곡에 직접적으로 이가라시가 참여하는 것은 오랫동안 없었다. 그로부터 약 9년 뒤인 2009년 9 월 23일 발매된 서른여섯 번째 싱글 "DREAM GOES ON", 같은 해 11월 18일 발매된 서른일곱 번째 싱글 "冷たい雨", 2010년 2월 24일 발매된 서른여덟 번째 싱글 "Change"에 이가라시가 사운드 프로듀서로 작곡 · 편곡에 참여하였다. 이가라시 탈퇴 후 곡의 작사는 거의 모두 모치다가 하고 있고, 작곡은 카즈히토 키쿠치, 타고 쿠니오, HIKARI 등의 작곡가로부터 곡을 제공받고 있다. 물론 모치다와 이토가 작곡을 맡는 경우도있다. 또한 사운드 면에서도 이가라시 시절에는 신디사이저를 많이 사용한 곡이 많았지만, 이가라시 탈퇴후 1년여를 거친 2001년 가을 이후에는 밴드 사운드 어쿠스틱 지향의 곡이 많아지고 있다. (이가라시 탈퇴 직후에는 그의 노래 스타일을 답습한 곡이 많았다). 2007년 무렵부터는 기타 이외의 반주를 메인으로 하고 기타를 장식음으로 처리하는 곡도 증가하기 시작해 이가라시가 프로듀싱을 재개한 2009년 이후에는 초창기의 스타일을 다시 도입한 곡도 만들고 있다. 대표곡 중 하나인 "fragile"는 2001년 오리콘 연간 가라오케 차트에서 1위를 차지, 그 후에도 3년 연속 연간 TOP10에 진입하는 등, 일반 여성의 가라오케의 애창곡으로 정착하고있다. 여성 아티스트의 경우 솔로 체제가 많은 가요계에서 이러한 밴드 체제로 데뷔 이후 15년 이상 활동을 하고있는 매우 귀중한 존재이다. 또한 NHK 홍백가합전은 8회 연속 출전하였다. (1997년 ~ 2004년) 사이드 기타. 탈퇴 후 ELT에서는 사이드 기타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보아 보아(1986년 11월 5일 ~ )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대한민국 솔로 가수 겸 배우다. 1998년 SM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참가해 연습생이 되었고 그 동시에 이수만이 제일 공을 들여 만든 최고의 연예인이다. 데뷔 전부터 일본어와 영어를 배워 해외진출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랜 연습 기간을 거친 뒤, 2000년 8월 25일 한국 첫 정규 음반 "ID; Peace B"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 일본의 레이블사 AVEX와 계약을 체결하고 2001년 일본 데뷔 싱글 "ID; Peace B"를 발매하며 일본에 진출했다. 일본 첫 정규 음반 "Listen to My Heart"는 한국 가수로 처음으로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1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4년 발매한 두 번째 일본 정규 음반 "Valenti"와 일본 베스트 음반 "Best Of Soul"이 100만 장을 넘겼다. 한국에서도 "No.1" (2002), "Atlantis Princess" (2003), "My Name" (2004), "Girls On Top" (2005)을 발매하였다. 2009년 4월 17일에는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미국 첫 정규 음반 "BoA"를 발매해 한국 가수로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진입했다. 2010년에는 한국에서 5년 만의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했고, 2년 뒤인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음반 "Only One"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2년여만인 2015년 5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전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에는 데뷔 이래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을 발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아홉 번째 정규 음반 "WOMAN"을 발매하였다. 보아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였다. 지금까지 여섯 장의 정규 음반을 연속으로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는 하마사키 아유미와 코다 쿠미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세 장의 정규 음반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밀리언 셀러를 달성하였고, 일본에서 지금까지 1000만 장에 가까운 음반이 판매되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보아의 경제적 가치는 2000억 원이 넘고, 음반 외 활동까지 합치면 수천 억 원에 이른다고 추산되고 있다. 보아는 어머니 성영자와 아버지 권재철 사이에서 1986년 11월 5일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에서 태어났다. 보아의 아버지는 TBC 방송국의 사운드 엔지니어였고, 방송국 퇴사 후에는 음향 장비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 후, 보아의 아버지가 목장을 경영하면서, 보아는 도시가 아닌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고, 보아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전원에서 마음껏 뛰놀며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이들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도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생활을 즐기며 감춰져 있던 감수성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해 지금의 삼남매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아의 형제로는 두 오빠가 있는데, 큰오빠인 권순훤은 서울대학교 음대 학사, 동대학원을 나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작은오빠인 권순욱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며 서인영, 보아, 걸스데이 등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보아는 남양주양정초등학교에 다녔고, 전교회장을 역임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고, 한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때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무척 좋아했거든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사립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이후 한국켄트외국인학교(K.K.F.S.)로 전학했다. 가수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수활동에만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2002년 8월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003년 4월 고졸(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던 중 13살(6학년)이었던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약 2년 반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 나중에 보아는 인터뷰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무대에 설 수는 없었습니다. 가수가 되기 위해 3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참아 냈습니다."라며 말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당시 보아를 "세계시장을 겨냥한 여가수"를 준비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NHK 아나운서의 집에 머물며 정확한 일본어 발음을 익혔고, 구리시 서울삼육중학교에 다니던 중 영어회화를 위해서 한국켄트외국인학교로 전학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보아의 데뷔 프로젝트를 "신비 프로젝트"라 이름을 붙이고 보아의 데뷔를 진행해 나갔다. 이는 30억 정도를 들인 프로젝트였으며, SM 엔터테인먼트에서 H.O.T. 등의 가수들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모두 동원한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보아의 데뷔가 다가오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바비, 신비라는 소문이 돌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아는 2000년 8월 25일 "15세의 춤추는 소녀"라고 불리며 데뷔 앨범 "ID; Peace B"를 발매했다. "ID; Peace B"에는 동명의 타이틀곡 "ID; Peace B"와 "SARA", 〈비밀일기〉 등 소녀적인 감성을 살린 밝은 댄스 곡과 발라드 곡으로 채워졌다. 보아는 2000년 8월 27일 SBS의 《인기가요》을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다. 보아는 나름 어린나이에 당시 춤과 노래를 소화하며 화제성을 모았으나, 데뷔 초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근거없는 루머가 퍼지면서 안티 팬들이 늘어 갔고 이들에게서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당시 차트 10위대를 유지하는 등 신인으로서 어느 정도 성공은 했지만, 30억이라는 준비 과정과 비교하면 첫 앨범 활동은 그에 걸맞은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데뷔 이후 2001년 3월 7일, 보아는 에이벡스와 레이블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진출을 선언했고 그동안의 수록곡들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바꿔 부른 스폐셜 앨범 "Don't start now - Jumping into the world"을 발매했다. 또한 같은 날, 일본 도쿄에서 대만, 홍콩, 일본 각국 취재진이 모여 쇼케이스를 취재했으며, 에이벡스는 이 쇼케이스에 7억을 투자했다. 에이벡스의 회장 요다 다츠미는 "보아는 카리스마와 빼어난 댄스동작, 가창력을 지녀 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를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2001년 5월 30일 보아는 일본에서 데뷔 싱글 "ID; Peace B"를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고 오리콘 주간 싱글차트 20위권에 진입했다. 7월 25일에 발매한 두 번째 싱글 "Amazing Kiss"를 발매해 역시 20위권에 진입했다. 12월 5일에는 세 번째 싱글 〈키모치와 츠타와루〉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최초로 11위에 진입했고, 이어 12월 19일에는 코다 쿠미와 함께 네 번째 싱글이자 9·11 테러 추모 싱글인 "The Meaning of Peace"를 발매해 오리콘 싱글차트 7위에 오르며 이때부터 일본에서 가능성을 보였다. 2002년 1월 17일에는 네 번째 싱글 "LISTEN TO MY HEART"를 발매해 처음으로 오리콘 싱글 차트 5위에 올랐고 18만 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보아는 7장의 싱글을 발매한 이후 2002년 3월 13일 첫 일본 정규 앨범 "LISTEN TO MY HEART"을 발매해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오리콘 일간,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했다. 이후 100만 장 이상을 판매해 앨범은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2년 4월 12일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 한국 정규 앨범 "No.1"을 발매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보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있던 상황이었고, 이와 동시에 타이틀 곡 〈NO.1〉은 2002년 월드컵과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의 음반 판매량 집계에 따르면 《No.1·늘..》은 2002년 한 해 동안 54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2002년 발매된 전체 음반들 중 4위를 차지하는 기록이다. 보아는 이 앨범에서 후속곡 〈My Sweetie〉와 발라드 곡 〈늘..〉 등으로 활동하다가 8월에 2집 활동을 마감했다. 8월 28일에는 일본에서 6번째 싱글 "VALENTI"를 발매했다. "VALENTI"는 라틴 리듬의 경쾌한 댄스 곡으로, 보아의 일본 싱글들 중 2019년 현재까지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싱글이다. 음반 순위 면에서도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어 3주 뒤에는 7번째 싱글 〈奇蹟/NO.1〉을 발매했다. 특히 싱글 〈/NO.1〉을 발매한 주에는 〈VALENTI〉와 〈/NO.1〉이 모두 주간 차트 5위권 내에 진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12월 11일에는 발라드 싱글 〈JEWEL SONG/BESIDE YOU-僕を呼ぶ声-〉를 발매하고 활동했다. 한편, 9월 26일에는 그 간의 일본 활동곡들을 모아 한국어로 번안하여 수록한 스페셜 앨범 《MIRACLE》이 대한민국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 보아는 〈VALENTI〉와 〈기적〉으로 활동했고, 3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히트했다. 이러한 정규 2집 활동과 스페셜 앨범에서의 활약 덕분에 한국음악산업협회 기준 2002년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아티스트가 되었고, 연말 보아는 서울가요대상과 SBS 가요대전, m.net Music Video Festival에서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매년 12월 31일 그 해 인기 가수들이 출연하여 노래하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무대에서 보아는 〈VALENTI〉를 노래했다. 이 때 출연한 뒤 보아는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홍백가합전 무대에 올랐다. 2003년 1월 29일, 보아는 일본에서 2번째 정규 앨범 "VALENTI"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120만장을 돌파하며 보아의 첫 밀리언 셀러로 기록되었고, 2003년 오리콘 연간 앨범 차트에서 5위를 마크했다. 《VALENTI》 발매 이후에는 오사카 시·나고야·도쿄 등지를 돌면서 첫 콘서트 투어 '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를 개최하였다.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4개의 공연이 일정에 잡혀 있었지만 이후 2회의 추가 공연이 결정되어 총 6회의 공연을 펼쳤다. 특히, 도쿄 공연 때에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관람한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5월 14일에는 9번째 싱글 〈Shine We Are!/Earthsong〉을 발매하였다. 발매 당일 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지만, 주간 차트에서는 모리야마 나오타로의 〈〉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2003년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는 한인들을 위한 음악제가 여럿 개최되었다. 보아도 4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음악제'와 9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한인 대축제'에 출연하였다. 5월에는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제작한 대한민국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서 출연하여 진행자와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 5월 30일에 보아는 대한민국에서 3번째 정규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타이틀 곡은 〈아틀란티스 소녀〉로,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묘사한 동화 같은 가사를 담고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보아는 이 곡으로 6월 1일부터 TV 활동을 시작했고, 후속곡 〈Milky way〉와 발라드 곡 〈나무〉로 활동을 계속하며 3집 활동은 9월까지 이어졌다. 이때 보아는 교통사고로 인한 매니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타이틀 곡 〈아틀란티스 소녀〉대신 〈나무〉를 불러 매니저를 추모하며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3집 발매에 앞선 2003년 2월 보아는 서울특별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이에 맞춰 보아는 서울을 홍보하는 노래 〈서울의 빛〉을 녹음했으며, 2003년 5월 25일 제1회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서울의 빛〉은 이 시기에 발매된 3집에도 수록되었고,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도 들을 수 있다. 10월 22일에는 싱글 〈DOUBLE〉이 발매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동시 발매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첫 싱글, 일본에서는 통산 10번째 정규 싱글이었다. 이러한 싱글 동시 발매는 이어 발매된 〈Rock With You〉도 똑같이 이루어졌다. 12월 3일에는 대한민국에서 《MIRACLE》과 같은 방식의 스페셜 앨범 《SHINE WE ARE》가 발매되었다. 2004년 1월 15일, 일본에서 3번째 정규 앨범 《LOVE & HONESTY》가 발매되었다.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보아의 통산 3번째 1위였다. 이 앨범으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영국의 UK 차트 등 공신력있는 음악 차트를 토대로 세계 각국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이후에도 보아는 《BEST OF SOUL》로 1위에 오른다. 앨범 발매 후 일본에서의 2번째 콘서트 투어도 진행되었는데, 'BoA LIVE TOUR 2004 LOVE & HONESTY'는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총 9회의 공연을 선보인 콘서트 투어였다. 3월 19일에는 보아가 참여한 m-flo의 싱글 〈the Love Bug〉가 발매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후 m-flo의 VERBAL이 보아의 콘서트 무대를 찾았을 때나, 2004년 연말 m-flo가 내한하여 MKMF에 참가했을 때 함께 〈the Love Bug〉를 부르기도 했다. 2월 14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MTV 아시아 어워즈'에 한국과 일본의 공동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최고 인기 아티스트상'과 특별상인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때 축하무대에서 보아는 록 밴드와 함께 〈Rock With You〉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불렀다. 6월 11일에는 대한민국 4번째 정규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타이틀 곡 〈My Name〉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음악 스타일은 이전의 보아와는 아주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 〈NO.1〉·〈아틀란티스 소녀〉 등의 귀여운 10대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타이틀 곡 〈My Name〉은 어반 댄스 스타일의 곡으로, 골반 댄스 등 노래의 안무도 화제를 낳았다. 보아는 이 앨범의 수록곡 〈Spark〉와 〈My Prayer〉로 9월까지 활동했고, 연말에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9월 1일에는 일본에서 13번째 싱글 〈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했다. 이어 3개월 뒤인 12월 1일에는 14번째 싱글 〈メリクリ〉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맞는 발라드 곡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보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판매량도 싱글 〈Shine We Are!/Earthsong〉 이후 넘지 못했던 10만 장 선을 넘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롱 히트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위저가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 2005년 2월 2일, 보아는 일본에서 첫 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을 발매했다. 《BEST OF SOUL》은 2001년 〈ID; Peace B〉로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メリクリ〉까지 총 14장의 싱글을 발매하는 동안 발표했던 싱글 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첫 주 48만장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110만 장 가까이 팔렸다.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고 2개월 뒤 일본에서의 3번째 라이브 투어 콘서트 '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를 열었다. 투어 기간 직전에 발매된 15번째 싱글 〈DO THE MOTION〉은 보아의 싱글들 중 최초로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이다. 2005년 보아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에서 출간한 영어교재 《》의 〈〉라는 글에 국제적인 스타의 성공 사례로 실려 화제를 모았다. 6월 24일부터는 대한민국에서 5번째 정규 앨범 《Girls On Top》을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Girls On Top〉은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댄스 곡으로, 이 곡에서는 곡 후반에서 남자 댄서의 등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안무가 화제가 되었다. 이 곡으로 보아는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수상했고,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는 7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 연속으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을 수상했다. 이어 후속곡 〈MOTO〉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의 5집 활동이 마감되어 갈 때쯤, 8월 31일에 16번째 싱글 〈make a secret〉이 발매되었다. 〈DO THE MOTION〉의 노선을 이어 나가듯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곡이다. 11월 23일에는 빠른 댄스 곡을 앞세운 17번째 싱글 〈抱きしめる〉를 발매했다. 한편, 이때부터 보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아는 2006년 2월 15일 네 번째 일본 정규 앨범 "OUTGROW"를 발매했다. "OUTGROW"는 발매 첫 주 222,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에 올라 네 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전 앨범들에 비해 발매 첫 주 가장 낮은 판매량을 보였다. 2006년 4월 5일에는 일본 19번째 싱글 "七色の明日~brand new beat~/Your Color"를 발매했다. 이어 8월 9일에는 20번째 싱글 "KEY OF HEART/DOTCH"를 발매했다. 〈KEY OF HEART〉도 〈~brand new beat~〉의 연장선 상에 서 있는 밝은 댄스 곡이다. 21번째 싱글 "Winter Love"는 11월 1일에 발매되었다. 처음으로 '실연'을 주제로 한 애절한 발라드 곡이다. 여름에는 일본에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ap bank 페스티벌'과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였다. 'ap bank 페스티벌'은 Mr.Children의 보컬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고바야시 다케시, 사카모토 류이치 등이 모여 만든 환경 단체인 ap bank에서 주최하는 축제로, 대형 가수들이 초대되며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대에서 보아는 사쿠라이 가즈토시와 함께 앨범 《OUTGROW》의 수록곡 〈cosmic eyes〉를 불렀다. '메이지 신궁 불꽃놀이 축제'는 매년 도쿄 메이지 신궁에서 개최되는 불꽃놀이로, 보아는 불꽃놀이 축하무대에 올라 6곡을 공연했다. 이 때 오른쪽 발목 부상을 입은 채 댄스 곡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가을부터는 라이브 투어 'BoA THE LIVE 2006 -裏ボア…聴かせ系-'를 개최했는데, 이 콘서트는 한 곡도 춤추지 않고 오직 노래만으로 공연한 콘서트이다. 댄스 곡도 새롭게 편곡하여 공연하였고, 이전까지와 비교하면 관객과 아주 가까운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했다. 한편 2006년에는 한국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OST 〈Sunshine〉에 참여했고, 성우로써 목소리 연기에 도전했다. 보아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헷지》에서 '헤더' 역을 맡아 한국어와 일본어로 목소리 연기했는데, 《헷지》가 제59회 칸 영화제에서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목소리 연기를 맡은 보아는 한국 가수로서는 처음이자 최연소로 칸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았다. 1월 17일에 일본에서 5번째 정규 앨범 《MADE IN TWENTY (20)》가 발매되었다.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내 통산 5번째 콘서트 투어인 '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를 개최하였다. 4월 25일에는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인 싱글 〈Sweet Impact〉를, 9월 26일에는 도시바 휴대전화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발라드 싱글 〈LOVE LETTER〉를 발매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Yutaka Furukawa와 함께한 격렬한 댄스 곡 〈LOSE YOUR MIND〉를 싱글로 내놓아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으로부터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전성기 때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는 극찬을 받았다. 2005년 영국에 이어 보아의 입지적인 스토리가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0월 말에는 애니콜의 광고 모델이 되었고, 애니콜을 홍보하기 위해 구성된 애니밴드라는 밴드의 메인 보컬로 참여했다. 이들은 11월 말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2006년에 이어 한국 영화 《M》의 OST 〈안개〉에 참여했다. 11월 26일에는 일본 베스트 히트가요제 골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홍백가합전과 함께 6년 연속 수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보아는 2월 27일에 일본에서 6번째 정규 앨범 《THE FACE》를 발매했다. 《THE FACE》는 11만장 대의 판매량으로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보아는 데뷔 앨범부터 정규 앨범 6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하마사키 아유미에 이은 역대 단독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어 콘서트 투어 'BoA LIVE TOUR 2008 ~THE FACE~'를 개최했다. 8월 15일에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펼치는 콘서트 "SM 타운 라이브 '08"에 출연해 9개월 만에 모국의 무대에 올랐다. 한편, 구글 코리아에서 리서치 목적으로 여러 웹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국 등 모두 31개국가 및 국민의 대표적 한국 대표 키워드 10개로 인물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확인되었다. 연말 보아는 연말 프로인 SBS 가요대전에 엔딩으로 참가하였으며 시간을 내어 연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보아는 2009년 3월 17일 미국 데뷔 음반 "BoA"를 발매하며 미국 진출을 했는데, 음반에는 블러드샤이& 아방트, 션 가렛, 브라이언 케네디와 같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 "BoA"는 발매 첫 주 8,000장을 팔아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올랐다. 빌보드 200 이외에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차트에서 5위까지 진입했다. 음반 발매에 앞서 2008년 10월 21일 첫 번째 싱글 "Eat You Up"을 발매해 빌보드 핫 댄스클럽 플레이차트 8위에 올랐으며, 2009년 6월 2일 발매한 두 번째 싱글 "I Did It for Love"는 19위까지 진입했다. 이후 2010년 1월 발매한 세 번째 싱글 "Energetic"은 빌보드 핫 댄스클럽 송 17위까지 진입했다. 비슷한 시기, 보아는 2009년 4월 18일 일본에서 두 번째 베스트 음반 "Best & USA"를 발매했다. "Best & USA"는 발매 첫 날 29,433만 장을 팔아 오리콘 데일리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위클리 차트에서는 145,000만 장을 팔아 2위를 차지했다. 200년 6월 2일 발매한 일본 26번째 싱글 "Vivid"는 29,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 5위에 올랐다. 싱글의 수록곡인 "Kissing you", "Sparkling", "Joyful Smile"은 모두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27번째 싱글인 "에이엔/UNIVERSE/Believe in LOVE"를 발매했고 22,000만 장의 판매량으로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이후 보아는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발매에 앞서 2009년 10월 28일 28번째 싱글 "BUMP BUMP!"을 발매했고, 13,800만 장을 팔아 위클리 싱글 차트 8위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9일 29번째 싱글 "마모리타이 ~White Wishes~"를 발매했고 50,000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3위에 올려놓았다. 한편, "White Wishes"는 2009 도쿄 게임쇼에 출연해 "Tales of Graces"의 주제곡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2009년 12월 4일부터 5일은 도쿄, 8일에는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크리스마스 콘서트 BoA THE LIVE X'mas 2009를 진행했고, 2010년 3월 3일 공연 실황을 담은 DVD 음반 "BoA THE LIVE 2009 X'mas"를 발매했다. 이후 보아가 직접 프로듀싱에 나선 일곱 번째 일본 정규 음반 "Identity"를 2010년 2월 10일에 발매했다. 음반은 오리콘 위클리 앨범 차트 4위에 올랐으며, 72,000만 장을 팔아치웠다. 이외에 타이완 국제 음반 차트 2위를 차지했고, 필리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6월 21일에는 한국 컴백에 앞서 30번째 일본 싱글이자 디즈니 온 아이스 일본 공연 25주년을 기념하는 싱글 "WOO WEEKEND"를 발매해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0위에 올랐다. 보아는 Live Tour 2010: Identity를 마치고 난 뒤, 2010년 8월 5일 여섯 번째 한국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하며 5년만에 컴백했다. 보아는 발매에 앞서 "GAME", 〈옆 사람〉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2011년 8월 2일 타이틀곡 "Hurricane Venus"의 티저도 공개했다. "Hurricane Venus"는 공개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 1위를 휩쓸었고, 가온 디지털 종합 차트 3위에 올랐다. "Hurricane Venus"는 55,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6집의 리패키지 음반인 "Copy & Paste"를 2010년 9월 24일 발매했다. 2010년 12월 6일에는 일본에서 디지털 싱글 "I See Me"를 발매하였으며, 이 곡은 보아 자신이 광고모델인 오디오 테크니카의 CM송으로 사용되었다. 보아는 2011년 12월 4일부터 SBS 《K팝 스타》에 출연했는데, YG를 대표하는 양현석, JYP를 대표하는 박진영과 함께 SM을 대표하는 심사위원으로 2012년 4월까지 방송되었다. 12월 7일에는 일본 데뷔 10주년을 맞이해 발매하는 DVD을 선보였는데, 이에 앞서 첫 DVD 싱글 "Milestone"을 발매했다. 또한 2011년 12월 10일과 11일 양일간 일본에서 자신의 일본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라이브, THE LIVE 2011 X'mas ~The 10th Anniversary Edition~을 개최했는데, 이 공연 실황을 담은 DVD도 발매되었다. 2012년 7월 25일 보아는 일곱 번째 한국 정규 앨범 "Only One"을 발매했다. 이에 앞서 22일 온라인을 통해 먼저 발매되었고, 동명의 타이틀곡인 "Only One"은 보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다. 또한 "Only One" 뮤직비디오에 유아인과 함께 출연했다. 2012년 7월 28일에는 일곱 번째 정규 앨범 컴백을 맞이해 SBS에서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성장 모습을 담은 컴백쇼 《보아 4354》를 방영했다. "Only One"은 가온 디지털 차트와 코리아 K-Pop 핫 100차트 2위에 올랐고, 앨범은 34,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2012년 11월 18일부터는 지난 해에 이어 《K팝 스타 2》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였다. 2013년 1월 26, 27일에는 대한민국 서울 올림픽 공원 올림픽홀에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BoA SPECIAL LIVE 2013 ~Here I Am~이라는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1월 28일에는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한 보아의 자작곡 〈그런 너〉의 음원을 공개했다. 이후 2월 27일에는 일본 31번째 싱글 〈Only One〉을 발매했고 첫 주 약 1만 장을 팔아 오리콘 위클리 차트 10위에 올랐다. 6월 26일 발매된 32번째 싱글 〈Tail of Hope〉는 일본 후지 TV 드라마 《백의의 눈물》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2013년 9월에는 KBS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에 캐스팅되어 배우 데뷔를 하였으며, 보아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메이크 유어 무브 3D》도 개봉했다. 2015년에는 한국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앨범 수록곡 전곡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를 발표했는데, 5월 6일에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작사와 피쳐링에 참여하고, EXO의 세훈이 뮤직비디오에 참여한 "Who Are You"를 선공개한 뒤, 그로부터 6일 뒤인 2015년 5월 12일에 동명의 타이틀곡인 "Kiss My Lips"를 비롯한 수록곡 12곡을 공개했다. 하지만 길었던 공백에 비해 음악방송 활동이 불과 3주에 불과해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는데, 대신 이전 앨범활동과 달리 《크라임씬》, 《삼시세끼》, 《냉장고를 부탁해》 등과 같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색다른 모습을 선보였으며, 2015년 8월 22, 23일에는 여성 아이돌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015 BoA Special Live "NOWNESS"라는 제목의 두번째 한국 단독 콘서트이자 데뷔 15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1일에 세트리스트 일부를 수정하여 도쿄에서도 공연하였는데 이는 보아가 최초로 한국 콘서트를 일본에서 공연한 것으로 세트리스트 대부분을 한국어로 불렀다. 12월 중순엔 일본에서는 EDM 장르의 새 싱글 "Lookbook"을 발매하고, 한국에서는 'Winter Garde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후배가수인 f(x)와 레드벨벳과 함께 순차적으로 겨울싱글을 발매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다. 2016년 SM STATION에 참여하여 빈지노와 함께한 ' No Matter What ' 은 음원차트 1위를 달성하며, Beatburger 팀이 부른 'Music Is Wonderful' 에 피처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음악활동 외에 연기활동도 이어나가 2015년 10월부터 《가을우체국》이라는 영화의 원톱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촬영하였고, 이는 2017년 3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미 상영되고, 2017년 10월 19일에 정식개봉하였다. 2016년 가을에는 송지효와 이선균이 주연인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촬영하였다. 2017년 1월, 보아는 첫 미니앨범을 2월 중으로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일정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2월 23일에는 보아가 프로듀스 101 시즌2를 진행한다는 기사가 발표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SG 워너비의 이석훈과, 전 애프터스쿨 리더 가희가 트레이너로 합류하여 함께 하였으며, 보아는 프로그램 진행 중 SM STATION을 통해 '봄비(Spring Rain)'를 한국에서 발표하고, 일본에서는 'BoA THE LIVE in Billboard Live' 개최, 디지털 싱글인 'Right Here, Right Everywhere' 공개를 발표하는 등 프로그램 이외의 가수로서의 활동도 함께 진행하며 성공적으로 방송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 방송(6월 16일)에서 중간 광고 방송 전 "CAMO" 컴백 티저 영상이 방영되며 컴백 소식을 알렸고, 2017년 6월 26일 디지털 싱글형태로 정식 발매되었으나 별도의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별도의 활동이 없었던 보아는 2017년 11월 일본 공식홈페이지에 2018년 초, 4년여만의 일본 정규 9집 앨범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 발매와 함께 2018년 3월부터 4월까지 일본 전국 라이브 투어 공연 BoA THE LIVE 2018 ~Unchained~ 개최가 됨을 알렸다. 또한 이번 개최되는 라이브 공연에서는 자신의 최초 미니앨범인 "Unchained"의 CD반을 관객 전원에게 증정하고, CD+DVD반은 mu-mo 한정으로 발매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편 한국에서도 "CAMO" 이후 약 반년만의 컴백 소식이 밝혀졌으며, 이 앨범의 준비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인《키워드#보아》가 방영되었다. 이 앨범의 선공개곡인 '내가 돌아(NEGA DOLA)'는 1월 31일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이 공개되었으며, 2월 1일 엠카운트다운을 시작으로 활동을 1주일 동안 활동을 하였고, 이후 2월 20일 데뷔 후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를 공개하고 1주일동안 각종 음악방송에 참여하여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앨범활동이 끝나고 2018년 5월부터 8월까지 이수근, 서장훈, 박성광, 태용, 유아, 니클라스 클라분데와 함께 《식량일기 닭볶음탕편》에 출연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0일~21일에는 열리는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데뷔 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해 11곡을 소화하였다. 그 다음 주 수요일인 10월 24일에는 한국 정규 9집 《WOMAN》이 발매되어 2주라는 짧은 기간동안만 활동하였지만, 2018년 11월 28일부터 SBS에서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더 팬》에 팬마스터 역할로 참여하고 있으며 2018년 12월 29일과 30일 양일동안에는 2018년 12월 20일과 21일 양일 간 일본에서 개최됐던 'BoA THE LIVE 2018 X'mas'의 한국 공연 버전인 ' BoA THE LIVE 2018 in SEOUL'을 개최하여 팬들을 만났다. 보아는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보아의 주요 장르로는 힙합, R&B, 댄스 팝이다. 또한 보아는 평소에 핑크, 에이브릴 라빈의 노래를 들으면서 록 장르의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발라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우타다 히카루, 하마사키 아유미와 종종 비교되어 왔다. 보아는 데뷔 이후 아티스트로서의 인생에 올인해야 했고, 이 때문에 "My Name", "Girl's On Top", "Hurricane Venus"와 같은 강한 일렉트로닉 댄스 노래만 해왔다. 하지만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앨범 "Only One"을 기준으로 보아는 강한 여전사 이미지를 버리고 일렉트로닉 댄스곡은 그만하고 싶다고 밝혔다. 보아는 미국 진출 당시 힙합풍의 노래 "Eat You Up"을 첫 싱글로 발매했는데, 《LA타임즈》에서 "Eat You Up"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질투할만 노래이지만, 보아가 미국에서 장기적 성공을 하기위해선 브리트니 이상의 차별화된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적인 뮤직비디오 감독인 조셉 칸은 보아에게 "보아는 굉장히 퍼포먼스적으로 춤과 노래가 모두 뛰어난 환상적인 가수다. 세계적인 어떤 스타들과 비교해도 보아만큼 퍼포먼스를 잘 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은 보아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아의 주요 음악적 영향은 힙합이지만, R&B도 즐긴다고 했다. 보아는 데뷔때부터 마이클 잭슨을 팬이자 롤 모델이라고 말해왔는데, "팝의 황제 잭슨은 내 영웅이고, 영원히 사랑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보아는 자신의 콘서트에서 잭슨의 노래를 공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자넷 잭슨, 브리트니 스피어스, 제니퍼 로페즈, 제이-지, 저스틴 팀버레이크, 넬리와 같은 댄스 팝, R&B 가수들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핑크, 에이브릴 라빈과 같은 팝 록 장르의 가수들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보아는 이후 많은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씨스타의 효린은 "그동안 보아를 존경했다. 그런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보아의 "My Name" 무대를 공연했다. f(x)의 루나는 "어렸을 적부터 보아가 롤모델이어서 모든 것들을 똑같이 닮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또한 보아는 활동 중인 후배 가수들과 연습생들 사이에서 조사한 "본받고 싶은 롤모델" 1위로 뽑혔다. 보아는 데뷔 2년 전부터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비교적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데뷔를 준비했고, 소속사 또한 그녀를 대한민국 내에서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해외진출을 데뷔 이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친 그녀는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전에 바로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거대 연예 매니지먼트사인 AVEX와 계약에 성공한 최초의 한국 가수이다. 보아는 많은 브랜드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보아가 광고를 했었던 브랜드로는 올림푸스, 나이키, 로레알, 꼬달리, 엘리트 교복, 서울우유, 미샤, 삼성 에니콜, 큐리텔, 비브라스, 하이트 맥주, 메이블린 뉴욕, 팅, KB 카드, 베가레이서, 브레인 토피아 닷컴, apm, 광동 옥수수 수염차, 초코틴틴, GM 대우 자동차 일본에서는 코세, 스케쳐스, 오디오 테크니카, 한국GM과 같은 광고에 출연했었다. Mr.Children Mr.Children()은 사쿠라이 가즈토시, 다하라 겐이치, 나카가와 게이스케, 스즈키 히데야로 구성된 일본의 록 밴드이다. 흔히 줄여서 미스치루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9년에 결성된 Mr.Children은 5천4백만 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가장 성공한 일본 록 그룹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1990년대 중반엔 발매한 음반들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등 ‘미스치루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다. Mr.Children은 싱글 29장 연속 1위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94년엔 〈Innocent World〉, 2004년엔 〈Sign〉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2012년 11월까지 Mr.Children은 정규 음반 14장과 싱글 33장, 컴필레이션 음반 5장, 라이브 음반 1장, 영상 음반 15장을 발매했다. 스즈키가 작곡한 〈Asia〉 (《Atomic Heart》)와 〈#2601〉 (《Discovery》) 를 제외한 밴드의 노래 대부분은 리드 싱어인 사쿠라이가 작곡하는데, 때로는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다케시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2008년 봄에는 그들의 노래 〈쇼넨〉이 NHK 야구 드라마 《배터리》의 주제가로 사용됐다. 여름, 그들은 3개월간 3작품 연속 발매를 발표했다. 첫 번째는 《2008년 하계 올림픽》 NHK 방송 테마송인 싱글 《GIFT》, 두 번째는 작년에 개최한 전국 투어에서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담은 DVD 《Mr.Childre "HOME" TOUR 2007 ~in the field》, 세 번째는 드라마 《코드블루》 주제가인 싱글 《HANABI》이다. 〈Habani〉는 야마시타 도모히사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코드 블루》의 주제가로 사용됐다. 11월에는 첫 디지털 싱글인 〈하나노 니오이〉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11월 22일 개봉한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연한 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싶다》 주제가로 쓰였다. 12월 10일엔 정규 음반 《Supermarket Fantasy》를 발매했는데, 발매 첫 주에 약 70만 장이 팔리며 오리콘 주간 음반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12월 1일, Mr.Children은 음반의 유일한 싱글이자 디지털 싱글로 발매한 〈fanfare〉가 수록된 그들의 16번째 음반 《SENSE》를 발매했다. 발매 직전인 11월 29일까지 발매일을 제외한 수록곡, 곡수, 음반 제목, 커버 등 상세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2011년 4월 4일, Mr.Children은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디지털 싱글 〈카조에 우타〉를 발매했다. 이 노래는 발매 첫 주에 AKB48의 자선 싱글 〈다레카노 타메니 (What Can I Do for Someone?)〉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2011년 일본의 아이튠즈 연간 다운로드 순위에서 일본의 음악가로는 가장 높은 순위인 4위를 차지했다. 2012년 4월 18일, Mr.Children은 3년 7개월만에 3A 싱글 〈이노리: 나미다노 기도/End of the Day/Pieces〉를 발매했다. 수록곡 가운데 두 곡 은 영화 우리들이 있었다 주제가로 사용됐다. 2012년 5월 10일에는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베스트 음반 《Mr.Children 2001-2005<micro>》와 《Mr.Children 2005-2010<macro>》 두 장을 함께 발매했다. 중앙 처리 장치 중앙 처리 장치(中央處理裝置) 또는 CPU()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제하고 프로그램의 연산을 실행하는 가장 핵심적인 컴퓨터의 제어 장치, 혹은 그 기능을 내장한 칩을 말한다. 컴퓨터 안의 중앙 처리 장치(CPU)는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 받고, 기억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하여 연산하고, 외부로 출력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중앙 처리 장치(CPU)는 컴퓨터 부품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컴퓨터 시스템 전체를 제어하는 장치로, 모든 컴퓨터의 작동과정이 중앙 처리 장치(CPU)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의 CPU 칩엔 실행 부분뿐만 아니라 캐시 등의 부가 장치가 통합된 경우가 많다. CPU에는 MCU(Micro Control Unit)와 주변 장치(외부 확장 장체에 관한 IC)가 다 들어있는 Soc(System On Chip)가 있다. 주변 IC가 따로 달려 있을 경우, 그것은 MCU라고 할 수 있다. CPU는 기계어로 쓰인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하여 실행한다. CPU는 프로그램에 따라 외부에서 정보를 입력받아,이를 기억하고, 연산하며, 결과를 외부로 출력한다. CPU는 컴퓨터 부품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컴퓨터 전체의 동작을 제어한다. 기본 구성으로는 CPU에서 처리할 명령어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 레지스터, 비교, 판단, 연산을 담당하는 산술논리연산장치(ALU), 명령어의 해석과 올바른 실행을 위하여 CPU를 내부적으로 제어하는 제어부(control unit)와 내부 버스 등이 있다. 각종 전자 부품과 반도체 칩을 하나의 작은 칩에 내장한 전자 부품을 마이크로프로세서라고 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전기 밥통에 쓰이는 낮은 성능의 제품부터 컴퓨터에 쓰이는 높은 성능의 제품까지 매우 다양하다. 마이크로프로세서들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성능이 높은 제품은 컴퓨터의 연산 장치로 쓰인다. 이것을 중앙 처리 장치라고 한다. '고정된-프로그램 컴퓨터' 라고 불리는 ENIAC같은 컴퓨터는 다른 종류의 작업을 하기 위해 전선을 재배열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CPU" 라는 용어가 소프트웨어의 실행을 위한 장치로 불리게 된 이래로, CPU라고 불릴 수 있는 장치의 출현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출현 덕분이었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는 J.Presper Eckrt와 John Willian Mauchly's의 ENIAC 설계에도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하지만 ENIAC을 빨리 제작하기 위해서 생략되었다. ENIAC이 만들어지기 전인 1945년 6월 30일 수학자 폰 노이만은 'EDVAC 초안에 대한 보고' 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개요로써 1949년에 완전히 정립되었다. EDVAC은 일정한 수의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확실한 것은, EDVAC 프로그램은 물리적 선의 연결이 아니라 빠른 속도의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ENIAC의 한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폰 노이만의 디자인은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단순히 메모리에 있는 내용을 바꾸는 것 만으로 손쉽게 실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EDVAC은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 컴퓨터는 아니었다. 맨체스터 대학교의 SSEM(Small-Scale Experimental Machine)과 마크 1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초기 버전이다. 트랜지스터 CPU는 당연히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이후 생긴다. 페드리코 페긴이 1970년대에 발명한 것은 CPU의 설계와 구현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70년에 등장한 최초의 상업용 마이크로프로세서(Intel 4004)와 1974년의 최초의 범용 마이크로프로세서(Intel 8080) 이후로 생겼다. 모든 CPU에서 메모리에 저장된 명령어들을 순서대로 불러와서 실행한다는 사실은 물리적형태와는 관계없이 동일하다. 그리고 CPU가 이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꺼내고, 해독하고, 실행하는 5단계가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에서 명령어를 실행하고난 이후에는 다시 이 다섯 단계의 명령 주기가 반복되며, 프로그램 카운터의 변화된 위치에서 실행될 명령어를 불러오게 된다. 첫 번째 단계인 인출(Fetch)은 프로그램의 메모리에서 명령어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프로그램 내부의 명령어의 위치(주소) 두 번째 단계인 해독(Decode)은 인출 단계에서 가져온 명령어를 해독하여 명령어 내의 데이터 정보와 연산 정보를 추출한 뒤, 중앙처리 장치 내의 각 장치에 적절한 제어신호를 보내 연산, 처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실행(Execute)은 명령어에서 추출한 두 데이터와 연산 정보를 이용해 실제로 연산을 하는 단계를 말한다. 연산이 끝난 결과는 곧바로 다음 명령어에서 사용될지, 그렇지 않을지에 따라 메모리 단계로 갈지, 라이트백 단계로 갈지 결정된다. 네 번째 단계인 메모리(Memory)는 연산결과가 다음 명령어에 바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과를 메모리에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 연산의 마지막 단계인 라이트백(Write-Back)은 이전 명령어의 연산 결과가 다음 명령어의 입력 데이터로 사용될 경우, 계산 결과를 레지스터에 다시 쓰는 것을 말한다. CPU의 내장회로는 CPU가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연산들의 집합인 '명령어 집합'으로 이루어져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숫자에 대한 가감연산 혹은 비교연산 같은것이 있다. 각각의 기본 연산은 옵코드라고 불리는 특정한 비트의 조합으로 나타내진다. 모든 명령어의 실제 수학적인 연산은 CPU 내부의 산술논리장치(ALU, arithmetic logic unit)이라는 조합논리회로에서 담당한다. CPU는 대부분 산술논리장치가 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명령어를 메모리로부터 불러오고, 연산의 결과값을 저장하는 일을 한다. 메모리로부터 데이터를 불러오는 연산의 명령어 집합의 종류와 동작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싱글 코어(Single Core)는 하나의 코어로 이루어진 CPU이다. 일반적으로 멀티 코어에 비해 경비가 싸고 프로그래밍도 간단하지만 보수 작업이나 고장의 경우에는 시스템이 완전히 멈추고 멀티 코어에 비해 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 나오는 중앙 처리 장치의 성능은 크게 클럭(Clock) 속도와 코어 수로 결정된다. CPU에서 클럭이라고 하는 수치는 중앙 처리 장치 내부에서 일정한 주파수를 가지는 신호로 이 신호에 동기화되어서 중앙 처리 장치의 모든 명령어가 동작되게 된다. 예를 들어, 클럭 수가 3.0GHz이면 초당 30억 번의 명령어 처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클럭 주파수가 빠를수록 제한된 시간에 더 많은 명령을 처리할 수 있기에 더 좋은 성능의 중앙 처리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또, 중앙 처리 장치안의 코어의 수로도 성능의 차이가 난다. 코어는 중앙 처리 장치의 역할을 하는 블록으로 예전에는 한 개의 칩 안에는 한 개의 코어의 구조를 가졌으나, 최근에는 한 개의 칩 안에 여러 개의 코어를 가지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이렇게 한 개의 칩 안에 여러 개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장치를 병렬적으로 연결한 멀티 코어 시스템을 통하여 더 좋은 성능의 중앙 처리 장치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싱글 코어 및 다중 코어를 칭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현재는 코어의 속도를 높이기 힘든 한계에 왔기 때문에, 병렬성을 높여 CPU 안에 코어를 72개 넣은 인텔 제온 파이 CPU도 있다. 대중적인 운영 체제하의 CPU 설계 또는 제작사 커널 커널(Kernel)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핵 (수학) 수학에서, 어떤 사상의 핵(核, )은 0의 원상의 포함 사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단사 사상이다. 범주론을 통해 추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적절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구체적 범주에서는 특정 원소의 원상의 포함 함수가 된다. 영 사상을 갖는 범주 formula_1 속의 사상 formula_2의 핵 formula_3은 다음과 같은 영 사상과의 동등자이다. 영 대상을 갖는 범주 속의 사상 formula_5에 대하여, formula_6인 formula_7가 존재한다면 formula_5를 정규 단사 사상(正規單射寫像, )이라고 한다. "정규"라는 용어는 군론의 정규 부분군에서 유래하였다. 임의의 영 대상을 갖는 범주에서, 정규 단사 사상은 (동등자이므로) 단사 사상이다. 모든 단사 사상이 정규 단사 사상인 영 사상을 갖는 범주를 정규 범주(正規範疇, )라고 한다. 준가법 범주 (아벨 군의 모노이드 범주 formula_9 위의 풍성한 범주)에서, 두 사상의 동등자는 그 차의 핵과 같다. 아벨 범주에서 모든 사상은 핵을 가지며, 모든 단사 사상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구체적으로, 아벨 범주에서 모든 단사 사상은 그 여핵의 핵과 같으며, 모든 전사 사상은 그 핵의 여핵과 같다. 환 formula_11 위의 왼쪽 가군의 범주 formula_12는 영 사상을 갖는 범주이며, 이 범주에서 모든 사상(가군 준동형)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formula_13의 핵 formula_14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formula_12에서 모든 단사 사상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이는 (군이나 유사환의 경우와 달리) 임의의 부분 가군에 대한 몫가군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형대수학에서 formula_11가 체일 경우, 체 위의 가군들은 벡터 공간이며,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는 핵이 존재한다. 특히, 행렬은 유한 차원 벡터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을 정의하며, 행렬의 핵은 벡터 공간의 범주에서의 핵이다. 선형대수학에서 핵은 영공간(零空間,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18에서, 영 사상은 1(군 연산의 항등원)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formula_18에서 모든 사상(군 준동형)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formula_20의 핵 formula_21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이 경우, formula_23는 formula_24의 정규 부분군을 이룬다. 군의 범주에서, 임의의 군 준동형 formula_20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아벨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9에서, 영 사상과 핵은 formula_18에서와 같다. 즉, 영 사상은 0(군 연산의 항등원)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며, 핵은 0의 원상으로 가는 포함 함수이다. formula_9에서 단사 함수인 모든 군 준동형은 정규 단사 사상이다. 이는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이 정규 부분군이기 때문이다. 유사환과 유사환 준동형의 범주 formula_33에서, 영 사상은 0 (덧셈 항등원)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formula_33에서 모든 사상은 핵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formula_35의 핵 formula_36는 다음과 같은 포함 함수이다. 이 경우, formula_38는 formula_11의 아이디얼을 이룬다. 유사환의 범주에서, 임의의 유사환 준동형 formula_35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곱셈 단위원을 갖는) 환과 환 준동형의 범주 formula_45에서 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디얼은 1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어 부분환을 이루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을 가진 공간의 범주 formula_46에서, 영 사상은 formula_47으로 가는 상수 함수이다. 이 범주에서 모든 사상 formula_48은 핵 formula_49을 가지며, 이는 formula_47의 원상에 대한 포함 함수이다. 정당 정당(政黨) 또는 당(黨)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을 일컫는다. 정당은 정치의 기구·조직 가운데서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편에 속한다. 사회가 근대화됨에 따라 정치가 다원화하는 것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의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게 되어 여기서 생기는 투입과정의 차질을 보완하기 위하여 점차로 정당이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서구의 정치사에서는 근대정당의 성립과 발전을 대체로 19세기 초부터 잡고 있으며 의회정치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에는 나라에 따라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당정치의 전통이 확립되는 경우도 있다. 근세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16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정당이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귀족이나 지식을 가진 계층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질 때 정치를 좌우하는 것은 합리성이며 또한 그 바탕은 동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단일의 정치적 주체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뒤이어서는 노동계급이 도전하게 되어 정치는 복잡한 투쟁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투쟁의 첫단계에서는 주로 폭력이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름했으나 어느 쪽의 종국적인 승리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는 타협과 선의의 경쟁이 룰(rule)이 되었고 이에 정당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당의 기본적인 개념을 정치사회적으로 보아 다원적 경쟁사회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길 때 현대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단일정당은 정당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수 기능을 장악한 정부의 한 조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당이란 어휘 자체가 원래 '부분적인 모임'이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현대의 신생 제국에서 대개의 경우 정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긴 하나 서구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지배자의 손발과 같은 사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때가 많다. 정당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도당 또는 당파를 조직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역사는 오래된다. 이것을 인간의 투쟁본능의 표현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어떻든 단결이 힘의 결집수단으로서 효과적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정당도 이러한 당파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단순한 도당과 정당 사이에서는 유사점보다도 상위점 쪽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당은 근대적 의회제도 아래서 정치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지만, 도당은 역사적으로 그 이전의 현상이며, 정치권력이 개인 내지 폐쇄적인 집단에 독점되었던 시대에 거기에 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도당은 직접 폭력수단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암살이나 협박, 반란 같은 수단에 의존했는데, 권력측도 이에 대항해서 투옥, 사형 등의 위력수단으로 준열한 탄압을 가했다. 그 결과 반정부세력은 종종 비밀결사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당파의 목적·구성원·조직·활동은 일체 비밀에 붙여지고, 이 비밀의 유지를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이 준수되었다. 한편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와 더불어 발전해 온 조직이다. 근대적 의회정치는 제도를 말한다. ‘전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의 개념은 고정적 이해의 대립을 초월한 공적인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하며, 이해관계나 의견의 대립을 무력이 아니라 토론과 다수결로 해결한다는 것은 다수와 소수를 초월한 전체라는 개념이 인정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근대적 의회정치가 시민사회를 기초로 하는 근대국가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의회 내부에서 동지로서 의원을 모아 다수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 벌어지고, 의원의 원내조직으로서 정당이 생기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의회의 세력이 한층 더 강화되어 정부가 의회의 다수파를 기초로 해서 설립되게 되자 정당도 정권의 획득·유지를 위해 그 결속을 한층 더 강화하게 되었고, 또 유권자의 범위가 한층 더 확대됨에 따라 정당 자체가 선거활동의 영역에까지 그 활동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이렇게 정당의 활동은 의회정치의 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당이라는 조직의 목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해서는 특정의 주의 및 정책의 실현이라고 하는 설과 정권의 획득·유지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후자의 설이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버크(1729년-1797년)는 '정당이란 그 성원 전원의 지지를 받는 특정원리에 입각해서 공동의 노력으로 국가적 이익을 추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단의 사람들의 결합체'라고 하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으나 실제로는 정책단체라고 볼 수 없는 정당이 적지 않다. 가령 미국의 양대 정당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의 여름에 각기 당대회를 열어 당의 강령을 발표하나, 양당 사이에 정책상의 차이는 별로 없고, 또 어느 당이건 선거강령과 집권 후의 정책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의회에서 의안이 채결될 때에는 같은 당 소속의 의원이 찬반 양진영으로 갈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정당을 정책을 중심으로 결집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오히려 정권의 획득과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단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2개 이상의 정당이 다같이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해서 활동한다는 것은 이들 정당이 서로 대립관계에 서서 정권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선거에서부터 시작되어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영역에서 인사 및 정책에 관해 격렬히 전개된다. 그러나 정당이 투쟁조직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당 상호간의 관계가 전부 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할 때는 선거나 내각타도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몇 개의 정당이 잠정적·부분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예가 적지 않다. 또한 연립내각도 이러한 잠정적·부분적 협력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어디까지나 일시적·부분적이며, 결국은 투쟁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지속적·전면적인 협력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이미 정당의 병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쟁조직으로서의 정당의 당면 과제는 투표자·지지자·당원 및 소속의원의 수를 늘리는 당세확장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원의 질을 높이고 그 사기를 고무해서 당의 결속을 강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원칙·무방침의 팽창정책이 당내에 많은 이질분자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아, 분파의 대립을 격화시켜 통제를 마비케 하고 결국은 당의 투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말하면 정당은 대립정당이 완전히 약체·무력하게 되는 것을 바라기보다는 강력하기를 바란다. 강력한 경쟁대상이 있어야 당내의 결속이 공고해지는 것이며, 상대방이 무시해도 될 만큼 무력할 때는 당의 결속이 이완되어 내분이 생기는 예가 많다. 정당은 의회정치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엔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공적 조직이며, 정당이 없는 민주정치는 생각할 수도 없다. 미국의 대통령선거나 비례대표제의 의원선거는 정당의 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의회의 의사운영도 정당이 없다면 극도의 혼란을 빚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여당이 결정한 정책은 정부에 의해 실제로 시행될 수 있다. 이렇게 정당이 국가적 의의가 있는 중요한 공공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정당에 국가기관적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당은 국가와는 다른 의미에서 사회에 기초를 두는 정치세력이며 본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지의 결사와 동일하게 사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서 정당은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결사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정치결사로 특정의 정치적 목적을 공통으로 갖는 사람들의 자발적 결집체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특정 정당의 활동자금을 보조하거나 세법상 특혜를 준다면 이는 민주국가의 헌법에 위배되는 처사가 된다. 정당은 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투쟁단체이고 정책단체는 아니나, 정당과 정책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적 의회제도 자체가 편견이나 폭력이 아니라 토론과 이성에 호소하여 문제를 처리하는 제도이므로 이 제도하에서 활동하는 정당이 일정한 원리에 입각하여 주의, 주장, 정책을 놓고 투쟁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거는 본래 ‘인물’의 선택을 의미했으나, 정당이 선거 때에 정책을 발표하게 되면서부터 ‘정책’의 선택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유권자의 수가 격증하고 사회적으로 많은 계층적 이질요소가 형성되어 종전처럼 입후보자나 그 지지자인 명망가들의 지명도나 권위에만 의존해서는 표를 모으기가 곤란해진 데서 온 결과이며, 또한 정부의 시책에 의해서 적절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문제의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에 유권자가 정책을 주목하는 경향이 생긴 데서 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는 1891년에 뉴캐슬에서 열렸던 전국자유당연맹대회에서, 미국에서는 1832년의 공화당전국대회에서 각각 최초의 당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선거는 종전처럼 후보자 개인의 인물의 선택과 그에 대한 백지위임이 아니라 당의 정책의 검토와 선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따라서 후보자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당과 당 사이의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선거 후에도 의원은 종전처럼 유권자의 백지위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의 공약으로 그 행동이 규제되며, 또 유권자의 감시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의원이 당원으로서 당의 강령에 구속되는 것은 당연한데, 의회 안에서의 당원의 행동통일을 기하기 위해 당의 규율도 점차 엄격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래와 같이 유권자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양심과 판단에 기해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의원은 없어지고, 의사당은 극언해서 거수기에 불과한 의원들을 조종하는 정당의 투쟁장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이 선거에 임해서 내세우는 정책은 될수록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유권자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대자본가, 중소기업자, 농민노동자, 연금생활자, 실업자, 인텔리층 기타 사회적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여러 계층의 정치적 요구를 광범하게 당의 강령 속에 반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당이 표방하는 정책은 내용이 포괄적이고 막연한 것이 되기 쉽고, 특히 중요한 정치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한 주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정당은 광범한 사회적 이익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사회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만 그 정당에게 ‘이끌리는 사회적 이익’과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과는 다르다. 가령 영국의 보수당이 조직이 없는 극빈층의 표를 상당히 획득하고 있다고 해서 보수당이 극빈층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원이나 당운영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는 간부의 출신계층이나 당자금의 공급원을 살펴보면 보수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은 영국의 전통적인 지배계급, 즉 재계와 자본가계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당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정책’은 그 정당이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각국의 정치사가 예증하고 있다. 보통 ‘수행하는 정책’과 ‘표방하는 정책’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사정의 변경 기타의 변명으로 일시적으로 미봉하게 되는 정도에 이르면, 공약 불이행의 비판을 초래할 것이고 유권자의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당은 사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활동은 의회정치에서 불가결한 공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선거는 의원, 대통령 및 기타 공직자의 지명절차이며, 각 정당은 입후보자를 내세우고 강령을 발표하며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선거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정당이 정치지도자 선출의 파이프로서 당에서 양성하고 선정한 자를 국민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정당이 중요한 정치문제를 쟁점으로서 국민에게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당의 정책을 밝혀 국민의 선택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유권자는 본래가 아무런 조직도 없는 개개인의 단순한 집합체에 불과하여, 공통의 이해나 명확한 정치적 의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주권자라고는 해도 실은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유권자 자신들이 정치지도자를 내세우거나 정치적 요구의 통일을 기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입후보자와 정당이 선택의 자료를 유권자에게 제공하고 유권자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지지 정당을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권자는 정당의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효과적으로 그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당이 유권자의 개별적 의사와 이해를 통합, 집약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정당에 의해 비로소 정치적 발언이 유효하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그 발언이 매우 한계가 좁았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유권자에게 제시된 것은 한정된 정당의 후보자와 정책에 불과하며, 정치참가를 단념하지 않는 한 유권자는 제시된 선택의 자료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권자 앞에 제시되는 정책이 전부 내용이 막연하여 구별의 기준이 생기지 않을 때는 유권자의 선택이 무의미해져 버린다. 선거란 정당이 유권자를 위로부터 조종하여 민의를 유도하고, 체제를 택하는 소란스러운 형식적 절차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당이 정치적 쟁점을 명시하여 정치문제에 있어서의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의 형성을 지도함으로써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정치교육을 행하는 것과, 혹은 선거 이외의 기회에 야당이 여론형성을 지도하여 이 여론을 배경으로 해서 정부를 비판하고, 여당이 정부의 정책을 수정시키는 것 등 국정과 여론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 정당의 부차적 기능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선거 결과 양당제의 국가에서는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집권하고, 다수정당제의 경우에는 정당 사이의 절충으로 성립된 연립내각이 정권을 담당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과반수의 선거위원을 차지한 정당의 입후보자가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담당한다. 이렇게 정권을 담당하는 당이 여당이고, 그 밖의 정당이 야당이다. 다수정당제의 국가에는 준여당과 준야당도 있을 수 있으나, 정당은 본래가 투쟁단체인만큼 엄밀한 의미에서의 중립은 있을 수 없고, 각 정당은 정권지지와 반대의 양진영으로 갈라진다. 정당의 국정기능은 주로 정권을 둘러싸고 이 양진영이 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한다. 먼저 여당은 당내에서 선정한 정치지도자를 정부에 보낸다. 정부의 수반은 여당 당수인데 그 밑에 여당간부가 각료로 취임한다. 적재적소라는 말은 구호에 그치고 있으며, 당내 분파의 영수들에게 약간의 포스트를 배정하는 일이 많으며 분파의 밸런스를 중요시하고 있으나, 이 관직분배로 오히려 분파의 불만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내각개편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예가 종종 있다. 다음에 여당은 다수의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원인이 된 '표방하는 정책'을 의회와 정부를 통해서 실천할 책임이 있다. 다수정당제하의 연립내각은 정권에 참여한 각 정당 사이에서 성립된 정책협정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선거 때에 각 정당이 내세운 정책이 그대로 실시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양당제의 경우에도 '표방하는 정책'과 '수행하는 정책'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공약의 '해석'을 대체로 왜곡되게 하고 '정세의 변화'라는 둔사(遁辭)에 의해 사문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의 '이끌리는 사회적 이익'과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이 다르다는 점에 근본적 원인이 있으며, '표방하는 정책'이 득표의 편의라는 견지에서 정해진다는 사실에 근본원인이 있다. 여당은 의회에서는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주된 임무이며, 마치 변호사의 형사재판(刑事裁判)에서의 역할이 피고인의 변호인 것과 동일하다. 의원내각제의 경우에는 정부를 조직하는 정당이 동시에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정부와 의회는 여당을 통해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부와 의회의 쌍방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 여당에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미국과 같은 권력분립제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속하는 여당이 반드시 의회의 다수파가 아니므로 정당을 통해서 정부와 의회가 연결되지 않는다면 국정은 마비될지도 모른다. 최후로 정부는 여당을 기초로 하지만 여당 그 자체는 아니며, 정부와 여당 사이에는 그 입장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가령 여당이 그 대표하는 사회적 이익의 여러 가지 정치적 요구를 당의 입장에서 정부에 제시하는 경우에도 정부는 여당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의회 전체에 대해, 그리고 의회를 통해 전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당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당의 임무는 주로 정부와 여당을 비판·공격하는 데에 있다. 19세기에 있어서는 의회에서의 토론이 다수세력 형성의 원동력의 하나가 될 수 있었으나, 현재는 의사당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정당이며, 웅변에 감동을 받아 개개의 의원이 그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의회에서의 토론은 매스컴을 통해서 유권자에게 호소하여 정부와 여당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한다. 야당의 주된 투쟁장소는 의회이지만 유세활동 및 선거구에서의 일상활동을 통해서 직접 유권자와 접촉하여 호소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다. 야당은 이렇게 정부와 여당을 비판 공격하는 한편으로 정권인수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행정책임을 맡을 능력이 있는 인재의 양성과 즉각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정책의 연구와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야당은 공직을 지배할 수 없고 또 운영자금도 부족한 형편이지만 야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야당으로서는 최대의 이점으로 모든 실정의 책임을 여당에게 물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또 일체의 반정부세력이 야당 주변에 집결하게 되면 그만큼 정부타도의 전망은 밝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당·야당을 통해서 정당은 의회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맡고 있다. 의회의 운영에 관해서는 헌법·의회법·의원 규칙 및 의사선례 등이 있으나, 그 해석이 반드시 획일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개개의 구체적인 사항은 정당 간의 협의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수백 명의 의원을 거느리고, 방대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의회에 만약 정당이 없다면 의회의 질서 있고 효과적인 운영은 도저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하나는 정당을 다양한 사회적 이익의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시켜 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민주정치의 도구로서 보는 설이며, 또 하나는 소수 지배층이 선거를 통해서 유권자를 조종하여 민의를 조작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지배층의 득표조직에 불과하다고 보는 설이다. 전자의 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이익이 복잡한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잡다한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는데, 이러한 요구는 그 자체로서는 사회 전체 중 소수자의 의사를 반영하며, 직접 정치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잡다한 요구를 집약해서 정치적 표현으로 발전시키는 작용이 정당의 존재로 인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정당은 그 입후보자와 정책을 통해서 사회적 모든 이해의 소리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를 대표해서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제1의 학설이다. 여기에 대해 제2의 학설에 의하면 다양한 사회적 이해는 저마다의 정치적 요구를 갖고 있으나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이해가 아니라 정당이며, 사회적 이해는 정당이 결정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 사회적 이익과 정당의 관계를 보더라도 정당의 우위가 확실하다. 물론 정당으로서도 다수의 지지를 얻어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각종 사회적 이해와 연결을 가지고, 그들의 요구를 입후보자나 정책에 반영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적 이해의 측에서도 정치적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정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이해는 무수히 있는 데 반해 정당은 고작 몇몇 개가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으므로 그 관계는 정당을 정치적 지지의 결정적 매수시장으로 했으며 정당의 우위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정당이란 일반 유권자가 자유로이 참가하여 당원대중의 민주적 의사로써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소수의 직업정치가의 집단이 당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입후보자와 정책을 결정하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정당을 현실적 입장에서 보는 한 유권자를 위로부터 조종해서 민의의 향방을 결정짓는 득표공작 기구라는 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영국이나 미국 같은 양당제를 전제로 하며, 스칸디나비아 3국과 같은 다수정당제하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각 정당과 사회적 이익이 명확한 형태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정당의 사회대표적 성격은 부인할 수 없다. 막스 베버는 정당조직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여 명망가 정당과 근대적 정당의 두 가지 형으로 정당을 구분했다. 명망가 정당은 근대적 의회정치의 초기단계, 즉 제한선거 시대의 정당형으로 의회내에서의 막연한 인적 결합을 의미했으며, 당규율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이합집산이 빈번한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당비 제도나 정기적 집회가 따르는 지속적인 조직으로서의 지방선거구 조직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선거시에만 지방 명망가의 정치집회가 임시적으로 열렸는데, 그 의장도 유력자가 임시로 맡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집회에서 입후보자가 선정되고 정책이 토의되었다. 그러나 정책은 입후보자나 의회의 정당에 일임되는 예도 많았다. 요컨대 지방선거구에서는 명망가가, 중앙에서는 개개의 의원이 정치의 주역이었다. 한편 근대적 정당은 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근대적 정당제도하에서 당비납부제와 정기적 집회 및 각 단계 당기관의 상호관계를 수반하는 지방선거구 및 전국의 당조직이 확립되고, 후보자 및 정강의 결정에 병행하여 당조직이 선거비용의 조달과 지출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선을 희망하는 의원은 당조직의 지도를 받는 한편 원내의 행동에 관해서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게 되어 의원의 독립성은 점차 상실되어 갔다. 그러나 당운영의 실권을 누가 장악하는가는 나라에 따라 다르며, 미국에서는 원외의 직업적 보스, 독일에서는 원내정당의 간부가 잡고 있다. 이러한 근대적 정당이 성립된 것은 미국에서는 1840년경, 영국에서는 1867년 이후였다. 뒤베르제는 정당을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보수정당이나 우익정당을 전자로, 사회주의당이나 노동당을 후자로 생각하고 있다. 간부정당은 선거를 그 목표의 중심에 두고 다수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일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에서는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수의 명사(名士)가 중심적인 존재가 된다. 명망이나 권세가 있어 표를 모으는 데 유리한 영향력이 있는 명사라든가, 유권자의 취급과 선거운동에 유능한 전문가나, 선거비용을 댈 수 있는 재계의 유력자 등이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같이 간부정당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당소속의 인원수보다 당소속 인원이 선거전에서 얼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반유권자를 권유해서 당원으로 만들 필요는 그리 없다. 또 조직면에서 볼 때 간부정당은 각 선거구의 당조직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인정하는데, 전국조직은 이러한 지방조직의 이완된 연합체로, 말하자면 지방분권적인 구조이며 중앙집권적이며 긴밀한 결속을 특색으로 하는 지부조직의 정당과는 다르다. 대중정당은 본질적으로는 선거를 위한 조직이 아니고 특정의 사회적 이익을 위한 정치운동이므로, 이 운동에 참가하는 당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조직은 강대해진다. 그 위에 당은 당원에 대해서 정치교육을 실시하며 정치지도자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당의 활동자금을 소수의 자본가의 기부에 의하지 않고 당비로 충당하므로 이 모든 의미에서 당원수가 많을 필요가 있다. 조직면에서는 대중정당은 긴밀하게 결속된 지부조직의 정당이며 중앙집권적인 전국조직이 그 구조적 특색이다.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의 구별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반대중에게 선거권이 없고 따라서 정치적 영향력이 전혀 없던 시대에는 대중을 당원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일이었다. 우선 당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한선거가 보통선거로 발전함으로써 생긴 개념이었다. 그러나 보통선거가 실현되면서 곧 대중정당이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간부정당은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대중을 득표조직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당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으나 대중의 정치참여는 한정된 범위내에서 인정한 데 불과했고, 당운영의 실권은 여전히 소수간부의 손에 머물러 있다. 대중정당의 출현은 사회당이나 노동당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민정당과 계급정당의 구분기준은 주로 정치투쟁의 무기로서 이용되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이며 학술적인 것은 아니다. 즉 보수정당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성립된다. 정당은 공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전 국민적·전 국가적인 이익의 추진을 목적으로 광범한 일반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국민정당의 본분이며, 특정의 계급적 입장에서 계급적 이익의 증진을 도모하고, 주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정당, 즉 계급적 정당은 특정계급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에 우선시키므로 의회민주주의 이념에 배치된다. 한편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주장은 이러하다. "사회에는 현실에 있어 서로 대립하는 계급이 존재하는데,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사회적·경제적 간섭이 적극화된 시대에는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전 국민적 내지는 전 국가적인 이익이란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국민정당을 주장하는 보수정당의 논리가 이해관계의 계급적 대립을 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지배계급의 이익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정당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결코 그들의 말하는 바와 같이 계급적인 것이 아니고, 그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배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유권자는 극히 소수이지만 피지배계급의 유권자는 압도적 다수를 이룬다. 따라서 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은 전자의 계급적 이익을 강조하고, 전자의 지지만으로는 정권의 장악이 불가능해지므로 공익관념이나 세계관이나 종교 등 초(超)계급적인 호소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은 후자의 계급적 자각을 높여, 그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계급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보수정당은 보수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며 혁신정당은 혁신주의에 입각한 정당이다. 문제는 보수주의와 혁신주의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가에 있다. 이 구별을 매콜리(1800년-1859년)는 인간의 기질의 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보수와 혁신을 초역사적인 인간본래의 기질에 둔다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존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질서에 대한 어떤 기본자세의 문제로서 포착되어야 할 것이다. 즉 현존의 질서를 방위 내지 옹호하려는 입장이 보수주의이며, 진보의 관념에 입각해서 현존질서에 비판적 내지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혁신주의이다. 그러므로 현존 질서하에서 지배적 계층에 있는 사람은 보수주의를 지지하고,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은 혁신주의를 지지하기 쉬운 것이다. 보수와 혁신의 의미를 현존질서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때는 그 중간적 입장은 이론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소위 중간정당은 실은 보수정당의 온건파와 혁신정당의 온건파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존 질서의 기초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질 때 중간정당이 항상 분열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원내정당(院內政黨)은 국회에 소속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이다. 정치력이 막강한 정당들이며 국회의원의 수가 많을수록 정치력이 강하다. 따라서 원내정당이 국회의원을 보유한 상태에서 차기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면 또 다시 원내정당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내정당은 국회의원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여당이 있어서 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이 있다. 원외정당(院外政黨)은 국회에 소속된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한 정당이다. 정치력이 미약한 정당들이며,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하여 원내에서의 발언권이 없어서 정당보다 시민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원외정당들은 원내진출을 하기 위해 국회의원 총선거에 주로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일이 많으나, 정치력이 미약하고, 출마하는 후보 및 선거구의 수가 적어 원내진출하는 일이 흔치 않다. 정당이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대립정당과의 효과적인 투쟁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영속적인 결사(結社)로서 그 조직을 확립하고,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구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명망가 정당의 단계에서는 거의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지도적 정치가 개개인의 주변에 막연하고 유동적인 집단이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치밀하고도 방대한 정당조직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보통선거제가 실현되어 많은 새로운 유권자가 등장하고 사회주의정당 기타의 대중정당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뒤베르제는 유권자를 정당과의 관계에서 투표자·지지자·당원·활동가의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성격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투표자는 선거에 있어서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자를 말하나, 반드시 그 정당의 당원은 아니다. 지지자·당원·활동가는 반드시 안정된 투표자이며, 유권자의 당에의 관계의 강도는 투표자에서 활동가의 순서로 강하다. 투표자수에 대한 당원수의 비율을 당원율이라고 말하는데, 간부정당은 당원율이 대중정당에 비해 훨씬 낮다. 그리고 투표자와 당원 사이에는 당내의 위기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응이나 그 수의 증감의 속도 등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양자가 상대적으로 독립한 두 개의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당원이 투표자 중의 자각분자라 해서 당원을 투표자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원과 기타 선거에 의한 공직은 투표자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만, 당원으로서 당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즉 극단적으로 말해서 의원은 투표자의 의사를 따를 것인가, 당의 명령에 따를 것인가 결정해야 할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 투표자와 당원의 정치의식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에 차질이 생기게 되므로, 정당은 그 일상적 활동 기타를 통해서 유권자나 투표자에 대한 교육 선전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음에 지지자라는 것은 선거시에 당의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의 기관지를 구독하고 당이 주최하는 집회에 출석하고, 혹은 당의 기금을 기부하는 등 당에의 관여도가 투표자보다 높은 자를 말한다. 지지자가 선거에서 당의 후보자에 대한 안정된 투표자인 것은 물론이다. 간부 정당에는 진정한 의미의 당원은 처음부터 존재치 않으며, 일반적으로 간부정당의 '당원'이라 함은 실은 이 지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대중정당의 경우는 지지자와 당원이 명확히 구별된다. 즉 당원은 당의 정규구성원으로 그 신분이 당원명부에 등록되어 당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당비납부·집회출석·선거운동·일상활동 등)를 가지나, 지지자에게는 이러한 요건이 없다. 활동가는 당원 중의 적극분자로 모든 단계의 당조직에서 활동의 중심이 되는 소수자이다. 따라서 일반당원보다 당과의 유대가 훨씬 긴밀하다. 당비를 규칙적으로 납부함은 물론 당집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여 적극 발언하고, 선거에서는 무보수로 선거운동의 선두에 나서는 등 실제 당활동의 기획과 수행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들은 당의 의사결정을 지도하는 자라기보다는 당무의 충실한 집행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간부정당에는 원래 당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조직 내부에서 일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말하는 소수의 활동가이다. 대중정당에 있어서 비로소 당원의 일부로서의 활동가의 관념이 성립되는 것이지만, 당원 중에서 활동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20% 이하이며, 만약 이것이 30%를 넘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특히 활기에 넘치는 정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활동가의 존재는 당의 운영에 있어 빠질 수 없으며, 그들 없이는 당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활동가라는 핵심집단이 형성되면 일반당원이 모든 적극적인 당활동을 일체 활동가의 수중에 일임해 버리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므로, 일반당원이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 당활동에서 멀어질 위험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당운영이 소수의 활동가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체제로 전환되게 된다. 그 하나는 당원조직에 대해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둘째로 원내정당과 당원조직의 관계, 셋째로 당내 민주주의의와 과두 지배체제의 문제가 있다. 모든 조직은 각기 권한과 책임을 달리하는 여러 기관이 상하의 계층질서를 형성하고 횡적으로 상호연결된 기구인데, 그 구성기관 중에는 하부의 의사를 집약하고 상부의 명령을 자체의 책임으로 이행하는 중추적 존재가 있다. 이것이 당원조직에 있어서는 이러한 지위를 가진 것이 선거구의 당조직인데, 그 하부의 조직은 선거구조직에 의해 통괄되며, 전국조직과의 관계로는 의원 후보자의 선정과 같은 업무처리에 있어서 어떤 범위까지의 자율권이 선거구조직에 인정된다. 이렇게 선거구조직이 정당의 기본적 단위로서 그 중추적 역할을 인정받는 것은 정당이 선거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따라서 전국조직에 권한을 집중시키는가(중앙집권), 혹은 선거구조직에 상당한 범위의 자율권을 인정하는가(지방분권) 하는 문제는 그 정당이 선거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과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별개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이 문제는 정당성립의 역사적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간부정당은 원래 독립된 각 지방의 선거위원회의 이완된 연락조직으로서 성립된 것이어서, 말하자면 지방분권적 성격을 체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중정당은 중앙에서의 정치운동으로 출발해서, 의회에 그 대표를 파견할 필요 때문에 지방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중앙집권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전국 조직이건 선거구 조직이건 요컨대 당원의 당조직인데, 당이 선출하는 의원들은 의회 안에서 협동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으므로 특별한 원내조직, 즉 원내정당을 만들게 된다. 즉 의원은 당원조직의 일원인 동시에 원내정당의 일원이기도 하므로 이 양자의 관계, 특히 후자의 당원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이 문제가 된다. 당 성립의 역사적 배경으로 볼 것 같으면 간부정당의 경우에는 먼저 형성된 것이 원내정당으로, 그 구성원의 재선을 확보하고, 다시 새로운 다수의 의원들을 선출하여 원내정당의 세력을 확대시킬 목적으로 당원조직이 만들어졌으므로 당원조직은 원래 원내정당 때문에 있으며, 봉사하는 수단이며, 당원조직이 원내정당을 구속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된다. 영국의 자유당을 예로 든다면 1876년에 전국자유당연합이 조직되어, 한편으로 선거구조직을 민주적인 것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또 한편 이와 같은 선거구조직으로 형성된 전국연합에 의하여 당출신 의원의 원내행동을 지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이 기도는 실패로 끝나고 원내정당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대중정당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노동당이나 사회주의정당의 경우 먼저 형성된 것은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운동과 같은 원외의 대중조직·대중운동이며, 당원조직은 원내활동의 필요 때문에 그 후에 형성되어 선거운동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의원들이 원내에서 조직한 원내정당은 당원조직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네의 정치적 요구나 정책을 의회를 통해서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당원조직이 원내정당에 요구와 지시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대중정당이 원내정당의 당원조직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것이 근대적 의회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로서 정권교체 체제 안에 묶여 버렸을 때에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원내정당의 독립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당내민주주의는 당원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당의 운영에 참여하여 그 의사에 따라 정당이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당의 의사결정의 최고기관인 당대회에 일반당원이 대의원을 통해서 참가하며, 당대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당의 임원은 일정한 임기 중 그 직무를 수행하고, 당대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조직형태이다. 그러나 문제는 형식적인 조직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당원의 의사로 당운영의 내용이 좌우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간부정당은 권위주의적·전통적 성격이 농후하여 당수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 당간부의 독재적 지배가 일반적인 사실이 되고 있다. 당수·당간부·원내정당·당원조직의 순서로 일관된 권위주의적 지도체제가 확립되어 있어 일반당원으로부터 상향하는 통제기능의 선은 매우 약하다. 이에 반해 대중정당은 당내민주주의의 원리를 당체제로서 내세우고 있으므로, 당원대중의 의사가 당지도부에 미치는 영향은 조직면에서 상당히 강하다. 즉 원리적으로는 당대회·집행부·원내정당·당수의 순서로 당원대중의 상향적 의사에 의해 민주적인 당운영이 보장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당내민주주의는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란 정당이 투쟁단체적 성격 때문에 신속한 의사결정의 능력과 군대적 규율을 가진 계층적·통일적 조직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과 방대한 수의 당원과 막대한 당재정과 정치의 복잡화 및 전문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당사무국 관료의 발언권이 증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당관료를 구사하는 실력을 가진 소수 간부의 수중에 당의 실권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당원은 무력함과 무관심 속에 빠지는데, 이것이 또 소수자의 독재를 필요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 악순환이 로베르트 미헬스(1876년-1936년)가 '과두지배의 철칙'이라고 부른 병리현상이다. 정당은 본래 근대적 의회정치하에서 등장하고 발전한 것이지만, 의회정치의 원리와 정당제도간에는 조화되지 않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의회정치의 입각점이 되는 국민대표권의 개념은 의원의 독립성을 요구하지만, 정당조직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의원을 당 의사의 구속하에 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국가가 정당을 오히려 적대시했다. 그러나 정당이 의회정치의 현실의 운영에 불가결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거법이나 의회법으로 이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또 나아가서는 국민의 정치적 통합이라는 정당의 중요 기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정당운영에 따르는 각종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관계의 입법 노력도 추진되고 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입법은 예전에는 원내위원회의 구성, 선거운동,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확보, 정치자금의 공개 등 개개의 사항에 관해 필요한 범위내에서 규제하는 내용에 그쳤으나, 근래에는 서독·이탈리아 및 한국처럼 헌법 중 정당에 관한 원칙규정을 두고, 또 정당에 관한 독립입법을 하는 경우(아르헨티나·서독·한국 등)도 생기게 되었다. 독립적인 정당입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반체제 정당의 목적은 파시즘 정당이 헌법상의 자유를 십분 이용하여 헌법체제 자체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쓰라린 경험에서 온 것이나, 서독에서는 1956년에 공산당이 반체제정당의 낙인을 찍혀 해산되었다. 정당을 대상으로 하는 독일의 법적 규제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연방공화국헌법 21조는 이러한 위임법률의 하나로서 1967년에 정당법이 제정·시행되었다. 민주노동당 (대한민국) 민주노동당(民主勞動黨)은 2000년 1월 30일 창당하여 2011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진보주의 정당이다. 국민승리21이 이 당의 전신이며, 2004년 17대 총선거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1%)을 획득하여 진보정당 최초의 원내진출을 달성하였다. 2008년 당의 한 축이었던 평등파 당원들이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결성하면서 분당되었고, 2011년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과 합당을 선언하여 통합진보당이 출범되면서 소멸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전신은 1997년 10월에 결성한 국민승리21이다. 국민승리21의 주요 세력은 진보정당 추진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민중정치연합'(대표:노회찬)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던 민주노총, 민족 민주운동을 대표하는 전국연합이었는데, 1997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전국연합은 이탈하고, 남은 두 세력을 중심으로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대표:권영길, 부대표:노회찬)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하였다. 지역구 당선자(2명)는 권영길(경남 창원을) 의원과 조승수(울산 북구) 의원이었고, 특히 정당 투표에서 13.03% 득표하여 8명의 비례대표를 당선시켜 '44년 만의 진보 정당 원내 진출'이라고 묘사되는 큰 성과를 얻었다. 국회의원 총선거 직후에 시행된 제2기 지도부 선거에서 김혜경 후보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7대 총선거 당시 울산 북구의 음식물 자원화 시설 관련 간담회에서 있었던 조승수 의원(당시 국회의원 후보)의 발언이 빌미가 되어 2005년 9월에 조승수 의원이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10월 26일에 시행된 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정갑득 후보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패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전체 의석 수는 총 9석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측은 조승수 의원이 뇌물수수 등의 범죄사실이 없으며, 조승수 의원의 의원직 박탈은 정부의 민주노동당 탄압의 일환이라고 비판하였다. 2007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의원이 심상정, 노회찬 두 후보를 누르고, 민주노동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의 득표율(712,121 표)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4년 제17대 총선의 13.03%의 득표율은 물론, 2002년 대통령 선거의 3.9%보다 낮아진 것이다. 각 시도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은 곳은 울산광역시(8.4%)이다. 민주노동당은 여러가지 문제로 진보신당과 분당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2007년 대선의 저조한 득표결과로 인한 지도부 책임론이다. 대선 이후 자주파의 지지를 받던 문성현 대표가 퇴진하고, 평등파에 속하는 심상정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심상정 위원장은 혁신안을 통해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진보정당으로서의 혁신을 위하여 노력했는데, 이것은 여러가지 당내 논쟁을 촉발시켰다. 혁신안의 핵심 내용은 당시 일심회 사건에 연루되어 당내 정보를 북한에 넘겨왔던 두 명의 당원을 제명하고 자주파 간부들을 당내 2선으로 물러나게 하며, 제3세력 중 일부에서 주장하였던 정파등록제를 도입하여 당내 여러 계파들을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것 등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왔던 당직선거에 대한 문제였다. 그동안 당직선거는 인터넷 투표를 악용한 대리투표(예를 들어 당직자가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당원들에게 자신의 정파 후보를 투표하게 하는 방식)와 오프라인 투표에서의 "몰표"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는데 대선 이후 부산의 한 지역위원회 위원장 투표에서 평등파 후보가 단일 후보로 나오자 다수파인 자주파에서 일부러 낙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부산에서 상당한 탈당이 이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북핵 사건으로 인한 종북주의 문제다. 2005년 북한의 핵보유 선언에 이은 2006년 북한 핵실험에 대한 입장 차이(평등파는 북한 핵실험을 규탄할것을 주장했고, 자주파는 북핵은 미국에 맞서기 위한 자위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규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로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에서 상당한 감정싸움이 진행되었고 심지어는 조승수 전 의원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신당 창당의 목적을 자주파의 종북주의 문제로 규정할 정도로 상당한 논란이 지속되었다. 결국 이러한 파행들로 인하여 당내 혁신에 한계를 절감한 당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의 모색이 본격화 되었고, 2008년 1월 11일 부산 해운대 평당원 52명의 탈당을 시작으로 분당과정을 겪게 된다. 탈당을 선언한 당원들과 평등파 일부가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선언하며'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발족했고 이들은 2월 3일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일명 분당대회) 이후에 진보신당을 창당하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심상정 위원장은 혁신안이 부결될 경우 탈당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반면 자주파 대의원들은 민주노동당이 국가보안법 피의자들을 이중처벌 한다는 점 등을 들어 혁신안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자주파와 평등파에 속하지 않는 제3세력들 중에는 자주파의 패권주의적 당 운영을 비판하는 동시에 평등파가 사실상 자주파를 대체하여 당내 권력을 쥐려 한다는 점과 함께 정파등록제를 통해 자신과 노선이 다른 계파들을 통제하려고 한다는 점을 비판하는 세력도 있었다. 결국 2008년 2월 8일, 센트럴시티 9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자주파 대의원들의 반대로 혁신안의 핵심 내용은 부결되었으며 자주파의 수정안대로 통과되었다. 혁신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위원장 등 비대위원 전원이 사퇴하였고, 민주노동당 제1기와 제2기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인물들 가운데 김혜경, 주대환, 김종철, 심재옥, 홍승하, 김기수 등이 탈당하였으며,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단병호도 탈당하였다. 임시당대회 이후 2008년 4월까지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사람은 16,904명에 이르렀고, 2008년 1월 당시 11만여 명에 이르던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9만 4천여 명으로 줄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사람들 중 일부는 2008년 2월 21일 '진보신당연대회의'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2008년 3월 진보신당 창당이 공식 선언되었고, 민주노동당은 분당되었다. 2008년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창원시 을 선거구에서 권영길 후보, 사천시 선거구에서 강기갑 후보가 각각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비례대표는 곽정숙, 홍희덕, 이정희 세 명의 후보가 당선되어 지난 2004년보다 5석 줄어든 5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 권영길 의원은 진보정당 국회의원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하였고, 강기갑 의원은 여론 조사 결과를 뒤엎고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측근인 이방호보다 182표를 더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2004년 총선의 13.1%에 못미치는 5.7%를 기록했으며, 진보신당의 2.9%를 합쳐도 9%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얻은 3.0%의 득표율보다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총선이 끝난 5월 초부터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이 불거져 나오자,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의원을 중심으로 졸속협상 비판,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한 투쟁에 돌입했다. 당 지도부가 일주일 동안 단식농성을 치렀으며, 이후에는 협상 내용을 비판하는 촛불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5월 말에는 정당 지지율이 10.3%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에는 강기갑이 당 대표에 선출되고, 이정희가 정책위의장이 되는 등, 국회의원단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구조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2009년 들어 벌어진 재보궐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텃밭으로 알려진 호남 지역에서 1명의 광역의원, 1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한편,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는 김창현 후보가 출마하였다가 진보신당의 조승수와의 여론조사 단일화를 이루며 사퇴하였고, 조승수가 울산 북구에 당선되었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에서는 "진보진영 단일후보 조승수 후보의 승리에 박수를 보낸다."는 논평을 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과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 인천에서 기초단체장 2명을 배출했고, 36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다. 그리고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역시 야권 후보 단일화로 전남 순천에서 최초로 호남 출신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2010년에는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 간의 마찰이 있었는데 경향신문은 '삼대세습을 비판 하는 것이 진보정당이 할 일'이라며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고,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이것은 색깔론과 같은 것이라며, 경향신문을 비판하며 일부에서는 절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이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민주노동당은 6.15남북 공동선언을 기초하여 이들 여론에 대해서 입장을 밝혔다. 다음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의 일부이다. 그 외에도 민주노동당은 부유세의 신설을 통한 빈부의 격차 해소와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2002년 대선과 2007년 대선에서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정책이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이중 무상 급식은 민주노동당이 가장 먼저 내놓은 정책으로 2010년 ~ 2011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정국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외에도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이자제한법,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같은 서민 정책도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들이었다. 처음 민주노동당이 주장한 부유세도 참여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로 빛을 봤다. 일반적으로 다른 정당이나 언론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남북통일 문제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과 관련된 정책만을 주되게 추진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기간 동안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들은 다음과 같다. 2000년 1월 30일, 민노당 창당대회는 강령과 정강정책을 채택한 뒤, 권영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200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득표수 미달로 해산된 민노당은 5월 24일 재등록한 뒤 6월 11일 당 대회에서 16대 총선 공식 평가안을 의결하고 김혜경 전 서울 관악구 의원과 최순영 전 경기 부천시 의원을 여성 부대표로 선출했다. 2001년 2월 24일, 민노당 대회는 2001년 사업계획과 진보세력 연대를 통한 재창당 방안, 2002년 양대선거 기본 방침등을 논의했다. 2002년 3월 16일, 민노당 당 대회는 경선을 통해 권영길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했다. 2002년 9월 8일, 민노당 대회는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90.8%의 찬성을 받은 권영길 대표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했다. 2003년 3월 1일, 민노당대회는 비례대표 공천과 당원소환권을 골자로 당헌을 개정하고, 부대표 보궐선거를 치러 김형탁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부대표로 선출했다. 2003년 11월 1일, 민노당 대회는 농민위원회 신설과 농민에 대한 부문할당 등 전국농민회총연맹과의 합의를 인준했다. 2004년 6월 6일, 민노당 당 대회는 전자투표를 도입한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당직자 선거를 치른 결과,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원내진입 이후 대거 유입된 자주파의 지원을 받은 김혜경 부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2005년 2월 27일, 민노당 대회는 혼재된 지역조직을 시군구 단위 지역위원회로 편제하는 것을 골자로 당헌을 개정하고, '주한미군을 감군 및 후방배치'한다는 강령을 '철수'로 개정하였다. 2005년 10월 31일, 김혜경 최고위가 10.26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자 12월 5일, 민노당 중앙집행위는 당 국회의원-시도당위원장 연석회의가 추천한 권영길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인준했다. 결선투표 2006년 2월 26일, 민노당 대회는 진성당원 총투표를 통해 문성현 경남도당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 뒤, 중앙위 명의로 발의된 결선투표 부정선거 의혹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최고위와 예비당원제 관련 당헌을 개정했다. 2006년 7월 24일, 민노당 대회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의 10%, 모든 선출직, 임명직 5%를 장애인에 할당하는 장애인할당제를 의결하고, 최고위원이 기타 당직을 의무로 맡게 하고 확대간부회의를 월 1회로 정례화, 시도당위원장에게 소집권을 부여하도록 당헌을 개정하였다. 2007년 3월 11일, 민노당 대회는 대의원 정족수 미달(2/3에 38표 부족)로 국민참여경선을 도입하는 당헌개정안을 부결시키고, 예결산 심의,의결권을 중앙위로 이관하는 안과 최고위원 숫자를 줄이고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대표최고위원이 임면하는 안 역시 부결시켰으나, 정기 당 대회 간격을 2년으로 연장하는 안은 통과시켰다. 결선투표 결과 2007년, 민노당은 7월 20일부터 9월 9일까지 전국순회경선을 실시해 권영길 전 대표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보다 득표가 감소하면서 일심회 사건을 비롯한 자주파의 종북 문제와 당직선거 부정 문제 등이 붉어지자 2007년 12월 29일, 문성현 최고위는 심상정 전 원내수석부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천한 뒤 총사퇴했다. 이후 2008년 1월 12일, 중앙위원회는 심상정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인준했다. 2008년 2월 3일, 민노당 대회는 '민주노총에 의존'하고 '친북 논란에 적극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대선패배평가와 종북논란을 일으킨 일심회 사건 관련 당원들을 제명안 등 비대위가 제안한 혁신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심상정 비상대책위원장을 포함한 비대위원들과 평등파 당원들이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2008년 2월 19일, 민노당 중앙위는 총사퇴 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한 혁신위를 대신해 천영세 대표대행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인준했다. 2008년 7월 17일, 민노당 대회는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강기갑 전농 전 부의장,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오병윤 전 광주시당 위원장, 박승흡 대변인, 최순영 전 부대표, 이영순 전 의원, 우위영 전 문예위원장과 민주노총 몫의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전농 몫의 최형권 전농 정치위원장을 각각 최고위원으로 선출했으나, 과반 득표자가 없어 대표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1,2위간 결선투표에 들어갔다. 7월 23일부터 7월 24일까지 진행된 온오프라인 결선투표 결과, 강기갑 전 부의장이 이수호 전 위원장을 꺾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6월 21일, 민노당 대회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 국민참여당 들과 연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2010년 3월 1일, 민노당 대회는 불법후원 논란으로 당원 전자투표가 불가능하게 되자,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에 한해 후보를 지역위 운영위, 당 대회에서 추천해 중앙위에서 인준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민노당은 7월 3일부터 7월 7일까지 진성당원 총투표로 치러진 당직자선거를 통해 이정희 의원, 장원섭 전 광주시당 위원장, 김성진 전 최고위원, 정성희 전 사무부총장을 일반명부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대표최고위원은 최고위원 선거 1,2위를 차지한 이정희 최고위원과 장원섭 최고위원 간의 결선투표를 통해 선출될 예정이었으나, 장원섭 후보의 사퇴로 이정희 후보가 찬반투표를 통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1년 6월 19일, 민노당 대회는 진보신당과의 합당을 통한 통합진보정당 건설과 당 강령에서의 '사회주의' 문구 삭제를 의결했다. 2011년 8월 28일, 민노당 대회는 진보신당과의 통합 합의문을 통과시키고,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안을 부결시켰다. 2011년 9월 25일, 민노당 대회는 참여당과의 통합 안을 상정, 64.6%의 찬성을 받아 합당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 66.7%를 채우지 못해 부결되었다. 2011년 11월 27일, 민노당 대회는 당권파 지도부의 지속적인 압력 끝에 참여당과의 합당을 의결함으로써,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는 통합진보당으로 출범하였다. 2010년 2월 6일, 경찰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혐의 규명을 위해 영장을 발부 받아 확보하려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서버 하드디스크를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빼내고 제출하지 않았다. 전교조와 전공노의 불법 정치 행위를 수사하던 경찰은 이들의 당원 가입, 당비 납부, 투표 기록 등을 확인하기 위해 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KT 인터넷데이터센터(IDC) 서버관리실에 있는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및 투표사이트 서버를 압수수색하였지만 관련 기록이 저장되어 있던 하드디스크 2개가 사라져서 압수수색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사라진 하드디스크 2개는 서버관리업체인 스마일서브 직원이 민주노동당의 요구로 하드디스크를 빼내서 전달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압수수색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당의 사유재산을 따로 보관한 것으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민주노동당 측 주장은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며 이는 영장집행중에 행한 증거인멸죄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압수수색과정에서 선관위에 등록되지 않은 민주노동당 계좌에서 10억원이 강기갑 대표 등 당직자의 계좌에 유입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동안 당의 공식 계좌로 입금되었다거나 노조조합비라고 밝혔던 돈이 소속 국회의원에게 넘어간 것에 대한 비판받고 있다. 정계와 인터넷에서 민주노동당의 행보가 친북, 종북 성향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1년 5월 30일 진보진영에서 논의중인 통합정당 정책 합의 과정중 진보신당이 통합진보정당의 정책으로 “북한의 3대 세습 반대 입장을 채택하자”고 요구한 데 대해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분단의 이분법”이라며 비판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이러한 가운데 2011년 8월 26일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과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에서 민주노동당 해산 청원에 나선 사실도 있다. 이들은 법무부에 '해산청원서'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에 대해 헌법학자인 김철수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2011년 8월 12일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민주노동당은 헌법적으로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벨 군 군론에서, 아벨 군(Abel群, ) 또는 가환군(可換群, )은 교환 법칙이 성립하는 군이다.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벨 군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교환 법칙을 만족시키는 군 formula_3이 주어졌다면, 여기에 와 같이 정수환의 작용을 정의할 수 있다. 반대로, 정수환 위의 가군 formula_8이 주어졌다면, 정수환의 작용을 잊으면 formula_3는 가환 법칙을 만족시키는 군을 이룬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생성 집합(生成集合, ) formula_11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부분 집합이다. formula_10의 최소 생성 집합(最小生成集合, )은 생성 집합 가운데, 집합의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이다. 최소 생성 집합이 유한 집합인 아벨 군을 유한 생성 아벨 군(有限生成Abel群, )이라고 한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일차 독립 부분 집합(一次獨立部分集合, ) formula_18는 그 합이 0인 선형 결합이 자명한 선형 결합밖에 없는 부분 집합이다. 즉, formula_19가 유한개의 성분들만 0이 아닌 formula_20개 음이 아닌 정수들의 순서쌍이라고 하면, 일 필요충분조건은 formula_22인 경우다. 아벨 군 formula_10의 계수(階數, ) formula_24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 기수이다. 따라서,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의 경우, 아벨 군으로서의 계수는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과 같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원소 formula_12 및 소수 formula_31가 주어졌을 때, formula_32의 formula_31-높이() formula_34는 다음과 같다. 아벨 군들의 집합 formula_36이 주어졌다면, 직접곱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군의 직접곱의 특수한 경우이며, 아벨 군들의 직접곱은 항상 아벨 군을 이룬다. 아벨 군들의 집합 formula_36이 주어졌다면, 직합 를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가군의 직합의 특수한 경우이다. 직합은 직접곱의 부분군이다. 만약 formula_41가 유한 집합이라면 직합은 직접곱과 같으나, 무한 집합이라면 직합은 직접곱의 진부분 집합이다. 임의의 크기의 집합 formula_41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우변은 기수의 합이다. 아벨 군들의 집합 formula_36이 주어졌다면, 텐서곱 을 취할 수 있다. 이는 가군의 텐서곱의 특수한 경우다. 다음과 같은 포함 관계가 성립한다. 특히, 모든 아벨 군은 데데킨트 군이므로,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은 정규 부분군이다. 아벨 군들의 직접곱은 아벨 군이다. 아벨 군의 부분군은 아벨 군이다. 그러나 아벨 군의 자유곱은 아벨 군이 아니다. 유한 생성 아벨 군의 유한 개의 직합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을 이룬다. 모든 아벨 유한군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이며, 계수가 0이다. 모든 아벨 군 formula_10에 대하여, formula_10의 계수는 formula_10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보다 같거나 작고, formula_10의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는 formula_10의 크기보다 같거나 작다. 아벨 군 가운데 단순군인 것은 소수 크기의 순환군 formula_51밖에 없다. 아벨 군은 정수환 위의 가군이므로, 가군론을 적용할 수 있다. 가군론적 각종 성질은 아벨 군의 성질에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서의) 크룰 차원은 다음과 같다. 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formula_55의 크룰 차원과 같다. 즉, formula_56일 경우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1이며, formula_58인 경우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formula_60이며, 0 또는 1이 아닌 경우 formula_10의 크룰 차원은 0이다. 아벨 군 formula_10의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서의) 길이는 그 합성열()의 최대 길이와 같다. 예를 들어, 아벨 유한군 formula_63의 길이는 formula_64의 소인수 분해가 일 때 formula_66이다. 무한 순환군 formula_4의 길이는 무한대이다. 정역 formula_68 위의 가군의 계수는 formula_69이다. 여기서 formula_70는 formula_68의 분수체를 뜻하며, formula_72는 분수체 위의 벡터 공간으로서의 차원이다. 이 경우, 아벨 군의 가군론적 계수는 아벨 군으로서의 계수와 같다. 아벨 군은 정수환 위의 가군이다. 대수기하학적으로, 정수환의 스펙트럼은 다음과 같이, 소수 주 아이디얼을 닫힌 점으로 하는 1차원 스킴이다. 가환환 위의 가군은 가환환의 스펙트럼 위의 가군층을 이룬다. 즉, 아벨 군은 정수환의 스펙트럼 formula_73 위의 층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유한 생성 아벨 군 의 지지 집합은 이다. 가군층의 직합 및 텐서곱은 아벨 군의 직합 및 텐서곱과 같다. 아벨 군 formula_10의, 닫힌 점 formula_77 위에서의 가군층의 올은 유한체 formula_78 위의 벡터 공간 이며, 일반점 formula_80 위에서의 가군층의 올은 유리수 위의 벡터 공간 이다. 즉, 일반점 위에서의 가군층의 차원은 아벨 군의 계수와 같다. 예를 들어, 순환군 formula_82의 지지 집합은 formula_83의 소인수들이다. 만약 formula_82 및 formula_85이 주어졌을 때, 두 아벨 군의 텐서곱은 이 된다. 특히, formula_83과 formula_64이 서로소라면 이는 자명군이 된다. 기하학적으로, 이는 formula_89의 지지 집합은 formula_82의 지지 집합과 formula_85의 지지 집합의 교집합이 되기 때문이다. 두 지지 집합이 겹치지 않는다면, 텐서곱이 항상 0이 된다. 아벨 군을 정수환 위의 가군으로 간주하였을 때, 사영 가군은 자유 아벨 군이며, 단사 가군은 나눗셈군이다. 임의의 아벨 군 formula_10는 자유 아벨 군 formula_93의 몫군 formula_94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자유 아벨 군의 모든 부분군은 자유 아벨 군이므로, 이는 길이가 1인 사영 분해를 이룬다. 따라서, 아벨 군 formula_10의 사영 차원은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임의의 아벨 군 formula_10은 어떤 나눗셈군 formula_102의 부분군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나눗셈군의 몫군은 역시 나눗셈군이므로, 이는 길이가 1인 단사 분해를 이룬다. 따라서, 아벨 군 formula_10의 단사 차원은 다음과 같다. 아벨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109는 대수 구조 다양체의 범주이므로, 완비 범주이자 쌍대 완비 범주이다. 이 경우, 각종 극한과 쌍대극한은 다음과 같다. 다시 말해, 정수환 위의 단사 가군은 나눗셈군이며, 정수환 위의 사영 가군은 자유 아벨 군이다. 아벨 군의 아벨 범주이며, 따라서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망각 함자 의 왼쪽 수반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집합을 그 집합으로부터 생성되는 자유 아벨 군에 대응시킨다. 마찬가지로, 포함 함자 의 왼쪽 수반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군을 그 아벨화에 대응시킨다. 또한, 아벨 군의 범주에서 유사환의 범주로 가는 충실충만한 함자 가 존재한다. 이는 아벨 군 formula_115를 모든 곱이 0인 유사환 formula_116, formula_117으로 대응시킨다. 폰트랴긴 쌍대성에 의하여, 아벨 군의 범주의 반대 범주는 콤팩트 하우스도르프 아벨 위상군과 연속 군 준동형의 범주와 동치이다. 또한, 아벨 유한군의 범주의 반대 범주는 스스로와 동치이다. 아벨 군의 모임은 하나의 2항 연산(+)과 하나의 1항 연산(−), 하나의 0항 연산(0)을 갖는 대수 구조 다양체이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와 마찬가지로, 아벨 군의 합동 관계는 임의의 부분군에 의하여 정의된다 (아벨 군의 경우 모든 부분군이 정규 부분군이다). 아벨 군들은 일차적으로 계수 formula_24에 의하여 분류된다. 이는 기수이다. 일반적인 아벨 군은 분류하기 힘들다. 다만, 다음과 같은 부분적인 분류가 존재한다. 모든 아벨 유한군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준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유일하다. 이를 소분해(素分解, )라고 한다. 여기서 formula_31는 소수이다. 마찬가지로 아벨 유한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이를 불변 인자 분해(不變因子分解, )라고 한다. 여기서 이다 (formula_125는 formula_126가 formula_127의 약수임을 뜻한다). 이 두 분해는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를 사용하여 서로 동치임을 보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와 같다. 여기서, 만약 formula_131라면 formula_132으로 정의한다. 아벨 유한군은 항상 계수가 0이며, 최소 생성 집합의 크기는 formula_133이다. 즉, 불변 인자 분해에서 항의 수와 같다. 아벨 유한군의 자기 동형군 역시 완전히 알려져 있다. 소분해가 주어진 아벨 formula_31-유한군의 자기 동형군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항상 이며, 이다. 임의의 아벨 유한군 의 자기 동형군은 이다. 모든 유한 생성 아벨 군 formula_10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준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유일하다. 여기서 formula_143는 아벨 유한군이며, formula_10의 꼬임 부분군이라고 한다. 자연수 formula_145은 formula_10의 계수와 같다. 꼬임 부분군이 자명군이며, 계수가 1인 아벨 군들은 다음과 같이 완전히 분류된다. 계수가 1인 아벨 군 formula_10가 주어졌다고 하자. 임의의 formula_12 (formula_149)에 대하여, 모든 소수 formula_31에 대한 formula_31-높이들의 수열 을 정의할 수 있다. 임의의 두 원소 formula_1 (formula_154)에 대하여, 계수가 1이므로 항상 인 formula_156이 존재한다 (formula_157). 따라서, 만악 formula_31가 formula_83 또는 formula_64의 소인수가 아니라면, formula_161가 된다. 즉, formula_162와 formula_163는 유한 개의 성분을 제외하고는 서로 일치한다. 이러한 두 formula_164에 대하여 와 같이 동치 관계를 정의하면, 동치류 formula_166는 formula_12에 상관없이 유일하게 정의된다. 이를 formula_10의 형() formula_169라고 하자. 그렇다면, 꼬임 부분군이 없는 계수 1의 두 아벨 군 formula_10, formula_171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계수가 2 이상인 아벨 군의 분류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계수가 2 이상인, 꼬임 부분군이 자명한 아벨 군의 분류는 계수 1인 경우와 비교할 때 (어떤 집합론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훨씬 더 어렵다. 흔히 볼 수 있는 아벨 군의 예로는 다음이 있다. 역사적으로, 군론은 고차 방정식의 해법 가능성 여부에 대한 갈루아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를 연구하던 닐스 헨리크 아벨은 어떤 다항식의 분해체의 갈루아 군이 아벨 군일 경우, 다항식의 해를 거듭제곱근만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이후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사실 갈루아 군이 가해군임이 족함을 보였다. 아벨 군은 가해군의 특수한 경우이다.) 아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카미유 조르당이 이 개념을 "아벨 군"이라고 명명하였다. 군 군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결합법칙 수학에서 결합법칙(結合 法則, associated law)은 이항연산이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는 성질이다. 한 식에서 연산이 두 번 이상 연속될 때, 앞쪽의 연산을 먼저 계산한 값과 뒤쪽의 연산을 먼저 계산한 결과가 항상 같을 경우 그 연산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고 한다. 실수의 덧셈과 곱셈은 결합법칙을 만족한다. 예를 들어 다음 식은 참이다.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가장 쉬운 예는 실수의 뺄셈일 것이다. 다음 식에서, 좌변과 우변의 결과값은 각각 -2와 4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수는 뺄셈에 대하여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실수의 나눗셈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식에서, 좌변과 우변의 결과값은 각각 0.38095...와 3.42857...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실수는 나눗셈에 대하여도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집합 "S"에 대해 정의된 이항 연산 formula_3이 결합법칙을 만족하면 다음 식이 성립한다. 이 때 좌변과 우변의 값은 연산을 수행하는 순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법칙은 formula_3 연산이 세 번 이상 나타날 때에도 확장해서 적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formula_3가 결합법칙을 만족하면 연산 순서를 따로 지정하지 않아도 모호함 없이 수식의 값이 결정된다. 따라서 보통 위의 수식을 괄호 없이 다음과 같이 쓴다. 교환법칙 수학에서, 교환법칙(, )은 두 대상의 이항연산의 값이 두 원소의 순서에 관계없다는 성질이다. 수학에서, 집합 "S" 에 이항연산 * 이 정의되어 있을 때, "S"의 임의의 두 원소 "a", "b" 에 대해 가 성립하면, 이 연산은 교환법칙(交換法則, commutative law)을 만족한다고 한다. 이때 연산은 가환(可換, commutative)이라고도 한다.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연산은 비가환(非可換, non-commutativ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자연수 집합에서 덧셈과 곱셈은 교환법칙을 만족한다. 그러나 뺄셈과 나눗셈은 일반적으로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다. 교환법칙을 만족하는 연산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교환법칙을 만족하지 않는 예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 대통령(大統領, president)은 공화제 국가의 국가원수이다. 대통령의 역할은 정부형태에 따라 달라지며, 같은 정부형태를 채택하더라도 나라마다 구체적인 권한과 의무, 임기 및 선출방식 등 운용이 다르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 및 행정부 수반으로서 이중적 지위를 가지며 정치적 실권이 있는 반면,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권한만 가진 존재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은 국가주석이고, 중화민국에서는 총통(總統, president)이란 명칭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문으로 번역할 때는 똑같이 President로 번역된다. 흔히 경칭으로는 각하(閣下)로도 알려져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사용되다가 제4대 윤보선 정부 때인 1960년 8월 12일 폐지되었으며, 1963년 12월 19일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부활했다가 제13대 노태우 정부 때인 1987년 12월 31일까지 쓰였다. 동양에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는 '통령(統領)'으로부터 비롯된 말이다. 청나라 후기에 '통령'은 오늘날 여단장급의 무관 벼슬 명칭인 근위영 장관(近衛營 長官)을 이르는 말이었다. 또 고대 한나라 시대에 북방 흉노 군대의 장군을 '통령'으로 지칭하는 등 소수 민족 군대의 장군을 비공식적인 표현으로 '통령'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조운선 10척을 거느리는 벼슬을 '통령'이라 불렀다. 일본에서는 '통령'이라는 말이 고대부터 쓰였는데,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라는 군사적 용어였으며, 군사적 수장이나 씨족의 족장을 의미하는 용어로 매우 흔하게 쓰였다. 근대 일본에서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집정관 등 다른 나라의 직위를 설명하는 번역어로 '통령'을 이용하였다. 일본은 'president'를 번역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통령'이라는 용어에 "큰 대(大)" 자를 덧붙여서 '대통령'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최소한 186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는 이미 '대통령'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기 시작하고 있다.『일본국어대사전』에는 1852년에 출간된『막부 외국관계 문서지일(文書之一)』에서 '대통령'이란 낱말이 처음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president'의 번역어로 1817년 '두인(頭人)'이라는 비칭(卑稱)의 성격을 띤 호칭을 사용한 이래, '총리(總理)', '국주(國主)', '추(酋)', '수사(首事), '추장(酋長)', '방장(邦長)', '백리새천덕' 등의 용어를 쓴 바 있다. '통령'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1838년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 '대통령'이라는 용어도 1875년 경 출현하기는 하지만 두 가지 용어 모두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1870년에 이르러 '총통'이라는 용어를 이미 널리 쓰게 되었으며, 총리와 대통령을 구분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화민국에서는 'president'를 '총통(總統)'으로 번역하고, 국부천대 후에도 자국 국가 원수의 직함으로 '총통(總統)'을 계속 쓰고 있다. 한국의 기록에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는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헌영이 1881년 펴낸「일사집략(日槎集略)」이라는 수신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글에서 일본 신문이 "미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 뒤 1884년『승정원일기』에서도 고종이 미국의 국가 원수를 '대통령'이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에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바로 상해 임시정부가 최고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차용되었던 이 용어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서양의 경우, 미국의 헌법의 모태가 된 1787년의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의 구성원들이 영국 헌정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정부 형태 자유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 사상을 충실히 수용하여 탄생하였다. 19세기가 되면, 1819년 대 콜롬비아의 성립을 시작으로 남미 국가에서 대통령제가 시행된다. 그리고 20세기가 되면, 1911년 ~ 1912년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공화제 국가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 소비에트 연방 등 일당제 국가까지 다양했다. 대통령의 헌법상의 지위는 나라마다의 권력구조에 따라 다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함께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의회와 별개 선거로 선출되어 별도의 정당성 기반을 가진다.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의 지위는 입법부와 사법부와 함께 동령에 위치한다. 그러나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은 삼부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지위에 의하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행정부의 수반을 의미하는 대통령이 입법부와 사법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지위에 있기도 하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만을 가지며, 정치적 실권은 행정부 수반인 총리에게 있다. 대통령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의전 등의 형식적 권한만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원집정부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와 함께 행정적 실권 역시 가진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와 달리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이 의회의 신임에 구속되므로, 의회의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의 정치적 실권의 크기도 변하게 된다. 동거정부 출현시 행정부 수반으로서 실권은 총리가 행사하게 된다. 각 국가의 헌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의무는 헌법 준수의 의무, 영업 활동의 금지, 겸직 금지의 의무, 청렴의 의무 등을 들 수 있다. 선출하는 방식도 국민의 직접 투표 혹은 의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입법부 선거와 별도로 행정부 선거를 두는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직선 선출이 대부분이나, 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연방국가의 특성상 시민권자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인단을 선출해 그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투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총득표자수는 많아도 선거인단의 수에서 뒤져 낙선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나라마다 다르고, 나라에 따라 중임(重任)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나 재선이 불가하고, 미국 대통령 임기는 4년이나 재선이 가능하다. 질병 목록 아래는 질병의 목록이다. 동화 동화(童話)란 어린이를 독자층으로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아동 문학의 한 장르이다. 판타지나 우화, 프로파간다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의 이솝우화, 이탈리아의 피노키오, 독일의 헨젤과 그레텔 등 동화로 알려진 문학이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 어린이를 위한 옛날 이야기를 동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문학 유형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 의미에서 동화는 한 지방이나 국가에서 세대를 거치면서 자기 나라말로 구전된 것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적 동화는 종류가 대단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서 동화의 창작은 간과할 수 없는 문학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본격적인 창작동화는 1923년 마해송(馬海松)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이 발표되고, 이어서 《어린이》·《아이생활》·《별나라》 등 여러 잡지와 구연회(口演會)를 통하여 방정환·고한승(高漢承)·진장섭(秦長燮)·정인섭·이정호(李定鎬) 등 색동회 동인들과 기타 이주홍(李周洪) 등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비로소 기반을 쌓게 되었다. 현재도 보리출판사, 사계절출판사, 예영커뮤니케이션 등 다수의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창작동화들을 출판하고 있다. 안네 프랑크 아넬리스 "아네" 마리 프랑크(, , 1929년 6월 12일 ~ 1945년 3월 12일)는 독일의 유대인 소녀로 나치가 네덜란드를 지배한 시기에 쓴 일기로 유명하다. 그 일기는 한국어로는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인 은행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Holländer Frank)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디트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여서-현대 유대교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를 주장하는 정통주의 유대교, 토라의 느슨한 준수를 주장하는 개혁파 유대교로 구분된다. 큰 딸 마르고트와 작은 딸 안네도 어려서부터 시나고그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참여하여 유대교 신앙을 배웠다.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교육, 교통, 거주지 등에서의 인종차별이 실시되고, 1938년 17세 소년 헤어쉘 그린츠판이 거주의 자유 박탈에 항의하다 파리주재 독일대사관 3등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살해한 사건을 구실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테러를 가한 범죄인 수정의 밤 사건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홀로코스트)이 일어나자, 삼촌들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 정책을 강제 추방에서 강제수용소 수용 및 학살로 바꿀만큼 유대인들의 망명을 좋아하지 않았고 영국의 경우 재정후원이 있는 경우에만 어린이의 망명을 허락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공범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개별 자유 수업을 받았으며, 중학교는 유대인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이유는 1938년 이후 유대인들을 유럽사회에서 소외시키려는 나치의 인종차별 실시로, 학교 진학에서도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13살 생일에 (후에《안네의 일기》라고 불리게 된) 붉은 체크 무늬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다. 안네는 일기장에게 '키티(Kitt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은 서부 유럽으로 확대되어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를 중립국가임에도 점령하였고, 곧 네덜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Otto Frank)가 나치의 네덜란드 점령에 대해 그리 위험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7년 1월 26일자 《타임》에서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오토 프랑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사건이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만큼 위험한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이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폐쇄되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없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암스테르담의 프린선흐라흐트(Prinsengracht) 263번지에 있는 펙틴(과일잼에 들어가는 식재료) 공장 사무실에 있는 창고를 책장으로 위장해서 교묘하게 막고(오른쪽 그림의 화살표) 1942년 7월 5일에 자신의 가족을 그곳으로 피신시킬 준비를 하였다. 은신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안네가 일기장에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적었을 정도였으며,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이웃들도 안네 자매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안네 일가가 나치에게 끌려갔다느니 하는 헛소문이 돌만큼 보안도 완벽했다.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자 안네 일가는 새벽에 일어나 옷가지같은 생필품만 챙긴 채 은신처에 갔다. 도망가는 것을들킬까 봐 트렁크는 쓸수 없었다.차별 때문에 안네는 자동 전차를 타지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서 걸어갔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을 불쌍하다고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고 적었다. 이때부터 비밀 저택이라고 이름붙인 은신처에서 2년간 숨어 살면서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안네의 일기》를 적어 갔다. 은신처에서 산 이들은 안네의 가족과 그의 이웃 유대인들(오토 프랑크의 사업을 돕던 판 단과 그의 가족, 치과 의사 뒤셀) 들을 포함한 총 8명이며, 약 2년 동안 생존을 위해 투쟁하였다. 식료품(주로 감자)와 생활용품)은 당시 오토의 공장에 종사했던 3명의 사무직원이 담당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프 기스(Miep Gies)라는 처녀가 심부름을 해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안네의 표현을 빌면 쉴 틈이 없었을 정도로 행동의 자유가 없는 은신처 사람들의 심부름을 해 주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압수과정으로부터 안네의 일기와 그가 습작한 글들을 몰래 빼돌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은신처에서 안네 일가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부친의 먹거리 장사로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누리던 은신생활 이전의 삶과는 달리 먹을 것, 속옷 등의 생활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부족했고, 같이 살기 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결점이 눈에 띄면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지 않기 위해 불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하지만 일기에는 자그마한 행복들도 보인다. 지하경제로 산 고기와 양념으로 소시지를 만들어서 사우어크라우트(양배추를 발효한 음식)와 같이 먹은 이야기, 불어, 영어, 지리, 역사 등을 공부한 이야기, 독후감, 딸기를 사서 먹은 이야기 등의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행복들이 일기에 담겨 있다. 1944년 8월 4일 밤, 익명의 밀고를 받은 나치의 제복 경찰(Grüne Polizei)은 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유대인전원을 체포하고 안네의 가족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래서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4일로부터 불과 3일 전인 8월 1일 화요일로 끝나 있다. 범우사에서 번역한 안네의 일기 해설에 의하면, 안네의 가족을 잡아간 나치의 게슈타포 카를 실베르바우어는 훗날 검거되었다. 안네의 가족을 고발한 밀고자의 신분에 관해서 지금까지 서너 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를테면 창고지기가 한 사람당 5길더를 받고 밀고를 했다는 설이 있는데,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안네는 16세의 나이로 1945년 3월에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Bergen-Belsen)에서 영양실조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해방되기 2달 전이었다.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언니 마르고트도 장티푸스로 죽었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안네가 상심이 커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네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 오토만이 옛 소련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안네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외 은신처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병이나 가스실에서의 학살로 죽었는데, 판단 씨 가족의 경우 부인은 안네와 마르고트와 같은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독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죽었고, 판단 씨는 가스실에서 학살되었으며, 안네의 남자친구였던 페터는 독일군의 수용자 강제이주로 어디론가 끌려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도 하고 수용소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안네가 쓴 일기는 1947년에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편집(안네의 성(性)에 대한 사춘기적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 부모와 은신처의 다른 가족을 비난하는 부분이 삭제되었다)을 거쳐 출판되었으며, 이 일기는 약 60개 국어로 번역되어 약 3천 2백만 권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중 한국어판은 안네 아버지가 편집한 원고를 출판해오다가, 원고를 모두 번역한 무삭제판이 안네가 습작한 단편소설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안네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네의 일기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국외 탈출에 실패한 아버지의 결단으로 2년간 은신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이며, 일기장에서 '키티'(Dear Kitty)라고 부르며 친구에게 말하듯이 써내려간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일부내용은 은신 생활에 들어가기전의 내용(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지만, 대다수 내용은 은신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썼고, 네덜란드어 판은 1947년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일부 원고 편집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1995년 한국어판으로 무삭제 원고를 완역되어,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 비밀경찰이 안네 일행이 살던 곳을 알아내 그 일행은 모두 붙잡혔고 그 뒤 안네는 다음해 3월 수용소에서 16살의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안네는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적은 일기도 퇴고해서 새로 적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기에는 오리지널 일기와 자신이 정서한 개정판 원고의 두 가지가 있다. 이 원고들은 어느쪽이건 완전한 책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에 출간된 책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양쪽을 상호 보완하는 형태로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이 편집의 도중에 안네가 기술한 내용 중, 사춘기 소녀다운 성적 호기심이나 지루한 에피소드, 어머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제 3자들에 대한 비판은 일부 삭제나 정정이 있었다. 그런데 안네 프랑크가 유명해지면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안네의 일기가 허구이며 안네는 실존하지 않았거나 일기의 내용이 부친에 의해서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58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안네가 실존했다면 안네를 체포한 인간을 찾아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치 헌터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은 게슈타포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SD 상사였던 카를 질베바우어를 1963년에 찾아내어 안네가 실존했음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인터뷰에서 실베바우어는 그가 전시중에 SD에서 일했음을 시인했고 안네 프랑크의 사진을 보고 그가 체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에게서 압수한 물건을 담는 가방에서 안네의 일기장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 그의 진술은 오토 프랑크의 진술과 합치했다.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끈질기게 안네의 일기가 허구라는 주장을 계속했으며 1970년대에 영국의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윙은 일기가 가짜라고 주장했고 1976년에 일기가 허위라는 팜플렛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배포하던 네오나치주의자 에른스트 뢰머와 에드거 가이스가 체포되었을때 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재판중에 오토 프랑크의 의뢰를 받은 역사가 팀이 원본을 정밀 조사하여 일기가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1978년 뢰머와 가이스가 상소하면서 독일 내무성 소속 범죄조사국(Bundes kriminalamt ; BKA)은 원본의 종이와 잉크에 대한 과학 분석을 실시해서 "일기를 적을 때 사용한 잉크는 전시중의 것이지만 나중에 기입된 정정사항들은 흑, 녹, 청 볼펜으로 기록된 것이다"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BKA는 이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일기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볼펜은 1950년대에나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일기가 허위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받아들였다. 1986년 일기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전시자료 연구소는 보다 상세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BKA에게 볼펜으로 기술된 부분을 지적할 것을 요구했으나 BKA는 그 부분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추후의 조사를 통해서 볼펜으로 기입된 종이 두 장을 발견했으며 1987년 함부르크의 심리학자로 필적 감정 전문가인 한스 오클먼은 그의 어머니인 도로시 오클먼이 미나 베커와 공동으로 일기를 조사했을 때 그 볼펜의 텍스트를 기입했음을 밝혀내어 일기의 진위에 대한 의문점은 해결되었다. 2003년에 출간된 수정판 일기에서는 논란이 된 두 장의 종이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소설가 가람 이병주는 역사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권위주의와 폭력을 비판하는 소재로 《안네의 일기》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인용했다. 둥젠화 둥젠화(동건화, ; , ; 퉁치화, ; 1937년 7월 7일 ~ )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반환 이후 초대 행정장관을 지냈다. 1996년에 위임하여 1997년 7월 1일 홍콩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취임했다. 2002년 재선되었으나 5년 임기를 채우기 전인 2005년 3월 12일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임했다. 현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다. 음높이 음높이 또는 피치(pitch)는 음의 높낮이를 가리키는 음악용어다. 보통 A4, B3과 같은 표기법을 사용하거나 Hz로 표기한다. 악보에서는 음높이를 줄과 칸으로 표현한다. 음의 진동수가 클수록 음높이는 높아지며, 진동수가 2배가 되면 한 옥타브 높은 음이 된다. 지역별 시대별로 여러 표준 음고가 있었지만 현재는 보통 1939년 런던 국제회의에서 정한 A4 = 440 Hz를 사용한다.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 후국()은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다.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866년 군대를 폐지한 이후로, 국방은 스위스에 의지하고 있다. 또한 1919년 협약에 의해, 따로 정하지 않은 경우에, 제3국에서 스위스 대사가 리히텐슈타인을 대표하여 외교행위를 할 수 있다. 주요 언어는 독일어이고, 국민 대다수가 믿는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이다. 면적은 남북으로 25km, 동서로 6km 정도 뻗어 있으며 세계에서 6번째로 작은 나라이다.(또한 유럽에서는 4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인구는 약 3만 명 정도이다. 독일의 슈베비슈 알프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다. 서쪽은 스위스, 동쪽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국경의 길이는 77.9km이다.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세계에서 둘 밖에 없는 이중 내륙국 가운데 하나이다. 평야지대는 기후가 다소 온화하여 1월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 2도~0도, 7월 평균기온은 15도~18도이며, 푄 현상의 피해를 자주 입는다. 연강수량은 평야부에서 800mm, 산릉부에서는 2,600mm에 이른다. 리히텐슈타인의 행정 구역은 11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산업구조는 2006년 기준 1차산업 2%, 2차산업 45%, 3차산업 53%이며 협소한 국토, 빈약한 부존자원 및 소규모 인구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는 스위스와의 관세동맹, EFTA 가입 및 EEA협약 서명 등 적극적인 대외개방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이같은 대외개방정책과 함께 국내정치 안정, 유리한 세제 및 편리한 교통 등의 조건이 약 1,600여 개의 기업 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주고 있다. 국내 노동력이 부족하여 2만 9천여 명의 노동자 중 1만 3천여 명이 스위스, 오스트리아 및 독일에서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2001년). 농업 부문은 밀을 약간 수입하는 것 이외는 국내에서 자급자족하고 있다. 포도와 포도주, 그 밖에 과실 등이 많이 산출되며, 목초지가 잘 정비되어 축산이 활발하다. 공업에 대한 의존도도 크며, 지금까지의 방직·피혁 이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근대화정책으로 금속가공업, 직물, 화학, 현미경·고주파기·광학기기 등의 정밀기계, 난방기기, 화학제품, 소시지가공, 전지, 제지업, 건축자재 접착기술(Hilti AG), 보일러(Hoval AG), 치과의료기(Ivoclar AG), 금속표면보호(Balzers) 등의 업종이 발달하였다. 또 아름답기로 소문난 우표의 매상이 많아 국고수입의 1/3을 차지할 정도이며,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항상 파두츠의 우체국에 몰린다. 1999년 3월 말에 스위스의 스위스콤이 민영화함에 따라 1921년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맺은 우편·전화협정은 효력이 없어졌으며, 리히텐슈타인은 1999년 4월 우편공사를 설립하였다. 세금 부담이 매우 가볍기 때문에 외국자본이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있으며, 수도인 파두츠에는 2,000개 이상의 회사들이 등록을 해놓고 있다. 최근 전반적으로 경제가 호조를 보이고 있으며 실업률이 1999년 2.0%에서 2002년 1.3%로 감소하였다. 1996년 수출은 24억 7000만 달러, 수입은 9억 173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전자계측기, 정밀기계, 치과용기기, 우표, 하드웨어, 도자기 등이며 , 수출상대국은 EU 62.6% (독일 24.3%, 오스트리아 9.5%, 프랑스 8.9%, 이탈리아 6.6%, 영국 4.6%), 미국 18.9%, 스위스15.7% (2004)이다. 수입품은 기계, 금속 등이고 주요 무역 상대국은 EU(61%)와 EFTA(유럽자유무역연합)국가들이며 특히 스위스(16%)와의 거래가 많다. 음악분야에서는 프란츠 리스트의 친구이자 저명한 작곡가 험퍼딩크(Humperdinck)의 스승이기도 한 작곡가 조셉 가브리엘 라인베르거(Joseph Gabriel Rheinberger:1839~1901)가 유명하다. 리히텐슈타인에는 유명한 음악가뿐 아니라 많은 음악협회나 합창단들이 있는데 그 수가 400개 이상에 이른다. 또한 리히텐슈타인 음악학교는 국립재단으로 열성적으로 음악사업을 육성하며 '국제적 마스터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미술분야에서는 플라스틱 아트로 유명한 게오르크 말린(Dr. Georg Malin)이나 브루노 카우프만(Bruno Kaufmann)등이 유명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정부에서는 'Art on Buildings' 법률로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은행이나 기업들도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부활절 전에 푼켄존탁(Funkensonntag;Spark Sunday)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일종의 마녀 화형식에서 유래하였으며 공공축제이면서 마을 간 대항전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인의 90%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기 때문에 많은 전통이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8월 15일 등 로마 가톨릭교회에 따른 기념일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전체 종교인의 87%를 차지한다. 그외 개신교는 7.2%, 이슬람은 5.4%이다. 국가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유럽 축구 연맹(UEFA)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프로 축구 리그가 없는 나라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축구 클럽은 스위스의 축구 리그에 참여한다. 리히텐슈타인의 외교는 스위스가 대신한다. 리히텐슈타인은 대한민국과 1993년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주스위스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국제 사회상에서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때는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IOC 정회원국으로서 선수 및 임원단을 서울에 파견하기도 했다. 칼 폰 린네 칼 폰 린네( , 1707년 5월 23일 ~ 1778년 1월 10일) 또는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는 스웨덴의 식물학자로서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현대 ‘식물학의 시조’로 불린다. 귀족이 되기 전 이름은 ‘카를 린나이우스(Carl Linnæus)’이고, 스스로는 라틴어 이름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Carolus Linnæus)’를 썼다. 웁살라 근교, 로스폴트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룬트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신학교수이자 식물학자인 셀시우스의 소개로 웁살라 대학교의 식물학자인 루드베크의 조수가 되었다. 1735년, 네덜란드의 하르더르베이크 대학교에서 의학 학위를 땄다. 이 곳에서 식물의 관찰, 분류학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다가 1738년 귀국, 《자연의 체계》, 《식물의 종(種)》을 저술하고, 약 4,000종의 동물, 5,000종의 식물을 다루었다. 속명 다음에 종명 형용사를 붙여서 두 말로 된 학명을 만드는 이명법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변종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투르느폴 밑에서 일하던 바이언의 저작에서, 수술의 중요성을 알고, 수술의 수로 강을 나누고 암술의 수로 목을 나누는 암수술 체계를 만들었다. 《자연 분류법 단편》을 초하여 식물 분류에 통일성 있는 원리를 만들려 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이것은 베르나르드 주쉬와 그의 조카인 앙트와느에 의해 계승되어 완성되었다. 칼 폰 린네는 1707년 5월 23일에 스웨덴의 스텐브로훌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닐스 린네우스와 크리스티나 브로델소니아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혈통에서 처음으로 정립된 성씨를 사용한 사람이었다. 닐스 린네우스가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던 청년 시절, 그에게는 하나의 성이 필요했고, 닐스 린네우스는 자신의 스웨덴 농가에서 자라나던 라임 나무의 라틴어인 Linnaeus을 성으로 삼았다. 이후 린네가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써서 칼 린네우스라고 지어졌다. 린네의 이 라틴어 이름 Linnaeus는 ae 합자로 쓰였는데, 인쇄물이나 손 글씨로도 항상 자신의 이름을 ae 합자로 서명했다. 린네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는 아마추어 식물학자였고, 루터교의 성직자였으며 마을의 부목사였다. 린네의 어머니 크리스티나 브로델소니아는 스텐브로훌트의 교구 목사 사무엘 브로델소니우스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이후 세 명의 딸과 아들 한 명을 더 낳았다. 아들은 사무엘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텐브로훌트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양봉에 대한 저서 또한 썼다. 칼 린네가 태어난 다음 해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사무엘 브로델소니우스가 죽고, 그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가 그곳의 교구목사가 되었다. 칼 린네는 어릴 때부터 식물, 특히 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닐스 린네우스는 자신의 아들인 린네와 함께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꽃을 좋아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꽃을 자주 보여주며 꽃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린네는 식물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칼 린네의 아버지는 린네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라틴어, 종교, 지질학 등을 가르쳤다. 칼 린네가 7살이었을 때, 닐스 린네우스는 선생 한 명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칼 린네의 부모는 그 지역의 자작농의 아들이었던 요한 텔란더에게 린네의 교육을 맡기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칼 린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훗날 린네의 자서전에는 요한 텔란더가 ‘아이의 재능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 텔란더는 린네를 2년 정도 가르쳤는데, 이후 그는 벡셰에 있는 초급 그래머 스쿨(Lower Grammer School) (1717)에 보내졌다. 당시 린네는 공부보다는 식물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주로 시골로 식물을 보러 다니는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했다. 15세에 최고학년이 된 린네는 교장 선생님이었던 다니엘 란네루스에게 지도받았다. 식물학에 관심이 있었던 교장 다니엘 란네루스는 린네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을 알아차리고 린네에게 그의 정원을 관리하게 했다. 또, 그는 린네에게 스몰란드의 주 의사이자 벡셰 김나지움에서 선생님을 하는 요한 로스만을 소개해주었다. 칼 린네의 식물학에 대한 관심은 식물학자였던 요한 로스만에 의해 크게 키워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성 생식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또 린네가 약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24년에 벡셰 김나지움에 입학한 린네는 그리스어, 히브리어, 신학, 그리고 수학을 본격적으로 배워나갔다. 이 커리큘럼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위해 체계화 된 것이었다. 김나지움에서의 마지막 해에, 칼 린네의 아버지 닐스 린네우스는 그의 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선생님들을 만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다. 당황스럽게도 닐스 린네우스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서 칼 린네가 절대 장학생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요한 로스만은 다른 선생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칼 린네에게 약학에 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요한 로스만은 닐스 린네우스에게 린네를 로스만의 가족과 함께 살게 하면서 생리학과 식물학을 배우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닐스 린네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요한 로스만은 린네에게 식물학이 진지한 학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먼저 그는 린네에게 투르네포르의 시스템에 의해 식물을 분류하는 법을 가르쳤고, 이후에는 린네가 세바스챤 바일란트로부터 식물의 성(性)에 대해 배웠다. 1727년에 21세의 청년이 된 칼 린네는 스코네에 있는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 버전인 "Carolus Linnaeus"로 등록하였고, 이 이름은 훗날 린네의 저서의 라틴어 출판본에 쓰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만난 교수 킬리안 스토바에우스는 자연 과학자이자 의사이고, 역사학자였던 그는 린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린네에게 교습과 숙박을 제공했고, 식물학에 대한 많은 책이 있는 그의 도서관을 사용하는 것 또한 허락해 주었다. 또 그는 린네에게 강의의 무료입장권도 주었는데, 이러한 많은 도움 아래에서 대학 생활을 한 칼 린네는 같은 취미를 가진 학생들과 함께 스코네의 식물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갔다. 1728년 8월, 린네는 그가 약학과 식물학을 모두 공부하는 것을 제안했던 요한 로스만의 조언에 따라 웁살라 대학교에 진학했다. 웁살라 대학에는 식물원이 있었는데, 린네는 곧 거기에 매료되었다. 웁살라 대학의 식물학, 동물학, 약리학과 해부학 강의는 그리 좋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린네는 그곳에서 올로프 셀시우스라는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올로프 셀시우스는 신학 교수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였다. 그는 린네를 그의 집에 받아들여주었고, 덕분에 린네는 당시 스웨덴에서 제일가는 식물학 도서관이었던 올로프 셀시우스의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729년에 칼 린네는 "Praeludia Sponsaliorum Plantarum"이라는 식물의 성(性)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교수 루드베크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2학년 밖에 안 된 칼 린네에게 대학의 강의를 맡겼다. 칼 린네의 강의는 인기가 있어 3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곤 했다. 같은 해 6월에 린네는 루드베크의 24명의 아이들 중 3명의 교사를 맡기 위해 올로프 셀시우스의 집에서 루드베크의 집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올로프 셀시우스와 린네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고, 서로의 식물학적 탐구를 계속해서 지지했다. 그 해 겨울, 투르네포르의 분류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한 린네는, 자신의 새로운 분류 체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술과 암술의 숫자를 기준으로 식물들을 분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꽃의 해부학을 담은 "Adonis Uplandicus"라는 식물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1731년 3월, 루드베크의 전 조수인 닐스 로젠이 약학 학위를 가지고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해부학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린네의 식물학 강의를 빼앗으려 했지만, 루드베크가 이를 막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린네는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님과 만났다. 린네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했지만, 그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격려했다. 린네는 부모님의 집을 방문했을 때, 라플란드로 여행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린네보다 앞서 루드베크가 1695년에 같은 여행을 했었는데, 그 당시 탐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불에 타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린네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식물, 동물, 그리고 가능하다면 값비싼 광물을 찾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원주민인 사미인의 관습에 대해 궁금해 했다. 사미인은 스칸디나비아의 넓은 툰드라를 방황하는 순록을 목축하는 유목민들이다. 1732년 4월, 린네는 웁살라의 왕립 과학회에서 그의 여행을 승인받았다. 린네는 5월에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저널을 가지고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가끔씩 그는 길에서 꽃이나 돌을 관찰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끼와 지의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지의류는 라플란드에 서식하는 순록의 주요 식단이다. 린네는 보트니아 만의 해안을 시계방향으로 여행하며 우메오, 룰레오, 토르니오에서 주요한 내륙 관찰을 했다. 그는 10월에 2000 km 정도 되었던 원정에서 돌아왔다. 그는 많은 식물, 조류와 돌 등을 모으고 관찰했다. 라플란드는 비교적 제한적인 종을 가진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린네는 그 곳에서 약 100여 종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의 책 《라포니카 식물상》("Flora Lapponica")의 기초가 되었다. 식물학계에서는 그의 저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린네가 포유류의 분류에 대해 통찰력을 얻은 것도 이 여행 도중이었다. 여행 중 길에 서 있던 말의 아래 턱 뼈를 살피던 중 린네는 “내가 모든 동물이 치아의 종류와 개수, 유두의 개수와 위치를 알면 나는 아마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네 발 짐승의 분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1733년에는 웁살라 대학에서 광물학 강의를 했다. 1734년, 린네는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광산지역인 달라나 원정을 갔다. 이 원정은 달라나 정부에 의해 후원받았고, 기존의 자연물을 분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로로스의 노르웨이 광산업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린네가 웁살라에 돌아갔을 때, 그와 닐스 로젠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팔룬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자는 클래스 쇼흘버그이라는 학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광산 검열관이었던 쇼흘버그의 아버지는 린네가 팔룬 근처의 광산을 방문할 수 있게 해주었다. 클래스 쇼흘버그의 아버지는 린네에게 쇼흘버그를 네덜란드로 데려가 그를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연사를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 중 하나였으며 스웨덴 인들이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주로 가는 곳이었다. 린네는 평소에 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쇼흘버그 아버지의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735년 4월, 린네와 쇼흘버그는 네덜란드를 향해 출발했다. 린네는 하르더르웨이크 대학교에서 약학 박사 과정을 밟기로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로 가던 길에 그들은 함부르크에 들러 시장을 만났는데, 시장은 그들에게 머리가 7개인 히드라의 유해의 박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린네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 박제에는 족제비의 발톱이 달린 발, 그리고 뱀의 피부가 붙어있었다. 린네는 자신의 관찰 결과를 공표했고, 그 히드라를 비싼 가격으로 팔려던 시장의 계획은 망쳐졌다. 이 때문에 시장의 분노를 살 위기에 놓인 린네와 쇼흘버그는 함부르크를 재빨리 떠나야만 했다. 린네가 하르더르웨이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바로 학위를 따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하르더르웨이크는 1주만에도 ‘인스턴트' 학위를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일 먼저 그는 스웨덴어로 작성한 말라리아의 원인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고, 대중 토론에서 자신의 논문 내용에 오류가 없음을 보였다. 다음 단계는 구두 심사를 받고 환자를 진찰하는 것이었다. 2주도 되지 않아 린네는 학위를 받았고, 28세의 나이에 의사가 되었다. 같은 해 여름에 린네는 웁살라에서 사귄 친구인 피터 아테디를 만났는데, 웁살라를 떠나기 전 그들은 한 명이 먼저 죽는다면 다른 한 명이 죽은 사람의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0주 후에 아테디는 암스테르담의 운하 중 하나에서 익사했고, 어류의 분류에 대한 그의 미완성 원고는 린네에게 남겨졌다. 린네는 헤르만 부르하베라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저명한 물리의사이자 식물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부르하베는 린네에게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여행할 기회를 주었지만 린네는 자신이 그곳의 더위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부르하베는 린네에게 그가 요하네스 버만이라는 식물학자를 만나야 할 것을 제안했는데, 린네를 만나고 그의 지식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버만은 겨울 동안 린네와 함께 지내며 서로의 연구를 도왔다. 요하네스 버만과 함께 지내던 동안, 린네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이사이자 하테캠프에 있는 큰 식물 정원의 주인인 조지 클리포드 3세를 만났다. 클리포드는 린네의 식물 분류 능력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를 자신의 의사이자 정원의 관리자로 초청했다. 린네는 버만와 겨울 동안 함께 있기로 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클리포드는 버만에게 한스 슬론 경의 《Natural History of Jamaica》라는 귀한 책을 주면서 린네를 보내줄 것을 설득했고, 결국 요하네스 버만은 린네가 조지 클리포드에게 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1735년 9월 24일, 린네는 하테캠프의 식물 관리자이자 주치의가 되었고, 그가 원하는 어떤 책이나 식물도 살 수 있게 되었다. 1736년 7월, 린네는 조지 클리포드의 자금으로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는 첼시 피직 가든과 그 관리자인 필립 밀러를 보기 위해 런던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린네는 밀러에게 《Systema Naturae》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식물 세부분류법을 가르쳤다. 필립 밀러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때부터 린네의 시스템에 따라서 자신의 정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린네는 식물학자인 요한 제이콥 딜레니우스를 만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에도 갔다. 하지만 린네는 딜레니우스에게 자신의 시스템을 공용으로써 받아들이게 하는데 실패했다. 영국 여행을 끝마친 린네는 많은 희귀 식물종들을 가지고 하테캠프로 돌아왔다. 다음 해, 그는 《Genara Plantarum》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935 속의 식물을 묘사했고, 얼마 되지 않아 《Corollarium Generum Plantarum》이라는 책으로 60가지 추가 속을 보충했다. 린네가 하테캠프에서 이룬 업적은 그곳의 식물들의 분류를 담은 새로운 책인 《Hortus Cliffortianus》를 출판하도록 했다. 그는 이 책을 9개월 만인 1737년 7월에 완성했지만, 1738년까지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낭상엽 식물의 속인 네펜데스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쓴 책이다. 린네는 1737년 10월 18일까지 하테캠프에서 클리포드와 함께 있었는데, 이후에 그는 그 곳을 떠나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병과 네덜란드 친구들의 친절은 그를 네덜란드에 몇 달 더 머물게 했지만, 1738년 5월에 그는 다시금 스웨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1달 정도 파리에 머물렀고, 안토니 쥐시외 등의 식물학자를 만났다. 그는 돌아온 뒤 다시는 스웨덴을 떠나지 않았다. 린네가 1738년 6월 28일 스웨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팔룬으로 가서 사라 엘리자베스 모라에아와 약혼했다. 린네는 그의 후원자가 되어준 카를 구스타프 테신 백작과 만났는데, 백작은 해군 본부에서 린네가 의사직을 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스톡홀름에 있는 동안 린네는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을 창설하도록 도왔고, 제비뽑기를 통해 첫 번째 대표가 되었다. 그의 경제 사정이 한 가정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약혼녀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린네의 결혼은 1739년 6월 26일에 이루어졌다. 7년 후에 사라 모라에아는 첫 아들인 칼을 낳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나라는 딸을, 그 다음 해에는 사라 마그달레나라는 딸을 낳았다. 안타깝게도 사라 마그달레나는 생후 15일 만에 죽었다. 린네는 이후 로비사, 사라 크리스티나, 요하네스와 소피아라는 네 명의 아이를 더 갖게 된다. 1741년 5월, 린네는 웁살라 대학의 약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곧 다른 약학교수와 자리를 바꿔 식물학과 자연사, 식물학 정원을 대신 맡게 되었다. 그는 정원을 철저하게 재건하고 확장했다. 이렇게 웁살라에서 자리를 잡게 된 린네는, 같은 해 10월에 그의 아내와 9살 된 아들과 함께 웁살라에서 살게 되었다. 린네는 교수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찾기 위해 욀란드와 고틀란드에 갔다. 먼저 욀란드로 가서 6월 21일까지 머물렀고, 이후 고틀란드에 1달 쯤 머물다가 웁살라로 돌아왔다. 이 원정을 통해 린네와 그의 학생들은 약 100여종의 기록되지 않은 식물을 찾았다. 이 원정에서 관찰된 것은 훗날 "Olandskaoch Gothlandska Resa"에 출판되었다. 라포니카 식물상과 같이, 이 책은 동물학적, 식물학적 관찰을 모두 담고 있었고, 욀란드와 고틀란드의 문화에 대한 관찰도 담고 있었다. 1745년 여름, 린네는 《Flora Suecica》와 《Fauna Suecica》라는 두 책을 더 집필했다. 《Flora Suecica》는 식물학 책이었고, 《Fauna Suecica》는 동물학에 관한 책이었다. 안데르스 셀시우스는 1742년에 그의 이름을 딴 온도 스케일을 만들었다. 초기 셀시우스의 스케일은 현대와 반대로, 끓는점을 0도로, 어는점을 100도로 설정하였다. 1745년, 린네는 이 스케일을 돌려서 지금 쓰는 표준 스케일로 만들었다. 1746년 여름, 린네는 정부에 의해 스웨덴의 바스터고틀랜드로 다시 원정을 나가게 되었다. 그는 6월 12일에 웁살라를 떠나 8월 11일에 돌아왔다. 린네는 이전 원정에서 함께 했던 에릭 구스타프 리드벡이라는 학생과 함께 스웨덴에 갔다. 다음 해 그는 이 원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것들을 담아 "Wastgota-Resa"라는 책을 출판했다. 린네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정부는 린네에게 최남단인 스카니아로 다시 원정을 떠날 것을 제안했지만,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에 이 일정은 연기되었다. 1747년, 린네는 스웨덴의 왕 아돌프 프레드릭으로부터 최고 의사를 나타내는 “Archiater”라는 작위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그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49년 봄, 린네는 드디어 스카니아로 원정을 갔다. 그는 올로프 소더버그라는 학생과 원정을 함께 했고, 스카니아로 가는 길에 스텐브로훌트에 있는 남매들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이 원정은 이전의 원정과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추가로 호두나무와 스웨덴산 마가목류를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 나무들은 군대에서 라이플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린네의 관찰 결과는 다음해에 출판되었다. 1750년, 린네는 웁살라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아마 그가 웁살라에 있는 시간 동안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린네의 많은 학생들은 세계의 다양한 곳으로 원정을 다니며 식물 샘플들을 수집했다. 린네는 이 학생들 중 우수한 학생들을 그의 Apostle, 즉 사도라고 불렀다. 그의 강의는 대부분의 경우에 크게 인기가 있었고, 식물 정원에서 진행되었다. 린네는 학생들에게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과 다른 사람을 신봉하지 말라는 것을 많이 가르쳤다. 린네의 강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여름 매주 토요일 이루어지는 식물학 교외활동이었다. 린네와 그의 학생들은 식물과 동물을 웁살라 근교에서 관찰했다. 린네가 웁살라 대학교의 교수이자 총장으로 있었을 당시, 그를 따르던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들 중 특별한 17명을 뽑아 "Apostles"라고 칭했다. 그들은 가장 유망하고 열성적인 학생들이었는데, 그들 모두는 린네의 도움을 받아 세계 곳곳으로 식물학 탐사를 다녔다. 그는 자신의 총장으로서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제자들의 원정에 장학금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그는 여정에서 무엇을 찾아보아야 할지 설명을 제시했다. 제자들은 린네의 분류체계에 따라 새로운 식물, 동물 그리고 광물들을, 곳곳에서 모으고 정리했다. 원정이 끝나면 그들은 수집물들을 린네에게 제공하였다. 린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들의 원정 덕분에 범세계적인 린네의 분류법을 만들 수가 있었다. 영국인 식물학자 윌리엄 스턴은, 제자들의 공로가 없었다면 린네의 새로운 분류 체계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제자들은 원정을 하는 과정 중에 생을 마감했다. 첫 번째 제자 크리스토퍼 탄스트롬은 아내와 자식들을 둔 43세의 사제로서 1746년에 그의 원정을 시작했다. 탄스트롬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같은 해에 열대 지방의 풍토병에 걸려 콘손 섬에서 사망하였다. 탄스트롬의 부인은 린네에게 자신의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는데, 이는 훗날 린네로 하여금 젊고, 미혼인 제자들을 식물학 원정에 보내기를 선호하게 했다. 훗날 피터 포스칼와 페르 로플링을 포함하여 6명의 제자가 추가로 원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탄스트롬이 원정을 다녀오고 2년이 지난 뒤, 핀란드 출신의 페르 캄이 두 번째로 북미에 원정을 가게 되었다. 그는 북미에서 2년 6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식물과 동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린네는 캄이 많은 꽃과 씨앗들을 가지고 돌아와 아주 기뻐했다. "Species Plantarum"에 소개되어 있는 700여종 중 90종은 캄이 원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솔란더와 요셉 뱅크스는 제임스 쿡과 함께 호주 원정을 떠났다. 다니엘 솔란더는 자신이 웁살라의 학생으로 있었을 때 린네의 집에서 살았었다. 린네는 그에게 자신의 장녀와의 결혼을 약속할 만큼 그에게 애정이 있었다. 또 린네의 추천으로 솔란더는 1760년에 영국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는 영국인 식물학자 요셉 뱅크스를 만났다. 이후 뱅크스와 솔란더는 제임스 쿡의 원정에 합류하여 1768-71년에 오세아니아에 다녀왔다. 솔란더 이외에도 제임스 쿡과 함께 원정을 다녀온 제자는 이후에도 더 있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었던 제자는 1770년부터 9년간의 원정을 다녀온 카를 피터 툰베리일 것이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3년간 지낸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내의 모든 외국인들은 데지마 섬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툰베리는 식물군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통역가들을 설득함으로써 다양한 식물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자신도 델리마의 정원에서 식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린네가 죽은 다음 해인 1779년에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린네는 웁살라가 너무 시끄러우며 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느껴, 1738년에 두 농장을 샀다. 그 농장의 이름은 함마르비와 사브자이다. 다음 해인 1739년, 그는 옆에 있는 에데비 농장도 샀다. 그는 함마르비에서 가족과 여름을 보냈다. 처음 그곳에는 작은 1층집 밖에 없었지만, 몇 년 뒤인 1762년에는 새롭고 큰 집을 추가하였다. 함마르비에서 린네는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또 1766년에 그는 함마르비 뒤에 있는 언덕에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곳으로 그의 도서관과 식물 컬렉션을 옮겼다. 이는 웁살라의 3분의 1 정도를 파괴하고 그의 주택을 위협한 불 때문이었다. 1735년 《Systema Naturae》가 처음 출간된 후 이 책은 몇 번이나 확장되고 재판되어, 10판이 1758년에 나왔다. 이 판은 동물학적 명명법의 시발점이 되었다. 1757년, 스웨덴의 왕 아돌프 프레드릭은 린네를 귀족으로 인정했고, 1761년에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으며 그는 칼 폰 린네(Carl von Linne)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린네는 Linnaeus를 줄이고 프랑스화한 것이다. 독일 타이틀 von은 그의 작위를 상징한다. 작위를 받은 후에도 린네는 가르치는 일과 집필을 계속했다. 그의 명성은 전 세계에 퍼졌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캐서린 2세는 그녀의 나라인 러시아에서 얻을 수 있는 씨앗을 보내주었다. 그는 지오바니 안토니오 스코폴리와도 교류했다. 그는 의사이자 식물학자였다. 스코폴리는 그의 모든 연구, 발견과 해석을 서로 나누었다. 린네는 그를 매우 존중했고, 그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린네와 스코폴리는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린네는 1763년에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에 대한 의무를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과 같이 10년 이상을 그곳에서 일했다. 이후 린네는 건강상의 이유로 웁살라 대학에서 1772년 12월에 사퇴했다. 린네는 그의 말년에 건강상의 문제에 시달렸다. 그가 1764년에 걸린 심각한 병은 로젠의 치료 덕분에 이겨 낼 수 있었다. 1773년에는 좌골 신경통을 앓았고, 그 다음해에는 발작을 일으킨 후에 몸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1776년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켰고, 오른쪽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며, 기억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감탄했지만, 그 글이 자신이 쓴 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777년 12월에,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몸이 매우 약해졌다. 결국 1778년 1월 10일에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린네는 함마르비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1월 22일 웁살라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도서관과 수집품은 그의 아내 사라와 아이들에게 남겨졌다. 조셉 뱅크스라는 영국인 식물학자는 그의 수집품을 사고자 했지만, 린네의 아들 칼이 거절하고 수집품을 웁살라로 옮겼다. 하지만, 1783년 칼이 죽고 사라가 수집품을 물려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조셉 뱅크스에게 팔고자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뱅크스가 그것들에 흥미를 잃은 이후였다. 대신 그의 지인이 수집품을 사기로 했다. 그는 24세의 의학과 학생인 제임스 에드워드 스미스로, 모든 수집품을 구입했다. 수집품은 총 14000여개의 식물, 3198개의 곤충, 1564개의 갑각류, 3000개의 편지와 1600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5년 후, 스미스는 영국 린네 협회(Linnean Society of London)를 창설했다. 폰 린네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 칼이 결혼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세대에서 사라졌다. 다른 아들인 요하네스는 3살에 죽었다. 린네의 딸 중 2명은 현재 200명 이상의 린네의 후손을 남겼다. 생명의 분류라는 제도는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물질, 또는 생겨난 물질을 형이상학적 방법으로써 첫 번째로 분류하여 발표한 사람이다. 분류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물질, 종, 속과 같이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단어를 제공하였다는 점과, 그의 제도가 린네에 의해 개조되어 보다 일반적인 모습으로 계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에 린네가 식물에 대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생식 방법에에 대한 관찰 등을 포함하여 동물들과 그 분류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대한 분류는 현대에 와서 주로 쓸모없는 추가적 정보로 취급되거나, 잊혀지게 되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분류는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제일실체는 철수, 영희와 같은 존재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이실체는 '사람인 철수와 영희'와 같이 제일실체의 일부분에 대한 서술로, 그에 대한 성질이나 특성 같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피터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사람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이실체라 말할 수 있는 특성은 한낱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종이란 각각의 생명체에 대한 가장 참된 제이실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동물이지만 모든 동물이 인간인 것은 아니다. 또한 속이 종을 포함한다는 것은 자명한 관계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을 포함하는 무한히 많은 개수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속이 발견될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린네의 분류체계 처럼 종을 문이나 강 등의 더 상위 구조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제이실체는 같은 속 안에서 특정한 차이점(종차)을 이용하여 하나의 종을 다른 종 과 구분 짓는다. 따라서 사람은 여러 일반적인 항목에서 나타나는 종차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종차의 합을 통해 종을 정의 내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사람은 살아 있고, 감각이 있고, 이성적인 실체이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정의는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와 같이 종과 그에 따르는 가장 일반적인 속을 포함하고 있다.그러나 종은 같아도 하나의 개체는 서로 다른 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기에, 이러한 종의 정의는 통일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러 속의 집합을 보았을 때, 가장 윗부분은 하나의 실체와, 반드시 실체 안에 존재해야 하는 일반적인 비본질적 성질 아홉 개를 포함한 열 개의 범주로 나뉘어 진다. 실체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지만, 양이나 질과 같은 비본질적 성질은 반드시 실체 안에만 존재한다. 고대의 분류에서는 속보다 상위 범주인 'being'은 그에 따르는 문제로 인해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사람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면 이성이라는 것은 동물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고 마찬가지로 종차란 그 종이 포함되어 있는 속에서는 존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발생된 문제는 중세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해결하기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속의 상위단계에 대해 고려할 수 없었다. 상위단계 'being'에 대해 고려하게 되면 그 안에 속해 있는 실체가 being의 일부가 될 수 없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being'의 문제점은 스콜라철학자들에서부터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해답은, 존재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존재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존재론은 공공적으로 더 나은 부분을 받아들였고, 철학과 실험과학에 선을 그었으며, 그 휴 실험과학은 실용적인 기술의 르네상스에 도달하였다. 고전 학자였던 린네는 다시 이 두 분야의 구분선을 접합하여 계몽주의 시대를 도입하였다. 스위스의 교수인 콘라드 폰 제스너는 당시까지 알려졌던 분류들을 편찬함으로써 중요한 진전을 이끌어내었다. 그 후 유럽인들의 신대륙 발견은 새로운 식물과 동물이 발견됨에 따라 분류하고 조사해야 할 생물의 증가를 이끌어내었다. 기존의 분류 체제는 가끔 같은 식물과 동물 채집품을 보고서도 서로 다른 명명을 하게 될 정도로 새로 발견된 종들을 연구하고 분류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분류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분류의 결과를 찾기 쉽고, 여러 종을 함께 묶어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분류 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형태학을 기초로 하여 비슷한 외모를 가진 생물체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이명법이 개발되었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 사이에는 동물에 대한 조심스러운 연구가 개시되었다. 또한 다양한 해부학적 지식이 발견되오 파브리시어스(Fabricius,1537–1619), 페트러스 세브리너스(Petrus Severinus, 1580–1656),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그리고 에드워드 타이손(Edward Tyson, 1649–1708)와 같은 해부의학자들은 이러한 지식을 이용해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 연구하고 자료를 모아 분류함으로써 분류학에 있어 많은 진전을 일으켰다. 또한 마셀로 말피기 (Marcello Malpighi, 1628–1694), 얀 스웨머담(Jan Swammerdam, 1637–1680), 그리고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2), 로드 몬보도(Lord Monboddo, 1714–1799)와 같은 곤충학자들과 최초의 미생물학자들 역시 분류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종간 관계를 진화의 이론과 연관지어 생각한 초기의 시도였다. 계통학이란 생물 간의 유연관계를 조사하여 계통적인 체계에 따라 생물을 분류하는 학문이다. 계통학자라는 이름은 칼 린네가 그의 저서 《Bibliotheca Botanica》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생물의 수집과 관찰뿐만이 아닌, 그것들을 분류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대표적인 계통학자들에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안드레아 캐살피노, 영국의 자연학자 존 레이, 독일의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아우구스투스 퀴리너스 리비너스, 프랑스의 의사, 식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가 있다. 안드레아 캐살피노는 그의 저서 《De plantis libri XVI》에서 식물의 첫 계통학적 분류를 제시했다. 그는 식물의 줄기와 과실의 구조에 따라 식물을 15가지의 “높은 속”으로 분류했다. 존 레이는 식물, 동물, 자연 신학에 대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영국의 자연학자였다. 그는 그의 저서 《Historia Plantarum》에서 현대 분류학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레이는 2분법적인 과거의 분류 시스템을 버리고 관찰에 의해 발견된 식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식물을 분류했다. 캐살피노와 레이는 분류학적인 위치를 나타내지 않는 기존의 식물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사과와 복숭아는 존 레이의 분류에서 서로 다른 속에 속했지만, 이름은 "Malus"와 "Malus Persica"로 그들의 분류학적인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리비너스와 피톤 드 투르네포트는 이에 한 발 더 나가 속을 분류학적 계층에서 특징적인 계층으로 만들어 식물의 속에 따라 이름을 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우구스투스 퀴리너스 리비너스는 식물의 꽃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며 목이라는 항목을 만들었다. (존 레이와 안드레아 캐살피노의 “높은” 속에 해당) 그는 처음으로 풀과 나무로 식물을 나누는 이전의 방법을 버리고 식물의 과실을 이용해 식물을 분리하고자 했다. 그의 명명법은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의 그것과 비슷했다. 같은 속에 있는 식물의 이름은 같은 단어로 시작하고(속명), 한 가지 이상의 종이 속해있는 속에서 첫 번째 종은 속명만으로 명명되었고, 그 이후의 종들은 종을 구분할 수 있도록 속명 뒤에 추가 단어를 붙여 명명했다. (예시 : 벼의 학명 "Oryza sativa" Linne) 조세프 피톤 드 투르네포트는 강, 아속, 속, 종으로 이루어진 더욱 복잡한 체계를 사용했다. 그는 처음으로 속명과 추가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종명을 일관성 있게 사용했다. 리비너스와 그의 다른 점은 두 가지 이상의 종이 속해있는 속에서 첫 번째 종만이 아닌 모든 종에 추가적인 단어를 붙여 그들을 명명했다는 것이다. 18세기는 자연학에 대한 지식이 팽창하던 시대로 많은 새로운 분야의 과학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는데, 린네 역시 ‘linnaean taxonomy’라 불리는 새로운 범위의 학문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는 생물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과학적 분류에 대한 학문이다. 린네 이전에도 동식물 분류를 시도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린네는 이전의 연구들을 뛰어넘는 본인과 제자들이 수집한 방대한 양의 수집 자료로써 당시에 알려져 있던 대부분의 동식물을 분류체계에 포함시켰다. 이는 당시 식물학자들에게 유용한 검색표를 제공했고, 분류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린네는 이전의 분류 체계를 더 세분화 시켜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 의 세 가지 계와 그에 속한 강, 목, 속, 종, 변종 등의 계급을 새로 도입했다. 린네의 방식은 자연을 3개의 계로 나누는 것으로 시작하여 서로 포함관계를 갖는 집단들로써 구분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계는 서로 다른 강으로, 강은 목으로, 목은 속으로, 속은 종으로 분리되었으며, 린네는 가끔 종에서 더 낮은 단위로의 분류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 분류학에서 이는 식물학에서의 품종, 또는 동물학에서의 아종을 의미한다. 현대 분류학에는 린네의 원래 시스템에는 존재하지 않던 ‘과’라는 등급이 목과 속 사이에 새로이 추가되어 있다. 동물계 린네는 분류에 필요한 조직적인 범주를 설정해 약 4000종의 동물을 분류하고 명명했다. 동물계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의 강이 속해 있다. 식물계 린네는 최초로 생식 기관을 식물의 분류 기준으로 사용했다. 식물은 꽃의 암술과 수술의 개수와 배치에 따라 24개의 강으로 분류되었다. 각각은 다음과 같다. 광물계 현대 분류학에서 광물은 생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린네는 광물도 하나의 계로 보고 분류했다. 린네의 가장 큰 분류학적 업적은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명명법인 이명법을 확립시켰다는 것이다. 린네 이전의 계통학자들 중에서도 속명과 종명을 이용해 종을 명명한 사람이 있었지만, 린네는 최초로 저작에서 일관되게 이명법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이명법이란 라틴어로 속명과 종명을 조합하여 나타내는 명명 방식으로, 속명은 고유 명사, 종명은 보통 명사 또는 형용사를 쓴다. 그 뒤에 명명자의 이름을 붙이고 필요시에 학명이 창시된 연도를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속명과 종명은 이탤릭체로 기울여 쓰고, 저자의 이름과 연도는 정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린네는 본인의 분류 체계를 스스로 인위적인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물간의 모든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려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의한 분류이기 때문이다. 린네의 생물 집단 조직은 간단한 차이점들 또는 공통된 물리적 특성들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겨난 여러 등급과 집단 중 동물의 상위 단계의 분류집단은 여전히 사용되지만, 몇몇 집단은 그 집단을 정의하고 기반하는 이론과 원칙에 따라 크게는 그 개념 자체의 변경이 있기도 했다. 실제로 식물의 생식기관에 의한 분류는 많은 오류를 낳았고, 이후 크게 수정되었다. 하지만 린네의 분류는 생물들을 지정된 범주 안에 넣기에 쉽고 유용한 체계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린네 분류학이 현대 분류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비록 린네가 관찰한 특성들 중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식 또는 DNA sequencing과 같은 새로운 실험 방법의 등장과 함께 변화되고 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분류학에서 린네가 사용한 기본적인 이론적 원리가 여저히 남아있는 것은 그가 관찰된 특성을 기반으로 분류학의 계층구조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하였으며 자연의 연관성을 그 아이디어에 반영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하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은 린네라고 한다. 린네는 사람을 분류학의 범주에 넣은 최초의 사람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다른 식물이나 동물과 같이 묘사함으로써 미래의 자연학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 린네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일부에 속한다고 믿었으며, 그의 분류 체제에서 사람을 동물에 포함시켰다. 《Systema Naturae》 (1748) 6판에 보면 린네는 안드로포모르파를 호모("homo")와 시미아("simia")의 두 가지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다. 린네는 사람을 《Systema Naturae》의 초판에서부터 영장류로 구분하고 있다. 하테캠프(Hartekamp)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는 몇몇 원숭이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사람과 그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기록할 수 있었는데, 그를 통해 그는 두 종이 말하는 기관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기본적인 해부학적 특징을 동일하게 갖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사람과 원숭이 모두를 사람과 유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안드로포모르파라는 같은 범주 안에 들어있도록 배치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요한 고스찰 웰러리우스(Johan Gottschalk Wallerius), 야곱 테오드르 클레인(Jacob Theodor Klein), 요한 조지 멜린(Johann Georg Gmelin) 등과 같은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신학에서 등장한 문제는 더 심각했다. 첫째로, 사람을 원숭이나 고릴라와 같은 수준에 넣는 것은 존재의 대사슬에서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둘째로 성경이 말하기를 사람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일 원숭이나 고릴라와 사람의 디자인이 크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말씀을 따랐을 때, 원숭이와 고릴라들 역시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많은 측면에서 받아들여 질 수 없었다. 사람을 동물의 한 종류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종교 사이의 충돌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의해 창조와 진화 사이의 논쟁이 시작됨으로써 몇 세기가 지난 현재도 뜨거운 냄비 속 물과 같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비판 이후 린네는 더욱 명확한 설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Systema Naturae》의 10판에서는 포유류(mammalia)와 영장류(primates)라는 새로운 단어를 포함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람을 이명법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명명하게 하였고 안드로포모르파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새 분류법의 도입으로 린네의 이론 대한 비판은 줄었지만, 사람이 자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많은 자연학자들은 여전히 그가 인간을 이전 위치에서 강등 분류하였다고 생각했다. 린네는 1658년에 출간한 《Systema Naturae》에서 호모 속에 호모 트로글로다이트(homo troglodytes), 1771년의 3판에서 호모 라(homo lar)라는 새로운 종을 추가하였다. 스웨덴 역사가인 구나 브로버그(gunnar broberg)는 린네가 묘사한 새로운 인류는 사실 신대륙에서 발견된 원주민이나 정착민들로, 외부인을 위협하기 위해 발랐던 진흙 등에서 비롯된 착오라고 말한다. 《Systema Naturae》의 초반 본에는 많이 알려진 전설 속 생물들인 불사조, 용, 맨티 코어 같은 것들이 포함된 포괄적 범주인 파라독사(paradoxa)가 존재한다. 린네는 히드라와 같은 생물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시도했다. 용에 대하여 린네는 그것들이 도마뱀 또는 광선을 보고 창조된 것이 계속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호모 트로글로다이트에 대하여 린네는 스웨덴의 동인도회사에 그것의 존재를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그 존재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호모 라의 경우 후에 긴팔원숭이(hylobates lar)로써 재분류되었다.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린네는 사람의 종을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Europæus albus" (white European), "Americanus rubescens" (red American), "Asiaticus fuscus" (brown Asian) and "Africanus niger" (black African)라는 4개의 세부 종으로 세분시켰다. 10판에서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4개의 기본적인 성질에 따라 각각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더욱 자세히 구분하였으며, 사람의 피부색을 노란색으로 바꾸었다. 추가적으로 린네는 야생에 존재한다는 인간이나 몬스터 등 알려지지 않은 그룹들에 대한 분류항목인 몬스트로서스(monstrosus)를 창조하였다. 《자연의 체계》 초판은 1735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1758에 10판이 되었는데, 4400여종의 동물과 7700여종의 식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Physalis annua ramosissima, ramis angulosis glabris, foliis dentato-serratis"와 같은 굉장히 길고 어려운 학명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학명들이 간결한 이명법을 따른 학명으로 대체되었다. 이명법을 따른 학명은 속명(specific name)과 종명(specific name)의 병렬식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 이명법들은 종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식물의 종 ("Species Plantarum, exhibentes plantas rite cognitas, ad genera relatas, cum differentiis specificis, nominibus trivialibus, synonymis selectis, locis natalibus, secundum systema sexuale digestas")》은 총 2권으로 1753년에 초판 인쇄가 되었다. 이 책은 국제적으로 현대 식물학 명명법의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1권은 5월 24일에 나왔고, 같은 해 8월 16일에 2권이 나왔다. 이 책은 총 2권 1200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7300여 가지가 넘는 종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에는 왕이 그에게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1754년에 린네는 식물계를 25개의 강으로 분류하였다. 《식물의 속》은 1737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은 식물의 분류법 중 속에 해당하는 부분을 기술하고 있다. 10 판의 출판은 린네 혼자 모든 것을 한 것이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1754년의 5판이다. 《식물 철학》(1751)은 식물 분류와 명명법에 대한 린네의 생각의 요약이었고 그가 이전에 출판했던 책들을 더 잘 갖추어 낸 책이었다. 이 책은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분류 시스템의 전체 개론을 담고 있었다. 또, 이 책에는 식물 정원을 관리하는 법과 여행에서 저널을 쓰는 것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린네 분류학은 확실히 현대 분류학의 시발점이었지만, 이 분류 체계는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먼저, 린네 분류 체계에서 식물계의 Monoecia 강에 속한 Monadelphia 목은 자웅동체이면서(Monoecia) 수술이 수술대에서 합쳐지는(Monadelphia) 식물로 분류되었는데, 침엽수 등과 함께 참꽃을 가진 식물이 포함되는 오류가 있었다. 또, 뚜렷한 생식 기관이 없는 식물인 Cryptogamia 강에는 양치식물, 선태식물, 이끼류를 비롯해 해면동물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물계의 6가지 강인 포유류, 조류, 양서류, 어류, 곤충류, 연충류 중 4가지는 분류가 확실했지만, 곤충류와 연충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7가지 분류체계를 통합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보다 부정확한 것이었다. 린네는 고래를 어류로 분류해 이후 수정되기도 했다. 린네는 종이 창조되었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물의 외형적인 특징에만 의존해 종을 분류하였다. 따라서 린네의 분류는 종간의 계통이나 유연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분류였다. 특히 식물의 생식 기관을 기준으로 한 분류에서는 정밀하지 못한 분류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후에는 생물의 발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를 기준에 따라 생물을 분류한 존 레이의 분류 체계를 따르게 되었다. 비록 린네가 구분하기 쉬운 분류를 했다고 하지만, 린네적 분류의 아이디어는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종의 기원》이 발간될 시기에 동물계와 식물계를 기반으로 하는 계통수로 바뀌게 되었다. 이래즈머스 다윈이 1796년에 《주노미아》를 출판하고,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동물철학》>이 1809년에 출간되면서 종의 변화라는 아이디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로버트 챔버의 책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분류는 '공통조상'의 존재라는 다윈의 이론을 반영하여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화석이 발견되고 연구됨에 따라 진화의 나무가 과학적인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조상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어 현대적인 집단으로 구성된 첫 번째 예시는 새이다. 새롭게 발견된 화석을 이용하여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새가 리처드 오웬에 의해 1842년에 명명된 집단인 공룡에서 진화되어 나왔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진화학적 분류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됨에 따라 많은 고생물학자들이 동믈의 역사를 알려진 집단끼리 연결시켜가며 이해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했다. 1940년대의 현대종합설은 주요 집단의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진화학적 분류는 린네 분류학의 기본적 원리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계통발생에 따른 명명법이 분기학적 방법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단원적 분기군과 의사단원적인 분기군, 다원적 분기군의 정의가 이루어졌고, phylocode라 불리는 계통학적 명명법이 공식적으로 정리되었다. 린네가 동물계, 식물계로 나누었던 2계 체제 역시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과정을 거쳐 바뀌게 되었다. 아래의 표는 그 변화 과정을 나타낸다. 생태학의 발전에서 린네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린네는 신과 자연, 물질과 영혼에 대해 신이 자연을 개개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그 사이의 관계를 조절했으며 이러한 질서와 목적은 식물, 동물과 같은 모든 자연의 기능과 모양을 뒷받침하는 '자연의 경제성'을 나타낸다는 관점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은 신과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서는 기독교, 플라톤, 스통다철학의 전통을 띠는 색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린네의 철학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부분 중 하나인 물질신학은 교회를 그 뿌리에 두고 있다. 그것은 지연학에 다양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은 근본적으로 그의 종교적 관념과 관련되었다. 그의 자연철학과 물질신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유용한 개념과 자연의 연구에 중요한 점을 모두 제공하였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적 연구는 경험적 관찰과 자연 철학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동물과 식물이 모든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자연의 경제성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 처음 사용된 것이며 신의 창조를 통한 자연의 지배 방법임을 반영한 것이었다. 린네는 이 개념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여 자연철학의 중요한 개념 개발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물질신학을 통해 창조를 통한 신의 정의라는 생각을 조직화시켰다.린네가 주장한 '자연의 경제성' 개념은 자연이 '자가 갱신' 과 '자가 정화'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그 자연이 죽은 생물과 같은 폐기물이 과다한 경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갱신하며 자연적으로 순환하는 과정과 지구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고 하였다. 1747년 그는 여행에서 '동물이 죽을 때 그들이 뿌리를 덮어 흡수되어 식물이 발생하고, 그것이 동물에 의해 흡수되어 다시 동물의 일부가 되는' 자연의 사이클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린네는 다른 동식물에 의한 일부 동물의 피해 역시 개별 종이 아닌 전체적인 생명에 대해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너무 빠른 번식에 의한 특정 종의 기초적인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린네의 개념과 생각 중 일부는 19세기에 세속적인 방향으로 기발되었으며,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서는 현대적 생태 용어의 개념을 포함하는 전구체적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생태학은 자연의 연결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강조와 선택에 의해 쉽게 좌우됨에 반해 린네적 유추 방법은 주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증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린네의 자연철학은 주로 '추측에 근거한'. '더 이상 쓸모 없는', '환상에 입각한' 과 같은 단어로 특징지어지곤 한다. 린네는 한 명의 물질 신학자로써 그는 전통을 심화시켜 물질신학이 더 복잡하게, 환경적 요인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발전하도록 하였다. 그 후 린네는 자연에서의 신의 작업이라는 관점을 유지하였으며, 환경의 영향은 단지 자연에서의 신의 존재성에 대한 더 넒은 예시이며, 창조를 위한 신성한 계획에 대한 증거라 생각하였다. 또한 린네는 유추를 이용하여 자연의 연결을 설명하였는데, 자연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레벨에 대하여 상호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현대 생물학의 생태와 진화에 연결될 수 있다. 19세기 초반에 생물에 대한 연구를 나타내기 위한 용어인 '생물'이 라마르크오 힐레어에 의해 제안되었다. 생물은 시스템 및 종 설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자연학과 대조적으로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과 생명체의 기본 원리를 찾기를 시도하였다.에른스트 헤켈은 '생태학'라는 용어를 제안하여 '생태학을 통해 우리는 동물의 경제성과 절약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고 정의하였으며, 이는 생태학이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그 주변 환경, 생태계를 구성하는 생물들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 즉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다양한 관계를 포함함을 의미했다. 이는 '생태'라는 것이 '자연의 경제성'또는 다윈이 주장한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것을 의미함을 말하며, 다윈과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 대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다윈의 주장은 크게 자연선택과 상속이라는 두 가지 이론의 조합으로 요약된다. 자연선택은 더 많은 생물이 특정지역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이 태어났을 때 발생하는 프로세스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연결됨을 의미하며, 모든 생물이 달라질 수 있어 이러한 변화 중 일부가 더 나은 적응의 형태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다윈에 의하면 이러한 이론 역시 진화에 필요한 조건이지만 새로운 종의 생성이 선택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선택과 진화와 관련된 모든 자연적 배경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으며, 이는 다윈으로 하여금 생태학적, 자연철학적 측면에 관심갖게 하였다. 따라서 다윈은 다양한 출처를 통해 초기 생태학적 자료와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새와 곤충이 자연에서 사는 방법에 대한 초기 관찰은 길버트 화이트의 책에서 영향을 받았다. 린네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화이트는 린네의 제자이자 그 당시 유명한 동물학자인 다니엘 솔랜더, 토마스 페넌트와 함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라이엘은 린네의 초기 생태학에 대한 아이디어와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해한 사람으로써 그의 개인적 업적에서 자연의 경제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대로 사용하였다고 평가받았다. 다윈은 1840년대에 린네의 책을 읽으며 린네의 아이디어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그 시기 그의 출간물과 편지에서는 '자연의 절약' 또는 '자연의 정치'와 같은 표현을 점점 더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다윈의 생각 중 다양한 생물종이 적절한 장소를 갖고 있다는 생각 역시 린네의 생각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다윈이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그의 아이디어를 경제학자 멜서스의 '인구 압력'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얻어왔다고 주장하였으나, 멜서스 이전에 이미 비슷한 아이디어가 라이엘 또는 윌리엄 패일리의 물질신학적 출간물에서 '모두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전쟁' 과 같은 표현이 발현된다는 것으로 보아 린네의 저서와 아이디어가 그들과 다윈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영감을 제공했을 수 있다. 린네가 제안한 자연의 경제성이라는 개념은 스웨덴에서 린네의 제자들에 의해 매우 제한된 범위로 전달되었다. 린네의 아이디어는 종의 우성성, 시스템, 그리고 스웨덴의 동식물에 대한 포괄적 연관성 지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린네는 다양한 규칙을 마련하고 그 규칙에 입각하여 자연이 어떻게 시스템화 되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였다. 린네 학문을 따르는 자들의 1세대와 2세대 모두 동식물을 차트로 정리하고 생물 간의 보다 일반적 연관성을 찾아 자연의 법칙을 찾으려 하였다. 린네의 초기 생태학적 아이디어는 잉글랜드에서 정교히 발전했지만 린네의 제자인 칼과 오드먼에 의해 스웨덴에서도 연구의 수행이 이루어졌다. 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영향에 관한 여러가지 초기생태학적 관찰을 진행하여, 인디언의 생활과 개척자의 등장에 의한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고 관찰하였다. 오드만은 열도의 새 전문가로서 초기 조류 생태 연구에 대한 예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린네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연의 상황을 묘사하였으나, 이론 수준에서는 새롭게 기여하지 않았다. 매년 린네의 생일이 기념되며, 특히 100년마다 린네의 생일은 크게 축하된다. 린네는 수많은 종류의 스웨덴 우표와 지폐에 등장하였으며, 전 세계 국가에 린네의 조각상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런던에서 열리는 린네 학회는 식물학이나 동물학에서 나온 좋은 결과에 대해 1888년부터 린네 메달을 수여한다. Växjö 대학과 칼 마르 대학은 스웨덴의 의회의 승인을 받아 2010년 1월 1일에 병합 후. Linnaeus 대학이 되었다. 린네의 이름을 딴 다른 것들에는 twinflower 속 Linnaea, 지구 달에 분화구 중 하나인 Linné 및 코발트 황화물의 미네랄 Linnaeite을 포함된다. 이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는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철학자이다. 칸트는 21세기의 철학에 까지 영향을 준 새롭고도 폭 넓은 철학적 관점을 창조했다. 그는 또한 인식론을 다룬 중요한 저서를 출간했고, 종교와 법, 역사에 관해서도 중요한 책을 썼다. 그의 탁월한 저서 중 하나인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공격하고 있으며, 칸트 자신이 그 분야에 공헌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가 만년에 출간한 다른 주요 저서에는 윤리학을 집중적으로 다룬 《실천이성 비판》과 미학, 목적론 등을 연구한 《판단력 비판》이 있다. 그는 종래의 경험론 및 독단론을 극복하도록 비판철학을 수립하였다. 인식 및 실천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 형식에서 찾고, 사유가 존재를, 방법이 대상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에서 찾고,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그는 도덕적 인격을 목표로 하면서도 자의적인 ‘한 사람의 의욕과 다른 사람의 의욕이 자유의 보편원칙에 따라 합치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법이라 생각하였다. 칸트에게 내적 자유의 실현 수단인 법은 외적 자유를 제한하는 강제를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도덕과 엄격히 구별되었다. 칸트는 국가에 대해서 계약론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는 국가계약을 역사적 사실처럼 생각한 계몽기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이것을 국민주권을 위한 이론적 요청으로 생각하였다. 또 칸트는 국가 간의 전쟁을 하지 않는, 영구 평화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저술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생긴 문제점을 전쟁이 끝난 뒤에 조정하여 해소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제도의 내용은 국제법의 개념에 근거한 국제 연맹이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와 어머니 안나 레기나(Anna Reg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 자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11명 자녀 가운데 어른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5명뿐이었다). 칸트는 '에마누엘'(Emanuel)이란 세례명을 받았으며, 히브리어 공부하고서 '이마누엘"(Immanuel: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꾸었다. 그는 삶을 통틀어서 단 한번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00마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지 않았다. 그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 (1682–1746)는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북쪽 도시인 메멜에서 이주한 독일인 마구(馬具) 제작자였다. 그 어머니인 느 레기나 도로시아 류터(née Regina Dorothea Reuter) (1697–1737)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트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스코틀랜드식("Cant")으로 적곤 했다. 어렸을 때 칸트는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의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칸트가 받은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 라틴어와 종교였고, 엄격하고 가혹한 훈련을 강조한 것이었다. 칸트 부모는 청교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유년시절 칸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드릭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지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자연과학에 관심 두었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후대 전기 작가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Gedanken von der wahren Schätzung der lebendigen Kräfte")이라는 졸업논문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자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수년에 걸쳐 지방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하면서 홀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Princip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 등 여러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 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사이 칸트는 원하던 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직을 얻었으며, 이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10여 년간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1780년대에 일련의 중요한 저서, 즉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4),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6)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점점 명성이 올라갔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초판:1781년, 재판:1787년),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판단력비판》(1790)에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칸트는 한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Vom radikalen Bösen in der menschlichen Natur")란 제목으로서 당시의 계몽주의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를 향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 칸트는 18세기 철학에 있어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칸트가 초감각적인 세계를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으며, 그러한 체계의 근거가 되는 인식론을 연구하여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두 사상의 한계에서 벗어난 철학을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이성이 이성 자신을 비판하는 철학이다. 칸트의 철학이 비판철학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세 가지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책의 제목 끝에 붙인 '비판'이라는 개념은 칸트가 과거의 철학을 비판적 연구 분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칸트는 이러한 측면에서 스스로의 철학을 '비판철학' 이라고 불렀다. 칸트가 이러한 비판 철학을 펼치게 된 데에는, 뉴턴의 자연과학과 루소의 철학, 그리고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흄의 회의를 받아들인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권의 저서 내용을 요약한 질문과 각 책이 다룬 영역은 다음과 같다. 17~18세기 철학의 인식론은 크게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뉘었다. 여기서 합리주의는 인간이 본래부터 지닌 선험적 이성을 중시하였고, 경험주의는 인간이 경험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귀납법을 중시하였다. 합리주의의 방식은 "백마는 희다"와 같이 술어가 주어의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분석판단 을 하므로,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경험주의의 방식은 귀납적인 방법을 강조하며 종합판단을 한 나머지 진리의 필연성을 찾는 데 한계를 드러내었다. 여기서 칸트는 이 두 사상을 통합한 선험주의를 주장하였다. 즉, 지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인식을 확장하는 '선험적(선천적:a priori) 종합판단' 을 긍정하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이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 인식에 선험적 형식을 도입하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을 시도하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인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진리는 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아야 하는 무엇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감성을 통해 얻은 감각을 범주를 사용하여 지성(Verstand:오성)으로 인식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감성은 어떤 물자체를 지각하는 능력이며, 범주는 이러한 감각을 인식하게 하는 하나의 틀이다. 따라서 감성과 지성은 인간이 지각 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요건인 셈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데 시간과 공간 값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연장과 존재하는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과 같은 것은 공간 값은 없지만 시간 값만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칸트는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초경험적인 것을 이성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가령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증명 등을 비판하여 여러 형이상학적인 사상들을 배격하고자 하였다. 이 말은 형이상학의 영역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 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형이상학적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의 지성(Verstand)이 사물의 현상을 분류,정리할 수 있으나, 그 현상 너머에 숨은 본질에는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이나 신에 해당하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초감각적이고 초경험적인 것을 인식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그런 오류에서 벗어나 이성의 인식체계에 대한 학문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는 형이상학적인 신, 영혼들의 존재를 도덕을 다루는 과정에서 다시 요청하게 된다. 칸트는 윤리학을 연구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나는’ 도덕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을 추구하였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을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칸트는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선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은 마음 속에서 충동과 도덕이 투쟁한다고 보았다. 즉, 옳고 그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충동과 도덕심이 투쟁을 하며, 도덕이 이기면 선한 행동을 하고 충동이 이기면 그른 일을 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렇다고 도덕이 충동을 없애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칸트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의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떤 결과를 얻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인‘무조건적인 명령’을 도덕법칙으로 제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적인 가언(假言) 명령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의무로서의 명령인 정언(定言) 명령을 내세운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든 따라야만 하는 정언 명령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명령은,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해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스스로 생각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명령은,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이다. 칸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반대하였다. 인간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본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부정하면서,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강조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도덕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에 합당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서양 사상에 대한 칸트의 폭넓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특정한 사상가에게 준 구체적인 영향을 넘어서, 칸트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철학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틀 구조를 바꾸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었다. 이러한 전환은 공리주의에서 후기 칸트학파의 사상에 이르는 혁신과 밀접하게 연관된 채로 철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 모두에서 유지되었다. 칸트의 생각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이후에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친 학파들에게서 드러나고 있다. 독일 관념론, 실증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비판 이론, 언어 철학,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가 그러한 예이다. 칸트의 영향은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에서도 나타나는 데, 막스 베버의 사회학과 장 피아제의 심리학, 그리고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칸트가 패러다임을 철저하게 바꾸었기 때문에, 특별히 칸트의 저서나 칸트의 용어를 언급하지 않는 학자들까지도 칸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생애 동안에, 그의 사상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1780년대에서 1790년대 까지 라인홀드, 피히테, 셸링, 헤겔, 노발리스에게 영향을 끼쳤다. 칸트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글쓰기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은 독일 관념론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독일 관념론자인 피히테와 쉘링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 포함되었던 "절대적인 것", "신", "존재"와 같은 개념을 칸트 비판 철학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칸트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칸트는 이성의 능력과 종교를 모두 비판했고, 이러한 비판은 당시에 이성을 신뢰하던 철학자나 종교를 믿던 종교인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 이었다.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는 그의 스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후천면역결핍증후군 후천면역결핍증후군(後天免疫缺乏症候群, ; )는, HIV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하면 나타나는 전염병이다. HIV는 바이러스의 이름이며, 에이즈는 HIV에 감염된 환자가 발병하면 나타나는 증상들을 일컫는다. 질병관리본부의 '문답으로 알아보는 에이즈 상식' 자료에 따르면 HIV와 에이즈(AIDS)는 다른 말이다. HIV는 바이러스를 말하며 에이즈는 면역이 결핍돼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HIV에 걸린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HIV 감염인이란 HIV에 걸린 모든 사람을 말하며 이 중에서 질병이 나타난 사람을 에이즈 환자라고 부른다. 아무런 치료를 받지 않아도 면역결핍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10~12년 정도 걸린다. 올바른 관리를 한다면 30년 이상 살 수 있다. 현재 에이즈는 만성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발견된 HIV 감염자는 현재 5000일째 살아있다. 에이즈는 신체의 면역, 저항력이 저하되는 질병으로 보통 에이즈 질환으로 인한 사망과 그외에도 면역력이 약화되어 기타 다른 질병에 함께 감염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에이즈는 병리학적으론 최초로 1981년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언제 HIV 바이러스가 번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으며, 의학계에서는 침팬지에서 발견되는 SIV에서 HIV가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출현 시기를 1930년대로 보고 있다. 즉 중앙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SIV를 보유하고 있는 침팬지와 접촉함으로 인해 인간의 면역체계를 약화시키는 변종 바이러스 HIV가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증거로는 현재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 및 사망률을 보이고 있는 지역이 바로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때는 아프리카 개발이 집중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인간들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사냥과 원시림을 파괴하며 얻은 SIV를 포함한 침팬치의 고기 및 다른 고기를 유통, 공급하면서 접촉하여 생긴 환경파괴 질병으로 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에이즈가 인식된 것은 다섯명의 치명적인 폐렴 환자를 보고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폐렴이 아닌 인체의 면역저하에부터 오는 Pneumocystis pneumonia 이었다. 즉 이들은 먼저 에이즈를 통해 면역저하를 걸린 후 이 폐렴이 발발한것이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 거주하는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에이즈 환자들은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에이즈가 혈우병과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마약에 중독된 이들은 그 주사바늘을 돌려쓰기 때문에 에이즈 환자들의 피와 직접 접촉이 되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 전반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동성애혐오적인 의미를 내포한 병명이 사용되기도 했었던 적이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에이즈는 의학자와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병명이 지어졌다. 하지만 곧 미국 질병관리예방센터는 에이즈 환자들의 다수는 동성애자들이며 그외에 피로 인해 접촉된 혈우병 환자, 아이티계 이민자, 마약 중독자들이 전체 환자 중 과반이 넘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특별히 남성끼리의 동성성관계를 하는 인구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27배나 에이즈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보고에 나와있다.(avert.org) 현재까지 에이즈는 약 2800만 명의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및 서부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에는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며, 특히 짐바브웨와 보츠와나는 25%에 달하는 충격적인 HIV 감염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추세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인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 그리고 특히 중국에서도 HIV의 감염자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에이즈 예방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에이즈는 HIV의 감염으로 생기는 궁극적인 결과이다.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는 레트로바이러스이다. 레트로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 침입하여 자신의 RNA를 DNA로 역전사한 후 숙주 세포의 DNA에 끼여 들어가 증식한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기관들인 CD4+ T 세포와 대식세포 그리고 수지상세포들에 우선적으로 감염된다. 특히 HIV는 직간접적으로 CD4+ T 세포들을 파괴한다. 특히 역전사 과정을 일으키는 역전사 효소는 일반적인 DNA 복제 효소와는 달리 오류정정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많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되어 HIV는 매우 쉽게 변이된다. 임상연구에서는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가 여러가지 변종의 HIV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자주 보고되고 있다. HIV 감염자의 50~70%는 감염 후 3~6주 뒤 독감과 유사한 급성 임상 증후군을 앓게 된다. 그러나, HIV 감염자는 그 이후 짧으면 3년에서 길면 12년까지 무증상 상태를 보이므로 곧바로 HIV 감염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며, 에이즈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미 신체의 면역 체계가 상당 부분 약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HIV가 CD4+T세포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혈액 1µL당 200개 안팎의 T세포 밖에 남지 않게 되면 세포성 면역을 잃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급성 HIV 감염은 곧 임상적 후기 HIV 감염으로 진행하게 되고 결국 에이즈에 이르게 된다. 혈액 내에 남아있는 CD4+ T세포의 수를 측정하여 위와 같은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HIV 감염의 진단은 ELISA를 통한 선별검사와 웨스턴 블롯을 통한 확진의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대개 감염 후 2주 정도면 혈액 속에 HIV 항체를 판별할 수 있으므로, 이때부터 진단이 가능하다. 에이즈는 체액 교환을 통해 감염되며, 현대 사회의 주된 에이즈 전염 경로는 성병 예방 조치를 하지 않은 성행위(혈액 감염)와 HIV 보균자의 출생을 통한 수직 감염, 불특정 다수가 돌아가며 사용하는 비위생적인 주사기 및 시술 도구 사용 등으로 인한 혈액 감염 이다. 특별히 남성 동성애자들의 항문성교를 통해 감염된다. 항문은 여성의 질과 달라서 그 점막이 매우 연약하여 약간의 마찰에도 찢어진다. 그래서 성관계시 에이즈 보균자의 항문의 찢어진 곳에서 나오는 혈액으로 성관계 대상자가 감염된다. 그러나 에이즈는 단순 신체 접촉이나 공기 중으로 감염되지는 않는다. HIV 보균자와 악수하거나 포옹을 한다고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다. 또한 에이즈 보균자가 항상 위험한 것이 아니며 더럽거나 혹은 종교적 저주를 받았거나 문란하거나 사회적인 악영향을 일으키며 에이즈를 감염시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왜냐면 에이즈의 경우 대부분이 혈액에 의한 감염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적은 소량의 혈액 한 방울에도 에이즈균은 존재하며 이로 인한 감염이 가능하다. 입 안 즉 구강에는 상처가 매우 쉽게 나기 때문에 에이즈 보균자의 침에는 혈액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손에 상처가 있는 에이즈 보균자가 만든 음식을 구강에 상처가 난 비감염자가 먹을 경우에도 혈액에 의한 에이즈 감염을 주의하여야 한다. 또한 성행위의 경우 생식기에 상처가 나있는 경우에 매우 소량의 혈액으로도 에이즈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동성애자(homosexuals)의 에이즈 감염율이 높은 이유를 말해준다. 따라서 에이즈 보균자의 경우 손이나 몸같은 신체 또는 구강 등에 상처가 나지 않았는지 주의해야한다. 또 에이즈 감염자의 경우 상처의 회복이 느린 점도 주의해야한다. 작은 상처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매우 소량의 혈액이 분비되며 여기에는 에이즈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In the United States intravenous drug users made up 12% of all new cases of HIV in 2009, and in some areas more than 80% of people who inject drugs are HIV positive. 에이즈는 다양한 성행위를 하면서 접촉하게 되는 체액(주로 혈액)들에 의해 감염될 수 있다. 콘돔 등 아무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갖게 되는 성행위를 통해서는, 삽입자 보다는 그 반대편이 위험도가 높다. 구강 성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구강 성교를 통해서 행위에 참여한 모두가 감염될 수 있다. 성폭력의 경우에는 감염 확률이 매우 높다. 강간 가해자는 콘돔의 사용 확률도 적으며, 피해자의 생식기나 직장에 외상을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약 복용도 HIV 감염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2008년 연구자들은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한 사람들이 성병 예방 조치 없이 성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결과 메스암페타민 복용자들은 당연히 타 집단에 비해 HIV감염 확률이 높았다. 다른 성 매개 감염(STI)들에 감염되면 생식기에 궤양을 일으킨다. 이렇게 상피 세포들이 손상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자나 질 분비물에 HIV 감수성이 있는 세포 혹은 HIV에 이미 감염된 세포(대식세포나 림프구)의 축적은 결국 HIV감염의 위험을 높인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북미에서 실시된 역학 조사에 따르면, 매독이나 연성 하감을 통해 발생한 생식기 궤양이 실제적으로 HIV 감염률을 4배나 증가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HIV의 전파도는 초기 감염자의 전파성과 감염되지 않은 파트너의 감수성에 영향을 받는다. 병의 전파성은 개인마다 일정하지 않다. 혈장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정액이나 생식기 분비물에서도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혈액 HIV 수치가 10배 증가할 때마다 81%의 경우에서 전파가능성이 증가했다. 여성의 경우가 호르몬 변화나 생식기의 미생물학적 환경 때문에 HIV-1에 더 감수성이 높다. HIV 균주 중 하나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다른 균주에 감염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는 더 병원성이 강한 균주에 의해 재감염 될 수 있다. 항문 성교의 경우 다른 체위에 비해 HIV 감염이 상대적으로 높다. 단 한번의 접촉으로 감염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경우 장기간 다수의 파트너와의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다. 이런 패턴이 오히려 많은 파트너에게 재차로 감염 기회를 높인다. 에이즈는 감염된 부모로부터 출생할 시에도 감염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에이즈 감염을 알고도 자녀를 출산한 경우가 1건 있는데, 1990년 4월과 5월 각각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부부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도 1993년 1월 여자 아이를 낳은 사례가 있다. 여자 아이를 출산한 에이즈 감염 부모는 줄곧 여자 아이의 에이즈 검사를 거부하다가 2003년 8월 검사를 하였는데, 만10세가 되는 이 여자 아이는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에이즈 병세의 발전 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로 나뉜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 치료 없이는 HIV감염 후 에이즈로 발달하기 까지 보통 9~10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에이즈로 진행된 후에는 평균적으로 10개월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임상적인 병의 진행 속도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2주도 안 걸리는 데 반해 다른 경우에서는 20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진행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면역 증강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도 진행을 늦추는데 도움을 준다. 나이가 많아 면역계가 약해진 노인층에서 진행 속도가 특히 빠른 것이 이 때문이다. 평소 건강 관리에 소홀했거나, 결핵과 같은 질병에 걸린 내력도 병의 급속한 진행을 돕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감염자의 유전적인 내력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사람의 경우 몇 가지 HIV 균주에 내성을 띠기도 한다. 일례로, CCR5-Δ32 유전자가 동형접합인 사람들은 특정 HIV균주에 저항성을 나타낸다. HIV 자체가 유전적 변동이 심한 편이며 그 균주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병의 진행 속도는 더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에이즈의 원인인 HIV는 대단히 약한 바이러스이다. 심지어 공기 중에 노출되기만 해도 죽는다. 따라서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전염경로를 차단함으로써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 에이즈의 완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발견되었으나,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1995년에 시작된 일종의 칵테일 요법인 고활성 항바이러스 요법("h"ighly "a"ctive "a"nti-"r"etroviral "t"herapy, 이하 HAART 요법)이 HIV 질환의 진행을 늦추고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데에 획기적인 성과를 나타내면서, 에이즈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당뇨병과 같은 조절 가능한 만성 질환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HAART 요법은 뉴클레오사이드 유사 역전사 효소 억제제(Nucleoside analogu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이하 NRTI)와 비뉴클레오사이드 역전사 효소 억제제(Nonnucleoside reverse transcriptase inhibitor, 이하 NNRTI) 및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Protease inhibitor, 이하 PI)와 같은 항바이러스 제제를 병합하는 요법이다. 2가지 NRTI 약물에 1~2가지 PI 약물을 환자에게 함께 투여하거나, 2가지 NRTI 약물에 1가지 NNRTI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이러한 초치료가 실패하면, 약물 전체를 바꾸어 다시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항바이러스 제제의 유형별 약물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에이즈 치료제의 주류를 이루었던 역전사 효소 억제제와 단백질 분해 효소 억제제의 치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기능을 갖는 약물의 개발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부터 새로운 형태의 에이즈 치료약이 미국 FDA의 승인을 받고 시장에 출시되기 시작했다. 2007년 7월에 처음 소개된 maraviroc (Pfizer, 상품명 Selzentry)는 최초로 병원체인 바이러스가 아닌, 숙주세포에서 감염에 관여하는 수용체 (receptor)의 작용을 억제시키는 치료제이며, 2007년 12월 FDA의 승인을 받고 시판된 Reltegravir (Merck, 상품명 Insentress)는 HIV 바이러스에서 역전사된 DNA가 숙주 세포의 유전자 안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억제하는 치료제이다. 2010년 12월 드디어 후천면역결핍증 완치 사례가 발표되었다. 해당환자는 2007년에 치료를 받고 현재 완치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 급성 골수형 백혈병의 치료를 위해 골수 이식을 받았다가 이 골수를 제공한 사람이 HIV저항인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인자를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게 된, 우연히 완치된 경우였고, 골수 이식의 위험 부담이 높아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의 Gene Therapy가 미국에서 연구되어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 시술법은, 개별 환자의 몸에서 T세포를 추출하여 HIV바이러스가 T세포와 융합하는 매개처인 CCR5 수용체를 변형, 삭제하여 다시 몸속으로 주입하여 환자 스스로 바이러스를 퇴치하게 만든다. 이미 실행된 임상실험에서는 75% 의 환자들에게서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5년에 드디어 트루바다라는 약이 에이즈를 예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이즈 감염균으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 외에도 에이즈 감염으로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다른 질병이 합병증으로 걸려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미국의 국립 암연구소 연구 결과 에이즈환자의 사망원인 가운데 비에이즈 관련 암, 특히 폐암, 항문암, 간암, 호지킨림프종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립암연구소(NCI) 감염증 면역역학 미레디스 쉴스(Meredith S. Shiels) 박사는 “에이즈환자에서 발생하는 암의 수와 암 형태는 1991년부터 2005년 15년간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Journal of the National Cancer Institute에 발표했다. HIV감염자에서는 카포지육종, 비호지킨림프종, 자궁경암 위험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또 HIV감염자에서는 폐암, 항문암, 간암, 호지킨림프종 등의 ‘비에이즈 관련 암’ 위험이 높아진다. 쉴즈 박사의 NCI와 미질병관리본부(CDC) 공동연구팀은 미국 에이즈환자를 대상으로 이들 2개군의 발암 현황을 검토하기 위해 미국HIV/에이즈 암대비연구와 CDC 데이터를 1991~1995년(전 HAART기), 1996~2000년(HAART초기), 2001~2005년(HAART 후기)의 3개 기간으로 나누어 평가했다. 이러한‘에이즈 관련 암’의 이환율은 1090년대 중반에 고활성 레트로바이러스약물요법(HAARTT)가 등장하면서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에이즈 관련 암 환자수는 예상대로 전HAART기(3만 4587명)에서 HAART 후기(1만 325명)에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에이즈의 정확한 원인과 예방법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8년에는 기존의 에이즈균과는 다른 변종 에이즈균 역시 나타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에이즈에 대해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라는 법령을 두어 관리하고 있다. 이 법령 제19조에 따르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제25조에서는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중국은 에이즈 발병율이 독보적 1위이다. 125만명의 에이즈 감염 중국인들이 존재하지만 이 수치는 주요 몇몇 도시에서 나타난 수치로 지방에서의 수치를 합하면 300만명에서 2천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비공식 기록으로 3억명) 또한 중국에서는 허난성 등등 마을에서 수만명이 집단으로 에이즈에 걸리는 등 에이즈 마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국제 이슈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사를 불가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 조사에 따르면 중국 여성 매춘부들의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유럽등지에 퍼져 있다고 한다. 이 중국 여성들이 귀국과 출국을 반복하면서 중국 남성들의 에이즈 감염율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남성들의 에이즈 발병률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에이즈 발병률과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90년대에 중국 마을을 대상으로 수혈로 생계 유지를 하는 것을 장려한 캠페인 덕택에 에이즈 비율이 늘어났다. 또한 중국인 여성 연예인들은 스폰서를 구하는데 베이징 Zhou bao 신문에 의하면 중국인 여성 연예인이 기업 스폰서 남성을 에이즈 전염을 이유로 고소한 일이 있다. 동아시아에서 사실상 성매매 합법 국가나 마찬가지인 일본과 싱가폴에서도 에이즈 발병률은 높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유럽에서 성매매 합법 국가인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등에서 그리고 북유럽에선 에스토니아, 아이슬란드에서 에이즈 인구가 늘고 있으며 남미에서는 매춘 합법 국가인 멕시코,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에서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등에서 에이즈율이 증가하고 있다. [[분류:보건재해]] [[분류: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와 후천면역결핍증후군| ]] [[분류:범유행]] [[분류:증후군|에이즈]] [[분류:감염병]] [[분류:성병]] [[분류:바이러스학]] 심장 심장(心臟, ) 또는 염통은 가슴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근육질로 둘러싸인 혈액을 들리고 보내는 역할을 하는 인체 순환 기관이다. 심장은 보통 자기의 주먹만한 크기이다. 가슴 한가운데 흉골을 기준으로 왼쪽에 2/3, 오른쪽으로 1/3이 위치한다. 심장은 인체에 퍼져 있는 총 80,000km(성인 기준) 이상 되는 혈관으로, 날마다 쉬지 않고 혈액을 순환시킴으로써 물질대사를 비롯하여 인체가 살아있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심장은 관상 동맥이라는 두 개의 작은 동맥들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내막, 중막, 외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장의 혈액을 내보내는 작용은 역학적으로는 펌프와 거의 같다. 즉, 심방이 확대되어 정맥에서 혈액을 빨아들인다. 심방의 수축과 심실의 확대에 의해 혈액은 심실로 빨려들어가고, 이어서 심실이 수축하여 혈액을 동맥으로 내보내는데, 이때 심방은 확대되어 다시 정맥으로부터 혈액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심장은 태생기에 활동을 개시하고 나서 죽을 때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 심실에서 내보내진 혈액량을 심박출량이라 한다. 건강한 사람이 안정된 상태에서 1회에 60-80㎖, 1분간 약 5ℓ를 내보낸다. 이 양은 체표 면적에 비례하며, 1m²당 2~3ℓ이다. 심장은 인체에 아주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심장 한 기관이 몸 전체의 기관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혈액은 우리 몸을 돌면서 산소 전달, 이산화탄소 흡수, 여러 영양물질을 공급한다. 그 혈액이 만약 멈추면 이산화탄소 흡수, 여러 영양물질 공급이 중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장이 잘못 되면 몸 전체에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심장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심전도가 많이 변화하기 때문에 제일 조심해야 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심장 바깥쪽은 두 겹의 막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이를 장막성(漿膜性) 심막이라 한다. 하나는 심장 근육에 밀착해 있어 이것은 심장 윗부분의 혈관이 드나드는 부분(심저)에서 구부러져 다시 심장 전체를 에워싼다. 이 두 겹의 막 사이의 틈을 심막강이라 하며, 내부에는 약간의 활액이 들어 있다. 바깥쪽 심막에는 많은 결합 조직 섬유가 붙어 있는데, 그 때문에 섬유성 심막이라 한다. 그 좌우 양 측면에는 폐의 벽측 흉막과 인접해 있다. 원시적인 심장은 환형동물의 지렁이 등에서 볼 수 있다. 지렁이에는 2개의 큰 혈관이 몸의 정중선(正中線)을 따라 등쪽과 배쪽으로 달리고 있어 각각 등혈관·배혈관이라고 불리며, 또 이것을 잇는 횡행 혈관이 있다. 등혈관은 자동적으로 수축하여 혈액을 몸의 뒤쪽으로부터 앞쪽으로 보내며, 등혈관에는 체절마다 판막이 있어 혈액의 역류를 막는다. 한편, 배혈관에는 자동성이 없고 판막도 없다. 이와 같이, 지렁이의 혈액 순환은 등혈관의 자동적인 수축과 판막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환형동물의 심장이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절지동물의 심장은 '심문(心門)'이라고 하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등쪽에 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관심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벽의 양쪽에는 근육'익상근'이 붙어 있어서 심장의 수축 운동을 맡는다. 바퀴벌레·지네 등은 원시적인 심장을 가지고 있는데, 배혈관이 넓어진 것 같은 심장이 배쪽에서부터 가슴 부위까지 이르고 있다. 심문은 심장의 좌우로 뚫려 있는데, 둘레는 판막으로 덮여 있다. 심장이 수축할 때는 판막이 닫히고 혈액은 동맥 속으로 보내지며, 심장이 이완할 때는 심문의 판막이 열려 심장 속으로 혈액이 흘러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바퀴벌레는 심문이 13쌍이나 있고, 지네 무리는 100쌍 이상의 심문이 있다. 절지동물의 혈관계는 동맥의 끝이 열려 있는 개방 혈관계이므로, 심장에서 보내진 혈액은 동맥을 통하여 체내의 조직으로 흘러들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연체동물의 심장은 심방과 심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심강(圍心腔)으로 싸여 있다. 심실은 1개이지만, 심방의 수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부족류는 2개, 권패(나사조개)는 1개, 오징어·문어는 2개로 되어 있다. 또 혈액의 역류를 막도록 심실과 심방, 심실과 동맥 사이에는 판막이 있다. 심실에서는 2개의 동맥이 나오는데, 하나는 머리로, 또 하나는 내장으로 뻗어 있다. 오징어·문어 등의 두족류는 2심방 1심실의 심장 외에, 좌우 아가미의 뿌리 밑에 아가미 심장이라는 특수한 기관이 1개씩 있어서 아가미로 정맥혈을 보낸다. 척추동물의 경우, 진화의 과정에서 육지 생활에 적응함에 따라 심장의 구성에도 변화를 볼 수 있다. 어류의 심장은 모두 1심방 1심실이지만, 양서류 이상의 동물은 심방이 2개이다. 양서류의 심장은 2심방 1심실로서, 심실이 1개이기 때문에, 2개의 심방에서 온 혈액이 심실에서 섞인다. 한편, 파충류의 심장은 심실 안에 격벽이 생겨서, 정맥혈과 동맥혈이 혼합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2심방 불완전 2심실의 구조를 나타낸다. 조류·포유류의 심장은 2심방 2심실로서, 심방·심실이 각각 좌우로 완전히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정맥혈과 동맥혈이 섞이는 일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조류·포유류가 일정하게 체온을 유지하여 활발히 활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다. 심장은 2심방 2심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방은 우심방과 우심실로, 온 몸에서 온 혈액은 상하 대정맥에 의해 우심방으로 돌아가며, 심실과의 경계인 방실판(房室瓣)을 통해서 우심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밀려나오면 폐동맥을 통해서 폐로 보내진다. 우심실과 폐동맥의 경계에는 폐동맥판이 있다. 두 번째 방은 좌심방과 좌심실이다. 폐에서 나온 혈액이 4개의 폐정맥에서 좌심방으로 돌아오면 심실과의 경계인 방실판(2첨판)을 통해서 좌심실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밀려나오면 대동맥으로 유출되어 온몸으로 보내진다. 좌심실과 대동맥과의 경계에는 대동맥판이 있다. 이 두 개의 방은 심방과 심방, 심실과 심실이 인접해 있고, 좌우를 구획하는 막을 각각 심방 중격(中隔)·심실 중격이라 한다. 심방 중격은 비교적 엷은 막으로, 태생기에 아래위에서 뻗어나와 중앙부에 구멍이 남는데, 출생후 1년 정도 되면 폐쇄된다. 심실 중격은 근육으로 된 두꺼운 벽으로, 태생기에 심첨(心尖)에서 뻗어나와 위쪽에 근육이 없는 곳에 약간 남을 뿐으로 좌우가 완전히 분리된다. 이 분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좌우 심실 사이에 연락 구멍이 남는 상태가 심실 중격 결손이다. 심방과 심실 벽은 심장에 독특한 근육(심근)으로 되어 있다. 완성된 심장의 심방은 약 절반 정도가 원래의 심방(심근 벽을 가진 심방)이고, 나머지 부분은 원래는 정맥관이었던 것이 심방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벽이 엷다. 심실벽은 모두 심근으로 되어 있는데, 좌심실 벽은 우심실 벽보다 3~4배로 심장 구조 중 가장 두껍다. 이것은 우심실은 혈액이 폐에만 도달할 정도의 힘으로 밀어내면 되지만 좌심실은 온몸에 혈액이 전달되도록 강한 힘으로 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심실 내면에는 심근이 불규칙하게 융기해 있는데, 이를 육주(肉柱)라고 한다. 그중 몇 개는 특히 잘 발달하여 손가락 모양으로 돌출해 있으며, 이를 유두근(乳頭筋)이라 한다. 유두근 끝에는 이첨판이나 삼첨판의 끝부분이 뻗어나온 건삭(腱索)이 붙어 있다. 심방이나 심실 내면은 심내막이라 하며, 한 겹의 엷은 막으로 덮여 있다. 심장 내부에는 혈액이 흐르고 있는데, 이 혈액에서 심근 등이 산소나 영양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혈액이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두꺼운 근육으로 된 내부와의 사이에서 물질 교환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근의 영양은 관상동맥에 의해 보급된다. 이 동맥은 대동맥 기부에서 대동맥판 바로 근처까지 가지가 갈라지며, 대동맥의 첫 가지이다. 관상동맥은 좌우 2개가 나오는데, 약 60% 정도의 사람이 오른쪽 관상동맥이 약간 굵고 길다. 관상동맥은 심방과 심실 사이의 경계에 있는 홈(관상구)을 따라 달리며, 그 도중에 심방과 심실로 가지를 보낸다. 관상정맥은 동맥과 거의 나란히 달리며, 심장 뒷면에 있는 관상 정맥동에 모여 우심실로 들어간다. 심장은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속이 비어 있는 장기이며 무게는 약 250~300그램이다. 심장은 양쪽 허파 사이의 공간에 위치하며, 정중선상에서 볼 때 2/3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고 횡격막 위에 얹혀져 있다. 심장의 경계는 위쪽은 제2늑연골, 오른쪽은 흉골의 약간 오른편, 왼쪽은 제3~5늑연골까지 걸쳐 있다. 소, 양, 돼지, 닭 등의 가금류의 심장이 여러 나라에서 식용으로 쓰인다. 심장은 내장으로 분류되지만 근육때문에 맛은 보통 육고기와 같다. 맛과 생김새가 사슴고기와 유사하다.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는 순대의 '염통' 부분도 돼지의 심장에 해당된다. 동방결절에서 발생된 느린 반응에 의해서 퍼니 채널(funny channel)의 안정막 전압에 의해서 활동전압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심방 전체로 퍼지게 된다. 이 전압은 방실 결절에서 지연되면서 심실과 심방의 시간차가 나는 박동이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심장 세포는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함께 뛰는 것이 정상이지만 유일하게 심방과 심장 사이에는 섬유질로 인한 차단 효과로 특수근전도계를 통하지 않고는 전도가 되지 않는다. 방실결절에서 지연된 활동전압이 푸르키네섬유를 통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심실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되어서 심실이 수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심근 세포는 빠른 반응을 보이게 되며, 0 단계에서는 Na 채널의 빠른 유입으로 인해서 가파른 곡선으로 탈분극이 되고, 1단계에서는 K 채널의 유출로 인해서 약간 재분극을 했다가 다시 2단계에서 Ca 채널의 유입으로 인해 평탄기를 가지면서 활동전압이 길게 유지되고 3단계에 다시 K 채널의 유출로 재분극이 되고 4 단계에 안정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심근세포의 활동전압은 그 유지시간이 길다. 따라서 절대적 불응기가 길게 되어서 강축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부정맥을 방지하는 하나의 원리가 될 수 있다. 푸르키네섬유나 방실 결절도 스스로 활동전압을 만들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활동전압을 만드는 동방결절에 의해서 억제 되므로 심주기에서는 동방결절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파두츠 파두츠(, )는 리히텐슈타인의 수도로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5019명이다. 리히텐슈타인 공작가(家)는 본래 오스트리아에 거소가 있었는데, 1938년부터 이곳에 거소를 두었다. 스위스 국경 부근의 라인 강 동쪽 비탈면에 위치하며 16세기에 건축된 군주 요제프 2세의 고성(古城)이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파두츠는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소를 방목하고 곡물이나 포도가 재배되는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섬유·식품·정밀 기계 등의 경공업도 활발하며, 아름다운 환경에 힘입어 관광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시 중앙에 있는 우체국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름다운 우표를 사려고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대공국(, , ), 약칭 룩셈부르크(, , )는 서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며 대공이 통치하는 대공국이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철강 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유럽 연합, 경제협력개발기구, 유엔, 북대서양 조약 기구, 베네룩스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며, 수도 룩셈부르크에는 유럽 연합의 여러 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201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2014년에 임기를 마쳤다. 2016년 기준 룩셈부르크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 혹은 도착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는 187개국이며, 이는 전세계 15위에 해당한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사이에 있는 내륙국가로 독일과 프랑스의 완충국으로서의 의미도 지녔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3개 구와 12개 주, 116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룩셈부르크의 행정 구역 목록이다. 전통적으로 협소한 국토 때문에 이웃 나라와 유대를 굳게 하여 1843년부터 1918년에 독일과 관세 동맹을 맺고, 1921년 이후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 등에 가맹함으로써 소국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따라 발달한 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철강산업은 무역액의 29%, 국내총생산(GDP)의 1.8%, 산업고용의 22%, 노동력의 3.9%를 차지한다. 남부의 구틀란트를 중심으로 농업이 이루어져 감자, 보리, 사탕무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 국경을 따라 흐르는 모젤 강 연안의 포도원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는 특히 유명하다. 이 나라 제1의 산업인 광공업은 남서부의 뒤들랑주, 로딩겐, 에슈쉬르알제트, 디페르당주 등지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을 원료로 하였으나, 철광석층의 대부분이 고갈되어 프랑스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밖에 화학제품·금속제품·시멘트를 생산하며, 맥주, 담배, 낙농제품의 제조도 성하다. 그러나 석유파동 이래 세계적 경제의 혼미는 룩셈부르크의 철강업에도 큰 영향을 끼쳐 정부는 경제적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기업유치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국(自國)을 금융시장으로 부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은 유럽 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1998년 이후에도 제조업의 수출증가나 금융업의 호조에 의해 고성장을 유지하였다. 무역면에서는 1998년 수출 208억 달러, 수입 174억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금속, 기계, 전기제품, 플라스틱, 고무, 섬유 등이고 수입품은 기계류, 전기제품, 금속, 수송용 기기, 광산물품(석유 포함)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등이다. 게르만족이 바탕이 되고 프랑스인과의 혼혈이 있다.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소수로 살고 있는 데, 이들은 룩셈부르크의 철강 산업의 붐이 일어날 때 노동자로 들어왔다. 헌법상의 명시적 조항은 없고, 룩셈부르크어(이 언어는 독일어의 방언으로 규정한다), 프랑스어, 독일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다. 입법활동은 프랑스어가 독점하고, 행정 및 사법분야는 3개 언어를 사용한다. 전국민의 97%가 익숙한 프랑스어이기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영어도 관광 장소에서 사용한다. 국교는 없고, 주민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세속화 경향이 심하고,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 무신론자나 이웃 종교 신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성공회, 이슬람교 등의 신자가 있다.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UN군으로 참전하여 44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해운협정(1987년)과 항공협정(2003년)을 체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2001년 수교하였다. 2016년 현재, 별도의 한국대사관이 존재하지 않고 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기원전 24년 기원전 23년 기원전 22년 기원전 21년 기원전 20년 기원전 19년 기원전 18년 기원전 17년 기원전 16년 기원전 15년 기원전 14년 기원전 13년 기원전 12년 기원전 11년 기원전 10년 기원전 9년 기원전 8년 기원전 7년 기원전 6년 기원전 5년 기원전 4년 기원전 3년 기원전 2년 기원전 1년 1년 = 365일 6시 9분 9.5초 + 0.0001초(t - 1900) (황도상의 고정점을 기준) = 363일 6시 13분 53.0초 + 0.0026초(t - 1900) (근일점기준) = 365일 05시 48분 46.0초 - 0.00530초(t - 1900) (춘분점기준) 2년 3년 4년 5년 6년 비어있다 7년 8년 9년 10년 비어있음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이벤 모글렌 이벤 모글렌(Eben Moglen)은 컬럼비아 로스쿨의 교수이다. 또한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포함한 수많은 프로 보노 고객들을 변호하는 소프트웨어 자유 법률센터(Software Freedom Law Center)의 설립자 겸 회장이다. 리처드 스톨만과 함께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GPL을 포함한 GNU 라이선스를 작성했다.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21년 22년 23년 24년 25년 후한이 건국되었다. 귀스타브 쿠르베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 1819년 6월 10일 - 1877년 12월 31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로코코 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 - 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르네 데카르트 르네 데카르트(, , 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지도의 규칙>을 썼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 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를 계승,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 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기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La Haye, 현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 시로 개명함)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르타뉴 지역 렌(Renne)시의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14달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몸이 무척 허약했다고 한다. 1606년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주(Collège la Flè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다. 5년간 라틴어, 수사학, 고전 작가 수업을 받았고 3년간 변증론에서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을 포괄하는 철학 수업을 받았다. 그가 이 시기에 받은 교육은 후에 그의 저서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특히 《방법서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데카르트는 라 플레쉬를 졸업하고서 푸아티에(Poitiers) 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자연 과학·법률학·스콜라 철학 등 배우고, 수학만이 명증한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 1616년 리상스(Licence)를 취득한다. 이후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 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 후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에 갔으며,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 출정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첫 작품인 짧은 《음악 개론》(Compendium Musicae)을 썼다. 같은 해에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여행하던 중 11월 10일 울름의 한 병영에서 자기 삶의 길을 밝혀 주는 꿈을 꾸게 된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삶의 목표를 학문에 두기로 하였다. 1620년 제대하고 프랑스에 귀환,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자연 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1627년에 다시 종군한 후, 1628년 단편 <정신 지도의 법칙>을 집필, 자신의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 하였다. 같은 해 겨울 연구와 사색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건너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은 네덜란드에 약 20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1628년 겨울에 데카르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하아렘, 에그몬드 등의 도시로 여러 차례 주거지를 옮기면서 더러는 개인 교사로 혹은 은둔 학자로 생활을 했다. 이 시기 (1630년 - 1633년)에 자연과학에 관한 책 '《세계론》(Le Monde)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1637년부터 데카르트는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해에 《방법서설》을 출판했다.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는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후에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1649년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에 부임하여 여왕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아카데미 창립에도 관여하였으나, 1650년 초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하였는데, 그렇지만 최후의 의심할 수 없는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도달, 이것이 철학의 근본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그 기계적 우주관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수학에 있어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여 근대 수학의 길을 열어놓았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철학자로의 삶도 살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도 배제 했는데, 이는 감각도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결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다.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방법서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는 《제일철학을 위한 성찰》에도 나와있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과 인위관념, 외래관념을 분리하였다. 여기서 외래관념은 밖에서 오는 관념을 말하고 인위관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며, 본유관념은 태어나면서 부터 존재하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관념은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 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은 것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덧붙여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증명은 나중에 칸트의 비판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려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바로 연장과 사유이다. 연장은 구체적인 부피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하고, 사유는 연장과 달리 부피와 같은 것이 없는 실체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을 제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송과선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데카르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그는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고 의사마저도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도 마음씨 고운 한 간호사의 보살핌 덕분에 그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때의 일로 인해 그의 이름을 '소생(蘇生)'이란 뜻의 '르네'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철학가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마 철학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부자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그는 스스로 형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자주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다녔고 친구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서 사팔뜨기 인형을 제일 좋아했던 그는 커서도 유독 장애인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8세 때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데카르트의 선생님은 그를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교과서를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1613년에 파리로 가서 법률을 배웠고 1616년 푸아티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식견을 높이기 위해 1617년 그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학과 관련된 도박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617년의 어느 날 한가로이 길을 걷던 데카르트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광고지가 붙은 곳으로 다가갔다. 광고는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광고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네덜란드 대학교 교장이었고 데카르트에게 광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광고는 어려운 기하학 문제가 적혀 있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데카르트는 단지 몇 시간 만에 문제를 풀었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고 말한 수학의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 수학자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 눈뜨기 힘든 아침 시간,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같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과는 달리 자기가 좋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였다. 중년이 된 데카르트는 학교생활을 되돌아보고 나서 이 길고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예에 해당하는 일화가 있다.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좌표 개념의 발견과 관련된 일화인데, 30년 전쟁 당시 용병으로 참여하였을 당시 몸이 약해 병영의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데카르트는 문득 자신에게 이상한 성향이 있음을 자각한다. 사시(斜視: 사팔뜨기)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만 보면 왠지 더 친근감을 느끼고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던 데카르트는 결국 어린 시절에 한 소녀를 사랑한 적이 있었고, 그녀의 눈이 사시였음을 기억해 낸다. 사랑에 빠진 데카르트에게 소녀의 신체적 결함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의 신체적 결점을 압도하여, 사시라는 결점은 훗날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어떤 선택의 순간에 부닥쳤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받은 감정적 충격이나 상처 때문에 종종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철학의 왕자’로 군림했던 데카르트는 이 사소한 일화를 통해, 감정이 어떻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하는지 깨닫는다. 르네 데카르트는 30년전쟁 때 울름가 주변의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그곳은 겨울에 너무나 추웠다. 그가 술회한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벽난로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그 난로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세 가지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약하여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는데 그 근처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어 데카르트 자신이 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두 번째 꿈에서 그는 미신으로 흐려지지 않는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폭풍은 일단 그 정체가 폭로되고 난 후에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세 번째로 꿈을 꿀 때는, 테이블 위에 사전과 그 옆에 다른 책이 놓여 있는데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오며 낯선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Quiet Non’(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이라 해석함)으로 시작하는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세 번째 꿈에서 깨어난 후에 이미 꾼 꿈들의 의미를 생각하였는데 첫 번째 꿈은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며,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기에의 길을 열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참된 지식으로의 접근법에 대하여 스스로가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미 이 꿈들을 꾸기 8개월 전 베크만에게 보낸 보고에 ‘앞으로는 기하학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계획을 공언하였다. 기하학과 대수학의 결합으로 두 개의 학문 영역을 하나의 학문으로 파악하는 데 성공한 데카르트는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모든 문제는 동일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방법을 그는 '보편수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철학의 진술은 수학의 진술처럼 아주 기초적이고, 논리적이고, 엄격해야만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했다. 철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했다. 그럼으로써 모든 근본 중의 근본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철학의 토대를 발견했으며, 이 토대 위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1649년 2월,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를 스웨덴 황궁으로 초대했다. “크리스티나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위대한 학자의 시간을 뺏을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녀에게 사랑에 관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그가 무시해왔던 제목이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그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었는데 반드시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명했다. 데카르트는 그동안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왕의 명에 따라 일주일에 3일은 한밤중에 일어나서 스웨덴의 찬 공기를 가르며 자신의 숙소에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야 했다. 1650년 2월 1일, 새벽 찬 바람을 맞은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고, 곧바로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데카르트는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1667년에 파리에 돌아왔고 주느비에브 뒤몽 성당에 안치되었다. 1799년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해를 프랑스 역사관으로 옮겨 프랑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모셨다. 1819년 이후 그의 유골은 다시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데카르트, 유럽 르네상스 이후 인류를 위해 처음으로 이성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한 사람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근세사상의 기본 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이원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자연관과 정신의 형이상학을 연결지어 세상을 몰가치적이고 합리적으로 보는 태도와 정신의 내면성을 강조하였다. 대륙철학의 합리주의의 근본이 된 그의 회의론은 다양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함으로써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학을 이러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 여겨 철학을 포함한 모든 진리를 수학적인 원리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철학 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적인 업적도 이룩하였다. 162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637년 《방법서설》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수학자로서의 그는 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formula_1를 사용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거듭제곱을 표현하기 위한 지수의 사용 등을 발명했다. 데카르트는 다양한 여러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학을 만든 혁명적인 수학자이며 동시에 고대 그리스 과학을 모두 집대성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보편적인 수학은 본인이 예견했듯이 광학, 천문학, 기상학, 음향학, 화학, 건축학, 물리학, 회계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본인이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분야인 전기학, 인공두뇌학, 미생물학, 유전학, 경제학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며 이 절대적인 진리를 이용해 구성요소의 진리값을 이용한 다른 진술을 증명하는 법을 개발했다. 그는 과학을 대하는 데에 있어 크기, 모양, 운동 등의 경험적인 양에 집중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이론에 따라 진공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세 가지 물질의 연장이 곧 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을 곁들인 데카르트적 회의는 서양철학의 특징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관한 부분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해석기하학의 창시이다. 특히 그가 고안한 직교좌표계는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던 대수론과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융합시켜 자신 이후의 뉴턴역학을 비롯한 근대 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직교좌표계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공간을 대체하였고, 이는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공간 개념을 도입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에 포함된 소논문 《"La Géométrie"》(1637)은 수학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논문에서 그는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해,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를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숫자(밑)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의 수학적 업적은 라이프니츠가 제안하고 뉴턴이 발전시킨 미적분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실계수의 n차방정식의 양의 실근의 개수는 다항식 formula_2의 실수의 열사이에서 일어나는 부호변화의 수와 같거나 그 수보다 짝수 개만큼 적다."는 데카르트의 부호법칙은 다항식의 근의 개수를 구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방정식의 미지수에 처음으로 formula_1를 사용한 것도 르네 데카르트의 업적이다. 1618년 르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이삭 베크만을 조우했으며, 그에게 많은 문제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수학이 어떻게 류트의 음정을 맞추는 데에 정확하게 응용될 수 있는지와 무거운 물체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수면의 높이 변화를 나타내는 대수적인 공식을 제안했다. 또한 진공 상태에서 물체가 낙하할 때 임의의 시간에서 그 물체가 가속하는 속도를 예측하는 방법과 어떻게 회전하는 팽이가 똑바로 서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공중에 뜰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베크만의 일기를 통해 1618년 말까지 데카르트가 이미 기하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수 방정식의 적용을 여러 방면에 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그 둘 간의 장벽은 해석기하학이 창시됨에 따라 허물어졌다. 그는 산술과 대수학은 그저 숫자의 과학이 아니라 무리수의 사용을 정의하고 새로운 수학의 가능성을 연 명제의 과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을 통해 그는 수학과 모든 과학은 상호관계적이며 둘을 따로 생각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쉽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로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10살 때, 라 플레슈(La Fleche)의 학교에 입학해 논리학, 윤리학, 물리학과 형이상학,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대수학 및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최신 업적에 이르기까지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과학자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1618년 르네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장교로서 복무하였는데, 이 때 그의 과학적 흥미는 탄도학, 음향학, 투시법, 군사기술, 항해술 등까지 발전시켰다. 그 해 겨울 아마추어 과학자이자 당시 수학의 지도자였던 이삭 베크만을 처음 만나 다시 이론적인 문제와 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이후 몇 년간 물리학분야에 있어 빛의 원리, 공학, 자유낙하 등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특히 그가 빛의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빛을 중요시하던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다(사실 이는 당대 수학자나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이론적 전개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가장 작은 수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고, 더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까지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스넬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굴절의 법칙이 이 때 발견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저서 《굴절광학》에서 독자적으로 증명한 "굴절의 법칙"을 언급하는 한편, 시력에 관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굴절의 법칙에 대해 서술할때 자신이 고안한 직교좌표계를 활용하여 법칙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는 《천체론(Le monde)》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후일 뉴턴에 의해 거부된 그의 와류이론에 의하면 에테르의 미소한 입자들이 혹성이나 태양 주위에 거대한 회전흐름, 즉 소용돌이 속에 떠 있는 어린이의 보트와 같이, 이 태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반되고, 달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위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Clifford Truesdell"로부터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현대적 의미의 시초이다.""(Truesdell 1984,6)"라는 평을 들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본질을 외연(extension)으로 보았다. 사물에 체계적 의심을 적용해 그것의 감각적 특징들을 지워 나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간의 일부를 채우고 있는 무색, 무미, 무취의 어떠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공간은 물질로 꽉 차있는 플레넘(plenum)으로, 불의 원소, 공기의 원소, 흙의 원소의 세 종류의 물질로 채워져 있다. 다른 어떠한 감각적 속성이 없이도 크기, 모양, 운동 등으로만 물질을 정의해 차가움, 뜨거움, 습함 등의 질적인 개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데카르트는 플래넘을 구성하는 작은 원소들의 충돌이 자연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또한 데카르트는 그의 책에서 눈에 대한 해부학적 구조를 설명하며 빛이나 외부 이미지가 동공과 내부 유리체를 거쳐 굴절되고 상이 뒤집혀 망막에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 뿐 아니라 눈이 얼마나 상을 최대화하고 또렷하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념에까지 확대시켰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렌즈 깎는 법을 설명하며 망원경과 현미경의 유용성을 언급했다.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윌리암, 하베이와 나란히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전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했다.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보며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으며, 네덜란드에 머무른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인체를 해부했다. 데카르트는 가설적 모델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해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 현상과 보행과 같은 복합 동작에 있어 많은 관찰과 다양한 기계론적 설명을 내세웠다. 이러한 모든 동작과 운동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근대적 생리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함으로써 자연계의 만물을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이 곁들여진 방법론적 회의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자신이 믿는 바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특징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 의심의 방법은 절대적인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의심한 르네 데카르트에 의해 서양 철학에 대중화 되었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방법론적이다. 데카르트적 회의의 목적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나 경험적 정보의 오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회의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 회의론의 목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 중 가장 저명한 것은 토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 지식을 파생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지식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를 토대로 쌓아갔다. 이는 대륙철학의 합리주의를 축약시켜 보여주는 원형적이고 중요한 예시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는(4개의 과학적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실이라고 아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둘째, 이 사실들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는 것. 셋째, 간단한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는 것. 넷째, 더 확장된 문제들의 완전한 목록을 만드는 것. ) 의심을 과대하게 하는 것이므로 의심의 경향성을 가진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기준으로의 지식은 단순히 합리적인 것 아닌 가능한 모든 의심을 넘어선 것을 말한다. ) 그의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만 이루어진 믿음체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믿음의 진실 여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적 회의의 원조인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신념, 아이디어, 생각, 중요성을 의심에 두었다. 그는 어떠한 지식에 대한 그의 근거나 추리 또한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식의 초기 상태인 감각적 경험은 잘못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의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보는 것은 환각일 수도 있다. 그가 보는 것이 환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만약, 어떠한 신념이 논박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이의 진실 여부에 대한 근거가 불충분한 것이다. 이 것으로부터 데카르트는 꿈과 악마라는 두 가지 주장을 제안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우리가 꿈을 꿀 때 믿기 어려운 와중에 현실 같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깨어있을 때의 경험과 꿈을 꿀 때의 경험을 구별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꿈이라는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에 산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성찰(1641)의 끝에 가서는 적어도 회상을 할 때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악의적 천재에 의해 조정 당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천재는 똑똑하고 강하며 남을 잘 속인다. 데카르트는 그가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울적인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한 사람이 미쳤었다면, 그 광기가 그 사람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정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부터 막는 어떤 강력하고 교활한 악마가 존재할 수 도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모든 감각들이 거짓말을 할 때, 한 사람의 감각이 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자신에게 거짓말 할 이유가 없는 강력한 존재가 심어두었으며 그의 강력한 존재에 대한 생각은 사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존재조차도 의심의 방법을 적용하여 의심하는 것이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란 말을 탄생시켰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려고 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식론에서 합리주의란 사실의 기준이 감각이 아닌 지적이고 연역적인 것이다. 이 방법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합리주의자들이 있다. 추리력이 지식을 얻는 다른 방법들보다 우선적이라는 온건한 위치부터 추리가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극단적인 위치까지 존재한다. 근대 이전의 합리주의는 철학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계몽운동 이후로, 합리론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에서와 같이 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합리주의는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의 대륙 쪽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대륙 합리주의라고도 불린다.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자주 대조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합리주의를 믿으며 동시에 경험주의를 믿을 수 있다는 점만을 봐도 아주 넓게 보았을 때 이 두 관점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경험주의자는 모든 생각이 외적인 감각이던 내적인 감정이던 경험을 통해 얻는다는 관점을 갖는다. 따라서 지식은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유추되거나 경험을 통해 직접 얻는다는 입장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있어서 논점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의 근본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합리주의의 몇 부류의 지지자들은 기하학의 자명된 이치와 같은 근복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가졌던 철학자들로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 되었던 인식론 상의 근본 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합리주의의 근본적인 접근의 발전을 가져왔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둘 다 원칙적으로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이 추론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수학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관찰했다.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구별은 나중에 일어난 일로 그 시기의 철학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 구별 또한 애매하여 대표적인 세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많은 경험주의자들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가까웠다. 데카르트는 불변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들만 추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지식들은 과학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꿈이 감각적 경험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꿈들은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자각하고 있는 감각적 경험은 환각이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감각적 경험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그 결과로 데카르트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든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얻어내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방법서설, 제1 철학에 관한 성찰과 철학원리에 실었다. 데카르트는 지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지식으로 분류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사실을 찾아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얻어낸 사실들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어떠한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추론을 통해 얻어낸 사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작은 요소들로 나뉘어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의 결과로 추론은 지식을 결정짓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 방법은 감각의 도움 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은 어떠한 경험의 간섭도 받지 않은 결론이다. 이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서 다른 모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명제는 그의 형이상학의 제일원리인 동시에, 견실한 과학에 도달하기 위한 제일 원리였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사상에 반동적이었으며 과학에서 발견된 사실을 철학적인 세계관에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기하학적 물리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데카르트가 보기에 그것은 엄밀성이 부족했다. 감각에 기초한 물질 세계의 개념과 좀더 엄격한 수학적인 물질세계의 개념을 구별하는 가운데, 데카르트는 후자가 더 객관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며 자주 착각을 일으키고 외부세계와 동일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주관을 넘어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취하는 입장은 감각적 경험이 아닌 이성관념으로, 이는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험적 관념에 따라, 실체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했다.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는 명확하고 명료한 속성들의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조합을 통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실체의 본성은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이며 물질적인 실체의 본성은 '연장된 것(res extensa)'였다. 먼저 정신은 연장적인 특징이 없고 불가분적이므로, 연장을 지니고 있는 물질과는 판명하게 구분된다. 데카르트는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을 물질과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좁은 의미에서는 순수한 지성(수학, 철학을 탐구하는)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상상 작용, 감각 작용이 속한다. 감각 작용 신체에서 온 감각인 내부 감각과 외부사물로부터 비롯된 외부 감각으로 나뉜다. 내부감각은 다시 어디에서 오는지 위치를 알 수 있는 고통, 배고픔, 목마름과 같은 관념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분노, 슬픔과 같은 정념으로 나뉜다. 이 신체들의 내부감각은 정신을 속여 가짜의지를 생성해서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이며, 제한 되어있지만 신과 동일한 유형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신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신이었으며, 이런 배경으로 인해 순수하게 지적인 능력인 상상력이나 감각 지각과 같이 육체를 전제로 하는 능력과 구분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물질(육체)은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하학적 공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섞여있거나 겹치지 않는다. 또한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무한 분할이 가능하며 이러한 모든 물체의 위치와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에서 좌표화 가능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공간 개념에 있어서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물질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것으로서 운동은 연쇄적으로 각 물질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관념들 자체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것으로 각 관념들은 물체를 특수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또한 정신과 육체는 섞여있는 것이다. 과거 플라톤의 정신과 신체는 선원과 배의 관계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것이었으나, 데카르트는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솔방울 모양의 샘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육체가 신경선으로 동물정기라는 기체화된 혈액을 자극하면 인과적으로 감각적 내용이 송과선을 통해 정신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설명에 대해 기계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의해 확립되었다’라는 주장을 한다. 과학혁명 이전의 자연관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자석들은 왜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어낼까? 상처에 약을 바르면 왜 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는 자연을 살아있는 신비한 생명체로 파악하며,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잡아당기는 이유는 서로가 공감을 하기 때문이고, N극과 N극이 밀치는 이유는 서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식물이 성장하고, 동물이 스스로 자각해서 움직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를 영혼으로 보았다. 이렇게 자연을 마치 생명과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여기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할 동기로 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은 자연에서 신비로움을 제거해 버렸다. 자연은 객관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이다. 데카르트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을 제시하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 기계적 철학은 자연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 현상이란 이런 물질들의 운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전제하고, 각종 자연 현상들을 미세한 물질들의 직선 운동과의 충돌로 설명했다. 앞에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자들이 자석을 공감, 반감을 이용해서 설명했던 것에 비해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는 입자와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고, 자석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나사들이 배열되어 있어서 자석의 구멍을 통해서 작은 나사들이 통과하는데, 나사들의 운동 방향에 따라서 자석은 서로 끌리기도 하고, 서로 밀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 자석은 외부에서 특별히 힘이 작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지만, 기계적 철학의 눈으로 본 자석은 신비로움을 잃었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자연을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이해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기계적 철학에서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조차 불필요했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단지 기계에 불과했으며, 그 자체의 목적이나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했다. 이로써 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자연계의 만물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17세기 과학혁명의 기본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자연은 정확한 수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한 기계"라는 그의 생각은 일생동안 하나의 가설로 남아있어야 했다.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시키고, 과학혁명을 완성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어받아, 뉴턴도 자연 현상의 기본을 운동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운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데카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입자의 운동에 수학적 성격을 합친 "힘"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운동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다시 말해서 "힘"을 운동의 원인으로 설정하여, 힘의 수학적인 표현을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가속도, 속도, 물체의 움직이는 궤적 등을 계산하는 역학의 방법을 정식화했다. 뉴턴은 결국 데카르트를 뛰어넘지만,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데카르트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다. 복잡한 자연을 단순하게 분해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나, 운동에서 자연 현상의 근원을 찾고, 그 운동을 수학적인 언어로 풀어내려고 했던 점 등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뉴턴 중 누가 옳았는가" 하는 문제가 양국 과학자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두 사람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이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을 그렇게 항목별로 비교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우리가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에 있다. 20세기 초에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 세계는 데카르트와 뉴턴이 확립해 놓은 고전역학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함을 뜻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생각된다는 것"은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 정의를 실체로 적용할 때, 의미를 악화시켜서 자신이 내린 정의에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그는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신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도 정의한다. 이는 실체 개념을 창조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자신이 내린 실체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 실체"라는 말은 불합리한 개념이며, 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한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고 한 스피노자의 정리에서 잘 드러난다. 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지에 대해서도 두 사상가는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인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데카르트의 신은 인격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 소멸, 심지어는 개입할 수도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그런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신의 의지에 의한 "기적"같은 것은 신의 작동 방식을 법칙으로 이해하고자 한 스피노자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종교적 믿음은 학계에서 엄밀히 논쟁되어 왔다. 그는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목적들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서 데카르트는 이원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받았다. 동시대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에게 손가락 움직임 하나만으로 세계를 확립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스티븐 고크로져의 데카르트 전기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정적인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저술한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죽은 후,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의 법이 신교도 지도자를 요구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기 위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 교사인 데카르트뿐이었다. 알칼리 금속 알칼리 금속(alkali metal, -金屬)은 주기율표의 1족 가운데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화학 원소를 통틀어 일컫는 표현으로 리튬(Li), 나트륨(Na), 칼륨(K), 루비듐(Rb), 세슘(Cs), 프랑슘(Fr)이 이 화학 계열에 속한다. 반응성이 매우 강하여 산소나 물, 할로젠 원소 등과 만나면 빠르게 반응을 일으킨다. 알칼리 금속은 대체로 은백색을 띠며, 매우 무르고 밀도가 낮은 고체이다. 할로젠과 결합하여 염을 생성하며, 물과 반응하여 강한 염기(-OH) 수산화물을 생성한다. 알칼리 금속은 모두 가장 바깥의 전자껍질에 1개의 전자를 가지고 있다. 반응성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공기 중에 방치하면 빠른 속도로 반응이 일어나 표면의 은백색 광택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알칼리 금속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빛이 차단되는 갈색의 병에 파라핀 등의 액상의 유기 탄화 수소를 채워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산소, 물 등과의 접촉을 차단하여 서늘한 응달에 보관해야한다. 알칼리 금속 자체의 강력한 반응성으로 인해 피부에 직접 닿지 않도록 취급해야 하고, 적은 양으로도 물과 접촉하면 폭발적으로 반응하게 되므로 항상 주의해야 한다.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하여 폭약을 만들기도 한다. 수소 수소(水素, )는 주기율표의 가장 첫 번째(1족 1주기) 화학 원소로, 원소 기호는 H(←), 원자 번호는 1이다. 표준 원자량은 1.008로, 질량 기준으로 우주의 75%를 구성하고있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이기도 하다. 순물질은 실온에서 기체상태의 H로 존재하며, 1족 원소중에서 유일한 비금속 원소이다. 동위원소로는 중수소(H)와 삼중수소(H)가 있다. 수소(水素)라는 이름의 어원은 ‘물을 만들다’의 독일어 Wasserstoff에서 유래하였다. 영어로도 Hydrogen은 라틴어의 Hydro(물)와 비금속 원소의 접미사 -gen(만들다)이 합쳐진 뜻을 가지고있다. 수소는 현재 주기율표에서 가장 바깥쪽 껍질에 전자를 하나 가진 리튬 위에 배열한다. 하지만 수소는 사실상 알칼리 금속들이 위치해있는 1족 원소치고는 화학적 성질이 할로겐 원소들과 여러면에서 더 비슷하기 때문에, IUPAC에서는 수소를 17족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급격히 불에 타는 가연성 연료이다. 수소가 불에 탈 때에는 “펑”소리와 함께 무색의 불꽃을 내며 타는데, 이때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물 분자가 형성된다. 2H(g) + O(g) → 2HO(l) + 572kJ(반응열, 286 kJ/mol) 수소 기체는 공기 중에서는 4~74%의 농도, 염소 화합물에는 5~95%의 농도일 때 강한 폭발성을 띈다. 혼합물은 자연스레 불꽃, 열 또는 태양광에 의해 폭발하며, 자연발화 온도는 대략 500°C이다. 순수한 수소-산소 불꽃은 자외선과 맨눈으로는 거의 볼 수 없는 매우 밝은 빛을 방출한다. 때문에 수소 가스의 누출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불꽃 감지기가 필요하다. 또한 수소는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비행선을 띄우는 데 적합한 제료로 사용되었지만, 1937년 연료 탱크에서 누출된 수소 가스가 폭발하여 발생한 힌덴부르크호 사건 이후로 현재 많은 나라에서 풍선이나 비행선에 수소를 채우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사건 당시 힌덴부르크 호에 탑승했던 승객중 3분의 2는 화재로부터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는 비행선에서 추락하거나 연료가 점화되어 사망했다. 단일 수소 원자가 전자 하나를 버리고 양이온(양성자)의 형태로 존재하면 금속을 부식시키는 등 산성 용액의 특징을 나타내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며, 상온에서 염소나 플루오린과 반응하여 염화 수소나 플루오린화 수소 등의 부식성 기체를 형성한다. 전자의 배치에 따라 오르토 수소나 파라 수소를 형성한다. 전자가 수소 분자의 바깥을 향하면 오르토 수소이다. 비교적 전환 속도가 느리므로 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상온에서는 오르토 수소와 파라 수소가 3:1 정도의 비율로 존재한다. 수소에는 세 개의 자연에서 발견되는 동위원소(H, H, H)가 있다. 다른 매우 불안정한 동위원소들은 실험실에서 합성된 적이 있으나(H,H,H,H),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H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수소 중 99.98%를 차지하는 가장 흔한 동위원소로 원자핵이 양성자 단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경수소라는 형식적 이름을 가지나 이 이름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H는 다른 안정한 동위원소로 중수소라고 불리며, 원자핵이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중수소는 대폭발 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수소는 방사성을 띠지 않으며 독성 위험도 크지 않다. 중수소와 그 화합물은 화학 실험에서 방사능을 띠지 않는 표지나 H-NMR 분광법의 용매로 사용되며, 상업적 핵융합의 잠재적 연료이기도 하다. 특히 중수소가 많이 포함된 물을 중수라고 부르며, 중성자 감속재나 원자로 용매로 사용된다. H는 삼중수소라고 불리며, 원자핵이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삼중수소는 방사성을 띠어 12.32년의 반감기를 갖는 베타 붕괴를 통해 He로 붕괴된다. 적은 양의 삼중수소가 우주선과 대기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나 자연에 존재한다. 삼중수소는 핵무기 실험에서 방출되기도 한다. 삼중수소는 핵융합 반응에 사용되거나 동위원소 지구화학에서 추적자로 사용된다. 수소는 각 동위원소의 다른 이름이 흔히 사용되는 유일한 원소이다. D와 T라는 표기가 H와 H 대신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여전히 H, H를 권장하지만 IUPAC도 D와 T를 인정하고 있다 방사능의 초기 연구에서, 많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이름 지어졌으나 수소 이외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16세기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금속이 산에 녹을 때 어떤 기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그 기체를 수소라고 맨 처음 언급하였다. 그 당시에는 수소가 일산화탄소와 같은 다른 가연성 기체와 혼동되었으나, 1766년 헨리 캐번디시는 수소가 다른 가연성 기체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1776년 월타이어는 수소가 연소할 때 물을 만든다는 것을 발견하고, 몇 년 후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를 수소라고 명명하였다. 수소 기체는 파라셀수스가 금속과 강산을 섞어 처음 만들었다. 그는 이 화학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가연성 기체가 새로운 화학 원소임을 알지 못했다. 1671년, 로버트 보일이 수소 기체가 발생하는 반응인 철가루와 묽은 산 용액 간의 반응을 재발견하고 기술하였다. 수소 기체를 개별적인 물질로 처음 인식한 것은 헨리 캐번디시였다. 그는 1766년 금속-산 반응에서 나오는 기체를 “인화성 공기”로 확인했고,1781년에는 그 기체를 연소시키면 물이 생김을 발견했다. 헨리 캐번디시는 보통 수소의 발견자로 인정받는다. 그 뒤 1783년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와 함께 수소가 연소되면 물이 생긴다는 캐번디시의 발견을 재현한 뒤 원소에 수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소는 제임스 듀어에 의해 재생식 냉각법과 그의 발명품인 진공 보온병을 이용해 1898년 처음 액화되었다. 그는 그 다음 해에 고체 수소도 만들었다. 중수소는 헤롤드 유리가 1931년 12월에 발견했고, 삼중수소는 어니스트 러더퍼드, 마크 올리펀트, 파울 하르텍이 1934년 만들었다. 물 분자에서 보통 수소의 자리가 중수소로 대체된 중수는 1932년 헤롤드 유리의 그룹이 발견하였다. 에드워드 다니엘 클라크는 1819년에 수소 기체 취관을 발명했다. 1823년에는 되베라이너 등과 석회광이 발명되었다. 수소 충전 풍선은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이 1783년에 처음 발명하였다. 앙리 지파르가 수소를 이용해 뜨는 비행선을 1852년에 발명하면서 수소가 항공 교통 수단이 공중에 뜨는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뒤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이 수소를 충전하여 공중에 뜨는 경식 비행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이 비행선은 나중에 체펠린 비행선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900년에 처음 비행했고, 1910년에는 규칙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1914년 8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체펠린 비행선은 중대한 사고 없이 3만5천 명의 탑승객을 운반했다. 전쟁 도중에 수소로 뜨는 비행선들은 관찰대나 폭격기로 이용되었다. 첫 무착륙 대서양 횡단은 1919년 영국 비행선 R34가 이루었다. 정기적인 여객 서비스가 1920년대에 재개되었고, 미국에서의 헬륨의 발견은 비행선에 더 큰 안전성을 보장했으나, 미국 정부는 비행선에 사용할 목적으로 쓰이는 헬륨을 파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LZ 129 힌덴부르크에는 수소가 사용되었고, 힌덴부르크는 1937년 5월 6일에 비행 도중의 화재로 파괴되었다. 이 사고는 라디오로 생방송되었다. 새어나온 수소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여겨졌으나, 수사 결과 알루미늄 섬유의 정전기 때문에 불이 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소의 비행선에의 사용은 이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비행선에는 거의 헬륨을 사용하고 있다. 니켈-수소 전지는 1977년 미 해군의 NTS-2에 처음 사용되었고, 국제 우주 정거장 과 마스 오디세이, 마스 글로벌 서베이어 에도 장착되었다. 수소는 공기보다 가벼워 한때 풍선속 공기로 활용되었지만 위험성이 알려지며 지금은 헬륨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수소가 싸다는 이유로 일부 상인은 불법으로 풍선에 수소를 넣고 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논란과 파문이 되고 있다. 양성자 하나와 전자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비교적 간단한 원자 구조 때문에, 수소 원자와 수소 원자가 내는 스펙트럼은 원자 구조 이론의 발전에 중심이 되어 왔다. 게다가 그에 따르는 수소 분자와 그 양이온 H의 간단함은 화학 결합의 본질에 대해 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간단함으로 인해 수소 양이온과 수소 분자 양이온에 대해 슈뢰딩거 방정식의 완전해를 구할 수 있다. 뚜렷하게 관찰된 양자적 효과 중 하나는 양자역학 이론이 완전히 정립되기 반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수소에 대한 맥스웰의 관찰이다. 맥스웰은 수소 분자의 비열용량이 상온에서는 이원자 분자의 비열용량 경향을 따르고 극저온으로 내려가면 단원자 분자의 비열용량 경향과 비슷해지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관찰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 현상은 양자화된 회전 에너지 수준 사이의 차이가 수소의 낮은 질량 때문에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수준 간의 큰 차이가 낮은 온도에서 같은 양의 열 에너지가 회전 운동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다. 한편 더 무거운 원자로 구성된 이원자 분자에서는 에너지 수준 간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H는 혐기성 생물이 하는 물질 대사의 결과물로써 수소화효소라고 부르는 철 혹은 니켈이 포함된 효소의 촉매 반응을 하는 미생물이 생성하기도 한다. 이 효소는 H와 그 구성 물질인 두 개의 양성자와 두 개의 전자 간에 이루어지는 역산화·환원 반응을 촉진시킨다. 기체 수소는 피루브산이 발효 과정에 관여하면서 생성된 같은 양의 물질이 전달 도중에 변형되어 발생한다. 물은 전기분해시 양성자와 전자, 산소 원자로 분리되며, 광합성을 하는 모든 생명체의 명반응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런 생물들 중에는 엽록체 내의 특별한 수소화 효소가 작용하여 양성자와 전자가 기체 수소로 환원되도록 진화한 개체도 있다. 대표적으로 , 남조류가 있다. 산소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효율적으로 H를 합성하는 남조류의 수산화효소를 유전자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생물반응기 내의 유전자 조작 조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수소는 공기와 혼합되었을 때 폭발과 함께 화재를 동반할 수 있다. 하지만, 수소는 원자번호 1번, 즉 공기보다 14배 가벼운 기체이기 때문에 공기중에 누출시에 매우 급속도로 확산되며, 점화 온도(약 500°C)가 높아 자연적 발화 자체가 극히 낮다. 액체 수소 (영하 253도 이하에서 액체화)는 극저온 유체로써 기체수소에 비해 부피기준 1/800 수준이기 때문에 약 10배 이상의 수소효율성이 예상된다. 액체상태의 수소를 직접 피부와 접촉하면 동상에 걸릴 수 있으나 일반인이 직접 접촉하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소는 또한 금속재료에 흡수되어 수취화(Hydrogen Embrittlement , 水素脆化)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 수소가 누출되면 수소 취성이 일어나거나, 균열이 가거나, 심할 경우에는 폭발할 가능성도 있다. 외부 공기와 접촉하게 된 수소 기체는 그 즉시 발화하게 되는데 이 때 일어난 화재의 경우 매우 뜨겁고, 거의 보이지도 않아 우연치 않게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동위 원소 동위 원소(同位元素, Isotope)는 원자 번호가 같지만 원자량이 다른 원소를 말한다. 어떤 원소의 동위원소는 그 원소와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를 가지지만, 다른 수의 중성자를 가진다.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양성자와 전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므로 동위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원래 원소와 같다. 하지만 중성자의 수가 달라서 질량이 다르므로 물리적 방법으로 분리할 수 있다. 즉, 동위 원소는 서로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즉, 화학적 성질은 비슷하다. 동위 원소는 양성자의 수가 같은 원소이다. 26년 27년 28년 29년 30년 31년 32년 33년 34년 35년 36년 37년 38년 39년 40년 41년 42년 43년 44년 45년 46년 47년 48년 49년 50년 51년 52년 53년 54년 55년 1세기 1세기는 1년부터 100년까지이다. 갈리아 아퀴타니아 갈리아 아퀴타니아(Gallia Aquitania)는 아키텐이라고도 알려진 로마 제국의 속주 중 하나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아퀴타니아가 벨가이 및 나머지 갈리아와 언어, 풍습, 제도가 다르다고 기술했다. 갈리아 전쟁 3년째 (기원전 56년)에 정벌되었으며 전후 갈리아 코마타 속주에 포함되었다가 후에 아퀴타니아 속주로 재편되었다. 로마 속주로서의 아퀴타니아는 황제 속주로서, 수도는 기원전 1세기 편성당시 메디올라눔 산토눔(생트), 48년부터 3세기까지 부르디갈라(보르도)였다. 그 이후의 수도는 불분명하나 레모눔(푸아티에)였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의 지배가 끝나고 몇 차례에 걸친 게르만족 침입이 있은 뒤 서프랑크 왕국에, 그리고 후에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중세를 거치는 동안 아퀴타니아 일대는 오크어로 아키타니오(Aquitània)라 불렸고, 아키타니오 공국이 되었다. 현재 아퀴타니아는 프랑스의 레지옹 아키텐이다. 이 일대는 현재 가스코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어와 다른, 오크어의 갈래인 가스코냐어를 사용한다.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 민주당(民主黨)은 대한민국에 있었던 정당(政黨)이었다. 당 대표는 박상천이었고, 당사(黨舍) 소재지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5-4번지였다. 2000년 1월 20일 기존의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해 새천년민주당(새千年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2005년 5월 6일에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통합을 선언하면서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하였다.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시키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실시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 이후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당선되어 새천년민주당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한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됨에 따라 정식으로 여당이 되었다. 이 때 단일화 과정에서 한 협상을 통해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공동으로 여당이 된다. 하지만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했고, 공동여당의 의석 수는 한나라당에 못 미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자유민주연합은 17석밖에 못 얻어 교섭단체가 될 수 없었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의 공동여당 구제방침에 의거해 그 해 12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유성의 국회의원 송석찬이 ‘의원 꿔주기’를 주도했다. 이때 장재식, 송영진, 배기선이 송석찬과 함께 자민련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의원 꿔주기에 대해 당시 여론은 민의 배반과 정당정치 근간 훼손 등의 이유로 숱한 비난을 쏟아내었으며, 자유민주연합 내에서 송석찬 외 3명의 영입을 반대하던 국회의원 강창희가 제명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때 “연어의 심정으로 민주당을 떠납니다”라는 송석찬 의원의 탈당의 변이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두 정당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당시 자민련의 권력남용 중 통일부 장관 해임 사건이 일어나자 민주당의 제안으로 공조가 파기되고 만다. 2002년 민주당은 노무현의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했으나, 바로 이듬해 노무현이 탈당하면서 민주당은 야당이 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탄핵을 주도하였다가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7대 총선에서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0년 1월 20일, 민주당 창당대회는 새정치국민회의와의 합당을 결의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총재로 선출한 뒤, 김대중 총재의 지명에 따라 서영훈 대표최고위원과 이인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인준하고 대한민국 제16대 총선 대비체제에 들어갔다. 2000년 8월 30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1인4표 방식으로 한화갑 지도위원, 이인제 전 경기지사, 김중권 전 대통령 비서실장, 박상천 전 법무장관, 정동영 전 국민회의 대변인, 김근태 전 민주당 부총재, 정대철 전 국민회의 부총재를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은 서영훈 대표, 권노갑 상임고문, 신낙균 문화관광장관, 장태완 의원, 장을병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지명한 뒤, 서영훈 대표를 다시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2002년 초, 민주당은 대의원 20%, 일반당원 30%에 일반 유권자를 지역별, 연령별, 성별 인구비례로 1천명당 1명씩 공모한 50%의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했다. 공모 경쟁률은 48:1에 달했고, 선거인단으로 선정된 일반 유권자들은 선거법 문제로 민주당에 입당해야했다. 한편으로는 인터넷 투표도 도입, 인터넷 투표 참가자 득표율을 1750표로 환산해 합산하고, 투표 방식으로는 선호투표제를 도입했다. 경선은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도는 순회경선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선에는 노무현 전 민주당 최고위원을 비롯해 김근태 최고위원, 김중권 최고위원, 유종근 전북지사, 이인제 최고위원, 정동영 최고위원, 한화갑 최고위원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지지율이 10%도 채 안 되는 군소 후보였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 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2001년 11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이 10.25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재직을 사퇴한 뒤,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는 총재직을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2002년 4월 27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1인4표 방식의 최고위원 경선을 통해 한화갑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2002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함으로써, 영남권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무현 후보의 공언에 따라 6월 18일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노무현 후보의 재신임을 의결했다. 2003년 9월,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분당되고 정대철 대표마저 이에 동참하기 위해 탈당하자, 민주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된다. 11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조순형 전 민주당 부총재를 대표로 선출했다. 2004년 4월 19일, 조순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와 대한민국 제17대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민주당은 총선당선자회의를 통해 한화갑 전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이후 4월 26일, 비상대책위원회는 당헌당규에 규정되지 않은 비대위원장직의 권한에 한계가 있음을 들어 한화갑 위원장을 대표로 추대하였다. 2005년 2월 3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의원 현장투표와 후원당원 우편투표를 8:2비율로 적용한 경선을 통해 한화갑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한 뒤, 열린우리당과의 합당 반대를 결의하였다. 2006년 6월 15일, 민주당 중앙위는 공동대표제를 도입하기로 하고, 대한민국 제4회 지방 선거를 승리로 이끈 장상 전 총리서리를 공동대표로 선출하였다. 2007년 4월 3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박상천 전 대표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민주당 통합수임기구 합동회의는 중도통합민주당으로의 신설합당을 의결했다. 가곡 가곡(歌曲, )이란 서양 고전음악에서 유래한 노래이다. 시와 음악의 긴밀한 결합으로 19세기 낭만시대에 나타난 음악의 형태로 지극히 개인적 감정이 담긴 낭만주의 서정시(괴테, 하이네, 뮐러 등)의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피아노의 발전으로 예술가곡에서는 노래와 이중주의 형태를 가진다. 종종 가곡집으로 묶여서 발표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가곡 작곡가로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이 있다. 가곡의 역사는 오래이며 고대까지 거슬러올라갈 수가 있지만, 일단 가곡의 정의를 "시에 곡을 붙인 음악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6-7세기 이후의 그레고리오 성가 등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종교가(宗敎歌)이며, 세속적인 가곡은 역시 12, 13세기 이후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인 미네젱거나 트루바두르의 출현을 기다려야 한다. 그 이후에 가극은 리트(독일)·칸초네(이탈리아)·샹송(프랑스) 등의 명칭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낭만주의 음악가인 19세기 이후에는 통속적인 가곡, 즉 오늘날 말하는 유행가나 파퓰러 송이 융성하여 칸초네와 샹송의 명칭을 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래의 가곡은 통속가곡에 대하여 예술가곡이라 구별하게 되었고, 각각 로망스, 멜로디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가곡을 좀더 자세히 역사적으로 관찰하면, 가곡이 정돈된 음악형식으로 일단 완성을 본 14세기 이후 르네상스 음악기까지 프랑스에서는 발라드나 샹송, 이탈리아에서는 마드리갈의 형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자느캥, 팔레스트리나, 몬테베르디 등의 대가들이 활약하였다. 또한 바로크 음악기 이후가 되면 고전주의 음악기인 18세기경까지 가곡은 일시 쇠퇴한 듯하다. 즉, 이탈리아는 17세기 초부터 점차 오페라의 나라가 되었고, 프랑스에서도 오페라나 발레만큼 가곡은 화려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약하고, 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기에 이르면 슈베르트가 나와 가곡의 주도권을 완전히 잡았다. 근대로부터 현대에 걸쳐 가곡은 다시 각국에서 꽃피어 드뷔시, 라벨, 프랑크, 메시앙 등이 프랑스에, 이탈리아에는 레스피기와 말리피에로 등이, 독일에서는 쇤베르크, 힌데미트, 헨체 등이 나왔다. 그 밖에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구소련), 그라나도스, 아르베니스와 프야리야(에스파냐), 데리아스와 브리덴(영국), 바르토크와 고다이(헝가리) 등이 중요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한국의 가곡은 1920년대부터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등이 있다. 전기 (문학) 전기(傳記, )는 특정한 인물의 남다른 경험이나 업적에 대하여 그 인물이 겪은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한 글이다. 전기문은 실제로 살아 있던 인물의 일생이나 일생의 일부를 기록한 글로, 전기문 속의 모든 인물, 장소, 사건 등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다. 전기문은 중심 인물의 활동과 그 동기, 활동에 참가하거나 관계한 다른 인물 등에 의하여 전개되므로 소설과 같이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다. 전기 속의 사건들은 작가가 드러내려는 주제와 관련되는 것들로 주로 선택된다. 전기는 실재했던 인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감동적인 교훈을 준다.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는, 일정한 지역에 대하여 국가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지방적 사무를 처리하는 지방자치의 단체를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라 지방자치를 보장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조직·운영 등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어 국가와 같은 모습의 통치단체 성격을 가지며 자치행정권은 물론이고 조례(條例)를 제정·개폐하는 자치입법권과 지방세 과징, 사무처리 경비를 수입·지출하는 자치재정권 등을 인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는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주민의 편의 및 복리증진을 위하여 노력하고, 조직 및 운영의 합리화와 그 규모의 적정화를 도모하며, 법령이나 상급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위반되지 않아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를 법률로 정하며, 지방자치법 제2조(지방자치단체의 종류)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는 광역지방자치단체와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있다. 광역시 광역시(廣域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이다. 특별시, 도와 동급의 행정 구역으로, 원래는 직할시였으나 지방자치법에 의해 1995년에 현재와 같이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광역시 체제 출범 당시에는 기존의 직할시였던 부산, 인천, 광주, 대구, 대전만이 있었으나 1997년에 경상남도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현재는 총 6곳이 되었다. 산하 행정 구역으로 기초자치단체인 자치구나 군을 둘 수 있다. 현재 광주광역시와 대전광역시를 제외한 광역시들 산하에 군이 있다. 광역시의 경우 기존의 직할시가 그대로 유지된 채 광역시로 지정되거나 승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광역시로 승격하는 자치시의 면적이 작으면 이웃에 있는 시, 군을 통합하기도 한다. 이는 옛 직할시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자치시의 인구가 100만명 이상이거나, 인접 시, 군과 통합하는 행정구역 조정으로 기초자치단체 단위의 인구가 100만명이 넘게 되면 광역시로의 승격이 거론된다. 단, 인구 100만 명 이상이 광역시 승격 조건이라는 법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의 광역시들이 보통 인구 100만을 즈음하여 광역시로 (당시는 직할시) 승격되었기에 그런 거론이 되는 것이다. 2008년 3월 성남시청 확대간부회의에서 이대엽 성남시장의 지시로 광역시 승격 준비 및 광역시 추진전략을 수립하기로 하였다. 2009년 9월 14일 성남시청이 이대엽 성남시장과 김황식 하남시장이 함께 추진하는 성남시·하남시 통합에 대해 각 구별로 주민설명회를 진행하였다. 2009년 9월 18일 행정안전부 이달곤 장관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도권 지역은 통합에 관한 한 어떤 컨센서스(합의)도 이루기 어렵다”고 밝혀 성남시·광주시·하남시 통합추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 장관은 “충청북도 청원군이 청주시를 도넛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어 군청을 비롯한 청원군 주요 기관들이 대부분 청주시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동일 생활권임에도 행정구역이 달라 주민들은 시외버스 요금을 내고 용무를 보러 다니는 등 불편을 겪고 있다”고 통합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이와 유사한 경우로 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군도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지역은 주민 동의를 얻어 우선적으로 통합시키는 게 좋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달곤 장관은 통합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지역의 경우 “수도권은 이미 대도시화됐고 큰 도시가 되면 자족성이 커지긴 하지만, 서울과 붙어 있는 지역이 인구 100만 명 이상으로 커져서 대도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특히, ‘통합시가 100만 이상의 경우 광역시 승격여부’에 대해서는 “지방에는 거점별로 일부 거대도시가 탄생할 필요가 있지만, 이들 지역을 광역시로 승격시켜주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이들에 대해서는 행정구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도시계획을 통합적으로 하게 해주고, 원하면 공단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인적·재정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밝혔다. 이달곤 장관의 이러한 발언에 앞서 행정안전부 관계자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남시·하남시·광주시 등 통합으로 인구가 100만 명이 넘더라도 광역시로 승격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100만 명이 넘는 지역은 관계 법률을 개정해 행정상의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2010년 2월 22일 국회정론관에서 민주당 이재명 부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성남 광주 하남이 자치권을 가지고 예산에 하향평준화가 되지 않는 광역시로의 통합을 주민의견 수렴하에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7년 12월 5일 수원시의회는 본회의에서 ‘대도시 행정 수요에 상응하는 수원광역시 승격 건의안’을 의결하였다. 수원시청도 이미 내부적으로 광역시 승격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 놓은 상태이다. 수원시청에 따르면 1963년 부산이 직할시(광역시의 이전 명칭)로 승격할 당시 인구가 116만명이었고, 인천은 1981년 직할시 승격 당시 108만명, 광주는 1986년 직할시 승격 당시 92만명, 울산은 1997년 광역시 승격 당시 101만명이었다. 수원시청 이광인 자치기획국장은 “인구는 광역시 승격 여건이 되지만 아직 도청 소재지로 머물러 있어 행정이나 주민 생활면에서 많은 불편이 따른다”며 “수원시를 광역시로 승격시켜 도시계획권과 인사권, 예산 및 지방세 권한 등을 독립시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기도청 정흥재 자치행정국장은 “6~7년 전에도 수원시가 광역시 승격을 주장했다가 당시 임창열 경기도지사가 경기도청을 용인시나 과천시로 옮기겠다고 하자 수그러들었다”며 “통합 행정이 중요한데 수원시를 광역시로 독립시키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행정적 낭비”라고 일축했으며 화성시청 조성행 자치행정국장도 “대응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 잘라 말했다. 현행법상 광역시 승격 요건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지만 수원시가 광역시가 되기 위해서는 경기도청의 의견 검토를 거쳐 중앙정부와 국회의 의결 절차를 밟거나 행정자치부가 타당성을 인정해 수원시민들의 투표를 거치는 방법 등이 있다. 두 가지 모두 경기도청과 중앙정부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수원시청이 독자적으로 광역시 승격을 추진하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와 관련하여 행정자치부 강병규 지방행정본부장은 “수원시의 광역시 승격을 위해서는 경기도 전체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부터 검토해야 한다”며 “현재로서는 검토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4일 민주공무원노동조합 수원시지부는 성명을 내고 "지방자치법상 자치 조직권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에 있다. 따라서 중앙정부가 지침 형태로 강제할 권한도 없으며, 지방자치단체가 이행할 의무도 없다. 올바른 행정이라면 오히려 정원축소보다 지방자치법 규정대로 광역시를 추진하고, 대시민 행정서비스 강화를 위해 증원을 요구하라"고 밝혔다. 2014년 7월 31일 손학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새누리당 김용남 당선인은 전날 수원병(팔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 후 인터뷰에서 “소속 상임위원회가 결정돼야 구체적인 계획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현안과 관련해 인구가 울산보다 많은 수원시를 특정광역시로 반드시 승격시키는데 힘을 보탤 것이다. 또 수원역 롯데쇼핑몰 개장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전통시장 활성화방 안, 구도심 재개발 등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2014년 9월 17일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수원병)은 수원시를 특정광역시로 승격하기 위한 '경기도 수원특정광역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경기도 수원특정광역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정안'은 '경기도 수원시'를 '경기도 수원특정광역시'로 변경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김용남 의원은 "개정안이 통과돼 수원시가 '특정광역시'라는 법적 지위를 갖게 되면 재정과 사무의 범위가 대폭 확대돼 시민들이 한 차원 높은 행정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2019년 5월 28일 세 지역간 상생협력협의회가 출범하였다. 2001년 10월 15일 군포·안양·의왕 등 3개 시 통합론이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활발히 재론되고 있는 가운데 군포시청이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기능적 통합이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군포시청은 “무조건적인 통합만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아닐 것”이라고 전제한 뒤 “해당 시간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미묘한 문제인 만큼 시민단체를 비롯해 모든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자연스럽게 통합이 이뤄져야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광역시로의 행정통합 이전에 복잡하고 낭비적인 요인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안양종합운동장과 군포시민회관 등 각종 시설물과 향후 유치할 법원, 검찰 등 공공기관 등을 해당 시민 구분없이 함께 이용하는 기능적 통합이 먼저 이뤄져야 시민공감대 형성은 물론 중복투자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년 9월 14일 오전 이필운 안양시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4개 시 통합과 관련하여 드리는 말씀'을 통해 안양·군포·의왕·과천 등 안양권 4개 시 통합을 공식제안했다. 이필운 안양시장은 "국회에서 자율통합에 관한 의원입법이 발의됐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 범정부차원에서 획기적 지원계획을 발표했다"며 "지금이야말로 4개 시가 다시 하나로 뭉치는 좋은 기회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시청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재영 군포시장은 "군포는 얻을 실익이 없으며 찬반 의견 제출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이형구 의왕시장은 "시장이나 일부 공무원이 추진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시민들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천시청은 "우리는 나머지 3개 시와 생활권이나 정체성이 다르다"고 말했다. 안양권이 통합되면 면적 184.63km(안양 58.46km·군포 36.36km·의왕 54km·과천 35.81km)에 인구 111만5000여명(안양 62만7000명·군포 28만2000명·의왕 13만6000명·과천 7만명)의 광역시급 도시가 탄생하게 된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성제 의왕시장 후보는 안양·군포·의왕 3개시 간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양권 통합을 반대했다. 김성제 시장후보는“통합의 명분이나 실익도 없고 결국에는 주민 갈등만 유발시키는 부작용만 우려되는 통합은 의미가 없다”며“3개시가 통합되면 광역시 승격 없이 인구 106만의 거대한 기초단체가 또 하나 탄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2년 4월 27일 통합반대의왕시민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의왕시는 2012년 2월 현재 인구 15만의 중소도시로 발돋음하고 있으며, 최근 국토연구원 건강도시지표에서 수도권 시·군·구 중 살기좋은 도시로 경기도 2위에 선정돼 살기좋은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3개시 통합은 의왕시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며 “여론조사는 통합추진에 따른 시민갈등 및 분열을 조장하는 실익이 없는 처사”라고 규정했다. 이종만 3개시 통합추진 안양시위원회 상임대표는 “조만간 3개시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개최해 통합 찬·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해 보자”며 “글로벌 시대를 맞아 안양권도 3개시를 통합해 선진 외국시처럼 경쟁력을 갖는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같은 날 주간현대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김윤주 군포시장은 행정구역개편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과 이명박 대통령 정권초기 논의대로 광역자치단체를 없애고 전국을 60~70개의 광역시로 재편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윤주 군포시장은 도를 없애는 방향으로 행정구역 개편 논의가 된다면 군포·안양·의왕의 통합을 찬성한다는 것이 군포시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행 중앙정부 →광역자치단체→기초자치단체를 거치는 행정 단계에서 광역자치단체를 없애 행정의 낭비를 줄이겠다면 통합에 찬성한다는 조건부 찬성이다. 그러나 현재 행정안전부 개편추진위원회가 도 단위 광역자치단체를 존치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어서 김윤주 시장의 행보는 사실상의 통합 반대로 풀이되고 있다. 2012년 5월 21일 오후 오마이뉴스가 안양시의회 회의실에서 지역 언론인 안양뉴스, 뉴스앤뷰와 공동으로 '안양·군포·의왕 통합토론회'를 열어 통합과 관련된 의견을 나누었다. 토론회 사회는 이민선 뉴스앤뷰 편집국장이, 토론자로는 김성균(성결대학교 겸임교수) 박사와 방극채 안양시의원, 김동별 군포시의원, 기길운 의왕시의원이 참석했다. 이날 기길운 의왕시의원은 "우리 지역의 역사성이 같다고 하는데, 안양시와 의왕시는 같은 자치단체로 있었던 것은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성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로 일방적으로 시민들을 호도하기 위한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의왕시는 수원과 화성권역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안양시에서는 인구 100만 이상인 광역시가 되어야 의왕의 택지개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과 다르다. 의왕시는 현재 15개 지역에서 재건축·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안양시 힘 안 빌리고도 잘 하고 있다. 안양과 합쳐봐야 실익이 없다. 만일 통합이 되면 이 개발이익금이 다 어디로 가겠나? 통합되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통합되어 100만이 넘는 도시가 되면 시장이 구청장을 임명하는데 큰 지역 위주로 가기 때문에 의왕시청 공무원들이 인사에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과 유형의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방극채 의원님이 청주와 청원이 통합될 때 비용이 많이 들고 우리는 그 비용이 안 든다고 하셨는데 통합된 걸로 보고 그냥 살면 되지 뭐 하러 통합을 하나."라며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2012년 6월 27일 충청매일에 따르면 김광민 한국은행 충북본부 과장은 “청주·청원 통합시는 인근 도시와의 경제적 비교우위를 선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아주 바람직한 선택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청주·청원 통합시는 엄청난 지역경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이는 곧 주민들의 삶의질적 측면과도 직결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며 “광역시로의 발돋움도 조심스럽게 점칠 수 있다. 아무튼 청주·청원 통합시는 향후 인근 세종특별자치시 및 대전광역시와 함께 광역도시권을 형성해 국토의 중심에서 행정·산업·R&D·교통 등의 주요기능 연계를 통한 중부권 핵심도시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2년 9월 10일 열린 314회 충청북도의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산업경제위원회 소속 이수완(민주통합당·진천)의 질의에 대해 이시종 충청북도지사가 청주 청원 통합시 출범이후 충청북도청 이전과 청주시의 광역시 승격은 정부 방침상 인구 100만이 넘더라도 광역시 승격이 어렵고, 충청북도청 입장에서도 광역시 승격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검토 대상도 아니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날 이수완 의원은 대집행부질문을 통해 “청주·청원통합에 따른 향후 광역시 승격이 예상되는데, 다른 시·도와 같이 행정관할 구역분리에 따라 충청북도청도 이전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통합시가 출범하면 향후 10년 이내에 인구 100만을 넘어서는 광역시로 승격될 전망이고, 이에 따라 인구 증가뿐만 아니라 충청북도의 행정과 경제, 문화 등이 발전되는 현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광역시 출범에 따라 충청남도청이 2012년 말 이전할 계획이고, 전라남도청도 2005년에 이전했으며 경상북도청은 2014년에 이전할 계획이다”면서 “그동안 도청 소재지 도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 당연히 행정관할 구역분리에 따라 도청을 이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12년 말 준공예정인 진천·음성혁신도시는 교통의 요람지이자, 자족형 미래도시가 될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부지확보 문제 등을 선결하고, 충청북도청을 교통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는 혁신도시로 이전하는 것이 북부권과 남부권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답변에 나선 이시종 충청북도지사는 "전라남도청(무안), 충청남도청(홍성), 경상북도청(안동·예천)처럼 도청이전을 추진했거나 추진 중인 지방자치단체가 있는건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기초자치단체가 인구 100만 명을 넘어도 광역시로 승격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방침 때문에 경기도 수원시는 114만 명이고 성남시는 98만 명, 창원시는 109만 명에 달하지만 광역시 승격은 불가능하다"며 "정부 방침에 비춰볼 때 향후 통합 청주시 인구가 100만 명을 넘더라도 광역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통합 청주시의 광역시 승격에 따른 도청 이전 문제는 검토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도청 이전보다는 통합 청주시의 조기정착을 적극 지원하고, 도내 모든 시·군이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균형발전 실현을 위해 도정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2013년 5월 10일 충북균형발전과 충주발전 전략 모색 학술토론회’가 충북행정학회(회장 안형기 건국대학교 교수) 주관으로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에서 열렸다. 이날 최일성 한국교통대학교 명예교수는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돼 인구 100만명 이상으로 광역시 승격이 되면 충청북도와는 행정구역이 별개로 돼 현재 청주에 있는 도청 이전이 불가피한데, 이때 충청북도청 이전은 균형발전과 역사와 전통문화의 산실인 중원문화권(충주)으로 복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3년 11월 27일 최일성 한국교통대학교 명예교수는 충주시청 탄금홀에서 열린 지역경제활성화 시민대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해 “통합청주시 인구가 100만명이 되면 광역시로 승격이 가능하다”며 “이 같은 일이 언제 이뤄진다고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타 지역의 도청 이전 추세로 보아 기정사실로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충청북도청의 충주 이전에 대한 당위성을 이어가기 위해 경상남도청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창원시는 지난 1983년 광역시로 승격된 부산시로부터 도청을 이전받아 현재 인구 100만여명의 메가시티로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는 설명이다. 도청을 이전하면 산하기관과 유관기관도 이전되기 때문에 인구 40만명 이상의 자족도시 형성은 시간 문제라는 해석이다. 최일성 교수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1986년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며 2005년 무안 남악신도시로 전라남도청이 이전된 점, 1989년 대전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같은 이유로 2010년 예산 내포신도시로 이전된 점, 대구에 있던 경상북도청이 역시 같은 이유로 2014년 예천군 도청신도시로 이전 계획을 세운 점 등을 들었다. 청주시와 청원군은 2014년 7월 1일 통합되었다. 2014년 8월 24일 통합청주시금고 운영자 선정을 앞두고 경제계의 한 관계자는 "통합청주시가 향후 광역시로 발돋움 하기 위해 온 힘을 집중시켜야 하는데 금고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잡음이 들린다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아 보인다"며 "청주시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 하나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08년 3월 5일 통합민주당 정원영 예비후보는 ‘군산시를 인구 100만의 ‘새만금광역시’로 만들겠다’는 정책공약을 제안했다. 정 예비후보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군산·새만금을 경쟁력 있는 개방도시, 살기 좋은 복지도시, 지속가능한 녹색도시, 번영하고 상생하는 균형도시로 만들겠다”며 “군산-서천(장항 포함)-김제-부안을 하나로 묶어 개발해 20년 이내에 인구 100만의 도시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으며 이어 “새만금밸트를 통해 해당지역이 하나로 묶이면 20년 이내에는 울산광역시에 버금가는 인구 100만의 전국 7대 도시로 우뚝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10년 2월 25일 민주당 서동석 군산시장 후보는 “2010년 4월 개통을 눈앞에 둔 새만금 방조제의 경계가 불분명해 분쟁의 우려가 높고 이 지역은 공유수면 매립지역이어서 지방자치단체 간 관할지역을 긋지 못하고 있다”며 “군산시와 김제시, 그리고 부안군을 아우르는 ‘새만금광역시’를 준비한다는 구상을 밝혔다”고 말했다. 2011년 5월 12일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 농림수산식품부, 전라북도청은 부안군을 시작으로 13일 군산시와 김제시에서 각각 주민 300명 안팎씩 초청해 새만금 행정구역 설정에 관한 대토론회를 공동 개최하였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주제를 발제하고 각 시·군이 추천한 전문가 토론회를 거쳐 여론을 수렴하였는데, 이 중 한 방안으로 거론되는 새만금광역시는 새만금과 주변 3개 시·군을 통폐합해 준광역시를 설립하자는 안이다. 군산시청이 선호하는 안으로, 이경우 새만금권 인구는 약 80만 명대에 달해 전주를 제치고 도내 거점도시가 될 것이란 기대다. 하지만 군산시청과 달리 주변 시·군청은 이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이에 대해 전라북도청 관계자는 “새만금광역시를 만드는 것은 새만금의 전략적 발전과 투자 유치, 정부 지원 등을 종합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가장 좋은 방안”이라면서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별로 의견이 엇갈리는 데다 장항권에서 통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새로운 통합 로드맵이 나와봐야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전라북도 전주시를 광역시의 전신인 직할시로 승격시키려는 논의가 있었으며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6월 정부와 민주자유당이 전주를 전북지역발전과 서해안개발의 거점도시로 활용한다는 방침아래 직할 자치단체로 승격, 중앙정부 차원에서 중점 지원한다는 방침 아래 필요한 행정적 조치를 검토한 바 있다. 당시 민주자유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날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전북 개발을 위해서는 중점도시인 전주에 대한 중앙정부차원의 행정및 재정지원이 절실하다"며 "가급적 연내 직할시승격을 위한 당정협의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전주 인구가 54만명(1991년말 기준)에 불과해 직할시여건이 미비한것은 사실이나 이는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 실제 거주자는 70만명에 달하고 유동인구를 합치면 1백만명에 육박한다"며 "이는 광주와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될 때와 비슷한 여건"이라고 직할시 승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재정재립도나 인구수를 기준으로 할 때 경남 울산과 창원이 우선적인 직할시 승격대상이나 직할시 승격문제는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도 검토해야할 문제"라고 우선 전주시를 승격시킨 뒤 울산 등 다른 도시의 승격문제를 검토할 것임을 시사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도 대선공약이었던 전라북도 전주시와 경상남도 울산시의 직할시 승격 논의를 거쳤으나 경상남도 울산시만 광역시로 승격된 바 있다.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는 전주시와 완주군의 경우 인구 65만 7140명으로 ‘시군을 통합할 경우 인구 50만 이상의 과대시가 되어 대도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이유로 통합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2012년 3월 21일 김완주 전라북도지사가 도지사 의전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전주 완주 통합논의를 묻는 질문에 대해 “4·11 총선을 20여일 앞두고 있는 만큼, 총선 이후 본격 논의에 들어갈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전주권이 광역시로 승격하려면 전주 완주 통합이 시급하다는 것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며 “총선 이후 전주시의 통 큰 양보가 있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완주 도지사는 전주시의 통큰 양보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주시와 완주군으로부터 통합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제출 받아 검토한 바 있다. 2012년 4월 11일 치러지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호 3번 자유선진당 백병찬 후보가 전주 불치병전문 통합의학특구 등과 함께 전주시의 광역시 승격을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가 통합한 통합창원시가 설립되어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가 되었다. 통합 6개월 후 창원시청이 만19세 이상 시민 2,060명을 대상으로 전문여론조사기관인 경남리서치에 의뢰해 통합평가, 시정만족도 등을 설문조사하였으며, 조사 내용 중 시민들이 원하는 향후 창원시의 행정체계상 희망 도시형태로 광역시를 32.2%가 꼽았고, 특정시 19.3%, 특별자치시 19.0%, 기초시 11.6% 순으로 나타나 응답자의 70.5%가 통합 창원시 규모에 걸맞은 권한 확대를 희망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2010년 8월 23일 김두관 경상남도지사는 경남도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통합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에 대해 "통합이 우여곡절을 겪고 된 만큼 (창원시는)도시 경쟁력을 키우는 문제, 삶의 질 높이는 문제를 고민하는 중일 겁니다. 그런데 특례조항이 관철되면 그런 고민이 더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책임 있는 분들이 이 어려움을 타개한다는 뜻에서 이 문제(광역시 승격)를 꺼내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통합 과정에서 후유증이 있었고 소외도 큰데, 이런 문제를 지금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통합이 아직 논의 중인데, 전체 시·군·구에 대한 큰 그림이 나온 다음에 광역시 승격을 하든 해야 합니다."라며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1월 3일 박완수 창원시장은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이라는 전제조건을 단 상태에서,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광역시 승격을 하려면 함안군을 통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인구와 경제력 모두 경남 전체의 3분의 1 수준을 차지하는 창원시가 경상남도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경상남도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경상남도민들에게는 아직도 “부산과 울산은 경상남도에서 분가한 자녀”라는 생각이 박혀 있어 창원시민과 비창원시민 간 반목과 갈등도 예상된다. 2012년 11월 24일 창원시의회는 의회 정례회 제1차 본회의에서 차형보 의원이 발의하고 전체 시의원이 동의해 대통령실장, 국회의장, 기획재정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등에 보낸 건의문을 통해 창원시민의 자치권 확립과 생활 자치를 실현하고 자치재정권의 한계 극복 및 주민에 대한 행정서비스 제고를 위해 창원의 광역시 승격을 강력하게 추진해줄 것을 건의했다. 창원시의회는 창원시장에게도 지역단체, 학계, 언론, 상공회의소 등 시민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창원광역시승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창원광역시 승격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줄 것을 촉구했으며 행정안전부장관과 국회의원에게 창원광역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안을 제정해 국회에 제출하고 법안이 국회의 심의. 의결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줄 것과 국회는 창원광역시 승격을 위한 법률안 제정에 적극 나서 줄 것 등을 건의했다. 건의문을 대표 발의한 차형보 의원은 " 창원시의 인구규모는 110만의 광역시급 자치단체인데도 행정체제는 경상남도 산하에 기초자치단체로서 조직, 인사, 재정의 취약점을 안고 있다"면서 " 광역시 승격으로 인해 시민들의 통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현실적으로 실현시켜 조기에 시민통합을 이루고, 각 분야별로 도출된 문제점과 현안사업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통합시의 장기 발전방향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통합시의 위상에 맞는 제도적 장치가 요구되므로 광역시로의 승격 추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했다. 2013년 2월 27일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이 “앞으로 시·군이 통합할 때 인구가 100만을 넘어가면 광역시로 승격하는 등 지방 활성화 차원의 접근을 하는 것은 어떻냐”고 묻자 “창원은 인구 100만의 도시이지만, 광역시 승격은 인구로만 판단하기 어렵다”며 유보적인 뜻을 나타냈다. 유정복 후보자는 광역시 승격 문제에 대해 “광역시 승격은 인구로만 판단하기 어렵고, 지방자치단체가 가진 주변 상황이나 도시화 정도, 재정 자치 여건과 성숙도, 또 주민의 정서나 동의 여부가 종합적으로 판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도시에 대한 것을 전반적으로 진단하고 검토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2013년 7월 3일 강기윤 국회의원·경남대학교·창원대학교 창원발전연구센터·창원상공회의소 주최로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창원시 자치분권 모델 개발포럼’에서 경상남도 창원시의 자치분권 모델로 광역시 승격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허명환 한국지방세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의 창원시에 대해 “광역시 승격도 어렵고 기초지자체로 그냥 두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광역시로 승격시키면 경남의 도세(道勢)가 위축되고 다른 시·군의 재정이 악화하는 등 균형발전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허 연구위원은 창원시 등 100만 대도시의 자치분권 모델로 직통시(直通市)와 대특례시(大特例市)를 제시했다. 직통시는 자치구를 두지 않은 광역시 모델, 대특례시는 현재의 기초자치단체는 유지하면서 일부 기능에서는 도의 지휘감독은 배제하는 모델이다. 이민호 한국행정연구원 정부간관계연구실장은 “3개 지방자치단체를 합쳐 탄생한 창원시가 다시 기초자치단체(구)를 설치하고 광역시로 승격하겠다는 것은 행정구역 통합 논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인구 50만명 이상 대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현행 특례 조항을 따르면서 준광역시(대특례시) 모델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일반시와 광역시의 이중적 성격을 갖고 구역 내에서 독점적 자치권한을 행사하는 특별자치시(=직통시) 모델을 제시했다. 2014년 11월 19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제322회 경상남도의회 정례회 2차 본회의에 참석, 새누리당 박해영 경상남도의원의 통합창원시 정체성 관련 질문에 대해 “창원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 경상남도는 껍데기만 남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정부-광역 시ㆍ도-기초 시ㆍ군’의 현 3단계 행정구조에서 창원시가 광역시가 되면 경기도와 경상남도는 껍데기만 남는다는게 반대 이유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다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소통하는 2단계 행정구조로 바뀌면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2015년 1월 5일 창원시청이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했던 '통합창원시 광역시 승격에 대한 시민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여론조사는 창원에 거주하는 19세 이상 시민 1502명을 대상으로 2014년 12월 20~30일 사이 실시되었는데 55.9%가 찬성하고 25.0%가 반대했으며, 19.1%는 '잘 모름'이라고 했다. 옛 지역별로 보면, 창원지역은 찬성 58.9%와 반대 24.6%, 마산지역은 찬성 54.0%와 반대 23.2%, 진해지역은 찬성 51.8%와 반대 30.2%로 상대적으로 옛 창원지역이 마산과 진해보다 광역시 승격을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역시 승격을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안상수 창원시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2015년을 광역시 승격 운동의 원년으로 삼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1월 7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가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같은 조건인 경기도 4개시(수원·고양·성남·용인)도 (광역시 승격을)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경기도가 도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결국은 도를 없애는 행정체계 개편을 해야 하고, 그리 되면 광역시든 무엇이든 의미가 없게 된다, 내가 재임하는 동안에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안상수 창원시장에 대해 "오죽했으면 그런 공약을 내걸었겠느냐? 광역시라는 꿈을 걸어놔야 서로 덜 싸우고, 마산·진해가 빠져나가지 않지 않겠느냐?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광역시 승격은) 어렵다"라고 말했다. 2015년 1월 8일 오전 간부회의에서 안상수 창원시장은 "창원광역시는 가능하고 성사돼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안상수 창원시장은 "홍준표 경상남도지사 입장에서 창원광역시 승격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이해가 된다"라면서도 "그러나 울산이 광역시가 될 때도 경상남도청은 반대했다, 창원은 울산처럼 경상남도청에서 반대해도 성공할 수 있다, 창원시장과 시민들의 합치된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또 "광역시는 경기도 1개, 지방 1개로 추진될 것으로 생각하고, 지방은 통합창원시에 통합인센티브로 광역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홍준표 경상남도지사가 경기도 분해를 언급하지만 인구가 1100만 명에서 400만 명이 빠져도 700만 명이 남는다, 경제력도 충분하며 분해될 이유가 없다, 전국 최고의 인구와 경제력을 가진 경기도는 변함이 없다"라고 밝혔다. 같은 날 창원시 공무원노동조합은 안상수 창원시장의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 본격추진과 관련 “승격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힌 것은 환영하나, 108만 시민의 뜻에 따라 추진되어야 하며,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내는 범시민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공무원노동조합 창원시지부는 이날 오전 창원시청 브리핑 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그 동안 공약사항으로 취임 이후 줄곧 구호에 그쳤던 광역시 승격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발표한 것은 보다 진일보한 추진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또한 “광역시 승격 추진은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한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냐가 더 중요한 문제”며 “주민의사 반영 없이 졸속 추진된 행정구역 통합의 잘못된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광역시 승격에 대해 지역 국회의원, 시·도의원 조차 부정적 여론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득해 나갈 것인지, 경상남도청을 비롯한 도내 타 시군에 대해서도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줄이고 창원시청의 입장을 충분히 알려 부정적인 여론에 대한 구체적인 설득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5년 1월 9일 창원시청 미래전략위원회(위원장 박재완)가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창원경제-제2의 도약' 주제로 주최한 토론회에서 안상수 창원시장은 광역시 승격 추진, 첨단산업과 관광산업 발전 전략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광역시 승격 추진에 대해서는 "광역시 승격은 대박이다"고 재차 강조했다. 2015년 3월 18일 ‘창원광역시 승격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가 창원컨벤션센터(CECO)에서 시민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창립총회에는 회원 140여 명이 참석해 김철곤 전 창원시의회 의장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부회장에 김형봉 전 진해시의회 의장, 김이수 통합창원시 초대 의장, 전서훈 창원산업단지경영자협의회 회장, 최팔관 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을 각각 선출했다. 또한 운영위원장에는 강인호 전 창원시의회 의장을 각각 선출하는 등 임원진을 구성했다. 2015년 5월 28일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는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창원광역시 승격과 국가 및 경남의 균형발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국토연구원장을 지낸 박양호 창원시정연구원장은 창원광역시 승격이 국가와 경남의 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고 안상수 창원시장은 창원광역시가 오히려 경상남도 전체의 파이를 키우게 된다고 강조하며 "국경이 없는 도시 간의 경쟁시대에 창원·부산·울산이 강력한 광역 벨트를 이루면 경제수도권이 가능하다"며 "창원이 (경남에서) 떨어져 나가도 새살이 돋듯 진주·김해·거제·양산이 지금의 창원처럼 성장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은 "창원광역시가 되면 '경남 공동화'를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며 "1997년 울산이 광역시가 되어 분리됐지만, 경남은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2015년 6월 2일 CBS 등이 보도를 통해 창원광역시 승격 추진 주민서명이 90만명을 넘었으나 안상수 창원시장이 공무원들에게 '서명'을 독려한뒤, 공무원들이 만사 제쳐놓고 묻지마식으로 서명을 받는데 몰두한 결과 주민 공감대가 없는 소위 '묻지마 서명'이 늘고 있다는 비판 이후 안상수 창원시장은 서명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서명운동에는 3개월 만에 무려 90만 명이 넘게 서명했지만 22만 명 정도가 중복 서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창원시의회 송순호 의원은 "관이 주도하는 승격추진운동은 5년전 창원시 통합 때와 비슷한 분위기다"고 지적하며 "장미빛 청사진만 제시하며 통합한지 불과 5년만에 광역시로 가야한다고 또 다시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통합 자체가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꼴이다"고 꼬집었다. 이어 "통합시 갈등을 서둘러 덮어두기 위한 안상수 시장의 정치적 미봉책이란 지적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창원시의회 김헌일 의원은 "추진동력이 붙지 않다보니, 광역시가 되면 여러 가지로 불리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 6월 8일 진해어민들은 “진해 어민들은 지금도 이래저래 조업하기가 곤란하다. 진해기지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 부근에서는 조업을 못하고, 부산 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조업구역을 이탈했다고 어업지도선이 단속을 나온다”며 “여기에 광역시 승격으로 인해 경남도에서 창원시만 조업구역이 한정돼 떨어져 나오게 되면 조업 가능한 해역이 줄어들고, 자연히 살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해상은 일반적으로 어업허가권자인 시·도 관할 육상 행정구역 경계에 맞춰 각 지자체 관할 수역을 설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연안어업(무동력 어선과 10t미만의 어선)의 경우 각 광역시장·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가 관할하는 수역에서 조업이 가능하다. 창원시 연안어업 허가 수는 3215개로, 진해 어민 대다수가 거제 외포와 장승포 칠천포 등지로 조업을 나간다. 진해를 통해 유통되는 장어의 90% 이상은 이곳에서 잡힌다. 이때문에 진해어민들은 “어민 대부분이 소형 선박을 이용해 진해만과 거제 일원에서 조금씩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데, 창원시가 광역시로 승격돼 조업구역이 창원시 관할 구역인 진해만과 마산만 일부로 한정되면 무얼 먹고 사느냐”며 우려를 표했다. 이에 대해 창원시청 수산과 관계자는 “인천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이와 유사한 일이 불거져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해상을 공동조업구역으로 설정해 어민들이 자유롭게 공동으로 조업하고 있다”며 “선례가 있는 만큼 이를 토대로 법제화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진해어민들은 “1989년 가덕도가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면서 거제 어민들의 조업 구역이 줄어 생계가 어려워졌고, 이에 공동조업구역 지정을 추진했지만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지 않느냐”며 “광역시 승격의 이점만 부각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당면할 시민들 삶의 변화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2015년 6월 30일 안상수 창원시장은 창원시청에서 열린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창원의 미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도시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광역시로 도약하는 것이다. 창원광역시 승격으로 창원, 부산, 울산을 잇는 광역벨트를 형성해서 수도권 집중에 대응하는 강력한 ‘경제수도권'을 구축해 국가 균형발전에 기여하고,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의 주요 도시와도 경쟁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2015년 7월 2일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는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주민센터에서 상남동 주민 100여 명을 대상으로 순회설명회를 열고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 회원인 최낙범 경남대학교 교수가 강사로 나서 광역시 승격의 필요성과 기대효과 등에 대해 설명했다. 김철곤 협의회 회장은 “메르스 여파로 연기했던 설명회도 본격적으로 개최하고 홍보캠페인도 전개하여 서명운동에 많은 시민들이 보여준 지지에 화답할 수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앞으로도 계속 시민여러분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2015년 7월 3일 창원광역시승격범시민추진협의회와 창원시의회 의장단은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한 식당에서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유원석 창원시의회 의장, 김하용 부의장, 정쌍학 기획행정위원장 등 의장단과 범시민추진협의회 김철곤 회장, 김이수 부회장, 강정운 기획분과위원장 등 20여 명이 참석했으며 협의회는 하반기 추진계획 설명과 시의회의 협의회 참여해 '광역시 승격 건의안'이 시의회에서 채택돼 국회나 정부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시의회의 협조를 구했다. 김철곤 회장은 "광역시 추진에 있어 시의회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며 "지금까지 시와 협의회가 주축이 돼 광역시 홍보와 서명운동을 추진했는데 이제는 시의회도 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광역시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유원석 의장은 "우리 시의회도 협의회와 뜻을 같이하고 아울러 앞으로 시와 시민과 함께 '창원광역시 승격'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2015년 7월 28일 경남시장군수협의회 회장인김동진 통영시장을 비롯한 12명은 경상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창원광역시 추진 반대' 입장을 냈다. 이날 회견에는 이창희 진주시장, 김동진 통영시장, 김맹곤 김해시장, 박일호 밀양시장, 나동연 양산시장, 오영호 의령군수, 차정섭 함안군수, 김충식 창녕군수, 박영일 남해군수, 허기도 산청군수, 임창호 함양군수, 하창환 합천군수가 참석했다. 시장군수들은 "1983년 경상남도청이 부산시에서 창원시로 이전하고 나서 창원시는 경상남도청의 집중적인 지원과 재정투자로 눈부시게 성장했다"며 "당시 경상남도 내 전 시·군에 고루 분배돼야 할 재원이 창원시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이어 "경상남도청의 전폭적인 지원과 17개 시·군의 희생과 헌신으로 100만 명품도시 창원시가 탄생한 것이다"며 "그러나 창원시는 경남도정과 보조를 같이해 17개 시·군과 상생발전의 길로 나가야 함에도 최근 광역시 승격이라는 이기적인 형태는 17개 시·군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경상남도 지역총생산(GRDP)의 37.8%를 차지하는 창원시청이 경상남도청로부터 독립해 나간다면 경상남도 도세 위축은 물론, 나머지 17개 시·군의 재정도 붕괴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창원시는 한편으로는 광역시 승격을 꿈꾸고, 다른 한편으로는 야구장 건립비와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비용, 로봇랜드 조성 등 17개 시·군은 꿈도 꾸기 어려운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을 경상남도청에 요구하고 있다"며 "이러한 창원시청의 행동을 17개 시·군 시장·군수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2015년 8월 10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는 "창원의 광역시 승격은 현 지방행정체계 하에서는 불가능하다"며 "광역시는 지방행정체제 개편 때 검토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추진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원시가 광역시 추진으로 행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면서 "지방행정체제를 3단계에서 2단계로 바꿀 때 광역시가 거론되는 것이지, 3단계 체계를 그대로 두고 창원시만 광역시로 할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2015년 8월 18일 홍준표 경상남도지사가 간부 공무원들과 티 타임을 갖고 창원시의 광역시 승격 추진과 관련해 “창원시청은 헛된 정치구호로 행정력을 낭비하면서 창원시민들을 현혹시키지 말고, 18개 시·군의 일원으로 돌아와 통합시의 균형발전과 내실을 기하는 것이 최우선 정책이 되어야 한다”며 ”경상남도 수부도시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도리“라고 강조했다. 2015년 9월 17일 허성무 새정치민주연합 창원시 성산구지역위원장이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사진)을 열어 "안상수 창원시장이 그동안 추진해 왔던 광역시 승격 운동은 서명운동을 제외하고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면서 "대책 없는 광역시 승격 논의를 중단하고 '100만 대도시 특례 추진협의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2010년 7월 3일 국회에서 포럼을 통해 남해안에 지역구를 둔 여야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된 국회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새누리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소속 의원들이 전남 동부권과 경남 서부권의 기초자치단체들을 통합하여 섬진강시로 개편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권 지역과 하동, 사천, 남해 등 경남권 지역을 통합해 동서 대화합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정의화 국회부의장은 인사말을 통해 "남해안을 발전시키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이 점차 해소되고 균형 있는 국토발전을 이뤄갈 수 있다"며 "섬진강이 동서를 나누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동서가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와 관련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단순한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유준상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박근혜 당선인은 이런 점을 감안해 광주전남에선 단순한 지역발전 공약보다는 국민대통합을 실천할 섬진광역시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면서 "황우여 대표에게도 이 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2세기 2세기는 101년부터 200년까지이다. 3세기 3세기는 201년부터 300년까지이다. 4세기 4세기는 301년부터 400년까지의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이 시기에 로마 황제로는 처음으로 기독교를 용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존재했던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서진이 중국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팔왕의 난을 겪었던 때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삼국시대가 이루어졌던 때이다. 5세기 5세기는 401년부터 500년까지이다. 이밖에도 불교가 미얀마와 인도네시아로 전파되었고, 과테말라 티칼 유적지 (마야 문화)와 이탈리아 라벤나에 네온 세례당이 건설되었다. 또한 고구려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정복 활동으로 최대 전성기에 이르렀으며, 아프리카인과 인도네시아인이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하였다. 6세기 6세기는 501년부터 600년까지이다. 7세기 7세기는 601년부터 700년까지이다. 8세기 8세기는 701년부터 800년까지이다. 9세기 9세기는 801년부터 900년까지이다. 9세기 초반에는 800년에 카를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된 후,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유럽 역사가 전개되었다. 카를 대제는 교황에 대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세력을 넓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가 중 로마 제국 이후로는 가장 넓은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이는 비잔틴 세계 및 이슬람 세계와 구별되는 서유럽 세계라는 정치·문화적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다. 카를 대제의 통치 기간 중 그 이전 시기의 민족 대이동으로 인해 쇠퇴했던 문화가 부흥하였고, (카롤링거 르네상스), 게르만·로마·기독교 등의 여러 요소가 융합하여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지중해 연안을 통한 무역은 이미 8세기부터 발흥한 이슬람교도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쇠퇴하였으며, 이는 서유럽 사회가 교환경제 사회에서 자연경제 사회로 되돌아가게 하여 경제 성장이 저해되었다. 이는 카를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그리고 로타르령의 세 왕국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에는 8세기부터 계속되어 온 바이킹의 내습에 의해, 분열되어 있던 앵글로색슨 계열의 7왕국이 차례로 정복되었으나, 최후로 남은 색슨계 왕국인 웨섹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878년에 이들을 격퇴하고 일부 영토를 수복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기원이 되었다. 9세기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莊園制)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主從)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封建制)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敎會領)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그러나 이에 대하여 비잔틴 세계는 고전 그리스 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며 아시아 여러 민족의 침입에 대하여 서유럽 세계를 지키는 방파제 구실을 해 주었고, 또 그들의 문화는 문화적 진공상태하에 놓여 있던 동구(東歐) 슬라브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8세기 중엽 안사(安史)의 난을 겪고 나서 당(唐)의 국운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당의 경제적 기초였던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고 현실적 토지 사유에 바탕을 둔 양세법(兩稅法)이 시행되자, 토지 집중화 현상을 빚어냄과 동시에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하였다. 또한 농촌 사회의 변동은 부병제(府兵制)를 동요시켜 모병제(募兵制)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절도사(節度使)가 용병(傭兵)을 사병화(私兵化)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절도사는 지방의 행정·군사·재정의 실권을 집중하여 사실상 지방정권화하였다. 더구나 양세법 시행 이후에도 당의 재정 곤란은 격심하여 여러 종류의 잡세가 부가되고, 아울러 상업 및 고리대본이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장원에 유입되거나 번진(蕃鎭)의 용병이 되는 일이 속출하였다.번진 세력의 대두와는 반대로 중앙 귀족이 조락하고, 정부 내 환관(宦官)의 전횡과 관료의 당쟁은 당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지방에 할거(割據)한 신흥 지주 호족 세력은 농민과 유민을 흡수하여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켰다. 9세기 후기의 황소(黃巢)의 난은 전후 10여 년에 걸쳐 당의 보고(寶庫)인 강회지방(江淮地方)을 유린함으로써 당 멸망에 결정타를 가했다. 10세기 10세기는 901년부터 1000년까지이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에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중국에서는 송이 5대 10국 시기의 정치적 분열을 통일하였다. 원난 지방에서 대리가 세력을 넓혀 갔으며, 북부 베트남 지역에서 중국의 오랜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다가 몇 차례의 왕조 교체가 이어진 후 대월이 성립되었다. 11세기 11세기는 1001년부터 1100년까지이다. 12세기 12세기는 1101년부터 1200년까지이다. 13세기 13세기는 1201년부터 1300년까지이다. 14세기 14세기는 1301년부터 1400년까지이다. 15세기 15세기는 1401년부터 1500년까지이다. 16세기 16세기는 1501년부터 1600년까지이다. 17세기 17세기는 1601년부터 1700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한국은 조선시대(선조 ~ 숙종)였으며, 일본은 임진왜란을 끝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명(明)이 청(淸)으로 교체되는 시기였다. 18세기 18세기는 1701년부터 1800년까지이다. 56년 57년 58년 59년 60년 61년 62년 63년 64년 65년 66년 67년 68년 69년 70년 민난어 민남어()는 중국어의 방언으로, 주로 푸젠성과 타이완에서 쓰인다. ‘민’(閩)은 푸젠(福建)을 간략히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으로는 8개, 지역에 따라 7~8개의 성조가 존재한다. 광둥어와 마찬가지로 입성(入聲)이 존재한다. 언어가 사용되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하문어는 장주어와 천주어를 기본으로 한 크리올이다. 71년 72년 73년 74년 75년 76년 77년 78년 79년 80년 81년 82년 83년 84년 85년 86년 87년 88년 89년 90년 91년 92년 93년 94년 95년 96년 97년 98년 99년 100년 로마 황제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를 시초로 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들은 여러 다른 칭호로 불렸는데,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성을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 황제가 세습한 것을 기원으로 해 "황제"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다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본인은 엄밀히 말하면 로마 황제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독일어 카이저, 러시아어 차르의 어원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시기에는 황제를 부를 경우 카이사르라고 했다. 그리고 제위 계승자에게 제일 먼저 붙이는 이름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즉 중국 군주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황태자를 칭하던 말이다. 공화정 체재 복귀를 선언하며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붙인 칭호로, '위엄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쉽게 말해서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원래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의미하는 말로 아우구스투스가 B.C.27년 1월 13일 공화정 복귀선언에서 3가지의 권리를 포기하는데 삼두정치권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본국의 주민과 속주의 주민들에게 서약을 해둔 이탈리아 서약과 이를 확대한 세계적 합의라는 3가지 권리를 포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은 것 중에서 임페라토르가 있다. 이를 항상 사용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서 계승되면서 군통수권과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권리와 이를 세습할 권리를 얻었다. 이후 황제의 이름에 임페라토르는 로마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자 통수권자라는 의미를 가진 뜻이 되었고, 이후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황제를 칭하는 Emperor의 어원이 바로 임페라토르이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어 병사들이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로 인해 자신에게 반감을 드러낼 것을 염려,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이의 별칭인 프린켑스를 사용했고, 이것이 후에 퍼져 시민들과 원로원 의원이 황제를 지칭하는 의미가 되었다. 황제의 권력은 '호민관 특권'(potestas tribunicia)과 '대행 집정관 권한'(imperium proconsular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호민관 특권은 황제에게 거부권(veto)를 부여하게 됐고,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까지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으로써,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서로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써 두명의 집정관과 10명의 호민관 모두에게 주어졌던 권한이다. 또한 호민관 특권은 황제의 신체는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그의 의무 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저주 곧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공화정 시대에는 호민관에게 주어졌던 특권으로, 본래 공화정 시대에는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민관의 특성상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성격이 더 강했던 특권이었다. 대행 집정관 권한(공화정 시대의 총독 역할을 맡던 대행 집정관의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군 통수권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몫이었던 전쟁 선언, 조약 비준, 외교 협상 등의 외교권도 가졌으며, 원로원 의원 임명권 등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황제는 종교 조직을 통제하였으며, 황제는 늘 최고 사제장(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주요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동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은 493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족의 테오도릭 대왕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의 지원을 받아서, 로마를 점령한 게르만인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건설하였다. 그 뒤, 테오도릭 대왕은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제논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552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에 장군 나르세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고트족은 3세기 이전까지는 한 민족이었으나 그 때를 전후해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두 부족은 로마인들이 마르스라 부른 전신을 숭배하는 등 문화적으로 동질했다. 3세기 무렵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다키아 속주로 이주했고, 동고트족은 흑해 연안에 왕국을 건설했다. 370년대 훈족의 대두는 동고트족을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민족으로 바꾸었다. 훈족의 침입에 맞서 당시 동고트 왕 에르마나리크는 몇 차례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한 뒤 11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얼마뒤 그의 후계자도 승산없는 훈족과의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서고트왕 프리티게른(Fritigern)이 도나우 강 너머로 재이주할 것을 권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동고트족은 발칸반도에서 훈족과 공존, 451년 샬롱(Chalons)의 전투에서처럼 훈족의 전쟁 도구로 사용되었다. 동고트족은 수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다. 훈족과의 교류에서 동고트족이 얻은 것이라고는 훈족의 기마문화를 도입하게 된 정도였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고트어는 크림반도 일대에서 16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고트족의 기록된 역사는 아틸라의 죽음과 함께 훈족 지배가 붕괴되며 시작된다. 454년 동고트의 테오디미르(Theodimir) 왕은 아틸라의 아들들이 이끄는 훈족 군대를 네다오(Nedao)의 전투에서 싸워 승리했다. 동고트족인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맺고 판노니아 속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5세기 후반동안 동고트족은 비잔틴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테오도릭 대왕은 네다오의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454년 테오데미르(Theodemir)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도릭은 유년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인질로 보내며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테오도릭은 로마의 귀족 칭호와 집정관 직위 등 로마식 관직으로 치장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행동했다. 488년, 테오도릭은 제논의 위임을 받고 이탈리아를 오도아케르로부터 수복하러 나서 493년 오도아케르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점령하고 손수 오도아케르를 죽였다. 동고트족의 지배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와 알프스 이남까지 미쳤으며,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중에 동-서고트족이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세력의 정점에서 테오도릭이 툴루즈의 서고트 왕국의 섭정이 되며 그의 영향력은 갈리아의 많은 부분과 스페인 거의 전체에 미쳤다. 부이으(Vouille)의 전투에서 테오도릭의 사위인 알라릭 2세(Alaric II)가 전사한 이후 동고트의 왕은 그의 손자 알라마릭(Alamaric)의 보호자로서 스페인과 갈리아의 남은 고트 세력의 지배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테오도릭이 살아있는 동안 서고트족은 그 아래에서 연합해 있었고, 프랑크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게르만 부족들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테오도릭 치세의 동고트족은 헤르마나릭(Hermanaric) 때보다 더 넓은 판도를 펼쳤으나,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테오도릭은 동고트족의 왕으로 있으면서 공식적인 황제 칭호를 받지 못한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행동했다. 고트족과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서로 자신들의 법에 따라 다르게 지배받았다. 이 시대의 고트족은 이탈리아 북부에 주로 자리잡았으며, 남부에는 몇몇 진지를 설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실권은 고트 왕에게 주어졌으나 로마에서는 아직도 명예직으로 집정관이 선출되었으며, 모든 로마의 옛 기관들이 계속 작동했다. 이 체제는 테오도릭 사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526년 테오도릭의 죽음과 함께 동-서 고트족은 다시 분열되었다. 알라마릭은 스페인과 셉티마니아(Septimania)의 고트 왕국을 계승했으며, 프로방스는 새로운 동고트 왕 아탈라릭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은 암살과 왕위 찬탈이 이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고트 내의 위기를 서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기회로 삼아, 535년 벨리사리우스에게 군권을 위임해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해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했다. 이후 계속 북진해 밀라노와 동고트 수도 라벤나를 540년 점령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 왕국을 이탈리아 북서부에 존속하게 하는 대신 재정의 절반을 넘기게 하는 것으로 강화를 맺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 조치에 만족하지 않았고, 고트족들조차 그 뒤에 무슨 음모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결국 그대로 교섭이 이루어졌다. 에라릭(Eraric)을 리더로 한 고트족의 귀족들은 패배한 왕 비티게스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넘기고 그에게 왕위를 넘겼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에 분노했다. 비잔틴 제국은 그때 동쪽으로부터 사산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유스타시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했다. 이탈리아는 비잔틴 장교인 존(John)에게 맡겨졌다. 545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에라릭은 살해되었고 고트 내의 친로마파는 무너져 있었다. 541년 고트족은 토틸라를 왕으로 뽑아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비잔틴군을 로마에서 몰아낸 상태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를 맞아 공세로 들어갔으나, 그의 반란을 염려한 유스티니아누스가 지원과 보급을 끊어버려 수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548년 동고트 전선은 환관 장수 나르세스에게 넘겨졌다. 나르세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552년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했고, 테이아, 알리게른(Aligern), 스키푸아르(Scipuar), 기발(Gibal) 등의 남은 고트 세력은 552년 혹은 553년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전멸했다. 고트 귀족 비딘(Widin)은 550년대에 고트 부흥운동을 펼쳤으나 결국 실패, 561년 혹은 56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비딘의 실패를 끝으로 동고트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갈리아, 스페인, 그리고 롬바르드족이 지배한 이탈리아의 일부에서처럼 게르만과 로마적인 것이 융합한 국가는 태어나지 않았다. 고트어 문학으로 남은 것은 울필라스의 성경과 다른 종교적인 저작 일부 뿐이다. 고트족의 법률로는 500년 테오도릭의 칙령 (라틴어)와 로마인 재상 카시오도로스의 저작이 남아있다. 사이온지 긴모치 사이온지 긴모치(, 1849년 12월 7일 ~ 1940년 11월 24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교육자이다. 일본의 공가 출신으로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정2위 대훈위 공작을 지냈다. 1924년에 마쓰카타 마사요시 사망 이후 최후의 원로로서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을 보필했다. 그 밖에 교토에 위치한 리쓰메이칸 대학의 전신 '리쓰메이칸 사숙'을 설립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사이온지는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간인류(閑院流) 계열의 청화가(清華家) 중 하나인 도쿠다이지가(徳大寺家)의 제28대 당주이자 우대신이었던 도쿠다이지 긴이토(徳大寺公純)의 차남으로 태어나 4세에 사이온지가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했다. 두 가문의 서열 모두 청화가였고, 후지와라노 긴자네(藤原公実)를 시조로 한다. 친형 사네쓰네(実則)는 시종장을 3번 역임하고 내대신으로도 근무한 궁중의 실력자였다. 바로 밑의 동생 스미토모 도모이토(住友友純)는 재벌 스미토모가(住友家)의 데릴사위로 제15대 스미토모 기치자에몬의 이름을 계승해, 장기간 재계에 군림했다. 그리고 막내동생 스에히로 다케마로(末弘威麿)는 외가인 스에히로가(末弘家)를 이어, 후에 사립 교토 법정학교(현재의 리쓰메이칸 대학)의 간사, 이사를 맡았다. 유년기의 거주지가 어소(御所)와 가깝고, 사치노미야 황태자(후의 메이지 천황)과 나이도 비슷하여 종종 그의 놀이 상대로 부름을 받았다. 이와쿠라 도모미나 산조 사네토미와 같은 에도 막부 말기에서의 정치적 공적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도쿠가와가와 시마즈가의 사적인 싸움이라고 보는 의견이 나오던 중에 적극적인 관여주전론을 주장해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토막파 공경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후 보신전쟁에는 산인도 진무총독, 아이즈구 정벌대참모로서 각지를 전전했고 그 후엔 에치고 부지사등을 역임했지만, 그 당시 10대의 젊은 나이로 임관이 가능했던 이유로 가문의 후광 이외의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또, 공경 중에서 처음 양장 차림으로 궁중에 참내해, 상당수의 잔류 양이파 공경의 노여움을 산 에피소드도 자기 저서(陶庵随筆)에서 피력하고 있다. 작가 시바 료타로는 저서인 '화신'()에서 도막파 병학자 오무라 마스지로가 사이온지를 후계자로 보고 있었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마스지로에게 “당신은 군문 쪽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공가식의 이름인 긴모치를 싫어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望一郎”로 개명하였다. 1871년 오무라의 추천을 받아 1871년 관비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자 (후에 감액을 신청한다) 그에 대한 답례 방문을 하기 직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친구와의 대화가 길어진 사이 오무라 마스지로가 습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학 당시의 편지에는 프랑스로 가는 배 안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일을 이해한 일이나, 백인소년에게 이별의 키스를 요청받아 당황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실려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파리 코뮌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다. 또한 클레망소(후의 프랑스 수상), 동료 유학생인 나카에 조민,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친교를 맺어 귀국 후까지 그 인맥을 이어갔다. 파리 유학에서 자유 사상을 접하고 자유민권운동에 심취하여 나카에 조민, 마쓰다 마사히사 등과 함께 1881년 3월 18일에 동양자유신문을 발행하지만 사이온지가 자유민권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싫어한 정부의 압력에 의해 퇴사를 종용 받아 4월 30일 제34호까지만 발행된 후 폐간의 쓰라림을 맞게 된다. 정치가로서의 경력은 1882년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순방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에서 시작된다. 유럽에서 이토의 지우를 얻은 사이온지는, 1900년 입헌정우회 개양에 참가해 1903년에는 총재가 되었다. 그 후 다이쇼 천황 즉위시에 원로의 반열에 올랐다. 사이온지의 사상은 자유주의(liberal)을 자칭하여 중의원에서의 다수파 정당이 내각을 조직하는 헌정의 상도를 관례로 여겼다. 또 프랑스 유학의 영향 탓인지 친유럽적인 면을 보여 군부등에서 국가주의에 반하는 사람으로 세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에게 정치력이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후의 일본에서 사이온지만큼의 정치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궁중 재계와의 인척관계를 배경으로, 그는 원로로서 궁중과 국무, 군부의 조정역을 맡아 일본 정계를 이끌었다. 또 문부대신 재임 중에는 교육칙어를 개정하려 하는 등 쇼와 초기의 국가주의적 정치와는 거리를 둔 언행을 간간히 보이며 군부의 세력 확대에 저항했지만, 전쟁을 막아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한 편액에 사이온지 가문의 본성인 후지와라 성을 살려 후지와라 긴모치(藤原公望)로 서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천 년 이상 황실과 함께 했던 후지와라씨의 후손이라는 강한 의식이 있었고, 그것이 정치자세가 되었다. 즉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기 때문에 오류가 용서되지 않는 천황의 친정에 계속 반대했다. 이것은 다나카 기이치가 만주모중대사건의 상주의 불일치를 쇼와천황에 질책당해 내각이 총사직했을때, 사이온지가 천황에 누를 끼치는 것을 구실로 천황에 의한 다나카에의 질책에 반대하고 있던 것으로 봐도 분명하다. 또, “입헌군주로서 신하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쇼와 천황의 신조는 사이온지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으나 황도파 장교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기반으로 하는 여당 정우회가 중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도 있었기에, 재무행정개혁에 착수했다. 1913년(다이쇼 2년)의 예산책정을 대상으로 세출 1할 삭감을 목표로 했지만, 육군은 2개사단의 증설을 요구하고, 해군도 또한 전함 3척 건조를 예산안에 포함시켰다. 육군은 사이온지 내각을 전복시켜서라도 2개사단 증설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했고, 내각이 끝까지 거부방침을 내타냈기에 우헤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육군대신에게는 직접 천황에게 상주하는 유막상주가 제도상 인정되고는 있었지만, 각료가 수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천황에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 육군이 후임육상을 내지 않는 한 사이온지 내각은 육상을 얻지 못한 채 사임할 수밖에 없어, 당시 육상사임의 영향은 매우 컸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사이온지는 이후 다이쇼 천황에게 불려가 천황의 입에서 육상의 사표제출을 알게 되었다. 그는 후임의 육상에 대하여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담했으나, 야마가타가 후임의 육상을 낼 생각이 없는 것을 헤아리자, 기선을 억제해 총사직했다. 정우회를 통하여 내각 총사직의 내막이 널리 알려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벌족타파, 헌정옹호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정우회는 입헌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등과 제휴해, 호헌운동의 진두에서 사이온지 내각의 후임내각인 제3차 가쓰라 내각과 대립했다. 다만, 정국제휴나 국민을 향한 연설회등에 사이온지는 직접 터치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이것들은 정우회의 간부로 있던 히라 다카시나, 마쓰다 마사히사등과 국민당의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가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의회는 원래부터 정우회가 절대다수였으므로, 의회가 개시되자 정우회와 국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해 가쓰라 내각은 궁지에 처했다. 거기에, 벌족측에서는 영국의 조지5세가 즉위한 때에, 즉위 직후인 것을 이유로 자유당과 보수당과의 정쟁을 금지하기위한 명령을 실현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모방해, 흡사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으므로 칙어를 내는 형태로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정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했다. 정우회에서는 천황의 의사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불신임안을 철회했고, 일단은 가쓰라 내각에 은혜를 배푸려는 의견이 한때 유력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국민당의 오자키 유키오가 강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이누카이 쓰요시의 조언으로 사이온지는 정우회 총재를 사임해, 정우회 자체는 끝까지 내각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때에 해군의 야마모토 곤베에가 정우회 본부를 격려를 위해서 방문했다. 결국, 호헌운동의 고조로 가쓰라 내각은 1913년 2월 11일에 총사직해, 동일 후계수상을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가 열렸다. 이때의 회의에는 사이온지도 처음 원로로서 출석했다. 그러나 정우회의 대표로서 출석은 결코 아니었다. 회의에서는 처음엔 사이온지가 후계수상에 추천되었지만, 이것을 받으면 칙어에 반하게 된다고 하여 사이온지는 사양했다. 결국, 후계수상은 야마모토 곤베에로 정해졌다. 1926년(쇼와 원년) 12월 28일, 황위를 계승한 직후의 쇼와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특별히 칙어를 내려(대훈위 공작 사이온지긴모치에게 주는 칙어), 이것에 의해 사이온지가 유일한 원로로서 내각총리대신 주천의 직무를 떠맡는 것이 사실상 확립됐다. 그는 1940년,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 탄생 전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내각수반 지명에 계속 관여하게 된다. 1936년의 2·26사건때는, 궐기장교의 일부가 사이온지 습격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습격을 주장하는 사람은 원로 사이온지를 군측의 간사한 수괴로 보고 있었던 것에 비해, 부정파는 천황과의 연결책으로 사이온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표면상 구실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쿄 스루가타이의 본가 외에, 시즈오카현의 고텐바초의 우편선총별장, 같은 시즈오카현 오키쓰의 자교소, 교토의 세이후소우의 각 별장에 은둔생활을 하며, 원로로서 중심을 이루었다. 최후의 만 년이 되면, 피서를 위해서 고텐바에 체재하는 것 이외에는 일 년의 대부분을 겨울의 기온이 온화한 자교소에서 보내었다. 1937년의 고노에 후미마로 1차 내각 성립 이후엔 점차 정치 표면에서 물러나, 계속 반대했던 삼국(독일-이탈리아-일본) 군사동맹 성립 2개월 후에 사망했다. 기대를 걸었던 고노에게도 배반당해 그를 수상으로 추천한 일을 마지막까지 후회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도대체 어디로 나라를 끌고가는 것이냐”라고 전해진다. 1941년 고노에 내각의 두뇌를 맡던 손자 기미카즈가 조르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다. 문부대신 시절의 사이온지는 교양있는 시민의 육성을 중시해, “과학, 영어, 여자 교육을 중시하라“고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1890년에 이노우에 다케시등이 만든 교육칙어에 반대해,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교육칙어 개정허가를 얻은 것과 동시에, 제2차 교육칙어의 작성에 임했다. 이 2차 교육칙어의 초안은, 사이온지가로부터 리쓰메이칸 대학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 아래의 교육기관 설립에도 관여하고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 컴퓨터 바이러스(computer virus, )는 스스로를 복제하여 컴퓨터를 감염시키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복제 기능이 없는 다른 종류의 악성 코드, 애드웨어, 스파이웨어와 혼동하여 잘못 쓰이는 경우도 있다. 바이러스는 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로(일부 형식의 실행 코드로) 확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용자는 인터넷이나 네트워크를 통하여, 또는 플로피 디스크, CD, DVD, USB 드라이브와 같은 이동식 매체를 통하여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네트워크 파일 시스템이나, 다른 컴퓨터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 상의 파일을 감염시킴으로써 다른 컴퓨터로의 확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 개념이 처음 사용된것은 1972년 SF소설 When Harlie Was One에서 이다. 1970년대에 인터넷의 선구자인 아파넷에서 크리퍼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됐으며 이것이 최초의 바이러스로 기록되어 있다. 크리퍼는 실험적인 자기 복제 프로그램이었으며 1971년에 BBN에서 밥 토머스가 작성한 것이다. 크리퍼는 아파넷을 사용하여 TENEX 운영 체제를 사용하는 DEC PDP-10 컴퓨터들을 감염시켰다. 크리퍼는 아파넷을 통한 접근 권한을 얻었고 스스로를 "I'm the creeper, catch me if you can!"(나는 크리퍼다, 잡을 수 있다면 나 잡아봐라!)라는 메시지가 있는 원격 시스템에 복사시켰다. 뒤에 리퍼(Reaper)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크리퍼 바이러스를 지우게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발견된 최초의 바이러스는 (c)브레인이라고 하는 부트 섹터 바이러스였으며 1986년에 파루크 앨비 형제가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에 매크로 바이러스가 일상화되었다. 이 바이러스 대부분이 워드와 액셀과 같은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램을 위한 스크립팅 언어로 기록되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통하여 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감염시키며 퍼져나갔다. 워드와 액셀이 OS X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이 대부분이 매킨토시 컴퓨터에도 퍼질 수 있었다. 2002년에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을 사용하여 확산된 바이러스가 처음 보고되었으며 학술적으로는 2005년에 증명되었다. 마이스페이스와 야후와 같은 웹사이트를 통한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 바이러스의 여러 사례가 있었다. 스스로를 복제하려면 바이러스는 코드 실행과 메모리로의 기록을 허가받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그들 스스로를 정상적인 프로그램들의 일부일 수 있는 실행 파일에 첨부해 들어간다. 사용자가 감염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려고 하면 바이러스 코드가 동시에 실행될 수 있다. 바이러스들은 실행될 때 두 가지 종류로 나뉠 수 있다. 비상주 바이러스들은 즉시 감염될 수 있는 다른 호스트들을 찾아 대상을 감염시키며 끝내 감염된 응용 프로그램에 제어권을 넘긴다. 상주 바이러스들은 이들이 위치한 호스트를 검색하지 않으나 실행을 할 때 스스로를 메모리에 상주시켜 호스트 프로그램에 제어권을 넘긴다. 바이러스는 백그라운드 환경에서 동작하며 이 파일들이 다른 프로그램이나 운영 체제 자체에서 접근하면 새로운 호스트들을 감염시켜 버린다. 비상주 바이러스는 검색자 모듈(finder module)과 복제 모듈(replication module)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검색자 모듈은 감염을 시킬 새로운 파일들을 찾는 데 치중한다. 검색자 모듈이 각 새로운 실행 파일과 마주치면 복제 모듈을 호출하여 해당 파일을 감염시킨다. 상주 바이러스는 비상주 바이러스가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복제 모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듈은 검색자 모듈을 통해 호출되지 않는다. 이 바이러스는 일단 실행하게 되면 복제 모듈을 메모리에 상주시키며 운영 체제가 특정한 운영을 수행하기 위해 호출될 때마다 이 모듈이 실행하게끔 한다. 이 복제 모듈은 이를테면 운영 체제가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호출된다. 이 경우 바이러스는 컴퓨터 상에서 실행되는 정상적인 모든 프로그램들을 감염시킨다. 상주 바이러스는 빠른 감염자(fast infector)와 느린 감염자(slow infector)로 나뉘기도 한다. 빠른 감염자는 가능한 많은 파일에 감염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를테면 빠른 감염자는 접근을 하는 모든 잠재적인 호스트 파일을 감염시킬 수 있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에는 특별한 문제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시스템 전체 검색시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컴퓨터 상의 잠재적인 모든 호스트 파일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이러한 바이러스가 메모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면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에 타고 올라가 바이러스 검사를 받는 모든 파일들을 감염시켜버린다. 빠른 검색자는 바이러스가 빨리 퍼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방식에서 보이는 단점은 수많은 파일을 감염시킬 때 이를 빨리 감지해낼 수 있다는 점인데 그 까닭은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느리게 만들거나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의심스런 동작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한편 느린 감염자는 비정기적으로 호스트를 감염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테면 일부 느린 감염자는 일들이 복사될 때 파일을 감염시키기만 한다. 느린 감염자는 이러한 동작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감지를 피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들은 컴퓨터를 눈에 띄게 느리게 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프로그램에 의한 의심스러운 동작을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감지할 때 비정기적으로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이 뜨게 만든다. 그러나 이 느린 감염자 접근은 매우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위치는 아래와 같다. 아래의 내용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의 개체 하나하나가 유전자 다양성을 지니고 있어서 질병으로 인하여 죽어갈 가능성을 줄인 것 같이 네트워크 상의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다양성도 이와 비슷하게 바이러스가 벌이는 잠재적인 파괴를 제한한다.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데스크톱 운영 체제와 오피스 제품군의 시장 우위를 차지하였던 1990년대에 특별한 개념이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아웃룩,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같은 네트워킹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특히 바이러스 확산에 취약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는 데스크톱 시장의 주도성으로 바이러스 제작자들이 표적으로 삼았고 바이러스 제작자가 이용하는 허점과 수많은 오류를 비롯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통합형, 개별형 마이크로소프트 응용 프로그램들(이를테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과 파일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스크립팅 언어로 된 응용 프로그램(이를테면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 및 네트워킹 기능이 있는 응용 프로그램)이 특히 취약하다. 윈도우가 이제껏 바이러스 제작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운영 체제가 되었지만 일부 바이러스는 아직도 다른 운영 체제에 존재한다. 서드 파티 프로그램이 실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운영 체제는 이론적으로 바이러스를 실행할 수 있다. 일부 운영 체제는 다른 운영 체제에 비해 덜 안정적이다. 유닉스 기반 운영 체제 (및 윈도 NT 기반 플랫폼의 NTFS 인식 프로그램)는 사용자들이 보호된 메모리 공간 안에서만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인터넷 기반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특정한 단추를 눌러 바이러스를 다운로드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보안 분석가 디디에 스티븐스(Didier Stevens)는 6개월 동안 구글 애드워즈에 "Is your PC virus-free? Get it infected here!"(여러분의 PC는 바이러스에서 해방되어 있습니까? 이 곳에서 감염되어 보십시오)라며 광고 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무려 409번 클릭이었다. 소프트웨어가 시스템 리소스의 허가되지 않은 이용을 막기 위한 특별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확산을 위하여 시스템이나 응용 프로그램 안의 소프트웨어 버그를 이용하여야 한다. 수많은 버그를 양산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전략은 일반적으로 잠재적인 악의적 이용을 부추길 수 있다. 수많은 사용자들은 실행 파일을 다운로드 받거나 실행한 뒤에, 알려져 있는 바이러스를 찾아내어 없앨 수 있는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가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로는 가장 흔한 바이러스 검사 방식으로, 바이러스 서명 정의 목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 메모리의 내용(램, 시동 섹터), 고정 및 이동식 드라이브(하드 드라이브, 플로피 드라이브)에 저장된 파일을 검사하고 알려진 바이러스의 서명 데이터베이스와 해당 파일을 비교함으로써 수행하게 된다. 이 감지 방식의 단점으로는 사용자가 최신 바이러스 정의 업데이트에 속한 바이러스로부터만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방식으로는 발견적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컴퓨터 행위에 따라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방식은 보안 회사가 서명을 작성할 바이러스까지도 검색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일부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은 비슷한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보낸 편지, 받은 편지뿐 아니라 열려 있는 파일을 검사할 수 있다. 이를 "실시간 검사"(on-access scanning)라고 부른다. 사용자들은 소프트웨어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여 보안 허점을 보완하여야 한다.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는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여 최신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한다.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더럽혀지면 완전히 운영 체제를 다시 설치하지 않고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계속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렸어도 이에 대비한 복구 옵션이 수없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능은 바이러스의 종류의 심각성에 따라 달라진다. 윈도 Me, 윈도 XP, 윈도 비스타, 윈도 7, 윈도 8에는 시스템 복원이라는 도구가 있어서 레지스트리와 중요한 시스템 파일을 이전 검사 지점으로 돌릴 수 있다. 바이러스가 시스템을 붙잡아 컴퓨터 전원을 강제로 껐다 켜면 그 즉시 시스템 복원을 보여 줄 것이다. 바이러스가 복원 파일을 손상시키지 않았고 이전 복원 지점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이전 날의 복원 지점을 선택해도 무관하다. 그러나 일부 바이러스들은 시스템 복원과 다른 중요한 도구(작업 관리자, 명령 프롬프트)를 사용하지 못 하게 만드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운영 체제를 다시 설치하는 것 또한 바이러스 제거의 다른 방안이다. 단순히 운영 체제 파티션을 다시 포맷하고 원본 매체로부터 운영 체제를 설치하거나, 깨끗한 백업 이미지의 파티션의 이미지 복제 과정을 동반한다. 이 방식은 단순하면서도 별도로 바이러스 검사를 하는 것보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악성 코드를 모두 제거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스스로 복제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트로이 목마로 불리며, 프로그램 복제가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감염되는 경우는 컴퓨터 웜으로 불린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숙주인 컴퓨터 내부에서만 증식을 하는 악성코드를 바이러스라고 하며, 숙주 컴퓨터가 필요 없이 네트워크상에서 계속 증식이 가능한 악성 코드를 웜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웜과 바이러스의 특징을 결합하여 프로그램에 기생하며 네트워크로도 감염시키는 웜 바이러스들도 많이 생겼다. 시동 바이러스(boot virus)는 컴퓨터를 처음 시동할 때 실행되는 시동 프로그램에 기생하는 컴퓨터 바이러스이다. 시동 바이러스는 일단 감염이 되면 시동 프로그램에 자리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를 처음 시동하고 그 뒤에 디스크 시동을 시작하는 순간 해당 바이러스도 메모리 상주 형식으로 같이 활동을 하면서 시동을 방해하는 등의 작용을 한다. 대표적인 시동 바이러스는 미켈란젤로 바이러스, 브레인 바이러스, LBC 돌 바이러스 등이 있다. 만일 시동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다면 아래와 같은 조치를 취하면 된다. 컴퓨터에 잠복해 있다가 13일의 금요일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바이러스다. EXE, COM 등의 확장자가 있는 실행프로그램을 파괴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년 11월 2일 - 1779년 12월 6일)은 18세기 프랑스의 화가이다. 샤르댕은 1699년 파리에서 목수인 아버지 장과 어머니 잔 프랑스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 시메옹이며, 간간히 장-바티스트로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그는 일찍부터 그림그리기에 관심과 재주을 보여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술학원 상-뤽 아카데미 ("Saint-Luc Académie")에 보낸다. 시메옹은 여기서 색채를 섞고 칠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술을 익히게 되며, 이 화법은 후에 샤르댕의 작품에서 역력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미술학원에서 장인 자격증을 취득한 후, 샤르댕은 아직 화가로서의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여러 군데 사설학원의 실습과정에 등록하여 화법을 개선하는 데 노력한다. 1728년 젊은 화가들의 전시회에 샤르댕은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게되며, 이를 계기로 같은 해 9월 25일 프랑스 아카데미(미술분과)에 자신의 작품을 선을 보여 곧바로 분과회원으로 가입된다. 회원가입에서 샤르댕은 동물과 과실의 기교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그의 작품은 실제로 이 지칭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세잔이 말년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중점적으로 정물화를 (약 200여 점) 그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세잔은 아직 인상주의 화가 마네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영향 밑에서 세잔 고유의 정물화 세계를 발견하였지만, 역사적으로 세잔의 정물화는 샤르댕의 정물화 없이는 생겨날 수 없었다. 1860년에 에콜 프랑스 (L'Ecole française)에 총 41점의 샤르댕의 정물화와 인물화가 전시됨으로써 처음으로 샤르댕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화가들 프랑스와 보뱅, 필리프 루소, 앙트완 볼롱 등이 적지 않은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3년 공꾸르 형제가 예술잡지 가제트에 샤르댕에 관해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샤르댕은 19세기 말에 프랑스 화단에서 재발견 및 평가되었으며,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서 샤르댕의 작품 구입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었다. 그의 입선작 <붉은 가오리>는 주제는 빈약하나, 강렬한 색채와 미묘한 구성이 그 위대성을 나타낸 작품이다. 그 후 그는 성실과 정적에 가득 찬 프랑스 사람들의 가정 생활을 그렸다. 필치는 면밀하고 무게가 있으며, 화면은 기름지고 풍부하여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풍긴다. 색채도 교묘히 사용하여 명암의 색조를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작품에는 <아침 기도> <가르다의 성> 등이 있다. 샤르댕 샤르댕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101년 102년 103년 104년 105년 106년 107년 108년 109년 110년 111년 112년 113년 114년 115년 116년 117년 118년 119년 고구려(高句麗)의 9대 국왕 고국천왕(高國天王) 120년 대한민국의 훈장 대한민국의 훈장(大韓民國勳章)은 상훈법 제2조 (서훈의 원칙)에 따르면, "대한민국 훈장 및 포장"의 줄임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나 우방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로를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무궁화대훈장(無窮花大勳章, Grand Order of Mugunghwa)은 대통령 및 그 배우자,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 또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안전보장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전직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에게 수여하며 등급은 없다. 건국훈장(建國勳章,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 국민훈장(國民勳章, Order of Civil Merit)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무공훈장(武功勳章, Order of Military Merit)은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근정훈장(勤政勳章, Order of Service Merit)은 공무원(군인 및 군무원을 제외) 및 사립학교의 교직원으로서 직무에 정려하여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보국훈장(保國勳章, 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자에게 수여한다. 수교훈장(修交勳章, Order of Diplomatic Service Merit)은 국권의 신장 및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수교훈장은 5등급으로 나뉘며며 1등급중 광화대장은 외국의 수상급이상, 광화장은 대사급 이상자에게 수여한다. 산업훈장(産業勳章, Order of Industrial Service Merit)은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새마을훈장(새마을勳章, Order of Saemaeul Service Merit)은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문화훈장(文化勳章, Order of Cultural Merit)은 문화·예술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 문화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체육훈장(體育勳章, Order of Sport Merit)은 체육발전에 공을 세워 국민체육 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과학기술훈장(科學技術勳章, Order of Science and Technological Merit)은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 수여한다. 정부 서훈절차는 추천기관에서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행정안전부에 대상자를 추천하면 행정안전부에서 이를 심사하여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수상대상자를 확정하고 친수 또는 전수함으로써 완료된다. 훈장 및 포장을 수여하면 수여사실이 수여대장(훈기부)에 기록되며, 이에 의하여 훈장증서 등의 증서를 분실한 경우 신청에 의거 수여증명서를 발급하며 훈장증 등의 증서의 재발급은 하지 않는다. 훈장을 분실한 경우 신청에 의거 신청자의 비용 부담으로 재교부한다. 대수로 된 훈장(모든 1등급훈장, 2등급건국훈장 및 2등급수교훈장)은 대수로 된 정장을 오른편 어깨에서 왼편 가슴 아래로 두르며 부장은 왼편 가슴에 단다. 부장이 있는 중수로 된 훈장(2등급훈장과 건국훈장 3등급)은 정장이 가슴 중앙에 오도록 중수를 목에 걸고, 부장은 왼편 가슴에 단다. 부장이 없는 중수로 된 훈장(3등급훈장)은 정장이 가슴 중앙에 오도록 중수를 목에 건다. 소수로 된 훈장 및 포장(4등급 및 5등급 훈장과 포장)은 소수로 된 정장을 왼편 가슴에 단다. 2개 이상의 대수 또는 부장이 있는 중수로 된 훈장(1등급 및 2등급)은 그 중 하나의 정장 및 부장을 패용하고, 기타는 좌측 가슴에 부장만을 순차로 패용한다. 2개 이상의 부장이 없는 중수로 된 훈장(3등급)은 그중 하나의 정장만을 패용하고 기타는 그 수를 역삼각형(▽)으로 축소하여 좌측 가슴에 순차로 패용한다(수의 축소방법은 수의 폭을 1변으로 하여 정삼각형으로 접되 무늬가 좌로 내려가도록 한다). 소수로 된 훈장을 2개이상 패용할 경우(4등급, 5등급, 6등급훈장 및 포장)에는 그 패용순위에 따라 좌측 가슴에 순차로 패용한다. 금장은 왼편 옷깃에 패용하며, 2개이상의 금장을 받은 경우 그중 하나만 패용한다. 약장(ribbon)은 좌측 가슴 호주머니 위에 패용한다. 2개이상의 약장을 패용할 경우에는 그 순위에 따라 패용한다. 동일종류, 동일등급 복수약장과 단수약장을 동시에 패용할 때에는 복수 약장을 선순위로 패용한다. 15개 이상의 약장을 패용할 때에는 축소한 약장을 패용할 수 있다. 훈장은 필요한 경우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축소훈장의 교부를 받고자 하는 경우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신청하며 제작비는 본인이 부담하여야 한다. 대수 또는 중수로 된 1등급 및 2등급훈장과 건국훈장 3등급은 정장과 수는 축소할 수 없으나 부장 및 약장은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건국훈장 3등급을 제외한 3등급훈장은 정장은 축소할 수 없으나 수만을 삼각형(△)으로 축소하며,약장은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수의 축소방법은 수폭의 길이를 1변으로 하여 정삼각형으로 접어 무늬가 우에서 좌로 내려가도록 한다. 4등급 및 5등급 훈장은 정장과 약장을 그 원형의 1/2비율로 축소할 수 있다. 포장은 훈장 다음가는 훈격이다. 근정훈장의 경우 단순히 비리 등으로 처벌받지 않고 근속 연수만 채우면 퇴직할 경우 당연히 수여받게 되어 훈격이 떨어진다는 논란이 있다. 행정안전부는 규정을 강화하고 훈장이 민간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울릉도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수사관이나 검사가 '간첩을 체포한 공로'로 보국훈장을 수여받았고, 2010년에 조작으로 판명된 이후에도 서훈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논란이 있다. 이외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자들에 대해서도 표창이 수여되었고, 형제복지원 원장과 간첩 조작 사건 연루자들에게도 표창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을 심의·의결해 훈장 21점, 포장 4점, 대통령 표창 17점, 국무총리 표창 14점 등 총 56점에 대해 서훈을 취소시켰다. 행정안전부는 앞으로도 부적절한 서훈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취소함으로써 정부 포상의 영예를 높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수교 이후 2013년까지 일본인의 수교훈장 수훈자는 326명이었는데 일본의 한국인 수교훈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남발되었다. 그리고 326명 가운데 일본제국주의와 관련되었거나 야스쿠니 신사참배, 독도망언을 한 12명은 받아서는 안되는 부적격자였다. 국민정서의 고려나 일정한 법적 기준도 없이 수여하는 방식도 정권에 따라, 정무적 판단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었다. 레오니드 레빈 레오니드 아나톨리에비치 레빈(, , , 1948년 11월 2일 ~ )은 소비에트 연방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현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출생한 전산학자, 수학자이다. 안드레이 콜모고로프의 제자였다. 1978년에 미국 국적을 얻어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전산학의 이론적 기반을 연구하면서 계산이론, 정보 이론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스티븐 쿡이 발견한 NP-완전을 1973년에 독자적으로 발견했다. ‘쿡의 정리’ 혹은 ‘쿡-레빈 정리’라고 부르는 이 정리는 전산학 분야의 획기적 발견이며, 계산 복잡도 이론의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책에서 한 장(chapter)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다윈 다윈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한 세대 앞서는 티탄족에 속하는 신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라는 뜻이다. 티탄 족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며, 아틀라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헤스페로스와 형제였다. 헤시오도스 《신통기》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제 1세대 티탄족인 이아페토스와 바다의 요정인 클리메네(혹은 아시아) 사이 탄생하였다. 그는 본디 티탄 신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흥미를 끈 사건이 그와 제우스 사이 벌어진 권력 다툼이다. 이 사건이 인간의 운명과 간접적으로 얽힘으로써 프로메테우스의 존재는 인류 문명사에서 신화적 해석을 하는 데 종종 언급한다. 게다가 아래에서 볼 권력 다툼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에서 즐겨 다룬 소재로 손꼽히기도 한다. 대양신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인 님프 클리메네 혹은 아시아가 그의 어머니라 하며, 아내는 그의 이모이자 사촌인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딸 헤시오네이다. 일설에는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다른 딸인 아시아가 그의 아내라고도 한다. 아들은 데우칼리온이다. 헤시오도스 《신통기》에 따르면, 인간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두고서 신과 협정 맺을 때, 소의 뼈를 가지런히 정렬하여 이를 윤기가 흐르는 비계로 감싸고, 살코기와 내장을 가죽으로 감싸 제우스 신에게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선택하게 하였다. 프로메테우스 계락을 간파한 제우스는 분노하여 인류에게서 불을 빼앗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이고 꺼지지 않는 불을 회양목 안에 넣어 인간에게 몰래 주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만들어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행동한 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에게 보내고, 프로메테우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피메테우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발생하여 인류에게 재앙이 찾아오게 된다. 또 그는 예언 할 능력을 갖추었는데, 제우스가 자신의 미래를 묻자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제우스의 분노를 사 코카서스 산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게 되었다. 후일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그를 구해 주었다. 헤라클레스가 12과업을 할 때 아틀라스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 게 프로메테우스라고도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신의 불을 '광명'으로 보아 인간이 신의 지식을 얻어 각성하게 되었다는 상징으로 유추되기도 한다. 같은 관점에서 구약의 율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지식(복음)을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 신에 관한 고대 그리스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작품이다. 그리스 비극은 3부작으로 공연되기 때문에, 이야기 줄거리상 첫편에 해당한다.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불을 옮기는 프로메테우스”의 2편이 이어질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2편은 사라져 버렸으며, 현대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아이킬로스 사후에 다른 작가가 완성했거나 썼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상연 연대도 불분명하며, 기원전 478년 이전에 상연되었다는 설과 만년의 기원전 460년설이 있다. 원자 질량 원자 질량("m",)은 원자의 질량이다. 단위는 결합이 없는 안정한 상태의 탄소-12 원자 질량의 1/12을 1u로 정의한 원자 질량 단위(, , 기호: u, Da)를 사용한다. 원자들의 대부분의 질량은 원자핵의 양성자와 중성자가 차지하고 그 값은 질량수에 근접한다. 원자 질량을 원자질량단위로 나누어 순수한 수 비율을 만들 때, 원자의 원자 질량은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이라고 불리는 무차원수(, )가 된다. 이와 같이 탄소-12 원자의 원자 질량은 12 u 또는 12 Da 이고 탄소-12 원자의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단순히 12로만 표현한다. 원자 질량 또는 상대 동위원소 질량은 단일 입자의 질량이며 근본적으로 원자량(, ), 표준 원자량("A", )와는 다르다. 둘 다 원소 표본에 대한 자연 상태 원자의 수학적 평균치이며 1 u 로 나누었기 때문에 무차원 수이다. 대부분의 원소들은 하나 이상의 안정된 핵종(,)을 가진다. 원소들의 각 핵종들이 다른 질량을 가지기 때문에 이 원소들에 대한 평균치는 원소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핵종들의 혼합비에 의존한다. 샘플의 공급원에 따라 이 값은 어느 정도 제한(표준 원자량이라고 하는 값을 설정)된다. 대조적으로 원자 질량은 각각의 입자 종과 관계가 있다. 같은 종류의 원자들은 동일하기 때문에 원자 질량 수치는 변화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자 질량 수치는 보통 원자량보다 더 많은 유효숫자(, )를 포함한다. 표준 원자량은 각 원소의 동위 원소(, )들의 존재비(, )에 대한 원자 질량과 관계가 있고, 대개 존재비가 가장 큰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과 거의 같은 값이다. 원자, 이온 또는 원자핵의 원자 질량은 결합 에너지(, ) 손실에 의해 그들의 구성요소인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들의 질량합보다 약간 작다.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탄소-12 원자의 질량을 12로 설정하였을때 주어진 동위 원소의 질량에 대한 상대치 이다. 상대 동위 원소 질량()는 원자 질량()가 원자 질량 단위()으로 표기될 때 같은 수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두 개념의 유일한 차이점은 상대 동위원소 질량은 단위가 없는 순수한 숫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단위의 상실은 탄소-12 원자를 표준으로 하여 그 비율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 동위원소 질량"에서 "상대()"의 단어는 위의 ^{12}_{6}C 원자에 대한 상대 척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12}_{6}C 원자의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정확히 12이다. 이와 비교하여, ^{12}_{6}C 원자의 원자 질량은 정확히 12 Da 또는 12 u 이며 ^{12}_{6}C 원자의 원자 질량은 1.998467052 x 10 kg 과 같이 다른 단위로도 표현할 수 있다. 원자 질량()과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혼동하기 쉽다. 또한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상대 원자 질량(, 또는 원자량)의 동의어인 표준 원자량(, 표준화 된 원자량이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종류의 원자량)과 같이 혼동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원자량()과 표준 원자량은 단일 핵종 원소가 아닌 원소 샘플의 동위 원소 존재도에 대한 평균치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원자량과 표준 원자량은 대개 원자 질량 이나 상대 동위 원소 질량과는 수치적으로 다르며 이 값들이 통일된 원자 질량 단위로 표현되지 않았을 때 원자 질량과는 다른 단위를 가질 수 있다. 원자 질량은 한번에 하나의 동위원소 또는 핵종의 원자의 질량으로 정의되며 존재도에 대한 가중 평균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화학 원소의 동위 원소나 핵종의 원자 질량 또는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매우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숫자이다. 그러한 핵종의 모든 시료들은 다른 시료들과 정확하게 동일할 것으로 예상되고 같은 에너지 준위의 모든 원자들의 핵종에 대한 모든 시료들 또한 다른 시료들과 정확히 동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소-16의 모든 원자들은 다른 모든 ^{16}_{8}O의 원자들과 정확히 동일한 원자 질량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단일 핵종 원소()이거나 하나의 주요 동위 원소를 갖는 많은 원소의 경우, 가장 일반적인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과 (표준) 상대 원자 질량 또는 (표준) 원자량 간의 실제 수치 유사성 또는 그 차이는 작거나 심지어는 없으며 대부분은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단일 핵종()으로 고려하지 않을 때 존재할 수 있으며 중요할 수도 있다. 하나 이상의 동위 원소를 갖는 비(非) 단일 핵종 원소들의 경우에는 상대 동위 원소 질량으로 부터 상대 원자 질량(원자량) 간의 수치적 차이는 질량 단위의 절반 이상일 수 있다(예컨대, 염소 (원소)의 경우에는 원자량과 표준 원자량은 거의 35.45 이다). 드물게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은 상대 원자 질량, 원자량 또는 표준 원자량과 조금 다를 수 있다. 통일된 원자 질량 단위로 표현된 원자 질량(즉,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은 ^{12}_{6}C 원자를 제외하곤 항상 2가지 이유 때문에 그 값이 자연수에 근접해있다. 원자 질량에 대한 질량수(핵자수)의 비율은 H 는 1.00782505, Fe 는 0.99884로 다양하다. 핵자간 결합 에너지로 인한 질량 결함은 실험적으로, 동등한 수의 자유 핵자들의 질량 합 보다 작은 비율(1% 미만)이다. ^{12}_{6}C 원자는 핵자당 평균 질량을 비교해보면 이는 다른 원자들에 비해 상당히 강하게 결합되어있다. 대부분의 원자들의 결합에 대한 질량의 결함은 매우 작은 부분이다. 자유로운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은 매우 작은 질량 차이가 있다(대략 0.00014 u). 원자 질량 단위로 주어진 상대 동위 원소 질량이나 원자 질량을 가장 가까운 자연수로 반올림하면 항상 핵자 수 또는 질량수가 산출된다. 덧붙여, 중성자의 수는 질량수(핵자 수)에서 양성자 수(원자 번호)를 차감하여 도출 할 수 있다. 질량수에 대한 원자 질량(단위: Da)의 비율은 탄소-12의 경우 1 로 정의되고, 그 이후로 최저치인 Fe 까지 감소한다(Fe 과 Ni 만 조금 더 큰 값을 가진다.). 그 후, 무거운 동위 원소들은 원자 번호가 증가함과 동시에 그 값 또한 증가한다. 이 결과로부터, 지르코늄보다 무거운 원소의 핵분열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나이오븀보다 가벼운 원소들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칸듐보다 가벼운 원소 2 개의 핵융합(헬륨은 제외)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칼슘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원자들의 질량에 대한 비교와 측정은 질량 분석법(, MS)을 통해 이루어진다. 거시적 수량에서 물질의 양을 정량화하는데 사용되는 국제단위계(SI)는 몰(, 단위 mol)이며 ^{12}_{6}C 12 g에 함유되는 원자의 수로 정의한다. 1 몰에 해당하는 입자의 수를 아보가드로 수()라고 부르며, 대략 6.0221415×10이다. 1 몰의 물질은 항상 그 물질의 몰 질량 또는 원자량을 거의 정확하게 포함한다. 그러나 자연 발생 원소인가에 따라서 원자 질량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철의 원자량은 55.847 g/mol 이고, 지구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철 1 몰은 55.847 그램의 질량을 가지고 있다. Fe 동위 원소의 원자 질량은 55.935 u 이고 1 몰의 Fe 원자들은 이론상 55.935 g의 질량을 가지나, 순수한 Fe의 이러한 수치들은 지구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찾을 수 있는 오직 하나만의 동위 원소를 가지는 22가지의 단일 핵종 원소(일반적으로, 베릴륨, 플루오린, 나트륨과 알루미늄)들과 이 원소들의 원자량과 원자 질량은 같다. 따라서 이러한 원소들은 원자 질량 값의 표준 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일 원자에 대하여 원자 질량 단위와 국제단위계 사이의 환산식은 다음과 같다. formula_3 formula_4는 몰 질량 상수, formula_5는 아보가드로 수이다. 분자 분자(分子, )는 두 개 이상의 비금속 원자가 화학결합에 의해 일정한 형태로 결합한 것 또는 독립된 입자로 행동한다고 볼 수 있는 원소 자체(He, Ne, Ar 등)를 의미한다. 보통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는 가장 작은 단위 입자"로 정의한다. NaCl이나 CaCl 등의 경우 '분자'라 하지 않고 '화학식 단위(formula unit)'이라 한다. 분자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것은 아보가드로로서 그의 분자설은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분자는 너무나도 작아서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예외는 있다. 고분자인 DNA는 거시적인 크기이다. 가장 작은 분자는 이원자 분자인 수소 (H)로 길이는 0.74 옹스트롬이다. 일반적으로 유기 합성을 위하여 쓰이는 분자의 크기는 몇 안 되는 Å부터 수십 Å에 이른다. 단일 분자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빛으로 관찰할 수 없으나 소분자와 각 원자의 윤곽은 원자간력 현미경을 이용하여 일부 환경에서 추적해 낼 수 있다. 가장 큰 분자는 이를테면 고분자나 초분자가 있다. 과학 저널에 따라, 분자를 보자 분자는 두 개 이상의 원자들이 화학결합에 의해 전기적으로 중성을 띠고 있는 그룹이다. 분자들은 이온과 그들의 전하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나, 많은 양자물리학, 유기화학, 그리고 생화학에서는, 분자라는 용어가 다원자성 이온에도 속하면서 덜 엄격하게 주로 사용된다. 기체 분자 운동론에서, 분자라는 용어는 그 구성과 관계없이 어떠한 기체 입자로 종종 사용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비활성기체 원자들은 단원자분자이기 때문에 분자들로 고려된다. 분자는 동종 핵일지도 모른다. 즉, 분자는 산소처럼 하나의 원소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을수도 있고 물처럼 하나 이상의 원소로 구성되어있는 화합물인 이핵 핵일지도 모른다. 수소결합이나 이온결합과 같은 비공유결합에 의해 연결된 원자들과 복합체들은 일반적으로 단일분자로 고려되지 않는다. 물질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자들은 흔히 유기 물질에 속한다(생화학에서). 그들은 또한 해양과 대기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지각, 맨틀, 그리고 지구의 핵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미네랄을 포함하는 지구에 있는 친숙한 고체 물질들의 대다수는 많은 화학 결합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분자들로 이루어있지는 않다. 또한, 어떤 전형적인 분자도 이온 결정(염) 과 공유결정(공유결합)으로 정의될 수 없다. 비록 이것들이 종종 일차원으로 (예를들어 그래핀처럼) 또는 삼차원으로(예를 들어 다이아몬드, 석영, 염화나트륨처럼)또는 에서 반복되는 단위세포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 반복되는 단위세포 구조의 주제는 또한 대부분 금속 결합과 응축상을 지지한다. 이 것은 고체 금속이 분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리(유리같은 무질서한 상태에서 존재하는 고체)에서 원자들은 또한 한정할 수 없는 어떤 분자의 존재의 없음 또는 결정을 특성화하는 반복되는 단위의 규칙성이 없음과 함께 화학 결합에 의해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분자과학 역사와 어원 결합 -공유결합 -이온결합 분자 크기 분자식 -화학식 종류들 분자 기하학 주요 기사: 분자 기하학 분자 분광학 주요 기사: 분자 분광학 이론적 양상 질량 보존 법칙 질량 보존 법칙(質量保存法則)은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법칙이다.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닫힌계에서의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의 질량) = (결과물의 질량) 이란 수식을 만족한다. 질량 보존 법칙은 비상대론적인 법칙이며, 상대성이론을 고려할 경우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상대론을 고려할 경우에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성립한다. 이 법칙은 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최초로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도 미하일 로모노소프 (Mikhail Lomonosov) 등이 언급한 바가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이 에너지로도 변환될 수 있다. ♣ 질량/물질 보존의 예외 1. 물질은 완벽하게 보존되지 않는다. 물질 보존의 법칙은 특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은 고전적 이론에서만 참인 근사적인 물리 법칙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특정 높은 에너지 활용을 제외하고는 거의 참이다. 보존의 개념에 특정한 어려움은, ‘물질’이 과학적으로 잘 정의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물질들이 ‘물질’이라고 생각될 때, (예를 들어 전자나 양전자) 등은 광자를 생성하기 위해 없어진다. (광자는 종종 물질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면 물질의 보존은 고립계에서도 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 보존은 방사능과 핵반응이 포함되지 않는 화학 반응에서 안전하게 추정될 수 있다. 물질이 보존되지 않더라도, 계 안에서의 질량과 에너지의 총 합은 보존된다. 2. 열린계와 열역학적으로 닫힌 계 또한 질량은 열린계에서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계 내부나 외부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들이 투입될 수 있거나 나갈 수 있는 경우가 그런 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방사능과 핵반응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계에서 도망가는 열, 일, 전자기적 방사선은 계의 질량의 감소로 측정하기에는 사실 너무 작다. 고립계에서의 질량 보존 법칙 (질량과 에너지가 전부 닫힌계) 은 어떤 관성계에서 봐도 게속 현대 물리학에서 참으로 여겨진다. 이것의 이유는, 상대성 방정식이 심지어 ‘질량이 없는’ 입자들, 예를 들어 광자들이 고립계에 질량과 에너지를 더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질량 (물질이 아니지만)이 에너지가 도망가지 않는 계의 과정에서 엄격하게 보존되도록 허락한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다른 관찰자들이 주어진 계에서의 보존된 특정 값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관찰자들은 이 값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계가 모든 것에 대해 고립되어 있다면) 3. 일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팽창하는 부피의 우주에서 광자의 변치 않는 총 질량은 적색 이동 때문에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질량과 에너지의 보존은 이론에서 에너지로 만들어진 다양한 수정들에 의존한다. 그러한 계들의 변하는 중력 퍼텐셜 에너지 때문이다. 원자론 원자론(原子論)은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물질에 대해서는 들어맞는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플라스마 또는 굉장히 높은 압력을 받는 입자들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과학 분야에서 원자론을 최초로 제기한 이는 18~19 세기의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으로 알려져 있다. 돌턴의 원자설은 '질량 보존의 법칙', '정비례의 법칙'을 설명하기위해 세워진 돌턴의 학설로서 오늘날의 원자론의 바탕이 된다. 돌턴은 각 기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질량비를 찾기 위해 원자론을 기반으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두 원소가 결합을 할 때, 각 원소의 원자가 1:1로 결합하여 2원자 화합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쉽다고 가정했다. 그러므로 두 원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화합물이 하나밖에 없으면 그것은 1:1로 결합한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화합물을 만든다면 하나는 1:1, 다른 하나는 1:2, 그다음은 1:3 등 결합에 있어서 가장 단순한 정수비를 따른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결합 규칙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돌턴은 여러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질량비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수소를 기준으로 한 원소들의 상대적 질량비, 즉 원자량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돌턴의 원자설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이 원자설은 오늘날 물질에 대한 생각으로서 보편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원자는 원소의 성질을 갖고 있는 원소의 가장 작은 기본 입자로 규정할 수 있다. 일정 성분비 법칙 일정 성분비 법칙(一定 成分比法則) 또는 정비례의 법칙(定比例法則)이란, 한 화합물을 구성하는 각 성분 원소들의 질량 비가 일정하다는 법칙으로, 1799년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약학자인 조제프 루이 프루스트(Joseph Louis Proust)가 발견하였다. 예를 들자면, 물(HO)에서 수소(H)와 산소(O)의 질량 비는 항상 1:8이다. 만약 물에서 수소가 차지하는 질량이 2.5g라면, 산소 원자가 차지하는 질량은 20g이 된다. 역사 이 관찰은 1798년과 1804년 사이에 실행된 여러 실험들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화학자 Joseph Proust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일정 성분비 법칙은 현대 화학자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일 수 있다. ( 모든 화학적 화합물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 그러나 화학적 화합물의 개념이 완전히 개발되지 않은 18세기 후반까지는, 그 법칙은 소설이었다. 사실 처음 그 법칙을 주장했을 때, 그것은 논란이 많은 발언이었고 다른 화학자들로부터 반대를 많이 받았다. 특히 Claude Louis Berthollet 이라는 프랑스인은 원소들이 어떠한 비율로든지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존재로 보아, 그 당시에는 순전한 화학적 화합물과 혼합물의 구별이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정 성분비 법칙은, John Dalton이 세운 원자 이론의 이론적인 기초로서 기여했다. ( 원자이론은 물질이 별개의 원자을 포함하는 것이며, 각각의 원소에 대해 한 종류의 원자가 있다고 했고, 화합물들은 다른 원자들의 고정된 비율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연관된 개념은 영국의 화학자인 William Prout의 Prout's hypothesis가 있다. 그는 수소 원자가 원자의 근본적인 단위라고 주장했다. 이 가정으로부터 정수 숫자의 법칙이 얻어졌다. (원자 질량은 수소 질량의 정수배라는 법칙). 이것은 1820년과 1830년에 원자 질량에 대한 정제된 측정 방식이 개발되면서 거부되었다. 특히 Jöns Jacob Berzelius에 의해 염소의 원자량이 35.45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이것은 가설에 모순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로, 이 차이들은 동위원소들의 존재로 인해 설명되었다. 여느 동위원소들의 원자량은 정수 숫자의 법칙을 만족시키는데 매우 가깝다. 결합에너지의 차이 때문에 생긴 질량 결함이다. 화학량적이지 않은 화합물들 현대 화학의 기초에 매우 유용했지만, 일정 성분비 법칙은 전우주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샘플에 따라서 원소 구성이 달라질 수 있는 화학량적이지 않은 화합물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배수 비례의 법칙을 따른다. 하나의 예시는 iron oxide wüstite이다. 그것은 0.83에서 0.95의 철 원자들을 각각의 산소 원자로 포함할 수 있다. 그래서 23%에서 25%의 질량비의 산소를 포함하게 된다. 이상적인 식은 FeO이지만, 결정학적으로 빈 공간 때문에 그것은 Fe0.95O로 줄어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Proust의 측정들은 그러한 변화들을 감지하기에는 충분히 정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원소들의 동위원소적인 구성은 그것의 유래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의 순수한 화학량적 화합물의 질량에 대한 기여는 달라질 수 있다. 이 변화는 지질화학적 연대측정에서 사용된다. 왜냐하면 우주적, 대기적, 해양적, 지각적, 그리고 지구 깊은 곳의 과정들은 선호에 따라 더 가볍거나 더 무거운 동위원소들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소와 그것의 동위원소들을 제외하면, 이 효과는 대부분 작다, 그러나 현대 기기로는 측정이 가능하다. 추가로, 많은 자연적 중합체들은 심지어 ‘순수할 때’도 구성에서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어 DNA, 단백질, 탄수화물) 중합체들은 분자식이 유일하고 화학량론이 일정해도 일반적으로 ‘순수한 화학적 화합물’로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례들은, 동위원소적인 다양함으로 법칙을 여전히 위배할 수 있다. 화합물 화합물(化合物, )은 두 종류 이상의 화학 원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순수한 화학 물질이며, 화학 반응을 통하여 더 단순한 물질로 분리해 낼 수 있다. 이를테면 물(HO)은 하나의 산소 원자마다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이다. 화합물은 고유의 화학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화학 결합으로 하나가 된 일정한 비율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화합물은 공유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된 분자 화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염은 이온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고, 금속 간 화합물은 금속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며, 배위 착염은 배위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는 분자 화합물이다. 한편, 순수한 화학 원소는 이것이 단일 원소(H, S 등)로 된 여러 개의 원자만 포함하는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화합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화합물은 오직 두 종류 이상의 원소들로 결합한 형태의 물질들을 이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위의 단일 원소(H, S 등)는 홑원소 물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합물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화학자들은 화합물을 다양한 형태의 공식을 이용하여 서술한다. 분자로 존재하는 화합물의 경우 분자 단위의 공식이 이용된다. 광물과 수많은 금속 산화물과 같은 중합체의 경우 실험식이 일반적으로 이용된다. 이를테면 염화 나트륨의 경우 NaCl로 표기한다. 화학 공식의 원소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순서로 나열되는데 이를 힐 시스템(Hill system)이라고 한다. 이러한 체계에서 탄소 원자들은 일반적으로 맨 처음에, 수소 원자는 그 다음에, 다른 모든 원소는 알파벳 순으로 그 뒤에 나열된다. 공식이 탄소를 포함하지 않으면 수소를 포함한 모든 원소는 알벳 순으로 나열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법칙에도 예외는 있다. 이온 화합물의 경우 양이온은 거의 언제나 맨 먼저 오고 음이온은 두 번째에 온다. 산화물의 경우 산소가 맨 마지막에 나열된다. 화합물은 몇 가지 가능한 상을 가질 수 있다. 모든 화합물은 적어도 충분히 낮은 온도에 있다면 고체로 존재할 수 있다. 분자 화합물은 액체, 기체, 또 특별한 경우 플라스마로 존재할 수도 있다. 모든 화합물은 열에 의해 분해된다. 이러한 분해가 일어나는 온도는 분해 온도라고 한다. 분해 온도는 열의 속도에 따라 달라지며 가파르게 바뀌지는 않는다. 화합물을 포함하는, 연구를 통해 알려진 모든 화학 물질들은 고유의 수치적 식별자인 CAS 번호가 있다. 상 상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용매 용매(溶媒, )는 용액의 매체가 되어 용질을 녹이는 물질로, 주로 액체나 기체상을 띤다. 예를 들어 액체에 물질을 녹여 용액을 만들 때나 액체에 액체가 녹아들어가는 경우에 그 양이 많은 쪽의 액체를 용매라고 하며, 용액 중에서 용매는 용질에 비해 용액을 구성하는 비율이 높다. 액체상의 용매의 경우 공통적으로 끓는 점이 낮아 휘발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용매는 액체상이 아닌 혼합물에서 특정 물질을 추출할 때에 사용되기도 한다. 용매가 액체 상태에 있는 경우, 용매가 어느 종류의 물질이냐에 따라 무기 용매와 유기 용매로 구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무기 용매는 물이며, 유기 용매로는 에테르나 아세톤, 알코올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극성 용매로는 물, 에탄올, 아세톤 등이 있고, 대표적인 무극성 용매로는 사이클로헥세인 사염화탄소, 벤젠 등이 있다. 121년 122년 123년 124년 125년 126년 127년 128년 129년 130년 테오도리쿠스 마그누스 테오도리쿠스 대왕(Theodoric the Great, 454년 ~ 526년 8월 30일, 재위 488년 ~ 526년)은 동고트 왕국의 초대 국왕이며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이탈리아의 군주였다. 고트어 이름은 티우다레익스()로 "백성들의 왕" 이라는 의미이다. 454년, 동고트족이 훈족들에게 점령된 지 1년째 되던 해에 튜다미르(Thiudamir)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도리쿠스는 튜다미르와 동로마 제국 사이의 협정의 결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볼모로 유년기를 보냈다.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내며 동로마 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레오 1세와 제논의 호의를 얻어 483년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군사 대장)가 되고 1년 뒤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이후 이십대 초반을 다른 동고트족과 보냈으며 488년 왕이 되었다. 이 무렵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 내에 로마의 포이데라티로 거주하고 있었으나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테오데릭이 왕이 된 이후 황제 제논과 협정을 맺어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476년 로마를 점령한 오도아케르를 몰아내는 데 협조를 받기로 하고 오도아케르의 왕국을 침략하게 된다. 테오도리쿠스는 488년 군대를 끌고 이탈리아에 도착, 489년 이손조의 전투와 밀라노의 전투와 489년 아다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493년 테오도리쿠스는 라벤나를 점령하고 오도아케르는 항복하나 테오도리쿠스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도아케르와 같이 테오도리쿠스는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의 총독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테오도리쿠스와 로마 황제의 교섭은 동등한 상황에서 진행되었고, 로마 황제의 간섭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오도아케르와 달리 테오도리쿠스는 왕국 내의 로마 시민들을 로마 법대로 다스린다는 약속을 지켰다. 고트족은 전통적인 법률과 관습으로 다스려졌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Clovis)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Audofleda)를 왕비로 맞아들여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왕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클로비스 1세는 506년과 523년 테오도리쿠스와 전쟁을 벌였다. 제위기간 대부분동안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형식적으로는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모두의 왕이었으며 505년경 어린 서고트족 왕의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507년 프랑크족에게 서고트 영토인 아퀴타니아를 빼앗겼으나 그 외에는 대부분의 외침을 격퇴했고, 반달족 왕 트라사문트(Thrasamund)를 격퇴해 약탈을 막았다.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며, 이 점 때문에 재위 말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마찰이 생겼다. 양국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테오도리쿠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충돌이 없었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라벤나에 매장되었으며, 사후 딸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손자 아탈라릭(Athalaric)을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프랑크의 군주 힐데리히 1세(Childeric I)의 딸이자 클로비스 1세의 누이인 아우도프레다(Audefleda)와 결혼하여 아말라순타 등을 두었다. 연소 연소(燃燒)는 열이 발생하는 화학반응이다. 주로 물질이 산소와 화합할 때 다량의 열을 내며 동시에 빛을 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설탕이나 에탄올 등은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연소하지만 소금은 아무리 가열해도 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물질에는 가열하면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이 있다. 1630년에는 페리고르 지방의 의사인 장레가 납과 주석을 불에 태우면 산화되어서 이 금속들의 양이 증가한다는 것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라부아지에보다 한 세기 앞서는 것이었다. 어떤 물질이 산소와 화합되는 현상을 산화작용이라 하며, 쇠가 녹이 난다든지 물질이 부패하는 경우처럼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것도 있지만 급격히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즉 연소란 빛과 열을 수반하는 급격한 산화반응이다. 연소가 일어나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완전연소의 경우, 반응 물질이 산소의 공급이 충분한 상태에서 완전히 타지만 이산화탄소와 물을 발생시킨다. 불완전연소는 연료가 완전히 반응할 정도로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은 경우 발생하며 일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 작열연소에서 연소현상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가연물, 산소, 점화에너지가 필요하며 이를 연소의 3요소라고 한다. 불꽃연소에서는 연소의3요소 이외에 연쇄반응이 4번째 요소로 작용하며 이를 연소의 4요소라 한다. 물질에는 설탕이나 에탄올과 같이 공기 중에서 가열하여 온도를 올리면 연소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철 등 금속은 덩어리인 상태에서 아무리 가열해도 연소하지 않지만, 가는 섬유로 만든 스틸 울은 가열하면 잘 탄다. 마그네슘도 얇은 리본처럼 만들거나 가루로 만들면 가열에 의해 불꽃을 내면서 격렬하게 연소한다. 또, 구리 가루는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빛깔이 검게 변할 뿐이지만, 산소내에서 가열하면 빨갛게 되어 심하게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물질이나 공기 속에서보다 산소 속에서 더 세게 연소한다. 반대로 산소가 없는 곳에서는 에탄올이나 석유 등을 아무리 가열해도 연소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물질이 연소하기 위한 조건들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물질을 잘게 부수거나 가루로 만들면 잘 타는 이유는 물질의 온도를 높이기 쉽고, 또 표면적이 증가하여 공기 속의 산소와 접촉하기 쉽게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나 에탄올을 석면에 스며들게 하고 병 속에서 태우면 병 안쪽에 물방울이 맺힌다. 또, 이 병 속에 석회수를 넣고 잘 흔들면 석회수는 뿌옇게 흐려진다. 병 안쪽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은 물질이 연소하여 물(수증기)이 생긴 것을 나타내며, 석회수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은 이산화탄소가 생긴 것을 나타내고 있다. 수소를 공기 중에서 연소시키면 물(수증기)이 생긴다. 또, 탄소를 공기(산소) 중에서 연소시키면, 탄소는 전부 없어지고 이산화탄소가 생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석유나 에탄올이 연소하면 물이나 이산화탄소가 생기는 것은 연소하는 물질, 즉 석유나 에탄올에 수소나 탄소가 함유되어 있어, 그것들이 연소하여 물이나 이산화탄소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설탕·판자·밀랍·종이 등과 같이 공기 중에서 연소하여 물이나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 물질에는 수소나 탄소가 성분으로서 함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철 등의 금속이나 황이 연소할 때 물이나 이산화탄소가 생기지 않는 것은 이들에 수소나 탄소가 함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틸 울은 연소하면 검은 고체 물질(산화철)이 되며, 마그네슘은 흰 고체(산화마그네슘)로 변한다. 또, 황은 코를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기체(이산화황)를 내면서 연소하는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연소하여 생긴 생성물은 원래의 물질에 따라 다르고, 또 연소하는 모양(열이나 빛을 내는 모양)도 물질에 따라 다르다. 양초가 타면 기체인 이산화탄소와 물이 생성되어 공기 속으로 빠져 나가고, 양초의 질량은 줄어든다.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은 연소하면서 질량이 커진다. 즉, 이들이 타서 생긴 산화철이나 산화마그네슘의 질량은 원래의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의 질량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이 연소하는 데는 산소가 필요하며, 또한 연소에 의해서 생긴 물질의 질량이 연소하기 전의 물질의 질량보다 커졌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연소로 생긴 물질 속에는 산소가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연소에 의해서 산소와 물질이 결합되었음을 말해 준다. 양초나 에탄올을 공기 속에서 가열하면 열과 빛을 내면서 연소하여 물과 이산화탄소를 생성하는데, 물은 수소와 공기 속의 산소가 결합하여 생긴 물질이고, 이산화탄소는 탄소와 공기 속의 산소가 결합하여 생긴 물질이다. 이와 같이, 물질이 열과 빛을 발생시키면서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연소라고 한다. 스틸 울이나 마그네슘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빛과 열을 내면서 연소하여 산소와 결합해서 각각 산화철과 산화마그네슘이 된다. 이와 같이, 물질이 연소하면 원래의 물질과 다른 물질이 생긴다. 이러한 변화도 화학적 변화의 하나이다. 아르곤 아르곤(←, )은 주기율표의 화학 원소로 기호는 Ar(←)이고 원자 번호는 18이다. 18족에 속하는 비활성 기체로 지구 대기의 약 0.93%를 차지하며, 비활성 기체 중 지구에서 가장 흔하다. 1894년 영국의 레일리에 의해 발견되었다. 상온에서는 무색,무취의 기체이다. 아르곤은 고체, 액체, 기체 상태 모두 무색, 무취인 불연성의 기체이다. 물에 대한 용해도는 산소와 비슷하며, 질소보다는 약 2.5배가량 더 용해된다. 대부분의 경우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하여 화합물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저온에서는 일부 아르곤 화합물이 관찰된 적이 있다. 2000년 핀란드 헬싱키 대학에서 발견된 아르곤 플루오로하이드라이드(HArF)가 대표적이다. 또한 반응성이 큰 플루오린과 염소와도 결합을 잘 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물 분자들 사이에 들어가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아르곤은 그리스어로 '비활성'을 뜻하는 αργον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1785년 헨리 캐번디시는 공기 중에 전류를 흘려 질산을 생성시키는 실험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량의 기체가 반응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관찰했다. 1882년 두 과학자가 독자적으로 공기 중에 포함된 원소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던 중 새로운 선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나, 어떤 원소에 의한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후 1894년 레일리와 윌리엄 램지는 순수한 질소 기체와 공기 중의 질소 기체 사이에 약 0.5% 정도의 질량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른 원소가 섞여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들은 런던대학교 UCL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공기를 액화시킨 후 이를 분별 증류하여 아르곤을 순수한 상태로 분리하였다. 1957년까지는 원소 기호가 A 였으나 이후 Ar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르곤은 대기 중에 부피 비율로는 약 0.934%, 질량 비율로 약 1.288%가 포함되어 있다. 지각 속에는 1.2ppm, 해수 속에는 0.45ppm 정도 포함되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르곤의 대부분은 아르곤-40(존재 비율 99.6%)이며, 이외에 아르곤-36, 아르곤-38 등이 미량 존재한다. 자연 상태에서는 칼륨-40이 베타 붕괴하면서 약 11.2%가 아르곤-40으로 변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한 칼륨-아르곤 연대 측정법은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사용된다. 또, 아르곤은 태양계 내에서도 행성에 따라 동위 원소의 존재 비율이 다르다. 이는 지구형 행성의 경우에는 암석 속의 칼륨-40이 베타 붕괴하여 생성된 아르곤-40이 대부분인 반면, 목성형 행성에서는 항성의 핵융합으로 생성된 아르곤-36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초저온냉동공학을 이용한 공기분리공장에서 주로 생산된다. 공기분리공장에서는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와 산소를 액화시켜 끓는점 차를 이용하여 분리하는데 이 중 아르곤은 산소와 끓는점이 유사하여 액체산소의 상위층에 많이 분포하게 되며, 이를 별도의 분별 증류를 이용하여 농축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매년 전 세계에서 70만 톤의 아르곤이 생산된다. 고온에서 2원자 물질인 질소가 불안정한데 반하여, 1원자 물질인 아르곤은 고온에서도 안정하다. 따라서 고온에서의 비활성 기체(inert gas)가 요구되는 곳에 많이 사용된다. 철강 제조시 고급제련강을 제조하는 경우에 주로 쓰이며, 그 외에도 TIG용접, MIG용접시에도 불활성가스로 사용된다. (가운데 I는 Inert를 의미함.) 또한 네온과 함께 PDP (플라즈마 액정 표시장치)의 내부에 플라즈마 형성을 위해 사용되고, 백열등 내부에서 텅스텐 필라멘트가 산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충전가스로도 사용된다. 한편 최근 반도체, LCD 제조의 90nm 이하의 공정에서 ArF(플로오르화 아르곤)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 및 광원제조에 사용되기도 한다. 청록색의 아르곤 레이저는 종양 제거 등의 목적으로 이용되며, 잠수부들이 사용하는 산소통의 혼합기체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감기가 269년인 아르곤-39는 빙하나 지하수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고압가스 및 특수고압가스를 제조, 공급하고 있는 에어프로덕츠코리아, 에어코리아, 대성산업가스, BOC 코리아, 프락스에어 코리아 등에서 주로 제조된다. 최근 수요처에 직접 공장을 설립하여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하는 온사이트 방식이 활성화되는 추세이다. 아르곤 자체의 독성은 없지만, 공기보다 무겁고 바닥에 가라앉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아르곤 누출 시 산소 결핍으로 인한 질식을 유발할 수 있다. 대기 대기(大氣, Atmosphere)는 천체의 주위를 대체로 일정하게 둘러싸고 있는 기체층을 말한다. 별다른 조건없이 '대기'라고 표현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지구 대기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생명체가 호흡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운석이나 기타 위협적인 요소들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태양계 위성 중에서는 타이탄이 질소 주성분의 대기를 가지고 있다 지구의 대기권은 기체층으로 지표에서 고도 약 1000 km까지 존재한다. 주로 질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이산화탄소, 헬륨, 아르곤 등의 희소 기체가 포함되어 있다. 수증기를 제외한 공기 성분은 약 80 km까지 거의 일정하다. 지구 대기권은 고도에 따라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외기권 등으로 구분된다. 기상의 변화는 대류권에서 나타나며 다른 권역에서는 오존층의 생성, 전자기파의 반사와 같은 성질을 보이는 특이층이 존재한다. 지구 대기의 역할은 생명체에 산소 공급, 온실 효과를 통한 지구 보온, 태양(Sun)으로부터 오는 자외선 차단, 저위도의 에너지를 고위도로 운반, 운석으로부터 지구 보호 등이 있다. 수성은 대기가 거의 없다. 달보다는 짙은 대기를 가지고 있지만, 우주 공간보다 약간 짙은 정도이다. 수성 대기의 대부분은 산소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의 대기는 95% 이상이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구 대기압의 90배에 달하는 두꺼운 대기를 가지고 있다. 금성의 대기는 두껍고 이산화탄소가 많아 온실효과가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 표면 온도가 500℃ 가까이 근접한다. 금성은 탈출 속도가 지구와 거의 비슷하지만, 표면 온도가 높기 때문에 질량이 작은 수소 기체 등은 활발한 분자 운동으로 인해 평균 운동 속도가 증가하여 금성을 벗어나 버리고, 질소와 약간의 아르곤 등이 대기 중에 분포하고 있다. 수증기는 대기 상층부에만 약간 존재하기 때문에 금성의 대기는 전체적으로 건조하다. 화성의 대기는 대부분이 이산화탄소이며 기압은 지구의 1/100 정도이다. 태양에서 비교적 먼 편이라 표면 온도는 영하권이다. 화성은 자기장이 매우 미약해서 대기가 태양풍의 영향으로 쓸려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화성의 여름에는 극지방의 드라이아이스가 녹아 이산화탄소가 대기중으로 유입되어 대기가 약간 짙어진다. 목성의 대기는 주로 수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반구에 커다란 소용돌이인 대적반이 관찰된다. 대체로 지구형 행성에 비해 매우 높은 기압을 가지고 있어서 탐사선을 통한 정확한 기압 측정이 불가능하다. 목성을 제외한 나머지 목성형 행성들인 토성,해왕성,천왕성등의 행성도 목성 대기 성분과 비슷하다. 위성은 행성에 비해 중력과 질량이 작기 때문에 대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은 지구 대기압의 1.4배에 달하는 질소 주성분 대기가 있다. 레이저 레이저(, )는 유도 방출 에 의한 빛의 증폭()의 머릿글자만을 따온 것을 한글화한 것이다. 원자나 분자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를 집약적으로 뽑아내는 결맞는 광이다. 전형적인 레이저 광은 단색, 즉, 오직 하나의 파장이나 색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레이저 빔은 가늘고 퍼지지 않는다. 반면, 백열전구와 같은 대부분의 광원은 결이 맞지 않은 수많은 빛을 넓은 파장 범위에서 넓은 면적으로 방출한다. 레이저의 파장은 매질 등의 구성요소에 의해 정확하게 정해진다. 매질에 따라, 아르곤에서는 푸른색, 이산화탄소에서는 무색(적외선), 루비에서는 붉은색의 레이저가 방출된다. 1917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전자기 방사선의 흡수, 자연 방출, 유도 방출을 위해 개념적으로 아인슈타인 계수에 기반을 둔 막스 플랑크의 방사 법칙을 재유도함으로써 방사양자설(Zur Quantentheorie der Strahlung)이라는 논문에 레이저와 메이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햇빛을 한 점에 집중하면 종이를 태울 정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레이저의 경우 태양빛에 비하여 단위 면적당 얻어지는 에너지가 훨씬 많은데, 태양빛은 직경 1000분의 1mm 크기에 집광(集光)시키는 것이 어렵지만 레이저 광(光)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1mW 출력의 레이저라도 단위 면적당으로는 태양빛의 100만 배의 에너지 밀도가 된다. 1mW라면 꼬마 전구를 켤 수 있는 전기보다도 더욱 작은 출력이다. 이렇게 되면 종이를 태우는 정도가 아니라 출력 여하에 따라서는 사람을 살상할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레이저 광이 '살인 광선'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얻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960년 7월, 미국의 T. H. 메이먼 박사는 여러 과학자들과 보도진 앞에서 레이저 빔으로 풍선을 터뜨려 보였다. 그 때부터 이 빛의 마술은 새로운 도구로서 과학사에 획기적인 한 페이지를 추가하게 되었다. 빛이 파동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자연광이 서로 다른 많은 파장과 위상의 빛이 섞여 있는 데 비하여 레이저 광은 단일 파장 동위상의 빛이다. 파장이란 물결의 봉우리와 봉우리, 혹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의 길이를 말한다. 빛은 파장마다 일정한 색을 가지고 있으므로 단일 파장인 레이저 광은 단일색이 된다. 레이저의 선명한 색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다만 레이저에는 모두 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시광(可視光) 이외의 파장을 가진 레이저 광이라면 모양도 색깔도 보이지 않는다. 위상이란 물결의 어긋남을 말하는데, 동위상이라는 것은 물결의 봉우리와 봉우리, 골짜기와 골짜기가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꼭 겹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레이저 광은 자연광에 비하여 매우 잘 다듬어진 '깨끗한 물결'의 빛이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레이저 광은 아무리 먼 거리까지 가도 빛이 퍼지지 않는다. 자연광이 사방팔방으로 확산해 버리는 데 비하여, 레이저 광은 똑바로 일직선으로 뻗어 간다.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닌 레이저는 많은 분야의 관심을 끌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용용도가 확대되어 갔다. 빛 본래의 성질에 더하여 그 강력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공업·의료·핵융합·계측·정보 기억·광통신에 이르기까지 탄생 후 불과 35년 동안에 눈부시게 연구 개발되어 용도가 확대되어 왔다. 현재 레이저 산업의 시장규모는 수조 원에 이른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분야는 콤팩트 디스크, DVD, 블루레이 디스크 등의 광디스크 장치이다. 이외에도 바코드 리더와 레이저 포인터에도 주로 사용된다. 산업적으로 레이저는 철이나 금속을 자르거나 표면에 그림, 글씨를 새기는 데 사용된다. 레이저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에서 사용되는데 특히 정확하게 정해지는 단색의 파장 때문에 분광학 분야에 주로 사용된다. 펄스 레이저의 경우 짧은 펄스 폭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 사용된다. 군사적으로 레이저는 공격 대상을 식별하거나 미사일 등의 무기를 유도하는 데 사용되며 전술 고에너지 레이저와 같이 미사일이나 비행체 등을 요격하는 용도로도 사용된다. 의학에서는 안과 수술, 미용 목적의 수술 등에 사용된다. 관성항법장치 내에서 Ring Laser Gyro나 Fiber Optic Gyro의 형태로 이용되며 물리학 분야에서는 레이저 냉각으로 원자를 극저온으로 냉각시키는 용도로 사용한다. 원자시계, 라이다 측량에서도 활용된다. 빛을 증폭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빛의 힘을 강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를 자극하여, 빛 등의 전자파를 에너지로서 꺼내는 것을 말한다. 물질에는 각각의 고유한 에너지 레벨이 있어, 증폭되었을 때에 방출되는 빛의 에너지도 각각 일정한 값을 갖는다. 방출되는 빛의 파장이 물질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분자와 원자는 통상 각각 일정한 에너지 레벨에서 안정되어 있는데, 이것을 바닥 상태라 한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에너지 레벨이 높은 여기 상태가 된다. 이 때의 분자와 원자는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에너지 레벨이 낮은 안정 상태로 돌아가려고 빛을 방출한다. 이 자연 방출로 얻어지는 빛은 무질서한 빛이 혼재하여 파장도 위상도 제각기 다르다. 이와 같은 빛을 '인코히런트(Incoherent)'한 빛이라 하는데, 이 빛은 일상 생활에서 체험하는 빛과 똑같은 것이다. 한편 원자와 분자는 자신이 자연 방출하는 빛과 똑같은 파장의 빛에 부딪치면 유도되듯이 빛을 방출하는 성질이 있다. 이 빛은 원래의 빛과 파장·위상·진행 방향도 완전히 똑같은 가간섭적(可干涉的) 빛이다. 레이저 광을 꺼내는 데는 광공진기(光共振器)를 사용한다. 이것은 광축(光軸)이 일치하도록 좌우에 서로 마주보는 거울을 놓고, 그 사이에 레이저 발진(發振)을 시키기 위한 물질 을 놓은 것이다. 매질로서는 결정(結晶)을 비롯한 고체 외에 액체, 기체도 사용되는데 현재까지 수천 종류에 이르는 레이저 광이 확인되고 있다. 이 광공진기의 레이저 매질에 자극을 주어 연속적으로 여기(勵起)를 만들어 내면, 자연 방출과 유도 방출이 일어난다. 자연 방출도 유도 방출도 처음에는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서 일어나지만 좌우의 거울에 수직으로 닿는 빛만은 반사되어 거울 사이를 몇 번이고 왕복하는 동안에 유도 방출을 되풀이하여 레이저 광으로 성장해 간다. 이때 한쪽 거울에 부분 투과성의 것을 사용하면 내부를 왕복하고 있는 빛의 일부분이 광공진기 밖으로 방출된다. 이렇게 해서 레이저 광이 발생되는 것이다. 레이저 가공은 강력한 출력의 레이저를 사용하여 금속, 플라스틱, 나무 그리고 천 등의 절단, 구멍 뚫기와 용접, 담금질 등을 하는 기술이다. 작동 속도가 빠르고 초점을 정확히 맞출 수가 있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 이용되고 있다. IC와 LSI, 정밀 기기의 가공에 레이저는 매우 뛰어나다. 매우 작은 점에 집광(集光)할 수 있고 에너지 밀도가 큰 것이 레이저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하여 보석·내열합금·세라믹스 등도 가공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시계의 베어링으로 쓰이는 직경 1mm의 루비에 직경 0.05mm의 구멍을 1초 동안에 10개 이상이나 뚫는다. 같은 레이저 가공기라도 출력을 달리 하면 갖가지 작업을 할 수 있다. 출력을 높여 연속적으로 빛을 대면 금속을 절단할 수가 있으며, 재료가 녹으면서도 증발하지 않을 정도로 출력을 줄이면 용접기로 변한다. 더욱 줄이면 금속 표면에만 열처리를 한다든지 금속 표면의 흠을 체크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산업용 레이저는 실용화가 뛰어나다. 아직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것만 해결되면 종래의 공작기계의 이미지를 바꾸어 버리게 될 것이며 소형화, 고효율화(高效率化), 자동화, 그리고 작업장의 면적을 줄이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바야흐로 커터라든가 드릴 등이 모습을 감추고 레이저 광선으로 바뀔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료 분야에서도 레이저는 눈부시게 활용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레이저 메스로 이것은 레이저 광을 렌즈로 집광시켜 한 점에 조사(照射)하여, 강력한 에너지로 생체 조직을 순간적으로 증발, 기화시켜서 절개하는 것이다. 절개되는 부분의 조직은 순간적으로 1500℃ 이상이 되어 열에 의하여 증발해 버린다. 출력을 100℃ 이하로 낮추면 조직은 응고되기 때문에, 종래의 메스보다도 출혈이 적어지므로 출혈이 많은 부위의 수술에 적합하다. 의료 분야에서는 레이저 메스로 대표되는 열 효과의 이용이 주였는데, 최근에는 다음 단계로 크게 진전되려 하고 있다. 이것은 광화학 반응을 이용하여 살세포 효과(殺細胞效果)를 얻으려는 것으로, 암 치료에 큰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체내에 HpD 라는 색소를 주입하면 암세포만이 반응한다. 왜 암세포만이 반응하는지 그 얼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반응이 생겼을 때 이 색소에 흡수되기 쉬운 레이저를 조사(照射)하면 암세포의 발육을 저지하고, 살세포 효과가 있는 물질이 생성되어 암이 치료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레이저를 치아에 조사하는 것만으로 치통을 멎게 한다든지, 이의 치료를 무통(無痛)으로 하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또한 흥미로운 일은 어떤 레이저를 이에 조사하면 치수(齒髓)의 반응성에 2차적인 석회화(石灰化)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한 것인데, 이것은 장차 충치 치료 방법을 크게 바꿀 가능성이 있다. 레이저에 의한 무통 치료의 경우도 왜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레이저라고 하면 이제까지는 열 효과면만이 강조되어 왔지만, 앞으로는 좀 더 다른 면에서의 응용이 적극적으로 연구, 개발되어 갈 것이다. 치료 목적 이외의 검사에도 레이저가 이용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응용이 기대되고 있다. '살인 광선'이기는 커녕 인류를 살리는 빛으로서 크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고 있는 분야로 레이저 계측(計測)이 있다. 과거에는 미리 알고 있는 두 점 사이를 맺는 선과 측정하고자 하는 지점과의 각도를 바탕으로 거리를 측정하여 지도를 만들었는데, 레이저 계측법은 측정하고자 하는 지점에 반사경을 놓고, 바닥점에서 레이저 광을 발사하여 되돌아오는 시간으로 거리를 구하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정밀을 요하는 지도 작성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이테크 산업이라 하여 각국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오늘날의 최첨단 기술 중에서도 광기술(光技術)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 마침내 실용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광통신의 주역도 레이저와 광파이버이다. 전기 신호 대신 빛의 신호를 통해서 먼 곳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보낼 수 있는 정보량은 종래의 방법에 비하여 엄청나게 크며, 또한 빨라졌다. 개발에서부터 불과 35여 년 동안에 레이저는 눈부시게 그 영역을 넓혀 왔고, 바야흐로 새로운 '인공 태양'까지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핵융합의 실험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용화가 뛰어난 레이저의 연구 개발은 종래의 산업, 의료, 계측, 통신 등의 분야를 일신하고, 과학사에 획기적인 한 페이지를 더해 줄 것이다. 온실 효과 온실효과(溫室效果)는 태양의 열이 지구로 들어 와서 나가지 못하고 순환되는 현상이다. 태양에서 방출된 빛 에너지는 지구의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일부분은 대기에 반사되어 우주로 방출되거나 대기에 직접 흡수된다. 그리하여 약 50% 정도의 햇빛만이 지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 지표에 의해 흡수된 빛 에너지는 열에너지나 파장이 긴 적외선으로 바뀌어 다시 바깥으로 방출하게 된다. 이 방출되는 적외선은 반 정도는 대기를 뚫고 우주로 빠져나가지만, 나머지는 구름이나 수증기,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 효과 기체에 의해 흡수되며, 온실 효과 기체들은 이를 다시 지표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은 작용을 반복하면서 지구를 덥게 하는 것이다. 실제 대기에 의해 일어나는 온실 효과는 지구를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만약 대기가 없어 온실 효과가 없다면 지구는 화성처럼 낮에는 햇빛을 받아 수십도 이상 올라가지만, 반대로 태양이 없는 밤에는 모든 열이 방출되어 영하 100℃ 이하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나쁜 영향으로 많이 거론되는 온실 효과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일부 온실 효과를 일으키는 기체들이 과다하게 대기 중에 방출됨으로써 야기될지 모르는 이상 고온에 따른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온실 기체 중에서 온실효과에 기여하는 정도를 4가지 주요 기체로 분류하였다: 지구 온실 효과에 기여하는, 기체가 아닌 주요 물질인 구름은 적외선 복사를 흡수하고 방출하므로 대기의 방사성 특성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구름은 무엇인가? 구름은 액체 상태에 속한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매년 그 양이 늘어나고 있다. 인간이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사용하게 된 화석연료에 의해 그 양은 크게 늘었다. 1750년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31%가 늘어나서 2003년에는 376ppm의 양이 대기 중에 존재했다. 이는 남극 빙하 속의 이산화탄소 양을 통해 측정한 과거 65만년 동안의 어느 시대에서보다 높은 양이다. 온실기체로 봤을 때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그다지 유발하지 않는 편에 속하며, 같은 농도의 메테인에 비해 20배 정도 그 효과가 약하다. 현재 연간 2억 5천만 톤이 대기 중으로 배출된다. 메테인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에도 발생하지만, 비료나 논, 쓰레기더미에서도 발생하고, 심지어는 초식동물이 풀을 소화시킬 때 호흡에서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고 식량 생산을 늘려 나가는 과정에서 대기 중에 메테인이 늘어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툰드라 지방의 땅이 온난화로 인해 따뜻해지면 메테인을 방출할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해저에도 메테인가스가 발생한다. 수증기는 대기 중에 대단히 많은 양이 존재하며, 흡수할 수 있는 열량 역시 이산화탄소나 메테인에 비해서도 대단히 크다. 하지만 수증기는 구름을 형성해서 태양빛을 반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떻게 수증기가 온실효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또한 대기 중의 수증기량을 인위적으로 제어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태양의 열은 지구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것이다. 그 열은 지구 복사열이라 한다. 그러나 온실가스의 증가로 온실가스가 지구를 둘러싸게 되었다. 그 이유로 지구에 막이 생겼으며 태양의 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온실가스는 지구의 대기 속에 존재하며, 땅에서 복사되는 에너지를 일부 흡수함으로써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기체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증기, 이산화탄소, 메테인이 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화석연료의 연소로 발생된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많아지게 됨으로써, 대기 중 온실가스가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 환경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온도 온도(溫度, , , )는 물질의 뜨겁고 찬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온도는 물리학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물리량 중 하나이다. 온도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온도의 경험적인 개념과, 독립적인 온도의 존재성을 보장하는 열역학 법칙중 제 0법칙에 기초한다.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온도의 기준을 통해 만들어진 온도계로 측정되는 값이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19세기 중반 열기관과 열역학에서 이어지는 통계역학이 발전되면서 에너지와 엔트로피간의 이해가 높아지면서 파생되어 나왔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에너지를 엔트로피로 편미분한 값으로 나타내지며, 다양한 기초적인 물리법칙과 근본적으로 관련되어있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계의 평형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의할 수 없다. 온도의 국제 단위는 켈빈(K)이다. 켈빈은 물의 삼중점의 열역학적 온도의 1/273.16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인 정의에 사용되는 온도 기준에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를 사용함으로써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라도 물리학적인 의미, 다양한 기초적인 물리법칙과의 관련성을 만들 수 있다. 온도의 개념은 우리의 경험에 비롯한 뜨겁고 차가움의 정도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를 접촉시키게 되면 뜨거운 물체로부터 차가운 물체로 자발적으로 에너지가 열의 형태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온도의 개념은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려고 하는 성질의 정도"" 이며, 편의 상 온도가 높을수록 에너지를 많이 방출하려고 하는 성질이 크다고 정의한다. 열역학 제 0법칙은 ""어떤 계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이다. 이는 앞서 말한 온도의 개념을 생각해본다면 온도, 즉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려고 하는 성질의 정도""가 외부에 접촉한 계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물리량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준이 되는 계 몇 개를 정하고 다른 계들을 그 계와 접촉시켜 열이 흐르는 방향을 봄으로써 계의 온도의 상대적인 높낮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대적인 높낮음을 절대 온도( K)나 섭씨 온도( °C)와 같이 기준을 만들어 정한다면 어떠한 계의 온도는 그 기준 내에서 이론적으로 정의가 된다. 온도의 기준과 온도에 따른 부가적인 성질들(알코올의 부피증가, 흑체복사 등)을 통해서 온도계를 만들 수 있고,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는 ""정해진 온도의 기준에 의하여 만들어진 온도계에서 측정되는 값"이라고 할 수 있다.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는 그 자체로 다음을 보장한다. 첫째, 온도가 다른 물체를 열 교환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접촉시켰을 때 온도가 높은 물체에서 낮은 물체로 자발적으로 열이 흐르게 된다. 둘째, 두 물체가 충분한 열 교환을 통해서 열 평형에 이르렀을 때 두 물체의 온도는 같게 된다. 온도의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은 개념에서 애매모호함이 있다. 첫째, 온도의 일반적 정의는 절대적 물리량으로서의 온도의 존재성을 보장하는 열역학 제 0법칙 ""어떤 계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을 근본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즉,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열역학 제 0법칙에 기초해야한다. (반면 뒤에 열역학적 정의는 열역학 제 0법칙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열역학적 정의는 오히려 열역학 제 0법칙을 증명할 수 있다) 둘째, 일반적인 온도를 정의함에 있어서 온도의 상대적인 높낮음을 통해서 온도의 기준을 정의하였는데, 그 기준에 물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즉 일반적인 온도의 온도기준은 온도의 상대적인 높낮음에 순서를 나타낼 뿐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열 평형 상태에 이른 물리적 계의 열역학적 온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formula_1 또는 formula_2 온도의 열역학적 정의는 일반적인 정의가 보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잘 보장한다. 내부적으로 열 평형 상태에 있는 두 계 A,B가 접촉되어있어 열 교환이 자유롭게 일어난다고 하자. 열역학 제 2 법칙에 따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계의 엔트로피의 합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열이 이동하며 열 평형상태에 도달하였을 때 전체 엔트로피는 최댓값에 도달한다. 각 계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U", "U"라고 하자. 계 B로부터 계 A로 미소 에너지 흐름 "Q"이 발생하였다고 할 때 "U"와 "U", "S"은 다음과 같다. 두 계가 열 평형을 이루고 있을 때 총 엔트로피는 최댓값을 가지므로 미소 Q에 대하여 "S"가 0이어야 한다. formula_6, 평형상태에서 따라서, formula_7 위 식은 두 계가 열 평형에 있을 때 두 계의 온도는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온도 기준에 기반하는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는 19세기 중반 열역학이 발전하여 온도와 열, 엔트로피에 대한 이해가 되기 전까지 확립이 되었다. 이때의 온도의 기준은 보통 열용량, 부피팽창, 흑체복사등에 기초하여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하지만 관계가 있는 물리량들에 기초하여 선형적으로 정의를 하였다. 반면 열역학이 발전하면서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와 다르게 그 자체로 기초적인 물리법칙과 물리량에 연관이 되어 물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는 일반적인 온도의 정의와 다르게 그 자체로 물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이론에 기초하여 정의가 되므로 실제로 정확하게 측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일반적인 온도를 정의할 때 사용되는 온도 기준을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에서 따온다면 그렇게 정의된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는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와 같이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인 정의의 온도와 열역학적 정의의 온도의 상호적인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BC 485년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그의 논문 <자연에 관하여>에서 프리멈 프리지덤(primum frigidum)이라는 가상의 물질을 만들어 이것이 세상의 모든 냉각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문을 온도에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702-1703년 길리암 아몬톤(Guillaume Amontons)은 외삽법을 통해 기압이 0이 될 때는 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 때의 온도를 0으로 한 아몬톤 온도를 만들어 절대 온도의 개념을 만들고자 한다. 실제로 그가 만든 아몬톤 온도에서의 절대 0도는 지금의 섭씨 온도로 환산하면 -240 °C 정도로 현재의 절대 온도로 쓰이는 -273.15 °C와도 33.15 °C의 차이만을 보인다. 온도를 정의하기 위해서 과거의 과학자들은 고정점(Fixed point)의 필요성을 느꼈다. 고정점(Fixed point)이란 온도의 기준점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같은 온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을 말한다. 고정점에 따라서 온도의 기준이 달라지므로 고정점에 따라서 온도의 정의도 달라졌다. 각자의 고정점과 방법으로 온도를 정의하려 한 과학자들을 살펴보자.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는 최초로 국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준 온도 단위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는 그의 논문 <온도계의 두 고정된 온도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f two persistent degrees on a thermometer “)>에서 물의 어는점은 기압에 무관하지만 끓는점은 기압에 의존한다는 실험 관찰 결과를 밝힌다. 현대의 측정 결과와 비교해봐도 손색없을 정도로 그의 측정은 정확했으며 표준 기압에서 벗어나는 압력에 의한 온도 변화를 보정할 수 있는 방법도 고안하여 온도의 단위를 제시했다. 그는 그의 온도를 스웨덴의 웁슬라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Sciences in Uppsala)에 제안하여 물의 끓는점을 0 °C로, 어는 점을 100 °C로 정의했다. 하지만 이후 1745년에 칼 리네우스(Carolus Linnaeus)에 의해 편의상 물의 어는점이 0 °C로, 끓는 점이 100 °C로 바뀌어 정의된다. 1777년 요한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는 그의 저서 피로메트리에(Pyrometrie)에서 일정한 부피를 가진 기체에서의 압력과 온도의 관계를 이용한 절대 온도계를 만들었다. 이 온도계를 이용해 람베르트는 기체의 압력이 0에 다다랐을 때의 온도를 절대 영도로 정의하고 외삽법을 통해 절대영도를 -270 °C라는 현대의 값과 매우 가까운 값을 얻어낸다. 1724년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는 세 가지 고정점을 이용했다. 가장 먼저 얼음, 물, 염화암모늄으로 이루어진 혼합물이 평형을 이뤘을 때의 온도를 0 °F로 정의했다. 물의 어는 점을 두 번째 고정점, 32 °F로 이용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고정점, 96 °F는 사람의 체온으로 정의했다. 이후에 파렌하이트는 자신의 온도를 이용하면 600도 부근에서 수은의 끓는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물은 어는점보다 약 180도 높은 온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파렌하이트가 정의했던 온도에서는 물의 끓는점이 32도보다 약 180도보다 높은, 애매모호한 온도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훗날에는 물의 끓는점이 212 °F가 되도록 화씨 온도가 새롭게 정의됐다. 이렇게 고정점을 기준으로 온도를 정의했기 때문에 기준으로 삼은 자연 현상이나 상태는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1776년 런던 왕립학회에서는 온도를 정의하는데 필요한 고정점들에 대한 제안받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한다. 물이 끓는 현상을 고정점으로 하는 과학자들이 당시에도 많았는데 물의 끓음 현상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먼저, 물의 끓음 현상은 기압에 의존했기 때문에 기압에 대해서는 고정이 되지 안 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립학회의 위원회에서 제안된 것은 29.8inHg(=756.9mmHg=0.996atm)의 기압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온도계 내부의 열 전달 문제였다. 당시에는 수은온도계가 사용됐었는데 온도계의 구부에 있는 수은의 온도와 온도계의 수은기둥의 수은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측정하고자 하는 온도가 측정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런던 왕립학회는 온도계를 구부는 물론이고 온도계 전체를 물에 담그면 된다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물이 정확히 고정된 온도에서 끓는 것이 아니라 끓으면서 온도변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온도에 따라서 그 끓음의 정도도 다르게 나타났다. 스위스의 지질학자이자 기상학자였던 제안 안드레 데루크(Jean-Andre Deluc)는 “물이 끓기 시작할 때, 물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열을 가지고 끓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전체, 즉 용기의 바닥부터 물의 표면까지 가장 격렬한 상태로 끓어야 한다. 물이 끓기 시작할 때부터 가장 격렬하게 끓는 상태까지 물의 온도는 1도 이상의 열을 흡수한다”고 얘기했다. 데루크(Jean-Andre Deluc)를 비롯하여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 프랑코이 마르셋(Francois Marcet), 프랑코이 마리에 루이(Francois Marie Louis), 루이 듀포어(Louis Dufour), 조지 크렙스(Georg Krebs)가 물의 끓음 현상과 온도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들 모두 일반적으로 정의된 끓는점은 물이 정확하게 끓게 하는 온도가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로 물이 끓는지에 관해서는 모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끓음 현상은 이후에도 고정점으로서의 의미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는 끓는 점을 초과하는 온도에서도 완전한 끓음이 시작되면 온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끓는 점을 초과하는 온도에서 끓는 현상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물을 끓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물의 끓음 현상을 고정점으로 사용하면서 끓음 현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끓어서 생긴 수증기의 온도를 재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1777년 헨리 캐번디시는 “끓는점을 보정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온도계를 물에 넣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는 용기의 수증기에 노출시키는 것이다.”라고 했으나 같은 해에 이에 대해 데루크(Jean-Andre Deluc)은 “이론적인 것을 떠나, 수증기와 물은 수증기가 생성되기 전에 섞여 있기 때문에 서로의 온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수증기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이나 물의 온도를 측정하는 것이나 그 문제점은 그대로 드러난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1842년에 프랑코이 마르셋(Francois Marcet)은 물은 105 °C에서도 끓지만 증기의 온도는 이 때 1 °C범위 내에서 초과한다는 실험을 통해 증기의 온도를 재는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이후로 게뤼사크를 비롯하여 프랑코이 마르셋(Francois Marcet), 루이 듀포어(Louis Dufour), 마셸 에밀레 베르뎃(Marchel Emile Verdet), 데시르 게르네즈(Desire Gernez), 샤를 톰린슨(Charles Tomlinson) 등의 사람들의 다양한 방법으로 온도와 물의 끓음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80~1881년에 존 에이켄(John Aitken)은 수증기의 온도는 물의 끓는 온도만큼이나 불안정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존 에이켄(John Aitken)에 따르면 증기의 온도가 안정된 고정점처럼 보였던 이유는 공기 중의 먼지 때문이었고 먼지가 걸러지면 물의 끓는점을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였다. 이후 데루크(Jean-Andre Deluc)의 제안대로 의해 온도를 수은온도계로 재는 것을 정의로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후에는 온도를 열소론으로 정의하려는 윌리엄 어바인(William Irvine), 레느 저스트 하위(René Just Haüy),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등이 등장했다. 윌리엄 어바인(William Irvine)은 열소(caloric)이라는 물질이 열의 원인 또는 열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열소의 양은 열용량과 절대온도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따라서 열용량은 물체가 열소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으로 정의했고 절대온도는 열소의 정량적인 값으로 정의했다. 잠열은 열용량이 변할 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열로 정의했다. 이후 1808년 존 돌턴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섞을 때 부피의 합보다 합쳐진 부피가 작기 때문에 열용량이 작아져 열소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온도가 상승하게 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후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는 결합 열소(combined caloric)를 물질과 화학적으로 결합된 열소로 온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열소로 분류했고 자유 열소(free caloric)를 물질과 결합되지 않은 열소로 온도에 영향을 주는 열소로 분류했다. 레느 저스트 하위(René Just Haüy)는 1803년 <자연철학에 관한 논문>(Elementary Treatise on Natural Philosophy)에서 물체가 열을 받아 팽창할 때 부피 팽창은 결합 열소 때문이고 온도 상승은 자유 열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낮은 온도에서는 분자간 거리가 작아 더 큰 인력이 필요하므로 결합 열소가 더 많이 결합되어야 한다. 1821년에는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는 결합 열소를 분자에 결합된 열소로 척력이 작용하지 않는 열소로 재정의했고 자유 열소는 분자에 결합된 열소로 척력이 작용하는 열소로 정의했다. 공간의 자유 열소는 물질에 결합하지 않은 열소이고 최종적으로 온도는 공간에 존재하는 자유 열소의 밀도로 정의했다. 온도에 대한 역학적 이론들이 등장을 하는데 이 이론들은 열을 입자들의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벤저민 톰프슨(Benjamin Thompson)은 분자들은 고정점들에 대해 진동을 하고 있고 온도는 이 진동의 진동수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진동하는 분자들은 에너지 손실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0°가 되는 온도도 없다고 주장했다. 존 헤라패스(John Herapath)는 온도가 분자의 속도에 비례한다고 주장했지만 존 와터슨(John Waterston)은 온도가 분자의 formula_8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1802년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은 일정한 압력에서 온도에 따른 기체의 부피 변화를 연구한다. 그는 그의 발견을 출판하지 않았지만 기체의 온도와 부피가 선형적으로 비례한다는 샤를의 법칙을 발견한다. formula_9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은 실험 자료를 바탕으로 절대 영도가 -273 °C에 있을 것이라 예측했고 기체 팽창 계수에 대해 처음으로 273이라는 수를 쓰기 시작했다. 1824년에 사디 카르노는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흐르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열기관을 고안해낸다. 이 열기관은 카르노 순환을 따르는데 카르노 순환이란 과정 1에서 기체가 고온 A에서 열을 받아 등온 과정을 거쳐 팽창하며 과정 2에서는 A를 제거하고 단열 과정을 거쳐 팽창한다. 그 다음 과정 3에서는 저온 B에 열을 내보내며 다시 등온 과정을 거치며 수축한다. 마지막으로 과정 4에서는 B를 제거한 후 단열 과정으로 수축시켜 다시 초기 상태로 되돌리고 이 순환과정을 카르노 순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카르노 순환을 따르는 열기관의 효율은 고온의 온도와 저온의 온도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보인다. 앞선 아몬톤의 시도, 카르노와 클레이페론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1848년에 윌리엄 톰슨은 절대온도를 물질에 관계없이 1도를 카르노 순환에서 단위일을 하는데 필요한 열의 양으로 정의한다. 이 때 제임스 줄은 열과 일이 상호변환 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열기관에서 고온에서 열기관으로 흘러들어온 열은 일부 일로 변환되고 남은 열이 저온으로 흘러나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854년에 톰슨은 이를 받아들여 카르노의 이론을 재정립하고 절대 온도에 대한 두 번째 이론을 만들어낸다. formula_10 formula_11 윌리엄 톰슨은 그의 논문 <온도의 단위에 대하여>(On the Thermometric Scale)에서 절대 영도의 정의와 그를 기준으로 한 온도 단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는 자크 알렉상드르 세사르 샤를과 조제프 루이 게이뤼삭의 앞선 연구에서 얻어낸 온도에 따른 기체의 팽창 계수 0.00366의 역수에 음의 값을 취한 -273.22 °C를 절대 영도로 정의하고 섭씨 온도의 눈금 크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온도의 단위를 만들고 이를 켈빈이라 정의했다. 윌리엄 랭킨(William John Macquorn Rankine)은 윌리엄 톰슨의 온도 단위와 거의 같은 온도를 정의했으나 그는 섭씨 온도의 눈금 크기를 사용하는 대신 화씨 온도의 눈금 크기를 사용했다. 1930년대에 기체의 온도에 따른 부피 팽창 실험을 정밀하게 한 결과 물의 어는점을 0 °C라 했을 때 절대 영도는 -273.15 °C로 나타났다. 1948년 제 9회 국제 도량형 총회(CGPM: Conférence Générale des Poids et Mesures, General Conference on Weights and Measures)의 세 번째 안건에 따르면 물의 삼중점을 정확히 0.1 °C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후 1954년 제 10회 국제 도량형 총회의 세 번째 안건에 따르면 캘빈 온도의 눈금 크기를 확립하기 위해서 물의 삼중점(0.01 °C)을 273.16K으로 약속했다. 즉, 물의 어는점과 삼중점의 온도차를 0.1K으로 약속한 것이다. 1967-1968년 제 13회 국제 도량형 총회의 네 번째 안건에서는 캘빈 온도의 눈금 크기를 물의 삼중점의 formula_12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 도량형 위원회(CIPM: Comité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sures, International Committee for Weights and Measures)는 엄밀한 정의를 위해 비엔나의 표준 물(Vienna Standard Mean Ocean Water)과 같은 성분을 가진 물의 삼중점을 273.16K으로 정의했다. 충분히 큰 계(통계역학적으로 충분한 입자 수를 갖추고 있는)의 열역학적 온도는 입자들의 병진운동 속도의 평균 평방근에 비례한다. 입자의 병진운동은 x,y,z 총 세 개의 자유도를 통해 움직인다. 이 특정한 형태의 운동에너지를 역학적 온도라고도 정의한다. 병진운동은 열역학적 온도뿐만 아니라 압력과 부피에도 관계를 가지는데, 특히 이상기체에서 이상기체 상태방정식 formula_13를 유도해 낼 수 있다. 병진 운동에너지 뿐만이 아니라 진동운동이나 회전운동과 같이 에너지가 미시상태를 나타내는 변수의 제곱에 비례하는 자유도일 경우 그 자유도가 가지는 한 입자의 평균 에너지는 다음과 같이 온도와 볼츠만 상수의 곱의 절반으로 정해지게 된다. formula_14 이는 에너지 등분배법칙 : 으로, 고전적 통계역학의 가장 중요한 결과중 하나이다. 이는 온도와 계의 운동에너지의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온도를 가진 물체가 다른 온도를 가진 물체와 열 교환을 하는 방식에는 전도, 대류, 복사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전도는 열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두 계의 분자들이 직접 충돌하여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이고, 대류는 온도가 다른 두 계에서 분자들이 직접 움직이며 섞임으로써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이다. 복사는 분자들이 가진 온도에 의해 방출되는 빛을 통해 에너지를 교환하는 방식인데, 이상적인 흑체의 경우에는 진동수 혹은 파장에 따른 빛의 세기는 플랑크 법칙을 따른다. 온도가 T인 흑체에서 방출되는 복사에서 진동수가 ν이고 파장이 λ인 빛의 세기는 다음과 같다. formula_16 formula_17 온도는 물리학 외의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많이 쓰이는 물리량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화학에서의 반응속도, 생물학에서의 효소의 활성온도, 천문학에서의 천체의 표면온도 등이 있다. 아래는 화학에 대한 내용이다. 화학반응의 자발성은 기브스 자유 에너지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식은 아래와 같다. 따라서 온도에 따른 엔탈피 변화량과 엔트로피 변화량이 주어져 있다면 어떤 특정 온도에서 그 반응의 자발성을 예측할 수 있는데, formula_19이면 정반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formula_20이면 역반응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formula_21이면 반응은 평형 상태에 있게 된다. formula_22 위와 같은 화학반응에서 반응속도는 아래와 같다. formula_23 여기에서 [A]는 A의 몰 농도, [B]는 B의 몰 농도이고, k는 반응속도상수라고 한다. 반응속도상수는 온도에 의존하는 값인데, 아레니우스 식에 의해 결정된다. formula_24 formula_25은 기체 상수, formula_26는 반응이 일어날 때의 절대온도, formula_27는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 그리고 formula_28는 빈도계수 또는 빈도인자라고 한다. 따라서 온도가 증가할수록 반응속도상수가 증가한다. 효소는 생명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단백질 촉매이다. 촉매 작용을 하는 원리는 기질과 결합하여 촉매-기질 복합체를 형성함으로써 화학 반응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어 반응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효소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온도가 변하면 단백질이 변형되어 기질과 잘 결합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효소의 활성도는 온도에 의존한다. 인체 내부에 있는 아밀라아제는 α-아밀라아제인데, 최적온도는 체온 부근이다. 반면에 β-아밀라아제의 경우에는 박테리아, 곰팡이, 그리고 여러 식물들에 존재하는 효소인데, 최적온도는 약 섭씨 60도 부근이다. 이처럼 같은 효소라 할 지라도 구조가 다르면 최적온도가 다를 수 있다. 천문학에서 온도는 천체를 종류별로 분류하는 데에 쓰이거나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복사의 종류를 나타낼 때 쓰인다. 천체들은 모두 흑체로 가정하며, 천체를 온도별로 분류하는 방법은 Harvard spectral classification이 있다. 주로 쓰이는 온도의 종류에는 아래와 같이 네 가지가 있다. 별에서 방출되는 플럭스를 전 파장에 걸쳐 합친 플럭스, 즉 관측된 전체 플럭스와 동일한 양의 플럭스를 방출하는 흑체의 온도를 유효온도라고 한다. formula_29 따라서 유효온도는 아래와 같이 된다. formula_30 두 파장 대에서 관측된 복사 세기의 비와 동일한 비의 복사를 방출하는 흑체의 온도를 색온도라 한다. formula_31 위의 식은 플랑크 법칙에 따른 것이며 식을 따르는 formula_32가 바로 천체의 색온도가 된다. 밝기온도는 관측된 표면 밝기와 동일한 밝기를 가지는 흑체의 온도이다. formula_33 위 식을 만족하는 formula_34가 바로 천체의 밝기온도이며, 우변은 플랑크 법칙을 통해 계산할 수 있다. 일정한 온도를 가지는 분자들은 열운동을 한다. 그 열운동에 의해 생기는 속도 때문에 분자들 사이에 속도 차이가 생기게 되고, 도플러 효과가 생기는데 이 효과를 열적 도플러 확장이라 한다. 열적 도플러 확장에서 파장 변화는 다음과 같은 식에 의해 계산될 수 있다. formula_35 이렇게 해서 계산된 분자들의 열운동에 의한 속도 차이는 분자들의 평균 속력 또는 평균 평방근(root mean square) 속력의 두 배가 된다. 그 속도 차이가 평균 평방근 속력의 두 배라고 가정한다면 기체 분자의 운동에너지 식에 따라 운동온도는 아래와 같이 된다. formula_36 온도를 측정하는 기구를 온도계라고 부른다. 온도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나눠보면 일반적으로 온도를 감지하는 측온부 (온도검출단)와 측온부에서 감지한 온도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표시부(수신계기), 측온부와 표시부를 연결시켜 주는 도선 또는 배관으로 이뤄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액체 글라스 온도계와 같이 측온부와 표시부가 일체형으로 된 것도 있다. 온도계는 측정 방법에 의해 측온부를 피측정 물체에 직접 접촉시켜 온도를 측정하면 접촉법, 그리고 접촉시키지 않고 측정하면 비접촉법으로 분류한다.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하고, 온도가 두개 이상의 물체에 접촉시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접촉된 물체들은 온도가 같게 되는 열평형 상태를 이루게 된다. 즉, 열역학 제 0법칙에 의해, 임의 두 물체가 각각 제3의 물체와 열평형을 이룬다면 임의 두 물체도 열평형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온도를 측정하고자 하는 피측정 물체에 측온부를 접촉시켜 피측정 물체와 측온부가 열평형 상태에 이르렀을 때 감온부의 변화량을 측정함으로써 피측정 물체의 온도를 감지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에 의한 온도 계에서는 감온부와 측정대상의 접촉의 정도에 따라 측정정도 크기가 좌우된다. 그래서 측온부를 측정대상에 접촉 할 수 없는 경우는 측정이 불가능하며, 접촉에 의해서 측정대상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는 큰 오차가 생긴다. 이와 같이 접촉방식을 이용한 온도계로는 유리제온도계, 압력식온도계, 열전대, 바이메탈식 온도계, 저항식 온도계 등이 있다. 피측정 물체에 감온부를 직접 접촉하지 않는 상태에서 피측정 물체로부터 나오는 빛 또는 열을 감지하여 온도와 빛, 열 에너지와의 일정한 관계를 이용하여 온도를 측정하는 측정방식이다. 측정대상으로부터 방출된 에너지의 강도는 절대온도의 4승에 비례하기 때문에 1000 ℃ 이하의 온도 범위에서는 측정정도가 나쁘나, 장점으로는 움직이는 피측정 대상 및 검출하고자 하는 대상이 보이기만 하면은 쉽게 접촉하지 않고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 비접촉 방식에 의한 온도계측에 사용되는 것으로는 방사온도계,광고온계,색온도계,적외선온도계(열선) 등이 있다. 온도의 단위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현재 국제 표준화 기구(ISO) 에서는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 SI)로 켈빈(K)을 사용하고 있다. 켈빈(K)은 절대 온도를 측정하므로, 0K은 절대 영도(이상 기체의 부피가 0이 되는 온도)이다. 이뿐만 아니라 각자 측정방법에 따라 기준을 다르게 잡아 섭씨(℃), 화씨(°F) 라는 온도 단위도 있다. 섭씨온도는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가 처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이는 1atm 에서의 물의 어는점을 0℃, 끓는점을 100℃로 두고 그 사이를 100등분 하여 정한 것이다. 화씨온도는 독일의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의 이름을 딴 온도 단위이며, 이는 1atm에서 물이 어는 온도를 32 °F, 물이 끓는 온도를 212 °F로 두고 이 사이의 온도를 180등분 하여 정한 것이다. 음의 온도란 절대 영도(0K)보다 낮은 온도를 말한다. 열역학 제3법칙에 따르면 절대 0도보다 낮은 온도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가능한 에너지의 상태가 제한되어 있는 전자와 핵의 스핀을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절대 영도보다 작은 음의 온도를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것은 거시적 관점에서의 온도에는 해당되지 않고, 에너지 등분배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를 서로 교환하거나 하지 않는 고립된 특별한 자유도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이다. 음의 온도는 바닥 상태에 있는 스핀들에 대해서 밀도 반전 (population inversion) 을 일으키는 “Radio Frequency Technique”를 통해서 실험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의 수가 많아지면 계 전체의 에너지가 증가하고, 계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면서 엔트로피 또한 증가하게 된다. 결국 계 전체의 에너지가 일정 값이 되면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의 수와 낮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는 상태의 수가 같게 되어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고,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갖는 상태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계 전체의 에너지가 증가하면 계의 상태가 정돈되고, 엔트로피가 다시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계의 총 에너지와 엔트로피에 대한 그래프는 위로 볼록한 함수의 꼴을 띠게 된다. 여기에서 온도의 열역학적 정의에 따라 formula_37 이고, 극대점에서 그래프의 기울기는 0이므로 극대점에서 온도는 특이점(singularity)이 된다. 또한 극대점 이후에서는 그래프의 기울기는 음이므로 이 부분에서는 음의 온도가 생긴다. 계의 에너지가 계속 커지면 음의 온도는 0에 수렴하게 된다. 밀도 반전 상태에서 생기는 음의 온도는 에너지가 높은 상태이므로 양의 온도보다 오히려 더 뜨거운 상태이며, 음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와 양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가 접촉을 하게 된다면 음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의 에너지가 양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계로 흘러갈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주거환경은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한 생활양식과 함께 개선되어왔다. 체온조절의 부담이 가장 적은 온도, 다시 말하면 덥지도 춥지도 않는 최적온도는 18℃ 정도이며, 15.6~20℃ 정도에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주변환경으로부터 쾌적함을 유지하려면 온도 외에도 습도를 고려해야 하는데, 습도가 30% 미만이거나 80% 이상이면 좋지 않고, 약 40~60% 정도면 대체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쾌적함을 주는 습도는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15℃에서는 약60%정도, 18~20℃에서는 약50%, 21~23℃에서는 약40%, 24℃ 이상에서는 대략 35%정도에서 적당한 습도로 여겨진다. 사람이 느끼는 춥고 덥다는 감각은 겨울은 추위에 대하여, 여름은 더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또 같은 기온이라 하더라도 봄에는 가을보다 보통 두껍게 옷을 입고 있는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사항들이 복합되어 최적온도는 겨울에는 낮아지고 여름에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체온조절을 위한 온도만큼이나 습도는 면역력을 유지하고 건강한 신체활동을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할수있다. 한편 겨울철 실내온도에 대한 적정 온도는 18℃~20℃라고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발표한바있는데 이 역시 외부 온도와의 차이 그리고 내복이나 방한용품 착용을 활용한 체온조절 그리고 쾌적한 습도의 유지가 용이함등 현대적으로 개선되어온 과학적인 생활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환경시험기준에서 온도표시에대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사용하고있다. 오존 오존(, O)은 산소 원자 3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온 대기압에서 푸른빛의 기체이다. 영하 112도 이하에서는 검푸른 액체이며, 영하 193도 이하로 내려가면 고체가 된다. 오존은 불안정하여 이원자의 산소로 분해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온도가 올라갈수록, 압력이 낮아질수록 강하다. 오존이 갖고 있는 강력한 산화력은 하수의 살균, 악취제거 등에 유용하게 이용되기도 하고, 지구 대기중에 오존층을 형성하여 보호막의 역할도 하는 등 좋은 역할을 하지만, 지표면에 생성되는 오존은 인간의 건강에 해로운 대기오염 물질이 된다. 1785년, 네덜란드의 화학자 Martinus van Marum은 물 위에 전기 스파이크를 수반한 실험을 수행하던 도중 이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그는 이것을 전기 반응 때문인 것으로 보았고, 그가 오존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반 세기가 지나 크리스티안 쇤바인은 같은 신랄한 냄새를 맡았다. 1839년 그는 기체 물질을 분리해냈고 이를 "오존"(ozone)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냄새가 나는"을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 ozein (ὄζει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쇤바인이 일반적으로 오존을 발견한 것으로 인정된다. 오존의 공식 O은 1865년 Jacques-Louis Soret가 처음 결정하였고 1867년 쇤바인이 확증하였다. 오존은 살균력이 뛰어난 화학물질로 수돗물을 만드는 데 쓰인다. 차아염소산(HOCl), 차아염소산이온(OCl), 클로라민보다 살균력이 우수하다. 지구 대기권 지구 대기권(地球大氣圈)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를 일컬으며 고도에 따라서 생기는 중력의 차이와 구성분자의 밀도에 따라서 여러 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각각의 층은 고도에 따라서 기온이 차가 심한 것을 관측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대기권은 비록 미소하지만 전자량에 따라서 전하가 가능한 전리층과 이것이 거의 없는 중성층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지구 대기권은 특성에 따라 지표면에서부터 대류권, 성층권, 중간권, 열권, 외기권의 다섯 층으로 나눌 수 있다. 대류권은 지표면에 가장 인접한 대기의 층이다. 대류권은 지표면의 복사열에 의해 가열되므로,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는 낮아진다. 즉 온도가 높은 공기가 아래쪽에 있으며, 이는 열역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므로 쉽게 난류와 기상현상이 발생한다. 대류권에는 무거운 공기 분자가 모여있으며, 전체 대기 질량의 거의 80%가 모여있다. 대류권은 극지방에서는 지표면으로부터 7–8 km 정도 까지의 영역이며, 적도지방에서는 더 높아 18 km 정도까지의 영역이다. 성층권은 대류권과 반대로 지상에서 올라갈수록 온도가 상승한다. 성층권의 가열 원인은 오존으로, 오존이 태양으로부터의 자외선을 흡수함에따라 가열되며, 따라서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는 상승하게 된다. 온도가 높은 공기가 위에 있으므로 열역학적으로 안정하며, 이러한 이유로 난류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비행기 고도(11–13 km)로 이용되기도 한다. 성층권은 대류권 위쪽에 위치하며, 대략 지표면으로부터 50 km 정도까지의 영역이다. 중간권은 다시 고도가 올라갈수록 온도가 감소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대류현상이 일어나 약간의 구름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기상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 50 km에서 80 km까지의 높이이며, 야광운이 생기기도 한다. 열권은 중간권 상부의 층으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상승한다. 그 이유로는 열권의 밀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적은 열로도 온도가 많이 올라간다는 것이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태양에 가깝다는 이유도 있지만 큰 영향력을 받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는 강력한 태양풍을 직접 맞아서 원자가 전리화되기 때문에 전리층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한 전리층은 전파를 반사하며, 이러한 반사 현상을 이용하여 원거리 무선통신을 하기도 한다. 지상 80–90 km에서 시작하여 500–1000 km까지의 높이이며, 오로라가 생기기도 한다. 외기권은 지구 대기가 우주 공간과 접하는 최외곽 영역이다. 이 곳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가스는 수소와 헬륨이며, 우주공간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외기권은 500–1000 km 상공에서 시작하며, 끝나는 지점은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10,000 km 정도까지로 생각하기도 한다. 크게 온도로 구별되는 5개의 층과 함께, 몇몇의 두 번째 층이 다른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지구 표면에 있는 대기의 평균 온도는 14도 이다. 해수면에서의 평균적인 대기압은 1이다. 대기의 전체 질량은 5.1480×10^18 kg (1.135×1019 lb)는 평균해수면의 압력과 지구의 산악지형의 51007.2 메가 헥타르에 해당하는 양보다 약 2.5%가량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 대기의 기압은 압력이 측정된 어떤 지점 위의 전체 무게이다. 따라서 기압은 지역과 날씨에 따라 다양하다. 만약 해수면으로부터 지구의 전체 대기가 특정한 밀도를 가진다면, 이는 8.5km 지점에서 갑자기 끝날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고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모든 5.6km지점에서는 절반이거나 성분에 의해 7.64km에서 절반이 된다. 그러나, 대기는 각 층마다 온도, 분자 성분, 태양복사, 중력요소에 있어서 일정한 변화량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지구 대기의 질량은 다음과 같이 적절히 구별되어 있다. ●50%는 5.6km 이하에 존재한다 ●90%는 16km 이하에 존재한다. ●99.99997%는 ‘Kármán line’라고 불리는 100km이하에 존재한다. 국제 협약에 따르면 이 곳은 우주 비행사들이 여행할 것으로 여겨지는 우주의 시작점으로 지정되었다.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은 8,848m인데 반해서, 민간 항공기는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 10km와 13km사이를 운항한다. 심지어 Kármán line 위에는 오로라같은 기상학적으로 중요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구간에서는 유성이 빛나긴 하지만 더 큰 유성의 경우는 더 깊게 진입하지 않는 이상 타지 않는다. 100km에서 500km이상의 지구의 다양한 전리층은 HF 라디오의 전파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에 반해, 국제 우주 정거장과 우주 왕복선은 일반적으로 대기 방해물이 존재하여 몇 달마다 재가동 시켜줘야 하는 전리층의 F층이 공존하는 350~400km의 고도에 존재한다. 태양 활동에 따라서 700~800km의 높은 고도에 있는 인공위성 또한 대기 방해물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각 층은 대부분 온도에 의해서 분할될 것이라고 논의된다. 온도는 해발고도가 낮아짐과 동시에 감소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온도가 안정화된 대류권의 나머지부분을 통해 큰 수직거리인 11km이상에서 변화되기 시작한다. 20km이상의 성층권에서는 오존층에 존재하는 산소와 오존가스들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상당한 양의 자외선을 흡수하기 때문에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서 온도도 증가한다. 또한 열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90km이상의 지역에서도 고도가 올라갈수록 온도가 같이 증가하는 구역이 존재한다. 이상기체에서의 음속은 가스의 압력이나 밀도에 의존하지않고 온도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고도에 따른 대기에서의 음속은 온도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고도에 따른 밀도와 압력의 변화는 반영하지 않는다. 해수면에서의 공기의 밀도는 약 1.2kg/m³ 이다. 밀도는 직접적으로 측정하지 않고, 온도, 압력, 습도의 측정값을 기체의 상태 방정식에 대입하여 계산한 것이다. 대기의 밀도는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감소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압에 관한 방정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더 복잡한 모델은 인공위성의 부식을 예측하는데 사용된다. 대기의 평균 질량은 약 5×10¹⁵톤 또는 지구 질량의 1/1,200,000 이다. 미국의 국립 대기과학 연구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전체 평균 질량인 5.1480×10¹⁸kg은 표면의 압력 또는 수증기의 양에 의존하는 1.2 또는 1.5×10¹⁵kg의 수증기 때문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수증기의 평균질량은 1.27×10¹⁶kg으로 측정 되었고 건조한 공기의 질량은 (5.1352±0.0003)×10¹⁸kg이다.” 태양복사(또는 햇빛)는 태양으로부터 지구에 도달하는 에너지이다. 지구 또한 복사방출을 일으키긴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장이 길다. 들어오거나 방출되는 복사는 지구 대기에 의해서 흡수되거나 반사된다. 빛이 대기를 통과 할 때, 대기와 광자가 서로 상호작용하여 빛이 산란된다. 만약 빛이 대기와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직접방사선이라 불리고 이는 마치 태양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과 같게 보인다. 간접적방사능은 대기에서 산란된 빛이다. 예를 들어,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린 날에는 전부 산란되기 때문에 직접방사능이 도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레일리 산란 효과에 의해서 짧은 파장의 빛은 긴 파장의 빛보다 더 쉽게 산란되는데, 이는 하늘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이다.(우리는 산란된 빛을 보고 있다.) 또한 이것은 어째서 노을이 붉은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지평선에 가까워지면, 태양의 빛은 평소보다 더 많은 대기를 통과하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청색 빛은 산란되어 날아가고, 붉은 빛이 노을에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분자들은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을 흡수한다. 예를 들자면, O₂와 O₃는 300nm보다 짧은 파장을 대부분 흡수한다. 물은 700nm이상의 대부분의 파장을 흡수한다. 분자가 광자를 흡수할 때, 분자의 에너지가 증가하게 된다. 이는 대기의 온도를 가열하지만, 이전에 언급한 대로 복사를 방출하면서 여전히 냉각된다. 대기중의 가스의 합쳐진 흡수선은 특정된 띠만을 나타나게 하도록 하는 창을 남기게 된다. 광학적 창은 약 300nm에서부터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인 400~700nm는 물론 적외선의 약 1100nm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적외선과 라디오파와 같이 긴 파장을 전달시키는 전파의 창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전파의 창은 약 1cm에서부터 약 11m까지의 파장을 포함한다. 방출은 흡수의 반대로, 이는 물체가 복사를 방출할 때 일어난다. 물체는 흑체복사의 곡선을 따라서 복사를 일으키려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뜨거운 물체는 짧은 파장의 복사를 더 많이 방출한다. 차가운 물체는 긴 파장의 복사를 더 적게 방출한다. 예를 들자면, 태양의 온도는 대략 6,000K이고, 태양의 복사는 500nm의 파장 근처에서 최대치를 이루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보일 수 있다. 반면, 지구의 온도는 대략 290K이고, 지구 복사는 10,000nm의 파장 근처에서 최대치를 이루는데, 이는 인간이 볼 수 있는 파장보다 훨씬 길다. 온도 때문에 대기는 적외선을 복사로 방출한다. 예를 들어, 맑은 날 밤에 지구의 표면은 흐린 날보다 빠르게 식는다. 이는 구름에 포함된 H₂O가 열을 많이 흡수하고 적외선의 형태로 복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밤에 고도가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이 더 추운 이유이다. 온실효과는 흡수와 방출효과에 있어서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대기에 있는 일부의 가스들은 적외선을 흡수하고 방출하지만, 햇빛에 있는 가시광선과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예로 CO₂와 H₂O가 있다. 공공엣 의절굴절률은에1이만만1보다는 크다. 굴절률의 체계적인 변화는 긴 광로를깆중을절토괗한 비은 하에을 하게 되는데 일관측인한 현상을평경수평선상에는놓옂이 이는되기때문이다. 공기의 굴었기 하고, 온도의 변화량이 클 때 귤절 효과는 증가하게 된다. 이와 같은 효과에 의한 예로는 신기루가 있다. 대기의 순환은 대류권에서 일어나는 거대한규모의 공기들의 움직임이고, 이는 열을 지구 전역에 배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대기의 대규모 구조의 순환은 매년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지구의 자전주기와 적도와 극지방 사이의 태양복사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거의 일정하다. 처음의 대기는 태양 성운에 존재하는 주로 수소에 의해서 구성 되었다. 거기에 더해, 아마도 현재는 목성이나 토성과 같은 거대한 가스에서 발견되는 주로 수증기나, 메탄과 암모니아와 같은 간단한 형태의 수소화물이 존재했을 것이다. 태양 성운이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가스들은 태양풍에 의해 부분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의 대기는 많은 양의 질소와 이산화탄소, 비활성 기체가 화산 폭발에 의해 공급되거나 소행성에 의한 거대한 충돌 동안 공급되었다. 이로 인해 방출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는 곧바로 물에 녹아서 탄산염퇴적물을 형성하였다. 물과 관련된 퇴적물들은 38억 년 전부터의 것부터 형성되어 왔다. 약 34억 년 전의 질소는 안정된 상태의 두 번째 대기의 대부분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명체에 대한 영향은 생명체는 대기보다 빠른 시기인 약 35억 년 전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 한다. 원시 태양이 현재보다 30% 적은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그 시대에 어떻게 지구가 액체상태의 물과 생명이 존재 할 수 있도록 기후를 따뜻하게 유지하였는지가 ‘젊을수록 어두운 태양의 역설’ 이라고 불리게 된 문제이다. 하지만 지질학적 기록은 완전한 상태의 지구의 따뜻한 표면과 약 24억 년 전의 빙하시기의 예상과의 지속적인 연관성을 보여준다. 시생대 시대의 말에 27억 년 전의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에서 발견된 남조류에 의한 광합성을 통해서 공급된 산소를 포함한 대기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기본적인 탄소 동위원소는 현재의 것과 매우 유사한 비율을 가지는데, 이는 기본적인 탄소 순환의 특징은 약 40억 년 전부터 이미 안정되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지구의 유동적인 산화의 진행과정은 약 21.5억년~20.8억 년 전의 가봉 공화국으로부터의 오래된 퇴적물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산화의 변동은 Lomagundi carbon isotope excursion에 의한 기반을 뒀을 것이다. 판 구조론에 의한 끊임없는 성분의 재배열과 지각의 탄산염 광맥으로부터의 이산화탄소 이동은 대기의 오랜 기간 동안의 진화 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활성산소는 약 24억 년 전 산소 급증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활성산소의 출현은 안정되어 있던 철 광맥의 종말을 나타냈다. 이 시기 이전에는 광합성을 통해 공급된 어떠한 산소도 환원되어 있던 주로 철과 같은 금속광물과 산화반응에 의한 소비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기 속의 활성산소의 분자들은 산소의 생산률이 환원되는 금속광물을 초과하기 전까지 모여들지 않았다. 이는 환원성 대기로부터 산화성 대기로의 흐름을 나타낸다. O₂는 선캄브리아대의 말기까지 15%이상의 O₂분자가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약 5.41억 년 전부터의 기간은 호기성생물의 출현이 시작된 캄브리아기의 초기시대인 현생대이다. 대기 중의 산소의 양은 6억 년 전부터 변동을 거듭하여 2.8억 년 전에는 현재의 수치인 21%보다 상당히 높은 약30%로 최고치에 도달하였다. 두 가지의 주요 과정들이 대기의 변화를 지배하였다. 하나는 식물들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사용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황철석의 붕괴와 화산 폭발로 인해서 대기로 유입된 산화된 황에 의한 대기 중의 막대한 양의 산소의 환원이다. 그러나, 화산 분출은 또한 식물이 산소로 바꿀 수 있는 이산화탄소를 방출시켰다. 대기 중의 막대한 양의 산소변화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대기중에 산소가 많은 기간 동안 동물의 진화를 촉진시켰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대기는 동물의 진화과정을 촉진시키기에 충분한 약 21%의 산소를 함유하고 있다. 최근에, 지구 온난화를 유발시키는 주범인 인류 개변의 온실가스는 대기에 축적되고 있다. 대기오염은 유기체에 해가되거나 불편함을 일으키는 대기중의 화학물질, 미립자, 또는 유기물질에 대한 소개이다. 성층권의 오존량 감소는 대기 오염에 의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대류권 대류권(對流圈, troposphere)은 지구 대기권의 가장 낮은 부분으로 대부분의 기상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다. 온실 효과 역시 대류권에서 발생한다. 대류권은 지표면(0km)에서 시작하며, 약 11km까지이다. 열대지방의 경우는 고도 16-18 km 까지이고, 극지방에서는 감소해서 10 km 이내이기도 하다. 이 층은 전체 대기 질량의 약 75~90%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제트기는 대류권의 최상부에서 비행한다. 대류권의 위 층은 성층권이다. 대류권은 셀이라고 불리는 6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이 영역은 대기 순환을 일으키며, 탁월풍을 유발한다. 대류권을 나타내는 영어인 "troposphere"는 "돌리다", "섞다"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인 "tropos"로부터 유래하였다. 이 말대로, 대류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대류권에서 중요한 가스로는 질소 및 산소가 있다. 고도에 따른 온도변화는 다른 어떤 대기권보다도 심하다. 중간 위도의 경우 해수면의 온도가 +17°C인 데 반해 대류권계면에서는 -52 °C에 이른다. 대류권계면에서의 온도는 대류권이 얇은 극지방의 경우는 -45 °C정도인 데 반해, 대류권이 두터운 적도지방에서는 -75 °C에 이르기도 한다. 대류권에서의 고도에 따른 온도변화를 살펴보면, 고도가 1 km 상승할수록, 온도는 대략 6.4 °C 내려간다. 대류권에서의 온도변화가 큰 이유는, 온도는 지표면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표면에서 멀어질수록 열을 전달할 대기 입자가 줄어들며, 대류로 인한 가열 역시 줄어들게 되고 온도는 급격히 하강한다. 대류권계면은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를 나타낸다. 대류권계면 위쪽으로는 고도 50km에 이르도록 온도가 서서히 상승한다. 대류권을 지나는 동안 비행기가 높이 뜨면 뜰수록 안내판의 기온은 섭씨건 화씨건 모두 낮아져서 최상부에 이르면 국내선 비행기는 -17도, 국제선 비행기는 -50°C까지 내려간다. 열 물리학에서 열(熱)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방식의 하나로서 일(work)과 대비된다. 즉 어떤 계(system)에서 에너지가 다른 계로 전달되는 방식에는 일과 열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중 외부의 변수와 관계없는 에너지의 전달을 열이라 한다. 물리학을 배운 사람들도 열을 에너지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표적인 오개념이다. 열은 에너지가 아니라, 에너지의 전달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계 사이에서 에너지는 일 또는 열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어떤 계가 일을 받으면 그 운동에너지가 늘어나듯이, 열을 받으면 그 내부에너지가 늘어난다. 이때 내부에너지를 열에너지라고도 한다. 즉 열에너지는 에너지이지만, 열은 에너지가 아니다. 한편 열의 이동 방법에는 열전도, 열대류, 열복사의 3가지가 있다. 반면 일상 생활에서는 흔히 "온도가 높음"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열역학 제1법칙은 닫힌계의 에너지는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의 에너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계로부터 다른 계로 또는 다른 계에서 계로 이동되어야 한다. 계의 질량이 일정할 때, 에너지를 이동시킬 수 있는 단 두 개의 메커니즘은 열과 일이다. 열은 온도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의 이동이다. 열에 의해 이동되는 에너지의 양을 나타내는 SI단위로 J(줄)이며, Btu(British Thermal Unit) 또는 cal(칼로리)도 때때로 사용된다. 에너지 이동의 비율을 나타내는 단위는 W(와트)이다. 열의 이동은 경로함수(상태함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열은 서로 평형상태가 아닌 계들 사이에서 흐르며, 자발적으로 온도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흐른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열적 접촉을 하면 그들은 서로 온도가 동일해질 때까지, 즉 열적평형상태에 이를 때까지 내부에너지를 교환한다. '뜨겁다'라는 형용사는 물체의 온도를 주위(또는 '뜨겁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온도와 비교하여 나타내는 상대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열'이라는 용어는 에너지의 흐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역학적 상호작용이 없을 때에는, 물체로 이동하는 열은 내부에너지의 형태로 물체에 저장된다. 비열은 물질의 온도를 1도 올리기 위해 계로부터 또는 계로 이동되어야 하는 단위질량당 에너지의 양으로 정의된다. 순수한 물질이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에는 온도의 변화 없이 열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상태변화) 상태변화 하는 동안 열이 이동하는 양은 숨은열 또는 잠열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물질과 그 상태에 따라 다르다. '열에너지'라는 용어는 종종 열이라는 용어와 혼동하여 사용된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열은 에너지의 전달 방식 중의 하나이고, 열에너지는 어떤 계(system)가 가진 내부 에너지를 말한다. 어떤 계가 열을 받으면, 그 계의 열에너지(내부 에너지)는 증가하고, 열이 제거되면 그 계의 열에너지는 감소한다. 뜨거운 물체는 많은 양의 열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많은 양의 열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물체는 '에너지'를 가질 수는 있어도, '열'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물리학에서는 열에너지라는 용어보다는 "내부에너지"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선호된다. 열 현상들과 열의 정의는 물에 대한 신화에서부터 열, 연소성 흙(terra pinguis : 라틴어로 '살찐 흙'이라는 뜻), 플로지스톤, 불공기(fire air, 산소), 열소(caloric), 열의 이론, 열의 일당량, 에너지론, 열역학까지 포함한다. 열의 역사의 대부분은 열역학의 역사의 선구적이 것이다. 1761년에 스코틀랜드 화학자 블랙(Joseph Black, 1728~1799)은 얼음이 녹을 때 온도변화 없이 열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열은 얼음 알갱이와 결합되어 있다가 보이지 않게 된다고 결론지었다. 1759년부터 1763년 사이에 그는 그의 과학적인 명성의 주된 기초가 되는 "숨은 열" 이론으로 발전시켰고, 또한 서로 다른 물질들은 서로 다른 비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와트 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는 블랙의 제자이자 조력자였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열을 전달시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토마스 뉴커먼과 제임스 와트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더욱이 1797년 대포 제작자인 럼퍼드 백작 벤자민 톰슨이 일을 열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항을 사용하여 증명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열손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특별한 모양의 대포 포신을 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날카로운 보링 도구를 무딘 드릴용 송곳으로 교체하고, 총의 앞부분을 물이 가득 찬 탱크에 담가놓았다. 이러한 장비를 사용하여 그는 차가운 물을 불을 사용하지 않고 2시간 30분 만에 끓게 만들었다. 열의 본성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이 발전하였다. 17세기 베허는 열이, 물질이 탈 때 물질로부터 빠져나오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보이지 않는 물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제안하였다.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가 주장한 3원리설에 의하면, 물질의 모든 성질은 세 가지 근본원리들 곧 가연성을 나타내는 황, 유동성과 휘발성을 나타내는 수은, 그리고 고체성과 안정성을 나타내는 염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물질이 타는 연소 현상은 다른 원소와 결합된 상태의 가연설원리인 황이 그 물질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열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을 발전시켜 슈탈(George E. Stahl, 1660~1734)에 의해 주장된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이다. 플로지스톤이론에 따르면 가연성물질들은 모두 플로지스톤을 포함하고 있고, 이러한 물질들이 탈 때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오면서 연소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금속이 공기중의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금속의 하소(calcination)도 금속이 플로지스톤을 내어놓고 재(calx)가 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점점 더 정확하고 정량적인 실험들이 이루어지면서 금속의 하소의 결과로 생성된 금속재가 원래의 금속보다 무겁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로지스톤이 빠져 나갔는데도 무게는 오히려 증가한다는 사실은 이 이론의 중요한 문제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를 플로지스톤이 음의 무게를 갖는다는 식의 설명으로 대체하기도 하였지만, 연소의 경우는 무게가 감소하기 때문에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아직 연소의 결과 생성된 기체의 무게를 고려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연소의 경우도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침내 1783년에 연소에서 산소의 중요성을 증명한 라부아지에에의해 논박되었다. 그는 대신에 열소(칼로릭)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무게가 없고 보이지 않는 유체로서 평형상태가 깨졌을 때 움직인다. 이 이론은 1824년에 프랑스의 사디 카르노가 ≪불의 동력에 대한 성찰≫을 출판할 때 사용되었다. 그는 "동력은 실제 열소의 소비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체로부터 차가운 물체로, 즉 평형상태를 향해 열소가 이동하면서 생성된다."며 열전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카르노에 따르면 이 원리는 열에 의한 운동에 의해 형성된 모든 기관에 적용된다. 또 다른 이론은 1738년에 스위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의 유체역학으로부터 나온 기체 분자 운동론이다. 이 연구에서 베르누이는 처음으로 기체가 모든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표면에 대한 그들의 영향이 우리가 느끼는 기체의 압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 물질의 내부에너지는 각각의 분자와 연관되어 있는 운동에너지의 합이고, 활동적인 분자들로 이루어져서 매우 높은 내부에너지를 가진 지역에서 덜 활동적인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내부에너지도 더 낮은 지역으로 열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임스 프레스콧 줄과 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의 연구는 열과 일이 교환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이는 1847년 헬름홀츠의 에너지 보존 원리에 대한 진술로 이어졌다. 클라우지우스는 1850년에 물질의 이동보다는 에너지의 보존을 이용하여 열소(칼로릭)이론이 기체분자운동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열역학 제 1법칙을 진술하였다. 1851년 윌리엄 톰슨은 제임스 줄과 같은 사람들의 최근 실험에 기초하여 열의 본질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을 개관하였다. "열은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역학적인 작용의 동역학적인 형태이다."(Heat is not a substance, but a dynamical form of mechanical effect.)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역학적인 일과 열 사이에 반드시 평형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현대의 용어로 열은 일반적으로 온도의 차이로 인해 전달되는 에너지의 형태나 저항에 의해 생성되는 에너지의 형태로 정의된다. 현대적인 용어로 열은 이동하는 에너지로 간결하게 정의된다.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1871년 그의 "열의 이론(The theory of heat)"에서 "열"의 현대적인 정의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첫째, 열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서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이동하는 어떤 것이다." 둘째, 열은 "측정할 수 있는 양"이고, 따라서 다른 측정가능한 양들처럼 수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다. 셋째, 그것은 "물질로서 취급될 수 없다." 또한 물질이 아닌 어떤 것(예를 들어 역학적 일)으로 변형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열은 "에너지의 형태 중의 하나이다." 현대적인 것과 유사한 간결한 정의들은 다음과 같다. 열은 온도가 높은 지역에서 온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열 전달은 전도와 복사의 매커니즘에 의해 일어난다. 공학에서는 전도와 유체 흐름의 복합적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대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대류는 열전달의 세 번째 메커니즘으로 여겨진다. 전도는 고체에서 열의 전달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도는 뜨겁고, 빠르게 운동하거나 진동하고 있는 원자, 분자들이 인접해있는 원자, 분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들 이웃 원자들에게 그들의 에너지(열)의 일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즉 전도는 물체 속에서 열이 순차적으로 전달되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전도에 의한 열의 전달속도는 물체 단위길이당 온도차에 비례하며, 물체의 재질에 따라 달라진다. 면적이 A이고 두께가 L인 판의 양면의 온도가, 한 면은 뜨거운 열저장고에 의해 T로, 나머지 한 면은 차가운 열저장고에 의해 T로 일정하게 유지될 때, 단위 시간당 전달되는 에너지양, 즉 전도율P는 formula_1 이다. 여기서 k는 열전도도로 물질에 따라 달라지는 상수이며 에너지를 빨리 전달하는 좋은 열전도체는 k값이 크다. 대류는 액체와 기체 내에서 일어나는 열 전달의 주된 형태이다. 대류라는 용어는 전도와 유체 흐름의 복합적인 효과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온도가 상승하면 밀도가 감소한다. 따라서 물이 가열될 때 냄비 바닥에 있는 뜨거운 물은 위로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차갑고 밀도가 큰 액체는 아래로 내려간다. 이러한 혼합과 전도의 결과 거의 동일한 밀도와 온도가 된다. 대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구별된다. 중력과 부력에 의해 유체의 운동이 야기되는 "자유대류"와 유체를 움직이기 위해 선풍기나 교반기 등의 도구를 사용하는 "강제대류"로 구분된다. 부력 대류는 중력에 의한 현상이므로 중력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복사는 유일하게 매질이 없는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열전달의 형태이다. 따라서 복사는 진공에서 열전달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열적 복사는 물질 속의 원자들과 분자들의 운동 때문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러한 원자들과 분자들이 전하를 띠고 있는 입자들(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운동은 전자기 방사선을 방출하고 이것은 표면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동시에, 표면도 끊임없이 표면으로 에너지를 전달하는, 주위로부터의 복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방출되는 복사의 양도 증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온도가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물체가 전자기 복사로 단위시간당 에너지를 내놓는 비율 P는 물체의 표면적이 A이고, 그 면의 절대온도가 T일 때 formula_2 으로 주어진다. formula_3은 슈테판-볼츠만(Stefan-Boltzmann) 상수이고, formula_4은 물체 표면의 방출률로 0과 1 사이의 값을 갖는다. 열을 측정한 양을 열량이라고 이며, 여기에 쓰이는 일반 단위는 칼로리(cal)이다. 슈테판-볼츠만 법칙 슈테판-볼츠만 법칙은 흑체의 단위 면적당 복사 에너지가 절대 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정확한 식은 다음과 같으며, 식에서 "j"는 흑체 표면의 단위 면적당 복사하는 에너지, "T"는 온도를 나타낸다. 식의 비례상수 σ는 슈테판-볼츠만 상수라고 부르며 값은 다음과 같다. 이 법칙은 1879년 요제프 슈테판에 의해 실험적으로 발견되었으며, 1884년 루트비히 볼츠만이 이에 대한 이론적인 틀을 제공했다. 볼츠만은 당시 가스가 아닌 빛을 사용하는 가상적인 열기관을 가정하여 설명하려 했다. 양자역학의 개념이 만들어진 이후의 현대 물리학에서 슈테판-볼츠만 법칙은 플랑크의 흑체복사 법칙에서 유도할 수 있다. 위 식은 이상적인 흑체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슈테판은 이 법칙을 3월 20일 열 복사와 온도의 관계("Über die Beziehung zwischen der Wärmestrahlung und der Temperatur")란 제목으로 빈 과학 아카데미(the Vienna Academy of Sciences)의 "Bulletins from the sessions"에 실었다. 제2연평해전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대한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어 30분 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손상을 입었다. 북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정장(참수리급은 150톤급으로 "함"이 아닌"정" 지휘관도 "함장"이 아닌 "정장")을 포함한 승무원 6명이 전사당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겪었다. 조선인민군 해군소속 등산곶 684호도 대한민국 해군의 반격으로 전투후 상당한 피해를 입고 예인당했다. 제2연평해전으로 조선인민군 해군 13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시 차단 기동에 대한 논란이 일었으며, 이후 차단기동은 교전수칙에서 삭제되었다.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 해상 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이남지역에서 북한의 무력 기습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차단기동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괴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괴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교전수칙에 따라 차단기동으로 대응하다가 고속정이 침몰됐고, 그 후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집중포격을 당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1계급 추서)이 그 자리에서 중상을 입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고, 부정장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쓰러진 정장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이희완 소령은 총상으로 한쪽 종아리의 근육을 잃은 상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전군에 경계 강화령을 내리고 서산 상공에서 초계비행하던 KF-16 전투기 1개 편대를 NLL 인근 해상으로 긴급 파견해 확전에 대비했다. 청와대 또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는 등 비상태세에 들어갔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사격을 가하는 등 무력도발 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는 행위로 묵과할 수 없다"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군 당국이 더욱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춰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ㆍ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30일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도 다시 검토됐으나 일정 취소가 국민 불안감을 높이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대통령은 공동 개최국 대표로서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경기에 참석하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러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고속함 1번함이 윤영하함으로 명명되어 진수되었으며, 2009년 6월 2일 실전배치되었다. 2009년 9월 23일 STX조선해양에서 2번함이 한상국함으로, 3번함이 조천형함으로 각각 진수되었다. 2009년 12월 11일 한상국함과 조천형함에 이어 STX조선해양에서 4번함인 황도현함, 5번함인 서후원함이 각각 진수되었다. 2010년 7월 28일 한진중공업에서 6번함인 박동혁함이 진수되었다. 남북한 함정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교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 교전이후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을 포기, 침몰했으며 침몰 당시에는 탑승한 승무원 30명 중 4명이 전사, 1명이 실종되고 20명이 부상하였으나 이후 치료를 받던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했으며 실종되었던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침몰 41일째 날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53일만인 8월 21일, 침몰된 배가 인양되고 수습되어 결과적으로 총 6명전사 19명 부상하였다. 대한민국 군당국은 북한 경비정이 3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하였다. 인양된 참수리 357호는 85mm 대구경 5발, 37mm 중구경 19발, 14.5mm 소구경 234발 등 모두 258발을 맞았으며, 40mm 중구경과 20mm 소구경 680발을 발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교전 중에 한상국 중사가 실종되었으나, 긴장 관계를 고려해 즉각 수색 작업에 나서지 못했다. 태풍으로 연기된 인양 작업은 다시 한 차례 연기된 후 8월 5일 시작되었으나, 기상 악화로 본격적인 작업이 미루어졌다. 8월 9일 조타실에서 한상국 중사의 유해를 수습하였고, 기상 악화와 작업의 난항으로 고속정은 침몰 후 53일만인 8월 21일에야 인양되었다. 고속정은 연평도 서쪽 25.2km 수심 28m의 해저에 가라앉아 있었다. 건져올려진 선체에는 조타실 앞부분의 2곳을 포함, 4군데에 축구공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수백 군데에 포탄과 파편 자국이 있었다. 함교 뒤 돛에는 여전히 태극기가 걸려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한상국 중사는 실종 후 함체 인양 중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박동혁 병장은 부상으로 후송된 후 치료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4명은 전투 중 전사하였다. 남한측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참수리 고속정에는 20mm 벌컨포, 30mm 기관포, 40mm 기관포와 M60 7.62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함정은 85mm 전차포와 14.5mm 기관총을 장착하여 화력에서 월등했다. 85mm 전차포는 사거리와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한 발만 맞아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데 비해서 참수리 고속정에 탑재된 무장들은 적함을 격침시키기 너무 어려웠고, 제2연평해전에서 등산곶 684호는 6척의 참수리 고속정에게 집중사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몰되지 않았다. 참수리 357호는 조타실에 85mm 포탄을 직격으로 맞고 지휘부가 타격을 입었다. 부정장의 지휘로 전투는 진행되었으나, 너무 약한 방어력으로 인해서 조타실 등 핵심 시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적함이 NLL을 침범하면,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순서로 대응해야 했다. 특히 적함을 밀어내는 차단기동은 기습 받기 쉬웠고, 참수리 357호정도 차단기동 중 공격당했다.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후 무려 18분이 지나서야 초계함들이 76mm 속사포를 발사하며 전투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참수리 357호정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전투 발생 초기, 초계함들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참수리 고속정들이 사거리 안에 없었다. 결국 화력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북한 고속정을 침몰시키지 못했다. 제2연평해전 유족은 3천100만~8천100만원의 일시금을 받았고, 38~86만원의 유족연금과 61~62만원의 보훈연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이것을 두고 보수 단체에선 정부와 여성부를 보상금 지급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로 비난한 바 있으나, 이당시 정부는 전사자에 대한 법 규정의 문제로 보상할 수 없었다. 2002년 제2 연평해전 당시 군인연금법으로는 순직과 전사가 구분되지 않아 포괄적인 개념의 공무원 사망자로 규정, 전사자로 취급받지 못해서 추가 보상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정부는 우회적인 방안으로 국민성금을 해서 전사한 6명의 장병에게 정부 지원금 포함 해서 도합 3억5천만원의 보상금이 전달되었다. 문제가 된 군인연금법은 박정희 정부 당시 베트남전 전시 전사자가 많아지면서, 국고의 고갈을 걱정한 정부가 교전 중 사망은 공무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고 사망보상금은 사망 직전 받았던 월급의 36배로 못박아 국가로 하여금 그 이상 지급할 수 없도록 한것이다. 추가로 1967년 국가보상법 2조를 제정, 직무수행중 입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받은 경우, 국가가 잘못이 있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였다.이에 참여정부 시절인 2002년에는 연금법 개정법안이 발의, 2004년에는 법안이 개정되어 전사와 일반 공무에 의한 사망이 구분돼서 전사 처리가 가능해졌으나,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겐 소급 처리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제2연평해전 유가족은 전사자 사망 보상금 2억원을 받지 못하고 3000만~6000만원 규모의 공무 보상금을 지급받는데 그쳤다.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사망 보상금을 소급 지급하려면 특별법을 제정할 수 밖에 없다" 고 밝혔다. 이후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게 전사자 예우를 하는 특별법 제정이 발의되었으나 무산되었다. 10월 14일 국방부 예비역정책발전 TF팀은 공문을 보내, 제2연평해전 희생자에 전사자 예우를 해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해당 공문에서 "각종 대침투작전과 국지전, 북한 도발에 따른 아군 전사자 등의 형평성 침해논란이 예상돼 법적 안정성 등을 위해 소급보상이 불가하다"고 밝혔다.이후 천안함 침몰사건(2010)의 경우에는 이 당시 개정된 군인연금법의 적용을 받아 천안함 용사 유가족들은 사병의 경우 사망보상금으로 일시금 2억 원, 원사는 3억5900만 원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6월 30일 교전 과정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해군장병 5명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을 추서했다. 2002년 6월 30일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에는 이한동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군 장병 등이 방문했다. 이 총리 등 국무위원 일행 21명은 이날 합동분향소를 방문, 헌화 및 묵념하고 고(故) 윤영하 소령에게 충무무공훈장, 고(故) 조천형 중사등 사망 및 실종 병사 4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 총리는 이어 병실을 찾아 부상장병 19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훌륭하게 싸웠소. 용감했소"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2002년 7월 2일 일본에서 귀국한 김대중은 "만약 북한이 또다시 군사력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려 한다면 그때는 북한도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이어 국군수도병원을 방문, 서해교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을 위로했다. 교전 발생후 한달뒤인 7월 23일 김대중은 서해교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장병 5명의 가족 12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1주기를 앞둔 2003년 6월 25일에 유가족들과 국가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어서 2003년 6월 27일 2함대를 방문하여 안보공원에 전시된 참수리357호정을 방문하여 묵념하고 헌화하는 등 추모하고 이후 참수리357호정에서 다리를 잃었지만 복귀한 이희완 중위에게 위로전화, 그 외에도 명절마다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처음 서해교전(西海交戰)이라고 부르던 것을 이명박 정부 집권 후 곧바로 2008년 4월에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제2연평해전 추모식을 정부기념행사로 승격시켰으며, 주관 부서도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국가보훈처로 옮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제2연평해전 10주년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군 통수권자가 제2연평해전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2002년 해전 이후 처음이었다. 무려 5단계에 이르던 대응기동 절차는 해군의 손실을 불러왔다. 참수리 357호도 차단기동 중 기습을 당했다. 기존에는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이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차단기동'이었는데 기습공격을 받기 가장 쉬웠다. 이에 국방부는 2004년 경고방송·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3단계로 개정했다. 이는 후에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의 승리의 바탕이 되었다. 제2연평해전에서 초계함의 늦은 대응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교훈으로 삼아, 참수리 고속정들이 초계함의 사정거리 안에서 활동하게 하여 대응을 높였다. 국방부는 참수리 357호가 조타실에 85mm 포탄에 명중당하여 파손된 것을 보고 방어력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이에 1함대와 2함대 소속 참수리 고속정 45척이 개량되어 방어력이 향상되었으며, 화력 향상을 위해 M60(7.62mm)기관총을 K6(12.7mm) 기관총으로 교체했다. 또한 30년을 써온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하기 위해서 개발된 PKX-A를 '윤영하급 고속함'으로 명명했고, 2007년 진수되었다. 참수리 고속정이 가장 강한 화력이 40mm 기관포에 불과해, 적 함을 격침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윤영하급 고속함에는 76mm 속사포를 장착, 화력을 증강하고 대함미사일인 해성 미사일을 탑재했다 해군은 인양된 고속정 357호정이 선체 구조물의 비틀림 현상과 장기간 침수로 재사용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평택 2함대사령부 충무동산에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2013년 10월에 영화 《NLL-연평해전》 이 개봉될 예정이었다. 김학순 감독이 제작 지휘를 하며 김무열, 진구 등이 출연한다. 특히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의 지원과 일반 국민의 모금 활동으로 제작비를 충당하여 제작되고 있다. 출연자와 제작진의 재능 기부로 15억 원만 모이면 3D 전쟁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으나, 1, 2차 크라운드 펀딩, 개인 투자자들의 합류로 2억 5000여 만원이 모여 제작비가 부족해졌다. 결국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2013년 4월 22일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운 상에서 제3차 크라운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충당했다. 해당 영화는《연평해전》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6월 24일 개봉 하였다. 칼로리 칼로리()는 에너지의 단위로, 온도가 다른 물체 사이에 전해지는 에너지의 양이다. 즉 물질의 온도를 높이는 데 소요되는 열의 양이다. 라틴어의 '"열"을 의미하는 단어인 "calor"에서 유래하였다. 칼로리 단위의 기호는 cal, kcal(1000cal)을 쓴다. 영양학에서는 주로 Cal을 사용한다. 1948년의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칼로리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고 사용할 경우에는 줄(J)을 병기할 것을 결의했다. 에너지, 열량의 국제 단위계(SI)의 표준 단위는 줄이며, 칼로리는 병용 단위로서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의는 "물 1그램을 1°C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나, 물의 비열이 온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히는 "1기압 하에서 14.5℃의 물 1그램을 15.5℃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다. 1칼로리(cal)는 4.184J(줄)이다. 1기압 하에서 14.5℃의 물 1그램을 15.5℃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은 약 4.1855J(줄) 로 표기되며 화학적 칼로리가 1 칼로리 당 4.186J(줄) 로 표기된다. 일상 생활에서 "칼로리"라는 말을 많이 접하는 것은 음식의 열량 단위를 칼로리로 재기 때문인데, 영양학에서는 생리적 열량의 단위로서 칼로리를 사용한다. 이 때의 칼로리는 cal가 아니라 Cal인데(영양학에서 cal은 너무 작은 단위이므로), cal과 Cal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Cal 역시 칼로리라고 읽기 때문에 오해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칼로리는 사실 킬로칼로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1 kcal은 1 Cal이고, 1,000 cal이다. 즉, 1 kcal = 1 Cal = 1000 cal. 한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으나 kJ 병기를 하는 나라도 있다. 생리적 열량을 계산할 때는 보통 간단한 계산을 위해 애트워터 계수(Atwater's coefficient)를 사용하며,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1그램당 4 kcal, 지방이 1그램당 9 kcal, 알콜이 7 kcal의 열량을 가지는 것으로 계산한다. 섭씨 섭씨 온도(Celsius , 攝氏溫度)는 1 atm에서의 물의 어는점을 0도, 끓는점을 100도로 정한 온도 체계이며, 기호는 °C이다.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가 처음으로 제안하였으며, 영어 등에서는 제안자의 이름을 따 ‘셀시어스’로 부르고 있다. 셀시우스는 물의 어는점을 100도, 끓는점을 0도로 제안하였으나 사용이 불편하여 후에 끓는 점과 어는 점의 기준을 바꾸었다. 하지만 온도 단위는 여전히 같은 100등분 이므로 섭씨 온도라고 부른다. 현재는 위와 같이 정의하지 않고 물의 삼중점을 0.01도로 정의한다. ‘섭씨(攝氏)’라는 이름은 셀시우스의 중국 음역어 ‘섭이수사(攝爾修斯, 병음 : Shè'ĕrxiūsī)’에서 유래한다. 척관법 척근법(尺斤法)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권역에서 널리 사용된 도량형 단위계이다. 척근법의 척(尺)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 중 하나이며 근(斤)은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 중 하나로서, 길이와 무게 그리고 길이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넓이와 부피 등을 재는 방법을 의미한다. 척간법(尺間法) 또는 척관법()으로도 불린다. 길이 단위로 모(毛)와 리(厘), 푼(分), 치(寸), 자, 장(丈), 척(尺), 간(間), 정(町), 리(里)가 있으며, 넓이 단위로는 평(坪)와 보(步), 정(町)이 있다. 부피 단위로는 홉(합, 合), 되(승, 升, 또는 되승), 말(두, 斗), 섬(석, 石), 곡(斛)이 있으며, 무게 단위로는 돈, 냥(兩), 근(斤), 관(貫) 등이 있다. 척근법의 단위는 지역과 시대에 상관없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그 기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유래한 척근법은 중국의 진한시대 이후로 정착되었는데 척근법의 원기는 신체의 일부나 자연물, 황금종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신체의 일부를 기준으로 삼은 예로는 척(尺)과 지(咫)가 있다. 도량형의 기준으로 삼은 대표적인 자연물로는 중국의 주식인 검은 기장이었다. 마지막으로 황금으로 만든 종의 길이와 부피, 무게를 기준으로 삼았다. 중국은 1925년 미터법을 도입하였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도량형제도를 따라 길이는 주척으로 하고, 부피는 중국의 1두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을 고려의 1두로 삼았으며, 무게는 16량을 1근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법전인 경국대전과 속대전, 대전회통에 기록되어 있다. 길이 단위인 척은 쓰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황금척, 주척, 영조척, 조례기척, 포배척이 그것이다. 부피, 즉 양을 측정하는 단위로는 합과 승, 두, 석이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합과 승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두가 많이 사용되었다. 1902년 도량형 규칙을 제정하고 평식원을 설립되었으며, 1905년 대한제국 고종 때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 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척근법을 서양에서 사용하는 미터법 및 야드-파운드법과 혼용하도록 하였다. 1909년 9월에 도량형법이 일본식 척관법으로 개정되었다. 1959년 국제계량단위국(BIPM)에 가입하고 난 후, 1961년 국제단위계를 법정계량단위로 채택하였다. 1964년에는 법령을 통해 공식적인 일에 척근법이나 야드파운드법 대신에 미터법만을 사용하게 하였다. 한시적으로 허용되었던 건물 및 토지, 수출입 등에 대한 척근법이나 야드파운드법의 사용이 1983년에는 금지됨에 따라 모든 단위는 미터법으로 표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생활 용어로서 자, 치, 푼 등의 길이 단위와 평, 정 등의 넓이 단위, 섬, 말, 되, 홉의 부피 단위, 양, 돈, 푼의 무게 단위가 여전히 쓰이는 경우가 있다. 스티븐 쿡 스티븐 아서 쿡(Stephen Arthur Cook, 1939년 12월 14일~ )은 미국의 전산학자이다. 1971년 ACM 《SIGACT Symposium on the Theory of Computing》에 실린 논문 〈The Complexity of Theorem Proving Procedures〉에서 NP-완전의 개념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논문에 들어있는 쿡의 정리는 충족 가능성 문제가 NP-완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P와 NP가 같은지를 질문했는데 이를 P-NP 문제라고 부르며, 컴퓨터 과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말라순타 아말라순타(Amalasuntha, ? ~ 535년), 혹은 아말라수엔타(Amalasuentha), 아말라스빈타(Amalaswintha)는 동고트 왕국 국왕 테오도릭 대왕의 딸이며 동고트족의 여왕이다. 515년 동고트족 귀족 출신인 유타리크(Eutharic)과 결혼해 아들 아탈라릭과 딸 마테수엔타(Mathesuentha)를 두었다. 526년 테오도릭 대왕의 죽음 이후 아탈라릭이 동고트 왕국의 왕위를 이었으나 아말라순타가 섭정으로 권력을 잡았다. 옛 로마 문화에 빠져 자식들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켰다. 534년 아탈라릭의 사망 이후 사촌 테오다하드와 함께 왕위에 올라 여왕이 되었다. 문예를 싫어한 테오다하드는 왕국 내의 아말라순타에 대한 반감을 이용, 그녀를 토스카나 호수의 볼세나 섬에 유폐시켰다. 아말라순타는 535년 목욕중에 살해되었다. 아말라순타는 그녀의 재상 카시오도로스의 편지와 프로코피우스, 요르다네스 등의 역사가의 기록으로 알려졌다. 아탈라리쿠스 아탈라릭(Athalaric, 516년 ~ 534년 10월 2일, 재위 526년 ~ 534년)은 테오도릭 대왕의 손자이며 동고트 왕국의 2대 왕이다. 526년 테오도릭 대왕의 죽음 이후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인 어머니 아말라순타에게 넘겨졌다. 아말라순타는 아탈라릭에게 로마식 교육을 시키고자 했으나 고트족의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고트식으로 키워지길 원했다. 결국 폭음과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건강을 망쳐 534년 10월 2일 죽었다. 테오다하투스 테오다하드(Theodahad, ? ~ 536년, 재위 534년 ~ 536년)은 테오도릭 대왕의 조카로, 동고트 왕국의 3대 국왕이다. 534년 아탈라릭 서거후 아말라순타와 함께 동고트 왕국의 공동 지배자가 되었으나, 535년 아말라순타를 유배보내 죽게 했다. 536년 아말라순타의 사위 비티게스에게 살해되었다. 비티게스 비티게스(Witiges 혹은 Vitiges, ? ~ 540년, 재위 536년 ~ 540년)은 동고트 왕국의 제4대 국왕으로, 아말라순타의 딸 마테수엔타과 결혼했다. 제3대 국왕 테오다하드가 왕위에 오르며 제2대 국왕이자 형부인 아탈라릭의 섭정으로 있던 장모 아말라순타를 살해하자 그 복수로 테오다하드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비티게스의 치세가 시작된 536년,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동고트 왕국을 쳐 나폴리와 로마를 수복하고 540년 동고트 수도인 라벤나까지 점령당했다. 마테수엔타와 비티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비티게스는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고 마테수엔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사촌 게르마누스와 재혼했다. 헬데바두스 일디바드(Ildibad, ? ~ 541년, 재위 540년 ~ 541년) 혹은 헬데바두스(Heldebadus)는 동고트 왕국의 5대 국왕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벨리사리우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도운 공으로 전왕 비티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간 뒤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암살당하고, 에라릭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일다바드는 실제로 스페인의 서고트족 왕 중 하나의 조카로 기록되어 있다. 암호학 암호학(暗號學, )은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언어학적 및 수학적 방법론을 다루는 학문으로 수학을 중심으로 컴퓨터, 통신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공동으로 연구, 개발되고 있다. 초기의 암호는 메시지 보안에 초점이 맞추어져 군사 또는 외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메시지 보안이외에도 인증, 서명 등을 암호의 범주에 포함시켜 우리의 일상에서 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현금지급기의 사용, 컴퓨터의 패스워드, 전자상거래 등은 모두 현대적 의미의 암호에 의해 안정성을 보장받고 있다. 현대 암호학은 암호 시스템, 암호 분석, 인증 및 전자서명 등을 주요 분야로 포함한다. 암호학을 이용하여 보호해야 할 메시지를 평문(平文, plaintext)이라고 하며, 평문을 암호학적 방법으로 변환한 것을 암호문(暗號文, ciphertext)이라고 한다. 이때 평문을 암호문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암호화(暗號化, encryption)라고 하며, 암호문을 다시 평문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복호화(復號化, decryption) 라고 한다. 암호학적 서비스가 제공하고자 하는 목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암호학의 기원은 수천년 전부터 이뤄, 최근 수십 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역사상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암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용한 대입암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스키테일 암호체계도 있다. 이 시기의 암호화 기법을 고전 암호학 이라 부르는데, 고전 암호학의 암호학 기법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고전 암호화 기법은 20세기 초에 이뤄서야 변화가 생겼는데, 이의 예로는 에니그마(독일어:Enigma 뜻:수수께기 )가 사용한 회전륜 가밀법이 대표적이다. 이후 전자요소와 계산기(컴퓨터)는 큰 발전을 이뤘으며, 이때 사용된 암호화 기법은 전통적인 사서통신에 쓰일 수 없게 되었다. 암호학의 발전은 암호분석학과 함께 발전했다. 즉 암호 편집과 가밀법에 대한 해독법을 말한다. 주로 가밀된 신호의 빈율을 분석하여 해석했는데, 이런 방법을 응용하여 해석된 암호문은때때로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예를 들어,치머만 전보를 해석한 것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동맹국이 나치의 암호문을 해석한 것은 2차세계대전의 기간을 2년정도 단축시켜 주기도 하였다. 20세기부터 70년대 이전에 암호학의 대부분은 정부의 안전범주에 속했지만, 공개표준키 체제의 탄생과 공개키 가밀법의 발명은 암호학을 대중영역에 접하게 하였다. 암호문을 생성(암호화)할 때 사용하는 키와 암호문으로부터 평문을 복원(복호화)할 때 사용하는 키가 동일한 암호 시스템이다. 암호 시스템의 안전성은 키의 길이, 키의 안전한 관리에 상대적으로 의존성이 높다. 암호문의 작성자와 이의 수신자가 동일한 키를 비밀리에 관리해야 하므로 폐쇄적인 특성을 갖는 사용자 그룹에 적합한 암호 시스템이다. 냉전시절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핫라인(hot line)에 적용되었던 OTP(one time pad)는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예이다. 엘리스(Alice)가 밥(Bob)에게 암호문을 보내고 복호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기술한다. 엘리스와 밥은 같은 키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엘리스는 공유한 키로 암호화를 하며, 밥은 같은 키로 이를 복호화한다. 보통 복호화 과정은 암호화 과정의 역과정이다. 암호화와 복호화에 사용된 키가 같지 않더라도 한 키로부터 다른 키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경우에는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범주에 넣는다. 대칭키 암호 시스템은 알고리즘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장점이 있지만 키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 시스템에 가입한 사용자들 사이에 매 두 사용자 마다 하나의 서로 다른 키를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formula_1명이 가입한 시스템에는 formula_2 개의 키가 필요하다. 또 각 사용자는 formula_3개의 키를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는 매우 큰 단점으로 키 관리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공개키 암호 시스템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안전성은 키의 길이와 매우 관련이 크다. 일반적으로 키의 길이가 길수록 안전성은 높다. 그러나 키의 길이를 무한정 길게 하면 그에 따르는 관리의 어려움이 커진다.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가장 큰 약점은 키관리의 어려움에 있다. 한 사용자가 관리해야 할 키의 수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타난 암호 시스템이 공개키 암호 시스템이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는 두 개의 키를 부여 받는다. 그 하나는 공개되고(공개키, public key), 다른 하나는 사용자에 의해 비밀리에 관리 되어야 한다.(비밀키, private key)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는 자신의 비밀키만 관리하면 되므로 키 관리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는 각 사용자의 공개키를 관리하는 공개키 관리 시스템(공개키 디렉터리)이 필요하며 각 사용자는 이 시스템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다른 사용자의 공개키를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은 두 키의 수학적 특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메시지를 암호화 및 복호화 하는 과정에 여러 단계의 산술 연산이 들어간다. 따라서 대칭키 암호 시스템에 비하여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엘리스(Alice)가 밥(Bob)에게 암호문을 보내고 복호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기술한다. 두 사용자에게는 각각 공개키와 비밀키가 부여되었고, 이들의 공개키는 공개키 디렉터리에 저장되어 있다. 엘리스는 공개키 디렉터리에서 밥의 공개키를 찾아 이를 이용하여 문서를 암호화하여 밥에게 보낸다. 밥은 수신한 비밀 문서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신의 비밀키로 복호화하여 엘리스가 보낸 문서의 내용을 알 수 있다. 공개키 만으로는 복호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엘리스 역시 암호화 하고 나서 복원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암호화-복호화 시스템은 두 키가 짝으로 동작하기 때문에, 비밀키로 암호화 하고 공개키로 복호화 할 수도 있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해당 공개키에 맞는 비밀키 보유자를 확인 할 수 있으며, 전자서명에서는 이런 성질을 이용한다. 이와 같이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는 암호화할 때 사용되는 키와 복호화할 때 사용되는 키가 다르기 때문에 비대칭 암호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에게 부여되는 공개키와 비밀키에는 수학적 연관이 있기 때문에 암호화와 복호화가 가능하다. 이 둘은 마치 두 조각으로 나뉜 유리 조각과 같다. 한쪽은 공개되어 있고 그에 맞는 다른 한쪽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한쪽이 그대로 공개된다면 숨겨진 다른 한쪽의 모습도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모습을 감추고 또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음은 잘 알려진 공개키 암호 시스템의 예이다. 이들은 각각이 갖는 알고리즘과 키 생성상의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처리 속도, 구현의 편의성과 연관이 되어 응용되는 분야를 결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개키 암호 시스템의 안정성은 한 방향으로의 접근은 쉽지만 그 역방향으로의 해결은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 RSA의 안전성은 알려진 매우 큰 두 소수의 곱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두 소수를 모르는 채 곱해진 결과가 어떤 소수들의 곱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 안전성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안정성의 기반이 되는 어려운 수학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문제에 안전성의 기반을 둔 암호 시스템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안전한 암호 시스템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one time password(OTP)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OTP는 대칭키 암호 시스템으로 키생성, 키분배 등 일련의 키관리의 어려움이 있는 암호 시스템이다. 양자암호(quantum cryptography)는 OTP와 같은 안전한 암호 시스템이 갖는 키분배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자암호는 양자키분배(quantum key distribution)으로 이해되고 있다. 양자암호의 안전성은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근거하고 있다. 양자암호에서 키분배를 위한 통신으로 양자채널(quantum channel)과 인터넷이나 전화와 같은 통신수단(classical channel)을 동시에 사용한다. 일반적인 통신 수단을 이용한 정보의 교환은 노출 되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양자채널을 이용한 정보의 교환은 보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키 분배 또는 공유 과정에서 불법적인 사용자가 양자채널을 통과하는 정보를 측정하게 되면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키분배 시스템의 정확도에 문제가 생겨 이를 합법적인 사용자가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자 공격 ()에 대해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으며, QND()를 응용한 FPB Attack에 대해서도 취약하다는 것이 증명 되었다. 하지만 위의 두 경우 물리적 수단이나 고가의 장비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 사실상 불가능하다. 1984년 Charles H. Bennett와 Gilles Brassard에 의해 완성된 키분배 프로토콜 BB84가 대표적이다. BB84에서는 광자 편광(photon polarization)의 상태를 수직, 수평 그리고 두 대각선으로 나누어 표현하여 디지털 신호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키분배에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광자 편광의 경우 노이즈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어 이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으며 실제 구현시, 위상차(phase)의 상태를 formula_4로 나눈 다음 Mach-Zehnder interferometer ()를 이용하여 구현한다. 토틸라 토틸라(Totila, ? ~ 552년 7월 1일, 재위 541년 ~ 552년 7월 1일)는 동고트 왕국의 6대 국왕으로, 그의 치세에 발행된 동전에 따르면 본명은 바두일라(Baduila)이다. 토틸라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재건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파엔차 근처에서 비잔티움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군대를 무찌르는 것으로 고트족들의 사기를 높였다. 542년 무겔로 계곡에서 또다른 승리를 얻은 뒤 토스카나를 떠나 나폴리로 향해 도시를 점령하고 루카니아, 풀리아, 칼라브리아 3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토틸라의 이탈리아 정복은 그 신속함만이 아니라 자비로움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은 "적과 친구를 불문하고 토틸라의 믿음과 자비에 기댄 사람 중 속은 사람은 없었다" 라고 기록했다. 545년 말 토틸라는 티볼리에 주둔하고 로마로의 식량 유입을 끊어 항복을 받아내려 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티베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시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시는 약탈되었고, 토틸라가 선언했던 대로 양 방목지까지는 되지는 않았지만 폐허가 되었다. 성벽과 다른 요새는 곧 재건되었고, 토틸라는 다시 로마로 향했으나 이번에는 벨리사리우스에게 패배했다. 549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나자마자 토틸라는 로마를 세 번째로 로마를 공격, 수비측 내의 일부를 매수해 손쉽게 점령했다. 토틸라는 곧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고트 함대를 그리스 해안 지대로 보내 위협하며 시칠리아를 점령할 준비를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환관 나르세스에게 명해 토틸라를 정벌하게 했고, 토틸라 역시 군대를 이끌고 싸웠으나 552년 7월 1일 타기나이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테이아 (동고트 왕국) 테이아(Teia, ? ~ 552년 혹은 553년, 재위 552년), 혹은 테야(Teja), 테이아(Theia), 틸라(Thila), 텔라(Thela), 테이아스(Teias)는 동고트 왕국의 7대 왕이자 이탈리아 최후의 고트족 왕이었다. 선왕 토틸라 아래에서 군관으로 활약하던 테이아는 부스타 갈로룸의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한 이후 왕으로 선택되었다. 남부 이탈리아를 탈출하던 중에 스키푸아르(Scipuar), 군둘프(Gundulf, 혹은 인둘프Indulf), 기발(Gibal), 라그나리스(Ragnaris) 등의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비잔티움 제국의 환관 장군 나르세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552년 혹은 553년 나폴리 남쪽의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테이아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동생 알리게른(Aligern)은 항복했으나 스키푸아르와 기발 역시 전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둘프와 라그나리스는 전장에서 도망쳤다. 라그나리스는 후에 나르세스의 암살자에게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동고트 왕국은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 패배와 함께 멸망했다. 이후 고트 귀족 비딘(Widin)이 북이탈리아에서 550년대에 고트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561년 혹은 562년 생포되고, 동고트 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타기나이의 전투 타기나이 전투 또는 부스타 갈로룸(Busta Gallorum)의 전투는 552년 7월 비잔티움 제국의 환관 겸 장수 나르세스와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의 군주 토틸라 사이에 벌어졌다. 551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수복할 것을 결심했다. 552년 봄에 노장 나르세스는 비잔티움인, 롬바르드인, 헤룰리인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군대를 모아 발칸반도를 거슬러 올라가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타고 로마로 향했다. 타기나이 마을(현대의 구알도 타디노)에서 나르세스는 토틸라가 이끄는 고트 군대와 만났다. 토틸라는 수적으로 불리한 것을 알고 교섭을 시도하며 비잔티움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으나 작은 언덕 하나를 점령하는 데에 그쳤다. 토틸라는 이후 2천 명의 기병 증원을 기다리며 진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르세스의 비잔티움군은 롬바르드인과 헤룰리인을 중심으로 하고 양 끝의 궁수 뒤에 기병을 배치한 원호 진을 쳤다. 토틸라는 기병들을 중앙에 모으고 보병들을 그 뒤에 배치했다. 처음에 동고트군 내의 비잔티움 탈영병이 나와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으나 패배했다. 그 뒤 기록이 확실하지 않으나 토틸라가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의식을 통해 사기를 진작시켰고, 점심 때가 되어 기병 지원이 도착했다. 점심 식사를 끝낸 토틸라의 군대는 밀집한 기병들로 나르세스군의 중앙을 쳐 무너트리려 했다. 그러나 고트 기병들이 나르세스의 원호 진형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양면에서 궁수들의 화살이 쏟아졌고, 고트군이 진형을 유지하려고 하는 틈을 타 나르세스의 기병들이 측면을 덮쳤다. 저녁 때가 되어 고트군은 토틸라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고트군은 완전히 흩어졌다. 이 해 말에 로마는 다시 비잔티움 제국에 수복되었고, 토틸라의 뒤를 이어 동고트 왕이 된 테이아가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에서 패배함과 함께 동고트족의 이탈리아 지배는 끝나게 되었다. 몬스 락타리우스의 전투 몬스 락타리우스(Mons Lactarius)의 전투는 553년 비잔티움 제국의 나르세스와 동고트 왕국 최후의 군주 테이아 사이에 벌어졌다. 부스타 갈로룸의 전투에서 토틸라 왕이 전사한 이후 비잔티움의 나르세스는 로마를 수복하고 쿠마이를 포위했다. 토틸라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테이아는 남은 동고트 전력을 모아 이 포위를 깨고 쿠마이를 구원하려 출발했으나, 나르세스의 군대를 캄파니아의 베수비우스 산 근처 평원에서 만났다. 553년 10월에 벌어진 이 전투는 이틀간 계속되었으며 동고트의 테이아 왕이 전사했다. 이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고트족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으로서도 이탈리아를 직접 통치할 여력은 없었고 이탈리아는 곧 프랑크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프랑크족 역시 격퇴되고 이탈리아 반도는 다시 짧은 시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춘추 전국 시대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아우러는 말이며, 기원전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시황제(始皇帝)가 통일한 시기까지며, 선진 시대(先秦時代)라고도 한다. 550년간 지속했으며,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상업이 많이 발달하였고 이때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주나라가 견융족에 의해 도읍을 낙읍으로 옮기자 주 왕실이 약화되어 봉건제가 약화됨에 따라 각각의 제후국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주왕실에 반기를 들고 춘추 전국 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전쟁 및 제자백가사상, 뛰어난 왕과 장군이 나타났던 시대이다. 특히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진, 초, 제, 연, 조, 위, 한의 일곱나라가 일어나 서로 대립했다. 춘추 전국 시대때는 상공업이 많이 발전하였고,철제로 된 물품을 상용하였고,남북조 시대와는 달리 인재의 등용에 힘을 써서 안으로는 치안과 평화를,밖으로는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였다. 또한 제자백가등 사상의 많이 발전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 사회는 큰 변혁을 일으켰다. 주나라 왕실이 쇠약해짐으로써 중앙집권체제는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사회는 극도의 혼란 속에 빠졌다. 인구의 증가, 민족의 대이동, 정전제도(井田制度)의 붕괴 등은 봉건체제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제후(諸侯)들의 세력신장은 전쟁을 발발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전통문화는 지배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사상의 태동을 요구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지식과 교육을 독점했던 귀족계급의 몰락은 사학의 발흥을 촉진하고 관학의 붕괴를 초래했고, 몰락한 귀족들은 민간에 흩어져 교육을 생업으로 삼았다. 또한, 제후들은 자기 세력의 확대를 위해 유능한 지식인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는 사학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군웅들에 의해 변방지역이 개척됨에 따라 한족(漢族)은 이민족(異民族)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였다. 따라서 한문화권은 확대되고 사회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들이 배출되어 당시 사회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제자백가는 이들 지식인의 대표자들이며, 유가(儒家)·도가(道家)·묵가(墨家)는 그중 가장 뛰어난 3대학파이다. 전국 칠웅 전국 칠웅()은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나라를 지칭한다. 전국시대에는 그 외에도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 일곱 나라가 가장 강력했고 중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보리 보리(영어:barley)는 벼목 벼과 보리속에 속하는 식물로,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 식물이다. 쌀보리와 구분해 겉보리로 부르기도 한다. 맥주의 재료이다. 보리는 서기전 7000년에 이미 야생종이 재배되었다고 하며, 서기전 3000년경부터는 아프리카 고대 왕조의 유적에서 육조종이 발견되고 있다. 줄기 속은 비어 있고, 높이는 1m 정도로 자란다. 일반적으로 가을에 심어 다음해 봄에 수확한다. 원줄기는 속이 비고 원주형이며 마디가 높고 마디 사이가 길다. 잎은 어긋나며 넓은 선상 피침형으로 너비 10-15mm이다. 꽃은 4, 5월에 핀다. 보리는 열매껍질이 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느냐, 쉽게 떨어지느냐에 따라 크게 껍질보리(겉보리)와 쌀보리로 구분한다. 겉보리가 추위에 더 잘 견딘다. 겉보리는 주로 영남에서, 쌀보리는 주로 호남에서 많이 재배된다. 또 열매에 줄이 두 개 있는 두줄보리와 여섯 개 있는 여섯줄보리 등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6세기 것으로 보이는 여섯줄보리의 일종인 껍질보리가 경기도 여주군에서 출토된 바 있어, 오래전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쌀보리는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껍질보리에 비해 추위에 견디는 힘이 약하다. 보리는 춘·추파성 및 내한성의 정도에 따라 겨울보리가 대부분이고 봄보리는 겨울이 지나치게 추워서 겨울보리의 재배가 어려운 경기 북부, 강원도 및 중부 산간지대의 일부에서 재배한다. 질 좋은 보리는 낟알을 싹틔운 다음 말려서 맥아로 만든다. 맥아는 맥주, 위스키, 고추장, 엿기름, 식혜 등의 중요한 재료이다. 다른 맥류와 비교해 볼 때 보리는 탄수화물의 함량이 높고 칼슘·인·철분 등의 무기질과 바이타민B (비타민B)가 풍부하다. Encyclopædia Britannica 11 번째판 (1910–1911년)은 보리의 성분을 에른스트 폰 비브라에 따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소금 성분 제외) 맥주 맥주(麥酒, , )는 보리를 가공한 맥아(麥芽)를 발효한 술로서 알코올은 맥주의 종류에 따라 2~18% 정도의 다양한 도수를 가진 술이다. 즉, 맥주는 한자 그대로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맥주는 고대 문명에서 농업의 번창함을 표현한 인류학적 증거라는 견해가 있다. 맥주는 기원전 6000년부터 양조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알코올 음료로 알려져 있다. 수메르,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지에서 보리와 밀을 경작하면서 맥주의 양조가 발달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맥주에 관한 법률이 나와 있다. 맥주는 인류가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전환해 농경 생활을 하면서부터 만들어진 음료이다. 기원전 4000년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메르인들은 곡물로 만든 빵을 분쇄한 다음 맥아를 넣고 물을 부은 뒤 발효시키는 방법으로 맥주를 제조했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3000년경부터는 이집트 지역에서도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맥주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가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에서 맥주의 양조를 담당했다. 수도사들이 금식 기간 동안 기분 좋은 맛을 내는 음료를 마시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8세기경 영국의 에일(ale)과 포터(porter)가 만들어졌고, 10세기경부터는 맥주에 쌉쌀한 맛을 내는 홉을 첨가했다. 맥주는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영국의 제임스 와트(JamesWatt)가 만든 증기기관은 물의 이송과 맥아의 분쇄, 맥즙의 교반 등에 동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며 맥주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독일의 카를 폰 린데(CarlvonLinde)는 냉동기를 발명해 겨울에만 만들 수 있었던 하면발효 맥주를 계절에 관계없이 양조할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LouisPasteur)는 술이 효모의 작용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과 열처리 살균법을 발명했고, 덴마크의 에밀 한센(EmilHansen)은 파스퇴르의 이론을 응용해 효모의 순수배양법을 개발하면서 맥주의 품질을 높였다. 우리나라에 처음 맥주가 들어온 것은 1883년이며 맥주를 우아(벗우, 아이아)로 표기하였는데 비어(beer)의 영어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서 맥주가 처음 생산된 것은 1933년 일본의 대일본맥주(주)가 조선맥주(하이트맥주 전신), 기린맥주(주)가 소화기린맥주(오비맥주 전신)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두 맥주회사는 미군정에 의해 관리되었고, 1951년에 민간에 불하되었다. 1992년에는 진로쿠어스맥주(주)가 설립되면서 하이트맥주, OB맥주, 카스맥주 등 3개 회사에서 맥주를 양조했다. 이후 카스맥주가 OB맥주에 인수되었고, 현재는 하이트진로(주)와 OB맥주(주)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 삿포르 맥주회사 -> 조선맥주(주) (1933) -> 해방 후 독립, 크라운 맥주로 알려짐 -> 한독맥주(주) 매수(1977) -> 하이트맥주 개발, 시판 (1993) -> 하이트 홀딩스(주)로 상호변경 (1998) 일본 기린 맥주회사 -> 동양맥주(주) -> 해방 후 독립 -> OB맥주 상호변경 -> 카스맥주(주) 흡수합병(1999) 보리와 밀을 가공한 엿기름을 더운 물에 담가 엿기름의 녹말을 당분으로 변화시킨다. 곡물 찌꺼기를 걸러낸 뒤 남은 맥아즙에 홉을 넣어 끓인다. 맥아즙이 서늘해지면 효모를 추가하여 발효시킨다. 효모는 당분을 에틸 알코올, 탄산 가스와 맥주의 맛에 영향을 주는 다른 성분으로 분해하는데, 이 과정을 발효라 한다. 병이나 캔 등에 담기 전에 효모를 없애기도 하며, 맥주를 몇 주나 몇 달간 놔둔다. 일정기간 저장·숙성한 후 여과하여 바로 제품화하면 생맥주가 되고, 병이나 캔에 넣어 저온살균 처리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맥주가 되는데, 그 공정은 다음과 같다. 맥주는 "양조용수·보리·홉" 등이 주원료로 된다. 나라와 지역에 따라 쌀·옥수수·녹말·당류 등을 녹말질 보충원료로 사용하며, 그 비율은 그 나라의 사정이나 기호에 따라 다르다(독일에서는 1815년 이후 수출맥주 이외의 하면발효맥주에는 부원료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맥주는 분류 기준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상면발효 맥주와(에일, Ale) 하면발효 맥주로(라거, Lager) 나눌 수 있다. 상면 발효 맥주는 인류 문명 발생 이전부터 만들어진 맥주로서 발효 과정에서 사카로마이세스 세레비지에(SaccharomycesCerevisiae)라는 효모가 맥주 위로 거품처럼 뜬다. 이 맥주가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인위적인 발효온도를 설정할 수 있는 기술 없이도 가능했기 때문이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독일의 바이스비어나 쾰쉬, 영국의 에일이나 스타우트, 포터 같은 맥주가 상면발효 맥주에 속한다. 상면발효맥주는 맥아농도가 높고, 10도에서 25도 사이의 상온에서 발효를 하기 때문에 색이 짙고 알코올 도수도 높은 편이다. 하면 발효 맥주는 19세기 중반에 처음 만들어진 맥주로서 상면발효 맥주보다 낮은 온도인 섭씨 12도 전후에서 발효하며, 발효 과정에서 사카로마이세스 카를스베르겐시스(Saccharo-mycesCarlsbergensis)라는 효모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독일의 양조사인 조셉 그롤이 체코의 필센 지방에 있는 양조장에서 처음으로 양조에 성공했는데, 이 양조장의 지하 저장고가 서늘했기 때문에 양조가 가능했다. 하면 발효 맥주는 저온에서 발효를 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부드러운 맛과 향이 특징이다. 전세계 맥주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라거(lager)가 대표적이다.양조법에 따라서는 드라이(dry) 맥주, 디허스크(Dehusk) 맥주, 아이스(ice) 맥주로 구분되고, 살균여부에 따라서는 생맥주와 보통맥주로 나뉜다. 상면발효 맥주는 효모와 "부유 단백질" 등이 맥주에 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탁하고 걸쭉한 맛을 내는 반면에 하면발효 맥주는 바닥에 가라앉은 효모와 부유 단백질을 제거하기 때문에 맑은 황금색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알코올 함량에 따라서 무알코올성 맥아 음료, 비알코올성 맥아 음료, 라이트 맥주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독일 바바리아에 베네딕토 Weihenstephan 맥주는 그 해로부터 문서가 홉 정원에 11조를 지불했음을 언급함으로써 768년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양조장은 1040년에 프 라이징시에 의해 허가를 받았고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 된다. 불연속적인 생산으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은 993년에 설립된 체코의 Břevnov 수도원이다. 양조 산업은 여러 가지 지배적인 다국적 기업 및 지역 양조장에서 선술집에 이르는 수 천명의 작은 생산자들로 구성된글로벌 비지니스이다. 2006년 판매 기준 $294.5 billion(£ 147.7 억 달러)으로 세계 총 판매 수익을 생산하며 1천 3백 30억 리터 이상이(3백 50억 갤런)매년 팔리고 있다. 양조장 또는 공예 양조장은 제한된 양의 맥주를 생산하는 현대 양조장이다. 양조장이 생산할 수 있는 맥주 최대량은 지역 및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해당 약 15,000 배럴(1.8 메가 리터, 396000 제국 갤런 또는 475000 미국 갤런)이다. brewpub은 술집이나 다른 음식점들을 통합한 양조장 유형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밀도의 양조장은 대부분 프랑켄의 독일 지역에 있다. 특히 약 200양조장을 가진 오버프랑켄 현 지역에 있다. 집에서 양조를 하는 것은 많은 나라에서 규제와 금지 적용을 받고있다. Homebrewing에 대한 규제는 1963년에 영국에서 해제되었다. 또한 호주는 1972년에, 미국은 1978년에 법을 해제시켰다. 그러나 몇 개의 주에서는 생산을 제한하는 그들만의 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허락되었다. 독일, 덴마크, 아일랜드, 체코,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맥주의 흥행국 독일에서는 전국에 걸쳐 1,000 여종의 맥주가 있다고 한다. 체코는 맥주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이다. 뮌헨의 아우구스티너, 파울라너, 호프브로이하우스, 뢰벤브로이 등과 함부르크의 홀슈텐, 아스트라, 하노버의 헤렌호이저, 린드너, 브레멘의 벡스 맥주 등, 각 지역마다 독특한 양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UEFA 챔피언스리그의 공식 스폰서인 하이네켄 맥주가 유명하고, 덴마크에서는 한때 리버풀의 스폰서이자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칼스버그 맥주가 유명하다. 아일랜드는 유명한 기록 책인 기네스 북을 발간하는 흑맥주 회사 기네스 맥주가 유명하고, 미국의 유명 맥주는 버드와이저, 밀러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칭따오 맥주가 유명하다. 음악페스티벌과 맥주축제가 함께 진행된다. 국내의 맥주들은 물론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맥주를 만날 수 있는 ‘동북아 맥주 대전’과 세계의 다양한 맥주를 맛 볼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역대 최대 85개 업체가 참가한 대구 치킨 맥주 페스티벌에선 치킨을 25만 5000여 마리, 맥주는 25만 리터가 준비될 만큼 굉장히 큰 축제이다. 두류공원에서 개최됐다. 치킨을 주제로 한 패션쇼와 전설의 복면가왕, 닭싸움 대회, 수제 맥주와 칵테일 경연대회, 각종 버스킹 등으로 많은 이벤트가 있다. 무제한 맥주와 함께 부산 밤바다를 즐길 수 있는 축제다. 맥주를 마시면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 들이 있다. 인디 밴드의 음악과 댄스 팀들의 퍼포먼스도 볼 수 있다. 야구 생중계를 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삿포르에서 매년 여름마다 ‘삿포르 맥주 축제’가 열린다. 삿포르 맥주를 비롯하여 아사히, 산토리, 기린 등 일본 유수의 맥주 브랜드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각 브랜드마다 홋카이도 한정 맥주를 판매하는 등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독특한 맥주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칭다오 세계 맥주 축제는 아시아 최대 맥주 축제이자 세계 4대 맥주 축제로 인정받고 있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칭다오시에는 음주 대회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과 공연이 펼쳐진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구 치맥 페스티벌과 칭다오 국제 맥주 축제가 양도시를 대표하는 치킨/맥주 관련 축제라는 것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축제 상호 간 우호 협력을 강화하여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MOU협약을 최근에 맺었다고 한다. 독일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는 독일 뮌헨의 민속 축제이자, 세계에서 열리는 맥주 축제 중 가장 규모가 큰 축제이다. 민속 의상을 차려입은 시민과 방문객 8,000여 명이 어우러져 뮌헨 시내 7km를 가로지르는 시가행진이 큰 볼거리이다. 축제 기간에는 회전목마, 대관람차,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 80여 종을 포함하여 서커스, 팬터마임, 영화 상영회, 음악회 등 남녀노소 함께 할 수 있는 볼거리가 운영된다. 술 (동음이의) 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음료 음료(飮料)는 액체를 많이 포함하여 마실 수 있는 음식을 뜻한다. 흔히 음료수(飮料水)라고도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음료수는 마시거나 요리에 쓰이는 물만을 뜻한다. 마시는 일은 수세기에 걸쳐 사교의 큰 부분이 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마시기 위한 사회적 모임을 심포지엄이라 하며, 여기에서 물에 희석시킨 포도즙을 마셨다. 수많은 초기 사회들은 술을 신들이 내려준 선물로 간주하여, 디오니소스와 같은 신들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음료는 대략 다음과 같이 나뉜다. 이산화 탄소 이산화 탄소(二酸化炭素)는 탄소 원자 하나에 산소 원자 둘이 결합한 화합물이다. 화학식은 CO이며, 고체 상태일 때는 해빙 시에 바로 기체로 승화하므로 드라이아이스(dry ice)라고 부른다. 기체 상태일 때는 무색, 무취, 무미로 지구의 대기에도 존재하며, 화산 가스에도 포함되어 있다. 유기물의 연소, 생물의 호흡, 미생물의 발효 등으로 만들어진다. 생물의 광합성 과정에서 주로 이산화 탄소를 이용하여 탄수화물이 합성된다. 상온에서 무색 기체로 존재한다. 약간 신 맛이 있다. 밀도는 0 °C, 1atm에서 1.976g/L이다. 삼중점은 -56.6 °C/5.11atm으로 상온 상압에서 승화하며, 승화점은 -78.50 °C이다. 임계 온도는 31.0 °C이며, 임계 압력은 72.80atm이다. 분압이 1atm일 때, 1부피의 물에 녹는 이산화 탄소의 상대적인 부피는 다음과 같다. 에탄올에는 물에 비해서 약 2배정도로 녹고, 카복실산 또는 그 무수물에는 물의 약 20배 정도 녹을 수 있다. 에테르, 벤젠 과는 잘 섞이지만 그 외의 많은 유기 화합물과는 잘 섞이지 않는다. 분자의 형태는 직선형이며,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간의 결합 길이는 1.62Å이다. 고체는 분자성 결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산화 탄소는 화학적으로 활성이 낮은 기체이다. 이산화 탄소가 관여하는 대표적인 반응은 다음과 같다. 이산화 탄소는 무극성 분자이다. 실험적으로 이산화 탄소는 석회암에 염산을 반응시켜 얻을 수 있다. CaCO+2HCl → CaCl+HO+CO 공업적으로 이산화 탄소는 주로 다음과 같이 얻을 수 있다. 공업적으로 이산화 탄소를 정제하는 데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이용한다. 위 반응들은 공통적으로 저온에서는 평형이 왼쪽으로 이동하고, 고온에서는 평형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위 반응의 반응물이 포함된 수용액과 이산화 탄소를 반응시켜 이산화 탄소를 흡수한 후 이를 가열하면 다시 이산화 탄소가 발생한다. 이 성질을 이용하여 이산화 탄소를 정제할 수 있다. 이산화 탄소는 다음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다. 이산화 탄소는 온실기체로 작용하여, 지구복사를 통하여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에너지 중 일부를 다시 지구로 되돌린다. 이러한 이산화 탄소의 성질은 지구의 에너지 평형을 깨트려서,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산화 탄소는 화석연료와 같은 탄소를 포함한 물질을 완전 연소시킬 경우 생성되는데, 최근 화석연료의 사용이 크게 늘면서 이산화 탄소의 배출량도 증가하여 대기중의 이산화 탄소 농도가 증가하였고 이는 지구온난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산화 탄소는 세포호흡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발생한 이산화 탄소는 순환계를 통하여 폐로 이동하여 체외로 방출된다. 이산화 탄소가 순환계를 통하여 세포로부터 폐로 이동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탄산 수소 이온의 형태로 이동할 경우. 조직 근처의 혈관에서 이산화 탄소 분자는 적혈구 내의 탄산탈수효소에 의해서 물 분자와 반응하여 탄산을 형성한다. 탄산은 곧 탄산 수소 이온과 수소 이온으로 해리되어 수소 이온은 헤모글로빈에 결합하고 탄산 수소 이온은 혈장으로 방출된다. 폐 주위의 혈관에서 탄산 수소 이온은 반대 과정을 거쳐 이산화 탄소가 되고, 이것은 폐를 통하여 몸 밖으로 방출된다.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은 혈액의 pH가 떨어지면 산소와의 친화력 역시 감소하는데, 이를 보어 효과라 한다. 물질대사가 활발한 조직에서는 이산화 탄소의 생성량이 증가하며, 그 결과 주위 혈액의 이산화 탄소 분압은 증가한다. 이산화 탄소는 물과 결합하여 탄산을 생성하므로, 이는 혈액의 pH를 떨어트린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에서 산소가 방출되고, 방출된 산소는 세포호흡에 사용된다. 식물은 광합성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를 흡수하여 이를 탄수화물의 형태로 만든다. 식물에 의해 흡수된 이산화 탄소는 캘빈회로로 들어가고, 루비스코에 의해 리불로스-1,5-이인산(RuBP)에 결합한다. 이는 여러 반응을 거쳐 글리세르알데하이드-3-인산(G3P)이 되고, 이것이 이후 포도당 또는 다른 탄수화물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한 분자의 G3P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분자의 이산화 탄소가 필요하다. 고농도의 이산화 탄소는 신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 부피 백분율로 0.6~2.5%의 이산화 탄소는 나른함을 일으킨다. 하지만 2.5%까지는 안전한 농도이다. 이 농도까지는 나른함은 일으키지만 오랜 시간 있어도 안전하며, 오랜 시간 노출되었다가 일반적 환경으로 나올 시에는 즉시 회복된다. 즉 2.5%까지는 즉시 회복이 가능하다. 3%가 넘어가면 호흡이 커지게 되며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3~4%사이에 오랜 시간 노출되었을 경우에는 후유증은 좀 오래가지만 시간은 걸리더라도 완전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4%가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4%가 넘으면 두통, 매스꺼움, 구토 등을 일으키게 되며 이 농도에 계속 노출시에는 장해가 생성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숨을 쉴때 내뱉는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4%인데 이 농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환이 잘 되지 않으며, 이러한 현상 때문에 4%가 넘어가면 이산화탄소의 독성 효과가 갑자기 크게 나타난다. 오랜 시간 4~5%에 노출시에는 폐 장해가 형성되며 기억력 감퇴, 시력 감퇴까지 나타날 수 있으며, 운동 능력 감퇴도 나타난다. 오랜 시간 노출시에는 이러한 현상이 회복되지 않는 장애 현상이 나타난다. 5%가 넘어가면 방안에 촛불이 자동으로 꺼진다. 6%에서는 공기가 부족한 고고도 환경에서나 일어나는 급격한 호흡수 증가 현상이 나타난다. 1~3시간 노출되면 장애 현상이 나타나므로 30분 내로 탈출해야 한다.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이 농도에 노출되면 사망하게 된다. 8%가 넘어가면 운동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며, 3분의 노출만으로 달리기가 불가능해진다. 이 농도에서는 20분 내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지으므로, 적어도 10분 내로 탈출해야 한다. 8%에서 농도에서 오랜 시간 넘어가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11%가 넘어가면 움직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2분안에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며, 5분내로 기절하게 되므로 적어도 1분 내로 이 농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30분~1시간내로 사망하게 되며 구토로 인한 기도 막힘으로 조기 사망도 할 수 있다. 13%의 농도에서는 짧은 시간내에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30초안에 탈출하지 못한다면, 움직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1분안에 즉시 기절하며, 호흡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8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15%의 농도에서는 즉시 기절하게 된다. 즉 물속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며 2~5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17%가 넘어가면 고농도 이산화탄소의 흡입으로 인한 중독으로 즉시 기절하게 되며 1분내로 사망하게 된다. 고농도 이산화탄소가 폐가 쌓여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므로 호흡 순간 즉시 기절하며 40초~1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지구 대기 1727년에 뉴턴적 고찰을 생리학과 화학에 도입하려고 노력한 영국 국교회 목사 스티븐 헤일즈는 유기 물질을 태울 때 특정한 기체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어떤 공기가 많은 유기 물질과 특정한 알칼리 토류에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이산화 탄소였다. 그러나 이 기체는 조지프 블랙이 1755년에 에든버러 철학학회에 보고하고 다음 해에 산화마그네슘, 석회, 그 밖의 다른 알칼리 물질에 관한 실험으로 발표하기까지, 특정 화학종으로서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조셉 블랙(1728~1799)은 마그네슘을 통해 ‘고정 공기’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당시는 알칼리성 물질이 부식성을 띠는 까닭을 플로지스톤설을 통해서 설명하였다. 즉, 산화 칼슘에 약염기에 탄산 나트륨또는 탄산 칼륨을 작용시키면 플로지스톤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였다. 블랙은 실험을 통해서 이 과정에서 산화 칼슘의 질량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반응 결과 기체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 기체를 '고정된 공기'(fixed air)라고 불렀고, 이것이 곧 이산화 탄소이다. 또한 그는 석회암에서 추출한 탄산 마그네슘을 가열하면 이산화 탄소가 발생함으로 인해서 질량이 감소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약염기성의 탄산염이 이산화 탄소를 방출할 경우 강염기성이 되고, 이것이 다시 이산화 탄소를 흡수할 경우 약염기성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 또한 고정 공기가 대기 공기나 인간의 호흡 속에 함유되는 것, 석회수에 흡수되어 백탁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가성 알칼리를 고정하여 온화 알칼리를 만드는 것 등이 블랙에 의해 밝혀졌다. 기체과학에서는 블랙에 뒤이어 캐번디시가 이 기체의 비중, 용해도 기타에 대해 자세한 연구를 하였다. 일산화 탄소 연료 연료(燃料)는 보통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물질을 말한다. 휘발유, 등유, 경유, 연탄 등이 있다. 모든 로켓의 추진제(propellant)는 연료(fuel)와 산화제(oxidizer)로 구성되어 있다. 제트엔진은 연료만 탑재하며, 산화제는 공기 흡입구를 통해 외부의 산소를 흡입하여 사용한다. 그러나, 로켓엔진은 공기 흡입구가 없으며, 내부에 산소통을 탑재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로켓 추진제는 연료와 산화제 둘이 사용된다. 2002년 FIFA 월드컵 2002년 FIFA 월드컵(, )은 17번째 FIFA 월드컵 대회로, 2002년 5월 31일에서 6월 30일까지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 대회이자 유럽과 아메리카 밖에서 열린 첫 대회이며,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자 전 대회 우승국 자동 출전권이 적용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또한 이 대회는 역사상 1번째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개최된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독일을 2-0으로 이기고 대회 역대 최다인 5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이 대회 우승으로 브라질은 FIFA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2005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자격을 얻었으며, 이도 또한 해당 대회의 5번째 출전 대회이다. 터키는 대한민국과의 3위 결정전 경기에서 3-2로 승리해 이 대회를 3위로 마감하였다. 중국, 에콰도르, 세네갈,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이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였고, 터키는 1954년 이후 48년만에 본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회는 충격적인 결과와 이변이 속출한 대회로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가 승점 1점을 얻는데 그치고 무득점으로 조별 리그에 탈락하였고, 또다른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도 조별 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또한 터키가 깜짝 3위를 기록하였고,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준결승전까지 진출하였다. 또다른 대이변으로는 세네갈이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16강전에서 스웨덴을 제압하고 8강에 오른 것으로 여기서 터키에게 아쉽게 제동이 걸렸다. 물론, 이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인 국가는 브라질로, 이 대회에서 5번째로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공식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New Millenium, New Encounter, New Start)로 하였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1996년 5월 31일, FIFA에 의해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본래 대한민국, 일본, 그리고 멕시코가 셋이서 따로 경합했었다. 그러나, 두 아시아 국가들이 최종 결정이 나기 전에 협력할 것을 합의하였고, 양국은 멕시코를 제치고 만장일치로 개최국이 되었다. 이 대회는 복수의 국가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FIFA 월드컵이다. 결정이 내려지던 시점까지 일본은 단 한번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개최국 선정 이후인 1998년에서야 본선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FIFA 월드컵 개최국들 대회 유치 전까지 한번도 출전하지 못한 국가는 1934년의 이탈리아와 2022년의 카타르 뿐이다. (우루과이는 1930년 초대 FIFA 월드컵을 개최함에 따라 그 전 대회가 없었으며, 이들은 1928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었다.) 이례적인 개최국 선정은 대부분 시차가 거의 없는 국가들에서 주로 축구를 하던 유럽에는 화젯거리였다. 경기는 유럽 기준으로 아침 시간에 열렸고, 일부 학교와 기업들은 경기일에는 늦게 문을 열거나 근무 시간 초에 사내 응원을 했다. 총 199개국이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행을 놓고 경합하였고, 1999년 12월 7일, 도쿄에서 예선 추첨식이 거행되었다.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와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과 일본은 자동 출전권을 획득함에 따라 예선전에서 빠졌다. 이 대회는 전 대회 우승팀(디펜딩 챔피언)이 자동 출전권을 얻은 마지막 FIFA 월드컵이다. UEFA (유럽) 에 배당된 진출권 수는 14장이며, CAF (아프리카) 에는 5장, CONMEBOL (남아메리카) 에는 4장, AFC (아시아) 에 2장, 그리고 CONCACAF (북중미 및 카리브해) 에 3장이 배당되었다. 남은 두장은 AFC-UEFA, CONMEBOL-OFC (오세아니아)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통해 결정되었다. 4개국(중국, 에콰도르, 세네갈, 그리고 슬로베니아)이 본선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2018년 기준으로 이 대회는 터키, 중국, 아일랜드가 밟은 마지막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이다. 터키는 1954년 이후 48년 만에 본선 무대에 등장하였고, 폴란드와 포르투갈은 1986년 이후 16년만이었다. 1998년 대회에서 4강을 차지한 네덜란드는 대회 본선에 합류하지 못하였으며, 대한민국은 비유럽, 비아메리카 최초로 5대회 연속 본선 진출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전적이 있는 7개국(우루과이, 이탈리아, 독일, 브라질,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그리고 프랑스) 모두가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고, 이들이 모두 출전한 대회는 이 대회가 1986년(당시 프랑스는 아직 대회 우승을 거둔 적이 없었다.) 대회 이후로는 최초이다. 다음은 본선에 진출한 32개국과 각국의 2002년 5월 15일 기준의 FIFA 랭킹이다. 2002년 대회에서 시드를 받을 팀이 2001년 11월 28일에 결정되었다. 시드를 받은 국가는 A포트에 들어갔다. B포트에는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11개의 유럽 국가들이 들어갔다. C포트에는 시드 배정을 못 받은 CONMEBOL과 AFC 소속 국가들이 편성되었다. D포트는 시드 배정을 받지 못한 CONCACAF와 CAF 소속 국가들이 들어갔다. 이 대회는 A조 톱시드로 전 대회 우승팀을 배정한 마지막 FIFA 월드컵 대회이다. 이 자리는 2006년 대회부터 개최국에게 고정적으로 배정되었다. 추첨 방식은 다음과 같다. 2001년 12월 1일, 부산의 벡스코에서 조추첨식이 열렸고, 각국의 일정이 최종 결정되었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잉글랜드, 그리고 스웨덴이 들어간 F조가 죽음의 조라는 평가가 나왔다. 복수의 국가가 승점에서 동률을 이룰 경우 다음 순서에 따라 조별 리그 순위가 결정되었다: 기존의 대회 본선 규정에서, 순위 규정은 다른 형식으로 결정되었는데, 상대 전적이 골득실차보다 우선이었다. 규정은 대회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으나, 기존의 규정 또한 FIFA와 UEFA의 웹사이트 등에 확인할 수 있어서, 올바른 규정을 찾는데에 있어서 혼선을 빚었다. A조는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가 세네갈, 우루과이, 그리고 덴마크와 경합하였다. 이번 FIFA 월드컵은 부상당한 지네딘 지단을 제외시킨 프랑스가 대회 새내기인 세네갈을 상대로 한 대한민국 서울에서의 개막전에 세네갈한테 0-1로 패배하였다. 다음날 울산에서 열린 덴마크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는 욘 달 토마손이 2골을 넣어 자국에 2-1 첫승을 안겨다 주었다. A조 두번째 경기에서 프랑스는 부산에서 지긋지긋한 적수 우루과이와 대적하였고, 티에리 앙리를 이 경기에서 퇴장으로 잃은 불운을 겪은 끝에 0-0으로 비겼으며, 대구에서는 덴마크와 세네갈이 1골씩 주고받아 비겼다. 덴마크는 이후에 인천에서 프랑스를 2-0으로 격파하고 전 대회 우승팀을 일찍 돌려보냈다. 전 대회 우승팀은 무득점으로 탈락하면서 FIFA 월드컵 전대회 우승팀들 중 최악의 성적을 냈다. (우루과이는 1934년에 불참을 선언했다.) 수원에서 열린 다른 A조 최종전 경기에서는 세네갈이 우루과이를 상대로 3-0으로 앞서나가다가 내리 3골을 실점해 3-3으로 추격당하기까지 했지만 남아메리카인들이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회 생존에 필요한 4번째 득점에 실패하면서 조2위를 사수하여 16강에 올라갔다. A조의 1위를 차지한 국가는 덴마크로 승점 7점을 획득하였고, 이어 세네갈이 5점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 2점밖에 획득하지 못한 우루과이는 전 대회 우승팀이자 승점 1점으로 조 최하위를 차지한 프랑스와 함께 탈락하였다. B조의 스페인은 경쟁국 슬로베니아, 파라과이 (각각 광주와 전주에서) 를 3-1로, 대전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3-2로 이기고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승점을 획득한 유이한 국가가 되었다. 파라과이는 서귀포에서 열린 처녀출전국 슬로베니아를 막판 결승골에 힘입어 3-1로 잡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골득실차에서 동률을 만들었다. (양팀은 4점으로 승점 동률을 이루었고, 부산에서 열린 서로간의 1차전 경기에서 2-2로 비겼다.) 그 결과, 6골을 득점해 더 많은 골을 득점한 파라과이가, 5골을 넣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치고 16강에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C조의 브라질도 옆조의 스페인처럼 3전전승을 거두었는데, 이들은 울산에서 터키를 2-1로, 중국을 4-0으로, 그리고 코스타리카를 수원에서 5-2로 제압했다. 브라질과 함께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국가는 터키로, 코스타리카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양팀은 인천에서 1-1로 비겼다.) 골득실차에서 우위를 점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 (5번의 FIFA 월드컵에서 모두 다른 국가를 지도하였다.) 가 이끄는 중국은 승점을 획득하기는 커녕 단 1골도 득점하지 못하였다.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은 D조에서 폴란드, 미국, 그리고 포르투갈과 한조에 들어갔고, 이들 4팀은 서로 혈전을 벌였다. 대한민국은 폴란드와 부산에서 첫 경기를 치렀으며, 대한민국은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로 2-0 완승으로 첫 FIFA 월드컵 승리를 쟁취하였다. 미국은 그 다음날 수원에서 포르투갈을 3-2로 손쉽게 제압하는 경이로운 결과를 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대구에서 결전을 펼쳤고, 양팀 골키퍼인 이운재와 브래드 프리델이 모두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1-1로 비겨 승점을 나누어 가져갔다. 조별 리그 최종전은 인천 (포르투갈-대한민국) 과 대전 (폴란드-미국) 에서 동시에 열렸고, 대한민국은 70분에 터진 박지성의 골에 힘입어 포르투갈을 귀국시켰고, 폴란드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3-1로 완승을 거두어 유종의 미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승점 7점을 적립해 사상 처음으로 조 1위까지 차지하였고, 미국은 승점 4점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승점을 3점씩 가져간 포르투갈과 폴란드는 각각 조 3위와 4위를 차지했다. E조에 속한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 아일랜드, 그리고 카메룬을 차례로 상대하였다. 아일랜드와 카메룬은 니가타에서 열린 E조 첫경기에서 1-1로 서로 비겼고, 독일은 삿포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진영을 8-0으로 해체하였다. 이바라키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독일은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19분 선제골에 힘입어 1-0으로 앞서나갔으나, 후반 인저리타임 2분에 집중력 부족으로 로비 킨에게 동점골을 실점해 비겼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이타마에서 카메룬을 상대로 후반에 사뮈엘 에토에게 실점하고 0-1로 패해 일찌감치 대회에서 탈락하였다. E조 최종전에서 독일은 시즈오카에서 마르코 보데와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연속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해 카메룬을 돌려보내고, 아일랜드는 요코하마에서 로비 킨, 게리 브린, 그리고 데이미언 더프의 연속골로 사우디아라비아를 3-0으로 제압하였다. 독일은 7점으로 조 1위를 차지하였고, 아일랜드가 승점 5점으로 그 뒤를 이었으며, 카메룬은 승점 4점으로 탈락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승점은 고사하고 무득점 12실점으로 대회를 꼴찌로 마무리했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잉글랜드, 그리고 스웨덴이 포진한 F조는 "죽음의 조"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바라키에서 열린 조별 리그 1차전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후반전에 터뜨린 결승골로 나이지리아를 1-0으로 이겼고, 사이타마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웨덴이 솔 캠벨과 니클라스 알렉산데르손이 나란이 골을 터뜨려 1-1로 비겼다. 스웨덴과 나이지리아는 이어지는 고베에서의 2차전에 서로 맞붙었고, 줄리어스 아가호와에게 선제골을 얻어 맞았으나, 헨릭 라르손이 2골을 터뜨려 나이지리아를 2-1로 역전시켜 탈락시켰다. 한편 삿포로에서는 잉글랜드가 데이비드 베컴의 페널티킥으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었다. F조 최종전에서 스웨덴은 아르헨티나와 미야기에서 1-1로 비겼고, 잉글랜드와 나이지리아는 오사카에서 득점 없이 비겼다. 스웨덴과 잉글랜드는 각각 승점 5점으로 나란히 1위, 2위를 차지해 F조에서 생존하였고, 승점 4점에 그친 아르헨티나는 그리하지 못하였으며, 나이지리아는 승점 1점으로 조 최하위였다. 이탈리아, 에콰도르, 크로아티아, 그리고 멕시코는 G조에서 서로를 맞닥뜨렸다. 니가타에서 G조 첫 경기가 벌어졌는데, 멕시코가 콰우테모크 블랑코의 페널티킥에 힘입어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날 밤 삿포로에서는 이탈리아가 처녀출전국 에콰도르에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2골로 2-0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이바라키에서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가 한판 승부를 벌였고, 크로아티아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2-1 역전승을 거두었다. 다음날 미야기에서는 멕시코가 에콰도르에 결정적인 2-1 승리를 거두었다. G조 최종전에서 멕시코와 이탈리아가 오이타에서 1-1로 비겼고, 에콰도르는 요코하마에서 크로아티아를 1-0으로 꺾어 FIFA 월드컵 첫 승을 맛보았다. 멕시코는 승점 7점으로 G조를 선두로 끝냈고, 이탈리아는 4점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승점 3점을 획득한 크로아티아와 에콰도르는 각각 조 3위와 4위로 탈락하였다. H조에는 또다른 공동개최국 일본이 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튀니지가 경합하였다. 일본은 사이타마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2-2로 비겨 첫 승점을 수확하였고, 러시아는 고베에서 튀니지를 2-0으로 제압하였다. 이후 일본은 요코하마에서 이나모토 준이치의 후반전 결승골로 러시아에 1-0으로 이겨 첫 FIFA 월드컵 승리를 거두었고, 벨기에는 오이타에서 튀니지와 1-1로 비겨 발목이 잡혔다. H조 최종전에서 일본은 오사카에서 튀니지에 2-0의 무난한 승리를 거두었고, 벨기에는 시즈오카에서 러시아를 3-2로 잡고 극적으로 생존하였다. 일본은 승점 7점으로 조 1위를 차지하였고, 벨기에는 5점을 확보해 다음 라운드 진출에 성공하였다. 러시아는 승점 3점, 튀니지는 1점으로 탈락하였다. 16강전은 서귀포에서 독일이 올리버 뇌빌의 결승골로 파라과이에 1-0 신승을 거두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 잉글랜드는 니가타에서 덴마크를 3-0으로 완파하였는데, 3골 모두 전반전에 터졌다. 스웨덴과 세네갈은 오이타에서 접전을 벌였고, 정규시간을 1-1로 마치고 앙리 카마라가 연장전에 골든골로 경기를 끝내 세네갈의 2-1 승리를 견인하였다. 수원에서는 스페인과 아일랜드가 경쟁하였고, 스페인은 경기시간 대부분을 1-0로 앞서다가 로비 킨에게 페널티킥을 얻어맞아 1-1로 정규시간을 끝내 연장전까지 뛰었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서 3-2로 이겼다. 미국은 브라이언 맥브라이드와 랜던 도너번의 릴레이골에 힘입어 CONCACAF의 숙적 멕시코를 전주에서 2-0으로 완파하였다. 브라질은 히바우두의 중거리 발리슛과 호나우두의 역습 마무리로 고베에서 벨기에를 2-0으로 격파하였다. 터키는 미야기에서 위밋 다발라의 12분 결승골로 1-0으로 이겨 공동개최국 일본의 행진을 멈추었다. 다른 공동개최국 대한민국은 대전에서 이탈리아의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후반 43분 설기현의 극적인 왼발 동점골로 연장전까지 승부를 펼쳤고 117분에 안정환의 골든골로 경기를 끝냈다. 골닷컴은 이 경기를 대한민국이 수많은 오심의 덕을 보아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이 8강행 막차에 오르면서 FIFA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국가들이 같은 대회의 8강에 이름을 동시에 올렸다. 8강에서 브라질은 잉글랜드와 시즈오카에서 경합하였고, 호나우지뉴가 데이비드 시먼의 머리를 넘기는 프리킥을 후반전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공시켜 경기를 2-1로 뒤집었다. 독일은 울산에서 39분에 터진 미하엘 발라크의 결승골로 미국을 1-0으로 침몰시켰고, 49분에 토르스텐 프링스가 골라인에서 공을 손으로 친 것에 대해 미국이 페널티킥을 요청하여 논란을 야기했으나, 주심은 이를 선언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광주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또다른 논란의 경기를 펼쳤고, 120분동안 득점 없이 비겼고,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4번째 키커 호아킨의 실축으로 5-3으로 이겼다. 스페인은 두 차례 득점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주심이 먼저 호루라기를 불었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개최국은 AFC 소속 국가로는 처음으로 FIFA 월드컵 준결승전에 오르면서 종전의 1966년 대회에서 8강에 올랐던 북한을 제쳤다. 나머지 8강전에서는 터키가 오사카에서 세네갈을 상대로 93분에 일한 만스즈의 골든골로 승리를 쟁취했다. 준결승전은 두 경기 모두 1-0의 접전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첫 준결승전에서는 독일이 미하엘 발라크의 결승골로 대한민국에 승리하였다. 그러나, 발라크는 옐로 카드를 받는 바람에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이타마에서 열린 그 다음날 경기에서는 호나우두가 후반전 시작과 함께 자신의 대회 6호골을 득점하였고, C조에서 싸우고 재회한 터키를 또다시 꺾었다. 대구에서 벌어진 3위 결정전에서 터키는 하칸 쉬퀴르가 상대의 킥오프를 가로채 10.8초만에 선제골을 기록하였고, 이는 FIFA 월드컵 역사상 역대 최단시간 득점이었다. 최종적으로 터키는 대한민국을 3-2로 이기고 대회 3위를 차지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호나우두의 두 골을 앞세운 브라질이 독일을 이기고 FIFA 월드컵 정상을 탈환했다. 호나우두는 후반전에서 12분 간격으로 두골을 뽑아내었고, 경기 후, 8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브라질은 통산 5번째 FIFA 월드컵 우승으로, FIFA 월드컵 역대 최다 우승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브라질은 1986년의 아르헨티나 이래 토너먼트전에서 한 번도 승부차기까지 가지 않고 우승한 국가가 되었으며, 1986년 대회 이후 (1982년에 승부차기가 도입되었으나 토너먼트전은 4경기에 불과했다.) 승부차기로 승부가 결정난 경기 수가 역대 최저 (2경기) 였다. 브라질은 1970년 이래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전승으로 우승한 국가가 되었고, FIFA 월드컵 우승국 역대 최고 골득실차 (+14) 의 기록도 세웠다. 브라질의 주장 카푸는 3번의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연속 출전하는 최초의 선수로 기록되었고, 자국의 대표로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본래 국내에 배정된 입장권은 매진되었고, 조직위원회는 4월 말까지 해외로 배당된 입장권 판매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개막전에 빈 좌석이 현저히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월드컵 입장권 판매국 (WCTB) 가 아직 팔리지 않은 입장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차차 밝혀졌다. FIFA가 이 입장권을 풀기로 하자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미야기의 일본 vs 터키 경기를 중심으로 전화판매를 하였으나, 양쪽 모두 매진이 아닌 것으로 확인했고, 700석가량이 비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대회 개최를 위해 각각 10개의 경기장씩 마련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대회를 앞두고 신축된 경기장이었다. A조부터 D조까지의 경기는 대한민국에서, E조에서 H조까지의 경기는 일본에서 열렸다. 2002년 FIFA 월드컵에는 각각 36명의 주심과 부심이 배정되었다. 대회 기간동안 심판의 판정에 논란이 수반되었다. 이탈리아-대한민국 경기의 판정에 대한 불만이 400,000건 접수되었고, ESPN은 10대 FIFA 월드컵 논란에 이를 선정하였다. 스페인-대한민국 경기에서 스페인 측은 호각 소리 이후에 골망을 가른 것을 골이라 주장했고, 이반 엘게라는 "도둑"이라 비난했고, 스페인 언론도 이에 동조해 "꿈을 앗아간 도둑"이라 비난했으나, FIFA는 단순한 인간적 오류일 뿐이라며 판정을 지지했다. 실제로 이탈리아-대한민국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들은 몸싸움에서 수 차례 팔꿈치를 이용하였고, 이 중 크리스티안 비에리 선수는 김태영의 안면을 팔꿈치로 가격해 코뼈 골절의 부상을 입혔으나,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대한민국-스페인 경기에서는 경기가 20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엔리케 로메로가 백태클로 김남일에 부상을 입혔으나, 역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 대회 본선에 참가하는 32개국은 모두 기존의 22명에서 증가한 23명을 엔트리에 등록하였다. 23명의 선수들 중 골키퍼는 3명이어야 했다. 조별 리그는 A조에서 D조까지는 대한민국에서, E조부터 H조까지는 일본에서 치렀다. 다음 조별 리그 순위표에서 다음은 해당 의미를 포함한다: 전 대회 우승국 프랑스는 새내기 세네갈과 덴마크에 패하고 무득점으로 A조에서 탈락하였고, 프랑스를 이긴 두 팀은 두 차례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전적이 있는 우루과이를 제치고 다음 라운드로 올라갔다.하지만 프랑스는 무득점으로 A조 꼴찌로 추락하였다. 스페인은 일찌감치 16강행을 확정짓고 조별 리그 3경기를 모두 이겼고, 슬로베니아는 2득점을 얻었으나 승점은 1점도 확보하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넬손 쿠에바스의 슬로베니아전 멀티골은 파라과이로 하여금 남아공보다 더 많은 득점을 기록하게 하여 16강전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남아공은 B조 최종전에서 슬로베니아가 파라과이를 이겼을 경우, 스페인에 지더라도 16강에 오를 수 있었으나, 본인들은 스페인에 2-3으로 지고, 슬로베니아마저 파라과이에 1-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16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브라질은 3경기를 모두 이기고 다음 라운드로 이동하였고, 그와 반대로 중국은 승점은 커녕 득점도 올리지 못하고 3전 3패(0득점 9실점)및 C조 꼴찌로 탈락하였다. 코스타리카는 허술한 수비로 인해 골득실차에서 밀려 탈락하였고, 그에 따라 터키가 조 2위를 차지하였다. 미국은 포르투갈을 3-2로 손쉽게 제압하는 이변을 연출한 후, 대한민국과 비기고, 폴란드에 1-3으로 완패하였으나,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데 필요한 승점을 충분히 적립하였다. 1차전에서 미국에 2-3으로 패했던 포르투갈은 2차전에서 폴란드를 4-0으로 이겼으나, 3차전에서 대한민국에 0-1로 지면서 탈락하였다. 폴란드 또한 미국과의 최종전에서 1승을 거두었으나, 그렇게 최종 조별 리그 에서 포르투갈, 폴란드는 3위, 4위로 조별리그를 마무리 하고 탈락 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독일과의 1차전에서 0-8로 박살난 것을 시작으로, 2차전에서는 카메룬에 0-1 패배, 3차전에서 아일랜드에 0-3으로 지면서 3전전패 무득점으로 12실점을 기록해 E조 꼴찌 및 대회 꼴찌(32위)로 탈락하였다. 독일은 카메룬을 2:0으로 누르고 조 1위로 토너먼트 16강전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의 로비 킨은 이 FIFA 월드컵 대회 내내 독일을 상대로 득점에 성공한 유일한 선수였고, (다른 한명은 결승전에 조우한 브라질의 호나우두) 인저리 타임 동점골에 힘입어 아일랜드의 조 2위를 견인하였다. 우승후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차기 우승후보로 꼽힌 아르헨티나 또한 스웨덴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1-1로 비기며 조별 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들은 2차전에서 잉글랜드에 0-1로 패배한 것으로 인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 스웨덴은 잉글랜드와 승점&골득실에서 동률을 이뤘으나 득점에서 앞서며 F조 1위를 차지하였고, 나이지리아는 잉글랜드와의 최종전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탈락했다. 멕시코는 조별 리그 처음 두 경기를 모두 이기고 무난히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이탈리아는 에콰도르가 요코하마에서 크로아티아를 이겨준 덕에 그대로 16강에 합류했는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멕시코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동점골을 득점했다. 그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이들을 상대로 첫승을 거둔 FIFA 월드컵 데뷔국 에콰도르가 남았고, 승점을 3점씩 적립하는데 그친 그들은 각각 조 3위, 4위를 차지하였다. 대한민국과 공동 개최국인 일본이 2승 1무로 조 1위를 차지했다. 벨기에 또한 러시아와의 최종전에서 멍군장군 경기 끝에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으나, 러시아와 튀니지는 각각 승점을 3점, 1점씩밖에 얻지 못하는데 그쳐 탈락하였다. 결선 토너먼트에서 16강전, 8강전, 그리고 준결승전은 A조, C조, F조, 그리고 H조를 통과한 팀의 경우 일본에서 치렀고, B조, D조, E조, 그리고 G조를 통과한 팀들은 대한민국에서 치렀다. 3위 결정전은 대한민국의 대구에서, 결승전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열렸다. 호나우두는 8골을 득점하여 이 대회의 득점왕에 올랐다. 도합하여 109명의 선수들이 161골을 터뜨렸고, 이 중에는 자책골 3골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책골 3골 중 2골은 같은 경기에서 나왔는데, 이로써 FIFA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한경기 양팀이 자책골을 기록한 첫 경기가 나왔다. 미하엘 발라크가 4도움으로 최다 도움을 기록하였다. 올리버 칸은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골든 볼 수상 골키퍼이다. 대회 종료 후, FIFA는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참가한 팀들의 진출 라운드와 결과를 상대적으로 반영한 최종 순위표를 발표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의 공식 스폰서는 두 분류로 나뉘었다: FIFA 월드컵 스폰서와 대한민국 / 일본 국가대표팀 스폰서. 한국팀이 출전하는 경기에서는 상대국 국가 가수와 한국의 성악가가 초청되어 현지 군부대 군악대의 취주악 반주에 맞춰서 해당국 국가와 애국가를 독창했다. 초청된 해외 가수는 터키전만 남성 가수가, 나머지는 여성 가수들이 초청되었는데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세계적인 가수들이 상대국 국가의 가수로 초청되었으며, 미국전은 한.미 친선의 의미로 한국인 소프라노 가수가 초청되어 미국 국가를 독창했다.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FIFA가 주최한 공식 문화 행사는 "바람의 시" 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의 난지천 공원에서 열렸으며, "바람의 시" 행사는 5월 29일부터 6월 25일까지 FIFA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고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깃발미술축제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참가해 손수 깃발을 그렸고, 화합을 추구하고 해외 손님들을 반기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2002년 깃발미술축제 조직위원회) 튜링상 튜링 상()은 ACM에서 컴퓨터 과학 분야에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매년 시상하는 상이다.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현대 전산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앨런 튜링의 이름을 땄다. 현재는 인텔사에서 후원하고 있으며 10만 달러의 상금이 부상으로 주어진다. 계산기 학회는 지난 2007년 6월 26일, 구글이 인텔과 함께 튜링상의 공동 후원을 맡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두 회사는 총 25만 달러의 상금을 각각 12만5천 달러씩 분담하기로 하였다. 앨런 튜링 앨런 매티슨 튜링(, , , 1912년 6월 23일 ~ 1954년 6월 7일)은 잉글랜드의 수학자, 암호학자, 논리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의 선구적 인물이다. 알고리즘과 계산 개념을 튜링 기계라는 추상 모델을 통해 형식화함으로써 컴퓨터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튜링 테스트의 고안으로도 유명하다. ACM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시상하는 튜링상은 그의 이름을 따 제정한 것이다. 이론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945년에 그가 고안한 튜링 머신은 초보적 형태의 컴퓨터로, 복잡한 계산과 논리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튜링은 1952년에 당시에는 범죄로 취급되던 동성애 혐의로 영국 경찰에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를 받아야 했던 그는, 2년 뒤 사이안화 칼륨을 넣은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사후 59년만인 2013년 12월 24일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튜링의 동성애 죄를 사면하였다. 이어서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 튜링은 15살 때 처음으로 수학적 연구결과를 도출했다. 그것은 역탄젠트 함수의 무한한 연속을 어림잡을 수 있는 계산 형식으로, 크게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후 튜링의 연구의 전체적인 방향을 보여준다. 즉 그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계산할 수 있는 실수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튜링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으며, 특히 막스 보른의 양자역학 강의와 리하르트 쿠란트의 미분 방정식 강의를 들으며 수치 해석을 비롯해 확률론, 통계학, 정수론, 군론 등에 관심을 가졌다. 1933년 튜링은 물리학자 에딩턴의 과학적 방법론을 수강하고 정규분포곡선(courbe normale)이라는 고전적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튜링은 자연 현상에서 규칙성 연구에서의 중심극한정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독일의 수학자 린데베르크(Jarl Waldemar Lindeberg)가 1922년에 먼저 증명한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를 증명했다. 이 증명으로 그는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리만 가설 등 소수의 개수에 대한 문제를 접한 튜링은 수치상으로 제타 함수를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제타함수 계산에 쓸 기계를 만들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냈으나,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전쟁 이후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다시 시도하게 된다. 이 기계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나, 튜링은 1953년에 제타 함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군론은 튜링이 평생 연구해온 분야인 수치상의 문제나 계산의 유효성과 거리가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가능한 모든 값의 치환을 통해 함수와 함수 풀이 영역 간의 구조적 상관성이라는 방법으로 튜링의 인생에 세 번의 영향을 주게 된다. 우선 1936년 튜링이 계산할 수 있는 수와 계산할 수 없는 수 사이의 경계선을 연구할 때 구조적인 계산의 유효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다음으로 함수이론의 연장선의 문제였고 셋째는 군론을 간접적으로 수치 적용해 양자역학과 암호학에 이용했다. 양자역학에서 군론은 상태 개념에 연관되어 있고, 암호학에서는 치환 개념과 치환 불변성의 개념에 관련되어 있다. 1936년 튜링은 결정가능성 문제에 대한 부정적 증명을 해낸 후 프린스턴 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이 때 튜링은 수리논리학의 알론조 처치와 군론의 존 폰 노이만을 만나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게 된다. 3년의 학업 이후 폰 노이만이 조교로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정중히 거절한 튜링은 케임브리지로 다시 돌아왔다. 튜링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만난 처치와 함께 수리논리학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그는 해결 불가능성의 정도의 산술적 서열을 구축함으로써 해결 불가능성의 개념이 고려된 형식 체계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인식 변화를 일구어냈다. 암호학과 통계학 분야에서 튜링이 전쟁동안 진척시켰던 연구 작업은 1996년 미국 정부에 의해 폐기되는 등 공개에 어려움을 겪어, 전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튜링이 없었다면, 영국은 전쟁에서 분명 패했을 것이다”라는 동료 D.미치의 인터뷰 증언 등을 고려할 때 그의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튜링은 당시 에니그마라 칭해졌던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냈으며 당시 컴퓨터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튜링은 수리논리학에서 정의된 계산, 조작 실행에 영향을 준 추상적 기계(알고리즘), 실행화시킨 물질적 기계를 토대로 이후 정보과학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암호학은 수학, 논리학, 물리학에 연관된 분야로 튜링은 전쟁 선포 이후 암호학 부서(GCCS)에 들어갔다. 열 명 남짓의 연구팀의 수장이 된 튜링은 독일 베를린의 잠수정 등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코드화하여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암호학의 새로운 기틀을 다졌으며 통계학과 기계화할 수 있는 논리적 방법을 통해 모순을 제거해 나갔다. 정보 개념, 혹은 데이터의 중요도는 원래 통계학적 속성인데, 선험적(a priori)가설로부터 경험적(a posteriori)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앨런 튜링은 1945년 10월 1일 테딩턴에 위치한 국립물리연구소(National Physical Laboratory, NPL)에서 영국의 첫 번째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전자 계산기 제작을 위한 수학 부서 창설을 추진했다. 그리고 맨체스터 대학교 등에서 컴퓨터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이 시기의 튜링은 전적으로 형태 발생과 수학적 모델화에 주력했다. 튜링 기계는 튜링이 알고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가상의 기계이다. 이 기계는 한정된 종류의 기호 중 하나를 기록할 수 있는 칸들이 무한히 이어진 띠와 각 칸의 정보를 읽고 수정하는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튜링 머신의 상태와 칸에 기록된 기호에 따라 지정된 절차를 수행한다. 튜링 머신이 수행하는 절차는 1. 현재 기계가 위치하는 칸의 기호를 수정 2. 띠의 위치 이동 3. 튜링 머신의 상태 변경 이 있다. 에니그마는 암호 작성과 해독을 돕는 기계로, 1918년 아르투스 슈르비우스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다. 이 기계는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이 군사 관련 정보를 암호화하는 데 쓰였다.작동 원리는 다중치환암호를 개선한 것이다. 다중치환 암호는 열쇠(key)값이 있을 때 그 열쇠값에 따라 암호화할 문장의 각 글자를 다른 글자로 치환한 암호를 의미한다. 에니그마는 기계적으로 다중치환 암호를 구현하고, 이에 스크램블러를 추가해 보안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튜링은 에니그마가 암호화와 복호화 둘 다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암호문의 스크램블러에 의한 효과를 없앴고, 자주 쓰이는 평문의 목록인 크립을 이용해서 이론적으로 에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하기 어려운 계산이 많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콜로서스라는 최초의 컴퓨터(많은 사람들이 에니악 컴퓨터가 최초라 알고 있지만, 이것은 당시에 영국 정부가 콜로서스의 존재를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튜링은 수학, 암호학, 생물학 등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 활동을 했지만, 특히 컴퓨터 과학 분야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컴퓨터 과학 및 전산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가 구상한 튜링 기계의 무한히 긴 띠는 컴퓨터의 메모리에, 기호를 읽는 기계는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CPU)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튜링 기계의 한 종류인 범용 튜링 기계는 프로그램을 내장해서 작동하는 현대의 컴퓨터를 많이 닮아 있다. 이외에도 콜로서스 개발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 계산기 학회(ACM)에서는 튜링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66년부터 매년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한테 주는 튜링상을 제정하였다. 현재 튜링상은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인공 지능에게는 뢰브너 상이 수여된다. 애플 컴퓨터의 로고인 "한 입 베어먹은 사과"는 튜링을 연상시키지만, 애플 컴퓨터가 로고를 만들 때 튜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애플 컴퓨터에서는 로고의 모델이 뉴턴의 사과라고 주장한다.(애플 컴퓨터를 창립한 스티브 잡스도 뉴턴의 사과를 모델로 애플 컴퓨터를 창립했다고 한다.) 적혈구 적혈구(赤血球, ) 또는 붉은피톨()은 가운데가 패인 원반 모양을 한 세포이다. 혈액 속에 들어 있으며, 이들이 혈구에 고루 분포하고 있어 혈액이 붉게 보인다. 적혈구는 허파에서 몸의 모든 세포들로 산소 운반을 위해 특화된 도너츠 모양의 세포로, 고도의 산소 보유능력을 가진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을 개당 약 2억 8천만 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개의 적혈구는 약 11억 2천만개의 산소 분자를 운반할 수 있다. 이 헤모글로빈에는 철을 함유하고 있어 붉은 색을 띠며, 적혈구가 붉은 색을 띠는 원인이 된다. 또한 헤모글로빈은 적혈구 건조 중량의 약 95%를 차지한다. 그리고 적혈구는 골수에서 생성되며 골수에서 처음 생성될 당시 미성숙 상태인 적혈구들은 핵을 가지고 있으나, 성숙 과정에서 세포핵이 퇴화하여 없어진다. 적혈구는 혈액의 혈구 세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정상 적혈구의 수명은 평균 120일이다. 혈액 1 mm³ 에 남자는 약 500만 개, 여자는 450만 개 가량의 적혈구를 가지고 있다. 적혈구는 직경이 7.2~8.4μm 정도이며, 두께는 가장 두꺼운 부분이 2~3μm, 중심 부위는 1μm 정도이다. 포유류에서는 적혈구의 양면이 오목한 쌍요면체형으로 되어 있어 어느정도 휘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성질 때문에 좁은 모세혈관을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다. 또한 적혈구는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혈액형은 적혈구 세포막 외벽에 붙은 탄수화물 구조물이 항원으로 작용하여 결정된다. 적혈구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얀 슈밤메르담(Swammerdam, J.)으로, 그는 1658년에 초기 현미경으로 개구리 피를 연구하였다. 적혈구라는 이름인 "erythrocyte"는 그리스어에서 "빨강"을 뜻하는 "erythros"와 "빈 용기"를 뜻하는 "kytos"가 변한 "-cyte"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적혈구에는 핵이 없기 때문에 세포 중앙이 움푹 파여 있는 형태, 즉 중심부가 양쪽으로 오목한 도넛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할 경우 적혈구 직경은 평균 7~8μm, 두께는 평균 2.2μm 정도 되는데 중앙 함몰 부분은 0.46~1.16μ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적혈구의 형태는 공 모양의 적혈구보다 혈구 표면적이 넓어 가스교환의 효율을 높여주고, 삼투압에 대한 변화나 외부 충격에 저항력을 가지게 하고, 적혈구 막에 유연성을 가지게 해 적혈구 직경보다 좁은 모세혈관(모세혈관의 직경은 약 4μm에 불과하다)을 쉽게 통과할 수 있게 한다. 적혈구 내부는 대부분 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헤모글로빈(혈색소)이 약 1/3 정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소량의 당, 효소, 단백질, 전해질, 비타민 등을 함유하고 있다. 적혈구에서 대부분의 산소를 운반하는 물질은 철이온을 가진 헤모글로빈이다. 산소에 대한 헤모글로빈의 친화도는 혈중 수소 이온의 농도와 2,3-비스포스포글리세르산(2,3-BPG)의 영향을 받는다. 혈중 수소 이온의 농도가 높을수록(즉, pH가 낮아질수록) 산소에 대한 헤모글로빈의 친화도는 낮아진다. 이산화탄소는 체액에 용해되면 물과 반응하여 중탄산이 되면서 체액을 산성으로 만드는데, 생체 조직은 산소에서 에너지를 얻고 결과물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므로, 생체 조직에서는 적혈구가 허파에서 얻은 산소를 쉽게 내놓게 된다. 2,3-BPG 역시 산소에 대한 헤모글로빈의 친화도를 떨어뜨린다. 순수한 헤모글로빈은 산소에 대한 친화도가 매우 높다. 실제로, 순수하게 분리해 낸 헤모글로빈은 오직 8%만의 산소만을 해리시킨다. 이것은 일반적인 생체 환경에서 77%의 산소를 해리시키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혈중에 존재하는 2,3-BPG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한편, 혈액 내 적혈구의 수가 감소하거나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의 농도가 낮아지게 되면 혈액의 산소 운반능이 저하되어 빈혈이 발생한다. 혈액 혈액(血液) 또는 피는 몸 안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회수하여 운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체액이다. 보통은 피라고 부른다. 혈액은 결합 조직의 한 종류로 액체 성분인 혈장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과 같은 각종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경우 혈액 속의 세포 용적은 여성의 경우 약 38%, 남성의 경우 약 46% 정도이다.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의 피가 붉은 색인 것은 적혈구 안의 철분이 산소와 결합하여 붉은 색을 띠기 때문이다. 혈액이 하는 역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동물의 혈액은 혈장과 혈구로 구성된다. 척추동물의 경우 혈구는 혈액의 약 45%, 혈장은 혈액의 약 55% 정도를 차지한다. 혈장의 91%는 물이다. 다음 표는 사람의 혈액 조성이다. 혈구에는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이 있으나, 무척추동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혈구만 볼 수 있다. 적혈구는 호흡 색소(혈색소)인 헤모글로빈을 포함하고 있는 혈구로서, 낙타·라마를 제외한 일반적인 포유류의 적혈구는 한가운데가 들어간 원반 모양이며 핵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낙타·라마 류의 동물의 적혈구는 타원형이고, 한가운데에 핵이 있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어느 것이나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주로 혈장에 들어 있다. 백혈구는 혈색소를 갖지 않는 혈액 속의 세포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혈액을 가진 모든 동물에서 볼 수 있다. 혈소판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으로서, 핵은 없고 혈액 응고 작용에 관계한다. 이러한 혈구, 특히 적혈구를 만드는 기관을 조혈 기관이라고 한다. 양서류 가운데 무미류와 파충류·조류 및 포유류에서는 골수가 대표적인 조혈 기관이다. 양서류 가운데 유미류에서는 지라와 몸 속에 흩어져 있는 특정한 종류의 조직이 조혈 기관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 한편, 조류나 포유류에서는 발생 단계에 따라 조혈 기관이 변한다. 즉, 배(胚)의 시기에는 간, 배의 후기에는 지라나 골수에서 혈액이 생성된다. 한편, 오래 된 혈구는 주로 지라나 간 및 골수에서 파괴된다. 백혈구는 배의 시기에는 간·지라 및 골수에서 만들어져 지라에서 파괴된다. 혈장의 약 91%는 물이고 혈장 단백질은 혈장 가운데 약 7%를 차지한다. 일부 항체와 단백질 형태의 호르몬을 제외한 대부분의 혈장 단백질은 간에서 생성된다. 혈장 단백질은 수소 이온을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어 혈액의 pH를 7.4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글로불린은 알파, 베타, 감마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알파와 베타는 간에서 합성되고 감마글로불린은 림프계통에서 합성된다. 림프계통에서 합성되는 감마글루블린은 면역 항체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혈장 단백질은 알부민, 글로불린, 피브리노겐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부적으로는 약 80여 종에 이른다. 알부민은 가용성 단백질 가운데 황산암모늄으로는 침전되지 않는 단순 단백질을 총칭하는 것이고, 글로불린은 물에 녹지 않으며 약한 염기성또는 중성 염류 용액에 녹는 단순 단백질이다. 한편, 피브리노겐은 수용성 단백질로 혈액 응고에 관여하여 혈소판의 침전 속도와 혈액의 점성에 영향을 미친다. 혈장 단백질은 거대 유기 분자와 결합하여 운반 작용을 하는데, 알부민은 헤모글로빈의 분해 산물인 빌리루빈을 운반하고, 글로불린을 포함하고 있는 지단백질은 콜레스테롤을 운반한다. 혈구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이 있다. 적혈구는 혈색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운반한다. 적혈구는 척추동물의 경우 낙타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운데가 움푹한 원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지름 약 7.5µm 두께 약 1.5µm이다. 적혈구에 있는 혈색소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는 포르피린과 구상 단백질인 글로빈의 복합체이다. 혈액은 혈색소 덕분에 동일한 양의 물보다 약 60배 많은 산소를 수용할 수 있다. 백혈구는 적혈구와 달리 자체적으로 세포핵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 염색하였을 때 세포내에 알갱이가 염색되는 과립성 백혈구와 알갱이가 염색되지 않는 무과립성 백혈구로 구분된다. 과립성 백혈구로는 염색 특징에 따라 호산성 백혈구, 호염기성 백혈구, 호중성 백혈구가 있고, 무과립성 백혈구로는 림프구와 단백구가 있다. 백혈구는 골수에 있는 공통 조상 세포인 조혈모세포에서 증식된 뒤 혈액 속으로 유입된다. 혈소판은 골수의 거핵 세포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부정형의 조직으로 크기는 약 3-4µm이다. 주된 역할은 손상된 혈관에서 응고 작용을 일으켜 혈액의 손실을 막고 혈관의 재생을 돕는 것이다. 동물의 혈관계는 개방 혈관계와 폐쇄 혈관계로 나뉜다. 절지동물인 새우의 경우, 개방 혈관계에서 산소가 포함된 혈액은 심장으로부터 혈관을 통해 몸의 중요한 부분까지 운반되는데, 혈관은 그다지 길지 않고 단순하다. 더구나 모세 혈관이 없으므로, 혈액은 혈관의 말단으로부터 직접 조직 속으로 흘러들어가, 세포 사이에 있는 체강액(체액)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직 세포에 산소를 공급한 혈액은, 정맥에 해당되는 단순한 혈관에 모인 후 아가미를 거치면서 산소를 많이 함유하여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계를 개방 혈관계라고 하며, 무척추동물에서 널리 볼 수 있다. 환형동물, 원색동물 및 척추동물 의 경우, 심장에서 나간 혈액은 허파나 아가미에서 가스 교환이 이루어지고, 대동맥을 통하여 몸의 세부에까지 산소를 운반하는데, 동맥과 정맥은 모세 혈관에 의해 연결되어 있어서, 개방 혈관계와는 달리 혈액이 조직 속으로 직접 흘러드는 일이 없다. 가스 교환은 모세 혈관의 얇은 막을 통하여 혈액과 조직 세포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또, 수분이나 영양분·노폐물 등도 모세 혈관의 벽을 통하여 조직 세포에 공급되거나 혈액 속으로 들어간다. 모세 혈관은 마침내 정맥으로 이어져, 혈액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은 순환계를 폐쇄 혈관계라고 한다. 혈액에는 여러 가지 물질이 녹아 있어서 무색인 경우는 드물다. 척추동물의 혈액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주로 적혈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헤모글로빈 때문이다. 무척추동물 중에도 혈액이 붉은색을 띠고 있는 것이 있으나, 이것은 혈장 속에 붉은색의 혈색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혈액 속에 직접 녹아 있는 산소의 양만으로는 생명 활동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산소와 능동적으로 결합하여 보다 많은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의 존재가 중요하게 된다. 이들 혈색소는 모두 금속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단백질로서, 산소 분압이 높은 호흡 기관에서 산소와 결합하며, 분압이 낮은 조직 세포에서는 산소를 해리하여 조직 세포에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혈색소는 산소 분자를 주고받는 일을 하므로 보통 '호흡 색소'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의 혈색소는 적혈구 속에 헤모글로빈으로 함유되어 있으나, 무척추동물의 다른 종류의 혈색소는 혈장에 들어 있다. 동물의 혈색소에는 헤모글로빈·헤모시아닌·클로로크루오린·헤모에리드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갑각류 등의 피가 녹색으로 보이는 까닭은 헤모시아닌에 함유된 구리때문이다. 헤모글로빈은 네 개의 햄 색소와 각각 알파와 베타로 불리는 두 개의 단백질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글로빈은 철을 포함하여 산소와 가역적인 방법으로 결합한다. 헤모글로빈은 세포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와도 결합하여 세포 조직으로 산소를 해리하고 이산화탄소를 체외로 내보내게 된다. 이때, 이산화탄소는 산소와 달리 햄 구조의 다른 부분에 결합하여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체내의 이산화탄소는 약 8%가 혈장에 녹아들고 20%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며 나머지 70%는 적혈구의 다른 부분에 스며들게 된다. 이산화탄소가 적혈구로부터 농도가 낮은 혈장으로 녹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적혈구는 물과 효소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를 탄산으로 변화시키고 이를 다시 중탄산이온과 수소이온으로 분리시킨 다음 중탄산이온은 혈장으로 내보내고 수소이온 만을 헤모글로빈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염화물 전환이라고 하며, 그 결과 혈장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주변 조직들로부터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두족류, 복족류와 같은 연체동물이나 대다수의 절지동물의 경우 혈색소는 헤모시아닌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모시아닌은 두 개의 구리와 산소가 결합하여 체내에 산소를 운반한다. 산소를 얻게 되면 산화구리의 색인 푸르스름한 빛을 지니게 되고 산소를 잃으면 무색이 된다. 대부분의 연체동물은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으나 일부 종류는 헤모글로빈과 헤모시아닌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린 때에는 헤모글로빈이 있다가 성체가 되면 헤모시아닌을 혈색소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연체동물 중에서도 혈색소가 헤모글로빈인 경우도 있는데, 피조개, 꼬막과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갯지렁이는 클로로크로우린을 혈색소로 사용하는데, 이 혈색소는 헤모글로빈과 같이 철을 산소와 결합하는 매개체로 사용하지만 헤모글로빈보다는 산소 결합력이 떨어진다. 혈중에 클로로크로우린의 농도가 높을 경우 붉은 색을 띄며 옅으면 녹색을 띈다. 혈액형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당단백질의 항원 기능에 따라 혈액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 대한민국 등에서 유행하는 ABO식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종의 사이비과학이다. 2006년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은 대한민국에서 성격과 혈액형에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혈액형 혈액형(血液型, )은 적혈구의 세포막에 있는 항원인 여러 종류의 당단백질의 유무에 따라 분류되는 혈액의 종류를 일컫는다. ABO식 혈액형이 유명하나 사람의 경우 이 외에도 RH식, MNSs, Lewis Duffy, Kidd 등 500여 가지 항원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ABO식과 RH식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수혈을 하였을 때 항원항체 반응으로 서로 다른 혈액형의 적혈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ABO식에도 많은 돌연변이가 있어 약(弱)A형이나 약B형의 경우 O형으로 오진될 수 있고, AB인자가 결합되어 O형의 배우자와 만나 낳은 자식이 AB형이 되는 시스-AB형, A인자와 B인자가 함께 있는 혈액 키메라 등이 생길 수 있다. 한편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도 혈액형이 구분되는데 개와 같은 경우 11가지의 혈액형이 알려져 있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구분된 방식. ABO식에 따라 서로 구분되는 인간의 혈액형의 종류는 A형, B형, AB형 그리고 O형 네 가지이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혈액을 섞었을 때 일어나는 응집반응의 여부로 구분하며, 이는 면역에서 말하는 항원항체반응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A형 항원과 B형 항체를 갖고 있는 A형 혈액과 B형 항원과 A형 항체를 갖고 있는 B형 혈액이 섞이면 항원 항체 반응으로 용혈이 발생한다. ABO 혈액형의 발견으로 항체와 반응할 수 있는 항원을 가진 혈액을 수혈할 수는 없음을 알게 되었으며, 전쟁터의 부상병이나 심한 출혈을 일으킨 부상자에게 수혈을 통해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AB형은 좀 더 늦게 발견하였다. 같은 란트슈타이너가 1940년 붉은털원숭이(rhesus monkey)의 혈액과 응집반응 여부를 통해 구분한 혈액형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이 혈액형은 어머니가 Rh-형이고 태아가 Rh+형인 경우, 첫 번째 출산으로 어머니의 몸 속에 Rh+에 대한 항체가 생겨 두 번째 아이의 임신에 영향을 주는 신생아 용혈성 빈혈에 중요하다. 또한 동양인은 Rh-형이 극히 적으므로, 수혈 시에 상당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Rh-형은 동양에서는 전체의 1%도 안 되는 반면, 서양에서는 Rh-형이 전체의 20%를 차지한다. 이런 희귀성 때문에 동양국가에서는 Rh-형인 사람들을 따로 등록해 두기도 한다. 바디바바디바(-D-/-D-)는 존재할 확률이 적은 희귀혈액형으로 Rh식 혈액형의 항원 C, D, E 중에서 일반인 대부분이 갖고 있는 C,E 항원이 없는 혈액형을 일컫는다. (참고로, 항원 CDE이 적혈구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Rh+, CE만 있다면 Rh-이다.) C와 E가 없다는 의미로 -D-/-D-로 표기하고, '바디바'로 발음한다. 부모 양쪽으로부터 모두 바디바(-D-)를 받을 경우에 나타나는데 만일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을 가진 산모가 다른 혈액형 남성의 아이를 가지면 혈액형부적합임신에 따라 이상항체가 만들어져 태아가 심한 용혈성질환에 걸려 심하면 태아 사망도 유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려면 부모에게 모두 인자가 있어야 하는데 인자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에 혈액형이 나타날 확률은 매우 적다. 30만명당 1명 꼴로 태어나고, 대한민국에는 2006년까지 3명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단 2차례의 보고 예만 있을 정도로 희귀한데, 그 중 한 예로 2004년 7월 이 혈액형을 가진 산모가 유산에 따른 출혈 과다로 입원해 대한민국의 다른 바디바바디바 혈액형의 사람으로부터 혈액을 공급받았으나 혈액량이 부족해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일본에서 몇 년 전 헌혈 받아 냉동시켜 놓았던 혈액을 공수받아 위기를 넘겼다. 이 혈액형은 anti-D 혈청 시약을 약 200배 정도로 희석한 용액으로 환자 혈액과 반응시켜 검사하는데, 이 희석 용액에서는 일반적인 anti-D 시약에 의한 양성 반응을 보이는 검체에서는 음성이 보이는데 반해 이 혈액형을 가진 혈액과 반응시키면 양성 반응을 보이므로 구분이 가능하다. 양성 반응이 나타나면 이 혈액형을 의심하면서 확인 검사로 C항원과 D항원 검사를 시행한다. 미국버몬트대학 생물학자 브라이언 발리프 등이 참가한 연구팀이 '란저레이스(Langereis)형'과 '주니어(Junior)형'으로 구분하는 새로운 단백질을 발견했다. 각 단백질엔 'ABCB6'과 'ABCG2' 이 붙여졌다. 2006년까지 알려진 혈액형의 종류는 대략 500종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ABO와 Rh 혈액형이다. 이 두 종류만이 현재로서는 99% 이상의 수혈에 문제가 없게 할 수 있는 혈액형이다. 이 두 혈액형이 맞았을 때 수혈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수혈할 때 이 두 가지 혈액형만 검사를 한다. 혈액형이 다를 경우 용혈성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O형은 A, B, AB형 모두에게 수혈해 줄 수 있고, AB형은 모두에게 받을 수 있으나(소량) 전시상황 같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혈액형이어야 부작용이 적다. 병원에서는 원칙적으로 같은 혈액형만 수혈을 한다. 혈액형에 따라 질병의 유병율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일설에 따르면 A형은 위암(gastric cancer)에 걸릴 확률이 O형보다 약 1.1배 높다.O형 혈액형은 십이지장 궤양(duodenal ulcer)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것은 소화기 질환이 병태생리학적으로 진행될 때 생기는 출혈때 적혈구의 항원-항체 반응이 위점막에 끼치는 영향이 각기 다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소화기 질환뿐만 아니라, 혈액형별로 세균 및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성이 다르다고 주장한다.예를 들면 O형인 사람들은 다른 혈액형 보유자들에 비해 말라리아에 대한 내성이 높거나 AB형 보유자들은 비교적 콜레라에 강한 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예. 이것은 대륙간,인종간 혈액형 분포의 차이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O형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것은 특정 바이러스가 그 지역 및 인종에 광범위하게 유행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특정 혈액형이 압도적으로 많아졌고 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일부의 주장에 불과하며 아직 혈액형 관련 질병에 따른 유병율의 차이에 관한 연구결과가 미비한 상황이라 아래의 혈액형의 따른 성격의 차이처럼 신빙성은 없다.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믿지 않으나, 대한민국과 일본 사람들이 ABO식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믿는 경우가 많다. 다윈과 골턴, 멜더스 이후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우생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주로 백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들이었다. 1901년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발견된 ABO식 혈액형 지식이 도입되면서, 191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의 에밀 폰 둥게른(Emile von Dungern) 박사는 ‘혈액형의 인류학’이라는 논문에서 혈액형에 따른 인종 우열 이론을 폈다.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 유럽민족, 즉 게르만민족의 피가 A형이고 그 대척점에 있는 B형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아시아 인종에게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런 연구를 통해 A형이 우수하고 B형은 뒤떨어지며, 따라서 B형이 비교적 많은 아시아인들은 원래 뒤떨어진 인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후, 이러한 주장은 거짓인 것으로 밝혀졌다. 1916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일본인 의사 키마타 하라는 혈액형과 성격을 연결시키려는 조사 논문을 발표한다. 1925년경,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병사들의 혈액형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그 정보가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영향을 받아 철학을 공부하고 동경여자사범학교의 강사로 있던 후루카와가 1927년 8월 자기 친척, 동료, 학생 등 319명을 조사해 <혈액형에 의한 기질연구>라는 논문을 일본심리학회지에 발표하였는데, 일본은 황인종의 나라이니만큼 차마 인종간의 우열기준으로 사용하진 못했고 그 대신 성격을 나누는 기준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의 이론에 따라 1930년대 처음으로 이력서에 혈액형 칸이 생겼다. 고용될 사람이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할 것인지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1937년 외무성 관련 업무를 하던 한 의사는 O형인 사람이 더 훌륭한 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 설은 그다지 지지를 얻진 못하고 일단 사라졌으나 전후 이 설의 영향을 받은 작가 노오미(能見)의 책(1971년)이 인기를 얻으면서 《혈액형 인간학》이 유행을 일으켰다. 노오미는 작가생활을 하면서 만나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에 따라 ABO식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에 대해 저술했다. 이후 이 이론은 여성지 등을 중심으로 궁합문제, 직업문제, 대인관계, 학습법 등으로 응용되고 온갖 파생 상품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여러 학자들의 비판으로 그 붐이 가라앉긴 했지만, 현재도 많은 관련 잡지와 책 등이 출판되고 있으며 점술업 등에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한 혈액형 성격설 맹신자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난다는 심리학회의 연구결과가 있는데 이는 피그말리온 효과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고 한다. 이렇게 통계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근거 없는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사람들이 계속 믿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심리학에서는 다음 이론들로 설명된다. 금속 금속(金屬, metal)은 일반적으로 단단하고 광택이 있으며, 열 전도율과 전기 전도도가 높은 물질을 아우른다. 화학에서는 전이 금속과 전이후 금속을 통틀어 일컫는 표현으로 쓰이나, 간혹 준금속을 금속의 정의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상온에서 고체 상태로 존재하며, 특유의 광택을 띠고 열과 전기를 잘 전달하는 도체로, 연성과 전성을 갖는다. 주기율표 상에 위치하는 118개의 원소 중 대략 4분의 3 정도가 일반적인 금속의 정의에 해당된다. 철, 구리, 알루미늄, 금, 주석, 우라늄 등이 자연 상태에서 흔히 발견된다. 보통 금속 원소는 전자를 잃고 양이온이 되기 쉬우며, 비금속은 반대로 전자를 얻기 쉽다. 천문학에서는 수소와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금속이라 하기도 한다. 금속은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청동기 시대나 철기 시대 등, 그 시대에 주로 쓰인 금속의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금속은 예로부터 인류의 생활을 지탱하고 문화의 발전에 주역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도서 지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 중에는 전혀 금속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용하더라도 아주 한정된 범위에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금속 중에 무기나 농기구로서 그 위력을 보인 것은 청동(구리와 주석의 합금)과 철인데, 이 철이 이용되지 않는 문명이라면 어느 정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즉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의 침략을 받은 끝에 멸망한 남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잉카 문명·마야 문명)이 그 예로서, 이들은 금이나 은은 풍부했으나 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철을 몰랐다고 해서 그 문명이 원시적 단계에 있었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훌륭한 국가 조직을 이루고 있었으며 특히 토목 기술은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웅장한 피라미드나 궁전의 유적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소수의 스페인인들의 손에 의해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주로 철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이 없으면 무기가 약할 수 밖에 없고, 그뿐만 아니라 산업 전체가 뒤떨어지게 마련이다. 농업에서도 나무나 석기 농기구로 경작하는 것이므로 그 생산력이 여간해서는 증진되지 못함은 뻔한 일이다. 전체 산업이 뒤떨어지면 그 사회 전체의 힘도 약하다. 그러므로 어떤 부분이 아무리 발달했더라도 남미의 고대국가는 실은 힘이 약한 사회였던 것이다. 금속 재료가 우리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옛날부터 금속이 너무도 인간 생활에 가까이 있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금속을 잘 이용하는 일이 고대의 인류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그 이상으로 우주 시대인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철에 습기 있는 공기가 닿으면 부슬부슬한 녹으로 변한다. 녹은 철과는 그 성질이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 녹은 철이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철은 자연 상태로는 산화물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철의 원료는 적철광(FeO)이나 자철광(FeO)으로, 철이 산소와 결합된 것이다. 이것은 철의 경우에만 한하는 현상은 아니다. 다른 금속도 대부분은 산화물 또는 다른 원소와의 화합물로서 자연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지각 중의 암석이다. 지각의 암석을 형성하고 있는 원소는 산소와 규소가 그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금속 원소는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금속 원소가 어디나 균일한 비율로 지각 속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면 암석 중의 금속 함유량은 매우 적은 것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각의 평균 화학조성을 중량의 백분율로 나타낸 클라크 수에 의하여 계산해 보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납 덩어리(부피 약 180cm, 무게 약 2㎏)를 얻기 위해서는 약 100t의 암석을 채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만한 암석을 채집한다는 것은 운반비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들게 된다. 다행히도 지각 중의 금속 원소는 어디나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 지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금속 원소는 각각 농도 높은 광석으로 되어, 이른바 광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광상을 채굴함으로써 인간은 경제적으로 광석에서 금속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납을 예로 들면 지각 중의 평균 함유량은 0.002%에 지나지 않지만, 광석 중에는 약 5%의 납이 들어 있다. 뉴턴 운동 법칙 고전역학에서, 뉴턴 운동 법칙(Newton運動法則, )은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세 개의 물리 법칙이다. 아이작 뉴턴이 도입한 이 법칙들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룬다. 중세를 거치면서 임페투스라는 관성과 유사한 개념이 도입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7세기 초에 관성의 개념을 완성하고, 실험을 통해 오늘날 뉴턴 제1 운동 법칙으로 불리는 관성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오늘날의 세 개의 뉴턴 운동 법칙은 아이작 뉴턴이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제1권에 처음 서술하였다. 뉴턴은 이 책에서 만유인력의 법칙과 뉴턴 운동 법칙을 사용하여 케플러 법칙을 비롯한 당시 알려진 모든 천체역학을 수학적으로 유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뉴턴의 운동법칙은 처음으로 회전체의 운동, 유체 안에서의 운동, 발사체의 운동, 빗면에서의 운동, 진자의 운동, 조석, 달과 천체의 궤도와 같은 물리학적 현상들에 대한 광범위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뉴턴이 제2법칙과 제3법칙을 써서 유도한 운동량 보존법칙은 물리학사상 최초의 보존법칙으로 여겨진다. 뉴턴의 법칙들은 200년이 넘게 실험과 관측을 통해 입증되어 왔다. 이 법칙들은 인류의 척도(10~10m의 길이에서 0~10m/s의 속도를 갖는 척도)에서 일어나는 운동학을, 관측 결과보다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대략 모든 속도들이 빛의 속도의 1/3 이하라면 뉴턴의 법칙은 대부분의 경우 그 오차를 무시할 수 있는 정도로 정확하다.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나 갈릴레이의 법칙으로도 불린다. 즉, 물체에 가해진 알짜힘이 0일 때 물체의 질량 중심의 가속도는 0이다. 제1법칙은 단순히 제2법칙에서 알짜힘이 0인 경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제2법칙과 제3법칙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기준틀의 개념을 정의한다. 이러한 기준틀은 관성기준틀이라고 부르며, 가속도가 0인 상태로 등속 직선 운동을 하는 관찰자의 기준틀이다. 등속 원운동은 등속력 운동이지만 속도의 방향이 바뀌므로 지구와 같은, 등속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의 기준틀은 엄밀히 말해 관성기준틀이 아니다. 그러나 지구의 운동으로 인한 오차는 (지구의 궤도 및 크기가 매우 크므로) 일반적인 실험에서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빗면을 따라 공을 굴리는 실험을 통해 만약 마찰력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면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모든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즉, 가만히 있는 물체는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계속 가만히 있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그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부터 갈릴레이의 이론(뉴턴의 제1법칙)으로 생각이 전환된 것은 물리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마찰력은 모든 움직이는 물체에 작용하여 물체를 느리게 하고 결국엔 정지하게 만든다. 아이작 뉴턴은 모든 물체의 운동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힘으로 보고, 이에 기반을 둔 수학적 모형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물체에 더 큰 알짜힘이 가해질수록 물체의 운동량의 변화는 더 커진다. 한 물체 A가 다른 물체 B에 힘을 가하면 이에 따라 B의 운동량을 바꿀 수 있다. (제3법칙에 의하여, 이런 경우는 A의 운동량이 감소하는 만큼 B의 운동량이 증가하므로, 두 물체가 힘을 통해 운동량을 서로 교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2법칙을 수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만약 물체의 질량 formula_2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여기서 위의 방정식에서 물체의 질량은 물체 고유의 성질이다. 일정한 질량 "m"을 가진 물체에 대해서만, 그 물체에 더 큰 알짜힘을 가할수록 운동량의 변화가 커진다. 그러므로 이 방정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질량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또한 F = "m"a에서, a는 직접 측정이 가능하지만 F는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이 아니다. 제2법칙은 단지 우리가 F의 값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힘의 계산법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또한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물체의 질량이 변할 수 있다면 formula_9을 적용할 수 없고, 좀 더 일반적인 다음과 같은 식을 쓴다. 운동량을 formula_11와 같이 표현하는 경우 (formula_12는 로런츠 인자), 이 방정식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도 유효하다. 전통적으로, 제3법칙은 "모든 작용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한다"라고 쓴다. 이 설명들은, 누군가가 물체를 200 N의 힘으로 때리면 그 물체 또한 같은 힘으로 그 사람을 때린다는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성만 항성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항성 또한 행성에 이끌리고 있다. 반작용력은 작용의 반대 방향을 가지고, 그 크기는 동일하다. 하지만 작용력과 반작용력이 항상 일직선상에 위치할 필요는 없다. 두 쌍극자가 점전하와 쌍극자를 잇는 선에 수직하게 위치한 경우, 점전하가 전기 쌍극자에 가하는 힘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힘이 점전하와 쌍극자를 잇는 선에 수직인 경우 점전하에 대한 반작용력은 반대 방향을 취하겠지만, 작용력과 반작용력이 서로 평행한 경우에는 공간 내에서 서로 겹쳐지지 않게 된다. 힘은 운동량의 시간 변화율이므로, 제3법칙에 따르면 A의 운동량이 줄어드는 만큼 B의 운동량이 늘어나게 된다. 즉, 계의 총 운동량의 보존을 의미한다. 반대로, 운동량 보존 법칙으로부터 제3법칙을 유도할 수 있다. 때때로 전자기력에서는 제3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즉, 물체 A가 B에 가하는 로런츠 힘은 B가 A에 가하는 힘과 일반적으로 다르다. 이는 A와 B가 생성하는 전자기장이 가진 운동량 교환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기장이 가진 운동량을 계산에 포함시키면 계의 총 운동량은 보존되며, 이에 따라 제3법칙이 성립하게 된다. 위에 인용한 제3법칙은 엄밀히 말해 제3법칙의 '약한 형태()다. 이에 따르면, 작용력과 반작용력은 크기가 같고 방향은 서로 반대지만, 그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는 서술하지 않는다. 즉, 입자로 이루어진 계에서, formula_13가 입자 b에 의한 입자 a에 대한 힘이라고 쓰면 제3법칙의 약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고전 역학적 힘은 이 조건을 만족한다. 이로써 질량 중심과 같은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제3법칙의 강한 형태()에 따르면, 작용력과 반작용력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서로 반대일 뿐만 아니라 두 힘의 방향이 두 입자를 잇는 직선과 평행해야 한다. 즉, 만약 a가 formula_15에, b가 formula_16에 위치해 있다면 두 힘은 다음과 같은 꼴을 취한다. 만유인력은 제3법칙의 강한 형태도 만족하지만, 전자기학의 로런츠 힘은 제3법칙의 약한 형태만 만족하고, 강한 형태는 만족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점전하와 쌍극자를 잇는 직선에 수직으로 위치한 점전하와 완전쌍극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제3법칙의 강한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 또한 예시로 로켓런쳐, 총 등을 쏠때 탄환과 반동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1916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인류가 이때까지 해왔던 모든 예상 척도를 뛰어넘는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빛의 속도에 비해 매우 낮은 속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모형은 고전역학으로 수렴한다. 즉, 속도가 빛의 속도에 비해 매우 작으면 속도의 로런츠 인자 formula_12는 1에 수렴한다. 기단 기단(氣團, )은 대략적으로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비슷한 성질의 공기의 덩이를 말한다. 기단은 형성된 지역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게 된다. 기단은 바다나 대륙과 같이 같은 성질의 지표면과 대기가 오랫동안 접촉하고 있으면 열 또는 수증기를 교환해서 같은 성질을 가진 거대한 공기의 덩어리 즉 기단이 된다. 대기가 지표면과 오래 접촉하려면 바람이 약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조건이 된다. 이와 같은 조건에 맞는 곳은 고기압권 내이므로 기단의 명칭은 고기압의 이름과 일치되는 수가 많다. 예를 들면 북태평양 기단 · 오호츠크해 기단 · 시베리아 기단 등을 들 수 있다. 기단의 성질은 온난 · 한랭 · 습윤 · 건조를 조합해서 표시한다. 해양에서 발생한 기단은 습윤하고 대륙에서 발생한 기단은 건조하다. 기단은 언제까지나 발원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상 상황에 따라 발원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기단은 하층에서부터 점차 이동해 온 지표면의 영향을 받아 성질이 변해 간다. 차가운 기단이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해 오면 하층에서부터 따뜻해지기 때문에 불안정해진다. 그래서 기단 상층까지 급격하게 변질된다. 특히 대륙성 한대기단이 따뜻한 해면 위에 이동해 온 경우에는 하층에서 열을 흡수하여 불안정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량의 수증기도 흡수하여 습도가 높아진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적운형 구름이 생기기 쉽다. 겨울에 시베리아 기단이 남동진하여 한반도 부근 해상에 도착했을 때는 시베리아 기단 원래의 찬 성질을 잃어 비교적 따뜻한 기단으로 변질된다. 오호츠크해 기단도 남하할 때 하층부터 따뜻해지는데, 시베리아 기단과 같이 급격하게 따뜻한 기단으로 변질되지는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따뜻한 기단이 차가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하층에서부터 냉각되어 안정을 유지한다. 그래서 기단 상층까지는 급격하게 변질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는 층운형 구름이 많이 생긴다. 여름에 태평양의 아열대 기단이 수온이 낮은 한반도 동해상으로 북상하면 하층에서 점차 냉각되어 종종 짙은 안개가 발생한다. 어떤 지역의 날씨 변화를 생각할 때 그곳이 어떤 기단에 덮여 있는지 또는 그 기단이 어디에서 발생하여 어떠한 경로를 거쳐 오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반도가 같은 시베리아 기단으로 뒤덮여 있을 경우라도 이 기단이 일단 중국까지 남하하고 나서 동진해 올 경우에는 기단은 이미 상당히 따뜻해져 있으므로 강한 찬 공기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시베리아 기단이 대륙에서 직접 한반도로 올 경우에는 한파와 서해안과 동해안, 울릉도, 독도, 제주도 등의 지방에 시베리아 기단으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대기와 상대적으로 따뜻한 바다의 온도 차로 인하여 발생한 눈 구름으로 인하여 많은 눈이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기단은 다음과 같다. 멘델의 유전법칙 멘델의 유전법칙()은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을 이용한 7년의 실험을 정리하여 1865년에서 1866년 사이에 발표한 유전학의 법칙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발표 초기 그리 큰 관심을 받지 않았으나 20세기 초 재발견된 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15년 토머스 헌트 모건이 보페리-서튼 유전자 이론과 함께 멘델의 유전법칙을 유전학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제시하였고, 이로써 고전 유전학이 완성되었다. 그레고어 멘델은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사제였다. 멘델은 1856년에서 1863년까지 교배 실험을 하여 얻은 29,000여 개의 완두콩에 대한 형질 조사를 바탕으로 멘델의 유전법칙을 정리하였다. 그는 이 실험결과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1865년 2월 8일과 1866년 3월 8일에 브르노에 있는 자연사 학회에 〈식물 교잡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송고하였다. 멘델의 논문은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생물학은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으며, 멘델 스스로도 자신의 실험을 모든 종의 유전형질로 일반화시킬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유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오늘날 유전자 연관에 의해 설명되는 혼혈 유전이 전부였다. 멘델은 자신의 실험이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자 낙담하였고, 얼마 후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자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자신의 실험에 만족하며 이 실험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1900년 무렵 휘호 더프리스, 카를 코렌스, 에리히 폰 체르마크와 같은 유럽의 과학자들이 잇달아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였다. 더프리스는 자신의 연구 논문 각주에 멘델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명기하였으며, 코렌스는 더프리스의 논문을 참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체르마크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법칙을 발견하였다고 여겼다. 1905년 윌리엄 베이트슨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유전자", "대립형질"과 같은 용어를 정립하였다. 베이트슨은 1906년 런던에서 열린〈제3차 국제 식물 잡종 연구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재발견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표하였고 이와 관련한 학문에 유전학이란 이름을 붙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1902년 당시 대학원생에 불과하던 미국의 월터 서튼과 독일의 동물학자 테오도르 보페리는 서로의 연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멘델의 유전법칙을 일으키는 원인이 염색체에 있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둘 다 실험적으로 이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노랑초파리에 주목하였다. 노랑초파리는 세대가 짧고 기르기가 쉬워 유전학 연구에 알맞은 모델 생물의 역할을 하였다. 1915년 모건은 수년 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멘델 유전법칙의 기제》를 발표하여 염색체가 유전형질을 전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고전 유전학이 정립되었다. 멘델은 완두콩을 오랫동안 자가수분하여 특정한 유전형질이 고정된 순종을 얻었다. 그리고 일곱 가지 대립되는 유전형질을 선택하여 이를 잡종 교배할 경우 자식 세대에 발현되는 형질은 어떻게 되는지 관찰하였다. 멘델은 실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다음과 같다. 순종의 대립 형질끼리 교배시켰을 때 잡종 제 1대(F1)에서 우성 형질만 발현한다. 원래 '우열의 법칙'으로 불렸으나, '우열의 법칙'이라고 하기에는 어긋나는 예가 많아 '우열의 원리'로 정정되었다. 우성만이 발현된 잡종 제1대(F1)를 자화 수분하여 얻은 잡종 제 2대(F2)에서 의 확률로 열성이 분리된다. 멘델이 선택한 7가지 대립형질 중 두 쌍 이상의 대립 형질이 유전되는 경우, 각각의 형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현한다.(오른쪽 그림 참조) 완두콩이 아닌 다른 식물의 경우 붉은 꽃과 흰 꽃의 잡종 1세대가 분홍색 꽃으로 발현하고 잡종 2세대에서 붉은 꽃, 분홍 꽃, 흰 꽃이 1:2:1로 발현하여 어느 한 쪽 형질이 완전한 우성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불완전 우성이라 한다. 불완전 우성의 경우에도 유전형의 전달은 여전히 멘델의 법칙을 따른다. 여러 유전자가 연관되어 유전형이 발현될 경우에는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양적 형질 위치를 보이는 사람의 피부색과 같은 유전 형질은 수 많은 유전자가 연관되어 발현하기 때문에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대립 형질의 유전자 사이의 우열 관계가 불완전하여 유전자형이 잡종일 경우 중간 형질이 나타난다. 이 때, 대립 유전자 사이의 우열 관계가 불완전하여 우열의 법칙에 어긋나고, 잡종 제 2대에서 유전자형과 표현형의 분리비가 일치한다. 예를 들어, 분꽃의 꽃 색깔의 경우, 붉은색 분꽃의 유전자형을 RR이라 하고 흰색 분꽃의 유전자형을 WW라 할 때, 이들의 생식 세포의 유전자형은 각각 R과 W가 된다. 이 두 생식 세포가 결합하여 생긴 잡종 제 1대(F1)의 유전자형은 RW(잡종)이며, 분홍색으로 표현된다. 또한, 잡종 제 1대의 생식 세포인 R,W를 사화 수분시키면 잡종 제 2대(F2)에서 붉은색(RR):분홍색(RW):흰색(WW)=1:2:1로 나타난다. 자연선택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으로 인한 진화가 후천형질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유전되었는가를 잘 알지 못했다. 다윈 사후 멘델의 유전법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여러 과학자들이 멘델의 유전법칙과 진화론의 연관성을 연구하여 진화는 후천형질이 아닌, 유전자의 변화임을 발견하고, 진화가 어떻게 자식세대에 유전되는지를 잘 설명하면서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다윈이 풀어내지 못한 진화의 유전 원인을 설명하였다. 현대 유전학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은 유성생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염색체의 감수분열 결과로 이해 된다. 즉, 평소 염색체는 2배체를 이루며 잡종 1세대에서 우성과 열성의 유전자는 각자 염색체 쌍을 이루고 있어 우성만이 발현된다. 그러나 생식세포는 감수분열로 인해 우성과 열성 가운데 한 가지의 유전자만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배우자와 다시 합쳐 잡종 2세대가 발생하기 때문에 위에서 살핀 우열의 법칙과 분리의 법칙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상 (물리학) 물리학에서 상(相, phase)은 일정한 물리적 성질을 가지는 균일한 물질계를 말한다. 물질의 상태 가운데 고체, 액체, 기체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플라즈마, 액정, 초유체, 초고체, 자석 등도 물질의 상이다. 상이란 기본적으로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이 물질이 갖는 여러가지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상은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거시적 성질을 보면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흐를 수 있는지에 따라 고체와 유체로 상을 구별할 수 있고, 유체도 용기에 담았을때 날아가 버리는지, 고이는지에 따라 액체와 기체로 구별할 수 있다. 어떤 물질의 경우엔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이 단순하게 몇 개의 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여러종류의 상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탄소의 경우, 잘 알려진 상으로 다이아몬드와 흑연이 있다. 두 결정은 모두 균일하고, 일정한 물리적 성질을 갖고, 같은 종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고체의 성질을 갖지만, 결정구조가 다름으로 인해 다른 물리적 성질이 생기게 된다. 또한 헬륨(He)의 경우에는 He I 과 He II 라는 두가지 액체 상을 갖기도 한다. 위의 상들은 기본적으로 온도와 압력의 변화를 통해 얻어지는 상들이지만, 다른 변화를 줌으로써 생기는 변화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상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주는 자기장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초전도상태를 갖는 물질은 초전도상태와 보통 상태 두가지로 나눌 수 있고, 강자성의 방향이 위쪽 또는 아래쪽이 되는 두가지 상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들의 경계는 거시적 물리량들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구간을 통해 상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다. 철은 고체, 물은 액체, 공기는 기체라고 하듯이 물질의 종류에 따라 각각의 상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상태는 온도 등의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예를 들면, 물은 보통 액체이지만 이것을 가열하면 증발하여 수증기(기체)가 되고, 냉각시키면 얼어서 얼음(고체)이 된다. 이와 같이 물은 고체·액체·기체의 3가지 상태로 변화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물질도 3가지 상태로 변화한다. 철도 용광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강하게 가열하면 액체가 된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서는 기체로도 된다. 또, 공기는 보통 기체이지만 압력을 가하고 냉각시키면 액체가 되고, 고체로도 된다. 이와 같이, 철이나 공기는 조건에 따라 고체·액체·기체의 어떤 상태로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에 따라서는 3가지 상태로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설탕은 가열하면 녹아서 액체가 되지만, 더욱 가열하면 증기로 되지 않고 분해하고 만다. 종이는 액체가 되는 일도 없이 분해하고 만다. 이와 같이, 물질 중에는 3가지 상태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또, 어떤 물질이든 고체로는 되지만 물질에 따라서는 액체나 기체가 되지 않는 것도 있다.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일을 '용융' 또는 '융해'라 하고,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것을 '증발' 또는 '기화'라고 한다. 반대로 기체가 액체로 변하는 것을 '응결' 또는 '액화'라 하고, 액체가 고체로 되는 것을 '응고'라고 한다. 물질의 고체·액체·기체 상태를 상(phase)이라 부르기도 한다. 얼음은 물의 고체상이고, 수증기는 물의 기체상이며, 실온에서의 물은 액체상이다. 또한, 고체가 용융하거나 기체가 응결하는 등의 변화를 상 변화라고 한다. 나프탈렌이나 장뇌는 가열하면 액체가 되지 않고 직접 고체에서 기체로 된다. 또, 기체가 액체로 되지 않고, 직접 고체로 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느 쪽이나 '승화'라고 한다. 승화의 예로는 이들 외에 아이오딘이 잘 알려져 있으며, 물에도 승화하는 성질이 있다. 0℃ 이하의 기온이 계속될 때 쌓인 눈이 녹지 않으면서도 줄어드는 것은 승화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얼음을 가열하면 0℃에서 녹아 물이 되고, 더욱 가열하면 1기압하에서는 100℃에서 끓어서 수증기가 된다. 이와 같이 물질 중에는 고체가 액체로 되는 온도와 액체가 1기압하에서 기체로 되는 온도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것이 많다. 이 온도를 각각 녹는점, 끓는점이라고 한다. 반대로 기체가 액체로 변하는 온도를 액화 온도, 액체가 고체로 변하는 온도를 어는점이라고 한다. 녹는점과 어는점, 끓는점과 액화 온도는 각각 같은데, 이 온도를 경계로 하여 상태가 변하는 것이다. 1기압하에서 승화하는 온도는 '승화점'이라고 불린다. 철이나 물, 공기는 온도나 압력의 조건을 바꾸면 상태가 변화하는데,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물을 컵에 넣고, 뚜껑을 닫지 않고 공기속에 놓아두면 물은 차차 증발하여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뚜껑을 단단히 닫아두면 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경우의 물과 수증기처럼 관련이 있는 것을 합쳐서 계(표)라 부르기도 한다. 위의 예에서는 컵 안에 있는 물과 컵 주위에 있는 수증기의 계에 대해서 증발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뚜껑을 덮지 않은 상태를 열린 계, 뚜껑을 덮은 상태를 닫힌 계라고 한다. 뚜껑을 덮지 않은 컵과 같은 열린 계에서는 물과 수증기가 공존하는데, 수증기는 컵 밖으로 자유롭게 퍼져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컵에서 물질이 빠져 나간다. 따라서, 계 안에 있는 물질의 전량이 변화한다. 한편, 뚜껑을 덮은 컵과 같은 닫힌계에서는 수증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컵 안에 있는 물질의 전량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열린 계와 닫힌 계에서는 물질이 출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어느 계에서나 에너지는 출입할 수 있다. 上平形圖 열린 계에서는 물이 계속 증발하여 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변화가 계속되지만, 닫힌 계에서는 얼마 후 증발을 멈추고, 일정 온도 아래에서는 그 이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물과 수증기의 계는 평형 상태에 있다고 하고. 이와 같이 평형 상태에 있는 증기를 포화 증기, 그 압력을 포화 증기압이라고 한다. 여기서 온도를 높이면 물은 수증기로 변하고 수증기의 양이 증가하여 그 압력이 증가한다. 반대로 온도를 내리면 수증기는 물로 변하고, 수증기의 양이 감소하여 그 압력도 감소한다. 또, 얼음이 승화하여 수증기로 되거나 수증기가 승화하여 얼음이 될 때도 얼음과 수증기 사이에는 위와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 또한, 얼음과 물은 0℃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이하의 온도에서도 압력을 가하면 얼음이 약간 녹아서 액체인 물이 된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즉, 얼음과 물이 함께 존재하는 온도도 압력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물의 응고점(어는점)인 0℃나 끓는점인 100℃는 모두 1기압에서의 온도이고, 압력이 증가하면 응고점은 내려가고 끓는점은 올라간다. 이와 같은 상태의 변화와 온도나 압력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세로축에 압력, 가로축에 온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리면 그림과 같이 된다. 이 그래프를 상평형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AT는 얼음과 수증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압력과 온도를 나타내고 BT는 물과 얼음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압력과 온도를 나타낸다. 또 CT는 물과 수증기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온도를 나타낸다. T점의 압력과 온도에서는 얼음과 물과 수증기가 동시에 안정하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삼중점'이라고 한다. 삼중점의 압력은 수증기압으로 4.58mmHg(높이 4.58mm의 수은주가 나타내는 압력) 온도는 0.0075℃이다. 이 그래프는 얼음·물·수증기 사이의 평형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공기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보통 물의 응고점은 760mmHg의 대기압 아래에서 0℃이므로, 삼중점의 값과는 좀 다르다. 또, 물을 서서히 냉각시키면 삼중점 이하로 내려가도 얼음이 되지 않고 액체 상태를 얼마 동안 유지한다. 이것을 과냉각 상태라고 하는데, 이 상태는 안정된 상태가 아니며, 휘젓거나 작은 얼음덩어리를 넣으면 금방 전체가 얼고 만다. 물뿐만 아니라 3가지 상태를 분명히 나타내는 물질에 대해서는 이러한 상평형 그림을 각각 그릴 수가 있다. 액체인 물은 1기압 100℃에서 수증기로 변한다. 따라서 1기압하에서는 100℃ 이상의 온도에서 액체인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100℃ 이상의 온도에서 물을 액체 상태 그대로 유지하려면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 압력을 가해서 218.3기압이 되면 물의 끓는점은 374.2℃가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온도가 되면 압력을 계속 가해도 물은 더 이상 액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 온도를 물의 임계 온도라 하고, 이때의 압력을 임계 압력이라고 한다. 공기는 1기압에서는 아무리 온도를 내려도 액체가 되지 않는다. 온도를 -140.7℃로 내리고 37.2기압보다 큰 압력을 가하면 비로소 액체가 된다. 즉, 공기의 임계 온도는 140.7℃이고, 임계 압력은 37.2기압이다. 이 이하의 온도에서는 더 낮은 압력을 가해도 액체가 된다. 얼음을 녹이려면 열을 가해서 온도를 높여야 하고, 물을 얼리려면 열을 빼앗아 온도를 내려야 한다. 이와 같은 상태의 변화와 열의 출입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얼음을 물로 변하게 하거나 물을 얼음으로 변하게 하는 경우와 같이, 고체―→액체―→기체의 변화는 열을 흡수하는 변화, 즉 흡열 변화(吸熱變化)이다. 이때 흡수되는 열은 물질의 내부에 에너지로서 저장된다. 이와는 반대로, 수증기를 물로 바꾸거나 물을 얼음으로 바꾸는 경우와 같이, 기체―→액체―→고체의 변화는 열을 방출하는 변화, 즉 발열 변화(發熱變化)이다. 이때 방출되는 열은 물질이 내부 에너지로서 가지고 있던 것의 일부이다. 이와 같이 상태의 변화에는 열의 출입 또는 물질의 내부 에너지의 증감이 수반된다. 얼음과 물이 섞여 있는 것을 가열해도, 2가지가 함께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온도는 O℃를 유지한다. 이것은 외부에서 가해진 열이 온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사용되지 않고 고체―→액체라는 상 변화를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도를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상태의 변화를 위해 사용되는 열을 잠열(숨은열)이라고 한다. 용융 때의 잠열은 용융열(또는 융해열)이라고 한다. 물을 가열하면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1기압에서 100℃가 되면 물의 표면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수증기로 변하여 거품이 많이 나온다. 이것이 끓음(또는 비등)의 현상이다. 끓음이 계속되는 동안 온도는 100℃로 유지된다. 이 경우도 외부로부터 가해진 열은 온도는 변화시키지 않고 액체―→기체의 상 변화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체의 잠열을 기화열(또는 증발열)이라고 한다. 0℃에서 얼음 1몰을 완전히 용융시키려면 1.44kcal의 열량을 가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얼음의 몰 용융열(또는 몰 융해열)이라고 한다. 또, 100℃에서 물 1몰을 완전히 기화시키려면 9.72kcal의 열량을 가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물의 몰 기화열(또는 몰 증발열)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수증기가 물로, 다시 물이 얼음으로 바뀔 때는 기화열 또는 용융열과 같은 양의 열이 방출된다. 즉 1몰의 수증기가 물로 변할 때 방출되는 몰 서림열(또는 몰 응결열)은 몰 기화열과 같고 1몰의 물이 얼음으로 변할 때 방출되는 열인 몰 응고열은 몰 용융열과 그 크기가 같다. 또, 승화 때의 잠열은 승화열이라고 한다. 소금물을 증발시키면 뒤에 작은 정육면체인 소금 결정이 나타난다. 이것은 무색 투명한 소금물 속에 흩어져 있던 결정과 같은 것이므로, 소금은 원래 작은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또, 결정이 규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배열이 규칙적이기 때문이다. 소금을 강하게 가열하면 녹아서 액체가 되는데, 이것은 결정을 이루고 있던 입자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을 더욱 가열하면 증기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며, 자유롭게 퍼져 나간다. 이것은 결정 입자가 더욱 흩어져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소금이 아주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고 물질의 변화를 생각해 보았는데, 일반적으로 물질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보자.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에는 원자·분자·이온 등이 있다.원자는 처음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로 생각되었지만, 현재 원자는 그보다 작은 기본입자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온은 원자가 (+)나 (-)의 전기를 띤 것이다. 분자는 기체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2개 이상의 원자가 결합하여 한 쌍이 되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물질의 화학적 성질이나 화학 변화의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원자·분자·이온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3가지 상태의 변화는 이들을 단순히 입자로서 다루어도 그 대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자·분자·이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3가지 상태의 변화를 입자의 행동에 입각해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고체 속에서 입자는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조금밖에 움직일 수 없지만, 가열하면 그 에너지를 흡수하여 차차 활발한 운동을 하게 된다. 녹는점에서 입자는 규칙적인 배열을 무너뜨리고 자유롭게 운동하게 되지만, 이를 위해 에너지가 필요하며, 모든 입자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될 때까지 온도는 올라가지 않는다. 액체가 되면 온도가 다시 올라가서 입자는 점점 활발하게 운동하고, 일부는 액체면으로부터 공중으로 뛰쳐 나간다. 끊는점에 이르면 입자는 서로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액체의 내부에서도 기체 형태(거품)가 되어 액체면으로부터 뛰쳐 나간다. 액체인 동안은 아직 입자가 서로 끌어당기고 있지만, 여기서 완전히 떨어지기 위해 에너지가 사용되며, 액체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온도는 변하지 않는다. 사신도 사신도(四神圖)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함께 그린 그림을 말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많이 나타난다. 고구려 고분 예술의 중요한 테마로 사신(四神)이 등장한다. 이것은 비불교적(非佛敎的)인 요소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테마이다. 무덤의 사방을 수호하는 영물(靈物)로서 4신도를 분묘에 장식하게 된 것은 도교(道敎)의 유입과 그 보급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벽화고분기 제3기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쌍영총의 창룡도(蒼龍圖)나 강서대묘의 사신도가 가장 우수한 사신도로 알려지고 있다. 이십팔수 이십팔수(二十八宿)는 고대로부터 동아시아에서 사용되어 온 황도와 천구의 적도 주변에 있는 28개의 별자리이다. 28수와 3원으로부터 하늘이 3개의 담과 나머지 28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동·북·서·남의 방위에 따라 사신이 7개씩의 별자리를 주관한다. 각 별자리(宿)의 해당 영역에는 또한 여러 별자리들이 속해 있다. 예를 들어 우수에는 직녀, 하고, 천부, 좌기, 우기 등이 속한다. 이러한 체계의 차이로, '3원 28수'의 별자리와 서양 88개 별자리는 1:1 대응이 되지 않는다. 각 수별 칠요와 신수(神獸)는 다음과 같다. 현대의 역주에서 칠요일과 일진 별로 해당되는 수는 다음과 같다. 국제고정력 국제고정력()은 1년을 28일씩 13개월로 하는 역법이다. 남는 하루는 세계일(World day)로 정하여 12월 다음에 넣는다. 윤년에는 6월 다음에 하루를 더 넣는다. 세계일과 윤일은 요일을 갖지 않는다. 이 역법은 한편 6월(June)과 7월(July)사이에 sol 이라고 불리는 달을 끼워넣어 13개월을 만들게 된다. 이 역법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이 역법은 다음과 같은 단점이 있다. 세계력 세계력(世界曆)은 1년을 4계로 나누어 각 계를 91일로 하는 역법이다. 각 계는 31일, 30일, 30일의 3개월로 나뉜다. 남는 하루는 세계일(World day)로 정하여 12월 다음에 넣는다. 윤년에는 6월 다음에 하루를 더 넣는다. 세계일과 윤일은 요일을 갖지 않는다. 이 역법은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요일 없는 날을 넣는 것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세계력에 반대해 왔다. 국경일 국경일(, 國慶日)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법률로 정한 경사스러운 날을 말한다. 국경일은 대부분 공휴일로 정해져 있고 각종 기념식과 경축 행사를 하며, 가정에서는 국기를 게양한다.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에 제정한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4대 국경일을 정하였다. 그 후 2005년에 한글날을 국경일에 추가하여 대한민국의 국경일은 5일이다. 미국에서는 1869년 연방회의에서 헌법 100년 기념제를 제정하였으며,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영국의 이스터 먼데이(부활절 다음 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절(10월 1일), 중화민국의 쌍십절(10월 10일), 일본의 기원절(2월 11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 (서방진영은 5월 8일, 러시아는 5월 9일), 프랑스의 혁명 기념일(7월 14일) 등도 유명한 국경일이며, 크리스마스(12월 25일),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8일) 등을 국경일로 지정한 나라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공휴일 대한민국에는 국민 전체를 기속(羈束)하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이 없으며,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서 국가기관이나 지방 정부 등의 공휴일을 정하고 있다. 관공서에는 국공립학교 등이 포함되나, 공기업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민간기업이나 민간단체는 노사간의 합의(주로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를 통해 스스로 휴일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관공서의 공휴일에 쉬어야 할 법적 의무는 없으나, 관행상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여 휴일로 써왔다. 연간 공휴일 수는 일요일, 선거일, 수시 지정하는 날을 제외하고 15일이다. 대체휴일제도의 적용 여부 등 여러 변수가 있긴 하지만, 토요휴무일을 포함하면 일본(119일)보다는 적고 미국(114일), 독일(114일), 프랑스(115일) 등과 비슷하다. 단,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과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인 경우(3월 1일이 월요일인 경우)에는 공휴일이 적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음력으로 1일, 7일, 15일, 23일에 관공서에서 업무를 보지 않았다. 또한 계절이 바뀌는 매절기에도 업무를 보지 않았다. 설날에는 7일, 대보름에는 3일, 단오에는 3일, 연등회에도 3일을 쉬었으며, 추석에는 하루를 쉬었다. 1주 7일의 요일제는 서양에서 전래된 것이며 갑오개혁기간인 1895년부터 시행되었다. 고종의 재위기인 1895년부터 개국기원절(조선 건국일·음력 7월16일), 대군주탄신(고종 생일·7월25일), 서고일(고종 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날·음력 12월2일)이 공휴일이었다. 순종의 재위기인 1908년부터 건원절(순종 생일·양력 3월25일·음력 2월8일), 개국기원절(양력 8월14일), 즉위예식일(순종 즉위일·양력 8월27일), 계천기원절(대한제국 선포일·양력 10월12일), 묘사서고일(순종 즉위를 종묘사직에 고한 날·양력 12월18일)이 공휴일이었다.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2조는 관공서의 공휴일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설날 연휴와 추석 연휴가 일요일을 포함한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에는 연휴 다음 첫번째 평일을 대체공휴일로 하고, 어린이날이 다른 공휴일이나 토요일과 겹칠 경우에는 그 다음 첫번째 평일을 대체공휴일로 한다.(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3조. 2013년 11월 5일 신설) 대한민국에서는 1959년 3월 27일부터 1960년 12월 30일까지 대체휴일제도(일요일 외의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경우 그 다음날도 공휴일로 함)를 실시한 적이 있다. 2009년부터 공휴일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꾸준히 국회에 상정되고 있으며 대체휴일 제도를 이 법률에 규정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어 왔으나, 이에 대해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와 재계가 기업의 휴일근로수당 증가 및 생산차질, 임시직과 일용직 근로자들의 소득감소 등 민간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보여 왔으나, 2013년 11월 5일부터 설·추석 연휴와 어린이날에 한해 대체공휴일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민간기업은 이를 지켜야 할 강제성이 없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2조제11호 기타 정부에서 수시 지정하는 날에 의하여 선거·투표, 대통령 취임일, 국장일, 국제대회나 회의와 각종 기념일, 기타를 포함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을 기념하기 위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관공서와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상을 통하여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따르기로 정한 기업체에 적용하는 임시 공휴일이 시행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일인 1988년 9월 17일, 2002년 월드컵 폐막 다음 날인 그해 7월 1일 월요일, 광복절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광복절 연휴로 이어지는 2015년 8월 14일 그리고 내수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대한상공회의소가 건의한 2016년 5월 6일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2005년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1차 정상회의가 열린 11월 18일을 교통혼잡 방지 취지에서 부산광역시 공공기관에 한정해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한편, 2015년 8월 14일과 2016년 5월 6일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하였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 궐위선거 특성상 임기만료에 의한 선거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2017년 5월 9일로 선거일을 정함과 동시에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또한 추석 연휴를 위해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미국의 월요일 공휴일 법이나 일본의 해피 먼데이 제도 같이 연휴가 보장되고 주말과 겹치지 않게 하는 것을 연구한다고 밝혔다. 종묘 종묘(宗廟)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종묘의 건물은 1394년 10월 태조가 한양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건물들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그리고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두었다. 종묘의 제사일은 4계절의 첫달 상순, 정초·단오·한식·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일로 정하였으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제하여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분향(焚香)·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한다. 그러나 국상일의 경우에는 이를 피한다. 종묘행사는 국가적 행사인만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의복·제기(祭器)의 규격, 제물(祭物)의 종류·수 등은 엄격하게 규정하고 준수한다. 그리고 문묘와 달리 고려의 예를 따라 역대 공신을 위한 공신종사(功臣從祀)가 있다. 종묘의 건축물들과 600여 년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세종대왕 작곡)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인 8월 16일(음력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나는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 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그 밖에 따로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齎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 10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여 종묘가 주변 언덕에 파묻혀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한 다음 종묘의 건물 형식을 고쳤다. 본래 종묘 건물은 'ㅡ'자로 길게 생겼는데, 지금은 감실에 신위를 모신 몸채 건물과 그 양큰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ㆍ서 월랑으로 구성되어, 가운데가 긴 ㄷ자형 건물이다. 태종 이래로 이 건축 형식이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되었다. 현재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별묘인데, 세종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러나 세종 원년(1419년)에 정종이 승하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종묘 정전 5칸에는 태조와 태조의 4대 조상을 합쳐 다섯 신위로 모두 차 있어서, 이제 이 다섯 신위에 더해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종묘에는 다섯 신위만 모시도록 예법에 규정되어 있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중국 송나라의 예를 따라 1421년 10월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別廟)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실 것을 결정한다. 이 별묘가 지금의 영녕전이다.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의 영녕전은 종묘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셨다고 하여 조묘(?廟)라고도 한다.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칸, 양 옆 익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원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앞서 말한대로 본래 종묘 정전에 다섯 신위를 모시기로 하였던 것인데, 그 뒤 다섯 신위 외에 다른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라는 제도가 생겨, 종묘 정전에 모시는 신위의 수는 다섯 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모셔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나자 칸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그 결과 종묘 정전 건물은 증축된다. 조선 초기의 왕 가운데 불천위로 결정된 왕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이다.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지다가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의 규모로 재건한다.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 뒤 현종 8년(1667년)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년)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묘를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는 종묘에 모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 경우 이전 장소로는 당시 쓰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주로 이용하였다.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므로 건축이 화려하지 않고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과 몇 개의 판위(版位),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히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으로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나타내었고, 단청 또한 극도로 절제되었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과 구조, 장식과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 건축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종묘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왔고 "이 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종묘 일곽의 주된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어숙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 망묘루(望廟樓)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그 이름은 제향시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건물 가운데 1칸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1443년(세종 25년)에 망모루 옆에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었으며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의한 것이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향대청은 종묘에 쓰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불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었다.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다.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하는데,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제향에는 임금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나 대신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다. 어숙실 일곽은 둘레담과 정문, 동협문, 서협문으로 싸여 뜰을 중심으로 북ㆍ동ㆍ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은 어재실, 동쪽은 세자재실, 서쪽은 어목욕청이다. 어숙실 서북쪽으로 종묘 정전이 위치하는데, 제향 때 제관은 어숙실 서협문을 지나 정전 동문을 통하여 정전에 이르게 된다.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으로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진다.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으로, 지면에서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며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하월대는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자리 잡고 일무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가 자리잡는 공간이다. 그리고 묘정 월대의 한가운데로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현재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나온 동ㆍ서 월랑 5칸이 자리하고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예감(망료위라고도 함)이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 수복방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과 제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종묘 정전(宗廟正殿)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물이며, 총 101m의 긴 건물로, 종묘의 중심이 된다. 국보 제227호이다. 종묘는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 후보로 계룡산ㆍ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년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을 벗어나 천도를 한 해에 터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태조 4년 9월 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준공된다. 준공된 종묘는 대실이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와 효비, 익조와 정비, 도조와 경비, 환조와 의비의 4대 신주를 개성에 옮겨와 봉안하였다. 정전 건물의 전면은 퇴칸을 구성하는 기둥만 서 있고 벽체 없이 모두 묘정으로 트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모두 전벽돌로 두껍게 벽체를 쌓아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함으로써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약간 뒤틀려 아래위가 벌어져 있다. 이는 혼 드나드는 통로임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로 통기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하방(門下枋) 좌우에는 신방목(信枋木)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 판문을 열어 발을 늘어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칸막이 벽체없이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으며, 뒷면 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각 감실에는 서쪽에 왕, 동쪽에는 왕비의 신주가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신실 구성 형식을 당(건물)은 같으나 실(칸막이)은 달리하는 동당이실(同堂異室)제도라도 한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동쪽으로 가면서 각 왕과 비를 합쳐 모두 49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있다. 정전 담장 안에 있는 3칸 짜리 작은 건물이다. '칠사'란 궁중의 신인 사명, 출입을 관장하는 호, 음식을 관장하는 주, 도성의 문을 관장하는 신령인 국문, 상벌을 주관하는 태여, 도로의 행작을 관장하는 국행, 그리고 중류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측면과 후면은 전으로 벽을 쌓고, 전면 중앙의 칸에는 판문을, 양옆 칸에는 격차창을 설치하였다. 공신당은 역대 왕의 배향 공신 94 신위 중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이와 함께 동쪽으로 증축되어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공신당 전면 중앙부 3칸에는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칸에는 하부에 벽체를, 그 상부에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다. 그 외 세 면의 벽은 전벽돌로 감싸여있다. 수복방은 제사를 담당하는 노비와 관원들이 거처하던 방이다. 수복방 전면에는 제사에 쓰일 제물을 심사하는 찬막단이 있고, 찬막단 동편에는 성생위가 있다. 전사청은 종묘 제례에 쓰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이다.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전사청 동쪽에 있는 제사용 우물이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현재는 한 채의 건물만 남아 있으며 개조된 것이어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기둥을 깎은 기법이 특이한데 둥구리 기둥(圓柱)을 15모로 접었으며 8모 기둥도 몇 개 있으나 대부분 16모 기둥을 썼다. 집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기둥머리가 건물의 제일 위에 설치한 마루보를 떠받치게 목재를 짠 것도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원래 12칸 중 2칸만 기둥을 따로 세우고 마루를 깐 툇간(退間)이었고 나머지 10칸에는 방을 들였었다. 건물 규모가 큰데 비하여 무늬를 넣지 않고 붉은색(朱色)만을 칠하였으며, 짧은 서까래를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서울에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세종 원년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나라에서 따로 별묘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 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분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처럼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있는 구성이다. 현재 영녕정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기본적으로 종묘 정전과 같으며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으며, 건축 규모 면에서는 영녕전은 정전보다 건축 영역이 좁다. 또 형식 면에서도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과 같은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크기가 작다. 영녕전에는 정전과 달리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는데, 이곳에 모신 목조, 도조, 환조, 익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어서, 함께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물론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왕의 배향공신도 종묘 배향공신이다. 영녕전에는 모두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제향(祭享, 제사) 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정갈하고 성스러운 물건이어서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개 제기고와 같은 건물은 바닥을 마루바닥으로 만든다. 마루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 않아 기물을 보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종묘제례는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조선 시대의 모든 제례 가운데 가장 격식이 높은 의식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종묘 제례는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지내는 대향(大享, 四時大享)과 섣달 그믐에 지내는 납일제(臘日祭), 영녕전에서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사, 그리고 속절(俗節), 삭망에 치르는 향사(享祀) 외에 종묘에 와서 빌거나 고하는 기고(祈告) 의식, 햇과일이나 햇곡식 등 새로운 물건이 나왔을 때 신물을 바치는 천신제(薦新祭), 그리고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종묘 영녕전에 와서 비는 알묘(謁廟) 의식 등이 있었다. 조선 시대 종묘 제례는 횃불과 초를 밝히고 한밤중에 봉행하였는데, 196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씩 올리다가 1971년 이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 일요일 낮에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한차례 올리고 있다. 종묘제례에 임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사 집사관은 7일 전부터, 기타 제례 참석자는 3일 전부터 제계를 한다. 종묘 제례는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신을 영접하고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다음 신을 보내드리는 순서로 행해진다. 종묘제례악은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추어 연주하는 음악이다. '악'은 악기의 편성과 연주, '가'는 악장의 구성과 가락, '무'는 일무(佾舞)의 의물(儀物)을 뜻한다. 음악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歌)로 구성된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樂記)에서, '악, 가, 무를 모두 갖춘 것을 악(樂)이라 한다'고 한 것처럼, 종묘제례악은 이 세가지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관리소는 종묘 내 문화재와 시설보호 및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된 대한민국 문화재청 소속기관이며, 종묘 내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재와 기타시설·수목 관리, 관람료 징수 및 기타 종묘관리소의 운영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다. 문화유산 문화유산(文化遺産)은 장래의 문화적 발전을 위하여 다음 세대 또는 젊은 세대에게 계승·상속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회의 문화적 소산이다. 과학, 기술, 관습, 규범 및 정신적·물질적 각종 문화재, 문화 양식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문화재는 조상들이 남긴 건물·조각·공예품·서적·서예·고문서 등의 유물·유적 가운데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거나 역사 연구에 자료가 되는 유형문화재, 연주·무용·음악·공예·기술 등에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무형문화재 및 기념물·민속자료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여 후세에 잘 물려주기 위해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였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지정방식은 크게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향토 유적·유물 등)로 나뉜다. 한국 요리 한국 요리(韓國料理, , )는 한국에서 발달한 고유하고도 전통적인 음식을 뜻한다. 복잡한 궁중 요리에서부터 지방의 특색 요리와 현대의 맛있는 요리에 이르기까지 재료와 조리법이 매우 다양하다. 전통적인 한국 정식은 밥, 국, 김치와 함께 나오는 많은 반찬들로 이루어진다. 한국 요리는 주로 쌀을 기반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분 포함 참기름, 들기름, 고추장, 된장, 간장, 소금, 마늘, 생강, 고춧가루, 다시마 국물 등으로 맛을 낸다. 김치는 거의 항상 모든 음식에서 제공된다. 식단은 계절별로 다양한데, 전통적으로 겨울 동안에는 마당에 구멍을 파고 땅 속에 묻어 놓은 장독에 저장된 김치와 그 밖에 절인 채소들에 많이 의존했다. 그러나 현재는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식단을 맛볼 수 있다. 한국은 기후와 풍토가 농사에 적합하여 일찍이 신석기시대 후에 잡곡 농사로 농업이 시작되었고, 그 후 벼농사가 전파되었다. 이후 곡물은 한국 음식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삼국시대 후기부터 밥과 반찬으로 주식, 부식을 분리한 한국 고유의 일상식 형태가 형성되었다 밥, 죽, 떡, 국수, 만두, 수제비, 술 등의 곡물 음식이 발달하였고 콩으로 메주를 쑤어 장을 담그는 발효 음식도 발달하였다. 재배 채소뿐만 아니라, 산야에 자생하는 산나물, 들나물 등 채소의 종류가 다양하여 생채, 쌈, 나물, 김치로 만들어 식탁을 계절에 따라 변화있게 차릴 수 있었다. 예로부터 약식동원(藥食同原,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같다)의 식관념 속에 생강, 계피, 쑥, 오미자, 구기자, 더덕, 도라지, 율무, 모과, 석류, 유자, 인삼 등 약으로 쓰이는 재료가 음식의 조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삼계탕, 쑥떡, 생란, 더덕, 생채 등 여러 가지 음식과 생강차, 인삼차, 모과차, 유자차, 구기자차, 결명자차, 율무차 등의 차와 오미자 화채 등의 다양한 음료도 있다. 조미료와 향신료도 약념(藥念)이라 하여 파, 마늘, 생강, 고추, 참기름, 깨소금 등이 약과 같은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국인의 일상식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여러 가지 반찬을 곁들여 먹는 식사 형태이다. 주식은 쌀만으로 지은 쌀밥과 조, 보리, 콩, 팥 등의 잡곡을 섞어 지은 잡곡밥을 기본으로 한다. 부식은 국이나 찌개, 김치와 장류를 기본으로 하고, 육류, 어패류, 채소류, 해조류 등을 이용해서 반찬을 만들었다. 이렇게 밥과 반찬을 같이 먹는 식사 형태는 여러 가지 식품을 골고루 섭취함으로써 영양의 균형을 상호 보완시켜주는 합리적인 식사 형식이다. 주식으로는 밥, 죽, 국수, 만두, 떡국, 수제비 등이 있고, 부식으로는 국, 찌개, 구이, 전, 조림, 볶음, 편육, 나물, 생채, 젓갈, 포, 장아찌, 찜, 전골, 김치 등 가지수가 많다. 이러한 일상 음식 외에 떡, 한과, 엿, 화채, 차, 술 등의 음식도 다양하다. 또 저장 발효 식품인 장류, 젓갈, 김치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한국 음식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식과,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거치는 통과 의례 음식,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년제와 풍어제, 부락의 평안을 비는 부락제 등의 행사에 따라 차려지는 행사 음식이 있으며, 또 고인을 추모하여 차리는 제사 음식이 있다. 이런 의례 음식에는 특별한 식품이나 음식을 빠짐없이 차리는데, 거기에는 기원, 복원, 외경, 존대의 뜻이 따른다. 또한 계절에 따라 그때그때 철에 나는 음식을 이용하여 시식(時食)을 즐겼다. 한국의 절식 풍속은 인간과 자연과의 지혜로운 조화를 이룬 것으로 영양상으로도 지극히 과학적인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정월대보름에 호두를 깨 먹으면 일년 내내 부스럼이 안 난다는 것은 역시 필수 지방산이 부족될 때 이를 공급하여 피부가 헐거나 버짐, 습진을 막는 데 효과적이라는 과학적 뒷받침을 가지고 있다. 입춘에는 새 봄에 나는 향채를 조리해 먹음으로써 봄맞이하는 기분뿐 아니라 생채가 부족했던 겨울을 지내고 난 후 비타민C를 보충해주는 합리화된 식습관이라 할 수 있다. 향토음식은 그 지역 공간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을 갖고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로 그 지역에서만 전수되어 오는 고유한 조리법으로 만들어진 토속 민속음식이라 할 수 있다. 즉, 향토음식은 고장마다 전승되는 세시풍속이나 통과의례 또는 생활 풍습 등은 문화적 특질 뿐 아니라 향토음식이 지니고 있는 영양적 의의도 크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홍어회와 과메기를 들 수 있다. 대가족 중심의 가정에서는 어른을 중심으로 그릇과 밥상이 모두 1인용으로 발달해 왔다. 그러나 핵가족 중심으로 바뀐 지금은 온 가족이 함께 두레상에서 개인용 접시에 나누어 먹는 형식으로 되었다. 음식은 처음부터 상 위에 전부 차려져 나오는 공간 전개형을 원칙으로 하였다. 쟁첩에 담는 반찬 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12첩 반상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갖춘다. 한국인의 일상식은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는 주 부식 분리형 양식이 삼국시대 이후로 하루 세끼 정규식사의 기본형으로 정착되어 왔다. 때로는 점심에 국수장국으로 차린 면상(麵床)이나 비빔밥, 장국밥과 같은 일품요리로 식사를 할 때가 있으나 이것은 하나의 별식(別食)차림이다. 밥상에서는 밥이 주격 음식이고, 반찬은 부격 음식이어서 반찬은 밥에 맞추어 선정된다. 반상차림은 식품의 배합, 간의 농담(濃淡), 음식의 냉온(冷溫), 색상의 배합 등 여러 면에서 합리성과 조합성을 이루고 있다. 반상차림에는 3첩, 5첩, 7첩, 9첩 반상이 있고,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왕에게 12첩반상을 차리었다. 가장 간단한 3첩반상은 국, 김치 외에 나물류와 생채, 조림이나 구이를 차린다. 간단한 3첩반상에서도 밥, 국, 김치, 장 외에 채소, 육류, 어류 등이 골고루 배합된다. 5첩반상에는 밥, 국, 김치, 장 외에 반찬 5가지, 찌개 한 가지가 오른다. 9첩반상에는 밥, 국, 김치, 장 외에 반찬 9가지, 찌개 한 가지, 찜 한 가지가 오른다. 왕의 수라상은 12첩반상이었다. 왕은 대원반에 앉고 곁반으로 소원반, 책상반이 곁들여진다. 원반에는 흰 수라, 곽탕, 장 3가지, 김치 3가지, 반찬 7가지, 뼈를 발라내는 그릇인 토구, 은잎사시 2벌이 놓인다. 수저 하나는 국용, 다른 하나는 동치미용이고 젓가락 하나는 생선용, 다른 하나는 채소용이다. 소원반에는 팥수라, 전골합, 찜, 반찬 두 가지, 찻주전자, 쟁반과 차주발, 사기 빈 접시, 은공기 그리고 수저 3벌이 놓인다. 팥수라는 흰 수라를 들지 않고 팥수라를 들고 싶을 때 바꾸어 놓는 것이다. 수저 3벌은 기미상궁이 검식과 음식을 더는 데 사용한다. 식사가 끝난 다음 차주발에 차를 따라서 쟁반에 받쳐 올린다. 곁반인 책상반에는 곰탕, 조치 2, 전골냄비, 더운 구이가 놓인다. 팥수라를 먹을 때는 곽탕 대신 곰탕을 옮겨 놓는다. 식사 예절은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현재는 지키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경상도는 남해와 동해에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남북도를 크게 굽어 흐르는 낙동강 주위의 기름진 농토에서 농산물도 넉넉하게 생산된다. 이곳에서는 고기라고 하면 물고기를 가리킬 만 큼 생선을 많이 먹고, 해산물회를 제일로 친다. 음식은 멋을 내거나 사치스럽지 않고 소담하게 만든다. 싱싱한 물고기에 소금간을 해서 말려서 굽는 것을 즐기고 바닷고기로 국을 끓이기도 한다. 곡물음식 중에는 국수를 즐기며, 밀가루에 날콩가루를 섞어서 반죽하여 홍두깨나 밀대로 얇게 밀어 칼로 썰어 만 드는 칼국수를 제일로 친다. 장국의 국물은 멸치나 조개를 많이 쓰고, 제물국수를 즐긴다. 음식의 맛은 대체로 간이 세고 매운 편이다. 1958년 서울 청진동에 문을 연 '장원'은 광주에서 같은 이름으로 요정을 하던 음식 솜씨로 유명한 주정순이 서울에 낸 요정으로 1964년에는 한정식 식당으로 바뀌었다. 요정 장원의 음식은 화려한 양념과 산해진미를 겸비한 전라도 한정식이었다. 유홍준 교수는 인사동의 영희네집을 한국의 3대 한정식집으로 꼽았다. 나머지 두 곳은 강진의 해태식당, 그리고 해남의 천일식당이다. 해방 후 서울에서 고관들이 먹던 궁중요리는 깔끔한 맛을 강조하여 양념을 많이 쓰지 않았지만 전라도 음식은 맵고 짠 편이다. 명월관의 궁중요리는 점차 사라지고 장원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운영하는 요정이나 요릿집들은 전라도식으로 변해갔다. 섬인 만큼 해산물을 활용한 요리가 많다. 평안도는 메밀로 만든 냉면 국수에 쇠고기 육수를 이용한 물냉면이 유명하다. 한국 전쟁 이후 이남에서 즐겨 먹는 물냉면은 평안도식 냉면을 말한다. 녹두를 갈아 두툼하게 만든 빈대떡은 술안주로 적합하다. 돼지고기, 두부, 마늘, 파 등을 넣은 만두는 겨울에 즐겨 먹는 음식으로 쇠고기국이나 갈비국에 넣어 물만두로 겨울철 특히 설날에 주로 먹는다. 양념의 관점에서 보면, 이남이나 함경도의 음식에 비해 맵거나 짜지 않다. 황해도는 연백평야가 펼쳐진 곡창으로, 특히 잡곡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조는 알이 굵고 구수하여 남도지방에서 보리를 먹듯이 메조를 많이 먹는다. 그리고 사료가 풍성하여 닭고기의 맛이 특히 좋아서 어느 음식이든지 닭고기를 많이 쓴다. 식성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아 충청도와 비슷하며, 구수하고 소박한 것을 즐겨 겉모양을 내는 일이 별로 없다. 유명한 음식으로는 잡곡밥과 누름적이다. 누름적은 김치 ·실파 ·돼지고기 등을 큼직하게 꼬챙이에 꿰어 밀가루를 묻혀 번철에 지지는데, 맛도 좋고, 인심 좋은 황해 사람의 품성이 엿보이는 음식이다. 함흥냉면이 가장 유명하다. 옛날 함경도에는 고구마가 많이 나서 냉면을 만드는 국수에 고구마 전분을 주로 썼으나 이남으로 이주한 도민은 제주도 감자 전분을 주로 쓰고 있다. 겨울에는 전 분만으로 국수사리를 빼고, 여름에는 밀가루를 섞는다. 전분을 익반죽해서 국수틀에 넣고 눌러서 끓는 물에서 삶아진 면을 건져 찬물에 씻어 사리를 만든다. 냉면에 올리는 회도 이북에서는 참가자미를 썼으나, 이남에서는 홍어로 회를 만들어 쓴다. 홍어는 껍질을 벗기고 잘게 썰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찬물에 씻어 쭉 건져 물기가 빠지면 식초를 넣어 버무리는데 여름에는 한 시간, 겨울에는 한시간 반 동안 재워 두었다가 간장을 넣어 버무린다. 그대로 두었다가 냉면에 얹기 직전에 회 양념으로 무치며 오이, 무, 배는 길쭉길쭉 썰어서 매운 양념으로 무친다. 함흥냉면의 국수는 감자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서 만든다. 함흥냉면 중 인기가 있는 것은 회냉면으로 매운 냉면비빔장과 무친 가자미를 얹는다. 지금은 새콤달콤하게 무친 홍어회를 많이 쓰지만 동해안지방에서는 명태회를 쓰기도 한다. 한국 음식은 곡류를 중심으로 하는 주식과, 곡류 외의 각종 식품으로 만드는 반찬, 후식이나 간식으로 떡과 한과가 있으며, 음료로서 차와 화채가 있다. 밥은 한국인의 가장 큰 주식으로서 매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먹는 것이 한식의 원칙이다. 밥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백미를 사용하는 백미밥이 있다. 백미는 껍질을 벗겨낸 쌀이다. 백미밥은 대체로 매우 하얗고 식감이 부드러워 아침상에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나 요즈음에는 매끼니 상관없이 먹는다. 현미밥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현미와 벗긴 쌀 백미를 적절히 섞은것이다. 쌀에는 대부분의 영양소가 껍질에 있어서 현미가 백미보다는 영양소가 많다. 또한, 현미는 위장에 있는 시간이 길어 포만감이 더 오래가 다이어트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현미는 꽤 딱딱한 감이 있다. 흑미밥은 검은쌀(흑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식감은 백미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건강에도 좋다. 잡곡밥은 여러가지 곡물과 백미, 현미를 섞은것이다. 대부분 콩과 조. 경우에 따라선 기장도 넣는다. 가장 영양소가 풍부하며, 건강식, 다이어트식으로 널리 식용된다. 보리밥은 보리를 현미 혹은 백미와 적절히 섞은것이다. 보리는 생산량이 많고 수확되는 시기도 빨라 한민족의 주요 곡식으로 널리 애용받았다. 옛날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보리가 수확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릿고개"라는 말이 붙은 적도 있다. 국은 밥과 함께 언제나 상에오른다. 국은 물에 국물을내는 재료를 넣고 끓인것이다. 국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미역국은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국물을 낸뒤 미역을 넣고 끓인것이다. 미역국은 산모가 출산 전후에 먹는음식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있다.콩나물국은 콩나물을 넣고 끓인것이다. 주로 아침상에 먹는다. 해장용으로도 애용된다.된장국은 멸치 다시마로 국물을 낸국물에 된장을 푼것이다. 무국또는 뭇국은 쇠고기 국물에 무를 숭덩숭덩 썰어넣고 끓인것이다.아욱국은 아욱을 넣고 끓인것이다. 탕은 건더기가 더 많이들어간 국을 의미한다. 탕은 주로 저녁상에 오른다. 우선 갈비탕이 있다. 소의 갈비와 채소, 그리고 몸에 좋은 한약재를 넣고 우린것이다. 삼계탕은 닭과 한약재, 인삼, 대추와 파, 그리고 갖가지 채소를 넣고 진하게 끓인것이다. 삼계탕은 이열치열(뜨거운 것에는 뜨거운 것으로 상대한다는 뜻)에 따라 무더운 여름 초복, 중복, 말복에 먹는다.그 외에 해물탕, 매운탕, 추어탕, 알탕 등 탕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재료를 기름에 튀긴 튀각과 부각은 간식으로 쓸 수 있으며, 특히 부각은 재료에 찹쌀 풀칠을 하여 필요할 때 튀겨 먹어 밑반찬으로 많이 쓰인다. 대표적으로 김부각이 있다. 포는 육포와 어포로 나뉘고 술안주나 간식, 밑반찬으로 쓰인다. 떡은 명절이나 큰 행사에 자주 쓰이는 음식으로 고조선 시대의 시루가 발견되어 긴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치는 떡, 빚는 떡, 찌는 떡이 있다. 백설기, 송편 등이 유명하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어 승려들이 많이 마셨다고 전하며 잎을 그대로 말려 마시는 녹차와 발효시켜 마시는 우롱차, 홍차가 있다. 김치는 한국 고유의 음식으로 전국적으로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이 있는 많은 김치가 있으나, 보통 김치라고 하면 배추에 파, 마늘, 고춧가루로 간을 하여 발효시키는 배추김치를 일컫는다. 김치를 제조할 때에는 '김치를 만들다' 라고 하지 않고 '김치를 담그다' 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깍두기 김치, 파 김치, 고구마줄기 김치 등이 있으며, 유산균이 시큼한 맛을 내고, 매운 맛이 식욕을 돋우는 음식이다. 화채는 냉수에 꿀이나 엿기름을 탄 음식으로, 과일이나 오미자즙을 넣어 만들기도 한다. 다른 음료로는 숭늉, 수정과, 식혜 등이 있다. 전통 식당에서 고기는 숯불 화로를 상에 놓고 여러 가지 반찬과 밥을 주위에 빙 늘어 놓고 구어 먹는다. 구운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자른 다음 신선한 상추, 밥, 얇게 저민 마늘, 쌈장(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것) 그 밖의 양념을 같이 싸서 먹는다. 주로 불고기나 삼겹살을 많이 먹는다. 사발 그릇에 밥과 여러 가지의 채소, 고기, 달걀, 고추장 등을 넣고 섞어서 먹는 비빔밥이 있다. 또한, 눌은 밥을 이용한 누룽지, 숭늉이 있다. 이 간단한 음식들은 길거리의 포장마차에서도 살 수 있고 보통 식사라기보다는 간단한 간식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많은 포장마차들이 밤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술을 같이 파는 경우도 있다. 빙수는 여름에 기분전환으로 인기가 있고, 따뜻한 국물, 김밥, 호떡, 붕어빵 등은 가을과 겨울에 많이 먹는다. 한식당은 떡볶이를 Spicy Rice Pasta로 적는 등 메뉴판에 한식의 고유명사를 쓰지 않고 정체불명의 이름을 쓰거나 음식을 설명하는 설명문만을 넣은 경우, 또 반대로 영어 설명 없이 고유명사만 써넣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2009년 대한민국 농림수산식품부는 한국음식에 대한 외국어 표기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2011년 여전히 미국의 한식당은 정체불명의 표기를 쓰는 곳이 많아 미국 뉴욕대(NYU) 대학원의 한인학생회가 '한식당 메뉴 정비 캠페인'을 벌이고있다. 소수 (수론) 소수(素數, 발음: [소쑤], , )는 자신보다 작은 두 개의 자연수를 곱하여 만들 수 없는 1보다 큰 자연수이다. 예를 들어, 5는 1x5 또는 5x1로 수를 곱한 결과를 적는 유일한 방법이 그 수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5는 소수이다. 그러나 6은 자신보다 작은 두 숫자(2×3)의 곱이므로 소수가 아닌데, 이렇듯 1보다 큰 자연수 중 소수가 아닌 것은 합성수라고 한다. 1과 그 수 자신 이외의 자연수로는 나눌 수 없는 자연수로 정의하기도 한다. 산술의 기본 정리의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그 자체가 소수이거나, 순서를 무시하고 유일한 소인수의 조합을 갖는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정수론에서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또한 현대에는 암호 분야에서의 기술적 사용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소수의 개수는 무한하며, 이는 유클리드의 정리에 의하여 최초로 논증되었다. 소수와 합성수를 구분해낼 수 있는 명확한 공식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나, 대역적으로 자연수 중 소수의 비율의 근사치를 예측하는 모델로는 여러가지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연구의 첫 결과는 19세기 말에 증명된 소수 정리인데, 이는 무작위로 선택된 한 수가 소수일 확률은 그 수의 자릿수, 곧 로그값에 반비례함을 알려준다. 처음 200개의 소수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2는 유일한 짝수 소수이다. 10 이하의 소수는 4개이고, 1000 이하의 소수는 168개이며, 10000 이하의 소수는 1229개임이 밝혀져 있다. 정수론의 기본 정리에 의해, 모든 자연수는 꼭 한가지 방법으로 소수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고 이를 소인수 분해의 일의성이라고 한다. 즉, 곱셈의 관점에서 소수는 자연수를 이루는 성분이다. 예를 들면, 이고 23244는 (약수의 순서를 무시하면)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 된다. 이 정리의 중요성은 소수들의 집합에서 1을 제외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만일 1이 소수라면 이 정리의 엄밀한 진술을 위해 추가적인 제한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소수는 무한하다. 이 명제를 유클리드의 정리라고 하며 가장 오래된 증명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의 《유클리드 원론》(제 9권, 정리 20)에서 볼 수 있다. 유클리드의 증명은 “어느 주어진 유한한 소수들 보다 더 많다.”라는 결론으로 표현되고, 그의 증명은 본래 아래와 같다. 다른 수학자들도 각자의 증명을 내놓았다. 그 중 오일러에 의한 증명은 모든 소수들의 역수의 합이 발산한다는 증명으로부터 소수의 개수가 무한함을 보였다. 소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서 찾을 수 있다. 파피루스에는 소수와 합성수를 구분해서 다른 형태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클리드 원론》(기원전 300년경)에는 소수가 무한히 많다는 내용과 정수론의 기본 정리가 포함되어 있다. 유클리드는 메르센 소수로부터 완전수를 만드는 방법도 설명하였다. 유클리드 이후 17세기까지 소수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페르마는 1640년에 페르마의 소정리를 증명없이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가 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를 반복하여 마지막까지 지우면, 남는 수들이 소수가 된다. 이 과정은 사실 어떤 자연수 formula_2이 소수임을 판정하기 위해서 formula_3까지만 진행하면 되는데 , 수가 수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 몫이 항상 필요하며 나누는 수와 몫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formula_4 이하이기 때문이다. 소수를 골라내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을 이용해 소수를 어느 정도 골라낼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하고 복잡한 판정법이 존재하지만, 위의 세 가지는 당연하고 간단한 것들이다. 모든 소수를 분류해서 해당 집합에 넣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특수한 소수에는 다음이 있다. 소수와 관련된 많은 미해결 문제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들은 아래와 같다. 오래전부터 수학자들은 자연수 혹은 정수의 테두리 안에서만 소수 개념이 적용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의 직접적 이유는, 다항식에 관한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기약다항식' 등 소수와 유사한 개념을 분석에 도입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사한 시기에 추상대수학에 대해 기초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어떤 연산이 정의된 대수 구조에 대한 일반적 관점에서 소수 개념을 다룰 필요성 역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수의 개념을 분석해 나가던 도중, 수학자들은 이전에 자연수 범위에서만 사용되던 소수의 두 가지 정의가 좀 더 일반적인 경우에는 서로 동치조건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예컨대 자연수 범위 내에서 소수는, 와 같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정의를 정수 범위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formula_24을 제외하고, 단순히 정의에 들어 있는 formula_9을 formula_26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는 바로 정수환 상에서 각각 덧셈에 대한 항등원과 단원의 조건이다.(이 일반화를 직관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우스 정수에 대한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이 때는 단위 순허수들까지 단원의 영역에 포함된다) 소수 개념은 이러한 이러한 일반화에 힘입어 일반적인 정역, 좀 더 나아가 1을 가진 가환 환까지 그 배경 집합이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일반화하고 보면,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위의 두 동치조건이 더이상 동치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전자를 소수, 후자를 기약수로 정의하고(혹은 소원, 기약원이라고도 한다) 일반화된 정의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이하에서 formula_24이란 주어진 환의 덧셈 연산에 해당하는 항등원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종래의 정수환과 가우스 정수환, 다항식환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 적용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소수와 기약수에 대해, 어떤 1을 가진 가환 환 formula_40위에서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사신 사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한국음악 한국음악(韓國音樂)은 한반도 및 중국 동북부 등에서 발생하여 고대시대부터 전래되어오는 음악과, 이를 기반으로 오늘날 새로이 생성되고 있는 음악(창작국악 등), 또한 현대에 서양음악의 기법을 사용하여 창작된 현대 대중음악 등을 포함하여, 한민족(韓民族)의 음악을 총칭한다. 지역상 동양음악의 한 갈래이다. 좁은 의미의 한국음악은 한국 전쟁 이전의 조선왕조에서 관촬하여 계승하도록 장려한 것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농악을 포함한 전래·전통 음악, 즉 국악(國樂)을 가리킨다. 이러한 협의의 한국음악은 기초 인문학인 음악사학의 연구대상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음악사를 조망하고 세계음악의 한 조류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명칭의, 즉 광의의 한국음악을 사용하기도 한다. 근대과학으로서의 한국음악사학 연구는 한국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한국국악학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혜구(李惠求)는 1940년대 <양금신보의 사조(梁琴新譜 四調)>를 발표한 이래 많은 논문을 내었고 논문집 <한국음악연구>와 <한국음악서설>, <한국음악논총>을 내었다. 장사훈(張師勛)은 <보허자고(步虛子考)>를 비롯하여 많은 논문을 내었고 논문집 <국악논고>·<한국전통음악의 연구>·<한국악기대관>·<국악총론>·<한국음악사>·<전통무용의 연구>를 내었다. 그 밖에도 함화진(咸和鎭)의 <조선음악통론>, 성경린(成慶麟)의 <조선음악독본>·<조선의 아악>·<국악감상>·<한국음악논고>·<한국의 무용>, 김기수(金琪洙)의 <국악입문>, 박헌봉(朴憲鳳)의 <창악대강> 등의 저서가 있다. 1959년에는, 비록 인문학인 한국음악사학이 엄연히 다른 음악 연주와 작곡을 담당하는 영역과 공존하는 형태이지만,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 이론전공이 신설되어 한국음악사학 연구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인문학의 성격은 퇴화되었다편 국립국악원이 주축이 되어 인출된 것으로 양악 5선보에 옮긴 <한국음악>이 제14집까지 나왔고 재래의 율자보(律字譜)에 의한 <한국음악선집>도 제5집까지 나왔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간행한 영인본(影印本) <속악원보>와 <대악후보>가 있고 양악 5선보에 채보한 이재숙(李在淑)의 <가야금산조>가 있다. 지금까지 활발한 연구활동을 한 사람으로는 권오성·한만영·이재숙·김정자·이성천·이병원·송방송·이보형·김길운·권도희 등이 있다. 한국국악학회(韓國國樂學會)는 한국음악사학을 연구하는 학회로서, 1948년 이혜구·성경린·장사훈의 발의(發意)로 한국국악학회 전신인 국악연구회(國樂硏究會)가 발대되었다. 이어서 제1회 정례 발표회를 가졌다. 1964년에 한국국악학회는 사단법인체로 인가 등록되고 회장에 이혜구, 이사에 성경린·김성태·정호근·장사훈(상임), 감사에 이주환·이상만이 피임되었다. 1972년까지 200여회 연구발표회를 가졌고, <한국음악연구>라는 학술지를 2회 발간했다. 또한 100여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10여권의 학술서적 및 악보가 출판되었다. 한국음악사학회(韓國音樂史學會)는 한국 음악사학을 연구하는 학회로서, 새로운 한국음악사 연구를 위해 1988년 대구에서 창립되어 학술지 <한국음악사학보> 제 1집을 발간하였다. 현재까지 53권의 학회지를 발간하였고 2004년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가 되었다. 현재 회장은 송방송이다. 한국음악은 크게 한국음악, 한국현대음악, 한국대중음악으로 구분한다. 한국현대음악은 일반적으로 20세기에 수용된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한 현대음악 작곡가와 국악기를 사용하거나 국악의 음악적 요소를 이용하여 만든 현대의 국악인 창작국악을 총칭한다.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한 현대음악은 서양음악의 일반적인 장르와 동일하다. 한국음악사학에서 한국음악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음악의 유래를 따져서 향악·당악·아악으로 나누기도 하고, 그 쓰이는 목적에 따라서 제례악·연례악·민간음악으로 나누기도 하고, 연주형태에 따라 기악·성악으로 나누고, 악기편성법에 따라 합악·삼현육각·세악·병주 같은 말도 쓰인다. 또 서양음악의 분류방법에 따라 관현악곡·중주곡·독주곡·합창곡·독창곡으로 나눌 수도 있고, 종교음악·세속음악으로 나눌 수도 있다. 한국음악의 역사적 분류법은 악곡의 유래와 형식에 의한 구분법이다. 이 구분법 상에서 국악은 크게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뉜다. 중국 송나라에서 유래한 정악으로, 구체적으로는 고려 예종 11년 (1116년)에 수입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가리킨다.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널리 쓰였으나, 고려 후기에 쇠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때에 박연이 중심이 되어 아악을 정리하였다. 현재에 남아있는 아악곡은 문묘제례악 하나뿐이다. 중국의 당나라에서 전래된 음악과 더불어 중국 송나라의 사악(詞樂)을 총칭한다. 《경국대전》 등에 보이며, 《고려사》〈악지〉에 40여종의 음악이 소개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당악은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뿐이다. 당악은 대체로 黃=C의 음계를 따른다. 아악과 당악을 제외한 한국의 재래 음악과 서역에서 전래된 음악을 총칭한다. 판소리, 민요, 잡가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향악은 대체로 黃=E♭의 음계를 따른다. 현재 남아있는 악곡으로 볼 때, 아악은 한 곡, 당악은 두 곡밖에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의 악곡이 향악에 속하게 되어 분류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또한 이 분류법에서는 민요, 판소리 등의 민속악과 현대의 창작국악을 분류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에는 이러한 분류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계상의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黃=C의 음계를 따르는 곡들을 '당악계 음악', 黃=E♭의 음계를 따르는 곡들을 '향악계 음악'으로 부른다. 현대에 가장 많이 쓰이는 분류법은 '정악'과 '민속악'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음악사학계에서 이견도 있다. 범패와 같은 불교음악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가 하면, '민속음악'이라는 말이 원래 '예술 음악(art music)'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산조나 판소리와 같은 예술음악의 분류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장르별로 분류하기도 하고, 종교음악을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한 연주되는 방법에 따라 기악곡과 성악곡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분류 방법을 따라 정악과 민속악, 창작 국악으로 구분하기로 한다. 정악은 궁중음악과 민간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모든 음악을 가리킨다. 세부적으로 분류하자면 의식 음악(제례악)으로 분류되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궁중의 연례악, 민간 상류층에서 향유하던 풍류 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민속 음악은 정악에 대칭되는 말로, 민요와 판소리, 잡가, 산조, 시나위를 포함한다. 크게는 불교의 종교 음악인 범패도 포함된다. 상고 시대의 국악에 관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계절제와 같은 제천 행사에 관련된 중국 역사서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의 상고시대 음악은 각 부족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이는 의식음악(儀式音樂)이었던 것이 옛 중국 문헌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예(濊)·마한(馬韓)·변한(弁韓) 등 상고시대 부족국가들은 추수가 끝나는 때, 혹은 씨를 뿌릴 때에 일정한 시기를 택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남녀노유(老幼)가 함께 모여 연일 밤낮없이 춤과 노래로 즐겼다고 기록되었다. 이런 제천의식을 부여에서는 영고(迎鼓),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 예에서는 무천(舞天)이라 불렀다. 한편 한국의 서북지방은 중국과 접해 있어서 한대음악(漢代音樂)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그렇지 못한 지역과 다른 특색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음악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중국의 진수(陣壽, 233-297)가 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으로, 여기에 의하면 마한에서는 5월 하종(下種)과 10월의 농공(農功)이 끝났을 때 귀신에게 제를 지내고 군중들이 밤낮없이 쉬지 않고 소리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이 3세기 마한의 굿음악은 아마 오늘날의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굿중패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춤추는 요란한 음악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3세기 마한·변한의 아마도 강렬하고도 투박하였던 음악은 저 신라 유적에서 발굴된 흑색의 소박한 토기에 비할 수 있겠다. 중국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변진에 중국의 축과 형상이 비슷한 현악기(絃樂器)가 있었다.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가얏고를 만들고 왕산악(王山岳)이 거문고를 만들기 전인 한국 최고(最古)의 이 악기는 '고'라고 불리는 가야고의 전신일 것이며 아마 6세기에 가얏고(가야금)가 가야국에서 새로 생긴 후로 자취를 감추고 만 것 같다. 영화(永和) 13년(357년)이란 연대가 표시된 안악 제3호 분(墳)의 벽화는 여러 가지 중국 고대악(古代樂)을 보여준다. 전실(前室)의 한 벽에는 입고(立鼓)와 소(簫)를 각각 연주하는 2인과 노래하는 사람 1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입고·소·가(歌)의 그림은 한(漢)의 전정(殿庭)의 고취(鼓吹)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회랑(廻廊)의 벽에는 대행렬도(大行列圖)가 있는데, 후부의 기마악대(騎馬樂隊, 4인으로 되었다)는 일렬 횡대로 고(鼓)·소(簫)·가(茄)(또는 소각(小角))·요를 주(奏)하고 있는데, 이 기마악대의 음악은 한 대(漢代)의 단소요가를 그린 것 같다. 후실(後室)의 벽에는 세 사람의 악인(樂人)이 앉아서 각각 거문고(또는 쟁(箏))·완함(阮咸)·장적(長笛)으로 춤반주를 하는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후전(後殿)의 곡연(曲宴)을 그린 것 같다. 이 4세기의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입고(立鼓)·소(簫)·가(苛)·요 등의 한대(漢代) 악기는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초두(醮斗)와 함께 한문화의 특색을 보여주고, 마한, 변한의 악(樂)과는 전혀 다르다. 고구려의 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유리왕의 황조가가 있다. 고구려의 국악사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한다. 제1기는 외래 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시기이며, 거문고도 이 때에 만들어졌다. 이 때의 음악은 거문고와 같은 향토 악기로 대표된다. 제2기는 고구려가 중국의 후위(後魏)와 교류를 하기 시작한 4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구분한다. 이 시기에는 공후와 같은 서역의 악기가 들어온 시기이다. 제3기는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로 구분한다. 이 때의 고구려의 음악은 매우 융성하여, 수나라의 9부기(九部伎) 등에도 포함되었다. 고구려 음악에는 서역음악인 구자악(龜玆樂)이 들어와 고구려에 많은 악기가 쓰인 시기이다. 공후·비파(琵琶)·오현(五絃)·생(笙)·소·피리·요고(腰鼓) 등 많은 악기를 사용하여 당시 백제와 신라의 음악에 비해 매우 발전하였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고구려음악은 악사(樂師)가 4인인데, 횡적(橫笛)·군후·막목(莫目, 일종의 관악기)과 무등사(無等師)였다. 즉 고구려의 연향악(宴享樂)은 횡적·거문고·막목(莫目)과같은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그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이었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백제악(百濟樂)도 고구려악과 같이 횡적·군후·막목으로 춤을 반주하였다. 백제가 고구려의 거문고를 차용한 것이 주목된다. 불교가 고구려에는 372년에 북부 중국에서, 그리고 백제에는 그보다 늦게 384년에 남부 중국에서 들어온 것처럼, 외국 악기도 고구려와 백제에 중국 남북조(南北朝) 말기에 각각 달리 들어온 것 같다. 즉 수서(隋書, 622년 찬)의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악은 5현금·쟁·피리·횡취(橫吹)·소·고를 썼고, 백제악은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악에 채용된 오현금과 피리는 서역계의 악기로서 중국의 북조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며, 백제악에 채용된 공후와 지, 특히 지는 남조의 청악(淸樂)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고구려는 북방 중국에서, 백제는 남방 중국에서 각각 악기를 수입하여 양국음악은 달랐다. 특히 고구려악은 북부 중국에서 새로운 세력을 가진 서역 악기를 수입 채용함으로써 풍부해져서 수(隋)의 궁중에서 7부기(七部伎), 그 후 9부기에 열(列)하였고, 계속하여 당(唐)의 궁중에서도 10부기(十部伎) 속에 들었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백제의 가요로는 〈정읍사〉가 있다. 현재 연주되는 악곡 중 〈정읍〉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백제음악의 자료는 고구려에서 보이는 고분(古墳)의 고구려악벽화(高句麗樂壁畵) 같은 것이 없고 기록이 영세(零細)하다. 고이왕(古爾王) 원년(238년)에 제천지(祭天地) 용고취(用鼓吹)라 하여 고취악(鼓吹樂)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대방(帶方)에서 사용된 중국계 고취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본후기》에 의하면 백제음악도 고구려와 같이 횡적·군후·막목으로 춤을 반주하였다. 백제음악이 고구려의 거문고를 차용한 것이 주목되는데 이 점은 백제음악이 고구려와 같고 신라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南宋)과 북위(北魏)에 소개되었고 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악사(百濟樂師)들이 교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음악을 전습(傳習)시켰는데 문헌에 보이는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 진노(進奴), 대덕(對德) 진시 등 4인은 횡적·군후·막목·무(舞)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백제에는 남조(南朝)음악의 영향이 보인다. 중국 문헌 《수서》의 〈동이전(東夷傳)〉에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과 같은 악기를 쓴 기록이 보인다. 이 악기들을 수의 구부기(九部伎)와 비교하면 강남(江南)의 청악(淸樂-淸商伎)에서 쓰이는 악기편성(樂器編成)과 비슷하다. 백제 사람 미마지(味摩之)는 중국 남부 오나라에서 기악(伎樂)을 배워 일본에 전했다. 수서의 <동이전>에 기록된 백제악기는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인데 공후·지를 쓴 점에서 수(隋)의 9부기에 나타난 청상기, 즉 청악의 악기와 비슷하다. 고구려음악이 서량악(西凉樂), 즉 북조(北朝)의 음악을 받아들인 것과 백제음악이 청악(淸樂), 즉 남조(南朝)의 음악을 받아들인 것은 대조가 된다. 백제기(百濟伎)의 무인(舞人)은 남부 중국의 피리(皮履, 단화)를 신고 고려기(高麗伎)의 무인은 북부 중국의 오피화(烏皮靴-장화)를 신은 점도 이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오(吳, 남부중국)에서 기악(伎樂)을 배워 가지고 612년에 일본에 전했다. 이 기악의 가면이 일본의 동대사(東大寺) 등 여러 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용모, 특히 높은 코가 서역의 특징을 말해 준다. 이 기악의 내용은 1233년 일본의 《교훈초(敎訓抄)》라는 책에 간단히 소개되었는데 그 구성이 오늘날 한국에 전해 내려오는 산대도감(山臺都監)놀이 및 봉산(鳳山)탈춤과 거의 비슷하다.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가서 가르친 기악(伎樂)은 오(吳), 즉 남부 중국에서 백제로 들어와서 오늘날까지 산대도감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통일 이전의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으로 대표될 수 있다. 가야금은 진흥왕때에 가야의 우륵이 신라에 전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음악으로는 《삼국사기》에 이름만 전하는 가야금 12곡이 있다. 진흥왕 13년에는 계고, 법지, 만덕이 우륵에게서 각기 가야금, 노래, 춤을 배웠다고 한다. 우륵이 가얏고를 신라에 가져오기 전 내해왕(奈解王, 196-229) 때 물계자(勿稽子)가 '고'를 쳤고 자비왕(慈悲王, 458-479) 때 백결 선생(百結 先生)이 '고'로 방아소리를 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신라음악은 일찍부터 '고'(가야금)가 대표적인 악기이다. <삼국사기>에 신라음악은 '고(琴)'와 춤(舞)과 노래(歌)로 편성되었다 하였고 <일본후기>에도 신라음악에는 '고'와 춤만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신라음악은 관악기와 타악기가 보이지 않고 오직 현악기 한 가지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이 점은 횡적(橫笛)·거문고·막목(莫目)으로 편성된 고구려 및 백제음악과는 다르게 단순한 편성으로 되었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古墳)의 구조가 같은데 신라의 그것만이 양자와 판이하게 다른 것과 상통한다.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는 우륵이 가야국으로부터 '가얏고'를 가지고 와서 신라에 퍼뜨렸는데 이 뒤부터 신라의 '고'는 가야국의 '고' 즉 '가얏고'로 대치된 것 같다. 우륵은 대내마(大奈麻)인 주지(注知·法知)·계고(階古)·대사(大舍)인 만덕(萬德)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가야국에서 만든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 등 12곡을 전수했다. 세 사람은 이 12곡이 아정(雅正)치 못하다 하여 5곡으로 줄이고 바로잡아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우륵의 12곡은 일부가 잡희(雜戱)이고 나머지는 각군(各郡)의 음악으로 산신제(山神祭)와 같은, 군(郡)마다 베푸는 의식음악(儀式音樂)으로 보인다. 이러한 군악(郡樂)은 <삼국사기> 악지에 보이는 신라의 음악 20여곡 속에도 보이고 있다. 신라의 종교의식 음악의 하나인 팔관회(八關會)는 고려를 거쳐 이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향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으로 대표된다. 거문고 음악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가 지은 30여 곡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비파음악은 212곡, 대금곡은 324곡, 중금곡은 245곡, 소금곡은 298곡의 이름이 전한다. 또한 당악이 유입된 것도 통일 이후이다. 문무왕 4년에 사람을 보내 당악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각종 유물에서 당악기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음악의 비중이 큼에 따라 재래음악, 즉 향악(鄕樂)에 대조되는 당악(唐樂)·당비파(唐琵琶)·당(唐)피리·당풍(唐風)의 범패(梵唄) 등 당나라에서 새로 수입된 음악 양식이 생기고 황종조(黃鍾調)·월조(越調)·평조(平調)·반섭조(般涉調)와 같은 당음악에서 쓰던 조들이 쓰이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들어와 융성해지자 범패가 성히 불리고 또 당에서 새로운 범패가 들어오자 신라풍·당풍·당 이전의 고풍(古風) 이렇게 세 가지 범패가 불렸다. 신라의 재래음악은 가야금·춤·노래로 편성되어 악기는 가야금만이 쓰이던 것이 고구려의 거문고와 서역에 기원을 둔 비파가 쓰이고 대금 등 관악기가 도입되어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 즉 삼현삼죽(三絃三竹)이 쓰이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보이는 금환(金丸)·월전(月顚) 같은 것들이 모두 서역계 잡희(雜戱)인 것과 같이 서역계 음악의 영향도 받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당악과 향악은 후세의 당악과 향악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진흥왕때는 '음성서'로 불리다 경덕왕때 '대악감'으로 고쳤다. 후 혜공왕때 다시 음성서로 바뀌었다. 신라시대의 당악에 관한 문헌이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에 '향악'이란 말이 있는 이상, 당연히 그 대칭인 당악(唐樂)도 벌써 9세기에 있었을 것이다. 또 향비파·향피리의 대칭으로의 당비파·당피리가 있는데, 당비파는 문무왕(文武王) 13년(637)으로 추정되는 계유명(癸酉銘)의 아미타불삼존(阿彌陀佛三尊) 사면(四面) 석상(石像)에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당악에서 사용되는 박(拍)이 신라 향악에까지 차용된 것을 보면, 본래 박을 사용하는 당악도 신라에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 범패(梵唄)에도 당음(唐音)·당풍(唐風)이 있는 이상, 음악에도 당연히 당풍·당악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의 당악은 방향(方響)·당비파·쟁·당적·당피리·퉁소·장고·박 같은 것을 사용하였고, 또 한편 앞에 언급한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은 비파·쟁·당적·퉁소·생·소·요고를 보여주는데, 이들을 종합 고려하면, 신라의 당악은 방향·당비파·쟁·당적·퉁소·당피리·생·소·요고·박을 썼을 것이다. 참고로 <사대사자재장(西大寺資材帳)>에 의하면 780년(보구(寶龜) 11년) 일본에서 대당악(大唐樂)은 쟁·비파·공후·방향·생·우·필률(대소(大小))·소·척팔(尺八)·횡적·동발자·갈고(鞨鼓)·갈양·요고(腰鼓)·계루·도고(倒鼓)·계고(楷鼓)·고악고(古樂鼓)·대고(大鼓)·백자(百子:박(拍))를 사용하여 신라시대의 당악에 참고가 된다. 당피리는 그 최저음이 황종(黃鍾, 다)이고 향피리의 최저음보다 4도 높기 때문에, 그런 높은 음역(音域)의 악기로 연주되는 당악은 향악에 비하여 청(淸)하다고 하겠다. 또 한어(漢語)의 가사를 가진 음악이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이고, 박판(拍板)은 규칙적인 길이의 구절을 떼어 주기 때문에, 당악은 향악같이 복잡하지 않고 정아하다고 하겠다. 당악이 새로 들어온 이후로(12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 때로 추정), 재래음악은 그것이 서역계악(西域系樂)이건 한국의 악이건 모두 향악이라고 불렸다(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의 예와 같이). 그것은 마치, 서양음악이 새로 밀려 들어온 후로 재래음악을 중국계의 음악이건 한국의 음악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국악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당악이 들어온 이후로 당악은 향악과 대(對)를 이루고, 각각 좌방악(左方樂)과 우방악(右方樂)이라고도 칭해졌고, 당악은 서(西)에, 향악은 동(東)에 위치하여 당악과 향악이 엇갈려 연주되는 풍습이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5수(首) 중에서 4수가 향악이 아나라 실은 서역계(西域系, 주로 산악(散樂)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가야금 한 가지 악기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 예전 신라악 이외에 고구려악이나 백제악도 존속하였다. 고려 때와 조선조 때까지도 백제악인 방등산(方等山)·정읍(井邑)이 연주되었고, 고구려악인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洲)가 <고려사>에 전하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악은 삼현(三絃)·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 삼죽(三竹, 대금·중금·소금(小芩))·박판(拍板)·대고(大鼓)·가무(歌舞)였는데, 신라악은 고구려의 현금·서역의 5현비파(향비파)·당의 박판을 여기저기서 섭취한 것이었다. 그런 신라의 관현반주는 가야금 하나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던 예전의 신라악에 비하면 큰 발전이라고 하겠다. 한편 박판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서, 또 현금 곡명(玄琴曲名)의 춘조곡(春朝曲)·추석곡(秋夕曲)·유곡청성곡(幽曲淸聲曲)·입실상곡(入實相曲) 등으로 미루어서, 그런 신라악은 종전 것과 달리 덜 복잡하고 더 아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하겠다.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쓰던 악기로 백제에서도 쓰였으며, 신라에서는 언제부터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효소왕(孝昭王, 643-702) 때 천존고(天尊庫)에 보존되었다는 것이 최고기록이고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때에는 민간에 퍼지게 되었는데 그 경위는 신라인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현금곡(玄琴曲) 30곡을 지어 그것이 거문고의 조종(祖宗)같이 되었다. 그의 금도(琴道)가 명득(命得)을 거쳐 귀금(貴金)에 이르러 단절된 뻔하였다가 다시 안장(安長)과 그의 아들 극종(克宗)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극종은 7곡을 지었다. 극종 이후에는 거문고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옥보고가 지은 30곡의 곡명은 <삼국사기>에 전한다. 신라의 범패는 태화(太和) 4년(830)에 당에서 돌아온 진감대사(眞鑑大師)에 의하여 유전(流傳)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17년 늦게 당에서 귀국한 일본승(日本僧) 자각대사(慈覺大師)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 의하면 중국 산동반도(山東半島) 등주현(登州縣)의 적산원(赤山院)이라는 신라인 절에서 본 강경의식(講經儀式)·일일강의식(一日講儀式)·송경의식(誦經儀式)에 신라풍(新羅風)·당풍(唐風)·당 이전의 고풍(古風) 등 세 가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진감대사가 유전한 범패는 당의 신풍(新風)이라 하겠다.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을 섬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고풍(古風)으로 선랑(仙郞)·국선(國仙)·선가(仙家)가 주재하였다. 이 팔관회 의식에서는 국선이 가무를 아뢰어 용천(龍天)을 환열(歡悅)시켜 복을 비는 제도였기 때문에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성히 하였다. 신라 진흥왕 때에 생겨서 숭상받은 국선 또는 화랑(花郞)은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다가 고려 예종 때부터 점점 쇠퇴하였다. 발해는 민간 음악과 궁중 음악이 발전함에 따라 태상시(太常寺)를 설치하고 발해의 음악,무영,제사에 관한 것은 본래 의부(義部)에서 맡아 보는 업무였으나 발해 음악과 무용이 발전하는 수요에 따라 새로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를 설치하고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였다. 발해교방은 발해악과 발해무를 직접 관리하는 전업기구이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太祖)는 신라의 고풍을 많이 답습하였다. 화랑 또는 선랑(仙郞)이 천령(天靈)과 오악(五嶽)·명산대천(名山大川)·용신(龍神)·신기(神抵)에 국가 태평을 비는 팔관회(八關會)와 불교의식인 연등회(燃燈會)가 그 일례이다. 이 두 가지 의식은 향악과 당악뿐만 아니라 백희(百戱)까지도 포괄한 대규모 의식으로, 그 음악들도 의식과 함께 신라의 것을 답습하였다. 신라풍의 사뇌가(詞腦歌)는 균여(均如, 917-973)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러나 예종, 의종(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유풍(화랑 따위)이 많이 쇠퇴하였다. 예종 때에는 송나라로부터 아악이 도입되었고, 또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신라 때 들어온 당의 음악을 밀어냈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향악은 고려에서도 계승되었고 새로 많은 향악곡이 생겨 그 일부는 조선 때까지 전승되었다. 명산대천·용신을 가무로 희열시켜 복을 비는 제도로 신라 국선의 유풍(遺風)이다. 연등회와 더불어 고려의 큰 국가의식의 하나로 궁중의 구정(毬庭)에 다섯길이나 되는 무대를 세우고 사선악부(四仙樂部) 및 용·봉·상(象)·마(馬)·차(車)·선(船)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춤을 비롯하여 가무백희가 행해졌다. 이 팔관회는 고려 초기에 극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 쇠퇴하기는 했으나 고려 말기까지 계속하다가 근세조선에 와서 철폐되었다. 송의 음악이 고려에 들어와 신라시대에 들어온 당(唐)의 음악을 밀어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실린 당악(唐樂)이란 것은 사실 전부 송의 사악이다. 사(詞)라는 것은 장단구(長短句)라고도 칭하듯, 시의 매행(每行)이 균일적으로 칠언(七言)으로 되어 있지 않고, 7언·5언·7언·6언과 같이 길고 짧다. 그러나 그 불규칙적인 길이의 가사에 붙여진 음악의 길이만큼은 규칙적으로 8행(井間譜로)이다. <고려사>의 '악지'에 실린 사(詞) 41수 중에서 8수가 중국시인 유영(柳永, 11세기)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판명으로 사가 대개 11세기 이후에 고려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사(詞)의 하나인 낙양춘(洛陽春)의 가사가 <고려사> 악지에 실려 있고,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작으로 판명되었는데, 4행 1구(尾前詞와 尾後詞)로 되었다. 또 한편 낙양춘의 악보는 18세기의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실려 있는데, 사(詞) 1행(5자-7자)이 규칙적으로 정간보의 8행에 들어 있고, 그 정간보 8행은 제4행과 제8행에 들어가는 박(拍)에 의하여 둘로 나뉜다. 위에서 ○표는 그 선행가사가 ○표가 달리지 않은 가사의 2배의 시가(時價)를 가진 것을 표시한다. 이 악보에 의하면, 중국의 사악(詞樂)은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 syllabic)이고 간주곡(間奏曲)과 후주곡(後奏曲)을 갖지 않은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고려조의 향악은 <고려사>의 '악지'에 29곡에 보여주는데, 그 중 오관산(五冠山)·거사련(居士戀)·처용(處容)·사리화(沙里花)·장암(長岩)·제위보(濟危寶)·정과정(鄭瓜亭)의 7곡은 이제현(李齊賢, 1288-1367)에 의하여 한문으로 역시(譯詩)되어 있어 그것들이 13세기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시가(詩歌)는 한시가 4행임에 비하여 3행 또는 5행과 같이 기수(奇數)의 행을 가진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그 1행에 두 박이 들어간다. 3행(行)의 예 귀호곡(歸乎曲-가시리) 가시리 가시리 /이꼬나난 바리고 가시리 /이꼬나난 위 중즐가 /大平盛代 5행(行)의 예 청산별곡(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 /라ㅅ다 청산의 살어리 /라ㅅ다 멀위랑 다래랑 /따 먹고 창신의 살어리랏다/얄리얄리 얄라 /얄라성얄라 <대악후보(大樂後譜)>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의하면, 향악은 대부분 일자수음식(一字數音式)이어서(예: 西京別曲) 중국음악의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의 아정(雅正)한 것에 비하여 염려(艶麗)한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또 향악이 중여음(中餘音, 間奏)을 가진 점에서도 중국음악과 다르다. 고려조의 향악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다. 그리고 관현 반주를 가진 노래는 간주와 후주 같은 발달한 형식으로 되었고, 또 일자수음식이라서 염려(艶麗)하여 이런 점에서 고려청자의 화려한 것에 비할 수 있겠다. 정재(呈才)란 궁중무용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고려 때에 쓰던 정재에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향악정재와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정재가 있는데, 그 제도가 다르다. 당악정재에는 포구락(抛毬樂)·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오양선(五羊仙)·연화대(蓮花臺) 등이 있는데, 포구락을 예로 들면 죽간자(竹竿子-정재에 쓰이는 도구로 긴 나무 막대기의 한쪽 끝에 가는 대 100개를 꽂았다)를 든 여기(女妓) 2인이 관현반주(管絃伴奏) 전인자(前引子)에 맞추어 입장하여 서면, 동시에 음악이 그치고 죽간자가 무반주로 한문으로 된 구호를 부른다. 다음에는 무기(舞妓)들이 관현반주로 춤추며 들어와서 서면, 음악이 그치고 무기들은 무반주로 한문의 창사(唱詞)를 부른다. 이어서 관현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나서 용알을 구문(毬門)의 구멍으로 던져넣는다. 용알 던지기가 끝나면 죽간자 2인이 관현반주(後引子)에 맞추어 나와 무반주로 '구호'를 부르고 나가고 뒤이어서 무기가 나간다. 이같이 당악정재는 죽간자의 입퇴장과 음악(전인자와 후인자)과 구호 및 무기들의 무반주의 창사를 그 특징으로 한다. 향악정재는 동동(動動, 牙拍)·무애무(無▩舞)·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이 있는데 동동을 예로 들면 무기 2인이 들어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음악에 맞추어 동동의 첫구, 즉 덕과 복을 드리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일어나서 관현악과 제기(諸妓)의 합창에 맞추어서 춤을 춘다. 춤이 끝나면 무기는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퇴장한다. 이같이 향악정재는 당악정재에 보이는 죽간자의 인자(引子)와 구호가 없고 창사처럼 무반주로 무기가 노래하지 않고, 신라시대의 무척(舞尺)·금척(琴尺)·가척(歌尺)과 같이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도 무기·관현반주·여성합창(女聲合唱)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세종, 세조 때에는 아악이 박연에 의해서 정리되고,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악기를 직접 만들어 썼으며, 정간보, 오음악보등에 의한 기보법이 창안되고, 아악보가 편찬되었다. 세종대왕은 정대업, 보태평 등을 직접 작곡하였다. 인조 21년에는 사직과 문묘제례악이 정해지고, 인조 25년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효종, 영조 때,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악기를 다시 만들었다. 종묘제례악과 삼현 육각에 의한 음악이 사용되었다. 또한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성악곡이 널리 불렸다. 특히 영조 이후, 일반 백성들에게서 판소리, 산조, 잡가 등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때의 판소리 체계화는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운 뒤 억불양유(抑佛揚儒) 정책에 따라 예악(禮樂)을 국시(國是)로 삼았다. 정도전 등은 건국과 더불어 많은 조선의 창업송가(創業頌歌)를 지었으나, 악곡은 고려조의 음악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차츰 제도가 정비되고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음악을 많이 개산(改刪)하였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비하고 율관과 악기를 제작하였고, 향악과 고취악(鼓吹樂)에 기하여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을 만들고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등을 제정하였으며,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를 만들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실었다. 세조는 부왕(父王)의 음악사업을 이어받아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악에 쓰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으며, 정간보를 개량하였고, 오음약보(五音略譜)를 내어 《세조실록》 악보에 실었다. 조선 전기의 음악정비 제작사업은 성종 때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성현(成俔)이 찬술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출간되어 한국 최초로 독립한 종합 악서(樂書)가 나왔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에 조선 초기까지 전하던 삼국시대 및 고려음악은 소멸되고 당악은 쇠퇴하여 향악화되었으며 새로운 향악곡이 생겨 조선 후기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전반기에 세종은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에 자극되어, 악리(樂理)를 연구하였고 박연에게 율관(律管)을 제작시켰고, 유량악보를 발명하였고, 성종 때 성현은 《악학궤범》 같은 독립한 악서를 찬술하여 음악의 학문면에서 큰 발전을 보았다. 또 한편 음악 예술면에서는 유교의 예악(禮樂) 사상의 영향을 받아 아악이 중요시되어 아악서(雅樂署)가 독립하였고 당악과 향악의 남녀상열지사도 개산(改刪)되었고, 그 때 특히 향악은 유식한 한문의 가사를 많이 써서 그런 가사에 붙여진 음악도 점차 당악같이 담담해져 조선 전기의 향악은 조선의 백자에 비할 수 있게 되었다. 태조 2년에 정도전이 〈납씨가(納氏歌)〉, 〈궁수분곡(窮獸奔曲)〉, 〈정동방곡(靖東方曲)〉을 지어 올렸고,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 등 신악을 선찬하고 4년에는 하윤(河崙)이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등 악장을 지어 올렸다. 〈납씨가〉는 고려의 〈청산별곡〉을, 〈정동방곡〉은 〈서경별곡〉의 곡에 가사만 새로 얹은 것이다. 이와 같은 근세조선 창업송가의 제작은 세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 때의 음악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유교가 대흥한 세종 때에 이르러서 전조의 음악을 많이 개산하였다. 박연·맹사성(孟思誠) 등 음악이론가들을 동원하여 아악을 정비하고 향악을 창작하고 악기를 제작하며 악보를 창안 편찬하는 등 근세조선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유교 특히 중국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은 아악의 완성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악을 재검토시켰다. 즉, 송의 사(詞)의 대부분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해서 비판되었고 예외로 〈수룡음(水龍吟)〉, 〈하운봉(夏雲峰)〉, 〈억취소(憶吹簫)〉의 가사만이 초정(稍正)하다 해서 그 곡은 그대로 쓰고 원가사(元歌詞)를 버리고 《시경(詩經)》의 가사를 차용하였다. 이런 가사의 개변은 태종·세종·중종 때에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면 중강조(中腔調)에다 《시경》의 녹명(鹿鳴)의 가사를 붙이는 따위이다. 조선 전기는 고려조의 음악을 습용(襲用)하였거나, 예를 들면 <대악후보(大樂後譜)>의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진작(眞勺)>과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풍입송(風入松)>, <야심사(夜深詞)> 또는 고려조의 음악에다가 신제가사(新製歌詞)를 붙이고 곡명을 바꾸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납씨가(納氏歌)>의 원곡은 <청산별곡>, <정동방곡>의 원곡은 <서경별곡>,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종 때에 <보태평>, <정대업>, <발상(發祥)>, <봉래의(鳳來儀- 前引子, 與民樂, 致和平, 醉豊享, 後引子의 모음곡)>,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의 신악(新樂)>이 제정되고 <세종실록>에까지 그 악보가 기록된 사실이다. 《보태평》은 선왕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은 그 무공을 각각 한문으로 칭송한 것이고 음악은 고취악에 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정대업》 중의 화태(和泰)와 순응(順應)의 음악은 각각 고려 때의 〈서경별곡〉과 〈만전춘〉의 곡에서 차용하였다. 《보태평》 11곡은 모두 임종궁(林鍾宮)의 평조(平調)이고, 《정대업》 15곡은 모두 남려궁(南呂宮)의 계면조(界面調)이다. 원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때 연례(宴禮)에 연주되었는데, 세조 9년(1464)에 이르러 향악이 아악 대신에 종묘제향악으로 채용되었다. 이에 따라서 짧은 제향(祭享) 절차에 맞게 개혁된 종묘악이 비록 후세에 그 리듬은 변개되었지만 조선 말까지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 〈발상〉 11곡은 가사가 한문으로 되었고 그 음악도 당악같이 6음계로 되었는데, 이 고취곡(鼓吹曲)은 세조 때 폐용되었는지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되었고, 1445년에는 조종(祖宗)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을 가영(歌詠)하고 후손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을 명심케 하는 <용비어천가> 125장을 한글로 지었고, <치화평(致和平)>과 <취풍형(醉豊享)>이라고 칭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치화평>과 <취풍형>이 각각 125장의 악보를 모두 기재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중에서 <치화평> 3기(三機)의 첫 16장과 졸장(卒章)만 연주하고, <취풍형>의 첫 8장과 졸장만 연주하였다. <대악후보>의 <치화평> 1·2기(機)의 경우에는 첫 3장만, 3기의 경우에는 첫 16장만 기보(記譜)되었고, <취풍형>의 경우도 첫 8장만 기보되었다. 〈보대평〉, 〈정대업〉, 〈발상〉,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봉황음〉, 〈만전춘〉 등 세종 때 음악이 《세종실록》 제 136권~제147권에 악보를 남기고 있는데, 그 악보는 1행 32정간(井間)으로 되었고, 그 정간은 시간 단위를 표시하여, 그것이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최고(最古)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서양의 오선지보다 약 2백년 늦다. 그 1행 32정간이 세조에 의하여 1행 16정간 2행으로 개서(改書)되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16정간이 대부분 20정간으로 변하여진 채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 세종의 정간보는 기보법 사상 획기적인 것이다. 《세종실록》 악보에는 〈회례악〉, 〈제례악〉, 〈보태평〉, 〈정대업〉, 〈발상〉, 〈봉래의〉, 〈전인자〉,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후인자〉, 〈봉황음〉, 〈만전춘〉 기타 종묘사직 등의 제례악이 실려 있다. 《세조실록》 48권~49권에 실린 악보이다. 《세종실록》 악보는 1행 32정간이나 《세조실록》 악보는 1행 16정간으로 축소되었고, 3·2·3·3·2·3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종실록》은 율자보로 되었으나 《세조실록》은 오음약보(五音略譜)로 되었고 당악에서 쓰던 공척보(工尺譜)를 병용하였다. 《세조실록》 악보에는 〈보태평〉, 〈정대업〉 등 종묘제례악과 원구제악이 실려 있다. 선조 5년 안상이 편찬한 악보로 일명 <금합자보(琴合字譜)>라 한다. 편장 안상이 명종 16년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이 되어 악사 홍선종(洪善終)·악공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악보를 편찬하고 선조 5년에 책을 낸 것이다. 거문고의 오음약보·합자보 및 육보(肉譜)와 노래와 사설을 적고 피리의 오음약보 및 육보·장고악보를 곁들여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만대엽(慢大葉)>, <정석가(鄭石歌)>, <북전(北殿)>, <사모곡(思母曲)> 같은 고가요(古歌謠)가 실렸는데,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했던 가곡의 실마리가 되는 <만대엽>, <북전>의 최고 악보로서 조선 전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 전형필(全瑩弼) 소장으로 보물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임진란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를 알 수 없는 고판본(古版本) 악보. 6·25전쟁 후에 세상에 알려졌다. <세조실록> 악보와 같이 6대강 16정간에 오음약보로 되었다. 4행을 한 묶음으로 하여 제1행은 오음약보, 제2행은 장고의 악보, 제3행은 박(拍)의 악보, 제4행은 악곡의 사설을 적었다. 이 악보에는 <사모곡>, <서경별곡>, <청산별곡>, <귀호곡(歸乎曲-가시리)> 등 많은 고려가요와 <납씨가> 등 조선 초기의 악가와 <성황반(城隍飯)>, <내당(內堂)>, <삼성대왕(三城大王)>, <대국(大國)> 등 10여곡의 무속가요가 있어서 고려 향악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악보의 발견으로 20여곡의 고가요가 새로 알려진 것이다. 원본은 이겸로(李謙魯)가 소장하고 있고 1954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조선 성종 때(1493) 성현이 주가 되어 찬술한 9권으로 된 종합악서이다. 이 악서는 제1권에 악(樂)의 원리, 제2권에 악기진설도설(樂器陳設圖說), 제3, 4, 5권에 정재도설(呈才圖說), 제6, 7권에 악기도설(樂器圖說), 제8, 9권에 의물(儀物), 관복도설(冠服圖說)을 자세히 기술하여 한국에서 최초로 독립된 악서(樂書)이다. 물론 그 이전에 박연이 악서 찬집을 제의하였지만 실현치 못한 것 같고, <세종실록> 128권에 악기도설과 악현도가 일부 게재되었으나 <악학궤범>같이 전반적인 것이 못된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악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악기가 파괴되었어도, 잿더미에서 구출된 <악학궤범>으로 인하여 악기를 제조하고, 음악의 고제(古制)를 복구할 수 있었다. 고악 복구에 불가결한 <악학궤범>은 초간 이후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영조(英祖), 1933년, 1968년 등 여러 번 복각(複刻)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한국의 문화는 큰 시련을 당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음악도 이 때를 계기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전기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은 난리통에 흩어졌다. 후에 문물이 바로잡히자 아악을 재건하였으나, 규모는 훨씬 줄어들고 말았다. 조선 전기 음악에 많이 전하던 고려조의 향악과 송의 사악은 대부분 상실되었거나 변질되었다. 당악은 향악화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명맥을 유지한 <영산회상>, <보허자> 가곡(<만대엽>) 같은 악곡은 많은 변주곡을 낳아서 조선 후기의 향악곡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영산회상>은 방대한 기악 모음곡으로 되었고, 가곡·가사·시조는 많은 종류가 생겼다. 한편 영조 이후에는 서민문화의 대두에 따라 판소리·산조·잡가와 같은 민속음악이 생겨 민간에 유포되었다. 조선 후기 음악은 민간음악의 대두와 해학적인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한시(漢詩)에 대가 되는 우리말의 <청구영언>, <구운몽>에 대가 되는 향토색이 짙은 <춘향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그림에 대가 되는 단원(檀園) 김홍도 및 혜원(惠園) 신윤복의 풍속도의 특징과도 같다. 당악도 세종 때의 <대악전보(大樂前譜)>에는 14곡이 기보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속악원보(俗樂源譜)>에는 겨우 <보허자>와 <낙양춘> 2곡밖에 없고, 그 두 곡만이 당악으로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그 <보허자>도 <대악후보>에는 1행 16정간으로 기보되었는데, <속악원보>에 이르러서는 1행 20정간으로 기보되어서, 리듬에서 변화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특히 <보허자>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원음(元音) 사이에 간음(間音)이 점점 들어가서, 당악인지 향악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 때만 하더라도 당악기는 서쪽에, 향악기는 동쪽에 따로 분리되어서 당악과 향악이 교대로 연주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당악기와 향악기의 합주로 되어 버려, 당악과 향악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 한편 향악도 <대악전보(大樂前譜)>에 실린 세종 때 된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은 물론 <대악후보>에 실린 <진작(眞勺)>, <이상곡(履想曲)>, <납씨가(納氏歌)>, <횡살문(橫殺門)>, <서경별곡>, <한림별곡(翰林別曲)>, <쌍화점(雙花店)>, <자하동(紫霞洞)> 등 많은 곡이 조선 후기에는 없어지고, 그 중에서 겨우 <감군은(感君恩)>, <만대엽(慢大葉)>, <북전>, <동동(動動)>, <정읍(井邑)>, <영산회상>이 남았다가, <감군은>, <만대엽>, <북전>은 조선 후기 늦게 없어져서 지금에 전하지 않고, <동동>, <정읍>, <영산회상> 등만 지금도 연주되는데, 그것도 <대악후보>의 곡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없도록 변해 버렸다. <보허자> 같은 당악이 원음에 간음을 추가하여 향악화한 것과 같이, 또 향악도 당악의 스타일로 접근하였다. 즉 <정대업(定大業)>의 혁정(赫整)은 원래 향악이어서, <대악후보>에서는 1정간(井間), 2정간, 3정간, 5정간같이 불규칙한 시가(時價)의 음으로 되었는데, <속악원보>에 이르러서는 균일하게 1정간의 음으로 되어, 그 음악은 중국 음악의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또 <정읍>, 일명 <수제천(壽齊天)>도 당악의 <낙양춘>만큼이나 한음 한음을 느릿느릿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향악에 독특한 꾸밈음(裝飾音)과 연음(連音)을 지녀서, 그전의 악보에서는 볼 수 없는 위엄을 새로 갖게 되었다. 이같이 조선 후기의 궁중에서는 향악도 중국 고전악같이 완서하고 위엄있게 연주하도록 정부가 신칙(申飭)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음악이 점점 빨라지는 데다가 가사도 해학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영산회상(靈山會相)>은 《대악후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의 노래로 무도에 쓰였다가 후에 《유예지(遊藝志)》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령산(中靈山), 세령산, 가락덜이 같은 본(本) 영산의 빠른 변주곡과 〈영산회상〉의 음악과 관계없는 상현도드리, 하현(下弦), 염불, 타령, 군악(軍樂)이 추가되었고, 나중에는 더 빠른 가벼운 곡으로 계면(界面) 가락도드리, 양청(兩淸), 우조(羽調) 가락도드리가 끝에 달렸다. 이같이 선비들이 즐기는 〈영산회상〉 같은 실내악이 위엄으로 시작하였다가 정악(正樂)을 벗어나서 가벼운 농조(弄調)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곡(歌曲)은 조선 전기의 <대악후보>와 안상의 <금합자보(琴合字譜)>에는 <만대엽(慢大葉)>만 보이지만, 임진왜란 후의 <양금신보(梁琴新譜)>에는 <만대엽> 외에 그보다 빠른 <중대엽>이 보다 많이 나오고,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18세기 당시에 벌써 제일 느린 <만대엽>은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보다 좀 빠른 <중한잎(中大葉)>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당시에 통용된 것은 빠른 잦은한닢(삭대엽)뿐이었다. <유예지>에는 그 잦은한잎보다 더 빠르고, 가사가 해학적인 농(弄), 낙(樂), 편(編)이 끝에 달린다. 가사(歌詞)로 말하면 1728년에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상사곡(相思曲, 相思別曲)>, <춘면곡(春眠曲)>, <권주가(勸酒歌)>, <백구사(白鷗詞)>, <길군악(軍樂)>, <양양가(襄陽歌)>, <어부사>, <처사가>, <황계가(黃鷄歌)>, <매화가>, <관등가(觀燈歌)>, <귀거래(歸去來)>, <환산별곡(還山別曲)>, <낙빈가(樂貧歌)>, <강촌별곡(江村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의 16곡이 보이고 그 중에서 뒤에 있는 6곡을 잃고, 대신 <죽지사(竹枝詞)>와 <수양산가(首陽山歌)> 2곡을 얻어 모두 12곡이 전창(傳唱)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청구영언>에 벌써 잡가인 <백구사>와 <매화가>가 가사에 섞인 점이다. 시조(時調)는 가곡인 삭대엽(數大葉)의 가사를 차용하나, 한수를 5장 대신 3장으로 나눈다. 시조의 악보는 서명응(徐命膺)의 <유예지(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에 보여서, 시조는 영조조(英祖朝)의 이세춘(李世春)에서 나왔다는 말을 수긍케 한다. 후에 시조도 평시조(平時調) 외에 지름시조와 사설시조(辭說時調)를 파생한 것도 잦은한닢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상은 상류층에서 애호된 음악들이고, 서민층에서는 판소리와 산조 같은 전혀 새로운 음악이 생겼다. 판소리는 광대가 부채를 들고 서서 그와 마주 않은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서 <춘향가> 같은 긴 이야기를 소리·아니리(白)·발림(科)으로 서술하여 관중을 울리고 웃기는 일종의 극음악(劇音樂)이다. 이 판소리는 <만화집(晩華集)>(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가사 <춘향가> 200구에 의하여, 늦어도 영조조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18세기의 판소리에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화용도(華容道)> 이외에 <배비장가)>, <옹고집>,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강릉매화가>, <무숙(武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12가지가 있었다. 그 중 지금은 먼저 다섯가지만 전해진다(<오가전집>에서처럼). 이 판소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은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이다. 가야금 산조는 가야금 독주곡으로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순서로 연주되고, 진양조는 우조(羽調)로 시작되어 계면조로 그친다. 이 가야금 산조는 광주(光州)의 아전인 김창조(金昌祖 또는 昌祚, 약 1865-1929)가 만들어냈다고 하며, 그 후 그의 제자 안기옥(安基玉), 한성기(韓成基)에 의하여 보급되었다. 이 기악 독주곡은 마치 판소리같이 감정을 충분히 표출하여 일반에 실감을 주어 애호되었다. 만대엽(慢大葉)은 <안상금보>, <양금신보> 등 조선 전기·중기 악보에 나타나는 옛 성악곡으로 <중대엽>과 더불어 가곡의 원류로 추정되는 악곡이다. 사설은 시조시(時調詩)로 되었고 가곡과 같이 5장으로 구분된다. 조선 초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옛 악보에는 장대엽·늦은한닢·진화엽(晋化葉)으로 보이며 <안상금보>에 처음 보이고 <유예지>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대엽(中大葉)은 <양금신보>, <유예지> 등 조선 중기 악보에 나타나는 옛 성악곡으로 조선 중기 <만대엽>에서 파생되어 <삭대엽> 즉 현존 가곡의 원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설은 시조시로 되었고, 평조·평조계면조·우조·우조계면조로 4조가 있었고 각 조마다 제1·제2·제3의 파생곡이 있었다. <양금신보>에서 처음 보이고 <서금보(西琴譜)>, <일사금보(一蓑琴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중한닢이라고도 부른다. 북전(北殿)은 <안상금보>에서부터 <유예지> 등 조선 전후기 악보에 보이는 옛 성악곡. 고려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불리던 악곡이었으나 조선 말기에 끊어지고 말았다. 사설은 시조시를 얹어부르는 등 가곡과 비슷한 형태의 성악곡으로 가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곡이다. 평조·평조계면조·우조 등 여러 조가 갖추어지기도 했다. 문헌에는 <후정화(後庭花)>, <후전(後殿)>으로도 보인다. <뒤전> 혹은 <대받침>으로도 부른다. 《양금신보(梁琴新譜)》는 광해군 2년(1610) 양덕수(梁德壽)가 엮은 거문고 판본 악보이다. 악사 양덕수가 임진란을 피하여 남원에 살았는데 거기서 예로부터 잘 알던 임실 현감 김두남(金斗南)을 만나 그의 권에 의하여 악보를 냈다. 6대강에 오음(五音-宮商角徵羽)·합자보·육보를 같이 적어서 알기 쉽게 엮었다. 내용은 <만대엽>, <북전>, <중대엽>, <감군은> 등 비교적 간략하나 <중대엽>은 4조(四調-平調 羽調 平調界面調 羽調界面調)를 갖춘 점에서 뒤에 없어진 중대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전기 음악과 후기 음악의 경과과정을 보여주는 악보이다. 이겸로(李謙魯) 소장으로,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광해군 12년(1620)에 이득윤(李得胤)이 엮은 거문고 악보. 이득윤이 광해군 때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지내며 엮은 것이다. 합자보로 되었고 정간법은 약하였다. 이 악보는 안상·조성(趙晟)·박근(朴謹) 등 여러 사람의 악보를 인용한 점이 특색이다. 이 악보에 실린 악곡은 <만대엽>, <북전>, <중대엽>, <삭대엽>으로 <양금신보>와 비슷하다. 이병기가 발견하여 이득윤 자필고본(自筆稿本)임을 밝혀냈다. 《현금신증가령(玄琴新證假令)》은 숙종 6년(1680) 신성(申晟)이 엮은 거문고 악보. 합자보와 육보를 함께 적었으나 정간법은 약했다. <만대엽>, <중대엽>, <북전>, <삭대엽>, <여민락>, <보허자> 등이 실렸는데, <중대엽>, <삭대엽>은 4조(四調-平調·羽調 平調界面調·羽調界面調)를 갖추었고 각각 제1·2·3곡이 나타나 있어서 <중대엽>과 <삭대엽>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혜구 소장이었으나 원본은 흩어지고 청사 등본이 국립국악원에 전한다. 《백운암금보(白雲庵琴譜)》는 숙종 무렵에 엮어진 편자 미상의 거문고와 퉁소악보. 육보에 합자보를 곁들였으나 정간법은 약하였다. 내용은 <중대엽>, <북전>, <감군은>, <만대엽> 단가(短歌)·<삭대엽>으로 <중대엽>과 <북전>의 비중을 크게 다루었고 보기 드문 단가 및 퉁소의 평조계면조 악보가 실려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이혜구 소장으로, 이 악보에 실린 단가 사설의 작자 백우암이 악보의 편자로 추정되어 <백운암금보>라 불리고 있다. <양금신보>와 <현금신증가령>과의 사이에 엮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악후보(大樂後譜)》는 영조 35년(1763) 서명응 등이 왕명을 받고 <대악전보(大樂前譜)>와 <대악후보>로 편찬한 악보. <대악전보>는 세종조 악보를 모아 엮었다 하며 내용은 당악계 음악이 주가 되고, <대악후보>는 세조조 악보를 모아 엮었다 하며 내용은 <세조실록> 악보의 <보태평>, <정대업> 등 제례악보와 그 밖의 많은 <진작>, <만전춘>, <동동>, <정읍> 등 고려가요가 주가 되는 시용(時用)의 향악보이다. 전보는 당악계 음악의 귀중한 자료인데 조선 말기에 아깝게 망실되고 후보는 국립국악원에 전하여 향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보법은 <세조실록> 악보와 같이 6대강 정간법에 오음약보로 되었다. 《속악원보(俗樂源譜)》는 영·정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편자 미상의 관찬 판본 악보. 6대강 정간법에 율자보로 되었다. 내용은 종묘·무안왕묘(武安王廟)·경모궁(景慕宮)의 제례악과 <여민락>, <낙양춘> 그리고 거문고·가야금·비파의 종묘제례악보와 방향보(方響譜)로 엮어졌다. 방향보는 9정간법을 썼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전한다. 《유예지(遊藝志)》는 서유구(徐有渠)의 저서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 가운데에 실린 악보. 대개 정조 무렵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유구는 <대악전후보>를 엮어 바친 서명응의 손자이다. 거문고 악보는 육보에 합자보를 곁들였고, 양금(洋琴)악보는 율자보(律字譜)로 되었고, 생황(笙簧)악보는 수자보(數字譜)로 적었다. 내용은 <중대엽>, <삭대엽>, <농엽(弄葉)>, <우락(羽樂)>, <계락(界樂)>, <편수대엽(編數大葉)> 등 가곡 악보와 <영산회상>, <영산회상이층제지(靈山會上二層除 指)>, <세영산>, <삼현회입(三絃回入)>, <염불타령>, <군악유입타령(軍樂流入打鈴)> 등 <영산회상> 악보를 실었고 양금보에 시조악보가 있다. 이 악보는 영조 이전의 음악과 고종 때의 음악을 비교연구하는 데 다리 구실을 하는 귀중한 악보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는 이규경(李圭景)이 순조 때 엮은 양금 악보. 양금은 조선 중기에 들어온 서양악기로, 이 악기로 된 악보로는 <구라철사금보>와 <유예지>의 양금 악보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양금 각현(各絃)과 거리가 먼 아악식인 12율순에 배율(配律)하여 적었기 때문에 해독이 불가능했던 것을 근년에 장사훈에 의하여 배율을 수정하여 이 악보를 해석했다. 내용은 <영산회상>, <하현환입>, 가곡·시조로 엮어졌다. 이병기 소장으로 되었다. 《삼죽금보(三竹琴譜)》는 고종 때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편자 미상의 악보. 책머리에는 경종 1년에 쓴 이승무(李升懋)서가 얹혀 있으나 악보 내용으로 봐서 고종 때 편찬된 이 악보에 이전부터 전해오는 이승무의 서문을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16정간에 육보로 적혀 있다. <영산회상>, <평조영산회상>, <군중취타>, <노군악(路軍樂)>, <가군악(家軍樂)>, <양청환입(兩淸還入)>, <삭대엽>, <소용>, <우롱>, <중대엽>, <상사별곡>의 무녀시조(巫女時調) 등을 포함하여 <영산회상> 가곡·가사 등 60여 곡이 매우 광범하게 실려 있다. 이 악보는 <유예지>와 현존 국악과 다리 구실을 하는 귀중한 악보이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었다. 동리 신재효에 의해 판소리가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양 음악이 들어오는 등 국악이 많이 쇠퇴한 시기이나 명맥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서구문화로 한국문화의 변화는 물론 한국인의 음악활동도 많이 변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지니 왕실의 의식이 없어짐과 때를 같이하여 여기에 쓰이던 수천년 전통 음악이 설 자리를 잃었다. 왕의 거동이나 군대 행진에 쓰이던 취타(吹打)는 양음악 밴드(Band)의 행진곡으로 대치되었다. 사랑(舍廊)마다 울려나오던 풍류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심신을 닦는 도로서 음악을 연주하던 풍류인들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열중하게 되었다. 광장에서 판소리와 잡희(雜戱)를 즐기던 대중들은 유행가와 신파극(新派劇)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한국음악은 더욱 위축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한국 전통음악은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원각사(圓覺社)와 협률사(協律社)에 이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 이은 조선정악원(朝鮮正樂院)·기타 사설전수소(私設傳授所)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갔다. 광무 원년(光武 元年, 1897)에 종래의 장악원(掌樂院)을 교방사(敎坊司)로 개칭하고 제조(提調) 이하 772인의 인원을 두었으며, 융희 원년(隆熙元年, 1907)에는 교방사를 장악과(掌樂課)로 고쳐서 궁내부(宮內部) 예식과(禮式課)에 부속시키고, 국악사장(國樂師長) 이하 305인의 인원을 두고, 김종남(金宗南)이 초대 국악사장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장악과는 아악대(雅樂隊)로 바뀌고 아악사장 이하 189인의 인원으로 줄었다. 이 중에는 양악군악대에 밀려서 시종원(侍從院) 부속 구 군악수(軍樂手)인 취고수(吹鼓手)들이 일부 편입되어 있었다. 그 뒤 인원을 84명으로 줄이고, 다시 57명으로 줄였다. 1917년에는 아악생 양성소를 두어 제1기생 9명(뒤에 18명)을 모집하여 수업연한을 3년(뒤에 5년)으로 하고 음악실기·음악이론·일반학과를 수업하였다. 1920년 일본 음악학자 다나베(田邊尙雄)의 건의로 1922년에는 당국의 보다 나은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25년에는 아악대에서 아악부(雅樂部)로 명칭을 고치고 당주동(唐珠洞) 청사에서 운니동(雲泥洞)으로 옮겼으며, 광복 직전까지 종묘·문묘 제향에 제례악을 연주하고, 아악생 양성·아악 방송·악서 및 악보 편찬·악기 제작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제1대 국악사장에 김종남, 제2대 국악사장 이남희(李南熙), 제3대 아악사장 함재운(咸在韻), 제4대 국악사장 명완벽(明完璧), 제5대 아악사장 김영제, 제6대 아악사장 함화진(咸和鎭)이 역임하였다. 이왕직 아악부의 전통은 현 국립국악원이 이어받고 있다. 음률을 즐기는 대갓집 사랑에는 율방(律房) 또는 풍류방(風流房)이라 하여 영산회상·가곡 등 정악 계통 음악을 연주 및 전수하는 사설 음악실이 있었다. 이러한 율방의 제도를 확대하여 1905년 9월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조직되었다. 정악의 연주도 하였지만 주로 정악의 전수에 주력하였다. 당시 교사진용은 가곡에 하규일(河圭一), 하순일(河順一), 거문고에 김경남(金景南), 가야금에 명완벽(明完璧), 함화진(咸和鎭), 양금에 김상순(金相淳), 생황에 한진구(韓鎭九), 단소에 조동석(趙東錫) 등이 이름난 대가들이었고, 서양음악에는 김인식(金仁湜)이었다. 1911년 조양구락부는 정악원(正樂院)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체하여 조선정악원 혹은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라 부르게 되었다. 1907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국립극장으로, 창극(唱劇)이 주가 되고 잡가(雜歌)와 잡희(雜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이다. 판소리는 원래 고수의 북장단에 소리하던 독창이었으나, 원각사 시절에 약간의 무대장치로 배역마다 여러 인물이 출연하여 연기하며 분창(分唱)하는 창극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 <춘향가>·<심청가> 등이 창극화되고, <귀의 성(鬼-聲)>· <치악산(雉岳山)> 등 신소설(新小說)이 극화되어 상연되었다. 창극에는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이화중선(李花中仙) 등 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출연하였고, 경서도창(京西道唱)과 재담에는 박춘재(朴春載)·문영수(文泳洙) 등이 출연하였다. 원각사는 3년이 못되어 해산되고, 협률사(協律社)·장안사(長安社)·연흥사(延興社)·광월단(光月團) 등이 조직되어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지방공연에 주력하였다. 원각사가 해산된 뒤에 여러 창극단체들이 명멸하였으나, 일제의 탄압 아래 활동이 저조하여 새로이 통합하여 재기의 길을 모색하였으니, 이것이 1933년에 조직된 조선성악연구회이다. 이 연구회는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에 주력하였는데, 당시의 진용은 판소리에 송만갑·김창룡·이동백·정정열·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김초향(金楚香)·박녹주(朴綠株)·김소희(金素姬) 등이었고, 기악에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신쾌동(申快童) 등이었다. 이 당시 상연된 창극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홍보가> 등 판소리를 창극화한 것, <배비장가>·<장화홍련전>·<숙영낭자> 등 고본(古本)을 창극화한 것이었다. 1940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관장 아래 조선악부가 설립되었다. 부장이사에 함화진, 상무이사에 박헌봉(朴憲鳳)이 역임하여 주로 창극과 가무로 지방공연을 하였으나 관헌의 간섭이 심하여 애로가 많았다. 여러 가객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판소리조로 연행하는 극의 한 분야. 조선 말기에 원각사(圓覺社)라는 국립극장이 생겨 판소리 가객들이 배역을 분담하여 판소리를 공연했던 데서부터 창극이란 용어가 비롯되며 그 후 각본도 새로 쓰고 곡조도 새로 붙인 창작 창극이 나왔다. 원각사 때에는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등 수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춘향가>·<심청가>·<최병도타령> 등 여러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1907년 경에는 김창환이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였으며, 송만갑 또한 서울에서 협률사를 조직하였다. 이 두 협률사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고, 1910년대 중반에서 단성사·장안사·연흥사와 같은 극장이 생겨 송만갑·이동백·김창룡(金昌龍) 등이 장안사와 연흥사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광주에서도 협률사가 조직되었다. 1920년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여러 창극단이 명멸하다가 1933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발족되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오태석(吳太石)·김연수(金演洙)·박녹주(朴錄珠)·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 수많은 명창이 활동하였는데, 1935년에 동양극장에서 '춘향전'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한 이래 <심청전>·<흥보전> 등 많은 창극을 공연하여 창극의 극성기를 이루었으나 1937년에 해산되었다. 1930년대 말에는 화랑극단·동일창극단이 있었고, 1940년 중반에는 쇠퇴하였다가 1945년에 서울에서 대한국악원이 조직되었고, 1946년에 대한국악원 창극부에서 대춘향전을 공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47년에는 김연수창극단·임방울(林芳蔚) 일행국극사(國劇社)·국극협회(國劇協會) 등이 있었으며, 김연수창극단에서 <장화홍련전>· <선화공주> 등을, 국극사에서는 <서동요>를, 국극협회에서는 <만리장성>, 조선창극단에서는 <호동왕자>, 김연수창극단에서 <사육신>을 공연하였고, 1948년에는 여성 명창들로 구성된 여성 국악동우회가 <옥중화와 해님달님>을 공연하여 인기를 끌자 기성 창극단들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6·25 당시 여성 국극단이 난립하자 1950년 중반에는 창극이 쇠퇴하고 말았다. 1961년 국립극장이 생기고 창극 대춘향전이 공연되어 성공하였고 이어서 국립극장 창극단이 창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극은 판소리 선율로 짜여지며 흔히 국악관현악 반주가 딸린다. 해방 이후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새롭게 전통음악이 정립되고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휴전 이후, 일부 국민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차차 높아지고 정부의 지원이 있게 되면서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국악사양성소(國樂師養成所)·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국악예술학교·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등 정규 국악교육기관이 차례로 생겨서 신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새로운 학문을 닦은 신인들이 연주·창작·연구·교육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음악은 어느 면에서는 밝은 전망이 보인다. 그러나 한편 판소리·십이가사·십이잡가 같은 특수분야는 신인들의 진출이 많지 않아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요구되고 있다. 한국음악을 연구하는 학술단체로 한국국악학회(韓國國樂學會)가 활약해 왔다. 오늘날에는 국악의 연주에 서양악기를 더하는 등 현대적인 느낌을 살린(크로스 오버) 국악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국악기의 개량 등 창조적인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음악을 근대 관현악으로 처음 작곡한 사람은 김기수(金琪洙)이다. 그는 1942년에 연구작품 <세우영(細雨影)-4중주곡>의 발표를 시작으로 1951년 <고향소(顧鄕韶)>, 다음해에 <정백혼(精白魂)>, <송광복(頌光復)> 등을 작곡하였으며, 그 후 10여년 간 20여곡의 작품을 썼는데, 이 시기가 국악 작곡의 초기라 하겠으며 그의 작풍(作風)은 1960년대 이후 출현한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서 신국악 공모를 시작하면서 많은 젊은 작곡가들이 참여하여 입선작 및 연구발표작을 내놓았는데, 이들의 작품은 대개 전통한국음악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기법과 연주법을 개발해 가면서 새로운 청중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강덕(李康德)은 합주곡 <새하늘>(1962년 작품)을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전통적인 선율과 장단 위에 새로운 양식을 구축했으며 특히 <가야금 협주곡 3번>은 그의 역작이다. 황병기(黃秉冀)는 1962년 가곡 <국화 옆에서>를 발표한 이래 독주곡과 합창곡을 많이 썼는데, 그의 특징은 가야금 독주곡에 있다. 황병기는 최초로 가야금 독주곡을 작곡했으며, 그의 작품 속에 흐르는 분위기는 전통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감각을 살린 시적이고 표제적이며 회화적이다. <침향무(沈香舞)>(1974)는 가야금 음악의 세계성을 시도한 작품이고 초기 작품 <숲>(1963)은 빈번히 연주되어 신고전작품처럼 되었다. 이성천(李成天)은 1962년 <청성자진한잎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발표한 이후 가장 폭넓고 활발한 작곡활동을 보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아악의 정신적 깊이를 추구한 작품에서 음악적 기교와 섬세한 음감각은 물론 음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데에 있다. 그의 역작은 가야금 독주곡 <놀이터>(1966)와 <숲속의 이야기>(1967-1974) 두 개의 모음곡들이다. 그는 <놀이터>에서 최초로 가야금의 양손 사용법과 글리산도의 주법을 도입하여 가야금 음악에 색채적 기법을 더하였고, 불규칙한 복합박자를 사용했다. 또 <두음을 위한 5현금>에서 가야금 12현 중 7현을 안쓰고 두음과 5현으로 제한한 그의 태도는 극도로 자기를 구속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예술가적 고행에 들어선 것이다. 김용진(金溶鎭)은 1962년 합주곡 1번을 발표한 후 2번(1966), 4번(1967), 5번(1969) 등과 많은 중주곡, 독주곡을 썼다. 그의 작품은 전통음악의 깊은 음악적 흐름과 양식적 요소들을 찾아 자신의 감각으로 부각시키려는 데 특징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역시 합주곡들이다. 조재선(趙在善)은 1963년에 합주곡 <합주> 다음에 <젓대를 위한 시나위>와 이어 <가얏고를 위한 시나위>를 썼는데 이 두 작품은 남도음악을 주제로 형식화시킨 작품이다. 이 음악은 1960년대에 가장 빈번히 연주된 합주곡으로 꼽을 수 있으며 1975년작 <원색(原色)의 율(律)>은 악기편성이나 배치가 동양 철학사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유율(有律)악기가 길게 뻗다가 끝을 밀어올리는 것과 무율(無律)악기의 끊임없는 간타음(間打音) 반복의 단순성에서 우주공간의 무한성을 느끼게 한다. 그 외 이해식(李海植)·이상규(李相奎)·김용만(金容萬)·박일훈(朴一薰) 등 젊은 30대들의 참신한 작품들이 발표되어 한국의 창작음악을 질적·양적으로 풍부하게 하고 있다. 또한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한 중진작가들인 정회갑·김달성·김흥교·이성재·강석희·백병동·박중후·서우석·이건용 등도 좋은 작품을 내놓았다.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은 국립중앙극장에 소속된 창극단, 1961년 정부조직법에 따라 만들어졌다. 1962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창단공연으로 창극 <춘향전>을 공연했으며. 이 때 함께 공연한 한국국악협회 회원들이 그 주체가 되었다. 그 후로 <심청전>, <흥보전>, <배비장전> 따위를 정기 공연하면서 창극을 일반인에게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73년부터는 단원들이 전원 유급제가 되고, 1974년에는 국립극장이 남산에 세워지면서 판소리 보급과 창극 공연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 후로는 <수궁가>, <숙영낭자전>을 비롯해서 앞서 공연한 작품을 반복해서 공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판소리 보급을 위한 강의와 감상회를 열고 있으며, 해외 공연도 시기와 기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하고 있다. 한일합방 후에 문묘제향은 엄수되었고 광복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 문묘제례악은 장악원(掌樂院) 좌방(左坊)의 전담으로 이른바 악생(樂生)들이 연주하였다. 한일합방 후에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아악수가 파송되어 연주하였으며, 광복 후 현재까지는 국립국악원 악사들이 1년에 두 차례 봄가을 석전일(釋尊日)에 파송되어 제례악과 일무(佾舞)를 아뢰어 왔다. 중국 상고시대 음악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고려 예종 때 들어와서 조선 세종 때 정비된 수천 년의 역사를 갖는 문묘제례악은 동양에서 가장 오랜 음률이다. 집사악사(執事樂士) 1인, 등가(登歌), 헌가(軒架) 집박(執拍) 2인, 차비악수(差備樂手)로 등가 헌가에 각 18인 외에 일무로 8일무, 64인의 무원이 동원된다. 종묘제향은 연5향(年五享)이었다가 한일합방 후 1911년에는 1월, 4월, 7월, 10월의 연4향으로 줄었으나 광복 직전까지 엄수되었다. 음악과 일무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전담하였다. 구성인원은 집사아악사(執事雅樂師) 1인, 집박아악수장(執拍雅樂手長) 2인, 가(歌)아악수장 4인, 차비아악수(差備雅樂手) 2인, 일무아악수(佾舞雅樂手) 36인이었다. 광복 후에 종묘제향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서 주관하여 연2향으로 계속되었으나 제례악은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0년부터 국립국악원 국악사들이 파송되어 종묘제향을 아뢰었다. 일무는 8일무를 추고 있다. 근세조선 세종 때 고취악과 향악을 토대로 제작된 종묘제례악은 세조 때 쓰기 시작하여 5백년 역사를 가지고 장악원·이왕직 아악부·국립국악원을 통하여 전해졌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1964년 12월에 지정되었다. 현재 종묘제향은 5월 첫 일요일에 연 1회 봉행하고 있다. 한일합방으로 근세조선 왕조가 무너짐과 동시에 왕실의 제반 연례의식에 쓰이던 음악은 폐용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왕직 아악부에서 연주행동과 아악생 양성을 통하여 광복되기까지 전해 왔고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에 전해 와서 순음악으로 보존되고 있고 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다. 국악고등학교·서울대학교 국악과·이화여대 국악과·한양대학교 국악과와 서울시립 국악 관현악단에서도 순음악으로 연주하고 있다. 예전에 대갓집 사랑에서 성행하던 이른바 율방(律房)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와 이왕직 아악부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서울대학교 국악과 등 각급 학교 및 사설학원에서 전해지고 있다. 영산회상에 뛰어났던 명금(名琴) 이병문(李柄文)의 거문고 수법은 이수경(李壽卿)을 거쳐 장사훈(張師勛)으로 전해져 왔고 여민락의 선금(善琴)이었던 함재운(咸在韻)의 거문고 수법은 함화진(咸和鎭), 장인식(張寅湜), 성경린(成慶麟)으로 전해져 왔고, 가곡 반주에 뛰어났던 김경남(金景南)의 거문고 전통은 임석윤이 이어받았으나 그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함제홍(咸濟弘)·최학봉(崔鶴鳳)·정약대(鄭若大)·함재영 등 대금 명인의 전통은 근세 젓대의 명인 김계선(金桂善)을 거쳐 김성진(金星振)이 이어받았다. 김수장(金壽長)·김천택·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 등의 가곡 전통은 하준권(河俊權)·하순일(河順一)·하규일(河圭一)·이병성(李炳星)·이주환(李株煥)을 거쳐 전효준(田孝準)·홍원기(洪元基)·김월하(金月荷)에게, 하규일·임기준(林基俊) 등의 가사 전통은 이병성·이주환을 거쳐 이양교(李良敎)·정경태(鄭坰兌)가 이어받았다. 송흥록(宋興綠)에서 비롯된 동편제(東便制) 소리는 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김세종(金世宗)·정춘풍(鄭春風)·김찬업(金贊業)을 거쳐 박기홍(朴基洪)·전도성(全道成)·이선유(李善有)·유성준(劉成俊)에 이르렀으나 오늘날 순수한 동편제 소리는 끊어졌다. 송흥록의 종손 송만갑(宋萬甲)은 동편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편제 정창업(丁昌業)의 소리제를 도입하고 자기 창제(唱制)를 개발하여 별입하였다. 송만갑의 제자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鳳來)가 있었으나 모두 송만갑 생전에 타계하였고 박녹주(朴綠株)가 김정문의 소리를, 박봉술이 박봉래의 소리를 이어받고 있다. 박유전(朴裕全)에서 비롯된 서편제(西便制) 소리는 이날치(李捺致)·정창업을 거쳐 김채만(金采萬)·김창환(金昌煥)에게 전해졌으나 순수한 서편제 소리는 듣기 어렵다. 김채만의 제자 공창식(孔昌植)의 전통을 임방울(林芳蔚)이 이어받았으나 제자없이 타계했고 한승호(韓承鎬)가 김채만의 소리를 약간 보유하고 있다. 정정렬(丁貞烈)은 정창업의 제자로 서편제 소리를 이어받았으나 전도성·박기홍의 영향으로 동편제 소리를 받아 자기류(自己流)로 별립했다. 정정렬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김연수(金演洙)·김소희(金素姬)가 전하였다. 박유전의 심청가는 정재근(鄭在根)·정응민(鄭應珉)을 거쳐 정권진(鄭權鎭)이 이어받았다. 염계달(廉季達)·고소관(高素寬)·김성옥(金成玉)에게서 비롯된 중고제 소리는 김정근(金正根)·김석창(金碩昌)을 거쳐 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으로 내려와 강장원(姜章沅)에게 이르렀으나 중고제 소리는 끊어져 버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판소리의 곡목별 예능보유자는 다음과 같다. 춘향가에 김여란(金如蘭)·김소희, 심청가에 정권진(鄭權鎭), 흥보가에 박녹주(朴綠株), 수궁가(守宮歌)에 정광수(丁光秀)·박초월(朴初月), 적벽가(赤壁歌)에 박봉술(朴奉述)·박동진(朴東鎭)·한승호(韓承鎬), 그리고 판소리의 고수로 김명환(金命煥)이 지정되어 있다. 김창조(金昌祖)·한숙구에서 비롯됐다는 가야금 산조(散調)는 여러 유파로 갈라졌다. 한성기(韓成基)류는 김죽파(金竹坡)가, 최망둥류는 함동정월(咸洞庭月)이, 안기옥류는 정남희를 거쳐 김윤덕(金允德)이 계승하였다. 강태홍(姜太弘)류는 원옥화(元玉花)가, 박상근류는 성금연(成錦鳶)이 이어받고, 심상건(沈相健)류는 끊어졌다. 백낙준(白樂俊)에게서 비롯된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申快童)과 박석기(朴錫基)에게 전수됐는데 박석기는 제자 한갑득(韓甲得)에게 전하고 한갑득은 다시 김윤덕에게 전하였다. 신쾌동류는 많은 제자를 길러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1977년 타계하였다. 거문고 산조의 기능보유자로는 한갑득이 지정되고 있다. 피리 산조는 이충선(李忠善), 대금 산조에는 박종기(朴宗基)를 이어받은 한주환(韓周煥)을 거쳐 강백천(姜白川)·편재준·김만식·한범수(韓範洙) 등이 있다. 해금 산조는 지용구(池龍九)를 거쳐 지영희(池映熙)가 이어받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까지 되었으나 지영희의 미주 이민으로 해제가 되었다.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의 경기잡가 소리는 박춘재(朴春載)·임기준(林基俊)을 거쳐 이창배(李昌培)·정득만(鄭得晩)·김순태(金順泰) 등이 이어받고 있다. 여악(女樂)으로는 일찍이 최정식(崔貞植)에게 사사한 안비취(安翡翠), 주수봉(朱壽奉)에게 사사한 묵계월(墨桂月), 그리고 이은주(李銀株) 3인이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잡가(민요)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각각 전수 장학생을 지도하였다. 한편 서도잡가 소리는 명창 장학선(張鶴仙)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타계한 뒤 김정연(金正淵)·오복녀(吳福女) 2인이 승계하여 또한 전수 장학생을 가르치었다. 한국현대음악은 일반적으로 1900년대부터 서양음악교육을 받고 서양음악의 악기, 양식, 음악어법 등을 사용한 한국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과, 1900년대부터의 현대적인 국악 작곡가로 나뉜다. 서양음악은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과 궁중 서양인 작곡가들 및 군악대를 통해 수용되었다.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는 김성태, 윤이상, 강석희, 박영희, 진은숙 등이 있다. 프로타고라스 프로타고라스 (, Protagoras, 기원전 490년경/485년 - 기원전 415년/410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소피스트이다. F.C.S. 실러는 프로타고라스를 프래그머틱한 휴머니즘의 시조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프로타고라스의 출생과 사망 연대에 관해서는 서류상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키아의 압데라에서 탄생하였으며 유명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향 출신이다. 그의 성장과 교육 과정에 대해서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후의 활동과 사상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당시에 배울 수 있는 모든 분야(문법, 수사학, 수학, 고전문학 등등)를 두루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라는 이름아래 철학 및 문명사에서 처음으로 손꼽히는 사상가, 교육자, 정치가로 손꼽히며, 그가 주장한 교육의 목적과 방법은 플라톤이 쓴 대화록 프로타고라스에서 비판적으로 토론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철학 사상의 골자를 이루는 주관주의 역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아 파르메니데스에 반대하여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것은, 인간은 인식하기를 제각각 인식하여 사물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지식은 인간의 인식에 기초하는데, 이 인식은 또한 인간의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인간의 감각 기관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각각 다르므로 지식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는 상대주의적 진리론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그는 "약한 언론을 강한 언론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개인의 감각(경험)을 거듭 쌓음으로써 현명한 정도에 우열이 있으므로 공공 단체는 그 우수한 것에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되며, 개인은 감각(자연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은 공공적으로 뛰어난 지식을 지니도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궤변과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신의 논리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프로타고라스는, 어느날, 한 청년으로부터 그의 논법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때 청년이 “돈이 없어도 논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며, “공부가 끝난 뒤, 치른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수업료를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청년은 그의 배려로 수업을 마쳤으나, 청년은 어떤 재판도 치르지 않고 놀기만 했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를 받기 위해 제자를 고소하고는, 재판정에서 청년에게 “어차피 너는 수업료를 물게 되어 있다.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의 계약으로, 지면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수업료를 물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오히려 스승에게 “저는 수업료를 물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면 수업료를 안 내도 된다는 판결로, 지면 스승님과의 계약에 따라 물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이로 인해, 프로타고라스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는 그의 논법이 서로 다른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이야기이다. 유화 유화(油畫, ) 또는 유채화(油彩畵)는 서양미술의 대표적 형태 중 하나로, 기름으로 갠 물감(안료)을 사용하여 그리는 서양화의 한 기법이다. 유화의 유래는 이미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당시에 그려진 그림들, 특히 벽화에서 그 원시적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교회의 장식 그림을 그리는 데 유화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15세기에는 그 기법이나 재료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16세기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유화는 비로소 서양미술의 중요그림 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재료적 측면에서 볼 때 유화는 이미 그 낱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 종류의 기름에 색소(피그멘트)를 섞어 갈아서 얻은 유화색채와 이 색채를 칠할 수 있는 마로 짠 화포(캔버스), 나무 판 혹은 마분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유화는 또한 유화색채가 지닌 여러 장점들에 크게 의존한다. 즉 기름이 끈적끈적한 젖은 색채를 그대로 쓰거나, 색채를 두껍게 미리 입힌 후 화도로 긁거나,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여 생산한 투명색채를 함께 입혀 가면서 그리거나 하는 등의 여러 기법 때문에 서양그림을 대표하는 그림 형식으로 간주된다. 이외에 유화는 유화색채가 건조된 후에 색채의 질이 빨리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오랜 기간 간편히 보존 및 보관 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와 반면에 유화색채의 기법에 유의하지 않았을 경우에 색이 바래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유화가 가진 단점으로는 사용한 색채의 질과, 칠한 두께 그리고 그림의 나이에 따라 색칠한 화면에 금(크라클뤼르)이 생기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림물감이 되는 안료(顔料)의 종류는 중세까지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반 에이크 무렵에도 연백(鉛白 Siverwhite), 천연의 군청(群靑 lapis lazuli), 녹토(綠土 테르·베르트), 석황(石黃 orpiment), 황토(黃土 ochre)와 그것을 구운 적갈색 및 흑갈색(브라운 페르다샤) 등과 식물성 염료인 매더 따위의 7,8색에 지나지 않는다. 르네상스 무렵부터는 식물성 염료나 동물성 색소도 이용되어 흑석(피에르 노아르) 등도 은필(銀筆)과 더불어 화재로 등장한다. 실재로는 안료가 인공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704년에 독일인 디스바하의 파랑부터이고, 산업혁명의 물결과 함께 19세기에 걸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수도 증가되고 있다. 그 때까지의 것은 화가의 화실에서 황토를 구워서 색상을 만들거나 약연으로 원석을 빻아서 수파정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들여 정제한 유화 그림물감의 보존법도 1924년 영국에서 금속 튜브가 발명되고 난 다음부터 오늘날과 같이 편리하게 되기까지는 동물의 장기에 채워 산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물항아리에 저장해 놓고 사용했다. 유화 그림물감도 그 시초부터 살펴보면 팔레트의 등장에다가 용법상의 결점 등으로 소멸되어 간 것도 그 수가 많다. 래피스 래줄라이(lapis lazuli) 등은 귀석(貴石)이므로 그림물감으로 하기에는 고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1824년 프랑스 정부는 장려금을 주고 화학자에게 합성법을 연구케 한 결과 오늘날의 울트라마린(ultramarino)이 생겨났고, 공작석(孔雀石 맬러카이트 그린) 등은 변색이 빠르므로 자연히 쇠퇴하였다, 18·19세기의 회화에 많이 사용되고 있었던 역청(瀝靑 bitumen)이나 테르 드 캬세르도 자연히 그 자태가 소멸되었다. 유화 그림물감 중에서 오늘날까지 오랜 동안 사용되고 있는 안료는 실버 화이트인데, 징크 화이트 등은 1845년에 공업화되고, 화학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특성에서 유화 그림물감 축에 들어간 것으로서 기법사적(技法史的)으로 본다면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기법상으로 징크 화이트는 보조적인 위치에 멈추고 있는 것이어서, 실버 화이트가 형성하는 마티에르의 효과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접어들어 유기합성화학의 발달에 따라 그 화학적인 성질이나 내구성이 약한 천연 유기(有機)의 것은 인공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또한 천연자원의 소멸에 의하여 네이폴즈 옐로나 테르베르트 등은 오늘날에는 배합 안료(配合顔料)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20세기가 되자 크롬 옐로 등이 유화 그림물감으로 등장하여 화가 터너에게 애용되었고, 고흐의 채필을 기쁘게 하였다. 황색 중에서 안정성이 있는 카드뮴 옐로도 이 무렵의 소산이다. 오늘날에는 더욱 더 진보하여 석유화학의 발달에서 아조계(窒素系)나 프델로우 시어닌계의 미립자안료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착색력이 큰 점에서 재료의 세계에 하나의 전기(轉機)를 줌과 동시에 합성수지의 발달로 중개물로 바뀌어서 기법상으로도 변혁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아크릴 그림물감 따위가 이것들을 이용한 것이다. 유화 그림물감의 각 빛깔은 안료 조성에 따라서 화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용법상의 성질인 점조도(粘稠度)·건조도(乾燥度)·피복력(被覆力)·고착력(固着力)·착색력·투명도 등을 대충 알고서 사용하는 것이 발색·고착·변색 등의 화학적인 변화와 기법상의 결함으로 나타나는 퇴산(褪散)·퇴색·암색화·초킹·불투명화·금이 감·박락(剝落), 화장지와 같은 잘디잔 주름 등등의 재해를 막을 수가 있다. 그리고 중개물이 유지이므로 투명성·반(半)투명성·불투명성의 성질을 살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들의 기본적인 성질은 기법상으로 기본이 되는 재료용법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화학적으로도 조성계열(組成系列)로 분류하여서 그 성질에서 혼색을 금기(禁忌)하는 관계를 알고서, 팔레트에 꺼낼 경우에도 색상에 관계없이 이 계열에 따라서 사용하는 습관을 붙이면 용법상 대단히 편리하다. 안료계열(顔料系列)은 대별하여 산화물계(酸化物系)·유화물계(硫化物系)·연화합물계(鉛化合物系)·동화합물계(銅化合物系)·코발트계·탄화합물계(炭化合物系)·인공레이크 계·신안료계(新顔料系)로 나뉘고, 유화의 그림물감으로서 회색조(會色調) 그림물감·배합안료 그림물감, 연색용 그림물감 등으로 되어 있다 화용에 사용되는 기름에는 용도에 따라서 용유(溶油)와 수지유(樹脂油=니스)의 계열로 나뉘는데 특수한 기법, 목적에서 그림물감 층에 윤성(潤性)을 갖도록 하는 것과 계면활성을 만드는 화액(畵液)이 있다. 용유에는 건성유(乾性油)와 휘발성유(揮發性油)가 있는 데, 일반적으로는 건성유로서 린시드 오일·포피 오일·너츠 오일이 있다. 모두 다 유화 그림물감의 점조도(粘稠度)를 약화시키고 전색성(展色性)을 늘리기 위하여 사용되며, 린시드 오일은 다른 건성유보다 그림물감의 층이 딱딱한 질이 될 성질을 가지고 있다. 다만 담색 명색인 것에만 사용하면 훗날 조금 갈색미를 띠게 되므로 화조는 어둡게 되기 쉽다. 이밖에 휘발성유가 사용되는데 휘발성유에는 식물성인 것과 광물성인 것이 있다. 식물성인 것에 테레핀유(油)가 있는데 이것은 생수지를 증류하여 만든 것으로서 바르삼 테레핀이다. 특유한 방향(芳香)을 가진 무색 투명한 것이 있는데, 공기나 빛에 방치해 두면 환원하여 기름이 되기 때문에 누렇게 변해지는 성질이므로 사용중에도 밀전(密栓)하여 항상 암소(暗所)에 둘 필요가 있다. 광물성인 것은 페트로르라고 불리는데 미네랄 스피릿이어서 완전 휘발성의 것으로서, 화용으로서는 용유라기보다는 용제(溶劑)로서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유화 그림물감이 용유로서 사용할 수는 있으나 유화 그림물감의 고착력을 약화시켜, 건조 후 색조(色調)는 단조롭기 쉽고 따라서 윤기가 상실된다. 증류 온도는 낮은 것이 아니면 유황분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화물계의 그림물감과는 흑변(黑變)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시판되는 것은 증류 온도 140-180도 정도의 것이므로 용유로서는 적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수지유에는 베로니 아 르츠셰, 베르니 아 판도르, 베르니아 타브로의 세 계열이 있다. 르츠셰는 보채용(補彩用)으로서, 마른그림물감 층에 재보필(再補筆)할 경우에 고착을 돕고 윤기가 날아간 부분의 복조(復調)·상호 화학변화를 일으키기 쉬운 그림물감이 서로 작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 즉 절연성을 갖게 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판도르는 용유와 수지유의 목적을 상승적으로 이용하는 화용유(畵用油)이다. 타블로는 완성된 작품의 보호피막을 만들기 위하여 완전 건조를 기다려서 사용되는 것이다. 니스류도 이밖에 윤기를 지우기 위한 세로니나 딱딱한 피박을 만드는 코파르의 니스 등 마티에르의 효과에 따라서 수종의 것이 그 목적에 따라서 사용된다. 그 밖에 고화(固化)된 그림물감 층에 윤성을 주는 효과를 가지는 라벤다유, 애스피크유 등이 있는데, 용법은 완전히 마른 그림물감층에 다시 그림물감을 덧칠해서 길들일 때 따위에 사용된다. 그리고 유성의 그림물감층에 수성의 과시 그림물감 등을 덧칠하는 기법에서는 그림물감층의 계면에 활성을 주는 피에르라고 불리는 화액 등이 유럽에서는 옛부터 사용되고 있다. 건조제는 유화의 그림물감에 그 안료의 기름과의 건조성의 지속(遲速)에 맞추어서 이미 배합되어 있는데, 유화 그림물감에 용유를 섞을 필요가 있을 때, 그 기름의 건조성을 빠르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본래의 용법이다. 유화 그림물감에 섞으면 건조가 촉진될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와전된 것으로 용법으로서 잘못이다. 따라서 용유로 할 기름에 일정한 양(乾性油 1리터에 대하여 3그램)을 미리 첨가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이 수치에서 지극히 소량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짐작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름을 건조하는 원칙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됨으로써 생기는 산화중합을 건조라고 하므로 건조제는 촉매로 사용되는 셈이다. 유화 그림 물감의 경우 일반적으로 산소에 의하여 표면이 건조하는 현상을 산화라고 하는 말로서 표현하고, 체질적으로 굳는 현상을 중합이라 하고 기법상으로 구별하여 생각한다. 건조제로는 표면이 건조하는 산화형의 것에 코발트나 망간이 있고, 망간은 건조 속도가 순차적으로 가속되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표면과 내면이 균일하게 건조되는 중합형(重合型)의 일산화연(一酸化鉛)이 있다. 역가(力價)가 높은 오크티르산(酸) 지르코늄 등도 중합형의 건조체이다. 유화 그림물감은 안료에 따라서 기름과의 건조에는 지속이 있으므로 그림물감 매제(媒劑)는 이러한 성질을 감안하여서 배합하고 건조 속도가 조정되어 있는 것인데, 현재 빠른 것은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와 같이 1일 정도의 것에서 버밀리언(vermilion)처림 10일 이상 2주간을 요하는 것도 있다. 이 차이는 작화 기법상 알아두고 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채색이 둔탁해지는 원인이 된다. 또한 기름의 건조는 산소와 결합하고 있는 도안에는 체팽창의 현상이 생기고 고화(固化)되어서 건조가 끝났을 때는 수축하게 된다. 로즈 매더(rose madder) 등의 그림 물감을 두껍게 많이 사용하면 말라서 표면에 가는 주름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재료기법에서는 이 종류의 것에 파테 메디움이라 하여 수축을 방지하는 용재도 있다. 시카티프 드 크트레이 브란이라고 하는 건조제는 바탕을 칠하기에 사용되는데, 이것은 산화·중합의 동시효과를 갖도록 일산화연과 이산화망간을 배합한 것이고, 시카티프 후라만드라고 불리는 것은 주로 수지가 혼합된 기름에 첨가하기 위하여 만들어지고 있는데 글라시 등의 기법에 사용된다. 이 화법은 네덜란드의 마니엘 위테(1617-1692)에 의하여 창안된 것으로서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실시된 것이다. 실버 화이트와 바인 블랙(오늘날의 그림물감으로 피치 블랙과 동질로 명암의 톤을 만들고, 부조(浮彫)와 같이 사물의 형태의 모델링을 그리고 표현하는 묘법(描法)으로서, 전체는 회색의 해조(諧調)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은 애당초 실내의 기둥이나 대들보의 장식으로서 실시된 것이었는데 이 방법이 작화상으로 언더 페인팅으로 이용되어 오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투명색을 살리는 용법으로서 살려지고 있다. 이 수법은 렘브란트의 작품 <삼왕 예배> 등이 있고, 루벤스의 작품 등에도 부분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몇 개 있다. 방법은 처음에 회색조로 사물의 모델링을 언더 페인팅하여 완전히 마르는 것을 기다려서 그 위에 로우컬한 빛깔을 투명성으로 덮어 씌우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채색되는 빛깔은 밑의 회색에 의하여 명암에 번져진 잘 조화된 색조로 보이게 된다. 투명색의 이러한 취급을 글레이징(glazing)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하나의 용법으로서 글레이징(글라시)의 용법을 확대하여 오늘날에도 활용되고 있다. 글라시라고 하는 것은 톱 레이어(top layer=화면에서 최상층의 색조를 가리킨다)를 유약처럼 유급하는 기법으로서, 이 경우 밑의 색층은 반드시 건조되어 있을 필요가 있다. 만약에 미건조된 위에 실시하면 밑의 빛깔과 섞여서 투명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이 용법의 발색의 깊이를 찾는 목적이 소실되는 결과가 된다. 이 용법에 사용되는 용유(溶油)는 수지분(樹脂分)을 가지면서 휘발성이 있도록 처리된 기름을 사용한다. 이 기법으로 루벤스가 스스로 처방하여 사용하고 있던 기름을 비벨르라는 프랑스의 회화 과학 연구자가 해명(解明)하고 후세에 매출된 리키 드 뤼반이란 기름이 프랑스의 화구점에는 있다. 베르니 아 르츠셰(시판되는 것) 50cc에 테레핀유를 소량으로 10그램의 화이트 단마 수지를 열에 용해한 다음에 첨가하고 30cc의 α-피넨을 합치면 된다. 글라시할 때는 붓이 아니라 글라시용의 솔이 있어서 이것을 칠하게 된다. 르누아르의 몇몇 작품은 이 기법의 응용으로서 예를 들면 도기(陶器)의 항아리 등을 그릴 때, 그 하이라이트 부분에(포앙 에크라테라고 한다) 우선 안파트몬이라 하여 실버 화이트로 밑바탕을 만들어 두고서 이것이 완전히 마른 위에 부드러운 붓으로 글라시하여 가는 것이다. 이 투명성을 이용한 채색법은 그 빛깔의 깊이가 동시에 조형감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갖게 된다. 루오도 이따금 작화 중에 이 수법을 채용하고 있다. 그 한두 예를 들면 에메랄드 그린은 변색하기 쉬운 빛깔이므로 작화상 변색하기 쉬운 부분에는 네이플스 옐로를 칠하고 잘 건조된 위에 빌리잔에 소량의 실버 화이트를 섞은 빛깔을 수지유로 녹여서 겹치게 하는 방법으로서 에메랄드 그린의 효과를 만들거나 또는 루오 울트라마린의 채색효과는 품위가 높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방법을 보면 밑의 빛깔에 로우 시엔너를 칠하고 건조를 기다린 다음 그 위에 실시하고 있다. 더욱이 유화 그림물감의 채색의 아름다움은 그 빛깔의 적도색층(適度色層)의 두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유화 그림물감은 필요 이상으로 두껍게 칠하여도 반드시 그 빛깔의 아름다움이나 솔리드한 힘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은 각각의 색층이 마르고 난 다음에도 그 발색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어떠한 색상의 것에 대하여도 그 조성계열(造成系列)에 따라서 체질적인 공통점을 가지면서 제각기 특이성을 나타내고 있다. 채색기법 중에는 이와 같은 사항을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으므로, 화면에서의 색채배치나 조화(調和)의 요소도 고려하면서 특이한 색채효과를 조직케 하는 연구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최종적인 색채효과를 위해서는 프로미에르 드 쿠시라고 하여, 초층(初層)에 사용되는 그림물감에 대한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이것은 프랑스의 아메데 오잔판이 고전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많은 뛰어난 화가의 채색층을 조사하여, 그 최대 공양수적인 것을 표시하고 있다. 그 기본적인 초층에 놓여 있는 그림물감 이름은 ① 비치블랙 ② 코발트 블루 ③ 로우 시엔너 ④ 테라 로즈 또는 베니션 레드 ⑤ 아크사이드 오브 크로뮴 ⑥ 실버 화이트(근년에는 징크 화이트라고 부른다). 이것들의 채색 위에 다채로운 변화를 갖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① 아이보리 블랙 ② 옐로 오커 ③ 시루리언 블루 ④ 인디언 레드 ⑤ 비리디언을 제2층 이후에 사용한 것이 채색효과가 좋다는 것을 표시하고, 화면에 생채를 주고 또한 최상층에서 회화의 형을 확정하고 조형성을 성립시키는 것으로서는 ① 카드뮴 옐로 ② 카드뮴 레드 ③ 에메랄드 그린 ④ 코발트 바이올렛 등을 들고 있다. 이들 그림물감의 발색이 산뜻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러한 취급을 하여야 된다는 것은 이화학적으로도 합리적이다. 또한 작화에 사용되는 색수는 상품으로서 메이커들이 70종에서 100종 이상이나 레이블명(名)을 붙여 내놓고 있는데, 실제로는 기껏 많이 사용하더라도 20색 내외로 충분하다. 작화의 기조에 적응된 기호에 따라서는 이것에 수종의 특색 있는 빛깔을 준비하는 것이 한도로서, 중간색 따위는 오히려 팔레트에서 조색하여 찾아내면 된다. 다음으로 그림물감을 칠하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면, 작품에 따라서는 중후한 밀도가 있는 그림물감층을 만들거나 또는 그림물감의 쌓아가는 방법으로 질량감을 표시하고 있다. 고흐처럼 붓끝이 작화충동(作畵衝動)을 야기하듯이 제3자에게 호소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자태도 있다. 이러한 유화 그림물감의 점조도(粘稠圖)를 이용한 기법은 16세기 후반 무렵부터 유화 그림물감에 체질적인 매제합성(媒劑合成)을 갖도록 되어, 밝은 부분은 두껍게 그늘이나 어두운 부분을 엷게 그림물감을 붙이는 베네치아파의 자태를 탄생시킨 다음부터로서, 17세기에 이르러 직접 묘법의 기법(사상적인 작화법)이 로마화파 가운데서 나와 이것이 에스파냐파(派)의 벨라스케스나 네덜란드파의 렘브란트의 수법 중에 생기를 주고 있는 브러시 스트로크로서의 용법을 가리키게끔 되었다. 스트로크는 유화 그림물감의 점조도의 조도(稠度, Plasticity)를 이용하여 필의(筆意)를 전하는 데 그 표현효과가 있다. 렘브란트 작품의 대부분은 어두운 부분의 톤의 해조(諧調)를 만드는 방법과 이 브러시 스트로크에 의하여, 그림물감을 잘 다루면서 모델링을 그려내는 수법인데 그는 이것의 명수였다. 이 수법은 고쳐 그릴 수 없는 결정적인 필법에 의하여 결정되어 가는 데에 테크닉의 높이가 있다. 동양의 수묵화에도 필의를 의탁하는 자세가 있는데, 다분히 정신주의적인 데 비하여 유럽의 이 종류의 것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이며 인간적이다. 유채화의 기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린다고 하는 것이 자칫하면 그림물감을 칠해서 겹쳐 가는 것이라 생각되기 쉬운데, 칠을 해서 겹친다는 것(코팅)이 (+)의 기법으로서 원칙적으로 이해됨과 함께 (-)의 기법으로서 그라타주라는 긁어내고 깎아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유화 그림물감을 두껍게 바른 후 나이프로 긁어 내면 엷은 색층을 만들 수가 있게 되는데, 그라타주란 말의 본래의 의미는 그라트와르(스크레이퍼)라고 하여, 양쪽 날을 가진 나이프로 미리 두껍게 칠해 둔 그림물감의 완전건조를 기다려서, 이 그림물감의 봉우리를 깎아 내는 방법이다. 깎여진 그림물감의 결은 밀도가 있는 딱딱한 질을 들어내고, 다음에 칠하는 그림물감을 통하여 솔리드한 느낌을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것이 마티에르의 질의 변화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 극단적인 이용법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에 영국의 벤 니코르손이 있다. 이것은 초층(初層)에 미리 예정한 색층을 칠하여 두고서, 완전히 마르는 것을 기다려 다음의 색층을 겹치고, 다음으로 부분적으로 초층이 들어날 때까지 상층의 색층을 긁어내어 하색(下色)을 보이는 채색법으로 색채의 대비가 명확하여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루오 등도 발색의 견뢰(堅牢)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색층의 그라타주를 실시하여 적당한 엷은 색층의 조합으로 작화하고 있다. 프로타주란 것은 프로테라는 말에서 생겼는데 그림물감을 문지르는 채색법을 말한다. 이 기법의 말이 뜻하는 것은 얇게 칠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하층색의 투색(透色)을 이용하여 복합하는 색채효과를 찾는 것이다. 이 기름의 기원은 독일 태생인 막스 에른스트(1891-1976)가 동양에서 말하는 탁본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나무나 돌이나 금속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서 탁본묵으로 그 모양을 문질러서 찍어내는 것처럼 하여 그림모양을 베껴내고 이것을 계획적으로 화면에 조합시켜서 작화하는 방법을 표시한 데서 생긴 기법용어로서, 문지르거나 두들기는 채색법에 전용된다. 이 경우의 그림물감은, 용유는 사용하지 않고 고점도의 유화 그림물감을 마른 화면에 수(穗) 끝이 커트된 듯이 빳빳한 붓 또는 솔로 그림물감을 문질러 나간다. 19세기 후반에 로르시냐크(1863-1935)나 조르주 쇠라(1859-1891)가 물리학이나 색채학의 학설에서, 예를 들면 광학(光學)에 있어서의 리츠의 결합원리에서 시각혼합의 법칙에 의하여, 화면에 병치혼합의 채색법을 생각하여 조형하는 양식을 표시하였는데, 그림물감의 칠하는 방법이 점 또는 그에 가까운 필치(筆致)로 표현하는 자세를 가리켜서 점묘(點描)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회화주의를 프왕티즘(點描主義, pointillism)이라고 한다. 이들 작품의 조형감과 채색의 취급면에서 그 화조를 보면, 이 형식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채색기법의 질서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채색된 빛깔은 안료의 품도를 유지토록 혼색을 하지 않을 것과, 트와르에는 반드시 이들 색채를 결합시키는 작용을 하는 엷은 회색조의 그라운드(바탕칠)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바탕칠의 회색조는 원색의 채도를 유지하여 화조 속에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원리는 포비슴 화가도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점묘형식도 이 효과에 의한다. 그리자유처럼 무채색의 회색기조에 의하여 모델링을 그리는 것과 구별되고, 유채색의 적갈색기조로(로 시엔너나 번트 시엔너를 주로 사용한다) 모델링을 그리는 명암묘법을 말한다. 루벤스의 소품에는 그리자이외나 카마이외의 묘법을 이용하여 예보시(祖描 ebauche) 하였을 뿐인 유품이 몇 개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 ~ 1274년 3월 7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가톨릭은 그를 천사장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Roccaseca)에서 아퀴노(Aquino) 지방 영주 중 하나인 란돌포의 9남매 중 일곱 번째 아들(아들 넷 중에서는 막내)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탄생 연월일을 명시한 기록은 전무하다. 이에 따라 그가 사망한 날짜, 즉 1274년 3월 7일을 기준으로 그가 태어난 해를 추정할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자인 토코의 굴리엘모(Guillaume de Tocco)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이 되는 해’에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또다른 전기작가인 베르나르 귀(Bernard Gui)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을 넘겨 50번째 해를 막 시작할 무렵’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루카의 톨로메오(Tolomeo de Lucca)의 경우,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살에 사망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48세에 사망했다고 말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서로 엇갈리는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해는 최소한 그가 48살까지는 살았다는 가정하에 1224년으로부터 1226년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다소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루카의 톨로메오의 기록보다는 토코와 베르나르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둔 1224년과 1225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이를 확정지을 만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1226년 더 나아가 1227년 출생설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는 1230/1231년경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을 받는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토마스의 부모들의 기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39년 경 토마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나온 후 당시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을 접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미래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으로 성장해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124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토마스의 가족은 도미니코 수도원의 주선으로 파리로 유학가던 토마스를 도중에 납치하여 로카세카 성에 감금했다. 그리고 약 1년여 간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도미니코회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도 그의 소신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결국 1245년 여름 토마스 아퀴나스를 나폴리의 도미니코회 소속의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이 귀족의 아들로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이 될 수 있는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방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 길 대신 청빈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소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후 재속 성직자들과의 논쟁에서 탁발 수도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단호한 수도사와 대주교직을 정중히 사절하게 되는 겸손한 수도사의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족들의 연금에서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온 1245년부터 1248년까지의 행적, 특히 그가 1245년부터 1248년 전반기까지, 즉 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따라 독일의 쾰른으로 떠날 때까지 약 3년 남짓한 기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그가 파리 대학교의 학생으로서 정규 교육 과정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학자들은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 3년간 파리 대학교 혹은 파리의 도미니코회에서 토마스가 7개의 필수 과목을 공부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파리대학에서 강의하던 알베르투스의 신학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먼저 인문학부에서 수학한 이후에나 신학과에 진학하여 신학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중세 대학 체제 상 토마스에게는 알베르투스의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년간의 파리 체제 이후 1248년 토마스는 쾰른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비로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년간 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이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영향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른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그의 우람한 몸집과 과묵한 성격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장난기가 섞인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별명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베르투스가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별명과 이와 얽힌 일화와 전설들이 사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전설들은 이국 땅에서 어눌한 외국어 구사능력으로 인해 혹은 몇몇 전설이 전하듯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래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이 소심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청년 수도사 토마스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심한 젊은 제자의 침묵 뒤에 숨겨진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꿰뚫어보고 이것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스승 알베르투스의 자상함과 혜안이 그가 전수한 학문적 지식과 더불어 미래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떤 영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251년 말에서 1252년 초엽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회 총장으로부터 파리에서 강의를 할만한 신학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에 알베르투스는 "학문과 삶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교의 교수로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벙어리 황소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 본 알베르투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학자 알베르투스의 강의, 심지어 그의 신학강의까지도 일부 분담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재능과 역량에 대해 의심할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의 총장은 토마스가 당시 기독교 세계의 문화/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던 파리대학에 도미니코회의 대표자로서 추천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그의 어린 나이, 즉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총장은 파리대학의 교수로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을 벌일만한 노련한 학자를 원했다. 그의 복안은 종단의 정신을 대표하는 자리에 당대 도미니코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인물이자 중세사회 최고의 지성인인 알베르투스를 파리대학으로 불러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파리대학 교수로 "벙어리 황소"로 불릴 만큼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이제 소년의 티를 갓 벗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천했다. 총장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총장의 당혹감과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로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총장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알베르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미니코회의 선배 수도사이자 당시 추기경이었던 생 셰르의 위그(Hugues de Saint Cher)까지 설득하여 총장에게 결정적인 압력을 가한다. 결국 위그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알베르투스의 요구는 관철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강독자로서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게 되며 1252년부터 시작하여 125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 강의와 더불어 신학교수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과정으로서 명제집 주석 집필에 착수하게 된다. 1256년 명제집 주석 작업이 완결될 즈음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파리로 올 당시부터 파리의 분위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재속성직자들과 교수들이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 출신 수도사들의 파리대학 교수 취임에 대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불만과 이에 따른 대립이 극에 달하여 재속교수들과 수도회출신 교수들 사이의 분쟁이 유혈폭력사태로 이어질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취임강연은 수도회 출신 교수를 반대하는 편의 사람들이 청중들의 입장을 방해하는 가운데 만약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프랑스 왕의 군대가 강연장까지 배치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친 상태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시기에 교수가 된 동시대의 또다른 거장 보나벤투라의 경우도 신학교수로 취임할 자격을 갖추고서도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도미니코회 총장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륜과 조용한 성격에 대해 우려했던 것도 파리가 이런 분위기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쾰른에서의 알베르투스와의 만남은 단순히 토마스의 성취를 단순히 학문의 영역에서만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삶"에서도 가능케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쾰른 체제기에 얻었던 스승 알베르투스의 신뢰와 명제집 주석 및 강해 과정에서 재차 확인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더해지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학자로서 각성하게 된다. 영민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쉽게 자신을 표현하지는 못하던 재능있는 청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소심함과 섬세함을 신중함과 정교함으로 변모시켜 체화함으로써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및 친구 보나벤투라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학자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덩치만 큰 수줍은 말더듬이 벙어리 황소가 적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그리고 조목조목 철두철미하게 비판하며 동료수도사들과 수도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최전선으로 뛰어든 위풍당당한 영웅으로 변모한 것 역시 이 때부터였다. 실제로 수도회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재속성직자들 및 교수들의 수장 기욤 드 생따무르(Guillaume de Saint Amour)의 입장을 주도면밀하게 반박함으로써 교황청이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두 미래의 교회학자,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체스코회의 보나벤투라의 투쟁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비록 소란스러운 가운데 진행되기는 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교수로서의 첫 강연은 대가로서 성숙해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첫 승리를 기념하는 이정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삶"에서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욥기 주석', 그리고 '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 그리고 자유토론집 VII과 XI과 같은 이 시기에 저술되거나 막 써내려가기 시작한 작품들은 물론, 오늘날 천사적 박사라 불리는 위대한 스콜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259년말부터 1261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가 1259년말에서 1260년초 사이에 후임자에게 교수직책을 물려준 이후 파리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그가 아냐니에서 교황청 강독자로서 2년간 머물렀다는 의견이 주목받은 바 있지만 이는 어떤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사실상 이 의견에 동의하는 학자는 찾기 어렵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토마스 아퀴나스가 본래 자신이 속한 교구인 나폴리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대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그의 행선지만큼 그가 이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런 막연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파리를 떠날 즈음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이교도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다. 이렇게 모든 사료에서 사라졌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1년 9월 14일 현재 그가 오르비에토에 체류중임을 확인해주는 기록에서 약 2년 만에 재등장하게 된다. 이후 1265년 로마로 떠나기 직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회를 대표하는 선생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성직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욥기 주석'과 '대이교도대전',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을 완성했으며 '4복음서 연속주해'의 상당부분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교회의 요구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오류를 반박하며'을 비롯한 다수의 소논문들을 작성한 것 외에도 오르비에토는 물론 주변의 도시까지 방문하여 성직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적을 살펴보면 높아져가는 명망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빠져가는 한 수도사의 강행군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높아져 가는 명망과 쌓여가는 피로 속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변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성실한 선생님이자 동료였고 또 따뜻하고 겸손한 사목자이자 수도사였다. 이와 같은 면모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르비에토의 수도원으로 한 젊은 수도사가 수도원장에게 심부름을 왔다가 원장실에서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수도사와 함께 어디에 다녀오라는 원장의 지시를 받게 된다. 이 젊은 수도사는 원장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서있던 뚱뚱한 수도사의 소매를 잡아 채고는 원장의 지시이니 같이 길을 나서자고 했다. 그런데 이 젊은 수도사의 빠른 걸음을 뚱뚱한 수도사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젊고 팔팔한 수도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오는 이 뚱뚱하고 느려터진 수도사에게 그로 인해 지체된 시간을 탓하며 오르비에토 시내에서 한복판에서 꽤 고약한 말들을 퍼부었다고 한다. 오르비에토의 사람들은 기겁을 한 표정과 침묵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국 한 사람이 보다 못해 이 젊은 수도사에게 묻기에 이른다. "저 분이 온 세상에 이름난 토마스 아퀴나스 수도사이신 건 알고 계십니까? 도대체 저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고 댁은 누구시길래 저 분을 이리도 혹독하게 대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젊은 수도사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과 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토마스 수도사에게 거듭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사죄를 했다고 한다. 한편 젊은 수도사가 투박을 주는 동안 한숨을 돌렸을 토마스 수도사에게 왜 한마디도 불평없이 그런 불편한 지경을 고스란히 당하셨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수도사의 본분은 순종과 겸양입니다. 저 젊은 수도사와 저는 그 본분을 따랐을 뿐입니다." 1265년부터 1268년까지 그 상징적인 이름에 걸맞지 않는 학문적 불모지였던 로마로 불려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교수로서의 활동은 물론 저작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 '신학대전'의 집필에 착수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또한 이 시기는 '신의 권능에 관한 정규토론집'을 비롯하여 '영혼에 관한 정규토론집', 그리고 '영적피조물에 관한 정규토론집' 등과 같은 작품들이 완성되는 등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시기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이 시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욤 모어베크(Guillaume Moerbeke)의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번역본을 사용하여 '영혼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주석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9년 남짓한 이탈리아 체재기간은 '대이교도대전'이 완성되고 '신학대전'과 같은 작품이 집필되기 시작한 시기이자, 그의 성숙한 사유를 반영하는 수많은 주요저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때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막 꽃피우기 시작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숙한 사상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이 시기의 저작들은 골방에 들어앉아 오로지 펜과 책만 붙들고 앉아 있던 그저 영민하기만 했던 학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무엇보다도 겸손한 순종의 태도로 신도와 동료들에게 잠깐의 강론을 하기 위해 며칠이 걸릴 지 모를 먼길을 떠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책임감과 사명감 강한 성직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에 완성되었거나 집필되기 시작한 두 대전을 비롯한 저작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책임감과 사명감 강한 인간의 초인적인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 사상 처음으로 두차례나 교수직을 역임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하지만 1268년으로부터 1272년까지 4년간의 파리체재기간은 겉으로 드러난 영광조차 느낄 시간도 없는 거론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또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하는 교수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느꼈을 책임감과 압박감은 엄청 났을 것이다. 그런 압박감은 종종 이 시기에 쓰여진 논박서, 예컨대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와 같은 저서에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예의 냉정함과 침착함을 잃고 노기까지 드러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프랑스 왕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세게 식탁을 내려치며 "그래! 마니교도들을 논박할 방법을 찾았다"를 큰소리로 외치고는 비서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하면 왕에 대한 결례로 큰 벌을 받았을테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구적 열의에 감동한 왕은 토마스가 비서들에게 구술하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두 번째 파리대학교수로 활동하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처했던 상황이 어려웠던 것만큼 잠시의 쉴 틈도 없었다. 아마도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년에 건강악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쉼없는 활동은 이 시기에 완성한 작품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과 양으로 결과를 맺었다. 마태오 복음, 바울서간 및 요한복음에 대한 방대한 주석 및 강해를 이 시기에 행했으며 '악에 관한 정규토론집' 및 자유토론집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토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신학대전의 1부와 2부를 역시 파리에서 두 번째 교수생활 당시 완성했으며 '영혼론 주석'과 '감각과 감각물에 관하여 주석'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도 이 시기에 완성하거나 집필했다. 특히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활동과 저작활동, 특히 엄청난 저술량과 그것을 능가하는 질적인 완성도, 특히 신학대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들이 보여주는 완성도는 '기적적'이라는 수식어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1272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나폴리로 향한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절필한 1273년까지 사도 바울의 서간문에 관한 주해 작업과 시편 주해, 그리고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신학대전의 3부와 같은 대작과 함께 여러 소논문을 작성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집필에 여념이 없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 중 어떤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당황케 했다. 그리고 그 미사 이후 가족들의 연금에서 풀려난 뒤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위대한 저작 활동을 완전히 멈춘다. 전한 바에 따르면,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3부 가운데 속죄에 관해 집필했었다고 한다. 그가 이제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그의 비서 레지날드가 토마스에게 그 이유를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레지날드 난 이제 할 수 없네"라고 답한다. 이 답을 듣고 더욱 걱정이 되어 재차 이유를 묻는 레지날드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었다는 증언들이 전기에 등장하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의 건강 상태가 이 무렵부터 급격히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273년 12월 말부터 1274년 1월 초 무렵 여동생 테오도라를 방문할 무렵의 기록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거의 아무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전하고 있다.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신이 내 저술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내 인생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것이라네"라고 힘겹게 말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에 따라 리용으로 향하던 2월 중순 이후로는 여행의 피로까지 겹쳐진 탓인지 기록에 따르면 식욕까지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결국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2월 말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일부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일생의 마지막 활동으로서 아가에 관한 짧은 주해를 남겼다고 하는데,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주해는 아마도 구술된 내용에 대한 보고서(Reportatio) 형식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원본이나 사본은 물론, 그의 사후 이 주해를 접했다는 증언조차 확인할 수 없다. 1274년 3월 7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100여 명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영면했다. 1274년 5월 2일 수요일 파리대학 총장과 운영진은 당시 철학부에 속해 있는 모든 교수들의 이름으로 도미니코회 총회에 비통함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젊을 시절부터 자라고 배우며 가르쳤던 파리에 묻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 파리대학 총장과 교수들의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이 '위대한 성인'의 시신을 내줄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추모와 존경의 표현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보내진 반응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죽은 지 정확히 3년째 되던 1277년 3월 7일 파리와 3월 18일 옥스퍼드에서 각각 에티엔 텅피에, 그리고 같은 도미니코회 출신의 로버트 킬워드비에 의해, 그리고 1286년 4월 30일 또다시 옥스퍼드에서 킬워드비의 후임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 이론을 포함한 몇몇 주요 이론들이 단죄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의 나이로 죽은 지 49년째 되던 1323년 7월 18일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론들에 대한 단죄는 모두 철회되었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옥스포드에서 요하네스 페캄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 당한 지 39년이 지난 해인 1325년 2월 14일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통성을 교황청이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1567년 4월 15일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학자로 공표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토마스가 성인의 격에 어울릴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한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할 때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는 태도를 갖고 은총과 자연,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조화로운 통일을 부여했다. 그의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전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부분이므로 인간이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推論)하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길인 것이다. 우선 그의 존재론(存在論)은 신학 전체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실재적 색채가 강하다. 신과 피조물(被造物)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는 '존재의 유비(類比)'를 사용하여 유비와 참여의 개념에 의해 동일성 안에 차별을 갖고 있는 존재의 파악을 가능케 하여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범신론(汎神論)의 위험을 피하였다. 본질구조(本質構造)의 규정원리(規定原理)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質料)와 형상(形相),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아비체나에게서 발견한 '본질과 존재'의 구별을 이용, 그의 독자적 원리를 전개하고, 본질과 존재가 일치하는 신(神) 존재의 필연성,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을 확립하였다. 신의 존재 증명에는 본체론적(本體論的) 증명을 피하고, 경험에 의해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제1원인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증명법을 사용한다. 악의 문제는 선의 결여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음에 인격의 단일성을 믿는 그는 영혼의 유일형상성(唯一形相性)에 바탕을 둔 인간학을 전재한다. 이성적 동물로서 영과 육의 합성체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영혼에는 이성작용(理性作用)과 의지작용(意志作用)이 있으며, 영혼은 이성적 인식작용의 원리일 뿐 아니라 동물적·식물적 생명원리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인식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인데 이성은 감각이 주는 내용으로부터 추상작용에 의해 대상의 본질개념을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능동지성(能動知性)과 수동지성(受動知性)을 구별한다. 도덕론에서는 모든 도덕은 신을 향하는 이성과 피조물의 운동이라고 파악하므로 종국적인 목표는 피안에 있어서의 신직관(神直觀)이 된다. 여기에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윤리적 행위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 도덕률을 영원법의 반영이라 보고 초자연적 신에 입각하여 신을 향하는 목적론적 존재론의 체계 안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초월적인 것인 동시에 자연의 이성의 소리가 된다. 이성에 복종하는 습성으로서의 덕에는 세 윤리덕(倫理德-正義·節制·勇氣)에 사려(思慮)의 덕을 추가하고, 그 위에 은총에 의한 신학적 덕(信望愛)을 추가한다. 그중에도 사랑이 여러 덕의 형상으로서 인격의 최종적 완성을 이루게 한다고 주장한다. 윤이상 윤이상(尹伊桑, Isang Yun, 1917년 9월 17일 ~ 1995년 11월 4일)은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이다. 본관은 칠원이며 독일식 이름은 Isang Yun(이장 윤)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에서 성장하였다. 북한 드라마 “민족과 운명” 5부~8부의 모델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선비 출신의 윤기현(尹基鉉)과 농가 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이상의 어머니는 용이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1920년 충무(지금의 통영)로 이사를 해 학교를 다녔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에 다녔다. 여덟 살에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풍금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잘 부르고 악보를 곧잘 읽는 등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웠고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池内友次郎)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선가곡 악보가 발각되어 1944년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서울에서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정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1956년에는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8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유학생들을 입북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 "출국"에서 오영민 박사(=실제인물 : 오길남 박사)를 유혹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1994년 9월 서울·부산·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하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을 거절함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사망후 김정일 명의의 화환이 보내졌으며 북한에서 국가적 차원의 음악회가 열렸다고 함.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1917년 1917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06년 1906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5년 1965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라틴 문학 고대 라틴문학은 라틴어(차이점 중세 라틴어)로 쓴 문학을 말한다. 고대 라틴 문학은 시대적으로 기원전 6세기 초에서 시작하여 기원후 4세기 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될 때까지 약 800년에 걸쳐서 고대 그리스 문학을 모체로 발전하였다. 이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이 시대적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로마 문학(라틴 문학)은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문학의 강력한 영향하에 비롯된다. 그 이전에도 구송(口誦)에 의한 영웅가요나 소극류가 있긴 했으나 이들은 너무 유치하고 조잡하여 세련된 그리스 문학의 유입에 저항할 길이 없었고 그 후의 문학발달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 문학은 발생 시초부터 그리스 문학을 전면적으로 계승할 운명이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를 점차적으로 수중에 넣는 과정에 있어 동시에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했다. 로마 문학 발생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타렌툼의 정복(기원전 272)으로 그때 노예로 끌려간 그리스의 소년 안드로니쿠스가 얼마 후 로마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 로마 문학의 제1작이 되었다. 특히 제1차 포에니 전쟁의 국민적 승리(기원전 241)에 의한 로마인의 물질생활의 여유는 고급문예의 출현을 촉구했고 다음해 개최된 '로마제'에서 상연된 안드로니쿠스 번역의 그리스극(劇) 성공은 연극시대의 단서를 열어 후에 2대 희극작가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를 낳게 했다. 그 후 그리스 문학의 단순한 모방 추종에서 탈피한 로마 문학은 제재와 장르 및 정신에 있어 점차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했다. 로마적 제재의 연극, 플라에테쿠스타 비극 및 토가타 희극은 과히 성공하지 못했으나 엔니우스는 로마 역사를 서사시로 읊어 '로마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고 그가 창시한 사투라(풍자시)는 로마만의 장르로서 루킬리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다. 산문가인 카토(기원전 234-기원전 149)는 로마의 그리스화를 꺼려 로마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완고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대세는 헬레니즘화의 방향으로 흘러 그리스적 교양이 높은 상류 인텔리층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문학은 더욱 세련되어 라틴어도 문학어로서 발달하면서 마침내 기원전 1세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가계(家系)와 선조의 공적을 자랑하는 로마인에게는 자기 나라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풍도 강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인 안드로니코스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번역한 후에 비로소 라틴어의 본격적 서사시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엔니우스의 『연대기』였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때쯤, 파비우스와 픽토르는 로마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어로 최초의 『역사』를 썼다. 파비우스를 포함해서 정치가가 문화인으로서 활약하는 예가 드물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 스키피오로서, 철학자 파나이티오스, 역사가 폴리비오스 등의 그리스인과 친교를 맺어 로마 일류의 지식인 살롱을 형성하고 있었다.헬레니즘의 유입에 대해서 그 개인주의가 로마의 전통적 미덕을 파괴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뿌리깊었다. 감찰관 카토가 그리스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에게 로마 퇴거를 명령하고, 원로원이 민중의 바쿠스 제의를 금한 것은 헬레니즘화 풍조에 대한 반발이다.실용성을 존중하는 로마인은 변론을 중시하였고, 나아가서 변론을 통하여 철학을 깊이 이해했다. 또한 마치 명연설을 듣는 것과 같은 문장을 최상의 명문으로 생각하게 되어, 간결하고 알기 쉬운 라틴 산문이 탄생했다. 대표적 웅변가 키케로는 변론에 손질을 가하여 널리 ‘읽히기’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변론에 대한 강한 관심도 작용하여 로마인은 연극을 좋아했다.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플라우투스, 카이킬리우스, 테렌티우스가 아티카 희극을 본떠서 로마 희극을 만들었다. 공화정 말기를 장식하는 변론 무대는 주로 법정과 민회였다. 정적의 고발, 피고의 변호, 민회에서의 법안 설명, 선동 등 변론은 실용적 기능이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카이사르 정도의 실리주의자가 변론의 제1인자가 아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듯이, 변론은 단순한 기능 이상으로 교양이나 학식을 알려주는 척도였다. 키케로(전 106 전 43)에 이르러서는 변론(즉 학식)에 의한 지배조차 꿈꾸었다.그의 웅변은 「카틸리나 탄핵 연설」에 의해 ‘국부(國父)’의 영예를 가져오지만, 「필리피카이」(안토니우스 탄핵연설)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키케로에게는 연설 형식의 시론(時論) 「베레스 탄핵」이 있다. 그러나 키케로뿐만 아니라 정치적 선전문서를 만드는 사람은 많았고, 그 중에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가 생겨났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문체는 알기 쉽고 분명하며 긴장감이 있고 힘차다. 불리한 사실을 생략하기 위해 간결한 말을 쓰고, 3인칭(카이사르는…했다)을 즐겨 써서 객관적인 인상을 풍기고, 암암리에 자기 선전·자기 변호에 힘썼다. 「갈리아 전기」는 라틴어 산문의 걸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객관성과 성찰의 완성은 역사가 살루스티우스의 작품들이다(「카틸리나 음모」「유구르타 전쟁」 「역사(歷史)」). 조국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대한 노여움, 그리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생긴 산문은 타키투스(55? 117?)의 모범이 되었다.시詩 혼란한 시대에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루크레티우스(전 94? 후 55)는 철학시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에서 무력한 기성 종교를 통박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세상에 ‘로마에서 제일가는 민감한 시인’(테니슨의 평)인 카툴루스(전 84? 후 54?)가 나타난 것은 하나의 경이이다. 22세 때 약 10세 연상의 유부녀인 클로디아를 알게 되어, 미모의 여인에 대한 열렬한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한 질투와 절망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시집』). 공화주의자 카토(전 95 후 46)는 죽는 순간까지 플라톤을 읽었다. 키케로는 플라톤에게서 배웠으며 대화 형식의 철학논문(「우정론」 「국가론」 등)을 썼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로부터 배우려는 태도였으며, 백과전서적 지식인 테렌티우스 바로의 방대한 저서 『라틴어론(論)』 『농업론』 등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 아리스토파네스(, , 기원전 446년 - 385년)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대표적 희극작가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출생과 사망 년도에 관한 서류상의 기록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의 상연년도 기록서에 따르면 최초로 그의 희극이 상연된 해가 기원전 427년이며, 이 해에서 약 20-25년 전을 그의 탄생 해로 잡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망 시기는 플라톤의 대화록 (혹은 심포지온: 향연)에 아리스토파네스가 등장하는 것에 비추어서 짐포지온의 편집 해를 기원전 380년 경으로 잡을 경우,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로부터 몇 년 후 사망하였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가정하고 있으나, 그 신빙성이 그리 높다고는 볼 수 없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근방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며 페리클레스 시대에 성장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극작을 시작했고 실제로 연극 경험을 쌓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30년 간 그는 평화론을 지켰으며, 기원전 427년에 처음으로 연극 경연에 참가하였다. 그의 희극의 전반적인 내용과 수준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아테네의 청소년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생과 사망 년도가 불확실 하듯이 그의 사적 생활에 관해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희극들 가운데 정치적 성향을 띤 작품들이 많기 때문에 아리스토파네스가 기원전 5세기 말의 혼란한 아테네의 정치에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서류상의 증거는 없다. 그의 인물상에 관해서는 플라톤의 짐포지온에 묘사된 것을 비유하여 간혹 이야기 하지만, 여기에도 플라톤 대화편이 창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크게 귀를 기우릴 만한 것이 못된다. 그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새로운 사상가들을 혐오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웃기는 재능을 타고나 모순과 잘못을 웃음으로 풍자하였다. 총 44편의 희극을 쓴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1편이 오늘날 남아 전하여지고 있다. 다른 고대 희극시 작가의 작품은 거의 인멸되고 인용 단편이 전해질 뿐이나, 아리스토파네스만이 예외적으로 11편의 작품과 다수의 단편이 현존한다. 희극 연출의 방법은 당시의 병화(甁畵) 등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에 의하면, 참으로 외설스러운 듯한 모양으로 대사에 넘쳐흐르는 식욕·성욕·금전욕 등에 대한 번뇌에서 볼 수 있는 노골적인 표현을 그대로 시각적으로 호소하는 듯한 가면의상(假面衣裳)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다른 작가와 아리스토파네스와의 사이에 큰 차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비극과는 달리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의 구성은 기발하고 풍자적인 에피소드를 대충 이어 맞춰놓은 것이 많아 극으로서의 각 부의 유기적 통일성의 결여, 나아가서는 이른바 희극적 성격의 불안전한 파악이라고 하는 결점 또한 다른 희극작가와 공통되는 점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희극작품 안에 일관된 극행동을 채택하고, 통쾌한 웃음을 섞으면서도 그 극행동에 자기의 주장을 곁들였다. <아카르나이의 사람들> <평화> <류시트트라테> 등의 작품에서 각 주인공의 수단은 참으로 엉뚱하고 기발한 것이나 각자가 평화를 획득하려는 행동을 일관함으로써 무수한 에피소드에 일단 매듭을 짓고 있다. 이 희극 작극술(作劇術)은 다분히 아리스토파네스의 독창성에서 그 영향을 받은 바가 많다고 하겠다. 또한 이와 같은 작극술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하여 그때 그때의 정치·사회·문예 등 각 문제의 본질에까지 육박, 희극의 웃음으로써 비판하고 지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삼개대표사상 3개 대표 사상(三個代表思想)(중국조선말: 세가지 대표)은 장쩌민(강택민)의 정치사상의 종합이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 전쟁 대한민국 국군 포로 한국 전쟁 국군 포로(國軍捕虜)는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전투 중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에 생포되거나 항복한 한국군 포로를 말한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시 유엔사령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쟁 중 포로로 붙집히거나 실종된 한국군을 8만2,000여명으로 추산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중 8,300여명만 송환했다. 1994년 조창호 소위를 시작으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국군 포로는 2015년 현재 80여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파악한 북한 생존 국군 포로만 540여 명, 휴전 후 납북된 민간인도 4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의 귀환 문제를 북한과의 대화 의제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보수층을 중심으로 상당하다. 국군 포로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1년 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비전향장기수 64명을 전원 북송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이후 2006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지나면서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 포로와 납북자들을 송환 시키기 위한 어떤 뚜렷한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북한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비전향 장기수와 국군 포로 문제는 전혀 별개라 주장하고 있으며,북한측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남은 국군 포로는 모두 스스로 원하여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해방전사'(인민군)로 편입되었으며 따라서 휴전협정에서 송환한 8,300여명의 국군 포로 이외에는 단 한명의 포로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1953년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으나, 수많은 국군 포로들이 송환대상에서 제외되어 오늘날 북한에 억류된 채 남아있다. 6·25전쟁 국군 포로 문제는 국가가 국군 포로 송환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역대 정부로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정부는 국군 포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대로 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당국이 아예 국군 포로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령의 국군 포로 당사자들 가운에 이미 상당수가 사망하였으며, 생존자들도 수명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더욱이 국군 포로들은 북한체제의 전체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인권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당사자와 가족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이유이다. 전쟁피로자(포로)나 피납자가 그 원래 소속국가로 송환되는 것으로 즉, ‘제자리’로 복귀하는 것은 인권의 회복이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자 국가이성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의 생사확인, 가족상봉, 송환문제해결, 제3국으로 탈북한 국군 포로와 가족의 안전한 송환, 귀환한 국군 포로의 안정적인 정착지원 등 국군 포로가 처한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북한 지역에 있는 국군유해발굴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 전쟁 참전용사 및 국군 포로 출신으로 구성된 재미 국군 포로 송환위원회가 국제 형사 재판소(ICC)와 유엔 인권위원회(UNHCR)에 211년 2월과 4월 각각 북한을 상대로 고소장과 진정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장과 진정서는 북한이 휴전협정에 따라 송환해야 할 국군 포로 대다수를 송환대상에서 제외시켜 억류한 뒤 인권탄압을 해 왔다면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500여명을 조속히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때 유엔군 사령부가 유엔에 제출한 자료는 6·25전쟁 국군 포로 및 실종자를 8만2000여명으로 추정했다. 북은 이 중 8300여명만 송환했다. 북에 억류된 7만명이 넘는 국군 포로들은 '괴뢰군 포로'라는 딱지를 붙이고 불발탄 처리, 탄광의 발파공, 벌목공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강요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환 포로들은 증언했다. (출처: 국군포로의 실상과 대책 -국방부 자료, 단위 명) 미송환 국군 포로의 수치는 추계(推計)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데 많게는 6만9000~9만4000명, 적게는 2만~4만1000명으로, 대략 4만~5만명으로 추정한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특별보고관의 〈유엔북한인권상세보고서〉에서는 북한이 억류한 국군 포로의 수를 5만~7만명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공산 측은 한국전쟁 초기에 5만명의 한국군 포로를 전선에서 석방하여 공산군에 강제 편입시킨 바 있었다”고 회고했다(《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당시 공산군 측 역시 휴전회담에서 5만여명에 달하는 국군 포로들의 행방을 추궁하는 유엔군 측에게“인도적 차원에서 현장에서 석방했다”고 주장했다. ※ 계급은 포로가 되었던 당시 계급 대략 6만여명의 미송환 국군 포로 중 현재 500여명이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미국 국방부 비밀해제 문서(미·러 전쟁 포로·실종자 공동위원회'가 1993년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 전쟁 당시 수천명의 국군 포로와 연합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보고있다. 131년 132년 133년 134년 135년 136년 137년 ● 후한 말의 문신 왕윤 138년 139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이산가족 상봉(南北離散家族相逢)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뉘어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서로 만나거나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책 또는 그 행사를 말한다. 때로는 같은 국가에 살면서도 서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에 대한민국의 대한적십자사가 한국 전쟁 또는 한반도 분단 때문에, 남과 북으로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십자사간의 합의에 의하여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교환 행사가 이루어졌다. 140년 141년 142년 • 형주 자사 유표 143년 ● 후한의 황제 충제 144년 후한 순제 145년 6·15 남북 공동선언 6·15 남북 공동선언(6·15 南北 共同宣言)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6·15 남북 공동 선언〉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사이의 회담을 통해 만들어진 선언문으로 다음과 같다. 합의안 두 번째 안에서 보듯 남측의 연합 단계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공통점이 있다며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했다. 남한 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 중 1단계인 ‘남북연합’은 남과 북이 독립국가로서 협력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골자다. 남북연합 정상회의, 남북연합회의(국회), 남북연합 각료회의 등을 통해 교류를 넓혀 가는 단계를 말하며, 국방 및 외교권은 남북이 각각 소유하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창하며 ‘완전한 고려연방제’달성 앞서서 잠정적으로 지역 정부에 국방과 외교권 등까지 부여하는 것으로 북한의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는 같으나 ‘1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 안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일정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46년 147년 148년 149년 150년 보진카 계획 보진카 계획(Bojinka、아라비아어:بجنكة)은 알카이다가 1995년 1월 21일에 실행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친 테러계획이다. 이 계획은 필리핀 마닐라의 테러 그룹 아지트에서 1995년 1월 6일에 발견되었다. 미국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테러 사건과 유사점이 많았기 때문에, FBI는 항공기 납치에 의한 테러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테러범들은 비행기 11 대(유나이티드항공,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등)를 폭파할 것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후에 비행기를 건물에 돌진시키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94년 12월 11일, 람지 유세프는 보진카 계획 시험의 일환으로 마닐라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필리핀 항공 434편을 폭파 시도를 하였으나 승객 한 명만 사망하였다. 람지 유세프는 이 사고 이후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었다. 151년 152년 153년 •후한 말의 정치가 공융 154년 155년 156년 157년 158년 QeigandhNs6whsnzhxbysxsahsleoxmdbcnhb 159년 160년 이승연 이승연(李丞涓, 1968년 8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대학을 마친 후 2년간 대한항공 KAL 국제선 항공 승무원 생활을 하다가 25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1992년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 미스코리아 미(美)로 선발되었으며 199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선 시티에서 열린 미스 월드 대회에도 참가하여 준결선(Top 10)에 진출하였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직후, MBC 《특종 TV연예》의 리포터로 발탁되어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이에 아울러 캠퍼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2기 멤버로 투입되어 극중 장동건의 첫사랑으로 출연하며 배우로서 화려한 첫발을 디뎠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호텔》, 《모래시계》, 《첫사랑》, 《신데렐라》 등 인기 드라마에 연거푸 출연,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로 90년대를 아우르는 정상급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SBS 《이홍렬쇼》를 뒤이은 단독 토크쇼인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가 성공하면서 TV 진행자로도 인정받아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이승연이 TV 드라마마다 걸치고 나오는 옷이나 액세서리는 크게 유행하였다. 그에 아울러 뛰어난 패션 감각 덕에 스스로 스타일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재벌 딸로 출연했을 당시에도 그녀의 옷들은 매회 화제였고, 《거미》에서는 푸른색 콘택트 렌즈가, 《신데렐라》에서는 머리에 묶은 손수건이,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는 검은색 정장이 빅히트했다. 해태음료와 1993년 2월부터 전속금 8천만원에 그 해 6월부터 1년간 전속계약을 맺었지만 이 기간 중 롯데제과 제품의 광고에 출연하여 전속계약을 위반했고 이 과정에서 1995년 2월 16일 서울민사지법으로부터 위약금 5000만원을 배상해야 했다. 前 매니저 박필기씨는 1992년 11월 18일부터 이승연과 3년 동안 전속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승연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고 이 과정에서 이승연은 1996년 9월 11일 서울지법으로부터 "박필기 매니저한테 9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야 했다. 1996년 나산과 1년 동안 모델료 2억원에 숙녀의류 모델을 체결했으며 1997년 3월 전속계약이 만료되었으나 나산 측이 계속 광고 사진을 사용하여 초상권을 침해받고 다른 회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는데 차질을 빚는 등 피해를 입게 되자 그 해 8월 20일 나산과 나산실업을 상대로 6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제기했다. 1998년 5월, 자동차학원 측에서 연예 관련 활동이 바쁘니 학원 홍보용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소양교육과 실기시험을 면제해 달라고 청탁하여, 출석부를 조작하고 대리시험을 치르게 해 운전면허증을 부정 발급 받았다. 운전면허 불법취득으로 불구속 기소돼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 사회봉사 80시간의 법원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던 MBC 드라마 《마음이 고와야지》가 조기종영되고, 단독진행하던 SBS 토크쇼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가 막을 내렸다. 특히, 앞서 언급한 드라마들 중 《마음이 고와야지》는 본인의 전 출연작인 KBS 2TV 《웨딩드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저조한 시청률 때문에 조기종영된 것도 있었지만 《웨딩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시대에 맞지 않지 않는 내용전개로 비난을 사 《웨딩드레스》와 함께 1998년 최악의 드라마 부문에 선정(웨딩드레스- 9위 마음이 고와야지 - 5위)되는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또한, SBS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노영주' 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이 사건의 파장으로 출연이 불발되었고 대신 유호정이 투입되었다 사건 이후, 1999년 KBS 미니시리즈 《초대》의 여주인공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여론악화로 촬영 중간에 하차했다. 이승연이 2회분까지 이미 촬영했다가 전면 촬영 취소되었던 여주인공 '최영주' 역에는 이영애가 대신 투입되었다. 한동안 자숙기간을 가진 후, 사건 발생 1년 6개월만인 2000년 KBS 드라마 《사랑하세요?》로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한편, 《이승연의 세이세이세이》가 본인(이승연)의 불미스러운 일로 1998년 가을개편에 앞서 조기종영(그 해 9월 9일)되는 수모를 당한 뒤 그 해 9월 23일부터 후속작으로 편성된 《김혜수 플러스유》는 1999년 8월 4일부터 같은 시간대로 변경한(당시 제목은 <섹션TV 파워통신>) MBC 《섹션TV 연예통신》 때문에 시청률이 하락한 데 이어 MC 김혜수와의 100회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2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아울러, 《김혜수 플러스유》자리에는 애초 목요일 1회였던 《한밤의 TV연예》를 2000년 8월 9일부터 수~목 2회로 확대시키는 한편 이승연을 여자 MC로 합류시켰으나 시청률 부진 뿐 아니라 이승연의 '전과' 때문에 다른 연예인들에 대해 제대로 코멘트하기도 힘든 처지가 되자 2000년 10월 25일부터는 유정현 아나운서가 수요일 시간대 단독 진행을 맡아왔지만 또다시 시청률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2000년 11월 29일부터 신용철 아나운서로 수요일 시간대 MC를 교체했으나 시청률이 오르지 않자 2001년 1월 18일 방송분 이후 목요일 1회로 축소됐고 이승연은 본업인 연기활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그 해 5월 17일 방영분을 끝으로 MC석에서 물러났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소득에 3억여원의 종합소득세를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며 1999년 1월 3일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이승연은 2001년 6월 25일 대법원 3부로부터 "원고의 광고출연은 수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독립적인 사업활동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반복성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원고의 전속계약금은 기타소득이 아닌 사업소득으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2002년 4월 '큰손' 장영자 前 회장 아들 김 모 씨의 뺑소니 사건에 연루되어 데뷔 후, 첫 기자회견을 열어 결백을 호소했다. 피의자 김모가 뺑소니 사고를 낸 차량의 명의자가 이승연이었고 이승연이 김모에게서 선물받은 차라는 정황이 드러나 검찰 소환을 요청받은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승연은 무혐의 처리되었으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2002》에 비련의 여인으로 출연하면서 이미지 개선을 시도했지만, 끝내 상대역이었던 배우 이경영이 10대 배우 지망생과 돈을 주고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긴급 체포됨에 따라 영화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CF 모델 전속계약금에 대한 세금 추징으로 은행 빚까지 끌어들여 5억3000만여원을 납부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000년대 초에서부터 연예계에서는 여성 연예인 누드집 출시 관련 유행이 있었는데 우선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고 연예인으로서 인기가 시들해진 여성 몇 명이 대중에게 다시 관심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누드집이 주목받으면서, 스타급 여성 연예인 몇 명이 가세하였다. 이런 연예계의 흐름에 편승한 이승연도 2002년 촬영을 강행하여 2004년 누드집을 출시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촬영했고 수익금 일부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돕는 데 쓰겠다는 둥 너무도 몰상식하고 이상한 주장을 태연하게 하면서 많은 돈을 받고 대중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화보 촬영을 고집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위안부 피해자 132명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공동성명으로써 프로젝트 중단을 촉구했다. 사회 전체에 걸쳐 공분을 얻어 여론이 악화하자 프로젝트는 백지화하였고 이승연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하였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여성 연예계에서 한탕주의가 지적되면서 누드집 열풍은 사그라들었다. 그 후에 일본에서도 이 누드집을 출판하려다가 들켜 엄청나게 비난받아야만 했다. 위안부 누드 파문 4개월만인 2004년 7월, 일본과 프랑스에서 100만 달러를 유치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 집》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활동 재개를 시도하였다. 이승연은 김기덕 감독과 함께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됐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거기다 《빈 집》이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의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승연의 연예계 복귀에 대한 찬반양론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는 큰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2006년,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로 연을 맺었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으로 브라운관에 본격 복귀하였다. 이에 아울러 이블 스타일채널 온스타일의 《스타일 매거진》으로 8년만에 MC로 복귀하였다. 뛰어난 패션 감각과 깔끔한 진행 솜씨를 지니며 '진행자'로서의 제2전성기를 열게 된다. 이후 2007년에는 2살 연상의 재미교포 사업가 김문철(2005년 연말에 만난 이후 교제)과 2년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2년 후 2009년 6월 첫 딸 김아람을 출산했다. 2013년 1월, 항정신성 수면유도제인 프로포폴 상습 불법투약혐의(마약류 관리법 위반)로 검찰 소환 조사를 명받았다. 이에 이승연측은 2003년 6월경 작품 촬영 중 입은 심각한 척추골절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로포폴 투약을 받았을 뿐 불법투약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피부과에서의 투약 행위에 관해서는 피부 케어 시술 과정에서 의사의 집회 하에 마취에 필요한 프로포폴 투약으로서 피부과와 성형외과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의료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미인애와 박시연과 함께 법원에 넘겨짐. 결국 이승연은 2013년 12월 KBS, MBC 출연금지 명단에 올랐으나 이후 2016년 8월 KBS 출연금지 명단에서는 해제되었으며 2017년에는 MBC에서도 해제됐다. 작곡가 작곡가(作曲家)는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다.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대학 혹은 대학교의 음악대학에 개설된 음악과, 작곡과, 실용음악과 등을 전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거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직업이다. 서양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피아노, 클라비코드, 하프시코드, 바이올린등 주요한 악기의 연주자가 되기도 했다. 국가 (노래) 국가(國歌)는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한 나라를 상징하고 그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구심적 기능을 갖고 있는 국가의 공식적인 노래를 의미한다. 법률로 규정되는 것, 국민의 공통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 역사적으로 정해지고 있는 것 등이 있으며 나라에 의해 (예로 에스파냐의 경우 제 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가가 리에고의 노래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국가는 1939년 제 2공화국이 무너지면서 폐지되고 이전 국가를 다시 쓰게 되었다), 시대에 의해, 개정을 하는 것도 있다. 모리타니, 에스파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과 같이 가사가 없는 나라도 존재한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같은 군주제 국가의 경우에는 왕실 국가도 있다.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의 경우 같은 국가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 국가를 그대로 쓰는 키프로스나 루마니아 국가를 그대로 사용한 독립 직후의 몰도바가 그러한 경우이다. 축구, 야구, 농구 등 운동 경기에서 두 나라의 국가가 연주될 때에는 원정팀의 국가를 먼저 연주하고 홈팀의 국가를 나중에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 8월 27일~1831년 11월 14일)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남성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1770년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778년부터 1792년까지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 후 1793년부터 1800년까지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청년기 헤겔의 사상을 보여주는 종교와 정치에 관한 여러 미출간 단편들을 남겼다. 첫 저술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가 발표된 1801년부터 주저 《정신현상학》이 발표된 1807년 직전까지 예나 대학에서 사강사 생활을 했다. 그 후 잠시 동안 독일 바이에른주 밤베르크 시에서 신문 편집 일을 했으며, 1808년부터 1816년까지 독일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의 한 김나지움에서 교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년 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후, 1818년 독일 베를린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취임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대논리학》, 《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 강의》, 《역사철학강의》 등이 있다. 1831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다. 다음은 헤겔이 손수 쓴 자신의 이력서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이력서는 1804년까지의 약력을 담고 있다. 이 이력서를 쓴 지 1년 후 1805년 헤겔은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된다. 1807년에는 헤겔 관념론의 핵을 이루는 정신현상학이 출판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생활 면에서 헤겔은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그녀로부터 아들 루트비히 피셔를 얻지만, 1811년 22살된 처녀인 마리 폰 투허(Marie von Tucher)와 결혼을 한다. 이 사이에 1808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받아 들인다. 1812년 논리학이 빛을 보게되며,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후 다음 해에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엔치클로패디)을 출판한다. 1816년 드디어 베를린 대학의 피히테의 후임 교수로서 초빙되어 여기서 사망할 때까지 연구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헤겔 철학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독일 관념론의 거성인 칸트 철학에서 출발하여 이를 마무리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칸트 철학의 근간은 인식론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칸트는 소위 '심리 철학', 윤리학 그리고 우주론과 신학에 접근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인데, 이 개념은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서 철학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코지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는 칸트에게 물론 지대한 관심을 끌었지만 그는 결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서 '자아'의 문제를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자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헤겔은 '개념'의 문제, 다시 말해 인간 사유의 산물 자체를 독자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한 것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인식론에 접근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개념'은 헤겔 철학에서 일종의 '논리적 범주'로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개념의 운동은 여러가지 헤겔 철학 용어로 풀이되는 바, Idee (개념, 이념), Natur (자연), Geist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헤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용어가 도대체 어떤 뜻으로 쓰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변증법을 정형화 하였다.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은 후 일 헤겔 좌파 철학자들을 거쳐 카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변증법은 만물이 본질적으로 끊임 없는 변화 과정에 있음을 주창하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내부적인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은 반(反)이다.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며 그 결과 새로운 합(合)의 상태로 변화한다. 이 변화의 결과물은 또다른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이러한 변화는 최고의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된다.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하인리히 샬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 1796~1862)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표현 대신,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 이라는 표현을 썼다. 헤겔에게 절대 이성은 변증법에 의해 도달되는 최고의 지점, 즉 더 이상 변화될 필요 없는 최고의 위치를 뜻한다. 얼핏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과 고정화된 절대 정신은 상충되는 맥락이 있지만, 이러한 헤겔 철학의 전제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노에시스 노에세오스(noēsis noēseōs)개념을 차용하여 절대 이성은 순수 사유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유하는 사유로서 이러한 모순점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헤겔은 세계사를 절대정신(이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 역시 변증법적 발전을 겪는다고 파악하였으며 그 결과 이성이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를 역사의 종말이라 명명하였다. 헤겔은 당대 독일이 역사의 종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가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 개념은 나중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 후 동명의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법은 객관적 정신의 즉자적(卽自的 : an sich) 현실화인 저차원(低次元)의 단계의 것(그 속에는 소유·계약·불법의 부정의 변증법적 삼발전 단계가 있다)으로서, 참다운(보편적) 자유를 목표로 하여 도덕의 단계, 다시 도의태(道義態)의 단계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여 간다. 이 도의태의 단계에서 정신은 사랑〔愛〕의 공동체인 가족으로부터 그것의 부정인 개인주의적 이익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로 전진하고, 다시 시민사회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국가라는 최고의 단계에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간다. 이 국가라는 완성 단계에서 정신은 완전한 자기실현(보편적 자유)을 얻는다. 국가를 이념과 현실의 완전한 합치, 최고 최종의 것으로 보는 헤겔의 사상은 국가 절대주의에 빠지고 당연히 국제법 질서까지도 부정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헤겔 철학의 절대지성을 종종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 개념과 연관을 짓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헤겔은 루터교 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의 역사철학강요에서 중세 철학에 대한 설명을 건너뛴다. 헤겔 연구가인 클라우스 뒤징(Klaus Düsing)은 헤겔은 철학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신학에 기대었던 중세 시대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고 본다. 헤겔은 신학과 철학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상은 국가, 종교, 철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원리를 지향한다. 그래서 헤겔은 프로이센이라는 국가와 프로이센의 개신교 교리를 자신의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했다. 헤겔의 철학은 국가를 절대정신이 구현된 완전한 전체로 보는 것은 물론, 프로이센이야말로 그러한 이상이 잘 실현된 보편국가라고 주장하였다. 국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헤겔의 철학은 프로이센 정부의 입맛에 매우 맞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프로이센 정부는 헤겔 철학을 권장하고 활용하였다. 이러한 헤겔 철학을 비판한 마르크스를 비롯한 청년헤겔학파들이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의 성씨와 이름 한국의 이름은 성(姓)과 명(名)으로 구성되며, 이를 합하여 성명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2015년 기준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나, 대한민국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역사적 성씨는 250여 개 정도이다. 성은 일반적으로 본(本)을 필수 요소로 한다. 한국의 성씨는 삼국 시대 이후 이두식 이름을 쓰다가 7세기 이후에 중국 문화가 유행하면서 중국의 성씨 제도를 차용한 것이 많고, 고려 시대부터 족보를 만들면서 토착 성씨를 한자식 성씨를 차용하여 표현하였다. 한국의 성씨는 대부분 한 음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음절로 된 복성(複姓) 도 있다. 한국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는 오해가 있으나 한국의 성씨는 250개이며 본관으로 나뉘어진다. 일본과 중국은 본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성씨의 경우 인구가 13억인 반면에 1920년 전에 사용하던 성씨는 300개 였지만 1940년 이후 성씨가 없던 중국 농민 계층이 한자를 골라 성씨로 사용하면서 성씨가 수 천개로 늘어난다. 한국은 인구에 비해 성씨가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金)씨, 이(李)씨, 박(朴)씨의 인구 비중이 높다. 성(姓)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다. 한자의 뜻을 풀어놓은 중국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에 따르면, "姓 人之所生也"로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였다. 한국에서 성은 부계 혈통의 표지로 쓰여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평생 바뀌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해, 씨(氏)란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에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였다. 즉, 씨는 핏줄이 아니라 땅과 연계되어 있는 개념으로, 한국의 본(本)과 유사하다. 한국의 성(姓)은 본(本)을 필수요소로 하여 각 성마다 한 개 이상의 본관(本貫)이 있고, 성이 같더라도 본이 다르면 동족(同族)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성과 이름을 성명(姓名)이라고 하는 데 비해, 일본은 씨명(시메이, 氏名)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씨(氏)는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다만, 일본은 1870년까지 무사(武士) 아래 계급에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씨를 갖게 되면서 출신지의 지명이나 지형적 특징을 씨로 정한 것이 많아 한국이나 중국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름이란 단어는 "이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중세 국어에서는 “일홈” 또는 “일훔” 등으로 표기되었다. 좁게는 성 뒤에 붙은 개인명(個人名: personal name)만을 말하며, 넓게는 성(姓)을 포함하여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거나 가리키는 모든 명칭을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한자(漢字) 등 중국 문물이 수입되었던 시기에 그와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씨족 사회와 그 집단을 통치하는 지배자 계급이 발생함으로써 정치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이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국호 고구려에서 따와 성을 고(高)씨로 하였으며, 주몽은 휘하의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 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왕이 하사한 백제 팔족성(八族姓)인 사(沙), 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苩)씨 등은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여 부여(夫餘)씨를 칭하였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백제 개국공신 중에는 마려(馬藜) 등이 있는데, 현재 마(馬)씨가 마려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이 설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며, 유리왕 6년에 6부 촌장에게 각각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등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성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565년 《북제서》에 신라 진흥왕인 김진흥(金進興)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김씨 성을 쓰기 시작한 신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성이 없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치원이나 장보고 등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계층에서부터 성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남해 완도의 천민(賤民) 출신인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당시 당나라 대성(大姓) 중 하나였던 장씨(張氏) 성을 취해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꿨다. 발해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대(大)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대(大)씨와 태(太)씨가 대조영을 시조로 삼고 있다. 삼국 시대를 통틀어 이름은 대부분 고유어를 한자로 취음한 표기로, 오늘날의 3음절 성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남북국 시대까지는 극소수의 특정 계층을 제외하고는 성(姓)이 없었다. 심지어, 귀족집안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도 처음에는 왕씨가 아니었으며 성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고려 태조의 선대(先代)가 어떤 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 태조의 윗대에서도 성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 자신의 경우도 원래 왕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기보다는 본래 성이 없었고 이름도 다른 것을 갖고 있었는데, 고려 개국과 함께 ‘왕’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도선의 예언을 내세우면서 성을 ‘왕’, 이름을 ‘건’이라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편년통록》 등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선왕(忠宣王)이 왕자로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한 사람이 충선왕과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충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듣건대 그대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755~762)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가 있어서 나온 말인가?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있을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당신의 나라 고려에 가서 자식까지 두었다는 것인가?” 이 말에 충선왕은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제현은 작제건(왕건의 조부), 용건(왕건의 아버지・다른 이름은 왕륭), 왕건 자신까지 3대가 이름에 ‘건(建)’자를 넣은 것은, 신라시대 존경의 표시였던 ‘간(干)’을 이름 밑에다 붙여서 부른 것이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와전(訛傳)되어 ‘건’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왕건의 성명에 대해 비판한 것은 그가 고려 왕실의 계보를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작제건", 아버지가 "용건", 그 아들(고려태조)이 "왕건"으로서 "건"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서양의 귀족들이 아들 이름을 아버지, 할아버지와 똑같이 하면서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과 유사한, 또는 부칭이나 성씨의 개념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아무튼 고려 초에도 한동안 성의 사용은 최상층 계급에 국한되었으며, 귀족 계급이라도 성을 갖지 않는 인물이 많았다. 참고로 왕건은 "임금 왕 세울 건"의 한자와는 상관 없는 당시의 순우리말, 즉 중세 한국어의 어떤 뜻을 지닌 단어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말을 한자로 각각 왕을 임금 왕으로 표기하여 성, 건을 세울 건으로 표기하여 이름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왕씨는 중국의 왕씨와는 한자는 같지만 관련이 전혀 없는 성이다. 신라 지증왕의 국호·왕호의 한자어 개정, 법흥왕의 연호·시호 사용, 경덕왕의 두 음절 지명 개정, 문무 관직명 개정 등 일련의 한화(漢化) 조치로 점차 중국식 이름이 보급되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의 통일 후 사성(賜姓)을 통해 귀족들이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국에 성명(姓名)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것을 도운 네 명의 부장(副長)인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白玉杉), 능산(能山), 사귀(沙貴)도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태조는 즉위한 후 홍술에게는 홍(洪), 백옥삼에게는 배(裵), 능산에게는 신(申), 사귀에게는 복(卜)씨 성과 함께 중국식 이름을 하사(下賜)했다. 이로써 홍술은 홍유(洪儒), 백옥삼은 배현경(裵玄慶), 능산은 신숭겸(申崇謙), 사귀는 복지겸(卜智謙)이라는 성명을 갖게 되었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성’은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필수 요건이 되었다. 1055년(고려 문종 9년)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할 자격이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된 이후 성씨 제도가 귀족 계급의 정치적 신분과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주로 지배계층이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전 인구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천민계층까지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일제강점 직전 해인 1909년 민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 조선 중기부터 천민층을 제외한 양인들에게 성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조선에서 성씨가 없는 무성층(無姓層)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족보매매, 족보위조, 공명첩 등을 통해 일부 천민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사회변화로 무성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8권에서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의 하나도 진짜가 없다.”며 이는 한 때의 세속(世俗)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적고 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김근식 교수(法制史)는 “김 이 박의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친족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고 평민, 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칭(僭稱)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위조 족보가 처음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주목할 점은 족보를 위조한 장본인이 양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764년 족보를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김경희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김경희가 여러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쇄시설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족보를 사들이거나 문중 대표들에게 뇌물을 주고 여벌로 족보를 더 찍게 한 다음 비밀리에 건네받는 방식이었다. 족보 매매를 의뢰한 고객이 족보를 선택하면 고객의 이름이 들어갈 지면을 확정하고 그 부분에 어울리게 가계 기록을 위조해 별도의 종이에 활자로 인쇄했다. 그리고는 본래의 족보를 해체하여 원래의 지면을 빼내고, 그 대신 위조한 별지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 수법이었다. 보학(譜學) 관련 책에 나오는 내용은 공식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게 많다. 각 집안에서는 자기들 가문의 선대(先代)에 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보내지만, 그 중에는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족보가 조작된 사례로 경주 김씨의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다. 조선 인조 때 나왔다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 말기에 출생한 김경대(金景大)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 종인(宗人)이었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조작한 위보도 있다. 성씨를 가진 양반 중에서도 일부는 반역, 모반에 연루되면 노비로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고,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는 신분으로 차별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의 장적, 호구 단자, 수원성 축조시의 임금 노동자 기록, 소송 문건 등을 분석해 보면 일반 평민은 물론이고, 일부 노비도 김(金)씨, 이(李)씨 등 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쓴 성이 본관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성관(姓貫)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성성역의궤》에 백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기록된 백성들의 이름들은 신체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키가 큰 사람들의 이름은 박큰노미(朴大老味), 최큰노미, 키가 작은 사람들은 김자근노미(金者斤老味), 임자근노미, 김작은복(金者斤福), 망아지처럼 잘 달리는 사람은 최망아지, 강아지처럼 생겼다고 김삽사리, 눈이 튀어나온 사람은 이부엉이, 지팽이처럼 말랐다고 신지팽(申之彭), 혹이 튀어 나왔다고 이혹불(李或不), 뚱뚱하고 느림보처럼 생겼다고 박뭉투리, 다리 길이가 작은 사람에게는 조조자근노미(趙足者斤老味), 착하다고 지어진 박선노미(朴善老味)·김순노미(金順老味), 일을 잘해 기특한 사람에게는 박기특·김기특이라고 천민들의 성과 이름을 짓고 기록하였다. 백성의 성씨와 이름을 알 수 없어 대충 나이로 이름 지은 기록도 있다. 나이가 한 오십쯤 된 것 같다고 김쉰동이(金五十同), 이름은 모르고 대충 태어난 달만 알아 지은 박시월쇠(朴十月金) 등이 있다. 김팔월쇠(八月金), 장막쇠, 정복쇠, 윤좀쇠 등 하층민의 이름에는 '김(金)'이나 '쇠'자가 들어가는 기록이 많다. 쇠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이기에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이다. 한편 황현(黃玹)이 저술한 역사책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의 인구를 의도적으로 늘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백성 중에서 전주 이씨를 희망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올려주어 이 때 전주 이씨가 10만 명이 늘면서 흥선군이 기뻐하였다고 쓰여 있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성씨가 없던 노비들은 모시던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고,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주었던 양반도 있었다. 무성층에게 성을 갖도록 했더니 대부분이 인구가 많던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하여 일부 성씨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10만개가 넘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성씨의 종류가 매우 적고, 그마저 인구도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인구가 기형적으로 많은 성본의 경우 씨족간 연대성은 찾기 힘들다. 신분질서 해방조치로서의 성씨 부여는 양반 질서를 허물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원래부터 인구가 많던 거대씨족을 더욱 더 거대하게 만들어주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외국에서 귀화하여 생긴 성씨까지 합하면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한자(漢字)로 표기할 수 있는 성씨는 1,507개이고, 한자가 없는 성씨는 4,075개로 조사되었다. 인구 1,000명 이상인 본관은 858개로 전체 인구의 97.8%를 차지한다. 본관은 그 시조가 자리잡은 고향을 나타내는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본은 김해 김씨이다. 각각의 성씨는 그 성씨 및 본관의 유래에 관한 설화를 갖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토착 성본의 경우 신라 등 고대 왕조와 연관 짓거나 고려 때 창성한 경우가 많고, 이 밖에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도 많다. 다만,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영향으로 일부 가문에서 중국인을 시조로 모시거나,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왕족이나 신라 귀족의 후손임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선계를 고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세계가 확실한 파조나 1세조를 실질적인 시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서양식 이름에 보이는 가운데 이름(Middle Name)이나 부칭(父稱) 등은 없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계층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고유어 이름을 썼다. 당시의 이름은 대부분 여러 음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자로 차자 표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법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지배 계급에서 중국식 성명을 채용함으로써 지배 계급에서 고유어 이름은 점차 사라졌다. 반면,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평민 이하의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고유어 이름이 계속 사용되는 경향을 보여 계층에 따른 차등을 보였다. 원나라의 고려 내정 간섭기에는 고려 국왕이 몽골식 이름과 고려식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31대 공민왕() 등으로 한자 표기된 몽골식 이름을 가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1940년부터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고 불린 일본식 성명 강요(日本式姓名強要)가 있었다. 창씨(創氏)란 '씨를 새로 만든다'는 뜻인데, 이는 조선식 성명(姓名)과 일본식 씨명(氏名)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姓)이 없고, 가계를 표시하는 씨(氏)만 있다. 일본식 씨명은 일가족이 모두 가장과 동일한 씨(氏)가 된다. 예를 들어, 남편이 김(金)을 씨로 쓸 경우 원래 이(李)씨였던 아내는 남편과 같은 김(金)씨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성이 바뀌지 않고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으며, 이성(異姓)의 아이를 입양하는 관습이 없는 조선의 전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창씨개명 당시 이를 홍보하는 일본 관리들은 호적상 조선식 성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옛 조선 호적의 본관을 '성명 및 본관'으로 표기하여 참고 정도로 하고 일본식 씨명만을 공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식 성명을 폐기하고자 하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각종 불이익(입학 및 진학 거부, 취직 불편화, 관청의 용무 금지 등)이 뒤따랐다. 창씨한 사람 중에는 원래 성의 의미를 살리고자 궁리한 경우가 많았는데,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외에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다음과 같이 씨성을 만들기도 했다. 해방 후 조선 성명 복구령에 따라 한국인들은 원래의 성과 이름을 되찾았다. 다만, 재일 한국인 가운데에는 통명(通名)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씨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노년층 여성 중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식 성명의 영향을 받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자(-子)"로 끝나는 이름이다. 자(子)로 끝나는 이름이 많은 것은 과거의 남아 선호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에서 일본식 성명은 주요 개명 사유 가운데 하나이다. 남자의 경우는 여자보다 드물지만, 마지막 음절이 "-랑(-郞)" 등인 일본식 성명의 영향이 발견된다. 현대 한국인의 성명은 한 음절의 성과 두 음절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세 음절의 성명이 가장 흔하며, 그 다음으로 한 음절(외자)의 이름을 가진 두 음절 성명이 많다. 두 음절의 성으로 이루어진 복성의 경우에는 외자 이름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세 음절 보다 많은 이름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이러한 3음절 내지 2음절 선호의 경향은 한자어 이름뿐 아니라, 고유어 이름(한글 이름)이나 외래어 계열 이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며, 각종 문서에서 이름을 표기하는 란에도 3~5음절을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이름은 한자의 의미를 따서 짓는 경우가 많으며,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의 범위는 인명용 한자라 하여 법률로 정해져 있다. 한국어에서 한자(漢字)는 1자1음의 음독(音讀)이 원칙이므로, 일본과 같이 훈독이나 임의적인 읽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남성의 이름에는 전통적으로 항렬(行列)이라고 부르는 동족 간의 서열을 나타내는 돌림자를 사용했다. 반면에 돌림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나 여성을 위해 따로 돌림자를 정한 집안은 상당히 드물다. 서양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부자간에 같은 이름이나 글자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으나, 유교 전통의 대한민국이나 중국에서는 피휘(避諱)라 하여 이를 기피하였다. 오늘날에는 항렬에 크게 거리끼지 않고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으나, 보수적인 가정에서는 아직도 항렬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해방 이후 민족의식의 확산으로 고유어 이름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졌다. 이는 1966년부터 1987년까지 계속된 서울대학교의 “고운이름 자랑하기 대회”로 본격화되어 “한글 이름”이라고 통칭되는 한국어의 고유 어휘를 사용한 이름이 작명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유형별로는 구체적인 명사에서 온 것(가람, 이슬, 하늘, 구슬 등), 추상명사에서 온 것(슬기, 한빛, 보라, 나라 등), 형용사에서 온 것(푸름, 힘찬, 빛나, 한결, 고운 등) 등이 있다. 또한, 고유어에 한자로 뜻을 부여해서 중의적인 이름을 짓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나라의 경우 낱말자체는 고유어 이름이면서 娜羅(아리따울 나+펼 라)와 같이 좋은 뜻의 한자를 찾아 씀으로서 이중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이름은 남성의 이름보다 그 수가 훨씬 한정되어 있는데, 이는 의미나 어감에서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한자나 한글의 음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 이름의 특징을 살펴보면,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 아름다움이나 맑음 등 여성적 미덕과 관련된 한자(美, 姸, 淑 따위)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여성이름에는 대부분 모음으로 끝나거나, 'ㄴ' 등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받침이 들어간 음절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발음들은 남성 이름에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구분이 엄밀한 것은 아니다. 현대 한국은 종교가 기독교인 사람이 꽤 많기 때문에 이와 연관된 서양식 성명을 갖는 경우도 있다. 개신교의 경우, 성서의 인물(요셉, 요한, 한나 등)에서 따오거나,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에서는 성서나 기독교의 역사에서의 성인들의 이름(베드로, 바울, 마가, 마태, 에스더, 루디아 등)을 본따서 이름을 짓기도 한다. 또한개신교인의 경우 이름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징하는 '하-' 또는 '예-' 를 접두어로 붙여 예찬(예讚, 예수 찬양), 하은(하恩 : 하나님의 은혜) 등의 작명을 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외래 성씨는 중국에서 빌려온 성씨· 몽골 · 여진 · 위구르 · 아랍 · 베트남 · 일본 · 네덜란드 등이 있으며 대체로 중국 문화가 유행할 당시 중국의 성씨를 빌려와 사용을 하였다. 일본계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 (김충선)(우록 김씨)와 함박 김씨 등이 있다. 베트남계로는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을 시조로 하는 화산 이씨, 정선 이씨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에 귀화한 김씨 중 가장 많은 것은 여진족에 뿌리를 둔 김씨다. 6진(六鎭)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귀화 여진족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또한 세종 이전에도 김씨 성을 하사받은 여진족이 있으며, 김고시가물(金高時加勿) 김광수(金光秀) 김대첩목아(金大帖木兒) 김동개(金同介) 등이 그들이다. 조선에 귀순한 여진족들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화한 여진족으로 김씨 성을 가지고 관직에 나간 사람이 많이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여진족이 조선 어디서든 살 수가 있어서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 현재 여진족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가 적은 것은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일 것이다. 족보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나오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는 모화사상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당시 만주 오랑캐라고 하면 멸시의 대상이었다. 설사 여진족이나 거란족 귀화인을 조상으로 둔 귀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감추었을 것이다.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성씨는 청해 이씨 뿐이다. 몽골계로는 연안 인씨 등이 있다. 박연, 하멜 일행 등 네덜란드로부터의 유입도 있었다. 최근에는 국내 거주 외국인의 증가와 국제 결혼 등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성과 본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내 귀화 성씨의 수는 총 442개로 토착 성씨 수의 1.5배에 달하며, 귀화 성씨와 토착 성씨를 합하면 성씨의 수는 692개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인과의 혼인으로 귀화한 경우이며, 국가별로 보면 필리핀계가 145개로 가장 많고, 일본계, 중국계 순이다. 유명 귀화인 중에는 귀화 당시 한국식으로 등록한 호적상의 성명을 쓰기도 하지만, 귀화 전의 이름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개화기의 기독교 선교사들 중에는 귀화 여부에 상관없이 한국식 성명을 쓰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이주자들이 한국에서 새터전을 잡게 되면서 한국사람에게 낯선 고유 이름에 갈음하여 통용되는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아직 이 사안에 대하여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는 없으나, 대부분 기존에 있는 외자 성을 채용하거나, 기존 외자 성에 자신의 국명이나 출신지의 음절을 따서 맞추거나 하는 식으로 성을 짓고 있다. 재중동포들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같이 한국식 성명을 쓴다. 다만, 한국과 중국에서 선호하는 글자나 발음 등의 차이로 인해 한국식 성명을 중국어 이름으로 쓰기 어색한 것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한식으로 작명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재일 한국인은 일본식 이름인 통명(通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며, 일본으로 귀화하는 경우에는 일본식 씨명으로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 한국인은 대부분 한국의 성(姓)에 영어식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고려인도 성은 한국의 것을 쓰고, 이름은 러시아식으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인의 경우, 재중동포나 재일한국인과 달리 한자문화권에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성씨가 호적 등록 과정에서 변형된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며, 귀화인이 아닌 이상 임의로 새로운 성을 만들 수 없다.(창성불허) 또한, 여성이 결혼해도 성이 바뀌지 않는다. 외국인이 대한민국에 귀화할 경우에는 성과 본관을 새로 만들어 신고하여야 한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2005년에 개정된 민법에 따라 2008년 1월 1일부터는 부모가 혼인신고 시에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고,(민법 제781조제1항 단서) 입양,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의 경우에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녀가 어머니, 양부 또는 계부의 성으로 성을 변경할 수 있다.(민법 제781조제6항) 대한민국에서는 1997년 이전에는 동성동본 간의 혼인이 법률상 금지되었으며, 이성동본의 경우도 일부 본관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동성동본 금혼 규정은 1997년의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2005년의 민법 개정에 의해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을 터부시하는 경향은 여전히 일부 남아 있다. 柳(류/유)와 羅(라/나)와 같은 몇몇 성 은 성의 한글표기에 관한 두음법칙 적용 여부에 대해서 사회적 논란이 있다.(예. 서애 류성룡) 대한민국에서는 주민등록상 성의 한글표기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자유롭게 써왔고 호적에는 성을 한자로만 기재하여 오다가, 2000년대 초에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호적을 전산화하면서 이들 성의 한글표기에 대해 획일적으로 두음법칙을 적용함으로써 '류'(柳)나 '라'(羅)로 성씨를 한글표기한 사람들의 반발을 불렀다. 이러한 반발이 지속되자 법원은 당사자가 정정허가신청을 할 경우에 호적상 성의 한글표기를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고치는 것을 인정하였고, 결국 2009년에 국어심의회는 맞춤법 해설서에서 성씨의 두음법칙 적용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였다. 성의 한글표기를 정정한 사람의 98.5%는 류(柳)씨로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라(羅)씨가 1%를 차지했다. 이름에 사용하는 한자는 현재 대법원이 정한 한문교육용 기초한자, 인명용추가한자, 인명용한자허용자체 외에는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제한은 1991년 이후 출생자에 대해 적용되며, 그 이전 출생자라도 개명시에는 인명용 한자 범위 내에서 새 이름을 정해야 한다. 또한, 이름에 사용하는 글자 수도 성(姓)을 제외한 다섯 글자까지만 등록할 수 있으며, 부모가 특이한 이름을 짓기를 원해도 법원의 판단에 따라 거부되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성(姓)을 변경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반면, 개명에 관해서는 법원이 그 사유를 폭넓게 인정하므로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개명을 하려면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며, 타당한 사유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법원은 개명을 허가하지 않는다. 주요 개명 사유는 이름으로 인해 놀림감이 되는 경우, 범죄자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과 이름이 같은 경우, 남자가 여자 같거나 여자가 남자 같은 이름인 경우, 일본식 이름일 경우, 이름이 나쁜 뜻일 경우, 영화나 드라마의 희화화된 등장인물(예. 영구)과 이름이 같은 경우, 가까운 친척 중에 동명이인이 있는 경우 등이다. 부모 중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전통적 성명 체제와 가족법 개정 이전의 호주제 등에 대한 비판으로 여성주의자들과 진보성향의 일부 지식인, 동성애자들을 중심으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이 199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었다. 페미니스트 고은광순, 영화감독 이송희일, 영화제작자 김조광수 등이 일례이다. 이와 같은 부모의 성 함께 쓰기는 다른 문화권(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한국의 성제도는 성(姓) 외에도 본(本)을 필수요소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이러한 운동이 일반대중에게 미친 영향도 미미하다. 한편,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부성주의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부성주의 자체는 위헌이라고 할 수 없으나,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시하였다. 즉, 헌법재판소는 출생 직후의 자(子)에게 성을 부여할 당시 부(父)가 이미 사망하였거나 부모가 이혼하여 모가 단독으로 친권을 행사하고 양육할 것이 예상되는 경우, 혼인외의 출생자를 부가 인지하였으나 여전히 모가 단독으로 양육하는 경우, 입양이나 재혼 등의 경우 성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개정된 민법(민법 제781조제6항)에서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을 변경하도록 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예시해 열거하고 있는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다른 요건을 요구하거나 성의 변경을 불허하는 경우에는 위헌적 제도 운영으로 평가될 소지가 있다. 정식 이름 외에 이름을 대용하여 부르는 여러 호칭이 있다. 한(漢) 문화의 영향으로 호(號)나 자(字)같은 이름들도 있으나, 호의 경우는 문인이나 정치인 등 유명인이 멋을 살려 짓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일반적이지 않으며, 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또 아명(兒名)이라 하여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집안에서 부모나 형제자매끼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아명 또는 아호라고 하며, 주로 어릴 때 집안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사용하는 친근한 이름이다. 옛날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천한 뜻의 이름으로 아명을 지었다. 간혹 아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정식 이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택호란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의 출신지 이름에 댁을 얹어 부르는 호칭을 말한다. 주로 결혼한 여성의 시집오기 전 친정의 지명에 붙여 본명 대신에 부르는 통명으로 사용하였다. 예) 안성댁(安城宅), 용인댁(龍仁宅), 이천댁(利川宅) 등 지명 외에 남편의 직업이나 직함(사장→사장댁, 김선생님→김선생님댁) 등에 붙이기도 한다. 당호란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집이나 거처의 이름으로써 인명을 대신하여 부르는 호칭이다. 종교에 따라 부여되는 특수한 이름들이 있다. 불교의 경우 일반인이 교의에 귀의하여 불자가 되고자 하면, 속세의 부모 내지는 보호자에 해당하는 은사(스님)로부터 새 이름을 받게 된다. 이를 법명(法名)이라고 한다. 법명을 받은 자가 수행을 거쳐 정식승려가 된 후에 여러 학업 및 수도를 통해 법납이 쌓이게 되면, 법명 외에 법호(法號)를 추가로 부여받는다. 가톨릭 신자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명을 받으며, 이 세례명은 대부분 가톨릭 성인(聖人)의 이름을 쓴다. 한국인은 상대나 자신의 성씨를 묻고 답할 때, 일반적으로 "김"과 같이 단독으로 말하지 않고 "김씨"와 같이 씨(氏)를 붙여 답한다. 또한, 타인에게 부모나 선생님의 성명을 말할 경우에는 “홍, 길자, 동자입니다”와 같이 이름의 성을 제외한 각 글자 뒤에 자를 붙여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이는 부모의 성명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결례로 보는 피휘의 일종이다. 상대를 호칭할 때 성(姓)만 호칭하는 일은 없으며 반드시 뒤에 경칭을 붙이는데, 경칭의 종류와 성명의 조합에 따라서 각각의 호칭이 주는 어감이 다르므로 구별해서 써야 한다. 한국에서는 윗사람과 직접 대화할 때는 보통 윗사람의 직함 등으로 부르며, 직접 성명을 사용하여 부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모르는 이의 이름을 알고자 직접 물어볼 때의 정중한 표현으로 "성함"이란 말을 쓴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공식적인 방법은 문화관광부가 2000년에 제정한 로마자 표기법 고시가 있으나, 인명의 경우 그 적용이 엄격하지 않아 하나의 이름에 다양한 표기가 쓰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래의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은 최근에야 겨우 고교 교육 과정 부록에 수록되는 정도이기 때문에, 보통은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개인이 임의로 정하는 경우가 많고 관례적으로는 영어 철자법에 준한 것이 많다. 문씨가 'moon', 선씨가 'sun'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박씨는 'Park, Pak, Bak', 이씨는 'Lee, Yi, Rhee', 최씨는 'Choi, Choe, Choy' 등 다양한 표기가 보이며,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동일한 성의 다른 로마자 표기를 별개의 성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이씨는 보통 영어권의 성(姓)인 'Lee'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이순신, 이승만은 기존 관례에 따라 각각 'Yi Sunsin', 'Syngman Rhee'로 표기한 것이다. 또, 최씨는 주로 Choi라고 쓰고 '초이'라고 읽어 외국인들이 헷갈려 한다. 성과 이름의 순서는 과거에는 유럽식으로 이름을 먼저, 성을 나중에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한국식으로 성을 이름보다 먼저 쓰는 경우도 많다. 영어 이름 중에서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발음을 차용해 와서 쓰는 경우도 있다. 예) 선희는 써니(Sunny), 재희는 제이(Jay), 철수는 찰스(Charles), 태호는 테오(Teo) 등. 분단 이후 문화적으로 남북이 단절되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명 습관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작명(作名)이 시대별로 어느 정도 유행을 타고 변해 온 것과 달리, 북쪽의 작명은 기본적으로 전통 이름을 고수해 온 편이다.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많은 비율로 존재하는 고유어 이름 등은 북쪽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전통에 따라 형제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돌림자로 이름을 짓고, 딸의 경우 정(正)자나, 순(純)자를 넣어 바르고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짓는 사례가 아직 존속되고 있다. 한편,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해 개명운동을 지시해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물론 김정숙(김정일 생모), 김형직-강반석(김일성 부모) 등 그 일가의 이름과 같은 주민들을 개명하도록 했다. 심지어 '미(美)'는 미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한동안 이름에 사용하지 못하다가 1990년대 이후 쓸 수 있게 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특히 평양산원에서 태어난 세 쌍둥이 이상의 쌍둥이에게는 김정일 우상화나 정권의 구호를 반영해 이름을 짓는 사례가 많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자의 한글표기에 관한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李)씨를 리씨로, 유(柳)씨와 유(劉)씨를 류씨로, 나(羅)씨를 라씨로, 임(林)씨를 림씨로 부른다. 한국 성명 체계는 한자 표기의 성과 두 음절 이름 등 중국 및 베트남과 외형상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각각의 문화에 따라 별도로 진화해 왔기 때문에 세부적으로는 차이점이 엄존한다. 한국과 달리, 현대 베트남에서는 한자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자 표기로 인한 국적 혼동의 우려는 없다. 한국 인명과 중국 인명은 한자로 표기했을 때는 국적을 잘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나, 선호하는 글자, 음절이나 성씨의 빈도 등으로 차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우선 박(朴)씨는 중국인에게는 거의 없는 성씨로서, 박(朴)씨인 사람은 한국인 또는 한국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조(, )씨나 배(, )씨 등은 글자로 구분된다. 중국에서는 이름이나 애칭으로 링링(玲玲)이나 추이추이(翠翠)같이 같은 글자를 겹친 이름 을 종종 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이름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10위권 성씨를 보면 한국-중국 간에는 이(李), 조(趙), 장(張)의 세 성이, 한국-타이완 간에는 이(李), 장(張), 임(林)의 세 성이, 중국-타이완 간에는 왕(王), 황(黃), 진(陳), 이(李), 장(張), 유(劉), 양(楊), 오(吳)의 여덟 성이, 중국-베트남 간 및 타이완-베트남 간에는 진(陳), 황(黃)의 두 성이 겹친다. 한국과 베트남은 10위권 내에서 겹치는 성이 없다. 일본의 성씨는 한자 두 글자나 세 글자로 이루어진 복성이 주류이므로, 한국, 중국, 베트남 등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의 성(姓)과 구별이 된다. 다만, 일본의 외자성(보통은 훈독하므로 한음절이 아닌 다음절로 발음) 중에는 한·중·베트남과 겹치는 성이 몇몇 있고, 한자의 사용에 따라서는 흡사한 이름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다음은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라 10대 성씨와 본관을 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는 한글로 표기할 때 동음이 되는 서로 다른 성들의 목록이다. 대법원 자료. 이 해에 태어난 신생아들의 이름 가운데 가장 흔한 것 10선(選)이다. 161년 162년 163년 164년 165년 •중국 삼국시대의 장수 장비 166년 167년 168년 169년 170년 •조조 휘하의 모사 곽가 171년 172년 173년 174년 •제갈 공명의 형 제갈근 175년 176년 177년 178년 179년 촉한의 군사 방통 위의 대신이자 진황제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 180년 181년 182년 183년 184년 •장각 185년 186년 187년 188년 189년 제갈근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 190년 191년 192년 193년 194년 195년 196년 197년 198년 199년 200년 이우형 (산악인) 이우형(? - 2001년 4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아마추어 고지도 연구가이다. 1980년 겨울 인사동 고서점에서 조선 영조때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쓴 《문헌비고》의 ‘산수고(山水考)' 내용을 기반으로 누군가 다시 쓴 《산경표》를 발굴해 내었다. 1990년에는 대동여지도에 누락되었던 동여도의 지명을 대동여지도로 옮겨 편찬했다.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묻혀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본을 찾아냈다. 고산자 김정호를 연구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았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을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아르키메데스 점 아르키메데스 점이란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킨다. 연구 대상을 그밖의 모든 것들과 관계에서 볼 수 있도록 하며, 그것들을 독립적인 것들로 유지하도록 하는, 그 연구 대상에서 "자신(관찰자) 제거하기"라는 이상(Ideal)은 바로 아르키메데스 점의 관점으로 묘사된다.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장소만 주어진다면, 지구라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임베디드 시스템 임베디드 시스템(영어: embedded system, 내장형 시스템)은 기계나 기타 제어가 필요한 시스템에 대해, 제어를 위한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장치 내에 존재하는 전자 시스템이다. 즉, 임베디드 시스템은 전체 장치의 일부분으로 구성되며 제어가 필요한 시스템을 위한 두뇌 역할을 하는 특정 목적의 컴퓨터 시스템이다. 이에 비해 개인용 컴퓨터와 같은 특정되지 않는 일반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과 대조된다. 특정 목적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이므로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수행하는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여 메모리에 기록하고 이를 읽어 동작 시키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전자 하드웨어와 기계 부분을 포함하는 전체 장치의 일부로 내장되었다는 의미에서 임베디드 단어가 사용되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오늘날 일상 생활에 쓰이는 많은 장치들을 제어하고 있다. 전자 시스템을 통해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 이며, 종종 실시간(real-time computing) 계산을 행하는 데 있어 제약을 갖는다. 임베디드 시스템에는 마이크로컨트롤러(microcontroller)나 DSP(digital signal processor) 등의 프로세서 코어가 장착될 수 있다. 마이크로컨트롤러는 규모가 작은 시스템에 사용하므로 보통 운영 체제를 포함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 임베디드는 좀 더 규모가 크기 때문에 운영 체제(윈도우 CE, 또는 리눅스 커널)가 시스템에 포함된다. 이 운영체제 위에 특수한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응용 프로그램이 장착되어 동작하는 경향이있다. 예를 들어 같은 ARM이라도 마이크로컨트롤러는 한 칩에 메모리(플래시, RAM)을 포함하고 기타 하드웨어(타이머, UART, SPI, ADC 등 필요에 따라 장착)를 포함한다. 여기서 메모리는 용량이 크지 않기 때문에 운영체제를 포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는 하드웨어는 한 칩내에 장착하지만, 칩 밖에 많은 용량의 메모리를 장착하고 PCB에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시스템이 크기 때문에 용량이 큰 메모리를 시스템에 장착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베디드 시스템"이란 용어는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닌 것이, 대부분의 시스템은 어느 정도의 확장성 또는 재프로그램 능력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수첩형 컴퓨터는 임베디드 시스템과 유사한 운영 체제와 마이컴을 사용할 수 있지만, 다른 응용 프로그램을 읽어들이거나 다른 주변장치를 연결하는 것이 허용된다. 더 나아가서 재프로그램성을 주요 기능으로 드러내지 않는 시스템도 보통 소프트웨어 갱신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범용" 과 "임베디드" 사이의 연속체 속에서 대형 응용 시스템은 한두 가지 기능 전용으로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부품 수준에서 범용 요소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는 하드 디스크와 같은 대용량 저장장치에 운영 체제를 내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임베디드 시스템은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들이 롬(플래시)에 이미지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시동과 동시에 램 디스크를 만든 다음, 램 디스크 위에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들이 구성되고 구동되는 시스템도 있다. 최초의 현대의 임베디드 시스템 가운데 하나는 MIT 인스트루멘테이션 연구소의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가 개발한 아폴로 가이던스 컴퓨터였다. 당시에 크기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로 개발된 모놀리딕 집적 회로를 도입했기 때문에 아폴로 프로젝트에서 이 아폴로 가이던스 컴퓨터는 가장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초기 대량 생산된 임베디드 시스템은 1961년에 출시된 미니트맨 미사일용 오토네틱스 D-17 가이던스 컴퓨터였다. 미니트맨 II가 1966년 생산을 시작했을 때, D-17은 최초의 고용량 이용 집적 회로였던 새로운 컴퓨터로 교체되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하나 이상의 주 처리 코어로 제어되는데, 이 코어는 보통 마이크로콘트롤러 또는 디지털 신호 처리 장치이다. 그러나 특정 임무 전용으로 사용되며, 때로 매우 강력한 연산능력이 요구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항공 관제 시스템도 임베디드 시스템으로 보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다. 비록 대형 컴퓨터와 공항, 레이다 망을 잇는 지역 또는 전국 전산망도 동원되지만 말이다. (각각의 레이다는 한 두개씩의 임베디드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특정 임무에 전념하기 때문에 설계자들이 최적화하여 그 크기와 생산 비용을 줄이고 신뢰성과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어떤 임베디드 시스템은 대량생산되어 규모의 경제로부터 득을 보기도 한다. 외형적으로 임베디드 시스템의 범위는 들고 다닐 수 있는 디지털 시계와 MP3 재생장치 부터 커다란 고정 설비, 예를 들어 교통 신호등, 공장 제어 장치, 또는 원자력 발전소 제어 시스템에 이른다. 복잡성도 다양하여 간단히 한개의 마이컴만 사용한 것 부터 매우 복잡한, 여러 단위와 주변장치, 네트워크를 갖추고 큰 캐비넷 안에 설치되는 것도 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대개 저가로 선택된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몇몇 기능은 매우 빠른 처리가 필요하며, 다른 기능들은 대부분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흔히 임베디드 시스템의 많은 부품들은 성능이 낮은 것들이다. 여기서 느리다는 것은 단지 클럭 속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임베디드 시스템의 전체 구조는 단가를 낮추기 위해 범용 컴퓨터 시스템의 하드웨어에 비해 의도적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임베디드 시스템은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이는 일반 주변장치 인터페이스에 비해 10^24배 정도는 느린 직렬 버스 방식으로 제어되는 주변 장치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임베디드 시스템이 수백만 개 규모로 양산되기 때문에, 생산 비용을 줄이는 것이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몇몇 임베디드 시스템들은 대단한 처리 성능과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시스템에는 (상대적으로) 느린 프로세서와 작은 크기의 메모리를 탑재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하드웨어 장치의 롬이나 플래시 메모리에 내장하는 소프트웨어를 일러 펌웨어라 한다. 임베디드 시스템 상의 프로그램은 대개 제한된 하드웨어 자원 위에서 실시간(real-time) 제약 조건을 가지고 동작한다. 시스템 상에 디스크 드라이브나 운영 체제, 키보드나 화면이 없는 경우도 많다. 파일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플래시 드라이브를 저장 매체로 사용할 수도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있다 하더라도 조그마한 키패드거나 LCD 정도일 수 있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여러 해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오류 없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된다. 따라서 펌웨어는 개인용 컴퓨터에서 쓰이는 소프트웨어보다 신중한 개발과 테스트 과정을 거친다. 대부분의 임베디드 시스템은 디스크 드라이브나 스위치, 버튼 등 기계적인 동작으로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부품의 사용을 피하고 대신 플래시 메모리 같은 물리적 손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칩 자재를 사용한다. 또한 임베디드 시스템이 적용되는 분야는 석유 시추공, 우주공간 등 인간이 직접 즉각적인 제어를 하기 어려운 장소일 수 있다. 따라서 임베디드 시스템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스로 다시 기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응급 복구는 소프트웨어가 주기적으로 타이머를 건드리지 않으면 컴퓨터를 초기화시키는 왓치독 타이머라고 불리는 전자 부품을 통해 이루어진다.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큰 흐름 가운데 하나는 특정 적용 분야에 맞는 IC들을 하나의 CPU 칩에 집적시킴으로서 별도의 주변 장치용 칩을 보드 위에 달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시스템 온 칩(SoC, System On Chip) 기술이다. 임베디드 시스템에는 ARM, MIPS, 콜드파이어/68K, PowerPC, x86, PIC 마이크로컨트롤러, 8051 등 많은 다양한 CPU 아키텍처가 사용된다. 이러한 점이 데스크톱 컴퓨터(개인용 컴퓨터) 시장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2003년 현재, 데스크톱 컴퓨터 시장에선 인텔/IBM x86이나 애플의 매킨토시에서 사용되는 모토로라/IBM PowerPC만이 경쟁 아키텍처이다. 2006년을 기준, CPU 아키텍처에서는 ARM 코어가 가장 강세이다. 이 밖에도 400여개 이상의 임베디드 시스템에 쓰이는 코어가 있다. 인텔 8051, PIC 마이크로컨트롤러, AVR(ARM 코어 사용) 8비트 등이 시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종류이다. ARM은 보통 8비트에 비해 고성능에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리눅스 커널을 포팅하여 많이 사용한다. OS를 탑재하기 위해 ARM 칩 외부에 RAM이나 FLASH을 PCB 상에 장착한다. 리눅스 개발에 필요한 요소와 ARM과 결합하여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가 개발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ARM-코어, FLASH, 그리고 RAM을 한 칩에 만들어 지면 리눅스 포팅이 힘들어져 OS없이 전체 시스템을 C언어 등을 동원하여 요구 동작에 맞게 코딩하여 시스템을 구성한다. 이러한 ARM은 8비트 MCU와 OS를 갖는 임베디드의 중간 성능과 기능을 발휘한다. 임베디드 시스템은 흔히 운영 체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사용한다 하더라도 윈도우 CE나 리눅스 등 임베디드에 맞춰진 운영 체제나 RTOS:국방/항공용 실시간 운영체제(NEOS)를 사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시스템에 설정한다. 이는 대개의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CPU나 메모리 자원 등의 구성이 일반 PC 등의 표준적인 플랫폼과는 달리 한계가 있는 시스템으로 일반 개인 컴퓨터용 운영 체제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그렇듯이, 임베디드 시스템 설계자들도 프로그래밍을 위해 컴파일러, 어셈블러디버거를 사용한다. 리눅스 커널 기반의 운영 체제를 사용할 경우, 개발 도구는 보통 GNU의 gcc을 사용한다. gcc는 소스를 웹사이트에서 가져온 뒤, 목적 CPU에 맞추어 컴파일하면 gcc 관련 도구를 생성할 수 있다. 목적 CPU을 설정하고 make을 사용하면 해당 CPU의 크로스 컴파일러 gcc 관련 실행 파일을 얻을 수 있다. gcc를 사용할 때, 프로그램 개발에서 다음 2가지 방식의 개발도구를 사용한다: 위의 이클립스를 사용하기 위해 개발환경은 리눅스 PC의 X-윈도우에서 주로 행해진다. gcc를 윈도우에서 실행할 경우, 시그윈 상에서 실행 되도록 gcc을 컴파일하면 된다. 커널이 동작할 때, 내부의 상태를 표시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C언어 커널함수 printk을 사용하여 외부의 통신라인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있다. 전용 CPU의 에뮬레이션 도구가 있다면 커널의 디버깅의 편리성을 얻을 수 있다. 이클립스는 디버깅 도구로 GDB을 사용할 수 있다. 리눅스 응용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때, GDB 서버를 타킷 보드에 설치하고 이클립스와 연결하면 이더넷 등의 통신을 통해 디버깅이 가능하다. 윈도우 CE는 윈도우 PC에서 동작하고 비주얼 스튜디오 개발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초기의 환경은 커널(윈도우 CE 플랫폼 빌더)과 응용 프로그램 개발(임베디드 비주얼 C++)이 다른 도구를 사용했다. 이후 커널 컴파일과 응용 프로그램 개발이 비주얼 스튜디오에 통합하여 개발한다. 윈도우 CE와 PC 윈도우 응용 프로그램은 차이가 있으므로 비주얼 스튜디오의 설정은 달라야 한다. 윈도우 CE용 개발 도구를 설치해야 한다. 윈도우 임베디드 컴팩트 7 설치 예: 순서로 설치한다. 디버깅은 인서킷 에뮬레이터 등의 디버거(디버깅 프로그램)를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임베디드 시스템 설계자는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가 흔히 사용하지 않는 도구들도 가끔 이용한다. 한국의 행정 구역 한국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두 정치체로 나뉘어 있다. 대한민국은 1 특별시, 6 광역시, 1 특별자치시, 8 도, 1 특별자치도로 나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 직할시, 2 특별시, 9 도 로 나뉘어 있다. 중화민국 중화민국(, )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본래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를 멸하고 중국 내륙에 세워진 공화국이었다. 다만 건국 초기에는 내분과 외침 등으로 불안하였고, 국공 내전으로 쫓겨나 현재는 타이완 등 몇 개의 도서 지역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영토 중 가장 큰 섬의 이름인 타이완() 또는 대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화민국은 1912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나라 복속기에 있던 한족 중국이 독립하며 세워진 공화국이며 만주국과 양분되게 되었다. 중화민국은 서양열강의 반식지화, 일본 제국의 침략과 정복에 의해 약소하고 불안한 상황이 계속 되었고 중화민국 헌법은 정치적인 진통을 겪다가 1947년에서야 공포되었다. 국공 내전 중 1949년 10월 1일에 마오쩌둥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에 기존의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베이 시로 이전했으며(국부천대),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영토도 타이완(타이완 성 포함) 및 푸젠 성 일부로 축소되었지만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국가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중화민국의 영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타이완은 17세기에 청나라의 푸젠 성에 속했던 지역으로, 1885년에는 푸젠 성으로부터 분리된 푸젠타이완 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만주, 펑후 제도와 함께 일본 제국에 종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45년에 만주와 타이완, 펑후 제도를 중화민국의 영토로 수복하게 되었고, 1947년 공포된 중화민국 헌법에 따라 타이완 성이 다시 설치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내전의 영향으로 중국 국민당은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 시로 이전하였고, 1955년을 기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면서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이 나라는 통상 타이완(대만)으로 불리기도 한다. 1949년 이래 국공 내전을 계기로 중화민국은 이미 국공내전에서 패한 채 망명되었고, 따라서 이 나라와 중국 본토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흔히 양안이라고 일컫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중화민국이 멸망하였으므로 중화민국이 가진 모든 권리의 승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반대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공산당의 반란으로 세운 불법정권으로 간주하여 본토 수복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며,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대만)이라고 부른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이전에는 사용하였으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약칭은 ROC이다. 1971년 중화민국이 유엔 회원국 지위를 잃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부르는 빈도가 훨씬 많아지면서, 통상적으로는 중화민국의 현재 남아있는 영토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명을 따서 타이완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해졌다. 과거 냉전시절 미국이나 대한민국 등 친서방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 )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유중국(自由中國, Free China) 또는 중국이라고도 불렀으나 탈냉전 이후부터는 빈도가 감소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3년 6월 26일, 덩샤오핑 이론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台灣特别行政區)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타이완 지구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국의 특별행정구처럼 간주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또는 )라는 별칭을 1980년대부터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나 국제기구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단,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중화민국의 가맹 명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관세영역(臺灣·澎湖·金門·馬祖 個別關稅領域; ; )이다. 2008년 6월 4일 어우훙롄()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국제기구 등에서의 '중화 타이베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반면 중화민국 감찰원에서는 중화민국 행정원의 정부 문서에서 ‘대만’의 사용 빈도가 높아진 것을 지적하였으며 ‘중화민국’이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차이잉원 행정부 시대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만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중화민국의 정식 명칭을 `대만민국`으로 알고있으나, 이는 일제의 대만 점령 전에 있었던 청나라의 속국을 칭한다. 중화민국에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 쓰는 국가기호는 TW이다. 1911년 우창 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에 참여한 단체들은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삼았으나,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반식민지화된 중국의 현실을 망각하고 갑자기 중화제국을 선포한다. 이에 전국적인 폭동과 군벌들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는데, 결국 위안스카이는 다시 제정을 폐지하고, 대총통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군벌이 계파별로 갈라지고 "군벌들의 전국시대"라고 할 만한 치열한 내전 상태에 들어간다. 일본제국은 난징을 침략하여 강간, 학살을 일삼고 중국인들을 유린하였다. 손중산과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광저우 시에 새로운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축출했다. 북벌을 완료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수도를 난징 시로 천도한다. 점차 정부의 권력이 중국 국민당에 집중되면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이에 대항해 중국 공산당이 장시 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으나, 3년만에 제압된다. 그 후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일 전쟁이 시작된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 전체가 전장이 되었다. 1937년 수도 난징이 일본 제국에 점령당했다. 국민정부는 난징을 탈출, 충칭 시로 도피했다. 일제는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학살, 강간하며 유린하고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다. 1940년에는 친일 성향의 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의해 수립된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고 중화민국은 반식민지에서 해방된다. 중화민국은 유엔에 가입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중일 전쟁에서 국공 합작을 맺고 일본 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다. 일본 제국의 패망 후 양 당은 공동의 적을 잃었기 때문에 양 당 사이의 내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하지만 양 당은 미국, 소비에트 연방의 중재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맺음으로써 화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내정에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으며 소비에트 연방 또한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국민 정부와 체결하면서도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다. 결국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난징 시에서 공산당을 배제한 채 1947년 정부를 재수립했으며 공산당이 이에 반발하면서 중국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국민당은 결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지만 공산당의 끈질긴 노력과 국민당에 등을 돌린 중국 인민의 민심, 전략의 실패, 그리고 경제 정책의 실패 등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중국 본토를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고 타이베이로 정부를 이전한다. 1949년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한 장제스 총통은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을 이유로 국가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 독재를 펼친다.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타이완으로 거점을 옮긴 중화민국은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약 30년 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 내에서의 '중국' 대표권을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겼고, 연이어 전세계의 냉전 체제가 해빙기를 맞으면서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 국가들이 점차 중화민국 단교를 전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함으로써 중화민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화민국의 실지 수복은 사실상 요원해졌다. 이에 타이완 토착세력인 본성인을 중심으로 '탈중국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태동하였고, 현재 중화민국의 내정은 중국 통일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범람연맹과 타이완의 새로운 주권 국가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범록연맹으로 양분되었다. 이런 갈등은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92년부터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92컨센서스'(92共識)에 따라, 통일이나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인 이른바 3불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 공화국을 염원하는 세력의 거두인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집권하여 정책적으로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은 2005년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하여 하나의 중국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리덩후이와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냉각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홍콩 출신인 중국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마영구)가 총통으로 재임하는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차이잉원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92 공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등으로 인하여 양안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아래는 1949년 국부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내전으로 분단된 이래 이념을 달리한 양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며, 각자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1945년 10월 25일에 창설된 유엔에서 중화민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진 주요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국공 내전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던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유엔 헌장 서명국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중국의 법통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승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엔은 1971년 10월 25일 개최된 총회에서 표결하여 2758호 결의가 채택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던 유엔 내 중국 대표의 모든 권리와 지위를 취득하였다. 유엔을 탈퇴한 중화민국은, 이 결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유엔 내부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불리한 조건에 놓이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타이완 지역의 본성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기존의 중화민국이 아닌 타이완 공화국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야당 출신 후보 중 최초로 총통에 집권했을 때 급진하였으나,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로 정권이 교체되고 전임 총통인 천수이볜이 부정비리에 휩싸여 구속되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러한 탈중국화 운동은 지지도가 다소 감소하였다. 중화민국의 정부는 입법원, 행정원, 사법원, 감찰원, 고시원으로 나뉘는 오권분립체제를 취하고 있다. 1949년 이후로 중화민국 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크게 실효 지배 지역인 타이완 지구와 ‘미수복 지역’인 대륙 지구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1991년 5월 1일 헌법을 개정해 정부 실효 통치 국토를 "자유 지구"라고 이름 붙이고, 헌법의 적용 지역을 "자유 지구"로 한정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인 타이완 섬과 펑후, 행정구역상 푸젠 성에 속하는 진먼, 마쭈 등의 섬들이 포함된다. 중화민국은 국내를 성(省)과 직할시(直轄市)로 구분하여 각각 지방 정부를 두고 있다. 다만 1949년 이후 중앙정부의 통치 구역과 타이완 성 정부의 통치 구역이 거의 겹치게 되었기 때문에 성 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현재도 성 정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앙 정부가 직접 현(縣)을 관할한다. 중화민국은 1912년 기준 청나라의 공식적인 영토를 자국의 국토로 규정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11,418,174km이다. 그에 반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면적은 9,596,960km, 타이완 섬만의 면적은 35,195 km²이다. 중화민국은 공식적으로는 실지(失地)인 중국 대륙을 포함한 국토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주장해오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국경획정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륙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이 아니지만 중화민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중국 본토, 몽골, 투바 공화국 등이 포함된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중 하나를 택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중인 미국과 일본 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화민국과의 교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중화민국은 아프리카 1개국, 유럽 1개국, 오세아니아 4개국, 중남미 9개국의 총 15개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나라 이름 우측 상단의 별표는 타이완 현지에 대사관이 설립된 국가를 나타낸다.) 타이완은 예전부터 일본인 미국인이 많이 관광하던 관광 도시이다.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대만 택시 강간 사건과 용호 마사지 성추행 사건등 요구르트나 차에 수면제를 타는 성추행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 주의가 필요하다. 중화민국 헌법 제 20조의 규정에 의해 중화민국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만 19세 이상의 남자에게는 12개월간의 병역 의무가 주어져왔으나, 2010년부터 모병제 전환을 시작하여 2019년부터 모병제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출생자까지는 복무기간이 1년인 징병대상이었으며, 1994년 이후 출생자는 4개월의 군사훈련(기초군사훈련 2개월, 군사특기 교육 2개월)만 받았다. 국군인 중화민국 국군은 정규군 약 30만 명, 예비역으로 약 350만 명의 병력을 포함하며, 정규군은 육군 20만 명, 해군 4만 5,000명, 공군 4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기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침공을 대비해 수는 적으나 CM11 전차나 키드급 구축함, F-16 전투기, AH-64 아파치,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해있다. 또한 중화민국 육군은 미국으로부터 M1 에이브럼스 전차를 도입받기로 결정했다. 정부를 타이완으로 이전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인하여 중화민국 국군은 최신예 개인 화기, 군용기, 군용선 등을 운용하고 있으며, 2019년의 국방 예산은 GDP의 2.16%에 상당하는 3460억 뉴 타이완 달러, 즉 12조 6500억 대한민국 원에 이른다. 중화민국 국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는 중국 연안의 진먼 현이다. 미국과의 단교 이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이 폐기되고 중화민국 주둔 미군이 철수했지만, 미국은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제정하여 첨단 무기를 판매하고 군사훈련에 미군을 참관시키는 등 군사협력관계를 간접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종교적 또는 개인의 비폭력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를 거쳐서 허용하고 있으며, 현재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양로원 등의 사회 복지 시설에서의 사회 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도록 하되, 합숙 생활을 하도록 하고 있다. 국공 내전 이후부터는 사실상 중화민국 영토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된 타이완 섬의 대부분은 산지 지형이며, 서해안의 평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타이완 섬 중앙부에 위치한 위 산(玉山)으로, 높이는 3,952 m이다. 한편, 진먼 현과 마쭈 열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중국 대륙의 해안에 근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편이고, 고도로 요새화된 지역이다. 둥사 군도와 난사 군도의 타이핑 섬은 남중국해에 위치하며, 모두 무인도이다. 타이완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아서 농업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 본토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토지로 인해 이주해 왔다. 청나라 시기와 일본 통치 시대에 걸쳐서, 타이완(대만)은 그 높은 농업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여 경제적 지위를 서서히 계속 확립했다. 1945년 중화민국으로 반환된 이후, 타이완은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하였고, 특히 1960년 이후의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신흥공업경제지역(NIES)의 일원이 되었다. 중국 본토로부터 타이완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함과 동시에, 강력하게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수출 지향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정책이 추진되어, 1973년에는 "십대건설(十大建設)"이라는 중공업의 계획적 개발이 실시되었다. 특히 인프라스트럭쳐의 정비, 철강, 조선, 석유화학 산업의 육성이 중요 과제로 실시되어, 결과적으로 오늘날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국내의 노동자 임금이 상승하면서 많은 기업들이 공장을 중국 본토와 동남 아시아 등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전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2002년 1월에 중화민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 관세 영역(Separate Custom Territories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라는 이름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세계의 자유 무역 체제와 일체화되었다. 그 결과 도상국 및 도상 지역 특례를 이용할 수 없게 되어, 무역 관련 제도의 개선, 관세의 인하, 서비스, 무역의 자유화 등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2014년의 국내총생산(GDP)는 약 5,295억 미국 달러, GDP 성장률은 3.5%였다. 2014년 중화민국의 1인당 구매력평가(PPP) 환산 국내총생산(GDP)은 45,854 미국 달러에 달한다. 이 수치는 스웨덴, 독일과 비슷하며, 아시아에서는 카타르, 싱가포르, 브루나이,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홍콩,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에 이어 9번째로 높다. 반면에 1인당 명목 GDP는 아시아에서 11번째로 높은 22,598 미국 달러(2014년)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중화민국의 통화 단위는 신 타이완 달러이며 (TWD, "New Taiwan dollar"), 통화의 발행은 중화민국 중앙은행이 맡고 있다. 농업은 타이완 섬 서해안의 비옥한 평야 지역에서 주로 발달했다. 전체 토지의 24%가 곡물 재배에 적합하다. 쌀과 사탕수수의 수확량이 많으며, 그 밖에 옥수수, 고구마, 아스파라거스, 버섯류, 콩, 땅콩, 차, 바나나, 파인애플, 감귤류 등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 일본 등의 국가로의 농산물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가축으로는 돼지, 소나 물소(이전에는 농경용), 양, 산양, 닭, 오리 등이 상업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국토의 약 60%가 삼림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목재는 그리 풍부하지 않다. 주로 오크, 개잎갈나무, 대나무, 코늄(Conium), 등, Rattan) 등이 산출(産出)되지만, 수요의 대부분은 수입재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어업은 근해어업과 원양어업이 전체 어획고의 8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연안어업과 양식업이다. 고등어와 다랑어의 어획량이 많다. 지룽 부근의 탄광에서 석탄을 생산하고 있다. 대리석, 유황, 원유, 천연가스, 암염 등도 소량이지만 산출된다. 주요 공업 생산품은 시멘트, 석유, 라디오, 텔레비전, VTR, 전자 계산기(전산기), 컴퓨터 시스템 기기 등이다. 특히 타이완에서 제조되는 전자 제품이나 전기 부품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화학공업, 석유화학공업, 섬유 산업, 플라스틱 제조업, 식품공업, 조선업 등도 번성하고 있다. 2002년 기준 연간 발전량은 1585억 3700만 kWh로, 그 약 4분의 1을 원자력발전소가 조달하고 있다. 국민당 정부의 경공업 위주 경제 정책에 따라 경공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공업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타이완은 세계 유수의 컴퓨터 부품 생산 기지로 세계 시장에서 유통되는 메인보드와 그래픽 카드의 절대 다수가 생산된다. 그 외에 반도체와 액정 디스플레이(LCD) 등의 세계 시장 점유율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자체 상표가 아닌 주문자의 상표를 부착하는 주문자 생산(OEM)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을 갖지는 못하고 있다. 금융업이 활발하여 많은 외국 은행이 지점을 설치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생긴 주식의 자유화와 상승을 배경으로 주식시장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2001년 이후의 불황으로 주가는 침체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의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2003년의 수출은 1,506억 12만 미국 달러, 수입은 1,272억 4,257만 미국 달러였다. 주요 수출품은 전기 및 전자 제품, 섬유 제품, 플라스틱 제품, 장난감류, 가공 식품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원유, 목재, 철강, 기계류, 전기 및 전자 부품, 식료품이다. 주요 무역 대상국 및 지역은 미국, 일본, 독일, 홍콩,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싱가포르 등이다. 2010년 중국 국무원이 신소재 산업을 포함한 7대 전략적 신흥사업을 선정하여 육성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신소재 산업규모, 기술력 등에서의 현저한 발전이 국민경제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 연구개발, 설계 생산 등 산업 시스템을 형성했고, 산업 규모, 기술력 등에서 현저한 발전을 이루며 국민경제와 국방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산업 밀집지역에 따라 분업화가 이루어지고, 중국 20여 개 성시에서 주요 첨단기술 산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신소재 산업의 분포는 주로 산업기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신소재 산업은 지역경제의 주요 성장축으로 자리잡으며 그 중 장쑤성, 저장성, 산둥성에서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탄탈-니오브-베릴륨 합금, 실리콘 철강, 초전도 소재 등의 생산기술은 국제 수준에 도달했으며 신소재 품목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체 에너지 소재, 정보전자 소재, 고분자 소재 태양전지는 결정 실리콘 태양전지, 박막 실리콘 태양전지, 집광 태양전지가 있다. 이 중 결정 실리콘 전지의 사용이 가장 광범위하며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현재 세계 태양전지 생산 분포는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는 추세이고 미래 태양전지는 다양한 기술이 공존할 것이다. 2차 전지는 니켈카드뮴 전지, 니켈수소 전지, 리튬 전지, 납축 전지 등을 포함하며 신에너지 자동차의 핵심이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2차 전지를 생산하는 나라이며 이미 리튬 전지의 생산라인을 완벽하게 구축했다. 정보전자 소재는 광전자, 마이크로 기술, 신형 전자부품 영역에서 쓰이며 정부에서 가장 관심있게 지켜보는 분야이자 시장규모도 가장 큰 분야이다. 광전지 소재는 광전자 기술의 기초이며 그 중 LED산업은 중국에서 이미 발전이 비교적 빠르고 향후에도 빠른 성장추세를 보일 전망이다. LED 기술은 이미 대규모 시장화에 들어선 단계이다. 신형 전자부품 방면으로는 자성 소재, 전자 세라믹 소재 등이 주요 발전 영역이 될 전망이다. 고분자 소재는 상대 분자질량이 비교적 높은 화합물로 구성된 소재로 고무, 플라스틱, 페인트, 접착제 등을 포함한다. 엔지니어링(변성) 플라스틱은 쉬운 가공성, 내충격성, 내열성 등 특수 성능을 지닌다. 중국은 세계 최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잠재 시장이자 수요의 성장동력이 된다. 하지만 중국의 유기 실리콘 산업은 비교적 낙후되고 가격도 해외보다 높은 편이다. 따라서 유기 실리콘 분야는 아직 외국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았다. 타이완의 교통 행정은 중화민국 교통부가 담당하고 있다. 타이완의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동서는 중앙산맥으로, 남북은 하천에 의하여 방해받고 있다. 육상 운송 수단으로는 도로망이 특히 발달하였다. 동해안의 쑤화 공로, 서해안의 포르모자 고속공로와 중산 고속공로, 섬을 횡단하는 동서횡관공로나 남부횡관공로등 간선도로가 잘 정비되어, 간선도로의 총연장 거리는 41,475km (2009년)에 이른다. 그 중 국가간선도로가 901km, 지방간선도로가 4,680km이다. 간선도로는 20,947km(고속도로 872km 포함)이며, 도심도로는 16,395 km이다. 자동차 보유율도 높아 평균 3명당 1대 정도이다. 또한 잘 정비된 버스운행체계를 가지고 있다. 수십년간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자동차는 일본과 반대로 우측통행을 한다. 철도는 대만철로관리국의 관리 아래 지룽을 기점으로 하는 동부간선이나 타이베이를 기점으로 하는 서부간선 등이 타이완의 해안선을 일주한다. 주로 물자 수송에 이용되고 있다. 2007년 타이완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철도의 총 길이는 1,496km (2003년) 이고 철도 밀도는 415km/10,000km이다. 타이베이(신베이 지역 일부 포함)와 가오슝, 타오위안은 제윈, 즉 지하철이 운행 중이다. 주요 항구는 지룽 시, 화롄 시, 가오슝 시, 타이중 시 등이 있으며, 특히 가오슝은 국제 무역항으로서 타이완 지구 최대 규모의 항구인 동시에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 중 하나이다. 국제 공항은 타오위안시 다위안 구의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과 가오슝시의 가오슝 국제공항이 있다. 중화민국의 국적기인 중화항공과 에바항공은 국내선과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다. 휴대전화의 보급율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또 일간지는 약 30지(紙)가 있으며, 주요 신문으로는 타이베이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자유시보"(自由時報), 가오슝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타이완신문보"(臺灣新聞報), 타이중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타이완일보"(臺灣日報) 등이 있다. 인구는 2335만 9928명(2014년 7월 추계), 인구밀도는 1km²당 636명(2005년 기준)이다. 인구증가율은 0.34%(2007년). 서해안의 평야부에 인구가 집중하여 인구밀도는 지극히 높다. 경제발전에 의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으로 인하여, 도시 인구는 70%를 넘는다. 최대의 도시는 타이베이 시로, 2,603,651명이 거주한다. 제2의 도시로는 가오슝 시에 1,528,430명이 거주하며, 타이완 최대의 공업 도시인 동시에 타이완 제일의 항만이 있다. 그 밖의 주요 도시로는 타이완 중부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인 타이중 시에 1,077,182명, 타이완 남부의 경제, 문화 중심지인 타이난 시에 771,864명이 있다. 그리고 '타이완의 실리콘벨리'라고 불리는 신주 시에 413,317명, 타이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가 있는 지룽 시에 387,207명, 그리고 자이 시에 273,639명이 거주한다. 타이완 주민은 크게 3개의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계 원주민(약 1.7%), 명·청시대에 중국 푸젠 성, 광둥 성 등에서 이주 정착한 한족계 본성인(약 85.3%), 그리고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중국 본토 각지에서 이주한 외성인(外省人, 약 13%)이 있다. 한족계 본성인은 일상에서 주로 쓰는 중국어 방언에 따라 민남어를 사용하는 복노인(약 73.3%)과 객가어를 사용하는 객가인(약 12%)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 섬으로 피신하면서 정권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본성인들을 억압하면서 1947년에 2·28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있었다. 1988년에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가 총통이 될 때까지 43년간 외성인 중심의 국민당 정권이 계속되면서 정치, 경제의 각 분야에서 여전히 외성인 출신들과 그 후손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타이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주로 미국인 등 서양인이다. 그밖에 일본인, 말레이 인종(필리핀 출신 주민 등), 베트남인, 몽골인, 티베트인 등이 있다. 국민당이 이주해 오기 전부터 타이완에 살던 사람은 본성인이라고 부르고, 국민당과 함께 이주해 온 사람들을 다른 성에서 왔다고 하여 외성인이라고 부른다. 국민당이 타이완을 통치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언어였다. 명나라 때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 와서 200년 넘게 살아온 본성인과 타이완 원주민은 민난어를 주로 사용했으나, 국민당은 만다린어를 표준어로 정하면서 본성인의 불만이 야기되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2.28사건으로 깊어졌다. 국민당이 담배전매권을 시행하고 폭압적인 단속을 하는 과정에서 시위가 발생하였고,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난폭하게 진압을 하면서 2만 명이 죽고 10만 명 가량이 행방불명되었다. 국민당은 이 때부터 1987년까지 40년간 계엄령을 발동하여 타이완을 통치하였다. 민난어를 쓰는 본성인은 주로 타이완 남부 지역에 거주한다.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국민당이 통치하던 때보다 일본 점령기가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일부 있다. 정치적으로는 국민당 반대파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지지하며 중국 대륙과의 통일보다는 현상 유지나 타이완 독립을 지지한다. 이에 반해 외성인에게 타이완은 임시로 거주하는 곳일 뿐이고, 타이베이는 임시수도일 뿐이다. 타이베이를 비롯한 북부에 많이 거주하며, 소수이지만 경제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다. 베이징어를 사용하고 대륙과의 통일을 바라는 국민당을 지지한다. 물론 대부분의 타이완 사람들은 독립이나 통일 같은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지만 선거 때가 되면 정치적 대립이 부각되면서 심한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중화민국의 공용어는 베이징 방언을 기초로 한 표준 중국어이다. 일상에서는 민남어(타이완어)나 객가어가 많이 쓰이며, 그 밖에 중국 각지의 방언도 쓰인다. 또한, 원주민은 각각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화민국의 정치 민주화를 반영하여 매스컴 등에서 민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외국어로는 영어와 일본어가 가장 많이 쓰인다. 종교로는 불교, 도교, 유교의 3대 종교와 기독교 등이 존재한다. 3대 종교 간의 구분은 극히 애매하며 이를 신앙하는 인구 비율이 93%를 차지해 압도적으로 많다. 성공회, 메노나이트,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의 기독교는 4.5%, 기타 2.5%이다. 타이완에서는 불교, 도교, 유교의 구분이 극히 애매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타이완 사람들의 종교 생활은 불교, 유교, 도교가 혼합된 것으로, 묘(廟)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신들이 합사되고 있다. 특정의 신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따라 참배하는 신들을 바꾸고 있다. 따라서 타이완 사람들은 종파를 넘어 깊게 종교와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종교 회의 등 종교 국제 기구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타이완 중화민국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많다. 타이완의 교육제도는 1946년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이 정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일본식 교육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의무 교육은 초등학교(국민소학; 國民小學)와 중학교(국민중학; 國民中學)의 9년간으로, 공립학교는 무료이다. 국민중학 졸업자의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중학(高級中學) 혹은 고급직업학교(高級職業學校)에 진학하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높다. 타이완에는 약 150개의 대학교와 전과학교(專科學校) 등의 고등교육 기관이 있다. 주요 대학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타이베이 가오슝 기타 지역 타이완 주민의 대부분이 한족이므로 그 문화 기반은 한문화(漢文化)이다. 중국 본토의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사회 조직의 중요한 사회 단위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선조 숭배는 현재도 중요한 가족 행사의 하나이다. 또 구정 및 이십사절기에 따르는 청명절이나 중추절 등의 전통적인 연중 행사는 매년 성대하게 행해지고 있다.
타이완 섬에 대한 일제의 강점기간은 한국보다 15년이 더 긴 50년(1895년-1945년)이지만, 타이완 주민들의 반일 감정은 한국인에 비해 현저히 덜한데 이는 1947년의 2·28 사건 이후 무려 38년간의 계엄령 아래서 본성인과 외성인을 차별했던 폭압통치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에는 세계적인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많다. 저명한 도서관으로는 타이베이 시에 있는 국립 중앙도서관이 있으며, 방대한 양의 장서를 보유할 뿐만 아니라 분관도 존재하고 있다. 또 각 주요 도시에 공립 도서관이 있다. 타이베이와 자이 현 타이바오 시에 있는 국립고궁박물원에는 베이징의 자금성으로부터 옮겨져 온 중국 역대 왕조의 뛰어난 문화유산이 다수 수집되어 있다. 또 국립역사박물관, 타이완성립박물관, 타이중 시에 있는 국립 타이완 미술관에는 중국의 민속 문물이나 현대 예술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기 있는 스포츠는 야구로, 중화 프로 야구 대연맹(타이완 프로 야구)이 있다. 중화민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국제결혼을 하러 온 중국인 여성들과 수 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결혼 생활을 하며 중국에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남편 몰래 성매매를 하고, 이를 중국 가족에게 송금하는 일이 자주 적발되었으며, 한국 남자와 결혼한 중국인 여자들과 조선족 여자들 3천명이 한 도시에서 조직적으로 매춘을 벌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유학하던 중국 여학생과 특히 대만 여학생들이 몰래 노래방과 클럽등에서 매춘을 하다가 적발되었는데, 그 이유가 "화장품을 구입하기 위해 매춘을 한다"고 하였다. 또한 버닝썬 사건을 통해 일부 중국과 대만 유학생 여자들이 69체위와 항문섹스 등을 하며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 클럽에서 마약을 복용하다 적발되기도 하였다. 중국 전통마사지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는 수많은 곳의 80%는 20~30대 중국인 여성이 성매매를 하는 곳이라고 조사됐다. 중국 정통마사지라는 곳에서 발가벗고 퇴폐마사지를 하다가 적발된 중국 여성들은 2012년 한해만 240여명에 육박하여 비적발된 중국 여성을 추정하면 아주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대한민국 남자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이완은 중화권에 속한 지역으로, 타이완의 대중 문화는 중화권과 맥을 같이 한다. 타이완 출신의 연예인들은 중국 대륙와 세계 각지의 화교 사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외국 문화 중에서는 일본의 대중 문화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타이완의 대중 문화 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타이완에서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 중에는 일본의 만화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 많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 문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201년 202년 203년 을파소 집정관 집정관(, , )은 정무관 중 최고 지위이며, 행정 및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원로원과 합하여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을 가진다. 임기는 1년이며 한 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간의 합의 하에 업무를 본다.(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 권력의 집중방지). 비상시 한 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전권을 위임(6개월을 넘지 못함)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이 된다.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었다. 집정관은 매년 민회의 투표를 거쳐 2명이 선출된다. 선출된 집정관은 로마법()에 따라 로마의 통치권을 대표단()으로부터 부여받음으로써 로마의 최고통치자로서 법적으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군사, 행정, 법, 원로원 임원 임명 및 추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원로원과 민회를 필요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현재 집정관이 통치하는 나라는 산마리노뿐이다. 집정관은 2명으로 하며 임기는 6개월이다. 204년 205년 206년 207년 • 원소의 둘째아들 원희 • 원소의 막내아들 원상 208년 • 후한의 정치가 공융 • 조조의 아들 조충 • 형주 자사 유표 209년 • 유비,손권의 누이동생 손부인과 결혼하다 210년 211년 212년 213년 214년 215년 • 조조,헌제의 황후 복 황후와 그일가를 모두 처형함 216년 • 조조가 위왕에 오름 217년 조위와 서진의 명신 가충 • 노숙 218년 • 조조의 장수 악진 219년 220년 자바 (프로그래밍 언어) 자바(, )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제임스 고슬링()과 다른 연구원들이 개발한 객체 지향적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1991년 그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95년에 발표했다. 처음에는 가전제품 내에 탑재해 동작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했지만 현재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하나이고, 모바일 기기용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현재 버전 10까지 출시했다. 자바의 개발자들은 유닉스 기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법적인 특성은 파스칼이 아닌 C++의 조상인 C 언어와 비슷하다. 자바를 다른 컴파일언어와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컴파일된 코드가 플랫폼 독립적이라는 점이다. 자바 컴파일러는 자바 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을 바이트코드라는 특수한 바이너리 형태로 변환한다. 바이트코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JVM(자바 가상 머신, )이라는 특수한 가상 머신이 필요한데, 이 가상 머신은 자바 바이트코드를 어느 플랫폼에서나 동일한 형태로 실행시킨다. 때문에 자바로 개발된 프로그램은 CPU나 운영 체제의 종류에 관계없이 JVM을 설치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는 어디서나 실행할 수 있으며, 이 점이 웹 애플리케이션의 특성과 맞아떨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자바 언어는 1991년 6월 셋톱 프로젝트를 위해 제임스 고슬링(James Gosling)이 만들었다. 이 언어는 원래 제임스 고슬링의 사무실 밖에 있던 오크 나무를 따다 오크(Oak), 혹은 그린(Green) 이라고도 불렀으나, 단어 리스트 중 무작위로 뽑은 자바(Java)를 선택했다. 고슬링의 목표는 C/C++ 스타일의 언어와 가상 머신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첫 공개 자바 버전은 1995년의 자바 1.0이었다. 한 번 쓰고 어느 곳에도 실행 "Write Once, Run Anywhere"하는 것을 약속하였고 인기 플랫폼에 무료 런타임을 제공하였다. 이 플랫폼은 꽤 안정성을 지녔고 보안 시스템은 여러 설정을 통해 네트워크 및 파일 접근을 통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브라우저들은 곧 자바 애플릿(Java Applet)을 웹 페이지 안에서 실행할 수 있었고 자바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자바 2(JDK 1.2 ~ 1.4)의 출현으로 여러 다양한 플랫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설정(Configuration)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J2EE는 엔터프라이즈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할 수 있고, J2ME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할 수 있다. J2SE는 스탠다드 에디션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 마케팅용으로 Java EE, Java ME, Java SE 순서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1997년 ISO/IEC JTC1 표준화 그룹, 그리고 나중에는 ECMA International 그룹과 접촉하여 정식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곧 이 프로세스에서 철수했다. 자바는 사실상 (de facto)의 표준이며 자바 커뮤니티 프로세스(Java Community Process)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바의 대부분을 무료로 배포하였으나 오픈이 아닌 사유 소프트웨어였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바 엔터프라이즈 시스템 같은 특정 라이선스를 팔아서 수입을 올렸다. 썬(SUN) 사는 자사의 개발용(소프트웨어 개발 키트 (SDK))과 개발용의 일부인 실행용(자바 런타임 환경, JRE)을 구분한다. 실행용에는 컴파일러, 유틸리티 및 여러 개발용 헤더 파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06년 11월 13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대부분은 자바를 GPL 라이선스로 소스를 오픈하였으며 2007년 5월 8일 이 과정을 마쳤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코어 부분을 오픈하였다. 2009년 4월 20일 제작사인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과 인수 합병됨에 따라 자바에 대한 권리 및 유지보수 또한 오라클로 넘어가게 되었다. 자바 언어는 다음 5가지의 핵심 목표를 지니고 있다. 자바는 초기 설계부터 객체 지향 언어(객체 지향 프로그래밍)로 설계되었다. C가 C++로 진화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같은 코드로 어떤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나 실행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자바만의 실행 코드인 바이트코드라는 중간 코드를 컴파일러에 의해 생성한다. 그리고 자바 가상 머신(JVM)에 의해 해석되어 실행된다. 따라서 C/C++ 코드로 작성되어 생성된 코드보다 일대일 상황이면 실행 속도가 느리다. 그러나 장점은 같은 코드로 다양한 플랫폼이나 운영 체제에서 실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자바가 여러 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CPU)에서 같은 코드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C/C++의 프로그램의 실행 구조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C/C++가 특정 CPU의 기계어 코드를 직접 생성하면, 이 기계어 코드가 메모리에 적체되어 바로 실행된다. 따라서 C/C++는 CPU가 달라지면 컴파일러가 달라져야 한다. 임베디드 프로그램의 경우, gcc는 gcc 소스를 사용해서 특정 CPU를 지정하고, 컴파일러(x86 플랫폼에서)로 크로스 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다. x86 리눅스용 프로그램 만든다면, x86 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다. ARM용 프로그램이라면 ARM을 지정하고 컴파일러 소스를 컴파일러(x86에서 실행되는)로 ARM용 크로스 컴파일러를 만들 수 있다. 만약 gcc를 사용하고 싶지 않거나 gcc 컴파일러가 없다면, 특정 CPU 개발 도구는 구입을 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자바는 같은 코드를 사용하여 다른 CPU에서 실행되도록 하기 위해 직접 CPU의 기계어 코드를 생성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바는 바이트코드()라는 것을 생성한다. 이것을 자바 가상 머신(JVM, )이 해석을 하여 실행한다. 자바 가상 머신이 인터프리터가 되어 코드 해석 방식의 실행을 함으로써, 같은 바이트코드를 가지고 여러 가지의 CPU에서 실행이 가능해진다. JVM은 CPU와 직접적 관계가 있으므로 이것은 CPU의 기계어 코드로 이루어진다. 자바의 실행 방식은 스택 실행 방식 언어()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을 C/C++를 x86 프로세서용 컴파일러로 컴파일하면, 컴파일러와 최적화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예의 코드가 생성될 수 있다. C 언어에서 실행할 때, 지역변수는 스택이나 CPU의 레지스터를 이용한다. 스택이냐 레지스터냐는 개발 도구의 옵션에서 설정하는 최적화와 함수 내의 변수의 숫자와 관련이 있다. 함수의 블록이 시작되면 레지스터를 스택에 대피시키고, EBP를 스택의 포인터 값으로 설정하여 변수의 베이스 주소로 사용한다. 스택을 이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어셈블리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x86 프로세서에서 어셈블리어 코드 예는: 이 코드는 2개의 정수형 숫자를 더해 다른 곳에 넣는 과정이다. 메모리에 적체된 코드를 x86이 읽어 실행시킬 수 있는 기계어로 일대일 대응된다. "bp" 레지스터는 CPU의 스택을 베이스로 한 포인터 레지스터이다. 주로 지역변수로 선언된 경우 스택을 사용한다. 그러나 자바에서 보면: 2개의 숫자를 더하기 위해 스택에 넣고, 다시 스택에서 꺼내서 더한다. 더한 값을 다시 스택에 넣는다. 이 코드는 특정 CPU의 기계어 코드가 아니라, 자바 고유의 기계어로 생각할 수 있는 코드 형태이다. JVM이 읽어 해석한 후, 해당 코드의 기능을 수행한다. 자바의 버전은 보통 Java SE 또는 JDK/JRE의 버전으로 말한다. JDK(Java Development Kit)는 표준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며, JDK 버전이 바뀜에 따라 이 라이브러리가 확대되고 API가 바뀐다. 초기 1.0/1.1 버전에서 JDK/JRE의 명칭을 사용하다가 Java 1.2가 발표되면서 J2SDK/J2RE라고 개명하여 사용했으나 기존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현재는 다시 JDK/JRE의 명칭으로 돌아왔다. 또한 J2SE(Java2 Standard Edition)라는 명칭 또한 Java SE(Java Standard Edition)로 변경되었다. 자바 버전 체계의 메이저 버전(소수점 위)이 계속 1.x로 고정되어 마이너 업데이트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어 1.5 버전부터 5.0(1.5), 6(1.6)의 형태로 제품 버전을 코드 버전과 별개로 발표하고 있다. 언어 자체는 자바 언어 명세(Java Language Specification, JLS)에서 정의되며, 판()으로 구분한다. JDK가 확장되는 동안 언어는 2판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으나, JDK 5와 함께 바뀐 JLS 3판에서 제네릭() 타입, 애너테이션() 같은 기능이 도입되면서 상당히 바뀌었다. JDK 7에서는 자바 언어에 상당한 변화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JDK 7로 예정되었던 변화가 JDK 7과 JDK 8로 나뉘면서 JDK 7에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언어 특성만이 추가되었다. 구체적으로 이진수 표기 추가, 가독성을 위해 수 표기에 밑줄()을 허용, 스위치 문(에서 문자열 사용, 제네릭 타입 객체 생성 시 타입 추론(), 자동 자원 해제를 위한 try 문법, 여러 예외 타입을 동시에 잡도록 허용하는 문법 등이 추가되었다. 현재 자바 언어는 JLS 3판, JDK는 버전 9이다. 현재 오라클 공식 홈페이지에서 JDK 8, Java.net에서 JDK 9가 배포 중이며, 다운로드 페이지 오른쪽에 있는 약관 동의에 체크하고 그 아래 링크를 이용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다음은 자바를 사용해 작성한 전통적인 Hello world 프로그램이다. 소스 파일명은 반드시 파일 내의 public class 이름과 동일해야 하며, 파일 확장자는 .java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만약 public class 이름이 HelloWorldApp이라면, 파일명은 반드시 HelloWorldApp.java가 되어야 한다. 이 자바 파일이 동작하기 위해서는 자바 컴파일러를 통해서 바이트코드로 컴파일되어 같은 이름의 .class 파일, 즉, HelloWorldApp.class가 생성되어야 한다. 컴파일된 class 파일은 자바 가상 머신을 통해 실행이 가능하다. 리눅스/유닉스 터미널 (혹은 윈도 cmd) 에서 자바 파일을 컴파일한 후 실행하는 방법 예제) javac HelloWorldApp.java 컴파일 후에는 같은 이름의 class 파일인 HelloWorldApp.class가 생성된다. java HelloWorldApp 실행 시에는 확장자인 .class를 붙이지 않는다. Hello World! 한편 안드로이드는 자바 VM에 해당하는 달빅계열하에 오픈 자바 클래스를 기반으로한 API로 프로그래밍을 함으로 이 경우 특수한 경우의 자바 프로그래밍이라고 부를수있다.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 또는 로우 레벨 프로그래밍 언어()란 컴퓨터가 이해하기 쉽게 작성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일반적으로 기계어와 어셈블리어를 일컫는다. 실행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배우기가 어려우며 유지보수가 힘든 것이 단점이다. 현재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다. 저급언어와 반대되는 것으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다. 기계어는 특별한 변환 과정 없이 컴퓨터가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현재 프로그래머들은 대개 기계어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지는 않는데 그 까닭은 고급 언어가 자동으로 다루는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명령마다 수많은 코드를 기억하고 찾아야 하고, 수정하기 또한 매우 어렵다. 아래는 n번째 피보나치 수를 계산하는 32비트 x86 기계어를 표현한 16진 기능의 예이다: 2세대 언어는 기계어 최상단에 추상적인 수준을 제공한다. TX-0, PDP-1과 같은 컴퓨터들을 이용하여 코딩하던 과거에는 MIT 해커들이 했던 최초의 일은 어셈블러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어셈블러는 매크로를 제공하므로 공통이 되는 일련의 명령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래는 상단의 피보나치 수 계산기와 동일하지만, MASM 문법을 이용하여 x86 어셈블리어로 표현한 것이다: 동일 기능을 C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또는 하이 레벨 프로그래밍 언어()란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작성된 프로그래밍 언어로서,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보다 가독성이 높고 다루기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다. 컴파일러나 인터프리터에 의해 저급 프로그래밍 언어로 번역되어 실행된다. C 언어, 자바, 베이직 등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고급언어에 속한다. 추상화의 정도는 얼마나 프로그래밍 언어가 높은 수준인지를 정의한다. 1960년대에 컴파일러를 이용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보통 오토코드라 불렀다. 오토코드의 예는 코볼과 포트란이 있다. 현대의 고급 언어를 실행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3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가 쓰인다: 한글과컴퓨터 주식회사 한글과컴퓨터는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이다. 2010년 472억 원 매출, 108억 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총 8년간 흑자 경영 체제를 이어가고 있으며, 2011년에는 연간으로는 566억 원대의 매출 목표를 삼아 ‘한컴오피스’ 신제품 출시와 씽크프리 모바일등 오피스 중심으로 사업계획을 재편 중이다. 대한민국 ‘정보자주독립’의 가치를 내걸고 1989년 자국어 워드 프로세서인 한글 1.0 발표, 1990년 10월 9일 설립되었으며, 2003년 프라임 그룹에 인수되었으며 2009년 삼보 컨소시엄으로 주인이 바뀌었으나 대표이사의 횡령이라는 악재 끝에 1년만에 다시 매물로 나왔고 결국 2010년 10월 소프트포럼에 의해 인수되었다. 2011년 들어 PC용 오피스인 '한컴오피스'에 더해 신사업 분야인 모바일과 클라우드 기반의 오피스 ‘씽크프리’, 전자책(eBook) 분야 등에서 글로벌 성장에 집중하여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두는 꾸준한 경영실적을 보이고 있다. 주요 매출구조로 30%정도의 매출을 공공기관에서 하고 있다.아래아한글(HWP)을 포함한 한컴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독점할 수 있는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소프트웨어로 살아 남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수입을 대체하는 대안오피스로 발전하고 있다. HWP 문서포맷은 2009년 공개되었으며, MS-Word를 비롯하여, 네이버오피스등 기타 오피스솔루션들에서 HWP파일 포맷을 지원하고 있다. HWP 문서포맷은 HWP2002부터 HWP2014까지 같은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 한글과 컴퓨터는 이찬진 사장이 경영하던 시절인 1990년대 소프트웨어 개발외에도 출판사업도 하였다. 당시 한글과 컴퓨터는 월간《한글과 컴퓨터》를 발간하였는데, 아래아한글 중·고급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아래아한글활용방법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실제로 1994년 《한글과 컴퓨터》잡지에는 피아노학원 원장이 아래아한글 2.1(일반용)로 악보만드는 법을 소개한 바 있다. 한글과 컴퓨터에서는 한컴프레스라는 출판사도 운영했는데, 한컴프레스출판사에서는 '따라해보세요'시리즈의 실용서를 출간하였다. 2010년 6월 29일에 한/글 2002 이후의 제품에서 사용되는 한/글 문서 파일 형식 5.0 및 한/글 97 문서 파일 형식 그리고 XML기반의 HWPML에 대한 문서 파일 형식내의 주요한 자료 형식 및 파일 구조, 레코드 구조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였다. 한컴은 최근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 이용조건 문구를 `한컴은 한컴오피스 한글문서파일(.hwp) 공개 문서에 따라 얻은 결과물을 기초로 또 다른 독점적, 배타적 권리를 취득하고 이를 한글과컴퓨터를 상대로 행사하고자 하는 자를 상대로는 적극적으로 권리행사를 할 수도 있다'고 수정했다. HWP의 개방형 문서형식으로 XML기반의 문서포맷인 OWPML(Open WordProcessor Markup Language)이 KS에 등록되었다. 카이스트(KAIST)와 한글과컴퓨터가 소프트 인력 양성과 해외 진출 경쟁력 강화에 함께 나섰다. KAIST와 한글과컴퓨터는 2014년 4월 8일 대전 유성 KAIST 교내에서 강성모 총장과 김상철 한컴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을 위한 산학협약을 체결하고 공동 태스크포스(TFT)를 발족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소프트웨어 인재 육성, 응용소프트웨어 분야, 한국 글로벌 소프트웨어 시장 확대를 위한 사업모델 발굴에 협력하기로 했다. 한글과컴퓨터는 이날 KAIST에 약 10억원을 소프트웨어 발전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김선일 (통역사) 김선일(金鮮一, 1970년 9월 13일 - 2004년 6월 22일)은 주 이라크 미군과 거래하는 업체인 주식회사 가나무역 소속으로 이라크 현지에서 근무하는 통역사였다. 그는 아랍어를 전공하여 2003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가나무역에 취직하여 2003년 6월 15일에 이라크로 갔다. 2004년 5월 30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팔루자 부근에서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이슬람교 계열 무장 단체인 유일신과 성전(현재의 이슬람 국가)의 인질로 납치되었다. 이 단체는 자이툰 부대 파병국인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라크로의 추가 파병 중단 및 현재 주둔하는 한국군을 즉각 철수시키라고 협박하였고,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강행하자 6월 22일에 그를 참수하였다. 뒤에 버려진 시신은 미국군에게 발견되어 미군 수송기로 쿠웨이트로 이송되었고, 이후 한국으로 김 씨의 시신이 송환되었다. 김선일의 아버지와 누나 등 유가족 측근 4명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김선일의 피살 과정에서 국가의 과실 또는 불법 행위는 없었다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221년 222년 223년 중국 위나라 최고 명장 조인 224년 225년 226년 227년 228년 229년 230년 231년 232년 233년 234년 235년 236년 진나라 초대 황제 사마염(司馬炎) 237년 238년 239년 240년 고구려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백제 및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한 주요 국가이다. 그 영토는 만주·한반도 북부,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와 몽골 동부까지 걸친 나라로 약 700년 동안 존재하였다.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었으나, 왕건이 건국한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고구려는 그 전성기에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요동반도와 포함하는 현 중국의 동북 지역 및 연해주 일대, 만주 지역과 현 베이징과 텐진 지역(유주)을 영토로 두었으며 최근에는 몽골 다리강가 고분이 발견되어 몽골 동부까지 지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요동·유주(현 베이징)·요수의 한족·거란·돌궐·말갈(만주족, 여진)·선비·지두우(몽골족) 등을 정복하고 통치한 나라이다. 또한 갈석산(제스 산)과 싱안링산맥(흥안련산맥), 아무르강과 쑹화강, 연해주를 모두 포함한 대제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광개토태왕비(好太王碑)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주몽)가 "천자(天帝)의 아들"(天帝之子, 天帝:하늘의 황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는 천손국가(天孫國家)였고 중원 고구려비에서 볼수 있듯이 "태왕"(太王)이라는 독자적인 칭호와 연호(年號)를 사용했고, "동맹"이라고 부르는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내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국가들의 경우 주변 국가는 모두 천자의 신하라고 부르고 기록하며 "천자"라는 단어의 사용을 사용하면 항의를 하였고 제후국의 제후들은 부모인 종묘와 땅과 농사의 신인 사직(社稷)에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심하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천손국가(天孫國家)를 주장한 것은 오직 고구려만이 제후국들을 거느리는 "천제(天帝)의 국가"라는 뜻이다. 이민족의 북조와 중국인들의 남조는 대략 1~2세기면 멸망한 것이 많지만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와 복속된 여러 민족들을 성공적으로 지배하고 7세기 동안 하늘에 제사를(天祭) 이어가며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 졸본부여에서 세력을 키운 주몽(추모라고도 하며 성씨는 해 또는 고)가 건국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며 국호를 고구려 스스로 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미 기원전 107년 기록에 . 그 후 국내외 사료에 남은 기록대로 편의에 의하여 '고려' 등을 혼용하였으며 고구려 후기의 주요 사료의 기록에는 '고려(高麗)'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장수왕 무렵에 고려로 공식 국호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 후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유일 수도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 고구려로 이름을 통일하여 부른다. 중국 측의 사료에는 예(濊)/맥/고리/구려/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도 고구려를 호칭하기도 했다. 훗날 대조영의 대진국(발해)의 경우도 국서에는 이라고 자칭한 유물 있으며 왕건이 개국한 고려와도 구별하기 위해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高句麗)로 통용하며(조선의 경우와 같음) 국호의 경우, 사료와 연구 부족으로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고구려는 동부여의 금와왕의 양자라 전해지는 추모[고주몽]를 중심으로하는 삼국사기의 건국설과 졸본부여 시절의 동명성왕의 건국설이 있다. 주로 한나라와 부여, 고대 군소 국가들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초기의 중심지인 산간지대를 수도로 한 고구려의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식량 사정과 전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흡수하는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였고 북쪽은 북부여가 있고 동쪽은 동부여가 있어 주로 단군조선[고조선] 고토 회복 운동 대의명분으로 요동, 요서 방향을 공략하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초기 유리명왕 시절의 신나라를 공격했다. 하고 있으며, 고구려본기의 내용 또한 중국사서의 기초를 두고 있어 유사하나 고구려후 추가 아닌 장수 연비(延丕)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고구려는 6대 태조태왕 이후 절대 왕족인 중앙의 고씨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초기 왕족인 해씨 소노부(消奴部) 왕비 배출 부족인 북부의 절노부(絶奴部) 동부의 순노부(順奴部) 남부의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동명왕(東明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졸본부여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기원후 3년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흡수하였다. 고구려가 이렇게 성장하자 이에 대항하는 국가가 늘었다. 농안을 근거지로 성장한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침공하고 복속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21년,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왕 (대소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후 부여는 고구려를 섣불리 침공하는 일이 없어졌다. 부여를 물리친 고구려는 더욱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자 28년 한나라가 이에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농성을 펼치며 막아냈고, 32년 낙랑국도 일시적으로 정복하는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쳤다. 53년에 즉위한 태조왕(太祖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고, 이후로 소노부 왕가가 물러나고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동예(東濊), 남으로는 살수(薩水),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무력으로 복속케 하고 한사군에 대한 원정 및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6년(동천왕 16년) 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은 194년에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의 부자 상속제가 확고히 되었다.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고구려와 위(魏)나라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위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정복하는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낙랑을 함락시키고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중국인들을 정복하고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 전쟁을 하였고 공격을 받았으나 고구려 군은 전연(前燕)을 침공하여 유주 지역(베이징과 톈진지역)을 정복했다. 고구려의 덕흥리 무덤에 성씨가 복성인 고구려인 제후왕에 유주시자라는 표문이 있어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고국원왕때부터 요동과 유주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를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가야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은 402년부터 중국의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 정복된 거란족을 이용하여 중국 후연을 공격하고 중국 후연의 성들을 차례 차례 공략하면서 후연은 고구려의 매서운 공격에 점점 쇠약해진다. 중국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유민을 천왕(天王:중국 북조의 황제의 호칭)으로 세우고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고구려의 속국이 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쇠약해진 부여와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위서의 고구려전에는 高麗 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黠虜, 實得征之이라고 쓰여 있으며 고구려가 해외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오랑캐들인 구이(九夷)들을 모두 정벌하여 왔다고 나타나 있다. 남제서 고구려전에서는 북위가 고구려의 사신과 남제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하여 고구려와 남제를 동급의 국력으로 취급하여 남제의 사신이 북위의 사신에게 항의하였으나 북위의 사신이 답하길 "그 자리도 높은 자리이니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남제서에서는 "고구려가 북위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하여 남제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435년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은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장군을 보내어 북연의 수도인 용성(조양)에서 북위의 군대와 대치하였다.북위의 장군 고필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놀라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가였다.그리하여 갈로와 맹광 장군의 고구려군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함락시키고 북연의 왕과 백성들을 고구려로 끌고 갔다. 북연의 왕, 한족 풍홍은 고구려가 풍홍을 매우 낮게 대하자 송나라에게 사람을 보내 구출을 요청한다. 장수왕을 그리하여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어 중국인 한족(漢族) 풍홍의 모후와 처자만 남겨두고 풍홍을 죽인다. 송나라는 왕백구와 7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손수와 고구를 몰래 공격하여 죽인다. 장수왕은 왕백구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사로잡고 송나라로 압송하였다. 송나라는 고구려의 뜻대로 왕백구를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놓아주었다. 435년 북위의 조양에서는 당시 전쟁에 만회를 하기 위해 고구려의 정벌을 논의한다. 그러자 북위의 낙평왕 비(丕)의 주청으로 중지하고 말았다. 대신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이오를 고구려에 파견한다.이오는 고구려가 조씨가 세운 위나라때보다 인구가 3배는 된다고 보고하여 고구려의 강성함을 알렸다. 북위 헌문종(465-471)의 부인 문명태후는 고구려에 청혼을 요청하고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李敷)등을 고구려의 국경까지 보내어 폐물을 보내는 등 예의를 다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수왕은 거절하였다. 헌문종 다음의 효문종에게 고구려 장수왕은 혼인을 강하게 요구하여 효문종은 고구려인인 문소태후와 결혼하고 선무종(499-515)를 낳았다.문소태후의 형제인 고조(高肇)일당이 선무종의 집권시기에 크게 세력을 키워 북위의 정권을 잡는다.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의 문자명왕때는 고구려는 북위를 위해 사당을 짓거나 애도를 표하지 않았으나 북위는 고구려 위세에 눌려 스스로 애도와 예의를 표했다. 위서에는 북위의 권력을 잡은 선비족 영태후가 동쪽 사당에 장수왕의 애도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508년에 북위의 선무종가 청주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짓기도 하였다. 520년 고구려는 북위를 공격하였다.대릉하 유역의 중심 도시인 조양에 발견된 한기의 묘지명에 평주사마 자의참군직에 있는 한상이 고구려군이 북위를 공격하였을 때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왔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유연과 함께 지두우족(현 몽골족)을 분할 점령하려고 한다.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북조를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북위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북조의 사서에 적혀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를 정복하고 멀리 내몽고의 대흥안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북위에서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무천진 선비족들은 2세기부터 중국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선비족과 경쟁하며 요동과 만주, 북연 등 중국인들을 정복하였는데 고구려보다 더 많은 남쪽의 중국인 한족들을 정복하여 예속시킨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고구려에 친조를 요구하였다.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고구려인 강이식이 "칼로 대답하자"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전쟁이 있었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에 군대를 향하게 하여 요서를 선제 공격하여 정복하자 이를 계기로 수나라의 수 문종은 수나라군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수나라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12년 수 양종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종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수나라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은 수나라군을 물리친다. 결국 수 양종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하고 죽었다(살수대첩). 결국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수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켜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에게 패하였고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당나라군을 패망시키고 고구려는 승리하였다.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고 무천진 선비족이 한족들을 예속시켜 세운 당나라는 국력이 세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의 아들 안승(고안승)이 신라에 귀순하여 김씨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인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정비된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은 본래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왕은 부족 연맹장이 되었다. 왕은 선출에서 세습제로 변하였는데 초기는 소노부에서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초기에는 국왕 밑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주부(主簿)·우대(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 등을 두었는데, 이 관계(官階)는 그 후 발전 과정을 통하여 427년 평양천도 이후에 재정비되었다. 관료의 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등으로 나뉘었다. ‘형’은 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부족 연맹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하면서 여러 족장 세력을 이러한 관등에 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된 것으로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뜻하는 것 같다. 대대로와 막리지(莫離支)는 수상격인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대대로가 평시 행정 담당의 수상이다. 막리지 밑에는 고추대가(古雛大加)·중외대부(中畏大夫)·대주부(大主簿)등을 두었는데 각각 내정(內政)·외정(外政)·재정(財政)을 맡아보았다. 지방은 동·서·남·북·중의 5부(部)로 나누고, 5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부왕(副王)급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내부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하여야 했다. 원래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을 여러 성(170)은 고구려 왕국의 사적·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었고 또 부세(賦稅)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기 마련이었다. 고구려에는 귀족 회의의 하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하였다.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했다. 그 밑에 각 이원(吏員)이 있어 사무를 분장하였다. 문무의 구별이 체계화되지 못하였던 고구려는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던 여러 성을 행정적·군사적 단위로 편성하였던 것같다. 5부를 중심으로 하여 기내(畿內)의 뜻인 듯한 내평(內評)과 기외(畿外)의 지방을 의미하는 외평(外評) 제도가 있었다. 또한 평양 천도 후에는 평양 이외에 국내성(國內城, 통구)과 한성(漢城, 재령)의 별경(別京)이 있어 삼경제(三京制)가 성되었다.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국내성·평양·한성(漢城: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맡았다. 주요 발사 무기로는 고구려에서 국궁과 각궁을 사용했다. 또한 석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성을 방어할때는 투석병이 있었다. 도끼창(미늘창)을병이했다. 고구려의 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첫 번째는 짧은 양날 변형으로 생긴 창으로 대부분 던지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단일 양날 검으로 한나라의 영향력을 받은 칼자루 안에 있었다. 투구는 중앙 아시아 민족이 사용하는 날개 달린 가죽 및 말꼬리 장식과 유사했다. 갑옷은 미늘갑옷이라 군인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신발은 밑에 뾰족하게 된 송곳이 박혀있어 적을 밟을 때 사용했다.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은 12배를 물게 하였다. 1책12법이라고도 하며 부여와의 공통점이다. 고구려에서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남의 가축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가 모여서 논의하는 제가 회의를 통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호민, 하호)·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또한 각기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조의·선인·대사자·상가·고추가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반 백성인 평민은 읍락의 지배계층인 호민(豪民)과 피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구분되며, 이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토지 경작과 함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며, 토목공사에도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천민인 노비는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다. 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피지배층 하호는 고구려 본족(本族) 중의 범죄자·낙오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피정복민이었으며 전쟁 때 포로가 된 한족도 있었다. 이들 하호는 신분적으로 노예와 구별되었으나 사회 경제적 위치는 노예에 준(準)하는 예속민으로서 대부분 정복당한 원주지에 살면서 농경을 포함한 생산 활동을 거의 전담하였고, 일부는 고구려에 이주되어 토지의 개척과 농경 등에 사역(使役)되었다. 또 전시에는 지배자의 사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영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 원칙에 입각하여 토지는 분배되었다. 왕실 직속령(直屬領)이었던 것은 물론 전쟁시의 뛰어난 훈공에 의해서 국왕으로부터의 상사(賞賜) 형식으로 수여되는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은 귀족의 대토지 소유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賜田)은 세습적인 상속이 인정되었고, 식읍은 자손에게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이들 토지 수급자(受給者)는 국가에 조세(租稅)를 납부하였다. 귀족에 의한 토지의 사적지배(사유화 과정)는 족장(귀족)·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장원(莊園)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귀족은 토지뿐 아니라 경작하는 예민(隸民)까지 마음대로 지배하였다. 고구려의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했으며, 국가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담당한 것은 피지배계급인 일반 농민이었다. 고구려의 세제(稅制)는 세(稅)와 조(組)가 있었는데, 인두세(人頭稅)에 해당하는 세로 포목 5필에 곡식 5섬을 받았고, 조는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상호가 1섬·중호가 7말·하호는 5말을 내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 졸본에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은 절할 때에도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은 펴서 몸을 일으키기 쉬운 자세를 취하였고, 걸을 때도 뛰는 듯이 행동을 빨리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3세기 들어 사라졌다. 형사취수제는 부여와의 공통점이다. 초기에는 남자가 처가 옆에 마련한 서옥(사위집)에 들어갈 때에 돈과 옷감 등을 예물로 처가에 주었으나, 그 이후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결혼했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만약 신부 집에서 재물을 받은 경우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동맹 때에는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신은 주몽의 어머니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전 부족적인 제례(祭禮)였던 이 의식에서는 부족원이 무리를 지어 연일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사람이 모여 사냥을 하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의 문화는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질을 잘 나타낸다. 지배층의 복식은 한나라(漢)·흉노에서 수입한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되었고, 전사(戰士)는 머리에 쓴 적[관(冠)]에다 깃털을 꽂는 이른바 절풍(折風)을 썼는데 많이 꽂혀있을수록 높은신분을 나타낸다 고구려인은 또한 거대한 분묘와 석총(石塚)을 만들었고, 많은 물건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다. 한자와 한문학은 삼국 중에서 가장 이르게 들여왔으며,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이미 국가에서 유학(儒學)의 교육 기관으로 "태학"(太學)을 세웠고,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의 자제에게 독서(讀書)·궁술(弓術)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인 사이에는 유교의 경전(經典)이나,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의 사서(史書)가 읽혀졌다. 옥편(玉篇)·자통(字統)과 같은 사전류(辭典類)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文選)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한자의 사용에 따라서 국가적인 사서(史書)의 편찬도 일찍부터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일찍이《유기(留記)》105권이 편찬되었으며, 이것을 600년(영양왕 11년)에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간략히 하여 《신집(新集)》5권을 편찬케 하였다. 한자 사용의 근거는 통구의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 414년)의 비문(碑文)과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약 1,800자(字)의 비문으로 능히 알 수 있고, 특히 광개토왕의 비문은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그 고굴(告掘)한 예서(隸書)의 자체(字體)는 서예(書藝)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瑠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와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주는 시)〉등이 한시(漢詩)로서 전하고, 그 밖에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등이 그 이름만 《고려사》〈악지〉(樂志)에 전한다. 고구려의 종교는 원시 신앙과 불교·도교로 대별할 수 있는데 원시 신앙으로는 자연물 숭배,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의 3신(三神) 숭배와 샤머니즘(shamanism)적 신앙이 있었고, 특히 나라에서는 부여신(河伯女)과 고등신(高登神: 주몽)을 시조신(始祖神)으로 해마다 4회 제사를 지냈다. 불교의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佛像)과 불경을 전래한 것이 그 시초이며, 그 2년 뒤에는 다시 동진(晋)에서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위의 두 불승(佛僧)을 거주케 함으로써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를 왕실에서 이와 같이 환영하였던 까닭은 불교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 통일의 요구에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다. 곧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고구려 말기인 624년(영류왕 7년)에 당 고조(唐高組)가 양국 간의 친선정책으로 도사(道士)를 보내와 전한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고구려 사신도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건축·미술에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대부분의 유적이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신앙·사상이나 풍속·복식(服飾) 등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삼국시대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쌍영총의 섬세·화려한 필치로 그려진 인물화나 무용총(舞踊塚)의 무인(舞人)·가인(歌人)의 그림은 고구려인의 풍속·복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청룡(靑龍)·백호(白虎) 등이 그려진 강서대묘(大墓)의 사신도(四神圖)는 강건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 수렵총(狩獵塚)·각저총(角抵塚)·수산리 고분·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가 건축·미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의 불교 미술은 중국의 북위(北魏)풍의 영향으로 불상이나 불화(佛畵) 또는 탑파(塔婆) 등의 미술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족이나 유물은 극히 드물다. 1940년에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118호)이나 어느 왕의 연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연가(延嘉)7년이라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 이 국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은 장수왕(長壽王: 재위 422~491),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491~519) 또는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5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에서 발견되었다. 이 외에 중국 요령성 의현에서 출토된 고구려 금동불상도 있다. 이 불상은 을유년에 제작되었다고 새겨져 있으며, '대고구려국'이라는 국명이 적혀 있는데, 을유년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크게 논의된 바는 없다. 이 불상 자체가 극히 최근에야 국내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구려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의 화공(畵工)·학승(學僧)이 일본으로 가서 불교문화를 전하는 데 공현하였다. 특히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曇徵)이 그린 벽화는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고구려인은 가무(歌舞)를 즐겼으나 더 이상의 문헌적 고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양원왕때의 국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칠현금(七鉉琴)을 개량(改良)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하고 100여 곡(曲)의 악곡(樂曲)을 지었다고 전한다. 송나라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 깃발 문화는 소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깃발은 그 종류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 단순하고 무늬도 없었다. 중국의 북조 및 북방 초원의 여러 민족과 교섭, 바다를 통해 남조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불교를 전파했으며, 고구려의 승려인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파하고, 호류 사 벽화를 남겨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바 있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의 계승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주몽·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주제로 한 여러 역사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화살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사에 집중되었다. 고구려(高句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한편 장수왕 3년(414년), 69년(481년)에 각각 설치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고려태왕(高麗太王),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고구려에선 왕을 '태왕'이라고 칭했다는 의견이 있다. 교향곡 5번 (베토벤) 《교향곡 5번 다 단조》(Op. 67)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806년에 착상하여 1808년에 완성한 교향곡이다.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초연되었다. 동양에서는 보통 '운명 교향곡'으로 알려져 쓰이고 있다. 단 서양에서는 다단조 교향곡으로만 통하고 있으나 '운명' 부제가 자주 쓰이기 시작하는 추세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 시내의 빈 강 곁에 있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극장에서의 1808년 12월 22일 저녁 '아카데미(Akademie. 당시에는 연주회를 Akademie라 했음)에서 베토벤이 자신의 세계 음악사상 불후의 작곡인 몇 가지 새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지휘로 선 보일 때에 이 작품도 함께 초연됐다. 음악 연주회 역사상으로도 손꼽을 유명한 이 "아카데미"는, 현대에는 상상할 수 없을 길다란 기록적인 연주시간(4 시간 이상)을 잡아 먹었다: 악장구성은 다음과 같다. 독일 음악사학자 Paul Bekker는 각 악장마다 '몸부림(Struggle)', '희망(Hope)', '의심(Doubt)', '승리(Victory)'라는 별칭을 달았다. '운명 교향곡'이라는 별칭은 일본에서 붙여진 것으로, 동양에서도 널리 쓰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곡 자체가 '운명 교향곡'으로 불리는 일은 적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다음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가 다음과 같이 쓴 것이다. 쉰들러가 쓴 베토벤의 삶에 대한 모든 기록은 전문가들에게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여지지 않으며, 대부분 쉰들러가 낭만적으로 비화시킨 관점으로 작곡가를 바라보았다는 의견이 많다 (예를 들면 그가 쓴 베토벤의 대화록은 전부 날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위 기록이 쉰들러가 꾸며낸 얘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크다.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 엘리자베스 슈웜 글레스너(Elizabeth Schwarm Glesner)는 베토벤이 "성가시게 묻는 사람들에게 별 도움이 될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점으로 위 이야기에 대해 논박했다. 알카에다 알카에다( )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이 창시한, 극단적 살라프파 무슬림에 의한 국제 무장 세력망이다. 소위 이슬람 원리주의 계통에 속해 반미국 반유대를 표방한다. 1990년대 이래 주로 미국을 표적으로 테러했다고 일컬어지며, 많은 사건을 대상으로 하여 스스로 그 실행을 인정하는 이 과격파 국제 테러 조직은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를 단행하여 미국과 친하거나 미국을 동경하는 세계를 크게 충격했는데 대테러전으로 수행된 같은 해의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의거해 그때까지 비호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타도되어 크게 타격당했다. 이러한 알카에다의 과격 테러로 인해 주변 중동국가들마저도 알카에다에 매우 적대적인 입장이다. 알카에다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항한 이슬람 의용군(무자헤딘)이 연대한 조직이 기원이다 그 후에 걸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군대를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이슬람교 제2대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상주하게 한 만행이 계기가 됐다. 이런 만행으로 말미암아 미국에 심정상 반발하던 무자헤딘들의 의식이 결합되었고 반미국 투쟁으로서 진화했다. 1990년대에 시작된 투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과격해져서 2001년에는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 국방부 건물 테러 사건,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소재한, 미국 군대 기지 폭파 사건,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 예멘 근해에 체류한, 미국 군함인 콜을 습격한 사건에 관여했다고 간주되며 2000년에는 미국 뉴욕에 소재한 세계무역센터 생물 학무기 테러 사건을 단행하면서 마침내 2001년 미국을 동시다발 테러한 외에서 동남아시아 각국의 반정부 이슬람 과격파 조직과도 연락하였다고 의심받는다. 2003년 말 이후는 미국과 영국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서 점령해 통치하는 이라크에 알카에다계 활동 인원이 다수 잠입하였으며, 2004년의 미국인 닉버그 몇 명과 김선일 처형에 간접으로 연관됐다고 간주된다. 241년 242년 243년 244년 245년 246년 247년 248년 249년 250년 251년 252년 253년 254년 255년 256년 257년 258년 259년 260년 261년 262년 263년 촉이 세운지 43년 만에 유선이 위나라 등애에게 항복함 촉 멸망함. 264년 265년 266년 267년 268년 269년 270년 위 (삼국) 위(魏, 220년 ~ 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 하나로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조위(曹魏)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부적인 전략과 재능을 가진 조조는 삼국 시대의 군웅들 가운데 두각을 일찌감치 드러내었고,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쟁패의 시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당대의 숙적 원소와의 회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원 일대를 평정하여 최강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중국 대륙이 삼국으로 분할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위나라가 국력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다. 《삼국지》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위나라는 220년(황초 원년) 후한 왕조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266년(진시 원년) 사마염에게 선양하기까지 5대 황제 45년간에 걸친 왕조로, 실제 건국은 조조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다 189년(중평 6년) 조조는 여러 제후와 함께 동탁 토벌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이때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 조조의 일족이 그를 따른다. 191년(초평 2년)에는 일찍이 청류파 지식인이었던 순욱이 조조의 진영에 가세한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등 국방과 내정 면에서 활약하는 여러 명사들을 천거했다. 192년에는 황건적의 잔당을 굴복시켜 자기 군사로 흡수한 다음 정예를 선발해 ‘청주병(靑州兵)’으로 부른다. 이 정예 부대가 대륙 각지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조조는 원술, 여포, 원소 등을 쳐부수고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적장이었던 장료, 장합, 가후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조조는 옛 원한을 잊고 재능만 있다면 투항한 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도 그 뜻에 감복하여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재능제일(才能第一)’이라는 인재등용 방침은 210년에 ‘구현령(求賢令)’으로 공포되는데, 여기에 기라성 같은 인재가 모여들어 크게 활약하게 된다. 이것이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조조의 수집벽인데, 알고 보면 조조의 뛰어난 통솔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한 왕조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조조는 황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년(건안 원년)에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그를 받들어 허(許)로 천도한다. 이때 원소의 참모도 황제를 영입할 것을 진언하지만 원소가 주저하는 사이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조는 황제를 봉대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어 관군이 되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는 조정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에 ‘전농부 둔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은 현지 조달로 식량을 충당했는데, 식량이 남으면 버리고 부족하면 약탈하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농촌은 황폐해지고 유랑민이 급증했다. 이에 조조는 “천하를 통일하는 일은 강력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 달려 있다”면서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획적으로 식량을 생산·저장하려고 시도한다. 이리하여 백성을 모집해 빈농에게는 토지뿐만 아니라 밭갈이 소와 농기구, 그리고 종자까지 대여해 낙양, 허 주변에서 둔전시킨다. 이미 둔전제 자체는 한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조조의 둔전제는 각지에 전농부를 설치하고 전농관이라는 농업 전업관에게 이를 관리하게 했다. 그래서 사방을 정벌하는 데 식량을 수송하는 노고가 없어져 삼국시대 최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208년에 승상, 213년에 위공, 216년에 위왕이 되어 이미 제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220년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후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음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조비는 낙양으로 천도하고, 허를 허창(許昌)으로 고쳐 불렀다. 낙양은 중국 삼국 시대 중 규모·인구 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조비는 유가를 부흥하여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고, 구품관인법을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조비 스스로 예를 따르지 않고, 오 정벌의 실패로 인하여 위신이 실추되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병사한 후, 위나라는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조예조차 239년(경초 3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후계자 조방은 이때 겨우 8살로, 사마의와 조상이 후견인이 된다. 곧이어 조상은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고 정무에서 소외시키지만 사마의의 노회한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 249년(정시 10년)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등을 실각시키고, 그에게 무고한 반역죄를 씌워 삼족을 모두 멸하고 만다. 이리하여 조씨 일족은 쇠퇴하고 실권이 사마씨에게 옮겨지며,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254년(가평 6년)에는 이풍, 장집 등이 주도한 사마사 제거 계획마저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고, 황제 조방도 폐위를 강요받는다. 이때부터 관구검, 문흠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257년(감로 2년)에는 제갈탄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모두 진압되어 사마씨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소된다. 260년에는 조방의 뒤를 이은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고 수백 명의 측근을 이끌고 출격하는데, 반격하는 군사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마지막 황제 조환이 사마소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지만, 사마소가 갑자기 죽게 된다. 마침내 265년(함희 2년) 아들 사마염 시대에 선양에 의해 진 왕조로 정권이 교체된다. ! 서력 ! 사건 1948년 1948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알린 코민스키크럼. - 대한민국의 가수 김국환. 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년 - 기원전 78년)는 로마 시대의 정치가, 장군이었다. 뛰어난 술수와 군사적 재능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두 번이나 진격하였고 독재관이 되어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영향력 높은 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몰락하여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의 하층민들과 보냈으며 메트로비우스라는 당대의 배우를 만나 평생 함께했다고 한다. 술라는 파트리키이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주택(insula)에 거주했고 재산 수준은 같은 공동주택에 살던 해방노예와 별반 다를바 없었다고 한다. 비록 젊은 시절을 방탕하고 가난하게 보내긴 했지만 술라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7년 당시의 집정관이던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의 군사 재무관으로 누미디아왕 유구르타(Iugurtha)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보쿠스와 유구르타를 격파하였다. 그 후 그는 마우레타니아왕 보쿠스(Bocchus)를 설득해 계략을 꾸며서 로마를 괴롭히던 유구르타를 생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마리우스의 사절로 만리우스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에 파견된 그는 보쿠스왕에게 로마에 투항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쿠스는 유구르타와의 관계를 들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보쿠스는 사절단을 술라에게 보냈고, 술라는 이를 마리우스에게 알렸다. 술라에게 융숭한 접대를 받은 사절들은 보쿠스에게 돌아가 술라가 너그럽고 자비로운 인물이라고 보고했다. 사절단의 일부는 마리우스를 통해 로마에 갔고, 로마 원로원은 정식으로 보쿠스가 로마의 동맹자임을 선언했다. 보쿠스는 아들 볼룩스(Volux)를 보내 술라를 모셔오게 했다. 볼룩스는 유구르타가 아군과 가까이 있음을 알리자 술라는 유구르타의 진영을 급습한 뒤 그들을 따돌렸다. 보쿠스는 이후 술라와 비밀회담을 열었다. 술라는 보쿠스에게 로마의 강한 힘을 설명하고 유구르타를 생포하는 것이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보쿠스는 속임수를 써 유구르타를 술라에게 보냈고 술라는 누미디아왕을 데리고 키르타로 돌아왔다. 이때의 공으로 술라는 대중에게 처음 알려졌으며 마리우스는 그에 대한 질투를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리우스와 사이가 나쁜 메텔루스(Metellus) 가의 사람들은 유구르타 전쟁은 오로지 술라의 공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기원전 104년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침입하자 술라는 역시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참전하였고 나중에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Quintus Lutatius Catulus)의 휘하에서 싸웠는데 이때 그의 군사적 재능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기원전 97년 술라는 엄청난 뇌물을 뿌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법무관(praetor)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킬리키아(Cilicia, 현재의 터키 남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로마의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르티아(Parthia)왕국의 대사를 만나 외교협상을 벌였고 훌륭한 외교력으로 로마의 이익을 가져왔다. 동방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귀족파(Optimates)에 가담하여 마리우스의 반대편에 섰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술라는 남부전선에서 속전속결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특히 당시 로마 군단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풀잎관(corona graminea, corona obsidionalis)"을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마리우스와 함께 마르시(Marsi)족을 격파하고 폼페야니(Pompeiani)족의 클루엔티우스(Lucius Cluentius)를 공격했다. 클루엔티우스의 군대는 전투에서 술라에게 패한 뒤, 놀라(Nola)로 달아났으나 술라에게 추격당해 그를 포함한 20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섬멸되었다. 이후 술라는 히르피니족(Hirpini)의 아이쿨라눔(Aeculanum)을 점령하고, 삼니테스(Samnites)족의 가이우스 파피우스(Gaius Papius Mutilus)를 격파했다. 동맹시 전쟁이 종결되자 기원전 88년 술라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Quintus Pompeius Rufus)와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직위인 집정관에 선출된다. 이와 함께 술라는 세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하여 당시 유력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문의 후원을 얻었다. 집정관으로서 술라는 때마침 벌어진 폰투스(Pontus)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지휘권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인 술피키우스 루푸스(Publius Sulpicius Rufus)는 마리우스와 협력하여 민회를 소집하여 술라가 부여받은 미트라데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집정관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아들이 죽고 루푸스도 도망쳤다. 술라는 잠시 피신했다가 놀라(Nola)에 주둔한 군사를 규합하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술라가 쿠데타를 일으킬지 꿈에도 몰랐으며, 술라가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저항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로마에서 탈출했다. 술라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술피키우스-마리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술피키우스는 참수되어 술라에게 보내졌다.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 술라는 집정관인 옥타비우스(Gnaeus Octavius)와 킨나(Lucius Cornelius Cinna)에게 로마를 맡기고는 미트라다테스 정복전쟁에 나섰다. 기원전 87년 술라는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아테네를 공격했다. 당시 아테네는 피레우스에서 주둔한 아르켈라오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의 농성군과 로마군은 투석전을 벌이며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 술라가 아르켈라오스가 판 땅굴에 황과 역청을 집어넣고 불태우자 많은 아테네군이 죽었다. 술라의 공격에 질린 아테네에서 강화사절을 술라에게 보냈고, 그 사절은 술라에게 아테네인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술라는 "그런 시시한 역사강의는 그대의 동포들에게나 들려주시구려. 나는 그대들의 강의를 들으러온 학생이 아니라 아테네를 함락시키라고 보내진 장군이오" 라고 답변했다. 곧 포위공격을 받아 식량이 떨어진 아테네는 술라에게 항복했다. 이어 술라는 보이오티아로 달아난 폰투스-그리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86년 카이로네이아(Chaeronea) 전투에서 술라의 15000명의 보병과 1500명의 기병은 아르켈라오스의 12만명의 대군과 싸웠다. 술라가 폰투스군에 접근하자 아르켈라오스는 기병을 출동시켜 로마군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어 80대의 낫을 단 폰투스 전차가 출격했으나 로마군은 전차를 피하듯 대열을 벌렸다. 전차가 통과하자 로마군은 측면에서 전차를 격퇴했다. 15000명의 폰투스 밀집보병 역시 격파되었다. 공격이 여러번 실패하자 아르켈라오스는 보병을 총출동시키면서 정예기병으로 술라군의 중앙을 돌파해 로마군 좌우익을 포위하였다. 술라는 그때 우익에 있었는데 로마군 좌익이 불리해지는듯 하자 좌익으로 갔다. 술라의 지원으로도 로마군 좌익은 여전히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술라가 로마군 우익으로 돌아오자 힘을 얻은 로마군 우익은 폰투스군 좌익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좌익에서도 적을 궤멸시켰다. 결국 아르켈라오스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술라의 압승으로 카이네로이아 전투는 막을 내렸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폰투스군은 10만이나 죽은 반면 술라군의 손실은 12명에 머물렀다고 한다. 같은 해, 오르코메누스(Orchomenus)에서 아르켈라오스의 공격을 받은 로마군이 달아나려 하자 이를 말리다 뜻대로 되지않아 격분한 술라는 병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시민들이여 훗날 누군가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였냐고 물으면 오르코메누스였다고 답하라!" 이 말을 들은 로마군은 다시 전투의지를 다지고 다수의 적을 척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 6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강화를 체결했는데 이 때도 술라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트라다테스를 굴복시켰다. 술라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대한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한편 술라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을 때 로마는 다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집권하여 술라를 반역자로 만들었다. 마리우스는 곧 죽었으나 뒤를 이은 킨나는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를 기원전 86년 술라에 맞서는 정규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시아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플라쿠스는 곧이어 일어난 군대의 폭동으로 살해당하고 부사령관 핌브리아(Gaius Flavius Fimbria)가 그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핌브리아는 미트라다테스를 격파하고 술라의 부하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술라는 그의 병력을 적군 가까이에 포진시켰다. 술라군과 핌브리아군은 가까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친밀감이 생겼고 곧이어 적병들은 모두 진영을 탈주했다. 결국 핌브리아의 병력은 고스란히 술라에게 흡수되었다. 이후 핌브리아는 병사들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하여 자살했다. 술라는 킨나를 격동시키는 글을 써 킨나에게 보냈고, 이탈리아를 술라로 부터 방위하려던 킨나는 그리스에 있는 술라를 정벌하려고 군대를 편성하다가 군단 폭동으로 죽고 말았다. 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하였다. 메텔루스 피우스(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와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등이 술라를 지지했다. 당시 집정관은 노르바누스(Gaius Norbanus)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Publius Cornelius Scipio Asiaticus)였다. 노르바누스와 소 마리우스가 술라를 급습했으나 오히려 술라에게 대패하며 6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술라와 교섭을 하던 중에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술라에게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기원전 82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와 소 마리우스(Gaius Marius)가 집정관이 되었는데 카르보는 기원전 85년과 84년에 킨나와 집정관을 지낸적이 있는 2선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82년 당시는 3선 집정관이다.) 프라이네스테(Praeneste)에서 소 마리우스는 술라의 병사들이 오랜원정에 지쳐있음을 알고 그들을 급습했지만 80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르보는 메텔루스 공격을 멈추고 철수했으나 폼페이우스의 기습공격으로 큰 손실을 봤다. 술라의 적인 카리나스는 여러차례 술라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그때마다 도망쳐 살아남았다. 이후 술라는 카르보가 출동시킨 군대를 모조리 무찔렀고 , 메텔루스 역시 파벤티아(Faventia)에서 카르보의 공격을 막아내고 10000명을 척살하였다. 폼페이우스는 클루시움(Clusium)에서 카르보군을 2만명이나 죽였다. 한편, 삼니테스족의 폰티우스 텔레시누스(Pontius Telesinus)는 로마로 진격하였고 술라는 소 마리우스에 대한 포위를 멈추고 콜리네(Coline) 성문에서 텔레시누스와 크게 싸웠다. 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의 우익은 크게 적군을 격파하였으나 술라 자신이 이끄는 좌익은 적군의 우익과 두 군대가 괴멸되기 전 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 도중에 술라는 적진에서 날아오는 창을 고개를 숙여 피해 전장에서의 죽음을 면했다. 결국 적의 좌익을 섬멸한 술라가 승리하였고, 로마에는 다시 술라의 정권이 세워졌다. 전투 후 소 마리우스와 텔레시누스는 동반 자살했고, 다른 집정관 카르보는 시칠리아로 달아나다 후에 폼페이우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콜리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로마로 입성한 술라는 대대적이고 철저한 반대파 학살에 착수했다. 우선 삼니테스족 패잔병 8000명을 원로원에서 회의하는 도중에 병사들을 시켜 학살했다. 술라는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자신의 씨족명 '코르넬리우스'를 하사하여 정적소탕의 행동대로 삼았다. 또한 살생부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적을 숙청했다. 그 살생부에 오른 인물은 모두 4천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숙적 마리우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그 시신은 부관참시되었고, 전년도 집정관이자 소 마리우스와 함께 술라를 공격한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도 제거되었다.(스키피오는 술라를 피해 도망가다 병사했다.) 이때의 살생부에는 18세의 킨나의 사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도 있었으나 카이사르는 학살을 면하고 도망쳤다. 한편 술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고 그의 안에는 수백명의 마리우스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한편 마리우스군 잔당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obarbus)는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되었으며 오직 히스파니아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만이 남아 술라에 대항했다. 기원전 81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이었다. 술라는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원래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임기가 6개월이었지만 술라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의 제안으로 민회는 이를 승인했다. 독재관에 취임한 후 그는 대대적인 국정 개혁에 나섰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독재관으로 이러한 개혁을 2년동안 정력적으로 실시한 술라는 기원전 80년 말, 돌연 사임을 발표하고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였고 나폴리 근처의 바닷가의 소박한 별장에서 은둔하였다. 술라는 1년여 한가한 은퇴생활을 한 후 기원전 78년 시골에서 세상을 떠났다. 술라의 장례식은 그의 부하들이 참가한 가운데 로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유해는 나중에 반대파에게 시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유언과는 다르게 화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비문이 쓰였다고 전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투키디데스 투키디데스(, 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역사가이며,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기원전 411년까지 싸운 전쟁을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말을 남겼다. 아테네 명문출신이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자신도 장군으로 선발되어 트라케에 파견되었으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죄로 추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중대성을 예견하고 자료를 수집했던 그로서는 불행했던 추방도 적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직접 체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주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간혹 언급된 개인적인 기록이 거의 전부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케 출신인 올로로스의 아들로서 기원전 465년을 전후로 하여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기원전 425년 또는 기원전 424년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22년에 그가 지휘하는 아테네군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이 시기에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앙리 마티스 앙리 에밀브누아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3일)는 20세기 야수파 프랑스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꼽힌다.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재혼을 하여 약 7년 동안 거주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시작하면서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뛰어났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만들었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1892년에는 양친을 설득하여 다시 파리에 나와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이어서 미술학교의 모로에게 배웠다. 동문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교우는 이 때에 시작하였다. 루브르에서 고인(古人)을 배웠고 인상파·신인상파를 한 발짝씩 연구해 갔다. 화상(畵商) 볼라르의 점포에서 세잔, 고흐, 고갱의 데생을 구입하였고, 런던으로 여행,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인상파의 유산을 계승하여 우키요에에 열중한 것도 초기 마티스에 있어서는 필요한 영양이 되었다. 1896 ~ 1897년경부터는 원색의 대비에 의하여 선명한 표현을 시도하였고, 앙데팡당 미술전의 출품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색채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렇게 그는 젊은 화가들의 선두에 서서 포비슴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의하면 포비슴의 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표현수단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용기를 고취하고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회화에서 구한 또 하나는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표현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강렬한 동작을 과시한다든지 하는 격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주체적으로 화면에 만들어 내는 색과 모양의 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긴밀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질서 있는 조형을 탐구하였는데, 예를 들면, 실내화(室內畵)와 정물화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의장, 장신구, 가구 꽃, 꽃병, 융단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인물이 의장보다 중요하다든가 융단의 색채가 다른 형태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관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은 모든 구성 요소의 균등한 비중에서 또 그 비중의 하모니에서 성립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가 그의 과제였다. 그는 '동비중(同比重)·순일(純一)·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정밀(靜謐)·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은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으로 평가된다. 271년 272년 273년 274년 275년 폴 세잔 폴 세잔(, 1839년 1월 19일 ~ 1906년 10월 22일)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가는 서부 Piedmont에 있는 Cesana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들의 성 세잔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에 있는 Aix-en-Province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약 한달 뒤인 1839년 2월 22일에는 그의 할머니를 대모로, 삼촌인 Louis를 대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아우구스테 세잔(Louis-Auguste Cézanne - 28 July 1798 – 23 October 1886)은 한 은행의 공동창업자였는데, 이 은행은 폴 세잔이 살아있는 동안 번영하여 폴의 경쟁자들에겐 불가능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폴은 큰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어머니였던Anne Elisabeth Honorine Aubert (24 September 1814 – 25 October 1897) 는 로맨틱하고 명량했지만 범죄를 저지르는데 빨랐다. 폴이 그의 인생에 대한 방향과 비전을 잡는데 그의 어머니로 영감을 얻었다. 그에겐 매일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매리(Marie)와 로즈(Rose), 두 여동생이 있었다.폴이 열살이 되던 해에 그는 Aix에 있는 성 요셉 학교에 입학했다. 1852년, 그보다 낮은 학년에 있던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Baptistin Baille를 만났던 Collège bourbon(지금은Collège Mignet)에 입학했다. 이후 세 친구는"les trois inséparables" (the three inseparables – 분리될 수 없는 세 사람) 로 알려졌다. 마지막 2년은 통학을 했지만, 그는 이 학교에서 6년간 지냈다. 1857년, 그가 스페인 신부인 Joseph Gibert로부터 미술을 공부했던 Free Municipal School of Drawing in Aix에 다니기 시작했다. 1858년과 1861년 사이에는 미술 수업을 병행하며 그의 아버지의 바램에 따라 University of Aix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61년, 폴 세잔은 그의 미술적 발전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법학을 버리고 아약스를 떠나 파리로 떠났다. 그의 결정에 있어서 이미 파리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된다. 처음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이로 인해 피사로는 세잔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Louveciennes와 Pontoise에서 10년이 넘게 함께 풍경화를 그리면서 둘의 관계는 합작하는 평등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세잔의 초기 작품들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특히 상상으로 그려진 중후하고 큰 풍경화도 있었다. 나중 그의 작품들은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숙된 작품들에서는 거의 건축에 가까운 굳어진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그는 한평생 동안 그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구조적으로 간단한 형태와 간단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그는 “나는 무언가 단단하고 박물관 속 미술처럼 오래가는 인상(impressionism)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한 것과, 그가 Poussin의 “After Nature”를 재구성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구성과 자연을 관찰하는 것을 통합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조했다. 1852년 세잔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가난하고 병약한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그가 곧 훗날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와의 관계는 그가 대표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 네 번째 소설 〈작품〉(L'oeuvre) 속에 등장시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의 모델이 세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국을 맞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상황이 세잔 본인과 비슷했고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졸라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과 유사했기에 세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졸라가 보내준 소설을 읽은 세잔은 1886년 4월 그에게 "이렇게 훌륭히 추억을 담아주어 감사하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30여년의 우정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잔은 졸라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두 사람의 우정과 갈등은 훗날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 , Cezanne and I, 2015)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 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통나무는 원기둥으로, 사과와 오렌지는 구로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각의 진실을 포착하고 싶어하는 세잔의 욕망은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생생하게, 혹은 살짝 다르게 해석하여 관객이 이전의 이상적인 관점과는 다른 심미적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세잔의 혁신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다양한 설명들을 병든 망막, 맑은 시각, 그리고 증기 기관차의 영향이라고 평가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잔의 작품들은 1863년Salon des Refusés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지만 전시된 작품들은 공식적인 Paris Salon의 배심원단에게 수용되지는 않았다. Salon은 세잔의 작품들을 1864년 부터 1869년까지 매년 거부했다.그는 Salon에 1882년까지 작품을 제출했다. 그 해에, 동료 화가인 Antoine Guillemet의 도움으로 Salon이 수용한 유일한 작품인 Portrait of Louis-Auguste Cézanne, Father of the Artist, reading 'l'Evénement', 1866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을 전시했다. 1895년 이전 세잔은 인상파 작가들과 함께 2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는 1874년이었고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는 1877년이었다.) 1895년 세잔에게 Ambroise Vollard가 개인전시회를 열어줄 때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개인작들이 전시되었다. 그에게 대중적 인기와 재정적인 성공이 있었지만 세잔은 예술적 고립속에서 작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주로 파리에서 먼 남프랑스 지방에서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몇가지 주제에 집중하였는데,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비롯해 목욕하는 사람을 연구하는데 균등한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에는 세잔은 누드 모델이 부족하여 상상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의 풍경화들처럼 인물화도 아내, 아들 그리고 주변 이웃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과 미술 경매장 딜러까지 주인공으로 사용했다. 그의 정물화는 디자인이 화려했고 두껍고 납작한 작업대에 그려졌으며Gustave Courbet의 작품들을 연상시켰다. 그가 현대 Aix 외곽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atelier)에 남긴 작업대는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 세잔의 후기 작품들에 종교적인 색채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는 로마 가톨릭의 신자였고 “내가 작품을 평가할 때, 나무나 꽃같이 하느님이 만드신 물체 곁에 두고 평가한다. 만약 작품과 물체가 대립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잔의 작품들은 Aix의bourgeoisie에 잘 수용되지 않았다. Henri Rochefort는 졸라가 소유한 그림들이 경매에 올라온 경매장에 갔다가 1903년 3월 9일, L'Intransigeant 에 “추함을 위한 사랑”(Love for the Ugly)라는 제목으로 비평을 실었다. Rochefort는 “세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울트라-인상파”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얼마나 우스웠는지를 자세하게 묘사했다. 사실 세잔이 그린 그림은 “졸라에게 전하는 예술적 안부”(The Art Dear To Zola)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Rochefort는 당시 독일에게 국방기밀을 넘겨준 프랑스의 관료와 그림을 연결지었다. Aix 사회는 충격을 먹었고, L'Intransigeant의 복사본들이 세잔의 집 문 앞 발판에 나타나 “당신은 우리의 불명예”(He was Dishonoring) 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가 떠나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어느날, 세잔은 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폭풍에 갇히고 말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2시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다. 세잔은 지나가던 마차에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늙은 집사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원래 혈색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러 나갔으나 얼마 후에 다시 쓰러졌다. 그와 함께 일하던 모델이 도움을 요청하여 침대로 돌아왔지만 세잔은 이후로 일어나지 못했다. 몇일 뒤, 1906년 10월 22일 그는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렴이었으며, 그는 그의 고향 Aix-en-Province에 있는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는Salon des Refusés라는 법령을 만들어Académie des Beaux-Artswere에 전시되어야 하는 작품들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작품 전시가 거부된 작가들 중에는 당시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던 어린 인상파 화가들도 있었다. 세잔은 그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관계는 좋지 않았다. (세잔은 불손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깔의 사용과 검은색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1859년 Aix-en-Provence 에 있는 École Spéciale de dessin에서 그리던 수채화들과 스케치들과는 크게 대조된다. 표현의 격렬함 또한 그의 전 작품들과 크게 대비되었다. 1866~1867년에, Courbet 의 예시에서 영감을 얻은 세잔은palette knife를 이용하여 작품 몇개를 그렸다. 세잔은 대부분이 인물화인 이 작품들을 두고une couillarde("비싼 에너지를 나타내기 위한 거친 단어")라고 불렀다. Lawrence Gowing은 세잔의 palette knife 작품들을 두고 “이것은 현대 표현주의의 발명이기도 했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예술의 첫 등장이기도 하다.”라고 평가했다. Couillarde 작품들 중에서는 세잔의 삼촌이었던 Dominique의 인물화를 통해 “단편적인 인상으로 정의 될 수 있는” 스타일을 발견하였다. 어둠의 시기 후기의 작품들 중에는Women Dressing (c.1867), The Rape (c.1867), 그리고 The Murder (c.1867–68) 폭력적이거나 에로틱한 작품들도 있다. 1870년 7월 보불전쟁이 발발하고 세잔과 그의 부인이던Marie-Hortense Fiquet는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 근처에 있는 L’Estague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잔의 작품 테마는 대부분이 풍경화로 변하였다. 1871년 1월에 세잔은 병역 기피자로 낙인 찍혔지만 그 다음달인 2월에 전쟁이 끝나면서 세잔과 그의 부인은 1871년 여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872년 1월, 그들의 아들인 Paul이 출생하였고 그들은 파리 근처에 있는Auversin Val-d'Oise로 이사를 갔다. 세잔의 어머니는 가정사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만 세잔은 아버지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세잔은 아버지로부터 100프랑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카미유 피사로는 당시 Pontoise에 살고 있었다. Auvers와 Pontoise에서 세잔과 그는 함께 풍경화를 그렸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잔은 피사로의 제자로 소개했으며, 그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모두 피사로의 가지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사로의 영향 아래 세잔은 어두운 색을 탈피하여 그의 캔버스는 한층 더 밝아졌다. 마르세유 지방에 Hortense를 벗어나 세잔은 파리와 프로방스 사이로 이사하여 그의 첫 전시회(1874)와 인상파 전시회(1877)을 열었다. 1875년, 그는 Victor Chocquet의 관심을 끌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세잔이 전시한 그림들은 우스웠고, 잔인했으며, 빈정거림이 있었다. 비평가 Louis Leroy는 세잔이 그린 Chocquet의 초상화를 보고 “이 이상한 머리와 오래된 부츠를 보고 임신한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황달에 걸릴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78년 3월, 세잔의 아버지는 Hortense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세잔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그 해 9월에 세잔의 가족을 위해서 400프랑을 주었다. 1880년대 초반에 세잔을 위해 Louis-Auguste가 스튜디오(Jas de Bouffan)를 지어주기 전까지 파리와 프로방스 지방을 계속 돌아다녔다. 이 스튜디오는 윗층에 있었는데 매우 큰 창문이 있어서 처마 사이로 불빛이 들어왔다. 이 형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잔은 L’Estaque에 정착하였다. 1882년 그는 르누아르와 함께 작업을 하였고 1883년에는 르누아르와 모네를 방문하였다. 1880년대 초반 세잔의 가족이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 후 얼마 동안 체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 이 이동은 파리 중심적이던 인상파들이 세잔의 고향이 있는 남쪽으로 중심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다. Hortense의 형제 중에 Estaque에Montagne Sainte-Victoire가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1880~1883년 사이에 산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1885~1888년 Gardanne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종종 ‘건설기’(The Constructive Period)라고 불리기도 한다. 1886년에는 세잔의 가족들에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였다. 세잔은 Hortense와 결혼하였다. 이 해에, 또한 세잔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잔에게 1859년에 산 사유지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1888년에 가족은 편리를 제공하는 넓은 땅이 있는 대저택 Jas de Bouffan으로 옮겼다. 이 저택은 현재 땅이 줄어들었지만 시 소유로 공공을 위해서 개방되어 있다. 또한 이 해에 세잔의 친구이던 에밀 졸라와의 친분도 깨어졌다. Jas de Bouffan에서의 이상적인 시기는 일시적이었다. 1890년부터 그의 죽음까지 성가시게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거의 미루어두었고 거의 은둔자처럼 지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이제 유명해겨 젊은 화가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890년 그가 당뇨병에 걸리면서 인격이 불안정해지면서 그의 인간관계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하면서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올 때 그는 혼자 포로방스로 돌아왔고 아내와 아들은 파리로 돌아왔다. 결국 금전적인 문제로 아내가 프로방스로 돌아왔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다. 세잔은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이사했다. 1891년에는 가톨릭신앙으로 돌아왔다. 세잔은 예전에 하던대로 Jas de Bouffan과 파리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1895년에는Bibémus Quarries를 방문하였고Montagne Sainte-Victoire에 올랐다. 환상적인 풍경에 매료된 그는 1897에 그곳에 작은 방을 얻어 풍경화를 그렸다. 형상들은 초기 “Cubist” 스타일에 영감을 주었으리라 믿어지고 있다. 그 해에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픈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의 아내와 다시 재결합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Jas de Bouffan의 집을 팔고 스튜디오를 지은 Rue Boulegon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의 인간관계는 폭풍 속이었다. 그는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1901년에는, Aix 지방 높은 곳에 있는 Chermin des Lauves 근교에 땅을 사서 스튜디오를 지었다. (현재는 공공을 위해 개방되어 있다.) 세잔은 1903년에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1902년에는 그의 모든 유산을 아내가 아닌 아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했다. 다시금 그의 부부관계는 파탄이 났고, 아내는 세잔 어머니의 유품을 불태워 없애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1903년부터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하였고 1904년에는 그의 집에 손님으로 있던Émile Bernard와 함께 작업을 했다. 그의 죽음 이후에 Atelier Paul Cézanne, 혹은 les Lauves라 불리는 기념물이 되었다.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인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스타일적인 접근법과 화법을 분석하여 에세이로 남겼다. 1945년 “세잔의 의심”( Cézanne's Doubt)의 제목이 붙은 그의 에세이에서 눈에 비친 상을 그대로 캡처하여 살아있는 지각을 얻기 위해 전통적인 미술의 기법(상의 정렬, 색을 구분하는 바깥 테두리, 단일 관점 등)들을 어떻게 포기했는지 서술했다.그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보고 느끼고 싶어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이 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그는 붓으로 한획을 긋고 몇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왜냐하면 한 획, 한 획마다 “공기와, 빛과, 물체와, 구성과, 테두리, 그리고 스타일”을 함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세잔은 100여개의 작품을 한꺼번에 작업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이미 지나가버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잡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환경은 그림을 그리는 현실의 일부분이 되었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개인적인 통각이며,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림에 구성하여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1906년 세잔이 죽은 이후, 1907년 9월에, 파리에서 그의 작품들을 모아 큰 박물관 같은 회고전이 열렸다. 1907년Salon d'Automne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은 파리에 있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위치를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격상되었고, 입체파의 아버지로 평가받았다. 세잔의 기하학적인 명료화와 광학 현상에 대한 탐구는 피카소, 브라크, 메챙제, 글레이즈, 그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쳐 같은 물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형상을 재구성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세잔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미술 영역에 큰 영감을 주어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뜻을 기려 Aix en Provence시에서는 프랑스에서 미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 세잔 메달(Cézanne medal)을 수여한다. 세잔의 작품인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The Boy in the Red Vest )는 2008년 스위스 박물관에서 도난당하였으나 2012년 세르비아 경찰에 의해 복원되었다.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 《목욕하는 여인》, 《아버지의 초상》, 《여자와 커피포트》, 《프로방스의 산》, 《에스타크의 바위》, 《생트 빅트와르의 산》 276년 277년 278년 279년 280년 281년 282년 조위와 서진의 명신 가충 283년 284년 285년 286년 287년 288년 289년 290년 호라티우스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Quintus Horatius Flaccus, 기원전 65년 12월 8일 - 기원전 8년 11월 27일)는 고대 로마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이다. 호라티우스의 출신 가문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아버지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신분(libertinus)으로서 로마 자유시민권을 가진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라티우스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으며, 기원전 45년에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유학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한다. 이 시기에 그는 역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친교를 맺게되어 그를 따라 소아시아 지방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한다. 기원전 약 40년을 전후로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젊은 문학자와 사귀면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주선으로 당시의 로마의 문학 애호가이자 부호인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Maecenas)에게 소개된다. 이 만남은 호라티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깊은 우정관계로 발전한다. 특히 마이케나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기원전 32년 사비나 농장을 선물함으로써,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시 창작에 열중하게 된다. 원전 해설서 번역본 표현주의 표현주의 (表現主義)는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의 한 양식이다.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표현주의에서는 표현적 측면이 미학적, 객관적인 측면에 비해서 압도적인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관람자를 위해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표현주의는 조형예술에서 생겨난 양식이며, 미술운동으로 20세기 초(1901-1925년)에 특히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던 양식경향이다. 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데 주력한 표현주의는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인상주의와는 대립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유희를 벗어나려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들인 세잔, 고갱, 반 고흐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특징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화가들은 이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 색채를 사용하는 데 몇몇 매우 간결하고 원색에 국한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표현주의의 화가들은 위에 언급한 화가들의 특징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 대상을 단순히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을 영향 하에서 표현주의는 새로운 양식 경향들과 부분적으로 중첩되거나 부분적으로 대체되었다. 색채, 역동성, 감정과 같은 요소들은 거의 모든 표현주의 미술작품에서 발견된다. 표현주의 화법을 통해서 나타난 색채, 형태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혼합되지 않은 색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목판화와 같은 형태, 소재를 본질적인 것으로 축소한 것, 전통적인 원근법의 해체에서 아주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인상을 현실에 충실하게 재현하거나 아름다운 형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와는 대조적으로 표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내적 흥분을 표현했고,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통렬하게 느끼'고 해석된 소재를 전달했다. 에른스트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 로트루프, 오토 뮐러, 막스 페히슈타인이 주축이 되어서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예술가 집단 "다리파"'(1905-1913년)와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가브리엘 뮌터, 파울 클레가 속해있던 뭔헨에서 결성된 청기사파(1911-1914년)가 대표적인 표현주의 집단이었다. 표현주의는 당시에 존재했던 기존 질서와 시민 계층에 대한 항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표현주의의 생성은 당시에 일어났던 삶의 개혁 운동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프리드리히 니체를 자신들의 생각을 선취한 사람으로 삼았다.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이 발행한 잡지 〈슈투름Sturm〉과 새롭게 창간된 예술 문학 잡지들이 주요 예술가들에게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낡은 미술적 형식들이 포기되었다. 결과적으로 표현주의는 자연주의와 대립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표현주의의 강령은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인상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양식적 특성으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미술이 강령에서부터 생겨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표현주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정신적 태도였다. 1906년 키르히너는 다리라는 제목을 지닌 목판화에서 다리파의 강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표현주의의 중요한 대표 화가들은 자신들이 표현주의자라고 지칭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예를 들면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오토 뮐러는 이런 표현이 자신들의 양식과 독창성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표현주의자라는 명칭을 거부했다. '청기사파'의 몇몇 회원들이 함께 했고, 예술적으로 아주 생산적이었던 튀니지와 북아프리카로의 여행은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오늘날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많은 작품들이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너시에 있는 노튼 시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1차대전 직전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뮌헨에서 일어나, 1920년대 중반 무렵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그칠 무렵까지 계속된 건축운동이다. 이 동안의 활동은 별로 통일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아르 누보에서 국가적인 로망주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것을 내포하면서 전개되어 갔다. 그것들은 유기적인 형태나 불안정한 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많았다. 이들 운동 중에 들어가는 작품으로서 멘델존의 아인슈타인탑(塔), 헨가의 칠리관(館), 페르치히의 급수탑(給水塔), 자르츠브르크 축전극장(祝典劇場) 계획안, 시타이너의 괴테관(館) 등이 있다. 베를린의 AEG 공장에 의하여 표현주의에로 이행한 페터 베렌스는 그 뒤 국가적인 로망주의로 이행한다. 그리고 표현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항의로서도 사용되었다. 20세기 표현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선구자들로는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를 들 수 있으며, 그뤼네발트와 엘 그레코와도 흥미로운 연관 관계가 설정될 수 있다. 얼마 후에 제작된 파블로 피카소나 조르즈 브라크의 입체주의적 작품과 마찬가지로 표현주의자들의 작품, 특히 다리파 미술가들의 작품은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미술품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 유럽의 민속박물관은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의 섬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가득 찼다. 가면과 인물 조각상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표현의 형태가 '새롭고 원초적인 자연'을 바라는 유럽 미술가들의 갈망을 채워주었다. 조형예술에서의 표현주의와 유사하게 문학에서의 표현주의도 우선적으로 전쟁, 대도시, 몰락, 두려움, 자아 상실, 세계 몰락과 같은 주제에 몰두했다.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794년~1185년)는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이다. 교토에 세워진 헤이안쿄가 가마쿠라 막부가 설립될까지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나라 시대에 율령정치가 시작되어 헤이안 초기에는 천황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 승려의 세력이 커지면서 후지와라씨 정권에 의한 부패가 횡행했다. 정치에 불만을 가진 하급귀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들이 설치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이들을 제압하려 커진 정치세력이 무사 계급이다. 귀족들을 대신해 무사의 정치가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부터 에도 막부시기까지 700년동안 이어졌다. 헤이안 전기(前期)는 전 시대(나라 시대)부터의 중앙집권적인 율령정치를 기본적으로는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인 수정을 하였다. 하지만, 율령제와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서 9세기말 ~ 10세기초에 정부는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율령제의 기본이었던 개인별 지배체제를 고쳐, 토지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지배체제로 크게 방침을 전환하였다. 이 방침의 전환은 민간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이를 현지에 부임하는 필두 고쿠시(國司:수령(受領))가 총괄하게하여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왕조국가체제라고 한다. 왕조국가체제기는 보통 고대의 말기에 해당하지만, 분권적 성격을 띠는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므로,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라고 생각되고 있다.(일본문학사 연구에서는 중고(中古)라는 표현도 쓴다.) 모노노케, 음양사를 비롯한 미신이 크게 성행한 하였다. 왕조국가 체제하에서는 국가에서 토지경영이나 백성을 지배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유력한 백성(다토(田堵), 묘슈(名主))층의 성장이 나타나며, 그들의 통제하기 위한 이 권력위임과 병행하여, 국가에서 군사경찰권을 위임받은 군사귀족층과 무예전문 하급관리 층도 또한 무사로서 성장하였다. 국가권한의 위임과 이에 의한 중앙집권의 지나친 부담의 경감에 의해 중앙정계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관직이 특정 가업을 담당하는 가계에 세습되는 현상이 진행되어 귀족의 최상위에서는 셋칸케(摂関家)가 확립되었고, 중류귀족에 고정된 계층은 중앙에서는 가업의 전문기능 에 따라 공무를 담당하는 기능관인으로서 행정 실무를, 지방에서는 수령이 되어 지방행정을 담당했다(헤이안 귀족). 이 시기는 셋칸케에 의한 셋칸 정치가 전개되었고, 특정 권문(権門)이 독점적으로 징세권을 얻는 장원(荘園)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하여 수령이 징세권을 담당하는 공령(公領)과 함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 11세기 후반부터는 태상천황(太上天皇)이 지텐노키미(治天の君)가 되어 정무를 돌보는 인세이(院政)가 시작되었다. 인세이의 시작이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인세이 시기에는 장원의 일원영역적(一円領域的)인 집적과 고쿠가료(国衙領)의 징세 단위화가 진행되어, 장원공령제라고 불리는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12세기 중반엔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되어, 이에 동원된 무사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하였다. 이러는 중에 최초의 무가정권(武家政権)인 다이라씨 정권이 등장하지만, 이 시기의 사회적 모순을 혼자 도맡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확대된 내란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다이라씨 정권의 붕괴와 함께 중앙정부인 조정과는 별개로 내란을 수습하여 도호쿠의 지배권을 얻은 가마쿠라 막부가 등장하여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마침내 799년 일본은 신라사(新羅使)의 파견을 중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03년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 했으며,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신라에게 헌상했다 한다. 발해는 812년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헤이안 시대였던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에만 견발해사를 파견하였다. 미생물 미생물(microorganism, 微生物)은 맨눈으로는 관찰 할 수 없는 작은 생물이다. 미생물은 영어로 "Microorganism"이라고 하는데, "Micro"는 그리스어로 "작다"라는 의미이다. 미생물에 대한 관찰과 연구는 1673년 레벤후크가 현미경을 발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진균(Fungi), 원생동물(Protozoa), 세균(Bacteria), 바이러스(Virus), 조류(Algae) 등을 포함한다. 미생물은 세포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원핵세포는 진핵세포에 비해 단순한 구조이며, 형태가 원시적이다. 핵과 세포기관이 없으며, 유전물질이 핵막에 둘러싸여 있지 않고 세포질의 핵양체(nucleiod)에 위치해 있다. 세균과 원핵조류가 여기에 속한다. 진핵세포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진 진화된 세포이다. 뚜렷한 핵막과 세포기관을 갖고 있다. 모든 동식물의 세포는 진핵세포이며, 조류(원핵조류 제외), 균류(진균), 원생동물등의 고등미생물이 여기에 속한다. 바이러스는 다른 종류의 미생물과 달리, 세포가 아니며, 세포막도 없다. 유전물질(DNA, RNA)과 단백질 껍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생물은 현미경으로 발견되었다.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미생물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 사용한 현미경은 단식 현미경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복식 현미경이 등장하였다. 현재는 이런 광학 현미경뿐만 아니라 전자 현미경이 발명되어 투과형에서 주사형(走査型)으로의 개발이 진행되고 거듭 개량되어 확대율이 향상되고, 높은 해상력(解像力) 및 입체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미생물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이 곤란한 생물을 말하나, 특허법상의 미생물이란 유전자, 벡터, 재조합벡터, 형질전환체, 융합세포, 재조합단백질, 모노클로날항체, 바이러스, 세균, 효모, 곰팡이, 버섯, 방선균, 단세포조류, 원생동물, 동식물의 세포, 조직배양물 등 특허 절차상 기탁 가능한 생물학적 물질(biological material)을 의미한다(생명공학분야 특허심사기준 1998. 3.).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을 특허출원하기 위해서는 그 미생물을 특허청장이 정하는 기탁기관 또는 특허절차상 미생물 기탁의 국제적인 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 조약에 따른 국제기탁기관에 기탁하고 그 수탁증을 출원서에 첨부하여야 한다.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자는 특허청장이 정하는 기탁기관 또는 특허절차상 미생물기탁의 국제적 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조약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제기탁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취득한 기관(이하 "국제기탁기관"이라 한다)에 그 미생물을 기탁하고 특허출원서에 그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국제기탁기관에 기탁한 경우에는 특허절차상미생물기탁의국제적승인에 관한 부다페스트조약규칙 제7규칙에 의한 수탁증 중 최신의 수탁증사본)를 첨부하여야 한다. 다만, 당해 발명이 속하는 기술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자가 그 미생물을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이를 기탁하지 아니할 수 있다. 특허출원인 또는 특허권자는 제1항의 미생물의 기탁에 대하여 특허출원 후 새로운 수탁번호가 부여된 때에는 지체없이 그 사실을 특허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미생물에 관계되는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법 '제42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한 명세서를 기재함에 있어서 제2조 제1항 본문의 규정에 의하여 미생물을 기탁한 때에는 그 기탁기관 또는 국제기탁기관의 명칭·수탁번호 및 수탁연월일을, 제2조 제1항 단서의 규정에 의하여 그 미생물을 기탁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미생물의 입수방법을 기재하여야 한다. 죽도 (울릉군) 죽도(竹島)는 울릉도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울릉도와 매우 가까워 좋지 않은 기상상황에도 육안으로 확인가능하다. 대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데에서 섬 이름이 유래하였다. 죽도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 위에 수평에 가까운 평지가 펼쳐져 있는 지형이다. 면적은 독도 전체 넓이(0.188km)보다 약간 큰 0.208km로, 울릉군에서 울릉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행정상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 산 1-1번지다. 2018년 기준으로 인구는 단 3명으로, 1가구가 더덕 농사를 지으며 거주하고 있다. 죽도 또는 대섬은 예전에는 죽서도(竹嶼島)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독도(獨島)의 일본 측 주장 명칭인 ‘다케시마()’와 비슷하여 서로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 명칭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죽서로 표기한다. 다만 죽도는 제3국에서의 비공식적인 명칭인 보우솔 암초(Boussole Rock)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으며, 한자 문화권에서는 대개 일본의 영향을 받아 오우산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섬이 타이완의 펑자섬과 유사한 형태의 지형을 가진 섬이기도 한다. 291년 292년 293년 294년 295년 296년 297년 298년 299년 300년 고구려의 14대 왕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음. 미천왕이 즉위함. 301년 302년 303년 304년 305년 306년 307년 308년 309년 310년 311년 312년 동진(東晉)의 실권자 환온(桓溫) 313년 314년 315년 316년 317년 318년 319년 320년 마사초 마사초(Masaccio, 1401년 12월 21일 ~ 1428년)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마사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산조반니발다르노에서 1401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늙은 약방 주인과 재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의 마사초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문서상의 기록으로는 1422년 마사초는 당시 피렌체 화풍을 이끄는 메디치 화가조합(Medici e speziali)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술에 대한 정열이 지나쳐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저분한 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아무튼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초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마사초의 프레스코, 특히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Cappella Brancacci)에 마솔리노와 함께 구약 및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한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마사초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조토의 작품을 모사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를 사귀게 되어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된다. 1423년 에는 그들의 격려로 마솔리노와 함께 로마로의 여행을 가서 고대 로마, 그리스 작품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화려한 장식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게 된다. 에드문트 후설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1859년 4월 8일 - 1938년 4월 27일)은 현대철학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인 현상학의 체계를 놓은 철학자이다. 그는 심리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비평을 통해 실증주의와 결별하였다. 그가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유대인은 인종적 분류가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종교적 분류일 뿐이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은 독일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교의 강사, 괴팅겐 대학교의 강사와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거쳐 은퇴 후 오히려 더욱 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각오로 연구와 강연에 매진하면서 죽는 날까지,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한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다. 후설은 1859년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 지방인 메렌 (Mähren, 현재 체코의 동부 지방)의 작은 도시 프로스니츠 (Proßsnitz)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6년에서 1878년까지 독일의 라이프치히 (Leipzig)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한 후 1878년 베를린으로 가 1881년까지 수학, 물리학, 천문학, 철학을 공부한다. 후설은 다시 빈으로 거처를 옮겨 1882년까지 프란츠 브렌타노 밑에서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다. 1883년 수학과에서 편차 계산론에 관한 연구 (Beiträge zur Theorie der Variationsrechnung)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886년까지 브렌타노 밑에서 계속 철학연구에 열중한다. 1887년에 수의 개념에 관하여: 심리적 분석 (Über den Begriff der Zahl. Psychologische Analyse) 논문으로 후설은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했다. 이 후 할레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전임강사로 취직하면서 같은 해에 말비네 쉬타인쉬나이더와 결혼한다. 후설은 1901년 《논리연구》를 출간하여 현상학을 개척하였다. 이후 프라이부르크에 재직하는 동안 현상학은 그의 주된 연구 대상이었다. 1933년 후설은 나치의 반유대주의로 인해 대학교의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가담하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하이데거 본인은 이는 중상모략이라며 부정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나치 치하였던 1941년,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후설에게 헌정한다는 문구를 삭제하였다. 1938년 후설은 사망하였으며 1년 뒤인 1939년 4만여 쪽에 달하는 그의 전집이 출간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급속하게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전통적으로 철학의 영역이라 여겨지고 있었던 분야들을 자신의 범주로 포함시켰다. 특히 심리학의 형성과 발전은 인지, 정신과 같은 철학 본원의 영역으로 인정 받던 분야 역시 과학의 탐구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과학의 거센 도전을 맞은 철학은 영국, 미국의 철학과 같이 보다 과학쪽으로 다가가거나, 리케르트와 같은 신칸트주의에서 처럼 과학과 철학을 별개의 학문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후설은 앞의 움직임과는 다른 방향에서 과학을 바라보았다. 그는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증주의를 공격하여 그것이 참된 의미의 객관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러한 실증주의 비판을 통해 후설이 제창한 철학을 현상학이라 한다. 빌헬름 분트(, 1832년 - 1920년, 독일의 심리학자)의 실험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인 실험의 대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로 인해 종종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분트에 의해 시작된 실험 심리학은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심리학이 모든 과학의 근원"이라는 믿음인 심리학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후설은 그의 저서 《논리연구》에서 경험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이 언제나 반박될 수 있는 귀납적 사례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심리학주의를 비판하였다. 후설은 철학을 과학보다 엄밀한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하고자 하였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의식과 대상을 실체적으로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이 철학적 오류라 비평하였다. 후설은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떤 무엇(즉 대상)을 향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대상 역시 의식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후설의 이러한 주장을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at)"이라고 한다. 이는 후설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별을 보면서 한 쪽으로는 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다루면서 한 쪽으로는 예술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을 인식하는 주체의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객관성을 절대적으로 부각한 나머지 가치 판단과 같은 인식의 주관성을 부정함하는 것은 오류이라고 지적하였다. 후설은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고 표현하였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현상"을 기술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때문에 그의 철학적 방법은 현상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 천황 일본 천황(, )은 일본의 군주로 일본 황실의 대표이다.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지위로서 천황의 기능에 대해서는 일본국 헌법 제1조부터 제7조에 명시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으로 규정되어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해, 법률이나 조약의 공포, 국회가 지명한 내각총리대신의 임명, 국회의 소집 등의 국사행위로 제한된 권한(제7조)을 가진다. 일본에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는 천황의 절대권을 의미한다. 일본 황실의 계보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존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의미로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이 있다. 일본 제국 때에는 세계의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이념이 천황제 파시즘과 황국사관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한편 천황이 국가원수의 지위를 갖느냐와 관련하여서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국가 원수라고 보는 견해와 반대하는 견해가 대립된다. 현재는 제126대 천황인 나루히토가 황위에 있다. 천황의 유래는 나라 시대(710년~794년)에 편찬된 《고지키》, 《니혼쇼키》 등의 역사서에 따르면 초대 진무 천황(神武天皇)이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다고 추정된다. 이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으나, 주로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와 비교하여 천황의 역사를 정당화하고자 후대에 연대를 올려 고쳤거나, 아예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두 설이 유력하다. 고대에는 오오키미(大君)라 불렸다. 1192년 이후는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잃었다. 근대 이전에는 연호가 국가적인 경조사 또는 재해에 의한 피해가 있을 때마다 바뀌어, 지금의 일세일원(一世一元)과는 달랐다. 제국 시대 (1868년 ~ 1945년) 에는 일본제국 헌법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1947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부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천황'이라는 칭호가 생기기 이전에 고대 야마토(大和)에서 수장이라는 뜻의 칭호를 국내에서는 「오오키미(大君)」(치천하대왕) 또는 천왕(天王)이라 불렀고, 대외적으로는 왜왕(倭王), 왜국왕(倭國王), 대왜왕(大倭王) 등으로 칭했다. 고대에는 스베라기(須米良伎), 스메라기(須賣良伎), 스메로기(須賣漏岐), 스메라미코토(須明樂美御德), 스메미마노미코토(皇御孫命) 등으로 불렸다. '천황'이라는 칭호가 성립된 것은 7세기 후반의 일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에서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법제화하기 직전인 덴무 천황(天武天皇) 또는 지토 천황(持統天皇)의 시대의 일로 보는 것이 통설인데, 시기상 7세기 후반은 중국 당(唐)의 고종(高宗)이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후의 일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이전의 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시대에 성립되었다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13세기 이후 「천황」이라는 칭호의 사용은 잠시 폐해지기도 했으나, 19세기 초에 다시 사용되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본 고대의 한자음 차자표기에서는 「덴와(てんわう)」로 표기된다. 「덴와(てんわう)」는 중세를 지나며 「덴노(てんのう)」로 변화되었다. 「천황」이라는 칭호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천황이라는 칭호는 율령(律令)(「의제령儀制令」)에 규정이 있는데, 《양로율령》(養老律令) 천자조(天子条)에 따르면 제제사에서는 ‘천자’(天子), 조서에서는 ‘천황’, 대외적으로는 ‘황제’, 신하가 직접 주달할 때에는 ‘폐하’, 황태자 등 후계자에게 양위한 경우에는 ‘태상천황’(太上天皇), 외출시에는 ‘승여’(乘輿), 행행시에는 ‘거가’(車駕) 등으로 부르는 7개의 호칭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러한 표현은 표기시에만 사용할 뿐, 어떻게 쓰더라도 읽는 것은 당시의 풍속을 따라 ‘스메미마노미코토’()나 ‘스메라미코토’() 등으로 칭한다(특히 제사 지낼 때에는 「天子」라 쓰고 「스메미마노미코토」로 읽었다). 천황의 죽음은 붕어(崩御)라 했고, 재위중인 천황은 금상 천황(今上天皇), 사망한 뒤 추시되는 시호가 정해질 때까지는 대행 천황(大行天皇)이라 불렸다. 배우자는 「황후(皇后)」. 천황 자신이 칭할 때는 「짐(朕)」, 신하들로부터는 「지존(至尊)」이라 불렸는데, 모두 중국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나라 시대(奈良時代)인 덴표호지(天平宝字) 6년에 진무 천황(神武天皇)부터 지토 천황까지의 41명의 천황 및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 겐쇼 천황(元正天皇)에 대한 한풍(漢風) 시호가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에 의해 일괄적으로 바쳐졌음이 《쇼쿠니혼키》(続日本紀)에 기술되어 있지만, 이것은 당대의 칭호와는 관계없는 시호일 뿐이다. 헤이안 시대부터 도쿠가와 시대까지는 ‘미카도’(御門, 帝)라거나 ‘긴리’(禁裏), ‘다이리’(内裏), ‘긴주’(禁中) 등의 여러 표현으로 칭해졌다. 미카도는 원래 어소(御所, 천황의 거처)에서 천황이 드나드는 문을 가리키며, 긴리·다이리·긴주는 그 어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은 천황을 직접 지칭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표현이다. 폐하도 마찬가지다. 또한 ‘주상’(主上, 오카미, 슈조)라는 표현도 이용되었다. ‘천조’(天朝, 덴초)는 일본의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정이나 국가, 또는 천황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스메라미코토’, ‘스메로기’, ‘스베라키’ 등 또한 사용되었다. ‘황후’는 ‘중궁’(中宮)이라고도 불렸으며, 금상천황 또한 ‘당금의 제’(當今の帝, 도긴노미카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상천황은 ‘상황’(上皇), ‘선동’(仙洞), ‘원’(院)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출가한 경우에는 ‘법황’(法皇)이라고도 불렸다. 태상 천황은 고카쿠 천황이 닌코 천황에게 양위한 이후에는 사실상 사라진 표현이며, 제국 시대 이후에는 제도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황실전범이 퇴위에 대한 규정 없이, 천황의 붕어를 통해 황태자가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처음으로 천황의 호칭이 ‘천황’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외교 문서 등에서는 ‘일본국 황제’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국내의 공문서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표기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는 ‘천자님’(天子様)으로 불리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육해군의 통수권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대원수’라고도 불렸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내의 각종 보도 등에서 천황의 경칭은 황실전범에 규정된 ‘폐하’를 채용하여 ‘천황폐하’로 칭한다. 궁내청 등의 공문서에서는 다른 천황과의 혼동을 막기 위해 ‘금상폐하’로 칭하기도 한다. 3인칭으로 경칭없이 ‘지금 천황’()이나 ‘현재 천황’(), ‘금상 천황’(今上天皇)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지만, 근래에는 완곡한 표현을 이용하는 것은 드물다. Emperor ‘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세계의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는 에도 막부까지 천황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은 자신을 ‘일본 국왕’이 아니라 ‘일본국 상국’(日本國相國)으로 칭했으며, 조선 또한 국왕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1407년 이후에는 정이대장군을 일본의 최고 실권자로 인식하고 국왕으로 호칭하였으며, 천황의 계보를 서술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같은 경우에는 쇼군을 국왕으로 호칭하고, 천황은 국정과 무관한 존재로 이름만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였던 학봉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알현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관백’(關白)을 ‘위황(僞皇)의 정승’으로 칭하고, 천황을 일본의 최고 통치자로 인식하였다. 다만 일본의 입장에서 천황을 지칭할 때는 ‘천황’이라고 지칭하여 호칭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종교적·의례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자리만 있을 뿐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쇼군에 대한 호칭도 관백으로 변화하였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천황(天皇)’을 ‘일본에서 그 왕을 이르는 말’로 설명되어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된 《한국사》에는 ‘덴노’로 표기되었다. 대한민국의 신문, 뉴스 등 매체에서는 ‘천황’ 대신 ‘일왕’(日王)이라 호칭을 낮추어 부르는 경우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과거 일본 외부에서 부르던 호칭이자, 비하하는 말인 ‘왜왕’(倭王)이라고도 불린다. 일본 측은 일왕(日王) 또는 왜왕(倭王)등의 호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125대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한 이후에 다른 국가와 일본 황실 사이에 문제가 빚어진 사례는 없다. 다만 쇼와 천황의 경우나 이전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좋지 않은 관계를 보여,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화염병 공격을 받기도 했다. 타이나 부탄 왕실과는 교우가 깊다. 천황의 지위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제국 헌법의 제정으로 일본에서 헌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제국 헌법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서 언급되어 있는 천황의 지위와 권한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천황이 통치권자이자 신성한 존재로 규정되었음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고 규정된 것이다. 일본제국 헌법 체제에서 천황의 지위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의사에 기초한 만세일계의 지위이다. 따라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천황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의율하여 중하게 처벌한다. 또한 천황은 천황대권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통치권을 총람하는 존재였다. 즉 국가의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에 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일본국 헌법의 천황의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것으로, 국민주권의 원리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천황제는 절대적인 것이라거나 불가변의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국민의 총의에 기하여 가변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인 내용면에서도 ‘신의 자손’으로 특별히 보는 규정은 없다. 권한의 면에서도 천황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국사에 관한 행위”, 이른바 국사행위만을 행할 수 있다. 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 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해, 천황이 일반적인 ‘국가원수’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보는 견해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각각 국회와 내각의 지명에 근거하여 행정부(내각)의 수장인 내각총리대신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장관을 임명한다(제6조)는 내용에 근거한다. 또한 “국권의 최고 기관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를 소집(제7조 2호)·해산(제7조 3호)하는 등, 국정의 중요한 행위를 ‘국사행위’로 수행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조, 다만 국사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함). 또한 “전권위임장 및 대사,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제7조 5호)하고,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를 인증”(제7조 8호)하며,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제7조 9호)하는 등,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천황이 실시하다고 정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천황이 국가원수라고 본다. 일본국 정부의 공식 견해로는, ‘천황은 국가원수’라고 한 1990년 5월 14일 참의원의 내각법제국 장관 답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을 ‘나라의 상징이며, 또 일정 부분의 외교 관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한정된 의미의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 플래카드 사건에서 도쿄 지방재판소는 ‘국가원수인 천황’이라고 표현하여 천황을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일본국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되어,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다음 순서에 따라 계승한다. 그러나 역대 일본 천황계보를 살펴보면 여자가 천황이 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특히 고교쿠 천황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천황에 즉위했다. 다만 황사에게 정신이나 신체상 불치의 중환이 있거나 중대한 사고가 있을 때에는 황실회의의 협의를 거쳐 위의 순서에 따라 황위계승의 순서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역대 일본 천황 계보에 의하면 태어나자마자 즉위하여 8살에 사망하거나 3살에 즉위하여 19살에 선양하고 59살까지 살거나(고토바 천황) 즉위하자마자 제위에서 쫓겨나거나(고분 천황) 천황의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原'씨 성을 부여받고 황족의 신분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강등당하거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후계자에게 선양하거나 이미 선양을 하고 나서 다시 정권을 되찾아 재즉위하거나(한 예로 역대 일본 천황 중에 고교쿠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이 동일인물이라는 점.) 하는 등 문제점도 많았다. 현재 일본 황실에는 여자 후손이 많고 남자 후손이 적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여자 황족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고 있다. 321년 322년 323년 324년 325년 326년 327년 328년 329년 330년 331년 332년 333년 334년 335년 336년 337년 338년 339년 340년 341년 342년 모용선비족의 연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함. 343년 344년 345년 346년 347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이세를 격파하고 촉을 점령하였다. 348년 349년 350년 351년 352년 353년 354년 355년 356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강족의 요양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하였다. 357년 358년 359년 360년 361년 362년 363년 유송 고조 무황제 유유(劉宋 高祖 武皇帝 劉裕) 364년 365년 366년 367년 368년 369년 370년 371년 동진(東晉)의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이 사마혁(司馬奕)을 폐위시키고 사마욱(司馬昱)을 즉위시키다. 372년 373년 동진(東晉)의 실권자 환온(桓溫) 374년 375년 376년 377년 378년 379년 380년 381년 382년 383년 384년 385년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었다. 삼두 정치를 행한 집정관의 한 사람으로서 옥타비아누스는 효과적으로 로마와 속주 를 지배하였고, 세력을 모아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죽은 뒤 집정관에 재선되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제2차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은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껍데기만 공화국인 이 나라는 훗날 로마 제국으로 불린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법에 따르면 ‘존엄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평생 동안 권력을 가지도록 하였고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을 가졌으며 기원전 23년까지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맺은 여러 피호 관계(clientela),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덟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며, 원래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 옥타비우스는 아이를 들에 버리라는 점성가의 경고를 받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라고 지었다. 그러나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이사가 거기서 자랐다. 옥타비아누스는 회고록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고만 적었다. 그의 친증조부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시칠리아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방의 여러 공공기관에 재직하였다 한다.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마케도니아의 총독 을 지냈으며, 아이의 가명(家名)을 투리누스로 지었는데, 이 가명은 옥타비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과 싸워 이긴 시칠리아의 투리이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평민이었지만,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로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안 돼 어머니 아티아는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6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하였다.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옥타비아누스는 4년 뒤인 기원전 47년부터 토가를 입게 되었고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세운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에서 행해지는 그리스 경기를 관장하였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자기 마차에 동승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였다. 로마로 돌아오고 난 뒤 카이사르는 새 유언장을 사제녀들과 함께 보관하였고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 상속자로 낙점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군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장교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 브룬디시움 근처에 있는 루피아이라는 곳에 상륙하고 난 뒤, 카이사르의 유서에 적힌 내용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재산의 2/3를 상속받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진정한 후계자가 되기로 하였다. 당시 카이사르에게는 살아 있는 적자녀가 없었기에 그의 이손(離孫, 누이의 친손 및 외손)인 옥타비아누스가 제1 상속자이자 아들로 입양되었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뒤 정식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쓰게 되었다. 로마 전통에 따라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에 ‘투리누스’ 대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는 가명을 붙여 자신의 출신 가문을 나타내었다. 아직 옥타비아누스가 당시 이 이름을 썼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이름은 그의 출신을 명백하게 드러내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하였지만, 이는 중상모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국에 성공적으로 입문하려면 자신의 빈약한 재산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브룬디시움에서 카이사르의 병사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후,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싸우려고 카이사르가 충당했던 일부 자금을 요구하였다. 이 돈은 브룬디시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무려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돈으로 원로원의 가장 큰 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치려고 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라진 공금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원로원은 이내 수사를 중단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해에 다시 큰일을 벌였는데, 동방 속주에서 이탈리아로 보낸 조공을 공식적인 허가도 받지 않고 가로챘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가 이끌던 정예병과 파르티아를 치려고 모은 군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특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그가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질러 로마로 이동할 때, 소문난 인품과 그가 새로 얻은 자금 덕분에 캄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카이사르를 숭상한 옛 노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44년 6월까지 그는 3천 명의 충성스러운 노련한 병사들을 얻었고 봉급으로 5백 데나리우스를 주었다.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쉽지 않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해 3월 17일에 원로원은 이미 암살자들에게 특사령을 내렸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들 대부분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외친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암살자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많은 로마 시민과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가 카이사르의 신격화 운동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안토니우스에게 양도하겠다고 하였으나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여름 동안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9월 귀족파 출신의 웅변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연설에서 안토니우스를 원로원의 가장 큰 위험한 인물이라고 역설하며 극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에서 인기가 떨어진 데다가 집정관 임기도 거의 끝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스리다가 안토니우스에게 편입된 갈리아 키살피나를 통제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일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임 병사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고, 11월 28일에는 안토니우스 휘하 두 개의 군단을 돈으로 현혹하여 쉽게 격파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과 원로원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에 위험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났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 포위하였다.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출신에 관하여 조롱하는 것을 비호해 주기도 하였는데 키케로는 “요즘의 젊은이들 중 가장 전통적인 공경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대는 그대의 이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라고 한 말을 들려주었듯이 이것은 안토니우스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의견의 정면 반박이었다. 과거 대표적인 반(反)카이사르파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조작화한 이 동맹으로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그는 전직 집정관들과 같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는 대군의 단독 사령권을 손에 넣었다.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Po Valley)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4만8천 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행진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아무런 군사적 반대 세력을 만나지 않았고 기원전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 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 이 5년간의 명백한 월권 행위는 비공식적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 정치와 달리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았다.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 3명의 집정관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 세 집정관의 이러한 수단은 암살자들과 친분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숙청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의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을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뒷날 이 전투들의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는데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추가로, 두 번의 승리의 전과를 따지는데, 안토니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직속 지휘권을 넘겨준 옥타비아누스를 겁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 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니아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곧 제대할 많은 병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일단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이 많은 병사는 과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화파 쪽에서 서서 싸운 병사들로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으면 쉽게 그의 정적들과 연합할 수 있었으나 그는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더 이상 병사들의 정착지를 위해 분배해줄 국유지가 없자 옥타비아누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로마 시민의 땅을 몰수하여 시민들을 멀리하는 것 또는 로마의 심장부에서 그에게 대적할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수 있는 많은 로마 병사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전자를 택하였다. 새 정착지를 만들기 위해 18개의 도시가 그 땅으로 사용되었는데 도시에 살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나 일부 시민들을 쫓아내 버렸다. 옥타비아누스가 추진했던 퇴역병의 정착 계획에 대한 많은 불만으로 인해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당파는 결집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인 클로디아 풀케라와 이혼하기로 결심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클로디아의 부부 관계는 진전이 없었고 그는 클로디아를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장모 풀비아에게 보냈다. 풀비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길러 옥타비아누스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세 집정관이 로마 병사들의 월급을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루키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를 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도박을 걸었다. 기원전 40년 초, 루키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응징에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지아)에서의 농성을 끝내고 항복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루키우스와 그의 군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편 풀비아는 그리스의 시키온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지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루키우스와 공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페루시아도 다른 장군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약탈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 이 잔인한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인생을 더럽혔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등은 이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 제1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승리한 이래, 아직 로마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9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과 협정을 맺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가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가 아닌 공화파 소속의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데 폼페이우스의 부하이자 사위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즉 폼페이우스의 외손녀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적녀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가 태어난 이 날은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한 날이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3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떠났다.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할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항, 브룬디시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정치적인 지지기반이었던 백인대장들이 싸움을 거부하였고 그들 휘하의 각 병사들은 백인대장을 따라 전투 중지를 원하였다. 한편, 시키온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가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보기 위해 시키온으로 가던 중이었다. 풀비아의 죽음과 백인대장들의 항명은 두 집정관을 잠정적으로 화해시켰다. 기원전 40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기로 하였다. 중부의 이탈리아 반도는 신병들에게 맡겨졌는데 사실 이 조약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기원전 40년 말엽,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친누나인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는 대 안토니아와 소 안토니아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간의 군량 수송 거부로 이탈리아의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였는데 폼페이우스의 아들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이탈리아에 큰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넵툰의 아들’(Neptuni filius)이라 불렀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으로 임시 평화 협정이 맺어졌는데 이탈리아의 해상 봉쇄가 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35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세 명의 집정관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간의 영토 협정은 기원전 38년 1월 17일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재혼하자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폼페이우스의 휘하 제독 중 하나가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반환하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를 공격하려면 안토니우스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던 옥타비아누스는 협정을 맺어 삼두 정치 체제를 연장하여 기원전 37년부터 시작하여 5년 동안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지지를 얻은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의 원정을 위해 그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그는 기원전 53년의 카르하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싶어하였다. 타렌툼(Tarentum)의 협정에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의 전함을 주고 옥타비아누스는 2만 명의 군사를 파르티아와 싸우려는 안토니우스에게 보내준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약속했던 병력의 불과 1/10인 2천 명밖에 보내주지 않았고 이러한 도발은 안토니우스가 6년 뒤 서로 전투에서 마주 대할 때까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한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합동 작전을 개시하였다. 옥타비아누스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기원전 36년 9월 3일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거의 완파되었다. 섹스투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항복한 폼페이우스의 병사를 손에 넣었는데 머지않아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를 다스릴 충분한 능력이 된다 자부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의 군대는 자신들이 싸우는 데 지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돈으로 유혹하자 레피두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투항하였다.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의 직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삼두 정치 체제에서 쫓겨나고 공직 생활 역시 끝이 나면서 이탈리아의 카페 키르케이에 있는 장원으로 유배되었다. 로마의 통치권은 이제 서방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게로 주어졌고 양분되었다. 공화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역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 외곽에 자리를 잡게 해주는 사이, 과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참가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던 3만여 명의 노예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오자 자신과 리비아, 옥타비아의 신변 안전의 보장을 원로원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누이인 옥타비아, 딸인 율리아는 주권면제권을 부여받았다. 한편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돌아갔다. 비록 옥타비아누스가 2천 명의 군사를 보내주었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고 작전 실패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그의 이미지도 추락하였다. 하지만 이미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안토니우스의 군사를 다시 보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안토니우스는 전처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냈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군사를 재건하여 다시 강대한 세력을 가지려고 계획했더라도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를 부정하고 동방의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선동을 하였고, 갈수록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추락하였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니 안토니우스가 삼두 정치 체제의 집정관 직을 사퇴하면 자신도 그리할 것이라 하였으나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권모술수로 자신의 독재적인 이미지는 감추면서 안토니우스를 더욱 극악하고 독재적인 이미지로 만들려 하였다.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가 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로 하여금 아르메니아의 왕 자리에 앉히고 클레오파트라에겐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을 하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원로원에게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야망을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기원전 33년 1월 1일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자 그는 원로원 회의에서 안토니우스가 가지고 있는 작위와 자식들이나 친척들 그리고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나눠준 영토 문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망명한 전직 집정관,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선동 에 불신을 품고 안토니우스의 편에 붙었는데 기원전 32년 가을, 변절한 각료와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변절하였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같은 망명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를 비난하기 위해 원로원의 승인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베스타 처녀의 신전에 폭풍이 불자 옥타비아누스는 수석 사제녀에게 안토니우스의 비밀 유서를 내놓으라 강요하였는데 그 유서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묻힐 영묘를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 쓰여 있었다.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의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였다. 기원전 31년 초, 아그리파의 함대가 로마군을 수송하여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횡단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곧 벌어질 큰 전투의 예비 단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본대를 그들의 해상 보급 경로에서 차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푸 섬 맞은편에 위치한 본토에 도착,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바다와 땅 모두에서 막히자, 안토니우스군의 탈영병은 하루가 머다 하고 계속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군은 전쟁 준비로 휴식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상 차단 해제를 기도하기 위해 그리스 서쪽 해안의 악티움 만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아그리파와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대가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대보다 수는 많지만 더 작고 조종하기 더 쉬운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였다. 안토니우스와 남은 군사들은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막판에 노력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추격하였고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자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는데 독사가 클레오파트라를 무는 사이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로 몸을 찌르고 클레오파트라의 팔 쪽으로 쓰러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있으나 하나로 족하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비록 그의 수단은 잔인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이자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과소평가하였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지지가 약해졌어도 ‘신의 아들(Divi filius)’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전에 적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었고 로마 시민의 호응이 없는 정책을 계속 고수하였으나 악티움 해전 이후 그는 그의 정적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신뢰를 쌓았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아직 로마는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이었고 로마 시민은 군주제와 독재라면 진저리를 쳤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부터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았다. 그중 기원전 28년과 기원전 27년은 아그리파가 동료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정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 이 칭호는 실제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폼페이우스에게도 수여된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현실 속에서 로마의 최고 책임자라는 것을 반영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위임받았던 여러 특권을 원로원에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속주와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보호자,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공공건물 건설과 가도 유지·보수에 자발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기대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가도 건설에 나섰다. 기원전 16년에 발행된 화폐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막대한 양의 돈을 공공기금에 기부한 후 이루어낸 가도 건설을 선전하였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Howard Scullard)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제권”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원로원은 내전을 종결시킨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 요청은 아우구스투스가 초법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원로원이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면서 계속해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10년 기한의 속주 통치 권한을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게 된 속주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등 로마에 정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속주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일 때, 자신이 통치하는 속주에 파견할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는다. 반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지 않는 “원로원령 속주” 의 경우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다.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얻어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압도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고대 로마의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던 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로원에서 파견한 총독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으며, 시칠리아 속주 및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등 여러 속주는 원로원에서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였다.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수의 속주만 원로원에서 임명한 전직 집정관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으며, 나머지 지역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렸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감히 대적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광활하고 지리적으로 먼 '황제령' 속주에는 대다수 군단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급 레가투스를 임명하고 자신의 재량으로 선전포고와 강화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감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아우구스투스의 집 출입구의 위쪽에 시민관(corona civica)을 걸고 출입구의 양쪽 기둥을 월계수 묘목 장식으로 뒤덮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황금 방패에 공화정을 복귀시켰다는 사실을 새겨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였다. 이 칭호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신의 아들(divi filius, 즉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더불어 ‘길조’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함축되어 있었는데, 로물루스가 엄숙한 징조(augusto augurio)를 보고 로마를 창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제2의 창건자로서 또 다른 로물루스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평화로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내전 등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옥타비아누스의 시대”와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2의 건국자임을 상징하기 위해서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따온 “로물루스”라는 칭호도 고려되었지만 로물루스라는 칭호는 왕정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자기 자신을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Imperator Caesar divi filius)이라 칭했다. 이는 자신이 신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것과, 승리를 상징하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받았던 특권인 보라색의 토가를 입을 수 있는 권리, 권위를 상징하는 머리띠와 홀을 쓸 수 있는 권리는 받지 않았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 한다. 그 방식은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무레나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동료 집정관과 협력하면서 파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늦봄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칫하면 죽을 수 있었던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았고,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인장을 넘기고 사위인 마르켈루스에게 병권을 위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관리하고 있던 공금 및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했다.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둔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유 재산만 자신이 지목한 상속자들에게 수여하려 했다.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여전히 군주정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만약 권력을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했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건강을 회복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에서 사임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 선출된 것은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뿐이다. 하지만 군 통수권은 여전히 원로원의 요청으로 지니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직에서 사임하여 구 귀족들에게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늘려 주었으며, 전통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계속 집정관직을 보유하는 것이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행적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공직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직 집정관으로 속주 통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 그는 기원전 27년부터 황제령 속주에 전임 집정관의 명령권(proconsulare imperium)을 계속 보유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원로원령 속주의 명령권보다 더 우위에 있는 상급 임페리움(maius imperium)까지 얻게 되어 권한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속주 총독들 위해 군림하고 필요한 경우 모든 군단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죽을 때까지 행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귀족 계급으로서 호민관에 취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민관 특권을 손에 넣어 거부권 행사, 선거 관리, 모든 모임에서 제일 먼저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을 활용하여 풍기 단속을 담당하고 시민들이 공익을 보존하는지 자세히 감찰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그리고 인구 조사와 원로원의 의원을 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 이 권한까지 손에 넣자 아우구스투스는 포룸에 들어올 때 전통 복장 토가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게 하여 로마 애국주의의 미덕을 지키려 하였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감찰관에 선출된 적도 없던 사람이 이런 권한을 갖는 것과 한 사람이 호민관 특권과 감찰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전례가 없었다.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인구 조사를 시행하거나 원로원 의원 명단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공화정 시대와 비교해서 호민관의 위상은 격하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을 여전히 법무관이 되고자 하는 평민 계급이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로의 의미는 살려둔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군 통수권도 손에 넣는다. 이는 이전에는 집정관이나 권한을 위임 받은 장군들만이 가지고 있던 권리였지만,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만 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만이 가지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오직 아우구스투스만이 명목상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장군들이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면 그 영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가 유일한 예외였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7년에 게르마니아에서의 공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갖고 있던 절대 지휘권은 기원전 13년에 기한 연장 승인을 받았다. 이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 머무르면서 퇴역 장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푼다. 앞에서 언급한 권한들의 획득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장이었다. 평민 계급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기원전 22년에 홍수와 기근이 겹쳐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영구 집정관직 혹은 독재관직을 부여할 것과 그가 직접 감찰관직을 맡아 곡물 담당관직(cura annonae)를 맡아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독재관에 취임하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비를 부담하여 짧은 시간 내에 사태를 해결하였다. 8년에 다시 발생한 기근 때에는 “식량청 장관”() 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로마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게 하였다. 기원전 19년에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의 상징을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권리와 두 집정관의 사이에 앉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했다. 그 결과권력은 공식적으로도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더라도 집정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이었던 레피두스가 죽은 후에 그 자리에 취임한다.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로부터 “국부”()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승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개선장군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를 집어넣어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 하였다. 이후 13년까지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라토르”라고 불릴 만한 21회가량의 큰 승리를 거두었고 3회의 정식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제4장에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치른 개선식, 감사제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도 적지 않았으며, 외교도 적절히 사용하였다. 한 예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당했던 대패(大敗)를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만회하는 대신, 아르메니아 왕국에 친(親)로마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힌 후에 파르티아를 압박하여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또한, 오늘날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원전 1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고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 이 지역에서 채굴되는 풍부한 광물 자원은 이후 군자금의 원천이 된다. 대표적인 곳으로 라스 메둘라스의 풍부한 금광이 있다.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완수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사이에 군사적 완충 지대가 생겼다. 지금의 모나코 근교에 알프스 전승기념비가 세워졌고 호라티우스는 이 승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아 족, 동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 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루수스는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동맹국을 완충 지대로 적극 활용하였다. 동방 방위를 위해 시리아 속주에 군단을 주둔시켰으며, 티베리우스가 파르티아와 교섭을 하였다. 이 협상의 결과로 로마는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패를 당했을 때 빼앗겼던 군단기(軍團旗)를 되찾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파르티아가 언제나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은 게르만 족을 상대로 대부분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에서 벌어졌다. 안토니우스와 최종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달마티아의 부족들과 벌였던 전쟁 이후 로마군은 착실히 도나우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당한 참패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케루스키 족 출신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족에게 전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티베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라인란트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은 후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금욕적인 모습과 달리 취미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도박에 부정적이라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줬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에 수립된 정책들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지속하였다. 양부로부터 이어받은 성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1400여 년간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카이사르는 여러 언어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아우구스투스 동상과 흉상이 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 신앙("Divus Augustus")은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서, 자신이 직접 쓴 《아우구스투스 업적록》("Res Gestae Divi Augusti")의 동판을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정면에 걸어 놓기를 원했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의 사본은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터키의 앙카라에서 발견된 사본의 경우, 라틴어로 되어 있는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공건물에 부착하였다. 테오도어 몸젠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을 “금석문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작품은 여러 편이 알려졌다. 이 중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시집 《시칠리아》, 〈브루투스의 《카토론》 반박〉, 13권에 걸쳐 기술한 《자서전》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분석하여 작품에 대한 추가 정보를 연구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정책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였던 기간에 계속 사용되었고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Pax Augusta")라 칭송받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셋째 아내인 리비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지혜와 결단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정치가였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많은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도인 로마 시에 “경찰청”("Praefectus urbi")과 “소방청”("Praefectula vigilum")을 만들었으며, 지방 자치 단체들에 상주하는 장관들을 파견하였다. 경찰청은 대대별로 500명씩이었으며, 소방청은 대대별로 500에서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7개 대대가 14개 구의 치안과 화재 진압을 담당하였다.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28개 군단,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조직한다. 이들은 각 속주의 주민들로 구성된 보조병과 함께 국방을 담당하였다. 또한 역참 제도를 창설하여 “관찰장관”("praefectus vehiculorum")이라 불리는 장교들이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자비를 털어서 도로를 유지 및 보수하였다. 동시에 추가로 가도를 더 건설하여, 더욱 더 빠른 통신 체계를 갖추면서 군대가 신속하게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는 현역 및 퇴역 군인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하여 “군인 연금 기금”("aerarium miltare")을 만들었다. 기원전 27년에는 자신의 경호를 목적으로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근위대는 훗날 원로원에 압력 넣기, 새 황제 추대, 기존의 황제 제거 등 로마의 역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근위대는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할 때까지 존속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언제나 공화주의자로서의 미덕과 규범을 실천하려 애썼다. 언제나 서민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보았던 그는 관대한 정책들과 과다한 지출 삭감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기원전 29년에는 25만 명의 시민에게 개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지급하였고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12만 명의 퇴역병에게는 1,000세스테리우스씩을 지급하였으며, 약 7억 세스테르티우스를 들여 자신의 병사들이 땅을 사서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로마의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 82곳을 복구하였다. 기원전 28년에는 검소하고 관대한 모습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모습을 본뜬 은상 80여 개를 녹였다. 아우구스투스의 긴 통치 기간과, 이 기간에 로마 제국에 남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들도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14년 당시의 젊은이들은 원수정 외의 정치 체제는 알지 못하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었더라면(예: 기원전 23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한동안 사실상 군주정이었던 로마에서 옛 공화정 지지자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추종자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경험과 인내심,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통찰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율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잘 훈련된 군대가 전선에서 주둔하는 것, 제위 계승에 대한 원칙, 황제의 자비를 털어 수도를 꾸미는 것처럼 여러 분야에서 로마 제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최고의 업적은 이후 2세기간 이어진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게 남았고, 이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풍조 아래 좋은 황제의 패러다임으로 남게 된다. 이후 로마의 모든 황제들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를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점차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칭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통치 기간에 원수정을 확립한 것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법학자, 공화정의 추종자인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 ~ 서기 10년 또는 11년)는 공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였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의 서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교활한 방법으로 공화정 로마를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에 티베리우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의 사람들은 노예 매매와 같이 계속하여 다음 주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원수정”과 “자유”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생각을 잘 조화시켰다고 믿었다. 3세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동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를 전제군주로 보았다. 시인인 마르쿠스 아나에우스 루카누스(39년 ~ 65년)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전통적 자유가 끝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인 체스터 G. 스타 2세는 루카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기엔 너무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썼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해군 장교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고든(1658년 ~ 1741년)은 아우구스투스를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하며 비판하였다. 토머스 고든과 몽테스키외는 아우구스투스가 전장에서는 겁쟁이라고 평하였다.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토머스 블랙웰(Thomas Blackwell, 1701년 ~ 1757년)은 "Memoirs of the Court of Augustus"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마키아벨리 성향의 군주라 보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세제 개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 시대에는 널리 행해졌던 속주민에 대한 특별 징세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반을 닦고 고정 세율로 직접세를 징수하였다. 세금을 불시에 임의로 거두어 속주민의 분노를 불러오는 대신에 고정 세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세입이 증가하였고, 돈의 흐름이 안정되었으며, 해마다 속주가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일정해졌다. 세금 징수를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 속주마다 내야 할 세금의 양이 정해졌다. 속주민과는 달리, 로마 시민권자의 경우 간접세만 납부하였다. 노예 매매 시 가격의 4퍼센트를 세금으로 냈으며, 경매 시에도 1퍼센트를 납부하였으며, 재산 상속 시에도 가까운 친척이 아닌 이로부터 1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상속을 받으면 5퍼센트의 세금을 납부하였다. 또한, 세금도 민간 징수원이 징수하던 기존 방식에서, 세금 담당 공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공화정 시대의 민간 징수원들은 세금을 과다하게 걷어가며 힘을 불려나가, 점점 로마의 정치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많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세금을 추가로 더 걷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었다. 이들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하였기 때문에 세금 납부자들에게서 부당 징수를 일삼았고, 이는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직접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점과 로마 정부 형태의 변화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비옥한 땅을 재정원으로 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아닌 아우구스투스의 사유지처럼 간주되었고, 이후에도 이집트는 황제들의 사유지로 취급된다. 이집트는 원로원 계급 출신이 통치하는 대신에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equestrian) 출신의 총독이 다스렸다. 아우구스투스와 이후의 황제는 이집트의 농경지에서 벌어들인 많은 수입을 복지 정책, 공공 정책과 군사 원정의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로마의 역법에서 “여섯 번째 달”()로 불리었던 달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이후부터 8월(, )이라는 지금의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8월이 31일이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딴 8월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7월(July)이 똑같은 날짜 수를 가지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13세기의 학자였던 사크로보스코의 요한네스(Johannes de Sacrobosco)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8월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뀌기 전부터 31일이었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 마크로비우스에 따르면, 이름이 '아우구스투스'로 바뀐 것은 로마 원로원의 결정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30년 8월에 알렉산드레이아를 함락한 뒤 권좌에 오르자, 이를 기리고자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제정했던 율리우스력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역법에 혼란이 왔는데, 이를 바로 잡으면서 8월을 '아우구스투스'로 명명하였다고도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라고 호언장담하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 발언이 황제의 권력에 대한 은유라고 분석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의 시대에도 건물을 지을 때 대리석을 사용했고, 그 후에 대리석의 사용량이 갑자기 증가하지도 않았다. 화재의 위험이 높았던 건물이 많았던 수부라 지역의 건설에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마르스 광장(Campus Martius) 근방에 평화의 제단()과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많이 세웠다. 평화의 제단 앞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기 위해 이집트로부터 가져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 따르면 평화의 제단에 새겨져 있는 돋을새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한 것을 경축하고, 앞으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 돋을새김에는 집정관, 여사제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카이사르 신전,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마르스 신전이 딸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포룸도 건설하였다. 다른 건설 사업들도 장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로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 아우구스투스가 건설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인 옥타비아 회랑, 마르켈루스 극장 등이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가족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건설하였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여 기원전 29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근방에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이 건립되었고, 기원전 19년에는 이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건설 사업은 제국 전역에서 행해졌는데, 현재까지도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여러 곳에 아우구스투스의 시대에 건설된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이후 로마 제정 시기 동안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코린토스 양식의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개인 재산까지 기부해 가며 책임지던 수도 유지·보수 업무를 정비하여야 했다. 그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지정한 3명의 원로원 의원이 로마의 수로교의 유지·보수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는 다섯 명의 원로원 의원이 “공공사업청”(curatores locorum publicorum iudicandorum)이라 불리는 공공건물과 신전의 유지·보수를 맡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도로청”(curatores viarum)을 창설하여 정기적으로 각 지방의 가도 유지·보수를 담당하도록 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386년 387년 388년 중력에 의해 사망 389년 390년 391년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를 쳐서 관미성을 비롯한 11개 성을 함락시켰다. 393년 고대 올림픽 경기가 종료되다. 394년 395년 396년 397년 398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신라를 토벌하여 복속하였다. 399년 백제와 동맹을 맺은 왜가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하였다. 401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이른바,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완성 402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후연을 쳐서 평주(랴오닝)를 함락시켰다. 403년 404년 고구려가 후연을 쳐서 유주(허베이)를 함락시켰다. 이때 왜군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의 대방(황해도) 지역을 침공하자,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일으켜 평양에서 왜를 무찔렀다. 동진(東晉)의 유유(劉裕)가 거병하여 환현(桓玄)을 격파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환현(桓玄) 405년 406년 407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를 일으켜 왜를 섬멸하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408년 409년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쳐서 항복시켰다. 411년 신라가 고구려의 사주로 일본 열도를 침공하여 야마토(倭) 오진(應神) 왕의 항복을 받았다. 412년 413년 414년 415년 416년 417년 418년 419년 420년 421년 422년 423년 424년 425년 426년 427년 428년 429년 430년 430년 아우구스티누스 사망 431년 432년 433년 434년 435년 436년 437년 438년 송 ,4학을 세움. 439년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440년 441년 헤로도토스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 , 대략 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25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어느 정도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으며 잘 짜여지면서도 생생한 줄거리에 따라 사료를 배치한 최초의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작 《역사》를 통해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특히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 시기의 이야기 자료를 기록하였으며 그 밖에 자신이 지중해와 흑해 주변의 여러 지역을 널리 여행하면서 접한 여러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긴 여담을 많이 썼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본인의 기록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고 하며 그는 자신이 여행하면서 들은 것만 기록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그의 《역사》에 간간히 언급된 기록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고향은 도리아 인에 의해 건설된 소아시아 지방의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터키의 남서쪽 해안 도시인 보드룸)이며 그의 선조는 아마 카리아 지방(현재 터키의 남서쪽 내륙 지방)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지배 가문을 축출하려는 시도에 연루되어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추방되어 사모스 섬으로 이주하였다. 약 30세를 전후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그리고 스키타이 지역(현재 우크라이나 지방)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 여행을 통해 수집한 많은 자료가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한 그의 《역사》에 들여지게 된다. 특히 제2권에서 보게되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이집트학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사망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6.91)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동기와 초기 상황에 관한 암시를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기원전 420년대에 헤로도토스는 아직 생존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40년경에 쓴 《역사》는 서양 최초의 역사책으로 여겨진다. 전 9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항쟁 유래로부터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저술되어 있는데, 제 9권은 미완성이다.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좁게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다루었지만 헤로도토스가 여행한 여러 지역의 문화, 풍습, 역사도 폭넓게 다루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자들의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하였는데 확인할 수 없는 증언은 적으면서 사실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썼다. 그러나 그의 역사 기술이 사실과 다르고 내용에 편향적인 시각이 들어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일례로 2세기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작품 《실화》에서 헤로도토스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하고 있다. 근대의 학자들 여러 명은 헤로도토스가 자신의 여행한 범위를 과장했고 정보 출처를 지어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고고학적, 문헌학적 발견으로 잘못이라 생각되었던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여러 차례 드러나면서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는 20세기 중반 이후 더 높아졌다. 이제 헤로도토스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민족지, 인류학의 아버지로도 평가된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내용에는 나일 강이 매년 범람하는 것이 남쪽 멀리 눈이 녹아서라는 증언이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에 눈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또 이집트에서 만난 페니키아 뱃사람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할 때 태양이 오른쪽에 떠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믿지 않은 증언들도 전달하면서 당시 지리학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과거의 위업을 후세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지극히 서사시적 발상하에 지리, 풍속, 역사, 삽화, 종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항이 수록되어 있어 이것이 때때로 주제에서 이탈함으로써 보기에 따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항을 동서간의 항쟁이라는 일관된 역사적 전체 속에 집어넣고 페르시아 전쟁도 그 한 부분으로서 파악한 데에 《역사》의 구성상 통일이 있고 그의 역사적 달관이 담겨 있다. 《역사》의 문체가 지니는 매력은 다양성과 유연성에 있다. 직설적인 묘사와 과학적 산문이라고 할 건조한 문체, 그리고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 표현 등 변화가 풍부하다. 또한 줄거리의 교묘함, 서사시적 웅대함, 줄거움을 주면서 가르치는 수완, 낭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점 등이 헤로도토스가 '산문의 호메로스'로 불리는 이유이다. 442년 443년 444년 445년 446년 447년 448년 449년 450년 451년 452년 453년 454년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끊고 독립하자,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를 침략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자 신라가 백제를 구원하였다. 456년 논리학 논리학(論理學, , )은 '논리' 및 그것과 관련된 구성과 원리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타당한 논증, 곧 추론과 증명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일반적으로는 논증의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판단·추리·개념 등과 관련하여 올바른 명제를 전제로하는 '타당한 추론(推論)의 형식'(Valid form of inference)에 관한 인문 과학이라고도 한다. 흔히 철학의 한 분과로 분류되나, 형식적 논리학은 수학기초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편 라이프니츠는 '모든 과학들이 공리들을 규명할때 그러한 사용에서 그리고 그러한 원칙에서의 논리학의 당위적인 역할'이라는 맥락의 서술을 한바있다. 논리학은 영어의 'Logic', 독일어의 'Logik', 프랑스어의 'Logique'에 해당되는 말이며, 이들은 모두 그리스어의 Logos에서 유래된 말들이다. Logos는 Legein(센다, 모은다, 배열한다, 말한다)이라는 동사에서 전환된 명사로서, 말, 생각, 사유, 사고, 논리라는 뜻 이외에도 개념, 판단, 정의(定義), 이유, 이성, 진리, 사상, 법칙, 이론, 학문 등의 뜻을 지닌다. 형식 체계를 중심에 두지 않는 논리학을 흔히 비형식 논리학으로 부르는데, 여기서는 추리 형식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연구한다. 예로부터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기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제각기의 입장에서 특징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했다. 베이컨의 귀납적 논리학, 칸트의 선험적 논리학,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학, 듀이의 실험적 논리학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리에 맞는 합리적인 사고로 그 내용을 올바르게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 하는 사고의 규범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심리학도 사고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나 심리학이 사고를 하는 원인에 초점을 두는 것이고 논리학이 사고 과정 자체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구별된다. 형식 논리학은 개개의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에 상관없이 추리의 형식상 타당성만을 문제로 삼는다. 형식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전논리학이 있으며 현대의 형식논리학은 흔히 수리논리학(기호논리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현대 수학의 근간을 이루는 수학기초론을 구성하기도 한다. 고전적인 형식논리학의 토대를 세운 것은 기원전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로, 그의 오르가논에서는 올바른 추론 및 증명을 논하는 '논증'의 토대가 제시되었고, 이는 수천년 간 서양 철학 발전의 근본을 이루게 된다. 이후 중세에는 오컴, 아벨라르, 라이프니츠 등의 학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논리학에 대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근대에는, 고틀로프 프레게가 그의 저술 《개념 표기법》에서 논리학적 기호와 체계화된 술어 논리를 고안하였고, 주세페 페아노는 집합론을 발전시키고 페아노 공리계를 고안하여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세웠다. 20세기 초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이전을 고전논리학, 그 이후를 현대논리학으로 구분될 정도로 중요한 변혁이 발생한 시기로, 특히 게오르크 칸토어의 집합론적 연구로부터 영감을 받아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동으로 저술한 《수학 원리》(, 1910-1913)가 출간되었는데, 이 저서는 현대 수학기초론이 성립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러셀의 역설이나 칸토어의 역설은 사실로 믿어져온 고전 논리학 및 집합론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확실한 수학적 공리의 필요성이 호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르트 괴델이 1930년 10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가 존재한다'는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면서 페아노 공리의 '완벽성'이 흔들리게 되었고, 논리학도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체르멜로-프렝켈 공리에 선택공리가 추가된 ZFC 공리계의 9가지 공리가 일반 수학기초론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공리들이 이와 무모순적(독립적)임이 증명되어 있다. 또한 공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다룸으로써 다양한 대상들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직관논리, 양상 논리 등 새로운 수리논리학적 체계들이 등장하였다. 오류론은 논리학의 응용기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즉 오류론은 논리학의 소극적 측면으로써 잘못된 추론으로부터 올바른 추론을 구별할수있도록 경고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오류론에 있어서 형식적 오류나 비형식적 오류에대한 인식 가능성은 올바른 추론을 위한 비판적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한편 비형식적 오류에는 언어적오류,심리적오류,자료적오류및 귀납법적오류가 있다. 한편 올바른 추론의 절차에서 '올바르다'는 의미는 연역적 추론에서는 '타당성'이 성립한 경우를 그리고 귀납 논리학에서는 '귀납적으로 강한' 추론을 가리킨다. 특히 '귀납적으로 강하다'는 의미는 '전제를 제시하고 그 전제로부터 나오는 결론이 성립되는 확률이 1'에 가까워지는 추론을 말한다. 또한 타당한 추론은 논리적으로 전제들이 제시되면 그 전체들로 부터 나오는 결론과 상관없이 추론의 타당성을 판별할수있는데 이를 '타당한' 추론형식이라고 부른다. 명제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 판단 내용과 주장을 언어 또는 기호로 표시한 완결된 문장을 가리킨다.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이를테면, ‘고래는 포유류이다.’ 따위이다. 명제의 핵심성분으로는 명사가 있다. 전통 논리학에서 사용해오던 '개념'이라는 용어에대해서 현대에와서는 기술적인 이유로 '명사'라는 용어로 전환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개념 혹은 명사에서 다루는 원리는 내포와 외연을 주요하게 다루고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진리값을 기준으로해서 비표준논리학을 포함하는 현대 논리학들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유피테르 유피테르(Iuppiter 또는 Iupiter, 속격 Iovis) 또는 요베(Jove)는 고대 로마의 종교와 로마 신화에서 하늘과 천둥의 신이자 모든 신들의 왕이다. 유피테르는 공화정과 제정 시기를 거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우세 종교가 될때까지 로마 국교의 최고신이였다. 로마 신화에서 제2대 로마의 왕 누마 폼필리우스와 공물, 제물 같은 로마 종교의 원칙들을 세우는걸 논의했다고 한다. 유피테르는 하늘의 신으로 기원한 것으로 보통 생각된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벼락이고 그의 가장 신성시 받는 동물은 다른 새들보다 앞서 길조로 우선시되었고 로마군의 가장 평범한 상징 (아퀼라) 중 하나가 된 독수리이다. 이 두 상징물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동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발톱에 천둥을 쥐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으로서 유피테르를 상징하는데 자주 혼합되었다. 하늘의 신으로서 그는 정의와 선치 등 신성시 받는 신뢰, 맹세에 대한 신성한 증인이였다. 그의 행사 대다수는 성채가 위치한 카피톨리노 언덕에 집중되었다. 그는 마르스, 퀴리누스와 함께 초기 카피톨리움 3신의 최고 신이였다. 후기 카피톨리움 3신에서는 유노, 미네르바와 함께 로마의 수호신이였다. 그의 신성시 받는 나무는 참나무였다. 로마인들은 유피테르를 그리스 신 제우스와 동일하게 여겼고, 라틴 문학, 로마 미술, 신화, 도상학에서의 제우스는 유피테르 (Iuppiter)라는 이름으로 각색되었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전승에서는 그는 각각 포세이돈과 하데스에 해당하는 넵투누스, 플루톤 의 형제이다. 그들 각자는 하늘, 바다, 지하세계라는 3개의 왕국에 거주했다. 고대 이탈리아의 신 디에스피테르 (Diespiter)는 햇빛에서 나타나는 하늘의 신이긴 하지만, 항상 유피테르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였다. 티니아는 그의 에트루리아 신화에서의 대응 모습으로 보통 여겨지고 있다. 로마인들은 유피테르가 그들에게 우월성을 주었다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다른 민족들 보다 유피테르를 더욱 숭배했다. 유피테르는 "쉬고 있는 신들과 로마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새점의 원천"이였다.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 내부 조직, 대외 관계등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화신이였다. 공화정과 제정기 시절 유피테르 신전에서의 그의 모습은 로마의 옛 왕들과 고위 집정관, 황제 숭배 등과 관련된 리게일리어를 갖고 있었다. 집정관들은 유피테르의 이름으로 그들의 지위에 대한 서약을 했고, 9월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리는 연례 행사에서 그를 숭배했다. 유피테르의 도움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또한 그의 지속적인 지원을 바라며), 집정관들은 금박을 입힌 뿔을 지닌 하얀 소를 그에게 제물로 바쳤다. 이와 비슷한 공물은 유피테르 신전에 있는 유피테르 조각상 발 밑에 승리의 징표들을 두고 간 개선 장군들이 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개선 장군들이 개선식 행렬에서 유피테르를 상징하거나 흉내낸 것으로도 보고 있다. 유피테르에 대한 군주제, 주권의 연관성은 로마의 정부 체제가 바뀜에 따라 재해석되었다. 본래 로마는 왕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지면서, 종교적 특권도 통치 귀족 가문들인 파트리키들에게 이전됐다. 군주제에 대한 향수(鄕愁), affectatio regni)는 반역 행위로 여겨졌다. 군주제에 대한 열망을 품는다는 혐의를 받으면, 어떠한 자리에 있든 간에 처벌되었다. 기원전 5세기 "개선 장군" 카밀루스는 유피테르가 몰고 다닌다고 여겨지던 4필의 흰색 말로 이뤄진 전차 (콰드리가)를 몰고 나서 추방을 당하였다. 침공해오는 갈리아인들에 맞서 유피테르 신전에서 방어전을 펼쳐 "카피톨리누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르쿠스 만리우스가 왕처럼 행세한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 혐의로 타르페이아의 바위에서 던져지며 쳐형당하였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그의 저택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어떤 귀족도 거기서 살도록 허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칙령이 내려졌다. 카피톨리누스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은 까다로운 위치에 세워졌다: 유피테르는 왕정 시기에서부터 지속된 왕가의 힘을 상징했고, 그에게 존경을 표한 정무관들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동시에 그는 당시 금지되고, 혐오받으며, 경멸받던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계층 갈등 시기에 로마의 플레브스들은 정치, 종교 공직 자리를 요구하였다. 그들 최초의 농성 (총파업과 유사) 기간 동안에 그들은 로마에서 물러나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들이 로마로 돌아오기로 동의할때, 그들은 로마 국가 공동체 (res publica)의 통합에 대한 상징과 보증인으로서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언덕으로 가서 언덕에 대고 맹세하였다. 플레브스들은 마침내 모든 정무관과 대부분의 사제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직은 파트리키들만의 것으로 남았다. 유피테르는 로마의 공식 대중 종교에서 각자 특정한 신들을 모셔던 15개 사제들의 콜레기움의 고위 사제들인 플라멘들 중에서 파트리키들로 이뤄진 플라멘 디알리스들이 다루었다. 이 사제들의 아내인 플라미니카 디알리카스 (Flaminica Dialis)는 그들만의 의무를 갖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비슷하게 열리는 "장날"인 "눈디나이"에 유피테르에게 숫양을 제물로 바쳤다. 이 부부는 유피테르에게 스펠트밀로 만든 빵을 제물로 바치는 귀족 계층들의 특권적인 의식인 콘파레아티오를 통한 혼인이 요구되었다. 플라멘 디알리스는 일부 독특한 금지된 규정들의 제한을 받았으며, 그 중 몇몇은 신의 절대적 본질을에 비춰지는 것이였다. 예를 들어, 유피테르의 플라멘들은 "천상의 신" 유피테르의 시야 아래에 있는 하늘에 그들의 나체 모습을 피하기 위해서, 지붕 아래에서 그들의 의복과 아펙스 (머리에 쓰는 모자)를 벗었을 것이다. 플라미니카들은 유피테를 달랠때까지 매시간 번개를 보거나 천둥 소리 (유피테르의 독특한 악기)를 들었고, 평범한 일상 생활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피테르의 플라멘들의 일부 특권은 유피테르의 절대적 본질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크러슬 의자에 앉았고, 릭토르보다 의전이 앞선 유일한 사제 (사케르도스)이자 원로원 의원에 자리가 있었다. 다른 규정들은 의식상 순서성과 군사 업무로부터의 분리등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말을 타거나 로마의 신성한 경계 (포메리움) 밖에 있는 로마 군대를 보는 것이 금지되었다. 성스러운 맹세를 상징하는 신을 섬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맹세를 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으로 허용되었다 (파스). 시체, 장례식, 장례용 불, 날고기등 어떤 죽은 것이나 죽음과 관련된 것들과 접촉해서도 안됐다. 이 일련의 제한들은 유피테르의 특징인 생명의 충만함과 절대적 자유를 반영한다. "아우구레스 푸블리키" (augures publici), 아우구르들은 모든 창업식 행사에 참여한 사케르도스 무리이며, "아우구리아" (auguria)라고 알려진 의식 행위를 행했다. 이들은 로물루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피테르의 의지를 유일하게 해석하는 자들로 여겨지며, 로마인들이 국가 권위의 원천을 유피테르로 보았기에, 아우구르들은 로마 정부에게 그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였다. 페티알들은 로마의 국제 문제에 대한 종교적 행정을 다루는 20명의 단체이다. 그들의 업무는 외국과 로마와의 관계에서 신들의 보호를 약속받는 복잡한 절차들인 페티알 법률 (ius fetiale)을 지키고 적용하는 것이였다. 유피테르 라피스는 그들의 행위를 보호해주는 신이며, 최고위 페티알 (pater patratus)은 강화 조약을 포함한 의식에 관여하였다. 선전 포고가 일어나면, 페티알들은 페티알 법률에서 잠재적 위반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려 천상과 지상, 지하의 신들인 유피테르와 퀴리누스들을 찾아갔다. 이들은 33일 이내에 선전 포고가 가능했다. 페티알들의 조치는 선의의 전능한 수호자인 유피테르의 권한에 해당했다. 페티알 지위의 일부 상징들은 유피테르가 존재했다. 규석은 페티알 의식에 사용된 돌로, 그들의 성소인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에 위치했다. 가끔식은 버베나로 확인됐던 성스러운 허브 (sagmina)는 그들의 의식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인근 성채 (아르크스)에서 채취됐다. 계층 갈등에서 유피테르의 역할은 종교적인 로마인들에게 반영되었다. 파트리키들은 로마의 새점을 보유함으로써 꽤나 자연스럽게 전능한 신의 지지를 주장할 수 있었고, 플레브스들은 유피테르가 정의의 원천이며, 그들의 대의 명분이 정당하기에 그가 자신들의 편이라 논쟁했다. 플레브스들의 첫 철수는 그들에게 짊어진 막대한 빚에 의한 것이였다. 법률 제도 넥숨 때문에 채무자들은 채권자들의 노예가 되었다. 플레브스들은 빚이 귀족들이 원한 전쟁의 비용 때문에 채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논쟁했다. 원로원이 전체 빚을 감행해달라는 독재관이자 아우구르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재기한 제안에 응하지 않자, 플레브스들은 안니오 강에 있는 노벤툼 다리를 건너 로마에서 북북동쪽 3마일 거리에 위치한 언덕인 성산 (聖山)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며, 보통 창자 점쟁이 점을 치던 장소였다. 결국에는 원로원이 플레브스들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을 지닌 10명으로 이뤄진 대표단을 보냈으며. 이중에는 메네니우스 아그리파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Manius Valerius)가 있었다. 다른 문서 자료들과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만들어져 1688년 아레초에서 출토된 명문에 따르면, 이 산에서 플레브스들을 내려오게 한 이가 발레리우스였다고 하며, 그후 철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올라간 언덕을 "유피테르의 땅"(Jupiter Territor)으로 축성을 하고 언덕 꼭대기에 제단을 지었다. 유피테르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은 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성산의 축성은 정상 부분만 언급됐을 것이다. 이 의식에서 아우구르 (마니우스 발레리우스로 추정)와 폰티펙스 (pontifex)의 참여가 요청되었다. 두 번째 철수는 귀족 행정관들과 사케르도스들에 의해 비밀을 유지되던 법률을 기록하기 위해 로마 시민들에게 임명된 데켐비리들의 횡포와 오만한 행위로 인해 발생하였다. 플레브스들의 모든 행정관들과 호민관은 자리에서 사임하였다. 이에 대한 결과로 12표법이 생겼지만, 민간 법률만 다루고 있었다. 플레브스들은 다시 한번 성산으로 올라갔다: 이 행위는 첫 번째 철수를 상기시키는 것 외에도 최고의 신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였다. 이 철수는 데벰비리들의 사임과 볼스키인과의 전쟁 중에서 그들의 지휘관을 버리고 알기두스 산 인근 그들의 야영지에서 탈영한 반란 병사들에 대한 사면으로 끝이 났다. 이 사면은 원로원에 의해 부여된 것이고 플레브스들의 새로운 호민관 후보로 여겨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인 퀸투스 푸리우스 (Quintus Furius, 리비우스의 버전) 또는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Marcus Papirius)가 보장하였으며, 그는 아벤티노 언덕에서 지지자들을 모았다. 권력 공백기 상황에서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역할은 종교적 배경과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tribunicia potestas)적 성격을 바탕으로 엄청난 요소였다. 학계의 대부분은 초기 시대의 로마가 신화의 양이 부족하거나 토착 신화가 그리스 신화의 영향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입장이다.. 로마 문화의 그리스화가 이뤄진 후, 라틴 문화와 도상학은 유피테르의 서술과 묘사를 제우스의 신화로 재해석하였다. 로마의 전설적인 역사에서 유피테르는 로마의 왕과 왕권과 자주 연관되었다. 유피테르는 프라이네스테에 있는 조각상 중 하나인 유노의 쌍둥이 형제로 묘사되어, 포르투나 프리미게니아가 이들을 간호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또한 프라이네스테에서 발견된 명문에서는 포르투나 프리미게니아가 유피테르의 첫 번째 자식이라고 한다. 자클린 샹포 (Jacqueline Champeaux)는 이 모순이 연이어 다른 문화와 종교가 합쳐짐에 따른 결과로 보고 있으며, 그리스 세계에서 온 영향의 파도가 포르투나를 유피테르의 딸로 만들었다. 제우스의 어린 시절은 그리스 종교, 미술, 문학에서 중요 요소이지만, 어린 시절 유피테르의 묘사는 드물고 확실치도 않다. 봄 초에 나쁜 날씨로 농작물이 위험에 빠지게 된 시기를 마주친 로마의 왕 누마는 그의 존재를 떠올리며, 신의 조언을 구하는 계획에 의존했다. 그는 술을 먹이게 하여 감금시킨 피쿠스, 파우누스 두 신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했다. 이 두 신들 (사로잡힌)은 유피테르를 불렀고, 그는 아벤티노 산에 있는 지상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이러한 이유로 "유피테르 엘리키우스" [Iuppiter Elicius])라고 불렸다. 누마가 인신공양에 대한 유피테르의 요구를 능숙하게 피한 후, 유피테르는 번개를 피하는 방법을 알기 원하던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누마에게 언급한 인신공양에 대한 대체품으로 다음을 요청했다: 양파의 비늘꼴 줄기, 머리카락, 물고기. 추가적으로 유피테르는 다음 날에 해가 뜰 때 누마와 로마인들에게 지배적인 권리를 줄 것이라 약속하였다. 다음 날, 맑은 하늘을 가로 지르는 3개의 번개를 던진 후, 유피테르는 천상에서 방패를 보냈다. 이 방패에는 각이 지지 않았기 때문에, 누마는 "앙킬레"(ancile)라고 불렀고, 이 방패가 로마의 운명을 지녔기에, 그는 진품을 숨기기 위해 많은 복제품들을 만들었다. 누마는 대장장이 마무리우스 베투리우스에게 복제품을 만들어달라 요청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품들을 살리이에게 주었다. 그의 일에 대한 보답으로 마무리우스는 그의 이름이 살리이들의 마지막 시에서 노래불러지게 해달라고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이야기에 살짝 다른 버전을 제시했는데, 이 방패의 신비로운 증여의 원인이 질병 때문이였고 로마의 지배권과는 관련이 없다고 썼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통치 기간에 종교에 대해서 경멸적인 자세를 가졌다. 그의 기질은 호전적이였고, 종교적인 의식과 경건함을 무시했다. 호라티우스와 쿠리아티이간의 대결로 알바니족을 정복한 후, 툴루스는 알바 롱가를 파괴하고 그곳의 거주민들을 로마로 추방시켰다. 티투스 리비우스가 전하는 이 이야기에서, 추방된 알바니인들이 유피테르의 성소와 연관된 그들의 옛 의식을 무시하였기에 알바니 산에 돌의 비가 내리는 징조 (프로디기움)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 징조들은 더 일어났는데, 알바니인들이 종교 의식을 수행하라는 요청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전염병이 뒤따랐고 마침내 왕 자신이 아팠다. 이에 대한 결과로, 호전적인 툴루스의 성격이 없어졌고; 그는 종교와 사소하고 미신적인 관행에 의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누마가 기록한 "유피테르 엘리키우스"를 불러들이는 종교 의식을 담은 책을 찾아냈다. 그는 의식을 시도했지만, 그는 의식 행위를 잘못 실행하여, 유피테르가 번개를 집어던져 그의 저택을 불태우고 툴루스를 죽였다. 타르퀴니우스가 그의 친종족들인 타르퀴니이인에서 실패한 후, 정치에서 그의 행운을 시험하기 위해 향하고 있었을때, 원을 돌며 소리를 지르며 날던 독수리 한 마리가 급강하 하여 그의 모자를 빼앗아다가, 다시 모자를 두고 날아갔다. 타르퀴니우스의 아내 타나퀼은 독수리가 하늘에서 날아왔고, 유피테르가 독수리를 보낸 것과 그의 모자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머리에 위치한 의류)를 건드린 것을 보고 이 징조를 그가 이 새를 기반으로 하여 왕이 될것이라 해석했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카피톨리움 베투스라는 건물을 지으며, 로마에 카피톨리노 3신을 전파했다. 마크로비우스는 타르퀴니우스가 지닌 사모트라케의 신비로운 믿음에서 이러한 성향이 발생됐다고 썼다. 유피테르에게 바쳐진 제물은 (호스티아이)은 소 (거세된 숫소), 양 (이데스, 오비스 이둘리스 때), 거세한 숫양 (1월의 이데스 때)이였다. 이 동물들은 새하얀 것이여만 했다. 양의 성별에 대한 의문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양은 일반적으로는 숫양이였지만, 오래된 축제 개회식에서 플라멘 디알리스들은 제물로 썼다. 이 규칙에는 플라미니카 디알리스들이 눈디나이에서 보여준 것에서는 숫양을 제물로 쓰는등 많은 예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포에니 전쟁 위기 당시에는 유피테르에게 그 해에 태어난 짐승들을 매번 제물로 바쳐졌다.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로마의 캄피돌리오 언덕에 서있었다. 그곳에서 유피테르는 개인 신으로서 숭배받았고, 유노와 미네르바는 카피톨리움 3신으로서 숭배받았다. 이 건물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짓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마지막 로마의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시기에 완료되어 로마 공화정 (기원전 509년 9월 13일) 초기에 개관되었다. 유피테르가 전차 기수로 되어있고 콰드리가 형태로 만들어진 4필의 말 조각상이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거대한 유피테르 조각상이 건물 내에 위치했고; 축제 때에 유피테르 조각상의 얼굴을 붉은 색으로 칠했다. 이 신전내 (또는 인근)에는 맹세한 서약이 이뤄진다는 유피테르 라피스: 유피테르의 돌이 있었다. 카피톨리노 유피테르 신전은 아마 속주 지역에 위치한 그의 신전들의 건축 모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 지역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지었을때, 유피테르의 신전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터 위에 세워졌다. "유피테르 스타토르" (Iuppiter Stator)에게 헌정된 신전 두 개가 로마에 있었다; 첫 번째는 제3차 삼니움 전쟁 이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기원전 294년에 짓고 헌정하였다.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하는 옛 입구인 무고니아 문 (Porta Mugonia) 아래에 있는 노바 가도 (Via Nova)에 위치했었다. 로물루스에게 바쳐졌다는 전설도 있다. 유피테르 숭배가 비문으로 증명되었기에 유피테르의 초기 신전 (파눔)이 이었을 수 도 있다. 오비디우스는 그 신전의 봉헌식이 6월 27일에 있었다고 하지만, 원래 날짜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복원된 이후 재봉헌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두 번째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는 기원전 146년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인근에서 개선식을 한 퀸투스 카이킬루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Quintus Caecilus Metellus Macedonicus)가 짓고 헌정하였다. 주랑 현관 (포르티쿠스 옥타비아이)으로 복원된 유노 레기나 신전과 연결됐었다. "유피테르 빅토르" (Iuppiter Victor)는 기원전 295년 삼니움 전쟁 기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짓고 헌정했다.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비문 "D]iovei Victore"이 발견된 퀴리날리스 언덕이나 Liber Regionum (regio X, aedes Iovis Victoris)에서의 Notitia에 따른 팔라티노 언덕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4월 13일 또는 6월 13일에 헌정되었던 것 같다 (오비디우스의 달력에 따르면 각각 유피테르 빅토르와 유피테르 인빅투스의 날). 제정 시대의 비문들은 팔라티노 언덕에 "유피테르 프로푸그나토르" (Iuppiter Propugnator )라는 알려지지 않은 신전이 있었음을 밝혔다. "유피테르 라티아리스" (Iuppiter Latiaris) 숭배 의식은 유피테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숭배 의식이다: 알바 롱가의 패권 하에서 라틴 동맹의 최고 수호자로서 유피테르에 대한 숭배는 알바누스 산 꼭대기 인근에서 먼 옛날부터 행해졌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알바 롱가를 파괴한 이후 이 숭배 의식은 잊혀졌다. 유피테르는 엄청난 바위 비를 통해 그의 불만을 나타냈다: 로마 원로원이 알아내기 위해 보낸 조사단도 바위 비를 맞딱드렸고 알바누스 산의 정상에 있는 숲에서 알바니인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른 유피테르에 대한 종교적 행위를 행하기를 요청하는 커다란 목소리를 들었다. 이 사건으로 로마인들은 9일 간의 축제를 벌였다 ("눈디나이", nundinae). 그렇더라도 질병이 발생하여: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병에 걸리고 마침내 유피테르의 벼락을 맞고 사망함으로써 끝이 나게 되었다. 이 축제는 로마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의해 원시적인 의식 형태로 다시 행해졌다. 페리아이 라티나이 또는 라티아르는 고대 라틴족들과 알바니인들의 축제 (panegyris)이다. 이 라틴족들의 고대 종교 전통에는 로마의 헤게모니를 뿌리체 뽑고 그들의 힘을 되찾으려는 목표를 하였다. 본래 숭배 의식은 바뀐거 없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의식의 일부 옛 특징들로 증명되고 있다: 의식에서 포도주를 배제하고 우유와 치즈를 공물로 바치며, 경기중 하나로서 춤 (몸 흔들기)을 추는등. 춤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의식 중 하나이며 매우 널리 퍼져 있다. 라티아르에서 춤은 나무에서 이루어졌고 승자는 당연히 가장 많이 흔들은 자였다. 이 의식은 알바니인들이 카이레의 왕 메젠티우스에 맞선 전투에서 실종된 라티누스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의식은 지상과 하늘에서 그를 찾는 것을 상징한다. 춤 뿐만 아니라 관례적으로 우유를 마시는 것은 유년기를 기념하고 의식적으로서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으로 고려되고 있다. 의식의 가장 최신 형태에서 로마인들은 로마에서 전래한 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가져왔고 모든 축제의 참가자들은 이 소고기를 분배받았는데, 이 의식은 "카르넴 페테레" (carnem petere)로 알려졌다. 참가자들이 있는 자치구에서는 다른 게임들도 열렸었다. 로마에서 열린 전차 경주 경기 (quadrigae)는 유피테르 신전에서 출발됐다: 승자는 향쑥으로 만든 증류주를 마셨다. 이 경기는 베다 문화권의 의식인 바자뻬야와 비교된다: 그곳 의식에서는 17개의 전차가 경기를 펼치고, 그 경기에서 이겨야만이 왕이 마두 (소마) 한 잔을 마시는 걸 허용한다. 축제는 적어도 4일 동안은 계속되었고, 니부어에 따르면 6일 동안이라는 가능성도 있다고 하며, 하루 당 6개의 라틴인과 알바니인들의 데쿠리아이가 참여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들에서는 47개나 53개의 자치구들이 이 축제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축제에 참여한 곳들의 지명들이 플리니우스의 NH III 69와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니소스의 AR V 61 기록들 사이에 너무 큰 차이가 있다). "라티아르"는 로마의 정치 생활에서 중요한 특징이 되었으며, 이들은 "페리아이 콩켑티바이"로 그들의 날짜는 매년 다양했다: 로마의 집정관들과 고위 행정관들은 국정이 시작하기 잠시 이 행사에 참여할 것이 요구되었으며, 본래는 3월 15일이였다: 페리아이는 일반적으로 4월 초에 열렸다. 로마인들은 페라이아가 끝이 나기전에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만약 페리아이를 도외시하거나 의식을 벌이지 않을 경우, 라티아르를 완전하게 반복적으로 해야만 했다. 제정 시기의 명문에서는 이 축제가 데켐비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하였다.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 비소바는 알바누스 산의 신전이 개선식에 대한 분명한 관계를 지닌 유피테르 신전과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기원전 231년 이래로 일부 개선 장군들은 로마에서 제1의 같은 법적 특성을 지닌 유피테르 신전에서 개선식을 벌였다. 이데스 (한 달의 중간 지점, 만월)는 그 날에 빛이 밤낮으로 빛 났기 때문에 유피테르를 신성하였다. 일부 (또는 모든) 이데스는 유피테르를 신성시 여기는 페리아이 요비스였다. 이데스에는 하얀 양 (ovis idulis)이 로마의 신성한 길을 따라 카피톨리노의 성체로 이끌려 유피테르의 제물로 바쳐졌다. 유피테르의 두 개의 에풀라 요비스 축제가 이데스 때 옵티무스 막시무스, 빅토르, 인빅투스, 스타토르 (가정)등 그의 신전들에서 열렸다. 눈디나이는 매 9일마다 반복되었으며, 달력을 1주일과 비슷한 시장 주기로 나누었다. 장날은 시골 사람들 (파기)에게 도심에서의 판매 기회와 3일마다 공개적으로 게시되는 종교 및 정치 칙령에 대해 통보를 받게 해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행사는 로마의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도입했다고 한다. 유피테르의 고위 성직자 (플라미니카 디알리스)들은 유피테르에게 양을 제물로 바치며 축성을 하였다. 공화정 시대 당시에는 로마 역법에 다른 어떤 신들보다 유피테르에게 헌정된 공휴일들이 있었다. 포도 재배와 포도주 축제는 포도가 악천후에 특히 취약하기 때문에 유피테르에게 바쳐졌다. 뒤메질은 취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힘을 가진 포도주를 베다 신화의 소마와 유사한 "왕의" 음료로 묘사했다. 세 개의 로마의 축제가 포도 재배와 포도주와 연관되었다. 8월 19일 시골에서 열리는 "비날리아 알테라"는 수확 전에 포도를 숙성시키기에 좋은 날씨를 달라고 요청했다. 포도가 익었을 때, 양을 유피테르에게 제물로 바쳤고 "플라멘 디알리스"들은 수확하는 첫 포도를 꺽었다. 10월 11일에 열리는 "메디트리날리아"는 포도 수확의 끝을 알렸다; 새로운 포도주가 압착되어, 맛을 보고, 발효공정을 위해 오래된 포도주와 섞었다. "파스티 아미테르니니" (Fasti Amiternini)라는 축제도 유피테르에게 해당하는 축제였다. 후기 로마의 사료에는 축제의 명칭을 설명하기 위해 여신인 "메디트리나" (Meditrina)를 만들어냈다. 4월 23일에 열리는 "비날리아 우르바나"에서 새로운 포도주를 유피테르에게 공물로 바쳤다. 다량의 포도주가 카피톨리노 언덕에 위치한 베누스의 신전 인근의 배수로에 부어졌다. 2월 24일에 열린 레기푸기움 ("왕의 도주")은 유피테르에게 신성한 날인 7월 5일에 열리는 포플리푸기아와의 연관성이 자주 논의되었다. 레기푸기움은 2월 23일에 열린 "유피테르 테르미누스" (유피테르의 경계) 축제 다음 날에 열렸다. 후기 로마의 골동품 전문가들은 레기푸기움을 로마의 왕을 축출시키는 걸 기념한 것이라고 잘못 해석하였지만, 이 축제에서의 "왕"은 의식으로 새해 (옛 로마 역법에서는 3월 1일)와 관련한 힘의 부활과 약화시키는걸 조절했던 렉스 사크로룸이라고 알려진 사제들이라고 알려져있다. 이 힘의 일시적인 공백 (공위시대로 해석)은 레기푸기움이 열리는 2월 24일과 새해가 다가오는 3월 1일 사이에 발생했고 (달의 주기가 태양의 주기와 일치했다고 여겨지던 때), 겨울의 두 달 동안에 불확실적인 변화는 끝이 났다. 일부 학자들은 이 행사때의 전통적인 정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피테르에게 신성한 날인 포플리푸기아 ("군대의 길")는 그 해의 후반기를 기념했던 것으로 보이며; 율리우스력으로 대체하기 이전에는 매달들을 숫자들로 퀸틸리스 (다섯 번째 달)에서 데켐베르 (10번째 달)까지 이름 붙였다. 포플리푸기아는 성인 남성이 정결 의식을 가지기 위해 모인 "초기 군사 의식"으로, 그들은 의식으로서 로마의 외부 적들을 몰아냈다. "에풀룸 요비스" (epulum Iovis, "요베의 축제")라 불리는 두 개의 축제가 있었다. 하나는 9월 13일에 열리며, 유피테르의 카피톨리움 신전의 설립을 기념하는 날이였다. 또다른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 축제는 루디 플레베이이의 일부로서, 11월 13일에 열렸다. 기원전 3세기 에풀룸 요비스는 렉티스테르니움가 유사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는 9월과 11월의 두 에풀라 요비스가 하루 지난 뒤 (dies ater "어두운 날"로 여겨졌던 이 날은 전통적으로 비록 nefas는 아니었지만 불행한 날으로 간주되었다)에 열렸다. "루디 마그니" (Ludi Magni)라고 이름 붙여진 9월의 경기는 원래라면 매년 열리는 것을 아니였지만, 시간이 흘러 매년 열리는 "루디 로마니" (Ludi Romani)가 되어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행렬을 가진 후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에게 헌정된 것이며,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피테르 숭배와 관련이 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개선식과의 유사함으로 이해했고, 뒤메질은 로마인들이 지닌 공통적인 에트루리아적 기원으로 이것을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기를 맡게 된 행정관들은 개선 장군 복장을 했고 폼파 키르켄시스는 개선식 행렬을 닮았다. 비소바와 몸젠은 로마인들이 위의 이유로 이 행사를 개선식의 분리된 일부라고 주장했다 (뒤메질은 이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디 플레베이" (Ludi Plebei)는 11월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에서 열렸다. 몸젠은 루디 플레베이의 "에풀룸" (epulum, 성찬)이 루디 로마니의 모델이라 주장하였지만, 비보사는 이 가정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루디 플레베이는 기원전 534년에 실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행사와 유피테르 숭배 의식의 연관성은 키케로가 증명했다. 12월 23일에 열린 이 축제는 아카 라렌티아 (또는 라렌탈리아)를 기리는 주요 의식에 집중된 날이며, 일부 고위 성직자들 (플라멘 퀴리날리스, 폰티프들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도 참여하였다. 파스티 프라이네스티니는 마크로비우스가 그러길 "요비스의 축제"라고 하였다. "파렌타티오" (parentatio) 의식이 유피테르 축제인지 혹은 같은 날에 열린 다른 축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소바는 유피테르와 그의 플라멘들이 사후 세계 또는 죽음의 신들과 연관이 없었기에 이 행사들의 연관성을 부인하였다. 라틴어 명칭 Iuppiter 는 고 라틴어 호격 *Iou 와 pater ("아버지")에서 기원했으며 고 라틴어 주격 *Ious로 대체되었다. 요베 (Jove)는 고 라틴어 사격의 어간 Iov- 를 기반으로 한 덜 사용되는 영어 형태이다. 언어학 연구 자료들은 *Iou-pater 형태가 인도유럽어 주격 *"Dyēu-pəter" (의미 "아버지 하늘신"; 주격형태: *"Dyēus-pətēr").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로마 내 유피테르의 옛 명칭은 Dieus-pater ("하늘의 아버지"), 그 이후에는 Diéspiter (디에스피테르)였다. 19세기 언어학자 게오르크 비소바는 이 명칭들이 Diovis, Diovis Pater에 개념적 - 언어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fulgur Summanum (밤의 천둥)와 플라멘 디알리스 (Dius, dies에 기반)반대되는 Vedius-Veiove와 fulgur Dium라는 유사한 형태를 비교하였다. 행성 (모음곡) 《행성》(The Planets, Op. 32)은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가 쓴,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이다. 작곡자에게 점성술을 가르쳐 준 클리포드 백스의 제안으로 1914년에 착상하여 1916년에 작곡을 마쳤으며 1920년 10월 10일 버밍엄에서 애플비 매슈스(Appleby Matthews)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도미타 이사오의 신시사이저 편곡이 있다. 이 중 〈화성〉은 넥스트의 《Lazenca - A Space Rock Opera》 앨범에 편곡돼 수록되어 있고,〈목성〉의 도입부는 MBC 뉴스데스크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홀스트가 '행성조곡'의 작곡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13년 그의 친구 클리포드 백스가 점성술에 관해 소개하는 데서 출발한다. 1925년 출판된 클리포드 백스의 회고록인 'Inland Far'에서 그는 1913년 3월의 어느 날에 그의 형인 아놀드, 밸포어 가디너 그리고 구스타브 홀스트와 가졌던 휴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클리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홀스트는 나에게 그가 막 점성술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알렸으며, 그러한 성향의 화제거리로 오랜 동안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가디너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그를 상하게 할 문제는 없었다." 책의 뒤에서 클리포드는 별도로 언급하기로는 홀스트에게 점성술을 소개한 이는 자신이었다고 적었으며, 홀스트가 점성술로부터 끌어낸 영감을 소진해 버리고 나서 그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홀스트의 딸 이모겐은 '행성조곡'의 원고 사본판 서문에서 그녀의 부친이 읽은 책인 1913년 런던에서 출판된 Alan Leo의 '천궁도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적었다. 사실 Alan Leo는 1차 대전 전과 전쟁 중에 점성술을 장려하는 일종의 대중적인 책과 인쇄물의 저자였다. 홀스트는 이 책을 보고(비록 친구들의 점괘를 맞추는 것 뿐이지만) 일생동안 '점쟁이' 노릇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Leo의 책에는 '화성 전쟁의 신', '토성 수확자' 처럼 각 행성의 성격에 대해 간단한 기술이 되어 있었고, 홀스트는 이에 착안하여 자신의 작품에도 각 행성 별로 부제를 붙였는데, '해왕성'에 붙인 '신비로운 자' 만은 Leo의 기술을 그대로 갖다 붙인 제목이었다. 1908년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기간에 영국에서는 드뷔시와 라벨에 의한 새로운 음악이 런던에서 연주(1908년 "바다", 1909년 "야샹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1912년 "어미 거위")되었고,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뤼스를 이끌고 와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1912),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모두 1913년),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1914)를 더했고, 작곡자의 관현악적 색채는 선명하게 확대되어서 영국의 음악적 조직의 지배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은 1914-16년 사이에 작곡된 '행성'에 홀스트에 의해 내면화 되었다. '행성'의 필사본에는 단순하게 '대규모 관현악을 위한 7개의 작품'이라는 제목이 달렸었다. 이미 언급한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와는 별개로, 1914년 8월 이전 런던에서 주목할 만한 관현악 초연은 1912년 9월 12일 헨리 우드 경의 지휘로 초연된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1914년 1월에 쇤베르크 자신의 지휘로 한번 더 연주되었다.)이었다. 최근의 몇몇 주석자들은 홀스트의 작곡의 시작점이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악보의 예로 보아도 된다는 의견을 냈다. 홀스트가 첫 연주회에 참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수첩 속의 기술은 그가 두 번째에는 틀림없이 참석했었음을 제시한다. 홀스트 생가 박물관의 관리자인 Lowinger Maddison은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의 문고판 총보는 홀스트가 가장 아끼던 소지품들 중에 하나로, 그가 작곡시에 그것을 곁에 두었음을 지적했다.('금성'에는 쇤베르크의 악보와 유사한 첼레스타 악구가 나타난다.) 홀스트는 '행성'을 2년 혹은 3년 간 다듬었지만, 마지막으로 쓰여진 '수성'을 제외하고 그는 그것들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순서대로 썼다는 점은 흥미롭다.(1차대전 전에 명왕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행성'은 실제로 거의 2년의 기간이 넘게 작곡되었다. 홀스트는 "그것은 마치 여인의 뱃속의 아기처럼 ... 2년 동안, 스스로 점차 확실하게 형태를 이루듯이" 그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자랐다고 말했다. 1914년에 먼저, 집요한 운율적 행보의 '화성'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발발에 대한 반작용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홀스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6월에 그의 스케치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후 전쟁 중의 첫 가을에 '금성'(평화를 가져오는 자)이, 그리고 '목성'(즐거움을 가져오는 자)이 나왔다. 1915년의 여름과 가을에 '천왕성'과 '해왕성'을 끝냈는데, '수성'은 1916년 초까지도 마치지 못했다. 그것은 홀스트가 작곡을 매우 천천히 했고 그의 오른팔의 신경염 때문에 세인트 폴 학교의 전(前)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팀의 사보가들의 봉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손으로 작성된 원고는 그의 딸 이모겐이 사본판으로 출판하였다. 홀스트 자신은 '행성'을 실제로 들어볼 수 있을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차 대전 종료 1주일 전 무렵에 그가 살로니카에 군대 음악교육계의 음악 간사로 가게 되었고, 그의 후원자이던 밸포어 가디너가 그에게 이별의 선물로 퀸즈 홀에서 퀸즈 홀 오케스트라로 '행성'의 연주를 주선하는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던 것이다. 홀스트는 즉각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29살의 야심있는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마침 그는 작품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 에이드리언, 내가 YMCA룰 위해 곧 살로니카로 가게 되었어. 밸포어 가디너가 은혜롭게 나에게 이별 선물로 퀸즈 홀과 퀸즈 홀 오케스트라 전부를 일요일 아침에 모두 주셨어. 우리는 '행성'을 할 예정이고 자네가 지휘를 해 줘야겠어." 볼트는 이미 전 해에 그 작품의 2대의 피아노 편곡판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홀스트의 청을 바로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행성'의 초연은 1918년 9월 29일에 이루어졌는데, 거의 '개인적인' 연주회였던 터라 초대된 청중들만 온 탓에, 넓은 퀸즈 홀은 절반도 못 채웠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대 성공이었다. 홀스트의 딸 이모겐에 따르면 "회랑에 있던 파출부들 조차도 넋을 잃을 정도" 였다고 하면서, '목성'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그들도 빗자루를 내려 놓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홀스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에 난처해 하였고, 연주회 후 볼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자네는 영광에 둘러싸였고 [중략] 자네의 성공은 내가 말과 글로써 형언하기 건방질 만큼이나 확실하다네. 신의 가호가 있기를!" 홀스트는 또한 '행성조곡'의 악보를 출판하면서 서문에 자신과 그 작품의 성공은 아드리안 볼트 덕분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볼트는 왕립 음악협회의 2차례 시즌의 두 번째 연주회인 1919년 2월 27일에도 초대되어 '행성조곡'의 5개 악장만을 연주하였다(대중에의 전곡 초연은 1920년 11월 알버트 코츠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볼트는 세계에 걸친 객원지휘 뿐만 아니라 버밍엄(1924-30 및 1959-60), BBC 교향악단(1930-50) 그리고 런던 필하모닉(1950-57) 등의 수석 지휘자로서의 경력 중에도 계속 '행성조곡'을 지휘하였고 녹음도 5회나 남겼다. 《행성》은 태양계의 일곱 행성에 해당하는 로마 신화의 신을 각각 주제로 한 일곱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천문학이 아닌 점성술 상의 행성 배열로 나누었고, 행성과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그리스로마 신화 신들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고, 곡에도 물론 반영되어 있다. 점성술의 이미지 외에 동시대에 작곡된 곡들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는데, 이교적인 기괴한 스토리와 거대한 관현악 편성, 미칠듯이 변하는 박자와 불협화음의 향연으로 스캔들이 되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이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 클로드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 와 '야상곡' 등의 영향이 종종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음악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 드뷔시와 달리 곡 자체를 크게 놓고 보면 그리 혁신적인 것도 아닌데, 오히려 대편성의 관현악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굉장히 다채로운 음색을 뽑아내는 면모 덕에 그런 인상을 받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이 곡은 영국 음악의 전통에 깊게 뿌리박고 있고, '목성' 의 중간부 선율은 애국적인 내용의 가사가 붙어 '내 조국이여, 나 그대에게 맹세합니다'(I vow to thee, my country) 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는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악명이 높았고, 초연 때의 연주는 연습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꽤 어설펐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개량되었던 녹음 기술 덕에 홀스트 자신이 직접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두 종류의 음반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것마저 한정된 녹음 시간과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곡의 독특한 색채는 거의 죽어버린 소리가 나왔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음반 포맷이었던 SP는 한 면당 기껏해야 3분~4분 반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었다. 그런 탓에 대곡을 녹음할 경우, 판 숫자를 줄이려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등 녹음 스탭의 요청 때문에 빨리 내달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압류해온 오픈릴 테이프와 그 레코더의 개량 작업, 그리고 스테레오 녹음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녹음의 질이 부쩍 좋아진 덕에, '스펙터클한 레퍼토리' 를 찾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음반 취입곡이 되었다. 다장조 5/4박자. 제시부-발전부-재현부-종결부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 - 특정 패턴의 이른바 "오스티나토" 리듬이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가운데 호른에 의한 제 1주제("da --- da da ---")가 시작된다. 제 1주제는 반복되면서 점차 복잡하게 발전하며 정점에 이른 뒤, 좀더 격렬한 느낌의 오스티나토 리듬을 타고 제 2주제("da - dada - da")가 등장하여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이 제 2주제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후 발전부로 이어진다. 발전부 - 행진곡 풍의 리듬을 타고 테너 튜바에 의해 제 3주제가 나타나고, 이 제 3주제는 확대 변형된 후 저음 현에 의해서 제 2주제가 다시 나타나 질질 끄는 듯한 느낌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금관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전 관현악에 의해 오스티나토 리듬이 나타나면서 재현부가 시작된다. 재현부 - 전 관현악의 총주로 오스티나토 리듬을 필두로 제시부의 제 1주제와 발전부의 제 3주제가 차례로 등장한 후 제 2주제가 등장하여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다 정점에 이르러서 금관과 오르간의 코랄이 포르티시시모로 등장하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 - 금관과 오르간의 마치 추락하는 듯한 느낌의 코랄이 잦아들면서 잠잠해지다가 다시 현악과 목관의 상승 음형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변형된 오스티나토 리듬의 팀파니와 금관이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데, 미국의 작곡가 존 윌리엄스는 자신이 작곡한 '스타워즈 영화부수음악'의 주제곡에서 이 부분을 차용하기도 했다. 내림마장조, 4/4박자. 호른을 제외한 금관과 타악기가 숨을 죽인 채, 조금 긴 호흡의 호른의 제 1주제가 개시된다. 이어서 목관이 가세하고 하프, 현악 합주로 see-saw음형의 제 2주제가 이어진다. 잠시 종결하는 듯한 후 다시 제 1주제가 나타나면서 고조된다. 이어 나타나는 감미로운 느낌의 첼로의 분산화음이 상승하면서, 호른과 목관의 유영하는 느낌의 반주를 타고 바이올린 독주가 고음역을 한가롭게 노래하는 제3주제가 이어진다. 한차례 클라이막스가 있은 후, 바이올린 독주와 목관, 호른의 반주가 교대 혼합되어 진행한다. 다시 제2주제, 제1주제가 나타나고, 앞에서 나왔던 첼로의 분산 화음이 한 옥타브 높게 등장한 후 제3주제가 다시 나타난다. 하프와 목관의 분산화음이 어우러지며 클라이막스에 이른 후 첼레스타의 속삭이는 듯한 분산화음에 호른이 see-saw음형을 노래하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고음으로 이어지고 흩어지듯이 사라진다. 내림나장조, 8/6박자. 비록 홀스트는 그의 계획에 독일 교향곡의 어떠한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없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느린 악장에 이어지는 스케르초이다. '화성'의 집중된 음향의 무게는 다시 멀어졌고, 목관악기와 약음기를 낀 현의 반짝이는 대비는 주목할 만한 발빠른 분위기를 창줄한다.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의 목관의 빠른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면서 하프의 달리는 느낌의 연주에 이어지면서 고조되다가 호른의 코랄로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분이 잠잠해진 후, 날아다니는 느낌의 목관이 다시 나타나고 현악기의 달려가는 듯한 악구가 고조된다. 팀파니의 빠른 패시지를 타고 목관이 연주되다 사라지고 첼레스타와 하프, 목관악기들이 어우러지며 고조된 후 조용히 끝맺는다. 다장조, 2/4박자. '화성'과 마찬가지로 소나타 형식이다. 제시부는 바이올린의 분산화음을 타고 호른이 귀에 익숙한 제1주제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이 주제는 오래 전에 모 방송국에서 저녁 9시 뉴스의 시그널로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목성'은 중간부의 아름다운 선율과 더불어 친근감이 드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목관의 분산화음이 더해지고 다른 금관들도 합세하여 한차례 더 반복된다. 이어 전 관현악이 분위기를 일신한 후 반복과 변형을 거듭하며 발전한다. 그후 제2주제인 3박자의 리듬이 반복되면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제1주제 등의 단편들이 나타나면서 제시부는 점차 잦아든다. 이어지는 발전부는 금관에 의해서 3박자의 유려한 선율이 전개되는데, 후에 홀스트는 이 선율에 'I Vow to Thee My Country'의 가사를 붙였다. 한껏 고조된 발전부가 끝나고 이어지는 재현부는 제시부의 선율들이 다시 순서대로 등장하여 부풀어 오르면서 종결부로 이어진다. 종결부는 하프와 현악기의 물결치는 듯한 아르페지오를 타고 저음 금관과 저음 목관에 의해 발전부 선율이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금관의 기상곡 풍의 팡파르가 등장하면서 끝맺는다. 다장조, 4/4박자.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곡상을 풀어가는 교향시의 성격이다. 플루트와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조용히 시작하면서 마치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듯이 '화성'의 제 1주제가 들어간 음형(이하 "A음형"이라 칭함)이 더블베이스에 의해 나타난다. 목관이 이 A음형을 반복하고, 점차 현악기군과 목관이 더해지고 금관이 지속음을 내면서 멎는 듯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으로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행진곡 풍의 리듬을 피치카토로 연주하기 시작한다. 의욕적인 출발의 느낌을 주는 A음형의 금관의 화음이 상승, 하강을 반복하면서 고조되다가 하프와 현의 잡아채는 듯한 리듬에 목관이 처음에는 순응하다가 점차로 저항하는 듯이 확대되면서 상승한다. 확대된 목관이 점차 고조되어 금관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저항을 이겨낸 듯 see-saw 음형의 행진 리듬으로 바뀐다. see-saw 음형과 A음형이 혼합되어 반복되면서 점차 침잠하는 듯이 잦아들고 마치 고독한 승자의 모습을 묘사하듯 플루트와 하프의 투명한 울림만이 남는다. 오르간의 지속음과 하프와 목관이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금관의 see-saw 음형이 명상적인 느낌을 이끌어 내며 천천히 음색을 변화시켜 간다. 마침내 모든 욕심으로부터 초연해진 듯이, 음악은 서서히 높은 곳을 향해 사라진다. 다장조, 6/4박자. 서주는 트럼펫과 테너 튜바, 베이스 튜바에 의해 "솔-미flat-라-시" 의 네 음으로 시작한다. 알렉산더 깁슨/RNO(Chandos) 음반의 내지 설명에 의하면. 이 네 음은 홀스트의 이름(GuStAv Holst)에서 따 온 것이라는 Malcolm MacDonald의 주장도 있다. 금관에 의해 제시된 네 음은 테너튜바와 베이스튜바가 모방하다가 팀파니에 의해 제지당하면서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어서 바순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다른 목관들도 차례로 합류하고 더불어 속도도 빨라진다. 점차 고조된 뒤, 바순에 의해 다른 주제가 나타나고, 이 주제를 다른 목관들이 따라 하면서 확대 발전한다. 이어 금관에 의해서 '화성'의 제 2주제가 나타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절정에 다다른 후 점차 가라앉는다. 여기까지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가 카오스로부터 여러 신과 물질을 창조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이스 튜바에 의해서 서주에 나왔던 네 음이 다시 등장하고, 새로운 주제의 행진곡이 등장하면서 확대 변형 발전하면서 점차 고조된다. 온갖 타악기들이 난무하는 소란스러운 선율로 한동안 정신없이 연주하는데, 마치 바람기를 억제하지 못한 우라노스의 행각(?)을 보는 듯하다. 전 관현악의 코랄과 함께 오르간이 거칠은 음향으로 등장하면서 모두 침묵하고 눈치를 살피는 듯한 하프의 see-saw 음형이 마치 가이아의 사주를 받은 제우스와 맞선 우라노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침내 일격을 가하는 제우스의 모습이 오르간과 전 관현악에 의해 연주되고, 비참하게 사라져 가는 우라노스의 모습이 하프의 see-saw 음형으로 표현되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다장조, 5/4박자. 제목에 걸맞게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시작한다. 하프와 다른 목관들이 선율을 따르며 발전하고, 금관이 부드럽게 지속음으로 받쳐준다. 이어서 일렁이는 느낌의 첼레스타와 하프의 아르페지오를 타고 팀파니, 심벌즈, 사이드 드럼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목관 금관의 지속음이 신비로운 느낌을 채색하다가 점차 가라앉는다. 저음 현의 지속음이 깔린 채 베이스 오보에와 바순의 느릿한 상승을 다른 목관들이 이어받으며 반복하는 중에,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한 2부 여성합창이 보칼리제로 지속음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호른이 see-saw음형으로 화음을 연주하고,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 고조되었다가 사라지면, 박자를 세는 듯한 느낌의 하프를 타고 여성 합창이 앞서의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연주했던 선율을 재현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여성합창이 쉬는 사이 목관과 금관의 지속음과 타악기의 부드러운 트레몰로와 하프 및 첼레스타의 아르페지오로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여성합창이 다시 등장하여 see-saw음형을 연주하면서 하프가 간간이 받쳐주다가 여성합창만이 연주된다. 이 부분에서 여성합창이 있는 곳의 문은 서서히 닫히도록 악보에 지시되어 있는데, 마치 보이저 2호가 마지막으로 해왕성 사진을 전송하고는 은하계 바깥으로 사라져 가듯이 여성합창도 점점 멀어진다. 1930년 명왕성이 발견되었는데, 홀스트는 명왕성을 위한 곡을 쓰는 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00년 할레 오케스트라(Hallé Orchestra)의 위촉으로 콜린 매슈스가 〈명왕성, 새롭게 하는 자〉()를 써서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했다. 매슈스는 해왕성의 종결 부분을 명왕성으로 넘어가도록 고쳤다. 명왕성이 포함된 《행성》은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2000년 5월 11일 맨체스터에서 초연했다. 2006년 8월 국제천문연맹이 명왕성의 분류를 행성에서 외행성으로 바꾸면서 《행성》은 다시 지구를 제외한 모든 태양계의 행성을 다루는 곡이 되었다. 플루트 4(3, 4번은 피콜로, G조 베이스 플루트 겸함.), 오보에 3(3번은 베이스 오보에 겸함),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4, 바순 3, 콘트라바순, 호른 6, 트럼펫 4, 트롬본 3, 튜바, 유포니움, 팀파니 2, 트라이앵글, 작은북, 탬버린, 심벌즈, 큰북, 탐탐, 튜블러 벨, 글로켄슈필, 첼레스타, 자일러폰, 하프 2, 오르간, 2부 여성 합창(무대 뒤) LaTeX LaTeX( )은 문서 조판에 사용되는 프로그램이다. 도널드 커누스가 만든 TeX을 쉽게 사용하기 위하여 1984년에 레슬리 램포트가 만든 매크로이다. TeX을 직접 사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LaTeX을 이용하여 문서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LaTeX 소프트웨어는 LaTeX Project Public License(LPPL)로 제공되는 자유 소프트웨어이다. 현재, OS X과 솔라리스 등의 유닉스, 리눅스와 BSD 계열 OS 등의 UNIX 호환 OS,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등 다양한 OS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최신 버전은 1993년 발표된 LaTeX2e이다. 구버전인 LaTeX 2.09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LaTeX2e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좋다. LaTeX2e 공식 로고는 formula_1와 같이 표기하고, 이 같은 표기가 불가능한 텍스트 또는 전자 우편의 경우에는 "LaTeX2e" 또는 "LaTeX 2e"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다. 아래는 LaTeX 입력의 예이다. 이 입력은 오른쪽 그림처럼 출력된다. 안녕하세요? 위의 코드로도 한글을 조판할 수 있으며 이보다 더 다양한 방법들은 KTUG Wiki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널드 커누스 도널드 어빈 커누스(Donald Ervin Knuth, , 1938년 1월 10일 ~ )는 미국의 저명한 컴퓨터 과학자이며,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의 명예교수이다. 본인의 홈페이지 FAQ에 의하면, 그의 성을 Ka-NOOTH()라고 읽는다. 한글 표기는 '크누스'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국제 음성 기호(IPA) 표기에 따라 '커누스'로 표기하고 있다. 한자 이름은 고덕납()이며, 이는 "커누스"(→가오)와 "도널드"(→더나)를 중국어 발음으로 음역한 것이다. 커누스는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책인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의 저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의 1권은 커누스가 28세일 때 지은 것이다. 알고리즘 분석 분야를 실질적으로 창조했으며, 이론 컴퓨터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기초적인 중요한 공헌을 했다. 조판 시스템과 메타폰트 폰트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문학적 프로그래밍 (literate programming)의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그는 수준 높은 프로그래머였으며, geek 유머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그가 쓴 책에서 오타나 실수를 찾아내면 상금으로 2.56 달러를 주는데, 왜냐하면 "256 센트가 16진수로 1 달러이기 때문"이다. (예외도 있는데 "3:16 Bible Texts Illuminated"라는 책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는 사람에게 걸린 현상금은 3.16달러이다). 소프트웨어의 버전번호는 3, 3.1, 3.14와 같은 방식로 π로 수렴한다. 메타폰트의 버전 번호는 같은 방식으로 e에 수렴한다. 학부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1963년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튜링상, 미국 국가 과학 훈장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취미 생활로는 음악을 즐기며 특히 오르간 연주를 즐긴다고 한다. (실제로 커누스의 집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고 한다.) 다만 연주실력이 썩 훌륭하지는 않다고 한다. 커누스는 또한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약 1975년부터 1990년 1월 1일까지만 이메일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그때 사용해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평생 동안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 우편만 사용한다고 한다. 커누스는 우편물을 "배치 모드(batch mode)"로 처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3개월 동안 받은 우편물을 하루 만에 처리하는 방식을 말한다.) 질 커누스 여사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자녀가 있다. 457년 458년 459년 460년 461년 462년 463년 464년 465년 466년 467년 468년 고구려가 신라의 실직주성을 점령함 469년 470년 471년 472년 473년 474년 475년 476년 477년 478년 479년 480년 481년 고려 · 말갈 동맹군이 신라를 쳐서 7개 성을 깨뜨리고 미질부로 진군하자, 백제 · 신라 · 가야 동맹군이 이를 섬멸하고 강릉의 이천 서쪽까지 쫓아가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482년 483년 484년 485년 486년 487년 488년 489년 490년 로버트 E. 하워드 로버트 어윈 하워드 (Robert E. Howard 1906년 1월 22일 ~ 1936년 6월 11일)는 판타지 작가이다. 1930년대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라는 잡지에 주로 글을 실었다. 미국 텍사스주 피스터(Peaster)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텍사스주 크로스 플레인스(Cross Plains)에서 자랐다. 15세부터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한 것은 1925년 7월달의 "Weird Tales"에 실린 "Spear and Fang" 이었다. 여러 장르의 소설을 썼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야만인 전사(戰士) 코난 시리즈이다. 최초의 코난 시리즈 작품은 1932년 12월에 쓴 "The Phoenix on the Sword"이다. 하워드의 문장은 미묘하거나 문학적이기보다는, 직설적이고 화려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재미있다. 마법사들과 칼을 든 영웅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며, 독자들을 즐겁게 하지만 말초적인 즐거움이 아닌 세련된 면도 갖추고 있다. 하워드는 러브크래프트와 클라크 애쉬턴 스미스같은 당시 통속잡지(pulp magazine) 저자들과도 교류했다. 결핵에 걸린 그의 어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3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야만인 코난 야만인 코난은 로버트 하워드가 1930년대 통속잡지인 "위어드 테일스(Weird Tales)"에 출판한 판타지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배경은 하이보리아 시대의 지구이다. 하이보리아 시대는 하워드가 지어낸 가상의 시대로,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에 잠긴 이후 고대 문명이 발생하기 전의 사이의 시대이다. 하워드는 러브크래프트와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서로의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소설에서 배경을 빌려와서 자기 소설에 끼워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크툴후 신화 시대에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하워드가 30살의 나이로 요절한 이후로 오늘날의 작가들이 코난 시리즈를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날의 작가들은 이런 연관관계를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코난은 북방의 야만족 킴메리아인이며, 대장장이의 아들로 전쟁터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이미 훌륭한 전사(戰士)로 이름이 높았으며 베나리움을 파괴하는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나중에 방랑벽에 사로잡혀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시작했으며, 이 모험을 하워드가 기록한 것이 바로 코난 사가(saga)이다. 코난은 전설속에 나오는 괴물들, 사악한 마법사들을 만나고 감미로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떠돌면서 노예로 잡히기도 하고, 도둑이나 무법자가 되기도 하고, 용병이 되었다가 용병단 두목이 되기도 한다. 부하들을 여럿 거느려서 땅을 다스리려 한 적도 있었으나 자신을 제외한 부하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경우를 종종 당하였다. 마침내 40대가 되어서는 당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던 아퀼로니아의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 신진출판사의 어린이용 전집에서 모험왕 코난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론 하워드가 1935년에 발표한 The Hour of the Dragon 을 번역한 것이며 정복자 코난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초로 영화화된 것은 1982년에 만들어진 "야만인 코난(Conan the Barbarian)"이다. 올리버 스톤과 존 밀리어스가 각본을 썼으며, 존 밀리어스가 감독을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코난 사가의 여러 이야기를 조합했고,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인공 코난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로 알려지게 된 슈왈츠제네거는 1984년에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에 출연하게 된다.) 1984년에는 속편격인 "파괴자 코난(Conan the Destroyer)"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슈왈츠제너가가 마찬가지로 주인공 코난 역을 했다. 슈왈츠제너거는 1985년에 로버트 하워드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레드 소냐(Red Sonja)"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6년 4월에 베가북스에서 '야만인 코난'이란 제목으로 1,2권을 내놓은 상태이다. 2010년 5월 20일 피망에서 에이지 오브 코난의 오픈 베타가 시작되었다. TeX TeX(, , )은 도널드 커누스가 만든 조판 프로그램이다. TeX 개발의 두 가지 목적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미려한 문서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컴퓨터 기종과 상관없이 똑같은 결과물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TeX으로 컴파일하여 만든 문서의 확장자는 device independent format을 뜻하는 .dvi이다. 이를 변환하여 PDF, 포스트스크립트 등의 문서파일을 얻는다. (.dvi를 만드는 것이 TeX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으나, 요즘은 사실상 문서 표준으로 자리잡은 PDF를 dvi를 거치지 않고 바로 만드는 방법도 많이 쓰인다.)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 경제학 등 많은 분야에서 논문, 책자, 발표 슬라이드 등 다양한 문서 작성을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식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강력하다. 현재 나와 있는 명령어 기반 수식 편집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 등(한글, 위키백과)의 명령어는 이 TeX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수식에 강점을 갖고 있지만, 목차, 표목차, 그림목차, 각주, 미주, 장절명령등이 자동화되므로, 내용에 집중한 구조적 문서를 만드는 것을 강제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 조판언어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어, 사용자들이 명령어를 익혀야 하는 등 초기 사용에 다소 진입장벽이 있다는 단점도 있다. 텍과 주변 패키지들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조의 밑에서부터 엔진-포맷(또는 포맷의 집합인 패키지)-클래스 순으로 생각하면 쉽다. 우선, 커누스 교수가 개발한 TeX 엔진은 그 자체로 사용하기에는 TeX은 단순한 명령어들을 자주 사용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에 이를 보완하여 레슬리 램포트가 TeX 위에서 구동하는 매크로방식의 포맷(자주 쓰이는 일련의 명령어를 하나의 명령어나 틀로 통합하여 간단하게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체계) LaTeX을 만들었다('레이텍'으로 읽는다). 이러한 포맷 중 수식편집에 강력한 기능을 가진 것에는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가 수학 논문 조판에 필요한 기능을 담아 만든 AMSTeX이 있다. AMSTeX과 LaTeX 등을 합쳐 같이 배포하는 형태를 "패키지"라고 한다(이 패키지의 이름은 AMS-LaTex으로 부름). 또한, 한글 등 다국어 문서 편집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포맷으로 LuaTeX, ConTeXt, XeTeX가 있다. 이런 포맷을 사용하여 텍 문서를 작성할 경우 각 포맷마다 요구하는 형식이나 조건들을 선언해 주어야 하는데, 이를 간편하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클래스"이다. 이중 한글사용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Memoir 클래스, 그리고 Memoir 위에서 구동하며 이를 더 편하게 쓸 수 있게 해주는 클래스 위의 클래스로서 Oblivoir 클래스가 있다. 또한, 프리젠테이션 파일을 쉽게 만들어 주는 beamer 클래스도 널리 사용된다.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문서를 만들려면 먼저 텍스트 파일 에디터를 이용, 텍스트 문서에다 위에 열거한 포맷과 클래스를 선언하여 이를 쓸 것이라고 지정해 주고, 그의 규칙에 맞게 텍 코드에 따라 문서를 작성해서(HTML을 생각하면 쉽다) 컴파일 하면 pdf 등 최종출력본 문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런 도구들과 이런 도구의 추가 설치 및 업데이트 한데 묶어서 배포하는 것이 ko.TeX 패키지 들이다.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 2012년까지는 한글 TeX 사용자그룹에 접속하여 ko.TeXlive를 다운받아야 했었는데, 2013년부터는 ko.TeX 관련 패키지가 CTAN에 대거 등재되면서 단순히 TeXlive를 다운받아 사용하더라도 한글 텍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 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TAOCP)은 도널드 커누스가 집필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관한 책이다. 2006년 현재 3권까지 나와 있고, 앞으로 4권이 더 발행될 예정이다. 2006년 9월에 1권이 한국어 번역판으로 발행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 고속국도 제1호선, 의 일부)는 부산광역시 금정구를 기점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를 종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이다. 1968년 2월 1일에 기공하여 1970년 7월 7일 완공되었다. 대부분의 구간이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 구간의 일부이다. 본래 경부고속도로였던 양재 나들목 - 한남대교 구간은 2002년 12월에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단순한 자동차 전용도로로 취급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차로 수는 왕복 4차로에서 10차로로 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구간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3개의 광역시를 거친다. 또한 수도권 대도시, 지역 거점 도시들을 거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국토의 대동맥’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속도로의 번호가 개통 당시와 동일하게 1번인 이유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고, 국가의 중요 도로이며, 남북축 도로이지만 일부 구간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매우 불규칙한 노선이기 때문에 다른 고속도로와 같은 체계로 번호를 매길 경우 혼란이 빚어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 부산과 서울을 통행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잇는 사업으로, 기공 전에는 현실성 등의 이유로 논란이 많았다. 경부고속도로는 429억원이 투입 되어 1968년 2월 1일부터 1970년 7월 7일까지 2년 5개월만에 완공 되었고, 연인원 892만 8천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고, 77명이 건설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6개의 업체와 3개 건설공병단이 참여하여 건설하였다. 2014년 승용차의 서대전 - 부산간 통행 요금은 13,800원이나 1970년엔 1,000원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되자 고속버스도 운행을 시작하였다. 1970년 당시 서울 - 부산간 고속버스 요금은 성인 1명 기준 1,600원이었으나, 2019년 3월 1일 인상 기준 서울 - 부산간 고속버스 요금은 일반고속 기준으로 24,200원이다. 2009년의 교통량 정보는 다음과 같다. 최고 통행량 지점은 수원신갈 나들목부터 신갈 분기점까지의 2.5km 구간으로, 24시간에 189,828대 (10개 차로, 차로당으로 환산하면 18,983대/차로)가 통과한다. 차로당 최고 통행량 지점은 신갈 분기점부터 판교 분기점까지 13.0km 구간으로 24시간당 차로당 23,038대 ((판교에서 서울 요금소까지는 서울 방향 5차로, 부산 방향 8차로, 이후 구간은 왕복 10차로), 총 184,310대)가 통과한다.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고속도로 중의 하나지만, 대체 도로 등이 계속 개통되면서 2005년부터는 대체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과거 양재 나들목 ~ 한남대교 구간은 경부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이었으나, 2002년에 이 구간의 관리권이 한국도로공사에서 서울특별시로 이양되면서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어 일반 자동차 전용도로가 되었다. 때문에 이 구간은 고속국도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현재는 양재 나들목이 고속국도 제1호선 경부고속도로의 종점이다. 그러나 도로명 주소상 정식 도로명은 여전히 경부고속도로이며, 교통방송 등에서는 아직도 경부고속도로라고 하거나 혹은 “시구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경부고속도로와 이어지는 만큼 이 구간도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 도로는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기 직전인 2002년 11월 25일자로 전 구간이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되었다. 때문에 보행자, 자전거 등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륜자동차(모터사이클 혹은 오토바이)는 긴급자동차(싸이카 및 소방용 모터사이클 등)에 한해 통행이 가능하며, 그 밖의 이륜자동차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당국에서는 경부고속도로라는 이름과 함께 2006년 1월부터 경부간선도로로 칭하고 있다. 아래 표에서, 구간 거리는 2002년 도로현황조서를 바탕으로 하였다. 1990년대 대대적으로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대전 ~ 대구 구간의 선형 개량 및 일부 확장 공사로 인해 대전 ~ 영동 구간에는 옛 경부고속도로 구간들이 많이 남아있으며, 대전광역시와 옥천군 구간에 있는 도로들은 일반도로로 활용 중이다. 구 경부고속도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코난 코난(Conan)은 켈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울릉군 울릉군(鬱陵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동해상의 군이다. 동해상의 울릉도 본도와 독도, 죽도, 관음도 등 44개 부속섬으로 이루어진다. 울릉도는 해안선 길이 64.43 km의 화산암 지역으로, 섬의 중앙부에는 성인봉(984 m)이 솟아 있고, 칼데라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나리분지가 있다. 주상절리, 기암괴석, 용출수, 원시림 등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39종의 특산식물과 6종의 식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드문 해양성 기후로 일교차가 작고, 눈이 많이 내린다. 특산물로는 오징어, 호박엿, 산나물, 울릉약소 등이 유명하다. 군청 소재지는 울릉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2면이다. 울릉도는 동해의 해저에서 분출한 마그마가 굳어서 형성된 화산섬이다. 울릉도는 형성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화산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화산체의 약 2/3는 바다에 잠겨 있으며 해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은 경사가 급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칼데라 분지인 나리 분지가 있으며 나리 분지 내에는 알봉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이중 화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며 해상에서는 특이하고 독특한 울릉도의 지형이 관찰된다. 섬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 지대이다.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부근 지역의 기후는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기후를 띠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약 12℃이며 가장 더운 달인 8월의 기온도 24℃를 넘지 않아서 여름에도 시원한 편이다. 연중 85%가 흐리거나 눈비가 내려 비교적 습한 지역이다. 그리고 가장 추운 달인 1월의 평균기온은 1.0℃로 온난한 편이다. 울릉도 주변 지역은 안개가 많고 연중 흐린 날이 160일 이상이며, 비가 내리는 날은 150일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 정도이다. 겨울철 강수는 대부분 눈이 쌓인 적설의 형태이며, 폭설이 자주 내린다. 울릉도의 바람은 서풍과 남풍계열이 출현빈도가 높으며 연간 평균풍속은 4.3㎧이다. 울릉군의 행정 구역은 1읍, 2면, 1출장소가 설치되어 있고, 면적은 73.33 km²이다.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9,975 명, 5,435 가구이고, 전체 인구의 70.5%가 울릉읍에 거주하고 있다. 남녀의 성비는 1.20:1로 남초 현상이 심한데, 성비 불균형이 인천광역시 옹진군(1.31:1)과 강원도 화천군(1.22:1) 다음으로 심각하다. 울릉군의 인구는 1974년에 2만9810 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후 계속 감소하여 2000년대 이후로는 1만 명 내외에서 정체된 상태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기초지방자치단체이다. 독도는 울릉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천연기념물 제 3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독섬으로 한자화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전한다. 독도는 해저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대략 460만 년 전부터 약 250만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울릉도(약250만 년 전)보다 약 200만 년, 제주도(약120만 년 전)보다는 약 340만 년 앞서 생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거친 바람과 파도에 꺾이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풍혈 (風穴)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냉기가 나오는 곳으로, 봉래폭포를 찾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이다. 땅 밑을 흐르는 지하수의 찬공기가 바위틈으로 흘러나와 항상 섭씨 4℃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름철 온도가 24℃ 이상 올라갈 때는 찬공기로 느껴지며, 겨울철 대기 온도가 영하로 내려갈 때는 오히려 따듯한 느낌을 준다. 여객선은 울릉도를 접근하는 가장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곳에서 울릉도 저동항에 여객선을 타고 접근할 수 있다. 차량 및 화물승선은 포항에서만 가능하며, 울릉도는 LPG충전소가 없으므로 LPG 차량은 입항이 되지 않는다. 울릉도 도동항에서 독도를 운항하는 것은 오션플라워호와 씨플라워호 그리고 삼봉호, 씨스타호가 있으며, 정기 운행은 되지 않는다. 울릉군에서 운행하는 농어촌버스 노선은 총 4개이며 운영업체로는 무릉교통이 유일하다. 대부분 중형차량이나 소형차량으로만 운행한다. 울릉도 전체를 일주하는 울릉도 일주도로가 있으며, 울릉도 가두봉 인근의 바다를 매립하여 1800미터급 활주로를 건설한뒤, 공항을 건설하여 향후 제트기가 취항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칭 울릉공항 건설 계획이 추진중이지만, 바다가 오염된다는 의견도 있다. http://www.ulleung.go.kr/health/ http://www.ulleung.go.kr/ula 울릉군에는 기상 등의 문제로 인해 정시에 시험지가 발부 및 회수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울릉군에서는 자격 시혐 등 국가공인시험 중 필기 부문이 치루어지지 않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험장이 없어 울릉도 학생들은 포항 등 외지로 나가서 수능을 본다. 다만 통신의 발달로 인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험장이 설치될 가능성도 대두되었으나, 2018년 수험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수시 대비 등의 이유로 80%가 군내의 수능 시험장 설치를 반대했다. 울릉도 울릉도(鬱陵島)는 경상북도 울릉군의 본도(本島)로, 대한민국에서 9번째로 넓은 섬이다. 면적은 72.86 km²이고, 2019년 6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9천8백 명이다. 이 섬은 동해의 바다 가운데에 위치한 화산섬으로, 섬의 중북부에 칼데라인 나리분지가 있으며, 마지막 화산 폭발은 약 5천 년 전에 있었다.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직선 거리로 130.3 km로 떨어져 있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이며, 독도와는 87.4 km 떨어져 있다. 포항항에서 뱃길로 217 km로, 빠른 배로 3시간 남짓 걸린다. 현포, 남서, 저동리에서는 고인돌, 무문토기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당시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시대에 우산국이 있었는데, 512년(지증왕 13년) 6월 하슬라주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 이후 고려 때까지 조공 관계가 계속되다가 11세기 초에 여진으로부터 침구(侵寇)를 받은 우산국 사람들이 본토로 도망오고부터 울릉도는 고려의 직할 구역이 되었다. 1407년(태종 7년) 3월 쓰시마 도주는 사신을 파견해 토산물을 헌납하고 납치해 간 포로를 송환하면서 울릉도에 쓰시마 사람을 이주시키어 살게 해서 쓰시마 도주가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조선 태종은 이를 거절했다. 조선 초기 왜구의 노략과 탈세를 막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1416년(태종 16년) 조정은 섬의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공도 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울릉도(당시 이름 무릉도)의 주민 3명을 이주시킨 후 여러 차례 무릉도 일대의 주민을 조선 본토로 이주시켰다. 조선 세종 때에 도망한 사람들을 벌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에 속한다.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으며,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지봉유설에는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들어가본 일이 있으나, 역시 왜의 분탕질을 당하여 정착하지 못하였다. 근자에 들으니 왜노가 기죽도를 점거했다 하는데, 기죽도라고 혹 말하는 것은 곧 울릉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614년(광해군 6년) 6월 쓰시마 도주는 서계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울릉도를 둘러봐야 하니 길안내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조정은 이를 거절하고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울릉도의 일본인 왕래를 금지하도록 지시했다. 1618년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니 집안과 무라카와 집안에게 울릉도 도해 면허를 내어 줬다. 그 집안 사람은 울릉도와 일본을 왔다 가며 조업했다. 1692년 3월 무라카와 집안이 울릉도로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이 무라카와의 도구로 전복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나가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본 사람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막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막부는 “저쪽이 잘못을 깨닫고 철수할 것이다”라는 답변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후 안용복 문제 등 충돌이 생기고 나서 막부도 1696년 일본인에게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다. 1787년 프랑스의 라페루즈 탐험대는 울릉도를 최초로 실측하여 '다줄레(Dagelet)'라는 명칭으로 지도에 포함시켰다. 고종 21년(1884년), 임금의 명에 따라 울릉도를 개척한 후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어 현대에 이른다. 울릉도는 독도와 함께 신생대 제3기에서 제4기 사이에 해저로부터 솟아난 해산(海山)이며, 섬 부분은 산의 봉우리 부근이다. 섬 중앙에는 성인봉이 있다. 섬의 북부에는 유일한 평지인 나리 분지가 있다. 울릉군은 주도인 울릉도 외에도 부속도인 관음도 · 죽도 및 여러 개의 암도를 동반하고 있다.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에 있었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종상화산의 정상부로, 조면암·안산암·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군으로는 너도밤나무·섬잣나무·솔송나무 등 650여 종이, 동물군으로는 흑비둘기 등 50여 종의 조류, 340여 종의 곤충류가 서식하고 있다. 2002년 경상북도는 환경부에 ‘울릉도·독도 해상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백두화산맥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동해상에 울릉도를 솟게 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남해상에 독도를 비롯한 많은 화산을 분출시켰다. 울릉도 중앙부에는 주봉인 성인봉(984 m)이 솟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미륵산(901 m)·초봉(608 m)·형제봉(712 m)·향목령(297 m), 동쪽으로는 관모봉(586 m)·망향봉(317 m) 등이 잇따라 있어 지붕을 이룬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가두봉(194 m), 동북으로 두루봉에 이르는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고, 산맥 사이에는 깊은 침식곡이 발달하여 자연적인 행정 경계를 이룬다. 섬의 북서부 사면에 있는 나리분지는 동남부·서남부가 높이 500 m 안팎의 단애에 둘러싸이고 북부가 200 m 이하의 낮은 산지로 막혀 있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이다. 이 분지는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가 삼각형 모양으로 함몰해 형성된 것이다. 그 화구에는 2차로 분출된 화산이 중앙화구인 알봉(538 m)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중화산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성인봉을 비롯한 동남부와 서남부의 높은 단애들은 이 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한다. 울릉군의 근해는 동한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조경수역이므로 회유성 어족이 모여들어 좋은 어장을 이룬다. 그러나 길이 56.5 km의 해안선은 대부분 단조롭고 높은 절벽을 이루며, 특히 서남과 동남 해안은 90m 높이의 절벽으로 천연의 양항 발달이 어렵다. 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 평균 강수량이 1383 mm 정도이며, 연 평균 기온은 12.4℃, 8월 평균 기온은 23.6℃, 1월 평균 기온은 1.4℃이다. 연 평균 풍속은 4.0m/s로 동해상에 고기압이 발달하는 늦봄과 장마전선이 형성되는 초여름에 북동풍이 우세하고,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주로 발생한다. 특히 울릉도는 대한민국의 다설지역으로 연 평균 강설 일수가 57.8일이다. 울릉도의 동남쪽에 9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독도는 대한민국의 최동단에 위치한 외딴 섬으로,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중심으로 가재바위·구멍바위·지네바위 등의 34개의 돌섬과 암초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도에는 화산 분화구가 있고 절벽이 솟아 있어 배를 대기가 어렵다. 이 곳에는 독도를 지키는 경비대 외에 상주 주민이 없다. 독도는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나 군사, 해양자원 관리, 해양 운항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938년 울릉도기상대는 울릉도 내륙의 해발고도 220 m에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일주 도로는 울릉도 둘레를 도는 도로로 총길이는 44.55 km이다. 이 도로는 1963년에 계획되었으며, 2001년 11월 13일까지 계획 구간 중 37.8 km가 완공되었다. 이후 지형에 따른 난공사와 예산의 문제 때문에 섬의 서북부 구간(섬목 ~ 내수전, 4,745 m)의 공사가 미뤄지다가, 2019년 3월 29일에 완전 개통되었다. 노선: 내수전 - 저동항 - 도동삼거리 - 울릉터널(340 m) - 장흥교 - 사동항 - 가두봉터널(35 m) - 통구미터널(142 m) - 남통터널(280 m) - 남양터널(96 m) - 남양피암터널(47 m) - 남서터널(10 m) - 구암터널(49 m) - 사태감터널(195 m) - 곰바위터널(59 m) - 수층교(135 m) - 수층터널(360 m) - 삼막터널(460 m) - 태하터널(280 m) - 현포령(풍력발전소) - 천부항 - 섬목터널(옛 관선터널, 77 m) - 섬목 - 와달리터널(1,955 m) - 내수전터널(1,527 m) - 내수전교 - 내수전 울릉공항은 울릉도 남단에 위치한 가두봉(194 m)을 깎아내고 가두봉 동북쪽에 위치한 사동항의 방파제 바깥쪽의 바다를 매립하여, 길이 1200 m×폭 30 m 규모의 활주로 1개와 여객터미널을 지을 계획인 공항이다. 울릉공항이 개항하면, 수도권에서 울릉도까지 8시간 걸리던 것이 비행기로 2시간 이내로 단축될 전망이다.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神話)는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 고유의 종교 의례와 의식 행위의 기원 및 의미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말한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신화를 토대로 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정치 제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신화로 만들어지게 된 생성 원리를 탐구한다. 그리스 신화는 여러 이야기 모음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도기 그림이나 봉헌물과 같은 구상 예술 작품에서도 내재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신, 여신, 영웅과 같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모험, 전설의 생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비 전승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오늘날에는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문학의 근원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호메로스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었던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쓴 두 서사시 《신통기》, 《노동과 나날》에서 세계의 기원, 신들의 왕과 인간 시대의 변천, 인간이 겪는 불행과 제물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서사시권에서 서사시의 일부인 호메로스 찬가, 서정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품, 고전학자의 문서와 헬레니즘 시대의 시, 플루타르코스와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로마 제국 시대의 저술가가 쓴 원문으로도 이어져 왔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여러 유물의 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신과 영웅들은 그리스 신화의 설명에 주요한 출처가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경에 만들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도자기에는 트로이아권과 헤라클레스의 모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호메로스 시가와 다양한 신화적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을 보충 설명하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명의 문화, 예술,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서양의 문화 유산과 언어 일부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시인과 예술가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신화의 주제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 및 관련성을 찾기도 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오늘날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900년부터 800년까지에 이르는 기하학 시대의 시각 매체에서 묘사되기도 하였다. 문학적, 고고학적 근원은 때때로 중간 단계에서 서로에게 협력하거나 충돌이 있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자료 집대성의 존재는 그리스 신화 요소들이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인 뿌리를 갖게 되는 강력한 지표가 되었다. 신화적 서술로 쓰여진 연극은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 장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리스 고대에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총체적인 신화 해설집은 동명의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가 유일하다. 이 신화 해설집은 시인들의 상반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고대 그리스 신화와 영웅 전설을 간명하고 빠짐없이 요약하였다. 아테네의 아폴로도로스는 신화를 주제로 많은 글을 쓴 기원전 180~120년 경의 인물이다. 《비블리오테케》가 쓰여진 시대는 그가 죽은 지 훨씬 후인 2세기 경이기 때문에, 현재는 동명이인인 저자가 쓴 서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의 아폴로도로스는 이 신화 해설집의 초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가장 초기의 문학 근원 중에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 "서사시권"으로 이루어진 다른 서사시들도 있었으나, 이러한 후기의 소규모 서사시들은 대부분이 모두 소실되었다. 호메로스 찬가라는 이름으로 전승된 시들은,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이 합창 찬가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대 초기에 등장한 것이다. 호메로스와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저서 《신통기》(신의 기원)에서 세계의 창조를 다룬 초기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신의 기원인 티탄과 기간테스뿐만 아니라 복잡한 가계도와 민간 설화, 기원 신화까지 자세하고 충실하게 설명하였다. 헤시오도스의 또 다른 저서 《노동과 나날》은 농경 생활에 대한 교훈 서사시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신화, 다섯 시대 설화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위험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신들로 인해 세상이 더 위험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서정시는 신화에서 그 주제를 가져올 때도 있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서사가 아닌 암시를 많이 썼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시모니데스와 같은 서정 시인들과 테오크리토스, 비온과 같은 목가 시인들은 각각의 신화적 사건을 서로 연관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화는 고전 아테네 연극의 중심 소재이기도 했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비극의 줄거리에 트로이아 전쟁과 영웅 시대의 신화를 차용하였다. 여러가지 비극적인 줄거리(아가멤논과 그의 자녀, 오이디푸스, 이아손, 메데이아 등)의 전형적인 형태는 이러한 비극에서 잘 드러나 있다. 희곡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또한 자신의 작품 《새》, 《개구리》에서 신화를 차용하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 스트라보는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글로써 기록하였는데, 이 이야기들은 수많은 지역 신화와 전설, 그리고 같은 이야기의 많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들은 다양한 구전 신화를 연구하였으며, 그리스와 동방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역사적이거나 신화적인 근원을 찾았다. 또한, 신화의 기원과 다른 문화적 개념을 혼합하여 융화시키고자 하였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시는 숭배 행위라기보다는 문학적인 목적으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다른 경우였다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중요한 많은 세부 설명들이 포함될 수 있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신화를 언급하는 같은 시대의 산문 작가로는 아풀레이우스와 페트로니우스, 롤리아누스, 헬리오도로스 등이 있다. 동명의 히기누스가 로마 작가 양식으로 쓴 《파불라에》(Fabulae)와 《아스트로노미카》(Astronomica)는 신화를 시적인 표현 없이 개요로 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필로스트라투스 3세와 4세의 《이매진》(Imagines), 칼리스트라토스의 《디스크립션》(Descriptions) 또한 작품의 주제에 신화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서술 양식에 대한 유용한 근거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사례는 비잔티움의 그리스 작가로, 상당수가 신화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설명을 남겼는데, 지금은 소실된 초기 그리스 작품이 유래가 된 것도 많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화를 보존한 사람은 아르노비우스, 《수이다스》의 저자, 헤시키우스, 요한 트제트제스, 에우스타티오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기독교적 도덕관의 시각에서 신화를 다루었다. 19세기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의 미케네 문명 발견과 20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경의 크레타 미노아 문명의 발견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해 남아있던 많은 의문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신과 영웅에 대한 많은 신화적 설명의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미케네와 미노아 지역의 신화 및 의식에 대한 증거는 모두 기념적인 것에 불과하였는데, 예를 들어서 선형문자 B 기록(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 문자)은 신과 영웅에 대한 이름이 애매하게 나타나 있기는 하였지만, 주로 농산물의 수확과 재산, 상품 목록을 작성하는 용도로 쓰였다. 기원전 8세기의 도자기에 새겨진 기하학 디자인은 헤라클레스의 모험뿐만 아니라 트로이아 연대기의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신화의 시각적 묘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많은 그리스 신화가 문학적 근원보다 항아리 묘사에서 일찍 등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헤라클레스의 12업은 케르베로스를 생포하는 모험만이 동시대의 문헌에서 등장한다. 또한, 시각적인 근원은 때때로 현존하는 문학적 근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신화, 또는 신화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어떤 경우에는, 기하학 양식에서 처음 묘사된 신화로 알려진 것이 몇 세기가 지난 후에야 고대 서사시에서 처음 언급되기도 한다. 이후 고대(c. 750–c. 500 BC)와 고전(c. 480–323 BC), 헬레니즘(323–146 BC) 시대에 등장한 호메로스풍을 비롯한 다양한 신화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적 증거를 보충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시간이 경과할 수록 문화의 발전에 적응하고 변화해왔으며, 이러한 변화에는 전체적인 것과 더불어 무언의 가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 형태는 대부분이 점진적인 변화를 거친 것으로, 길버트 커스버트슨의 주장처럼 그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던 발칸 반도의 초기 거주자들은 애니미즘 사상을 통해 자연의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형태로 가정된 이러한 영혼들은 지역 신화에서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발칸 반도 북부의 부족들이 침범하게 되면서, 정복과 세력, 싸움에서의 용기, 영웅적 자질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새로운 판테온 신들이 기존 발칸 반도의 신화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농경 사회에 존재했던 오래된 신들은 그들의 더욱 강력한 침략자에 융합되었고, 그렇지 못한 신들은 쇠퇴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고대 중반 이후에는 남신과 남성 영웅 간의 관계에 대한 신화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기원전 630년 경에 확산되었다고 여겨지는 교육적 동성애(Eros paidikos, παιδικός ἔρως)의 동시적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기원전 5세기가 끝날 무렵, 시인들은 아레스를 제외한 모든 중요한 신과 많은 전설적 인물에게 적어도 한 명의 에로메노스(성적인 관계의 어린 소년)를 정해두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처럼 이전에 존재하던 신화 또한 암시적인 동성애 관계가 가미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유행에 맞추어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의 이야기를 각색하였으며, 초기 로마 제국의 문학 신화 수집가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서사시의 업적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신화적 연대기로 발전하였고, 그리스 신화는 세계와 인간의 발전 모습 또한 표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용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적 서술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 구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연대는 파악할 수 있다. 신화에서 설명하는 "세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세 시대, 또는 네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신들의 시대가 동시대의 신화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온 반면에, 고대와 고전 고대의 그리스 작가들은 영웅의 시대를 더 선호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업적에 대한 기록과 연대를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서, 영웅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신통기》와 호메로스 찬가의 규모와 유행을 위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영향으로 "영웅 숭배" 문화는 종교 생활의 개혁을 가져왔고, 죽음(영웅)의 세계에서 신들의 세계를, 올림피안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분리하여 표현하였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인간(종족)의 시대를 금, 은, 청동, 철의 네 시대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종족, 또는 시대는 신들의 창조를 기준으로 구별하는데, 금의 시대는 크로노스의 지배에 속하며, 이후의 종족은 제우스가 창조한 것이다. 헤시오도스는 청동 시대 다음에 영웅의 시대(종족)를 삽입하였다. 마지막 시대는 철의 시대로, 시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동일하였다. 시인들은 이 시대를 최악의 시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판도라의 신화를 통해서 철의 시대부터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게 되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좌절되고 오직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헤시오도스의 네 시대 개념을 가져왔다. "근원 신화" 또는 "창조 신화"는 인간의 용어로 우주를 이해하며,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를 말한다. 철학적인 설명으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서술되어 있다. 그는 세상이 지루한 공허인 카오스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공허가 끝나자 에우리노메, 가이아(대지)가 나타났고, 에로스(사랑), 무저갱(나락, 타르타로스), 에레보스와 같은 다른 근본 신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가이아는 남자의 도움 없이 우라노스(하늘)를 낳았고 그와 결합하였다. 이 결합으로 거인족 티탄이 처음으로 태어났는데, 이들은 코이오스, 크리오스, 크로노스, 히페리온, 이아페토스, 오케아노스의 여섯 남자, 므네모시네, 포이베, 레아, 테이아, 테미스, 테티스의 여섯 여자로 구성되었다. 이윽고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외눈박이 키클롭스와 100개의 손이 달린 헤카톤케이레스를 낳았다. 크로노스("교활하며, 가장 젊고 무서운 가이아의 자녀")는 우라노스를 거세시키고 신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누이 레아를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다른 형제 티탄들을 지배층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립 주제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들 제우스에게 적대를 받으며 되풀이되었다. 아버지를 배반하였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빼앗아 삼켜버렸다. 이것을 증오하던 레아는 마지막으로 낳았던 아들 제우스를 숨기고 강보에 싼 바위를 대신 주어 크로노스가 삼키도록 하였다.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이 든 음료를 마시게 하여 구토를 하게 만들었고, 크로노스의 위장에 있던 레아의 다른 자녀들과 바위가 모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제우스는 신들의 왕위를 차지하고자 크로노스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벌였다. 막바지에 이르러 키클롭스(제우스가 타르타로스에서 구출)의 도움으로 제우스와 형제들은 승리하게 되었고, 패배한 크로노스와 티탄들은 내쫓겨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다. 초기 그리스인들은 시에 대하여 신통기를 원형적인 시 장르—원형적 미토스—로 여겼으며, 내용 대부분에 마법적인 힘이 깃들여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원형 시인 오르페우스 또한 신통기를 읊는 원형적 가수였는데, 아폴로니오스의 《아르고나우티카》에서는 바다를 잠재우거나 폭풍을 일으켰으며, 하데스로 하강하여 지하세계 신들의 냉혹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였다.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 헤르메스가 서정시를 고안해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신들의 탄생에 관한 것이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전해내려오는 신들의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무사이에게 영감을 비는 긴 첫머리에서 아르카익 시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충실히 담고 있다. 신통기는 또한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에피메니데스, 아바리스와 그 밖의 전설적 현자가 지었다고 여겨지며, 내밀한 정화 의식과 밀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소실된 많은 시들을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실제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 신통기의 몇가지 이야기에 정통했다. 그러나 종교 의식과 신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신앙은 유지된 반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문화의 종류의 보고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이후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서, 일부만이 종교 의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헌에서 이러한 의식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소실된 직접적인 문헌과 달리 글의 방향이 너무 명료하고 의도적인 것에 불과하다. 도기와 종교적 예술품에 묘사된 장면들은 다양한 신화와 전설로 해석되었으며, 잘못 해석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러한 작품의 일부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의 인용과 최근에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파피루스 조각 중의 하나인 데르베니 파피루스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천지 창조 시가 최소 기원전 5세기부터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최초의 철학적 우주론자들이 반대하거나 성립해온 대중적인 신화적 개념들이 한동안 존재했었다. 이러한 개념들의 일부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대지가 오케아노스의 강 위에 떠있는 평평한 원판이며, 태양, 달, 별이 있는 반구형의 하늘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하였다. 태양(헬리오스)은 전차를 몰면서 하늘을 가로질렀고, 밤에는 황금 사발을 타고 대지 주위를 항해하였다. 태양, 대지, 하늘, 강, 바람은 발원의 대상이 되거나 입증 선언에서 이름이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의 균열은 보통 하데스의 지하 세계이자 그의 전신인 죽음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생각하였다. 다른 문화권의 영향은 언제나 새로운 주제를 창출해내었다. 고전 시대 신화에서는 티탄들의 패배 이후, 신들의 새로운 판테온이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주요한 그리스 신들 중에서 올림피안은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제우스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들을 말한다. 이들의 인원이 열두 명으로 제한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개념으로 보인다. 올림피안 이외에도 그리스인들은 염소 신 판, 강의 정령 님프, 샘에 사는 나이아드,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 바다에 사는 네레이드, 강의 신, 사티로스를 비롯한 그 지역의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였다. 여기에는 에리니에스(또는 푸리아이)처럼 혈연 관계에게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뒤쫓는 저승의 암흑 세력도 있었다. 시인들은 그리스 판테온의 영광을 기리고자 호메로스 찬가를 지었다.(33편의 노래). 그레고리 나지는 호메로스 찬가를 "각 노래마다 신에 대한 기원을 노래하는(《신통기》에 비해) 간결한 서가"로 간주하였다. 그리스 신화를 구성하는 방대한 신화와 전설에서 그리스인들이 생각해낸 신들은 본질로 봤을 때는 물질적이지만 이상적인 신체를 가졌다고 묘사된다. 발터 부르케르트는 그리스의 신인 동형론의 특징에 대하여 "그리스 신들은 인간이며,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고대 그리스 신들은 그들의 근원적인 형태와는 별개로 많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들은 질병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매우 특정한 상황에서만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을 불사로 보았고, 영원한 젊음과 더불어 이러한 불사의 능력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섭취하여 혈관에 신성한 피를 돌게 하는 방법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다. 각 신들은 서로 다른 관심사를 추구하며 자신의 계보를 이어가며, 특유의 개성에 의해 좌우되는 전문적인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묘사들은 다른 것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고대 지역 전승의 다양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시나 기원, 의식에서는 신들을 호명할 때 이름과 수식어를 결합하여 부르며, 다른 명시와는 다른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들을 식별한다.(예를 들어 아폴로 무사게테스는 "무사이의 지도자 아폴로") 수식어만을 사용하여 부르는 것은 신의 특정하고 부분적인 모습만을 식별하는 것으로 보이며,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신들은 삶의 특정한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하데스는 죽음의 신,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의 여신이었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같은 일부 신들은 복잡한 특성을 가지며 다양한 영역을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반면 헤스티아("난로")와 헬리오스("태양")처럼 좀 더 전형적인 화신의 성향을 가진 신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주요 신전들은 거대 범그리스 신앙의 중점이 되는 제한된 숫자의 신들만을 헌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개별 종교와 마을에서는 비주류 신들을 숭배하며 의식을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도시에서 또한 잘 알려진 신들을 독특한 지역 의식과 함께 찬양하였으며, 다른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를 그들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또는 반신) 숭배가 부가되기도 하였다. 신들만이 살아갈 때의 시대와 인간의 문제에 신성한 간섭이 제한된 시대를 이어주는 것은 신과 인간이 함께 활동하였던 과도기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세계의 초기 시절로, 신과 인간의 무리들이 나중의 시대와 비교할 때 서로 더 자유롭게 어울렸던 시대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이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려졌으며, 여기서는 주로 사랑 이야기와 징벌 이야기의 두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랑 이야기는 주로 근친 상간, 또는 남자 신이 인간 여자를 유혹하거나 강간하여 영웅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는 피해야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데, 상호 합의의 관계에서도 해피 엔딩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 신이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도 드물게 있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치는 호메로스 찬가〉에서는 여신이 안키세스와 동침하여 아이네이아스를 낳았다고 이야기한다. 두 번째 유형(징벌 이야기)은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쳤을 때, 탄탈로스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제우스의 식탁에서 훔쳐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신들의 비밀을 누설할 때, 프로메테우스나 리카온이 제물을 날조할 때, 데메테르가 트립톨레모스에게 농업을 전수할 때, 마르시아스가 아울로스를 만들어 아폴론과 음악 경연을 펼칠 때와 같이 어떤 의미 있는 문화적 아티팩트의 전유나 발명을 포함하고 있다. 이안 모리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신들과 인간의 역사 간의 지위"로 간주하였다. 3세기에 기록된 작자 미상의 파피루스 조각에는 디오니소스가 트라키아의 왕 리쿠르고스에게 내린 형벌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는데, 뒤늦게서야 새로운 신을 알아본 리쿠르고스는 내세까지 이어지는 잔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디오니소스가 등장하면서 트라키아에서 그의 숭배가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이스킬로스 삼대 비극의 주제이기도 하다. 또 다른 비극인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여신도들》에서는 테바이의 왕 펜테우스가 디오니소스를 경시하고 그의 여성 숭배자 마이나스를 몰래 구경하다 신의 형벌을 받게 된다. 비슷한 주제가 반영된 오래된 설화를 모티브로 한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데메테르가 도소라 불리는 노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의 딸 페르세포네를 찾던 중 아티카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에게 환대를 받는다. 데메테르는 켈레오스에게 보답하고자 그의 아들 데모폰을 신으로 만들 의식을 치루지만, 도중에 어머니인 메타니라가 불에 휩싸인 아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자 노여워하며 일을 그르치게 된다. 데메테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탄식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영웅들이 살았던 시대를 영웅 시대로 부른다. 서사시와 계보시에서는 특정한 영웅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는 이야기들의 순환을 만들어 내었고, 다른 이야기 속 영웅 간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연속적으로 이야기들을 배열하였다. 켄 다우든에 따르면 이것은 연대기 효과로도 볼 수 있으며, 계승되는 세대의 운명을 따라가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영웅 숭배가 등장한 이후, 영웅은 신만이 차지하였던 신성한 영역에 가세하며 맹세와 기원의 대상으로서 그 이름이 신과 함께 언급되었다. 신들의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영웅 시대 동안에는 영웅들의 명단이 수정되지 않은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또한, 위대한 신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웅들은 언제나 죽음의 무리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영웅이 지역 단위의 무리에게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 또한 신 숭배와 영웅 숭배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영웅 시대의 서막은 헤라클레스의 기념비적인 모험들을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영웅 시대에는 장대한 군사 사건인 아르고나우타이의 원정, 테바이권과 트로이아 전쟁도 포함된다. 일부 철학자들은 헤라클레스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화가 아르고스 왕국의 종속 국가 지도자와 같은 실존 인물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일부 철학자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태양이 1년동안 황도 12궁을 통과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문화권의 초기 신화로 비추어 볼 때,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이미 확립된 영웅 신화의 지역화로서 보여진다는 의견도 있다. 전통적으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페르세우스의 손녀 알크메네의 아들이었다. 그의 환상적이고 유일무이한 공적은 그것들이 갖는 설화적 주제와 함께 인기있는 전설의 소재를 제공하였다. 그는 희생자이자 제단의 창립자, 게걸스러운 먹보로 묘사되거나 언급된다. 희극에서 등장하는 그의 이러한 역할은 그의 비참한 죽음이 많은 비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상반적이다. — 탈리아 파파도푸루는 《헤라클레스》에 대해서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연구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예술과 문학에서 헤라클레스는 보통의 인간보다 막대한 힘을 가진 남성으로 등장하며, 활을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종종 곤봉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꽃병 토기에는 헤라클레스의 묘사가 다른 소재와 비할 수 없는 인기를 구가하였는데, 특히 그가 사자와 싸우는 장면은 수백 개의 토기에서 발견되었다. 헤라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신화 및 숭배에도 등장하며, 로마인이 쓰던 라틴어 감탄사 "mehercule"은 그리스어인 "Herakleis"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헤라클레스를 상인의 신으로 숭배하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특징적인 재능인 행운이나 위험에서의 구조를 염원하기도 하였다. 헤라클레스는 도리스 왕의 시조로 공식 지정되어 높은 사회적 위신을 이루었다. 이것은 도리스인이 펠로폰니소스로 이주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스 부족의 이름이기도 한 영웅 힐로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자 헤라클레이다이(헤라클레스의 자손, 특히 힐로스의 후예를 말하며, 다른 헤라클레이다이로는 마카리아, 라모스, 만토, 비아노로, 틀레폴레모스, 텔레포스가 있다.)의 한 명이 되었다. 헤라클레이다이는 미케네와 스파르타, 아르고스의 펠로폰니소스 왕국을 정복하였으며, 전설에 입각한 주장에 따르면 조상 대대로 왕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의 지배가 시작된 것을 종종 "도리스인의 침입"이라고도 부른다. 리디아인과 후기 마케도니아 왕들 또한 같은 계급의 지배자로서 헤라클레이다이가 되었다. 초기 세대의 다른 영웅들은 페르세우스, 데우칼리온, 테세우스, 벨레로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헤라클레스와 공통적으로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행적은 헤라클레스처럼 혼자서 해낸, 환상적인 것들로, 동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키마이라와 메두사같은 괴물을 처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벨레로폰의 모험은 평범한 형태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모험과 유사하다. 상상으로 빚어낸 영웅의 최후는 초기 영웅 전설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으며,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서사 시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감독)의 《아르고나우티카》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헬레니즘 서사시로써, 이아손과 아르고나우타이가 황금 양모를 찾기 위해 신화 상의 지역인 콜키스로 항해를 떠나는 신화를 다루고 있다. 《아르고나우티카》에서 한 쪽에만 샌달을 신은 남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네메시스라는 신탁을 받은 펠리아스 왕은 이아손에게 강제로 임무를 부여한다. 이아손은 강에서 샌달을 잃어버린 채로 펠리아스의 궁전에 도착하고, 이때부터 서사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헤라클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차세대 영웅들이 이아손과 함께 아르고 호를 타고 황금 양모를 찾으러가는 모험에 가담하였다. 이 세대에는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른 테세우스, 여걸 아탈란테, 한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경쟁하던 서사시의 주인공 멜레아그로스도 있었다. 핀다로스, 아폴로니우스, 아폴로도로스는 아르고나우타이의 전체 목록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아르고나우타이는 아폴로니우스가 기원전 3세기가 되어서야 쓴 서사시지만, 그 이야기 구성은 《오디세이아》보다 먼저 존재하였으며, 이아손의 공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오디세우스의 방랑은 부분적으로 이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이 원정을 역사적 사실, 즉 그리스인이 흑해에서 무역과 식민지 사업을 개척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했다. 또한, 매우 인기를 끌어 여러가지 지역 전설이 덧붙여진 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비극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하였다. 아르고 원정과 트로이아 전쟁 사이에는 주로 잔혹한 범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세대가 있다. 여기에는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아르고스에서 벌인 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아트레우스 가문(라브다쿠스 가문과 함께 두 주요 영웅 왕조 중 하나)의 신화 뒤에는 권력 이양과 주권을 계승하는 방법에 얽힌 문제가 드러나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형제는 미케네의 권력 이양의 비극의 주역으로 출연하며, 그들의 자손들도 이것을 반복한다. 테바이권은 주로 도시의 창설자인 카드모스와 연관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에는 테바이에서 일어난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사건을 중점으로 다룬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국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와 에피고노이의 손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며 끝을 맺게 된다.(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초기 서사시 등장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이디푸스가 관계되어있는 초기 서사시에는 그가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이 드러난 이후에도 테바이를 계속해서 통치했으며,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신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비극 작품(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과 후기 신화에서 보아왔던 이야기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의 트로이아 전쟁과 그 결과에서 절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작품에서는 주된 줄거리가 이미 충분한 형태와 요지를 갖추었으며, 개별적인 주제의 경우에는 그 후에 그리스 연극과 같은 매체에서 더욱 자세해졌다. 트로이아 전쟁은 또한 아이네이아스의 이야기로 로마 문화에서 굉장한 관심을 이끌어내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트로이아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아를 떠나 방랑하던 중 로마 제국의 건국 시조가 된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고 전하는데, 베르길리우스가 이후에 《아이네이스》라는 책으로 자세히 다루었다.(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2권에는 매우 잘 알려진 트로이아 부대 이야기가 있음.) 마지막에 와서는 딕티스 크레텐시스, 다레스 프리기누스라는 이름의 저자가 썼다는 허위 연대기 두 권이 라틴어로 쓰여져 전해 내려온다. 서사시 모음인 트로이아권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에리스와 칼리스티의 황금 사과, 파리스의 심판, 헬레네 납치, 아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피게니아 이야기로 시작한다. 헬레네를 되찾고자 그리스는 메넬라오스의 형제이자 미케네, 또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거대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트로이아는 헬레네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전쟁이 일어난지 10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뛰어난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반목,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와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의 전투에서 빚어지는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헥토르의 죽음 이후 트로이아 진영에는 동맹 관계인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 에피오티아의 왕이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이 가세하였다. 아킬레우스가 이 둘을 죽였으나, 그는 파리스의 화살로 죽게 되었다. 그리스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키기 전에 성채에서 팔라스 아테나의 목조상(팔라디움)을 훔쳤으며, 마지막에 와서는 아테나의 도움으로 트로이아 목마를 완성시켰다.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아인들은 그리스 진영의 탈영병으로 가장한 시논의 설득만을 믿고 그 목마를 아테나에게 바치는 공물로써 트로이아 성 안으로 들였다. 신관 라오콘이 이 목마를 파괴하려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바다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 밤이 되어 그리스 함대가 돌아오자, 목마에 숨어있던 그리스인들은 트로이아의 성문을 열었다. 총력을 기울인 약탈이 이루어지면서, 프리아모스와 남아있던 그의 아들들은 살해 당했고, 트로이아의 여자들은 그리스 여러 도시의 노예로 전락했다. 모험적인 그리스 지도자의 귀향 항해(아가멤논을 살해한 아이네이아스와 오디세우스의 방랑 포함)는 두 개의 서사시 《귀향》(소실된 노스토이),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 다루고 있다. 트로이아권은 트로이아 세대의 자녀들이 겪는 모험도 담고 있다.(오레스테스와 텔레마코스) 트로이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주제를 제공하였으며, 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예: 트로이아 약탈이 묘사된 파르테논의 메토프) 트로이아권에서 유래한 주제가 이같은 예술적 선호를 받은 사실은 이것이 고대 그리스 문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동일한 신화적 연대기 또한 후대 유럽 문학 작품의 일련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호메로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트로이아 중세 유럽 작가는 트로이아 전설에서 영웅과 낭만적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과 함께, 이것이 그 시대에 맞게 궁정풍의 기사적인 전형으로 각색하기 쉬운 구조를 갖췄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누아 드 셍트 모르(《로망 드 트로이》, 1154-60년), 엑세터의 조셉(《드 벨로 트로이아노》, 1183년)과 같은 12세기 작가들은 전쟁을 묘사하면서 딕티스와 다레스의 이야기를 각색하였다. 이들은 호라티우스의 조언과 베르길리우스의 전례를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말하는 대신에 트로이아의 시를 다시 쓴 것이다. 트로이아 전쟁에 등장하는 유명한 영웅들은 다음과 같다. "트로이아 진영:" "그리스 진영:"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는 일상의 중심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그들의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 그들은 자연 현상과 문화적 변화, 인습적인 증오와 친교를 설명하는데 신화를 사용하였다. 한 지도자가 신화적 영웅, 또는 신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설명하는 트로이아 전쟁의 진실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사 역사가, 칼럼니스트, 정치 수필가이자 전 고전학 교수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과 고전학 부교수 존 히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 서사시의 심오한 지식은 그들의 문화 변용의 기저로 간주되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학문"(Ἑλλάδος παίδευσις)이었고, 그의 시는 한 권의 "책"이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철학과 역사, 산문과 합리주의가 등장한 이후, 신화의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신화적 계보도가 포함되던 역사의 구상에서도 초자연적 요소가 배제되었다.(투키디데스 역사 등) 시인들과 극작가들이 여전히 신화를 개작했던 반면에, 그리스 역사가와 철학자들은 이것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와 같은 일부 급진 철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시인들의 이야기를 신성 모독적인 거짓말로 여겼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려낸 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신들에게 귀속시켰다. 절도, 간통, 서로 기만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표현은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서도 광범위하게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자신만의 우의적인 신화를 만들었고(《국가》의 에르의 몽상), 신들의 부도덕한 속임수, 도둑질, 간통을 소재로 하는 구비 설화를 비판하였으며, 문학 작품에서 그들이 중심 역할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신화를 "늙은 아내의 수다" 로 비유한 플라톤의 비판은 호메로스 신화 전통에 대항하는 최초의 중대한 도전이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에 근접한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적 접근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헤시오도스와 신학 작가들은 그들에게 그럴듯해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우리를 배려하지 않았다 ... 하지만 신화적 문체로 돋보이려는 작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는 없다. 우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며 나아갈 그들에게 반대 심문을 해야만 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플라톤은 그 자신과 그의 집단을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일례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서술은 철학자들이 스승의 정직한 삶을 찬양할 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서사시풍의 비극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핸슨과 히스는 호메로스 전통에 대한 플라톤의 거부가 그리스 문명의 대중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 오래된 신화는 지역 종교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계속해서 시 문학에 영향을 미쳤고, 회화와 조각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종종 오래된 전통을 비웃는 연극을 제작하였으며, 그가 창조한 배역의 목소리를 빌어 의심의 어조를 담아내었다. 그가 제작한 연극은 언제나 예외없이 신화를 주제로 행해졌다. 이러한 많은 연극들은 과거에 같거나 비슷한 신화를 소재로 쓰인 연극의 회답으로 쓰여졌다. 에우리피데스는 주로 신에 대한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과거 크세노크라테스의 표현과 유사한 반대에 입각한 비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묘사된 신들은 너무 어리석게도 인간과 닮았다." 헬레니즘 시대 동안 신화는 일정 신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일류 엘리트 지식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동시에 고전 시대의 회의적인 성향 또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스 신화 수집가 에우헤메로스는 신화적 존재와 사건이 기초로 하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찾는 관례를 확립하였다. 그의 본래 작품("Sacred Scriptures")은 유실되었지만, 디오도로스와 락탄티우스가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신화 해석학의 합리화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물리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높은 관심을 받았다. 유헤메로스 학파가 신화를 역사적 형태로 합리화한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신과 영웅에 대한 설명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스토아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신화적 전통의 도덕적 의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그리스 어원에 바탕을 두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시민들의 마음에 사로잡힌 미신의 두려움을 쫓고자 하였다. 리비우스 또한 신화적 전통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전설(파불라에)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직접 판단을 내리고자 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로마인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종교적 전통의 강력하고 변증적인 관념을 동반하였으며, 전통이 종종 미신의 온상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도 했다. 고전학자 바로는 종교는 인간의 제도이며, 사회의 선을 보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고, 종교적 숭배의 기원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의 저서인 《신의 역사》("Antiquitates Rerum Divinarum")(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에서 일반적 접근법을 찾을 수 있다.)에서 바로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는 반면, 진실로 경건한 사람은 그들을 부모로서 공경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에 따르면, 로마 사회에서 신은 시인이 연극과 오락을 위해 만들어낸 신화적 가치, 도시와 사람들이 숭배를 위해 이용하는 시민적 가치, 철학자가 만들어낸 자연적 가치의 세 가지 가치로 구분된다. 바로는 시민의 신학이 시적이고 신화적인 가치, 철학자의 가치와 결합된 곳이 최고의 국가라고 덧붙였다. 로만 아카데믹 코타는 신화를 문자 그대로, 또는 우의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모두 조롱하였으며, 철학에는 신화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키케로 또한 일반적으로 신화를 경멸하였으나, 바로와 마찬가지로 국교와 국교의 관례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였다. 이 합리주의 확장이 사회적 척도와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키케로는 그 누구도(노파나 소년도) 하데스의 공포나 스킬라, 켄타우로스, 다른 괴물의 존재를 믿을만큼 멍청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미신적이고 잘 속는 속성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키케로의 사상은 저서인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De Natura Deorum)에 포괄적인 요약이 드러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와 다른 외래의 수많은 신들이 융합된 로마 신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로마 신화가 이러한 발생 과정을 갖게된 이유는 로마인들만의 신화가 적었기 때문이며, 주요 로마 신들이 그리스의 대등한 신들의 특징을 답습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신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주신 제우스와 주피터는 이러한 신화적 공통점의 좋은 예이다. 두 신화적 전통의 결합에 더불어 새롭게 유입된 동방 종교는 더욱 심화된 융합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서, 태양 숭배 문화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시리아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 로마에 들어온 것이다. 아시아의 신 미트라(태양이라 칭함)와 바알은 아폴로와 헬리오스에 융합되어 하나의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가 되었고, 집성 의식을 받으며 혼합된 속성을 띄게 되었다. 아폴로는 종교에서 헬리오스, 또는 심지어 디오니소스와 점점 동일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신화를 개작한 문헌에서는 이러한 발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승 문학 신화는 실제 종교적 관습에서 갈수록 더 분리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작품인 2세기 오르페우스 찬가 모음집과 5세기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의 《사투르날리아》는 융화 경향과 합리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페우스 찬가는 고전 이전의 시적인 구성을 취하며, 유명한 신화의 주인공인 오르페우스가 썼다고 전한다. 실제 이 시들은 몇 명의 시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사 유럽 신화에 대한 줄거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사투르날리아》의 목적은 마크로비우스 자신이 읽은 자료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었으나, 신에 대한 시각은 베르길리우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 신화, 신학의 색채를 띄었다. 《사투르날리아》에서는 유헤메로스, 스토아,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적 의견이 다시 등장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이해의 기원을 신화를 "거짓말", 또는 전해져 오는 우화로 재해석하는 "기독교적 악의에 찬 전통적 태도"에 대한 18세기 말의 반발 작용으로 인한 것으로 평가한다. 1795년경, 독일에서는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다.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는 괴팅겐에서 그리스 연구를 다시 부활시켰고, 그와 동시에 후임자인 크리스티안 고트로프 하이네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과 함께 독일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신화 연구에 대한 기초를 다졌다. 19세기 비교 언어학의 발전과 20세기의 민속학적 발견이 더해져, 신화는 신화학이라는 학문 형태로 정립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이래로 신화에 대한 연구는 모두 비교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빌헬름 만하르트, 제임스 프레이저, 스티스 톰프슨은 민담과 신화의 주제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데 비교 연구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다. 1871년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그의 저서 "Primitive Culture"에서 비교 연구 방법을 적용하여 종교의 기원과 발달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넓게 분리된 문화권들의 물질 문화, 종교와 신화를 한데 모으는 타일러의 절차는 카를 융과 조셉 캠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막스 뮐러는 신화 연구에 비교 신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도입하여 아리아인의 자연 숭배의 왜곡된 잔해를 발견하였다.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는 신화가 공통의 사회적 기능을 이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신화들의 형식적인 관계와 유형을 비교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신화가 인간의 보편적이고 생물학적인 개념, 그리고 억압된 발상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 신화 해석의 논거는 해몽으로, 프로이트의 개념인 꿈 작업은 꿈 속에서 나타난 어떤 개별 요소든지,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후 관계가 중요함을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의견은 프로이트 개념에서 신화에 대한 구조 언어학자와 정신 분석적 접근 간의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카를 융은 자신의 이론 "집단 무의식"과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부호화된 원형("태고적" 양식의 승계)을 통한 보편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신화를 해석했으며, "신화 형성 구조의 요소는 무의식 정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A. 세갈은 융의 방법론과 조셉 캠벨의 이론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캠벨의 신화 해석은 단순히 원형을 동일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오디세이아》 해석은 오디세우스의 삶이 어떻게 영웅적 양태에 합치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융은 원형의 동일시가 단지 신화 해석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의 현대적 연구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칼 케레니이는 융의 그리스 신화에 대한 원형 이론을 적용하고자 신화에 대한 자신의 초기 견해를 철회하였다. 현대에는 그리스 신화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성서적 이론에 따르면, 신화적 전설은 실제 사실에서 가장되고 바뀐 부분은 있으나 모두 성서 속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이론에서는 신화에서 언급되는 모든 인물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과 관련된 전설은 단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본다. 이 이론에서는 아이올로스의 이야기를 아이올로스가 티레니아 해에 위치한 어떤 섬의 지배자였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우의적 이론은 모든 고대 신화가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추정한다. 이와는 다르게 물리적 이론에서는 공기와 불, 물의 원소가 본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주요한 신들이 이러한 자연의 힘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생각을 따르고 있다. 막스 뮐러는 인도유럽 종교의 형태를 "본래" 명시하던 아리아인의 흔적을 찾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했다. 1891년,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인류 고대사에 관한 최고로 중요한 발견은 ... 다음의 표본 등식이었다. 산스크리트어 디아우스 피트르 = 그리스어 제우스 = 라틴어 주피터 = 고대 노르드어 티르" 서로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 드러나는 특성과 기능은 밀접한 평행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전승이 공유되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라누스와 산스크리트 바루나 또는 그리스의 모이라와 노르드 신화의 노른의 경우처럼 언어의 유사성을 보이는 증거가 부족하여 확실한 입증은 어렵다. 한편, 고고학과 신화학에서는 그리스가 소아시아와 근동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아도니스는 근동의 죽음의 신과 유사성을 띄는데, 신화보다는 숭배 의식에서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아프로디테의 도해가 셈족 여신에서 파생된 부분이 많은 반면, 키벨레는 아나톨리아 문화를 그 뿌리로 두고 있다. 초창기 신의 세대(카오스와 그의 자손들)와 에누마 엘리시의 티아마트 또한 공통점이 많다. 메이어 라인홀드는 "권력을 원하는 세대의 투쟁, 폭력을 통한 신의 계승을 비롯해서 근동의 신통기적 개념은 ... 그리스 신화 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인도유럽과 근동 기원에 더하여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가 크레타, 미케네, 필로스, 테베, 오르코메누스와 같은 프레헬레닉 문명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로 추측하고 있다. 종교 역사학자들은 크레타와 관련된 수많은 고대의 신화 구성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졌다.(황소의 신, 제우스와 에우로페, 황소와 관계를 맺어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파시파에 등) 마틴 P. 닐슨 교수는 주요한 고전 그리스 신화가 미케네 문명과 선사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부르케르트는 크레타 궁전 시대의 도해로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이론은 확증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광범위하게 수용된 기독교는 신화의 유행을 억제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고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오비디우스의 시는 시인과 극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영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르네상스 초기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교적인 주제를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와 나란히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라틴 매체와 오비디우스 작품의 유입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와 조반니 보카치오, 단테와 같은 중세 르네상스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북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시각 예술의 주제로 채용하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받은 영국인의 예술적 창조력은 초서와 존 밀턴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리지스를 통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고대 신화를 개작하면서 그리스 연극을 부활시켰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저항이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신화는 극작가들에게 여전히 천연 그대로의 중요한 소재였으며, 헨델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리브레토로 쓰여지기도 했다. 18세기 말에 와서는 낭만주의가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그리스 문화의 뜨거운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 작품의 새로운 번역물이 출간되면서 동시대의 시인(알프레드 테니슨, 키츠, 바이런, 셸리 등)과 화가(프레더릭 레이턴, 로렌스 앨머 태디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토프 글루크, 리차드 스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는 음악에 그리스 신화적 주제를 심어두기도 하였다. 토머스 불핀치와 너대니얼 호손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영미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고전 신화의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최근에 와서는,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리엇과 같은 극작가와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와 같은 소설가에 의해 고전적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피에로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만능인으로 어릴 때부터 수학·음악·회화 외에 모든 학문에 있어서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성모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2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이른바 환상적인 색감을 살리는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1516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1516년 프랑수아 1세가 있는 프랑스의 끌로 뤼세(Clos Lucé)로, 그의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함께 이주한다. 그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간다. 여기서 <성 안나>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 설계하였다.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슼코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회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한동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라틴어수업》(흐름출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과 과학공부 뿐만 아니라 라틴어 공부도 했다. 율리우스력 율리우스력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해 기원전 45년부터 시행한 양력(陽曆) 역법이다. 율리우스력의 1년은 365일 또는 366일(4년에 한번)이다. 기원전 46년 이전까지 고대 로마에서는 태음력을 사용하였으며, 점차 계절의 변화(즉, 태양의 일주)를 고려해 태음력과 태양력을 섞어서 년(年)과 월(月)을 계산하였다. 이에 따라 특히 달을 계산하는 데 적지 않은 혼란과 계산의 착오가 생겼으며, 이러한 착오는 제사장이 임의로 수정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채택한 달력은 태양력을 기준으로 2월을 제외한 달은 모두 30일 또는 31일로 정함으로써 이전에 있던 번거로움을 한꺼번에 해소하였다. 율리우스력은 4년마다 2월 29일을 추가하는 윤년을 두어 율리우스력의 한 해 길이는 365.25일이다. 이는 365.2422일인 태양년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어서 128년마다 1일의 편차가 났기 때문에, 1582년부터 보다 정확한 그레고리력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현재(1900년 ~ 2099년),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의 차이는 13일이다.(그레고리력 1월 14일은 율리우스력으로 1월 1일이다) 그레고리력을 교회력으로 채택하고 있는 서방 교회(천주교와 개신교)와 달리 동방 교회는 율리우스력을 교회력으로 쓰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성탄절은 율리우스력 12월 25일로, 이는 그레고리력으로 1월 7일이다. 안톤 체호프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는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 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시베리아, 사할린 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스스로 사임하고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 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단편 극 미토콘드리아 미토콘드리아(), 고대 그리스어 mitos: 끈 + chondros: 낱알)는 진핵생물에서 산소 호흡의 과정이 진행되는 세포 속에 있는 중요한 세포소기관으로, 한자 표기로는 사립체(絲粒體) 또는 활력체(活力體)라고도 한다. 미토콘드리아라는 이름은 아래의 모식도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겉모양이 낱알을 닮고 내부 구조가 마치 끈을 말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본적인 기능이 여러 유기물질에 저장된 에너지를 산화적 인산화 과정을 통하여 생명활동에 필요한 아데노신삼인산(ATP)의 형태로 변환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발전소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25%의 세포질을 차지하고 있으나 그 크기와 수가 세포의 종류와 역할에 따라 다양하다. 자체적인 DNA(미토콘드리아 DNA)와 를 가지고 있어 세포질 유전에 관여한다. 자체적인 DNA의 존재와 이중막 구조는 미토콘드리아뿐만 아니라 엽록체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오래전 세균에 의한 세포내 공생의 결과로 진핵생물의 탄생이 이루어진 데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미토콘드리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것이 있다는 사실이 전자 현미경의 연구로 알려져 있으나, 광학 현미경에서는 아주 작은 과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세포 내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수는 세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많은 수가 존재한다. 전자 현미경에 의한 관찰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는 바깥쪽을 둘러싸는 막질 부분과 내부로 이루어져 있다. 막 부분은 외막과 내막의 이중막으로 되어 있는데, 내막의 일부는 안쪽으로 돌출하여 여러 겹으로 접혀 있다. 이렇게 접혀 있는 내막의 구조를 ‘크리스테(cristae)’라고 한다. 미토콘드리아에는 TCA회로나 전자 전달계에 관여하는 모든 효소가 들어 있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내 호흡에 의해 유기물의 화학에너지를 ATP로 바꾸는 중요한 기관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막과 같은 형태이며 단백질을 포함하고 있는 인지질 2중층으로 이루어진 내막과 외막을 가지고 있다. 외막과 내막의 기능은 각각 다르다. 미토콘드리아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무게 기준으로 인지질과 단백질이 반반씩 구성하고 있다. 포린(porin)(2~3 nm 정도 크기의 비교적 큰 내재성단백질(integral proteins))이 많이 있는데 이 포린은 5000D(달톤)이하인 분자가 투과할 수 있는 통로(channel)이다.[Alberts, 1994] 5000D보다 큰 분자들은 능동수송에 의해서만 외막을 통과할 수 있다. 지방산의 탄화수소부분의 합성/신장, 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의 산화, 트립토판의 분해등의 기능에 관련된 다양한 효소들이 이러한 능동수송 과정에 작용한다. 4가지 종류의 기능을 가진 단백질(효소)을 가지고 있다.(Alberts, 1994): 내막은 구불구불 접혀져 있기 때문에 막 표면적이 넓어져 ATP생성 능력을 높여준다. 이러한 내막이 늘어난 부분을 크리스테라고 하고, 이런 구조형태를 '크리스테 구조' 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간의 미토콘드리아는 크리스테를 포함한 내막 표면적이 외막의 5배에 달하며 근육세포와 같이 더 많은 ATP를 요구하는 세포의 경우 간세포의 경우보다 더 많은 크리스테를 가지고 있다 기질은 내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tRNA, DNA, 게놈의 복사본과 수백 가지의 효소가 존재하고 있다. 효소들의 기능은 지방산과 피루브산의 산화, TCA회로를 포함한다.(Alberts, 1994) 미토콘드리아는 자체적인 유전물질을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RNA와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 핵에서 유래하지 않은 미토콘드리아 DNA는 내막을 구성하는 펩티드(사람에서는 13개의 펩티드)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자체 생성된 펩티드는 숙주세포의 핵에서 유래한 폴리펩티드와 함께 미토콘드리아 막을 구성한다. 미토콘드리아의 기본적인 기능은 유기물질을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 형태인 ATP로 전환하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의 일부 기능은 특정한 세포에서만 수행된다. 예를 들어 간세포의 미토콘드리아는 단백질 대사의 부산물인 암모니아를 해독하는 효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변이는 여러 가지 미토콘드리아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의 주 기능은 ATP의 생산으로 해당과정(미토콘드리아의 바깥쪽 세포질에서 이루어진다)의 주생산물인 피루브산과 NADH 대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ATP의 생성은 세포의 유형이나 산소의 존재유무에 따라 2 가지 방법이 있다. 해당과정에서 생성된 피루브산 분자는 능동수송에 의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거쳐 기질로 들어간다. 기질에 들어간 피루브산은 coenzyme A에 결합해 acetyl CoA를 생성하고 생성된 acetyl CoA는 TCA회로(구연산회로 또는 Krebs 회로)로 들어가게 된다. 1개의 피루브산에 의해 3개의 NADH와 1개의 FADH2가 생성되어 전자전달계에 관여하게 된다. 미토콘드리아 내막에 붙어있는 숙신산 탈수소효소(succinate dehydrogenase)를 제외하고 TCA회로에 관여하는 모든 효소는 미토콘드리아 기질에 녹아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에너지 요구에 반응하여 DNA를 복제하고 분열한다. 세포의 에너지요구량이 높아지면 미토콘드리아는 신장하여 분열하며 에너지 요구량이 낮아지면 미토콘드리아는 파괴되거나 불활성화 상태가 된다. 세포가 분열할 경우 세포질의 분배가 다소 불균등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의 분배 또한 균등하지 않다. 미토콘드리아는 세균과 같이 이분법으로 자신을 복제하지만 세균과는 달리 미토콘드리아끼리 융합하기도 한다. 때로는 단백질과 폴리리보솜이 많은 곳에서 새로운 미토콘드리아가 생기기도 한다.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핵의 유전자와 같은 방법으로 유전되지 않는데, 정자에 의한 난자의 수정에서 난자의 핵과 정자의 핵이 동등하게 수정란의 세포핵유전자에 기여하는 반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의 것만 유전된다. 난자에 수정되는 정자는 단 1개뿐이며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편모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내는 데 사용되다 난자에 들어오게 되면 이내 파괴되게 된다. 반면 난자 자체는 정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미토콘드리아를 가지고 있지만 살아남아서 분열을 계속하여 성체의 세포에 존재하게 된다. 즉 미토콘드리아는 거의 대부분 모계(母系)유전하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모계유전(maternal inheritance)은 동물을 포함 대부분의 진핵생물에서 볼 수 있다. 드물게 부계유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침엽수(소나무와 주목 제외)에서 흔하게 나타나며, 인간의 경우 아주 낮은 확률로 나타난다고 한다. 단일계통 유전은 서로 다른 미토콘드리아 계통 간의 유전자 재조합 가능성이 낮고 미토콘드리아 DNA가 대체로 클론임을 의미한다. 만약 유전자 재조합이 없다면 모든 미토콘드리아 DNA는 일베체형에 서두 동일하기 때문에 집단의 진화적 역사를 연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 재조합 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미토콘드리아가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정세균 무리보다 무척 적은 규모의 게놈을 가지고 있다. 일부는 소실된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수가 세포핵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진화적으로 볼 때 비교적 일반적으로 보인다. 미토콘드리아의 단일계통 유전은 일부 효모종의 미토콘드리아의 Petite 돌연변이(자신의 DNA 일부 또는 모두를 잃어 산화적 인산화를 못하는 비정상적인 미토콘드리아 돌연변이. petite와 정상적인 효모사이의 융합이 일어나게 되면 딸세포의 일정 비율은 petite가 됨.)에서 볼 수 있듯이 유전자 간 분쟁(intragenomic conflict)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포소기관의 분쟁은 남성과 여성의 분화로 해결할 수 있으며 유전자간 분쟁은 성의 분화가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생각된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유전자 재조합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단 유전학이나 진화 생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반수체의 형태, 즉 거의 대부분 모계로부터 유전되기 때문에 다른 개체간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관계는 계통수(系統樹, phylogenetic tree)로 나타낼 수 있으며 미토콘드리아 DNA의 유형분석을 통해 집단의 진화역사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 진화 유전학에서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기원설(인류 최초의 여성조상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추적)과 네안데르탈인 연구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토콘드리아는 거의 모계로만 유전되어 재조합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최초의 여성인류를 추적할 수 있다. 모든 인류에게서 미토콘드리아 DNA 유형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와 공통점이 없어 현생인류의 조상인지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 현생인류와 연관성이 없음이 밝혀져 네안데르탈인 후예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끔 하였다. 그러나 미토콘드리아 DNA는 집단에서의 여자(모계)쪽의 역사만을 반영하기 때문에 전체 군집의 역사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인구의 분산이 주로 남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미토콘드리아 연구로는 알아내지 못한다. Y염색체(포유동물에서 재조합이 없는 영역)를 포함한 핵DNA연구(재조합으로 분석하기가 힘듦)로 보다 넓은 범주의 집단의 진화적 역사를 연구한다. 미토콘드리아는 리보솜과 GOZA를 가지고 있고 스스로 분열할 수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생활을 하던 원핵생물의 세포 내 공생으로 유래했다고 본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대체로 원형이고 여러 유전정보를 담고 있어 원시세균 무리 중 특수하게 분화된 것이 원시 미토콘드리아로 되었다는 가설도 있고(Futuyma 2005), 리케차(rickettsia)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지만 세포내 공생에서 유래했다 점에서는 동일하다. 세포 내 공생에 관해서도 기생에 의한 것이라는 이견도 있지만 숙주의 내포작용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원시 미토콘드리아의 숙주세포 내 공생으로 숙주는 세포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같은 영양을 공급받더라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원시 미토콘드리아는 생존을 보장받고 양질의 양분(당)을 공급받게 되어 상호간의 상승작용이 일어나 생존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미토콘드리아뿐만 아니라 엽록체 또한 세포내 공생으로 상승작용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적어도 20억 년 전 세포공생이 이루어졌다고 추측되는 미토콘드리아는 아직도 그 기원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 미토콘드리아는 진핵세포(80S 리보솜)와 달리 원핵생물과 유사한 70S(침강계수, sediment coefficient)리보솜을 가지고 있다. 둘째, DNA가 원핵생물과 유사하다. 반복구간이 없이 코딩DNA비율이 높고 대체로 인트론(intron)이 없으며 원래 원핵생물보다 적은 유전정보를 담고 있지만 직선이 아닌 원형DNA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인트론이 거의 없고 반복구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형 mRNA를 잘라 다시 접합(polyadenylation)하여 완성된 mRNA를 만드는 다인자 전사(multigenic transcript)를 한다. 일부 진균(microsporidian)이나 원생생물(metamonad, entamoebid, 독립영양 pelobiont)과 같은 진핵생물에서는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경우도 있다. rRNA계통수에서 이들은 매우 원시적인 진핵생물로 여겨지며 미토콘드리아의 세포공생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미토콘드리아에 의해 유도된 세포소기관 과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으므로 실제로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진핵생물은 없다고 봐야한다. 결론적으로 미토콘드리아의 존재는 진핵생물의 발달에서 중요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독일어: Vorsokratiker, 영어: Presocratics)란 문자 그대로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를 한데 묶어서 쓰는 낱말이다. 이 낱말은 처음 독일의 고전 문헌학자 헤르만 딜스가 이들 철학자의 단편들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의 제목에서 비롯된다. 그 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를 직역하여 그대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 철학사에서 굳어진 낱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흔히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며, 또는 그들이 태어난 지방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 엘레아 철학자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에 대한 중요한 분석들은 그레고리 블라스토스, 조너선 번스, 고든 클라크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중요한 문헌들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 문헌들이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후대의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던 것들과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뿐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그들 주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신화적 해석들을 거부했으며, 대신 좀 더 이성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일부는 나중에 수학적, 과학적 그리고 철학적 연구의 기초가 되는 문제들과 역설들을 정의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초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우주론은 근대 과학에서 기초된 관점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내놓은 대답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물었던 질문들은 이후 철학자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 , 기원전 6세기 초 - ?)는 고대 그리스의 이른바 전소크라테스 철학자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출생 연대는 매우 불확실하다. 기원후 3세기에 쓰여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기원전 504년 경에 이른바 아크메(Akme, 사람이 가장 많이 활동하는 나이, 40대)에 접어 들었다고 하며, 에페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밖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애에 관해 오늘날 전해지는 일화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글을 자주 씀으로써 이미 고대에 '어두운 철학자'(Skoteinos)로 이름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머물러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성, 변화"를 중요시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인간이 만든 것 또한 아니다. 언제나 살아 있는 불로서 정해진 만큼 연소되고 정해진 만큼 꺼지면서 언제나 있었고 또 있으며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라면서 세계의 원질을 불에 비유하였다. 또한 "만물은 움직이고 있어서 무릇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도 두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善)도 악(惡)도 하나인 것이다. 위로 향하는 길이나 아래로 가는 길도 다 같이 하나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생(生)과 사(死), 각성(覺醒)과 수면(睡眠), 젊음과 늙음의 양상도 모두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화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전화하여 이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생성의 원리로서 "대립" 또는 "다툼"을 제시하였다. 그는 "여기에 말해 둔 것은 항상 그대로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비로소 그것이 들려와도 들리지 않던 전과 다름이 없다. 만물의 생성이 여기에 말해 둔 대로 행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런 범례(範例)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말에도 행동에도 그런 범례는 마땅히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로고스(logos)의 개념을 제시하여 감관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헤겔 이후 재조명 받았고 흔히 '존재에서 생성으로' 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철학의 전회에 따라 영향권이 확장되고 있다. 니체, 베르그송, 들뢰즈 등 현대의 거장들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현저하다. 또한 운동/생성에 대한 고찰이 유사한, 노장철학과 중국철학과의 연관성으로 동양철학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히폴리토스 히폴리토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 1865년 6월 13일 ~ 1939년 1월 28일)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벨 위원회는 "고도의 예술적인 양식으로 전체 나라의 영혼을 표현한, 영감을 받은 시"라는 평가를 남겼다. 아일랜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예이츠는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완성해 낸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예술가인 잭 버틀러 예이츠의 형이며 존 버틀러 예이츠의 아들이다. 더블린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슬라이고 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시를 공부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일랜드의 전설과 신비주의 모두에 매료되었다. 두 가지 주제 모두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으며, 이후 세기가 바뀔 때인 1900년 무렵 까지도 그의 작품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 가 처음으로 낸 시집은 1889년에 출간되었고, 그 시집에 담긴 시들은 느리고 서정적이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라파엘 전파의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영국 시인 두 사람 곧 에드먼드 스펜서와 퍼시 비시 셸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화가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화가를 지망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뒤늦게 시를 쓰기 시작하여, 1889년 처녀 시집 <마신의 방황>을 발표하여 와일드 등 유명한 시인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점차 상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세워지자 원로원 의원으로 정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민 극장 창설에 앞장섰다. 대표작으로 시집 <갈대 사이로 부는 바람>과 희곡집 <심원의 나라> 등이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 는, 윌리엄마이트 군의 군사이자 리넨 상인이었다가 1712년 세상을 떠난 저비스 예이츠의 자손이었다. . 저비스 예이츠의 손자 벤저민은 킬데어의 부유한 지주의 딸인 메리 버틀러와 결혼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부친인 존은 결혼할 당시에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곧 런던의 헤더리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중단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모친인 수전 메리 폴렉스핀은 슬라이고에서 제분업과 운송업으로 성공한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윌리엄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족은 외갓집과 함께 지내기 위해 슬라이고로 이사하는데 그 곳은 어린 시인의 가슴 속에 어린 시절 속 공간일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집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라이고는, 사실로써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예이츠에게 “마음속의 고향” 이 된다. 버틀러 예이츠 가족은 무척 예술적인 집안이어서, 그의 남동생 잭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누이 엘리저베스와 수전 메리(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들을 롤리와 릴리라고 불렀다)는 미술 공예 운동에 가담하였다. 예이츠가 어렸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 우위(Protestant Ascendancy)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급격한 시대 변화로 인해 개신교 신자였던 예이츠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에 벌어지는 변화에는 전반적으로 찬성했지만 19세기 민족주의의 부활로 인해 재산에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예이츠의 인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7년, 예이츠의 전기집을 쓴 포스터(R. F. Foster) 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20세였을 당시의 세상을 이해해야한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경우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라고 했다. 개신교 신자가 권력을 잃어가면서 예이츠의 어린 시절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1880년대에는 정치가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이 권력을 얻으면서 홈룰 운동(아일랜드의 토지를 영국계 지주들의 손에서 되찾아내려는 운동)이 널리 유행했고 1890년대에는 민족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세기말에는 가톨릭 신자가 기득권층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예이츠의 시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국가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67년, 예이츠의 부친 존이 영국에서 예술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하자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한다. 예이츠의 부모는 처음에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하였다. 예이츠의 모친은 아이들에게 아일랜드 전래동화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부친은 예이츠를 슬라우 지역으로 데려가 자연사 탐구를 도우면서, 독특한 지리와 화학 교육을 제공하였다. 1877년 1월 26일, 어린 시인은 고돌핀 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 학교를 다닌다. 예이츠는 학업 면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으며, 그의 담임교사는 성적표에 “나쁘지 않은 수준. 다른 과목보다는 라틴말에 능한 듯함. 철자법에 매우 취약함.”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예이츠는 수학과 언어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마 그가 음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물과 동물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80년 말, 예이츠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더블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도심에서 살다가 후에 호스 시 교외로 이사했다. 1881년 10월, 예이츠는 더블린에 위치한 에라스무스 스미쓰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재개한다. 부친의 화실이 학교 주변에 위치했던 덕분에 예이츠는 많은 시간을 화실에서 보냈고 도시의 유명한 화가들과 작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즈음, 그는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885년 예이츠의 초기 시들과 <사무엘 퍼거슨 경의 시 (The Poetry of Sir Samuel Ferguson)> 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예이츠는 토마스 거리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현 국립 예술 디자인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가 17살이었을 때 지어졌는데 그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왕위에 오르는 마법사에 관한 시(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가 있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지은 다른 작품에는 어느 양치기에게 이교도로 고소당한 여인, 주교, 그리고 수사에 관한 연극을 비롯해 사랑과 관련된 시, 그리고 중세시대 독일 기사에 관한 설화시 등이 있다. 그의 초기작들은 지극히 평범했고, 비평가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의 말에 따르자면 “아주 아일랜드답지 못하고 그에게 속삭이는 꿈이라는 어둠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이 셸리,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그리고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시의 구절들과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에 반해, 예이츠가 이후에 지은 작품들은 아일랜드의 전설과 전래동화,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영향을 받았다. 예이츠는 후에 블레이크를 “인간들에게 위대한 진실을 전달해 준, 위대한 조물주 중 하나”라고 칭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1891년, 예이츠는 <존 셔먼(John Sherman)> 과 <도호야(Dhoya)> 를 출판했는데 전자는 중편소설이었고, 후자는 짧은 이야기였다. 두 작품은 더블린의 더 릴리풋 프레스(The Lilliput Press)에서 1990년 재출판 되었다. 예이츠의 가족은 1887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890년에 예이츠는 플릿 스트릿(Fleet Street) 술집에서 정기적으로 시낭송을 하면서 알게 된 런던 시인들 중 한 명인 어니스트 리스(Ernest Rhys)와 라이머클럽(Rhymers' Club)을 공동설립하였다. 이 때 발표한 작품들은 훗날 <비극적인 세대(Tragic Generation)> 라는 이름으로 1892년 첫 번째, 1894년에 두 번째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그는 에드윈 엘리스(Edwin Ellis)와 함께 처음으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작품집을 완성시키면서, 잊혀진 시 를 재발견하게 된다. 훗날 셸리(Percy Bysshe Shelley)에 대한 에세이에서 예이츠는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를 다시 읽어보았다. 신성하다고 여겼던 그 어떤 책들보다도 훨씬 확고한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 예이츠는 평생 신비주의나 심령론,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생동안 광범위한 주제의 글들을 읽고 초자연현상 연구단체인 <고스트 클럽(The Ghost Club, 1911년)> 회원이 되었는데, 특히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 초에 예이츠는 “내가 신비로운 힘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블레이크집에 단 한 단어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캐서린 백작부인(Countess Kathleen)>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비로운 인생이야말로 나의 모든 행동과,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글의 중심이다.”라고 저술했다. 신지학자인 모히니 채터지(Mohini Chatterjee)가 연구했던 힌두교, 그리고 신비주의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이츠의 그러한 관심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큰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은 지적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영향력을 무시하고 있다. 특히 위스턴 휴 오든(W.H. Auden)은 이러한 면에 대해 “다 큰 성인이 뻔한 마술과 쓸데없는 인도(India) 의식에 사로잡혀 우스운 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처음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를 시적 모델로 한 판타지 작품 <아일랜드의 위상(The Isle of Statues)>이었다. 이 작품은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실렸으나 그 이후 재출판되지는 않았다. 첫 단독 출판집은 <모사다 극시(Mosada: A Dramatic Poem> (1886)라는 소논문으로, 예이츠의 부친이 돈을 들여 100부를 인쇄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1889년에는 그가 1880년대 중반에 지었던 시들을 모아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 라는 작품집을 발행하였다. 예이츠 전기작가인 포스터(R. F. Foster)는 이 긴 제목의 시집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일(Gael)식 이름, 두드러지는 반복기법, 끊어짐 없는 운율이 세 단락에 걸친 이 시들에 미묘한 변화를 준다.”라고 말했다. 1885년에 예이츠는 더블린 연금술회(Dublin Hermetic order) 창립에 합류하게 되었다. 6월 16일에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예이츠는 의장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신지학협회 (Theosophical Society) 런던지회에 강의를 하러 온 체터지와 공동으로 더블린 신지학회 지부(Dublin Theosophical lodge)를 열었다. 다음 해에 예이츠는 그의 첫 강신회에 참여하였다. 훗날 신지학협회와 신비학, 특히 황금여명단(Golden Dawn)의 장미 십자회 이념이 접목된 신비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12년에 열린 강신회에서는 자신을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라 칭하며 예이츠의 수호신 또는 반(反)자아라고 주장하는 혼령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산문집이 이다. 예이츠는 1890년에 황금여명단에 정식으로 가입되어 'Daemon est Deus inversus(‘악마는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뜻)'라는 마법명을 받았다. 이 이시스 우라니아(Isis-Urania) 종단 사원의 열렬한 전도자였던 예이츠는 그의 숙부인 조지 폴렉스펜(George Pollexfen)과 모드 곤(Maud Gonne), 플로렌스 파르(Florence Farr)를 입단시켰다. 그는 비록 개인숭배가 저변에 깔린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는 있었지만 황금여명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매력을 느꼈다. 예이츠는 플로렌스 파르, 맥그리거 매터즈(Macgregor Mathers)와 함께 협회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였으나, 블리스 로드 사건(Battle of Blythe Road)이 있던 당시 매터즈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를 퇴출시키고 황금여명단의 소유물들을 독점하도록 하는 데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황금여명단이 해체되어 여러 분파로 나뉜 후에 예이츠는 1921년까지 샛별회(Stella Matutina)에서 활동하였다. 1916년, 51세가 되던 해에 예이츠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는 1916년 여름에 모드 곤(Maud Gonne)에게 마지막으로 청혼을 했다. 곤의 정치 혁명 활동 경력과 클로로포름 중독, 1916년 부활절 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훗날 영국군에게 처형당한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와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등 그녀에게 있었던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적인 재앙들 때문에 그녀는 부적절한 아내로 여겨졌다. 전기작가인 포스터(R.F. Foster)는 예이츠의 마지막 청혼은 모드 곤과 결혼하려는 진심어린 마음 보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예이츠는 조건을 붙여서 무관심한 태도로 청혼했으며, 내심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랐다. 포스터(R.F. Foster)에 따르면 그가 의례적으로 모드에게 청혼하고 의례적으로 거절당했을 때,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녀의 딸에게로 옮겨갔다.” 이조 곤(Iseult Gonne)은 당시 21세로 모드가 루시앙 밀레보이예(Lucien Millevoye)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이였다. 그녀는 그 때까지 슬픈 삶을 살아왔다. 짧은 생을 살고 간 그녀의 오빠를 환생시키려는 시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은 그녀의 엄마의 입양된 조카로 소개되었다. 그녀는 11세에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위해 총기 밀반입자로 일했다. 15세 되던 해, 그녀는 예이츠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리고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접근한지 몇 개월 후에 이조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해 가을, 예이츠는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소개로 만난 25세의 조지 하이디 리즈(Georgie Hyde-Lees, 1892-1968)에게 청혼했다. “조지, 안돼. 그 사람은 곧 죽을 노인이야.”라는 그녀의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이디 리즈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그 해 10월 2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나이차이와 예이츠가 신혼여행 도중 품었던 후회와 회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성공적이었다. 부부는 안느(Anne)와 마이클(Michael) 2명의 자녀를 낳았다. 비록 나중에 예이츠가 다른 여성들과 불륜관계를 맺었을 때라도 조지는 그녀의 남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죽은 후에 사람들은 당신의 불륜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거에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난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기억하고 있을테니까요.” 그의 결혼생활 초반에 예이츠와 조지는 사이코그래프법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안에서 조지는 그들이 “선생님”라고 부르는 다양한 영혼, 안내자들과 소통했다. 영혼들은 글자와 역사에 관한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했고, 부부는 이를 무아지경(최면상태)의 환경과 단계, 원뿔, 나선형에 대한 설명을 통한 실험을 하면서 발전시켰다. 예이츠는 이 내용을 《비전》(1925)으로 출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24년에 그는 자신의 출판인인 워너 로리(T. Werner laurie)에게 “나는 아마 이 책이 내 책 중의 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 예이츠는 20세기 영시 작가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상징시를 즐겨 지었는데 작품 속에서 사물을 암시적으로 형상화시키거나 상징적 구조를 주로 사용했다. 그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서 표면적 의미 이상의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사용한 상징은 대부분 그 자체로서의 의미와 더불어 무형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들이었다. 다른 모더니즘 작가들이 자유시 창작을 시도한 것에 반해 예이츠는 기존 문학 양식의 대가로서 문학 양식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그 또한 모더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차츰 종래의 시어법에서 벗어나 소박한 언어와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서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의 중기 작품인 《일곱 개의 숲에서》(In the Seven Woods), 《책임》(Responsibilities), 《초록 투구》(The Green Helmet) 등에 두드러진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는 보다 개인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사망하기 20년 전에 지어진 작품들에서는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언급이나 늙음에 대한 사유가 드러난다. 《서커스 동물들의 탈주》(The Circus Animals' Desertion) 이라는 시에서 예이츠는 후기 작품 창작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이츠는 1919년 이래로 골웨이 주 고트 인근의 투르 발릴리(Thoor Ballylee) 탑 (위도53°06'11.4", 경도08°46'29.2") 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다가 1929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 여름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이츠는 1932년 더블린 근교 래스파에서 리버스데일(Riversdale) 휴양지를 임대해 머물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발자취는 주로 아일랜드 외부에 남겨져 있다. 그는 말년에 창작활동에 주력하면서 많은 운문, 연극, 산문시 등을 발표했다. 1938년, 예이츠는 그의 희곡 《연옥》(Purgatory) 의 첫 공연을 감상했다. 같은 해에 그는《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자서전》(Autobiographies of William Butler Yeats) 을 완성했다. 예이츠의 초기 작품 중 대부분이 아일랜드 전설과 민담을 소재로 삼은데 반해 그의 후기 작품은 보다 현실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예이츠의 초기 문체와 후기 문체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이츠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어조와 함께 화려한 수식을 특징으로 삼으며, 인정없는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에는 서사시인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이나 《아일랜드의 위상》(The Isle of Statues) 이 있다. 《오이진의 방랑기》는 예이츠가 남긴 유일한 장편시이다. 그의 다른 초기작품에는 사랑이나 몽환적 주제에 관한 서정시가 있다. 중기 작품을 창작할 때 예이츠는 초기 시의 라파엘 전파적 경향을 떨쳐내고 새로운 특징의 시를 짓는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던 우미한 스타일은 딱딱하고 건조한 것으로 변화하고, 환상적이던 심상은 금속적이라 할 만큼 구체성을 지닌 심상으로 전화한다. 예이츠의 중기 작품을 좋아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모더니즘적이라고 평가한 반면, 그의 작품을 비방한 비평가들은 시적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들에는 시인이 강신론의 영향을 받아 얻은 창의적인 영감이 잘 드러난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후기 작품들은 초기 작품들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이츠의 초기 작품인《오이진의 방랑기》에서 다뤄졌던 세속적인 기사와 종교적인 성직자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후기 작품《영혼의 대화》(A Dialogue Between Self and Soul)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어떤 비평가들은 미술 분야의 파블로 피카소와 비슷하게 시 분야에서는 버틀러 예이츠가 19세기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예이츠가 정말로 T.S. 엘리엇 (T. S. Eliot) 이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와 더불어 모더니즘 작가로 인정받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더니즘 작가들은 《재림》(The Second Coming) 이 예이츠가 엘리엇의 모더니즘을 모방해 유럽에서 문명이 쇠퇴함에 따라 바치는 장송곡이라고 평가했지만 훗날의 비평가들은 이 시가 예이츠의 종말론 이론에 관한 시이기 때문에 1890년 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내렸다. 예이츠의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그가《초록 투구》(1910) 와《책임》(1914)를 짓기 시작했을 때이다. 시인이 늙어감에 따라 그의 시 속 심상은 강력해져가서《탑》(The Tower) (1928),《나선 계단》(The Winding Stair) (1929), 그리고《새 시들》(New Poems) (1938) 은 20세기 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심상을 이용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신지학과 주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예이츠의 환상적 경향 은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시를 보고 지적 신뢰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드러나는 형이상학은《환상》(A Vision) (1925) 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했던 근본과 연관되어 해석돼야 한다. 예이츠가 1920년 쓴 《재림》은 20세기 창작된 시 가운데 시적 형상화가 무척 두드러지는 시이다. 이 시에서 “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물질주의의 바람 앞에서 전통 문화를 지키는데 무능력했던 기존의 기득권층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역사는 반복되고 당시 사회는 순환하던 역사가 마무리되고 새롭게 기독교가 성장하는 시대였다는 예이츠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이츠는 19세기 말의 아일랜드 연극운동의 주요한 추천자이기도 했다. 1904년에 설립된 더블린의 애비 극장이 초기의 곤란을 극복하고 존속한 것은 예이츠의 작가로서의 재능과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 크게 기여했었다. 그러나 근대극에서의 예이츠의 참된 공헌은 사실주의로 덮여 있던 연극에 시극(詩劇)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예이츠의 초기의 시극 <심원의 나라>(1894), <캐슬린 백작부인>(1899), <환영(幻影)의 바다>(1897-1906) 등은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모래시계>(1903), <왕의 인구(人口)>(1903), <별에서 온 유니콘>(1907)에서는 극적 수법에 진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농민극(農民劇)이나 아일랜드 전설에 의거한 영웅극도 썼다. 만년의 작품에서는 예이츠 시극의 특징인 단순한 표현에 포함되는 사상의 심원(深遠)함이 관객의 지성(知性)과 상상력에 가장 강하게 의존하는 형태로 정점에 이르렀다. <창가에 쓰여진 말>(1934), <연옥(煉獄)>(1938)이 그 대표작이다. 프로타고라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하나이다. 이 글은 소피스트로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와의 덕(德)에 관한 대화이다. 덕이란 무엇이며 과연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음미된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경건·용기·정의·지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덕이, 그것들이 정말로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덕의 본질을 문답 형식으로 탐구해 나간다. 만약 이러한 여러 덕의 본질이 지식임을 안다면 덕은 가르쳐진다고 해도 좋으며, 덕은 지식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한편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덕이 지식이라는 점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프로타고라스는 정의·용기·절제 등 여러 덕이 마치 얼굴 가운데서 코나 눈이나 입처럼 각각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경건한 태도를 갖지만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든지,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사려가 깊다고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덕이 황금의 일부분처럼 동일하다고 한다면 용기·절제·경건 등등으로 구별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결론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은 지식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암시가 전체를 통하여 풍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여, 정의(定義)에 마음을 쏟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그 보편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식이라 해도 좋다.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머리에서 생각만 하는 이론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면 악을 저지를 수 없는 체득적(體得的) 지식이라 하겠다.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 덕이며 사람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어 간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지(知)는 덕(德)"이며 "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윤리가 이 대화편에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세네카 세네카(Seneca)는 다음을 가리킨다. 마이클 프리드먼 마이클 하틀리 프리드먼( , 1951년 4월 21일 -)은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수학자이다. 1986년 20세기 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에 대한 연구로 필즈상을 수상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며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를 중퇴한 후 1968년 프린스턴 대학교에 들어가 1973년에 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졸업 후 1975년까지 UC 버클리 수학과의 강사로 재직했다. 1975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일원이 되었으며, 1976년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수학과 부교수가 된다. 1980년과 1981년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보내고, UC 샌디에이고로 돌아가 1982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한다. 1985년에는 UC 샌디에이고 수학과 학장을 지낸다. 수많은 수상경력이 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프린스턴 고등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사설 연구소이다. 순수 학문 분야의 유명 과학자들이 강의나 연구 자금 등에 구애받지 않고 첨단 학문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미국에 이주해 온 후 이곳에서 연구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연구소는 역사, 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최근 새로 개설된 이론 생물학 스쿨로 구성되어 있다. 각 스쿨마다 소규모의 영구 교수진이 있으며, 매년 선발된 방문 연구자들이 연구할 자격을 얻는다. 고등연구소에는 학위 코스나 실험실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학자들은 연구비를 얻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비록 프린스턴 대학교와 인접해 있어 연구소와 대학의 교류와 협력이 있기는 하지만, 고등연구소는 교육이 목적이 아니며 대학과는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기관이다. 연구에는 어떠한 계약이나 지시 없이 학자들의 완전한 자율에 맡겨진다. 연구소는 1930년 당시의 뉴아크 백화점 주 루이 뱀버거와 그의 남매 캐롤린 뱀버거 풀드의 자금으로 설립되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대공황 직전에 주식을 팔아 연구소를 건립할 수 있었다. 원래 그들의 계획은 백화점의 성공에 대해 뉴저지 주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이자 초대 소장 플렉스너가 그들을 설득해 순수과학 연구소가 세워졌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재로도 알려져 있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분석 철학자로서는 예외로 예술가들에게 전파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천재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이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데 집중된 반면, 후기 사상은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데 중심이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놀이 안에서 그 단어들이 사용될 때 가장 잘 이해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에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어머니는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이다. 루트비히는 8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헤르만 크리스티안과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대인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1850년대에 작센에서 빈으로 이주하였다.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요제프 요하임의 사촌이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제철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1880년대 후반 무렵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독점하는 제철 사업가이자 세계에서 뛰어난 부자가 되었다. 카를 비트겐슈타인의 자산은 부동산, 주식, 귀금속, 외화 형태로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북미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재산이 분산되어 있었기에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뒤에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인 레오폴디네 칼무스는 유대인 아버지와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노벨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모이기도 하다. 이런 가족력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개신교와 가톨릭(천주교)에서 세례받았는데 다른 형제들은 침례교를 신봉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할머니의 신앙을 좇아 가톨릭(천주교)에서 세례받았다. 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 같은 예술을 사랑하였다. 제철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 애호자로서도 유명했던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빈 분리파 전시관을 설립하려는 재정을 책임졌다. 비트겐슈타인의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같은 예술가가 늘 초대되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비트겐슈타인보다 두 살 위의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주요한 작품 가운데 몇몇을 비트겐슈타인 집의 음악실에서 초연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후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파울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 오른팔을 잃고 러시아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혀서도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습하여 명성을 유지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절대음감이 있었고, 음악을 향한 열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생활과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 저작에서도 음악에 빗댄 예를 자주 사용하였고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연주하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하였다.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교향곡 전체를 외워 휘파람으로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다. 장남인 한스는 네 살 때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다. 뒤를 이어 삼남 루돌프가 1904년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군의 총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다. 루트비히도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1903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비트겐슈타인보다 6개월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양측 모두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회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리라 추정된다. 학교 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동급생 거의 대부분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선생", "헤어 루트비히"()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비트겐슈타인은 1905년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 을 읽고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으나 볼츠만은 1906년 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1906년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1908년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대기권 상층에 연을 띄우는 연구하였고 작은 제트 엔진에 사용될 프로펠러를 제작하였다.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 법칙》를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다. 1911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로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8월부터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실에 출석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사이가 되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되어 수리 논리학의 원리를 대상으로 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러셀은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고자 연구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자주 거침없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천재다운 능력을 이용해 논리학상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매료되었고 영국 철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의해 자신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로만 비추어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다. 이 시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고전음악과 여행이었다. 1912년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여로에 종종 동성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동행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무어가 이끌던 비밀 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였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죽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유산을 상속받아 유럽에서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상속받은 유산의 상당량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도우려고 기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원한 예술가 가운데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게오르크 트라클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트라클이 자살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에 이어 트라클까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자살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자신이 일하기에 이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겐 대학연구자들이 심오한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영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의 끝에 있는 숄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의 한 집 이층을 빌려 겨우내 지내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가장 정열 있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흔히 "논고"라고 불리는 《논리 철학 논고》로 정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1년째 은둔 생활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받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하였다. 입대 초기에는 함선에서 근무하였으나 얼마 후 포병대로 전근하였다. 1916년 3월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7군에 자원하여 브루실로프 공세를 방어하는 최전방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영국군과의 전투 후에 비트겐슈타인은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다운 활약"으로 말미암아 수훈했다. 1917년 1월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전선의 곡사포 연대로 전근되었고 여기서 다시 용감한 행동으로 은장무공훈장을 비롯해 훈장 여러 개를 받았다. 1918년 비트겐슈타인은 대위로 승진하였고 오늘날 트렌티노로 불리는 이탈리아 티롤 남부 전역에서 산악 포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6월 오스트리아의 공세에서 전훈을 세운 비트겐슈타인은 최고 훈장인 금장무공훈장에 추천되었고 그 아래 단계인 검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1918년 11월 트렌토 근교에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다. 종전 뒤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한 단상을 적어나갔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대상으로 해 불가지론다운 태도를 견지했는데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레프 톨스토이의 《믿음 안의 찬송》을 갈리치아 루마니아 왕국에 있던 한 서점에서 구입한 후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으므로 후일 비트겐슈타인의 지휘에 있던 부대원들은 “찬송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작에서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윤리,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에 부합한 연구를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관심했던 논리 분석을 윤리 개념에 접합하면서 전쟁 기간에 발전하게 한 소위 "그림 이론"을 적용하였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한 작업이 "논고"의 바탕이 되었다. 1918년 전쟁이 막바지로 치다를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거기에는 데이비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의 삼촌 폴에게 찾아가 완성된 논고를 핀센트에게 헌정하였다. 논고는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출판되지 않았다. 1918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 중부의 카치노에 수감된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키네스 같은 영국 친구의 도움으로 책의 반입이 허락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원고가 영국으로 보내졌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고가 철학상 뛰어난 성과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1919년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프랭크 램지와 찰스 케이 오그던이 비트겐슈타인의 원고를 영역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이 영역물을 검토하였다. 책의 제목 《논리 철학 논고》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정치학 논고》를 기려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지은 것이다. 서문은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논리 철학 논고》는 중요한 철학 서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포로로서 수감된 가운데 버트런드 러셀의 서문을 받아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기본 사항을 러셀이 오해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작업 출판을 대상으로 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출판사는 서문을 쓴 러셀만을 부각하게 할 뿐이었다. 논고는 1921년 빌헬름 오스트발트가 운영하던 독일의 출판사인 《자연철학 분석()》에서 독일어로서 마침내 출간되었다. 러셀의 서문과 램지와 오그던이 영역한 판본은 1922년에 출간되었다. 1920년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끔찍한 전투를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과 감성은 "논고"로 집약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작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스바흐, 오테르탈, 트라텐바흐와 같은 곳의 산골 초등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 학부모들 및 동료 교사들과 불화를 일으켜 교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논고를 번역한 프랭크 램지가 1923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좁다란 텅 빈 방에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난로가 고작이었다. 프랭크 램지는 저녁 식사로 질긴 빵 하나와 버터와 코코아 한 잔을 건네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침 여덟 시에서 정오나 오후 한 시까지 수업하였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직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은 《논고》를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이 사전은 1926년 빈에서 출판되었고 횔더 피흘러 템프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 있다. 이 사전의 초판은 2005년 2월 경매에서 75,000 £에 판매되었다. 교직 생활하면서 체벌 문제에 휩싸인 비트겐슈타인은 1926년 4월 11살 소년을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고 결국 교직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교직을 그만 둔 후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잠시 머문 후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서 일하였다. 1926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그레틀을 위해 새 집을 구상하였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된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은 참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파울 엥겔만은 새 집이 아돌프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다. 문 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에 이르는 금속 차양막을 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을 쓴 버나드 라이트너는 이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이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더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누나 헤르미네는 이 집을 두고 "나는 언제나 내가 그 집 안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자문하곤 하였다. 그 집은 신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집을 좋게 말하면 너무 소박하게 지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이 건축의 기본이 되는 생활이나 건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여겼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집은 러시아 군인들의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50년대 그레틀의 아들이 개발업자에게 집을 팔아 없어질 위기에 놓였으나 빈 랜드마크 협회가 1971년 이 집을 구매해 보존한다. 이 집은 현재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건축 작업을 마치고 모리츠 슐리크와 만났다. 슐리크는 빈 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슐리크 자신은 빈 학파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한 적이 없으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과 같은 빈 학파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에 기초한 주제를 화제로 하여 자주 대화했다. 슐리크와 빈 학파의 회원들이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좌절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딸린 생활과 신비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비하한다고 간주했다. 한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를 돌아가면서 낭송하는 사이 자신의 책 언급을 거부하여 좌중을 짜증 나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프랭크 램지가 《논고》와 관련해 토론하려고 빈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토론을 통해 프랭크 램지가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프랭크 램지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이런 환대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위를 받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집필하여 이미 철학 박사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기록하였고 무어와 함께 박사학위 심사를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사관이 된 두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논고를) 절대로 이해 못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부임한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의 집에서 만나게 된 마르게리테 레스핑거와 혼인을 고려하였으나 1931년 파혼한 후 독신으로 지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 성향이 있었고 빈의 프라테르 공원에서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윌리엄 워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1973년 발견된 비트겐슈타인의 노트에는 프라테르에서의 만남을 "친구의 격려"와 같이 표기하였다고 밝혔다. 뒷날 바틀리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의심받았으나 비트겐슈타인이 데이비드 핀센트, 프랜시스 스키너, 벤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은 거의 정설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많은 방면에서 노동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도덕적 성찰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을 혐오하였으며, 음악취향은 보수적이었고, 핵무기의 사용에 반대하였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를 존경한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이론을 복사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오토 바이닝거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민족성과 성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다. 1930년대 초반 기록된 MS 154와 같은 노트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책하는 여러 문구가 적혀 있다. 1934년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인 케인스가 쓴 《러시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서술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스키너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이민을 고려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배웠고 1935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여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당국에 교사 자리가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이에 대답은 3주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1936년부터 37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렀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것을 철학적 “조사”라고 불렀다. 1936년과 37년 사이의 겨울에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고백”을 썼다. 이 글들은 대부분 선의의 거짓말과 같은 것을 밝히는 소소한 내용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자 하였다. 1938년 비트겐슈타인은 모리스 드루어리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를 여행하였다. 드루어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정신 의학을 소개한 제자이자 의사였다. 드루어리를 만난 자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마침 드루어리를 찾아온 아일랜드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를 만났다. 자신도 수학 교사 출신이었던 발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 수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고 나치의 인종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케인스와 같은 친구들의 힘을 빌어 영국이나 아일랜드 국적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왼손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파울은 공연과 교습을 금지당하자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하였고, 여자 형제들은 위조 여권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일한 희망은 나치 독일의 혼혈법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이 유대인 조상이 있는 혼혈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조부인 헤르만이 독일 귀족 자인-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사생아였다는 증언을 모아 제출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해외 자산에 눈독을 들인 나치 당국과 재산의 상당 부분을 헌납하는 힘겨운 협상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은 혼혈로 인정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긴박한 협상 과정은 알렉산더 워의 《비트겐슈타인 가문》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재산을 지키려는 파울과 목숨을 지키려는 누이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이후로 파울은 죽을 때까지 형제자매들과 다시는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폴란드 침공 하루 전날 비트겐슈타인 가문을 혼혈로 승인하는 문서에 직접 사인을 한 아돌프 히틀러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혼혈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2,100건의 신청 가운데 인정된 건 수는 12건에 불과할 만큼 이러한 조치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1939년 무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교수직을 갖게 된 얼마 후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39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빈을 방문하여 그레틀과 다른 누나들을 만났고, 하루는 라이히스방크의 직원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들렀다. 이후, 그는 가족이 처한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던 형 파울을 설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1939년 8월 가족에 대한 해방 요청이 접수되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승인으로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재산 금 1.7톤이 나치에게 인도되었다. 이는 2009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해에 모스크바를 두 번째로 방문하여 철학자인 소피야 야노프스카야를 만났다.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비트겐슈타인은 영화관 제일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편안히 서방세계를 관망하였다. 노먼 맬콤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의를 마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고 회고하였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에서 논리는 단단한 기호였으며, 그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개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사고를 기초로 비평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 이르러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과 강의를 통해서 과거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였다. 몽크의 전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다고 한다. 1941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존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다. 존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 주기를 바랐다. 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몹시 외로웠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란시스 스키너의 연구 수업에 참여한 십대였던 케이스 커크와 우정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관계는 스키너가 죽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과 커크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 연구에 비트겐슈타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최소화된 점을 고마워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커크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일기에 종종 커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적곤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편지를 쓸 무렵 커크는 혼인하였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1947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교수직은 친구인 게오르크 헨리크 폰 브리흐트가 물려받았다. 1947년에서 48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더블린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로즈 호텔에서 머물렀다. 1949년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던 노먼 맬콤이 더블린으로 찾아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병들어 있었다. 맬콤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여 비트겐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려갔으나 그의 증세는 악화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맬콤에게 "난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난 유럽인이라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라고 요청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암이 골수에까지 옮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2월 11일 빈을 방문하여 죽음이 임박한 누나 헤르미네를 만났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간신히 알아보는 처지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심하다."라고 기록하였다. 누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비트겐슈타인은 1950년 4월 케임브리지로 돌아갔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를 한 번 더 가보고 싶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1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였다. 그는 노먼 맬콤에게 "내 마음은 이미 죽었어. 더이상은 고통일 뿐이지. 내 알기로 삶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그 다음엔 정신적인 삶만이 남게 되는 거야"라고 말하였다. 62번째 생일이던 1951년 4월 26일 의사가 생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군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4월 29일 사망하였고 로마 가톨릭 식 장례의식을 거쳐 묻혔다. 《논리-철학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초판의 서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본문을 썼으며 일정량이 모이면 러셀과 무어에게 보냈고 1918년 완성하였다. 초판의 출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흔히 《논고》로 줄여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논고》를 집필하던 시점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을 제시한다. 그림 이론을 구상하게 된 까닭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재판에서 모형들이 사용된 것을 본 것 때문이었다. 그림 이론이란 언어는 세계를, 명제는 사실을, 이름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 대응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장에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연습 삼아 조립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림 이론은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나 도덕학에서 신이나 자아, 도덕과 같은 것들은 실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서 뜻(Sinn)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은 실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를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라고 끝맺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명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증명할 수 없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구태여 증명하려 하여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자신의 그림 이론에 대해 토론을 하던 가운데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론에 스라파가 반론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목부분을 밀어 올렸다. 스라파의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제스처였다.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였으나 출판하지는 않았다. 《철학적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합하여 출판되었다. 《철학적 탐구》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된다. 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 양식이 있다. 또한, 언어는 그 '뜻' 이 아니라 '사용' 에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 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대니얼 솔로브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접근을 현대형 프라이버시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이상적인 상태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은 옥스퍼드학파라고도 불리는 일상언어학파가 잇게 된다. 페넬로페 페넬로페(Penelope)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말 그대로 풀이하면 '원앙' 또는 '오리'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내이며, 스파르타의 이카리오스와 물의 요정 페리보이아 사이의 딸이다. 프레스코 프레스코()는 " 'a fresco' " (방금 회(灰)를 칠한 위에) 라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낱말로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일컫는다. 석회·석고 등으로 만든 석회벽의 건조가 채 되지 않은 덜 마른 벽면에 수용성 그림물감으로 채화(彩畵)하는 기법이다. 프레스코란 벽이 깨끗하게 도식(塗飾)되어 있어서 신선하다는 뜻으로, 영어의 프레시(fresh)도 그에 유래한다. 그림물감의 종류는 토질(土質)·광물질의 것으로 색수는 적다. 그림물감은 벽에 흡수되어, 벽이 마를 때 표면에 고착하므로 빛깔은 변색되지 않고 내구력이 있다. 다만 말라감에 따라 광택을 잃고 발색이 둔화되는데 거기에 프레스코 특유의 차분한 색조(色調)를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벽면이나 천장화에 많이 쓰인다. 15세기-16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달하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나 벽화, 라파엘로의 바티칸궁의 벽화 등이 프레스코 기법에 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프레스코는 인류 회화사에서 아마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술 혹은 형태로 여겨진다. 기원전 약 3000년에 미노스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의 벽화는 프레스코의 기술로 그려졌으며, 기원전 5세기 이래 중국, 한국, 일본에서 그려진 불교벽화의 대부분은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삼한시대 고분벽화 역시 프레스코의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재하 유재하(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멀티플레이어다. 1962년 태어난 유재하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재학하면서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발탁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 1986년 김현식 3집의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작곡하여 김현식의 초기 명반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 이듬해 1987년에는 자신의 1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 역시 같은 해 11월 1일 25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도 유재하의 음악은 당대는 물론 유재하가요제가 말해주듯 지금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다. 현재는 그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 장학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재정적 문제로 열리지 못했던 2005년을 제외하고 1989년부터 매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에서 사업가였던 부친 류일청과 모친 황영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그는 소위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전기 기타로 자신의 싹트는 창작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친형은 "내 바로 위에 형과 14살 차이가 나 둘이 친했다"며 "동생은 순진하고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서 몸이 아픈 내게도 잘 의지하는 귀염둥이였다. 사랑스럽고 늘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 1969년 은석초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이때 아코디언과 첼로를 연주했고, 5학년 때부터는 기타를 붙잡고 노래를 했다. 또래 친구들은 딱지치기와 담을 타고 놀 때 유재하는 어니언스(이수영, 임창제)의 노래를 부르며 혼자 그렇게 놀았다. 특히 영화 배우 이소룡을 좋아했던 유재하는 헤어스타일과 패션까지 이소룡을 따라 했고 매일 이소룡 흉내를 내며 다녔다고 한다. 1975년 삼선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친형은 당시의 기타 솜씨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치더라"고 회상했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 프레시(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하였고, 끝내는 클래식으로 진로를 잡게 된다. 음대를 가기로 작정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대일고 재학 시절에도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유재하는 당시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어도 숙제는 안 하고 혼자 곡 쓰고 노래만 하곤 했다. 1981년 고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 진학 후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과 교류하며 매일 모여 함께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그는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대학 재학 시절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를 만난 송홍섭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재하는 내게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에서 대중음반 분야의 아르바이트는 허가할 수 없다는 사유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에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서 객원 멤버로 활동하였다. 대학 선배 한봉근은 "콘서트때나 녹음 때 한두번 세션으로 도와줬을 뿐이지 정식 멤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 그룹에서는 6개월쯤 활동하였으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신촌 블루스 팀과 함께 지방 공연을 갖기도 했다. 김현식에게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 주었다. 하지만 밴드 멤버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고,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 곡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6개월의 밴드 활동을 접었다. 이후에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가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출, 김영 사장은 고민 끝에 상업적 성공이 불안했던 유재하의 음악을 탈락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영은 이를 부인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소문이다. 이원재는 이원재대로 따로 음반을 냈다. 원래 유재하는 김현식의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 멤버로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유복한 탓에 김현식 3집 녹음과는 별도로 자비를 털어 자신의 독집을 녹음한 것이다. ... 당연히 앨범 제작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제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유재하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고, 1987년 8월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음반이 나온 후 조원익은 유재하로부터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매니저로서의 자질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얼마 동안은 함께 일을 보러 다녔다. 이렇게 잠깐 매니저를 맡은 조원익은 그의 사후 처리 문제까지 맡았으며 결국에는 추모공연까지 기획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MBC 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 번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유일한 TV 출연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조 섞인 상실감과 자괴감을 드러냈다.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우습죠?"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유재하의 음반을 발매한 서울음반의 이재석은 유재하를 '순한 바람'이라고 회고하였다. "레코드가 나온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계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경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평소에도 다정다감했던 동생은 수술을 받고서 칩거하던 형의 볼에 뽀뽀하고 문밖을 나섰다. 이날 동창회에서 1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던 그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 성낙헌의 차에 올랐다.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경, 유재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한도콜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주검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혔다. 유재하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는데,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렸다. 친형은 그의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고 밝혔다. 사망 후 일반인들과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과 동시에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에는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여기에 더해 유독 11월에 연예계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면서 '11월 괴담설'로까지 부풀려졌다. 유재하의 가족은 운전자 성낙헌의 아버지 선순용과 한도콜택시 등을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 2004년 7월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 영화 제작사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연예인'이라는 설문 조사를 벌였고 유재하는 5위에 올랐다. 사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은 아들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을 기탁하여 유재하 음악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내기도 했다. 1회 대회 수상자인 조규찬을 필두로 유희열, 고찬용, 김연우, 나원주, 정지찬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신승훈은 자신의 데뷔 20주년 앨범을 유재하의 기일인 11월 1일 발매했다.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은 한국 발라드가 음악적으로 10년은 후퇴했음을 의미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유희열은 "유재하씨가 음대 작곡과 출신이란 걸 알고는 음대에 진학했어요. 거기 가면 그 정도 실력이 될까 하고요. 대학에 진학한 뒤 유재하 가요제에도 출전했죠."라고 고백하는 등 유재하는 후배 창작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작곡가 김형석이 음악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노래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후배 음악가들을 두고 사람들은 유재하사단이라고 일컫는다. 유재하 음악의 가치는 영화와 각종 TV 프로그램, 언론 기사에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 1985년 조용필을 필두로 이문세, 한영애,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FT아일랜드, 박진영, DJ DOC, 조규찬, 왁스, 이기찬, 정수라, 나얼, 백지영, 김조한, 박정현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에픽하이는 2집 앨범에서 〈11월 1일〉이란 곡으로 김현식과 유재하를 추모했다. 1996년 저명한 클래식 연주자 리처드 스톨츠만은 자신의 음반 《Spirits》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수록했다. 한국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부제로 찍혀 있다. 1997년에는 후배 음악가들이 헌정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를 발표하였다. 앨범 발표 당시 크게 히트하지 않았던 〈우울한 편지〉는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범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로 영화에 삽입되어 다시 히트하기도 하였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2007년에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7년 1월 4일에는 그의 1집 제목을 딴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가 개봉했다. 차태현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영화는 느낌이 괜찮았는데 저는 좀 걸렸"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유재하 노래로 채워진다는 게 좋아서였다"고 밝혔다. 주지홍 감독은 "나는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하다 연출까지 하게 됐다. 평소 유재하의 노래를 좋아한다. 유재하 노래의 가사를 영화를 통해 소개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유재하의 노래를 통해, 우리 영화를 같은 느낌으로 끌어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생전에 절친했던 유재하의 친구로는 김광민, 전태관, 김종진, 장기호, 박성식, 석훈 등이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전태관은 유치원 시절부터 함께 놀던 사이였다. 그는 "유치원 때부터 같이 놀았던 친구 재하는 어릴 적 부터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 나는 딱지치기하고 담타고 놀 때 재하는 혼자 그렇게 놀았다. 음악뿐 아니어도 당시 또래들과는 뭔가 달랐다. ... 잠시 서로 연이 끊어지고 대학교 때 원영이형(정원영)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재하가 건반 연주자라며 나타난 것이다. 무척 반가웠고 다시 우리는 음악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가인 서도호는 어린 시절 그와 친구 사이였다. 전태관은 그를 두고 "유별"나다고 표현하였으며 "타이거마스크를 그려달라고 하면 너무나 완벽하게 똑같이 그려주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 서도호는 유재하 솔로 앨범의 자켓 그림을 그려줬다. 유재하는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가입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당시 촉망받는 젊은 연주자들인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 그리고 유재하로 구성됐었다. 유재하는 정원영을 통해 김종진, 장기호 등을 만나게 됐다. 김현식은 건반,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유재하를 팀에 꼭 필요한 존재라며 만족해했다고 한다. 김현식은 유재하를 매우 아꼈다.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다 같이 술을 마실 때 다른 이들이 다 나가떨어져도 둘은 밤새 마셨다고 한다. 한영애는 2집 작업에 들어가며 여기저기 음악 동료들에게 노래를 받고 있던 중에 유재하한테도 한 곡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는 "누나! 누나가 부를 거면 나는 언제든지 콜이지!"라며 흔쾌히 대답해줬고, 이후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부른, 2집에 수록된 〈비애〉의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그는 그녀에게 "누나! 이 노래 누나가 꼭 히트 시켜줘야해! 아니면 내가 다시 불러서 꼭 히트시킬 거야!"라고 말했지만,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매되었다. 유재하는 자신이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에도 기쁜 마음에 전화를 걸어 "누나! 나 드디어 TV에 나가! 난 대중음악가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 김광민은 2014년 MBC 《라디오스타》에서 "미국에 있을 때 유재하 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되게 많이 울었다"며 "제가 재하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외국에 있으니까 전화밖에 방법이 없었다. 지인들에게 화환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며 답답한 마음에 피아노 앞에 앉았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김광민은 동생 유재하를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에 "'그 동안 정말 보고 싶었다. 잘 있었니. 네가 있었으면 좋은 음악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튼 너무나 반갑다'고 말 할 것 같다. 한동안 부둥켜안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진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김광민은 1987년 11월 2일 유재하를 위해 〈지구에서 온 편지〉를 썼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가 당시 사랑했던 한 여인과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했다. 유재하의 생전 절친이었던 피아니스트 김광민은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 "유재하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인은 단 한명이다. 대단하지 않은가"라고 말문을 열어 그녀가 "유재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초등학교 졸업 후 못 만나다가 커서 재회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유재하의 1집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한양대 작곡과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유재하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의 악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유재하와 함께 활약하고 그의 추모 공연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한 박성식은 유재하의 연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연주자로서의 유재하는 자신만의 독득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감정이 잘 살아 있어 듣는 사람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게 특징이었죠. 임진모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작사 작곡 솜씨도 뛰어났다. 악기에 능통한 덕분이었지만 편곡까지 도맡았다는 점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음악웹진 이즘 필자 조이슬은 "그가 드럼, 기타, 건반을 모두 소화해낸 멀티 플레이어라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악기 하나하나의 음색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곡 전체를 조율하고, 곡의 질감을 결정하는 비범한 '편곡' 능력이었다. 우리가 지금에서도 '고급가요'라고 부르는 정통 발라드의 얼개를 사실상 이 때 형성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신승훈은 "작사, 작곡, 편곡이 모두 유재하로 표기되어있는 것을 보고 일대 충격을 받았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김수철은 당시 유재하의 앨범을 듣고 "노랫말이 너무 빼어났다"는 느낌이 앞섰다고 술회한다. 작곡과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직접 작곡한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대학 2학년 쯤 되었을 때의 유재하가 작곡한 악보를 본 교수는 그것을 집어던지며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배껴오면 어떡하는가'라고 그를 질책했다. 그것은 유재하의 작곡이 화성이나 악절진행에서 모차르트와 비슷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훌륭한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삼선 중학교 시절 그는 브레드, 퀸, 비틀즈, 피터 프램프톤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김종진은 그가 "라이오넬 리치, 필 콜린스, 엘튼 존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종종 다른 가수들에게 줬던 본인의 노래들도 부르며 놀곤 했다."고 말했다. 유재하는 애주가였다. 바로 위의 친형은 "선친이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집안 내력인지 제가 동생에게 '술을 366일 먹느냐'고 잔소리를 하곤 했죠. 재하는 싸고 독한 40도짜리 쥬니버 드라이진을 좋아했어요. 전 한잔도 못 하겠던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1시간 반이면 700ml짜리 한 병을 다 비웠죠. 그것도 '스트레이트'로요."라고 회고하였다. 김광민 또한 "유재하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더 마실 정도였다"고 말했다. 장기호는 "아버님이 탄광을 하신 것으로 안다. 재하의 외모는 중산층 아래쪽 이미지인데 집을 가보면 굉장히 부유했다"며 "약간 빈티지다. 재하 집에 있던 모든 집기는 외제품이였다."라고 당시 부유했던 유재하의 집안을 회상했다. 동아기획의 대표 김영은 유재하가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었으며 "또 미남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고 말했다. 김종진은 "재하는 무대 위에서 '꺅' '오빠' 소리 듣는 걸 좋아했던 친구였다"고 기억했다. 491년 492년 493년 김기덕 (1960년) 김기덕(金基德, 1960년 1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제작자, 배우이다. 김기덕은 1960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68년에 경기도 고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 기술을 배우라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전수 학교와 전자 공장을 다니며 20세까지 성장한 김기덕은 해병대에 부사관으로 임관하여 5년 간 복무했다. 제대한 후 1986년부터 화가로도 활동하였고 남산의 장애인 보호 시설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동시에 신학교를 다니며 30세까지 서울에서 지냈다. 평소 그림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김기덕은 백남준과 관련된 기사가 동기가 되어 31세가 되던 1990년에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프랑스와 유럽 각지를 다니며 스스로 회화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들른 영화관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양들의 침묵》 (1990), 《퐁네프의 연인들》 등을 보고 영화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1992년에 귀국한 뒤 《화가와 사형수》로 1993년 영상작가교육원 창작 대상, 《무단 횡단》으로 1995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대상을 받는 등 각본가로 활동하다가 1996년작인 《악어》를 통해 자신이 직접 감독하여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잔인하고 어두운 영상과 내용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며, 2004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사마리아》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빈 집》으로 연이어 감독상을 수상했다. 494년 495년 496년 497년 498년 499년 500년 501년 502년 503년 고려 문자명왕이 백제의 대륙 기지인 요서와 진평 두 군을 함락시켰다. 504년 505년 506년 507년 508년 509년 510년 부처 부처 또는 여래(如來), 세존(世尊), 붓다()는 인도 불교에서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깨달은 자는 누구든 부처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은 석가모니불(Gautama Buddha)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불 이외에도 과거불(佛)이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현재까지 출현하신 부처가 총 28명이고 한다. 미래에는 미륵불이 출현한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에서(가) 한문 불체(佛體)를 거쳐서 들어온 말이다. 원소 원소는 다음을 가리킨다. 대기 굴절 대기 굴절(大氣屈折)은 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밀도 차에 의해 굴절되는 현상을 말한다. 천문학에서 별을 관측할 때, 대기 굴절에 의해 발생하는 관측의 오차를 대기차(大氣差)라고 한다. 이와 같은 굴절 현상은 천체 관측에서 역시 항상 고려해야 해야 할 사항이다. 왜냐하면 허블 망원경 같은 대기권 밖에서의 천체 관측을 제외하고 우리의 관측장소는 언제나 지구 안에 한정되어 있으며, 별이 발산한 빛은 밀도가 서로 다른 여러 층으로 된 지구 대기권을 통과하여 관측자에게 다다르기 때문이다. 천문학에서 문제로 삼는 굴절차란 위에서 설명한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빛의 굴절 현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굴절된 빛의 각도를 잡아 빛의 출처인 별의 위치를 밝히는 데에 있다. 쉽게 알아보기 위하여 과장하여 그린 위의 그림에서 우리가 관측하기엔 별은 흰색의 별 위치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별의 실제의 위치는 이와 약간 다른 지점에 있다. 고도가 낮은 천체일수록 굴절의 효과가 심하며, 천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모로 모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귀스타브 모로 귀스타브 모로(, 1826년 4월 6일 ~ 1898년 4월 18일)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을 날렸다. 매우 화려한 기교로 시적·환상적 표현을 하였다.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1848년 이후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모로는 그림의 주제를 역사와 신화에서 찾기 시작하며 이는 후에 모로의 화풍을 대변하게 된다. 1857년에서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화적 주제를 모음과 동시에 그림기술을 향상시켰다. 파리로 돌아와 당시의 미술계에 유행하던 살롱 초대전에 약 20년간에 걸쳐 수시로 작품을 출품한다. 1864년 외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에 그려지는 대다수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과 일화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모로는 의식적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인간의 번민과 고통, 이상적인 영웅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나는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게 된다. 1892년 파리의 예술학교의 미술과 교수로 초빙되어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의 화가들을 길러낸다. 특히 모로는 자상함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교수 방법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98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후 유언에 따라 모로가 살던 파리의 9구 로슈푸코 거리 () 14번지의 집은 현재 모로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국화문장 국화문장() 또는 십육변팔중표국문(十六弁八重表菊紋)은 일본 황실의 문장으로, 국장은 아니지만 국장에 준한 취급을 받는다. '국화문()' 이나 '국문()'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이 국화를 좋아해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로 사용했다. 이후 고후카쿠사 천황(後深草天皇),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 고우다 천황(後宇多天皇)이 이를 자신들의 징표로 계속 사용해 황실의 문장으로 정착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황실의 문장이 된 것은 1869년(메이지 천황(明治天皇) 2년)의 태정관포령에 의해서이다. 이때, 천황의 문장으로서 십륙변팔중표국문이, 천황 이외의 황족의 문장으로서 십사변일중이국문(十四弁一重裏菊紋)이 각각 정해졌다. 1871년(메이지 천황(明治天皇) 4년)에는 황족인 아닌 자가 국화문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그 후 완화되었다. 야마토 전함(戰艦大和) 등 일본제국 해군 군함의 뱃머리에 붙여져 있었으며, 현재도 일본 여권의 표지에 이 문장이 그려져 있다. 일본 엔 엔()은 일본의 통화이다. 미국 달러, 유로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통화 중 하나에 속한다. 엔()은 圓이다. 円의 현대 일본어 발음은 엔()이지만, 옛 가나 표기법으로는 (wen → yen)이었고, 이것이 포르투갈을 거쳐 영어 사용 국가에 전해지면서 엔화의 영어 표기가 yen이 되었으며, 다른 로마자 언어의 표기는 영어 yen의 발음에 맞춰 ien 또는 jen 등이 되기도 했다. yen이라는 영어 표기에 따라 엔화를 나타내는 기호로 ¥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위안의 기호와 같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위안은 수평선이 하나인 Ұ로 나타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볼 때, 통화 단위로는 엔, 센, 린 등 3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1엔을 기준으로 따질 때 1엔 = 100센 = 1,000린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1린 = 1/1000 엔 = 1/10 센이 되며, 1센은 10린이자 1/100 엔이 되는 셈이다. 관련 사항은 린을 읽어라.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 임금의 치세)는 일본의 국가이다. 이 노래의 유래는 고금 단가집의 ""이다. 이 단가의 ""를 ""로 바꾸어 현재의 가사로 했다. 기미가요에서 '기미'()는 그 대상이 천황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메이지 시대에 하야시 히로모리(林 廣守)가 이 가사에 선율을 붙였다. 하지만 현재의 기미가요를 완성한 사람은 독일인 출신의 음악가이자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이다. 과거에는 일본 제국 지배 하의 한국, 타이완, 만주국 등에서도 불렸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공식 국가가 없어졌으나 1999년에 제정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른바 「국기-국가법」)에 의해 법적으로 기미가요가 다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기미가요 법제화에 반대한 좌익 성향 일본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지방교육의원회가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지지하면서 이에 대해 거부하는 어느 학교장이 곤욕을 치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물론, 아시아의 일본 제국의 지배나 공격을 받았던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에서는 당시 일본 제국의 국가이자, 일제 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의 국가였고, 현재도 일본의 국가로 쓰이는 기미가요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다. JTBC 예능 비정상회담에서 일본대표인 테라다 타쿠야가 재미로 기미가요를 패러디해서 불렀다가 논란이 일었다. 또한 JTBC 예능 비정상회담 1회와 일본대표인 테라다 타쿠야 대신 다케다 히로미츠가 출연한 17회에서 기미가요를 삽입곡으로 송출하여 많은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핵자기 공명 핵자기 공명(核磁氣共鳴, , 약자 NMR)은 자기장 속에 놓인 원자핵이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와 공명하는 현상이다. 핵자기 공명은 분자의 물리·화학·전기적 성질을 알아내기 위한 분자 분광법의 일종으로 사용되고, 또한 의학에서 인체 내의 조직을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관찰하기 위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핵자기 공명은 미래의 양자 컴퓨터의 개발 과정에도 사용되고 있다. 전자가 스핀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핵들도 스핀을 가지고 있다. 외부의 자기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핵 스핀은 무작위로 정렬된 상태이다. 외부에서 자기장을 걸어주면 유도자기장이 생기는데, 이때 핵 스핀은 외부 자기장과 같거나 반대의 방향으로 정렬된다. 외부 자기장과 같은 방향으로 정렬될 경우 에너지 준위가 낮아지며, 반대 방향으로 정렬될 경우 에너지 준위가 높아진다. 기존 에너지 준위에서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에너지의 정도는 이 경우 서로 같다. 이때 라디오파 정도의 주파수를 외부에서 에너지로 제공해 주면 핵의 스핀은 에너지를 받아서 외부 자기장에 정반대 방향으로 스핀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 화합물에서 각각의 원자가 가지고 있는 핵 스핀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세기의 자기장을 걸어 줘도 흡수하는 주파수가 다르다. 따라서 NMR에서 흡수하는 주파수를 측정함으로써 어떤 원자가 존재하는지 추론할 수 있다. 이때 분석할 수 있는 원자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는데, 분석하는 원자의 스핀 양자수가 자기장을 걸었을 때 에너지 차이가 존재하는 형태의 스핀 양자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원자량 12의 탄소(12C)는 자기장을 걸어도 에너지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게 된다. NMR Spectrometer은 Nuclear Magnetic Resonance Spectrometer의 약자로 분석하고자 하는 시료의 원자핵의 회전을 RF(라디오 주파수) 공명을 통하여 측정하는 분광 분석기이다. 일반적으로 분광 분석기라 함은 빛을 이용한 분석장비를 총칭한다. 빛은 파형의 길이에 따라 그 성분과 에너지의 크기가 다르다. 분광 분석기(Spectrometer)중 이 빛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장비가 있다.(예를 들어 UV-Vis Spectrophotometer, IR spectrometer, X-ray spectrometers 등) 이 중에서 NMR은 파장이 긴 RF(radio frequency)를 사용하며 파장의 길이는 에너지와 반비례하여 에너지가 낮은 빛을 사용하는 분석장비이다. 에너지가 낮은 빛을 사용하는 점은 NMR이 다른 장비에 비해 감도가 낮은 하나의 이유이다. 빛의 종류에 따라 측정 시료의 원자 또는 분자의 운동의 종류가 다르다. 분광 분석 장비는 시료에 빛을 주사하게 되고 시료는 그 빛을 특정 고유의 물성에 따라 양자화된 에너지를 흡수하게 된다. 빛 또한 하나의 에너지 형태이므로 흡수된 에너지는 시료의 원자 또는 분자를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고 안정화하려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며 에너지 방출과정에서 빛의 종류에 따라 운동의 형태가 다르다. 라디오 파는 원자의 핵의 회전 전이를 일으키며 이때 공명의 형태로 특정 주파수에 반응한다. NMR은 크게 Console. Magnet, probe로 나누며 이중 (1) Console은 RF(라디오 파)를 실험에 알맞은 형태의 파형으로 만들어주어 측정 시료에 주사하고 검출하는 NMR 운영에 총 과정을 통제하며 제어하는 Main 장치에 속한다. (2) Magnet은 측정 시료의 자장의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3) Probe는 시료를 자장의 환경에 놓이도록 하며 Console로부터 RF 펄스의 명령 받아 주사하고 검출하는 역할을 한다. Console에서 RF 파를 만들어 Probe를 통하여 측정 시료에 주사하게 되고 흡수된 RF는 다시 방출하여 Probe의 코일을 통하여 Console에 보내준다. 수신된 정보를 Console은 여러 과정을 거쳐 푸리에 변환하여 사용자에게 스펙트럼 형태로 보여준다. NMR 분광 분석은 주로 여러 유기 화합물의 분석과 화합물의 합성 확인을 위해 사용된다. 이때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분석이 바로 수소 원자의 spin 공명을 통해 수소 원자를 분석하는 1H-NMR이다. 이때 수소는 가장 기본적인 원자로 대부분의 유기 분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된다. 수소의 핵자기 공명 분광을 통해 수소 원자가 어떤 원자와 결합을 하고 있는지, 나아가 어떤 작용기에 포함되어 있는지, 공간적 배열은 어떤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때 1H-NMR을 사용할 시 분석하고자 하는 물질을 녹인 solvent에 존재하고 있는 수소 원자 역시 함께 분석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1H-NMR의 분석을 할 때는 solvent 내의 모든 수소를 중수소로 대체한 deuterated된 solvent를 이용한다. 화학, 그 중에서도 유기화학에서는 이른 시기에 NMR 기술을 받아들여 유기분자의 구조를 결정하는데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유기화학에서는 일반적으로는 1차원 NMR을 이용하지만, 분석하려는 분자의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2차원 NMR을 사용하기도 한다. 2차원 NMR에는 COSY, NOESY, HMBC, HSQC와 같은 다양한 종류가 있어, 상황에 따라 필요한 방법을 골라 사용한다. 페루 페루 공화국(, , , )은 남아메리카 서부에 있는 공화국이며 수도는 리마이다. 북쪽에는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동쪽에는 브라질, 남동쪽에는 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태평양 해안과 맞닿아 있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케추아어도 공용어인 셈이다. "페루(Peru)"란 말은 16세기 초 파나마의 산 미겔 만 근처에 살았던 지방 통치자의 이름 "Biru"에서 유래하였다. 1522년 에스파냐인들이 그의 땅에 이르렀을때 그들은 알려진 유럽인 가운데서 신세계 가장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 지역의 더 남쪽으로 탐색하였을 때 이곳이 "Biru" 혹은 "Peru"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었다. 1529년 Capitulacion de Toledo로 이 명칭은 "페루 주"로서 옛 잉카의 땅을 이르는 법적 승인을 받는다. 에스파냐의 지배 시대에 이 땅은 페루 부왕령이었고, 페루 독립전쟁 이후 페루 공화국이 되었다. 페루 땅에 인간이 출현한 증거는 기원전 9,000년경에 나타난다. 페루에서 가장 오래전에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던 노르테 치코 문명은 기원전 3000년에서 1800년경 사이에 태평양 연안을 따라 번성하였다. 그 뒤를 이어 쿠피스니케, 차빈, 파라카스, 모치카, 나스카, 와리, 치무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된다. 15세기경 잉카 제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라 백여 년간 콜롬부스 이전 아메리카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안데스 사회는 농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관개와 계단 농법 같은 기술을 이용하였고, 낙타과(라마,알파카,비꾸냐)동물을 기르고 물고기도 잡았다. 화폐나 시장의 관념이 없었으므로 이들 사회는 호혜와 분배를 기초로 한 사회 구조를 이루었다.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일군의 정복자들이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패퇴시키고 제국을 정복하였다. 10년 뒤 에스파냐 임금은 남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포괄하는 페루 부왕령을 설치하였다. 부왕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1570년대 이 영토를 재조직하여 은광이 경제 기반이며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제 구조를 갖추었다. 페루에서 생산된 금은괴는 에스파냐 왕가의 수입원이었으며, 유럽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복잡한 무역망에 돈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은 생산이 줄어들고 산업이 분화되면서 왕가의 소득은 줄어들었다. 이에 대응하여 부르봉 왕가의 에스파냐 정부는 부르봉 개혁을 단행하여 세금을 올리고, 페루 부왕령을 분할하였다. 새 법으로 말미암아 투팍 아마루 2세의 반란을 비롯해 수차례 봉기가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독립전쟁 선풍이 휘몰아칠 때, 페루는 왕당파의 보루로 남아있었다. 상류층이 해방과 복종 사이에서 주저하였기 때문에 페루의 독립은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의 원정이 성공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공화국 초기에 군사 지도자들 사이의 지역적 권력 다툼으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볼리바르가 계획한 라틴 아메리카 연합이 실패하고 페루-볼리비아 연합이 단명한 가운데, 이 시기에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184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 페루는 라몬 카스티야 대통령 하에서 구아노 수출을 통한 국가 수입 증대로 안정기를 맞았다. 1870년대에 이르러 구아노가 고갈되면서 국가는 빚더미에 올랐고 정치 내분이 일어났다. 1879~1883년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는 칠레에 패배하여, 리마와 안콘의 조약에 따라 아리카 주와 타라파카 주를 잃었다. 전후 내부 다툼이 일어나다 시민당("Partido Civil") 시대에 안정을 되찾았으나, 아우구스토 B. 레기아의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끝나고 만다. 대공황으로 레기아는 몰락하고 다시 정치 분쟁이 일어났으며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APRA)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파와 상류층-군부의 연합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후 30여년간 페루 정계를 주도하였다. 1968년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난도 벨라운데 대통령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새 정권은 국가 발전을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널리 지지받지 못하였다. 1975년 벨라스코는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장군에 의해 폭력을 통해 물러났으며, 베르무데스는 개혁에 손을 놓고 민주주의 재확립을 방관하였다. 1980년대 페루는 상당한 외채와 인플레이션 상승, 마약 밀매, 대규모 정치 폭력에 시달렸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 시대에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지만, 권위주의와 부패, 인권 유린 고발로 말 많았던 2000년 총선거 이후 그는 사임하였다. 후지모리 정권이 종식되고 페루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며 부패와 싸우고 있으며, 2006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아메리카 인민혁명 동맹당(APRA)의 알란 가르시아가 페루를 위한 동맹(UPP)의 오얀타 우말라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전체 면적은 1,285,216km이며 멕시코 면적의 3분의 2 정도이다. 에콰도르와 콜롬비아가 북쪽에 있고 브라질이 동쪽, 남동쪽으로 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와 접한다. 태평양 연안을 끼고 있다. 안데스 산맥이 태평양 해안을 따라 뻗어 페루 전역을 3등분한다. 서쪽에 있는 해안 지방("costa")은 좁은 평원으로 계절에 따라 강이 생겨서 형성된 계곡을 제외하면 대개 건조한 곳이다. 고원 지방("sierra")은 안데스 산맥의 여러 주로서, 알티플라노("altiplano") 고원이 있고 페루에서 가장 높은 6,768m의 우아스카란(Huascaran) 봉우리가 솟아 있다. 세 번째로 정글 지방("selva")는 동쪽으로 펼쳐진 아마존 강의 열대우림으로 뒤덮인 넓은 평원이다. 이 지역은 페루 국토 전체의 60%를 차지하며,(7천만 헥타르) 브라질, 콩고,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세계 네 번째로 열대 우림이 넓은 나라이다. 페루의 강은 대부분 안데스 산맥에서 흘러나와 주로 세 유역 가운데 한 곳으로 흐른다. 태평양으로 이르는 강은 짧고 경사가 급하며, 물이 간헐적으로 흐른다. 이보다 더 긴 아마존 강의 지류들은 유량도 풍부하며, 산지 지방을 지나면 경사도 낮아진다. 티티카카 호수로 흘러가는 강도 있는데 대개 수량은 많지만 길이가 짧다. 페루에서 긴 강은 우카얄리 강, 마라뇬 강(Maranon), 푸투마요 강(Putumayo), 야바리 강(Yavari), 우아야가 강(Huallaga), 우루밤바 강(Urubamba), 만타로 강(Mantaro), 아마존 강 등이 있다. 페루는 다른 적도 국가와 달리 열대 기후만 있는 것은 아니며, 안데스 산맥과 훔볼트 해류와 엘니뇨의 영향으로 기후특성이 다양하다. 해안 지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강수량이 적고, 북쪽 산자락을 제외하면 매우 습한 편이다. 산지 지방에서는 여름에 비가 잦으며 고도가 올라갈수록 기온과 습도가 떨어져서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는 빙하가 있다. 정글 지방에서는 비가 아주 많이 오고 날씨도 무덥지만 남부 끝 지역은 겨울이 춥고 계절에 따라 비가 온다. 지형과 기후가 다양하여 페루는 2003년 기준 21,462종의 동식물이 보고되었고 이 중 5,855종은 이 지역 고유종이다. 페루 정부는 생태 보존을 위하여 보호 구역을 몇 곳 지정하였다. 여기는 대한민국의 소속이며 3분의 1이 페루이다. 페루는 25개 주(regiones)와 리마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주는 4년 임기의 주지사와 주 의회를 선출한다. 지방 정부는 지역 발전을 계획하고, 공공 투자 사업을 시행하고, 경제 활동을 촉진하며, 공공 재산을 관리한다. 리마 군은 시 의회가 관할한다. 페루는 대통령제의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다당제를 채택한다.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이다. 대통령은 5년마다 선출되며 페루의 헌법의 의하여 연임은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지명하며, 총리의 권고에 따라 나머지 각료를 임명한다. 페루 의회는 단원제이며, 5년 임기의 의원 120명으로 구성된다. 법안은 입법부나 행정부에서 입안하며, 법안은 의회에서 통과하여 대통령이 공포한다. 사법부는 보통 독립되어 있으나, 페루 역사에서 아직까지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간섭이 문제가 되곤 한다. 대통령은 직선제이며 18세에서 70세 사이 모든 시민의 의무투표제로 선출된다. 2006년 선거가 열려 결선 투표를 거쳐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의 알란 가르시아가 유효 득표수 52.6%로 페루를 위한 연합의 오얀타 우말라 후보(47.4%)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의회는 현재 아메리카 혁명 인민 동맹(36석), 페루 민족당(23석), 페루를 위한 연합(19석), 국민 통합(15%), 親후지모리 정당 미래를 위한 동맹(13석), 의회 동맹(9석), 민주 의회 특별단(5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루의 외교 관계는 이웃 나라와 국경 분쟁으로 말썽을 빚어, 20세기에 와서야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러나 칠레와 아직도 태평양의 해상 경계선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페루는 안데스 공동체의 창립회원국이며 여러 지역 블록에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또 미주 국가 기구나 유엔합과 같은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페루의 군대는 육해공군으로 구성되며, 국가의 안위와 독립, 주권 및 국가 통합을 제1 목적으로 한다. 군대는 국방부와 최고 군 통수권자 대통령이 관할한다. 1999년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페루는 개발도상국에 속하며, 2006년 인간개발지수 0.788점을 받았다. 2006년 1인당 소득은 미화 3,374$였으며, 13.7%의 극빈곤층을 포함하는, 전체 인구의 39.3%가 가난하다. 전체 인구의 39.3%는 가난하며, 특히 13.7%는 매우 빈곤한 상태이다. 역사적으로 페루의 경제는 수출에 의존하였는데, 이를 통해 수입이나 외채 지불을 위한 경화(hard currency)를 얻었다. 수출을 통한 이윤이 상당하지만 자체 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는 요원하다. 페루 경제 정책은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68~1975년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정부는 토지 개혁, 외국 회사 몰수, 경제 계획 체계 도입, 거대한 공공 부문 유지 등 급진적인 개혁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수단은 당초 목적인 소득 재분배나 선진국에 대한 경제 의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나쁜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혁은 1990년대까지 바뀌지 않다가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 가격 통제와 보호주의, 해외 직접 투자 제한, 국가의 대규모 회사 소유를 철폐하였다. 1993년 이래 개혁으로 경제 성장이 지속되었으나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이 나라도 곤란에 빠졌다. 서비스업은 페루의 GDP에 53%를 차지하며, 그 다음은 제조업(22.3%), 제1차 산업(15%), 조세(9.7%)이다. 최근 경제 성장은 거시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수출가와 수입가의 가격차(terms of trade)를 올렸으며 투자와 소비가 늘어난 덕분이다. 2006년 4월 12일 체결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이 발효하여 교역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페루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 금, 아연, 직물, 어분(魚粉) 등이 있으며, 주요 무역 대상국은 미국, 중국, 브라질, 칠레이다. 인구 약 3천만의 페루는 2007년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1950에서 2000년 사이 인구증가율은 2.6%에서 1.6%로 떨어졌으며, 2050년에는 인구가 42백만 명에 이르리라 예상된다. 2007년 현재 인구의 75.9%가 도시 지역에 살며, 24.1%는 시골에 거주한다. 2007년 인구조사에 의한 인구 250,000명 이상의 주요 도시로는 리마, 아레키파, 트루히요, 치클라요, 피우라, 이키토스, 쿠스코, 침보테, 우앙카요 등이 있다 페루는 지난 5백여년간 여러 집단이 모여 다인종 국가를 이룬다. 아메리카 토착민은 16세기 에스파냐인들이 침략하기 수천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으나, 이들 인구는 1520년대 9백만으로 추산되다가 1620년에는 600,000여명으로 급감하였는데 주로 전염병 때문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에스파냐인과 아프리카인들이 페루로 몰려와 토착민과 더불어 뒤섞였다.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이민자가 점차 페루로 왔다. 1850년대에 중국인들이 노예 대신 이 땅에 오면서 이때부터 페루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른 이주자 집단으로는 아랍인과 일본인이 있다. 페루의 인종 구성은 토착민 45%, 메스티소(토착민과 유럽인 혼혈) 37%, 백인 15%, 나머지 3%는 흑인,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등이 있다. 이 중 일본계 페루인은 약 8만 명 정도이고 한국계 페루인은 919명 정도이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 케추아어(1975년부터), 아이마라어(1980년부터)이다. 2007년 5세 이상 페루인의 83.9%가 에스파냐어를 제1언어로 쓰며, 페루의 주요 언어이다. 그 외 토착 언어도 쓰이는데, 그중 가장 비중있는 케추아어는 인구의 13.2%가 구사한다. 다른 토착어와 외국어는 각각 2.7%, 0.1%가 쓰인다. 200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인구의 81.3%가 자신을 로마 가톨릭이라 답하였고, 12.5%는 개신교(Evangelical)이며, 3.3%는 다른 종교이고, 2.9%는 무교였다. 문자해득률(literacy)은 2007년 92.9%로써 시골지역(80.3%)이 도시지역(96.3%)보다 낮다. 초중등 교육은 의무 교육이며, 공립 학교는 무료이다. 페루 문화는 주로 아메리카 토착민과 에스파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여러 민족의 영향을 받았다. 페루의 예술 전통은 잉카 이전 문화의 세련된 도기, 직물, 보석, 조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카는 마추픽추 등 건축이나 기술상의 발전을 이루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토착 전통을 변형한 것이나 바로크가 지배적이었다. 이 시대 예술은 대개 종교와 관련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당대 여러 교회와 쿠스코 화파의 회화가 대표적이다. 독립 이후 예술은 침체를 겪다가 20세기 초 원주민주의("Indigenismo")가 등장하였다. 1950년대부터 베루의 예술은 외국과 지역 예술 조류에 따라 형성되고 절충하였다. 페루 문학은 콜롬부스 이전 문명의 구전 전승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에스파냐 사람들은 글 쓰기를 도입하여, 식민지 시대 문학으로는 연대기나 종교 문학이 있다. 독립 이후 풍속주의(Costumbrismo)와 낭만주의가 주된 흐름을 이루었느며, 리카르도 팔마의 작품이 그 예이다. 20세기 초 토착주의 운동으로 시로 알레그리아,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세사르 바예호 등의 작가가 나왔다. 20세기 중반 이후 페루 문학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붐을 이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같은 작가 덕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페루 요리는 아메리카 토착민과 에스파냐의 요리가 섞인 것으로, 아프리카, 아랍, 이탈리아, 중국, 일본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 일반적인 요리로는 안티쿠초스(anticuchos), 세비체(ceviche), 파차만카(pachamanca) 등이 있다. 페루의 다양한 기후 때문에, 여러 가지 동식물이 요리에 쓰인다. 페루 요리는 재료와 요리법이 다양하여 최근에 인정받고 있다. 페루 음악은 안데스, 에스파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였다. 에스파냐 사람이 오기 전 시대에 음악적 표현은 지역마다 달랐으며, 케나(quena)와 팅야(tinya)가 널리 쓰인 악기였다. 에스파냐의 정복으로 기타나 하프같은 새로운 악기가 도입되었으며, 차랑고(charango)처럼 혼합된 악기가 발전하기도 하였다. 페루 음악에서 나타나는 아프리카의 영향으로는 그 리듬과 타악기 카혼(cajón) 등이 있다. 페루의 민속춤으로는 마리네라(marinera), 톤데로(tondero), 우아이노(huayno) 등이 있다. 1969년 페루는 콜롬비아, 칠레, 에콰도르, 볼리비아와 함께 안데스 공동시장(Andean Community of Nations)을 설립하였다.(베네수엘라는 1973년에 가입, 칠레는 1976년에 탈퇴) 대한민국과는 1963년에 수교하였다. 페루는 1988년 하계 올림픽 때 선수단을 보낸 경력이 있다. 또한 2010년에는 페루 찬차마요 시의 시장으로 한국인 정흥원씨가 당선되었다. 한편 페루는 북한과는 1988년 수교하였다. 1872년 요코하마에서 일어난 마리아 루스 호 사건(María Luz 號 事件)을 계기로 수교하였다. 많은 이민자들이 건너가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일본계 인구가 많은 페루는 1990년대에 일본계 정치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급속하게 관계가 긴밀해졌지만 이후 실각하고, 추후 후지모리는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기도 하였다. 여권 여권(旅券) 또는 패스포트()는 해외 여행을 하는 사람을 위해 정부가 발행하는 공식 신분증명서이다. 소지한 사람의 사진과 서명, 법적이름, 생년월일, 국적 등 신분에 관한 사항을 증명한다. 가장 대표적인 여행증명서이다. 여권은 다른 나라의 입국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 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영사의 보호나 다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각 상황에 맞는 특별 조약이 있어야 한다. 다만, 여권은 일반적으로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그 여권을 발행한 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영사의 보호를 받을 권리는 국제조약과 여권 발행국의 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발생한다. 여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가운데 하나는 타나크이다. 이 경전의 느헤미야서 2장 7절에서 9절까지의 기사에는 기원전 450년 경 페르시아 제국 시기 아르타세르세스 1세의 신하였던 느헤미야가 유대로 여행하겠다고 청하자 왕이 "강을 넘어서도 효력을 발휘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중세 아랍 제국에서는 세금을 납부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수증인 "바라아"가 여권을 대신하였다. 당시 아랍 제국에서는 시민만이 세금을 내었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자카트를 납부하였고 딤미는 지즈야를 납부하였다. 따라서 바라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곧 아랍 제국의 시민임을 뜻했고 여권의 역할을 하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항구나 도시의 성문을 통과할 때 신분증명서를 요구받았고 그것에는 소지자가 여행한 도시나 항구들의 목록이 적혀있었다. 자국의 시민이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의 안전을 위해 국가가 신분을 증명하는 근대적 의미의 여권을 처음으로 시행한 사람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이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기차 여행이 시작되자 이전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수많은 국경을 지나가는 일이 빈번해지자 국가마다 서로 다른 이전의 여권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럽은 보편화된 여권법을 마련하게 되었다."History of Passports 아미노기 아미노기(amino group)는 유기 화합물이 가지는 작용기의 하나이다. 질소 원자에 수소가 결합된 형태를 취한다 (-NH2). 양성자와 결합하여 양전하를 띠는 양이온이 될 수 있고, 질소 원자가 가지고 있는 비공유 전자쌍 때문에 친핵체로 작용할 수 있다. 독일어 독일어(獨逸語, , )는 게르만어파 서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사용된다. 독일어는 학술어로서 그 중요성이 크며 세계 출판업계에서 영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다. 모국어로서의 사용자수는 약 1억 2천만 여명으로 세계 10위 수준이며, 유럽 연합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전 세계에서 제2언어로 배우는 사용자의 수가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프랑스어 다음으로 많아, 세계의 주요언어 중 하나로 여겨진다. 독일어는 서게르만어계의 언어이며,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일부이다. 독일어는 중서부 유럽에서 모국어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로, 유럽 연합의 공용어이자 공식 실무 언어이기도 하다. 독일,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의 국어이며,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루마니아에서 공용어로 사용하고 아프리카 서부 나미비아에서도 공인지역어로 독일어를 채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남티롤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주),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 동유럽 국가들의 국민, 특히 중장년층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미국은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 약 500만 명 정도로 영어와 혼합한 특수한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다. 19세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에서 남아메리카로 이주했던 사람들의 후손이 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특히 히우그란지두술주, 산타카타리나주, 파라나 주, 이스피리투산투주)에 소수의 독일어 사용자가 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소련 당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독일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도 소수의 독일어 사용자가 있다. 독일은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을 이룬 뒤에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빌헬름 1세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뒤늦게 다수의 식민지를 개척했다. 이 때 독일어는 카메룬, 부룬디, 나미비아, 탄자니아, 르완다 등 아프리카 국가와 파푸아뉴기니,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사모아, 팔라우 등 오세아니아 국가에 전파됐다. 그러나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결과,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으면서 짧은 점령 기간 탓에 독일어를 쓰는 나라는 줄어들었다. 반대로 벨기에의 경우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결과 독일 라인 지방의 일부를 할양받으면서 독일어가 공용어로 추가 지정되었다. 루마니아의 경우는 1990년까지 한동안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사용이 합법화되었으며, 최근에는 지방 언어로 지정되었다. 독일어는 로마 문자를 사용한다. 영어에서 쓰는 26개의 표준 문자에 3개의 움라우트, 즉 "ä", "ö" 그리고 "ü", 또 "ss"를 나타내는 특수한 문자인 ß(에스체트)가 추가되어 있다. 독일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락투어 와 슈바바허() 등의 흑자체로 인쇄되고 쥐테를린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씌었는데 훈련 없이는 이들을 읽기 힘들다. 오늘날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리프체와 산세리프체가 사용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에스체트의 표기 문제로 1996년 독일어 정서법 개정 당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독일 이외 즉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등에서는 에스체트를 공문서나 웹사이트에서 모두 "ss"로 표기하여 불편함을 없애 두었다. 이들 나라에서 독일어 출판물이 나올 때는 독일어권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에스체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어의 명사는 남성, 여성, 중성의 3개의 성별과 주격 (Werfall; Nominativ), 소유격 (Wes[sen]fall; Genitiv), 여격 (Wemfall; Dativ), 목적격 (Wenfall; Akkusativ)에 따라 다른 관사가 사용된다. (각각을 편의상 1격, 2격, 3격, 4격 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Dativ와 Akkusativ의 경우 문장 내에서 목적어에 해당하며 각각이 우리말로 (~에게), (~을/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동사 혹은 전치사는 특정한 격을 반드시 필요로 하므로 이 관계는 반드시 숙지하여야 한다. 예시 일반적으로 다른 언어에서 독일어를 이르는 명칭은 어원에 따라 6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독일의 독일어 관련 기관 Goethe-Institut(괴테-인스티투트)는 전 세계의 지부에서 독일어 능력 인증 시험인 Goethe-Zertifikat(괴테-체어티피카트)를 실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Goethe-Institut Seoul(괴테-인스티투트 서울), 즉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시험을 볼 수 있으며, 시험 등급은 유럽 표준에 따라 A1부터 C2까지 나뉜다. 이 시험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능력을 모두 평가하지만, TOEFL 등의 시험과는 달리 CBT 방식으로 치러지지는 않는다. 아르바이트(Arbeit,노동.노동자는 Arbeiter.), 테마(Thema), 이데올로기(Ideologie), 마하(Mach), 아우토반(Autobahn), 알레르기(Allergie), 킨더가르텐(Kindergarten,유치원.어린이를 뜻하는 킨더와 정원을 뜻하는 가르텐을 더하여 만듦.), 비어(Bier), 벤츠(Benz), 아스피린(Aspirin), 분데스리가(Bundesliga), 에델바이스(Edelweiß), 카테고리(Kategorie), 마이스터(Meister), 호프(Hof), 로렐라이(Loreley), 비타민(Vitamin), 파밀리에(Familie) 등 위례성 위례성(慰禮城)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다. 한강을 기준으로 하여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으로 구분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의 서편에는 배와 나루터, 동편 일대에는 군사훈련과 민가 마을, 그리고 길쭉한 사성(蛇城)으로 쌓여져 있어 이 성벽이 이어져 숭산(崇山)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례성이라는 명칭이 어디에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한강을 뜻하는 옛 이름 아리수(阿利水)·욱리하(郁利河)의‘아리’·‘욱리’에서 왔다고도 하고,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어라하(於羅瑕)에서 왔다는 의견과, 울타리를 말하는 순우리말 '우리'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삼국유사에서 위례성의 위치를 직산(稷山)으로 비정한 것에 따라, 천안 성거산 위례성을 위례성으로 추정해 왔다. 하지만 이후 정약용은 삼국사기에 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위례성을 하남과 하북으로 분리해 하북위례성을 한강 이북 지역으로, 구체적으로는 북한산 동쪽 기슭에 옛 성곽이 남아있고 일대 지명이 한양고현(漢陽古縣)이라는 점에서 이 일대를 하북위례성으로 추정하였다. 삼국유사에서 위례성을 직산으로 추정한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475년 남쪽으로 피란하던 문주왕이 잠시 머무른 곳이라는 의견과, 웅진 천도 후 지명이 옮겨간 현상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위례성을 "위치는 알 수 없고 지명만 남아있는 곳"으로 분류하였다.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기원전 5년부터 기원후 476년까지 백제의 수도였으며, 일반적으로 서울 몽촌토성 및 풍납토성으로 비정되지만 유적·유물의 조사가 빈약해 명쾌한 해답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하남위례성은 한성(漢城)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세력은 한강 이북 지역에 정착했다가, 낙랑, 말갈 등 북쪽으로부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좋고 땅이 기름진 한강과 남한산 사이로 도읍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하남위례성을 수도로 정하기 전에 잠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곳으로, 위치는 세검정, 중랑천, 상계동, 우이동 등 여러 추측이 있으며 방학동에 남아있는 방학동 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하북위례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백제의 도읍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이었다고 간주한다. 강금실 강금실(康錦實, 1957년 2월 12일 ~ )은 대한민국 前 제55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이다. 본관은 곡산(谷山),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그녀는 첫 여성 법무법인 대표, 첫 여성 민변 부회장, 첫 여성 법무부 장관 등을 지낸 상징성 있는 법조인이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서울 지역 첫 여성 형사 단독판사였다.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하였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3년 2월에 노무현 정부 첫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57년 2월 12일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학사 학위했다. 1984년 결혼했고 2000년 이혼했다. 강금실의 아버지 강계돈(康季敦)은 용공조작 사건으로 유명한 '유지(有志) 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알려져 있다. 유지 사건은 1950년 8월 초순 제주지역 법원장, 검사장,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제주읍장 등 16명의 지역유지급 인사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연행된 대표적 사건이다. 당시 제주농업고등학교 교감이었던 강계돈은 무고 혐의로 구속되어 1951년 4월에 열린 부산지방법원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가 1951년 11월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한 끝에 1952년 1월 15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훗날 계엄사령부(제주도 해병대 정보참모실)가 용공조작한 사건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강금실의 가족은 제주도를 떠나 육지에 나가게 되었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3년 제3차 사법파동에 참여하여 소장 판사들과 함께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하였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참여정부에서 제55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개혁적인 업무 추진과 발랄한 언사로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또 꼭짓점 댄스를 잘 춰 '강효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측의 출마 권유가 있었으나 물리치고 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법무부 장관 사직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서울 시장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서울 시장 낙선 후 정계를 잠시 떠나 법무법인 <우일아이비씨>의 고문 변호사 겸 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로 활동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및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각각 통합신당과 통합민주당의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법무법인 원의 구성원 변호사로, 한국인권재단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최문순이 제37대 강원도지사로 선출되는 데 기여하였다. 법무법인 원 고문 변호사로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해당 로펌이 제주도에서 공익적 법률서비스를 펼치고자 제주 분사무소를 개소하면서 활동 영역을 제주도로 확장하였다. 강금실은 제주도변호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윤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원 제주 분사무소를 이끌었다. 2000년 강금실은 논문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를 이석태 변호사와 함께 저술하였다. 해당 논문에서 강금실은 "호주제는 배우자나 가족 사이의 주종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헌법의 평등권 보장 취지와 인권 이념에 반한다. 호주제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 봉건적 유교이데올로기와 일본 천황제 파시즘이 결합해 남한 사회에 정착한 이후 권위주의 정권이 이를 적극적으로 정권 유지에 부합하는 제도로 유지·고착시켰기 때문이다. 호주제는 단순히 남성 중심의 문화적 의식구조에 의해 유지된 것이 아니라 구한말 봉건제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닌 복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림세력이 조직적으로 호주제 폐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호주제는 우리 사회에 너무 오래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 입법을 통한 방법만으로는 부족하다.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과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통해 위헌 결정을 받아내는 소송 전략을 제시하는 바이다. 최종적으로 유엔 인권 이사회에 제소하는 방법도 있다. 호주제 폐지 후의 대안으로 가족별 호적의 편제방법, 주민등록제도와의 일원화 등을 검토할 수 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대에 설치된 주민등록제도와 관련한 호적제도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고 지적했다. 2003년 3월, 법무부 장관 강금실은 "법무부는 법의 집행뿐 아니라 ‘소수자 집단’의 인권 향상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남녀불평등을 야기하는 대표적인 독소 조항 '호주제'의 폐지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라고 말하며 호주제 폐지를 공언하였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고, 2005년 3월에 민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3년 후인 2008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되었다. 유기화학 유기화학(有機化學, Organic chemistry)은 유기 화합물의 구조나 특성, 제법 및 응용등을 연구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원래는 살아있는 생명체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유기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었으나,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가 무기물인 사이안산암모늄으로부터 요소를 만들어내어, 유기물질이 생명체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험실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음이 알려진 이후로는 탄소를 포함하는 화합물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재정의되었다. 유기화학에서의 유기화합물은 일반적으로 탄소와 수소를 포함하고 있는 분자를 지칭한다. 주어진 화합물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유기화학에서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여러가지 분석기법이 동원되는데, 기본적으로 NMR, IR, Mass Spectrometry Data등이 필요하며 기타 특성으로 고체화합물의 경우 녹는점을 측정하며 UV-vis data를 통해 분자내 발색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광학활성인 화합물의 경우 비선광도(specific rotation)나 CD spectrum등의 자료가 필요하다. 추가적인 구조분석자료로 고체시료의 경우 X-ray crystallography data가 이용된다. 유기 화합물의 이름은 규칙을 논리적으로 따라 조직적인 이름으로 이루어지거나, 다양한 전통을 따라 비조직적인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조직적인 이름은 IUPAC의 권고로 규정되어 이루어진다. 조직적인 명명법은 분자 안의 부모 구조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이때 이러한 부모 이름은 접두사, 접미사, 숫자로 수정된다. 수백만의 유기 화합물이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이름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IUPAC 권고는 복잡한 분자들이 아닌 단순한 화합물에 따라가려고 한다. 조직적인 명명을 이용하려면 부모 구조의 이름과 그 구조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 구조에는 탄화 수소, 복소환식화합물, 또 그에 따른 단작용하는 파생물을 포함한다. 조직적이지 않은 명명은 적어도 유기 화학자들에게 더 단순하고 애매함이 없다. 비조직적인 이름은 화합물의 구조를 가리키지 않는다. 비조직적인 이름은 대부분의 천연 상품을 포함하는 복잡한 분자들에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비공식적으로 이름이 붙은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라는 이름은 조직적으로 이름을 붙이면 (6aR,9R)-N,N-diethyl-7-methyl-4,6,6a,7,8,9-hexahydroindolo-[4,3-fg] quinoline-9-carboxamide가 된다. 511년 · 클로비스 1세, 사망. 프랑크 왕국 분열. 512년 513년 514년 515년 516년 517년 518년 519년 520년 521년 522년 523년 524년 525년 526년 527년 +여기서 이차돈은 죽으면서 목에서 흰 피가 났으며, 꽃 비가 내렸다고 한다. 528년 529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 다라에서 페르시아에 대승을 거둠 530년 531년 532년 533년 534년 535년 536년 537년 538년 539년 540년 541년 542년 543년 544년 545년 546년 547년 548년 549년 550년 금속공학 금속 공학, 야금학(metallurgy)는 재료 공학의 한 분야이지만 특히 금속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대한 평가나 새로운 금속의 연구 개발을 실시하는 학문이다.본래는 광석에서 유용한 금속을 채취 정제·가공하여 여러가지 목적에 따른 실용 가능한 금속 재료·합금을 제조하는 이른바 야금을 범위로 하는 학문이며, 야금학의 이름도 여기에서 딴 것이다. 역사적으로 금속공학은 인류가 구리를 제련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금속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많다. 금속공학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분야로 파생되고 또 물리학이나 화학 등과 같은 다른 학문 분야와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개념들을 사용하게 되어 엄밀히 따지면 재료공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재료공학에서 사용하는 상당수의 논리 체계는 전통적인 금속공학에서 차용한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흔히 금속·재료공학이라고 많이 표현한다. 재료를 구분하는 방법은 관점에 따라서 다르지만, 크게 무기 재료(금속/세라믹)와 유기 재료(플라스틱 등의 고분자 재료)로 구분할 수 있다. 천명제 천명제(天命帝,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는 건주여진 출신으로 여진 종족들간의 패권투쟁에서 승리하여 1616년 자신을 한으로 선포하고 이후 후금을 건국했다. 휘는 아이신 교로 누르가치(), 묘호는 태조(太祖, )이고, 연호는 천명(天命, , )이라고 부른다. 첫번째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무황제 (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武皇帝)으로, 줄여서 타이주 호롱오 한(太祖武皇帝, ), 네번째 시호는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으로, 줄여서 고황제(太祖高皇帝, )이다. 별호로는 태조한조종(太祖汗祖宗, )이 있다. 생전 도장에 새겨진 칭호는 압카이 푸링가 아이신 구룬 한()이다. 누르가치(奴兒哈赤, )의 이름은 지금까지 누루하치·누루카치와 누하치 등의 독법이 있지만, 누르가치가 올바른 명칭이다. 또한 그의 이름 누르가치는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을 가진 누허치(奴可齊, )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누르가치는 1559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탁시에게는 최소한 세 명의 처첩이 있었다. 사료로 고증할 수 있는 본처는 아구(阿古, ) 도독의 딸이다. 성은 히타라(喜塔腊, ), 이름은 어머치(額穆齊, )인 그녀는 탁시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누르가치, 셋째 아들이 슈르가치, 넷째 아들이 야르가치(雅爾哈齊, )다. 딸은 정확한 이름이 남아있지 않다. 누르가치의 집안은 건주여진의 숙수후부(蘇克素滸部, )에 속했었다. 누르가치는 요동에서 개원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해서여진인들을 통합하여 하다국을 설립하고, 여진과 몽골의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과도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었던 완 한()의 족녀 하다나라 컨저(哈達那拉 懇哲, )의 학대를 받아 18세의 나이에 퉁갸씨와의 결혼과 동시에 동생 슈르가치 등과 함께 분가했다. 탁시는 분가하는 누르가치에게 노비 남성 6명, 여성 5명, 마 2기, 소 4마리를 지급했다. 누르가치는 처가인 퉁갸 가문으로 가서 직접 인삼을 채취하여 명나라 상인들에 파는 등 빈곤하게 살아간다. 6년 뒤, 조부 교창아와 부 탁시가 구러산성 공방전에서 명군의 오인으로 살해되자 본성 허투아라로 귀환했다. 16세기 말기, 누르가치가 정복하기 직전의 여진 제부는 현재 중국 둥베이와 러시아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국가들을 이루거나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의 지역에 일종의 행정구획인 위소(衛所)를 200여 개를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그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다. 이때 명이 설치한 여진위소는 종족, 인구수 등 모든 면에서 명나라 내지의 위소와는 전혀 다른 전통적 여진부락에 불과하며 여진 종족들의 부락에 위소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였다.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후너허 강 상류부터 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후너허()·왕야·동오·저천()의 5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건주 5부는 각각은 본래 별개로 세워진 독립 세력이며, 각각의 집단 사이의 혈연적·종족적 결합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외에 백두산 일대의 너옌()·주셔리()·야루 걍()의 3개 아이만도 때로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숙수후부 출신의 누르가치의 조부와 부친이 아타이를 공격하던 명군에게 살해 당한 뒤 이성량은 그를 위무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우선 그에게 칙서를 수여하고 말을 하사했다. 그에게 지휘 직위를 주도록 명나라 조정에 건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성량과는 달리 요동 관원들은 니칸 와이란에게 더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런 행동은 누르가치의 불만을 샀다. 당시 건주여진에는 여러 막강한 세력이 있었다. 숙수후부, 후너허부, 왕야부, 동오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부족은 명 조정에서 니칸 와이란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누르가치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닝구타 일족인 교창아의 여러 형제들 세력조차 니칸 와이란에게 귀순해 의지했다. 누르가치 역시 명 조정에 드러내놓고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는 도리 없이 몰래 니칸 와이란에게 불만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건주의 작은 부족의 수령들과 긴밀한 연계를 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갸무후성의 주인 가하샨(), 사르후성의 주인 구와라()와 그 아우 노미나() 등이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힘을 모아 니칸 와이란을 타도하는 대열이 동참하기로 하늘에 맹세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누르가치는 명나라 조정에 "내 조부와 부친의 죽음은 사실 니칸 와이란의 사주에 의한 것아다. 그를 사로잡아 나에게 넘겨줘야 비로소 마음이 편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명 조정은 당연히 그에게 회답하지 않았고, 누르가치는 부조의 복수를 위한 군대를 일으키는 빌미로 얼마 후 니칸 와이란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누르가치의 세력은 크지 않았는데 건주의 각 부족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은 100명에 불과했다. 그의 부친도 그이기 고작 갑옷 13벌의 미미한 유산만 물려줬다. 그러나 누르가치는 이런 열악한 상황이고 불구하고 1583년 5월에 니칸 와이란이 성주인 투런()이라는 성으로 진공을 개시했다. 출병 당시에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해 출정 시기를 누설했다. 이로 인해 니칸 와이란은 누르가치의 예봉을 피해 피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런성은 누르가치에게 점령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25세의 누르가치가 감히 명나라 군다에 지원하는 건주의 주인 니칸 와이란을 패퇴시킨 것은 대사건이었다. 그의 지위는 급작스럽게 부상하게 됐다. 누르가치는 계책을 세워 노미나의 세력을 제거한 다음 노미나가 공격할 것을 제의한 바르다이(巴爾達, )성까지 함락했다. 누르가치가 투런성과 사르후성을 얻은 뒤로 숙수후 부민은 대부분 누르가치의 부족으로 편입됐다. 그는 새로이 복속시킨 이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으며 그들이 편안하게 살면서 평소에는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러나 누르가치의 일족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그의 1대조, 2대조, 3대조, 6대조의 자손들이 종묘사직에서 맹세한 다음 누르가치를 모살하려고 했다. 누르가치의 시위와 매부 가하샨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가하샨의 복수를 위해 마르둔() 성채에서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듬해 동오부를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1585년 2월, 누르가치는 또다시 건주의 작은 부족인 저천부의 자이퍈()성을 목표로 출병에 나섰다가 철군하는 과정에서 태란강에 이르렀을 때 자이퍈과 바르다이 등의 성주가 규합한 400여 명의 병력을 격파하여 자이퍈성의 주인 너신()과 또 다른 우두머리인 바무니()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누르가치는 돌아와서 병마를 정돈하고 군비의 확충이 적극 나선 뒤 4월 저천부를 재정벌한다. 저천부는 이에 누르가치를 습격하기로 했다. 토모호(), 장갸(), 바르다이, 철아호(撤兒湖), 자이퍈의 성주가 800여 명의 병사를 규합해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누르가치는 어린 동생 무르가치와 부하를 이끌고 그들을 패퇴시켰다. 1년 후 토모호성을 함락했고, 1587년에는 용맹한 장수 어이두로 하여금 바르다이성을 공격해 저천부를 합병했다. 숙수후부와 동오부를 겸병하고 저천부를 멸망한 누르가치는 1586년 7월, 니칸 와이란이 은거한 오르혼()성을 공격했다. 이때 니칸 와이란은 도주하고 니칸 와이란의 향병 40인이 누르가치에게 30여 군데 창상을 입히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가치는 40기를 보내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로 도주하던 니칸 와이란을 추격하도록 했고,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의 요동변장의 수비대의 수수방관으로 자이사에게 참수당한 채로 누르가치에게 받쳐졌다. 누르가치는 이로써 자신의 미래 사업을 위한 공고한 기초를 닦았다. 명나라 군대가 누르가치로 하여금 니칸 와이란을 죽이도록 방치한건 누르가치라는 존재를 인정한 까닭이었다. 이에 건주여진의 대부분의 부족이 앞다퉈 그에게 귀순하기 시작했다. 수완()의 우두머리 솔고(), 동오 우두머리의 손자 호호리(), 야르구() 촌장 후르한() 등이 모두 1588년에 무리를 이끌고 귀순한 인물이다. 같은 해 9월 누르가치는 군대를 이끌고 숙수후강과 동오부 사이의 파저강 상류의 작은 부락인 완안성을 공격하여 왕야부를 병합했다. 건주여진에 대한 누르가치의 통일 사업은 이로써 완전히 끝나게 됐고 이듬해 명 조정은 누르가치를 도독첨사로 임명했다. 1593년, 해서여진 예허의 국주 부자이와 나림부루, 하다의 국주 멍거부루, 우라의 국주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 호이파의 국주 바인다리, 코르친 몽골의 옹가대와 망구스 그리고 밍간, 주셔리()의 우두머리 유렁어(), 너옌()의 우두머리 서오원() 및 석시()와 화친하고 9부 연합군을 결성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하였으나 누르가치가 강을 따라 난 길이 좁고 험한 구러 산에서 매복하고 여러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들을 유인한 탓에 연합군은 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 과정에서 부자이는 낙마한 뒤 건주병 우탄에 의해 전사했다. 1595년 누르가치는 명 조정으로 부터 임기 3년의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직첩을 받아냈으며, 1596년 조선을 상대로 여진국건주위관속이인주(女眞國建州衛管束夷人之主)를 자칭했다. 1599년, 누르가치는 어르더니() 박시와 까까이() 자르구치에게 명하여 몽골 문자를 개량한 주션 문자[無圏點点字]를 창제하게 했고, 10월 말에는 하다가 명의 중재하에 예허와 동맹을 맺고 하다로 파병된 건주의 지원군을 몰살하고 그 장수를 사로잡자 슈르가치와 함께 하다를 공격하여 25일에 하다성을 함락하고 국주 멍거부루를 생포한 뒤 하다부민을 모두 건주여진으로 사민했다. 1606년, 내칼카 바야우드의 엉거더르 타이지와 그가 인솔한 5위의 사신이 누르가치에게 쿤두런 한(, )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607년 9월에 호이파(輝發, Hoifa)부를, 1613년에는 우라부를 병합했다. 둥베이와 연해주 지역에 산재해 있던 독립국간의 패권투쟁에서 승리한 누르가치는 1616년 정월, 허투 아라에서 팔기 버이러와 여덟 암반()에게 가난하여 고통받을 여러 나라를 돌보라는 천명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겅옌 한(英明汗, )으로 추대됐다. 그 사이에 삼대정은 거의 해결되었고, 명나라는 누르가치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강력한 예허부를 지지함으로써 누르가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다. 1618년 4월, 누르가치는 "7가지 큰 원한"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예허에 가담하여 여진국을 공격한 것, 조부 교창아와 아버지 탁시가 명군에게 사살당한 것 등이 적혀 있다. 이 무렵, 누르가치는 사위인 엉거더리 타이지와 사하랸에게 금나라 황제들의 전례를 언급한 것을 계기로 아골타가 천조제의 거란을 공격한 것과 자신의 대명전쟁을 동일시 하고, 금나라의 황제를 '우리'라고 부르는 등 금나라와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나라도 '아이신 구룬'(금나라)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619년 3월 명나라는 예허부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여 47만에 이르는 여진 토벌군을 결성하고 이듬해 무순에서 가까운 사르훠(薩爾滸, Sarhū)에서 10만여 명이라 칭하는 만주의 군대과 격돌했다. 수적으로 불리한 여진이었지만, 공을 탐한 명나라 장군 두송이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기 때문에 각개 격파할 수 있었다(사르후 전투).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도 부차 전투에서 포위되어 김응하가 전사하고, 곧 항복하게 된다. 사르훠에서 명군에 큰 타격을 준 누르하치는 후원자를 잃은 예허부를 습격하여, 복속함으로써 흑룡강 일대의 야인여진들을 제외한 여진족을 통일했다. 1621년(천명 4년), 기세가 오른 누르가치는 심양, 요양을 잇따라 함락시켰고, 요양 옆의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 때 금의 세력권은 요동 전역에 미쳤다. 1626년(천명 9년), 연전연승하던 누르가치는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 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홍이포를 대량으로 거취하고 금군을 맞이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금군은 패배하고, 퇴각했다. 영원성 전투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영원성 전투 이후 누르가치는 몽골의 칼카 원정을 떠났고, 또 코르친과 동맹을 맺었다. 그렇기에 근대의 역사학자들도 누르가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주장을 하나같이 믿지 못할 견해로 본다. 영원성 전투에서 포탄으로 인해 사망한 것은 누르가치의 아들이나 비왕으로 기록될 뿐이다. 원숭환은 "누르가치가 영원의 패전을 수치로 여겨 이로 인한 화로 종기가 생겼다"고 말한 바 있다. 팽손이 또한 《산중문견록》에 "건주국한의 등에 종기가 생겼다"라고 기록했다. 따라서 누르가치의 사망은 종기가 돋는 피부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같은 맥락에서 청하에서 온천욕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종기가 발병한 원인이 영원성 전투에서의 포격에 의해 다친 옛 상처가 재발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누르가치는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국가를 통치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누르가치의 8남 홍 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한의 지위를 계승했다. 누르가치는 복릉(福陵, )에 안장됐다. 한산 이씨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가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있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의 5대조인 이윤경을 시조로 하는 혈족이 호장공계(戶長公系) 한산 이씨이다. !23/17세 !!24/18세 !!25/19세 !!26/20세!!27/21세 !!28/22세 !!29/23세 !!30/24세 !!31/25세 !!32/26세 !!33/27세 !!34/28세 !!35/29세 !!36/30세 !!37/31세 !!38/32세 !!39/33세 !!40/34세 !!41/35세 !!42/36세 !!43/37세 !!44/38세 호장공 기준으로 보고 싶다면, 이한의 5대조로 이윤우(본래 광주 이씨 후손)를 시조로 하는 혈족이 권지공계(權知公系) 한산 이씨이다. 고사기 고사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그 서문에 따르면 와도(和銅) 5년(712년)에 겐메이 천황의 부름을 받아 오호노아소미 야스마로(太朝臣安麻呂)가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지키라는 제목은 음독이며, 훈독으로는 후루코토후미()라고도 읽지만 일반적으로 음독으로 불린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필사본 형태로 몇 가지 사본이 전하고 있다(성립 연대는 이 사본의 서문에 기록된 날짜에 따른 것이다). 내용은 일본에서 신대(神代)라 불리는 신화 시대의 아메쓰치(天地)의 창조에서 시작해 스이코 천황의 시대에 이르는 여러 가지 사건(신화나 전설 등을 포함)과 함께, 고대 일본의 수많은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덧붙여 「다카마노하라(高天原)」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점도 《고사기》의 특징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역사서로 알려져 《일본서기》와 함께 고전으로 중시되나,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더 후대를 기술한 책인 일본서기로 간주된다. 《일본서기》처럼 율령국가의 정사(正史)로서 황명으로 편찬된 책은 아니지만, 서문에 "제기(帝紀)를 찬록하여 구사(舊辭)를 토핵하고, 거짓을 깎아내고 사실을 가려 후세에 전해주려 한다(撰錄帝紀 討覈舊辭 削僞定實 欲流後葉)"는 덴무 천황의 발언이 실려있는 것에서 미루어 《일본서기》와 같은 황명으로 편찬된 사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당시 천황을 제신(祭神)과 연결시켜 천황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성립 경위를 기록한 서문에서는 덴무 천황의 명으로 히다노 아레(稗田阿礼)가 「송습(誦習)」하고 있던 「제황일계(帝皇日継)」(천황 계보)과 「선대구사」(先代舊辞)(오래된 전승)을 오오노 야스마로가 글로 적어서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송습」은 「암송」으로 해석되지만, 오기와라 아사오(荻原浅男)는 쇼가쿠칸에서 펴낸 『일본고전문학전집(日本古典文學全集)』 제1 《고사기》에서 「옛 기록을 보면서 고어로 구절을 떼어 반복해서 낭독하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책 제목인 《고사기(古事記)》는 원래는 단순히 '오래된 책'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로 정식 이름은 아니며, 그 제목을 야스마로가 붙였는지 후대에 누군가가 붙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사기》는 상, 중, 하의 세 권으로 나뉘는데, 천황가의 계보와 신화·전설 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신들의 이야기, 중 · 하권은 각 대(代)의 계보와 천황 · 황자들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중권은 초대부터 15대 천황까지, 하권은 16대부터 33대 천황까지). 내용은 크게 「제기」(천황 기록) 부분과 「구사」(전승)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제기」는 초대 천황에서 제33대 스이코 천황까지의 이름, 황후 · 황자 · 황녀의 이름 및 그 자손의 씨족과 이밖에 황궁의 이름 · 치세 햇수 · 붕어한 해의 간지 · 수명 · 능묘의 소재지 및 그 치세의 주된 사건 등을 적었는데, 이것은 당시 야마토 조정의 가타리베() 등이 암송했다가 천황의 모가리(), 즉, 빈소에서의 제의 등에서 구술하던 관습을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구사」는 궁정 내의 이야기, 황실이나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집계한 것으로 「제기」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제기」나 「구사」는 6세기 전반 내지 중엽 무렵까지의 시기에 야마토 조정의 오키미(大王)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이나 호족이 창작한 구비전승으로서 '천황'(오키미)이라는 존재가 야마토(일본)을 지배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임신의 난을 넘기고 신성화된 왕권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천황의 지배하인 국가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일본 민족의 진정한 역사적 전승은 아니다. 한편, 널리 민중들에게도 수용하게 할 필요도 있었던 점에서, 민중을 의식한 상권 부분이 본래의 《고사기》가 아니냐고 보는 설도 있다. 오노 야스마로는 히다노 아레가 '송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자의 훈독과 음독 표기를 섞고 알기 어려운 말에는 주(註)를 달았다. 본문은 변체 한문을 주로 하고 일본의 고어나 고유 명사처럼 한문으로 대용하기 어려운 것은 한 자 한 음 표기로 하고 있으며, 가요는 모두 한 자 한 음 표기로 본문의 한 자 한 음 표기 부분을 포함해 고대 일본의 특수한 가나 사용법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또 한 자 한 음 표기 가운데는 일부 신(神)의 이름 등의 오른쪽에 상(上), 거(去)처럼, 중국의 문서에서 볼 수 있는 한어의 성조인 사성 중 상성이나 거성 같은 문자를 배치하고 있다. 《고사기》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면서도 많은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 상당수는 민요나 속요로서 이야기에 맞추어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명한 것은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之男命)가 구시나다 히메(櫛名田比売)와 결혼했을 때 지어 불렀다는, 와카의 시초로 여겨지는 등이 있다. 사료상으로 서문에 기록된 성립 과정이나 당시 황실의 관여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거나(서문에서 밝힌 천황의 지시로 완성했다는 《고사기》 성립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전혀 없다) 혹은 실제 사실과 모순되는 점이 많다는 견해가 있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같은 다른 공식 사서의 기록에도 《고사기》의 언급이 없는 등, 《고사기》라는 사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물증도 없다는 점에서 《고사기》를 위서로 간주하는 설도 주창되고 있다(후술). 《고사기》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남북조 시대의 것으로 그 이전의 모습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른바 '개찬설'도 있으나, 여기에는 고고학적인 반론이 있다. 《고사기》는 국가 통치의 기본을 확립할 의도에서 작성된 것으로 사서로서의 일면도 있으나, 또한 신화 · 전설 · 가요 등 문학성이 풍부한 내용을 가진 일본 문학사의 최초를 장식한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으며, 일본 신토의 '경전'의 하나로서(《고사기》에 수록된 신들은, 현재 일본의 많은 신사에서 제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신도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 문화 · 정신 문화에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상권에 나와있는 신화 부분은 한국의 신화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한국의 신화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현존하는 《고사기》 사본은 주로 오나카토미노 사다요(大中臣定世)에 의해 필사된 것을 조본(祖本)으로 하는 「이세본(伊勢本)」 계통과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우라베 가네나가(卜部兼永)가 필사한 것을 조본으로 하는 「우라베본(卜部本)」 계통으로 나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이세본」 계통으로 겐토쿠 2년/오안(應安) 4년(1371년)부터 이듬해 분추 원년/오안 5년(1372년)에 걸쳐 신후쿠지(真福寺)의 승려였던 겐유(賢瑜)가 필사한 신후쿠지본(真福寺本) 《고사기》 3첩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것이 「이세본」의 조본이며, 발문에는 상 ・ 하권만 사다요가 필사하고, 중권은 후지와라노 미치마사(藤原通雅)가 필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밖에 고카 원년/에이토쿠 원년(1381년)에 필사된 도과본(道果本) 상권 전반부, 오에이 31년(1424년)에 필사된 도상본(道祥本) 상권, 오에이 33년(1426년)에 필사된 춘유본(春瑜本)이 있는데, 이 세 필사본은 모두 신후쿠지본과 가까워서 똑같이 「이세본」 계통으로 분류된다. 이밖의 사본은 모두 「우라베본」 계통이다. 고사기가 근세기 국학자들이 만든 역사서라는 위서설도 있다. 크게 고사기의 서문만 위서라는 설과 본문도 위서라는 설이 있다. 고대 일본어의 한자 표기법과 언어학적 측면에서 위서설은 부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일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일본의 육국사(六國史)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고사기》까지 포함하면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일본 역사서이다. 덴무 천황의 명으로 도네리 친왕이 중심이 되어 편찬, 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했다.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 지토 천황의 시대까지를 취급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30권과 계도(系圖) 1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계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 한국의 사료와 《위서》 《진서》 등 중국의 사서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의 진구 황후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였다는 황당무계한 대목이 있고 연대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사학자도 있다. 《고사기》와 달리, 일본서기에는 편찬한 경위가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편찬한 《속일본기》의 기록에 의해서 편찬 경위를 알 수 있다. 속일본기 720년 5월에 기록된 경위에는 "이전부터, 일품 도네리 친왕이 천황의 명을 받아 《일본기》(日本紀)를 편찬하였고, 기30권과 계도 한 권을 완성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진서》 안제기(安帝紀)에는 266년에 왜국(倭國) 관련기사가 등장하는데, 그 다음으로는 5세기 초인 동진(東晋) 의희(義熙) 9년(413년)에 왜국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이전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서에 왜국의 기술이 없고, 고고학적인 문자 기록도 없는 점에서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부른다(4세기 후반 이전의 야마토 왕권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야마토 왕권 항목 참조). 《송서》에 실린 왜왕 무(武)의 상표문이나 스다 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에 소장된 명문이 새겨진 구리거울, 지바현 이나리다이(稲荷台) 1호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이 새겨진 철검(鐵劍),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稲荷山古墳)에서 발굴된 철검 명문 등으로 미루어 5세기대 일본에서 '문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야마토 조정 내에서 상시적인 문자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수서(隋書)》 권81의 열전(列傳)제46 동이(東夷)에는 왜국의 사정에 대해 "문자가 없고 단지 나무에 새기고 줄을 엮을 뿐인데, 백제에서 불법을 얻고 나서는 처음으로 문자가 생겨났다(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고 기록되어 있다. 1968년에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발견된 금착명철검(金錯銘鐵劍)에는 5세기 중순의 일본의 지방 호족이 작성한 '오오히코(意富比垝)'에서 '우와케노오미(乎獲居臣)'에 이르는 8세대에 걸치는 계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철검에 새겨진 '오오히코'를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제8대 고겐 천황(孝元天皇)의 제1황자 「오히코노 미코토(大彦命)」(4도 장군의 한 명)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었고, 가와구치 가쓰야스(川口勝康)는 명문에 나오는 「우와케(乎獲居)」를 「오오히코」의 손자 「데요카리와케(弖已加利獲居)」로 보고, 도요카리와케노 미코토(豐韓別命)는 다케누나카와와케(武渟川別)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지만, 철검 명문에서 데요카리와케는 다카리소니(多加利足尼)의 아들로 되어 있다.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의 발견으로 5세기 중순의 유랴쿠 천황의 실재를 인정한 다음, 그 전후, 특히 닌토쿠 천황 이후의 일본내 전승에 일정한 진실성을 부여하려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한편에서는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고사기》나 《일본서기》, 《조구키(上宮記)》의 기술은 신용할 수 없고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오키미의 이름이나 계도 등은 신뢰성이 부족하며, 이나리야마 고분 철검의 명문에 대해서도 한자 읽기 방식을 딱 잘라서 짚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쇼토쿠 태자에 의해 일본 최초의 '국사'가 성립되기 전에도 각종 계도(系図)가 존재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게이타이 천황 즉 오도노 오키미(オホド王)의 계도를 기록한 《조구키(上宮記, 또는 가미쓰미야노후미)》나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가 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만약 스이코 천황 때인 600년경 《조구키(上宮記)》가 성립되었다면, 게이타이 천황이 사망한 531년과는 70년의 차이가 있다). 덧붙여 《고사기》, 《일본서기》 편찬의 기본사료가 된 《제기(帝紀)》, 《구사(舊辞)》는 7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스이코 천황 20년(620년)에 "이 해에 황태자는 시마노 오오오미와 함께 의논하여, 천황기(天皇記) 및 고쿠기(國記), 오미(臣) · 무라치(連) · 도모노 미야쓰코(伴造) · 구니노 미야쓰코(國造) 180부와 공민(公民) 등의 본기(本記)를 기술하였다(是歲 皇太子、島大臣共議之 錄天皇記及國記 臣 連 伴造 國造 百八十部并公民等本記)"는 기록을 전하고 있지만, 이러한 야마토 왕권의 사서 편찬에 이바지한 정확하고 충분한 문자 기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할 뿐더러, 그것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대부분은 구비전승에 의지해야 했다고 추정된다. 이때 쇼토쿠 태자가 만들었던 역사서 《고쿠기》나 《천황기》는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 이루카(入鹿) 부자가 멸망할 때 대부분 소실되고 화재를 면한 일부가 덴지 천황에게 바쳐졌다고 한다. 현대에는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기술(특히 편년)은 정확함을 보증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시기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세 가지 이설이 전해지는 등 기술이 중첩되는 점, 또한 《일본서기》 편찬자가, 한반도 계통의 사서로 추정되는 《백제본기(百濟本記)》에 근거해, 531년설을 본문에 채용한 것을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다. 《백제본기》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과 함께 '백제삼서(百濟三書)'라 불리며, 풍부한 기록성으로 3서 가운데서도 《일본서기》 편찬에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사서이다(《삼국사기》 백제본기와는 다르다). 종래의 일본 학자들은 6세기 후반 위덕왕의 시대에 백제가 왜왕에게 제출하고자 편찬한 것을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참조했으며 이 '백제삼서'와 《일본서기》 기사를 대조해 나가면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여기에는 백제가 일본의 전통적인 속국이었다는 인식이 수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내용을 《백제본기》에 기초한 《일본서기》 게이타이기(繼體紀), 긴메이키(欽明紀)의 기술에는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많이 있는데,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술(《백제본기》에 이르기를 "임나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고 일본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진구기(神功紀) ・ 오진기(應神紀)의 주석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신라가 귀국(貴國)을 받들지 않아 귀국은 사치히코(沙至比跪)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등 왜국을 '귀국(貴國)'이라 부른 기술이 있는데,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는 이 단어를 종래의 일본 사학에서는 2인칭 대명사로 '당신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일본서기》 본문에는 제3자의 상호간 대화에서도 왜국을 '귀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부분이 있는 점을 들어 '귀국'이란 '가시코키 스메라미코토(可畏天皇)', '히지리노 오키미(聖王)'가 군림하는 '귀한 나라', '신의 나라'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였는데, 이처럼 일본을 '아라히토카미(現人神)'가 지배하는 신국(神國)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 백제삼서에 기재된 '일본', '천황' 등 호칭의 출현과 같은 덴무 천황의 시대의 일이며, 《백제본기》가 다룬 6세기 후반의 시대는 물론 일본 최초의 역사가 편찬되었던 스이코 천황 때에도 이러한 '신국'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백제삼서'의 기사의 원형은 백제 왕조의 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에서 백제가 멸망하고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걸쳐 왜국으로 망명한 옛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이 가지고 온 본국의 사서를 재편집하여 천황의 관부에 바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야마오 유키히사는 《일본서기》의 편찬자는 이것을 대폭으로 개변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율령국가체제 성립 과정에서의 국가적 대사업으로 이루어졌던 《일본서기》 편찬, 편찬 주체로 설정된 '천황'의 신하라는 입장(정치적 지위 보전 등) 등의 문맥을 무시하고서는 '백제삼서'와의 대음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일본서기》와 《백제본기》와의 대응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책의 원래 이름은 '일본기(日本紀)'였다는 설과, 처음부터 '일본서기'였다는 설이 있다. '일본기'로 보는 설은 《속일본기(續日本紀)》의 요로(養老) 4년 5월 계유조 기사에 '서(書)'라는 글자가 없고 일본기라고만 적혀있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서》, 《후한서》의 경우처럼 기전체 사서를 '서'라고 부르고, 제왕의 치세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은 '기(紀)'라고 불렀는데, 이 용법을 모방했다면 《일본서기》는 '기'에 해당하므로 '일본기(日本紀)'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이어 편찬된 《속일본기》나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모두 이름에 '서' 자가 없는 것도 이 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경우 '서' 자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 된다. 반대로 '일본서기'로 보는 설은, 오래된 사본과 나라・ 헤이안 시대 초기의 성립 시기가 비교적 이른(아울러 편찬 시점과도 가까운) 시대의 사료에서도 '일본서기'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고닌사기(弘仁私記)》 서문, 《석일본기(釋日本紀)》에 인용된 「엔기강기(延喜講記)」 등에서 '일본서기'라고 되어 있으며,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영집해(令集解)》에서 인용한 《고기(古記)》(738년 성립)로 여겨진다. 또한 참고로 삼았던 중국의 사서는 《한서》 ・ 《후한서》처럼 전체를 '서'라고 부르고 그 일부에 '기'를 가진 체재를 따랐다. 이 점을 들어 현존하는 《일본서기》는 중국의 사서에 적용시키면 '일본서(日本書)'의 '기(紀)'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일본서기》라 불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니혼쇼키(にほんしょき)'인지 '닛폰쇼키(にっぽんしょき)'인지 정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야마토(やまと)'라는 훈독으로도 불렸던 '일본(日本)'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음독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며, 나라 · 헤이안 시대의 문헌에 '日ほん'이라는 기술이 나오기는 하지만, 탁음도 반탁음도 없던 당시의 가나(仮名) 사용법을 가지고는 추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의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는 자신의 저서 『일본의 국호(日本の国号)』(깃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에서 '닛폰쇼키'로 주장하였지만,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현재는 '니혼쇼키'로 통용되고 있다. 덧붙여 《일본기》와 《일본서기》는 서로 다른 책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만요슈》에는 두 이름이 모두 병용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자료는 기사 내용의 전거가 된 사료와, 수사의 전거가 된 《삼국지》, 《한서》, 《후한서》, 《회남자》 등의 한문 서적이 주를 이루며, 다음의 사료들이 포함된다고 여겨진다. 등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스이코 천황 28년(620년)에 쇼토쿠 태자나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서 편찬되었다는 《천황기》, 《국기》 등의 오래된 사서가 존재했으나, 고교쿠 천황 4년(645년)의 을미의 변(다이카 개신) 때에 소실했다. 《일본서기》는 본문에 부기된 주석의 형태로 많은 '이전(異傳)', '이설(異說)'을 써두고 있는데, 드문드문 보이는 「일서에 이르기를(一書云)」, 「일본에 이르기를(一本云)」, 「별본에 이르기를(別本云)」, 「구본에 이르기를(舊本云)」, 「혹본에 이르기를(或本云)」 등의 기술은 그러한 이전, 이설을 적은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책이 《일본서기》 편찬에 이용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인용된 서적 대부분은 일부분의 경우만 책 제목을 밝히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당시 《일본서기》 편찬은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천황가(天皇家)나 씨족(氏族)의 역사상에서의 위치 설정을 하기 위한 것이어서 지극히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다. 편집 방침의 결정이나 원사료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우위자가 주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서기》의 문체 · 용어 등 문장상의 다양한 특징을 분류한 연구 ·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30권 가운데 각권1 · 권2의 신대기(神代紀)와 권28 · 29 · 30의 덴무 · 지토기(持統紀)의 실록적인 부분을 제외한 후의 25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각권3의 진무기(神武紀)에서 각권 13의 윤공(允恭) · 안코기(安康紀)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권14의 유랴쿠기에서 권21의 요메이(用明) · 스슌기(崇峻紀)까지이다. 남는 각권 22·23의 스이코 · 조메이기(舒明紀)는 전자, 권24의 고교쿠기에서 권27의 덴지기(天智紀)까지는 후자에 속하는데, 권13에서 14의 사이 즉 유랴쿠기를 전후한 부분에 고대사의 획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서기》는 순한문체로 여겨져 왔지만, 교토산업대학 교수 모리 히로미치(森博達)의 연구에서는 《일본서기》의 어휘나 어법에서 일본어적 발상에 근거한 오용이나 기용, 소위 '왜습(倭習)'이 많이 확인되며, 나아가 《일본서기》에 실린 만요가나의 음운의 차이 등의 연구를 토대로 α군(각권14~21, 각권 24~27)과 β군(각권13, 각권22~23, 각권28~29)로 분류하였는데, 왜습이 없는 정식 한문이 가득한 α군을 중국인(당에서 도래하여 일본에서 다이가쿠의 음박사가 된 속수언續守言과 살홍각薩弘恪)이, 왜습으로 가득한 한문이 쓰인 β군을 일본인(특히 신라에 유학했던 유학승 야마다노후비토 고우보山田史御方)이 쓴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α군에도 일부 '왜습'이 보이긴 하지만 이것은 원자료에서 직접 문장을 인용했거나 혹은 나중에 일본인에 의한 추가 · 수정이 이루어진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각권24, 각권25는 α군으로 분류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을미의 변 · 다이카 개신에 관한 부분에서 '왜습'이 빈번히 출몰하고 있는데, 소가씨를 역신으로서 주멸한 쿠데타였던 '을미의 변'에 관한 기록이 겐메이 천황(덴지 천황의 아들)이나 후지와라노 후히토(후지와라노 가마타리의 아들)의 의향으로 대폭 가필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백제로부터의 불교 전래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긴메이 13년(552년) 10월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석가불상과 경론을 바쳤다고 했으나,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이나 《겐코지연기(元興寺緣起)》는 긴메이 천황 무오년 10월 12일(다만 긴메이 천황의 치세에는 무오년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긴메이 천황이 아닌 센카 천황 3년, 서기 53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에 불교가 백제로부터 전해졌다는 설을 전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이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이같이 《일본서기》에는 개변된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되고 있다. 조정 지배의 정당성을 역사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했던 당시의 경향을 담고 있어, 달력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까지 편년체를 통해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윤색된 부분이 많다. 따라서 연대가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료로서의 신뢰성이 적다. 예를 들어 진구 황후가 가야를 정복했다거나 백제가 일본한테 신칭했다는 기록 등 한반도 삼국과의 관계를 지극히 왜곡해 기술했으며, 진구황후와 히미코를 동일화하기 위해 기술 연도를 2갑자 뒤로 돌린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이 있다. 백제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 《백제기》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사서가 그대로 보존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본서기의 연대표기에 관하여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설이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이 일본의 역사년대를 끌어 올리기 위하여, 역사 기록을 120년(2갑자) 앞당겼다는 가설이다. 일본서기는 칠지도와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기 30권과 계도 1권이 있지만 계도 1권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메르쿠리우스 메르쿠리우스( , )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과 이익 추구, 교역의 신이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의 메르크스(merx; 상품) 또는 메르카토르(mercator; 장사꾼)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에트루리아 신화의 투름스(Turms)와 매우 유사하다. 영어 이름 머큐리라도 부른다. 로마의 아벤티누스와 팔라티누스 두 언덕의 사이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경기장에 위치한 메르쿠리우스의 신전은 기원전 495년 지어졌다. 경기장인 동시에 상업의 중심지였으니 상업의 신을 숭배하는 신전의 자리로 알맞은 곳이었다. 평민들의 거점인 아벤티누스 언덕과 귀족들의 중심지인 팔라티누스 언덕 사이에 있는 것은 메르쿠리우스가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신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매년 5월 15일에는 메르쿠리우스를 기리는 축제인 메르쿠랄리아(Mercuralia)가 열렸다. 상인들은 로마 근교의 포르타 카페나(Porta Capena) 근처에 있는 메르쿠리우스의 신성한 우물의 물을 머리에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메르쿠리우스는 로마 제국이 정복한 여러 민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켈트 인들은 메르쿠리우스를 그들의 주신 루구스(Lugus)와 동일시하였고 게르만 인들은 오딘과 동일시하였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메르쿠리우스의 다른 이름은 "날개 달린 발을 가진"이란 뜻의 알리페스 (Alipes)이다. 유럽의 많은 언어에서 그의 이름은 수성의 이름에 쓰이고 있다. 주피터 주피터(Jupiter)는 다음과 같다: 조영관 조영관(造營官) 또는 안찰관(按察官 )은 고대 로마의 관직이다. 조영관은 원래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는 케레스 신전의 관리인들이었는데, 케레스 신전은 장터이자 무역 전초지였을 뿐 아니라, 초기에 평민들의 정치 유세 중심지였다. 이들의 기능은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평민들의 기금과 문서보관소의 관리인들이었고, 리비우스(책 3:55)에 따르면 기원전 449년부터는 원로원의 결의들을 관리했다. 훗날에는 경찰로서 활동했고, 시장터, 계량, 공공 사업, 음식과 물 공급, 공공 오락을 관장했다. 키케로의 저서에 따르면: "De legibus" 3.3.7 suntoque aediles curatores urbis, amronae, ludorumque sollemnium, ollisque ad honoris amplioris gradum is primus ascensus esto.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기원전 497년 - 기원전 406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 시인이다. 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으로 꼽힌다.😍 소포클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그의 전기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497년 아테네의 행정 구역 콜로노스에서 부유한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다. 16살 되던 해에 살라미스 해전을 기리는 연회에서 선창 소년으로 뽑혀 노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468년 29세에 디오니소스제의 비극 경연에서 선배인 아이스킬로스를 물리쳐 명성을 떨쳤다. 펠로포네스전쟁을 전후로 하여 소포클레스는 정치 생활에 들어가 요직을 여러 번 지냈다. 페리클레스의 정치 노선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43년 델로스 동맹의 10명으로 구성된 통솔자에 선출되었으며, 펠로포네스전쟁 초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군 제독으로 활약한 바도 있어, 그의 뛰어난 재질과 미모로써 아테네의 우상이 되고 시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사망 후에는 아테네 시민은 그에게 덱시온이라는 영웅 칭호를 주었다. 그는 특히 비극예술의 완성자로서 유명하다. 비극 경연에서의 1등 우승은 24회나 되었다고 한다. 극·송가·비가·잠언 등 123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 뿐이다. 그 밖에 다수의 단편(斷片)이 있다. 그는 극에 있어서 3부극을 폐지하고 합창 대원을 늘리는 등 극의 단순성을 극복하였으며, 치밀한 구성, 완벽한 기교 등으로 비극을 완성시켰다. 그가 연극에서 추구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무한무궁의 확대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에 깃들인 무한한 깊이였다. 그는 세 배우를 등용시켜 동시에 대화를 갖게 함으로써 극을 진행시키는 기법을 비롯해서 소도구의 연구나 배경화 등을 채용했다고도 전한다. 당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극장 개축(改築)이나 관람요금의 지급 등 문화진흥정책으로 아테네의 연극 활동은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의 특색은 장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고 치밀한 대화를 통하여 모든 인물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단순한 입장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설사 입장을 같이하는 몇 사람의 인간 사이에도 개개의 인간 안에는 제거할 수도 없고 서로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중핵적인 힘이 깃들어 있음을 객관적인 대화의 기법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드라마는(해야 할 행위에의 결의로 시작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한 영웅적 책임감으로 결정(結晶)되는 과정을 드라마라고 부른다면) 그 중핵적인 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나타냈던 것이다.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왕>과 같은 극작이 운명극이나 성격극으로도 해석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일단은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혔던 인간이 자기의 의욕적인 성격을 일관시킴으로써 암흑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광명을 획득하는 것도 드라마의 근원을 성격 안에서 발견하고 대화의 묘로써 사건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원전 번역본 아이아스 아이아스 또는 아약스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아이아스(Αἴα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두 명의 아이아스가 나온다. 로마 신화의 아약스(Ajax)에 해당한다. 큰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의 용사이며 오디세우스와의 투표에서 지자 그 날 밤에 미치광이가 되어 소를 죽이게되고 날이 밝은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자살한다. 엘렉트라 (동음이의) 엘렉트라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무기화학 무기화학(無機化學, )은 화학에서 유기화학의 여집합의 개념으로 출발한 학문이다. 유기화학이 주로 탄소-수소 결합이 포함되어 있는 화합물의 화학을 다룬다고 한다면 무기화학은 전이 금속, 희토류 금속과 이의 유기 화합물과의 반응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 학문이다. 이 분야는 유기 화학 물질을 포함하는 무수한 유기 화합물(대개 C-H결합 화합물)을 제외한 모든 화학 화합물을 포괄한다. 유기화학의 하위 학문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두 학문사이의 절대적인 구별은 되지 않는다. 촉매, 재료 과학, 색소, 계면활성제, 코팅, 의약품, 연료 및 농업을 포함하는 화학 산업의 모든 측면에서 응용된다. 대부분의 무기 화합물은 양이온과 음이온이 이온 결합에 의해 결합하고 있는 염의 형태로 발견된다. 양이온의 예로는 Na나 Mg 등이 있고, 음이온의 예로는 Cl나 O 등이 있다. 염은 전기적으로 중성을 띠기 때문에 이러한 이온들은 NaO나 MgCl와 같은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온들은 산화수를 가지며, 이온들이 화합물을 형성할 것인가는 양이온의 경우 이온 퍼텐셜, 음이온의 경우 전자 친화도로 추론할 수 있다. 무기 화합물은 크게 산화물, 탄산염, 황산염, 할로겐 화합물로 분류될 수 있다. 대다수의 무기 화합물은 높은 녹는점을 가지며, 대부분 고체 상태에서 전기적 부도체이다. 물에 대한 용해도와 결정화도 또한 무기 화합물의 중요한 특징이다. 어떠한 무기 화합물(예를 들어 NaCl)은 물에 매우 잘 용해되는 반면에, 다른 무기 화합물(예를 들어 SiO)은 그렇지 않다. 가장 간단한 무기 반응은 복분해로, 이는 두 염을 혼합할 때 이온들이 산화수 변화 없이 치환되는 반응이다. 또다른 반응인 산화·환원 반응에서는 산화제의 산화수가 감소하고, 환원제의 산화수는 증가한다. 이러한 산화수 변화의 본질은 전자의 이동이며, 이는 전지의 반응에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자의 이동은 전자 화학에서 자세히 다룬다. 반응물에 수소 이온이 있을 경우 반응은 산-염기 반응 이론에 의해 양성자를 주고 받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일반적 정의에 의하면, 전자쌍을 받으려는 경향을 가진 물질을 루이스 산이라고 하고, 반대로 전자쌍을 주려는 경향을 가진 물질을 루이스 염기라고 한다. 발전된 산-염기 반응 이론인 HSAB 이론은 이온의 극성과 크기까지 고려한다. 자연에서 무기 화합물은 광물의 형태로 발견된다. 흙에는 황철광의 형태로 황화 철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고, 석고의 형태로 황산 칼슘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무기 화합물은 또한 생체 내에서도 발견되는데, 전해질로 사용되는 염화 나트륨이나 에너지 저장에 사용되는 ATP, DNA의 골격을 이루는 폴리인산 등이 그 예이다. 인공적으로 합성된 최초의 중요한 무기 화합물은 비료로 이용하기 위해 하버법을 통해 합성된 질산 암모늄이다. 무기 화합물은 촉매로 사용되기 위해 합성되기도 하는데, 산화 바나듐이나 염화 티타늄(Ⅲ) 등이 그 예이다. 유기 반응의 반응물로 사용할 목적으로 수소화 알루미늄 리튬을 합성하기도 한다. 무기화학의 하위 학문으로는 유기금속화학, 클러스터화학, 생물무기화학 등이 있다. 이러한 분야는 초전도체나 새로운 촉매, 의약품 개발을 목표로 하여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무기화학은 화학에서 굉장히 실용성이 높은 분야이다. 전통적으로, 한 나라의 경제 수준이 황산의 생산량으로 가늠되기도 한다. 캐나다, 중국, 유럽, 일본, 미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20개의 무기 화합물은 황산 알루미늄, 암모니아, 질산 암모늄, 황산 암모늄, 카본 블랙, 염소, 염산, 수소, 과산화 수소, 질산, 질소, 산소, 인산, 탄산 나트륨, 염소산 나트륨, 수산화 나트륨, 규산 나트륨, 황산 나트륨, 황산, 이산화 티타늄이다.(2005년 기준) 연금술의 성과가 서적으로서 중세 유럽에 전해져, 그 박물학적 지식의 집합이 근대 화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무기 화합물에 관한 지식이었고, 화학 자체가 그 연구 대상에 의해 분류하고 구별할 만큼 넓은 영역을 다루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이전의 화학은 무기화학과 같은 의미였다.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발견된 유기 화합물의 종류가 증가함에 따라, 기원에 의한 물질의 분류와 연구대상에 의한 연구 영역의 구분이 시도되게 되었다. 1806년 경 스웨덴의 옌스 베르셀리우스는 유기체를 의미하는 "organ"에서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이나 유기 화합물(organic compound)이라고 하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학술 용어나 학문 영역으로서 정착함에 따라, 유기화학 및 유기 화합물에 대응하는 학문 영역으로서 무기화학과 무기 화합물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근대 무기화학은 주기율을 시작으로 하는 조성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가 되었다. 무기화학의 경우 그 구조론의 기원이 되는 것은 1883년에 독일의 알프레드 베르너가 제창한 배위자 이론(배위설)이다. 그 후 무기화학은 금속 착화합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착화합물에 대한 연구에 이어서는 무기구조화학이 확립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전자현미경이나 X선 구조분석 등 서브 마이크로 사이즈의 물리 계측이 가능해지면서 구조론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오늘날의 무기화학에 있어서는 고온 초전도 물질의 페로브스카이트상과 같은 구조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주류가 되고 있다. 집적 회로 집적 회로(集積回路, ) 또는 모놀리식 집적회로, 칩, 마이크로칩, IC는 반도체에 만든 전자회로의 집합을 말한다. 집적회로는 여러 독립된 요소를 집적해서 하나의 칩으로 만든 것인데, 각각의 트랜지스터 칩을 이용해서 회로로 만들 때 보다 훨씬 작게 만들 수 있다. 집적회로는 손톱수준의 크기에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나 다른 전자부품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조밀하게 만들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회로선폭은 점점 더 세밀해진다. 2008년에는 100나노미터 미만으로 떨어졌고, 지금은 수십 나노미터이다. 반도체 소자가 진공관처럼 증폭기 및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 지고, 반도체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매우 많은 수의 작은 트랜지스터를 작은 칩에 합치는 것은 전자 부품을 이용하여 손으로 회로를 조립하는 것을 넘어서는 굉장한 발전이었다. 집적회로의 대량생산 능력, 신뢰성, 회로 설계에 대한 빌딩블록 방식 접근은 이산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던 산업이 빠르게 집적회로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집적회로는 이산회로에 비교해서, 비용과 성능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장점이 있다. 한 번에 하나의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는 방식과는 달리 사진석판술을 이용하여 모든 부품을 한꺼번에 찍어내기 때문에 비용이 낮아 진다. 또한, 크기가 작고 부품들이 조밀하게 설계되어, 동작 속도가 빨라지고, 전력 소모는 줄어들게 된다. 2012년, 전형적인 집적회로의 크기는 수 제곱 밀리미터에서 약 450제곱 밀리미터였고, 제곱 밀리미터당 약 9백만 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었다. 집적회로는 전자공학에 혁명을 일으켰고 오늘날 거의 모든 전자장비에 사용된다. 현대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컴퓨터, 휴대폰 그리고 다른 모든 가전기기들은 싼 가격의 집적회로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다. 집적회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모든 또는 일부의 회로 소자들이 상업용 따위의 목적으로 불가분하게 배선돼있는 것. 이 정의를 만족하는 회로들은 박막 트랜지스터, 박막기술, 하이브리드 집적회로 등이 있다. 초기 집적회로의 개발은 독일의 공학자인 베르나 야콥이 집적회로와 비슷한 반도체 증폭 기기에 대한 또한, 갈릴레이는 동시대의 천문학자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을 지지해 줌으로써,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대한 비판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케플러를 무례하게 무시했고, 케플러의 업적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독일의 저널리스트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흔히 교회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것도 잘못된 것이며, 그런 이미지는 오히려 케플러에게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갈릴레오는 케플러와 달리 과학의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교와 대립을 피하려고 애썼다. 구트베를레트는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결정적인 이유는 신학에 대한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과학적문서들을 설명한 갈릴레오의 초기 작품들은 공기와 수중에서 물질들의 무게를 측정하기 위한 정확한 균형을 설명한 《작은 천칭》()이라는 1586년의 소책자와 1606년에 발행된 기하학 및 군사 영역에서의 수행을 다룬 《기하학적 및 군사적 컴퍼스의 작동》()이라는 입문서가 있다. 그의 동역학부분에서의 초기 작품은 1590년에 《운동에 관하여》(, )와 약 1600년 경의 《역학》(, )이 있다. 1590년의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르키메데스의 유체역학에 근거했으며, 유동매질에서의 중력에 의한 낙하의 속도는 매질 위에 있는 물체의 특정한 무게에 비례하며 진공상태에서도 물체의 특정질량에 비례하여 낙하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저서는 또한 진공상태에서 힘이 스스로 분산될 수 있으며 자유낙하할 수 있다는 히파르쿠스-필로포누스 힘 역학은 초기 가속도 구간을 지나면 특정 질량에 따른 본질적인 종단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찬성하였다. 갈릴레오의 1610년의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망원경의 관찰을 기초로한 것으로 발표될 예정이었던 첫 번째 과학적 저서였다. 그리고 이 책은 갈릴레오의 '4대 위성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출판하면서 자기 관측 결과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해 케플러의 의견을 구하였다. 케플러는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를 통해 매우 열심히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 뒤 케플러가 갈릴레오에게 더 나아간 지지를 제공하기 위해 달에 대한 망원경 관측을 가지고 《목성의 위성에 대한 해설》을 출판했을 당시 갈릴레오는 왜인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케플러는 실망하였다. 갈릴레오는 1613년 태양과 천체는 변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해주는, 태양의 흑점에 대해 설명한 《흑점에 관한 편지들》()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것은 또한 천동설을 완전히 반박하고 17세기의 지동설에 대한 전환을 증진시킨 그의 금성 전체 형상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사실이 쓰여있다. 1615년 갈릴레오는 1636년까지 발표되지 않은 형식의 《크리스티나 공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원고를 준비하였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물리적인 사실이며 성서와 일치한다고 옹호함으로써 신학에 대한 침범이라 하여 비난받았고, 조사를 받고 있던 《》의 개정판이었다. 1616년에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에 의해 갈릴레오가 더이상 코페르니쿠스의 지위를 옹호하거나 고수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진 후에,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적 지구에 입각한 조석현상에 대한 논문인 《()》을 썼다. 1619년 혜성의 해석을 두고 예수회와 논쟁하면서, 갈릴레오의 제자 마리오 귀두치(Mario Guiducci)는 《혜성에 관한 논설》()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는데, 이것은 갈릴레오의 강의를 정리한 것이었다. 1623년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바탕을 둔 이론들을 공격하면서 실험방법과 과학적 사고들의 수학적 체계를 발전시킨 《분석자》(, )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심지어 가톨릭교회의 계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이 책의 성공에 이어 갈릴레오는 1632년에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616년에 발간된 논문에 대한 조사가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우호적이었고, 태양계의 비(非)지구중심적 모델로 말미암아 갈릴레오는 재판을 받았고, 책의 출판이 금지되었다. 출판 금지에도 불구하고 1638년 갈릴레오는 사법권의 범위 밖인 네덜란드에서 그의 논문과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수성 수성(水星, 라틴어: Mercurius)은 태양에서 평균 5,800만 km 떨어진 가장 가까운 궤도를 도는 행성이다. 또한, 반지름 약 2,400km, 둘레 439,264km로 가장 작은 내행성이기도 하다. 공전 주기는 88일, 자전 주기는 58일이며, 밀도는 5.427g/cm이다. 핵은 수성 전체 반지름 70 % 이상을 차지하고 철을 주성분으로 할 것으로 추정된다. 규산염으로 구성된 맨틀이 그 바깥을 차지한다. 표면은 달과 비슷하게 크레이터가 많으며, 행성이 식으면서 수축할 때 형성된 거대한 절벽이 존재한다. 나트륨, 칼륨 등으로 구성된 대기가 있지만, 세기는 지구 1조 분의 1로 매우 희박하다. 또한, 약한 자기장도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행성 중 태양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강력한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매년 조금씩 궤도가 움직인다. 태양이 생겨나고 남은 가스 구름 및 먼지로 이루어진, 원반 모양인 ‘태양 성운’에서 여러 행성이 생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현재 인정받는 행성 생성 이론은 강착(降着) 이론이다. 강착 이론으로 설명하면, 행성들은 중심부의 원시별 주위를 도는 먼지 알갱이들이 뭉치면서 생겨났다. 이 알갱이들은 직접 서로 충돌하면서 지름이 1~10킬로미터에 이르는 천체, 곧 미행성으로 자라났다. 이 미행성은 작은 천체를 빨아들이면서 수백만 년에 걸쳐 매년 15센티미터 정도씩 지름이 커졌다. 태양과 가까운 지역(4천문단위 이내)은 온도가 높아서 물이나 메테인과 같은 휘발성 분자들이 압축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생겨난 미행성들은 금속류(철, 니켈, 알루미늄) 및 규산염 암석 등과 같이 녹는점이 높은 물질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암석 천체는 종국적으로 수성과 함께 금성, 지구, 화성과 같은 지구형 행성이 되었다. 지구형 행성을 이루는 물질은 우주에서 매우 희귀한 존재이기 때문에(성운 질량 0.6퍼센트에 불과하다.), 지구형 행성은 크게 자라날 수가 없었다. 아기 암석 행성은 현 지구 질량 약 10퍼센트 수준까지 자랐고, 태양 생성 후 약 10만 년 동안 물질을 끌어모으는 것을 멈췄다. 이후 이들은 충돌하고 뭉쳐지는 과정을 다시 시작했는데, 이 충돌 과정은 약 1억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들 원시 행성은 서로 중력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각자의 공전 궤도를 끌어당기면서 서로 충돌했고, 지금의 크기로 자라나게 된다. 이 충돌 과정 중 수성을 강타한 충돌은 수성의 외포층을 날려 보냈다. 지금으로부터 40억 년 전(태양계가 생겨나고 5~6억 년 뒤) 후기 대충돌이 있었는데 수성 표면에 있는많은 충돌구(운석 구덩이, 크레이터)는 이 때 생겼다. 수성은 지구형 행성 중 하나로, 표면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성은 태양계 행성들 중 가장 반지름이 작은 행성으로, 구체적인 크기는 2439.7 km이다. 특히, 태양계 내 위성 중, 가니메데나 타이탄은 수성보다 반지름이 크다(그러나 수성은 이들보다는 더 무겁다). 수성은 질량의 70 %는 금속, 나머지 30 %는 규산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수성의 밀도는 지구의 5.515 g/cm³다음으로 큰 5.427 g/cm³이다. 그러나 지구는 자체 중력의 영향으로 내부 물질이 더 조밀하게 뭉쳐 있기 때문에, 압축되지 않은 조건에서 비교할 경우 수성의 밀도는 5.3 g/cm³으로 지구의 4.4 g/cm³보다 크다.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 수성이 태양계 행성들 중 가장 밀도가 큰 천체임을 알 수 있다. 수성의 밀도를 알아내서 내부 구조를 추측할 수 있다. 지구의 밀도는 수치상으로는 크지만 사실 자체 중력으로 인해 내부가 압축된 상태임에 반해, 수성은부피가 지구보다 훨씬 더 작고 내부 또한 그리 압축되어 있지 않다. 이 같은 수성의 큰 밀도는 내부 핵 크기가 크고, 핵에 포함된 철 함량이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질학자들은 수성의 핵 부피가 전체 대비 42 %(지구는 17 %)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특히, 최근 연구로 수성의 핵이 용융 상태라는 것이 밝혀졌다. 중심핵 바깥쪽에는 두께가 600km인 맨틀이 존재하는데, 과학자들은 수성이 생성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 백 km 에 이르는 천체가 수성을 강타하여, 원래 존재했던 맨틀 상당량을 날려보내고 지금의 얇은 맨틀층만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만약 미지의 천체가 수성을 강타한 게 사실이라면, 강타 전 수성의 맨틀 두께는 훨씬 두꺼웠을 것이다. 매리너 10호 자료와 지구상에서 관측하여 수성의 지각 두께는 약 100 – 300 km 인 것이 밝혀졌다. 수성 표면에는 수많은 좁은 계곡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수 백 km 길이로 펼쳐져 있다. 이들은 지각이 식었을 때 수성의 핵과 맨틀이 수축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수성 핵에는 다른 태양계 행성보다 많은 철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 여러 종류가 제시되었다.그 중 널리 인정되는 이론 3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론은, 원래 수성 질량은 지금보다 2.25 배 컸으며, 다른 암석 물질과 함께 콘드라이트 운석과 비슷한 규산염 및 철질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태양계 형성 초기 시절, 질량의 6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미행성과 충돌하여 원시 수성의 지각과 맨틀 상당량이 우주로 날아갔고 상대적으로 무거운 물질만 남아서 지금같은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두 번째 이론은, 원시 태양이 내뿜었던 열기로 인해 수성 표면이 증발했다는 이론이다. 수성은 태양의 복사 에너지 방출량이 안정되기 전 태양 성운에서 형성되었고, 현재 질량 두 배 정도 크기였지만, 원시 태양이 수축하면서 수성 근처 온도는 2,500 - 3,500 K 까지 상승하여(심지어 10,000 K 이상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 높은 온도 때문에 수성 표면의 대부분이 '암석 증기' 형태로 변해, 항성풍에 실려 날아갔다는 이론이다. 세 번째 이론은, 태양 성운에서 수성이 생겨나면서 강착 단계에 접어들면서 가벼운 입자들을 끌어당겼다는 이론이다. 위 세 이론은 현재 수성 표면 조성을 각자 다른 상태로 가정하고 있지만, 앞으로 수성 관측을 담당하게 될 메신저와 베피콜롬보 미션은 세 이론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검증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수성 표면은 달에 있는 바다와 유사한 평원과, 수십억 년 동안 활동하지 않는 큰 충돌구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수성 지질에 관한 정보는 매리너 10호와 지상에서 관측하여 알려진 것이다. 특히, 최근 메신저의 탐사로 정보량이 더 증가했다. 한 예로, 그릇 형태로 된 퍼진 충돌구가 발견되었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거미(the spider)" 라고 부른다. 수성 표면은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지역마다 알베도가 다르다. 특히, 수성은 링클 리지외에도, 고원, 산, 평원, 절벽, 계곡 등 여러 지형이 존재한다. 46억년 전부터 38억 년 전까지, 수성 표면에 혜성과 소행성이 충돌하는 기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을 후기 대폭격기라고 한다. 이 기간동안에는 수성은 전체적으로 폭격을 받아 충돌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는 지구와 달리 수성은 대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충돌체의 속도가 감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시기에는 화산 활동도 활발했다. (칼로리스 분지는 마그마로 가득 차 있었다) 2008년 10월, 메신저에서 전송된 수성 표면에 관한 자료는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자료로 수성 표면은 화성이나 달 표면보다 더 이질적라는 것이 밝혀졌다. 수성의 충돌구는 작은 그릇 형태 구멍부터 수 천 km 에 달하는 충돌 분지까지 매우 다양하다. 또한, 생성되지 얼마되지 않은 충돌구에서부터 이미 크게 풍화된 충돌구에 이르기까지 각 상태도 다양하다. 수성과 달의 충돌구는 서로 미묘하게 다른데, 달 충돌구는 수성보다 분출물이 적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수성 표면 중력은 달보다 강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성 표면에서 가장 큰 충돌구는 직경 1,550 km 되는 칼로리스 분지이다. 칼로리스 분지에 가해진 충격은 매우 강해서 용암이 분출하고, 높이 2km인 동심원 형태 고리가 충돌구를 둘러싼 형태로 퍼져나갔다. 또, 분지 반대편에는 "기묘한 지역(Weird Terrain)"이라 불리는 언덕 형태의 독특한 지형이 있다. 이 지형에 대한 2 가지 가설이 있다. 분지에서 일어난 충돌로 인한 충격파가 "기묘한 지역" 부근을 쓸고 지나간 결과, 표면에 강한 힘이 가해져 생성되었다는 설과 충돌로 인한 분출물이 그 곳으로만 집중되어 생성됐다는 설이 있다. 수성의 부분 사진에서 충돌 분지 15개 확인되었다. 주목할 만한 분지는 폭 400 km 의 톨스토이 분지이다. 베토벤 분지는 분출물 덮개와 비슷한 크기이며, 폭은 625 km 이다. 특히, 수성의 표면은 태양풍과 미세 유성우로 인한 우주 풍화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다.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성에는 평원 2개가 존재한다. 충돌구 중간중간에 있는 완만한 경사, 구릉 형태로 된 평원은 수성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지형이다. 이런 평원은 먼저 있었던 충돌구가 사라졌을 때 형성된다. 이는 직경 30 km 이하인 충돌구는 소수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화산 활동으로 평원이 형성됐는지 혹은 충돌로 평원이 형성됐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평원은 행성 전체에 걸쳐서 균일하게 분포한다는 점이다. "매끄러운 평지(smooth plain)"는 다양한 크기의 함몰지가 존재하며, 달의 바다와 많은 유사성을 띠는 곳 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칼로리스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고리이다. 달의 바다와 달리, 수성의 "매끄러운 평지" 는 모두 알베도가 같다. 이 점은 화산 활동 흔적은 많지 않아도 화산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수성의 "매끄러운 평지"는 칼로리스 분지가 형성된 후에 형성됐다. 이 사실은 칼로리스 분출물 덮개의 밀도보다 낮은 충돌구가 증거가 된다. 평지에 덮인 칼로리스 분지의 층(層)은, 지질학적으로 보았을 때 산맥 형태와 다각형 형태로 균열이 갔다. 그러나 이 역시 충돌로 용암이 분출한 것인지, 충돌로 녹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행성 표면의 독특한 지형 가운데 하나는 수 많은 압축된 층 또는 절벽이다. 행성 내부가 냉각되고, 표면은 수축하면서, 이런 지형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층은 다른 지형 최상부에서도 볼 수 있다. 수성의 표면은 강한 조석 융기로 인하여 구부러졌다. 수성 평균 온도는 442.5 K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온은 100 K - 700 K 로 극단적이다. 이는 대기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적도와 극의 온도 차가 크기 때문이다. 수성의 태양 직하점의 온도는 원일점에 있을 때는 550 K 이며, 근일점에 있을 때는 700 K 까지 상승한다. 반면, 밤인 쪽 평균 온도는 110 K 이다. 수성 표면에서 태양빛의 세기는 태양 상수가 지구의 태양 상수보다 4.59 - 10.61배 크기 때문에 매우 강하다. 이렇게 표면 온도가 높지만 수성을 관측하면 얼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극의 깊숙한 곳에 있는 분화구는 직접적으로 태양빛을 받지 않아, 온도가 102 K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얼음은 레이다를 잘 반사시키는 특징이 있다. 1990년대 초반, 과학자들은 골드스톤 복합 단지의 70 m 망원경과 VLA을 이용하여 극 근처를 관측하다가 높은 알베도를 갖는 곳을 발견했다. 얼음은 알베도가 높은 지역에서 존재하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천문학자들은 위의 사실을 대부분 그럴듯하다고 수긍한다. 얼음으로 덮인 지역은 10–10 kg 상당의 얼음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표토층으로 덮여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비교해보면, 지구의 남극에는 4 × 10 kg, 화성 남극관에는 10 kg 상당의 얼음이 존재한다. 얼음의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두 가지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행성 내부의 물이 기화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혜성과 충돌하여 얼음이 퇴적되었다는 설이다. 수성은 대기를 오랜 시간동안 잡아 두기에는 자체 중력이 너무 작다. 수성의 외기권은 수소, 헬륨, 산소, 나트륨, 칼슘, 칼륨과 여러 미량 원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 수성의 외기권은 불안정하며 끊임없이 소멸하고 다시 생성된다. 수소와 헬륨 원자는 태양풍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다시 우주로 탈출하기 전에 수성의 자기장으로 흩어진다. 메신저는 많은 비율의 칼슘, 헬륨, 하이드록시기, 마그네슘, 산소, 칼륨, 실리콘, 나트륨을 발견했다. 지금 존재하는 수증기는 혜성과 충돌한을것 비롯한 여러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성된 것이다. 특히, 많은 양의 물과 관련된 이온(O, OH, HO이 발견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이온은 수성의 우주 환경에서는 태양풍에 의해 날아간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1980 - 1990년대, 나트륨, 칼륨과 칼슘이 수성 대기 속에서 발견됐다. 이 발견으로 여러 원소는 미소 유성우와 수성 표면의 암석이 충돌하여 증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굳어졌다. 2008년, 메신저가 마그네슘을 발견했다. 다른 연구에서는 나트륨 방출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행성의 자기극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자기권과 행성 표면 사이의 상호 작용이 있음을 내비친다. 작은 크기와 59일에 이르는 느린 자전 속도에도 불구하고, 수성은 강한 영향을 주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다. 매리너 10호의 수성 자기장 크기 측정 결과 지구의 1.1 %임이 밝혀졌다. 수성 적도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300T이다. 수성은 지구처럼 쌍극자 자기권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지구와는 다르게 수성의 양극은 수성의 회전축과 나란하다. 매리너 10호와 메신저가 측정한 결과 자기장의 형태와 세기가 일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자기장은 다이너모 효과를 통해 발생하는데, 어느 정도는 지구 자기장의 원인과 비슷하다. 이 다이너모 효과로 행성의 핵은 회전하게 된다. 특히, 수성의 큰 이심율로 인한 강한 기조력은 다이너모 효과를 일으키는데 필요한 핵을 액체 상태로 유지시킨다. 수성의 자기장이 매우 희박하다지만 행성 주위의 태양풍을 막고, 태양풍 플라스마를 가둘만큼 약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행성 표면의 우주 풍화 현상에 원인이 된다. 한편, 매리너 10호는 밤인 쪽의 자기장에서 낮은 에너지의 플라스마를 감지했다. 또 자기장의 꼬리(magnetotail)에서 폭발하는 고 에너지 입자도 발견됐다. 2008년 10월 6일, 메신저가 두 번째로 스윙 바이를 하는 동안 "구멍난" 자기장을 발견했다. 또 자성(磁性) "토네이도" 도 발견했는데 이 "토네이도" 는 폭이 80 km로 행성 반지름 1/3을 차지한다. 이 "토네이도" 형태는 자기장이 태양풍을 매개로 수성 자기장과 접촉했을 때 형성된다. 태양풍이 불어 수성 표면에 걸쳐 작용하면, 난입해 온 자기장은 태양풍과 함께 소용돌이 형태로 빨아올려진다. 이를 빛다발 현상이라 부른다. 이는 수성 표면을 직접적으로 강타하는 태양풍을 통해 자기 차폐 현상을 일으켜 "열린 창(window)"의 형태를 만든다. 행성과 행성 사이 자기장의 연결 과정을 자기 재결합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전 우주에서 흔한 현상이다. 자성 회오리가 생기는 지구의 자기장에서도 자기 재결합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재결합률은 메신저 관측 결과수성에서 보다 10배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수성에서의재결합율하는 비는 지구의 1/3에 불과하는데, 이는 태양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수성의 궤도 이심율은 0.21로 모든 행성들 중에서 가장 크다. 그 궤도는 태양에서 4,600만 km 에서 7,000만 km 까지 펼쳐져 있다. 이 궤도를 수성이 공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8일이다. 오른쪽 그림은 같은 긴반지름일 때 수성의 현 궤도와 원 궤도 일 때를 그린 그림이다. 5 일 간격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공전속도는 근일점 근처에서 훨씬 빠르다. 또한, 천구의 크기는 태양을 중심으로 변화한다. 수성은 3:2의 비율로 궤도 공명이 이루어지는데, 이 때문에 표면 온도의 복잡한 변화가 생긴다. 이 공명 현상으로 수성에서의 하루는 2 수성년(176 지구일)이다. 우측 그림과 같이 수성 궤도는 지구 궤도에 대해서 7 °만큼 기울어져있다. 이 때문에, 수성 일면통과 현상은 황도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놓이고 수성이 지나갈 때 일어난다. 수성의 자전축 기울기는 0.027 °로 거의 0 °에 가깝다. 이는 두 번째로 작은 목성(3.1 °)보다 훨씬 작은 수치이며, 수성 극점에 관측자가 있을 때, 태양이 지평선 위로 2.1 각분 이상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성 표면에서 특정한 곳은 1 수성일 동안 관측자가 태양이 중간 정도 떠올라, 백야와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는 근일점에 이르기 약 4일 전에는 수성의 공전 속도와 각속도가 같아지기 때문에 태양의 겉보기 운동이 멈추기 때문인데, 이 때 태양은 역행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근일점에 이르고 4일 후에는, 정상적인 태양의 겉보기 운동이 다시 지속된다. 수성은 조석 고정 상태이기 때문에, 달 처럼 항상 태양과 같은 면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1965년, 레이다 관측으로 3번 자전하는동안 2번 공전하는 3:2 궤도 공명 효과를 받는 것이 증명되었다. 천문학자들이 처음에는 그 이유를 동시에 고정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수성이 관측하기 최적의 자리에 있을 때마다, 항상 궤도 공명이 이루어지는 곳 근처에 위치하여, 같은 면만 바라보는 것을 보고, 우연히, 수성의 자전 주기가 지구에 대한 회합 주기의 정확히 절반임을 알았다. 궤도 공명 현상으로 인해, 수성의 태양일은 176 일, 항성일은 58.7 일이다. 수성 궤도 변화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궤도 이심율을 0.45 이상으로 놓고 수 백만년 후까지 무작위로 시뮬레이트 한 결과 다른 행성과 섭동 인있었기한때문으로 졌다. 이런 상태는 이심율이 클 경우에 더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수성의 궤도 공명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방책이다. 또, 수치적으로 시뮬레이트한 결과, 수성 궤도 이심율이 증가하면 목성과의 궤도 공명으로 수성이 금성과 앞으로 50억 년 안에 충돌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수성의 궤도는 100년 당 대략 5600 각초만큼 근일점이 이동한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이는 100년에 5567 각초여야 하는데, 20세기 초 일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 33 각초의 차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1859년 프랑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위르뱅 르베리에는 수성 궤도의 근일점 이동이 수성과 태양 사이 다른 행성의 중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가상의 천체를 불칸이라고 명명했다. 르베리에는 천왕성 궤도의 섭동을 기초로 해왕성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예측하였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그 주장을 따라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상대성 이론이 등장할 때까지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수성의 경도는 서쪽으로 갈 수록 커진다. 특히, 훈 칼 충돌구는 경도를 측정할 때의 기준점이다. 훈 칼 충돌구의 중앙 부분은 서경 20°이다. 수성의 겉보기 등급은 -2.3 - 5.7 등급 사이로 변한다. 이런 극단적인 변화는 천구 상에서 태양과 가까이 있을 때 일어난다. 수성은 태양과 가까이 있어, 상대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관측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아침이나 여명 무렵에 짧은 시간동안만 관측할 수 있다. 한편, 허블 우주 망원경으로는 수성을 관측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안전 상의 이유로 태양과 가까운 곳을 촬영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달 처럼, 수성, 역시 위상이 있는데, 내합일 때는 "없고" 외합일 때는 "꽉 차" 있다. 하지만 달과는 다르게 이 때는 지구에서 볼 수 없는데, 이는 태양과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상현과 하현 때의 위상은 각각 동방, 서방 최대 이각에 이르렀을 때(17.9° - 27.8°) 일어난다. 수성은 서방 최대 이각에서는 일출 직전에 잠시 볼 수 있고, 동방 최대 이각에서는 일몰 직후 잠시 볼 수 있다. 수성은 지구 북반구보다는 남반구에서 더 쉽게 관측 할 수 있다. 이는 남반구의 초가을에는 항상 서방 최대 이각의 위치에 있고, 반대로, 늦겨울에는 항상 동방 최대 이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양 쪽 경우 모두, 황도와 수성이 이루는 각이 최대이기 때문에 남반구 아르헨티나나 뉴질랜드 같은 온대 지역에 있는 나라에서는 태양이 뜨기 직전과 태양이 진 직후에 수성을 볼 수 있다. 반대로, 북반구의 온대 지역의 어두운 밤 하늘에선 지평선 위로 조금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수성은 다른 행성이나 밝은 별과 마찬가지로 일식 때도 관측할 수 있다. 수성은 보름달과 상현달의 중간 단계에 있을 때 가장 밝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 모양일 때 수성은 초승달 모양일 때 보다 멀리 있지만, 밝은 면이 거리로 인한 밝기 감소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수성 관측에 대한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물.아핀 석판이다. 여기 기록된 자료들은 대부분 기원전 14세기, 아시리아의 천문학자들이 기록한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쐐기문자를 이용해 수성을 "Udu.Idim.Gu\u.Ud" 라고 기록했다. 기원전 1세기, 바빌로니아에서도 수성 관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성을 나부라고 불렀다. 기원전 7세기, 고대 그리스에서는 Στίλβων 또는 Ἑρμάων라고 불렀다. 후에, 헤시오도스의 영향으로 그리스에서는 아침 하늘의 수성은 아폴론, 저녁 하늘의 수성은 헤르메스라고 불렀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이 두 천체가 같은 천체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 로마에서는 다른 행성 보다 가장 빨리 천구를 가로지는 것을 보고 수성을 머큐리라고 불렀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저서 《Hypothesis in planmenn》에 행성의 일면통과 가능성을 기술했다. 또, 그는 당시 일면통과를 누구도 관측하지 못 했던 이유를 수성이 매우 작아서 볼 수 없거나 혹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진성(辰星)'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오행과 관련이 있다. 인도 신화에서는 수성을 수요일을 관장하는 부다와 동일시했다. 북유럽 신화의 오딘 역시 수성 및 수요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야 문명에서는 수성을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전령의 의미로 올빼미라고 불렀다. 고대 인도에서 기원전 5세기에 작성된 천문학 문서, 수르야 싯단타에는 수성의 반지름이 4,841 km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현재 측정된 반지름과 오차가 1 % 밖에 나지 않는 수치이다. 이 수치는 수성의 각지름(3.0 각분)을 이용하여 계산한 것이다. 이슬람의 천문학을 살펴보면 11세기,알 안달루스의 천문학자, 아르자헬은 수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며, 그 궤도는 타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는 못 했다. 12세기, 이븐 밧자는 두 행성이 태양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관측했다. 15세기, 인도의 케랄라 대학 천문학자, 닐라칸타 소마야지는 부분적인 지동설을 주장했다. 17세기 초, 갈릴레이가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해 수성을 관측했다. 하지만 그 당시 망원경이 좋지 않아서 자세히 관측할 수 없었다. 1631년, 피에르 가상디가 최초로 망원경을 이용해 수성의 일면통과 현상을 관측했다. 1639년, 조반니 주피는 수성의 상(phase)을 관측했다. 이런 관측들은 수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천문학에서 아주 드문 현상 중 하나는 엄폐 현상이다. 수성과 금성은 수 세기 마다 서로를 엄폐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이 관측한 경우는 1737년 5월 28일에 일어난 경우 뿐이다. 이는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존 베비스가 관측했다. 다음 수성과 금성의 엄폐 현상은 2133년 12월 3일에 일어날 것이다. 수성은 다른 행성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기 관측할 때 어려움이 많다. 1800년, 요한 슈뢰터는 높이가 20km인 산을 관측하고 그림을 그렸다. 프리드리히 베셀은 슈뢰터의 그림을 이용해 자전 주기와 자전축의 기울기를 계산하여 각각 24 시간, 70 ° 이라고 밝혔다. 이는 현재와는 매우 차이 나는 수치이다. 1880년대, 조반니 스키아파벨리는 수성을 좀 더 정밀하게 그리고, 자전 주기가 88 일 이유는 조석 고정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성 표면을 지도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 되었는데, 1934년, 유게니우스 안토니아디는 그의 관측 자료와 그림을 묶어서 책으로 내기도 했다. 수성을 비롯한 다른 행성의 지형의 이름은 그의 저서에서 따온 것이 많다. 1962년 6월, 소련, 무선전자과학연구소(Institute of Radio-engineering and Electronics)의 과학자들은 최초로 수성에 레이다를 쐈는데, 이것이 레이다 관측의 시작이었다. 3년 후, 고든 페텡길과 R. 다이스는 푸에르토리코 아레시보 천문대에서 직경 300 m 인 전파망원경을 이용하여 수성 자전 주기를 관측한 결과 59 일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 관측으로 수성이 동주기 자전한다는 학설은 제대로 확립되었지만, 천문학자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다. 천문학자들은 이전에는 수성이 조석 고정 상태라고 가정하고, 어두운 면은 극도로 추울 것이다라는 추측을 했지만. 전파 관측을 하고 보니 예측했던 것보다는 온도가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동주기 자전 이론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바람에 의해 열이 분산된다는 대체 이론을 제시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주세페 콜롬보는 수성 자전 주기가 공전 주기 2/3인 것 행성의 자전과 공전이 1:1 이 아니라 3:2 공명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이런 사실은 후에 매리너 10호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와 동일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스키아파벨리와 안토니아디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천문학자들은 순간순간마다 같은 지형을 보고 기록했다. 그러나 수성의 관측하던 면이 태양을 등질 때는 기록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수성을 관측해도 최초의 수성 탐사기가 탐사하기 전 까지는 자세히 관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지상의 관측 능력도 향상되었다. 2000년, 윌슨 산 천문대에서 1.5 m 의 헤일 망원경으로 고 해상도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수성 지형 부분부분을 제대로 보여주는 최초의 사진이었다. 후에 그 사진은 칼로리스 분지보다 거대한 이중 고리 형태인 충돌 분지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칼로리스 분지는 비공식적으로 스키나카스 분지라고도 불린다. 수성 표면 대부분은 아레시보의 레이다 망원경을 이용한 자료를 바탕으로, 5 km 의 해상도로 지도화 되어있다. 수성 탐사는 궤도가 태양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큰 도전을 요구한다. 수성 탐사선은 91,000,000 km 를 이동하여 태양의 중력권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구의 공전 속도는 30 km/s 임에 비해 수성은 48 km/s 이다. 따라서, 호만 전이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탐사선은 속도에 큰 변화를 주어야 한다. 태양의 퍼텐셜 우물이 떨어지면 퍼텐셜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변환된다. 이 때문에, 탐사선이 안전하게 착륙하거나 혹은 안정된 궤도로 진입하는 여부는 전적으로 로켓 모터에 달려있다. 에어로브레이킹은 수성 대기가 매우 엷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지만, 수성으로 이동할 때는 태양계를 완전히 벗어나기 위한 로켓 연료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성은 단 2 기의 탐사선만 방문했다. 이런 방법 외에 수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솔라 세일이 있다. 수성을 최초로 방문한 탐사선은 NASA의 매리너 10호이다. 매리너 10호는 금성의 중력을 이용하여 궤도 속도를 조정하여 수성에 근접한 탐사선이다. 또한 스윙바이를 이용한 최초의 탐사선이자 여러 행성을 방문한 최초의 탐사선이기도하다. 매리너 10호는 수성의 거대한 크레이터와 여러 종류의 지형까지 보이는 표면의 확대 사진을 최초로 찍은 탐사선이다. 불행하게도, 매리너 10호의 궤도 주기 때문에 수성의 밝은 면만 찍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수성의 뒷면을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여, 결과적으로, 표면의 45 % 이하만 지도화되었다. 1974년 3월 27일, 최초의 플라이바이 하기 이틀 전, 매리너 10호가 수성 근처에서 많은 양의 자외선 복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는 임시적으로 수성의 위성을 확인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자외선은 컵자리 31에서 방출되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수성의 위성은 역사책에서 각주로만 남게되었다. 매리너 10호는 수성에 3 번 접근했다. 그 중 가장 가까이 접근한 거리는 327 km 이다. 처음으로 접근했을 때, 매리너 10호는 자기장을 감지했다. 두 번째로 접근했을 때는 주로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접근했을 때는 대규모의 자기장을 감지했다. 그로 인해 수성 자기장은 지구와 비슷하며, 행성 주위의 태양풍을 빗겨나가게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수성 자기장의 정확한 기원은 아직까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1975년 3월 24일, 마지막으로 근접하고 8 일 후, 매리너 10호의 연료가 떨어졌다. 그 후로 더 이상 궤도를 선회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곧 모든 장비는 기능을 멈추었다. 매리너 10호는 아직까지 태양을 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NASA의 두 번째 수성 탐사 계획인 메신저는 2004년 8월 3일에 케이프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2005년 8월과 2006년 10월에 각각 지구와 금성을 이용해 플라이바이를 하여 2007년 6월, 수성에 도달 할 수 있는 궤도에 진입했다. 수성을 이용한 최초의 플라이바이는 2008년 1월 14일, 두 번째는 같은 해 10월 6일, 세 번째는 2009년 9월 29일에 이루어졌다. 메신저는 2011년 3월에 수성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메신저는 중요한 임무 6개를 맡고 있다. (수성의 밀도, 지질학, 자기장의 근원, 핵 구조, 극점의 얼음 유무, 대기의 근원) 이를 위해, 메신저는 고해상도 사진을 찍기 위한 촬영 장치, 분광기, 자기장 감지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2012년 3월까지 메신저는 약 10만장의 수성 표면 사진을 지구로 전송했고, 2013년 3월 6일자로 수성 표면의 100% 촬영을 완료하였다. 이후 메신저는 수성 표면에 지나치게 가까워질 때마다 연료 재분사를 반복하며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으며 2014년 10월 마지막 재분사까지 2차례의 임무 연장 끝에, 동부 표준시 2015년 4월 30일 오후 3시 26분에 수성 표면에 충돌하였다. 충돌 직전 속력은 14,081 km/h (8,750 mph) 였으며 충돌로 인하여 지름 약 16미터의 새로운 충돌구가 만들어졌다. NASA는 2015년 5월 1일 메신저의 수성 표면 충돌과 함께 11년간 했던 임무 종료를 발표하였다. 베피콜롬보는 ESA와 일본 JAXA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수성 탐사 계획이다. 2기의 탐사기가 수성 궤도를 선회할 것이다. 2018년 10월에 발사하여, 2025년 12월, 수성 궤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베피콜롬보는 자기장 탐사선과 행성 탐사선을 발사하여, 1년간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특히, 행성 탐사선은 메신저의 분광기와 비슷한 것을 탑재하여, 다양한 파장의 전자기파 영역에서 수성을 연구할 것이다. 태양계는 궁극적으로는 다가오는 수십억 년 동안 어떤 행성도 태양계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없고,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안전한 상태’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행성의 궤도가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혼돈 상태’이다. 태양계의 모든 천체는 제각기 다양한 리아프노프 시간(예측 가능한 행성의 궤도 시간, 2백만 년~2억 3천만 년)을 지닌다. 태양계 행성들의 궤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혼돈 상태에 가까워진다. 이는 어떤 행성의 궤도가 종국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리 정확한 예측 기구를 이용해도 추측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겨울과 여름이 오는 시기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부 천체는 궤도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올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혼돈은 이심률의 변화를 통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일부 행성의 궤도는 더욱 크게 찌그러지거나, 또는 원형에 가깝게 변할 수도 있다. 수성의 궤도 변화는 내행성의 궤도를 혼돈 상태에 빠지게하며, 태양계에서 튕겨 나가게하거나 태양, 또는 지구와 같은 이웃 행성들과 충돌하게 될 수있다. 수성과 금성이 충돌할 경우, 금성에 수성의 질량을 더한 새로운 행성이 태어날 것이다. 먼 미래 태양이 나이를 먹으면서 진화하면, 태양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태양이 가지고 있던 수소를 거의 다 태우면, 남아 있는 연료를 태우면서 내부 온도는 더 뜨거워지며, 연료를 태우는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그 결과 태양은 10억 년마다 11퍼센트씩 밝아진다. 지금으로부터 10억 년 후 태양의 복사량이 증가하면서 생물권은 지금보다 바깥쪽으로 물러날 것이다. 약 64억 년 후, 태양 중심핵에 있던 모든 수소 연료는 헬륨으로 치환된다. 이제 중심핵은 더는 내리누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해 수축하기 시작하며, 중심핵이 수축하면서 중심핵 바깥쪽의 온도가 수소를 태울 정도로 높아진다. 이 과정이 심화하면서 태양의 외곽층은 막대하게 부풀어 오르게 되며, 적색 거성으로 불리는 진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76억 년 후 태양의 외곽층은 1.2천문단위(지금 태양 반지름의 256배)까지 팽창할 것이다. 이 단계는 적색 거성 가지로, 팽창한 만큼 표면 온도는 2600켈빈까지 내려가서 붉은색으로 빛나게 되며, 밝기는 지금의 2700배까지 올라간다. 태양은 적색 거성 단계에서 항성풍 형태로 원래 지녔던 질량 10분의 1을 (목성질량의 110배) 날려 보낸다. 태양은 적색 거성 단계에서 약 6억 년 머무를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가 되면 수성은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며, 명왕성과 카이퍼벨트의 얼음까지 녹아버리며 생물권은 50AU까지 밀려나게 된다. 수성은 수메르인 시대(기원전3000년)부터 알려졌다.옛 기록에서는 수성이 바빌로니아인에 의해 관측되었으며 gu-ad 또는 gu-utu라고 명명되었다.고대 그리스인은 수성을 헤르메스에 대응시켰다. 이것은 가장 안쪽에 있는 행성으로 운행이 빠르기 때문에 발이 빠른 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헤르메스는 고대 로마에서 메르쿠리우스와 동일시되어 영어로 머큐리(Mercury)가 되었다. 금성 금성(金星, 라틴어: Venus)은 태양계의 두 번째 행성이다. 샛별, 새별로 불리기도 했다. 태양 주위를 224일 주기로 돌고 있으며 달에 이어서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천체이다. 가장 밝을 때의 밝기는 -4.5등급이다. 금성의 명칭은 오행 중 하나인 '금(金)'에서 유래하였으며, 태백성(太白星)으로도 불렸다. 금성은 그 출현 시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저녁 무렵에 나타나는 금성을 장경성이라고 부르고 새벽 무렵에 나타나는 금성을 샛별 혹은 명성(계명성)이라 불렀다. 서양에서는 로마 신화의 미를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을 따라 비너스 (영어:Venus)라 부른다. 지구형 행성인 금성은 크기와 화학 조성이 지구와 매우 비슷하여 지구의 '자매 행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성의 표면은 반사도가 높은 불투명한 구름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가시광을 통해서 표면을 관찰할 수는 없다. 20세기에 들어와 행성과학자들이 그 비밀을 풀기 전까지 금성에 대하여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금성은 지구형 행성 중에서 가장 농밀한 대기를 가지고 있다. 대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이고, 표면에서의 대기압은 95기압에 이른다. 금성의 내부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거의 없지만, 크기와 밀도가 지구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금성의 내부구조 역시 지구와 마찬가지로 핵, 맨틀, 지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금성의 핵 역시 최소한 일부분은 액체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금성의 크기는 지구보다 약간 작지만 이 차이로 인한 내부 압력의 차이는 상당히 크리라고 생각된다. 지구와 금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판 구조론적인 활동이 금성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금성의 표면과 맨틀이 건조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 차이로 인해서 행성 내부의 열 방출이 늦어지는데, 이것은 금성의 지자기가 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준다. 약 80%에 달하는 금성의 표면은 평탄한 현무암질 평원으로 되어 있다. '대륙'이라고 불릴 만한 높은 지형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금성의 북반구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적도의 바로 남쪽에 있다. 북쪽의 대륙은 이슈타르 테라라고 하는데, 이름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사랑의 여신인 이슈타르에서 따왔다. 이슈타르 테라의 면적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도이다. 맥스웰 산은 금성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슈타르 테라에 있다, 정상의 높이는 금성의 평균 표면 높이보다 11 km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반면에 지구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은 해수면으로부터의 높이가 9km가 조금 되지 않는다. 남반구의 대륙은 아프로디테 테라라고 부르며,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로부터 따왔다. 면적은 아프로디테 테라가 조금 더 커서 남아메리카대륙 정도의 넓이이다. 이 대륙의 대부분은 단층으로 덮여 있다. 충돌구와 마찬가지로 산과 계곡은 대체로 암석질의 표면을 가지고 있는 행성에서 발견된다. 금성에서는 몇 가지 특이한 지형을 볼 수 있다. 파라는 팬케이크를 닮은 꼭대기가 평평한 화산인데, 그 직경은 20에서 50km가량 되고 높이는 100m에서 1000m 정도이다. 노바는 별모양의 단층 시스템이고, 아라크노이드는 거미줄 같이 방사상의 단층과 동심원상의 단층이 함께 나타나는 지형이다. 코로나는 고리 모양의 단층을 말하는데, 주변이 침하되기도 한다. 이들 지형들은 모두 화산과 연관되어 생긴다. 거의 모든 금성의 표면 지형은 역사상의 또는 신화에 나오는 여성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단 예외가 있는데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이름을 딴 맥스웰 산과 두 고지를 나타내는 알파 레지오와 베타 레지오이다. 이 세 지형의 이름은 행성의 지명을 정하는 국제 천문학 연맹에서 현재의 시스템을 받아들이기 전에 지어진 것이다. 금성 표면의 대부분은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대체로 금성은 지구에 비하여 몇 배 정도 많은 화산을 가지고 있다. 100km가 넘는 거대 화산 167개가 금성에서 발견되었다.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이만한 크기의 화산은 하와이 제도의 본섬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것은 금성의 화산활동이 지구보다 활발해서라기보다는 금성의 표면이 지구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표면은 끊임없이 섭입을 통하여 해구 아래로 사라지기 때문에 그 평균 연령은 1억 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금성의 표면은 적어도 5억 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섭입되지 않는 대륙지각 위의 화산들은 활동이 끝남과 동시에 풍화에 의해서 더 빠른 속도로 지워진다. 다수의 관측자료에 따르면 금성의 표면에는 현재에도 활동 중인 화산이 있는 것 같다. 러시아의 베네라 계획 동안 베네라 11호와 베네라 12호의 탐사선들은 끊임없이 치는 벼락을 관찰하였고, 베네라 12호는 착륙 직후 큰 천둥 소리를 녹음하였다. 지구에서는 천둥이 강우에 동반되지만, 금성에는 강우가 없다. 한 가지 가능성은 화산 분출시 나오는 화산재가 천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이산화황의 대기 농도이다. 1978년과 1986년 사이에 이산화황의 금성 대기중의 농도는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큰 화산 활동이 관측 전에 있어서 이산화황의 농도를 증가시켰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약 1000개 정도의 충돌구가 금성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들의 분포는 전 행성 표면에서 고른 것으로 밝혀졌다. 지구나 달에서 발견되는 충돌구들은 풍화된 흔적을 보이는데, 이는 끊임없는 열화작용의 결과이다. 달에서의 열화작용은 이후에 오는 충돌에 의하여 일어나고, 지구의 경우에는 바람과 비에 의한 풍화에 의하여 충돌구가 열화된다. 금성에서는 85%의 충돌구가 최초의 상태를 보존하고 있다. 충돌구의 수와 이들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이 행성은 5억 년 전에 완전히 새로 표면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의 지각은 판 구조 활동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반면에 금성의 표면은 이러한 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 판 구조 활동에 의해서 맨틀의 열이 방출되지 않기 때문에 금성은 맨틀의 온도가 지각이 안정하게 있을 수 없는 일정 임계 온도까지 계속 올라가고, 그렇게 되면 1억 년 정도의 시간 동안 지각이 몽땅 맨틀 안으로 섭입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지각이 형성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금성에 있는 충돌구의 크기는 작게는 3km부터 크게는 280km까지 분포한다. 직경이 3km보다 작은 충돌구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두꺼운 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운동 에너지가 특정한 값보다 작은 물체는 속도가 느려져서 충돌구를 만들지 못한다. 금성은 극도로 두꺼운 대기를 가지고 이산화탄소가 풍부한 대기에 의해서 온실효과가 발생하며, 금성 표면의 온도를 400도까지 높여 놓는다. 금성의 표면 온도는 태양까지 거리가 절반밖에 되지 않아 단위 면적당 4배나 많은 태양에너지를 받는 수성의 표면 온도보다 더 높다. 연구에 따르면 수십억 년 전 금성의 대기는 현재의 지구 대기의 상태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표면에는 상당한 양의 액체 물이 존재했으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물이 증발하면서 대기중으로 들어간 수증기가 온실효과를 폭주시켰다고 생각된다. 금성은 극단적인 기후 변화의 예가 되기 때문에 기후 변화 연구에 유용한 수단이 된다. 표면에서의 대기 순환은 해들리 순환을 따른다. 금성 하층 대기의 등적 비열과 바람에 의한 열의 이동으로 보건대, 매우 천천히 자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성의 표면 온도는 낮과 밤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표면에서의 바람은 매우 느려서 한 시간에 수km 정도를 이동할 뿐이다. 하지만 대기의 밀도는 높기 때문에 바람에 의해 전달되는 힘은 상당하고 먼지나 작은 돌들을 표면에서 이동시킨다. 두터운 이산화탄소의 층 위에는 주로 이산화황과 황산 물방울로 구성된 두꺼운 구름층이 있다. 처음에는 수증기로 된 구름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들어와 구름의 주성분이 황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산은 상층대기에서 이산화황과 수증기가 자외선을 받아 광화학 반응을 일으켜 생성된다. 이 구름들이 60%에 달하는 태양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금성의 표면은 가시광으로는 관찰하기 어렵다. 금성은 영구적으로 구름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지구보다 태양에 가까이 있지만, 금성의 표면에는 태양 빛이 드리우는 일도, 태양 빛에 의해서 가열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금성의 온도는 현재 지구의 표면온도와 비슷하게 된다. 구름 층 꼭대기에는 시속 300km에 이르는 강한 바람이 4-5일에 한바퀴씩 금성을 일주한다. 1980년대에 파이오니어 금성 궤도선은 금성의 자기장의 강도와 공간적 범위가 지구에 비해 작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작은 자기장이 생기는 원인은 전리층과 태양풍의 상호작용 때문으로 지구와 같이 핵에서의 다이너모 현상에 의해 생기는 자기장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었다. 금성의 자기권은 우주선(Cosmic Ray)으로부터 대기를 보호하지 못할 만큼 약하다. 금속으로 된 액체 핵의 대류에 의해서 생기는 다이너모 현상에 의해 자기장이 생긴다고 생각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금성 같이 지구와 비슷한 몸집으로 미루어 내부가 완전히 식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에 스스로 유지되는 자기장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사실이었다. 다이너모 현상은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전도성 액체, 회전, 대류이다. 하지만 금성의 핵은 지구와 마찬가지고 철과 니켈이 주성분인 도체라고 여겨진다. 또한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금성이 자전 속도가 매우 느리긴 하지만 다이너모 현상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한다. 따라서 금성의 핵이 대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이너모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지구에서는 액체로 된 외핵에서 대류가 일어나는데, 외핵의 하부가 상부보다 더 뜨겁기 때문이다. 금성에서는 내부의 열을 외부로 방출해 주는 판 구조 활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금성의 내부는 충분히 뜨거워서 금속으로 된 내핵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즉 핵이 아직까지 냉각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핵이 모두 거의 같은 온도라는 설명이다. 금성은 태양 주위를 평균 거리 약 1억 600만 km를 두고, 224.7일을 주기로 공전하고 있다. 태양계의 행성들 중에서 금성의 궤도가 가장 원에 가깝다. 궤도 이심률은 0.01 이하이다. 내합 시에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데, 이때 거리는 약 4000만 km이다. 금성의 회합 주기는 584일이다. 금성은 243일을 주기로 자전한다. 태양계의 여덟 행성 중에서 가장 느린 자전 속도이다. 따라서 금성에서의 하루는 거의 1년과 맞먹는다. 적도에서 금성 표면은 시속 6.5km로 자전하는데, 지구 적도에서의 속도는 1600km에 달한다. 금성의 태양일은 116.75일이다. 따라서 금성 표면의 관측자는 태양이 매 116.75일마다 서에서 떠서 동으로 지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금성의 자전은 여느 행성과는 달리 북반구에서 보았을 때 시계방향으로 자전하고 그 속도 또한 매우 느리다. 이것은 금성의 자전 속도가 처음으로 측정된 이후 풀리지 않은 의문 거리이다. 원시 태양계 원반에서 금성이 처음 생겼을 때는 그 자전 속도가 지금에 비해 훨씬 빨랐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수십억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무겁고 두꺼운 대기에 작용하는 조석 효과가 금성의 자전 속도를 늦추었을 수 있다고 한다. 금성 궤도의 신기한 점의 하나는 금성의 지구와의 회합 주기인 584일이 거의 정확히 금성의 태양일 길이의 다섯 배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584 = 116.75 * 5) 이 현상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지구의 기조력에 의한 공명인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금성에는 위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행성 2002 VE은 현재 금성과 유사위성궤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6년 10월에 칼텍의 알렉스 알레미와 대이비드 스테벤손에 의한 연구에 따르면 수십억 년 전에 금성은 대충돌에 의하여 형성된, 최소한 하나의 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천만 년 정도 후에 또 다른 대 충돌에 의하여 금성의 자전 축이 뒤집혀졌고, 자전축이 바뀌었기 때문에 위성과 금성 사이의 기조력으로 인하여 위성이 점차 각운동량을 잃고 금성에 충돌하였다고 하는 설이 제시되었다. 금성은 항상 다른 행성에 비하여 밝게 보인다. 금성의 실시 등급은 -3.8등급에서 -4.6등급 사이에서 변한다. 이 정도 밝기는 이론적으로 낮에도 볼 수 있는 등급이지만 실제로는 관측이 어렵다. 하지만 개기 일식이 일어나면 무조건 그 지역에서는 금성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2005년의 터키에서 일어나는 개기 일식 중에서 오른쪽에 금성이 보인 바 있고, 2011년 중국 만리장성에서 개기 일식이 일어날 때에 금성이 왼쪽에서 빛나고 있었고, 평소 때에 관측이 거의 불가능한 수성도 함께 보였다. 특히 태양이 지평선 낮게 위치할 때 잘 보인다. 금성은 내행성이기 때문에 태양으로부터 47˚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금성은 매 584일마다 지구를 앞질러간다. 따라서 금성은 저녁의 개밥바라기로 보이다가 내합이 지나고 나면 새벽의 샛별로 보이게 된다. 또다른 내행성인 수성은 최대 이각이 28˚에 이르지만 종종 박명 때문에 구별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금성은 밝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금성의 이각이 커진다는 것은 해가 진 이후에 금성이 따라 질 때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 너무 밝은 발광점으로 보이기 때문에 금성은 UFO로 잘못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금성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면서 태양, 지구와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달과 같이 위상변화를 보여준다. 금성은 내합 시에는 달의 삭과 같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지만 외합시에는 보름달과 같이 둥근 모양으로 보이게 된다. 금성이 최대이각에 다다랐을 때 금성의 모양은 반달 모양과 같고, 금성이 가장 밝게 보일 때는 좀 더 살이 빠져서 초승달이나 그믐달과 같은 모양을 한다. 금성이 완전히 보이지 않음에도 밝기가 최대가 되는 이유는 이때 금성이 지구에 좀 더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달의 보름달과 같은 모습을 할 때에는 태양 너머 완전히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금성이 너무 작게 보이고 천구상에서 태양에 가깝게 위치하기 때문에 관찰하기도 쉽지 않다. 금성의 궤도면은 지구의 궤도면에 대해서 살짝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금성이 지구와 태양 사이를 가로질러 갈 때 일반적으로는 태양면을 통과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금성의 태양면 통과는 약 120년 마다 8년을 사이에 두고 두 번의 태양면 통과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최근의 금성의 태양면 통과는 2012년에 일어났으며 그 전은 2004년이다. 역사적으로 금성의 태양면 통과는 중요한 이벤트였는데, 천문학자들은 이 기회를 통해 1천문단위(태양-지구 거리)를 직접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천문단위의 크기가 결정되면 태양계의 크기도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1769년 4월 13일에 제임스 쿡 선장은 영국의 왕립협회에 고용되어 태평양 상의 타히티에서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였다. 금성 관측의 오래된 수수께끼 중의 하나는 애센 광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것은 금성이 초승달 위상에 있을 때 금성의 그늘 부분(태양 반대편)에서 보이는 약한 발광현상을 일컫는다. 애센 광은 1643년에 처음으로 관측되었지만, 발광 현상의 존재가 믿을 만 한 것으로 확인된 적은 없다. 금성을 관측하는 사람들은 이 빛이 금성 대기에서 일어나는 벼락 같은 전기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하지만 애센 광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아주 밝은 초승달 부분을 함께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키보드 키보드()는 다음을 말한다. 무령왕 무령왕(武寧王, 462년~523년 6월 5일(음력 5월 7일), 501년~523년)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그가 동생 곤지와 부인을 공유했다고 하나, 이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라는 설이 있다. 또한 《백제신찬》과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화처럼 전해진 이야기로 곤지에게 보내진왕비가처녀가 아니었다고 곤지에 의해 처형당하자 동성왕이 임신중이던 자신의왕비를 곤지에게 시집을보내고 왕비는 일본으로 가는중 규슈의 섬에서 무령왕을 출산하고 무령왕은 일본서 곤지의 앙자들과 함께 성장하고 일본왕의 양자처럼 자란다 이후 다음 일본 왕은 무령왕은 일본 왕괴 엄마가 같은 형제가되고 백제가 위험 할때 항시 구원병을 보내게 돤다 이때 일본으로가 왕비가 배제 귀족 진씨로 여겨진다 현재도 백제의 후손이라는것의 기원이다. 한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무령왕은 501년 동성왕이 위사좌평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재위 23년, 나이 62세에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다. 후일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호령왕'(虎寧王)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고려의 제2대 왕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고,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비유왕 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본래 개로왕의 후궁이었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의 자료에 의하면 동성왕은 그의 이복형이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이 임신한 후궁(실제로는 곤지의 애첩)을 그의 동생 곤지에게 주어 일본으로 가게 했다고 한다. 461년 규슈 쓰쿠시(筑紫)의 각라도(各羅島)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산기를 느껴 사내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이가 백제 무령왕이라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 의하면, 그가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곤지는 그의 이름을 사마라고 지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백제신찬에서 백제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송서에도 백제 무령왕이 개로왕을 친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사마왕이 동성왕(부여곤지의 둘째아들)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동성왕과 백제 무령왕의 나이가 거의 비슷하여 부자관계가 아니라, 백제 무령왕이 동성왕(모대)의 이복 동생 또는 씨가 다른 남남(동성왕은 모씨, 백제 무령왕은 여씨)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무령왕의 이복형인 동성왕은 왕권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위사좌병 백가를 위시한 반대파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오히려 한솔 해명과 함께 501년 정월 가림성(加林城)에 근거를 두고 저항하던 백가를 토벌 하고, 그 해 11월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치고, 같은 해에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 507년 고구려의 지시를 받은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가야지역으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경남서해안으로 진출하였으며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였다.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중국의 역사서 《양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백제의 지방행정조직으로 읍에 해당)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집권화와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무령왕은 지방통치에 왕족을 이용함으로써 커다란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왕족들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또한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 개편을 통해 귀족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 있게 분담시킴으로써 신·구세력을 통제하였다. 이로써 직책이 없는 좌평도 등장하게 되었다. 스다 하치만 신사(隅田八幡神社)에 소장된 일본의 국보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명문에는 『계미년(503년) 8월 10일 (무령) 대왕이 다스리던 때에, 남제왕(男弟王:게이타이)이 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무령왕)는 (게이타이의) 장수를 기원하며 開中費直,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두 사람을 보내어 상질의 백동 2백 한을 가져다 이 거울을 만들었다.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念長壽 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는 기록이 있다(명문의 판독과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521년 양 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즉위 5년에 왜에 이미보내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과 교체를 하여 왕족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한편, 일본의 게이타이 천황에게 동경(銅鏡) 을 하사하였다.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 와 516년 고안무(高安茂) 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523년 62세로 붕어하였다.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아들 순타태자가 요절하였으므로 다른 아들인 명농(성왕)이 보위에 올랐다. 1971년 음력 7월 충청남도 공주군 송산리에서 발견된 왕릉의 지석에는 능의 축조연대와 함께 사망 시의 무령왕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무덤이며, 금제관식, 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 금제뒤꽂이, 은제팔찌, 청동신수경, 석수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에 달하는 부장품들이 출토되어 오늘날 백제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령왕릉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으로, 백제 무령왕과 그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고분군 내의 7호분 무덤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은 현재 총 7기가 있다. 무령왕릉은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송산리 고분의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반원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굴식 벽돌무덤이다. 돌방무덤은 한성도읍기부터 시작된 무덤 양식이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들여온 무덤양식이다. 봉분의 윗부분은 지름 약 20m의 구모양을 하고 있으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무덤 꼭대기까지 높이는 7.7m이다. 널방은 연화무늬 벽돌과 글자가 새겨진 벽돌 등으로 쌓여진 하나의 방으로 북쪽을 축선(軸線)으로 평면이 4.2m × 2.72m로 되어 있다. 천장은 아치 모양이며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꽃모양 창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 안에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 없이 풍부하고 화려하다. 공예품으로는 각종 금은 장신구가 태반이고 다음에 청동제품·이기류(利器類)·도자기·목제품의 순으로서 지금까지 자료가 빈약했던 백제 금속공예의 면모를 뚜렷하게 밝힌다. 금제투작 초화문관식은 백제 왕관의 독자적인 양식이라 할 온화하고 우아한 특성을 보이는 대표적인 장신구로 손꼽힌다. 그 외의 장신구로는, 아홉 마디의 금목걸이·금팔찌·은팔찌·금귀고리·금제 뒤꽂이·거울(銅鏡)·금두식곡옥(金頭飾曲玉) 등이 뛰어난 세공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곡옥은 백제에서는 처음 나타난 신례(新例)로서 정교한 세공을 보이며, 금제 뒤꽂이는 연화문 또는 타출보상당초문(打出寶相唐草紋)이 섬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용(龍)의 양각과 음각 명문(陰刻銘文)이 있는 은제 팔찌이며 또 제품으로 벌집 모양의 금박선(金箔線) 안에 각종 무늬(飛天·鳳凰·蓮花紋)를 그린 왕비의 베개(頭杭)와 베갯머리에 꽂은 한 쌍의 봉황두(鳳凰頭)가 희귀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봉황두의 머리는 흑(黑)·주(朱) 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혀 거의 원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0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정교하게 깎아 만든 쏨씨가 뛰어나다. 왕과 왕비가 안치된 목관은 일본 규슈지방의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금송은 일본에서 불단이나 무덤의 꽃으로 사용되며 일본인에게 금송은 신성한 나무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관재는 수령 3백년 이상인 거목으로 금송의 키가 30미터에 지름이 1미터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금송은 목질이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최고의 관재로 여겨졌으며 일본에서는 지배계층만 사용하였다. 왕의 관은 동쪽에 있고 왕비의 관은 안쪽, 즉 서쪽에 놓여 있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자 등 중국 물품들은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 때 국제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11년에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묘의 석실 바닥에서 긁어모은 티끌과 흙을 정밀 분석한 결과 은어의 등뼈 141점과 종류를 알 수 없는 다른 생선 뼈 조각 136점을 발견하였다고 발표되었다. 이를 토대로 추정을 해 보면, 길이 25cm 정도의 은어가 최소한 세 마리 이상 부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은어의 척추뼈들 가운데 푸른빛으로 변색된 것이 적지않고, 청동 그릇이 다수 발견되었으므로, 청동그릇 녹물이 은어의 등뼈를 물들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은어를 부장한 까닭은 제수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과 부활을 상징하는 물고기를 제의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왕릉 축조에는 모두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으로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다. 글씨가 새겨진 벽돌은 '…士壬辰年作(사임진년작)'이라는 글씨가 새겨있거나 大方(대방), 中方(중방), 急使(급사)라는 명문이 압출(壓出)되어있다. 또한 벽돌의 문양은 짧은 변에 연꽃무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가 장식되어 있고, 긴 변에는 연화사격자무늬(蓮花斜格子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로 장식되어 있다. 무령왕릉의 아치형으로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써 중국 남조에 속하는 남경을 수도로 한 양나라의 무덤의 양식과 유사하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백제로 들여갔다는 기록도 있어 무덤의 축조에 양나라의 기술자들이 동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는 의미의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경에 있는 제가산 남조묘들과 무령왕릉의 양식이 매우 흡사하다. 무덤의 양식은 보수성이 강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데 무령왕릉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이를 통해서 무령왕시대에는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1년 7월 5일 송산리 5, 6호분의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7월 7일 무덤의 아치형 입구를 발견하였다. 호우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자정까지 배수로를 팠다. 7월 8일 날이 밝자 발굴을 다시 시작하여 오후 3시경 입구를 막는 벽돌의 바닥까지 발굴을 하였다. 위령제를 지낸 후 4시경에 입구를 막는 벽돌 하나를 들어내자 하얀 연기가 나왔다. 계속해서 벽돌을 들어내자 널길의 중앙에서 돌짐승을 발견하였다.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南朝風)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1442년 만에 무령왕과 왕비의 실존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팀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왕릉의 발굴을 발표하였다. 이후 혼란 속에서 밤을 세워 유물을 수습하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돌로 만든 짐승(石獸 : 석수) 모양이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묘실의 관을 올려 놓은 대위에는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들었던 나무 조각이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하였던 장신구와 몇 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 허리띠, 금동장신발, 은제팔지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베개 및 발받침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에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은제탁잔 등이 출토되었다 공주문화원, 공주예총, 향토사학자, 언론인, 사진작가 등으로 구성된 공주 10경 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한 공주 10경 후보지 15개소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종 공주 10경에 무령왕릉이 선정되었다. 동명왕편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고려 때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서사시(敍事詩)를 5언시로 읊은 것이다. 그는 이 작품속에서 이 작품을 쓴다고 밝혔다. 또한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이해하였다. 뇌졸중 뇌졸중(腦卒中, , , 腦卒症)은 뇌혈류 이상으로 인해 갑작스레 유발된 국소적인 신경학적 결손 증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뇌졸중은 증상에 대한 용어로서, 의학적인 질병으로 칭할 때에는 뇌혈관 질환(腦血管疾患, , 줄여서 CVA)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cerebrovascular stroke라고 한다. 한의학적인 표현을 빌려, 흔히 중풍(中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중풍이라는 말은 좀 더 광의의 표현이다. 뇌졸중은 크게 뇌경색과 뇌출혈로 분류된다. 뇌는 몸 전체에서 무게로는 체중의 2%만 차지하지만, 뇌로 가는 혈류량은 심박출량의 15%나 되고, 산소 소모량은 몸 전체 산소 소모량의 20%나 된다. 게다가 뇌는 에너지원으로 포도당만을 사용하므로 에너지 공급이 잠시만 중단되어도 쉽게 괴사가 일어난다. 따라서 뇌혈류의 이상은 뇌손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한뇌졸중학회에서는 뇌졸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환자의 98%가 (hemiplegia), 언어장애, 시각장애, 어지럼증, 심한 두통 때문에 병원을 찾는다고 밝혔다. 또한, 3시간 이내에 병원을 찾아야 막힌 혈관을 뚫거나 뇌경색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혈전용해제는 뇌졸중 증상이 최초 발생한 이후 3시간 이내에 인체에 투여될 때, 뇌세포의 괴사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고, 뇌출혈 등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으므로 이를 '골든타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CT, MRI 촬영과 진단에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하여, 60분 이내에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급적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래야지 적절한 혈전용해제 치료를 기대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뇌졸중은 사망률로서 전체의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체 장애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뇌졸중 환자의 약 20% 정도는 3개월 이상의 장기 입원 치료를 요하며, 15~30%는 영구적인 장애를 갖게 된다. 그러나 처치 기술의 발달로 사망률은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뇌혈류의 차단으로 인해 뇌세포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뇌세포에서는 이온 펌프의 중단으로 인해 뇌세포막의 탈분극이 유발되고, 무기 대사가 촉진된다. 뇌세포막의 탈분극은 다량의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하며, 이들이 산화되면서 독성을 가진 자유 라디칼이 생산되어 독성을 발휘한다. 또 한편으로 뇌세포막이 탈분극되면 세포 내로 칼슘 이온이 대량 유입되는데, 이로 인해 지질 분해, 산화 질소 형성, 단백질 분해가 촉진되어 세포 손상을 일으킨다. 한편으로 뇌세포에 무기 대사가 촉진되면, 대사의 산물인 젖산이 세포 내에 축적되는데, 이로 인해 세포질이 산성화되면 철 이온의 유리로 인해 역시 산화 라디칼 형성이 촉진되어 독성이 유발된다. 결국 이러한 기전들로 인한 뇌세포의 손상으로 인해 뇌세포의 대량 괴사가 유발된다. 정상적인 뇌의 혈류량은 100그램당 55밀리리터 정도이다. 만약, 뇌혈류량이 30ml/100g 이하로 떨어지면, 뇌조직이 손상되기 시작한다. 뇌혈류량이 25ml/100g 이하가 되면 뇌세포의 기능 장애가 본격적으로 일어나 뇌파 상에서 뇌세포의 전기적 활성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15ml/100g 이하가 되면 뇌세포막 손상이 유발된다. 뇌조직 손상의 속도는 뇌혈류량이 감소할수록 증가한다. 뇌졸중의 위험인자는 다양하다. 이를 불변성 인자와 가변성 인자로 나누면 아래와 같다. 뇌경색(cerebral infarction)은 임상적 특징과 여러 진단적 자료에 근거한 TOAST 분류법 에 따라 분류한다. TOAST 분류법은 뇌경색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뇌졸중은 사망률이 높고, 치료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며, 치료한다고 하여도 장애를 남기기 쉬운 질환이다. 또한 뇌졸중은 치료 후에도 상당수가 재발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예방이 중요하다. 예방은 가변적 위험 인자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테면, 혈압 관리, 금연, 체중 관리, 운동 등이 뇌졸중의 위험인자로부터 피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심혈관계 질환을 미리 인지하고 치료하고,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추어야 한다. 경동맥 협착과 심방 세동에 대한 검사를 수행하여 이러한 질환으로 인한 뇌졸중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다. 급성기 뇌졸중의 치료는 소위 '6D'로 압축된다. 즉, 뇌졸중 증상을 조기에 발견하고, 환자를 병원에 빨리 이송한다. 그 다음에 응급실에 들어가 응급 치료를 시행하고, 환자의 중증도를 선별하며, 병력 청취, 진찰, 혈액 검사, EKG, 응급 두부 CT로 환자의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를 바탕으로 처치 방법을 결정하며, 필요한 경우 적절한 약물 치료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환자의 미세 순환을 개선하고, 2차적 손상을 최소화하며, 혈전 확장을 예방하고 혈전 용해 치료를 하며, 합병증을 예방하는 것이 급성기 치료의 내용이다. 항혈전 요법은 항혈소판제 투여, 항응고제 투여, 혈전용해제 투여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항혈소판제와 항응고제는 더 이상의 혈전 생성을 억제하여 뇌졸중의 악화를 억제하며, 혈전용해제는 혈전을 녹여, 응급 환자의 뇌혈관 재관류를 유도하여 뇌세포의 회복을 촉진한다. 주로 혈전성 뇌졸중에 사용되며, 아스피린(aspirin),트리플루살(Triflusal), 티클로피딘(ticlopidine), 클로피도그렐(clopidogrel), 디피리다몰(dipyridamole), GIIb/IIIa 수용체 길항제 등의 약물이 있다. 주로 색전성 뇌졸중에 사용되며, 헤파린(heparin), 저분자량 헤파린(low molecular weight heparin, LMWH), 와파린(warfarin) 등의 약물이 있다. 허혈 상태에서 뇌세포가 완전히 죽지는 않아, 재관류시 조직의 회복이 가능한 부분을 허혈성 음염(ischemic penumbra)이라고 하며, 혈전 용해제로 혈관을 막는 혈전이 용해되면 이 부분은 회복이 가능하다. 이 부분의 회복을 위해 혈전 용해제를 투여하며, 재관류율은 25~70% 정도로 평가된다. 효과적인 재관류를 위해서는 정맥내 주사(intravenous injection, IV)로 뇌졸중 발생 후 3시간 이내에 조직 타입 플라스미노겐 활성화제(Tissue-type Plasminogen Activator, rt-PA)를 투여한다. 그러나, 뇌졸중 발생 후 3시간 이내에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효과가 크지는 못하다.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 동맥내 주사(intraarterial injection, IA)로 유로키나제(urokinase)를 투여하는 방법이 6시간까지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혈전 용해제는 출혈의 위험성을 높이므로 초선택적 혈관조영술로 출혈의 위험을 검사해야 한다. 혈관 용해제를 부적절하게 사용할 경우 혈관을 막던 색전이 떨어져 갑작스럽게 혈관 내압이 높아지면서 혈관 내피층이 손상될 수 있고, 이로 인해 경색된 부위에 출혈이 생기는 출혈성 변환(hemorrhagic transformation) 현상이 유발될 수 있다. 조선 통신사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일본의 입장에선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후기 까지 조선 통신사라고 불렀을 뿐 정확한 명칭은 통신사이다. 일본 열도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무로마치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들이 있었다. 1510년 중종 5년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된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일본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내놓게 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나라를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쓰시마 번을 통해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을 쇄환하기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선조 40년)에 강화를 맺었다. 그에 따라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강화와 그 조건 이행의 확인, 일본의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 그 뒤 조·일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60여 차에 걸쳐 차왜(差倭 : 일본에서 보내는 사신)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자위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조·일 국교가 수립된 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대략 4~5백 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처음에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파견되었지만,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그 역할이 사라지는 대신 문화적으로 선진 문물의 전달 창구로서의 조선 통신사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육로로 갔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하였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그 외에도 일본 민중 문화에 끼치는 영향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유산으로는 당인의 춤(唐人誦), 조선 가마, 필담창화(筆談唱和)의 시문(詩文)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양산, 벼루, 미농지(美濃紙) 등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일본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 속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고, 성대한 향응을 베풀었으며, 통신사의 숙소에서 수행원으로부터 글이나 글씨를 받기 위해 몰려든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해 마상재(馬上才)로 불리는 2명의 광대를 데리고 가서 쇼군 앞에서 곡예를 연출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하여 곡마 묘기나 통신사의 행진을 자개로 새긴 도장주머니가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일본의 화가들은 다투어 통신사 일행의 활동을 대형 병풍, 판화, 두루마리 그림 등으로 그렸는데 수많은 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을 귀중하게 간직하여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통신사가 한 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일고,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 문화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같은 지식인은 통신사에 대한 환대가 중국 사신보다도 높은 데 불만을 품고 이를 시정할 것을 막부에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18세기 후반 이후 일본의 국수정신을 앙양하기 위해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새로이 연구하는 국학(國學) 운동이 일어난 것을 일본 지식인의 조선 붐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는 일본에서 겪은 견문을 기록하여 많은 견문록이 전하고 있다. 일본에 평화가 정착된 에도 시대 이후 문화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18세기 이후에는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1711년 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간 조태억은 당시 일본의 최고 유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와 필담을 하였는데, 동서 양양의 지식에 해박했던 아라이의 학문과 세계관이 조선통신사에 크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통신사의 수행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상당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일본의 발전상은 조선의 학문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학문적으로도 일본의 유학 사조인 고학(古學)의 연구성과가 조선에 들어와 정약용 등을 비롯한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 통신사 파견이었던 1811년의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이 불안하여 대마도에서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통신사 파견은 경제적인 부담에 점점 노골화되는 서구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로 통신사를 파견하거나 영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국학 운동이 해방론(海防論)으로 발전하고, 다시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 등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하고 난 뒤에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자는 정한론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1876년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일본의 사학계 일각에서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 측 사절단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 이래 개항할 때까지 외교정책은 성리학적 외교원칙인 사대교린으로서, 중화에 버금가는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여진, 일본, 류큐 등은 어디까지나 교린의 대상이었지, 결코 사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에 대한 일본학계의 자의적인 해석은 나올 수 있어도, 당시의 조선이 사대의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조선 후기에 통신사 파견 요청 자체가 전적으로 에도 막부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에 대응할 만한 일본국왕사가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군이 일본국왕사의 상경로로 침공한 일에 대한 응분의 조치로 일본 사절단의 상경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본 막부 측에서 조선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파견하게 하였다. 원중거 등 파견된 통신사 중 일부는 일본의 이중적인 권력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비록 실권 없이 상징적이기는 하나, 형식상 쇼군을 임명하는 국가의 상징이 되어 있는 군주,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여, 후일에 막부를 타도하고 군주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면, 형식상 군주의 신하인 쇼군과 동등한 지위를 맺고 있는 조선 국왕에 대해서 외교의례적 문제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 예견은 실제로 메이지 유신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되었다. 이 또한 19세기에 들어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의 치열한 역사로 인하여 통신사를 재발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1970년대에 재일 한국인 학자들이 통신사 유적이나 문헌의 재발견에 주력하였다. 기대 이상으로 일본 내국인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처음에 대마도에서, 그 다음에 혼슈 각지의 통신사 연고지에서 조선 통신사 이벤트가 열렸고, 다시 한일 공동 행사로 승화되고 있다. 2011년 4월 21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조선 통신사 역사관이 개관되었다. 에너지 에너지(←, ←)는 물리학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일반적으로 '석유 에너지', '원자력 에너지'와 같이 '에너지원'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에너지의 SI 단위는 일과 마찬가지로 줄이며 1줄(1J)은1N의 힘으로 물체를 1m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에 해당한다. formula_1 이 외의 단위로는 칼로리가 있다. 1 칼로리(cal)은 물 1g의 온도를 14.5 °C에서 15.5 °C까지 올리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로 정의된다. 또 다른 단위로는 영국 열 단위(Btu)가 있다. 1Btu는 물 1파운드의 온도를 63 °F에서 64 °F로 올리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로 정의된다. 일-에너지 등가 원리에 의해 1J은 1N의 힘으로 물체를 1m 움직이는 동안에 하는 일과 그 일로 환산할 수 있는 양에 해당한다. 에너지 (E)는 힘을 물체를 움직인 거리에 대해 적분한 값과 같다. 운동 에너지란 운동하는 물체가 가진 에너지이다. 이는 정지 상태의 물체를 해당 속도로 움직이도록 하는 데 들어가는 일의 양과 같다. 일-운동에너지 정리에 의하면 물체가 받은 일의 양은 물체의 운동에너지 변화량과 같다. 위치 에너지(Potential energy)는 물체가 어떤 위치에 있음으로서 가지는 잠재적인 에너지이다. 위치 에너지는 중력에 의한 위치 에너지, 탄성에 의한 위치 에너지, 전기력에 의한 위치 에너지 등이 있다. 열에너지도 에너지의 한 종류이다. 열은 한 계에서 온도가 더 낮은 다른 계로 전달되는 에너지의 한 형태이다. 특히 어떤 물체가 가지는 열역학적 상태에 의한 에너지를 내부 에너지라 한다. 전기적 위치 에너지는 전하량과 전위의 곱으로 나타낸다. formula_4 축전기에 저장된 전기 위치 에너지는 전압의 제곱에 비례하고 유전율에 비례한다. formula_5 모든 상호작용에서 에너지는 보존된다. 가령, 당구공이 부딪히면 운동 에너지와 소리 에너지 등으로 바뀌지만 이들의 총합은 일정하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모든 상호작용을 다 고려한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해밀토니안 연산자로 나타나며, 상호작용의 시간흐름에 대한 변환으로 나타낼 수 있다. 서태지 서태지(, : 鄭鉉哲, 1972년 2월 21일 ~ )는 대한민국의 음악가다. 시나위 밴드에 들어가면서 현재의 ‘서태지’란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본관은 온양. 서태지는 197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구한말시절 군인이었던 증조부 이래로 줄곧 종로구에서 거주하였다. 재동초등학교를 거쳐 대동중학교(지금은 폐교) 2학년 때인 1985년에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으며, 음악에 심취하여, 열정과는 달리 가출을 자주 하며, 중학교 3학년 때는 전체 537명 중 꼴찌를 할 정도로 공부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듬해 서울북공업고등학교 (건축과, 현 학교명: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퇴를 하였다. 그후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멤버 구인광고를 보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을 채 하기 전에 해체가 되고, 이후 그는 당시 신중현이 운영한 록 카페인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을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우트되었다. 신대철에게서 스카우트된 서태지는 18세때인 1989년 시나위에 합류하여 베이시스트로 활약하였다. 당시 시나위의 보컬은 김종서였다. 당시 시나위는 최고의 밴드로 이름이 널리 퍼졌지만, 방송 출연은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일 정도였고, 리더 신대철과의 의견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넷째 음반 "Four"의 활동을 끝으로 시나위는 잠정 해체되었다. 이후 서태지도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시나위의 해체 이후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1년에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고 1992년 4월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였다. MBC의 《특종 TV 연예》를 통해서 정식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TV 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난 알아요》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첫 활동 곡으로〈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다시 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1994년 8월에 3집을 발표하였다. 3집에는 기존 음반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었고 통일을 다룬 〈발해를 꿈꾸며〉의 성공과 교실 이데아 소동 등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92년 ~ 1995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음반을 발매하였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 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12월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1996년 1월 19일에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돌연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잠정은퇴를 발표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그리고 잠정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2월에는 베스트 음반 'Goodbye Best'를, 6월에는 싱글 '시대유감'을 발표했다. 한편, 2008년 제작된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 따르면, 서태지는 잠정 은퇴 이후 미국으로 떠나 1년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고 나온다. 잠정 은퇴 한지 2년후 1998년 7월 7일 서태지는 갑자기 첫 번째 솔로 음반을 발표했다. 훗날 서태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음악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1년의 휴식 끝에 음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첫 솔로 음반을 발표할 당시 “연예인으로는 은퇴한 서태지가 음악가로서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 음반은 아무런 제목도 없이 "Seo Tai Ji" (서태지)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으며, 수록된 6곡의 노래 모두 특정한 제목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6곡의 노래와 3곡의 간주곡이 담긴 28분짜리 소형 음반으로, 보라색 케이스에 담겨 발매되었다. 팬들은 이 음반을 솔로 1집으로 부르지 않고 ‘5집’으로 부른다. 얼터너티브 록 장르의 5집 음반은 1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올리며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은퇴 번복과 짧은 러닝타임 문제 때문인 논란에 휩싸여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서태지의 지지자와 반대자의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서태지의 반대자들은 28분짜리 EP 수준의 음반을 정규 음반의 가격으로 판매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서태지는 자신의 메시지가 담긴 몇 줄의 이메일과 컴퓨터 영상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발표 이외에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일체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은퇴 선언 후 4년 7개월 만인 2000년 8월 11일에 서태지가 인터넷 팬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고 2000년 8월 29일 김포공항을 통하여 미국에서 귀국하여 통산 6집을 발매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김포공항은 수천 명의 팬들과 수백 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되었으며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 메탈을 시도한 음악들은 많은 화제가 되었다. 서태지가 컴백 직후 가진 콘서트인 《20000909 서태지 컴백콘서트》는 추석특집으로 MBC에 방송되었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일요일에 재방송까지 하였다. 2001년 《서머 소닉》에 참여한 후, 한국에서도 대규모 록페스티벌인 ETPFEST(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 이티피페스트)라는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서태지 6집은 140만 장의 판매고(서태지닷컴에 의한 기록)를 기록하면서 통산 음반 판매량은 1천만 장을 넘겼다. 2004년 1월 사회적인 메시지 등을 담은 7집 음반 "Seotaiji 7th Issue"를 발표하였다. 컴백 공연이었던 "2004 Live Wire"에서 그는 콘(KoЯn), 피어 팩토리(Fear Factory) 등 유명 해외 뮤지션과 합동 공연을 벌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태지 자신은 이 앨범에 담긴 노래의 장르를 ‘감성코어’로 명명했다. 4년의 공백을 불식시키듯 5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2004년 5월 8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최하였다. 이때 서태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신허 마을 옛터’라는 러시아 한인이주 기념비를 헌정하였다. 이후 8월에는 "ETPFEST"를 진행하였으며, "Watchout" 와 라이브 실황 음반인 "Live Tour Zero 04"를 발매한 후 다시 다음 음반을 작업하기 위해 인도로 출국하였다. 2005년까지 서태지 "7th Issue"는 50만 장의 판매량을 올린 것으로 한국음반협회에 보고된 상태이다. 2007년 12월 1일 한정판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벌였으나, 서태지 자신은 출연하지 않고 후배 뮤지션들의 공연으로 채워졌다. 2008년 7월 초 코엑스 상공에서의 UFO 동영상, 충청남도 보령에서의 미스터리 서클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서태지가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8집에 대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으며 서태지는 서태지닷컴을 통해 글을 남겨 8집 발매를 앞뒀음을 암시했으며 코엑스에서의 UFO 구조물을 설치하여 더욱더 기대감을 모았다. 또한, 서태지닷컴을 비롯한 문화방송의 〈쇼 음악중심〉에선 매주 서태지의 티저영상을 방송하였다. 2008년 7월 29일 서태지는 8집 정규 음반 발매 이전에 싱글 음반인 "ATOMOS PART MOAI"를 우선 발매하였다. 발매와 거의 동시에 10만 장이 전부 선예약주문으로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워 추가로 5만 장을 추가 제작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2008년 7월 29일에는 MBC 일산 드림센터에서 MBC에서 방영될 컴백스페셜을 위한 미니콘서트를 개최하였고, 8월 1일에는 코엑스에서 ‘게릴라 콘서트’ 를 열었다. 이후 8월 6일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스페셜 -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 첫 번째 싱글 곡인 "Moai"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본격적인 8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태지는 이번 앨범을 네이처 파운드(Nature Pound)라는 신조어를 이용해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자연과 여행을 주제로 이 같은 장르를 만들었다.”, “자연을 심장처럼 두드린다는 표현”이라며 ‘쪼개다.’, ‘부수다.’라는 어감도 좋다고 하여 ‘네이처 파운드’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8월 14일, 8월 15일에는 마릴린 맨슨, 더 유즈드, 드래곤 애쉬 등이 참여한 2008년 ETPFEST를 개최하였다. 9월 27일에는 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더 그레이트 2008 서태지 심포니〉 공연을 했다. 12월 7일에는 톨가 가쉬프와 함께 베토벤 바이러스의 모델로 알려진 성남시립오케스트라와 〈서태지 심포니 앙코르〉 공연을 하였다. "T`ik T`ak"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으며, 영화 《20세기 소년》과 공동프로모션으로 CGV 극장에서 뮤직비디오가 선행 공개되었고 이후 곰TV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했다. 이후 서태지는 10월 1일에 KTF를 통해 서태지폰을 출시하여 두 번째 싱글 "ATOMOS PART SECRET"의 1번 트랙인 "BERMUDA Triangle"를 선공개하고 10월 24일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을 배포했다. 2008년 11월 30일 서태지는 《SBS 인기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본격적인 공중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서태지는 12월 6일에 MBC에서 방영하는 《쇼 음악중심》, SBS에서 방영하는 《인기가요》에 출연하였다. 여기서 서태지는 "Human Dream"의 ‘쫄핑크 댄스’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이후 10여 년 만에 댄스가수로서의 면모를 다시 선보였다. "Human Dream"의 뮤직비디오는 12월 12일 방송된 MBC 에브리원 《신해철의 스페셜 에디션》 1회에 처음 공개되었다. 이 뮤직비디오는 블록버스터급의 뮤직비디오로 부산 벡스코 앞에서 대규모 폭발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후 파이널 에피소드는 곰TV를 통해 공개됐다. 현재까지 서태지의 8집 첫 번째 싱글 앨범은 2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2008년 12월 31일 서태지는 (Adieu 2008 쫄핑크파티 with 태지)라는 타이틀로 서울 하얏트 호텔 그랜드볼륨에서 1,000여명의 팬들과 함께 연말 송년파티를 열었다. 이날 팬들에게 받은 물품들을 기증받아 나눔바자회도 함께 실시하여 수익금 224만 6000원 전액을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 청음회관에 기부하였으며, 팔리지 않은 물품은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하였다. 2009년 2월 22일 ‘Missing Taiji’라는 실종 컨셉으로 여러 마케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실종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3월 10일 서태지는 둘째 싱글인 "ATOMOS PART SECRET"을 발매하였다. 둘째 싱글은 선주문 10만 장을 돌파했으며, 공식 집계로는 예약판매 포함 13만 장을 넘어섰다. 그리고 3월 14일과 15일에는 올림픽 공원에서 두 차례 ‘WORMHOLE’이라는 콘서트를 열었다. 가요 프로그램 《쇼! 음악중심》과 《인기가요》에 출연하여 "Juliet"와 "Bermuda (Triangle)"를 불렀으며, 특히 데뷔 후 최초로 케이블 음악 프로그램인 《M! 카운트다운》에 출연함으로써 둘째 싱글의 공식적인 활동을 마쳤다. 또한 싱글1과 싱글2를 합친 음반 판매량은 25만 장을 넘어섰다. 서태지는 2009년 6월 13일에 7집의 Live Zero Tour '04 이후로 5년 만에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이번 전국 투어의 타이틀은 "The Möbius"(뫼비우스의 띠)로,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시작해 전국 9개 도시(부산 사직 실내체육관, 대구 월드컵 경기장, 대전 무역 전시관, 인천 삼산 월드 체육관, 일산 킨텍스, 성남 실내 체육관, 안양 실내 체육관, 광주 염주 체육관 순서로)를 순회했다. 서태지는 용산 전쟁 기념관에서 처음으로 정규 8집에 실린 신곡 2곡(Replica, 아침의 눈)을 선보였고, 7월 1일 서태지 정규 8집 Seotaiji 8th Atomos가 발매되었으며 10만장에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싱글1과 싱글2에 수록된 곡들이 그대로 포함되어있어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BERMUDA [TRIANGLE]과 같은 곡은 싱글에 수록된 곡에 비해 정규 앨범에 수록된 곡의 퀄리티가 월등히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앨범 전곡 리마스터링, 부분 재녹음이 이뤄졌으며 지금까지 발매된 8개의 정규 앨범중 가장 긴 러닝타임이다. 2009년 7월 25일에 전국 투어를 마친 서태지는 2009년 8월 15일에 잠실종합운동장 내 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2009년 ETPFEST에 참가했다. 이번 ETPFEST 에는 림프 비즈킷, 나인 인치 네일즈, 킨, 피아, 검엑스 등이 참가했다. 그리고 2009년 8월 29일과 8월 30일에 열린 "The Möbius Encore"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8집 활동을 끝마친 서태지는 당분간 휴식을 취했다. 2009년 10월 2일에는 8월 15일에 열린 09 ETPFEST를 SBS에서 방영했다. 2009년 12월 2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있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 CD를 발매했다. 2010년 1월 22일~2월 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3만 5천명과 함께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2주간 한정상영으로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에서 개봉되었다. 국내 가수로는 최초의 콘서트 영상 유료상영 의 기록을 남겼으며,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2주동안 일일 최다관객수 2,138명, 전체 누적관객수 16,013명으로 국내 단관개봉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 동원스코어를 기록하였다. 2010년 2월 23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있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일반판 블루레이 및 DVD 형식으로 발매되었다. 2010년 5월 21일~6월 27일에는 2009년 8월 30일에 있었던 The Mobius Encore 공연 실황이 담긴 가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5/21~6/13)에서 개봉되었다. 기존 MBC에서 상영했던 <서태지 심포니>와는 달리 미공개 컨텐츠 였기 때문에 예매율이 높아 메가박스에서 유래없는 풀타임상영(쉬는 시간없이 9회차 내리 상영)을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지방관객들을 위해 부산 서면 메가박스(6/19~6/27)에서 연장상영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일일 최다관객수 3,578명, 전체 누적관객수 31,879명이 관람하여, 종전 서태지심포니(16,013명)가 세운 단관사상 최고 기록을 거의 더블 스코어로 다시한번 갱신하였다. 2010년 7월 16일에는 2009년 6월 13일부터 시작된 2009 Seotaiji Band Live Toue (The Mobius) 공연 실황앨범이 발매되었다. 2011년 9월 19일에는 서태지 8집 뮤직비디오를 찍은 여정을 모두 담은 DVD, 블루레이 'Seo taiji 8th Atomos The film' 가 1만개 초판한정으로 발매되었다. 2012년 7월 27일부터 7월 29일에는 영등포 CGV에서 서태지 8집:398일의 기록 (SEOTAIJI RECORD OF THE 8TH [398], 2012) 이 상영되었다. 2012년 7월 30일에 서태지 8집:398일의 기록 {SEOTAIJI RECORD OF THE 8TH (398), 2012}이 DVD&블루레이 합본 1만개 초판한정으로 발매되었다. 2012년 12월 1일부터 12월 9일 에는 20년전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CGV 영등포점 6층에 서태지 카페를 마련, 지방(대구, 광주, 부산, 제주도) 엔 커피버스를 보내 팬을 인증하는 팬분들께 아메리카노 1만잔을 제공하였다. 그와 동시에 <서태지 특별 상영 주간> 이 진행되어 서태지밴드 라이브 콘서트 ‘태지의 화', 서태지밴드 라이브 투어 ‘제로', 서태지 심포니, 서태지밴드 라이브 투어 ‘더 뫼비우스' 공연실황이 상영되었다. 2012년 12월 4일에 아이튠스 서태지 아티스트 페이지가 오픈하였고 iTunes LP가 포함된 seotaiji & 20 스페셜 에디션 음원의 프리오더가 진행, 20일에 정식 출시되었다. 2012년 12월 21일에 SEOTAIJI & 20 “우리 여기 있어요” DVD 93 마지막 축제 Re-Edit 95 다른 하늘이 열리고 Original DVD가 1만개 한정으로 발매되었다. 2013년 5월 3일부터 5월 5일에는 영등포 CGV에서 ETP FESTIVAL 08X09 SEOTAIJI가 상영되었다. 2013년 5월 10일부터 5월 12일에는 영등포 CGV에서 ETP FESTIVAL 08X09 SEOTAIJI가 추가상영되었다. 2013년 5월 28일에 ETP FESTIVAL 08X09 SEOTAIJI가 DVD&블루레이 합본으로 발매되었다. 2014년 10월 2일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에 수록된 곡이자 서태지가 작사·작곡한 노래인 소격동을 선발매했고 10일 서태지 본인이 부른 버전을 발매했다. 2014년 10월 16일에는 서태지의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의 타이틀곡인 Christmalo.win(크리스말로윈) 이 공개되었다. 또한 10월 18일에는 서태지의 9집 컴백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이는 서태지의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를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로, 선공개된 '소격동'을 포함한 신곡과 서태지의 대표곡 라이브 및 아이유, 바스코, 스윙스 등과 함께하는 다양한 합동 무대로 구성되었다. 네이버는 신곡을 포함한 3곡의 라이브와 서태지의 메시지가 담긴 특별 영상, 사전 공연 무대 등 공연 전반부를 오후 6시 30분부터 생중계하였다. 서태지 9집 타이틀곡 '크리스말로윈'의 드라마 버전 뮤직비디오도 최초로 공개되었다.  지금까지 서태지는 시나위로 1장, 서태지와 아이들로 4장, 솔로 활동으로 5장의 정규 앨범과 2장의 싱글 앨범을 발표하였다. 서태지 자신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부터 정규앨범을 계산하여 자신의 솔로 앨범은 5집, 6집 하는 식으로 부른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한국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해외의 영향력 있는 음악 장르들이었던 갱스터 랩(gangster rap), 뉴 메탈(nu metal), 랩 메탈(rap metal) 등을 선보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헤비메탈 음악에 대한 꾸준한 사랑으로 커다란 대중적, 음악적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통일 문제, 교육제도, 청소년 가출, 사전심의제도, 음악산업, 낙태 문제 등을 다룬 사회적인 가사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정규 앨범 외에도 다수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서태지는 8집에서 2개의 싱글과 하나의 앨범을 발매하는 방식으로 전곡을 타이틀곡화 했으며, 직접 만든 새로운 장르인 네이쳐 파운드(nature pound)를 도입했다. 5집 1. Maya 2. Take One 3. Take Two 4. Radio 5. Take Three 6. Take Four 7. Lord 8. Take Five 9. Take Six 6집 1. 아이템 2. 탱크 3. 오렌지 4. 인터넷전쟁 5. 대경성 7. 레고 8. 울트라매니아 9.ㄱ나니 히든트랙 - 너에게(락버전) 7집 - Issue 1. Intro 2. Heffy End 3. Nothing 4. Victim 5. DB 6. Live Wire 7. 로보트 8. Down 9. 10월 4일 10. FM 비즈니스 11. Zero 12. Outro 8집 01. Moai 02. HumanDream 03. T'ikT'ak 04. Bermuda[Triangle] 05. Juliet 06. COMA 07. 아침의눈 08. Replica 09. Moai (RMX) 10. T'ikT'ak (RMX) 11. Bermuda[Triangle] (RMX) 12. COMA (Nature) 9집 01.Intro 02.소격동 03.Chrismalo.win 04.숲 속의 파이터 05.Prison Break 06.90s ICON 07.잃어버린 08.비록(悲錄) 09.성탄절의 기적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 매니저의 무분별한 방송 스케줄 구성으로 양질의 공연을 선보이지 못한다고 판단한 서태지는 매니저와 결별하고, 2집 이후로는 각종 예능·교양 프로그램의 출연을 직접 선별하여 출연하였다. 방송사의 출연요청을 거절하는 것 역시 당시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대중의 절대적인 인기와 서태지의 프로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서태지 솔로활동 이후부터는 공연을 직접 기획·출현하는 방식 위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방송활동은 공연을 편집하여 내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존 방송프로그램의 게스트 출연보다는 컴백콘서트, ETP FESTIVAL, 전국투어 콘서트 등의 단독 특집 프로그램을 통하여 출연하는 편이며, 활동기마다 사전녹화방식을 통하여 방송 3사의 가요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또한, 관련 서적과 같은 의미로 서태지를 분석한 프로그램이 많다. 다음 방송 목록 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각종 음악 프로그램과 시상식은 제외했다. 서태지가 직접 기획하지 않은 콘서트에는 '참가'라고 표시하였다. 그 외 모든 공연은 서태지가 직접 기획·출연한 단독 콘서트이다. ETPFEST, 위성콘서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콘서트, 심포니 협연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공연으로 한국 공연문화 및 대중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집은 다른 활동기간보다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 빈도가 높고, 특히 단발성 출연이 대다수이다. 주말에는 방송 3사 프로그램에 모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할 정도로 '소비'되었다. 6집 솔로 활동부터는 주로 MBC를 통해 컴백 스페셜 등을 출연했으며, 각종 음악 프로그램은 사전녹화 방식으로 방영되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의 MTV가 개국하면서, 음악문화에서 뮤직비디오란 새로운 장르가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날로 발전하는 미국의 뮤직비디오 문화와 비교하면 뮤직비디오란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노래방에서 사용하는 영상음악만이 존재했다. 방송과 가수들은 음악의 한 문화로서 뮤직비디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개념도 미비했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이제는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서 미국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 가요계에서 기획사 시스템은 가수 개인의 의사나 희망보다는 매니저와 기획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서태지 역시 데뷔 당시 이 악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스터 테이프를 들고 기획사들을 전전했고, 기획자 유대영을 만나 앨범 제작과 방송 데뷔를 할 수 있었다. 데뷔 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큰 인기를 누렸고, 기획사는 최대한 많은 이익을 위해 엄청난 스케줄을 요구하였다. 훗날 서태지는 이때 음악을 만들 시간이 너무나 적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힘들었고, 이것이 팀 해체의 한 원인이었다고 고백하였다. 데뷔 3개월 후 서태지는 결국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줄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후 요요기획을 설립하여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도 서태지는 특정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가 아닌 자신만의 기획사 ‘서태지 컴퍼니’를 차려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 저작권, 초상권이라는 단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저작권 분쟁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사건의 출발은 전 매니저와 결별을 하기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을 놓고 매니저가 서태지의 동의 없이 한 비디오 제작자와 판권계약을 했던 일에서 출발했다. 서태지는 서태지대로 자신이 고른 제작회사와 판권계약을 마친 상태였지만 이 때문에 동시에 두 곳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 외에도 몇몇 프로덕션에서 불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이미 시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태지는 이들을 고소하고, 뮤직비디오에 대한 저작권을 들어 서태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끝내 이겼다. 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써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 나갔다. 서태지는 예전부터 아티스트가 기획사나 음반저작권협회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개진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독립 기획사를 차려 활동 중이며, 2006년부터는 음악저작권협회를 상대로 저작권료 반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서태지는 거리패션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1990년대 패션유행을 선도했다. 1집 〈난 알아요〉에서는 밝은 랩댄스곡에 어울리도록 상표를 떼지 않은 원색 의상과 컬러풀한 티셔츠를 착용한 스쿨룩 패션을 선보였고 2집 〈하여가〉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레게와 힙합에 맞춰 힙합바지와 레게머리를 했다. 힙합바지는 방송불가 판정을 받아 다른 스타일로 금세 바꿔야 했지만, 레게머리는 청소년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00년에 서태지가 귀국할때 입고 들어온 삼지창 흑백무늬의 옷은 명절 전후 경향의 옷가게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서태지 패션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유니섹스 디자인이라는 점과 비만 등으로 열등감을 갖기 쉬운 몸매를 드러내지 않아 몸매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 영향을 끼치는 등의 사회적 요인 또한 작용하였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서태지는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데뷔 이후 신세대들에게 받은 열광적인 지지와 영향력은 기존 기성세대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다. 언론들은 '왜 하필 서태지인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서적·시사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법들로 '서태지 신드롬'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서태지를 분석한 서적들은 4집 이후 본격적으로 발행됐다.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1월 31일 이후 2000년 컴백 이전까지 서적 출간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가사집, 화보, 악보집, 위인전, 대중가요사 관련 서적 등은 목록에서 제외됐다. 서태지는 일명 '서태지의 자퇴서'가 인터넷에 떠도는 것에 대해 그 글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며, 언론에 보도된 것은 오보라고 밝혔다. 서태지는 병역이 면제되었다. 이 일로 인해 세간에는 서태지가 성격장애로 병역이 면제된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 서태지가 병역이 면제된 사유는 위천공이다. 위천공은 서태지의 가족력이며 실제로도 서태지의 6촌형인 신해철이 이 사유로 사망했다. 신비주의는 서태지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내가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TV 출연 등을 잘 하지 않는다. 다만, 가수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음반 제작, 공연은 꾸준히 하는데 평소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신해철이 진행을 맡은 MBC 에브리원의 《스페셜 에디션》에서 서태지는 자신과 신해철이 6촌 친척관계임을 밝혔다. 이 사실은 서태지가 처음 데뷔했을때 알려졌으나, 이후 신해철과 둘이 같이 방송출연을 하지 않으면서 잊혀졌다가 해당방송을 통해 다시 알려진 것이다. 방송에서 서태지와 신해철은 실제로는 같이 스키장을 다니는 등 개인적으로 각별하고 친근한 사이임을 과시했다. 한편 2014년 10월 24일 서태지 곡 리메이크 미션으로 치루어진 엠넷 《슈퍼스타K 6》 생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심장정지로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는 신해철의 쾌유를 빌며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신해철은 2014년 10월 27일 사망하였고, 서태지는 이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본인의 공식 사이트에 추도문을 직접 올렸다. 그리고, 같은 달 31일 치러진 발인식 및 영결식에서 서태지는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15주년 기념앨범 - [&] Seotaiji 15th Anniversary》가 2007년 11월 29일 발매를 앞두고 11월 초 예약판매를 시작하였는데 9만 5천원의 고가에도 조기에 품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1만 5천장 한정판인 탓에 모든 인터넷 음반구매사이트의 예약이 폭주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ETP Shop 판매물량도 홈페이지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다운되어 판매가 취소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결국 추첨으로 판매하게 되었다. 또한, 앨범발매 취지와는 다르게 인터넷상에서 20만 원 이상의 고가의 가격으로 불공정 거래가 발생하였고 앨범판매 사기사건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 팬들이 한정판임에도 감상용, 소장용으로 이중구매를 하는 경우도 있어 많은 팬들이 앨범 구매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앨범 조기품절 이후 일반판 발매를 둘러싸고 팬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등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생하여 결국 서태지컴퍼니 측에서 15주년 기념음반의 음원이 모두 수록된 1~7집 리마스터링판 재발매를 결정하게 되었다. 2009년 4월 3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2집, 2009년 5월 22일 서태지와 아이들 3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을 재발매했다. 2009년 9월 29일에는 5집이자 첫 솔로 앨범인 Seo Tai Ji가 재발매되었으며, 2009년 10월 29일에는 6집인 Seo Tai Ji 6가 재발매되었다. 빼빼로데이이기도 한 11월 11일에는 감성코어인 7집 Seotaiji 7th Issue가 재발매되었다. 서태지는 공식 팬클럽을 두지 않는다. 서태지 팬들은 일반적으로 서태지 매니아로 통칭되고, 서태지닷컴 공식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생적인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통하여 주로 소통한다. 서태지 매니아들은 어느 사회문화단체 못지않게 대중문화 및 사회이슈에 관심이 있고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 오고 있다. 1996년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후, 음악순위제 폐지운동, 저작권 지키기 등 음악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운동을 활발히 해왔다. 2011년 4월 21일 이지아와 서태지의 결혼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이지아는 변호사 4명을 선임, 서태지를 상대로 위자료 및 재산분할청구 소송을 벌였다. 4월 30일 서태지가 직접 입장 표명을 한 뒤 이지아는 소송을 취하했으나 5월 17일 서태지가 소취하 거부를 선언하자, 7월 29일 향후 소송, 신청, 진정, 고소, 고발 기타 일체의 가사 및 민·형사상 책임을 묻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으며, 어느 일방이 혼인생활을 위주로 한 출판을 하는 경우 위반한 자는 상대방에게 위약금 2억원을 지급한다는 합의를 통해 이 소송은 취하되었으며, 2006년 1월 23일, 이지아는 미국 로스엔젤레스 상급법원에 서태지를 상대로 한 이혼 청구를 했다. 서태지컴퍼니에 따르면, '이에 8월 9일부로 양측의 부부관계는 법적으로 종결됐다'라고 밝혔다. 이지아와 서태지의 혼인 사실은 큰 사회적 파장을 가져왔으며, 주요 방송 뉴스에서도 이 내용을 중요하게 다뤘고, 연예인들의 공인논란에 대해 다시 한번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서태지는 2008년《BERMUDA(Triangle)》 뮤직비디오의 히로인으로 낙점 된 여배우 이은성과 첫 인연을 맺었다. 서태지는 이전에 김종서가 출연했던 SBS 드라마 《행복합니다》를 통해 이은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이은성도 서태지에 좋은 감정을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은 16세의 나이차이를 뛰어 넘어 2009년부터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2013년 5월 15일 서태지는 이은성과 결혼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고, 결혼 1년 3개월여만인 2014년 8월 27일에 첫 딸을 얻었다. 현재 이은성은 연예계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95년 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도 본 사건을 "광주인민봉기(光州人民蜂起)"로 부르며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로 《꽃잎》,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등이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1979년 자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고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통제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같은 해 4월 14일에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대한민국 내의 정보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같은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부마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였고, 공수부대 같은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부터 5월 18일 직전까지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5월 18일 16시 이후로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에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다음에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한민국 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로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 1996년 자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대법원이 1997년에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로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11월 7일에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두환은 1980년 2월에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에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에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5월 11일에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5월 13일에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같은 날에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로 말미암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에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였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에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자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는 같은 날 새벽 2시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게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에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1980년 3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 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하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시 자로 2군사령관의 강조 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같은 지침으로 인해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더욱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고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5월 21일에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됐다. 5월 15일 자 광주에서는 오후 4시에 대학생 3만여 명이 도청 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학생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을 내리면 16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에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시위 방침을 시달했다.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보안사령부는 오후 10시 경에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날 자정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휴교령·보도검열강화·정치활동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 검속했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18일 오전에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에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을 가한 사례들이 이러하다.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5월 21일 오전에 전남도청과 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 대표는 21일 오전에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에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시민군은 21일 저녁에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에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다음은 그 담화문의 전문이다.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22일 이후로 광주는 군인들게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 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 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대한민국 측은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미국은 5월 18일 오전에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에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에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에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 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한미대사관으로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부터 였다. 이 때는 이미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루어진 다음에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다. 미국은 이후에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국은 5월 21일 이후에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항목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에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인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 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은 자신은 광주사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였으며, 이 일을 벌인 신군부를 두고두고 비난하였다.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 글라이스틴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는 첫 회동을 5월 23일에 두었다. 글라이스틴은 대한민국 측에 5월 17일 자 계엄령 확대 정책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검찰은 1994년에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에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2001년 당시에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나이 가장 어린 사망자는 4세 가량의 남자 어린이로서 1980년 5월 27일 자로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에 계엄군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드러나, 5.18 유족회 측이 학살자들에게 단호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에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5년에 1980년 당시의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는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 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한다. 5·18에서 3천여명에 달하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으로 말미암아 폭행 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됐다. 연행자는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에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5·18과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하여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에게서 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뒤에도 오랜 시일 동안에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뒤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라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말했다.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에 연행됐었거나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 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 박탈, 복종 강요, 지각 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 연행자는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피해자들의 55.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고 있으며, 자살자 비율은 10.4%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으로 말미암아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7월 4일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에 5공 청문회를 거치고 국회에서 1995년 12월 21일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 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에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을 심의·의결하여 5·18 진압 관련자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 5개와 국무총리 표창 4개를 취소하였다. 과거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훈·포장 68점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표창은 관련법이 없어서 대통령령인 '정부표창규정'의 개정을 통해 취소 근거를 마련하였다.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을 시행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리면서 보도검열 위반 시 폐간 조치하겠다고 위협했다. 5·18 민주화 운동 이후 5월 20일에 동아일보, 동아방송, 중앙일보, 경향신문, 문화방송, 합동통신 등의 양심적 언론인들은 사실 보도를 요청했다. 조선일보는 5월 21일에 5·18 사실 보도, 보도 검열 전면 철폐를 요구하면서 제작 거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하지 못하게 되자,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사표를 쓰고 이를 약 2만 장 인쇄하여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 언론인을 초청, 현지 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유도'한다는 명분과 목적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합계 49명을 2처 2과장 중령 이용린이 인솔해 1980년 5월 24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광주 일원 소요 현장을 취재하도록 했고,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합계 64명을 4일에 걸쳐 호텔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미국은 5·18 당시에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이 5·18 당시의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특전사의 지나친 반응이 비극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관리들은 그와는 반대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광주의 라디오 방송이 "미국 측이 특전사의 광주 파견을 승인했다."라고 보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역정보 행위를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고, 이를 정식으로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취소하지 않았다. 또한 보안사의 조종을 받는 대한민국 언론은 미국 관리의 항의에도 "미국에서 전두환을 승인했다."라는 보도를 쏟아내었다. 이러한 신군부에 의한 왜곡 보도는 대한민국 내 반미 감정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2012년 5월 20일, 광주KBS·광주MBC는 32년 만에 5·18 왜곡보도 반성문을 썼다. 이들은 '32년 만에 쓰는 반성문'에서 "시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 때 당시 우리는 언론이 아니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무릎을 꿇고 진실을 알리지 못했던 저희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밝혔다. 김영삼은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라고 하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5·18 민주화 운동의 교훈을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 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이라고 규정하고, "광주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만의 자랑이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믿고 숭상하는 전 세계인의 자랑이며 인간승리의 대서사시"라고 평가했다. 노무현은 5·18 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라고 연설하며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높이 평가했다.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했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2008년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제28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참가해 기념사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8년 전 오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 영령들 앞에 온 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그 날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시는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 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 사회를 이루는 데 큰 초석이 됐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는 "5·18의 민주화 정신은 많은 국가들에게 표본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며 광주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밝혔다. 레이건 정권 당시 리처드 앨런 전 미국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5·18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한민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 왜곡은 놀라울 정도라고 밝혔다. 한편 전두환과 5공의 핵심인사들은 2016년 6월 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5·18 당시 광주 지역 계엄사령관, 2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계엄 상황의 군 명령 체계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나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의 월권 행위는 있을 수 없다며 5·18에 대한 신군부의 개입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2002년 이래로 극우 성향의 논객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은 올인코리아, 코나스넷 등의 극우단체들을 통해 선전됐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극우 성향의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13년 5월 15일, 서울중앙지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보낸 북한의 특수부대였다는 글을 쓴 지만원에게 사자명예훼손 유죄를 선고하면서 "지만원이 인용한 탈북자들의 수기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일성의 공모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담고 있지 않으며,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라고 판단했다.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북한 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2004부터 2006년까지 한나라당 대표로서 지낸 박근혜는 2007년 8월에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라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자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온 국민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민주 영령들"이라고 평가했다. 전두환 역시 2016년 6월 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대부분의 군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보안사령관으로서 5·18 시기 조선인민군 개입에 대한 정보 보고는 전혀 없었고 그러한 증거도 없었다며 조선인민군 개입설은 지만원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 등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0년 당시에 11공수여단 소속 병사였던 이경남 목사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란 제목의 수기를 통해 "80년 5월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는 법원의 최종 기록과는 달리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 장갑차가 급히 퇴각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쳐 죽게 한 것이 계기가 됐다."라고 밝혔다.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 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 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는 "젊은 여자,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만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떠올랐다."라고 회고했다.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 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으면 우리의 민주화 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 현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라고 증언을 했다. 중앙일보 광주 주재 기자 장재열은 5·18 당시 작성한 수첩에서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집까지 쫓아가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졌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5·18 당시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서 지낸 서청원은 "5·18 민중항쟁이 정치에 입문(민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라며 "당시 신문에 5·18 기사가 나가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당시 취재기자들과 함께 책을 발간했다."라고 말했다. 종합편성채널인 JTBC가 개국하면서, 1980년 당시 TBC 동양방송이 "80년 광주"라는 미공개 단독 영상을 방송했다.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 세계에 타전했다. 프랑스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홍콩 특파원인 마쓰나가 세이타로는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종반에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지도자들 마음 속에 광주항쟁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AP 통신 기자인 샘 제임슨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인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있었던 육박전을 연상하게 한다."라면서 "육군 병사들이 착검된 총을 가지고 인간을 도륙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500년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미국의 선 지의 서울 특파원인 블레들리 마틴 볼티모어는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 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칭 등 사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했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 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 시카고 트리뷴 특파원으로 수십년 동안 한국을 지켜본 외신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대한민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라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독일의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티아스 라이는 "나는 외국인이지만 역사의 한복판에서 고통받았던 광주 시민을 만났을 때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라며 "세계인들도 나처럼 5·18 역사를 배우면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상주 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인 기자인 노먼 소프는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AWSJ) 기자로 근무하던 중 5·18 민주화 운동을 겪었다. 그는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 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라며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 운동 때 대한민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대한민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또한 "외국 잡지나 신문을 대한민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주거 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1980년 9월에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의 표시로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하였다. AP 통신 기자인 테리 앤더슨(당시 LA타임스의 일본 지부 총국장)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 독일 남부독일신문 기자인 히일셔는 "5·18 당시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 부상자들을 수용할 병실이 부족했다."라고 회고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물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매점매석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대동세상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라고 강연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미래 사회에 자유라는 빛을 던져준 사건'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지렛대였으며, 그 에너지는 전 세계에 강하게 퍼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005년 자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에 보도된 논평에서 "광주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들은 독재로부터 탈출과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을 연관짓게 됐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에드워드 베이커 전 미국 하버드대 엔칭 연구소 부소장도 2005년 12월 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독재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전환점'으로 5·18을 기술하기도 했다.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태국의 시민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앙카나 닐라파이지트는 "힘 없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주는 감동은 믿기지 않을 만큼이었다."라며 "5·18과 이후 광주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례"라고 밝혔다. 광주인권상의 2005년 수상자인 와르다 하피즈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 사무총장은 "5·18 이후 대한민국의 인권발전은 아시아 인권활동가의 표본이자 목표"라고 높이 평가했다. 광주인권상의 2003년 수상자인 단데니야 G. 자얀티 스리랑카 실종자 기념회 대표는 "나에게 5·18은 인권투쟁을 위한 훌륭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치켜세웠다. 바울 슈나이스 목사는 "광주는 깨어 있는 양심과 열린 눈으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경고인 동시에 격려이며, 폭력, 전쟁,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뭉쳤던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라며 "이런 광주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수찌 여사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은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라면서 5·18의 정신과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에도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다.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1984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문지는 광주였다. 교황은 경호를 맡은 청와대 경호팀의 만류에도 5·18의 상징 장소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돌아 미사 장소였던 광주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은 '용서'라는 주제의 미사를 통해 "광주시민과 같은 특별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다."라며 광주시민들을 보듬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했다. 검찰은 1995년 7월에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라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12월에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인용 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97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지 않고 있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준 천주교 신부에게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피고인들의 정권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 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 질서 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적시했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 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정지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2011년 5월 25일에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편철 4,271권, 8,580,904페이지, 네거티브 필름 2,017컷과 사진 1,733장, 영상 65작품, 1,471명의 증언, 유품 278점, 연구물 411개, 예술작품 519개 등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관련 기록물은 다음의 9개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여고생이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적은 일기장은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일기를 적은 인물은 이를 유네스코 등재 위원회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강운태 광주시장은 2011년 9월 4일에 기자회견을 두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31년 만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쾌거."라며 "5·18 민주화 운동이 헌법전문에 명시되도록 추진하겠다."라고 밝혔다. 앞으로 시민과 해외 선교사 등을 대상으로 자료 수집 운동을 펼쳐 수집된 자료를 추가 등재할 계획이며, 이와 함께 광주가톨릭센터에 5·18 아카이브의 구축을 통한 기록물 디지털화, 기록물의 국가문화재 지정과 또한 5·18의 헌법전문 명시, 유네스코와 협력하여 인권평화상의 제정 등이 추진된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1990년 제정 뒤, 2000년에 법률 제6122호까지 4차례 개정되었다. 유족의 범위와 보상지원을 위한 위원회 설치, 보상금과 각종 지원금 등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법률 제6650호)로 2002년 1월 26일에 제정된 뒤, 2004년에 개정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유공자와 그 유가족에게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양로지원, 양육지원 및 기타 지원을 실시한다.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기념 추모사업을 실시하며 국립 5·18묘지를 설치한다. 5·18 당시에 광주대동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의 대열에 참여해 총상을 입었던 윤기권은 광주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으며, 정신질환 치료비 조로 보상금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91년 1월에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을 수령하였고, 노모에게 광주 보상금을 건넨 뒤,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영국 대사관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했다. 지인들은 "윤씨가 사람들의 긴 침묵에 괴로워했다."라면서 5월 항쟁의 큰 충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한 고등학생에게 11년이 지난 오늘 '월북'이라는 '돌연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5·18 현장에 있었던 많은 증인은 진압군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등의 증언을 하고 있다. 술 취한 군인이 연행자를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1980년 5월 22일쯤에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은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부상자는 헬기로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몇 시간 뒤에 병원장에게서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 김순현 준장은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자신에게 대들었으며 술 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 5·18 당시의 '여학생 유방 난자'라는 유언비어와 관련해, 5월 20일 밤과 5월 21일 오전의 가두방송을 주도하며 관련 내용을 방송했던 전옥주는 민화위에 출석해 "여학생의 유방이 찔렸다는 말이 유언비어라지만, 나는 여자의 가슴이 칼에 찔려 유방이 드러난 것을 봤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국회 광주 민주화 운동 특위는 1989년 1월 16일 항쟁 당시에 부상 시민들을 수술했던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과 종합병원에 대한 문서 검증을 해 항쟁 초기 단계에 공수부대원의 대검과 진압봉에 의해 자상과 타박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확인했다. 그 결과 전남대 흉부 외과의사였던 오봉석 씨의 증언을 확인하였다. 에도 막부 에도 막부() 또는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서 세 번째로 나타난 최후의 막부이다.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음력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 (게이오 3년 음력 10월 14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면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에도 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을 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통신사를 12회 초청하여 두 세기 동안 양국간의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에도 시대 말기, 막부 타도 운동이 융성하였던 격동의 시기는 막말()이라 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겠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나타냈고,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토벌군(서군)을 창설하게 된다. 서군은 명분상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삼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군을 창설한다. 1600년 서군과 동군 총 10만의 병력이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펼치게 되는데(세키가하라 전투), 이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항복함으로써 서군은 대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1603년 3월 24일 일본의 패권을 완전히 잡은 도쿠가와는 에도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에도 막부는 설립하였지만 도쿠가와에게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라는 걸림돌이 남아있었다. 이에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를 공격하였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목숨과 영지는 보장하지만 막부의 지시를 받드는 것을 요구하여 전쟁은 끝나는 듯 했으나 오사카 성에 잔류하던 히데요시의 가신들(낭인)은 승복할 수 없다며 무기와 낭인들을 계속 모아 다시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내의 낭인들을 내칠것을 히데요리에게 요구하였으나 낭인들을 통제하지 못한 히데요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실 오센은 오사카 성에서 도망을 시키고 요도도노와 함께 폭탄을 폭발시켜 자진하며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된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세가지로 분류된다. ┌─ 감정봉행(勘定奉行) 쇼군─(다이로)─로주(老中)-와카도시요리(若年寄)─┼─ 마치부교(町奉行) 에도 막부 시기에 태평 무드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 등 상품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경제 발전의 혜택은 기존의 사무라이 계층보다는 상인 계층, 즉 조닌들이 차지하였다.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에 따라 무사에 돈을 주고 무사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에도막부에서는 교역선에 슈인장을 부여하여 조닌들은 동남아에 진출하여 일본인들의 마을을 만들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대(1680~1709년)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1688~1703년)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겐로쿠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재위:1709~12년)는 겐로쿠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쇼토쿠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겐로쿠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겐로쿠와 쇼토쿠(1711~15년) 시대의 짧은 호황을 지나면서 견고했던 막부 체제는 점차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농민의 궁핍화와 거듭되는 재해는 농민폭동을 빈발하게 하여 바쿠한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도 토지매매 금지령이 유명무실해져 자작농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노부 대(1709~12년)에 겐로쿠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기이 도쿠가와 씨 출신으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45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로의 복귀를 표방하면서 절검, 상무를 강조하면서 상품경제와 조닌을 억제하는 개혁(교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농민봉기 즉 잇키가 빈발하였다. 18세기 후반 들어 다시 관정개혁을 실시하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 막부 정권은 점차 동요하게 된다. 먼저 막부정권과 각 지역 한[藩]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에 경제난을 모면하고자 조닌과 농민의 이익을 권력층이 차지하는 전매제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민중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에는 다누마 오키쓰구 등 다누마 씨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산케 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다누마 씨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에도 막부 정권 시기에는 그 이전의 사무라이 집권시대와 많은 차이를 보였다. 에도에 설치된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봉건 영주)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하였고, 전국 각지의 군사적 요충지와 상업지역, 무역항구 등을 직할지로 삼아 전 열도를 중앙에서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 막부 정권을 '중앙집권적 봉건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은 《대일본사》(大日本史)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를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가 번성하였다. 오다이노가타 ┬ 초대 이에야스 ┬ 노부야스 │ ├ 가메히메 ─ 다다아키라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집필한 중국의 대표적 연의(고전역사소설)로,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책이다. 서진(西晉)의 진수가 집필한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취하여 쓴 작품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하며, 영미권에서는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라는 영문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하는 《삼국지연의》는 명 가정 1년인 1522년에 판각한 최초 판본은 “가정본(嘉靖本)”, 혹은 나관중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이라 하며, 명나라 때 전해지던 《삼국지연의》의 읽기 불편한 점을 청나라 때 모종강이 읽기 쉽게 다시 엮은 “모본(毛本)”이 있다. 이야기는 184년(후한 영제 중평(中平) 원년)으로부터 280년(진 무제 태강(泰康) 원년)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국지 연의는 기본적으로 유비가 주인공이며, 모든 에피소드는 유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당시는, 중국 인구사에 따르면 한나라 중기 5600만명이었던 인구가 한나라 말 극심한 혼란기에 3000만명으로 줄었으며, 삼국지 시대에는 1600만명으로 인구가 급감한, 전란으로 인한 참담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등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제갈량은 후대 독자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삼국지연의》는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과 함께 중국 4대 기서로 꼽힌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도 《삼국지연의》는 인기가 대단히 많은데 대한민국에서는 예로부터 '중국 = 삼국지'로 등식화되었으며, 일본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가 이를 만화로 각색하고, 총47화의 애니메이션까지 제작하였다. 왕부림 감독이 제작한 삼국연의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이는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삼국지와 더불어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NHK에서 제작한 인형극 삼국지도 볼만한 작품이다. 최근에는 삼국지연의를 패러디한 애니메이션 강철 삼국지도 나왔는데, 이는 오나라의 관점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예를 들면 만화 《삼국지 장군전》 등). 이문열 등 대한민국의 많은 소설가가 《삼국지연의》를 번역했으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적대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당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중화민국에서 원본을 가져왔다. 그러나 중화민국에서 가져온 그 원본은 나본을 각색한 모본으로서 제대로 된 원본 《삼국지연의》가 아니었고, 지명이나 인명 등에서의 오류도 심각했다. 그러나 1992년 이래, 한·중(중화인민공화국|중공) 수교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삼국지연의》 원문 문서가 대거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 그로 인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문서를 비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본을 번역한 번역본 역시 대한민국 시장에 등장하게 되었다. (일례로, 인민문학출판사의 삼국지연의가 황석영의 번역본 검증에 창비사에서 사용됨) 200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북경휘황동화공사와 일본의 퓨처 플래닛의 합작으로 애니메이션 최강무장전 삼국연의가 제작되어 CCTV에서 방영되었는데, 원작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일본 TV오사카에서도 방영되었다. 나관중본 계열 현대어역 모종강본 계열 현대어역 요시카와 에이지본 계열 기타 계열 만화 《삼국지연의》의 총 등장인물의 수는 1233명이다. 삼국지연의는 역사 소설(통속연의란 제목 자체가 이런 뜻을 담고 있음)로서 역사에는 없는 가공의 설정들을 많이 등장시켰다. 그 예로, 소설의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결의형제(도원결의)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실제 삼국지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을 나관중의 창작에 의해 만들어서 등장시킨 가공의 인물들이 존재한다. 나관중은 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이러한 가공의 인물들을 소설에 추가했다. 이 중에는 관색과 같이 삼국지연의 이전의 민담 등에 등장하는 가공인물들을 나관중이 채택해서 투입한 사례도 있다. 184년 - 황건적의 난.발발. 도원결의 189년 - 후한 영제의 사망. 십상시의 난 190년 - 반동탁 연합군 결성. 한 왕조, 동탁에 의해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 192년 - 연환지계. 여포, 동탁을 살해 200년 - 관도 대전 202년 - 강유 출생 207년 - 삼고초려 208년 - 적벽 대전 219년 - 유비의 한중왕 등극. 관우의 사망 220년 - 조조의 사망. 후한의 멸망. 위나라의 성립 221년 - 촉한 성립 - 장비 사망 222년 - 이릉 전투 223년 - 유비의 사망. 제갈량의 남만 정벌 227년 - 출사표. 제갈량의 북벌시작 229년 - 손권이 황제가 됨. 오나라의 성립 234년 - 오장원 전투. 제갈량의 사망 263년 - 촉나라 멸망 265년 - 위나라 멸망. 진나라(서진)의 성립 280년 - 오나라 멸망. 삼국 통일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기대승은 삼국지 연의에 대해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였다. 오귀스트 콩트 오귀스트 콩트(, 1798년 2월 19일 ~ 1857년 9월 5일)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다. 오귀스트 콩트는 1798년 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막바지에 태어나 프랑스의 정치적인 급변이 계속되던 혼란의 시기에 살았다. 프랑스는 그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혼란은 더해져 가고 있었다. 콩트는 이러한 시기를 살았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안정을 이루고 개선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에꼴 폴리테크니크(당시의 엘리트 기술학교)를 그만둔 후 당시의 저명한 연구자인 앙리 드 생시몽과 교류하였으며, 그와 함께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론보다는 사회를 개선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더 비중을 두는 생시몽과 갈등하였으며 결국 결별하였다. 콩트는 이후 자신의 저작인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하는 데 주력하고 ‘사회학’의 원리들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그다지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의도한 모든 과학의 통합은 지나치게 큰 야망으로 생각되었고 따라서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결국 학계에서 고립된 콩트는 자신의 후기저작인 《실증정치체계》에서 과학보다는 종교적인 색채의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류교’를 만들고 스스로 사제가 되었다. 즉, 종교의 대체물로서 실증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전과 매우 대비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생시몽 유사 종교적 속성을 비난하였으며 그러한 이유로 생시몽과 결별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학문 내에서도 모순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였으나 그가 사회학을 창시하고 후대의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콩트의 대표적 저서인 실증철학 강의를 중심으로 본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콩트는 생시몽과 결별한 후 자신의 대표저작인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한다. 『실증철학강의』는 콩트 사회학의 정수로 그의 사회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콩트는 이 저작에서 사회학적 이론의 원칙, 실증주의적 연구에 대한 방법론, 사회 진보의 단계와 법칙, 사회학적인 연구 대상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사회물리학 : 자연현상에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처럼 사회에도 그런 법칙이 있음 2)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 : 사회는 어느 한 부분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는 유기적 전체 콩트는 당시 아이작 뉴턴에 의해 일어난 과학혁명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는 뉴턴(만유인력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자연법칙에 종속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시키려 했다. 그는 관찰에 기초하여 사회를 연구하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을 사회학적 이론의 전개(관찰을 통해 사회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히는 것)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사회학 방법론과는 동 떨어진 것으로, 그는 단순히 사회학적 사실들에 대한 인과적인 연구를 원한 것이 아니라, 그 인과 관계들을 통해서 사회의 궁극적인 속성을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콩트는 관찰에 기초하여 사회학적인 원리와 법칙을 발견하려 하였고 이것을 실증주의라고 불렀다. 실증주의라는 단어는 현대에 와서 경험주의로 오독되는 경우가 많은데 콩트의 실증주의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단순히 현상을 관찰하는 데 그치는 조야한 경험주의를 비판하면서 “모든 이론이 관찰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면, 모든 현상도 이론에 기초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창하는 실증주의가 단순히 경험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법칙의 발견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현실을 관찰하는 방법론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콩트에게 사회학의 목적은 추상적인 이론적 원칙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단 사회학이 이론과학으로서 잘 정립되고 나면 그 법칙들은 사회세계를 개선하는 도구나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 사회의 조직과 변동에 관한 법칙은 다양한 새로운 사회적 제도들을 창출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 콩트는 사회적 법칙, 원리를 발견하려는 사회물리학의 연구 방법으로 체계적인 3개의 방법론(또는 4개)을 제시한다. 이것은 사회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관찰, 실험, 비교 또는 역사적 분석이 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말한 바 있듯이 관찰은 단순히 현실의 사회적 사실을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앞서 콩트는 이러한 것을 조야한 경험주의라고 비판했다는 것도 언급했었다. 콩트는 관찰에 대해 “관찰은 현상의 동적법칙과 정적법칙에 종속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론적 뒷받침이 없는 경험적 사실들의 관찰은 과학의 발전에서 무용한 것으로 증명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관찰이란 현실의 사실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적인 법칙관계를 밝혀내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콩트는 과학적 방법론인 실험을 사회학적인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실험이라는 인위적인 방법은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로 인해 사회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콩트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그는 인위적 실험 대신 자연적 실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콩트는 자연적 실험에 대해 “현상의 규칙적인 과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간섭받을 때 언제나 이루어진다.”라고 쓰고 있다. 자연적 실험의 대표적인 예는 생리학의 병리적 현상 관찰처럼 사회적 병리현상의 관찰, 즉 사회적 일탈현상의 관찰을 들 수 있다. 사회물리학자들 역시 병리학적 사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회의 정상적 과정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콩트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비교와 역사적 분석이다. 비교란 간단히 말해서 사회들의 비교를 통해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역시나 생물학적인 방법을 차용한 것으로 콩트는 다양한 형태를 가진 사회형태들의 비교를 통해 각 사회들의 작동원리와 근본적인 속성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적 분석이란 사실, 비교의 방법 중 하나로(현재와 과거에 대한 비교), 시공간적 측면에서 사회를 비교하는 것이며, 그의 역사적 ‘삼단계 법칙’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띤다. 콩트의 사회학은 여러 가지 과학 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기체에 대한 생물학적인 연구가 사회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학은 근본적으로 유기체적인 사회조직에 관한 연구로서, 사회조직이라는 이 연구대상은 유기체가 나뉠 수 없는 것처럼 결코 나뉠 수 없는 것이고 부분에 대한 연구는 전체의 맥락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콩트는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학적 구조를 세웠다. 그는 “사회물리학에서 질서의 개념과 진보의 개념은 생물학의 조직 개념과 생명 개념처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개념들은 실로 과학적 견지에서 생물학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사회를 유기체로 보는 자신의 사회관과 자신의 사회학적 연구 대상들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앞서 말한 사회물리학의 두 개 개념들 중 질서에 속하는 것이 바로 사회정학이다. 사회정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 그들 간의 질서에 대한 법칙을 연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정학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의 전제조건에 관한 연구로 질서에 대한 관심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조건’간의 조화에 관한이론이다.” 그는 사회의 ‘진정한’ 구성요소를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보았다. 그가 개인이 아닌 가족을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로 본 것은 가족이 ‘사회유기체의 다양한 특성들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이 개인이 가지는 이기심을 중화시키고 사회로 통합될 수 있도록 도운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인은 절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기본적인 구성단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콩트의 사회정학에서 중요한 점은 사회의 통합과 질서에 관련된 법칙, 조건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회의 하부구조들이 단순한 상태에서 좀 더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경향은 사회기능의 분리를 가져오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총합적, 일반적 정신을 소멸, 제한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의 각 기관들은 점점 더 전문화, 분화되지만, 동시에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통합을 유지 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그러한가? 콩트의 설명을 살펴보자. 그는 사회적 기능의 분화가 불러오는 전문화가 오히려 사회구조들 간의 상호의존을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분업의 예를 살펴보자, 분업을 통해 물건을 생산하는 경우 각 노동은 분리되고 전문화된다. 이러한 기능분리는 각 분업참가자들 간의 이질성을 강화시키지만 동시에 의존성을 심화시킨다. 각 노동이 합쳐지지 않는 이상 개별노동은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콩트는 통합을 이루는 다른 두 가지에도 주목했다. 하나는 각 부분 간의 교환과 통합을 유도하는 지배력과 권위의 집중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간의 보편적 합의였다. 그는 사회 성원들 간에 언어와 종교 같은 공통된 지적관념과 도덕성이 존재함으로써 통합을 이루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들이 사회분화 현상을 상쇄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보았다. 후에 논의하게 되겠지만 그는 사회를 지배하는 역사적 지식체계를 세 가지로 구분했으며 그중에서도 자신의 실증주의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지식체계라고 보았다. 1) 체계의 각 부분들의 상호의존성 2) 부분들간의 교환을 조정하는 권위의 집중화 3) 성원들 사이의 공통의 도덕성 두 번째 연구대상은 진보의 개념에 관한 것으로 콩트는 이를 사회동학이라고 불렀다. 사회동학은 계승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계승의 법칙이란 인간문명의 주요 변동이 잇달아 일어나는 추상적 질서를 뜻한다. 콩트는 이러한 계승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3단계 지식, 사고 체계에 상응하는 사회발전의 3단계 법칙(신학적`군사적- 형이상학적`법적- 실증적 단계로 이어지는)을 정립했다. 이러한 삼단계법칙에는 몇 가지 유의해서 볼 점들이 있다. 첫 번째, 각 단계는 진화적이다. 즉, 각 단계의 사회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각 단계의 조건들이 성숙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변화가 갑자기 일어나거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번째, 각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의 단계에는 전단계의 요소들과 다음단계의 요소들이 서로 갈등하면서 혼란을 일으킨다. 콩트는 발전의 과정을 순탄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중간단계에서 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이 살던 시기를 이러한 혼란의 시기로 인식한 듯 보이며 자신이 주창한 사회물리학의 임무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 신학적 단계 : 인간의 힘이 아닌 초자연력에 의지하는 단계, 모든 현상은 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함. 2) 형이상학적 단계 : 여러 현상은 본질이나 본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고 믿는 단계, 사물에는 그 속에 담긴 어떤 본질이 있고 그것을 밝히는 연구를 통해 지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단계 3) 실증적 단계 : 진정으로 참다운 지식의 단계, 현상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에 따라 실험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 그렇다면 진보의 계기는 무엇인가? 콩트는 기본적으로 사회 진보의 계기를 자장 먼저 지식의 진보에서 찾는다. 그는 사회동학의 확립에 튀르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 달리 경제력보다는 지식의 진보가 사회진보의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말함으로써 튀르고와는 차이를 보인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지식진보의 삼단계에 따라서 사회진보의 삼단계법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콩트는 단순히 지식의 진보만이 모든 진보의 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또 다른 계기는 바로 인구이다. 당시에 인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멜서스 식의 인식이었다. 즉, '인구의 증가가 인류의 불행을 불러올 것'이라는 인식으로, 이것은 인구의 증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콩트는 반대로 인구의 증가가 진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도 인구의 증가가 분명히 자원의 부족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원의 부족이 인류에게 위기로 다가오기보다는 인간에게 ‘필요’를 발생시킴으로써 진보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앞서 말한 지식의 진보와 함께 사회내부적인 해결책인 생산성의 발달(산업화로 인한 분업의 확대가 대표적인 예다.)을 이룸으로써 인구증가로 인한 자원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콩트는 지식의 삼단계법칙, 과학의 위계론을 『실증철학강의』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창안한 ‘사회물리학’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로 인간의 지식이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단계는 사회의 진보 단계처럼 진화적으로 진행된다. 즉, 각 단계는 뛰어넘을 수 없고, 각 단계는 다음 단계의 조건을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콩트에 따르면 사회학은 바로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의 최고 정점에 선 학문이다. 왜 그런 것 일까? 콩트는 과학의 위계론을 통해 사회학의 성격과 위치를 규정짓는다. 그는 과학에는 위계가 있으며 총체적인 성격의 과학은 하부과학의 발전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한다. 콩트의 말에 따르면 천문학이 가장 먼저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고 물리학, 화학 등이 뒤를 이으며 이어서 유기체에 관한 학문인 생물학이나 생리학이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물리학'은 생물 유기체에 관한 연구에 기반 하여 사회적 유기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가장 마지막에 실증적 단계에 도달한다. 이것은 사회물리학이 모든 과학 중 가장 총체적인 학문이며 모든 과학을 통합한다는 콩트의 생각을 대변한다. 또 이러한 생각들은 과거의 사회학에 남아있던 신학적, 형이상학적 잔재를 청산하고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회학을 창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콩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믿음은 근대 사회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고 있다. 허버트 스펜서 허버트 스펜서(, 1820년 4월 27일 ~ 1903년 12월 8일)는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 철학자이다. 오귀스트 콩트의 체계에 필적할 대규모의 종합사회학 체계를 세워 영국 사회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활약한 그는 주 활동 분야인 사회학과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심지어는 당시 형태를 갖춰 나가던 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주로 20세기 초반 서유럽에서 유행했던 사회 진화론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스펜서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1830년대에 철도공으로 일하면서 지역 신문의 논객으로 많은 글을 기고했다. 자유 무역을 옹호하는 잡지인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부편집장을 지내면서 1851년 첫 저서인 ≪사회 정학(Social Statics)≫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인류가 진보할수록 사회적 상태에 적합하게 되며, 국가의 역할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고 삼촌의 유산을 물려받아 경제적으로 안정된 그는 전적으로 집필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후 나온 두 번째 저서가 바로 ≪심리학 원리(Principles of Psychology)≫(1855)다. 여기서 그의 사상의 대표적인 또 다른 특징 하나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인간의 심리조차도 자연 법칙에 지배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라는 종족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그 후로도 광범위한 집필 활동을 계속했고, 철학, 교육학,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방면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또한 자연과학, 특히 당시 형성되고 있던 진화론에도 큰 관심을 표방해 ≪생물학 원리(Principles of Biology)≫(186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일찍이 자연 과학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진화 철학을 주장하고, 진화가 우주의 원리라고 생각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도 강한 사람만이 살 수 있다는 '적자 생존설'을 믿었으며, '사회 유기체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진화론에 관한 이해는 오해된 부분이 많았고 또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러한 "진화론"적 입장은 더 이상 지지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심리학에서 의식의 진화 과정, 도덕적으로는 공리주의를 지지하였다. 이런 저술 활동으로 스펜서는 1870년대까지는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의 한 명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사상은 당대에 이미 서유럽을 넘어서 동아시아까지 소개되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19세기 사상계에서 스펜서의 위치가 20세기의 과학철학자로 여러 분야의 학문에 영향을 미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에 비할 만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스펜서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진화 사상이다. 사실, 진화 사상을 제외하면, 스펜서 사상의 방향은 영국 전통 사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그의 사상의 전반적인 방향은 애덤 스미스나 맬서스 등의 자유 방임론, 벤담 등의 공리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는 발생학, 지질학, 열역학, 진화론 등 당대의 최신 과학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진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최신 성과를 적극 반영한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종합 철학(synthesized philosophy)”라고 불렀다. 이렇게 스펜서는 자신의 사상에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특히 생물학이나 지질학)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는 했지만, 자연과학적인 현상의 배후에는 인간의 지성이나 인지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과학으로부터는 유사성, 차이, 감각적 인식으로부터의 차이를 알 수 있을 뿐 현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과학의 영역인) 물체, 운동, 그리고 힘은 미지의 본질의 상징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스펜서는 이런 형이상학적 본질을 “제1원인(first cause)”이라고 불렀다. 이런 스펜서의 진화 사상은 사실 당시의 시류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찰스 다윈을 진화론의 시조라고 보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이전인 19세기 초중반의 유럽 지성계에서는 생물의 진화는 부인할 수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2년 전(1857)에 나왔으며, 이후 스펜서는 다윈의 학설을 이용해서 자신의 진화 사상을 정교하게 다듬기는 했지만, 자신의 진화 사상의 핵심은 그대로 가져갔다. 또한 이렇게 스펜서는 찰스 다윈의 영향을 받았지만, 역으로 다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종의 기원≫ 초판 (1859)을 발표한 후, 저서에 대한 반응을 살피며 계속 개정판(4판까지)을 내고 있던 다윈은 스펜서와 직접적 교류는 없었지만, 스펜서가 유행시키거나 고안한 용어인 “진화(evolution)”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이라는 말을 5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펜서의 진화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단순성(homogeneity)에서 복잡성 (heterogeneity)으로 가는 법칙이 전 우주의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 창조뿐만 아니라 동물의 진화, 인류의 진화, 그리고 사회의 진화까지도 모두 이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환경이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변화하면서 동식물뿐만 아니라 인간, 그리고 사회도 이에 적응을 통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단순성, 복잡성은 하등, 고등 혹은 열등, 우등의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는 진화가 자연의 선택 결과일 뿐, 하등, 고등의 정도와는 무관하다고 본 다윈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스펜서의 진화론은 환경의 적응도에 따라 생물의 진화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프랑스의 초기 진화 사상가 라마르크의 생각과 더 가깝다고 평가받고 있다. 에밀 뒤르켐 다비드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 1858년 4월 15일 ~ 1917년 11월 15일)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다. 사회학(Sociology)이라는 이름은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사회학'이 도대체 뭘 어떻게 연구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제대로 제시한 것은 에밀 뒤르켐이 사실상 최초이며, 통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사회학의 방법론적 기조를 창시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사회학의 종주(宗主)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원래 뒤르켐은 종교적/인종적 단일성이 깨진 근대 사회가 어떻게 통합과 응집성을 유지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근대 사회의 사회 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뒤르켐은 사회 현상에 거의 처음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사회학을 사회적 사실이라고 하는 객관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관찰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을 초월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한다. 언어, 집합의식, 집단표상, 종교, 사회연대와 같은 것을 전형적인 사회적 사실로 보고 사회적 사실은 개인에 외재하면서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강제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허버트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뒤르켐은 사회의 여러 분야들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기능하는지 밝혀서 그 성격과 존재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를 기능주의 사회학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뒤르켐은 사회는 각 부분의 합 이상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사회적 사실은 각 개인의 행동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 그 자체로 존재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 구성원은 분명 자아와 개인 의식 및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외부적인 압박으로 인해 의식과 자유에 제한이나 구속을 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외부적 압박을 사회적 사실로 규정한다. 산업화 이전의 전통사회는 유사성에 토대한 사회적 연대가 이룩되었으나 노동분화가 고도화되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이와 같은 기계적 연대가 상실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산업사회에 사회적 연대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차이에 근거한 기능적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새롭고 고차적인 사회연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분업의 기능은 사회적 연대 또는 사회통합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뒤르켐은 자살을 개별적 행위로만 규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 강제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고, 사회 혹은 집단의 통합 정도와 규제력의 정도에 따라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즉 자살을 개인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사실로 설명하였다. 뒤르켐은 교육학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도덕을 사회 속에서 합의되어 원활한 생활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로 보았으며 구성원들의 행위는 이에 따라 결정된다. 개인이 이러한 도덕을 내면화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입문하는것을 '도덕 사회화'라고 불렀다. 뒤르켐에 의하면 도덕교육의 목적은 이러한 도덕을 지키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성향(도덕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단순히 규칙을 지키도록 세뇌하는 것이 아니다. 뒤르켐은 도덕성이 3단계에 거쳐 형성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실천에 직결되는 이론을 연구하여 당시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한 것과 대조적으로 뒤르켐은 사회에 관한 과학적 이해에 근거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사회통합의 접착제였던 종교의 권위가 허물어진 혼란의 시기에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매커니즘이 무엇인가 탐구할 목적으로 종교의 기원을 인류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자연계에 그 어떠한 사물도 본래 신성하거나 세속적인 것은 없다. 초자연적 표상체계를 예찬하는 종교의식을 통해서 집합의식을 내면화하여 사회통합이 강화된다. 요컨대 종교의 본질은 사회적 산물이며 개인은 종교적 실천을 통하여 집합의식을 내면화하여 소속집단 혹은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에서 기능적 역할에 대하여 강조한다. 카를 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다. 트리어 출신.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843년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정치성 다분한 저술활동으로 인해 마르크스는 무국적자 신세로 수십년 간 영국 런던에서 처자식과 함께 망명생활을 했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합작,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연구하며 주요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1848년 출간된 소책자 『공산당 선언』과 3권짜리 『자본론』이다.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사상은 그 이후의 사상사, 경제사, 정치사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마르크스주의라는 일대 학파를 이루어 그 이름은 보통명사, 형용사화되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정치이론을 집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 사회가 계급투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으로써 나타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지 여부다.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에 의해 통제되며,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임노동자로 부려먹힌다. 소위 사적유물론이라는 비판이론에 의해 마르크스는 과거의 사회경제체제들이 그러했듯 자본주의 체제 역시 내재된 모순에 의해 내부적 긴장이 발생할 것이며 그 긴장에 의해 자멸하고 사회주의 체제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것이라 예측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불안정성과 위기취약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적대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다.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 계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골자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예측이 현실화되기를 앉아 기다리지 않고, 노동계급이 혁명적 행동으로써 자본주의를 거꾸러뜨리는 사회경제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저술·출판작업에 평생 매진했다. 마르크스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나 부정하는 입장에서나 모두 마르크스가 인류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의 경제학 저술은 오늘날의 노동 및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이해 대부분의 기초를 놓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자, 노동조합, 예술가, 정당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각자 재독해, 변형, 변용했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근대 사회학의 뼈대를 세운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하인리히 마르크스(1777년-1838년)와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1788년-1863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프로이센 왕국의 니더라인도 트리어시 브뤼켄골목 664번지. 마르크스는 혈통적으로 유대계였다. 외조부는 네덜란드의 랍비였고, 친가는 1723년 이래 대대로 트리어 랍비 집안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 탄생 당시 친조부 마이어 할레피 마르크스(Meier Halevi Marx)가 트리어 랍비였다. 마르크스의 부친 하인리히는 어릴 때 이름은 헤르셸(Herschel)이었고, 집안 최초로 세속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율사가 되었고, 마르크스 집안은 모젤 포도주 포도밭을 여러 개 개 소유하는 등 상류 중산계급의 삶을 누렸다.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에 라인란트 지역의 유대인 해방령이 폐지되었다. 이 때 헤르셸은 유대교에서 프로이센 합동복음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이시디어 이럼 "헤르셸"을 버리고 독일식으로 "하인리히"로 개명했다. 하인리히는 세속적인 계몽주의자였고, 이마누엘 칸트, 볼테르 같은 계몽철학자들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전자유주의자가 된 그는 당시 절대군주제였던 프로이센 왕국에 헌법을 제정하고 개혁을 하자고 선동하고 다녔다. 1815년,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변호사로 개업했고 1819년 살림이 펴서 포르타니그라 근교의 10칸짜리 저택으로 이사갔다. 하인리히의 처이자 마르크스의 모친인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는 네덜란드계 유대인으로, 이후 네덜란드 굴지의 전기공학회사 필립스를 창업하게 되는 부유한 사업가문 출신이었다. 헨리에테의 여동생 조피 프레스부르크(1797년-1854년)이 리온 필립스(1794년-1866년)와 결혼했는데, 이 둘의 손자가 기라르트 필립스와 안톤 필립스이며, 증손자가 프리츠 필립스가 된다. 리온 필립스는 담배공장 사장으로 매우 부유했으며, 이후 카를 마르크스 부부가 런던에 망명생활을 하면서 그에게 자주 생활비를 꾸었다. 마르크스의 어릴 적 삶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9남매 중 셋째였지만 형 모리츠가 1819년 요절하여 장남이 되었다. 마르크스 집안에서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난 아이는 카를, 조피, 헤르만, 헨리에테, 루이제, 에밀리, 카롤리네 이렇게 2남 5녀였다. 7남매는 1824년 8월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모친 헨리에테는 1825년 11월에 세례를 받았다. 마르크스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우다가 1830년 트리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교장 후고 비텐바흐는 마르크스 부친의 친구였는데, 자유주의·인문주의 성향의 교사를 다수 고용하여 보수적인 지방정부의 눈밖에 났다. 결국 1832년 경찰이 학교에 들이닥쳐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유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설파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당국은 이런 이념교육이 선동적 치안방해행위라고 여기고 교직원 여러 명을 자르거나 교체했다. 모두 마르크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1835년 10월, 당시 17세의 마르크스는 본 대학교로 갔다. 마르크스는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부친은 실용적인 법학을 공부하기를 강권했다. 18세 때는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본 대학교에서 마르크스는 시인동호회에 가입했다. 이 동아리는 경찰에 요시찰인으로 찍혀 있는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트리어 주막음주향우회()라는 동아리에도 가입해 공동총재까지 지냈다. 그리고 논쟁이나 토론에도 참여했는데, 때때로 이것이 심각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1838년 8월 보루시아군단(Borrusian Korps)이라는 동아리와 결투가 벌어졌는데, 마르크스도 여기 참여했다. 마르크스의 성적은 첫 학기에는 상위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쭉쭉 떨어졌다. 부친은 마르크스를 잡아다 좀 더 학구적인 분위기의 베를린 대학교에 집어넣었다. 1836년 트리어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낸 뒤, 마르크스는 학업과 인생설계에 관해 진지하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기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약혼했다.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교육받은 남작영애로, 프로이센 하급귀족이었으며 마르크스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폰 베스트팔렌은 먼저 어떤 젊은 귀족과 약혼을 하고 있었는데, 마르크스와 약혼하기 위해 선약을 파혼했다. 마르크스와 폰 베스트팔렌의 교제는 두 사람의 종교적, 사회적 출신성분의 차이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예비장인인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을 구워삶아 장인과 친구가 된다. 폰 베스트팔렌 남작은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진 귀족이었으며, 마르크스는 이후 박사논문을 예비장인에게 헌정했다. 약혼하고 7년 뒤인 1843년 6월 19일, 카를 마르크스와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크로이츠나흐의 개신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36년 10월, 마르크스는 베를린에 도착해 베를린 법대 시설 이용권을 얻고 미텔가(Mittelstrasse)에 하숙집을 구한다. 베를린 대학교에서의 첫 학기 때 마르크스는 진보헤겔주의를 대표하는 에두아르트 간스(역사의 자유주의적 측면과 사회적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역사는 합리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 역사법학파를 대표하는 카를 폰 자피크니 등 학자들의 강의를 수강했다. 그러나 법학을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언제나 철학에 있었고, “철학 없이 무엇도 성취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법학과 철학을 같이 공부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얼마 전 죽은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사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유럽 대부분의 철학 학파들이 헤겔의 개념들을 활발히 논의하던 시대였다. 슈트랄라우에서 요양을 한 뒤 마르크스는 헤겔사상 토론 동아리인 박사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이 동아리를 통해 소위 청년 헤겔학파라 불리는 극단주의 사상가들과 접선하게 되는 게 1837년이었다. 청년 헤겔학파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를 중심으로 모여든 집단이었는데, 마르크스는 그들 중 아돌프 루텐베르크와 친하게 지냈다. 마르크스와 청년 헤겔학파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청년 헤겔학파는 변증법을 이용해 기성 사회, 정치, 종교를 좌익적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했다. 1838년 5월, 마르크스의 부친이 죽으면서 가족의 수입원이 줄어들었다. 마르크스 부자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으며, 부친이 죽은 뒤에도 마르크스는 부친과의 추억을 귀중히 여겼다. 1837년, 마르크스는 문학과 비문학을 모두 써 본다. 마르크스가 쓴 문학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전갈과 펠릭스」, 희곡 『오울라넴』, 그리고 약혼자 예니에게 바치는 연애시들 따위가 있었다. 이 문학작품들은 마르크스 생전에 출간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는 곧 문학창작을 집어치우고 영어공부, 이탈리아공부, 미술사공부, 라틴어 고전번역에 몰두했다. 1840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함께 헤겔의 『종교철학강의』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또 박사학위논문도 쓰기 시작하여 「역사법학파 철학선언」을 1841년에 완성했다. 이 학위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신학이 철학에게 지혜의 상석을 양보해야 한다고 대담하게 논했다. 이 논문은 논쟁적이었는데, 특히 베를린 대학교의 보수적 교수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논문 제출을 취소하고, 좀더 진보적인 분위기의 예나 대학교로 가서 거기에 논문을 다시 제출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41년 4월 예나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와 바우어는 모두 무신론자였기에, 1841년 3월 『무신론기록원』()이라는 제목의 학술지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같은 해 7월, 마르크스와 바우어는 베를린에서 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술에 만취하여 교회에서 떠들며 웃고 당나귀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등 기행을 벌여 구설수에 올랐다. 마르크스는 학인의 길을 계속 걷고 싶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정부가 자유주의와 청년 헤겔주의를 계속 탄압했기에 마르크스의 진로는 좌절되었다. 1842년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이사가서 언론인이 되었다. 급진 성향의 『라인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는데,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시각과 그가 일찍이부터 경제에 관심이 많았음을 이 글들에서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럽 각국의 우익 정부들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역시 무능하거나 역효과만 불러온다고 비판했다. 이런 내용을 계속 싣던 『라인 신문』은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걸려들었다. 원고들 중 불온한 내용이 있는지 당국이 샅샅이 검사한 이후에야 인쇄를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탄식했다. “경찰이 우리 신문에 코를 박고 킁킁대서, 무엇이든 비-기독교스럽거나 비-프로이센스러운 냄새를 맡게 될 경우, 신문을 아예 낼 수가 없다네.” 1843년 『라인 신문』에서 러시아 군주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갔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에 이 신문의 폐간을 요구했고, 프로이센 정부가 그에 따름으로써 『라인 신문』은 폐간되었다. 1843년,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새로 창간된 급진좌파 언론 『독불연지』의 공편자로 취직했다. 『독불연지』는 독일 사회주의자 아르놀트 루게가 독일과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을 합작시키자는 목표의식으로 창간한 언론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 부부는 1843년 10월 파리로 이사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바노가 23번지에서 루게 부부와 동거하다가, 1844년 1월 첫딸 예니가 태어나면서 루게의 집을 나왔다. 『독불연지』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독일 쪽 기고가들로만 가득차게 되었고, 결국 비독일계 기고가는 러시아에서 망명온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이 유일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지면에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한 서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를 기고했다. 이 중 후자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동력이라는 신념을 소개하며 공산주의에 관한 수용을 본격화했다. 『독불연지』는 창간호밖에 나오지 못하고 폐간되었지만 그 창간호가 상당히 잘 팔렸는데, 하인리히 하이네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를 풍자하는 시를 기고한 덕분이었다. 그 결과 독일계 영방국가들은 『독불연지』 발행을 금지시키고 수입된 부수들을 회수했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했음에도 루게는 다음 호를 발행하기를 거부했고, 루게와 마르크스는 절교하게 되었다. 『독불연지』가 이렇게 망하고, 마르크스는 독일어 좌익언론으로 유일하게 검열을 받지 않던 『전진!』지에 기고를 하기 시작했다. 『전진!』은 파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공상적 사회주의 비밀결사 의인동맹의 기관지였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 모임에 여러 번 참여하기는 했지만 가입하지는 않았다. 『전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 사상에 기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회주의관을 갈고 닦으면서, 동시에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자나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1844년 8월 28일, 마르크스는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평생의 물주가 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자기가 최근 출간한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을 보여주었고, 노동계급이 역사의 최종혁명의 주체이자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논했다. 곧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 마음이 맞아 마르크스의 옛 친구인 브루노 바우어를 공격하는 데 합작했다. 그 결과물은 1845년 『성가족』으로 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막스 슈티르너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같은 청년 헤겔학파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 엥겔스와 함께 포이어바흐 유물론마저 등지게 되었다. 바노가 38번지에 살던 시절(1843년 10월-1845년 1월),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제임스 밀 등), 프랑스 사회주의(생시몽 백작, 샤를 푸리에 등), 프랑스 역사를 파고들었다. 그 중 정치경제학 연구는 마르크스가 이후 여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가 되었고, 그 결실이 생애 말년에 3권짜리 대표작 『자본론』으로 맺어지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크게 세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독일의 헤겔변증법,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그리고 영국의 고전경제학이 그것이다. 헤겔변증법은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부터 공부했던 것이고, 나머지 둘을 마르크스가 파리 체류기에 연구하기 시작했음은 마르크스주의의 3대요소가 늦어도 1844년 가을에 일단 모두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른 일들, 예컨대 급진 언론사의 기고자나 편집진으로 참여하거나 시민들의 잠재적 혁명행동을 선동하는 조직지도작업 따위로 자주 새었기 때문에 이 연구는 매우 느려진다. 그럼에도 마크르스는 언제나 경제학 연구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본주의의 내부적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하여튼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골조는 카를 마르크스라는 개인의 머릿속에 1844년 말에 이미 준비되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으로 세계 정치경제학의 다양한 양상을 상세하게 해석하는 것, 마르크스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새로운 경제학 이론을 명료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를 저술한다. 이 초고는 다양한 주제들을 오가며 소외노동의 개념을 구체화한다. 계속된 정치경제학 연구 끝에 마르크스는 1845년 봄, 자신의 새로운 정치경제이론, 과학적 사회주의가 보다 철저한 유물론적 세계관 위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학 철학 초고』는 1844년 4월에서 8월 사이에 저술되었다. 하지만 초고를 퇴고하던 마르크스는 이 내용이 포이어바흐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완성을 위해 포이어바흐 유물론과의 단절을 추구했기에 이듬해(1845년 4월)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기면서 11개 명제로 구성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작성한다. 「테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지막 명제인 제11명제다. 그 내용인즉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관념론 전반, 즉 자기 이외의 모두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물론 철학은 관조적이며, 관념론 철학은 실천을 이론으로 축소시킨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현실세계보다 추상적 실재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첫 번째 편린이 이 「테제」에서 소개된다. 바로 세계는 idea(생각, 관념, 사상)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물리적인, 물질적인 활동과 실천으로만 변화된다는 것이다. 1845년, 프로이센의 요청으로 프랑스 정부가 『전진!』을 폐간시켰다. 프랑스 내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실업자가 된 마르크스를 프랑스에서 추방했다. 프랑스에서 쫓겨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를 계속하자는 희망을 품고 브뤼셀로 갔다.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신세가 된 마르크스가 벨기에 브뤼셀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 1845년 2월이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는 현재의 정치시사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브뤼셀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온 다른 사회주의자들(모제스 헤스, 카를 하인첸,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등)이 득시글거렸는데, 마르크스는 그들과 어울렸다. 동년 4월, 엥겔스가 독일 바르멘에서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의인동맹 간부단도 브뤼셀을 새 본부로 삼으려 했다. 얼마 뒤 엥겔스와 사실혼 관계가 되는 메리 번스가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떠나 브뤼셀로 와 엥겔스에게 합류했다. 1845년 7월 중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잉글랜드로 가서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첫 영국행이었으며, 1842년 11월부터 1844년 8월까지 이미 2년간 맨체스터에 머물렀던 엥겔스가 여행 가이드 노릇을 해주었다. 엥겔스는 그 사이 영어를 배워 능통했을 뿐 아니라, 차티스트 운동가들과도 안면을 트고 가깝게 사귀고 있었다. 그랬기에 엥겔스는 잉글랜드의 차티스트, 사회주의 언론들을 물어다 주는 기자 노릇까지 해주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잉글랜드 여행을 런던과 맨체스터의 다양한 도서관들에서 경제학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이즈음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합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는데, 이것은 역사적 유물론 개념에 관한 그의 최고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등 청년 헤겔학파, 그리고 카를 그룬 등 "관념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여겨진 다른 사회주의자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로지 유물적인 것이 역사를 유일한 추동하는 힘이라는 자신들의 철학을 마침내 완성시켰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형태로 쓰여졌지만, 그럼에도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다른 초기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고, 1932년에야 초판이 출간되었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한 마르크스는 “진실로 과학적인 유물론 철학”의 견지에서 작동하는 “혁명적 무산자 운동”의 “이론과 전술”에 관한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 사이에 구분을 짓고자 하는 의도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람이란 자신의 경제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노동자 개개인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가 동원되어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노동계급에게 최대의 물질적 이득을 보장한다고 계급 단위의 선동을 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다음 책의 주제로 계획한 것이었다. 그 책의 제목은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1847년작)이라고 붙였다. 또한 이 제목은 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이론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1840년)의 “소시민적 철학”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철학의 빈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 「공산당 선언」의 토대를 놓은 준비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도 의인동맹과의 관계를 계속했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이 노동계급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대규모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즉 의인동맹이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비밀결사적 지하활동이 중단되고, 공개적인 "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의인동맹 맹원들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결국 설득되었고, 1847년 6월 의인동맹은 지상 공개단체로 전환, 새 명칭을 "공산주의자동맹"이라고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과 조직원리 작성에 참여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으로서 「공산당 선언」을 1847년 12월부터 1848년 1월에 걸쳐 공저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21일 처음 공개되었다.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더이상 비밀결사가 아니고, 의인동맹 시절 그랬던 것처럼 신념을 숨기지 않으며 공개적인 대중행동을 목표로 삼을 것을 천명했다. 「공산당 선언」의 첫 줄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부유한 자본가 계급)와 프롤레타리아(산업 노동자 계급)의 이해가 서로 충돌하기에 상호 계급간의 적대가 발생함을 분석한다. 또한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당대의 다른 사회주의 단체, 자유주의 정당들과 달리 진짜 노동자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는 단체이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그것을 사회주의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임을 논했다. 그해 말, 유럽 전역은 시위, 반란, 폭력적 대격동에 휩싸였다. 1848년 혁명이었다.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마르크스는 이런 혁명활동들에 호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 아버지의 유산(아버지는 1838년 죽었지만 그때까지 삼촌 라이오넬이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6,000 내지 5,000 프랑을 받았는데, 마르크스가 그 중 3분의 1을 벨기에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되고 있지만, 어쨌든 벨기에 법무부는 마르크스가 그런 반란모의를 했다고 기소, 체포하려 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공화국이 들어섰으니 이제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프랑스로 도망갔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잠시 머무르면서 공산주의자동맹 본부를 파리로 옮기고 파리에 살던 독일인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독일노동자동호회를 설립했다. 혁명이 독일에까지 번지기를 기대하며 마르크스는 1848년 쾰른으로 갔고, 「독일에서의 공산당의 요구」라는 찌라시를 돌리고 다녔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열 가지 요지 중 네 가지만 발췌, 재인용하여 혁명을 선동했다.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키려면, 우선 독일 부르주아들이 봉건군주제와 귀족제를 전복시키는 시민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년 6월 1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유산을 털어 『신라인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 신문을 통해 유럽 전역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마르크스는 주필이자 대기자로서 신문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졌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다른 맹원들도 기고를 하기는 했지만,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신라인신문』은 그야말로 마르크스 독재였다. 마르크스 등 혁명가들은 경찰에 정기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마르크스는 여러 번 기소되었다. 마르크스가 기소된 혐의는 검사장 모욕죄, 언론지상 경범죄, 조세거부 및 무장반란 선동죄 등이었는데,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한편, 혁명으로 수립되었던 프로이센의 민주주의 의회가 붕괴하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새 내각을 반동주의자들로 채워 반혁명 정책을 실시했다. 좌익을 비롯해 혁명분자들은 프로이센에서 숙청되었다.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었고, 『신라인신문』은 폐간, 마르스크는 5월 16일 추방령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파리는 반혁명이 기승을 부리고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마르크스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했다. 아내 예니가 곧 넷째 아이를 낳을 판이었는데, 독일도, 벨기에도, 프랑스도 머무를 수 없게 된 마르크스는 마침내 1849년 8월 런던 망명을 선택했다.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동맹 본부 역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이끄는 파벌은 공산주의자동맹이 지금 봉기하면 전체 노동계급이 전 유럽에서 "동시적으로" 들고일어나 합류할 것이며 전유럽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 봉기를 선동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무계획적 봉기는 “모험주의적”이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자살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 샤퍼나 빌리히 등이 주장한 봉기들은 유럽의 반동 정부들의 군경에 쉽사리 분쇄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동맹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사회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한 줌 인간들의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매진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봉기들이 분쇄당한 현재(1850년경)의 사회발전단계로 미루어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진보적 부르주아들과 합작하여 봉건귀족제를 우선 타파하도록 공산주의자동맹이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정부개혁, 입헌공화국, 자유선거, 보통(남성)선거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민주화 운동에 노동계급이 참여해야 하며, 노동계급 의제와 노동계급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 결과를 거둔 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내홍을 겪은 끝에 마르크스의 입장이 승리하고, 빌리히와 샤퍼 등은 탈당했다. 한편 마르크스는 독일노동자교육결사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결사는 런던 도심 유흥가인 소호 그레이트윈드밀가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단체 역시 마르크스를 따르는 무리와 샤퍼, 빌리히를 따르는 무리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서는 샤퍼, 빌리히 파벌에게 패배했고, 1850년 9월 17일 단체에서 탈퇴했다. 런던 망명기 초기에 마르크스는 오로지 혁명활동에만 골몰했기에 마르크스 가족은 극심한 빈곤을 겪어야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용돈을 받아 연명했고, 엥겔스의 그 돈은 엥겔스의 부유한 자본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프로이센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굴리면서 그 지면을 통해 예상 독자인 노동계급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무일푼이 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새로 만들 수 없었고, 국제언론으로 관심을 선회한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미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남아프리카의 6개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2년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이것이 그동안 주 수입원이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부르주아" 언론들에 기사를 써가며 입에 풀칠을 했다. 마르크스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기사를 독일어로 써서 빌헬름 피퍼에게 영어로 번역을 맡겼다. 영어가 유창해지기 전까지 마르크스는 이런 식으로 기자일을 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1841년 호레이스 그릴리가 창간한 신문으로, 진보적 부르주아 언론인, 출판인들이 편집주간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지 리플리, 찰스 앤더슨 다나 등이 있었다. 신문 주필이었으며 또한 푸리에주의자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다나가 마르크스의 주 거래처였다. 『트리뷴』은 마르크스가 대서양 너머의 헨리 찰스 케리와 “숨은 전쟁”을 벌이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이 신문은 여러모로 노동계급 친화적이었는데, 우선 값이 2 센트로 저렴했다. 또한 발행부수가 50,000 부로 그 회전율이 당대 미국에서 최대 수준이었다. 편집주간들은 진보적이었고, 창업주 그릴리 본인부터 노예제 폐지론자로 그 관점이 신문 논조에 반영되었다. 마르크스가 이 신문에 송고한 첫 기사는 영국 의회선거에 관한 것이었으며, 1852년 8월 21일 게재되었다. 1857년 3월 21일,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불경기 때문에 매주 기사 한 부치 고료만 주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다른 특파원들은 기사가 지면에 실려야 고료를 받았지만 마르크스는 기사가 실리지 않아도 매주 한 부치의 고료는 받았다. 마르크스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기사를 송고했다. 10월이 되자 『트리뷴』은 재정 악화가 더 심해져 마르크스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럽 특파원들을 잘랐고, 마르크스도 주 1회 기사로 일감이 줄어들었다. 1860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의 기사는 달랑 다섯 번 지면에 게재되었다. 6개월 쉬고, 마르크스는 1861년 9월부터 1862년 3월까지 기사를 썼다. 그 뒤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미국 국내 문제로 인해 『트리뷴』에는 더이상 런던 특파원 자리를 둘 여유가 없다고 편지를 썼다. 1857년 4월,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신미국백과』의 전쟁사 부문 집필을 주선했다. 다나의 친구이자 『트리뷴』 문예주간이었던 조지 리플리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백과사전에 67개 항목을 기여했다. 그 중 대다수인 51개가 엥겔스가 쓴 것이었지만, 마르크스도 대영박물관을 돌아다니며 다소간의 연구로 도와주었다. 1850년대 말이 되면 미국인들은 유럽 사정에 관심이 시들해졌고, 마르크스의 기사들도 “노예제 위기”나 1861년 미국 내전 발발 같은 미국 국내 문제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 1851년 12월에서 1852년 3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프랑스 2월 혁명에 대한 이론연구를 집대성하여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론, 무산자독재,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무산자의 승리 등 여러 개념을 넘나들었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1850년대에서 1860년대 사이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주의 관념론과 "장년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념이 철학적으로 단절되는 경계선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학자들이 이 도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자신들의 경제이론 및 역사진보이론에 반영시켰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혁명적 추진력이 소진된 것 같은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가 "모험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다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마르크스는 "의지의 힘" 따위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며, 경제적 요소야말로 필수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여겼다. 1852년 미국 불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혁명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주었다. 물론 이 정도 경제는 아직 자본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미숙했다. 미국의 사회불안정은 서부의 빈 땅 개발 바람으로 희석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 일어나는 경제위기가 유럽 대륙의 경제에 혁명적 확산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유럽의 각 국가들은 국경선을 경계로 철저한 폐쇄경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최초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57년 공황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로서, 그전까지의 경제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1844년부터 13년간 궁한 생활을 감당하느라 여러가지 부업을 뛰었고, 경제학 연구는 거의 내팽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경제학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마르크스는 『트리뷴』이 진보적 논조를 유지하는 이상 계속 기고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861년 말 찰스 다나가 퇴사하고 편집주간이 물갈이되면서 신문의 논조도 변했다. 『트리뷴』은 예전처럼 노예해방과 북부연방의 완전한 승리를 부르짖지 않았다. 남부의 노예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부연방과 남부맹방 사이의 즉각적인 평화를 지지했다. 마르크스는 이 새 편집방침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1863년 『트리뷴』에서 잘리게 된다. 한편 다나는 1868년 『뉴욕 썬』이라는 경쟁지를 창간해 자기가 주필을 맡았다. 1864년,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소위 제1인터내셔널에 참여하여, 초기 총평의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바쿠닌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과 내부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에서 마르크스가 승리했지만, 1872년 총평의회 소재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긴 이후(마르크스도 이 이전에 동의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제1인터내셔널 존속기간 중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사건은 단연 1871년 파리 코뮌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두 달 간 도시를 점거했고, 정부군은 이를 유혈 진압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써서 코뮌측을 옹호했다. 노동자 혁명들과 각종 운동들이 계속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좀더 철저히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영박물관 열람실에 틀어박혀 다양한 정치경제학 서적과 경제지표들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1857년까지 마르크스는 자본, 부동산, 임노동, 국가, 무역, 세계시장에 관한 800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썼다. 다만 이 원고는 1939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출간되기 전까지는 미공개로 남아 있었다. 마침내 1859년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마르크스의 저서들 중 경제학에만 집중한 첫 저서로서, 훗날 완성될 『자본론』의 예고편 정도의 의도로 쓰여졌다.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수용, 확장했다. 이 책은 상당히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초판이 빠르게 매진되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마르크스는 1860년대 초부터 자신의 일생을 집대성한 평생의 역작을 쓰기 시작한다. 3권짜리 『자본론』, 그리고 『잉여가치론』이었다. 『잉여가치론』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 앞선 정치경제이론가들에 대해 논하는 내용인데, 때론 이것이 『자본론』 제4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경제사상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논고이기도 했다. 1867년, 『자본론 제1권』이 출간되었다. 그 내용은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분석한 것이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토머스 호지스킨의 영향을 받은 노동가치설을 정교하게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호지스킨의 『자본의 범죄로부터 보호된 노동』을 극찬하며 그 영향을 받았음을 『자본론』 지상에서 여러 번 인정한다. 호지스킨은 “개인의 노동에 자연스러운 보상”은 없어졌으며, “각 노동자는 전체의 어떤 부분만을 생산할 뿐이고, 각 부분들은 혼자서는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으니,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논했는데, 마르크스는 호지스킨의 이런 주장을 근대 자본주의 생산하에서 노동의 소외를 방증하는 수단으로서 인용했다. 『자본론 제1권』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착취의 개념을 설명하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이윤율 급락으로 이어져 산업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1871년 가을에 『자본론 제1권』 독일어판 초판은 매진되었으며 바로 2판 인쇄에 들어갔다. 러시아어판 요청에 따라 1872년 3월 27일에는 러시아어판도 3,000 부 출판되었다. 『자본론 제2권』과 『자본론 제3권』은 마르크스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고 원고로만 남았다. 두 권 모두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출간했다. 『자본론 제2권』은 1893년 7월에, 『자본론 제3권』은 1894년 10월에 출간되었다. 『잉여가치론』은 『자본론』의 "제2원고"였던 『1861년-1863년 경제학 원고』에서 파생된 것인데, 『1861년-1863년 경제학 원고』는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제30책에서 제34책 절반에 해당한다. 『잉여가치론』은 그 중 제30책에서 제32책에 해당한다. 제34책 나머지 절반은 『1863년-1864년 경제학 원고』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원고가 『자본론』 "제3원고"로 여겨진다. 이 제3원고는 펭귄북스판 『자본론 제1권』 부록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잉여가치론』 축약본 독일어판은 1905년과 1910년에 출간되었는데, 1951년 런던에서 이 축약본의 영어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잉여가치론』의 비축약 완전본은 1963년과 1971년 모스크바에서 『자본론 제4권』으로서 출간되었다. 생애 마지막 10여년간 건강이 악화된 마르크스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없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당대 정치시사, 특히 독일과 러시아의 상황에 관해 논평하는 정도의 활동만 간간히 했다. 1875년에 쓴 「고타 강령 비판」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통일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자 페르디난트 라살의 국가사회주의와 합작하려 하는 경향에 반대한 서한이다. 마르크스의 또다른 유명한 말인 “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이 문건에서 등장한다. 1881년 3월 8일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러시아가 미르 공동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마르크스는 러시아의 농촌공동체가 러시아의 사회적 부흥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수단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농촌공동체에게 사방에서 가해지는 해로운 영향들을 먼저 일소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경고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파괴적 영향들을 배제해야 농촌공동체의 “자발적 개발의 정상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에는 ……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완전한 격리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 편지의 초안들 중 하나에서 마르크스는 최근 인류학에 관심이 생기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미래의 공산주의는 태곳적 과거의 공산주의 이상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렇게 피력한다. “우리의 시대의 역사적 경향은, 유럽과 미주에서 절정에 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치명적 위기다. 그 위기는 자본주의의 파괴를 야기할 것이며, 그 파괴 이후 근대사회는 그 어떠한 태고의 집단생산, 집단사용보다도 더 우월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원시공동체의 활력은 셈, 그리스, 로마 등등 어떠한 사회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컸으며, 근대 자본주의 사회들보다는 더 한층 강력하게 컸다.”고 덧붙였다. 마르크스는 죽기 전에 엥겔스에게 이 생각을 정리해 줄 것을 부탁했고, 1884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출간되었다. 마르크스 부부는 슬하에 일곱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열악한 생활 통에 그 중 장성한 것은 딸 세 명 뿐이다. 마르크스의 일곱 아이는 다음과 같다. 예니 "예니헨" 카롤리나(1844년-1883년), 예니 라우라(1845년-1911년), 에트가어(1845년-1855년), 헨리 에드워드 "구이도" 기(1849년-1850년), 예니 에펠리네 "프란치스카" 프란체스(1851년-1852년), 예니 율리아 엘레아노르(1855년-1898년), 그리고 이름도 붙이기 전에 죽은 막내(1857년 7월). 마르크스가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와의 사이에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를 낳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주장은 1962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며 마르크스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고 입증할 만한 물질적 사료적 근거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셋방을 구할 때 자주 가명을 사용했다. 아마 탄압해오는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파리에 살 때는 "무슈 랑보)"라는 이름을 썼고, 런던에서 편지를 보낼 때는 "A. 윌리엄스()"라고 서명했다. 마르크스의 동료들은 그를 “무어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안색이 어두운 편이고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흑발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기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올드 닉(Old Nick)”이나 “찰리(Charley)”라고 부르라고 했다. 자기 주변사람들에게도 별명을 붙여 부르곤 했는데, 엥겔스는 “장군님(General)”, 가정부 데무트는 “렌헨(Lenchen)” 또는 “니임(Nym)”이라고 불렀다. 장녀 예니헨은 “중국 황제 취취(Qui Qui, Emperor of China)”라고 불렀고, 차녀 라우라는 “카카도우(Kakadou)” 또는 “호텐토트(Hottento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스스로 “존재의 비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건강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았는지 알아보려 했다. 마르크스 전기작가 베르너 블루멘베르크(Werner Blumenberg)는 마르크스가 1849년에 간과 쓸개에 문제가 생겼으며 그것이 평생 갔고,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악화되었다고 한다. 병이 도질 때마다 두통, 결막염, 두부신경통, 류머티즘통이 수반되었다고 한다. 1877년에는 심각한 신경장애가 생겨서 만성 불면증 환자가 되었고 마르크스는 마취제를 맞아가며 잠들어야 했다. 밤중에 일을 하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다 보니 병증은 더욱 가중되었다. 마르크스는 양념을 잔뜩 친 요리, 훈제 생선, 캐비어, 오이 초절임을 좋아했다. 어느것 하나 간부전증 환자에게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게다가 포도주와 리큐어를 좋아했고, 담배도 엄청나게 피웠다. 돈이 없어서 저질 시가를 피우니 더욱 몸에 안 좋았다. 1863년부터 마르크스는 종기에 관한 불평을 많이 남기는데, 이것은 간이 안 좋은 환자에게 매우 흔한 증상이며, 아마 간부전증과 원인도 같았을 것이다. 농양이 너무 심해서 마르크스는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고약한 성질머리 역시 간 환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역사학자 J. E. 시겔(J.E. Seigel)은 마르크스가 10대 시절에 폐렴이나 흉막염에 걸렸다는 설을 제기했다. 그 후유증으로 프로이센 군대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것이다. 『자본론』을 집필하던 시기에 마르크스는 건강 삼중고에 시달렸다. 아마 유전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간질환은 과로, 나쁜 식습관, 수면부족으로 악화되었다. 결막염은 밤에 일을 너무 많이 한 탓이었다. 그리고 종기 부스럼은 마르크스의 생활습관(술, 담배, 편식)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전반적 체력쇠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이런 위험한 생활을 바꿔야 한다고 여러 번 훈계했다. 시겔의 논문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런 자기파괴적 생활은 부친에게서 주입된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가책감이었으리라 지적한다. 1881년 12월 아내 예니가 죽었다. 마르크스는 카타르염에 걸렸고, 이것이 기관지염과 흉막염으로 발달하여 처음 발병한지 15개월 뒤인 1883년 3월 14일, 향년 64세의 무국적자로 사망했다. 1883년 3월 17일 장례식이 있었고, 런던의 가족들과 동료들은 그를 하이게이트 묘지 동편 불가지론자-무신론자 묘역(조지 엘리엇의 묘가 근처에 있다)에 매장했다. 창례식 참석자는 아홉 명에서 열한 명 사이였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 가까운 동료들이 추모사를 읽었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3월 14일 오후 3시 15분 전, 산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사상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마르크스의 두 딸 엘레아노르와 라우라, 그리고 사위인 샤를 롱게와 폴 라파르그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롱게의 아내인 마르크스의 장녀 예니헨은 1883년 1월 아버지보다 두 달 먼저 죽었다.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위원이었던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어로 연설을 했고, 프랑스 노동운동가였던 롱게는 불어로 짧게 추모사를 남겼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노동자 정당에서 각기 전보를 보내왔고 그 내용도 낭독되었다. 엥겔스의 연설과 함께 장례식 절차는 이와 같았다. 친지가 아닌 참석자들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운동의 옛 동지들이었다. 1852년 쾰른에서 공산주의자 재판으로 3년 수감되었던 프리드리히 레스너(Friedrich Lessner), 엥겔스에 따르면 “공산주의자 동맹의 고참 맹원”이었던 G. 로흐너(G. Lochner), 그리고 맨체스터의 화학 교수이자 왕립학회 석학회원이며 1848년 바덴 혁명에 참여했던 카를 쇼를레머가 그들이었다. 그 외에 영국 동물학자 레이 란케스터도 참석했다. 엥겔스는 1895년 죽으면서 마르크스의 두 딸에게 상당한 몫의 유산을 떼어 주었다. 그 가치는 2011년 물가로 미화 480만 불 정도였다. 마르크스 일가는 1954년 11월 지금 자리로 이장되었고, 1956년 3월 14일 카를 마르크스 석묘가 제막되었다. 마르크스 석묘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장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마르크스의 원래 무덤은 장식이 소박했으나, 영국 공산당이 새 석묘에 로런스 브래드쇼가 조각한 큼직한 흉상을 올려놓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마르크스가 실패자로 죽었다 말할 수 없다.” 비록 영국에서는 그의 이론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의 저작은 이미 그 생전에 독일과 러시아에 거대한 좌익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죽고 불과 25년 뒤, 마르크스의 영향을 인정하는 공산주의 정당들이 유럽 각지에서 15%에서 47%에 이르는 득표를 거두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러 다른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한다(이것을 엥겔스와 레닌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수용한 것은 논란이 있다). 이 사관에는 실재와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헤겔 주장의 영향이 명백하다. 하지만 헤겔은 관념론자로서 관념을 최우선에 놓은 반면, 마르크스는 헤겔변증법을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다시 써서 물질이 관념에 우선함을 주장했다. 헤겔은 "정신"이 역사를 추동한다고 했지만, 마르크스는 이것을 인간의 실재를 흐리는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인간의 물리적 행동이야말로 세상을 빚어나가는 힘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헤겔주의가 실재의 운동을 머리에 두고 있으나, 그것은 머리가 아닌 발에 있어야 한다고 쓴 바 있다. 마르크스는 미신적인 것을 싫어했지만, 저술에 있어 고딕물 화법을 여러 번 사용했다.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인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유럽의 모든 권력들이 이 유령을 구마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가 그 대표적인 예다. 『자본론』에서도 자본이란 “노동의 생산물을 에워싸는 강령술”이니, “흡혈귀”니 하는 표현들을 사용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마르크스는 그들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가 선호하는 소규모 사회주의 공동체는 주변부로 밀려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거대 규모의 경제체제 변혁이야말로 진정한 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헤겔주의와 함께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엥겔스의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이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역사를 바꾸는 변증법으로 구상했고, 근대 노동계급이 혁명과 진보의 힘이라고 지목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슐츠가 사회운동이란 “생산력과 생산양식의 모순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한 것 역시 여기에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는 역사와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역사의 경향과 사회갈등의 결과를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 추종자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 혁명은 가만히 있어도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묘비에도 새겨진 「포이어바흐 테제」 제11명제에서 드러나는 마르크스의 생각은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세계를 직접 변혁시키고자 노력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마르크스는 다른 사상가들과 적극적으로 격론을 벌였고, “사회과학에서 비판방법론을 제대로 사용한 첫 번째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형이상학을 이념과 동일시하면서 사변적 철학들을 공격했다. 이 접근법을 통해 마르크스는 중대한 발견들을 이념적 편향으로부터 분리하려 시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많은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매우 구분되는 존재다. 드 토크빌 자작이 관료제적 폭정은 서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듯이, 마르크스도 단일 폭군의 폭정의 성격을 논한 몽테스키외 같은 고전사상가들과 단절하고 대신 “자본의 폭정”을 분석하려 했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란 인간본성의 변화와 맞물려 있으며, 그 변화는 인간 주체와 물적 객체를을 포괄하는 것이다. 인간은 실제의 자신 그리고 잠정적인 자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마르스크와 헤겔은 모두 인간의 자기계발은 이 인식에서 비롯되는 내부적 소외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실제의 자신을 주체(subjective agent)로서 인식함에 따라 그 잠재적 상대자들은 이해의 대상인 객체(objective agent)가 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본성을 원하는 대로 주형함으로써 주체는 객체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그리하여 비로소 개인은 완전한 인간으로 현실화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노동의 함수로서 존재하는 유적존재()이다. 마르크스의 "유의미한 노동" 개념의 근본은 어떤 주체가 소외된 객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의 세계에 존재하는 물적 객체에게 문자 그대로의 영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객관적 인간이 진짜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인간이 행(work)한 바의 결과”임을 이해했다고 인정하면서도, 헤겔주의 자기계발론이 지나치게 “정신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인간이 본성적 능력을 가진 유형의, 실제의, 지적인, 객관적(objective)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그 본성에 자기 인생을 표현하고자 하는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목적(object)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 내지는 인간이 자기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목적을 통하는 것 뿐임을 의미한다”며 헤겔과 단절한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헤겔의 "행함(work)"을 유물론적인 "노동(labour)"으로 개조시키고,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노동력"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람과 그 사람의 노동력 사이의 관계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주제를 소외의 문제로 상세하게 다루었다. 변증법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헤겔주의 소외론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유물론적 구상으로 발전시켰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통해 생산의 사회적 관계(노노관계, 노사관계 등)를 조율한다. 이 때 노동 역시 그 상품에 포함되며, 시장에서 사고 파는 대상이 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누군가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소유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며 정신적 상실이라 할 수 있는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상술했듯이 노동력은 그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상실을 상품물신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삶과 움직임은 사실 상품에 의해 조정된 것일 뿐이다. 상품물신성은 엥겔스가 "허위의식"이라고 부른 것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상이란 특정 시대의 특정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나, 당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보편영원하다고 생각한다고 논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요지는 그런 보편영원성에 관한 믿음이 절반의 진실일 뿐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장악한 계급은 식량과 제품의 생산만 통제하지 않고, 사상의 생산마저 통제한다. 이것은 피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이 때로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사상을 따르는지 한가지 설명을 제공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도 이 분석에 따라 이해했다. 1843년작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트리어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 졸업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종교의 최우선 사회적 목적은 연대를 증진하는 것이라 했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정치적 경제적 현상유지, 즉 불평등의 유지를 강조하고 기여하는 것이라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아동노동에 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 개회 연설에서 영국 산업은 “피를 빨아 연명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동의 피마저 빨고 있”으며, 미국 자본은 “자본화된 아이들의 피”로써 재정을 마련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마르크스의 노동사상은 그가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관계(경제결정론)라고 우선순위를 부여한 것과 관계가 있다. 자본축적이 사회체제를 빚어낸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변혁이란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들간의 갈등에 의한 것이며, 그 충돌은 경제적 힘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갈등이론의 근간이 되는 발상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며 자유롭고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과업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제적이고 탈인간적인 것으로 바뀌었으며, 자본주의 체제는 그 경향의 첨단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의도적인 과정이 아니며, 개인이나 심지어 국가조차 이 경제의 힘에 거스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사회의 조직은 생산수단에 의존적이다. 생산수단이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필요조건들 중 인간의 노동을 제외한 모든 것들, 즉 토지, 천연자원, 과학기술 같은 것들이다. 생산관계란 인간들이 이 생산수단을 취득하고 사용함으로써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다. 이 두 가지가 조합됨으로써 생산양식이 정의되며, 마르크스는 이 생산양식의 변천에 따라 역사시대를 구분한다.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를 구분하는데, 토대 또는 하부구조란 경제체제이며 상부구조란 문화정치체제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토대와 사회적 상부구조의 괴리가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주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비판을 강조하고 그것을 대체할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논했지만, 적어도 자본제 사회가 과거의 사회(노예제 및 봉건제 사회)들보다는 진보된 것임을 인정했다. 마르크스는 윤리학에 관해서는 명징한 언설을 내놓은 적이 없지만, 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저술들이 도덕과 정의의 개념에 관해서도 논리적 귀결을 내놓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막스 베버 막시밀리안 카를 에밀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또는 막스 베버 (Max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는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 정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로, 사회학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를 연결한 프로테탄스 윤리로 유명하다. 그는 사회학과 공공정책학 분야에서 근대적인 연구토대를 마련한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베버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처음 연구 활동을 시작했으며, 말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빈 대학교 그리고 뮌헨 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당대 정치 분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베버는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제국 측 협상대표로 선임되기도 했으며, 바이마르 헌법의 초안을 닦는 위원회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에밀 뒤르켐과 더불어 가장 영향력있는 사회학자로 평가된다. 베버는 독일 튀링겐주의 에르푸르트에서 막스 베버 1세의 일곱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국민자유당의 부유하고 유력한 정치가이자 공무원이며, 어머니 헬레네 팔렌슈타인(Helene Fallenstein)은 절대적인 도덕 신념을 견지한 개신교도이자 칼뱅주의자였다. 베버 1세가 공직 생활을 하면서 그의 가정도 정치와 가까워졌으며, 그의 살롱에서는 여러 저명한 학자와 유명 인사가 드나들었다. 베버는 어머니의 인생관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어린 베버와 동생 알프레드 베버(그 역시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가 되었다)는 이렇듯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베버가 13살이던 1876년 성탄절에 부모님에게 준 선물은 두 편의 역사 평론인 "독일 역사의 과정에 대하여. 황제와 교황의 지위를 중심으로"와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민족 대이동까지 로마 제국 시대에 관하여"였다. 14살 때 그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리비우스를 주석으로 단 글을 썼으며, 대학 진학 전에 괴테,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에 대한 지식을 섭렵하였다. 베버가 사회 과학 분야로 학업을 계속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1882년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다. 법과 공부를 하는 동시에 젊은 베버는 경제학 강의를 듣고, 중세 역사와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잠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군으로 복무하였다. 1884년 가을에 베버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하고자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8년 동안 괴팅겐 대학교에서 한 번, 그리고 잠시 군사 훈련차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빼고 베버는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며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하급 법정 변호사로, 나중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된다. 1886년 베버는 영미권의 법 체계에서 변호사회에 해당하는 "참조인"(Referendar) 시험에 통과하였다. 1880년대 말에 베버는 역사 공부를 계속하였다. 1889년 그는 "중세 사업 조직의 역사"라는 제목의 법제사에 대한 박사 논문을 써서 법학 박사 학위를 땄다. 2년 뒤 베버는 하빌리타치온 논문인 "로마의 농업사와 공법 및 사법에서 그 중요성"을 완성하였다. "시간강사"(Privatdozent)가 된 베버는 이제 독일에서 교수직 자격을 얻게 된다. 박사 논문과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쓰는 사이 몇 년 동안 베버는 당시 사회 정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8년 그는 역사학파 쪽 독일 경제학자들의 새로운 모임인 "사회정책학회(Verein fur Socialpolitik)에 가입하였는데, 이들은 경제학의 역할은 우선 당시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경제 문제에 관한 대규모 통계 연구를 주창하였다. 그는 정계에도 발을 들여 좌파 성향의 복음주의 사회 의회에 가입하였다. 1890년 "폴란드 문제" 즉 동부 이동(Ostflucht, 지역 노동자들이 당시 급속히 산업화되던 독일 도시로 이주하면서, 독일 동부로 외국인 농장 노동자들이 유입하던 것을 뜻한다)를 연구하기 위하여 "학회"(Verein)이 설립되었다. 베버는 이 연구에 뛰어들어 결과물의 상당 부분을 썼다. 최종 논문은 뛰어난 경험적 연구 저작으로 널리 찬사받았으며, 농업 경제학 분야에서 베버의 명성을 굳혔다. 1893년 그는 그의 먼 친척인 마리안 슈니트거(Marianne Schnitger)와 결혼하였는데, 나중에 이 사람은 여성주의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작가가 되어, 베버가 죽은 뒤 남편의 학술지 논문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데 기여하였다. 1894년 부부는 프라이부르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베버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189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같은 자리를 받았다. 이듬해에 아버지 막스 베버 1세는 아들과 심한 다툼을 하고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베버는 점차 신경 과민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어 교수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의 상태 때문에 자신의 수업도 줄어들었고, 1899년 가을 마지막 강의는 끝내지도 못하였다. 1900년 여름과 가을에 요양소에서 몇 달을 보내다가 베버와 아내는 그 해 말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으며, 1902년에야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왔다. 1890년대 초에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한 뒤 베버는 1898년 초부터 1902년 말까지 전혀 글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1903년 가을에 교수직을 떠났다. 이러한 의무에서 벗어나 그 해에 베버는 사회 과학과 사회 정책(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학술지에서 동료 에드가 야페(Edgar Jaffé)와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와 함께 공동 편집장직을 맡았다. 1904년 베버는 이 학술지에 그의 매우 독창적인 몇몇 저작을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있었다.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 되었으며, 나중에 그가 경제 체제의 발전에 문화와 종교가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는 데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 저작은 베버 생애에 출간된 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또 그 해에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세인트 루이스에서 세계 박람회(루이지애나 만국 박람회)와 연계한 예술 및 과학 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베버는 자신이 그때 일반 강의를 다시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1907년에 유산을 받아 개인 학자로 계속 활동하였다. 1912년 베버는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규합하기 위하여 좌파 정당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여러 자유주의자들이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혁명 이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베버는 하이델베르크의 군 병원에서 원장으로 잠시 복무하였다. 1915년과 1916년에 그는 전후 벨기에와 폴란드에서 독일의 수위권을 유지하려는 위원회에서 일하였다. 독일 제국의 확장과 전쟁에 대한 베버의 생각은 전쟁을 거치면서 바뀌었다. 그는 19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 베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정전 위원회와 바이마르 헌법 기초를 맡는 위원회에서 고문이 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의 제48조 를 삽입하는 데 지지하였다. 이 조항은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포고를 통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이용하여, 히틀러 정부가 반대파를 억압하고 독재 권력을 얻게 되었다. 이때 베버가 독일 정치에 기여한 점은 아직도 논쟁거리이다. 베버는 이때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빈 대학교에서, 나중에 1919년에는 뮌헨 대학교에서 일하였다. 뮌헨에서 그는 독일 대학에서 최초인 사회학 학회의 회장이 되었으나, 결국에는 개인의 사회학 직위를 갖지는 않았다. 베버는 1919년과 1920년에 우파의 선동 때문에 정계를 떠났다. 뮌헨의 여러 동료와 학생들은 1918년과 1919년 독일 혁명 당시 그의 연설과 좌파적 태도에 반대하였으며, 일부 우파 학생들은 그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막스 베버는 에스파냐 독감에 걸렸으며, 1920년 6월 14일 뮌헨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역사파의 계통에 속해 있으나, 학문 방법론에서는 리케르트 영향하에 신 칸트 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특징을 프로테스탄티즘과 관련하여 밝힌 것은 그의 뛰어난 업적이다. 그의 학문적 활동은 사회학·경제학·역사학·법학 등 매우 폭이 넓었으며, 근대의 가장 위대한 사회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베버의 주요 저작들은 종교 사회학, 정치 체제, 조직 이론, 행위의 합리화를 다루고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술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그는 종교 사회학의 관점에서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서방과 동방 문화가 각자 발전하는 방식의 여러 원인 가운데 종교가 한 요소였다고 주장하며, 금욕적 칼뱅주의라는 특정한 성격이 서구의 합법적 권위, 관료제,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한다. 또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적 맥락처럼 순수하게 유물론적이지 않고 소유 관계, 기술, 지식의 발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이상과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소명과 예정 그리고 검약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개신교가 자본주의의 발흥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였다. 그의 또다른 주요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국가를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독립체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현대 서구 정치 과학 연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했던 관료제 분석은 현대의 조직 연구에서 아직도 중심적이다. 그의 유명한 업적을 "베버 명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으로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권위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여,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로 범주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근대 국가 조직이 합리적인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썼다. 베버에 따르면, 문화의 세계는 이른바 가치의 세계이므로 가치를 떠나서는 어떠한 사회과학 연구도 진전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가치는 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한 성격과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성격이 모두 있으므로, 과학의 이치나 체계에 부합한 지식을 얻으려면 가치문제를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베버는 가치 문제를 3가지(가치 관련, 가치판단, 가치중립)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사물의 근본이나 기초가 되는 가치관련은 사회학자, 역사학자가 연구 시행 시 가치 설정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실재는 무한하고 문화의 세계는 가치의 영역이므로 연구자는 설정 없이는 연구를시작할 수 없게 된다. 베버는 연구에서 가치 관련의 예를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 연구 주제의 선택, 결정 시 둘째, 본질적인 것을 부차적인 것들로부터 고르는 선택 시 셋째, 연구 작업 과정에서 여러 요소와 의미 사이의 인과관계 정립과 합리한 이유의 제공 넷째, 인과관계의 연쇄의 소급 적용 시. 즉, 인과적 소급의 진전의 상한 설정. 다섯째, 연구 내용 논증에서 개인에 국한된 경험과 모호한 감정성의 배제로써 연구 내용을 객관화하게 할 수 있다. 베버는 사회과학에서 해석이나 이론을 정책이나 실천과 구별한다. 이것을 이용해 가치 관련을 개입하게 해야 하고 좋고 나쁨을 결정하고 가치판단을 개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한 이유는, 해석 이론은 그 내용에서 명증적이어야 하는 것이지, '올바른' 등의 형용사적 용어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가치판단은 정책과 정치세계의 가치이다. 베버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정책입안, 정책실천 시에는 가치판단이 요구된다. 베버는 당시 독일 정치가들이 분명한 가치판단을 결여한 상태로,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모습을 비판하였다. 베버는 가치중립을 강의실에서의 가치라고 주장했다. 베버는 대학강단에서의 개인적(사적)가치판단을 반대했다. 강의실에서 교수는 강의를 하고, 학생은 침묵상태에서 학습하고 있으므로 대등한 입장에서의 비판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교수의 일방적인 개인적 가치판단이나 개인적 신념의 주입강의는 불공평하다고 인식하였다. 교수의 개인적 가치판단의 주입강의는 학생을 자기보다 좁은 시야의 사고를 갖게 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사회와 같이 가치들의 적대성이 지배하고 다신교의 시대에는 개인적 가치판단은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베버는 가치중립의 입장을 교수들의 강의윤리라 설명하고, 교수의 성실성은 그가 얼마나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강의하는가에 의해 증명된다고 강조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교수가 해야 할 역할은 여러 가지 가치들과 그리고 목적에 대한 여러가지 수단들의 관계의 선택항목들을 여러가지 수단들의 관계의 선택항목들을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분석하여 제시하는 데 그치고, 가치판단은 유보하여 후에 학생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베버의 시대는 가치의 혼돈과 가치판단 범람의 시대였다. 당시 독일 대학들에서 대부분의 대학교수들은 황제를 찬양하는 소위 어용교수들이었다. 따라서 강의시간에도 황제를 찬양하고 강의 방식은 자신의 주장과 견해만을 강력히 설명하면서 타인의 견해는 부정, 비판하는 가치판단에 의거한 방식이었다. 베버는 이러한 방식을 비판하고, 엄격한 학문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학설들을 공정하게 설명해주는 가치중립적 강의를 주장했다. 이를 통해 독일 민족의 꺼지지 않는 지적 심장을 대학 안에 잘 보존하고자 하였다. 베버는 사회과학과 역사에서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베버는 마르크스의 경제환원주의를 다시 세분화 하였다. 경제적 결정 부문은 경제적 목적을 위해 일부러 창출한 제도들을 뜻한다. 즉, 경제 제도 자체의 영역을 의미하며 은행, 주식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경제적 연관 부문은 그 자체는 비경제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연관된 행동과 제도의 영역을 의미한다. 가령, 정치,법률,종교 등을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조건 부문은 그 자체로 분명히 비경제적 현상이면서 경제와 연관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시대의 경제제도의 영향을 받거나 영향주는 영역이다. 가령, 문학, 예술 사상 등이 예이다. 이처럼 사회는 경제적으로 연관되고,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진 영역이 매우 많으므로 각 부분이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버는 마르크스가 경제에 의해 결정되는 종속적인 반영물로 본 관념까지도 상대적 자율성이 있으며, 사회 변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할수도 있다고 논증하였다. 베버에 의하면 위대한 사상가나 학자의 머리속에 있는 사상이나 관념은 사회변동을 가져올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관념과 물질력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이 사회변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관념은 물질력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회 변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선 관념의 특징은 일부 지식인들이 현실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구제 목적을 내세우는 여러 가지 관념 또는 특수 가치이념에서 찾을 수 있다. 지식인들은 이 관념에 의거하여 새로운 세계상을 만들어 제시하며, 관념이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이론적 합리성을 갖추어서 신뢰성을 갖는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관념들과 세계상들은 그 자체가 각각 소우주의 성격을 갖고 자율적이며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도록 이론적 합리주의를 발전시킨다. 베버에 의하면 이것만으로는 관념들이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되지 않는다. 그 관념들이 일정의 이해상황에 동조를 구해야 한다. 즉, 내적 심리적 이해상황에서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자행하는 결사체를 결성하려는 단체 결성력의 추동이 나온다. 이에 내적심리적 이해상황에서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자행하는 결사체를 조직할 때 외부와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거나 사회에 관계되는 이해 상황의 갈등상태에 비추어서 그 사람들의 요구와 목적을 가장 잘 충족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하나의 관념을 가운데서 친화력이 큰 것부터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자행하는 결사체가 관념을 선택하는 기준은 친화력이 가장 중시되므로 베버의 이론을 선택적 친화력의 이론이라고 명명한다.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자행하는 결사체가 선택적 친화력에 의거하여 관념을 선택하면 그 관념은 실천적 합리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자행하는 결사체는 선택된 관념의 지도와 규제와 추동을 받으면서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변동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베버에게 있어 사회과학은 추상적 개념속에 존재하는 가설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념형은 사회과학 이론과 연구속에 존재하는 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하고도 형이상학적인 요소로 이해되었고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구분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된 것이다. 이념형은 주어진 현상의 여러 요소나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것은 각각의 특정한 여러 케이스의 특징과 모두 일치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추상적인 현상을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상이한 여러 용어로 규정해 볼 수 있으나 반대로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용어 각각이 추상적인 현상 하나를 온전히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념형이란, 완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없고 도덕적 이상성도 아니며, 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수치의 평균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가 있으나 주어진 환경에서의 공통적인 여러 사례를 강조하는 특정한 요소로 이해해 볼 수 있다. 한편 '이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은 대단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베버는 '이념'이라는 용어를 사상의 세상(독일어로는 'Gedankenbilder')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것은 이 이념형이라는 용어가 완벽한 것이 아니며 단지 순리를 따르는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실체의 혼란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내 주는 것을 돕는 사상의 구조로 인식하는 것이다. 베버는 그 사람의 저서에 적기를, "이념형이란 하나나 다수한 관점에 의해 강조된 한 쪽 입장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고 엄청나게 다분화하고 각각의 통합에 의해 그리고 한 쪽 측면으로 강조된 여러 관점이 내용을 구성된 여러 요소로 세분하는 구성의 모습으로 통합되는 현재 혹은 종종 구체적인 현상의 부재등으로 구성된 개념"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념형은 비교사회학적 측면에서 사회나 경제적 현상을 분석할 때 굉장히 유용한 도구이며 이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생각과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등과 같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그러하다. 이념형은 자본주의와 같은 전역사적 현상과 베버 자신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분석과 같은 역사적인 독특한 현상의 일반적인 분석 모두를 가능하게 해준다. 특정한 현상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기 위해서, 행위자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해석해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행동의 해석은 행동을 이전의 선험적 이념형에 종속되어 분류해내려는 시도를 가진 관찰자의 문제를 수반하기도 한다. 베버는 과학적인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논쟁한 최초의 인물인데, 왜냐하면 엄격한 경제적 환원주의는 바로 경제적인 현상에서조차도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은 전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형이상학적 '사상'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진해서 예언을 했지만, 과학은 어떤 예언의 타당성도 보장할 수 없다. 베버는 마르크스주의 교의를 또한 개인적인 선호도의 이유로 거부하였다. 그는 집단주의적인 사회주의 경제가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모든 활동과 같이 경제도 그 수단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에 세계적 구원의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것은 오히려 관료제적 기제하에서 인류에 대한 억압으로 이끈다.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집단화된 경제는 시장경제보다도 더 악화된 무정부를 이끌기도 하는데, 그것은 집단화된 경제에 의해 탄생하는 과도한 관료제 때문이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주의혁명은 사회를 추상적으로 두 개의 대립적인 진영으로 구분하지만, 모든 구체적인 역사상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지 진영 내부에서의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여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계층의 다원성이 있다. 베버에게서 혁명은 흔히 지식인의 흥분의 근원이 된다. 인간이 탈소외라는 모호한 개념의 이름을 빌려서 혁명에 의해 급격히 전환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바로 대이변을 바라는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리는 지식인의 병폐이나 베버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의 비관용성을 매우 비난한다. 그 사람들은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고서 경멸하는 나머지 대중에게 그것을 강요하고자 한다. 베버에게서 그 사람들은 토론이 불가능한 '믿음의 전사들'처럼 보이는데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그 사람들의 헌신은 경험을 무시하게 했다. 베버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특히 독일에 있는 러시아 망명자들과의 만남을 종종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에 대해 단지 제한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정치에 관계된 활동에 대한 뜻을 반영하려는 의지가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게오르크 지멜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1858년 3월 1일~1918년 9월 28일)은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이다. 지멜은 사회학의 독특한 연구 분야를 그대로 그려 내고자 했다. 그는 만일 사회학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면, 그것은 연구 영역을 전혀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유로 포괄적이고도 “종합적”인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허버트 스펜서와 오귀스트 콩트의 개념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포괄적인 자연과학이 있을 수 없고, 단지 개별적이고 전문적인 과학자들만이 있을 수 있듯이, 사회과학자에게도 각 분과는 그 고유 영역을 가져야만 한다. 과학이 되기 위해서 사회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되어야만 하는 잘 규정된 연구 주제를 가져야 한다고 지멜은 제안하였다. 1858년 베를린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으며 <칸트의 물리적 단자론에서 본 물질의 본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신문과 잡지 등에 200여 편의 글을 발표했고 <사회 분화론>, <돈의 철학>, <사회학의 근본 물음>을 포함하여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다. 지멜은 사회학과 철학에 관한 책의 저자로서뿐만 아니라 에세이스트로도 유명했다. 그의 주요 전공 논문 저작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소스타인 베블런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 1857년 7월 30일 - 1929년 8월 3일)은 노르웨이계의 미국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존 커먼즈와 함께 제도경제학의 선구자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유한계급론》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년)이 있다. 빌프레도 파레토 빌프레도 페데리코 다마조 파레토(Vilfredo Federico Damaso Pareto, 1848년 7월 15일 - 1923년 8월 19일)은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경제학에 있어 그의 중요한 기여 중에는 부의 분배에 대한 그의 이론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선택에 관한 분석이 있다. 또한 사회학에 있어 '엘리트'란 개념을 널리 쓰이게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탈리아의 상위 20%의 인구가 80%의 부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관찰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관련한 그의 선구적 연구결과는 후일 루마니아 태생으로 미국의 엔지니어이자 품질연구가였던 조지프 엠 주란(Joseph M. Juran)에 의해 파레토 법칙, 파레토 분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또한 이 통계적 법칙은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데릭 존 데 솔라 프라이스(Derek J. de Solla Price)에 의해 프라이스의 법칙(Price's Law)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한국어 번역서로는 2018년 말 현재 정헌주가 번역한 『파레토의 엘리트 순환론』(간디서원, 2018)이 유일하다. 역사가 진보하지 않고 반복된다는 사관을 견지한 그는 이 책에서 인류 역사를 소수 엘리트가 다수의 대중을 지배하는 가운데 그저 그 엘리트 계층이 교체되는 틀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당시 부흥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을 일종의 종교적 정서에 휩싸인, 소수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산업 발달과 함께 노동자층이 증가하는 가운데 새로이 엘리트 층으로 진입하려는 세력)이 견인하는 가운데 다수 노동자 대중이 끌려오는 그러한 현상으로 보아 비판하는 동시에 이에의 부르주아의 무능한 대응 또한 지적한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관련하여 그에게 흔히 던져지는 비난에 관하여는 학자들의 여러 입장들이 서로 갈린다. 한 예로 칼 포퍼(Karl Popper)는 "전체주의 이론가(theoretician of totalitarianism)"로 그를 비난하나, 레나토 치릴로(Renato Cirillo)는 이를 두고 포퍼가 당시 반파시스트들 사이에서 흔히들 떠도는 낭설쯤에 불과했던 그러한 표현들을 파레토에게 씌우기 전에 그의 글을 본인이 직접 제대로 읽기나 했었는지 이를 뒷받침할 증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정부 정부(政府, Government)는 어느 지역 또는 국가를 통치하는 단체나 기관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를 모두 포함하며, 좁게는 행정부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합한 국가라면 내각도 포함한다. 그리고 만약 일당제 독재국가라면 당도 포함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대통령과 행정부로 구성되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 정부의 개념은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정부는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사법부 기타 모든 국가 기관을 총망라한 국가의 통치 기구 전체를 의미하고, 영어의 “Government”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 정부는 국가의 정치 기구 중 입법부·사법부를 제외한 집행부, 즉 행정부만을 의미하고 영어의 “Executive”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 정부는 행정부 중에서도 행정의 실권자, 즉 미국식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을, 영국식 의원내각제,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 국가에서는 행정의 실권을 가지는 내각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의 개념을 이렇게 사용하면 영국식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명목적인 권한밖에 가지지 못하는 국왕 또는 대통령과 같은 국가 원수는 정부에 포함되지 않게 된다. 정부의 첫 번째 개념이 가장 역사가 오래고, 또 소박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 기능이 입법·행정·사법으로 분화되지 않은 과거 절대 군주 국가에서는(개명 전제 국가(開明專制國家)에서는 사법은 어느 정도 분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국가의 모든 통치 기구를 정부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절대 군주 국가에서는 군주가 정부를 상징하였고, 정부라는 독특한 개념은 아직 발생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첫 번째 개념은 오늘날에도 영·미국(英·美國)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데, 영·미국에서는 민선 대표(民選代表)로써 구성되는 국회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의 모든 통치 기구를 설정한다는 뿌리 깊은 관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두 번째 개념은 전과는 반대로 권력 분립주의에 의거한 정치 기구가 설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발생한 개념인데, 현재 독일과 일본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 국가에서는 국민 주권 사상의 발전이 비교적으로 지체되었고, 따라서 민선 의회를 기반으로 하여 국가의 모든 정치 기구를 설정한다는 관념이 없었고, 그 반면에 권력 분립에 중점을 두는 입헌군주제 하에서 오랫동안 통치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정부의 세 번째 개념은 군주가 민선 국회(民選國會)의 제약을 받지만, 아직도 강대한 권한을 가지는 이른바 입헌 군주 정체로 군주가 단지 상징적 대표적 권한밖에 가지지 못하는 이른바 의회제 군주(parliam­entarische Monarchie) 정체로 발전함으로써 확립된 개념이다. 끝으로 국가의 중앙 정부와 대립되는 개념도 있지만, 이것은 헌법상 국가 권력이 상방(上方:聯邦)과 하방(下方:支分國) 간에 분할되어 있어서 상호간에 침해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연방제 국가에서는 의의가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국가 권력이 중앙 정부(국가)에 집중 통일되어 있는 통일제 국가에서는 그다지 큰 의의를 가질 수 없다. 정부 형태(政體)와 국가 형태(國體)를 구별하고, 국가 형태는 주권이 1인에게 존재하느냐 또는 다수인에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군주국과 공화국을 구별하고, 또 공화국은 그 다수인을 국민 전체로 구성하느냐, 또는 특정 계급으로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민주공화국과 계급제 공화국(귀족 공화국 및 영농제(榮農制) 공화국)으로 분류하지만, 결국은 국가(중앙정부) 형태는 정부 형태에 따라서 결정될 수밖에 없고, 현재 군주 주권을 공공연히 표방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시피 되어 있다. 우선 정체에서도 첫째 군주 정체와 공화 정체를 분류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군주 정체의 국가에서 군주의 권한(예컨대 영국)이 공화 정체 국가의 대통령의 권한(예컨대 미국)보다 미약하기도 하고, 군주 정체 국가에서도 민주 정치가 가능한가 하면, 공화 정체 국가에서도 독재 정치가 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구별의 의의가 상실되게 되었다. 둘째로 정체에서 직접 민주 정체와 간접 민주 정체가 구별되지만, 직접 민주 정체는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현대 국가에서는 기술적으로 채용하기가 곤란하고, 더욱 지금에 와서는 국민 투표, 발안제와 같은 직접 민주 정치 제도를 병용하는 이른바 혼합 민주 정체(混合民主政體)를 채용하는 국가가 많이 출현하였기 때문에, 이 구별 역시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셋째로 정체에서 입헌 정부와 비(非)입법 정체가 구별되지만, 입헌 정체의 개념 자체가 애매하여 학고(學考)와 그것이 실시되는 국가(중앙정부)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고, 또 현재에서는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성문 헌법전(成文憲法典)을 가지고 있고 그 성문 헌법전 속에는 국민 주권을 구가하고 있고, 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회·행정·재판소 등 권력 분립에 의거한 국가의 통치 기구를 설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별 역시 현실적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현재는 입법·행정·사법 간에 권력 분립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 나라의 정부 형태의 특색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첫째 입법·행정·사법의 기관의 구별은 하지만 삼권 간의 권력 통합주의(權力統合主義)로 나가는 이른바 회의제(會議制:Versammelungsregierung)와 삼권 간의 권력 분립주의로 나가는 기타의 정부 형태가 구별된다. 삼권간의 권력 분립주의로 나가는 국가에서 삼권간의 권력 분립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여러 정부 형태가 구별된다. 그러나 사법권을 입법권과 행정권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독립시켜야 된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국가에서든지 인정을 받고 있고, 따라서 사법권과 입법권·행정권과의 권력 분립에서는 국가 간에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서도 그 나라의 사법부가 민선 의회(民選議會)가 제정한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 여부를 심사할 수 있는가, 또 그 나라의 사법부가 민·형사 사건뿐만 아니라 행정 사건까지도 관할할 수 있는 이른바 사법형(司法型)의 국가인가, 또는 그것이 불가능한 행정형(行政型)의 국가인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입법권과 사법권과의 권력 분립은 국가 간에 크게 차이가 나는데, 여기에서 미국의 대통령제와 영국의 의원내각제가 갈라진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입법권과 행정권간의 권력 분립을 되도록 엄격하게 하려고 노력한 데서 나온 정부 제도이고, 입법권과 행정권 간의 조정에 의한 상호 의존(wechselseitige Abhangigkeit durch Koordination)을 도모했고, 영국의 의회제는 영국 왕의 수중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행정권마저 의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정부 제도이고, 입법권과 행정권 간의 권력 분립을 원칙으로 하지만 내각의 국회로의 통합에 의한 상호 의존(wechselseitige Abhöngigkeit durch Integlation)을 도모한다.""' 한국의 정부 형태는 미국식 대통령제, 영국식 의원내각제,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를 절충한 독특한 정부 형태이고 원리상에서는 미국식 대통령제에 속한다. 즉 현행 헌법상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은 실질적인 행정권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지고 있다(헌법 66조). 그리하여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국가 원수가 가지는 선전 포고와 강화권, 조약의 체결·비준권, 외교 사절의 신임·접수·파견권, 국군 통수권, 긴급 처분권, 계엄 선포권, 공무원 임면권, 사면권, 국회에 대한 의견 표시권 등을 가진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의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고 국론(國論)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현행 헌법은 또 대통령에게 권력 분립의 원리를 초월하여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통합 조정하고 중재하는 국정의 통합·조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즉 대통령은 헌법 개정안의 제안권,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 투표에 붙일 수 있는 권리, 국회 임시 회의 집회 요구권 등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또 대통령은 헌법상의 필수 기관인 국무회의의 의장으로서 국무회의 주재권을 가지고, 국무회의의 심의 안건을 제출할 수 있는 등 정치의 일선에 나가고 있다. 물론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중요한 정책은 대통령 외에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구성되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고, 헌법 제88조에 열거된 사항, 즉 거의 행정 전반에 긍하는 여러 문제는 반드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고, 또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 관한 모든 문서에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副署)가 있어야 하지만, 이 국무회의의 심의권과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권(副署權)으로 인하여 대통령의 권한이 제약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해서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임명을 하고 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에 대하여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대통령제 정부 형태에서 국회가 내각에 대하여 해임 건의를 할 수 없으나 대한민국의 정부 형태가 절충형을 취해 의원 내각제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기에 이러한 권한을 국회에 부여하여 정치적으로 행정부, 즉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구 헌법에서는 해임 건의권 대신 더 강력한 해임 의결권을 국회에, 이에 대하여 대통령에게는 국회 해산권을 각각 부여하였으며 국회가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 의결을 결의하였을 때에는 대통령은 반드시 이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을 설치했었다. 그러나 제9차 개정 헌법은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을 삭제하는 대신 국회의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 의결권도 해임 건의권으로 완화하고 또한 이행 의무 규정도 삭제하였으므로 국무총리·국무위원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책임을 지울 뿐이며 국회에 의한 대통령의 권한을 제약할 가능성은 적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행정의 실권은 명실 공히 대통령에게 귀속될 수밖에 없다. 이 행정의 실천자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국회가 불신임 결의권(不信任決議權)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국회가 탄핵 소추는 할 수 있지만, 본래 탄핵은 정치적인 책임을 묻는 제도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므로 의원 내각제 정부 형태에서의 수상처럼 국회에 대하여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야당이 국회의 다수당이 되더라도 대통령은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다수결에 의한 재의결(再議決)에 의하지 않고는 극복되지 않는 강력한 법률안 재의권(法律案再議權)을 가지고 있으므로 능히 야당 국회의 정치적 공세를 좌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대통령의 임기 5년간은 행정부는 국회의 제약을 받음이 없이 안정될 수 있는 강력한 행정부를 한국 헌법은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헌법 규정상 절충식 정부 제도이지만 실제 운영상에서는 미국식 대통령제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헌법 66조 4항). 대통령 밑에 국무총리와 행정 각부라는 행정 관청을 놓았고, 정부의 중요 정책의 심의 기관으로서 국무회의를 두었다. 국무회의는 정부의 내부 기관이고 행정 관청은 아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서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헌법 86조 2항). 행정 각부의 장은 국무위원 중에서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헌법 94조). 따라서 대한민국에서는 국무위원이 아닌 행정 각부의 장은 존재할 수 없는데, 이 점에서 영국·프랑스와 다르다. 국무총리 또는 행정 각부의 장은 소관 사무에 관하여 법률이나 대통령령의 위임 또는 직권으로 총리령 또는 부령을 발할 수 있다(헌법 95조). 여기서 행정의 개념이 문제될 수 있는데, 행정의 개념은 실질적 개념과 형식적 개념이 대립할 수 있다. 행정의 형식적 개념에서는 행정 기관이 행하는 모든 작용이 행정에 포함되겠지만, 삼권 분립주의가 국가 권력을 약화시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정책적 동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행정의 실질적 개념을 규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20세기 행정 국가(行政國家)에서의 행정은 너무도 그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독일의 포르슈토프(Forstoff) 교수는 행정은 추사(beschreiben)할 수 있지만, 정의(定義, definieren)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행정은 국가 작용 중에서 일반 추상적인 법규를 정립하는 입법 작용과 구체적인 쟁송(爭訟)에 법을 적용 선언함으로써 쟁송을 해결하는 사법 작용을 제외한 모든 작용이라고 보는 이른바 공제설(控除說)을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실질적인 의미의 행정 작용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입법 및 사법 작용에 관련되는 광범한 권한도 가지고 있다. 정부의 권한 중에 입법 작용과 관련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무에 관계되는 입법 사항(立法事項)을 규율하는 실질적 의미의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로, 긴급 처분·명령권(헌법 76조), 계엄 선포권(헌법 77조), 명령 제정권(헌법 75조), 조약 체결·비준권(헌법 73조) 등이 있다. 둘째 국회의 입법 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으로 헌법 개정안 제안권(헌법 128조 1항), 확정 헌법의 공포권(헌법 130조 3항), 법률안 제출권(헌법 52조), 법률안 재의(再議) 요구권(헌법 53조 3항), 법률 공포권(헌법 53조 6항), 국회에의 출석·발언권(헌법 81조) 등이 있다. 또한 정부는 사법 작용에 영향을 미치게 될 권한도 가지고 있는데,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권(헌법 104조)과 은사권(恩赦權) 등이 그것이다. 681년 682년 683년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는 대한민국의 서해안에 있는 광역시이다. 서쪽으로는 황해를 사이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있다.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제조업과 물류 산업이 발달하였다. 시청 소재지는 남동구 구월동이고, 행정구역은 8구 2군이다. 2003년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개청되어 송도·청라·영종 지구를 관할한다. 인천에 사람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문학산, 계양산 등에서 발견된 각종 석기류들로 미루어 신석기인 것으로 추정되며, 학익, 주안, 문학 등에 분포된 고인돌은 청동기에 부족세력이 거주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인천은 백제시대에 미추홀(彌鄒忽)로 불렸으며 비류 백제의 도읍지이기도 하였다. 미추홀이란 이름은 물가에 있는 지역을 뜻하는 뭇골, 또는 거친 들판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맷골의 음차라는 해석이 있다. 백제의 온조(溫祚)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이후 500여년간 백제의 영토였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 일대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설치하였다.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점령하여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삼국통일 이후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됐다. 소성현은 고려 때에는 수주(樹州)에 속했다가 1105년(숙종 10년), 문종(文宗)의 왕비이자 순종(純宗), 선종(宣宗), 숙종(肅宗), 대각국사 의천(義天)을 비롯한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생산한 인예태후 이씨(仁睿太后 李氏)의 외향이라 하여 경사의 근원지를 뜻하는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7대 국왕 인종(仁宗) 역시 어머니 문경태후 이씨(文敬太后 李氏)의 친정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재승격시켰으며, 1390년(공양왕 2년),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 경원부(慶源府)로 개칭되었는데, 문종조에서 인종조까지 7대에 이르는 동안 인주이씨 집안에서 다섯 왕비(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 사숙왕후, 순덕왕후)가 나왔고, 다섯 임금(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이 인주이씨 왕비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제국이 고려를 침입하자, 1232년(고려 고종 19년) 고려 정부는 수도를 개경(開京)에서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항쟁하였다. 이 시기 고려는 강화도에서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다. 강화는 강도(江都)로 불리며 1270년(고려 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 까지 38년간 고려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개경 환도 이후 발생한 삼별초의 난 시기에는 삼별초가 안남도호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강화도에 강화 고려궁지이 세워지자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는데, 왕궁과 성곽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지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간척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강화도의 면적은 크게 확장되었으며 본래 두 개의 섬이었던 강화도는 하나의 섬이 되었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인주로 격하(환원)된 뒤, 1413년(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지는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함으로, 인천이라는 이름이 태어났고, 이 날(1413년 10월 15일)에서 유래하여 매년 10월 15일을 '인천 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460년(세조 6년) 세종(世宗)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의 외향이라 하여 인천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 내용에 의해 부산(釜山), 원산(元山)과 함께 개항이 결정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제물포 개항으로 제물포에 인천감리서가 설치되면서 사실상의 읍치가 관교동에서 제물포로 이전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전국을 23부로 개편하여 인천부(仁川府)가 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다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지금의 학익동, 문학동, 관교동, 선학동 일대를 포괄하던 인천부 부내면은 1906년 인천부 구읍면으로 개칭되었고, 부내면의 이름은 당시 다소면의 일부였던 개항장(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으로 넘어갔다. 한국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이다. 1899년 9월 18일 인천역에서 노량진역까지 33km의 구간이 개통되었다.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개통되었고 사흘 후인 7월 7일 서울역까지 연결되어 서울-인천간 철도 교통이 완성되었다. 경인선은 개통초기 하루 2회 왕복하였으나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하루 5회 왕복 운행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통신인 전신은 인천의 제물포에 처음 도입되었는데, 청나라가 조계지와 본국간의 연락을 위해 전신을 설치하였다. 한편, 한반도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청나라에 파견된 유학생 상운이 1882년 3월 제물포항으로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이 시초이나, 실제 통화를 위해 개설된 것은 1898년 무렵으로 보인다. 가장 오래된 통화 기록은 1898년 1월 28일 인천 감리가 외아문(外衙門)에 “오후 3시에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으로 일본이 서울-인천 간 전화를 불법으로 가설하려하자 조선이 서둘러 사업을 시작하였다. 인천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요리로는 짜장면과 짬뽕, 쫄면 등의 면식류를 들 수 있다. 화교들에 의해 전해진 짜장면은 중국 요리 작장면에서 지금의 달짝지근하고 짭짤한 장에 비벼 먹는 면 요리로 발전하였으며, 짬뽕은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한 화교들에 의해 들어와 점점 우리 입맛에 맞게 변하며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을 가진 짬뽕으로 발전했다. 쫄면은 1970년 중구의 광신제면이라는 제면 업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서쪽으로 서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해안 매립지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 잔구형산맥이 해안까지 발달해 있고, 시가지를 중심으로 300m 내외의 잔구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 반도형 지괴가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부평구는 원적산, 광학산(201m), 거마산(205m)을 경계로 인천 도심과 시가지가 분리되고, 연수구는 문학산(213m)을 경계로 인천 도심과 시가지가 구분되며, 계양구는 계양산(395m), 천마산(285m)을 경계로 인천 도심과 별개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계양구와 부평구는 이처럼 구분되어 있어서 북인천이라고 통칭한다. 서구도 마찬가지로 동으로는 계양산 등의 산맥이 있고 남쪽의 동인천 지역으로는 2016년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가좌동 지역을 제외하면 왕래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서인천이라고 부른다. 동구와 중구(영종도 제외)는 원도심으로,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서 동인천이라고 부르며, 나머지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는 남인천이라고 부르나 상기한 산맥의 존재로 서, 북, 동인천에 비해 그리 잘 불리지는 않는다. 강화군은 행정구역상 인천에 속하지만, 강화대교가 연결된 동쪽의 김포시와 밀접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방위를 기준으로 육지의 경우, 북으로 경기도 김포시, 동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부천시 전역, 동남쪽으로 시흥시와 접하고 있다. 해상은 남쪽으로 충청남도 당진시, 서산시, 태안군과 접하고 있으며, 북한과는 북방한계선을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 룡연군, 옹진군(황해남도), 강령군, 청단군, 연안군, 배천군 및 황해북도 개풍군과 맞닿아 있다. 해수 권역이 광역시 중 가장 넓다. 인천은 1981년 직할시 승격 당시 면적은 201.21 km였다. 1989년 경기도 김포군 계양면(30.9 km)과 옹진군 영종면ㆍ용유면(72.0 km) 편입으로 면적이 310.83 km가 되었다. 1995년 강화군(401.3 km), 옹진군(163.6 km), 김포군 검단면(42.2 km)의 통합으로 면적이 955 km가 되었다. 이후에는 공유수면 매립 등으로 면적이 넓어져 2014년 말 기준으로 1,047 km에 이르고 있다. 인천광역시의 전체 1,047 km 중 강화군이 411 km, 옹진군이 172 km이고, 중구의 섬지역이 118 km(영종도, 무의도 등)를 차지해, 인천의 전체 면적 중 인천 본토는 346 km, 섬 지역은 701 km로, 섬 지역이 육지 지역의 약 2배이다. 인천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 에 속하며, 구분에 따라서는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서해 5도와 같이 온대 하우 기후("Cwa")에 속하는 곳도 있다. 해안도시이지만 낮은 수심의 경기만 깊숙이 위치해 있어 기온과 강수량은 내륙 지방과 비슷하다. 7~8월에 기온이 가장 높고 강수량이 높다. 인천은 북서풍의 영향을 받아, 같은 위도 상에 있는 동해 연안의 도시보다 겨울철 기온이 낮다. 강수량은 한국 중부의 타 지역에 비해 적은 편이다. 옹진 섬 지역은 인천 육지보다 바다의 영향으로 따뜻한 편이다. 인천은 강한 편서풍 기류를 타는 몽골 사막지대의 황사 발생원에 가깝기 때문에 황사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다. 높은 산과 구릉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내륙 도시들에 비해 황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2016년 10월 인천의 인구는 서울과 부산에 이어 3번째로 300만을 넘어섰다. 인천은 서울과 부산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2016년 10월말 기준으로는 인천광역시의 총 인구는 300만 445명(주민등록 294만 1793명, 외국인 5만 8652명), 세대 수는 116만 9208세대이다. 인천광역시는 대한민국 7대 도시 중 2008년 이후 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도시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남초 도시 중 하나이다. 2017년 통계청 전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천광역시의 전체 인구는 292만 5,967명인데 이 중 남자가 147만 2,081명이었고 여자가 145만 3,886명으로 성비 101.3 : 100의 남초 상태였다. 인천 내 10개 구, 군 별로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연수구와 부평구, 계양구 단 3곳을 제외한 나머지 7개 구, 군에서 모두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중 성비 불균형이 가장 심한 곳은 옹진군인데 이 곳의 성비는 무려 132.7 : 100까지 올라갈 정도로 매우 극단적인 남초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옹진군에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인들 때문에 남자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옹진군 다음으로는 성비 106.6 : 100을 기록하고 있는 중구가 가장 높다. 반면에 부평구는 98.4 : 100으로 인천 내에서 가장 낮은 성비를 기록하고 있다. 인천광역시의 행정 구역은 8구 2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위 행정구역은 1읍 19면 125동이다. 면적은 1,063.1 km이다. 2019년 7월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른 인구는 295만 6,818명이다. 송도, 청라 및 영종의 세 구역으로 구분되며 인천국제공항과 항만을 포함하여 총 132.9 km 규모가 지정되었다. 동북아시아의 물류, 비즈니스, 레저, 관광산업 중심지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 내에서는 최초로 지정되었다. 수도권 주요 도시에서 1시간대, 중국과 일본을 가운데서 연결하여 2시간 이내에 접근가능하며, 배후시장으로 비행시간 3시간 이내의 지역에 147개의 인구 1백만 명 이상의 도시들을 포함하여, 약 20억 명의 대규모 소비시장이 있다. 송도국제도시는 연수구 송도동에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일원으로 연수구 송도동 인근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건설되었으며, 2020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제금융과 무역, 지식기반산업, 친환경적인 주거지역으로 특화되어 있으며 13,162 에이커의 면적에 252,000명의 인구를 수용할 계획이다. 센트럴파크, 동북아무역타워, 송도컨벤시아, G타워 등의 시설과 인천대학교,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한국뉴욕주립대학교 등의 교육기관이 위치해 있으며 2016년 7월 기준 인구는 10만 3천여 명이다. 13,833 ha 면적의 영종지구는 2020년까지 친환경적인 공항신도시로 개발된다. 인천국제공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과 방문객들, 물류업 종사자들에게 특화된 지역으로 계획되어 있다. 인천국제공항과 연계한 물류, 관광 산업에 최적화되어 있다. 모두 144,800명의 인구를 수용할 계획에 있으며 2016년 완성을 목표로 했다. 서구 청라동에 위치한 청라국제도시는 신도시 형태의 거주지구를 포함하여 테마파크와 체육시설, 원예단지와 국제금융에 특화되어 있다. 송도, 영종과 더불어 인천경제자유구역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국제업무와 레저의 중심지로 개발되고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공항철도, 경인고속도로, 경인아라뱃길 등 영종과 서울을 잇는 주요 교통 축 상에 바다를 끼고 자리한 해안도시로서 탁월한 입지조건을 갖고있다. 2014년 제 17회 아시안게임 개막식이 열린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이 위치해 있다. 2016년 주민등록 인구가 10만 명을 돌파하였다. 인천광역시의 시장, 교육감, 시의원은 지방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선출직이며, 현재의 선출직 공무원들은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에 의해 뽑힌 사람들이다. 현임 인천광역시장은 박남춘, 교육감은 도성훈이다. 인천광역시의회는 지역구의원과 비례대표의원을 포함하여 총 33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유한국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인천광역시의 각 자치구에는 의회가 구성되어 있다. 통계청이 분석한 인천광역시의 1인당 지역내 총생산은 2,227만원으로 7대 도시중 울산과 서울에 이어 3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높은 지역은 생산 지표에 비해 1인당 소득과 소비 지출은 각각 1,417만원과 1,279만원으로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인천의 높은 총생산 수치에 비해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소득이 적고 동시에 소비 씀씀이가 위축되어 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천의 가구당 평균 소득 규모는 4,078만원으로 비슷한 규모의 광역시인 부산, 대구보다는 높았으나 7대 도시 평균치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동시에 가구 당 평균 부채 규모는 5,518만원으로 서울 8,638만원에 이어 2위였다. 이는 신도심인 송도국제도시와 청라국제도시등이 개발되면서 주택 대출 증가 등을 이유로 꼽고 있다. 인천의 1인당 지역내 총생산 및 시민의 소득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곳은 인천에 소재하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청사로 직원들의 1인당 평균 연봉이 8,600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 소속 공공기관 가운데 평균연봉이 7000만원 이상인 기관은 총 8곳으로, 그 중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직원 1인당 평균연봉이 가장 높은 수치인 것이다. 인천의 생산구조에서는 서비스업이 59%로 가장 높은 비율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제조․건설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이동하는 양상을 보였다. 범국가적으로 건설업의 비중과 성장세가 저하되고 축소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7대도시중 가장 높은 건설업 비율을 자랑하던 인천도 이에 자유롭지 못했다. 건설업의 비중이 2010년 8.9%에서 7.3%로 떨어졌으며 제조업 역시 29.4%에서 29.1%로 다소 둔화됐다. 반면 서비스업은 58.2%에서 59%로 소폭 상승하며 여전한 성장세를 굳혔다. 2014년 7월 송도국제도시에 동북아트레이드타워가 준공되었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아트센터대로 175에 위치한 G타워로 이전하였다. 대한민국 최대 국제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이 중구 영종도에 위치해 있다. 2001년 3월 29일에 개항하였으며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운영하고 있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항공편의 59.7%가 대한민국의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노선이며 나머지 40.3%는 외국 항공사들에 의해 운항되고 있다. 인천공항을 통하여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도시들과 도쿄, 상하이, 뉴욕, 싱가포르, 홍콩,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오사카 등 전세계 수많은 도시들이 항공교통으로 연결되고 있다. 비행거리 3시간 내에 인구 100만 명 이상 도시 61개가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허브 공항으로 불리며 중요한 지리·경제적 이점을 갖고 있다. 영종도에는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하늘길을 연결하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국제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해 있다. 수로에서 수도권의 관문인 인천항은 1883년에 처음으로 개항되었다. 인천항은 수출항이며, 구형 자동차와 각종 수출품들을 외국으로 수송하고 인천과 중국으로 오가는 여객선이 있다. 현재 내항, 북항, 남항으로 구성된다. 내륙 수로로는 황해와 한강을 잇는 경인 아라뱃길이 2012년 개통되었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각 도시로 운행하는 국제 여객선이 운항 중이다. 제1국제여객터미널에는 잉커우, 친황다오, 옌타이, 다롄, 단둥으로 가는 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제2여객터미널에는 웨이하이, 칭다오, 톈진, 롄윈강 방면으로 선박이 운항되고 있다. 현재 인천항신국제여객터미널이 건설 중이다. 고속도로 5개 노선(경인고속도로, 제2경인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과 고속화도로 1개 노선(제3경인고속화도로)이 인천을 기종점으로 삼으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도 인천 동부를 지난다. 2009년 영종도와 송도국제도시를 잇는 길이 21.38km의 인천대교가 개통되었다. 인천대교는 대한민국 최장 교량이자 세계 7위 규모이다. 2017년 3월 23일에는 인천을 통과하는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인천 ~ 김포 구간이 개통되었다. 인천에는 80개의 간선버스(시내버스)노선과 70개의 지선버스(마을버스)노선, 37개의 좌석버스 노선이 2017. 6월 기준) 운영되고 있다. 인천광역시는 2009년 10월 10일부터 서울특별시·경기도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수도권 통합요금제에 참여해 시행하였다. 2013년에는 청라국제도시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을 잇는 BRT가 개통되었다. 버스 터미널은 미추홀구 관교동에 있는 인천종합버스터미널이 유일하다. 일부 시외버스는 용현동에 있던 구 터미널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철도가 개통된 지역 중 하나로, 1899년의 경인선을 시작으로 개통된 여러 철도 노선이 인천과 서울 및 주변 지역을 잇는다. 도시간 간선 철도는 1974년에 경인선을 포함한 구간에서 전철 운행(수도권 전철 1호선)이 시작되면서 운행을 중지하였으며, 이후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인천국제공항선을 통하여 검암역과 인천국제공항역에 KTX가 운행되었다. 시 관내를 운행하는 도시 철도로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과 2호선, 수도권 전철 1호선(인천역~부개역), 서울 지하철 7호선(부평구청역~삼산체육관역), 수인선(인천역~소래포구역), 인천국제공항철도(인천공항2터미널역~계양역)가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과 인근 지역을 잇는 인천공항 자기부상철도 또한 운행되고 있다. 인천은 한국 근대 스포츠의 시발점으로서 축구와 야구가 대한민국에 가장 먼저 소개된 도시이다. 현재 인천을 연고지로 삼고 있는 프로 스포츠 팀은 총 4개 종목(축구, 야구, 농구, 배구) 7개 팀이 운영 중이다. 인천 연고 프로 스포츠 팀은 인천 유나이티드 FC가 미추홀구 숭의동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 SK 와이번스가 미추홀구 문학동의 인천 SK 행복드림구장, 부평구 삼산동의 삼산월드체육관, 계양구 서운동의 계양체육관, 남동구 서창동의 인천남동아시아드럭비경기장, 도원동의 도원체육관등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한국마사회 지점이 미추홀구 숭의동, 부평구 부평5동, 중구 동인천동, 연수구 연수동에 위치하고 있다. 2002년 6월 14일 문학경기장에서 2002 FIFA 월드컵 대한민국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열렸다. 2009년 8월 7일부터 10월 25일까지 80일간 송도국제도시에서 개최되었다. 2010년 G20재무차관회의를 개최하였다.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개최되었다. 2015년에는 아시아에서 3번째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 책의 수도 국제 행사를 개최했다. 2005년 부터 2년 간격으로 개최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도로교통분야 전문 박람회이다. 한국의 록 음악가들은 물론 세계의 유명 뮤지션들도 참여하는 록 페스티벌으로, 인천광역시가 후원한다.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5개의 철학(MUSIC/PASSION/Environment Friendly/D.I.Y/Friendship) 과 정신을 연결고리로 표방한다. 인천의 명물 음식으로는 동구 화평동의 세숫대야 냉면, 중구 신포동에 위치한 신포시장에서 시작된 신포 닭강정과 쫄면, 메밀국수, 중구 차이나타운의 짜장면 등이 있다. 특히 인천에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음식 중에는 면 요리가 많은데, 이는 인천항의 개항과 인천 차이나타운 개방 이후 시작되어 확산된 중국 문화의 영향이다. 중구 연안동 연안부두 앞에 위치한 인천종합어시장 일대의 횟집 거리와 중구 북성동 월미도의 횟집 거리도 많은 인파가 찾는 명소다. 개항과 더불어 거류지와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세워진 근대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1897년 건립된 답동성당은 인천을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부평역 앞 거리와 구월동은 유흥주점, 영화관, 쇼핑몰, 백화점 등 다양한 시설이 군집되어 대규모 상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바다와 관련 된 명소로는 무의도, 신도, 시도, 실미도 등이 있으며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유명 섬으로 자리잡았다. 중구 북성동 월미도 문화의 거리 역시 많은 인파가 찾는 볼거리 중 하나다. 중구 영종도의 을왕리 해수욕장은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 2009년 10월 완공된 인천대교는 연수구 옥련동과 영종도를 연결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교량이자 세계에서 7번째로 긴 교량이다. 강화군에는 고려-몽골 전쟁시기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영향으로 조성된 고려궁터와 고려 왕릉,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한옥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과 용흥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던 문수산성, 정족산성, 초지진, 광성보 등 근현대사의 문화 유산이 많다. 최근에는 송월동 동화마을도 각종 매스컴에 등장하며 유명세에 따라 방문 인파가 많아져 동인천의 관광 활성화에 톡톡한 이바지를 하고 있으며 송도국제도시개발에 따라서 송도 센트럴파크나 커낼워크도 관광 포인트로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인천에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대종교, 증산도, 대순진리회 신자가 모두 존재하고 있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주민의 상당수는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다. 2015년 인구총조사 결과 인천시 인구 2,783,565명 중 개신교 신자는 23.1%인 642,215명, 다음 천주교가 265,369명(9.5%), 불교 244,467명(8.8%)를 차지했다. 따라서 개신교의 세가 큰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함께 불교도가 적은 지역으로 꼽힌다. 실제로 조계종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부설 불교미래사회연구소는 부평/계양구와 남/연수구를 주요 포교 취약지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인천에는 대한민국의 성장기인 1960년대 ~ 1970년대에 기독교 신자가 급증하였고, 그 결과로 많은 수의 교회들이 생겨나 성장하였다.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지역 일대에 가톨릭 인천교구를 설치했으며, 인천 내에는 82개의 성당과 33개의 공소가 있다. 한국 정교회는 간석동에 성 바울로 성당을 두고 있으며, 한국 성공회에서는 성공회 서울교구의 서부교무구와 강화교무구에 18개의 성당을 두고 있다. 개신교 교회는 이 지역이 1908년에 선교사들의 선교구역이 분할될 때 감리교의 선교지역으로 지정된 관계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세가 좀 더 강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중부연회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기타 다양한 장로교 교회들도 들어와 있다. 개신교 교회 중에서는 내리교회, 숭의교회, 인천순복음교회, 주안감리교회, 주안장로교회 등의 주요 교회가 있다. 인천의 초기 개항장이었던 중구 항동 1가에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위치해 있으며, 동인천역 부근에 있는 답동성당은 사적으로, 성공회 내동성당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강화군에는 강화읍에 성공회 강화성당이 사적으로, 성공회 온수리성당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012년 UN 국제기구 녹색기후기금(GCF) 본사를 인천의 송도국제도시에 유치하면서 인천은 아시아 최초로 UN 소속의 국제기구 본사를 가진 도시가 되었으며 현재 인천이 보유한 국제기구는 19개에 이른다. 다음은 인천광역시와 자매 결연을 체결한 도시이다. 684년 685년 686년 687년 688년 689년 흑치상지 사망 690년 정물화 정물화(靜物畵)란 그림의 표현 대상에 따라 구분하는 미술의 한 유형이다. 한국어의 정물화라는 단어는 영어()와 독일어()의 뜻을 따온 것이다. 프랑스어의 과장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물화란 자연적 환경과는 동떨어진 장소에 움직이지 않는 (죽은) 대상을 화가의 미적 시각에 따라 화폭에 담는 그림의 한 형태이다. 정물화에서 흔히 보게되는 이 죽은 대상들은 과일, 꽃, 채소, 도자기, 유리잔, 식기, 고기나 새, 책상보나 커튼 등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살아있는 대상들 개나 사람이 정물화의 배경에 들어가기도 한다. 르네상스가 종말을 맞이할 즈음, 미술시장은 귀족과 고위 성직자뿐만 아니라 부유한 부르주아지와 떠오르는 상인계급을 포함 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의 존재는 배제한 채, 생명이 없는 사물만을 그리는 것이 독자적인 주제가 되었다. 이 장르는 재능있는 전문가들의 작품으로 인해 그 자체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곧 새로운 의뢰인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당시 정물화 장르는 유럽전반, 특히 북유럽 국가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단테 알리기에리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 1265년 3월 1일경 ~ 1321년 9월 13일 또는 9월 14일)는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 또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단테의 아들 야코포의 설명: “Durante olim vocatus Dante, condam Alagherii de Florentia”).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의 중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출생 일자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구구하며, 5월 30일이 실제 출생일이라는 설이 있다. 유년 시절의 단테의 삶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년 시절에 경험한 베아트리체와의 인연을 주제로 하는 자서전적인 《새로운 삶》(Vita nuova)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단테가 9살이 되었을 때 폴코 포르티나리 (Folco Portinari)의 딸 동갑내기 베아트리체를 처음으로 멀리서 보고 애정을 느끼며, 이 진귀한 유년 시절의 경험은 단테의 인생 행로를 좌우하게 된다. 그러나 단테는 그가 12세인 1277년 젬마 도나티(Gemma Donati)와 약혼을 하게 되며 1291년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즉 베아트리체가 24세로 사망할 때까지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혼과 열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1275년에서 1294년에 걸쳐 약 20여 년간 신학을 비롯하여 다방면에 걸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테는 특히 브루네토 라티니 밑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신곡》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단테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스콜라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또한 배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단테는 1290년대에 피렌체와 피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당파 싸움에 가담하였으며, 1300년에는 피렌체 시협의회 회장(Priorat)직을 맞아 1303년까지 적극적으로 정치무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피렌체가 로마 교황의 세력에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로마교황을 옹호하는 궬피(Guelf)당을 지지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받드는 기벨리니(Ghibelline)당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 후 궬피당의 승리로 두 당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궬피당이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어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흑당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여 백당을 패배시키게 되고 단테를 추방했으며 이 때부터 단테의 길고 긴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그 후 단테는 백당의 남은 사람들과 함께 흑당을 무찔러 피렌체를 탈환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게 되고, 단테만이 백당의 일원으로 남게된다. 그 후에 단테에게 고국으로부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 사면을 내려주겠다는 조건부의 사면령이 내려졌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겐 더할 수 없는 치욕이라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흑당은 단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궐석 재판을 열었다. 단테는 라벤나로 돌아가 귀도 노벨로(Guido Novello)의 비호를 받으며 그 곳에서 말라리아로 생애를 마감했다. 단테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신곡》이며 이외에도 라틴어로 쓰여진 수필, 청년기의 시집도 다수 있다. 청년기에는 로맨틱한 스틸 노보 (Stil Novo) 풍의 연애시를 다수 썼으나 피렌체에서의 추방 이후부터 《신곡》과 《항연》, <토착어에 대하여> 등의 그의 대표작이 쓰여졌다. 망명 중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활하였다. 여러 편의 시나 논문을 썼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신곡》이라는 장시이다. 내용은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에 이끌리어 지옥에 가고, 지옥보다는 고통이 덜한 연옥을 지나, 끝으로 베아트리체에게 안내되어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 사상에 기반한 이야기인데, 그 생생한 묘사가 근세 문학을 낳게 하였다. 유랑 중에 철학 윤리 등의 문제를 논한 《항연》 등이 있다. 《신생》은 18세 때부터 그 후 7-8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최초의 것으로 중요한 문헌이다. 신곡은 오늘날 세계 고전 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광대한 규모와 조화의 미를 가지는 대서사시이다. <토착어에 대하여>(De Vulgare Eloquentia) 는 이탈리아의 토착어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되나, 라틴어로 쓰여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군주들에게 바쳐진 책으로 생각된다. <토착어에 대하여> 는 군주들을 청자로 삼아 국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단일된 토착어의 보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언어로 말미암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최초로 언급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단테는 행동만이 사람들을 비참함으로부터 행복으로 이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파한 뒤, 비길데 없는 시구(詩句)로 씌여진 자신의 작품을 "코메디아"라고 했다. 당시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는 작품은 희곡(코메디)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 방법을 "볼품없고 저급한"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곧 "여자들도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였던 것이다. 당시 문화어인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고 속어인 이탈리아어를 사용한 것은 《신곡》에 담긴 중세적인 카타르시스와 구원의 메시지를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리려는 뜻이었다. 단테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한번도 소유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한 여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아 《신곡》에 뒤지지 않는 유명한 연애시도 썼다. 단테는 자신의 부인에 대해서는 자신의 시 속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혼생활의 사랑은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 마음의 여주인"인 베아트리체를 로맨틱한 열정을 기울여서, 또한 그녀의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정열적으로 사랑했다. 찬양받아 마땅한 여성, 천국과 같이 해맑은 그녀는 살아 생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사후에는 하늘에 올라가게 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와 견주어졌다. 로마의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던 이탈리아의 역사추리소설 작가 줄리오 레오니는 그의 소설 4권에서 단테를 주인공이자 탐정으로 등장시킨다. 이것들을 묶어 "단테 시리즈"라고 부른다. 이 소설들의 시대적 배경은,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은 단테가 피렌체 코무네의 최고 행정위원으로 재임을 시작한 1300년 6월 15일에서 22일까지, 《단테의 빛의 살인》은 재임기간이 끝나가는 1300년 8월 5일에서 14일까지, 《단테의 비밀의 집회》는 《신곡》이 완성되기 이전 단테의 유랑생활을 시작하던 1301년 11월 5일에서 16일까지로 설정되어 있다. 당시의 시대상과 소설 속에서 가공의 사건들과 음모들을 파헤쳐 가는 단테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스릴러이다. 민중문자 민중 문자(民衆文字, Demotic)는 신성 문자, 신관 문자와 함께 고대 이집트어를 기록한 문자로서, 속용 문자(俗用文字)라고도 한다. 민중 문자가 소개된 이후 신관 문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게 되었으며, 민중 문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관 문자와 달리 민중 문자는 주로 돌이나 나무에 새겨졌다. 기원전 66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이미 고대 이집트의 주요 문자가 되어 있었다. 4세기에 들어서며 민중 문자 대신 고대 그리스어 자모가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451년 필라이의 사원 벽에 새겨진 것이다. 민중 문자는 로제타 돌에 쓰여진 두 번째 문자이다. 이는 상형문자가 해독되기 이전에 이미 해독되었고,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은 실베스트르 드 사시(Silvestre de Sacy)이다. 1799년 로제타석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어와 이집트 민중 문자, 이집트 상형문자로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콥트어에 대한 지식과 함께 이집트 문자들을 해독할 수 있었다. 민중 문자에 대한 전문가인 이집트학자들과, 언어학자, 파피루스 학자들을 데모티스트라고 부른다. 신관문자 신관 문자(神官文字)는 이집트 신성 문자의 흘림체로, 이집트 제1왕조(약 기원전 2925년~기원전 2775년) 때 처음 사용되었다. 신관 문자는 파피루스 위에 갈대 펜과 잉크로 써졌으며, 기원전 660년경 민중 문자에 밀려났으나, 신관들 사이에서 수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이다.
1970년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대한민국의 보물 525호로 지정되었다가 대한민국의 국보 322-1호로 승격되었다. 그밖에 1981년 조병순 소장 영본(零本)과 경주부간본(慶州府刊本)이 각각 보물 722호, 723호로 지정되었다가 경주부간본이 국보 322-2호로 승격되었다. 국보 322-1호, 322-2호가 유일한 완본으로 현전하며, 722호는 7권 1책이 전해진다. 고려 왕조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귀족 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앞 시대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로 편찬했다. 고기(古記)·유적(遺蹟) 혹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뽑아 편찬, 간행하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김부식이 정계에서 은퇴한 1142년에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기는 1145년(인종 23년)이다.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삼국사기》편찬에 참여한 편수관(編修官)은 총 11명으로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참고(參考) 8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과 관구(管句) 2명(김충효, 정습명)이다.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머리말, 논찬,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10명의 편수관이 수행했다.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비판적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토대로 여겨진다. 기전체로 작성되었다.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이 세 나라의 역사를 각각의 본기로 나누어 편년체로 서술하였으며, 총 28권이다. 신라본기 12권(1~12권), 고구려본기 10권(13~22권), 백제본기 6권(23~28권)으로 구성되었다. 〈연표〉는 중국 역대 왕조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국의 왕계를 표로 작성하였으며, 총 3권(29~31권)으로 구성되었다. 〈지(志)〉는 〈잡지〉로서 삼국의 제도, 문화, 지리 등을 분야별로 서술한 것으로 총 9권(32~40권)이다. 1권은 제사(祭祀), 악(樂), 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3~6권은 지리(地理), 7~9권은 직관(職官)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열전〉은 인물의 전기로 총 69명이 수록되어 있다. 1~3권이 김유신 열전으로 가장 분량이 많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화랑·문인(文人)·반역인(叛逆人)과 관련 인물 등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삼국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구성하였다. 기전체에서 〈본기〉는 정통성을 가진 중심 국가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이며, 이와 상반되는 부분으로 〈세가(世家)〉와 〈열전〉이 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다루는 부분으로, 중국에 대해서 제후국으로 자처했던 조선 때 편찬된 《고려사》는 각 왕대의 역사를 〈세가〉로 구성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이는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로 비판받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삼국은 모두 대등하게 다루어졌다. 삼국 모두 각각의 〈본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국의 〈본기〉에서는 해당 국가를 ‘我’(우리)라고 칭하며 나머지 2개 나라 및 기타 나라는 타국으로 다루었다. 삼국을 제외한 〈부여〉, 〈가야〉, 〈발해〉 등의 역사는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삼국사기》가 정사(正史)를 표방하고 있으며, 단대사(單代史)임을 명백하게 밝힌 점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잡지〉는 삼국의 제도, 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이 신라의 기록이며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지리지와 직관지가 가장 분량이 많다. 특히 지리지는 총 4권으로, 앞의 3권은 신라의 지리로서 통일신라의 9주를 다루고 있다. 각권마다 3개 주씩 총 9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데, 1권은 신라, 2권은 고구려, 3권은 백제의 영역에 해당하는 주로 구성하였다. 4권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였는데, 앞의 세 권의 연혁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지명도 다루고 있다. 〈열전〉에는 김유신을 비롯한 69명의 전기를 실었다. 특정한 편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각 권별로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3권은 김유신 열전, 4~5권은 무장 및 명신들의 열전, 6권은 학자 열전, 7권은 순국열사 열전, 8권은 효자 및 열녀 등 일반인 열전, 9권은 반신(叛臣) 열전, 10권은 역신(逆臣) 열전으로 볼 수 있다. 단, 중국의 정사에서 흔히 보이는 왕실 종친이나 후비 등의 열전은 수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사들과 별도로 총 31편의 사론(史論), 일부 항목의 서문(序文), 기타 주석이 실려 있다. 특히 사론은 김부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평가를 내린 것으로서 이를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본기〉에 23편, 〈열전〉에 8편의 사론이 실려 있으며 이 사론은 성격에 따라 포폄적(褒貶的) 사론과 역사학적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 포폄적 사론은 역사적 사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것으로 전체 분량의 2/3 가량을 차지한다. 포폄적 사론을 통해서 역사를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학적 사론은 사실의 규명이나 출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를 저술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원칙, 서술한 이유, 역사적 사건의 원인 및 결과, 사료의 부족, 역사의 해석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는 《고기》, 《해동고기》, 《삼한고기》, 《본국고기》, 《신라고기》 등의 이름으로 한국의 고유 기록을 제1차 사료로 삼았으며, 중국의 사료와 한국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는 한국의 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가 먼저 출간된 《구삼국사》를 보다 간결하게 다듬은 형태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의 관계는 《구당서》와 《신당서》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나 《구삼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삼국사기》 표지에는 약칭인 《삼국사》로 적혀 있다. 고려 시대의 간행본은 없어지고, 조선 시대에 와서 1393년부터 1394년 사이(태조 2~3년)에 진의귀·김거두가 고쳐 펴냈고, 1512년(중종 7)에 이계복이 다시 고쳤다. 이후 목판 또는 활자로 수차 간행되었다.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에 대해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사대주의적이라는 점 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다. 또한 칭제건원과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한 신돈 일파들을 반대하여 숙청한 주화파 세력이였으며 송나라의 학자를 존경하였고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인이 중국왕조를 찬양하여 쓴 중국 사서들을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인용하여 삼국사기를 썼다는 비판이 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1579년 7월 30일 ~ 1632년 3월 14일, 재위 1605년 ~ 1623년)는 에도 막부 제2대 쇼군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삼남이다.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칭호를 물려받아 쇼군이 되었다. 1614년과 1615년 2회에 걸친 오사카 공격에 쇼군이자 총대장으로 참가, 도요토미 가문의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렸다. 1623년 쇼군의 지위를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넘겨주었으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1632년 사망할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였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유교사상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공표하고, 기독교 금령을 평민들에게까지 적용하여 배척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쿠가와 바쿠후는 평민들이 마을의 절에 시주하게 하고, 절에서는 시주를 낸 이들의 명단을 내도록 했다. 또한 장례와 제사도 승려가 대행하게 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화장후 유골을 절에 모시는 일본의 전통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기독교 배척 정책은 사상을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묘소는 도쿄 미나토 구의 조조지(増上寺)에 있다. 덴쇼(天正) 7년 4월 7일(1579년 5월 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으로 도토미 국 하마마쓰(浜松)에서 출생하였다. 생모는 이에야스의 측실 사이고노 쓰보네이다. 사이고노 쓰보네의 친정인 사이고 씨는 규슈 기쿠치 씨(菊池氏)의 일족으로,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인 미카와의 슈고다이이기도 했던 명문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히데타다가 태어나기 전 이미 적장자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후일의 유키 히데야스) 두 아들이 있었으나, 히데타다가 태어난 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가 사망하고 오기마루는 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내졌다가 유키 씨(結城氏)의 후사를 이으면서 명문 혈족이자 순서상으로도 장남이 된 히데타다가 사실상 이에야스의 후계자로서 대우받게 되었다. 유모는 오오바노 쓰보네이며, 아명은 나가마쓰(長松), 다케치요(竹千代)이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즈음에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질로써 교토에 상경하여 관례를 치른 뒤 오다 노부카쓰의 딸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인 오히메(小姫, 슌쇼인春昌院)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혼하였다. 이후 주나곤에 서임되어 에도노 주나곤(江戸中納言)으로 불렸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羽柴) 성씨가 주어졌다. 분로쿠 4년(159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또 다른 양녀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淀)의 여동생 고우(江, 에요)와 재혼하였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도카이도(東海道)를 지나는 이에야스 본대와 더불어 나카센도(中山道)를 지나는 별동대를 인솔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날씨 변화로 인한 명령 지연과 행군 속도 저하, 시나노 국 우에다 성(上田城) 공격 지연 등으로 시간을 허비한 히데타다의 군대는 결국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합류하는 데 실패하고 9월 20일에야 오쓰(大津)의 본진에 도착하였다. 이 때 히데타다는 승리를 축하하고 시간을 지체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즉각 부친 이에야스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이에야스는 「속이 시원치 않다(気分がすぐれない)」는 말과 함께 아들의 면회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또는 3일 뒤 이에야스는 결국 면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게이초 8년(1603년) 2월 1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이이 다이쇼군의 지위에 올라 에도 바쿠후를 열었다.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씨의 쇼군 세습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히데타다에게 전통적으로 차기 쇼군 후보에게 주어졌던 직책인 우코노에곤다이쇼(右近衛大将)의 관직을 내려줄 것을 조정에 주청을 올렸고, 같은 해 4월 16일 허락을 받으면서 히데타다는 에도노 우다이쇼(江戸右大将)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히데타다가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는다는 것과 동시에 도쿠가와 가문이 대대로 쇼군의 자리를 잇는다는 것이 사실상 확고해졌으며, 이후 쇼군가에서 우다이쇼(右大将)는 쇼군 후계자에 대한 호칭으로 굳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위세를 꺾고 도카이, 간토 등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한 도쿠가와 가문은 명실공히 간토의 독립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후 2년 뒤인 게이초 10년(1605년)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에서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오고쇼(大御所)로 물러나면서 히데타다는 제 2대 세이이 다이쇼군으로 취임하였다. 히데타다가 정식으로 쇼군 자리를 물려 받은 뒤, 쇼군 히데타다는 에도 성, 오고쇼 이에야스는 슨푸 성에 거주하며 두 부자가 함께 정치를 운영하는 이원 정치 체제(二元政治体制)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살아 있는 동안 사실상의 실권은 이에야스에게 있었고, 히데타다는 혼다 마사노부 등의 보좌를 받으며 이에야스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가신들과 다이묘 통제에 있어서도 이에야스가 상대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을 상대한 반면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직할령 및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을 관리하였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이에야스와 함께 참전한 히데타다는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측의 중신인 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에게 본진을 위협받기도 하였다. 이 전쟁에서 도요토미 가의 당주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가 자결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였고, 도쿠가와의 권력은 공고해졌다. 이후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정국 안정을 위한 법률 구상을 추진하여 무가 출신의 다이묘들을 통제하는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 조정과 문관들을 통제하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등을 제정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타다는 쇼군 지위는 물려받았으나 겐지장자(源氏長者), 쇼가쿠인(奨学院) 별당은 받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에는 받았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사후의 추증이라는 것이다.이것이 사실이라면 도쿠가와 쇼군으로서는 히데타다가 유일하게 겐지노쵸쟈가 되지 못했던 쇼군이라는 뜻이 된다. 겐나 2년(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하면서 정국의 실권을 쥐었다. 사카이 다다요, 도이 도시카쓰 등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을 로주(老中)에 임명하여 바쿠후의 중추를 장악하였으며,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다수의 도자마 다이묘들을 개역하여 본보기를 보였다. 이후 고산케를 구성하는 세 남동생들에게 각각 오와리, 기이, 미토를 영지로 내리고 차남 다다나가에게는 스루가, 도토미, 가이를 주었다. 한편으로는 동생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조카이자 사위인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즈미 등 가까운 인물들 역시 개역한 뒤 귀양보내는 등 엄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 대해서도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 긴축을 요구하는 한편 막내딸인 마사코를 고미즈노오 천황의 황후로 입궁시켰다. 외교적으로는 쇄국 정책을 추구하여 외국 국적의 선박이 기항할 수 있는 항구를 히라도(平戸), 나가사키(長崎) 등으로 한정하였다. 겐나 9년(1623년) 쇼군의 지위를 적장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넘겨주고 오고쇼로 물러났다. 그러나 부친 이에야스가 그랬듯이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에 관여하였다. 오고쇼로 물러난 초기에는 이에야스가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처럼 오다와라 성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고려했다고 하나, 결국 에도 성 니시노 마루(西の丸, 현 천황 일족이 거주하는 교코皇居)에서 정사를 보살폈다. 간에이 6년(1629년) 시에 사건 이 발생하면서 조정, 신사 및 사원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듬해인 간에이 7년(1630년) 9월 12일 외손녀 이치노미야(一宮)가 메이쇼 천황으로 황위에 오르면서 천황의 외조부가 되었다. 간에이 8년(1631년), 차남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영지를 몰수하고 칩거를 명령하였으나, 이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이듬해인 간에이 9년(1632년) 1월 사망하였다. 사무라이 디퍼 쿄우에서의 히데타다는 호탕한 성격으로 전국을 유람하는 영법사(影法師) 베니토라(紅虎)로 나온다. 훈족 훈족(-族, Huns)은 4-6세기 중앙 아시아와 코카서스에서 거주했던 투르크 민족이다.유럽의 전승에 따르면, 훈족들은 당시에 스키티아라고 알려진 지역의 일부였던 볼가강 동쪽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훈족의 정착은 인도이란계 민족인 알라니족들의 서쪽으로 이주에도 관련이 있다. 370년에, 훈족들은 볼가강에 이르렀고, 로마 제국의 국경 밖에 살고 있던 고트족과 다른 게르만족들을 정복하고,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 영토로 도망치게 한, 이들은 430년에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세웠다. 특히나 아틸라 왕의 지도하에서, 훈족들은 동로마 제국에 잦고 파괴적인 약탈을 벌였다. 451년에는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속주를 침입하여,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와 서고트 연합군과 교전했으며, 452년에는 이탈리아를 침입했다. 453년에 아틸라가 죽은 후로, 훈족들은 로마를 향한 위협을 멈추었고 네다오 전투 패배 후로 영토의 상당량을 상실했다. 훈족의 후예들이나 유사한 명칭을 가진 후계자들은 대략 4-6세기에 동유럽과 중앙 아시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남쪽과 동쪽, 서쪽의 이웃한 민족들에게 기록되었다. 훈족의 변형적 명칭들은 코카서스에서는 8세기 초까지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 학자 조제프 드 기네는 훈족 그리고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북방 민족인 흉노족과의 연관성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기네 이후로 훈족은 이란계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이란계 훈족 또는 투르크 민족으로 알려져있다. 훈족의 문화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최종적으로 훈족과 관련되었다는 유적지들은 극히 적다. 훈족들은 청동으로 된 가마솥을 사용했고 인위적인 두개골 변형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틸라 시대의 훈족의 신앙이나 종교에 대한 비문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점복이나 샤먼의 존재 같은 풍습들은 존재한다. 훈족들이 튀르크어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직 세 단어이자 인명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인명은 대부분이 튀르크적이지만 동게르만식에 영향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이들은 유목 목축의 형태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로마와의 접촉이 늘어남에 따라, 훈족의 경제는 조공, 약탈, 교역을 통하여 로마와 점차 엮이게 되었다. 훈족들은 유럽으로 진입할 때는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지지 않고, 로마인들과의 전쟁에서 통일된 부족 지도 체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훈족들은 다양한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들을 지배했으며, 피지배 민족들 일부는 자기들만의 지도자를 유지했다. 훈족의 핵심 군사 기술은 궁기병이었다. 훈족들은 서로마 제국의 붕괴에 기여를 한 요소인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자극했을 것이다. 훈족에 대한 기억은 여러 기독교 성인들의 삶에도 살아있는데, 거기서 훈족들은 게르만 신화의 인물들에 대한 적이나 동맹 역할로 나오는 게르만족 영웅 전설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인들에게서는 적대 인물 역할을 한다. 헝가리에서는 헝가리인, 특히나 세케이인계가 훈족들의 후손이라는 중세 연대기를 바탕으로 한 전설이 발전했다. 하지만 주요 학계는 헝가리인과 훈족들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부인한다. 훈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훈족이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며 이들을 이란계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은 투르크족으로 보고 있다.고전 사료들은 훈족들이 370년 무렵에 갑자스럽게 유럽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훈족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로마 저술가들의 시도들에서는 이들을 단순히 이란계 유목민족들과 동일시 했다. 로마 작가들은 또한 훈족들이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리미아로 들어간, 야생 사슴이나 잃어버린 소들을 찾다가 고트족의 영토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고트족들의 땅이 좋은 것을 알게된 훈족들은 고트족을 공격했다. 요르다네스의 《게티카》에서 고트족들은 훈족들을 "사악한 영들"과 고트족 마녀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라 생각한다고 나타난다. 18세기에 조제프 드 기네 이래로, 현대 역사가들은 4세기에 유럽 경계에 나타난 훈족을 기원전 3세기와 서기 2세기 사이 오늘날 북방 스텝 지역에서 중국을 침입했던 흉노족과 관련시켰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흉노족들은 유라시아를 통해 이주했으며 따라서 이들이 훈족과의 일부 문화적, 유전적 연속성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또한 흉노족, 훈족, 그리고 “훈족”으로 알려지거나 훈족에서 정체성을 가졌다고 여겨진 “이란계 훈족”, “서융”, “키다라인”, 그리고 가장 유명한 “에프탈” (또는 백훈족) 등 수 많은 중앙 아시아 민족들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오토 J. 멘헨헬펜은 저술 자료 연구를 주요 기반으로 삼는 전통적인 연구법에 도전하고, 고고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멘헨헬펜의 연구 이래로, 훈족의 선조라는 흉노족의 정체성은 논란이 되었다. 추가적으로, 일부 학자들은 유럽계 훈족이 있는 “이란계 훈족”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월터 폴 (Walter Poh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거대한 유목민 전사들의 연합은 인종적으로 동일하지 않았고, 명성을 이유로 다른 민족들이나, 생활 방식 또는 지정학적 기원을 외부인들이 묘사하기 위해서 같은 이름이 사용되었다. 우리 모두가 확실히 말하는 훈족이라는 명칭이란, 고대 시대에서는 저명한 튀르크 전사들의 지배 계층으로 묘사한다. 최근 학계에서, 특히 김현진과 에티엔 드 라 배지에르 (Etienne de la Vaissière)는 훈족과 흉노족이 한 민족이고 같다라는 이론을 부활시켰다. 드 라 배지에르는 고대 중국과 인도의 사료들이 흉노와 훈을 서로를 번역하는데 사용했고, 다양한 "이란계 훈족" 들은 흉노족과 유사하게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김현진은 훈족이라는 용어가 "주로 민족 그룹이 아니라, 정치적 범주"라고 여겼고, 흉노족과 "이란계 훈족" 사이뿐만 아니라 흉노족과 유럽계 훈족 사이 간에 근본적인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연속성을 주장한다. "훈족" (Hun)이라는 명칭은 고전 유럽의 사료에서 그리스어로 "우노이" ("Οὖννοι")와 라틴어로 "훈니" (Hunni) 또는 "쿠니" (Chuni)로 나타난다. 이오아네스 말랄라스는 훈족의 명칭을 "우나" ("Οὖννα")라고 기록했다. 훈족과 일치 여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또다른 가능한 그리스어 명칭으로는 "쿠노이" ("Χοὖνοι")일 수도 있다. 고전 사료들은 훈족이라는 명칭 대신에 오래되고 관련 없는 유목민들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고, 마사게타이, 스키타이인, 킴메르라 칭했다. 훈족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다양하게 제시된 어원들은 일반적으로 최소한 훈족이라 알려진 다양한 유라시아 민족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 훈족의 명칭이 튀르크어 왼(ön), 외나(öna, 성장이라는 뜻), 쿤(qun, 대식가), 퀸(kün), 귄(gün), "아마 '사람들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퀸(qun, 힘), 휜(hün, 사나운)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수 많은 제시된 튀르크어 유래 가설들이 존재한다. 오토 멘헨헬펜은 이 튀르크어 유래 가설들을 "단순한 추측"이라며 부정했다. 멘헨헬펜은 hūnarā (기술), hūnaravant- (숙련된) 등 아베스타어에 가까운 단어에서 온, 이란어군 유래를 제시하고, 훈족이라는 명칭이 본래는 민족 보다는 계층을 지칭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베르트 베르너 (Robert Werner)는 토하라어 ku (개 )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고, 중국인들이 흉노족을 훈족의 토템 동물이었던 개라고 부른 사실을 바탕으로 주장했다. 그는 마사게타이의 명칭에 있는 사카족의 요소가 개를 뜻한다는 점을 주목하며, 마사게타이의 명칭과도 비교했다. 해럴드 베일리 (Harold Bailey), S. 파를라토 (Parlato), 잼시드 코스키 (Jamsheed Choksy) 같은 다른 이들은 아베스타어에 가까운 이란어군 단어 Ẋyaona에서 유래했고, "적대감, 적"을 뜻하는 단어가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퍼 앳우드 (Christopher Atwood)는 음운과 기록적 근거의 가능성을 모두 부정했다. 언어학으로 접근하지 않은, 앳우드는 흉노족의 명칭과 같거나 유사하게 발음되는, 몽골의 옹기강에서 훈족의 명칭 유래를 가져왔고, 민족적 이름 보다는 가문이나 왕조의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훈족들에 대한 고대 기술들은 로마인의 관점에서 이질적인 외모를 강조하는 것이 같았다. 이 기술들은 훈족들을 괴물로서 보통 묘사했다. 요르다네스는 훈족이 작은 키에, 적갈색의 피부를 지녔다고 강조했다. 여러 작가들은 훈족들이 눈이 작고 로마인보단 평평한 코를 지녔다고 언급했다. 로마인 작가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의 목격자 기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넓은 가슴과 큰 머리를 가진, 작은 키에, 그의 눈은 작았고, 그의 턱수염은 얇고 새치가 나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혈통을 나타내는, 평평한 코와 적갈색 피부를 지녔다." 많은 학자들은 이 묘사들을 동아시아인 ("몽골로이드")들의 인종적 특징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로 받아들였다. 멘헨헬펜은 많은 훈족들이 일부 동아시아인적인 인종 특징들을 지녔음에도, 그들이 야쿠트족이나 퉁구스족 같이 아시아인으로서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 논했다. 그는 주목했다 당연하게 여기지던 훈족들의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훈족 중 일부만이 동아시아적 특징을 지닌 중앙아시아 민족의 단위임을 나타낸다는 것을 주목했다. 김현진은 유사하게 동종의 인종적 그룹으로 훈족을 바라보는 것에 경고하고, 훈족들이 "일부분적으로나 절대다수가 몽골로이드 (최소한 처음에는)."라고 주장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훈족들이 "몽골로이드" 특징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고 했고, 주류 학자들은 훈족들의 생김새는 주로 "코카서스 인종"이라 논쟁한다. 다른 고고학자들은 "몽골로이드" 특징들이 훈족 귀족들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고 주장했으나, 그 무덤에는 훈족의 정치 체제에 흡수된 게르만족 지도자들도 포함했다. 김현진은 샬롱 전투 (451년)을 언급하며, 아틸라의 "대다수" 측근들과 군대가 유럽에서 기원헀다고 주장하였다. 훈족의 구성은 원래부터 코카서스라고 주장했다. 로마인들은 훈족의 폰토스 스텝 지역 침략이 수 천명의 고트족들을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도나우강 하류로 이동한 376년에 훈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훈족들은 로마 제국으로 도망쳐온 많은 민족들과 함께, 알라니족, 그레우퉁기족 또는 서고트족의 거의 대부분, 거의 대부분의 테르빙기족 또는 동고트족을 정복했다. 395년에 훈족들은 동로마 제국에 최초의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훈족들은 트라키아를 공격했고, 아르메니아를 휩쓸었고, 카파도키아를 약탈했다. 이들은 시리아 일부 지역에도 진출하여, 안티오키아를 위협했고, 에우프라텐시스 속주를 거쳐갔다. 같은 시기에, 훈족들은 사산 제국도 침공했다. 침공은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까지 접근하며,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페르시아인들의 반격에 극심한 패배를 당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에서 잠깐 방향을 돌리던 시기에, 훈족들은 서쪽 너머에 있는 부족들을 위협했을 것이다. 동시대 사료들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인식된 최초의 훈족인 울딘은 이탈리아를 방어한 라다가이수스에 맞서 훈족과 알라니족을 이끌었다. 울딘은 도나우강 인근에서 동로마인들에게 문제를 일으킨 고트족 반군을 진압하고, 400-401년 쯤에 고트족 가이나스를 처형한 것으로 처음으로 알려졌다. 동로마인들은 408년에 다시 울딘의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울딘은 도나우강을 건너 트라키아를 악탈했다. 동로마인들은 울딘을 매수하려 노력했지만, 그의 요구액이 너무 높아서 대신에 그들은 울딘의 부하들을 매수했다. 이는 울딘의 무리에 많은 이탈을 야기했다. 울딘도 도나우강을 다시 넘어 도주했고, 이후로 그는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훈족 용병들이 4세기와 5세기에 고트족들뿐만 아니라 동, 서로마에 몇 차례 고용되었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433년에 판노니아 지역의 일부를 서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가 훈족들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434년부터 아틸라와 블레다 형제가 훈족을 같이 다스렸다. 아틸라와 블레다는 자신들의 숙부 루길라만큼이나 야망찬 이들이었다. 435년에 이들은 동로마에게 훈족들의 무역 권한과 로마로부터 매년 조공을 받기로 한 마르구스 조약을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로마인들이 440년에 조약을 어기자, 아틸라와 블레다는 로마의 요새이자 도나우강의 기슭에 있는 상업지인 카스트라 콘스탄티아스 (Castra Constantias)를 공격했다. 훈족과 로마인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고, 훈족들은 약한 로마군을 압도하고, 마르구스 (Margus), 싱기두눔, 비미나키움 등의 도시들을 파괴했다. 441년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2년 뒤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조공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고 전쟁이 재개됐다. 이후 전쟁에서, 훈족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했고 케르소네소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배하기 전까지 몇몇 도시들을 약탈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의 요구를 들어주고 443년 가을에 두 훈족 왕들과 아나톨리포스 조약을 맺었다. 블레다는 445년에 죽고, 아틸라는 훈족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447년에 아틸라는 발칸 반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그 전쟁은 로마인들이 아틸라에게 연간 2,100 파운드의 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하므로써 449년에 종결되었다. 동로마 제국 곳곳을 약탈한 훈족들은 서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약혼 반지를 보내고 원로원 의원에게 약혼하는 자신을 구해달라는 도움을 요청했다. 아틸라는 그녀를 자신의 신부라 주장하고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 추가적으로, 그가 잘리어 프랑크인의 왕에 대한 정당한 후계자라는 분쟁이 일어났다. 451년에 아틸라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입했다. 갈리아에 들어오자마자, 훈족들은 맨처음 메츠를 공격했고, 그러고나서 아틸라의 군대는 파리와 트루아를 지나쳐 오를레앙에 포위 공격을 가하면서,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오를레앙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로마와 서고트족 연합군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을 격퇴시켰다. 다음 해에, 아틸라는 호노리아와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다시 요구했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들어온 아틸라는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로마가 약탈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는 만토바 인근 민치오강에서 아틸라를 만난 교황 레오 1세뿐만 아니라 고위 관리 겐나디우스 아비에누스 (Gennadius Avienus)와 트리게티우스 (Trigetius) 등 세 명의 대사를 파견했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황제와 강화 협상을 맺을 것이라는 약속을 얻어냈다. 새로 즉위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조공 지불을 중단했고, 이는 아틸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계획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453년에 아틸라는 자신의 결혼식 중이던 밤에 출혈로 사망한다. 453년에 아틸라가 사망하자, 훈 제국은 봉신화된 게르만족과 훈족 지배층 간의 내부 권력 갈등을 마주했다. 아틸라가 총애하던 아들이자 아카치리족의 통치자였던 엘라라크가 이끄는 훈족은 훈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게르만족의 연합을 이끈 게피드족의 왕 아르다리크와 네다오 전투에서 교전했다. 같은 해에 발라미르 휘하의 아말리계 고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고, 전해진 바에 의하면 전투에서 훈족을 물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훈족 제국의 완전한 붕괴를 일으키지는 못 했으나, 많은 게르만족 봉신들의 상실을 낳았다. 동시에, 훈족들은 오그후르족, 사라구르족, 사비르족을 포함해서, 동쪽으로부터 오그후르계 투르크어인들의 늘어나는 도래를 처리했다. 463년에, 사라구르족은 아카치리 또는 아카티르 훈족을 패배시키고 폰토스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했다. 뎅기지크 휘하의 서쪽의 훈족들은 훈족의 동맹인 사다게스족의 전쟁에서 발라미르에게 패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군사 작전은 또한 이주해오는 오그후르인들에게 집중을 하길 원하던, 아카치리 훈족의 통치자 에르나크에게 반대되기도 했다. 뎅기지크는 에르나크의 도움 없이 467년에 로마를 공격했다. 그는 로마군에게 둘러쌓여 포위됐고, 로마인들이 땅과 자신의 굶주린 군대에 식량을 가져다준다면 항복하겠다는 조약을 맺었다. 협상 기간에, 로마군에서 복무하던 훈족 Chelchel은 고트족들이 훈족 주군들을 공격하게끔 설득했다. 아스파르 장군 휘하의 로마군은 불켈라리이의 도움으로, 서로 싸우던 고트족과 훈족들을 공격해서 물리쳤다. 469년에, 뎅기지크는 트라키아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뎅기지크가 죽은 후, 훈족들은 불가르족 같은 다른 민족들이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현진은 에르나크 휘하의 훈족들은 쿠티구르족, 우티구르계 훈족 불가르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결론은 여전히 논쟁의 주제 거리이다. 일부 학자들은 고대 사료에서 또다른 민족 그룹을 순수 혈통인 북 코카서스 훈족들인, 훈족으로서 인식했다고 또한 주장했다. 훈족 이후의 스텝 지역 민족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틸라의 후손이라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다양한 유목 민족들은 이후에도 비잔틴과 서구의 사료들에서 훈족이라 불렸다. 훈족들은 전통적으로 가축들에 의존하고 자신들의 가축들을 방목하기 위해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이동시켰던 목축 유목민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김현진은, "유목민"이라는 용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유목민이라는 용어가 완전하게 영토의 개념이 없이, 방랑하는 민족 그룹을 뜻한다면 '유목민'이라는 용어는 훈족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 이른바 모든 유라시아 스텝 역사의 '유목민'들은 목초지를 찾아 움직이지만 고정된 영토내에서 움직이는 목축민들로서 확실히 분별된 이들이다. 멘헨헬펜은 목축 유목민 (또는 "준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여름 목초지와 월동지 사이를 교대로 돌아다닌다고 언급했다: 목초지는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며, 월동 장소는 항상 같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내용은 요르다네스가 훈족계 부족인 알치아기리족 (Altziagiri)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며, 이들은 크림 반도의 케르소네소스에서 목축을 했고 멘헨헬펜이 주장한 시바시 같은 장소들이 있는 북쪽으로 더 나아가 월동을 했다. 고대 사료들은 소, 말, 염소, 비록 고대 사료에서는 언급되지는 않지만 "말들 이상으로 훨씬 스텝 유목민에 기초적이고" 가축의 큰 부분을 차지했음이 틀림없는 양을 포함해서 다양한 동물들로 구성했다. 추가적으로, 멘헨헬펜은 훈족이 사마르티아인에서도 입증된, 오늘날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인 자신들의 영토의 일부에 소규모 쌍봉낙타 무리를 유지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아미아누스는 멘헨헬펜이 주장한거와 같이, 훈족 식단의 대부분이 다른 스텝 유목민들을 통해 알려진 양고기의 치즈와 우유와 같이 양고기를 주로 먹었을 가능성에 근거하여, 가축들에서 획득한 고기에서 온다고 기록했다. 다른 스텝 유목민으로 그들은 또한 "틀림없이" 말고기를 먹고, 당나귀의 젖을 마셨으며, 치즈와 쿠미스를 만들었을 것이다. 궁핍한 시기에, 이들은 음식으로써 말의 피를 끓여 먹었을 것이다. 고대 사료들은 훈족들이 어떠한 형태의 농업을 했다는 것을 하나같이 부정한다. 고대 사료들에서 이 기록들에 대하여, 톰슨은 "스텝 지역의 변방에서 정착한 농업 인구의 도움 없이는 그들은 살아남지 못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훈족들이 어쩔 수 없이 사냥과 채집으로 식단을 보충했다고 했다. 그러나 멘헨헬펜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에서 다양한 스텝 유목민들이 곡물을 키웠음을 나타낸다고 언급했고, 특히 그는 편두를 한 사람들이 농경을 짓는, 오비강의 화레즘에 있는 Kunya Uaz 지역의 발견을 훈족의 농업 증거라고 확인했다. 김현진은 모든 스텝 제국들은 유목민과 정주민이 있었다며 유사하게 주장했고, 훈족을 "토양-유목민"이라 분류했다. 유목민족인, 훈족들은 말을 타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암미아누스는 훈족들 "대부분이 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라고 했고, 조시모스는 훈족들이 "말 위에서 지내고 잔다"라고 했고, 시도니오스는 "말이 자신의 등에 태우러 왔을 때, 어머니의 도움 없이 서는 법을 배운 아이들은 겁이 드물었다"라고 했다. 그들은 다른 유목민들에게서도 관찰되는, 말을 타고 있는 기간이 너무 길어서 걷는 것이 어색하게 보였다. 로마의 사료들은 훈족의 말이 못 생겼다고 묘사했다. 훈족들이 사용한 말의 품종을 정확히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로마의 묘사는 상대적으로 좋았다. 시노르는 몽골 품종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확인된 모든 훈족의 무덤에서 말의 유해는 존재하지 않다. 다른 유목민들의 말들의 인류학적 설명과 고고학적 발견 등을 바탕으로, 멘헨헬펜은 훈족들이 주로 거세마를 탔을 것이라 생각한다. 말 외에도, 고대 사료들은 훈족들이 운송수단으로 마차를 사용했다고 언급했고, 멘헨헬픈 그 마차들이 훈족들의 천막, 약탈품, 노인, 여자, 어린 아이들을 옮기기 위해 주로 쓰였다고 생각한다. 훈족들은 로마인들의 용병으로 일하는 대가나 그들에게서 얻은 공물을 통해, 많은 금을 받았다. 약탈 역시도 훈족들에게 금과 다른 가치 있는 물건들을 제공해주었다. 데니스 시노르 (Denis Sinor)는 아틸라 시기에, 훈족의 경제는 로마의 속주에서 나오는 약탈물과 조공품에 거의 완전히 의존한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훈족에게 사로 잡힌 민간인이나 군인들은 몸값이 치루어져 돌아가거나 노예로서 로마 노예 상인들에게 팔렸을 것이다. 멘헨헬펜이 주장하길, 훈족들 자체는 자신들의 유목 목축을 하는 삶의 방식 때문에 노예들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유목 목축인들이 실제로는 정주 사회들 보다 노예 노동을 더 사용했을 것이라 입증했다. 노예들은 훈족들의 소, 양, 염소 등의 무리들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프리스코스는 노예들이 가사를 돕는 하인으로 사용되었다고 언급하나, 교육을 받은 노예들은 훈족들이 행정직이나 심지어는 건축가로 사용했다. 일부 노예들은 전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훈족들은 로마인들과 교육을 하기도 했다. E. A. 톰슨 (Thompson)은 훈족들이 로마제 무기, 리넨, 곡물 및 다른 사치품들을 위하여 말, 가죽, 고기, 노예들을 교역한, 이들의 무역이 아주 큰 규모라고 주장했다. 반면 멘헨헬펜은 그가 생각하기에 “황금을 얻는데 가장 고려할만한 자원”인 말들을 훈족들이 교역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다른 반면으로 그는 톰슨의 주장에 회의적이다. 그는 로마인들이 야만인과 교역을 하는걸 극도로 제한한 것과 프리스코스에 따르면 무역이 1년에 단 두 번만 열렸다는 점을 지적했다. 반면에 그는 밀수가 이루어지기 쉬웠을 것이라는 점을 주목했음에도,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교역들의 규모가 확실히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는 포도주와 비단이 훈족 제국에 많은 양이 수입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로마제 금화는 훈족 제국 전역에서 화폐로서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앳우드는 최초 훈족의 유럽 지역 침략의 이유가 당시에 이들의 지배 하에 있었고, 비단길을 따라 아시아를 향하는 무역에 종사했던 소그드인 대상들을 위하여 흑해 지역에 대한 시장 설치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앳우드는 요르다네스가 6세기에 훈족계 아카치리족의 지배하에 있었던 크림 반도의 도시 케르소네소스를 ”탐욕스러운 무역업자들이 아시아의 물건들을 가져오는 곳”이라 묘사한 점을 주목했다. 훈족의 정부 체계는 오랜 기간 논쟁이 되어왔다. 피터 헤더 (Peter Heather)는 훈족들의 체계가 지도자들이 완전하게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무질서적인 연합이었고 게르만족 사회처럼 서열 계급사회를 이뤘다고 주장했다. 데니스 시노르도 역사적으로 불명확한 발람베르를 제외하고, 어떠한 훈족 지도자도 울딘 때까지 사료에서 언급된적이 없으며, 이것이 훈족 지도자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유사하게 언급했다. 톰슨은 영구적 왕권이 훈족의 유럽 침입과 인근의 계속된 전쟁이 잇따르면서 겨우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아틸라 시기의 훈족 지배 체제에 대하여, 피터 골든 (Peter Golden)은 "나라라고 부르기 어렵고, 제국이라 부르기에는 더더욱 그렇다”라고 평가했다. 골든은 대신에 "훈족 부족 연합"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현진은 흉노족 국가 체계를 일부 기반으로 삼은 훈족들이 꽤나 조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월터 폴 (Walter Pohl)은 다른 유목 제국들의 정부 체계와 훈족의 정부 체계가 유사성에 주목했지만, 그럼에도 훈족들이 유럽에 도착하던 때에 이들이 통일된 조직으로서 보인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암미아누스는 그가 살던 시기의 훈족들이 왕이 없었지만, 대신에 훈족의 각 조직들은 전쟁 시기에는 조직의 지도자 (“primates”)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E.A. 톰슨은 전쟁 시기조차도 지도자들이 실제 권력은 적었다고 추측했다. 그는 더욱이 훈족들이 순전하게 세습적인 지위를 획득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너 헤더는 암미아누스가 단순히 훈족들이 하나의 지도자를 갖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는 올림피오도로스 (Ὀλυμπιόδωρος)가 훈족들이 “왕 중의 일인자”라고 하는 왕과 함께, 여러 왕들을 두었다고 언급한 점을 주목했다. 암미아누스는 또한 훈족들이 말의 등에 탄 채로, 총 회의 ("omnes in commune")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훈족들이 부족들로 구성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프리스코스나 다른 작가들은 훈족들의 일부에 이름을 붙이며, 부족들로 이뤄졌다고 언급했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훈족 지도자는 울딘이다. 톰슨은 울딘이 전쟁에서 실패하고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을 훈족의 왕위가 영구적인 체계라기 보다는 당시에는 “민주적”이었다는 것으로서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김현진은 울딘이 사실상의 칭호이고 그는 단지 낮은 왕(subking)이었다고 주장했다. 프리스코스는 아틸라를 "왕" 또는 "황제" ("βασιλέυς")라 불렀지만, 그가 번역한 토착 칭호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틸라의 단독 통치를 제외하면, 훈족들은 자주 두 명의 지배자를 두었는데, 아틸라조차도 자신의 아들 엘라크 (Ellac)를 공동왕으로 임명했다. 훈족의 피지배 민족들은 같은 민족의 왕이 이끌었다. 프리스코스는 또한 아틸라 정부를 구성한 "선택된 자" 또는 "로가데스" ("λογάδες")들에 대해 언급했고, 그들 중 다섯 명의 이름을 댔다. "선택된 자"들의 일부는 출신과 가치 있는 다른 이유들로 뽑힌 것으로 보인다. 톰슨은 이 "선택된 자"들에 대해서 "훈족 제국 전체의 행정가 이들에게 달려 있었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울딘 정권에서 이들의 존재와 선택된 자 각각들이 훈족 군대의 원정대 지휘권이 있었고 조공을 수집해야하는 의무가 있었던, 훈족 제국의 특정 지역을 다스렸다는데 동의했다. 하지만 멘헨헬펜은 "로이데스"라는 단어는 단지 중요한 인물들일 뿐이고 고정된 임무를 지닌 고정된 계급은 아니라 주장했다. 김현진은 훈족 제국의 행정에 대한 “로이데스”의 중요성을 찬성하지만, 이들 사이에 계급 차이는 없었다는 데에 주목했고, 주로 세금과 조공을 징수하고 다니는 하급 계급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훈족으로 향한 여러 로마인들 망명자들이 훈족 제국의 행정에서 일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훈족의 예술과 물질 문화에 대한 두 가지 단서가 있는데, 고대의 저작물과 고고학이다. 불행히도, 훈족 사회의 유목민의 천성은 이들이 고고학적인 기록을 조금도 남기지 않게 했다. 사실 1945년 이래로 많은 양의 고고학 유물들이 발굴되었음에도, 2006년을 기준으로 단 200개만이 훈족의 물질 문화를 만들어낸, 훈족의 매장소일 가능성으로 확인되었다. 훈족과 사르마티아인들, 이 둘은 가까이에 살았고 아주 유사한 물질 문화를 가진 것처럼 보여서, 훈족의 고고학적 발견물들을 사르마티아의 것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므로 김현진은 어떤 유물을 민속학적으로 훈족에 대입하는 것이 어려움을 알렸다. 유럽내 훈족들이 게르만족의 물질 문화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한편 훈족에 대한 로마의 기록들은 흔하게 편향되었고, 그들이 훈족에 대해 상상한 원시적인 점을 강조했다. 고고학 발견물들은 1896년에 파울 라인케 (Paul Reinke)의 연구에서 솥들이 훈족이 제작한 것으로 확인된 이래로, 수 많은 솥들을 발견했다. "청동 솥"이 전형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훈족의 솥들은 자주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질이 나빴다. 멘헨헬펜은 19개로 알려진 중부 유럽와 동유럽 그리고 서부 시베리아에서 나온 훈족의 솥들을 기록했다. 그는 청동 주조물들의 상태로 보아, 훈족들이 매우 뛰어난 대장장이들은 아니었으며, 가마솥이 발견 된 동일한 장소에서 솥들이 주조됐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솥들은 모양이 다양하며, 때로는 다른 곳에서 기원을 한, 다양한 그릇들과 같이 발견됐다. 멘헨헬펜은 훈족의 솥들은 고기를 삶는 영도의 요리를 위한 것들이라 주장했으며, 많은 솔들이 물가 근처에서 파묻혀 있다가 발견된 것들이며, 보통은 성례 사용되는 것과 같이 매장되지 않았다. 솥들은 흉노족이 사용한 솥들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암미아누스는 훈족들이 강철검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톰슨은 훈족들이 강철검을 주조할 수 있는 지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멘헨헬펜은 "훈족 기병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과 마른의 성벽을 물물교환 하거나 빼앗은 검을 가지고 싸웠다라는 생각은 어리석다."라고 주장했다. 고대 사료들과 무덤에서 나온 고고학 발견물들은 훈족들이 정밀하게 장식된 금제 또는 금박으로 된 디아뎀을 착용했다라는 것을 입증한다. 멘헨헬펜은 훈족의 디아뎀이라고 알려진 총 6개를 기록했다. 훈족 여성들은 네크리스와 다양한 재료로 이뤄진 거의 수입산 구슬로 된 팔찌를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보석으로 장신구와 무기를 장식하는 초기 중세의 대중적인 관습은 훈족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훈족들은 또한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 방식의 작은 거울을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거울들은 무덤에 넣을 때 의도적으로 부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발견물들은 훈족들이 자신들의 의상에 장식품으로, 수입산 유리 구술뿐만 아니라 황금 브로치를 착용했음을 나타난다. 암미아누스는 훈족들이 리넨이나 마멋의 가죽으로 된 의류와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각반을 착용했다고 기록했다. 암미아누스는 훈족들이 건물이 없었다고 기록했지만, 지나가는 말로 훈족들이 텐트와 마차를 보유했다고 언급한다. 멘헨헬펜은 프리스코스가 아틸라의 텐트를 언급하고, 요르다네스가 비단으로 된 텐트에서 아틸라가 당당히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훈족들이 "펠트와 양피로 된 텐트"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5세기 중반에, 훈족들은 영구적인 문제 건물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 건물을 맨헨헬펠은 훈족에게 종속된 고트족들이 지은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고고학자들은 훈족이나, 훈족의 귀족 계층,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게르만족들도 어린 아이의 두개골을 묶어서 인위적으로 힘을 가하는 과정인 편두를 행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의 목표는 "귀족과 평민들 간에 육체적 차이를 확실히 하게 하는 것"이었다. 에리크 크뤼베지 (Eric Crubézy)는 이 풍습의 전파가 훈족에서 기원했다는 것에 반대한 반면에, 대다수의 학자들은 유럽에서 이 풍습의 전파가 훈족이 기여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풍습은 본래는 훈족들이 도입한 것이 아니라, 훈족들과 밀접하게 관련있는 알라니족과 사르마티아인들이 도입한 것이다. 아시아에서 훈족이라 불리던 다른 민족들에서도 역시 행해졌다. 다양한 언어들이 훈족 제국 내에서 사용됐다. 프리스코스는 훈족어가 아틸라의 궁전에서 사용된 다른 언어들과 다르다고 언급했다. 그는 아틸라의 광대 제르코가 "훈족어와 고트어가 섞인 뒤죽박죽의 라틴어"로 어떻게 아틸라의 귀인들을 웃기게 했는지 언급했다.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의 "스키타이인” 종속들이 "훈족어나 고트어 등 그들의 야만한 언어외에도, 서로마 제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라틴어를 구사했지만; 트라키아와 일리리아 국경 지역 출신을 제외하고는 그들 누구도 그리스어를 능숙히 하지 못 했다"라고 했다. 몇몇 학자들은 고트어가 훈족 제국의 "링구아 프랑카"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김현진은 훈족들이 어떤 주된 언어를 가지지 않고, 다양한 정부 계층에서 고트어, 라틴어, 훈족어(튀르크어), 스키타이어, 사르마티아어 등 많은 네 가지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훈족어 그 자체에 대해선, 단 세 단어만이 고대 사료에서 “훈족의 언어”라고 기록되었으며, 세 단어 모두 인도유럽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훈족어에 대한 모든 다른 정보로는 인명과 부족명이 있다. 이 명칭들을 근거로, 학자들은 훈족어가 튀르크어, 몽골어족과 튀르크어 간에 한 언어나 예니세이어족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직 많은 학자들은 훈족의 언어를 분류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훈족의 엘리트 계층들은 복혼을 행한 반면에, 훈족의 평민들은 단혼이었을 것이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 여성들이 격리되어 산다고 주장했지만, 프리스코스가 직접 보고 남긴 문서에서는 훈족 여성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남자들과 어울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리스코스는 훈족 여성들은 아틸라가 마을에 들어갔을 때, 그의 가신 오네게시우스의 아내가 하인들과 함께 음식과 음료를 건내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을 때지어 다녔다고 묘사했다. 프리스코스는 어려움 없이 아틸라의 서열 1위 아내인 헤레카의 천막에 들어갈 수 있었다. 프리스코스는 또한 아틸라의 형제 블레다의 미망인이 로마의 대사들이 지나갔던 마을을 다스렸고, 그녀의 영토가 넓은 영역을 차지했을 것이라 증언했다. 톰슨은 우티구르족과 사비르족 같은 유목 민족들이 여성 부족장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것을 언급하고, 훈족들이 미망인에게 높은 존경심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훈족의 방목적인 경제 특성으로 인해서, 훈족의 여성들은 가정에서 많은 권위를 가졌을 것이다. 훈족의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로마인 작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들이 종교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5세기의 기독교 작가 살비아누스는 훈족들을 이교도라고 분류했다. 요르다네스의 "게티카"는 또한 훈족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아틸라의 권한을 나타내는 고대의 검인, "마르스의 검"을 숭배한다고 쓰여있다. 멘헨헬펜은 흉노족을 포함한 유목 민족들에게서 검 모양의 전쟁의 신 숭배가 널리 퍼져있음을 주목했다. 반면에 데니스 시노르는 훈족들에서의 검 숭배가 불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멘헨헬펜은 또한 훈족들은 아틸라를 신성한 존재로서 여기지 않은 반면에, 아틸라가 다스린 일부 민족들에서는 그를 신성시했다고 주장했다. 예언과 점괘에 대한 믿음이 훈족들에게서 증명되었다. 멘헨헬펜은 예언과 점괘를 행하는 자들이 샤먼일 것이라 주장한다. 시노르는 또한 훈족들에게 샤먼의 존재가 완전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샤먼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멘헨헬펜은 또한 암미아누스가 언급한 관습에서 물정령에 관한 믿음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는 훈족들이 작은 금속, 목제 또는 돌로 우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다른 유목 민족들에게서도 증명된 것이고, 비잔티움의 사료에서도 6세기 크림 반도에 있는 훈족들로 증명된 것이다. 그는 또한 봄에 훈족들이 행한 의식들을 할 수 있는 흐르는 물이나 그 근처에서 묻혀있다가 발견된 훈족의 청동 솥들과 연결 지었다. 존 맨(John Man)은 아틸라 시기의 훈족들이 흉노족에서도 숭배되었던, 하늘과 스텝의 신 텡그리를 숭배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멘헨헬펜 역시도 이 시기의 훈족들이 텡그리를 숭배했을 가능성을 주장하지만, 9세기까지 유럽 기록에서 텡그리에 대해서 입증되지 않았음을 주목한다. "탕그리 칸"(T'angri Khan)이라는 이름의 텡그리 숭배는 7세기 말 기간에 몹세스 카간카트바트시(Movses Kaghankatvatsi)가 쓴 아르메니아 연대기에서 코카서스계 훈족에게서 증명되었다. 몹세스는 또한 코카서스계 훈족들이 나무를 숭배했고 텡그리를 위한 재물로 말들을 불태웠고, "불과 물 그리고 특정한 도로의 신들, 달 및 훈족들의 눈에서 놀랍다고 여겨지는 모든 생물들에게 제물을 바쳤다."라고 기록했다. 유럽계 훈족들에게 인신 공양에 관한 일부 증거도 존재한다. 멘헨헬펜은 "스트라바"(strava)라는 이름으로 요르다네스가 기록한, 아틸라의 장례 의식에서 사람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주장한다. 프리스코스는 훈족들이 스키티아 지역에 들어온 후에, "승리를 위해서" 포로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주장하지만, 이 내용은 훈족의 관습으로 증명되지 않았고 허구일 것이다. 전통 신앙뿐만 아니라, 훈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과 기독교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라는 많은 증거들이 존재한다. 코카서스 훈족들에서 행해진 기독교 선교 활동은 고위 지배자 알프 일테베르의 개종이라는 결과를 내며, 부분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틸라는 자신의 피지배층 사이에 니케아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황 레오 1세가 아퀼레이아 교회에 보낸 주교 교서에서는 452년에 아퀼레이아에서 훈족들에게 끌려간 기독교도 노예들이 훈족의 종교 활동에 강제로 참여됐다고 나타낸다. 훈족의 군사는 전반적으로 연구가 잘 되지 않았다. 훈족의 군사 정보에 관한 대표적인 출처 중 하나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로, 훈족의 군사 전술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훈족들은 자극을 받으면 가끔씩 싸우기도 하며, 그들은 목소리로 내는 메들리로 야만적인 소리를 내면서, 쐐기모양을 이루어 전장에 진입한다. 그리고 그들은 재빠른 움직임을 위하여 가볍게 무장했고 예상하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은, 의도적으로 산개된 부대로 갑자기 나누어 공격하여, 여기저기를 혼란에 빠트리고, 대살육을 벌인다; 그리고 이들의 비정상적으로 재빠른 움직임 때문에, 그들은 결코 성벽을 공격하거나 적의 진영을 약탈하는 것을 보이지 못 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훈족들을 모든 전사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통상적인 화살촉 대신, 뛰어난 기술로 화살대에 결합한 날카로운 뼈를 가진 화살로 멀리서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벌어진 공간으로 달려들어서 자신들의 목숨을 상관하지 않고 칼을 들고 근접해서 싸웠다. 적들이 검에 찔려 부상을 당하는 것을 막는 동안에, 훈족들은 직물로 밧줄을 올무를 만들어 적들에게 던져서 걸리게 하여 팔다리를 못 움직이게 하고 말을 타거나 걸아다니는 힘을 빼앗았다. 암미아누스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멘헨헬펜은 훈족의 전술이 다른 유목민 궁기병둘이 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암미아누스가 언급한 "쐐기 대형" ("cunei")이 ""쿠르""(cur)라고 불렸을, 지도자들이 이끄는 씨족이나 가문으로 이뤄진 대형일 것이라 주장한다. 쿠르라는 칭호는 씨족에서 계승되는 것처럼, 물려받았을 것이다. 암미아누스처럼, 6세기 작가 조시모스 역시도 훈족들의 대부분에게서 궁기병의 독점적인 사용과 훈족들의 극도의 민첩함과 기동력을 강조했다. 앞에서 언급한 점들은 그 당시 유럽에 있던 다른 유목민 전사들과는 달랐는데, 그 예로 사르마티아인들은 랜스를 들고 중무장을 한 캐터프랙트들에 의존했다. 훈족의 무시무시한 함성의 사용 역시도 다른 사료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의 많은 주장들은 현대 학자들에게 이의를 제기받고 있다. 특히, 암미아누스는 훈족이 야금술을 모른다고 주장했으나, 멘헨헬펜은 그렇게 훈족들이 원시적이라면 로마인들 상대로 성공적인 전쟁을 거뒀들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훈족의 군대는 극도의 기동력과 "공격할 때와 도망칠 때를 아는 영리한 감각"에 의존했다. 훈족이 사용한 주요 전략은 도망치는 것을 의도해서 후퇴하여 적을 속이고 그런 다음에 돌아서서 적을 공격하여 혼란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조시모스와 아가티아스가 언급한 바이다. 그러나 훈족들이 항상 회전에서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439년 툴루즈에서 패배를 했고, 447년 우투스 전투에서는 간신히 승리를 거뒀으며,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는 패배나 무승부에 가깝고, 네다오 전투 (454년?)에서는 패배를 했다. 크리스토퍼 켈리 (Christopher Kelly)는 아틸라가 "심지어는 가능한 한, [...] 로마군과 대규모 교전"을 회피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전쟁과 전쟁에 대한 위협은 로마를 협박하기 위한 도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훈족들은 자신들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 토착 지역의 배신자들에 자주 의존했다. 전투 기록들은 훈족들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방벽이나 마차를 원형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진영을 요새화했다고 언급한다. 훈족의 유목 생활 방식은 뛰어난 기마술 같은 특징들을 조성했고, 한편 훈족들은 잦은 사냥을 통해서 전쟁 훈련을 했다. 일부 학자들은 훈족들이 헝가리 평원 지대에 정착한 뒤에 자신들의 군마와 유목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그것이 싸움꾼으로서 그들의 유효함을 눈에 띄게 감소시키게 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훈족들은 초창기에 그들의 피지배 민족 또는 동맹으로서 훈족들이 아닌, 게르만족이나 이란계 민족과 함께 싸웠다고 거의 항상 언급된다. 헤더가 언급하기를, "훈족'의 병력들은 동유럽과 중앙 유럽의 수 많은 게르만족을 흡수함으로써 늘어났고, 매우 빠르게 증가했다.".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는 그의 피지배 민족들을 측면에 두고 반면 훈족들을 가운데에 두었다고 요르다네스가 언급했다. 훈족 시기의 유목민 군사 전략 정보에 대한 주요 출처는 "스키타이인들, 즉 다시 말해, 아바르족, 튀르크족, 그리고 훈족들의 삶의 방식과 닮은 민족들이 다루는" 전쟁술에 대해서 묘사한 6세기의 스트라티이콘이다. 스트라티이콘은 아자르족과 훈족을 군사적 문제에 대해 기만적이고 매우 능숙하다고 묘사한다. 이들은 적들을 속이고, 기습을 하고, 보급을 차단해서 패배시키는 것을 선호했다고 묘사된다. 훈족들은 교체 용도로 쓰고 전투 시에 많은 수의 군대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많은 말들을 끌고 다녔다. 훈족들은 고정된 진지를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씨족에 따라 목초지를 가로 질러 퍼졌고, 이른 아침에 전선을 구축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 필요로 하는 말들을 지켰다. 스트라이티콘은 훈족들이 꽤나 먼거리에 보초병들을 두었고 기습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서로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스트라티이콘에 따르면, 훈족들은 로마인과 페르시아인들이 사용한 방식의 대형을 구축하지 않았고, 일렬로 불규칙적인 크기의 대형을 형성하고, 매복과 예비 병력으로서 인근에 병력을 나누어 두었다. 스트라티이콘은 또한 훈족들이 밀집하고 전방을 향한, 튼튼한 대형을 사용했다고 언급한다. 스트라이티콘은 훈족이 전선에서 대략 1마일 떨어진 곳에 보통 규모의 보초병들과 함께 여분의 말과 짐들을 누었고, 때로는 여분의 말들을 주요 전선 뒤쪽에 묶어 놓았을 것이라 언급한다. 훈족들은 매복, 포위 공격, 위장 후퇴 전술을 향하며, 먼거리에서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 스트라이티콘 역시도 암미아누스가 언급한 쐐기 대형을 언급하고, 멘헨헬펜이 혈연적으로 된 부대라고 입증했다. 스트라이티콘은 훈족이 승리를 거두고 끈질기게 적을 추격하여 오랜 공성전으로 적을 지치게 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언급한다. 피터 헤더는 훈족들이 441년 원정 때 성곽 도시들과 요새들을 성공적으로 공성전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이 공성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 주목했다. 헤더는 공성 무기에 관한 지식 획득에 다양한 가능성을 주목했으며, 아이티우스 휘하에서 복무하는 동안에 배웠을 수 있고, 포로로 잡힌 로마 공학자들에게서 획득했거나 부유한 실크로드의 도시 국가들을 압박하기 위해서 개발하여 유럽으로 가져왔다라고 제시한다. 데이비드 니콜 (David Nicolle)은 후자쪽 의견에 동의하고, 훈족들이 카자흐스탄에 있는 Igdui-Kala 요새 같은 진보된 요새 시설 건설에 관한 기술들을 포함한 공학술을 가졌을 것이라 주장한다. 스트라이티콘은 훈족들이 일반적으로 사슬 갑옷, 검, 활, 랜스를 착용했고, 대부분의 훈족 전사들이 활과 랜스로 무장했고 필요에 따라 바꿔 사용했다고 언급한다. 훈족들이 또한 퀼트로 된 리넨, 양모, 때로는 금속을 말들을 보호하는데 썼고 킬트로 된 코이프와 카프칸을 착용했다고 언급한다. 이 주장은 볼니코브키(Volnikovka)와 브루트 (Brut) 매장지 같은 곳에서 발굴된 훈족들의 군사 장비를 통해 많은 부분이 입증됐다. 베르카소보 (Berkasovo) 방식의 후기 로마 솟은 투구가 루마니아의 콘체슈티에 있는 훈족의 무덤에서 발견됐다. 활꼴 방식의 훈족의 투구가 Chudjasky에서, 1784년 트라보스키 (Tarasovsky)의 무덤에서 훈족의 스팡겐헬름이, 투라에보 (Turaevo)에서 굴레투구가 발견되었다. 훈족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늘 투구의 파편들과 투구의 내부 구체가 이아트루스(Iatrus), 일리케프카( Illichevka) 그리고 칼크니(Kalkhni)에서 발견되었다. 훈족의 미늘 갑옷으로 보이는 3-4세기의 미늘 조각 두 개가 오비강 상류와 카자흐스탄 서부 지역에서 발굴된 적이 있지만, 유럽에서 발견된 적은 없다. 루마니아의 바다바그(Badabag) 인근 할미리스(Halmyris)의 요새에 있는 토프라키오이 (Toprachioi)에서 발견된 대략 52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늘 발굴물은 5세기 후반 또는 6세기에 도입되었음을 암시한다. 유라시아 아바르족들이 미늘 갑옷을 6세기 중반에 로마군과 대이동기 게르만족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후 형태의 미늘 갑옷이 이 시기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다. 또한 훈족들이 대동기 게르만족과 후기 로마군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60cm 길이의 칼날을 지닌, 랑색스를 유럽에 전래했다고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검이 중국에서 유래했고 사르마티아인과 훈족들이 4세기 말과 5세기 초 기간 동유럽에서 좁고 긴 랑색스로 발전한, 중앙아시아에서의 짧은 색스를 사용하며, 전달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초창기 검은 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빈-짐머링 (Wien-Simmerming)이라는 동유럽에서 출현한 최초의 형태로,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른 주목할만한 훈족의 예시에는 러시아 볼니코브카 (Volnikovka)에서 발견된 랑색스가 있다. 훈족들은 기다랗고 대략 83cm 길이로 쭉 뻗어 있으며, 항상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제 보호판이 있는 이란 또는 사산 양식의 스파타의 일종을 사용했다. 이런 양식의 검들은 알틀루스하임 (Altlussheim), 시르머베셰뇨 (Szirmabesenyo), 볼니코브카 (Volnikovka), 노보이바노브카 (Novo-Ivanovka), 시벨리움 (Tsibilium) 61 같은 곳들에서 발견되었다. 훈족들은 일반적으로 금박이 된 검의 자루, 금박 칼집, 다양한 색체로 장식된 칼집을 지녔다. 검은 수대(綬帶) 방식 보다는 검대에 붙이고 다니는 “이란 방식”으로 들고 다녔다. 훈족의 가장 유명한 무기는 다르야 (Qum Darya) 방식의 합성 반곡궁이며, "훈족 활"이라고도 불린다.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초창기 모델이 발견된 이 활은 기원전 3세기 또는 2세기에 발명되었고, 훈족의 이주가 일어나기 전에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활은 145-155cm 길이의 단면에서 비대칭인 것이 특징이며, 손잡이와 시야(siyahs)에 4-9개의 라스 (lath)가 있었다. 유럽의 기후에서 온전한 활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뼈로 된 시야는 꽤나 흔하게 발견되고 스텝 장례의 특징이다. 온전한 포본이 니야 (Niya), 쿰 다르야 (Qum Darya), Shombuuziin-Belchir 같은 타림 분지와 고비 사막 등에서 발견됐다. 훈족 같은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자작나무 타르와 생크 (shank)를 사용하여 부착한,세 갈래로 나뉜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제 화살촉을 사용했으며, 보통 75cm 길이의 화살대에 타르와 감은 힘줄로 화실깃을 달았다. 이런 세 갈래로 갈라진 화살촉들은 평평한 화살촉 보다 더 정확하고 관통력이나 살상력을 지녔다고 여겨졌다. 유럽내에서 이러한 방식의 활과 화살 유물은 제한적이지만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더 많은 유물들이 발칸 반도 북부와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발견됐음에도, 가장 유명한 예시는 빈짐머링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훈족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훈족에 관한 다양한 설화들이 발생했다. 그것들 중에는 훈족이 등장하는 기독교 성인들의 설화들이 많다. 중세 시대에 쓰인 익명의 교황 레오 1세의 전기에서, 452년 이탈리아로 향한 아틸라의 진군은 멈추게 되었는데, 아틸라가 로마 외각에서 레오 1세를 만날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파울로스가 나타나서 돌아가라는 교황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검을 아틸라의 머리 위로 겨누고 위협했다고 한다. 다른 설화에서는, 아틸라가 교황을 인질로 데려갔으나 성인들이 그를 놓아주라 강요했다고 한다. 성녀 우르술라의 설화에서, 우르술라와 그의 성녀 11,000명이 성지 순례를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쾰른에 도착했는데, 이름 불명의 훈족 귀족이 이끄는 군대에게 쾰른이 포위를 당했다. 우르술라와 성녀들은 훈족들의 성적인 제의를 거부하고 나서 훈족들이 쏜 화살에 맞아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 뒤에 살해당한 성녀들의 영혼들이 천국의 군대를 만들어 훈족들을 쓸어버리고 쾰른을 구했다. 훈족과 성인에 대한 전설을 지닌 도시들에는 오를레앙, 트루아, 디외즈, 메츠, 모데나, 랭스 등이 있다. 최소한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인 통에런의 세르바티우스의 설화에서, 세브바티우스가 아틸라와 훈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으나, 얼마 안되어 배교자가 되었고 자신들의 이교로 돌아갔다고 한다. 훈족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의 사건들을 담고 본래 구전을 통해 전승된, 중세 게르만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유럽에서 고트족과 훈족 간에 분쟁들에 대한 흔적들이 13세기에 아이슬란드의 《헤르보르와 헤이드레크의 사가》로 전해진, 북유럽의 시뿐만 아니라 고대 영어 시 원방여행자에 남아있다. "원방여행자"는 또한 아틸라가 훈족의 지배자라 언급하고, 여러 전설적이고 역사적인 통치자들과 민족들의 우두머리로 두었고, 그 중에 훈족을 가장 유명한 이들로 나타냈다. 고대 영어로 애틀라 (Ætla)라고 나타난, 아틸라 (Atila)라는 명칭은 앵글로색슨족들이 지배하는 잉글랜드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었고 (예: 도체스터의 애슬라 주교) 그 당시 잉글랜드에서 이 명칭의 사용은 원방여행자등에서 등장한 신화의 영웅적인 왕들과 연관됐을 것이다. 그러나 멘헨헨펠은 앵글로색슨족이 그 이름을 사용한 것이 훈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의심쩍게 생각했고, 그 이름이 "희귀하지 않다." 고 주장했다. 베다는 "잉글랜드인의 교회사"에서 앵글로색슨족이 잉글랜드를 침입할 당시에 독일에 살던 민족 중에 훈족을 기입했다. 이것은 베다가 훈족의 일부가 앵글로색슨족으로 전해졌다고 본 것을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훈족과 아틸라는 널리 알려진 게르만 전설 일대기, 니플룽과 디트리히 폰 베른 (역사속 테오도리크 대왕)의 이야기에서 중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니벨룽 전설은 게르만의 니벨룽의 노래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기록된 북구의 《고 에다》 와 《볼숭 일족의 사가》에서 437년 라인강에서 있는 부르군트 왕국을 파괴시키는 데에 훈족과 아틸라 (북구의 전승에서는 아틸라가 죽고 나서)에 연관이 있다.. 디트리히 폰 베른에 대한 전승에서, 디트리히가 베로나 있는 그의 왕국에서 쫒겨난 후, 아틸라와 훈족은 디트리히에게 피난처와 지원을 제공했다. 네다오 전투 사건의 버전은 전승에서 잘 보존된 것 같으며, 중세 고지대 게르만어 버전 "Die Rabenschlacht"와 전투에서 아틸라의 아들들이 쓰러진 북유럽의 "Thidrekssaga" 등 두 가지로 전승되었다. 한편 아키텐의 왈타리우스의 전승은 훈족들이 피지배 민족들에게 조공으로 아동 인질을 받았다고 나타낸다. 보통 대륙 게르만 전승은 아틸라와 훈족을 부정적인 면이 뚜렷하게 나오는 스칸디나비아의 것들 보다 좀더 우호적으로 나타낸다. 중세 게르만 전설에서, 훈족들은 헝가리인들로 여겨졌고, 이들의 수도 수도 "에첼부르크" (Etzelburg, 아틸라의 도시)는 에스테르곰이나 부다로 여겨졌다. 그러나 북 게르만의 것을 바탕으로 한, 북구의 "Thidrekssaga"에서는 "후나란트"가 북독일에 위치했고, 베스트팔렌에 있는 조스트를 수도로 삼았다. 다른 북유럽의 것에서는, 훈족이라는 용어가 때로는 분별없이 다양한 민족을 가리키는데 적용됐고, 특히 스칸디나비아 남쪽에서 그랬다. 13세기부터, 중세 고지 독일어에서 훈족을 뜻하는 단어 "hiune"는 거인의 동의어가 되었고, 현대에서는 "Hüne"와 "Heune"가 이 뜻으로 사용된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들, 그중에서도 특히 북독일 지역들의 것들은 "Hünengräber" (훈족의 무덤)이나 "Hünenbetten" (훈족의 침대)라고 인식되었다. 고중세 시대가 시작할 무렵, 헝가리 사료들은 헝가리인(마자르인)들이 훈족의 후손이라거나 이 둘이 밀접한 관계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은 비헝가리 사료에서 처음 나타났고 훈족의 부정적 의미 때문에 헝가리인들은 서서히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작자 불명의 "헝가리인의 사적" (1200년 이후)은 아르파드 왕조의 왕 계열이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언급한 최초의 헝가리 사료지만, 헝가리인과 훈족들이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훈족과 헝가리인들이 관련이 있다고 한 최초의 헝가리 작가는 Gesta Hunnorum et Hungarorum (1282–1285)을 쓴 케저이 시몬이었다. 시몬은 훈족과 헝가리인들이 후노르와 머고르라는 형제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은 헝가리인들에게 옛 뿌리를 주었고 이들의 판노니아 정복을 합법화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 주장들을 상당히 부인한다. 이 연대기에서 발견된 훈족의 기원에 대한 주장에 대하여, 쉬치 예뇌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물론 마자르인에 대한 훈족 기원은 프랑스인의 기원이 트로이인이라거나 다른 “오리고 겐티스”라는 당시에 많이 조작된 이론들처럼 가짜이다. 마자르인들의 진짜 기원은 핀우랄계 민족의 우랄계 분파에서 발생했고 동유럽의 스텝 지역을 떠도는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특히 이란계와 다른 튀르크계) 문화와 민족 요소들을 흡수하고, 훈족과 유전적 역사적 연관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19세기에 헝가리어와 핀우그리아어파 사이의 관계 증명은 헝가리인들이 훈족에서 기원했다라는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게 해주었다. 케저이 시몬에서 생겨난 또다른 주장은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어 화자 민족인 세케이인들이 아틸라가 죽은 후 트란실바니아로 도망쳐 온 훈족의 후손들이며, 헝가리인들의 판노니아 정복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세케이인들의 기원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현대의 학계는 세케이인들이 훈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마커이 라슬로 (Makkai László)는 일부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세케이인들을 아바르족 (동시대 유럽인들에게는 훈족이라고 인식됨)들로 인해 7세기 말에 카르파티아 분지로 밀려난 헝가리 부족이나 오노구르-불가르족이라 여긴다는 것을 언급했다. 전승과는 달리, 세케이인들은 11세기에 헝가리 서부에서 트란실바니아로 재정착했다. 이들이 훈족이라면 예상될 수 있는, 이들의 언어가 비헝가리어에서 헝가리어로 변화하는 어떠한 증거도 보이지 않았다. 헝가리인들과 세케이인들이 훈족의 후손이 아닐 수도 있는 반면에, 이들 민족들은 역사적으로 튀르크계 민족들과 밀접한 관계였다. 팔 엔겔 (Pál Engel)은 아르파드 왕조의 왕들이 아틸라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것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지만” 훈족의 통치하에서 있던 헝가리인이었다라고 생각될 수는 있다고 언급했다. 김현진은 헝가리인들이 그가 생각하기에 훈족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보던 불가르족과 아바르족을 통해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헝가리인들이 훈족의 후손이라는 개념은 주류 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지만, 그 생각은 헝가리 민족주의와 국가 정체성에 적절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헝가리 귀족 계층의 다수는 20세기 초까지 자신들이 훈족이라는 견해를 지속했다. 헝가리의 파시즘 정당 화살십자당은 프로파간다로써, 헝가리를 "훈니아" (Hunnia)라고 나타냈다. 훈족 기원은 오늘날 극우파 정당 요비크의 범투란주의의 이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루마니아에 있는 소수 세케이인들의 훈족 기원에 관한 전승들은 이들의 민족 정체성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세케인들의 훈족 기원은 헝가리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진 상태로 남아있다.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던 1900년 7월 27일에,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의화단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자비를 보이지 않을 것이고, 포로도 없을 것이다. 1천년 전, 아틸라 휘하의 훈족들이 가졌던 평판이 전설로서 살아있는것처럼, 중국에서도 독일의 이름이 그럴 것이며, 그렇게 되면 어떠한 중국인들도 독일인들을 감히 다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 연설이 나중에 독일인들을 잔혹한 야만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과 기간 영국과 영어권에서 프로파간다로 사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쓰였지만 그전 보다는 덜 사용되었다. 두벌식 자판 두벌식 자판은 닿소리와 홀소리가 서로 다른 글쇠에 배치된 한글 자판이다.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표준은 모두 두벌식 자판 기반이며, 두벌식이라고만 하면 이 표준 두벌식 자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표준 두벌식 자판은 1982년에 제정된 KS X 5002 “정보처리용 건반 배열”로 표준화되어 있다. 이 자판은 왼손에는 자음, 오른손에는 모음을 배치하여 자음-모음 또는 자음-모음-자음 순서대로 한글 한 글자를 입력하도록 한 것이다. 흔히 쌍자음 5자(ㄲ, ㄸ, ㅃ, ㅆ, ㅉ)와 모음 2개(ㅒ, ㅖ)가 표준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격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고 키와 글쇠를 함께 눌러서 입력할 수 있다고 권장사항처럼 규정되어 있다. 또 KS의 규정에 쌍자음은 단자음을 거듭 쳐서 구현할 수 있고, 모음 ㅒ, ㅖ도 조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쌍자음은 받침과 초성의 관계 때문에 일반으로 거듭쳐서 구현할 수 없다. 거듭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분자가 필요하다. 기타 ㄳ과 같은 겹받침 및 ㅘ와 같은 이중모음은 보이는 대로 두 글쇠를 연속해서 눌러 입력한다. 다만 ㅐ, ㅔ, ㅒ, ㅖ는 실제로는 조합되지 않고 합자꼴 자체로 입력해야 한다. 이 자판은 컴퓨터가 보급된 이후 가장 널리 쓰이는 한글 자판이며, 한글을 제외한 숫자와 기호의 배치가 영문(미국) 쿼티 자판과 역슬래시() 대신 ₩표를 할당한 것 외에 같고, 한글 입력에 필요한 글쇠의 수가 적어서 배우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국가 표준이므로 한글을 입력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컴퓨터 장비에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식(아날로그) 타자기와 같은 배열의 사용이 불가능하고, 도깨비불 현상(종성우선현상)이 일어나며, 양 손의 부담률이 불균형인 단점들이 있다. 그리고 모음 중 ㅠ자 1개는 왼쪽에 와 있어, 좌 자음 우 모음의 원칙에 약간 벗어나 있다. 역슬래시()가 없는 것도 미국표준 쿼티자판과 정확히 호환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처리 관점에서 초, 중, 종성에 관한 일관성 있는 식별과 처리가 어려우며, 입력된 정보를 한글 음절로 구현하기 위해 모아쓰기 오토마타가 반드시 필요하다. 두벌식 자판은 자음 14개, 모음 10개, 쌍자음 5개가 필수이고 ㅐ, ㅔ는 ㅏㅣ, ㅓㅣ로 조합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쌍자음이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미 표준이 굳어졌으므로 고치기가 어렵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표준 자판은 두벌식으로서, 한국의 표준 자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규 9256에 규정되어 있다. 이 표준은 국제적으로 KPS 9256이라고 부른다. 처음 1991년 26키에 치환방식(예, ㄱ+ㅏㅏ=까, ㄱ+ㅓㅓ=꺼)을 국제표준 시안으로 제출했으나 어문생활과의 정합성 결여로 사용될 수 없었고 결국 1993년 표준으로 결정되었다. 한국과 자음, 모음 영역은 같으나 배열만 차이가 있다. 모음 중 ㅠ 하나만 좌측에 있는 것도 한국의 표준 자판과 같다. 입력 방식도 같다. 세벌식 자판 세벌식 자판은 한글 낱자를 3벌(첫소리 1벌, 가운뎃소리 1벌, 끝소리 1벌)로 나누고, 벌이 다른 낱자는 서로 다른 글쇠 자리에서 넣거나 서로 다른 입력 방법으로 넣게 한 한글 자판이다. 일반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종류는 공병우가 개발한 타자기 자판에서 나온 공세벌식 자판이다. 1990년대 이후에 실용화한 세벌식 속기 자판들과 신세벌식 자판 등도 세벌식 자판에 속한다. 큰 틀에서 세벌식 자판은 입력 방식에 따라 이어치기 방식과 모아치기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입력 방식과 함께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 낱자들이 놓이는 배열 방식을 따져 공병우식, 안마태식 등으로 종류를 더 잘게 나눌 수 있다. 세벌식 자판은 셈틀(컴퓨터)의 정보처리 관점에서 첫소리, 가운뎃소리, 끝소리의 개념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다. 셈틀에서 로마자의 A와 a가 다른 부호값으로 처리되는 것처럼 한글의 첫소리 ㄱ과 끝소리 ㄱ도 다른 문자 정보로 처리된다. 세벌식 자판은 첫소리와 끝소리를 다른 글쇠 자리에서 넣으므로, 한글 입력기에서 두벌식 자판보다 단순한 오토마타로 구현할 수 있다. 세벌식 자판의 종류에 따라 두벌식 자판으로 쓸 수 없는 입력 기능이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함께 누를 수 있는 글쇠 조합을 다양하게 이용하는 모아치기나 줄여넣기(약법)로 글을 넣는 속도를 높이기도 하고, 모아주기 기능으로 낱자 차례가 어긋나서 생기는 오타를 바로잡기도 한다. 1990년대부터 윈도우, 맥 OS 등은 공세벌식 자판을 기본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두벌식 자판보다 쓰는 이가 적고, 아직 어느 배열도 국가 표준 규격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공병우는 1949년에 세벌식 자판을 쓰는 한글 수동 타자기를 일반에 선보였다. 1951년부터 한국군의 행정 업무에 수동식 공병우 타자기가 쓰이기 시작한 뒤에 이 타자기에 쓰인 공세벌식 자판(공병우 세벌식 자판)이 널리 실용성을 인정받는 한글 자판으로 자리잡았다. 그 뒤에 전신 타자기(인쇄 전신기), 전동 타자기, 자동 식자기 등 여러 기기에 맞추어 변형한 공세벌식 자판들이 나왔다. 공병우는 앞서 내놓은 자판 배열을 보완하면서 새로운 기기에 맞추어 세벌식 배열을 다듬는 작업을 거듭하였다. 이 작업은 공병우가 세운 사설 문화 단체인 한글 문화원이 1990년대에 3-90 자판과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을 발표할 때까지 이어졌다. 전자 기기인 셈틀(컴퓨터)에서도 타자기에서 이어진 공세벌식 자판이 쓰이고 있다. 한글문화원에서 보급한 3-90 자판과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은 윈도우, 리눅스, 맥 OS 등 주요 운영체제들의 기본 입력기들이 지원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세벌식 자판이다. 한글문화원은 자판 글쇠에 덧붙여 쓰는 딱지를 PC 통신의 전자우편으로 신청받아 우편으로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3-90 자판과 3-91 자판을 보급하였다. 그 뒤에도 이미 나온 배열을 특수한 목적에 맞추어 응용하거나 더 개선한 공병우 계열 자판들이 제안되었다. 1990년에 안종혁은 3-90 자판을 바탕으로 하여 윗글쇠()를 쓰지 않고 한글을 넣을 수 있는 안종혁 순아래 자판을 제안하였고, 1993년에 김경석은 3-90 자판을 바탕으로 옛한글을 넣을 수 있게 바꾼 3-93 옛한글 자판을 제안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3-90 자판 또는 3-91 자판을 개선·절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세벌식 자판들이 더 제안되고 나오고 있다. 1980년대까지는 세벌식 자판 가운데 컴퓨터나 타자기 등에서 쓸 수 있게 구현되어 실용성을 널리 인정받은 것은 공세벌식 자판뿐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공세벌식이 아닌 다른 세벌식 자판들도 전자 기기를 통하여 쓰이고 있다. 의회 등에서 속기록을 작성할 때 쓰이는 CAS 속기 자판은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를 함께 눌러 넣는 모아치기에 적합한 글쇠 배열을 가진 자판이다. 1995년에 신광조는 공세벌식 자판과 비슷한 배열을 쓰면서 전자식 입력 특성을 활용하여 공세벌식 자판보다 더 적은 글쇠로 한글을 넣게 한 신세벌식 자판을 내놓았다. 2003년에는 안마태가 일반 컴퓨터 자판 규격으로 모아치기를 할 수 있게 만든 안마태 소리 글판을 발표하였다. 공세벌식 자판은 공병우 세벌식 자판을 줄인 이름이다. 첫소리를 오른손 자리, 가운뎃소리(홀소리)를 왼손 자리의 오른쪽, 끝소리(받침)를 맨 왼쪽 두는 배열 방식을 기본 특징으로 한다. 오른손에서 타자를 시작하여 왼손에서 끝나게 하는 배열 방식은 쌍초점 방식을 쓰는 기계식 타자기를 만들 때의 편의에 맞춘 것이다. 공세벌식 자판은 ㅖ와 받침 ㅆ이 아랫글쇠에 들어가 있어서 표준 두벌식 자판(KS X 5002)보다 윗글쇠()를 적게 누른다. 그러나 윗글쇠를 누르고 넣는 한글 낱자의 수는 표준 두벌식 자판보다 많다. 3-90 자판을 기준으로 보면, ㅒ와 홑받침 ㄷ·ㅈ·ㅊ·ㅋ·ㅌ·ㅍ과 ㅆ을 뺀 겹받침들을 윗글쇠를 눌러 넣는다. 공세벌식 자판에는 겹홀소리를 만들 때 쓰는 ㅗ·ㅜ나 겹홀소리 ㅢ가 따로 들어가기도 한다. '오'이나 '운'처럼 홑홀소리만 넣을 때는 ㅗ·ㅜ를 왼쪽 글쇠로 치지만, '와'나 '원' 등의 ㅘ·ㅝ·ㅞ·ㅙ·ㅚ·ㅟ 등을 넣을 때에는 ㅗ·ㅜ를 오른쪽 글쇠에서 치는 식이다. 공세벌식 자판의 왼손/오른손 타수 비율은 표준 두벌식 자판과 거의 같다. 하지만 왼손으로 홀소리와 받침을 이어칠 때에 대체로 2째/3째 손가락으로 홀소리를 넣고 3째/4째/5째 손가락으로 받침을 넣는다. 이 규칙성 때문에 공세벌식 자판이 왼손에 힘이 덜 들고 율동감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글을 넣을 때에 영문 자판의 숫자 자리 글쇠까지 써야 할 만큼 한글 낱자가 많이 들어 있어서, 운지 거리가 길고 배열을 익히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공세벌식 자판의 단점으로 꼽힌다. 공세벌식 자판은 타자기와 셈틀에서 쓸 수 있게 구현되었던 것을 합치면 40가지가 넘을 만큼 변형 배열이 많다. 공세벌식 자판의 배열 종류가 유난히 많은 것은 다음 까닭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1950년대 초까지 쓰인 초창기 공병우 타자기 자판에는 겹받침이 ㄿ을 빼고 거의 들어갔고, 첫소리는 ㄲ, ㄸ, ㅃ, ㅆ, ㅉ까지 들어갔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공병우 타자기는 첫소리 겹낱자들이 빠지고, 겹받침 수가 줄고, 기호와 겹홀소리를 만들 때 쓰는 ㅗ·ㅜ가 더 들어갔다. 이는 공병우 타자기에 움직/안움직 글쇠 장치 구성이 바뀌어 나타난 결과이다. 공세벌식 자판은 1990년대에 한글 문화원이 만들고 보급한 3-90 자판과 3-91 자판(공병우 최종 자판)이 주로 쓰이고 있고, 그 뒤에도 한글 문화원이 만든 배열을 응용하거나 개선을 꾀한 배열들이 제안되고 있다. 세벌식 입력 방식의 특성을 살려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 낱자를 적는 차례에 따라 한 글쇠로 벌이 다른 두 낱자를 갈마들어 넣게 한 세벌식 자판 배열이다. 배열은 공세벌식 자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입력 방식이 공세벌식 자판과 다르다. 신광조는 신세벌식 자판(신광조 세벌식 자판)의 입력 원리와 원안 배열과 어셈블리 입력 변환 프로그램 소스를 월간 《마이컴》 1995년 10월호 기사를 통하여 '신 3벌식 자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제안하였고, PC 통신망 하이텔의 '한글프로그래밍 동호회'의 자료실에 배열표가 든 요약 설명문과 입력 변환 프로그램을 공개하였다. 신광조의 원안 배열을 바탕으로 조금씩 배열을 바꾼 변형안들이 뒤이어 나왔다. 신세벌식 자판은 글쇠 하나에 벌이 다른 한글 낱자가 2개씩 들어갈 수 있다. 한 글쇠에 첫소리/가운뎃소리 또는 가운뎃소리/끝소리로 짝지어 들어가는 식이다. 한글 낱자 2개가 들어간 글쇠를 치면, 한글을 모아쓰는 차례에 맞게 때에 따라 다른 낱자가 갈마들어(번갈아) 들어간다. 이 첫가끝 갈마들이를 통하여 신세벌식 자판은 공세벌식 자판보다 더 적은 글쇠로 모아쓰는 한글을 윗글쇠()를 쓰지 않고 넣을 수 있다. 신세벌식 자판들에는 겹홀소리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ㅗ·ㅜ 등을 합쳐 대체로 29개 글쇠에 47~48개 안팎의 한글 낱자가 들어간다. 신세벌식 자판은 기본 배열에 겹받침이 ㅆ만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겹받침이 많이 들어간 공세벌식 자판보다 기본 배열에 들어가는 낱자 수가 적다. 윗글쇠를 쓰지 않으면서 3줄 글쇠만으로 한글을 넣을 수 있다. 숫자는 영문 자판과 같은 자리에서 넣을 수 있다. 3-90 자판보다 영문 자판에 더 가까운 기호 배열을 쓸 수 있고, 영문 자판의 기호들을 모두 담고도 5개 이상의 글쇠 자리가 남는다. 남는 글쇠 자리에는 가운뎃점(·)처럼 영문 자판에 없지만 한글 문서에 쓰이는 기호들이 들어가기도 한다. 낱자 조합 규칙을 더 넣고 입력 방식을 변통하여 옛한글을 조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세벌식 자판은 왼손가락을 거듭 쓰는 때와 같은 글쇠를 거듭 누르는 때가 공세벌식 자판보다 잦다. 특히 왼손 집게 손가락이 느끼는 피로가 더 크다. 공세벌식 자판은 윗글쇠를 누르면서 타자 동작에 제동이 걸려 왼손가락이 쉴 틈이 있지만, 신세벌식 자판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글쇠를 누르는 차례를 지켜야 하므로, 공세벌식 자판에서 어긋난 낱자 차례를 바로잡는 모아주기 기능은 신세벌식 자판에서 거의 쓸모가 없다. 처음에 신세벌식 자판의 원안은 도스에서 입력 변환 프로그램(SHIN3.COM)을 램에 띄워서 표준 두벌식 자판을 지원하는 응용 프로그램의 글쇠 입력 내용을 가로채어 바꾸는 방법으로 쓸 수 있었다. 요즈음에 신세벌식 자판을 쓰려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와 3beol판 libhangul처럼 첫가끝 갈마들이를 처리할 수 있는 세벌식 한글 입력기나 한글 라이브러리가 필요하다. 속기자판은 보통 세벌식으로 구성되며, 한국스테노(카스) 와 소리자바 등 전용하드웨어 모델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일반적인 컴퓨터 자판과 배열이 다른데, 첫소리가 왼쪽, 가운뎃소리가 가운데 아래쪽, 끝소리가 오른쪽에 놓여 있다. 가운뎃소리를 엄지로 친다. (자세한 것은 속기자판 참조) 안마태 세벌식 자판(안마태 소리 글판)은 흔히 쓰이는 컴퓨터 자판으로 모아치기를 할 수 있게 한 한글 자판이다. 글씨를 쓰는 차례처럼 첫소리가 왼쪽, 가운뎃소리가 오른쪽, 끝소리가 아래쪽에 놓여 있다. 아래쪽에 놓인 끝소리를 첫째 손가락(엄지)으로 눌러 넣는다.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 글쇠를 한꺼번에 눌러 한 낱내씩 넣을 수 있다. 안마태 소리 글판은 본디 한국어를 넣기 위한 배열로 나왔지만, 중국어를 넣을 수 있게 응용한 배열도 개발되었다. ‘삼벌식’이라고도 하지만, 세벌식 사용자들은 물건을 셀 때는 ‘삼 벌’이 아니라 ‘세 벌’이라고 해야 어법에 맞는다는 이유로 ‘세벌식’을 권장한다. 1990년대에 도스, 윈도우, 맥 OS 등 일반 PC의 주요 운영체제들에서 쓰인 한글 입력기들은 공세벌식 자판을 지원하더라도 모아치기나 모아주기는 지원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실무에 쓰인 세벌식 속기 자판 제품들을 통하여 '모아치기' 타자법의 원리가 알려졌고, 2000년대에 날개셋 한글 입력기와 새나루를 비롯한 입력기들이 모아치기의 일부 원리를 응용하여 이어치기 자판에서 쓸 수 있는 조합 규칙으로 바꾼 '모아주기'를 구현하였다. 이 모아주기가 '모아치기'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모아치기를 공세벌식 자판의 주요 기능으로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원인이 되고 있다. 속기 자판들은 엄지 손가락까지 써서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를 함께 누르는 모아치기를 하기 좋게 글쇠 배열이 짜여 있지만, 공세벌식 자판은 한 글쇠씩 이어 치는 타자법에 맞추어 배열이 짜여 있다. 그래서 흔히 알려진 공세벌식 자판 배열들은 모아치기를 통하여 속기 자판만큼 타자 속도를 끌어 올리기 좋은 꼴이 아니다. 다만 모아주기를 구현하는 조합 규칙을 통하여 한글 낱자를 넣는 차례가 어긋나서 생기는 오타를 바로잡는 효과를 낼 수는 있다. 공세벌식 자판을 쓰면서 모아주기 기능에 너무 기대는 버릇을 들이면, 모아주기 기능을 쓸 수 없는 입력 환경에서 많은 오타를 내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 환경에서는 공세벌식 자판을 쓰려고 익히는 이에게 흔히 '모아치기'라고 알려진 '모아주기' 기능을 쓰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세모이 자판처럼 공병우식 배열을 응용하여 모아치기를 하기 좋게 고쳐 만든 세벌식 자판도 있다.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에 비하여 쓰는 사람이 적고, 그 가운데 공세벌식 자판은 배열 종류에 따라 쓰는 이들이 나뉘어 있다. 타자기는 글쇠 배열이 제품마다 새겨져 나왔지만, 셈틀 자판은 수요 문제가 걸려서 세벌식 배열이 글쇠에 새겨진 제품이 잘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눈으로 글쇠 배열을 보며 세벌식 자판을 익힐 기회를 잡기 어렵다. 1990년대 초에 한글문화원은 공병우 계열 자판인 3-90 자판과 3-91 자판을 글쇠에 덧붙이는 딱지(스티커)를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보급했다. 이는 뒷날에 더 개선한 배열을 내놓을 수 있음을 함께 헤아린 임시 방안이기도 했다. 그 뒤에는 한글문화원의 활발한 보급 활동이 끊어진 가운데, 수요와 비용 문제가 걸려서 딱지를 덧붙여 쓰는 방법이 그나마 현실성 높은 세벌식 자판 보급 방안이 되고 있다. 2000년대부터는 업체에 주문하여 만든 제품을 여럿이 함께 사는 방식으로 3-90 자판, 3-91 자판, 안마태 자판을 비롯한 세벌식 배열을 넣은 글쇠판 제품이 나오기도 하고 있다. 개인 차원에서 레이저 각인으로 빈 글쇠나 영문 배열만 새겨진 글쇠에 세벌식 배열을 새기는 방법이 시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병우 자판 쪽은 전체 수요가 크지 않은 가운데 대표 배열도 뚜렷하지 않아서, 배열이 글쇠에 새겨진 제품이 꾸준히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안마태 자판 쪽은 안마태연구소 가 2013년부터 글쇠에 배열을 새긴 제품을 내놓고 있다. 또한 다양한 세벌식 자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윈도우에서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 리눅스에서는 Libhangul과 Ibus한글, Mac OS에서는 구름 입력기, 안드로이드에서는 Multiling O Keyboard, iOS에서는 세벌식 입력기가 개발되어 있다. 옛한글에는 ㅵ, ㅱ, ᄴ처럼 요즘한글보다 훨씬 다양한 겹닿소리가 쓰인다. 두벌식 자판은 첫소리와 끝소리를 같은 글쇠로 치므로, 'ㅊㅏㅂㅅㅏㄹ'을 쳤을 때 '찹살'을 친 것인지 "을 친 것인지를 가릴 수 없다. 그래서 두벌식 자판으로 요즘한글에 쓰이지 않는 겹닿소리가 들어간 옛글을 넣으려면 치는 사람이 때때로 한글 조합을 끊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세벌식 자판은 첫소리를 치는 때가 앞 낱내(소리마디, 음절) 조합을 끊고 새 낱내 조합을 시작하는 때가 되어 낱내의 경계가 뚜렷이 갈리므로, 치는 사람은 한글 조합을 끊는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낱소리들을 차례대로 쳐서 옛한글을 넣을 수 있다. 그 때문에 두벌식 옛한글 자판보다 세벌식 옛한글 자판이 옛한글을 빠르고 매끄럽게 넣기에 좋다. 도깨비불 현상은 이를테면 두벌식 자판으로 '우리나라'를 칠 때에 '울', '린', '날'처럼 글을 넣는 과정에서 넣고자 한 것이 아닌 글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세벌식 자판은 도깨비불을 일으키지 않아서 치고 있는 글을 알아보기 좋고 글을 치는 행동이 더 자연스럽다는 시각이 있다. 두벌식 입력으로 한글 처리를 매끄럽게 하기 어려울 만큼 전자 회로의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렸던 때에는 도깨비불이 없는 세벌식 입력 체계를 쓰면 한글 처리를 빠르게 하기 좋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자 기기 환경에서 도깨비불은 빠른 한글 처리를 가로막는 문제는 아니다. 세벌식 자판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두벌식 자판을 쓸 때에 도깨비불 현상 때문에 눈이 피곤하고 오타가 많아진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을 의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나 논문은 아직 없다. 복벌식은 표준 두벌식과 세벌식 겸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입력 방안이다. 원래 NumLock이 켜져 있으면 표준 두벌식, NumLock이 꺼져 있으면 세벌식으로 설정하게 하였는데, 그 뒤 한글은 항상 초성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왼쪽의 글쇠부터 시작하면 두벌식, 오른쪽의 글쇠부터 시작하면 세벌식으로 자동인식하게 한 것도 있다. 눈에 보이는 글자가 고정적이지 않아 복벌식 자체를 표준화하기 어렵고, 컴퓨터가 두벌식, 세벌식 각각의 자판 배열을 인식하고 사용한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미쓰(, 1604년 8월 12일 ~ 1651년 6월 8일, 재위 1623년 - 1651년)는 일본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이다. 1623년 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로부터 쇼군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1632년에 가서야 비로소 실권을 장악하였다. 막부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으며 1638년 기독교를 믿는 농민들의 반란인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을 계기로 기독교 단속과 쇄국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 일본과 교역이 허가된 나라는 오직 조선, 청나라 그리고 전도를 하지 않는 네덜란드의 3국 뿐이었다. 묘소는 닛코(日光) 린노지(輪王寺)에 있다. 게이초 9년(1604년) 7월 17일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에도 바쿠후의 2대 쇼군 토쿠가와 히데타다이며, 어머니는 히데타다의 정실 에요(江与)이다. 이미 히데타다에게는 장남 나가마루(長丸)가 있었으나 이에미쓰가 태어날 즈음에는 이미 요절하여, 사실상 이에미츠가 후계자로 여겨졌으므로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아명인 다케치요(竹千代)를 아명으로 물려받아 사용하였다. 유모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이었던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이자 이나바 마사나리의 정실인 가스가노 쓰보네이다. 게이초 10년(1605년) 아버지 히데타다가 정식으로 2대 쇼군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게이초 11년(1606년) 동복 동생인 구니마쓰(国松, 후일의 도쿠가와 다다나가)가 출생하였다. 후세의 기록인 『무야촉담(武野燭談)』에 따르면 두 형제의 양친은 병약하고 말을 더듬었던 장남 이에미쓰에 비해 차남 다다나가를 더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가스가노 쓰보네가 오고쇼(大御所)로 물러나 있던 이에야스에게 장유유서를 명분으로 직소하여 이에미쓰를 후계자로 확립하는 데 일조하였다고 한다. 실제 이 기록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나 기록상 이에미쓰가 후계자로 확실시된 시점은 겐나 원년(1615년)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겐나 2년(1616년) 5월 사카이 다다토시, 나이토 기요쓰구, 아오야마 다다토시 등을 맞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9월에는 약 60명의 소년들을 시동으로 들여 일련의 가신단을 구성하였다. 겐나 3년 정식으로 쇼군 후계자의 거처인 니시노 마루에 들었고, 겐나 4년 조정의 칙사를 맞이하는 등 공식 행사를 수행하였다. 겐나 6년 관례를 치르고 다케치요에서 이에미쓰(家光)로 개명한 뒤 종 3위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임명되었다. 본래는 「이에타다(家忠)」로 개명할 것이 결정되었으나, 스덴(崇伝)의 추천으로 「이에미쓰」가 낙점되었다. 겐나 9년(1623년) 3월 5일 쇼군 후계자로서 우코노에곤다이쇼(右近衛大将)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아버지 히데타다와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7월 27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정식으로 쇼군 선지를 받고 3대 쇼군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나다이진(内大臣)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셋케의 일원인 다카쓰카사(鷹司) 가문의 다카코(孝子)와 혼인하여 정실로 맞아들였다. 치세 초기에는 오고쇼로 물러난 부친 히데타다가 여전히 군사 지휘권 등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히데타다 - 이에미쓰 2원 구도로 정치 체제가 운용되었다. 실제로 간에이 3년(1626년) 7월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행차 당시 히데타다와 함께 교토에 상경하였을 때에도 쇼군인 이에미쓰 본인보다 오고쇼인 히데타다가 다테 마사무네, 사타케 요시노부 등의 유력 다이묘와 하타모토 등을 다수 거느리고 상경하였으며 천황 알현 이후에도 이에미쓰가 사다이진(左大臣) 겸 사코노에곤다이쇼(左近衛大将)로 승격한 데 그친 것에 비해 히데타다는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승격하였다. 간에이 9년(1632년) 히데타다가 사망하면서 비로소 이에미쓰 1원 구도로 사실상의 친정을 시작하였다. 하타모토를 중심으로 직할 영지의 재편에 착수하여 막부의 재정 및 권력 구축을 확고하게 하였으며 로주(老中), 와카도시요리(若年寄), 부교(奉行), 오메쓰케(大目付) 제도를 도입하여 현직 쇼군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간에이 12년(1635년)에는 부케(武家) 법도를 개정하여 다이묘들 사이에 이미 관례로 자리잡아 있던 산킨코타이(参勤交代)를 법적으로 제도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나가사키 무역의 이익을 막부가 독점하기 위하여 무역을 통제하고 기독교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간에이 14년(1637년) 시마바라의 난을 거쳐 간에이 18년(1641년)에는 쇄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 같은 막부의 권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이에미쓰 시대까지의 정치는 후세의 「문치 정치(文治政治)」와 대비하여 「무단 정치(武断政治)」로도 불린다. 같은 해에는 이에미쓰의 나이 37세만에 비로소 장남 다케치요(竹千代, 후일의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태어났다. 간에이 19년(1642년) 간에이 대기근이 일어났으나 막부 체제는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후 농민 통제의 일환으로 전답 매매를 금지하였다. 게이안 3년, 병이 들어 각종 의례를 장남 이에쓰나에게 위임하였다. 이듬해 4월 향년 48세로 에도성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홋타 마사모리, 아베 시게쓰구 등이 이에미쓰를 따라 순사하였다. 이에미쓰의 삼남 쓰나시게, 사남 쓰나요시는 각각 고후 도쿠가와가(甲府徳川家), 다테바야시 도쿠가와가(館林徳川家)라는 가문을 창설하여 고료덴(御両典)이라 불렸다. 이 가문들은 비록 영지가 도쿠가와 고산케 보다는 적었지만 가격은 높았다. 이 두 가문이 멸문한 이후에야 고산케에서 쇼군이 나올 수 있었다. 에리크 (포메라니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 , , 1382년 - 1459년 9월 24일)는 칼마르 연합으로 즉위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공동 군주이다. 덴마크의 국왕 에리크 7세(, 재위: 1396년 ~ 1439년), 노르웨이의 국왕 에리크 3세(, 재위: 1389년 ~ 1442년), 스웨덴의 국왕 에리크 13세(, 재위: 1396년 ~ 1439년)에 해당한다. 포메라니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뤼겐발데(Rügenwalde, 현재의 폴란드 다르워보(Darłowo))에서 바르치스와프 7세(Warcisław VII) 공작과 메클렌부르크의 마리아 공작부인의 아들로 태어나 모친 마리아의 이모이자 에리크의 외이종조모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의 양자가 되었다. 에리크의 외외증조부는 발데마르 4세이며 외할머니가 잉에보르 애 단마르크 왕녀(Ingeborg af Danmark)이기에 마르그레테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기에 자격이 충분했다. 에리크는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의 지원으로 1397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세 왕국의 공동 군주가 되었고 그 후 1412년까지는 마르그레테가 섭정을 맡았다. 에리크는 독일에서의 영향력 강화에 힘쓰고 세 왕국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었다. 결국 1434년에는 스웨덴에서 엥엘브렉트 엥엘브렉트손이 주도한 광부들의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에리크는 세 왕국에서 차례대로 폐위되었고 포메라니아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후 세 왕국의 왕위는 그의 여동생인 포메라니아의 카타리나(Katharina, 1390년 ~ 1426년)의 아들인 크리스토페르 3세(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가 대신하게 되었다. 히로시마번 히로시마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아키 1국과 빈고 국의 절반을 지배했던 번으로, 그 영지는 지금의 히로시마현의 대부분에 속해 있었다. 게이슈 번() 또는 아키 번()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역대 번주는 국주격()에 해당했으며, 대대로 아키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607년에서 1764년까지 조선 통신사가 방문할 때 그 기항지가 되었다. 번청은 히로시마 성이다. 5만석 (1632년 ~ 1720년) 3만석 (1730년 ~ 1869년) 후쿠오카번 후쿠오카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지쿠젠 1국을 지배했던 번으로, 지금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시에 위치했다. 지쿠젠 번()으로도 불리며, 번주가 도자마 다이묘인 구로다 가문()이었기 때문에 구로다 번()이라는 속칭도 있다. 번청은 후쿠오카 성에 두었다. 1600년 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 일부를 영유하고 있던 고바 야카와 히데아키가 비젠 국 오카야마 번으로 전출되어 봉해졌다. 대신 부젠 국 나카쓰 번 번주였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공에 따라 지쿠젠 국 일대 52 만 3 천여 석의 큰 봉토를 받음으로써 번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영주는 일국의 영토를 가진 다이묘 가문이 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후쿠오카 번 구로다 가문을 우대했고, 2대 구로다 다다유키 이후 역대 번주에 마쓰다이라의 성과 장군 실명 한 글자를 수여했다. 마쓰다이라 지쿠젠을 유지하며 구로다 가문은 에도 막말에 이른다. 구로다 가문(종가) 아키즈키 번(秋月藩)은 후쿠오카 번의 지번으로 1623년 겐나 9년 구로다 나가마사의 셋째 아들 나가오키가 후쿠오카 번으로부터 5만석을 나눠받아 번을 세웠다. 번청은 아키즈키 진야(현 후쿠오카현 아사쿠라 시)에 세웠다. 성이 없는 다이묘였지만, 성주의 격을 부여했다. 4대 번주 나가사다의 딸 하루히메는 다카나베 번 아키즈키씨에 시집을 갔으며, 둘째 아들은 명군으로 유명한 우에스기 요잔이었다. 간에이 연간에 후쿠오카 번과의 사이에 게자 군 일부와 호나미 군, 야스 군의 일부 영지를 교환했지만, 막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어내증체’(御内證替)라고도 불렸다. (일설에는 후쿠오카 번으로부터 아키즈키 번이 받은 중신의 영지를 그대로 안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아키즈키 진야의 눈과 코 앞에 있던 교통의 요충지인 아마기야도를 후쿠오카 번이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아키즈키와 후쿠오카 두 번의 경계선은 아마기야도를 후쿠오카 번령에 포함시키는 복잡한 형태가 되었다. 폐번치현 이후엔 자작위를 받았다. 아키즈키 구로다가 도렌지 번(東蓮寺藩) 혹은 노가타 번(直方藩)은 후쿠오카 번의 지번이다. 도렌지 구로다가 노가타 구로다가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또는 다중접속 역할 수행 게임은 한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인터넷을 통해 모두 같은 가상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롤플레잉 게임(RPG)의 일종이다. MMORPG는 전 세계적으로 플레이되고 있다. MMORPG의 전 세계 소득은 2005년 5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2006년 서부 국가 쪽의 소득은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MMORPG라는 용어는 리처드 개리엇이 대규모 다중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과 게임의 사회 공동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신라 신라(新羅, , 기원전 57년 ~ 935년)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 하나로 꼽힌다. 진한에 소속된 소국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이 그 시초이며, 박혁거세 거서간(干)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王)이라는 단어를 쓰기 전에 진한(辰韓)의 사로국에선 왕(王) 또는 수장(首長)을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또한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로 서기 503년 지증왕 때에 정해졌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갖추는 데는 가장 늦었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에 6세기중엽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현 청더시, 친화다오시, 텐진시, 베이징시)을 지배하였을 때는 신라의 세력이 약하였다. 선비족이 중국인들을 정복하고 건국한 당나라와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와 연합이 파기되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이로써 신라의 한반도 남부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 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내부 분열이 이는 와중에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삼국으로의 분열 및 부정부패의 만연 등으로 국력이 쇠락한 신라는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로 하면서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만에 멸망했다. 진한(辰韓)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말기에도 충지 잡간(匝干), 아간(阿干) 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徐羅我[서라벌]) · 서야(徐耶:徐耶我) · 서라(徐羅) · 서벌(徐我) 등 여러 한자 가차자와, 계림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한자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고유어에서 중국식의 "왕"으로 바꿨다. 당시 여러 민족들에 한자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선비족등 여러민족이 한자식 이름과 호칭을 썼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쇠'(鐵, 黃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뱃사람들의 은어로 동풍을 샛바람이라 하는 점 등)'이 있다. '서라벌'은 '서라'에 넓은 땅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이다. '라'의 모음이 약해져서 탈락하면 '서르벌', '서벌'이 된다. '라'의 자음이 약해지면 '서야'가 된다.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니사금 편에 기술되어 있다. 높은 땅을 뜻하는 '달'과 '서벌'이 합쳐지면 '달서벌'이 되고 '서'의 모음이 약해지면 '달스벌/달스불'이 된다. 닭(鷄)을 닥, 달 등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달스벌/달스불'을 닭+수풀, 즉 계림(鷄林)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 고려시대에 만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라 신라 천년을 3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신라의 역사를 시기 구분할 때는 《삼국사기》의 구분을 따른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삼국유사》는 불교와 연관지어 상고·중고·하고로 신라사를 구분하였다. 신라사를 5기의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내물왕 이전의 시기를 제1기, 내물왕부터 제22대 지증왕까지(356년~514년)를 제2기, 제23대 법흥왕(法興王)부터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까지(514년~654년)를 제3기,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부터 제36대 혜공왕(惠恭王)까지(654년~780년)를 제4기, 제37대 선덕왕(宣德王)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敬順王)까지(780년~935년)를 제5기로 잡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가 자신들을 다스려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였다. 기원전 27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내물 마립간 (재위: 356년 ~ 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99년 (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 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 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하였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진보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하였다.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 ~ 576년 )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진흥왕 이후에는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선덕여왕 (재위: 632년 ~ 647년)대인 642년에는 백제에 신라의 턱밑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까지 빼앗기며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신라는 67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 남부 통합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676년 신라가 한반도 남부에서 여러 국가를 통합한 것을 말한다.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멸망시켰고, 676년에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한반도 남부를 통합하였다. 나당 전쟁으로 외세를 축출하였으나,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로는 진출하지도 못하여 삼국의 통일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 또한 외세 개입시켜 이뤄낸 결과로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발해(698년 ~ 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은 틀린 표현이며, 신라의 '삼국해체', '한반도 남부 통합' 또는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신라의 한반도 남부 통합은 고구려의 영토를 상당부분 상실했다는 점에서 영토적인 면에서 분명 한계이다. 또한 한반도내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있었으며 이는 고려나, 한반도 내에서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 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킨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신라는 원래 육부(六部) 연맹에서, 출발 근처의 작은 부족 연맹을 병합·정복하여 국세가 점점 강성하여져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남부를 통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방 관제도 그 국세의 확장에 따라서 확대·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증왕 때는 주군(州郡) 제도가 처음 생겼고, 영토의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된 법흥·진흥왕 때에는 그 지방관제가 확립된 듯하다. 신라의 지방 행정조직은 군사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중요한 곳은 주(州)로 삼았다. 주에는 군주(軍主)를 두어 그 영역의 군정을 맡아서 이를 통치하게 하였다. 군주 밑에는 여러 성주가 있었다. 또 《양서》신라전에 따르면, 신라가 동해 남단에 편재(偏在)할 당초에는 경주 부근에 6부(六部) 가 있었고, 기외(畿外)에는 52읍륵(邑勒)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차차 주현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한편 중요한 곳, 즉 아시촌(阿尸村) 과 국원(國原) 에는 소경(小京)을 두고, 지방장관인 사신(仕臣)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신라는 확대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보다 강력한 왕권 아래 정치 체제를 재정비해야 했다.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왕족의 혈연적 제약을 벗어나, 종래 ‘성골(聖骨)’의 신분만이 계승한 왕위는 이후 ‘진골(眞骨)’로 바뀌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골품제는 진골을 제1급으로 하여 확립되었다. 또 종래의 불교식 왕호 대신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의 존엄성을 높였다. 모든 관료는 엄격한 신분 제약을 받아야 했고, 율령정치(律令政治)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족장 회의제의 정치 체제는 관료 정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중앙 관료를 감찰하는 기관을 위시하여 여러 중앙 관서가 분화·확충되었다. 골품제와 더불어 신라의 17관등(官等)의 관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실제로는 신라의 한반도 남부 통합 시기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가 진덕여왕 5년(651년)에 설치되고, 형률(刑律) 사무를 관장하는 이방부(理方府)의 규범 60여 조가 새로 정해지고, 감찰 기관인 사정부(司正府)가 신설되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주·군에 외사정(外司正)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이 밖에도 조부(調部)·예부(禮部)·선부(船部) ·위화부(位和府)·사록관(司祿館)·병부(兵部)·창부(倉部)·승부(乘部)·예작부(例作府)·영객부(領客部) 등을 설치했고, 도성(都城)의 수축이나 사찰을 영조(營造)할 때마다 소관의 관서가 세워졌다. 왕권의 강화의 추세에 따라 군현의 명칭과 관호(官號)가 전면적 중국식으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관료 체제의 지향은 진골 신분의 반발 때문에 혜공왕(惠恭王) 때에는 다시 원래의 칭호로 환원되었고, 이후 진골 신분 간에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야기되었는바 선덕왕·원성왕은 모두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는 영토 확장에 따라 신문왕 때 9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갔고, 또 정치·군사상의 요지에는 5소경(五小京)을 두었다. 종래 전략상의 의의가 컸던 주의 장관인 군주(軍主)는 문무왕 때에는 총관(摠管)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어 점차 지방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주 밑에는 군(郡)을 두고,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장관을 각기 태수(太守)·현령(縣令)이라 칭했다. 이들 지방 장관은 관계(官階)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을 일정한 제한 밑에서 신라의 관료 체제에 흡수하였다. 군현 외에 신라에서 특수한 것으로는 일종의 천민 집단(賤民集團)인 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지방의 호족은 지방 관서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검찰하고 번상(番上)·시위(侍衞)케 하여 그들의 지방에서 발호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반도 남부 통합 후 신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이 필요하자 종래의 6정을 개편·확충하고 중앙의 군단 조직인 9서당(九誓幢)과 지방의 군대 조직인 10정(十停)을 배치하여 복속민을 회유·견제했다. 또 5주서(五州誓)와 3무당(三武幢) 등을 두어 군제를 보충 내지 확충하였다. 남북국 시기에 접어들어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민(民)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삼국 후기부터 지방 통치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전국의 민과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이 점차 강화되었는데, 이는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에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 신라 행정 조직의 말단 단위는 촌(村)으로, 이는 자연적인 경계에 따라 형성된 촌락이었다. 이런 촌을 단위로 3년마다 경작지의 면적, 호구, 가축, 과실수, 뽕나무 등이 조사되어 문서가 작성되었고, 그 기간 내에 변동된 사항도 그때마다 보고되어 문서에 추기(追記)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매년 조세와 역역(力役)이 부과되었다. 각 촌의 위에는 이 같은 자연촌락 몇 개가 묶인 행정촌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촌주(村主) 한 명이 있어 행정 업무를 도왔다. 촌주는 현지인이 되었는데, 삼국 시기와는 달리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각 행정촌은 상급 기관인 현에 귀속되었으며, 현은 군에 속하였다. 그리고 소경과 군에 직접 귀속된 촌들도 있었다. 군의 상급 기관이 주였고, 주와 소경은 조정에 직속되었다. 업무에 따라 중앙에서 군에 직접 하달하고 군에서 중앙으로 직접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밖에 부곡(部曲)과 향(鄕)이 있었다. 이들의 성격에 대해선 일반 군·현의 주민과는 달리 천민 신분에 속하는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특수 행정 단위화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있어왔는데, 근래에는 군·현으로 편제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지역을 부곡과 향으로 삼았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각급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주와 군에는 각각 감찰관을 따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10정(十停)이라 하여, 전국의 주요 지점 열 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군대를 상주시켰다. 그밖에 지방민의 신앙과 의례(儀禮)의 대상이 되어온 전국의 주요 산과 하천에 대한 제사도 정비하여 중앙에서 간여하였다. 이들 제사는 지방민의 결집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중앙의 각급 관서들도 확충되었다. 그중 왕 직속의 집사부(執事部)가 행정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또 감찰기구인 사정부(司正部)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확충된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군의 핵심으로 9서당을 두었고, 왕실의 경호를 맡는 시위부(侍衞府)를 개편, 강화하였다. 이들 기구는 왕권과 중앙권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물리력이었다. 삼국 시기 이래 관리에 대한 주된 보수 지급 방법은 녹읍(祿邑)을 주는 것이었다. 녹읍은 촌 이상의 단위로 주어졌고, 녹읍의 거주민들이 국가에 내야 하는 조세를 관리가 대신 받아가게 하였다. 이 같은 녹읍은 7세기 후반 신문왕대에 폐지되고, 대신 관리들에게 녹봉(祿俸)이 매달 지급되었다. 이는 녹읍지의 민으로부터 관리가 직접 조(租)를 받는 데 따른 민에 대한 경제외적 침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역시 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757년 다시 녹봉제가 폐지되고 녹읍제가 부활하였다. 이는 행정적인 번거로움과 함께 귀족 세력의 반발 등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일단 외형상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통치 조직이 정비되어 국가 권력이 촌락 내부에까지 깊숙이 뻗쳤다. 하지만 국가 권력이 촌락 사회에 작용한 정도는 아마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지간에 삼국 시기와 비교했을 때 집권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비된 통치 조직을 바탕으로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귀족 회의는 존속하였으나 권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왕은 전제군주의 면모를 지녔다. 유교적 정치이념이 전면에 내세워졌고, 충과 효가 주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왕호도 유교식이어서, 6세기에서 7세기 중반까지의(中古期) 불교식 왕명과 차이를 보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를 시기 구분하면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에서부터 그의 직계 후손인 왕위를 이어간 1백여 년간의 시기를 중대(中代)라 하였다. 이런 구분은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관료 조직이 정비되고 왕권이 전제화되었지만, 중대의 집권체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관료제는 그 실제 운영에 있어 신분제에 의한 제약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출신 신분에 따라 관직의 임용에서 차별을 받았고, 비(非)진골 신분의 인사들이 승진하는 데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중요 관서의 장은 진골 귀족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 권력은 소수의 진골 귀족 출신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관리의 선발은 보편적인 제도 없이 궁술(弓術)과 추천에 의거해서 이루어졌다. 활이 주요 병장기였던 고대 초기에는 궁술이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주는 기준이 될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결국 관리가 되는 주된 길은 귀족의 천거를 받는 것이었다. 천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 중앙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았다. 이런 관리 선발 방식은 왕권과 중앙 정부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근원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진골 귀족의 정치권력을 증대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7세기 후반 통일 전쟁과 새로운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이루어진 귀족층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귀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골 귀족의 세력이 재차 강화되었으니, 이는 신라 중대의 지배체제를 기저에서부터 위협하는 것이었다. 혁거세 거서간은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 만큼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화백회의를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면서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다.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 때문에 중앙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들은 금일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영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우고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도록 하여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몸과 마음을 연마하였다. 화랑은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왕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백성들에 대한 제약은 상당했는데,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관료 체제가 확충되는 데 따라서 토지 제도상으로도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귀족·관료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의 형식으로 토지·인민 또는 노비가 분배되었다. 한편 관리에게 특수한 경우에 세조(歲租)가 지급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소(大小) 족장이었을 관리들은 토지와 인민을 녹읍(祿邑) 형식으로 사여(賜與)받아, 그들 원래의 생활 기반을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끔 보장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화의 추세에서 이와 같은 토지 사여 형식은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왕 때(689년) 내외 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일종의 녹봉제(祿俸制)로서 관료전(官僚田) 을 급여하였다.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정전제(丁田制)가 실시되었다. 또한 최근에 와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 문서(民政文書)를 통하여 수취 체제 확립을 위한 신라 왕조의 노력을 엿보게 해준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은 정치 중심지로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여 수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인 5세기 말에 조정에서는 상인으로 하여금 좌상점포(坐商店鋪) 를 개설케 하였으나,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시전(市廛)을 갖추게 되고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를 감독케 하였다. 지방에는 행상(行商)에 의한 향시(鄕市)가 일찍부터 벌어져서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한편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이 더욱 성행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역된 물화(物貨)는 각종 금은세공품(金銀細工品)·직물을 위시하여 신라의 인삼, 당나라의 차(茶)와 서적 등이었다. 왕실·귀족과 관서의 수요 물품은 향·소·부곡민의 노역으로 운영된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으로써 생산되었고, 마포(麻布)나 견직물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하였다. 평민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소수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농민은 촌락 단위로,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정(丁)과 정녀(丁女)인 20세에서 59세 사이의 남녀를 중심으로, 그 이하의 사람들을 조자(助子)·조여자(助女子), 추자(追子)·추여자(追女子), 소자(小子)·소여자(小女子)로, 그리고 60세 이상은 제공(除公)·제모(除母), 노공(老公)·노모(老母)로 분류되었다. 이런 분류에 따라, 노동력 징발 시 각 촌에 부과될 인원이 정해졌다. 촌락 내에 있는 농민의 토지는 논과 밭으로 구분되어 각각 결부법(結負法)에 따라 면적이 조사되었으며, 이에 따라 조세 부과량이 정해졌다. 결부법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조세 부과량을 산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였다. 결부법에서의 계산 단위는 결(結)·부(負)·속(束)·파(把)이다. 파는 한 움큼의, 속은 한 묶음의, 부는 한 짐의 곡식 줄기를 뜻하였으며, 또한 각각 10배씩 증가하였고 다만 100부가 1결이었다. 나아가 각 단위는 곧 그만큼의 수확을 내는 토지 면적을 가리킨다. 아직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농토에 따라 비옥도의 차이가 컸고, 산과 계곡이 많은 자연지형이었으므로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농토의 측량이 여의치 않았던 조건에서, 비교적 손쉽게 면적을 산출할 수 있고 조세 부과에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결부법이었다. 남북국 시대에 들어서는 이 같은 결부법에 의거한 양전 사업(量田事業)이 널리 이루어졌다. 이후 결부법은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면적 산정 방법이 수차에 걸쳐 보완되면서 19세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당시 농토는 전반적으로 상경화(常耕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토, 특히 그중 밭의 경우는 2~3년에 한 번 경작되었다. 농민들은 조세를 내고 부역을 지는 외에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현물세로 내야 했다. 토지는 국유제가 표방되었고, 722년에 백성에게 토지인 정전(丁田)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때 황무지와 같은 일부 토지를 농민에게 분여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전국적인 토지 분급이 행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서원(西原) 소경 부근의 네 개의 촌락에 관한 기록을 담은 장적 문서(帳籍文書)에서는 ‘연수유전답(煙受有田沓)’이라 하여, 농민이 가지고 있는 땅을 모두 국가에서 분급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전국의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따른 표현일 뿐이다. 왕토사상은 국가에서 조세 수취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한 명목이었고, 실제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널리 행해졌다. 단 농민의 토지 소유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일반 농촌에는 노비가 많지 않았다. 위의 장적 문서를 보면, 전체 인구 462명 중 노비가 25명뿐이었다. 그리고 노비 중 정남과 정녀가 19명이었고, 3년간 태어난 노비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노비가 자신의 호(戶)를 이루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외거 노비(外擧奴婢)가 아닌 솔거 노비(率居奴婢)였을 것이며, 당시 일반 농촌에서 노비의 노동력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을 것이다. 노비의 주된 소유층은 진골 귀족이었고, 왕실이 최대의 노비 소유자였다. 숫자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신라의 재상가(宰相家), 즉 진골 귀족이 노비를 3천 명이나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각지에 농장과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부려 그곳에서 경작과 가축 사육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경우 노비의 예속 형태는 외거 노비였다. 지역적으로 노비가 제일 많이 있었던 곳은 역시 수도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귀족의 대저택이 있었고, 그런 집에는 다수의 노비가 있었다. 수도에 사는 귀족의 노비들은 가내 노동과 귀족의 사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수공업품 생산에도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 사찰이 소유한 노비의 경우도 예속 형태가 비슷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국가 체제 정비와 함께 종래의 재지(在地) 수장층(首長層)이 소유하고 있던 수공업 생산 수단과 기술 인력이 국가와 왕실 및 일부 귀족에 귀속되었다. 지방 장인(匠人)들의 경우 생산품을 특산물 현물세(調)의 형태로 공납하였고, 중앙에선 이들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면은 남북국 시대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다. 남북국 시대 신라의 수공업은 장인들의 소속처에 따라, 내성(內省) 산하의 궁실 수공업, 주요 관서에 귀속되었던 관영 수공업, 귀족들의 사영 수공업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장인들의 처지는 국가의 통제하에서 신분화되었다. 장인 중 하급 관등을 받아 골품을 지닌 이들이 있었고, 기술 노역만 제공한 평민도 있었다. 노비로서 생산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궁실 수공업의 주된 노역자였다. 궁실 및 관영 수공업은 국가와 왕실에 소요되는 물품을 할당받아 생산하였다. 귀족의 사영수공업도 주로 골품제의 의례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는 등 귀족집안 자체의 수요에 부응하는 형태였다. 이와 같이 수공업은 시장을 상대로 한 상품 생산의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외에 일반 농민의 가내 수공업은 농업과 함께 결합되어 농민층 자신의 수요를 충당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상업이 발달해갔다. 긴 평화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농업 생산이 늘고 계층 분화가 진전되었으며,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인구의 이동이 있게 되고 수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졌으며, 일부 상품의 질도 고급화하였다. 남북국 시대 초기 당나라와의 조공 무역에서 신라가 보낸 물품은 주로 자연산 특산품이었는데, 이후 점차 고급 비단과 금속 공예품 등이 많아졌다. 일본과의 교역에서는 금속 제품과 모직물 등을 수출하고, 풀솜과 견직물을 수입하였다. 당시 고급 물품은 주로 수도의 궁실 및 귀족에 소속된 공장(工匠)들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조정도 상업을 장려하여, 수도에 시장이 두 곳 더 개설되었다. 당시 상업에 주요 교환매체였던 견포(絹布)의 길이를 정하는 등의 조치는, 상업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상행위는 금지하였지만 일반 신도들의 상업 활동은 인정하였다. 그리고 유가론(瑜伽論)의 ‘공교명사상(工巧明思想)’이 유포되었는데, 이는 배우고 익힌 기술로 적은 노력을 들여 많은 재보(財寶)를 만들어 모아, 이것을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이익을 줄 것을 강조한 사항이었다. 이는 승려들이 장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논거로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였다. 실제 당시 유명한 승장(僧匠)이 적지 않았고, 불교 사원에서도 수공업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8세기 후반 이후 집권 체제에 동요가 생기고 국가의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 해외 무역은 조공 무역 외에 점차 민간인이 행하는 사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새로운 부원(富源)을 찾아, 그리고 좀 더 자유로운 인간관계하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바다로 나가 활동하였다. 또한 많은 수의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해안 지대 각지에 신라방(新羅坊)이란 집단적인 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신라 상인들에 의한, 신라와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무역도 성행하였다. 남부 중국의 무역항을 거쳐 수입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산 사치품들이 수도의 귀족층 사이에서 애용되었고, 신라 상인들이 아랍 상인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하기도 하였다. 신라에 대한 지식이 아랍 지역에 알려진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듯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서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신라 하대에 기존의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하였다. 반면에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도 발전하였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또한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공예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로마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특기할 만하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왕이나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한편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남북국 시기의 신라의 문화는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신라의 문화가 그처럼 난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남북국 시대의 신라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경주 부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혜초(慧超)가 대표적으로 이들은 당나라 또는 인도에 가서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했으며, 혜초는 인도에 가서 불적(佛跡)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당시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고승의 배출과 함께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었으니,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 외에 새로이 화엄종(華嚴宗)과 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어 이른바 5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들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족들 사이에 신봉되었다. 원효(元曉)는 여러 종파의 대립·상쟁(相爭)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하려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에 따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 신앙을 대중 속에 널리 유행시켰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선종(禪宗)의 유행이 그것이다. 신라 왕조의 지배층은 불교의 장려와 동시에 유교 사상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지배층이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신문왕 2년(68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으며, 원성왕 4년(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學閥)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유학의 보급에 따라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이 증가되고, 강수(強水)·설총(薛聰)·김대문(金大問)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당나라의 과학 기술이 수입되어 천문 관측기구가 제작되었으며,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화와 전설이 기록되었고, 통일 전에 발생한 향가(鄕歌)는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삼국 시기의 초기 향가는 아마도 가야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그 시초 형태였던 것 같고, 따라서 민요적인 소박성을 지녔으며, 주술적 기원을 담은 주가(呪歌)의 요소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통일기의 향가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면이 보이나, 주술적 기원을 불교 신앙을 빌려서 행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향가는 신라인의 우아하고 숭고한 이상과 기원을 담은 아름다운 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소개하는 〈제망매가(祭亡妹歌)〉는 그러한 한 예이다. 여기서 작가인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누이와의 사별(死別)을 서러워하면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신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 시기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抒情性)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處容歌)〉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향가의 형식은 원래 4구체(四句體)였던 것 같다. 남북국 시대에도 4구체 향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 다수의 향가는 10구체(十句體)의 정형시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8구체(八句體)의 향가도 지어졌다. 이러한 향가는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 한시로서는 최치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삼교(三敎)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뿐 아니라 변려체(騈儷體)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발달한 미술은 남북국 시기 신라의 문화 중 가장 큰 특색을 지니고 그 빛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뛰어난 제작 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신라 미술품 중 가장 정채(精彩)를 발휘하는 것은 석굴암(石窟庵)이다. 조각 미술의 전당을 이룬 석굴암은 김대성(金大城)이 발원(發願)함으로써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미술의 대표적인 것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는 귀족 김대성(金大成)의 원찰(願剎)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된 것이다. 정문인 자하문(紫霞門)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층계와 석축은 신라 당대의 것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대웅전 앞의 좌우에 서 있다. 이 중 석가탑은 남북국 시기의 신라 탑의 일반형인 3층 석탑의 대표적인 것이다. 삼국 통일 이후 초반에 등장한 3층 석탑인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에선 웅장하고 강건한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석가탑 단계에 오면 극도로 세련된 미적 감각과 절제된 균형미가 무르익어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3층 석탑은 이 단계를 지나면서 세련미가 과도해져 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신라 귀족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의 변화와 유관한 것이다. 다보탑은 신라 석탑의 특수형에 속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려한 모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신라에는 당(幢)과 정(停)이라는 군제의 기본을 이루는 일종의 군단이 있었다. 당·정은 어떤 표지(標識)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드는 집단, 혹은 단체를 의미한 말로 특히 당에는 크고 작은 많은 종류의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대당(大幢)과 귀당(貴幢)이었다. 대당은 수도 부근에 설치된 듯한 대군영(大軍營) 또는 대군단(大軍團)이며, 귀당은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관구에 두던 군영이었다. 정은 대당·귀당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만 지방 군관 내의 본부·본영으로서 거의 각 주치(州治)에 설치되었다. 당과 정은 지방의 중요성 여하에 따라 개칭되기도 하고 폐지되었다. 9서당(九誓幢)은 신라의 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군대 편제의 하나이다. 진평왕 5년(583년)부터 증설되어 신문왕 7년(687년)에 완성된 중앙의 군단(軍團)으로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인, 백제인 등을 포함하여 만들어진 군대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 부대였던 듯하다. 이는 이국민(異國民)에 대한 반란의 위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한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으로, 금색(衿色, 목둘레 깃의 색)에 의하여 부대를 구별하였다. 10정(十停)은 통일 신라의 군대 편제 가운데 하나이다. 9주·5소경의 완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측되며, 지방에 배치된 중요한 부대였다. 10정은 가장 지역이 넓고 또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漢山州)에만 2개 정을 설치했으며, 다른 8개 주에는 1개 정씩을 배치했다. 이 10정은 국방만이 아니라 경찰의 임무까지도 담당한 듯하다. 이진경 이진경(, 1963년 ~ )은 대한민국의 사회학자이다. 초기 필명은 이진형이다. 사회학, 철학, 경제학 관련 연구자, 저술가이다. 2003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본명은 박태호이며 가명인 이진경은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라는 설이 있었으나 본인은 아무 의미 없이 "이진형"이라고 썼다가 다른 책에 이진경으로 인용되면서 그렇게 바뀌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반적으로 초창기 PD 운동권 계열의 주요 인물로 분류된다. 1963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저자로 밝혀져 진보 진영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89년 3월 서울대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 및 1990년 1월 17일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과 무크 《현실과 과학》제4집에 실린 「왜곡으로 빚어진 PD파의 오류와 무지가 연출한 NDR론의 복권」 및 등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로 구속됨. 이후 1990년 1월 23일 박태호에 이어 안민규가 연행됐고, 2월 12일 안기부가 `노동계급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안기부는 “1989년 3월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 남한 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위해 전국적 규모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전위당’을 건설키로하고 서울, 인천, 부산 등 전국의 노동현장과 학원가 등에 기관지 《노동계급》을 제작배포해 왔다”고 발표했다. 구속된 두 사람은 "안기부에서 고문 등 불법수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 : 근대적 주체의 생산과 관련하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유+너머라는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 중이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혁거세 거서간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기원후 4년, 기원전 57년~기원후 4년)은 신라의 초대 국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의 역사는 신화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출생과 사망은 신화적으로 과장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赫居世와 弗矩內와 같은 이표기를 통해 그것이 고유어 인명이었음을 유추해낼 수 있다. 赫은 고대국어 *pʌlVk-, 世는 *nULi를 나타낸다. 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즉,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 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다.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 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으로 지었고 이름을 혁거세(赫(爀)居世)라고 지었다. 일연은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기록하였다. 여기서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거서간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하였다 한다. 여기서 중국을 지금의 중국이 아닌 말 그대로 중국(中國). 여러 제후를 다스리는 중심적 나라라는 견해도 있다. 혁거세의 부친과 관련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 혁거세는 빛날 혁,살 거,인간 세.세상에 빛나게 살다라는 뜻이다. 혁거세 거서간은 10세 때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고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 6월 8일(음력 4월 28일 병진일)에 즉위하고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를 지칭)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나정)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일설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신라 박씨 족보는 혁거세 거서간의 장남 박특(朴忒)을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 하고 있어 혁거세 거서간의 출생이 사료의 기록(기원전 69년)보다 이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설로 보고 있다. 혁거세 거서간은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백성들은 할수없이 양다리와 양팔과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혁거세 거서간의 무덤은 5개가 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들을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뱀 때문애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따로 묻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오릉(五陵)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691년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이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다.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을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루터의 주장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이라는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다. (다섯 솔라) 루터 본인은 자신이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종교 개혁이 하나님에게 이끌림을 받아, 할 수 없이 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설교자, 박사, 교수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그가 행했던 일들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개신교가 태동했을 뿐 아니라, 성서 번역, 많은 저작 활동, 작곡과 설교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크게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한국 루터회에서는 루터를 말틴 루터라고 칭한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출생했다. 중산층 가정으로 생계에 지장이 없었지만 상당히 검소하여, 모친은 다른 동네 부인들처럼 장작을 주웠다. 부친은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신념의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진로문제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했는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과 사학(四學, ) 을 마치고서 1502년 9월 문학 학사학위, 1505년 1월 17명 가운데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예비학교를 마친 5월에 본격적으로 법 공부를 시작했다. 루터가 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인근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성 안나(성모의 어머니)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했는데, 수도회에서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요한 폰 스타우피츠 교수는 루터가 성서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면 평안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루터를 성서학 교수 사제로 임명했는데, 이로 인해 루터는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루터는 로마서, 시편, 갈라디아서 강의를 통해 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확립하게 되었다. 칭의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교리다. 하나님의 의란 수동적인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주어지는 의이며, 대표적으로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wie geschrieben steht: "Der Gerechte aber wird aus Glauben leben."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의해 설교 중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의 만성 교회()의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다. 다만 루터가 물리적으로 논제를 교회에 게시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는 없다. 반박문은 루터가 수기한 후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며, 책으로 발간한 후에도 교회의 문 또는 인근에 이를 게시했다는 내용은 획인되지 않았다. 교회 벽 게시에 대해 최초로 거론한 사람은 필리프 멜란히톤이며, 루터 사후 자신의 저서에서 루터에 대해 언급한 것이 반박문을 벽에 게시한 일을 기록한 최초의 것이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는데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을 면해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는데, 실제로 요한 테첼은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천국 향해 올라가리라”고 신자들을 기만하였던 것이다. 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작센 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으며, 성서도 적절히 인용하고 연옥에서 당신들의 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감정에도 호소함으로써 순진한 신자들을 현혹하였다. 이러한 타락에는 교인들도 원인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식을 면하려는 손쉬운 신앙생활을 좋아하였으며,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이 과연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종교 개혁 운동은 로마 가톨릭의 문제를 논박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십자가의 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루터가 말한 영광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신학자 김영한에 따르면 루터의 영광의 신학은 신학자가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사역에서 지각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는 신학이라고 한다. 영광의 신학은 출애굽기 33장이 보여주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보이는 본질을 통해서 그의 보이지 않는 본질의 지혜를 파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루터는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십자가의 낮아지심과 수치 속에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의 영광과 존엄성 속에서 인식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다." 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길이다. 영광의 신학은 “주여 아버지를 보여주소서”(요14:8) 라고 간청하는 빌립의 요구에 상응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는 빌립처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14;8)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창조사역으로부터 인식 - 하나님의 사역(Werke)으로부터 시도하는 하나님의 인식이다. 이 사역이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이다. 하나님을 창조사역으로부터 인식하고자 하는 자연신학과 사변적 형이상학과 도덕적 인간의 행위 거룩성은 함께 속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이끌고 간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영광과 능력”(Glorie und Macht)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 -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중세의 스콜라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이성적 추론에 의하여 하나님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 사색이나 행위의 의(work-righteousness)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시도이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상승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는 영광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공개적인 신적 능력, 지혜와 영광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윤리적 실적으로 행위하는 자, 하나님 앞에 율법의 이행자로서 세운다. 그래서 도덕적 행위주의(moralischer Aktivismus)를 정당화 한다.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인 - 세상의 지혜란 인간의 도덕성과 이성의 능력을 말하며, 여기서 인간은 자기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나가고자 한다. 이것은 영광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영광과 인정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러한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에게 다가 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린 약하고 무능한 자로 보기 때문이라고 신학자 김영한은 말한다. 애당초 학자들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되었다.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스콜라주의 영광의 신학 , 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영광의 신학과 대조적으로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신학자 김영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보이는 것, 그의 뒷면을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지각한다.” 루터는 출애굽기 33장 주석을 통하여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살지 못하리라“(출33;20).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 틈에 두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기 까지 모세를 그의 손으로 덮으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면만을 보고, 그의 영광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뒷면을 보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신자의 십자가를 하나님 인식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숨어 계신 처소, 즉 약하심,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을 고난과 수난으로 부름 받은 자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이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을 무능화 한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간 속에 행하시도록 한다. 인간은 순수히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수용하는 자가 된다. 십자가 신학은 영광의 신학의 기준에 따르면 고난, 즉 악함과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 루터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역들로부터 하나님의 인식을 오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고난으로부터 인식되기를 원하며, 보이지 않는 본성의 지혜는 보이는 본성의 지혜를 통해서 폐기되기 원하신다.”고 한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됨과 십자가 속에 그의 감추심은 대립된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신학과 진정한 신 인식이 있다. 십자가는 자연신학과 자연적인 에토스(ethos)의 자기의식을 깨뜨린다. 십자가는 인간의 성공이나 번영의식을 깨뜨린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경험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에 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세상의 지혜에는 감추어져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연약하고, 우둔한 것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것은 오로지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폐(die Verhehlung Gottes)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die Ohnmacht Gottes)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직접적으로 계시되지 않고 역설적으로 그의 무능과 낮아지심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진노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과 복은 십자가 아래, 말하자면 “불행과 재난” 아래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의 눈에는 거짓(Lüge)으로, 세상의 거짓은 진리로서 나타난다. 루터는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악마처럼 다가온다. 십자가 신학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수천명, 수만명이 모여서 열광하고 설교자가 스타처럼 청중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하는 설교단에 계시기 보다는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소수의 무리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말씀을 듣는 세상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설교단에 임재해 계신다. 설교자가 마치 황제처럼 청중들을 종교적 열광으로 몰아가고 번영과 성공을 나누어주는 설교단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청중에게 재난과 어려움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진실한 설교단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신다. 루터는 십자가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영광의 신학은 통찰력을 갖고 있지도 합당한 신학도 아니다. 실제로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모르므로 고통보다 행적을, 어리석음 대신 지혜를 선호하기 때문에 십자가 고통에 감추어진 하느님(Absconditus Deus)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한 자들은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필리포서 3:18)이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을 혐오하고, 업적들과 그 영광을 좋아하며, 그리하여 십자가의 선을 악이라, 악의 행업을 선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기 행업들에서 추론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남용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와 반대로, 즉 당신의 고통을 통해 인식되기를 원하셨고, 또 그리하여 가시적인 것에서부터의 인식을 새로이 입증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행적안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분으로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고통 안에 자신을 감추시는 분으로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그런 자들이 하느님의 자기 비하와 십자가 사건을 인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고,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배척하신다. '야훼 당신은 진정 숨어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야 45:15)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종교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 지시하였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추기경 토마스 카예탄(Thomas Cajetan)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토마스 카예탄은 1518년 10월 12일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년)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신다는, 루터의 표현대로 수동적인 의인 칭의론(이신칭의)도 굽히지 않았다. 카예탄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선제후 (1519년 1월)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진 밀티츠()가 선제후에게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른 만남은 허락되었다. 회합을 가진 두 사람은 이제 이후로는 피차 공적으로 침묵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교수 요한 에크가 침묵을 깨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였다(1519년 7월 4일 - 7월 14일). 요한 에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치히 대학교를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2개의 작센()을 대표하는 대학교들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 공의회(1414년 - 1418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고, 에베소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하였다. 루터와 에크의 논쟁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 공국(Herzogtum Sachsen)의 작센 공 게오르크()와 대립되었으나, 한편 그의 단호한 태도는 멜란히톤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켰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 시켰다. 엑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고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단죄하고,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뢰번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도 불에 타 버렸다. 교황의 화형영장은 루터를 분개하게 했다. 며 교황의 화형 영장을 태워버린다.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자신에 대한 파문은 루터의 영혼 깊숙이 상처를 내었다. 사실 루터는 면죄부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교황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면죄부의 오용들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때 루터는 비로소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한 것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과거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급작스레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에서 돌아선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자기는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세 번이나 출교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필두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카를 5세 황제는 신변의 안정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1521년 3월 6일, 초청장을 보냈다. 황제의 안전 보장은 믿을 바가 못되었다. 선제후의 궁전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였다. 결국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루터가 선택할 몫이었다. 루터는 주위의 우려와 권고를 물리치고 단호하게 보름스를 향했다. 슈팔라틴()도 그의 결연한 모습을 감지했다.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트리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물었다. 첫 번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 루터는 하루의 여유를 구했다. 루터는 4월 17일 저녁에 비엔나의 요하네스 쿠스피니아누스()에게 그날과 다음 날의 일에 대해 편지를 썼다. 다음날(4월 18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죽음을 무릎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카를 5세 황제는 루터에 대한 신분 안전 보장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루터가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동료들과 함께 보름스를 떠났다. 길을 가던 중 루터는 프리드리히 3세가 미리 주선한 대로 위장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갔다. 여기서 루터는 게오르크 기사 행세를 하며 10개월간 지냈다. 한편 루터가 보름스를 떠난 후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서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는 누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은 파리, 뢰번, 쾰른 대학교 신학부로부터도 정죄당하였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강제된 휴가’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이 기간을 성서 주석,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의 번역에 사용하였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서(Septemberbible)’로 불리게 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독일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하고, 독일어 발전에 이바지한 신학적,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독일 종교개혁 이전에 사용된 성서는 라틴어 성서였으므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터가 고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어,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루터가 성서 번역에 사용한 고지 독일어는 현대의 표준 독일어가 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성서 번역은 독일어와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루터는 성서 번역을 훌륭히 수행하여 ‘독일의 나이팅게일들이 로마의 방울새들 만큼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서 번역의 원칙을 알 수 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덕분에 빠르게 보급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성직자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도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성서를 축자영감설등의 경전적 해석에서 벗어나, 사회학, 수사학, 사본들과의 비교, 역사등의 학문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성서비평이 태동하는 거름이 되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세 명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도 합세를 했다. 성만찬에서는 그때까지 평신도에게 거부되었던 포도주도 제공되었으며, 혁신적인 예배양식과 예복이 도입되었고, 로마 가톨릭 미사를 거행하던 수도사들은 돌에 맞았으며, 성상들은 교회에서 제거되고 불태워졌으며 소요가 일었다. 루터는 믿음의 일로서 시작한 자신의 일이 오해받고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자, 12월 중 비텐베르크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5일간 머물다 돌아갔다. 이 때의 느낌을 슈팔라틴에게 쓴 편지에서 루터는 저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강제 조항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소요가 계속되자 루터는 자신의 망명지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으로 설교하였다. 말씀만이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안녕과 질서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1520년 사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토마스 뮌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1년-1525년), 다음으로는 에라스뮈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년-1525년) 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농민, 토마스 뮌처, 인문주의자들에게 루터가 외면을 받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들에 있어서 공통점은 루터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성서가 정경화를 통해 등장하기 전에는 교회가 있었다는 이해에 따라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성서위에 올려 놓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루터는 ‘성서만으로’를 주장하였고,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주관적인 계시이해에 대해서는 성서의 객관적인 말씀을 주장하였으며,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성서가 말하는 확실성을 주장하였고, 복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농민혁명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만 된다면 그 결과는 저절로 온다고 확신하였다. 루터는 42세이던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했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였다. 루터는 자신의 결혼의 목적이 늙은 아버지에게 자손를 안겨 주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설교를 몸소 실천하면서 본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반대하였다. 동료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마귀가 웃을 것이며 그 자신이 그동안에 이루어 놓은 일을 다 헛수고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특히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결혼선언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독일 농민들이 영주들의 착취에 저항하여 일으킨 독일 농민전쟁도 처음에는 동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재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주장하여 영주들에게 강경진압을 요구하였다. 지금까지 교황은 세속권력에 대한 우위권을 주장하였는데, 이제 농민들은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복음의 이름으로 칼을 손에 쥐었다는게 루터의 생각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이때 그는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에 있었던 법적 논쟁을 중재하러 가 있는 중이었다. 루터가 사망하던 밤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루터는 다음 성경 구절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요나스 박사는 마지막이 이른 것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의 몸이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루터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만인 성자 교회()에 안치되었다. 루터는 음악이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였다. 음악은 신학과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영혼을 고치고 영들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음악이 없으면 인간은 목석과 마찬가지이지만 음악이 있으면 마귀를 멀리 보낼 수 있다. 루터는 이것을 영적인 고통 가운데에서 직접 경험하였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러나 음악을 멸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은 음악의 이 유익을 몰랐다. 그들은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루터는 고 하였다. 한편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한정된 이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어 오던 성가를 만인의 소유물로 돌려주었다. 이전의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는 미사때 회중은 잠잠히 있고 성가대의 전문가들만이 영광송(Doxology)을 번갈아 불렀다. 그러나 루터는 일반 회중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전례 즉, 예배 양식을 개혁하였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를 비롯하여 많은 찬송곡을 작사, 작곡 하였다. 그의 곡들은 ‘코랄’이라는 장르로 자리 잡는다. 그는 자신의 ‘작고 못생긴 목소리’를 불평했지만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하는 능수능란한 음악가였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성가의 능력을 믿었다. 성가는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배운 이들에게도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장이 가족에게 찬송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루터가 살던 시대에 개신교 목사들의 수준은 낮았다. 개신교 목사들은 부패하고, 부도덕했으며, 주정뱅이, 직접 술집을 운영하는 자도 있었다. 교인들이 연보를 하지 않아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은 1528년 3월 《선제후령 작센의 교구목사 시찰자를 위한 지침서》를 제작하여 교구목사들을 교육하고자 했다. 영방에 소속된 개신교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국가에 소속된 공무원과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성서와 신앙을 가르칠만한 역량을 갖춘 성직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자들이 주관하는 성직고시를 합격하고, 대학교 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개신교 성직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영방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감독회에서는 사회복지, 결혼, 예배, 신앙교육등을 담당했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의 핵심사상은 크게 세 가지 구호로 설명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다. 그의 종교개혁 작업의 핵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고 그 위에 자신의 종교를 쌓아가려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고해서 성서의 권위와 성령의 감도(영감)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또한 선행(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믿음의 중요성에 무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급진적이었던 것은 이 말들 앞에 붙은 한 작은 단어, “오직”(sola) 이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것들을 말하면서도 실은 그 밑바닥에는 인간 중심의 종교가 사로잡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서의 권위를 말하면서도 성서를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를 그 위에 세웠으며, 은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이 율법의 의를 쌓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능력’으로만 이해하였고,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처음에는 시작하다가 어느덧 ‘선행(善行)으로 형성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서는 그 문자가 자명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서,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해석자도 중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성서만으로!), 은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신앙을 보시고 의인으로 인정해주시는 ‘호의’(신학용어로 이를 '칭의'라고 한다.)로 이해하였고(은총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단번에 모든 율법을 성취하며 인간을 의롭게 한다고 하였다(믿음만으로!). '오직 성서'(Sola Scriptura)는 교권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신학과 교리의 최우선의 권위는 성서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원칙 하에서 나온 이 세 가지 종교개혁의 구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만으로’의 원칙이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다. 루터는 신·구약성서를 통틀어 성서의 주제는 그리스도라고 이해하여, 라고 하였으며, ‘은총만으로’는 대속에 있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절대적 중요함과 또한 충분함을 주장하였고, ‘믿음만으로’는 율법의 종결자로 오시며 그 요구를 ‘텅 비게’ 하시는 신인(神人)즉,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신 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교리뿐만 아니라 윤리, 문화, 정치에까지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루터는 이 조항 위에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고 그 중요성을 강변하였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더 이상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행위를 드릴 필요가 없다. 대신 그는 그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베푼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calling, 부르심) 안에서 충실할 때 누구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 을 실천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자 김세윤 박사는 《기독교 사상》2008년 12월호에 기고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개혁을 위하여'에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오직 그리스도 사상은 교회가 선언해야 할 복음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를 전하는 십자가 복음이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세상에서 부와 출세의 복음이 지배하는 한국 교회에 적절한 비평이라고 김세윤 박사는 신학자의 지성으로 주장하였다. 루터는 세상을 떠나기 전인 1545년에 학자들이 소위 "자서전적 단편"이라고 부르는 글을 썼다. 마르틴 루터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고 구걸하는 것 곧 무위도식에는 "구걸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고, 윤리에 어긋나며, 인간 존엄성에도 어긋난다."라는 논리로 반대했지만, 배우자와의 사별, 질병, 강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악 등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곤경에 처한 형제를 돕고 섬기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예배"라며 찬성하여 매주 주일마다 라이스니히 시에서 시민들이 매 주일 예배때마다 공동모금함에 봉헌하여 모아진 헌금으로 병·연로함 등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시민들을 돕는 라이스니히 금고규정(1523년)에 서문작성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전통은 북유럽에도 번져나간다. 루터는 1543년에 발표한《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Die Juden und ihre Lügen)》이라는 글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갑자기 유대인 탄압을 선동한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19세기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교사회노동당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 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갔고 나치에게 파급되었다. 또한 루터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까지 해 가면서 유대인들에 대해 인도주의를 제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손대접》,Christine paul, 정옥배 옮김, 복있는 사람.p.123)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배계급들과의 결탁에 의해 진행되었으므로, 독일농민들이 제후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항쟁을 벌이자(독일 농민전쟁), 제후들에게 서신을 보내 진압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루터는 농민항쟁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후들의 착취에 맞서 계급투쟁을 벌이는 농민들을 사회를 위험하게 하는 폭도라고 비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제후들과의 결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종교개혁이 진행될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에서 농민항쟁 진압을 주장하였다. 즉 루터에게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지배질서로부터 민중을 구원하는 성서의 하나님보다, 현실권력인 제후들과의 결탁을 통한 종교개혁 진행이 중요했던 셈이다.이는 개신교도 기존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종교와 정치간의 결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재침례교에서는 종교와 정치간의 분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의 분리사상은 시민혁명이후 종교와 정치간의 결탁이나 소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한 것이지,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질서에 대해 교회는 정치에 간여하면 안 된다면서 침묵하거나 기독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보수적이거나 때로는 수구적인 신학으로 유지시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주장했다는 사실에서 즉, 교회개혁의 신학적 모델을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신학자이다. 복음주의 클럽 운영자인 양희송은 《복음과 상황》 171호 표지이야기- <불멸의 루터, 한 말씀하시다>에서 루터를 가리켜 기성교회인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는 지성과 자신의 생각을 95개조 반박문 작성으로 옮긴 열정을 모두 갖춘 신학자라고 평가했다. 루터 자신도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종교개혁은 정의감이 아닌 신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또한 그의 십자가 신학은 기독교의 전통인 청빈, 자족과 반대되는 영광의 신학에 물든 미국과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에 좋은 대안이 된다. Biographien Quellen Luther und die Juden Luther und das Alte Testament Luther und die Hexenverfolgung Luther und seine Testamente (1537 und 1542) 692년 693년 694년 신라 문무왕의 친동생이자 태종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이, 장안에서 향년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다. 695년 696년 697년 698년 고왕이 발해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다. 699년 시인 - 왕유 탄생 700년 그대를바라볼때면 모든개멈춪ᆢ 701년 사모스섬 사모스()는 에게 해 동부, 히오스 섬의 남부, 파트모스 섬과 도데카니사 제도의 북부,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그리스의 섬이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이 태어난 섬이며, 그녀를 모신 신전 유적은 1992년에 사모스섬의 피타고리오와 헤라 신전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 에피쿠로스와 피타고라스가 태어남 섬이기도 하다. 현재의 터키의 서남쪽의 육지로부터 약 2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섬의 크기는 472.5km²이며 동서로 폭은 약 43km, 남북으로는 약 13km에 달한다. 섬의 중심부에는 사화산 케르키스 산(고대 그리스어로는 케르케테아스 산, 고도는 1,433m에서 1,450m 사이 수치가 주어진다)이 솟아 있으다. 섬의 중심 도시이자 사모스 현의 현도는 항구 도시인 사모스이다. 이 도시의 옛 명칭은 바시(Βαθύ)로 지금도 구 시가는 바시로 불린다.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딴 피사고리오(Πυθαγόρειο, 옛 이름은 티가니)도 주요 항구도시이다. 고대에 이오니아 문화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540년경에 세워진 헤라 신전인 헤라이온이 유명한 건축물이다. 사모스 섬에 관련된 인물로는 피타고라스와 아이소포스(이솝)이 유명하다. 담배, 사모스 포도주, 꿀, 올리브유, 감귤류, 말린 무화과 열매, 아몬드, 포도주에 사용되는 머스캣 포도가 생산된다. 특히 사모스 포도주는 사모스 섬의 전통적인 특산물로 고대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아직도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는 고급 포도주라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 702년 703년 704년 아리스타르코스 아리스타르코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산 목록 강 목록 강(江)은 붙여 쓴다. (외래어 표기법 제4장 3절 참조) 아래는 외국의 강 목록이다. (한국의 강 목록) 프레이저강 프레이저 강(-江; )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강이다. 로키 산맥부터 태평양 쪽의 조지아 해협으로 흐른다. 총 길이는 1400 km, 면적은 220,000 km²이다. 로키 산맥에서 발원한다. 남해 차차웅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남해 이사금, 기원전 50년~24년, 재위 4년~24년)은 신라의 2대 국왕으로,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적자이다. 이름은 남해(南解), 다른 이름은 민해(愍海)이다. 그의 칭호에 대하여는 국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존장의 칭호로서 오직 이 임금에게만 칭한 것이다" 라고 전한다. "차차웅"이라는 왕호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김대문을 인용하여,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은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에, 그를 외경해 마침내 존귀한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 고 전하는 바, 이는 신라가 초기에는 샤머니즘의 사회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태진 교수는 "차차웅"은 가가웅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또한 "거서간"에서 이어지는 호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태진 교수는 "고대부터 "ㅊ, ㅉ" 발음은 "ㅋ, ㄱ" 발음과 혼용되어 왔다. 고대 로마에서 카간을 차가누스라고 부른 것처럼 말이다. "차차웅" 또한 "가가웅, 카카웅"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각간을 각찬이라고도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차차웅이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 호칭이 아닌 거서간에 연속성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6년(즉위 3년) 음력 1월에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묘(廟)를 세웠고, 8년(즉위 5년)에 석탈해를 맏사위로 받아들였고, 10년(즉위 7년)에는 그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다. 남해 차차웅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14년(즉위 11년)에 왜가 민가를 노략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였다. 18년, 경주에 가뭄이 들었다. 음력 7월에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고구려에 복종하는 일곱 나라가 와서 투항하였다.(월 미상) 19년(즉위 16년)에 북명(北溟)에서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 차차웅에게 바쳤다. 《삼국지》〈〉 부여조(條)에 "그 나라 인장에는 '예왕지인'이라 한 글귀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예나 부여가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이름이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비추어 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24년(즉위 21년)에 죽어 경주 사릉원(蛇陵園) 안에서 장사지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브리티시컬럼비아주(, , )는 캐나다 서해안에 있는 주이다. 주도는 빅토리아이며 최대 도시는 남부의 항구 도시 밴쿠버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땅의 대부분은 북아메리카 본토에 속하지만 큰 섬인 밴쿠버 섬이 있고 작은 섬들도 많다. (주의: 밴쿠버는 육지에 위치하고 빅토리아 시는 밴쿠버 섬에 있다.) 밴쿠버에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이민온 사람과 영어를 배우러 온 유학생들도 많다. 주요 산맥은 로키 산맥과 코스트 산맥이다. 주요 강에는 프레이저 강·컬럼비아 강·스키나 강·피스 강 등이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지방에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 지방에는 인디언들이 살았다. 북부에 아사바스칸 족들과 남부 내륙 지방에 살리시 족은 유럽인들의 도착 시기에 가장 다수의 단체들이었다. 그러나 하이다 족, 크와키우틀 족, 누트카 족과 치미시안 족들은 가장 부유하고 진보적이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살았고, 식량을 위하여 고래, 해달, 연어와 넙치를 잡았다. 이 인디언들은 위대한 예술적 기능을 개발하고 그들이 새긴 토템 폴은 오늘날 관광객들의 목적지이다. 내륙 지방의 인디언들은 사냥을 하거나 큰 강들을 따라 물고기 잡이를 하였다. 그들은 겨울 피난처를 위하여 땅에서 용골 집들을 파냈다. 이 집들은 땅과 덮어진 나무로 만든 지붕들이 있었다. 여름 동안에 인디언들은 섬유 돗자리 혹은 가지들과 함께 덮어진 막대기 틀 구조인 돗자리 오두막에 살았다. 1774년 후안 페레스 아래의 스페인 함대가 현재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인 지방을 봤으나 상륙하지 않았다. 페레스와 그의 선원들은 브리티시컬럼비아를 보는 데 알려진 첫 유럽인들이었다. 잉글랜드의 탐험가 제임스 쿡은 이 지방에 상륙한 첫 유럽인이 되었다. 1778년 그는 밴쿠버 섬의 서해안에 누트카 사운드로 들어가는 데 2대의 영국 함선을 지도하였다. 쿡은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향하는 통행을 추구하였다. 그의 선원들은 해달의 살을 위하여 인디언들에게 의류, 구슬과 칼을 교역하고, 중국과 유럽에서 해달 살을 팔았다. 1786년으로 봐서 영국인들은 인디언들과 융성하는 모피 교약을 가졌다. 1789년 스페인인과 영국인들 사이에 누트카 사운드 논쟁이 일어났다. 스페인은 페레스의 항해 때문에 누트카 사운드 지역을 주장하였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조약들 때문에 경계의 선의 서부에 있는 모든 대지를 스페인에게 주었다. 스페인인들은 자라나는 영국의 무역에서 경계되었다. 그들은 누트카 사운드에서 몇몇의 영국 배들을 붙잡아, 두나라는 거의 전쟁으로 들어갈 뻔하였다. 논쟁은 1790년 누트카 회의에 의하여 진정되었다. 소유권은 미해결 된 채 남아있었으나 영국인과 스페인인들은 동등한 교역 권리들을 받았다. 잉글랜드의 탐험가 조지 밴쿠버는 오리건에서 알래스카까지 태평양 해안의 3년간 측량에 1792년에 착수하였다. 이 항해에 그와 그의 선원들은 많은 후미와 다른 해안 특색들에 이름을 지었다. 동부 캐나다에서 온 스코틀랜드의 모피 교역인 알렉산더 매켄지는 1793년 로키 산맥을 가로질러 태평양에 도달하였다. 모피를 교역하는 노스웨스트 회사의 2명의 다른 회원들 사이먼 프레이저과 데이비드 톰슨은 1805년과 1807년 각각 따라갔다. 프레이저와 톰슨은 동부 캐나다로부터 서부로 오면서 모피 교역지들을 열었다. 그들의 교역지들의 지점은 캐나다의 육로 모피 교역로가 되었다. 1808년 프레이저는 자신의 이름을 딴 강을 탐험하였다. 톰슨은 1811년 컬럼비아 강의 입구에 도달하였다. 1821년 후에 권력적인 영국의 교역 상사 허드슨 베이 회사는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모피 교역을 통치하였다. 회사는 또한 오늘날의 워싱턴주과 오리건주를 구성하는 지역에서 모피 교역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반 동안에 많은 미국인 정착자들이 이 지방의 남부에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은 영국 회사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 거부하고 이 지역에서 정부를 설립하는 데 미국에 요청하였다. 미국에서 민주당원들은 1844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이 지역에 미국을 위한 주장들의 발행을 만들었다. 그들은 위도 54도 40선 만큼 멀리 북부로 태평양 해안에 영토를 원하였다. 그들은 "54 40 아니면 싸운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영국인들은 로키 산맥으로부터 컬럼비아 강까지 49선을 따라가는 데, 그러고나서 남부와 서부에서 강을 따라가는 데 영국 영토의 남부 경계를 원하였다. 이 일은 현재의 워싱턴 주 서부의 전부를 영국에 주려 하였다. 민주당원들이 선거를 이기고 제임스 K. 포크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타협을 제안하였고 1846년 두 나라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밴쿠버 섬을 제외한 전부의 영국 영토를 위한 남부 경계로서 49선을 세웠다. 영국인들은 49선의 남부에 놓인 밴쿠버 섬을 간직하였다. 1843년 허드슨 베이 회사는 포트 빅토리아(현재의 빅토리아)를 창립하였다. 1849년 영국 정부는 밴쿠버 섬의 식민지화를 위하여 회사에게 책임을 주었다. 1851년 회사의 공무원 제임스 더글러스가 식민지의 총독이 되었다. 더글러스는 1856년 밴쿠버 섬의 입법부 회의를 설립하였다. 1850년대 프레이저 강에서 금의 발견이 1858년에 행운 사냥꾼들의 수천명을 영토로 데려왔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보트를 타고 와 공급물들을 사러 포트 빅토리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말과 수레를 타거나 걸으면서 육로에 왔다. 본토 지방에 자신들의 보유를 강하게 하는 데 영국인들은 1858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를 형성하였다. 1859년 수도는 뉴웨스트민스터에서 서립되었다. 더글러스는 본토 식민지의 총독이 되고, 또한 지속적으로 밴쿠버 섬의 총독을 지냈다. 뉴웨스트민스터는 1868년 빅토리아가 대체할 때까지 수도였다. 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합병을 위하여 신청을 해야하나 혹은 새로운 캐나다 자치령에서 주가 되느냐에 토론을 하였다. 1871년 그들은 연방 정부가 브리티시컬럼비아를 동부 캐나다와 함께 잇는 데 철도를 지을 상태에서 캐나다의 일부가 되는 데 동의하였다. 존 포스터 매크레이트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초대 주지사가 되었다. 자치령과 연합은 처음에 불행복적이었다. 정부는 10년 안에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데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건설은 1881년까지 시작되지 않았고, 서서히 착수하여 계속되었다. 연기는 자치령으로부터 탈퇴하는 데 위협을 받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민들을 지루하게 하였다. 철도는 1885년에 주에 도달하였다. 이 젊은 주는 곧 거대한 빚으로 들어갔다. 소비는 세입의 위로 멀리 달하였다. 많은 주민들은 흩어진 인구와 함께 산의 지역을 다스리는 비용이 높을 것이라고 믿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주지사 리처드 맥브라이드는 협력의 의문에 대하여 자치령과 상의하였다. 1906년 다른 주들은 10만 달러의 해마다 지불에서 자치령으로부터 1백만 달러를 받아야 한다는 동의를 하였다. 철도 길들은 1910년과 1920년 사이에 주의 어떤 중부 지역들을 열었다. 철도는 재목 진영, 광업, 농업과 산업들의 개발을 서둘렀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수산업은 캐나다에서 가장 커졌다. 주는 또한 제재소 제품과 아연과 납의 생산에서 지도적이 되었다. 이미 캐나다 퍼시픽 철도를 위한 서부 터미널이 된 밴쿠버는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장된 후 지도적인 세계 항구가 되었다. 운하는 곡식, 재목과 생선 제품들을 배에 실어 유럽과 미국 동부로 나르는 데 더욱 싼 방향을 마련하였다. 1900년대 중반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위대한 향상의 세월이었다. 넓게 퍼진 개발이 주의 북부에서 일어났다. 1,422 마일(2,288 킬로미터)의 알래스카 간선 도로가 1942년에 개장되었다. 간선 도로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도슨 크리크에서 알래스카주 페어뱅크스로 지속적으로 북부로 향하는 다른 간선 도로와 이어지는 알래스카 주 정크션으로 뻗어있다. 1951년 천연가스와 석유가 주의 피스 강 구역에 있는 포트세인트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파이프라인의 건설이 주를 통하여 산업적 확장을 밀어올렸다. 케마노 수력발전 프로젝트는 1954년 키티매트에서 운영되기 시작한 알루미늄 공장으로 전력을 주는 데 네차코 강의 흐름을 전환하였다. 1958년 피스 강 구역으로 향하여 북부로 뻗은 퍼시픽 그레이트 이스턴 철도가 완공되었다. 1964년 퍼시픽 그레이트 이스턴 철도는 서밋 호에서 내륙 지방의 포트세인트제임스로 지선을 세웠다. 이 선은 거의 쓰이지 않은 대지를 벌목과 광업들로 열었다. 이전으로 벌목은 서부 해안에 중심을 잡았고, 나무의 거의는 재목을 위하여 쓰여졌다. 1960년대 동안에 내륙의 산림들은 나무의 중요한 근원이 되었다. 1960년대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는 정착과 상업적 개발을 위하여 주의 새로운 부분들을 열었다. W. A. C. 베넷의 사회적 신용설 정부는 장기적 개발 프로그램들의 연속을 후원하였다. 주요 프로젝트인 피스 강에 수력발전 댐이 1968년에 운영을 시작하였다. 1964년 캐나다와 미국은 컬럼비아 강 유역에 4개의 댐(각각 3개와 1개)의 건설을 요구한 컬럼비아 강 조약을 찬성하였다. 1967년 덩컨 댐이 완공되었고, 1969년 휴 킨리사이드 댐이 헌납되었다. 1972년 리비 댐이 몬태나주 북서부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1973년 마이카 댐이 완공되었다. 일본과의 무역은 1970년대 동안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경제에 더욱 나가서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전으로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는 그 주요 시장들을 위하여 동부의 주들과 미국에 시선을 돌렸다. 1968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석탄 회사가 15년의 기간에 석탄의 대략 5천만 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데 동의서에 서명하였다. 1970년 석탄 운송을 다루는 데 주와 연방 정부들에 의하여 지어진 항구는 밴쿠버 남부의 로버츠 뱅크에 열었다. 1980년대에 텀버 리지 근처에 있는 주의 북동부에 석탄 매장량들이 일본 시장을 공급하려고 개발되었다. 1971년 퍼시픽 그레이트 이스턴 철도가 북동부에서 포트넬슨에 도달하였다. 철도선은 지역의 자연 자원들의 개발을 위하여 길을 열었다. 1972년 그 이름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철도 회사로 바뀌었다. 회사는 2000년대 초반에 CN 레일로 화물 운영들로 넘겨졌다. 1972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투표인들은 주의 첫 사회민주적 정부를 선출하였다. 신민주당의 데이비드 바레트는 새 정부를 지휘하였다. 1973년 주의 입법부는 보험과 펄프와 종이 산업들에서 개인적 상사들과 경쟁하는 데 정부 소유의 주식회사들을 세웠다.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사회 신용당이 다시 브리티스컬럼비아 주를 다스렸다. 1991년 신민주당이 통치를 이겼다. 당은 2001년 주의 자유당이 신민주당에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정부의 통치를 차지할 때까지 주를 다스렸다. 세계적으로 넓은 통신과 교통 기술들의 박람회인 엑스포 '86가 1986년 밴쿠버에서 열렸다. 그 일은 주에서 관광업을 촉진시키는 도움을 주었다. 1900년대 후반에 호프, 캠루프스와 오캐너건 강 유역 사이에 간선 도로들의 건설이 남부 내륙 지방의 개발에 공헌하였다. 2000년 캐나다 정부는 주의 니스가 족 인디언들에 의한 대지 주장을 진정시킨 니스가 조역을 비준하였다. 조약은 돈과 다른 경제적 이득들은 물론 주의 북부에 있는 대지의 대략 775 스퀘어 마일(2,000 스퀘어 킬로미터) 이상의 니스가 족의 통치를 승인하였다. 또한 니스가 족을 위한 자치적 정부의 형성을 위한 마련을 하기도 하였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대략 50개의 다른 인디언 다네들도 또한 캐나다와 주와 함께 조역들을 협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3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2010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서 밴쿠버를 선택하였다. 휘슬러의 스키 리조트가 많은 종목들을 개최하였다. 서비스업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국내총생산의 대략 4분의 3과 고용의 대략 5분의 4를 차지한다. 많은 이 산업들은 주의 주요 도시들, 특히 밴쿠버에 있다. 밴쿠버 지역은 캐나다 서부의 지도적인 금융의 중심지이다. 밴쿠버는 또한 주의 지도적인 무역과 교통 산업의 중심지이다. 주 정부의 활동들은 주도인 빅토리아에 중심을 잡고 있다. 제조업은 밴쿠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제조업의 거의는 그 임업과 농업 생산품을 가공하는 데 봉납된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산림은 주의 지도적인 제조품들인 목재와 종이 제품들의 제조를 위하여 쓰여진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는 목재와 종이 제품들의 제조에서 미국과 캐나다의 주들을 이끌고 있다. 목재 제품들을 만드는 어떤 회사들은 자신들의 큰 제재소의 옆으로 대고 제지 공장을 운영한다. 식품과 음료 가공업도 또한 중요하다. 공장들은 낙농제품, 생선, 과일과 채소, 그리고 정육의 큰 양을 가공한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제조되는 제품들의 다른 타입들은 컴퓨터 비품, 콘크리트, 산업적 기계, 초기 금속 생산품과 교통 수단을 포함한다. 천연가스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광업 소득의 지도적인 근원이다. 천연가스는 주의 북동부에서 체굴된다. 석탄과 구리도 또한 중요하다. 석탄은 주의 남동부 지역과 도슨 지류의 남서부에서 체굴된다. 구리는 내륙 지방과 밴쿠버 섬에서 채굴된다. 산림들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절반 이상을 덮고 있다. 상록수의 숲들은 산림 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재목의 대부분은 내륙 지방에서 왔으며, 어떤 재목들은 해안 지역으로부터 왔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의주도는 빅토리아이다(victoria)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농산물 생산의 대부분은 주의 남부 절반에 있다. 쇠고기, 낙농제품, 온실 채소, 종묘 산품과 가금류 산품들은 주의 농장 소득의 지도적인 근원들 중에 있다. 프레이저 강 유역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가장 집중된 농업 지방이다. 낙농제품, 달걀, 돼지, 가금류와 채소는 거기서 생산되는 중요한 일용품이다. 중부 내륙 지방은 소의 산업으로 알려졌다. 소, 카놀라와 사료와 더불어 주의 곡식의 대부분은 피스 강 지역에서 생산된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는 상업적 수산업에서 중요한 주이다. 양식과 야생 연어는 주의 물고기 잡이의 가치의 대략 절반을 차지한다.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인구가 4,113,487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인구는 2001년으로 본 3,907,738명에서 대략 5 퍼센트나 증가하였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남서부는 주의 가장 거대한 인구를 가진 부분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민의 대략 절반은 밴쿠버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산다. 이 지역과 애버츠포드, 캘로나(켈로나)와 빅토리아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은 캐나다 통계에 의하여 밝혀지면서 인구 조사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이다. 주의 가장 큰 도시 밴쿠버는 프레이저 강의 입구 근처에 놓여있다. 밴쿠버는 주요 항구이며 중요한 비지니스와 금융의 중심지이다. 많은 주의 다른 공동체들은 밴쿠버 메트로폴리탄 지역 안에 놓여있다. 이 공동체들은 버너비, 코퀴틀람, 리치먼드와 써리를 포함한다. 주도인 빅토리아는 밴쿠버 섬에 놓여있다. 빅토리아에는 많은 정원, 구부러진 거리와 국회 건물들이 있다. 캠룹스와 프린스조지는 밴쿠버 지역의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들이다. 오카나간 강 유역에 있는 캘로나(켈로나)는 빠르게 번창하는 공동체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민의 대략 75 퍼센트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다른 나라들에서 온 가장 큰 단체들은 중국, 영국과 인도에서 왔다. 주의 가장 큰 민족 단체들은 중국,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계통의 주민들이다. 주에서 대략 195,000명의 주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혹은 이누이트 족의 혈통이다. 유리 이사금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57년, 24년~57년) 또는 노례 이사금(弩禮 尼師今)은 신라의 제3대 국왕으로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다. 박혁거세의 손자이며, 천일창의 동생 이다. 왕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왕(許婁王)의 딸 박씨라는 설이 있지만, 일지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노례(弩禮), 치리(治理), 치리(齒理), 치리적(治理赤)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노례, 박씨 족보에서는 치리 또는 치리 이다. 24년부터 5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24년부터 43년까지 친정하였고 43년부터 57년 붕어할 때까지 매제 석탈해(훗날 탈해 이사금)가 대보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이사금은 방언이니 잇금을 이른다. 이전에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둘은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시험해보니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 즉위 이듬해인 25년 친히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를 사면했으며, 28년(즉위 5년)에 홀아비, 과부, 고아, 늙고 병든 이들에 대한 구휼을 실시했다. 즉위 9년에 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렸는데, 이 무렵 신라의 진한에서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나타낸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위 17등급을 정리했는데, 삼국사기에는 17등급이 전부 이때 정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리 이사금이 그 기틀을 다지고 후에 제도를 손봐 17등급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35년(즉위 13년) 음력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당하였다. 37년(즉위 14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40년(즉위 17년) 가을 음력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유리 이사금은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그리고, 42년(즉위 19년) 가을 음력 8월에는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57년(즉위 34년) 가을 음력 9월에 유리 이사금은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유언 비슷한 말을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57년 겨울 음력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진한 6부 진한 6부(辰韓六部) 또는 사로 6촌은 현재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부족연맹체 진한에서 신라의 기반이 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이며, 씨족 집단으로 육촌(六村) 또는 육부촌(六部村)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살며 생겨났다고 하였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지촌(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 혹은 加里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다. 유리 이사금이 32년에 개편하여 양산촌을 양부(梁部)라 하며 이씨(李氏)를,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라 하며 최씨(崔氏)를, 대수촌을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牟梁)이라 하며 손씨(孫氏)를, 간진촌을 본피부(本彼部)라 하며 정씨(鄭氏)를, 가리촌을 한기부(漢祇部)라 하며 배씨(裵氏)를, 고야촌(명활부, 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라 하며 설씨(薛氏) 성을 주었다. 대체로 부족사회의 6촌이 점차적으로 분화되어 단계적으로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변화된 것 같다. 일찌기 진한 땅에서도 지금의 경주지역에는 골짜기마다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6촌이 있었다. 6촌의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맞아 '사로(斯盧)'의 왕으로 받들어 진한 12소국의 하나인 사로 6촌이 되고, 점차 신라 6부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그 공으로 각기의 성(姓)을 받아 신라 6성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경주 6부로 개편되었다. 사로 6촌의 촌장들은 처음 표암봉(瓢嵒峰)에 내려온 알천 양산촌장 알평(謁平), 형산(兄山)에 내려온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 화산(花山)에 내려온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 이산(伊山)에 내려온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온 가리촌장 지타(祉陀),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온 고야촌장 호진(虎珍, 설거백)을 말한다. 알천 양산촌의 남쪽은 고려시대의 담엄사이다. 고려시대의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고려시대의 구량벌(仇良伐) · 마등오(麻等烏) ·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진지(또는 빈지, 빈자, 영지)촌이다. 고려시대의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무산 대수촌은 고려시대의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고려시대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 고려시대의 상ㆍ하서지(上下西知) ·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고려시대의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旀村) · 궐곡(閼谷, 또는 갈곡(葛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사로가 신라로 발전하면서 6촌은 6부로 자리잡았다.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은 왕경 내에 있었고,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은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왕경 내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이 세력이 컸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는 양산촌이 중추로 있다가 6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허촌인 사량부와 진지촌인 본피부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기 32년(유리왕 9) 6부의 후손들이 알평은 이씨(李氏), 소벌도리는 최씨(崔氏), 지백호는 정씨(鄭氏), 구례마는 손씨(孫氏), 지타는 배씨(裵氏), 호진은 설씨(薛氏)를 성씨(姓氏)로 받아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고, 뒤에 후손들이 모두 계림(鷄林, 경주)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왕성(王姓)인 박씨(朴氏), 석씨(昔氏), 김씨(金氏)와 함께 신라 토성(土姓)으로 인식된다. 고려가 통일한 뒤인 940년(고려태조 23)에 '경주'(慶州)라는 이름과 함께 급량부는 중흥부(中興府), 사량부는 남산부(南山部), 본피부는 통선부(通仙部), 점량부는 장복부(長福部), 한기부는 가덕부(加德部), 습비부는 임천부(臨川部)로 개편되었다. 고쿠라번 고쿠라 번()은 일본 에도 시대 부젠 국 내에 있던 번으로, 지금의 후쿠오카현 기타큐슈 시의 고쿠라키타 구에 위치했다.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기간 중에는 가와라 번(), 후에 도요쓰 번()으로 불렸다. 번청은 고쿠라 성이다. 지즈카 번(千束藩)은 고쿠라 번의 지번이다. 첫 이름은 고쿠라 신덴 번(小倉新田藩)으로 불렸다. 탈해 이사금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 57년~80년)은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왜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 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 먼곳에서 왔다고 하며 북방 신화가 강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 고구려 남쪽의 함경도,연해주 또는 우산국(울릉도)출신이라는 추측 설과 캄차카 반도 또는 인도에서 왔다는 추측 설 그리고 자신을 신성시하기 위해 동해 북쪽 멀리에서 왔다고 하며 용궁 전설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역사에 기록된 도이의 입구에서 보이듯이 고려인과 여진족계의 해적이 일본 큐슈 지방을 침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연해주와 남만주 지역의 한민족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그때 당시 왜국은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북 큐슈(九州)에 있다고 보는데 그 북 큐슈에 있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가 연해주와 남만주 지역이기 때문이다. 석탈해의 출신지인 다파나국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용성국은 정확히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은 캄차카 반도의 부족인 이텔멘 부족(Itelmens)의 신화에 "까마귀"가 등장하는 것을 보아 석탈해를 캄차카 반도에서 기원한 "이텔멘(Itelmens)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석탈해가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 왕국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로 보고 허황옥 신화처럼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월지족이 인도의 불교를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전파한 것을 신화로 나타냈다는 설이 있다. 24년, 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고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탈해 이사금은 즉위 초에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탈해 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땅을 개척하고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음력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에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에는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음력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이와 같이 탈해 이사금 치세 때, 신라와 백제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山) 봉산(烽山)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당년에 벌써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백 명정도의 군사를 내었다는 것에 의문이 있다. 또한, 두 나라가 간혹 화호(和好)한 일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큰 나라로서 늘 먼저 굴복하였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加羅) 6나라와 사벌(沙伐)·감문(甘文) 등 완충국(緩衝國)이 있었는데 백제가 가라 등의 나라들과는 한 번의 충돌도 기록이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라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7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다.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사후 9대 왕 벌휴 이사금이 즉위하였으나 연대차이가 심하여 그의 손자 여부는 불확실하다. 탈해 이사금은 신라 제4대 왕으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원래의 칭호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다.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 현재 영일(迎日) 지역)에서 고기잡이 할머니 아진의선이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8년(남해왕 5)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伽耶)와 싸워 크게 이겼다. 능은 양정(壤井, 경주 북쪽)에 있다. 월성 석씨 선원세계도와 신라 김씨 선원세계도 등에 의하면 석탈해의 손녀 마정부인이 그의 양자격이었던 김알지의 처가 되었다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장남의 이름은 강조(康造)라 기록되어 있는데 석탈해의 월성 석씨 족보에서는 강조(康造)가 아닌 구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광은 가야국왕 김수로왕의 딸의 이름이다. 즉 석탈해는 수로왕과의 관련성이 보아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성 석씨의 선원세계도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달라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에게 출가한 딸들이 각각 더 있었다. 파사 이사금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112년 10월, 80년~112년)은 신라의 제5대 국왕이다.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자 일성 이사금의 이복 동생 또는 이복 형이라 한다. 다른 이름은 검(檢) 또는 검(儉)이다. 성은 박씨이며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일성 이사금의 동생이라는 설과 함께 파사 이사금이 적자가 아니라는 대목이 같이 등장한다.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이다. 본래 유리왕의 맏아들 일성(逸聖)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라 해, 파사와 일성 사이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투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기 80년 8월에 탈해 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81년 봄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이어서, 파사 이사금은 민생을 살피고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으로 군비를 가다듬는 등 체제정비에 나섰다. 즉 81년 음력 3월 주, 군을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구휼하며 교수형 및 참수형이 아니면 모두 용서하였다. 82년 봄 음력 1월에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 특히 군사들에 대한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가다듬었다는 것은 사로국의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가 정비되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로국의 힘은 경주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84년 봄 음력 2월에 명선(明宣)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으로 삼았다. 신라의 17관등은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법흥왕에 의하여 완성되었으나 파사 이사금 시기에도 이찬이나 파진찬 등의 관직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 음력 5월에 고타군주(古抒郡主)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 남신현(南新縣)에서 보리줄기가 가지를 쳤다. 크게 풍년이 들어 여행하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고타군은 지금의 안동지방을 일컫는데 이 지역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사 이사금 시기에 사로국에 편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타군에 있던 반(半)독자적인 권력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연맹 속의 일원으로서, 맹주국인 사로국에 특이한 생산물이나 조장 등을 바치는 일종의 납을 바침으로써 사로국에 충성을 서약하거나 동맹관계를 지속시켜 나갔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남신현은 경주 남쪽의 어떤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타군의 군주가 바쳤다고 하는 청우는 크고 튼튼하게 잘 자란 소를 의미한다. 한편, 이 내용을 농업생산력이 곧 국력이던 당시에 우수한 종자를 배포함으로써 그것을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85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은 걸로 보아 곧 격퇴된 것으로 생각된다. 87년 음력 7월에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문헌 사료나 고고학 자료 등을 검토한 결과 마두성은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대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당시 거창군은 가야의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하므로, 가조면 일대에 성을 쌓았던 시기는 파사이사금 시기가 아니라 한참 후대의 일이라고 해석되거나, 파사 이사금 시기에 마두성을 쌓은 것이 틀림없다고 인정한다면, 마두성을 거창지역의 성이 아니라 경주 인근에 쌓았던 작은 성이라고 해석된다. 90년 음력 7월에 사자(使者) 10명을 나누어 파견하여 주주(州主)와 군주(郡主)를 감찰하여, 공무에 힘쓰지 않거나 밭과 들을 크게 황폐하게 한 자의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파면하였다. 93년 정월에 윤량(允良)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啓其)를 파진찬으로 삼았다. 음력 2월에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 주었다. 94년 가야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였으나 아찬 길원(吉元)에게 기병 1천기를 보내 쫓게 하였다. 96년 음력 9월 가야군이 다시 습격해 왔으나 이때 왕이 5천기를 거느리고 친정, 대승을 거두었다. 97년 정월에 가야를 치러 하였으나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용서하였다. 102년 음력 8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금관가야의 수로왕(首露王)에게 맡겼다. 수로가 판결을 내 땅을 음즙벌국에 귀속되게 하였다. 파사 이사금이 진한 6부에 명해 수로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게 하였는데, 모두 이찬을 보내 접대하게 했으나 한기부(漢祇部)만이 하급 관리를 보내 수로가 노하여 종을 시켜 한기부주 보제(保濟)를 죽이게 했다. 보제를 죽인 종 탐하리(耽下里)는 음즙벌의 왕 타추간(타鄒干)의 집에 숨었다. 파사 이사금이 노해 음즙벌국을 치니 타추간이 항복하고, 실직(悉直), 압독(押督)의 두 왕도 항복하였다. 104년 음력 7월 실직이 배반하여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겼다. 105년 백제와 화친했고, 106년 음력 8월 마두성주에 명해 가야를 치게 하였다. 108년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쳐 병합했다. 112년 10월에 서거하였다. 음즙벌국 음즙벌국(音汁伐國)은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해 있던 소국이다. 102년 실직곡국과의 영토 분쟁이 있었다. 두 나라는 신라의 파사 이사금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파사 이사금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 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파사 이사금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음즙벌국은 신라 지배 아래에서 음즙화현(音汁火縣) 이 되었으며, 고려때 안강현(安康縣)에 속해졌다. 실직곡국 실직곡국(悉直谷國), 실직국(悉直國), 혹은 실직(悉直)은 현재의 삼척시(구 삼척군) 에 위치해 있던 소국으로 설립은 전해지지 않으며 102년 음즙벌국과의 영토 분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파사 이사금의 분노를 사 음즙벌국을 치니 왕 타추간(陀鄒干)이 항복하고, 실직곡국도 함께 항복했다. 2년 뒤인 104년 신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신라 영토가 되었다. 태종 무열왕 6년인 659년 북진(北鎭)이 설치되어 신라의 대고구려 북방 방어기지가 되었다. 초팔국 초팔국(草八國)은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과 초계면 사이에 있던 진한의 부족국가 중 하나이다. 파사 이사금 29년 (108년)에 비지국, 다벌국과 함께 신라에 복속되어 초팔혜현(草八兮縣)이 되었다가 경덕왕 16년 (757년) 팔계현(八谿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려때 초계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벌국 다벌국(多伐國)은, 진한 소국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파사 이사금 29년(108년)에 비지국, 초팔국과 함께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벌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증 마립간 6년 (505년) 퇴화군(退火郡)이 설치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고도 불렸던 지금의 대구광역시로 추정되고 있다. 비지국 비지국(比只國), 비화국(非火國), 불사국(不斯國)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 인근의 창녕에 위치했던 진한의 소국으로, 파사 이사금 29년 (108년)에 다벌국, 초팔국과 함께 신라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파사 이사금 시기의 신라에게 점령된 비지국은 지금의 경주시 북부의 인강읍에 있었던 세력이라는 추측도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비화가야로도 불렸다. 조후번 조후 번()은 지금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 있었던 일본 에도 시대의 번으로, 조슈 번의 지번이다. 번주는 모리 가문()이며, 나가토 후추 번()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번청은 당초 구시자키 성(, 번 성립 당시에 오야마 성()으로 개칭)에 두었으나, 1615년에 이 성이 에도 막부에 의해 규정된 1국 1성령()에 의해 폐성됨에 따라, 인근에 조후 진야()를 새로 지어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막말에는 가쓰야마 성으로 번청을 이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번청으로 사용하였다. 에리크 9세 에리크 9세(, 1120년경 ~ 1160년 5월 18일) 또는 에리크 예드바르드손()은 스웨덴의 국왕(재위: 1156년 ~ 1160년 5월 18일)이다. 에리크가 출신이며 성 에리크()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루터교 성인(聖人)이 된 군주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인 예드바르드(Jedvard)의 아들로 태어났다. 1156년 스베르케르가(Sverker) 출신의 스베르케르 1세 국왕이 피살되면서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 출신의 웁살라 대주교인 헨리크(Henrik)와 함께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일으키면서 핀란드를 정복했다. 에리크 9세 국왕의 명령을 받은 헨리크 대주교는 핀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재위 기간 동안에는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을 제정했다. 또한 덴마크 오덴세 출신 베네딕도회 신자들에게는 웁살라 구 시가지에 수도원들을 건립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유럽 전역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1160년 5월 18일 웁살라에서 스베르케르가(Sverker) 출신의 칼 스베르케르손(Karl Sverkersson, 칼 7세)의 지원을 받은 망누스(Magnus, 망누스 2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덴마크의 에스트리센가(Estridsen) 출신인 크리스티나 비에른스도테르(Kristina Björnsdotter)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자녀로는 아들인 크누트 에릭손(Knut Eriksson, 스웨덴의 크누트 2세 국왕), 딸인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Margareta Eriksdotter, 노르웨이의 스베레 시구르손 국왕의 아내) 등이 있다. 신라의 역대 국왕 아래는 신라를 다스린 역대 군주의 목록이다. 제2대 남해 차차웅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인 유리와 석탈해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유리가 왕이 되었다. 유리 이사금은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제외하고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제4대 임금 석탈해가 죽고 나자 석탈해의 아들은 왕위 계승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고 이전 임금이었던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인 파사가 이사금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나중에 파사 임금이 죽자 파사의 아들 지마가 제6대 이사금으로 즉위하고, 그 뒤를 이어서 예전에 파사에 의해 밀려났던 유리이사금의 첫째 아들 일성이 제7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초기 신라, 즉 사로국의 경우 제1순위인 태자가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그런 다음에 양보했던 그 사람이 다시 훗날 왕위에 오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보다는 성씨가 다른 세력의 수장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을 하는 등 왕권 승계의 질서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왕권 승계가 아무런 갈등이나 마찰 없이 아주 평화롭게 이뤄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초기 신라의 3대 세력이었던 '박-석-김' 세력이 각각 독립적인 계보를 이어 내려오다가, 훗날 그것들을 뒤섞어서 단일 왕계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미화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갈문왕(葛文王)은 신라 때 왕실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왕족 및 왕의 근친 귀족에게 추봉하던 왕명이다. 고구려의 역대 국왕 아래는 고구려를 다스린 역대 국왕과 재위 년도이다. 기요스에번 기요스에 번(淸末藩)은 나가토 국에 존재하던 번이다. 번청은 기요스에 진야(지금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시 기요스에). 도자마 1만석 르'리에 르'리에(R'lyeh)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도시이다. 르'리에는 신적인 존재인 크툴후가 잠자고 있는 태평양에 가라앉은 도시이며, 비유클리드 기하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남위 47도 9분, 서경 126도 43분에 위치해져있다고 하나 실제로 확인되지 않았다. 오거스트 덜레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남위 49도 51분, 서경 128도 34분이라 했다. 덜레스의 좌표는 폰페이 섬으로부터 1일 거리 위치인데, 이 때문에 이 섬은 크툴후신화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르'리에는 크툴후신화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기도문에 등장한다. "ph'nglui mglw'nafh Cthulhu R'lyeh wgah'nagl fhtagn", 번역하면 "르'리에의 그의 집에서 죽은 크툴후가 꿈꾸며 기다린다" 아자토스 아자토스(Azathoth), "악마 술탄" 혹은 "끓어오르는 혼돈의 중심"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호러 단편에 언급된 크툴후신화의 신적인 존재이다. 아자토스는 눈멀고 바보같은 존재로 묘사되며 크툴후 신화 만신전의 꼭대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은 아자토스는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끝없는 더러운 욕망들을 즉시 풀어주는 다른 외부신 니알랏호텝(Nyarlathotep)과 다른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다. 아자토스를 숭배하는 자는 극히 적으며, 그런 자들은 모두 미친 범죄자들인 경우가 많다. 아자토스의 소환은 가능하나, 소환하는 자의 재앙과 절망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아자토스는 다음과 같은 분신을 갖고 있다. 러브크래프트 국내 사이트 : http://weirdtales.org 니알라토텝 니알라토텝(Nyarlathotep)은,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와 어거스트 델레스 등의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신적인 존재이다. 한국어 표기로는 니알라쏘텝, 냐르랏토텝, 냐르랏쏘텝, 니알랏토텝, 니알랏쏘텝, 냐르라토텝, 냐르라쏘텝 등으로 읽을 수 있다. 1920년 미국의 펄프픽션 잡지 《유나이티드 아마추어》(United Amateur)지에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쓴 소설 《니알라토텝》이 기고되었다(다만 당시 이 잡지가 늦게 출간된 점으로 미루어 정확한 발표시기는 1920년 이후로 보고 있다). SF 소설작가 브루스 스털링은 러브크래프트의 이 작품을 '가상현실을 다룬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하였으며, 니알라토텝의 이름이 등장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크툴루 신화를 체계화한 어거스트 덜레스는 니알라토텝을 그레이트 올드 원(옛 지배자)의 하나로써 아자토스를 필두로 하는 아우터 갓(외부 신들)을 섬기는 메신저(심부름꾼)이자 전령, 영혼으로써, 그레이트 올드 원(옛 지배자)와도 맞먹는 힘을 가진 존재로써 4원소 가운데 흙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정하였다(아자토스의 하인으로써 그의 욕구를 즉시 충족시키기도 한다). 니알라토텝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는 키 크고, 날씬하며 유쾌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지구를 걸어 다니며 활동한다. 하지만 그 실체는 얼굴이 없는 신으로 천 가지나 되는 다른 모습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며, 때문에 크툴루 신화에서 중요한 신격(神格)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찾아보기 어렵다. 니알라토텝은 다른 아우터 갓(외부 신들)과는 달리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 단지 인간 세계에 광기를 일으키는 것을 더 즐기고 인간 세계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암약하고 있다. 그가 인간 세계에 가져다 준 갖가지 마술이나 비법, 기계 등의 기술을 전수받은 인간들은 대부분 자멸을 맞이했다. 니알라토텝이 천적으로써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그레이트 올드 원(옛 지배자) 크투가뿐이다. 또한 엘더 갓인 노덴스와도 대립하고 있다. 그레이트 올드 원 가운데 요그-쇼토스나 하스터처럼 먼 별에 유배되어 있거나 크툴루처럼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니알라토텝만이 유일하게 유폐되는 것을 면했으며, 다른 그레이트 올드 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냉소적으로 대하면서도(정확하게는 인간 앞에 나타날 때 그 인간들에 대한 아무런 목적성이 없다) 그들과는 달리 자신이 나서서 인간과 접촉하고, 힘과 사기술, 조종 심지어 선전 등을 통해 그의 목표를 달성하는 등 크툴루 신화 안에서도 가장 인간에 가까운 특이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신성(神性)으로써 '크툴루 신화의 트릭스터'로 불리고 있다. 아자토스의 자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니알라토텝의 처는 커다란 사슴 여신인 이호운데, 사촌 누이동생으로 그림자의 여성 악마라 불리는 여신 마이노그라가 있다. 다른 신적인 존재들이 자신들의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데 비해 니알라토텝은 그러한 신적인 존재들을 숭배하는 위치에 있으며 자신도 특정한 권속을 거느리지 않는다고 하나, 드림랜드에 거주한다는 육식새 샨타크로부터 경배받고 있다. 또한 드림랜드에서 지구의 하급 신들을 보호하는 「이형의 신」이라는 집단의 하나로써 활약하기도 한다. 러브크래프트는 1921년 리하르트 클라이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무나도 현실적이며 끔찍한 꿈"을 꾸었으며 이것이 그의 시 〈니알라토텝〉의 기초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 꿈속에서 그는 친구 새뮤얼 러브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러브크래프트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또한 러브크래프트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환상문학의 거장 로드 던새니의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차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니알라토텝은 "니알라토텝의 가면"이라고도 불리는 수많은 분신을 통해 활동한다. 동조궁 동조궁()은 일본의 센고쿠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616년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자 닛코()에 웅장한 동조궁을 건조하고 이듬해 그 유골을 안장하였다. 이후 일본 각지에 그의 위패를 모신 동조궁이 속속 세워져 에도 시대에는 그 수가 500여개소에 이르렀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상당수의 동조궁들이 철폐되거나 통합되는 수난을 겪었고, 무녀들도 추방되었다. 어떤 것은 세월이 다소 흐르면서 복구되기도 했다. 현재 남아있는 동조궁은 130여개소 정도이다. 도쿠야마번 도쿠야마 번(德山藩)은 에도 시대의 번으로서 조슈 번(하기 번)의 지번이다. 본래 이름은 구다마쓰 번(下松藩). 번청은 스오 국 구다마쓰(지금의 야마구치현 구다마쓰 시)였으나 도쿠야마(본래 이름은 노가미 촌, 지금의 야마구치 현 슈난 시)로 이전하였다. 도자마 4만 5천석 → 3만석 → 4만석 이와쿠니번 이와쿠니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스오 국 오시마 군의 일부 지역인 나루토 촌()・고지로 촌() 및 구가 군 남부를 지배했던 번으로, 지금의 야마구치현 이와쿠니 시에 위치했다. 깃카와 가문이 번주로 있었기 때문에 깃카와 번()이라는 통칭도 있다. 번청은 당초 이와쿠니 성에 있었으나, 1615년에 이 성이 에도 막부에 의해 규정된 1국 1성령()으로 철거되면서 인근에 진야를 새로 지어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정식의 번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번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번인 조슈 번으로부터 지번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다이묘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와쿠니 번이 아닌 이와쿠니 령()으로 불렸다. 정식으로 다이묘의 반열에 올라서 이와쿠니 번이 성립한 것은 대정봉환 이후 폐번치현 직전의 게이오 4년(1868년) 3월의 일이었다. 번조()는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아들인 깃카와 히로이에이다. 영지 규모는 당초 표면상의 액수인 3만 석이었으나, 간에이 11년(1634년) 실제 고쿠다카인 6만 석으로 공식 개정하여 막부에서도 이를 인정받았다. 3만석 → 6만석 말라리아 말라리아(Malaria) 또는 학질(瘧疾)은 학질모기가 옮기는 전염병으로, 매년 2억에서 3억 명의 사람이 감염되고 수백만 명이 사망하는 위험한 질병이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을 비롯한 많은 유전병들이 말라리아에 강하다는 이유로 남아 있다. “학질” 또는 “하루거리”(간일학(間日瘧))라고도 불렸으며, 주로 열대 지방에서 발병되는 질병이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도 흔한 병이었다. 원인 기생충은 "Plasmodium vivax" (삼일열원충), "Plasmodium falciparum" (열대열원충), "Plasmodium malariae" (사일열원충), "Plasmodium ovale" (난형열원충) 등이다. 말라리아는 이탈리아어로 나쁜(또는 미친)의 뜻을 가진 'Mal'과 공기를 뜻하는 'aria'가 결합한 용어로, 19세기 말엽까지도 말라리아가 나쁜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고 믿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실 말라리아라는 이름은 18세기에 명명되긴 하였으나, 늪지에서 발생한 나쁜 공기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붙여졌던 것이다. 즉 모기가 말라리아를 옮기는 중간 매개체인 것은 19세기말에야 밝혀졌지만 모기가 서식하는 늪지와 말라리아와의 관련성은 옛날부터 인지하였던 것이다 말라리아 기생충들은 말라리아 원충에 속해 있다. 말라리아 종류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는데 열대열 말라리아, 사일열 말라리아, 난형 말라리아, 삼임열 말라리아가 있다. 이것들 도중 열대열 말라리아가 가장 많이 확인되었고(75%) 그 뒤에는 삼임열 말라리아가 따른다(20%). 비록 열대열 말라리아가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죽음을 설명하지만, 최근 증거들은 삼임열 말라리아가 잠재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가 열대열 말라리아급이라고 말한다. 삼임열 말라리아는 아프리카 밖에서 보통 일어난다. 지구 온난화는 말라리아 전염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심각성과 그러한 효과들의 분배는 확실하지 않다. 감염된 모기(학질모기)가 사람을 물면 모기의 침샘에 있던 말라리아 원충이 혈액 내로 들어간다. 이렇게 들어간 원충은 사람의 간으로 들어가서 성장하며 잠복기가 끝나면 사람의 적혈구로 침입하여 발열하게 된다. 원충이 적혈구에서 다시 성장하면서 암수 생식모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이 때 말라리아 매개모기인 중국 얼룩날개모기가 사람의 피를 흡혈하면 이들이 다시 모기를 감염시킴으로써 점차 전파된다. 말라리아 증상들은 전형적으로 감염 후 8-25일 정도에 시작된다. 하지만, 예방으로 반말라리아 약물들을 먹은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일어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말라리아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초기 징후들은 독감 같은 증상들, 염증, 위장염, 그리고 바이러스성 질환들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두통, 열, 몸서림, 관절 통증, 구토, 용혈성 빈혈, 황달, 소변에서의 헤모글로빈, 망막 손상, 그리고 경련이 나타난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 가슴에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 전형적인 말라리아 증상들은 몸서림과 열 그리고 땀나는 것에 뒤따르는 순환성 발작의 발현이다. 심각한 말라리아는 보통 열대열 말라리아에 의해 일어난다. 열대열 말라리아의 증상들은 감염 후 9-30일 후에 나타난다. 뇌 말라리아를 가진 개개인들은 비정상적인 자세, 안구진탕증, 주시마비, 후궁반장, 발작들, 또는 코마를 포함한 신경 증상들을 자주 보인다. 말라리아 유행지역이라도 도시 지역은 대부분 안전하다. 예방약 복용 등의 화학요법은 모기에게 물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화학요법을 사용 하더라도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또한 예방약을 복용하는 즉시 예방효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므로, 말라리아 유행지역을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은 입국 2주 전부터 약을 복용하기 시작해야 하며 출국 후 4주까지 예방약을 계속 복용해야 한다. (단, 항말라리아 약제 중 아토바쿠온과 프로구아닐은 예외적으로 입국 2일 전부터 복용을 시작하고 출국 7일 후까지만 복용하면 된다.) 아직 말라리아에 대한 백신은 없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2008년 세계보건기구는 2억 4700만명 이상의 환자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2006년을 기준으로 연간 881,00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환자는 5세 미만의 아이들이며, 임산부도 또한 취약한 계층이다. 전파를 막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염 지역은 1992년 이래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실제로 말라리아가 현재의 상승세를 유지한다면, 20년 이내 치사율이 현재의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883년 조선에 처음 입국한 미국 의사 앨런도 말라리아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기생충인 열원충이 일으킨다. 열원충은 간으로 갔다가 적혈구로 들어간다. 한국에서 말라리아에 대한 최초의 공식 기록은 고려 의종 때이며, 조선 세종 2년에는 대비가 이 병으로 죽기도 했다. 1970년대말 한국에서 토착성 말라리아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1993년 휴전선 근처에서 1명의 군인이 감염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4142명이 국내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다. 최근에 대한민국에서의 말라리아는 대부분 휴전선 인근에서 주로 발생되었으며 경기도의 김포시, 고양시, 성남시, 파주시, 연천군, 포천시, 서울특별시 강북구, 노원구, 도봉구, 성북구 등지까지 남하한 상태이다. 한때 토착 말라리아가 존재했지만, 현재는 멸종되었다. 현재는 외국에서 귀국한 사람에 의해 감염된 사례가 연간 100 례 이상이다. 또한, 열대 열 말라리아가 증가 추세에 있다. 현재 제 4류 감염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진단 의사는 7일 이내에 보건소에 신고하는 의무를 가진다. 콜레라 콜레라() 또는 호역(虎疫)은 수인성 전염병이며,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이 일으킨다. 감염되면 설사와 탈수증세를 보인다. 심한 탈수 증세를 보여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괴질(怪疾)로 불렸으며 신사년(1812년)에 유행한 괴질이라는 의미에 신사년 괴질로 불렸다. 구한말 일본에서 콜레라라는 세균명이 들어오면서 음차하여 호열랄로 불리다가 ‘호열자’(虎列刺)와 혼용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제1종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프리카 등 적도지방에서 흔하며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극히 드물게 발생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종류의 콜레라인 "엘토르 타입 콜레라" 또한 존재한다. 콜레라균은 날것 또는 덜 익은 해산물이 감염원인이 될 수 있으며, 오염된 손으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섭취할 때 발생할 수 있다. 또는 분변, 구토물로 오염된 음식이나 물을 통해 감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감염 증상을 일으키는 데는 많은 수의 균(약 1억~100억 개)이 필요하나, 무산증 환자(위액의 산도(酸度), 특히 염산량(鹽酸量) 저하 또는 결여된 상태의 위산 결핍증)나, 혹은 위 절제술을 받은 사람은 더 적은 수의 균으로도 감염될 수도 있다. 대변 검사로 균 배양 및 검출을 시행하고, 혈액 검사로 신부전 및 전해질 불균형(나트륨, 칼륨, 염소, 중탄산염, 음이온차, 삼투압) 등의 이상 증상이 동반되었는지를 확인한다. 특징적인 임상증상과 함께 분변 배양 검사를 통하여 콜레라균이 검출되면 콜레라로 진단할 수 있다. 임상에서는 현미경으로 콜레라균의 특징적인 움직임을 확인하고, 항혈청(항체를 포함하는 혈청) 투여 시 균의 움직임이 저지되는 것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콜레라균에 대한 항독소나 항체 수의 상승을 확인하는 방법 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임상적 유용성은 떨어진다. 수액 주입으로 손실된 수분과 전해질을 공급하고 체내 전해질 불균형을 교정하는 것이 주된 치료 방법이다. 구토가 없고 중증의 탈수가 동반되지 않는 경우에는 경구 수액 보충이 가능하다. 항생제를 투여하면 증상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테트라사이클린(tetracycline), 독시사이클린(doxycycline), 박트림(bactrim), 시프로플록사신(ciprofloxacin) 등의 항생제가 사용된다. 치료하지 않을 경우 급속하게 탈수가 진행되고 혈액 내 산 성분이 많아지는 산혈증(혈액의 pH가 정상 이하로 떨어지는 상태.) 및 순환기계 허탈이 발생한다. 병이 진행되면서 신부전이 동반되지만 이는 대개 회복 가능하다. 중증 콜레라의 경우 4~12시간 만에 쇼크에 빠지고 18시간~수일 내에 사망할 수 있다. 치료하지 않으면 사망률은 50% 이상이지만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면 사망률은 1% 이하이다. 콜레라의 전염력은 지금까지 7 차례의 세계적인 유행성 콜레라가 발생하였다. 2006년 에도 7기 전염이 되고 있었다. 2009년 1월 29일 짐바브웨에서 유행 중인 콜레라 사망자가 3000명에 이르고, 또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에도 옛날부터 존재했었지만, 세계적인 유행성 확산을 나타낸 것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다. 콜레라의 초기 발생 지역은 인도의 갠지스 강 하류의 벵골에서 방글라데시에 걸친 지역으로 생각된다. 가장 오래된 콜레라의 기록은 기원전 300년 경의 것이다. 그 다음은 7세기 중국과 17세기 자바에서 콜레라로 추정되는 악성 역병의 기록이 있지만, 세계적인 대유행은 1817년에 시작된다. 이 해 캘커타에 생긴 유행성 콜레라는 아시아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아프리카에도 퍼져서 1823년까지 계속되었다. 일부는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1826년부터 1837년까지 크게 유행하여 아시아,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 확산된 전 세계적인 규모였다. 이후 1840년부터 1860년, 1863년, 1879년, 1881년, 1896년, 1899년, 1923년 총 8 차례에 걸친 아시아 형의 대유행이 있었다. 그러나 1884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콜레라균이 발견되고 의학의 발전으로, 방역 체제가 강화됨과 동시에 아시아형 콜레라의 세계적 유행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콜레라가 여전히 남아서 유행이 반복되었고, 중국에서는 1909년, 1919년, 1932년에 대유행이 있었으며, 인도에서는 1950년대까지 모두 만 명 단위의 사망자를 낼 정도였다. 1817년, 인도에 새로운 병이 유행했다. 몇 시간 이내에 건강한 사람을 시체로 만들만큼 격렬한 설사와 구토를 유발했다. 사람들은 흑사병이 무서운 병이라고 하지만, 역사상 흑사병보다 더 많은 사람이 콜레라로 죽어갔다. 가난과 비위생적인 환경이 만들어낸 병이었다. 이 때문에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공중위생법과 공공 의료법이 만들어졌다. 아직도 콜레라의 유행은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한편, 엘토르 타입의 콜레라는 1906년 시나이 반도의 엘 토르(El Tor)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행은 1961년부터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하여 개발 도상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확산을 했으며, 1991년에는 페루에서 대유행이 발생했고, 선진국에서도 산발적인 발생이 보고 되고 있다. 1992년에 발견된 O139균은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유행을 했었지만, 세계 규모의 확대는 되지 않았다. 잠복 기간은 5일 이내로 보통 2~3일이며, 빠르면 몇 시간만에 나타나기도 한다. 잠복기가 지난 후 과다한 물 같은 설사가 갑자기 시작되어 하루 20~30차례 발생하며, 구토가 동반될 수 있으며, 설사로 인한 순환기계 허탈 증세와 쇼크를 나타낼 수 있다. 보통 복통은 없다. 심한 경우 쌀뜨물 같은 설사와 함께 구토, 발열, 복통이 있을 수 있고, 극심한 설사로 인해 심한 탈수현상을 초래하여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다. 무증상 감염자나 만성보균자가 존재할 수 있으며, 엘토르 형은 무증상 또는 경미한 감염의 빈도가 높다. 고전적인 콜레라형의 경우, 환자:불현성보균자의 비율이 1:4 정도인 데 비해, 엘토르 형의 경우 1:36이기 때문에, 콜레라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의심자를 격리하지 않을 경우 주변에 콜레라가 확산될 위험이 높아진다. 치료하지 않는 경우 전형적인 환자의 25-50%에서 치명적일 수 있으나, 최근에 발생하는 엘토르 형의 경우에는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경우 사망률은 1% 미만이다. 2001년 크게 유행하여 162명의 환자가 밝혀졌으며, 2004년 10명, 2005년 16명, 2006년 5명, 2007년 7명, 2016년 8월 31일 3명, 2016년 9월 18일 4명의 환자가 보고되었다. 동남부 지역에서 ‘콜레라대유행’이 발생해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 현재까지 3명이 사망하고 53명이 감염된 것으로 보고된 이번 콜레라대유행은 쿠바혁명이 있은 1959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온조왕 온조왕(溫祚王, 생년 미상 ~ 28년 음력 2월, 기원전 18년 ~ 28년 음력 2월)은 백제의 건국자이다. 아버지는 고구려의 동명성왕이다. 형으로는 유리명왕와 미추홀의 창업자 비류가 있다. 동명성왕의 부인 예씨 소생 유리명왕이 졸본으로 오자 어머니 소서노와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위례성에 자리잡고 백제를 건국하였다. 일본에서는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이라 부른다.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여러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의 왕자였으나, 동명성왕의 적자 유리명왕이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 태자가 되자 형인 비류와 함께 한반도로 남하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자리를 잡았고, 온조왕은 하남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살 수 없어 백성들이 위례로 떠나자 비류는 자결했고,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인 뒤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고, 이 이름은 성왕이 남부여로 바꿀 때까지의 국호가 되었다. 이때 본래 성(姓)은 해(解)였으나,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이후 부여(扶餘)를 성으로 삼았다. 온조의 이름이 본명이 아닌 묘호라는 주장이 있으나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백제는 태조(고구려 태조 추모왕 (중모왕), 백제 태조 도모대왕)를 제외하면 묘호를 따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백제의 경우 무령왕~성왕 시기 중국 양나라의 강례박사 육후가 백제로 건너와 시호법을 전수하기 이전에는 그 나라의 방언으로 왕호를 붙였다고 한다. 해동역사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시호법을 제정한 시기는 백제 성왕 1년(523년)이다. 백제 역사상 최초로 시호를 받은 군주는 성왕의 부친인 무령왕이다. 즉, 백제는 성왕 1년 이전에는 묘호와 시호 둘 다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사에서 묘호를 최초로 사용한 시기는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일이다. 그 다음으로 오래된 건 발해 고왕(대조영) 시기이다. 때문에 시조 온조의 이름이 묘호라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고구려 태조대왕처럼 묘호 비슷하게 지은 왕호일 가능성이 있다. 백제 건국 설화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상기한 시조 온조설에 입각해 있으나,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비류설과 시조 구태설 등 다른 설도 있다. 현재는 시조 온조설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동부여에서 유리가 생모 예씨부인을 데리고 남하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형제를 데리고 남하했다. 기원전 18년 형 비류는 인천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미추홀이라 하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라 했다가 나중에 인구가 늘어나자 백제라 하였다. 기원전 17년 음력 3월 족부(族父: 왕의 7촌 종숙) 을음(乙音)을 우보로 삼았다. 기원전 16년 음력 9월에 말갈이 침입해 왔지만, 백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15년에는 낙랑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1년에는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10일만에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다가 온조왕에게 500명이 죽었다. 기원전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후에 백제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고 목책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자 그 틈을 노려 동예가 기원전 1년에 위례성을 함락했다. 기원전 1년에는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었다. 그리고 위례성을 쳐들어간 보복으로 동예를 쳐들어갔지만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서기 4년 음력 8월에는 석두와 고목에 성을 쌓았고, 6년 음력 7월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았다. 하지만 마한의 압력으로 목책을 철거했다. 7년 음력 2월에는 왕궁의 우물이 넘쳤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가 하나고 몸이 2개였다. 온조왕은 그것이 길조라고 생각하여 합병계획에 들어갔고, 9년 음력 2월에는 마한을 기습공격해 패망시켰고 마한은 원산성등지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끝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단, 마한 전토가 모두 병합된 것은 아니고 노령이남의 전남지역은 일단 백제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한동안 독립을 유지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 서기 9년 음력 7월에는 대두산성을 쌓았고, 서기 10년 음력 2월에는 왕자 다루를 태자로 삼아 군정을 맡겼다. 16년 음력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1달 만에 진압되고 주근은 자결했다. 18년에 백제는 탕정성, 고사부리성을 쌓았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했다. 22년 음력 9월과 11월에는 말갈이 술천성, 부현성을 습격하였지만 간신히 적을 퇴치했다. 온조왕은 28년 음력 2월에 생을 마감했다. 일본에서는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왕이 아니라 주몽을 백제의 시조로도 본다. 속일본기에는 "백제 원조(遠祖) 도모(都慕)왕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라고 연력 8년 1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도 백제의 시조를 도모(주몽)으로 설정하고 있다. 백제왕실의 후예인 인정(仁貞)은 백제의 태조를 온조왕이 아니라 주몽으로 지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백제에서 어느 시점에 주몽에게 태조라는 시호를 추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본 칸무 덴노의 생모 고야신립의 묘비명에는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백제에서 온조가 아니라 그 아버지인 주몽을 시조로 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루왕이 온조왕의 첫째아들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왕력편에 의하면 다루왕은 온조왕의 차남이라 한다. 시조 구태설 시조 구태설은 백제의 시조에 대한 설이다. 중국의 사서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도 있으며, 현재 정설로 인정되는 것은 시조 온조설이다. 구태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구태와 비류, 온조 형제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고, 사학자 이병도의 고이왕과 구태의 동일 인물설을 지지하고 인용한 동아일보사와 미국 브리테니커 회사가 합작하여 만든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에서는 백제의 고이왕이라고 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병도는 구태(仇台)를 '구이'로 읽어 고이왕의 '고이'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논거로 하고 있다. 한편, 비류백제설을 주장한 재야사학자 김성호는 구태가 백제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소서노의 전 남편인 우태와 구태의 발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한 주장이다. 비류 비류(沸流)는 우태의 장남 혹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차남으로, 백제 온조왕의 형이다. 온조와 함께 고구려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 하남의 땅은 북은 한수를 띠고, 동은 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를 격하였으니, 그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비류는 듣지 않고 미추홀(지금의 인천)을 도읍으로 정해 나라를 세웠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지 못하여 동생이 세운 나라로 이주하자 자결하였다. 백제의 시조가 비류라는 시조 비류설에 따르면,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 사람으로 우태에게 시집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의 사후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도읍하고 고구려를 세운 뒤 소서노를 맞아 왕비로 삼고 비류와 온조를 양자로 삼았다. 이후 부여에서 예씨(禮氏)의 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가 졸본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가 미추홀에서 살았다고 한다. 백제 시조에 대해서는 그 외에 시조 온조설과 시조 구태설이 있으며, 현재는 시조 온조설이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동명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은 비류로, 동생은 온조로 이름 지어졌다. 이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비류와 온조는 왕위에 오르는 가장 유력한 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비류와 온조를 얻기 이전에 동명성왕과 북부여의 예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에 찾아오자 동명성왕이 반겼다. 게다가 동명성왕은 첫째 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임명하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후일이 두려워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시조 비류설의 내용을 따른다. 연기 연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공주시 공주시(公州市)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중앙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서쪽으로 예산군, 청양군, 남쪽으로 논산시, 계룡시, 부여군, 북쪽으로 아산시, 천안시와 접한다. 시의 중앙으로 금강이 흐른다. 삼국시대에는 웅진(熊津)으로 불렸으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10월 부여군와 합동으로 백제문화제를 개최한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감영이 있었고, 1932년까지 충청남도청 소재지였다. 명소로는 공산성, 무령왕릉, 계룡산이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공주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등 국립 대학교가 있다. 시청은 봉황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읍 9면 6동이다. 공주는 삼국시대에는 웅진(熊津)으로 불렸으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538년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 (현재의 부여군)으로 옮겼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라고 불렸다. 고려 태조 23년 처음으로 공주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983년(고려 성종 2년) 처음으로 십이목(十二牧)을 두었는데 이 때, 공주에 공주목(公州牧)을 두었다. 이는 현재의 충남 지역에서는 유일한 것이었다.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나주로 피란할 때, 곰나루를 건너 공주에 이르러 수일을 머물렀다. 조선 전기에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 4대 목 중 하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공산성에 명나라 군의 지휘부가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공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이 공주에 이전됨으로써 충청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일시 몽진하였다. 이괄의 군이 개성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피란을 왔다. 충청남도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에 치우쳐서 넓은 지역에 자리하며, 동쪽으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서쪽으로 예산군, 청양군, 남쪽으로 논산시, 계룡시, 부여군, 북쪽으로 아산시, 천안시와 접한다. 북쪽으로는 무성산(613.6m), 국사봉(590.6m), 금계산(574.8m), 갈미봉(515.2m) 등 차령산맥의 산지 지형이며, 남동쪽으로는 국립공원인 계룡산이 자리해 높은 지형을 이룬다. 시의 중심부에 금강 본류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고 그 지류인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용성천 등의 하천들이 흐르고 있어서, 그 주변에는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중앙으로는 금강이 동서로 흘러 지대가 낮다. 공주는 대표적 내륙수로의 하나인 금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수로와 육로의 간선 교통체계가 서로 마주치는 곳이었다.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와 밀접한 생활권에 포함되어 배후도시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기후적으로는 중위도상에 위치하여 온난 다습한 기후지역에 속하며, 한서의 차가 심한 편이다. 공주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6조2903억원으로 충청남도 지역내 총생산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5649억원으로 9.0%의 비율을 차지하며,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2조1607억원으로 34.4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3조5646억원으로 56.7%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특히 건설업(9.7%)과 사업서비스업(8%), 공공행정(6.3%), 교육서비스(5.1)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공주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42,063명으로 충청남도 총종사자 수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91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7,902명으로 18.8%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33,980명으로 80.8%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충청남도 전체의 비중(32.8%)보다 낮고 3차 산업은 충청남도 전체 비중(66.7%)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1%)과 숙박 및 음식업(11.8%), 교육서비스업(10.9%) 보건 및 사회복지서비스업(8.8%)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공주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19,487명이고 주간인구는 125,338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05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없고, 출인구는 4,870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924명, 유출인구는 1,429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5,851명 더 많은데,이는 충청남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공주시의 행정 구역은 1읍, 9면, 6동, 245리, 131통, 1,928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864.29km로써 충청남도 15개 시,군 중 가장 넓다. 인구는 2015년 1월말 기준으로 48,707세대, 113,294명이다. 공주 송산리 1호분은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백제 중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실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하나이다.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7번째 발견된 고분이며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에 기준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송산리)이다.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충청남도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성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의 문주왕 원년(475) 한강유역의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시대의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마곡사(麻谷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있는 절이다.[1] 640년(신라 선덕여왕 9년)에 자장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 때(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고 범일이 재건하였다.[1]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의 대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이 있을 뿐이다.[1] 이 밖에 사보로는 5층석탑(보물 제799호), 범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 1폭, 목패,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만 남아 있다. 신원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서쪽에 위치한 사찰이다. 백제 의자왕 11년(651년)에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대웅전은 1876년 중수되었다. 동학사(東鶴寺)는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사찰이다.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있으며, 서쪽의 갑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한다. 동학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구니 승가 대학으로 1860년에 문을 열었다. 갑사(甲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신라 24대 진흥왕 17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뒤에 의상이 도량을 설치하고 법당을 증수하여 그 규모가 커졌다. 경내에는 대적전, 부도, 철당간지주 등의 보물과 군자대, 용문폭 등의 비경이 있다. 동구의 울창한 숲길은 여름에도 서늘한 감을 주며 계곡 사이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보로는 천근 범종과 《월인천강지곡》 목각판 등이 있다. 공주 선화당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현재 공주시 웅진동 3-1에 옮겨져 있으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백제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34년에 만들어진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출범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하였고, 해방 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2004년 5월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기존의 박물관 건물은 현재 충남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석장리박물관은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구석기 역사 박물관이다. 공주 석장리유적은 사적 제334호로, 공주시 석장리동 118번지 일원에 위치해 있다. 갑사 계룡산 고마나루 공산성 금강 금학생태공원 마곡사 무령왕릉 석장리풍경 창벽 공주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금강을 건너는 곳이었다. 백제 시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관련된 곰나루와 이어져 있는 공산성의 공북루 옆에는 '배다리'의 자취가 남아 있다. 강바닥에 박았던 나무 말뚝들과 섶다리를 받쳐 놓았던 돌무더기들이 있다. 1933년 세워진 공주철교 이전에는 이 배다리를 통하여 삼남대로가 이어졌다. 이 배다리의 이름은 산성교로 목선 25척을 연결하여 고정시켰다. 1920년대에는 자동차까지 통행할 정도로 넓고 견고하게 보수되었다. 공주와 조치원간의 승합차 운행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갑순이 사비를 들여 가설하였다. 현재에도 충청남도의 교통의 중심지로서, 국도 1호, 23호, 32호, 36호, 39호, 40호, 43호 등이 공주시와 충남 각 지역을 연결한다. 또한 논산천안고속도로를 통해 북으로는 수도권, 남으로는 호남 지역과도 쉽게 소통되며, 2009년 5월 28일 개통된 당진영덕고속도로, 서천공주고속도로를 통해 동서 방향의 교통이 더욱 좋아졌다. 또한 호남고속철도의 개통과 함께 KTX 전용 역인 공주역이 운영을 개시했다. 1. 공주 > 서울(경부): 30~40분간격 / 금호고속 2. 공주 > 광주광역시(광천터미널): 1일6회 / 금호고속 3. 공주 > 함평: 1일2회, 광주경유 / 금호고속 연기군 연기군(燕岐郡)은 대한민국 충청남도의 동부에 있었던 군이다. 연기군은 남쪽으로 대전광역시 유성구, 동쪽으로 충청북도 청원군(현 청주시), 서쪽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북쪽으로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높은 산이 없고 평평한 지형이며, 금강과 미호천이 흐른다. 금남면과 남면, 동면 일대에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며, 군역(郡域) 전체가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백제의 땅이었으며, 당시 불리던 이름은 두잉지현이었다. 남북국 시대에는 웅주에 속했다. 고려 시대에는 청주목에 속했고,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는 전의현과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으로 하였다가 1416년에 각각 환원하였다. 1895년 전국을 23부로 나눌 때에는 공주부에 속했고, 1896년 13도제 실시 이후에는 충청남도에 속했다.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전의군(현 소정면, 전의면, 전동면)과 공주군의 일부(현 금남면 일원과 연기면의 일부)가 연기군에 편입되었다. 연기군은 충청남도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동서로 21.6 km, 남북으로 34.9 km로 뻗어있다. 동쪽은 충청북도 청원군(현재는 청주시로 통합), 서쪽은 공주시, 남쪽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북쪽은 천안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경부선 철도와 국도 제1호선이 관통하고, 충북선 철도의 시발점이며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와 인접해 있다. 사통팔달의 편리한 교통망으로 어느 지역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고 미호천과 금강이 흐르며 산은 높지 않아 목야지, 과수원으로서 농산물의 재배에 적당하다. 온도는 연평균 13.1도로 한서의 차이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극심한 편이 아니다. 군청 소재지인 조치원읍과 위도가 비슷한 지역은 충청남도 홍성군, 경상북도의 문경시, 안동시 등이다. 1읍 7면, 203리 1018반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군청은 조치원읍에 있었다. 인구 최고치는 1960년의 10만2914 명이었다. 2012년 7월에 세종특별자치시가 금남면, 남면, 동면과 공주시 장기면, 반포면 일원에 설치되었다. 2008년 4월의 계획에 따르면 세종시 면적의 93.3%는 연기군 지역이며, 이는 연기군 전체 면적의 18.8%에 해당한다. 2012년에 행정기관 입주가 시작되어 2014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금남면 대평리에 있고, 금남면 호탄리에 시청이 들어섰다. 대전광역시와 밀접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시 시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우보 (관직) 우보(右輔)는 백제 때 좌보의 다음의 최고직으로, 군사와 병마를 총괄했다. 좌보는 내정을 맡았다. 우상(右相)이라고도 하며, 260년 (고이왕 27년) 폐지되었다. 아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역대 우보이다. 섬 섬은 물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으로서 대륙보다 작고 암초보다 큰 것을 말한다. 특히 사람이 살 수 없거나 살지 않는 섬은 무인도라고 한다. 적당히 큰 섬은 도(島, island)라 하고 작은 섬은 서(嶼, islet)라 하여 이 둘을 통칭 도서(島嶼)라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은 덴마크의 속령인 그린란드이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섬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가 각각 분할 통치하고 있는 섬인 보르네오섬이며, 중국에서는 하이난섬이 가장 크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은 제주도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섬은 영국 콘월주 실리 제도에 위치한, 비숍 록 ()이다. 섬은 크게 육도(陸島)와 양도(洋島)로 나뉜다. 육도는 다시 ‘대륙의 단편에 해당되는 도서’, ‘호상열도’, ‘화산열도’로 세분된다. 안정된 대륙 지역에서 해면의 변화 혹은 완만한 조륙운동에 의해서 육지의 주변부가 바다 속으로 함몰하여 높은 부분이 섬이 되어 대륙에서 분리되었다고 생각되는 예로는 순다 육붕 외에 보르네오 섬과 싱가포르 섬 등이 있다. 대륙의 주변부에 낡은 암석으로 형성되는 지역이 신기 조산운동의 영향을 받아 섬으로서 분리된 예로는 술라웨시 섬·코르시카 섬·사르데냐 섬 등이 있다. 신기조산대의 연속부가 바다 가운데에서 열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 좋은 예는 서태평양에서 볼 수 있는데, 즉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 열도·타이완·필리핀 제도를 거쳐 남으로 뉴질랜드로 이어지는 호상열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호상열도가 해면 아래에 숨어 있거나 극히 일부분이 해면상에 나타날 경우 그 위에 발달한 대화산들은 화산열도를 형성하게 된다. 알류샨 열도, 쿠릴 열도, 뉴브리튼 섬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양도는, 해상에 독립적으로 발달하는 화산섬과 해저화산 같은 것 위에 발달하는 산호섬으로 구분된다. 화산섬의 좋은 예로서는 하와이 제도와 사모아 제도를 들 수 있으며, 산호섬의 좋은 예로서는 폴리네시아나 미크로네시아의 환초를 들 수 있다. 100 킬로미터 10 킬로미터 백제의 관직 백제의 관직 및 관료 체제에는 정무(政務)의 분담과 문무관의 분화가 나타나고 있어, 중국의 관제를 수용한 것을 보여준다. 백제의 관료 제도는 초기에는 고구려의 것을 많이 빌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초기의 최고직인 좌보는 166년 (초고왕(肖古王) 즉위년) 국상(國相)으로 개칭되기까지 고구려의 최고직이기도 했다. 백제의 관직제도가 정비된 것은 260년 고이왕 27년의 일이다. 이때 우보와 좌보가 모두 폐지되었으며, 16관등·6좌평(佐平)으로 관직을 정비했다. 제1품은 대신 급의 좌평(佐平)으로, 수상 격인 내신좌평(內臣佐平)을 비롯하여 내두좌평(內頭佐平), 내법좌평(內法佐平), 위사좌평(衛士佐平), 조정좌평(朝廷佐平), 병관좌평(兵官佐平)의 여섯이다. 제2품부터 제6품까지는 ‘솔’관으로, 제2품 달솔(達率), 제3품은 은솔(恩率), 제4품은 덕솔(德率), 제5품은 한솔(扞率), 제6품은 나솔(奈率)이다. 제7품부터 제11품까지는 ‘덕’관으로, 제7품은 장덕(將德), 제8품은 시덕(施德), 제9품은 고덕(固德), 제10품은 계덕(季德), 제11품은 대덕(對德)이다. 그 이하 관등은 하급 관리로서, 제12품은 문독(文督), 제13품은 무독(武督), 제14품은 좌군(佐軍), 제15품은 진무(振武), 제16품은 극우(克虞)이다. 6품 이상의 좌평과 솔관은 자색 옷을 입고 은제 꽃으로 관을 장식하며, 11품 이상의 덕관은 비색, 16품 이상의 하급 관리는 청색 옷을 입었다. 이러한 지위에 따른 복식은 왕족을 정점으로 하는 백제 사회의 신분적인 차등을 나타낸 것 같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북사(北史)》에 따르면 좌평은 5명으로 1품, 달솔은 30명으로 2품이며 그 외는 백제본기 고이왕조의 기록과 같다. 은솔 이하는 관등에 정해진 인원이 없으며 각각 부서가 있어 다른 업무를 관장했다. 내관(內官)으로는 전내부(前內部), 곡내부(穀內部), 내경부(內경部), 외경부(外경部), 마부(馬部), 도부(刀部), 공덕부(功德部), 약부(藥部), 목부(木部), 법부(法部), 후궁부(後宮部)가 있으며 외관(外官)에는 사군부(司軍部), 사도부(司徒部), 사공부(司空部), 사구부(司寇部), 점구부(點口部), 외사부(外舍部), 주부(綢部), 일관부(日官部), 시부(市部)가 있는데, 부서의 책임 관료는 3년 임기로 바뀌었다. 10 메가미터 100 메가미터 좌평 좌평(佐平)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다. 백제 고이왕 27년(260년)에 개혁 이후 마련되었다고 하나 확실성은 없고, 그 후 근초고왕 때 대략 완성된 듯하다.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며, 다만 내신좌평이 이들 중 좌장에 해당하였으나 이후 상좌평(上佐平)이 생기고 상좌평이 수상의 자리가 되었다. 이는 중국의 6전 조직(六典組織)을 모방한 것으로 후세의 6조(六曹)와 비슷하였다. 졸본 졸본(卒本) 또는 홀본(忽本)은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며 도읍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런 현(桓仁縣) 오로산성으로 비정된다. 고구려의 첫 도읍은 위서(魏書)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이를 홀본성(忽本城)이라 하고, 삼국 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다. 현재는 위서의 흘승골성은 '본'을 '승'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城)은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 ) 유역에 위치하였다. 혼강은 당시에는 졸본(卒本)이라는 지역명을 따서 졸본천(卒本川)이라고 부르거나 비류수(沸流水)라고 불렸는데, 비류수의 상류에는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다고 한다. 1 메가미터 705년 706년 707년 708년 709년 710년 711년 712년 713년 714년 715년 716년 717년 718년 719년 720년 김대문 김대문(金大問, ?~?)은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문장가이며 관료이자 학자이기도 하다. 《화랑세기》의 저자이며, 본관은 경주이고, 금성 출신이다. 왕실의 먼 친척으로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고, 성덕왕 3년(704년)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서 여러 가지 저서가 《삼국사기》 편찬의 사료로 사용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46의 열전에는 그의 저서로 《계림잡전》, 《한산기(漢山記)》, 《고승전(高僧傳)》, 《악본(樂本)》, 《화랑세기》 등이 나열되어 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까지 남아 있어서 자료로 인용되었다고 한다.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의 일부가 1989년과 1995년 경주 시내의 사찰에서 두 차례 발견되었으나, 내용은 일부 단편이고 진위 여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화랑세기 《화랑세기》(花郞世記)는 김대문에 의해 저술된 신라시대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신라 성덕왕의 재위기간 (702년 - 737년) 사이에 쓰였다. 《화랑세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서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1989년 2월에 남당 박창화가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 한문 필사본이 김해에서 발견되었다. 1995년에는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모본‧母本)이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의 풍월주 32명의 전기가 담겨 있다. 필사되었다고 주장되는 《화랑세기》는 유교적 가치관과 사뭇 다른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현재까지 박창화가 필사한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도의 구체적인 구조 및 진골정통(성골 참조), 대원신통(진골 참조), 마복자 등 신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많이 전하고 있다. 문화방송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 필사본을 소재로 삼고 있다.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은 바로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의 아버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용수와 용춘이 동일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은 황룡사탑의 중수기에 보이는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기록과 배치된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용수는 생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용수가 죽었고, 그 처와 아들을 아우인 용춘이 부양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세종(世宗)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는 노종으로 등장하며,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자 이를 따라 그 동생 무덕(삼국유사의 무득), 무력과 함께 신라에 귀순하였다. 즉 김유신의 큰할아버지가 되는데, 여기서 세종이라는 이름은 곧 누리+부와 같으므로 세종은 단양적성비의 내례부지(대아간지), 《삼국사기》 〈거칠부전〉의 노부(파진찬), 북한산비의 내부지(일척간), 마운령비의 내부지(이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노리부(이찬 상대등)와 동일인으로 추정되어 대아찬, 파진찬, 이찬으로 승진하는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는 영실과 보현공주의 아들 노리부(사도태후의 오라비), 태종와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6대 풍월주, 미실의 지아비)만이 등장할 뿐, 구형왕의 아들인 세종이나 노리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오히려 작중 15세 유신공의 세계에서는 구형왕의 아들로 무력, 무득만이 등장하고 세종이 누락되어 있다. 이에 대해 진서론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으며, 구형왕의 아들 세종과 풍월주 세종이 동명이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계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오류일 가능성이 희박하며, 김태식은 자신의 저서에서 동시대에 두세 명의 동명이인이 활동했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거칠부와 황종이 서로 싸웠다고 하는 것만큼 무리한 것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박창화가 저술한 다른 책들의 성격도 진위를 판별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가 지은 것 중 '도홍기', '홍수동기', '어울우동기' 같은 음란 소설이 많다. 그가 쓴 수십권이 넘는 책 중 성이 모티브가 되는 것이 많다. 그리고 박창화가 위서를 만들려 한 예가 있다. 그가 남긴 유고에 '유기추모경'이 있다. 유기는 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사서의 이름이고 추모는 주몽의 다른 표기이다. 박창화가 썼으면서 고려 시대의 인물인 황주량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기추모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박창화의 다른 유고인 '추모경'은 한지에 쓰여 있고 황주량에 대한 기록이 없다. 등장인물 총 420명 중에 다른 사료에서 나타나지 않고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만 보이는 인물은 240여 명인데, 신라 금석문에서 독자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없다. 반면 타 사료에서 발견되는 180명 중 24명은 금석문에서 확인이 되었다. 또한, 필사본에서 신라 왕을 제(帝)나 대제(大帝)라 했지만 이 역시 금석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광복 이후에 박창화가 쓴 글에 의하면, 한국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며,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복 이전에 화랑세기 진본을 필사한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을 할 이유가 없으며, 스스로 생전에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언급을 한 일도 없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향가가 한 수 기록되어 있는데, 진서론자들은 아마추어 역사가인 박창화가 향찰로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서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위서론자들까지 위서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진서론자들은 《화랑세기》필사본이 박창화가 1930~1940년대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도서료. 오늘날의 서릉부)에서 사무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도서관 내의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국어학자들도 향가를 겨우 한두줄 해석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미실이 연인인 사다함에게 보내는 향가인 <송출정가> 등이 향가의 형식을 빌어 창작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1942년에 와서야 양주동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의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을 출판하였다. 진서론자들은 향가에 대한 해석조차 어려운 일제강점기에 아마추어 역사가인 박창화가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서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지왕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있었고, 형인 용수가 천명공주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후에 동생 용춘이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용수와 용춘이 형제인 두사람이 되나, 기존의 전통적인 사료 및 해석에 의하면 용수는 용춘의 이명(異名)으로 알려져 있다. <대역 화랑세기>의 역주해자인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종욱은 <대역 화랑세기>에 "《삼국사기》태종무열왕 즉위조에는 무열왕이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삼국유사》왕락편에는 용춘은 일작 용수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용춘과 용수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으나, 《화랑세기》를 통하여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은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노(奴)와 비(婢)는 현재 알려져 있는 천민(賤民)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20세기에 창작해낼 수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화랑세기에는 무관랑이 월성의 궁궐 담장을 넘다가 구지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은 다른 사료에서 발견되지 않은 기록이다. 구지란 일종의 해자(垓子, 성 주위를 둘러 판 방어용 인공 연못)로 보이는데, 이 구지로 추측되는 연못 유적이 박창화가 사망한 이후에 발견되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사다함 조에 보면 나오는 내용으로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해자에 빠져 죽었으며 사다함이 이를 슬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기존 사서 어디에도 생몰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이 13살에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합뉴스의 김태식 기자는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이 기록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가야 가야(伽倻, 加耶, 伽耶)는 낙동강이 존재하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이다. 가락(駕洛, 迦落) 또는 가라(加羅, 伽羅, 迦羅, 柯羅)라고도 한다.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에 위치했던 변한의 금관가야(구야국, 狗邪國)를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을 결집해 성립된 전기 가야 연맹이며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의 세력이 약화되자 5 - 6세기 경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국을 만들었다. 562년에 사라졌다. 가야왕(王)의 이름은 일본서기에서 나타나는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와 "기본한기", "우사기아리질지간기(斯岐阿利叱智干岐)"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가락국의 왕(王)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간(干)"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전기 가야연맹은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었다. 전기 가야연맹의 철기 문화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되고있다. 당초에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의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었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기존 변한의 소국들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기반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소 엉성한 국가연맹체를 구성했었다. 구야국(금관가야)의 왕위를 두고 구야국왕인 수로왕이 신라 사람인 석탈해와 왕권다툼을 벌여 이겼고 석탈해는 신라로 돌아가 탈해이사금이 되었다. 탈해이사금 21년인 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전기 가야연맹 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 금정산)을 함락하고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전기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전기 가야연맹은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그들을 부추겨 신라를 공격했다. 전기 가야연맹과 신라는 초기부터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가야는 당시 중국,일본의 소국들,최씨낙랑국,마한,동예,신라를 제외한 진한의 소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신라가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에 밀렸다 전기 가야연맹의 구야국은 지금의 김해평야인 고김해만이라는 옛 바다를 천혜항구로 무역을 발달시켰던 전형적인 상업국가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또 일본과 변한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중국과 일본도 변진과 전기 가야연맹의 철을 수입하였다. 일본은 당시에 제철 기술 등이 전무해 전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철에 의지했다. 3세기를 전후해 구야국이 무역을 독점하고 구야국과 여타 소국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면서 내부결속마저 깨지기 시작했다. 골포국(창원), 고사포국(고성),사물국(사천) 등의 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과 침미다례의 불미국 등 남해안 8개 나라가 전기 가야연맹에서 이탈해 포상팔국을 결성하고 전기 가야연맹에 대항했다.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고 심지어 신라와도 항쟁하는 등 한때 극성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의 도움으로 전기 가야연맹이 이들을 간신히 평정할 수 있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를 끌여들이고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구야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소국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백제가 중국 요서와 평양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구야국을 중심으로 짜인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위협하고 신라가 낙동강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낙동강 수로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했다. 4세기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연패하고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앙심을 품었고, 결국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전기 가야동맹과 왜국이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전기 가야동맹의 중기병들과 왜군들은 신라군 보다 강력하여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서라벌을 함락하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援軍)이 동원되고 신라가 구원되었다. 가야군과 왜군들이 궤멸당하고 남쪽으로 후퇴해, 결국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구야국을 패망시키고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되었다. 고구려는 종발성을 공격했고 구야국은 옛 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경제 기반이었던 해상 무역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고령지방의 대가야가 이후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옛 변한지역은 가야가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한동안 혼란을 겪었었다. 그 시기를 전후해 그때까지 변한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내륙의 반파국이 가락국의 망명객을 받아들이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면서 가야의 주도권을 잡고 반파국을 중심으로 소위 후기 가야연맹대가야를 형성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침범하고 패망시키고 백제를 압박했다. 중앙집권적국가체제를 정비한 대가야는 신라의 낙동강수로와 옛 김해만 대신으로 백제의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고 섬진강 유역은 새로운 무역항이자 새로운 무역기반이 되고 전북에서 남원, 진안, 임실, 장수 일대에 기문지방이 이루어지고 전남에서는 모루(牟婁, 광양), 사타(娑陀, 순천), 상,하다리(여수) 등의 지역을 장악해 소위 섭라지방이 형성되고 대가야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섭라지방에서 산출된 옥은 고구려로 수출되고 고구려는 옥을 북위와의 무역에서 중요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대가야는 일본과의 무역 주도권을 잡았다. 479년에 가야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고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고 48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백제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에 대가야 군이 동원되고 신라를 구원하였다. 475년 백제의 동성왕은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고구려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무령왕은 다시 세력을 확충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 49년(249년, 삼국사기 기년조정 시 369년) 3월 근초고왕은 백제장군 목라근자와 왜군 사사노궤가 끌고온 왜군과 함께 남쪽의 침미다례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치고 가야 7국을 쳤다고 쓰여있다. 494년 가야연맹은 22개국에 달하여 경상남도를 최초로 장악한다.512년(백제 무령왕 12년)에 대가야가 지배하고 있던 기문지방과 상,하다리·사타(娑陀)·모루(牟婁) 등의 4현(縣)을 돌려받게 되고 가야는 15국으로 줄어든다. 513년 3월 반파는 자탄(子呑),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까지 연결하고 봉화대와 군량고를 만들고 이열비(爾列比),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연결하고 군과 무기를 모으고 신라와 화친하였다. 6세기 초 백제는 무령왕때 남진 정책을 피어 대가야는 호남 동부를 잃었다.대가야는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지만 신라는 가야와의 외교분쟁을 야기하고 529년 탁기탄(啄己呑, 경남 밀양)을 점령하고 후기 가야연맹의 소국들은 대가야 조정을 불신하게 되고 대가야는 무산되었다. 이후 아라가야가 위기를 느끼고 3월 안라회의를 개최하여 다시 가야를 살리려 하지만 회의에서 백제와 신라는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 531년 백제가 아라가야를 소국으로 만들었으며 신라는 532년 금관가야를 멸망시킨다. 538년 탁순국의 마지막왕인 아리사등이 신라에 항복하여 멸망한다. 541년과 544년 1,2차 사비회의가 성왕의 주도하에 열리고 일본 사신과 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산반하,걸손,졸마, 사이기,다라의 8개 가야소국의 대표가 모여 회의를 하나 무산되었고 548년 아라가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여 백제를 공격한다. 하지만 신라의 개입으로 고구려와 아라가야가 패하며 3년 뒤 백제와 신라와 가야연맹은 한강유역을 빼앗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553년 신라가 백제를 배반하니 554년 관산성전투가 열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고 소가야와 사물국이 멸망하게 된다. 555년 신라는 창녕군에 완산주를 설치한 뒤 남은 가야 10국을 공격한다. 그 뒤 557년부터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고 559년경 임례,자타,걸손,졸마,사이기,산반하의 6개국이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561년 2월 신라는 아라 파사산을 공격하여 아라가야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성과 비석을 설치한다. 562년 1월 남은 3국 중 다라국,거열국이 신라에 멸망하였고 562년 9월 결국 마지막 대가야를 멸망시켜 복속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9명의 간들이 하늘에 빌어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지고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하고 그 하나는 수로왕이 되고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나라가 없던 때에 백성들이 하늘의 명을 받아 구지봉에 올라 “거북아,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하며 제사를 지내자, 하늘에서 붉은 도자기에 쌓인 황금 알 여섯 개가 내려왔다. 12일이 지난 후 가장 먼저 깨어 나온 수로를 백성들은 가락국의 왕으로 모시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 나온 사내아이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가야인들은 신라사회에 편입하면서 정치와 군사, 문화에서 활약을 하였다. 금관국의 왕족인 김씨 일족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고 금관국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신라 장군으로 활약하고 김무력의 손자인 김유신과 김흠순 형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하면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었다. 금관국의 김씨 일족에 연원을 둔 김해 김씨는 한국의 주요성이다.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가야금을 가져 왔다. 전기 가야연맹은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이용·활용한 조직적인 군대를 운용한 선진 군사문화를 이루고 왜는 6세기 초까지 제련로를 만들지 못하고 조직적인 군대 운용의 흔적이 없었다. 금관가야 금관가야(金官伽倻), 본가야(本伽倻)는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로, 신라에게 멸망하기 전 국명은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불렸다. 가락국중에 하나인 금관가야는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전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였으나, 4세기 말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신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종발성(부산 추정) 공격에 세력이 약화되었고 국가는 지속되었으나 후기 가야 연맹체인 대가야와 안라국에 가야 연맹체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가락국(駕洛國)이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국명이며 삼국유사 이전에는 금관가야 혹은 구야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에 대해 중국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한국을 한자의 음차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가야는 가야(伽倻,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등 여러 한자로 표기되었다. 금관가야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변한 지역 연맹체의 중심국가였기 때문에 '가야'라는 말은 변한 지역 전체 또는 그 국가연맹체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 때문에 금관가야에 이어 후기가야연맹을 이끌었던 반파국 역시 금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을 이끌 때 쓰던 대가야란 이름을 연맹체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는 외국을 뜻하는 일본어의 'から(가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락국은 수나라(須那羅)'라고 쓰고 있는데 현대 우리말로는 '쇠나라'로 읽힌다. 이는 왜(倭)와의 교역에서 가야의 주요 수출품이 쇠(鐵), 즉 철기였기 때문이었임을 추정할 수 있으며, 금관가야란 이름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관국(金官國)이란 이름 역시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해 일대는 장유면 등지에서 지석묘 등의 청동기유적이 발견되어 태고적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은 대성동 고분이 있다. 당시 진한에서는 사로국을 건국하고 고구려에서 온조가 한강일대를 기반으로 백제를 세우고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였다. 변한에서는 수로왕과 구도간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수로왕을 중심으로 건국된 가야국은 탈해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석탈해는 수로왕에게 대패해 진한지역의 신라로 도주했고 수로왕은 석탈해를 200척의 대함대로 추격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은 42년부터 400년까지로, 금관가야가 맹주로써 이끌었다. 1,2세기 가야는 신라에게 5차례 1번의 패배도 없이 승리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나,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서 세력이 약해지기 358년 동안 지속된 연맹이다. 석탈해를 격퇴하는 것으로 기반이 공고해진 수로왕의 금관가야는 그 후 나머지 변한제국(弁韓諸國)들을 결집해 그 맹주자리에 오르는 한편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곧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 발전해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금관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한, 예, 왜등에 공급되었다. 이런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가락국을 변한제국내에서 맹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주었지만 한편으로 이에서 소외된 변한제국들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다. 3세기 초입에 가락국에 눌려 해상무역에 힘을 쓰지 못했던 변한 남해안의 7개국과 역시 금관가야로 인해 해상무역에서 힘을 못쓰고 있던 전라남도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되는 침미다례세력의 중심인 보라국(保羅國)등이 연합해 포상팔국을 형성했고 그리고 그 포상팔국이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기 위해 금관가야와 변한제국들에게 대항한 것이다. 209년에 포상팔국은 가락국과 가야제국들에서 두 번째로 세력이 컸던 안라국을 침공했고 금관가야는 인접국인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군은 물계자장군을 앞세워 금관가야를 도와주었고 이후 전쟁은 포상팔국과 신라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215년에 포상팔국 중에 3개국 연합함대의 울산 공격을 마지막으로 포상팔국의 패퇴로 끝났다. 포상팔국과의 전쟁에 신라의 지원을 받음으로서 금관가야의 위신은 추락했고 가야 전체의 맹주자리도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후 가락국의 해상무역은 다소 침체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백제가 고이왕대에서 근초고왕때에 걸쳐 백제가 중국의 요서와 산동을 점복하여 백제의 영토로 편입시킴으로써 대륙 무역로가 차단당했다. 399년에 가야의 철기군은 신라의 주요항구인 울산으로 북상을 시작했고 여기서 상륙해 있던 왜군과 합류했다. 가야군과 왜군은 남천가에서 신라군의 주력을 격파한 뒤 곧바로 서라벌을 공격했고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급히 고구려의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남하해 있던 광개토대왕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가야와 마찬가지로 철기병이 주축인 고구려군이 서라벌을 기습공격했다. 고구려군은 가야의 종발성까지 공격하였다. 이 전쟁으로 전기 가야 연맹체의 수장격이였던 금관가야는 세력이 약해졌다. 금관가야의 세력 약화는 변한에서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가 부상하게 되었다. 금관가야(구야국)의 세력 약화로 고령에 위치했던 대가야가 가야의 맹주로 떠올랐다.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금관가야는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차지하면서 세력이 강했던 496년에 가락국은 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대가야의 다른 지역에서 고총(高塚)이라는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고 있을 때 금관가야는 중규모의 고분이 있었음을 보면 가락국은 완전히 쇠퇴해 있었던 것이다.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갸야제국들 중에 하나인 안라국과 무역관계에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왜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남가야는 세력이 약해졌다. 그 와중에 532년 금관가야국의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하였다. 가야 귀족들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어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나중에 김유신 등이 신라의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차별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대중매체등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나 사서에 그런 증거는 없다. 이런 신김씨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은 김유신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제휴하면서부터로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 노력하는 한편 삼국통일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웠다. 그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에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왕이 되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은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시대 이후 신 김씨는 본관을 김해로 지정받아 김해 김씨가 되었다. 가락국의 고토는 신라의 병합이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고 680년 김유신의 조카인 문무왕에 의해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하고 16년뒤에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명해 지금의 김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문무왕은 가야왕실의 외손으로 김수로왕의 능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도 했다. 신라말이 되자 가야 김씨인 김인광(金仁匡)이 강력한 사병군단을 기반으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을 칭하며 진례성(進禮城)을 중심으로 김해와 창원일대를 장악하였다. 김인광은 신김씨의 후손으로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김인광, 김율희의 활약으로 고려시대에 김해지역이 역사상 "금관가야"로 인식되었다. 오늘날, 경남 김해시인 이곳은 금관가야가 존재했을 당시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다나 갯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처럼 구포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몰되지 않은 얕은 구릉에서는 어김없이 조개무지인 패총(貝塚)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락국, 소위 금관가야는 김해와 부산 일대에 많은 수의 고분군과 그에 부장된 유물을 남기고 있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광개토왕의 남정 전까지 활발한 고분조성이 이루어졌으나 그 이후 그 조성이 중단되어 가락국의 패망을 시사해주고 있다. 라는 서술은 잘못된 것으로 복천동의 최상위층 고분인 10, 11호와 21, 22호, 39호, 53호 등은 모두 고구려왕 남정이 이루어진 400년의 뒤인 5세기 1/4분기 이후에 조영된 고분이며 이후 동아대 1호가 조영되는 6세기까지도 복천동에서는 계속해서 대형의 고분들이 조영된다. 신라와 함께 가야의 장례풍습중에 주요특징은 다량의 유물을 껴묻는 후장(厚葬)이다. 이로 인해 다양한 토기와 유물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특징은 독무덤과 함께 덧널무덤에 있는데 이와 함께 도질토기(陶質土器), 그리고 순장의 풍습등은 북방문화의 영향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금속유물은 다수의 철정(鐵鋌)과 함께 철제 갑옷과 금동관이 파편으로나마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철이 주종을 이루고 금, 은 등의 귀금속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에 많은 량의 옥(玉)제품이 출토되었다. 귀금속이 발견된 것은 5세기 이후의 일이다. 금관가야는 왕위가 부자에게 정통적으로 세습된 국가이다. 스웨덴 스웨덴 왕국( ), 약칭 스웨덴(, )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반부를 차지하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는 스톡홀름이다. 스웨덴의 선사 시대는 후기 구석기인 기원전 12,000년경 남부 지방의 브로메 문화(Bromme Culture)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석기 기술을 사용하였으며 나무 열매를 채집하고 순록이나 물고기를 사냥하였다. 기원전 4천 년경의 푼넬 비커 문화(Funnel-beaker Culture)에서는 농사와 가축 길들이기가 시작되었고 다듬어진 돌도끼와 장식된 토기가 부장품으로 발굴된다. 청동기는 기원전 1,700년경에 시작되는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구리가 나지 않으므로 이 시기의 금속은 수입 후 가공된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단층의 긴 목조건물과 농장을 갖추었다. 스베아족(고대 스웨덴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98년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등장한다. 바이킹 시대의 스웨덴인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세계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이 길을 통해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벌였다. 스웨덴인들은 유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으나 11세기에 올로프 솃코눙이 스웨덴 왕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스웨덴은 제후 연합체였고 군주제도는 라이벌 관계에 있는 왕조들, 더 나아가서는 왕과 봉건제후들의 대립 관계로 주기적인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에리크 13세)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왕이 되어 1439년까지 스웨덴을 통치하였다. 그의 퇴위 후 80여 년에 걸쳐 스웨덴의 섭정들과 덴마크의 왕들은 3왕국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이 되었다. 1523년 스웨덴은 덴마크와의 스웨덴 해방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칼마르 동맹에서 독립했다. 이를 계기로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한 구스타브 1세 바사(재위 1523-1560)는 1718년까지 계속된 바사 왕조의 계보를 확립하고 루터교로 이행하는 종교개혁을 강행하였다. 그의 후계자들 치세에 스웨덴은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서 커다란 난항을 겪었다. 161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즉위와 함께 스웨덴은 루터교로 복귀하였다. 구스타브 2세는 발트 해를 스웨덴의 바다로 만드는 한편 독일 개신교 측의 후견인으로 30년 전쟁(1618-1648)에 참전하였으나 전신 각부에 집중 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초강대국 스웨덴(스웨덴 제국 혹은 발트 제국)은 약 1세기 가량 계속되었으나 칼 12세가 강행한 러시아와의 대북방 전쟁(1700-1721)이 실패로 끝나 와해되었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세기 후반에 구스타브 3세가 국가 중흥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끝내 암살됨으로써 원점으로 돌아갔다. 스웨덴의 대외 전쟁 참가는 나폴레옹 전쟁이 마지막이었는데, 빈 회의 결과 핀란드를 상실하고 노르웨이를 얻었다. 그 후 대규모 군사활동은 거의 대부분 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입헌군주제는 1849년에 실현되었다.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하여 현재의 영토가 확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가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에게 비자를 제공, 입국시켰다. 1946년에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한국 전쟁 때 한국에 야전병원부대를 지원하였다. 1946년 총리가 된 타게 에를란데르는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23년 뒤 올로프 팔메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몇 년 뒤 사임하였다. 팔메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월남전쟁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여, 양국 간의 물의를 빚고 말았다. 이후 다시 임명되었지만, 1986년 재직 중 암살되었다. 이후에는 잉바르 칼손이 총리가 되었다. 2014년 10월 4일에는 스테판 뢰벤이 새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좌파 정권이 재출범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국가이다. 반도의 동부를 차지하며 서쪽에는 노르웨이가 있다. 스웨덴 동쪽에는 핀란드가 있고 남쪽에는 덴마크가 있다. 스웨덴의 행정 구역은 21개 주(län)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지역은 290개 지방 자치체(kommun)로 나뉜다. 스웨덴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연중 기온이 온화하다.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동일 위도상의 다른 지역보다 따뜻하여 남부와 중부 지방은 여름에 종종 25 ~ 30℃에 이른다. 북부 지방은 북극 기후의 영향으로 6개월간 영하의 온도가 계속된다. 입헌군주제로 현 국왕은 1973년 9월 15일에 재위한 칼 16세 구스타프다. 사민주의를 내세우는 사회민주당 계열이 20세기 장기집권한 바 있고, 21세기 들어서도 원내 1당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스웨덴이 북유럽권 복지 국가로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 다만 2006년 우파연립내각이 들어서며 2010년엔 처음으로 우파 재집권에 성공하기도 했으며, 2010년대 들어선 반이민 정서를 내세운 극우 성향의 정당 스웨덴 민주당도 의회에 최초로 진입하는 등 어느정도 변화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14년엔 사민당을 필두로 한 좌파연립내각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였다. 고대 게르만 족의 부족인 스베아족과 고트족이 융합하여 오늘날의 스웨덴인을 형성하였다. 2017년 CIA 자료에 의하면 스웨덴의 전체 인구는 약 9,960,487명으로 거의 천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참고로 스웨덴의 인구는 수만명 규모의 북부 원주민 사미인들을 포함한다. 핀란드와의 국경에 주로 사는 5만여명의 핀란드계 스웨덴인들도 있지만 원주민 소수 민족이나, 20세기 이후에 스웨덴에 이민 온 핀란드인 1, 2세대가 45만명 정도로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스웨덴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민을 내보내는 나라였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로 바뀌었다. 2004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3.3%가 외국 태생이고 약 5분의 1이 이민자거나 그 자녀들일 만큼 이민자 출신이 많다. 이민자들의 출신지는 핀란드, 구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터키, 이란, 칠레, 그리고 기타 북유럽 국가 순이다. 스웨덴은 내전에 놓여있던 나라들로부터 피난민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스웨덴 사회에도 많이 진출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암살된 전 총리 올로프 팔메는 네덜란드의 후손이다. 그러나 2010년대 시리아 내전 등으로 유럽에 난민이 폭발적으로 유입되며 테러 및 범죄가 증가하는 것 아니냔 우려도 일각에서 제기되자, 스웨덴도 상기한 스웨덴 민주당 같은 극우 성향의 정당들이 2010년대 들어 일정 세를 얻고 있다. 스웨덴은 스웨덴어(svenska)를 공용어로 지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스웨덴어는 같은 북게르만어군인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와 비슷하고 특히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노르웨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상당한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노르웨이어와 유사하다. 반면, 말이 아니라 글은 노르웨이어(보크몰)가 아닌 덴마크어와 비슷하다. 스웨덴 남부의 일부 지역은 덴마크어에 가까우며, 남북에 걸쳐 기다란 국토로 말미암아 지역에 따른 사투리의 차이가 꽤 있다. 북부의 사미인들이 쓰는 말은 1960년대까지도 억눌렸다. (이 점은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이유로 이웃 핀란드의 주민 약 7%가 스웨덴어를 쓰며, 스웨덴어가 핀란드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정해져 있다. 1999년부터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5개의 소수 언어를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사미어, 메앤키엘리어(Meänkieli, 토르네달렌 핀란드어), 표준 핀란드어, 로마니어, 이디시어이다. 추가로 아랍어를 스웨덴의 공식언어로 인정할 지에 관해서는 아직 검토 중에 있다. 샤미어는 스웨덴에서 7천명 정도가 사용하며 아리에플로그(Arjeplog), 옐리바레(Gällivare), 요크모크(Jokkmokk), 키루나(Kiruna) 시와 그 주변의 정부기관, 법정, 유치원, 양로원에서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어와 메앤키엘리어는 옐리바레, 하파란다(Haparanda), 키루나, 파얄라(Pajala), 외베르토르네오(Övertorneå) 시와 그 주변에서 쓸 수 있다. 영어의 경우,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교육을 통해 사실상 제2언어에 가까운 구사 능력을 보여준다. 11세기 이전에 스웨덴인들은, 노르드교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가 있었다. 웁살라에는 웁살라 사원이 중심지였다. 11세기부터 스웨덴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바꿨다. 한때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종교개혁 이래 루터교의 전통이 강했던 나라였다. 스웨덴어가 노르웨이어와 달리 일찍 표준 정서법이 잡혔던 것도 다름 아닌 이 시기의 성경 번역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됐다. 이후로 20세기 전반까지 루터교 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1960년대 이후 급격하게 세속화되어갔고 현대에는 무신론 및 무종교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로 변했다. 또한 자발적인 헌금이 아닌 자산격차 문단에 상기된 교회세 강요 문제도 젊은 층이 이탈하는 데 한몫 했고, 결국 스웨덴 루터교는 2000년에 국교회 지위를 포기해야만 했다. 2010년 유로바로미터 설문조사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8%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전년도인 2009년에 실시된 갤럽 조사에서는 17%만이 교회가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응답했다. 이밖의 기독교 교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침례교가 있다. 사미인들의 일부는 애니미즘 신앙을 따른다. 이민 등을 통해 퍼진 이슬람교 교인들도 일부 있다. 스웨덴 인구의 약 2%가 개신교 예배에 참석한다. 이 나라는 세계적으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턴 어릴 때부터 영어 교육을 받아 대부분의 국민이 영어로 큰 무리없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스웨덴의 교육은 크게 4단계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는 유치원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의무적 과정은 아니고, 1세부터 6세까지를 위한 과정이다. 두 번째는 의무교육 과정이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관계없이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모든 공교육 시스템은 무료로 제공된다. 7세에서 16세까지는 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통합한 종합학교가 의무교육기관 역할을 맡는다. 세 번째 단계는 고등학교이다. 고등학교는 의무는 아니지만 무료이다. 네 번째 단계는 대학교 과정이다. 스웨덴에는 총 61개의 대학교 교육기관이 있다. 대학교 교육도 무상으로 제공되며, 유학생도 2011년 봄학기까지는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 현재는 비EU권 유학생들은 연간 1200만원 정도의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 대학은 3년 과정, 석사는 2년 과정이 대부분이다. 박사의 경우 직업 개념이라서 소정의 월급이 나오는 대신 강의를 해야한다. 하지만 학력에 따른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좋은 일자리를 가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스웨덴 국방군(Försvarsmakten)은 스웨덴의 군대이다. 2010년 7월부로 징병제를 폐지하였다.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북부 변경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과 지배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었다. 스웨덴은 수백년간 자국의 영토가 전쟁에 개입된 적 없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정적인 나라였으며, 무장 중립 노선을 유지해 유럽에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덕분에 2차세계대전 기간에도 스웨덴 경제는 성장할 수 있었고 이는 복지강국 스웨덴도 가능하게 하였다. 즉, 정부는 외부의 적에 대한 침략보다 국민을 더 신경쓸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면서 안보 상황이 불안해지고 있는 데다가 지원병제로는 충분하고 우수한 병력자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징병제를 부활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징병한다. 스웨덴은 세계적으로 국가 경쟁력이 높은 나라이다. 대표적인 경제강소중국 중 하나로 2017년 기준 스웨덴의 1인당 GDP는 $53,248이다. 널리 알려진 스웨덴의 대표 기업으로는 볼보,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이케아, H&M 등이 있다. GDP 대비 R&D 지출도 높은 편이다. 유럽 연합에 가입한 국가이긴 하지만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자체 화폐인 크로나(Krona, 왕관을 뜻하는 crown에서 유래)를 쓴다. 화폐 단위 표기는 ':-'를 사용하며 통화 기호는 SEK이다. 스웨덴은 북유럽 제1의 광공업국이다. 철광석의 생산이 세계 10위 안에 들며, 큰 수출품이 되고 있다. 대신 석탄이 별로 생산되지 않아 많이 수입하는 형편이다. 자동차, 기계, 철강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이 제품의 수출량이 큰 편이다. 무역 상대국은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영국, 미국 등이다. 스웨덴은 경제/사회학적으로 semi-socialist state(半 사회주의형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며 가장 전폭적인 복지 정책을 추진하는 나라로 꼽힌다. 이 나라의 복지 모델이 확립된 것은 1950년대 스웨덴이 유럽 1위의 경제 부국으로 등극한 후 제도적 측면에서 사회주의 모델을 차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스웨덴은 높은 복지와 함께 높은 세금 부담률이 특징이며 학교, 보육, 건강, 연금, 노인 복지, 사회복지 사업 등을 국가가 거의 무상 제공하고 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우파연립내각이 들어서며 스웨덴 복지 제도가 상당히 축소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합의이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좌파연립내각이 다시 들어섰다. 다음은 사회민주주의 연대 문서자료실의 스웨덴 복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스웨덴의 의료는 의료비를 본인과 나라가 같이 부담하고 있다. 스웨덴은 1년에 진료비가 900크로나(15만원)를 넘으면 바로 ‘무료 진료카드’가 나온다. 이 때부터 병원 치료비는 모두 공짜다. 약값도 1800크로나(32만원) 이상은 내지 않는다. 환자가 부담하는 상한금액은 국회에서 결정하는데, 1998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제도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입원비는 하루에 80크로나를 별도로 낸다. 입원했을 때 먹는 세 끼 식사와 간식 값이다. 이러한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 월급의 50%를 세금으로 내지만 복지를 제공받기 때문에 국민들의 조세 불만이 없다. 또한 노동자가 병이 나면 법으로 병가를 주도록 되어 있어서, 병이 났다고 해서 해고되는 부당해고가 없으며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월급의 80%를 사회보험청에서 준다. 스웨덴 요리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덴마크, 노르웨이)처럼 전통적으로 조리법이 단순한 편이다. 특히 생선 중 청어와 고기, 감자가 주요 식품 재료이며, 향신료의 사용은 적다. 유명한 요리로는 전통적으로 그레이비와 삶은 감자, 월귤잼을 곁들인 스웨덴식 미트볼, 즉 쇼트불레와, 팬케이크, 루테피스크와 스웨덴식 부페인 스뫼르고스보르드()가 있다. 아크바비트()는 인기있는 증류된 술이며, 스납스()를 마시는 것은 문화적 중요도를 가진다. 납작하고 건조하며 바삭바삭한 전통적인 빵인 크네케브뢰드()는 근래에 들어 여러가지의 형태를 지니며 발전해왔다. 지역적으로 중요한 음식은 북스웨덴에는 발효한 청어인 수르스트뢰밍()이 있으며,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에는 장어가 있다.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외국의 영향에 개방적이며 스웨덴인들이 수용하여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18세기에 수입된 프랑스 요리에서부터, 비교적 근래 수입된 스시나 케밥 등이 있다. 북쪽 지대에 위치한 특성상 스키 등 겨울 스포츠가 발달해있다. 그 외 상당수는 축구도 즐겨한다. 또한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헨릭 라르손, 프레드릭 융베리, 요한 엘만데르 등이 있다. 인구 대비 글로벌한 인지도를 가진 가수들을 제법 배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혼성 그룹 ABBA(아바)가 20세기 글로벌한 인기를 얻은 바 있으며, 아카펠라로 유명한 리얼 그룹(The Real Group)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헤비 메탈의 성지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여러 유명 메탈 밴드들이 스웨덴 출신이다. 대표적으로 아치 에너미, 오페스, 아몬 아마스, 메슈가 등이 있으며 유명 헤비 메탈 뮤지션으로는 네오클래시컬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 등이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 핀란드 등 여러 북유럽 국가에서는, 과거에 폴란드에서 들어온 폴스카를 춘다. 이 밖에 스웨덴의 제례·사교 댄스인 레크스트와 4분의 4박자로 짝이 되어 추는 렌닝엔 등이 있다. 양국은 1959년에 수교하였다. 참고로 이때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하였다. 그리고 스웨덴은 한국전쟁 때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야전병원선을 파견한 바 있다. 한국은 스톡홀름(주 라트비아 대사관 겸임)에, 스웨덴은 서울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 총 2,050명(재외국민 922명, 시민권자 1,128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스웨덴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1988년 하계 올림픽 때 스웨덴은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은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스웨덴은 일본과 교류 관계가 그리 많진 않지만, 냉전 시대 이후부터 같은 친서방 국가로서 협력하였다. 1964년 하계 올림픽, 2002년 FIFA 월드컵 때 대표팀을 파견하였다. 스웨덴은 친서방적인 노선으로 미국과 부드러운 외교 관계이며, 오늘날에도 스웨덴은 미국과 친선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구스타브 1세 바사 구스타브 1세 바사(, 1496년 5월 12일 ~ 1560년 9월 29일) 또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Gustav I Eriksson Vasa)은 스웨덴의 국왕(재위: 1523년 6월 6일 ~ 1560년 9월 29일)이자 바사가의 시조이다. 1509년부터 1514년까지 웁살라 대학교에서 재학했다. 1518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덴마크군의 포로로 잡혔지만 1519년에 도피했고 달레카를리아(Dalecarlia)에 귀환했다. 1520년 11월에는 스톡홀름을 점령한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의 귀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구스타브는 스웨덴을 탈출한 뒤부터 저항 운동에 앞장섰다. 1521년 달라르나 지방으로 귀환한 이후에는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일으킨 농민 반란은 스웨덴 해방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1523년 6월 6일에는 스웨덴 의회로부터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 국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스웨덴의 독립을 선언하여 마침내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다. 스웨덴에서는 매년 6월 6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 바사는 국교를 루터교, 곧 개신교로 정하는 종교 개혁을 시행하였다. 1527년에는 전체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또한 그립스홀름 성 등을 짓고, 개혁을 잘 이끌어 훗날 스웨덴이 발트 해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544년에는 스웨덴 의회를 통해 선거군주제를 폐지시키고 세습군주제로 전환했다. 1560년 9월 29일 사망하여 웁살라 대성당에 묻혔다. 망누스 아브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망누스 바사 (, 1542년 7월 25일 ~ 1595년 6월 26일) 는 스웨덴 왕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로부터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에 봉해졌다. 카타리나 폰 작센라우엔부르크 공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Katarina av Sachsen-Lauenburg, 1513년 9월 24일 ~ 1535년 9월 23일)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첫 번째 왕비이다. 작센라우엔부르크 공 마그누스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언니 도로테아는 덴마크의 왕자(훗날의 크리스티안 3세)와 결혼했다. 카타리나는 1531년 구스타브 1세의 왕비로 맞아들여져 1533년 에리크 14세를 낳았다. 청나라의 군주 목록 1616년 ~ 1636년 1636년 ~ 1912년 순치제 순치제(順治帝, 1638년 3월 15일 ~ 1661년 2월 5일)는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첫번째 황제이다. 휘는 아이신 교로 푸린(, ), 묘호는 세조(世祖, ), 시호는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짧은 시호로는 장황제(章皇帝, )이며, 연호는 순치(順治, , ) 청 제국의 첫번째 황제인 숭덕제의 아홉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그의 후궁이었던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이다. 1643년(숭덕 8년), 아버지인 숭덕제가 급사한 이후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뜻하지 않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 후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과 종숙 지르가랑이 섭정으로서 국사를 도맡아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에는 중원으로 들어가 멸망한 명나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통일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강경책과 유화책을 골고루 사용, 한족의 문화와 생활 관습을 존중하고 중요한 상소문에도 만주어와 한문의 병용을 허락하였으나 한족 백성들에게는 변발을 강요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아담 샬 폰 벨과 같은 예수회 선교사를 골고루 등용하여 천문대와 화포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서양 문화에 대한 호감은 뒷날 그의 아들인 강희제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순치제는 운남성 등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을 궤멸시키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다. 1638년(숭덕 3년) 3월 15일에 성경(盛京) 고궁 영복궁(永福宮)에서 장비(莊妃) 박이제길특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푸림은 학문을 좋아하고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만주어와 몽골어는 물론 중국어에까지 관심을 보이며 사서삼경을 잘 외웠다고 한다. 푸림이 학문에 열중하던 도중, 1643년(숭덕 8년) 8월 9일 홍타이지는 명나라로 출정하기 위해 대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푼 후 갑작스럽게 52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해란주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서 사망으로 추정) 평소 아무런 질병을 앓지 않던 강골의 홍타이지는 생전에 어떠한 유조도 남기지 않아 조정이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다음 황제를 정하기 위해 모든 친왕과 군왕, 패륵, 패자, 그리고 조정의 대소 신료가 모여서 회의를 가지고 이 중 가장 세력이 컸던 7인은 다음과 같다. 이 의정회의에서 각 친왕은 최연장자인 대선을 의장으로 만장일치로 정하고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는 자신에 수하로 있는 팔기군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대선의 강력한 중재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 중 공이 많던 2인으로 좁혀졌는데 도르곤과 호격이다. 두 사람 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이 컸으나 조정에서의 위치는 도르곤이 호오거보다 위였다. 비록 호오거가 도르곤보다 나이는 많았다 하나 도르곤은 호오거의 숙부였고 팔기군 중 정예부대인 정백기와 양백기를 거느리고 있어 그 위세가 막강하였다. 도르곤의 당여들은 만주족의 전통적인 승계방식인 형제승계를 따라 도르곤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 주장하였으나, 호오거는 형제승계가 아닌 부자승계로 황제를 뽑아야 한다며 도르곤의 의견을 반박했다. 도르곤은 이에 부자승계에 동의하는 대신 숭덕제의 정식 후비(后妃)인 오궁(五宮) 소생 중 장남인 9황자 복림이 황위에 오르고 또한 도르곤 자신과 호오거를 지지하는 정친왕 지르하란을 각각 좌우 섭정왕으로 삼아서 정무를 보는 조건을 내걸었다. 호오거와 의정왕대신회의를 주관하던 예친왕 다이샨은 도르곤의 절충책에 동의하였다. 1643년(숭덕 9년) 10월 8일, 푸림은 성경 고궁 대정전(大政殿)에서 겨우 6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르니 이가 제3대 황제 순치제이다. 그가 즉위하게 된 것은 강력한 외가와 숙부 도르곤이 강력하게 추천한 덕분이었다. 도르곤은 1644년(순치 원년, 명 숭정 17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명나라가 멸망하자, 투항한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 함께 이자성을 공격, 어부지리로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하였고, 명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조라고 선포하였다. 중국 대륙을 점령한 청나라의 첫 황제가 되었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추포하라 명령,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 이자성은 쫓기는 도중 살해당한다. 그러나 이는 유언비어며 실제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자성이 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1650년 도르곤이 병으로 죽자 순치제는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순치제는 독일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 폰 벨을 만났는데 그와 친밀하여 아담 샬을 사적으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치세 초반의 순치제는 자주 샬 폰 벨에게 조언을 청했으며, 또한 베이징에 로마 고딕 양식의 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했다. 1657년 이후부터는 그는 점차 불교의 선종으로 관심을 두기도 했다. 이후 그는 환관과 승려들의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 초기의 정치형태는 종실 가운데 누가 얼마만큼의 여러 부족 기(旗)의 기주권(旗主權)을 확보하는가에 따라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순치제는 친정을 시작한 후 가장 먼저 도르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친왕들과 양황기파 세력이 도르곤의 정백기파를 숙청한 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전에 양황기파만을 통솔하던 순치제는 이제 정백기까지 장악하고 친정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르곤 세력을 숙청한 직후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를 정비해 간다. 일단 1644년 이후 명나라의 계승자를 자처하였지만 황제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또한 명나라에서 귀화한 관료를 적극 회유하고 등용하였다. 항복해온 명나라 학자, 관료들에 대해서는 공적이나 대동하고 온 무리의 수에 따라 대하는 것 외에도 그들의 건의를 적극 수용하였다. 도르곤은 북경에 수도를 정한 이후 명의 문무 관료와 대다수의 지방 관료에게 복직을 권유하고 그들이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 줌으로써 혼란을 예방하였다. 순치제 역시 이를 계승하여 명나라 출신 인사에 대한 귀화, 회유 정책을 펼치고 남명 인사들에게도 귀순을 권고하였다. 그의 치세에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대포 기술과 고딕 양식의 건축 기술을 들여와 북경에 고딕 양식의 성당을 지었다.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어머니 효장태후를 싫어하여 당시 역시 싫어하던 몽골 출신인 황후를 폐하고 새로운 황후 효혜장황후를 세웠는데, 그녀 역시 몽골 출신이었다. 그는 '현비'(賢妃)동악씨 라는 후궁을 총애하였는데, 그녀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정치에 뜻을 잃었다. 얼마 안가 순치제는 그녀를 황후로 추시하였으나, 대신들은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듬해인 1661년(순치 18년)에 황위를 황태자인 3황자 현엽에게 물려주고 24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했는데, 일설에는 동악씨의 죽음과 동악씨의 황후 추서 반대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해서 제위에서 물러난 뒤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순치제가 썼다고 하는 출가시가 오늘날까지 불가에 내려오고 있다. 그는 숙부이자 섭정이었던 도르곤을 황부섭정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도르곤의 쿠데타 기도가 그의 사후에 알려지면서 작위를 추탈한다. 721년 722년 723년 724년 725년 726년 727년 728년 729년 730년 731년 732년 733년 734년 735년 736년 737년 738년 739년 740년 나라 동대사의 초대주지 료벤스님의 초청을 받아 신라의 학승 심상스님이 금종사에서 화엄경을 강설함. 이때 쇼무천왕이 화엄강론에 참석하였음. 달솔 달솔(達率)은 백제의 제2품 관직으로, 북사(北史)에 따르면 총 30명이었다고 한다. 은솔 은솔(恩率)은 백제의 16관등의 하나이자 제3품 관직 이름이다. 덕솔 덕솔(德率)은 백제의 제4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지방관으로서 치안 업무를 맡았다. 한솔 (관직) 한솔(扞率)은 백제의 제5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나솔 나솔(奈率) 또는 내솔은 백제의 제6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장덕 (관직) 장덕(將德)은 백제의 제 7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시덕 시덕(施德)은 백제의 제8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고덕 고덕(固德)은 백제의 제9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계덕 (관직) 계덕 (季德)은 삼국시대 백제의 16개 관직 중 10등급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대덕 (관직) 대덕(對德)은 백제의 제11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문독 문독(文督)은 백제의 제12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무독 무독(武督)은 백제의 제13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좌군 좌군(佐軍)은 백제의 제14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진무 (백제의 관직) 진무(振武)는 백제의 제 15품 관직으로, 260년 고이왕 27년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극우 (관직) 극우(克虞)는 백제의 제 16품이자 최하위 관직이다. 260년 고이왕 27년에 있었던 개혁으로 만들어졌다. 지마 이사금 지마 이사금(祗摩 泥師今, ?~134년, 112년~134년)은 신라의 제6대 국왕이다. 성은 박(朴)으로서 파사왕(婆娑王)의 적자이며,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 왕후는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인 애례부인(愛禮夫人 金氏) 김씨이다. 즉위 4년인 115년 음력 2월 가야(伽耶)가 남쪽 변경을 공격하자 음력 7월 가야 친정에 나서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는데, 가야인들의 복병에 걸려 패하고 간신히 퇴각하였다. 이듬해 음력 8월 다시 1만 병사를 거느리고 가야 정벌에 나서 공성전을 벌였으나 결국 다시 물러났다. 이후 지마이사금은 가야정벌을 포기했다. 즉위 10년인 121년 음력 4월 왜(倭)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때의 여파가 심했는지 이듬해 음력 4월 수도 주민들이 왜의 침입이 다시 있는 게 아닌가 소문이 퍼져, 이찬 익종 등에게 시켜 수습하였다. 이듬해인 123년 왜와 강화하였다. 즉위 14년인 125년 음력 1월과 음력 7월에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 이에 지마이사금이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해 백제가 다섯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파사 이사금 26년 (105년) 화친한 이후 지마, 일성 이사금 2대동안 평화적이었다. 단 아래의 가계 중 아들 이비와 손자 아도, 증손 박물품은 경주 박씨의 족보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가계에 의하면 지마왕은 일본에서 순절한 박제상에게 고조 할아버지가 된다. 후궁 김씨는 성한의 딸로, 그의 손녀사위 구도 갈문왕과는 증대고모, 종증손이 된다. 갈문왕 갈문왕(葛文王)은 신라 때 왕실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왕족 및 왕의 근친 귀족에게 추봉하던 왕명이다. 갈문왕의 추봉 범위는 대개 진골 중에서도 왕의 아버지, 왕의 외할아버지, 왕의 동생, 여왕의 남편 등으로,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회적 의의를 인정해 주었다(→신라의 관직). 이사금 시대에는 “갈문”이라고 표현하다가 중국식의 “왕”이라는 호칭이 수용되면서 마립간 시대에는 “갈문왕”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갈문왕이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갈문왕은 왕궁에 살았다. 왕궁에 살던 왕의 형제들이 갈문왕이 되었다. 마립간 시대에는 왕의 형제만이 아니라 먼 혈족도 갈문왕이 되었다. 갈문왕은 죽은 후에 추증되는 게 아니라 살아있을 때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즉 왕의 아버지로서 왕이 되지 못했던 사람, 혹은 왕비의 아버지, 혹은 왕을 견제할 만한 권력을 지녔던 세력가, 왕의 동생이나 삼촌들에게 갈문왕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점차적으로 왕의 형제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왕의 형제들 이런 특정한 인물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조분 이사금의 아버지 골정(骨正), 첨해 이사금의 아버지 세신(世神), 지증 마립간의 아버지 습보(習寶), 진덕여왕의 아버지 국반(國飯) 등이 왕의 생부로서 갈문왕에 봉해졌으며, 일지(日知), 허루(許婁), 마제(摩帝), 지소례(支所禮), 내음(奈音), 이칠(伊柒), 복승(福勝) 등은 왕의 장인으로서 갈문왕에 봉해졌다. 또한 알천의 경우 김춘추에게 제위를 양보한 것으로 김춘추가 알천의 조부를 갈문왕에 봉한 기록이 있다. 또한 왕의 숙부로서 갈문왕에 봉해진 사례도 있다. 진평왕의 동생이자 선덕여왕의 삼촌인 백반(伯飯) 갈문왕과 국반(國飯) 갈문왕이 그들이다. 왕의 남편으로 갈문왕이 된 사례로는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飮葛文王)이 있다.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금석문 '영일냉수리신라비' 에도 등장한다. 갈문왕이 초기에는 제2인자로서 실권을 가지고 왕의 위상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왕의 권력이 점차적으로 강화되어 나가면서 갈문왕의 위상은 약화되어서 나중에 가면 의식, 의례적인 칭호로 바뀌어 가게 된다. 통일 이후 무열왕 이후 왕권 전제화에 따라 폐지되었다. 일성 이사금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44년? ~ 154년, 재위 134년~154년)은 신라의 제7대 국왕으로,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이라고도 하며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 또는 유리 이사금의 아들인 아도 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부인이다. 즉위 4년 137년과 즉위 6년인 139년에 말갈이 침입해 이듬해인 140년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세웠다. 142년 말갈 공격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146년 음력 10월 압독이 반란해 군사를 내어 토벌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의 왕릉은 경주시 탑동 묘좌에 안장되었는데 일성왕릉은 1970년대에 사적 173호로 지정되었다. 후궁 석씨의 묘는 금서문 밖 자좌에 있다 한다. 걸스카우트 걸스카우트(Girl Scouts) 또는 걸가이즈(Girl Guides)는 소녀들의 수련 단체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소녀들의 수양, 교육단체.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 소녀들이 올바르게 자라도록 돕는다. 현재 118개국에 약 800만 명의 단원이 있다. 베이든 포웰 경이 1908년 보이스카우트를 만든 데 이어 1910년 이 단체를 만들 때는 걸 가이드(Girl Guides)라 하였으나, 이것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걸 스카우트로 바뀌어 전파되었고, 현재는 두 단어 모두 사용되고 있다. 1928년 세계연맹이 창설되었다. 1946년 한국에서도 걸 스카우트가 조직되었다. 간호사 간호사(看護師, )는 개인, 가족 나아가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과학적인 방법인 간호과정을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간호(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 증진, 회복하도록 돕는 일)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직업이다. 「의료법」에 의하면 의료인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간호사가 속하며, 간호사는 환자의 간호요구에 대한 관찰, 자료수집, 간호판단 및 요양을 위한 간호,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 간호 요구자에 대한 교육·상담 및 건강증진을 위한 활동의 기획과 수행, 간호조무사가 수행하는 업무보조에 대한 지도 등을 수행한다. 간호사가 되려면 간호학사를 받을 수 있는 4년제 이상의 대학교 및 전문대학(4년제)을 졸업하고 간호사 국가고시에 통과하여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면허를 받아야 한다. 간호사는 역사적으로 고대(Ancient), 중세(Medieval)에서도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으나, 오늘날의 간호사는 크림 전쟁 때 전문직업으로서의 간호사로 종군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로부터 비롯하였다. 나이팅게일은 크리미아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38명의 영국 성공회()수녀들과 같이 헌신적으로 실천하여 열악했던 군 의료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영국인들의 기부로 의사 및 간호학교를 개교하였다. 나이팅게일 이전에는 중세 유럽에서 유럽 가톨릭 수녀들이 운영한 병원이 있었는데, 이러한 수녀들이 간호사의 연원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간호사들의 지위는 국가마다 거의 비슷함에 가깝다. 간호사 역시 기업의 사원처럼 직급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병원의 규모나 종류에 따라 간호부서의 최고 직급과 직급 체계는 다를 수 있다. 대학병원으로 위시되는 대형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의 최고위 간호사는 병원 내 인력 면에서 가장 큰 조직인 간호부서를 관리하는 장으로서 영향력이 클 뿐만 아니라, 병원 행정 및 경영에 관여하기도 한다. 학생간호사는 주로 대학병원에 실습나오는 간호대학 3, 4학년 대학생들로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간호사 국가고시 면허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아니므로 정식 간호사가 아니다. 또한, 간호조무사는 의사 및 간호사의 업무지도를 받아 양호 및 보건활동을 하는 직업으로, 의료인인 간호사와 다르다. 유엔 유엔() 또는 연합국기구(聯合國機構, , , , , , )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국제 기구이다. 1945년 10월 24일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출범했다. 설립 목적은 국제법, 국제적 안보 공조, 경제 개발 협력 증진, 인권 개선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발족됐으며 원칙적으로는 각국의 전쟁을 막고 대화 교섭을 찾자는 명분으로 국제 연맹의 역할을 사실상 대체하게 되었는데, 기존과는 달리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등 세계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주권국으로 인정되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유엔 회원국이다.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으며, 뉴욕에 있는 본부에서는 매년 총회를 열어 주요 안건을 상정 및 논의한다. 또한,네덜란드 헤이그에 국제법원을 두고 있다. 사무국은 케냐 나이로비(유엔 나이로비 사무국), 오스트리아 빈(유엔 빈 사무국), 스위스 제네바(유엔 제네바 사무국)에 위치하고 있다. 기존에 국제 질서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던 국제 연맹은 국제 사회 내 영향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세계대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에 유엔은 국제 연맹을 이을 일종의 계승체가 된다. 영문명인 "United Nations"(유나이티드 네이션스)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와 윈스턴 처칠이 추축국에 대항해 계속 싸울 것을 결의하고자 발표한 연합국 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 선언은 1943년 승인됐으며 연합국 기구를 결성하기로 했다. 이듬해 연합국 주요국 대표들이 모여 덤바턴오크스 회의를 열었다. 2년 동안의 논의를 통해 유엔의 주요 목적, 회원국, 구조, 평화, 안보, 공조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기에 이른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 회의에 참석한 50개국 대표는 초안을 바탕으로 유엔 헌장을 작성해 6월 26일 조인했다. 같은 해 10월 24일 헌장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비에트 연방, 중화민국과 46개의 타국가 동의로 발효하면서 유엔이 출범했다. 유엔의 창설일인 10월 24일(유엔의 날)은 각국에서도 기념일로 지정되고 있다. 최초 51개 회원국이 모두 참석한 최초의 유엔 정기총회는 1946년 1월 런던에서 열렸다. 유엔 헌장은 모두 19장 111조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유엔의 주요 기구는 다섯 곳이다. 유엔 신탁 통치 이사회도 포함됐으나 1994년에 팔라우가 독립하면서 이 기관의 실질적인 기능이 사라지게 되어 주요 기구에서 제외하고 있다. 주요 기구 다섯 곳은 다음과 같다. 여섯 곳 중 다섯 곳은 뉴욕에 위치하며 국제법원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위치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국가 간 평화와 안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과 일본 등에서는 안보리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다른 유엔 조직에서는 "권고안(Recommendation)" 선까지만 발표할 수 있지만 안보리에서 만큼은 유엔 헌장 25조에 따라 관련 사안의 심각성, 국제적 협력을 통해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낼 수 있다. 안보리는 15개국이며 5개국의 상임이사국과 10곳의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다.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논의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절차상에 문제에 대해 결의안 자체에 관한 논의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개의 비상임 이사국은 2년마다 바뀌며 대륙 안배를 고려해 선거로 결정된다. 잇따른 위기 상황 대처에 신속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안보리 자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기도 하다. 유엔 사무국은 유엔 사무총장이 수장이며 유엔의 직원들이 일하는 곳이다. 세계 시민에게 봉사한다는 뜻으로 국제 공무원(international civil servants)으로 불린다. 회원국 간의 회의에 따라 필요한 시설 확충, 연구 사항에 대해 실질적인 업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유엔 총회를 통해 결의되거나 상정된 안건에 대해서 제안을 하기도 한다. 직원의 경우에는 헌장에서도 가장 유능하고 외국어에 유창하며 상호 협동성이 뛰어난 사람이 적합하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지역적 안배를 거론한다. 직원에 대해서 업무를 제한하거나 요청하는 것은 유엔을 제외한 어느 권력 기관도 할 수 없다. 특정 국가에서 공무원으로 지내다가 파견되는 경우도 있기에 어느 국가의 정치적 이해가 반영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사무총장만이 직원의 임명에 권한을 가진다. 사무총장의 의무는 국제 분쟁을 조정하며 평화유지군 관련 결의를 조정, 국제 회의 준비, 총회의 결의안에 대한 이행, 회원국 정부와의 다양한 이해 사안 조정 등이다. 사무국의 주요 사무실에는 유엔 인도지원조정국과 유엔 평화유지군 사무소도 포함된다. 유엔 사무국은 사무총장이 지도자로 역할하며 사실상 유엔을 대표하는 대변인에 해당한다. 현재의 사무총장은 2017년도에 취임한 안토니우 구테흐스이다. 유엔 헌장 상 사무총장은 5년 기한을 10년까지 연임할 수 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말했듯이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 사회의 조정자"이며 헌장에서는 유엔의 최고 행정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헌장에서는 사무 총장 또한 세계 평화와 안보 유지에 반하는 문제가 있을 시 안보리에 논의 사항으로 상정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어 특정 사안에 대해 세계적 시각으로 판단하고 조율할 것을 간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사무총장이라는 직위는 단순히 유엔의 공무원이 아니며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자 중재자로서 기본적인 업무에서 국제 사회의 각국 분쟁 사항 조율을 추진함과 동시에 회원국 간의 국가적 합의를 이루도록 협조하는 데 있다. 국제법원(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하며 유엔의 가장 주요한 사법 기관이다. 1945년 유엔 헌장에 따라 설립됐으며 이듬해 국제정의법원(Permanent Court of International Justice)의 계승기관이 되었다. 법정 규정 및 성문율은 국제정의법원과 마찬가지로 법률을 규정하고 특정 사안에 제한하는 일종의 헌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이하게도 국제법원은 헤이그의 사립 법률학교인 헤이그 국제법학학교와 건물을 공유하며 평화국은 ICJ의 독자 관할 구역이다. 사실 지금 ICJ 소속 근로자들 다수가 바로 옆 학교의 학생들이거나 출신자들이다. 국가 간 분쟁 사안을 조정하고 인종 차별을 무기로 대량 살상을 저지르거나 불법 전쟁 범죄를 자행하는 사건을 주로 다루기도 한다. 국제형사법원(ICC)는 ICJ와 관련돼 있으며 유엔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국제적인 논의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자 2002년 설립됐다. ICC는 국제법에 반하는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법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전문적으로 맡게 될 최초의 국제 법정이 됐다. ICC는 인사, 자금운용 면에서 유엔의 간섭을 받지 않지만 주요 결정 사안에 대해서는 유엔이 직접 참관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UN과 ICC 간 법적으로 충분한 견해를 공유하자는 뜻해서 일종의 양해각서 체결이 있었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The Economic and Social Council, ECOSOC)는 세계 경제사회의 협력개발을 증진하고자 정기 총회의 업무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는다. 유엔 총회에서 2/3 이상의 다수결로 선출된 54개국이 3년 간 이사국을 맡는 식이다. 의장은 대개 중립국이나 강소국 출신의 인물이 1년 간 임기를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경제사회국 회의는 해마다 7월 4주간 열리며 1998년 이후로 4월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위원회가 참석하는 가운데 세계 경제부 장관들이 모여 회의를 갖는다. 경제사회 이외에 세계 각국의 정보를 수집하며 특정 사안이나 우려가 있을 경우 관련국에 통보 및 권고안을 내놓기도 한다. 또한 유엔 내부 기구 중 유엔 자체의 업무에 가장 충실히 입각하는 기관이기에 국제 사회에서 논의된 정책이나 다른 기관들과의 조율을 이루도록 노력하며 이런 면에서는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유엔 헌장은 각각의 유엔의 주요 조직들은 다양한 전문기구를 그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설립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몇몇 잘 알려진 기구들은 국제 원자력 기구, 식량 농업 기구, 유네스코, 세계 은행, 그리고 세계 보건 기구이다. 유엔은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대부분의 인도주의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예시들은 세계 보건기구의 백신 프로그램들, 세계 식량 계획의 기근과 영양 실조의 방지, 그리고 유엔난민기구의 취약하고 추방된 사람들의 보호이다. 유엔의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이다. 영어는 영국 영어를 사용하고 중국어는 표준 중국어와 간체자를, 아랍어는 현대 표준 아랍어를 사용한다. 이들 언어는 유엔 총회,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를 비롯한 주요 기구에서 사용된다. 한 나라의 각 대표는 6개 언어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여 말하거나 다른 언어로 말하고 6개 공식 언어 가운데 하나에 대한 해석을 제공할 수 있다. 유엔은 유엔 통역 서비스를 통해 5개의 다른 공식 언어로 동시 통역을 제공한다. 6개의 공식 언어는 유엔에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며 각 6개 언어의 문자는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유엔 사무국에서는 영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1946년에 열린 제1차 유엔 총회에서는 국제법원 이외의 모든 유엔 기구들에서 사용될 언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스페인어 5개 언어를 공식 언어로, 영어, 프랑스어 2개 언어를 작업 언어로 각각 지정했다. 1948년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스페인어가 작업 언어로 지정되었고 1968년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러시아어가 작업 언어로 지정되었다. 1973년에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중국어가 작업 언어로 지정되었으며 아랍어가 공식 언어, 작업 언어로 추가 지정되었다. 2011년 7월 15일 남수단이 가입하면서 현재 유엔 회원국으로는 193개국이 있다. 모든 독립 주권 국가를 유엔 회원국으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바티칸 시국과 팔레스타인은 유엔 총회 옵서버로 회원은 아니다. 이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일원으로 간주되며, 중화민국은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가 통과된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로 간주되므로 회원국이 아니다. 참고로 남극 대륙에는 독자적인 정부가 없다. 유엔 헌장에서는 회원 자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G-77은 유엔 내에서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과 외교력 증진을 꾀하고자 회원국 내에서 생겨난 기구이다. 초기 가입국은 77개국이며 지금은 130개국으로 그 수가 늘었다. 1965년 6월 15일 설립됐으며 유엔 무역개발협의회에서 발표한 "77개국 협정 선언"에 따라 효력을 발휘했다. 최초로 주목을 받았던 회의는 1967년 알제리에서 열렸다. 유엔은 회원국들의 분담금을 정해 자발적으로 일종의 회비를 걷는다. 보통 2년 단위로 예산을 측정하며 유엔 총회에서 정한 분담 비율에 따라 국가에 따라 부과된다. 정기 총회에서는 예산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각 회원국 간 분담금을 정하기도 한다. 분담금을 측정하는 기준은 각 나라의 국민총소득(GNI)에 따른 것이며 이는 각국의 상대적인 기준을 고려하여 산출된다. 대외부채의 차이 혹은 1인당 소득이 전체 인구로 나뉠 때 줄어드는 정도 등을 감안한다. 총회에서는 유엔이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재정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에 한 나라가 충당할 수 있는 분담금의 최고 비율은 일반 예산마다 제한을 받는다. 2000년 12월 총회에서는 최근의 세계 경제 상황을 감안해 분담금 산정 방법을 개정하게 됐다. 최고 분담 비율이 25%에서 22%로 줄어든 것이 한 조항이며 이에 해당하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이외에도 최소 분담 비율은 전체 UN 예산의 0.001%로 조정됐으며 최빈국의 경우에는 최대 0.01%에 해당하는 금액까지 낼 수 있다고 명시했다. 현재 유엔의 연간 예산은 대략 41억 9천만 미국 달러에 준한다. 최대 소비 부분은 평화유지군을 비롯한 안보 관련 문제에 배정된다. 평화유지에 관련한 예산은 2005-2006년 간 7만 명의 군인이 전 세계에서 17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대략 50억이 쓰였다. 2013년 1월 1일 기준으로 평화 유지 관련 분담금을 가장 많이 부담하는 13개국은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이탈리아, 캐나다, 스페인, 브라질,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유니세프나 UNDP 등 전문기구는 자발적인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자금을 운용하기에 유엔 자체의 예산과는 별도이다. 대부분이 자금 관련 기부로 이뤄지지만 농산물이나 생필품의 형태로 기아 인구를 위해 제공되기도 한다. 유엔은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평화유지 군병력을 분쟁 발생지역에 파견하고 있다. 유엔은 독자적인 군사 체계가 없으므로 대개 국가의 자발적인 병력 지원에 따라 파견되며 발생하고 있는 평화 협정의 진행 상황에 따라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 상황을 점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198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창설 때부터 창설국들은 국가 간 분쟁 상황이 일어나면 산발적인 전쟁의 재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자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냉전의 지속과 함께 여러 국가의 유지 병력 파병 및 결의는 극도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탈냉전에 이르면서 유엔 자체적으로 과거 동의안에 대한 결의가 이뤄졌으며 2015년 기준으로 현재 16곳에 파견되어 있다. 대개는 민족 간 분쟁, 정치적 상황으로 인한 치안 붕괴에 해당한다. 유엔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벌어졌던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략한 직후에 안보리는 이를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이어서 7월, 처음으로 유엔군을 결성하여 참전했는데, 6.25전쟁 당시 참전국은 1951년 초까지 총 16개국이었다. 군대 파견을 신청한 국가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을 한 16개 국가의 분포는 미국, 캐나다 북미 2개국, 콜롬비아 남미 1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아시아 4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2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 유럽 7개국이다. 이들 참전국들은 유엔이 요구하는 최소 규모인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하였다. 주요 참전 병력은 1953년을 기준으로 영국 약 1만 4,200명, 캐나다 약 6,100여 명, 터키 약 5,500여 명, 오스트레일리아 2,200여 명 등이다. 1953년까지 한국 전쟁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총 3만9천여 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할 경우 총 34만 1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유엔 결의문에 따라 회원국 및 국제 기구들이 각종 지원을 하기 시작했는바, 5개국(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이 병원 혹은 병원선 등 의료 지원을, 그리고 40개 회원국과 1개 비회원국(이탈리아)과 9개 유엔 전문 기구가 식량 제공 및 민간 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개입 이후에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나토) 증강 등의 약속에 비추어 유럽 국가와 기타 회원국들의 참전을 요청하였으나,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의 참전은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태국 등 4개국에 국한되었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그들이 집단 안보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참전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유엔은 또한 1951년 8월 총회 결의 제500호를 통해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채택하는 등 다각도의 전쟁 지원책을 강구하였다. 1. 강대국에 대한 의존 1950년대 이래 유엔의 조직과 그 활동에 대해 논란과 비판이 있어 왔다. 미국에서는 초기의 유엔 반대자였던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는 유엔의 목적은 "하나의 세계 정부"를 이루는 것이라며, 1959년 "UN에서 US(미국)을 몰아내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1967년 리처드 닉슨은 미국 대선 중에 유엔을 당시 냉전과 같은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에 "쓸모없고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의 유엔 대사로 임명한 잔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은 1983년 뉴욕 타임즈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토론 과정을 두고 정치적 논의나 문제 해결 노력보다는 미국의 "강도짓과 비슷하다"고 기고한 바 있다. 2003년 2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임박하자(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유엔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조지 W. 부시는 "자유 국가는 무능하고 부적절한 말싸움 집단 때문에 미국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5년 부시는 존 볼턴을 유엔 대사로 임명했는데, 볼턴도 유엔을 수차례 비판했다. 1994년 "유엔 같은 것은 없다. 단지 국제 공동체가 있을 뿐이며, 오직 지금의 최강국 미국만이 세계를 이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총회에서 모든 나라가 찬성하더라도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가 반대한다면 그 의제는 부결된다. 그 중 미국과 러시아는 유엔의 의사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아이티 콜레라 창궐에 대한 무시 아이티에서는 2010년 대지진 이후 평화유지군이 주둔했는데, 이때 네팔 부대가 쓰고 버린 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전 지역에 콜레라가 창궐, 7년간 9,500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반기문 사무총장은 이를 5년 동안 인정하지 않다가 2016년 12월 공식 사과했다. 그동안 유엔은 아이티 내에서 콜레라가 창궐한 것이라며 책임을 피해왔다. 3. 전쟁을 막아내지 못한 단점 본래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겪은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결성하였던 기구였다는 점이 있지만 아쉽게도 이와는 달리 창설 이래 여러 전쟁들이 발발하게 되었고 그 전쟁을 막아내지 못하였던 점도 있다. 대표적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있으며 UN이 창설된지 5년 만에 일어난 전쟁이자 미국 정부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에치슨이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키고 1949년 주한 미군의 전투병력을 본국으로 철수한 것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한반도에서 남북간 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을 만들었던 점이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을 주력으로 창설 이래 다국적 전투파병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으로 결성된 UN 지원군이 결성되어서 대한민국에 급파되었던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베트남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에 중동전쟁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침공하는 걸프전쟁도 발발하게 되면서 창설 이후 전쟁을 막아내지 못하였던 점도 있다. 다만 전신인 국제연맹과는 다르게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등 정회원국이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던 것에 비하면 이라크는 전쟁을 일으킨 이후에도 UN 정회원 지위를 유지하며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점에서 다른 면이 있다. 4. 대한민국의 UN 가입에 대한 여러 차례 부결 대한민국은 1949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UN 정회원국으로의 가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하는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유일하게 반대를 하여 대한민국 정회원 가입이 부결되었고 다시 1955년에 재신청을 하였으나 이 역시 소련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에 미국을 주도로 한 자유진영국 13개국의 의결로 대한민국의 정회원 가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이 역시 소련이 극구로 반대하여 부결되었다. 소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원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적국이자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도 대한 지원 논의에도 대사가 불참하는 등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성향을 드러내었다. 소련의 반대로 한동안 가입을 보류하였다가 1973년 박정희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UN 가입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희망을 가졌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영구 분단을 조장한다며 반대하였고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로 가입하자고 맞섰다. 1975년 남북베트남의 가입을 계기로 다시 대한민국에 대한 가입신청이 논의되었으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부결되어 가입이 좌절되었다. 사유로는 소련과 소련을 등에 업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의 공산권 국가가 반대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들어서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를 계기로 미국과 소련이 참가하면서 헝가리, 오스트리아, 인도 등이 대한민국의 UN 가입희망을 지지하였고 쿠바, 말리, 르완다 등 공산권 성향 국가들이 반대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한소 수교가 이뤄지고 한 -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가 이뤄진 것을 계기로 1991년 대한민국의 UN 가입 논의가 시작되어서 그 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UN 동시가입이 이뤄졌다. 이 같이 어느 나라가 UN 가입을 희망해도 상임이사국 5개국이 반대하면 가입이 좌절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아달라 이사금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 ~184년, 154년~184년)은, 신라의 제8대 국왕이며, 상대(上代)의 마지막 박씨 군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 왕후는 지마왕(祇摩王)의 딸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이다. 3년(156년)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고, 4년(157년) 2월에는 감물현(甘勿縣)과 마산현(馬山縣)을 두었으며,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했다. 5년(158년) 계립령에 이어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으며, 9년(162년) 사도성(沙道城)에 순행해 병사들을 위로했다. 이 해에 왜인들이 우호적인 목적으로 신라를 방문했다. 12년(165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치자 왕은 백제에 길선의 신병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거절했고, 이에 왕이 몸소 백제 원정을 나섰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2년 뒤인 14년(167년) 7월 백제가 신라를 역습해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잡아갔으며, 8월에는 일길찬(一吉湌) 흥선을 시켜 군사 2만으로 백제를 공격하고 왕은 8천 기(騎)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넜으며, 이에 백제는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길선의 모반 사건은 신라 역사상 최초의 「반란」이었다). 17년(170년) 봄 2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중수하였다. 10월에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다. 19년(172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波珍湌),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구도는 훗날 김씨로서 최초의 신라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미추(味鄒)의 아버지이다. 20년(173년) 음력 5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 이후 10년간 기록을 남기지 않다가 31년(184년) 봄 3월에 왕은 사망하였다. 사인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내해 이사금이 아달라왕 사후 12년 만에 왕위에 올른 것과 그의 생모가 내례부인이란 것을 감안할때, 이매가 아달라 이사금의 아내 내례부인 과 모종의 일이 있었고, 이에 아달라왕과 이매 의 아버지 벌휴 이사금 사이에 내분이 있었고, 결국 아달라 이사금은 패배하여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경주군 남쪽 15리 배일산(拜日山)의 세 왕릉 중 맨 위의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맨 앞은 경명왕의 능이라 한다. 《삼국사기》에는 일성왕과 지소례왕의 딸(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사후 후손이 없어 왕위가 석씨계의 벌휴(伐休)에게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하대 신라의 신덕왕(神德王)은 아달라왕의 원손(遠孫)을 자처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제1에는 아달라왕의 치세에 있었던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이름의 부부가 등장하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로서 아달라왕 즉위 4년인 정유(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연오랑이 서 있던 바위(물고기라고도)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태운 채 그대로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연오랑을 보고 「이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라며 그들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바닷가로 나가서 남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바위 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했고, 세오녀가 그 바위에 올라가자 바위는 다시 움직여서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다시 놀라면서 연오랑에게 나아가 아뢰었고, 부부는 재회하여 세오녀는 왕인 연오랑과 함께 나란히 귀비(貴妃)가 되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고 없는 사이,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사라져 온통 암흑으로 뒤덮이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일관(日官)은 「우리 나라에 있던 해(연오랑)와 달(세오녀)의 정기가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아달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 데려오게 했지만, 연오랑은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나의 비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라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사신에게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었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자 과연 신라에는 해와 달이 예전처럼 돌아왔다. 이후 신라에서는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해 국보로 삼았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 (都祈野)라 하였다고 한다. 야마타이국 야마타이 국()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고대 부족국가이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 이사금 20년인 173년 그 왕인 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3세기의 삼국지에도 야마타이코쿠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야마타이코쿠의 현 위치는 긴키 지방 혹은 규슈 일대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삼국지에는 239년 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만요슈나 일본서기 등에서는 쓰시마 국・이키 국・마츠우시로 국 등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히미코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 ~ 247년 또는 248년)는 일본의 여왕이다. 자신이 다스린 야마타이코쿠를 중심으로 하여 왜국을 지배하였다. 봉호는 친위왜왕(親魏倭王). 그가 죽은 후 친족인 일여가 여왕으로 즉위 했다. 삼국지 위지왜인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조에 기록되어있다. 「위지 왜인전」(魏志倭人伝)에 따르면 히미코 즉 비미호(卑弥呼)는 사마대국(邪馬台国)에 거주하며(女王之所都) 귀도(鬼道)로써 무리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事鬼道、能惑衆). 이 '귀도'(鬼道)나 '홀렸다'(惑)는 말의 의미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위지 왜인전에는 「으레 뼈를 태워서 갈라진 자국을 살펴 길흉을 점쳤다」(輒灼骨而卜、以占吉凶)고 하는 것처럼 점술 같은 것을 행하는 무녀(샤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중국 사서에는 여명기의 중국 도교(道教)에 대한 것을 귀도라 적은 사례도 있다. 일본 후쿠오카 현(福岡県) 이토시마(糸島)의 히라바루 유적(平原遺跡)에서 야타노카가미(八咫の鏡)와 같은 직경이 크고 꽃무늬가 새겨진 구리 거울 다섯 점을 비롯해서 대량의 옥이나 장신구들이 발굴된 점을 들어 일본의 고고학자 하라다 다이로쿠(原田大六)는 무덤의 피장자는 태양신을 받들던 무녀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위지 왜인전에는 그것이 이도국(伊都国)의 중요한 역할로 되어 있어서 비미호는 이도국과 얽혀 있는 계통의 무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나이가 많았던 데다 남편도 없어(年已長大、無夫壻) 남동생 한 명이 그를 도왔다고 전하며(有男弟佐治國) 왕이 된 뒤에는 그를 보는 사람은 적었고(自爲王以來、少有見者) 단지 한 명의 남자만이 음식을 올리고 동시에 그의 곁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 궁실은 망루나 성책이 엄중하게 설치되어 있었고 항상 무기를 든 자들이 지키고 섰다(居處宮室・樓觀、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비미호가 죽고 왜인은 직경 백여 보(이 시기 중국의 백 보는 일본의 2백 보에 해당하였다)가 되는 큰 무덤을 만들었고, 노비 백여 명을 순장하였다(卑彌呼以死、大作冢、徑百餘歩、殉葬者奴婢百餘人). 무덤의 크기를 직경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에서 무덤이 원형이었거나 그와 비슷한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三國志)권4 위서(魏書)4 삼소제기(三少帝紀)제4에는 정시(正始) 4년에 「겨울 12월에 왜국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봉헌하였다」(冬十二月倭國女王俾彌呼遣使奉獻)라고 되어 있다. 다음 세 가지 중국 정사에도 관련 기사가 있으나, 모두 왜국의 역사를 개괄한다는 문맥에서의 기술로 사료로써의 가치는 낮다.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야마타이 국은 본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는데, 70~80년을 지나 왜국이 어지러워져서 몇 해 동안이나 서로 싸우다가, 이윽고 함께 한 여자를 왕으로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였다. 중국 위나라 황제인 조예에게 손자인 난승미를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이 때부터 야마타이 국은 위나라의 신하 국가가 되었다. 다음은 그를 보는 사람은 적었고, 단지 한 명의 남자만이 음식을 올리고 동시에 그의 곁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 궁전은 누각이나 성벽을 위나라 낙양성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렵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가 죽고, 왜인은 그의 무덤을 직경 백여보가 되는 큰 무덤을 만들었고, 노비 백여 명을 순장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173년 왜(倭) 여왕 히미코가 신라에 사자를 보냈다고 한다. 위지왜인전에는 비미호의 죽음이 기록되어있다. 기록은 정시 8년(247년)에 사마대국과 구노국(狗奴國)의 분쟁이 일어났고, 이 분쟁이 사마일국의 사신을 통해 조위에 알려졌다는 기록이다. 히미코의 죽은 뒤에 연도의 기재는 되어 있지 않고, 그 후도 연도의 기재가 없는 채로, 1년에 걸쳐 일어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양의 기록이 있어, 몇 년에 걸친 장기적인 기록일 가능성이 높지만, 히미코의 사망연도가 정시 8년(247년) 혹은 정시 9년(248년)인지(혹은 그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나뉘고 있다. 또 정시 8년(247년)의 기록은 정시 원년(240년)에 제준(梯儁)을 파견한 이후 왜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보고한 것으로, 히미코의 죽음도 240년부터 246년까지 구노국과의 분쟁이 일어난 즈음으로 추정된다. 「以死」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통설에서는 「以」에 무언가 깊은 뜻은 없다고 보아 「사망하고」 즉 「사망해서」 무덤이 조성되었다, 내지는 「곧 사망하였다」고 풀이해서 서술 직전의 「난승미가 조서와 황당을 받아 격문으로 고유하였다」(拜假難升米 爲檄告諭之)는 시점에서 비미호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라고 해석하였다. 이 경우 비미호의 사인은 알 수 없다. 한편으로 「이에 사망하여」 즉 「그래서 죽었다」고 읽어서 이에 앞서 서술된 비미궁호(卑弥弓呼)와의 불화, 구노국과의 분쟁 또는 난승미의 고유가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구노국의 남자 왕 비미궁호에게 비미호는 살해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천문학자 사이토 구니하루(斎藤国治)는 248년 9월 5일 아침(일본 시간 기준. 세계시로는 9월 4일)에 북부 규슈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다는 계산을 얻어내고 이것이 히미코의 죽음이 관계가 있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다치바나 다카아키(橘高章)나 야스모토 비텐(安本美典)은 247년 3월 24일 저녁에도 북부 규슈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음을 지적하여, 247년의 일식이 원인으로 비미호가 살해당했고, 일식이 원인이 되어 남자 국왕을 대신하여 일여가 즉위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설은 사마대국 북부 규슈 소재설이나 비미호=아마테라스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다만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는 어느 일식도 사마대국의 비정지인 규슈나 기나이의 일식현상은 부분일식이며, 부분일식은 반드시 드문 현상은 아니고, 일식과 비미호의 죽음의 관련성은 의문시되고 있다. 비미호가 죽었던 시기는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훈 시대로 가는 시기로, 사마대국 기나이 소재설은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 궁내청에서는 야마토토토히모모소히메노미코토(倭迹迹日百襲媛命)의 무덤이라고 한다)이 비미호의 무덤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규슈 설은 히라바루 유적(平原遺跡)을 비미호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혈통을 만세일계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히미코와 그의 일족에 의한 일본 통치 기록을 삭제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증거로 일본서기에서는 제10대 스진 천황에서부터 제16대 닌토쿠 천황까지 각각의 천황들이 모두 수십년(40년~99년)의 치세와 100살이 넘는 수명(100살~140살)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히미코 일족의 120년에서 200년 이상의 통치를 삭제하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주갑인상)으로 행해진 것이며 당시 고대 일본의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터무니없는 기록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뉴턴식 망원경 ] 뉴턴 망원경은 반사 굴절 망원경의 한 종류로, 그 기본적인 구조는 광선을 받아 초점을 잡아주는 굴절거울과 이 초점을 다시 꺾어 주는 반사경으로 되어 있다.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 경에 의해 발명되었다. 풍월주 풍월주(風月主)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도의 수장이다. 후에 화랑도의 파가 갈라지며 국선과 풍월주가 각 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540년 처음 설치되어 681년 폐지되었으며, 32명의 화랑에게 승계되었다. 풍월주는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등의 사서에도 나타나지만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진흥왕은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몇달 후 화랑을 신설하면서 《화랑세기》에 7대 풍월주로 기록된 설원랑을 초대 국선으로 삼았다하여 《화랑세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아테네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이며, 아티키 주의 중심 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도시이며, 역사 시대가 개막한 지 3,400년에 이른다. 대략 기원전 11세기 ~ 7세기부터 인간이 정착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고대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으며, 고대 아테네의 부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아테네와 연합을 시작한 피레아스 항구를 통해서 유입됐다. 아테네 행정 구역내 인구는 664,046명(2011년)이며, 면적은 39 평방 킬로미터이다. 아테네의 도시 경계 바깥을 아우른 도시권 전체 인구는 3,130,841 명(2001년)이며, 면적은 412 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 유럽연합 통계국에 따르면, 아테네 대도시권역(LUZ, Larger Urban Zone)은 유럽 연합 내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다고 한다.(3,753,783명, 2011년) 혼잡한 국제 대도시인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 금융, 산업,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세계 도시 중 알파-급 도시로 등재되어 있다. 이 도시는 유럽 연합의 주요 사업 중심지로 급속히 거듭나고 있다. UBS의 어느 연구에서 2008년 아테네는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에서 32위로 부유한 도시이며, 25위로 물가가 비싼 도시로 선정되었다. 고전기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지였던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도 아테네에 있었다. 이 도시는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 고대 세계의 쟁쟁한 위인들을 배출하였다. 또 기원전 5세기와 4세기경 아테네가 이룬 문화적ㆍ정치적 업적이 당시 유럽 대륙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끼쳐, 이 도시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아테네에는 고전기의 유산이 아직 잘 남아있다. 수많은 고대 기념물과 예술 작품이 남아 있으며, 서양 초기 문명의 기념비적 건물인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있다. 그리고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다양한 유적이 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유적도 약간 남아있어 이 도시의 유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 독립 국가가 세워진 18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대에 들어선 랜드마크도 있는데, 그리스 의회 의사당, 그리스 국립 도서관, 아테네 대학교, 아테네 학회가 있다. 또 아테네에서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가 열렸으며, 108년 뒤에 다시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명 아테네 명칭은 아테나이(Ἀθῆναι)로 아테나 여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 도시의 명칭은 테바이, 뮈케나이, 델포이처럼 문법상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아테나이는 아테나(Ἀθῆνα)의 복수형이다. 19세기에 아테나이(Αθήναι) 표기가 아테네 시의 공식 명칭으로 다시 정해졌다. 그리스 정부가 1970년대 카타레부사 그리스어의 사용을 포기하면서 아티나(Αθήνα)가 아테네의 공식 명칭이 된다. 적어도 3,000년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원전 천 년에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후 약 500여년간 아테네만의 문화 유적을 토대로 아테네는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중세 시대에 아테네는 쇠락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부흥으로 다시금 영화를 누린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이탈리아와의 교역을 토대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오랜 침체를 겪게 된다. 아테네는 19세기 그리스 공화국의 수도가 되면서 2천 명에 지나지 않던 마을이 다시 부흥세를 누려 1870년에는 4만 5천명이 거주하였고, 1896년 제1회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1920년대 그리스-터키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이동하면서 아테네 시의 인구가 급작스럽게 늘어난다. 1930년대 초에는 70만명의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인구 성장은 1950년대와 1960년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에 아테네는 엄청난 인구 팽창을 겪어 도시 전반이 점차적인 성장을 겪는다. 1980년대 자동차와 공장에서 방출되는 매연이 크게 증가하고 인구 과밀 등으로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아테네 시는 1990년대 본격적인 오염 규제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의 인프라가 증대되면서 오염이 상당 수준 경감되었으며 대기 질 향상을 토대로 훨씬 기능적이고 다기능적인 도시로 아테네가 탈바꿈하게 된다. 리카베투스 산이 아테네 중앙에 솟아있다. 아테네는 흔히 "아티키 분지"라고 하는 아티키의 중앙 평야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분지는 네 산으로 경계를 이루는데, 아테네 시 기준으로 서쪽에는 에갈레오 산이, 북쪽에는 파르니타 산맥, 북동쪽에는 펜텔리 산이, 동쪽에는 이메토스산이 있다. 넷 중 파르니타 산맥이 가장 높으며(1,453m),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길이 잘 닦여 있으며 계곡, 샘과 여울, 동굴이 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많은 도시 사람들이 네 산지에서 등산이나 산악 자전거를 즐긴다. 남서쪽으로는 사로니코스 만이 있다. 아테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여서 10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비가 많이 내리는 반면, 여름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아 가끔 폭풍우나 소나기가 내리는 데 그친다. 파르니타 산맥 때문에 강한 비그늘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아테네는 다른 지중해성 지역에 비해서 매우 건조한 편이다. 산을 끼고 있는 북부 교외 지역은 겨울 동안 눈이 더 많이 내리거나 기온이 떨어지는 사뭇 다른 기후 형태를 보인다. 도심에는 안개가 무척 드물지만 이메토스 산을 끼고 있는 동쪽 지역에는 안개 현상이 더 잦다. 눈은 거의 일 년에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지난 10여년간 아테네 지역에는 몇번 폭설이 내렸다. 1987년 3월, 1992년 2월, 2002년 1월 4~6일, 2004년 2월 12~13일, 2008년 2월 16~18일에 눈보라 로 도시 지역의 상당 부분이 큰 피해를 겪기도 했다. 봄과 가을은 바깥 활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은 특히 무덥고 때로는 스모그와 공해가 발행할 수도 있다.(그러나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7월에 낮시간 평균 기온은 33.5도까지 올라가며, 남쪽 혹은 남서쪽에서 그리스 전역으로 열풍이 부는 7, 8월에는 혹서가 빈번하다. 그런 날에는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테네는 이 평원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여 장래에는 양적 성장이 어렵게 되었다. 아테네는 산악 지형 때문에 기온 역전 현상이 일어났으며 도시의 오염 문제를 관할하는 그리스 정부는 산업 공해를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1970년대에 아테네는 공해가 극심하여 그리스 문화부에서는 "에렉테이온(Έρέχθειον)의 여상주(女像柱)가 심하게 훼손되고, [파르테논 신전]]의 서쪽 면에 있는 기병의 얼굴도 지워졌다"고 보고했다. 시 당국 일련의 엄격한 규제를 실시하여 오늘날에는 공해가 점점 드문 현상이 되었다. 1990년대 그리스 당국은 광범위한 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아티키 분지의 대기 상태를 개선해왔다. 그러나 공해는 아직도 아테네의 문제거리이며, 특히 여름의 더운 날에는 더욱 그렇다. 2007년 6월 말, 아티키 지역에 산불이 크게 일어나서 파르니타 산맥 국립공원의 숲 상당 면적을 불태웠으며, 이는 아테네 연중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데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져 도시 대기 상태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지난 10여년간 폐기물 처리 노력(특히 프시탈리아 섬의 시설) 덕분에 사로니코스 만의 수질이 개선되었으며 아테네 해안의 수질은 이제 수영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2007년 1월 아테네는 아테네 교외 아노 리오시아 인근 쓰레기 매립장이 가득 차서 일시적으로 쓰레기 처리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 문제는 1월 중순 당국이 임시 매립장으로 해결한 바 있다. 아테네는 아티키 주의 아테네 현에 속해있다.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아티키 주의 주도이기도 하며 아테네 현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1834년 이래 아테네는 그리스의 공식 수도가 되었으며, 이는 1832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수도였던 나플리오를 계승한 것이었다. 아테네는 아티키 주에 속하였으며, 아티키 주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아티키 주는 4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3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최밀집지역이지만 그리스의 행정 구획 상 가장 면적이 적은 곳이기도 하다.(1,470 평방제곱킬로미터) 아테네 현은 모든 그리스의 주를 통틀어 가장 인구가 많은 곳으로서 아티키 주의 370만 인구 중 260만 명이 살고 있다. 아테네 자체가 대도시(metropolitan)이기도 하지만 아테네 지자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아테네 다음으로 가장 큰 지자체는 피레아스 현, 키클라데스 현이 있으며 이들 주는 자체적으로 선거구가 있어 시장을 선출한다. 아테네 현은 7개의 개별 구획을 두고 있다. 아테네는 원래 개별적으로 고유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지만 대도시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그 구역이 점차적으로 통합되고 확대되었다. 현재 아테네 현 중앙 정부는 55개의 지자체로 구성되어있으며 전체 745,514명의 인구로 이루어져 있다. 아테네는 세계에서 고고학이 가장 빈번하게 연구되며 조명받는 곳에 해당한다. 그리스 자국의 국가 연구소 이외에도 아테네 국립 대학교, 고고학 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고고학 연구소들이 위치해 있으며 관련 박물관도 셀 수 없이 많다. 또한 아테네는 지금까지 17개에 달하는 외국 연구자들의 고고학 워크숍을 유치했으며 12개 이상의 고고학 전용 박물관과 3개의 특별 고고학 연구소가 있다. 항시 아테네는 고고학 연구자들의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연구처가 되고 있으며 모든 고고학 분야에 있어 관련 규약을 제시해주는 장소로 통한다. 아테네는 상고시대 이래로 여행자들이 찾는 관광지였다. 과거 수십 년간 관광 인프라와 사회적 자본이 급격하게 향상됨에 따라 2004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 그리스 중앙 정부는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베니젤로스 공항(Venizelos)과 아테네 지하철을 위한 자금 마련에 착수했으며 최근에는 세계에서 6번째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수도가 되기도 했다. 환단고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이유립이 1979년에 출간한 책이다. 고대부터 전해지던 역사서 4권을 계연수가 묶은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검증 결과 위서(僞書)로 판단하여 고중세사의 사료로 취급하지 않는다. 《환단고기》는 1979년 이유립에 의해 처음 출간되었다. 저자는 계연수로 1911년에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5가지 책을 엮고 해제를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제자인 이유립에게 주고 60년 뒤에 공개하라고 하였다. 이유립은 이 책을 간직하고 있다가 1979년에 출간하였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각 책들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를 전수받았다 주장하는 이유립이 밝히는 출간 경위는 아래와 같으나, 역사학계에서는 위서이므로 이러한 출간 경위 자체가 허위라고 판단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는 환인과 환웅이 통치하였으며, 각각 7대와 18대를 전하였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사백력을 시베리아로, 천해는 바이칼 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유목문화를 바탕으로 한 연방국가이며 각각의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신시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고대 국가라고 한다. 환웅이 다스린 국가로 18대 1565년의 역년이며,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 또한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열두 아들 중 막내가 태호 복희이며, 그의 후손이 현재의 산시 성(山西省, 산서성)에 살았다고 한다. 환단고기에서는 태호 복희씨가 팔괘의 시초임을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해모수(解慕漱)는 고리국(고리, 구려, 고려, kherei, 모두 같은 말이다.) 사람으로, 고열가 단군의 지배하에 23세의 나이로 군대를 일으켰고, 8년째에 단군이 되었다. 고조선의 고열가 황제는 장수들이 더이상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자 권력을 버리고 제국을 다섯 명의 중앙 귀족, 오가의 손에 넘겼다. 해모수는 23세에 장군이 되었다. 해모수와 그의 군대는 백악산을 습격하여 차지하고 천왕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단군 해모수는 기원전 195년에 죽었으며, 태자 모수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북부여의 2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모수리(慕漱離, 기원전 195년경 ~ 기원전 170년)는 북부여의 두 번째 단군이다. 고진의 형이기도 하다. 기원전 170년, 모수리 단군은 죽고 태자 고해사가 계승하였다. 고해사(高奚斯, 기원전 170년 ~ 기원전 121년)는 북부여의 세 번째 단군으로, 고우루와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121년 고해사 단군이 죽자 태자 고우루가 북부여의 네 번째 단군이 되었다. 고우루(高於婁, 기원전 121년 ~ 기원전 86년)는 북부여의 네 번째 단군으로,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형이다. 기원전 86년 고우루는 상속자가 없이 죽고 그의 동생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군대와 고리국왕 고진을 보내어 위만 조선(기원전 195년경 ~ 기원전 108년)의 경계를 방비하였다.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의 공격으로 위만 조선이 해체되었고, 북부여는 4군을 두려는 한나라의 병력을 공격하였다. 고두막(高豆莫, 기원전 108년 ~ 기원전 60년)은 동명의 창건자이며 북부여의 5번째 단군으로, 고열가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그는 기원전 86년 해부루 단군을 몰아내고 북부여에서 권력을 잡았다. 기원전 108년 고두막은 졸본에서 동명을 창건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왕은 군대를 모아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86년에 19회의 전투 후에 한나라군을 몰아내고 방비하였다. 기원전 87년 북부여의 단군 고우루는 동명왕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을 전언을 받고 근심하다 병들어 사망하였다. 고우루의 사후 그의 동생 해부루가 왕좌에 올랐으며, 기원전 86년에는 가섭원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 그때 동명왕은 북부여의 5번째 단군이 되었다. 동명왕은 고무서를 북부여의 태자로 삼았다. 고무서(高無胥,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는 북부여의 6번째 단군이다. 고무서는 기원전 59년 고두막의 사후 왕좌에 올랐다. 기원전 58년 그의 치세 2년에 해모수의 직계 후손 고주몽이 졸본부여로 왔다. 고무서는 고주몽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과 결혼시켰다. 고주몽은 그의 자리를 이어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다. 해부루(解夫婁)는 북부여 네 번째 단군 고우루의 동생이었다. 기원전 86년 고우루가 죽자 고열가의 후손 고두막이 왕좌를 차지하고 해부루를 동쪽으로 밀어냈다. 해부루는 동해 근처의 가섭원으로 이동하였고 동부여를 창건하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한국 고유의 신앙과 구환(九桓)의 풍속, 풍습을 서술하고 있다. 마한과 변한의 역사를 적고 있다. 역대 마한, 변한의 군주가 나타난다. 단군 시대의 신교(神敎)를 설명하고 있다. 《삼일신고》와 인류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부 전해지지 않는 여러 서적의 인용문을 통하여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고진(高辰)은 북부여의 창건자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고진은 고리국의 왕이며, 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고진은 북부여의 장군으로 북부여의 4세 고우루 단군 아래에서 그는 고리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곳은 압록강 서안에 위치하였다. 그는 고령에 고리국을 다스리며 우거를 막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였고, 이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진의 증손 고주몽은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다. 고주몽은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고주몽의 생부는 고모수(高慕漱) 또는 불리지(弗離支)라고 한다. 불리지는 고진 왕의 손자였는데,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옥저후인 고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결혼하였고, 불리지가 죽자 고주몽은 웅심산(熊心山)에서 자랐으나 미움을 받아 탈출하였다. 경계를 넘어서 그는 북부여로 들어 갔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6번째 단군 고무서의 사위가 되었고, 고무서가 죽자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다. 대진국(발해)의 역사와 함께 역대 황제(왕)의 묘호와 시호, 연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위해는 《환단고기》에서 황제로 기록하지 않았고 당시에 사용된 연호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환단고기》가 처음 쓰여진 1911년 당시 대위해는 발해의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1940년에야 발해의 국왕으로 인정되었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하다. 〈대진국본기〉에서는 대진국이라는 명칭만 사용되며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대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범례에는 1911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단지 저술시기에 대해서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을 뿐이다. 광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없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또한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친일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규원사화》의 경우 일부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지만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위작이며, 거의 대부분의 역사 기록들은 그 문헌적 근거가 없고 당시의 역사 발전문화 발전 단계에도 부합되지 않고 객관적인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2006년의 남북한 공동 연구 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또한 《고시코덴()》등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이 병존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주장을 먼저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하 내용은 고준환의 《신명나는 한국사》의 진서론과 문영의 《만들어진 한국사》의 반론을 정리한 것이다.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 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잘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 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 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동원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 도 있다. 《환단고기》는 출간 경위 자체에 모순이 많다. 이러한 모순을 추적하여 《환단고기》 자체가 이유립에 의해 조작된 창작물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두드러진다고 평가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범투란주의 혹은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자민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주장이 비학술적이라 비판하였는데, 그 논거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실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판단하여 사료로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유자민은 《환단고기》에 입각한 비주류의 견해만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을 통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신뢰성을 낮추려는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일부에서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기록이라 주장하기도 하는 《환단고기》가 오히려 동북공정에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적되기도 한다. B형 간염 B형 간염은 B형 간염 바이러스(HBV)에 의한 전염성 질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기 감염동안에는 증상이 없다. 일부의 사람들은 구토, 피로, 복통 등과 같은 증상으로 인한 급격한 발병을 겪기도 한다. 흔히 이러한 증상들은 몇 주간 이어지며, 드물게 초기 감염으로 사망한다.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약 30~180일이 걸린다.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상이 없으나 간경화 및 간암이 발병할 수 있다. 이러한 합병증으로 인해 만성 질환 환자의 15~25%가 사망한다. 바이러스는 전염성 혈액이나 체액에 의해 전염된다. 출생 무렵 또는 유년기에 다른 사람의 혈액에 접촉하는 것은 B형 간염이 흔한 지역에서 B형 간염에 걸리게 되는 가장 흔한 경로이다. B형 간염이 흔치 않은 지역에서는 정맥 주사 또는 성교가 가장 흔한 전염 경로이다. 다른 위험 요인으로는 보건 의료 직종의 종사, 수혈, 투석, 감염된 사람과의 생활, 감염률이 높은 나라로의 여행 등이 있다. 1980년대에 문신과 침술에 의한 상당수의 발병 사례가 있었으나 위생의 개선으로 인해 줄어들었다. B형 간염은 손잡기, 식기의 공유, 키스, 포옹, 기침, 재채기, 모유 수유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감염은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30~60일 이후에 진단 가능하다. 진단은 일반적으로 바이러스의 일부와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에 대한 혈액 검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감염은 1982년 이후 예방접종에 의해 예방 가능해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가능하다면 출생시 예방접종을 받을 것을 권장한다. 충분한 효과를 위해서는 2~3회의 추가 접종이 필요하다. 2006년을 기준으로 약 180개국이 백신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공한다. 또한 감염 예방을 위해 수혈 전 B형 간염 검사를실시하는 것이 권장된다.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는 테노포비르(tenofovir)나 인터페론(interferon)과 같은 항바이러스제가 유용하다. 종종 간 이식이 간경변의 치료에 이용된다. 만성 질환으로 이어진 3억 4300만명을 포함하여 인구의 약 1/3이 B형 간염에 감염되었다. 2013년에는 1억 2천 9백만건의 새로운 발병 사례가 보고되었다. 이러한 B형 간염으로 매년 75만명이 사망하며, 약 30만명은 간암으로 인해 사망한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혈액, 정액에 의한 감염이 대부분이고, 침(타액)등을 통한 감염은 거의 없다. 보유자와 성접촉으로 감염되거나, 보유자의 혈액을 수혈하는 경우, 보유자와 면도기, 칫솔 등을 같이 쓰는 경우, 어머니가 자녀에게 수직감염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외의 일상생활이나 술잔 돌리기 등을 통해 감염될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없다. 예방접종을 통해 B형 간염 표면 항체(HBs Ab)가 만들어지면 평생 B형간염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없다. 특별한 예방조치가 없다면 어머니가 B형 간염 표면 항원(HBs Ag)이 양성인 경우, 출산시 약 60%의 감염 확률이 있다. 만약 어머니가 B형 간염 e 항원도 양성이면, 90%의 감염 확률이 있다. 수직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출산 12시간 이내에 면역글로불린(HBIG)과 B형간염백신을 접종한다. 이 방법으로 대부분의 B형간염 수직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데 산모가 B형 간염 e 항원이 음성이면 실제 수직감염 가능성은 0%이고 B형 간염 e 항원이 양성이면 약 10%에서 수직감염이 된다. 이러한 예방 조치 이후 총 수직감염율은 약 5%이다. 수직감염 위험은 산모의 혈중 B형간염바이러스 양(HBV DNA)과 가장 관련이 높다. 이런 이유로 임신 마지막 3개월동안 항바이러스를 써서 산모의 HBV DNA를 낮춰 수직감염 가능성을 낮추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어머니에 의해 수직감염된 경우 대부분이 B형 간염 바이러스의 보유자로 살게되고, 20대 후반-30대 후반 사이에 만성 B형 간염이 발병될 가능성이 높다. 만성 B형 간염은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때로는 피로감이나 쇠약감을 동반하며, 이외에 특별한 자각증상 없이 인체 내부의 면역반응으로 인해 혈액의 간 효소 수치가 급상승하게 된다.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간세포의 파괴가 촉진되어 간경변이나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진다. 성인이 되어 감염된 경우에는 대부분이 급성 B형 간염을 앓고 자연 치유된다. 다음은 급성 B형 간염의 증상이다. 보통은 위의 경우처럼 자연 치유되지만, 일부는 전격성 간염으로 사망하거나, 만성 간염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5~8%(약 350만명)이 B형 간염 바이러스의 보균자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B형 간염환자는 50만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인구 10만명당 B형 간염 진료인원은 2014년 643.3명에서 2016년 718.5명으로 11.7% 증가했다.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기 위해 신생아, 항원 항체가 없는 사람에게 예방백신을 접종한다. B형간염 예방백신은 총 3회 접종하는데 0, 1, 6개월 / 0, 1, 2개월 접종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일부 국가는 0, 1, 2, 12개월 접종한다) B형간염 예방백신으로 B형 간염 표면 항체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지면 이후 추가 접종은 필요 없고 평생 면역이 유지된다. B형간염 예방백신은 매우 효과가 높으며 접종 후 항체가 만들어졌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선 접종 대상자들은 접종 3개월 후 항체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항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백신의 종류를 바꿔 3회 다시 접종한다. 한국은 B형간염이 다발하는 지역으로 모든 국민이 B형간염 예방 접종의 대상이다. 다음에 해당하는 사람은 우선 접종 대상자이다. B형간염 예방백신은 엉덩이에 맞아서는 안되며 성인은 삼각근에 근육주사, 소아는 대퇴부 전외측에 근육주사 한다. B형 간염 표면 항체가 없는 사람이 B형간염바이러스에 노출되면 B형간염바이러스 면역글로불린(HBIG)를 접종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는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다. 급성B형간염은 증상에 따른 치료를 한다. 급성B형간염에서의 치료가 B형간염이 만성화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급성B형간염의 경우 증상이 심해서 입원치료가 요구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극히 소수의 환자(0.1%이하)에서 전격성 간염에 의한 간부전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때는 이식을 하지 않을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만성B형간염의 치료 목적은 단기적으로는 HBV(B형간염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여 간염을 완화하며 섬유화를 방지하는 것이다. 검사상의 지표로는 gpt(ALT)의 정상화, 혈청 HBV DNA의 감소, HBeAg의 혈청소실 혹은 혈청전환, 조직소견의 호전이다. 장기적으로는 만성B형간염 단계에서 염증을 완화시켜 간경변증, 간기능부전 혹은 간암으로 진행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간질환에 의한 사망률을 낮추고 만성 간염의 경우에는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고 간의 염증괴사를 막아 장기적으로 간경변증과 간암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인터페론, 페가시스(페그인터페론)이나 제픽스(라미부딘), 헵세라(아데포비어), 바라크루드(엔테카비어), 레보비르(클레부딘), 세비보(텔비부딘), 비리어드(테노포비어) 등을 투여한다. 만성B형간염의 치료 대상은 B형간염바이러스가 증식하고(혈중 HBV DNA가 100,000copies/mL 이상) 지속적으로 간세포의 염증괴사가 있을 때(ALT 80 이상 상승)이다. 그러나 간조직검사에서 염증이 있거나, 간경변증이 있을 때, 간암이 있을 때는 혈중 ALT가 상승하지 않아도 치료를 시작한다. 741년 742년 743년 744년 745년 746년 747년 748년 749년 750년 아랍어 아랍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어파에 속하는 언어 중 하나로, 주로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아랍권에서 사용된다. 같은 셈어족에 속하는 바빌로니아어, 아시리아어, 페니키아어는 사어가 되었으며 아람어는 시리아와 이라크, 몰타의 일부 지방에서 보존되고 있다. 표기로 아랍 문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며 굴절어에 속한다. 아랍어의 대다수의 단어는 기본 세 글자의 자음을 어근을 바탕으로 한다. 이 바탕에 모음 및 접두사, 접미사, 접요사가 부가되어, 여러 어휘를 파생하거나 활용이 이뤄진다. 이렇게 아랍어는 형태론적으로는 굴절어에 속한다. 셈어족에 속한 아랍어는 남서셈어에서 발달되었다. 남서셈어는 아라비아 반도 히자즈 지역을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했던 유목민들의 북방어와 농경 생활을 하던 예멘의 남방어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마리브 댐()이 유실되면서 예멘인들이 히자즈 등 아라비아 반도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북방어인 히자즈어()가 예멘인들을 비롯한 주변 부족들의 언어와 섞이게 되었다. 한편 꾸라이쉬 부족은 메카의 시장을 장악하였다. 아랍어의 모체인 꾸라이쉬족의 말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시를 쓰고, 후에 무함마드가 꾸란을 기록하는 데 주로 쓰이면서 표준어가 되었다. 아랍어는 터키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말레이어, 스와힐리어, 하우사어 등의 언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랜 역사와 넓은 분포를 가진 언어이지만 다른 언어에 비하면 변화가 비교적 보수적이며 매우 점진적이다. 아랍어는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의 아랍 세계에서 약 3억 명이 사용하며 UN 공용어 6개 중 하나이다. 아랍어의 통제기관으로는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위치한 아랍어 아카데미,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카이로 아랍어학원을 비롯해서, 몇 국가에 설치된 아랍어 아카데미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이 기관들은 과학 분야를 제외한 외국어의 차용을 가능한 한 제한하여, 새로운 개념에 대해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기존 아랍어 어휘로 대응하는 경향이 강하다. 후스하는 아랍에서 통용되는 공용어로 아랍 문자로 기록된다. 4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꾸란를 기록하는 데 사용된 언어인 고전 아랍어를 바탕으로 그 기원을 찾으며, 현대에 사용되는 어휘를 추가한 아랍어이다. 이슬람 세계의 출현 및 확대와 함께 북아프리카에 전파되어 현재에 이른다. 아랍 세계의 공용어로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는 아랍어는 후스하이다. 꾸란은 고전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무함마드가 살았던 헤자즈의 아랍어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꾸란에 따르면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언어가 아랍어이므로 무슬림은 아랍어를 알라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꾸란은 아랍어로 음운에 맞춰 낭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알라가 내린 언어가 아랍어로 적혀진 꾸란 그 자체인 이유로 이슬람교의 원칙에 따라 꾸란의 번역은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꾸란 학습 및 암송은 경건한 이슬람 교도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로 취급되며 이를 공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아랍어를 읽어야 하기에 아랍어가 공용어가 아닌 지역(터키, 인도, 동남 아시아)의 이슬람권에서도 지식층 사이의 공용어로 통용된다. 이 꾸란을 표기하는데 이용된 문어는 근대에 이르러 간략한 형태로 정련되어 근대 이후 발생한 새로운 개념을 위한 어휘가 대량으로 추가되어 현대에서 사용되는 표준 아랍어 후스하가 성립됐다. 후스하는 아랍어에서 공적인 면을 대표하는 언어로 종교 관련 외에, 학술, 서적, 잡지, 신문 등의 문장에서 뿐만 아니라 공적인 장에서의 회화나 TV 뉴스 등 격식이 필요한 곳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학교에서 배우는 아랍어는 후스하다. 한편, 일상 생활에서 대화에 사용되는 아랍어는, 암미야이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각국의 각 지역에서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아랍어의 방언이다. 현대의 구어로서의 아랍어는, 국가 및 지역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분화되어 있다. 이들 방언은 말하기 언어로 사용되며, 공식적이지 않은 서신 등에서는 이를 문자화시켜 표현하며, 대중 대상의 소설이나 연극, 시가 등에서 지역 구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크게 걸프 방언, 힌쟈즈 방언, 이라크 방언, 시리아 방언, 레바논 방언, 팔레스티나 방언, 이집트 방언, 수단 방언, 마그리브 방언, 핫사니야 방언 등으로 나뉘며, 각 지역 안에서도 세분화된 방언들이 존재한다. 지역 뿐만 아니라, 생활 형태에 따라 지역을 넘어 유목민 방언, 농촌 방언, 도시 방언 등으로도 나뉠 수 있다. 현대 아랍권 세계에 있어서 후스하와 암미야의 관계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지배했던 시기의 라틴어와 로망스어군의 관계, 즉 후자가 전자로부터 파생되어, 여러 변종의 언어로 갈라져나가는 점에서 유사하다 볼 수 있다. 라틴어가 일상생활에서는 사어가 되었으나, 공적 대회 언어, 표기용 언어 등으로 통용됨에 반해, 로망스어군의 언어들은 실생활의 사용에 비해 표기되는 경향은 적었다는 점을 볼때 그러하다. 아랍어의 여러 방언 중 이집트 방언, 시리아 방언, 레바논 방언 등은 매스미디어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유로 아랍권에서 통용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같은 아랍어권이라 하더라도 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는 각자의 방언으로는 회화에는 지장이 있을 수 있다. 문어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이, 읽고 쓰거나 공적인 연설, 보도 등에서 사용되므로, 아랍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이 현지에서 무리 없이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방언을 습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기본적인 문어의 학습 외에 별도의 구어를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랍어의 표기는, 통상 아랍 문자를 이용한다. 후스하에는 아랍어 특유의 정서법이 규정되어 있으나, 방언(암미야)을 표기할 때도 이 아랍 문자를 이용한다. 몰타어에서는 라틴 문자 표기의 정서법이 사용된다. 아랍 문자의 특징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쿠르드어, 파슈토어 등, 아랍어가 아니나 이슬람교의 영향권인 지역에서도 아랍 문자를 표기 수단으로 삼는 언어가 존재한다. 이 경우, 표준 아랍어 음운에는 존재하지 않는 각 언어의 음 표기를 위해, 일부 자음 문자의 변형된 형태의 문자가 이용되기도 한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는 국가 중, 국민의 대다수가 아랍인인 국가는, 공용어로 후스하, 일상 언어로는 안미야를 사용한다. 레바논의 경우, 마론파 등 그리스도교도도 다수 존재하나, 민족적으로는 아랍인이며, 대다수가 후스하와 레바논 방언의 아랍어를 사용한다. 알제리의 경우, 국민 대다수가 아랍어를 사용하나, 카빌어등 베르베르어 군의 언어 사용자도 있다. 이라크의 경우, 쿠르드인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쿠르드어도 사용되나, 아랍어 사용자가 대다수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과거 영국의 위임통치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영어, 아랍어 및 히브리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아랍어와 히브리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유다계 이스라엘인의 아동 및 학생을 대상으로 한 초중등교육에서는, 공용어인 아랍어 대신 영어 교육을 중시하는 경향이, 아랍계 이스라엘인의 초중등교육에서는 아랍어 및 아랍문학 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벤야민 네타냐후 정권이 발족하며 2017년 5월 7일에 아랍어를 공용어에서 빼고 히브리어 만을 공용어로 하는 각의 결정이 결행되었다. 모리타니아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무어인이 다수를 점하며, 아랍어가 아랍어를 공용어로 되어 있으나, 남부를 중심으로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흑인이 많고, 구 프랑스령인 관계로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강함. 수단도 아랍계가 다수를 점하나, 서부의 후르인 등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도 다수 존재하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공용어는 아랍어와 영어. 말타의 공용어인 몰타어는 현대 아랍어의 변종으로 분류된다. 유럽권의 언어, 특히 이탈리아어에서 차용된 단어가 많으며, 아랍 문자가 아닌 라틴 문자로 표기된다.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교리의 특성상 아랍어로 기술된 꾸란이 유일한 교전으로 되어 있는 관계로, 이슬람교의 예배에서는 반드시 아랍어로 꾸란을 낭송하도록 되어 있다. 아랍어 외의 꾸란은 인정되지 않으나, 꾸란의 번역본이 주해서로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아랍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아도 이슬람교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꾸란의 내용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랍어의 지식이 요구되는 관계로, 이슬람교가 퍼진 국가에는 아랍어의 학습이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소수 민족으로 아랍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아랍어가 사용된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이란의 경우, 남서부에 있는 후제스탄 주에는 아랍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어, 아랍어가 통용된다. 아랍어는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화자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지역이 중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밀집해있는 관계로, 언어로서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아랍어는 여러 국제기관에서 공용어로 채택되어 있다. 유엔은 1973년 아랍어를 공식 언어로 추가하여, 현재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스페인어를 포함 6개 공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랍 연맹은 아랍권 국가의 협력기관으로, 유일한 공용어로 아랍어를 사용한다. 이슬람 협력 기구는 영어, 프랑스어와 함께 아랍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아프리카 연합 또한, 아랍어 사용 인구가 많은 국가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스와힐리어와 함께 아랍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지 《삼국지》(三國志)는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중국 삼국시대의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후한 말기부터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다. 본래의 표제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인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삼국지는 '사기', '한서'의 체계를 따라 기전체(紀傳體)로 구성되어 있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쓰여진 역사서이다. 진수는 황제들의 전기인 본기를 위나라의 황제들로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무제(武帝, 조조), 명제(明帝, 조예) 등의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여 기술하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는 진수가 벼슬을 하던 진나라가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나라이기에 위를 정통으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진수의 이러한 사관은 훗날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나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이 촉을 정통으로 보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위/촉한정통론에 대해서는 정통론을 참조하라.) 《삼국지주》(三國志注) 또는 《배송지주》(裴松之注)는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가 역사학자 배송지에게 명하여 삼국지에 주를 단 것으로 “배주”(裴注)라고도 하고 원문과 함께 칭할 때는 “수지배주”(壽志裴注)라고도 한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한 것이다. 본래 주(注)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약 200여 권이 넘는 여러 사서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 자, 주(註)가 54만 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본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 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 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 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 자 주가 약 4만 2천 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 자 주가 약 6만 5천 자이다. 서술이 간결하고 분명하여 명저라 일컬어져 왔다. 또한 위서의 마지막 30권인 위서 동이전(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순서별로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 왜인 등의 동양 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혼란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어려워 많은 사료를 참고하지 못하였다. 진수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왕침(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전(夫餘傳)은 총 930자(字)이며,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한 최초의 열전(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衣食)·의례(儀禮)·풍속·산물(産物) 등 부여의 생활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현도군·후한(後漢)·공손씨(公孫氏) 등 중국의 제(諸) 세력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 《위략(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진수가 참고한《위략(魏略)》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위략(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魏略)》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부여전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두찬(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략(魏略)》이 멸실된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계백 계백(階伯, ? ~ 660년 8월 20일(음력 7월 9일), )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 황산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부여성충, 흥수와 함께 백제의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660년 당의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의 관등은 달솔이었다. 계백은 대장군으로서 5천 명의 결사대를 뽑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이때 계백은 "한 나라의 군사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손으로 식구들을 죽였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병사들 앞에서 월(越)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吳)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용기를 다해 싸워서 국은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세 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삼국사기》열전) 이에 신라군은 장수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을 전장에 내보냈으나 전사하고, 반굴 다음으로 선봉에 나선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官昌)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감안해 돌려보냈으나, 또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에 고무된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백제군을 공격해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실려있는 데에서 고려 시대에 이미 유교적 대의명분에 입각해 계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이르면 유학자들로부터 이미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조국을 끝까지 지키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진 영웅이자 충신이라는 추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백제 말년의 재상이었던 성충이나 흥수와 함께 계백을 백제 말기의 3충신의 한 명으로 꼽았으며, 백제의 역사를 거론하면서는 백제 멸망의 부분에서 꼭 빠지지 않고 계백의 이름을 언급했다. 신라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는 유명한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무도했고 도의에 어긋난 지나치고 잔인한 처사였다는 평가 가 있는 반면, 자기 자신도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으로 끝났으니 중도에 어긋나기는 했어도 이것만 가지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는 계백옹호론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묘안도 없으면서 마음만 앞서서 처자를 죽인 것이 결국 병사들이 겁먹고 사기(士氣)가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고 싸우기도 전에 패하게 된 것이라는 지적 에 대해서도, 자신의 집과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이나 미련을 잊어버린 뒤에야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할 수 있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들어 계백을 변호한 주장 도 존재한다. 한편 백제의 옛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지방을 유람한 조선의 시인, 묵객들은 어김없이 계백의 죽음을 기리며 그의 행적을 추모하는 시를 남기고 있다. 보통 계백을 성명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반이지만, 김정호의 《大東地志(대동지지)》 기록 을 논거로 계백은 본래 백제의 명장인 黑齿常之(흑치상지)처럼 백제 왕족의 후예였다는 견해가 에 . 열전에서 계백의 전체 성명이듯이 언급한 '계백'은 기실은 계백의 조상이 백제 왕실에서 분봉받은 지역으로서 그곳은 음운상 김부식이 事大主義(사대주의) 사관에 기초해 편찬한 《삼국사기》잡지에 기록된 당시 皆伯縣(개백현)으로 比定(비정)되며, 계백의 조상이 분봉된 지역이자 階伯氏(계백씨)의 유래가 된 곳이라는 주장이다. 성리학적 질서의 확립과 더불어 각지에 위인을 모신 사립학교의 형태를 띤 서원이 건립되면서 계백을 제향하는 서원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를 중심으로 건립되었는데, 대부분 조선 말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일부가 20세기에 들어서 재건되었다. 알려진 것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었던 황산벌 서북쪽에 해당하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기슭에는 오래전부터 계백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고분이 존재했는데, 이 고분이 확실히 계백의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민간의 전승과 고고학적 추론 외에는 아직 확실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은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고, 1989년 12월 29일에 '계백장군유적전승지(階伯將軍遺蹟傳承地)'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으며, 인근에 건립된 백제군사박물관을 중심으로 현재 성역화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수 수학에서, 정수(整數, )는 양의 정수(1, 2, 3, 4, 5, 6, 7, 8, ... , n) 및 음의 정수(-1, -2, -3, -4, -5, -6, -7, -8...) 및 0으로 이루어진 수 체계이다. 수론의 가장 기본적인 연구 대상이다. 정수 전체의 집합의 기호는 formula_1이다. 정수 체계는 (0을 포함하는) 자연수 체계 formula_2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집합 formula_3 위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최소 동치 관계를 주자.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몫집합을 정수 집합 formula_5라고 정의하자. 그 위에 덧셈과 곱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렇다면 정수의 집합 formula_1는 환을 이루며, 이를 정수환(整數環, )이라고 한다.이러한 구성 방법은 일반적으로 모노이드에서 군으로 체계를 확장할 때 생기는 그로텐디크 군의 한 형태이다. 자연수 집합과 마찬가지로, 정수 집합은 덧셈과 곱셈에 대해 닫혀 있다. 하지만 자연수 집합과 다르게, 뺄셈에도 닫혀 있다. 나눗셈에는 닫혀 있지 않다. 유리수와 정수의 관계는 대수적 수와 대수적 정수의 관계까지 일반화될 수 있다. 요그-소토스 요그-쇼토스(Yog-Sothoth), "하나로 모두인 자"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후 신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외부신이다. 일반적으로 거대한 방울들의 덩어리로 형상화된다. 요그-쇼토스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나 현재는 우주의 밖에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화의 요그-쇼토스는 하나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자 모든 것으로서 존재하는 하나이며, 단지 시간-공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상과 수학을 넘어서는 존재의 궁극적 본질과 맞닿아 있다. 지구의 많은 사교들이 요그-쇼토스를 다양한 이름 아래 섬기었으며 유고스의 균사체 미-고들 또한 "넘어선 자"라는 이름으로 요그-쇼토스를 숭배하였다. 요그-쇼토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을 본다. 이 신의 환심을 사는 것은 여러 지혜로 보답받을 수 있으나, 크툴후 신화의 모든 신적 존재들이 그러하듯 이 신을 보거나, 이 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부 작가들은 요그-쇼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로 인간 제물이나 영원한 복종 등을 제시하였다. 요그-쇼토스는 〈던위치의 공포〉(1929년)에 언급된 신비스런 옛것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옛것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요그-쇼토스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옛것들과 요그-쇼토스가 일종의 협력관계라는 것은 요그-쇼토스의 인간 아들 윌버 화틀리가 옛것들을 소환하여 윌버의 타락한 쌍둥이 동생을 지배하도록 시키려 했던 점에서 짐작된다. 단편 〈찰스 덱스터 워드의 경우〉에서 요그-쇼토스의 이름은 망자를 되살리는 주문의 일부로 등장한다: 벌휴 이사금 벌휴 이사금(伐休泥師今, ?~196년, 184년~196년)은 신라의 제9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7번째 왕이다.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只珍內禮) 부인이다.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박씨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갔다. 탈해이사금의 아들인 각간 석구추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하니 이는 신라 사회에 2세기 말까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시사한다. 185년 음력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해 소문국(召文國)을 치게 하였다. 188년 음력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 막게 하였다. 이듬해인 189년 음력 7월 구도가 백제군을 상대로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190년 음력 8월 백제가 다시 공격해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패배하니, 이사금은 구도의 벼슬을 깎고 설지(薛支)를 그 자리에 앉혔다. 193년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를 피해 대규모로 신라에 도망왔다. 아들 골정은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의 아버지였고, 내해 이사금의 장인이었다. 다른 아들 이매는 내해 이사금의 아버지였다. 또한 일설에는 대서지에게 출가했으며 실성왕의 모후가 되는 이리부인(伊利夫人)이 그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그밖에 석등보(昔登保) 또는 석등야(昔登也)는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세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내해 이사금 내해 이사금(奈解 泥師今, ? ~230년, 196년~230년)은 신라의 제10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8번째 왕이다. 다른 이름은 엽(燁)이다.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내례(內禮)부인이며, 비는 석씨로 조분 이사금의 누이이다. 벌휴 이사금의 태자인 석골정(昔骨正)과 석이매(昔伊買)가 먼저 죽고 석골정(昔骨正)의 아들(조분 이사금)이 어려 이매의 아들 내해가 왕이 되었다. 성은 석씨(昔氏) 아버지는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의 아들인 이매(伊買)이고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다. 사후 아버지 이매를 헌성대왕(憲聖大王)에 추존하였다 한다. 벌휴 이사금의 태자인 석골정(昔骨正)과 둘째 아들 석이매가 일찍 죽고 적손인 석골정의 아들 조분(助賁)이 어렸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 비(妃)는 조분 이사금의 누이 석씨로서 사촌간에 근친결혼을 했다. 자녀로는 태자 우로(于老)와 병마사(兵馬事)를 관장했던 이벌찬 이음(利音) 조분왕의 비가 된 딸 아이혜(阿爾兮)가 있다. 재위중 자주 백제의 침입을 받았다. 214년 백제군이 요차성(腰車城)을 공격해오자 반격에 나서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218년 백제가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해오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했다. 이밖에 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했다. 미-고 미-고(Mi-Go), 혹은 "유고스로부터의 균사체"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후 신화에 등장하는 외계의 종족이다. 미-고는 인간 크기의 갑각류, 균사체 생명체로, 우주 멀리 항행이 가능한 날개를 갖고 있다. 이들은 태양계 외부에서 기원했으나 현재는 명왕성(신화상 지명으로 유고스)을 차지해 있다. 미-고는 지구에서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5피트 크기의 갑각류 몸통의 분절된 사지 외에 여러 촉수가 달려 있어 지느러미나 날개처럼 보인다. 이 외에 한 쌍의 박쥐 날개와 같은 것이 달려 있어 우주의 에테르를 따라 날 수 있다. 이 날개는 지구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미-고는 자원의 채취를 위해 종종 지구에 들르며 인간을 채집하는데, 인간의 두개골에서 뇌를 꺼내 "뇌 실린더"라 불리는 장치에 담아 유고스까지 데려간다. 뇌는 이 장치를 통해 말하고, 보고, 들을 수 있게 된다. 미-고는 요그-쇼토스, 니알랏호텝, 슙-니구라스 및 유고스의 구덩이에 거주하는 크샤크슈클루스 등을 숭배하나, 그들은 종교적인 열정보다는 과학적 탐구에 더 관심이 많다. 미-고의 도덕 체계는 인간의 것과 판이하게 달라 인간에게는 사악하게 비칠 수 있다. 벨리사리우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장군이다. 일리리아(현재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젊어서부터 군에 입대했다. 530년 다라의 전투에서 사산 제국의 군대와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의 전투에서 완패,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었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교가 되었다. 533년 아프리카로 항해해 레프키스 마그나 근처에 상륙, 당시 반달족이 수도로 하고 있던 카르타고로 향했다. 반달왕국의 왕 겔리메르를 맞은 벨리사리우스의 비잔틴군은 카르타고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드 데키미움의 전투를 벌여 완패했다. 그러나 겔리메르의 조카가 전투에서 죽어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벨리사리우스는 티카메론의 전투에서 반달군을 격파, 534년 항복하게 만들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나르세스를 동고트 왕국전선에서 해임하고 벨리사리우스를 투입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했다.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수복하고 540년 동고트 수도인 라벤나를 점령했다. 동고트족을 비잔틴 황제는 믿지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괜찮다고 여겨 그에게 왕국 절반을 주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왕관을 받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분노를 샀다. 수도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재투입되었으며, 빼앗긴 시리아를 놓고 페르시아와 한동안 교전을 벌이다가 545년 금 5천 파운드를 전쟁 보상금으로 페르시아에 넘겨주는 대신 페르시아군이 로마령을 5년간 침공하지 않는 것으로 강화협정을 맺었다. 541년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그가 옹립한 동고트 왕 일디바드는 암살되었고 토틸라가 왕이 되어 있었으며, 토틸라의 동고트군은 비잔틴군을 무섭게 몰아내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에 대해 공세로 들어갔으나, 머지않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 559년 벨리사리우스는 도나우 강을 건넌 불가르족 전선에 투입되어 그의 장수로서 경력의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562년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횡령 혐의로 고소되어 징역이 선고되었으나, 현대 연구자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가 꾸며낸 모함이었다. 황제는 곧 벨리사리우스를 풀어주었다. 565년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갈사국 갈사국(曷思國, 22년~68년)은 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사국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소국으로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이 22년에 세운 나라이다. 22년 2월에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여가 혼란에 빠지자 갈사왕은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따르는 무리 100여 인과 함께 피신하였다. 4월 경에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을 때,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인 뒤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 갈사왕의 손녀인 해씨부인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 호동을 낳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는 친선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갈사국은 고구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 대신 안전을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 갈사왕의 아들의 이름이나 재위년은 전하지 않으며, 손자인 도두(都頭)가 즉위한 뒤 68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 태조대왕에게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로써 갈사국은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갈사국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갈사왕이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국왕을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압록강 북쪽 또는 발해만 일대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갈사'라는 말은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으로서,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 지역을 말한다고 하면서,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로 일컬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갈사국의 위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이 된다. 갈사국은 3대 48년간 지속되었으며, 역대 국왕의 재위 기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향가 향가(鄕歌, )는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로서 보통 향찰로 기록되었다. 보통 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것을 말한다. 승려, 화랑을 포함한 다양한 작자층에 의해 불교적 기원, 정치적 이념, 민요 또는 주술적 성격이 내용을 담은 작품들. 향가의 구조적 형태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나뉘며, 한자로 지은 노래도 있고, 이두로 지어진 노래도 있다. 삼국시대 때는 4구체 향가가 많았으나, 남북국 시대 전기와 고려 초기로 가면서 8구체와 10구체 향가들이 다양하게 지어졌다. 다양한 내용이 있으며, 노동요나 민요로 추측되는 풍요, 귀신이나 액운을 막기 위한 주요(呪謠)로 부르기도 하며, 또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모두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한 것으로 이두(吏讀)와는 달리, 각 수의 가사 전체를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순수하고도 고유한 고대 한국어인 것이 주목할 만하다. 향가란 명칭은 삼국시대에는 ‘우리나라 노래’란 뜻이다. 우적조 미루어 보아, 당시 중국을 당(唐)이라 한 데 대해 신라를 향(鄕)이라 일컬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써 생각할 때 중국의 사장(詞章)에 대해 신라의 노래를 향가라 하였을 것이다. 일찍이 이 노래의 부분적인 어학적 주석은 일본인들이 시도하다가 25수 전반에 걸친 주해는 오구라 신페이가 처음으로 이루었다. 그 뒤로 양주동이 더 나은 해독을 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지헌영(池憲英)을 비롯한 이탁(李鐸), 김준영(金俊榮), 이숭녕(李崇寧), 김동욱(金東旭), 김선기, 서재극, 홍기문, 정렬모, 김완진 등이 계속 연구·발표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수많은 향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로, 도합 25수 뿐이며, 이 중 《균여전》에 수록된 향가는 고려 초기의 균여대사의 작품으로 10구체의 불교 예찬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불교에 관련된 설화를 수집하고 기록한 여러 편에 실려 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 시기로 연대상 가장 오래된 향가에 해당한다. 설화에는 서동(백제 무왕의 아명)이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노래라고 나와 있다. 혜성가(彗星歌)는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10구체 향가이며, 혜성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으므로 이 노래로써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한다. 풍요(風謠)는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양지(良志)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 때 부역 온 성내 남녀가 불렀다는 민요이며, 일명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라고도 한다. 문무왕 때 또는 효소왕 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광덕(廣德)의 처가 지은 10구체 향가라고 하는데, 광덕이 죽자 그의 친구 엄장(嚴莊)이 그 처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설화만 전해 온다. 노래의 원문에 “願往生”이란 말이 겹쳐서 나와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에 가고 싶다”라는 말로 풀이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락노래”라고 한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명확한 제목은 전하지 않는다. 신라 효소왕 때에 만들어진 8구체 향가로서, 화랑가이다. 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곡(得烏谷, 또는 득오랑)이, 그의 스승 죽지랑을 사모하고 찬양하여 지은 8구체 향가로서, 노래의 주인공은 화랑 죽지랑이므로 노래의 이름이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이며, 일명 득오곡모랑가(得烏谷慕郞歌)라고도 부른다. 죽지랑은 김유신(金庾信)의 부원수로서 삼국 통일에 공이 컸다. 득오곡은 그의 낭도로서 풍류와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 노래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 신라 성덕왕 때에 지어진 4구체 향가이다. 《삼국유사》에는 “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철쭉꽃을 꺾어다 드릴 때에 부른 노래”라고 하여 “노인헌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헌화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수로(水路)부인”이 한국어로 지은 이름을 한자로 뜻을 옮겨 만든 것인지, 바다를 끼고 곧 물을 따라가는 부인이라는 뜻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원가(怨歌)는 신라 효성왕 때 신충(信忠)이 지은 8구체 향가로서, 연군가(戀君歌)이다. 효성왕이 등극 전 신충과 잣나무를 두고 후일을 언약하였으나, 등극 후 그 일을 잊으매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그 나무가 말랐다. 《삼국유사》 권5에 신라 경덕왕 때(760년)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4구체 향가이다. 해 2개가 나란히 나타나매 왕이 월명사로 하여금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어 재앙을 물리치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스님, 표훈대덕 편”에 실려 있다. 경덕왕이 충담 스님에게 “나를 위하여 편안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노래를 지으라.”라고 명령을 내려서 지은 노래이다. 10구체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천의 〈월명〉(月明)은 〈제망매가〉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품으로, 나뭇잎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충담사가 화랑 기파랑의 인품을 흠모하여 쓴 10구체 향가이다. 제망매가와 함께 현전하는 향가 가운데, 문학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는 경덕왕 때에 희명(希明)이 지은 향가로, 천수관음가(千手觀音歌)·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권5 “도적을 만나다”에 이 노래를 짓게 된 이유 등이 실려 있으며, 이 노래의 내용을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 편이 있다. 8세기 중엽에 지어진 노래이다.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고려 가요 중에도 처용가가 악학궤범에도 전해져 후에 향가 해독에 도움을 주었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초 균여대사(923~973)가 지은 11수의 10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 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 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고려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화랑세기 필사본 중 6세 세종 장에 미실이 사다함이 출정할 때 지었다는 풍랑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은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위작으로 취급하는 견해가 우세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고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향가로 보는 이도 있다. 그 밖에 경주박물관 미술관 공사부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기록된 내용을 향가로 보는 논문이 출간된 바 있다. 이 향가로 추정되는 글에는 '만신가'(万身歌)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경 (동음이의) 동경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동경(東京)은 동쪽 서울(수도)이라는 뜻의 한자어이다. 옛 이름으로 "동경"(東京)을 쓴 도시가 아시아에 여럿 있다. 그밖에 동경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알루미늄 알루미늄(←, , ←) 또는 반소(礬素←)는 전이후 금속에 속하는 화학 원소로 기호는 Al(←)이고 원자 번호는 13이다. 은백색의 부드러운 금속으로 전성(展性), 연성(延性)이 풍부하며 박(箔)이나 철사로 만들 수 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알루미늄은 98.0~99.85%의 순도이며, 주요 불순물은 규소와 철이다. 성질은 순도에 따라 다른데 전기의 양도체로, 비저항은 구리의 약 1.6배이다. 또 비중으로 보아 전형적인 경금속이다. 공기 중에 방치하면 산화물의 박막을 생성하여 광택을 잃지만 내부까지 침식되지는 않는다. 공기 중에서 녹는점 가까이 가열하면 흰 빛을 내며 연소하여 산화 알루미늄이 된다. 이 때 높은 온도가 되므로 분말을 써서 금속의 야금이나 용접을 한다. 질소, 황, 탄소 등과 직접 화합하여 질소화물, 황화물, 탄화물이 되며, 할로겐과도 작용하여 염화물, 브롬화물 등을 만든다. 산에 녹아 염을 만들지만 진한 질산에는 잘 침식되지 않는다. 알칼리에 녹아 수소를 발생하여 알루민산 염이 된다. 가볍고 튼튼하며 산화에 강해 산업 전반에 널리 쓰인다. 특히 항공우주 분야와 교통, 건축 분야에서 많이 쓰인다. 산화물인 보크사이트에서 전기 분해로 얻어지며, 재료로 쓰이는 주요한 합금으로는 두랄루민 등을 꼽을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알루미늄이 다량 검출되어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 된다는 논란이 있다.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알루미늄의 동위 원소로는 Al이 100% 존재하고 있으며 핵융합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원소이다. Na + He → Al 자연계에서 미량으로 존재하는 Al은 우주 광선을 통해 생성되며 반감기는 71만 7천 년이다. 생성과정은 우주에서 강한 우주 광선으로 인해 속도가 매우 빠른 양성자가 날아와 Mg의 중성자 한개를 방출하고 대신 양성자 한개가 들어가서 결합되면서 생성된다. 지금은 우주선으로 인해 미량 생성되므로 Al의 10 과거 태양계 역사 초기에 매우 풍부하게 존재했다. N + He → F F + He → Na Na + He → Al 왜냐하면 Al은 항성의 핵융합 과정을 통하여 생성된 원소이며 현재 지구상에 매우 풍부하게 존재하는 Mg에 그 증거가 있다. 과거 Al은 초창기 지구에 많이 존재했던 Fe과 함께 지구의 용암 바다의 오랜 기간 유지와 태양계 초창기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원소이다. 지금은 비록 우주 광선을 통하여 매우 미량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Al의 태양계 초창기 역사에 매우 많은 양이 존재했었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과 우리 태양계에 중원소가 풍부하다는 이유로는 초신성 폭발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로 남을 것이다. 알루미늄은 산소(Oxygen)와 규소(Silicon) 다음으로 지구상에 많은 원소이다. 하지만 알루미늄의 비교적 큰 산화성 때문에 다른 금속에 비해 늦게 정제되었다. 금속의 반응성(산화성) 나열표를 보면, 마그네슘(Mg)>알루미늄>아연(Zn) 순서에 있다. 이러한 비교적 큰 반응성 때문에, 고대에는 산화 알루미늄(AlO)등의 산화물 형태로 존재했다가 전기 분해로 인한 정제 기술이 개발되면서 18세기 때 처음으로 순수하게 분리 되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 질량의 8.2%나 차지하는 알루미늄의 풍부함과 알루미늄의 순수 정제 가능으로 인해 이후 알루미늄의 사용은 급증하게 되었으며, 전성과 연성이 뛰어나고 전기 전도성이 좋아 고압 전선의 재료로 쓰이고, 광택의 우수함, 산화 피막 형성 등의 성질 등으로 인해 창틀 재료로 많이 쓰인다. 비행기 비행기(飛行機, )는 날개와 그에 의해 발생하는 양력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하늘을 나는 능력을 지닌 항공기를 말한다. 최초의 동력 비행기는 1903년 12월 17일에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발명하였다. 비행기의 종류에는 여객기, 전투기, 무인기, 방제기 등이 있다. 양력 발생에 필수적인 추진력을 얻기 위한 엔진으로는 프로펠러 엔진, 제트 엔진, 로켓 엔진 등이 사용된다. 세계적인 여객기 제작사로는 에어버스와 보잉이 있다. 처음 비행기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와 구조를 생각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였다. 다빈치는 1505년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활공기와 동력비행기 발명자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정확하기는 했지만 지상에서만 행동하는 인간의 힘과 체중에 대한 비율을 정량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 후 영국의 과학자 조지 케일리(George Cayley)는 날개에 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적용하여 분석함으로써 날개치지 않는 비행기계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그는 1809년과 1810년에 발표한 <공중비행에 대하여(On Aerial Navigation)>라는 논문에서 항공기에 작용하는 네 가지 힘, 즉 양력(Lift), 항력(Drag), 추력(Thrust), 중량(Weight)을 기초로 처음으로 비행이론을 주장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가솔린 기관을 이용해 만든 플라이어 호가 190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에서 사상 최초로 12초 동안 36m를 동력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에어하트라는 사람이 태평양 횡단을 하다가 실종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행기의 성능이 급속도로 개선되어 1927년에 미국의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 2세가 'Spirit of Saint Louis'를 타고 뉴욕과 파리 사이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거리 5809km, 비행 시간 34시간 55분)에 성공했다. 이 부분은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만약에 더 나은 정보가 있다면 편집하여 주십시오 현재로는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기를 최초로 만들고 비행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에 반대되는 입장도 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아닌 구스타프 화이트헤드가 라이트 형제보다 앞서서 비행에 성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열 명의 증인과, 미국의 한 박물관의 계약서를 제시하였는데, 그 계약서에는 박물관이 라이트형제 이외의 다른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고 주장한다. 비행기가 공기 속을, 예컨대 매초 100m의 속도로 달리면 매초 100m의 바람이 앞에서 날개에 부딪혀 온다. 날개의 단면은 〔그림〕-1처럼 윗면은 구부러짐이 크고 아랫면은 구부러짐이 작은 것이 보통이며, 이것을 앞에서 오는 바람의 방향에 대하여 적당한 받음각이 되도록 해둔다. 받음각(angle of attack)이란 기류의 방향에 대한 날개의 기울기를 말한다. 그러면 바람, 즉 공기의 흐름은 윗면·아랫면으로 나누어지나 윗면을 통하는 흐름은 구불어짐의 영향으로 흐름의 속도가 빨라지며, 아랫면은 반대로 느리게 된다. 그 때문에 '베르누이(Bernoulli)의 정리'에 따라 윗면의 기압은 대기압보다도 낮으며, 즉 부압(負壓)으로 되어 날개를 위쪽으로 빨아올리는 작용을 한다. 또 아랫면의 기압은 대기압보다도 높아져서, 즉 정압(正壓)으로 되어 날개를 아래서부터 밀어올리는 작용을 한다. 이 부압과 정압으로 날개에는 위로 향하는 양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력은 날개면적 , 속도와 관계가 있다. 양력계수·날개면적이 일정하다면 양력은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속으로 날 때에는 받음각을 조절하여 양력계수를 작게 하고 저속으로 날 때에는 크게 하여 양력과 중력(重力)의 균형을 유지시킨다. 비행기가 일정한 속도로서 수평(水平)으로 날고 있을 때에는 양력이 비행기 전체의 무게와 같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날개 뒤의 동체(胴體) 가까이에는 플랩(flap)이 붙어 있다. 이것은 좌우 한꺼번에 내리게 되어 있다. 그 작용으로 비행기는 느린 속도에도 안전하게 날게 된다. 이륙과 착륙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즉 플랩을 내리면 양력계수가 크게 되므로 느린 속도에도 충분한 양력이 얻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 날개에서 중요한 것은 상반각(上反角)인데, 이것은 옆기움을 복원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만일 비행기가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 날개가 아래로 처지고, 왼쪽 날개는 위로 들리게 된다. 그리고 기울어진 방향(오른편)으로 옆미끄럼(side slip)을 시작한다. 그러면 기류가 생겨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려는 힘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날개의 형은 음속(音速)에 가까운 속도 이상으로 나는 비행기는 모두가 뒤로 쏠린 후퇴날개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에 기술한 충격파의 영향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형이다. 날개에 의하여 양력이 생기듯이 비행기가 어느 속도로 공기 속을 전진하면 날개뿐만 아니라, 기체의 여러 부분에 바람이 부딪혀서 비행기를 뒤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공기저항(空氣抵抗)이 생긴다. 따라서 비행기가 전진하려면 공기저항을 이겨내기 위하여 프로펠러나 제트의 추력(推力)이 필요하게 된다. 비행기가 일정한 속도로 수평으로 날고 있을 때에는 추력이 공기저항과 동일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이다. 추력이 공기저항보다 크면 그 여력으로 비행기는 상승한다. 프로펠러가 돌고 있는 뒤에 서게 되면 굉장히 센 바람을 받는다. 이것은 프로펠러가 공기에게 뒤로 향하는 속도를 주어 힘차게 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단위시간에 어느 질량의 공기에 어느 속도를 주게 되면 공기에게 운동량의 변화를 주는 것이 되므로 그 반동으로 앞으로 향하는 추력(推力)이 얻어진다. 제트엔진에서 수평꼬리날개(水平尾翼)의 양력이 작용하는 위치는 받음각(迎角)에 따라 앞뒤로 이동한다. 한편 무게 중력은 비행기의 중심에 작용하므로 날개의 양력과 중력과는 언제나 같은 점에 작용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힘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수평꼬리날개가 붙어 있다(〔그림〕-5). 만일 양력이 중력보다 앞에서 작용하고 있을 경우에는 수평꼬리날개에는 위로 향하는 힘이, 또 양력이 중심보다 뒤에서 작용하고 있을 경우는 수평꼬리날개에는 아래로 힘이 작용하고 있어야 한다. 수평꼬리날개에 작용하는 힘의 방향(상향이든 하향이든)과 크기를 가감하기에는 수평꼬리날개를 움직여 받음각을 바꾸거나 승강키의 각을 바꾸어야 한다. 수평꼬리날개의 뒷부분은 상하로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승강키(flipper)라고 한다. 승강키를 올리면 꼬리날개에 아래로 향하는 힘이 더해져서 비행기는 머리를 올린다. 반대로 승강키를 아래로 내리면 비행기는 머리를 숙인다(〔그림〕-6). 꼬리날개에는 하나의 수직꼬리날개가 있다. 이것은 비행기가 진로(進路)를 바로잡고 날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비행기는 비틀거리며 사행(蛇行)을 하게 된다. 수직꼬리날개의 뒷부분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이것을 방향키(rudder)라고 한다. 방향키를 왼쪽으로 하면 왼쪽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하면 비행기는 오른쪽으로 향한다(〔그림〕-7). 비행기에는 위에서 기술한 승강키와 방향키 이외에 보조날개(aileron)라고 하는 키가 있다. 이것은 날개의 뒷부분에 붙어 있으며, 왼쪽 보조날개를 내리면 오른쪽 보조날개가 올라가, 그로 인하여 비행기는 오른쪽으로 기운다. 그와 반대로 하게 되면 비행기는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3개의 키를 사용하여 비행기는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기울게도 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여러 가지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밖에 날개 뒷부분에는 보조날개와 나란히 동체와 가까운 곳에 플랩이 붙어 있다. 이것은 보조날개와는 달리 좌우 동시에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으며, 그 작용으로 비행기는 느린 속도에서도 안전하게 날 수 있다. 이륙(離陸)이나 착륙할 때에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되어 있다. 맨앞이 조종석으로 되어 있고 뒤에는 객실과 화물실로 되어 있다. 비행기를 비행시키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의 계기·유압장치·전기장치·라디오·레이더 등도 대부분 동체 안에 장치되어 있다. 동체부에는 사람이 타기 때문에 고공(高空)에서도 산소가 부족하지 않도록 여압장치(與壓裝置)에 의해 압축된 공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 많다(소형기는 제외). 고공에 오르면 기압도 떨어지고 산소가 부족하게 되며, 기온도 내려간다. 따라서 4,000∼5,000m 이상의 고공을 비행하는 비행기는 여압장치에 의하여 바깥의 공기를 압축하여 안으로 집어넣어 압력을 올리기도 하고, 냉난방(冷暖房)도 하고 있다. 압력은 보통 지상 2400m 상당의 0.75기압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비행기가 지면에 있을 때 이것을 지탱하는 장치로서 일반적으로 앞에 1개, 뒤에 2개가 있다. 각각 몇 개의 바퀴와 착륙할 때에 쇼크를 완충시키기 위한 올레오(유압식 완충장치:oleo shock absorber)로 되어 있다. 날고 있을 때에는 필요가 없으므로 날개나 동체 속에 접어넣어 공기저항을 감소시키는 것이 접게들이바퀴이다. 바퀴 대신으로 플라우트(flout)를 달아 물 위에서 발착하는 것이 수상기(水上機)이다. 동체가 보트형으로 되어 있고, 수상에서 발착하는 것을 비행정(飛行艇)이라고 한다. 또 다른 착륙장치로는 플랩(FLAP)과 스피드 브레이크(SPEED BRAKE)등이 있다. 비행기는 공기 속을 고속으로 운동하기 때문에 매우 심한 바람의 힘을 기체가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무작정 두꺼운 금속을 사용한다면 그만큼 무거워져서 성능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될 수 있는 한 가볍고 견고한 구조로 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여러 가지의 비행기는 알루미늄합금의 얇은 판제로서 동체와 날개의 형태를 이루고 도리와 쇠오리를 안에 넣어 튼튼하게 하고 있다. 즉 기체가 받는 하중(荷重)을 거의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외피에 의하여 지탱하고 있다. 이 구조를 모노코크 구조(Monocoque construction)라고 한다. 비행기를 설계(設計)하는 데 있어서는 그 비행기가 부닥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상정(想定)하여, 그때그때 받을 힘에 견딜 만한 강도를 유지하도록 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비행기를 사용하여 철저한 강도시험(強度試驗)을 행하여, 설계와 다름없는 결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아페투스 이아페투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산해경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대표적인 신화집 및 지리서이다. 우(禹)의 협력자 백익(伯益)의 저서라고도 전하나 이것은 가설이고, 춘추 시대부터 한대(漢代) 초기까지 걸쳐서 호기심 많은 학자들이 한 가지씩 첨가한 것인데, 남산경(南山經)에서 시작하여 해내경(海內經)으로 끝나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晋)나라(265-420)의 곽박(郭璞)이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찬하여 주(註)를 달았다. 본래 《산해경》은 인문지리지로 분류되었으나, 현대 신화학의 발전과 함께 신화집의 하나로 인식되고 연구되기도 한다. 《초사》의 <천문>과 함께 중국 신화를 기록한 귀한 고전이다. 고대 천문학의 개론서이라고 한다.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 각지의 산과 바다에 나오는 풍물을 기록하였다. 내용 중에는 상상의 생물이나 산물이 있어서 지리서라고 하지만 전설 속의 지리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고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산해경에는 중국의 역사로서 포함되기도 하는 황제, 치우, 소호, 전욱, 고신씨, 예, 요임금, 순임금이나, 조선, 청구, 천독 등의 실제로 있었던 지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은 신화적지리적백과사전적인 내용들이 있다. "동쪽 끝 탕곡(湯谷)에 부상(扶桑)의 나무가 있다. 10일간 햇빛을 받는데, 9일은 하지(下枝)에 받고 1일은 상지에 받는다."(<해외동경>)란 태양에 관한 이야기이고, "서쪽에 왕모(王母)의 산이 있어… 봉황의 알을 먹고, 감로(甘露)를 마시고"(<대황동경>)란 서왕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웠을 때, 풍우를 진압하기 위해서 왕녀인 발(魃)을 하계에 내려 보냈는데, 전후(戰後)에 발이 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전조(田祖)인 숙균(叔均)의 권유로, 발을 적수(赤水)의 북쪽으로 쫓았다"(<대황북경>)라고 한 것은, 한발(旱魃)이란 말의 유래를 설명한 것이다. 또한 곤륜(崑崙)의 위치나 약수(弱水)의 원류(源流) 등을 설명한 점은 《우공(禹貢)》과 비슷한 지리(地理) 서적이며, 순초(荀草)가 미인이 되는 약이라는 등 많은 약초를 소개하는 것은, 후세의 《본초(本草)》(한방의 약학)의 원류를 이루는 것이다. 《산해경》은 「산경(山經)」 5권, 「해경(海經)」 13권으로 모두 18권이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 (, , , 기원전 341년 사모스 – 기원전 271년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이라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이다. 에피쿠로스는 300여권의 저술활동을 했는데, 그중 몇 권의 일부만이 전해진다.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의 대부분은 후대의 추종자들이나 해설자들에 그 유래가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정(ataraxia),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無痛, aponia)의 특징이 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 제10권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의 부모 네오클레스(Neocles)와 카이레스트라테는 모두 아테네 출생이었으며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2월에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시민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에피쿠로스가 태어나기 십년 전에 에게해의 사모스 섬으로 이주했다. 그는 소년시절 플라톤 학자인 팜필루스 아래에서 4년동안 철학을 공부했다. 18살에 2년 동안 아테네에서 군인으로 복역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뒤 즉위한 페르디카스는 사모스섬의 아테네인 이주민들을 콜로폰(Colophon)으로 이주시켰다. 군 복무를 마치고 에피쿠로스는 콜로폰에서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제자인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 아래에서 공부한다. 기원전 311년과 310년에 에피쿠로스는 미틸리니에서 강연을 했으나 이에 대해 반발이 생겼고 그는 미틸리니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는 람프사쿠스(Lampsacus)에서 학교를 세웠고 기원전 306년에는 아테네에서 그의 학파가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던 ‘정원’(the Garden)을 만들었다. 그의 많은 사상이 그 이전의 철학자들,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는 결정론에 관해서는 데모크리토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그가 다른 철학자들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다른 철학자들을 비난했고, 그는 의견들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요로결석을 앓았고, 이는 그가 기원전 270년 결국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요로결석의 굉장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이도메네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들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시켜준다네. 자네에게 부탁하네.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의 아들을 잘 돌봐주게. 그 젊은이가 내게, 그리고 철학에 보여준 헌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헌신적으로 그를 추종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초기 멤버에는 Hermarchus, Idomeneus, Leonteus, 그의 아내 Themista, 풍자 작가 Colotes, 람사쿠스의 수학자 Polyaenus와 Metrodorus가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여성을 예외가 아닌 정식으로 받아들인 첫 학파였다. 이 학파는 원래 에피쿠로스의 집과 정원에서 열렸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에 있는 조각은 세네카의 편지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행복의 재료로 중요히 여겼고, 학교는 친구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라 종종 비유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계급을 매겼고, 그들이 그의 교의에 맹세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는 자연학에 있어서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여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종의 평정(아타락시아, ataraxia)을 말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널리 퍼져서 종교처럼 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 에피쿠로스는 직접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추론으로 시험된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발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의 자연과 물리에 대한 많은 생각들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을 예견했다. 그는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의 중국, 인도, 이란, 근동, 고대 그리스에서 혁명적인 생각이 나오던 시대의 중요 인물이었다. 그의 상호관계에서의 윤리에 대한 주장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최초였으며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한 사람에게의 피해의 최소와 다른 사람에게의 최대의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공식화와 구별되었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그와 동시대의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이었으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이 가졌던 여러 원칙과 같은 원칙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처럼 그 또한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조각(atoms, , 나눌수 없는)들이 빈 공간(khaos)을 떠다니는 것이라고 믿은 원자론자(atomist)였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원자들이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 없이 충돌하고 되튀며, 서로 부착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현대의 물질관과 비교해보라) 하지만 그는 그 입자들의 운동이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가끔 방향이 바뀐다고 말했다는 점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는 달랐다. 이것은 이전의 원자론에서는 필연적이었던 결정론을 피하고 세상에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과 비교해 보라) 그는 정기적으로 여성들과 노예들을 그의 학파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인에게 근본적인 인간 평등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그는 당시에 흔하던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숭배하는 전통을 깨뜨린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적 활동을 신을 생각하며 그들을 하나의 행복한 삶의 예시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전통적인 그리스 종교 활동에 참여했으나 신에 대해 거짓된 생각을 갖는 것은 잘못됐다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불사의 존재이며 축복받은 존재이고, 이 이외에 그 어떤 부가적인 가치를 신에 부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이다. 신은 우리가 흔히 믿는 것처럼 나쁜 자를 벌하고 착한 자에게 상주지 않는다. 대중들은 신이 사악한 인간에게는 악을 주고, 신을 모델로 삼아 올바른 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는 축복을 준다고 믿지만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신들은 인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불경한 자는 대중이 숭배하는 신을 부정하는 자가 아니라 신에 대해 대중이 믿는 대로 단언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든 선하고 나쁜 것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것은 기쁜 것이고, 나쁜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선함과 악함의 궁극적인 도덕적 기준이다. 만약 고통이 쾌락보다 더 큰데도 그것이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그것이 결국에는 더 큰 쾌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가 무분별한 쾌락의 추구를 지지했다고 흔히 오해받지만, 그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고통의 부재-죽음의 공포와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 고요함의 상태-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으로 괴롭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쾌락이 필요 없고, '완벽한 마음의 평화의 상태'(ataraxia)가 된다.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에피쿠로스파 의사였던 아스클레피아데(Asclepiades)와 비티니아에 의해 의학에 접목되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의약품을 처음으로 로마에 들여온 인물들 중 하나다. 아스클레피아데는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기분좋고 고통 없는 치료 방법을 도입했다. 그는 정신 질환에 관해 인도적인 치료방법을 지지했고,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가두지 않고 식이요법과 마사지 같은 자연적 치료법으로 치료하려했다. 그의 가르침은 놀라우리만치 현대적이며, 따라서 마스클레피아데는 정신과치료, 물리치료에 선구자로 평가된다. 에피쿠로스는 지나친 방임에 대하여 명료하게 경고했는데, 그것이 때때로 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현대의 ‘숙취(hangover)’에 대해 말 하는듯한 그의 한 이론에서 에피쿠로스는 너무 열정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한 사랑 대신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을 곁에 두는 것을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지켜나가는 데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로)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죽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말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생겨난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 "Non fui, fui, non sum, non curo"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 이 문장은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많은 로마제국 시대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인문주의 장례식(humanist funeral)에 종종 사용된다. "에피쿠로스의 역설"은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역설은 '신은 전능하며 신은 선한데 악은 존재한다'는 삼도논법(trilemma, 3자 택일의 궁지)이며 그 내용은 자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이 주장은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것과 비슷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에피쿠로스를 바라본 락탄티누스(Lactantius)가 그를 무신론자로 평가하는데 잘못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레이놀드(Reinhold F. Glei)에 의하면 변신론(theodicy, 신의론, 또는 호신론)은 그 학문적 기원이 에피쿠로스가 아니며, 반-에피쿠로스 학파에 있을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삼도논법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회의론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ricus)의 기록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신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현생이나 내세에서 우리를 벌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인식론에서 이성을 강조했으며, 그의 '다수 설명의 원칙(the Principle of Multiple Explanation)'("만약 여러 가지 이론이 관찰되는 데이터들과 일관된다면 그 모두를 유지하라")은 일찍이 과학철학에 기여했다. 어떤 하나의 원인만을 말해서는 충분하지 않고,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해야 중 하나가 그 원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멀리서 사람의 시체를 보았을 때 여러 가지 사인을 말해보아야 그 중에 실제로 그 죽음을 일으킨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칼에 찔려 죽었는지, 얼어 죽었는지, 병사했는지, 독사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종류의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것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와 대조적으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당시 정치 참여에 흥미를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정치 참여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에피쿠로스는 은둔을 지지했다. 그의 이러한 원칙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lathe biōsas λάθε βιώσας" (Plutarchus De latenter vivendo 1128c; Flavius Philostratus Vita Apollonii 8.28.12) 이는 "비밀스럽게 살라", "너 자신이 주목받게 하지 말고 삶을 살아라" 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부와 영광을 추구하며 살지 말고 음식, 친구들 같은 소소한 것들을 즐기면서 이름 없이 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도덕적 지침으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와 행복의 극대화를 강조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지 않으면 현명하고 바르게, 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요소들은 서양 지식 역사상 다양한 방법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재포장되고 공명되어 왔다. 원자에 대한 것(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은)과 마가레트 케빈디쉬의 자연철학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강조한 상호 이익에서의 그의 공식인 고통의 최소화와 행복의 최대화는 나중에 프랑스 혁명 때의 민주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사람은 ‘삶과 자유, 그리고 성질’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쓴 존 로크 같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로크에게, 한 사람의 몸은 그들의 성질이고, 한 사람의 성질에 대한 권리는 그 사람의 소유물과 마찬가지로 안전이 보장되어야 했다. 이 세 가지는, 에피쿠로스의 평등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의 미국인들의 자유 운동과 독립 선언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와 ‘삶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의 불가침 권리’에 나타내져 있었다. 제퍼슨은 본인을 에피쿠리안으로 생각했다. 인간오성론에서, 데이비드 흄은 에피쿠로스를 우리가 아는 신은 그의 창조가 그를 설명하는 것 보다 더 대단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신의 불가능함을 설명하는데 사용했다. 칼 마르크스의 박사 학위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다. 에피쿠로스는 처음으로 사람의 자유는 원자의 운동의 비결정론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몇몇 철학자들로 하여금 에피쿠로스의 자유는 기회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하게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에 따르면, 그는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가장 잘 알려진 글이라고 했다. 그러나 메노이케우스에 쓴 그의 편지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고 사 가지 가능한 이유를 정리했다. - “몇 가지는 필요성에 의해서 생기고, 다른 것은 기회, 나머지는 우리의 조력자에 의해서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들은 ‘우리에 의해서’ 생긴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동의했고, 칭찬과 비난이 자연적으로 그것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에피쿠로스에게, 기회는 원자가 결정론을 패배시키고 자주적으로 방을 나가려고 할 때 방향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아서 쇼펜하우어에게 고통과 죽음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들의 견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도록 한 영감을 제공했다. 그 중 하나가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니체는 그의 작품들을 쓸 때마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자신의 친화도를 인용했다. 니체는 에피쿠로스의 고통스러운 얼굴 속에서도 활기참을 가지고 있는 철학을 매우 존경했다. 하지만, 긴장으로부터 느껴지는 자유와 같은 행복의 개념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것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저명한 철학자 중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삶을 다룬 책 5권에 나오는 세 장의 편지와, 두 묶음의 인용문이다: 디오게네스의 책 5권에 있는 주요 교리와 바티칸 도서관에 필사본으로 남아있는 바티칸의 말씀이다. 그의 37권에 달하는 자연에 관한 책들이 헤르쿨라네움의 파피리의 빌라에서 발견되었다. 추가로, 다른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 쓴 것들도 그의 다른 일들에 관한 중요한 인용을 담고 있었다. 더욱이, 많은 증거와 자료가 유스너의 에피쿠라아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서 발견되었다. 서왕모 서왕모(西王母)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며, 곤륜산에 산다고 한다. 성은 양(楊), 이름은 회(回)였다고 한다. 산해경에 서왕모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목천자전에 주 목왕이 서쪽으로 가 곤륜산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나 사랑했다고 하고, 한무제내전에 한무제가 서왕모를 보고자 빌었더니 칠월 칠석에 서왕모가 아홉 빛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서왕모가 불사약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불사수라고도 하고 천도복숭아라고도 한다. 예가 항아의 바가지에 비위를 맞춰주려고 곤륜산에 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역시 한무제내전에 한무제가 불사약을 구했더니 서왕모가 동방삭이 자신의 궁궐에서 복숭아를 훔쳐갔다고 답했다 한다. 동방삭 동방 삭(東方朔, 기원전 154년 ~ 기원전 92년)은 전한 중기의 관료로, 자는 만천(曼倩)이며 평원군 염차현(厭次縣) 사람이다. 전한 무제 시기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걸출한 외모, 익살스러운 언변과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동방삭은 생존할 당시부터 이미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특히 동방삭의 해학과 말재주를 좋아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동방삭에 관련된 설화는 한국에서도 널리 유행하였다. 《한서》 권65 〈동방삭전(東方朔傳)〉에는 그의 저술로 〈답객난〉(答客難), 〈비유선생〉(非有先生), 〈봉태산〉(封泰山), 〈책화씨벽〉(責和氏璧), 〈황태자생매〉(皇太子生禖), 〈병풍〉(屛風), 〈전상백주〉(殿上柏柱), 〈평락관부렵〉(平樂觀賦獵), 〈팔언칠언〉(八言七言), 〈종공손홍차거〉(從公孫弘借車)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 외 《신이경》과 《십주기》(十洲記) 등 지괴(志怪)소설의 저자가 동방삭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가탁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동방삭이 삼천갑자를 살았는데,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죽지 않게 되었다고도 하고, 저승사자를 잘 대접했다고도 한다. 원래 별의 요정이었다는 말도 있다. 한국에서는 마고가 동방삭을 잡으려 계교를 꾸몄는데, 냇가에서 숯을 씻었다. 동방삭이 이를 보고 내가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으나 검은 숯을 씻어 희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하니 마고가 잡아갔다. 경기도 용인에서 발원하는 탄천(炭川)에는 이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탄천의 상류인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서는 전설을 중심으로 탄천문화제라는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삼천갑자동방삭을 잡기 위해 저승사자가 이곳에서 숯을 갈았다’는 전설이 깃든 탄천에서 저승사자의 숯가는 모습을 연출하고 고싸움도 벌일 예정이라는 것인데 주민들은 매 2년마다 하던 행사였지만 개발로 수년째 중단됐던 이것을 이번에 다시 살려 정례화했다. 예 (전설) 예(羿) 또는 후예(后羿)는 중국의 각종 전설에 나오는 명궁이다.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이야기가 있다. 일월조정 등의 천지창조신화 중, 영웅형 신화의 전형적 인물상과 하나라의 예란 인물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창세 무가(巫歌)에서 나타나는 인물(대별왕, 소별왕 등)과 같은 기원으로 추정된다. 《춘추좌씨전》 양공 4년조에서 위장자가 주군 진 도공에게 간언한 말에 후예 설화가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예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예는 본디 유궁씨(有窮氏)의 임금이며, 소강 즉위 전 하나라가 쇠약한 틈을 타 하후 상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활 솜씨를 믿고 정사를 보지 않고 사냥에만 빠졌으며, 어진 신하를 버리고 한착(寒浞)을 재상으로 삼았다. 한착은 예가 사냥하도록 조장하고 예의 국민들을 모두 장악하였다. 예는 권세를 잃고, 한착에게 장악당한 국민들에게 삶아죽임을 당했다. 예의 아들에게 삶은 예를 먹이니 아들은 자살했다.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활을 잘 쏘는 후예'는 이 예로 여겨진다. 예가 죽은 이유가 예를 시기한 예의 제자 봉몽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예의 제자는 복숭아나무로 몽둥이를 만들어 예를 때려죽였다고 한다. 한국 (동음이의) 한국은 다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아페투스 (위성) 이아페투스(Iapetus)는 토성의 23번째 위성다니토 성으로부터 약 356 만 km 정도 떨어져 있고, 이심률은 0.028 정도이며 지름은 약 1494.8 km 정도이다. 이는 토성의 위성 중 3번째로 큰 것이며, 공전 주기는 약 80 일이고, 자전 주기 역시 동주기 자전으로 인하여 공전 주기와 같은 80일 정도이다. 적도에는 태양계 최대의 산맥이 존재하는데 높이는 4,509m 정도이고, 최대 높이는 13 km 일 것으로 보인다. 이아페투스의 한쪽 표면은 흰 눈으로 덮여있는데 반해, 한쪽 표면은 먼지로 시커멓게 뒤덮여있다. 이아페투스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모습은 최근 카시니호("Cassini")가 이아페투스에 여러 가지 물리적 작용이 일어남으로 인한 것임을 밝혀냈다. 이아페투스는 1671년 10월 25일,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발견하였다. 이아페투스는 1671년 10월 25일에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발견하였다. 당시 이 발견은 타이탄(Titan)의 발견에 이어 두 번째 발견이었다. 이아페투스는 원래 고대 그리스 신화의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타이탄족의 이름인 '이아페토스(Ιαπετός)'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스식의 발음은 '이아페토스'이지만 영어식 발음은 '아이애피터스(aɪˈæpɨtəs)'이다. 영어에서 가끔 이아페투스를 'Japetus'로 쓰기도 한다. 이 이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존 프레더릭 윌리엄 허셜(John Frederick William Herschel)이다. 1847년, 그의 저서인 『"희망봉에서 이루어진 천문 관측 결과" ("Results of Astronomical Observations made at the Cape of Good Hope")』에서 이 이름의 제안 내용이 나와있다. 당시 이 발견은 타이탄에 이어 두 번째 발견이었다. 그러나 디오네(Dione), 테티스(Tethys), 레아(Rhea)의 발견이 뒤로 이어지자, 이아페투스는 토성 V라는 정식 명칭을 얻게된다. 그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로마 숫자로 번호 메기기를 좋아하여 발견된 천체에 자주 로마 숫자 번호를 메겼다. 미마스(Mimas)와 엔셀라두스(Enceladus)가 발견되자 이아페투스는 토성 VII라는 정식 명칭이 주어졌고, 1848년, 히페리온(Hyperion)이 발견되자 이아페투스의 정식 명칭은 오늘날 정식 명칭인 토성 VIII로 변경되었다. 이아페투스의 소유격 명칭은 'Iapetian', 'Japetian'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발음은 '이아페투스'인데 가끔 '아이아페투스'나 '이아페토스'도 사용된다. 한국에서 이아페투스를 '라페투스'라고 표기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Iapetus의 'I'를 'L'로 잘못보고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이런 발음은 인터넷과 TV에서, 심지어는 책에서까지도 표기된 적이 있다. 이런 식의 표기는 일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이아페투스는 아서 찰스 클라크(Arthur Charles Clarke)의 소설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에서 스타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이아페투스의 표면은 매우 독특하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한 쪽에는 먼지로 검게 덮여있는 반면, 다른 한 쪽은 흰 눈으로 덮여있어 보는 이에게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은 이아페투스에게만 존재하는 특유의 모습으로 최근 2009년, 그 이유가 밝혀진 듯 하였다. 스피처 망원경(Spitzer Telescope)은 2009년, 토성의 거대한 고리를 적외선으로 촬영하였는데 그 고리가 이아페투스와 포에베(Phoebe) 사이에 걸쳐있었다. 그 고리의 이름은 포에베 고리(Phoebe Ring)로 지구가 자그마치 10억 개나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그러나 그 입자는 매우 작아서 21세기가 될때까지 발견되지 못했고, 2009년에서야 스피처 망원경의 적외선 촬영으로 발견되었다. 고리 입자가 이아페투스의 한 쪽면과 충돌하였고 그 과정이 계속되어 눈으로 덮여있던 이아페투스는 토성과 마주보는 면 반대편에서 입자와의 충돌에 먼지가 쌓여 검게 변한 것이다. 즉, 먼지 쌓인 면이 입자와 충돌하는 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리는 비교적 오랫동안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어두운 부분에만 적도 능선(赤道 稜線, 아까 언급했던 '산맥')이 발달한 것으로 보아 이 입자들이 적도에 충돌하여 산맥을 형성하였고 그 미세한 입자들이 쌓이는 과정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어야 하므로 그렇게 추정한다. 어두운 부분은 정확히 말해서 먼지가 쌓인 것은 아니고 눈이 녹아 원래의 표면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눈으로 덮여있던 면이 작은 열을 가진 포에베 고리 입자와 충돌하여 녹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흰 면은 토성과 마주하는 부분이다. 먼지가 쌓인 면은 '카시니 영역(Cassini Regio)'라고 부르는데 흰 부분은 '롱스보 대지(Roncevaux Terra)'라고 부른다. 지구에서 카시니 영역이 보일때는 실시 등급이 11.9 정도이고 롱스보 대지가 보일때는 10.2 정도로 밝아진다. 한편, 표면의 카시니 영역에 존재하는 적도 능선인 산맥은 높이가 4,509m 정도이고 최대 13 km 이다. 이 산맥은 포에베 고리의 입자들이 오랫동안 쌓여서 만들어졌다. 적도 능선은 카시니호가 2004년 12월 31일, 이아페투스에 접근했을 때 발견하였다. 보이저호(Voyager)가 이아페투스에 접근했을 때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산맥은 약 1,300 km 정도의 길이에 폭은 20 km 정도이다. 강희제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 제국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두 번째 황제이다. 성과 휘는 아이신 교로 효완예이(玄燁, ), 묘호는 성조(聖祖, ),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이며,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 )이다. 연호는 강희(康煕, , )이다.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인 순치제의 셋째 아들인 그는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퉁갸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이기도 하다. 1661년(순치 18년) 부친인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 강희제는 60년간의 통치를 통해 청 제국의 성장과 안정에 비범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청 제국을 근세(근대 초기)의 제국들 가운데 가장 큰 국가로 만든 것은 대체로 그의 굉장한 지적 능력, 정치적 직감, 체력 덕댁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 제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소성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辰時, 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戌時, 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 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승은공 동도라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억지로 혼인한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동악씨는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닌데 황후에 봉해지고, 서출 출신의 죽은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고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순치제는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제위에서 물러나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다. 〈세조장황제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황위가 유고 상태가 되었다. 당시 황태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태후는 순치제가 붕어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 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 그 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 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康煕仁皇帝)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煕)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煕)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1662년(강희 원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南明)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 및 평서왕 오삼계에게 버마에서 처참히 죽임을 당해(6월 1일, 음력 4월 15일),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고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오배에 비해 세력이 미약한 대신들이나 아직 친정을 시작하지 못한 강희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 1667년(강희 6년) 7월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강희제를 강압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索額圖)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려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색니의 차남 색액도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막강한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삼번은 남명에 대비한 것으로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의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이 관할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정남왕의 직위는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강희제 즉위 무렵에는 이미 남명이 멸망하고 반청 세력이 일소된 상황이었으나 삼번은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삼번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려는 청나라 조정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오삼계는 삼번왕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았고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인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조정이 걷은 세금 가운데 백은 2천만냥이 오삼계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국가 총 수입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인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는 원인이 되었다.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은퇴는 허락하지만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조정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조정은 이들이 모반을 일이키려한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다. 1673년(강희 12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고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황족을 옹립하지는 못하였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 이남은 물론이고 섬서 몽골 등 여러 지역의 반청세력이 가담하여 전란이 확대된 후 삼번의 난은 9년 동안 계속 되었다.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한편, 평남왕 상가희는 오삼계의 호응 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강희제에게 알려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고자 했으나, 이에 반발한 아들 상지신이 상가희를 연금시키고 오삼계와 합류하였다. 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까지 진군하였다.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어서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춘다. 청나라 조정의 군사를 너무 만만히 봐서 거만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오삼계를 물리쳤다는 자신을 역시 너무 과신하여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盛京)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圖海)·주배공(周培功)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으로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아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경정충은 곧 청군에게 끌려와 1681년(강희 20년)에 반역에 공모한 죄로 사형당한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고,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 즉 오주(吳周)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昆明)에서 자살을 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킴으로써 9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다. 이 반란 이후에 강희제는 번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친왕들과 군왕들에게 최소한의 사병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녹영이나 팔기군에 배속시켜 친왕들의 군 지휘권을 거의 뺏어 버렸다. 이 반란은 강희제의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으나 역대 중국 왕조와 같이 사대관계에 의해 번국에 준하여 대하였고,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의 북벌론을 문제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숙종은 청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인 정권을 물리치고 대표적인 북벌론자 윤휴를 처형하는 고육책을 써야 했다. 삼번의 난 중에 조선은 큰 기근이 들었는데 강희제는 1671년(강희 10년, 현종 12년) 조선에서 온 동지사 복선군 이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흔히 군약신강(君弱臣強)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시 조선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크다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비웃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삼번의 난을 끝으로, 중국 본토는 일단 잠잠해졌다. 그러나 오직 대만, 팽호 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이 아직 청나라의 소속이 아니고 대만 호족인 정성공이 통치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남명의 융무제에게서 연평군왕(延平郡王)의 작위를 받고 명나라의 황실 성씨인 주(朱)씨의 성을 하사받고 국성야(國姓爺)로 불렸다. 1662년(강희 원년)에 정성공이 사망하자 장남인 정경이 뒤를 이어 지배하고 있었다. 대만 군사들은 삼번의 난 때부터 때때로 본토로 쳐들어와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는 등 피해가 났다. 청나라 수군이 여러 차례 대만 수군과 해전에서 싸웠으나 바다에서 노련하고 네덜란드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함선까지 빠른 대만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한편, 대만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정씨 왕조가 들어서자 청나라를 등진 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대만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여력을 갖고 있었다. 강희제는 대만의 반란을 우려하여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의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이 해상 금지령도 청나라 쪽에 피해가 컸다. 당시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길 때, 이들의 불만이 컸으나 강희제는 특별히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전부 면제하고 내륙에서 살 돈까지 줘서 무마시킬 수 있었다. 대만은 원래 정성공 사망 이후부터, 정경을 비롯한 정성공의 친족들이 후계자 쟁탈로 사정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이 사이에 정경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정극장(鄭克藏)과 정극상(鄭克塽)이 연평군왕 자리를 놓고 싸워 결국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다. 강희제는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施琅)을 수군 총제독으로,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였던 당시의 복건 순무인 요계성(姚啓聖)을 병부상서 급의 권한을 가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로부터 자문을 구해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였다.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그에 따른 대만 상륙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강희 22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강희제는 대만의 민심을 의식하여 관용을 배풀어 이들을 반란 세력이 아닌 과거 왕조에 대해 충절을 바친 것으로 규정하여 정극상을 한군공(漢軍公)에 봉하는 한편, 정성공에게 충절이란 시호를 내렸다. 청나라는 1639년(숭덕 4년)부터 1643년(숭덕 8년)에 걸쳐 흑룡강 일대 원주민들(예벤키족, 다우르족 등)에 대한 군사행동을 실시하여 그들을 복속시켰다. 1643년 겨울에 바실리 콜랴코프의 코사크 기병대가 흑룡강 유역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650년대에는 예로페이 하바로프와 아무르 원주민들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다. 루스 차르국은 1655년 "아무르 지역 군사총독"을 임명했다. 이렇게 러시아와의 국지적 충돌이 계속되자 순치제 때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에 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다. 조선은 1654년(순치 11년)과 1658년(순치 15년)에 군사를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 이렇듯 강희제 치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오곤 했다. 나선정벌 이후 30여 년 뒤, 러시아는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한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토착민에 대해 약탈과 부녀자 강간, 살인을 일삼곤 하였는데,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주변 야만인과의 싸움으로 여겼고, 청나라의 북만주 주민들은 이러한 러시아인들을 생사람을 잡아먹는 나찰이라 불렀다.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하였고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며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먼저 국경에 애혼성(愛琿城, 아이훈 성)을 쌓았으나 계속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자 그에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아르바진을 점령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물러나지 않고 뺏긴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군과 러시아군이 흑룡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강희 28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妻叔)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 강과 스타노보이 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은 중국사 이래 처음으로 국가간의 평등한 위치에서 맺은 조약으로서 당시 동양 국가들이 맺는 대국-소국 간의 조약과는 다른 유럽식 조약이었다. 여기서 청나라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무역에도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에는 그다지 득을 볼 만한 조항은 많지 않아 훗날 함풍제의 치세 때, 러시아가 애로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빌미로 만주와 연해주의 많은 땅을 도로 가져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부족의 칸인 갈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갈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강희제는 울란 부퉁에서 갈단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 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갈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 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귀족 툴리센을 남러시아 볼가강 하류에 살던 투르구트(Torghut)족에게 사절로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갈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미 팔기군에 관한 정책은 조부인 숭덕제가 만주족 팔기군, 한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으로 나누고 아버지 순치제 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 있었으나, 강희제는 이를 다시 개편하였다. 당시 팔기군 아래에 녹영(綠營)이라는 군단이 있었는데 이 휘하에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이나 대만 수복 때 정씨 휘하 군사들을 대파한 시랑 등 한족 장군들이 바로 여기에 속하였다. 강희제는 이들 녹영을 팔기군이나 황제 직속 부대의 예하로 편제하여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한족을 포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만약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강희제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 생각하였고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후대인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특히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강희제의 여러 전쟁 때 큰 활약을 하며 승리를 안겨주었다. 후대에 가서는 팔기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지는데, 강희 시대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많이 하였으나, 후대에 들어가 전쟁이 별로 없고 군사들의 수도 갑자기 늘어나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흐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강희제는 소년 시절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유학, 즉 성리학을 좋아하였으며 그 자신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노력하였다. 서예 역시 매우 달필이어서 소림사의 현판을 바로 강희제가 썼다. 어린 시절 강희제가 쌓은 학식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어 경연이나 조회 등에서 신료와 유학자들과 논의를 펼치고 난 뒤에, 이들은 강희제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한다. 심지어 강희제가 크게 병이 난 도중에도 결코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한다. 강희제는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나,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매우 월등한 것을 알고 그것을 만주족 대신들에게 융화시키려 하였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 이미 아버지 순치제 때 중국에 와서 흠천감 장관을 재직했던 아담 샬 폰 벨 신부를 시작으로 한때 러시아와의 전쟁 때 간접적으로 러시아를 돕기도 했던 서양의 선교사 조아킴 부베·마테오 리파·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주세페 카스틸리오네·장 당빌 등이 계속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대소 신료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폰 벨의 뒤를 이어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만들었다. 또한,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다. 리파는 1723년에 그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선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성당을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를 제외한 근본주의 성향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라 비판하였고, 곧 이들 선교사들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다.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明史)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와 명 성조 때 나라가 번창하였다는 점과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陳廷敬)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많은 한족 학자들을 숙청한 문자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미 문자의 옥은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자의 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계속되었는데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도르곤을 황숙(皇叔)이 아닌 왕숙(王叔)으로 써서 도르곤과 당시 황제인 순치제를 왕(王)으로 모독한 이유로 한족 학자가 교살되었다. 이들 학자는 만주족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강력히 부인하여 중국의 평화적이고 자애로운 통치를 지향하던 강희제의 분노를 샀다. 문자의 옥에 연루된 학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져 능지형을 받았다. 또한, 그 구족의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참수시키고 16세 이하의 남자와 모든 여자는 노비로 삼아 변방으로 보냈다. 실제로 1711년(강희 50년)에 대명세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쳐 만주족에 비판적인 학자를 더욱 탄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하였고, 비판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지정하였다.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尙書房)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靳輔)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강희 23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대운하 역시 보수·증축하여 많은 배가 물량을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황하가 안정되어 많은 물자가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타고 범람 걱정 없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들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의 치수 공사가 완성된 1684년(강희 23년)을 시작으로 1689년(강희 28년), 1699년(강희 38년), 1703년(강희 42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등 총 6번 남방으로 순행하여 장강 이남의 많은 지역 유지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이남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방 순행 때, 정해놓은 예산을 제외한 별도의 비용은 가져온 내탕금으로 모두 지출하여 남쪽 백성들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 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몽골의 소수 민족과의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1703년(강희 42년) 성경과 가까운 곳인 승덕 지방에 피서산장이라는 큰 이궁을 지었고 그 곳에서 각기 다른 소수 민족의 족장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거나 부족의 의식도 행하게 허락하였다. 재정 정책 역시 기존에 비해 수정하여, 세금을 적게 하였어도 무역 등으로 이미 은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도 그다지 별문제가 없었다. 1668년(강희 7년)에 1,500만 냥, 1710년(강희 49년)에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의 말년인 1722년(강희 61년)에는 은자가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으며, 강희제 역시 정무를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진 4남 옹친왕 윤진()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강희제의 정책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1644년(명 숭정 17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 기나긴 전쟁과 반란, 기근으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 이하로 내려갔으나 전쟁을 끝내고 강희제의 강력한 내정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자 인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강희제가 죽을 때에는 다시 1억 명에서 올라가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옹정제, 건륭제를 거쳐 계속 인구는 늘어났다. 훌륭한 정치를 펼친 강희제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그다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 모두를 자신의 경연 토론장인 남서방에서 교육시켜 유학의 사상이 몸에 밴 황자로 만들려 하였으나 대부분 그리 되지 못하였다. 제2황자이며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胤礽)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강희 13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이에 서장자이고 제1황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윤잉보다 두 살이 많은 윤시(胤禔)가 대신들 사이에서 윤잉의 경쟁 상대로 떠올랐으나 강희제는 여러 번 공식석상에서 윤잉을 후계자로 천명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 강희제는 윤잉의 거처를 과거 명나라 때 황태자들이 머물던 동궁인 종수궁(鍾粹宮)으로 선택하지 않고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 옆에 새로 궁을 지어 육경궁(毓慶宮)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윤잉의 거처로 정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다른 어느 황자들보다 그 위상을 높였으며, 그리고 황제에게만 입히는 황포를 윤잉에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황궁 어디서든 가마나 말을 탈 수 있게하였다. 또한 당시 어느 친왕들보다 더 많은 봉토와 식읍을 받는 등 큰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윤잉이 받았던 봉토와 식읍은 역대 청나라 친왕 중 가장 많은 봉토를 받은 도르곤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강희제는 윤잉이 훗날 황자들에게 핍박받을지도 모를까봐 윤잉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려하였고 실제로 1700년대까지 윤잉을 제외한 황자들은 모두 친왕에 오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을 가르치는 사부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왕섬을 임명하여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머리가 총명하던 윤잉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미 4살 때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7살에는 사서오경을 다 떼었다 한다. 그리고 강희제의 순행과 몽골 원정 때에도 황태자로서 조정을 장관, 대소사를 처리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백성들에겐 따뜻하던 강희제는 자식, 특히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아끼던 자식인 윤잉에겐 더없이 냉정하고 혹독하게 대하였다. 윤잉은 20대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나 30대가 넘어서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였다. 속으로는 윤잉을 매우 아꼈으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냉정함과 혹독함,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여읜 모정의 갈망, 그리고 형제들간의 암투 등으로 인해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3황자 윤지,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 등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부서를 책임지고 도맡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육부를 관리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고 군왕, 친왕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윤잉은 어떠한 부서도 맡지 않은 채, 부황의 눈밖에 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까지 일삼았다 한다. 그리고 이미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는데, 이 중 윤시는 자신이 장자인데 언제나 차남이며 황태자인 윤잉의 뒤에 서야 되고 윤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으며 자신이 아우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는 반면 윤잉은 이복 형인 윤시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황태자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것이 큰 불만이라 반윤잉 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하였는데 그 계보와 파벌에 참가한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러하다. 그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太子黨)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納蘭明珠)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해 처형하거나 유배보낸 뒤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으나, 여전히 윤잉은 달라지지 않고 나태하였으며 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宗人府)에 가두어 버렸다. 윤잉을 폐위하고 태묘(太廟)에 고할 때, 강희제는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중풍에까지 들었다고 실록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본래 윤잉을 총애하였고 황태자를 자리에 두고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윤잉이 직접적으로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색액도와 납란명주는 40년 동안 강희제의 곁에서 정치를 도와주던 조정의 수반들이자 영시위내대신이었으나 황위를 놓고 당쟁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이들을 단호히 조정에서 혁파하여 당쟁의 불씨를 끄려 하였다. 하지만 윤잉이 복위되자 안심하였던 황장자당을 중심으로 황팔자당까지 합세한 반황태자파는 다시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와 이간책을 꾸몄다. 황팔자당은 8황자 윤사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가담한 대신으로는 또다른 조정의 영수이며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세 번째 장인인 동국유와 그 아들인 융과다가 윤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윤잉이 반성을 하지 않고 다시 주색잡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제는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려 황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1712년(강희 51년)에 강희제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라 엄중히 명하였다. 이 사건의 폐단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하였을 뿐, 생전에 어느 황자도 황태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다. 이로 인해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하였다. 그중 4남 옹친왕 윤진, 8남 염친왕 윤사(胤禩), 14남 순군왕 윤제(胤禵)가 가장 실력있는 아들들이었다. 장자인 직군왕 윤시는 과거 윤잉이 처음 폐위되었을 때 폐태자 윤잉을 저주하고 몰래 자객을 보냈으며, 윤잉의 방에다 칼이 꽂힌 윤잉의 인형을 숨겨놓기도 하였다. 심지어 윤시는 부황 강희제 앞에서 윤잉을 죽이겠다 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혼나고 윤잉처럼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8남 윤사가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 윤사는 간교하였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윤사는 심복을 시켜 점쟁이를 매수하여 자신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내어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강희제 말기에 윤사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인 강희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만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만리장성을 수호하는 중책인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의 작위와 병부의 지휘권을 내렸다. 병권을 내려주면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던 황자들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乾淸宮)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千叟宴)이다. 천수연은 이미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의 나이가 육순이 넘은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동년배인 대신들을 불러 축하를 해주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이 천수연에선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이후, 천수연은 손자인 건륭제도 여러 번 베푸는 등 궁중의 주요 행사가 되었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얼마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9세였다.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야심 많은 4남 윤진의 휘하이자 자신의 외사촌동생이며 자신의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라는 점으로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본래 융과다는 8남 윤사의 수하였으나 윤진의 설득과 매수로 결국 윤진의 수하로 들어갔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孝陵) 옆에 있으며, 청동릉(淸東陵)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인의 뜻으로 국가를 다스려 진정으로 통일시킨 큰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하여 성조(聖祖), 시호는 생전에 강희제가 인과 덕을 중시한 것을 따 인황제(仁皇帝)로 명명하였다.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로 이 긴 시호에서도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합천’(合天)은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시켰다는 뜻이고 ‘홍운’(弘運)은 국운을 크게 넓혔다는 뜻이다. ‘문무’(文武) 역시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과 무를 고루 이용하여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에게 올리는 시호로 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에게 올려지는 ‘고’(高) 자와 더불어 황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이며 그리고 ‘중화’(中和)와 ‘대성’(大成)은 청나라를 중흥시켜서 나라를 더욱 번창시키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패륵 윤사, 9황자 패자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대장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2013년 9월 4일 중국의 뉴스 포털사이트 텅쉰왕(騰訊網)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遼寧)성 문서보관소는 2일 역대 처음으로 강희제의 유조를 공개했는데 이 유조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쓰여 있어 한자 몇 글자 고치는 유조 조작으로는 그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돼 있다고 한다. 이로써 옹정제가 무려 291년 만에 황위찬탈 혐의를 벗었다. 강희제는 유교 사상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했다. 아버지 순치제와 아들 옹정제가 만주족이 믿던 불교, 즉 라마교를 중요시하였다면 강희제는 오히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더욱 중시, 즉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는데 그 방식은 청나라 이전에 중국을 다스린 한족 출신의 황제와 그 통치 이념이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불교를 믿어 불교를 그리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것이라 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삼국 시대 때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 즉 ‘모든 것을 쏟아 붇는다’와 국궁진력한 후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해준다’를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유교적 사상을 중시한 강희제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효를 중시하여 백성에게 유교 지침서를 내렸고 아버지 순치제와 어머니 효강장황후가 떠난 후 자신의 양육을 책임진 조모 효장태황태후를 모시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이 효도를 다하려 노력하였다. 효장태황태후는 1688년(강희 27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희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손자인 강희제와 증손자들인 황자들에게 큰 존중을 받았다. 또한 강희제는 인(仁), 덕(德), 예(禮) 중심의 인자한 정치를 펼치고 되도록 과격한 정치를 펴지 않으려 주력하였다. 강희제는 본래 명나라 홍무제가 만들고 순치제가 바꾼 〈육유(六諭)〉를 확대한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1667년(강희 6년)에 반포한 뒤 백성들에게 이 내용을 토론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옹정제는 성유십육조의 매 조마다 친히 설명을 붙이고 그 의의를 보다 알기 쉽게 해설한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유교통치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황제 중심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의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당시 궁핍하게 살고 있는 한족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강희제 스스로도 자신이 직접 쓴 《근검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런 강희제의 인자한 정치는 한족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1717년(강희 56년) 강희제는 〈고별상유〉(告別上諭), 즉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바치는 글을 남겼는데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후대의 황제에게도 이를 훈계하였다. 강희제는 황제로서 자식과 같은 백성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겨 황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하였다. 강희제는 자신에게 올려지는 상소문과 보고서, 비망록 등 하루에 무려 300개에서 400개의 문서들을 모두 읽은 뒤 결재하고, 일일이 그 상소에 대한 비답도 적어주었는데, 심지어는 전시에도 하루에 200개 이상의 문서들을 결재하여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삼번의 난 때에는 무려 하루에 500여 개의 문서들을 본 뒤 다 처리하고 때로는 밤을 새울 때도 많았다 한다. 학식이 높은 황제의 적절한 대안은 성지가 내려오는 즉시 수행하여 백성들이 살기 편안해졌다. 그의 학식은 경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그의 학식과 논리정연한 질문을 듣고 경연에 참가한 재상들과 대신들이 모두 대답을 제대로 못하였다 한다. 수학 등 서양 학문까지 공부한 강희제는 더욱 학식이 풍부해져서 당시 그가 습득한 학식은 당시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 왕족들의 평균 학식보다 훨씬 우월하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구별을 없애려 하였듯이 선교사들에게도 큰 호의를 베풀어준 강희제는 남방 순행에도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떠났다. 이렇게 만주족으로서 중국의 사상, 즉 한족의 사상인 유교에 적극적이었던 강희제였으나 만주족으로서의 근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엄청난 양의 정무의 스트레스를 타파하기 위해 자주 사냥에 나갔으며 피서산장 근처의 황실 사냥터에서 대신들과 외국 사신들에게 자신의 사냥 솜씨를 마음껏 뽐내어 자신이 정무에만 시달리는 문약한 군주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가 몽골에 친히 원정을 간 것 역시 그의 강건함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강희제는 노년기에 스스로 자신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냥감을 잡았다 하였는데, 실제로 강희제는 강궁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다. 그는 노년기에 자신이 평생동안 사냥해서 잡은 맹수들을 열거하기를 호랑이 135마리, 멧돼지 132마리, 늑대 96마리, 표범 25마리, 곰 20마리, 그리고 원숭이 10마리를 잡았다 한다. 또한 하루에 토끼 310마리를 잡았으며 꿩, 너구리, 사슴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다고 전한다. 강희제는 문(文)과 무(武)를 모두 중시하고 문이 필요할 땐 문사를, 무가 더 필요할 땐 무사를 더 썼지만 언제나 힘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는 한쪽에만 치우침이 없이 고루 그에 걸맞은 인재들을 등용하였기에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강희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강희제의 훌륭한 정치는 후대에게도 큰 본보기가 되었다. 아들인 옹정제는 부황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서 내치를 더욱 다져서 청나라를 안정시켰으며,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처럼 내정에 신경을 썼지만 역시 외정에도 적극적이어서 위구르와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라 한다. 건륭제는 강희제를 평생 모범으로 삼고 감히 조부를 뛰어넘을 수 없다하여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보다 적은 재위 60년 만에 퇴위를 하였다. 강희제의 정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면 역사 또한 그를 성군으로 평가하게 되는 좋은 예였다. 강희제의 붕어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당시 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이 부음을 접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가 성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책 역시 강건성세 시기에는 대체로 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해외 열강들이 청나라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강희제가 추진하고 이룩한 정책들은 결국 폐기되었다. 청나라 이전에 한족을 제외한 다른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할 때,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폭압을 가하였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방법을 달리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공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재위 기간인 61년간의 기나긴 희생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은 그 뒤로 70여 년간 윤택해지고 안정되었다. 강희제는 당시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서 반대가 심하였던 만주족의 황조를 굳건히 다졌고 만주족들에게 한족의 문화를 대거 소개함으로써 만주족의 지식과 예절 수준을 높였으나, 훗날 만주족들은 너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전통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또한 청나라 멸망 때에는 강희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었는지, 만주어를 잘 아는 만주인은 흔치 않았다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와 장강을 보수하여 근처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당시까지도 이 두 강은 여름에 계속 범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나 재빨리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후 완성시키자 한 해에 범람 횟수가 아예 없거나 그 전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자금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많이 떠나 북방과 남방의 교류를 활발히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소요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자신이 실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겸허히 수렴하여 즉시 시행하였고 황제로서의 책임을 솔선수범하여 군주의 모범을 보였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통치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나갔다. 강희제는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문자의 옥을 시작시켜서 한족 학자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문화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고, 명나라의 수녀제(秀女制) 를 따르라는 부황 순치제의 유명을 받들었고 그에 충실히 따라 많은 자식들을 두어 황실을 번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교육에 실패하여 황태자를 자리에 놓고 황태자였던 윤잉과 쟁탈전을 벌이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편애까지 일삼아 훗날 강희제 말년과 옹정제 초기의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잔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본래 유교를 숭상하던 강희제는 자식들에게 주입식 유교 교육을 시켰으나 완전히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황자들은 적장자가 황위를 갖는 것이 아닌 가장 유능한 아들이 황위를 갖는 것이라는 전통을 저버리지 않고 끝내 아버지의 교육에 순응하지 않았다. 처음 강희제는 윤잉에게 매우 큰 기대를 하며 자신의 뒤를 이을 현군이 되길 바랐으나 윤잉이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그 기대가 점차 작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강희제는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때, 많은 황자를 조정과 군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서자이며 능력있는 황자들에겐 요직을 내렸으나 정작 유일한 적자이며 황위를 계승할 한 명의 황자에게는 자신의 순행 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황자들 사이에 황위를 놓고 골이 맺혀 형제들은 윤잉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강희제의 비난은 언제나 총책임자인 윤잉에게 돌아갔고 바로 이것이 윤잉을 압박하여 윤잉의 비정상적인 기행을 낳았다. 자신도 나름대로 노력했던 윤잉도 자신의 뜻이 언제나 다른 형제들이나 적대시하는 대신들에게 좌절되자 우울증이 생기고 부황의 비빈을 건드리는 등의 기행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또한 평생 동안 너무 정무에 매진하였기에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여가가 없었고 강희제와 자식들간의 소통은 그리 원만치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강희제를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에서 실패한 군주라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강희제가 펼친 선정에 대해 단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책을 채택한 것으로 백성을 ‘생각했다’는 것이지 결코 정책에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愛民)의 마음은 녹아 있지 않았다고 강희제의 정책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현재는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장쩌민과 후진타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역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희제에게서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적극적인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가 얼웨허(이월하, 二月河)가 쓴 소설 《강희대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소설 《옹정황제》·《건륭황제》 등도 독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2001년에 중국중앙방송에서 소설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드라마 중 하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희제 역을 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견 배우인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의 리더십, 자식들로 인하여 골치를 앓는 모습 등을 잘 보여주었다. 이로 젊은이들에게 강희제의 모습과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각인시켜, 중국의 국민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이 작품들의 인기 역시 높았다. 《강희왕조》 전에 방송하였으나 강희제의 다음 세대인 옹정 시대를 시대적 배경을 다룬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강희제는 현명하지만 《강희왕조》 때보다 자식들의 일로 피곤한 삶을 산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무협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차남인 윤잉과 14남 윤제만을 편애하다가 이것이 한번도 부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4남 윤진에게 자극제가 되어 결국 윤진에게 염주로 목졸려 살해당하는 비운의 군주로 나온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 역시 청년의 강희제가 오배, 오삼계, 정경 등과 마찰을 빚을 때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를 썼는데, 여기에서 강희제는 매우 호방한 군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중국 및 홍콩특별행정구역 그리고 대만의 방송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거의 허구였다. 아직도 강희제는 그의 손자 건륭제, 할머니인 효장문황후, 그리고 청나라의 문을 닫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만든 게임 에 나오는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지도자가 강희제이기도 하며 게임 역사에 그의 이력과 통치 철학 등의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나라 궁정에서 강희제에게 신임을 받던 프랑스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강희제의 외모를 이렇게 설명했다. 강희제는 또한 폭식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적당히 먹었다 한다. 그는 신선한 채식 중심의 음식을 많이 먹었고 노년에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은 후에는 좋은 생각만 하거나 서양에서 가져온 문물을 보기도 하였고 후원을 산책하며, 또는 독서에 전념하는 등 음식의 소화에까지도 신경을 썼다 한다. 강희제는 황후 네 명, 황귀비 세 명, 귀비 세 명을 두었으며, 첩지를 받은 후비가 모두 64명으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비를 거느렸다. 슬하에는 35남 20녀를 두었으나 이 중 아들 11명은 영·유아 때 요절하여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이아페토스 이아페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티탄(거신족)으로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이다. 오케아노스와 테튀스의 딸인 클리메네 혹은 아시아와 결혼하여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등의 아들을 낳았다. 프로메테우스의 후손인 데우칼리온이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인류의 조상이 된다. 새벽별의 신인 헤스페로스 혹은 루키페르 역시 이아페토스의 아들이라 한다. 헤시오도스의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아버지는 이아페투스라고 나오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또한 아이스킬로스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아버지 이름은 나오지 않고, 어머니는 테미스라고 한다. 기독교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창 6:10,) 노아의 아들 세명 중 한 명인 야벳(יֶפֶת) 이 바로 이 이아페토스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혹은 야벳에서 이아페토스가 나왔다고도 함) 애국가 국제 표준화 기구 국제 표준화 기구(國際標準化機構, , (國際規格化機構)) 또는 영어약어로 ISO는 여러 나라의 표준 제정 단체들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표준화 기구이다. 1947년에 출범하였으며 나라마다 다른 산업, 통상 표준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을 개발하고 보급한다. ISO의 회원가입 현황은 2015년 기준으로 총 163개국이 가입,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ISO로 알려진 기구는 1926년에 ISA(International Federation of the National Standardizing Associations)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활동은 1942년에 멈추었다가 전쟁 이후에 최근에 형성된 UNSCC(United Nations Standards Coordinating Committee)에 의해 새로운 세계 표준화 기구의 형성이 제안되면서 ISA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946년 10월, ISA와 UNSCC의 25개국 대표들은 런던에서 모임을 갖고 새로운 표준화 기구를 창설하기 위해 하나가 되기로 동의하였다. 즉, 새로운 기구는 공식적으로 1947년 2월에 운영을 시작하였다. 스위스 민법에 의해 설립된 비정부 기구 민간 기구로서, ISO가 정한 표준은 보통 국제 협약이나 국가 표준 제정 시 광범위하게 인용, 활용되기 때문에 국제적인 영향력이 크며 실질적으로 각국 정부의 표준 정책과 깊은 유대 관계에 있다. 특히 유럽연합의 지역표준화 기구인 CEN 과의 Vienna Agreement 의 체결로 유럽의 표준이 ISO 국제표준으로 채택되는 가능성이 높아, 유럽의 영향이 매우 크다. 각국의 대표 기관을 지정하고 이 기관으로부터 추천받은 전문가들이 표준 개발에 참가한다. 의사 결정은 회원 기관에게 부여되는 1표의 투표권 행사로써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ISO는 전기 기기에 관한 국제 표준화를 담당하는 국제 전기 표준 회의(International Electrotechnical Commission, IEC)와는 표준 개발의 지침이되는 ISO/IEC Directives 를 공동으로 활동하는 등, 상호 보완적인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ISO 라는 명칭은 International Standards Organization 또는 그 비슷한 정식 명칭을 줄인 것이라는 오해가 많지만 ISO는 머릿글자를 딴 약칭이 아니고 그리스어의 ισος( isos, 이소스), 즉 "같다, 동일하다"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국제 표준화 기구의 영어 명칭은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프랑스어 명칭은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Normalisation이어서 약자는 각각 IOS, OIN으로 서로 다르므로 기구의 창설자들은 중립적인 명칭인 ISO를 전 세계 공통의 약칭으로 택하였다. 따라서 ISO의 발음은 "아이에스오"가 아니라 아이소(또는 이소)로 읽는 것이 맞다. ISO에서 정해지는 각 표준마다 번호가 매겨지며 그 형식은 "ISO 표준번호:공표연도: 제목"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전)공업진흥청 표준국이 KBS(Korean Bureau of Standards) 라는 명칭으로 1963년 ISO에 회원(Member body)으로 최초 가입하였으며,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1997년 국립기술품질원(KNITQ: Korean National Institute of Technology and Quality)으로 회원기관 명칭 변경 신청을 하였고, 1999년 이후로는 기술표준원(KATS: Korean Agency for Technology and Standards)이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세그레인식 망원경 카세그레인 망원경은 프랑스의 공작기술자 로랑 카세그렝이 뉴턴식 망원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한 망원경이다. 카세그레인식 망원경은 오목거울에 반사되어 들어 온 빛(대상)이 원초점 앞에 위치한 볼록거울에 의해 다시 오던 방향으로 다시 반사되는 원리에 착안하고 있다. 특히 볼록거울에 의해 반사된 빛의 초점이 대단히 멀리 잡히게 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른바 이 카세그레인 초점은 오목거울의 한가운데에 뚫어진 구멍을 통과하여 망원경 몸체의 뒷편에 맺히게 되며 그리고 초점 거리를 망원경의 노출구의 축소와 확대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경기도 경기도(京畿道)는 대한민국의 북서부에 있는 도이다.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를 둘러싸고 있고, 동쪽으로 강원도, 서쪽으로 황해, 남쪽으로는 충청남도·충청북도와 접하며, 북쪽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경계를 이룬다. 경기도청 소재지는 수원시이고, 의정부시에 북부청사가 설치되어 있다. 경기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지와 하남시 미사동의 신석기시대 유적지, 여주 흔암리의 청동기시대 유적 등 주요한 선사 취락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경에는 진국(辰國)에 속하였으며 이후 삼한이 성립되고 마한이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에 분포하였다.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10여 개가 경기도 지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8년,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건국된 이래 백제의 중심지로 4세기 말까지 기능하였다. 396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475년에는 한강 이남 지역도 상실하여 경기도 대부분이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551년에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경기도 일대를 수복하였으나 553년에 신라가 연합을 파기하고 경기도 일대를 차지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개칭하였다. 신라는 경기도를 차지하여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신라 시기에는 한산주(漢山州)가 설치되었는데 757년에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9세기 말에 신라가 혼란에 빠지자 경기도 각지에는 호족 세력이 난립하였는데 898년에 궁예의 세력이 경기도 일대를 평정하였다. 궁예의 후고구려는 송악(宋岳)에 도읍을 두기도 했다. 918년에 송악의 호족인 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송악을 개경(開京)으로 개칭하고 도읍으로 삼았다.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지방행정구역을 십도(十道)로 개편할 때, 현재의 경기도는 관내도(關內道)와 중원도(中原道) 일부가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개경 주변에 적현(赤縣)(경현京縣이라고도 함)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설치하였고, 1018년에 현종이 적현과 기현을 묶어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정식으로 '경기(京畿)'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경기는 오늘날 경기도의 북부 일부(파주시의 북부, 연천군의 서부)만 포함하였고, 이를 뺀 경기도의 대부분 지역은 양광도에 속하였다. 1067년에 서울의 강북 지역에 남경(南京)이 설치되었다. 1069년에 양광도(楊廣)·교주도(交州)·서해도(西海道)로부터 39현을 포함하면서 원래 경기 13현과 합하여 총 52현을 관할하는 규모로 확대되었으나, 얼마 후 경기의 영역은 현종 때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조선 개국 2년 전인 1390년, 총 44현을 통할해 1069년에 확대되었던 영역과 비슷한 규모로 재편되었고 처음으로 도 단위의 지방조직이 되었다. 당시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경기의 영역을 재조정하였다. 1402년(조선 태종 2년)에는 경기좌우도를 경기좌우도성(京畿左右道省)으로 명명했고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는 지금과 비슷한 경기도의 경계선이 확립되었다. 1414년(조선 태종 14년) 1월 18일에 경기좌도(京畿左道), 경기우도(京畿右道)가 경기도로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안(遂安), 곡주(谷州), 연안(延安) 등 옛 경기도 북서부 지역이 풍해도(豊海道, 황해도(黃海道))에 편입되었으며 양주(楊州), 광주(廣州), 수원(水原), 여주(驪州), 안성(安城)을 비롯한 옛 충청도 북부 지역이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세종 시기에는 경기도 철원(鐵原), 안협(安峽)이 강원도에 이관되었고 충청도 죽산(竹山)이 경기도에 이관되었다. 1895년에 종래의 행정구역을 개편한 23부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경기도는 대체로 한성부, 인천부, 충주부, 공주부, 개성부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1896년에 13개의 도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으며 경기도의 수부(首府)는 수원에 두었다. 2017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경기도의 각 시와 인구와 면적은 다음과 같다. 인구는 12,783,741명이고 남여비율은 1.01로 전반적인 남초 지역이다. 시군별로는 포천시 (1.11)와 연천군 (1.11)이 가장 높고, 시흥시 (1.10), 화성시 (1.07), 광주시 (1.06), 오산시 (1.06), 안산시 (1.05), 안성시 (1.05), 가평군 (1.05), 이천시 (1.04), 안성시 (1.04), 양주시 (1.03), 파주시 (1.03), 양평군 (1.02), 여주시 (1.02), 수원시 (1.01), 하남시 (1.01), 김포시 (1.01), 남양주시 (1.00), 부천시 (1.00), 의왕시 (1.00), 구리시 (0.99), 군포시 (0.99), 동두천시 (0.99), 안양시 (0.99), 용인시 (0.99), 광명시 (0.98), 성남시 (0.98), 고양시 (0.97), 의정부시 (0.97), 과천시 (0.95) 순으로 높다. 경기도(에 해당하는 지역, 강화군/옹진군 및 인천광역시 제외)의 연도별 인구 추이 2017년 7월 현재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그래프는 10,000명당 1씩 표현하였고 1,000의 자리가 8이상인 경우 반올림하였다. 현재 경기도지사는 2018년 지방 선거에서 당선된 이재명이다. 1989년 과천시에 한국마사회 서울경마공원이 개장하였고, 경기도에 8개의 KRA 플라자가 운영되고 있다. 삼두정치 삼두정치 (Tresviri 혹은 Triumviri)란 고대 로마사에서 흔히 듣게 되는 낱말로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조지 1세 조지 1세(George I, 1660년 5월 28일 ~ 1727년 6월 11일)는 영국 하노버 왕가의 시조로 재위기간은 1714년 8월 1일부터 1727년 6월 11일까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인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팔츠의 조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외외증손자(딸의 외손자)가 된다. 23세 때 사촌 누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도로테아와 결혼했고, 조지 2세와 조피 도로테아(훗날 프리드리히 2세의 어머니)를 뒀다. 그러나 결혼 13년 만에 아내의 부정(不貞)을 이유로 즉시 이혼하고 알든 성(城)에 유폐한 후, 자신의 정부(情婦) 멜루지네 폰 슐렌부르크와의 사이에서 세 딸 안나 루이즈 조피, 멜루시나, 그리고 마르가레테 게르투르트를 뒀다. 1701년 제정된 영국 왕위계승법으로 제임스 1세의 손자인 어머니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3순위가 됐다. 그보다 앤 여왕에 더 가까운 친척들도 50인 이상 있었으나 영국 왕위계승법은 카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원천 금지하고 있어, 조지 1세와 그 어머니가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신교도 혈육으로서 왕위 계승자에 이름을 올렸다. 1714년 7월 8일에 어머니가 향년 84세로 죽자 차기 계승자가 됐고, 앤 여왕이 같은 해 8월 1일 후사 없이 향년 49세에 비만으로 인한 당뇨 합병증 등의 원인으로 서거하자 54세의 나이에 영국 왕에 올랐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점차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됐고, 1721년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에게 전권을 줘 각의를 주재하게 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는 동시에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가 영국에서 뿌리내렸다. 1727년 6월 11일 당뇨 합병증의 원인으로 서거 후 시신은 그가 태어난 하노버 라인 궁(Leineschloss) 헤렌하우젠 정원(Herrenhausen)에 묻혔다. 조지 2세 조지 2세 (, , 1683년 11월 10일 ~ 1760년 10월 25일)는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재위: 1727년 ~ 1760년)이다. 조지 1세와 조피 도로테아의 아들이며 프로이센 왕비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오빠이다. 조지 2세의 어머니인 조피 도로테아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남편인 조지 1세에 의해 감금되었는데, 이때 조지 1세는 아들이 어머니와 만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조지 2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조지 1세와 공공연히 대립했고 자신이 머물던 레스터 하우스에서 월폴 등과 어울렸다. 조지 2세는 건장한 체격에 왕으로서 위엄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으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고 오페라를 좋아했으며 독일 출신의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의 최대 후원자였다. 헨델은 조지 2세를 위해 그의 대관식 찬가인 《사제 사독》을 비롯해 《왕궁의 불꽃놀이》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조지 2세는 생애 전반에 걸쳐 군인처럼 규칙적인 일과를 보냈고 군사 방면에도 관심을 보여 1743년에 있었던 데팅겐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조지 2세는 1705년에 할머니인 팔츠의 조피의 소개로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결혼했다. 총명하고 아름다운 캐롤라인은 그의 좋은 조언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그러나 부부는 아들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프레더릭은 정치적으로 조지 2세의 반대세력인 토리당과 잦은 접촉을 했고 조지 2세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들의 불화는 프레더릭이 조지 2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1760년 조지 2세는 아내 캐롤라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정신장애(우울장애, 조현병)가 생겼으며, 내과질환인 당뇨병을 앓기도 했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청력도 약해진 그는 결국 1760년 10월 25일 아침에 대동맥류로 인한 우심실 파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있는 아내의 묘소 옆자리에 묻혔다. 둠스데이 알고리즘 둠스데이 알고리즘(Doomsday algorithm)은 존 호턴 콘웨이가 발명한 알고리즘으로, 임의의 날짜에 해당하는 요일을 쉽게 구하는 데에 쓰인다. 한 해에서 다음 날짜는 언제나 요일이 같다. 이것은 일과 월이 모두 4부터 12사이의 짝수로 되어 있으므로 외우기 쉽다. 한편, 다음과 같은 날들도 위의 날짜들과 요일이 같다. (이것은 흔히 'nine-to-five', 'seven-eleven'이라고 외운다.) 그리고 1월과 3월은 다음 날짜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한 해에서 요일이 같은 날들을 일컬어 둠스데이(Doomsday)라고 한다. 이 날짜와 그 해의 둠스데이의 요일만 기억하고 있으면, 날짜에 따른 요일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어떤 한 날과 다른 한 날의 요일이 같으려면, 그 두 날 사이의 날짜 차이가 7의 배수여야 한다. 예를 들어서 1월 1일과 1월 8일, 1월 15일은 같은 요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앞에서 4월 4일과 6월 6일은 63일 차이가 나며, 6월 6일과 8월 8일 역시 63일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이, 한 해 안에서 요일이 서로 같은 둠스데이의 날짜 차이 역시 7의 배수이다. 둠스데이는 한 해 안에서 항상 요일이 같은 날들, 예를 들자면 1월 1일과 1월 8일 같은 날들 중 사람들이 기억하기 쉬운 날짜를 선택해서 만든 날들이다. 그레고리력으로 2019 년의 둠스데이는 목요일이다. 대한민국 이라크 평화재건사단 자이툰 부대(, ) 또는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은 평화 유지와 재건을 위해 이라크에 파병되어 2004년 2월 23일부터 2008년 12월 20일까지 활동했던 대한민국 육군의 민사 부대이다. 자이툰()은 아랍어로 올리브를 뜻하며, 이는 평화를 상징한다. 대한민국은 2003년 4월 2일 국회는 "국군부대의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연방 정부는 한국에 200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한다는 목적하에 더 많은 군을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아들인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2월 23일에 평화 유지와 재건을 임무로 하는 자이툰 부대를 8,000여명 가량의 사단으로서 창설되어 이라크 다국적군의 일원으로서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아랍 저항단체에서는 이 부대를 이라크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전 미국의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이 2004년 10월 10일 이 부대를 방문하여 격려하였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도 12월 8일 이 부대를 전격 방문하였다. 대한민국 시간으로 2007년 5월 19일 오후 6시 45분경(오후 1시45분 현지시간) 자이툰 부대 오모 중위가 영내에 있는 자이툰병원 의무대 이발소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2007년 6월 4일 타살이 아닌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자이툰 부대는 쿠르드인들에게 부지와 대부분의 건설 장비 등을 넘겨주고 2008년 12월 20일에 쿠르드 자치구 아르빌에서 철수하였다. 초기에는 사단 사령부와 사령부 직할대, 제1100건설공병단 "서희"(2003년 4월 15일 창설) 와 제320의료지원단 "제마" , 그리고 각각 특전사 인원이 주축인 2개 민사(또는 재건 지원)대대와 각 특공대에서 차출된 대원들로 구성된 1개 경비대대, 그리고 장갑차 중대가 편성된 제11민사여단(111, 112재건지원대대)과 제12민사여단(121, 122재건지원대대)으로 구성되었다. 사단 사령부의 경비는 해병대 지원병으로 구성된 1개 경비중대가 맡았다. 총 규모는 약 3,600여명이었다. 2007년 12월 28일, "국군부대의 이라크 파견 연장 및 임무종결계획 동의안"에 따라 1년 더 파병이 연장되면서 사령부 부서인 민사처가 민사협조본부로, 재건지원대대에 경비대대가 통합되었다. 병력 감축에 의해 650여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소장 계급의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 제58항공수송단 "다이만"에서 자이툰 부대에 군수 및 병력을 공수하여 지원하였다.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42년 11월 16일 ~ 37년 3월 16일)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42년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는 반 아우구스투스파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때 참여하자 1세때 부터 로마를 떠나서 페루시아와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치며 생활해야 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피 당시, 네아폴리스에서는 몰래 항구로 도망치던 중, 티베리우스가 2차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이때 일행들에 의해 버려질뻔 했는 기록도 있다. 그 후로도 어딘가에서(이탈리아 반도로 추정) 어머니 리비아가 티베리우스를 대리고 야반도주를 할 때 숲에서 산불이 났고 티베리우스 모녀는 이 산불에 휩쓸려 죽을뻔 했다가 간신히 머리와 옷만 그슬리고 살아남았다.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티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로 맡겨지기도 했다고, 이때의 고난들은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슴 깊이 남았는지 티베리우스는 시칠리아에서 어머니가 폼페이아에게 받았던 망토와 핀 금제 장식들을 보관했고 100여년 뒤인 오현제 시절인 수에토니우스도 바이아이에 남아있던 이 유물들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티베리우스가 3살이었을 무렵에 사면령이 내려져 티베리우스 일가는 로마에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의 미모에 반하여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부모는 이혼하고, 리비아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였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가 결혼 직후에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에게 거두어져 양육되었다. 티베리우스가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에게로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청소년으로 성장한 티베리우스는 벌써 로마의 제일인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겨우 12세에 나이로 정무나 군무업에 종사하였다. 기원전 29년 8월,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개선식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함께 개선식에 참가하였다. 그 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각지에 파견되어 자신이 유능한 장군임을 계속 증명해보였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며 임페라토르로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임페라토르을 세습시킴으로써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유지할 생각으로 후계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조카 마르켈루스와 동지인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이 후보로 생각해서 자신의 딸 율리아를 처음에는 마르켈루스에게,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후에는 아그리파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사이에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두 형제가 태어나자 두 명의 손자들을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보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두 명의 손자들의 후견인으로서 아그리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율리아가 또다시 미망인이 되자 당시 자신의 친척 중에서 최연장 남자인 티베리우스를 후견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폰포니아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였으며,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셋이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빕사니아와 이혼시켜 율리아와 결혼하게 만들었다.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의 이별을 슬퍼했지만 율리아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윽고 품행이 좋지 않던 율리아의 행실로 부부 사이가 악화되어, 티베리우스는 자진하여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간통죄를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년에 로마로 귀환하였지만, 후계자 후보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이미 요절한 상태라 소거법적으로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의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 기원전 4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다. 그 때,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小)드루수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이 흐르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해, 티베리우스에게 두 번째의 호민관 직권이 주어졌다. 한편 티베리우스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포스트무스는 양아들 결연이 파기되어 추방되면서,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13년에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사실상 공동 임페라토르가 되었으며, 서기 14년부터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노환으로 실질적으로 단독 임페라토르가 된다. 이윽고,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의 유언장에 의해 유산의 상속자로 지명되었고 티베리우스는 임페라토르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금융 위기 대택,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임페라토르 주최의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는 낮았다. 서기 26년 ~ 사망 (서기 37년) 까지 카프리 섬에 은거하여,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를 통해서 로마를 통치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29년에 이루어진 아그리피나 소탕작전은 더욱 티베리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서기 31년 10월 28일에는 권력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던 (Sejanus)를 교묘한 전략을 사용해 처형하기도 했다. 37년, 79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유대 출신의 철학자 필론(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티베리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칼리굴라 칼리굴라()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 재위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이다.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귀여워하며 붙여준 '꼬마 장화'라는 뜻을 가진 별명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大)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또한, 네로의 어머니인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미친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마차를 끌어온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왔다. 또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非)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Cassius Chaerea) 등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원로원이 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의 부흥을 기획했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된다.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기원전 10년 8월 1일 - 54년 10월 13일)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小)안토니아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드루수스나 형 게르마니쿠스와는 달리 그는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 황실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형인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배려해 주었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찾아낸 역사가 리비우스의 영향으로 에트루리아나 카르타고의 역사를 저술하여 역사가로서의 측면을 갖게 되었다.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에 의해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으로 취임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1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즉위에 임하기 전에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근위군단의 군사력에 의해 즉위한 것인지라,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최초의 예가 되었다. 교양을 갖춘 역사가였던 그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이 극렬했던 유대의 통치 문제 등을 해결하였지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인이나 아니우니족 출신의 해방 노예 등을 등용하여 다양한 행정 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은 비(非)원로원 의원의 정치 참여를 증대하여, 황제에게의 권력 집중이나 관료제의 발달로 이어졌다. 45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다.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4번째 아내이자 다음 황제인 네로의 어머니인 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네로 네로()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5일 ~ 68년 6월 9일, 재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칭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이자 양자이며 칼리굴라의 외조카가 된다. 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어머니은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의 출생 당시 로마 제국은 외삼촌인 칼리굴라의 집권기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서기 49년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숙부(네로의 외종조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네로는 서기 54년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세 살 차이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 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집권 전반기 그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로마의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라는 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를 대학살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 그러나, 55년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이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하였고,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 온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기독교도를 대학살함으로써 로마 제국 황제 중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었다. 65년에는 스승인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Phaon)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갈바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3년 12월 24일 ~ 69년 1월 15일)는 로마 제국의 여섯 번째 황제이다. 갈바가 69년 1월 15일에 죽음으로써 69년에 죽은 첫 번째 황제(왕)이 되었다. 갈바는 기원전 3년 12월 24일,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20년, 23살의 나이로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33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39년에는 칼리굴라에 의해 라인 강 방위군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45년 그는 북아프리카 총독에 임명되었다. 49년, 그는 소 아그리피나가 그 당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었는데 갈바는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10년 정도나 정치에서 은퇴생활을 해야 했다. 61년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68년에는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68년 6월 8일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 10월에 로마로 돌아왔는데 로마에 돌아와 그가 국정에 관하여 내린 조치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중 하나가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것으로 이 조치는 재정을 다시 확보하려고 그런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갈바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은 더욱 실추되기 시작한다. 69년 1월 2일에는 라인 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1월 10일에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Lucius Calpurnius Piso Licinianus)를 입양하여 자신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자신이 갈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오토를 분노케하여 오토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토는 1월 15일에 황제를 수행하던 중 일행에서 빠져나와 근위대에 접근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에 당황하여 반란군과 대항하려 했으나 오토 측의 기병에 공격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오토 (로마 제국)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 32년~69년)는 로마 제국의 일곱 번째 황제이다. 그가 자신이 살해한 갈바에 이어 69년 4월 16일에 자살함으로써 69년에 죽은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오토는 32년 4월 28일 에트루리아 남부에 있는 페렌티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로원으로부터 에퀴스트리안의 직위를 임명받았으며 집정관까지 되었다. 오토는 네로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네로가 그의 아내 사비나와 사랑에 빠짐에 따라 신임을 잃어 루시타니아의 총독으로 보내졌다. 오토의 사랑을 시기한 네로는 사비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갈바가 네로정권을 뒤집고자 세력을 구축하자 그를 지지한 오토는 네로의 종말에 한 몫을 했다. 갈바가 황제가 된 뒤 예전부터 권력을 원했던 그는 자신이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이용하여 갈바와 그의 후계자 피소를 죽이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곧 원로원의 투표에 의해 갈바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지 3개월 후 비텔리우스가 다시 내란을 일으키고 초기 진압에 실패한 오토는 자결로 일생을 마쳤으며, 비텔리우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비텔리우스 비텔리우스 (15년 9월 24일~69년 12월 22일)는 로마 제국의 여덟 번째 황제이다. 그가 69년 12월 22일에 죽음으로써 69년에 죽은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5년 9월 24일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48년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61년에는 아프리카의 총독에, 68년에 하(下)게르마니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내란기를 거치며 69년 1월 2일에 하게르마니아군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주모자로 추대되었으나 막상 군을 끌고 오토를 공격하여 로마를 점령한 사람은 부하인 카이키나와 발렌스였다. 덕분에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쉽게 4월 16일에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승인되었다. 로마로 가는 길에 그가 보여준 것은 환락, 축제, 그리고 무분별한 언동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경솔했던 것은 그가 내뱉은 무분별한 말로 “죽은 적의 냄새는 달콤하다”는 말은 수많은 사람의 적개심을 샀다. 그 해 5월에는 자신의 게르마니아군을 근위대로 승격시키고 기존의 수도의 근위대는 해체시켰다. 7월 1일에 비텔리우스에 대항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반기의 기치를 들고 일어서게 된다. 비텔리우스는 7월 18일 휘하 병력과 함께 로마에 입성하였다. 입성한 비텔리우스는 부하들의 전횡 방치, 연이은 환락생활, 무분별한 군단관리 등 그야말로 정치에 관해서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 10월에는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카이키나가 이끄는 라인 군단과 충돌해 승리하고 자신들을 모욕하였던 크레모나의 주민을 무참히 학살한 뒤 로마로 쇄도하기 시작한다. 12월 20일, 도나우 군단에 맞서 군사를 보내나 보낸 군사들이 쉽게 도나우 군단에 항복을 하게 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겁을 먹은 비텔리우스는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친위대에 의해 거부 당하고 숨어 지내다 도나우 군단에게 끌려나와 처형되고 만다. 죽기 직전에 군인들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고 살해되려 할 때, 군인들에게 "나는 그래도 한때나마 너희들의 황제였었다."라고 외쳤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살아 생전에 그가 황제답게 행동한 유일한 모습이었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비웃었다.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9년 11월 17일 - 79년 6월 23일),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이다. 그는 비텔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는 아시아 속주의 징세청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어머니는 베스파시아 폴라이다. 두 형제의 차남으로 사비니지방의 레아테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로마 황제가 되는 타이스 도미티아누스를 두었고, 또 도미틸라라는 딸을 두었다. 형을 따라 공직에 입문하고, 36년 트라키아 지방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다. 이듬해 회계 감사관으로 선출,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복무한다.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 39년 조영관직을 거친 후 이듬해인 40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페렌티움 출신의 기사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는데,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집안의 해방 노예 출신인 체니스라는 여자를 곁에 두고 안주인처럼 대우했다.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가신이었던 해방노예 나르키소스의 천거로 그는 게르마니아에 있는 제2군단 아우구스타의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 집안의 둘째 아들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네로시대에는 뛰어난 장군으로 로마 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로마 황제의 그리스 별궁에서 네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네로 황제의 시를 들으며 졸았다는 이유로유배되어 양봉을 하며 소일하게 된다. 2년여의 세월이 지나자 유다 지역에서 유대교민족주의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를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되는데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다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다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 쪽의 상생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다를 무리 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로마에서는 네로의 자살로 말미암아 큰 혼란이 야기되고 이를 수습할 적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인에게 선택되면서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내전 상태의 로마를 평정하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시키면서 군인 출신이었던 세 명의 황제의 뒤를 이어 새로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이며 그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를 이루게 되었다. 티투스 티투스 (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로마 제국의 열 번째 황제이며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이다. 기원후 39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티투스는 황궁에서 제국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제위 계승자의 한 명이었던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좋아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바로 옆에서 그를 죽인 독을 시험하느라 오랫동안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을 티투스는 평생 잊지 않고,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의 상을 건립했다고 전하고 있다. 기원후 61년부터 기원후 63년에 걸쳐 트리브누스·미리튬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 등지에서 복무했다. 기원후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이듬해에 마르키아·프루니라와 재혼했다. 아내의 생가는 제위 후계자로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네로의 대항 세력에 속했지만, 결혼한 해인 기원후 65년에 원로원 의원 피소에 의한 네로의 암살 의혹 사건(Pisonian conspiracy)으로 아내와는 이혼해야 했으며, 그 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67년에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유대인항쟁진압을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고,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Legion) 을 지휘했다. 쿠에스톨(재무관)이있던 티투스는 동지로 군의 지휘관으로서 근무한다. 그러나 로마에서 68년에 네로가 자살로 내몰리고 갈바가 스스로 황제로 취임한다. 이 때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으로 갈바에 황제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도중에 갈바가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했던 오토가 자살했으며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서방의 정세가 혼란에 빠진 것을 알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유대항쟁 진압에 전념했다. 이같이 1년에 황제가 네 명이나 교체되는 불안정한 '4황제의 해'에, 티투스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함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다. 기원후 69년에야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한 선봉으로, 이듬해에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선언을 위해 차례로 로마로 향한 뒤, 예루살렘 공략의 사령관이 되어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을 2년동안의 전쟁끝에 점령, 기원후 73년까지 혁명당원 들이 저항을 계속한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의 반란을 평정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후 81년에 세운 것이다. 이 때에 유대왕가의 일족인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다. 기원후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 개선식의 모습은 포룸·로마눔의 동쪽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릴리프에 남아 있다. 그 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공동 통치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은 그는 73년 아버지와 함께 감찰관을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집정관이 된지 7년 째 되는 기원후 79년에, 티투스는 제위 계승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역모를 진압하기도 했으며 그 해에 아버지가 죽자 아무 소란 없이 즉각 제위에 올랐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사람들은 그가 다시 네로와 같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라고 훗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쓰고 있다. 이유는 애인인 베레니케로,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의 재래로 여겨졌고, 시민들의 두려움을 깨달은 티투스는 베레니케를 아내로 하는 것을 단념했으며 이를 계기로 시민의 동정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하고,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티투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좋은 것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하루를 잃어 버렸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티투스가 즉위한 해 8월에 그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가 멸망했는데 이때 그는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원후 80년로마에 사흘 동안에 걸친 대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때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을 마무리지었고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축하행사를 벌였다.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와중인 기원후 81년 9월 13일, 티투스는 치세 불과 2년 만에 열병으로 죽었다.(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남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도 기록하였다.) 그가 죽자,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51년 10월 24일 - 96년 9월 18일)는 로마 제국의 열 한 번째 황제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제 9대 로마황제이었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졌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군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 85년에는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토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기독교의 케뤼그마에 반대되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 우상화에 반대하여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 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 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에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그 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생전에 남긴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에 처했음에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네르바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로마 제국의 제12대 황제(96년 9월 18일 - 98년 1월 27일)이다. 로마 제국의 5현제 중 첫 번째 황제이지만,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이렇다 할 업적은 없다. 어떤 이는 네르바의 유일한 업적으로 다음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은 일을 들기도 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나르니아(현재의 나르니)에서 태어났다. 71년과 90년 두 번에 걸쳐서 집정관을 맡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남색 상대의 한 사람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96년에 암살되어, 고령에다가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 황제로 옹립되어 원로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자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군대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던 탓에, 당시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군대의 인기가 높았던 트라이아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이 날 이후, 양아들의 형태로 제위를 계승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5명의 황제들을 오현제(五賢帝)라고 부른다. 트라야누스 트라이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53년 9월 18일 - 117년 8월 7일)이다. 속주 출신자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황제에 올랐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힌 시저이다. 로마 제국의 속주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 태생이다. 대(對) 게르만족 최전선인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을 맡고 있었던 그는 97년에 네르바 황제의 양아들이 되어, 98년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네르바 황제가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입양한 이유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으로, 유능한 트라야누스가 제국을 경영하도록 하는 지혜로운 생각이었다. 트라야누스 치세의 교회사를 미주한인크리스천신문에 기고한 한평우 목사에 따르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네르바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중 한 사람으로, 탁월한 황제로 인정을 받았다. 군인 출신인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의 방위 정책에 반해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도나우 강을 넘어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다키아와 일시적으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도 제국령으로 삼는 등 트라이아누스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의 영토는 최대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의 판도는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일대에서부터 이집트 남부, 북쪽으로는 브리타니아 남부에까지 미쳤다. 내정 문제에 대해서는, 선제 네르바를 본받아 원로원과의 협조를 중시하였다. 또, 구빈 제도 충실, 세금 부담 경감, 공공사업 진흥 등의 사회복지와 행정 개혁을 대거 실시하는 등 제국의 번영에 노력하였다. 시내에 포로 로마눔 부근에 새로운 광장을 축조하여, 벽돌을 세워 공설 시장을 마련해 시민들을 입주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뛰어넘어 로마 시민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이러한 내정과 원정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원로원에서 ""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당시 주조된 화폐에도 새겨져 있다. 비티니아 속주 플리니 총독이 그리스도인 즉 기독교인들의 예배에 대해 보고하고, 대처방안을 문의하자 '고발이 있을 경우에 심문을 하고, 배교를 하면 풀어주되, 배교를 하지 않는다면 처형할 것'이라는 행정지시를 내린다. 즉, 법치주의에 따라 기독교라는 신흥종교를 다스리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기에 이그나티우스 주교가 순교한다.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남색을 좋아한 그는 항상 아름다운 한 무리의 남자들을 대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황제로서의 그의 직무 수행에 방해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식이 없이 죽고 만다. 제위는 양아들로 삼은 사촌형제로 하드리아누스가 계승하였다. 하드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76년 1월 24일~138년 7월 10일)는, 로마 제국의 제14대 황제(재위: 117년~138년)이다. 네르바 - 안토니누스 조(朝)의 제3대 황제이다. 제국령을 두루 시찰하여 제국 각지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 한편 트라야누스 황제의 팽창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토대로 변경 안정화로 전환하였다. 76년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원적(原籍)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니아(현재의 에스파냐) 파에튀리카의 이탈리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어머니는 도미티아 파울리나로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촌 형제의 아들에 해당한다. 85년 먼 친척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견인이 됨으로써 로마로 거주지를 옮긴다. 93년(또는 94년), 18살의 나이로 20인 위원(委員)직을 맡아 민생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고, 로마 제국 제2군단의 부관에 임명되면서 지휘관의 발판을 놓게 되었다. 나아가 96년에 제5마케도니아 군단의 지휘관, 97년 제12프리미게니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판노니아, 하부 모이시아 및 상부 게르마니아 각 속주에서 고급 장교의 임무를 수행해 공적을 세운다. 101년에 원수재무관(元首財務官)에 취임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서로서 활약, 황제의 연설을 원로원(元老院)에서 대변하는 역할을 맡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105년 호민관(護民官)에 취임하였고, 나아가 법무관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제1미네르바 군단의 사절, 군사령관으로서 제2차 다키아 전쟁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웠고, 107년부터는 속주의 장관으로서 하부 판노니아를 다스렸다. 이때 쌓은 공적으로 이듬해 108년 명목상 황제 다음 가는 로마 제국의 관직인 보좌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114년부터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황제 트라야누스의 보좌역을 맡아 두터운 수완을 발휘한다. 117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속주 시리아의 총독(코메스)로 임명하였다.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대신 파르티아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돌아가지만, 도중에 킬리키아 지방의 세리누스에서 사망하고 만다. 죽기 전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지명했는데, 이것은 황후 프로티나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8월 9일에 안티오키아에 머무르고 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트라야누스의 양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고 이틀 뒤 트라야누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휘하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황제)」라 불렸고, 이 날이 하드리아누스의 공식적인 「즉위날」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세리누스로 가서 조문을 표한 뒤, 다시 시리아로 돌아갔다. 그 뒤 동부 변경의 안정을 위해 속주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포기한다는 처리와 함께, 야만족의 침입으로 불온한 정세에 놓인 도나우 강 유역에서 물러나 속주 다키아와 모이시아를 재편성하고 이듬해 7월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에 대해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견을 드러냈는데,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던 심복 근위장관 아티아누스가 예방적 차원의 처치로서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집정관을 맡았던 유력한 원로원 의원 4명을 살해했다(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이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이루어진 특기할 만한 사실들은 이 있다. 그가 황제로 취임할 때, 선제 트라야누스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이르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찍이 다키아를 속주로 삼았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았으며, 치세 말기에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동방에 인접해 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하드리아누스는 외교 기조를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하는 대신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국의 동부 이외에도 제국의 방어력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군사적인 요충지에는 방벽(리메스) 구축으로 천연의 요새를 지어 제국을 방비했다. 그 중에서도 칼레도니아인과의 분쟁이 있었던 브리타니아 북부에도 방벽을 구축하였다. 보통 「하드리아누스 방벽(하드리아누스의 벽)」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게르만인과의 경계였던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 지역, 북아프리카에도 방벽이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 스스로가 군기를 철저하게 바로잡고자 하여 순찰 여행 도중에도 현장에서 병사 훈련을 사찰했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군단에 현지 병사를 채용함으로써 군단의 규모를 안정시키고 군비를 절약하였다. 파르티아 문제를 수습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우선 속주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 속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와의 일체화에 노력을 기울여,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순찰 여행에 나섰다. 여행 목적은 제국 방비의 재정비와 제국 행정의 조사, 통합의 상징으로서 황제 자신을 주지시키며 제국 각지(특히 길리시아화된 지역)의 순찰에 있었으며, 건설 관계자를 동반하는 등 공공 부분의 공사도 함께 행해졌다. 20년간 3차례에 걸친 제국 전역을 시찰하여 제국 영토의 방위나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한 대처, 통치 기구 정비 등 제국 내부를 튼실하게 만드는 데 충실하게 노력하여 제국을 재구축한 황제로 불린다. 특히 통치 기구 정비가 매우 철저하여 그가 구축한 관료 기구는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고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지만, 군사면에서도 우수하였다. 군대의 규율 개정에 의한 군 내부를 개혁시켰으며, 용병술에 뛰어난 하드리아누스 덕분에 로마군은 연전 연승이었다. 또 전투 상황일 때는 앞장서서 지휘를 하였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법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여 사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명하여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이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게 한다(완성은 131년경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인 6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것은 법무관이 내리던 기존의 고시(속주 총독이나 심판인의 법의 근원)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훗날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 이들을 토대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로마법 대전』)이 편찬되었다. 130년에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때에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을 로마풍의 도시로 건설하여, 자신의 씨족명 「아일리아」를 붙인 식민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 명명하였고, 132년에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바르 코크바의 반란).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속주로부터 군단을 동원하여 3년 만인 135년에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러한 반란의 결과로 유대 지방은 「속주 시리아 ・ 팔레스티나」라 명칭이 바뀌었고 유대라는 이름은 사라졌으며, 유대인들은 제국 각지로 대규모 이산되고(디아스포라) 이후 예루살렘 시내에 거주하는 것이 제한되었다(예루살렘에서의 야훼 숭배도 금지되었다). 치세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국내, 외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지만, 로마 원로원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했다. 일단 하드리아누스 치세 초기에 집정관 경력이 있었던 원로원 의원 네 명이 살해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드리아누스는 방위에 필요한 병력과 유지비 등의 부담이 늘어나 결국 제국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러한 판단 아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다는 현실 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는 실제로 전장을 누비며 영토 확장에 공헌한 자들도 있어, 하드리아누스의 온건한 대외 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원로원 일부의 거센 반발에 하드리아누스의 지지자들은 반대파 거물 네 명을 숙청하는 강경책으로 대처했다. 치세 말기 후계자를 선출할 때에도 의견이 맞지 않아, 황제의 의형제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그 손자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자살로 몰아갔다. 황제의 치세 말기 하드리아누스와 원로원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있었다(그러나 몇몇 그룹과의 관계가 긴장 상태였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황제가 서거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여 국가신(國家神)의 반열에 올리는 것조차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 경우 신격화되지 못한 채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 말살형」에 처해져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관련된 모든 기록이 말소될 수 있었다. 황제의 후계자가 된 안토니누스는 눈물을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원로원 설득에 힘썼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안토니누스는 「경건한 안토니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로마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많이 세워졌던 로마에서 5현제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을 기리는 비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118년,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 대규모의 별장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건설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후세의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건축에 큰 영향을 준, 로마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테온 신전의 재건에 착수했다. 그 외에도 로마의 베누스와 로마 신전 등 각지에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 사생활의 면에서 비티니아의 미청년 애인 안티누스를 총애하여 속주 아이깁투스(이집트) 시찰 중에 그 미청년이 나일 강에서 사고사한 뒤에는 그를 신격화하여 신전을 세우고 도시 안티누폴리스를 지었으며, 제국 내에 안티누스의 상을 세우고 천공에 안티누스가 거할 자리를 짓게 했다고도 전한다. 몸이 튼튼했지만 만년에는 컨디션 불량에 시달렸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성공 직전에 늘 노예에게 들켜 제지되곤 했다). 또한 자신의 후계자로 처음 지정했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Lucius Aelius)가 138년 1월에 사망하기도 했는데, 다음 달에 다시 안티누스(Antinous 또는 antinoös)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138년 7월에 바이아이(Baiae)의 별장에서 62세로 서거하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86년 9월 19일 - 161년 3월 7일)이다. 5현제 중의 한 명으로 꼽히며, 피우스는 '경건한 자'라는 뜻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주어진 존칭이다. 선제(先帝)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계승한 그의 치세는 대체적으로 평온하였다. 단지 군사 원정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야만족의 발전을 허락하여, 후대에 화근을 남겼다고도 일컬어진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콘술)을 지냈으며, 원래 갈리아 출신 집안 태생이었지만, 안토니누스는 로마와 가까운 라누위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외가의 조부 아미우스 안토니누스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미우스는 대(大)프리니우스의 친구였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신임도 두터웠고,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 요직을 역임한 뒤, 이탈리아 반도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안토니누스가 후계자로서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 138년 2월 25일에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 양아들 아에리우스 베루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아내의 남동생에 해당하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아에리우스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 두 명을 양아들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이 훗날의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이다. 아내인 대(大)파우스티나와의 사이에는 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지만, 딸 소(小)파우스티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 사망했다. 소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고결한 성품을 가진 황제였으며, 현군으로 추앙받게 될 양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로마로부터 12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에트루리아의 로리움에서 열병 때문에 161년에 사망하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또한, 중국의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의 상인들이 중국의 정치가인 손권을 만나서 고향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은 대식국(大植國,로마를 한자로 옮겨쓴 이름)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당시 30세 안팎이었던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지명하였는데,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나와 약혼함으로써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1월 1일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가 급사하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라 불린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 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케이오니나와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키고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켰다.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은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재위 첫해부터 본국 이탈리아와 그 주변에 걸쳐 기근과 홍수가 일어났다. 같은 해 파르티아가 제국 동방에 침입하여 반격에 나섰던 1개 군단이 궤멸당하고 카파도키아의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총독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으며, 아르메니아 왕국이 파르티아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카파도키아 총독에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를 임명하고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으로 보내어 파르티아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루키우스 베루스를 대신하여 직접 전쟁을 수행한 사람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다. 그는 163년 동방의 남은 군단들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격파한 뒤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를 탈환했으며 165년에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까지 진격하고 166년 티그리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의 심장부로 깊숙히 쳐들어가 철저히 격파했다. 한편 168년부터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해 이 과정에서 169년 공동 황제 루키우스가 죽었고 170년 봄부터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키아 속주에서부터 북상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해 게르만족들을 패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사령관 프론토가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설상가상으로 270년 만에 북부 방위선이 뚫리면서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북부까지 쳐들어왔으며, 이에 대응하여 황제는 4개 군단을 신규로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171년 북아프리카 속주에서는 마우리타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니아까지 쳐들어와 눌러앉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마르쿠스는 베테랑 장군 아우피디우스 빅토리우스를 파견해 이를 진압했다. 172년부터 본격적인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시작되어 빈과 베오그라드에서 동시에 공세를 감행했으나 도나우 강 건너편에서 근위대가 패배하고 근위대장 빈덱스가 전사하는 등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173년부터는 각개격파작전으로 선회하여 전쟁을 우세하게 이끌었고 174년 강화가 성립되었다. 175년에는 시리아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오보를 접하고는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빠진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177년그때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178년에 시작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은 집정관 율리우스 베루스가 전사함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에서 대공세를 펼친 결과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을 압도하며 전황을 우세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180년 3월 17일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강변의 군사기지였던 빈도보나(현재의 빈)에서 재개될 전쟁을 준비하던 도중 지병이 악화되며 병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변의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명상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 Democritus, 기원전 460년 무렵 ~ 380년 무렵)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아폴로도로스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전기에 따르면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약 470 - 460년에 그리스 북부 지방 트라키아의 해안 도시 압데라에서 부유한 시민인 헤게시스트라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데모크리토스는 젊은 시절에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클레멘스, 스트로마타 1.69). 레우키포스에게서 배운 후, 그 생애의 대부분을 연구와 저술 및 교수로서 보냈다. 이 밖의 개인적인 면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데모크리토스는 전소크라테스 철학자 가운데 마지막 큰 인물로서 소크라테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철학 사상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원자론을 먼저 손꼽을 수 있으며, 윤리학, 인식론 등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개념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잘 표명되었다.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그리고 사물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치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고대 원자론'을 완성하였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많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는 이 원자와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원자가 합쳐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자연의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발달과 문화의 발달 등을 설명하였다. 이 원자론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학설은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초기 유물론의 완성인 동시에, 후기 에피쿠로스 및 근세 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조분 이사금 조분 이사금(助賁 泥師今, ? ~ 247년, 230년 ~ 247년)은 신라의 제11대 임금이며, 벌휴 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骨正), 혹은 홀쟁(忽爭) 갈문왕이며, 어머니는 구도(仇道) 갈문왕의 딸 옥모(玉帽)부인이다. 내해 이사금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이다. 조분은 키가 크고 태도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며, 일에 임할 때는 명쾌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230년 즉위함과 함께 연충(連忠)을 이찬에 임명, 군사를 정비한 뒤 이듬해 231년 음력 7월 이찬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해 감문국을 쳐 병합했다. 232년 음력 4월에는 왜가 금성을 포위하니, 이사금이 친정하여 적을 격퇴하고 1천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33년 음력 5월 왜가 다시 동쪽을 노략하니 음력 7월에 이찬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왜인과 싸우는데, 화공으로 왜인들의 배를 불태우고 적병을 수장시켰다. 236년 음력 2월에는 골벌국(骨伐國)의 아음부(阿音夫) 왕이 무리를 이끌고 와 신라에 항복하였다. 저택과 사유 경작지를 하사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240년에 백제가 침공하였다. 244년, 이찬 우로를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하게 하였다. 245년 음력 10월에 고구려가 침공하였다. 석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고구려군에 패하고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이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첫 번째 침공이다. 기림 이사금은 보통 그의 손자로 보나 이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기림 이사금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고 하며, 삼국유사의 왕력편에는 그의 손자라는 설과, 왕력편의 다른 대목에는 기림이사금이 조분의 둘째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월성석씨 족보에는 유례이사금과 걸숙 외에도 지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지의 10대손 오원(五源)으로 후사가 이어졌다. 아브디라 아브디라(현대 그리스어: Άβδηρα) 또는 압데라(고대 그리스어: Ἄβδηρα)는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에서 네스토스 강이 에게 해로 흘러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도시이다. 고대에 도시 국가가 있었으며, 오늘날 아브디라 시는 행정 구역상 크산티 현에 속한다. 헤로도토스(역사, 1.168)에 따르면 클라조메네의 주민들에 의해 기원전 656년에 건설된 식민도시라고 한다. 상업 도시로서 빨리 번창하였으며 후에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여 아테나이와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압데라는 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원전 4세기 중반 마케도니아의 흥기와 더불어 거의 자주권을 잃고 마케도니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두 명의 유명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프로타고라스를 배출하였다. 첨해 이사금 첨해 이사금(沾解 泥師今, ? ~ 261년, 재위 247년 ~ 261년)은 신라의 12번째 임금이며,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이다. 재위 원년에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우로를 파견해 이를 평정하고 사벌국을 폐지해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이는 신라 역사상 첫 주(州)의 설치 사례이다. 재위 이듬해인 248년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249년에는 서불한 석우로의 실언으로 왜가 쳐들어와 우로를 죽였다. 255년 음력 9월 백제가 쳐들어와 일벌찬 익종(翊宗)을 보내 괴곡(槐谷) 서쪽에서 맞아 싸우게 했으나 패배하였다. 그대로 음력 10월에 봉산성(烽山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후 약 6년간 왕위에서 있다가 261년 12월 28일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다음 왕이 조분이사금의 사위인 미추이사금인것으로 볼 때, 또한 능과 가족관계는 남아있지 않다. 259년과 260년 연달아 가뭄과 홍수를 맞아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261년 음력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에 음력 3월에 백제가 화친을 요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51년 752년 753년 754년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발생하였다. 756년 니가타현 니가타 현(, )은 일본 혼슈의 동해 연안에 있는 현이다. 현청 소재지는 니가타 시()이다. 니가타 현의 육지부는 옛날은 에치고 국(越後国)로 불리고 있었다. 고신에쓰 지방(甲信越地方)의 '에쓰'(越)는 '에치고'(越後)의 두문자이다. 고대에는 현재의 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을 포함한 고시 국(越国)으로 불렸으나 일본의 중심이었던 교토에서 가까운 순으로 전중후로 나누어 에치젠 국, 엣추 국, 에치고 국으로 분할되었다. '에치젠'은 현재의 후쿠이 현 중·북부, 엣추는 현재의 도야마 현이다. 현재의 이시카와 현은 원래 에치젠 국에 속했으나 이후 가가 국, 노토 국으로 분리되었다. 사도가 섬은 사도 국이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450년전의 센고쿠 시대에는 우에스기 겐신이 활약하였다. 현재의 야마나시 현을 중심으로 나가노 현 남부, 시즈오카현 동부를 통치한 다케다 신겐과 치열하게 다투었다. 에도 시대 말에는 니가타 항이 요코하마 항, 하코다테 항, 고베 항, 나가사키 항과 함께 개설되었다. 니가타 현은 일본의 전통적인 지방 구분으로는 주부 지방에 속해 있다. 이 지방 구분은 메이지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지리적으로 니가타 현은 이 주부 지방에서 동해에 접하는 호쿠리쿠 지방에 속한다. 그러나 호쿠리쿠 지방의 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긴키 지방의 영향력이 강한 반면, 니가타 현은 고속 교통망 정비에 따라 도쿄 및 간토 지방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이 때문에 현재는 나가노현, 야마나시현과 함께 고신에쓰 지방, 더욱 간토 지방과 합쳐서 "간토 고신에쓰 지방"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야마나시 현을 제외하고 "신에쓰(信越) 지방", 또한 이와 호쿠리쿠 지방을 합쳐서 "호쿠신에쓰(北信越) 지방"이라고 말할 경우도 있다. 또 니가타 현은 위치가 도호쿠 지방에도 가깝고, 특히 동부의 가에쓰 지방에서는 도호쿠 지방의 후쿠시마현에서 흘러온 강이 흐르고 있거나 방언과 기후 등이 후쿠시마 현, 야마가타현과 유사하기도 한다. 더욱 센다이 시에 본사가 있는 도호쿠 전력이 도호쿠 지방의 여섯 현과 함께 니가타 현에도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따라서 도호쿠 지방의 경제인을 중심으로 니가타 현을 도호쿠 지방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산이 많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유명한 관광지가 많으며, 다설 지역이라 스키장이 많아서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지나 대도쿄권 지역의 대학생들이 MT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다. 니가타 현에는 2000년 12월 현재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이 112개(시 20개, 정 57개, 촌 35개) 있었으며 홋카이도, 나가노현 다음에 일본에서 3번째로 시정촌 수가 많았으나 일본 전국에서 정부 주도로 진행된 시정촌 통합 흐름에 따라 2006년 3월말까지 35개 시정촌(시 20개, 정 9개, 촌 6개)으로 감소되었다. 니가타 현은 옛날에 에치고 국였던 육지부와 동해의 사도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지부는 또한 조에쓰 지방, 주에쓰 지방, 가에쓰 지방의 세 지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는 에치고(越後)의 越에 교토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상중하로 나눠서 명명한 것이다. 에치고 국 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교토, 오사카에 가장 가깝다. 기후, 문화적으로 호쿠리쿠 지방의 세 현의 영향이 강하다. 중심 도시인 조에쓰 시()는 1946년, 옛날의 성시였던 다카다 시()와 동해에 접하는 항구 도시 나오에쓰 시()가 통합된 시이다. 또한 2005년 1월 1일에 주변의 13개 시정촌을 편입했다. 나가오카 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며, 니가타 현 중에서 도쿄 및 간토 지방의 영향력이 제일 강하다. 또한 니가타 현 중에서도 제일 눈이 많고, 산간 지역에서는 겨울에 4m 정도 눈이 쌓이다. 고급 쌀, 정종, 감상용 잉어, 기모노 등의 산지인데, 2004년에 니가타 현 주에쓰 지진, 2007년에 니가타 현 주에쓰 오키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알려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출신지이기도 한다. 현청 소재지인 니가타 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에치고 국 내에서 교토에서 가장 먼 지역으로 옛날에는 발전이 더뎠지만, 에도 시대 말에 니가타 항이 개설된 이후에는 니가타 현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가노 강() 이북은 기후, 문화적으로 도호쿠 지방의 영향이 강하다. 사도가 섬에는 10개 시정촌이 있었으나 2004년 3월 1일 모두 통합하고 사도 시가 발족했다. 니가타 현의 농산물은 쌀이 중심으로 생산량은 일본 내 1위이며, 특히 고시히카리라는 쌀 품종의 생산이 활발하다. 또한 주에쓰() 지방의 우오누마()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고급 쌀로서 유명하다. 또한 주에쓰 지방에서는 수박의 생산도 활발하다. 사도 섬()에는 옛날에 금광이 있었으나 1989년에 폐쇄되었다. 동해 연안에는 규모가 세계적으로도 유수한 도쿄 전력 가시와자키 가리와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드문 원유 산지이기도 하다. 757년 758년 759년 760년 이스의 위대한 종족 이스의 위대한 종족(Great Race of Yith)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후 신화에 등장하는 지성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는 외계의 종족이다. 자신들의 행성이 파괴되면서 정신을 지구의 생명체로 옮겨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폴립들이 5천만 년 전 이스의 위대한 종족의 문명을 파괴할 때까지 약 2억년간 지구에 살았다. 지구에서는 큰 원뿔 모양의 집게발이 달린 갑각류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 생명체에서 저 생명체로 정신을 옮기며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 고등한 종족은 다른 시대의 생물체와 몸을 바꾸면서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데. 이 방법으로 인간들의 문화, 과학, 비술 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프나코틱 사본>을 남겼다. 이스의 위대한 종족은 러브크래프트의 <시간을 벗어난 그림자(The Shadow Out of Time)>에 기술되어 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로마 제국 최초의 세습 왕조이다. 그 이름은 왕조의 처음 두 황제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씨족명에서 유래했다. 총 5명의 황제들을 배출하였으며, 기원전 27년부터 68년까지 약 100년간 제국을 다스리다가 마지막 황제인 네로가 자살하면서 맥이 끊어졌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통에서 다음 후계자를 낼 수 있도록 외동딸 대(大)율리아를 조카인 마르켈루스에게 시집가게 한 뒤 후계자로 결정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가 기원전 23년에 죽어 후계자 후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를 심복인 아그리파에게 시집가게 해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이들, 즉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기원전 2년에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마르세유에서, 기원전 4년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터키에서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기원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며, 티베리우스의 즉위에 의하여 계통은 율리우스 씨족에서 클라우디우스 씨족으로 바뀌었다. 이 때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성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성립 과정이 복잡하면서, 제위도 친자식에게 계승된 예가 없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후보로서 양아들로 맞이할 수 있었던 당초부터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후계자를 자기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통을 고집한 아우구스투스가 질녀를 통해 율리우스 씨족의 피가 흐르는 게르마니쿠스의 제위 계승을 바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티베리우스는 "중계"였다. 그 게르마니쿠스가 죽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가 세 번째 황제가 되지만, 그도 치세 4년에 아내와 딸과 함께 암살되고 만다. 네 번째 황제로서 즉위한 숙부인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있었지만, 이것도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조카딸인 소(小)아그리피나를 아내로 삼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를 제위에 오르게 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참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계도, 로마 황제 연대표 이그 (크툴루 신화) 이그(Yig)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하급 신 중 하나로, "뱀들의 아버지" 혹은 "나쁜 약"로 알려져 있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끊임없이 달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그는 쉽게 진정시킬 수 있지만 화를 내는 것도 빠르다. 이그는 적들을 파괴하거나 변형시키기 위해 뱀 떼를 종종 보낸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이그의 저주(The Curse of Yig)>에 묘사되었다. 이그는 1990년대 코네티컷에서 십대 청소년들이 차창 밖으로 "이그(YIG)"라고 소리치는 반(半)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났다. "이그질"(Yigging)이라 이름붙은 이 의식적인 행위는 "이그"를 가능한 한 크게 소리질러 상대, 주로 골프 치는 사람들이나 교회 신도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거나 협박하는 데 있었다. 현재는 많이 줄어들어 연간 2-5건의 "이그질"이 보고된다. 이그는 때로 네스 호의 괴물과도 연관된다. 비잔티움 비잔티움(, )은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이다. 기원전 667년 고대 그리스의 메가라의 주민들이 식민지 도시로 건설한 뒤, 이들의 왕 뷔자스 또는 뷔잔타스()의 이름을 따 비잔티움이라 불렸다. 라틴식 표기인 “비잔티움(Byzantium)”이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다. 후대에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으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투르크들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667년 무렵에 메가라의 식민지 인들에 의해 건설된 그들의 왕 ‘뷔잔타스’를 따서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원주민 트라키아인의 도시가 있었다는 설도 있어 건설에 대해서는 전설의 영역을 넘지는 않았다. 그 후 기원전 5세기 초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까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기원전 478년에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비잔티움 공성전 (기원전 478년)으로 함락을 당했다. 그 이후 아테네의 속국이 되었지만 다른 도시들과 함께 기원전 357년에 반란(동맹시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자치를 회복했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 일대에 점령하여 기원전 340년에 비잔티움도 그의 의한 공격을 받았지만, 페르시아와 아테네로부터 원군을 지원 받아 마케도니아를 격퇴했다. 196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시대에 그와 대립하던 황제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 징벌로 도시는 파괴되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이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중요한 건축물이 될 경마장(히포드롬)도 이때 건설된 것이 바탕이 되었다.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이 동서남북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천연의 양항 금각만을 가진 것에 착안하여 330년에 로마에서 이 도시로 천도했다. 그후 수도에 걸 맞는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노와 로마’(‘새로운 로마’라는 뜻)로 개칭했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이 도시를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은 후세 이 도시의 옛 칭호를 따서 ‘비잔틴 제국’ 등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수도로 번영하였고, 중세 유럽의 주요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여덟 이름을 가진 도시’로 알려졌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후 제국의 수도로 다시 이 도시는 동부 지중해 지역을 커버하는 제국의 수도로 번성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점차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이름이 보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의 후신인 이스탄불은 속속 교외로 시가지를 확대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 후에도 터키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을 계속하고 현재 전역에서 1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거대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761년 762년 당나라가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763년 764년 765년 766년 767년 768년 당송팔대가 한유 769년 770년 한라산 한라산(漢拏▽山, )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해발 1,947.06m, 면적 약 1,820km²의 화산으로, 제주도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상에 백록담(白鹿潭)이라는 화산호가 있는데,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흰 사슴이 물을 먹는 곳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산자락 곳곳에 오름 또는 악(岳)이라 부르는 다양한 크기의 측화산들이 분포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한라산은 폭발 가능성이 없는 사화산으로 알려져 왔지만 다시 폭발할 수도 있는 활화산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국에서는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려왔다. 예전엔 가마오름(釜岳), 원산(圓山), 진산(鎭山), 선산(仙山), 두무오름(頭無岳), 부라산(浮羅山), 영주산(瀛州山), 혈망봉(穴望峯)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한라산 일대는 천연보호구역으로서 천연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고, 1970년 3월 24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7년 6월 27일 오후(대한민국의 시간) 유네스코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제주도의 중심부에 솟아 있는 휴화산으로, 제주특별자치도는 물론 대한민국의 실질적 영토 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기록상으로 고도 1,950m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의 진산(鎭山)이다. 전체적으로 순상화산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산정부는 종상화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한라산 정상에는 지름이 약 551m에 이르는 화구호인 백록담이 있다. 산 주변으로 380여 개의 측화산이 분포하고 있다. 고도에 따라 난대성 식물에서 한대성 또는 고산식물 등 다양한 식생이 나타난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라산은 제주도의 전역을 지배하며, 동심원상의 등고선을 나타내어 순상화산(楯狀火山)에 속한다. 한라산은 약 360개의 측화산(側火山)과 정상부의 백록담, 해안지대의 폭포와 주상절리(柱狀節理, 다각형 기둥모양의 금) 등의 화산지형, 난대성기후의 희귀식물 및 고도에 따른 식생대(植生帶)의 변화 등 남국적(南國的)인 정서를 짙게 풍겨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1970년에 한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한 최고봉이자, 역사적인 영산인 한라산은 1966년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에 등재되었으며,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8년에는 물장오리오름 산정화구호 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한라산은 험준한 한반도 내륙의 산과는 달리 완만한 경사로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5개의 등산로가 있다. 어리목 탐방로와 영실 탐방로는 백록담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윗세오름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 돈내코 탐방로는 15년간 폐쇄되어 있다가 2009년 12월 개방하였는데, 남벽을 지나 윗세오름까지 연결되어 있다. 남벽분기점에서 백록담에 이를 수 있는 성널오름 코스까지는 1km 떨어져 있는데, 2009년 개방에서는 제외되었다. 한라산은 과거부터 제주는 물론 한국 육지에서도 신성하게 여겨져 온 산으로, 전설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불려오기도 했다. 조정에서 해마다 산정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산제(山祭)를 지냈는데, 산제를 지내러 갔던 백성들이 동사하기도 하였다. 이에 1469년(예종 1) 목사 이약동(李約東)은 지금의 산천단(山泉壇)에 산신묘를 세우고 이곳에서 산제를 지내도록 하여 그 석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가마오름(釜岳)·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두무오름(頭無岳)·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의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銀河水)를 뜻하며, 라(拏)는 맞당길나[相牽引] 혹은 잡을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진산이란 보통 도읍의 뒤에 위치하여 그 지방을 편안하게 지켜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라산을 진산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한반도로 밀려오는 남태평양의 큰 바람을 한라산이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또한 원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고, 사방 주위가 아래로 차차 낮아져 원뿔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붙여졌다. 맑은 날 해남이나 진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산 전체가 완만한 원뿔로 보인다. 영주산이란 중국의 ≪사기 史記≫에서 유래한다. 바다 가운데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 등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서기 전 200년경 역사(力士) 서불(徐市)에게 그 약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두무오름이란 머리가 없는 산을 의미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잘못하여 활끝으로 천제(天帝)의 배꼽을 건드렸는데, 이에 화가 난 천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산정부가 던져진 곳은 지금의 산방산(山房山)이며, 뽑혀서 움푹 팬 곳은 백록담(白鹿潭)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마오름이란 산정의 깊고 넓은 분화구가 연못으로 되어 있어 마치 가마솥에 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연못은 성록(聖鹿)인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고 하였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4년(세조 10) 2월에 제주에서 흰 사슴을 헌납하였다(濟州獻白鹿)고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있는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정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에 의하면, 한라산을 등산하는 데는 대정현 쪽으로 험한 산길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따라 수목 사이를 헤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곧 운무가 사방을 덮어버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5월에도 눈이 남아 있어 얼음이 필요하면 산에 올라가서 가죽 부대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는 것으로 제주 10경 중의 하나이다. 국립공원 국립공원(國立公園)은 자연환경보호법에 따라 국가에 의해 지정된 자연환경, 이를테면 산, 강, 평야 혹은 바다의 한 부분 등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특별히 보호할 가치가 있는 자연환경이란 천연적으로 아름다움을 가진 자연뿐만 아니라 희귀 생물들의 서식지, 그리고 그곳에 남겨진 뜻깊은 유적지 등을 포괄한다. 1872년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설립되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기도 하다. 웨일스 공 프레더릭 프레더릭 루이스(Frederick Louis, 1707년 2월 1일~1751년 3월 31일)은 영국 왕 조지 2세의 장남이자 조지 3세의 아버지이다. 왕세자 자리에 있다가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부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젊었을 때는 낭비벽이 심하고 방탕한 삶을 보냈으나, 1736년 작센고타 공녀 아우구스타와 혼인하고 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1 킬로미터 원소 (화학) 원소(, )는 화학적 방법으로 더 간단한 순물질로 분리할 수 없는 물질이다. 원소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 요소로, 원자핵 내의 양성자 수와 원자 번호가 같다. 중성 원자의 양성자의 개수와 전자의 개수는 같다. 현재까지는 118종이 알려져 있다. 순물질의 구성 입자를 원자라고 부른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진 원자핵, 그리고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소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이를테면 포도당(CHO)은 물질의 기본적 구성요소인 탄소(C), 수소(H), 산소(O)의 3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탄소는 현대문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또한, 메탄(CH)은 탄소(C)와 수소(H)의 2개의 원소로 구성된다. 원소 이름의 유래는 원소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황, 금 같이 고대부터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원소들은 각 나라와 언어 별로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과 영어의 은 모두 나트륨을 가리킨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원소의 영어 이름은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이 결정하며,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에서 유래한 이름이 서로 섞여 있다. 원소의 한국어 이름은 대한화학회가 결정하며, 2007년부터는 모든 원소의 명칭을 독일어가 아닌 IUPAC에서 정한 대로 부르고 있다. 최근에 발견되어 새로 이름이 붙이는 원소의 경우 발견자에게 그 명명권이 주어지며, 지명이나 사람 이름으로부터 유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체로 학자적 양식을 지닌 과학자들은 원소 이름의 어원에 대한 몰지각한 관행에 반발하여 다른 명칭으로 부른다. 또한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반감기가 매우 짧아 극히 짧은 시간에만 존재하는 원소들이 실험실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어느 연구단이 해당 원소를 발견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 원소 이름이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으나 논쟁 등의 이유로 아직 이름이 결정되지 않은 원소의 경우 원자 번호를 기준으로 체계적 원소 이름이 붙여진다. 예를 들어 원자 번호가 123인 원소는 각 자리에 해당하는 토막인 -un-, -bi-, -tr(i)-를 -ium에 붙여 unbitrium(Ubt, 운비트륨)이 된다. 한자어로 이루어진 원소들의 이름은 개화기 이후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 과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일본에서 명명된 것들이다. 일본은 주로 독일에서 원소이름들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수소(水素), 산소(酸素), 탄소(炭素), 질소(窒素)등은 각각 독일어 Wasserstoff, Sauerstoff, Kohlenstoff, Stickstoff에서 직역된 이름들이다. 가령 독일어 Wasserstoff는 Wasser와 Stoff의 합성어인데 각각 '물'과 '재료'를 뜻하며, 한자로 水素가 되었다. 물질을 기호로 나타내는 일은 예부터 행해졌는데, 금속 7원소를 7가지 별에 비유하여 기호로 나타낸 것은 매우 오래전의 일로 고대 이집트인은 이미 이 기호를 써 왔으며, 이들 기호는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었지만 중세 연금술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래 쓰여졌다. 연금술사들은 자신의 비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기호를 사용했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 영국의 과학자 돌턴이 원으로 된 원소기호를 고안하였고, 그 뒤 베르셀리우스가 오늘날 쓰이는 기호를 처음 제안하였다. 다음은 베르셀리우스의 원소 이름 붙이기 규칙이다. 원 원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불 불(火)은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여 연소하면서 에너지를 빛과 열의 형태로 방출하는 산화 과정이다. 보통 가연성 물질이 충분한 산소, 열과 결합할 때 발생한다. 원자가 고온의 상태에 놓이면 전자를 잃고 전리되는데, 이렇게 전리된 고온의 플라스마가 내는 전자기 파동이 불의 형태가 되어 보이는 것이다. 1777년에 프랑스의 화학자인 라부아지에가 증명한 불타는 현상 즉, 연소는 산소와 다른 물질이 급속하게 결합하면서 생긴다. 인류는 불을 이용하여 조명으로 사용하고 체온을 보존하며 짐승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고 음식물을 익혀 먹는 등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로 인해 영양소를 더 많이 흡수할 수 있게되어 뇌 발달 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불을 문명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과 함께 불을 일으키기 위한 연료의 확보는 모든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자원이 되고 있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도 불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고대 그리스나 중국의 철학에서는 불은 원소의 하나로 생각되었으며, 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도 있다. 대표적으로 불을 숭배하는 종교는 배화교(조로아스터교)가 있다. 또한 불은 화재나 전쟁 등 죽음이나 파괴의 상징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인류가 언제부터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류가 갑자기 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낙뢰나 산불에 의해 불타고 있는 나뭇가지 등을 주거 혹은 동굴에 가져가 불씨로서 보존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불의 사용 자국은 150만 년 전 남아프리카, 스왈시크란스 동굴이나 140만 년 전 동아프리카의 케냐의 체소완자 유적 등이다. 불의 온도는 산소가 많을 수록 온도가 올라가기도 한다. 불꽃의 온도는 빛깔에 따라 다르다: 불 (동음이의) 불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서원 서원(書院)는 동아시아에서 일종의 학교이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며,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서원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내외의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는 사설기관이었는데, 선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를 합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 중심 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하였다. 세종은 특히 이를 장려하여 상을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 되었으니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액(額 : 간판)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마침 황폐해 가는 향교에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백 24개, 숙종 때에는 1도에 80 ~ 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서원은 명목상으로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과 덕행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이면서도, 동시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그 기능이 달랐다. 그밖에도 지방 사족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며, 사화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의 활동 기반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한다. 이와 같이 서원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의 역할, 향약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서원은 교육 기관이므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적게 받는다는 이점이 있고, 문중 서원의 경우에는 자기 문중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번창하게 되었다. 서원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 여기에 부속된 토지에는 조세를 과하지 않았고, 또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 유생은 향교보다도 서원에 들어가 학문을 공부하는 대신 붕당(朋黨)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몰하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하여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도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원의 남설(濫設), 누설(累設)은 조정의 중대한 두통거리가 되어 1644년(인조 22년)에는 서원 설치를 허가제로 하였고, 1657년(효종 8년)에는 서원을 누설한 자는 처벌하는 규정을 발표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영조, 정조, 철종 등도 서원 정비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정조 때는 650개의 서원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송악서원(松嶽書院), 화양서원(華陽書院), 만동묘 등이었다. 정사(精舍)는 유학자 개인의 순수한 학술 연마 장소로 그 기초는 길재(吉再)로부터 비롯한다. 개설자의 명망에 따라 문도의 번성과 강학의 수준은 서원보다 월등하였다. 그 대표적 예가 퇴계(退溪)의 농운정사와 율곡(栗谷)의 은병정사(隱屛精舍)이며 사후에는 서원으로 바뀌었다. 입학은 개방적이었으며 학칙은 자율성을 강조하고 과거를 목적으로 한 공부를 규제하여 사제지간의 전통을 중요시하였다. 생도는 자치적으로 유식한 연장자를 당장(堂場)으로 추대하고 장의·유사를 선정하며, 2인의 직월(直月)을 윤번으로 선임한다. 특히 직월은 사제·학우간의 강론을 기록하고 생도의 품행을 적어 스승에게 바친다. 서로 강론하고 직월을 교체한다. 이때 까닭없이 불참하면 문책당하고 반성하지 않을 때에는 출재한다. 1864년(고종 1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하였다. 이듬해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를 폐쇄하였다. 1871년(고종 8) 최종적으로 전국의 서원과 사우 1000여 곳을 헐어 버리고 47개소만 남겼으며, 서원 소유의 토지들을 거두어 국가에 귀속시켰다. 이때 서원을 정리하게 된 배경 가운데, 서원에서 소유한 토지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사우(또는 사당)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서원이나 문중 재산을 은닉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문중 서원도 철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서원은 2019년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9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하였다. 포함된 서원 9 곳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을 대표하는 시설로서, 중세 동아시아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인 성리학이 조선에 전래되어 조선 사회에 정착‧형성한 산실로써, 중국의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서원에서 중국, 일본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성리학인 지향하는 자연관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 반영된 교육 유산의 특출한 전형으로, 특히 서원의 건축 공간은 성리학적 가치관, 세계관, 자연관이 반영된 물리적 표상이다. 2019년 5월 유네스코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할 것을 권고했다. 사단법인 한국서원연합회에서는 전국의 648개 서원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으며, 9대 서원으로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을 꼽고 있다. 조지 3세 조지 3세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1738년 6월 4일 – 1820년 1월 29일)는 1760년 10월 25일부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국왕이었으나, 1800년 연합법이 제정된 이후, 1801년 1월 1일부터 1820년 사망할 때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왕이 되었다. 영국의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공작이었으며, 1814년 10월 12일 하노버 왕국이 수립되면서 하노버의 국왕을 겸임했다. 그는 하노버가의 3번째 영국 군주였지만, 이전의 국왕과는 달리 그는 제1언어로 영어를 썼으며, 영국에서 태어난 군주였고, 하노버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일생과 재위 기간은 이전 영국 왕들에 비해 훨씬 길었으며, 그 대부분은 영국과 하노버가 개입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초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프랑스를 7년 전쟁에서 격파해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유럽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독립 전쟁을 겪고 난 이후,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독립했다. 이후 1793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개입한 영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 조지 3세의 재우위 말기애 그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그가 양극성 장애 또는 포르피린증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의 질병에 대한 원인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결국 1810년 섭정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지 3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조지가 섭정왕자로써 조지 3세가 죽을 때까지 영국과 하노버를 다스렸고, 이후 조지 4세로써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3세의 삶에 대한 역사적 분석은 그의 자서전을 쓴 이의 편견들이나 역사학자들이 이용가능한 자료에 따라 크게 변화했다. 미국에서 그는 폭군 중 한명으로 일컬어졌고, 영국에서 그는 "제국주의의 실패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그는 재평가되었다.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 훗날의 조지 3세는 조지 2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와 그의 아내 오거스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오거스타가 출산 전날인 6월 3일, 남편과 함께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서 산보를 하던 중에 갑자기 진통이 와, 그 자리에서 출산하였다. 게다가 예정일보다 3개월이나 빠른 비정상적인 조산이었다. 나중에 국왕이 되고 나서 가끔 나타난 정신 장애의 원인을 이 조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 조지는 아버지인 프레더릭 루이스를 미워했던 할아버지 조지 2세에 대해 마음 깊이 반감을 품고 있었다. 특히 감수성이 강한 시절에 겪었던 이런 경험은 그에게 일종의 자폐증을 불러왔다. 조지는 가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때가 많았고, 11살이 될 때까지 글을 정확히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조지가 13살이 되던 즈음인 1751년, 아버지 프레드릭이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이나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했다. 그가 어머니 오거스타와 깊은 관계에 있던 뷰트 백작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초상화에 비해 상당히 못생겼던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또한 그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초상화와는 달리 심하게 못생기고 키가 작은 샬럿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세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내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고, 종교적 신념도 있어서 평생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영국의 죄수들은 19세기에 지금의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불리는 무인도 영토로 귀양을 보냈다. 그 때 당시에는 무인도와 다름없는 영토였는데 훗날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국가가 따로 탄생하면서 동시에 영국 연방이라는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 국기에서도 영국기가 있다. 그리고 그 곳은 바서스트라는 황금이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근방에 있는 섬나라인 뉴질랜드도 영국 연방이 되었다. 조지 2세의 아들들이 모두 조지 2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조지 2세가 서거하자 프레더릭 루이스의 아들인 손자 조지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때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앞선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와는 달리 독일 악센트가 전혀 없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 탁월한 자질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항상 노력하는 학구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이었다. 역대 어느 왕보다도 독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개인기도로 보낼 때가 많았다. 그가 왕으로 즉위한 후 제일 먼저 했던 일도, 종교적 배경 하에 조부 조지 2세의 비도덕적인 왕실의 관행들을 뜯어고치는 것이었다. 조지 3세가 왕위에 오를 즈음 정치를 좌우하던 대(大)피트가 1761년 10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문제로 사임하고 또 한 명의 정치가인 뉴캐슬 공작 펠럼 홀리스도 곧바로 재정 비리 의혹으로 사퇴했다. 조지 3세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였던 뷰트를 수상 자리에 올렸다. 7년 전쟁이 끝난 후, 뷰트 내각은 정국 안정과 전쟁으로 인해 악화된 재정 회복이라는 2가지 당면과제를 안게 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발전과정에 놓여 있는 상태로 아직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의회 지도자들은 정부에 협조하기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트집을 잡는 것이 일과였으며, 심지어 이런 트집은 각료들 사이에서도 일상사였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조지 3세는 먼저 상원의 원로귀족들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생각하였다. 이 일은 조지 3세의 측근인 수상 뷰트가 담당했다. 정가에서는 이를 국왕이 수상의 손을 빌려 적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와 책략쯤으로 인식했다. 정국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재정 회복은 더욱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에 뷰트 내각은 조지 3세의 기대에 제대로 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급진파 의원인 존 윌크스가 언론을 동원하여 조지 3세에 대한 비방을 퍼부어대고 대 피트와 뉴캐슬을 동정하는 일부 정객들이 “평화는 어설픈 사기극이며 국왕이 수상과 협잡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뷰트 내각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1763년 4월 뷰트는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조지 3세는 어린 시절 자주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뷰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실제로 뷰트는 정치적으로는 무능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지 3세는 측근을 통한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왕실 친척인 조지 그렌빌과 숙부인 컴벌렌드의 윌리엄 오거스터스 공, 대 피트, 그리고 그래프턴 공작에게 자신의 의중을 보이면서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7년 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입은 왕실의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타개책도 강구되지 못하고 상황만 어려워졌다. 당시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해외무역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으나, 동인도회사는 민간 회사였기 때문에 그들의 막대한 수익은 본국 경제에 실제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정가에서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운용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것을 비난하며 정책 강구를 촉구했다. 이에 내각은 식민지를 운용하기 위한 행정비용을 식민지 자체에 부담시키는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렌빌이 제의한 〈인지세법〉은 이듬해 로킹엄의 주도로 폐지되었고, 간접세 부과를 위한 〈타운센드법〉은 산출량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차세를 제외하고는 주민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것은 식민지의 본국에 대한 반감밖에 없었다. 마침내 ‘보스턴 차 사건’이 문제의 초점이 되면서 영국은 1775년 4월 ‘북아메리카와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조지 3세는 노스를 수상에 임명하여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전쟁 승부에 관계없이 그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조지 3세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란 잠재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조지 3세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어갔다. 사실 의회는 점점 깊이 빠져드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또 의회는 아메리카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가까운 아일랜드로 하여금 반기를 들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또한 1778년 이후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고 있으므로 세력균형이란 국제외교 분위기에서도 결코 영국에 이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었다. 결국 의회는 불리해져 가는 상황을 들어 조지 3세에게 전쟁을 끝내도록 요구했으나, 조지 3세는 특유의 필사적인 집착으로 전쟁을 2년 더 연장시켰다. 그러다 보니 조국에 재앙을 안겨준 책임에 따른 의회의 공격은 노스 내각에 집중되었다. 또한 국민들조차 노스 내각의 전쟁 수행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노스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국내여론에 못 이겨 1782년 조지 3세의 만류에도 스스로 사퇴하였다. 그리고 노스가 스스로 수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영국의 노스 내각의 붕괴로 충격을 받은 조지 3세는 급기야 셸번을 다음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그 내각마저도 단명하면서 왕의 위신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늘 왕을 비판하던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노스 경이 만나 연립내각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조지 3세는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런 형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북아메리카를 잃은 뒤 식민지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인도가 되었는데, 인도에는 일찍부터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많은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민간회사였으므로 정부로서는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 점을 부당하게 여긴 폭스와 노스는 동인도회사를 정부가 관장하는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론은 회사의 개혁안을 통해 시행되는 공직임명권을 통하여 폭스와 노스가 권력을 영속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조지 3세는 상원에서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지지하는 의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으로 간주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의 선언에 따라 법안은 무효화되고 폭스를 비롯한 관련 각료들은 줄줄이 사퇴했다. 국왕으로서의 위신을 되찾기 위해 조지 3세는 자신의 뜻을 잘 진행시켜줄 새로운 수상으로 소(小) 윌리엄 피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피트의 세력은 하원 내 소수파에 불과했기에 경질된 각료들은 당장에라도 헌법상의 정변을 단행하기라도 할 태세였다. 노스 내각 이후 왕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모든 것은 1784년 3월의 총선 결과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결론은 소 피트 내각이 성립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소 피트가 수상이 되어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정책들을 제시했을 때, 조지 3세는 상당 부분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이들 정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 피트도 조지 3세의 입장을 일부 묵인하는 조건으로 그로부터 막대한 통치 권력을 이양받았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을 늘려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여러 번 특사를 파견하여 건륭제(재위: 1735년 ~ 1796년)에게 진귀한 선물을 주어 이를 타개하려 하였고 또 공사를 상주시켜 청나라의 동정을 항시 살펴보려고 하였다. 1788년 영국은 전권 대사로 카스카트(Cathcart)를 파견하였으나 카스카트가 청나라로 가는 도중 병사하여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1792년 9월 26일, 조지 3세의 영국 정부는 다시 특별 사절단을 편성, 건륭제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지 매카트니 백작을 특사로, 조지 스턴튼()을 부사로 명하여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탄신 만찬에서 삼궤구고두를 올리며 건륭제에게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친서와 영국에서 가져온 여러 진귀한 선물을 전달했다. 친서에서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상주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친서에서는 영국에게 주산 근처의 작은 섬을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도 쓰여있자 건륭제는 진노하며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 사절단의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다. 건륭제는 그 다음 달인 9월에 영국 사절단의 귀국을 강제 조처하였다. 그 후 영국과 청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어 영국이 ‘아편 전쟁’ 후 〈난징 조약〉을 통해 내정 간섭을 하는 빌미가 되었다. (↔건륭제·조지 매카트니 백작·영중 관계) 그는 1760년 10월 25일부터 1820년 1월 29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4번의 대리청정 체제를 거쳤는데 그와 같은 대리청정 체제 역할을 맡은 섭정은 다음과 같다. 1810년 막내딸 아멜리아 공주가 죽자, 큰 충격을 받은 조지 3세는 이듬해 앞서 몇 번이나 있었던 지병인 착란증세를 다시 일으켰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한편 왕정을 반대하거나 하노버 왕실에 부정적이었던 영국 귀족들은 그가 연설 도중 말을 더듬는 것을 보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의회는 왕세자의 섭정권을 인정하고 샬럿 왕비에게 조지 3세의 보호감호를 위탁하는 칙령을 공표했다. 조지 3세는 간혹 평정 상태를 되찾기는 했으나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820년 1월 29일 윈저 궁에서 서거했다. 그의 아들들 중 하노버를 물려받은 다섯째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남자 직계 후손이 현재까지도 전한다. 이들은 독일 국적으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상태이다. 그밖에 넷째 아들 윌리엄 4세의 사생아 아들들의 후손들은 영국에 체류하고 있다. 정신착란이 도진 말년의 행적을 다룬 조지왕의 광기 (The Madness of King George)(1994)라는 영화 작품이 있다. 미추 이사금 미추 이사금(味鄒 泥師今, ? ~ 284년, 재위: 261년 ~ 284년)은 신라의 13번째 임금이며, 김씨로 임금이 된 첫째이다.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김알지의 6대손으로 어머니는 지마 이사금의 손녀이자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김알지의 5대손(세한-아도-수류-욱보-) 구도(仇道)이다. 비는 석씨 광명부인(昔氏光明夫人)이다. 첨해 이사금이 죽은 후(261년 음력 12월 28일),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266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으나 성주 직선(直宣)이 2백 기를 몰고 격퇴하였다. 272년 음력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였으나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278년 음력 10월에는 백제가 귀곡성(槐谷城)을 공격했으나 역시 격퇴했다. 미추이사금은 또한 농업과 민생에도 깊이 관심을 기울여, 264년 가난한 자들을 위문, 구제하였고 268년 신하들을 각지로 보내 민중들의 불만사항을 수렴했고, 272년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일은 모두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76년에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이사금이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 하여 거부하였다. 281년 음력 9월 양산(楊山) 서쪽에서 병사를 시찰했다. 283년 음력 9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음력 10월에 괴곡성을 포위,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다. 미추 이사금설화는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아류부인 김씨는 일설에는 그의 딸이 아니라 내물 이사금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유례 이사금 유례 이사금(儒禮 泥師今, ? ~ 298년, 284년 ~ 298년)은 신라의 14대 임금이다. 아버지는 조분 이사금이며, 어머니는 나음(奈音) 갈문왕의 딸 박씨이다. 286년 백제와 화친했다. 287년에는 왜인들이 일례부(一禮部)를 쳐 일천 명의 주민을 잡아갔다. 289년 음력 6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돌자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고 전쟁 준비를 했는데, 이 해 왜인이 쳐들어 오지는 않았다. 292년 음력 6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 사도성(沙道城)을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大谷)으로 하여금 구원하게 하였다. 293년 음력 2월에는 사도성을 다시 개축하고, 주민 80여 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294년 여름 왜가 다시 쳐들어와 장봉성(長峰城)을 쳤으나 격퇴되었다. 295년 이사금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왜인이 계속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다. 백제와 계획을 세워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서불한 홍권(弘權)이 신라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며 백제를 믿을 수 없다 하여 반대하여 왜 정벌 계획은 취소되었다. 297년 이서고국(伊西古國), 혹은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이때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나 이서국군을 쳐부순 뒤 사라졌는데, 이후 미추 이사금이 묻힌 죽장릉(竹長陵)에 수만개의 대나무 잎이 쌓인 것을 보고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님이 하늘나라 병사들을 보내 도우셨다" 라고 하였다. 기림 이사금 기림 이사금(基臨 泥師今, ? ~ 310년, 재위; 298년~310년)은 신라의 15번째 왕이며, 기립(基立)이라고도 한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찬 석걸숙(昔乞淑)이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고 하나, 삼국유사에는 그가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과, 조분 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이 동시에 수록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림 이사금은 이찬 석걸숙(昔乞淑)의 아들이며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는 기림 이사금이 조분 이사금의 둘째 아들이며 아이혜부인의 아들이라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孫)라고 하며 제대로 된 세계를 알 수 없다. 300년 정월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比列忽)에 순행하여 가난한 자를 위문하였다. 그해 음력 3월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 307년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조지 4세 조지 4세(, 1762년 8월 12일 - 1830년 6월 26일)은 영국의 왕(재위 1820년 1월 29일 - 1830년 6월 26일)이다. 조지 4세는 1762년 8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조지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세자 시절의 소행이 매우 나빴으며, 왕실 비용의 반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의 빚을 지게 되어 부왕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1788년 토마스라는 가명의 왕족으로서 처음으로 제9회 Derby Stakes에서 우승하거나, 1791년에 가짜 승부 사건을 일으키거나 했다. 1810년 부왕 조지 3세가 포르피린증의 재발로 정신이상자 또는 정신분열증이 되어버리자 섭정 및 대리청정법 조항에 따라 1811년 2월 5일부터 1820년 1월 29일까지 왕세자로서 대리청정을 맡아보았다. 이 시기의 큰 사건으로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가 있었다. 조지 4세는 강경한 군주로 알려져 부왕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정치문제에 개입했다(특히 로마 가톨릭 해방에 관한 문제 등). 당초엔 수상 스펜서 퍼시벌과의 대립을 반복했지만, 퍼시벌이 암살되자 그의 치세 대부분은 리버풀 백작 로버트 젠킨손이 수상으로서 국정을 돌보았다. 노예제 폐지운동 노예제 폐지운동(奴隸制廢止運動, Abolitionism)은 19세기에 서유럽과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폐지를 목적으로 전개된 인도주의적 개혁 운동이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최초의 노예 무역을 시작한 이래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노예 시장화시켰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공회 평신도이자 국회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가 감리교창시자이자 성공회 신부인 존 웨슬리 신부의 지지에 힘입어 노예 제도의 폐지를 추진함으로써 1807년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으며, 1833년에는 대영 제국 전체에서 노예 제도가 없어졌다. 노예 제도 반대 투쟁은 근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향상, 주일학교 운동, 아동 노동 반대 등과 더불어 실천하던 기독교사상에 따른 사회개혁 중 하나였다. 기독교인들의 사회 개혁에 대한 열정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등장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사회 참여를 통해 드러내기보다는 개인에 한정지어서 이해하는 개인주의적인 신앙과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가 아무런 변혁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종교적 보수주의인 탈(脫)정치, 사회적인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침체되는듯 하였으나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자 헌장을 반포하면서 부흥의 조짐도 나타났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1840년대 ~ 1850년대에 대부분 노예 제도를 없앴다. 미국에서는 국내(주로 남부)에서 목화 농사 중심의 농업에 필요한 인력으로 흑인 노예들을 이용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민감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목화농사가 지역경제의 중심이라 노예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부에서는 1831년 흑인 내트 터너가 백인지주의 억압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내트 터너 봉기 이후 노예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북부에서는 흑인들을 저임금 공장 노동자로 흡수하려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 노예 제도 폐지 협회(대표 윌리엄 개리슨)가 중심이 되어 노예 제도 폐지를 외치면서, 노예 제도 폐지 논쟁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북부와 농업 경제가 발전한 남부 간의 심각한 지역 감정으로 치달아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 논쟁이 일어나, 기독교 근본주의 전통의 남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노예제에 찬성하고, 진보적 신학전통을 가진 북부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를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상황적 해석을 함으로써 노예제에 반대하였다. 또한 19세기 미국교회에서 소수였지만, 퀘이커, 메노나이트등의 소수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은 당신이 대접받으려는대로 이웃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근거하여 노예제에 반대했다. 초기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은 대중적 지지 기반의 결여로 1837년 러브조이 암살 사건 등 탄압도 적지 않았으나 1852년 헤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대 인기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 결과 국회위원 시절에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난한 경력이 있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고 이에 반발한 남부 11개 주의 잇단 연방 탈퇴로 1861년 ~ 1865년 남북 전쟁이 벌어졌다. 1863년 공포된 노예 해방 선언은 1865년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발효되어, 미국 내의 흑인들은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자본가(부르주아)들이 흑인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흡수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주장한 북부에만 있었다. 남부에서는 과격 비밀 결사 단체 쿠 클럭스 클랜 (Ku Klux Klan; KKK) 등의 보수반동적인 남부잔당들이 흑인들을 탄압하였다. 그나마 북부의 흑인들도 신분은 해방되었으나, 상당수가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등 북부의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하는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지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 상인으로 종사하는 흑인들은 영업을 해서 번 만큼 가지는 벌어먹기로써 먹고 살던 사람들이라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뉴잉글랜드 뉴잉글랜드(New England)는 미국 북동부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구릉성(丘陵性) 산지와 해안 지방에 있는 매사추세츠주, 코네티컷주, 로드아일랜드주, 버몬트주, 메인주, 뉴햄프셔주의 6개 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북쪽으로 캐나다, 서쪽으로 뉴욕주와 맞대어 있다. 뉴욕 주와 뉴저지 주는 본래 뉴잉글랜드에 속하지 않지만 문화적으로는 뉴잉글랜드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뉴잉글랜드는 1776년 7월 4일, 영국 왕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 미국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독립전쟁을 일으킨 시발점인 이 지역은 주민의 교육 수준과 사회 경제적 지위가 매우 높아 미국의 고급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이다. 명문 사립 기숙학교들이 많고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고급문화들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많다. 초기에 이 지방은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많았던 곳으로, 충실한 청교도의 이주자가 많았고, 이들이 개척한 농업식민지였다. 자연 조건이 혹독하며, 당초는 독립한 자작농민에 의한 농·어업, 조선업, 무역업에 의존하였으나 그 후 수력을 이용하여 섬유공업이나 금속공업이 발전하고, 지금은 도시인구가 80%를 넘는다. 이들 중산계급은 독립심과 재능은 훌륭한 문화와 각종 산업을 발달시켜 문화적 수준이 높고, 미국 구민의 자질이라고 하는 개척자 정신·종교심·기업정신 등은 뉴잉글랜드의 주민에 의해서 대표되는데, 동시에 보수성도 강하고 전통·제도·사고 방식 등에서 다른 지방과 다르다. 뉴잉글랜드는 일찍부터 자주적 연합을 형성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는 일종의 종교정치가 행해지고,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에는 국왕의 총독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참여도가 높은 이 지역은 롱펠로, 소로,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등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유명한 정치인과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곳이다. 미국 문호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본국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다른 지방과의 접촉도 그다지 없어 교육 제도·조합 교회제(組合敎會制)·타운 미팅제(制) 등 독특한 뉴잉글랜드의 전통을 낳았다. 이 지역에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복원 도시 윌리엄스버그나 '자유의 종'이 있는 필라델피아의 독립 기념관 등, 식민지 시대를 회상시키는 역사적 건축 양식이 있는 오래된 도시들이 있다.. 뉴잉글랜드는 다음 6주를 포함한다. 굵게 는 각주의 수도 를 보여준다. 내물 마립간 내물 마립간(奈勿 麻立干, ? ~ 402년, 356년 ~ 402년) 또는 내물 이사금(奈勿 泥師今)은 신라의 17대 임금으로, 내물왕(奈勿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고, 구도(仇道)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13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구(金末仇)요,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이며, 왕후는 보반부인이다. 보반부인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다른 이름은 나물(那勿), 나밀(那密)이고 나물왕,나밀왕이라고도 한다. 그가 미추 이사금의 조카라는 설과 그의 부인인 보반부인이 미추의 딸이라는 설은 그와 미추의 활동기간의 차이로 신뢰가 어렵다. 내물 이사금 재위 시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석씨 가문의 흘해 이사금에 이어 김씨인 내물 이사금이 등극함으로써 이후 김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이는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되어 여타 집단들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 366년 음력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동맹을 맺었으며, 368년 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명마 두 필을 보내왔다. 373년 백제의 독산 성주가 3백 명의 주민과 함께 투항해오자, 내물 마립간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의 항의가 있었으나 내물 마립간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으며,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해져 내물 마립간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가야와 왜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몸져눕자 401년 고구려는 볼모로 와있던 실성을 돌려보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한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며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신라 군사로 위장하고 들녘에 용병을 매복시켜놓았다. 토함산에 신라 군사가 많은 것으로 믿은 왜군은 곧바로 직진하여 들녘으로 향했으나 신라 복병의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군사들은 마립간에게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지만, 마립간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여, 마침내 왜군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함으로써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381년, 위두(衛頭)를 중국의 진(351년~394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진의 황제 부견(재위 357년~ 385년)이 묻기를 "해동의 사정을 말하매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데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중국과 동일한 현상이라,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옛과 같겠는가?" 하였다. 400년 신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신라는 볼모까지 보내며 고구려와 제휴하였고,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열세에 있던 백제는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를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왜의 소국들을 동원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잇단 천재지변과 왜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된 신라는 남천 가에서 크게 패하고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게 서라벌까지 함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다급해진 내물 마립간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 에 진주해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그의 도움으로 겨우 가야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덕에 신라는 오랜 숙적 가야를 패퇴시키고 낙동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져누운 내물 마립간은 402년 5월에 붕어하여 첨성대 서남쪽으로 그의 능이 조영되었다. 신라 후기에는 그의 방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흘해 이사금 흘해 이사금(訖解 泥師今, 249년? 또는 253년? ~ 356년, 310년~356년)은 신라의 16대 왕이다. 성은 석씨로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각간 석우로(昔于老),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의 딸 명원부인(命元)부인이다. 그러나 우로의 사망 시 갓난아이였던 그가 310년에 즉위해서 356년까지 재위한 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른 이름은 석욱(昔郁)이다. 월성석씨는 조분 이사금의 아들 석지(昔祉)를 파조로 하는 일파와 흘해의 아들 석보를 파조로 하는 일파가 있다. 태어난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 의하면, 석우로가 죽은 249년 혹은 253년에 갓난아기였다 한다. 이덕일에 의하면 그와 석우로와의 연대 차이가 많이 나서 그의 아들이 아니라 후손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석우로가 일본에서 죽을 당시 그가 갓난아기였다면 310년 즉위할 때 흘해의 나이는 62세 혹은 58세가 된다. 혹은 유복자로 보더라도 즉위 당시 나이는 61세 혹은 57세가 된다. 311년 정월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다음해인 312년 왜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14년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31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해 석방하였고, 이듬해 318년에는 지난해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백성을 부려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330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337년 음력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344년 음력 2월 왜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청하자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345년 음력 2월 왜왕이 국교를 끊는다는 사신을 보내고, 346년 크게 군사를 내어 금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은 금성에서 농성하며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왜군의 퇴각 시점에 맞춰 기병을 내어 격퇴하였다. 부인은 김씨라고 전할 뿐, 부인의 친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中央─共和國)은 아프리카 중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줄여서 중앙아프리카 또는 중아공이라고도 호칭한다. 19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으나 아프리카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독재자 장베델 보카사의 쿠데타로 1976년에 중앙아프리카 제국으로 개칭되었다. 1979년 프랑스 낙하산 부대와 반대 세력들의 쿠데타로 제국은 붕괴되고 이전 상태로 되돌려졌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은 14개 주와 2개의 경제주, 1개의 자치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행정 구역은 다시 71개 구로 나뉜다. 경제주 자치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은 내륙국이며 아프리카 중앙 부분에 있다. 서쪽은 카메룬, 북쪽은 차드와 수단, 동쪽은 남수단, 남쪽은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대부분은 평평하고 이어지는 평원 지대이며 평균 고도는 500m 정도이다. 북동 지방에는 페리트 언덕이 있으며 남서 지대는 구릉지대가 펼쳐진다. 북서쪽에는 화강암 고원이 나타나며 이 곳의 평균 해발고도는 1,143 m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기복이 완만한 고원이다. 전체 면적은 622,984km이며 세계에서 43번째로 큰 나라이다. 우크라이나와 거의 크기가 비슷하며 미국 텍사스 주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다. 남쪽 국경 일대의 다수는 콩고 강의 지류가 흘러가는데 동쪽으로는 음보무 강(Mbomou River)이 흘러가며 우엘레 강이 합류하여 우방기 강(Ubangi River)을 이룬다. 전국토의 8% 정도가 삼림이며 남쪽에 숲이 많이 우거져있다. 상업적 삼림 채벌을 위해 숲이 우거진 경우도 많으며 현재 삼림 벌채는 일년에 0.4%이다. 평면상의 지형은 부르키나파소와 약간 닮았다. 열대 기후를 보이며, 현재는 가뭄이 심하다. 게다가 현재는 이 나라의 열대우림이 심하게 파괴되고 있다. 북쪽 지대는 사막성 열풍이 불어서 매우 덥고 먼지가 많이 날리는 편이다. 삼림 채벌이 심하여 사막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나머지 지대는 강과 지류 등으로 인한 홍수가 많이 난다. 중앙부는 고온다습의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21도이다. 대통령제 공화정 국가이다. 한 때는 제국, 군사 독재를 한 바가 있었다. 프랑수아 보지제 대통령은 국제 사회의 원조를 받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다. 대한민국과는 1963년 9월에 수교하였고 1988년 88서울올림픽때는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2008년 9월 재개설된 주 카메룬 대사관이 겸임한다. 모두 20명(재외국민 20명, 시민권자 0명)의 한민족들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69년에 수교하였다가 1971년에 단교했고 1977년에 재수교하였다. 1964년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1976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덴마크는 방기에 명예 영사관(상위 기관은 駐부르키나파소(와가두구 소재) 대사관)을 두고 있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駐벨기에 대사관(브뤼셀 소재)이 주덴마크 대사관을 겸임하고 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2005년 선거 당시, 콩고 공화국의 대통령 드니 사수응게소는 프랑수아 보지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주재하는 다국적군(FOMUC)에 콩고 공화국의 군대도 포함되어 있다. 북부지역에서 계속되는 내전으로 2008년에만 최소 12만 5천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주산물은 면화와 커피로, 이 두 품목을 합쳐 총수출고의 61%를 차지한다. 땅콩과 다이아몬드도 수출품목인데, 다이아몬드는 세계의 20%를 생산(1983년 22만 7천캐럿). 운수와 농업면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원조를 받고 있다. 주민은 반투족 계열의 민족이 중심이다. 이 나라에 거주하는 민족은 바야족, 벤다족, 사라족, 바가족, 프랑스인, 기타 등이다. 반자, 반다 등 수단계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주민의 35%가 원시 종교 신봉자이며, 그외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로 취학률은 50%이다. 1995년 헌법 17조 4항에 "공용어는 상고어와 프랑스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어가 유일한 공용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출판물은 전부 프랑스어로 작성되고, 후에 그 일부를 상고어로 번역한다. 상고어는 어휘의 51%가 프랑스어와 같다. 일부는 스와힐리어, 아랍어도 사용한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문해율이 48.6%로, 국민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다. 종교는 전통 신앙이 24%, 개신교가 25%, 가톨릭이 25%, 이슬람교가 15%, 기타가 11%이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기아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정도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46.1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118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최악의 기아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웨일스 공녀 샬럿 웨일스 공녀 샬럿 오거스타(, 1796년 1월 7일 ~ 1817년 11월 6일)는 영국 왕 조지 4세의 유일한 외동딸이자 상속자였다. 아버지가 웨일스 공일 때 태어났기 때문에, 웨일스의 샤를로테 아우구스타라고도 불린다. 1816년 훗날 벨기에의 왕이 되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자 레오폴트와 혼인하였으나, 다음 해 1817년 그녀는 남자아이를 사산한 이후 곧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전에도 두 번의 임신을 했었으나 두 번 다 유산했었다. 레오폴 1세 레오폴 1세(Leopold I, 1790년 12월 16일 - 1865년 12월 10일)은 벨기에의 초대 국왕(재위: 1831년 7월 21일 ~ 1865년 12월 10일)이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그 부군 앨버트 공의 삼촌이다.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과 그의 아내인 아우구스테 로이스 추 에베르스도르프 백작부인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레옹 전쟁 동안에 동맹군에 입대하여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였다. 1816년 웨일스 공녀 샬럿 오거스타와 결혼하지만, 이듬해에 그녀가 사망하고 만다. 레오폴은 계속 영국에 머물었다가, 그리스 국왕으로 추대받았지만 거절하고 1831년 벨기에로 갔다. 귀국 후에 벨기에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국왕에 오르자마자, 벨기에의 군대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보조와 함께 벨기에를 독립 왕국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네덜란드의 빌럼 1세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웠다. 1839년까지 레오폴드는 국가의 교육 제도를 넓히는 자유-가톨릭 연립 내각을 지속하는 도움을 주었다. 1836년 큰 도시들과 시골 지역들에 더욱 큰 정치적 자치제를 승인하였다. 1839년 연립 내각이 빌럼 1세의 벨기에 왕국의 독립 인정을 통하여 네덜란드의 압력을 퇴거시키면서 끝났다. 레오폴은 프로이센(1844)과 프랑스(1846)과 함께 상업적 조약을 맺었고, 중립적 외교 정책을 지속하였다. 그의 왕좌는 1848년 혁명 동안에 심각히 기피되지 않았다. 1852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 아래 적대 정권의 접근 후, 안트베르펜 지역의 방어 공사(1868년 완공)에 후원하였다. 가끔 "유럽의 네스토르"로 주목된 그는 유럽의 외교술에서 높게 영향력 있었고, 자신의 결혼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와 제휴를 강화하는 데 썼다고 한다. 1865년 12월 10일 라에켄 왕궁에서 사망하였다. 통신공학 통신공학(通信工學)은 전기적 신호를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정보교환을 구현하는 공학분야를 지칭한다. 포괄적인 범주의 통신은 인류 역사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에는 인간의 언어, 문자가 포함된다. 통신공학은 인류가 발명한 정보교환 수단 중에서 주로 전기적 신호를 기반으로 하는 통신방식을 다룬다. 전기적 신호를 사용한 통신에 대한 연구는 19세기에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1876년 그레이엄 벨이 실용 가능한 전화기 발명에 성공한 이후에 본격적인 현대적 정보통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기파 부문에서는 전자 공학과, 컴퓨터나 전자 기기가 이것을 수용하는 데에는 컴퓨터 과학이 필요하여 양쪽의 학문 합쳐지는 학문이라는 개념 측면에서 컴퓨터 공학과 비슷하거나 연관이 깊다. 그레이엄 벨은 1877년 벨 전화회사(Bell Telephone Company)를 설립하여 전화통신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음성전화기가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벨 전화회사는 장거리전화설비를 위한 회사를 자회사로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AT&T이다. 유선통신기술은 음성만이 아닌 다양한 미디어 정보교환이 가능한 현대의 통신기술로 발전해왔다. 마르코니가 1896년 무선통신 개발에 성공하고, 1897년 런던 마르코니 무선전신사를 설립함으로써 무선통신이 개시되었다. 무선통신기술은 현대의 무선이동통신으로 발전하였다. 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디지털 기반 통신기술의 등장이 그 계기가 되었다. 디지털통신기술은 1960년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어 디지털 통신망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디지털 통신망은 컴퓨터간 디지털 통신망으로 활용되었다. 미국의 ARPANET이 1969년 구축되었다. 당시 ARPANET은 미국 전역에 분산되어 있던 연구소와 대학교의 컴퓨터를 연결하는 패킷교환망을 기반으로 하였다. ARPANET은 현대의 인터넷으로 발전하였다. 디지털통신기술 개발의 혁신적인 의미는 음성통신에 국한되었던 통신의 대상이 디지털 정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종류의 정보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 정보로 표현된 정보는 컴퓨팅 처리에 의해 디지털 통신을 통해 용이하게 전달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대 통신망 즉 네트워크는 이미 디지털 기반의 통신망으로 진화된 상태이며 통신망의 기반을 이루는 통신장비 역시 모두 컴퓨팅 요소를 지닌 장비로 구성되고 있다. 현대 정보통신에서 멀티미디어 통신을 지향함은 음성, 동영상, 정지영상, 각종 데이터 정보의 교환이 디지털 통신망을 통해 통합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의 구축을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디지털 통신은 차세대 통신환경이 다양한 형태의 통신 미디어 융합(convergence)으로의 진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기존의 각 목적별로 구축된 유선통신망들과 무선이동통신망들이 하나의 통합된 디지털 통신망으로 융합하고, 하나의 통합망에서 다양한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차세대 정보통신망이 지향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ARPANET으로부터 진화한 인터넷은 1990년대 WWW의 등장으로 그 구축과 활용이 급속히 확장되어 현재에는 모든 종류의 통신망이 하나로 융합될 수 있는 기반 통신망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인터넷은 IP(Internet Protocol)을 기반으로 하는 데이터 통신망이다. 초기 인터넷에 적용된 IP는 IPv4(Inernet Protocol version 4)이며 현재까지 인터넷 기반 프로토콜로써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IPv4는 IP 주소가 제공할 수 있는 주소의 한계, 상업적 용도로써 적용하기에는 미흡한 보안기능, 통신품질 제어기능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차세대 인터넷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표준기구인 IETF(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에서는 차세대 인터넷 프로토콜인 IPv6(Internet Protocol version 6)의 표준안을 제정하였다. 향후 인터넷은 기존의 IPv4 기반 인터넷망과 IPv6 기반 인터넷망이 공존하는 오랜 기간을 거쳐 IPv6 기반 인터넷으로 발전하게 될 전망이다. 또한 IPv6 기반의 인터넷망은 유선-무선 통신, 방송-통신, 음성-데이터 통신의 융합통신망을 구현하는 기반 통신망으로 자리할 예정이다. EMI/EMC(Electormagnetic Interference and Compatibility) 이동통신이란 자동차, 열차, 선박, 항공기 등의 이동하는 물체와 고정된 지점간 또는 이동하는 물체 상호간을 연결하는 통신방식으로, 통상 HF, VHF, UHF 및 SHF대의 전파가 사용되고 있다. 이동통신은 다른 통신 수단에 비하여 여러 특징을 가지는데, 첫째 무선을 사용한다는 점, 둘째 사용가능한 무선주파수가 한정되어 주파수의 이용 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개인 이동 통신으로 셀 분할 방식의 셀룰러(celluar) 시스템과 위성 이동 통신이 있다. 셀룰러 시스템은 아날로그 방식의 AMPS, TDMA를 거쳐 현재 디지털화된 기술로 현재 한국과 북미에서 주로 사용하는 CDMA 방식과, 그 외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유럽방식의 GSM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위성 이동 통신은 미국 모토롤라를 중심으로 한 이리듐(IRIDIUM) 이 1990년대 상용 서비스를 하였으나,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프레더릭 오거스터스(Frederick Augustus, 1763년 8월 16일 - 1827년 1월 5일)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둘째 아들이자, 조지 4세의 동생이다. 그는 아버지가 가장 총애한 아들이었으며 형과도 사이가 돈독했다. 1780년부터 그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영국 육군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1793년 프랑스의 침공을 막기 위해 플랑드르로 향했다. 그러나 이 출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프레더릭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했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외동딸 프레데리케와 결혼하였다. 메리 메리(Mary)는 영어권에서 쓰이는 여자 이름이다. SIL SIL은 다음 중 하나를 의미할 수 있다. 국제 SIL 국제 SIL (國際 -; SIL International)은 세계 성경번역 선교회(WBT)의 자매기관으로서, 원이름은 하계 언어학 연구소(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며 기록하여 언어학 발전과 문맹 퇴치, 소수 언어 발전 및 성서 번역을 통한 선교를 돕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단체이다. 국제 SIL가 출판하는 에스놀로그(Ethnologue)는 전 세계의 알려진 언어에 대한 각종 통계치를 집대성한 것으로 언어학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단행본 형태와 홈페이지(Ethnologue.com)를 통해 출판된다. 국제 SIL은 에스놀로그에 기록되는 모든 언어에 3자리 부호를 매기는데 그 부호 수는 ISO 639나 RFC 3066 등 기타 언어부호 체계의 부호 수보다 월등히 많으며, 2007년에 ISO 표준(ISO 639-3)으로 인정되었다. 다음은 SIL 부호의 몇가지 예이다. 전체 목록은 http://www.ethnologue.com/codes/#downloading 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ISO 3166 ISO 3166은 전 세계의 나라와 부속 영토, 나라의 주요 구성 단위의 명칭에 고유 부호를 부여하는 국제 표준으로 세 가지 세부 표준으로 구성된다. 유전형 유전자형(遺傳子型, )은 세포, 생물, 개체등에서 발현된 유전적 특성을 뜻하는 유전학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종의 특성을 나타내는 형질을 뜻한다. 유전형질(遺傳形質)이라고도 한다. 유전자형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표현형이 있다. 표현형은 생물체의 발생과 성장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여 나타나는 특징을 뜻하며 유전되지 않는다. 한편, 돌연변이 등으로 인해 부모 세대로부터 유전되지 않은 새로운 유전형질이 생길 수 있다. 후생유전학에서는 이러한 유전되지 않은 DNA의 발생을 비전형적인 유전형질로 파악한다. 이러한 후생적 유전형질 발생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암을 들 수 있다. 게놈은 한 개체에 있는 모든 유전자의 총 염기서열로 한 생물종의 거의 완전한 유전 정보의 총합이다. 게놈은 종 마다 다를뿐 아니라 집단, 개체 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게놈에 존재하는 염기서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집단의 유전자 풀에서 무작위 표집된 수많은 대립형질이 조합되어 한 개체의 게놈을 이룬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생물에서 유전자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게놈은 약 30억 쌍(60억 bp)의 염기 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세포 하나에 들어있는 DNA의 길이는 2m에 이른다. 전형적인 바이러스의 게놈은 10,000개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장균의 게놈은 4백 50만개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다 복잡하다고 알려진 생물이 더 큰 게놈을 갖는 것은 아니다. 백합의 DNA 크기는 인간의 18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아주 간단한 구조를 갖는 생물에서 조차 유전형질은 매우 다양한 대립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낱말이 생물학에서 가지는 뜻은 멘델이 완두 교배 실험에서 발견한 법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멘델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어버이 세대에서 나타난 표현형의 특징은 다음 세대에 섞어져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흰 꽃을 피우는 완두와 자주 꽃을 피우는 완두를 수정 교배하여 얻은 씨앗을 심었을 때, 우리가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연분홍색의 완두가 생겨나지 않는다 (옆의 그림). 이 현상을 멘델은 우성적 혹은 열성적 유전 요소 (Vererbungsfaktor)라는 개념을 써서 설명하였다. 여기서 유전 요소라는 낱말은 20세기 초에 도입된 유전자와 비슷한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성 혹은 열성 유전 요소는 멘델에 따르면 완두의 표면상의 특징을 대변하지 않는다. 이 유전 형질의 표면상의 특징과 내면상의 유전 요소의 구분은 1880년대에 멘델주의자들에 의해 주장 되었으며, 이때 이미 유전자형, 표현형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었으나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40년 대에 들어서서 유전 형질의 화학적 성분이 밝혀짐으로써 유전자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전자형 그리고 표현형이라는 개념 역시 생물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생물체의 외면상의 특징을 일컫는 데 국한하여 쓰이던 표현형이란 용어는 다윈의 진화론을 유전학과 연관하여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신다윈주의자들에 의해서 그 뜻이 넓게 풀이되고 있다. 이 확장해석에 따르면 생물의 외면상의 형태와 특징뿐만이 아니라 생물이 지닌 생화학적 구조 및 생태를 표현형의 범주에 넣고 있다. 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낱낱의 생물체는 상이한 환경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른 표현형을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종이 같고 유전자가 같은 새가 그들이 갖고 있던 둥지를 짓는 고유하고 공통적인 습성을 버리고 그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새로운 습성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자연계에서 더러 관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생물체의 환경 적응에 따른 표면상의 변화를 신다윈주의자 리처드 도킨스는 넓은 의미에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이라 정의하고 있다. 디오메데스 (동음이의) 디오메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트로이아 전쟁에서 그리스 군으로 참전한 영웅이다. 그 외에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771년 772년 773년 당송 8대가 중 유종원 탄생 774년 775년 776년 777년 778년 디오메데스 디오메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으로 아르고스의 왕이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제5권. 410-415행)에 따르면 티데우스와 데이필레의 아들로서 고모 아이기알레이를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디오메네스는 물론 호메로스의 영웅 서열에서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 다음 가는 장수이지만, 일리아스의 제 5권은 그의 무공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특히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에게 상처를 입히고서도 벌을 받지 않은 유일한 속세 사람으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디오메데스가 죽자 그의 자손들은 아레스의 벌을 받았으며, 아르고스는 그 이후 적군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쇠퇴한다. 그리고 제 6권에서는 글라우코스와 금과 동의 무기를 교환함으로써 후세에 유명한 속담의 장본인이 된다. 《일리아스》 밖에서 전해지는 디오메데스에 관한 일화가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아르고스와 이탈리아 지방에서 숭배된 전설 속의 영웅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779년 780년 781년 782년 783년 784년 785년 발해의 문왕이 동경 용원부로 천도하였다. 786년 787년 788년 789년 790년 실성 마립간 실성 이사금(實聖 泥師今, ? ~ 417년, 재위 402년 ~ 417년)은 신라의 제18대 임금이며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와 석씨 이리(伊利) 부인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은 실주왕(實主王), 보주(寶主), 보금(寶金)이다. 아버지 김대서지는 김알지의 후손이라 하나 정확한 세대는 알수 없고,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라 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의 설을 따르면 그는 미추 이사금및 말구의 동생이고, 구도(仇道)갈문왕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아버지 대서지는 알지의 먼 후손으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 되었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고 한다. 부인은 내물 이사금의 딸 아루부인 김씨이다. 내물 이사금이 죽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 실성이 대신 왕으로 옹립되었다. 원년인 402년 음력 3월 왜와 우호를 맺고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냈다. 403년 음력 7월 백제가 침입했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405년 음력 4월 왜가 침입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깨트리지 못했고, 이사금이 기병을 거느리고 퇴로를 막아 3백여 명의 왜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왜는 407년 음력 3월과 6월에 동쪽과 남쪽으로 다시 침입하여 노략질을 해 일백여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408년 음력 2월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실성 마립간은 선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 '무기란 흉하며, 싸움이란 위험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두었다가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 때 나가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며 이용당하지 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 라고 조언하여 실성 마립간이 그의 말을 좇았다. 이가 곧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2년 실성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415년 음력 8월 왜인들과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실성마립간은 복호에 이어 내물 마립간의 또 다른 아들 눌지까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려다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가 반기를 들어, 결국 눌지에게 처형되고, 눌지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으로써 김씨의 왕위 계승이 이어지게 되었다. 왕비인 아류부인 김씨는 내물 이사금의 딸이라 하며, 일설에는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별자리 별자리 또는 성좌(星座)는 천구(天球)의 별을 지구에서 보이는 모습에 따라 이어서 어떤 사물을 연상하도록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별자리는 보통 비슷한 방향에 놓이지만, 실제로 같은 별자리에 속한 별들이 반드시 3차원 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별자리는 문화권별로 다르며 시대마다 달라지기도 하지만, 현재는 1930년 국제 천문 연맹(IAU)에서 정한 88개의 별자리가 공통으로 쓰이고 있다. 공인된 별자리는 아니지만 북두칠성이나 봄의 삼각형처럼 널리 쓰이는 것은 성군(星群; Asterism)이라고 한다. 별자리는 대략 기원전 3천년 바빌로니아부근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맨 처음 생겨난 이후 그리스 로마에게로 전승되었고 별자리에 자신들의 신화에 나온 영웅,동물등의 이름을 넣었다. 이는 고대 문서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기원전 8세기경 호머와 헤소이드의 작품에 오리온과 큰곰자리등이 나오고 기원전 3세기 경 시인 아라투스의 파이노메나에서 44개의 별자리 목록을 소개했다. 이후 대략 4~50여개의 별자리로 개수가 고정이 되어갔다. 현재 쓰이는 별자리는 2세기 후반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리한 48개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중세에 접어들며 별자리를 성도에 나타내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페터 아피안에 의해 맨 처음 나온 성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48개 별자리 뿐만 아니라 머리털자리와 사냥개자리를 추가하였다. 이후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헤벨리우스가 조금씩 손을 보았다. 17세기 이후로 일부 별자리가 나뉘었다.(예: 아르고자리 ⇒ 고물자리, 돛자리, 용골자리, 나침반자리 1930년) 1750년경 프랑스의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가 남쪽하늘의 별자리를 관측, 14개의 별자리를 추가하면서 현재와 같은 88개의 별자리가 생겨났다. 이후 1930년 국제 천문 연맹이 1875년 춘분점을 기준으로 적경과 적위를 매기고, 88개 별자리 사이의 경계를 정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 이름과 약자를 정했다. 천구는 관측자가 적도에서 멀어지는 만큼 반대편의 별자리가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북반구에서는 남쪽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할 때, 남반구에서 북쪽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할 때에는 위도의 제한이 있다. 남쪽 하늘 별자리에 대한 관측 가능한 위도는 다음과 같다.(지평선 부근 5°까지는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현대의 모든 별자리 이름은 라틴어 고유의 이름이거나 단어이며, 몇몇 별들은 위치한 별자리 이름을 따라 소유격이나 탈격('~에서')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라틴 문법의 통상의 규칙을 따라 만들어졌는데, 소유격을 만드는 법칙은 다음과 같다. 또한, 모든 별자리 이름은 표준의 약 자의 약자가 IAU에 의해 지정되어 있다. 예를 들면, 양자리는 Ari, 물고기자리는 Psc, 궁수자리는 Sgr, 큰곰자리는 UMa 등이다. 특정 별자리 내에서 별을 구분할 때에는 바이어(Bayer) 식별이 사용되기도 하며(알파 센타우리 등), 플램스티드 명칭에서는 61 Cygni(백조자리 61), 변광성에는 RR Lyrae(거문고자리 RR) 등과 같이 표시한다. 어쨌든, 많은 어두운 별들은 별자리 이름이 없는 번호로만 표시된다. 종종, 별을 나타낼 때에도 3글자 별자리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예:Alpha Cen, 61 Cyg, RR Lyr) 동아시아의 중국·한국·일본에서 19세기까지 쓰였던 별자리이다. 삼황오제 중의 하나인 복희씨가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요·순 임금 시기에 별자리를 관측한 기록이 있고,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5세기경에 만들어진 칠기상자에서 별자리의 명칭이 확인되었다. 이후 3세기 초에 280여개의 별자리로 구성된 별자리가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나, 실제로 전해지는 별자리의 그림은 중국 당대(唐代)의 돈황성도(敦煌星圖)가 가장 이른 것이다. 3원과 28수, 280여개의 별자리, 1460여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는 고구려때 처음 만들어진 천문도이다. 하지만 이는 오랜세월 전쟁으로 소실되어서 1395년 조선 태조때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이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잊혀져서 지냈다. 그러다 숙종 13년 1687년에 이민철이 남아있던 복사본으로 다시 새로운 돌에 새겼다. 이후 영조때 천문을 맡은 관리가 불타버린 경복궁 터에서 태조본 돌 천문도를 발견하였고 흠경각을 지어 태조본 천문도와 숙종본 천문도를 같이 보관하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천문도는 등잔 밑에 있었다. 1991년 덕수궁 유물전시관에 태조본 천문도를 옮기다가 뒷면에 있던 천문도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현재 3개의 천문도가 전해져오고 있다. 태조본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있고 숙종본은 세종대왕기념본이 있다.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 육안만으로 보이는 별은 대략 6등까지이나, 시가지에서는 하늘이 밝기 때문에 2등 또는 1등까지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밤에 구경 10 cm 정도의 망원경을 사용하면 약 11등까지, 구경 20cm이면 약 13등까지를 볼 수 있다. 겉보기의 실시등급에 따라 구분한 별의 총수(북반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남쪽 하늘의 별도 포함)를 추정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숫자는 구간별 숫자이며, 누적된 값이 아니다. 황도12궁을 이용한 점성술이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페어리테일에서는 별자리를 모델로 한 생명체를 성령(星靈)이라고 한다. 일본의 특수촬영물중 하나인 초성신 그란세이져의 주인공들은 황도12궁을 모델로 한 인물로 변신한다. 트로이아 트로이아(, )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언급되는 지명이다. 호메로스는 Τρωία 외에 이오니아방언 Τρωίη를 더러 쓰기도 하며 혹은 시운 때문에 Τρωες라고 쓰기도 한다. 호메로스는 자주 트로이아를 일리오스 (Ίλιος 혹은 드물게 Ίλιον)라고 부르기도하며 라틴어로는 일리룸()이라고 쓰인다. 영어식 발음을 따서 트로이(Troy)라고도 하며, 표준어도 트로이로 등재되어 있다. 트로이아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Τρωία가 고대 그리스어의 고유의 낱말인지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많이 이야기되었으나 오늘날까지 정확한 어원학적 설명은 아직 없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북부 지방 (현재의 터키)에 번성하였던 히타이트문명의 언어 Truisa, Wilusa 낱말에 트로이아의 뿌리가 있다는 설이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트로이아의 지리적 위치에 관해서 고고학적으로 관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 고고학을 취미로 하는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이 역시 고고학을 취미로 일삼는 영국의 프랭크 캘버트가 내세운 주장에 따라 1871년 현재의 터키의 북동쪽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히사를리크 (Hisarlik) 구릉에서 놀라운 유적물을 발굴한 것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의 연대기 작가들은 트로이아 전쟁의 시기를 기원전 12,13,14세기로 다양하게 잡고 있다. 에라스토테네스는 기원전 1184년으로,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1250년으로, 사모스의 두리스는 기원전 1334년으로 잡고 있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아를 트로이아 7기 유적에 비정하고 있다. 일리아스에서 아카이아인들은 그들의 캠프를 (오늘날 카라멘데레스강으로 알려진)스카만더강 입구에 설치하고 타고온 배는 해변에 올려놓았다. 트로이아 시는 트로이아 전쟁의 전투가 일어난 스카만더강의 평원 건너편에 있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이 고대 도시는 오늘날의 해안선으로부터 5 km 떨어진 지점에 있지만 약 3000년 전의 고대 스카만더강 하구는 내륙 멀리 있는 큰 만으로 흘러나갔다. 이 만은 천연 항구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지금은 고대 이래로 계속된 퇴적물로 인하여 막혀버렸다. 최근 지리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대 트로이아의 해안선이 원래 어떠했는지 재구성해 본 바,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아의 지형이 거의 정확했음이 확인되었다. 트로이 (동음이의) 트로이는 다음을 부르는 말이다. 신라의 관등 신라의 관직 제도는 법흥왕 때 완성된 경위(京位) 17 관등과 외위(外位) 11관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지방인에게 주는 11위는 통일신라 이후인 674년(문무왕 14년)에 지방세력가들을 지배체제 속에 포섭하기 위해서 지방 출신에게도 일률적으로 경위를 주게 됨에 따라 자연히 폐지되었다. 신라의 통용 신분체제인 골품제에는 형식상 왕/귀족 · 6두품 · 5두품 · 4두품 이외 기타(외국인) 신분이 있었다. 왕과 귀족인 성골과 진골과 더불어 두품의 분류에 따라서 신분 규정이 있었다. 성골과 진골은 중요 관등 중의 하나인 이벌찬까지 직임할 수 있어, 형식상으로 신라 사회 질서의 기준이 되었으나, 그 외의 신분 체제인 6두품, 5두품, 4두품은 중요 관등인 대아찬, 잡찬, 이벌찬, 파진찬, 이척찬까지의 직임은 이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자색 공복을 입게 되는 5순위 이상 관등들은 신라 사회의 분열을 막기 위한 상징과 명예 직임에 가까웠으며 (*물론 실권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사회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것도 이들 때문이었다.) 그러한 고정된 신분체제의 대응으로 실세라고 할 수 있는 관직은 6두품, 5두품, 4두품들이 자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골품제와 두품 및 직임 중인 관직에 따라서 거주하는 집의 형태와 크기·지붕·공복 등의 차별 규정이 있었다. 1등위부터 5등위까지의 관직은 "적(赤)색과 청(靑)색의 합(合)색인 자(紫)색" 공복(公服)을 입도록 했고, 6등위(아찬)부터는 비(緋)색 공복, 10등위(대나마)부터는 청색 공복을, 12등위(대사)부터 17등위까지는 황색 공복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골품제는 관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육정(六停)을 비롯한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장군은 급벌찬부터 이벌찬이지만 가능한 경우 성골과 진골만이 되도록 규정했다. 이러한 신분 규정의 목적은 단지 계급의 서열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신라는 사로 6촌이라는 연맹체를 시초로 한 나라였으며 따라서 각각 다른 시조와 본류를 지닌 출신 성분을 서로 구별하여 그에 따른 다소 특수 이상적인 신분 사회를 구성하려 하였다. 골품제가 완전히 경직된 신분체계는 아니었으나 일반적으로 신라 사회에서 형식적 인식이 있었던 것일뿐이었다. 또한 왕의 아버지나 장인은 갈문왕에 봉해졌다. 갈문왕은 유사시 왕권이 흔들릴 경우에 대비해서 봉해지는 것으로써 직접적인 권위는 없지만 특수한 경우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조선시대의 대군과 비슷한 작위였다. 따라서 왕의 사촌과 같은 친족중에서 봉해졌다고 한다. 제2대 남해 차차웅이 석탈해를 대보(大輔)에 임명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며, 제3대 유리 이사금이 관위 17등급을 설치하였다고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관직제도는 삼국사기 잡지 7권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두 관위는 오늘날의 부통령에 해당되며 태대각간의 경우는 신라 역사상 김유신이 유일하게 오른 관직이다. 상대등(上大等)은 법흥왕 때 둔 귀족회의의 의장으로, 실질적으로 수상과 비슷했다. 시중(侍中)은 집사부의 장관으로, 진덕여왕때 수상직을 맡아 상대등과 맞서게 되었다. 신라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한이 강해졌다. 두품 두품(頭品)은 신라의 골품제의 하나로, 일종의 신분제도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관직에서 확인 가능하다. 신라 때에는 골품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위의 한계가 있었는데, 1등 이벌찬부터 5등 대아찬까지의 관위는 진골만이 가능했고, 6등 아찬부터 9등 급벌찬까지는 6두품 이상, 10등 대나마부터 11등 나마까지는 5두품 이상, 12등 대사부터 17등 조위까지는 4두품 이상의 골품만 가능하였다. 3두품 이하는 평민인데, 율령 반포 초기에는 평민도 셋으로 구분한 듯하나 1, 2두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미루어 흐지부지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중 신라 왕성(王姓)이었던 박씨, 석씨, 김씨 등이 대표적인 진골 후손의 성씨이다. 신라 왕성의 분파를 상술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신라 박씨 모든 박씨는 신라 박씨로서 신라 제1대 왕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후손들이다. 신라 석씨 신라 김씨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들이다. 박혁거세를 신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신라 6부 세력은 대체로 6두품에 속하였으나, 6부 중 세력이 컸던 급량부 대인 알평의 집안과 사량부 대인 소벌도리의 집안은 진골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알평의 후손인 경주 이씨와 소벌도리의 후손인 진주 소씨 측 자료는 당해 씨족이 진골 귀족임을 기록하고 있다. 경주 이씨는 신라 개국좌명공신인 급량부 대인 알평(謁平)을 시조로 한다. 알평은 535년(법흥왕 23년) 문선공(文宣公)의 시호를 받았고, 656년(태종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이 지은 경주 이씨 파조(派祖)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에 신라 말 경주 이씨 중시조(中始祖)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이 진골만 오를 수 있는 3등 관위 소판(잡찬) 벼슬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거명의 아들인 금현(金現) 역시 진골만 오를 수 있는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하였다. 고려 태조 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녹훈된, 금현(金現)의 아들 금서(金書)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와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와 혼인하였고, 이를 통해 경주 이씨 집안과 신라 왕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경주 이씨의 분적종도 진골 후손으로 볼 수 있다. 우계 이씨, 차성 이씨, 합천 이씨, 성주 이씨 등은 시조 알평 후대에 분적하였고, 재령 이씨, 아산 이씨, 진주 이씨, 장수 이씨, 원주 이씨 등은 중시조 소판공 거명 후대에 분적하였다. 평창 이씨는 경주 이씨의 분적종에서 제외되었으나 논란의 소지는 있다. 알천(閼川)은 신라 제8대 왕 아달라 이사금의 14세손이다. 진주 소씨 측은 알천이 신라 개국좌명공신 사량부 대인 소벌도리의 25세손이라고 하여 그 시조로 받들고 있다. 알천은 신라 1등 관위인 각간을 역임한 진골 귀족이었다.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 재임 중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고, 김유신 등 공신과 함께 뜻을 모아 김춘추를 왕위에 등극시키니 이 분이 태종 무열왕이다. 무열왕은 알천의 공로에 보답하여 656년(태종 무열왕 3년) 알천의 선조인 사량부 대인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에 추봉하는 등 신라 6부의 시조를 왕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532년 신라로 항복해 온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해 김씨가 진골로 편입되었다. 김유신 가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골에 편입되었음에도 신라 제29대 왕 태종 무열왕 이전까지는 비주류 취급을 당하였다. 555년 비화가야(비사벌가야)가 신라에 복속되면서 그 왕족은 김씨를 사성받고 진골로 편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비화가야의 직계왕손인 옥결은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이례향과 혼인하여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을 낳았고, 조계룡은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왕 김인평과 동일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보덕국왕 안승은 이후 신라에 투항하였고, 679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지역을 평정한 후, 나당전쟁에 참전하여 당나라 군을 격퇴하였으며, 680년(문무왕 20년) 문무왕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683년(신문왕 3년)에는 문무왕의 조카딸과 재혼하여 3등 관위 소판(잡찬)의 관위를 받고 김씨 성을 사성받은 후 진골로 편입되었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장에 따르면, 발해 고왕 대조영(발해 제1대 왕)이 발해 건국 직후인 700년 신라와 수교를 맺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자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 효소왕(신라 제32대 왕)이 발해를 번국으로 삼고 대조영에게 신라 5등 관위인 대아찬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이는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품계로 대조영을 진골로 대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조영 입장에서 5품에 불과한 관위는 다소 굴욕적인 일일 수 있다. 다만, 최치원의 기록 외에는 이를 증명할 만한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발해의 국력과 외교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사실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대개의 최씨 집안이 경주 최씨에서 분파하였지만, 수성 최씨의 경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13세손인 시조 수성백 최영규가 고려 충렬왕 때 사성을 받아 창성한 것이므로 진골 후손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김씨라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귀화한 성씨는 골품제와 관련이 없다. 길가메시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 敍事詩; Epic of Gilgamesh)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로 수메르 남부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Gilgaméš)를 노래하였다. 19세기 서남아시아 지방을 탐사하던 고고학자들이 수메르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보다 15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수메르 왕 명부"에 따르면 길가메시(수메르어 이름은 빌가메시 Bìl-ga-mèš)는 기원전 28세기경 우루크를 126년 동안 지배한 왕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이때 이미 길가메시의 일생이 신비스럽게 꾸며진 것을 알 수 있다. 길가메시의 일생에 관한 전설은 시로 만들어져 구전되었는데, 기원전 21세기경 우르 왕이었던 슐기 때, 특히 길가메시에 대한 많은 시들이 지어진 듯하다. 그때까지 구전되던 시 몇 편이 이 무렵에 설형문자로 처음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18세기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시(빌가메시)에 관한 시 다섯 편의 일부가 현재 전해지는데 모두 슐기 왕 시대에 기록된 시들의 사본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18세기에 함무라비 왕의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이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로 등장하며, 아카드어를 사용하는 바빌로니아인들도 길가메시에 대한 전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주요 아카드어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한 구절을 따서 "모든 다른 왕들을 능가하는 왕(Surpassing all other kings)"으로 불리는데 함무라비 왕의 재위 기간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1300년과 1000년 사이 신레케운니니(Sin-leqe-unnini)라는 시인이 그때까지 전해지던 길가메시 전설을 하나의 서사시로 편집했다고 하는 아카드어 판본을 오늘날 표준판이라 한다. 이 판본은 첫 행을 따 "깊은 곳을 본 이(He who saw the deep)"라고 불린다. 그 후에 발견되는 여러 판본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표준판을 기초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판본은 니네베에 있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재위 기원전 668년-627년)의 서고에서 발견된 12개의 점토판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히 전하지 않아 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여러 판본으로 전체 모습을 복원하고 있다. 우루크의 지배자 길가메쉬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으로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인 초인(超人)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의 압제에 불만을 터뜨리자 천신(天神) 아누(Anu)(수메르어로는 안)와 모신(母神) 아루루(Aruru)는 길가메쉬의 힘을 낮추기 위해 엔키두라는 힘센 야만인을 만든다.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싸우고 예상외로 길가메쉬가 이기자 둘은 친구가 된다. 둘은 삼나무 숲의 괴물 파수꾼 훔바바를 정벌하는 모험을 떠나 그를 죽이고 우루크로 돌아온다. 길가메쉬가 여신 이슈타르(Ishtar)(수메르어로는 이나나)의 유혹을 뿌리치자 이슈타르는 아버지인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릴 것을 요청한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를 죽인다. 엔키두가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죽인 데 분노한 신들이 엔키두를 죽인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죽지 않는 유일한 인간인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선다. 고생 끝에 우트나피시팀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전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얻지만 모두 실패하고 우루크에 돌아온다. "올라와서 그 산을 향하여 보아라[...]! 나는 나의 신성한 잠을 빼앗겼다. 나의 친구, 나는 오, 나는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 얼마나 방해하는 꿈을 보았다! 나는 그 대초원지대의 거친 황소를 붙잡았다. 그가 그 땅을 발로 차 올렸기 때문에 그 먼지는 하늘을 뿌옇게 했다. 나는 그 앞에서 물러났다. 그는 나의 옆구리를 강하게 덮칠 것이다. 그는 ... [...] ... 찢어버렸다. 그는 그는 음식을 주었다... 그는 음료를 주었고, 그는 나에게 그의 젖은 피부로부터 마시게 해주었다. "그 신, 나의 친구에게 우리는 갔고, (10) 이런 형태가 이상하다 해도 거친 황소가 아닐까. 바로 보이는 그 거친 황소는 찬란한 Shmash이고, 비탄 속에서도 그는 그의 두 손을 잡을 것이다. 그의 젖은 피부로부터 그대에게 마시기 위해 주었던 그 사람, 그는 그대에게 명예를 주려는 너의 신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Lugallbanda, 그에게 합하여야 하고, 우리는 죽음을 통해 불명예스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할지도 모른다. -"길가메쉬 발췌" 성경에서 신은 사악해진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길가메시 서사시에 포함된 우트나피시팀의 이야기에서 신은 그 수가 너무 많아지고 소란스러워진 인간들을 벌하려 한다. 이 두 이야기는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대홍수와 관련된 상징이나 서사 구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집트 신화가 보여주는 상징이나 서사 구조인, 인간 삶을 여정으로 보는 것, 사후 세계의 인정, 신적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부활, 동물혼의 묘사, 신적 존재와의 감응 - 그리스 신화도 그러하지만 - 등의 유사성은, 기독교 성경과의 비교를 도리어 무색하게 하므로, 여러 고대 종교들이 기록한 '대홍수기'를 별도의 주제로 설정하고 비교하는 것이 보다 유의미 할 것이다. 고구려의 관직 고구려의 관등은 고구려에서의 관료 또는 관직의 등급이다. 총 14개의 관등으로 나뉘어 있다. 삼국사기 잡지는 수서, 신당서, 책부원귀 세 권으로부터 인용했다. 율령이 반포된 후부터 정비된 고구려의 관등은 수상 격인 대대로 이하 태대형·울절(혹은 주부(主簿))·태대사자·조의두대형·대사자·대형·수위사자(收位使者)·소사자(小使者)·소형·제형·선인 등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다. 그 후 시대를 내려옴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아직 관계(官階)와 관직(官職)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 관계 체제는 대소 족장 세력의 전제 왕권에의 종속과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정비 과정 속에서 점차 정비되었다. 그 체계는 ‘형’과 ‘사자’의 두 계열로 나뉜다. ‘형’은 친족의 호칭 또는 연장자 족장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 고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각기 상응하는 여러 ‘형’으로 개편되어 관직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원대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의미하는 ‘사자’는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되어 상위사자·대사자·대부사자 등 여러 관명을 이루었다. 이러한 과거의 복수적인 관료 체계가 복합되어 단일한 고구려의 관료 체계로 성립되었다. 그것은 또 사자·조의두대형·선인 등 원래의 부족장의 가신체제(家臣體制)가 분화되면서 패가·대로·주부·우태(優台) 등 중앙 관료 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 체제로 정비된 것이기도 하다. 우륵 우륵(于勒, 생몰년 미상)은, 대가야의 악사이다.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모방해 가야금(伽倻琴)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다. 이후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부하여 대가야의 음악을 신라에 전수하였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조선의 박연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삼국사기》에는 우륵을 성열현(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사람이라고만 적고 있다.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 진(晉)의 악기인 쟁을 모방해 가야금을 만들고 12개의 악곡을 지었다(우륵의 12곡 참조). 우륵은 훗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자 니문(尼文)을 데리고 신라로 귀순했고, 진흥왕 개국(開國) 원년(551년) 3월에 낭성(娘城)의 하림궁(河臨宮)에 행차한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해 보였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國原)에 안치하고, 대나마 계고, 대사 법지, 대나마 만덕 세 사람을 시켜 우륵에게서 대가야의 음악을 배우게 했다. 세 사람은 우륵으로부터 각각 가야금과 노래, 춤을 배웠는데, 우륵이 전수한 12곡을 음란한 음악이라며 5곡으로 줄여버렸다. 우륵은 이에 분노했지만, 음악을 들어보고 나서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고 평하며 그들이 바꾼 음악을 인정하였다. 한편 신라의 대신들은 진흥왕에게 "가야를 망친 망국의 음악 따위는 본받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가야악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간언하였지만, 진흥왕은 "가야왕이 음란해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드신 뜻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 법도를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못 다스려지고는 음악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라며, 결국 우륵이 전수한 가야악이 신라의 궁중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樂師省熱縣人于勒)" 이외 구체적인 지명을 명시하지 않으면서 음상사학적(音相似學的)으로 해석하여 유사한 지명을 비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및 《고령군지》(高靈郡誌)에는, 고령읍 북쪽에 있는 금곡(琴曲)은 우륵이 공인(工人)을 인솔하여 가야금을 연습한 곳이라고 한다. 금곡은 다른 이름으로는 정정곡(丁丁谷)이라고도 했다. 《삼국사기》에 우륵의 연고지로 기록된 성열현은 사열현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으로 비정되는데, 장금대는 우륵이 신라인 세 제자에게 가야금, 춤, 노래를 전수한 곳으로 전해진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는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와 사휴정(四休亭)을 우륵이 노닐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우륵의 고적 및 유물과 기념물 현황은 다음과 같다. 대보 (관직) 대보(大輔)는 신라 초기의 최고 관직으로, 지금의 수상에 해당한다. 남해 차차웅이 석탈해를 임명한 것이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58년에는 탈해 이사금이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였다.후에 관제가 확립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라의 중앙 관제 신라의 중앙 관제는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라의 정치 조직은 법흥왕 3년(516년) 군사분야의 병부(兵部)가 최초로 설치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진흥왕 26년(565년) 재정과 국가기밀을 담당하는 ‘품주(稟主)’를 설치했다. 진평왕(眞平王)대에 이르러 위화부(位和府)·조부(調部)·예부(禮部) 등 중앙관서와 내성(內省)이 갖추어졌다. 진덕여왕(眞德女王) 때 품주를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면서 ‘창부(倉部)’가 따로 분설 되었다. 이방부(理方府)라는 관청도 설치했다. 위의 관서는 필요에 따라 시기적 차이를 두고 설치되었고, 관서명과 관직명은 변동이 잦았다. 남북국 시대에는 집사성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13부를 두었다. 이를 이·호·예·병·형·공의 체계에 따라 나누면 다음과 같다. 그밖에도 국립 대학인 국학(國學, 신문왕 때 설치)과 녹봉을 관장하는 사록관(司祿館, 문무왕 때 설치)이 있다. 왜 왜(倭) 또는 왜국(倭國, 왜나라)은 중국 등지에서 일본 열도 남서부에 위치했던 고대의 부족국가들을 일컫던 말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국호를 왜인(倭人)이라 기술하고 있다. 왜는 670년 국호가 일본(日本)으로 바뀌기 전까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일본의 대외적인 명칭이었다. 과거 15세기까지는 단순히 일본 열도의 고대 부족국가만을 한정지어 정의했으나, 일본이 통일된 후에도 간혹 일본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백제와 왜는 평소 문물을 자주 교류하고 지냈다. 예를 들어, 백제인인 왕인 박사는 왜에 천자문과 기타 유교 경전을 전수했으며, 수수허리지는 일본에 술을 만드는 법을 전파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술자들과 학자들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였고, 백제는 이를 통해 군사적 이득을 얻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와 왜가 교류 했다는 증거로 무령왕릉의 무령왕 관을 예로 들 수 있다. 무령왕의 관의 재질은 일본의 금송으로 그당시 일본지역에서만 자라던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게 되자 왜는 고교쿠 천황(사이메이 천황)이 백제를 돕기 위해 3만 대군을 출병시켰으나 백강구 전투에서 신라군에 의해 대패하였다. 멸망한 이후의 백제 유민의 상당수는 왜로 유입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상당수는 일본의 지배층으로 발전하게 된다. 기원전 50년에 왜인들이 군사를 몰아와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 박혁거세가 거룩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돌아갔다.혁거세 거서간 대에, 호공은 왜에서 신라로 건너가 신라의 관리를 지낸 바 있다. 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59년 신라와 수교하였으나, 73년에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신라에서는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이처럼 초기에는, 왜와 신라는 대체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당과 신라 연합에 따라 발해는 왜와 돌궐 등의 연합을 구축하였다. '倭'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기원했으며, 당시 일본 내에서 태초의 자국에 대한 명칭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학설은 상당히 많으며, 연구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다. '倭'에 대한 기원은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눠져 있다. 하나는, 倭의 부수인 사람인변과 '和'(화)와 '委'(위)라는 글자의 뜻으로부터 유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현재 일본어에서 '나'를 지징하는 1인칭 대명사에서 기원했다는 설이다. 세 번째는 북방민족의 지도자를 뜻하는 '汗'에서 파생된 '汙'라는 한자에서 유래했다는 설 또는 한민족을 포함한 동북 민족과 관련이 된 용어라는 설이다. 중국 지역에서 '倭'라는 한자가 어떠한 경로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현재 학계는 첫 번째의 학설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두 번째 설은 일본 내 소수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세 번째 설은 한국 내 일부 국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데, 신빙성이 떨어진다. 첫 번째 학설에 기반하여 주장한다면, 일본인을 의미하는 '和'라는 한자가 '委'라는 한자와 연관하여 생성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倭'를 포함하여, '委'의 요소가 들어간 대부분의 한자가, '작은', '구부러진', '아첨', '가식', '복종하는' 등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리고 倭傀(왜귀), 倭遲(왜지) 등의 한자의 원래 뜻이 적혀져 있는 『회남자』와 『설문해자』를 조사할 때, '倭'는 '복종심이 강하고, 체구가 작으며, 다리가 구부러진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의미하거나, 이로 전용된 상태로 형성된 단어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결론적으로 당시 고대 중국은 일본인에 대한 비하의 의도를 갖고 '倭'라는 명칭으로 일본을 불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일본에게만 하던 행위가 아니었다. 중국은 과거 주나라 시기부터 주변 민족을 칭할 때 비하의 의도를 담은 한자어를 사용해왔다. 말갈 말갈(靺鞨; , 뭐허)은 6~7세기경 중국의 지린 성, 헤이룽장 성과 한국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고대 중국어: Miut Kit)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중세 중국어: Muat ɣat)이라 부른다. 이후 말갈 7부는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통제를 받았으며, 속말말갈은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의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 후위 시대에는 물길 그리고 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다. 이 말갈은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부터는 여진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말갈임을 인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이 신라, 백제와 교전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들 국가와 교전한 "말갈"은 예(濊, 동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위치상 강원도의 영동, 영서에 있어서 영동말갈, 영서말갈로도 표기하나 퉁구스/숙신계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僞)말갈(혹은 가짜말갈)"로 표기한다. 삼국사기의 이런 기록 때문에 강원도나 중부지방 내륙 등 한반도에도 말갈이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언급했듯이 동예 등 예맥계 주민이었거나 혹은 말갈이라고 불렸던 가짜말갈이며, 한반도로 내려온 말갈족들은 소수에다가, 대부분 한반도의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퉁구스계 말갈이 읍루, 숙신 등으로 불려왔던 것을 볼 때 말갈이라는 명칭이 옮겨갔을 것을 보기도 한다. 말갈이라는 것이 평안도 북부나 함경도 대부분의 경우는 고려, 조선 초기까지 말갈의 후손인 여진족들이 존재했으나 4군 6진 개척이후 이곳의 말갈, 여진족들은 한민족에 동화되거나 압록강, 두만강 북쪽으로 도망쳐서 그곳에 살게 되었다. 말갈(靺鞨) 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백돌부(백돌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숙신계)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 되어있었고, 점차 고구려화된 부족이다.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직, 간접지배를 받게 된다. 이외에 사모말갈(思慕靺鞨), 군리말갈(郡利靺鞨), 굴열말갈(窟說靺鞨), 막예개말갈(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는 캐나다 대서양 연안에 있는 주로 주도는 샬럿타운이다. 세인트로렌스 만의 프린스에드워드섬(Prince Edward Island)으로 이루어져 있다. 캐나다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주이고, 준주를 제외하면 인구가 가장 작은 주이다. 현재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에 속하는 지대의 인디언들이 미크매크 족에 속하였다. 바이킹들이 기원후 1000년 경에 섬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150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 온 바스크인 선원들이 이곳에 상륙하였다. 1534년 6월 30일에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섬에 상륙하였다. 다른 프랑스의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이 1603년 섬에 프랑스를 위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일 생 장(아일 세인트 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섬은 아카디아의 프랑스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다. 1720년 프랑스인들은 섬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1758년 영국군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프랑스계 아카디안들의 대부분을 프랑스로 강제 소개시켰다. 1763년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섬을 영국에게 주었다. 영국은 이름을 세인트 존스 아일랜드로 바꾸고 노바스코샤의 일부로 만들었다. 1765년 식민지는 67개의 군구들로 나뉘어졌다. 1767년 이 군구들은 영국의 귀족, 사관과 공무원들에게 당첨에서 주어졌다. 영국인들은 지역을 개발시키는 데 이 지주들에 의지를 하였다. 약간의 지주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향상시키는 데 약속을 지기고 대지 소유의 의문은 격렬한 정치적 논쟁들로 이끌었다. 1769년 세인트존스 아일랜드는 갈라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1799년 이름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로 바꾸었다. 영국인들은 1851년 자신들의 지방적 정세들의 통치를 섬주민들에게 주었다. 1864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즈윅에서 온 사절단들이 해양 연합을 형성하는 논의를 하는 데 샬럿타운에 모였다. 오늘날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에서 온 사절단들은 그들에게 가입하여 모든 지방들의 연방 연합을 제출하였다. 사절단들은 그해에 다시 퀘벡에서 다시 만났다. 이 회의는 1867년 7월 1일 캐나다 자치령을 위한 창조로 이끈 캐나다 연합의 계획을 작성하였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자차령에 가입하는 데 거부하였다. 주민들은 거대한 경제적 번영의 시기를 즐기고 연합을 필요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추가로 그들은 큰 지방들이 새 정부에서 자신들의 작은 섬을 통치할 것 같은 위협에 놓였다. 1870년대 초반에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철도가 지어졌다. 결과로서 섬은 빚으로 떨어지고 주민들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873년 7월 1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7번째 주로서 자치령에 가입하였다. 보수당 소속의 제임스 C. 포프가 연방에서 주의 초대 지사가 되었다. 불참한 대지 소유의 문제는 1875년 주 정부가 대지 매입령을 통과시킬 때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법령은 많은 지주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팔도록 강요하고 주에게 재산을 사는 데 기금을 주었다. 주민들은 주로부터 대지를 사서 자신들의 농장들을 향상시켰다. 1800년대 후반 동안에 주의 작은 지방적 산업들은 캐나다 중부에서 더 큰 산업들과 경쟁하지 못하여 섬의 경제가 쇠퇴하였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의 한정된 세금으로부터 소득은 인구가 적어지면서 줄어들고 섬은 더욱 연방적 원조에 의지하게 되었다. 수천명의 섬 주민들이 이주해 버렸다. 그들은 캐나다의 어떤 다른 곳들과 미국에서 더욱 거대한 직업 기회들을 찾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는 교육, 보건과 공공 사업 같은 정부적 서비스들을 확장시켰다. 이 서비스들의 높은 비용들은 주의 재정적 문제들을 늘였다. 1941년 인구 조사국은 1891년 이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에 첫 인구가 증가된 것을 보여주었다. 1940년대 동안에 주는 섬의 많은 붉은 점토 도로들의 포장하는 데 도움을 준 연방적 원조에서 큰 증가들을 받았다. 주에서 향상된 고속도로들은 시장들로 농산물과 수산물의 배달을 번영시키고, 도시와 시골 지역들 사이에 연락을 향상시고, 학교의 합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69년에 시작된 연방적으로 후원된 경제적 개발 계획이 1984년에 결말지어졌다. 이 계획은 새로운 학교와 고속도로들을 위한 마련을 하고 농산물과 수산물을 위한 대로운 시장들을 열고 관광업을 확장시켰다. 그 계획은 또한 주에 어떤 작은 제조업 회사들을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주는 지속적으로 서비스업, 특히 관광업과 농산물에 의지하였다. 주는 또한 아직도 거대하게 연방적 경제 원조에 의지하고 있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는 또한 캐나다 전국에서 최저의 주와 개인당 소득들의 하나를 가졌다. 그러나 섬의 주민들은 편안한 생활을 만드는 데 도시 지구와 작은 공동체들 양쪽에서 주민들을 부여할 안정된 경제를 창조하는 데 일을 하고 있다. 1993년 노섬벌랜드 해협을 가로질러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와 뉴브런즈윅 주를 잇는 다리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컨페더레이션 다리로 불리는 이 다리가 1997년에 완공되었다. 그해 1월 자유당은 당수와 주지사로서 조지프 기즈의 뒤를 이으는 데 캐서린 콜벡을 선택하였다. 자유당원들은 3월에 총선을 이겨 그녀를 캐나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주지사로 만들었다. 콜벡은 1996년 당수와 주지사로서 사임을 하여 키스 밀리건이 양쪽의 지위들에서 그녀의 뒤를 이었다. 진보보수당이 11월에 총선을 이겼다. 그러고나서 보수당 지도자 패트릭 G. 빈스가 주지사로 되었다. 2007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의 자유당이 총선을 이겨 11년 간의 보수당 정부를 끝냈다. 자유당 지도자이자 조지프 기즈의 아들 로버트 기즈가 주지사로 되었으며, 그는 당시 33세였다. 서비스업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의 국내 총생산의 대략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 산업들은 주의 노동자들의 대략 4분의 3을 고용한다. 많은 이 산업들은 주도인 샬럿타운에 있다. 농장 지대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 내륙 지역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감자가 주요 수확물이며, 거의 프렌치프라이로 만들어 지는 데 지방 가공장들로 보내진다. 주에서 다른 중요한 수확물들은 보리, 블루베리와 채소를 포함한다. 폭이 넓은 밭들은 낙농업을 위한 건초를 생산한다. 가축은 육우와 젖소, 그리고 돼지를 포함한다. 농산물과 수산물의 가공업은 주의 제조업 소득의 거의를 차지한다. 항공기 부품들의 제조업도 또한 주요 산업이 되었다. 주에 있는 회사들은 또한 합성 금속 제품, 비료, 의학 기구, 인쇄 금속과 목재 제품들을 생산하기도 한다. 가재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의 가장 중요한 잡이이다. 다른 잡이들은 게, 청어, 대서양고등어, 굴과 다랑어를 포함한다. 주는 캐나다의 양식된 홍합의 거의를 공급한다. 가치적인 상업적 해초인 진두발속의 홍조는 해안에서 경작된다.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의 인구가 135,851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인구는 2001년으로 본 135,294명에서 1 퍼센트 이하로 증가되었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민의 대략 45 퍼센트는 도시 지역들에 산다. 대략 25 퍼센트는 샬럿타운에 산다. 섬머사이드는 주의 단 하나의 다른 도시이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는 각각 10,000명 이하의 주민들과 함께 한 대략 40개의 합병 타운들과 마을들이 있다. 주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주민의 대부분은 영국 혹은 아일랜드 계통이며 거의 영어를 사용한다. 주민의 대략 4분의 1은 프랑스 혹은 아카디아인의 자손들이다. 프랑스어는 약간의 작은 공동체, 특히 주의 서부에 있는 에번젤린 지방에서 사용된다. 대략 450명의 미크매크 인디언들이 주에 있는 보호 구역들에 산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1874년 뉴런던에서 태어났다. 몽고메리가 1908년에 발표한 빨간 머리 앤은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샬럿타운 축제에서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작폼에 등장하는 그린게이블스(초록지붕집)는 캐번디시에 실제로 소재한다. 남북국 시대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698년 – 926년)는 신라의 한반도 중남부 점령과 북부 발해의 건국부터 고려의 한반도 통일까지 시기를 가리키는 한국사 시대구분이다. 이에 따르면 발해를 북국, 신라를 남국이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러왔으나, 통일 범위가 좁고 이 당시에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도 존재했으므로 한국사의 범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는 적절하지 못했다. 따라서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에 수용하기 위해 두 나라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남북국 시대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부에서 반대하는 견해도 있지만, 근래에는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예는 최치원의 글과 〈삼국사기〉에 이미 나타난다. 최치원의 글 중에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가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가 북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북국은 발해를 가리킨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남북국이란 용어를 단순한 방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의 체계 속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발해는 신라와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민족 구성, 중심지의 위치, 발해 멸망 이후의 상황 등 여러 면에서 오로지 한국사에만 속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며,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 나라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것을 제대로 밝혀내는 연구 성과가 있어야만, 남북국시대란 용어도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일반적인 발해가 건국된 지역과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다들 별 문제가 없지만 발해에 대한 정통성이나 문화성 그리고 그 역사관이 어느 나라의 뿌리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특히 한반도 고대사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사료 문제도 있다. 만일 남북국시대를 인정할 경우 한반도의 진정한 통일시기는 신라시대가 아닌 고려시대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여러가지로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러한 난제들에도 발해의 역사는 한반도 역사와 영토분쟁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중국의 《구당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이라 기록했다. 《신당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며 고려에 부속된 자들로 성은 대씨라고 기록했다. 《무경총요》는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라고 기록했다. 《신오대사》는 발해는 본래 말갈인데, 고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했다. 《금사》는 당 초엽에 말갈에 속말(粟末)과 흑수(黑水) 두 부(部)가 있었다. 모두 고려에 신속(臣屬)하였는데, 당이 고려를 멸망시키자 속말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해져서 발해라고 불렀는데, 성은 대씨이고 문물과 예악이 있었으며, 당 말엽에 이르러 점점 쇠퇴하여져서 이후로는 다시 들리는 바가 없었다. 금이 요를 정벌하자 발해가 귀부해왔는데, 대개 속말말갈의 후예라고 기록했다. 《속일본기》는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 ,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구》는 말갈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는데, 대조영은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으로 등극하였다. 영주에서 동으로 2000리나 되고 군사가 수만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발해에 대한 여러 사서의 기록들을 인용하고 결론을 도출했는데, 다음과 같다.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데,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해가 뜨는 곳(震旦)이라고 불렀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서기 678)에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祚榮)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남은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곧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분리되고 통합됨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指掌圖)』를 살펴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등으로 칭함으로써 발해의 주체를 고구려가 아닌 말갈로 기록했다. 이는 김부식이 신라계로 신라만이 '삼한일통'의 정통 왕조라는 사관을 가지고 결론을 도출한 것과 연관이 있다. 최치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는 본래 보잘 것 없는 말갈의 부락에서 속말이라는 소번의 이름을 가지고있었다고 서술하면서도 "총장 원년(668)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삼국사기』" 라고 하거나 ,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동문선』" 이라고 하기도 했다. 《제왕운기 下》는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성에 의거하여 측천무후 갑신년(684년)에 나라를 열었는데 발해라 이름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협계태씨족보 권1》는 사성 13년(696년)에 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震國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했다. 신라는 고구려 및 백제, 당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676년부터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들을 억눌렀다. 또한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한편 30여년이 지난 후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698년, 대조영이 대사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이끌던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규합하여,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한 뒤 진국을 건국하고, 곧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남북국사관에서 북국 발해와 남국 신라라는 200여년간의 남북국 시대가 시작됐다. 서기 900년, 신라는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의 북부에서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남부의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남북국 시대의 양상과 사실상 병존하였다. 918년에 태봉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로 국호를 환원하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남국의 고려에서는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면서 국내에서 삼한을 일통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조선 전기에는 일부 비주류 역사관을 제외하면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를 배제한 채 발해를 한국사의 주류와 별개인 말갈족 왕조로 보고 신라만이 '삼한일통'의 정통 왕조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신라-고려시대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발해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에도 세조 시기에 발해의 역사를 조선사로 편입시키고 발해의 역대 왕들을 제사지내자는 상소문이 올라왔지만 조선 세조는 본래 발해는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에 속했다가 떨어져 나간 국가로 일축했다. 유희령의 16세기 초반 저작인 《표제음주동국사략》에서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편입했고, 조선 후기 일부 실학자들이 국제하천인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발해사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북학파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하며 삼국 시대가 종결된 후 남부 신라가 있었고 북부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현재주의 관점인 '남북국사관'을 창조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부르며 발해의 존재와 그 역사적 소속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으나,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중국 사학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정통 역사로 인정,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제외되어 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발해를 외면했다는 이유로 중국 일부 사학계의 동북공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된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한국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역사적 통일은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도 있다. 비록 발해의 영토와 인구 대부분은 고려가 흡수하지 못했지만, 인도주의적인 형태로 고려 태조 왕건은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934년,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수용하였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 한반도 남부 통합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후기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이전 삼국시대처럼 서로 적극적으로 무력분쟁이 일어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733년, 후기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으며, 발해의 공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 금성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서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이러한 교역로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였다. 신라도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자주 이용된 시기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이다.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라인과 발해인들은 서로 적지 않은 경쟁의식을 가졌던 것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고려사》 최언위 열전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발해는 고구려 사람이 건국한 나라이며,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한국사의 일부라는 통일된 견해를 갖고있으나, 일개 국가에서 남북조 혹은 남북국이란 그들이 본래 통일되어 있었는데 후에 상호 대치하는 두 왕조로 분열되었다가 역사발전의 결과 다시 통일되는 경우에 출현하는 것으로,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는 이러한 역사조건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 후의 발전과정에서도 신라는 발해를 통일하지 않았고 발해도 신라를 통일하지 않았으며, 왕건의 고려 통일왕조까지 포함해도 발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남북국시대란 역사 사실에서 벗어난 유득공의 일종의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한 현재 한국에서는 국가가 주도하여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면서, 신라의 존재를 무시하고 발해를 한국사의 정통으로 삼는 것이 타당한가, 또는 발해를 신라와 동일한 비중을 두고 남북국 시대로 다루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791년 792년 793년 794년 795년 796년 797년 798년 799년 800년 801년 802년 803년 비잔티움 여제 이레네 804년 805년 806년 807년 808년 809년 810년 811년 812년 1월 11일 - 동로마 제국의 전 황제 스타우라키우스 813년 814년 815년 816년 817년 818년 819년 820년 당 헌종이 환관에게 살해당하다. 821년 822년 823년 824년 825년 826년 신라가 300리 장성을 지었다. 827년 828년 829년 830년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는 일본에서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연구가로, 미술평론가이다. 학습원(學習院) 고등부에 재학할 때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를 만들었다. 1913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유럽 유학 후 귀국하여 1919년에서 1923년까지 도요 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있었다. '사라지는 한 조선 건축물에 대하여'를 1922년 《개조》(改造) 9월호에 발표하는 등의 논설 활동을 했고, 1924년 서울에 조선 민속 미술관을 세우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개최했다. 한국의 전통 미술 및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평론 및 수집을 하였다. 한국의 미를 설명하면서 한국 민족의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민예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대표적인 성과가 1936년 도쿄도 메구로 구에서의 민예관 설립이다. 일제 강점기 광화문 철거 당시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타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와 존중을 표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어족 어족(語族)은 언어학에서 하나의 공통된 조어(祖語)에서 갈라나왔다고 추정되는 여러 언어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대부분의 자연어는 여러 어족에 각기 속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어족은 계통적, 발생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언어 집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해당 어족의 모든 언어는 하나의 공통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족의 개념은 한 언어의 역사적이고 계통적인 조상이 있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남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언어가 급격하게 변화했거나 교체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학적인 조상의 개념은 생물학적인 조상의 개념보다 불분명한데, 혼성어와 같은 몇몇 극단적인 역사적 언어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어족의 언어 간의 혼성어의 경우 여러 어족의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어느 어족에 속하는지 불분명하거나 잘못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혼성어와 같은 경우는 실제론 상대적으로 상당히 드물며, 대부분의 언어의 경우에는 그다지 불분명하지 않게 개개의 어족들에 분류해 넣을 수 있다. 어족에 속한 언어들의 공통 조상은 공통조어(祖語: protolanguage)라고 한다. 이러한 조어들 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가장 잘 알려진 어족 가운데 하나인 인도유럽어족의 조어인 인도유럽조어(인구조어, 印歐祖語, Proto-Indo-European: 보통 PIE로 줄여 쓴다.)이다. 인도유럽조어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시기의 언어이므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때로는 일련의 언어들의 조어가 역사상의 실제하는 언어로 판별되기도 한다. 라틴어(혹 통속라틴어)의 각 지방의 방언들이 오늘날 로망스어군의 여러 언어들로 발달했기 때문에, 고전기 작가들의 문어 라틴어, 고전 라틴어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로망스조어는 라틴어와 거의 일치한다. 이와 비슷한 예가 고대 노르드어의 경우로, 다소 기록으로 남아있는 고대 노르드어는 각지로 퍼져서 여러 곳의 방언들이 각기 오늘날의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페로어, 아이슬란드어 등의 조상이 되었다. 한 어족의 공통 조상으로 직접적으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몇몇 고전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언어들이 상대적으로 최근의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언어학적 방법들을 적용함으로써 조어의 많은 특징들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복원 과정은 주로 여러 언어들의 낱말들 사이에 나타나는 말소리의 규칙적인 대응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이와 관련된 연구방법론은 비교 재구(比較再構:comparative reconstruction)라고 불린다. 비교재구는 19세기 초기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라스크(Rasmus Christian Rask), 야콥 그림(Jakob Grimm), 아우구스트 슐라이허(August Schleicher), 젊은이 문법학파(독: Junggrammatiker/영: neo-grammarians) 등등의 일군의 비교언어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언어학적 방법은 아래에 제시된 수많은 어족들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어족은 더 작은 계통적, 발생적 단위로 나뉠 수 있는데 관습적으로 어족의 하위 부류는 ‘어파’라고 불린다. 하지만, ‘어족’이라는 용어가 계통수에서 어떤 특정한 단계를 지칭하는 데 제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게르만어족은 인도유럽어족의 하위 부류이다. 일부 학자들은 ‘어족’이라는 용어를 특정 단계에만 사용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어떤 합의나 동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파’의 하위부류를 ‘어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족’보다 큰 단위를 ‘대어족’이라는 용어로 지칭하기도 한다. 언어들 중에서 확실히 어느 어군으로 분류할 수 없는 언어를 고립된 언어(language isolate)라 한다. 어족 내에서도 다른 어족 내의 언어들과 친족관계가 밝혀지지 않아 별개의 어파로 분류해야 하는 고립된 언어가 있다. 인도유럽어족의 경우에는 그리스어가 여기에 해당하며, 인도유럽어족 내에서 고립된 언어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보다 좀 더 극단적인 고립된 언어로 바스크어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바스크어는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고립된 언어이다. 바스크어의 경우, 어휘, 음성, 통사구조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을뿐더러, (비록 주위지역의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의 로망스어의 영향을 받긴 하였지만) 현존하는 어떤 다른언어와도 친족어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국어, 수메르어 등이 고립된 언어에 포함된다. 이러한 고립된 언어들은 각각 하나의 작은 어족을 형성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례로, 바스크어를 바스크어·나바로라부르댕 바스크어·술탱 바스크어로 나누어 이들이 바스크어족을 형성한다고 보거나 한국어중 제주어를 별개로 보아 한국어족으로 분류하는 등 언어를 나누는 기준에 따라 고립된 언어가 될 수도 있고 작은 어족이 될 수도 있다. 이들 언어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끼리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생겨난 혼합어로 어떤 언어를 토대로 했는지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또 이들이 분화되어 생겨진 언어들의 친족 관계도 살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영어를 기초로 한 크리올어인 비슬라마계 언어, 즉 비슬라마어·톡 피신어·솔로몬 제도 피진어 등은 서로의 유사성이 확연하며 어느 정도 상호 의사 소통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세 언어는 멜라네시아라는 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피진이기 때문에 멜라네시아 외 지역에서 발생한 영어 피진, 즉 하와이 크레올 영어, 자메이카 크레올 영어등과는 상호 이해도가 아주 낮아 토대 언어가 같다고 해서 한 갈래로 나누기에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의견도 있다. 수화는 손짓을 중심으로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언어이며 다른 자연어와는 독립된 발달을 하였다. 농아자들을 위한 수화가 대부분이지만 침묵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수도자들이 쓰는 수도원 수화, 서로 언어가 다른 부족끼리의 의사소통 등 여러 이유로 쓰이는 평원인디언 수화 등도 있다. 이들도 다른 자연어와 같이 변화·분화하기 때문에 계통 연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국 수화는 일본 수화 및 대만 수화와 관계가 있다. 미국 수화는 프랑스 수화에서 발달한 것으로, 영국의 수화와는 다른 형태를 지닌다. 에스페란토 등의 인공어도 이론상 자연어와 같이 변화·분화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인공어는 역사가 짧기도 하고 성격상 언어 형태가 정립되어 있어 분화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에스페란토에 기초하여 이도가 만들어진 예와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자연어의 분화와는 다르지만 인공어간의 친족 관계를 거론할 수도 있다. 여러 어족들에 대해 여러 학자들 간에 그 당위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더 나아가서 여러 어족들을 묶어 대어족을 제안하기도 한다. 일부 대어족은 가설로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수준 재구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어족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나 학파는 그 존재를 부정하거나, 보류하고 있는 상태이다. 다음은 지금까지 알려진 주요 어족의 목록이다. 여기서 이러한 어족들을 지리적 분포에 따라 정리한 것은 단지 편의를 위해서이지 지역별로 '대어족'이 있었음을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아프리카(Africa, : 아비리가(阿非利加))또는 비주(非洲)는 아시아 다음으로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은 대륙이다. 면적은 주변 섬을 합하여 3천2십만km²으로, 지표 표면의 6%이며, 육지 면적의 20.4%를 차지한다. 61개 영토에 11억 명(2014년 기준)이 살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14.8%에 해당한다. 아프리카 대륙 주변으로 북쪽에는 지중해, 북동쪽에는 수에즈 운하와 홍해, 남동쪽에는 인도양, 서쪽에는 대서양이 있다. 이 대륙에는 분쟁 지역인 소말릴란드를 빼고 마다가스카르와 여러 도서 지역을 포함하여 총 55개국이 있다. 아프리카연합에서는 서사하라를 정식으로 국가로 인정하여 55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프리카 중 특히 동아프리카는 학계에서 현생 인류와 사람과 계열의 발상지로 여겨지는데, 초기 인류와 그 조상의 발견되었으며, 약 200,000여 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초기 호모 사피엔스와 더불어 7백만여 년 전에 발견된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르가스테르 등의 많은 유인원들도 발견되었다. 적도가 지나며, 다양한 기후대가 나타난다. 또 북부 온대에서 남부 온대가 걸쳐있는 유일한 대륙이기도 하다. 아프리(Afri)는 카르타고와 인접한 북아프리카에 살던 여러 민족의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보통 페니키아어로 "먼지"를 뜻하는 아파르("afar")와 연관되는데, 1981년의 어느 이론 에 따르면 이것은 "동굴"을 뜻하는 베르베르어 낱말 이프리("ifri")나 이프란("ifran")에서 나온 말로, 동굴에 사는 사람을 이른다고 한다 아프리카 또는 이프리, 아페르 는 알제리와 트리폴리타니아의 바누 이프란족의 이름이다.(아프란의 베르베르 부족) 로마 시대에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속주의 도읍으로, 이 지역은 오늘날 리비아의 해안 지역도 포함되었다. 라틴어 접미사 "-ca"는 "나라" 혹은 "땅"을 의미한다. 나중에 지금의 튀니지 땅에 들어선 무슬림 왕국 이프리키야(Ifriqiya)에도 이 이름 형태가 남아있다. "아프리카"의 다른 어원으로는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는 지중해를 사이로 유럽과 떨어져 있고, 아시아와는 대륙의 북동쪽 끝에 폭 163km의 수에즈 지협(수에즈 운하가 지나간다)으로 이어진다. (지정학적으로 수에즈 운하 동쪽에 있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는 아프리카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륙 최북단 튀니지의 라스 벤 사카(37°21′ N)에서 대륙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굴라스 곶( 34°51′15″ S)까지 거리가 약 8,000 킬로미터에 이른다. 또 대륙 최서단 베르데 곶(17°33′22″ W)부터 대륙 최동단 소말리아 라스 하푼(51°27′52″ E)까지 거리는 약 7,400km이다. 해안선은 26,000km로 굴곡이 매우 적은데, 면적이 아프리카의 1/3 정도인 10,400,000 km²밖에 되지 않는 유럽은 해안선이 32,000km에 이른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나라는 알제리이며, 가장 작은 나라는 동부 해안에서 떨어진 세이셸 군도이다. 대륙 본토에서 가장 작은 나라는 감비아이다. 고대 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아시아"는 아나톨리아와 동방의 여러 지역을 일컬었고, 아프리카는 이집트의 서쪽을 이르는 말이었다. 두 대륙의 정확한 구분선은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그었는데, 본초자오선을 알렉산드리아로 잡고, 홍해와 수에즈 지협을 두 대륙의 경계로 삼았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진짜 규모를 알게 되자, '아프리카'의 의미는 확대되었다. 지리적으로 아프리카는 아라비아 반도,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포함하며,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는 아프리카판을 이룬다. 에티오피아구와 사하라-아라비아 사막은 북쪽과 생물지리학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아프리카아시아어족도 북쪽 지역을 언어학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기후는 열대에서 고산지의 아북극에 이른다. 북부 지역은 건조하거나 사막이며, 중부와 남부 지역에는 사바나 초원과 울창한 밀림(열대우림)이 있다. 둘 사이에는 수렴 지대가 있으며 식생은 주로 사헬이나 스텝이 지배적이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야생 동물의 수와 종류, 영역, 분포 밀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보이며, 큰 육식 동물(사자, 하이에나, 치타 등)과 초식 동물(물소, 영양, 코끼리, 낙타, 기린 등)이 인간이 소유하지 않은 평원에 자유로이 살고 있다. 또 아프리카는 온갖 밀림 생물(뱀이나 영장류)이나 수생 생물(악어나 양서류)들의 서식지이다. 아프리카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강인 나일강과 세계에서 수심이 제일 깊은 콩고강이 있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호수인 빅토리아 호수를 비롯해 아프리카의 대호수로 알려진 거대한 호수들이 있다. 중생대 초 아프리카는 판게아의 일부로 지구의 다른 대륙과 붙어 있었다. 아프리카는 트라이아스기에 가까워질 때까지 초대륙 전체를 통틀어 수각룡, 고용각룡, 원시 조반목이 지배적인 균일한 동물군을 이루었다. 후기 트라이아스기 화석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견되며, 북부보다는 남부에 더 많이 나온다.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의 아프리카 지층에 대해 철저히 연구되지는 않았으나, 두 시대는 전지구적인 영향으로 발생한 멸종 사건으로 경계를 이룬다. 전기 쥐라기 지층은 후기 트라이아스기의 층과 비슷한 모양으로, 남쪽에는 노두(outcrop)가 더 흔하고 화석층은 적은데, 북쪽으로 갈수록 화석층이 많아진다. 쥐라기가 지나면서 아프리카에는 용각류와 조각류와 같은 더욱 거대해진 공룡 무리가 늘어났다. 중기 쥐라기 지층은 아프리카에서 잘 보이지 않고 연구도 잘 되지 않은 실정이다. 후기 쥐라기 지층도 탄자니아의 텡데구루(Tendeguru) 동물군을 빼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기 쥐라기 텡데구루는 북아메리카 서부 모리슨층에서 발견된 화석과 비슷하다. 중생대 중반, 약 1억5천만~1억6천만여 년 전에 마다가스카르 섬이 아프리카에서 떨어져나왔는데, 이 섬은 인도와 여타 곤드와나 땅덩어리에 붙어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화석 가운데는 아벨리사우루스와 티타노사우루스가 있다. 마다가스카르와 달리 아프리카 본토는 중생대에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판게아의 나머지 땅덩어리가 계속 갈라지면서, 다른 대륙과 관련하여 큰 변화가 있었다. 후기 백악기 초에 남아메리카는 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가 남대서양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류 변화로 전지구의 기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악기에 아프리카에는 거대한 육식 공룡 등 알로사우루스류나 스피노사우루스류가 살았다. 티타노사우루스는 이 지역의 고대 생태계에서 중요한 초식 동물이었다. 백악기의 유해는 쥐라기 유해보다 많으나, 동위원소 연대 측정이 안 돼서 정확한 시기를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고인류학자 대부분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류가 발생하였으며, 지구상에서 인간이 최초로 거주한 땅이라고 보고 있다. 20세기 중반 인류학자들은 아마 7백만여 년 전에 인간이 살았던 여러 증거와 화석을 발견하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동위원소 연대측정에 따라 기원전 3백9십만~3백만 년경),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대략 기원전 2백3십만~1백4십만 년경)), 호모 에르가스터(기원전 1백9십만~6십만 년경) 등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 보이는 초기 유인원 여러 종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선사 시대에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과 마찬가지로) 나라가 없었으며, 코이족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으로 먹고 사는 무리들이 살았다. 빙하 시대가 끝나자(기원전 10,500년 경 추정) 사하라 사막은 비옥한 녹지 계곡으로 바뀌었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해안 고지나 내륙에서 나와 이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후가 따뜻하고 건조해지자 기원전 5000년경 사하라 지역은 점차 건조하여 살기 힘든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하라를 떠나 제2폭포 밑의 나일강 계곡으로 가서, 영구적인 혹은 반영구적인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큰 기후 정체가 일어나자 중앙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계속 많이 내리던 비가 줄었다. 이 시기부터 동아프리카는 건조한 날씨가 우세하게 되었으며, 이후 200여 년 동안 에티오피아에서 이어졌다. 아프리카에서 농경이 발생하기 전에 소가 가축화되었는데, 아마 사냥ㆍ채집도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000년경 북아프리카에서 소는 이미 길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사하라-나일강 지역에 사람들은 알제리에서 누비아 사이 지역에 흔하던 나귀나 염소 등의 여러 동물을 길들였다. 기원전 4000년에 사하라의 기후는 급속하게 건조해졌다. 이 기후 변화로 호수와 강은 크게 말라버리고, 사막화가 심해졌다. 그리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줄어들고, 농경 집단이 서아프리카의 열대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 일조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북아프리카에 철기가 도입되어, 사하라를 지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북부 지역에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기원전 500년경 금속 가공은 서아프리카에서 보편화되었다. 기원전 500년경에 동서 아프리카 지역에 철기 이용이 완전히 확립되었는데, 다른 지역은 기원후 몇백 년이 돼서야 철기를 가공하게 되었다. 이집트, 북아프리카, 누비아, 에티오피아에서 기원전 500년경에 만들어진 구리 유물이 서아프리카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사하라 사막 사이로 무역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300년경 북아프리카에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문자가 생기면서 역사 기록이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오래된 문명인 이집트는 다른 지역에 영향을 주면서 기원전 343년까지 존속하였다. 이집트의 영향력은 오늘날 리비아와 크레타 북부, 가나안, 남쪽으로는 악숨 왕국, 누비아까지 이르렀다. 북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와 무역을 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아프리카에 온 첫 유럽인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었다.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 사람에게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웠으며, 그가 죽은 뒤 이 도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이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정복하여, 이 지역은 경제와 문화 면에서 로마 세계에 편입되었다. 로마인의 거주지는 오늘날 튀니지나 여타 해안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팔레스티나에서 이집트를 따라 이곳까지 전파되었으며, 남쪽으로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누비아까지 퍼졌으며, 최소 6세기에는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렀다. 7세기 초에 새로이 발흥한 아랍의 이슬람 제국이 이집트를 지나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다. 이 지역의 베르베르족 상류층은 급속히 무슬림 아랍 부족에 통합되었다.8세기에 우마위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자, 지중해 세계에서 이슬람의 중심지는 시리아에서 북아프리카의 알 카이라완으로 옮아갔다. 무슬림 북아프리카는 다양하게 발전하여, 신비주의자, 학자, 법학자, 철학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주로 무역로와 이주를 통해 사하라 이남에도 퍼졌다. 식민 지배 이전의 아프리카에는 10,000개 이상의 국가와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제각각의 정치 조직과 지배 체제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는 아프리카 남부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작은 가족 집단도 있고, 아프리카 남부와 중부의 반투어권 씨족 집단처럼 좀 더 크고 조직을 갖춘 집단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뿔의 씨족 집단, 사헬 지역의 왕국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와 이그보(Igbo) 혹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의 무역 도시와 같은 자치 도시국가나 왕국처럼 더욱 체계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기원후 9세기경 초기 하우사 등 일련의 왕조 국가들이 사하라 이남 사바나에서 서부 지역부터 중부 수단을 지배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는 가나, 가오, 카넴-보르누 제국이었다. 가나는 11세기에 쇠퇴하였으나, 말리 제국이 뒤를 이어 13세기에 서부 수단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카넴은 11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서아프리카 해안의 삼림 지역에는 북쪽 무슬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 왕국들이 성장하였다. 이그보의 은리 왕국(Nri)은 9세기에 세워진 초기 왕국이었다. 또 오늘날 나이지리아 땅에서 매우 오래된 왕국으로, 에제 은리(Eze Nri)가 다스렸다. 은리 왕국은 이그보 우크부(Igbo Ukwu)에서 발견된 정교한 청동 유물으로 유명하다. 이 청동 유물은 9세기경으로 보인다. 요루바의 도시국가와 왕국 가운데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페(Ife)는 "이페의 우니(Ooni)"라는 성직자 오바(oba, 요루바어로 "왕" 혹은 "지배자"를 뜻한다)가 다스렸다. 이페는 아프리카에서 종교와 문화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청동 조각의 독특한 자연주의 전통으로 유명하였다. 이페의 정부 형태는 오요 제국(Oyo)에서 수용하여, 이곳의 오바(임금)은 "오요의 알라핀(alaafin)"이라고 하였으며, 한때 수많은 다른 요루바 혹은 비(非)요루바 도시국가와 왕국을 다스렸다. 다호메이의 폰 왕국(Fon)은 오요의 지배를 받는 비 요루바 나라 중 한 곳이었다. 알무라비툰은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 왕조로, 11세기에 광활한 북서 아프리카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바누 힐랄과 바누 마킬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 베두인 부족의 연합체로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집트를 거쳐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융합하여, 지역 주민이 아랍화되고, 아랍 문화는 이슬람을 기초로 지역 문화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였다. 말리 제국이 붕괴하자 손니 알리(Sonni Ali, 1464~1492)라는 지역 지배자가 니제르 중부와 수단 서부에 송가이 제국을 세우고 사하라 사막간 교역을 장악하였다. 손니 알리는 1468년 팀북투를, 1473년에는 젠네(Djenne)를 함락하여 교역 수입과 무슬림 상인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정권을 세웠다. 그의 후계자 아스키아 무함마드 1세(Askia Mohammad I, 1493?1528)는 이슬람을 국교로 삼아 모스크를 짓고, 수단의 아프리카 무슬림 학문 전통을 세운 알 마길리(al-Maghili)와 같은 학자들을 가오에 보냈다. 11세기경 카노(Kano), 지가와(jigawa), 카치나(Katsina), 고비르(Gobir) 등 일부 하우사 나라은 성벽 도시로 발전하여, 무역에 종사하고 대상(隊商)을 맞아들이며 재화를 생산하였다. 15세기까지 이들 소국들은 당대 수단 제국의 변경에 있었으며, 서쪽의 송가이와 동족의 카넴 보르누에 공물을 바쳤다. 유사 이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도 노예제가 있었다. 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랍의 노예 무역은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 교역로를 통하여 1천8백만의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갔다. 1482년 포르투갈인들은 엘미나에 자리를 잡고 기네아 해안에 수많은 무역 항구를 설립하였다. 주요 상품은 노예, 황금, 상아와 후추였다. 유럽인들이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자, 이전에는 육상 무역이며 여러 대륙에 걸쳐 분화되었던 노예 무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를 주축으로 급속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대서양간 노예 무역으로 7백만~1천2백만의 노예가 신세계로 보내졌다. 서아프리카에서는 1820년대에 대서양간 노예 무역이 쇠퇴하면서 이곳 나라들은 갑작스러운 경제 변화를 맞았다. 신세계에서 노예 수요가 떨어지고,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반노예제 입법이 늘어나고, 영국 해군이 서아프리카 해안에 출몰하면서 노예 무역은 점차 쇠퇴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은 새로운 경제 형태를 찾게 되었다. 1808년에서 1860년 사이 영국의 서아프리카 함대는 약 1,600여 척의 노예선을 나포하고 배에 있던 150,000명의 아프리카인을 해방하였다. 노예 무역을 불법화하는 데 거부한 아프리카 지배자들에 대한 응징도 이루어졌는데, 가령 "라고스의 찬탈자 왕"은 1851년 권좌에서 쫓겨났다. 반노예제 조약에 50개 이상의 아프리카 나라들이 승인하였다. 서아프리카의 강대국 아산테 연맹, 다호메이 왕국, 오요 제국은 제각기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아산테와 다호메이는 팜유, 코코아, 목재, 금 등 오늘날 서아프리카 수출의 기반을 이루는 "합법적 상업"의 발전에 주력하였다. 적응에 실패한 오요 제국은 내전으로 붕괴하였다. 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영토 쟁탈전을 벌이며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병탄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식민 국가가 생겼으며, 독립국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일부 정착하여 세운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신봉하는 에티오피아(유럽인들은 이곳을 "아비시니아Abyssinia"라고 불렀다) 밖에 없었다. 유럽의 식민 지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으며, 전쟁이 끝나면서 여러 나라들이 점차 독립을 얻었다. 아프리카의 독립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국가들이 약화되면서 활발해졌다. 1951년 이탈리아 식민지 리비아가 독립하였다. 1956년 튀니지와 모로코가 프랑스에서 독립하였다. 가나는 이듬해 그 뒤를 따라 사하라 이남에서 최초의 독립 국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나머지 나라는 이후 10년 사이 독립하였으며, 상당수는 평화적으로 독립하였지만, 일부는 특히 알제리처럼 폭력 투쟁을 거쳐 독립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최초로 독립을 얻은 나라이지만, 1994년까지 백인 정착민들의 백인 지배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지속되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에는 54개 독립 주권 국가가 있으며, 이들 나라를 가르는 국경선은 대부분 유럽 식민 지배 시대에 획정된 것이다. 식민 지배 이래 아프리카 나라들은 불안정, 부패, 폭력, 권위주의에 시달렸다.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는 대통령제 형태의 공화국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민주적인 정부를 이룬 나라는 거의 없으며, 대개 쿠데타가 되풀이되며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독립 이후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자는 대부분 장군 출신으로, 교육 수준도 낮고 민주적인 통치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이질적인 종족들이 이들 지배자 밑에서 통합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 불안정의 요인이다. 여러 정치인들은 정치적 이익("분할하여 통치하라")을 위해 식민 통치로 발생하거나 악화된 종족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군대는 질서를 제대로 유지할 유일한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군사 지배가 나타났다. 1960년대 초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아프리카는 70번 이상의 쿠데타와 13번의 대통령 암살이 발생하였다. 유럽인들이 그어놓은 국경선 때문에 국경 및 영토 분쟁도 흔하며, 무력 갈등이 널리 일어나고 있다. 미합중국과 소비에트 연방간의 냉전과 국제통화기금의 정책도 아프리카의 불안정에 한몫하였다. 한 나라가 독립하면 이 나라는 두 강국 중 한 곳과 동맹해야 하기 마련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소련의 군사 원조를 받았으며, 아프리카 중부와 남부의 경우 미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1970년대 새로이 독립한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소련과 동맹을 맺었으며, 아프리카 서부와 남부에서는 반정부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여 소련의 영향력을 억누르고자 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1984년 에티오피아의 기근으로 수십만명이 굶어죽었다. 어떤 이는 마르크스 소비에트 정책이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파괴적인 군사 충돌은 제2차 콩고 전쟁이다.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이 전쟁과 그 여파로 5백4십만 여명이 죽었다. 2003년부터 다르푸르 분쟁이 계속되어 인도주의적 재앙이 되었다. 에이즈도 해방 이후 아프리카의 심각한 문제거리이다. 아프리카의 현대 정치는 유럽 열강 주도의 16세기 노예 무역과 19세기 제국주의적 식민 통치, 그리고 1960년대 대거 독립 이후 경제·정치·문화상의 신식민주의적 행태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식민주의는 많은 수의 민족 그룹을 불안정하게 했으며 여전히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유럽이 아프리카에 영향을 미치기 전 국가 경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고 아프리카인들은 아라비아 등의 타 지역의 관례를 따라 그룹의 영토를 그 그룹의 군사적 또는 상업적 영향력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유럽 열강들은 1884년 이른바 ‘베를린 회의’에서 서유럽 식민국가들 간의 정치 흥정에 의해 명확한 경계선을 지어서 타 유럽 국가의 식민지와 구별하고자 했는데 이는 원래 이어져 있던 정치적 세력들을 나눠 버리거나 전통적 적들을 같이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콩고 강은 자연스러운 지리적 변경선 같아 보이지만 강의 양쪽에는 같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다른 여러 부분을 공유하는 무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벨기에와 프랑스가 강을 사이에 두고 영토를 분리하게 되자 이들 무리는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식민 통치 시기에 만들어진 국경을 이어받은 신생국들은 모두 유럽식 민족 국가와의 거리가 먼 다부족 국가들이다. 1960년대 초반 독립한 아프리카 각국은 국경의 테두리 안에서 부족간 통합을 이루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그 통합은 각 부족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정당 간의 경쟁과 균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느 한 부족의 정당ㆍ지도자가 배타적ㆍ독점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나이지리아의 한 고위 관리는 “아프리카 말에는 아예 ‘야당 지도자’라는 개념이 없다. 오직 정적(政敵)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에서 통치란 본질적으로 행정부가 주도하는 일당 독재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연합(AU)은 서사하라를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 국가로 구성된 국가 연합체이다. 아프리카 연합은 2001년 6월 26일 아디스 아바바에 본부를 두고 창설되었다. 2004년 7월에 아프리카 연합의 범아프리카 의회(PAP)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미드란드(Midrand)로 옮겼으나, 아프리카 인권 및 민권 이사회는 아디스 아바바에 남아있다. 아프리카 연합의 여러 기관을 분권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로 기관을 분산하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 이사회가 아닌) 아프리카 연합은 연합법에 따라 창설되어, 장차 연방체인 아프리카 경제 공동체로 변화하고 나아가 국제적인 대표 회의를 두는 일개 국가로 발전하고자 한다. 아프리카 연합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갖춘 의회제 정부로 국가 수반이자 범아프리카 의회 의장인 아프리카 연합의 대통령이 이끈다. 연합 대통령은 범아프리카 의회에서 과반수 득표를 얻어 선출된다. 아프리카 의회 의장의 권한과 권위는 연합법과 범아프리카 의회 의정서에 따르며, 이와 더불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사무총장이 범아프리카 의회에 부여하는 등 아프리카의 조약이나 국제 조약에 의거한다. 아프리카 연합 정부는 연합 전체, 지역, 국가, 지방 당국과 수백 개의 기관이 함께 날마다 연합내 사무를 맡는다. 아프리카의 기관과 국가 사이에 네트워크가 증대되고 있는 조짐이 분명히 보이고 있다. 빈곤하고 비아프리카 국가가 개입했던 콩고 민주 공화국(구 자이레) 내전에서 인접 아프리카 국가들이 개입하였다. (제2차 콩고 전쟁) 1998년에 전쟁이 시작하여 사망자 수가 5백만에 이르고 있다. 아프리카 연합과 같은 정치 연대 덕분에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협력과 평화가 증대될 희망이 생겼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있으며, 어떤 경우 국가가 감독하는 가운데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폭력은 내전의 부작용 등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 최근 심각한 인권 침해가 일어나는 나라로는 콩고 민주 공화국,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수단, 짐바브웨, 코트 디부아르 등이다. 아프리카에는 천연 자원이 풍부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저개발 지역으로,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질병과 바이러스(에이즈와 말라리아 등), 그리고 심각한 인권 침해를 자행하기도 하는 정부의 부패, 국가 계획의 실패, 높은 문맹률, 해외 자본의 부족, 빈번한 부족간 혹은 군사 충돌(게릴라전에서 학살에 이르기까지) 등이 있다. 국제 연합 2003년 인권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최하위 25개국(151위에서 175위까지)은 모두 아프리카 국가였다. 의료 부족과 더불어 빈곤, 문맹, 영양 실조, 부적절한 수도 공급과 위생으로 아프리카 사람들 상당수가 고통받고 있다. 2008년 8월에 세계 은행 에서는 하루 1.25$ 수입(이전의 기준은 하루 1.00$)을 새로운 국제 빈곤선으로 정하여 세계의 빈곤 수치를 개정하여 발표하였다. 2005년에 인도의 하루 수입이 2.50$(PPP) 이하였던 인구가 85.7%였는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의 경우 이 지역 인구 중 80.5%가 그에 해당하였다. 이 수치를 통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나라들이 세계에서 빈곤(하루 수입 1.25$)을 줄이는 데 가장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이곳 인구의 약 50%(2억 명)이 빈곤 상태였으며, 1996년 이 수치는 58%까지 올랐다가 2005년에 50%로 떨어졌다.(3억8천만 명)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평균적인 빈곤 인구는 하루 수입이 겨우 70센트 밖에 되지 않으며, 1973년 수치보다 2003년에 더 악화되어, 일부 지역에서 빈곤이 증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빈곤은 식민 지배와 냉전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곳의 경우 정부나 외국 회사가 주도한 경제 자유화 계획이 실패한 탓이기도 한데, 외부 요인보다는 국제 정부 정책의 문제를 드는 연구도 있다. 부분적으로 문제는 국제 지원금이 목화, 코코아와 커피 등 수출용 곡물을 재배하는 것에만 쓰이고 자립적 농업에는 투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또한 만성적인 자본 유출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로 유입되어 오는 자본은 곧바로 나가는데, 이는 수출 품목이 외국 소유이라서 (석유가 좋은 예이다.) 곧바로 외국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경우거나 또는 세계 은행이나 공업 국가에 융자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5년에서 2005년까지 아프리카의 경제성장률은 올라가서, 2005년에 평균 5%대이다. 앙골라, 수단, 적도 기니 등 일부 국가는 더 높은 성장률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 세 나라는 최근 석유 추출을 시작하거나, 석유 정제 용량을 늘렸다. 최근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은 점차 아프리카 국가와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2007년 중국 회사는 아프리카에 총 1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대략 아프리카인의 80%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 거주한다.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인들 사이에는 폭넓은 신체적 특성 차이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차이나는 것은 큰 키로 알려진 마사이족과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것으로 알려진 피그미인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신을 아프리카인이라 칭하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무게를 지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300년간의 식민 역사를 위시하여 자신들을 "아프리카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토지의 재 분배가 화제인 현대 남아공에서는 "아프리카인"이라는 명칭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와 일치한다. 한편 19세기 노예 무역의 대한 응답은 자신을 흑인또는 아프리카인 이라 부르는 것에 일정한 혜택을 가져다왔다. 최근 존 케리 미 대통령 후보의 부인이 자신을 아프리칸 아메리칸 이라고 칭한 것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프리카에는 유럽 백인의 식민 지배보다 더 긴 역사를 지닌 아랍계열 민족의 상업 교류와 사하라 북부의 이슬람 정복이 있다. 또한 인도와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수의 인도 혈통의 민족과 아랍 혈통의 민족을 아프리카에 정착시켰다. 아프리카에는 3천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하며, 이들 중 아프리카에서 파생된 언어들은 네 가지 어족으로 나뉜다. 유럽의 언어 또한 널리 사용된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강세를 이루며 타 국가의 공식 언어 (네덜란드어,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아프리칸스어, 러시아어) 또한 가끔 볼 수 있다. 아프리카는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여럿의 겹쳐지는 문화를 지닌다. 가장 많이 쓰이는 문화적 구분은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의 문화와 연계되는 이집트와 모로코 사이의 북부 국가들이다. 이러한 비교법에서 사하라 남쪽의 국가들은 다문화에 포함되는데 그중 영향력이 큰 반투어군을 들 수 있겠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와 나머지 영역, 특히 예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또한 문화적으로 경계를 지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프리카의 지역과 기본적으로 근대적인 지역이다. 전통주의자들은 가끔 목축주의자들과 농경주의자들로 나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예술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표출한다. 가장 오래된 것은 니제르에서 발견된 6,000년 된 석판이며, 이집트의 기자의 피라미드는 4,000년 후 에펠 탑이 세워질 때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에티오피아 라리벨라에 있는 단석 교회들 중 성 제롬의 교회는 공학적 신기로 평가된다. 아프리카의 음악은 아프리카의 가장 역동적인 예술 표현이다. 이집트는 오랫동안 아랍 세계의 문화적 집중점이었지만 사하라 남쪽의 아프리카 특히 서 아프리카의 리듬 전통은 대서양 노예 무역을 통해 근대의 블루스, 재즈, 레게와 로큰롤으로 전해졌다. 대륙의 근대 음악은 남부 아프리카의 놀라운 완성도의 합창 노래와 콩고 민주주의 공화국의 음악이 주도하는 수쿠의 춤 리듬등을 들 수 있다. 21세기의 최근 트렌드는 아프리카의 힙합의 발생이며 특히 세네갈에서 전통적 음발라와 섞인 형태를 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한다. 세계의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많은 형태의 조상 숭배와 애니미즘이 존재한다. 여러 신앙 구조들이 공유하는 바 중 하나는 영적 세계를 도움이 되는 것과 손해가 되는 것으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움이 되는 신령들은 자신의 계승자들을 돕는 조상의 영혼들과 공동체를 자연 재해나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강력한 영혼들을 들 수 있다. 아프리카의 종교는 크게 이슬람교·기독교·전통종교로 나뉜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아프리카로 전해져 지중해 연안지역으로 퍼졌다. 이슬람교가 사하라사막을 넘어 블랙아프리카까지 퍼지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무렵으로, 평화적인 포교활동과 지하드(聖戰),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블랙아프리카와의 교역활동에 힘입어 널리 전파되었다. 이슬람교의 블랙아프리카로의 확대과정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분할기에도 계속되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은 북부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며, 동부에서는 수단·소말리아·에티오피아, 그리고 케냐에서 탄자니아를 거쳐 모잠비크 북부에 이르는 연안부에도 띠모양으로 이슬람권이 형성되어 있다. 중앙아프리카에도 차드(인구의 50%)와 카메룬(20%) 등의 국가에 많은 이슬람교도가 있다.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의 총수는 1981년 1억 4,574만 명으로, 그 가운데 반수가 북아프리카, 1/4이 서아프리카, 나머지 1/4이 동부 및 중앙아프리카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 기독교는 1세기 이후 지중해 연안에서 북아프리카로 전래되었는데, 블랙아프리카에 전파된 시기는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이 지역 진출에 따른 것으로, 그 뒤 현재의 콩고나 앙골라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블랙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의 대대적인 포교활동이 시작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며,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식민지주의의 본격적 진출과 함께 포교활동도 절정에 달했다. 1981년의 통계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기독교인 수는 총 1억 3091만으로, 개신교가 약 6,978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약 4,802만, 정교회 및 기타가 약 1,310만 명이다. 그외 아프리카 기독교 교파로는 성공회, 아프리카 독립 기독교회(African Independence Christian Church)가 있다. 기독교의 분포지역은 대체로 이슬람교도의 분포지역에서 벗어난 블랙아프리카가 중심이다. 이 밖에 힌두교도가 약 138만을 헤아리나 분포지역은 인도계 사람이 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케냐 등 동아프리카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아프리카인들은 대부분이 애니미즘으로 분류되는 여러 가지 전통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사회의 근대화에 따라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경향도 보인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의 수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교통체계는 식민지시대에 식민국의 전략적 의도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광산·농업·임산자원의 개발·반출에 적합하도록 정비되었다. 각국의 식민지정부는 개별적으로 자국 식민지에 철도망을 건설하였으나, 이웃 여러 나라와의 연관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는 화물수송을 위주로 하며 현재에도 총수송량의 약 3/4은 수출용 화물이다. 아프리카의 철도 총연장은 약 7만5,000km 로 약 30%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철도수입의 절반 이상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외 지역의 철도는 각 영역마다 궤도가 다르고 정합성(整合性)이나 제휴성이 약했지만, 독립 뒤에는 일부 지역에서 기존 노선의 연장과 새로운 노선이 건설되었다. 특히 내륙국인 잠비아와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을 연결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는 중국의 원조와 기술협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편, 철도와 수운(水運)의 이용이 한정된 아프리카에서는 도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산품의 집하·운송과 소비물자 및 승객의 수송에 편리한 소형트럭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도로포장률이 낮고 도로의 유지·보수 등이 완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UN의 아프리카경제위원회는 몸바사와 라고스를 잇는 사하라횡단고속도로와 서아프리카의 라고스에서 다카르를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도시간(間)의 교통은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으나, 지역간 운반 교통으로는 북부지방에서는 낙타, 중부지방에서는 흑인, 남부에서는 소를 많이 이용한다. 도로망의 발달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치적·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으며, 경제 산업상의 목적은 그 다음이었다. 따라서 독립이 된 지금은 도로가 크게 부족하다. 수운(水運)은 콩고 강, 나일 강, 니제르 강, 잠베지 강 등이 하천 교통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안지방의 도시인들은 국제적인 무역항이 많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지름길 역할을 한다. 북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아시아 아시아(, : 亞細亞 아세아) 또는 아주(亞洲)는 지구에서 가장 넓고 인구가 많은 대륙으로, 면적은 44,579,000km²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수에즈 운하를 경계로 만난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는 다르다넬스 해협,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 흑해, 코카서스, 카스피해, 우랄강 (혹은 엠바강), 그리고 우랄산맥과 노바야제믈랴 제도까지를 경계로 한다. 세계 인구 전체의 60% 정도가 아시아에 거주한다. 아시아의 지역은 대륙과 인도양 및 태평양의 인접 군도를 포함한다. "아시아"("Asia")라는 말은 그리스어 "Ἀσία"에서 나왔으며, 기원전 440년경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와 이집트에 대비되는 지역 개념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가리키거나 혹은 아나톨리아 지방을 뜻하는 말로 '아시아'를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논평하기를, 거대한 세 땅덩어리에 왜 여성 이름(에우로페,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지칭하는 리비아)이 쓰이는지 의아스럽다면서, 그리스인 대부분은 아시아라는 이름이 프로메테우스의 부인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나, 리디아 사람들은 이 이름이 사르데이스의 한 부족 이름에서 나온 코티스(Cotys)의 아들 이름인 아시아스(Asias)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노라고 썼다. 헤로도토스 이전에도 호메로스는 트로이아의 동맹인 아시오스(Asios)와 그가 어느 늪을 묘사할 때 쓴 아시오스(ασιο?, 일리아스 2, 461)를 알고 있었다. 이 그리스어 낱말은 아마도 기원전 14세기에 서부 아나톨리아에 있던 연합 국가 앗수와(Assuwa)에서 나온 듯 하다. 히타이트말로 "앗수-"("assu-", "좋은")가 이 명칭의 일부일 것이다. 이 외에도 아카드어로 "밖에 나가다" 또는 "올라가다"라는 뜻으로 중동에서 해가 뜨는 방향을 일컫는 "(w)aṣû(m)"에서 "아시아" 이름이 나왔으며, "동쪽"을 뜻하는 페니키아어 "asa"와 아마 관련이 있다고도 하기도 한다. 이 말은 아카드어로 "들어가다" 또는 "(해가) 뜨다"라는 뜻의 "erēbu(m)"가 지명 '유럽("Europe")'의 어원이 되었다는 비슷한 류의 설명과 대비된다. 그러나 이런 어원 설명은 의심스러운데, "아시아"란 말이 처음에는 셈어권의 서쪽에 있는 아나톨리아와 연관된 말인데, 흑해와 지중해 사이 해협을 항해하는 페니키아인 선원의 입장이 아닌 이상 이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는 수에즈 지협과 홍해를 기준으로 하며, 아시아와 유럽 사이는 관습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 마르마라해, 보스포루스 해협, 흑해, 캅카스산맥, 카스피해, 우랄강, 우랄산맥에서 카라해를 경계로 삼는다. 이렇게듯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을 구분한다. 이것은 특히 아시아의 경우에 그러한데, 이 기준으로 보자면 아시아 대륙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처럼 서로 다른 땅덩어리로 볼 수 있는 여러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아시아의 북동부에 있는 시베리아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북아메리카와 떨어져 있다. 아시아 대륙 남쪽에는 인도양(서쪽에서 동쪽으로 아덴만, 아라비아해, 벵골만)이 있고, 동쪽에는 태평양(반시계방향으로 남중국해, 동중국해, 황해,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이 있으며, 북쪽은 북극해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오세아니아)는 이 대륙의 남동쪽에 있다. 어떤 지리학자는 아시아와 유럽을 별개의 대륙으로 보지 않는데,"Asia." "Encarta|MSN Encarta Encyclopedia". 2007. 북아시아 북아시아()는 아시아의 북부 지역이다. 북아시아는 주로 러시아의 아시아 부분인 시베리아 전체를 포함한다. 통상적으로 동북아시아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을 말하며 일부 정의에 따르면 시베리아 전체가 북아시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넓게는 몽골도 포함된다. 북아시아는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냉대 기후와 한대 기후 지역이기 때문에 인구분포가 미미한 편이다. 민족으로는 러시아인이 많지만 퉁구스계, 투르크계, 우랄계 유목민족이나 수렵민족들이 살기도 한다.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아시아의 핵심 지역 중 하나로, 서쪽으로 카스피해부터 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까지, 북쪽으로는 러시아부터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이다. 스탄이 붙는 여러 국가들이 이곳에 산재해 있는데,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의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넓은 범위로 보았을 때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로 포함된다. 현대적 의미에서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5개 공화국을 지칭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중앙아시아에 포함되는 국가로 인구는 2013년에서 2014년 사이의 기준으로 약 6,600만 명이다. 인구가 3110만 명인 아프가니스탄도 중앙아시아에 가끔 포함된다. 이는 지정학적 범주에서 본 중앙아시아로 유네스코에서 정의한 중앙아시아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 중앙아시아의 정확한 범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는데 어느 것이 분명한 것인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경계에 대한 명확한 범위가 없음에도 이 지역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나를 예로 들자면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비단길과 유목민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서 사람, 물자, 그리고 문화의 이동로 역할을 해왔다. 구분된 지역으로서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생각은 1843년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처음 도입했다. 중앙아시아의 국경은 여러 정의들에 따라 나누어진다. 정치적인 지리학과 지리문화학을 통해 역사적으로 2개의 중요한 한도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정의에 관한 학구적인 문학들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가장 제한적인 정의는 소련의 공식적인 것으로, 중앙아시아를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 중앙아시아의 구성국으로 보고 있다. 이 정의는 이 시기 소련 외부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문화는 2개의 구별되는 용어를 가지고 있다. "Средняя Азия" ("Srednyaya Aziya" 또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는 더 제한된 정의로 전통적으로 슬라브족이 거주하지 않는 중앙아시아의 영토로 역사적인 러시아의 국경 지대에 합병된 지역을 일컫지만, "Центральная Азия" ("Tsentralnaya Aziya" 또는 "중앙아시아")는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정의로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토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중앙아시아 영토를 포함한다. 독립 이후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지도자 4명이 타슈겐트에 만나 중앙아시아의 정의에 소련이 포함한 4개국 외에도 카자흐스탄을 포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가 되었다. 1992년 출판된 유네스코 "중앙아시아 문명의 역사"는 중앙아시아를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이란, 파키스탄, 북인도, 중국 서부, 몽골과 옛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라고 정의내렸다. 대안은 중앙아시아를 민족성으로 분류하는 것이며 특히 동부 투르크족과 동부 이란인, 몽골인이 집중된 지역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 지역들에는 남부 시베리아의 터키인 지역과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5개국, 아프간 투르케스탄, 카슈미르 분지, 신장위구르 자치구를 포함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체와 파키스탄 북부 및 서부 지역도 이 지역에 포함될 수 있다. 티베트와 라다크인 거주 지역도 포함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언급한 모든 민족은 넓은 지역의 원주민으로 분류될 수 있다. 아시아의 중심이라 주장되는 몇몇 지역이 있다. 러시아 연방 내에 위치한 투바의 수도인 키질이나 신장 지역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지역이 대표적인 예시다. 다니엘 파입스는 중앙아시아를 중동과 종교가 같은 아제르바이잔을 포함시켜 6개국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중앙아시아를 신중동이라는 용어로 새롭게 정의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는 다양한 지리가 있는 매우 넓은 지역이다. 높은 고개와 톈산 산맥과 같은 험준한 산맥, 타클라마칸 사막, 키질쿰 사막과 같은 넓은 사막, 그리고 특히 나무가 없고 풀이 많은 스텝이 중앙아시아의 지리에 포함되어 있다. 중앙아시아의 넓은 스텝 지역은 동유럽의 스텝 지역과 동일한 지리학적 지역으로 분류되며, 두 지역을 합쳐 유라시아 스텝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농경을 하기 위해 매우 건조하거나 바위가 많다. 고비 사막은 파미르 고원의 입구인 동경 77°에서 다싱안링 산맥이 있는 동경 116°–118°까지 뻗어있다. 중앙아시아는 아래와 같은 지리학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대부분 이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가축을 키우며 생계를 유지한다. 산업화는 지역의 주요 도시에 자리잡고 있다. 아무다리야 강, 시르다리야 강, 이르티시 강, 하리 강, 무르가브 강과 같은 주요 강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카스피 해를 포함하는 서부 및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거대한 내륙유역의 일부인 아랄 해와 발하시 호가 주요 수자원 공급원이다. 산업적 목적과 개간 산업을 통한 강의 분산으로 아랄 해와 발하시 호 모두 수량이 줄고 있다. 수자원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희귀한 자원이며, 이것은 국제적 분쟁을 야기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는 시베리아의 숲들을 북쪽 경계로 삼고 있다. 중앙아시아, 그 중 카자흐스탄의 북반 지역은 유라시아 스텝의 중앙부에 해당한다. 서쪽으로 카자흐 스텝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스텝과 합쳐지며 동쪽으로는 준가르와 몽골의 스텝, 그리고 사막과 연결된다. 남쪽으로 갈 수록 땅은 점차 건조해지고 유목 인구가 점차 줄어든다. 남쪽의 인구밀집지역과 도시들은 관개가 가능한 지역이다. 주요 관계 지역은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을 따라서 있거나 동부 산맥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이란 국경지역인 코페트다그 산맥 북쪽에도 밀집되어 있다. 코페트다그 산맥 동쪽은 메르브의 중요한 오아시스들이 있으며 헤라트나 발흐와 같은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한 몇몇 도시들이 있다. 톈산 산맥의 2개의 돌출부가 동쪽 산맥들에 3개의 만입부를 형성한다. 북쪽의 가장 큰 만입부가 카자흐스탄 동부로 전통적으로 제추 또는 세미르체예로 불렸는데, 이 지역은 발하시 호를 구성한다. 중앙에는 작지만 인구가 밀집된 페르가나 분지가 위치해 있다. 남쪽이 박트리아로 이후 토차리스탄이라 불리게 되며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 산맥과 접하고 있다. 페르가나 계곡에서 시르다리야 강이 발원하며 박트리아에서 아무다리야 강이 발원한다. 두 강 모두 북서쪽 방향으로 흐르며 아랄 해로 유입된다. 옥수스 강이 아랄 해와 만나는 지점에서 거대한 삼각주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화레즘 지역으로 히바 칸국이 이 지역에 자리잡았다. 옥수스 강 북쪽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와 같은 교역도시들에게 수자원을 제공하는 제라프샨 강이 흐르고 있다. 다른 거대 상업도시에는 페르가나 분지 입구에 위치한 타슈켄트가 있다. 옥수스 강 북쪽은 트란스옥시아나 또는 소그디아나라고 부르는데, 소그디아는 비단길을 장악한 소그드인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키질쿰 사막과 준사막이 옥수스 강과 시르다리야 강 사이에 있으며 카라쿰 사막이 옥수스 강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코페트다그 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호라산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를 의미하며, 메르구는 메르브 인근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우스튜르트 고원이 아랄 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코페트다그 산맥을 가로질러 남쪽에 페르시아, 즉 이란이 위치하고 있다. 유목 아리아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여 2,500년전에는 페르시아의 문화권이었고 그리스 문화를 지나서 유목 동부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서쪽과 동쪽 주위의 많은 유목민족들의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튀르크계인 흉노가 발흥하였고 7세기부터는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7세기부터는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하여 거주하고 있던 튀르크계 유목민족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여 중앙아시아에서는 튀르크인들이 주도한 이슬람 문명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티무르 왕조가 멸망하고 17세기 중반부터 러시아와 외교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따라 19세기 중반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은 러시아에 영향을 받았고 20세기 초 소련에 합병되었다. 선사 시대부터 중앙아시아는 여러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슬람 문화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비단길로 인해 인도, 동아시아, 유럽이 서로 연결되었다. 교차로에 위치한 여러 지역은 부족주의, 전통주의, 근대화 사이의 분쟁을 증폭시켰다. 이슬람 종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중앙아시아는 동부 이란어를 사용하는 아리아계 인종들인 박트리아인, 유목민인 소그드인, 호라스미안인 등이 거주하고 있었고, 유목민인 스키타이족과 반유목민의 파르티아인도 이 지역에서 거주했다. 중앙아시아의 아리아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위의 여러 유목민족들에게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스키타이족들이 주위 많은 유목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 등이 있다. 튀르크족이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하고 나서 중앙아시아 또한 수많은 튀르크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과 튀르크 문명이 대표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대표적인 예로 카자흐인, 우즈베크인, 투르크멘인, 키르기스인, 위구르족 등이 있으며 다른 튀르크계 국가의 주민들도 포함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앙아시아는 때때로 투르키스탄이라 불리기도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에 편입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일 때에는 소련 공산주의로 인해 공산주의식 농장들과 군사 기지들도 존재하였다 . 소련의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은 독립 초기의 극도로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3자리 수 이상의 인플레이션, 민족 갈등, 국경선 문제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시장 경제에 합류했다. 타지키스탄의 내전은 종식되었으며 풍부한 자원과 경제 건설의 이점으로 이란, 터키, 미국, 러시아의 경제 외교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자흐스탄은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 대외경제협력의 확대를 통한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외교 정책을 구사하여 많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중앙아시아 중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우즈베키스탄은 2001년 4월 북한의 경수로 건설에 자국의 인력을 투입하는 등 다른 국가와의 경제적 협력을 발전시켰다. 대우의 자동차조립공장과 같은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진출해있기도 하며 소련 연방에 속해있을 때에는 천연자원과 전략적 광물의 공급지와 완제품 판매시장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동아시아 동아시아(, , ) 또는 동북아시아(, )는 아시아의 동부 지역을 지칭하는 지리적, 문화적 명칭이다. 총 면적은 11,839,074km²로 전체 대륙의 15%를 차지한다. 동아시아에는 다음의 국가 또는 지역이 있다.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의 고속국도 제1호선인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4,000km에 달하는 31개의 고속도로 등의 도로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3,000km의 철도 및 광역전철, 지하철 등이 있다. 도로에 비해서는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다. 서울특별시 등 수도권의 광역전철망이 가장 광대하며, 그 외에도 광역시에는 지하철이 설치, 운행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노선의 복구작업과 새로운 철도노선 건설에 대한 계획이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1957년 이후로는 중국·소련 기술진의 협력에 의하여 소련·몽골·베트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과의 국제선 건설도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울란우데-울란바토르-알렌을 잇는 지닝()철도가 몽골과 러시아·중국을 연결해서 관통하고 있는 외에 초이발산 철도가 시베리아 철도와 접속되어 있다. 또한 쿤밍 ~ 하노이 사이 등 베트남에 이르는 노선은 베트남 전쟁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한에서는 1961년부터의 7개년계획으로 철도노선의 신설, 광궤화(廣軌化), 전화(電化), 디젤화가 진행되었으나, 아직도 수송력 부족현상은 해소되지 않아 계속적으로 철도 노선 증강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러시아 양국과의 국제선은 조중국경철도연합위원회(朝中國境鐵道聯合委員會)·조소국경철도협동위원회 관리하에 운영되고 있다. 근대적 육상 교통의 발달이 뒤진 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상 교통이 하는 역할이 크다. 하천은 예로부터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고 경제적 동맥이 되어 왔으며, 특히 창 강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부터 중국에서 남선북마(南船北馬)라 일컬은 것은 창 강 수계가 차지하는 경제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수나라 때부터 화중의 농산물을 화북으로 운송할 목적으로 건설된 대운하는 현재 국부적으로 이용될 뿐, 남북간의 물자 수송은 경한선·진포선 등의 철도로 하고 있다. 당나라의 문화가 이웃 나라에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당나라가 이웃 나라에 전파한 문화는 한자와 유교, 율령과 불교, 도교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공통 요소는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에는 한강, 낙동강, 압록강, 두만강, 영산강, 황하강, 쑹화강, 랴오허강, 양쯔강 등의 강이 있다. 산맥은 소싱안링산맥, 대싱안링산맥, 칭바이산맥, 태백산맥 등의 산맥이 있으며, 호수는 둥팅, 판양, 차오후, 석촌호수, 대청호 등이 있다. 주로 온대성 기후를 띠며 러시아의 극동지방은 한대성 기후가 주로 나타난다. 베트남,필리핀 등의 지역은 열대성 고온다습 기후가 나타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어를 쓰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어와 여러 소수민족의 언어(만주어, 좡어, 회어 등)를 쓰며, 홍콩과 마카오, 광동성 지방에서는 영어, 포르투갈어, 광동어 등을, 둥베이 지방에서는 한국어를 함께 쓴다. 일본은 일본어를 쓰며, 베트남은 베트남어, 필리핀은 타갈로그어, 영어, 스페인어등을 사용한다. 러시아의 극동지방에서는 러시아어와 여러 소수민족들의 언어가 쓰인다. 중화민국에서는 중국어, 타이완어, 객가어를 주로 사용한다. 몽골에서는 몽골어 등을 사용한다. 남아시아 남아시아() 또는 남부아시아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부탄, 몰디브,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아시아의 한 지역이다. 4,480,000 km²혹은 대륙 전체의 10% 면적을 차지하며, 인도 아대륙으로도 불린다. 네팔을 제외한 모든 남아시아 국가들은 과거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가 1947년에서 1965년 사이에 독립했다. 높은 서비스업 비중은 남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으로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파키스탄 모두 GDP에서 차지하는 서비스업의 비중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 등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서비스업 비중이 높다. 이들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으며 공식 기업 부문에 속하지 않는 개인의 소매업, 자영업 등에 의한 비공식 부문이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수요편향가설(demand bias hypothesis)과 생산성편향가설(productivity bias hypothesis)이 있는데, 수요편향가설은 소득이 증가할수록 상품 수요보다는 서비스 수요가 더 빨리 증가하여 산업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바뀐다는 가설인데 이들 국가들은 제조업이 산업구조에서 우위를 차지한 적이 없으므로 적용이 곤란하다. 생산성편향가설은 생산성이 단절적으로 증가하는 서비스업이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제조업과 달리 제조업 부문 생산과 생산성을 부합시키기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게 되고 결국 제조업보다 생산성은 뒤떨어지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카라치에서 인더스강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라호르·라왈핀디를 거쳐 페샤와르를 지나 카이버 고개에 이르는 옛 실크로드가 간선도로이다. 방글라데시는 대중교통수단으로 릭샤가 있고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2인용 베이비 택시와 10인용 템포는 공해의 주범이다. 네팔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언덕과 산이 많은 북부 지역에서는 도로나 다른 기반시설을 만드는 것이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 2003년 기준, 포장도로는 8500km이었다. 인도에서 네팔의 카트만두 계곡으로 가는 믿을 만한 도로는 단지 1개 뿐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3개국에 나뉘어 있다. 이것은 영국령시대에 부설된 것들이다. 1849년에 동인철도회사가 설립되었고, 53년에는 최초의 철도가 봄베이 타나 사이에서 개통되었다. 인도에는 철도부의 관할하에 8개의 철도가 있고, 각각 중부·동부·북부·동북부·동북국경·남부·동남부·서부의 8개 지구를 달리고 있다. 현재 철도의 총연장은 약 6만 km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철도교통은 항상 혼잡하다. 방글라데시쪽의 철도는 태반이 1,000mm 게이지인 데 비해 파키스탄의 철도는 주로 1,676mm 게이지이다. 1960년 이후 계속적으로 전화(電化)보다는 디젤기관차를 채용하는 움직임이 강하다. 파키스탄의 철도는 간선도로와 같은 방향으로 건설된 노선의 교통량이 가장 많다. 네팔의 철도는 남부에 있는 59km짜리 한 개가 유일하다.(2003년) 인도에서 카트만두 계곡으로 가는 믿을 만한 도로는 단지 1개 뿐이다. 인도는 갠지스강, 브라마푸트라강, 인더스강 등의 대하천을 이용한 하천 교통이 있는데 상당히 먼 내륙지방까지 기선의 항행이 가능하다. 방글라데시도 수로가 중요 교통로이며, 약 7,240km 정도에 이른다.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데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기적으로 다닌다. 인도는 콜카타, 첸나이, 뭄바이 등의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네팔에는 48개의 공항이 있으며 그중 10개는 포장된 활주로가 있다. 서아시아 서아시아() 혹은 서남아시아()는 아시아의 남서쪽 부분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모두 접하는 길목이다. 흔히 중동의 일부로 분류된다. 지형적으로 북부와 남부에 고원을 이룬 곳이 많으며, 그 사이에 메소파타미아의 평야, 혹은 해안의 저지가 있다. 기온은 건조하며, 이라크의 7월 평균 온도는 약 36도나 되며, 아라비아의 사막 지역은 그보다 더 덥다. 하지만, 겨울엔 온도가 비교적 낮아 고산지역 같은 곳에선 적설을 볼 수 있다. 강수량은 이라크로 따지면 연 140mm,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사람이 사는 지역은 보통 강, 혹은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매우 중요했다. 서아시아 지역 대부분은 건조지역이라 오랫동안 유목이 발달했으나, 지금은 국경이 생겨 나라를 옮겨다니기 힘들어 유목민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오아시스나 하천이 있는 데는 농업이 발달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건조 지역에 인공 수로로 물을 올려와 농사를 짓는다. 아라비아 사막은 석유가 많이 나 1980년대에는 이스라엘을 고립시키기 위해 석유 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 석유가 가장 많이 나며, 그 주변 국가도 석유 수출국 10위 내에 든다. 서아시아는 지리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 있어 과거에 침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 바빌론 같은 거대한 제국은 서아시아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아시아는 역사가 매우 복잡하다. 서아시아는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국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제외하곤 공용어가 아랍어다. (이스라엘은 히브리어와 아랍어 둘 다 사용) 하지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동성지다. 유대교는 통곡의 벽이, 기독교는 성묘 교회, 이슬람교는 바위 돔 사원(우마르 사원)이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와 메디나는 이슬람 3대 성지라 예루살렘 바위 돔 사원과 같이 매년 수많은 아랍인이 순례를 다녀온다. 지형은 대부분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표적인 사막은 룹알할리 사막이 있다. 강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등의 강이 있고 산맥은 술라이만 산맥, 코페트 산맥 등이 있다. 기후는 주로 건조기후이며 지중해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를 띤다. 대부분의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50mm이하이며 메소포타미아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근처에는 약 250mm~700mm가 이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이다.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 )는 아시아의 세부 지역 중 하나이다. 판의 경계에 있으며(일본 포함) 지진과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동남아시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과거 일본도 동남아시아로 분류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는 다음과 같은 국가와 지역을 말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대국가는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뜻한다. 참고 : 말레이시아의 영토는 보르네오 섬과 인도차이나반도(말레이반도)에 속해 있어 애매한 점이 있다. 수도는 인도차이나반도(말레이반도)에 위치해 있다. 뉴기니섬의 서쪽 부분인 이리안자야는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오세아니아에 속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때로는 파푸아뉴기니도 동남아시아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동티모르를 제외한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을 구성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대륙 본토와 보르네오섬으로 나뉘어 있으나, 말레이 제도의 일부로 본다. 면적으로는 약 4,000,000 km² 가량이며, 2004년 현재 약 5억 9천만명으로 세계인구의 12분의 1정도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 1/6 이상인 1억 1천만명이 인도네시아의 자와섬에 거주하고 있다. 약 2천 8백만 명의 화교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의 주요 종교는 불교이다. 태국,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싱가포르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교를 믿고 있다. 말레이 제도의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즉 도서 지역에는 이슬람교가 널리 퍼져 있다. 필리핀과 동티모르는 유럽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를 거쳤기에 기독교가 우세하다. 태국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서구문명에 많이 물들어 있어 화려함이 돋보인다. 따라서 이름있는 관광지라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고 퇴폐 문화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에 비해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 특유의 엄격함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관광지의 시설들은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지만 타이처럼 화려한 엔터테인먼트나 퇴폐 문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해변휴양지에는 건전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 이외에 화려한 쇼 같은 공연 장소 등을 찾기가 힘들다. 싱가포르도 말레이시아처럼 엄격하기는 하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는 타이 이상으로 화려해 타이와 말레이시아를 복합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지역에서는 축구가 인기를 끌고 있으나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필리핀만은 농구가 인기를 끌고 있다. 말레이 제도(말레이시아, 인니, 필리핀 등)에서는 마인어, 필리핀어 등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주로 쓰이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따이까다이어족(태국어, 라오스어 등), 오스트로아시아어족(베트남어, 크메르어 등)이 쓰이는 등 풍부한 언어적 다양성의 지역이다. 한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베트남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어는 남아시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아, 수많은 범어 어휘를 공유한다. 말레이 제도의 남도어족 제어는 모두 로마자로 표기하며, 인도차이나 제어는 로마자로 표기되는 베트남어를 제외하면 거의 인도 아대륙에서 기원한 아부기다 계열의 독자적 문자를 이용한다. 유럽의 식민제국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은 결과로, 영어, 프랑스어 등의 언어가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 쓰이고 있으며, 화교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기에, 표준중국어를 비롯한 광동어, 민남어, 객가어 등의 중국어 방언 역시 화교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쓰인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 수단은 항공편이다. 섬 나라가 많은데다 열대우림 등으로 뒤덮인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섬나라 현지 서민들은 값싼 배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나 배는 시간이 많이 걸려 여행자들이 이용할 만한 교통 수단은 아니다. 특히 대륙에 붙어 있는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등 일부 국가를 이동할 때는 철도나 도로 등을 이용할 수 있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이완 등 섬나라로 이동할 때는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인도네시아는 국영기업인 가루다 인도네시아가 국내선과 국제선을 운영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다카에 국제공항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자바에는 포장도로망이 발달해 있으나 그 밖의 섬에서는 도로가 미개발상태에 있다. 필리핀은 루손을 중심으로 자동차 도로가 발달해 있다. 1893년에 시작된 태국의 철도는 그 뒤 국유화되어 타이국철이 운영하고 있다. 주요한 노선은 방콕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즉 치앙마이에 이르는 북선(北線), 코라토를 거쳐 농카이 또는 우봉에 이르는 동북선(東北線), 아란야부라테이트를 지나 캄보디아 국유철도에 접속하는 동선(東線), 하자이를 거쳐 말라야 철도에 통하는 남선(南線) 등 4개 노선이다. 1965년 무렵부터 디젤화가 추진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철도가 자바와 수마트라의 일부 지방에 부설되어 있다. 여러 가지 궤간(軌間)의 철도가 있는데, 3/4은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에 부설되어 있다. 베트남에는 하노이에서 호치민 시(옛 사이공)까지 해안선을 남하하는 철도가 있는데, 프랑스와 싸운 인도차이나 전쟁과 이어진 베트남·미국 등과의 베트남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특히 베트남 남부의 피해가 커서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통일 후인 1976년에는 30년 만에 개통하였다. 베트남전쟁중 북베트남 최대항구인 하이퐁과 수도 하노이를 연결하는 철도는 큰 역할을 하였다. 캄보디아에는 수도 프놈펜으로부터 서쪽으로 보이베트(타이 국경)에 이르는 노선과 남쪽으로 콤퐁솜 만(灣)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 있는데 모두 단선이다. 필리핀에도 루손 섬, 파나이 섬에서 철도가 경영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열차 여행은 문명의 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미와 원주민들의 순박함과 친절함, 싼 물가, 이국적인 남국의 독특한 풍물 등 멋진 정취를 가져다 준다. 1993년에는 세계적인 철도회사가 이스턴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호화 유람 열차를 싱가포르-쿠알라룸푸르-방콕 노선에서 운항하기 시작하였다. 미얀마는 하천수운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서 이라와디강()이 교통의 대동맥이 되고 있어, 하구에서 1,500km 떨어진 바모까지 기선이 통행하고 있다. 시탕강(), 살윈강도 교통에 이용되고 있다. 많은 섬으로 된 국가인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에서는 해운(海運)이 극히 중요하다. 인도네시아는 전전(戰前)에는 네덜란드의 업체가 연안항로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으나, 1957년에 이러한 권익은 모두 인도네시아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국제 교통 허브이다. 많은 항공 및 해운 노선이 이곳을 지난다. 싱가포르 항()은 PSA 인터내셔널()과 주롱 포트()에 의해 운영되는데, 취급 선적 톤수 기준으로 세계 2위(2005년)인 총중량 11.5억톤,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2,320만 TEU를 기록했다. 필리핀도 선박 통행으로 국토가 이어지게 되었다. 미얀마는 대외무역이 주로 양곤 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태평양 태평양(太平洋, Pacific Ocean)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양이다. 지구 표면의 1/3을 차지하며, 표면적은 1억 8천만km²이다. 이는 지구상의 모든 대륙을 합친 것보다 넓다. 북극권의 베링 해부터 남극 대륙의 로스 해까지 뻗어 있으며, 인도네시아부터 콜롬비아까지 동서로 뻗어 있다. 태평양의 서쪽 극은 믈라카 해협이다. 적도를 기준으로 북쪽을 북태평양, 남쪽을 남태평양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이라는 이름은 라틴어 “"Mare Pacificum"”(평화로운 바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이름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험난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잔잔한 바다에 감동하여 지었다고 한다. 실제 태평양은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과 같은 열대 저기압이 그치지 않는 험난한 바다이다. 태평양과 다른 바다의 경계는 다른 바다들과 겹쳐 있는데, 남중국해, 동중국해, 동해, 반다 해, 베링 해, 술라웨시 해, 술루 해, 코랄 해, 태즈먼 해, 황해 등의 부속해가 있다. 믈라카 해협은 태평양과 서쪽의 인도양을 이어주며, 마젤란 해협은 태평양과 동쪽의 대서양을 이어준다. 태평양과 대서양은 파나마 운하로도 연결된다. 태평양에는 2만 5천개 정도의 섬이 있으며 이는 지구의 다른 모든 대양의 섬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이다. 이 섬들의 대부분은 적도 남쪽에 위치해 있다. 태평양에서 가장 큰 섬은 뉴기니 섬이다.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을 환태평양 국가라고 하며 이들중 많은 국가가 경제 협력체인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에 가입되어 있다. 태평양에는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큰 쓰레기 섬이 여럿 있다. 인류가 버린 쓰레기가 해류를 타고 모여서 만들어진 섬인데, 해양오염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이를 먹이로 알고 섭취하는 어류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이를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라고 한다. 메구로구 메구로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메구로에는 15개국의 대사관과 총영사가 있다. 도쿄 최고의 상류층 거주 지역 중 하나인 가키노키자카가 메구로에 위치해있다. 히가시야마 패총에는 구석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메구로’라는 이름은 오색부동 중 하나인 목흑부동()에서 온 것이다. 메구로 구는 1932년에 성립되었다. 메구로 구는 네 개의 다른 구들에 둘러싸여있다. 북동쪽으로 시부야 구, 서쪽으로 세타가야 구, 남쪽으로 오타 구, 남동쪽으로 시나가와 구와 접한다. 고립어 (비교언어학) 고립어(孤立語, language isolate), 또는 고립된 언어는 비교 언어학에서 친연관계로 밝혀진 언어가 없이 홀로 분포하는 언어를 뜻한다. 고립어라는 가설이 제창되었을 때 이것을 고립어족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많은 논의가 있다. 고립어의 경우 사멸되어서 기록이 부족한 경우가 많고 현재 사용자 인구도 다른 어족과 비교하여 극히 소수이다. 바스크어·아이누어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는 설도 있다. 친족 관계에 있던 언어들이 일찍이 사멸되면서 남은 언어가 고립어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니세이어족의 마지막 생존 언어인 케트어가 그 예이다. 반면 바스크어 등의 언어는 문헌 기록이 있었을 때부터 이미 고립된 언어였던 경우이다. 이 밖에도 넓은 의미로 사어(死語)라도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불분명하거나 증명되지 않았을 때는 고립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어·엘람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문법적 특징에 따른 구분인 '고립어'(isolating language)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역사언어학에 따르면 현재 쓰이는 거의 모든 언어는 공통된 몇몇 조어(祖語)에서 갈라져나왔으므로 그 조어에 따라 몇 개의 어족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어는 다른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과 공통의 조어(인도유럽조어)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므로 친족 관계이며 중국어는 중국티베트어족와 친족 관계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고립어는 저마다 홀로 한 어족을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립어들의 계통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과거부터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스크어는 남카프카스어족 등 현존하는 어족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수메르어 등 지금은 사멸한 어족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는데 계통적 연관성을 증명할 납득할 만한 결과는 나온 바 없다. 고립어라는 개념은 그 언중이 고립되었다는 뜻과는 전혀 다르다. 이스터 섬의 라파누이어의 경우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만 고립어가 아니며, 마다가스카르의 마다가스카르어도 동남아시아 지역의 몇몇 언어들과 친족 관계이다. 일본어는 분파된 언어로 류큐어가 있으며 이들은 고대부터 갈라져 상호의사소통성이 매우 낮아 서로 별개의 어파로 여겨진다. 이러한 경우 언어 계통이 일본열도에 한하여 고립되어 있음에도 충분한 다양성으로 인해 하나의 일본어족이 성립하는 것이다. 한국어의 경우 고립어로 볼 경우 화자 수가 가장 많으나, 내륙 한국어와 차이가 큰 제주어를 별개 언어로 보아 현대 한국어족이 성립한다고 보기도 한다. 다음은 고립어로 알려진 언어 목록이다. 몇몇 수화들은 다른 수화들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니카라과 수화가 있다.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약칭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나라이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수도는 카라카스이다. 북쪽으로 대서양과 카리브 해를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가이아나, 남쪽으로 브라질, 서쪽으로 콜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스페인어로 '작은 베네치아'라는 뜻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메스티소이며, 흑인, 백인이 소수로 거주하고 있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를 표명하는 나라이기도 하며, 대통령 중 일부는 장기 집권을 하였기도 하였다. "베네수엘라"란 이름은 북서 해안의 베네수엘라 만을 항해한 1499년의 해군 탐사대를 알론소 데 오헤다와 함께 이끌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과히라 반도에 이르자, 선원들은 물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팔라피토"palafito")을 보게 되었다. 이를 본 베스푸치는 이탈리아 도시 베네치아를 떠올려 이 땅을 이탈리아어로 "작은 베네치아"를 뜻하는 "Venezuola"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이것이 에스파냐어로 바뀌어 같은 뜻의 "Venezuela"가 되었다. 베스푸치와 오헤다 탐사대의 선원이었던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그의 책 "Summa de Geografia"에서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Veneciuela"라고 불렀다고 썼다. 즉 "베네수엘라"란 이름이 토착어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베네수엘라의 기원을 설명할때 널리 회자된다. 베네수엘라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1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잎사귀 모양의 도구와 찍개, 평평하고 둥근 긁개 등의 도구가 베네수엘라 서부의 강변(Rio Pedregal) 높은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후기 구석기의 화살촉을 포함한 사냥 도구가 베네수엘라 북서부(El Jobo)의 일련의 사이트에서 발견되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이들 유적은 기원전 13,000 ~ 7,000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16세기에 스페인의 베네수엘라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자, 토착민들은 조직적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구아이카이푸로(Guaicaipuro), 타마나코(Tamanaco) 같은 원주민들의 지도자들은 스페인의 습격에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정복되었다. 타마나코는 카라카스의 설립자 디에고 드 로사다(Diego de Losada)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522년에 스페인에 의해 현재의 쿠마나(Cumaná)에서 식민지가 되었다. 이들 베네수엘라 동부는 뉴 안달루시아에 통합되었다. 16세기 초부터는 산토 도밍고의 아우디엔시아로부터 관리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의 대부분이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la Nueva Granada)에 속하게 되었고, 1776년 이후로는 도독령(Captaincy General)으로 개편되었다. 잇따른 봉기의 실패 후, 베네수엘라는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장군의 지휘 하에 1811년 7월 5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어쨌거나, 1812년 카라카스 지방의 파괴적인 지진과 야네로(llanero)의 반란으로 베네수엘라의 첫 번째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1813년 8월 7일에 선언된 베네수엘라의 두 번째 공화국은 수개월 간 지속되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했다. 1819년에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을 이루다가 1830년에 분리를 선언하였다. 콜롬비아로부터는 1845년에 승인을 받았다. 안토니오 구스만()은 정교 분리, 공교육 제도를 실시하는 등 베네수엘라를 국민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후안 비센테 고메스()의 통치 기간 중에는 석유에 관한 이권이 외국 자본가들의 손에 넘어갔다. 외국 석유기업의 수익에 대한 세율을 50% 인상한 석유법이 제정된 것은 이사이아스 메디나 안하르티아()에 이르러서였고, 선거를 제대로 치러본 해는 1948년이었다. 하지만, 로물로 가예고스()를 기반으로 한 정부는 1년이 못 가 군사 쿠데타로 폐지되고,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시기에는 국가치안대(SN)을 신설하여 수많은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히메네스 대통령은 80만 헥타르의 토지에 대한 석유 채굴권을 다시 외국 자본가들 손에 넘겼다. 히메네스 정권은 1958년에 국민의 힘에 의해 타도되고, 민주행동당(AD)과 사회기독당(COPEI)의 양대정당 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된 정국을 유지해왔다. 1974년에 집권한 페레스 로드리게스()는 반정부 세력에 정치활동을 보장하여 사회협조를 현실화하는 한편, 특히 천연자원에 대한 민족주권회복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고 1976년에는 석유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하지만, 1989년 2월 재취임한 페레스는 이전까지 거부해온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도를 받아들여 금리자유화·공공요금 인상 등 긴축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에 시민들의 대규모 폭동이 야기되고 1992년 2월과 11월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독직사건을 계기로 불명예 퇴진하였다. 이 쿠데타에는 우고 차베스(육군 중령)도 참가했다. 1994년 2월 사회기독당(COPEI) 소속의 라파엘 칼데라()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여소야대 정치구도하에서 민주행동당(AD) 및 사회주의운동당(MAS)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국정을 운영해 왔으나 경제정책 실패 및 1995년 12월 지자제 선거참패로 인해 사회주의운동당(MAS)이 이탈하면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이후 개각을 단행하였다. 1996년 4월 국내유가 467% 인상, 외환통제 전면철폐, 변동환율제로의 전환, 도매세 및 사치품세 인상 등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칼데라가 물러나고 우고 차베스가 1999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92년 쿠데타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2002년 4월 11일 카르모나(Pedro Carmona)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차베스도 언론 통제, 반대파 억압 등으로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다. 차베스는 2013년 사망하였고,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임시 대통령은 2013년 4월 14일(현지시각)에 치러진 대통령 재선거에서 야권 통합 후보인 엔리케 카프릴레서 주지사를 누르고 승리했다. 베네수엘라 본토는 남아메리카 판에 속한다. 해안선의 길이는 2,800 km이며, 이 나라는 다양한 자연 경관을 보여준다. 북동부 끝에서 안데스 산맥은 베네수엘라의 북서쪽으로 뻗으며, 북쪽 카리브 해안으로 이어진다. 이곳에 베네수엘라 최고봉 피코 볼리바르(4,979m)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중심부는 야노스 평원으로 콜롬비아 국경에서 동쪽의 오리노코 강 삼각주에 이른다. 남쪽의 기아나 고원은 아마존 분지의 북쪽 언저리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폭포인 앙헬 폭포가 있다. 충적토가 쌓인 오리노코 강은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수계와 유역을 이룬다. 카로니 강과 아푸레 강도 베네수엘라의 주요 강이다. 베네수엘라는 기후와 생물지리의 기준으로 10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북쪽에는 베네수엘라 안데스와 북서부 산지 코로 지역으로 산맥과 계곡 지형을 이룬다. 국토 북쪽은 마라카이보 호와 베네수엘라 만이 있는 저지가 있다. 중앙 산맥은 해안과 나란히 뻗었으며, 카라카스 주변에도 이 산맥의 언덕이 둘러싸고 있다. 동부 산맥은 카리아코 만 때문에 중앙 산맥과 갈라지며, 수크레 주 전체와 모나가스 주 북부를 포괄한다. 야노스 지역은 국토의 1/3을 이루며, 오리노코 강 북쪽에 펼쳐져 있다. 남쪽에는 2십억 년 전 선캄브리아기에 생성된 기아나 순상지가 있으며, 꼭대기가 편평한 테푸이 산이 있다. 베네수엘라 영토 중에는 섬 지역도 있는데, 카리브 해의 누에바에스파르타 섬과 베네수엘라 연방 속지가 있다. 또 오리노코 강의 삼각주 지역은 델타아마쿠로 주를 이루며, 강은 대서양으로 흐른다.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열대 기후에 속하나, 이곳 기후는 연중 기온이 섭씨 28도인 습한 저지 평원에서 연중 섭씨 8도인 빙하와 고원("paramos")에 이르기까지 매우 지역차가 크다. 연중 강우량은 북서부 반건조 지역의 430mm에서 동쪽 오리노코 삼각주의 1,000mm에 이른다.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는 6월에서 10월 사이이다.(이 우기를 "겨울"이라 한다) 기온 변화가 위도와 일치하지는 않으나, 1년 중 나머지 기간은 건조하고 더워 "여름"이라 한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보통선거 및 직선제로 선출되며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을 겸한다. 임기는 6년이며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다(2009년 2월 15일 개헌 이후). 1676만여 유권자 가운데 70.33%가 참여했고, 이 중 54.85%가 개헌에 찬성하였다. 찬성과 반대의 표차는 약 100만 표에 이르렀다. 이로써 1999년 개정된 베네수엘라 헌법 가운데 주지사(160조), 자치의회 의원(162조), 시장(174조), 국회의원(192조), 대통령(230조)의 임기를 한 차례 연임만 가능하도록 제한하는 5개 조문이 바뀌었다. 그 결과 연임 제한 규정으로 2013년 2월 물러나야 했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3선 도전도 가능해졌다.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와 관계가 깊은 나라 중 하나이며 최근 러시아 해군이 기동 훈련차, 베네수엘라로 출항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부통령을 임명하며, 내각의 구성과 규모를 결정하고, 입법부와 함께 각료를 정한다. 대통령은 필요한 경우 입법부에 법안 재심의를 요청할 수 있는데, 의회에서 과반수로 대통령의 거부를 물리칠 수 있다. 이 나라의 부통령은 다른 나라의 부통령과는 다르게 총리와 유사한데, 일례로 부통령을 선거로 뽑지 않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게 특징이다. 베네수엘라 국회("Asamblea Nacional")는 단원제이다. 167명의 의원이 있으며, 이 중 3석은 원주민 대표로 배정된다. 국회 의원 임기는 5년이며 2번 중임할 수 있다. 국회 의원은 정당명부식과 소선거구제를 병행하여 국민 투표로 선출된다. 사법부 최고 기관은 최고 사법 재판소("Tribunal Supremo de Justicia")이며, 대법관은 의회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12년이다. 국가 선거 재판소("Consejo Nacional Electoral", CNE)는 선거 사무를 담당하며, 국회에서 5명의 주요 위원을 선출한다. 투표는 18세 이상의 베네수엘라 시민이면 가능하며, 의무투표제를 시행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에는 두 개의 정당 블록이 있다. 집권 좌파 블록인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PSUV)과 주요 동맹 정당인 모두를 위한 조국(PPT), 베네수엘라 공산당(PCV)이 있으며, 야당 세력으로는 신시대당("Un Nuevo Tiempo")과 함께 베네수엘라 계획, 정의제일, 사회주의 운동당 등이 있다. 1958년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가 몰락하면서 중도 사회기독당(COPEI, "Partido Social Cristiano de Venezuela")과 중도 좌파 사민주의 민주행동("Acción Democrática") 정당들이 베네수엘라 정계를 주도하게 되었고, 푼토피히스모 협약으로 이 양당제 체제가 굳어졌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1998년 선거 이후 깨졌고,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볼리바르 혁명을 개시했다. 2005년 의회 선거에서 대부분의 야당 세력은 선거를 보이콧했다. 그 결과 우고 차베스의 제5공화국운동(MVR) 블록이 국회의 167석 전석을 확보했다. 그 뒤 제5공화국 운동은 투표로 스스로 의회를 해산하고 새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으로 모여서 제5공화국 운동의 지지정당들이 하나로 모일 것을 요청했다. 국회는 2000년과 2007년 두 번이나 차베스에게 여러 분야에 대해 직권 입법 권한을 부여했다. 이 권력은 이전 정부들에게도 부여된 바 있었다. 그 동안 차베스 정부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에콰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파라과이 등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집권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최근에 정권이 교체될 전망이었던 탓에 니콜라스 마두로와 엔리케 카프릴레스 라돈스키 둘 중 하나가 정권을 잡을 예정이었으나, 니콜라스 마두로가 이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차베스와 유사한 좌파 성향이 계속되는 계기가 되었다. 1월 23일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베네수엘라는 23개 주(estados / 에스타도스)와 1개의 수도 지구(Distrito Capital / 디스트리토 카피탈), 1개의 연방 속지(dependencia federal / 데펜덴시아 페데랄)로 나뉘어 있다. 혼합 경제 체제의 베네수엘라에서 석유 부문은 GDP의 거의 1/3을 차지하며, 수출의 80%이고, 정부 수입의 절반 이상이다. 베네수엘라는 금, 다이아몬드, 철광석도 생산하지만, 전체 경제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적으로 거대한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늘 세계 원유 생산국 10위안에 든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자원은 주로 마라카이보 호, 베네수엘라 만(인근 술리아), 오리노코 강 분지(동부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최대 매장량)에 분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높은 정부 보조금 덕분에 세계에서 유가가 낮은 나라이다. 철도는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으나 도로가 발달하여, 4만 7,720km가 완전 포장되어 있다. 1922년 마라카이보 호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베네수엘라 독재자 후안 비센테 고메스는 미국인들이 베네수엘라의 석유법을 만들게 했다. 1943년 뉴 저지의 스탠더드 오일사가 50 대 50 비율에 따라 베네수엘라와 협정을 맺었다. 쿠데타가 일어나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 등 좌파 정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1945년 베네수엘라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되었다. 1958년 새 정부는 나중에 석유 수출국 기구(OPEC)가 되는 국제적인 석유 카르텔을 계획한 페레스 알폰소를 다시 끌어들였다. 1973년 베네수엘라는 석유산업을 완전히 국유화하기로 표결하여 1976년 1월 1일부터 발효했다. 이로써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공사(Petróleos de Venezuela S.A., PDVSA)가 여러 석유 회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듬해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유럽에 광대한 원유 정제 및 판매 제도를 구축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수출과 유가에 매우 의존하고 있다. 석유 수출국 기구의 창립 회원국인 베네수엘라는 OPEC 의장국이던 해에 기구 내의 주도권을 주장했으며, 40년 뒤 제2차 OPEC 정상 회담을 열기도 했고, 알바로 실바 칼데론 전 에너지 장관을 사무총장으로 지명했다. 1997~98년 유가가 폭락하자 로드리게스 정부는 유가를 올리기 위해 OPEC 주도의 원유 감산 확대를 촉구했다. 2002년 석유 부문은 GDP의 1/4이었으며, 수출액의 73%, 중앙 정부 집행 예산의 절반에 이르렀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네 번째로 석유를 많이 수출하는 나라이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해외 투자에 탄화수소(석유의 주 원료) 부문을 넓게 개방하여 대규모 원유 생산과 석유 산업 활성화, 여러 석유화학 합작 산업에 수십억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14개국에서 거의 60여개 외국회사들이 베네수엘라의 각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와 외국 석유회사는 세번의 입찰에서 33개의 한계 유전(marginal field)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천연 가스와 석유화학에 대한 새로운 입법으로 석유 산업은 더욱 개방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 가격을 약속받은 투자자들은 새로운 국내 소매 경쟁법에 실망했다. 2001년 11월 13일 국회 입법으로 차베스 대통령은 2002년 1월부터 발효하는 새 석유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1943년 석유법과 1975년 국유화법을 대체했다. 특히 새 법은 추가 원유 생산을 위한 합작 투자의 경우만 제외하고 모든 석유 생산과 분배 활동을 국가의 통제로 두게 되었다. 2002년 12월에서 2003년 2월 사이 국영 석유공사의 경영자와 고임금 고급 기술자들이 회사를 폐쇄하고 사보타주를 감행하여 국영공사의 석유 생산과 정제가 멈추다시피 했다. 당시 베네수엘라의 여러 많은 기업 소유주들도 직장 폐쇄에 동참하여 차베스 정부를 뒤흔들려고 했다. 직장 폐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세력이 경영자 없이 국영공사를 다시 가동시켜 산업 활동이 다시 재개되었다. 그래서 총 45,000여명의 국영공사 직원 중 19,000명이 해고되었는데, 이들 상당수는 경영자와 고위 기술직이었다. 2006년 제조업은 이 나라 GDP의 17%였다. 제조업 부문은 연 26.93% 비율로 급성장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강철과 알루미늄, 운송 장비, 직물, 의류, 음료, 식료품을 제조하여 수출한다. 시멘트, 타이어, 종이, 비료, 자동차 부품도 생산하여 국내외 시장에 판매한다. 농업 부문은 GDP의 3%로, 노동인구의 10%, 베네수엘라 국토의 1/4 이상을 할애한다. 수출품으로는 쌀, 옥수수, 생선, 열대 과일, 커피, 쇠고기, 돼지고기가 있다. 베네수엘라는 농업 여러 분야에서 자급자족하지 않으며, 필요한 식량의 2/3를 수입한다. 2002년 미국 회사들은 밀, 옥수수, 콩, 두유, 면화, 동물 지방, 식물성 기름 등 농산물 34,700만$ 어치를 베네수엘라에 수입하여, 이 나라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미국 수출 시장이다. 미국은 베네수엘라 식량 수입의 1/3 이상을 공급한다. 석유 수출 덕분에 베네수엘라는 보통 무역 흑자를 기록한다. 최근 非석유 부문 수출이 급속히 성장했으나, 아직 총 수출의 1/6에 불과하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주요 교역 대상국이며, 브라질은 2011년 對미국 교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2년 한 해에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44억$ 어치의 교역품을 수출하여 미국 입장에서 (석유 제품을 포함해) 25번째로 큰 시장이었다. 또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151억$어치의 교역품을 수출하여 미국 입장에서 14번째로 큰 상품 공급처였다. 베네수엘라의 출산율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볼리비아, 파라과이, 프랑스령 기아나 다음으로 높은 수치이다. 1930년대부터 베네수엘라 인구조사는 인종에 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관련 수치는 추정에 근거한 것이다. 인구의 약 70%는 메스티소이며, 20%는 순수 백인(대개 이탈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독일계 후손)이다. 이 나라의 주요 토착 부족으로는 국토 서쪽 술리아에 있는 와유족과 서쪽 안데스 산맥의 메리다에 있는 티모토쿠이카스족이 있다. 다른 주요 집단으로는 아프리카-베네수엘라인도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들어온 후손들이다. 아시아인으로는 레바논인 등 아랍인과 중국인 집단이 있다. 인구의 5%만이 순수 원주민이다. 20세기 중반 경제 성장으로 남아메리카 이웃나라나 유럽에서 여러 이주민 집단이 유입되었다. 미국의 난민 및 이주민 위원회에서 발간하는 "2008년 세계 난민 조사"에 따르면 2007년 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 난민과 망명요구자 252,200명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2007년 10,600명의 망명자가 새로이 베네수엘라로 들어왔다. 인구의 85%는 베네수엘라 북부의 도시 지역에서 거주하며, 73%는 해안선에서 100 km 이내의 지역에 살고 있다. 베네수엘라 국토의 거의 절반은 오리노코 강 남쪽에 있으나, 이곳에는 베네수엘라 인구의 5%만이 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공용어이자 널리 쓰이는 언어는 에스파냐어이다. 과히보어, 페몬어, 와라오어, 와유어와 야노마뫼 언어군 등 31개 토착 언어도 쓰인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인구의 92%는 로마 가톨릭 신도이고, 나머지 8%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 혹은 무신론자라고 한다. 베네수엘라 복음주의 평의회(Venezuelan Evangelical Council)에서는 복음주의(Evangelical)적인 개신교 신도가 인구의 10%라고 산정했다. 2004년 베네수엘라의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16명으로 남아메리카 평균보다 매우 낮은 수치였다. (비교하자면, 2006년 미국의 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5명이다) 유아 영양실조(5세 이하 유아의 발육장애나 체력약화가 기준이다)는 17%로 델타 아마쿠로와 아마조나스 주는 국내 최고 수치를 보였다. 유엔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인구 32%, 특히 시골 지역 거주자들에게 위생시설이 부족하다고 한다. 장티푸스, 황열병, 콜레라, A형 간염, B형 간염, D형 간염이 현재 이 나라에 분포한 질병이다. 하수 처리는 겨우 3%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는 처리 시설이 부족하다. 베네수엘라인 17%는 식수 부족을 겪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전국적인 무료 의료 보장 제도를 갖추고 있다. 차베스 정부에서 시작한 바리오 아덴트로 미션으로 쿠바의 의사와 의료장비를 도입하고 쿠바에 석유를 제공하며 쿠바 의사가 기존에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거나 접근이 어려운 지역에 상주하며 1차 의료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속하면서도 생활 풍속에서 다른 남미 국가와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카리브 지역 및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통 춤과 음악은 호로포(joropo)라고 하는데, 작은 기타(Cuatro) 및 마라카스(Maracas:말린 씨가 들어 있는 호박으로 제작) 등의 전통악기를 사용하는 목동들의 유희이다. 해변 지역(카라카스 포함)의 전통음악 악기로는 드럼통(tambores)이 유명하고, 이는 아프리카에서 유래하였으며, 카리브 지역 음악의 주악기이기도 하다. 수도 카라카스는 현대 연극, 영화, 무용, 음악, 미술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도시로서 수준급 박물관과 다수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베네수엘라는 미인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세계 4대 미인대회에서 미스 유니버스 7명, 미스 월드 6명, 미스 인터내셔널 7명, 미스 어스 2명이 베네수엘라 출신이다. 1981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였던 아이린 사에스(Irene Saez)는 차카오(Chacao) 시장에 당선된 적이 있으며, 199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바 있고 1998년에는 12월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2008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인 다야나 멘도사가 2009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인 스테파니아 페르난데스에게 왕관을 물려 주었는데, 같은 나라의 후보가 2년 연속 미스 유니버스 왕관을 쓰게 된 건 베네수엘라가 처음이다. 그래서 2년 연속 미스 유니버스 우승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베네수엘라 TV 일일연속극(Tele-Novela)은 중남미 및 동유럽 지역에 수출되는 등 유명하다. 스포츠에서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이 주로 축구를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의 강한 영향을 받아 야구가 인기가 있으며, 세계 최고의 야구 강국 중 하나이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결승에서 대한민국과 맞붙기도 했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 많은 선수가 진출해 있으며, 2011년 현재 260명의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뛰고 있다. 미국 이외의 메이저리거 배출국 중에 도미니카 공화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이다. 외국인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MLB를 제패한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오지 겔렌 감독을 비롯하여 사상 5번째 사이영상 수상 두 번째 순위를 자랑하는 최강 왼손 투수 요한 산타나, 2006년 리그 최다승을 올린 선수 중 한 명인 카를로스 잠브라노 , MLB 년간 최다 세이브 기록 보유자 K-ROD의 애칭으로 알려진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2008년 홈런왕 미겔 카브레라 등 많은 스타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겨울철에는 국내에서 8개 구단으로 구성되는 윈터 리그(Venezuelan Professional Baseball League )가 개최된다. 이 윈터 리그는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 조정을 겸해 참가한다. 이 리그에서 우승하는 팀은 베네수엘라 대표로 캐리비안 시리즈에 출전한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국 중의 하나로 제1회 대회는 베네수엘라 국내의 기대를 모았지만, 2라운드에서 탈락하여 감독이 비판을 받았다. 제2회 대회에서는 산타나, 잠브라노 등 막강한 투수진과 강력한 타선을 무기로 4강에 진출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세계선수권 (현 IBAF 월드컵)에서 우승 3 순위를 기록하는 등 쿠바 등과 대등한 아마추어의 강호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미 대륙에서 경쟁이 격화되는 것 외에도 국내 선수의 메이저 리그 지향이 강해져 대표팀의 부진이 지속되면서 올림픽은 베이징 대회까지 한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축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아닌 유일한 국가였지만, 최근에는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남미 축구 연맹 소속 10개국 중 유일하게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적이 없고, 오랫동안 "남미 최대 약점"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체질을 강화하여 월드컵까지 앞으로 1단계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07년 처음 코파 아메리카 를 개최하여 준준결승, 2011년에는 준결승에까지 진출했다. 최근에는 아르헨티나를 이기는 등 체질이 강화되고 있다. 징병제 국가 1902년 시프리아노 카스트로의 베네수엘라 정부가 더 이상 유럽 은행들의 요구를 진정시킬 수 없게 되자, 영국, 이탈리아, 독일의 해군은 베네수엘라 해안을 봉쇄하고 심지어는 해안 요새를 포격하기까지 하였다. 미국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Elihu Root)는 카스트로를 미친 짐승("a crazy brute")이라고 규정지었지만,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 제국이 이 지역에 침투할 것을 염려하였다. 베네수엘라의 대외 관계는 20세기 초반부터 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20세기 내내 베네수엘라는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와 서구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73년에는 안데스 공동시장(Andean Community of Nations)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1998년 선출된 이후, 우고 차베스 정부의 외교 정책은 기존의 베네수엘라 정부들과는 실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로 잠시 집권했던 페드로 카르모나를 미국이 인정하면서, 두나라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 미국과 동맹을 맺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나 중동의 여러 국가들과 베네수엘라와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최근 차베스 대통령의 반미행보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안보 위협국으로 지목하고 무기 금수 조치를 내린 바 있다. 2008년 9월엔 카라카스 주재 미국 대사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추방되기도 했다. 원유에 있어서 두 나라는 상호의존적이다. 베네수엘라는 원유 수출량의 6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고, 미국은 원유 수입분의 11%를 베네수엘라에 의존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미국과 연합국이 반대하는 압하스와 남오세티야의 국제적 인정에 대해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비아 대안("Alternativa Bolivariana para los Pueblos de Nuestra América", ALBA)이나 무역 계획, 새로 개국한 라틴 아메리카 TV 방송국 텔레수르(teleSUR) 등을 통해 새로운 지역 통합 대안을 추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미주기구(OAS)의 반부패 협정 채택을 제안했으며, 메르코수르 무역 블록을 통해 무역 및 에너지 통합에 적극적이다. 이 나라는 제3세계 국가의 유대 강화를 통한 "다극" 체제를 지지한다. 베네수엘라는 아메리카 대륙 유일의 석유 수출국 기구(OPEC) 회원국이다. 바티칸 시국 바티칸 시국(, ), 약칭 바티칸(, )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km의 면적에 약 9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녔으며 면적과 인구로 보아 매우 작은 독립 국가이다.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으로 비교하면 바티칸 시국의 면적은 상계5동의 면적과 같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전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했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 교황령의 회복을 목표로 한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의 체결로 독립을 성취하여 오늘에 이른다.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 국가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본부이다. 바티칸 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는 성좌(Sancta Sedes)로 호칭된다. ‘바티칸’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은 카톨릭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의 시대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티칸 시국의 영토는 로마의 북서부에 있는 바티칸 언덕과 그 앞 인근에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 궁전과 시스티나 경당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 등의 건물들이 세워진 평원이다. 이 지역은 1929년까지 로마의 보르고 지구의 일부분이었다. 로마 시와 분할된 것은 레오 4세가 테베레 강 서쪽 연안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게 성벽을 쌓아 올린 때부터이며, 이후 레오 4세의 벽을 포함하여 바오로 3세, 비오 4세, 우르바노 8세가 새로 쌓아올린 성채 덕분에 면적이 더 확장되었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바티칸의 영토를 환상선에 의해 둘러싸인 구역을 경계선으로 명시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부 국경 지역은 벽이 없는 대신 어떤 건물들로 선을 긋는 것으로 대신하였으며, 국경의 작은 일부분에는 현대식 벽을 건설하였다. 바티칸의 영토에 포함된 성 베드로 광장은 로마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탈리아 정부와 바티칸은 대체적으로 성 베드로 광장 밖의 비오 12세 광장 구역을 가상의 경계선으로 보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테베레 강까지 닿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화해의 길)와 이어져 있는데, 이 웅장한 도로는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기념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건설되었다. 또한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교황청은 이탈리아 영토 안에 일정한 소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카스텔간돌포와 대주교좌 성당들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산재한 교황청 소속의 관청이나 사무소 등으로 이러한 소유지는 외국 대사관의 지위와 유사한 치외 법권을 누리고 있다. 카스텔간돌포와 대성전으로 지명된 시설은 경찰들이 정기적으로 순찰하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이 아닌 바티칸 시국 소속이다. 성 베드로 광장은 일반적으로 바티칸과 이탈리아 양국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 교황은 직무상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자 바티칸 시국의 정부 수뇌자로, 이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있었던 그의 직분인 로마 주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좌라는 표현은 바티칸 시국이 아닌 교황의 영적 통치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로 로마 교황청에서 사용한다. 바티칸 시국과 관련한 교황의 공식 직함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교황직은 선거군주제(선거에 의한 비(非) 세습형 군주제도)로, 추기경단에서 선발한다. 또한 법적으로 교황은 절대 군주에 해당하며, 바티칸 시국의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 교황은 유럽에 남은 유일한 절대 군주이다. 교황은 콘클라베에서 여든 살 이하의 추기경들이 선출한다. 바티칸 시국을 관리하는 그의 휘하는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으로, 과거 바티칸 시국의 장관이 했었던 역할을 1952년에 이어받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2001년 이후,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의 공식 칭호는 바티칸 시국의 장관 겸 행정처장이다. 평상시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사도 궁전에 거주한다. 이곳에서 교황은 자신의 집무를 수행하며, 외국에서 온 사절을 맞이한다. 2013년 3월 14일 현재 남반구, 아메리카 출신인 프란치스코가 교황이고,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은 이탈리아 대주교인 주세페 베르텔로이다. 주세페 베르텔로는 2013년 4월 13일에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기용되었다. 바티칸이 자리잡기 전에 이곳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로마 신화의 키벨레와 그 배우자 아티스를 숭배하던 곳이었으며, 점을 치는 언덕(ager vaticanus)이라 부르며 오랫동안 신성하게 여겨왔다. 그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곳에 거주민들의 통행과 정착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서기 1세기 초에 대 아그리피나(BC 14년 - AD 33년 10월 18일)는 바티칸 언덕과 그 주변에 물을 대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개인 정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칼리굴라(37년 - 41년)는 이곳에 거대한 원형경기장(Circus Gaii et Neronis)을 만들었고, 나중에 황제 네로 시대에 완공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 장식된 오벨리스크는 본래 칼리굴라가 원형경기장을 꾸미기 위해 서기 3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가져와 경기장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삼아 고대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초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은 다신교의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지어졌었다. 이러한 고대의 잔재들은 수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사를 할 때 빈번하게 발견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적인 발굴작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고, 5세기 초에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커져갔으며 19세기 중반 신흥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 동안 로마와 그 주변 지역들을 장악해 교황령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는 바티칸이 아닌 라테라노 궁전이었으며, 아비뇽 유수기(1309년 - 1377년)를 제외한 최근 세기 동안에는 퀴리날레 궁전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창궐하면서 교황청은 차츰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1870년에는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점령당하면서 교황의 소유지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 이러한 로마 문제라고 불리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티칸으로 대거 피신했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 및 기타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이탈리아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요구라며 항의했고 바티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교황령이 이탈리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이탈리아로부터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다. 이탈리아는 바티칸 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한 무력행사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을 포함하여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해갔다.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잃은 이후 스스로를 ‘바티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은 1929년 2월 12일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라테라노 조약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교황 비오 11세 양측으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에 의해 각각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가이며 교황청의 소유와 국제법상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티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탈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더불어 양측은 라테라노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폐기하였다. 라테라노 조약은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7년 이탈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다만 1984년 양측 합의로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정교 협약으로 수정되었다. 바티칸 시국의 정치는 전제주의적 성격의 선거군주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가톨릭교회의 중심지라는 권위를 차지하고 있다. 교황은 비 세습형 군주의 사례로서는 드물게 직무상 (성좌와는 별개의 실체로서) 바티칸 시국의 영토 안에서 제일의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한다. 바티칸 시국의 정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교황이 나라의 주권자이며, 입법권은 5년마다 교황이 임명하는 추기경들로 구성된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가 갖고 있다. 행정권은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이 갖고 있으며, 총비서와 총무대리가 보조하고 있다. 바티칸 시국의 대외관계는 국무원과 외교관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도 역시 교황은 바티칸 시국 일대에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갖고 있다. 교황은 현재 유럽에서 유일한 절대 군주이다. 바티칸 시국에는 보건, 보안, 통신 등과 관련된 특정 부서들도 있다. 사도좌 공석(교황직 공석) 기간에는 교황 궁무처장 추기경에게 성좌의 자산 관리와 방위에 대한 권한이 일시적으로 맡겨진다. 바티칸 시국의 나머지 사람들은 바티칸 시국 주교 위원회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다. 교황 궁무처장이 국가원수 구실을 하는 동안, 추기경들 가운데 각 품급(주교급 추기경, 사제급 추기경, 부제급 추기경)을 대표하는 추기경 세 명은 매일 3일마다 선발된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활동한다. 이들 네 명의 추기경은 모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추기경단 전체의 허락을 미리 받아야 한다. 바티칸 시국이라는 국가는 1929년 성좌에 작은 영토와 함께 그 안에서 세속적인 독립과 사법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라테라노 조약에 세워졌다. 바티칸 시국은 성좌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요컨대 성좌에 독립적인 영토는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필요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성좌는 로마 제국 시대 이후 법률상의 실체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모든 세속적 영토를 빼앗기고 잠시 권리가 중단되었을 때(예를 들면 1870년에서부터 1929년까지)만 빼고는 고대 후반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강력하고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실체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 때 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서기 325년부터 성좌가 외교 활동을 벌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외국 주재 대사들은 성좌에서 파견하는 것이지, 바티칸 시국이 결코 아니다. 입법 기능은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이 이끄는 단원제의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에 위임하고 있다. 일곱 명의 주교회의 일원은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들로 구성되며, 임기는 5년이다. 주교회의의 모든 활동은 먼저 교황청 국무원을 통해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사도좌공보》의 특별 부록에 실리고 나서야 효력이 발생한다. 이 부록에는 대부분 교령, 회칙, 새 우표 승인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 기능은 바티칸 시국 행정처에 위임하고 있다. 행정처는 바티칸 시국 주교회의 의장, 국무원장, 국무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자 5년마다 교황에 의해 임명된다. 행정처가 중요한 활동을 할 때는 주교회의와 국무원을 통해서 교황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 행정처는 휘하에 여러 부처와 기관을 두어 중앙 정부 기능을 총괄하고 있다. 이들 기관의 총장들과 공무원들은 5년마다 교황이 임명한다. 이들 기관은 구역 보안, 기록, 교통, 재정을 포함한 바티칸 시국 내 물자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는 현대적인 보안 기기와 바티칸 시국 국가헌병대로 불리는 경찰 부대가 지키고 있다. 사법 기능은 내사원과 대심원, 항소원에 위임하고 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교황은 바티칸 시국과 전 세계 교회에 대한 최고의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언제든지 행사할 수 있다. 비록 과거 교황들이 교회군의 일부로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긴 했지만, 교황의 개인 경호원으로서의 스위스 근위대는 1506년 1월 22일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창단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교황청 연감 목록에는 스위스 근위대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성좌’에 종속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 2005년 말엽, 근위병의 숫자는 134명이 되었다. 신병은 성좌와 스위스 간에 맺은 특별 협정에 따라, 스위스 국적의 젊은 남자 가톨릭 신자로 제한되어 있다. 팔라티누스 근위대와 귀족 근위대도 있었지만,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해체되었다. 최초의 주력군은 교황령에 복무하며 바티칸 영토 안에 근무하던 국민군이었지만, 귀족 근위대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의장병에 불과했다. 바티칸 시국에는 경찰력으로서 활동하는 국가헌병대도 있다. 정식 명칭은 ‘바티칸 시국 국가헌병대(Corpo della Gendarmeria dello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이지만, 때때로 ‘비질란차(Vigilanza)’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바티칸 시국 국가헌병대는 공공질서와 법 집행, 군중과 교통 통제 그리고 바티칸 시 안에서 일어난 범죄를 수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바티칸 시국은 국제법상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공인받고 있으나, 외교적 업무 수행은 성좌가 대신하고 있으며, 성좌가 몸소 외교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 그와 관련된 국제 협약까지 맺는다. 따라서 바티칸 시국은 직접 외교적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성좌는 다른 나라에 외교관을 파견하거나 외국의 외교관을 주재시킬 권리를 갖고 있다. 바티칸 시국은 영토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성좌 주재 외국 대사관들은 로마 시내에 있다. 성좌는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성좌는 국교의 여부와 관계없이 다양한 국가들과 수교하고 있다. 각 나라에 파견된 교황대사는 다른 나라의 대사들과 동등한 위계를 가지나 주로 유럽이나 가톨릭 국가에서 외교단장을 맡거나 외교의전상 대사의 성직품에 관계없이 상석에 위치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성좌 대표의 서열에 관하여 접수국에 의하여 승인된 어떠한 관행도 침해하지 아니한다. 교황 대사가 없는 경우 성좌는 교황 사절을 임명하여 그 역할을 하게 한다. 교황 사절은 교황 대사에 버금가는 우대와 특권을 받는다. 성좌가 현재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모두 177개국에 달한다. 대한민국과는 1963년에 외교 관계를 맺었다. 현재 성좌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국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등이다. 유럽의 극소국가 가운데 하나인 바티칸 시국은 로마의 서중부 쪽에 있는 테베레 강에서 서쪽으로 몇백 미터에 있는 바티칸 언덕 위에 있다. 국경을 따라 성벽이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데, 이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교황을 보호하려고 건설한 것이다. 위치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 있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더한층 복잡하며, 올바른 국경은 베르니니의 열주에 의해 형성된 타원형 안팎이지만, 담당 경찰은 이탈리아에서 맡고 있다. 바티칸 시국의 영토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국으로 과수원보다 크고 에버랜드보다 작은 0.44km에 불과하다. 2007년 7월, 바티칸은 탄소 방출에 관해 중립적 입장을 최초로 밝힌 국가가 되었다. 바티칸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상쇄한다는 계획을 달성하고자 헝가리에 바티칸 기후 산림을 조성하고 있다. 바티칸의 기후는 로마와 똑같은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이다. 8월부터 5월까지는 비 오는 겨울이며, 5월 중순부터 9월까지는 건조한 여름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의 상상을 초월한 크기와 해발고도, 분수, 거대한 넓이의 포장된 광장이 원인이 되어 일부 구역에는 안개와 이슬이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바티칸 시국의 경제는 유일무이한 비영리적 경제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보내는 봉헌금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받거나 우표와 기념품 판매, 미술관 입장 수수료 그리고 출판물 판매 등으로 재정을 충당하기도 한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봉헌금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이른바 베드로 성금이다. 6월 마지막 주일에 전 세계 가톨릭 교구에서 성 베드로 사도의 이름으로 모금된 봉헌금이 바티칸에 전달된다. 바티칸에서 근무하는 평신도 노동자들의 수입과 삶의 질 수준은 로마 시민과 별반 차이가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바티칸 시국은 독자적인 주화를 유통하고 있다. 바티칸은 유럽 연합과 맺은 특별 조약(위원회 결의 1999/98/CE)에 따라 1999년 1월부터 유로를 화폐로 사용하고 있다. 유로화 주화와 지폐는 2002년 1월 1일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바티칸에서 자체적으로 유로화 화폐를 만들지는 않는다. 조약에 따라 유로화로 명명된 주화의 발행은 교황이 바뀔 때마다 평소보다 더 많이 발행되는 한 해를 제외하고는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바티칸의 유로 주화는 그 희소성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수집가의 열렬한 수집 대상이 되었다. 유로화를 채택하기 전까지 바티칸의 지폐와 주화는 바티칸 리라 통화로 명명되어, 이탈리아 리라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바티칸 시국은 바티칸 은행(약어는 IOR)이라고 명명된 독자적인 은행도 있다. 바티칸 은행에 있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용 설명서가 라틴어로 되어 있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이다. 바티칸 시민 824명(2008년 기준) 가운데 거의 대다수는 바티칸 성벽 안에 거주하며 그 외 나머지는 외국 주재 교황대사관에서 성좌의 외교 활동을 맡고 있다. 바티칸 시민은 대체로 교황청의 공무를 수행하는 성직자와 스위스 근위대 이렇게 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티칸 인력의 과반수를 이루는 3천 명의 평신도 일꾼 대다수는 바티칸 밖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국민이며, 이탈리아 외 다른 나라의 국민은 소수이다. 사실상 바티칸 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가톨릭 신자이다. 바티칸 시국의 공용어가 이탈리아어이다.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서 가운데 권위 있는 것들에는 라틴어가 자주 쓰이며, 입법과 공식 보도에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 또한, 바티칸 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일상 언어 역시 이탈리아어이다. 스위스 근위대에서는 명령 계통의 언어로는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충성 서약을 할 때는 근위병 개개인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또는 이탈리아어 등 각자의 언어로 한다. 현재 바티칸 시국의 공식 웹사이트 언어들은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중국어, 아랍어이다.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은 직무법의 인가를 받아 확정된 자격으로 바티칸에서 노동을 위하여 임명된 특정인들에게만 부여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용기간이 만료되면 일반적으로는 시민권이 해약된다. 또한, 고용된 동안에는 시민권자의 배우자(결혼이 취소되었거나 무효가 되었거나 또는 부부간의 별거가 선고되었더라도 상관없이)와 자녀들(만일 그들이 일할 능력이 있으면 25살이 되거나 아니면 딸의 경우, 결혼할 때까지)에게까지 시민권이 확대된다. 바티칸 시민권을 잃게 되면, 이탈리아 법의 판단에 의해 다른 어떤 나라의 시민권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자동으로 이탈리아 시민권을 갖게 된다. 2011년 12월 31일 기준, 바티칸 시민권자는 594명이다. 594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시민권 보유자의 70%가 가톨릭 추기경, 성직자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신병 모집 조건으로 삼은 스위스 근위병들이다. 그 밖의 55명의 시민권자는 바티칸의 어떠한 직책이 없는 가톨릭 평신도들이다. 따라서 바티칸 시민권자는 모두 가톨릭 신자이다. 이 통계는 바티칸에 거주하는 시민이 아니라 시민권자를 다룬 것이다. 성좌의 재외 외교 활동 분야에서 활동하는 시민권자들과 대다수 추기경 그리고 바티칸에서 일하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높은 비율로 바티칸 밖에 거주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기독교 종파와 다른 종교단체에서 온 대표단에 성녀 마르타 호텔에 투숙하게 하는 등 환대가 자주 베풀어졌다. 그런 연유로 인구조사는 특정날짜에 현재 국내에 있는 인구 수를 계산하는 것이므로, 바티칸 시의 인구조사에서 반드시 가톨릭 신자가 100%를 차지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바티칸은 나라 자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의 보고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이나 시스티나 경당 등에는 산드로 보티첼리,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하는 르네상스 예술 사상의 거장들이 마음껏 솜씨를 발휘한 작품들로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다. 또 바티칸 박물관과 바티칸 문서 자료관에는 역사상 귀중한 콜렉션을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다. 바티칸은 1984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바티칸은 일종의 성지(聖地)이기 때문에, 명문화되지는 않지만 복장 규정이 있다. 특히 관광객이라 해도, 바티칸에 입국할 때 복장에 신경쓸 것(반바지 금지 등)을 요구받는다. 아울러, 필리핀과 영국령 사크 섬과 함께 전세계에서 이혼 제도가 없는 3개 지역 중 한 곳이다. 바티칸은 순례자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방문하는 관광객으로 언제나 떠들썩하다. 교황은 세계 각국에서 방문하는 신도들을 위해서 매주 일요일에는 그들 앞에서 미사를 거행해, 평일에도 평신도들과 함께 하기 위해 알현 등을 실시하고 있다. 부활절 등 특별한 축일에는 성 베드로 광장에 모습을 보여 전 세계에 인사를 보내는 것이 관습이 되고 있다. 831년 832년 833년 834년 835년 836년 837년 838년 839년 840년 841년 토번국 멸망하다 842년 843년 844년 845년 846년 847년 848년 849년 850년 노바스코샤주 노바스코샤주(, ←"새 스코틀랜드에서", )는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주(州)이며, 주도(州都)는 핼리팩스이다. 대서양에 접한 반도이며 북서쪽으로 본토와 유일하게 육지로 연결되는 뉴브런즈윅주와 경계를 접한다. 주 이름의 의미처럼, 스코틀랜드 문화가 강한 주이며, 스코틀랜드계 주민이 29.3%를 차지한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의 고향이 바로 이곳 노바스코샤이다. 최소한 10,000년 전 노바스코샤에 인류가 살았다. 고고학자들이 구석기 시대 인디언으로 부르는 가장 초기 주민들은 주로 순록의 떼 옆에 살던 사냥꾼들이었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노바스코샤에 도달하였을 때 미크마크 족이 그 지역에 살았다. 오늘날 미크마크 족은 자신들이 노바스코샤 주에서 가장 초기의 주민들의 자손이라고 숙고한다. 지방의 초기 거주민들은 여름에 해안을 따라 낚시를 하였으며, 겨울에는 산림의 내륙 지방에서 사냥을 하였다. 1497년 잉글랜드에서 복무하던 이탈리아의 항해자 존 캐벗이 케이프 브레튼 섬 혹은 뉴펀들랜드에 상륙하였다. 캐벗은 자신이 아시아에 상륙한 것으로 믿었다. 1520년과 1524년 사이에 몇몇의 다른 탐험가들이 서부로 아시아로 향하는 해로를 찾는 시도를 하는 동안 노바스코샤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항해자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와 2명의 포르투갈의 항해자 주장 알바레스 파군데스와 에스테반 고메스를 포함한다. 베라자노는 프랑스의 봉사에서 탐험을 하고 고메스는 스페인의 봉사에 항해를 하였다. 어떤 역사가들은 파군데스가 케이프 브레튼 섬에 식민지를 창립하였다고 생각한다. 1500년대 후반의 여름 동안에 프랑스와 바스크족 고기잡이 선원들은 자신들이 앞바다에서 잡은 마른 대구를 위하여 노바스코샤의 항구들을 이용하였다. 이 선원들은 매 가을 마다 프랑스로 돌아갔다. 1598년 프랑스의 앙리 4세는 대서양 캐나다의 다양한 지역에서 모피 교역의 독점을 프랑스의 귀족 마르키 드 라 로셰 - 메스구에에게 승인하였다. 라 로셰는 자신이 일 드 부르봉이라고 이름을 지은 세이븡 섬으로 대략 50명의 남자들의 원정을 동행하였다. 그해 후반에 라 로셰는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다른 남자들은 섬에 머물었다. 많은 이들은 사망하였다. 하지만, 약간의 생존자들은 1603년에 귀국하는 데 자신들의 길을 만들었다. 1603년 앙리 4세는 프랑스의 귀족 피에르 뒤 가 드 몽스에게 노바스코샤를 포함한 지역에 대지와 교역 권리들을 승인하였다. 드 몽스와 사뮈엘 드 샹플랭을 포함한 다른 탐험가들은 1604년 현재의 노바스코샤 주, 뉴브런즈윅주와 메인주에 속하는 해안을 따라 함께 항해를 하였다. 샹플랭은 해안의 첫 정확한 해도를 만들었다. 노바스코샤 지방과 그 주위의 대지는 아카디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드 몽스는 뉴브런즈윅 주를 메인 주로부터 갈라지게 하는 생크루아 강의 입구에서 기지를 설립하였다. 1605년 어려운 겨울 이후에 기지는 오늘날 애나폴리스 로열 근처의 포트로열로 옮겼다. 새 정착지는 미크마크 족과 모피 교역을 위한 거류지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지로서 취급되었다. 1613년 버지니아에서 온 잉글랜드의 원정대가 포트로열의 프랑스 정착지를 불태웠다. 선장 새뮤얼 아골이 공격을 지도하였다. 다음 150년 동안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이 아카디아의 통치를 위하여 서로 싸웠다. 1621년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를, 제임스 6세로서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국왕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알렉산더 경에게 대지의 승인을 만들었다. 그 승인은 오늘날의 노바스코샤 주(케이프 브레튼 섬을 포함), 뉴브런즈윅 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그리고 메인 주와 퀘벡주의 일부들을 포함하였다. 헌장은 새로운 스코틀랜드를 의미하는 노바스코샤로 지방을 부른 국왕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1629년 알렉산더 경의 아들 윌리엄 2세 경은 포트로열에 전 프랑스인 정착지의 지대 근처에 찰스포트를 지었다. 식민지는 1632년 평화 조역이 아카디아의 통치를 프랑스에 반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 회사에 의하여 보내진 식민주의자들은 포트로열의 통치를 차지하였으나 노바스코샤의 남해안에 라헤이브에 초기적으로 정착하였다. 1636년 경에 이 정착자들의 많은 이들은 농업을 위하여 더욱 가능성을 가진 포트로열 지역으로 다시 배치시켰다. 포트로열로 불린 그들의 주요 정착지는 원래의 포트로열 정착지로붜 대략 10 마일(16 킬로미터)이나 떨어져있다. 제방들을 지으면서 그들은 농사를 위하여 바다로부터 늪지대를 재주장하였다. 윌리엄 핍스 경 아래의 잉글랜드군이 1690년 포트로열을 포획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1697년 리즈윅 조약 아래 포트로열을 프랑스에 돌려주었다.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에서 온 영국군의 결합된 군단이 1710년에 다시 차지하였다. 그해에 영국인들은 포트로열을 1713년에 식민지의 수도가 된 애나폴리스 로열로 이름을 바꾸었다. 프랑스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아래에서 노바스코샤 본토를 포기하였다. 그 조약은 거기에 남아있던 아카디아인들의 영국 주제를 만들었다. 조역은 프랑스가 일루알(현재의 케이프 브레튼 섬)과 일생장(현재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을 간직하는 데 허락하였다. 양국은 오늘날 뉴브런즈윅 주의 대부분에 권리를 주장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지방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단언하는 데 일루알에 있는 루이부르에 요새화한 타운을 지었다. 영국에 의하여 통치된 뉴잉글랜드에서 온 군인들이 영국의 왕립 해군의 원조와 함께 1745년 요새를 포획하였다. 프랑스는 1748년 유럽의 전쟁을 가라앉힌 애라샤펠 조약 아래에 다시 얻었다. 그러나 루이부르는 7년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1758년에 영국에게 떨어졌다. 영국인 정착자들은 1749년 핼리팩스를 설립하고 같은 해에 노바스코샤의 수도가 되었다. 1750년대에 많은 프랑스, 독일과 스위스의 개신교도들이 노바스코샤로 이주하였다. 1755년 노바스코샤 의회는 모든 아카디아인들의 국외 추방에 명령을 내렸다. 그때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의 통치를 위하여 싸우고 있었으며 의회는 아카디아인들의 영국에 충성에 의심하였다. 이듬의 해들에 1763년까지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온 군인들이 강제적으로 노바스코샤, 일생장과 일루알로부터 대략 10,000명의 아카디아인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처음으로 그들은 아카디아인들을 프랑스로 보냈다. 이 대변동의 시기 동안에 병과 난선들이 많은 아카디아인들을 죽였다. 1763년 경부터 1785년까지 많은 아카디아인들이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였다. 또한 1700년대 동안에 영국인들은 미크마크 족들과 평화와 우호 조역들의 연속들에 동의하였다. 1725년부터 1779년까지 창조된 이 조약들은 오늘날 미크마크 족에 의하여 대지의 주장을 위한 근거를 형성하였다. 1758년 영국 정부는 대표적 회의를 선출하는 데 노바스코샤 주에서 식민주의자들을 허락하였다. 첫 회의는 핼리팩스에서 열렸으며, 주민들에게 그들의 정부에서 어떤 발원권을 주었으나 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총독과 의회는 지속적으로 주를 통치하였다. 1763년 파리 조약은 공식적으로 케이프 브레튼 섬(전의 일루알)과 세인트존스 섬(전의 일생장)을 영국에게 주었고, 그들은 노바스코샤 주의 일부가 되었다. 세인트존스 섬은 1769년 갈라진 식민지가 되어 1799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케이프 브레튼 섬은 1784년부터 1820년 또 다시 노바스코샤 주의 일부가 될 때까지 갈라진 식민지로서 존재하였다. 1760년 뉴잉글랜드인들을 실은 20척 이상의 배들이 노바스코샤 주에 도착하였다. 뉴잉글랜드인들은 아카디아인들이 재주장한 기름진 늪의 대지들을 차지하고 그들은 많은 새로운 정착지들을 설립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는 동안과 그 후에 미국으로부터 대략 35,000명의 주민들이 노바스코샤 주에 왔다. 왕당파로 불린 이 주민의 대부분은 독립 전쟁에서 영국에 싸우는 것을 거부한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셸번을 설립하고, 또한 가이즈버러, 딕비와 다른 타운들에 정착하였다. 어떤 왕당파들은 노바스코샤 주에서 노예 제도로부터 자유가 약속된 흑인들이었다. 왕당파들의 수는 1763년 이래 영국이 노바스코샤의 일부로서 통치한 오늘날의 뉴브런즈윅 주에 정착하였다. 1784년 뉴브런즈윅은 자신의 행정과 함께 갈리진 식민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교회 등 기독교인들이 1773년에 동부 노바스코샤 주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다음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큰 수에 이민을 와서 후에 픽토우와 앤티고니시 카운티들이 된 지역에 주요 단체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이민들도 또한 1800년대 초반에 도착하여, 주로 핼리팩스와 그 주위에 정착하였다. 미영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더 많은 흑인들이 미국에서 왔다. 1848년 영국 정부는 노바스코샤 주에게 식민지의 행정 내각에 선출된 대표 회의 권안을 주었다. 거기서 노바스코샤 주는 대영 제국 안에서 최초의 자치 정부 식민지가 되었다. 노바스코샤 주의 강렬한 편집자이자 정치인 조지프 호우는 자치 정부를 위한 싸움을 이끌었다. 1800년대 동안에 노바스코샤 주는 번창하는 산업과 늘어나는 세계 무역과 함께 번영하였다. 조선 회사들은 상선을 짓는 데 주의 산림에서 온 재목을 이용하였다. 1860년으로 봐서 노바스코샤 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상선 함대들의 하나를 가졌다. 1867년 노바스코샤 주는 캐나다 자치령으로 불린 연방을 형성하는 데 뉴브런즈윅 주,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와 함께 가입하였다. 그러나 많은 노바스코샤 주민들은 연합에 반대하여 고 연방을 후원한 지도자들을 축출하였다. 다음 25년은 노바스코샤 주를 위한 경제적 어려움의 시기였다. 투자자들은 주를 산업화하는 데 비성공적인 노력에서 해운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1890년대 후반 동안에 석탄과 제철 산업이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핼리팩스에는 북아메리카와 유럽 사이를 오가는 연합국 호송선을 위한 본부가 위치하게 되었는데, 1917년 폭발물을 실은 프랑스 배가 마침 핼리팩스 항구에 정박한 노르웨이 배와 충돌하여 폭발하였다. 이 폭발로 인해 대략 2,0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고 도시의 거의 모든 부분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이어 노바스코샤 주는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불안을 함께 경험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떠났다. 잠시 번성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어려운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1950년대 중반에 캐나다의 전부의 전후 번영이 노바스코샤 주에 새어나기 시작하였고 주의 경제가 자라났다. 학교, 병원과 근대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캐나다 횡단도로의 노바스코샤 주 부분이 지어졌다. 1955년 주의 본토와 케이프 브레튼 섬을 잇는 캔소 인도가 완공되어 주의 경제 번창과 관광업의 확장에 공헌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주민들이 주의 도시 지역들로 이주하면서 노바스코샤 주의 시골 인구가 쇠퇴하였다. 1950년대 동안에 캐나다의 연방 정부와 노바스코샤 주 정부는 주 안에서 경제의 번창을 촉진하는 일을 하였다. 주와 연방의 대리들의 연속은 기간이 지난 산업을 문 닫고 새로운 것들을 끌어들이는 추구를 하였다. 이 대리들은 산업 소유지 유한 회사(1957년 설립), 케이프 브레튼 개발 주식 회사(1967년), 시드니 제철 주식 회사(1969년)과 노바스코샤 전력 주식 회사(1973년)를 포함하였다. 산업과 항구 시설들의 확장은 1970년대에 노바스코샤 주의 경제를 향상시키는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1970년 큰 컨테이너 상선들을 다루는 데 핼리팩스 항구에서 컨테이너 터미널이 개장되었다 1970년대 초반 동안에 캔소 해엽의 기슭에 산업 공원이 지어졌다. 190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몇몇의 중요한 경제적 개발들이 노바스코샤 주에서 일어났다. 화물, 특히 컨테이너 상선들의 늘어나는 양들을 다루는 데 주를 핼리팩스 항구에서 확장되고 계량된 시설들이 할 수 있게 하였다. 세이블 섬 근처에서 1970년대에 발견된 천연가스의 생산이 1999년에 시작되었다. 추가로 유람선들은 큰 관광객들의 큰 수를 노바스코샤 주, 특히 핼리팩스로 데려왔다. 하지만 주는 또한 경제적 도전을 향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동안에 연방 예산에 균형을 이루는 노력들이 감소된 주를 위한 기금으로 이끌었다. 결과로서 정부의 기획들이 전환되었다 어떤 지방 자치제 정부들, 병원과 학교부, 그리고 더 높은 교육의 연구소들이 돈을 모으는 데 노력에서 합쳐졌다. 1992년 정부는 주의 전기 서비스의 주요 공급자 노바 스코샤 전력 회사를 개인적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추가로 대서양 캐나다의 대구 잡이 산업이 사실상 남획의 이유로 쇠약해졌다. 서비스업은 노바스코샤 주의 국내 총생산의 가장 큰 부문을 생산한다. 서비스업들은 노바스코샤 주민의 다수를 고용한다. 많은 이 산업들은 핼리팩스 지역에 있다. 주도인 핼리팩스는 연방과 주 정부 활동들의 중심지이다. 핼리팩스 지역은 대서양 주들에서 가장 큰 금융의 중심지이다. 도시는 또한 노바스코샤 주에서 무역과 관광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큰 해군 기지가 핼리팩스에서 운영된다. 노바스코샤 주의 제조업의 거의는 주의 자역적 자원들의 가공에 중심을 잡았다. 식품과 음료 가공업은 지도적인 활동이다. 식품은 낙농제품, 생선 제품, 정육과 가금육, 그리고 저장된 과일을 포함한다. 목재와 종이 제품들의 제조업도 또한 주에 중요하다. 노바스코샤 주에서 공장들은 또한 항공 우주 제품, 항공기 부품, 보트와 배들을 제조하기도 한다. 큰 미쉐린 타이어 공장들은 브리지워터, 켄트빌과 뉴글래스고 근처에서 운영된다. 핼리팩스 지역은 석유 정제소를 가지고 있다. 노바스코샤 주는 생선 잡이의 가치에서 주들 중에 첫째로 랭킹에 들어와있다. 가재는 노바스코샤 주의 가장 가치적인 잡이이다. 주에 둘러싸인 바닷물에서 한번은 중요하던 대구는 거대하게 고갈되었다. 생선 양식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서의 바닷물과 브래스 도어 레이크에서 증가적으로 중요해졌다. 노바스코샤 주의 가장 가치적인 미네랄 산품들은 석고, 천연가스와 석유이다. 천연가스와 석유는 노바스코샤 주의 남동부 해안에 놓인 세이블 섬 근처에서 체굴된다. 석고는 핸츠, 인버네스와 빅토리아 카운티들에서 왔다. 가축과 축산물은 주의 농장 소득의 대부분을 마련한다. 우유는 지도적인 농산물이다. 주요 낙농업 지방들은 콜체스터 카운티와 애너폴리스 밸리에 있다. 주에서 다른 중요한 농산물은 육우, 닭과 달걀, 그리고 돼지이다. 사과, 블루베리와 딸기는 노바스코샤 주의 가장 가치적인 과일들이다. 장식용 꽃들과 종묘 산품들의 재배도 또한 중요하다. 크리스마스 트리 종묘들 이 부문의 지도적인 일부이다. 노바스코샤 주의 산림들은 주의 펄프와 종이 공장, 제재소, 소형선 조선소와 가구 공장들을 위한 목재를 공급한다. 단풍나무와 자작나무는 주의 주요 활엽수이다. 주요 침엽수는 발삼 전나무와 가문비나무를 포한한다.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노바스코샤 주의 인구가 913,462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주의 인구는 2001년에 보고된 총 908,007명에서 1 퍼센트 이하로 증가하였다. 노바스코샤 주민의 대다수는 원래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온 조상들을 가지고 있다. 다른 주민들의 중요한 수들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아프리카와 미크마크 계통이다. 케이프 브레튼에서 주민들의 소수는 아직도 자신들의 스코틀랜드인 조상의 게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노바스코샤 주에서 더욱 큰 수의 아카디아인과 미크마크 족은 아직도 제마다 프랑스어와 미크마크어를 쓰고 있다. 핼리팩스는 노바스코샤 주의 주도이며, 멀리서 주의 3개의 지방 자치제 중에 가장 크다. 그 자치제는 핼리팩스, 다트머스와 베드퍼드의 공동체들을 포함한다. 핼리팩스는 노바스코샤 주에서 주요 철도와 항공 터미널은 물론, 캐나다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들 중의 하나이다. 핼리팩스 지방 자치제는 캐나다 통계에 의하여 밝혀진 대로 주의 단 하나의 인구 조사국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인구 중심지를 포함한다. 노바스코샤 주의 두번째로 가장 큰 지방 자치제는 케이프 브레튼 지방 자치제이다. 그 자치에는 케이프 브레튼 섬에 있고, 시드니와 글레이스 만의 공동체들을 포함한다. 뉴브런즈윅주 뉴브런즈윅주 (영어 : New Brunswick [njuː bɹʌnz.wɪk] 프랑스 : Nouveau-Brunswick [nu.vo.bʁœn.swik, 퀘벡 프랑스어 : [nu.vo.bʁɔn.zwɪk])는 캐나다 동부 대서양에 면한 주. 아카디아 등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주민이 인구의 약 30 %를 차지하며, 영어 혹은 프랑스어 중 하나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다른 주와는 달리 두 언어 모두를 공용어로 하는 유일한 주이다. 주도는 프레더릭턴. 총 면적 73,500km², 주 인구는 75만 1,171명 (2011 년 추계). 서쪽으로 미국의 메인주, 북쪽으로 퀘벡주, 동쪽으로는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와 노바스코샤주를 경계로 두고있다. 현재 뉴브런즈윅 주에서 첫 유럽인 정착자들이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미크매크 족과 말리시트 족들을 찾았다. 둘다 이 주민들은 알곤킨어족에 속하였다. 미크매크 족은 지방의 동부를 돌아다녔다. 말리시트 족은 세인트존 강 유역에 살았다. 퍼스트 네이션의 주민들은 폭포로부터 내려오는 시냇물 혹은 강에서 조수의 더 멀리 도달하는 곳 근처에 진을 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위치들은 연어와 송어를 위한 최고의 잡이를 마련하였다. 퍼스트 네이션의 주민들은 또한 해안을 따라 대합조개와 굴을 모으기도 하였다. 1534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샬루어 만에 도착하였다. 더욱 나가서의 탐험은 1604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해 프랑스의 탐험가들 사뮈엘 드 샹플랭과 피에르 뒤 과 드 몽스가 펀디 만으로 항해하여 들어갔다. 그들은 해안을 탐험하고 세인트크로이 강의 입구에 있는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겨울을 보냈다. 1605년 그들은 펀디 만을 가로질러 현재 노바스코샤주에 있는 포트로열로 이주하였다. 1600년대 후반에 프랑스인 정착자들이 지역에 농장과 낚시장들을 설립하고, 그 지방을 아카디아라고 불렀다. 모피 교역을 설립하는 희망을 가진 이들이었던 프랑스인들은 영토의 통치를 위하여 자신들 사이에 싸우기 시작하였다. 가장 유명한 투쟁은 샤를 드 라 투르와 돌네 드 샤르니세 사이에 일어났다. 라 두르는 오늘날 세인트존 일대에 교역지와 요새를 가졌다. 드 샤르니세는 라 투르가 없는 사이에 그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교역인의 부인 마리 드 라 투어는 요새의 방어를 지도하였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프랑스인들 사이에 경쟁은 차차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에 경쟁으로 주어졌다. 남부로 잉글랜드의 식민지들이 재빠르게 번창하였다. 많은 잉글랜드의 선원들과 다른 주민들은 뉴브런즈윅 지방에 끌어들여졌다. 잉글랜드인들은 1654년 아카디아를 정복하였으나 1667년 브레다 조약에서 프랑스에게 돌려주었다. 1690년 잉글랜드인들은 다시 아카디아를 침입하였다. 앤 여왕 전쟁 이후, 프랑스는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아카디아의 노바스코샤 본토 지역을 영국에게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뉴브런즈윅의 대부분의 소유에 논쟁하였다. 많은 아카디아인들은 뉴브런즈윅 지방에 남아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마지막에서 영국이 지방을 포획하였다. 그들은 많은 아카디아인들을 추방하였다. 파리 조약은 아카디아의 뉴브런즈윅 부분의 영국 소유를 확립하였다. 뉴잉글랜드에서 온 교역인들이 1762년 세인트존에 도착하였다. 1763년 다른 뉴잉글랜드인들이 현재 프레더릭턴 근처에 있는 모거빌의 정착지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에 뉴브런즈윅 지방은 노바스코샤의 영국 주의 일부가 되었다. 많은 아카디아인들은 지방으로 돌아오는 데 허락되었다. 그들은 북부와 동부에서 대지들의 승인들을 받았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과 그 후에 영국에 충성한 대략 14,000명의 주민들이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으며, 대부분 1783년에 왔다. 이 왕당파들은 세인트존에 상륙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세인트존 강 유역 하류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프레더릭턴을 창설하였다. 다른이들은 미국과의 국경에 있는 패서매쿼디 만 근처에 정착하였다. 1784년 영국인들은 뉴브런즈윅을 갈라진 지방으로 설립하였다. 1785년 세인트존은 현재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합병된 도시가 되었다. 이듬해 식민지 입법이 창조되어 농부와 대지주들은 지방의 첫 입법부 회의를 선출하였다. 조선업과 영국과의 재목 교역은 1800년대에 번창하였다. 1815년 이후에 수천명의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착자들이 영국에서 직업들을 찾지 못한 이유로 뉴브런즈윅에 왔다. 이 아일랜드 이민들의 어떤이들은 아일랜드 대기근을 달아나고 있었다. 1825년 거대한 산불이 미라미치 강 지방에서 대략 6000 스퀘어 마일(16,000 스퀘어 킬로미터)를 지나가 타올랐다. 허리케인 같은 바람에 의하여 번진 화재는 전체의 정착지들을 휩쓸어 대략 15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였다. 집이 없는 정착자들은 다른 주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의류, 돈과 공급품들을 받았다. 1830년대로 봐서 뉴브런즈윅의 대략 5분의 4는 아직도 왕실 소유지들이었다. 재목 교역인들은 산림에서 운영하는 데 보수를 내야 했다. 1833년 지방의 입법부는 왕실 소유지들을 획득하는 데 운동을 시작하였다. 영국 정부는 1837년에 뉴브런즈윅에 대지들을 주었다. 뉴브런즈윅과 메인에서 온 정착자들이 애르스툭 강의 유역에 살았다. 영국과 미국은 이 지방에서 경계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고, 뉴브런즈윅과 메인의 벌목꾼들 사이에 논쟁들이 나타났다. 뉴브런즈윅과 메인에서 온 시민군들이 싸우려고 모일 때 1839년 최고점이 왔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은 애루스툭 전쟁으로 불린 논쟁을 가라앉히려고 윈필드 스콧 장군을 보냈다. 스콧은 휴전을 협정하였다. 1842년 영국과 미국의 권위자들은 뉴브런즈윅-메인 경계선을 설립하였다. 뉴브런즈윅의 인구가 자라나면서 지방 자치권을 위한 요구들도 자라났다. 정치적 권력은 차차 런던에 있는 영국 식민지 사무소로부터 프레더릭턴에 있는 지방의 입법부로 옮겨졌다. 1849년 영국은 뉴브런즈윅을 그 자신의 사정들에 거의 완료된 통치를 뉴브런즈윅에 승인하였다. 1864년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에서 온 사절단들이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의 샬럿타운에 모여 연합된 식민지를 형성하는 논의하였다.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에서 온 사절단들은 그들에게 가입하여 북아메리카 동부의 모든 영국인 지방들의 연방을 제안하였다. 사절단들은 1864년 퀘벡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캐나다 자치령의 창조로 이끈 캐나다 연방을 위한 계획을 끌어올렸다. 많은 뉴브런즈윅 주민들은 제안된 연합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잃을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지방의 정치 지도자 새뮤얼 레오너드 틸리는 더 큰 지방들이 자신들을 통치하지 않을 주민들을 납득시키는 주요 일부를 수행하였다. 1867년 7월 1일 뉴브런즈윅은 캐나다 자치령의 4개의 원래 주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른 주들은 노바스코샤주,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였다. 연방당의 앤드루 R. 웨트모어는 연방의 성립 후 뉴브런즈윅 주의 초대 지사가 되었다. 연방에 이은 세월에 가장 두드러진 주지사는 1871년 무료의 공공 학교들을 설립한 법령을 통과시킨 조지 E. 킹이었다. 주의 수산업, 제재업과 광업은 차차 확장되었다. 그러나 철강 증기선 이용의 증가가 뉴브런즈윅 주의 항해선 산업이 종말로 이끌었다. 그 산업은 중요한 섬유와 철강 산업들로 대체되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동안에 많은 뉴브런즈윅 주민들이 서부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방들은 더욱 나은 직업 기회들을 제공하였다. 1890년으로 봐서 2개의 국내 철도 시스템들이 뉴브런즈윅 주의 도시들을 몬트리올과 이었다. 세인트존은 캐나다 동해안에 주요 겨울 항구로서 노바스코샤 주의 핼리팩스와 함께 랭킹에 들어왔다. 하지만 온타리오 주와 퀘벡 주는 캐나다에서 제조업과 무역을 통치하였다. 1900년 이후 펄프 산업이 뉴브런즈윅 주에서 증가적으로 중요해졌다. 공공 근로 프로그램들은 1900년대 초반 동안에 주에서 통신과 교통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1919년과 1925년 사이에 뉴브런즈윅 주의 산업들은 심각한 쇠퇴를 겪었다. 회복이 서서히 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에 주요 번창이 종이 산업에서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주의 펄프와 제지 산업들은 거대하게 확장되었고, 조선업은 세인트존 지역에서 중요해졌다. 구리, 납, 은과 아연의 큰 매장량들은 1952년과 1953년에 배서스트-뉴캐슬 지방에서 지도에 그려졌다. 1953년과 1957년 주는 광업과 제조업을 위한 추가적인 전력을 공급한 수력 발전소들을 완공하였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석유 정제소가 1960년 세인트존에 건설되었다. 배서스터-뉴캐슬 금속 광석 매장량들에 관계된 건설 프로그램이 1962년에 시작되어 1968년에 완공되었다. 프로그램에서 계획들은 화확품과 비료 공장, 부두와 해운 시설, 제재와 제조 회사, 광산과 파이프라인들을 포함하였다. 금속 광석의 체굴은 지방의 가장 큰 광산이 운영을 시작할 때 1964년에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건설 프로그램에 의하여 마련된 경제적 자극에 불구하고 뉴브런즈윅 주의 생활의 표준은 국내적 수준의 아래에 남아있었다. 주의 외부 이동이 솟아 올랐다. 1968년 수력발전소가 프레더릭턴 근처에 있는 세인트존 강에 노인 맥터쿼크 댐에서 개장되었다. 이 발전소에서 온 전력의 절반 이상이 배서스터-뉴캐슬 지방에 있는 산업 지대들로 간다. 1960년대 후반 동안에 주지사인 자유당 소속의 루이 J. 로비쇼가 자신이 부른 동등한 기회의 프로그램에서 주를 지도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주 정부는 모든 재판소, 학교와 보건·복지 연구소들의 운영을 차지하였다. 활동은 주의 전역을 통하여 그런 시설들에 의하여 마련된 서비스들의 품질을 동등하게 하는 데 장악되었다. 로비쇼의 시기는 또한 뉴브런즈윅 주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카디아인 소수를 위한 더욱 많은 문화적, 경제적과 정치적 역할과 함께 협조되었다. 1969년 뉴브런즈윅 주 입법 회의는 입법부 자신에 프랑스어를 영어와 함께 재판소, 정부 사무소와 학교들에서 동등한 지위의 공용어로 만든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해 후반부에 캐나다 국회는 공용어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10 퍼센트 이하의 주민들이 프랑스어를 쓰는 구역들에서 두개국어에 서비스를 마련하는 데 연방 시설들을 요구한다. 이 법률 아래, 뉴브런즈윅 주의 전체는 연방 서비스들을 위한 두개국어 구역을 숙고하였다. 뉴브런즈윅 주의 조선업 시설들은 1970년대에 확장되었다. 1970년 유조선을 위한 북아메리카의 첫 심해 터미널이 세인트존 근처에 개장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세인트존 지역은 주요 산업적 확장을 경험하였다. 주요 계획들은 조선업과 석유 정제 단지들의 확대를 포함하였다. 식품 가공업, 광업과 임업들도 또한 뉴브런즈윅 주를 통하여 확장되었다. 1983년 대서양 캐나다에서 첫 원자력 발전소가 포인트 레프로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1983년과 1985년에 2개의 칼륨 광산들이 주의 남부에 있는 서식스 지방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7년 지속된 홍수가 광업의 큰 수를 닫는 원인을 가져왔다. 또한 그해에는 컨페더레이션 다리가 완공되었으며, 뉴브런즈윅 주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를 잇는 데 뉴섬벌랜드 해협을 따라 뻗어나간다. 1990년대에 주 정부는 전화 통화 센터들 같은 정보 기술 비지니스들에서 투자를 촉진시켰다. 주의 지도자들의 전진하는 근심은 특히 북부에서 노동력을 위한 직업들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혹은 젊은이들의 캐나다의 다른 부분들로 이동을 막는 데 자라왔다. 1996년 채섬에 있는 왕립 캐나다 공군 기지가 문을 닫았다. 2000년대 초반에 펄프와 다른 목재 제품들을 생산한 제재소들이 배서스트, 덜하우지, 미라미치와 다른 위치들에서 문을 닫았다. 다른 제재소들은 생산을 줄였다. 수백명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잃었다. 왕립 캐나다 해군을 위한 최신식의 순찰 프리깃함을 생산한 세인트존 부두와 조선소도 또한 문을 닫았다. 서비스업은 뉴브런즈윅 주의 국내총생산과 고용의 가장 큰 부문을 마련한다. 세인트존과 멍크턴은 뉴브런즈윅 주에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들이다. 주도인 프레더릭턴은 정부 활동의 중심지이다. 뉴브런즈윅 주 제조업의 거의는 주의 농산물과 임업 제품의 가공에 봉납하는 편이다. 지도적인 식품들은 제과류, 낙농제품과 수산물의 제품들을 포함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프렌치프라이 생산 회사 매케인 식품이 플로런스빌에 본사를 두었다. 종이와 재목 제품들도 또한 중요하다. 펄프와 제지의 공장과 제재소들은 주의 전역을 통하여 운영된다. 세인트존은 큰 석유 정제소가 있으며, 정제된 석유는 중요한 수출품이다. 금속은 뉴브런즈윅 주 광업 소득의 가장 큰 부문을 바련한다. 아연이 지도적인 금속 광물이다. 구리, 납과 은도 또한 높은 랭킹에 들어와있다. 금속 광산의 대부분은 배서스트 지역에서 일어난다. 주로 비료로 사용되는 토탄은 주의 북동부에서 수납된다. 석탄은 그랜드레이크 근처에 있는 민토치프먼에서 체굴된다. 비료를 만드는 데 쓰이는 쓰이는 칼륨은 서식스 지역에서 체굴된다. 뉴브런즈윅 주에서 잘라지는 나무들의 대부분은 발삼전나무와 가문비나무이다. 다른 상업적으로 중요한 나무들은 미루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히말라야산목,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포함한다. 임업은 1970년대 이래 1조 그루 이상의 새로운 나무들을 심었다. 가재와 게는 뉴브런즈윅 주의 가장 중요한 잡이이다. 주는 연어, 송어와 물고기의 몇몇의 다른 타입들을 생산하는 양식업이 자라나고 있다. 감자는 뉴브런즈윅 주에서 지도적인 수확물이다. 감자의 대부분은 칼턴과 빅토리아 카운티들에서 왔다. 뉴브런즈윅 주는 또한 종묘품과 장식용 꽃의 중요한 생산주이다. 농부들은 또한 과일과 채소의 다수를 생산하기도 한다. 낙농제품은 지도적인 축산물로서 랭킹에 들어와있다. 낙농업의 거의는 주의 남동부에서 일어나는 편이다. 가축을 기르는 농부들은 육우, 돼지와 가금류를 사육하기도 한다.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뉴브런즈윅 주의 인구가 729,997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주의 인구는 2001년에 본 729,498명에서 1 퍼센트 이하를 증가하였다. 뉴브런즈윅 주민의 대략 절반은 도시 지역들에 산다. 주민의 대략 3분의 1은 멍크턴과 세인트존의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에 산다. 멍크턴과 세인트존은 캐나다 통계에 의하여 규정되면서 주의 단 하나의 인구 조사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이 있다. 프레더릭턴은 20,00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뉴브런즈윅 주에서 단 하나의 다른 도시이다. 주는 10,000명 이상의 인구와 함께 한 몇몇 만의 도시와 타운들이 있다. 모든 100명의 뉴브런즈윅 주민의 대략 96명은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다른 주민들의 대략 절반은 미국 혹은 영국에서 왔다. 뉴브런즈윅 주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이며, 캐나다에서 단 하나의 입법적으로 2개국어를 사용하는 주이다. 주민의 대략 3분의 2는 자신들의 토착 언어로서 영어를 쓴다. 그들은 1700년대에 아메리카 식민지를 떠난 왕당파의 자손들을 포함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다른 이들은 1800년대에 도착한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계통을 포함한다. 아카디아인들로 불리는 뉴브런즈윅 주민의 대략 3분의 1은 자신들의 토착 언어로서 프랑스어를 쓴다. 주의 남부와 서부는 대부분 영어를 쓰는 편이다. 아카디아인들은 북부와 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뉴브런즈윅 주민의 대략 3분의 1은 양국어를 다 쓰는 편이다. 뉴브런즈윅 주에서 대략 18,000명은 아메리카 인디언 계통이다. 영국 연방 영국 연방(英國聯邦, )은 영국 본국과 함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옛날 영국의 식민지였던 52개의 국가로 구성된 국제 기구이다. 통상 줄여서 영연방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세에 영국은 지리상 신발견의 대항해에 동참하여 식민지 제국을 만들었다. 18세기에는 캐나다를 통일하여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확정했으며 1788년 죄수들을 시드니에 유배시켜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화의 기반을 닦았다. 1600년에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인도는 1877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로 즉위하여 단순한 식민지가 아닌 동군 연합의 성격을 가미시켰다. 1867년 캐나다가 자치령으로 승격된 이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자치령이 되어 영국 국왕에 충성한다는 공동의 취지하에 영연방의 윤곽이 잡혔다. 1947년 인도, 파키스탄 등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이 독립하여 영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영연방은 문화적 다원주의로의 체제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1949년 영연방 총회는 런던 선언(London Declaration)에서 '영국 국왕은 영연방의 수장(首長)이며 자유로운 결합의 상징'이라 정의하였다. 이리하여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은 사실상 필요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구의 이름이 브리튼 연방()에서 네이션 연방()으로 바뀌었다. 1971년 영연방 총회는 싱가포르 선언에서 영연방을 '인류 공통의 이익인 국제적인 이해와 세계 평화를 촉진시키고 협력하는 독립 주권 국가들의 연합체'로 정의하였다. 모잠비크(포르투갈의 식민지)와 르완다(벨기에의 식민지)는 영국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영국 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즉, 현재의 영연방은 국제법적 의미의 연방국가와는 개념이 다른 느슨한 형태의 국제 기구일 뿐이다. 영연방 수장은 영국 국왕의 세습직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조지 6세 전 영국 국왕이 초대 수장을 역임한 이래 엘리자베스 2세 현 여왕이 수장직을 물려받았으며, 2018년 4월 엘리자베스 2세는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차기 수장으로 영국 찰스 왕세자를 추천하였다. 영국 테리사 메이 총리는 찰스 왕세자를 차기 영연방 수장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영국 야당인 노동당은 회원국이 돌아가며 수장을 맡는 것이 적정하다며 반대하고 있다. 괄호 안에 있는 날짜는 영국 연방에 가입한 날짜를 의미한다. 굵은 글씨는 영국 연방 왕국을 구성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근래 영국 연방의 영향을 받아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과 그 국가들의 이전 식민지 국가들이 유사한 기구들을 만들었다. 훈민정음 《훈민정음》(訓民正音, )은 조선조 제 4대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 그리고 그 책에서 해설하고 있는 뒷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세종대왕이 궁중에 정음청(正音廳)을 두고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25년(1443년)에 완성, 28년(1446)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이라는 말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라는 뜻으로, 독창적이며, 쓰기 편한 28자의 소리글자였다. 한글은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면서 조선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통하여 문자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훈민정음의 판본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크게 해례본(한문본), 언해본이 있고, 그밖에 예의본이 있다. 실록본이 있는데, 이는 예의본에 속한다. 이 가운데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부가 존재한다.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 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 센티미터, 세로 32.3 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다. 훗날 이것을 입수한 간송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개 삼아 잤다고 한다. 상주본은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익기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했다. 세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 모씨가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 상주본은 낱장을 비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서적을 오히려 훼손할 우려가 있어 서적 보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분쟁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민사 소송에서 대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으며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배 씨는 형사 재판에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안동 광흥사에서 복장유물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어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배 씨에게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2심 과정에서 조씨가 주장하는 보관 과정과는 배치되고, 배씨와 일치되는 증거가 나왔다. 재판부는 골동품상 조모씨등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고 직접 본 사람과 다른 점, 절취하였다는 날 직후에 공개된 점이 의심스러운 점을 무죄 선고의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1년 5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유권자는 조씨라고 확정 판결했다. 배씨는 2012년 9월 무죄로 풀려났지만 재판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듯하여 조씨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배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들을 위증 및 교사 등 혐의로 고발하면서 현재 외부와 연락을 끊은 상태이다. 그러나 경북 상주시는 '훈민정음해례 상주본'을 상주박물관에 유치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고 2013년 4월 9일 밝혔다. 한편 배익기씨는 2017년 4월 12일 재보궐선거에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 책은 한글의 창제 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책이다. 《해례본》에 포함되어 있는 예의(例義)는 특히 창제 당시의 자체(字體)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그 중 가장 높이 평가된다. 또한, 해례는 오랫동안 문제로 삼던 글자의 기원 등 여러 가지의 의문점을 밝혀 주고 있다.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간송본(국보 70호)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 모두 한글 창제 원리를 풀이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다.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 편찬됐다. 서울 간송미술관에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이지만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학자의 어문학적 견해가 많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예의본》은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후쿠야마 번 후쿠야마 번()은 에도 시대의 번 이름이다. 1607년 1607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617년 1617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624년 1624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851년 852년 853년 854년 855년 856년 857년 858년 859년 860년 861년 862년 863년 864년 865년 866년 0866.11.17 (신라 경문왕 6년) 해적이 나타남 배구 배구(排球)는 각 6명 또는 9명(국제 경기에서는 각 6명을 많이함, 사회 경기에서 각 9명을 많이함.)으로 구성된 두 팀이 중앙에 네트가 설치된 코트에서 네트 너머로 공을 쳐 넘기며 겨루는 구기 경기 종목이다. 배구는 189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홀리오크(Holyoke)에 있는 YMCA의 체육부장 윌리엄 모건(Williams G.Morgan)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당시 모건은 과격한 농구보다 유연한 구기 종목의 필요성을 느껴, 흥미있고 남녀노소가 적당한 운동으로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운동을 모색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배구의 초기 명칭은 미노넷(Minonette)으로 불리었다. 테니스에서 힌트를 얻어 테니스 네트를 체육관 중앙에 6피트 6인치 높이에 설치하여 시험하였고, 미국 매사추세츠의 스프링 필드의 할스테드(DR.Halstead)씨가 볼을 네트 위로 넘겨 날려 보내는 게임을 창안해낸 후부터 ‘Volley Ball’ 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처음엔 직장인을 위한 레크레이션 활동으로서 고안되어 1팀이 5명으로 이루어져 21점제로 게임을 했었는데, 1918년 6인제·15점제·로테이션제라는 6인제 국제규칙이 확립되었다.(지금은 2000년 1월 1일부터는 새롭게 바뀐 25점 랠리포인트제(5세트는 15점)로 국제경기 진행) 미국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배구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군들을 통해 유럽 지역에 전해졌고, 1947년 프랑스 파리에서 소련,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 등 1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FIVB(Federation Internationale de Volleyball:국제배구연맹)가 창설되었다. 이러한 단체가 결성되면서 배구 규칙도 통합 제정되고, 국제 경기도 개최되는 등 배구 경기의 열기를 자극시켰다. 이렇게 발전한 배구가 올림픽 종목으로서 처음 채택된 대회는 1964년 제18회 도쿄 올림픽이다. (남자배구는 1961년 아테네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여자배구는 이듬해인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결정) 배구 경기는 한 팀이 6명으로 구성된다. 리베로까지 포함할 경우 1명이 추가되어 7명의 선발 엔트리를 정할 수 있다. 국내 리그의 경우 한 팀에 등록 가능한 최대 선수는 18명이고, 국제 경기의 경우 한 팀은 18명(정규 선수 14명, 리베로 4명)으로 구성된다. 국제식은 6+1인제이지만, 사회체육에서는 9인제도 많이 하고 있다. 배구는 두 팀 간에 네트를 사이에 두고 볼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서로 쳐서 상대방 팀의 코트에 떨어지게 하는 구기스포츠이다. 한 팀은 공을 3번 접촉한 뒤에는 반드시 네트 너머로 되돌려 보내야 하고 발리볼이라고도 하며 6인제와 9인제가 있다. 센터 공격수는 코트 가운데에 위치하며, 블로킹 및 속공에 가담하는 포지션이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을 블로킹해야 하는 특성상 체력 소모가 심하고, 수비시에 리베로와 종종 교대된다. 라이트 공격수는 주로 오른쪽 공격을 도맡아 하며, 수비에 가담하기보다는 공격 비중이 높다. 왼손잡이 공격수가 주로 라이트 포지션에 위치하는데 이는 코트에서 토스한 공을 때릴 때 공을 마주 본 채로 때리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라이트가 공격만 하다보니 수비 부담이 있다. 리베로와 함께 리시브를 책임진다. 보통 2명을 두는데 모두 수비에 가담한다. 제1레프트는 수비, 제2 레프트는 수비와 공격을 둘다 맡는다. 세터는 주로 공을 다른 공격수에게 토스하는 역할을 하며, 때때로 2단 공격에 가담하기도 한다. 리베로는 수비 전문 포지션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디그하거나 서브를 리시브하는 역할을 한다. 리베로는 코트에 있는 주로 후위에 있는 센터와 교대가 가능하지만, 반드시 후위에 위치해야 하며 공격에 가담할 수 없다. 심판은 대개 1명의 주심, 1명의 부심 및 2명 또는 4명의 선심으로 구성된다. 길이 18m, 너비 9m로서 구획선에서 2m 이내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어야 한다. 남자 경기는 높이 2.43m, 여자 경기는 2.24m이다. 지름 20cm, 무게 270g 정도이며, 겉은 부드러운 가죽으로 싸여 있다. 배구의 기본 기술에는 패스·토스·서브·리시브·스파이크·블로킹 등이 있다. 상대편 공격을 리시브하여 공격 플레이로 전환시키는 기본 기술이다. 즉 패스는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의 원동력이 되며, 게임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술이다. 패스할 때의 기본 자세는 발은 앞뒤로 벌리고 발뒤꿈치를 약간 들며, 무릎을 굽혀 몸의 중심을 낮게 한다. 두 손의 엄지와 엄지 사이를 약간 벌리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삼각형을 만들며, 다른 손가락의 힘을 빼고 공 모양을 만든다. 패스를 변형한 기술로, 세터가 공격자인 스파이커에게 공격하기 쉽도록 공을 띄워 올려 주는 기술이다. 공격 방법, 세터와 공격자의 거리, 위치 등을 고려하여 토스해야 한다. 공을 인플레이시키는 수단으로서, 엔드 라인 밖에서 네트 너머로 상대 코트 안에 공을 쳐서 보내는 공격 기술이다. 서브권을 가진 팀의 순번에 해당하는 선수가 주로 손이나 손목으로 쳐서 상대편 코트에 넣되, 일단 공이 손에서 떨어지게 한 다음 쳐야 한다. 서브를 넣는 선수는 서브권이 상대편에게 넘어갈 때까지 계속 서브를 넣는데, 서브권을 얻은 팀은 위치를 시계 바늘과 같은 방향으로 각각 한 자리씩 이동한다. 공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상대 코트에 넘길 수 있는 서브이다. 무릎과 상체를 앞으로 굽힌 자세에서 공을 짧게 위로 올려 팔을 뒤에서 앞으로 흔들어 올리면서 쳐낸다. 공을 머리 위에서 치는 오버핸드 서브의 기본 방식으로서, 팔의 힘과 손목의 스냅으로 인해 스핀이 주어진다. 공이 네트를 넘어 직선으로 떠오르도록 하는 서브이다. 공을 위로 던져 놓고, 큰 원을 그리면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감듯이 쳐내는 서브이다. 플루팅도 섭하며 공의 중심부를 재빨리 강하게 쳐서, 공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상대편 코트에 넘어가도록 하는 서브이다. 상대편이 서브한 공을 받아 올리는 것 등 상대의 공격 공을 받아 내는 기술이다. 리시브 방법에는 오버핸드 리시브와 언더핸드 리시브가 있다. 상대편 코트 안으로 공을 강하게 때려 넣는 기술로, 가장 위력적인 공격 방법이다. 높이 뜬 공을 상대편 코트의 빈 자리에 내리쳐야 하므로 점프력이 요구되며, 손목의 스냅과 허리의 힘을 잘 이용하여야 한다. 상대편의 공격을 직접 차단하는 기술로, 네트 가까이 있는 선수가 손을 펴들어 일종의 수비벽을 만드는 동작이다. 블로킹은 단독 블로킹보다 2, 3명이 동시에 행하는 블로킹이 훨씬 위력적이다. 도쿄 올림픽 대회 이후부터 블로킹할 때의 오버네트는 반칙이 아니라는 규칙이 적용되어,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경기 상황에 따라 3단 공격, 2단 공격, 시간차 공격, 페인트 공격 등 여러 가지 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스파이크 공격시 상대편 블로킹으로 수비의 허점이 생기지 않도록 재빨리 커버해야 한다. 수비는 서브 리시브에서부터 시작되며, 강한 스파이크에 대한 블로킹과 리시브가 요구된다. 867년 868년 테니스 테니스()는 두 명의 선수(단식) 또는 각각 두 명의 선수로 이루어진 두 팀(복식)이 겨루는 라켓 스포츠의 한 종류이다. 선수들이 줄이 매어진 라켓을 이용해 속이 비고 표면이 펠트로 이루어진 고무 재질의 테니스공을 쳐서 네트 너머 상대방의 코트로 계속하여 넘겨서, 어느 한 쪽이 공이 두 번 바운드 되기 전에 치지 못 하거나 친 공이 네트를 넘지 못 했을 때, 혹은 친 공이 상대방 코트에 들어가지 못 했을 때 그 실패한 선수의 상대방이 점수를 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경기의 종류는 선수 구성에 따라 단식과 복식, 혼합복식으로 나뉜다. 과거에는 소프트 테니스(연식 정구)와 함께 하드 테니스(경식 정구)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대 테니스는 19세기 후반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행해졌던 론 테니스(lawn tennis)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것은 크로케나 잔디 볼링과 같은 여러 종류의 필드 스포츠 및 옥내 테니스와 같은 더 오래된 라켓 스포츠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19세기에는 테니스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론 테니스가 아닌 옥내 테니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례로,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소설 시벌(sybal, 1845)에서는, 유진 드 비어 경이 '햄프턴 코트에 내려가서 테니스를 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테니스의 경기 규정은 1890년대 이래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 두 가지 예외는 1908년부터 1961년까지 서버가 서브를 할 때에 한 발이 계속 땅에 닿아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존재했던 것과, 1970년대에 타이 브레이크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최근의 변화는 호크아이라 불리는 전자 판독 시스템을 도입하여 선수가 심판의 공에 대한 인-아웃 판정에 대해 챌린지(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대 테니스의 기원은 두 갈래로 나뉜다. 1859~1865년 사이에 장군과 그의 친구였던 는 바스크 전통 공놀이의 일종인 펠로타에 라켓을 접목시킨 새로운 구기를 고안하여 영국 버밍햄의 크로케 구장에서 즐겼다. 1884년 7월 23일에는 슈러블랜드 홀(Shrubland Hall)에서 열린 최초의 테니스 대회 경기 모습이 녹화되기도 했다. 한편, 1873년 12월 월터 윙필드 장군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경기를 고안하였다. 그는 이 경기를 "스페어리스티크"(, , '공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뜻)라고 명명했으며, 이것은 이후 좀 더 간단하게 '스티키(sticky)'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이 경기를 웨일즈의 흘라넬리단(Llanelidan)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가든 파티를 열 때마다 손님들의 오락을 위해 활용하였다. 그가 고안한 경기는 좀 더 현대적인 스포츠인 실외 테니스나 리얼 테니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대 테니스의 관련 용어들이 이 시기에 윙필드 장군이 실내 테니스의 명칭 및 관련 프랑스어 어휘들을 차용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1877년 영국 윔블던에서 최초의 테니스 대회가 개최되었다. 미국의 사교계 명사였던 메리 유잉 아웃터브리지는 1874년 버뮤다에서 윙필드 장군을 만나고 돌아온 뒤, 뉴욕의 뉴 브라이튼 스테이튼 아일랜드(New Brighton Staten Island)에 위치한 에 테니스 코트를 만들었다. 이 클럽은 현재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페리 선착장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880년 미국 최초의 국제 테니스 대회가 이 곳에서 열렸다. O.E 우드하우스(O.E Woodhouse)라는 영국인이 단식 우승을 차지했으며, 복식에서는 미국인 복식조가 우승했다. 당시에는 클럽마다 규정에 다소 차이가 있어서, 보스턴 지역에서 사용되는 공은 뉴욕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크기가 컸다. 1881년 5월 21일 미국 국제 론 테니스 협회(현재의 미국 테니스 협회)가 경기 규정의 표준화 및 대회 운영을 위해 창설되었고, 오늘날의 US 오픈의 전신인 U.S. 국제 남자 단식 챔피언십이 역시 1881년에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개최되었다. U.S. 국제 여자 단식 챔피언십은 1887년 처음 열렸다. 테니스는 프랑스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프랑스 오픈이 1891년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열렸다. 이렇게 테니스의 초기 발전 시기에 생겨난 윔블던, US 오픈, 프랑스 오픈, 그리고 호주 오픈(1905년 최초 개최)은 그 오랜 역사로 인하여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테니스 대회로 인정받는다. 이 4개의 대회들은 "메이저 대회" 혹은 "그랜드 슬램"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국제 테니스 연맹의 전신인 국제 론 테니스 연맹(International Lawn Tennis Federation)은 1924년 공식 테니스 경기 규정을 발표했으며, 이 규정은 나중에 제임스 앨런()이 고안한 타이브레이크 제도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 80여년째 그대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한편, 같은 해인 1924년 이후부터 테니스가 올림픽 공식 종목에서 제외되었으나, ITF 회장이었던 필립 샤트리에(Philippe Chatrier), 데이비드 그레이(David Gray) 사무총장, 그리고 파블로 로렌스(Pablo Llorens) 부회장의 노력과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적극적인 지지로 60년 만에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21세 이하 시범종목으로 다시 채택되었다. 이 때의 성공에 힘입어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는 테니스가 다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00년에는 남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인 데이비스 컵이 창설되었다. 이 대회의 명칭은 순은 우승컵의 기증자인 드와이트 데이비스(Dwight F. Davis)의 이름을 따서 정해졌다. 유사한 형태의 여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인 페드 컵 대회가 1963년 ITF의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페더레이션 컵"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되었다. 1926년 C.C. 파일(C.C. Pyle)은 미국 및 프랑스의 테니스 선수들이 비용을 지불한 관객들과 시범경기를 가져주는 최초의 프로 테니스 투어를 만들었다. 이 당시 활동했던 가장 초기의 유명한 프로 선수로는 미국의 비니 리차즈와 프랑스의 쉬잔 랑글렌이 있었다. 이 당시의 대회는 프로와 아마추어로 나뉘어 있어서, 아마추어 선수가 일단 '프로 전향'을 하면 그 선수는 더 이상 메이저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60년대에 밀어 닥친 상업화의 물결과 일부 아마추어 선수들이 뒷돈을 받고 있다는 루머 등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결국 1968년부터 이와 같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 없어지면서 오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모든 선수들이 어느 대회든 제한 없이 참가할 수 있고 상위권 선수들은 테니스 선수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오픈 시대의 시작으로 국제 프로 테니스 서킷이 창설되고 TV 중계권료 수입이 생기면서 테니스는 세계 전역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하였고, 영어권 국가의 상·중류층 스포츠라는 낡은 이미지를 벗어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정관념은 현재도 부분적으로는 남아있다고 여겨진다). 1954년 밴 앨런은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비영리 기념관인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을 설립했다. 이 기념관은 테니스 관련 중요 기록들과 기념품, 그리고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 및 전 세계 테니스 선수들에 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매년 새로운 헌액자를 위한 기념 행사가 잔디 코트 대회와 함께 열린다. 테니스가 대한민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00년 초였으며, 최초의 공식 경기는 1927년에 열렸다. 경기(match)는 '점수(point) → 게임(game) → 세트(set)'로 구성된다. 한 경기는 보통 3세트(3전 2선승제)이다. 다만, 4대 그랜드 슬램, 데이비스 컵, 하계 올림픽의 남자 경기는 5세트(5전 3선승제)이다. 한 게임은 4점을 먼저 얻으면 승리하고, 한 세트는 6게임을 먼저 이겨야 승리한다. 다만, 점수가 3대 3이면 듀스가 되어 연속해서 2점을 먼저 얻어야 게임을 승리하게 되고, 게임이 5대 5이면 게임 듀스가 되어 7대 5로 이겨야 세트의 승자가 된다. 만약 게임이 6대 6이 되면, 타이브레이크에 따라 서로 번갈아 서브를 해서 7점을 먼저 얻는 선수가 승자가 된다. 다만, 4대 그랜드 슬램 중 프랑스 오픈, 윔블던 대회의 마지막 세트는 타이브레이크 없이 2게임을 연속으로 이겨야만 그 세트를 승리한다.//호주 오픈은 2019년 부터 타이브레이크 도입 상대가 5게임을 이기기 전에 먼저 6게임을 이기는 쪽이 승리한다. 게임이 5 대 5를 이루면 먼저 7게임을 이기는 쪽이 그 세트의 승자가 되며, 다시 6 대 6이 되면 타이브레이크로 세트의 승자를 가린다. 다만, US 오픈을 제외한 그랜드 슬램 대회는 타이브레이크를 적용하지 않고 듀스 규칙을 적용해 한 선수가 2게임을 연속으로 먼저 이길 때까지 계속 경기를 진행한다. 0점을 러브(love, 0), 1점을 핍틴(fifteen, 15), 2점을 써티(thirty, 30), 3점을 포티(forty, 40)라고 하며, 4점을 먼저 얻는 쪽이 이긴다. 3대 3은 듀스(deuce)가 되며, 듀스 다음에 1점을 득점하면 어드밴티지(advantage)라 부른다. 어드밴티지에서 다시 같은 선수가 연속으로 1점을 더 얻으면 그 게임의 승자가 되고, 반대의 경우 다시 듀스가 된다. 만약, 3 : 3 듀스가 되었을 때 먼저 상대방 보다 2점을 얻었다면 게임(game)이라 부른다. 테니스는 서브권을 가진 선수가 상대 코트에 서브를 하여 처음 공을 넘기면 상대 선수가 그 공을 한 번 바운드 시킨 뒤 받아치면서 시작된다. 최초에 서브를 받아 넘긴 이후에는 공을 바운드 시키지 않고 바로 치는 것이 허용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이 되면 상대 선수가 1점을 득점을 하게 된다. 코트 좌우 양쪽의 가장 바깥쪽에 그려진 선은 복식 사이드라인으로, 이것은 복식 경기에서 사용되는 코트를 표시한다. 복식 사이드라인 안쪽에 평행하게 그려진 선은 단식 사이드라인으로, 이것은 단식 경기에서 사용되는 코트를 나타낸다. 복식 사이드라인과 단식 사이드라인 사이의 길고 좁은 공간을 복식 앨리(alley)라 부른다. 네트와 평행하게 코트의 양쪽 끝에 그려진 선을 베이스라인(baseline)이라 하며, 베이스라인의 중앙에는 센터 마크가 있다. 네트와 베이스라인 사이에 평행하게 그려진 선을 서비스 라인(service line)이라 하는데, 서비스라인은 이 라인과 네트 사이의 공간에 서브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한쪽 서비스라인의 중앙에서 반대쪽 서비스라인의 중앙으로 네트를 가로질러 그어진 선을 센터 라인이라 한다. 서비스 라인과 센터 라인이 만드는 닫힌 직사각형 공간을 서비스 박스라 하며, 서브하는 선수는 서브를 이 공간 안에 넣어야 한다. 공이 첫 바운드 시에 라인 안쪽 공간이나 라인의 일부분에 닿지 않을 경우 '아웃'이라고 한다. 모든 라인의 너비는 51mm(1.2인치)가 되어야 하며, 베이스라인은 필요에 따라 그 너비를 100mm(4인치)까지 늘릴 수 있다. 주요 경기에서는 콜 저지 1명, 네트 엄파이어 1명, 풋폴트 저지 2명, 라인즈 맨 10명 등 14명의 심판으로 구성된다. 콜 저지, 즉 주심은 네트 옆의 의자에 높이 올라앉아 득점을 판정한다. 네트 엄파이어는 네트 포스트 부근에서 서브·네트에 관한 사항 등을 판정하며, 풋폴트 저지는 서브에서의 풋폴트를, 라인즈 맨은 인(in)·아웃(out)만을 판정한다. 테니스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테니스 경기의 종류는 두 사람이 경기하는 단식과 네 사람이 경기하는 복식, 그리고 남녀를 섞어 네 사람이 경기하는 혼합 복식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뉘며, 프로 대회의 경기는 모두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 여기에 더해 세 명이 함께 경기하는 변형된 형태의 경기 방식도 일부 존재하지만 프로 경기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단식(單式)은 동성(同性)의 선수 두 명이 일대일로 경기하는 방식이다. 복식(複式)은 동성(同性)의 선수 두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총 네 명의 선수가 경기를 하는 방식이다. 앨리라고 불리는 코트의 양쪽 사이드 공간을 포함하여, 단식보다 더 넓은 코트를 사용한다. 혼합 복식의 규칙은 복식과 동일하며, 다만 남녀 선수 한 쌍이 한 팀을 이루어 경기한다는 점이 다르다. 테니스 코트는 일정한 재질로 이루어진 사각의 평평한 땅이다. 코트의 길이는 23.77m이며, 너비는 단식의 경우 8.23m, 복식의 경우 10.97m이다. 코트 주변에는 선수가 뛰어 다닐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한다. 네트는 코트를 이등분하는 위치에 베이스라인과 평행하게, 코트 너비보다 약간 더 길게 세워진다. 네트 높이는 네트 포스트(기둥) 부분이 1.07m이며 가운데 부분이 91.4cm이다. 최초의 테니스 코트는 1873년 월터 윙필드 장군이 고안했던 스티케 테니스(스페어리스티크)의 코트 규격을 본따 만들어졌다. 이 코트 규격은 1875년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수정되었는데, 이것은 라인 구조는 윙필드 장군의 것과 유사했지만 코트의 형태가 모래시계 모양이 아닌 직사각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테니스 코트의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뉘며, 종류에 따라 공이 바운드되는 속도와 높이에 차이가 있다. 현대의 테니스 라켓은 길이, 무게, 헤드 사이즈 등이 다양하다. 길이는 주니어용 라켓의 경우 약 21-26인치이며, 성인용 라켓은 27-27.5인치 정도이다. 무게 또한 줄을 매지 않았을 때 8온스에서 12.5온스 정도 까지 다양하다. 헤드의 경우 그 크기에 따라 라켓의 특성이 달라진다. 헤드가 클 경우 일반적으로 더 강한 파워를 낼 수 있으며, "스윗 스팟(sweet spot)"이 더 넓어서 공을 라켓에 맞추기가 더 쉽다. 헤드가 작을 경우 더 정확한 컨트롤이 가능해진다. 오늘날 라켓의 헤드 크기는 90평방인치에서 137평방인치까지 다양하다. 대량생산되는 라켓 중 가장 작은 헤드 크기를 가졌던 모델은 윌슨 프로 스태프(Pro Staff) 6.0으로 85평방인치의 헤드 크기를 가졌다. 라켓의 줄은 거트(gut)라고 하며, 스트링(string)이라고도 한다. 무게는 56.70~58.47g, 지름은 6.35~6.68cm의 것을 이용한다. 색상은 옅은 초록색이나 노란색이 주종을 이루지만 제한은 없어서, 노란색과 주홍색 등 두 가지의 색상으로 이루어진 공도 있다. 그랜드 슬램은 테니스 대회들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래 4개 대회를 가리킨다. 869년 870년 필드하키 필드하키(, ) 또는 지상 하키 경기는 스틱으로 상대방 골에 공을 쳐서 넣어 승부를 가르는 구기이다. 짧게 하키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팀 선수는 11명.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경기자는 스틱으로만 공을 다룰 수 있다. 최근 필드하키의 강국은 네덜란드·대한민국·인도·파키스탄 오스트레일리아등이다. 11명으로 이뤄진 두 팀이 구부러진 막대기(스틱)로 딱딱한 공을 패스하거나 드리블해 상대편 골에 넣어 겨루는 스포츠이다. 영국의 스포츠 연구가인 데이비드 모건에 따르면 하키의 시초는 기원전 2천 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미니아의 나일강 근처에 있는 베니 핫산에서 발견된 제 16 무덤의 벽화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서서 스틱과 같은 막대기를 마주대고 있는 장면이 발견되었다. 또 1922년 아테네 해안의 방파벽에서 템스토클레스에 의하여 조각된 양각의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에는 여섯 사람의 플레이어가 그려져 있고 오늘날의 불리와 비슷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근대 하키는 다른 경기와 비슷하게 영국에서 시작됐다. 19세기 크리켓 선수들이 경기를 할 수 없는 겨울에 시작한 것이 기원이라고 알려졌다. 영국에서 하키협회가 발족하고 규칙이 제정된 것은 1887년이다. 올림픽 채택 남자 1908년 런던 올림픽, 여자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에는 1945년 도입됐다. 경기장은 폭 60야드(54.86m), 길이 100야드(91.44m)의 장방형이다. 반지름 16야드(14.63m) 부근에 골을 노리기 위한 슈팅 서클이 있고, 그 밖에는 5야드 라인이 있다. 각 골 라인의 중앙 안쪽 가장자리에서부터 7야드(6.4m) 앞쪽에 축구의 페널티킥과 비슷한 페널티샷을 때리기 위한 페널티지점(지름 15cm)이 있다. 경기장의 모든 선은 75mm의 넓이로 표시하며, 선은 경기장의 일부이다. 긴 선이 사이드 라인으로 길이는 91.44m이다. 짧은 선이 백라인으로 길이는 54.86m이다. 골은 높이 2.13m, 넓이 3.66m로서 골 네트를 치고 넓이 45cm 이내의 널빤지를 골의 3면에 설치한다. 전, 후반 2×15분씩 실시하며 휴식시간은 15분. 휴식시간에 진영을 바꾼다. 정해진 시간 안에 더 많은 득점을 올린 팀이 이긴다. 동점일 경우 연장전(전, 후반 각 7분30초)을 치르고 득점이 나온 시점에 경기가 끝난다.(골든골) 그래도 동점일 경우에는 5명씩 페널티 스트로크(PS)를 겨룬다. 경기장에 설 수 있는 건 한 팀 11명(골키퍼 1명 포함)이다. 각 팀은 18명의 명단을 제출한다. 선수 교체는 경기중 몇차례든 할 수 있고, 한차례 경기장에서 나간 선수가 다시 뛸 수도 있다. 스틱은 왼쪽 면만 평면인 나무로 된 것으로, 끝을 날카롭게 깎은 것이나 금속은 사용할 수 없다. 뒷면은 둥그스름하며 길이 90-95cm, 무게 340-794g인데, 보통 510-567g이다. 굵기는 안지름 5cm의 링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 흰 가죽 또는 희게 칠한 가죽으로 둘러싸고 내부는 코르크 및 연사(꼰 실)로 채우는데 무게 155-165g, 둘레 23-24cm로, 야구공보다 약간 크다. 2명이서 경기장의 1/2씩 나누어 담당하되, 필요에 따라서는 자기 쪽 사이드 라인 전체를 담당한다. 자기 담당이 아닌 지역의 판정은 못한다. 경기의 시작과 끝, 반칙이 생겼을 때, 공이 사이드 라인 또는 골 라인을 넘어갔을 때, 득점하였을 때 등을 판정한다. 경기는 양팀의 주장이 토스로써 코트를 정한 다음, 축구의 킥오프와 같은 발리로 시작된다. 스트라이킹 서클 안에서 공격측 선수가 공을 스틱으로 치거나, 스틱에 닿은 다음 골인될 때, 또는 공이 골포스트 사이의 골 라인을 완전히 통과하였을 때는 득점으로 인정된다. 스쿼시 스쿼시(squash)는 두 명(단식) 또는 네 명(복식)의 선수가 사방이 벽으로 이루어진 코트에서 작고 속이 빈 고무공으로 경기를 하는 라켓 스포츠이다. 과거에는 스쿼시 라켓(squash rackets)라고 불렸는데, 이는 스쿼시의 전신이 되는 옛 실내 라켓 경기인 ‘라켓’(또는 하드 라켓)이 딱딱한 공을 사용했던 것에 비해 스쿼시에서는 잘 ‘찌그러지는(squashable)’ 말랑말랑한 공을 사용함을 가리키는 의미의 명칭이었다. 스쿼시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공인을 받았으며 2012년 5월에는 2020년 하계 올림픽 정식 종목 후보로 선정되었다. 스쿼시는 줄이 매어진 라켓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테니스와 매우 유사한데, 그 직접적인 기원은 과거 영국에서 행해졌던 실내 라켓 스포츠인 ‘라켓’(rackets)에서 찾을 수 있다. 라켓은 딱딱한 공을 벽에 치는 방식이었으며, 여기에서 공의 재질 등이 변화하면서 스쿼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스쿼시는 1830년 경 영국 해로 스쿨에서 옛 라켓 경기를 변형하여 즐긴 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다른 학교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오늘날의 국제적인 스포츠로 발전하게 되었다. 해로우 스쿨에 처음 만들어졌던 코트는 각종 파이프와 기둥, 연통, 선반 등이 그 주변에 있어 위험했다. 학교는 곧 4면의 실외 코트를 만들었다. 공의 재질로는 고무가 사용되었다. 학생들은 협소한 공간에 적합하도록 라켓을 짧게 개조하여 사용했다. 스쿼시 라켓은 테니스 라켓과 훨씬 더 유사하게 변형되었다. 초기에는 라켓 재질로 나무 합판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1980년대부터 그라파이트와 같은 더 가벼운 탄소계열 재료와 케블라, 붕소, 티타늄 등을 합성한 재질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라켓 스트링은 천연 거트에서 인조 스트링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에 스쿼시는 점차 인기를 얻어 여러 학교와 클럽에서 행해지고 사설 코트도 생겨 났으나, 아직 일정한 규격은 없었다. 북미 지역 최초의 코트는 1884년 뉴햄프셔에 있는 세인트 폴 스쿨에 처음 만들어졌다. 1904년에는 필라델피아 및 펜실베니아 지역에서 미국 최초의 스쿼시 연맹 조직이 미국 스쿼시 라켓 협회(United States Squash Racquets Association)이라는 이름으로 생겨났으며, 이 조직이 오늘날의 유에스 스쿼시(U.S. Squash)가 되었다. 1907년 4월, 테니스, 라켓과 파이브즈 협회가 모여 스쿼시의 표준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 결과 세 가지 스포츠를 결합한 "스쿼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1912년 RMS 타이타닉에는 일등석 구역에 스쿼시 코트가 설치되었다. 1923년이 되어서는 영국의 로열 오토모빌 클럽에서 스쿼시 규정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를 위한 미팅이 개최되었고, 5년 후 영국에서 스쿼시 라켓 협회가 설립되어 스쿼시 표준을 만들게 되었다. 이후 스쿼시는 미국과 캐나다에 확산되었으며, 전 세계로 퍼졌다. 한국에서는 1989년 5월 한국 스쿼시볼 협회(1992년 현재의 대한 스쿼시 연맹으로 명칭 변경)가 창설되면서 각종 대회 유치와 행사 개최로 국내 스쿼시 보급의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1998년 1월 대한체육회 인정종목 경기단체로 승인된 대한 스쿼시 연맹은 2001년 2월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로 승인되었으며, 2003년 2월에는 정가맹 경기단체로 승인되어 엘리트 체육으로 정착을 도모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350여 개의 전용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2000년부터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한국 스쿼시는 각종 국제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 및 입상 성적을 내고있다. 주요 성적으로는 2002년 아시아 챔피언십 여자부 3위,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 동메달, 2004년 캘거리 오픈 준우승, 2007년 나라쿠르테 오픈 우승, 2009년 차이나 오픈 준우승,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여자 단체전 동메달 등이 있다. 한국에서 스쿼시는 2004년 제85회 충북 전국체전 및 2005년 86회 울산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고, 2006년 제88회 경북 전국체전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매년 남녀 고등부 개인전, 남녀 일반부 단체전, 해외동포 남녀 일반부 개인전이 전국 17개 시도와 10여개 이상의 해외지부의 참가 하에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코트 크기는 가로 6.4미터, 세로 9.75미터로 1920년대에 정해졌다. 앞벽에는 4.57미터 높이의 ‘프론트 월 라인’이 있고 공이 이 라인이나 라인의 위쪽 영역에 맞으면 ‘아웃’이 된다. 이 아웃 라인은 옆벽을 따라 뒷벽의 2.13미터 높이의 아웃 라인까지 연결된다. 앞벽에는 또 1.78미터 높이의 ‘서비스 라인’이 있으며, 서비스가 이 라인보다 아랫쪽 영역에 맞으면 아웃이 된다. 앞벽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0.43미터 높이의 ‘바텀 라인’은 ‘틴’의 상단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틴은 앞벽 아랫부분에 철제 판넬이 붙어 있는 영역으로, 이 부분에 공이 맞으면 역시 아웃이 된다. 코트 바닥에는 가로 방향으로 ‘하프코트’ 라인이 그려져 있고 뒤쪽의 ‘쿼터 코트’와 두 개의 ‘서비스 박스’로 나뉜다. 미국 경기를 위한 전통적인 ‘아메리칸’ 코트는, (이제는 ‘하드볼 스쿼시’라 불림) 비슷한 크기지만, 폭이 5.64미터(18피트 6인치)로 더 좁다. 바닥과 벽 마킹이 ‘국제’ 코트와 약간 다르며 틴이 15인치 높이로 더 낮다. 그러나, 미국에서 하드볼 스쿼시는 소프트볼 방식의 표준 방식의 스쿼시로 대체되었고 이제 거의 사라졌다. ‘컨버티드 코트’는 라켓볼 코트를 스쿼시로 바꾸다 보니 생긴 것이다. 라켓볼 코트는 20피트 너비에 40피트 길이를 가지므로, 뒷 벽을 약간 개조하여 20피트 너비에 32피트 길이로 스쿼시 코트와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지게 된다. 라켓의 규격은 규정으로 정하고 있다. 전통적인 라켓은 목재 합판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에 천연 거트 스트링을 맨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규정의 변화 이후 오늘날 대부분의 라켓은 합성 재료나 금속(그라파이트, 케블러, 티타늄, 붕소 등) 프레임에 인조 스트링을 맨 형태이다. 현대의 라켓은 길이 676밀리미터(27인치)에 너비 215밀미미터(8.5인치)이며, 스트링 영역의 최대 면적은 500평방센티미터(90평방인치)이다. 최대 무게는 255그램(9온스)이나, 실제로 경기에서 사용되는 라켓의 무게는 일반적으로 90~150그램(3~5.3온스) 정도이다. 스쿼시 공의 지름은 39.5~40.5밀리미터, 무게는 23~25그램이다. 두 조각의 고무를 접착제로 붙여 속이 빈 공을 만들고 표면은 무광택 처리한다. 기온과 공기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공이 사용되는데, 상급자는 초중급자가 사용하는 것에 비해 바운드가 작고 속도가 느린 공을 사용한다. 고무 재질의 특성상 스쿼시 공은 온도가 높아지면 더 잘 튀고, 온도가 낮을 때에는 잘 튀지 않는 성질이 있다. 이 때문에 경기 전에 공을 십 수회 쳐서 데우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의 표면에 표시된 색깔 있는 점들은 아래와 같이 공의 탄성을 나타낸다. 더블 옐로 도트 공은 2000년에 도입되었으며, 과거의 옐로 도트 공을 대체하여 현재까지 대회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렌지 닷 볼은 멕시코 시티, 캘거리, 덴버, 요하네스버그와 같은 높은 고도에 위치한 곳에서 사용된다. 북 아메리카에서는 던롭 그린 닷 볼이 주로 높은 고도에서 사용된다. 남자 선수는 일반적으로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나 민소매 셔츠, 또는 폴로 셔츠 등을 착용한다. 여자 선수는 보통 스커트에 티셔츠나 민소매 셔츠, 또는 스포츠 드레스를 입는다. 미국 국립 보건원은 경기시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고글을 착용할 것을 권장한다. 스쿼시 공의 주요 생산업체로는 프린스, 던롭, 포인트포어(Pointfore), 윌슨 등이 있다. 그외 다른 종류의 공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선수들은 주로 라켓을 돌려서 누가 처음 서브를 할지 정하고,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이 선수가 원하는 서비스 박스에서 첫 랠리를 시작한다. 공정한 서브를 위해, 서브하는 사람의 한 발은 서비스 박스에 들어가야 하고, 공은 라켓에 맞은 뒤에 꼭 앞벽의 서비스라인과 아웃라인 사이를 맞추고, 리시버가 발리로 쳐내지 않는 이상 반대편 쿼터 코트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곤 선수들은 번갈아가며 앞 벽으로 공을 쳐낸다('랠링'이라고 부름). 공은 발리로 치거나(공이 바닥에 한번 튀기기 전에 치는 것) 한번 바운스 된 후 두 번 바운스 되기 전에 칠 수도 있다. 쳐낸 공이 'good'이 되기 위해선 공이 바닥에 닿기 전에 앞벽의 '아웃'라인과 '보드'혹은 '틴' 사이에 맞아야 한다. 아웃라인이나 틴 위의 라인에 닿는 공은, 테니스와는 반대로, "아웃"으로 처리된다. 공은 또한 앞벽에 맞기 전에 나머지 세개의 벽에 먼저 맞아도 괜찮다. 옆벽이나 뒷벽을 먼저 맞는 샷은 '보스트'나 '앵글'이라고 부른다. 랠리는 한 선수가 상대방의 공을 받아치지 못하거나 실수하게 될 때까지(예. 공을 '아웃'되게 치거나, 두 번째 바운드 이후에 치거나, 바닥이나 '보드'로 칠 경우), 혹은 레프리에 의해 '렛'이나 '스트록'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된다(밑에를 참고하시오). '전통적인' 영국 점수제도(1926년에 도입됨)에서, 점수는 서브하는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다. 리시버가 랠리에서 이길 경우, 점수 대신 서브권을 얻는다. 경기는 주로 9점까지(다만, 점수가 8-8이 될 경우 리시버는 '세트 투'를 요청하여 10점까지 경기를 진행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행해진다. 경기는 주로 '5전3선승제'로 행해진다. 대신, 포인트어랠리 점수제도(주로 PARS나 '미국식' 점수법으로 부름)에서는 점수는 서브권에 상관없이 각 랠리의 승자에게 주어진다. 전통적으로, PARS 점수제도은 15점까지(14-14가 될 경우 리시버는 15점이나 17점 중 어느 점수까지 플레이 할 것인지 고를 수 있다) 이다. 그러나, 2004년에 PARS 점수제도는 프로경기에서는 11점까지로 줄어들었다(10-10이 될 경우 무조건 한 선수가 2점차로 앞서야 끝난다). PARS는 이제 남자 프로 투어에서 사용되고, 틴의 높이는 남자 프로 토너먼트에서 2인치 낮아졌다(이러한 변화는 랠리의 시간을 단축하여 결과적으로 경기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여자 프로 투어는 여전히 원래의 "9점 영국 점수제도"와 원래의 틴 높이를 사용한다. '국제' 경기에서는, 클럽, 복식 혹은 오락성 경기는 주로 전통 '영국식' 점수제도를 이용해 행해진다. 점수제도와 게임규칙은 더 짧은 경기 시간을 위해(예. 7점까지 행해지는 3전2선승제 경기) 혹은 여러 명이 즐기기 위해(예. 3쿼터코트, ㄱ자게임으로 불리는 게임형태로 서브를 넣은 쿼터코트는 랠리에서 사용하지 않고 나머지 선수들이 거기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랠리에서 지면 바로 다음 차례의 사람이 플레이한다) 약간 조정될 수 있다. '영국' 점수법은 일반적으로 USSRA(United States Squash Racquets Association) 경기를 위해 사용된다. 스쿼시 경기의 필수적인 전략은 공을 옆벽과 일직선으로 쳐서 백코너로 보내고(스트레이트 드라이브, 벽(wall), 혹은 "랭쓰(length)"라고 부름), 상대방의 리턴을 받아낼 수 있도록 그 후에 코트 중앙의 "T" 근처로 이동하는 것이다. 부드럽거나 "짧은" 샷으로 앞 코너를 공격 하는 것은('드롭 샷'이라고 부름) 상대방이 코트를 더 많이 커버하도록 만들고 명백한 승리샷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앵글(Angle)' 샷은 속임수를 위해 쓰이고 이 역시 상대방이 코트를 더 많이 커버하도록 만든다. 뛰어난 기술의 선수들은 자주 공이 앞벽을 맞은 뒤 '닉(nick)'(옆벽과 바닥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영역으로 가도록하는 각도로 쳐서 랠리를 끝내려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면 공은 바닥을 따라 구르게 되어 받아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샷이 닉을 놓치게 되면 공은 옆벽에서 튀어나오게 되고 상대방이 쉬운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 스쿼시의 핵심적인 전략은 "T를 지배하기"(T, 코트 중앙의 붉은 선의 교차지역으로서 선수가 상대방의 다음 샷을 받아치기 가장 좋은 지점)이다. 기술좋은 선수들은 샷을 받아치고는, 다음 샷을 치기 전에 'T'로 돌아 간다. 이 위치에서 선수는 코트의 어느 부분이든 신속하게 다가갈 수 있어 상대방의 다음 샷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받아낼 수 있다. 경험있는 선수들의 랠리에서는 랠리마다 30회 이상의 샷이 오고가기 때문에 유산소, 무산소 체력 모두 매우 중요하다. 선수가 더 기술을 발전시키고, 특히, 샷을 더 잘 받아칠 수 있게 되면, 점수따기는 주로 소모전이 된다. 높은 수준의 경기일수록, 체력이 더 뛰어난 선수가 유리하다. 대부분의 선수들은(경험이 적든 많든) 다음과 같은 경기 스타일로 분류될 것이다 : 공을 치는 마지막 찰나에 공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 역시 상대방의 균형을 깨기 위해 중요하다. 전문 선수들은 상대방의 샷을 평균적인 선수들보다 영점몇초 정도 빠르게 예측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빠르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한 기술은 주로 많은 연습과 경기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간섭과 방해는 두명이 한 공간에 묶여서 하는 매우 활발한 스포츠에서 피할 수 없는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스쿼시 경기규칙은 선수들에게 제대로 공에 접근할 수 있고, 제대로 스윙할 수 있고, 앞벽으로 향하는 어떤 샷이든 방해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다. 간섭이 일어났을 때, 선수는 '렛'이라고 어필할 수 있고 그러면 레프리(만약 없다면 선수들 자신이)는 간섭의 범위를 판단한다. 레프리는 '렛'을 허용하여 선수들이 그 랠리를 다시 하도록 하거나, '스트록'(포인트 혹은 서브권)을 그 선수에게 부여한다. 이는 간섭이 일어난 정도와, 간섭받은 선수가 만약 간섭이 없었을 때 위닝샷을 칠 수 있었을지 여부를 따져 결정한다. 간섭이 적거나 없었다고 판단되면, 경기의 연속성과 가짜로 렛을 어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렛이 허용되지 않는다. 판단의 주관성때문에, 렛과 스트록의 주어짐은 종종 논쟁의 여지가 생긴다. 선수의 샷이 앞벽에 맞기 전에 상대방을 먼저 쳤을 때는, 간섭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공이 상대방을 쳤을 때 옆벽을 향하고 있었으면, 보통 렛이 된다. 그러나, 공이 상대방을 쳤을 때 앞벽을 향해 곧게 나아가고 있었다면 공을 친 사람에게 스트록이 주어진다. 세계 곳곳에서 스쿼시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지고 있다. 미국 안에서는 훨씬 딱딱한 공과 다른 크기의 코트에서 '하드볼' 단식과 복식이 행해진다. '하드볼' 단식이 북아메리카에서 유명세가 꺾였지만('국제공인' 방식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 하드볼 복식게임은 아직도 활성화되어 있다. 같은 크기의 공으로 하는 복식경기 방식의 하나로서, 좀 더 넓은 코트에서, 좀 더 테니스 같은 방식으로 행해지는 스쿼시 테니스도 있다. 미국의 스쿼시 사촌 격인 라켓볼에 비해서 스쿼시는 상대적으로 작은 코트와 저탄성의 공이 점수를 내는 것을 어렵게 한다. 라켓볼과 달리 모든 공이 앞벽 틴(tin) 위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공은 쉽게 '죽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스쿼시는 랠리가 라켓볼에 비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스쿼시 선수들은 자신과 생리학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비슷한 동료를 선호한다. 이는 작은 능력의 차이라도 한 선수가 경기를 완전히 압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국제적인 표준안은 없는 상태이다. 스쿼시는 심혈관 운동으로서 매우 뛰어나다. 선수는 한 시간의 스쿼시로 700에서 1000 칼로리정도를 소모하는데, 이는 다른 대부분의 운동보다 많고 일반적인 테니스나 라켓볼에 비해서도 70% 이상 많다. 또한 이 운동은 양 다리를 코트 안을 뛰는 데 사용하고, 팔/몸통을 라켓을 휘두르는 데 사용하여, 상하체 운동으로도 매우 좋다. 그러나, 몇몇 연구에서는 스쿼시가 심각한 심장 부정맥(Cardiac arrhythmia)를 초래할 수 있다고 암시하였고 스쿼시는 심장 질환이 있는 노인에게는 부적절한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스쿼시는 현재 전 지구적으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148개의 국가에 코트가 있다. 영국 스쿼시라켓(스쿼시) 협회는 1930년 12월에 첫 남자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십을 열었다. '챌린지' 시스템을 이용한 이 대회는 찰스 레드(Charles Read)가 우승자가 되었지만, 돈 붓쳐(Don Butcher)와의 홈, 어웨이 경기에서 패하였고, 이 선수는 1931년의 챔피언이 되었다. 이 챔피언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1947년부터 '토너먼트' 방식으로 바뀌었다. 시초부터 남자 브리티시 오픈은 몇몇 선수가 지배했다 : 1930년대는 F.D. 암르 베이(F.D. Amr Bey) (이집트) ; 1940년대는 마흐모드 카림(Mahmoud Karim) (이집트); 1950년대와 1960년대는 하심 칸(Hashim Khan)과 아잠 칸(Azam Khan) (파키스탄) 형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요나 바링톤(Jonah Barrington)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과 죠프 헌트(Geoff Hunt) (호주); 1980년대는 자한기르 칸(Jahangir Khan) (파키스탄); 1990년대는 장셔 칸(Jansher Khan) (파키스탄). 여자 챔피언십은 1921년에 시작되었고, 역시 상대적으로 적은 선수들이 지배했다 : 1920년대는 조이스 케이브(Joyce Cave)과 낸시 케이브(Nancy Cave) (영국); 1930년대는 마곳 럼(Margot Lumb) (영국); 1950년대는 자넷 모르간(Janet Morgan) (영국);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헤더 맥케이(Heather McKay) (호주); 1980년대는 비키 카드웰(Vicki Cardwell) (호주)과 수잔 데보이(Susan Devoy) (뉴질랜드); 1990년대는 미셀 마틴(Michelle Martin) (호주);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사라 피츠제럴드(Sarah Fitz-Gerald) (호주). 헤더 맥케이(Heather McKay)는 그녀의 긴 샷과 절대적인 경기지배력으로 인해(그녀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18년동안 한번도 지지 않았다), 최고의 여성 선수로 꼽힌다. 남자 중에서는, 대부분의 현대 평론가들이 자한기르 칸(Jahangir Khan) (1980년대)혹은 장셔 칸(Jansher Khan) (1990년대)(성은 같으나 혈연관계는 없음)을 최고의 남성 선수로 꼽는다. 다른 뛰어난 후보들은 요나 바링톤(Jonah Barrington), 죠프 헌트(Geoff Hunt), 하심 칸(Hashim Khan)이다. 그 전통 때문에, 브리티시 오픈은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월드 오픈보다 훌륭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겨왔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2005년 대회에서 최고수준 선수들을 참가시키지 못한 예를 들어(상금의 불균형에 일부 기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브리티시 오픈의 최고를 유지할 능력에 걱정을 표했다. 2005년 브리티시 오픈의 남자와 여자 경기의 상금은 7만1천 달러로 2005년 월드 오픈의 상금 27만 달러에 비해 크게 못 미쳤다. 하심 칸(Hashim Khan)은 첫 번째 파키스탄인 스쿼시 챔피언이었고, 이 후 우승한 자한기르 칸(Jahangir Khan)과 장셔 칸(Jansher Khan) 역시 파키스탄 챔피언이었다. 자한기르는 현재 세계스쿼시연맹의 회장이며, 브리티시 오픈에서 10차례, 월드 오픈에서 6차례 우승하였다. 장셔는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월드 오픈 8차례, 브리티시 오픈 6차례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골프 골프(golf)는 골프채(club)로 골프공을 쳐서 코스상에 있는 구멍(hole cup)에 넣는 운동이다. 구기종목의 하나로, 국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가와 스포츠로 즐기고 있다. 정식 경기는 18홀, 레크레이션의 경우 9홀로 구성된 코스에서 진행되며 타수가 적은 순서대로 선수들의 순위가 결정된다. 경기 종류에는 홀마다 개별적으로 대결하는 매치플레이방식과 전체 코스에서 소요된 타수를 세는 스트로크 플레이방식이 있다. 골프 코스는 따로 정해진 규격 없이 고유한 디자인과 지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넓은 면적이 필요한 것이 특징이다. 각 홀은 경기를 시작하는 티박스(tee box)와 내경 108 mm(4¼ inch)의 홀컵을 포함한 퍼팅 그린(putting green)이 있어야 한다. 골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네덜란드의 아이스하키 비슷한 놀이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늘날과 같이 골프가 조직화된 것은 15세기 무렵으로, 1860년 영국에서 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나왔다. 골프라는 단어의 어원은 스코틀랜드 고어인 ‘고프’(goulf)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최근 골프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고프는 ‘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커프(Cuff)와 동의어인데, 여기서‘c’가 스코틀랜드식인 ‘g’로 변화하여 고프가 되었고 이것이 점차 변화하여 오늘날의 골프가 되었다는 설이다. 대한민국에 골프가 처음 전해진 것은 1900년으로, 고종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원산 바닷가의 세관 구내에서 6홀의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는데, 이것은 훗날 1927년 서울 컨트리 클럽의 기초가 마련되기도 했다. 골프는 과거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인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깊었으나, 1990년대 후반 들어 박세리 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로 활약하면서 점차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한국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각 홀의 규정 타수의 2배를 치면 이를 '양파', '더블파'라고 하며 그 이후로는 세지 않는다. 특히 많은 여자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2013년까지 박세리(5회), 박인비(4회), 신지애(2회), 박지은, 장정, 김주연, 지은희, 유소연, 최나연, 유선영(이상 1회) 등의 선수들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골프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인기도 향상에 기여하였다. 남자 선수들 중에서는 메이저 대회 우승은 양용은이 유일하여 상대적으로 여자 선수들에 비해 눈에 띄는 성과는 적은 편이다. 다만 세계 남자 골프계에서는 아시아 선수의 활약이 아직까지 저조하여 남자 골프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아시아인 선수는 2014년까지 양용은이 유일하다. 201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여자부의 박인비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골프 코스는 보통 18번 홀이 기준이며 전체 길이 5,500-6,300m, 너비 100-180m, 전체 지역은 약 70만m 정도이다. 각 홀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전반의 9홀을 아웃코스, 후반의 9홀을 인코스라 한다. 350m 전후인 중거리(미들)의 홀을 중심(10홀)으로 쇼트 홀(4), 롱 홀(4) 등 합계 18개 홀인데 쇼트는 229m 이하, 미들은 230-430m, 롱은 431m 이상이며, 쇼트의 표준 타수 3, 미들 4, 롱을 5로 하여 이것을 파(par)로 한다. 여자의 경우는 527m 이상의 롱홀 파는 6으로 되어 있다. 홀의 거리는 티(tee)의 중심에서 그린(green) 중심까지 수평으로 계측하고 구부러진 홀에서는 설계자가 의도한 페어웨이의 중심을 통하여 계측한다. 평균 4타로서, 18개 홀 전체의 기본 타수는 4타×18홀=72타이다. 프로 경기에서는 규정 타수를 70~71타로 줄여서 난이도를 높이기도 한다. 간혹 파6, 파7홀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티잉 그라이름운드(te­eing ground)를 줄인 말로, 각 홀에서 첫 번째로 공을 치는 출발 지역. 좁고 평탄한 지역으로 티(페그)라고 하는 나무 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못 위에 골프공을 얹어 놓고 친다. 다음 샷부터는 공을 티 위에 얹어 놓지 않고 홀 아웃할 때까지 그라운드에 놓인 대로 친다. 티에서 그린까지 잔디를 잘 다듬어 놓은 지역. 올바르게 친 공의 정상적인 통로라는 뜻으로, 잡초를 제거한 가늘면서 긴 지역인데, 공을 치기 쉽고 그린이 잘 보인다. 페어웨이 끝 지점에 있으며, 잔디를 짧게 잘 깎아 다듬어 놓은 지점이다. 지름 10.8 cm, 깊이 10 cm 정도의 홀이 있는데, 이 홀에 공을 쳐 넣으면 그 홀의 경기는 끝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친 스트로크(타수)가 한 홀에 대한 점수이다. 경기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에 특별히 설치한 방해물 또는 함정으로 벙커(bunker)와 워터 해저드(water ha­zard)가 있다. ① 벙커:지면에서 푹 꺼진 부분에 모래로 채워진 지역으로 공이 그 속에 들어가면 탄력을 잃고 정지해 버린다. ② 워터 해저드:바다·연못·하천·호수·도랑 등 물이 차 있는 지역.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신발바닥에 스파이크를 단 것으로, 무거운 것이 오히려 덜 피로하며 안정감이 있다. 1904년 하계 올림픽을 끝으로 폐지되었던 골프 종목이 2016년 하계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112년만에 재채택되었다. 콤모두스 콤모두스()는 로마 제국의 제17대 황제(161년 8월 31일 - 192년 12월 31일)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며, 로마 제국 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어 '포학제(暴虐帝)'라고도 불린다. 콤모두스가 등극함으로써 이른바 오현제 시대는 종식을 고했다. 연로한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통치하는 형태로 177년에 정권에 올라, 아버지와 함께 도나우 강 연안에서 게르만족에 맞서 싸웠다. 180년 3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자 콤모두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182년 누이 루실라()가 원로원과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분노한 콤모두스는 상당수의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 190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로마의 반이 소실되었는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좋은 기회라고 여긴 콤모두스는 재건된 로마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라고 명명했다. 또 달력을 자신과 연관된 이름으로 바꾸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는 다음날에 검투사 복장으로 원로원에 가 집정관 직위를 받아들일 계획을 세우고 자고 있던 중에, 고문관들이 고용한 레슬링 선수에 의해 목이 졸려 암살되었다. 그가 죽은 후, 원로원은 기록 말살형을 선고하였지만, 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호의를 얻기 위해 콤모두스의 죄를 면제하여 그의 기록은 회복되었으며, 신으로서 모셔졌다. 콤모두스가 암살됨에 따라 군대가 국가의 실권을 잡아, 다음 황제 페르티낙스 이후, 군인에 의해 황제가 옹립되게 되고, 후에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불리는 정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종로구 종로구(鐘路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중북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으로 동대문구, 서쪽으로 서대문구와 은평구, 남쪽으로 중구, 북쪽으로 성북구와 접해있다. 종로구는 1394년 조선 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중구와 함께 서울특별시의 원도심을 이루었고, 현재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일컫는 내사산을 연결한 한양도성은 남산을 빼면 모두 종로구 지역이다.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은 도성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연히 성 안과 성 밖을 잇는 문들도 생겼다. 한양도성은 전체 둘레 약 18.7 km 구간 요소마다 네 개의 대문을 만들었는데 유교의 5상(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따라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정문을 두었다. 그 가운데에는 보신각을 두어 도읍지의 이상과 정치 이념을 나타냈다. 또한 대문과 대문 사이 요충지에 소문을 두어 관문으로 쓰게 했는데 바로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이다. 1975년에 333,970명을 기록한 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종로라는 이름은 지금의 종로1가에 도성문을 여닫는 시각을 일러주는 큰 종을 매달았던 종루에서 비롯한다. 아침의 ‘파루’와 저녁의 ‘인정’을 말하는데, 종루가 있다고 해서 운종가라도 불렀으며, 1943년 4월 1일 구제도를 실시할 때 ‘종루가 있는 거리’(bell street)라는 뜻으로 종로구라 이름 붙였다. 종로구의 지리 형세는 예부터 명당으로 주목했다. 인왕산·백악산·낙산으로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과 언덕이 천연 담장을 이루고 있고, 남쪽에는 큰 개천이 울타리 구실을 하며, 그 안에 황토마루·솔고개·배고개·붉은재·박석고개·마두산 등 작은 둔덕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판판한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종로구는 예로부터 정치 1번지라고 불렸는데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들과 청와대, 정부중앙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서울지방경찰청 등이 있고 부촌들도 있으며 대학가도 위치해 있고, 빈민층도 있어서 정치적으로 표가 많이 갈려오는 편이었다. 정치1번지의 위상으로써 여야의 정치거물들이 많이 출마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현재 국회의원은 정세균이고 현재 종로구청장은 김영종인데, 과거에는 민주당의 전신 정당들이 앞서기도 했었다. 그러나 유신정권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새누리당의 전신 정당들이 당선되어 왔지만, 현재는 혜화동의 영향으로 다시 더불어민주당이 우세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다만 평창동, 사직동, 삼청동 등은 부촌영향으로 여당이 아직 우세한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종로구 전역에서 승리했다. 여야간 표차가 얼마나지 않는 지역 중 하나이다. 종로구의 행정 구역은 87개의 법정동을 관리하는 1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한다. 종로구의 면적은 23.91km이며, 인구는 2018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73,655세대, 163,569명이다. 1395년 조선 태조 4년, 도읍지 한양에는 한성부 동부 숭교방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성균관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성균관을 착공하여 태조 7년(1398) 7월에 준공하게 되었는데 성균관에는 문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서재, 정록소, 양현고, 식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성균관 직제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대사성 1인, 좨주 1인, 악정 2인, 직강 1인, 전부 1인, 박사 2인, 직학 2인, 학유 4인 등 도합 22인의 교수직을 두었다. 그 후 1401년 태종 원년 7월의 관제 개혁 때, 직명 일부를 개정하여 좨주는 사성(司成)으로, 악정은 사예(司藝)로, 전부는 주부 등으로 바꾸었는데, 성균관 관원은 성균관 유생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가운데 일부는 사부학당 교수, 훈도를 겸하여 사학생도들도 가르쳤고, 또 종학박사를 겸하여 종친을 교육하는 일도 맡았다. 성균관의 직제는 세조 12년(1466) 1월의 관제 경정(官制更定) 때 축소되어 ≪경국대전≫에 따르면, 성균관의 장인 지성균관사는 대제학이 예겸하고, 그 아래 동지사 2인은 겸관이었으며, 대사성 1인, 사성 2인, 사예 3인, 직강 4인, 전적 13인, 박사 3인, 학정 3인, 학유 3인, 학록 3인 등 38인의 관원으로 문묘의 석전제와 유생의 교육을 맡았다. 한편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생원, 진사 1백 인, 기재 1백 인 도합 2백 인이었으며, 당시 이들의 경비는 양현고와 성균관에 주어진 전지 및 이를 경작하는 노비로 충당되었다. 성균관은 이렇듯 구한말 갑오경장(1894) 때까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는데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제가 빼앗자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일제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막을 목적으로 1924년 일본 정부가 서울(당시 경성부) 연건동에 종합대학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후에 경성제국대학이 서울과 그 근교 9개 전문학교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종합대학교로 설립한다는 내용의 1946년 7월 13일에 발표된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 방침으로 촉발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국대안) 파동을 겪게 되면서 1946년 8월 22일을 설립일로 하여 국립 서울대학교로 다시 탄생하였다. 당초 서북학회는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어려워짐에 따라 관서지방(평안남북도·황해도)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관북지방(함경남북도)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 1908년 1월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여 입헌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당시 서우학회는 박은식(朴殷植)·김병희(金秉熹)·신석하(申錫廈)·장응량(張應亮)·김윤옥(金允玉)·김병일(金秉一)·김달하(金達河)·김석환(金錫桓)·김명준(金明濬)·곽윤기(郭允基)·김기주(金基柱)·김유탁(金有鐸) 등이 발기하였다. 한북흥학회는 오상규(吳相奎), 이준(李儁), 유진호(兪鎭浩), 설태희(薛泰熙), 이동휘(李東輝), 이종호(李鍾浩), 강용구(康瑢九), 윤익선(尹益善), 이재성(李載聖), 태명식(太明軾), 주우(朱瑀), 김주병(金炳), 양효건(楊孝健), 강윤희(姜玧熙), 정진홍(鄭鎭弘) 등이 설립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토대로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고,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69개 지역에 학교를 두었다. 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황해도의 신흥시민층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회원은 2,500여 명이었다. 서북학회의 건물은 청나라 기술자를 불러들여 지었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현대식 건축물이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33명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 색다르다. 공사기간을 거쳐 1908년 11월 2일에 준공되었다. 낙원동 교사는 3층 양옥이었는데 3층이라지만 1층은 반지하다. 연건평 395평였으니 1886년 서울 중구 정동에 건평 200평 규모의 한식 기와집에서 시작된 초창기 이화학당보다는 훨씬 컸다. 여기서 단국대와 건국대(설립인가 순)가 태동하고 국민대는 설립 기성회의 임시 사무실로 썼다. 이보다 예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서북협성학교도 한 때 이 건물에서 배우고 가르쳤는데 '종로 낙원동 교사'로 불리면서 서울대학교가 있었던 혜화동 대학로(마로니에 공원)와 더불어 대학가에서 꽤 알려졌던 곳이다. 유서 깊은 '종로 낙원동 교사'로 신흥 사학의 산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종로 낙원동 교사'였던 서북회관은 이후 백화점의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운영하다 민중병원을 운영하던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건국대 설립자 유석창에게 건물의 소유가 넘어갔다. 이후 1977년 건물은 도시계획으로 철거·해체, 1985년 건국대학교 교정안으로 이전·복원되어 현재 군자동 건국대내의 상허기념관으로 활용하면서 등록문화재 제53호 '서북학회회관(西北學會會館)'으로 등록되어 있다. 참고로 대학 50년사 를 보면 대학설립의 비사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데 해방후 새롭게 정립한 '민족정기'로 1946년 8월 22일을 서울대학교의 '개교일'로 잡아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듯이 설립 인가서를 기준으로 2년제 전문대학 형식이던 이화여자전문대가 신청일자가 19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희전문대는 1946년 7월 31일부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고 보성전문대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부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 고려대학교라는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역시 전문대학의 형태로 운영되던 종로구 혜화동의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敎)가 1946년 9월 20일, 동국대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종로구 명륜동의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는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로 설립인가를 받았는데, 종로구 낙원동의 단국대는 1947년 11월 1일에 광복 최초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대, 중앙대, 한양대, 국민대, 1949년에는 건국대, 홍익대가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 가인가를 받았던 경희대는 1952년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일제때 평양에 있다가 폐교되었던 숭실대는 1954년 4월 15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한국대학신문의 광복이후 정규대학 설립인가 현황(1946년~1954년) 참조) 종로구청(鍾路區廳)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기관으로 종로구청장은 지방정무직공무원으로, 종로구 부구청장(3급)은 지방부이사관으로 임명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봉로 43에 자리하고 있다. 페르티낙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126년 8월 1일 - 193년 3월 28일)는 로마의 군사 지휘관 및 193년의 3개월 간 황좌를 차지한 로마의 황제이다. 콤모두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지속되는 혼란의 시기를 연 주인공들 중 한 명이다.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 들어간 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거물로 떠올랐다. 이 공로로 인해 속주의 총독, 원로원 의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콤모두스의 죽음 이후, 그는 황제의 자리를 얻게 되었고 여러 안정화, 개혁 정책을 시도했으나 워낙 짧은 재위 기간 탓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개혁 정책으로는 근위대의 권력 제한이 들어있었는데, 이는 근위대의 반발을 불러와 결국 그가 암살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명령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페르티낙스는 이탈리아의 알바 폼페이아에서 해방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후 로마 군단에 입대하여 장교의 자리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르티아와 전쟁이 일어났고, 페르티낙스는 전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브리튼, 도나우 강 등지에서 활약을 세워 다키아 속주의 총독 자리에까지 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공방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좌천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중앙 정부는 다시 그를 불러 중임을 맡겼고, 다시 승진 가도를 걷게 된 페르티낙스는 모이시아·다키아·시리아를 관할하는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인 페렌니스가 상승가도를 달리는 동안 뒤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콤모두스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 콤모두스 황제의 치세가 끝날 무렵 그는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고 세베루스는 도나우 강 상류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콤모두스가 192년 12월 31일 암살당하자 원로원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회의를 열고 당시 제국의 장군인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일반 경비뿐만 아니라 군사비의 지출도 억제하려 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제위에 오른 지 채 3개월도 못 되어 근위대장 레토가 이끄는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 뒤이어 같은 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칙령을 내려 피살당한 통치자를 기리는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하고 거기에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붙였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틴어:Didius Julianus) (133년 1월 30일 ~ 193년 6월 1일)는 로마 제국의 열아홉 번째 황제이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부유한 원로원 의원으로 콤모두스 황제에게 추방당했다. 이후 콤모두스 황제는 192년 12월 31일에 살해당하고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올랐으나 193년 3월 말에 레토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근위대장 레토와 1만 명의 근위대의 추대를 받아 페르티낙스의 장인 플리비우스 술피키아누스와 겨루어 승리해 옥좌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황제를 자칭했다. 그리고 세베루스와 알비누스가 연합해 세베루스의 2개 군단이 남하하며 해군이 배반하자 재위 3개월 만에 그를 추대한 것을 후회하던 근위병 몇 명에게 살해당했다. 중구 (서울특별시) 중구(中區)는 서울특별시의 중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서울 도심부 한가운데에 있다. 동쪽으로는 성동구, 서쪽으로는 서대문구와 마포구, 남쪽으로는 용산구, 북쪽으로는 종로구와 접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산인 남산이 있다. 서울특별시청 등 각종 관공서와 기업체들의 본사 건물, 재래시장 등이 밀집한 곳이다. 중구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정해진 것으로, 조선인들이 북촌(北村, 현재의 종로구), 일본인들이 남촌(南村)에 많이 모여 거주하였기 때문에, 남촌 일대가 경성부의 중심이라 하여 중구라 명명되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광역시에서 중구라는 자치단체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민 표어 등에는 서울 중구란 표기를 흔히 볼 수 있다. 1943년 4월 1일 구제도 실시를 전제로 경성부 전역에 7개 사무소가 설치되어 중구지역에는 중앙사무소가 설치되었고, 동년 6월 10일 구제도가 실시되어 경성부 직할구역소로 중구역소가 설치되었다. 해방 이후 1946년 9월 28일 서울시는 서울시 헌장에 의해 경기도를 벗어나 도(道)와 같은 지위를 갖게 되어 서울시 중구로 승격되었으며 1946년 10월 1일 기존의 정(町)의 행정구역을 동(洞)으로 일괄 변경하였다. 1970년 3월 17일 조선호텔은 지하 2층, 지상 18층 규모의 최신식 호텔을 새로 지어 개관하였다. 1971년 10월 18일부터 서울 시청 광장과 맞닿아 있는 화교 상가가 철거됐다. 한국화약이 소공동 땅을 화교로부터 매입하여 호텔부지를 확보하였다. 소공동 일대 도심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3년 한국화약은 소공동 부지 지하 3층, 지상 22층 짜리 호텔을 짓기 시작해 1976년 9월에 준공했다.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 제1호 사업으로 플라자호텔이 탄생한 것이었다. 중구는 수도 서울의 심장부로서 퇴계로, 을지로, 청계천로, 남대문로, 왕십리길 등의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지하철 1-6호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남대문시장, 중부시장, 평화시장 등 대형 재래시장과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 대형백화점 및 명동, 충무로의 현대식 쇼핑가, 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신구 유통 시장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서울의 중심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소공동, 북창동 등 중구 핵심지대는 회사, 무역상사, 은행본점 등의 중추 관리 기능이 밀집됨으로써 중심업무지구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고, 핵심지역의 외곽도 보험 및 증권회사, 행정관리 기능과 전문 서비스 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도서출판과 보도기능 같은 서비스 기능도 입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구의 중심 지대에는 중추 관리 기능이, 간선도로변에는 도심성 소매활동이 간선 도로 후면에는 서비스활동이, 을지로와 청계천에는 기계, 기구, 부속품 등의 판매 지역이 서로 연계하여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도심지역의 각 블록의 앞면에는 빌딩군을 이루고 있고 뒷면은 여전히 오래된 주택들이 남아있는 곳이 많으며 이들은 주로 음식점, 주점, 숙박업소로 이용되고 있어 역시 도시로서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고 최근 도심재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구는 서울 정치에서 종로구와 더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종로구, 용산구와 더불어서 서울 도심권의 하나로 서울 정치 지형의 중요성을 뒷받침해주는 지역인데, 서울 중구는 민주당계 정당과 자유한국당 계열 정당의 스윙보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중구의 중앙청사인 중구청은 1979년에 지어졌으며,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 17 (구 예관동 120-1)이다. 서충세 徐忠世 ~ 1946년 12월 31일 윤승용 尹承龍 1946년 12월 31일 ~ 권태술 權泰述 1949년 2월 12일 ~ 중구의 행정 구역은 15개의 행정동으로 나눠서 관할하고 있으며, 면적은 9.97 km로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좁다. 서울 중구의 인구는 2018년 2분기 기준으로 135,427명, 61,091 세대이다. 남대문시장, 중부시장, 평화시장 등 대형 재래시장과 롯데, 신세계 등 대형백화점 및 명동, 충무로의 현대식 쇼핑가,굿모닝시티, 두산타워,동대문 밀리오레,명동 밀리오레,케레스타 등 신·구 유통 시장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서울의 중심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소공동, 북창동 등 중구 핵심지대는 회사, 무역상사, 은행본점 등의 중추관리기능이 밀집됨으로써 중심업무 지구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고, 핵심지역의 외곽도 보험 및 증권회사, 행정관리 기능과 전문 서비스 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도서출판과 보도기능 같은 서비스 기능도 입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구의 중심 지대에는 중추관리기능이, 간선도로변에는 도심성 소매활동이 간선도로 후면에는 서비스활동이, 을지로와 청계천에는 기계, 기구, 부속품 등의 판매 지역이 서로 연계하여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도심지역의 각 블록의 앞면에는 빌딩군을 이루고 있고 뒷면은 여전히 오래된 주택들이 남아있는 곳이 많으며 이들은 주로 음식점, 주점, 숙박업소로 이용되고 있어 역시 도시로서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고 최근 도심재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문화는 대표적인 것으로 충무아트홀, 음악 등이 있다. 충무로는 근대 영화 산업이 발전한 곳이었으며, 충무로 일대에는 유명한 극장이 지금도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충무로 국제 영화제가 열린다. 청계천은 서울특별시의 남산, 북악산 등에서 발원하여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을 거치며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른 하천이다. 본래의 이름은 ‘개천’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m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1897년 고종 34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함녕전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 이 수리된 뒤 대한문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 융희 1년 순종 즉위 후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신당동에 있는 떡볶이타운은 떡볶이를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1급 호텔로는 소공동의 호텔 롯데, 웨스틴조선호텔, 남대문로의 지운현무서울힐튼호텔, 태평로의 서울프라자호텔, 장충동의 신라호텔,회현동의 티마크그랜드이 있다. 중구는 퇴계로, 을지로, 청계천로, 남대문로, 왕십리로 등의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서울 지하철 1·2·3·4·5·6호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한국은행 등 주식회사 국민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언론기관의 본사가 중구에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46년 4월 11일 - 211년 2월 4일)는 193년부터 211년까지의 로마 황제이다. 아들 카라칼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면서 로마 황제 자리의 세습제를 사실상 시작한 황제이다. 북아프리카 렙티스 마그나(현재의 리비아 트리폴리) 출신으로 회계 감사관, 호민관을 거쳐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시칠리아 등의 총독으로 부임하다가 191년 가까운 판노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내란에 일어나 뒤를 이은 페르티낙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살해당하자 황제를 자칭하였고 뒤이어 시리아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황제를 자칭하였다. 이에 7대 군단 4만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알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는 조건으로 연합하고 12개 군단 7만 2000명 중 2개 군단을 본국으로 내려보내 율리아누스를 살해하고 로마에 입성해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뒤이어 8개 군단 4만 8000명의 동방 군대를 이끄는 니게르와 내전을 벌여 193년 말에 벌어진 페린투스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194년 1월 니카이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0월 이수스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 니게르를 대파하고 추격대를 보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살해했다. 그리고 197년 2월 19일 배로 불어난 대군을 이끌고 리옹 근처의 평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함에 따라 알비누스가 자결하고 세베루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로마인과 원로원을 무시했고 로마 제국의 마지막 가도 건설 사업이던 세베리아나 가도 건설 사업을 벌였다. 또한 그는 군대를 30개 군단으로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이전 300 데나리우스 은화, 1200 세르테르티우스 동화에서 375 데나리우스 은화, 1500 세르테르티우스 동화로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고 199년 파르티아를 향한 동방 원정을 개시해 티그리스 강변까지 쳐들어가 파르티아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했다. 그리고 포로 로마노의 마지막 건축물인 세베루스 개선문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본국에 머무르며 각종 공공 시설 개발 사업을 벌이다가 205년 세습 문제 중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가 아들 카라칼라가 플라우티아누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10년부터 칼레도니아 전역 제패를 목표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다가 211년 2월 4일 에부라쿰에서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용산구 용산구(龍山區,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한강 위쪽 중간에 있는 자치구이다. 북쪽으로는 중구, 동쪽으로는 성동구, 남쪽으로는 영등포구와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 서쪽으로는 마포구와 접해있다. 북동부에 남산, 응봉 등의 산지가 경계를 이루는 외에 대체로 낮은 구릉성 지형으로 되어 있다.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한강대로가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한강대로 주변은 상업지구와 업무지구를 형성한다. 명칭의 기원은 『증보문헌비고』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가지에 나와 있지만 내용이 각기 다르다. 고려까지 과주(果州, 지금의 과천시)에 속했던 곳으로 이후에 남경에 편입되어 한양부로 불리었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말에는 용산방 지역이 되었다. 1896년 4월 17일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1911년 용산방이 용산면이 되었다. 1914년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영등포출장소 이속, 경성부 용산출장소(치소-신계동, 청엽정1~3정목, 원정1~4정목, 금정, 미생정, 경정, 대도정, 영정, 청수정, 산수정, 암근정, 도화정, 강기정, 삼판통, 한강통, 마포동, 이촌동), 용산면의 일부는 고양군 용강면으로 개편되었다. 용산구는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근대 이후 경제 및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남쪽으로 한강을, 북쪽으로 남산을 경계로 중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과 남쪽은 용산동2가, 서쪽은 동자동, 갈월동과 접해 모두 6개 자치구와 접하고 있다. 한강을 잇는 대교들 중 6개의 한강대교와 경부선 철도가 용산을 지나고 있어 서울 도심을 잇는 관문이며 교통의 요충이라 할 수 있다. 용산구에는 효창공원,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전쟁기념관, 한강시민공원 등 도심공원이 많아 주민들이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자연 휴식 공간이 많다. 또한 관내에 미 8군 기지를 비롯하여 많은 외국 공관저와 문화원, 이태원 관광특구 등이 있어 타지역에 비해 특히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고속철도의 중앙 역사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용산역과 과거 전자기기 유통의 중심이었던 용산전자상가 등이 존재한다. 미군기지가 이전하면서 개발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한때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이 추진되었다가 무산되었으나 재추진 기대도 있으며, 한강로2·3가, 한남뉴타운, 이촌동, 서빙고동 등에서 뉴타운과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지면 용산 부지는 2027년까지 국가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용산에서 열린 2018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제 용산은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생태자연공원으로 조성될 것"이라며 "2005년 선포된 국가공원 조성계획을 이제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용산구의 행정 구역은 16 행정동이며, 면적은 21.87km이다. 인구는 2018년 2분기를 기준으로 108,516 세대, 245,245명이다. 이 지역에는 1900년 건립된 한강의 첫 교량, 한강철교와 1917년 건립된 한강의 첫 도로 교량, 한강대교가 존재한다.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를 탈 수 있다. 대체로 경부선, 경전선 계통의 열차는 서울역에서, 호남선, 장항선, 전라선 계통의 열차는 용산역에서 시종착한다. 강원도로 가는 열차는 용산역의 ITX-청춘이 있으나, 춘천 이외의 지역으로 가려면 청량리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성동구 성동구(城東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북쪽으로는 동대문구, 동쪽으로는 광진구,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 서쪽으로는 중구, 용산구와 접해있다. 한양도성의 동쪽이란 뜻에서 구명을 정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강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2호선, 3호선, 5호선, 경의·중앙선, 분당선이 통과하며, 동호대교, 성수대교를 축으로 강남, 강북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이다. 청계천, 중랑천, 한강 등 총 14.2km의 수변과 접하고 있는 물의 도시로, 성동구는 수변구간의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수변도시로 발전을 꾀하고 있다. 2.17km의 성수 준공업 지역의 생산 기능과 용답동 중고자동차 매매시장, 마장동 축산물시장의 유통 기능, 금호동, 옥수동, 행당동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주거 기능을 고루 갖추고 있다. 성동구의 행정 구역은 1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서울시의 2.8%를 차지하는 16.85km이다. 성동구의 인구는 2015년 8월을 기준으로 126,989가구, 298,202명이다. 남산, 북악산 등에서 발원하여 종로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을 거치며 중랑천과 합류한 뒤 한강으로 흘러드는 마른 하천이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본래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청계천”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살곶이다리는 보물 제1738호로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에 있으며, 현재의 위치는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전곶교’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1420년 세종 2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1483년 성종 14년에 완공했다. 성수대교 북단, 서울 지하철 2호선 뚝섬역과 한양대역 사이에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전망이 탁 트여 있다. 동쪽으로는 성수대교 교차로와 강남 빌딩군, 서쪽으로는 동호대교와 한강의 풍경을 찍을 수 있다. 본래 골프장과 승마장이 있었던 지역으로,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약 235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2005년 6월에 완성하였다. 면적은 1,156,498m (약 35만평)이며, 5개의 테마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강과 중랑천이 공원 근처에 흐르고 있다. 마포구 월드컵공원 (100만평)과 송파구 올림픽공원 (50만평)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 큰 규모의 공원이다. 서울에 최초로 설치된 수원시설이었다. 1903년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 웍크는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상수도시설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이들은 정수장의 송수실과 완속여과지를 1906년 8월에 착공하여 1908년 8월에 준공하였다. 당시 정수장 건물은 수도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임충재(任忠宰) 1945년 11월 2일 ~ 1946년 12월 31일 이무성 李武聖 1946년 12월 31일 ~ 김정태(金政泰) 1949년 2월 12일 ~ 카라칼라 카라칼라 (186년 4월 4일 - 217년 4월 8일)는 정식으로는 안토니누스라고 알려진 198년에서 217년까지의 로마 황제이다. 세베루스 왕조 출신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의 장자였다. 카라칼라(Caracalla)란 본명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명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 나눠준다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로 198년 ~ 211년까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공동 통치를 했다. 황제에 오른 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동생 게타와의 경쟁이 심했는데 211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 잉글랜드 요크 지방에서 죽고 게타가 드디어 로마 제국의 2인자에서 1인자로 오르면서 경쟁이 더 심화되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은 지 1년 만인 212년 2월에 카라칼라는 게타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고 단독 황제로 올랐다. 이때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과했으나 후에 로마의 재정 문제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213년 북부 지역을 순찰하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고 215년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으나 볼로가세스 5세가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줌으로써 명분을 잃고 중단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던 중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216년 볼로가세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다시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밀어붙였다. 이때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로원까지 반카라칼라 진영으로 돌변했다. 결국 217년 4월 이에 카라칼라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의심을 품은 병사들이 마크리누스에게 호소해 카라칼라는 자신을 경호하던 백인대장의 형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의 신전에서 암살당했다. 카라칼라는 비록 동생을 죽이고 단독 황제로 오르는 등 여러 포악한 일을 일삼았으나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성품이 너그러웠다.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정책은 세수 충원을 원할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전부터 제국에 인력과 세수에 많은 기여를 하던 속주민에게 새로운 자긍심을 심어주어 제국 일체화에 공헌하였다. 광진구 광진구(廣津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으로 경기도 구리시, 남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서쪽으로는 동대문구와 성동구, 북쪽으로는 중랑구와 이웃하고 있다. 광진(廣津)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한강의 나루터였던 광나루에서 유래하였다. 광진은 경기도 양주의 남쪽 한강 부근에 있었던 나루로 양진(楊津)이라고도 한다. 광진 또는 양진은 '광주로 가는 나루' 또는 '양주에 있는 나루'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일설에는 광진을 '너븐나루'라고 하여 강폭이 넓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근거는 정확히 찾기 어렵다. 반면 양진(楊津)은 '양주의 나루'로 한강 북쪽 나루의 이름이고, 광진(廣津)은 '광주의 나루'로 한강 남쪽 나루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 아차산(해발고도 287m)과 용마산(해발고도 348m)이 솟아 있다. 동쪽과 남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동구·송파구·강남구와 접하고, 서쪽은 성동구·동대문구, 북쪽은 중랑구·경기도 구리시와 닿아 있다. 광진구의 행정 구역은 7개의 법정동을 15개의 행정동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고 있다. 광진구의 면적은 17.06km이며,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58,534세대, 384,269명이다. 능동에 소재한 가족 단위 휴식 공간으로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장하였다. 약 53만여 m로 개장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으며, 푸른 숲과 파란 잔디의 녹지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린이는 물론 청소년과 일반시민을 위한 휴식 및 문화공간으로서 시민공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각종 교양시설 및 동, 식물원, 놀이시설 등을 갖춘 어린이의 낙원이자 살아있는 학습교육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백제 시대에 건축된 아차산성이 있으며, 이 성은 현재 백제의 도성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풍납토성과 마주보고 있다. 아차산은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시대의 전략요충지로 특히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학문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이 지역 주민들은 온달장군이 아차산에서 전사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 불리는 약수터와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의 거대한 공기돌이 있다. 도로교통은 천호대로가 동서 방향을, 구의 경계를 지나는 동일로와 강변북로가 남북 방향을 지난다. 철도교통은 수도권 전철 2호선과 5호선이 평행하게 동서를 가르고, 7호선이 남북을 관통한다. 2호선 강변역 부근에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마크리누스 마크리누스 (165년 - 218년)는 로마 제국의 22대 황제로 황제에 올랐음에도 단 한번도 수도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황제이다. 원로원 출신이 아닌 최초의 황제로 카라칼라가 217년 파르티아와 싸우다가 장교들에게 암살당하자 재위에 올랐다. 파르티아와 오랫동안 싸웠으나 결판을 내지 못했고 218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국왕의 어머니와 배상금, 그때까지 손에 넣은 전리품들을 모두 반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군대의 지지를 잃었고 그사이 율리아 마이사의 사주로 시리아 군대가 엘라가발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마크리누스는 군대를 모아 맞섰으나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군대가 모두 엘라가발루스에게 투항했다. 이에 로마로 도주하던 중 비티니아에서 발각되어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동대문구 동대문구(東大門區)는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대문'의 명칭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인 한양의 동문인 흥인지문의 별칭 '동대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재 흥인지문은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해 있다. 동대문구는 서울특별시 동부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은 성동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중랑천을 경계로 중랑구와 광진구, 북쪽으로는 성북구, 서쪽으로는 종로구와 접하고 있다. 일찍이 동대문구는 청량리, 경동시장, 청과시장을 중심으로 부도심 근린생활기능을 수행하는 서울 동부의 중심지로써 천호대로, 왕산로, 고산자로 등 주요 간선도로가 관통하고 청량리역 등 서울 지하철 1호선 및 2호선이 통과하는 교통망이 구축되어 주요 교통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대문구의 행정 구역은 10개의 법정동을 14개의 행정동으로 관리하며, 면적은 14.20km이다. 동대문구의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57,650세대, 375,683명이다.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 강북 구간이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총 길이는 45.3 km으로 서울특별시내의 하천 중에서 제일 길다. 자전거 도로 등이 잘 조성되어 있다. 또한 여러가지의 운동시설도 있다. 청량리역에서 새마을호, 무궁화호, ITX-청춘열차를 탈 수 있다. 중랑구 중랑구(中浪區)는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은 경기도 구리시, 북쪽은 노원구, 남쪽은 광진구, 서쪽은 중랑천 건너 성북구·동대문구와 맞닿아 있다. 동대문구에서 분구할 때 분구의 기준이 되었던 중랑천에서 이름을 따왔다. 다만 이 중랑천은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이름이며, 원 이름은 한천(漢川)이다. 동쪽은 불암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산(검암산), 망우산, 용마봉의 산줄기가 발달해 있고, 북쪽은 봉화산 일대의 구릉지가 있다. 서쪽으로 묵동천, 면목천이 계곡 사이를 흘러 중랑천에 합류되고, 다시 한강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면목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은 상습 침수 지역이었으며, 거의 대부분 복개되어 있다. 중랑구의 행정 구역은 16개 행정동으로 관리되며, 면적은 18.51km이다. 중랑구의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74,313세대, 423,655명이다. 망우리공원에서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선생님,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인 오세창, 한용운, 천연두 보급의 선구자로 의학자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 임시정부 내무부서기를 역임한 문명훤, 동아일보 주필과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의 묘소가 있으며, 이들 일곱분의 유명인사 연보비가 공원내 산책로 조성과 함께 지난 1997년 2월에 설치되었다. 이어서 1998년 2월에 시인 박인환,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교육가 오긍선 등 여덟 분의 변보비가 추가로 설치되어 역사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독립운동가 김정규,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 김말봉, 김이석, 최학송, 작곡가 채동선, 언론인 설의식, 정치인 이병홍, 가수 차중락, 친한 일본인 아사가와 다쿠미, 조선 순조의 첫째 딸인 명온공주 등이 안장되어 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성북구 성북구(城北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성북의 명칭은 이 지역에 있던 성북동(城北洞)에서 나왔다. 성북구는 북한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성북에는 서울성곽, 북한산성과 같은 방위시설 등의 유적지가 유달리 많고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에서 보듯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로 각종 문화유산이 많으며, 특히 병자호란 때 여진족이 한성의 부녀자를 붙잡아 갔다는 미아리고개(수유령)는 한국전쟁 때에도 많은 시민이 끌려간 곳으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말로 더욱 유명하다. 대일외국어고등학교 및 고려대학교 등 명문 학교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어 지성과 교양이 가득한 고장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수도권 지하철 4호선, 6호선 개통과 함께 도시의 다양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의정부 등 서울 북부 외곽지역과 도심을 연결하는 부도심권으로서 그 발전이 매우 기대되는 지역이다. 성북구의 행정 구역은 39개의 법정동과 20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북구는 1949년 8월 13일 설치되었으며(동대문구 일부 지역과 고양군 숭인면 일부지역포함), 1988년 5월 1일 구단위 지방자치단체를 시행하여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성북구의 면적은 24.57km이며, 서울시의 4.05%를 차지한다. 인구는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99,398세대, 494,422명이다. 김교홍(金敎鴻) ~ 1956년 9월 19일 이갑주 1956년 9월 19일 ~ 엘라가발루스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3년 무렵 ~ 222년 3월 11일)는 로마 제국의 23대 황제이며, 엘라가발루스신의 제사장을 역임한 것에서 황제 별명이 붙었다. 흔히 괴팍한 행동과 장난을 많이 친 황제로 유명하다. 217년 카라칼라 황제가 마크리누스에게 살해당하고 마크리누스가 황제에게 올랐으나 218년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등이 군대를 결성하여 마크리누스를 살해한 후 폐위시키고 엘라가발루스를 황제에 올렸다. 엘라가발루스는 최초의 동방 출신 로마 황제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장군을 처형하고 로마 왕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믿었던 바알신을 강제로 믿게 해서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자기가 살던 지방의 이방인들을 불려들였다. 또한 곤충과 동물을 좋아해 거미줄을 수집하기도 했고 각종 동물들을 자기 마차에 올려놓기도 했다. 게다가 파티에는 손님들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했으며, 제대로 된 음식에도 거미를 넣거나 말똥을 섞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파티에는 꽃잎을 마구 퍼부어보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꽃잎을 너무 많이 퍼부어 몇 명이 질식하여 죽었다. 어떤 때에는 거대한 목욕탕을 지었는데 한 번만 사용하고 부숴 버렸다. 또한 그는 극심한 동성애자로, 로마 제국의 동성애자 탄압 정책을 없애려고 하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이렇게 황제가 괴팍한 행동과 장난을 많이 치자 국고는 바닥나기 시작하면서 이에 분노한 할머니 마이사가 너무 일찍 동생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결정하자 근위대장을 시켜 마이사와 알렉산데르를 죽이려하다가 오히려 222년 3월 11일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근위대장과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강북구 강북구(江北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북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구 전체면적은 23.60km(서울시 면적의 약3.90%)로 그 중 공원녹지 지역이 12.922km로 구 전체면적의 54.8%를 차지한다. 구의 동쪽은 노원구와 도봉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남쪽은 성북구, 북쪽은 도봉구 및 경기도 양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구청장은 박겸수이다. 한강 이북에 위치해서 강북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한강과 접해있지는 않다. 강북구 면적은 23.61km로서 서울시 면적 605.52km의 3.9%를 차지한다. 13개 동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관할하는 동은 우이동으로 10.95km(구 전체면적의 46.4%)이며 가장 작은 동은 번 제1동으로 면적은 0.55km(구 전체면적의 1.3%)이다. 강북구는 서울특별시의 동북단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노원구, 도봉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남쪽은 성북구, 북쪽은 경기도 양주시, 도봉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울의 외곽 지역이다. 지형적으로는 서부산지, 중앙저지, 동부산지로 구분되며 서부의 산지는 태백산맥 철령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달리는 광주산맥 지맥의 일부로 이 광주산맥은 서울 부근에 이르러 웅장한 산세를 이루게 된다. 지질은 중생대 말에 관입한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된 후 절리와 표면의 풍화작용으로 지금의 모습과 같이 산세가 험준하고 경사가 심한 암벽 봉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인근에 북한산이 있고 시 외곽에 위치해 있으며 1990년 이후 강수량이 감소하면서 맑은 날씨의 일수가 증가하고 있다. 하절기에 강수량이 많고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몬순 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산지가 많은 강북구는 도심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서리와 눈을 많이 볼 수 있어 도심과 비교하여도 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다. 강북구의 행정 구역은 미아동, 번동, 수유동, 우이동 4개의 법정동과 13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북구의 면적은 23.60km로서 서울시 면적 605.21km의 3.90%에 해당하며,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42,150세대, 346,493명이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Augustus, 207년 경 - 235년 3월 19일)는 222년부터 235년까지의 로마 황제 및 세베루스 왕조 출신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222년에 암살당한 숙부 엘라가발루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며, 그 자신도 암살을 당해 50년에 가까운 내전, 외국의 침입, 현재 논란되고 있는 화폐 경제 붕괴등의 3세기의 위기가 일어났다. 알렉산데르는 자신의 근위대 의해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함께 살해당하고 모욕을 주기 위해 시신을 테베레강에 던져진 19세의 황제인 친척의 후계자였다. 그와 친척 둘다 그 유명한 갈리카 제3군단를 통해 엘라가발루스의 황제 즉위 동위를 주선해낸 영향력과 권력을 지닌 율리아 마이사의 손자들이였다.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어머니를 암살을 유발했다는 알렉산데르의 죽음에 대한 루머가 있었다. 그의 13년간의 통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이래로 단독 황제로서는 가장 긴 기간이였다. 또한 그는 하나된 제국이 존재하던 시기 합법적인 단독 황제로서는 두번째로 젊었으며, 가장 젊은 이는 고르디아누스 3세이다. 알렉산데르의 평화로운 제위 시기는 번창하였다. 하지만 로마는 번영하는 사산조 페르시아과 게르마니아 부족들의 늘어나는 습격을 군사적으로 맞딱드렸다. 그는 사산조의 위협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게르만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칠때, 그들을 외교적과 뇌물로 평화를 이룰려고 시도했다. 오리엔트 지방의 소도시 알카 카이사리아 출생으로 222년 3월 13일에 동생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되면서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법학자 울피아누스를 등용해 로마 제국의 일시적 부흥기를 마련하며 6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가 울피아누스를 실각시키고 후에 살해하면서 내정이 붕괴되고 226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로마의 동방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5만 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시리아 속주에서 군단병들의 파업에 부딪치고 페르시아와 일차전을 벌이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소득은 거의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원로원에는 승리로 보고한 뒤 철수해 234년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라인 전선으로 떠났다. 하지만 알렉산데르가 게르만족과 평화 교섭을 진행하자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235년 3월 9일에 갈리아 지방의 마인츠 근처의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해되었다. 이로써 5대에 걸친 세베루스 왕조가 붕괴되고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되면서 로마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광주시 (경기도) 광주시(廣州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동부에 있는 시이다. 광주산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며, 경안천이 흐른다. 동쪽으로 양평군, 여주시, 서쪽으로 성남시, 남쪽으로 용인시, 이천시, 북쪽으로 하남시, 남양주시와 접한다. 조선시대의 광주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강동구·송파구(1963년 1월 1일 편입), 성남시(1973년 7월 1일 시 승격), 하남시(1989년 1월 1일 시 승격)까지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1979년 5월 1일 광주면이 광주읍으로 승격하였고, 2001년 3월 21일 광주군이 도농복합시인 광주시로 승격하였다. 3읍 4면 3동을 관할하는 도농복합시다. 광주시는 경기도의 중부에 있는 도시로서 동서간 27.88 km, 남북간 30.26km로 전면적 431km에 달한다. 동쪽으로 여주시, 이천시에 접하고, 서쪽에는 성남시, 남쪽에는 용인시를 이웃하고 있으며, 한강을 경계로 하여 남양주시, 양평군과 하남시를 마주보고 있다. 서울-부산간 국도가 광주시를 남북을 종단하고 있어 자동차가 빈번히 왕래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광주시의 경작지는 주로 한강 유역과 동서를 관통한 경안천 유역에 있고, 그 외에는 산간 계곡에 흩어져 있으나 산악이 좋은 곳이다. 광주시의 행정 구역은 3읍 4면 3동, 75통 168리이며, 2017년 6월 기준으로 면적은 431.05km이다. 광주시의 인구는 2017년 6월 기준으로 334,798명이며, 134,658세대이다. 광주광역시는 '광주'로 짧게 발음하지만, 경기도 광주시는 '광:주'로 길게 발음한다. 광주시의 인구는 2016년 8월 현재 319,594명이며 인구밀도는 741명/km이다. 0~14세 인구는 16.3%, 65세 이상 인구는 10%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3.8%이며,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2.07%, 노년인구부양비는 13.31%이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약 106으로 남자가 다소 많다. 당초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와 함께 통합을 구상하던 도중에 탈퇴했었으나, 2009년 9월 2일부터 성남·하남의 통합에 광주시도 함께 참여하기로 의견을 또다시 변경하였다. 2009년 11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로부터 광주,성남,하남지역을 통합추진 지역 6곳 중에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 지역주민 대부분이 통합을 지지하는 것을 바탕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행정구역 통합 논의는 3개 시의 시의회에서 통합을 모두 의결함에 따라 확정되었으나, 통합 반대 여론이 많아 사실상 통합은 전면 보류되었다. 광주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12조9151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1257억원으로 0.97%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6조3191억원으로 48.93%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6조4701억원으로 50.1%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9.6%)과 건설업(7.5%), 운수업(6.3%)과 부동산업 및 임대업(4.2%)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광주시 산업의 총 종사자 수는 115,876명으로 경기도 총 종사자 수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161명으로 0.1%의 비중을 차지하며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44,171명으로 38.1%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71,544명으로 61.7%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7.6%), 운수업(7.5%)과 숙박 및 음식점업(8.3%), 문화 및 기타서비스업(5.9%)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남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행정 주소 상으로는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84-16 (산성리 563)에 속해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 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팔당호는 팔당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흔히 두 물이 만난다 하여 '두물머리'라 한다. 다목적댐은 아니며 일반댐이다. 북한강의 하류지점이며 남한강은 이곳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흐른다. 남쪽으론 경안천이 흘러들어온다. 광주경기도자박물관은 분원관요와 그 생산품에 대한 자료의 수집, 보존, 연구, 전시를 목적으로 설립되어 조선백자를 연구하고 유적의 발굴과 학술연구사업, 전통 도자문화 교육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선 도자 전문 박물관이다. 2개의 대형 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다목적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규모의 야외조각공원과 장작가마, 한국정원, 다례시연장 및 광주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판매하는 도자쇼핑몰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도봉구 도봉구(道峰區)는 서울특별시의 북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명칭은 이 지역의 명산인 도봉산(道峰山)에서 이름을 따왔다. 도봉구에 속하는 모든 법정동인 쌍문동, 창동, 방학동, 도봉동은 모두 조선 초까지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고 각각 다음의 지역에 속했다. 도봉동은 상루원리, 무수동, 영국리, 방학동은 암회리, 원당리, 도당리, 쌍문동은 소라리, 계성리, 우이리 일부(현재의 쌍문1동 일대)였고, 창동은 당시 창동리, 마산리, 유만리였으며, 1914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관할이 되어 도봉리, 방학리, 쌍문리, 창동리가 되었다. 단, 현재의 행정구역인 쌍문1동의 우이천 서부 지역은 1914년 이전에는 경성부 숭신방(숭인면) 우이리에 속했다. 도봉구는 서울시청으로부터 약12km 동북부에 구의 중심인 방학동이 위치하며, 구 전체면적은 20.84km로 서울특별시 면적의 3.4%를 차지하고 있다. 도봉구 면적 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은 북한산국립공원을 비롯한 공원으로, 구면적의 48.2%인 10.05km에 달하고 있다. 서울시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봉구는 동쪽으로 노원구 상계동과, 서쪽은 강북구 수유동·우이동과, 남쪽은 노원구 월계동 및 강북구 번동과 북쪽은 의정부시 호원동 등과 접하고 있는 서울 동북부의 관문 지역이다. 도봉구의 지형은 서남부는 강북구와 경계를 이루는 우이천이 흐르고, 북부는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루는 도봉산이, 동부는 낮은 지대로 함경남도 원산의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뻗어 내린 좁고 긴 골짜기인 추가령 지구대 남단에 해당되는데, 이 골짜기를 따라 한강상류 지류인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이 동부 저지대를 사이에 두고 노원구쪽에 불암산(508m), 수락산(637.7m)이 있다. 도봉구의 상징인 도봉산은 서울의 진산이라 불리는 북한산과 연접해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739.5m)을 비롯하여 만장봉(718m), 선인봉(708m), 오봉(625m) 등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고, 그 사이로 계곡의 맑은 물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도봉구는 의정부시를 포함한 양주시 출신 인구가 상당히 많다. 의정부시, 양주군를 포함한 광의의 구 양주군 출신은 도봉구 전체 인구 중 약 30% 정도 되어 지역색, 텃세가 상당히 강한 편에 속한다. 아울러 이 지역은 서울에서 개신교 신자가 가장 적은 곳이다. 전체 인구 34만 명 중 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비율로 보면 전체 인구의 15% 정도이다. 도봉구의 행정 구역은 14개의 행정동과 385통 2,926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봉구의 면적은 20.70km로 서울시의 3.42%에 해당한다. 도봉구의 인구는 2019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138,087세대, 339,413명이다.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양주시 장흥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한 부분이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연봉을 따라 운악산·불곡산을 거쳐 남서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울 동북쪽에서 우뚝 솟아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최고봉인 자운봉(739.5m), 남쪽으로 만장, 선인봉, 서쪽으로 오봉, 여성봉이 있다. 조선 제10대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군부인 신씨( 1476 ∼ 1537)의 무덤이다. 중종 8년 1513년에 조성되어,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의 선영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의 예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한강의 여러 지류 중 하나로,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해 의정부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 강북 구간이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총 길이는 45.3 km으로 서울특별시 내의 하천 중에서 제일 길다. 광주 (동음이의) 광주는 대한민국에서는 지명으로서의 통상 광주광역시를 가리키며, 경기도 광주시를 지칭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경기도 광주’라고 한다. 광주는 다음 뜻으로도 쓰인다. 노원구 노원구(蘆原區,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북동부에 있는 자치구다. 도봉구에서 분구될 때, 이 지역의 옛 행정구역 명칭인 양주군 노원면에서 구명을 따왔다. 노원구에 속하는 모든 법정동인 월계동, 공릉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동은 각각 조선 초까지는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관할이 되었다. 1963년 성북구에 편입되었고, 1973년 도봉구를 거쳐 1988년 노원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노원구는 서울 최동북부에 위치하며 북쪽과 동쪽으로 수락산, 불암산 등을 통해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구리시와 맞닿아 있다. 구의 서쪽 경계를 따라 월계동을 관통하며 중랑천, 당현천이 흐른다. 서울은 물론 대한민국에서 가장 토박이가 적은 지역으로 현재 이 지역에서 3대 이상 살아온 토박이는 3명도 안 되며, 또 이 지역의 85% 정도가 아파트로 돼 있어 애향심이 서울에서 가장 낮은 자치구이다. 왜냐하면 인구 전출입이 서울 관내 25개 중 가장 많기 때문이다. 노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는 갈대(蘆)만 무성해서 행인들이 불편을 겪어 여관인 원(院)을 설치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단순히 갈대(蘆)가 많은 들판(原)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노원구의 행정 구역은 5개의 법정동과 이것을 관리하는 19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원구의 면적은 35.44km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5.85%를 차지한다.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222,959세대, 600,829명이다. 과거에는 광운대역(성북역)에서 경춘선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를 탈 수 있었으나 현재는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근열차, 누리로 등 일반 열차를 타려면 서울역 (경부선, 경전선, 충북선 (누리로), 동해선), 용산역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청량리역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으로 가야 한다. 노원구 공릉동에는 국내 유일의 종합트레이닝 센터인 태릉선수촌이 위치해 있다. 노원구는 대한민국의 여섯 곳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곳과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미국의 어바인과는 자매결연 관계와 유사한 우정도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터키 이스탄불 에미뇌뉘 구와는 상호 협력 관계에 있다. 은평구 은평구(恩平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북서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구의 동쪽으로는 서대문구 및 종로구, 남쪽으로는 마포구, 북쪽과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접한다. 서울특별시와 고양시 및 파주시를 연결하는 수도권 서북부 교통의 요지이다. 은평구에는 석기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평구 지역은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하는 씨족끼리 취락을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였으며, 움집 같은 곳에 기거하면서 농경과 수렵, 어로활동을 통하여 음식물을 구하고 원시적인 방직술을 습득하여 간단한 천(직물)을 짜 입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인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757년 경덕왕 7년에 ‘한주’로 고쳤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의 하나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1087년 문종 21년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소경이 되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1308년 충렬왕 34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다. 1394년 조선 태조 3년에 한양부로 도읍을 천도하면서 ‘한성부’로 이름을 바꿨으며, 서울 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동, 서, 남, 북, 중) 중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이라는 말은 이 두 지명(연은방+상평방)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 서북부 지역에 위치한 은평구는 동경 126˚와 북위 37˚에 위치해 있다. 경기도 고양시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판문점과의 거리가 불과 40km 근거리로 통일을 대비한 서울의 관문으로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종로구, 남쪽은 서대문구,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일산신도시로 이어지는 지하철 3호선과 은평구 외곽까지 이어지는 지하철 6호선은 지역 교통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지형은 대부분이 임야, 분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며, 백두대간에서 분기된 한 줄기가 멈춰선 북한산이 시가지 우측에 남북으로 접해 있고, 그 진산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평지를 둘러싸고 있어 시가지 전체는 정사각형의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북한산으로부터 남쪽의 한강을 향해 서서히 지세가 낮아지는 지역으로, 주위에는 북한산(836m)의 지봉인 남장대(715m)를 비롯한 비봉, 백련산 등의 봉우리가 있다. 계곡으로부터 발원된 깨끗한 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은평의 중심부인 불광천을 흘러 한강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가지 지역이 분지형인 관계로 비교적 온난한 지역으로 녹번동 삼거리를 중심으로 인왕산, 북악산에 접한 비봉, 문주봉, 석가봉 그리고 멀리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으로 연결되는 산악군이 대륙성 기후의 한냉한 기온을 순화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평균 90여일의 맑은 날과 12°~13°C의 비교적 따뜻한 기온, 1200mm~1600mm의 강수량을 보이고 있다.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인 51.25%가 그린벨트로 묶여있다. 이는 서울시내 구들 중 1위이다. 은평구의 행정 구역은 16행정동, 551통, 4,111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는 2015년 5월 말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49만9491 명, 20만2991 세대이다. 면적은 2013년 말을 기준으로 서울 전체 면적의 4.9%를 차지하는 29.70 km이다. 은평구청은 녹번동에 소재한다. -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작은박물관으로, 요리체험, 악기체험, 춤체험, 물건관람, 의상체험등 다른나라의 체험을 할 수있다. 서대문구 서대문구(西大門區)는 서울특별시의 중서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은평구, 동쪽으로는 종로구와 중구, 남쪽으로는 마포구와 접해있다. '서대문'의 명칭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인 한양의 서문인 서대문(돈의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서대문이 헐린 자리는 서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해 있다. 서대문구는 동경 126˚와 북위 37˚에 위치한 비교적 온난한 지대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만세문 비각 도로원표로부터 반경 5km내에 위치하며, 구의 동쪽은 종로구와 중구에 접하여 있고 남쪽은 마포구, 서쪽은 은평구와 마포구 일부지역, 북쪽은 은평구에 접해 있으며, 대부분이 임야지, 분지, 구릉의 세 지역으로, 임야지는 인왕산(338m), 안산(296m)등 여러 봉우리가 종립하고 있어 홍은동, 홍제동 지역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연연한 계곡일대에는 자연의 조화와 아울러 산지 수려한 선경을 이루고 있으며 한강을 향하여 서서히 감하고 있어 구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검천을 원류로 흘러내리는 홍제천과 불광천은 한강을 향해 나란히 흐르고 있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녹지가 풍부한 환경으로 인해 일찍이 전형적인 주거지역을 이루어 노후주택 및 시민아파트가 밀집되어 있어 도로·주택 등에 대한 환경개선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문화재와 사적지, 유서 깊은 대학을 비롯한 수십 개의 교육기관이 밀집된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서 그에 걸맞은 다양한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한편 산업화에 따른 도시의 다핵화 현상에 따라 지역별로 특성에 맞춰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는데 충로 정지역은 서울 도심부의 외곽을 형성하는 상업·업무지구로써의 기능을, 가좌지역은 유통과 주거의 기능을, 홍은 지역은 상업과 주거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신촌 지역은 서울 부도심의 하나로 상업 지구를 이루고 있는 한편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8개의 대학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젊은 문화의 거리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의 행정 구역은 14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17.61km이다. 서대문구의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 사찰이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의 안산 자락에 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도선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보우가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사후에는 태조의 초상이 봉안되기도 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하기 위해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세레딘 사바틴이 설계했고, 그 현판은 김가진의 작품이다. 1897년에 지어진 역사적 유물로,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서대문독립공원에 위치해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접근할 수 있다. 1907년 융희 원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한국통감부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이후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활용되다가 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박물관, 문화재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형무소 건물에는 독립공원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군사독재 정부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대문구 신촌동(대현동)과 창천동, 마포구 노고산동과 대흥동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주변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인문캠퍼스) 등 대학교들이 밀집해 있어 젊은 문화가 발전하였다. 서울역에서도 멀지 않고 고양, 김포, 파주, 인천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편이 발달하였으며, 많은 유흥업소 등이 모여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부도심이자 관광지 중 하나이다. 신촌오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바로 연결되고, 이화여자대학교 인근의 경의선 신촌역도 연계된다. 마포구 노고산동, 동교동, 서교동, 상수동, 신수동, 창전동 일대를 포함하는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 주변도 신촌 권역에 속한다. 2003년에 문을 연 공립 박물관으로, 대한민국의 첫 자연사박물관이다. 서울 도심과 강서구, 관악구,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은평구 등을 연결하는 간선버스 상당수가 서대문구를 통과하며, 인천광역시, 부천시, 김포시, 고양시로 가는 광역좌석버스도 상당수가 서대문구를 경유하거나 서대문구에서 회차한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도 있다. 서대문구청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248 (연희동 168-6번지)에 위치해있다. 구청장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으로, 2급 정무직공무원으로 보한다. 마포구 마포구(麻浦區)는 서울특별시의 서부에 있는 구이다. 1990년대 이후 여의도와 인접한 강변 지역을 중심으로 재개발이 진행되어 서울특별시 서부권의 중심 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서구와 영등포구, 동쪽으로는 중구와 용산구, 북쪽으로는 서대문구, 은평구와 접해있다. 마포의 명칭에는 두가지가 전해 내려온다. 마포구의 행정구역은 26개의 법정동을 16개의 행정동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고 있다. 마포구의 면적은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23.84km이며, 인구는 166,722세대, 393,576명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마포구의 합정 (영등포구의 당산역과 연결), 홍대입구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인천국제공항철도와 환승), 신촌, 이대, 아현역 (서대문구의 충정로역과 연결)을 지나간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은 마포구의 마포역, 공덕역 (서울 지하철 6호선, 인천국제공항철도,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과 환승), 애오개역을 지나간다. 서울 지하철 6호선은 마포구의 월드컵경기장역, 마포구청역, 망원역, 합정역 (서울 지하철 2호선과 환승), 상수역, 광흥창역, 대흥역, 공덕역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인천국제공항철도, 서울 지하철 5호선과 환승)을 지나간다. 인천국제공항철도 및 용산선이 마포구를 거쳐 가며, 공덕역이 마포구에서 가장 많은 노선이 교차하는 역이다. 공공예술가 5명의 모임인 "공화국 리라"는 2007년부터 망원동의 구석구석을 예술품으로 장식하는 "동네예술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들은 방범초소나 주택 외벽에 벽화를 그리거나 나무 화단을 설치하고 있다. 공덕동에는 순댓국 등을 파는 "소문난 집", 두부찌개 등을 파는 "옥상휴게실", 모듬전 등을 파는 "원조 할머니 빈대떡"이 있다. 도레미의 만화 《검정고무신》과 구자홍의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의 배경이 된 지역이기도 하다. 안정근(安定根) 1949년 2월 12일 ~ 양천구 양천구(陽川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있는 구이다. 북쪽으로는 강서구, 서쪽으로는 경기도 부천시, 남쪽으로는 구로구, 동쪽으로는 영등포구와 접해있다. 양천의 이름은 고려 시대부터 쓰인 이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양천구는 서울특별시의 서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안양천을 경계로 영등포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경기도 부천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구로구, 북쪽으로는 강서구와 마주하고 있다. 한강과 안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양천구의 지세는 대부분이 과거 저습지 기원의 지형으로 대표되는 동부지역과 20~60m의 저기복의 구릉지형이 나타나는 중앙부 지역, 그리고 60~80m의 소규모 구릉지가 나타나는 북동부와 남서부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크게 한강 연안의 충적지형(자연제방, 배후습지, 범람원)과 침식 구릉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구의 중심부로부터 남서쪽으로는 해발고도 20~60m의 낮고 평평한 구릉지가 분포하고, 구의 북동부와 남서부에 70~80m 높이의 침식구릉이 나타나며, 안양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구의 동쪽에는 배후저습지를 중심으로 하는 충적층이 매우 낮은 고도로 분포한다. 배후저습지의 경우 현재는 안양천 부근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과 안양천지류 복개공사, 그리고 매립으로 인하여 대부분이 사라져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따라서 양천구의 전체적인 지세는 저평한 구릉지와 한강과 안양천을 중심으로 따라 형성된 배후저습지 지형으로 요약되며 이러한 지세는 서고동저의 경향을 나타낸다. 양천구의 행정 구역은 목동, 신정동, 신월동 3개의 법정동을 18개의 행정동으로 나누어 관리를 한다. 양천구의 면적은 17.41km이며, 인구는 2016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477,739명이다. 전체 면적 중 70% 이상이 주거 지역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 철거민들이 대규모로 집단 이주한 목동・신정동・신월동 지역과, 서울특별시의 인구를 강남 지역으로 분산하기 위해 1979년부터 정부가 계획하여 조성한 목동 대단위 주택 단지로 구분된다. 목동 대단위 주택 단지가 있는 동부 지역에는 파리공원, 서부지역에는 양천공원을 비롯하여 근처 안양천변 둔치에 목동 운동장이 갖추어져 있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좋은 편이다. 또한 목동 하이페리온 1~2차, 목동 트라팰리스 등 고층 아파트단지들이 많다. 아파트가 많은 지역 특성 때문에 2014년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인구 밀도 1위를 차지했다. 목동에 SBS, CBS, KT인터넷컴퓨팅센터, 한국콘텐츠진흥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의 방송, IT업체가 소재하고 있다. 상업 활동은 등촌시장, 목동시장, 신곡시장 등 11개 재래 시장과 현대백화점 목동점, 행복한백화점, 농협 하나로클럽 목동점, 홈플러스 목동점, 이마트 목동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목동에 대한민국과 프랑스의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파리공원과 서울특별시 서부 지역 최완전실화합경기장인 목동종합운동장이 있다. 또한, 대단위 주택 단지의 전력 수요를 충당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열병합발전소가 있다. 대한민국의 지상파 방송국 중 하나인 SBS (서울방송)의 본사도 목동에 위치하여 있다. 용왕산에 신정제1우수배제펌프장이 있고, 신정동에 신정제2우수배제펌프장,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차량사업소가 있으며, 신월동에 김포수원지가 있다. 신월동에 경인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신월 나들목이 있고, 영등포·강남 등 부도심으로 갈 수 있는 오목로, 남부순환로가 있다. 목동·신정동 지역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과 서울 지하철 5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그러나 신월동에는 도시 철도망이 없어 상대적으로 교통이 불편하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는 신월동에서 출발해 목동 대단위 주택 단지를 거쳐 당산역으로 가는 경전철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강서구 (서울특별시) 강서구(江西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서남부에 있는 구이다.서울남부에 속한 자치구 중 하나이다. 동쪽으로는 영등포구, 서쪽으로는 인천광역시 계양구와 경기도 김포시, 남쪽으로는 양천구와 경기도 부천시, 북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포구와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다. 한강의 서쪽에 위치해서 강서라고 이름을 지었다. 강서구의 행정 구역은 13개 법정동을 20개의 행정동으로 나눠서 관리를 하고 있다. 강서구의 면적은 41.42km로 서초구에 이어서 서울특별시에서 두 번째로 넓다.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223,708세대, 573,794명이다. 구로구 구로구(九老區)는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있는 구이다. 면적은 서울특별시 면적의 약 3.3%를 차지한다. 인구는 오류2동이 가장 많다. 제조업 중심의 공업단지인 구로공단이 2000년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쪽으로는 영등포구와 동작구, 북쪽으로는 양천구, 서쪽으로는 경기도 부천시, 남쪽으로는 금천구, 경기도 광명시에 접한다. 1995년 3월 1일에 남쪽 지역이 금천구로 분리됨에 따라 현재의 지형을 이루었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구로동에서 이름을 얻었다. 1980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되어 나올 당시에 구로구 분구 방안으로 3가지가 검토되었는데 1안은 기존의 영등포구를 도림천을 경계로 분할하는 방안, 2안은 당시 관악구의 노량진, 상도동, 신대방동, 대방동 일대를 도림천 이북 지역의 영등포구에 편입하는 방안, 3안은 신설된 구에 경기도 시흥군 소하읍 광명리 일대와 철산리 일부를 편입하는 방안이었는데, 1안이 최종안으로 결정되어 구로구로의 분구가 이루어졌다. 구로구는 서울특별시의 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서해안시대의 중심축인 김포국제공항, 인천항, 서해안고속도로와 인접한 서울특별시의 남서관문으로서 경부선 · 경인선 철도와 전철 1 · 2 · 7호선, 경인 · 경수국도가 연계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안양천을 경계로 동서로 생활권이 나뉘어 있어 지역간 연계 체계가 다소 미흡하며, 오류2동, 수궁동 지역에 개발제한구역(4.96km, 구면적의 24.6%)과 시계경관지구(2.1km, 구면적의 10.4%) 등의 미개발 지역과 함께 서울남부교도소·구치소 등 도심 부적격 시설이 위치해 있어 장기적으로 경인로를 축으로 신도림 · 구로역세권, 서울남부교도소·구치소 이적지, 천왕동 · 항동 지역을 잇는 종합적인 도시 개발이 필요한 지역이다. 구로1동은 서부간선도로와 남부순환로, 경부선과 경인선, 안양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구일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구로구의 행정 구역은 15 행정동과 10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20.12km이다.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인구는 454,478명, 171,498세대에 이른다. 금천구 금천구(衿川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있는 구다. 서울 면적의 약 2.1%를 차지하며, 중구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작다. 10개의 행정동과 3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정동 중에서는 가산동의 면적이 가장 크고, 독산4동이 가장 작다. 구명은 시흥군의 전 명칭이던 금천현(衿川縣)에서 유래하였다. 1995년 3월 1일자로 구로구에서 분구되어 설치되었다. 금천이란 명칭은 조선 시대의 지명인 금천에서 유래되었다. 동쪽 및 북동쪽으로 관악구, 서쪽으로 경기도 광명시, 남쪽으로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북서쪽으로 구로구와 접해있으며,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현재의 지형을 이루었다. 지역의 형태는 신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1978년에 개통된 남부순환로가 동ㆍ서간을 따라 구로구, 관악구와 경계를 이루고, 남북간으로는 길게 안양천이 광명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경부선이 나란히 지나고 있으며, 이 구간 지하에 새로 건설될 강남도시고속화도로가 통과할 예정이다. 또한 시흥대로가 금천구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1번 국도인 경수대로,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되며, 서부간선도로가 시흥대교에서 연결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고 KTX 광명역(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이 인접하는 등 서울특별시 남·서부 교통의 요충지가 되고 있다. 금천구의 행정 구역은 10개의 행정동과 3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천구의 면적은 13.07km로 시의 2.15%에 해당된다. 금천구의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04,357세대, 260,734명이다. 초등학교 서울가산초등학교 서울문성초등학교 서울두산초등학교 서울시흥초등학교 서울금나래초등학교 서울신흥초등학교 서울안천초등학교 서울영남초등학교 서울금천초등학교 서울탑동초등학교 서울금동초등학교 서울동광초등학교 서울금산초등학교 서울문백초등학교 서울문교초등학교 서울정심초등학교 서울백산초등학교 독산3동에서는 2006년부터 "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처음엔 구청이 행정 업무로 시작했으나 2007년 10월, 20여 명이 참여하는 주민협의회를 결성한 뒤에는 주민들이 주도권을 쥐고, 공공미술을 설치할 장소 선정 등을 결정한다. 독산3동에서 "민둥산 독에 담긴 독산동 사람들의 푸른 이야기"라는 주제로 다양한 공공미술 사업이 진행 중이다. 영등포구 영등포구(永登浦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남서부에 있는 구이다. 면적은 24.37km(2004)으로 서울시 면적의 약 4%에 해당한다. 여의도동이 가장 넓으며, 전체 영등포구 면적의 34%를 차지한다. 16만 세대가 살고 있으며 710통 5,131반으로 구성(2006)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강서구와 양천구, 남서쪽으로는 구로구, 동쪽으로는 동작구,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마포구, 용산구와 접해있다. 한강과 안양천 그리고 안양천과 도림천, 대방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평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울 서남권(영등포 권역)서울남부의 중심지로서, 서울과 수원, 안양, 부천 등 수도권 서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수도권 서남부 최대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영등포는 한강 이남 지역 중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편입된 지역이다(1936년 영등포 경성부 편입, 1949년 대림동 서울 편입). 특히 영등포역은 도심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예산 규모는 약 2000억원 정도(2004)이다. 기록상으로는 1789년 조선 정조 13년 《호구총수》라는 통계자료가 경기도 금천현조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는데,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샛강변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을 오가며, 한강밤섬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현재의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로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샛강변에서 성행된 영등굿과 관계되어 변형표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永登(영등)"과 물가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 "浦(포)"를 합친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견해에 의하면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으로 추측되는 소머리제(牛頭峴(우두현))가 있어,「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금의 영등포구(대림동 제외) 일대와 동작구 지역(신대방동, 사당동 제외)은 한강 이남 지역 중에서 가장 먼저 서울(경성부)에 편입된 지역으로, 경인선 권역(현재의 금천구, 구로구, 관악구, 강서구, 양천구, 광명시, 부천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 일대)의 경성부 추가 편입 을 염두에 두어 영등포의 경성부 편입이 이루어졌다. 1936년 경성부 편입 이전에도 영등포 지역에서의 경성부 편입 추진이 있었으나 한강대홍수 사태 등으로 무산된 적이 있다. 1930년대 초반에 영등포 지역은 자족적인 신생공업도시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있던 시기였고,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부 편입에 반대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대경성계획 정책에 따라 경성부 편입이 단행되었다. 서울특별시 한강 이남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작구, 서쪽으로는 양천구, 남서쪽으로 구로구, 북쪽으로는 관할인 여의도를 사이에 두고 마포구, 용산구와 마주하고 있다. 영등포구의 행정 구역은 34개동 574통 4,828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등포구의 면적은 24.56km이며, 2013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인구는 377,200명, 167,863세대이다. 지방선거가 실시된 1995년 이후에 재임한 구청장들은 모두 불법 행위로 인해 재판을 받았다. 이는 전국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 일어난 사례이다. 헌법기관 의료기관 우체국 경찰서 동작구 동작구(銅雀區)는 서울특별시의 남부에 있는 구이다.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용산구, 동쪽으로는 서초구, 남쪽으로는 관악구, 서쪽으로는 영등포구와 접한다. 동작구의 명칭은 조선 시대 '동작진'(銅雀津)에서 유래하였다. 동작구는 서울특별시의 중심을 흐르는 한강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구릉지대로 서초구, 영등포구, 관악구, 용산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작구는 일찍이 서울특별시의 관문인 ‘노들나루’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중앙대학교, 숭실대학교, 총신대학교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3개의 사립 대학과 함께 100여개의 학원가가 밀집해 있는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을 모신 국립서울현충원과 사육신묘,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이 서있던 장승배기, 양녕대군이 올라가서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정조대왕이 현륭원 참배 길에 잠시 쉬어가던 용양봉저정,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역인 노량진역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동작구의 행정 구역은 9개의 법정동을 15개 행정동으로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 동작구의 면적은 16.35km이며,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69,293세대, 416,268명이다.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214)에 1955년 7월 15일 설치된 국방부 소속의 국립 묘역이다. 조경이 잘 정비되어 있다.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묘와 그 외 사육신비 등이 안장된 공원이다.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를 새로 조성하였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년)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에 추가로 김문기를 현창하여 모신 곳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년)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여 모두 죽임을 당했다. 노량진 학원가는 1980년 이후 입시학원들이 이전해 오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최근 공무원과 경찰, 소방 등 이와 관련된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을 포함하여 5만여명의 수험생들이 운집하는 대단위 상업지구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류 도소매 직판장으로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이다. 경매장 2,106평, 판매장 2,564평, 주차장 9,387평 등 연면적 16,819평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1927년 서울역 부근 의주로에서 경성수산으로 문을 열었다. 1971년 한국냉장이 노량진역 북쪽의 현 위치에 도매시장을 건설하여 1975년까지 운영한 뒤, 2002년까지 민간 3개사의 공동 관리하에 있었다. 2002년 2월 수산업협동조합이 시장을 인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지역에는 1900년 건립된 한강의 첫 교량, 한강철교와 1917년 건립된 한강의 첫 도로교량인 한강대교 와 1899년 개통된 대한민국 첫 공식 철도 노선 경인선의 노량진역이 있다. 관악구 관악구(冠岳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남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으로는 서초구, 서쪽으로는 구로구와 금천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안양시와 과천시, 북쪽으로는 동작구와 접해 있다. 구명은 분구될 때, 이 지역의 명산인 관악산(冠岳山)에서 따왔다. 관악구의 행정 구역은 봉천동, 신림동, 남현동 3개의 법정동을 21개의 행정동으로 관리를 하고 있다. 관악구의 면적은 29.57km이며,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247,598세대, 540,520명이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사당역은 서초구 및 동작구의 경계상에 접하고 있어 사실상 관악구의 전철역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은 청림동을 통과하지만, 정거장은 없다. 서초구 서초구(瑞草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남동부에 있는 구이다. 남쪽으로는 경기도 성남시와 과천시, 동쪽으로는 강남구, 서쪽으로는 동작구와 관악구,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용산구와 접해있다. 면적은 약 47km로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넓다. 1988년에 강남구에서 분리되었다. 구명은 분구될 때, 이 지역의 중심지인 서초동(瑞草洞)에서 유래하며, 서초동의 지명은 옛날 이곳이 서리풀이 무성했다 하여 이름붙여진 상초리(霜草里) 혹은 서초리(瑞草里)에서 온 것이다. 또는 물이 서리어 흐르는 벌판이란 뜻으로 '서릿벌'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변해 서리풀이 된 것이라고도 한다. 서초구는 서울특별시 한강 이남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강남구, 서쪽으로는 동작구와 관악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과천시와 성남시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한강 건너 용산구와 마주하고 있다. 강남대로를 경계로 강남구, 동작대로 및 현충로,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동작구, 관악구, 반포대교 및 한남대교 등을 경계로 용산구, 남태령을 경계로 경기도 과천시와 경부고속도로 및 청계산을 경계로 경기도 성남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초구의 행정 구역은 10개의 법정동을 18개의 행정동이 관리를 하고 있다. 서초구의 면적은 47.00km이며, 서울시의 7.8%를 차지하고 있다. 서초구의 인구는 2018년 2분기를 기준으로 443,989명, 174,268세대이다. 조선 제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묘인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 합장되어 있는 묘인 인릉이 있다. 둘을 합하여 헌인릉이라 한다.(내곡동 소재) 구룡산(九龍山 : 306m)기슭에 세종대왕릉(英陵)이 있었으나, 영릉은 1469년(예종 1년)에 여주로 천장(遷葬)하였다.(내곡동 소재) 예술의 전당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종합예술시설로서, 오페라하우스, 미술관, 서예관, 음악관 등이 있고, 예술의 전당 바로 옆에는 국립국악기관인 국립국악원이 있다.(서초동 소재) 서초동에는 교보문고, 대법원, 검찰청, 국립중앙도서관등이 있다. 반포4동에는 신세계백화점, 마르퀘스플라자, 메리어트호텔, 호남선 고속버스터미널 등이 있는 센트럴시티가 있고 바로 옆에는 경부선 등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있다. 반포한강공원에는 세빛섬과 반포대교 달빛무지개 분수 등의 명소가 있다. 서초구 양재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양재시민의 숲은 가족단위로 나들이하기에 좋은 공원으로 1986년 개장한 곳이다. 가을의 은행나무 낙엽길이 유명하다. 양재동에는 유스호스텔인 서울교육문화회관과, 반포동 고속터미널에 JW 메리어트호텔 서울, 서울팔레스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방배동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하다. 1976년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레스토랑 "장미의 숲"은 1980년대 방배동을 "최고의 카페촌"으로 부상케 한 대표적인 곳이다. 카페 "밤과 음악사이"는 1970~80년대 가요와 인테리어를 하고 있으며, 통골뱅이와 김치찌개가 대표적인 안줏거리이다. "멋쟁이 카페"들로 명성을 날렸던 방배동은 청담동에 그 명성을 내준 대신 요즘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하다. 이 일대는 아귀찜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또 근래에는 새롭게 치장한 소규모카페들도 하나둘 생겨나며 먹자골목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반포4동 방배중학교 앞 일대 "서래마을"은 일명 "서울 속 작은 프랑스"라고도 한다. 1985년 한남동에 있던 프랑스학교가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자녀 교육을 위해 프랑스인이 모여들어 자연스레 작은 프랑스가 형성됐다. 2006년 현재 반포4동에만 560명은 산다는 게 서초구의 추정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하양으로 곱게 채색된 삼색 보도블록을 볼 수 있다. 서래마을은 한국인에겐 와인바를 비롯해 이국(異國)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장소 정도였는데, 근래 들어 전문 와인바는 물론 여러 종류의 유럽계 레스토랑들까지, 새롭게 문을 여는 업소가 늘어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몽마르뜨 공원이 들어섰고, 갤러리도 문을 열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 산사태 참극을 빚은 서울특별시 서초구가 산사태 예보를 발령하라는 산림청의 공문을 묵살한 것으로 CBS취재 결과 드러났다. 산사태위험지관리시스템에 따라 산림청은 지자체 관계자들에게 일강우량이 80mm이상이면 산사태주의보를, 150mm이상이면 산사태경보를 내리도록 SMS로 안내하고 있다. 해당 지자체는 이를 참고하여 지자체단체장의 결정으로 주의보나 경보를 내리고 주민들에게 대피하도록 지도한다. 서초구는 이와 같은 산림청의 줄기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초구 산사태 담당자는 "산림청 문자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며 "폭우 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휴대전화 배터리까지 나가서 문자함을 열어보지 않아서 잘 기억이 안난다"고 밝혔다.그러나 이는 변명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산림청 확인결과 산사태위험지관리시스템에 의하여 서초구에는 이 담당자를 포함해 모두 4명에게 SMS가 전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2011년 7월 31일 서초구청 확인 결과 산림청이 서울 서초구에 보낸 '산사태 발생 위험 예보 정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는 서초구의 퇴직 공무원들에게 전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연진 서초구 도시디자인 국장은 31일 "서초구의 현직 담당자들은 문자메시지를 받은 적이 없고 산림청이 보낸 문자메시지는 퇴직 공무원들에게 발송되었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사건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죽었으며, 주변 삼풍아파트, 서울고등법원, 우면로 등으로 파편이 튀어 주변을 지나던 행인 중에 부상자가 속출해 수많은 재산상, 인명상 피해를 끼쳤다. 그 후 119 구조대, 경찰,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국군, 정부, 국회까지 나서 범국민적인 구호 및 사후처리가 이어졌다.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는 937명이며 6명은 실종되었다. 피해액은 약 2700여 억원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중 최명석(崔明碩, 1975~)은 11일, 유지환(柳支丸, 1977~)은 13일, 박승현(朴昇賢, 1976~)은 17일 동안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생존자 중 유지환 양은 구조 직후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냉커피가 마시고 싶다."라고 대답하여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서초동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인 대림 아크로비스타가 2001년 착공되어 2004년 완공되었다. 강남구 강남구(江南區)는 서울특별시의 남동부에 있는 구이다.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용산구와 성동구, 광진구, 동쪽으로는 송파구, 서쪽으로는 서초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성남시와 접한다. 한강 이남에 위치해서 강남이란 이름이 붙었다. 부촌 지역으로 잘 알려진 서울 강남 일대의 중심지로, 다양한 번화가가 위치해 있다. 강남구의 행정 구역은 14개의 법정동을 22개의 행정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강남구의 면적은 서울특별시 전체의 6.53%에 해당하는 39.5km이며, 강남구의 인구는 2018년 6월을 기준으로 229,160세대, 551,888명이다. 서울지하철 청담 역 1968년부터 토지 구획 정리 사업에 의해 계획적으로 개발되면서 교통문제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그리하여 도심과 곧바로 이어지는 청담대교, 영동대교,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등이 잇달아 가설되었고, 강남대로, 영동대로와 올림픽대로, 남부순환로가 직교식으로 연결되어 바둑판 같은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KTX, ITX-새마을, 무궁화호, 새마을호, 누리로 등의 일반 열차를 타려면 서울역, 용산역, 청량리역 등으로 가야 한다. 강남구청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동로 426 (삼성동 16-1번지)에 위치해 있다. 1975년에 지어진 과거 조달청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현재 구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강남구청장은 구청의 행정을 총괄하며 관리책임을 수행한다. 정무직공무원에 해당하며 강남구의 인구가 50만 명을 넘음에 따라 2급으로 보해진다. 현재 강남구청장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선출된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정순균이다. 훈 (악기) 훈(塤)은 점토로 빚은 뒤 구워서 만든 관악기이다. 서양의 오카리나와 유사하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한 악기 분류법 중 토부에 속하며, 한국의 아악에 사용된다. 흙을 빚어 저울추 모양으로 만들고, 여러개의 구멍을 뚫어 구워 만들어 불며, 소리는 부드럽고 어두운 편이다. 고대 중국의 악기로, 한국에는 고려 예종 11년에 들어왔다. 문묘 제례악에만 쓰이는 보기 드문 악기이다. 진흙이나 백면토를 황토에 섞어 만들어 굽되 위끝은 뾰족하게, 밑은 평평하게 저울추 모양으로 하고 맨 꼭대기에 취구를 뚫고, 앞에 3개, 뒤에 2개의 구멍(指孔)을 뚫는다. 취구에 입김을 넣어 부는데, 오른손 엄지로는 뒷면 오른편 구멍(제1공)을, 왼손 엄지로는 뒷면 왼편 구멍(제2공)을, 왼손 식지로는 앞면 왼편구멍(제3공)을, 오른손 식지로는 앞면 오른편구멍(제4공)을, 오른손 장지로는 앞면 아랫구멍(제5공)을 여닫는다. 문묘제례악에 쓰이므로, 구멍을 반만 막는 주법을 섞어가며 12율을 낸다. 음넓이는 황종·다(c)에서 응종·나(b)까지이다. 송파구 송파구(松坡區)는 서울특별시의 남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인구는 약 66만여 명 이며 동쪽으로는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 서쪽으로는 강남구, 남쪽으로는 경기도 성남시, 북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광진구와 접하고 있다. 한강과 성내천, 탄천 등의 하천과 청량산이 에워싸고 있다. 송파구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두 지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본래의 송파 지역은 광주군 중대면에 속했고, 잠실 지역은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던 섬이었다. 잠실 지역은 1970년대 한강 공유수면 매립 사업으로 본류였던 남쪽의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75만평의 육지로 만들고, 샛강이었던 북쪽의 신천강의 너비를 넓혀 현재의 지형을 만들었다. 송파구는 1970년대 강남권 개발에 따른 가락·잠실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된 신개발 지역으로, 1986년 아시안 게임 및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이 치러졌던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 공원 등 대단위 종합체육시설이 밀집되어 있으며,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과 롯데월드 등이 있어 서울 동남권 상업유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09년 10월에는 국제 연합 환경 계획(UNEP)이 공인하는 리브컴 어워드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혔다. 송파구의 행정 구역은 13개의 법정동을 27개의 행정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33.87km이며, 인구는 2015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667,480명(남자:325,950명, 여자:341,530명 (외국인 포함)), 256,611세대이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외에 소재한다.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1982년 7월 22일에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송파구 방이2동 88-3번지에 소재한다.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고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1975년 5월 27일에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에 소재한다.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서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의 주인보다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 같고, 독무덤(옹관묘)이나 작은 돌방무덤(석실묘)에 묻힌 사람들 보다는 조금 높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덤들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롯데그룹의 계열사인 호텔롯데에서 운영하고 있는 테마파크로, 실내에 놀이기구, 공연장, 식당 등이 위치한 롯데 어드벤쳐와 야외의 인공 섬에 놀이기구, 식당 등이 위치한 매직아일랜드로 나뉜다. 송파구에서는 일반 열차가 정차하는 역이 없다.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 등 일반 열차를 타려면 서울역 (경부선, 경전선, 동해선)이나 용산역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청량리역 (중앙선, 영동선, 태백선)으로 가야하며, SRT를 타기 위해서는 수서역으로 가야 한다. 송파구의 택시 업체로는 다음이 있다. 공신통운, 대륜운수, 대영운수, 덕왕기업, 동부실업, 삼광교통, 삼성육운, 승리상운, 승일교통, 승일운수, 양지상운, 유림운수, 창운기업, 한석교통, 행운택시, 흥덕기업 강동구 강동구(江東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으로는 경기도 하남시, 남쪽으로는 송파구, 서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광진구, 북쪽으로는 경기도 구리시와 접한다. 한강의 동쪽에 위치해서 강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정확하게는 아이가 넘을 만한 작은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재 또는 강서아재 (서쪽강에 아차산)와 함께 강동아재 (일자산과 작은 언덕들) 라는 말이 강동의 어원이 되었다. 이로써 경기도 광주/이천 사람들은 서울가는 길의 작은 2아재를 지나쳐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서아재(아차산)와 동아재(당산재 - 천호동 북망지언덕 - 고덕산(고지봉) - 일자산)이다. 강동구 암사동에는 기원전 5000년경에 세워진 신석기 시대의 집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서울 암사동 유적(사적 제 267호)이라 한다. 한편 암사동선사주거지에서는 신석기 유물 뿐 아니라 민무늬토기 등 청동기 시대 유물도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강동구 고덕동과 명일동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 당시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에도 강동구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부터 475년 개로왕까지 백제의 수도였던 하남위례성이 이 남측에 위치해 (지금의 풍납동으로 추정)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1960년대 학자의 의해 강동구 암사동과 천호동에서는 백제 시대의 토성으로 추정되는곳이 발견되기도 해 이 곳이 백제의 영토였음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천호동~암사동 지역은 삼국시대때 백제의 초기도읍지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동북방향의 지역으로서 풍납토성 동북쪽~ 고덕산 사이에 이르는 지역이 바로 지금의 천호동과 암사동의 지역이다. 과거 해발50~60에 낮은 산들이 위치해 백제 초기도읍 북쪽지역의 방어와 한강의 범람으로부터 서민들을 지키는 마을로써 쓰였던것으로 추정된다. 강동구에서는 백제의 초대 임금인 온조왕(?~28) 의 이름을 딴 온조대왕 문화체육관을 고덕동에 건설해 온조왕과 백제를 기념하고 있다. 백제의 영토였던 하남위례성은 475년 장수왕의 침략으로 함락당해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고구려는 강동구를 포함한 서울 부근에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551년 나제동맹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까지 이곳을 77년간 다스리게 된다. 나제동맹으로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553년 신라가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점령해 신주로 이름붙인다. 신주는 이후 북한산주, 한산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남북국 시대인 757년에 이르러 한주(현재의 경기도/충청북도/황해도 지역) 한양군(서울 지역)의 명칭을 얻게 되고 강동구 영역도 이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성종 2년인 938년 강동구 일대는 광주목으로 개편, 일대가 마을로 발전하기 시작해 원터골에 명일원이라는 숙박시설을 보급하고 천호동, 명일동 지역에 역참을 설치한다. 강동구 일대는 선조 10년(1577년) 광주부로 승격된다. 당시 강동구의 일대의 명칭은 조선 성종때 구천(龜川) 어효첨(魚孝瞻) 선생(先生)이 사셨던 고장이라하여 선생의 아호(牙號)를 따서 구천면(龜川面)이라 했으며 일제가 한일합방 이후 행정구역(行政區域)을 새로 정할 때 구천면(龜川面)의 이름에서 龜(거북구)자가 복잡하다하여 九(아홉구)자로 바꾸어 구천면(龜川面)이 구천면(九川面)으로 바뀐 것이다. 현종 8년(1667년) 현재의 암사동 일대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 건립되는데, 이 서원은 숙종 23년(1697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어 크게 성장하나 고종 8년(1871년)에 실시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이 서원이 있었던 자리 인근에 서원마을이라는 자연부락이 들어섰다. 강동구에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신도비(죽은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 가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연산군 2년(1496년) 3월에 건립된 광릉부원군 이극배의 익평공신도비, 헌종 12년(1846년) 건립된 옥천부원군 유창의 유창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96호) 등이 있다. 조선시대 때 광주군 구천면 지역엔 굽은다리, 벽동말, 차재말, 당말, 은호말 등이 존재했다. 너른나루가 조선시대부터 발전하여 동쪽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가 되었다. 구천면에서 가장 큰 지역으로 발전되어 1936년에 광진교가 지어졌다. 이로써 그 당시 제2한강교나 다름없던 다리가 놓여졌다. 일제는 조선시대 때 이미 만들어진 천호동 지역에 광주 가던 역(驛)장길들을 우회, 재건하여 2차선 도로를 만든다. 강동구의 행정 구역은 9개의 법정동과 그것을 관리하는 18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동구의 면적은 24.58km이며, 인구는 2015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458,658명, 180,508세대이다. 강동구는 강남구, 용산구, 종로구와 함께 서울시 교육청 도서관이 두 곳 있는 자치구이다. 강동구자기주도학습지원센터는 교육기관, 학생 및 학부모 모두가 이용/참여가 가능한 자기주도형 학습할동지원 및 진로·학습에 관한 상담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동시에 강동구 교육관련부서의 청사 기능이 있으며 서울특별시 강동구 구천면로 385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민선 5기 구청장의 공약사항이었으며 6월 30일 강동구 자기주도학습지원센터 설립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10월 30일에는 자기주도학습 지원센터 설립조례를 제정했고 11월 30일에 센터를 개관했다. 중구 (부산광역시) 중구(中區)는 부산광역시 남부에 있는 구이다. 부산의 구도심에 해당한다. 면적이 기초 자치 단체 중에서 가장 작으나, 부산항여객터미널, 용두산공원, 번화가인 남포동, 자갈치시장 등이 있다.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본점도 있어, 현재도 부산의 경제·교통·관광의 중심지이다. 유럽으로 향하는 모든 대륙횡단도로가 이 곳에서 시작하며, 이 충장대로, 번영로를 통해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이어지고, 이 중앙대로를 통해 아일랜드 코크까지 이어진다. 또한 부산광역시의 주요 간선도로가 모두 중구에서 시작되는데, 중앙대로, 충장대로, 구덕로, 대교로, 대영로, 대청로가 이에 해당된다. 조선 시대에는 용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중구의 일대에는 왜관(倭館, 초량 왜관)이 있었다. 왜관의 주요 시설인 연대청의 이름은, 중구의 동서를 관통하는 대청로의 명칭에 자취가 남아 있다. 1876년, 한일 수호 조약에 의해 부산항이 개항지가 되면서, 세관등의 주요 항만 시설이 중구에 놓여 항구에 인접한곳에 부산역도 건설되었다. 현재의 중앙동에는 부산부청이 놓여 있었다. 부산부청은 대한민국 성립후는 시청이 되었다. 중구에 있던 행정 기관은 교외에의 이전이 진행되어, 부산시청도 1999년에 연제구에 이전하여 지금 옛 시청부지는 롯데월드가 건설되고 있다. 왜관시대부터 중구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어, 일본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구의 지세는 구봉산 줄기를 북쪽으로 이어 받은 보수산이 주봉을 이루고 부산항이 앞에 펼쳐지고 있어 배산임해라는 부산 전체 지세를 고스란히 축소해서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마치 안산처럼 중구 품안에 안기고 있는 용두산도 원래 보수산 산자락 가운데 한봉우리인 복병산이 다시 남쪽으로 그 산자락을 뻗어내리다가 나지막하게 솟은 동산이었다. 부산항의 중추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중구는 동쪽은 영주천, 서쪽은 보수천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북은 복병산을 접하고 남은 바다에 임하고 있다. 복병산 지맥인 용두산이 한가운데 솟아 동서로 나누고 있고, 중구의 중심부인 중앙동, 대청동,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 등은 구 시청(용미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축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수동, 대청동, 영주2동, 동광동 복병산, 영선산(현재 완전주택지) 산록이 주택지로 형성되어 있다. 중위도대에 속하는 우리나라 중위도지방에 나타나는 기후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춘하추동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온대성 기후를 보인다. 아시아 대륙의 동만에 있으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서 대륙과 대양의 경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계절풍이 뚜렷하다. 겨울에는 대륙으로부터 차고 건조한 북서 계절풍이 불면서 춥고 건조한 기후가 나타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해양성 열대원으로부터 동남계절풍이 불어 무덥고 습한 기후가 나타난다. 이 지역 역시 우리나라의 기후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인, 여름에는 기온이 높고, 겨울에는 추운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형성하고 연간 강수량은 1,491.6 mm로서 우리나라의 삼다강우지역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은 14.4˚C로서 1월에 가장 낮고, 8월에 가장 높으며, 연평균 습도는 66%로서 여름철에는 80%이상으로 대단히 다습하나, 겨울철에는 50%정도로서 현저하게 저습하다. 겨울철의 극단적인 저습은 건조한 대륙성 고기압과 부산지방 주변산악의 지형적 영향에 기인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중구의 행정 구역은 41개 법정동을 9개의 행정동으로 분류하며, 세부적으로 172개의 통과 736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2.82 km이다. 2015년 12월 31일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부산광역시 중구의 인구는 45,816 명이다. 용두산으로 불리는 언덕이 공원이고, 정상에는 부산타워가 있다. 부산 남부의 남포동에 인접하고,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대청동에서 중앙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중앙동에서 부산호텔 근처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광복동에서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 부산항이나 영도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부산타워의 아래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옛 부산광역시 시청이 있던 자리가 용미산으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동구 (부산광역시) 동구(東區)는 부산광역시 중부에 있는 구이다. 동구는 부산 중앙에 위치하여 동쪽은 동천을 경계로 부산 남구, 동북쪽은 수정산, 구봉산을 경계로 부산 진구, 부산 서구와 서쪽은 영주천을 경계로 중구와 접하고 있으며 동남으로 길게 뻗쳐 있다. 원래 동구는 지세가 해안을 끼는 배산 임해의 지형을 형성하며 대부분 경사 지대로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할 수 없는 지형이다. 따라서 주로 초량천, 부산천, 호계천 등 하천과 구봉산, 수정산 골짜기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왔으며, 시가지의 1/3 정도는 일제 시대 해안매립으로 조성되었다. 2016년 1월 31일을 기준으로 부산 동구의 행정 구역과 현황은 다음과 같다. 자성대는 조선시대에 만든 부산진성의 지성을 말한다. 원래는 부산성의 한 부분으로 공식적인 이름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며, 넓이는 24,198m²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서구 (부산광역시) 서구(西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은 중구, 동구, 영도구, 북쪽은 부산진구, 사상구, 서쪽은 사하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관광지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처음 만들어진 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과 송림공원 등이 있다. 과거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 경상남도청의 소재지였다. 구덕운동장과 국민체육센터 등의 체육시설이 있으며, 구도심의 축인 기존시가지 중심 일반 주택 밀집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도심지 재개발ㆍ재건축 사업으로 주거환경이 크게 개선될 예정이다. 환경 친화적인 문화예술 도시의 기반을 마련한 천마산 조각공원, 구덕문화공원 조성 등은 새로운 서구의 자랑거리이다. 또한, 부산공동어시장은 전국 수산물 수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감천항 일대에 동북아 최대의 해양국제수산물류, 무역기지가 완공되면 21세기 국제수산물 유통기지로서의 큰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서구라는 명칭은 1945년 해방 후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6개의 출장소가 설치되었는데, 당시 중앙동에 소재했던 부산시청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그 후 1957년에 비로소 구제를 변경하면서 ‘서구’(西區)로 발족하였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소속되어 있다가, 이후 일어난 6가야 중 금관가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이후 거칠산국의 영역에 들어갔으며, 6세기 초 신라가 거칠산국을 병합함에 따라 신라영역에 편입되었다. 505년 신라 지증왕 6년 거칠산군(居漆山郡)에 소속되었다. 757년 경덕왕 16년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개칭하였으며, 서구 일대는 동래군의 속현인 동평현(東平縣)에 소속되어 있었다. 892년 진성여왕 6년 후삼국시대 일시적으로 후백제 견훤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918년 고려 태종 원년 신라의 군현제인 9주 5경 중 상주, 양주, 경주를 합하여 동남도(東南道)라 하여 서구 지역은 동남도에 편입되었다. 1108년 고려 헌종 3년 영남도, 영동도를 통합하고 경상주도, 진협주도로 나눴는데, 이때 경상주도에 소속되었다. 1368년 공민왕 17년 부산(釜山)이란 지명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서구는 남북으로 8.3 km, 동서로 2.4km의 길쭉하게 서 있는 생선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16개 구군중 남단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동쪽으로는 중구, 동구와, 서쪽으로는 사하구와, 북쪽으로는 부산진구·사상구와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남해 바다와 접하고 있으나 남동쪽에는 영도구에 접한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구덕산, 시약산, 아미산 연봉의 일부가 남으로 이어져 천마산, 장군산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산령을 경계로 하여 사하구와 접하고 보수천을 경계로 중구와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 부산터널, 북쪽으로 구덕터널, 서쪽으로 대티터널이 있어 동서북으로 교통 소통을 원활히 해주고, 영도구와 서구를 잇는 남항대교가 개통되어 늘어난 항만 물동량을 수송해 주고, 남쪽으로 남항이 있어 우리나라 어업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온대계절풍 기후대와 해양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해양성기후의 특징으로 사계절 변화는 뚜렷하지만, 기온차가 크지 않아 생활에 적합한 기후이다. 부산 서구의 행정 구역은 13개 행정동과 205통, 972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산 서구의 면적은 13.88 km이며, 인구는 2015년 12월 31일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11만5963 명, 5만3199 가구이다. 영도구 영도구(影島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부 영도(影島)에 위치해 있는 구이다. 대한민국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섬으로만 구성된 곳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부터 말의 명산지로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이 곳에서 자란 말은 그림자가 안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알려져왔으며 영도의 다른 이름인 절영도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삼한시대는 변한에 소속되었다가, 이후 가락국의 속령이 되었다. 신라시대 지증왕 6년 에는 거칠산국의 속령이 되었다. 영도(절영도)는 부산 앞바다에 위치한 섬이다. 구의 중심으로 봉래산(해발 394.7m)이 위치해 있으며 대개 봉래산을 둘러싸면서 주거지역이 위치해 있다. 구의 동쪽으로는 부산광역시 남구가 부산항대교로 연결되었으며, 서쪽으로는 부산광역시 서구가 남항대교를 통해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부산광역시 중구가 영도대교와 부산대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태종대가 있다. 영도구의 행정 구역은 11개 행정동과 219통, 1,171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14.13 km이다. 2019년 6월 30일 주민등록 인구는 55,185세대, 118,588명이다. 부산진구 부산진구(釜山鎭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중앙에 있는 구이다. 약칭으로 진구(鎭區)로 통칭되기도 한다. 부산진구에는 부산시의 대표적 번화가인 서면이 있다. '부산진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부산진성'에서 유래하지만, 관련 지명인 부산진성터, 부산진역, 부산진시장은 부산진구 인근의 동구에 위치하고 있다. 북부·남서부·동남부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서 부산 서구,부산 동구,부산 남구에 인접해 있고, 동쪽에서 연제구, 서쪽으로 사상구와 인접 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부산 북구,동래구가 있다. 부산진구 남서쪽에는 부산항 배후에 있는 구덕산이 있어 부산 중심부는 산과 바다에 끼워진 지형이 되어 있다. 진구는 부산 원도심에서 북쪽으로 갈때의 출입구에 해당되어서, 시내·시외의 교통의 요충지이다. 2016년 1월 31일 현재 부산진구의 인구는 아래와 같다. 동래구 동래구(東萊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의 중북부에 있는 구이다. 삼한시대에는 변한 독로국의 유지이며 한때 거칠산국의 치소로서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으로 되었다가,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동래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래’(東萊)라 함은 ‘동쪽의 내산’(萊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의 약칭으로 풀이되고 있다. 군치소는 원래 수영 부근에 존재했지만, 고려 때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현재의 동래읍 자리로 성을 옮겼다. 1018년 고려 현종 9년 울주 동래현으로 되었으나, 1397년 조선 태조 6년 ‘동래진’이 설치되었다. 1547년 조선 명종 2년 국방과 대일외교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어 당상관인 정3품 문관이 목민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 최초의 패전지라는 이유로 일시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99년 선조 32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914년 부제의 실시로 동래부는 부산부와 분리되어 부산부에 속하지 않는 지역과 기장군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동래군으로 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동래출장소로 개편되었다.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동래구의 인구와 면적은 다음과 같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송상현을 모신 사우이다. 이후 그 뒤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산진성 싸움에서 전사한 정발이 배향되었으며, 1735년 영조 11년에는 다대첨사 윤흥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남구 (부산광역시) 남구(南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동부에 있는 구이다. 부산 문현금융단지가 들어서는 구이기도 하다. 남구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는 변한, 삼국시대는 신라에 소속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 동래군으로 칭하여 고려시대까지 이어졌고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에 소속되었다가 1949년 8월 15일부터 부산시제가 실시되었고, 1975년도에 남구로 승격된 후 1995년 3월 1일 남구에서 수영구가 분구되었다. 부산광역시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동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으며, 한반도의 남북, 동서를 연결하는 대동맥의 출발지로 지적도와 국립해양조사원에서는 용호동에 소재하는 오륙도를 기준으로 동해와 남해로 구분하고 있다. 용호동은 대규모 고급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면서 쾌적한 주거지와 중대형 평형대가 많아 부유층들이 많이 거주하는 부촌을 형성하고 있다. 대연동은 원래 원룸과 빌라, 단독주택 등이 많이 위치한 동네였으나, 2010년대에 들어서 대연혁신지구를 필두로 대규모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중소형 평형대 위주의 신축 아파트들이 많이 건설되며 부자들이 많은 부촌 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서민들이나 중산층들이 유입이 늘면서 신흥 주거지로 떠오르고 있다. 또 문현동의 경우 혁신도시 사업으로 문현금융단지등으로 개발이 되는 중이며 그리고 부산의 상징이자 시 지정문화재인 오륙도와 천혜의 해안절경으로 유명한 이기대공원, 신선대 유원지 등의 시민 여가를 위한 휴식공간이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기후를 나타내며 온대 계절풍이 부는 온화한 해양성기후 지역이다. 동천을 경계로 서쪽은 부산 동구 황령산 경계로 서북쪽은 부산진구 금련산과 황령대로 대남교차로 경계로 동쪽은 수영구, 금련산 경계로 북쪽은 연제구 남쪽은 부산항대교 연결되는 영도구에 접하며, 구청 소재지는 남구 대연 6동이다. 남구의 행정 구역은 17개 행정동과 6개의 법정동, 360통, 2,577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26.81km이다. 2014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인구는 114,412세대, 290,137명이며, 행정 구역별 세부 인구는 다음과 같다. 구청 인근에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못골역이 있다. 북구 (부산광역시) 북구(北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북서부에 있는 구이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지배권에 있었으며, 6가야의 부상으로 금관가야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삼국시대 신라 지증왕 때 그 지배권에 복속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665년 문무왕 5년 삽량주에 속했다가, 757년 경덕왕 16년에 양주에 속하였다. 940년 고려 태조 23년 양주에 속했다가, 938년 성종 2년 경주목 양주군이 되었다. 1022년 현종 13년에는 경상도 양주군이 되었다. 2015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부산 북구의 인구와 면적은 다음과 같다. 해운대구 해운대구(海雲臺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동부에 있는 구이다. 해운대해수욕장과 센텀시티, 마린시티, 해운대 신시가지 등으로 유명하다. 해운대(海雲臺)라는 이름은 신라 말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자 해운(海雲)에서 따온 것이다. 고운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가던 중 해운대에 들렀다가 달맞이 일대의 절경에 심취되어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며 동백섬 남쪽 암벽에 '해운대'라는 세 글자를 음각함으로써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해운대는 삼한시대에는 거칠산국과 장산국 지역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5년에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그 이후 고려 현종 9년 울주에 병합되었다가, 조선시대를 거쳐 동래군 동면, 구한말에는 동래부 동하면이 되었고, 1942년 부산시 수영출장소에 편입되었다. 수영만의 동쪽 연안의 해운대 일대에서 후방의 산중에 퍼진다. 구역의 서쪽으로 수영강이 흘러 이것을 거의 경계로서 수영구, 동래구와 인접해 있다. 서북으로 금정구, 동쪽에서 기장군과 접한다. 최고봉은 해운대 해수욕장의 배후에 있는 장산(634 m)인데, 1978년에 행정 구역 개편으로 장산의 북쪽에 있는 반여동·반송동이 해운대구에 편입되어 구의 중앙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동쪽에 있는 송정해수욕장도 해운대구에 속한다. 센텀시티, 해운대 마린시티, 해운대 신시가지 등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해운대 해수욕장, 달맞이 고개, 동백섬과 각종 편의시설 및 랜드마크가 포진되어 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해운대의 인구와 현황은 아래와 같다. 과거에 동백섬 APEC 건물 앞 바닷가에는 해녀 탈의실이 있었다. 사하구 사하구(沙下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서부에 있는 구이다. 사하라는 명칭은 1868년 고종 5년에 편찬된 《동래부사례》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사천면’이라는 지역이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분리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동래군(東萊郡) 사천면(沙川面)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사천면을 상단(上端)과 하단(下端)으로 각각 구분하게 되었고, 이후 사천면 상단 지역은 동래군 사상면이 되고, 하단 지역은 동래군 사하면이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부산부 사하면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사하면 암남리를 부산부에 편입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242호로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다. 부산의 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사하는 장군봉, 천마산, 아미산, 시약산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서구와 접하고 있으며 낙동강을 경계로한 서쪽에는 강서구, 구덕산 서쪽 능선과 승학산 줄기를 경계로 북쪽에는 사상구, 그리고 남쪽으로 남해와 접하고 있어 서부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은 대체적으로 단층지형으로 단층산지, 단층곡지, 단층해안 지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낙동정맥의 줄기인 시약산에서 발원한 괴정천은 싸리골을 시작으로 괴정동을 반월형으로 감싸며 당리로 내려오다 승학산에서 내려오는 당리천과 만나 하단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었으나 교통난 해소를 위한 복개도로 건설로 지금은 그 모습이 낙동강 하구쪽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천마산 줄기인 장군반도와 낙동강변 산줄기인 두송반도 사이의 감천만은 대부분 암석 해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지금은 감천항 종합개발사업 추진으로 매립되어 화물 전용부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동아시아 최대 국제 수산물 시장이될 부산국제 수산물 거래소가 개설될 예정이다. 사하지역의 기후는 온대 계절풍 기후대에 속하면서 해안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이가 비교적 적다. 봄철에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을 주로 받아 좋은 날씨를 보일 때가 많으나 양자강 부근에서 발생한 저기압의 잦은 통과로 비도 자주 내린다. 여름철에는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해 고기압 사이에 형성된 장마전선의 영향을 받고, 그 이후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고온 다습한 날씨를 나타낸다. 특히 태풍 이동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태풍의 직, 간접 영향을 받기도 한다. 가을철에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은 날씨를 많이 보이며 겨울철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한랭하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북서 계절풍이 불지만,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타지방에 비해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 사하구의 행정 구역은 16개동, 433통, 2,598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41.70km 이며,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사하구의 행정 구역과 인구 등의 세부 현황은 다음과 같다. 부산의 서남단 낙동강 하구에 자리 잡은 사하구는 김해공항, 감천항, 남해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한 서부산의 관문이자 신평·장림산업단지를 축으로 하는 부산 산업경제의 중심지이다. 전통적으로 물자가 집산되었던 낙동강 하구 하단을 제외하면 소외된 지역으로 일제시대 분뇨처리장이 설치되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피난민이 판자촌을 만들어 집단 거주했던 변두리 지역이었다. 사하구가 부산 서쪽의 관문이자 산업기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1960년대초 감천화력발전소(현재의 한국남부발전(주) 부산천연가스발전본부) 건설은 사하구의 산업기지로서의 발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어서 1970년대에는 산업기지 건설을 위한 기초 인프라 확충이 전개되었다. 서대신동과 괴정동을 있는 대티터널이 뚫리고, 괴정동에서 북구 엄궁동을 거쳐 남해고속도로와 김해공항까지 연결되는 낙동로가 확장·포장되는 한편으로 주요 간선도로인 다대로, 감천로가 확장되고 도시발전의 걸림돌이었던 분뇨처리장이 이전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사회 인프라가 갖춰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공장이 들어섰다. 괴정과 하단 지역의 구획정리사업으로 많은 농경지가 주택지로 정비된 것은 사람들의 이주를 가속화시켰고, 준공업 지역으로 지정되었던 것은 공장의 설립, 이주를 보다 활성화시켰다. 사하구가 이웃 사상공업단지와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의 위치로 부상했던 것도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이를 통해 사하구는 지역 변두리에서 차츰 시가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는 지름 60m, 최대 물높이 55m, 물 분사 노즐 수 1046개, 조명 511개, 소분수 24개 등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바닥음악분수이다. 부산광역시 북구, 사상구, 사하구, 강서구 일원으로 1966년 7월 13일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낙동강 유역 일대는 옛날부터 유명한 철새도래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 유역은 사하구 다대동에서 장림동, 하단동을 경유하여 북구 금곡동에 이르기까지, 또 서쪽으로는 강서구 명지동과 가덕도동을 포함한 광활한 낙동강 하류 일대의 공유수면 일대까지 퍼져있다. 낙동강하구에 삼각주로 이루어진 섬으로 갈대밭과 수초가 무성하고 어패류가 풍부하여 철새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한 이곳은 낙동강 하구둑 다리 건설로 교통이 편리하여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을숙도 상단부에는 넓은 주차장, 문화회관, 자동차 전용극장, 야외공연장, 인라인 스케이트장, 간이축구장, 잔디광장, 휴게소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가족 단위의 산책 장소 및 단체모임의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금정구 금정구(金井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구이다. 구의 이름은 구의 서쪽에 위치한 금정산(金井山)과 금정산성에서 따왔다. 부산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육로 교통의 관문으로 안으로는 북구, 동래구, 해운대구, 기장군과 접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와 경계로 경부고속도로 및 부산 울산간 국도 7호선, 산업도로, 도시철도의 기·종점 및 시내 진입로가 위치하고 있다. 산지는 기본적으로 태백산맥의 말단에 해당되며, 이 말단부가 신생대 제3기 중신세부터 일어났던 북동-남서방향으로 축을 가진 언양단층, 양산단층, 울산단층 등 일련의 단층운동에 의해 포항 부근에서 세 갈래로 분기되면서 부산 지방에 와서는 한 단계 고도를 낮추면서 대한해협에 몰입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개좌산과 공덕산, 서쪽으로는 해발 801.5m의 금정산, 북쪽으로는 계명봉의 능선으로 둘러싸였고 남쪽으로는 트인 분지지형이다. 수영강은 낙동강에 이어 두 번째로 긴 하천으로 총 길이 30Km이다. 양산시의 원효산에서 발원하여 금정구 선동 회동수원지를 거쳐, 해운대구 재송동에 이르러 금정산에서 발원하는 온천천과 합류하여 수영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수영강의 지류인 온천천이 중앙부를 흐르고, 온천천을 따라 펼쳐진 저지대와 구월산 기슭에 시가지가 펼쳐진다. 행정동 17개, 273통, 1,719반으로 구성되며, 면적은 65.20km이다.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전체 인구는 98,005세대, 257,090명며, 행정 구역별 구는 다음과 같다. 강서구 (부산광역시) 강서구(江西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서부에 있는 구이다. 강서구는 낙동강 본류를 따라 동쪽으로 북구, 사상구, 사하구가 접하고, 서쪽으로 김해시, 창원시 진해구가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남해가 펼쳐져 있다. 강서구에는 김해국제공항과 부산신항이 있으며, 부산시와 경상남도를 연결하는 남해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제2지선이 통과한다. 강서구의 대부분 지역은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부산시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강서구는 김해시와 역사적 기반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대저동은 조선 시대에 양산군에 속해있다가 1906년에 김해군으로 편입되었고, 가덕도동은 웅천군, 창원군, 의창군을 거쳐 1989년에 신설된 강서구로 합쳐졌다. 낙동강 하구 지역으로 남해와 접하고 있으며, 낙동강이 운반하는 토사량이 많으며 경사가 완만하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적어 운반물질의 퇴적으로 인한 삼각주 지형이 발달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낙동강 하구는 1만 년 전에는 지금보다 북쪽인 김해시 대동면과 북구 금곡동 사이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거대한 만입(灣入)이었으나, 해수준면의 상승에 따라 완신세의 두꺼운 충적층으로 매립된 삼각주가 형성되었다. 강서구의 대저동, 강동동, 명지동은 낙동강의 동서 분류로 인하여 형성된 낙동강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대저도, 대사도, 덕도, 제도, 맥도, 둔치도, 명지도 등이 있었다. 이런 낙동강의 하중도(河中島)들은 1934년 대저제방이 축조된 뒤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김해평야와 그 서쪽 녹산동의 산지와 가덕도 등 도서 지역으로 형성된 181.5 km²의 구역을 관할하고 있다. 가덕도에는 자생하는 동백군락지가 있고, 동양에서 손꼽히는 철새도래지 등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동남단으로 남해와 접하고 있으며,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연 평균기온은 14~15 ℃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700~1,800 mm이며 연평균 풍속은 4~5 m/sec이다. 풍향은 여름에는 남남서풍, 겨울에는 북서풍의 영향을 받는다. 조수간만의 차이는 비교적 적은 편으로 평균 조차가 1.4 m이고, 고극조위 2.8 m, 저극조위 0.85 m로 그 차는 약 2 m에 달하는데, 이 때 발생하는 조류의 에너지와 조량이 삼각주의 사주에 미치게 되므로 하천을 통하여 운반되어 오는 물질의 이동과 퇴적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의 차이가 적고, 강수량도 충분한 편으로서 여름철은 해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다른 지방보다 낮은 대신 겨울철은 바다와 북쪽 산악의 영향으로 기온이 높아 비교적 좋은 기후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나, 겨울철에 바람이 강하고 건조하여 산간지역과 도서지역에 산불이 발생하기 쉽고 해안과 해상에서의 활동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강서구의 행정 구역은 8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구의 면적은 181.5 km²로 부산광역시의 23.6%를 차지하고 있다. 2017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11만7382 명, 세대는 4만7850 가구이다. 강서구는 최근 뚜렷하게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명지동과 녹산동(특히, 신호동)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명지동은 2008년 12월부터, 녹산동은 2013년 12월부터 인구 유입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반면, 구(區)의 원도심인 대저1동과 대저2동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비옥하고 넓은 평야 지역에는 대저, 강동, 가락 화훼단지, 강동 깻잎, 명지 대파, 대저 토마토, 범방미나리, 가락황금쌀 등 우수한 특산물이 생산되고 있고,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낙동강 하구지역에는 굴, 김, 파래 양식이 이뤄지고 있으며, 가덕도 숭어 등 다양한 수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강서구에는 녹산, 신호, 부산과학, 화전, 미음산업단지 등 1개의 국가산업단지와 4개의 일반산업단지가 있다. 녹산산업단지는 조립금속, 정밀기계, 석유화학, 섬유의복 기업이 입주해 있다. 남부 지방의 대표적인 관문인 김해국제공항이 강서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 제주등의 국내 도시와 도쿄, 상하이등의 외국 도시로 연결된다. 연제구 연제구(蓮堤區, )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중부에 있는 구이다. 부산광역시청·부산지방경찰청·부산지방법원·부산가정법원·부산고등법원·부산지방검찰청· 부산고등검찰청 등의 소재지로 행정과 법조타운이 밀집되어 있는 부산의 중심부이다. 연제구는 연산동의 '연', 거제동의 '제'자를 따서 만든 자치구이다. 기원전 5세기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마제석검이 사직동, 거제동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삼한시대를 거쳐 거칠산국의 중심이었다가, 신라 제4대 탈해왕 때 거도에 의해 정벌되어 병합되었고, 505년 지증왕 6년 거칠산군이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757년 경덕왕 16년 지방 행정제도를 동래군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 현종 9년 동래현이 되었다가 조선 태조 6년 동래진, 조선 명종 2년 동래도호부, 조선후기에 동래도호부 서면에 소속되어 있었다. 1957년 1월 1일 부산시의 구제 실시로 동래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동래구에서 분리돼 신생구로 새롭게 탄생했다. 거제 1~4동, 연산 1~9동으로 연산동의 연(蓮)과 거제동의 제(堤)자를 따서 연제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98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이전하면서 명실공히 연제구는 부산의 행정중심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그 해 시청과 함께 부산시의회, 부산지방경찰청이 연산 5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부산지방노동청과 부산시선거관리위원회가 곧바로 시청 맞은 편으로 이전했고, 동남지방통계청도 최근 바로 옆에 둥지를 틀었다. 거제동에는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고등검찰청, 부산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부산가정법원이 이전하면서 법조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이 밖에 부산지방우정청,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국가인권위 부산사무소, 부산시소방본부 등 부산의 대표적인 기관이 30개나 몰려있는 행정 중심구로 탈바꿈했다. 2008년 연산 6,7동을 연산6동으로 통합하였다.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한 연제구의 주민등록 인구와 현황은 다음과 같다. 온천천은 금정산 범어사 계명봉 아래 계곡에서 발원하는 온천천은 금정구, 동래구, 연제 3개구를 통과해서 약14.1km를 흐르다가 수영하수종말처리장 부근에서 수영강과 합류한다. 각종 쓰레기와 악취로 버려진 온천천을 연제구에서 1998년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자연친화형 하천으로 복원하고, 둔치에는 자전거 도로를 비롯한 22종의 각종 시설물과 넓은 잔디밭, 6,600m의 화단에는 다양한 종류의 수목과 야생화로 단장하여 도심속 주민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2002년 아시안게임의 주경기장 및 월드컵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K리그 클래식의 부산 아이파크가 홈구장으로 쓰고 있다. 구단 측은 축구전용구장과 같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2008년 K리그부터 동쪽과 북쪽 스탠드 방향 육상 트랙 위에 가변좌석을 설치하여 활용하고 있지만, 2014년부터 '아시아송 페스티벌' 및 '부산아시아원페스티벌' 등 지역별 특색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986년 이윤택의 연희단거리패에 의해 광복동 현 조은극장2관 자리에 설립되었던 가마골소극장이 2009년 거제동 치과의사신협 건물 지하1층으로 옮겨온 것이 한결아트홀의 시초이다. 애초 가마골소극장이 지역 문화계에서 갖는 위상이 컸기에 거제동으로 확장 이전해 온 가마골은 더 흥성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이 다소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거대자본 기획사를 앞세운 질 낮은 상업 기획연극에 밀리게 되자 자존심이 상한 이윤택은 2012년 돌연 폐관을 선언하고 2013년 1월 폐막공연 '오구'를 마지막으로 밀양연극촌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가마골소극장의 공동대표였던 김성배가 연희단거리패와는 별개로 같은 자리에 한결아트홀을 세워 그 명맥을 잇고 있는데, 종종 가마골소극장때의 공연 레퍼토리를 다시 상연하기도 한다. 수영구 수영구(水營區)는 부산광역시 남부에 있는 구이다. 1995년 3월 1일 부산 남구에서 분리되어 수영구가 신설되었다. 지명은 조선시대 경상좌수영이 있었기 때문에 수영(水營)이란 이름이 붙었다. 광안리 해수욕장과 금련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수영이라는 명칭은 현재의 수영동에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동해쪽의 해상방어를 담당하였던 지금의 해군 지역본부에 해당하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곳으로 ‘수군’에서 “수(水)”자와 ‘절도사영’에서 “영(營)”자를 따와서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수영구는 부산의 동남부의 황령산 남측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심으로부터 7.8 ~ 12km에 위치해 있다. 주변지역은 동북쪽으로 수영강을 경계로 해운대구와 서남쪽으로는 대남로타리를 경계로 연제구와 부산 남구 등 4개의 자치구와 인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금련산을 경계로 부산진구와, 북쪽으로는 동래구와 접해 있다. 도심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통과지역에 입지하여 교통이 혼잡한 편이며, 남쪽으로는 해안에 접해있어 해양 휴양기능이 강한 지역이다. 구청 소재지는 수영구 남천 2동이다. 수영구의 행정 구역은 5개의 법정동, 10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영구의 면적은 10.2 km이고, 2015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17만9795 명, 7만6325 가구이다. 도심 속에 자리잡은 천혜의 광안리 해수욕장은 대표적인 수영구의 관광지로 면적 82,000m, 사장길이 1.4km, 사장폭은 25~110m에 달한다. 질 좋은 사질에 완만한 반월형으로 휘어진 사장은 전국적으로 이름나 매년 많은 사람들을 불러온다. 수려한 금련산에 둘러싸인 쾌적한 주거환경인 데다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광안대교와 수영사적공원, 민락수변공원, 광안리해변테마거리 등 친환경적인 휴식공간도 많아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머물고 싶은 도시, 다시 찾고 싶은 관광지”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다. 수영구는 ‘수영야류’와 ‘좌수영 어방놀이’, 수영성 남문, 곰솔 등 많은 유무형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이 있을 뿐 아니라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한 각종 문화활동도 활발한 지역이다. KBS·MBC 방송국 등이 자리잡은 언론의 중심지이며 민락·남천횟촌, 벚꽃거리, 카페거리 등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부하다. 부산 지하철 2호선과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의 환승역을 교통 중심축으로 하고 있어 부산 동남부의 관광, 정보, 상업, 유통 기능의 중심 도시 지역이다. 구청 인근에는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남천역과 금련산역이 있다. 사상구 사상구(沙上區)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의 서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으로는 부산진구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강서구, 남쪽으로는 사하구와 서구에 접하며 북쪽으로는 북구와 접한다. 감전동을 중심으로 괘법동, 덕포동, 학장동 일대에는 공업단지로서는 부산에서 제일 큰 규모인 사상공업단지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거칠산국 (또는 독로국) 지역이었고, 가야시대는 금관가야의 영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탈해왕 때 병합되었으며, 지증왕 때 거칠산군 대증현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 경덕왕 16년 행정 조직 체계를 정리하여 주군현의 이름을 당나라 식으로 고쳐 9주로 정비하였고, 이 지역은 양주에 속하였다. 양주에는 12개 군이 있었고, 그중의 하나가 동래군이었었으며, 동래군은 다시 동평현과 기장현 두 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상 지역은 구포, 주례, 개금 지대에 이어진 지역으로 동평현에 속했다. 995년 고려 성종 14년 12목 제도를 고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종정의 12목은 12주로 고쳤는데 사상은 영동도 양주군 동평현에 속해 있었다. 1021년 고려 현종 13년 5도 양계제도의 정착으로 사상지역은 경상도 양산군 동평현에 속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동래군 사천면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시대 동래군 사상면이 되었으며, 1936년 서면지역이 부산부로 편입되면서 부산진출장소가 설치가 된다. 1963년 1월 1일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사상면으로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1일 부산진구 구포 및 사상출장소 통합되어 부산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2월 15일 북구가 설치되면서, 북구출장소는 폐지되었다. 1995년 3월 1일 북구의 일부를 관할로 사상구를 설치하였다. 사상구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천혜의 양항인 부산항을 모체로 발달한 항구도시이자 동남경제권의 중심도시인 부산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1300리가 바다와 맞닿는 하구에 위치하고 동쪽은 백양산을 경계로 부산진구와 접하고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강서구와 마주보며 북쪽은 북구, 남쪽은 구덕산, 승학산을 경계로 서구, 사하구와 접하고 있다. 또한 서부산의 관문으로 남해고속도로와 연결되고, 지하철 2호선이 사상구의 중심을 관통한다. 면적은 36.06km로서 부산시 전체의 4.7%를 차지하며 지역별로는 삼락동이 6.68km로 가장 넓고 덕포1동이 0.56km로 가장 좁다. 2011년 12월 31일 현재 12개동 287개통 1,469반이다. 전반적으로 자유한국당(구 한나라당)이 우세를 보이고 있으며, 1996년부터 2008년 총선까지 사상구 내에서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55%대 득표율을 보이며 득표율 40%대의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를 누르면서 당선되었다. 현재 국회의원은 자유한국당 소속의 장제원 의원이다. 2012년 현재 사상구는 사하구 을 지역구 (의원 조경태)와 함께 부산에서는 둘밖에 없는 새누리당 이외의 정당에 속한 후보가 당선된 지역이다. 구청장인 송숙희는 현재 새누리당 소속이다. 기장군 기장군(機張郡)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동북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북쪽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서생면과 접하고, 남서쪽으로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금정구와 접한다. 1914년 기장군이 동래군에 흡수되었다가,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고, 1995년 기장군이 부활하면서 경상남도 양산군에서 부산광역시로 이관되었다. 군청 소재지는 기장읍이고, 행정구역은 3읍 2면이다. 기장읍과 정관읍 일대로 택지지구가 개발 중이며, 장안읍에는 고리원자력발전소와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있다. 기장의 원래 이름은 갑화양곡(甲火良谷)이다. 갑향의 갑은 음독하여 갓[邊]과 통하는 것으로 보고 갓마을[邊城-변두리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갑을 대(大)로 보고 ’큰마을’로 보기도 한다. 나중의 한자식 명칭인 기장(機張)은 두 가지의 유래설이 있는데 첫째는 《서경》(書經)의 고우기장주(苦虞機張註)에 기(機)는 노아(弩牙)라 하고, 또 노기기장(弩機旣張)이라 하여 갑병으로 국토를 지키기 위하여 이곳 변방인 기장을 수비한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하고 둘째는 기장 지역의 지형적 모습과 관련하여 현 기장읍의 소재지가 일광산을 배산으로 하여 베틀(機)을 차린(張) 형국이라는데서 유래된다고도 한다. 기장은 차성(車城)이라고도 불렸는데 차(車)는 정수리(首)를 뜻한다고 하여 해안과 접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장을 차성으로 부르게 된 듯하다. 기장군의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16만1651 명, 6만5738 가구이고, 기장읍과 정관읍에 기장군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거주한다. 2008년 12월 부산울산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해운대구, 울산 시내로의 접근이 20분 이내 가능하게 됐다. 2011년 2월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과 정관신도시를 잇는 국도와, 기장 장안읍과 울산광역시 온산읍을 잇는 장안 - 온산 국도가 공사 중이다. 대구 (동음이의) 대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1636년 1636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643년 1643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양파두 양파두(兩把頭)는 중국 청나라 때에 황후, 후궁, 공주, 궁녀, 입궐하는 여인 등이 황궁 안에서 착용하던 머리장식이다. 일명 기두(旗頭)라고도 한다. 신분에 따라 장식에 다는 꽃의 색깔 등이 달랐다. 뉴사우스웨일스주 뉴사우스웨일스주(State of New South Wales)는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에 있는 주로 주도는 시드니이다. 동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빅토리아주, 서쪽으로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북쪽으로는 퀸즐랜드주와 접한다. 1788년 영국이 유형수들을 시드니에 상륙시킴으로써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고 이후 이민이 점점 증가하여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강력하며 중요한 주이다. 대륙의 동남부를 차지하며, 대륙 개발의 거점이 되었던 지역이다. 밀·귀리·옥수수·쌀·포도가 많이 나고 석탄·은·납·아연이 매장되어 있다. 특히 이곳은 중요한 공업지역으로 철강·화학·섬유·식품공업이 발달해 있다. 2007년 6월 말을 기준으로 뉴사우스웨일 스 주의 추정인구는 6백 89만명이다. 인구성장률은 전년에 비해 1.1% 상승을 기록하고 있고, 국가 전체 성장률 1.5%보다는 낮은 추세이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인구의 62.9%가 시드니에 근거를 두고 있다. 빅토리아주 빅토리아주()는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에 있는 주(州)이며, 본토에 있는 주 중 가장 작은 주이다. 그러나,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도시화된 곳이다. 개발이 전반적으로 고르게 이루어진 가장 발전된 주라 하겠다. 남쪽 지역은 이 나라 최대의 낙농 지대를 이루며, 내륙에서는 관개농업이 활발하다. 1830년 빅토리아 주는 원래 농업 지역이었으나, 1851년 금광의 발견으로 공업과 상업 중심지로 변모했다. 2013년 3월 현재 빅토리아 주의 인구는 5,713,000명으로 뉴사우스웨일스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주이다. 주도(州都)는 멜버른이며, 70% 이상의 빅토리아 주민이 이곳에 산다. 1788년 대륙을 반으로 갈라 한쪽은 뉴 홀란드라 이름 붙이고, 나머지 한쪽은 뉴사우스웨일스주라 이름 짓고 식민지를 건설하고, 시드니에 식민지 정부가 세워졌다. 빅토리아 주로의 첫 이주는 현재 빅토리아 주의 서부 해안에 있는 포틀랜드에서 이루어졌으며, 멜버른은 1835년에 존 배트맨에 의해 세워졌다. 멜버른 지역의 초기 정착지는 필립 항만 주변으로 알려져 있다. 1851년에 뉴사우스웨일스로부터 분리되어 빅토리아 식민지가 선포되었다. 1851년 발라랏에서 금이 발견되고, 이어서 벤디고 등 빅토리아 전역을 가로질러 수많은 금광이 발견됐다. 이것은 전례 없는 골드러시의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식민지는 인구와 경제력이 빠르게 증가하여 10년 후 빅토리아의 인구는 76,000 명에서 540,000 명으로 늘어났다. 금 채광의 성과는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금광 지대"라는 말과 세계에서 가장 큰 금 덩어리로 나타났다. 1851년부터 10년간 빅토리아 주는 2천만 온스의 금을 생산해내 세계 생산량의 1/3을 차지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금을 찾기 위한 이주자들이 찾아왔으며, 주로 아일랜드, 중국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중국인 광부들은 벤디고 근교에서 일을 하며 대를 이었으며, 그들을 향한 인종 차별이 일기도 했으나 뉴사우스웨일스의 래밍 플랫 폭동같은 반 중국 폭동의 수준에는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1857년 브라이트인근의 버크랜드 계곡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1854년 버크랜드 계곡에서의 장티푸스 발생은 비좁고 비위생적인 금광지대의 조건으로 인해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854년에는 빅토리아 정부의 채굴세(유레카 스토케이드)에 광부들이 반발해 무장 반란군 세력이 영국군과 충돌한다. 그러나 반란군의 몇몇 지휘자는 그 후 빅토리아 의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호주 민주주의의 발전의 계기가 됐다. 첫 해외 군사 작전으로는 뉴질랜드의 마오리 전쟁에 병력과 전함을 보내는 것이었고, 뉴사우스웨일스의 병력은 그 이전 크림 전쟁에 참전했다. 1901년 빅토리아 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일원이 됐다. 골드러시의 결과, 멜버른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멜버른은 1901년~1927년 사이에는 개발 중인 캔버라를 대신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였다. 그 당시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대영 제국 당시의 도시 중에 런던 다음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했다. 그 후 멜버른 은 계속 중요한 다국적 기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남았지만, 1970년~1980년에 걸쳐 천천히 시드니에게 역전 당하고 만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조사 결과 빅토리아 주의 인구는 4,932,422 명으로, 1996년의 통계보다 6.2% 증가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통계청은 2007년 6월 빅토리아 주의 인구가 5,087,000 명애 다다르며, 2050년 경에는 7,200,000명으로 증가할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빅토리아 주 인구의 토대는 앵글로-켈틱계 였으나 동유럽, 남부 유럽, 동남아시아에서의 이민자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동,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도 많은 이민자가 찾아오고 있다. 빅토리아 주의 노년인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평균 수준이다. 정부는 2021년에는 빅토리아 주의 60세 이상 인구가 1/4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06년 인구조사로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평균 연령이 2001년 조사때의 35세에서 37세로 증가한 사실을 알게 됐고, 이는 1969~72년에 최고점에 이르렀던 인구 증가의 반영으로 보고 있다. 빅토리아 주 인구의 70% 이상이 주 남부에 위치한 주도 멜버른에 살고 있어, 멜버른 권역에만 대략 4,246,345명(2012)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밖에도 절롱, 발라랏, 벤디고, 쉐파톤, 밀두라, 워넘불, 라트로브 벨리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빅토리아 주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도시화가 진행된 곳으로 인구의 90%가 도심에 거주하고 있다. 1871년, 빅토리아 주민의 절반 이상이 도심에서 살게 됐으며, 오늘날에는 주민의 12%만이 벽지에 거주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주민의 균형적인 거주정책에서 불구하고, 멜버른을 향한 인구의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빅토리아 주민의 약 72%는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이다. 이 수치는 멜버른에서는 66%까지 떨어지지만, 북서부 지역에서는 95%까지 올라간다. 빅토리아 주민의 2/3은 영국, 아일랜드계이며, 주민중 1% 이하만이 어보리진이다. 외국 태생의 빅토리아 주민의 대부분은 영국, 이탈리아, 베트남, 그리스, 뉴질랜드출신이다. 종교 빅토리아 주민의 약 60.5%는 기독교인이다. 로마 가톨릭이 빅토리아 주민의 27.5%로 가장 크며, 그 뒤를 성공회와 오스트레일리아 교회 연합이 잇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인이 각각 인구의 30%이다. 불교는 빅토리아 주에서 비기독교 종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불교인은 132,634명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빅토리아 주에는 109,370명의 무슬림과 41,105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 빅토리아 주민의 20%정도는 무교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주의 북부 경계는 머리 강을 따라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의 남쪽을 가로지른다. 서쪽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와 맞대고 있고, 남쪽은 태즈메이니아와 맞대고 있다. 빅토리아 주와 태즈메이니아의 주 경계는 39°12' S로 윌슨곶에서 남쪽으로 85m 떨어진 배스 해협을 가로지르며 오스트레일리아의 주 경계 중 가장 짧은 곳이다. 빅토리아 주는 매우 다양한 지형, 지질, 기후를 지니고 있다. 남동쪽의 깁슬랜드의 따뜻한 날씨부터 눈덮힌 오스트레일리아알프스와 북서쪽의 반건조초원같이 말이다. 빅토리아 주는 나머지 주들과는 달리 강수량이 높기 때문에 많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강은 머리 강이며, 그 밖에도 오븐스 강, 거번 강, 킹 강, 캄파스페 강, 로돈 강, 위메라 강, 엘진 강, 바원 강, 톰슨 강, 스노이 강, 러트로브 강, 야라 강, 마리버농 강, 미타 강, 홉킨스 강, 메리 강, 키와 강이 있다. 빅토리아의 주도인 멜버른에는 70% 이상의 인구가 몰려있어 주의 경제, 매체,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도시는 빅토리아 주의 지방 자치 행정 구획, 빅토리아 주의 지역 목록에서 볼 수 있다. 빅토리아 주의 기후는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북서부는 반건조지역이며 해안쪽으로 갈수록 온대 지역과 선선한 기후가 나타난다. 빅토리아 주의 그레이트디바이딩산맥은 주의 중심부에 서늘한 산악 기후를 조성한다. 빅토리아 주는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의 다른 주와는 달리 최남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서늘하고 습한 날씨가 나타난다. 그레이트디바이딩산맥 남부의 해안 평야는 남극해의 바람 덕분에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로부터의 영향을 덜 받는다. 그렇기때문에 멜버른 등의 도시들은 이 지역에 위치한다. 말레와 위메라는 사막과 가까워 빅토리아 주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빅토리아 주의 여름 평균 기온은 30 °C이며, 1939년 1월 10일 밀두라에서 47.2 °C를 기록한적이있다. 겨울의 평균 기온은 15 °C이며, 1947년 8월 13일 호담 산에서 -12.8 °C가 기록된적이있다. 강수량 빅토리아 주는 태즈메이니아 다음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주이다. 빅토리아 주의 강수량은 북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데 특히 고산지대에 많은 비가 내린다. 북동부 지방의 몇몇 곳은 연간 강수량이 1,800mm를 넘어가기도하지만, 북서부에서는 연간 250mm도 안내리는 곳도 있다. 남부 빅토리아 주의 오트웨이 국립공원과 북동부의 깁슬랜드가 특히 많은 비가 내린다. 덕분에, 깁슬랜드지역의 땅은 농경지로 주로 쓰이고 있다. 눈은 보통 산맥과 구릉지대인 주의 중심부에만 내린다. 빅토리아 주의 하루 최고 강수량 기록은 375mm로 오트웨이 국립공원의 1983년 3월 22일 태니브린에 내린 비이다. 빅토리아 주의 주요 관광지 기타 유명한 관광 활동으로는 글라이딩, 행글라이딩, 열기구, 스쿠버다이빙이 있다. 커다란 행사 개최도 빅토리아 주의 관광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주로 멜버른에서 개최되지만, 필립 섬에서 열리는 V8 슈퍼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모터사이클 그랑프리, 워넘불의 장애물경마대회, 절롱에서 열리는 오스트레일리아 국제 에어쇼, 포트 페어리 민속 축제, 퀸스클리프 음악 축제, 벨스비치의 서프클래식, 브라이트의 가을 축제와 같은 많은 지역 축제가 있다. 빅토리아 주는 호주식 풋볼의 본고장이며, 오스트레일리아 풋볼 리그의 16개의 클럽중 10개의 클럽이 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전통적으로 AFL시즌 최종 경기는 멜버른 크리켓 경기장에서 9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열린다. 빅토리아 주의 크리켓팀인 빅토리안 부쉬레인져스는 전국 푸파 컵에서 경기를 뛰고 있다. 빅토리아 주의 멜버른 스톰과 멜버른 레벨스으로 각각 전국 럭비 리그와 호주 럭비 선수권 대회의 주 대표 팀으로 참가하고 있다. 축구 종목에서는 빅토리아 주의 멜버른 빅토리 FC와 A리그에서 4번이나 전국 선수권을 거머쥔 사우스 멜버른 FC가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세인트존 (뉴브런즈윅주) 세인트존(Saint John)은 뉴브런즈윅주의 가장 큰 도시이며 캐나다에 통합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2006년 5월 시인구는 69,961 명이었고 인구통계도시지역(Census Metropolitan Area, CMA)의 인구는 126,000 명이었다(Enterprise Saint John). 지리적 위치는 펀디 만Bay of Fundy의 북쪽 기슭에서 세인트존 강Saint John River의 하구에 걸쳐있다. 세인트존(Saint John)은 캐나다 뉴브런즈윅주에 있는 도시이다. 17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각축 끝에 18세기 중엽 영국이 최종적으로 장악했다. 18세기말에는 미국 독립혁명에서 밀려난 영국 국왕파가 이 지역으로 많이 들어왔다. 금성 (동음이의) 금성에는 다음 뜻이 있다. 거스테이브 홀스트 거스테이브 시어도어 홀스트(, 1874년 9월 21일 ~ 1934년 5월 25일)는 영국의 작곡가이다. 잉글랜드 첼트넘에서 태어나 런던의 왕립음악대학(RCM)을 졸업했다. 대표 작품으로는 1916년에 완성된 《행성 모음곡》을 들 수 있지만, 두 개의 《군악대를 위한 모음곡》과 《무어사이드 모음곡》와 같이 관악단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고 있는 곡들도 남겼다. 그는 초기 작품은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많은 작곡가들처럼 그도 악기를 연주했는데, 트롬본 주자였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으나 오른팔에 신경염이 있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를 할 수는 없었다. 1933년에 위장에 문제가 생겨서 1934년 5월 25일 런던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딸 이모겐 홀스트도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행성 행성(行星, planet) 또는 떠돌이별은 항성의 둘레를 도는 천체의 한 부류이다. 대체로 갈색왜성보다는 작지만, 지름이 수천 킬로미터 이상의 천체를 행성이라 부른다. 20세기 이전에는 태양계 안에 있는 여덟 개 행성만이 알려져 있었지만, 태양계 밖의 행성도 관측이 가능해짐에 따라 2012년 기준으로 적어도 200개 이상의 외계 행성이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행성은, 어떤 항성의 기원이 되는 성운이 붕괴하였을 때 원시성 둘레를 돌게 된 기체와 먼지가 모여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어에서 모든 태양계 행성의 이름은 별을 뜻하는 한자 별 성(星) 앞에, 고대 사람들이 그 행성의 속성이라고 믿었던 말이나 서양의 행성 이름을 번역한 말을 덧붙여서 되어 있다(중국어와 일본어도 그렇다). 지구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는 고대 사람들은 지구도 행성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서양 언어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을 따서 행성을 명명했다. 예를 들어, 토성을 뜻하는 단어 'Saturn'은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의 이름에서 따 왔다. 옛날에는 천동설을 믿었고, 태양과 달도 행성으로 믿었기 때문에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의 이름을 빌려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 만들어졌다. 태양계 안의 행성은 물리적 특성에 따라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으로 분류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지구형 행성은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고, 목성형 행성은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다. 또한 지구를 기준으로 궤도가 안쪽이면 내행성, 바깥쪽이면 외행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행성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 왔다. 천문학이 발전하고, 특히 지동설이 받아들여지면서 태양과 달은 태양계의 행성에서 제외되었고 (그 이후에도 일요일과 월요일은 계속 있다), 그 이후인 20세기에는 태양계에 훨씬 다양한 천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행성의 확실한 정의에 논란이 있었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은 총회에서 행성을 “별 주위를 돌고, 구형을 유지할 만한 크기와 중력을 가졌지만, 위성이 아닌 천체”라는 새로운 정의를 초안으로 내세웠다. 이 초안에 따르면, 명왕성이 행성으로 유지되고, 케레스, 카론, 에리스(당시 이름은 “2003 UB”)가 태양계의 행성에 추가되어, 총 12개의 행성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많은 반발이 잇따랐으며, 8월 24일 태양계 안에 있는 천체에 국한하여 행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이 요건을 모두 만족하는 태양계의 행성은 모두 여덟 개이다. 그리고 앞의 두 개는 만족하지만 마지막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서, 위성이 아닌 천체는 왜행성으로 정의했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고대 동양에서도 쉽게 관측되었다. 다른 별 사이를 움직여 다니는 다섯 별을 본 고대 동양인은 이 별들에게 음양 오행설에서 따온 “화(불), 수(물), 목(나무), 금(쇠), 토(흙)”이라는 특성을 부여했다. 이들은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서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행성의 명칭이 되었으며, 구한말 이전에는 歲星(세성=목성), 熒惑(형혹=화성), 鎭星 또는 塡星(진성=토성), 太白(태백=금성), 辰星(진성=수성)으로도 불리고 기록되었다. 고대 동양의 관측 기술로는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서양의 천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 행성의 이름을 자국어로 옮길 때 우라노스가 하늘의 신이므로 천왕(天王)이라는 한자어를, 포세이돈이 바다의 신이므로 해왕(海王)이라는 한자어를, 하데스가 명계(冥界)의 신이므로 명왕(冥王)이라는 한자어를 만들어 붙였고, 한국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최근 천체 90377 세드나가 태양으로부터 90AU 거리(태양과 명왕성 거리의 약 3배)에서 태양을 공전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누이트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 이름을 딴 세드나는 직경 1180~2360킬로미터인 천체다. 몇몇 언론은 이미 세드나를 열째 행성으로 보도했지만, 천문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은 아니다. 명왕성과 비슷한 질량과 궤도를 가진 90482 오르쿠스도 행성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고, 다른 후보로는 50000 콰오아나 20000 바루나 등이 언급되곤 한다. 그 후 에리스가 발견되어 명왕성보다 더큰것으로 확인되어 행성으로 인정될뻔하다가 2006년 IAU총회에서 정해진 행성의 정의에 따라 왜행성이 되었다. 하지만 IAU가 세드나는 왜행성으로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등 문제가 있으며 2009년 총회에서 다시 기준이 바뀔수도 있다. 행성 X(추측컨대 명왕성 바깥쪽 궤도에 있다)나 벌컨(수성 안쪽 궤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음)을 비롯해, 천문학적인 필요에 따라 '가정된' 행성들을 찾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 천문학 역사에 여러 번 있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상대성이론에 의해 이 천체는 없는 것이 밝혀졌다. 1988년 발견된 세페우스자리 감마 Ab 이후로 태양이 아닌 다른 항성을 공전하는 많은 외계 행성들이 발견되어 왔다. 2008년 8월까지 296개의 외계 행성들이 발견되었다. (성간 행성)떠돌이 행성(Rogue planet)은 행성과 유사한 질량을 지니고 있으나, 어떤 항성의 중력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아서 우주 공간을 독립하여 움직여 다니는 행성급 천체를 일컫는 단어이다. 여러 천문학자들이 떠돌이 행성으로 의심되는 후보(예:오리온자리 S 70)를 발견했지만 확실하게 검증된 존재는 아직 없다. 일부 천문학자들은 떠돌이 행성은 원래 항성 주위를 돌다가 어떤 이유로 항성의 중력에서 도망치게 된 천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머지 천문학자들은 행성이란 확인된 자료에 따라 정의되어야 하며, 탄생 과정이 밝혀지지 않은 대상을 행성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비판한다. 만약 이 떠돌이 행성이 항성처럼 가스구름 속에서 단독으로 생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행성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항성 항성(恒星, ) 또는 붙박이별은 막대한 양의 플라스마(전리된 기체)가 중력으로 뭉쳐서 밝게 빛나는 구(球)형 천체이다. 통상적으로 별(star)이라 한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은 태양으로 지구상의 에너지 대부분을 공급한다. 지구에서는 다른 별을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데 낮에는 태양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항성은 그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으로 풀려나는 에너지가 내부를 통과하여 방출되면서 빛을 내게 된다. 우주에서 수소와 헬륨보다 무거운 물질 대부분은 항성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별의 분광형 및 밝기, 우주 공간에서의 고유 운동을 통하여 항성의 질량과 나이, 화학적 조성 등을 알아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질량은 그 항성의 진화 및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질량 외에도 항성의 특징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진화 과정과 반지름, 자전 주기, 고유 운동, 표면 온도 등이 있다. 헤르츠스프룽-러셀 도표는 밝기와 표면 온도를 기준으로 항성의 분포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도표를 통해 특정 항성의 나이 및 진화 단계를 알 수 있다. 항성은 수소 및 헬륨, 기타 중원소로 이루어진 성간 구름이 붕괴하면서 탄생한다. 중심핵이 충분히 뜨거워지면 수소 중 일부가 핵융합 작용을 통하여 헬륨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나머지 수소 물질은 대류 및 복사 과정을 통하여 중심핵에서 생성된 복사 에너지를 바깥쪽으로 옮긴다. 항성은 내부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복사압과 자체 중력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 있다. 중심핵에 있는 수소가 모두 소진되면 태양 질량의 0.4배 가 넘는 항성은 적색 거성으로 진화하며, 이 단계에서 항성은 여러 중원소를 중심핵 또는 중심핵 주변에서 태운다. 항성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이 지닌 질량을 우주 공간으로 방출하며 축퇴된다. 방출된 물질은 이전보다 중원소 함량이 더 많으며, 이는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는 재료로 재활용된다. 홑별(단독성)은 다른 항성과 중력적으로 묶여 있지 않고 홀로 고립된 항성이다. 우리의 태양은 대표적인 홑별이다. 이와는 달리 쌍성 혹은 다중성계는 두 개 이상의 항성이 중력으로 묶여 있는 구조이며, 보통 질량 중심을 기준으로 안정된 궤도를 형성하면서 공전한다. 두 별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궤도를 그릴 경우 상호 작용하는 중력으로 인하여 항성 진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항성은 인간의 문명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다. 인류는 항성을 종교적 제의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천체를 이용한 항해 및 방위 판단에 항성을 이용했다. 고대 천문학자들은 항성은 천구에 붙어서 항구히 움직이지 않고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여겼다. 천문학자들은 합의를 거쳐서 항성을 별자리에 따라 묶었고, 이를 이용하여 행성과 태양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인류는 하늘의 별을 기준으로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태양력을 만들어서 농업 활동을 규칙적으로 수행하는 데 이용하였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그레고리력은 가장 가까운 항성 태양에 대한 지구 자전축 각도를 바탕으로 만든 달력이다. 가장 처음으로 신빙성 있는 항성 기록을 남긴 국가는 기원전 1534년 고대 이집트였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많은 별에 아랍어 이름을 붙였고, 그중 많은 수가 지금도 불리고 있다. 이들은 항성의 위치를 관측하고 예측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천문 관측기구를 발명했다. 1019년 천문학자 아부 라이한 알 비루니는 우리 은하를 성운 형태 항성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다. 일반적으로 항성은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지만 중국 천문학자들은 새로운 별이 나타나는 것을 알아냈다. 튀코 브라헤와 같은 초기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에 새로 나타나는 천체를 발견하여 훗날 ‘신성’ 이름을 붙였다. 1584년 조르다노 브루노는 밤하늘의 별은 태양과 같은 존재이며 그들은 자신만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고 이 행성 중에는 지구와 같은 천체도 있다고 주장했다. 브루노의 주장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나 에피쿠로스가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별이 태양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천문학자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왜 태양 주변의 별이 태양계에 대하여 중력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에 대해 아이작 뉴턴은 항성이 모든 방향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주장은 신학자 리처드 벤틀리가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제미니아노 몬타나리는 1667년 알골의 밝기가 변화하는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에드먼드 핼리는 지구 근처 ‘고정된’ 항성 한 쌍이 고유 운동을 보이는 것을 측정했다. 이 별들은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와 히파르코스가 살던 시절의 자리로부터 일정량 이동했다. 항성까지의 거리를 직접 측정한 최초의 사례는 1838년 프리드리히 베셀이 시차법을 이용하여 11.4광년 떨어진 백조자리 61을 측정한 것이었다. 시차 관측법을 통해 항성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다는 것이 밝혀졌다. 윌리엄 허셜은 밤하늘 항성의 분포 상태를 측정한 최초의 천문학자이다. 1780년대 그는 600개에 이르는 방향을 기준으로 삼고, 각 구역 내 시선 방향을 따라 관측한 별의 수를 세었다. 이 방법으로 그는 별의 밀도가 우리 은하 중심 방향으로 갈수록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윌리엄 허셜의 아들 존 허셜은 아버지의 연구를 물려받아 남반구 하늘에서 같은 작업을 수행했고, 남반구에서도 은하 중심 방향으로 갈수록 별이 많아짐을 알아냈다. 또 윌리엄 허셜은 몇몇 별은 시선 방향과 일치하게 자리 잡지 않으며 동반 천체를 거느리는 쌍성 구조를 지님을 발견하였다. 요세프 폰 프라운호퍼와 안젤로 세키는 항성 분광학의 지평을 열었다. 이들은 태양과 시리우스의 스펙트럼을 비교하여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흡수선(별의 빛이 온도가 낮은 대기층을 통과할 때 대기 중 원자나 이온이 특정 파장을 흡수하여 생기는 선.)의 개수 및 세기가 서로 다름을 알아냈다. 1865년 안젤로 세키는 항성을 분광형에 따라 분류했다. 그러나 근대적인 항성 분류의 틀은 1900년대 미국 천문학자 애니 점프 캐넌이 확립했다. 19세기 쌍성 관측 분야는 천문학 내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1834년 프리드리히 베셀은 시리우스의 고유 운동에 변화량이 있음을 발견했고 여기서 숨겨진 동반성의 존재를 예측했다. 에드워드 피커링은 1899년 104일 주기로 미자르의 스펙트럼선이 갈라지는 것을 토대로 분광쌍성의 존재를 최초로 입증했다. 천문학자 윌리엄 스트루베와 셔번 웨슬리 버넘은 많은 쌍성계를 관측하고 자료를 정리했다. 1827년 펠릭스 사바리는 망원경 관측을 통해 쌍성계의 공전 궤도에 대한 의문점을 풀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항성 관측의 발전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 이 시기 개발된 사진은 값진 천문학적 관측 도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항성의 색 및 온도는 겉보기 등급과 사진 등급을 비교함으로써 측정이 가능함을 알아냈다. 광전 광도계의 발명으로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어 여러 파장대의 밝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1921년 앨버트 마이컬슨은 윌슨 산 천문대에서 간섭계를 사용하여 최초로 항성의 반지름을 측정했다. 20세기 초 항성을 물리적으로 분류하는 중요한 기준이 마련되었다. 1913년 헤르츠스프룽-러셀 도표의 개발로 천체 물리학의 발전에 박차가 가해졌다. 항성의 내부 및 항성의 진화를 설명하는 성공적인 모형들이 개발되었다. 양자 물리학의 발전으로 항성의 스펙트럼 양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개발되었다. 이를 통해 항성 대기의 화학적 조성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초신성을 제외하면 인류가 알고 있는 별의 대부분은 우리 은하 내 국부 은하군 및 우리 은하 내 관측이 가능한 부분들(성표에서 다루고 있다.)에 속해 있다. 그러나 지구에서 1억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처녀자리 은하단 내 M100의 별 몇몇이 관측되기도 했다. 현재 망원경 수준으로 국부 초은하단 내 성단과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국부 은하군 내 개개의 별을 관측하는 것은 가능하다.(세페이드 변광성 참조). 그러나 국부 초은하단 너머에 있는 별 및 성단을 낱낱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10억 광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거대 성단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성단은 수백 개에서 수천 개의 별이 뭉쳐 있다. 이 성단은 이전에 관측되었던 가장 먼 성단보다 열 배 먼 곳에 있다. 별자리의 개념은 고대 바빌론 제국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날 하늘을 관찰하던 사람들은 별이 특정한 모양을 그리면서 배치되어 있음을 보고 이를 자연물이나 신화 속 등장인물과 연결시켰다. 이들 별자리 중 황도 근처에 있는 12개는 점성학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많은 별은 아랍어 또는 라틴어 이름을 갖고 있다. 태양이나 특정 별자리처럼 별은 각자 고유의 신화를 갖고 있다. 별은 죽은 자 또는 신의 영혼으로 여겨졌다. 대표적으로 알골은 고르곤 메두사의 눈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17세기 별자리의 이름을 그 구역 안의 별 이름 앞에 붙이게 된다. 독일 천문학자 요한 바이어는 성도(星圖)를 만들고 각 별자리 구역 내에 있는 별의 밝기 기준으로 그리스 문자를 붙였다. 그 뒤 영국 천문학자 존 플램스티드는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하여 플램스티드 명명법을 개발한다. 이후 여러 성표가 작성되면서 다양한 항성 목록 분류법이 개발되었다. 오늘날 과학계에서 항성 또는 기타 천체에 이름을 붙일 권한이 있는 기관은 국제 천문 연맹이다. 현재 여러 기업체가 돈을 받고 별에 이름을 지어 붙이는 업무를 보고 있으나, 이들이 지어 붙인 이름은 과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과학계의 많은 인사는 이런 사기업을 별 이름을 짓는 과정을 잘 모르는 시민을 속여서 사기 행각을 벌이는 단체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항성 제원은 전통적으로 SI 단위계 방식으로 표시하지만, CGS 단위계 방식도 함께 사용한다. 예를 들면 별의 밝기는 erg/sec(초당 에르그)로 표시하기도 한다. 태양 외 항성의 질량, 밝기, 반지름은 태양을 1로 놓았을 때의 값을 기준으로 표시한다. 태양의 질량, 밝기, 반지름의 구체적인 값은 아래와 같다. 초거성의 반지름이나 쌍성계 구성원 간의 공전궤도 긴반지름 등은 주로 천문단위로 표시한다. 1AU는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로, 구체적 값은 약 1억 5천만 킬로미터이다. 항성은 분자 구름 속에서 태어난다. 이 구름은 성간 물질 중 밀도가 높은 지역(그러나 지구의 진공실보다도 낮은 밀도이다)으로 주로 수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23 ~ 28퍼센트의 헬륨 및 수 퍼센트의 중원소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항성이 태어나는 대표적 장소로 오리온 성운을 들 수 있다. 질량이 큰 별은 태어난 뒤 강력한 빛으로 주위 먼지구름을 밝히면서 주변 구름을 이온화하고 H II 영역을 만든다. 모든 별은 삶의 대부분을 주계열 단계로 보낸다. 이 기간에 별은 중심핵에서 수소를 태워서 헬륨으로 바꾼다. 질량이 다른 별들은 진화단계에서 각자 극명하게 다른 물리적 속성을 보여준다. 무거운 별은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의 형태에 있어 가벼운 별과는 다르다. 천문학계는 항성을 질량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항성 형성 과정은 분자 구름 내부 중력이 불안정해지면서 시작된다. 또는 초신성 폭발의 충격파나 두 은하의 충돌(폭발적 항성생성은하로 부른다)로도 발생한다. 일단 어떤 영역이 밀도가 충분히 높아져 진즈 불안정성으로 불리는 조건을 만족하면 자기 스스로의 중력 때문에 붕괴하기 시작한다. 분자 구름이 붕괴하면 밀도 높은 먼지 및 가스 덩어리 등은 보크 구상체를 형성한다. 이들의 질량은 태양의 50배에 이른다. 구상체가 스스로의 중력 때문에 수축하면서 밀도가 늘어날수록 중력 에너지는 열로 바뀌며 온도는 올라간다. 원시별 구름이 안정적인 유체 정역학적 평형 상태에 이르면 구름 중심부에서 원시별이 탄생한다. 이런 원시별 주위에는 원시 행성계 원반이 형성된 경우가 많다. 중력 수축 과정은 약 1천만 년에서 1천 5백만 년에 걸쳐 진행된다. 원시성 중 태양 질량 2배 이하를 황소자리 T 항성으로 부르며 그보다 질량이 큰 경우는 허빅 Ae/Be 항성으로 부른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별은 자전축 양단에서 허빅-아로 천체로 불리는 성운끼를 발산한다. 항성은 자신의 일생 중 90퍼센트에 이르는 기간을 중심핵의 고압, 고온 환경 아래 수소를 태워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작용을 하면서 보내는데 이 기간을 주계열 단계라고 한다. 주계열 단계에 있는 별을 다른 말로 난쟁이별이라고도 부른다. 영년 주계열로부터 시작해서 중심핵에 축적되는 헬륨의 양은 점차 늘어난다. 그 때문에 중심핵에서 필요한 핵융합 작용의 빈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항성은 천천히 뜨거워지고 밝아진다. 예를 들면 태양의 경우 46억 년 전 영년 주계열에 도달하였을 때에 비해 지금의 태양은 밝기가 40퍼센트 정도 증가한 상태이다. 모든 별은 가스를 우주 공간으로 지속적으로 방출하는데 이를 항성풍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별의 경우 항성풍으로 잃는 질량은 미미하다. 태양은 매년 자기 질량의 10배 만큼의 가스를 항성풍으로 날려 보내는데 이 추세라면 태양은 자신의 일생 동안 자기 질량의 1만분의 1을 잃는 셈이다. 그러나 매우 무겁고 밝은 별은 매년 태양 질량의 10배에서 10배에 해당하는 질량을 방출하며 이는 이들의 진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처음 태어날 때 태양보다 50배 이상 무거운 별은 일생 동안 자기 질량의 절반 정도를 날려 보낸다. 주계열상에서 항성이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자신이 가진 수소를 어느 정도 속도로 태우느냐에 달려 있다. 즉 태어날 때의 질량 및 밝기가 항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태양의 경우 주계열상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약 110억 년이다. 태양보다 더 큰 별은 태양보다 연료를 빨리 태우며 빨리 죽는다. 반면 태양보다 질량이 작은 별(적색 왜성 및 오렌지색 왜성)은 연료를 매우 알뜰하게 소비하며 수백억 년에서 수천억 년까지 살 수 있다. 생의 마지막에서 이들은 서서히 식으면서 어두워진 뒤 흑색 왜성이 된다. 그러나 이런 별의 수명은 우리가 아는 우주의 나이(137억 년)보다 길기 때문에 아직까지 흑색 왜성으로 진화한 사례는 없다. 질량 외에도 무거운 원소의 함유량이 그 별의 진화 과정에 영향을 끼친다. 천문학에서는 헬륨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를 ‘금속’으로 부르며 항성 내 이들의 화학적 농도를 ‘중원소 함유량’으로 부른다. 금속 함유량은 항성이 수소를 태우는 기간에 영향을 주며 자기장의 생성을 조절하고 항성풍의 강도를 바꾼다. 항성종족 I과 같이 젊은 별은 종족 II처럼 늙은 별보다 중원소를 더 많이 지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태어난 분자 구름 속에 중원소가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 별이 죽음을 맞으면서 외곽 대기에서 방출한 물질로 말미암아 분자 구름 속의 무거운 원소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한다. 태양 질량의 0.4배 이상 천체 태양보다 2.25배 무거운 별의 경우 적색 거성 단계에서의 핵융합 반응은 중심핵 바깥쪽 층에서 계속된다. 중심핵은 헬륨 융합이 일어날 수준까지 압축되며 항성은 서서히 수축하며 표면 온도가 높아진다. 질량이 더 큰 별의 경우 중심핵 부분에서 수소 핵융합은 헬륨 융합 작용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항성이 중심핵에 남아 있는 헬륨을 소진하고 나면, 핵융합 반응은 탄소 및 산소로 이루어진 뜨거운 중심핵 바깥층에서 이루어진다. 그 뒤 항성은 원래의 적색 거성 단계와 평행한 진화 경로를 거치지만 표면 온도는 더 뜨겁다. 태양보다 9배 이상 무거운 별은 헬륨을 태우는 단계에서 적색 초거성으로 진화한다. 중심핵의 헬륨이 소진되면 이들은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을 순차적으로 태운다. 중심핵은 탄소를 태울 수 있을 온도와 압력이 나올 때까지 압축된다(탄소 연소 과정 참고). 같은 식으로 적색 초거성은 산소(산소 연소 과정 참고), 네온(네온 연소 과정 참고), 규소(규소 연소 과정 참고)까지 핵융합 작용의 연료로 사용하며 중심부에 무거운 원소들을 계속 축적시킨다. 항성의 목숨이 거의 끝날 즈음 핵융합 작용으로 생성된 물질들은 항성 내부에 양파 껍질처럼 층을 이루게 된다. 각 층은 서로 다른 원소들을 태우는데, 가장 바깥쪽 층은 수소, 그 아래층은 헬륨, 그 아래는 산소, 네온, 규소, …의 식이다. 별의 가장 마지막 단계는 중심부에서 철이 생성될 때이다. 철의 원자핵은 다른 원소들보다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핵융합 작용을 할 경우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한다. 같은 이유로 철은 핵분열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없다. 질량이 큰 별 중 상대적으로 늙은 별 내부에는 핵융합을 할 수 없고 철로 된 거대한 중심핵이 만들어진다. 이런 별 안에 있는 무거운 원소들은 항성 표면으로 이동하며 항성은 울프-레이에 별로 진화하여 밀도 높은 항성풍의 형태로 외곽 대기를 우주 공간에 뿌린다. 평균 정도 질량을 가진 별은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외곽 대기를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우주 공간으로 방출한다. 만약 외곽 대기를 날려 보낸 후 남은 질량이 태양의 1.4배 이하일 경우 별은 지구 정도 크기로 수축하며 백색 왜성이 된다. 백색 왜성 내부의 전자 축퇴 물질은 더 이상 플라즈마가 아니다(보통의 항성은 플라즈마의 덩어리이다.). 백색 왜성은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식으면서 흑색 왜성이 된다. 외곽 대기를 날려 보낸 후 남은 질량이 태양보다 1.4배 이상 더 큰 별의 경우 철로 된 중심핵에서 자신의 질량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 핵융합이 계속된다. 이 핵은 전자가 양자 속으로 밀려들어가서, 역베타 붕괴 폭발 혹은 전자 포획 형태로 중성자 및 중성미자를 만들면서 빠르게 붕괴한다. 이와 같은 급속한 붕괴로 생기는 충격파로 인해 항성의 나머지 부분은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초신성은 매우 밝아서 어떤 경우는 은하 전체의 밝기와 맞먹는 빛을 뿜기도 한다. 우리 은하 내에서 초신성 폭발이 관측되었을 때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별이 태어난 것처럼 보였으므로 이들을 ‘새로운 별’[新星]로 부르기도 했다. 원래 지니고 있던 질량의 대부분을 초신성 폭발로 날려 보내고 난 뒤(이 경우 게성운과 같은 잔해를 형성한다) 남은 물질들은 중성자별(펄서나 엑스선 버스터를 중성자별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이 되거나 잔해를 뿌리고 난 뒤 중심부에 남은 물질이 태양 질량의 4배가 넘는 천체들처럼 가장 무거운 별의 경우는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중성자별 내부 물질은 중성자 축퇴 물질 상태에 있으며 아마도 중심핵 부분은 더 야릇한 축퇴 물질인 쿼크 물질(QCD 물질)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블랙홀의 내부 물질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죽어가는 별 외곽부에서 방출된 중원소를 포함한 물질은 새로운 별을 만드는 재료로 재활용된다. 이런 무거운 원소로부터 지구와 같은 암석 행성이 탄생한다. 초신성 폭발 물질 및 거대 항성의 항성풍은 성간 물질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항성은 태양처럼 홀로 생겨나기도 하지만 두 개 이상의 별이 동시에 생겨 서로 공전하기도 한다. 다중성계 중 가장 흔한 것은 쌍성이다. 그러나 세 개 이상의 별로 이루어진 항성계도 발견된다. 안정된 공전 궤도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세 개 이상의 별은 보통 계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층 구조란 행성 주위를 위성이 도는 것처럼 항성도 서로를 도는 작은 계가 다시 더 큰 계를 한 개체로서 도는 구도를 말한다. 성단과 같이 더 큰 항성계도 존재한다. 성단은 성협과 같이 별 몇 개가 느슨하게 묶인 집단으로부터 구상 성단처럼 수백 수천 개의 항성이 빽빽하게 뭉친 경우까지 다양하다. 항성 대부분이 서로 중력으로 묶여 있는 다중성계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오랫동안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매우 무거운 O나 B형 항성의 경우는 잘 들어맞는 가설이다. 이러한 무거운 별의 약 80퍼센트는 다중성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질량이 작은 별일수록 홑별(single star)의 비율은 많아진다. 적색 왜성의 경우 85퍼센트가 홑별로 추측된다. 적색 왜성이 은하 내 항성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우리 은하에 있는 별은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이 홑별인 셈이다. 그러나 홑별이 차지하는 비중이 50퍼센트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 도 있는 등 홑별과 그렇지 않은 계(系)의 비율은 논란의 대상이다. 별은 전 우주 차원에서는 균일하게 퍼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은하 단위로 살펴보면 성간 가스 및 성간 물질과 함께 균일하게 무리를 짓고 있다. 전형적인 은하에는 수천억 개의 별이 있으며 관측 가능한 우주 내에 존재하는 은하의 수는 총 1천 억 개에 이른다. 별은 주로 은하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은하와 은하 사이 공간에 있는 별도 발견되었다. 천문학자들은 관측 가능한 우주 영역 내에 적어도 700해(垓) 개에 이르는 항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수효는 4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우리 은하를 1천 750억 개 모아야 채울 수 있는 수치이다. 항성 자체는 지구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무겁고 밝은 존재이지만 항성과 항성 사이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은 켄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로 빛의 속도로 4.2년이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 거리는 39조 9천억 킬로미터에 이르며, 태양에서 명왕성까지 거리의 6000배에 이르는 간격이다. 프록시마에서 떠난 빛이 지구에 이르기까지는 4.2년이 걸린다. 우주 왕복선의 지구 궤도선상 속도(시속 3만 킬로미터)로 프록시마까지 가려면 15만 년이 걸린다. 이 정도는 은하면에 존재하는 별 사이에서는 평균보다 약간 가까운 거리에 해당한다. 은하 중심 또는 구상 성단에 있는 별들 사이의 거리는 훨씬 가깝고, 은하 헤일로에 있는 별들 사이의 거리는 훨씬 멀다. 은하핵 바깥쪽에 위치한 별들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별과 별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드물 것으로 여겨진다. 구상 성단이나 은하 중심부처럼 별들의 밀도가 높은 곳은 별끼리 충돌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 흔할 것이다. 이런 항성끼리의 충돌은 청색 낙오성을 만들어 낸다. 이 비정상적인 별들은 성단 내 비슷한 밝기의 주계열성에 비해 표면 온도가 더 높다. 항성의 운명은 처음 태어날 때의 질량에 따라 대부분 결정된다. 초기 질량은 그 별의 밝기, 크기, 진화 과정, 수명 및 최후를 맞는 양상 등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별의 나이는 대부분 1억 살에서 100억 살 사이이다. 일부 별은 우주의 나이와 비슷한 137억 살 근처일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 가장 나이가 많은 별은 HE 1523-0901(예상 수령은 132억 살)로 알려졌으나, 2013년 기준으로 가장 오래된 항성이자 천체는 HD 140283으로 그 추정 나이는 136억 6000만년에서 152억 6000만년 사이이다. 이에 NASA는 이 별에 성경에서 가장 장수한 인물로 나오는 므두셀라에서 딴 “므두셀라성(Methuselah star)”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무거운 별은 중심핵의 압력이 매우 커서 수소를 작은 별보다 훨씬 빨리 태우기 때문에 질량이 큰 별일수록 수명은 짧다. 가장 질량이 큰 별은 백만 년 정도 사는 반면 적색 왜성처럼 질량이 작은 별은 연료를 매우 느리게 태우므로 수백억 년에서 수천억 년까지 산다. 항성이 태어날 때의 구성비는 대체로 70퍼센트의 수소, 28퍼센트의 헬륨 및 나머지 2퍼센트 중원소로 되어 있다. 무거운 원소의 비율은 통상적으로 항성 상층부 대기 내에 포함된 철(iron)의 함유율로 표시하는데 이는 철이 상대적으로 흔한 원소이자 흡수선이 강하게 나타나서 측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별이 태어나는 분자 구름은 초신성 폭발이 일어나면서 중원소 함량이 점차 늘어나기 때문에, 한 항성 내의 중원소 함유량을 통해 그 별의 나이를 알 수 있다. 무거운 원소의 함량은 그 항성이 주위에 행성을 거느리고 있는가를 추측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례 중 가장 금속 함유량이 적은 별은 HE1327-2326으로 이 별의 중원소 함유비는 태양의 20만 분의 1에 불과하다. 반대로 사자자리 뮤의 중원소 함유율은 태양의 두 배에 이르며 행성을 거느린 허큘리스자리 14의 경우 중원소 비율이 세 배에 이른다. 크로뮴이나 희토류 원소와 같이 화학적 특이성을 보여 스펙트럼상 평범하지 않은 원소가 많이 함유된 경우도 존재한다.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태양을 제외한 별은 지구에서 볼 때 지구 대기 때문에 깜빡거리면서 빛나는 점으로 보인다. 태양은 항성이지만 지구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원반 형태로 보이는 것이다. 태양을 빼면 그 다음으로 시지름이 큰 별은 황새치자리 R로 시지름은 고작 0.057초각에 불과하다. 별의 시지름은 대부분 지상에서 망원경을 이용하여 관찰하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간섭계를 사용하여 크기를 측정한다. 간섭계 외에 항성 반지름을 재는 다른 방법으로 엄폐 현상을 이용하기도 한다. 달이 특정 항성을 가리거나 다시 드러내는 순간 항성의 밝기가 변화하는 수치를 정확히 측정하여 항성의 각지름을 계산할 수 있다. 쌍성계에서 한 별이 다른 별을 가리면서 광도가 변화하는 것을 통해 항성의 지름을 구하기도 한다. 별의 실제 반지름은 종류와 진화 단계에 따라 다양하다. 중성자별의 경우 고작 20~40킬로미터에 불과하며 오리온자리에 있는 베텔게우스와 같은 초거성의 경우 태양 반지름의 650배(9억 킬로미터)에 이른다. 그러나 베텔게우스의 밀도는 태양에 비해 매우 희박하다. 태양에 대한 항성의 움직임을 통해 항성의 나이 및 탄생 장소, 가까운 은하의 구조 및 진화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시선 속도는 항성의 스펙트럼선을 이용한 도플러 효과로 구할 수 있으며 단위는 km/sec(초당 킬로미터)로 나타낸다. 고유 운동은 정밀 측성 장치로 값을 구하며 단위는 연간 밀리초각으로 나타낸다. 별의 시차가 주어지면 고유 운동을 속도로 변환할 수 있다. 고유 운동 값이 큰 별은 상대적으로 태양과 가까우며, 이들은 시차 측정이 쉬운 대상들이다. 고유 운동 및 시선 속도 값을 모두 알고 있다면 한 항성이 태양 또는 은하에 대하여 움직이는 우주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 근처의 별 중 종족 I 항성은 대체로 늙은 종족 II 항성에 비해 운동 속도가 느린 것으로 관측되었다. 종족 II 항성은 은하면에 대하여 기울어진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인접한 항성의 움직임을 비교하여 성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성협의 구성원은 큰 규모의 분자 구름 속에서 한꺼번에 태어났으며 같은 고유 운동을 보인다. 별의 자기장은 내부의 대류 순환 작용을 통하여 발생한다. 다이너모 과정과 유사한 플라즈마 전도 작용을 통해 항성은 별 전체에 걸쳐서 자기장을 형성한다. 자기장의 세기는 별의 질량 및 화학적 조성에 따라 다르며 표면에서의 자기 활동량은 항성의 자전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와 같은 표면 활동을 통해 흑점이 생겨나며 이는 강한 자기장이 발생하는 지역으로 주변보다 온도가 낮다. 코로나 루프는 활성화된 표면 영역에서 코로나 영역으로 활 모양처럼 솟구쳐 오르는 자기장이다. 항성 플레어는 고에너지 입자들의 폭발로, 앞과 동일한 자기 활동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젊고 빠르게 자전하는 별은 자기장이 강하기 때문에 표면 활동도 더 활발한 성향이 있다. 자기장은 별의 항성풍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나, 별의 자전에 제동을 걸어 자전 주기를 서서히 느려지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태양처럼 비교적 긴 세월을 살아 온 항성의 경우 자전 속도는 매우 느리며 표면 활동량 역시 작다. 자전 속도가 느린 별의 표면 활동량은 주기적으로 변동을 보이는 성향이 있으며 일정 기간 항성 전체가 활동을 멈추기도 한다. 예를 들면 태양은 70년 주기로 거의 흑점 활동을 멈추는 기간이 있는데 이를 몬더 극소기로 부른다. 질량이 큰 별 중 하나로 꼽는 것은 용골자리 에타 로 에타 별의 질량은 태양의 100~150배에 이르며, 수명은 매우 짧아서 수백만 년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아치스 성단을 연구한 결과 현 우주의 상태에서 항성 질량의 상한선은 태양의 150배로 추측하고 있다. 상한선이 왜 150배에서 멈추는지 원인은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으나 에딩턴 한계가 그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딩턴 한계는 항성이 대기를 우주 공간으로 날려 보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한계점을 일컫는다. 빅뱅 이후 최초로 생겨난 별은 리튬보다 무거운 중원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질량이 매우 컸으며 태양 질량의 약 300배에 이르는 별이 탄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극도로 무거운 별(종족 III 항성)은 매우 빨리 죽었으며 현 시점에서는 이론상의 존재일 뿐이다. 2010년 7월 22일에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최근 발견되어 R136a1로 명명된 별은 현재 태양보다 265배 정도 무겁다고 관측되었으며 태어났을 당시에는 320배 정도 무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황새치자리 AB의 반성 황새치자리 AB C의 질량은 목성의 93배에 불과하며, 이는 지금까지 관측된 중심핵에서 핵융합을 하는 항성 중 가장 작은 존재이다. 태양과 중금속 함유량이 비슷한 별은 이론적으로 중심부에서 핵융합 작용을 일으켜 항성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목성 질량의 75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아주 희미한 별들을 연구한 결과 금속 함유량이 매우 낮은 천체가 항성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태양 질량의 8.3퍼센트 또는 목성 질량의 87배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질량이 가스 행성과 항성의 중간 정도 되어 핵융합 작용을 일으킬 상태가 되지 못하는 천체를 갈색 왜성으로 부른다. 항성의 반지름과 질량으로부터 표면 중력이 결정된다. 거성은 주계열성에 비하여 표면 중력이 매우 낮다. 반면 중성자별이나 백색 왜성은 막대한 중력을 지니고 있다. 표면 중력은 항성의 스펙트럼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중력값이 큰 항성에서는 흡수선의 폭이 넓어진다. 항성의 자전 주기는 분광학적인 측정법을 쓰거나 항성표면 흑점이 이동하는 속도를 측정함으로써 값을 구할 수 있다. 젊은 별의 적도 자전 속도는 초속 100킬로미터를 넘는다. 예를 들면 분광형 B의 청색 주계열성 아케르나르의 경우 적도 자전 속도는 초당 225킬로미터 이상에 이른다. 이 별은 자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적도 쪽이 부풀어 오른 회전 타원체 모양이다. 만약 이 별이 조금 더 빠르게 자전해서 초당 300킬로미터에 이르면 별은 산산조각으로 찢겨 나갔을 것이다. 반대로 태양의 자전 주기는 25일~35일 정도로 적도에서의 공전 속도는 초당 1.994킬로미터에 불과하다. 항성이 생성하는 자기장 및 항성풍은 주계열 기간에 머무르는 동안 별의 자전 속도를 크게 낮춘다. 밀집성은 작은 질량까지 수축하기 때문에 매우 빨리 자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운동량 보존 법칙(회전하는 천체가 수축하여 덩치가 줄어드는 만큼 회전 속도가 늘어나는 현상)에 따라 수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를 보인다. 항성 각운동량 중 많은 부분은 항성풍으로 질량을 잃는 과정에서 소실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서의 자전 속도는 매우 빠르다. 예를 들면 게성운 중심부에 남은 펄서는 초당 30번 회전한다. 펄서의 자전 속도는 복사 에너지 방출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느려질 것이다. 주계열 단계에 있는 항성의 온도는 중심핵에서 핵융합 작용을 하는 강도 및 반지름에 따라 결정되며 보통 색지수로 표시한다. 온도는 보통 유효 온도로 표시하며 이는 표면 전체에서 균일한 밝기의 복사 에너지를 방출하는 이론적 흑체의 온도이다. 유효 온도는 단지 대푯값일 뿐 실제 항성의 경우 중심핵에서 표면까지의 거리가 멀수록 실제 온도는 감소한다. 항성의 중심핵 부분의 온도는 수백만 켈빈에 이른다. 항성의 온도에 따라 특정 원소가 이온화되거나 복사 에너지화되어 스펙트럼 상에 독특한 흡수선을 형성하게 된다. 항성의 표면 온도 및 절대 등급, 스펙트럼 흡수선에 따라 항성을 분류한다(#항성 분류 참고). 질량이 큰 주계열성은 표면 온도가 5만 켈빈에 이른다. 반면 태양과 같이 보통 크기의 항성은 표면 온도가 수천 켈빈 정도이다. 적색 거성은 3,600켈빈 이하로 상대적으로 차갑지만 전체 표면적이 매우 크기 때문에 총체적 광도는 주계열성에 비해 상승한다. 핵융합의 부산물로 별이 발산하는 복사 에너지는 전자기파 및 입자 방사선의 형태로 우주 공간에 분출된다. 입자 방사선은 항성풍의 형태로 발산되며 이 항성풍은 항성 외곽 대기에서 나온 전기적으로 대전된 입자(다시 말해 자유 양성자, 알파 입자, 베타 입자) 및 항성 중심핵에서 나온 중성미자가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중심핵에서 생산되는 복사 에너지는 항성이 아주 밝게 빛나는 이유이다. 매 순간 한 원소 내 두 개 이상의 원자핵은 서로 융합되어 더 무거운 새로운 원자핵을 형성한다. 여기서 생성되는 에너지는 항성의 바깥쪽 층에 도달함과 함께 전자기 에너지, 가시광선과 같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바뀐다. 항성의 색은 광구를 포함한 항성 외곽 층의 온도 및 가시광선 영역 내 최고 주파수가 좌우한다. 가시광선 외에도 항성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기 복사 에너지를 발산한다. 실제로 항성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모든 영역에서 복사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길게는 전파 및 적외선 영역으로부터 짧게는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까지 뿜어낸다. 이 성질은 적색 왜성처럼 차가운 별부터 청색 초거성처럼 아주 뜨겁고 밝은 별까지 일치하는 속성이다. 항성 스펙트럼을 이용하여 천문학자들은 한 항성의 표면 온도 및 표면 중력, 중원소 함유량, 자전 주기를 알 수 있다. 시차법 등을 이용하여 항성까지의 거리를 알고 있다면 밝기를 구할 수 있다. 그 후 항성 모형에 기초해서 질량을 비롯한 반지름, 표면 중력, 자전 속도를 구할 수 있다(쌍성의 경우 질량을 곧장 알아낼 수 있다). 또한 중력 렌즈 기법으로 항성의 질량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앞서 구한 자료로부터 항성의 나이를 알아낼 수 있다. 천문학에서 밝기는 기준 시간 동안 항성 한 개가 발산하는 빛의 강도 및 다른 형태의 복사 에너지를 말한다. 항성의 밝기는 반지름과 표면 온도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별은 모든 표면에 걸쳐 균일한 플럭스(기준 면적에 가해지는 복사 에너지의 양)로 발산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빠르게 자전하는 베가의 경우 양극이 적도 부분보다 더 많은 플럭스로 발산한다. 항성 표면의 평균 밝기보다 온도가 낮고 어두운 부분을 흑점이라고 부른다. 태양처럼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항성의 표면은 거의 특징이 없이 밋밋한 원반 위에 작은 흑점 여럿을 지닌다. 태양보다 더 큰 거성의 흑점은 더 크고 뚜렷하며 주연 감광 현상을 보여 준다. 주연 감광이란 항성 원반의 바깥쪽으로 갈수록 밝기가 어두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고래자리 UV 등 플레어 별과 같은 적색 왜성의 경우 표면에 뚜렷한 흑점이 여럿 나타난다. 한 항성의 밝기는 겉보기 등급을 측정해서 값을 구한다. 겉보기 등급은 항성의 밝기, 지구에서의 거리, 지구 대기의 영향 등에 따라 결정된다. 절대 등급은 모든 별을 지구에서 32.6광년(10파섹) 떨어진 곳에 세워 놓았다고 가정했을 때의 밝기로 별 자체의 광도와 관련이 깊다. 절대 등급, 겉보기 등급 모두 로그 단위를 이용하여 표시한다. 별의 밝기에서 1등급의 차이는 약 2.5배이다. 2.5를 다섯 번 곱하면 근사적으로 100이 된다. 여기서 1등급별은 2등급별보다 2.5배 밝고, 6등급별보다 100배 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씨가 가장 좋을 때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어두운 별은 6등급 정도 밝기이며, 천구 전체에 걸쳐 6등급 이상의 눈에 보이는 별의 수는 약 6000개 남짓 수준이다. 절대 등급과 겉보기 등급 모두 수치가 작아질수록 밝은 별이며 수치가 클수록 어두운 별이다. 가장 밝은 별의 경우 절대 등급과 겉보기 등급의 값이 작다. 밝은 별과 어두운 별 사이 밝기 등급 차이를 구하려면 어두운 별의 밝기 등급에서 밝은 별의 밝기 등급을 뺀 뒤 그 값을 기준값 2.512의 지수로 사용하면 된다. 공식으로 간단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자체 밝기 및 지구에서의 거리에 따라 한 항성의 절대 등급 및 겉보기 등급은 달라진다. 예를 들면 시리우스의 겉보기 등급은 −1.44이지만 절대 등급은 +1.41이 된다. 태양의 겉보기 등급은 −26.7이지만 절대 등급은 +4.83에 불과하다. 따라서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는 태양보다 23배 밝은 셈이 된다. 밤하늘에서 시리우스 다음으로 밝은 카노푸스는 절대 등급이 −5.53으로 태양보다 14000배 밝다. 실질적으로는 카노푸스가 시리우스보다 훨씬 밝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시리우스가 더 밝게 보인다. 이는 시리우스는 지구에서 고작 8.6광년 떨어져 있는 반면 카노푸스는 310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으로 관측된 항성 중 가장 밝은 존재는 R 136a1으로 절대 등급은 무려 −12.3에 이른다. 여기서 계산한 이 별의 밝기는 태양의 740만 배 정도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별 중 가장 어두운 것은 NGC 6397 성단 내에 있다. 여기서 발견된 적색 왜성들의 겉보기 등급은 26이었고 28등급의 백색 왜성도 발견되었다. 이 별의 밝기는 달 표면에 있는 촛불을 지구에서 관측했을 때의 밝기와 맞먹는다. 매우 뜨거운 O형부터 상층 대기에 분자가 생성될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M형까지 스펙트럼에 따라 항성을 나누는 여러 기준이 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분류 기호는 O, B, A, F, G, K, M으로 표면 온도가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순서에 따라 7개로 구별한 것이다.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별의 경우 특수 분류 기호를 쓴다. 가장 흔한 사례는 L과 T형으로 이들은 차가운 M형 별 및 갈색 왜성이다. 각 기호마다 아라비아 숫자로 0부터 9까지 다시 나눈다. 이 체계는 표면 온도를 기준으로 한다. 다만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뜨거운 항성은 O2로(예: HD 269810), O0과 O1 분광형을 갖는 항성이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항성은 부피 및 표면 중력에 따라 다른 스펙트럼선을 나타내는데(이를 광도 효과라고 부른다.) 이 기준에 따라 항성을 나누기도 한다. 가장 거대한 초거성 0부터 시작하여 거성 III, 주계열성 V, 가장 작은 백색 왜성 VII처럼 부피가 작아짐에 따라 로마 숫자가 증가한다. 대부분의 별은 수소를 중심핵에서 태워서 핵융합을 통해 빛과 열을 내는 주계열 단계에 있다. 이들은 헤르츠스프룽-러셀 도표에서 일정한 선을 그리면서 배열되어 있다. 우리 태양을 표면 온도 및 표면 중력에 따라 표시하면 G2V로 표면 온도가 G에서 세 번째로 뜨거운 그룹에 속하는 동시에 주계열성 상태라는 의미이다(G형 주계열성을 황색 왜성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태양은 온도가 제법 높고 질량도 큰 편에 속한다. 특이한 현상을 보이는 별은 앞에서 설명한 기호 옆에 작은 글씨를 덧붙인다. 예를 들면 “"e"”는 방출선 현상을 보이는 항성에 붙이는 기호이며 “"m"”은 중원소 성분이 강하게 검출되는 별이고, “"var"”는 분광형이 일정하지 않은 별에 사용한다. 백색 왜성의 경우 분광형 기호로 D를 쓴다.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특정 분광선에 따라 이를 다시 세분하여 DA, DB, DC, DO, DZ, DQ 등으로 표시한다. 세분한 기호 뒤에 온도에 따라 아라비아 숫자를 다시 덧붙여 표시한다. 예를 들면 시리우스 B의 분광형은 DA2이다. 변광성으로 불리는 항성은 외부적 또는 내부적 요인 때문에 밝기가 규칙적으로 또는 불규칙적으로 변화한다. 내부적 요인에 따라 변광성은 크게 세 무리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항성 진화에서 겪는 변광 과정이다. 항성이 나이를 먹으면서 몇몇 별은 헤르츠스프룽-러셀 도표에서 변광성의 성질을 보이는 영역을 통과하게 된다. 이 단계를 보이는 항성을 맥동 변광성으로 부른다. 맥동 변광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밝기와 반지름에 큰 변화를 보이며,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년의 주기에 걸쳐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이 부류에 속하는 항성에는 케페우스형 변광성과 미라형 변광성(장주기 변광성)이 있다. 둘째, 분출 변광성이 있다. 이들은 항성 플레어 방출 또는 질량의 대량 방출 등의 이유로 급격하게 밝기가 변화한다. 여기에 속하는 항성으로는 원시별, 울프-레이에 별, 플레어 별, 거성, 초거성 들이 있다. 셋째, 격변 변광성 또는 폭발 변광성이다. 이들은 앞의 둘에 비해 훨씬 더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여기에 속하는 항성 진화 단계로는 신성과 초신성이 있다. 반성으로 백색 왜성을 거느린 쌍성계의 경우 백색 왜성은 신성 및 Ia형 초신성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후보이다. 백색 왜성 주변에 주성(主星)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강착 물질이 일정량 쌓이면서 수소 핵융합이 가능한 질량까지 축적이 되면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일부 신성은 약한 강도로 주기적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외부적 요인에 따른 변광성도 존재한다. 식쌍성, 흑점이 매우 많은 별(자전하면서 밝기가 변화한다.) 등이 그 예이다. 식쌍성 중 대표적인 예로 알골을 들 수 있는데 이 별은 2.87일 간격으로 밝기가 2.3에서 3.5등급까지 변화한다. 안정된 별의 내부는 유체 정역학적 평형 상태에 있다. 유체 정역학적 평형이란 항성 내부의 압력 기울기에 따라 중력과 복사압이 서로 평형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압력 기울기는 중심부에 비해 바깥쪽으로 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는 '플라즈마의 온도 기울기'에 따라 생겨난다. 주계열성이나 거성 중심부의 온도는 최소 1천만 켈빈이다. 주계열성 중심핵에서 수소를 태워서 생기는 온도 및 압력 때문에 항성은 핵융합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며 동시에 자체 중력을 버티며 붕괴하지 않고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원자핵은 항성 중심부에서 융합하면서 감마선 형태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광자는 주변 플라즈마와 반응하여 중심핵에 열에너지를 공급한다. 주계열 단계에 있는 항성은 수소를 헬륨으로 변환하면서 느리면서도 지속적으로 중심핵 부분에 헬륨을 누적시킨다. 결국 헬륨이 임계점 이상 쌓이면 중심핵에서의 핵융합 반응은 멈춘다. 태양 질량의 0.4배 이상 되는 별은 축퇴된 헬륨층 바깥의 외곽층으로 핵융합 장소를 옮기게 되며 항성은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안정된 항성 내부는 유체 정역학적 평형 외에도 열적 평형으로 불리는 안정적인 에너지 상태를 유지한다. 항성의 내부 전체에 걸쳐 방사상으로 온도 기울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로써 열 흐름은 내부에서 바깥쪽을 향하게 된다. 항성 내부 모든 층에서 외부로 흘러나가는 에너지 흐름과 아래에서 각 층으로 밀려 올라오는 흐름은 그 양이 정확히 일치한다. 복사층은 복사열 전달로 에너지 흐름이 효율적으로 유지되는 지대이다. 복사층에서 플라즈마는 안정되게 존재하며 큰 움직임은 없다. 그러나 이 안정된 상태가 깨질 경우 플라즈마는 불안정해지고 대류 작용이 발생하며 대류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외곽층처럼 불투명도가 높은 곳 또는 중심핵 부분과 같이 높은 에너지 흐름이 발생하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주계열성에서 대류층이 생겨나는 장소는 질량에 따라 결정된다. 태양보다 몇 배 무거운 항성은 항성 내부 깊은 곳에 대류층이 있으며 바깥쪽에 복사층이 둘러싸고 있다. 태양처럼 상대적으로 질량이 작은 별은 이와 반대로 복사층이 깊은 곳에 있고 대류층이 항성 바깥쪽을 싸고 있다. 태양 질량의 0.4배 이하에 해당하는 적색 왜성은 항성 내부 전체가 대류층으로 중심핵에 헬륨이 쌓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별 내부 대류층은 별이 나이를 먹거나 내부 구성 상태가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뀐다. 지구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항성의 표면을 광구라고 부른다. 이곳은 항성의 플라즈마가 빛 형태 광자로 투명하게 바뀌는 층이다. 중심핵에서 생산된 복사 에너지는 광구를 떠나면서 우주 공간으로 자유롭게 퍼져 나간다. 광구 표면에는 흑점이 생기는데, 이는 주변보다 온도가 낮기 때문에 검게 보이는 것이다. 광구보다 높은 고도에는 항성 대기가 펼쳐진다. 태양과 같은 주계열성의 항성 대기 중 최하단부는 채층으로, 이곳에서는 스피큘(spicule, 제트 기체)이 발생하고 항성 플레어가 생겨난다. 채층에서 불과 100킬로미터만 올라가면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한다. 채층 바로 위는 코로나로 극도로 뜨겁게 가열된 플라즈마가 수백만 킬로미터까지 퍼져 있는 영역이다. 코로나는 항성 내부 대류층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코로나의 온도는 극도로 뜨겁지만 빛의 발산량은 미미하다. 태양 주위 코로나 지대는 보통 일식 현상 중에만 관측이 가능하다. 코로나로부터 플라즈마 입자 형태의 항성풍이 바깥쪽으로 퍼져 나가면서 성간 매질과 반응한다. 태양의 경우 태양 코로나에서 뿜어져 나온 항성풍은 거품 모양을 한 태양권 전체로 퍼져 나간다. 항성 내부에서는 질량과 화학적 조성에 따라 항성 핵합성의 일종인 핵융합 과정이 발생한다. 합성된 원자핵의 순수 질량은 산술적인 합산량보다 작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장한 formula_3 공식에 따라 손실된 질량은 에너지로 바뀐다. 수소 핵융합 과정은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중심핵의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핵융합의 강도는 막대하게 증가한다. 주계열성의 중심핵 온도는 가장 뜨거운 별과 가장 차가운 별을 비교하면 10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O형 항성의 경우 중심 온도는 4천만 켈빈이며 어둡고 희미한 적색 왜성의 중심부 온도는 4백만 켈빈 정도에 이른다. 태양 중심핵 온도는 1천만 켈빈이며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을 통하여 수소를 헬륨으로 치환하고 있다. 연쇄 반응의 과정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반응은 총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반응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e는 양전자, γ는 감마선 광자, ν는 중성미자, H와 He는 수소 및 헬륨의 동위 원소이다. 앞의 반응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는 수백만 전자볼트(MeV)로, 이는 실제 에너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수없이 꾸준하게 반복함으로써 항성은 복사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생산한다. 질량이 더 큰 별에서는 탄소가 촉매로 작용하는 CNO 순환 작용을 통해 헬륨이 생산된다. 태양의 0.5~10배 질량을 지닌 별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중심핵 온도가 1억 도에 이르게 되면 반응중간체 베릴륨을 이용하는 삼중 알파 과정을 거치면서 헬륨을 탄소로 바꾸게 된다. 총체적인 반응 과정은 다음과 같다. 무거운 별 내부에서는 중심핵이 수축하면서 네온 연소 과정 및 산소 연소 과정을 통해 더 무거운 원소를 태울 수 있다. 항성 핵합성의 가장 마지막 단계는 안정된 철-56을 생산하는 규소 연소 과정이다. 이 단계까지 오면 융합 작용은 흡열 과정 없이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는 중력 수축을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게 된다. 아래 표는 태양 질량의 20배인 별이 자신이 가진 모든 핵융합 연료를 태우는 데 걸리는 시간을 나타낸다. 이 별은 실제로 분광형 O의 청색 초거성으로 반지름은 태양의 8배, 밝기는 태양의 6만 2천 배에 이른다. 레너드 번스타인 레너드 번스타인(, 1918년 8월 25일 ~ 1990년 10월 14일)은 미국의 지휘자, 작곡가, 작가, 음악 교육자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지휘자 중 전 세계에 걸쳐 명성을 얻은 첫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뉴욕 필하모닉에서 장기간 음악 감독으로, 세계의 저명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캔디드, 원더풀 타운, 온 더 타운을 쓰기도 했다. 1954년에서 1989년까지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 시리즈를 위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다수에 출연한 첫 번째 고전음악 지휘자로 고전 음악 대중화에 기여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뛰어난 피아노 테크닉을 구사했고 다수한 교향곡과 다양한 연주회용 음악을 남겼다. 1918년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러시아 Rovno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레너드 번스타인의 부친 샘 번스타인은 회사원이었고 처음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반대했지만 그러면서도 종종 루이스(아들의 별칭)를 오케스트라 공연장에 데려갔다. 한번은 번스타인이 피아노 공연을 듣고 곧 마음이 사로잡혀서 곧장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기간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보스턴 라틴 스쿨에 다녔다.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졸업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월터 피스턴에게 음악을 배우고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프리츠 라이너에게 지휘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커티스에 있는 동안, 레너드 번스타인은 Helen Coates와 Heinrich Gebhard에게 피아노도 배웠다. 다이나에게 지휘하는 방법을 배웠고 쿠세비츠키에게서도 지휘하는 방법을 사사(師事)하였다.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교육자로서 크게 인정받았고 대중에게는 뉴욕 필하모닉에서 장기간 음악을 감독해서 특히 잘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은 세계에서 유수한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고 현대의 위기를 표현한 교향곡이나 영화 음악을 작곡한 사람으로서도 명성이 드높다. 특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작곡한 사람으로서 특히 주지(周知)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교향곡 3개, 오페라 2개, 뮤지컬 음악 5개 등 다수의 작품을 썼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정치 성향은 확고한 좌파였지만, 다른 동시대인과 달리 레너드 번스타인은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반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을 돕고자 자선공연도 했고 베트남 전쟁을 공개로 반대했다. 로진스키에게 인정받아 뉴욕 필하모니의 부지휘자가 되고 1943년 11월에, 아픈 브루노 발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으며, 즉시 성공했다. 1949년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튀랑갈릴라 교향곡을 세계에서 초연했다. 1957년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텔아비브에서 Mann Audiotorium의 개관 공연했으며, 그곳에서 많이 녹음했다. 1960년대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을 위한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 시리즈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레너드 번스타인가 한 작곡은 유대교 전례 음악(특히 레너드 번스타인가 지은 교향곡 제1번과 제3번, 치체스터 시편), 구스타프 말러, 조지 거슈윈, 레너드 번스타인의 친구 에런 코플랜드에게서 크게 영향받았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레너드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청중 약 100만 명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때, 레너드 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 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 사람의 축복을 내렸으리고 확신한다”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말했다. 많은 음악가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고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로 객원으로서 지휘하면서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특히 구스타프 말러, 에런 코플런드, 요하네스 브람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당연히 레너드 번스타인의 자작곡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으나 몇몇 사람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양식이 신파조인 데다가 짜증 나게 하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지휘하면서 춤추고 발작하듯이 기뻐하곤 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 영광, 작곡가로서 생산성, 열정 넘치는 정치활동으로 말미암은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레너드 번스타인은 가족을 향한 헌신과 양성애 성향 간에서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하지만, Arthur Laurents(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을 조력한 사람)는 《The Gay Metropolis》의 저자인 Charles Kaiser에게 레너드 번스타인은 단지 “혼인한 게이였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전혀 충돌을 느끼지 않았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단지 게이였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 Shelly Rhoades Perle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기(傳記)를 쓴 사람인 Meryl Secrest에게 자신은 “레너드 번스타인가 성(性)은 남성을, 감성은 여성을 원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년(晩年)에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 배우 Felicia Montealegre와 1951년에 혼인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Felicia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삼 번째 교향곡인 《Kaddish》의 1960년대 뉴욕 필 연주에 화자(이스라엘 출신의 전설 같은 Hanna Robina가 공연했던 역할)로 참여했다. 자상한 아버지인데 음악계에서 난잡한 성생활로 악명 높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여러 동성애 관계가 Felicia 에게 알려지자 1976년에 별거했고 5년 전부터 파트너였던 작가 겸 음악 감독 Tom Cothran과 동거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1977년 Felicia가 폐암을 진단받자 그 여자에게 돌아와 그 여자가 죽을 때(1978년 6월)까지 간병했다. Tom Cothran은 1981년에 AIDS로 죽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정신병자 Samuel Byck은 자신의 계획의 세부를, 한 사람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존경했던 번스타인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1990년 8월 19일 텡글우드에서 벤자민 브리튼의 와 베토벤의교향곡 제7번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생애에서 최후로 지휘하고서 동년 10월 14일 폐렴으로 죽은 레너드 번스타인의 유해는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번스타인이 직접 쓴 책: 번스타인에 대한, 또는 번스타인을 다루는 책: 서양음악 작곡가의 목록 서양음악 작곡가의 일람. 871년 872년 873년 874년 875년 876년 877년 878년 879년 880년 881년 882년 883년 884년 885년 베지에 곡선 베지에 곡선 혹은 베지어 곡선(Bézier Curve)은 formula_1개의 점으로부터 얻어지는 formula_2차 곡선으로 수치 해석 분야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3차 베지에 곡선은 포스트스크립트 글꼴, 메타폰트(METAFONT), 김프 등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생성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으며, 트루 타입 폰트에는 2차 베지에 곡선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 르노사의 기술자인 피에르 베지에가 1962년 자동차 몸체 디자인에 사용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조절점 B, B, ..., B 에 대해 베지에 곡선은 로 쓸 수 있다. 여기서 "J"("t") 는 다음과 같다. "t" 가 0부터 1까지 변화할 때,B 에서 시작하여 B 에서 끝나는 베지에 곡선을 그리게 되며, 일반적으로 곡선은 이외의 조절점을 지나지 않는다. 조절점 A, B, C에 대한, 2차 베지에 곡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점 P("t") 의 자취이다. 위 식을 바꾸어 보면 베지에 곡선의 기하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첫 번째 괄호로 묶인 (1 -t) A + t B는 A와 B를 잇는 선분을 t:(1-t) 로 나누는 내분점임을 알 수 있고, 두 번째 괄호로 묶인 점도 마찬가지로 B와 C의 t:(1-t) 내분점이다. 그리고 P(t)는 이 두 내분점을 다시 t:(1-t) 로 나누는 내분점이다. 2차 베지에 곡선은 다음과 같이 재귀적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 886년 887년 888년 889년 890년 891년 892년 893년 894년 895년 896년 897년 898년 899년 900년 -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함. 중구 (대구광역시) 중구(中區)는 대구광역시 가운데 있는 구로, 대구광역시청 소재지이다. 면적이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작다. 대구광역시 최대의 시장인 서문시장이 있는 대신동과 성내동 관할의 태평로, 동성로, 종로, 봉산동 등은 대부분 중심 상업 지구이며, 남산동과 대봉동, 달성동 일대에만 전형적인 주거지를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구는 75,841명으로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적다. 중구는 조선 선조 34년(1601년) 경상감영이 현 포정동 에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의 중심지로 형성되었고 현재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의 심장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구는 분지 형상인 대구의 중앙 저지대에 도심이 형성되어 동편에 흐르는 신천을 경계로 동구, 수성구로 나뉘며 명덕로를 경계로 남구, 달성공원 서편 기슭과 비산동 동편을 경계로 서구, 달서구와 나뉘고, 대구역의 동서로 뻗은 경부선 선로를 따라 북구 칠성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중구는 동·서·남·북·수성·달서구에 둘러싸인 대구광역시의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통계치는 2011년 12월 31일 기준이다. 동구 (대구광역시) 동구(東區)는 대구광역시의 북동쪽에 있는 구이다. 달성군을 제외하고 대구광역시의 기초자치단체 중 면적이 가장 넓으며, 면적의 80% 이상이 팔공산괴(八公山塊)에서 갈라진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동구의 생활권은 금호강 서쪽에 위치한 경부선 동대구역 인근의 신암·신천·효목 생활권(신암동, 신천동, 효목동)과 금호강 동쪽에 위치한 대구국제공항 인근의 동촌 생활권(지저동, 동촌동, 방촌동, 해안동), 옛 안심읍 일대의 안심동(반야월) 생활권, 팔공산과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일대의 팔공산 생활권(불로봉무동, 도평동, 공산동) 등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원도심인 신암동, 신천동, 효목동 일대와 공군 비행장이 있어서 개발 고도가 제한된 동촌 지역은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특히, 공군 비행장으로 인한 개발 제한은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동촌 지역 구간의 이용률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동촌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행장에서 떨어져 있는 안심동 지역은 반야월 신길을 중심으로 율하지구·동호지구가 개발되고, 신서동·각산동 일대에 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팔공산 생활권 중 불로봉무동은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며, 공산동은 농촌 성격을 강하게 띄고 팔공산(갓바위, 동화사, 파계사 등)을 중심으로 한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대구광역시 동구의 행정 구역은 20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구의 면적은 대구시 전체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182.22 km²의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인구는 2018년 12월 31일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35만1291 명, 15만2370 가구이다. 서구 (대구광역시) 서구(西區)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서부에 있는 구이다. 면적은 남구와 비슷하다. 비산7동, 상리동, 중리동, 이현동은 공장 지역이고, 평리동, 비산1~6동, 내당동은 달서구와 접한 주거 지역이다. 내당동의 경우 달서구와의 경계상으로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통과하는 지역이다. 원대동은 북구 생활권과 가깝다. 서대구 나들목, 북부정류장 등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섬유 산업의 침체로 연고지 공단인 비산염색공단과 서대구산업단지의 불황으로 인해 발전이 더디어졌고, 인구도 해마다 유출되는 등 장기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택지 재개발 사업과 마을 환경 재정비 사업으로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는 곳이다. 서구는 대구광역시의 중서부 교통 요충지로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88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의 관문이며, 섬유산업, 염색단지, 기계공업 업체가 집중된 지역 경제의 중추 도시이다. 대구지방은 내륙분지형으로 분지라는 지형적 영향으로 기상학적 현상이 다른 지방과는 차이가 있어 특수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기온의 교차가 심하게 나타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적다. 대구 부근 지역은 연평균 기온이 11 ~ 13℃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00 ~ 1100mm로 적은 편이며 8월의 평균최고기온은 31.3℃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데, 이것은 기류가 풍상측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이류하면서 수증기를 탈락시킨 후 건조한 상태로 분지인 이 지역으로 불어오기 때문이다. 대구 서구의 행정 구역은 9개의 법정동과 이것을 관리하는 1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 서구의 면적은 17.48 km²이며, 인구는 2016년 10월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남구 (대구광역시) 남구(南區)는 대구광역시의 자치구이다. 대명동이 90% 이상을 차지하며, 대명동은 대구광역시 소재 동들 중 행정동이 가장 많은 동이다. 이천동과 봉덕동 일대에 설치되어 있는 미군 기지 때문에 발전 속도가 더딘 편이다. 대명11동 관문시장 인근은 논공읍 금포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달성군청 소재지였다. 남구는 대구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신천을 경계로 한 수성구와 접경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앞산공원이 소재하며, 수성구, 달서구, 달성군과의 접경하며, 북쪽으로는 명동로, 명서로를 경계로 한 중구와 접경하고 있다. 남구 지역은 조령에서 발원하여 남경산을 양분, 북류하는 신천의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 평야이며, 사력질 토양으로 투수성이 강하여 항상 건조한 지반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 남구의 행정 구역은 이천, 봉덕, 대명 3개의 큰 법정동을 13개의 행정동으로 나눠서 관리하는 체계이다. 대구 남구의 면적은 17.44 km이며, 인구는 2015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16만0852 명, 7만4949 가구이다. 북구 (대구광역시) 북구(北區)는 대구광역시 북쪽에 있는 구이다.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고등교육의 중심인 경북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북구의 지리는 금호강을 따라 남북으로 나누거나, 생활권과 역사성을 기준으로 금호강 이남에 무태조야동을 묶은 동부(옛 달성군 북면 지역)와 서부(칠곡군에서 편입된 옛 칠곡동 지역)로 나눌 수 있다. 대구광역시 북구의 인구는 2018년 12월 31일 기준으로 43만9489 명, 17만7162 가구이다. 수성구 수성구(壽城區)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동남부에 있는 구이다. 북쪽으로는 동구, 서쪽으로는 중구와 남구를, 남쪽으로는 달성군 가창면,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산시와 인접하고 있다. 수성구는 동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현재의 수성구로 만들었다. 수성(壽城)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 수성군에서 기인한다. 1914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한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과 현재의 구역을 비교해 보면, 동구 효목동, 신암동, 신천동, 남구 대명동, 봉덕동을 제외하고 일치하며, 경산군 고산면(현재의 시지 일대)이 편입됨으로써 현재의 구역을 가지게 되었다. 수성구의 주요 시설로는 대구스타디움, 대구지방법원, 대구고등법원, 대구지방검찰청,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대구미술관, 어린이회관(어린이대공원), 수성못 등이 있으며, 교육 여건이 우수하여 주거 지역으로 선호하는 지역이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달구벌대로 범어동, 만촌동, 시지 구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교통도 편리하다. 범물동, 지산동, 황금동, 두산동 일대에 대구 도시철도 3호선이 2015년에 개통되었다. 현재 수성구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는 약 45만여 명이다. 수성구의 행정 구역은 23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성구의 면적은 76.46 km²이며, 인구는 2014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영국 왕녀 엘리자베스 영국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United Kingdom, 1770년 5월 22일 ~ 1840년 1월 10일)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7번째 자녀이자 3번째 딸이다. 엘리자베스는 런던의 버킹엄 궁전에서 조지 3세와 샬럿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1786년 궁정 시종 조지 레이머스와 혼인했다는 설도 있으나, 1814년 무도회에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장교였던 프리드리히와 만나 4년 뒤인 1818년 4월 7일 런던에서 정식 혼인하였다. 1820년 프리드리히가 헤센홈부르크 방백이 되면서 엘리자베스 또한 헤센홈부르크 방백비가 되었다. 1829년 남편 프리드리히는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시동생 루트비히가 방백위를 계승했다. 엘리자베스는 184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었다. IPv6 IPv6(Internet Protocol version 6)는 인터넷 프로토콜 스택 중 네트워크 계층의 프로토콜로서 버전 6 인터넷 프로토콜(version 6 Internet Protocol)로 제정된 차세대 인터넷 프로토콜을 말한다. 인터넷(Internet)은 IPv4 프로토콜로 구축되어 왔으나 IPv4 프로토콜의 주소가 32비트라는 제한된 주소 공간 및 국가별로 할당된 주소가 거의 소진되고 있다는 한계점으로 인해 지속적인 인터넷 발전에 문제가 예상되어,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IPv6 프로토콜이 제안되었으며, 국제 표준이 RFC 를 통해서 확정되었고, 실제로 IPv6 주소는 휴대폰 및 컴퓨터에 할당되어 적용되고 있다. 2012년 1월 30일 기준으로 IPv4의 2인 4,294,967,296개 중에 3,410,303,904개가 할당, 588,514,560개가 특수용도, 296,148,832개가 미할당이다. 그리고 IANA에서의 할당은 더 이상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APNIC에서는 1회에 한정하여 1024개만을 할당하고 있다, 2012년 1월 30일자로, 대한민국에 IPv4는 112,231,936개가 할당 되어있다. IPv4 주소는 빠른 속도로 고갈되었으며, 인터넷에 접속된 컴퓨터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모자라는 주소를 더 많은 네트워크에 할당하기 위해 네트워크 프래그멘테이션(Network Fragmentation)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라우터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의 주소 고갈과 네트워크 프래그멘테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인터넷에 확장성과 데이터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IPv6가 제안되었다. IPv6는 팰로앨토 연구소에서 개발하고, 1994년 IETF(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가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IP Next Generation(IPng)라고 불렀다. 현재 IPv6의 사용량은 매우 적은 편이며, 인터넷의 나머지 부분은 아직도 IPv4 프로토콜로 작동하고 있다. 2012년 1월 30일 기준으로 IPv6의 2인 약 3.4x10개(340,282,366,920,938,463,463,374,607,431,768,211,456개) 가운데 21,131,922개의 주소만 전 세계에서 할당되어 사용중이고 이 중에 20,971,520개의 주소는 특수목적용으로 할당되어 있으므로 실제 160,402개의 주소만 실제 사용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5,219개의 IPv6 주소를 할당받아 사용 중이다. 특히, 2014년 9월 SK텔레콤이 한국인터넷진흥원과 함께 갤럭시 노트4 부터 IPv6 상용화에 성공한 후 실제 음성과 데이터 통신에 IPv6 통신을 사용중이며, 2016년 7월 현재 SK텔레콤 전체 가입자(2600만명)의 약 25%인 600만명이 IPv6 단말을 사용하고 있다. IPv6와 기존 IPv4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IP 주소의 길이가 128비트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터넷 사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IPv6는 여러가지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는 동시에 기존 IPv4와의 호환성을 최대로 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때문에 몇몇 예외(FTP, NTPv3 등)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네트워크 수준 상위 프로토콜들은 큰 수정 없이 IPv6 상에서 동작할 수 있다. IPv6 프로토콜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는 프로토콜로 개발되었다. 노드는 수동 구성이나 DHCP (Dynamic Host Configuration Protocol) 서버와 같은 서버의 도움 없이도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인터넷과 연결될 수 있는 글로벌(전역) IPv6 주소를 자동으로 생성할 수 있다. IPv6을 사용하는 링크의 장치는 라우터 알림(Router Advertisement, RA) 메시지의 모든 글로벌 접두사를 알리고 링크의 기본 장치로서의 기능을 통지 하여 구성한다. RA 메시지는 주기적으로 그리고 시스템 시작시 호스트가 보내는 장치 요청 메시지에 대한 응답으로 전송이 된다. 링크상의 노드는 인터페이스 ID(64 비트)를 RA 메시지에 포함된 접두사(64 비트)에 추가하여 전역 IPv6 주소를 자동으로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노드에서 구성한 결과로 나오는 128 비트 IPv6 주소에 중복 주소 검색이 적용되어 링크의 고유성을 보장한다. ICMP 패킷 헤더의 유형 필드에 133의 값을 갖는 장치 요청 메시지는 시스템 시작시 호스트에 의해 보내지므로, 다음 예약 된 네트워크 상에서의 RA 메시지를 기다릴 필요 없이 호스트가 즉시 자동으로 주소를 구성할 수 있다 IPv4는 32비트의 주소공간을 제공함에 반해, IPv6는 128비트의 주소공간을 제공한다. 32비트 주소공간이란, 32 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주소영역을 지칭한다. 32 비트에 의해 생성할 수 있는 모든 IPv4 주소는 2인 4,294,967,296개이다. IPv6의 128비트 주소공간은 128 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2개인 약 3.4x10개(340,282,366,920,938,463,463,374,607,431,768,211,456개)의 주소를 갖고 있어 거의 무한대로 쓸 수 있다. IPv4 주소에 비해 IPv6 주소는 그 표현 비트 수가 128비트로 IPv4의 32비트에 비해 4배가 되었지만, 생성되는 IPv6 주소공간 영역은 IPv4 주소공간에 비해 2배의 크기를 갖는다. IPv6 주소공간은 향후 인터넷에 등장할 대량의 유비쿼터스 통신 장치들이 상호 통신을 할 수 있는 주소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냉장고, TV, AV 스피커, DVD 플레이어, 홈 보안장치, 전화기 등 각 요소 장비들이 지능화하면서 동시에 무선 인터넷 등을 통해 상호 통신할 수 있도록 각 장치(device)에 IPv6 주소를 제공할 수 있다. 128비트의 주소공간은 지표면의 모든 공간에 10m당 1개씩의 IPv6/48 네트워크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의 많은 개수를 갖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주소가 지나치게 많고, 그렇게 많은 네트워크가 필요하게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IPv6의 128비트 주소공간은 주소가 바닥나는 것을 막는 것 외에도 네트워크가 여러 개의 작은 단위로 조각나는 것을 막아 라우팅을 빠르게 만들기 위한 목적도 갖는다. IPv6의 128비트 주소공간은 다음과 같이 16비트(2옥텟)를 16진수로 표현하여 8자리로 나타낸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리가 0의 숫자를 갖게 되므로, 0000을 하나의 0으로 축약하거나, 혹은 아예 연속되는 0의 그룹을 없애고 ':' 만을 남길 수 있다. 따라서 아래의 IPv6 주소들은 모두 같은 주소를 나타낸다. 또한 맨 앞자리의 0도 축약할 수 있다. 따라서 는 로 축약할 수 있다. 그러나 0을 축약하고 ':'로 없애는 규칙은 두 번이나 그 이상으로 적용할 수 없다. 만약 두 번 이상 적용하는 것이 허용되어 와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면, 이 표현은 다음의 네 가지 주소 가운데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의미가 불분명해질 것이다. IPv6 네트워크(혹은 서브넷)는 2의 제곱수를 크기로 갖는 IPv6 주소들의 집합이다. 네트워크 주소는 네트워크 프리픽스 뒤에 프리픽스의 '/' 기호와 함께 비트 수를 붙여서 나타낸다. 는 부터 까지의 주소를 갖는 네트워크를 나타낸다. 기존 네트워크와의 호환성을 위해, IPv4 주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을 통해 IPv6 주소로 나타낼 수 있다. │ IPv6 Network │ <──> │ Translater │ <──> │ IPv4 Network │ 중구 중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중구(中區)는 행정 구역의 이름이다. 광역시 중 광주광역시는 중구가 없으며, 동구가 예전 중심지 역할을 했다. 남구 남구의 뜻은 다음과 같다. 동구 동구는 다음을 가리킨다. 북구 북구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서구 서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황해 황해(黃海)(, ) 또는 서해(西海)()는 태평양의 일부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연안의 바다이다. 황하의 토사가 유입되어 바다의 색깔이 누런 빛을 띠었다는 것에서 황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서해(朝鮮西海)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프랑스 지도 제작자 당빌이 만든 신중국지도첩(1737년)에 표기된 황해()가 국제 표준으로 쓰이며 한국 내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총 면적은 약 38만 km이며, 평균수심은 약 45m이다. 최대수심은 100m를 넘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따라서 갯벌이 발달해있다. 겨울과 여름 수온 차가 매우 심하며, 담수의 유입이 많고 수심이 얕은 이유로 황해 북부 서한만과 중부 경기만 일부 지역, 가장 고위도 지역인 랴오둥 만은 겨울에 얼어붙기도 한다. 황해는 전라남도 해남 반도 남쪽 끝부터 제주도까지를 경계로 동해와 나뉘고, 제주도 서쪽 끝부터 장강(양쯔 강) 하구까지를 경계로 동중국해와 나뉜다. 한반도와 중화인민공화국로부터 황해로 흐르는 주요 강은 다음과 같다. 발해만에서 여러 유전이 발굴되었으며, 천연 가스도 상당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약 2만 년 ~ 1만 2천 년 전의 빙하기(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20m 가량 낮아, 황해 전 지역은 큰 강이 흐르는 평야였으며, 황해로 흘러드는 강들은 이 강의 지류로 여겨진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바다가 차츰 넓어졌다. 황해(서해)를 중심으로 한 해안과 섬에는 물고기, 조개, 해조류 등의 각종 해산물을 포획·채취하여 양식으로 활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국은 이미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신라 말에는 장보고가 무역로를 독점하고 해상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역사시대 이후로 많은 해전이 기록되었다. 전태일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1948년 음력 8월 26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전신에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명동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방치하였다. 결국 당일 밤 10시에 사망했다.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그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4년 서울 남대문국민학교(남대문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 한때 그의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다니며 동냥했다. 그러나 봉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취직하여 월세방을 마련하면서 월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이후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63년 3월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년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다시 가출,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와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견습공)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1965년 구두닦이로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그해 가을 의류제조 회사인 삼일사에서 시다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삼일사에 입사했다. 이후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회사에 밉보여서 1966년 여름 해고된다. 1966년 8월 17일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는 점퍼, 의류 공장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의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1967년 2월 초 무렵 하숙하고 있던 집의 딸과 연애하였으나, 돈 문제 등으로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낀 그는 연애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공장 노동자 생활 중에도 고등학교 복학을 꿈꿨고, 1967년 2월 20일 자신의 바지와 하숙방에 있던 곤로를 팔아 연합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백50원에 산다. 수중에 남은 15원으로 10원짜리 노트를 산 뒤 전화비 5원을 주머니에 남겨두고 3일간 금식하였다. 당시 한 쪽지에 그는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백76일 남았구나.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라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 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는 재단회사 시다들과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듣고 집에 와서 말하는 일이 잦아지다가 나중에는 노동 운동에 본격 투신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처음에는 그를 말렸지만, 1969년 6월 아버지 전상수가 고혈압으로 사망하면서 아들이 하는 일을 막지 말라고 하여 이때부터는 말리지 않게 되었다.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 근처 공장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바보회의 취지에 대해 지금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그의 권고를 기피하였지만, 그가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노동자들을 변호하여 해고를 막거나 재입사 시키면서 그의 바보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규합하는 어려움, 주변의 냉소와 비야냥거림, 노동청과 근로감독관, 언론들의 기만극, 생계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서있었다. 일부 미싱사와 봉제 노동자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당시에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라고 썼다. 그는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찾아 암기하며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불이익에 저항하였다. 그는 동대문구청을 찾아가 열악한 환경에 대해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청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지만, 근로감독관은 평화 시장의 참혹한 얘기에 관심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노동청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전태일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노동이나 근로 기준법조차 사업주들의 편이라는 현실은 그를 한동안 허탈 상태로 몰아 넣었다. 그는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직접 조사, 설문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돌아온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 뿐이었다. 처음에 약간 말투가 어눌했던 그는 부랑자로 몰리거나, 노동청 공무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노동자 권리 청원은 언론들도 외면했고, 경향신문 등에만 간략하게 보도되었다.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노동청을 찾아가 근로 환경 개선,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0년 4월부터는 평일에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당 교사가 되었다. 주말 낮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다니던 감리교회의 건물이 완공되자 1970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 가서 4개월간 잡역부로 일하였다. 1970년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8월부터 9월 1개월간 모 미싱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그가 2개월간 일했던 미싱회사 대표의 외조카는 그가 키가 작고 탄탄했다고 기억하였다.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 한 일기에서 그는 북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전쟁은 북한이 먼저 도발해서 일으킨 전쟁이라고 기록해 두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대부로 인식되는 탓에 그를 마치 반정부적이고 반체제적인 인물로 왜곡된 인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보낸 탄원서에서도 그는 '대통령은 국부이고, 곧 저희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극히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주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다. 박정희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는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아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어 은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한번 밟(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이하 생략)…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요.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곳(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라고 했다.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해 10월부터 그는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면서도 노동자들의 참상을 전달했다. 1970년 10월 7일 마침내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1970년 10월 8일 그는 삼동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노동자 숙소 다락방 철폐, 정식 기숙사 설치, 노조 결성 지원, 위생 환경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노동 8개 항의 요구를 제출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중간에 소거되었다. 10월 24일 그는 서울 도심에서 근로 조건 개선 거리시위를 기도했으나, 오후 1시 사전에 경비원의 신고로 정보를 입수하여 출동한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노동청에서는 11월 7일까지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법 개정을 약속한 11월 7일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11월 8일 전태일은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했고, 거사 날짜는 11월 13일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작성하였다. 이에 따라 전태일은 삼동회 회원들을 이끌고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고 시위가 무산된 뒤 점심 식사를 마친 그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화시장 골목 근처에 있다가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와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켠 뒤, 평화시장 앞길로 뛰쳐나왔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시장 앞길을 뛰어다녔다. 이때 전태일의 친구였던 이름 미상의 남자가 그에게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조영래는 1983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며 이 남성의 이름을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붙였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남성에게 김개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민종덕이라는 설도 있다. 그에 의하면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가명인 전태일의 벗의 이름 '김개남(가명)'은 민종덕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그는 전태일을 자신의 고향, 고부에서 출정한 동학 전봉준에 비견하였고 비슷한 위용을 떨쳤던 김개남을 전태일 친구의 가명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전태일은 3분 가량 방치되었으며,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을 불타고 있는 전태일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방치당하고 있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 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한다.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한다.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쓰러졌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치료를 받은 전태일은 온몸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앞치마를 벗어 덮어주고 의사에게 갔다. 1만 5천 원짜리 주사 두 대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터이니 그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때 평화시장 담당 서울시청 근로감독관 한 사람이 전태일을 따라 병원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머니 이소선이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매달리자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 외엔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명동 성모병원으로 전태일을 옮기는 앰블런스가 오자,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 등과 함께 타고 병원을 떠났다. 차 안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릴 듣고 나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라고 마음 속으로 분개하였다. 오후 4시경 그는 그는 구급차에 실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로 다시 후송되었지만, 11월 13일 오후 10시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하였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 그는 한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그날 저녁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 11월 13일 혼수상태에 있었던 그는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마석 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산)에 안장되었다. 다음은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유서의 전문이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다른 공장들에도 노동조합 결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죽어간 사건은 당연히 노동계에 큰 영향을 주어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1970년 8월~9월에 일하던 모 미싱회사의 사장은 전태일 때문에 자신이 조사를 받을까봐 고민했다 한다. 그 회사 사장 외조카에 의하면 "외삼촌은 전태일 때문에 노동청 조사를 받게 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의 외삼촌은 "우리 공장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라고 나중에 말했다. 사장의 외조카 역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에 누워 계시고, 오빠가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외삼촌의 공장에서 월급 2만원을 받고 시다로 일하면서 전태일을 봤다고 한다. 일부 미싱사 등은 냉소적으로 반응하였다. 일부 노동자와 미싱사들 중에는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교만 나와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일부 노동자들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귓등으로 흘렸다. 기본적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한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 1백여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고, 상대생 4백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11월 20일 서울대생, 성균관대생, 이화여대생 등과 기타 서울시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다가 해산되었으며, 고려대, 연세대생들도 집회를 열었다. 시위 직후 서울대 측은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으나 서울대생들은 계속해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 22일 새문안교회(예장통합)대학생부 신도 40여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기독교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고(故) 장공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이래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사망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 1970년 당시 전태일은 봉제 노동자들의 월급 액수를 설문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1970년도 당시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체로 시다가 월 1천8백 원에서 3천 원, 미싱사가 7천원에서 2만 5천원, 미싱보조는 3천원에서 1만 5천원, 그리고 재단사가 1만 5천원에서 3만원까지 받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1983년 뉴스에도 그가 조사한 조사자료와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동아일보 기자가 1983년 설문한 자료에도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평화시장 근로자들은 하루평균 14~15시간을 높이 1.5m의 다락방에서 일하고 재단사가 월1만5천원에서 3만원,미싱사가 월7천원에서 1만5천원, 시다 라는 이름의 견습공이 월1천8백원에서 3천원정도 받았다."고 한다. 전태일이 불을 붙일 당시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불을 붙였으나 불을 붙인 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인권변호사 조영래에 의하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제3의 인물이 있었다 한다. 《전태일 평전》을 처음 집필한 조영래는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였다는 그의 친구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시위가 무산당하자, 그날 오후 그는 아무 말 없이 김개남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눈짓을 하여 그를 사람이 좀 덜 다니는 옆 골목으로 끌고 갔다. 전태일은 "아무래도 누구 한 사람 죽어야 될 모양이다."라고 말하며 김개남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 달라고 부탁했다. 조영래에 의하면 '그 전날 저녁에 김개남은 전태일이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한다.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 달라는 전태일의 부탁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긴 했으나 "설마…"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의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현장에 사람이 있었으나 3분 가량 방치되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석유를 온 몸에 뿌린 그의 몸에) 불길은 순식간에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화염이 확확 들이 찼던 것인지 나중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 소리로 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현장에서 3분 가량 방치되었다. 도리어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 하여 근로기준법 법전들을 불타는 전태일을 향해 던졌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으나, 그는 3~4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그는 치료다운 치료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응급실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 그는 병원 도착 직전까지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다시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3~4시간 정도 방치되었다고 한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 의사는 전태일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가량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없이 환자를 거의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 어머니 이소선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며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 화기가 입 속으로 들어가서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물을 적셔서 입에 축여주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기력이 탈진해 가는 듯 잠잠히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도 전태일의 진료비를 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환자를 살려야 되는 의사들이 책임을 방관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당시 전태일의 담당 의사는 한 개인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의 대한민국 의료계 전체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동반한 주치의였다. 그 글(전태일의 입원 과정)을 읽었던 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의 의료계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던 듯 했다."는 비판이 있다. 2002년 11월 28일 그는 보상금 930만원을 받았다.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全泰壹)에 대한 보상금은 930만원에 불과한 반면 91년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윤용하는 2억 3천만원을 받게 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가배상법은 희생 당시 월급액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정하도록 돼 있어 당시 월급이 2만원에 불과한 전태일씨와 90년대 들어 노동자의 월급이 급격히 오른 후의 대상자와 보상금이 수십 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현실화해 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2005년 4월 1억 4천만원의 추가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정부는 4일 국무회의를 열어 이같은 보상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률 일부 개정령'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전태일 열사의 유족들에게 1억 4천여만원이 추가로 보상되었다. 그의 삶은 1983년 출판된 조영래 변호사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전태일재단에서 전태일 평전이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과 내레이션 역할을 맡은 배우 문성근은 이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였다. 2000년에는 전태일 30주기에 맞춰 제작된, 전태일열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영화 《전태일의 기억》이 개봉하였다. 연극으로는 자유학교 물꼬 학생들의 연극모임 '터'의 9기 학생들이 선보인 《스물 한살》이 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이 죽은 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여동생 전순옥도 노동운동가가 되어 2012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여동생 전순옥은 35세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노동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1년 영국인과 결혼하였다. 그에게는 성이 다른 이모와 외삼촌이 있는데,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 이성조는 어머니 이소선이 4살 때 사망, 외할머니는 정씨 남자와 재혼하였다. 성서학자 정승우에게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동계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 호칭을 붙인다. 한편 이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함규진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소박하고 온건하다.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을 보면 골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악덕 기업주들을 단속해 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라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급진적이거나 생각이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양심으로써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태일 평전에 전태일이 쓴 일기가 실려있는데, 십계명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으니 노동자들은 휴식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자식들에 대해서: 이소선은 "난 자식들한테 할 말이 없는 사람이야.내가 미쳐 돌아다녔는데, 애들이 밥을 먹었는지, 어찌 살았는지 모른다. 해준 것이 없어. 딸(순옥)이 영국 유학갈때 난 그것도 몰랐어 짐싸놓고와서 간다길래 가는가 했지, 학비 한번 대준 적이 없어. 태삼이 그거는, 니는 쌍둥이 자식도 있으니 데모하는데 나오지 마라고 해도, 알았다면서 데모가면 나와있어. 엄마가 노동운동 못하게 한다고 원망해. 순덕이는 우리집 사람들은 전부 가출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 언니도 오빠도 모두 노동운동하러 다니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거야. 그런 순덕이가 시집가서 뒤늦게 집을 장만했다는데도 난 가보지 못했어. 그렇게 오라고해도 갈수가 없어. 지들 사는데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참 난 못난 사람이야"라고 구술했다. 태일에 대해: "태일이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같은 노동자를 너무도 사랑했다고. 그러니 열사나 투사보다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와 함께하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달라고 전해줘. 태일이는 날 참 좋아했어. 아직도 이 옷을 못 버리고 겨울이 오면 꼭 챙겨입는데, 태일이가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엄마 준다고 손수 만들어 준 내의야. 누가 새옷 입으라고 사줘도 안입고 난 이것만 입어…그런 태일이 아니냐" 태일의 동무들에 대해: "나 그대들 없었으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어. 태일이가 죽고 병원에 찾아와서 이제부터 지들이 내 아들이라는거야. 그리고 지금 40년 가까이 지났어. 변치않고 엄마 이상으로 잘해줘. 얼마나 챙겨주는지 몰라. 난 정말로 태일이 친구들을 내 아들이라 생각해. 배곯아가며 두들겨 맞아가며 청계노조를 만들고 지켜냈지. 이들이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태일이와의 마지막 약속도 지킬 수 없었을거야. 난 그냥 미쳐 죽었을테지. 어머니라고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순덕이 결혼할때도, 손주들 대학들어갈때도 이들이 태일이 노릇 다했어. 열서너살 먹은 여공들, 그 어린 것들이 얼마나 고생했냐. 이들이 없었으면 청계노조를 지탱해올 수도 없었을꺼야. 명절때마다 한복 차려입고 세배하고 그랬어. 지금 다 시집가고 애낳고 살지만 그래도 떡이랑 사들고 찾아오고 그래 이 엄마 준다고." 70년대 봉제공이던 전태일의 경우 당시 월급이 2만원 가량이었다. 미래소년 코난 미래소년 코난 (, )은 닛폰 애니메이션에서 제작하여 NHK에서 1978년 처음으로 방영된 26부작 애니메이션이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지구를 그린 총 26회의 TV 방영용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알렉산더 케이의 SF소설 <살아남은 사람들 The Incredible Tide>이 원작이다. 서기 2008년 7월, 가공할 무기로 인한 전쟁으로 모든 대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애니메이션은 괴력을 가진 소년인 주인공 코난과 궁극적인 태양 에너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과학자 라오 박사의 손녀 라나가 인더스트리아의 독재자 레프카의 세계 정복 야욕을 막기 위해 벌이는 모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극히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내포하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은 하이하바 섬으로 대표되는 농촌 공동체와 인더스트리아로 대표되는 기계 문명 사회의 대립, 과학문명의 오용으로 인한 암울한 미래, 원시 공동체에의 동경 등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 요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후 작품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깊은 주제를 담은 이 애니메이션은 당시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현재도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우는 '일/KBS/MBC'순. 내용중 일부는 베스트애니메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본작의 주인공이자 홀로 남은 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소년.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우주선의 남자와 여자 탑승자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이며 섬에서 탑승자로 있었던 할아버지와 단 둘이서만 지내온 탓에 할아버지 이외에 사람의 존재를 알지 못하여 물고기 등을 사냥하며 지내다가 해변에서 이끌려왔던 소녀 라나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여자아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영향 때문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지만 섬에서 자라서 물고기를 사냥한 영향으로 민첩성과 강한 발가락을 가진 소유자이기도 하다. 라나를 데리러 섬에 왔다가 할아버지를 죽게 만든 몬스리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왔으나 나중에는 관계가 풀어진다. 성우:오하라 노리코,손정아,박영남 본작의 여주인공. 코난이 살고있는 홀로 남겨진 섬의 해변에서 쓰러져 있었을 때 코난에 의해 구해져서 코난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였다가 자신을 구해준 코난과 친해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데리러 온 몬스비에 의해서 끌려갔다. 사실은 브리이오크의 권위자인 라오 박사의 손녀이며 할아버지와 텔레파시로 통하는 능력이 있고 갈매기와도 대화가 가능한 능력도 가졌다. 성우:노부사와 미에코,김정애,성유진 코난이 할아버지의 원수이자 라나를 데려간 몬스리가 있는 인더스트리아로의 모험을 떠났을 때 만났던 소년. 처음에는 코난을 식량 절도범으로 보면서 부당하게 여겨왔으나 나중에는 코난과 친해지게 되면서 그의 모험 동반자가 되었다. 활을 사용하고 있으며 코난 못지않은 날렵한 신체능력을 갖고있다. 여자를 싫어하는 성격이다. 성우:아오키 가즈요,한인숙,이선주 성우:야마노우치 마사토,김계원,김태훈(추정)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추락한 우주선의 탑승자로 우주선이 홀로 남은 섬에 불시착하면서 한때는 동료들과 섬에서 수렵을 하며 지냈으나 동료들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남자 탑승자와 여자 탑승자 사이에서 낳아진 코난을 키우며 둘이서 홀로 남은 섬에 살고있다. 부모를 잃은 코난을 보살펴주며 친손처럼 여겨왔고 라나가 해변에 쓰러졌을 때 간호를 하면서 구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라나를 찾으러 홀로 남은 섬에 온 몬스리와 대립하면서 무기를 들며 위협하다가 몬스리의 부하인 쿠즈가 발포한 총탄에 맞아 무기 폭발과 함께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코난에게 불구대천의 원수를 심어주었던 순간이기도 하였다. 성우:야마노우치 마사토,김계원,김태훈(추정) 인더스트리아의 행정국 차장. 라나를 찾기위해 부하 쿠즈와 함께 홀로 남은 섬에 오면서 코난의 할아버지와 대립하였다가 그가 폭사당하면서 라나를 발견하여 인더스트리아로 데려간다. 과거 어린시절에 전쟁을 경험한 영향 때문에 당시 전쟁을 주도했던 어른들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으며 코난에게는 할아버지를 죽게 만든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이 없는 첫 인물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코난의 편에 들어가게 되었고 다이스 선장과 결혼하게 된다. 성우:요시다 리호코,임수아,최성우,오수경(DVD 발매판 일부 부분) 몬스리와 함께 라나를 찾기 위해 홀로 남은 섬에 온 인더스트리아인으로 코난의 할아버지가 무기로 위협을 하였을 때 막판에 총을 장전하여 코난의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면서 코난에게 몬스리가 할아버지의 원수라는 것을 심게 해주었다. 인더스트리아의 행정국장. 사실상 인더스트리아를 지배하는 독재자로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으며 냉혈적이고 악랄한 성격을 지녔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라면 부하라도 무조건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성우:가유미 이에마사,노민,김용식 성우:나가이 이치로,탁원제,최원형 하이하바 섬 마을 반대쪽의 황무지에 사는 소년으로 불량집단 리더이다. 17세. 자신에게 하이하바의 지배자의 그릇이 될만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코난 일행들과 몇 번이나 충돌했을뿐더러, 섬을 인더스트리아의 위협에 노출하게 된다. 성우:이시마루 히로야,김환진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 제1공화국(第一共和國)은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 의해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어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지속된 첫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이다. 집권 여당은 자유당이다. 남한만의 정부 수립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촉발되었고, 1948년 2월 26일에 이루어진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1948년 7월 17일 국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선출되었고, 8월 15일 이승만은 정부 구성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초기에는 국내 질서 확립과 일제 강점기 잔재의 청산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런 이유로 1948년 9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으나 친일 반민족 전적 경찰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에 실패하였다. 광복과 동시에 들어선 미 군정은 효율적인 행정 처리를 위해 친일 반민족 전적의 인사들을 관료와 경찰에 대거 기용했고 이는 친일 반민족 전적의 인물들을 단죄하는 일에 있어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역할을 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전후 시기에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1948년에는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좌익과 우익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와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1960년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3·15 부정선거를 일으켰고 이를 규탄하는 3·15 마산시위가 발생했다. 그 와중에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4·19 혁명이 발생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제1·2·3대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하였고 이로써 이승만 정부는 붕괴되었다. 이후 민주당 주도로 허정 과도 정부가 들어섰다. 허정 과도 정부는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하였고, 이 헌법에 따라 1960년 7월 29일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1960년 8월 19일 장면의 국무총리 인준이 가결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구성되면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이 완전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고,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소련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이를 거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에서는 제헌 국회를 구성하고 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공식적인 수립 이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실제로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 1월의 일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무소속 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상세한 것은 대한민국 제헌국회 참조). 이승만은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초대 내각에 한민당 출신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민당 소속 정치인들은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통치기간 내내, 행정부의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고, 그해 9월 22일 법률 제3호로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1948년 10월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이승만 정부의 방해, 친일세력의 반민특위위원 암살 음모, 친일경찰의 6.6 특경대습격사건, 김구의 암살, 그리고 반민특위 법의 개정으로 1949년 10월에 해체되었다. 군정기였던 1948년 4월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은 제1공화국 당시에도 이어져 이에 대한 대량학살 등 여러 건의 대량학살이 이승만 정권 시기에 발생하였다. 1948년 10월 19일에는 전남 여수에서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난다.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제주 4·3 사건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반란은 10월 27일 완전히 진압되었고, 이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공모자 색출이 시작,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의 반공주의 노선은 강화되어 갔으며 이승만은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 김창룡으로 하여금 의심스러운 공산주의자와 북한의 첩보원을 체포하고 고문하도록 하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실형을 받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관련 서류가 소실되고 대부분의 피고인이 월북하는 등으로 인하여 항소심이 진행되지 않고 종료되었다. 1949년에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농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지개혁이었는데, 농민들의 농지및 토지개혁에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1공화국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게 된다. 농지 개혁의 주 내용은 '토지및 농지개혁제도는 토지상한선 3정보로 평년작 150%를 농지가격으로 환산하여 매수하는 유상매입과 지주에게 지가증권 발급하고 토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5년간 수확물의 30%를 균분 연부하는 방식으로 정부에 상환하는 형식인 유상몰수로 불하한다.'는 주요 내용으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당시, 지주 세력과 농민 세력 양측 다 반발하여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렇게 됨으로써 1950년 3월달에 개정을 하게 되고, 5월에 농지개혁법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때 곧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농지개혁법이 전면 실시는 지연됨으로써, 1953년에 본격적으로 시행을 하여 개인에 불하하도록 실시하였다. 1950년 1월 6일, 대한민국 정부는 비공개 회의를 가졌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타이완 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화인민공화국 승인(1950년 1월 6일)은 서방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1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스티코프를 통해 소련 외무부에 보고되기도 했다. 한편, 제헌 국회의 임기가 끝날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계는 물론이고 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제2차 총선거 실시를 지연시키는 한편, 적자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를 반대하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각서 도달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변경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50년 5월 30일)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 북조선은 이에 대해,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 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농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남한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1950년 6월 19일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 개원식에서는 존 포스터 덜레스가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날 국회가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전쟁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주로 6·25 전쟁, 6·25 사변이라 부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다른 국가들도 조선전쟁(일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 한국 전쟁(Korean War, 미국 등 서구권)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대한민국이 먼저 공격해 왔다는 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이승만 정부는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 일부 장관들의 경질에 따라 법무부 장관에 김준연, 농림부 장관에 공진항, 사회부 장관에 허정, 문교부 장관에 백낙준, 보건부 장관에 오한영이 임명되었다. 이들 중에서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과 장기영의 입각은 제헌국회 말기 1950년 3월 내각책임제 개헌운동 때 이들이 야당 대열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논공행상이 반영된 것이었으며, 민주국민당의 조병옥은 워커 미군 사령관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교통부의 김석관 장관은 차관 시절 전쟁의 와중에서 무기 및 병력수송의 공로와 기관차 한 대도 북한군의 손에 넘겨 주지 않은 투철한 책임의식에 대한 평가로 발탁되었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범석으로 하여금 자유당을 창당케 하여,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되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자유당 참조).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는 1952년 5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과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을 동원,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시킨 부산 정치 파동이 있었으며,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 이용문과 박정희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의 협조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군부내 평안도 인맥을 지칭이 평안도 출신인 장면 전 총리와 결탁한다는 소문을 접하였고 이때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내렸으나 이종찬 등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들어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이종찬을 해임하려 하였으나 밴플리트 등의 만류와 전황으로 무산되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은 발췌개헌을 시도하여 개헌안이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되고 7월 7일 공포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대통령 선거 방법을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1952년 8월 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개헌의 1등 공신인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의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뜨리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 데 앞장섰다.(자유당 참조) 한국전쟁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한국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1953년에는 서울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954년 5월 31일, 자유당이 장악한 3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11월 27일 사사오입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였다(→사사오입 개헌). 또한 이때, 국무총리제가 폐지되었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후 1956년 5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 후보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은 서로 유세를 하는 도중에 민주당 초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병사했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를 마음대로 못바꿨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만 내세웠다.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에는 야당 후보인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이기붕 역시 그러했다. 또한,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저항을 타개해 나갔다. 이로써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은 1959년 간첩죄로 사형당한다. 1957년 1월 이승만은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0월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1959년 2월 《경향신문》의 칼럼 여적(餘滴)에 실린 글로 인해 관련자들이 내란선동 혐의로 기소되고 경향신문이 폐간 명령을 받았다.(경향신문 폐간 사건)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3·15 대선을 앞두고 대구에서 장면의 선거 유세가 있던 1960년 2월 28일, 2·28 대구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권(자유당)은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대표되는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으며,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에서 이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3·15 마산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는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어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가 확산되어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가 이승만을 찾아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장기간에 설득 끝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기로 결정하고 1960년 4월 26일 공식적으로 선언했으며, 동시에 자유당 정권도 붕괴되고 민주당 주도로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9년 6월 21일 법률 제31호로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1953년 원화에서 환화로 화폐 단위를 바꾸었다.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국토를 복구하고자 전후 복구사업을 하였고, 미국으로부터 무상 원조경제체제로 갔었다. 이 시기에는 생활필수품(식료품, 의복, 의료품등)과 소비재 원료(면방직, 설탕, 밀가루), 농산물등 무상 원조경제체제로 통해 식량문제에 해결에 도움되었고, 삼백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책으로 인해 국내의 공업 부분의 불균형 현상을 보였고, 생산재 산업의 부진이 심화되었으며 국내 농산물 가격 하락 및 밀과 면화 생산이 크게 타격받아 농업기반이 파괴되었다. 1950년대말에 미국 내 경제불황이 생기면서 무상 원조경제체제가 감소되면서 폐농, 이농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자, 제1공화국 정부는 유상차관으로 전환하여 국내 경기 불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1953년 2월 15일 화폐개혁을 선포했다. 2월 17일부터 '원'표시 통화를 금지시키는 대신 '환'표시 통화를 유통시키되, 그 교환비율은 100원에 대하여 1환으로 하고, 2월 17일부터 국민이 소지한 모든 통화는 금융기관에 예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폐개혁은 악화 일로를 걷던 전쟁 인플레이션을 막아야 원조를 할 수 있다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화폐개혁은 오히려 물가를 폭등시키는 결과를 낳는 등, 실패한 화폐개혁으로 비판받았다.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무상으로 제공하는 후생주택과 유상으로 분배하는 재건주택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1952년에 17,000호 1953년에는 30,100호의 주택을 건설하였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이 무상원조에서 차관원조 형식으로 변화하며 1958년 개발차관기금(DLF, Development Loan Fund)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원조형식의 변화 속에서 후진국의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승만 정권도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제개발 7개년 계획 중 전반부인 1960~1962년을 기간으로 하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여기서 이승만 정권은 "이 3개년경제개발계획은 7개년계획의 절반에 해당하며 자립경제체제(体制)의 확립이라는 장기적 문제를 해결(解決)할수 있는 기초(基礎)로서 우선 자립화의 기반을 조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여 자유경제 원칙 하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산업기반을 조성하고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하야하며 계획은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수정-계승되었다.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 사라는 열대저기압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카테고리 5급」까지 발달했던 태풍으로, 대한민국 최대 명절인 추석날 한반도를 강타하여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1949년 이승만은 한글 맞춤법을 소리나는 대로 쓰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한글 간소화 파동)을 하였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1955년 주장을 철회하였다. 제1공화국 시기의 외부환경은 전후 동·서간의 정치 · 군사질서의 재편성 과정에서 각종 반공체제가 형성되어 국제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국 외교활동의 중심적 지역도 미국 · 유엔 · 유럽, 그리고 반공국가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고, 외교정책의 구체적인 활동, 목표, 그리고 달성수단과 선택도 반공이라는 틀 속에서 국가목표의 달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당시의 한국의 외교정책은 냉전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한국의 외교정책은 한국 전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주의 노선이 더욱 뚜렷이 반영되었다. 따라서 제1공화국 시대는 한국 외교 정책의 형성기인 동시에 시련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48년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이후, 급선무는 각국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기의 외교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① 철저한 반공주의(反共主義)를 표방하는 외교정책이다. 북한을 무력으로라도 격퇴하고 통일을 달성하려는 의지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② 중립국이나 중립노선을 표방하는 국가에 대한 적대주의 외교정책, ③ 철저한 반일주의(反日主義)의 표방이다. 일본과의 교류,무역 등을 철저히 배격하고 한국전쟁의 일본 참전도 거부하였다. ④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우방 국가와의 우호증진정책이다. 미국은 제1공화국의 불신의 대상이자 강력한 동맹국가였다. 제1공화국의 무력에 의한 통일론에 미국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⑤ 유엔의 통한결의한(統韓決議案)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⑥ 제1공화국은 또한 평화선 설정과 그에 따른 어업 수역 획정 등으로 일본 및 중화인민공화국 측과 소규모의 유혈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⑦ 서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한국을 승인하고,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많은 원조를 해 주었다. ⑧ 제1공화국은 반공 정책을 공공히 하고자 아시아 지역의 집단안보 구축에 앞장 서기도 하였다. 이상의 정책을 공고히 하고 한국만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할슈타인 원칙 을 채택하였다. 정부 수립 후, 초기의 해외 공관장의 임명은 외무부 장관의 입김이 스며들 여지조차 없이 이승만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모두 결정되었다. 또 그의 망명생활에서 익힌 구미식 외교 철학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이따금 그는 그의 측근들에게 "외교란 돈있는 사람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하는 것"이라고 피력했으며 인선도 재계 중심으로 했었다. 그 예로, 장택상 외무부 장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정 때 신한공사 총재를 지낸 정항범을 주 중화민국 특사로 임명(1948년 11월)한 것을 비롯해, 일제 때 조선은행 간부를 지내 당시 상당한 재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윤치창을 초대 주영국 공사로 임명(1950년 2월)했다. 또 주일 대표부 대사에는 구미외교위원부에서 학자로 자기를 도왔던 정한경을 기용(1949년 1월)하는 한편, 뉴욕(남궁염(南宮炎, 남궁억의 장남), 샌프란시스코(주영린), 상하이(신기준), 홍콩(차균찬) 등지의 총영사 또는 영사에는 현지의 재력있는 교포나 망명 때 조력한 동지를 기용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1948년 9월 9일, 중앙청 앞뜰에서,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되는 장면, 조병옥 두 특사의 장도를 축하하는 애국청년연합회 주최 환송회가 성대히 열렸다. 이 환송회에서 두 특사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고 오겠다"고 다짐한 뒤 상오 11시5분쯤 노스웨스트 항공 DC4기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한국 대표단은 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서 그 구성원은 장면(단장), 조병옥, 장기영, 김활란,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였다. 제1공화국은 한국 전쟁 이후로는 북한과의 통일관계는 승공통일, 멸공통일이라는 원칙을 제시하였고, 이 원칙에서 일보 벗어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승공통일, 멸공통일의 방법으로 무력통일을 시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이승만은 북한을 무력으로라도 격퇴하고 통일을 달성하려는 의지를 관철하려 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좌절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맥아더와 협력하에 만주 폭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는 맥아더가 원수직에서 해임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이 무력통일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반발은 1953년의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나타났다(→ 한국 전쟁 포로 교환 문제). 제1공화국은 한국 전쟁에서 국제연합군을 주도한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는 등 호의적인 반면에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을 상당히 불신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 한국대사 장면에게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미국 또한 이승만을 불신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승만이 언제 어떤 돌출행동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경계의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닉슨 미국 부통령이 1953년 11월 13일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한국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에는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한국 전쟁 휴전 이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깊이 인식하면고, 양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 1954년 11월 17일 발효),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양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또한 전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하여 안보를 다지고 경제원조를 강화했으며 미국은 전후복구사업 및 경제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이 시기의 한국의 안보외교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이를 보완하고 있는 유엔참전 16개국 선언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목적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즉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의 재발을 방지한다는 것과 둘째, 미국은 한국의 안보에 대한 관심을 공식조약의 형태로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 3조에 명시된 '헌법적 절차에 의한' 출병(出兵)이란 구절은 한·미간의 관계에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유엔참전 16개국의 선언도 점점 그 효력에 있어서 의문을 야기시키는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이 선언은 그 효과면에 있어서 공식조약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승만은 반세기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통하여 나타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패전한 뒤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교류, 무역 등을 철저히 배격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反日)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평화선과 보상 요구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19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19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평화선(Peace Line, Syngman Rhee line)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설정된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는 이 경계선은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이승만은 이를 "평화선"이라 불렀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 선언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특히 당시 일제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불법 조업 어선을 여러 차례 나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어업 종사자가 죽기도 하고, 한국 경찰관이 중국에 납치되기도 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 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 일본에 대한 반감과는 달리, 1946년 10월 이승만은 "친일파 문제는 우리 환경이 해결할 수 없으니 극렬 친일 분자라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깊게 관련된 미국은 두 동맹국 간에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는 1948년 8월 수교하였다. 이것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정부승인 외교를 위해 조병옥, 장면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한 이승만 대통령은 우방과 어떤 형태로든 외교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따라서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승만은 우선 맹방인 중국에 특사관(特使館)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1948년 11월 이승만은 정환범(鄭桓範)을 주중화민국 특사로 임명했다. 정환범은 미군정 때, 신한공사 총재를 지낸 인물로, 외무부 장관 장택상은 그의 선임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특사관 창설을 위해 이정방(李鼎邦) 참사관, 최문경(崔文卿) 1등서기관, 한유동(韓有東) 주사 등 3명을 선발대로 중화민국의 난징에 파견했다. 이 참사관 이하 세 사람의 선발대는 서울-상하이 간을 1주일이 한 번 비행하는 노스웨스트항공의 DC4기편을 이용, 김포공항을 출발(정 특사는 그보다 1주일 후에 출발하였다.)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상하이의 교포들에게 특사관 창설을 알리고 사무실, 집기 등을 마련한 뒤 11월 6일 공관 설치를 위해 난징에 도착하였다. 선발대가 난징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처한 중국의 정세는 심각했다. 양쯔 강을 사이에 두고 국부군과 공산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다가, 일행이 난징에 도착하고 며칠 후 난징이 함락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당사 외교사절단 단장인 주 중화민국 프랑스 대사가 매일 전황 브리핑을 해 주고 있었는데 양자강 건너편 공산군은 사기가 충천되어 있었고, 국부군은 패색이 짙어 있었다. 중화민국 외교부의 안내로 투숙하게 된 호텔인 예빈관 3층방에 사무실을 차리고 11월 7일 창밖에 "대한민국 주중특사관"(大韓民國 駐中特使館)이라고 붓글씨로 쓴 현판을 걸었다. 이 특사관은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재외공관이었고, 대한민국의 선발대는 중화민국의 서른여섯번째 외교 사절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밀려 본토로부터 타이완까지 1만여리를 철수하는 국민당의 피난길을 따라나서야 했기 때문에 재외공관 중 "피난 공관"으로 가장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고 따라서 대한민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과 수교 상태를 유지하였다. 중화민국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 10월 국제연합군에 대항하여 한국 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38도 주변 지역의 북쪽에서는 국제연합군을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남 지역에서의 공세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잔존하다가 1958년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는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적대적 관계가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으로서는 한국의 독점적 통치권을 침해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수가 없었고,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도 적국인 중화민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대한민국과 수교할 수가 없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각각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중간 공식적인 관계의 부재는 양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자국 국민과 기업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제1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해 침범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 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제1공화국 시절의 아시아 동맹국으로는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필리핀, 터키, 타이, 말레이시아 등이 있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에는 철저히 적대적이었다. 이승만은 1949년부터 아시아 지역의 집단안보를 역설해왔다. 1953년 11월 중화민국을 방문해 장제스를 만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아시아에서 반공 전선을 구축하겠다며 다른 나라의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장제스 또한 대한민국을 방문하였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비하여 중화민국을 ‘자유중국’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한중 관계는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베트남 공화국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1953년 10월 인도의 수상 네루가 "한국이 휴전 조항을 무효화하려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유엔군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취하는 행동에서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바란다"고 말하자, 공보처장 갈홍기는 네루를 '소련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제1공화국 당시에 대한민국은 필리핀(1949년), 터키(1957년), 타이(1958년), 말레이시아(1960년 2월)와도 수교하였다. 구한말 이래 서구제국과의 관계에서 전통적 우호관계의 대표적인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프랑스 양국은 한국문제의 유엔상정 이전부터 한국을 지지, 정부수립 후 미국·중화민국에 이어 영국은 1949년 1월 18일, 프랑스는 2월 5일에 한국을 승인하였다. 이어 공사관이 설치됨으로써 국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양국은 그 후 유엔 한국문제 등에서 한국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한국 전쟁 때에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원조해 주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을 승인 지지한 서유럽 국가는 영국·프랑스 이외에 바티칸(1949년 4월 13일), 네덜란드(1949년 7월 25일), 그리스(1949년 8월 4일), 벨기에(1949년 8월 15일), 룩셈부르크(1949년 8월 29일), 아이슬란드(1950년 2월 12일)이다. 한국이 서구제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영국·프랑스(1949년), 스페인(1950년), 서독(1955년), 이탈리아(1956년),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1959년)의 순서이다. 영국·프랑스 양국은 한국전쟁에 임하여 참전 16개국 중의 하나로서 군사·경제지원 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공헌이 지대했을 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기타 많은 국제기구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한국의 지위향상·보전 및 우호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계속한 나라들이다. 영국·프랑스 양국은 한국의 대서구제국 관계사에서 중추적인 존재이며, 적어도 전통적으로 대서구 외교전개의 2대 거점국이라 할 수 있고, 동시에 우방국임을 말해주고 있다. 영국과는 계속 우호 친선관계가 유지되었다. 한국 전쟁 후 영국 정부는 한국 재건을 위해 2,60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한 때 유엔결의로 북한과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물자 금수조치(物資禁輸措置)가 취해진 후 영국은 1957년 3월 4일 단독으로 대 중국금수의 일부 완화를 선언하게 되어 한국정부는 그것이 북한에 대한 이적행위라는 점에서 항의하는 사태가 생겼다. 이에 대해서 영국은 완화조치가 비전략물자(非戰略物資)에 한정된 것이라 밝히고, 유엔 한국문제·통일문제 등에서 계속 한국을 지지하였다. 프랑스도 전후 부흥사업에 협조하였고, 1958년 10월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이탈리아와는 1959년 11월 24일 외교 사절의 교환에 합의하여 공사관을 설치했으며, 1958년 12월에는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한국 전쟁시 이탈리아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나 야전(野戰)병원을 파견하였고, 250만 달러와 기타 물자를 한국에 제공했다.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은 한국을 정식 승인하지는 않으면서도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정부 승인 문제에 덴마크·노르웨이가 찬성을 하였고, 한국 전쟁 시에는 3국이 모두 의료단을 파견하였다. 1956년 3월 17일에는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1958년 10월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의 지원을 받은 국립중앙의료원이 개원(開院)되었다. 독일과의 관계는 한국이 휴전 후 총영사관 교환을 희망한 데 대해 독일연방 공화국은 상업 대표단의 교환을 희망하였다. 이런 이견 속에 1954년 5월 20일 총영사를 임명하였으나, 독일은 2년이 지난 1956년 봄에야 영사 인가증(領事認可證)을 발급하고 6월 5일에 주한독일 총영사를 임명하였다. 그 후 1957년 3월 양국정부는 총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시켰고, 다시 1958년 8월 1일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게 되었다. 이 시기는 분단된 남북이 미·소대결에 따라 상대측에 대한 불승인 정책을 고수한 시기여서 남과 북을 가려서 지지하지 않는 한 중립국은 모두 외면되었다. 따라서 중립국 일반에 대해서는 그들을 경원하는 정책이 취해지고 때로는 자기측에 불리한 중립국엔 그를 적대시하는 정책을 곁들여 갔다. 한국 전쟁 말기까지는 남북대치가 절대적인 것이어서 대중립국 외교가 전무했던 데 비한다면 한국 전쟁 후의 과도적 상황 속에 반둥 회담(1955년)을 거치면서 남북대치도 상대적이어서 대중립국 외교 역시 조금씩 유연성을 띠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은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제1차 과도 권한대행 체제(1960년 4월 27일 ~ 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국무총리는 장면, 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국회는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核)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 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장면 정권은 군사반란의 조짐을 보고받고도 미국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당하였고, 결국 제2공화국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4·19 혁명 이후 국회는 1960년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6·15 개헌) 이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민의원, 참의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임시 국무총리에는 4월 27일 이후 내각수반을 맡았던 허정이 선출되었고, 허정은 8월 12일 대통령이 선출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계속 겸임하였다. 1960년 8월 12일, 국회 양원합동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4·19 혁명으로 인해 집권이 확실해진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개헌 갈등을 벌였다. 장면이란 유력 대통령 후보가 있었던 신파는 신속한 정·부통령 재선거를 주장(先選後決, 선선후결)하였고, 내세울만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던 구파는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주장(先決後選, 선결후선)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구파와 시민 혁명으로 위기에 처했던 자유당이 결탁하여 의원내각제가 새로운 헌법체제로 채택되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정무(政務)적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있었고, 대통령은 형식적인 국가원수였다. 그 밖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국회 양원제,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제2공화국 헌법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민주당 정부는 4·19 혁명에 따른 다양한 개혁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리였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형식적인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간 파벌 갈등까지 벌여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정책적 실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 청산 문제에도 과감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제2공화국은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이 벌인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 헌법은 효력이 정지되었고, 대한민국 헌정(憲政)은 이후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軍政) 체제로 들어간다. 제2공화국 정부는 '자유화'의 원칙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 각층의 열망이 활발한 정치활동과 노동조합의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정치활동의 규제가 풀리면서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가 만들어졌다. 4·19 혁명 주체가 아닌 장면 정권은 4·19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시민들의 이러한 다양한 활동은 최대한 보장하였으나,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4·19 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 1960년 10월 11일에는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0월 17일, 민의원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 부칙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에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12월 31일에는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되었다. '자유화'의 바람은 남북관계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도 나타났다. 북진통일론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남북교류와 통일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대두되었다. 1961년 1월,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세력과 혁신세력은 독재 타도의 여세를 몰아 직접 접촉을 통한 남북협상을 전개하려 시도하였다. 1961년 5월 13일,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통일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불과 9개월 존속한 당시의 장면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현상을 겪고 있는 와중에 명목상의 국가원수임에도 공공연한 간섭과 비난성명으로 장면정권에 부담을 주는 등 제2공화국 정부의 정치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를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사회혼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윤보선과 장면은 공무원 인사와 국군통수권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했다. 정권 인수의 3개월만인 1960년 12월까지 장면은 자유당정권에 적극 부역한 경찰관 4천500명 등 다수의 공무원을 해임하였다. 그런데, 그 빈자리의 상당수는 민주당 당원출신으로 채워졌다. 윤보선은 공무원 인사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 구파를 안배할 것을 압박하며 인사문제에 개입하는 한편으로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인사를 '정실인사', '부정부패'라고 비난했다. 또한 윤보선과 신민당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부분적 군통수권이 있다고 주장해 장면과 민주당을 당황케 했는데, 이는 대통령이 상징적인 국가원수로서만 존재하는 의원내각제의 근간을 뒤집는 주장이었다. 이 일로 국회에서는 군통수권 중 군령권은 대통령, 군정권은 총리가 갖게 하자는 신민당과 총리가 완전한 군통수권을 갖게 하자는 민주당 간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게 됐다. 특히, 국군통수권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권력다툼은 군사반란의 빌미로 작용했다. 제2공화국 헌법 제61조제1항은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제72조에서는 '선전(宣戰), 강화(講和), 계엄안(戒嚴案), 계엄해제,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사항 및 각군 참모총장의 임면(任免)'은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통수권의 실질적 행사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군(軍)통수권에 관한 구체적인 하위법률의 제정과 정비가 필요했음에도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대립으로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 해 2월 17일 장면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쿠데타 발생 후 이틀만에 군사반란세력과 한패가 되었다. 결국,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고, 대통령 윤보선은 자기에게는 '군통수권이 없다'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의 병력동원 허가를 거부함으로써 군사반란을 사실상 방조하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 헌정질서 중단을 초래케 했다. 제2공화국은 경제분야에 있어서 4·19 혁명 직후의 사회불안 요인과 노동운동, 시위의 증가 등 경제 불안요소 때문에 경제성장이 정체되었다. 실업률과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봄까지 미국 달러화에 대한 대한민국 환(圜)화의 가치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공업과 농업의 생산력 증가, 실업자 해소, 국토개발 등을 목표로 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이를 집행할 수 없었다. 장면 정권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진전이 없었던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여 일본 자민당 대표단의 방한을 실현시켰다. 1960년 7월, 손원일(당시 주서독 대사) 특사 일행은 콩고 공화국 독립식전에 참석 후 카메룬, 토고,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6개국을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온타리오주 온타리오주(, )는 캐나다의 정치, 경제의 핵심을 이루는 주이다. 주도는 토론토이다.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도 온타리오주의 동부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온타리오호, 이리호, 휴런호, 슈피리어호의 4개 호수를 통해 미국의 뉴욕주, 펜실베이니아주, 오하이오주, 미시간주, 미네소타주의 5개 주와, 동쪽으로 퀘벡주, 서쪽으로 매니토바주와 경계를 접한다. 보수당의 더그 포드가 2018년 6월 29일부터 주 지사를 맡고 있다. 현재의 온타리오 지역에 유럽인들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에 3개의 아메리카 원주민 단체들이 살았다. 치페와족(오지브와족 혹은 아니시나베 족으로도 알려짐)은 슈피리어호 동부와 북부에 있는 숲들에서 비버와 작은 사냥감들을 사냥하였다. 휴런족은 휴런호와 온타리오호 사이에 살았다. 그들은 식량을 위하여 경작된 수확물에 주로 의지하였다. 휴런 족은 가끔 온타리오주의 남부에 있는 몇몇의 정착지들에 살던 이로쿼이족과 싸웠다. 온타리오 지방을 탐험한 첫 유럽인은 프랑스의 에티엔 브륄레였다. 퀘벡의 창립자 사뮈엘 드 샹플랭응 1610년에 브륄레를 그 지역으로 보냈다. 1613년 샹플랭은 오타와강으로 노를 저어 올라갔다. 1615년 그는 휴런 호 지역들로 더 멀리 남부로 여행하여 브륄레에 가입하였다. 브륄레는 휴런 족과 살아왔고 휴런어와 의상을 도입하였다. 샹플랭은 모피를 출산하는 동물들에서 휴런 호 지방을 부유하게 찾았다. 프랑스의 모피 교역자들은 털가죽을 수집하는 데 그의 과정을 따랐다. 그들은 원주민 안내자들과 동행하여 숲들로 깊숙히 여행하였다. 프랑스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며 총과 모피를 위한 칼들을 교환하였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브륄레와 장 니콜레를 포함한 프랑스의 탐험가들은 슈피리어 호 지방, 미시간 호와 그 범위를 넘어서를 탐험하였다.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온타리오 지방으로 모피 교역자들을 따라갔다. 1639년 예수회 성직자들이 휴런 족들을 따라 선교지들의 단체의 중심지로서 포트 세인트 마리를 지었다. 이 선교지들은 휴러니아로서 함께 알려졌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영양 부족과 병에 의하여 약해진 휴런 족들은 이로쿼이 족들을 위한 쉬운 먹이가 되었다. 이로쿼이 족들로부터 압력의 아래에 예수회들과 휴런 족은 1648년과 1649년에 휴러니아를 달아났다. 1650년대와 1660년대 동안에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슈피리어 호의 북부 지방에 들어왔다. 이 탐험가들은 피에르 에스프리 라디송과 메다르 슈아르 드 그로세예르를 포함하였다. 그들의 탐험들은 런던에서 허드슨 베이 회사라 불리는 교역 회사의 창립으로 이끌었다.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말기에 프랑스는 온타리오 지방을 영국에게 주었다. 그때로 봐서 흩어진 약간의 프랑스인의 정착지들이 현재 킹스턴, 나이아가라폴스와 윈저 근처에 남아있었다. 약간의 더 멀리의 정착지는 1784년까지 차지하였다. 그해에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 영국에 충성을 한 주민들이 미국으로부터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왕당파로도 불린 대략 6,000명의 이들은 1785년에 왔다. 그들은 오늘날 킹스턴과 윈저 근처와 온타리오주와 뉴욕주를 잇는 지협인 나이아가라 반도에 정착하였다. 왕당파들은 자신들의 집과 부유를 잃었다. 영국 정부는 그들에게 식량, 옷, 대지, 가축과 씨를 주었다. 대략 4,000명의 다른 정착자들도 또한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다. 1791년 현재 온타리오주의 남부가 어퍼캐나다의 식민지가 되었다. 뉴어크가 그 수도였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다스리는 데 부총독을 임명하였다. 부총독은 자신에게 충고하는 데 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입법 의회와 행정 의회를 임명하였다. 주민들은 입법 회의에 16명의 의원들을 선출하였다. 초대 부총독 존 그레이브스 심코 대령은 도로 건설과 확장된 정착지를 장려하였다. 1793년 심코는 현재의 토론토에 속하는 요크를 새로운 수도를 위한 지대로 선택하고 정부가 거기로 옮기는 데 1797년에 끝냈다. 차차 더 많은 정착자들이 도착하였으며, 그 중에 어떤이들은 결성된 단체에 있었다. 독일 이민의 자손들의 대부분인 펜실베이니아 더치의 단체가 현재 키치너 근처에 정착하였다. 미국에서 온 많은 주민들이 싼 대지를 취득하러 왔다. 멀리 북부에 있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교역지들에서 온 교역자들은 자신들의 가족들과 함께 남부의 타운들에 정착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잉글랜드인 혹은 스코틀랜드인이었다. 1812년 미영전쟁이 어퍼캐나다의 정착자들의 충성을 시험하였다. 식민지 주민들의 절반 이상이 전 미국의 시민들이었다. 많은 이들은 오히려 전쟁의 밖으로 있기를 좋아하였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어떤 캐나다의 시민군들에 의하여 협력된 영국군은 어퍼캐나다에서 일어난 몇몇의 전투들에서 침입하는 미군을 정지하였다. 1812년과 1842년 사이에 어퍼캐나다의 인구는 4곱 이상이나 늘어났다. 1851년으로 봐서 인구는 952,000명으로 도달하였다. 개인적 투자자들은 대지를 팔고 이민을 장려하는 데 캐나다 회사 같은 대지 회사들을 형성하였다. 현재 오타와에 속하는 바이타운과 다른 타운들이 번영하였다. 영국으로 목재와 밀의 수출은 경제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운하, 제조소, 작은 공장과 도로들이 지어졌다. 리도 운하, 트렌트 운하와 첫 웰랜드 운하들이 이 시기로부터 날짜를 매긴다. 1825년 이리 운하는 이리 호와 온타리오 호를 뉴욕과 이었다. 어퍼캐나다의 경제적 번영에 의하여 흥미를 느낀 많은 아일랜드 이민들이 1800년대 초반과 중반에 온타리오 지방에 정착하였다. 1830년대에 많은 어퍼캐나다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부와 불만이 심해졌다. 정부의 식민지 시스템 아래에 주민들은 단 하나의 입법 회의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실질적 권력이 부총독과 그를 보조하는 데 그가 임명된 회의들과 제출되었다. 이 회의의 의원들은 가끔 가정 계약으로 불리었고 정통적으로 식민지의 부유하고 권력적인 주민들을 대표하였다. 입법 의회는 입법 회의가 통과를 시킨 입법을 봉쇄하였다. 이런 입법은 도로와 학교들을 건설하고 정착자들에게 자유의 대지를 마련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가정 계약과 영국 정부는 주민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줄 정치적 개혁들을 봉쇄하였다. 1837년 입법 회의의 의원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과 수백명의 문하생들의 단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식민주의적 시민군이 반란을 억제하였다. 정부는 반란자들의 어떤이들을 체포하고, 어떤이들은 추방하였으며 2명을 사형에 처하였다. 매켄지와 다른이들은 미국으로 달아났다. 1840년 영국 의회는 연합 법령을 통과시켰다. 1841년에 효과적으로 들어간 이 법령은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현재의 퀘벡주)를 합쳐 캐나다 식민지로 불리는 단 하나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인들은 로어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다수가 어퍼캐나다에서 영어를 쓰는 다수에게 흡수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쓰고 영어를 쓰는 개혁자들은 자신들의 별개의 권리들을 보호하는 데 동의하고, 더 많은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캐나다 식민지가 책임적 정부를 얻었을 때 1848년에 어떤 성공을 이루었다. 책임적 정부 아래 그들이 국민의 선출된 대표들의 다수를 성원할 만큼을 위하여 정부의 우두머리와 내각이 다스린다. 1864년 캐나다 식민지에서 온 정치인들이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모든 영국 식민지들의 연방적 연합을 제안하였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와 뉴펀들랜드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들은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는 데 동의하였다. 1867년 7월 1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령은 캐나다 자치령을 창조하였다.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온타리오와 퀘벡은 자치령의 주가 되었다. 오타와가 연방 수도로서 선택되었다. 온타리오주의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 경이 캐나다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와 아무 관련되지 않은 존 S. 맥도널드는 온타리오주의 초대 지사였다. 캐나다 연방의 성립에 이어 온타리오주의 경제는 처음에 서시히 자라났다. 하지만 농업의 과학적 방법들과 기계의 이용은 농업에서 증가로 이끌었고, 제재업은 캐나다 보호 지방에서 확장되었다. 새로운 철도들이 내륙 교통을 확장시키고, 운하들의 망상 조직이 주에서 물의 항해를 열었다. 제조업이 증가하고 토론토와 해밀턴의 도시들이 중요한 비지니스와 산업의 중심지들이 되었다. 아직 이런 느린 실질적 경제의 번창에 불구하고 많은 온타리오 주민들이 더 낳은 직업의 기회들을 위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3년 철도 건설업자들은 서드버리 긑어에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구리-니켈 매장량을 찾았다. 주요 체굴은 1892년 구리 회사가 갈라놓은 구리와 니켈을 위하여 실습적 진행을 개발했을 때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1900년대 초반에 광업과 제조업이 빠르게 증가하는 데 시작되었다. 코발트의 도시는 1903년 근처에서 큰 은의 매장량이 발견된 후, 번영하는 광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네랄의 탐험이 캐나다 보호 지역을 통하여 일어났다. 몇년 안에 투기자들은 금, 은과 다른 미네랄 자원들의 많은 새로운 매장량들을 발견하였다. 지방은 곧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광업의 지역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펄프와 종이 산업이 1900년대 초반에 온타리오주에서 발전하였고, 그 산업은 곧 주요 중요성으로 자라났다. 1904년 페리 보트들이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부터 디트로이트강을 건너 윈저로 자동차 부품들을 나를 때에 온타리오주의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었다. 윈저는 자동차 조립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6년 주 정부는 온타리아주의 수력 발전 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 대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다른 수력 발전의 근원들을 개발하였다. 1911년으로 봐서 더 많은 온타리오 주민들이 시골 공동체들에 보다 도시들에서 살았다. 1912년 온타리오주의 북부 경계 지방은 올버니강의 북부로부터 허드슨만과 제임스만들로 뻗었다. 이 확장은 주에게 그 현재의 지역을 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 온타리오주의 경제적 개발을 촉진시켰다. 온타리오주는 무기와 다른 군사적 공급품들의 생산에서 주들을 이끌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캐나다 군사에서 다른 주에서 보다 더 많은 지원자들이 온타리오주에서 왔다. 1917년 온타리오주에서 여성들이 주의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데 권리를 얻었다. 1920년대 동안에 투기자들이 북부의 숲 지방에서 새로운 광산들을 개발하였다. 많은 핀란드인, 스칸디나비아인과 퀘벡 주에서 온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캐나다인들이 이 지역들에 정착하였다. 자동차 생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철강과 제철, 그리고 펄프와 종이 산업들이 번영하였다. 이 번영은 1930년대의 대공황과 함께 끝났다. 대공황이 일어나는 동안에 온타리오 주는 경제적 불안을 경험하였다. 이 일은 1940년대 동안에 노동 연합들에 증가로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온타리오주에서 대공황에 종말을 가져왔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온타리오주의 공장, 농장과 광산들이 무기를 공급하고 연합국의 육군들을 먹이는 데 생산을 늘였다. 후에 수십만명의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들을 떠나 온타리오주로 이주하였다. 1945년과 1970년 사이에 캐나다에 정착한 3백만 명의 주민들의 절반 이상은 온타리오주에 자신들의 집들을 만들었다. 인구는 대략 4백만 명에서 7백만 명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민들의 대다수는 독일, 이탈리아, 영국,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그리고 서인도 제도에서 왔다. 전쟁은 1950년대 초반에 절정을 이룬 온타리오주의 제조업의 생산을 자극하였다. 다양한 미네랄 자원들의 발견들은 경제적 붐으로 공헌하였다. 1952년 지질학자는 엘리엇 호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단 하나의 우라늄 광석의 매장량들 중의 하나를 찾았다. 1953년 투기자들은 뱅크로프트 근처의 또 다른 큰 우라늄의 매장량과 매니토워지 호에서 풍부한 아연-구리 광산을 찾았다. 또한 1950년대 동안에는 에너지 회사들이 캐나다 서부로부터 온타리오주로 천연가스와 석유를 나르는 데 파이프라인들을 놓았다. 사니아로 날라지는 석유는 도시의 정제업의 개발로 이끌었다. 온타리오주의 철강과 제철업이 빠르게 번창하였다. 주는 나이아가라 폭포와 다른 지대들에서 수력발전소들을 확장시키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공장의 생산이 한번 더 두 배로 늘어났다. 1964년 미국의 미네랄 회사가 티민스 근처에서 구리, 은과 아연 광석들의 큰 광산들을 발견하였다. 노천굴의 광산이 1966년에 거기에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온타리오주의 번창하는 산업들은 전력에서 거대한 증가들을 요구하였다. 주는 원자력의 필요함들을 만나는 데 그 전력에 눈을 돌렸다. 1945년 캐나다의 첫 원자로가 온타리오주 초크강 근처에 운영으로 들어갔다. 거기의 노동당원들은 값이 싼 원자력 개발의 길을 찾는 데 일하였다. 1960년으로 봐서 발전소는 5개의 실험에 의한 원자로들과 극소량의 가속 장치를 포함한 다른 연수 시설들을 가졌다. 캐나다의 첫 원자력 발전소는 롤프턴에서 1962년 운영을 시작하였다. 그 성공은 1967년 더글러스 포인트에서 운영을 시작한 캐나다의 첫 철저한 원자력 발전소의 개발로 이끌었다. 원자력 공장이 1971년 피커링에 개장되었다. 온타리오 주민의 전부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번영으로부터 동등하게 이득을 얻은 것이 아니다. 북부와 동부에서 제조업이 남동부에서 보다 더 적게 개발되었다. 1968년 캐나다 상원은 온타리오 주민의 13 퍼센트 - 1백만 명의 주민들이 가난에 살았다고 보고하였다. 온타리오주의 강한 경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토론토를 캐나다의 지도적인 금융의 중심지로서 나타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많은 은행들과 캐나다의 주요 증권 거래소인 토론토 증권거래소를 포함한 다른 재정적 연구소들이 거기에 본부를 두었다. 관광업은 1900년대 후반에 온타리오주 경제에 증가적으로 중요해졌다. 주의 숲과 호수들은 번창하는 피서객들의 수를 끌어들였다. 토론토의 다른 주의 도시들의 역사적 구역들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1972년 주는 온타리오 보건 보험 계획을 통과시켰다. 계획의 아래, 온타리오 주민들은 작은 할증금을 내거나 아니면 내지 않고, 그것을 내는 데 자신들의 능력에 의지하였다. 그 계획은 보건의 최소한 수준으로 대부분의 병원과 의사의 법령들과 함께 재정적 보조를 마련한다. 캐나다는 1990년대에 경제적 침체를 겪었다. 많은 주민들은 1989년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만들어진 자유 무역 협정에 핑계를 대었다. 협정은 관세의 제거와 두 나라 사이에 다른 무역의 장벽의 제거를 요구하였다. 그 일은 미국의 수입품에 대항하여 정부의 한계를 옮겨 온타리오주의 제조업자들을 위한 더욱 거대한 경쟁을 창조한다. 1994년 북아메리카 자유 무역 협정은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원래의 협정에 힘을 주었다. 1980년대 이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중동과 서인도 제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더 낳은 기회의 추구에 온타리오주로 이주하였다. 1995년 유엔은 토론토를 세계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다양한 도시로 선언하였다. 온타리오 등 캐나다의 도시들은 미국과 달리 인종 차별 문제는 현저히 없는 편이다. 온타리오주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동안에 자라나는 예산의 부족을 향하였다. 부족을 줄이는 데 노력에서 진보보수당원 주지사 마이클 D. 해리스는 정부 문제들의 넓은 범위에 소비를 삭감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복지, 도시, 보건, 교육과 환경을 위한 기금을 줄였다. 그는 또한 소득세를 낮추었다. 해리스 정부의 경제와 사회적 프로그램들이 논쟁을 일으켰어도 보수당은 1999년 재선되었다. 1997년 온타리오주의 입법부는 토론토와 둘러싸인 공동체들을 병합하는 데 투표하였다. 주 정부는 합병이 자치 도시의 서비스들의 중복을 줄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토론토의 새로운 통합된 도시는 1998년에 진행되었다. 이듬해 입법부는 둘러싸인 공동체들과 시골 지역들을 더 커진 도시들로 형성하는 데 해밀턴과 오타와를 포함한 다른 자치 도시들을 요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자치 도시의 합병은 1999년에 통과되어 2001년의 시작에 효과적으로 들어갔다. 같은 해 불만족의 투표인들로부터 늘어나는 압력 아래에 해리스는 2002년 주지사로서 사직할 것이라고 공고하였다. 보수당원들은 해리스를 대신하는 데 어니 이브스를 선출하였다. 2003년 주 선거에서 진보 보수당은 자유당에게 정부의 통치를 패하였다. 온타리오주의 자유당원 돌튼 맥귄티가 주지사로 되었다. 서비스업은 온타리오주의 국내 총생산과 고욕의 대략 4분의 3을 차지한다. 서비스업들은 토론토와 남부 온타리오주의 주요 도시 지역들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주도인 토론토는 정부 활동들의 중심지이다. 도시는 국가에서 지도적인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가장 큰 은행, 보험 회사와 재산 개발업들의 대부분이 거기에 본부를 두었다. 토론토 증권거래소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증권거래소들 중의 하나이다. 많은 캐나다의 가장 큰 병원과 법률 상사들이 토론토에 있다. 도시는 온타리오주의 가장 큰 대학들 중의 2개인 토론토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의 본거지이다. 서비스업들은 또한 토론토 외부에서도 중요하다. 해밀턴, 런던, 오타와와 워털루에 있는 큰 대학들은 많은 주민들을 고용한다. 키치너, 오샤와와 오타와 같은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에서 빠른 인구의 번창은 주에서 주택을 위한 요구를 늘이면서 온타리오주의 부동산 회사들에 이득을 주었다. 해마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다른 캐나다의 주보다 온타리오주를 방문한다. 식당, 호텔과 다른 서비스업들이 관광객들의 소비로부터 이득을 얻는다. 제조업은 온타리오주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활동들이다. 캐나다의 산업 근로자들의 대략 절반이 온타리오주에 산다. 이 근로자들은 국가의 제조품들들의 대략 절반을 생산한다. 토론토 지역은 캐나다의 지도적인 산업의 중심지로 랭킹에 들어와있다. 교통 수단의 생산은 온타리오주의 주요 제조업이다. 자동차 제조업은 이 산업의 주요 부분이다. 캐나다의 자동차 생산의 대부분은 온타리오주에서 일어난다. 몇몇의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온타리오주 남부에서 큰 조립 공장들을 가지고 있다. 많은 트럭들도 온타리오주에서 생산된다. 자동차 부품들은 배리, 벌링턴, 귈프, 런던, 미시소거, 토론토와 윈저를 포함한 많은 도시들에서 제조된다. 해밀턴과 솔 세인트마리는 온타리오주의 주요 철강업의 중심지들이다. 화학, 전자와 플라스틱 제품들도 또한 온타리오주의 제조업의 중요한 일부들이다. 온타리오주의 화학품들의 대부분은 사니아와 토론토에서 제조된다. 통신과 컴퓨터 비품들은 온타리오주에서 만들어지는 전자 비품들의 지도적인 타입이다. 포장 물질들은 온타리오주의 지도적인 플라스틱 제품들 중에 랭킹으로 들어와있다. 토론토는 온타리오주의 플라스틱 제조업의 거의의 본거지이다. 농산물과 임업 제품의 가공도 또한 중요하다. 토론토는 북아메리카의 주요 정육 포장의 중심지이다. 캐나다의 오대호 지방에서 재배되는 과일과 채소는 온타리오주의 공장들에서 가공된다. 주의 공장 지대들은 우유과 다른 낙농제품의 큰 양을 생산한다. 온타리오주의 제분소들은 캐나다에서 재배되는 밀을 밀가루와 제빵 혼합물로 가공한다. 맥주, 다른 주류와 청량음료는 지도적인 음료 제품이다. 온타리오주의 펄프와 제지 공장과 제재소들의 대부분은 주의 북부에 있다. 온타리오주의 농장들은 주의 내륙 지역의 대략 5 퍼센트를 덮고 있다. 가축과 수확물은 각각 온타리오주 농산물의 대략 절반을 차지한다. 우유는 농장 소득의 지도적인 근원이다. 육우와 돼지의 사육도 또한 중요하다. 육우와 젖소들은 휴런 호의 남동부 기슭과 온타리오 호의 서부 저지대 기슭 사이에 있는 목초지에서 방목된다. 낙농업은 온타리오 호와 세인트로런스 강을 따라 동부로 향한 지역에서 또한 중요하다. 온타리오주 남부의 농부들은 돼지의 큰 수를 사육한다. 온타리오주의 농부들은 가축들을 먹이는 데 자신들이 필요한 수확물을 재배한다. 주요 수확물은 옥수수, 건초, 콩과 밀을 포함한다. 온타리오주는 달걀과 가금류의 생산에서 주들을 이끌고 있다. 온타리오주는 캐나다의 지도적인 과일과 채소의 생산지이다. 유명한 나이아가라 과일 지대의 과수원과 포도원은 사과, 포도, 복숭아, 딸기와 다른 작은 과일들을 생산한다. 주에서 재배되는 주요 채소들은 콩, 양배추, 당근, 오이, 버섯, 양파, 피망, 감자, 사탕 옥수수와 토마토를 포함한다. 이리 호를 따라 재배되는 담배는 온타리오주에서 지도적인 가치적 수확물 중에 있다. 온타리오주에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화초 원예 산업을 가지고 있다. 많은 재배인들은 날씨로부터 식물을 보호하고 식물의 생장을 통제하는 데 꽃과 채소들을 실내에서 재배한다. 온실 채소들은 레밍턴 지역에서 주로 자란다. 온타리오주 광업 소득의 대부분은 금속 광석들의 생산으로부터 오는 편이다. 주는 다른 주보다 더 많은 금속 미네랄 자원들을 생산한다. 구리, 금과 니켈은 온타리오주의 가장 가치적인 미네랄 산품들 중에 있다. 금 생산 지역들은 캐나다의 보호 지역 지방을 통하여 흩어져 있다. 매러톤 근처의 헴로 금광은 단 하나의 금 생산 지역이다. 그레이터 서드버리 지역은 캐나다의 니켈 생산 중심지이다. 구리는 그레이터 서드버리와 티민스 지역들에서 체굴된다. 온타리오주에서 체굴되는 다른 광물들은 시멘트, 석유 제품, 소금, 모래와 자갈과 돌을 포함한다. 온타리오주는 캐나다의 지도적인 시멘트, 소금, 모래와 자갈과 돌의 생산지이다. 천연가스와 석유는 온타리오주 남부와 이리 호 물의 바로 밑에서 찾아졌다. 모래와 자갈은 주의 남부에 있는 채굴장들로부터 획득된다. 온타리오주에서 온 화강암, 석회암과 대리석은 세계를 통하여 건물들을 아름답게 꾸민다.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온타리오주의 인구가 12,160,282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인구는 2001년으로 본 11,410,046명에서 6.5 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모든 100명 중의 대략 95명인 온타리오 주민의 대다수는 주의 내륙 지역의 12 퍼센트에 살고 있다. 이 거대하게 인구로 이루어진 지방인 온타리오주의 극남부 자욕운 니피싱 호의 남부에 놓여있다. 이 지역은 그레이터 서드버리/그랜드 서드버리와 선더 베이 지역들을 제외한 온타리오주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의 전부를 포함한다. 온타리오주에는 캐나다 통계에 의하여 규정지은 대로 15개의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이 있다. 온타리오 주민의 대략 85 퍼센트는 도시 지역들에 산다. 온타리오주는 다른 캐나다의 주들보다 50,000명 혹은 그 이상의 인구를 가진 더 많은 도시들이 있다. 토론토는 온타리오주와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온타리오주의 다른 대도시들은 브램턴, 해밀턴, 키치너, 런던, 마크햄, 미시소거, 오타와, 본과 윈저를 포함한다. 온타리오 주민의 대략 70 퍼센트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주에는 중국, 인도,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태어난 많은 주민들이 있다. 많은 온타리오 주민들은 잉글랜드 계통이다. 또한 중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와 스코틀랜드 계통의 주민들도 있다. 온타리오주에는 대략 160,000명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있다. 인디언들의 대략 3분의 1은 주의 보호 구역들에 산다. 이 지역은 주에서 총 674,000 헥타르를 덮고 있다. 또 다른 80,000명의 온타리오 주민들은 토착민 계통이다. 이상 이상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백병동 백병동(白秉東, 1936년 1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나온 후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작곡가 윤이상을 사사하였으며, 1961년 신인 예술상을 필두로 대한민국 작곡상(1977, 1990년),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상(1982년), 서울시 문화상(1983년), 한국음악상(1995년), 올해의 예술상(2006년),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및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사이타마현 사이타마 현(, , 기옥현)은 일본 간토 지방 중서부에 있는 현이다. 현청 소재지는 사이타마 시이다. 도쿄도 북쪽에 인접하며 도쿄 대도시권에 포함된다. 유명한곳은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현 이름의 유래는 행복을 가져오는 신을 의미하는 사키미타마/사키타마(), 다마(; 현재는 도쿄도 서부에 있는 지역) 앞을 의미하는 사키다마/사키타마(), 혹은 현내 북부 교다 시() 사키타마() 지구 등이라고 한다. 간토 지방 중서부, 동경 138도 42분 ~ 139도 54분, 북위 35도 45분 ~ 36도 17분에 위치한다. 주위의 1도 6현과 접하지만, 바다에는 접하지 않는다. 동서폭은 약 103km이고 남북은 약 52km이다. 남쪽에서 도쿄도와 맞닿으며 도쿄 중심부로부터 최단 거리는 약 12km이다. 동쪽 약 2/3가 간토 평야, 서쪽 약 1/3이 간토 산지에 포함된다. 서쪽 산지 안에는 치치부 분지()가 있다. 도네 강()이 북부에서 동으로 흐르고, 아라카와 강()은 치치부에서 출발하여 현 북부를 경유해 중앙부를 남쪽으로 흐른다. 도쿄와 가깝기 때문에, 근대 이후(특히 1960년대~70년대)에 남동부를 중심으로 인구가 급증했다. 2000년에 인구가 700만을 돌파하고 현재 모든 도도부현 중 인구 순으로 5위에 속한다. 현재는 현 북부도 도쿄 통근권이 되어서, 도쿄로 통근 및 통학하는 사람의 수가 100만 명을 넘는다. 현청 소재지 사이타마 시는 2002년에 우라와(), 오미야(), 요노()의 세 시가 합병되어 만들어졌고, 현에서 처음으로 인구가 100만 명 이상인 도시가 되었다. 그 이후 2005년에도 이와쓰키()시가 흡수 합병되었다. 사이타마 시 뿐만 아니라 면적이 작은 시도 많아서, 40개의 시는 일본 전국에서 최다이다. 사이타마 현은 예전에 무사시 국의 일부였다. 708년에 현재의 사이타마 현의 지치부 군에서 구리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이타마 현은 간토 지방을 위한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비옥한 농업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도 시대에 많은 후다이 다이묘가 사이타마 지역 내의 작은 영지들을 지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쿄의 급속한 팽창과 장거리 통근이 가능한 현대적인 교통수단, 도쿄에 이용가능한 땅의 부족으로 사이타마 현은 빠르게 개발되었고 인구는 1960년대의 거의 3배가 되었다. 현의 도시들의 대부분은 도쿄 도심과 도시 철도에 의해 밀접하게 연결되어있고 도쿄의 주거와 상업 교외지 역할을 한다.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의 무대는 현 중서부에 있는 도코로자와 시()이다. 또한 《짱구는 못말려》와 《럭키스타》의 무대는 현 동부에 있는 가스카베 시(), 그 외에도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이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막스 레거 요한 뱁티스트 요세프 막시밀리안 레거 (Johann Baptist Joseph Maximilian Reger, 1873년 3월 19일 ~ 1916년 5월 11일)는 독일의 낭만주의 음악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육가이다. 바이에른의 브란트에서 태어나 뮌헨과 비스바덴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01년 뮌헨에 정착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가르쳤고 1907년에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대학에서 1908년까지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고, 그 후로 계속 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를 지냈다. 그가 가르친 사람으로는 조세프 하스와 조지 셀이 있다. 1911년부터 마이닝겐에 있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914년 오케스트라가 해체되고 나서 거처를 예나로 옮겼다.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폭식증을 평생 앓았으며 이로 인해 비만으로 인한 각종 합병증에 시달렸다. 1916년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중 현재 널리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푸가나 변주곡이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의 주제에 의함)도 이에 속한다. 그는 오르간을 위한 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는 《BACH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가 있다. 그밖에도 오페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형식의 음악을 썼다. 레거는 그의 음악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요하네스 브람스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프란츠 리스트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화성을 확장한 것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복잡한 대위법을 합쳐놓은 구조의 음악을 썼다. 캐나다의 총독 캐나다의 총독(, )은 캐나다에서 영국의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대리자이자 국가원수이다. 공식 직함명은 "캐나다 내외의 총독 겸 총사령관(The Governor General and Commander-in-Chief in and over Canada)"이다. 총독은 총리의 조언에 따라 국왕이 임명하며, 만약 국왕이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심각한 헌법적 문제를 발생시키게 된다. 1950년대 이전에는 영국 출신이 임명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캐나다인이 담당하고 있으며, 영어 사용권 출신자와 프랑스어 사용권 출신자가 번갈아가면서 맡고 있다. 임기는 기본적으로 5년이지만 수상의 조언에 따라 국왕이 임기를 늘일 수 있다. 캐나다의 현 총독은 우주비행사 출신인 쥘리 파예트로 2017년 10월 2일에 임기를 시작하였다. 법적인 모든 권력은 현재 여왕에게 있으나, 실제로는 총독이 캐나다 내에서 여왕이 해야 할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캐나다 의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은 총독을 통해 왕실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총독은 캐나다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한다. 총독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캐나다를 방문하는 외국 요인들을 위한 연회에 참가하거나, 특별한 시상식 등에 참가해 메달과 상을 건네주는 것이다. 캐나다 기사단의 후원자이기도 하며, 위에 설명한 대로 여왕을 대신해 전군 총사령관의 역할도 수행한다. 총독은 의회의 회의가 시작될 때마다 수상에 의해 쓰여진 캐나다 정부의 의사일정이 담긴 연설문을 읽는다. 총독 관저는 온타리오주 오타와에 위치한 리도 홀이며, 총독은 전통적으로 매년 몇 주 정도를 퀘벡 시의 시타델에서 보낸다. 캐나다의 총독 목록 이하는 캐나다와 현재의 캐나다를 이루는 식민지들의 총독들의 목록이다. 정복시기 이전의 누벨프랑스(뉴프랑스)의 총독 목록은 누벨프랑스의 총독 목록을 참고하라. 캐나다의 총리 캐나다의 총리(, )는 캐나다의 정부수반이며, 일반적으로 캐나다 하원의 제1 석을 점하는 정당의 대표이다. 총리는 캐나다 총독의 인사를 영국 국왕에게 "조언"할 권한을 갖고 있으며, 매년 총선으로 국민들의 투표로 총리를 임명한다. 캐나다의 현재 총리는 캐나다 자유당의 당수 쥐스탱 트뤼도이다. 법적으로 캐나다의 총리는 투표 가능한 연령인 18세 이상의 어느 시민도 될 수 있다. 총리는 하원에 의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총리가 재선에 실패하는 경우, 같은 당의 다른 당선자가 의석을 포기하고 총리를 출마시켜 다시 선거를 치를 수 있으나, 실제로 다음 선거까지 기간이 짧은 경우는 그냥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존 터너는 1984년에 총리가 되었을 당시 의석이 없는 총리였고, 다음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했다.(실제로는 그가 총리로 취임한 후 몇 개월 후 치러진 총선에서 그의 소속당이 다수석을 확보하지 못하여 그는 의석을 획득한 후 곧바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총리의 공식 관저는 온타리오주 오타와의 서섹스 가 24번지로, 1951년 루이 생로랑 이후 모든 총리들이 이 곳에 살았다. 초기에는 국왕이 캐나다의 새 총리들에게 기사 작위를 하사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1919년 니클 결의안 이후로는 국왕이 캐나다인에게 작위를 주는 것이 금지되었다. 바흐 (동음이의) 바흐(Bach)는 독일어로 작은 강 또는 내를 뜻하며, 사람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Elizabeth, Elisabeth)는 여자 이름이다. 긴 이름에 대한 짧은 애칭으로 리즈 (Liz), 리사 (Liza, Lisa), 엘리자 (일라이자, Eliza, Elisa), 베티 (Betty) 등이 있다. 군사 계급 군사 계급(軍事階級)은 군 조직의 상하 관계와 지휘 계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계급이 모병제를 시행하는 국가의 계급보다 실질적으로 2계급이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 예컨대 징병제 국가의 하사는 미군의 상병과 거의 동일하다. 병과 부사관까지 이 경우의 적용을 받지만, 장교의 경우 징병제 국가든 모병제 국가이든 계급이 동일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 과 미군간의 경우 카투사와 미 육군 혹은 대한민국 공군 병사와 인근 지역 미군 병 간의 교류 발생시 혼란을 막기 위해서 '양 국 병사와 부사관은 상대 국가 병과 부사관의 계급을 그대로 인정하고 예우'하도록 규정하여두었다. 이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이후 엄격히 시행되고 있다. 흔히 언론에서 일컫는 '사병'이란 말은 한국에서 징집병을 뜻하나, 이는 1994년 군인사법 개정 이후 '하사관'과 마찬가지로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enlisted'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원래 한국에서 '사병' 이라는 말은 '부사관'(non-commissioned officer)을 포함하는 의미였다. 따라서, 한국어로는 장병이나 (군인 모두를 의미), 장교, 부사관, 병으로 구분하여 명시하여야 한다.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 원사 계급의 영어명은 ‘’이지만, 는 미군 계급으로 원사가 아닌 ‘주임원사(별도의 계급이 아닌 보직)에 해당하므로 ‘’가 보다 합리적인 명칭이다. 미군 계급에서 위관급은 Company Grade Officer, 영관급은 , 장성급은 라고 흔히 불린다. 또 Lieutenant는 중위와 소위를 통칭하며, 는 부사관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아래의 도표는 대한민국·미국, 일본과 북한의 군사 계급의 명칭을 담고 있다. 준사관 또는 준위라는 계급은 군대에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미군에서는 Warrant Officer로 칭함)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만 종사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준위는 특별참모로서 계급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장급까지 지휘관을 담당할 수 있다. 또한 항공준사관에 한하여 유일하게 자신의 상급자를 직속부하로 둘 수 있는데, 항공준사관은 보통 항공기의 정 조종사가 되며 그에 따른 부 조종사로 소령 또는 대위급 장교가 편제되는 경우가 많다. 정조종사는 준사관이 대부분이지만 항공기 지휘는 선임 장교가 지휘한다. 군인 봉급표에 나오는 '본인의 지원에 의하지 아니하고 임용된 하사'(준 부사관이라고 할 수 있음)는 전문하사와는 다르다. 전문하사는 의무복무기간동안은 군인사법 상 징집병과 동일하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직업으로서의 하사로서 부사관으로 다시 군생활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1994년 이후 병 중 차출되어 임용된 일반하사는 폐지되었으나, 전시의 경우 예비역 병장과 보충역, 제2국민역 중 임용하므로 공무원 봉급표 상 여히 존재한다. 공무원 임용규칙 [시행 2015.10.20.] [인사혁신처예규 제12호, 2015.10.20., 일부개정] 공무원 임용규칙 [시행 2014.11.19.] [인사혁신처예규 제1호, 2014.11.19., 타법개정] http://www.law.go.kr/admRulBylInfoR.do?bylSeq=1712843&admRulSeq=2200000024584&admFlag=1 [제12호, 인사혁신처예규, 2015.10.20.] 법제처 주소: http://www.law.go.kr/lsBylSc.do?menuId=12&query=%EA%B3%B5%EB%AC%B4%EC%9B%90%EA%B2%BD%EB%A0%A5%EC%83%81%EB%8B%B9%EA%B3%84%EA%B8%89%EA%B8%B0%EC%A4%80%ED%91%9C#AJAX 참고바람 (행정규칙 별표1) 대한제국 당시에 도입된 군 계급의 호칭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대한민국 국군 계급의 뼈대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의 계급은 장교는 동일했으나 사병에서 차이가 있었다. 척추동물 척추동물(脊椎動物)은 등뼈가 있는 동물을 말한다. 등뼈짐승이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은 그 서식 장소가 넓어 지구상 어디든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체제가 복잡하여 분화한 기능과 다양한 생활양식을 나타내는, 동물계의 가장 진화된 종류이다. 현존하는 척추동물은 동물 전체의 1/20인 45,000종 가량이 알려져 있다. 척추동물의 몸은 머리 부분·몸통 부분·꼬리 부분으로 나뉜다. 몸통 부분에는 대개 몸을 지탱하는 두 쌍의 부속지가 있는데, 어류에서는 이것이 지느러미로 나타나지만, 양서류 이상의 동물에서는 앞다리와 뒷다리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래에서는 뒷다리가, 뱀에서는 앞다리와 뒷다리가 모두 퇴화되어 있다. 한편 척추동물의 몸은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파충류·조류·포유류에서는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 사이에 목 부분이 존재한다. 몸의 표면은 피부로 싸여 있는데, 이들은 내부 기관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털이나 깃털이 나와 있어 보온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피부는 표피와 진피로 이루어져 있는데 파충류의 비늘, 조류의 깃털, 포유류의 털·발톱 등은 모두 표피로부터 생겨난 것인 반면, 경골어류의 비늘, 거북의 등딱지는 진피 속에서 생긴 골질의 판이다. 머리 부분에는 뇌·눈·코 등의 중요한 감각기관이 모여 있으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골격이나 연골이 발달하여 두개골을 형성한다. 몸통 부분에는 척추뼈와 내장의 대부분이 포함된다. 체강은 심장을 싸고 있는 위심강과 소화관 등을 포함하는 흉복강으로 나뉜다. 특히 흉복강을 이루는 흉강과 복강은 조류에서는 사격막(斜膈膜)에 의해 불완전하게 나뉘며, 포유류에서는 가로막에 의해 완전히 나뉜다. 꼬리 부분은 항문에서 뒤끝까지로, 길고 짧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퇴화된 종류도 있다. 골격은 두골(머리뼈)·척추·갈비뼈·가슴뼈 등을 포함하는 중축 골격과 사지골·견대·요대 등의 측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두골은 뇌나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을 보호하는 두개골과 아래턱이나 혀뼈(설골)를 포함하는 장골(臟骨)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경골어류의 두골은 40개 정도의 뼈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척추는 많은 척수로 되어 있으며, 고등한 종류일수록 더욱 분화된 형태를 나타낸다. 즉, 경골어류에서는 동추와 요추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양서류에서 두골과 한 개의 경추, 뒷다리에 이어지는 한 개의 선추로 이루어져 있어 경추·흉요추·선추·미추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포유류의 경우는 척추가 경추·흉추·요추·선추·미추의 다섯 부분으로 구분되어 가장 발달된 체제를 나타내며, 특히 갈비뼈와 가슴뼈가 발달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슴뼈는 양서류에서는 불완전하게 존재하며, 조류에서는 그 발달이 두드러진다. 이와 같이 골격을 이루는 뼈는 척추동물 특유의 것으로서 골세포와 골기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질은 석회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매우 단단하다. 또 뼈에는 혈관이나 신경이 지나는 관이 있어서, 이 관을 중심으로 하여 골세포와 골기질이 고리와 같이 늘어서서 배열되어 있다. 현존하는 척추동물을 분류하는 관례적인 분류법은 모든 해부학적, 생리학적 특징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에 기초하여 7개의 강(綱)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 분류법은 학교 교과서와 개론서, 비전문가에게서 그리고 대중적으로 가장 흔히 접하게 되는 분류 방식이다. 현존하는 척추동물은 다음과 같다. 또한 멸종된 2개의 강, 판피류와 극어류가 추가된다. 척추동물을 분류하기 위해 고안된 다른 방법은 특히 초기 양서류와 파충류의 계통 발생을 강조한다. 잔비어(Janvier, 1981년 및 1997년), 슈(Shu) 외(2003년) 그리고 벤톤(Benton, 2004년) 등이 제시한 그 한 예는 다음과 같다. 모리스 라벨 모리스 라벨 (, 1875년 3월 7일 ~ 1937년 12월 28일)은 프랑스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음악원 선배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초 인상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관현악곡인 로 유명하며,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피아노곡인 의 관현악 편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음색과 악기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Ciboure에서 바스크계의 어머니와 스위스인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열 네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 주기를 원하여 라벨을 파리 음악원으로 보냈다. 피아노와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재학 중 발표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현악 4중주곡 바장조>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서 그는 ‘아파치’라는 작곡가 학생들의 모임에 가입했는데, 이는 술을 마시고 여성들에게 집적대는 모임으로 유명했다. 파리 음악원에서 라벨은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웠다. 음악원에 있는 동안 로마대상을 받으려고 했지만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충분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대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음악원을 떠났다. 라벨은 클로드 드뷔시에게 영향을 주었고, 재즈와 아시아의 음악, 그리고 유럽 전역의 민요와 스페인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라벨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으며 무신론자로 보인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처럼 공공연히 종교적인 색채를 부여한 음악을 싫어했으며, 대신 고대 야화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 편이었다. 1932년에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1937년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여 사망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의 복잡하고 정교한 음악에 빗대어 그를 “스위스 시계 장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라벨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양성애자였기 때문에 오랜 관계를 맺은 남자가 있었다. 또한 파리의 사창가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그는 불타오르는 애국심에 군대에 지원했지만 몸이 약했기 때문에 프랑스 부상병을 옮겨주는 운전사 생활을 하였다. 라벨은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이지만, 그의 음악은 환상적인 묘사만을 강조하는 드뷔시와는 달리 프랑스 고전주의의 틀을 지키며 근대적인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정교하고 치밀하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라벨은 자신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하는 것을 즐겨했으며,의뢰를 받아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1937년에 모리스 라벨이 죽자, 그의 형제 에두아르가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는 Montfort-l'Amaury의 집을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1954년에, 에두아르는 교통사고을 당하고, 잔느 타베른이란 간호사가 그를 간병했고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가 에두아르의 기사가 되었다. 1956년에 에두아르의 아내가 세상을 뜨고 타베른 부부는 Saint-Jean-de-Luz에 있는 에두아르의 집에 살게 된다. 라벨의 동생 에두아르는 파리시에 80%의 저작권을 양도하기로 결심했지만, 마음을 바꿔 잔느를그의 유증 수혜자로 결정했다. 1960년, 에두아르가 죽고 모리스의 조카들이 유산 착복을 이유로 타베른 부부에게 소송을 걸었지만 실패한다. 1964년, 잔느가 세상을 뜨면서 그녀의 남편 알렉산더가 볼레로의 저작권료, 3억 6천만 프랑을 상속받게된다. 이렇게 SACEM의 법률 이사이었던 쟝 자크 르모안이 사직한 후 변호사가 된 후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결탁하고 그의 법률 고문이 되었다. 그들은 출판사에게 매우 유리한 계약서를 개정하기 위해 모리스 라벨의 작품 계약권자인 듀랑 출판의 사장, 르네 도망쥬를 고소했다. 르네 도망쥬는 당시 80세 이었기 때문에 합의로 해결하고 결국 작품의 모든 저작권과 작품 계약서를 쟝 자크 르모안에게 양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71년에 ARIMA (국제 저작권 관리 매니지먼트)를 지브롤터에 설립했고, 저작권 계약(앵글로색슨의 법률이지 프랑스 법률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근거로, 알렉산더는 그가 가지고 있던 저작권의 절반 이상을 ARIMA에게 양도했다. 알렉산더의 두 번째 부인의 딸, 에블린 펜 드 카스텔에 따르면, ARIMA는 모리스 라벨 작품에 대해 모든 저작권의 독점 피양도인이고 그 연간 소득은 40년 전부터 2백만 유로일 것이라고 한다. 한국환상곡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은 안익태가 작곡한 환상곡(관현악곡)이다. 연주시간은 약 15, 20, 30분으로, 관현악단과 혼성 합창으로 구성된 단일 악장이다.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의 더블린 시에서 초연되었으며, 보완을 거쳐 1958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완성된 곡이 연주되었다. 독일 후기 낭만파 양식이 기조가 되고 있다. 특히, 후반부의 합창 부분은 〈애국가〉의 가락이 중심을 이루며 ‘만세 만세’의 가사로 격앙과 고조를 이루면서 끝이 난다. 줄거리는 태고의 민족 탄생과 유구한 역사, 그리고 외적 침략에 항거하며 독립하여 광복을 이룬다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쟁취하려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작품에 담겨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1년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회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이 처음 연주하였다. 해외에서도 중국 · 일본 · 미국 · 남미 등에서 연주되면서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노래하는 한국음악의 국제적 선양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이탈리아어 이탈리아어(, )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약 6천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사용하는 로망스어군의 언어이다. 표준 이탈리아어는 토스카나의 방언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의 방언과 북부의 갈로로망스 방언의 중간 정도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오랫동안 표준어로 자리잡아왔던 토스카나 말씨는 근래에 와서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이 되는 밀라노의 말씨의 영향에 어느 정도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다양한 방언이 존재하나, 표준 이탈리아어가 명실상부 사회의 모든 면에서의 공용어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탈리아 내부의 소형 도시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에서 역시 쓰인다. 이탈리아의 인접지역에서도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스위스 남부인 티치노주와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리아 지역이 그것이다. 이탈리아 왕국의 구 식민지인 소말리아나 리비아 등에도 화자가 일부 남아있으나 사용빈도는 높지 않다. 이탈리아어는 프랑스어·스페인어 등 대부분의 근대 로망스어와 달리 라틴어에 있던 이중 자음(장자음)을 보존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로망스어와 마찬가지로 음절 강세의 구별이 있으며, 통상 뒤에서 둘째 음절에 강세가 붙는다. 외래어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단어가 개음절로 끝날 정도로 자음어미를 회피한다. 총 21자의 로마자를 사용. h (악까)는 묵음이며 소유동사 avere의 변화형을 나타내기 위한 관습적인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한편 J, K, W, X, Y 등의 글자는 외래어를 표기하기 위해서만 쓰인다. 9개의 품사가 있다. 명사,형용사,관사,대명사,동사는 굴절하나, 부사,접속사,전치사,간투사는 굴절치 않는다. 동사는 자동사·타동사·사역동사·재귀동사가 있고 제1·제2·제3변화로 분류할 수 있다. 불규칙동사,규칙동사가 있다. 남녀의 2성과 단복의 2수가 있다. 명사의 격변화는 대개 상실하였으나, 격변화의 흔적으로 명사의 복수형태를 표시할 때 어미에 단순히 -s만 붙이는 스페인어나 불어 등의 기타 로망스어와는 달리 남성명사는 -i, 여성명사는 -e로 굴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사변화로 대개 인칭을 나타낼 수 있어, 많은 경우에 주어 대명사는 생략하며, 어기를 강조하고 싶을 때만 주어 대명사를 표기한다. 존댓말이 존재하며, 2인칭대명사를 3인칭대명사인 lei로 치환하거나 2인칭 복수대명사인 voi를 사용하여 나타낸다. 한국에서 이태리어의 학습빈도는 높지 않으나 이탈리아의 문화적 영향력에 인해 사회 곳곳에서 주로 심미적 용도로 이태리어 단어가 쓰이고 있다. 피아노(piano), 포르테(forte) 등 많은 서양 음악 용어가 유래한 언어이기도 하다. 달서구 달서구(達西區)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남서부에 있는 구이다. 달서구는 동경 128°, 북위 35°에 있으며, 동쪽은 성당로를 경계로 남구 대명동, 서쪽으로는 달성군 다사읍, 고령군 다산면, 남쪽으로는 달성군 가창면·화원읍, 북쪽으로는 달구벌대로를 경계로 서구 내당동 및 큰장로를 경계로 중구 남산동과 접경하고 있다. 서구와 남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만든 자치구다. 달서구는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늦게 설치된 구이지만, 2017년 현재 인구가 58만여 명으로 대구광역시 최대 자치구이자, 전국 2위 규모의 자치구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송군과 자매 결연한 도시이다. ‘달서’라는 명칭은 1938년까지 존재한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달서면은 당시 성서면, 월배면이 함께 존재하였고, 현재의 서구에 더 일치되어서, 명칭에 대한 논란을 부르고 있다. 달서구는 동쪽은 성당로를 경계로 남구 대명동, 큰장로를 경계로 중구 남산동, 서쪽으로는 달성군 다사읍, 고령군 다산면, 남쪽으로는 달성군 가창면·화원읍, 북쪽으로는 달구벌대로를 경계로 서구 내당동과 접경하고 있다. 대구 신개발 중심지역으로 구마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88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향후 낙동강변 도로가 건설될 예정으로 있으며, 지하철 1호선의 기점과 지하철 2호선의 통과지점으로 무한한 성장·잠재력이 있는 지역이다. 특히 1988년 월성지구를 시작으로 상인·성서·대곡·용산·장기지구 등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있으며, 국토 동남권 최대규모의 첨단산업단지인 성서산업단지가 위치하여 대구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2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달서구에는 문화예술회관, 83타워, 이월드, 성당못, 선사유적공원 등이 있으며, 두류공원내 야외공연장이 있어 위락·휴양·문화시설을 고루 갖춘 대구의 신중심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달서구 중 월배 일대에는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역, 진천역, 월배역, 상인역, 월촌역, 송현역)이, 성서 및 두류동 일대 지역으로는 대구 도시철도 2호선(강창역, 계명대역, 성서산업단지역, 이곡역, 용산역, 죽전역, 감삼역, 두류역, 내당역, 반고개역)이 통과한다. 대구광역시 일원 및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구미시, 칠곡군, 고령군 각 일부 지역을 운행한다. 대구광역시에서 운행되고 있는 시내버스는 준공영제 및 환승 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추가로 경산시의 시내버스와도 상호 환승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현재 급행(좌석버스) 8개 노선, 순환(이하 도시형버스) 4개 노선, 간선 67개 노선, 지선 32개 노선이 있다. 달서구에는 월곡역사공원내에 월곡역사박물관이 있고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내에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이 있으며 본리동에는 온 어린이박물관이 있다. 달성군 달성군(達城郡)은 대구광역시의 군이다. 1995년 3월 1일에 경상북도에서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6읍 3면이고, 군청 소재지는 논공읍 금포리이다. 군의 이름은 대구의 옛 이름이자 별호(別號)인 달성(達城)에서 따왔다. 달성군의 관할 구역은 1981년 7월 1일에 대구직할시가 설치될 때까지 편입되지 않은 잔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중부(3읍), 남부(2읍·1면), 북부(다사읍·하빈면), 동부(가창면)의 4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다사읍과 하빈면은 달서구에 의해 분리된 월경지이고, 가창면은 비슬산 때문에 분리되는 사실상의 월경지이다. 화원읍과 옥포읍을 거쳐 유가읍까지 내려오는 비슬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산지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저지로 나뉜다. 비슬산맥에는 주봉인 비슬산과 함께 주암산, 청룡산, 산성산 등이 있다. 동부지역인 가창면에는 최정산, 상원산이 있고, 남부지역인 현풍읍에는 대니산, 북부지역인 다사읍에는 와룡산이 있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퇴적암과 이를 관입한 불국사화강암이 주로 분포한다. 군의 서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낙동강은 지류인 금호강과 다사읍 남단에서 합류하여 총 7개 면의 서단을 흐른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왕선들, 옥공들, 현내들 등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곡창지대를 이룬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도 쌀 생산지인 강창벌이 형성되어 있다. 낙동강 본류의 구간은 하빈면 묘리에서 구지면 대암리까지 55km에 이른다. 가창면에는 가창저수지(가창댐), 유가읍에는 달창저수지가 있다. 달성군의 행정 구역은 6읍 3면, 255개의 행정리와 95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달성군의 면적은 426.67 km²이며, 인구는 2018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25만0543 명, 10만0030 가구이다. 달성군은 2010년대 들어 대구광역시의 기초자치단체 중 사실상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지역이고, 그 증가 속도도 빠르다. 중구 (인천광역시) 중구(中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부에 있는 구이다. 중구는 1883년 인천항 개항 때부터 동구와 함께 인천광역시의 원도심을 이루었고, 1989년에 영종도, 용유도 등이 편입되었다. 중구에는 대한민국의 항공 관문인 인천국제공항과 서해안 최대 항구인 인천항이 있다. 인천 중구의 행정 구역은 12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134.29 km²이고, 2018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12만2499 명, 5만7887 가구이다. 중구는 인천항을 중심으로 도심을 이룬 원도심권과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으로 2000년부터 신도시를 개발·확장하고 있는 영종도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원도심권과 달리 영종도권의 인구는 공항이 개항한 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구의 전체 인구도 2008년에 8만8천 명 대까지 감소했다가 2009년 5월 이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중구청의 청사가 있는 원도심과 영종도 사이에는 서로 직접 연결하는 도로가 없어 왕래가 불편하다. 이 때문에 영종동 주민센터와 용유동 주민센터의 건물에는 구청의 민원업무를 담당하는 출장소(영종출장소, 용유출장소)가 있다. 원도심의 어업은 무역항인 인천항에서 출항하며 지방어항 및 어촌정주어항은 영종도권에 있다. 동구 (인천광역시) 동구(東區)는 인천광역시의 구이다. 동구는 1883년 인천항 개항 때부터 중구와 함께 도심을 이룬 인천광역시의 원도심으로, 인천광역시의 10개 기초자치단체 중 면적이 가장 작고 자치구 중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인천 동구의 행정 구역은 11행정동 204통 980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 동구의 면적은 7.19 km²(시 전체의 0.69%)이며,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6만9487 명, 2만9870 가구이다. 미추홀구 미추홀구(彌鄒忽區)는 인천광역시의 중앙에 위치한 구이다. 조선 시대에 인천도호부의 청사가 자리잡으면서 인천의 중심이 되었다.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된 후 여러 차례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쳤고, 1960년대 이후 인천의 대표적 주거 밀집 지역으로 성장하여 여러 교육기관과 병원들이 들어서 있다. 구의 서남부는 본래 바다였으나 1960년대에 간척 사업으로 매립되었고, 숭의2동에 미추홀구청, 용현5동에 옹진군의 군청, 문학구장(프로야구) 인천축구전용경기장(프로축구, 숭의구장)이 위치하고 있다. 인천도시철도의 교통요지로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철도인 코레일1호선, 수인선, 인천지하철2호선, 인천지하철1호선 등 4개의 도시철도노선이 지나고 남쪽으로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지난다. 2018년 7월 1일부터 인천 구 명칭 변경 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된 결과인 옛 인천광역시의 명칭인 미추홀을 따서 미추홀구로 개칭되었다. 인천 미추홀구의 행정 구역은 21 행정동과 7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 미추홀구의 면적은 24.84 km²이며, 인구는 2017년 12월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41만9267 명, 18만2292 가구이다. 연수구 연수구(延壽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남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은 남동구, 북쪽은 미추홀구에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황해에 면한다. 북쪽에 문학산이 솟아 있고, 동쪽 경계를 따라 승기천이 남류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인천 연수구의 행정 구역은 6개 법정동, 14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수구의 면적은 54.95 km²이며, 인구는 2019년 2월 주민등록 기준으로 36만1763 명, 13만1716 가구이다. 2010년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6.0%, 65세 이상 인구는 9%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5%로 전국평균 73%보다 비율이 높고 여자 인구 100명 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9.18으로 여자가 다소 많다. 1개였던 국회의원선거구가 2016년 3월 3일 2개(갑: 옥련2·선학·연수1·2·3·청학·동춘3동, 을: 옥련1·동춘1·2·송도1·2·3동)로 분리되었다. 남동구 남동구(南洞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이다. 고잔동에 구직할 남동공단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구월동에는 인천광역시청이 소재한다. 남동(南洞)은 1914년 인천부 남촌면(南村面), 조동면(鳥洞面)을 부천군 남동면(南洞面)으로 합면하면서 칭하여, 1940년 남동면이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명칭이 소멸되었다가, 1988년 인천직할시 남구로부터 분구되면서 명칭을 회복하였다. 구 인천부 주안면(1914년 이후 인천 재편입 이전까지: 부천군 다주면) 지역이었던 구월동, 간석동을 제외하고는 1914년부터 1940년까지의 남동면의 영역과 일치한다. 인천 남동구의 행정 구역은 20개동 608개통, 3,493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 남동구의 면적은 56.84 km이며 인천의 5.7%를 차지 한다. 인구는 2018년 11월을 기준으로 218,860세대, 537,923명이다. 소쉬르 소쉬르()는 프랑스어의 성이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음이 있다. 후한 후한(後漢, 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신나라 말기, 한조 부흥 운동 과정에서 제위에 오른 경시제(更始帝)의 휘하에 있었던 유수는 곤양 전투에서 대활약을 펼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유수는 왕망과 적미군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무능한 경시제를 폐위하고, 후한 왕조를 창업하였다. 광무제는 선정을 베풀어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후한 시대에는 채륜(蔡倫)이 세계 최초의 종이인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張衡)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번창하였다. 그리고 반초(班超)가 서역의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였다. 그러나 4대 황제인 화제(和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부터 예법 상 혹은 혈연 상 모후(母后)인 황태후(皇太后)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황태후의 친가로서 권력을 장악한 외척 세력과 성인이 된 황제(皇帝)가 친정을 도모하면서 이용한 최측근의 환관 세력의 권력 쟁탈로 정치는 점점 타락해 갔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안제(安帝)의 치세부터는 서쪽의 강족(羌族)이 변경을 자주 침입하였고,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치세부터는 당고의 화가 두 차례나 일어나면서 유능한 선비들이 정가에서 축출·제거되어 조정의 자정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매관매직과 수탈이 빈번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갔다. 정국이 점차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 장각(張角)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결국 이 난은 정부군과 조정을 지지하는 군벌에 의하여 제압되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벌들의 힘은 강화된 반면, 후한 조정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다. 결국 군벌들의 힘이 후한 왕조를 능가하게 되면서 천하를 둘러싼 영웅들의 대결이 펼쳐지고 삼국 시대가 사실상 개막되었다. 양주(凉州)의 군벌이었던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추대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웅 할거 시대가 개막되었다. 조조(曹操)는 헌제를 보위하는 데 성공하고, 숙적 원소(袁紹)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차지한다. 이후 조조의 아들인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에게 헌제가 제위를 넘겨주며 후한 왕조는 멸망하였다. 왕망이 전한의 정권을 약탈하는 데 이용한 부명(符命)의 예언설이나, 광무제가 한실(漢室)을 부흥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활용한 도참(圖讖)은 각기 준거할 곳을 유가 경전에서 구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미 전한말에는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을 원리로 삼는 갖가지 천인감응 사상에 의하여 유가의 경서를 해석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시류의 유자(儒者)는 한층 권력에 영합키 위해 공자의 저작으로 가탁한 위서(緯書)를 만들어 경학을 신비주의로 감쌌다. 기원후 56년 광무제가 도참을 천하에 공포하고, 장제(章帝)가 79년에 학자를 백호관(白虎觀)으로 모아놓고 5경(五經)의 국정 해석(國定解釋)을 토의시켜 전한 이래의 금문(今文)학의 우위를 보증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 정권에 활용되었던 고문(古文) 경학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에 접근하고 있었다. 금·고문의 차이는 금문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로 한왕조의 정책 운용에 적응한 이론을 제공하여 학관(學官)을 독점해 오고 있었는데 반하여 고문은 복고주의를 주창하면서 고대 성현의 이상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5경을 종합하는 텍스트의 언어해석을 기초로 한 해석학을 확립시켰다. 유흠·가규·반고와 같은 학자들은 고문의 경전이 도참의 불비를 보강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모시(毛詩)》 등을 국가에 공인시키려고 한 운동을 격렬하게 일으켰으나 대개 이 학문의 본령은 민간 사학에서 발휘되었다. 후한 때에는 일반적으로 ‘녹리(祿吏)의 도(道)’가 개방되었으므로 유생들이 다투어 경학을 배워 금고문에 능통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분질서를 중하게 보는 계급사상과 그 실천인 예를 존귀하게 여기는 명절(名節)의 기풍이 넘치게 되었다. 대략 명(明)·장(章)·화(和)의 3제(三帝, 58~105) 시절에 예교 국가(禮敎國家)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당시의 지식인의 언행은 점차로 관료 후보의 예비공작적인 것으로 변해 갔다. 금고문 두 학파의 논쟁이 체제교학(體制敎學)의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학술의 기운이 사법(師法)을 준수한 전한의 일경 전문(一經專門)으로부터 5경 겸학(兼學)으로 진보하고, 다시 금문·고문 양 경학을 겸습하여 절충하고 총합하려고 하는 학자가 나타났다. 가규와 허신 등이 그들이다. 후한말이 되어 하휴(何休, 129~182)는 훈고의 형식에 의하여 춘추학을 완성시켰고, 정현(鄭玄)은 참위설도 살려가며 금고문의 예학을 통합함으로써 위진(魏晋) 이후의 경학의 일대 종주가 되었다. 국교인 유학이 신비화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중에 지배권력의 의사를 거슬려서 천인감응의 참위설을 부인하는가 하면 음양오행설을 신봉하는 모든 학설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돌려댄 지식인들이 출현하였다. 환담(桓譚)에서 시작하는 무신론자의 계열이 그것이다. 그들은 경험주의와 예리한 이성으로 그런 것들에 공격을 가하였다. 왕충을 필두로 왕부(王符), 중장통(仲長統)이 계속 나왔다. 왕부는 그의 〈잠부론(潛夫論)〉에서 빈부를 사회적 근원부터 추구하여 유법(儒法) 양면에서 사회비판을 행하였고, 중장통은 〈창언(昌言)〉에서 신권적인 왕조 순환사관(王朝循環史觀)을 비판하며 지배자의 철학에 각각 준열한 타격을 주었다. 166년 로마의 사신이 처음으로 한나라를 방문하였다. 901년 902년 903년 904년 905년 906년 907년 908년 909년 910년 911년 912년 913년 914년 915년 916년 917년 918년 919년 920년 921년 922년 923년 924년 925년 926년 927년 928년 929년 930년 931년 932년 933년 934년 935년 936년 부평구 부평구(富平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였고, 계양구와 함께 원적산, 광학산, 거마산을 경계로 남동구, 미추홀구 등 인천 남부 지역과는 떨어진 형태로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부평은 황해와 한강을 사이에 둔 지역으로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활동이 있었다. 인근의 가현산 북쪽에 140여 기의 고인돌 군이 있어 이 일대가 강력한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게해 준다. 부평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한시대의 일로 부평은 마한의 영역에 해당하였다. 백제가 형성되면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이남을 공략하여 주부토군(主夫吐郡)을 세웠고 부평역시 주부토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백제가 다시 이 지역을 회복하였으나 553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부터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남북국 시대인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장제군이 되었고 하위 행정지역으로 술성현(戌城縣), 김포현(金浦縣), 동성현(童城縣), 분진현(分津縣) 등이 있었다. 부평은 고려 초기에 수주로 불리었으며, 이후 이름이 바뀌어 의종 4년(1150년)에 안남, 고종 2년(1215년)에는 계양, 충렬왕 34년에는 길주 등으로 불렸고, 부평이란 이름은 충선왕 2년(1313년)에 붙여진 것이다. 그 후로는 계속해서 부평으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13년(1413년) 부평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종 32년(1895년)에 부평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부평도호부는 지금의 부평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계양산을 중심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서구, 계양구, 경기도 부천시, 서울특별시 구로구 서부, 강서구 오곡동과 오쇠동을 관할하고 있었다. 1914년 부천군이 설치되어 부내면이 되었고, 1940년 부내면이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부평구의 행정 구역은 22개동 (637통, 4,197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평구의 면적은 31.98 km로 인천시의 약 3.09%이며, 인구는 2019년 7월 기준으로 517,029명으로 인천시의 약 17.5%를 차지한다. 계양구 계양구(桂陽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이다. 계양(桂陽)은 본래 부평군에 속했는데, 1914년에 부천군, 1940년에 인천부를 거쳐 1968년에 인천직할시 북구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계양구가 신설되었다. 계양구는 계양산, 천마산을 경계로 인천의 서부 도심과는 별개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동쪽은 경기도 부천시와 서울특별시 강서구, 서쪽은 서구, 남쪽은 부평구, 북쪽은 서구 검단동과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에 접한다. 계양구의 행정 구역은 12 행정동, 23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양구의 면적은 45.58 km이며, 인구는 2015년 9월 말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33만6071 명, 12만7398 세대이다. 계양구의 인구는 2012년 말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6.5%, 65세 이상 인구는 6.6%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6.9%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높다.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1.5%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낮고, 노년인구부양비는 8.6%로 전국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인구 100명당 남자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0.8로 남자가 다소 많다. 서구 (인천광역시) 서구(西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서북부에 있는 구이다. 1988년 신설되었고, 1995년 김포군 검단면을 편입하였다. 마전동에는 구 직할의 검단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475년 삼국시대 남부 주부토군이다가 통일신라에는 장제군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수주에서 안남부, 계양도호부, 길주목, 부평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21법정동, 21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137.12 km²이며 이는 서울 강남구의 3배가 넘는 넓이이다.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51만6017 명, 19만9152 가구이다. 옹진군 (인천광역시) 옹진군(甕津郡)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 속한 군이다. 백령도·연평도·대청도·소청도 등 서해 5도와 덕적도·자월도·영흥도 등 경기만 일대의 섬 일부를 관할 구역으로 한다. 본래 옹진군은 황해도의 옹진반도와 그 인근의 섬을 관할하였고, 강화군과 서해 5도를 제외한 경기만 일대의 섬들은 1914년부터 거의 대부분 경기도 부천군에 속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은 1945년에 38선 이남의 황해도 옹진군과 장연군 백령면, 벽성군 송림면 등이 경기도로 편입된 것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한국 전쟁 후에 육지인 옹진반도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어 백령면(백령도·대청도·소청도)과 송림면 연평리(연평도)만이 남았다.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어 부천군에 속하던 경기만 일대의 섬들이 옹진군에 편입되었고, 1995년에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군 청사는 옹진군 관내가 아닌, 인천항에 가까운 미추홀구 용현동에 위치하고 있다. 옹진군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읍이 없는 유일한 군이다. 교통상에서는 영흥면이 유일하게 경기도 안산시 대부도를 통해서 육로로 갈 수 있는 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은 모두 선박을 타고 가야한다. 섬 지역으로 어업 활동이 주요한 경제 산업이다. 특히 백령도, 연평도 부근의 북방한계선 해역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풍부한 어장 중의 하나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최고의 조기 어장으로 알려져 조기파시가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조기의 이동에 따라 이 지역에 찾기 힘든 어종이 되었다. 현재는 백령도, 연평도 해역에서 꽃게가 많이 잡혀 대한민국 내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옹진군은 황해도 서남부인 황해에 산재한 섬과 인천항 전역에 산재한 유인도 25개와 무인도 75개 섬 으로 형성되었으며, 농경지가 좁지만 토양은 비옥하여 많은 농산물이 생산된다. 사면이 바다로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수산업에 유리한 입지조건일 뿐만 아니라 계절적으로 황금어장이 형성된다. 덕적면 서포리 해변은 관광지로 유명하며, 또한 백령도의 용기포 해변은 천연비행장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개발이 기대되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지역 대부분이 섬으로 이뤄진 영향 때문에 영흥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선박을 통해서 갈 수 있다. 한때는 영흥도도 선박을 타고 갈 수 있었으나 대부도를 잇는 영흥대교와 선재대교 개통으로 옹진군에서 유일하게 육로로 갈 수 있는 지역이 되었다. 최근 5년간 비온 날은 평균 102일이며, 평균강수량은 232.4mm이다. 연간 전체 기후 중 맑은 날은 27.6%이며,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날이 많다. 최근 10년간 백령도의 평균 강수량은 660mm이며, 평균 기온은 11.3도이다. 최고 기온은 내륙보다 2~3도 정도가 낮고, 최저 기온은 1~2도 정도 높게 나타나는 해양성기후의 특성이 약하게 나타난다. 옹진군의 행정 구역은 7면 2출장소 75리 272반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172.48 km²이고, 인구는 2018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2만1036 명, 1만1746 가구이다. 남녀의 성비는 1.31:1로 대한민국의 시·군·구 중 성비 불균형이 가장 심각한데, 특히 서해 5도인 연평면, 백령면, 대청면의 남초 현상이 심하다. 옹진군은 2012년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3.2%, 65세 이상 인구는 18.1%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68.7%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19.2%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낮고, 노년인구부양비는 26.3%로 전국평균인 14.5%보다 높다. 대한민국에서 옹진군보다 인구가 적은 지자체는 경상북도의 영양군과 울릉군 뿐이다. 성비 불균형이 매우 심한 곳 중 하나인데 2017년 통계청 전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옹진군의 인구는 19,294명이었고 이 중 남자가 11,004명, 여자가 8,290명으로 성비가 무려 132.7: 100인 극단적인 남초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옹진군에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인들 비중이 높은 탓으로 보인다.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는 대한민국의 서남부에 있는 광역시이다. 동남쪽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쪽으로 담양군, 서쪽으로 함평군, 서남쪽으로 나주시, 북쪽으로 장성군과 접한다. 2005년까지 전라남도청 소재지였다. 호남 지방의 경제·행정·교육·문화의 중심도시로서, 고등법원, 고등검찰청, 세무서 등 호남 지방을 관할하는 관공서와 기업의 지역본부 및 자회사 등이 밀집한 호남권의 거점도시 역할을 한다. 인구는 약 146만 명이다. 시의 동부에 무등산(1,187 m)이 있고, 도심에 광주천이 흐르며 구 시역과 광산구와의 사이에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흐른다. 광산구 서쪽으로 평야가 이어진다. 광주학생항일운동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도시이다.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과학기술원 등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광주(光州)의 고유어인 빛고을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2년마다 광주 비엔날레가 열리고, 2010년 광주세계광엑스포, 201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하였으며, 2019년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이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이고, 행정구역은 5구 95동이다. 무진(武珍)은 한자어가 아니라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 한국어를 적은 것으로 진(珍)의 옛 한자 새김이 들, 돌인 것에서 무진(武珍)의 원래 발음은 무들, 물들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는 물+들(물이 많은 들판)일 것으로 보고 있다. 차자표기이기 때문에 무진(武珍)외에 무진(茂珍)이란 표기도 썼으며, 광주의 명산인 무등산의 이름인 무등(無等)도 같은 말의 차자표기로 추정된다. 광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주 영산포 일대를 이두로 수입이(水入伊: 물들이)라한 것으로 보아 옛날에 이 지역일대에 늪지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삼한시대 마한에 속했고 백제 시대에는 노지(奴只)라는 이름이 보이며, 신라 신문왕 6년에 무진주라고 하였다가, 신라의 백제 병합이후 경덕왕이 무진주에서 무(武)자를 취하여 무주로 개칭하였다. 현재 쓰이고 있는 광주(光州)란 이름은 고려 태조 시기에 등장한다. 이후 행정구역의 변동에 따라 목(牧), 부(府), 현(縣), 군(郡) 등의 행정단위위계의 변동은 있었으나 명칭은 이어져 오게 된다. 광주지방에 국가단위 사회가 발생한 시기는 마한 시대로 추측된다. 魏誌東夷傳韓條에 의하면 마한지역 중 광주와 관련하여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는데 구사오단국은 장성군 진원면 일대로, 불미지국은 나주일대로 보고 있다. 불미지국의 경우 나주의 반남ㆍ덕산ㆍ대안ㆍ신촌에 소재한 30여기의 고분군으로 보아 나주일대로 추정이 가능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반남 등지에서 고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마한의 성장기반인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무리가 있다. 따라서 구사오단국의 지역을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우치동ㆍ송암동ㆍ서창동 등 극락강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국 광주가 속한 구사오단국은 극락강 대촌 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한시대 각국의 인구수는 약 5천~1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상한년대는 지석묘중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로 보아 서력 기원전후가 되며 하한년대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 마한 잔여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아 AD 4세기 후반이 된다. 따라서 마한은 기원전후에서 4세기 후반까지 4ㆍ5백년간 지속된 것으로 본다. 백제는 고조선이 망한 후에 남하하여 온 유이민 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점차 주변 부족국들을 통합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한 마한 54국 중의 하나인 百濟國에서 일어난 삼국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소라 하고 있다. 전남지역의 군현은 중ㆍ동ㆍ남ㆍ서ㆍ북 오방의 하나인 남장 久和下城(장성ㆍ구례의 二說)에 속하였는데 이 무렵의 광주지역은 武珍州이며 직할 3현인 未冬夫里縣(남평), 복룡현(나주일대), 굴지현(창평)을 통치하였으며 전남지역에는 13군 42현이 있었다. 당시 백제의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한 거점이 된 武珍(광주), 發羅(나주), 月奈(영암)는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중요 교통로라는 점에서 武珍은 문물교역의 요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군현의 행정조직을 정비한 것은 경덕왕 16년(754)의 일이며 이 때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양주에 금해경, 한주에 중원경, 삭주에 북원경, 웅주에 서원경, 전주에 남원경의 5경을 두었고 이 당시 전남지역은 남원경에 속한 武州이며 15군 32현을 관할하였다. 광주가 武州라고 기록된 것은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병하여 웅주, 전주, 무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경계 및 신라의 옛땅을 합하여 9주를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무진주조에 기록이 보이며 신라 신문왕 6년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지방조직의 핵을 이룬 9주를 살펴보면 상주, 양주, 강주, 한주, 삭주, 웅주, 연주, 전주, 무주로서 군현제는 피라미드형의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혜공왕 12년에는 경덕왕 때에 개칭된 관제가 다시 옛날처럼 복구되어 지방군현의 명칭 역시 다시 복구되었을 법 하지만 기록이 없고, 다만 신라후기에 무주ㆍ무진주로 부른 예가 있고 보면 혜공왕 이후에는 무주가 다시 무진주로 호칭되었거나 아니면 함께 부르게 되었던 듯 하다. 무주는 근처 3현인 현웅현(남평), 용산현(나주일부), 기양현(창평)을 직할한 전남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이 당시 최소의 지방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이다. 촌은 대략 10호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통일신라는 군사조직으로 도성을 호위하는 侍衛府와 9誓당의 중앙군 이외에도 5州誓 및 三邊守, 그리고 지방군을 두었다. 十停이 바로 지방군을 뜻하며 停은 군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각 지방요지에 설치한 지방군단이었다. 그 십정 중의 하나가 未多夫里停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玄雄縣(남평)에 있었으며 군단의 표지는 黑色衿이었다. 한편 무주의 전신은 未多夫里停이 아니었나 하는 추론도 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防守婢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에 무진주를 점거하고 부근 군현을 빼앗아 완산주(전주)에 진군하여 도읍을 삼고 후백제왕이라 칭했다. 그때 북방의 궁예도 강원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도읍을 松岳(개성)으로 옮긴 뒤 경기도를 정복, 효공왕 5년에 후고구려왕을 자칭하였다. 궁예는 칭왕 이후 3년에 국호를 마진이라 하다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또 당시 궁예에 투항하였던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 및 충남 공주를 평정하여 궁예에 귀부 시키고, 해상을 통해 후백제 견훤을 공격하여 금성군(나주) 등 10여군을 공략한후 나주에 진을 쳤다. 신라를 두고 후백제와 태봉(마진)이 광주와 나주를 경계로 그 霸를 겨루었다. 고려 태조 19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였으며 태조 23년(940년)에 武州를 光州로 개편하고 동시에 도독부를 두었다. 그후 성종 14년에 관제개혁이 있었는데 전국을 3경ㆍ4도호부ㆍ10도로 나누는 동시에 12주목을 12주절도사로 변경하였고 이 개혁으로 전라남도를 해양도라 했으며 도호부를 안남(현재 영암)에 설치하였고 광주에는 刺史를 두었다. 당시 해양도에는 1도호부에 14주 62현이 있었는데 전주ㆍ승주에서는 절도사가 있었고, 자사를 둔 곳은 담주(담양)ㆍ패주(보성), 광주의 3주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에 다시 행정구역을 재현하여 諸道의 안무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4대 도호부ㆍ8목ㆍ56지주군사ㆍ28진장ㆍ20현령을 두었다. 이때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이 되었다. 연대는 미상이나 그후 주로 승격되었다가 26대 충선왕 2년에 다시 강등되어 화평부가 되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획히 알 수 없으나 당시 광주에는 토호의 세가 강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취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그 후 공민왕 11년에 다시 이름을 바꿔 茂珍府라 했다. 전라도에는 좌도ㆍ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해 있었다. 세종 12년 邑人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하였다는 죄과로 牧을 강등하여 무진군이라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문종 원년에 다시 복칭되었다가 성종 20년 광산현으로 강등되고 연산군 7년에 복구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인조 숙종대에도 이와 유사하게 불미스러운 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사례가 있었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지방제도에 따라 광주에 읍장을 두었는데, 그 당시의 광주는 성벽안을 성내면이라 했고 성외에 기례방ㆍ공수방ㆍ부동방의 3방이 있었기 때문에 1면 3방을 합병하여 광주면이라 호칭하였다. 1931년 4월 1일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광주읍으로 승격시켰다가 1935년에는 다시 府政을 실시 광주부로 고쳤다. 이때 행정구역은 41개 정으로 확장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하자 주둔 미군에 의한 군정이 2년 11개월 동안 실시되다 1947년 6월 3일부로 군정청이 폐지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광주부가 1949년 광주시로 바뀌면서 두 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이 이루어졌다. 1963년에는 서창ㆍ대촌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시 관할 구역은 214.92km로 좁아지고 6개 출장소와 45개 동이 되었다. 1966년에는 계림1구ㆍ월산동ㆍ효죽동의 3개동을 분동하여 48개 동으로 늘렸고, 1970년 다시 산수2동ㆍ서석2동ㆍ학3동 등 10개 동을 분동하여 모두 58개 동이 되었으며 당시 광주 인구는 52만 명이었다. 1973년 7월 1일부터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ㆍ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시키는 한편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 구제(區制)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1980년 4월 1일 석곡ㆍ지산 2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를 신설하여 3개구로 운영하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부산ㆍ대구ㆍ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이때만 해도 3구 72동으로 행정구역 면적은 215.11km에 불과했으나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 공포로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광주직할시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은 501.44km로 크게 늘어나고 4구 83동 9출장소를 관할하는 서남권 중추관리기능도시로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5년 1월 1일 직할시의 명칭이 광역시로 변경되었다. 1995년 3월 1일 서구에서 남구가 분구되었고 2010년말 현재 5개 자치구에 95개 행정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광주는 UN지정 인권도시 추진을 통해 세계적인 민주ㆍ인권ㆍ평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적극 노력하고 있으며 2007년도에 광역시 중 세 번째로 수출 100억 불 도시를 달성한 이후 2014년에는 수출 162억 불을 달성하고 2015년도에는 165억 불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등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2011년 11월까지 전국 최초로 4개 권역에 문화산업 투자진흥지구가 지정되고 2011년 1월에는 9개 지구에 광주연구개발(R&D) 특구가 지정되면서 미래성장동력 기반을 확충하였고 새로운 일자리 10만 개 창출과 자동차ㆍ광ㆍ가전ㆍ그린에너지ㆍ금형산업 등 5대 주력산업을 중점 육성하는 등 우리시의 소중한 자산이자 장점인 「민주ㆍ인권, 문화예술, 첨단산업」 3각축으로 한「더불어 사는 광주, 더불어 행복한 시민」도시 건설을 위해 광주가 새롭게 비상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남쪽으로 남구 승촌동이 나주시 산포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북구 우치동이, 동쪽은 북구 용강동 영산강변 동부지역이 화순군 남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은 광산구 양동이 함평군 나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간, 남북간의 연장거리 간격은 각각 34.3km, 23.1km이다. 대한민국 서남부에 위치한 광주는 호남 지방의 중핵도시로서 역할을 수행다. 광주를 기점으로 하여 나주시, 무안군, 목포시를 잇는 광목선, 영암군, 해남군, 완도군을 연결하는 광완선, 화순군, 순천시, 여수시를 연계하는 광려선, 담양군, 순창군, 남원시의 광남선, 장성군, 정읍시, 전주시를 연결하는 광전선 그리고 영광군, 고창군, 부안군을 연결하는 광부선 등 6개 방향의 중심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제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호남 지방 중추관리 기능도시로서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다. 광주는 동부 산악지와 서부 평야지대의 점이지대라고 할 수 있다. 광주의 산 지형은 노년기에 속하여 대체로 준평원화된 구릉성 지대라고 보면 된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의 산세를 보면 북쪽에 노령산맥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전북과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소백산맥과 그 기맥들이 남북방향으로 뻗어 경남과 경계를 이루어 전남은 두 산맥의 울타리 사이에 자리한다. 광주평야는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지맥들 사이의 영산강 유역에 대상분포하며, 광주천과 그 소지류 및 극락강 유역에 연속되어 나타나고 있고 영산강 본류를 따라 인접한 나주 등지로 이어져 결국 나주평야의 일부를 형성한다. 광주광역시의 기후 특성은 서해안형과 내륙형의 중간형으로 대체로 서해안형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고 있다. 겨울에는 몽골부근에서 그 세력을 우리나라쪽으로 확장하는 한랭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삼한사온의 날씨를 보이며, 여름에는 북태평양 동부에 중심을 두고 그 세력을 아시아쪽으로 확장하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무더우나 초여름과 늦여름에는 장마기가 있어 호우에 의한 기상재해가 발생하며, 태풍은 연간 한두번 영향을 미친다. 봄과 가을에는 중국에서 이동하는 이동성고기압의 영향으로 건조하고 맑은 날이 많다. 2010년도 광주지방의 평균기온은 전년도와 유사한 14.2℃이었으며 8월에는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28.1℃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연중 강수총량은 1,573.1mm로 전년도보다 84.9mm가 많았으며 7월에는 2010년에 가장 많은 강수량인 453.0mm가 내렸다. 광주광역시에는 5개 자치구(광산구, 동구, 서구, 남구, 북구)와 90개 동이 있다. 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는 580,427세대, 1,472,199명이다. 면적은 501.18km이다. 동구는 전통적으로 광주의 중심지로, 구 전라남도청과 구 광주시청이 자리잡고 있다. 5.18 운동의 중심이 된 금남로와 충장로가 위치하고 있으며 황금동, 대인동 등의 번화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구 전남도청과 전남도의회가 있던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북구 역시 광주의 중심지로 북구 중흥동에는 광주 교통의 중심지였던 광주역이 위치한다. 남구는 주월동, 봉선동 등의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구에는 상무 신시가지가 개발되었으며 현재 시청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광산구는 원래 광산군 지역이었으며 광주송정역 주변의 송정동이 광산구의 주요 시가지이다. 광산구에는 첨단지구 및 신가지구, 신창지구, 운남지구, 하남1, 2지구, 수완지구, 선운지구, 북구에는 첨단2지구가 완료되었으며 남구의 효천지구 등이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광산구에 광주과학기술원(GIST), 삼성전자 공장, 북구에 국립광주과학관, 서구에 기아자동차 등이 자리잡고 있다.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나주시, 담양군, 장성군, 화순군, 함평군이 광주권으로 규정된다. 광주는 산지와 평야의 2개 이질 지역 접촉지대에 발달한 군사·행정상 및 교역상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충장로·금남로 일대가 상업의 중심지이며 ‘교육도시’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학 및 각급 학교가 많아 전남 문화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광주에는 국립 전남대학교를 비롯하여 조선대학교·광주대학교·호남대학교·광주교육대학교 등 8개의 4년제 대학교, 조선간호대학교 등을 포함한 8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초등학교 108개교, 중학교 69개교, 고등학교 58개교 등에 38만여 명이 재학하고 있다. 광주에는 방송사 8개와 신문사 6개가 있다. 주요 스포츠 시설로는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있으며, 풍암동에 광주월드컵경기장, 염주체육관 등이 있다. 동구에 전라남도청이 있었으나 2005년에 전라남도청은 무안군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그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서구에 광주광역시청이 자리잡고 있다. 사법기관으로 광주 지방 법원과 광주 고등 법원이 있고 검찰 사무를 담당하는 광주 지방 검찰청 및 광주 고등 검찰청과 치안업무를 담당하는 광주지방경찰청이 있다. 서구 상무동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5.18 기념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북구 망월동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국립 5.18 민주묘지가 있다. 2010년 현재 의료기관 1800여 개, 의사 3000여 명이 있다. 전국 광역시 중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가장 많다. 상급종합병원 종합병원 대학치과병원 대학한방병원 2012년 광주광역시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6조770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0.7%이다. 지역내 최대 주력산업 (단위 : 천억원, 대, 억불 등) 출처 : 주1) 통계청 광업제조업 조사보고서 주2) 자료 : 한국무역협회 한국광기술원을 비롯한 고등광기술연구소, 전자부품연구원, 생기원호남본부, ETRI호남센터, 한국광산업진흥회 등 국가 광산업 발전 추진체 집적화 산업단지 주요현황 집계표 그 외에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호남대학교에서 부속 박물관을 운영 중이다. 프로 야구단인 KIA 타이거즈, K리그2의 광주 FC가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한다. 광주 서구 화정동에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있고, 산하에 동부ㆍ서부 2개의 교육지원청이 있다. 광주시에는 2010년 기준 유치원 248개, 초등학교 145개교, 중학교 85개교, 고등학교 72개교가 있다. 교육청 산하에는 도서관을 비롯하여 교육연수원, 교육과학연구원, 학생교육원, 교육정보원 등이 있다. 광주의 공공도서관은 2012년 현재 17개가 시, 구, 교육청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광주대구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와 고창담양고속도로가 도시의 북부, 무안광주고속도로가 도시의 중부를 관통하며 북광주 나들목, 서광산 나들목, 운수 나들목, 북광산 나들목, 광산 나들목, 동림 나들목, 산월 분기점, 서광주 나들목, 용봉 나들목, 동광주 나들목, 문흥 분기점이 도시와 연결된다. 또한 도심을 순환하는 제1순환도로와, 도심 외부를 순환하는 도로인 제2순환도로가 있으며, 이 도로는 1구간 (문흥 분기점 ~ 장원 나들목), 2구간 (장원 나들목 ~ 효덕 나들목), 3구간 (효덕 나들목 ~ 서창 나들목), 4구간 (서창 나들목 ~ 산월 분기점)로 분류되어있다. 유료 구간은 2구간 (장원 나들목 ~ 지원 나들목), 3구간(효덕 나들목 ~ 풍암 나들목), 4구간 (서창 나들목 ~ 산월 분기점)이다. 그리고 2015년 12월 23일에 광주외곽순환고속도로(제3순환도로)가 착공되어 2022년 12월에 개통될 예정이다. 또한, 광천동 종합버스터미널은 한 때 동양 최대규모를 자랑하였던 버스 터미널로서, 2006년 8월경 '유스퀘어'라는 이름으로 새로 단장했다. 이 터미널에서는,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가 약5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종합버스터미널이라서, 고속버스뿐만 아니라 시외버스 및 일부 농어촌버스 노선도 승차 가능하다. 자매도시간 상호원칙에 따라 2004년 12월 29일에 상무지구에서 동림 나들목을 잇는 도시고속도로인 (개통 당시에는 일반도로였음) 센다이로가 개통되었으나, 광주 관문도로에 명명된 일본식 이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따라 지금은 빛고을대로로 변경되었다. 광주광역시의 버스는 광주광역시와 산하 구청에서 관리하고 각 운수 회사에서 운행하며, 2006년 12월 21일부터 준공영제와 무료환승제가 시행되고 있다. 10개 시내버스회사와 몇몇 공항·마을버스 회사가 광주광역시 전역과 인근 시군을 900여대의 버스로 운행하고 있으며, 인근 5개 시군의 7개 시내·마을버스 회사도 200여대의 버스로 광주광역시와 인근 시군간을 연결·운행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버스운행정보 시스템에서 버스의 배차 간격과 운행 시간, 환승 정보 및 도착 정보를 알 수 있다. 급행간선(좌석)버스는 5개 노선, 간선버스는 30개 노선, 지선버스는 60개 노선, 마을버스는 광산구에 4개 노선, 서구에 1개 노선이 운행 중이며, 이 외에도 공항버스 1개 노선이 있다. 광주시 서부로 광주송정역을 지나는 호남선이 위치하며, 이곳의 하남역에서 광주선이 분기하여 광주역으로 연결되며 광주송정역에는 KTX가 운행한다. 또한 광주송정역에서는 순천역 및 삼랑진역 방면으로 경전선이 연결된다. 본래 경전선은 광주송정역 - 극락강역 - 광주역 - 남광주역 - 효천역 구간이었으나 도심 철도의 문제성, 그리고 주변 주민들의 민원으로 인하여 광주송정역 - 서광주역 - 효천역으로 이설하고, 광주송정역 - 극락강역 - 광주역구간은 광주선으로 분리하고, 광주역 - 남광주역 - 효천역 구간은 폐선되었다. 2015년 4월 2일에 오송역에서 광주송정역 구간의 호남고속선 1단계 공사가 완공되어 용산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1시간 30분대에 이용이 가능하다. 광주송정역에서는 목포역, 용산역, 인천국제공항역, 행신역 방면 호남선 열차와 순천역, 진주역, 부전역 방면 경전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으며, 광주역에서는 용산역 방면 호남선 열차와 목포역 방면 무궁화호 열차, 순천역 방면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2004년 4월 28일 동구 소태동에서부터 서구 상무 신시가지까지를 잇는 광주 도시철도 1호선 1구간이 개통되었고 2008년 4월 11일 서구 상무 신시가지 - 평동까지의 1호선 2단계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1호선이 완전 개통되었으며, 광주송정역과 광주공항이 지하철과 연계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 1호선 녹동 - 평동 광산구에 위치한 광주공항에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의 여객기가 김포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노선을 이용할 수 있다. (무안국제공항 개항으로 광주공항의 국제선기능이 무안공항으로 넘어가 국제선은 무안에 위치하고 있는 무안국제공항에서 이용해야 한다.) 동구 (광주광역시) 동구(東區)는 광주광역시의 구이다. 과거 전라남도청의 소재지였다. 서남권 개발의 중핵으로 전통 깊은 민주도시이며, 세계속의 문화도시로 발돋움하는 광주의 중심부 역할을 해온 동구는 동경 127°북위 35°에 위치, 북쪽으로는 광주광역시 북구와 연접하고,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화순군과 경계를 이루며 광주천을 서남쪽에 끼고 무등산 너른 자락 밑에 자리잡고 있다. 광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무진주라 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주라 불렸으며, 광주라는 명칭은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처음 쓰게 되었다. 그 후 1373년 공민왕 22년에 광주목으로 개칭되고, 1430년 조선 세종 12년에 무진군, 1910년 광주면, 1931년 광주읍, 1935년 광주부 등으로 불렸다. 해방 후 1949년 8월 15일 광주시로 개칭되었다. 동구는 1973년 7월 1일 광주시 중부, 동부, 북부출장소를 통합 개청 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동구는 북쪽으로 광주광역시 북구와 연접하고,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화순군과 경계를 이루며, 광주천을 서남쪽에 끼고 무등산 너른 자락 밑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 정상에서 남으로 장불재를 지나 천제등, 바람재, 향로봉을 통해 장원봉으로 이어지는 광주시를 향한 무등산 주능선과 남쪽으로 장불재와 중머리재 사이의 샘골에서 발원한 영산강 지류인 광주천을 끼고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시가지를 형성하는 동고서저형의 지형구조를 보이고 있다. 멀리 북쪽으로부터 서남쪽을 향해 흐르는 영산강의 본류인 극락강을 바라보고 지정학적으로는 호남 내륙의 중심을 점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남부평지다우형 기후구에 속하며 2010년 연평균 기온 14.8℃, 최고기온은 8월에 35.5℃, 최저기온은 1월에 -10.1℃, 연강수량은 1,510mm,로 7월에 607mm, 1월에 36mm였다. 평균습도는 최저 55 ~ 최고 82%였다. 광주 동구의 행정 구역은 34개의 법정동과 이것을 관리하는 13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동구의 면적은 49.21 km이며, 인구는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서구 (광주광역시) 서구(西區)는 광주광역시의 구이다. 광주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금당산, 개금산, 송학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어 자연과 도시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풍성한 녹지와 편리한 교통여건을 갖추고 있다. 상무·풍암·금호지구 등 광주에서 가장 쾌적한 주거환경을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청사 입주로 광주행정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터미널 등이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로의 역할을 한다. 신구 도심과 농촌이 혼재되어 어느 지역보다 주민의 행정수요가 다양하다는 지역특성을 가지고 있다. 광주 서구의 행정 구역은 18개 행정동과 18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서구의 면적은 47.88km이며, 인구는 2012년 12월 기준으로 117,665세대, 316,545명이다. 남구 (광주광역시) 남구(南區)는 광주광역시의 구이다. 1995년 1월 1일 본격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앞두고 자치제의 정신에 따라 중앙집권적인 의미의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개칭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 서구에서 분구되어 남구를 개청하였다. 같은 해 4월 20일에는 광산구로부터 대촌동의 편입으로 면적 60.90km에 20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998년 10월 1일 행정운영동의 설치에 관한 개정 조례에 따라 사구동, 서1동, 서2동이 사직동으로 통합 변경됨으로써 종전의 20개 동에서 18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면적은 토지등록전환 및 등록사항 정정 등 토지이동에 의해 종전 60.90km에서 61.03km로 변경되었다. 이후 2000년 7월 1일 행정운영의 설치에 관한 개정조례에 따라 월산1, 2, 3동이 월산동으로 통합 변경됨으로써 면적 61.03km에 종전 18개 동에서 16개 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광주 남구의 행정 구역은 30개의 법정동과 이것을 관리하는 16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남구의 면적은 61.03 km이며, 인구는 2013년 9월 30일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북구 (광주광역시) 북구(北區)는 광주광역시의 구이다. 광주 북구의 행정 구역은 41개의 법정동과 이것을 관리하는 2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북구의 면적은 120.31 km이며, 동별 면적 및 인구 현황은 2012년 12월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광산구 광산구(光山區)는 광주광역시의 서쪽에 있는 구이다. 광산구의 행정 구역은 79개의 법정동과 이것을 관리하는 21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산구의 면적은 222.916 km2이며, 인구는 2015년 12월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광산구 인구 중에 수완동이 거의 8만 명을 이루고 있다. 남부대국제수영장은 2015광주유니버시아에서 수영경기장으로 사용됐고 2019년 수영세계선수권에서 사용될 예정이다. 대전광역시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는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있는 광역시이다.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분기하고,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지선, 중부고속도로 등 주요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이다. 1997년 정부대전청사가 설립되어 중앙행정기관이 입주해 있으며, 한국철도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등 공기업 본사도 소재한다.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조성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등 정부출연연구기관과 전력연구원 등 공기업 및 민간 연구소가 밀집한 과학기술도시이다. 1993년 세계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과학도시로서 위상을 확립하였고, 2011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도시로 지정되었다. 2015년 OECD 과학기술 장관회의를 개최하는 등 MICE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시청은 서구 둔산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5구 78동이다. 대전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우술군에 속하였던 땅으로 신라와의 경계에 위치하였고, 이때 지어진 계족산성이 남아있다. 남북국 시대에는 비풍군이라고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의 회덕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 대전지역은 공주목의 직할의 일부와 회덕현, 진잠현의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은 한밭이라고 불리며 회덕현의 일부였다. 16세기 후반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고, 대전 일대에서 박팽년(朴彭年),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권시(權諰), 윤휴(尹鑴) 등이 활동하면서 17세기 이후 기호학파는 조선의 정치 주도권을 차지한다. 1900년대 초까지는 오늘날 대전시의 중심가인 대전천 주변에는 정기 시장도 없는 아주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다. 1905년 경부선 대전역이 들어서면서 대전은 근대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역이 생기자 일본인들이 대전천과 대동천의 합류 지점에 몰려 거주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는 회덕면 읍내리(현 대덕구 읍내동)에 있던 회덕군청을 산내면 대전리(현 중앙동)로 이전하고, 1913년에 호남선 철도가 완공되면서 교통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932년 충청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여 충청남도 행정의 중심이 되었고, 도시가 목척교를 건너 용두동 구릉지대까지 확대되었으며, 일본인이 정착한 대전읍이 확장되어 각종 산업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항복 선언 이후 1945년 10월 7일 미군이 대전에 진주하였다. 1949년 대전부에서 대전시로 개칭하였고 해외동포가 돌아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서울에서 피난온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에 잠시 머무르면서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대전 전투가 벌어지고 대전은 6·25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이북 5도와 경기도의 피난민이 대전에 정착하고 곧 전후의 복구사업으로 전국에서 대전으로 사람들이 모여살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에 따라 충청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1970년 회덕 분기점에서 갈라지는 경부고속도로가, 12월 30일 호남고속도로가 각각 개통하게 되면서 교통 물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한다.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가 자리잡아 과학기술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대전은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위치하므로 중도(中都)라고도 부른다. 수도권과 영남·호남을 잇는 삼남의 관문이며, 고속도로와 철도, 국도가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시청을 기준으로 직선거리는 서울까지 139km, 부산까지 200km, 대구까지 121km, 광주까지 140km이다. 북서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서쪽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남서쪽으로 논산시·계룡시, 남쪽으로 금산군, 북동쪽으로 충청북도 청주시, 동쪽으로 옥천군·보은군과 인접한다. 금강 유역 주요 국가 하천인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 합류하여 북쪽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그 강변으로 넓은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유등천과 대전천은 탄방동과 오정동에서 합류하고 이 물길은 다시 대화동과 도룡동에서 갑천과 합류한다. 서쪽에서는 진잠천·유성천·반석천·탄동천·관평천이 갑천에 합류한다. 대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갑천은 신탄진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금강은 대전의 동부에서 북부를 흐른다. 갑천, 유등천, 대전천 연변에는 해발고도 40m의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있다. 충적지 주변에는 경사가 완만한 산록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이 충적지와 구릉지는 대전의 농경, 거주, 산업활동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지형이다. 대전의 동부 금강 유역에는 대한민국 3대 호수인 대청호가 있어서 수자원이 풍부하다. 대전의 동부와 남부는 비교적 고지대이며, 서부와 북부는 낮은 구릉지와 평야가 전개되어 저지대를 이룬다. 대전의 동부에는 계족산(398.7m), 개머리산(365m), 함각산(314m)이 있고, 서쪽으로는 계룡산(845m)과 우산봉(573.8m), 갑하산(469m), 빈계산(414m)으로 이어지는 계룡산 자락이 있다. 대전 남부에는 보문산(457.3m)이 있고, 서남부에는 구봉산(264m)이 있으며, 동남부에는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식장산(597.4m)이 있다. 대전의 북부에는 금병산(345m)과 매방산(182m), 불무산(161m) 등 100m 내외의 낮은 언덕이 있다. 대전의 동쪽 산지는 규암과 변성암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서쪽 산지지역은 맥암류와 반암류가 밀집 분포되어 있어 풍화 및 침식에 강하다. 대전 중앙부의 화강암 지역은 풍화 및 침식에 의하여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었다. 대전은 냉대동계건조기후와 온대하우기후의 특성을 모두 띄고 있다. 기온은 연평균 기온 13.0℃, 가장 무더운 달인 8월의 평균기온 25.6℃, 가장 추운 달인 1월의 월평균기온 -1.0℃, 연교차는 26.6℃로 대륙성 기후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여름 8월 평균기온은 대구·부산·광주·서울보다 낮아 상대적으로 서늘하고, 겨울 1월 평균기온은 서울보다 높아 비교적 온화하다. 극값으로는 최고기온이 39.3℃(2018. 8. 15), 최저기온은 -19.0℃(1969. 2. 6)를 나타내었다. 강수량은 연평균이 1458.7mm이며 계절적으로 연강수량의 50-60%가 여름에 내리고, 5-10%는 겨울에 내리며, 일강수량의 최댓값은 303.3mm(1987. 7. 22)이었다. 바람은 일반적으로 북서계절풍이 남서계절풍보다 강하고, 특히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불며, 운량은 7월에 많고 10월에는 적게 나타난다. 계절관측으로는 첫서리는 10월 5일, 첫얼음은 10월 12일, 첫눈은 10월 23일에 관측되었다. 대전의 대기는 미세먼지 농도 44㎍/m로 한국의 7대 도시에 비해 오염도가 가장 낮고 공기가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보고되었다. 대전광역시의 행정구역은 대체로 3대 하천의 물길을 따라 구획되어 있다. 대전천의 동쪽은 동구와 대덕구, 대전천과 유등천 사이는 중구, 유등천과 갑천 사이는 서구, 갑천의 서쪽은 유성구, 갑천의 동쪽은 대덕구이다. 인구는 2014년 9월 30일 기준 591,975세대, 1,551,931명이다. 대도시권 광역교통 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2조에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공주시, 논산시, 계룡시, 금산군 및 충청북도 청주시, 보은군, 옥천군을 대전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전광역시의 인구는 2014년 9월 30일 기준 591,975세대, 1,551,931명이다. 인구를 기준으로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 이어 대한민국 5대 도시이다. 세대 당 인구는 2.5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775,595명, 여성 776,336명으로 균형 성비를 이루고 있으며, 등록 외국인은 16,116명이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지난 5년간 대전의 인구증가율은 4.1%로 전국 평균 인구증가율인 2.8%보다 높은 수준이다. 자치구별로는 유성구가 31.8%가 늘어나 증가율이 가장 높다. 고령인구 비중은 8.8%로 전국 평균 11.3%에 비해 매우 낮다. 평균 연령은 36.1세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젊은 도시이다. 2011년 대전의 출생아수 증가율은 3.4%로, 전국 평균(0.2%)을 크게 웃돌며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2010년 다른 지역으로부터 대전으로 전입한 인구는 충남(21,341명), 경기(16,368명), 서울(13,819명), 충북(8,853명) 순으로 많다. 연령별로는 30대의 순유입이 가장 많다. 2011년에는 3,344명이 순유입(전입-전출)되었고, 인구이동률은 전국 시·도 중 세 번째로 활발하다. 2014년 조선일보·미디어리서치의 전국 거주지 만족도 조사에서 대전시민들의 94.3%가 대전이 살기 좋다고 대답하여 거주지 만족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대전의 1인당 개인소득은 울산, 서울에 이어서 전국 3위이다. 자치구별로는 유성구의 소득이 가장 높다. 국세청이 근로소득 연말정산 신고현황을 토대로 분석한 근로자의 평균 연간 급여는 대전이 전국 3위이다. 등록 자동차 대수는 2013년 12월말 기준 606,283대로, 가구 당 1.03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다. 2011년 기준, 주택보급률은 102.4%이고, 자가 비율은 50.8%로 서울(41.4%)보다 높다. 2011년 미국 아카마이 테크놀로지스의 인터넷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주요 도시별 인터넷 접속 속도 순위에서 대전은 57.6Mbps를 기록하여 1위에 자리했다. 2011년 대검찰청이 발간한 '2011년 범죄분석'에 따르면 대전의 인구 10만명당 범죄 발생비율은 1,367명으로 전국 평균인 3,750명의 36.5% 수준이었다. 2011년 보건복지부가 2011년 지역건강통계’에서 대전시민의 평균 건강수명은 72.85세로 전국 2위의 건강한 도시로 조사되었고, 흡연율(41.9%)은 가장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2012년 현대경제연구원의 '대한민국 경제적 행복지수' 조사 결과, 대전에 사는 사람들의 경제적 행복감이 가장 높았다. 2013년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와 세이브더칠드런이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어린이 행복종합지수 분석에서 대전이 행복지수 전국 1위로 평가되었다. 2011년 대전에서 투자되는 연구개발비는 6조8173억원이다. 2007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전의 연구개발비는 서울(1조7057억원), 경기(1조1096억원), 인천(3151억원) 등 수도권을 합한 것보다 많고, 수도권과 대전을 뺀 지방 전체의 연구비를 합한 것(2조1668억원)보다 많다.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기술), ST(우주항공기술), ET(환경·에너지기술), CT(문화기술) 등 미래유망 신기술 6T(6Technology)에 대한 연구비도 수도권과 12개 지자체를 합한 것보다 높은 수치이다. 중국 사회과학원과 미국 벅넬(Bucknell)대학교 등이 공동 작성한 ‘2008년 세계 도시경쟁력 보고서’에서 대전은 대한민국 도시 중에는 서울(12위), 울산(162위)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203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대도시 중에는 인천(221위), 부산(242위), 대구(287위), 광주(295위) 등 다른 광역시보다 높은 도시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1997년 세계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경쟁력을 평가한 결과에서 대전은 서울(19위)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세계 25위의 도시경쟁력을 차지했다. 2006년 산업정책연구원이 국내 75개 도시를 대상으로 도시 경쟁력을 평가한 결과, 대전이 서울(2위)을 제치고 미래 경쟁력 1위 도시라는 평가를 얻었다. 대전시에서는 2015년 6월 30일 기준으로 하루에, 특구내 특허출원이 39.4건, 사업체가 2.9개씩 증가하고 있으며, 42.1억원의 지방세를 징수한다. 하루 40.9명이 태어나고, 20.4명이 사망하는 한편, 24.9쌍이 결혼하고, 7.7쌍이 이혼한다. 대전은 정부대전청사와 특허법원 등 국가 중앙행정기관이 입지해 있는 행정도시이다. 대전 서구 청사로 189 (둔산동)에 대지 면적 518,338m, 20층 건물 4개동 및 부속건물 연면적 226,502m 규모로 1997년 12월 건립되었다. 총 14곳의 국가기관 공무원 및 직원 6,6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대전발전연구원에 따르면 정부대전청사 파급효과는 직·간접 생산을 포함한 총 생산유발효과는 5862억원, 지역 내 실질 부가가치는 2882억원으로 분석됐다. 대덕연구개발특구(大德硏究開發特區)는 관련 특별법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일대에 지정, 고시된 지역이다. 대덕연구단지와 첨단산업단지로 조성된 대덕테크노밸리, 대전산업단지 및 추가 개발 예정지역을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계획이 수립되고, 1974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92년 준공되었다. 1980년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정부출연연구소가 입주하였으며, 민간 부문은 대체로 1990년대에 입주하였다. 당초 연구·학원 도시로서 생산시설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1999년 대덕연구단지관리법 개정을 통해 연구성과의 실용화 및 벤처기업 입주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9월 정부는 대덕연구단지를 산·학·연 복합단지로 발전시킨다는 취지의 대덕밸리 선포식을 가졌고, 2005년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구의 32개 법정동(유성구 죽동, 궁동, 어은동, 구성동, 노은동, 하기동, 수남동, 외삼동, 신성동, 가정동, 도룡동, 장동, 방현동, 화암동, 덕진동, 자운동, 전민동, 문지동, 원촌동, 봉산동, 탑립동, 용산동, 관평동, 송강동, 금고동, 대동, 금탄동, 신동, 둔곡동, 구룡동과 대덕구 문평동, 신일동 일원) 67.8km 면적이 신기술의 연구·개발·사업화촉진을 주기능으로 하는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출범하였다. 2011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되었다. 2015년 대덕연구개발특구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 26개, 정부 및 국공립기관 24개, 기타비영리기관 23개, 대학 7개, 기업 1,613개 등 1,705개 기관이 입주해 있다.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코스닥 상장기업은 39개, 연구소 기업 175개, 첨단기술기업은 110개이다. 석사·박사 등 대덕연구개발특구에 근무하는 전문 인력은 67,696명이다. 2015년 총 연구개발비는 7조 5014억원이다. 2015년까지 특허등록은 국내특허 173,633건, 해외특허 76,653건으로 총 250,286건이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을 토대로 산학연간 융복합 공동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삼성 대덕연구센터, LG화학, LG생명과학,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기술연구원, KT 네트워크기술연구소, 한화그룹 중앙연구소(한화케미칼, 한화건설), ㅎ G합연굿텍, GS칼텍스 중앙기술연구소, KT&G 중앙연구원, SK C&C, SK이노베이션 글로벌 테크놀로지, 한국타이어 중앙연구소, 대림산업 연구소, 삼양 중앙연구소, 롯데케미칼 연구소, 금호석유화학 중앙연구소, 대한항공 기술연구원, 애경 종합기술원, 두산중공업 기술연구소, 쌍용양회공업 기술연구소, LIG넥스원 대전연구소, 태광산업 중앙연구소, 한전원자력연료 등 대기업 연구소와 ㈜선바이오텍, ㈜매크로그래프, ㈜비티웍스, ㈜제이피이 등 연구소기업, 중앙백신연구소 등 벤처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대전은 호서 지방의 수부도시로서 대전·세종·충청지역을 관할하는 사법·행정 기관들이 모여있다. 국토의 중심에 자리한 대전은 주요 고속도로와 국도, 고속철도, 철도가 연결되는 교통의 허브 도시이다. 대전은 교통량 1·2위인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대한민국 철도 교통의 중심지이다. 대전역은 경부선과 충북선을 운행하는 모든 열차가 정차하며, 서대전역은 호남선과 전라선을 운행하는 모든 열차가 정차한다. 신탄진역에도 경부선과 호남선을 운행하는 일부 열차들이 정차한다. 고속철도(KTX)가 개통되어 대전역에서 서울역까지 50분만에 도착할 수 있고, 동대구역까지 약 50분, 부산역까지 약 1시간 40분만에 이동할 수 있다. 서대전역에서 용산역까지는 약 55분, 광주역까지 약 2시간, 여수엑스포역까지 2시간 20분 소요된다. KTX 열차는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일반열차와 함께 공용하고 있으나, 서울 방향 대전조차장역에서부터는 KTX 전용 선로를 이용한다. 대부분의 ITX-새마을, 무궁화호 열차도 정차한다. 대전에는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되어 운행 중이다. 대전의 동남쪽인 판암역부터 서북쪽인 반석역까지 22.6 km, 22개 역을 지하철로 운행하고 있다. 통과 역은 판암 - 신흥 - 대동 - 대전역 - 중앙로 - 중구청 - 서대전네거리 - 오룡 - 용문 - 탄방 - 시청 - 정부청사 - 갈마 - 월평 - 갑천 - 유성온천 - 구암 - 현충원 - 월드컵경기장 - 노은 - 지족 - 반석이다. 종점 간 운행 시간은 40분이며, 평상시 10분, 출퇴근시 5분 간격으로 배차되고 있다. 2013년 승차인원은 39,868,883명이고, 하루 평균 승차인원은 109,230명이다. 모든 역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대전 도시철도 2호선은 과학 도시를 상징하는 자기부상열차 순환 노선이 국토교통부 사업승인을 통과하고 국비를 확보한 상태이나, 2014년 12월 4일 권선택 시장이 노면 트램으로 변경하겠다고 발표하였다. 3호선과 기존 경부선, 호남선 철도를 복선화하여 신탄진역과 흑석리역을 연결하고 논산~계룡~대전~조치원~청주공항 등에 대전권 광역철도를 운행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다. 회덕 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지선이 분기하고 있으며,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가 두 고속도로를 연결함으로써 외곽순환도로의 역할을 한다.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는 통영대전고속도로와도 연결되어 진주·통영 방향으로 통행할 수 있다. 당진과 대전을 85km(1시간 이내)로 연결하는 당진대전고속도로는 유성 분기점, 남세종 나들목에서 진입할 수 있다. 2011년 대전의 도로연장은 2267km이고, 井자형 구조로 되어 있어 시내 교통이 편리하다. 대전에서 시외로 나가는 국도는 국도 제1호선, 국도 제4호선, 국도 제17호선, 국도 제32호선이 지나가며 지방도는 국가지원지방도 제57호선, 국가지원지방도 제32호선이 있다. 시내 간선 도로로는 계룡로, 계백로, 한밭대로, 대덕대로, 둔산대로, 유성대로, 북유성대로, 동서대로, 도안대로, 중앙로, 충무로, 자양로, 계족로, 신탄진로, 대전로, 인효로, 한밭도서관길, 배재로, 도산로, 도안동로, 대둔산길, 도안길, 진잠길, 삼성로, 금병로, 동춘당로, 동대전로, 과학로, 노은로, 가정로, 대학로, 엑스포로, 대종로, 옥천로, 우암로, 유등로, 문화로, 갑천도시고속도로 등이 있다. 갑천에는 교통량이 많은 둔산 도심과 연구개발특구를 잇는 카이스트교가 2014년 준공되었다. 둔산 도심과 사이언스 콤플렉스가 조성되는 도룡동을 잇는 왕복 4차로의 제2엑스포교도 건설될 예정이다. 대전복합터미널,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유성고속버스터미널, 대전서남부터미널, 대전청사버스정류장 등에서 고속·시외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기존의 대전고속버스터미널과 대전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합하여 2011년 12월 동구 용전동에 준공된 대전복합터미널에는 신세계 스타일 마켓과 이마트, CGV 영화관, 영풍문고가 들어서 복합쇼핑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구암역과 인접한 유성구 구암동에도 지하 4층·지상 10층, 건물면적 244,000㎡의 유성복합터미널이 건립될 계획이다. 지하 1층은 고속버스터미널, 지상 1층에는 시외버스터미널, 지상 2∼3층에는 교보문고와 CGV 영화관, 삼성디지털프라자 등 상업시설이 입점한다. 유성복합터미널은 시내버스 및 급행버스시스템의 기점지와 환승주차장, 화물차고지를 포함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유성복합터미널에서 정부세종청사를 20분 이내에 운행하는 BRT 노선도 신설될 예정이다. 대전 시내버스는 도시철도와 함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시내 주요지점을 운행하고 있다. 광역ㆍ급행ㆍ간선ㆍ지선ㆍ외곽으로 분류되며, 광역버스는 2개노선,급행버스는 3개 노선, 간선버스는 26개 노선, 지선버스는 37개 노선, 외곽버스는 31개 노선, 맞춤버스는 1개 노선, 마을버스는 유성구에서 3개 노선이 운영 중이다. 첨단 교통 정보 시스템을 도입하여 각 정류소에서 버스 도착 정보를 알 수 있고 인터넷으로 버스의 현재 위치를 조회할 수 있다. 대전시는 KT와 함께 승차인원이 많은 시내버스 정류장에 GiGa WiFi 존을 설치하여 운영한다. 도안신도시 8.1 km 구간에 중앙버스전용차로를 개통하였고, 이후 대전 전역으로 확대 시행할 계획이다. 2012년 9월부터 유성구 반석역~정부세종청사~오송역 31.2km의 구간에 간선급행버스체계(BRT)가 운행된다. 대전 지하철 및 시내버스와 세종시 BRT 차량 간 무료 환승이 가능하다. 대전역~와동에도 BRT 노선을 신설할 예정이다. 향후 동일 생활권인 대전~세종~청주에 광역 버스정보시스템(BIS)을 구축할 계획이다. 시민 공용자전거 무인대여 시스템인 타슈를 시행하고 있다. 타슈는 충청도 사투리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교통카드 또는 휴대폰으로 인증 후 원하는 장소에서 쉽게 대여하고 사용 후 반납할 수 있다. 2012년 확대되어 103곳의 대여소와 1000대의 자전거로 운영된다. 타슈 대여소 설치 지역은 5개 권역으로 구분된다. 둔산·유성·연구단지권 56곳, 도안 신도시권 11곳, 태평동 11곳, 판암동·가오동 10곳, 중리동·송촌동 12곳 등이다. 간선도로와 하천 주변에 자전거 전용도로 960km를 개설하였다. 갑천 39.07 km, 유등천 16.68 km, 금강 8.81 km 등 강변을 따라 자전거 전용도로가 조성되어 있고, 유성에서 세종특별자치시까지 총연장 20km의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었다. 자전거도로가 조성되면 금강 수변공원에서 유성온천 족욕장까지 용수천 강변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오갈 수 있게 된다. 또한 대전광역시는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자전거책임보험에 가입하였다. 향후 자전거 전용도로를 확충하고, 대여소와 자전거를 확대 보급하여, 자전거 타기 좋은 녹색교통도시를 조성할 계획이다. 대전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청주국제공항으로 중국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으나, 편수와 노선이 많지 않아 주로 인천국제공항이나 김포국제공항을 이용하고 있다. 정부청사 시외버스 정류장이나 도룡동 공항버스 정류소에서 김포국제공항과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운행한다. 공항버스나 충북선 열차를 이용하여 청주국제공항으로 갈 수도 있다. 청주국제공항까지 버스와 자동차로 약 40분 걸리며, 인천국제공항까지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대전에는 유치원 265개, 초등학교 143개교, 중학교 88개교, 고등학교 62개교가 있다. 2013년 대전의 학생 수는 초등학교 91,599명, 중학교 56,765명이고, 일반계 고등학교 38,838명, 특수목적 고등학교 3,010명, 특성화 고등학교 10,272명, 자율고등학교 8,879명이다. 교원은 초등학교 5,976명, 중학교 3,624명, 고등학교 4,244명이다. 교원 1인당 학생 수는 15.0명이다. 특수목적고등학교로는 대전과학고등학교, 대전외국어고등학교 등이 있으며, 2014년 과학영재학교가 개교한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에 따른 외국인 및 연구 원 자녀와 대전의 우수 인재 육성을 위하여 2017년 개교를 목표로 유성구 상대동 도안신도시의 옛 유성중학교 부지에 국제중학교, 국제고등학교 설립이 추진된다. 2013년 대전의 대학교 학생 수는 91,772명이고, 대학원생은 18,024명이며, 전문대학 학생 수는 20,424명이다. 대학교 교원은 3,670명이고, 전문대학 교원은 558명이다. 대전에는 22개의 공공 도서관과 185개의 민간 도서관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은 시에서 운영하는 한밭도서관이다. 중구 문화동에 위치한 한밭도서관은 좌석이 3700여석이고 장서는 54만권이며 하루 평균 4600여명이 이용한다 중구에는 한밭도서관을 비롯하여 시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대전평생학습관, 대전학생교육문화원이 있다. 대전평생학습관에 부속된 테미도서관은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1961년에 개관하였으나, 2013년 산성동으로 이전하고 이름을 산성도서관으로 변경하였다. 이외에 구에서 운영하는 지역도서관이 있다. 동구에는 가오도서관·용운도서관·성남도서관·판암도서관·홍도도서관·문화정보관이 있고, 서구에는 둔산도서관·가수원도서관·갈마도서관·어린이도서관이 있으며, 유성구에는 유성도서관·노은도서관·구즉도서관·진잠도서관, 대덕구에는 안산도서관·신탄진도서관이 있다. 신탄진도서관은 1200여석, 목동에 위치한 대전학생교육문화원은 1100여석으로 규모가 크다. 2015년 대전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4조 618억원이다. 2015년 대전의 지역내총소득은 38.7조원으로 생산액보다 높다. 2016년 1인당 지역내총소득은 2,626만원이고, 1인당 개인소득은 1,776만원으로 서울, 울산, 경기도(1,790만원)에 이어 전국 4위이다. 2016년 1인당 민간소비는 1,564만원으로 서울, 울산에 이어 전국 3위이다. 사업체 수는 105,676개이며, 수출액은 47억3천200만 달러이다. 산업단지 면적은 863만9천m이다. 산업구조별 비중은 서비스업이 76.6%를 차지하고, 제조업 18.2%, 건설업 3.9%, 전기·가스·증기·수도사업 1.1%, 농림어업 0.1%이다. 제조업 비중은 2010년 16.5%, 2011년 17.9%, 2012년 18.2%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연과학 및 공학 연구개발업과 법무∙회계∙세무, 경영컨설팅, 디자인,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창조산업관련 사업체는 7440개로, 8%를 차지한다. 국세청이 공개한 2012년 대전 소재 기업의 평균 소득은 전국 4위로 인천, 경기도 등 수도권보다 높다. 2013년 1월 대전의 벤처기업은 1천개를 돌파하였다. 매년 10% 이상 성장하며, 인구 10만명당 벤처기업 집적도는 65개로 서울(60개)을 제치고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2010년 기준 경제활동인구는 72만 8천여명이다. 2013년 11월말 기준 대전의 실업률은 2.4%로 전국 평균보다도 낮으며, 특별·광역시(평균 3.0%) 중에서도 가장 실업률이 낮다. 대전의 연간 일자리 증가율은 6.45%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2010년 대전의 수출은 35억46백만 달러이고, 수입은 27억76백만 달러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다. 2011년 대한민국 지방정부 최초로 대전광역시가 국제신용 평가기관인 무디스(Moody's)로부터 대한민국 국가 신용등급과 동일한 'A1등급'을 받아 외자차입 및 외국인투자기업 유치에 상당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대전의 1인당 개인소득은 울산, 서울에 이어서 전국 3위이다. 근로자의 평균 연간 급여도 대전이 울산, 서울에 이어 전국 3위이다. 2014년 산업연구원이 작성한 '지역별 일자리 질의 현황 및 추이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대전은 서울에 이어 지역별 일자리 질 2위를 차지했다. 2013년 대전에 소재하는 31개 상장기업 직원의 평균 연봉은 5421만원으로 서울(5312만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4년 가구금융 조사 결과 시도별 소득규모에서 대전은 평균 가구소득 4,799만원으로 조사되어 울산, 경기, 서울에 이어 전국 4위를 차지했으며, 전국 평균보다 소득이 높고 인천(4,249만원), 부산(4,219만원), 대구(4,346만원) 등 다른 광역시보다도 훨씬 소득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가상승률은 2012년 이후 2년 동안 0%대의 등락률을 보이며, 전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모습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대전의 주력 산업으로 무선통신융합, 로봇자동화, 금속가공, 메디바이오, 지식재산서비스를 선정하고, 협력사업으로 기능성화학소재, 광전자융합, 지능형기계산업을 확정하는 '2014년 지역산업진흥계획'을 의결했다. 주력산업인 무선통신융합 분야엔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과 방송장비 제조 등 435개 사업체에 1800여명이 근무하고 있고, 의약용 화합물 및 항생물질 제조업 등 메디바이오 분야엔 217개 업체에 3200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로봇자동화 분야 367개 업체에 1300여 명, 금속가공 분야 381개 업체 2700여 명, 지식재산서비스 분야는 278개 업체에 22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협력산업인 기능성 화학소재분야엔 156개 업체에 2800여 명, 광·전자 융합 분야는 242개 업체에 4300여 명, 지능형기계 산업분야에는 261개업체에 23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정부와 대전시는 대전의 주력 산업 및 협력 산업 육성을 위해 2017년까지 국비와 시비를 집중적으로 투입한다. SK그룹은 대전 창조경제 조성에 정보통신기술(ICT)과 에너지 사업 등 800억여원, 중소기업과 공동으로 벤처육성 펀드 45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SK는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를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 도시로 지정됨에 따라 과학공원 일원에는 대전 사이언스 콤플렉스가 건립될 예정이다. 연면적 271,366m, 지하 4층, 지상 43층 규모의 초고층 건축물로, 과학과 문화, 쇼핑과 여가 콘텐츠가 융합된 복합엔터테인먼트시설로 조성된다. 신세계는 지역법인 ㈜대전신세계를 설립하였고, 대전의 랜드마크로 조성할 계획이다. 네이처(Nature)는 2017년 발간한 특별판 《2017 과학도시(Science Cities)》에서 대전이 한국 기초과학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대전·서울, 스페인 바르셀로나·마드리드, 중국 베이징·광저우·상하이·선전,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 10개 도시를 대표적인 과학도시로 선정하여 소개했다. 한국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대전은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비롯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LG화학 기술연구소 등 기업부설 연구소, 1만명이 넘는 연구원이 모여있어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대전은 농업인구와 경지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주로 동구와 유성구에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배와 포도가 유명하다. 동구 산내동, 판암동, 산성동 일대에서 포도가 재배되고 있고, 전국 포도 생산량의 8.4%를 차지한다. 대전은 1969년 대한민국에서 와인이 최초로 생산된 지역이다. 유성구에서는 배가 생산되고 있고 맛과 향이 우수하다. 그 외에 고구마, 상추, 수박, 오이, 버섯, 앵두, 딸기, 방울토마토, 쌀, 들깨 등이 생산된다. 2011년 대전의 경지면적은 4,732ha이고, 농가 수는 9,130호이다. 대전은 대한민국의 주요 제조업 도시이다. 2012년초 대전의 제조업체 수는 2085개로 대기업(300인 이상) 16개, 중기업(50인 이상 300인 미만) 149개, 소기업(50인 미만) 1920개로 집계됐다. 대덕구 갑천변에 있는 제1·2·3·4공업단지와 유성구 탑립동의 대덕테크노밸리 등에 380여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대전 제1·2공업단지는 대덕구 대화동과 읍내동 일대에 입지하며, 금속·석유화학·섬유·식품·제지 업종 등의 13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전 제3공업단지는 대덕구 문평동·신대동 일대에 입지하며, 기계금속·섬유·화학·제지 업종 등의 66개 업체가 있다. 대전 제4공업단지는 대덕구 신일·목상·문평동 일대에 입지하며, 기계·전자·자동차 업종을 중심으로 17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전테크노파크는 특허분쟁 대응과, 수입국시험 및 제품인증절차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고가의 장비와 실험시설을 마련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합성반응기라는 장비의 경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구·생산에서 이용되는 장비인데, 60~100060~1000ℓ 등 다양한 규격을 갖춰 많은 기업들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주요 기업으로는 KT&G, 한라공조, 계룡건설산업, 충남도시가스, 아트라스BX, 실리콘웍스, 웅진에너지, 동양강철, 삼영기계, 금성백조주택, 우성사료, 라이온켐텍, 골프존, 더맥키스컴퍼니, 보쉬, 한국타이어, 애경, 한솔제지, 아모레퍼시픽, 유한킴벌리 등이 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 확정이라는 호재와 맞물리면서 민선 5기 들어 웅진에너지, 한화국방연구소 등 당초 세종시 이전 예정 기업과 344여개 기업을 유치하고 그 동안 투자를 망설였던 외국계 기업들이 잇따라 투자의향을 밝히고 있어 투자규모가 늘어날 전망이다. 투자 유치 금액은 총 5억3200만달러, 일자리 창출 효과가 1만5300여 개에 달한다. 독일의 보쉬코리아는 향후 3년간 1억 달러 규모를 투자하여 대전에 디젤자동차 부품제조 생산시설을 증축한다. 영국의 블루앤도 음이온, LED 성능개선 사업을 위해 약 3천만불 규모의 생산공장 설립 협의 중이다. 일본계 기업과 중국계 기업들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SMC 한국법인인 한국SMC공압은 대전지역에 제3공장(16,000m, 260억원)과 아시아기술센터(1,000억원, 연구인력 300~400명) 설립을 긍정적 검토 중이고, 일본의 NDK는 일본의 나고야전기와 국내기업이 합작회사 태양광 발전 관련 부품제조를 위해 양해각서체결 협의 중이다. 또한 중국의 이메텍은 휴대폰 반도체 제조시설 건립을 위해 투자협의 진행 중에 있다. 외국인투자지역의 기능을 대체하게 될 빌딩형 외국인 전용 인큐베이터센터 건립이 구체화된다. 또한, 서구 평촌동과 동구 하소동 등 2곳에 친환경 일반산업단지 조성이 추진된다. 아랍에미리트(UAE)의 '알 만할 그룹(AI Manhal International LLC)'은 대전지역 기업인 ㈜에코그린과 공동으로 남대전에 연구개발센터와 생산 공장 건립을 위해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한다. 국내 3대 시약 제조업체인 대정화금을 비롯하여 루맥스에어로스페이스, 엠쏘텍, HMG, 코노바코리아 등도 대전으로 본사와 연구소, 생산기지를 이전할 계획이다. 2012년 통계청이 발표한 1~3분기 지역경제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년 동기 대비 광공업생산지수는 전자부품, 담배, 화학제품 등에서 생산이 활발한 대전이 17.5%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한국무역협회 대전충남지역본부가 발표한 '2014년 2월 대전충남지역 수출입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전시 수출은 전년 동기대비 16.1% 증가하였다. 특히 냉방기, 펌프류, 무선통신기기 등 수출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두 자릿수 수출증가세를 이어갔다. 무선통신기기 수출의 경우 국내기업의 세계 시장지배력 강화 및 거래물량 확대 등에 따라 무선통신기기 부품수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구 평촌·용촌·매노동 일대에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선다. 시는 2021년 완공을 목표로 85만8000㎡ 용지에 2444억원을 투입해 평촌일반산업단지를 신규 조성해 100여 개 기업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유성구 안산동 일대에는 22만4천㎡ 규모의 안산첨단국방산단이 2022년 준공될 예정이며, 국방벤처 기업 20여개를 유치할 계획이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중심도시로서 로봇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대전소재의 367개 로봇자동화 기업체에 13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대전의 로봇산업 관련 9개 기업들이 신기술 및 제품 개발을 위한 정부 공모사업에 잇따라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게 됐다. 자율비행로봇 시범사업, 4D 스노보드 시뮬레이터 개발, 고가반하중 모듈형 로봇개발, 수직 이착륙 비행로봇 시스템 개발, 로봇지능 모듈기술 개발, 동력기계용 초음파센서 모듈개발, 자동·무인화 실내 자동항법 기술개발, 골프장 캐디로봇 상용화사업, 호텔 서비스용 지능형로봇 통합솔루션 상용화사업 등이 지식경제부 공모사업에 선정되었다. 2013년 대전에 소재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대한항공 기술원, 한화 대전사업장,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센터가 나로호 발사에 성공함에 따라 대전은 대한민국의 항공우주 산업을 선도하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2013년 11월 대한민국 첫 적외선 우주관측 위성인 과학기술위성 3호(STSAT-3)가 대전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지상국과의 교신에 성공했다. 대전 내 메디바이오 기업은 118개에 종사자 수는 3,200여명으로 대한민국 메디바이오산업의 6.7%(서울·경기에 이어 전국 3위)를 점유하고 있다. ㈜알테오젠 등 대전 소재 메디바이오 기업들의 2014년 매출은 전년 대비 38%, 고용은 6% 증가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은 2005년 그 구상이 제안되고, 2008년 10월에 관련부처가 추진지원단을 만들면서 본격화된 사업이다. 2010년 12월 관련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2011년 5월 16일 거점지구 및 기능지구로 대덕연구개발특구가 확정되었다. 거점지구인 대덕단지에는 과학벨트의 핵심요소인 기초과학연구원(IBS) 본원과 대형실험시설인 중이온가속기가 들어서게 된다. 기능지구로는 청원(오송·오창)·연기(세종시)·천안 등이 지정. 산업·금융·교육·연구측면에서 거점지구를 뒷받침하게 된다. 대전광역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중심이 되며, 연구단 수는 대덕연구단지에 약 25개(본원 15개+KAIST 10개)가 배정될 예정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위치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엑스포과학공원으로 결정되었고, 과학벨트 거점지구는 신동·둔곡지구에서 도룡동 일원까지 확대되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동에 들어설 95만m 중이온가속기 부지는 국고로 매입하기로 하였고, 둔곡국가산업단지에 대기업을 유치하여 R&D 성과를 상용화하기 위한 첨단 산업단지와 주거 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2015년 8월 26일 정부는 사업기간을 2021년까지 4년 연장하고, 1단계(2012∼2017년), 2단계(2018∼2021년)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하였다. 1단계에서 부지조성과 인프라 구축, 기초과학연구원(IBS) 본원의 1차준공, 중이온가속기 설계완료와 시제품 제작을 목표로 하였다. 2단계에서는 공사를 완료하고 정주여건을 갖추기로 하였다. 또한 기초과학연구원의 2차준공 및 캠퍼스를 설립, 중이온가속기 사업의 완료와 과학기반 비즈니스 환경에 기반한 성과 도출을 포함한다. 2018년 11월 대전테크노파크,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가스기술공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수소특화단지인 '수소산업 전주기 제품 안전성 지원센터'를 유치하였다. 2021년까지 신동연구단지에 210억원(국비 105억원·시비 105억원)을 투입해 시험동과 관련 시험설비 등을 구축할 예정이다. 대전은 사면팔방으로 통하는 광범위한 교통망을 가지고 있어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도심인 둔산을 중심으로 정부대전청사, 대전광역시청, 법원, 검찰청 등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신용협동조합중앙회 본사, KT 충남본부, SK텔레콤 중부본부, 삼성생명 충청지역사업부, 한화생명 충청지역본부, 아모레퍼시픽 대전지역사업부 등 기업과 금융기관, 병원, 변호사·회계사·세무사·변리사·법무사 등 사무소가 밀집되어 업무지구와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대전역 주변 은행동과 대학로인 궁동 일대에는 번화가가 조성되어 있고, 서대전역, 터미널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상권이 형성되었다.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는 LED 스카이로드가 조성되어 있다. 대전은 백제 문화권 관광의 관문으로서 유성온천을 중심으로 호텔 등 숙박업소와 유흥업소들이 모여있어 1994년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롯데시티호텔은 유성구 도룡동에 준공되었다. 대전은 수도권과 충청·영남·호남을 연결하는 삼각유통의 중심지로 전국물류산업의 거점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덕구 문평동에 CJ대한통운 대전허브터미널이 있고, 유성구 대정동에는 14만 평의 대전종합유통단지가, 중구 안영동에는 1만 3000평 규모의 농수산물 물류센터가 건립되어 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유통시설은 기존의 대전공용화물터미널, 현대물류산업, 대전산업용재유통단지 등과 협력하여 유통기능을 극대화함으로써 중부권 물류유통산업기지로 성장하고 있다. 2013년 동구 구도·낭월동에 56만m 규모의 남대전종합물류단지 준공되었고, 우정사업본부 소포센터와 SK내트럭이 입주할 예정이다. 2011년 기준 대전의 금융기관은 202개이며 신용협동조합중앙회 본사와 KEB하나은행 충청영업그룹, NH농협은행 대전영업부, 삼성생명 충청사업부, 한화생명 충청지역본부, KB손해보험 충청본부, 아주캐피탈 본사 등이 있다. 107개 기업들이 콜센터 본부를 대전에 건립하면서 1만 4천여명의 고용효과와 경제적 파급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지족동에 국민은행 콜센터, 오류동에 하나은행 콜센터, 둔산동에 신한카드 콜센터, 현대해상, 한국 야쿠르트, 대흥동에 한화생명, KB손해보험, 우리은행 콜센터 등 금융기관과 SK브로드밴드 컨택센터 등 통신사, 공공기관 등의 콜센터가 많다. 삼성화재해상보험도 둔산동과 은행동에 텔레마케팅센터를 신설한다. 금융위원회는 전국에 분산되어 있던 콜센터를 통합하여 대전 둔산동에서 1397 서민금융 통합 콜센터를 출범하였다. SK텔레콤 컨택센터도 대전무역회관에 설치되었다. 서구 괴정동 에는 KT그룹의 KTcs 본사가 있고, 탄방동에는 홈플러스테스코 본사가 있다. 대전·충청권 해외 교역 활성화의 거점기지가 될 대전무역회관이 지방 최대 규모인 지상 18층, 지하 7층, 연면적 3만 7373.47m로 2012년 9월 서구 월평동에 건립되었다. KOTRA는 글로벌역량강화지원센터를 대전에 개설하였다. 대전은 교통이 편리하여 오랜 기간동안 도소매업이 발달하였다. 2010년 기준 2개의 공영도매시장과 32개의 전통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전통시장 중 유성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오래된 전통을 지닌 5일장이다. 관광특구인 유성구 봉명동에는 신우 면세점이 입점하였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조성되는 엑스포과학공원에 연면적 271,366m 지하 4층, 지상 43층의 사이언스 콤플렉스가 건립될 계획이다. ㈜신세계는 2017년 4월 대전 현지법인을 설립하였다. 2017년 12월 19일 기공식을 하고, 2020년까지 쇼핑·문화·과학·여가를 즐길 수 있는 복합 엔터테인먼트 시설로 조성할 계획이다. 193m 피라미드형의 사이언스 타워는 갑천변에 배치되어 상층부 9개층은 랜드마크 시설로 전망대와 식당, 놀이시설이 들어서고, 특급호텔과 병원 등 힐링센터, 과학문화시설도 입주하며, 옥상에는 테마공원과 야외수영장이 조성된다. 유성온천역 인근 유성구 봉명동 549-11번지에 연면적 89,000㎡ 지하 6층, 지상 9층의 프리미엄 아울렛 '골든하이(DOLDEN HI)'가 2019년 오픈될 예정이다. 현대백화점은 유성구 용산동 대덕테크노밸리 일대 99,690㎡ 부지에 2,140억원을 투입해 250개 매장을 갖춘 아웃렛, 100실 규모의 호텔, 컨벤션센터, 영화관, 테마공원 등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제출했고, 2017년 도시계획심의를 통과했다. 2019년 준공될 계획이다. 2011년 기준 의료기관의 수는 1990개이고, 의사 3089명, 치과의사 630명, 한의사 604명이다. 대전 의료관광사업이 국토해양부의 중부첨단산업권 발전 시범사업에 선정되어 '메티컬스트리트'와 '유성온천 건강거리' 등이 조성될 계획이다. 보건복지부가 '2015 해외환자유치 지역 선도의료기술 육성사업'공모에서 '건강검진과 지역의 우수한 특화의료기술, 관광 등을 연계한 의료관광 융복합 모델 구축사업'으로 '의료관광 해외환자 유치' 선도 기관 선정되었다. 국제협회연합(UIA)이 발표한 2012년 국제회의 개최 순위에서 대전은 국내 4위, 세계 47위를 차지했다. 대전은 2008년 대전컨벤션센터 개관 당시 222건이던 행사가 2011년 654건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대전컨벤션센터를 찾는 참가자(전시회 관람객 제외)도 21만9000명으로 2008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일반 과학기술 분야뿐 아니라 기초과학, 로봇, 원자력, 항공우주, 의학 분야 학술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2006년 국제회의 유치 전담기구인 대전컨벤션뷰로(현 대전마케팅공사)의 발족 이후 국제회의는 2007년 27건, 2008년 31건, 2009년 34건, 2010년 49건, 2011년 54건으로 증가했다. 중구 대흥동 일대의 문화·예술의 거리에는 화랑, 갤러리, 소극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공간이 있고, 야외공연장이 있는 우리들공원에서 '대전프린지페스티벌'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어남동에는 대전 출신 독립운동가인 신채호 생가가 있고, 조선시대 건축물이 있는 무수동의 유회당(有懷堂), 여경암(餘慶菴), 거업재(居業齋)에서는 대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전통민속놀이로는 부사칠석놀이, 문창동엿장수놀이, 버드내보싸움놀이 등이 전해오고 있다. 동구 가양동에는 우암사적공원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송시열이 흥농서당과 남간정사를 세워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며 북벌책을 강구하던 곳이다. 동구 대동 하늘동네에는 거리 벽화가 있다. 대덕구 송촌동에는 조선시대 유학자인 송준길이 살던 건축물인 동춘당(보물 제209호)이 있고, 매년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동춘당 문화제가 열린다. 대덕구 읍내동에는 회덕향교가 있고, 유성구 교촌동에는 진잠향교가 있다. 산림청은 진잠향교마을숲을 전통마을숲 복원사업 대상지로 선정했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다목적 영상종합시설을 갖춘 스튜디오 큐브(Studio Cube)가 2017년 9월 25일 엑스포 과학공원에 개관했다. 건물은 6만 6115㎡의 대지면적에 연면적 3만 2040㎡,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졌다. 국책사업으로 조성되어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운영한다. 과학도시 대전을 상징하는 대전 사이언스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축제다. 효문화뿌리축제, 대전국제와인페어, 유성온천축제, 금강로하스축제, 디쿠페스티벌, 계족산맨발축제, 견우직녀축제 등이 열린다. 프로야구단인 한화 이글스, 프로축구단인 대전 시티즌, 프로배구단인 대전 삼성 블루팡스와 대전 KGC인삼공사가 대전을 연고지로 한다. 2018년까지 유성구 용계동과 학하동 일원 137만9천m에 주 경기장, 야구장, 실내사격장, 체육관, 빙상장 등 종합스포츠타운이 조성될 계획이다. 2010년 기준으로 대전시내에는 전체 581개소의 공원이 있다. 생활권공원(근린공원, 소공원, 어린이공원)이 524개소, 주제공원(체육공원과 수변공원 각각 14곳과 문화공원 5곳 등) 49개소이다. 동구에 93개소, 중구에 96개소, 서구에 132개소, 유성구에 170개소, 대덕구에 90개소가 있다. 둔산대공원은 대전광역시에서 1993년 1월 16일 토지공사로부터 56만 9천m에 달하는 부지를 인수받아 산림청 등과 함께 공원 조성에 착수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공원에는 한밭수목원, 시민광장 등의 부대시설도 있다. 한밭수목원은 2001년부터 3단계에 걸쳐 시설을 조성, 순차적으로 개관하고, 2011년 열대식물원의 준공과 함께 공립수목원(제33호)으로 등록되었다. 대전에는 대전·세종·충남 지역을 관할하는 천주교 대전교구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주교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의 초청을 받고, 대전교구에서 열리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5일 대한민국 대전에서 만나자”라며 대전 방문을 공식 발표했다.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25년 만이다.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성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가 위치한 당진 솔뫼성지와 서산 해미읍성 등 대전교구 지역을 방문했다. 불교 2대 종단 중 하나인 천태종이 중앙 종무행정기관인 총무원을 단양 구인사에서 대전으로 옮길 계획이다. 천태종 총무원장은 2014년 1월 서울 관문사에서 신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대전 유성구 계산동 광수사에 99,000m의 터를 확보해 천태문화전승관을 짓고 총무원을 2018년까지 대전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총무원의 대전 이전은 천태종 중창조인 상월원각 대조사가 불교와 종단의 미래를 위해 구상했던 방안으로, 대전 총무원은 국제 포교와 행정의 중심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총무원 청사의 총 공사비는 정부가 절반을 부담한다. 대전의 국회의원 선거구는 총 7개이다.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의 첫 대선인 14대 대통령 선거부터 19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전에서 우세한 득표를 얻은 후보가 모두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대전은 대한민국 민심의 캐스팅보트라고도 불린다. 대전광역시는 2019년 예산안을 5조 7530억원 규모로 편성하였다. 이는 2018년보다 5071억 원(9.7%) 증가한 것이다. 세출 예산안은 정부 정책과 연계한 청년 일자리 확충, 아동수당 및 기초연금 매칭분 반영, 4차 산업혁명 육성 기반 조성, 무상보육 및 무상급식 전면 시행 등이다. 대전광역시는 안정적인 재정 운용과 계획적인 재정 투자로 양호한 재정건전성을 보이고 있다. 안전행정부가 6대 광역시를 대상으로 2013년도 지방채무를 조사한 결과 채무 비율과 시민 1인당 지방채가 대전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채무비율은 대전시가 16.7%로 가장 낮았고, 다음으로 울산 17.1%, 광주 19.9%, 부산 27.7%, 대구 28.1%, 인천 35.7% 순이었다. 주민 1인당 지방채도 43만6000원으로 울산 45만1000원, 광주 54만200원, 대구 77만5000원, 부산 80만7000원, 인천 109만5000원에 비해 가장 빚이 적은 것으로 나타나 재정건전성이 제일 우수하다. 대전광역시 선정 관광명소는 오월드, 뿌리공원, 엑스포과학공원, 한밭수목원, 계족산황톳길, 대청호반, 장태산휴양림, 대전둘레산길, 동춘당, 대전문화예술단지,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 유성온천 등 12곳이다. 대전광역시는 세계대도시연합(METROPOLIS), 아태도시정상회의(APCS), 세계지방자치단체연합(UCLG) 등 다양한 국제기구에 가입하였고, 1998년 세계과학도시연합(WTA)을 주도적으로 결성해 의장도시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해외 44개국, 91개 회원 도시 및 기관과 교류하고 있다. 대전은 11개국, 14개의 해외 자매도시 및 14개국, 18개의 해외 우호도시와 교류하고 있다. 대전광역시 2016년 주요업무계획 에도 시대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는 에도 막부가 정권을 잡은 시기를 가리킨다.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이 되어 에도에 막부를 연 시기를 에도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868년 5월 3일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에 함락되는 때까지의 265년간을 가리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에 취임하고 자신의 영지인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한다. 도요토미 정권 붕괴 후의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생산, 교육의 진흥, 그 외의 대책에 힘을 쏟음과 동시에 오사카 전투에 의해 도요토미 세력을 일소한다. 길게 계속된 정국불안은 끝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철저한 정국안정책을 실행하여,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하는 등 다이묘와 조정에 대해 철저한 법치체제를 깔았다. 다이묘의 대부분이 영지몰수로 모습을 감추고, 전국의 중요 지방은 직할령으로서 다이묘를 두지 않고 다수의 신반다이묘에게 큰 영지를 맡기고, 그 사이에 토자마다이묘를 배치하여 후다이다이묘에게는 작은 영지와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절묘한 분할정치책을 실시하였다. 자가우선주의라는 비평도 있지만, 이에 의해 결과적으로는 265년 이상 계속된 장기안정정치의 기초를 확립하여, 천하태평이라는 일본어가 생겨날 정도로 상대적인 평화 상태를 일본에 가져왔다. 농본주의적으로 생각되는 이에야스이지만,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또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규제완화에 의한 경제진흥책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성장중시의 경제 진흥파였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평화가 도래하여 대량의 병사(무사)가 비생산적인 군사생활에서 행정활동으로 옮아가고, 광역적인 개간활동이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까지 긴 성장을 계속해왔던 경제는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고도성장시대가 시작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나가사키 데지마에서의 중국, 네덜란드와의 교류와 쓰시마 번을 통한 조선과의 교류 이외에는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폈다.(하지만 실제로는 류큐를 통한 대명, 청 교역이나 북방교역이 존재했다.) 바테렌(기독교 선교사)추방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령하였지만, 쇄국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시마바라의 난으로, 기독교와 잇키의 협력으로 인해 농민들의 난을 제압하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정치적 위험성이 강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일본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에게는 일본 식민지화의 의도가 있어 위험하다고 막부에 조언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정책을 해금(海禁)정책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에는 주로 연안지역의 왜구를 포함한 해적 방어와 해상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일본의 쇄국과는 사정이 다른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쇄국도 중국의 해금과 같이 쇄국보다는 해금이라고 하는 쪽이 적당하다는 설명도 있다. 쇄국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일본인의 해외진출은 활발했고, 동남아시아에 많은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한 태국에 건너간 야마다 나가마사처럼 그 나라에서 중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쇄국 후에는 오로지 국내중시 정책이 채용되고, 기본적으로 국내 자급 경제가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3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 경제와 각지의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하는 한(藩)경제와의 복합적인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각지의 특산물이 주로 오사카에 집중되어, 거기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하여, 경제적인 번영을 보인 것이 겐로쿠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문학과 미술 면에서도 이하라 사이카쿠의 우키요조시, 마츠오 바쇼의 하이카이, 치카마츠 몬자에몬의 죠루리,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우키요에 같은 것이 탄생한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의 개혁으로 막부의 재정을 튼실하게 하였지만, 다시금 재정이 악화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의 개혁, 미즈노 다다쿠니의 덴포의 개혁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고 점차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겐로쿠 문화와 같이 상공인이 중심이 된 가세이 문화가 꽃을 피웠고, 가부키, 하이카이, 우키요에 등이 유행하였다. 화폐상품 경제가 발달하자, 예전부터 쌀을 기반으로 연공수입을 가졌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막부와 같이 번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이 개혁이 성공하였고, 막부 말기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에도 말기 구미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채결하게 된다. 이에 존왕양이 사상이 고추되어 갔고 막부의 고위관료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선언하고 다음 해인 1868년 5월 3일에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붕괴되었다.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국군(, )은 1948년 8월 15일에 창설된 대한민국의 군대이다. 육군, 해군, 공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설 후 한국 전쟁을 거쳐 1964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 1973년 철수 때까지 20만 명이 참전하였다. 그 외에도 1991년 걸프전, 1993년 소말리아, 1999년 동티모르 등에 세계평화유지를 위해 파병되었다. 창설 당시 국군의 모든 지휘권은 대한민국 정부에 있었으나 한국 전쟁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에게 국군의 모든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고, 1978년 7월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유엔군 사령부에 있었던 국군의 모든 작전지휘권(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로 이양되었다. 1992년에 지상군 사령부에 대한 지휘권이, 1994년에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게 환수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49만 2천, 전차 약 2300 대, 장갑차 약 2500대, 견인포/다연장 로켓 약 5200문, 유도무기 약 30기, 헬기 약 600기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예하 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만 8천명, 잠수함 약 20척, 전투함정 약 140척, 지원함정 20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50대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은 병력 약 6만 5천명, 전술기 460대, 감시통제기 약 40대, 공중기동기 약 40대, 훈련기 180대, 헬기 약 40대를 보유하고 있다. 2017년 12월 육군에는 현재 39개 사단(전방 기계화보병사단 6개, 그 외 상비사단 16개, 향토 방위 12개, 동원 예비군 5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해군 예하 해병대 2개 사단이 있다. 2026년까지 1군와 3군을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하며, 5개의 지역군단과 1개의 기동군단으로 개편하고, 31개 이하의 사단을 유지할 계획이다. 1950년 7월, 국군의 모든 지휘권과 작전 통제권은 한국전쟁(6.25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으나 1992년에 평시작전통제권 중 지상군에 대한 지휘권이, 1994년에는 나머지 평시작전통제권 전부가 국군에 이양되었다. 2012년 4월 12일에는 전시 작전통제권도 국군에 이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10년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2015년 12월로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이유는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 해군 함정 천안함 이 서해 백령도 부근에서 북한군 반잠수정에 의해 침몰된 사건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재연기는 없는 것으로 하였으나 2014년 10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국방부 장관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정하지 않고 2020년대 중반에 전환 여부를 검토한다고 합의하여 사실상 무기한 연기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거하여 대한민국 국군(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을 통솔하며,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받아 군사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고 합동참모의장과 각군의 참모총장을 지휘·감독하고, 모든 군에게 명령을 직접 지휘하고 하달한다. 합동참모의장은 군령에 관하여 국방부장관을 보좌하며, 국방부장관의 명을 받아 전투를 주임무로 하는 각군의 작전부대를 작전지휘·감독하고, 합동작전의 수행을 위하여 설치된 합동부대를 지휘·감독한다. 육군에 육군참모총장, 해군에 해군참모총장, 공군에 공군참모총장을 두며, 각군 참모총장은 국방부장관의 명을 받아 각 군을 지휘·감독하나, 전투를 주임무로 하는 작전부대에 대한 작전지휘·감독은 제외된다. 해병대는 해군 산하로, 해병대에 해병대 사령관을 두며, 해병대사령관은 해군참모총장의 명을 받아 해병대를 지휘·감독하며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사령관을 겸직한다.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제국군과 의병,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 1939년 1월 8일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 그리고 1940년 9월 17일에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 광복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실체적으로는 1946년 1월 15일에 편성된 미군정의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시작이었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백선엽, 이용무, 양국진, 최덕신, 김백일, 유재흥, 신학진, 박동균 등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인맥들이 주축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움트기 시작했다. 과거 일본군·만주국군·중화민국 국민혁명군 등에 소속하였던 군사 경험자들은 조국의 광복(1945.8.15)과 때를 같이하여 군사단체를 조직했다. 해병대(1945년 8월 23일)·국군준비대·육해공군 동지회·학병동맹·해방병단(海防兵團)(1945년 11월 11일) 등이 결성되었으나,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 [[:s:군정법령 제28호|법령 28호]]로 아놀드 군정장관 지휘하에 국방사령부가 설치되자 앞서 발족한 여러 군사단체들이 서서히 하나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 국방사령부의 설치는 국군 창설의 최초의 시도로서 이때부터 비로소 [[대한민국]]의 국방을 위한 조직·편성·훈련이 착수되었다. 최초로 국군의 기간장교가 육성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2월 5일]]에 [[미군정청]](美軍政廳)이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여 110명의 요원을 배출하는 때부터였다. [[1946년]] [[1월 15일]]에는 불과 1개 대대의 병력으로 남조선 경비대(초대 대장 [[마셜]] [[미국 육군|미 육군]]중령)가 창설되었으며, [[1946년]] [[3월 29일]] 공포된 미 [[:s:군정법령 제64호|군정법령 제64호]]에 따라 국방사령부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로, [[1946년]] [[6월 15일]]에는 [[:s:군정법령 제86호|군정법령 86호]]에 따라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는 다시 통위부(統衛部)로 개칭되었다(초대 통위부 부장 [[유동열]], 초대총사령관 [[송호성]]). 이 때부터 통위부 밑에 조선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창설되었으니, [[1946년]] [[1월 15일]]자로 발족했던 남조선 경비대는 국방경비대로, 그리고 [[1945년]] [[11월 11일]] 발족했던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각각 발전하였다. 그해 [[12월 1일]]에는 현행 계급제도가 채택되었으며, [[1948년]] [[4월 1일]]에는 국방경비대 안에 항공부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됨에 따라 초대 국방장관에 [[이범석 (군인)|이범석]] 장군이 임명되었고, [[8월 29일]]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국군으로 편입되어 [[9월 5일]] 마침내 육군(초대 참모총장 [[이응준 (군인)|이응준]]) 및 해군(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후 육군에서 공군과 해군이 나뉘고, 해군에서 해병대가 창설 되면서 현재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1948년]] [[4월 1일]] 국방경비대 안에 창설되었던 항공부대는 [[9월 13일]] 육군 항공사령부로 승격하고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군이 분리되어 공군(초대 참모총장 [[김정렬 (1917년)|김정렬]])으로 정식 발족함으로써 비로소 3군 체제형성의 발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보다 앞서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해군의 예하인 해병대(초대 사령관 [[신현준 (군인)|신현준]])가 창설되었다.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육군]]은 동부전선의 이성가,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8보병사단]], [[대한민국 6보병사단]]이 선전을 했으나, 서부전선의 경우 고전을 치러야 했다. [[옹진반도]]를 방어하던 [[육군본부|대한민국 육군참모본부]] 직할 17연대([[백인엽]] 지휘)는 개전 직후 철수했으며, [[청단]]-[[개성특급시|개성]]-[[문산]]을 방어하던 [[대한민국 1보병사단|1사단]]([[백선엽]] 지휘)은 동년 동월 27일까지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였으나, 우측의 [[대한민국 7보병사단|7사단]]이 괴멸하여, [[서울]]이 점령됨에 따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1보병사단|1사단]]도 전투력의 60%이상을 상실하였으나 건제를 유지하였다. 의정부-포천축선을 방어하던 [[제7보병사단 (대한민국)|7사단]]의 경우 [[의정부]]지구 1연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포천축선의 9연대가 괴멸되고 이에 축차투입된 [[수도경비사령부]](현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3군사령부]] 예하[[수도기계화보병사단]]) 3연대, 2사단, 5사단도 붕괴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중국 국부군]] 2성 장군 출신의 [[김홍일 (1898년)|김홍일]] 장군이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조직하여 혼성 사단을 조직 한강선을 7일간 방어함으로써 미군이 전개할 시간을 얻었다. 50년 7월 5일과 7월 24일에 단행된 사단 재편성을 거쳐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는 사단은 1사단, 6사단, 8사단 이상 3개 사단이며 [[대한민국 3보병사단|3사단]]은 7월 5일부로 해체되었으나, 예하 22, 23연대의 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7월 24일부 다시 사단이 구성된다. 상기 4개사단 (1, 3, 6, 8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단 ([[대한민국 2보병사단|2]], [[대한민국 5보병사단|5]], [[대한민국 7보병사단|7사단]])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가 후에 재창설된다. [[수도경비사령부]]의 경우 7월 5일부 [[수도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초기 창군 과정에서 장교들이 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장군이라고 해도 김홍일, 김석원, 이응준 장군을 제외한 나머지 장군들이 20대 후반 ~ 30대 중반이었던 관계로 지휘 경험과 대규모 군대 운영 및 행정 경험이 부족하여 전쟁 기간 내내 지휘력, 전투력 부족 문제로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위의 3 장군도 50년 9월 이후는 전쟁 일선에서 물러났다. 사단급 제대가 다시 10개로 늘어난 후에도 군단 편성이 늦어진 점이나 편성된 군단도 다른 나라 "군단" 급 부대에 비하면 보병사단 3개를 모아둔 것에 불과할 뿐, 군단으로서 전투력을 가지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실제로 이들 제1, [[대한민국 2군단|2군단]]은 모두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고, 현재의 [[대한민국 1군단|제1군단]]은 1952년에 [[지리산 공비 토벌전]]을 위해 임시 편성인 기동 부대 성향의 [[백야전사령부]]를 모태로 새로 창설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국군은 투지는 강했으나, 훈련의 양과 질, 장교의 지휘 능력, 보유 장비 등에서 부족함이 많았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1개 보병사단 전체를 105mm 1개 포병대대가 지원하고, 연대는 4.2인치 [[박격포]] 중대가 지원하는" 상황이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미군 보병사단은 1개 155mm 대대와 3개 105mm 대대로 사단 포병을 구성하고 있었다. [[1951년]] 이후 [[미국]]이나 [[대한민국]] 모두 국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과 [[냉전]] 분위기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1년까지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은 증강에는 동의했지만, 그 방식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승만대통령은 기존 10개 사단 외에 10개 사단 추가 증설을 위한 지원을 요구했고, 미국은 기존 사단들도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데 무슨 10개 사단 증설이냐면서 기존 사단들의 전투력 배양이 먼저라고 맞받아쳤다. 즉, 양이냐, 질이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자를, 미국은 후자를 주장한 것이다. 이 와중에 [[현리 전투]]에서 [[대한민국 3군단]]이 맥없이 패배하여 수십Km를 후퇴했고, 이웃한 미군 사단들이 급히 수습에 나서야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전투에서 국군이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은 결국 [[미국 8 군]]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의 중대 결단을 낳게 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본부]]는 최전방에 전방지휘소를 두고 국군 군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협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국군의 전체 지휘권을 넘겨주었지만, 미군은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해 육본의 독자 지휘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전방지휘소 뿐만 아니라 제3군단마저 폐지하고 모든 국군 사단을 미군 군단에 배속시키게 된다. 군단급 이상 상급 부대가 모두 폐지된 것은 국군에게는 치욕이었으나, [[이승만]]도 미군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전쟁 중 국군의 1차 증강은 미군의 주장에 따라 기존 사단들의 전투력 배양과 장교에 대한 교육 과정 강화를 우선 사업으로 시작하게 된다. 휴전 후 병력증강과 [[M4 셔먼]], [[M47 패튼]] 전차 도입 등 장비증강이 진행되었고, 1954년까지 제1, 2군 사령부와 군수기지사령부·군관구사령부, 10개 예비사단이 창설되었다. [[1963년]]부터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파견, 지원할 군사적 협력을 세계 각국에 요청하였고 [[대한민국]] 역시 [[미국]]의 파월 지원 요청에 응하여 비둘기부대를 비롯한 건설공병대대 파견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약 32만명의 국군을 파병하게 된다. 32만명 파견 중 전사 5천명, 부상 1만 9천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국군 발전사상 [[베트남 전쟁]] 파병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64년]] [[9월 11일]] 1300명으로 구성된 제101 이동외과 병원과 10명으로 구성된 태권도 교관단의 파견, [[1965년]] [[3월 16일]] 육군 건설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1개 공병대대, 해병 공병중대, 경비대대, 수송중대)가 파견된 이후 계속 증파되어 [[10월 9일]]에는 [[제2해병사단 (대한민국)|제2해병여단(청룡부대)]]를, [[10월 22일]]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맹호부대)]]를, [[1966년]] [[8월 30일]]에 [[제9보병사단 (대한민국)|제9사단(백마부대)]]가 파병됨으로써 무려 약 5만명(군단 규모)을 헤아리게 되었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그 때마다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과 [[대한민국 국회]]의 승인이 있었으나 그 심의과정에서는 야당인사인 [[윤보선]], [[장준하]] 등의 반대를 시작으로, 파병 찬·반 양론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월남전에 파월(월남에 파병)한 국군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대한 전공과 업적을 쌓았으며, [[베트남]] 땅에 국군에 대한 많은 신화를 남겨 놓게 되었다.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받은 자금과 회수한 무기로 군사무기 개량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제 개발 사업 자금 등으로 활용되었다. 베트남전이 서서히 막을 내리던 [[1973년]] [[3월]] 파월 국군은 완전히 베트남 땅에서 철수하였다. 평균 경상운영비에는 [[인건비]], [[급식]] 및 피복, 국방[[정보화]], 장병[[보건]] 및 [[복지]]향상, 군수지원 및 협력, 교육훈련, 군사시설운영, 예비전력관리, 기타 [[행정]] 경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2014년 3월 기준으로 17개 지역에 1,195명을 파병하고 있는데, 이중 [[국제 연합 평화유지군]]으로는 640명, 다국적군으로는 555명을 파병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 안보 지원군]]에 참가중인 인원은 총 130,930명이고, 그중에 대한민국은 총 246명을 파견하고 있다. [[파일:Flag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svg |섬네일|left|230px|대한민국 육군기]]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 약 492,000 명, 전차 약 2,300 대, 장갑차 약 2,500 대, 견인포/자주포/다연장 로켓 약 5,200 문, 유도무기 30 기, 헬기 60 여 기를 보유하고 있다. [[파일:ROKS Munmu the Great (DDH 976).jpg|섬네일|left|230px|[[림팩]] 2006 훈련에 참가중인 [[DDH-976 문무대왕]]함]] [[파일:ROK Navy Base Oryuk-Do in Busan.jpg|섬네일|300px|항공모함 등 30여 척 함정의 계류가 가능한 부산해군작전사령부]] [[대한민국 해군]](예하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포함)은 병력 약 68,000명, [[잠수함]] 약 15 척, [[이지스함]] 3척을 포함한 [[전투함]] 약 140 척, [[지원함]] 20 척, [[헬기]]/[[해상초계기]] 약 60 대를 보유하고 있다. [[파일:ROK Marine with K2.JPEG|섬네일|left|200px|한 대한민국 해병대원이 강습 훈련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에서 초대 지휘관에 [[신현준 (군인)|신현준]] [[중령]]이 임명되고,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사 (군인 계급)|병]] 300명으로 창설되었다. 해군 예하의 국가 전략기동군으로서 상륙 작전을 주임무로 하며, 그 외 김포, 강화, 포항, 경주, 진해, 제주, 도서지역 등을 방어하고, 예비군 교육 및 훈련 등의 임무도 수행한다. [[한국전쟁]]에서의 전과기록 등을 통해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2011년|2018년]] 8월 현재 2개 [[사단 (군사)|사단]]과 2개 [[여단]]을 보유하고 있고, 이외에도 [[연평도]]와 [[진해]] 및 기타 여러 도서 지역들에도 해병 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있다. [[국방개혁 307계획]]에 의해 신속대응과 공중, 지상 기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개편하기 위해 제주부대, 해병대 사령부 직할 항공단을 신설하고, 사령부 예하로 정보단과 통신단을 정식으로 편제하였다. [[파일:F15k.jpg|섬네일|200px|대한민국 공군의 주력기체 중 하나인 F-15K (슬램 이글)]] 대한민국 공군의 장비는 [[KF-16]] (Block 52+) 134대와 [[F-16|F-16C/D (Block 52+)]] (PB형) 35여대, [[F-15K]] 60대, [[제공호|KF-5E/F 제공호]]와 [[F-5|F-5E 타이거 II]] 195대, [[F-4|F-4E 팬텀]] 80대 (퇴역 중), [[T-103]] 러시아제 훈련기 IL-103 72대, [[KT-1]] 기본 훈련기 105대, [[KA-1]] 전선항공통제기/경공격기 20대, [[T-50]] 고등 훈련기 60대+98대 생산 확정, [[T-50|T-50B]] ([[블랙 이글스]]) 10대를 보유 중이며, [[TA-50]] 전술입문기 (LIFT) 22대를 운용 중이고 [[KF-16]]에 버금가는 다목적 공격기인 [[FA-50|FA-50 파이팅 이글]] 60~120대를 도입 중에 있다. 수송기는 [[BAe-748]] 2대, [[CN-235|VCN-235]] 1대, [[보잉 737|보잉 737-300]] 1대, [[보잉 747-400]] 1대, [[C-130J|C-130J-30 수퍼 허큘리스]] 4대, [[C-130|C-130H 허큘리스]] 12대, [[CN-235|CN-235-200M]] 20대, [[C-118]] 1대의 수송기와 기타 정찰기로 [[금강 정찰기]], [[백두 정찰기]], [[KF-16|RKF-16]] 5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으며, 공중 조기 경보 통제기 보잉 [[E-737 피스아이]] 4대, F-15K 60대를 운용 중이며 F-4E, KF-5E/F (제공호)와 F-5E (타이거 II)등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있어서 [[F-5|F-5E 타이거 II]], [[제공호|KF-5E/F 제공호]]는 [[FA-50]] 60대로 대체되고, [[F-4|F-4E]]는 [[F-35|F-35A]]로 대체된다. 그리고 2019년 1월 A330 공중급유기 1호기가 도착하였으며 [[KC-330]] 시그너스라 명명하였다. 향후 3대가 더 들어올 예정이다. 상비군 수준의 정예화 된 [[예비군]]은 [[1961년]] [[12월]] [[27일]], [[박정희]]대통령이 '향토 예비군 설치법'과 '향토 예비군 설치법 대통령 시행령', '비상 대비 자원 관리법', '징발 법에 관한 법률'을 정한 뒤 공표하였고, 1968년 3월 31일에 들어서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1961년]] [[5월 16일]]의 [[5.16 군사 정변]]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관 출신 인사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경제발전등의 성과는 있었으나 이후 [[12.12 쿠데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학살 등의 문제로 군사 독재의 문제점은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1993년]] [[문민 정부]]의 출범과 함께 군사 독재 정권은 종결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까지의 시대를 군사 독재 시기로 간주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국군]]은 심할 정도로 장교를 과다하게 선발한다. [[ROTC]]제도를 하는 국가들 중에서 후보생 전원을 현역 소위로 임관시키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미군의 경우는 상위 5%만 현역에 배치하고 나머지 95%는 [[석사장교]]처럼 임관과 동시에 전역한다. 서방권 군대의 경우, 중대에서 1소대장만 소위 및 중위급 장교 소대장을 배치하고 나머지 소대에는 상사 및 원사 소대장을 배치하여 처음부터 장교를 적게 선발하고 그로 인해 [[소령]]에 이르러서는 인원이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배치되지만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상비사단 보병소대의 경우 소대장을 전원 소위 및 중위급 장교 소대장으로만 배치하기 때문에 과다한 장교 숫자로 인해 [[소령]] 계급부터 심각한 인사적체가 발생하고 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이렇게 과다한 장교들을 [[유신 사무관]]이라는 이름의 고급 공무원으로 특채하여 인사적체를 해결했으나 유신 사무관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는 여전히 인사적체가 심각한 수준이다. 당장 [[대령]]부터 보직 대비 인원 초과율이 거의 2배에 달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초과 보직된 대령들 중 무시못할 비율이 [[부사단장]], 각 대학교 [[ROTC]] 단장, [[연구관]] 등으로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군인사법 제 3조는 "[[장군]]은 장성으로 장교는 영관 및 위관으로 구분하고 장성은 [[5성 장군| 원수]], [[4성 장군|대장]], [[3성 장군|중장]], [[2성 장군|소장]] 및 [[1성 장군|준장]]으로 한다. 영관은 [[대령]], [[중령]] 및 [[소령]]으로, 위관은 [[대위]], [[중위]] 및 [[소위]]로 한다. 준사관은 [[준위]]로 한다. [[하사관]]은 [[원사]], [[상사 (군인 계급)|상사]], [[중사]] 및 [[하사]]로 한다. 병은 [[병장]], [[상등병]], [[일등병]] 및 [[이등병]]으로 한다." 라고 대한민국 국군의 [[군인 계급|계급]]을 정의 한다. [[징병제|징집병]]의 경우, [[모병제]]를 시행하는 국가의 [[군인 계급|계급]]보다 통상 2[[군인 계급|계급]]이 낮다. 예컨대 국군의 [[하사]]는 [[미국의 군사|미군]]의 [[상등병]]과 연합체계로 볼때, 유사하다. 그러나 이는 [[병사 (군인 계급)|병]], [[하사관]], [[준사관]]의 경우이며 실제로도 유럽의 군대와 자위대는 주임원사에 해당되는 직책이 주임준위이며 미군 역시 2014년에 주임준위를 신설했다. 다만 [[장교]]의 경우는 어떠한 국가이든 [[군인 계급|계급]]이 동일하다. 즉 국군의 대위는 [[미국의 군사|미군]]의 [[대위]]와 동일하다. [[분류:1939년 설립]] [[분류:1948년 설립]] [[분류:대한민국 국군]] [[분류:대한민국의 군사]] [[분류:한국 전쟁]] [[분류:베트남 전쟁]] 행주대교 행주대교(幸州大橋)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과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최초의 행주대교는 경인고속도로와 통일로를 연결하기 위한 도로 공사 (지금의 국도 제39호선)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1978년 7월 22일에 준공되었으며, 이후 11월 21일에 국도 제39호선이 완공되었다. 이 다리와 도로가 개통됨으로써 경인고속도로에서 통일로로 가는 데 거리가 20km로 줄어들었고 당시 기준으로 소요 시간도 약 1시간으로 줄어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다리는 교량 폭이 10m 정도 인데다, 왕복 2차선의 비좁고 초라한 다리에 그쳤다. 행주대교의 남북단으로 일산신도시와 중동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교통량이 증가하여 교통난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행주대교를 사장교 형태로 건설하였다.(사업비 170억원) 본래 198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말에 개통할 예정이었으나, 1992년 여름에 건설 중이던 신행주대교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재건설에 3년이 더 걸림으로써 결국 1995년 5월에 개통하였다. 2000년 12월에 제2신행주대교까지 완공되면서 구 행주대교는 벽돌 등의 칸막이로 폐쇄되었고, 2011년 일부 구간은 철거한 상태다. 구 행주대교는 폭 10m (왕복 2차선)에 불과했는데, 행주대교 개통 이후 서울 서부 외곽지역의 교통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1987년 10월 착공하였다. 당시 개설 당시 명칭은 제2행주대교였으며 총 사업비 460억원을 투입해 폭 14.5m (3차선)에 총길이 1,460m로 건설하여 1992년에 개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2년 7월 31일에 신행주대교 붕괴로 개통이 지연됨에 따라, 일산·중동 신도시 개발에 따른 수도권 교통망 확충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후 다시 복구하여 1995년 5월 19일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에는 구 행주대교와 병용하여 고양 방면으로 1차선, 서울 방면으로 2차선을 배정하고 구 행주대교는 고양방면 승용차 전용으로 일방통행으로 변경하여 운영되었다. 이후 1996년에 신행주대교와 구 행주대교 사이 공간에 제2신행주대교 (또는 제3행주대교) 건설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비 691억원을 투입하여 1996년 9월에 착공하여 2000년 12월 16일에 통행 개시를 하여 12월 28일에 정식 개통되었다. 이 다리가 완공되면서 신행주대교는 서울 방면으로만, 제2신행주대교는 고양 방면으로만 이용하게 되었으며, 구 행주대교는 이 다리 개통과 함께 폐쇄되었다. 새로 건설 중이던 신행주대교가 1992년 7월 31일에 붕괴한 사고이다. 원인은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주탑 주변에 교각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콘크리트 사장재 4개를 세워 놓고 무리하게 작업을 진행해오다 하중을 못이긴 상판과 교각이 무너지면서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이 공사에 쓰인 사장재는 하나 당 무게가 무려 110t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조사 결과 사고 원인은 교량 상판의 이음새 부분에 대한 설계및 시공이 허술한 데서 비롯된 사소한 잘못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신행주대교는 연속압출공법과 콘크리트 사장재공법을 함께 적용하면서 건설되었는데 이 공법을 함께 적용하면서도 설계 또는 시공과정에서 이음면의 전단내하력(외부하중에 견딜 수있는 힘)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붕괴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4번째 임시교각 남쪽 상판은 가장 큰 하중이 걸리기 때문에 상판을 요철형태로 연결해야 하는 데도 설계를 맡은 한국종합기술이나 시공업체인 벽산건설이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사장재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결국 8백m구간의 상판과 교각, 주탑이 연속적으로 붕괴된 것으로 분석했다. 1992년 7월 31일 오후 6시 59분경, 2개의 주탑 중 하나가 부러지고 두 주탑 사이의 상판이 약 800m 정도 내려앉으면서 주탑 양 바깥쪽의 상부 구조물 전체가 주탑 방향으로 일시에 연쇄적으로 밀렸고 결국 교각과 함께 붕괴하였다. 다행히도 사고 당시 작업이 끝나 인부들이 현장에서 철수를 한 시간이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고로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 등 3명이 직위해제되었다. 사고 이후 복구공사에서는 당초 설계에 미비하였던 많은 점을 보완토록 하였고, 특히 콘크리트 사장재를 케이블 사장재로 변경하여 시공성을 높이고 사하중을 경감시켰다. 또한 사장교 구간을 연속 PSC 박스거더에서 강합성 교량으로 변경하여 재사용하는 주탑의 부담을 줄였고, 기초 파일도 복구 부분에서는 All Casting 공법 현장타설 말뚝을 사용토록 했으며 교각에 격벽을 추가하고 단면도 증가시켰다. 한편 이 교량 건설과 함께 추진해오던 구 행주대교의 확장 공사는 무기한 보류되었다. 또한 당시 건설을 맡았던 벽산건설은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현재 벽산건설은 과징금 등을 다 낸 상태이다.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고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고는 1993년 1월 7일 청주시 우암동 (현 청원구 우암동) 우암상가아파트가 붕괴되어 28명의 사망자와 48명의 부상자 및 37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사고이다. 01:13 경에 발생한 붕괴사고 당시 구조된 주민은 176명이었다. 또한 아파트복합건물 4/1층 9,090.12㎡가 붕괴됨으로써 약 9억 원 정도의 재산피해가 발생되었다. 이 사고는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참사 사건이었다.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龜浦驛無窮花號列車顚覆事故)는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에 부산직할시 (現 부산광역시) 내에 있는 경부선 하행선의 구포역 인근 삼성종합건설의 공사현장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되어,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를 낸 사고이다. 이 사고로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사망자수를 경신한 한국 최악의 철도사고로 기록되었다. 사고발생 5분 전인 오후 5시 24분 경 약 94km/h로 사고가 일어난 공사현장을 운행한 제175열차가 통과한 후 노반이 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역을 오후 12시 45분에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던 무궁화호 제117열차가 물금역을 오후 5시 23분 경에 통과하여 약 85km/h로 운행하다 선로 노반이 침하되어 있는 것을 약 100m 전방에서 발견하고 비상제동을 체결하였으나 제동거리가 미치지 못하여 기관차 및 발전차, 객차 2량 등 총 4량이 탈선·전복되었다. 이 사고로 인하여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열차운행이 1일 13시간 30분 동안 불통되었다. 물적 피해로는 열차가 대파되고 선로가 파손되는 등의 피해를 입어 시설물 피해액 총 30억 6천만원을 삼성종합건설 측에 구상하였다. 대한민국 철도법 제76조에 의하면 철도경계선으로부터 약 30m 범위 안에서 열차 운행에 지장을 주는 각종 공사는 할 수 없도록 되어 있고, 공사 시 행정 관련기관의 승인을 받은 뒤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삼성종합건설이 이를 무시하고 열차 운행선의 노반 밑을 관통하는 지하 전력구를 설치하기 위한 발파작업을 임의로 시행함으로써 사고를 일으켰다. 이후 삼성종합건설은 해당 법률 위반으로 2,550만원의 과징금과 함께 당시 최고수준의 행정처분인 6개월 영업정지와 사장 구속 등을 당하였으며, 1996년에 삼성물산(주)에 흡수합병되었다. 부산고등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김인수)는 1994년 1월 24일에 업무상 과실치사, 뇌물공여 등으로 기소된 16명의 피고인 중에서 삼성종합건설 대표이사 남정우와 토목사업본부장 김창경, 토목담당이사 이홍재, 한국전력공사 지중선사업처장 김봉업, 하도급 업체 사주 박영복 등 5명에 대하여 열차 전복과 관련된 부분은 무죄를 선고하면서 동명기술공단 기술사 남기창에게 원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는 등 5명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부산고등법원 93노1395) 한강 영화 촬영 헬리콥터 추락 사고 한강 영화 촬영 헬리콥터 추락 사고는 1993년 6월 14일 영화 촬영 중의 헬리콥터가 한강에 추락한 사고로, 7명의 사망자를 냈다. 오후 4시 경, 영화 《남자 위의 여자》 의 첫 장면인 선상 결혼식 장면을 촬영하던 중, 영화제작 관계자와 주연 배우 변영훈, KBS 〈연예가중계〉 취재팀 등이 근접촬영을 위해 헬리콥터의 고도를 낮추다가 불시착하여 한강에 추락하였다. 사고 이후 뒤늦게 구조활동을 벌이면서 창문을 깨며 헬기에서 탈출한 KBS PD 김일환 씨를 제외한 헬기 기장 최 모씨 등 5명은 구조 당시 이미 숨진 상태였고, 배우 변영훈과 영화사 대표 이 모씨는 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했다. 이 사고는 필수 탑승 요원인 부기장이 탑승하지 않았고, 정원수 이상의 정원이 헬기에 탑승하여 발생한 사고이다.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OZ733, AAR733, 등록번호 HL7229)는 아시아나 여객 항공기가 1993년 7월 26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운거산 인근 232m 지점에 추락하여 승무원 포함 66명이 사망하고 44명이 중상을 입은 항공 사고이다. 해당 항공기는 1990년 6월 14일에 제작된 보잉 737-500기로, 1990년 6월 26일 덴마크의 머스크에어(Maersk Air)로 첫 인도되어 1992년 11월 26일까지 현지에서 운항하다가 1992년 11월 27일자로 아시아나항공에서 리스로 임차, 임차 도입 당시 기령 2년 5개월차 된 비교적 새 비행기로 분류되었다. 1993년 7월 26일 14시 20분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5시 15분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소재 목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당시 목포 및 영암 지역의 기상 상태는 비가 내려 해당 항공기의 도착이 지연될 정도로 좋지 않았으며, 해당 여객기는 15시 24분 첫 번째 착륙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어 15시 28분에 2번째 착륙 시도, 15시 38분 3번째 착륙 시도까지 총 3회의 착륙 시도에 실패한 후 15시 41분 목포공항 레이다에서 완전히 사라지며 관제탑과의 교신이 두절됐다. 이어 15시 50분 이 여객기는 목포공항 남서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뒷산에서 추락한 채 발견됐다. 사고 소식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때처럼 산 아래 마을의 화원면 지소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고 군 병력까지 동원하여 구조가 시작되었으나 산에 추락한 관계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사고 후 해당 여객기가 세 번의 착륙 시도에 따라 속도가 떨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길이가 1,500미터로 짧고 한 쪽 방향밖에 사용할 수 없는 목포공항의 활주로와 자동착륙 유도 장치와 ILS가 설치되지 않은 목포공항의 열악한 시설, 조종사의 무리한 착륙 시도 등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사고의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은 해당 항공기가 정상 비행 항로를 이탈하였으며 조종사가 거리 착각을 일으키고 무리한 착륙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고 당국은 조종사가 착륙 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착륙을 준비하는 등 조종사의 과실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조종실 내 녹음내용에 따르면 기장은 충돌 몇초 전 "OK, 800(피트)"이라고 말한것으로 보아 규정(1600피트)보다 일찍 하강해 추락한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는 아시아나항공 설립 후 첫 번째 여객기 추락 사고였다. 아시아나항공은 사고 후 김포 - 목포 노선을 일시 운항 중단하고 유족들과의 보상금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당시 교통부는 이 사고를 계기로 전라남도 무안에 무안국제공항을 건설할 계획을 밝혔고, 2007년에 무안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목포공항은 군용으로만 이용하고 있다. 이 사고로 아시아나항공은 보잉 757-200의 주문을 취소하고 그 대신 에어버스 A321을 주문하였다. OZ733편 해남 추락 사고 이후 아시아나항공에서는 7월에만 추락 사고가 2건 더 발생하여 7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다. 충주호 유람선 화재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는 1994년 10월 24일 충주호에서 충주호관광선 소속 충주 제5호 유람선에서 화재가 발생, 전소된 사고이다. 이 사고로 30명의 사망자 또는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충주 제5호는 1986년 7월에 부산에서 건조되었다. 54톤급에 길이 28m, 폭 5m로, 워터제트식(물분사추진식) 디젤동력엔진을 사용하였다. 승선인원은 127명이다. 충주 제5호는 1994년 10월 24일 16시에 단양읍의 신단양선착장에서 승무원 3명을 포함한 132명의 승객을 싣고 충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16시 15분경, 구단양철교를 지날 때에 기관실쪽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10여 분 사이에 선실과 갑판으로 옮겨붙었다. 유람선은 1시간 만에 전소되었다. 화재가 발생하자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선실로 몰아 넣었다. 선실 내부는 연기로 자욱했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구명 조끼는 지급되지 않았다. 남자 승객들은 선실 유리를 깨고 선실내의 승객들을 끌어내었고, 인근의 유람선과 어선이 물에 뛰어든 승객들을 구조하였다. 경찰, 공무원, 소방대원들은 17시 20분 이후에 현장에 도착하였다. 구조대는 익사한 4구의 시신을, 선실 내부에서 불에 탄 3구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조명 기구가 없어 야간에는 수색을 하지 못했다. 배의 화재는 17시 20분경에 진압되었다. 사고 선박 주변에는 오일 펜스를 설치하였다. 10월 25일까지 모두 25구의 시신이 인양되었고, 5명은 실종되었다. 생존한 102명 중 33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시체 훼손 상태가 심해 사망자들의 신원 확인은 쉽지 않았다. 10월 26일에 4구의 시신이 발견되어 실종자는 1명이 되었다. 구조대의 현장 도착이 늦었고, 승무원의 승객에 대한 안전 조치도 미흡했으며, 당국의 안전 점검과 감독이 소홀했음이 지적되었다. 해당 선박은 1993년 8월에 한국선급의 정기 검진에서 합격했었다. 10월 21일의 성수대교 붕괴 3일 후에 발생한 사고여서 사고의 여파는 한국내 여행의 안전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三豊百貨店 崩壊 事故, )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건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죽었으며, 인근 삼풍아파트, 서울고등법원, 우면로 등으로 파편이 튀어 주변을 지나던 행인 중에 부상자가 속출해 수많은 재산상, 인명상 손해를 끼쳤다. 그 후 119구조대, 경찰,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국군, 정부, 국회까지 나서 범국민적인 구호 및 사후처리가 이어졌다.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는 937명이며 6명은 실종되었다. 피해액은 약 2700여 억 원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중 최명석(崔明錫, 1975~)은 11일, 유지환(柳智丸, 1977~)은 13일, 박승현(朴勝賢, 1976~)은 17일동안 갇혀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생존자 중 유지환 양은 구조 직후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냉커피가 마시고 싶다."라고 대답하여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서초동 삼풍백화점 있던 자리에는 주상복합 아파트인 대림 아크로비스타가 2001년 착공되어 2004년 완공되었다. 이 부분은 붕괴와는 관련이 없지만 건설과정에서 비리가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1989년, 삼풍아파트가 완공된 후, 삼풍건설은 그 앞에 남은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에 상가나 다른 건물을 짓고자 공사를 시작했지만, 무허가 공사를 이유로 제재를 받아 중단했다. 이유는 그 땅은 백화점 따위를 지을 수 없는 상가용 부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삼풍그룹은 서초구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뒤 불법적으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1987년 설계 당시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명칭으로 서초동 삼풍아파트 대단지의 종합상가로 설계되어 있었다. 계획 당시의 건물은 지하 4층에서 지상 4층이었다. 그러나 거의 다 지어졌을 무렵, 당시 삼풍건설산업(주)의 회장 이준(李鐏, 1922~2003)은 당시 시공사인 우성건설에게 백화점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백화점으로 바꾸게 될 경우, 건물의 구조가 상당히 바뀌기 때문에, 건물 붕괴를 우려한 우성건설 측이 이를 거부하자, 이준 회장은 계약을 파기하고 당시 삼풍그룹 계열사인 삼풍건설산업에 변경을 지시했다. 그러나 법률상 건물의 사용용도에 의해 구조를 변경할 시 반드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야 하는데 삼풍백화점 설계당시에는 이를 무시하여 설계, 공사가 강행되었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다. 이후 9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준공승인을 받았으며, 1994년 10월에는 기초부분인 지하1층에 구조변경 공사를 했고, 1994년 11월에는 위법건축물로 판정을 받았다. 삼풍백화점은 애초에 무량판 공법(플랫 슬래브 구조)의 건물로 설계해서 완공한 백화점 건물이었고 초기의 건물은 문제가 없었지만, 용도가 바뀐 뒤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일단 삼풍은 넓은 매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건물의 벽을 없앴다. 본래 벽과 기둥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이 하중을 같이 버텨 줬지만, 그 벽이 사라지는 바람에, 기둥에만 무게가 분산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만들기 위해 각층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 때 사라진 구멍 만큼 콘크리트가 사라지면서, 옆에 있는 기둥이 버텨야 하는 무게는 더 커졌다. 또한 이 기둥조차도 줄였다. 애초 구조계산서에는 건물 4층과 5층의 20개 기둥 가운데 8개는 지름이 800mm로 그 안에 고장력 철근 16개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 8개의 기둥이 설계 과정을 거치면서 지름은 600mm로 가늘어지고 철근 숫자도 8개로 줄였다. 이런 식으로 기둥이 줄어들면서 철근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을 설치하기 위해 기둥의 4분의 1을 아예 잘라버렸다. 바닥과 기둥을 연결하고, 기둥이 옥상을 뚫고 나오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L자형 철근을 사용해야 했는데, 삼풍은 비용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ㅡ자형 철근을 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바닥과 기둥을 연결할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기둥이 바닥을 뚫고 나오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건물이 붕괴될 때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본래 4층까지만 설계를 했던 삼풍백화점은 우성과의 계약 파기 이후 무리하게 5층으로 확장공사를 시행했다. 정부기관의 허락도 없이 했으니 불법적인 행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바닥과 기둥이 추가로 생겼으며, 이에 따라 기둥이 버텨야 할 무게는 더 커졌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5층의 용도까지 바꾼 것이다. 처음에 5층을 만들었을 때는 롤러스케이트장으로 계획했지만 백화점 용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식당가로 불법 변경하였다. 그 결과 5층 바닥에 배수로가 설치되고 콘크리트도 추가되면서 건물에 무리가 갔다. 더욱이 그 식당가도 한식당이라 바닥에 온돌을 깔기로 하였는데, 온돌의 효과를 주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가 추가된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5층에는 설계에 없던 벽돌벽과 무거운 돌정원, 대형 냉장고 등 무거운 가전제품을 설치했다. 이러한 불법 용도 변경으로 인해 하중이 3배 이상 증가하였다. 더군다나 4층에서는 매장 확장을 이유로 기둥을 없애는 일도 자행되었다. 이런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들이 건물 붕괴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본래 옥상의 슬라브는 6cm 두께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방수 처리를 하면서 9cm를 더 두껍게 했다. 또한 문제가 되었던 냉각탑 3개도 본래 지하에 설치하고자 했지만 지하공간 확보를 이유로 옥상에 설치했는데 구조 계산도 하지 않은 채 설치했으며 결국 평방 미터 당 610 kg/m의 하중이 추가되었다. 해당 냉각탑 건물 전체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개장 초기부터 건물 전체가 미세한 진동이 울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본래 삼풍백화점의 에어컨은 북관 동쪽 삼풍아파트 7동 방향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풍백화점은 삼풍아파트와 불과 30m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소음으로 삼풍아파트와 삼호가든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경영진들은 1993년 8월, 에어컨을 북관 서쪽 우면로(牛面路) 방향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이동 방법이 문제였다. 당시 삼풍백화점은 남, 북관 옥상에 삼각형 모양의 채광창을 옥상 가운데에 설치했는데, 원래 크레인으로 들어서 옮기는 게 옳은 방법이지만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에어컨을 옮길 때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고, 굴림대에 싣고 반대쪽으로 ㄷ자 모양으로 밀고 가는 최악의 실수를 일으켰다. 그 결과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넓직한 매장공간 확보를 이유로 기둥을 없애고, 무단 증축하는 등 잘못된 시공으로 약해진 건물은 결국 이 과정에서 바닥이 깨졌고, 옥상 바닥이 버틸 수 있는 한도는 이미 도를 넘은 것이다. 물론 붕괴가 어느 한 순간부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개장 초기에도 미세한 진동이 울리고, 물이 이유도 없이 새는 등의 징조가 계속 나타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냉각탑을 잘못 옮김으로써, 본격적인 붕괴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건물 붕괴는 사실상 예견됐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서 위험신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의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당시의 한미, 조흥은행 등)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공사 후 삼풍문고라는 이름의 서점으로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서적들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사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1995년 3월 2일 서점을 철수했다. 하지만 이미 생긴 균열은 점점 늘어났고, 중앙홀과 B관(스포츠센터)의 건물에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자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며 붕괴일인 6월 29일경에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부터는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붕괴당일 오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예측할 수 있다.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임을 느끼게 되었다. 사고 당일 오전 9시 때 삼풍백화점 5층 식당 <춘원> 주인 김서정에게 긴급 전화가 걸려오게 되는데, 그 내용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집에 바닥이 돌출부분이 2m가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소리였고, 그는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가 직접 보니, 5층 기둥이 20cm가량 금이 가 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뒤 우동집과 냉면집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5층의 식당가 영업이 전면 중지되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삼풍백화점 측은 낮 12시 무렵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공급을 중지시켰다. 에어컨의 전원을 차단한 상태였고, 당일은 유난히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었다. 그래서 당일 쇼핑을 온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오후 3시, 우원건축에서 임형재 소장과 이학수 구조기술자가 삼풍백화점에 도착했다. 한 시간 뒤인 4시에는(붕괴 약 2시간 전)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회장 주재로 2차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 소장은 칠판에 건물 구조도를 그려가며 "점검 결과 건물의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됐으니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백화점 영업을 중지하고 고객들을 대피시키라."라고 경영진들에게 권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마저도 매장 폐쇄 여부가 관건이었고, 이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 이 회의에서 이학수 구조기술사가 "신공법으로 보수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진행되던 침하는 현재 멈췄다."라고 경영진에 보고했고, 이준 회장도 사고 직후 검찰에서 "기술자들이 지지대를 받치고 보수를 하면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했고, 영업 중지를 건의한 중역들도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결국, 붕괴되기 불과 2시간 전, 이 회장은 "큰 위험은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징조는 있었으나 영업을 강행했다. 회의 이후 1시간이 넘게 구체적인 보수 계획에 대한 논의가 되는 한편, 임 소장은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삼풍 측은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오후 5시 40분쯤 임원실 회의장으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이영철 시설부장의 전화였다. "현재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였고, 이 회장 등 경영진들은 회의를 중단하고 일제히 건물 밖으로 긴급하게 대피했다. 그 후 중앙홀의 침하현상은 좀 멈춘다 싶었지만, 붕괴 16분 전인 5시 41분 백화점 침하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중앙홀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결국, 이상함을 느낀 중앙홀과 백화점 2층 직원, 손님들은 일부 대피하였으나, 나머지 고객은 모른 채 쇼핑 중이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삼풍 측은 중앙홀 1층의 통행과 영업을 중지하고 2층도 영업을 중지했으나, 이윤을 위해 백화점 1,2층은 영업을 강행했다. 당시 삼풍 측은 침하를 막기 위해 백화점 4각 구간에 뼈대를 세워서 가까스로 침하현상은 막았으나 1층이 침하현상이 멎자 5층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1, 5층과 지하 1층에 막대한 균열이 생겼다. 그들이 대피하는 동안 백화점 매장에서는 1천여 명이 훨씬 넘는 고객과 종업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쇼핑과 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5시 50분부터는 경영진들에 의해서가 아닌, 삼풍백화점 직원들의 고함이 5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긴급히 대피하라"는 소리였고, 건물이 우르릉 하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몇몇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피를 한 경우도 존재했으나,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듣지 못했다. 결국, 오후 5시 57분, 5층 바닥의 가장 약한 기둥 2개가 무너지며, 그 기둥이 옥상까지 끌어당기면서 건물 붕괴는 시작되었다. 곧바로 삼풍백화점의 가장 얇았던 5층 바닥과 천장이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백화점 5층의 잔해와 콘크리트가 무너져내리며 아래층을 차례대로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약 20초만에 건물은 지하 4층까지 완전하게 매몰되었으며, 안에 있던 1,500여 명의 사람들은 잔해 속에 묻히게 되었다. 순식간에 건물 주변이 뿌연 먼지와 회오리바람으로 가득 찼고, 백화점 앞 우면로와 서울고등법원 청사에는 건물파편들이날아왔다. 붕괴 직후 태풍 같은 바람이 10여 초간 휘몰아쳤다. 이후 먼지 바람들이 가까운 타 지역으로까지 날아갔다. 사고 직후 남아 있는 건물 잔해 사이에선 손수건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살려달라는 간곡한 비명과 신음과 애원소리, 주변에는 백화점 진열상품들이 나뒹굴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잔해를 헤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속속 목격됐다. 붕괴후 흩어진 백화점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도 목격됐다.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삼풍백화점의 붕괴 후 전 삼풍건설그룹 회장 이준이 서초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여기서 조사를 받는 이준이 떳떳하게 기자를 보고 "이보쇼 기자양반!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것이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는 발언을 하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붕괴 사고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호황 시기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피해자들 중 최명석은 11일, 유지환은 13일, 박승현은 17일(377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또한 1995년 7월 26일에 방영된 MBC 경찰청 사람들에서는 이번 사고와 관련되어 비리에 연루된 관련자 일체를 공개 수배하기도 하였으며, 국회의원 안상수는 이 사건에 대한 방송으로 국민적 관심을 받아 정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방송사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하여, KBS, MBC, SBS 등의 케이블 TV가 개국했지만, 실시간 YTN으로 뉴스 속/특보로 방송하였다. (KBS 2TV 제외) 동구 (대전광역시) 동구(東區)는 대전광역시의 구이다. 대전역과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시설공단 본사가 위치하고, 용전동에는 대전복합터미널이 있다. 동부에는 대청호가 있다. 2012년 가오동의 신축 청사로 이전하였다. 대전 동구는 대전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옥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대덕구와 중구를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금산군과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와 옥천군의 북부와 접하고 있다. 1980년 인공적으로 형성된 대청호가 맑은 호수를 이루고 있으며, 대덕구와 충청북도 청주시·보은군의 경계에도 걸쳐 있는 대청호에 대청댐을 건설함으로써 대청호 인근의 일부 지역이 수몰되었다. 특히, 내탑동에 있던 내탑초등학교는 수몰로 인해 폐교되었다. 조선시대 이성계의 태를 묻었다는 해발 537m의 만인산이 우뚝 서서 남풍을 막고, 그중턱 동쪽으로는 597m의 식장산이 그 줄기를 이루어 북쪽 계족산까지 펼쳐져 있으며, 동구의 수계는 식장산에서 발원한 세류가 흐르는 대동천과 만인산에서 시작하여 식장산 세류와 합쳐지는 대전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동구는 한반도의 내륙지방에 있어 기후가,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방에 비하면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덜 받지만, 여름은 북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기류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시베리아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기류의 영향을 받아 저온건조한 편이다. 1년간 총강수량의 53.8%가 여름에 집중되고 있으며, 겨울의 강수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리고 1년 평균 강수량은 1.488mm(최근 5년간)이며, 연평균 기온은 13.3℃로 인근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비록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기는 하지만 4계절이 뚜렷한 지역이다. 2012년 12월 31일 동구의 인구는 102,263 세대, 238,085 명이다. 현재 원동 85-5번지에 위치한 동구 청사는 노후화로 인해 가오지구에 착공하였으나, 호화청사 건립 논란과 재정난으로 2010년 6월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이후 민선5기 한현택 청장이 취임한 이후 대전광역시가 원동 현 동구청사를 매입하여 청소년 문화센터로 사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행정안전부의 2010년 하반기 지방재정 투.융자 심사에 통과하여 공사 재원을 확보하여 2011년 5월 공사를 재개하였고, 2012년 4월 중 준공되어 5월~6월 중 신청사 시험가동 및 사무실 이전을 거쳐 2012년 7월부터 가오동에서 본격적인 구청 업무가 시작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통영대전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판암 나들목과 비룡 분기점이 있다. 그리고 금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17호선과 옥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4호선이 지나간다. 경부선이 동구를 관통하며, 대전광역시의 중심 역이자 동시에 충청북도 제천시의 제천역과 함께 충청권 철도 교통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대전역이 동구에 위치해 있어 여객 수요가 매우 많으며(KTX 이용도 가능), 대전 도시철도 1호선에서 같은 이름의 역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 연계 환승이 편리하다. 그 이외에도 대전역과 옥천역(부산 방면) 사이에 세천역이라는 소규모 역이 있으나 영업을 하지 않는 역이다.2016년 12월부터 강남 수서에서 출발하는SRT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철도시설공단, Korail 본사 트윈타워가 있으며 대전 최고층 사무동 건물이다 동구에는 대전 도시철도 1호선이 통과한다. 판암차량기지가 있고 판암역, 신흥역, 대동역, 대전역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구 (대전광역시) 중구(中區)는 대전광역시의 구이다. 오류동에는 호남선 철도 서대전역이 있다. 동쪽으로는 대전천을 경계로 동구, 서쪽으로는 유등천을 경계로 서구와 접한다. 구청 소재지는 대흥동이다. 대전 중구의 행정 구역은 17개의 행정동과 33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전 중구의 면적은 62.13 km²이며, 인구는 2013년 12월말 기준으로 103,705세대, 266,423명이다. 중앙로- 중구청 - 서대전네거리 - 오룡역 호남선 서대전역 대전 원도심의 번화가인 으능정이거리(은행동)가 위치하고, 홈플러스 문화점과 세이백화점이 위치한다. 전통시장으로는 문창, 태평, 유천, 용두, 산성시장 등이 위치하고 있다. 서구 (대전광역시) 서구()는 대전광역시의 구이다. 대전광역시청과 대전고등법원, 대전지방법원, 대전고등검찰청,대전지방검찰청, 대전광역시지방경찰청, 대전광역시교육청 등이 위치한 대전의 중심지이다. 1988년 중구의 일부 동을 분할하여 서구가 설치되었는데, 둔산신도시의 개발로 인하여 관공서와 기업, 금융기관 등 업무지구를 형성하면서 대전의 도심이 되었다. 대한민국 중앙행정기관인 중소벤처기업부, 관세청, 통계청, 문화재청, 특허청, 산림청, 조달청 등이 있는 정부대전청사와 특허법원이 있는 행정도시이다. 서구는 대전의 중심부에서 서남부 지역에 걸쳐 길쭉한 모양으로 위치하고 있다. 서쪽 및 북쪽으로 유성구와, 동쪽으로 중구와 접하며, 일부는 대덕구와도 접한다. 중구 및 대덕구와는 유등천을 경계로 한다. 갑천은 서구의 한복판을 흘러 서구의 북쪽에서 유성구와 일부 경계를 이룬다. 서남쪽으로는 구봉산 등 산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이외는 대체로 평지이다. 2013년 12월 31일 기준 서구의 인구는 186,185세대, 502,167명이다. 등록 외국인은 3,250명이다. 행정구역은 23개의 행정동이 설치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전국 단위의 관공서 혹은 대전광역시 단위의 관공서들이 서구에 위치해 있다. 호남고속도로지선(251번)과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300번)가 서구를 지나며, 서대전 분기점에서 연결된다.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서대전 나들목이 서구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국도 제32호선이 북쪽에서 동서로, 국도 제4호선이 남쪽에서 동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국가지원지방도 제52호선이 남북으로 통과한다. 호남선이 서구를 지난다. 서대전역은 서구가 아닌 중구에 위치해 있다. 서구에서는 여객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기 때문에 호남선을 이용할 수 없다. (흑석리역은 2008년 12월 1일부터, 가수원역은 2011년 8월 1일 이후 모든 열차가 무정차 통과하므로 이용할 수 없다.) 이 서구를 지나며, 용문역, 탄방역, 시청역, 정부청사역, 갈마역, 월평역, 갑천역이 서구에 위치해 있다. 서구의 서남쪽에는 구봉산, 장태산, 안평산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경치가 좋아 산행을 하기에 좋다. 장태산에는 장태산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어, 산림욕도 가능하고 휴양림 내부에 마련된 숙소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만 년동에는 한밭수목원이 조성되어 도심 속 자연을 경험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둔산동을 중심으로 서구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에 걸맞은 공연 및 예술 관람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1998년 대전시립미술관이, 2003년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이 개관하였다. 이응노미술관은 사립미술관으로서 2007년에 개관하였다. 모두 만 년동에 위치하고 있다. 1994년 갈마동에 갈마도서관이 개관한 이래 2000년에 가수원도서관이, 2007년에 둔산도서관이 2008년에 정림동에 어린이 도서관이 갈마도서관 분원으로 있다. 유성구 유성구(儒城區)는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서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조성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밀집해 있다. 유성온천은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 ~ 4세기 삼한시대 유성은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고, 유성 계산동과 학하동 일원에 부족국가인 신흔국이 자리잡았다. 삼국시대 대전은 백제의 우술군에 속하였다. 문주왕 때 백제가 수도를 웅진성(공주)으로 옮긴 후 유성은 백제의 수도권역에 속하였다. 신라가 통일한 후에는 노사지현은 유성현, 소비포현은 덕진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 유성은 공주목에 영속된 군현으로 유성현과 진잠현이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이어왔고, 덕진현은 현종 9년에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였다. 장대동에서는 '□城縣官(□성현관)'이라는 기와가 발견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유성 근교의 계룡산은 한양 무악산과 함께 새 왕조의 유력한 도읍지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수도를 정하기 위하여 태조 2년에 임금의 행차를 계룡산으로 행하였고, 2월 7일 유성에 도착한 왕은 온천에서 머물렀다.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한 것은 유성온천이 처음이었다. 결국 궁궐을 짓는 도중 천도가 무산되었지만, <정감록> 등에서 이씨 왕조가 망하고 계룡산 일대가 새 나라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현대 들어서, 유성 인접지역에 정부대전청사와 정부세종청사, 3군 본부 등이 건립된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전국의 군현제도를 새롭게 개편하였을 때, 공주목의 임내(任內)였던 유성현과 덕진현은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게 되었고, 진잠현은 공주목의 영현이 되었다. 1602년 충청도 감영 소재지가 충주에서 공주목으로 이전되면서 충청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성은 오래전부터 유성온천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백제시대 말 신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다친 아들의 약을 찾던 어머니가 백설이 뒤덮인 들판에서 날개 다친 학 한 마리가 눈 녹은 웅덩이 물로 상처 난 날개를 적셔 치료하는 것을 보고 아들의 상처를 그 물에 담그게 하여 말끔히 치료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계룡산 신도안으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쉬어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 태종이 왕자이던 1393년 이곳에서 목욕을 한 뒤 군사훈련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가 시작될 무렵에는 임금이 쉬어갈 정도로 훌륭한 온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들어와 욕조 4개와 특등욕장 2동을 지어 근대적인 온천시설인 만년장을 준공시킨 것을 계기로 오늘날의 유성온천으로 발전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온천욕을 위해 유성에 방문했던 일화 등도 전해지고 있다. 1994년 유성온천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유흥업소 영업시간 제한이 없어지고 유흥업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 15개이던 유성의 목욕탕은 1997년 22개까지 늘었다.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가 개발되어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기업 연구소가 들어서면서 과학기술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993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박람회기구 공인 엑스포인 대전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과학도시로서 위상을 확립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도시 중 하나로서, 노은동에 위치한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FIFA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2011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선정되었다. 유성구는 지리적으로 대전광역시 서북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흐르는 갑천을 경계로 서구, 대덕구와 인접한다. 서쪽으로는 갑하산(469m), 우산봉(573m), 빈계산 등 계룡산 산맥을 경계로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으로는 계룡시와 접한다. 북쪽으로는 금병산과 금강을 경계로 세종특별자치시, 동북쪽으로 충청북도 청주시와 접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조선 도읍지로서 최고의 길지는 '유성'과 넓은'태전'이라 하였을 정도로 예로부터 토지가 비옥하고 산수가 수려하여 유성은 살기 좋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충남대학교, 한밭대학교를 비롯한 교육시설 있고, 라듐 온천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유성 온천으로 유명하다. 1993년 세계 박람회의 성공적 개최를 계기로 국제관광도시, 과학기술도시, 교육문화도시, 군사교육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 기술의 중심지인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조성되어 있다. 정부세종청사 1단계 이전 공무원 3,809명의 거주지를 조사한 결과 23.8%인 906명이 유성구에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세종시 첫마을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구이다. 유성구 다음으로 대전 서구(167명·4.4%)와 충북 청원군(133명·3.5%)이 뒤를 이었다. 2013년말 세종시로 이전하는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5,601명 중 42.1%가 아직 집을 구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어 향후 상당수가 세종시와 10분 거리에 인접한 유성구로 전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행정도시와 10km 정도 떨어진 유성구 노은 3·4지구에는 내년 상반기까지 대규모(3,837가구) 아파트가 완공된다. 정부세종청사 공무원의 유성구 전입이 늘어나자 유성구는 이들에 대한 행정지원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노은동 일대에 노은지구가 조성되었으며, 대전 도시철도 1호선이 노은동 중심부를 지난다. 원신흥동은 서구 관저동, 가수원동과 함께 도안신도시가 조성되어 있다. 북부에는 대덕연구개발특구와 함께 아파트가 조성되어 있다. 유성구는 11개 행정동이 설치되어 있고, 53개 법정동이 있다. 2018년 11월 30일 유성구의 주민등록 인구는 141,300세대, 349,944명이다. 2018년 9월 30일 등록 외국인은 6,510명이다. 유성구의 행정을 담당하는 유성구청 본청에는 585명의 공무원이 근무한다. 그 외에 각 동 주민자치센터에 160명, 기타 구 관할 사업소를 합하여 총 745명의 공무원이 유성구 소속으로 근무한다. 유성도서관과 구즉도서관은 유성구 소속 사업소이다. 2013년 12월말 기준 유성구의 학교 수는 184개교이고, 학생 수는 110,240명이다. 유성복합터미널은 구암역과 인접한 32,693㎡ 부지에 6337억원을 투입해 2021년까지 지하 4층~지상 10층, 연면적 24만4000㎡ 규모로 지어진다. 대형 서점과 영화관, 전자제품 판매장, 오피스텔(798실) 등이 들어선다. 유성복합터미널은 시내버스 및 급행버스시스템의 기점지와 환승주차장, 화물차고지를 포함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유성구 일대의 대덕연구단지는 한국 최고의 연구개발 고급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정보기술, 생명공학, 나노기술, 로봇, 우주공학 등 혁신산업에 집중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기술을 토대로 산학연간 융복합 공동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삼성 대덕연구센터, LG화학, LG생명과학,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기술연구원, KT 네트워크기술연구소, 한화그룹 중앙연구소(한화케미칼, 한화건설), GS플라텍, GS칼텍스 중앙기술연구소, KT&G 중앙연구원, SK C&C, SK이노베이션 글로벌 테크놀로지, 대한항공 기술연구원, 대림산업 연구소, 삼양 중앙연구소, 롯데케미칼 연구소, 금호석유화학 중앙연구소, 한국타이어 중앙연구소, 애경 종합기술원, 두산중공업 기술연구소, 쌍용양회공업 기술연구소, LIG넥스원 대전연구소, 태광산업 중앙연구소, 한전원자력연료 등 대기업 연구소와 ㈜선바이오텍, ㈜매크로그래프, ㈜비티웍스, ㈜제이피이 등 연구소기업, 중앙백신연구소 등 벤처기업들이 밀집해 있어 DRAM & SRAM 칩, LCD 모듈, 휴대폰 기술, 무선광역통신기술 분야 등 상용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반석동에는 삼성탈레스 대전연구소, 한국항공우주산업 대전연구센터, 국방과학연구소 민군협력진흥원 등이 있다. 금호폴리켐㈜ 등도 대전으로 연구소를 이전할 계획이다. 2011년 기준 대덕연구개발특구에는 정부출연출연기관 31개, 공공기관 11개, 국공립기관 14개, 기타비영리기관 33개, 대학 5개, 기업 1306개 등 모두 1400개 기관이 입주해 있고, 전문 인력은 6만2689명이다. 2011년 연구개발비는 6조8173억원이다. 특허출원은 11만3211건이고, 해외특허가 29%를 차지한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되었다. 유성구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한국천문연구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한국연구재단 등 정부출연연구기관과 한국수자원공사 연구원,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등 공기업과 삼성중공업, LG화학, GS칼텍스, SK이노베이션, KT, 한화케미칼, 롯데케미칼, 대한항공 등 대기업 연구소, 벤처기업 등이 밀집한 첨단 과학기술의 도시이다. 국립중앙과학관과 엑스포 과학공원 등 과학문화 시설이 많고, 유성온천을 중심으로 서비스업이 발달하여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충남대학교, 한밭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등 국립대학교가 많고, 정부통합전산센터, 국립대전현충원, 한국조폐공사, 한전원자력연료, 한국가스기술공사, 대전컨벤션센터, 대전월드컵경기장, 금강유역환경청, 대전충남지방중소기업청, 정보통신산업진흥원 등 주요 기관들이 유성구에 있다. 육군교육사령부, 육군군수사령부 등 주요 국방 기관도 위치한다. 노은지구, 도안신도시, 대덕테크노밸리 등 신도시 개발이 활발하여 인구 증가율이 매우 높다. 정부대전청사, 정부세종청사와 인접하고, 3군 본부가 위치한 계룡시도 인접하기 때문에 과학·경제·행정·교육·문화의 중심도시로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되었다. 구청 소재지는 어은동이다. 유성구는 사업체와 경제활동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2013년말 기준 유성구의 사업체 수는 18,205개이고, 종사자는 123,971명이다. 산업별 경제활동 인구는 과학기술 연구개발업이 22%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제조업 13%, 교육 서비스업 11% 순이다. 유성에는 병원 165개소, 한의원 86개소, 치과 88개소, 보건소 1개소, 보건지소 2개소, 보건진료소 4개소, 약국 121개소가 있다. 종합병원으로는 유성선병원이 있다. 유성의 금융기관은 총 102개이다. 우리은행 12개 지점, 국민은행 11개 지점 , 신한은행 6개 지점 , IBK기업은행 3개 지점 , KEB하나은행 10개 지점, 신협 9개 지점, 농협중앙회 6개 지점, 농업협동조합 25개 지점이 있다. 지족동에는 국민은행 콜센터가 있다. 덕명동에는 신협중앙연수원이 있다. 2011년 전문가들의 입지 평가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대전 유성구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로 확정되었다. 2013년 6월 28일 미래창조과학부는 ‘제2차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위원회’를 개최하여 대전광역시 유성구 엑스포과학공원을 거점지구로 포함하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지구 확대 및 기본계획 일부 변경(안)’을 심의·의결하고, 2013년 7월 3일 미래창조과학부와 대전광역시 등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관련 기관의 협력사항을 담은 업무협약서(MOU)를 체결하였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위치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엑스포과학공원으로 결정되고, 과학벨트 거점지구는 신동·둔곡지구에서 도룡동 일원까지 확대되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동·둔곡동에 들어설 중이온가속기 부지는 국고로 매입하기로 하였고, 원안대로 전체 면적이 유지되며, 신동·둔곡지구에 대기업을 유치하여 R&D 성과를 상용화하기 위한 첨단 산업단지로 조성하기로 하였다. 엑스포과학공원에는 국제 사이언스 센터가 건립될 계획이다. 지상 20층 이상 규모의 국제 사이언스 센터에는 첨단기업 창업·입주 공간, 국립 과학도서관, 기술거래소, 과학기술 핵심 기관이 들어설 계획이며, 엑스포과학공원은 시민 과학체험 공간과 전시공간을 갖춘 과학 테마파크로 재창조될 계획이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조성되는 엑스포과학공원에 연면적 271,366m, 지하 4층, 지상 43층의 사이언스 콤플렉스가 건립될 계획이다. ㈜신세계는 2017년 4월 대전 현지법인을 설립하였다. 2017년 12월 19일 기공식을 하고, 2020년까지 쇼핑·문화·과학·여가를 즐길 수 있는 복합 엔터테인먼트 시설로 조성할 계획이다. 193m 피라미드형의 사이언스 타워는 갑천변에 배치되어 상층부 9개층은 랜드마크 시설로 전망대와 식당, 놀이시설이 들어서고, 특급호텔과 병원 등 힐링센터, 과학문화시설도 입주하며, 옥상에는 테마공원과 야외수영장이 조성된다. 유성온천역 인근 유성구 봉명동 549-11번지에 연면적 89,000㎡ 지하 6층, 지상 9층의 프리미엄 아울렛 '골든하이(DOLDEN HI)'가 2019년 오픈될 예정이다. 현대백화점은 용산동 대덕테크노밸리 일대 99,690㎡ 부지에 3,000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12만8699㎡, 250개 매장을 갖춘 아웃렛, 100실 규모의 호텔, 컨벤션센터, 영화관, 테마공원 등을 설치한다는 계획을 제출했고, 2017년 도시계획심의를 통과했다. 2019년 준공될 계획이다. 국립중앙과학관과 엑스포 과학공원 등 과학문화 시설이 많고, 계룡산국립공원과 동학사 및 유성컨트리클럽, 경마장 등을 비롯한 위락시설을 골고루 갖추는 등 국제적인 관광·휴양도시로서 개발되고 있다. 지하 100m이하에서 분출되는 섭씨 27~56도의 고온 열천으로 알칼리성 라듐 온천이다. 우리나라의 온천 지구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유성온천은 부존량과 사용량에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약알칼리성 단순천으로 천질이 매끄럽고 피부에 자극이 없고 양이온 및 아연, 철 등 미네랄성 금속류들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다. 대중 온천 목욕탕과 유성호텔, 호텔 리베라, 호텔 인터시티, 계룡스파텔 등 대형 숙박업소와 유흥업소, 편의시설 등이 군집하고 있고, 족욕체험장이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1994년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매년 5월 유성온천문화축제가 열린다. 눈을 닮은 하얀 꽃잎이 아름다운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는 눈꽃거리가 있다. 행정안전부는 유성을 2012년 온천대축제 주개최지로 선정하였다. 대덕구 대덕구(大德區)는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북동부에 있는 구이다. 대덕이라는 지명은 대전의 대(大)와 대전의 옛 지명인 회덕의 덕(德)을 합친 것이다. 이는 1935년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군을 대덕군으로 개편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대덕구에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대전조차장역이 위치해 있고, 금강이 흐르는 대전의 관문으로 신탄진역이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나들목과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분기점인 회덕 분기점이 위치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대덕구의 동쪽에는 대청댐이 위치하여 대전과 주변 지역에 용수를 공급한다. KT&G, 한국수자원공사 등의 본사가 위치하고, 대전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주요 행정기관으로는 대전지방국세청이 있다. 구청 소재지는 오정동이다. 대덕구의 행정 구역은 12개 행정동, 25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덕구의 면적은 68.47km이며, 2013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는 77,420세대, 206,391명이다. 공기업 준공기업 국세청 우체국 경찰서 소방서 공공기관 도서관 공영 도매시장 역 종교기관 옴진리교 옴진리교(, Aum Shinrikyo)는 일본의 사이비 종교 집단이자 테러리스트 범죄 집단으로 교주 아사하라 쇼코()에 의해 1984년에 설립되었다. 줄여서 "옴" ("aum", )으로 불리기도 했다. 옴진리교는 1989년 11월 4일에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과, 1993년 카메이도 악취사건, 1994년 6월 27일에 나가노현 마쓰모토 시에서 마쓰모토 사린 사건, 1995년 3월 20일에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키는 등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저지를 정도의 악명높은 종교단체로 알려져 있다. 1995년 5월 16일에 아사하라가 야마나시현 니시야쓰시로 군 가미쿠이시키 촌에서 체포되었고 옴진리교가 일으킨 여러 범죄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집행이 연기돼 오다가 2018년 7월 6일 교주 아사하라 쇼코 등 7명에 대한 사형이 도쿄구치소에서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아사하라가 체포된 지 23년만이다. 2000년 2월 4일 알레프()로 이름을 바꾸고 재편성했으며 2002년 1월 조유 후미히로가 종교단체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아직도 옴진리교라고 부른다. 1984년 아사하라 쇼코는 이후에 옴진리교가 된 요가 도장 〈옴진리회〉를 시작했다. 이 즈음에 오컬트계 잡지인 〈무〉가 이 옴진리회를 일본의 요가단체로 취재하고 사진이 첨부된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가부좌를 튼 채로 도약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이 후에 이를 동교단이 말하는 공중 부양의 원형인 ‘달 돌리 싯디’라고 여겼다. 또 아사하라는 〈무〉 1985년 11월호에 사카이 가쓰토키의 예언서 〈신비의 일본〉에 근거하여 초능력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영적으로 진화하기 위한 돌인 ‘히히이로카네’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투고했다. 1987년, 도쿄도 시부야 구에서 도장을 〈옴신선회〉로 개칭했으며, 종교 단체 〈옴진리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뉴욕 지부도 설립하였으며, 1989년 8월 25일, 도쿄도에 종교 법인으로 인증되었다. 아사하라는 티베트 망명 정부의 일본 대표인 뻬마 걀뽀(Pema Gyalpo)와 접촉하여 그의 도움으로 1987년 2월 24일 및 1988년 7월 6일에 인도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회담하였다. 아사하라 측은 양자의 회담의 모습을 비디오 및 사진 촬영해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가 ‘일본에 진정한 불교를 넓혀달라’라는 말을 아사하라에게 했다는 것을 옴진리교의 홍보 및 선전 활동에 많이 활용했다. 뻬마 걀뽀는 그후 옴진리의계를 끊고 적극적으로 대립하여, 티베트 망명 정부에게도 향후에는 아사하라와의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종교 법인으로서 인가된 후 일본 전국 각지에 지부나 도장을 설치하고 러시아나 스리랑카 등 해외에도 지부를 두고 있었다. 1989년 당시에는 약 만 명 정도의 신자가 존재했었다고 한다. 옴진리교는 기발한 선교 활동 등으로 일부에서 주목 받고 있었다. 1989년 11월에 일어난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나 1994년 6월에 일어난 마쓰모토 사린 사건, 1995년 2월 28일에 일어난 메구로공증인사무소 사무장 납치 감금 치사 사건 등에서 용의 단체라고 주목받아 그 이후 경찰에게 감시받고 있었다. 1990년 5월, 구마모토현 나미노 촌에 진출하지만 현지 주민의 격렬한 반대 운동에 직면한다. 또, 그 사건과 관련하여 국토 이용 계획법 위반 사건으로 강제 수사를 받는다. 이 사건은 옴진리교의 피해의식을 강화시켜 그 이후 일어난 사건의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또한 같은해 '진리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저조한 득표율로 교주 등 25명의 후보가 모두 낙선되었다. 검찰청 측의 주장에 의하면 1995년 3월에 경찰의 전국 옴진리교 시설의 일제 수사의 내부 정부를 입수한 옴진리교 간부는 경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도쿄 도에서 대사건을 일으키자는 일을 생각해내어, 1995년 3월 20일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켰다고 여기고 있다. 이에 따라서, 사건 자체는 내란이 아니었다고 여기지만, 내란을 일으키기 위한 시간 벌기라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오히려 옴진리교의 사건 관여에 대한 확신이 깊어진 경시청은 1995년 3월 22일에 야마나시현 가미쿠이시키 촌에 있는 옴진리교 본부 시설에 대한 강제 수사를 실시하였다. 시설에서는 사린 등의 화학무기 제조 설비, 생물무기 설비, 살포를 위한 군용 헬리콥터 등이 발견되어, 옴진리교의 특이한 실태가 밝혀졌다. 사건에 관여되었다고 지적받은 옴진리교의 간부층 신자가 잇달아 체포되었다. 도쿄 지검은 마쓰모토 치즈오 17건의 용의자로 기소했지만 그 안에 있는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메스칼린, 각성제, 마취제 등 약물 밀조(密造)에 관련된 4건에 관계된 재판의 신속화를 도모하기 위해 2000년 10월 5일, 기소를 철회하였다. 이 사건과 관계되었다고 여기는 최대 중요 용의자인 히라타 마코토, 기쿠치 나오코 ,다카하시 가쓰야 3명 모두 각각 2011년 12월 31일,2012년 6월 12일,6월 15일 경 체포되었다. 1995년 5월 16일에는 옴진리교 대표인 마쓰모토 지즈오(아사하라 쇼코의 본명)가 가미쿠이시키 촌의 옴진리교 시설에서 체포된다. 그 이후 무라오카 다쓰코 대표 대행이 되었지만, 1995년 10월 30일, 도쿄 지방 법원에 의해 해산 명령을 접수하였고, 같은 해 12월 19일의 도쿄 고등 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되자 즉시 항고하였다. 1996년 1월 30일에 최고재판소에서 특별 항고가 모두 기각되어 종교 법인으로서 해산되었다. 1996년 3월 28일, 도쿄 지방 법원이 파산법에 따라 옴진리교에 대해 파산 선고를 내린 뒤, 같은 해 5월에 확정했다. 1996년 7월 11일 공공의 이익에 해치는 조직범죄를 행한 위험단체로서 파괴 활동 방지법의 적용을 요구하는 처분 청구가 공안 조사청에서 행해졌지만, 같은 법률로 인한 중복 처벌은 헌법 위반이라는 헌법 학자의 주장이 있으며 또, 단체 활동의 저하나 법을 어긴 자금원의 감소가 확인된 것들로 인해 처분 청구는 1997년 1월 31일, 공안 심사 위원회에 의해 기각되었다. 파괴 활동 방지법 처분 청구 기각 후, 옴진리교는 태도를 바꾸어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우리는 아직 옴진리교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등의 도발적인 포교 활동을 실시하거나 컴퓨터 판매를 통하여 자금 조달을 진행하였다. 한편,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옴진리교가 한 증거가 없다’는 말을 하는 등 일체의 반성도 하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도 응하지 않았다. 옴진리교의 이러한 자세는 사회의 강한 저항을 불러모아 나가노현 기타사쿠 군 기타미마키 촌에서 벌어진 주민 운동을 계기로 옴진리교 반대 운동이 전국적인 고조를 보여 국회에서도 옴진리교 대책법으로 무차별 대량 살인 행위를 실시한 단체의 규제에 관한 법률 이른바 〈옴진리교 신법〉 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2000년 2월 4일, 옴진리교를 모체로써 바로 작년에 출소한 조유 후미히로를 대표로 한 〈종교 단체 알레프〉가 설립된다. 알레프는 2003년 또 한 번 〈종교단체 알레프〉라고 개칭했으며, 2008년 5월 20일에는 또 한번 〈알레프 (Aleph)〉라고 개칭한다. 〈알레프〉라고 개명한 이후에 같은 이름이 존재하지만 옴진리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업이 옴진리교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에 피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그만둔 신자와 현 알레프 신자에 대한 전입계의 접수 거부나 퇴거 권고·취입학 거부 등 지방 자치 단체에 의한 위법 행위로서 사회 문제되고 있다. 주민표 불수리 재판은 모두 지자체 측이 지고 있다. 아사하라의 재판은 간부의 증언만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이에 대해, 아사하라는 ‘제자들이 마음대로 행한 일이다’라는 주장을 일관하였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은 TBS 간부가 옴진리교 간부 하야카와 기요히데에게 옴진리교를 비판한 촬영물을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TBS는 이 사건에 대하여 빌미를 제공한 것에 대하여 사과했다. 2011년 11월 21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사린가스 제조에 관여한 혐의로 1,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수의사 출신 교단 간부 엔도 세이치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2006년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비롯, 핵심 주모자 13명의 사형이 확정됐고 5명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2016년 4월 10일에 러시아에서 옴진리교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정황을 수사 당국이 포착해 압수수색에 나섰다. 그 결과로 모스크바 등의 주요 도시의 옴진리교 신자들의 숙소 20곳 이상을 압수수색해서 일본인과 러시아인 등으로 구성된 60명을 구속했다. 그리고 숙소에서는 종교 의식에 사용된 책자, 도구와 용 그림이 그려진 옷 등의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2018년 7월 6일에는 옴진리교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를 비롯한 간부 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군산 서해훼리 소속의 110t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사고로, 292명의 사망자를 냈다. 1990년 10월 건조된 110톤급 철선이다. 길이 33.9m, 폭 6.2m에 평균 시속 12노트로, 부안과 격포 사이를 1일 1회 정기 운항하였다.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 221명이었다.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9시 40분경 362명의 승객과 화물 16톤을 적재하고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부안 격포항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10시 10분쯤에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났고, 회항하려고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에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면서 곧바로 전복되고 침몰되었다. 서해훼리호에는 9개의 구명정이 있었으나, 그중 2개만이 작동되었다.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정에 나누어 탔고, 부유물에 매달렸다.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하였다. 사고가 난 1시간여 후,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와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어, 10월 10일 22시까지 모두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하였으나, 시신의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수가 크게 늘어났다. 10월 15일에는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발견되었고,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선체의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 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다.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였으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하였고,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 낚시용 아이스박스와 파카 잠바가 구조에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연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 사고에 비해 생존자가 많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기상 여건이 좋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운항한 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악천후였지만 예보 내용을 따른다면 규정상 출항이 가능한 여건이었고,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으나 일부 승객들이 출항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선박의 운용에도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승객은 정원을 초과하였고, 승무원은 규정된 인원보다 부족했다. 사고 직전 배가 흔들린 후에 승객들에 안전하게 선실에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커졌다는 일부 생존자들의 주장, 선박 회사가 연료를 줄이기 위해 위험한 항로를 운항했다는 현지 주민의 주장도 있었다. 배가 급회전한 것은 조종 미숙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열악한 운용 환경이 지적되었다. 승객에 비해 운항 횟수는 적고, 선박 회사가 크게 의존하던 국가 보조금도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업체가 영세하고, 선장이 업자의 눈치를 보는 환경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선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배의 구조가 불안정했지만, 1990년에 선박기술업체의 복원력 시험에 통과했었다고 보도하였다. 12월 1일, 해양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의 발표에서, 선박의 구조에는 문제가 없고, 정원 초과와 과적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2월 13일, 사건을 수사한 전주지검에서는 초과 승선과 과적, 운항부주의, 방수구(放水口) 부족 등이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발표하였다. 희생자들 중에는 위도면 주민들이 60여 명으로 가장 많았고, 군의 전산화를 담당하던 영관급 장교들 외 군 장교 10여 명을 포함하여 위도에서 낚시나 단합대회를 하거나 할 예정이었던 사람들이 단체로 희생되기도 했다. 유가족들에게는 합의에 따라 사망자 1인당 9,910만원을 지급한다고 보도되었다. 사망자 보상 금액은 모두 282억 원이었으나, 서해훼리호의 배상 능력이 10억 원 뿐이었고 해운공제조합에서 73억 원만 지급되어, 국민성금에서 남은 93억과 재해의연금으로 나머지 금액을 충당하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정원 초과로 악천후에 선박을 운행하는 것을 ‘준 살인행위’, ‘자살 운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0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를 ‘후진국형 인재(人災)’라 주장하였다. 승객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등, 대책본부의 운용에도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고, 해경의 초기 대응이 늦었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정부 주도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모금이 진행되었으며, 문책인사로서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 군산지방해항청장이 해임되었다. 교통부와 해운항만청의 관계 공무원 38명이 문책되었고, 해운조합이사장도 해임되었다. 당시 여객선 회사가 여객선에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서 시체가 무리지어서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죽음의 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장면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판소리 ('판소리', )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발림)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소리’는 ‘음악’을 말하고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구광대가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긴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가며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한국 전통음악의 하나이다. 일정한 극적 내용을 광대 혼자 육성과 몸짓의 창극조로 한국 향토의 선율을 토대로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켜 연행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당초에 '소리'라는 범칭으로 불리었으며 타령, 잡가, 광대소리, 극가(劇歌). 창극조(唱劇調) 등의 용어로도 통용되었다. 1964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11월 7일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판소리는 창(唱)의 문학의 한 형태로서, 특히 한국에서 18세기 부터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음악 예능의 한 형태이다. 판소리는 판+소리의 합성어로서 원래는 판놀음 속에서 부르는 소리를 말했다. '판놀음'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을 일컫기도 하고 근두(筋斗), 줄타기 등을 하는 놀음 전체를 말하기도 하였다. 순조시대의 판놀음에는 새면(樂子)에 의한 음곡(音曲)과 더불어 시조와 판소리(本事歌)가 들어갔다. 그러므로 판소리를 보통 창극(唱劇)·창극조(唱劇調)라고 말하는 것은 적당한 용어가 아니다. 창극은 원각사(圓覺社) 이후 판소리가 극화(劇化)된 뒤의 명칭으로는 그런대로 근거가 있으나 순수한 판소리의 명칭으로는 적당치 않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창극조는 이런 창극에서 부르는 가락이라는 음악적 용어로서는 적당하나 판소리의 형태적 면에서는 역시 적당치 않다. 이상을 통해서 판에서 부르는 소리라는 뜻의 판소리는 판놀음이란 용어에서 독립해서 나온 음악 용어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판소리의 문학적 조사(措辭) 내지 문자로 정착된 형태를 판소리사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음악적 용어로서의 판소리와 문학적 용어로서의 판소리사설을 구별하여야 하겠지만, 시조(時調)처럼 이를 통용하여 '판소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판소리의 장르적인 유형은 중세기 시대에 동서양에 편재했던 음악과 문학 형태이다. 중국에 있어서도 당대의 변문(變文)에서 시작된 강창류(講唱類)가 송대에는 평화(平話)로서 발전했던바, 이는 설창인(說唱人)들이 이야기와 창(唱)을 섞어 대중에게 고사(故事)를 들려주는 서사문학(敍事文學)이었다. 이것이 금대에 와서는 제궁조(諸宮調)라는 한국 판소리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발달하여, 여기서 다시 잡극(雜劇)으로 창극화(唱劇化)되어 원곡(元曲)으로 넘어가고 애초의 평화(平話)는 창사(唱詞)로서 청(淸) 말까지 전승되기도 하고, 창을 잃고 소설로서 명·청시대에 크게 성행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도 중세기 이후 음유(吟遊)시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성당의 수도사들이 라틴어가 아닌 토속어(lingua romana)로 그 성당의 내력에 대해 순례자를 위해 부른 것이 무훈시인 샹송 드 제스트(changson de geste)이고, 로맨스도 광장이나 살롱에서 여러 사람을 위해 노래 부른 형태에서 발달한 것이다. 이런 문학과 음악과의 협동으로 생성된 서사시 형태는 어느 민족에게도 있었다. 이는 10세기 전후에서 14, 5세기 전후에 걸친 중세기 공통의 문학형태인데, 한국의 판소리는 문자로 형성된 소설이 먼저 나오고, 이런 판소리 형태가 18세기에 이르러 나온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판소리가 무당의 남편인 광대(廣大)에게서 나왔다고 하면 그 음악적 소원(溯源)은 그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보형이 나눈 무가의 가락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판소리의 계면조(界面調)는 시나위권에서, 우조(羽調\)는 가곡(歌曲)·정악(正樂)에서, '경드름'은 경기 민속악에서 그 원류를 잡고 있다. 또한 경드름은 경기 북부무가의 창부타령(倡夫打令)의 가락과 흡사하다는 설이 있다. 다시 판소리의 가락은 그 박자(拍子)의 느린 것으로부터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 등의 템포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용어 '모리'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즉, 시나위조로 부르는 전라도 지방의 살풀이 굿이나, 경기도·충청도 지방에서 부르는 도살풀이(女唱)·도살모리·발래 등과 전기 판소리 가락을 비교하면 다같이 중모리·중중모리로 진행하는데 특히 남자무당, 즉 광대가 부르는 고사소리는 옛날의 홍패고사(紅牌告祀)나 요즈음의 성조(成造)·안택(安宅) 등에서 중중모리·중모리·자진모리 등의 템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 가설, 즉 충청도 광대에서 판소리가 생성됐다는 이론에 상부되는 것이 바로 이 남무(南巫)인 광대가 부르는 홍패고사·성조·안택 등의 무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욱 밝혀져야 할 문제이나 이런 것으로 보더라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독서성(讀書聲)에서 판소리가 나왔다고 하는 추리는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대는 민속창자이기 때문에 이런 무가의 가락을 근간(根幹)으로 하여 여러 민속창을 섭취하여 이를 완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성립 당시는 무가의 가락을 원용하였다 하더라도 그 전승과정에서 이를 순화하고 판소리로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므로 오늘날의 판소리가 고도의 음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판소리가 하나의 민속음악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완성의 단계에 이른 시기는 대체로 조선왕조 숙종 조로부터 영조 조까지의 시기라 생각된다. 또한 판소리의 전성시기는 대개 정조 조로부터 철종 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18세기 말경에서 19세기 초까지가 그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저 유명한 판소리 작가이며 이론가인 신재효와 8명창(八名唱) 등이 배출(輩出)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판소리에는 열두 소리가 있는데 이를 열두 마당이라고도 한다. 1810년경 간행된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본사가(本事歌) 대목을 보면, 판소리의 열두 마당을 <춘향가(春香歌)> <화용도타령(華容道打令)> <박타령>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변강쇠타령> <왈자타령(曰字打令)> <심청가(沈淸歌)>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옹고집타령(甕固執打令)> <가짜신선타령> <토끼타령> <장끼타령> 등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철종 때(1852)에 제작된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 서(序)에도 판소리에 12강(十二腔)이 있음을 기록하였고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도 판소리에 열두 판(마당)이 있음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 열 마당은 <관우희>의 것과 같으나 다만 <관우희>의 <왈자타령>을 <무숙이타령>이라고 하고, <가짜신선타령>을 <숙영낭자전>이라 한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상의 근거로써 최소한 1810년 이전부터 판소리에 열두 판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재효 때에 내려와서는 그 대부분이 불리지 않았고 그 후에도 차차 줄어서 지금은 겨우 다섯 마당이 불리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적벽가)> <박타령(흥부가)> 등은 실제로 불리고 있는 것들이며,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등은 사설(唱本)만 전해오고 있을 뿐 실제로 불리지는 않는 것들이다. <강릉매화타령> <왈자타령(무숙이타령)>은 창본도 전해지지 않고 물론 불리지도 않는 것들이다. 그 중 <숙영낭자전>은 근세의 명창 정정렬(丁貞烈)제가 불리고 있는데 이것이 정정렬 작곡의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것과 철종·고종 시의 명창 전해종(全海宗)의 <숙영낭자전>의 가락과 사설의 전승 관계는 애매한 바가 있다. 판소리의 마당수가 앞에서 열거한 여러 전적(典籍)들에 의해 열두 마당으로 되어 있는 것은 판소리가 꼭 열두 마당뿐이었다는 것보다는, 선인들이 민속적으로 '열둘'이란 숫자를 좋아한 데서 판소리에서도 열두 마당으로 맞추어 일컫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판소리의 레퍼토리는 열둘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나 혹은 이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현재 불리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 하여 열두 마당에서 독립시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다섯 마당에는 역대 명창들의 '더늠'이 전해지고 있다. <숙영낭자전>은 정정렬(丁貞烈), <장끼전>은 김연수(金演洙)가, <변강쇠전>은 박동진이 복원하여 불렀으나 열두 마당 시절의 가락을 전승한 것은 아니며 새로 편곡하여 부른 것이다. 판소리는 민속연희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기록이 없고 향반들의 방증(傍證)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광대이므로 광대의 사회적 신분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광대는 일명 화랑(花郞)·재인(才人)이라고 하여 중세기의 연예를 맡았던 우인(優人)이다. 그들은 소위 '사니'계급에 속하는 일종의 천민이며, 무속의 담당자인 무당의 남편이었다. 그들은 호적에 우인(優人)이라 표기되며, 대기 군아(郡衙)의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무계라는 그들 계급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군아에서 잔치를 할 때는 재인(才人)으로 봉사케 하고 군수가 나들이 할 때는 그들에게 고취(鼓吹)를 잡히어 악기를 연주케 하고 1년에 한 군에서 몇 명씩 악공으로 서울에 올라가 한두 달 연습을 하고 궁중의 나례(儺禮)를 치르게 하였다. 또 명이나 청국의 사신이 오면 산대잡희를 이들로 하여금 연출케 하였다. 평상시에는 무당의 남편으로 아내인 무당이 굿을 할 때 북을 쳐주는 조무(助巫)로 봉사했고, 무당이 창을 하면 이와 간투적(間投的)으로 '만수바지 창법'을 사용하여 흥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남의 집 잔치에 나가서 잡희를 하고 과거에 합격하고 내려온 신급제(新及第)의 3일유가(三日遊街)나 문희연(聞喜宴) 땐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고서 전도(前導)를 하는 등, 조선사회에선 우인·창자(唱者)로서 연예문화에 봉사해온 것이다. 이 중에서 그들의 중요한 소임은 인조 이후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희자(戱子)로서 가면극을 연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산대도감극은 대화와 창(唱)과 춤(舞)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소박하나마 하나의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이 스토리를 여러 사람이 협동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설명을 해가며 그 장면 장면을 노래와 대사로 엮어 갈 때 '배뱅이굿' 같은 형태의 그 무엇이 생성(生成)된다. 그 무엇이 바로 판소리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판소리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불리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조선창극사》에는 1930년대의 여러 명창들이 증언한 것을 토대로 하여, 판소리는 숙종 말에서 영조 초에 걸쳐 하한담(河漢潭)과 결성(結成)의 최선달(崔先達)에 의하여 시창(始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묘연하다. <목천읍지(木川邑誌)>에 우인의 이름으로 하한돌(河漢乭)이 <효행(孝行)편>에 나오고 결성에 해주최씨가 살고 있으나 그곳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우춘대(禹春大) 다음에 권삼득(權三得)이 나오는데 이 권삼득은 생원(生員)이라고도 하며 전북 완주군(完州郡) 안동 권씨(安東權氏) 향반(鄕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영조 47년(1771)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판소리문학에 내재된 그 문학성을 해명하는 데는 이런 향반 자제의 참가가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대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판소리사(史)는 세 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첫째 시기는 시창기(始唱期)에서 영·정조대까지의 형성기, 둘째 시기는 고종 때까지의 전성기, 그리고 셋째 시기는 고종 말기 이후로 그 쇠잔기라 할 수 있다. 판소리의 시창기(始唱期)에서 영조·정조대까지이니, 이 당시의 문헌으로는 영조 30년 만화본(晩華本) <춘향가>가 현존하여 있고 그 2년 뒤에 양주익(梁周翊)의 <춘몽연(春夢緣)>이 쓰여졌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이 당시의 광대로는 하은담(河殷潭:河漢潭), 최선달(崔先達), 우춘대(禹春大) 등이 있으나 그 자세함이 전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는 판소리의 전성기로서 정조대부터 고종대까지라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기록으로는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활약하던 광대는 우춘대(禹春大)이고 권삼득(權三得)과 모흥갑(牟興甲)은 당시 젊은 가객(歌客)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소위 열두 마당이 이미 정립되어 있었고 <관우희>는 그의 아들의 등과(登科)에 따른 문희연(聞喜宴)에 광대를 부르지 못하여 이 글을 지었다는 것이다. 순조 26년에 이루어진 신자하(申紫霞)의 <관극시(觀劇詩)>에는 고·송·염·모(高素寬·宋興祿·廉啓達·牟興甲)의 명창 외에 김종운(金鍾運)의 존재를 밝혀주고 있다. 이 당시의 고문서론 순조 25년의 <갑신완문(甲申完文)>과 순조 27년의 <정해소지(丁亥訴志)>가 있어 당시의 창자들의 이름과 무계를 조직하고 있는 상황으로 재인(才人)들이 각 도에서 서울로 올라가 칙행(勅行), 즉 청국 사신이 올 때에 잡희(雜戱)를 연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광대가 나례산주(儺禮山主)로서 판소리를 하는 동시에 나라에서 요구하는 잡희(雜戱)에 동원되어 외국사신 접대에 배우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을 명시해 주고 있다. 다음은 철종 3년에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가 이루어져 열두 마당과 그 연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판소리의 사적 전개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은 고창(高敞)의 신재효이다. 그는 순조 11년(1811)에 나서 고종(高宗) 갑신년(甲申年:1884)에 죽었다. 그는 고창에서 관약방(官藥房)을 하던 광흡(光洽)의 아들로, 나중에 호장(戶長)을 사서 아전(衙前)이 되었지만 그의 할아버지대만 하더라도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었다. 그는 중년에 집이 요부(饒富)하게 되니 광대의 후원자 노릇을 하고 다시 판소리 여섯 마당 <춘향가>(南唱·童唱), <토별가(兎鼈歌)> <심청가(沈淸歌)> <박흥보가(朴興甫歌)> <적벽가(赤壁歌)> <변강쇠가(卞強釗歌)>와 그 밖의 많은 가사를 창작하기도 하고 개작(改作)하기도 하였다. 이 신재효의 존재로서 광대가 아전과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판소리 사설을 다듬어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 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한시(漢詩)·한문을 위시해서 소위 유식한 성귀(成句)들은 사실 아전의 가필(加筆)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그는 <광대가(廣大歌)>에서 판소리의 이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서 송흥록(宋興祿)·모흥갑(牟興甲)·권삼득(權三得)·신만엽(申萬葉)·황해청(黃海淸)·김계철(金啓喆)·주덕기(朱德基)·송광록(宋光祿)·고소관(高素寬) 등의 조격(調格)을 비유하고 있다. 이 시대는 판소리의 황금기로 위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시골 백성에 이르기까지 판소리를 애호했고 또 당시의 소설 사본·판본의 출현에 힘입어 이런 사설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나온 텍스트만 하더라도 <춘향전(春香傳)>에 30종, <심청전>에 10여종, <흥부전>에 10여종, <토별가>에 20여종, <장끼타령>에 10종의 텍스트를 남겨 놓고 있다. 대개 이 시대에 속하는 광대 창자(唱者)만 하여도 《조선창극사》에 70∼80명이 실려 있다. 조선 고종 말기 열강의 침략과 더불어 국정이 어수선하여지고, 또 일본에 건너갔다 온 이인직이 원각사에서 신파극 운동을 일으키자 여기에 자극받은 판소리 가객(歌客)들이 1인창(一人唱)이었던 판소리를 극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판소리는 창극이 된 것이다. 이때에 활약한 인사들이 송만갑·이동백(李東伯) 들이니 이들은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나라 잃은 울분을 판소리에 담아 노래했고, 1930년대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후배를 양성하였으니 김연수(金演洙)·박녹주(朴綠珠)·김소희(金素姬) 등의 창작들은 대기 당시에서부터 판소리의 최후의 명맥을 이어 온 사람이다. 사실 판소리는 광복 후에 민족음악, 국악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젊은 층의 기호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20세기가 지나면서 판소리는 다양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창극과 마당극이 있다. 20세기에 나타난 판소리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로 꼽히는 것은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장르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마당극은 여러 배우와 다양한 악기가 등장해 일반 연극과 흡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 계면조를 선호하게 되고,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파간 경계가 무너졌으며, 여성 명창이 등장하였고, 장단 구조가 변용되었으며, 전조(길바꿈) 기법이 확대되었다. 판소리의 유파는 사사관계(師事關係)와 출신지역에 따라 갈라진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되어 오는 동안 각기 노래의 흐름과 가창법, 이론 등이 확립되었고, 큰 줄기에서 갈리어 나간 몇 개의 작은 유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판소리의 유파는 동편제와 서편제의 양대산맥으로 크게 분류되었는데, 판소리에서 유파를 제(制)로 표현하는 것은 시조(時調)에서 경제(京制)·영제(嶺制)·완제(完制)·내포제(內浦制) 등 제(制)로써 유파를 분류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바가 있다 판소리는 지방에 따라 동편제와 서편제 외에도 중고제로 나눌 수 있다.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인 운봉, 구례, 순창, 흥덕 지역을 기반으로 웅장하고 씩씩하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아니리가 길게 발달하지 않았고, 빌림도 별로 없고 목을 내는 통성에 의지하여 연행하는 소리재이다. '대마디 대장단'이라는 말고 같이 장단에 소리를 맞춰서 붙여 나간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광주 나주, 해남, 보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유파의 소리를 지칭하며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음악적 특징은 계면조를 주로 써서 슬프고 원망스런 느낌을 애절하게 잘 그려내며,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고 감칠맛 나는 소리를 그려낸다. '비동비서'라 하여 소리 스타일이 중간적이며 창을 할때 비교적 낮은 음성에서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한계점에 이르렀을때 음성을 낮추어 부른다. 소리의 높고 낮음이 분명하여 명확히 구분하여 들을 수 있으며 곡조가 단조롭고 소박한 맛이 있다. 판소리 공연은 《광대》와 《고수》, 그리고 《청중》이 같이 한다. 광대(소리꾼)는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노래를 하는데, 노래하는 부분과 말로하는 부분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노래하는 부분을 소리, 말로하는 부분을 아니리, 연극적 동작을 하는데 이를 발림 혹은 너름새라고 한다. 고수는 광대의 소리에 북을 쳐서 반주하면서, 소리 중간중간에 '얼씨구', '좋다' 따위의 추임새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연행자이다. 흔히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소리판에서는 소리꾼과 광대가 함께 판을 이끌어 나간다. 청중은 조용히 듣고 있기보다는 ‘추임새’를 넣어 준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하는 이가 서서 '소리(唱)'와 '발림(科)'을 섞어가며 긴 사설(辭說)로 연출해 나가고 한 사람의 북반주하는 이가 앉아서 북장단을 치며 소리에 반주하고 '추임새'로 흥을 돋운다. 소리하는 이를 옛날에는 가객(歌客)·광대(廣大)·창우(倡優)라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두루 쓰이는 말이 없다. 창우의 복색으로는 창의에 갓을 썼다.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반드시 부채와 손수건을 들었다. 갓으로는 갓놀음을 하였고 부채로는 발림을 돋운다. 고수는 두루마기에 갓을 썼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하는 이와 한 사람의 북치는 이에 의해서 연출되므로 판소리의 음악은 소리하는 이의 소리 가락과 북치는 이의 북가락에서 형성된다. 판소리 가락은 대목에 따라 일정한 장단(長短)으로 되었고 고수는 이 판소리 가락에 따라 장단을 친다. 판소리 가락은 대목에 따라 일정한 장단으로 부르되 기본적인 리듬으로 부르는 이른바 '대마디 대장단'으로 부르기도 하고 변형된 리듬으로 부르는 이른바 '엇붙임'으로 부르기도 한다. 판소리 가락은 또 그 음구성·선율형·악상의 표출에 따라 여러 가지 조가 쓰인다. 진양·중모리·자진모리 등 일정한 장단에 소리가락(旋律)으로 사설을 불러 나가는 것을 말한다. 소리는 '말조'로 할 때도 있으나 대부분은 일정한 음조직을 갖는 조(調)로 된 가락을 부른다. 장단의 느리고 빠름은 긴박과 이완을 나타내고 조의 변화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나타내는데 판소리 사설에 나타난 극적 상황에 따라 장단과 조를 적절히 배열하여 부른다. 판소리의 창우가 갓으로 하는 발림의 일종. 머리를 교묘하게 끄덕여서 번쩍 번쩍하는 통양갓의 움직임으로 소리가락에 따른 액센트를 주는 멋진 발림을 하였다. 오늘날에는 갓을 쓰지 않으므로 갓놀음의 전통이 끊어졌다. 판소리하는 창우가 장단을 변하여 소리를 낼 때 부채를 말아 그 끝으로 고수에게 향하여 리듬을 치며 소리를 냄으로써 고수에게 장단을 지시하는 발림의 일종으로 장단마다 이것을 쓰는 것은 아니다. 장단이란 반복되는 북의 일정한 빠르기의 리듬형을 말하는데 판소리 가락의 빠르기와 박자(拍子)에 따라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세마치 등이 쓰인다. 이 밖에 휘중모리·단중모리·평중모리·닷모리 등이 있으나 이것들은 위의 장단의 변형이므로 따로 취급하지 않는다. 판소리에는 무용에서나 잡가(雜歌) 혹은 무가(巫歌)에서 쓰이는 굿거리·타령·덩덕궁이·살풀이 따위와 같은 장단은 쓰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판소리 장단의 특징은 소리가락에 따라 밀고, 달고, 맺고, 푸는 법이 분명한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것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 잡가나 기악에서 보이는 장고(長鼓) 장단을 쓰지 않고 반드시 북장단을 쓴다. 고수는 오른손에 북채를 쥐고 북의 오른편 굴레와 북통을 치고 왼손은 엄지를 왼편 변죽에 걸치고 손바닥으로 북의 왼편 굴레를 친다. 장단은 반드시 오른편 굴레와 왼편 굴레를 마주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쌍(雙) 혹은 합(合) 혹은 합궁이라 하는데 구음(口音)으로는 대개 '덩'이라 하기도 하고 '합'이라고도 한다. 채로 북통을 칠 때는 '채' 혹은 '편(鞭)'이라 하는데 구음으로는 대개 '딱' 혹은 '딸그락'이라 하며, 크게 치는 '딱'은 소리가락을 맺는 데 친다. 왼손으로 북의 굴레를 치는 것을 '북' 혹은 '고(鼓)'라 하는데 구음으로는 '궁'이라고 부른다. 소리가락의 시작은 '덩'을 크게 치고 소리가락이 다는 것은 '딸그락'을 치며 소리가락이 맺는 것은 '딱'을 크게 치고 소리가락을 푸는 것은 '궁'으로 푼다. 판소리 가락에는 우조·계면조·평조·경드름·설렁제·석화제·추천목 등이 있어서 판소리 사설의 내용에 따라 이를 적절히 배합하여 극적 상황에 따른 음악적 변화를 준다. 이것들은 판소리 가락에 쓰이는 음구성(音構成)·가락형(旋律型)·발성 및 악상 표현 방식에 따른 특징으로 결정된다. 판소리에서 부르는 이의 음질(音質), 창법 및 가락형에 따라 무슨 목, 무슨 성하고 이름지어 부른다. 대개 목은 가락형과 창법에 관계가 깊고, 성은 음질과 관계가 깊다. 가볍게 발성하고 가락에 물을 들인다 하여 여러 가지 장식적인 맛을 들이는 것으로, 육자배기와 같은 가락장식이나 창법을 쓰는 것을 말하는데, 명창들은 이를 꺼리고 있다. 어느 조에서 그 조의 일반적인 구성음이 아닌 음이 쓰이거나 일시적인 변청이 되는 것을 말한다. 좀 껄껄하고 쉰 듯하여 설득력이 강한 명창의 음질. 송만갑, 정정렬이 수리성이었다. 금이나 옥을 굴리는 듯 맑은 소리를 말한다. 판소리 명창이란, 판소리 창자(唱者) 가운데 뛰어나게 잘 부르는 사람을 일컫는다. 판소리의 최고 문헌은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실린 <춘향가>이다. 판소리 명창의 최고인은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나타난 우춘대(禹春大)·권삼득·모흥갑과 <갑신완문(甲申完文)>에 나타난 하은담 등으로, 근세 조선의 영조·정조 때의 사람들이다. 우춘대·하은담 이전에도 판소리의 명창이 있었을 것이나, 문헌으로만 남아 있거나 구전되지 않고 있다. 순조 때는 뛰어난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에 여러 가지 조를 구성하고 더늠을 형성시켰는데 권삼득·황해천(黃海天)·송흥록·방만춘·염계달·모흥갑·김계철·고소관·신만엽·송광록·주덕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 여덟을 골라서 8명창(八名唱)이라 부른다. 이들 명창들의 이름은 신재효의 <광대가(廣大歌)>에도 보인다. 이 무렵부터는 소리에 중점을 두는 '소리광대'가 나타나서 '아니리'에 중점을 두는 재래의 '아니리 광대'와 구별되었던 것 같다. 철종·고종 초기는 판소리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김창록·장자백·김찬업·이창윤 등 기라성 같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를 고도의 예술적인 경지로 이끌어 놓았다. 이들은 사사관계와 지역적인 지연관계에 의하여 여러 유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중에 여덟을 골라서 후기 8명창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종 말기와 일정 초기는 판소리의 결실기인데 한편으로는 원각사 이후 창극이 성행하게 되자 판소리는 반대로 쇠운(衰運)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각 지방의 명창들이 서로 왕래하므로 판소리의 유파는 차츰 그 특색을 잃어 갔다. 이 시기에 활약한 명창들은 박기홍·김창환·김채만(金采萬)·송만갑·이동백·유공렬(柳公烈)·전도성·김창룡·유성준·정정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명창에서 다섯을 골라 5명창이라 부른다. 5명창의 바로 뒤에는 장판개·이선유·김정문·박중근·공창식·이화중선·임방울·강장원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하였으나 창극에 휩쓸리고 서양음악에 밀려, 판소리는 후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후대의 명창으로는 박녹주·김연수·정광수·김여란·박초월·김소희·박봉술·박동진·박귀희·정권진·한애순(韓愛順)·장영찬 등이 있다. 이들은 사라져 가는 판소리를 부흥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정부와 사회의 적절한 대책이 없다면 사라져 버릴 위기에 직면했다. 그래서 이 중 박녹주·김연수·정광수·박초월·김여란·김소희·박귀희·정권진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세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창들이 작고한 후에 조상현·박송희·송순섭·성창순·성우향·오정숙·남해성·신영희·안숙선 등이 2세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난초, 유수정, 정회석, 윤진철, 왕기철, 왕기석, 채수정, 유미리, 이주은, 염경애 등 수많은 중견 명창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다. '판소리'란 광대가 한 손에 합죽선을 멋있게 들고 온갖 너름새를 곱게 섞어가면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로써 보는 이에게 연극적 효과를 전달하는 한국 특유의 예술형태 중 하나이다. 연극이 상연되자면 각본이 있어야 하고 그 각본은 원전희곡(原典戱曲)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판소리도 광대에 의하여 소리가 되려면 그 이전에 '판소리 사설(辭說)'이 있어야 하며, 이 판소리 사설을 기록한 문서를 '판소리 창본(唱本)'이라 한다. 즉 판소리에 있어서 창본은 연극에서의 희곡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 창본에는 연극의 희곡이 갖지 못한 큰 특색이 있는데 그것은 희곡이 누구에 의해서든 상연될 수 있는데 반하여 판소리 창본 중에는 특정된 광대를 위한 창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창본을 '유명창본(有名唱本)'이라 부르며 특정된 광대가 없는 '무명창본(無名唱本)'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송만갑 창본'이라 하면 그것은 송만갑이 부르던 판소리의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송만갑 자신의 창작적 작품은 아니다. 물론 광대 본인의 작품인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뛰어난 문사(文士)나 후원자가 지어준 것들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광대들은 문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립(定立)된 창본들은 대개 구구전승(口口傳承)으로 후대에 이어온 것(無名唱本)이거나 문사들이 어떤 특정된 광대를 위해 지어준 것(有名唱本)이다. 판소리의 창본은 그 전승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즉 몇 백년동안 전승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동안 창본의 내용에 있어 약간의(때로는 상당한) 변이(變異)현상이 일어난다. 가령 초기의 <춘향가>는 3시간이면 그 한 마당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인데 오늘에 와서는 8시간 반을 부를 만큼 내용이 대폭 부연되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판소리의 창본은 동일 계보의 창본일 경우에도 차츰 많은 창본이 파생된다. 판소리 열두 마당에 대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현재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를 꼽는데, 이 중에 창본에 관한 기술이 없으므로 1810년대 이전의 창본에 대해선 그것이 어느 광대의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1810년 이후의 문헌에서도 뚜렷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전에 의한 것으로 누구누구의 창본이라 하여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사본 또는 전사본(轉寫本)의 창본이 몇 개 있으며, 유진한(柳振漢)의 <만화문집(晩華文集)>에도 그것이 누구의 창본이라고는 밝히지 않은 채 <춘향가>가 실려 있다. 창본은 크게 무명(無名)의 창본과 유명(有名)의 창본으로 나뉜다. 즉 완판본(完板本)인 <별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 세창서관본(世昌書館本)인 <원본 별주부전> 등등은 누구의 창본인지 알 수 없는, 즉 무명의 창본들이며, 신재효(申在孝) 창본인 <판소리 여섯마당> <방만춘(方萬春)창본> <송만갑(宋萬甲)창본> 등은 주인이 뚜렷한, 즉 유명창본(有名唱本)들이다.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로 《서편제》(1993년), 《휘모리》(1994년), 《천년학》(2007년)이 있다. 당대 최고의 가수로 명성을 떨쳤던 김현정은 판소리를 배운 경험을 창법에 접목시켜서 당대 최고 수준의 가창력을 선보였다. 23880 통일 23880 통일(23880 Tongil)은 태양계의 소행성이다. 공전 주기는 4.36년, 이심률은 0.17, 태양과 가장 가까울 때의 거리는 약 3억 3천만 km이다. 1998년 9월 18일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이 연천에서 발견했다. 한국인이 처음으로 발견한 소행성이다. 소행성 소행성(小行星,Asteroid)은 목성 궤도 및 그 안쪽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행성보다 작은 천체이다. 태양계 밖에서도 소행성을 정의할 수는 있으나, 당분간 발견될 가능성은 없다. 처음으로 발견된 소행성은 세레스이며, 일부 소행성은 그 자신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가스로 된 코마나 꼬리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혜성과 구분되지만, 일부 소행성은 과거에 혜성이었다. 그래서 목성 궤도 밖의 천체를 포함해 소행성체로 구분한다. 대부분의 발견된 소행성은 화성과 목성 궤도 사이의 소행성대에 존재한다. 소행성대는 태양으로부터 2.2에서 3.3 AU에 있다. 목성 트로이군으로 불리는 소행성 무리는 목성의 라그랑주점 L와 L 주변에 위치한다. 이 영역에서 가장 큰 소행성은 624 헥토르이다. 2005년까지 약 2000개의 소행성이 발견되었으며, 소행성대에 분포하는 소행성 수의 절반 정도가 이곳에 있으리라 보인다. 433 에로스와 같은 지구 근접 소행성도 있다. 색, 반사도, 그리고 스펙트럼형에 따라 C형, S형, M형으로 흔히 구분한다. 약 75%의 소행성은 C형으로, 반사도가 낮아 매우 어두우며, 광물에 의한 강한 흡수선에 보이지 않는다. 나머지 소행성은 대부분은 S형인데, 감람석에 의한 강한 흡수선이 나타난다. M형은 철이나 니켈에서 나타나는 스펙트럼을 보인다. V형은 4 베스타와 일부 소행성에서 나타나는데, S형에 비해 휘석에 의한 강한 흡수선이 보인다. 대부분의 소행성은 관성주축 가운데 최단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 이는 최단축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 가장 에너지가 낮은 상태이며, 이 상태로 떨어지는 시간이 대체로 짧기 때문이다. 자전 주기는 소행성의 크기에 따라 특징적인 분포를 보여준다. 지름이 200미터보다 큰 것들의 자전 주기는 대부분 2.2 시간보다 짧지 않은데, 이는 이러한 소행성의 내부가 중력으로만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단 하나의 예외(2001 OE)만이 발견되었다. 지름이 200미터보다 작은 것들은 대체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데, 이는 이들이 약간이나마 인장강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1801년 주세페 피아치에 의해 세레스가 처음 발견된 이래로, 팔라스, 유노, 베스타가 차례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소행성의 발견은 중단되었고, 1845년 아스트라이아의 발견 이후 많은 소행성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었다. 1923년에는 1000번째, 1990년에는 5000번째 소행성이 발견되었으며, 2013년 1월 30일 기준 35만3926개의 소행성에 공식적으로 숫자가 부여되었다. 탐사선이 직접 다가가서 관찰한 소행성도 다수 존재한다. 처음으로 소행성에 접근한 탐사선은 갈릴레오 호로 1991년과 1993년에 각각 951 가스프라와 243 이다를 지나가며 많은 사진을 지구로 전송했다. 이때 소행성의 첫 위성인 다크틸이 발견된다. 니어 슈메이커는 253 마틸다에 접근하는가 하면, 2001년 433 에로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2005년에는 하야부사 우주선이 25143 이토카와에 착륙하여 표본을 수집했다. 새로 발견되는 소행성은 그 시기와 순서에 따라 와 같은 임시 이름을 부여받는다. 앞의 2012은 발견된 연도이며, 첫 번째 로마자는 발견된 달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해서 24개 문자 중 하나로 표시된다. ‘A’는 1월 전기이며, ‘D’는 2월 후기, ‘Y’는 12월 후기이다. 단, 문자 ‘I’는 사용되지 않고 ‘H’에서 ‘J’로 건너뛴다. 뒤에 붙은 문자와 숫자는 해당되는 보름의 기간 안에서 그 소행성이 발견된 순서를 나타낸다. 첫 번째 발견된 소행성은 ‘A’가, 25번째 발견된 소행성에게는 ‘Z’가 붙는다. 이 경우에도 ‘I’는 건너뛴다. 26번째부터는 숫자가 붙기 시작하여, , , ..., , , 와 같은 순서대로 진행된다. 따라서 앞의 는 2012년 2월 후반기(D)에, 351번째()로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후 궤도가 확정된 소행성에게는 고유한 번호와 이름이 조합된 소행성명이 주어지며, 발견자가 원하는 경우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고유 번호는 대개 순서대로 붙지만, 간혹 예외도 존재한다. 위에서 예를 든 는 367943 두엔데라는 정식 명칭이 붙었다. 초기에 발견된 소행성에게는 대부분 새로운 이름을 붙였으나, 발견되는 소행성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따로 이름을 만들지 않고 임시 이름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재 임시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소행성 중 가장 고유 번호가 낮은 소행성은 이다. 한국과 관련 있는 소행성 목록 사람 이름을 딴 소행성 목록 오카야마번 오카야마 번()은 일본 에도 시대 비젠 1국 전역 및 빗츄 국 내의 일부 지역을 지배했던 대형 번으로, 지금의 오카야마현 오카야마 시에 속해 있었다. 비젠 번()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으며, 에도 시대 전 기간에 걸쳐서 도자마 다이묘인 이케다 가문()이 지배하였다. 번청은 오카야마 성이다. 고바야카와 가문 이케다 가문(데루마사-다다쓰구,다다카쓰 계통) 이케다 가문(종가. 데루마사-도시타카-미쓰마사 계통) 이케다가 - 2만 5천석 도자마 이케다가 - 2만 5천석 도자마 이케다가 - 1만 5천석 도자마 아코번 아코 번()은 일본 에도 시대 하리마 국 아코 군(지금의 효고현 아코 시·아이오이 시·가미고리 정) 주변을 지배했던 번으로, 주신구라()의 전설로 유명하다. 번청은 아코 성이다. 하리마 1국의 국주()인 이케다 데루마사의 5남 이케다 마사쓰나는 겐나 원년 (1615년) 3만 5천 석을 분봉받았고, 이에 따라 아코 번이 세워졌다. 간에이 8년(1631년) 마사쓰나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사요 군 히라후쿠 번 2만 5천 석의 번주였던 이케다 데루오키가 상속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데루오키는 쇼호 2년(1645년) 갑자기 발광하여 정실과 시녀 수 명을 참살했기 때문에, 영지가 몰수되어 본가인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에게 맡겨졌다. 그 해 대신 히타치 국 가사마 번으로부터 아사노 나가나오가 5만 3천 석으로 들어왔다. 나가나오는 고쿠다카의 실태에 맞지 않게 굉장한 아코 성을 구 성터의 남쪽에 축성하였는데, 준공까지 13년이 걸렸다. 이어서 조카마치의 건설도 추진하였다. 전봉과 이와 같은 공사로 인해 재정은 악화되었다. 이케다 가문()의 대부터 시작된 염전 개발을 장려하였고, 이를 정비하면서 소금을 아코의 특산품으로 삼았다. 이후 소금은 아카호의 특산품으로써 번의 재정을 지탱해 나가게 되었다(당시에는 「아카호 소금()」이라는 통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현재 현지 유적의 발굴로, 그 기원은 야요이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2대 번주 아사노 나가토모는 간분 11년(1671년) 의형과 의제에게 각각 3천 5백 석과 새로 개간한 농지 3천 석을 분봉해 주었고, 이에 따라 고쿠다카는 5만 석이 되었다. 3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다이묘의 한 사람이다. 겐로쿠 14년(1701년), 에도 성 내에서 하타모토 기라 요시히사()를 베어 부상을 입히고 할복하였기 때문에 아사노 가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의 겐로쿠 15년(1703년[1702년 아님]) 가신들에 의한 겐로쿠아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있었던 겐로쿠 14년(1701년), 아사노 가문을 대신하여 시모쓰케 국 가라스야마 번으로부터 나가이 나오히로가 3만 2천 석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5년 후인 호에이 3년(1706년) 시나노 국 이야마 번으로 전봉되었다. 그해 빗추 국 니시에바라 번에서 모리 나가나오가 2만 석으로 들어왔다. 이후 모리 가문()은 폐번치현까지 12대 165년 동안 아코 번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번을 지배하였다. 모리 가문의 지배 기간을 통해서 번의 재정은 곤궁해져 갔고, 시대가 지나서 악화 일로를 걸어가게 되었다. 이에 5대 번주 모리 다다히로는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번주 자신이 질소 검약을 행하였고 저축을 장려하였다. 이어서 염전 개발 및 양초의 원료가 되는 거먕옻나무의 식수 등 식산흥업에도 힘썼다. 그러나 재정의 재건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10대 번주 모리 다다노리는 분카 6년(1809년) 드디어 소금을 전매제로 했다. 안세이 4년(1857년, 막말) 이후, 번정 개혁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혁신파 간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번 내부는 분열되었다. 이때 일부 혁신파 번사들이 탈번()하여 조슈 번으로 달아났다. 분큐 2년(1862년)에는 양이파가 보수파의 중신을 암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번은 내부 여론이 분열된 상태에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게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의 폐번치현으로 아코 현이 되었고, 그 후 히메지 현()・시카마 현()을 거쳐 효고현에 편입되었다. 번주 가문이었던 모리 가문은 메이지 17년(1884년) 자작이 되어 화족의 반열에 올랐다. 이케다 가문 아사노 가문 나가이 가문 모리 가문(森氏) 지구 접근 천체 지구접근천체(地球接近天體, )는 지구로부터 0.3AU 이내에 접근하는 천체로 정의한다. 주로 소행성과 혜성이다. 1999년 6월, 토리노에서 열린 지구접근천체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천체의 지구와의 충돌 위협을 정량화한 토리노 척도가 공식화되었다. 2011년 11월 8일 직경 400m 크기의 소행성 가 지구에서 32만km 떨어져서 통과하였다. 2013년 2월 15일 19시 20분 경에 (협정 세계시 기준) 367943 두엔데가 지표에서 2만 7700km 떨어진 곳을 통과하였다. 이는 정지 궤도 보다도 낮은 고도다. 토리노 척도는 지구접근천체(NEO)가 지구에 충돌할 확률 및 충돌했을 경우의 예측 피해 상황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색과 수치로 표시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Binzel 교수가 제안하여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개최된 국제천문연맹 회의에서 채택되었고, 2005년에 설명문이 개정되었다. 잘못된 경보를 제외해도 그 수는 지구에 충분히 위협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소행성 (29075) 1950 DA은 약 1.1km의 지름을 가진 아폴로 소행성군으로 관측 결과 2880년 3월 충돌 가능성이 300분의 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추가적인 관측 결과 실제 충돌 가능성은 2만분의 1로 나타났다. 천문단위 천문단위(天文單位, astronomical unit)는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길이의 단위로 지구와 태양과의 평균 거리이다. 2013년 기준으로 149,597,870,700 m로 정의되어 있다. 주로 태양계의 천체(행성) 간 거리에 사용되며, 특히 천문 단위계는 태양 질량과 대등한 길이의 단위로서 중요하다. 국제단위계(SI)에 속하는 단위는 아니지만, 병용이 인정되는 단위이다. 천문단위의 정의는 '태양과 지구의 거리'이다. 하지만 지구(정확하게는 지구와 달의 중심)의 궤도는 완전한 원형이 아닌 타원형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구 궤도의 길이 반경 (타원의 장축의 절반)’으로 평균 거리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2012 년 8월 제28회 IAU(국제천문연맹) 총회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권장하고 있다. 단위 표기는 ‘천문단위’로 표시 되며 ‘AU'라는 기호가 사용되지만 국가별로 다르다. 프랑스는 천문단위를 프랑스어로 천문단위인 ‘unité astronomique’를 줄인 단위기호 ‘UA’를 쓰고 있지만 한국이나 영어권에서 사용은 적다. 이 외에도 독일에서는 ‘AE’를 사용한다. 하지만 향후 ‘AU’에 수렴할 것으로 보인다. 천문단위는 단지 길이의 단위일 뿐만 아니라 천문학에서 중요한 상수이다. 태양계내의 행성이나 혜성 등의 천체 사이의 거리는 천문단위를 이용함으로써, 취급하기 쉬운 크기의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때, 화성과 지구사이의 거리는 0.37AU정도 이고, 태양에서 토성까지는 약 9.5AU, 가장 먼 행성 해왕성까지는 약 30AU가 된다. 30AU부터 100AU까지에는 명왕성을 비롯한 태양계 외부 천체가 분포하고 있다. 태양계의 경계이며 혜성의 고향이라고 여겨지는 ‘오르트 구름’은 수만 천문단위에 퍼지고 있다고 여겨지며, 천문단위가 사용되는 한계이다. 항성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는 파섹(pc)과 광년(빛이 1년 동안 움직이는 거리)이 사용된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알파성까지의 거리는 4.2 광년이며, 천문단위로 나타내면 약 270000AU가 된다. 기원전 3세기, 아리스타쿠스(Aristachus)는 계산과 관찰에 의해 태양은 달의 18~20배 멀리 있다고 결론지었다. 관측 장비의 정확성이 나빠서 값은 실제와는 크게 달랐지만, 기하학적 계산은 맞았다. 이러한 비율만으로는 천체까지의 구체적인 거리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양까지의 거리의 단위를 천문단위로 간주한다면, 아리스타쿠스는 달까지의 거리를 처음으로 구한 것이 된다. 17세기, 케플러 또한 관측 데이터와 기하학적 관계를 이용하여 시행착오와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면서 화성의 궤도를 거의 정확하게 재구성했다. 케플러의 노력으로 행성 사이 운동의 상대적 관계를 잘 설명할 수 있었고, 머지않아 뉴턴역학에 의해 역학적 구조도 밝혀졌다. 역학적 구조가 밝혀져 케플러의 운동과 미세한 오차를 알 수 있게 되자, 수세기에 걸쳐 천체 역학에서는 놀라운 발전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행성의 움직임은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천체가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태양과 지구가 어느 정도의 질량을 가지는지를 m과 kg같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위를 사용하여 정밀하게 알기에는 역시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값을 정밀하게 알 필요도 없었다. 아리스타르쿠스와 마찬가지로 지상의 단위에 의지하지 않아도 태양계 자체를 기준으로 하면, 즉 미터 대신 천문단위를, 킬로그램 대신에 태양질량을 사용하면 행성의 움직임은 매우 정확히 측정 할 수도, 예측도 가능했다. 예를 들어, 19 세기 전반에 천문학자들이 각도의 1분(1°의 1/60)에 못 미친 천왕성의 위치 예측과의 차이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행성의 질량과 행성까지 거리가 일상의 단위에서 얼마인지는 무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았으며, 천문학자들은 이로 인해 해왕성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천문학에 길이 단위로 천문단위처럼 지상과는 다른 단위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필연이기도 했다. 여기에 천문단위가 천문학에서 사용되어 온 첫 번째 의의가 있다. 1809년 가우스는 지구의 궤도 장축 반경을 길이단위, 태양질량을 질량단위, 지구의 하루를 시간단위로 하는 단위계를 통해 태양계의 운동을 기술하는 기초 작업을 했다. 이때 도입된 가우스중력상수 k는 이 단위계로 나타낸 만유인력상수의 제곱근이 되면서 하루 지구가 태양을 둘러싼 평균 각도를 라디안 단위로 설정되었다. 이 단위계가 보안된 뒤, 현재 국제천문연맹에 의해 1976년의 천문단위계와 천문단위의 개념에 직접 도입되고 있다. 천문단위계에서는 길이의 천문단위외에 질량과 시간의 천문단위를 정하고있다. 이들은 가우스와 마찬가지로 질량의 천문단위 Ms로 태양질량, 시간의 천문단위 D로 1일, 즉 24×60×60=86,400초를 가리킨다. 그러나 보통은 질량과 시간의 천문단위는 천문단위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천문단위의 경우엔 길이의 천문단위를 가리킨다. 천문단위는 태양계뿐만 아니라 더 먼 별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되었다. 거리를 측정하기 위한 가장 단순 명쾌한 방법은 서로 다른 두 지점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그 방향의 차이(시차)와 두 점 사이의 거리에서 삼각형의 기하학을 사용하여 대상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삼각측량의 방법이다. 천문학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다. 같은 항성을 지구에서 1년간 계속 관측하면 지구의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더 멀리 있는 배경 천체에 대해 항성의 위치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연주시차). 이 별의 겉보기 운동의 최대 각도는 지구 궤도의 크기와 별까지의 거리로 결정되며, 지구궤도의 크기에 거의 대응하는 천문단위를 이용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 할 수 있다. 이 관계를 이용하여 별까지의 거리의 단위로 사용되는 파섹(pc)이 정의되어있다. 그러나 연주시차에서 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근거리 천체에 한정되기 때문에 더 먼 거리의 천체를 측정할 때에는 다양한 다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 때, 각각의 방법에는 사용할 수 있는 거리 역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연주시차로 측정 할 수없는 거리에 A라는 방법으로, A로 측정 할 수없는 거리는 B의 방법으로, B에서 측정 할 수없는 거리는 C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별도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방법은 측정 기술을 향상시키고 사다리의 단처럼 각각의 방법을 이어 먼 거리를 측정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천문단위의 정의가 태양질량 Ms에 의존하기 때문에 태양질량의 변화와 함께 천문단위의 값은 변화할 수 있다. 태양은 핵융합에 의해 질량의 일부를 에너지로 바꾸고,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기 때문에 1년에 대략 10조분의 1의 비율로 질량을 잃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감소는 태양에서 중력의 감소를 의미하고 모든 행성의 궤도 반지름과 공전 주기를 증가시킨다. 이 천문단위 크기의 증가는 이론상 100년당 0.4m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2004년 러시아의 크라신스키와 부룬베루쿠는 측정된 천문단위의 값이 실제로는 100 년당 15±4 m의 비율로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미국의 스탠디시(E.M.Standish)와 러시아 삐체봐(Е. В. Питьев)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천문단위의 증가라는 새로운 수수께끼는 2010년 기준으로 원인불명이며, 그 의미도 파악하기 어렵다. 크라신스키의 보고는 레이다 등을 이용한 화성, 금성, 수성 등의 거리측정에 의해 얻어진 미터와 천문단위의 관계 데이터에서 밝혀온 것이다. 레이다 거리측정은 전파의 왕복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으로, 이 왕복시간이 매우 천천히 증가하는 것으로 포착되어 행성의 궤도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성의 움직임 자체는 천문단위 시스템에 표시된 것과 잘 일치하고 있으며, 천문단위로 보면 행성의 궤도도 운동도 확대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상하게도 천문단위가 미터단위로 매우 천천히 확대 하고 있다. 지금까지 태양질량 과 중력상수의 변화, 우주 팽창의 영향 등이 검토 되어 왔지만, 모두 그 효과는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작다고 생각할 수 있어 만족한 설명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원인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계속 있다. 태양이나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행해져 왔지만, 하늘의 단위와 지상의 단위를 결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양과 달 사이의 거리의 비율을 구한 아리스타르쿠스도 지상의 단위로 값을 얻고 있지 않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의 히파르코스가 일식의 모습이 지역마다 다른 것을 이용하여 지구의 반지름을 기준으로 달이나 태양까지의 거리를 추정했다. 히파르코스가 계산한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 반지름의 490배 이상이었다.(실제 값은 약 23,500배) 히파르코스의 구체적인 산출 방법은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그 성공적인 기하학적 방법이 현재 비슷하게 재구성 되고 있다. 기록은 손실되었지만 , 쿠레오메데스의 저서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기원전 90년경에 달과 태양까지의 거리를 추정하고 있다. 포세이도니오스는 지구의 그림자를 원주라고 생각하고, 월식의 그림자크기에서 달이 지구의 절반 직경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또한 달의 겉보기 크기와 알려져 있던 지구의 크기 에서 지상 단위로 달까지의 거리를 추정했다. 그 5백만 디온값은 실제보다 2.1-2.6배 과대 추정되었다. 이것은 지구의 그림자 원뿔이라고 생각 하고, 달을 실제 약 2배의 크기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한편 태양까지 거리의 추정은 근거가 부족한 추측에 그치고 있다.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에 기초하여 저술한 천문학 저서)에서 천구에 둘러싸인 천동설에 기초한 우주이미지를 구축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스 타르코스와 히파르코스의 관측과 기하학적 추론, 또한 자신의 추측을 섞어 태양과 달뿐만 아니라 행성까지의 거리를 추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달의 평균거리가 지구 반경의 48배, 태양이 1,210 배, 토성은 17,026 배 등이다. 이렇게 설립된 우주이미지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한 아라비아 로 전해졌다. 이러한 우주상은 다음 유럽으로 전해져, 중세에 걸쳐 큰 권위를 갖게 되었다. 혜성 혜성(彗星, , ) 또는 살별, 꼬리별은 태양계를 구성하는 천체(SSSB) 중의 하나로, 태양 복사에 의해 핵으로부터 발생한 코마(핵을 둘러싼 구름층)와 꼬리를 갖는다. 혜성은 홍수, 기근, 전염병 등을 불러 일으키는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으나, 영국의 에드먼드 핼리가 핼리 혜성의 주기를 계산, 다음 출현을 예견함으로써 태양계의 천체임을 입증하였다. 혜성의 이름은 관례적으로 발견자의 성을 붙인다. (동시 발견의 경우 3명까지 가능하다.) 혜성의 핵은 대부분 얼음과 먼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수 km ~ 수십 km 정도이다. 혜성의 기원은 태양계 외곽의 오르트 구름이라는 혜성의 밀집소이며, 평소에는 태양을 공전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해 긴 타원의 궤도로 태양 근처로 떨어져 내려오면 표면의 얼음과 먼지가 증발하며 꼬리가 생긴다. 보통은 헤일-밥 혜성이나 햐쿠타케 혜성처럼 한 번 태양에 접근 했다가 멀리 사라지는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의 주기를 돌지만, 목성 등 행성의 인력에 잡혀 핼리 혜성, 엥케 혜성처럼 짧은 주기를 돌게 된 혜성도 있다. 그런 혜성은 '단주기 혜성'이라 불리며, 반대로 수천 년의 주기를 가진 혜성은 '장주기 혜성'이라고 불린다. 태양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여 증발되는 혜성들이 있으며, 이들은 소호 태양 관측 위성에서 종종 관측된다. 혜성은 대부분 어두운 것이 보통이지만, 지구에 가깝게 접근하거나 매우 밝은 혜성이 지구 근처를 통과할 때는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그리고 혜성이 지나가며 남긴 먼지 찌꺼기는 혜성의 궤도를 따라 이동하다가 태양풍에 의해 서서히 밀려나게 되며, 그 궤도 사이를 지구가 통과하면 대기와의 마찰에 의해 불타면서 지구로 낙하하는데, 그것이 바로 별똥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유성우이다. 또한 혜성은 궤도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공룡의 멸종이 혜성의 충돌로 인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1994년. 슈메이커-레비 9 혜성의 목성 충돌로 혜성의 지구 충돌 가능성이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얻었다. 혜성은, 동양에서는 빗자루, 서양에서는 머리를 푼 별로 인식되었다. 혜성의 천문 기호()는 원과 머리카락 같은 꼬리로 표현된다. 장주기 혜성은 태양계 외곽의 오르트 구름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이 중력의 작용으로 간섭을 일으켜 충분히 긴 타원 형태의 궤도를 갖게 되면 태양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혜성의 본체는 핵으로 불린다. 핵은 순수한 얼음이 아닌, 암석질 또는 유기질의 먼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로부터, 혜성의 핵은 '더러운 눈덩이'에 비유된다. 핵의 평균 직경은 수백 m 정도로, 작고 어두운 것이 수십 m, 특별히 큰 것이 드물게 50 km 이 되기도 한다. 질량은 크기에 따라 다른데, 직경 1 km 정도의 혜성이 수십억 t 단위, 직경 10 km 정도의 혜성이 수조 t 의 단위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는, 지구의 산 하나 정도에 해당된다. 얼음의 구성성분은 분자수로 보면, 80% 이상이 물(HO) 이며, 다음으로 일산화탄소(CO), 이산화탄소(CO), 메탄(CH)의 순서이며, 암모니아(NH)와 사이안화수소(HCN) 등도 미량 포함되어 있다. 쌍안경이나 천체망원경으로 관측할 때에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은, 이들의 적은 성분이 태양광으로 분해되어 생기는 C와 CN 등의 라디칼(radical)의 스펙트럼이 강한 때문이다. 태양으로부터 먼 곳에서는, 저온으로 핵이 완전이 얼어붙어 있으므로, 지구상에서는 단지 소행성 형태의 천체로만 보인다. 하지만, 혜성이 태양에 가까이 오면, 태양으로부터 복사되는 열에 의해 그 표면이 증발하기 시작한다. 증발된 가스와 먼지는 매우 크고 희박한 대기가 되어 핵의 주위를 구형으로 감싸게 되는데, 이를 '코마'라 부른다. 그리고, 태양으로부터의 복사 압력과 태양풍에 의해, 태양과 반대쪽 방향으로 꼬리가 만들어진다. 혜성의 꼬리는, 먼지 꼬리라는 먼지와 금속으로 구성된 흰 빛의 꼬리와, 이온 꼬리라 부르는 이온화된 기체로 구성된 푸른 빛이 도는 꼬리가 있다. 먼지 꼬리는 곡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는 핵으로부터 방출된 먼지가 독자적인 궤도에서 공전하게 되고, 서서히 핵 본체로부터 떨어져 태양풍이나 광압의 영향 등을 받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큰 혜성들은 이러한 꼬리가 휘어진 형태로 넓게 퍼져 보였다. 이에 대하여, 이온 꼬리는 기체와 먼지보다 태양풍의 영향을 크게 받고, 태양의 인력보다는 자기장에 따라 운동하므로, 태양의 거의 반대편에 수직으로 뻗게 된다. 단, 태양풍이 불규칙하게 불어 때에 따라서는 굽혀지거나 찢기는 등 격렬한 변화를 보일 때도 있다. 또한, 지구가 혜성의 궤도면을 통과할 때에는, 혜성의 휘어진 먼지 꼬리와 지구와의 위치에 의해 태양의 방향으로 꼬리가 뻗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코마나 꼬리는, 핵에 비해 규모가 매우 커진다. 코마는 태양(직경 약 139만 km)보다도 크게 될 때가 있다. 또한, 꼬리도 1 천문단위(AU) 이상의 길이가 되기도 한다. 1996년 봄에 밝아졌던 관측 사상 가장 큰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햐쿠타케(百武) 혜성은 꼬리의 길이가 3.8 천문단위(5억 7천만 km)가 되었다. 먼지는 태양빛을 직접 반사하고, 기체는 이온화되어 밝게 빛난다. 대부분의 혜성은 너무 어두워 망원경이 없으면 보이지 않지만, 10년에 몇 개 정도는 육안으로도 충분히 보일 수 있을 만큼 밝게 된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혜성은 밤하늘의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나타나, 조금씩 보이지 않게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혜성의 핵은, 태양계에 존재하는 천체 중에서도 가장 검다. 1986년, 지오토 탐사기가 핼리 혜성의 핵에 접근하여 핵의 알베도(반사도)가 4 %임을 측정하였다. 또한, 딥스페이스 1호도 2001년에 발레리 혜성에 접근, 관측하였고, 핵 표면의 알베도가 2.4% ~ 3% 정도로 측정하였다. 이는, 달이나 아스팔트의 알베도가 7%인 것에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치이다. 이는 복잡한 유기화합물이 어두운 표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태양에 의해 표면이 가열되면 휘발성의 화합물이, 특히 검은 빛의 긴 사슬의 화합물을 남기고 증발하여 석탄이나 원유와 같이 검게 되는 것이다. 혜성의 표면이 매우 검으므로, 열을 흡수하여 바깥층의 기체가 방출된다. 1996년, 햐쿠타케 혜성의 관측으로부터 혜성이 X-선을 복사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혜성이 X-선을 복사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어서 연구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혜성과 태양풍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났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온이 급격하게 혜성의 대기에 돌입하면, 이온과 혜성의 원자와 분자가 충돌하게 되어, 이로부터 이온이 여러개의 전자를 포획하여, X-선이나 자외선을 방출하게 된다고 추측되고 있다. 대부분의 혜성은 길게 늘어난 타원 궤도를 갖는데, 궤도의 한쪽은 태양에 가까이 있으며, 나머지는 태양계 바깥쪽으로 멀어진다. 혜성들은 일반적으로 그 궤도 주기로 분류되는데 이때 주기가 길수록 궤도의 이심률은 커진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 동·서양에서는 혜성에 대한 여러 관측과 연구가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을 완벽한 세계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깨뜨린 것이 혜성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혜성은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핼리혜성의 출현이었다. 핼리혜성은 로마시대때 유독 자주 등장했는데 로마인들 역시 혜성은 불행을 예고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됐을 때 천문학자들은 붉은 혜성을 낮에도 목격했으며, 사람들은 이 혜성이 율리우스가 신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 믿었다. 불길함을 암시한다는 믿음때문에 로마의 황제 네로는 혜성이 나타날때마다 주변에 있던 신하들을 죽였다. '가장 중요한 신하들을 처형해 하늘의 분노를 피해야 한다'는 점성술사들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에도 불행을 암시한 혜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시대에는 왕의 죽음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헤성이 등장했는데, 장보고가 염장에게 암살당했을때도 혜성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당시 기록에는 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빛은 대지를 환하게 했고 우레와 같은 소리가 있어 산이 붕괴되고 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혜성의 꼬리는 페가수스 자리로 내달았고 55일만에 사라졌다". 조선시대때 나타난 혜성 역시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됐다. 왕은 혜성이 나타날때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는데 혜성은 역모나 반역의 징조로 해석됐기 때문이었다. 조선 개국 후 처음 나타난 핼리혜성은 1456년 23일에 걸쳐 관측되었는데 며칠 후 의정부 우찬성인 정찬손과 김질이 세조에게 알현을 청했고, 그 결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밝혀졌다.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일주일 후 모진 고문 끝에 처형되었으며 이들 중 주모자 6명은 후대에 사육신으로 기록된다. 핼리혜성은 당시 민감한 정치 사안인 단종 복위라는 사건을 암시했다고 여겨진 것이었다. 1531년 나타난 핼리혜성은 중종 때 좌의정까지 오른 김안로의 등용과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 중종의 외척인 김안로는 희대의 간신으로 남아있는데 그가 한성보 판인에 제수된 다음날 하늘에 10여자에 이르는 긴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은 혜성의 출연을 하늘의 경고로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좌의정까지 오른 김안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족을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폈다. 6년 후 결국 김안로는 문정왕후 폐위 기도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만다. 핼리혜성은 왕과 왕실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했다. 1607년 병석에 누워 있던 선조는 그해 여름 핼리혜성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6개월 뒤 죽게 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혜성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던 때 이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17세기 폴란드의 귀족 '루베이넹츠키'는 415회에 다르는 혜성의 출연과 사건들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치우침 없이 거의 고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역사적 재앙과 혜성의 출연은 서로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혜성에 대한 불안감은 막을 수 없었다. 같은 17세기 영국의 밤하늘에 나타난 정체 모를 혜성은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당시 점성가들은 강력한 역병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나타나 혜성이 나타난 1664년부터 런던은 치명적인 전염병인 '페스트'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대역병은 1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정부의 노력 끝에 대역병은 1666년 가을부터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는데 1666년 9월 새벽 2시경, 한 빵공장에서 일어난 불이 크게 번져 세계 3대 대화재로 남은 '런던 대화재'가 일어났다. 불은 5일동안 87채의 교회와 13,000여 가구를 불태우며 9명의 희생자와 7만여명의 노숙자를 낳았다. 당시 사람들은 런던이 3년 사이에 대역병과 대화재를 겪은 이유가 2차례에 걸친 혜성의 출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같이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던 혜성은 18세기에 들어서야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천문학자였던 에드먼드 핼리는 혜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는데 그의 친구인 아이작 뉴턴이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뉴턴은 1680년 10월과 11월에 관측된 혜성이 태양 뒤로 사라졌다가 12월에 나타나자 두 혜성이 같은 것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핼리는 1705년 24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여 1531년과 1607년, 1682년에 출연한 세 개의 혜성이 같은 혜성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1758년 이 혜성이 또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이 혜성이 75~76년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핼리의 예측대로 1758년 긴 꼬리를 드리운 혜성이 밤하늘에 나타났다. 이로써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혜성에 주기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혜성은 그의 이름을 따 핼리혜성이라 이름을 붙이게 됐다. 이후 다양한 연구를 통해 혜성은 주기적으로 지구를 지나간다는 것과,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혜성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뒤에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0년 세계에는 때아닌 종말론에 휩싸였다. 당시 언론들은 종말론에 대한 기사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는데 이는 혜성이 지구와 근접한다는 근거에 의한 것들이었다. 방독면과 독가스 해독약이 불티나게 팔렸으며, 비상시에 마실 공기를 미리 채워놓기 위해 자전거 튜브를 사재기하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지구 종말의 공포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이렇게 전 세계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은 주인공은 바로 그해 5월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핼리혜성이었다. 당시 지구 종말론의 근거는 핼리혜성의 꼬리였다. 1910년 지구는 핼리혜성의 꼬리 부분에 분포된 가스 속에 파묻히게 됐는데 프랑스의 천문학자 '까미오 프라마리오'는 핼리혜성의 꼬리 부분에 청산가리의 원료인 '시안'이 함유돼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지구가 핼리혜성의 독가스 속으로 파묻히게 된다는 속설때문에 최후의 만찬을 위한 파티가 유행했으며, 약삭빠른 장사꾼들은 혜성 액땜 알약과 방독면을 팔았다. 그러나, 그해 5월 지구는 20일에 걸쳐 혜성의 꼬리 파묻혔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핼리혜성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성이 지구에 근접할 경우 지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은 종종 제기된다. 코넬대학교 천문학과 '제임스 맥케니'는 '행성X, 혜성 그리고 지구이 변화'라는 저서에서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지 않아도 지구에 막대한 재난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혜성이 지구를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지진과 화산을 일으킬 수 있으며, 지축의 변동까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돌의 세계'의 저자 '임마뉴엘 벨리코브스키'는 인간의 역사를 기록한 이래 지구는 꾸준히 혜성과의 충돌 위험을 겪었으며, 이로인해 지구의 지축이 변하면 기후 및 기상이 변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지구의 대격변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혜성이 지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충돌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지구와 혜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혜성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과 상관 없이 혜성 자체에 대한 공포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다. 1997년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미국 캘리포니아 경찰은 주택 안에 나란히 누워 있는 39명의 시신을 발견한다. 모두 짙은색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얼굴에 보자기가 씌워져 있었다. 이들은 외계 생명체 추종 단체인 천국의 문(Heaven's Gate) 회원들로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들이 지구 종말의 원인으로 생각한 것은 '헤일-밥 혜성'이었다. 헤일-밥 혜성은 공전 주기가 약 3천년이며, 핼리혜성보다 약 100배 밝은 혜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 헤일-밥 혜성이 1997년 지구에 인접했을 때 무려 18개월동안 맨눈으로 관측할 수 있었는데 당시 신도들은 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혜성은 약 1,600여개이며, 이중 궤도가 밝혀진 것은 600여개만이 궤도가 파악돼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혜성은 달의 정기가 모여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천체의 출현은 길흉의 판단으로 이어졌는데, 혜성은 주로 재난의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천문류초》에 의하면, 혜성(彗星)은 요성(妖星)의 대표적인 종류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대체로 요성과 혜성, 객성 등의 종류를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고 '혜성'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요성은 오행의 정기에 따라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천문류초에서는 혜성을 포함하여 21가지 종류의 요성을 분류하고 있으며, 혜성은 오래된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는 의미에서 빗자루를 가리키는 소성(掃星)의 별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성'의 묘사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혜성은 병란과 홍수의 징조로 여겼는데, 패성, 천봉, 천창, 천참, 치우기, 천충, 국황, 소명, 사위, 천참, 오잔, 육적, 옥한, 순시, 천봉, 촉성, 봉성, 장경, 사진성, 지유장광 등의, 서로 특성이 다르나 대체로 혜성과 유사하거나 관련이 있는 천체의 명칭이 있었다. 기원전 2세기경의 것으로 추측되는 마왕퇴 무덤에서 혜성의 여러 형태와 명칭을 기록한 백서(帛書)가 발굴되었다. 기록된 역사의 초기부터 혜성의 관측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9년(기원전 49년) 봄 3월의 기록이다. 신라 진평왕 대에 혜성이 나타나자 이변이 사라질 것을 기원하며 신라의 승려인 융천사가 〈혜성가〉라는 향가를 지어 읊은 기록도 있다. 이후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서운관의 각종 문서에 여러 혜성들이 관측, 기록되었다. 혜성은 그 위치와 크기, 형태, 꼬리의 길이와 방향 등이 기록되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혜성은 물의 정기이며, 얼음과 같이 투명하여 햇빛을 받아 빗자루와 같이 보인다'고 추측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기상학(Meteorology)'에서, 혜성이 황도를 벗어난 위치에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혜성은 행성과는 다른 것이며, 유성이나 오로라, 은하수와 함께 상층 대기의 현상이라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2천 년간 서양의 혜성 이론을 대표하였다. 토리노 토리노(, , , )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산업 도시로 피에몬테주의 주도이자 토리노현의 현도이다. 포 강 서쪽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인구는 886,837 명(2017년 조사)으로, 주위의 도시권을 합치면 170만명이 된다. 2006년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이다. 예수의 시체를 쌌다고 하는 토리노의 수의가 유명하다. 예수의 얼굴이 나타난다고 한다. 토리노는 오래된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218년에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현재의 토리노를 점령하였다. 기원후 65년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기 공업 중심지였고, 전쟁 때 많은 공장들이 파괴되었다. 전후, 재건되었다. 이탈리아의 주요한 산업 중심지이다. 피아트가 소재하며 이를 중심으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했다. 통신업체 텔레콤 이탈리아, 방송사 RAI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토리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인 유벤투스 FC와 토리노 FC의 연고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 피라미드(pyramid)는 일반적으로 정사각뿔 꼴의 고대 유적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앙아메리카 등 많은 문명권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유적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태왕릉이나 장수왕릉등도 정사각뿔 형태이므로 피라미드의 일종이다. 그중에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특히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대체로 국왕,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무덤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피라미스, 이집트인은 “메르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80여 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90킬로미터인 나일 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수단의 나파타와 메로에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전자는 기원전 8~7세기의 나파타 왕국의 것으로 18 기, 후자는 기원전 3세기 이후의 것으로 약 50 개가 있다. 피라미드에 대해 남아있는 최고의 기록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역사》2권에 있다. 거기에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높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화재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양식이다. 그 이후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하였다. 마스타바는 무덤으로 이곳에 왕을 매장하였다. 마스타바는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벤치라는 의미이다. 그러던 중 파라오 조세르(Djoser) 시대에 마스타바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다층 마스타바 혹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임호테프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이후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당대의 피라미드 건축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붕괴하고 만다. 스네프루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의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공사 중에 각도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그러나 스네프루는 굴절 피라미드로 만족할 수 없었고, 더욱 상징적이고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재차의 노력을 했으며, 이 건축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이미지와 같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다음의 파라오 쿠푸(Khufu)는 이미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대규모의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이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점을 이루고,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들도 만들어졌다. 장영주 장영주 (張永宙, , 사라 장; 1980년 12월 10일 ~ )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고전음악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영세명은 사라 장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재능 있는 고전 음악 연주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장영주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장민수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교사이며 어머니는 작곡가였다. 이들은 1979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주 후 장민수는 템플 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했으며 어머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작곡 강좌를 수강하였다. 장영주는 "한 번도 실제 한국에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한국에 뿌리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일곱 살 터울의 남동생, 마이클이 있다. 1998년 PBS와 가진 인터뷰에서 장영주는 남동생의 이름이 유명한 중국계 테니스 선수 마이클 창과 똑같아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곤 한다고 한 바 있다. 장영주의 아버지는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정착했고, 그녀의 남동생 마이클은 201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장영주는 6세가 되던 1987년,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사단조로 오디션을 치르고 줄리어드 학교에 합격하였다. 이후 그녀는 주말에 뉴욕을 방문하여 줄리어드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89년부터 장영주는 도로시 딜레이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도로시 딜레이는 장영주의 아버지를 한 때 가르치기도 했다. 역시 도로시 딜레이의 제자 중 한 명이며 줄리어드의 바이올린 교수인 강효 역시 장영주를 가르쳤다. 장영주의 모국어는 영어이며, 한국어와 독일어에도 능통하다. 1999년 뉴저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영주는 줄리어드로 돌아와 도로시 딜레이의 지도하에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다. 장영주는 3세 때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4세 때는 16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을 선물로 받고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8세 때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이후 이 지휘자와 교향악단은 장영주와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1991년 10세가 되던 해, 장영주는 EMI 클래식스 레이블로 데뷔 앨범 "Debut"를 녹음하였다. 이 앨범은 1992년 8월 18일 발매되었으며 곧바로 빌보드 클래식 차트의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이후 장영주는 국제적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한 해 150회 이상의 연주회를 갖는 연주자가 되었다. 2002년 장영주는 북한 평양에서 연주하였다. 이 경험에 대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다. "객석은 전부 정부 관료들로 채워졌어요. 모든 자리가요. 전석 초대인 공연이었지만,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신나는 일이었다고 할까요. 전 정말 제가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느꼈어요. 음악가로 사는 게 정말 축복으로 느껴졌고, 또 한편 음악이야말로 유일무이한 보편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죠." 2004년 장영주는 뉴욕에서 올림픽 성화를 봉송했다. 2005년 예일 대학교는 스프라그 홀에 장영주의 이름을 딴 자리를 마련하였다. 장영주는 이 해 여름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멤버들과 함께 현악 육중주 곡들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07년 4월 7일 장영주는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애슐리 웨스와 함께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열었으며, 2007-2008 시즌 동안에는 에사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과 할리우드 볼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2009년 5월부터 2010년 6월에 걸쳐 장영주는 피아니스트 앤드류 폰 오이엔과 함께 유럽, 북미, 아시아 순회 연주회를 열었다. 2010년 2월 12일에는 런던의 바비칸 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남가주 대학교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였다. 2010년 8월에는 할리우드 볼에서 공연하였다. 예후디 메누힌은 그녀를 "내가 지금껏 들어 본 이중 가장 대단한, 가장 완벽한, 가장 이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다"라고 평가했다. 히메지번 히메지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지금의 효고현 서남부에 해당하는 하리마 국 시키토 군()을 지배했던 번이다. 번청은 히메지성(지금의 효고현 히메지 시). 번주는 당초 도자마 다이묘인 이케다 가문()으로, 후에 수많은 후다이 다이묘 가문이 이곳으로의 전봉을 거듭한 끝에 1749년 이후부터 폐번치현 때까지는 후다이 다이묘의 명문인 사카이 우타노카미 가문()이 번주로 있었다. 고쿠다카는 당초 52만 석으로, 후에 15만 석이 되었다. 이케다 가문 혼다 헤이하치로 가문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사카키바라 가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재봉) 혼다 헤이하치로 가문(재봉) 사카키바라 가문(재봉)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재봉) 사카이 우타노스케 가문 버르토크 벨러 버르토크 벨러(, 1881년 3월 25일 ~ 1945년 9월 26일)는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중앙유럽의 민요를 수집해서 정리한 음악학자이다. 버르토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大)헝가리 부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너지센트미클로시(Nagyszentmiklós)는 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 마레(Sânnicolau Mare)이다. 본명은 버르토크 벨러 빅토르 야노시()이다. 그는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코다이 졸탄을 만나 같이 민요를 수집했다. 이는 그의 음악스타일에 크게 작용했다. 예전의 그는 헝가리 민요에 대해서 프란츠 리스트의 곡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집시 멜로디로 생각했었고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영웅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를 기리기 위한 대편성 관현악곡 《코슈트》에서도 그런 선율을 사용했었다. 집시 멜로디가 아닌 머저르(헝가리인) 농부들의 민요를 접하고 나서 그는 이를 진짜 헝가리 민요라고 생각하고 민요적인 색채가 드러나도록 그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02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다페스트 초연을 들었을 때 이는 버르토크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1907년 왕립음악학원에서 피아노 교수직을 맡으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트란실바니아 일대의 민요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음악은 민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코다이가 클로드 드뷔시를 파리에서 데려오면서 그와도 교류했다. 그는 당대의 요하네스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대편성의 관현악곡들을 써왔지만 그의 피아노 소품은 민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민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최초의 작품은 현악 사중주 제1번(1908)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마르터 치글러(Márta Ziegler)와 결혼하여 1910년에 버르토크 벨러 주니어를 낳았다. 1911년에 버르토크는 그의 유일한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을 그의 아내 마르터(Márta)에게 헌정하였다. 이를 Hungarian Fine Arts Commission 주최의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연주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는 이 오페라를 공연하려 했지만 헝가리 정부는 오페라의 작사자 벌라주 벨러(Balázs Béla)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라는 압력을 주었다. 버르토크는 거부했고 결국 오페라는 1918년까지 공연될 수 없었다. 이후 그는 헝가리 정부와 기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콩쿠르의 일이 있고 나서 2~3년 정도만 곡을 쓰고 그 후엔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 터키 일대의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민요 수집이 힘들게 되자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발레곡 《허수아비 왕자》(1914~6)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버르토크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발레곡 《중국의 이상한 관리》와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작품 중 화성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가장 복잡한 작품이다. 《중국의 이상한 관리》는 노골적인 주제 때문에 1926년까지 공연되지 않았다. 1923년 버르토크는 마르터(Márta)와 이혼하고 그에게 피아노를 배운 파스토리 디터(Pásztory Ditta)와 재혼하여 다음해인 1924년에 두 번째 아들 페테르(Péter)를 낳았다. 1924년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2음기법을 완성한 해이기도 하다. 버르토크는 이후 곡을 쓰지 않다가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한 여섯 권 분량의 피아노 연습곡 《미크로코스모스》(1926~37)를 썼다. 이는 현재에도 피아노 교재로 쓰이고 있다. 이후에 쓴 현악 사중주 제6번(1939)는 그가 유럽에서 쓴 마지막 곡이 된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고 그는 헝가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나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독일에서 유명해졌을 때에도 독일에서의 콘서트를 거부했고 독일 출판사와도 계약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한 세계관은 헝가리의 우익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는 부인과 함께 마지못해 미국으로 떠났다. 페테르는 1942년 미국으로 가서 후에 미 해군에 입대한다. 벨러 주니어는 헝가리에 남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생활은 편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유명하지 않았고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계속 유고슬라비아 민요를 정리했지만 그의 재정 상황과 건강은 나빠졌다. 그는 현악 사중주 제6번(1939)을 끝으로 작곡을 그만 두려 했지만,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탁으로 《Concerto for Orchestra》(1943~5)를 작곡했다. 예후디 메누힌의 위탁을 받아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작곡했고 비올라 협주곡에 착수했다. 1945년 버르토크는 뉴욕 시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미완성의 비올라 협주곡은 그의 제자 Tibor Serly가 완성했다. 버르토크의 유해는 뉴욕 주 Hartsdale에 있는 Ferncliff Cemetery에 안장되었다. 후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나서 1988년 7월 7일에 부다페스트의 Farkasreti Cemetery로 안장되었다. 태평양 제도 태평양 제도(太平洋 諸島) 또는 태평양 군도(太平洋 群島)는 넓은 의미로 태평양에 있는 약 2만 - 3만 개의 섬들을 가리킨다. 태평양(주로 남태평양)의 섬들을 하나로 묶어 오세아니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세아니아는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로 나뉜다. 한강 한강(漢江, )은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중부를 동에서 서로 관통해 경기도 김포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개풍군의 경계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한국의 주요 하천이다. 태백산맥의 금대봉 정상부 북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강화해협 부근의 어귀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본류로 한다. 대한민국의 관찬 자료집인 《한국하천일람》 2013년 판에 따르면 본류 총연장은 494km 남짓이다. 한강 본류는 경기·관동·해서·호서 등 네 지방에 걸쳐 북한강·임진강() 을 위시한 수백 개의 지류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 지류들을 기반으로 한강 수계는 한국을 지나는 모든 하천 수계망 중 두 번째로 넓은 빗물받이(35,770km², 한반도 전체 넓이의 약 1/6)를 가졌다. 길이(494km)로는 압록강·두만강·낙동강에 이어 한반도에서 네 번째,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길다. 같은 한강 본류 중에서도 특정 구간만을 따로 떼어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지역의 큼직한 합수머리를 기준으로 구간을 나눈 경우가 많다.한강의 최장 발원천은 금대봉 북쪽 정상부의 고목나무샘 (태백시 창죽동)에서 발원하며, 이 물줄기는 금대봉골이라는 골짜기를 타고 산 중턱에 위치한 유명한 샘인 검룡소 (태백시 창죽동)까지 흘러내려온다. 한편, 태백시청은 비록 검룡소가 고목나무샘보다 하류에 있긴 하나 금대봉골 유로 상에서 제일 큰 샘이라는 점을 들어,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라고 홍보하고 있다. 한강이 충분히 커져 법적인 의미의 '하천'으로써 관리되기 시작하는 기점은 태백시 상사미동의 디디기벌 인근에 있으며, 여기서부터 아우라지로 유명한 송천 합류점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까지의 구간을 골지천(骨只川)이라 한다. 이어 송천 합류점에서부터 동대천 합류점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까지의 구간은 조양강(朝陽江), 동대천 합류점에서부터 평창강 합류점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까지는 동강(東江), 평창강 합류점에서부터 북한강 합류점(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까지의 구간은 남한강(南漢江)이라 일컫는다. 끝으로 임진강 합류점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부터 어귀까지는 조강(祖江)이라 한다. 구석기 시대부터 한강 유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포전리 점말 동굴과 단양군 애곡리 수양개 선사유적지가 한강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를 지나 백제를 비롯한 마한의 몇몇 소국이 한강에 자리를 잡았고, 그 중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백제가 한강 일대를 차지하였고, 이후에는 고구려가 한강을 차지한다. 진흥왕 때에 신라는 한강을 차지한다. 이처럼 한강 유역을 소유하면 나라가 번영했다는 것에서 한강이 한반도에서 지리·인구·외교 등에서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한강을 '아리수', 백제는 '욱리하'라 했다. 신라는 한강의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 하였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한강을 '북독'이라고 했다. 고려 시대에는 한강 유역 대부분을 양광도가, 그리고 북한강 유역은 교주도가 관할했고, 지방 3경 중 하나인 남경과 12목 중 광주목·충주목·청주목이 있었다. 당시 한강은 물줄기가 맑게 뻗어 내린다 하여 '열수'라 했고, 모래가 많아 '사평도', '사리진'이라고도 불렀다. 고려가 멸망하고 건국된 조선은 한강 유역의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 한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한강의 수운 조건과 풍수지리설의 영향 그리고 정치적 배경 때문인데, 당시에 한강이 교통이 편리하고 지리적으로도 좋은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의 경창은 조세로 징수한 미곡과 포백을 운송하는 조운제도의 중심이 되었고, 9개의 조창 중에서 충주의 가흥창·원주의 흥원창·춘천의 소양강창 총 3개소가 한강 중류와 상류에 있었다. 한양 근처의 한강은 '경강'이라 했는데 조운을 통해 경강에 많은 상인이 모이며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울 강'(Seoul river)이라는 표현이 외국 문헌에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한강 곳곳에 진을 설치하고 수비하게 하였다. 조선 말에는 프랑스와 미국이 한강과 강화도에 침입했고, 개항을 한 후에는 증기선이 한강에서 운항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철교인 한강철교가 완공되었고, 1916년에는 최초의 인도교가 가설되었다. 1912년, 1920년, 1925년에는 큰 홍수가 났었는데, 특히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한강 유역이 수몰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 전쟁 때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파괴되었고, 이후 재건되었다. 1970년에는 잠실지역의 하중도를 육지로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어 육지와 연결됐고, 잠실지역이 개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류하던 흐름을 끊으면서 하적호인 석촌호수가 생겨났다. 근대화·산업화로 당시 한강의 수질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에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공원을 조성하고 올림픽대로가 만들어지고 수질을 개선시켰다. 이후 수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중보인 잠실보와 신곡보가 건설되었다. 2007년에 서울시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강에서 수상택시 운영이 이뤄지고 있고, 공원 조성사업으로 한강공원의 개발사업 등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 정부에서 한강에 경인운하·한반도 대운하 등을 건설하여 수운을 이용한 교통체계를 마련하려고 하나, 효율성 등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한강에 한은 삼한을 가르키는 한이며 "크다" 또는 "왕"이라는 뜻이다. 글자가 없던 시절에 한자를 빌려 (漢江)또는 (韓江)이라고 불렀다. 한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근처 지역을 백제 때는 한성이라고 불렀고 조선시대 때는 한양이라고 불렀으며 조선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가 한강을 불렀던 이름인 '아리수'의 '아리'와 백제가 한강을 불렀던 이름인 '욱리하'의 '욱리'는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 현재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의 '으리'와 같은 어원으로서 '크다'의 뜻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한강의 '한' 역시 크다(우두머리)는 뜻이므로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한자로 된 우리 지명도 그 어원은 대부분 순우리말인 경우가 많다. 한강의 이름은 그 지역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은데, 송파 부근의 한강을 송파강이라 하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나 그 지역은 예전에는 섬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구분하며 부른 것으로 보인다. 한강을 부르는 이름은 모든 지류를 통틀어 말하거나 양수리와 한강 하구 사이의 한강 본류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한강을 기록한 문헌은 삼국사기·동국여지승람·연려실기술·세종실록지리지·고려사지리지·팔도지리지·택리지 등이다. 영어 명칭은 "Han Gang"이다. 한강 유역은 주로 산계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해발 300m에서 500m 사이 높이의 산이 주로 분포한 저산성 구릉지에 속한다. 한강의 지류들은 보통 수지상 하계망을 이루지만 가평·춘천 등지의 경춘가도 부근 등에는 단층에 의한 직각상 하계망이 발달해 있다. 한강 유역의 대부분은 경기 육괴 지역에 속하며, 남한강 일부는 옥천지향사대에 속한다. 화성활동으로 북한산부터 철원 사이의 광주산맥 부근과 관악산에는 화강암 저반이 발달하였다. 양수리부터 하류 사이의 서울 지역은 연천계 편암과 편마암 그리고 중생대 말기의 불국사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강 남쪽에서부터 동북 쪽으로는 준편마암류와 편암류의 암석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남한강을 비롯한 차령산맥 부근은 화강암이 발달했는데, 불국사 화강암과 함께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이 옥천지향사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다. 충적층은 한강의 상류에서 평균 5.29m, 중류에서 5.97m, 하류에서 6.95m의 두께로 나타났다. 한강에는 다른 곳에서 온 많은 하천들이 합쳐져 흘러 들어온다. 남한강은 한강의 본류이며, 북한강은 경기도 양평군의 양수리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한강의 주요 지류는 다음과 같다. 국가하천으로 지정된 지류 지금까지 한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다리가 건설되었다. 하류에서 상류 순으로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 한강의 양수리 이후 구간에 있는 다리는 모두 27개이다. 대부분이 자정, 또는 오전 1시까지 야간 조명을 밝힌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횡단 교량이 아닌 강변을 통과하는 종단 교량이 있다. 여의도 남단을 통과하는 한강의 샛강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강 상류~하류 순으로 나열) 강 내부의 하중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있다. 서울에서 한강의 북쪽과 남쪽에는 각각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가 건설되어 있다. 1·2·3·4·7호선·인천국제공항철도는 철교를 통해, 5호선과 분당선은 하저 터널을 통해 한강 본류를 관통하고 경의·중앙선은 북한강을 철교로 가로지른다. 이외의 지하철 노선들은 한강 본류를 관통하지 않지만 지하철 8호선과 신분당선은 한강 본류를 관통할 예정이다. 한강을 옛날과 같이 깨끗한 강으로 되살리자는 목표로 198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지역 41.5km의 구간(강일동-개화동)을 살아있는 강으로 변화시킨 공원이다. 아울러 강변에 시민 휴식공원과 축구장·배구장·농구장·수영장 등 각종 체육시설과 수상스키장·요트장·보트장·낚시터·주차장 등을 갖추어, 시민들이 오락·휴양지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 밖에 자전거 도로 및 산책로가 한강을 따라 개설되었으며 한강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주요다리에 승강기가 설치되고 있다. 또한 6개의 교량에는 한강전망카페가 설치되어있다. 비타민 A 비타민 A는 시각 기능에 관여하고, 성장 인자로 작용하는 비타민이다. 비타민 A는 눈의 망막에서 대사 산물인, 흡광 분자 레티날의 형태로 작용하는데, 레티날은 박명시(어두운 환경에서 물체를 보는 능력)와 색조감각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비타민 A는 또한 레티놀이 비가역적으로 산화된 형태인 레티노 산의 형태로 상피 세포 등에서 호르몬과 같이 중요한 성장 인자로서 기능을 한다. 동물성 음식에 들어있는 비타민 A는 대부분 레티닐 팔미테이트(retinyl palmitate)와 같은 에스터 형태로 존재하며, 음식으로 섭취된 뒤 작은 창자에서 알코올의 일종인 레티놀로 변환된다. 인체는 비타민 A를 레티놀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마다 시각계에서 작용하는 알데히드인 레티날로 변환하여 사용한다. 비타민 A에서 비가역적으로 합성되는 대사 산물인 레티노 산은, 비타민 A로서 부분적인 기능만 하며, 망막의 시각 회로(visual cycle)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모든 형태의 비타민 A는 레티닐 군이라 불리는, 이소프렌이 부착된 이오논(ionone) 고리가 있다. 이 두가지 구조적 특징은 비타민 효과(vitamin activity)에 필수적이다. 당근에 함유되어 있는 황색 색소체인 베타 카로틴은 두 개의 레티닐 군이 결합한 것으로, 그 두 개의 레티닐 군이 체내 비타민 A 농도에 기여한다. 알파 카로틴과 감마 카로틴은 레티닐 군이 하나씩 있고, 이것이 비타민 효과를 나타낸다. 카르티노이드 베타 크립토잔틴은 이오논 군을 가지고 있고 인체에서 비타민 효과를 가진다. 비타민 A는 음식에서 두 가지의 주요한 형태로 발견된다. 비타민 A의 발견은 1906년의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연구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밖의 다른 요인이 소의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1917년,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의 앨머 맥컬럼(Elmer McCollum)과 예일 대학교의 라파예트 멘델(Lafayette Mendel)과 토마스 버 오스본(Thomas Burr Osborne)에 의해, 이러한 물질 중의 하나가 독립적으로 발견되었다. "수용성 인자 B"(비타민 B)가 당시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지용성 인자 A"(비타민 A)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1919년, 스틴벅(Steenbock)(위스콘신 대학교)이 황색 식물 색소(베타 카로틴)와 비타민 A와의 관계를 주장하였다. 비타민 A는 1947년 두 독일 화학자 David Adriaan van Dorp와 Jozef Ferdinand Arens에 의해서 처음으로 합성되었다. 어떤 카르티노이드는 비타민 A로 변환될 수 있으므로, 음식 안의 얼마나 많은 카르티노이드가 특정한 양의 레티놀과 동등한지를 결정해서 다른 음식의 효용을 비교할 수 있게 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인정되는 등량이 변해왔기 때문에, 상황이 혼란스러워졌다. 오랫동안, 1 IU(international unit)이 0.3 μg의 레티놀과 같고, 0.6μg의 베타 카로틴, 1.2 μg의 다른 프로비타민 A 카르티노이드과 같은 등량 체계가 쓰였다. 나중에, 레티놀 당량(RE)이라는 단위가 도입되었다. 2001년 이전에는 1 RE가 1 μg의 레티놀, 2 μg의 기름에 녹은 베타 카로틴(용해도가 낮기 때문에 대부분의 보충제에서는 일부만이 용해된다), 6 μg의 일반 음식의 베타 카로틴(기름에 녹은 것만큼 잘 흡수 되지 않기 때문에), 12 μg의 음식에서의 알파 카로틴, 베타 카로틴 또는 감마 카로틴에 대응하였다. 이 후의 연구에서 프로비타민 A 카르티노이드의 흡수가 이전에 생각하던 것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결과, 2001년, 미국 의학연구소(Institute of Medicine)는 RAE(retinol activity equivalent)라는 새로운 단위를 권고하였다. 1 μg RAE은 1 μg 레티놀, 2 μg의 기름에 녹은 베타 카로틴, 12 μg의 식품의 베타 카로틴, 24 μg의 세 가지의 다른 식품의 프로비타민 A 카르티노이드에 상응한다. 인체에서의 프로비타민 카르티노이드의 레티놀로의 변환은, 신체에서 이용가능한 레티놀의 양에 따라 적극적으로 조절되므로, 위의 변환은 오직 비타민 A 결핍인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프로비타민의 흡수는 프로비타민을 함유한 섭취된 지질의 양에 크게 의존한다. 지질은 프로비타민의 흡수를 증가시킨다. 최근의 연구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과일과 채소는 생각했던 만큼 비타민 A를 얻기에 유용하지 않는 것이다. 즉, 과일과 채소의 IU 값은 동식물의 지방이 녹은 기름과 (일부) 보충제의 동일한 IU 값보다 가치가 낮다. 소량의 육류나 소량의 비타민 A 보강 음식을 먹는 나라에서 야맹증이 만연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채식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이다. The Food and Nutrition Board(page 120)에 의해 비타민 A를 충분히 제공하는 일일 비건 표본 식단이 발표되었다. 한편, 미국 과학 아카데미(United State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의해 제공된 레티놀 기준치 또는 그 등량이 감소해 왔다. 1968년의 일일 권장 허용량(RDA, Recommended Daily Allowance)(남자)은 5000 IU(1500 μg 레티놀)이었다. 1974년에는, 일일 권장 허용량은 1000 RE(1000 μg 레티놀)로 되었고, 현재는 영양섭취기준(Dietary Reference Intake)이 900 RAE(900 μg 레티놀 또는 3000 IU 레티놀)이다. 이는 1800 μg의 베타 카로틴 보충제(3000 IU) 또는 10800 μg의 음식의 베타 카로틴(18000 IU)과 등량이다. 비타민 A 영양섭취기준 미국 의학연구소(Institute of Medicine)에 따르면, "RDA는 거의 모든(97-98%) 개인의 필요량을 만족하도록 설정되었다. 건강한 모유수유한 유아에 대해서는 AI가 평균 섭취량을 의미한다. 다른 연령대와 성별에게 AI는 모든 개인의 필요량을 충당한다고 믿어지지만, 데이터가 부족하여 이 섭취량으로 필요량이 만족되는 개인의 백분율을 확실하게 명시할 수 없다." 비타민 A는 많은 음식물에서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주: 데이터는 USDA database 에서 가져온 것이며, 괄호 안의 값은 RAE이고, 음식물 100그램당 비타민 A의 성인 남성 RDA에 대한 백분율이다. 카로틴이 레티놀로 변환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음식의 카로틴은 생물학적으로 다양하게 이용가능하다. 비타민 A는 신체의 곳곳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시각 회로에서의 비타민 A의 역할은 특히 레티날 형태와 관련이 있다. 눈 안에서 11-시스-레티날은 라이신 잔기에서 로돕신(간상세포)과 아이오돕신(원추세포)과 결합한다. 빛이 눈으로 들어옴에 따라, 11-시스-레티날은 전 트랜스(all-"trans") 형태로 변환된다. 전-트랜스-레티날은 광퇴색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옵신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러한 이성질체화(isomerization)가 시신경을 따라 뇌의 시각중추로 전해지는 신경신호를 유발한다. 옵신과 분리된 이후에, 전-트랜스-레티날은 일련의 효소 반응에 의해 다시 11-시스-레티날 형태로 변환되어 재사용된다. 또한 일부의 전-트랜스-레티날은 전-트랜스-레티놀로 변환되어 interphotoreceptor retinol-binding protein(IRBP)와 함께 상피 색소 세포로 보내진다. 이후에 전-트랜스 레티닐 에스터로 에스터화가 일어나 전-트랜스-레티놀을 상피 색소 세포 안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 다시 쓸 수 있게 한다. 11-시스-레티날의 변환의 마지막 단계는 망막의 로돕신을 재형성하기 위해 옵신과 결합하는 것이다. 로돕신은 빛이 적을 때나 야간의 시각 기능에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비타민 A 결핍이 로돕신의 재형성을 억제하고, 그 첫 번째 증상인 야맹증을 일으킨다. 레티노 산 형태의 비타민 A는 유전자 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레티놀이 일단 세포로 흡수되면, 레티놀 디히드로게나아제에 의해 레티날로 산화되고, 레티날은 레티날 디히드로게나아제(retinal dehydrogenase)에 의해 레티노 산으로 산화된다. 레티날의 레티노 산으로의 전환은 비가역적 과정이며, 레티노 산의 핵수용체 리간드로서의 활성 때문에 레티노 산의 생성은 엄격히 제한된다. 레티노 산은 두 개의 다른 핵수용체와 결합되어 유전자 전사를 유발하거나 억제할 수 있다. 이를 레티노 산 수용체(RAR, retinoic acid receptor) 또는 레티노이드 X 수용체(RXR, retinoid X receptor)라고 한다. RAR과 RXR은 서로 결합한 후 DNA와 결합할 수 있다. RAR은 RXR과 RAR-RXR의 헤테로다이머(hetrodimer)를 형성하지만, RAR-RAR의 호모다이머(homodimer)를 쉽게 형성하지는 않는다. 한편, RXR은 RXR과 RXR-RXR의 호모다이머도 쉽게 형성하고 많은 다른 핵 수용체와도 헤테로다이머를 형성하는데, 갑상선 호르몬 수용체(RXR-TR), 비타민 D 수용체(RXR-VDR), 페록시솜 확산-활성 수용체(peroxisome proliferator-activated receptor, RXR-PPAR), 간 X 수용체(RXR-LXR)등이 있다. 호모다이머 RXR-RXR은 레티노이드 X 반응 요소(retinoid X reponse element)를 인식하는 반면, 헤테로다이머 RAR-RXR는 DNA 위의 레티노 산 반응 요소(retinoic acid response element)를 인식한다. 다른 RXR 헤테로다이머도 다양한 다른 반응 요소와 결합한다. 일단 레티노 산이 수용체와 결합하고 이양체가 형성되면, 수용체는 구조적인 변화를 거쳐 보조 억제물질(co-repressor)이 수용체로부터 분리되게 한다. 그 다음에 공활성화 인자(coactivator)가 수용 복합체와 결합하여, 히스톤의 염색질 구조를 느슨하게 하는 것을 돕고, 전사 기관과 상호 작용하게 된다. 수용체는 DNA의 반응 요소와 결합하고 대상 유전자의 발현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 그 예로 세포 레티놀 결합 단백질(CRBP)과 수용체 그 자체를 부호화하고 있는 유전자가 있다. 비타민 A, 더 구체적으로는 레티노 산은 유전자를 활성화시키고, 케라티노사이트(keratinocyte, 미성숙한 피부 세포)와 성숙한 상피세포를 구별함으로써 피부의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한다. 피부 질환의 치료에 쓰이는 레티노이드 요법의 정확한 메커니즘은 연구 중이다. 여드름의 치료에 가장 많이 처방되는 레티노이드 약품은 13-시스 레티노 산(isotretinoin)이다. 이는 피지샘의 크기와 분비활동을 줄인다. 40mg의 아이소트레티노인이 분해되어 10mg의 ATRA가 된다.(이 약품의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논쟁 중이다.) 아이소트레티노인은 피부 표면과 도관(duct) 모두에서 박테리아 수를 감소시킨다. 이것은 박테리아의 영양공급원인 피지의 감소에 따른 결과로 생각된다. 아이소트레티노인은 단핵백혈구와 호중구(neutrophils)의 화학주성 반응을 억제하여 감염을 줄인다. 또한 선택적으로 세포사멸(apoptosis)을 발생시키는 유전자 발현에 변화를 주어 피지샘을 개선시킨다. 아이소트레노인은 기형을 유발할 수 있고, 수 많은 잠재적 부작용이 있다. 따라서, 의사의 지도하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비타민 A가 부족한 쥐도 레티노 산이 보충되면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는 비타민 A 결핍으로 인한 발육장애와 초기의 안구건조증에 대한 반례이다. 그러나 그러한 쥐는 불임이 될 수 있고(남성과 여성 모두) 망막이 약화되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해당 기능에 레티날 또는 레티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환과 배아에서의 레티놀로부터 레티노 산의 국부적 합성 때문에, 비타민 A 결핍인 쥐의 생식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레티놀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타민 A의 결핍이 대략적으로 전 세계 5세 미만의 아동의 3분의 1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예상된다. 비타민 A의 부족때문에 개발도상국에서 매년 대략 250,000-500,000명의 어린이가 시력을 잃는다.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두드러진다. 비타민 A 결핍은 일차적인 결핍증과 이차적인 결핍증을 유발할 수 있다. 일차적인 비타민 A 결핍증은 과일과 채소 또는 동물성 식품과 유제품의 비타민 A를 통해 적정 섭취량의 프로비타민 A 카르티노이드를 섭취하지 못한 아이와 어른에게서 발생한다. 이른 젖떼기도 비타민 A 결핍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이차적인 비타민 A 결핍은 만성 지질 흡수 불량, 담즘 생성 및 분비 불량, 담배 연기와 같은 산화제에의 만성적인 노출, 만성적인 알콜중독과 관련이 있다. 비타민 A는 지용성이고 소장에서의 흡수되는 정도는 미셸의 용해도에 의존하므로, 저지방 식단이 비타민 A 부족을 일으킬 수 있다. 비타민 A 전달 단백질 합성과 레티놀-레티날 변환의 보조인자로서 아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아연 결핍도 비타민 A의 흡수, 전달, 대사 불량을 일으킬 수 있다. 영양결핍인 사람들에게는 보통 비타민 A와 아연의 섭취량이 작으면, 비타민 A 결핍증이 심해지고 생리적인 징후와 결핍증의 증상이 나타난다. 부르키나 파소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아동에게 비타민 A와 아연을 보충해주면 말라리아 증상이 크게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티날의 시각 색소포로서의 기능 때문에, 비타민 A 결핍의 가장 빠르고 구체적인 징후 중에 하나는 시각 손상으로, 특히 박명시가 약화된다(야맹증). 지속적인 결핍은 일련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가장 끔찍한 변화는 눈에서 일어난다. 또 다른 눈의 변화는 안구건조증이다. 첫째로 정상적인 눈물샘과 점액을 분비하는 상피조직이 각화성 상피조직으로 대체됨에 따라 결막의 건조가 발생한다. 이는 불투명한 플라크에서 케라틴 조각들이 형성(비토 반, Bitot's spot)된 후에 발생한다. 결국에는 거친 각막 표면이 연화과정에 의해 침식되고, 각막이 손상되고(각막 연화증) 시력을 잃게 된다. 다른 변화로는 면역 불량(귀의 감염과 요로의 감염 가능성이 증가된다. 수막구균성 질환) , 과각화증(모낭의 백색 덩어리), 모공 각화증 그리고 편평 상피화생이 있다. 치과에 관련되는 것으로는, 비타민 A 결핍이 에나멜 저형성을 일으킨다. 과도하지 않은 적절한 비타민 A의 공급은 정상적인 태아의 성장을 위해 임산부와 수유중인 여성에게 특히 중요하다. 결핍증은 생후의 비타민 보충으로 보상되지 않는다. 대개 비타민 보충제의 과도한 복용으로 인한 과도한 비타민 A 섭취는 선천적 결손증을 유발할 수 있고 따라서 일일 권장량을 초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임신 중 음주로 인한 비타민 A 대사 억제는 태아기 알코올 증후군을 일으키며 산모의 비타민 A 결핍과 관련있는 최기성을 나타낸다. 리보플라빈 리보플라빈(riboflavin) 또는 비타민 B는 수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이다. 락토플라빈(lactoflavin)이라고도 한다. 리보플라빈 부족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은 잘못된 식생활이다. 리보플라빈이 포함된 육류, 달걀, 우유, 치즈, 요구르트, 잎채소, 통곡식 등을 섭취하지 않으면 결핍된다. 리보플라빈은 수용성이므로 체내에 축적할 수 없어 매일 섭취해야 한다. 간 이상이나 약물 부작용 등 다른 원인으로 리보플라빈 부족이 생길 수도 있다. 리보플라빈이 부족하면 아래의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리보플라빈은 과잉되면 소변으로 배설되기 때문에 과잉장애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루 필요량의 수백 배를 장기간 투여하여도 무해하다. 그러나 하루에 400mg 이상 섭취하면 설사나 다뇨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잉 섭취한 후에는 소변이 형광노란색이 된다. 효모, 간, 달걀노른자, 시금치, 우유 등 비타민 B6 비타민 B는 수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로, 비타민 B 복합체에 속한다. 여러 형태가 알려져 있는데, 인산 피리독살(PLP)이 활성형이며, 아미노기 전이, 아미노기 이탈, 카르복시 이탈을 포함한 아미노산 대사와의 많은 반응에서 공동 인자가 된다. PLP는 또한 글리코겐으로부터의 포도당 방출을 지배하는 효소 작용에도 필요하다. 7가지 유형이 알려져 있다. PA를 제외한 모든 유형들은 상호전환이 가능하다. 대사 작용으로 활성화된 비타민 B의 유형인 인산 피리독살은 다량 영양소의 대사, 신경 전달 물질 합성, 히스타민 합성, 헤모글로빈 합성, 유전자 발현 등의 여러 측면에서 연관되어 있다. 인산 피리독살은 여러 반응의 보효소로서 기여하며, 카르복시 이탈, 아미노기 전이, 라세미화, 제거, 교체, 상호 변환 작용이 용이하도록 돕는다. 비타민 B의 대사는 간에서 이루어진다. 비타민 B12 비타민 B() 또는 코밸러민(, 시아노코발라민 )는 수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이다. B12는 정신안정 작용이 있다. 비타민 C 비타민 C()는 비타민의 한 종류이다. 거의 모든 음식물에 들어있을 정도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비타민의 하나이다. 인체에서 이 비타민이 결핍되면 괴혈병이 발생한다. 강한 환원제로서 콜라겐의 합성 효소 활성화등 인체에 있어 필수적인 성분중 하나이다. 비타민 C, 아스코르브산 또는 간단하게 아스코르브산염(아스코르빈산의 음이온)은 인간과 특정한 다른 동물 종에게 필수적인 영양제이다. 비타민 C는 아스코르브산과 그것의 염, 몇몇의 디히드로아스코르브산과 같은 산화된 형태의 분자를 포함한 동물에서 비타민 C의 움직임을 갖는 여러 개의 비타머들을 말한다. 아스코르브산염과 아스코르브산은 pH에 따라 그 형태가 상호전환 되는 이후로 그들 중 하나가 세포내로 삽입된다면 그들 중 하나가 둘 다 자연적으로 체내에서 보존된다. 비타민 C는 콜라겐 합성 반응이 고장 날 때 가장 심각한 괴혈병의 증상을 야기시키는 여러 개의 반응을 포함한 적어도 8개의 효소 반응의 보조인자이다. 동물에서 이러한 반응들은 특히 상처치료와 모세혈관에서의 출혈 예방에 중요하다. 아스코르브산염은 또한 산화 물질로부터 보호하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한다. 아스코르브산염(아스코르브산의 음이온)은 모든 동물과 식물들에서 다양한 필수적인 신진대사를 요구로 한다. 이것은 거의 모든 유기체에서 내부적으로 만들어진다; 주요 예외 상황으로는 대부분의 박쥐, 모든 기니피그, 카피바라, 그리고 직비원류(안경원숭이, 원숭이 그리고 인간과 다른 유인원들을 포함한 두 주요한 아목 중 하나)가 있다. 아스코르브산염은 또한 몇몇의 새와 물고기 종에서 합성되지 않는다. 아스코르브산염을 합성하지 못하는 모든 종들은 그것을 식사를 통해 얻는다. 인간에게서 이 비타민의 결핍은 괴혈병을 이르킨다. 아스코르브산은 또한 산화를 예방하는 음식 첨가물로도 널리 쓰인다. 비타민 C는 열, 물, 산소 등에 의해 쉽게 파괴되므로 영양제를 통해 부족분을 보충하기도 한다. 비타민 D 비타민 D()는 지용성으로 분류되는 비타민의 일종이다. 비타민 D는 비타민D와 비타민 D로 나뉜다. 비타민 D는 식물에, D는 동물에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비타민 D가 사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비타민D는 지방에 융해되는 비타민으로서 골격 형성에 필요한 칼슘을 대장과 콩팥에서 흡수시키는 데 기여하며 또한 부갑상선에서 생산되는 파라토르몬(Parathormon) 과 칼시토닌(Calcitonin)과 협동으로 칼슘을 알맞게 골수로 운반하여 뼈대가 제모양으로 크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비타민D는 화학적 구조로 볼 때 비타민 D(에르고칼시페롤, Ergocalciferol])와 D(콜레칼시페롤,Cholecalciferol)로 나뉘지만 그들의 형성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다시 말해 피부에서 7-Dehydrochorsterin이 태양의 자외선을 받아 비타민 D가 형성된다. 최근 자외선 차단에 사용이 늘고 있는데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하는 것이 비타민D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때문에 태양 광선이 비타민 D의 합성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며, 태양을 아주 적게 쐬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를테면 광부)은 비타민 D의 결핍에 주의하여야 한다. 하루에 20분 정도 쐬어줘야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 D가 충분한 양이 생성된다. 비타민 D의 결핍은 뼈의 성장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한다. 이에 따른 대표적 질병으로는 후천성 구루병, 현기증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비타민 D를 과다 섭취할 경우엔 간에 축적 되어 고칼슘혈증, 식욕 부진등의 여러가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비타민 D 결핍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몸 속에 비타민 D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비타민 D 합성에는, 음식 섭취보다는 바깥에서 햇빛을 쬐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특히,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상태에서 햇빛을 쬐면 효과가 없다. 피부암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햇빛을 쬐어야 한다. 비타민 E 비타민 E는 지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이다. 생체막에서 지방질 산화 방지, 적혈구 보호, 세포호흡, 헴 합성 및 혈소판 응집에 관여한다. 비타민 E는 토코페롤과 토코트리에놀()을 모두 포함하는 화합물을 의미한다. 식물성 기름, 밀이나 쌀의 씨눈, 우유, 알의 노른자위, 채소의 푸른 잎 따위에 들어 있다. 비타민 K 비타민 K는 지용성 비타민의 한 종류이다. 녹황색 채소나 간, 곡류, 과일 등에 많이 들어있다. 엽산 엽산(葉酸, ) 또는 폴산(folic acid)은 비타민의 일종으로, 비타민 B 또는 비타민 M이라고도 불린다. 태아의 신경과 혈관 발달에 중요하기 때문에, 임신전과 임신 초기인 임신부에게 권장되기도 한다. 과일에 풍부하게 존재한다. 영어(folic acid, folate) 등의 언어에서 엽산을 가리키는 단어는 나뭇잎을 뜻하는 라틴어 folium에서 왔다. Dietary Reference Intake(DRIs)는 미과학청에서 건강한 사람들이 섭취하도록 계획된 참고값을 설정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 표는 두가지의 참고 값을 포함하고 있다. Reference Daily Intake(RDI 값,즉 일일섭취권장량은 약 97-98%의 건강한 미국 사람들이 하루에 섭취해도 적절한 수준의 양을 토대로 기준을 잡았다.)과 tolerable upper intake levels(UL,즉 일일섭취최대허용치는 체내에서 독성을 갖지 않을 정도로 먹을 수 있는 최대 허용치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엽산의 결핍은 엽산을 적게 섭취할 때, 흡수불량일 때(예, 술), 요구량이 증가할 때(예, 수유기), 과한 배설이 있을 때, 보통 비타민 B결핍과 함께 나타난다. 크고 핵이 있으며, 미성숙한 적혈구(적혈구에는 핵이 없다). 보통 상태의 적혈구에서 분열된 세포가 그 작용을 미처 다 하지 못한다. 엽산은 DNA 합성에 영향을 미친다. 엽산이 결핍되면 골수에서 DNA 생성이 안 되므로 전구세포(precursor cell)가 분열, 성숙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세포는 크기가 커지는데 RNA가 남아 단백질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세포는 커지며, 성숙하지 않고, 핵이 남아 있는 megaloblast가 된다. 이 세포는 산소 결합능력이 떨어지고, 약해지고 피로해진다. 장관 흡수 능력이 떨어지고, 만성 설사를 한다. 백혈구의 합성에 혼란이 온다. 무엽산 식사를 6~12주 정도 지속해야 적혈구에 변화가 온다. 다른 증상으로는 혀와 입의 염증, 피부의 비정상적인 색소, 설사, 성장지연, 우울증, 신경증상 이상 등이 나타나난다. 태아 발달 시, 신경관 형성에 결함이 생긴다. 임신부가 엽산결핍이면 태아 발달에 위험 요소이다. 그 외 마비, 요실금, 학습 능력 상실 등이 나타난다. 척추갈림증이라고도 하며, 태아의 신경관이 닫히는 임신 21~28일 사이에 모체의 엽산이 결핍되면 나타나는 질병이다. 태아의 척수나 척추 말단이 부풀어 나오거나 무뇌아로 태어난다. 무뇌아일 경우에는 출생 직후나 며칠 이내에 사망한다. 나이아신 나이아신(niacin) 또는 니아신은 비타민 B으로도 불리는 수용성 비타민이다. 니코틴산(nicotinic acid)이라고도 한다. 판토텐산 판토텐산()은 비타민 B 복합체에 속하는 물질로 판토스(Pantos)은 그리스어로 '모든 곳으로 부터' 라는 뜻이다. B5라고도 불리며 동식물에서 극히 미량이지만 광범위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식품에 함유되어 있다. 판토텐산은 피부와 머리카락을 구성하는 콜라겐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물질이고, 지질을 분해하여 유분기있는 피부를 방지하기 때문에 깨끗한 피부와 건강한 머릿결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인간이 스트레스를 느낄 때에 만들어지는 부신 피질 호르몬의 합성을 판토텐산이 돕기 때문에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되어 비타민 C와 함께 항스트레스 비타민이라고 불린다. 또, 판토텐산에서 생성된 코엔자임 A는 제초제, 농약 등 유해 물질에 대한 해독 작용을 하며 비타민 B6 , 엽산과 협력하여, 면역 능력을 높이기 위한 단백질 생성한다. 20-49세 성인의 1일 충분섭취량은 5mg이다. 효모, 간장, 계란, 표고버섯, 소 간, 고추, 녹차, 완두콩, 브로콜리, 송이버섯, 장어, 난황, 현미, 대두, 마늘, 연어, 전복 등 거의 모든 식품에 함유되어 있다. 판토텐산은 대부분의 식품에 함유 되어 있어 정상적인 식생활 시 결핍증이 나타나지 않지만 불균형한 식생활을 하는 알코올 중독자에서 결핍증이 나타날 수 있다. 판토텐산이 부족하면 성장정지·체중감소 , 피부염, 신경계 변성(變性),항체생산의 저하, 부신피질 기능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아직까지 과잉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이오틴 바이오틴(Biotin, 비오틴) 또는 비타민 B7은 비타민 H라는 별칭을 가진 비타민의 일종이다. 코엔자임 R이라고도 한다. 홍탁 홍탁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아카시번 아카시 번()은 일본 에도 시대 하리마 국 아카시 군(지금의 효고현 아카시 시・고베 시 니시 구・다루미 구 일대)을 지배했던 번이다. 성립 초기부터 여러 후다이 다이묘가 자주 교체되어 들어왔던 번으로, 이 상태는 신판 다이묘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번주로 들어온 1682년까지 계속되었다. 번청은 아카시 성이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하리마 1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케다씨()의 소령이었다. 겐나 3년(1617년), 히메지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가 돗토리 번으로 전봉되면서, 하리마 국 내의 소령은 중소 규모의 번으로 분할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아카시 번이다. 그 해 시나노 국 마쓰모토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다다자네가 10만 석으로 들어오면서 아카시 번이 세워졌다. 다다자네는 그때까지 이 지방의 거점이었던 후나게 성()을 폐성하고 아카시 성을 건설하였다. 이 성이 가진 성격은 해상 교통의 감시와 서국 다이묘(. 규슈・시코쿠・시코쿠 지방의 여러 도자마 다이묘)들을 압박하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아카시 성은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점 성곽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간에이 9년(1632년), 다다자네는 부젠 국 고쿠라 번 15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이듬해의 간에이 10년(1633년) 도다 마쓰다이라가(, 도다씨 종가)의 마쓰다이라 야스나오가 7만 석으로 들어왔다. 그가 이듬해의 간에이 11년(1634년)에 18세로 사망하면서 그의 형인 마쓰다이라 다다미쓰의 장남 마쓰다이라 미쓰시게가 그 뒤를 이었으나, 간에이 16년(1639년) 미노 국 가노 번으로 전봉되었다. 그와 교대로 오쿠보 다다모토가 가노 번으로부터 7만 석으로 들어왔으나, 게이안 4년(1649년)에 히젠 국 가라쓰 번으로 전봉되었다. 그해 단바 국 사사야마 번으로부터 후지이 마쓰다이라가의 마쓰다이라 다다쿠니가 7만 석으로 들어왔다. 그의 차남인 2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유키의 대에 동생 마쓰다이라 노부시게에게 5천 석을 분할 증여하면서 아카시 번은 6만 5천 석이 되었다. 노부유키는 명군으로 이름이 높았고, 번 통치 면에서는 농지 개간을 진행하였다. 엔포 7년(1679년) 야마토 국 고리야마 번으로 전봉되었고, 그 이후에는 로주가 되었다. 그와 교대로 혼다 마사토시가 고리야마 번으로부터 6만 석으로 들어왔으나, 영내에 가혹한 정책을 강요했다는 죄로 덴나 2년(1682년) 무쓰 국 이와세 번 1만 석으로 삭감 전봉되었다. 그 해 에치젠 국 오노 번으로부터 마쓰다이라 나오아키라가 6만 석으로 들어오면서, 이후 에치젠 마쓰다이라가()가 폐번치현까지 대대로 이어졌다. 8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코토는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25남으로, 이 때 2만 석이 추가 지급되어 8만 석이 되었고 그 격식은 10만석격이 되었다. 그러나 쇼군 가문의 자식을 번주로 맞아들이는 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재정난은 한층 더 박차가 가해졌다. 막말에는 신판 다이묘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좌막파가 되어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도 막부군 측으로서 참전하였다. 그 후, 신정부 측에 귀순하였다. 메이지 4년(1871년)의 폐번치현으로 아카시 현이 되었고, 이후 히메지 현()・시카마 현()을 거쳐 효고현에 편입되었다. 번주 가문이었던 에치젠 마쓰다이라가는 메이지 17년(1884년)의 화족령으로 자작가가 되었다. 오가사와라 가문 도다 마쓰다이라 가문 오쿠보 가문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 혼다 헤이하치로 가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마우스 마우스()는 평면 위에서 2차원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 컴퓨터 입력장치이다. 손에 잡히는 정도의 크기의 마우스를 손으로 움직이면 컴퓨터 화면상의 화살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마우스에 달린 단추를 한 번 누르거나, 연속으로 두 번 누르면 화살표가 가리키는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동작을 실행시키는 식으로 입력 기능을 수행한다. 마우스 본체의 움직임은 볼이나 적외선을 이용한 센서로 감지된다. 마우스의 종류로는 기계식 마우스, 광학식 마우스, 레이저 마우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984년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통해 대량 보급되었다. 매킨토시의 마우스 버튼은 한 개였지만, 그 이후의 마우스는 버튼이 3개였다. 마침내 애플도 마이티 마우스라는 이름으로 3개의 버튼을 가진 마우스를 내놨다. 컴퓨터 이용 시 마우스는 가장 필요한 도구 중 하나로서 마우스는 ‘컴퓨터의 팔’로 불리기도 한다. 마우스의 감도를 보이는 단위는 미키로, 1/100 인치를 1 미키로 삼는다. 컴퓨터 포인팅 장치로서 "마우스"(mouse)라는 용어는 빌 잉글리시의 1965년 출판물 "Computer-Aided Display Control"에서 비롯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마우스를 다듬어 한국어 순화 표현으로 다람쥐를 보급하였으나 정착되지 않았다. 트랙볼(track ball)이라고 명명된 초기 형태의 마우스는 1952년 캐나다 해군의 군사 비밀 프로젝트인 DATAR(Digital Automated Tracking and Resolving)에 참여했던 톰 그랜스톤(Tom Cranston), 프레드 롱스태프(Fred Longstaff) 그리고 케년 테일러(Kenyon Taylor)에 의해 발명되었다. 여기에는 캐나다의 파이브 핀 볼링(five pin bowling)에서 사용되는 규격 구(球)가 쓰였고 비밀 군사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특허 출원되지는 못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우스는 스탠퍼드 연구소(SRI, Stanford Research Institute)의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가 그의 동료 빌 잉글리시(Bill English)의 도움을 받아 1968년 발명하였다. 그들은 초기 모델이 뒷부분에 꼬리 같이 생긴 코드가 부착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보통 생쥐와 닮았기 때문에 이 장치를 마우스로 이름지었다. 엥겔바트는 마우스가 개인용 컴퓨터에서 널리 사용되기 전 그의 특허가 만료될 때까지 특허에 대한 로열티는 전혀 받지 않았다. 표준 PC 마우스는 한때 D-sub 단자를 통한 RS-232C 직렬 포트를 사용하였고, 마우스 이동의 데이터뿐 아니라 마우스의 회로를 구동하는 전력을 제공했다. 산업 표준의 USB 프로토콜과 단자는 마우스에 널리 사용되며 가장 대중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로 속한다. 무선 마우스는 적외선(IrDA 참고)이나 라디오(블루투스, 와이파이 포함)를 통해 데이터를 전송한다. 수신기는 직렬 포트나 USB 포트를 통해 컴퓨터에 연결 가능하며, 내장되어 있을 수도 있다. (종종 블루투스와 와이파이가 있는 케이스에) 아마가사키번 아마가사키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셋쓰 국 가와베 군・무코 군()・우하라 군()・야타베 군()・아리마 군() (지금의 효고현 아마가사키 시・니시노미야 시・아시야 시・고베 시 동부・이타미 시・다카라즈카 시・가와니시 시・이나가와 정 일대) 등을 지배했던 번이다. 번청은 아마가사키 성(지금의 효고현 아마가사키 시)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써 사관했던 다케베 가문()는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줄곧 아마가사키 군다이()로써 7백 석의 소령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의 당주였던 다케베 마사나가는 겐나 원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전공을 거두었다. 이 전공으로 일약 가와베 군・니시나리 군() 내의 1만 석의 소령을 지배하는 다이묘가 되면서 아마가사키 번이 세워졌다. 겐나 3년(1617년), 하리마 국 하야시다 번으로 전봉되었다. 그해 도쿠가와 가문()의 후다이 다이묘인 도다 우지카네가 5만 석을 받고 오미 국 제제 번에서 아마가사키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 당시의 아마가사키 번은 가와베 군・무코 군()・우하라 군()・야타베 군()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우지카네는 간에이 12년(1635년) 미노 국 오가키 번으로 전봉되었다. 아오야마 요시나리가 도토미 국 가케가와 번으로부터 들어와서 도다 가문()의 체제를 이어받았다. 이때 새로 개간한 농지 4천 석이 추가되어 5만 4천 석이 되었으나, 초대 번주 요시나리는 분가에 6천 석을 분할해 줄 것을 막부에 요청해 이를 허가받았고, 이에 따라 영지 규모는 4만 8천 석이 되었다. 4대 번주 아오야마 요시히데는 쇼토쿠 원년(1711년) 시나노 국 이야마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아마가사키 번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마쓰다이라 다다타카가 도토미 국 가케가와 번으로부터 들어와서 아오야마 가문()의 체제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무코 군・우하라 군・야타베 군 내의 도합 26개 촌이 막부에 몰수되면서, 4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또한 이마즈(), 니시미야(), 미카게(), 효고() 등지의 유복한 36개 촌이 막부에 몰수되었다. 대신 하리마 국 각지의 71개 촌이 주어져 고쿠다카는 5천 석이 추가되었으나, 실수입이 격감하면서 번 내 영지가 분단되어 영내의 지배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번의 재정은 점점 기울어져 갔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조정에 공순의 뜻을 밝혀 영지가 안도되었고, 그해 2월에는 신정부의 지시로 「사쿠라이()」로 성을 바꾸었다. 메이지 4년(1871년)의 폐번치현으로 아마가사키 현이 되었고, 이듬해 효고현으로 편입되었다. 최후의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오키는 세이난 전쟁 당시 박애사(, 훗날의 일본 적십자사)의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케베 가문 다메 도다 가문 아오야마 가문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 제제번 제제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오미 국 오쓰 주변을 지배했던 번으로, 지금의 시가현 오쓰 시에 위치했다. 1651년 이후의 고쿠다카는 7만 석으로, 당시 후다이 다이묘가 지배했던 기나이 지방의 번들 중에서도 히코네 번・오바마 번에 다음가는 대형 번이었다. 번청은 제제 성이다. 다메 도다 가문 혼다 히코하치로 가문 노다 스가누마 가문 이시카와 가문 혼다 히코하치로 가문(재봉) 제제현()은 일본의 옛 행정구역명이다. 제제 번이 폐번치현으로 인해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현으로 바뀐 것이다. 그 후 1872년 1월 2일 부현(府縣) 합병으로 오쓰현에 편입되었다. 간무 천황 간무 천황(, 737년 ~ 806년 음력 3월 17일 (양력 4월 9일), 781년~806년)은 일본의 제50대 천황이다. 고닌 천황과 백제인의 후손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아들이다. 794년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로 옮겨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를 열었고 이후 교토는 100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도가 되었다. 737년 아버지 시라카베노 오오키미(), 즉, 고닌 천황과 어머니 화씨부인 타카노노 아소미니이가사()에게서 태어났다. 일본의 한국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일본 언어학계의 거두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廣三郞)는 간무는 백제인이다고 말하였고, 일본 제 125대 천황인 아키히토는 2001년 12월 23일 만 68세 생일을 맞이해서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간무의 대표적인 치세로는, 일본의 수도를 나라(헤이조쿄)에서 나가오카(나가오카쿄 784)로 옮겼다가 다시 헤이안쿄(平安京)(794)로 옮겼다. 그곳의 황궁 이름은 헤이안노미야였다. 이것은 일본 역사의 헤이안 시대의 시작이었다. 간무는 정부 조직과 기능을 개선하려고 시도한 적극적인 천황이었다. 간무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758~811)를 에미시에 파병했다. 같은 시기에 후지와라노 다마로는 우대신이 되었는데 이 당시에 좌대신과 우대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주요 상담원(대납언)과 천황은 책임과 권력을 직접행사하였다. 간무 천황의 치세는 25년간 지속되었다. 1764년 1764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임광 임광(任珖, 1579년~164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字)는 자정(子瀞). 사헌부 감찰 익신(翊臣)의 아들이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09년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계축옥사(癸丑獄事)의 진행 과정을 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1623년) 후 순릉 참봉을 거쳐 162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각지의 행정을 바로잡았다. 1636년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후 다시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643년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어 우부빈객(右副賓客) 김육과 함께 선양에 볼모로 억류되었다가 돌아오게 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다가 164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이에쓰나(, 1641년 9월 7일 - 1680년 6월 4일)는 에도 막부 제4대 쇼군(재위 1651년 - 1680년)이다. 1641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남으로 에도 성 혼마루(本丸)에서 출생하였다. 모친은 호주인(宝樹院, 오라쿠노 가타お楽の方)이며, 유모는 야지마노쓰보네(矢島局)이다. 1644년 이름을 아명인 다케치요(竹千代)에서 이에쓰나(家綱)로 고친 뒤 1645년 관례를 치렀다. 이후 1650년 거처를 니시노마루(西の丸)로 옮겼다. 1651년 이에미쓰가 사망하면서 조정으로부터 나이다이진(内大臣)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에도 성에서 제 4대 쇼군으로 즉위하였다. 이에쓰나가 11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쇼군이 된 이 사건은 쇼군 직위가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세습된다는 점을 확고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에쓰나를 비롯하여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제외한 후대의 쇼군들은 모두 쇼군 선지를 받기 위해 교토의 천황을 방문하는 옛 관습을 버리고 에도에서 직접 장군 선지를 받게 된다. 이에쓰나의 나이가 아직 어린 틈을 타 유이 쇼세쓰(由比正雪), 마루바시 주야(丸橋忠弥) 등이 주도한 게이안의 변(慶安の変)이 일어나는 등 즉위 초기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에쓰나의 숙부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를 비롯하여 이에미쓰 시대부터의 다이로(大老)인 사카이 다다카쓰(酒井忠勝), 로주(老中)인 마쓰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 아베 다다아키(阿部忠秋), 사카이 다다키요(酒井忠清) 등 여러 명신들의 보좌에 힘입어 혼란은 수습되었으며 정치 기구가 한층 더 정비되는 등 이후 29년의 치세 내내 안정된 정권이 유지되었다. 또한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에게도 말기 양자를 들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보다 완화해 주었고 순사금지령(殉死禁止令)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하여 과거의 무단정치(武断政治)에서 문치정치(文治政治)로의 정책 변환을 꾀하였다. 재위 후반기에 들어서면 초기의 노신들은 다수가 사망하거나 노령으로 은퇴하여 1666년 사카이 다다키요(酒井忠清)가 다이로에 취임한 이후부터는 로주들간의 합의와 이에쓰나 자신과의 상의를 통하여 막부가 운영되었다. 또한 이에미쓰 시대의 간에이 대기근 당시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농정(農政)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유통, 경제 정책을 전개하였으며 『본조통감(本朝通鑑)』을 편찬하는 등 문화 사업도 행해졌다. 막부 내부의 직제도 정비되었으며 조정과의 관계도 안정되었다. 이에쓰나는 후시미노미야 사다키요 친왕(伏見宮貞清親王)의 3녀인 아키코 여왕(顕子女王)을 미다이도코로로 맞아들였으나 후사를 얻지 못했으며, 측실인 오후리(お振)와 오마루(お満流) 또한 회임을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모두 사산하거나 유산하였다. 결국 1680년 병으로 쓰러져 위독한 상태에 빠진 이에쓰나는 중신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의 권유를 받아 다테바야시 번주로 있던 동생 마쓰다이라 쓰나요시를 양자로 맞아들여 쇼군의 직위를 물려준 뒤 사망하였다. 묘소(墓所)는 도쿄 다이토 구(台東区)의 간에이지(寛永寺)에 있다. 미카와국 미카와 국()은 일본의 옛 구니로, 현재의 아이치현이다. 미카와는 오와리 국, 미노 국, 시나노 국, 도토미 국과 경계를 접한다. 미카와라는 말은 현재까지도 아이치 현의 동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주요 도시로는 도요하시 시, 오카자키 시, 도요타 시 등이 있다. 갖은자를 써서 ""라고 적기도 하며, 산슈(, )라고도 한다. 미카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진출하기 전까지의 본거지였다. 미카와의 주요 성은 오카자키였으며, 토요하시 근방의 요시다 성 역시 당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미카와는 불꽃놀이로 유명한데, 이는 군사상 보안의 이유로 에도 막부가 화약의 제조를 허가한 유일한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윤순지 윤순지(尹順之, 1591년 ~ 166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字)는 낙천(樂天), 호(號)는 행명(連溟)이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작은할아버지 월정 윤근수의 문인이다. 감사 윤훤(尹暄)의 아들이다. 작은할아버지 윤근수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1620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조정의 관직을 두루 지냈으나 1627년 정묘호란 때 아버지가 군무(軍務)를 다하지 못한 죄로 사사(賜死)되는 바람에 운둔하였다. 1629년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1643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4년 지방 업무 처리에 문제가 발생하여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1657년 선조 수정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63년 공조 판서가 되었다. 히코네번 히코네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오미 국 북부를 지배했던 번으로, 지금의 시가현 히코네 시에 위치했다. 번주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의 필두격인 이이 가문()으로, 번청은 히코네 성이다. ※ () 안은 성립에서 폐지까지의 존속 기간 2004년 하계 올림픽 2004년 하계 올림픽(, , )은 2004년 8월 13일부터 8월 29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이 열린 지 108년만이다. 201개 전 IOC 회원국이 참가하여 17일간 28개 종목의 301개 메달을 걸고 경쟁하였다. 1997년 9월 5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개최지가 결정되었다. 2004년 8월 29일 모든 경기가 끝나고,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폐막식이 열렸다. 약 7만 명의 인원이 폐막식을 관람하였다. 이 대회에는 키리바시, 동티모르 2개국이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탈레반 정권 몰락 이후 아프가니스탄이 1996년 하계 올림픽 이후 8년만에 다시 참가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전 대회에서는 이전 탈레반 정권이 여자선수에 대한 출전금지령을 내린 것이 밝혀지면서 인종 및 성별 차별을 금지하는 IOC 규정 위반으로 출전이 금지되었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으로 탈레반 정권이 몰락하면서 출전 금지가 해제되었다. 2004년 하계 올림픽 참가국 및 인원 수는 다음과 같다. 오가키번 오가키 번()은 일본 에도 시대 미노 국 오가키 주변을 지배했던 번으로, 지금의 기후현 오가키 시에 위치했다. 번청은 오가키 성이다. 이시카와 가문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야스모토 계통) 오카베 가문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사다카쓰 계통) 다메 도다 가문 충청남도 충청남도(忠淸南道)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도이다. 동쪽으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를 둘러싸며 충청북도와 접하고, 서쪽은 서해에 면하며, 남쪽으로 전라북도,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접한다. 행정구역은 8시 7군이다. 도청 소재지는 홍성군 홍북읍 일원의 내포신도시이다. 충청남도의회는 도청과 인접한 예산군 삽교읍에 있다. 2018년 예산규모는 6조 9,648억원(일반회계 5조 4,858억원, 특별회계 4,678억원, 기금 1조 112억원)이다. 고대에는 마한에 속해 있었다. 마한의 중심지였던 목지국은 지금의 천안시 목천읍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나, 백제가 마한을 점령하면서 백제에 속하였다. 백제 문주왕 때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성왕 때는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신라가 통일한 후 신라가 9주 5소경을 설치하면서 9주 중 하나인 웅주를 충남 지역에 두었다.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지금의 경기도, 충청북도 지역과 함께 양광도로 묶이게 된다. 조선 시대 충청도로 개편되었고, 충청남도의 서부 지역에는 홍주목(홍성), 동부 지역에는 공주목이 설치되었다. 선조 31년(1598년) 충청도 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였다. 이후에 충청도의 명칭은 공청도, 충청도, 공홍도, 충홍도, 공충도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 개칭되다가 순조 34년(1834년)에 공청도에서 충청도가 되었다. 23부제가 실시되었을 때 홍주부와 공주부가 설치되었다. 1896년 8월 4일에 충청도를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하였고 충청남도의 수부(首府)는 공주에 두었다. 1910년 10월 1일 일제도 충청남도청 소재지를 공주로 하였으나, 1932년 대전으로 도청을 이전하였다. 1914년 충청남도 평택군이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1963년 전라북도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와 대덕군이 대전직할시로 승격되어 충청남도에서 분리되었다. 2012년 7월 1일 연기군과 공주시 일부를 일원으로 세종특별자치시가 신설되면서 충청남도에서 분리되었다. 2012년 12월 28일 도청을 홍성군 홍북읍, 예산군 삽교읍 일원의 내포신도시로 이전하였다. 동쪽으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를 둘러싸며, 충청북도와 접하고, 서쪽은 황해에 면하며, 남쪽으로 전라북도,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접한다. 충청남도의 지형은 대체로 낮고 평평하다. 해발 고도 1,000m 이상을 넘는 곳은 한 곳도 없으며, 도 전체의 평균 고도가 100m로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지형을 이룬다. 평균 600m 이하의 낮은 차령산맥이 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동서로 지나고 대표적인 산으로 오서산(791m), 칠갑산(561m), 광덕산(699m) 등이 있다. 차령산맥 남쪽 수계권의 대표 강인 금강은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큰 강으로서 금산에서 감입곡류하면서 충북으로 흐르다가 공주, 청양을 지나 논산 강경에서 논산천과 합류하여 부여, 서천을 거쳐 장항에서 서해로 유입된다. 금강 유역에서는 부여의 금천 하류의 구룡평야와 논산의 논산천 일대의 논산평야가 비옥하다. 논산천 유역에는 탑정호가 있다. 차령산맥 북쪽 수계권의 대표 하천인 삽교천은 차령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쪽 아산만으로 흐르면서 예당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삽교천 유역에는 대한민국 최대 저수지인 예당저수지가 있다. 충청남도 황해 해안선은 출입이 매우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며 서북쪽으로는 태안반도가 돌출되어 있다.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과거보다 해안선이 단순해졌다. 서산 A.B지구 방조제, 아산만 방조제, 삽교 방조제, 대호 방조제 등은 해안선의 출입을 단순하게 만든 대형 방조제들이다. 해안사구의 발달로 만리포·연포·몽산포·대천·무창포 해수욕장 등이 있다. 충청남도의 산림 환경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제6차 국가산림자원조사(2011~2015)결과 2015년말 충청남도의 산림면적은 408천ha로 충청남도 전체면적 821천ha의 49.7%, 전국 산림면적 6,334천ha의 6.4%를 차지한다. 산림면적은 각종 개발 등으로 산림 이외의 용도로 전환·사용하는 일이 많아 매년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며, 특히 2012년 7월 1일 세종시가 출범하면서 당초 충청남도 소관이었던 연기군(19,837ha)과 공주시(3,917ha-반포·의당·장기)의 임야 23,754ha가 세종시에 편입되어 ’10년말 기준 438천ha에 비하여 ’15년말 408천ha로 6.8%가 감소하였다 임목축적은 산림의 울창한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2015년도 말 충청남도의 총 임목축적과 은 53,918천㎥로 전국 924,809천㎥의 5.8%이다 ha당 평균 임목축적은 치산녹화 원년(1973년)의 11.3㎥(전국)에 비하면 충청남도가 2015년 기준 132.1㎥/ha으로 비약적으로 증가(11.6)하였으나 임업 선진국인 뉴질랜드 (392㎥/ha), 독일(321㎥/ha), 스위스(352㎥/ha)에 비해서는 아직도 낮은 수준으로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2010년도 대비 2015년도 말 충청남도 ha당 임목축적은 132.1㎥로 ’10년의 109.7㎥ 대비 22.4㎥(20.4%)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2015년말 기준 충청남도 산림면적은 제주도를 제외한 8개도 중 가장 적고 ha당 임목축적은 8개도 중 7위이나 ’10년대비 증감율은 20.4%로 1위이다. 충청남도 임목축적은 OECD 평균 131㎥/ha 및 미국의 임목축적을(131㎥/ha) 추월한 수치이다. 충청남도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다. 겨울에는 북서풍을 막을수 있는 지형적 장애물이 적은편이기 때문에 같은 위도상에 위치하는 동해안보다 춥다. 서북부 해안지대에는 눈내리는 양이 많다. 기온은 1년 쾌청일수는 60~70일이며, 일조일수는 58~60%로 해안지방이200~220일이며, 내륙지방은 180~200일이다.1월 평균기온이 도서지방의 경우 -1 °C, 내륙지방은 -3 °C이다. 8월 평균기온은 도서지방이 24 °C, 내륙지방이 26 °C로서, 도서지방과 내륙지방의 온도차는 2 °C이다. 강수량은 지역마다 다르다. 서해안은 연간 1.150mm~1.350mm이다. 강수량이 금강유역과 태안반도 지방이 가장 많고, 해안지방의 1년 강우 일수는 약 90일, 내륙지방이 약110일인데 7월에 많고 1월이 가장 적다. 2018년 6월 기준 충청남도의 행정 구역은 8시 7군, 25읍 136면 46동이다. 2018년 6월 기준 충청남도의 면적은 8,226.17km이다. 2018년6월 기준 주민등록 인구는 923,282세대, 2,121,618명이다. 통계청의 시도별 장래인구추계(2015~2045)를 바탕으로 산정한 충청남도 시군 장래인구추계(2015~2035) 결과, 2017년 현재 211만명보다 30만명이 늘어난 2035년 241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1970년에는 서산군(서산시)과 논산군(논산시)이 전국 시·군 중에서 인구 6위, 10위로 상위권을 차지하며 도내에서 대전시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다. 그러나 수도권의 확장으로 경기도와 인접한 천안, 아산의 인구는 급증한 반면, 충청남도 서부 및 남부 지방 인구는 감소하여 지역 내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충청남도청은 충청남도의 행정을 총괄하는 지방행정기관으로 도지사는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부지사는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이나 별정직 1급상당 지방공무원 또는 지방관리관으로 보한다. 현재 도지사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양승조이다. 도청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충남대로 21에 위치한다. 산하 기관으로 직속기관 16개, 사업소 8개, 출장소 2개를 두고 있다. 충청남도는 지방재정법 제39조 및 같은법 시행령 제46조, 충청남도 도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에 근거를 두고 청남도가 독점적으로 행사해 왔던 예산편성권한을 지역주민들이 함께 행사하는 도민참여예산제도를 운영한다. 예산의 투명하게 공개하며, 도민의 참여를 통하여 예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대표의 협의를 통한 실현 가능한 예산안을 편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충청남도는 충청남도 지방보조금 관리 조례 제20조를 근거로 보조금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전국 최초로2016~2017 회계연도에 대한 보조금 총괄 정산을 실시하고 정산 자료를 도의회에 제출하였다. 더 일 잘하는 지방정부를 위해 혁신경영으로 미래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는 기업들과 혁신을 논하고, 도정 접목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로 충남혁신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제1회는 2016년 5월 31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개최되었으며, '공유경제와 규제, 그리고 혁신'을 주제로 '에어비앤비'와 '모두의 주차장', '콜버스' 등 3개 기업의 대표 등을 초청해 사례를 듣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역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여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입법과제로 제안하는 등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일련의 과정인 충남의 제안을 운영한다. 충청남도는 도가 공공정책을 수립하거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인간의 충돌인 공공갈등 관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충청남도 공공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다. 2015년 자치행정국에 갈등관리부서(도민협력새마을과 갈등관리팀)를 신설하여, 갈등에 대한 대응체계를 구축하였다. 2018년 갈등관리부서를 갈등정책부서(행정부지사 직속 공동체새마을정책관 갈등정책팀)로 조직개편을 시행하였다. 이는 갈등에 대한 사후적 관리 체계에서 선제적 갈등 예방을 위한 정책적 대응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지적도 기반의 위치정보와 증강현실 기술을 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위치기반 증강현실(AR)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며, 재난 현장에서 드론이 촬영한 영상을 도청 종합상황실로 전송하고 내부망에 연결된 모든 컴퓨터에 실시간으로 영상을 중계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충남도는 구성원들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도민이 도정의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할수 있도록 하는 정보기술(IT) 인프라 구축(정책포털, 공공기관 업무지원, 인사정보 통합관리, 통화이력관리 시스템)과 무기명 토론방, 무기명 단체채팅방, 사무공간 재고성 등을 통한 자유로운 소통을 통한 협업과제를 추진하여 2013년 대한민국 지식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이래 전국 최초로 5년 연속 수상하고 2014년, 2017년 2차례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내포신도시는 충남도청 소재지로, 충청남도 홍성군 신경리와 예산군 삽교읍 목리를 중심으로 조성 중인 신도시이다. 내포신도시의 내포라는 명칭은 다양한 매력을 지는 신도시의 특징을 함축시킬 수 있는 이름을 만들기 위해 2006년 전국을 대상으로 공모를 실시하였고 공모결과 내포신도시라는 명칭이 충남의 발전과 비전, 정체성, 상징성, 에 제일 적합한은 것으로 평가되어 신도시의 명칭을 내포로 결정하게 되었다. 내포신도시의 '내포'는 예로부터 서해바다에 인접한 충남 서북부 지역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에 김좌진, 윤봉길, 한용운 등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지역으로서 불교와 천주교의 전파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2006년에 대전광역시에 위치해 있던 충남도청을 홍성군과 예산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2010년에 신도시 이름이 내포로 결정되었다. 내포신도시는 충청남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선도하는 LOHAS형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 개발 방향이다. 지형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전국 어느 지역으로든 갈 수 있는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2017년말 기준 시외버스는 587개의 노선을 운행하는 중이며, 농촌 또는 산간지역 829개 노선, 시 지역간 시내버스 888개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서부에는 서해선 (2020년 개통 예정)과 장항선, 남부에는 호남선과 호남고속선, 북동부에는 경부선과 경부고속선이 지난다. 도의 북부 지역인 천안시와 아산시에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운행된다. 또 한국고속철도 KTX가 아산시 배방읍 장재리에 위치한 천안아산역과 공주시 이인면 신영리에 있는 공주역,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 있는 계룡역, 논산시 취암동에 있는 논산역에 정차한다. 충청남도의 법정도로 총 연장은 7,234km이다. 2017년 12월을 기준으로 도로 포장률은 85.6%이다. 동부에는 논산천안고속도로, 서부에는 서해안고속도로가 도의 남북을 연결한다. 동북부 천안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남부 논산, 계룡으로는 호남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지선, 동남부 금산으로는 통영대전고속도로가 지난다. 2009년 충청남도 동서를 연결하는 당진대전고속도로와 서천공주고속도로가 차례로 개통하여 충청남도 모든 지역에 고속도로가 연결된다. 국도망 역시 2000년대에 들어서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구간은 자동차전용도로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단지형 외국인 투자지역은 천안, 인주, 천안5, 송산2, 송산2-1 총5개소이다. 전체면적 1310,769.7㎡ 중 분양면적22,750㎡를 제외한 임대면적은 1,054.204.3㎡로 임대율(83.2%)은 높은편이다. 기업입주현황은 천안42개사, 인주7개사, 천안5 14개사, 송산2 2개사, 송산2-1 1개사로 총 66개기업이 현재 가동중이거나 입주 준비중이다. 충청남도는 최근 7년간 총 4,865개 국내기업을 유치하였고, 그 중 308개사는 수도권 이전기업이다. 2017년 12월말 기준 충청남도의 산업단지 현황은 총 151개소이다. 가장 많은 단지수를 차지하는 농공단지는 91개소(14,469,000㎡)이고, 뒤를 이어 일반산단 53개소(64,258,000㎡), 국가산단5개소(28,104㎡), 도시첨단2개소(1,299,000㎡) 순이다. 황해를 중심으로 역내 공동번영 방안을 모색하여 충남도가 지방정부차원의 성장 동력을 마련함으로써 환황해권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사업으로 현재는 사업발굴 단계이다. '환황해포럼'은 2015년부너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환황해이니셔티브 시행계획 수립'은 2018년 계획 수립을 토대로, 연차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충청남도는 해외바이어 초청 수출상담회, 해외 무역사절단 운영지원, 해외지사화 사업지원 등을 통하여 도내 내수 및 초보기업을 수출기업으로의 육성 추진을 통해 우리 도의 수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충남도의 수출액과 무역수지는 꾸준히 전국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8년 3분기에 무역수지 41,110백만불로 전국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충청남도는 총 면적8,226.1㎢로 전 국토면적 100,339.5㎢의 8.2%인 전국 6위 규모의 면적을 보유한 도로 2017년도말 현재 923천세대에 인구는 2,180천명이며, 수산분야 참여인구는 8,598가구 18,114명으로 도내 인구의 0.8%, 전국 어가인구 121,734명의 14.9%를 차지하여, 전남, 경남에 이어 대한민국 전국 3위이다. 행정구역은 8시 7군으로 이중 7개 시․군이 연안을 접하고 있고, 8개의 지구별 수산업협동조합과 169개 어촌계가 있으며, 5,948척의 어선과 연간 162천톤의 수산물을 생산 전국 생산량 3,743천톤의 4.3%를 점유 전국 4위를 차지하고 있다. 3농혁신은 충청남도의 농업 핵심 프로그램으로 3농은 지속가능한 농어업, 살기좋은 농어촌, 행복한 농어업인을 의미한다.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도시는 점점 잘살게 되고 농가인구는 점차 감소하고 고령화는 심해지며 도시와 농촌의 양극화 또한 심각해 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농혁신은 충청남도가 민선 5기부터 실행한 사업이다. 목표는 가치증진을 통한 지속가능한 농어업육성, 누구나 와서 살고 싶은 농어촌 만들기, 농어업인이 주체가 되는 협치농정의 실현이다. 농업환경실천사업은 지속가능한 농업활동을 위하여 농업인을 중심으로 농업환경 개선사항을 자율 실천하기로 행정-마을간 협약을 맺어 실천사항을 이행하는 사업이다. 농업환경 개선활동을 통해 토양환경을 개선하고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충남해양호 어업인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어선의 안전조업 도모 및 수산자원 보호와 어업질서 확립을 통해 지속가능한 수산업을 위해 활동하는 어업지도선이다. 충남해양호는 총톤수 180톤으로, 길이 39.9m, 폭 7.5m, 깊이 3.6m이며 최대승선인원은 40명으로 승무원이 13명, 기타 승선인원이 27명이다. 선박의 최대속력은 27노트로 시속 약 50km이다. 기관은 디젤기관 3,918마력 2대가 탑재되어 총 7,836마력으로 총 86억 4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유기·유실동물 보호관리 사업은 충청남도가 2013년 1월부터 실행한 사업으로, 유실·유기동물에 대한 보호, 분양 등 조치를 통하여 동물복지 도모 및 동물혐오자들의 민원요인을 차단하며, 유기동물 분양에 대한 적극적인 독려로 안락사 사례를 최소화하고 분양률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 있다. 세부사업내용으로는 유기동물처리사업, 유기동물 반려가족 만들기 2종이 있다. 유기동물 반려가족 만들기는 유실·유기동물 입양비 지원을 통한 입양 활성화 유도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으로, 충남의 15개 시·군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센터에서 입양되는 동물을 기준으로 질병검사, 예방접종, 중성화 수술 등 실시비용을 마리당 20만원 이내 지원한다. 축산물이력제 관리사업는 충남의 소 및 쇠고기의 이력정보 제공으로 유통의 투명성 확보 및 소비자 신뢰성을 확보하고, 이동경로 확보로 위생·안전 문제가 발생할 시 즉시 대처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소의 출생신고시 귀표부착 등에 소요되는 인건비 및 제반비용을 지급하고, 소 사육단계 이력관리로 쇠고기 이력제 정착기반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소 농가 진료비 지원사업은 2010년부터 가축질병 조기진단과 적기치료 유도로 농가피해를 최소화하고 환축 자가 치료에 따른 약물 오남용 방지로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공급을 하기 위하여 충청남도에서 자체적으로 추진한 사업이다. 2018년 사업량은 30,000두, 사업비 3,000백만원이며 한·육우, 젖소 소규모 영세농가가 우선 대상이다. 환축 진료비 중 50%지원 및 상담, 치료 등 컨설팅을 지원한다. 조류 인플루엔자 재발 방지를 위하여 AI 바이러스에 취약한 오리 사육농가의 위험기간(11월~2월) 동안 사육제한과 이에 대한 휴업을 보상하는 "오리 휴지기 사육제한 농가 지원사업"을 진행한다. 대상농가는 2회이상 중복발생 농가와 철새도래지 인근의 발생 위험이 높은 지역 소재 농가들을 우선 선정하며 사육제한 마리당 지원 단가는 농가 순수익의 80% 수준으로 지원한다. 내포 보부상촌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동리 일원에 51,205m²(15,490평)의 규모로 실시되는 사업으로 시범운영을 거쳐 2020년에 개관예정이다. 덕산은 난전놀이 보존회가 운영되는 등 보부상의 고유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타 지역에 비해 많은 유물과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내포 보부상촌에 보부상의 고유문화를 활용한 콘텐츠 개발을 통해 전시관, 어귀, 장터, 난장 마당, 체험공방, 보부상 이야기길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예산군은 보부상촌과 연계해 이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내포보부상촌 밤마실 문화 저잣거리’라는 지역특화 프로그램사업을 제안하여 6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덕산온천관광지에서 마당극, 뮤직퍼포먼스, 영화제, 할로윈데이 호박파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총 5회 진행된다. 2018년 충남교육청의 학교현황에 따르면 유치원 511 개, 초등학교 420개, 중학교 189개, 고등학교 117개, 특수학교 7개, 방송통신중학교 1개, 방송통신고등학교 2개, 고등기술학교1개, 각종학교 1개가 있다. 총1,249개의 교육기관에서 272,749명이 교육받고 있다.사설학원은 2,883개, 독서실 128개, 공공도서관 16개 운영중이다. 충청남도의 교육은 참학력을 갖춘 인재 양성, 교육의 동등한 출발선, 인권이 존중되는 학교, 공정한 열린 행정, 협력하는 교육공동체를 이룬다는 교육의 기본방향을 가지고 있다. 현직 충청남도교육감은 2018년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에서 직접 선거로 당선된 김지철이다.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교육과정 중 한 학기 동안 수업을 학생참여형으로 개선하고 다양한 체험활동이 가능하도록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제도로서, 중학교 1학년을 대상하여 2017년 2학기부터 전면 실시하였다. 충청남도 중학생들은 한학기에 오전시간에는 기존의 교과수업을 듣게되고 오후시간에는 진로탐색, 주제선택, 예술·체육, 동아리의 4가지 활동을 한다. 민선 4기의 공약 중에 영어마을 조성이 있다. 이에 대해 적은 비용 대비 고효율의 효과를 내고자 농어촌 방과 후 영어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영어사각지대에 놓인 농어촌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직접 원어민 교사를 통해 대면하면서 영어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대한민국의 최초 사례이다. 이 사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원어민과의 접촉을 통해 학생들이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게 하여 친근감을 만들고 국제화마인드를 어렸을때부터 함양하는데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이다. 충청남도는 대한민국 최초로 특성화고 해외 인턴십을 추진하였다. 특성화고 해외 인텁십은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국내 뿐만아닌 해외를 접함으로 더 큰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경험을 통해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해외 취업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또한 영어와 기술 두가지의 능력을 겸비하여 글로벌 기능 인력으로 양성하고 이를 통하여 특성화 고등학교가 활성화 되도록 하기 위해 추진되게 되었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4개국에 375명을 파견하였으며 2018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 용접.배관, 전기.전자, 기계, 요리.제과.식품, 미용, 자동차 정비등 전문분야에 50명을 파견할 계획이다. 정보기기 사용의 역기능 해소를 위하여 올바른 교육과 상담으로 인터넷 및 스마트미디어 중독을 사전 예방하고 건강한 정보를 활용함을 도모한다.충청남도스마트쉼센터(충남도청 별관) 중심의 예방교육과 상담을 추진하고, 협력기관을 모집 및 선정하여 효율적인 업무를 추진하려 한다. 예방 대상은 유아에서부터 성인까지 미디어에 중독된 모든 사람이며, 사업 종류는 크게 인터넷 및 스마트폰 중독 예방교육과 중독 위험자를 직접 찾아가는 가정방문상담 두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과학창의축전을 통한 과학에 대한 흥미와 창의적인 사고력 배양으로 미래핵심인재 양성하기 위해 충남과학창의축전을 개최한다. 대한민국의 65세 이상 노인인구수는 2016년 말 기준 전체인구의 13.5%(6,955천명)이다. 충청남도는 16.6%(350천명)으로 대한민국 평균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에 충청남도에서는 제 2차 노인복지 5개년 계획을 수립해서 노후생활안정을 위한 소득지원사업, 소외된 노인보호, 노인들의 여가활동 지원, 노인장기요양보험을 통한 요양서비스 증진사업추진하고 있다.또한 지역의 보건소·복지관·지역주민과 함께 생계·의료·돌봄·건강관리 등의 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인 '전국 방방곡곡 찾아가는 보건·복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읍면동 주민센터의 복지공무원·방문간호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한다. 여성의 사회참여로 인해 부모의 양육부담이 커지고 있고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아이를 많이 출산하지 않아 저출산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유아 보육에 대한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다. 충청남도의 학교가기 전 영유아는 136,336명이다. 이중에 69,364명이 보육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충청남도에 있는 어린이집의 수는 1,974개로 만 0~2세 아동 37,521명에게 보육료를 지원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는 아동에게 지원을 한다. 충청남도는 보육의 질 향상을 위해 충청남도 어린이 인성학습원, 충청남도 육아종합지원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충청남도 아기수당은 '충청남도 아기수당 지원에 관한 조례'에 근거하여 소득기준 무관 0~12개월 영유아에게 월10만원씩 지급하는 수당을 말한다. 제4기 충청남도 지역사회보장 기본계획 수립은 사회보장급여의 이용,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 제35조에 근거하여 4년마다 충청남도지사가 복지, 보건의료, 고용, 주거, 환경, 문화, 교육 등 7개 영역에 걸친 지역사회보장기본계획이다. 충남 양성평등 비전 2030은 충남의 특성에 맞는 장기 미래 비전계획으로서, 충남의 성평등 현황을 점검하고, 성평등, 수준의 지속적 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실행계획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충남 양성평등 비전 2030은 법정계획인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과 ' 의 틀과 범위를 넘어서 도민의 생활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기본계획이다. 충청남도는 자원봉사활동기본법에서 정하고 있는 자원봉사활동지원, 진흥 및 행복한 시민 공동체 건설을 목적으로 사단법인 충청남도자원봉사센터를 2016년 1월 1일 설립하였다. 충청남도자원봉사센터는 충남도청 별관(의회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민의 25% 자원봉사자 등록과 등록도민의 25% 활동을 목표로 한다. 주요업무는 충청남도내의 자원봉사종합계획 및 시책사업 추진, 자원봉사활동 프로그램 개발 및 지원, 자원봉사자 교육 및 훈련 지원 , 시군자원봉사센터 협력 및 조정, 자원봉사 진흥 홍보, 읍면동자원봉사거점센터 사업를 수행하고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사업은 할머니들이 유아교육기관을 직접 방문하여 선현들의 삶의 지혜와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유아들에게 들려주는 사업이다. 미래세대의 중추인 유아에게는 인성을 길러주고 세대간 단절을 극복하고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고, 어르신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자아실현과 사회봉사의 기회를 제공한다. 충청남도는 도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천안의료원, 공주의료원, 서산의료원, 홍성의료원 등 총 4개의 지방의료원을 운영하고 있다. 의료혜택이 취약한 충청남도 내 도서주민의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병원선 충남501호를 운항중이며, 주요 진료과목은 내과, 치과, 한방과이다. 의사 3명을 포함한 총 18명의 인원이 근무중이며, 보령, 서산, 당진, 서천, 홍성, 태안 등 6개 시군의 29개 도서를 매월 1회 이상 순회 진료하고 있다. 도서 및 산간 등 취약지역에서 발생한 중증응급환자의 골든타임을 확보하고 신속한 응급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2016년 1월 28일부터 단국대학교병원을 거점 의료기관으로 하는 닥터헬기를 운용중이다. 충청남도 내 닥터헬기 인계점은 2017년 12월 기준 133개소이며, 2017년 11월 7일 500회 환자 이송을 돌파하였다. 충청남도는 전국 61기의 석탄화력 중 30기가 있으며,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 당진 제철‧철강단지 등 대형사업장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국립환경과학원 국가대기오염물질배출량 통계 자료(2015년 기준)에 따르면, 충청남도의 대기오염물질(SOx, NOx, 먼지) 배출량이 전국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충청남도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 및 미세먼지 감축을 위해 2017년도에 이어 2018년에도 '청정한 국민의 삶을 위한 친환경 에너지전환'이라는 주제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였다. 10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동안 국내외 전문가 및 관계자 200여명과 학술회의 및 정책 공유를 통해 에너지전환 방향을 모색하였다. 2018 탈석탄 친환경 에너지전환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아시사 최초 '탈석탄 동맹'에 가입하였고, 환경부·서울·경기·인천·충남 탈석탄 친환경 에너지전환 공동선언을 하였다. 수소에너지 국제포럼은 충남의 수소사회 구현 의지를 표명하고, 국내외 수소관련 정보 공유 및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자 1년에 1번 개최된다. 매년 11월 첫째 주를 충청남도 미래성장본부 국제행사 주간으로 지정하여 수소에너지 포럼을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충청남도는 도내 해안가에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해양쓰레기, 유류잔존물의 유입경로, 원인 등을 조사하여 기초DB를 구축하고 제도개선 방안 제시 등 해양환경 정책을 수립하는데 활용하기 위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해양오염물질 발생량을 조사하고 산정하는 기법을 개발하여, 충남도 내 주요 해역 해양오염물질 발생량과 유입경로를 조사하여 이를 근거로 해양 오염물질의 저감을 위한 체계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또한항포구 등에 방치된 어구, 어망 및 해안가 부유쓰레기로 인한 해양환경오염을 해결하고자 2015년도부터 '깨끗한 해양환경 만들기' 해양쓰레기 종합대책을 수립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군 현장에 맞는 해양환경 정책 공모사업, 해양쓰레기 버리지 않기 예방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해양쓰레기 정화사업으로 충남 도의 5개 연안 시군(보령, 당진, 서천, 홍성, 태안)의 해양환경 개선을 위해 국비와 도비 시군비를 투입하고 있다. 충청남도의 체육 정책은 체육활동 참여를 통한 건강증진, 전문체육 육성을 통한 충남위상 제고, 체육을 통한 지역활성화를 통해 체육으로 행복한 충청남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충청남도의 체육은 2017년 통합체육회가 시작하면서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을 연계하였다. 전국체육대회 대비 훈련 및 참가,다양한 종목의 체육팀의 운영, 우수 학생선수 지원(충남교육청과 협력) 등 전문체육 진흥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충청남도에 소재한 주요 체육시설은 다음과 같다. 충청남도 소방본부는 화재를 예방, 경계, 진압하고 화재, 재난, 재해, 그 밖의 위급한 상황에서의 구조, 구급 활동 등을 통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도민의 안녕 및 질서유지와 복지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충청남도 의용소방대(忠淸南道 義勇消防隊)는 소방본부장 또는 소방서장이 관장하는 소방업무를 보조하기 위하여 충청남도에 설치된 민간 소방조직이다. 심정지환자 등 중증환자 발생 시 구급대원이 현장에서 적절한 응급처치 실시로 소생률 향상하기 위하여 도입 되었으며, 소방서별로 전문구급차를 1대씩 지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운영인력은 3명(구급대원 2명, 운전원 1명)으로 구성된다. 2017년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충청남도와 폴란드 비엘코폴스카주의 자매결연 15주년을 기념하여 비엘코폴라니에 민속공연단이 충청남도 계룡, 천안, 내포에서 충남국악관현악단과 함께 공연을 펼쳤다. 충청남도의 경우 전국시도지사협의회와 공동 주관하여 2004년부터 K2H(Korea Heart To Heart) 연수사업을 시행중이며, 2018년도에는 3명(중국 1, 캄보디아 1, 베트남 1)을 대상으로 6개월간 연수사업을 펼쳐 2018년까지 53명의 연수생을 배출하였다. 특히 충남도의 경우 K2H프로그램 20주년을 맞아 글로벌 인적교류 우수지자체로 선정되어 광역자체단체 중에서는 강원도와 함께 공동 수상하였다. 충청북도 충청북도(忠淸北道)는 대한민국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도이다. 서쪽으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동쪽으로 경상북도, 남쪽으로 전라북도, 북쪽으로 경기도, 강원도와 접한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바다에 접하지 않은 도이다. 충청북도청 소재지는 청주시이고, 옥천군에 남부출장소, 제천시에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3시 8군이다.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었을 때 오늘날의 충청북도는 중원도(中原道)로 칭하고 충주를 절도사 소재지로 하였고, 1106년(예종 원년)에 중원도, 하남도와 관내도 일부를 묶어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 1171년(명종 원년) 충청도와 양광도로 분리시 충청도로, 1324년(충숙왕 원년) 충청도와 양광도를 다시 합쳐 양광도(楊廣道)가 됐다가, 1356년(공민왕 5년) 양광도의 명칭이 충청도로 바뀌었다. 1395년(태조 4년)에 고려말 충청도 지역에서 일부인 지금의 충청도 지역과 경기도 남부일부, 강원 영월 등을 충청도로 분리를 함과 동시에 충주를 관찰사의 행정시로 삼게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여주, 안성, 양성, 죽산, 음죽, 이천, 용인군을 경기도에 넘겨주고, 경상도에 속했던 옥천, 청산, 황간, 영동, 보은의 군과 현을 충청도에 속하게 하였다. 1896년 8월 4일 충청도를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분리하면서 충청북도의 수부(首府)는 충주에 두었다. 이때부터 오늘날의 충청북도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도청 소재지를 청주로 하였다. 충청북도는 3개 시와 8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청북도의 연도별 인구 추이 인구는 1,555,952명이고 남녀 성비는 1.02로 남자가 조금 더 많다. 시군별로는 음성군 (1.10)이 가장 높고, 진천군 (1.08), 증평군 (1.06), 괴산군 (1.02), 제천시 (1.02), 단양군 (1.02), 충주시 (1.01), 옥천군 (1.01), 보은군 (1.00), 영동군 (0.99), 청주시 (0.99) 순이다. 그 외에도 다음의 도시와 우호교류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전라북도 전라북도(全羅北道)는 대한민국의 서남부에 있는 도이다. 서쪽은 서해에 면하고, 동쪽으로 경상남도·경상북도, 남쪽으로 전라남도, 북쪽으로는 충청남도·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행정구역은 6시 8군이다. 도청 소재지는 전주시이다. 전라북도는 삼한 중 마한국의 중심지로서 마한국 총54개 부족국가 중 15개가 위치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마한국과 병합한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백제가 지방에 정방제를 성치하여 통치할때 그중 중 방(고섭성-고부지방)이 본 도의 중심지였다.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망하게 됨에 따라 당나라의(웅진도독부 설치) 통치를 받다가 676년(신라 문무왕 16년)당나라가 쫓겨 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685년 전국에 9주 5소경을 둘 때 본도에는 완산주(현 전주)와 남원경(현 남원)을 두었다. 892년(진성여왕 6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을 때 후백제의 중심지역으로서 50여년간 존속하다가 통치를 당하다가 936년 후백제 신검(神劍)대에 고려(태조 왕건)에 귀속되었다. 후백제가 900년부터 고려에 귀속되기까지 완산주(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전라도 일대를 통치하였다. 996년(고려 성종 14년)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본 도는 강남도(江南道)라 칭하고 4주(전주-전주지방, 영주-고부지방, 순주-순창지방, 마주-옥구지방)를 설치하였다. 1018년(현종 9년)에 전국을 5도 양계(兩界)로 크게 나누면서 강남도(전북)와 해남도(전남)를 합하여 전라도라 칭하고 전주에 안찰사를 두었다. 1413년 태종 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하면서 전라도는 전주에 관찰사를 두고 현재의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 일대의 1부(府) 4목(牧), 4도호부(都護府), 12군(郡), 31현(縣)을 관할하였다. 1896년 고종 33년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분리되고 전라북도는 26군으로 구성되었다. 1910년 옥구군을 군산부로 개편하면서 1부 27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을 통폐합하여 1부(군산) 14군(전주·익산·옥구·김제·정읍·고창·남원·순창·임실·장수·진안·무주·부안·금산)이 되었다. 행정구역 조정으로 구례군이 전라남도로 편입되었고, 개야도, 어청도 등 충청남도에 속해 있던 일부 지역이 전라북도로 편입되었다. 1935년 전주군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고, 전주군은 완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 익산군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되었다. 1949년 군산부, 전주부, 이리부가 각각 군산시, 전주시, 이리시로 개칭되었다. 1963년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전라남도 영광군 위도면이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81년 정읍군 정주읍, 남원군 남원읍이 각각 정주시, 남원시로 승격되었다. 1989년 김제군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었고, 전주시에 완산구, 덕진구가 설치되었다.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을 군산시로, 이리시와 익산군을 익산시로, 정주시와 정읍군을 정읍시로, 남원시와 남원군을 남원시로, 김제시와 김제군을 김제시로 통합하였다. 전라북도는 8,061.41km로서 전국토의 8.1%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동남쪽은 경상남도 하동군, 함양군, 거창군과 경상북도의 김천시와 소백산맥의 주능선인 방야봉(1,732m), 토끼봉(1,534m), 명성봉(1,586m), 백운산(1,279m), 남덕유산(1,508m), 무용산(1,492m) 등으로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전라남도의 영광군, 장성군, 담양군, 곡성군, 구례군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충남의 금산군, 논산시, 부여군, 서천군, 충청북도의 영동군과 접하여 있고 서쪽은 황해를 건너 중국과 접하고 있다. 순창군 풍산면 삼촌리 북위 35° 18´을 최남단으로 익산시 용안면 용두리 북위 36° 9´을 북단으로 남북 52´사이에 걸쳐 있으며, 동으로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동경127° 55´ 서쪽으로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 동경 125° 58´ 사이에 있으며 남북보다 동서가 약간 긴 지형을 갖고 있다. 전라북도는 순천완주고속도로 개통 이후 대한민국 최초로 모든 시/군에 고속도로가 지나게 되었다. 대학교 전북대학교(전주시, 익산시), 군산대학교(군산시), 한국농수산대학 (전주시) 원광대학교(익산시), 원광보건대학교(익산시), 전주대학교(전주시), 전주비전대학교(전주시), 기전대학교(전주시), 우석대학교(완주군), 호원대학교(군산시), 한일장신대학교(완주군), 전주교육대학교(전주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전주시), 예수대학교(전주시), 예원예술대학교(임실군), 원광디지털대학교(익산시), 전북과학대학교(정읍시), 서해대학(군산시), 군장대학교(군산시), 백제예술대학교(완주군), 군산간호대학교(군산시), 한국폴리텍대학교(익산시, 김제시) 김제 지평선 축제 전라북도의 행정 구역은 6개의 시, 8개의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14읍과 145면, 82동으로 세분된다. 전라북도의 연도별 인구 추이 인구는 2012년 초를 기준으로 1,873,333명이며, 전라북도의 면적은 8,061.41km로서 전국토의 8.1%를 차지하고 있다. 남녀 성비는 0.99로 여자가 조금 더 많다. 시군별로는 완주군 (1.06)이 가장 높고, 군산시 (1.03), 임실군 (1.03), 진안군 (1.02), 익산시 (1.00), 장수군 (0.99), 김제시 (0.99), 전주시 (0.98), 정읍시 (0.98), 부안군 (0.98), 무주군 (0.98), 남원시 (0.97), 고창군 (0.97), 순창군 (0.96) 순이다. 전라남도 전라남도(全羅南道)는 대한민국의 서남부에 있는 도이다. 광주광역시를 둘러싸며, 서쪽으로 서해에 면하고, 북쪽으로 전라북도,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의 지리산과 섬진강을 경계로 경상남도, 남쪽으로는 남해를 경계로 제주특별자치도가 있다. 도청 소재지는 무안군 삼향읍의 남악신도시이며, 순천시에 동부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5시 17군이다. 종래의 전라도는 1895년 6월 23일 23부제의 시행으로 잠시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 제주부로 나뉘었다가 다시 1896년 8월 4일에 이 4개의 부(府)를 폐지하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누었다. 앞서 1896년 6월 단발령에 대한 나주군민의 극심한 반발로 나주부를 폐지하고 광주로 이전하였는데, 전라남도가 설치되면서 수부(首府)를 광주로 확정하였다. 일제도 도청 소재지를 광주에 두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이래 전남 일대의 중심지였던 나주의 위상이 축소되고 통일신라 시대까지 중심지였던 광주가 다시 성장하였다. 1896년부터 1945년까지 49년 동안 전라남도에 속했던 제주도(島)는 1946년 8월 1일 제주도(道)가 설치되면서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고, 제주도가 떨어져 나간 지 41년 만에 광주광역시가 분리되었다. 도청 소재지는 옮기지 않고 19년 동안 더 위치하다가 2005년에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로 옮겼다. 전라남도는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소백산맥의 높은 봉우리로 경상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은 노령산맥의 구릉성 저산지로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고서저와 북고남저의 형태이며, 동쪽이 북쪽에 비해 높으며, 남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섬은 1,965개로 전국 섬의 62%를 차지한다. 전라남도를 흐르는 하천은 서남부 및 서북부의 광대한 평야를 유역에 형성시켜 비옥한 농토를 제공하고 목포만으로 유입하는 영산강과 전라북도에서 발원하여 호남의 동부 산악 지대를 흘러내리고 있는 섬진강, 장흥군과 강진군 유역을 흐르는 탐진강으로 삼분되며, 전라남도의 평야는 영산강 유역의 나주평야가 전라북도의 호남평야와 더불어 대한민국 굴지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전라남도의 행정 구역은 2017년 9월 말을 기준으로 5시 17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33개의 읍, 196개의 면, 68개의 동이 있다. 전라남도(에 해당하는 지역, 광주시/광산군 및 광주광역시 제외)의 연도별 인구 추이 남녀 성비는 0.99로 대체적으로 비슷하며, 시군별로는 신안군 (1.13)이 가장 높고, 광양시 (1.06), 영암군 (1.05), 여수시 (1.03), 장성군 (1.02), 나주시 (1.01), 담양군 (1.01), 무안군 (1.00), 완도군 (1.00), 목포시 (0.99), 순천시 (0.99), 영광군 (0.99), 함평군 (0.98), 화순군 (0.97), 진도군 (0.96), 곡성군 (0.95), 구례군 (0.98), 해남군 (0.95), 보성군 (0.94), 장흥군 (0.94), 고흥군 (0.93), 강진군 (0.93) 순으로 높다. 전라남도의 교통은 개발의 역사가 길고 험준한 산지가 비교적 적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항공교통으로서는 광주공항을 기점으로 서울 및 제주와 연결되고, 목포공항와 여수공항이 있다. 하지만 2007년 무안국제공항이 완공되면서 목포공항의 기능이 무안국제공항으로 이전하였고 2008년에 광주공항의 국제선 노선까지 이전하였으나 적자로 인해 운항편수를 감편 및 운휴 등의 조치를 취하는 사례도 일부 있다. ※ 목포공항은 무안국제공항이 개항되면서 2007년 11월 8일 폐쇄되었다. 철도는 총연장 432km에 이르고 서부에 호남선 (1914년 개통), 동부에 전라선 (1937년 개통), 그리고 남부에 경남을 잇는 경전선 (1967년 개통)의 3선이 근간을 이룬다. 철도의 수송 분담률은 근래 고속도로의 개통과 자동차의 증차, 항만 시설의 확장으로 차차 그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 또한 2015년 호남고속선이 개통되었다. 도로는 고속도로 7개 노선, 국도 12개 노선, 국가지원지방도 7개 노선, 지방도 708 ~ 897호선 등이 존재한다. 고속도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무안과 광주, 무안광주고속도로와 광주대구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고창담양고속도로가 있다. 국도는 국도 제1호선, 국도 제2호선, 국도 제13호선, 국도 제23호선 등이 있다. 해운업은 목포·여수를 기지로 하여 다도해에 산재하여 있는 수많은 도서와 육지를 연결하고 있으며, 특히 목포는 제주와, 여수는 부산을 잇는 항로의 주요 기지이다. 근년에는 완도와 장흥이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또한 물류항은 목포신항과 광양항이 담당하고 있다. 부속도서가 많은 지역이라서 중학교 산하의 분교장이 타 지역보다 많이 분포한다. 중학교 분교와 초등학교가 같이 운영되는 곳도 있다. 부속도서가 많은 지역이라서 초등학교 산하의 분교장이 많이 분포한다. 중학교 분교와 초등학교가 같이 운영되는 곳도 있다.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절로서,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양산 통도사(불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다. 신라 말엽에 혜린대사가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 부르던 것을 시작으로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도, 참선 도량으로 삼은 뒤부터 승보사찰이 되었다. 지눌, 진각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하였다. 목조삼존불감, 국사전 등의 국보와 보물이 있다. 오와리번 오와리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오와리 1국 전역과 미노, 미카와, 시나노 3국(기소 강 상류 유역의 산림 지대)의 일부 지역을 지배했던 번으로, 그 지배 영역은 지금의 아이치현 서부에 속해 있었다. 지금의 아이치현 나고야 시에 있는 오와리 국 나고야 성을 거성으로 삼았던 관계로,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나고야 번()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번주 가문은 도쿠가와 고산케의 필두격이었던 오와리 도쿠가와가()로,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가격()을 보유했다. 표면상의 고쿠다카는 61만 9천 5백 석으로, 고산케 중에서도 영지 규모가 가장 큰 번이었다. 강원도 (남) 강원도(江原道)는 대한민국의 북동부에 있는 도이다. 동쪽은 동해, 서쪽은 경기도, 남쪽은 충청북도·경상북도와 접하고,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강릉시, 속초시, 동해시, 삼척시, 태백시 등 영동 지방과 서쪽으로 춘천시, 원주시 등 영서 지방으로 구분된다. 강원도청은 춘천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릉시에 강원도청의 출장소인 환동해본부가 설치되어 있다. 행정 구역은 7시 11군이다. 강원도의 총면적은 20,569 km이며 이 가운데 휴전선 이남이 82%인 16,873.51 km로, 총 면적중 81.7%인 13,783.68 km가 임야이며 농경지는 9.7%에 해당하는 1,625.22 km이며, 기타는 8.6%인 1,457.49 km로 구성되어 있다. 경지 면적은 밭 1,625.22 km, 기타 1,457.49 km이며, 농가 호당 면적은 1.48 ha이다. 강원도는 위도상으로 북위 37도 02분에서 38도 37분에 걸치고,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도 05분에서 129도 22분에 걸쳐있다. 북위 38도선은 본도의 거의 중앙부를 통과하고 휴전선은 고성군 현내면 북위 38도 45분 근처에서 서남하하여 향로봉, 문등리 및 김화읍의 북방을 연결하는 북위 38도 20분선 부근에서 145km에 걸쳐 그어져 있다. 강원도 동서의 길이는 약 150km, 남북은 약 243km에 달한다. 서쪽은 황해도 신계군·김천군, 경기도 연천·포천·가평·양평·여주 등 여러 군과 접해 있고 남쪽은 충청북도 충주시·제천시, 단양군 및 경상북도의 영주시, 봉화군·울진군과 북쪽은 함경남도 안변군·덕원군 및 황해도의 곡산군과 접하여 5도 3시 13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는 대다수의 지형이 산악이며, 그중 500m에서 1000m 사이의 중간 산야 지대가 43.4%로 전국에서 가장 비중이 높다. 또한 강원도는 한반도 중앙부의 동측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크게 구분되어 있다. 영동은 경사가 급하여 해안평야의 발달이 취약하고, 영서는 경사가 완만하여 남한강, 북한강 같은 대하천이 발달되어 있다. 강원도 지방은 북위 37°와 38°사이의 중위도 온대성 기후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여름에 고온·다습하며,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춥고 건조하다. 또한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기 때문에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의 기후또한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원도의 연평균기온은 영동 11.0 °C, 영서 10.8 °C로 최저 6.6 에서 최고 13.1 °C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또한 강원도의 최저기온은 철원에서 관측된 -29.2 °C와 강릉에서 39.4 °C를 기록 하였다. 또한 연 강수량은 1300~1900mm로, 산간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강수량을 보이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다설지중 하나이다. 또한 봄철의 영동지방에서는 건조한 국지강풍이 빈번히 발생한다. 강원도는 총 18시군, 즉 7개의 시와 11개의 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시군은 187개의 읍·면·동과 4203 통·리, 21,951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주민 미저구 5개면과 그에 속한 29개 리, 면장 미실시 1개면과 그에 속한 4개 리중 3개의 리를 제외하고 있다. 강원도(1948년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외)의 연도별 인구 추이 2017년 7월 현재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그래프는 1,000명당 1씩 표현하였다. 기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원도에서도 여러 문화재들이 존재한다. 최소 강원도에 사람이 살게된 시기는 정확하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소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반도의 중요 시기별 강원도의 대표적인 문화재를 꼽자면 통일신라 시대때 주조된 상원사 동종과 더불어 남북극 시대때의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고려시대때의 강릉 임영관 삼문, 그리고 조선시대때의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오죽헌, 경포대 같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문화재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강원도의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월정사나 오세암등의 유명한 사찰이나 혹은 암자가 많이 위치하여 있다. 강원도내의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차원에서는 2002년 국립 춘천박물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정부 차원에서는 박수근미술관, 오죽헌/시립박물관, 태백석탄박물관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민간 차원에서는 강릉의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박물관등 특별한 주제를 가진 박물관들이 존재하고 있다. 강원도 각 시군단체에서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강원도 강릉에서는 유네스코가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 목록에 등재한 강릉 단오제등 여러 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강원도 지방의 음식들은 산악지대나 고원지대가 많다보니, 감자, 메밀 등으로 만든 음식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서 강원도 전지역에서 먹는 나물밥, 그리고 산지인 정선군에서는 곤드레밥과 영월군에서는 메밀전병, 화천군에서는 화천산천어영양돌솥밥, 화천삼나물밥이 유명하고, 양구군에서는 양구 시레기가 유명하다. 또한 또한 해안지역에서는 생선요리와 젓갈류등이 발전하였는데, 동해시에서는 동해생선찜, 속초시에서는 속초 오징어 순대, 삼척시에서는 삼척복어요리 등이 유명하다. 이런 강원도의 토속 음식들은 극히 소박하고 조리법이 간단하다. 강원도에 위치한 태백산맥으로 인하여 수려한 산들이 많아 국립공원들과 천연기념물들이 강원도 각지에 분포하고 있다. 철원 화산지대를 통과하는 한탄강은 한탄강 대교천 현무암 협곡 등의 천연기념물을 가지고 있다. 한탄강 지역은 한국전쟁 시절 당시 격전지였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래프팅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한탄강 인근에서 발견된 신증후성 출혈열 바이러스는 이 바이러스를 발견한 한탄강 유역에서 따와서 지어졌으며 현재 한타바이러스 속은 이 한탄바이러스에서 이름을 따와서 붙여진 속이다. 또한 민통선이 존재하여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철원평양에는 임진강 부분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멸종위기 동물인 두루미가 철새로 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양구의 해안면의 해안분지는 암석의 풍화와 침식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가 '화채그릇'(Punch Bowl)을 닮았다고 해서 이명인 펀치볼로 유명한 분지이다. 이외에도 강원도에는 여럿 유명한 관광지들이 존재한다. 남이섬을 비롯하여 통일전망대, 소양강댐, 정동진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평창군에는 평창군에서 태어난 소설가인 이효석을 기리는 이효석 문학관등이 있다. 또한 동해안을 끼고 있는 특징으로 인해 경포해수욕장등 여럿 해수욕장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정선에는 내국인용 카지노인 강원랜드가 위치해 있다. 일반 도로는 총 9800 km 이며, 포장률은 75.1%이다. 관동 지방에는 진부령(인제 ∼ 간성), 한계령(인제 ∼ 양양), 대관령(원주 ∼ 강릉) 등의 예전부터 있었던 고갯길이 존재한다. 이런 고갯길뿐만 아니라,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중 일부인 국도 제7호선이 강원도를 통과하고 있다. 고속도로는 인천광역시를 기점으로 강릉을 종점으로 하는 영동고속도로와, 광주원주고속도로, 그리고 경상도지역을 연결하는 중앙고속도로와 동해안 지역을 통하는 동해고속도로, 그리고 서울과 양양을 연결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분산하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양양고속도로의 인제양양터널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긴 도로 터널 기록을 가지고 있다. 철도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강원도는 대한민국의 다른 시외버스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다. 강원도의 모든 시군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존재하며, 이를 이용하여 강원도 내 다른 지역이나 혹은 강원도 바깥으로 나갈수 있다. 강원도에 부설된 철도는 보통 광복 혹은 일제강점기 시절 태백 산간지방의 지하자원 개발을 목표로 하는 산업철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재 강원도의 남서부에 간선 철도인 중앙선이 지나며, 서울 ∼ 춘천간에는 수도권 전철 경춘선이 있다. 또한 산업철도로 만들어졌으며, 중앙선에서 분기하여 강릉까지 가는 영동선이 있으며, 동해에서 삼척까지 분기하는 삼척선이 존재한다. 또한 제천에서 분기한 태백선이 존재하며, 중앙선 · 태백선 · 영동선의 일부가 강릉시까지 전철화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로 인해 경춘선이 간선철도 겸 수도권 전철의 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2012년 6월 착공된 경강선구간 중 현재 완공된 구간을 대상으로 2017년 12월 22일부터 KTX 열차가 운행중이다. 2017년 경강선에서 운행중인 KTX를 속초시까지 연장시키는 동서고속화철도사업 계획이 발표되었으며 , 2025년까지 공사를 완료할 계획을 갖고 있다. 강원도를 지나가는 간선 철도 중에 경원선과 더불어 동해북부선은 군사분계선으로 인해 도중에 끊겨져 있으며, 그 중 동해북부선은 북한 지역에서 고성군 북단의 제진역까지 연결되어 있다. 현재 강원도에는 여러개의 군사공항들과 민간공항이 있으며, 그중 2개의 공항이 여객을 수송한다. 원주공항의 경우, 김해국제공항과 마찬가지로 군사기지를 공유하고 있으며, 군공항이 아닌 유일한 민간공항은 양양국제공항이 있다. 원주공항의 경우,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하여 있으며 현재 국내공항으로 운용되고 있으며, 양양국제공항도 현재 국내공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양양국제공항의 경우, 길이 2,500m, 폭 45m의 활주로 1본이 설치되어 있으며, 연간 항공기를 4만 3천건 수용할수 있으며, 또한 연간 317만명의 여객(국내선 207만명, 국제선 110만명)을 처리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원주공항의 경우,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선 전용 공항으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해와 접해있는 강원도는 여러 항구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어서 묵호항의 경우 태백산맥에서 채굴한 시멘트와 석탄을 선적하고 있으며,속초항의 경우 어항, 철광석 적출항, 관광항 등 여러 가지 기능이 결합된 무역항기능을 맡고 있다. 또한 최근 호산항에는 한국가스공사의 삼척 LNG 생산기지가 건설되고 있으며, 2014년 개항과 동시에 LNG 수송선이 접안하였다. 현재 강원도에서는 국내선과 해외선 페리 항로가 존재하며, 또한 속초항에는 크루즈를 접안할수 있기도 하다. 다음은 2018년 2월 현재 강원도의 페리 항로이다. 강원 FC는 2008년 4월 28일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K리그의 15번째 구단으로 축구단 창단을 발표하고, 2008년 11월 5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강원의 창단을 승인받았다.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최순호 감독이 강원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08년 11월 17일에 우선지명을 통해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출신의 선수 4명을 비롯하여 14명의 선수를 선발하였고, 11월 20일에 실시된 2009 K리그 드래프트를 통해 9명의 선수를 더 선발하여 23명의 선수를 선발하였으며,2008년 12월 18일 창단했다. 하이원 아이스하키단은 강원랜드가 춘천에서 운영하는 프로 아이스하키 팀으로 2004년 9월 창단한 아이스하키 팀이다. 국내에 3개밖에 없는 실업 아이스하키단 중 하나이며강원랜드측은 아이스하키, 스키 및 스키점프, 장애인스키등 비인기 종목을 육성하고 있으며, 강원도 스포츠 인재육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명 킬러웨일즈는 대명그룹이 2016년 창단한 프로 아이스하키팀으로, 국내에 3개밖에 없는 실업 아이스하키단 중 하나이다. 원주 동부 프로미는 원주가 연고지인 대한민국의 농구 팀으로 2005년 10월 DB그룹이 TG삼보컴퓨터로부터 원주 TG삼보 엑서스 농구단을 인수하고 DB손해보험을 모기업으로 하여 창단하였다. 지역 기업인 대한석탄공사와 손을 잡고 사회공헌 활동도 진행중에 있다. 현재 강원도에는 다음과 같은 스포츠 클럽들이 존재하고 있다. 1999년 1월 30일부터 2월 6일까지 강원도 내의 평창군, 강릉, 춘천 인근에서 동계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이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2위의 실적을 올렸다. 2018년 2월 9일 ~ 2월 25일까지, 평창군에서 제 23회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이 행사는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 이후 대한민국에서 30년 만에 열리는 올림픽이다. 또한 2018년 3월 9일부터 2018년 3월 18일까지 2018년 동계 패럴림픽이 열릴 예정이다. 평창군에서 개막식 및 폐막식과 대부분의 설상 경기가 진행되며, 모든 빙상 종목은 강릉시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정선군에서는 알파인 스키 활강 경기가 개최될 예정이다. 춘천송암레포츠타운 내에 의암야구장이 있으나, 프로구단의 홈 구장은 아니며, 강원도는 전국 9개 도 중에 제주특별자치도와 함께 프로야구 문화를 간직하고 있지 않는 곳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때에는 삼미 슈퍼스타즈가 강원도 의암야구장에서 경기를 하기도 했으나, 1989년 이후 강원도는 프로야구 문화와 멀어지게 되었다. 강원도 강원도(江原道)는 관동 지방(關東地方)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395년에 설치되었고 강원도라는 이름은 도의 주요 도시인 강릉과 감영 소재지였던 원주에서 따 온 것이다. 강원도는 한반도 중앙부의 동측에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크게 구분되어 있다. 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 02분에서 38도 37분에 걸치고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도 05분에서 129도 22분에 걸쳐 있으며 북위 38도선은 본 도의 거의 중앙부를 통과하고 휴전선은 고성군 현내면 북위 38도 45분 근처에서 서남하하여 향로봉, 문등리 및 김화읍의 북방을 연결하는 북위 38도 20분선 부근에서 145km에 걸쳐 그어져 있다. 강원도 동서의 길이는 약 150km, 남북은 약 243km에 달하며, 동쪽은 약 314km에 걸쳐 해안선을 이루면서 이어져 있고, 서방은 황해도 및 경기도와 접해 있고 남쪽은 충청북도 및 경상북도, 북쪽은 함경남도 및 황해도와 접하여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45년에 강원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할되어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국군이 진주하였다.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인해, 두 개의 정부가 각자 관할하게 되었다. 현재 남측의 강원도는 북측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북5도위원회를 통한 형식적인 시장 및 군수 등을 임명하고 있다. 분단 후 북측은 함경남도 원산시를 강원도에 포함시키는 등, 당시의 행정구역을 일부 확장하였다. 단, 이는 대한민국에서 인정되지 아니한다. 남측은 북측의 강원도(원산시 등 함경남도령 제외)를 자신들의 강원도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북측은 자신들의 강원도를 북강원도, 남측을 남강원도로, 사실상 다른 도로 분리하고 있다. 아래 행정 구역은 《경국대전》에 따른 행정 구역이다. 아래 행정 구역은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이다. 이태형 이태형(李泰炯, 1964년 12월 11일 ~ )은 도시계획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강원도 춘천시에서 출생했다. 1989년 대한민국 최초의 별자리 안내서인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을 출간했다. 이 책은 30만부가 팔리며 국내에 별자리 열풍을 불러왔다. 1998년 9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소행성을 발견하여 통일로 이름붙였다. 현재 (주)천문우주기획의 대표이사 및 한국우주환경과학연구소 소장이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 제3공화국(第三共和國)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의한 군정 아래에서 1962년 12월 17일에 실시된 국민 투표로 공포, 시행된 헌법에 따라 설립한 대한민국의 세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이다. 이 헌법에 따라 이듬해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직접 선거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제3공화국은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체제로 전환하면서 끝났다.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공항 등의 사회 간접 자본도 확충하여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어갔다. 또, 간척 사업과 작물의 품종 개량으로 식량 생산도 증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 외국 자본에 의존하던 자본 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자본 집중이 심화되어 소수의 재벌들이 생산과 소득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내 산업의 수출 의존도가 심화되며, 민주주의가 억압되는 등 큰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산업화로 인해 크게 늘어난 공장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기업가의 경영 합리화와 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 등을 주장하는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제3공화국은 반공주의를 국가 정책으로 내걸고 반공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능률과 실질을 중시하는 기능 양성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자치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교육의 중앙 집권화와 관료적 통제는 계속되었다. 1968년에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은 이 시기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제2공화국의 내각제를 폐기하고 막강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였다. 대통령은 국민 투표로 직접 선출되었다. 박정희는 1963년,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9년 제6차 개헌을 국민 투표를 통해 통과시켜 3선의 기반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대중을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5년에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였다. 야당은 반대했고 학생들도 반대시위를 일으켰지만, 6월에 일본과 몇몇 조약 및 협정을 체결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등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했다. 6·3 항쟁이 일어나 무력으로 진압했다. 1966년 9월 22일 국회에서 한국비료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한 일로 대정부 질문 중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무위원들에게 미리 준비한 인분을 투척한 국회 오물투척사건이 있었다. 1967년 박정희는 윤보선 등을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된다. 1967년 6월 8일 제7대 총선을 통해 각 지역구에서 소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131명을 선출하였다.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선출한 44명의 전국구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은 모두 175명이다. 1972년의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 제정하였다.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제2공화국 정부에서부터 계획되었던 5개년 계획안이 제3공화국 정부로 넘어오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이 수정되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경공업 위주 중심의 수출주도형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으로 수출산업이 크게 육성되었고,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되었다. 1964년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 발표하여 1965년부터 시행하였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이 승인되었다.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하였다. 1968년에 경부고속국도를 착공하여 1970년에 완전개통하였다. 이 시기에 화폐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었다. 1970년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국내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다. 1971년 12월 25일 서울의 대연각호텔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16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 안호상, 박종홍 등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으나, 김영삼 정부 초인 1994년에 폐기되었다. 박정희는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 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다. 허정 과도정권을 이은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의 외교목표는 사실상 이행되지 못한 채 5·16 군사정변을 맞았다. 당시 군사정부의 혁명공약에 나타난 외교정책 부분을 보면 과거의 정책과는 다른 일면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군사정부는 경제력의 증강과 반공결의의 공고화에 의한 국토통일의 목표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군사정부의 외교정책은 1963년에 5·16 군사정변의 주체였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더욱 뚜렷이 부각되었다. 제3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외교정책의 목표를 이행하려고 하였다: (1) 적극적인 다변외교(多邊外交)를 지향하여 중립노선(中立路線)을 표방하고 있는 국가와의 외교관계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미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를 불신하였으나, 베트남 참전 결정은 이러한 미국의 시각을 완화시켜 주었다. 미국은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 미군을 감축하였고 한국은 자주국방을 위하여 대미 일변도를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71년부터 비적성(非敵性) 공산국가와의 통상관계 허용을 선언하고 할슈타인 원칙을 전면 폐지하였다. (2) 경제외교(經濟外交)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 한국은 서구 제국과의 우호·친선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경제개발 계획의 성취를 위한 경제외교를 적극 추진하여 각국과의 자본협력 및 기술협력 관계를 가일층 강화하고 통상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서구국가 중 독일 연방공화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한국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땅을 사들여 해외농업투자를 하였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3) 한국은 미국의 압력과 경제개발의 자금 충당이라는 동기로, 국내 야당과 대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4) 또한, 지역안전 방위체제를 염두에 둔 아시아·태평양이사회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나, 회원국들의 반대로 문화 및 경제협력기구에 머물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한국의 외교정책을 현실화시키는 한편 한국외교의 방향전환에 기틀을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초반은 세계정치의 격변기였다. 따라서 한국 외교정책의 시련기이기도 한 것이다. 제3공화국 정부는 12월 21일 서독에 광부 1진 123명을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기술근로자 파견을 통한 일자리 창출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는 1960년 여름, 제2공화국 정부의 대표단(대표:백영훈)이 서독의 경제부 노동국장을 만나 3000만 USD의 차관을 빌리는 조건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이후 프랑스, 독일 등지에 광부, 의사, 간호원이 파견되었고 서남아시아에는 건설기술자들이 파견되었다. 한국 간호사와 광부들의 숨은 노력으로 1961년 말 독일 언론에서는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을 '살아있는 천사'로 묘사하였다. 박정희는 집권 초 미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하였고,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했다. 군사 정변 초기부터 공산주의자 라는 의혹을 받았고 이 의혹은 1960년대 내내 박정희를 국내외에서 괴롭혔다. 1962년 이후 미국 정부의 정변 승인을 얻어내기는 하였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1964년, 제3공화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내부를 돌아보았다.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 1968년 초부터 한국 정부는 미국의 군사지원에 계속 의존함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여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협상요청을 완강히 거부한 한국 정부는 1975년까지는 주한미군 전력이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닉슨 행정부는 한국군 현대화 지원을 조건으로 1971년 6월까지 주한미군 지상군 1개 사단 병력 약 2만명을 철수시켰고 이후 인권정책을 도덕외교의 핵심으로 내세운 카터 행정부는 이를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시키면서 박정희 정부를 압박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가속화된 미국내의 여론과 1960년대에 세계 도처에서 파생된 변화는 세계구조의 점진적인 변모를 야기시켰다. 이러한 국제적인 권력구조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미국의 닉슨 독트린(1969년 7월 25일)은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에 대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미국은 한국의 반대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도 불구하고 주한 미군 병력 중 2개 사단을 감축시키고(1960년대부터 1971년), 비무장지대(DMZ)의 경계 지역에 배치되었던 전방 미군사단을 후방으로 옮겼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안보는 한국 자체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한국의 대미일변도(對美一邊倒) 정책을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1965년 한일기본조약(또는 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회담을 진행해왔다. 제3공화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실패하고나서 경제개발을 하는데 지원자금을 충당하려는 목적과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미국의 압력으로 인하여, 일본과의 지지부진하던 회담을 1961년 겨울부터 다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독도소유권 주장을 인정하는 독도밀약에 서둘러 합의한다. 미국은 협상의 진전을 위해 독도의 공동소유를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독도밀약에 합의한 박정희는 이를 일축하는 척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사죄가 없이 한일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에 대개 1965년 야당에서는 굴욕외교라 주장하였고, 장택상, 윤보선, 허정, 박순천, 함석헌 등 야당 지도자들은 굴욕외교 반대라는 명목으로 시위를 하였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민간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이후 ' 6.3 학생운동 ' 으로 불렸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하였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에서는 일본의 사죄 없는 한일협상은 굴욕외교라며 시위를 벌였고, 조약 조인 이후에도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고(1965년 6월 22일), 비준서가 교환(12월 18일)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였다. 양국은 또한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재산과 청구권(請求權)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양국 간의 수교로 양국의 대사가 교차 임명되고, 일본의 장관급 인사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이 조약들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 적절했는지 논란이 있어 왔다. 한일협정 과정에서도 보상금 8억 달러라는 보상금을 놓고도 적은 액수라는 비판이 있었다.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를 요구했고, 장면은 28억 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필리핀은 14억 달러를 받았다. 한편 북한은 계속해서 일본에게 과거사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전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조약을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위안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청구권문제와 같이 어업문제 , 문화재 반환문제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일본 측에서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 중이다. 이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한편 일본 외무성이 2013년에 시민단체에 공개한 한일 국교 정상화 관련 일본 외교 극비 문서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에 우편 저금과 유가증권, 미지급 임금, 연금 등 식민지 지배시 법률관계를 전제로 한 돈만 계산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제 동원에 대한 사죄나 배상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제3공화국은 표면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의 태도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당시에는 더 중요시 했기 때문에 그러나 정부 차원의 접촉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이 아시아·태평양 제국과 현실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그것도 특히 제3공화국 정부가 들어서고난 뒤부터였다. 당시 한국은 국제정치의 다원화(多元化)와 중국 주변에서의 새로운 국제긴장의 조성이라는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새시대외교의 기본좌표'의 하나로, 아시아 반공체제의 강화와 지역내 제반 협력의 증진을 통해 추구해 나갈 것을 정하였다. 종래 진영외교(陣營外交)의 테두리 안에서 수직관계에 있었던 한국의 외교는 다원적 세계 안에서의 수평관계로 전환되는 가운데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외교기반을 확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 동안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1964년~1973년),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등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를 넓혀나가는 한편 반공 전선의 구축을 강화하기 위한 동남아 외교정책을 추진해 왔다. 한국은 이미 1960년대의 국제 역학구조 변화에 대비하여 1966년 아시아 태평양 이사회를 중심으로 지역협력에 노력하였다. 이동원이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한국의 선구적인 외교노력이 결실을 보아 1966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제1차 각료회의를 개최한 결과 창설된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는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중화민국, 일본,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베트남 공화국 등 9개국을 회원국으로 하고 라오스, 인도네시아를 옵저버로 하여 발전하여 왔다. 그 당시 한국은 이 지역기구가 포괄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의도하여, 회원국 상호간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함으로써 자유·평화 그리고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공동사회(共同社會)를 건설할 것을 구상하였다. 따라서 한국은 이 기구 자체를 지역안전 방위체제로 유도하려고 노력했으나 일본·말레이시아·뉴질랜드 기타 회원국의 반대로 문화 및 경제협력기구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은 이란·요르단·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1962년), 몰디브(1967년)와 수교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2월 7일,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이스마일 나시루딘(Ismail Nasiruddin of Terengganu) 국왕 및 툰쿠 압둘 라만 총리 등과 환담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필리핀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공화당 정부는 서구 제국과의 우호·친선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경제개발 계획의 성취를 위한 경제외교를 적극 추진하여 각국과의 자본협력 및 기술협력 관계를 가일층 강화하고 통상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서구국가 중 독일 연방공화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심이 되었다. 독일 연방공화국과는 1961년 3월 18일 한·독 기술원조협정을 체결한 것을 비롯하여, 동년 12월 13일에는 한·독 차관협정, 1962년 3월 15일 한·독 경제협력의정서, 1963년 2월 14일 한·독 경제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등이 체결되어 경제협력 관계가 강화되었다. 1964년 12월 6일에는 독일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박대통령이 독일을 공식 방문하였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은 한국의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의 유럽 방문으로서, 이 방문을 통한 양국 정상회담에서는 한·독 양국간에 우호와 협조를 증진시키고, 국토가 분단된 공동운명체로서의 유대의식을 재확인하고, 공동목표의 성취를 위해서 동일보조를 취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또한 방독 중인 12월 7일에는 한·독 경제협력협정이 체결되어 1억 5,900만 마르크 규모의 차관을 공여(供與)받았다. 박 대통령의 방문 중,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 '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 1965년에는 MRO차관 1,500만 마르크, 통신시설의 확장을 위한 재정차관(財政借款) 1,900만 마르크를 제공받고, 한·독 실무자 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여 양국경제관계의 전반을 협의하였다. 1966년에는 효성물산 나일론사(絲) 공장차관 832만 마르크와 영남화력발전 차관 8,800만 마르크가 도입되었다. 1967년 3월 2일에는 박대통령의 초청으로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방한(訪韓), 3월 6일 국토통일을 위한 긴밀한 협력, 한국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한 지원, 독일 기업의 대한투자(對韓投資) 장려, 제2영남화력 발전소·낙농(酪農) 시범농장·부산직업학교·괴테회관의 설립 등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후 1970년 2월 18일에는 한·독 광부협정, 5월 15일에는 한·독 문화협정이 체결되고, 이어 다음날 부산 직업훈련소 설치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는 등 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미국 및 일본에 다음가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의 경제협력 관계와 우호관계도 계속 강화되어, 이탈리아·프랑스와의 어업협정을 통한 어선의 도입, 팔당 수력발전을 위한 프랑스와의 차관계약이 1964년 11월에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와는 1961년 3월 7일 한·이 특허권 및 상표권(商標權) 상호 보호협정, 1962년 1월 15일 한·이 경제협력의정서, 1965년 3월 9일 한·이 무역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와도 1961년 2월 1일 한·불 상표·상호(商號) 등록에 관한 협정을 비롯하여, 1962년 5월 25일 한·불 관세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영국도 경제협력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과의 사이에 철도신호시설의 도입을 위한 차관계약을 하였다. 그리고, 벨기에·그리스·네덜란드·포르투갈(1961년), 아이슬란드·스위스·룩셈부르크(1962년)과 오스트리아·바티칸 시국(1963년), 몰타(1965년)와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 등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로 국군 해외 파병으로 1964년에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고 1965년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어 베트남참전 8년간 총 31만 2,853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외화획득 등 많은 경제적 이익과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그 대가로 수많은 전사상자와 고엽제 피해를 낳았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베트남에서 자행한 국군의 과오등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공산권 제국(諸國)은 한국의 국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 왔기 때문에 한국과 공산국가와의 관계는 완전단절 상태를 지속해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이 북한을 능가하는 경제력과 국력을 갖게 되면서 다변외교를 공산권에까지 확대하려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질적인 다변외교의 시발점이 된 것은 비적성(非敵性) 공산국가와의 통상관계를 허용하겠다는 1971년 봄의 박정희 대통령의 발언으로서, 이를 계기로 정부는 대공산권 관계개선방침을 세우고서 유고슬라비아와 직접적인 통상관계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정부는 국교수립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던 할슈타인 원칙을 전면 폐지한 것으로 1971년 8월 7일 알려졌다. 정부고위 소식통은 "할슈타인 원칙은 동서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현 국제 조류에서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이것은 이미 우리의 외교원칙이 아니기 때문에 폐지선언을 하거나 발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이같은 할슈타인 원칙폐지방침은 "우리에 적대행위를 취하지 않는 어느 국가와도 수교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1971년 8월 6일 김종필 국무총리의 국회 발언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남북적십자회담(1972년)의 진전 및 7·4 남북 공동 성명(1972년)의 발표는 이러한 정부 방침에 보다 적극성을 띠게 만들었다. 김용식 외무장관이 7월 8일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소련·중국·동구 국가와 통상을 포함한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고 발언한 것은 그러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김종필 국무총리 역시 7월 18일 국회에 대한 서면답변에서 중립국과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접근은 정부의 다변안보외교라는 기본방침에 따라서 취하고 있는 조처이며, 단계적으로 교류를 시도하되 종국에 가서는 외교관계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할슈타인원칙을 맹목적으로 고수하지 않고 신축성 있게 상황 변동의 추이에 따라 운용한다는 정부방침을 제시하였다. 특히 김종필 국무총리는 8월 11일 방미(訪美) 중 『뉴욕 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중국과 소련이 한국에 적대적인 정책을 버리고 한국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이들과의 관계도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여, 한국의 대공산권 외교가 원칙론적인 데서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적성국가의 개념이 고착적(固着的)인 것에서 신축성 있는 개념으로 변경되고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요컨대 한국의 대공산권 외교방침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9월 2일에 행한 시정연설에서 밝혔듯이 유연성 있고 자주적인 실리외교(實利外交)를 추구한다는 원칙하에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통상교류로부터 시작, 점차 그 접촉의 폭을 넓혀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정부가 이러한 방침을 취하게 된 것은 국제적인 다원화경향 속에서 종래의 폐쇄적인 대공산국 대결정책을 취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도 내정불간섭(內政不干涉)·상호주권존중 원칙하에 국가적 실리를 추구하려는 현실주의적 정책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접촉을 통한 북한과의 정치·사회·경제의 비교에서 우리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됨으로써 국제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남북적십자회담 제2차 서울본회담 등을 통해서 한국인의 반공의식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이 증명됨으로써 공산국가와의 접촉에서 생겨날지도 모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점차 사라지게 된다는 것 등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 1972년 8월 방미 중이던 김종필 총리가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1972년 9월 13일, 서울)에 공산권의 기자 입국을 허용한다고 밝혔고, 이어 비정치적인 경제교류에서 유연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0년 12월 개정된 무역거래법에 따라 대공산권 교역을 종래의 간접거래에서 직접거래로 전환시키고자 시도해 왔는데 그 결과 매년 거래액이 증가해 갔다. 뿐만 아니라 교통부 훈령 제386호 1조에 규정되어 있는 외국선박에 대한 출입항(出入港) 규정 중 북한·중국·월맹·쿠바 등 적대국가로 가는 배의 입항금지 부분 중 쿠바를 해제했다. 또 한국 선박의 공산국 기항문제와 다국적 기업 종사자의 공산국가 상륙 문제도 신축정책을 적용토록 했다. 이 시기는 냉전의 종결에 따른 평화공존의 흐름이나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의 대거 UN 가입과 더불어 재래의 국제정치 권력구조의 다원화 추세를 배경으로 하는 UN과 한반도 안팎에서 남북한의 UN동시 초청 논쟁과 남북지위의 경쟁적인 대결에 골몰한 시절이다. '두 개의 한국관'을 누르고 유일 합법성을 고수하는데 있어 그 많은 제3세력과의 새로운 관계와 지지표가 긴요해서 신축성 있는 대중립국 접근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대한민국은 자유우방과의 선린증진 및 유대강화에 못지않는 중립국과의 친선유대책을 도모함으로써 중립국 군(群) 속의 지지세력을 늘여 나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는 남북한을 나누어 보는 중립국의 처지에도 상당한 성격이 깃들이기 시작하여 중립적 입장에서 대한민국만을 지지하는 나라도 있고 그들 중 뒤어어 북한에도 접근하려는 나라도 있으며, 또한 그런가 하면 처음으로 남북한을 동시에 대등하게 주목하려는 나라도 있어 대북(對北) 이중접근을 견제하려는 할슈타인 원칙이 적용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전개된 다각적이고도 능동적인 대중립국 외교의 주요내용은 첫째 중립국의 승인·외교망의 확장·친선사절단의 파견·초청외교의 강화 등을 통한 정상적 외교차원의 모색, 둘째 중립국과의 통상관계 촉진을 통한 실제적인 이해관계의 확대와 셋째 문화교류 및 기술협력을 통한 상호이해의 증진과 협력제휴의 도모 등이었다. '두 개의 한국'에 뜻을 둔 북한측도 경제적 문화적인 대중립국 관계의 확대와 각 중립국내의 공산세력과 제휴하는 소위 인민외교를 통해서 반서방적인 연대형성과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 온갖 방편을 동원하였다. 그래서 UN 내외나 중립국 내외에서는 남북한간의 경쟁적인 총력외교가 집약적으로 진행되는 양상을 엿보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제3공화국이 탄생하고 중국의 지위가 향상되어가는 1964년 초를 중간으로 해서 그 전반은 고식적인 고립외교가 점차로 지양되어가는 시기이고 그 후반은 다각적인 적극외교가 더욱 실질적이고도 경쟁적인 방식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박정희는 아르헨티나와 외교를 시작했으며 넓은 아르헨티나의 국토를 활용하기 위해 1971년에 국가예산을 들여 아르헨티나에 땅을 구입한 뒤 국민들 중 일부를 엄선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 구매한 아르헨티나 땅으로 보내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기후가 완전히 다른 데다가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구입한 상당수의 땅이 황무지였으므로 파견된 대한민국의 농부들은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아르헨티나의 각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박정희가 구입한 아르헨티나의 땅 중 산 하비에르는 농업에 적합한 땅으로 훗날 박정희는 산 하비에르에 한해서 아르헨티나로 파견된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이전시켜줬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아르헨티나와의 외교관계는 현재도 돈독해지는 추세이며 현재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는 상호 비자면제 협정을 할 정도로 준우방국이 되어 있다.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에는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 교련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제1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2년 ~ 1967년), 제2차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1967년~1971년) 등을 수립 추진하였다. 1963년 6월 26일 사립학교법을 공포하여 사립학교 운영의 기준을 세웠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였고,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19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런가 하면 19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19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일반 영세 기업체들이 산집해 있는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제4공화국(第四共和國)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네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이다. 유신 체제로 불리기도 하는 대통령 1인 독재 체제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끊임없는 논란과 논쟁을 낳고 있는 체제이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용하여 10월 17일, 당시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을 추구하던 대통령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 정당 활동 중지, 일부 헌법의 효력 정지 등의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했다. 11월 21일 국민 투표로 유신 헌법을 확정하였고, 12월 23일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선출, 27일 취임했다. 이것이 10월 유신으로 이 시기를 유신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제4공화국 정부는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제4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독재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속에서 10·26 사건이 일어나 유신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10월 유신(十月維新)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제3공화국 헌법을 제4공화국 헌법으로 개헌한 것을 말한다. 이 때의 헌법을 유신 헌법이라 하며, 유신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라고도 부른다. 제4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연임할 수 있었으며, 대통령 선출 제도가 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뀜으로서 행정·입법·사법의 3권이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로 1인 영구 집권 체제인 총통제(總統制)를 채택하였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이 헌정 체제 하에서 많은 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다. 이 체제는 오직 대통령 박정희 1인의 독재를 위한 체제였으며, 한국의 6개 공화국 중 가장 민주주의가 무너진 헌정이었다. 1973년에는 독재에 저항하던 정치인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였고, 1974년에는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긴급조치가 선포되고, 1975년에는 고려대학교에 군대가 투입되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 위기 등으로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박정희는 이러한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1975년 인혁당 재건 사건 관련자를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 판결(2007년 재심에서 무죄 확정) 이튿날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1975년 10월 8일 대한민국 제9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 김옥선은 반 유신헌법 취지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의원직 사퇴, 공민권 제한이라는 파동을 일으켰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후 치러진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민주공화당이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지는(다른 야당인 민주통일당까지 더하면 득표율 격차는 8%에 이른다) 등 민심 이반의 조짐이 나타났다. 1979년 10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79년 10월 2일에 부산에서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인 부마항쟁이 발생하였으며,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고,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며 부마항쟁은 진압되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12월 12일, 살해 장소에 함께 있었던 정승화를 전두환 등이 연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기구를 설립해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당진송신소 개소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국군 서울지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간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에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 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그리고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을 연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군부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하였다. 10.26 사태 이후 한국의 모든 정치 세력은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민주적인 내용이 담긴 헌법으로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오랜 1인 독재 체제를 마감하고 민주화를 기대하는 국민 여론이 높아졌다. 1980년 5월 12일 여야는 같은달 20일 국회개헌특위가 마련하는 헌법개정안을 접수하는 한편, 계엄해제안을 비롯한 정치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였다. 신현확 총리 역시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후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국보위를 설치하여 내각을 장악한다는 취지의 집권 시나리오를 모의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하여 정치활동 금지, 휴교령, 보도검열 등의 조치들을 내렸다. 신군부 세력은 이에 항거하는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사전 계획대로 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이후, 9월 제5공화국 헌법을 확정하고, 10월 27일 공포하였다. 이듬해 3월 3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체제하의 70년대에도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다.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77년부터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우선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경제구조에 균형이 잡히고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여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됐다. 1973년에 준공된 포항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의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면서 공업진흥청을 신설했다. 같은해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 ~ 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했다. 70년대에는 중동의 석유수출국가들이 석유가격을 인상하여 경제발전에 압박을 가하였으나 수출은 꾸준히 지속되어 1977년에 100억 달러, 1981년에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수출상품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어섰다. 그리고 공업생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5%를 상회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건설업체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외화를 버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전체적으로 60년대와 70년대의 수출신장률은 연평균 40% 정도, 경제성장율은 8.9%를 기록하여 세계적으로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민족주체성을 강조하여 국민의 자존심을 부추기고, ‘하면 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박대통령의 강력한 신념과 개발독재형의 지도력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성취욕, 수천년 간 선진문명을 꾸려온 문화적 잠재력이 되살아난 것 또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대외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의존성의 심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오는 산업불균형,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에서 오는 부패의 만연, 지역발전의 편차, 농촌의 피폐와 도시빈민층의 형성, 공해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이러한 모순점이 재야 및 학생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74년 12월 박정희 정부의 탄압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기로 했었던 회사들이 무더기로 해약하고, 그 결과로 동아일보에서는 광고를 채우지 못한 부분을 백지로 내보내거나 아예 전 지면을 기사로 채워버린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로 동아일보 광고가 해약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계열사인 동아방송에도 사태의 영향력이 퍼져서 이듬해 1월 11일 보도 프로그램 광고가 무더기로 해약되어 방송 광고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몇몇 방송 프로그램은 아예 폐지하고, 심지어는 전체 방송 시간이 단축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광고를 평상시처럼 싣지 못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무려 7개월간 이어져,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경영난을 가져왔다. 결국 동아일보 경영진이 정권에 굴복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갔던 직원들을 강제로 해고함으로써, 사태가 종결되었다. 당시 해고당한 직원들은 한겨레신문을 만들었다. CIA 비밀문서를 통해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북한에 미리 알린 사실도 드러났다.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의 집권기는 한미 관계가 악화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인권외교와 민주주의, 미군철군을 외치는 카터와 박정희는 가장 껄끄러웠던 사이였다. 또한 알려진 바는 없으나 박정희가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도하여 미국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1977년 1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포함한 한반도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안보관련 부서에 지시했고,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초기에는 반발하다가 뒤에는 할테면 하라는 투로 응대하였다. 1977년 1월 말 지미 카터는 월터 먼데일(Walter F. Mondale) 미국 부통령을 일본에 파견하여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직접통보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먼데일은 한국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외교적 무례는 박정희와 한국정부를 심히 분노하게 만들었다. 2월 15일 지미 카터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지미 카터는 스나이더 대사와 존 베시(John W. Vessey) 주한미군사령관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재확인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인권정책의 개선도 함께 촉구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굴욕이나 하대로 간주하고 응하지 않았고, 한미관계는 1970년대 말에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1979년 6월 29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도쿄에서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친 카터는 예정상 김포공항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으나 김포지역의 안개로 착륙이 늦어져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환영 인파 등 겉모습으로 ‘우방’이었지만, 카터와 대면한 박정희는 인권정책과 미군철수 문제로 마찰을 빚어야만 했고 합의점을 도출해내지 못하였다. 카터는 방한 전부터 한국 내 인권 탄압이 시정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했다. 카터는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초대를 무시하고 이례적으로 서울 용산 미8군 영내에 숙소를 정했다.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40여 분간 카터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강의’했다. 화가 난 카터는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미 정부와 민간이 모두 말린 결과 카터는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미군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했다. 1970년 6월에는 제주도 남쪽 8만km²를 제7광구로 정하고 한국령으로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1972년 일본이 “한일간의 중간선에서 일본 쪽으로 넘어온 부분은 양국이 50%씩 지분을 갖고 공동개발하자”고 제의했고 한국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74년 한일대륙붕 협정이 맺어진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제주도와 중국 대륙에 붙어있는 7광구의 해저지형 때문이었다. 일본과 7광구는 깊이가 8000m에 이르는 ‘오키나와 해구’가 갈라놓고 있다. 당시까지 지배적 이론이었던 자연연장설로 볼 때 일본이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72년 당시 정설이었던 자연연장설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유리한 처지였으나, 박정희 정권의 공동개발 합의로 유리한 처지가 부각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권이 이 사실을 알고 합의를 맺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일본은 공동개발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계속 지연시키면 2028년 대륙붕 협정이 만료하는 날 자연연장설 대신 UN의 새 해양법이 적용되어서 일본에 유리하게 된다는 시각이 있다. 대중국 관계는 제1공화국과 차이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적대시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가 서거하자 김종필 명의로 애도를 표시하기도 했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아주 등한시하지는 않았는데 중국 공산당 측이 호응하지 않아서 무위에 그쳤다. 특히 1970년도 초부터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아시아 태평양 이사회의 성격을 전환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인 상황은 다른 분야의 외교정책에도 계속적인 변화를 강요했다. 그런데 1975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이후 태평양 지역의 외교 상황은 급격히 변모하여 많은 국가들이 중립화 경향을 표방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한 때, 태평양의 국가들간에는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서 남북한과의 등거리 외교를 추구하던 적도 있었다. 한국은 이런 국가들과도 적극 외교관계를 유지·강화하면서 안보외교의 성과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동남아 지역에서의 공산화는 한국 외교에 달갑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아스팍을 주도하면서 아시아 제국간의 반공 보루를 다져오던 한국 외교는 1975년 월남의 공산화에 이어 라오스·캄보디아까지 적화됨에 따라 궤도수정을 해야 될 새 단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월남에 국군을 보냈던 한국은 세계 외교무대에서 공산 월남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와 비동맹회의 등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의 공산화는 비단 한국뿐이 아니라 그간 친미 반공노선을 추구하던 이 지역의 모든 나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어 독자적인 외교노선의 추구를 실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1976년에 미국에서는 카터 대통령이 당선되어 대동남아 정책에 대한 인권문제와의 결부 등으로 불안이 겹치게 되자 이 지역 국가들은 자구책으로 탈미(脫美) 중립화 정책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역 국가들은 개별적 활동으로 동남아의 중립화 목표를 추구하는 한편 1976년 2월에는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서 수뇌회담을 열고 외부의 내정간섭을 배격하는 등의 자주 연대성을 강조한 우호협력조약을 조인했다. 이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외부의 간섭을 배격하는 중립화를 내걸면서 경제협력에서는 지역내의 협력을 강조하는 아시안 협력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필리핀은 아시안 외상회의에서 '초강대국의 보장 아래 동남아에서의 강대국의 각축과 지역내 간섭을 배제하며 이 지역 국가들만의 영향권으로 선언'하는 세칭 '아시안 독트린'을 제의했다. 또 인도차이나의 새로운 정치질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이 지역 국가들은 중국 및 소련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중·소 양국과 국교를 맺고, 싱가포르도 대중국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동남아 지역의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 일본은 경제협력을 통한 반공노선의 강화를 지원하는 입장을 유지하는 한편 자국의 무역증대를 꾀했다. 따라서 한국은 이 지역에서 무역 증대를 통한 경제적 외교와 반공 강화를 위한 중립화 외교를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 10월 16일에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975년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사망하자 이를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인도(이하 1973년), 네팔, 오만, 카타르(이하 1974년), 미얀마, 싱가포르(이하 1975년), 바레인(1976년), 스리랑카(1977년), 쿠웨이트(1979년)와 수교하였다. 프랑스는 1972년 제27차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 불상정안에 기권함으로써 새로운 문제점을 던져 주었다. 영국은 경제협력·통상문제 등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나, 그 대신 정치문제에서는 한국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유엔 한국문제에 대한 영국의 기여는 특기할 만하다. 유엔에서의 한국 문제가 공산측의 활동으로 미묘해지자, 한국정부는 1971년부터 한국정책에 불상정정책(不上程政策)을 취하였다. 이러한 한국정책에 영국정부는 1971년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 1년 연기안을 영국안으로서 제출 채택하게 하는데 적극 노력하여 성공시켰다. 1972년 제27차 유엔 총회에서도 영국은 다시 한국문제 토의 1년 연기안을 제출하고, 콜린 크로우 영국대표는 서울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 7·4 공동성명을 지적하면서, 유엔의 회원국들이 한국의 이같은 노력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유엔에서 이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야기될 냉전(冷戰)의 신랄하고 난폭한 언어를 방지하여 화해정신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라 지적하면서 한국문제 토의 연기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973년에는 핀란드와 수교하였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정세가 화해와 대화의 시대로 변모하자 한국도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외교정책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바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6·23 외교선언'을 대통령 특별성명 형식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 요지는 ①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및 남북한의 상호불침략과 대화 재개, ② 남북한이 UN 및 국제기구에 동시 가입, ③ 대공산권 국가 등에 대해서도 상호평등의 원칙하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등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단절시켜 오던 폐쇄정책 대신 문호개방 정책을 펴면서 비동맹 세력을 비롯한 다각적인 외교전략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6·23 선언 이후에도 소련·중국 및 동구 공산권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다만 국제적인 화해 무드에 의한 직접·간접적인 교류가 다소 늘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련과의 관계에서는 197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한국 선수가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1974년에는 국회 도서관과의 자료 교환이 있었고, 1975년엔 역도·레슬링 등의 선수권 대회에 한국 선수가 참가하기도 했다. 동구권과도 각종 국제회의나 대회 때 한국 대표가 입국할 수 있는 계기가 늘어나고 있는데 IPU 이사회, 적십자평화회의 등으로 유고에 입국한 것을 비롯해 1976년에는 동구권 인사가 6명이나 한국을 다녀갔다. 중국은 6·23 선언 이후에도 계속 적대감을 보이면서 오히려 소련이 한국인을 입국시킨 사실을 맹렬히 공격하는 태도를 취했다. 또한 한국 어부들이 중국의 어로(漁撈)를 방해한다는 등의 비난을 계속하면서 가끔 한국 어부들을 납치해 가서는 송환시키기도 했다. 6·23 선언 이후 한국이 보여준 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공산권 외교는 그 한계가 있었다. 국제정세의 바로미터인 유엔의 변화에 따라 한국 외교는 유엔총회 그 자체보다 비동맹·중립지역의 국가들과 깊은 유대를 갖는 방향으로 차츰 전환해 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할슈타인 원칙은 더 이상 유리한 외교전략이 아니었으므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비록 북한과 수교를 해도 단교까지는 취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북한과 수교중인 중립·비동맹 국가와 외교관계를 갖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비동맹 국가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위해서는 이미 1975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 가입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가입신청을 제출한 북한은 승인되었으나 한국은 거부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국의 대미·친서방 편향 및 베트남 전쟁참전에 대한 비동맹국가들의 배타였다.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 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미국과의 연관 가능성을 소련 측에 간접적으로 언급하였으며, 이같은 사실은 외교통상부가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이 경과해 22일 공개한 1979년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이 문서에서 일본의 우어모도 주 모스크바 대사는 1979년 10월 29일 휘류빈 소련 외무차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박 대통령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앙정보부(KCIA) 부장에게 살해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만조선 위만조선(衛滿朝鮮: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또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로, 기원전 194년 연나라에서 이주한 위만이 고조선의 왕인 준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국호는 그대로 조선으로 한 뒤 왕검성에 도읍하여 건국되었다. 위만조선은 대체로 중국계 유민과 토착민이 연합된 국가로 여겨진다. 이들은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변 지역을 활발히 정복하였고,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위만조선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진국과 한나라의 교역로를 가로막게 되었고, 이에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가 고조선 군에 살해된 것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한나라와의 1년간의 전쟁 끝에 내분이 발생, 위만의 손자이자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 살해되고, 성기가 주살당하면서 왕검성이 함락되어 기원전 108년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또한 건국자인 위만의 국적이나 지배세력과 이주민, 유민과의 관계와 통치방법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중국에서 진나라가 망하고, 기원전 206년에 고조가 전한을 건국한 뒤 주위의 여러 나라에 공신(功臣)을 봉하여 제후를 삼았다. 이때에 노관은 연왕으로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전한에서 주위의 제후들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시작하자 연왕 노관은 미연에 화를 면하려고 반하여 흉노 쪽으로 도망하고 연은 한나라 군대에 점령당하게 되어 일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위지》(魏志)에 따르면, 이 틈에 연나라의 위만이 연의 영내에서 유민 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서 조선에 들어와 조선왕 준(準)을 말하여 고공지(故空地)의 수비를 하겠다고 하였다.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博士: 지방 장관직)를 삼아 서변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주었다. 그러나 위만은 이들 유망인을 통솔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기른 다음, 하루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여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를 《사기》(史記)에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 기원전 194년~ 기원전 180년)라고 하였다. 도읍은 이전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왕검성에 정했다. 이때 준왕은 남쪽의 진국 방면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위만은 《사기》 이하 《한서》 등에 모두 연인(燕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최남선은 이를 국치(國恥)로 여기고, 위만조선을 한사군과 더불어 ‘지나인의 북새질’이라 규정하고, 위만의 왕위 찬탈을 ‘위만의 도둑질’이라고까지 하였다. 고조선의 지배자가 된 위만은 외국으로의 출정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을 다스리는 정비에도 힘을 써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토착민의 회유에도 상당히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 집권 초의 한나라도 건국 초기로 국가적인 체제가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전부터 계속하여 침입하던 흉노에 대비하기가 급급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은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변동은 인접한 요동군에 대하여 불안을 준 듯하여 요동 태수는 위만으로 하여금 한의 외신(外臣)이 될 것과 요동 새외(塞外)의 만이(蠻夷)가 한의 변경을 침범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만이의 제 군장(君長)이 한의 천자를 입현하려고 할 때 막지 말 것 등을 맹약하게 하고, 한제(漢帝)의 재가를 얻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위만은 한으로부터 병력과 물자의 원조를 얻어 세력을 신장하였다. 특히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임둔 등을 아울러 복속하여 영토가 수천리에 달하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고, 주위의 여러 씨족사회를 통합하여 갈등을 줄이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했다. 진무 등이 남월과 조선이 병력을 장비하여 중국을 엿보고 있으니 이들을 치자고 주청한 사실로 보아 위만은 주위의 여러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기회가 오면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여 패권을 잡아보려는 계획을 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진무 등의 주장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지만, 당시의 위만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위만의 강성은 그 자체의 실력도 있었지만 이때 북아시아에 강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던 흉노 제국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위만의 아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그의 손자는 우거왕이었다고 그 이름이 전한다. 우거왕 때는 중국 한 무제(기원전 140~87) 때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이때 중국은 사방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무제에게는 흉노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흉노를 치기 위하여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하여 동맹 관계를 맺으려고 한 것도 이때였다. 무제의 동방에 대한 조선 정책에는 흉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도 있었을 것이다. 《한서》에는 “동이(東夷)의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의 28만 인이 투항하였으므로 이곳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후한서》에는 수년이 지나자 창해군을 혁파하였다고 하여 남려가 우거의 지배하에 있다가 한에 투항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 무제는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彭吳)를 시켜 이곳에 이르는 통로 개척을 명하였으나 공사비와 노동력이 막대하게 투입되는 사실 때문에 창해군이 설치된 지 3년 만인 기원전 126년에 혁파하고 말았다. 또 우거는 위만 때와 달리 한의 망명인을 포섭하고 세력을 양성하여 한에 대항하여 입현(入見)하지 않을 뿐더러 진번에 남접한 진국이 한에 입조하려는 것을 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한의 동방침략의 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흉노가 위만조선과 동맹을 맺게 되면 한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무제는 외교적 방법으로 우거의 거한 정책(拒漢政策)을 무마하려 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09년에 사신으로 섭하를 파견하여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우거는 제의를 거절하고 종전의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한은 섭하를 요동군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하였는데 조선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그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한 무제가 조선에 침략군을 일으킬 구실을 준 것이며, 한 무제의 근본 정책은 즉위하여 사방을 침략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한 무제는 죄인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칠 준비를 하였다. 기원전 109년 가을에 이르러 육해로를 통하여 침략을 개시하였다. 양복이 발해를 거쳐 왕검성(王儉城)으로 쳐들어가는 수로군을 맡았고, 순체는 요동으로 출발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는 육로군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격으로 온 육·육·수로 양군이 모두 무너지자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조선 정복이 불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자 한 무제는 다시 우거에게 평화적 방법을 제의하게 되었다. 위산(衛山)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케 하였다. 우거도 태도를 바꾸어 화의에 동조하면서 화의 교섭에 응하고 태자를 파견하여 사례하는 뜻을 표하게 하였다. 그러나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사길에 나선 태자가 패수를 건널 때 교섭사 위산과 순체는 태자의 호위군사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하였고, 신변을 걱정한 태자는 도강을 중지하고 왕검성으로 돌아오니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순체와 양복은 왕검성에 이르러 서북과 남쪽에 진을 치고 포위하였다. 하지만 순체와 양복은 주전론, 화의론으로 각기 그 의견이 엇갈려 전쟁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한 무제는 위산의 평화 교섭 실패와 순체·양복 간의 불화로 인한 작전의 부진 등을 감안하여 현상 타개를 위한 방법으로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현지에 파견하여 이 문제를 해결토록 하였다. 공손수가 전쟁터에 이르자 순체는 전날 양복의 소행을 들어 양복과 조선이 함께 아군을 멸할지도 모른다고 그의 의중을 밝히자 공손수는 순체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양복을 잡아 가두고 수로군을 순체의 휘하에 병합시켜 작전의 일원화를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손수로부터 이러한 전말을 보고받은 무제는 공손수를 참형에 처하였다. 순체가 총공격을 감행하는 중에 왕검성 내의 조선 조정에서는 화·전 양파로 대립이 심각하여 주화파(主和派)는 집단적으로 이탈하거나 한군에게 투항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양복과 몰래 화의를 추진하던 일파로 보이는 한음·왕겹·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한군에 투항하다가 노인은 중도에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지배층의 내분 때문에 전력은 약화되었고 기원전 108년 주화파로써 성내에 잔류하고 있던 이계상 삼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한군에 가서 항복하게 되었다. 우거왕 피살 후에도 왕검성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우거의 대신이었던 성기가 반격전을 펴 순체는 앞서 투항한 왕자 장과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성내의 백성을 회유하게 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위만조선의 3대 80여 년 계속된 왕조는 막을 내리고 한은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위만 조선을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보고 있는데 이 때에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족장사회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국가에 대한 정의로써 마셜 살린스(M. Sahlins)는 무력의 합법적인 사용과 중앙집권화된 조직의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최근까지도 가장 공약수가 많은 견해이다. 켄트 플래너리(K. Flannary)는 위의 특징 외에 법률, 도시, 직업의 분화, 징병 제도, 세금 징수, 왕권, 사회 신분의 계층화 등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제 특징들이 위만 조선 관계 기사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직업적인 계급을 가진 중앙 관료 정부와 막강한 군사력, 계층화된 신분 조직, 행정 중심지로서의 왕검성, 왕권의 세습화 등의 요소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위만 조선은 초기에 주위의 유이민 집단을 정복해 나가다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완벽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위만조선은 정복 국가로 보는 견해와 무역에 기초를 두고 성장한 국가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최근에는 후자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변한, 진한, 마한, 왜, 예 등 철을 중심으로 하는 교역이 남부 지방에 행해지고 있을 때 위만 조선은 한반도 북쪽의 지리적인 요충지에 자리잡아 그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중심지 무역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흑자를 보았다. 이를 토대로 국가를 성립시킴과 동시에 세력을 확장,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당시의 무역로는 명도전의 출토지로 보아 난평-요양-무순-위원, 강계-평양이 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산둥 반도를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기자조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고조선의 왕조 중 하나인 고대 국가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을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기자가 세웠다고 하는 기자조선은 이 중 두 번째 시기에 해당된다. 명칭은 단군조선과 같은 ‘조선’이지만, 구분을 위해 후조선(後朝鮮) 또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기자조선은 실재 여부를 비롯하여 건국 과정, 성격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논란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는 일반적으로 기자조선에 대한 고전적인 인식(기자동래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승계 등)을 부정하며, 실재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다.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전 195년 경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근대 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개 시기로 구분하였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시작된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상세해진다. 한나라 이전의 문헌(선진문헌{先秦文獻})에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던 사실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기자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기자조선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全)》과 《사기》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한나라 이전의 《상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이 추가되어 있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며 주나라 무왕은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기》 〈송미자세가〉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위략(魏略)》, 《한서》, 《삼국지》 등에서 기자동래설을 계속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부왕과 준왕은 기자의 40여세손 기부(箕否), 기준(箕準)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등장한 이후부터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의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의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정립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에 대한 전기적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종휘의 《기자세가》, 정인기의 《기자지》 등에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연도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자는 원래 상나라의 왕족으로 상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상나라 멸망 후 기자가 주나라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고, 반대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서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상반된 기록이 함께 존재한다.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된 것은 기묘년(기원전 1122년)의 일로 전해진다. 기자는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국의 기록 《삼국유사》에는 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기자 이후 기원전 323년에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을 때까지 기자조선의 역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300년경에는 연나라의 진개(秦開)에게 서쪽의 영토 2000여 리를 빼앗겨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하며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기원전 214년에 몽염(蒙恬)이 만리장성을 쌓자 당시 기자조선의 왕이었던 부(否)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고 한다. 부는 기자의 40여세손이라고 전해진다. 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준은 기원전 194년에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였고, 이로써 기자조선은 멸망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각 시대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고려 시대에 들어 기자에 대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소개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전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의식이 체계화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은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서 인식하였다. 단군과 더불어 기자에 매년 제를 지냈으며,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는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후로 등장한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의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의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한국의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조선 초기의 체계를 따랐다. 대한제국 이후의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조선시대의 논란은 주로 사서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것이었다. 주의 무왕을 피해 조선에 자리잡은 기자는 주나라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장유, 홍직필 등)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의 내용을 근거로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다. 기자조선의 존재 부정하거나 한민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이마니시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일본의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에서 기원했으므로 중국인이 세운 나라로 조선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하였다. 광복 이후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 1974년에는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고조선에 대한 논쟁에서 기자조선의 실재성이 논의되었고, 교과서에 기자조선이 각주로 언급되었다. 1990년부터 발행되는 역사교과서에서도 각주로 언급되었으나,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 언급되지 않는다. 현재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와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세운 것을 근거로 중국을 부모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뒤에 기자조선에 대한 악평이 내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제시되어 있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몇몇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와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건국했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기자가 오기 이전에도 분명 단군조선이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문헌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실제에 바탕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는지의 여부, 한반도와 만주에 위치하였는지의 여부, 그 세력의 크기에는 각기 다른 주장이 있다. 발해만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기후방정에 나타난 기후(㠱侯)를 한자가 다른 기자(箕子)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문의 해석을 잘못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원전 323년 경에 불조선(番韓)의 임금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 기자가 고조선에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이야기는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주장이다. 주장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 1102년(숙종 7년)에 고려의 왕이 평양에서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외에도 정전(井田)과 같은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실제 고고학 조사 결과 이들 유적은 모두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준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익산의 무강왕릉이 나타나는데, 이 무덤은 실제 발굴 결과 백제의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확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황하 유역과 요하 동쪽 지방의 신석기·청동기 문화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도 주요한 논점이다. 중국의 청동기와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청동기는 양식이 전혀 다르며 성분 또한 크게 다르다. 기자가 상나라의 왕족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상나라와 관계가 있는 청동 유물 등이 나타나야 하나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는 두 지역 사이에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기자조선과 관련된 문헌 사료를 살펴보면 선진문헌과 한대 이후의 문헌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선진문헌인 《논어》, 《상서》, 《죽서기년》 등에는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부터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한 기록과 기자조선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홍범구주는 주 무왕이 은둔하였던 기자를 찾아가서 얻은 것으로, 기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홍범구주의 전래가 불가능하다. 한편 이마니시 류는 《사기집해》에서 기자의 무덤이 량국 몽현(蒙懸; 현재 하남성 상구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평양의 유적은 위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정인보는 기자의 기(箕) 자는 임검의 검(儉) 자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발음이 변한 것이며, 검(儉)과 기(箕)는 모두 높다(高) 혹은 윗사람(上)의 뜻이라고 하였다. 즉, 고구려 환도성에 있던 기산(箕山)이란 일명 기구(箕丘)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검재"를 한역(漢譯)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떠돌이 중국인들이 고조선 고구려 백제 등으로 이민하여 들어오면서 그들에 의하여 날조되었고 사대사상이 강한 중세 조선에 이르러 사실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 곡주 협계현조를 예로 들어 신라 경덕왕이 협계현을 단계(檀溪, 단군골)라 고친 것은 이 곳에 기산(箕山), 즉 "검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지던 시기의 중국은 그 세력이 황하 유역에 불과하였으며 기자가 조선까지 이동하려면 먼 거리와 다른 이민족들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또한 당시 조선에는 단군조선으로 알려져 있는 토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망명자에 불과한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는 것은 어렵다는 점도 부정론의 근거로 제시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발행한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기원전 12 ~ 11세기에는 고조선이 대릉하, 요하의 상류 지역까지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기자가 스스로 와서 왕이 될 수 없었으며, 중국 사학자들은 예부터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중국 특유의 중화의식을 지적하였다. 춘추좌씨전에서는 기국이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箕)자가 새겨진 은·주 시대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어, 기국은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윤내현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은 기자가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도망친 것을 배반으로 다루지 않고 기자의 조선 거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국식 표현이라 주장하였다. 아래 계보는 18세기 이후에 등장하여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기자지(1879)》, 《태원선우씨세보(1932)》,《청주한씨중앙종친회》 등에 기자조선의 각 왕의 명칭과 치세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대 수는 같으나 그 명칭과 역년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칼 세이건 칼 에드워드 세이건(, 1934년 11월 9일 ~ 1996년 12월 20일)은 미국의 천문학자, 천체화학자, 작가이자 천문학, 천체물리학, 그외 자연과학들을 대중화하는 데 힘쓴 운동가이다. 세이건은 외계생물학의 선구자였으며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계획의 후원자였고 미국 항공우주국의 자문위원으로도 참가했다. 생애 동안 세이건은 매리너 계획 참가, 하버드 대학교 강사, 코넬 대학교 교수, 파이어니어 계획 참가, 바이킹 계획 참가, 행성연구소 소장, 칼텍 초빙연구원 등의 다채로운 경력을 가졌다. 또한 냉전 말기에는 핵겨울 이론을 통해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세이건은 과학 대중서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60여 개국 5억여 명이 시청하였고 에미상과 피버디 상을 수상한 1980년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 《코스모스》("Cosmos: A Personal Voyage")의 제작자이자 공저자로도 명성을 얻었다.. 《코스모스》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책으로도 나왔는데, 이 책은 휴고상을 수상했다. 또한 세이건은 1997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콘택트》("Contact")도 썼다. 일생동안 세이건은 600편 이상의 과학 논문과 대중 기사를 작성했고, 작가·공저자·편집자 등의 자격으로 20권 이상의 책들에 참여했다. 세이건은 자신의 연구와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세속적 인간주의, 과학적 방법, 회의주의를 주장했다. 칼 세이건은 1934년 11월 9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유대계와 러시아계 이민자로, 1904년에 외조부 라이프 그루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이었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사소브(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 살다가 사람을 죽이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1905년에는 그루버의 아내 차야가 남편과 합류했고,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딸 레이첼 그루버를 낳았다. 한편, 아버지 새뮤얼 세이건은 사소브에서 남동쪽으로 190 km 떨어진 카메네츠포돌스키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온 새뮤얼은 1933년에 레이첼을 만나 3월 4일에 브루클린에서 결혼했고, 그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세이건이 7살일 때 여동생 캐럴(캐리) 세이건이 태어났는데, 어머니 레이첼은 아들을 다소 편애했다. 세이건은 어렸을 때부터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부모에게서 처음으로 도서관 카드를 받은 세이건은 85번가의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별("stars")에 관한 책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사서는 클라크 게이블, 진 할로 등의 사람들의 사진이 실린 그림책을 가져왔고, 그는 항의를 한 뒤 올바른 책을 받았다. 어린 세이건은 우주의 거대함과 인간의 하찮음에 놀라워했으며, 이때부터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8, 9세 무렵에는 만화와 공상 과학에 빠져들었다. 학교측은 부모에게 세이건은 재능이 있으니 사립학교를 가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부모는 세이건을 공립학교에 보냈는데,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재능이 뛰어났던 세이건은 몇 학년을 월반했다. 세이건은 라웨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세이건은 이 학교를 ‘콘웨이(교장 이름) 수용소’라고 부르며 냉소하는 등,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세이건은 과학적 기반이 약한 선생들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세이건은 고등학교 시절을 “시간 낭비”라고 여기면서 독서에만 빠져들었다. 이때 훗날 친구가 되는 과학소설계의 거물 아서 찰스 클라크의 《성간 비행》("Interplanetary Flight")을 접하고 로켓 기술과 수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클라크 외에도 아서 에딩턴, 제임스 진스, J. B. S. 홀데인, 줄리언 헉슬리, 조지 가모브, 윌리 레이, 레이첼 카슨, 사이먼 뉴컴 등의 저서들을 탐독했다. 고등학교 졸업이 다가오면서, 세이건은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굳히고 윌슨 산 천문대, 팔로마 천문대 등지의 천문학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하지만 가족들은 세이건의 진로를 탐탁치 않아 했다. 할아버지는 천문학자가 되었을 때의 경제적 어려움을 걱정했고,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의류 사업을 하기를 바랬으며, 어머니는 아들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졸업식이 가까워지고 세이건은 대학을 알아보았다. 점수는 좋았으나 월반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졸업 당시 나이가 겨우 16살이었다. 대학들은 이렇게 어린 학생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 상황을 따져본 뒤, 입학 연령 제한이 없고, 여키스 천문대를 소유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시카고에 정착했다. 1996년 12월 20일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세이건은 가장 유명한 불가지론자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무신론자가 되려면 제가 지금 알고 있는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데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서는 여러번 회의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우주를 창조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좀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와 같은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려면 우주에게 시작은 없었다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세이건의 어머니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이고 아버지는 불가지론자였는데,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 유대교 교육을 받았고 보수적인 토라 회당에도 다녔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종교 교육을 지루해했고 모든 신앙에 회의적 태도를 보였다. 이라크 이라크 공화국(, , )은 서남아시아에 있는 공화국이다. 1932년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는 중립지대의 면적이 924 km이고, 내해까지 포함하면 43만5052 km가 추가된다. 수도는 바그다드이며, 인구는 약 3,112만 명(2012)이다. 남쪽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은 요르단, 북서쪽은 시리아, 북쪽은 터키, 동쪽은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1918년부터 1932년까지 대영 제국에 속했으며, 1932년 10월 3일에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68년 아랍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바트당을 이끈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 전쟁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했고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다.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은 미국의 주도로 붕괴되었으며, 내전이 끝났지만 치안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여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 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라크는 쿠르드족 등 민족이 다양한 만큼 다언어 지역에 속하며, 아람어도 소수가 쓰인다. 이라크는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모술, 바그다드 및 바스라의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차 대전 종전 후 영국령이 되었으며, 1932년에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였다. 1958년에 군주제가 쿠데타로 붕괴되고 또한 일련의 쿠데타가 계속된 끝에 1968년 이슬람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7월에 정권을 장악한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1988년)을 일으켰으나,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승부로 끝났다. 1990년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했고, 이라크는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다.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으로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2004년 6월 29일부터 아랍어와 쿠르드어가 공용어가 되었으며, 2008년에 징병제를 폐지했다. 이라크의 전체 면적은 43만7072 km이다. 국경선의 총 길이는 3631 km인데, 이 중 이란과의 국경선 길이가 1458 km, 요르단과 181 km, 쿠웨이트와 242 km, 사우디아라비아와 814 km, 시리아와 605 km, 터키와 331 km이다. 해안선의 총 길이는 58 km이다. 주로 저지대로 이루어진 이라크는 고도가 300 m를 넘는 경우가 드물고, 450 m를 넘는 고지대는 전 국토의 15%가 채 안 된다. 지형적으로는 이라크 중부와 남동부에 걸쳐 있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충적평야지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북부에 자리 잡은 알자지라 고원지대, 서부와 남부의 사막지대, 북동부의 고원지대 등 4개 지역으로 나뉜다. 국토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충적평원지대는 기복이 적으며 자연 배수가 잘 안 되어 소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평원 북쪽의 메마른 고원지대인 알자지라에는 높이가 1,500 m 이상인 신자르 산맥이 있다. 이라크 서부와 남부지역은 전체가 광대한 사막 지대로 국토 면적의 5분의 2를 차지한다. 서부 사막은 와디·언덕·침강지대 등이 있으며 동쪽에는 덤불식물로 뒤덮인 모래사막이 있다. 국토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북동부 고원지대는 대부분 산악지대와 저지대 사이의 점이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라크는 폭넓은 기후대를 보이는데, 여름은 더운 편으로 특히 남부 지역은 평균기온이 43 도를 넘어간다. 겨울은 이와는 반대로 기온이 크게 떨어져 상당히 춥다. 북부 고원지대는 남부 지역보다 여름에 서늘하고 건조한 편이다. 10월부터 4월까지의 겨울에는 기온이 급강하하기 때문에 산악 지대에는 종종 눈이 내리기도 한다. 수도인 바그다드를 포함한 이라크의 중앙지역은 6월부터 8월까지 사이에 평균 기온이 33.3 도까지 올라가는데 가장 더울 때에는 50.6 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겨울에 바그다드의 평균기온은 9.4 도까지 떨어져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상당히 큰 편이다. 이라크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인 바스라(최고 기록은 58.8 도)의 평균기온은 여름 37 도, 겨울 14 도 정도이다. 걸프만 인근의 남부지역은 습도가 높은 편이며, 기온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중의 하나이다. 강우량은 북동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부족하며, 보통 연평균 강우량도 400~600 mm에 지나지 않는다. 강우는 주로 10월부터 5월까지 사이에 내리며, 사막 지역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농업은 주로 강으로부터의 관개수로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수로가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때때로 돌풍이 일어나 경작물을 망치는 경우도 있어 큰 골칫거리이다. 이라크는 18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빌 주와 다후크 주, 술라이마니야 주는 쿠르드 자치구에 속한다. 이라크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4는 아랍인이 차지하지만, 그 밖에 쿠르드인, 투르크멘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소수 민족이 존재한다. 이러한 복잡한 민족 구성은 이라크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주민은 아랍인이 약 78%, 쿠르드인이 약 17%, 그 밖에 투르크멘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5%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의 99%는 무슬림이다. 이라크의 공용어는 아랍어와 쿠르드어이다. 미국의 영향 아래 제정된 2005년 이라크 헌법 제4조(언어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의회, 내각회의, 법정 등에서는 아랍어 또는 쿠르드어로 이를 진행하여야 한다. 공보는 반드시 아랍어와 쿠르드어로 함께 출판해야 하며, 지폐, 여권 및 우표도 두 언어를 병기(倂記)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규정이 아랍어 사용 지역에서 반드시 쿠르드어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공용어로서 쿠르드어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쿠르드 자치구에서는 반드시 양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투르크멘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는 그 사용인구가 다수인 지역에서 아랍어와 쿠르드어에 추가하여 공식적 언어이다."라는 규정과 "지방자치단체는 주민투표를 거쳐 지자체 내에서 다른 공용어를 추가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즉, 아랍어와 쿠르드어는 공식적인 차원(공보, 지폐, 여권, 우표)에서 대등한 공용어이지만, 쿠르드어를 공용어로 한 주된 목적은 쿠르드 자치구 내에서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해 쿠르드인을 탄압하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있다. 또, 그 밖의 소수 언어(투르크멘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등)도 지역 내 다수가 사용하면 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데에 2005년 제정 이라크 헌법의 취지가 있다. 영어도 사용한다. 이라크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으며, 이 중 시아파가 64%, 수니파가 30%이다. 소수 종교로는 기독교와 야지디교 등 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3% 내외이다.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예배 허용 등 일정 부분 종교적 자유를 존중받았지만, 기묘하게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후부터 아랍 민족주의가 격해지면서 극우 무슬림들의 공격 표적이 되고 있다. 이라크의 민족융합은 다양한 종교만큼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아랍인 외의 다른 민족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대에 주로 들어왔는데 가장 최근에 이민온 노동자들은 모리셔스, 이집트, 수단으로부터 온 민족이 다수를 점한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 동안 일어난 이란-이라크 전쟁 때에는 외국 기술자의 수가 2백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았으며, 이 수치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1백만 명으로 감소했다. 대다수는 침공 1년 동안 떠났었는데, 그 이유는 이라크와 이집트 간의 관계악화와 10여 년이나 지속된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이라크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1991년 걸프전 종전 당시 시아파 반란세력이 이란 등 인접 시아파 국가의 지원 없이 수니파인 당시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 대항해 봉기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됐다. 약 20만 명에 달하던 시아파 반란세력은 이라크 정부군에 몰려 탱크와 지상군의 접근이 어려운 이라크 남부의 늪지대로 도주하였는데, 후세인은 늪 외곽 지대에 군병력을 집결시키고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기 위한 대규모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걸프전 후 유엔은 이라크가 군사적 비행과 국민들에 대한 탄압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 금지 규정을 두었으나, 당시 이라크 정부는 이러한 금지 규정을 무시하고 이 지역의 시아파 마을과 난민 거주지에 폭격을 가하였다. 2003년에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반미 테러가 격화되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과도정부 수립부터는 의회 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통합 이라크 연맹, 쿠르드 연맹, 이라크 민족당, 타와푸크연합 등 여러 정당이 있다. 이라크의 병역은 징병제로서 이라크의 유명 가수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군가를 부르는데 이는 동원령이라는 의미로 이후 모든 이라크의 예비역이 현역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라크 공화국의 군대이다. 사담 후세인 시절의 이라크군과, 사담후세인 몰락 후의 이라크군으로 나뉜다. 후자의 명칭은 미국에서는 이라크 보안군(Iraqi Security Army)이라고도 한다. 군사력을 재건 중이다. 이라크 국방부는 $43억 어치의 러시아 무기를 도입 결정했다. MI-28N 공격헬기 30대와 Pantsir-S1 대공 시스템 42대를 도입했다. 미코얀 MiG-29 업그레이드 버전과 장갑차들도 도입할 수 있다. 이라크군은 72기의 전투기와 140대 이상의 전차가 필요하고 T-90 전차가 될 확률이 크다. 이라크는 석유가 풍부한 나라로, 1970년대 사담 후세인 대통령 정권기에는 대한민국과 일본, 미국의 원조를 받았다. 197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라크에 파견하여 석유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걸프 전쟁과 이후 경제제재와 이라크 전쟁으로 이라크의 경제는 어려워지고 있다. 유프라데스, 티그리스 양하천은 주요 교통로의 역할을 한다. 알레르기 알레르기(, ) 또는 앨러지()는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만 두드러기, 가려움, 콧물, 기침 등의 이상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알레르기는 "과민 반응"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낱말 allos가 어원이며, 이는 "변형된 것"을 뜻한다. 알러지 또는 앨러지는 영어 발음, 알레르기는 독일어식 발음으로 한국어에선 둘 다 혼용되어 통용되나 표준어는 알레르기이다. "알레르기"라는 개념은 1906년 오스트리아 빈의 소아청소년과학자 클레멘스 폰 피르케가 그의 환자들 가운데 몇몇이 먼지, 꽃가루, 특정 음식과 같은 일반적으로 무해한 실체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소개하였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물질을 알레르겐 또는 항원이라고 한다. 꽃가루나 항생제가 한 예이다. 식품이 일으키는 알레르기를 식품 알레르기라고 한다. 항원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항체가 만들어지고 항원항체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알레르기의 증상이 생긴다. 항체의 종류에 따라 I, II, III, IV, V 형 다섯가지로 분류한다. 한냉 알레르기, 햇빛 알레르기도 있다. 즉 차가우면 알레르기가 생기거나 햇빛에 노출되면 알레르기가 유발되는 것이다. 알레르기는 접촉성 피부염이나 과민 반응, 혹은 독반응이나 부작용과 구별되어야 한다. 면역 과민 반응에는 알레르기 반응, 접촉성 피부염, 과민성 쇼크 반응 등 5가지로 나누며 약간씩 유발의 원인이 되는 항원-항체 반응이 다르다. 그러나 치료는 비슷하다. 면역 과민 반응이란, 보통 사람은 항원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을 항원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체는 해로운 물질을 항원으로 인식하고 항체를 만들어 이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보통사람은 항원으로 인식하지 않는 물질을 항원으로 인식하여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모든 육류, 즉 단백질에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고기만 먹으면 항원-항체 반응, 알레르기가 유발된다. 가장 많은 항원 물질은 단백질이다. 진화학에 따르면, B세포나 T세포가 분자적인 방법으로 외부의 물질을 제거할 수 없을 때,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서 외부의 병원균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기전(메커니즘)으로 보기도 한다. 즉, 외부에서 유해한 물질이 들어 왔는데 분자적인 기작을 통해 제거할 수 없으므로 물리적으로 재채기 등을 하게 하여 밖으로 방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대개의 두드러기는 처음 주사를 맞으면 곧 좋아지지만, 다시 하루 이틀 내에 재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옻이 항원이면 한 달 이상 증상이 계속 되기도 하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항생물질 항생물질(抗生物質, antibiotics, antibacterials)은 "미생물이 생산하였고 다른 미생물의 발육을 억제하는 물질"이라고 정의된다. 병원성 박테리아 감염의 치료 및 예방에 사용되는 항균제 약물이다. 통속적으로 항바이러스제와 혼동될 수도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물질로 만든 약을 항생제 또는 일상적으로 마이신(mycin)이라고 부른다. 항생제는 감기나 인플루엔자와 같은 바이러스에 효과적이지 않다.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약물은 항생제가 아닌 항바이러스 약물 또는 항바이러스제라고 한다. 처음에는 곰팡이 또는 토양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만들어 낸 것을 이용했으나, 현재는 구조를 약간 바꾼 반합성, 또는 완전히 새로운 합성 항생제도 많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주로 결핵치료에 쓰이는 방선균(放線菌)의 하나인 스트렙토미세스속(屬)에서 분리한 항생 물질인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에서 유래하여 '마이신'(mycin)으로 약칭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영어 어원인 antibiotics는, 반대/저항이라는 뜻의 anti와 삶/살아있는 것을 뜻하는 bio의 결합으로, 미생물을 죽인다 혹은 저항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항균제(antimicrobia)와 항생제(antibiotics)도 구별할 수 있다. 항균제는 비누와 소독제에 사용되며, 항생제는 의약품으로 사용된다. 숙주인 사람에게는 해롭지 않고 병원체에게만 큰 손상(injury)을 미치는 물질로 감염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화학요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법이 실시된 것은 화학요법이란 말이 생기기보다 아득한 옛날이다. 즉 조충(tapeworm) 치료에 고사리의 일종인 malferin을, 회충증에는 santonin을, 말라리아에는 quinine을, 아메바감염증에는 emetine을 사용한 역사는 미생물학의 역사보다는 월등하게 앞선다. 전염병의 원인이 미생물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 로베르트 코흐와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생물을 죽이는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근대 화학요법은 파울 에를리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를리히는 조직염색표본에서 원충이 특이하게 염색된다는 사실로부터 염색약품이 원충과 특이한 친화성(affinity), 즉 선택독성이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염료가 치료에 사용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염료를 연구하여 끝내는 1909년에 염료는 아니지만 살바르산(salvarsan)을 만들어 근대 화학요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최초의 항생제로서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은 세균 성장을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또한, 페니실린은 최초로 만들어진 미생물을 직접 파괴하는 종류의 항생제이다. 항생제는 종류에 따라 살균 작용과 정균 작용을 수행한다. 살균 작용(bactericidal effect)은 미생물을 직접 죽이는 것이고, 정균 작용(bacteriostatic effect)은 미생물이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정균 항생제를 사용하는 경우 미생물은 결국 식균작용이나 항체 등 숙주의 방어기전에 의해 제거된다. 항생제마다 항균 스펙트럼이 다르다. 광범위항생제(broad spectrum antibiotic)는 다양한 그람양성균과 그람음성균에 효과를 나타내는 반면, 특정한 종류 미생물에 대해서만 효과를 나타내는 좁은범위항생제(narrow spectrum antibiotic)도 존재한다. 인체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항생물질을 이용하려면, 항생물질이 선택적 독성을 가져 병원체에 손상을 입히면서도 인간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세균 등 원핵생물을 표적으로 하는 항생물질을 찾기는 비교적 쉬운데, 원핵생물과 진핵생물의 구조적·기능적 특징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 곰팡이나 원생생물, 기생충처럼 진핵세포로 이루어진 병원체를 표적으로 하는 항생물질은 개발하기가 한결 어렵고 따라서 그 종류도 다소 한정적이다. 세균을 표적으로 하는 항생물질의 작용 기전과 그 대표적인 예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항생제는 진핵세포 생물에게도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항생제는 곰팡이로 인한 질병 또는 암에 대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나, 사람 또한 진핵세포 생물이므로 이 항생제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항암성 항생제에 대해서는 화학요법계열의 안트라사이클린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항생제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던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저항성이 있을 것이란 것은 쉽게 예측 가능하다. 현재는 항생제 내성이 있는 미생물이 매우 많다. 이러한 미생물을 내성균이라 하며, 병의 치료 및 원내 감염이라고 불리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주고 있다. 내성균의 비율은 자연적으로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페니실린의 개발 후 많은 사용에 따라 내성균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페니실린만이 아닌 메티실린 등의 다른 항생물질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 대체 항생물질에 내성을 가지는 슈퍼 박테리아가 발생되어 그 위험이 많이 증가하고 있다. 부적절한 항생제 처방과 항생제의 과용은 항생제 내성 균들의 출현을 가속시켰다. 의료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들 스스로가 처방하는 것과 농업에서 성장 촉진제로서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은 더욱 더 문제를 악화시켰다. 더욱이 항생제는 그 사용상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서 종종 처방되기도 하며, 때로는 환자에 맞지 않는 약이 처방될 때도 있다. 몇몇 경우에서는 굳이 항생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처방되기도 한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적의 치료약으로 불리던 페니실린(penicillin)과 에리스로마이신(erythromycin)에 대한 내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원에서 치료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항생제를 사용한 것 역시 다양한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antibiotic-resistant bacteria)들이 등장하는 데에 일조했다. 여행자들이 예방 목적으로 사용하는 항생제를 포함하여 항생제를 오용하고 있는 경우는 대개 환자의 몸무게와 이전에 환자가 사용한 항생제들을 고려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한다. 두 변수 모두 항생제 처방 효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른 오용의 경우, 처방자가 내린 투약 지시를 정확하게 따르지 않아 생기는데, 예를 들어 8시간마다 복용한다고 할 때 그냥 하루에 세 번 투약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처방된 약을 끝까지 다 복용하지 않고, 중간에 투약을 중단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러한 습관은 항생제 내성 세균의 등장을 가속한다. 부적절한 처방 역시 문제가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일반적인 감기와 같은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질환에 아무 효과 없는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호흡계 감염성 질환에 대한 한 연구는 의사들이 항생제 처방을 원하는 환자에게 더 많은 항생제 처방을 한다고 발표했다. 처방 받은 환자들 4명 중 1명 만이 실제적으로 항생제가 필요한 환자였다고 한다. 다원적인 항생제 사용 감시 체제는 오남용을 막기 위해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적용된다. 다양한 연관 기구들이 규제 풍조의 강화를 위한 로비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항생제의 오남용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촉구를 위해 항생제 내성 대비 통합 테스크 포스 (Integracy Task Force on Antimicrobial Resistance)팀이 만들어졌으며 미국 질병 예방 관리 본부(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와 식약청(FDA), 국립 보건원(NIH)와 협력하고 있다. NGO 단체들도 꾸준히 캠페인 활동을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항생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Antibiotics are not automatic”)라는 캠페인이 2002년에 시작되어, 불필요한 항생제의 사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영국의 병원 진료소에는 NHS가 제작한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항생제는 당신의 감기를 낫게 할 수 없을 겁니다’ 라고 쓰여있다. 이것은 바이러스 감염에 항생제를 처방해야 된다는 환자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법원이 항생제의 과 처방 병원 명단을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려 항생제 오남용의 비율이 상당히 줄어들었으며 국민들의 인식도 크게 개선되었다. 동물의 성장 촉진제로서 항생제를 사용하여 결국 항생제 내성 균이 발생함에 따라 1970년 영국에서는 그것을 금지시켰다.(Swann report 1969). 현재 유럽 연합은 광범위하게 성장 촉진제로서의 항생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70% 이상의 항생제가 병이 없는 가축(소, 돼지, 닭)에게 사료와 함께 투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축에 사용된 항생제는 Salmonella spp., Campylobacter spp., Escherichia coli, and Enterococcus spp 등의 내성 균주들의 출현에 기여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렇게 발생한 내성 균주들이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으며, 기존에 처방 되던 항생제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일부 조직들 (The American Society for Microbiology (ASM), 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 (APHA) and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AMA))이 축산물을 포함한 비치료 목적의 항생제 사용의 금지를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법제화에는 몇 가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난관이 존재하여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특히 항생제를 파는 사업체들의 불만도 많으며 축산물에 대한 항생제 사용과 치료 불가능한 세균성 질병의 출현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대한민국에서도 가축용 사료에 대한 항생제 사용이 2011년 7월부터 전면 금지되었다. 다중 내성 세균(MDRO; Multi-drug-resistant organisms)이란 일반적으로 기존의 항생제 처방으로 죽일 수 없는 세균을 의미한다. 이처럼 항생제가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항생제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내성-번조 약물(RESISTANCE MODIFYING AGENTS)에 대한 설명이다. 내성균에 맞서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근래에 개발되고 있는 기술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원리에 근거한다. 다중 내성 세균 자체를 약물학적인 방법을 통해 다시 항생제에 영향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래의 것들이 이러한 약물의 목표가 되고 있다. 세균을 감염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인 파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파지 테라피(Phage Therapy)이다. 파지는 세균에게 있어서 생태학적 동반자인데, 다양한 환경에 존재하는 세균의 개체 수를 통제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치료법은 1920년대 미국과 동·서 유럽에서 인간에게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때의 성공적인 치료는 사실 일회적인 것이었다. 신약의 효용성을 판단하는데 사용되는 엄격한 과학적 연구에서는 파지 테라피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결론이 났다. 1940년대 페니실린이 발견된 이후, 미국과 유럽은 파지 테라피에 대한 연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세균 감염에 대한 대책으로 항생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구 소비에트 연방은 연구를 계속했고, 그루지아의 Eliava Institute of Bacteriophage, Microbiology & Virology에서 연구를 이어나갔다. 내성균의 등장에 따라, 다시금 서방 의학계에서는 파지 테라피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인데, 영국의 Intralytix, Novolytics, 인도의 Gangagen와 같은 회사와 대학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다양한 재단이 파지 테라피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 변형에 대한 문제 때문에 연구에 제한이 가해지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직까지 파지 테라피가 실재적인 효용을 가지기에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단계이다. 박테리오신은 세균에 의해 생성되어 다른 세균에 작용하는 물질을 말한다. 저분자 항생제의 대체재로 각광받으며 특이적 수용체에 흡착함으로 작용한다. 1입자가 1개의 세균을 죽일정도의 높은 향균성을 지니기도 한다. 영양분 차단은 항생제를 대체 할 수 있다. 철분 공급의 제한은 인체 내에서 세균의 급증을 막는 한가지 수단이다. 체내에서 철분을 빼내가는 메커니즘은 병원균 사이에서 거의 공통적이다. 이러한 것을 이용해서, 많은 연구진들이 철분을 제거하는 새로운 킬레이트제를 만들고 있다. 이 킬레이트는 다른 병원균들이 사용할 철분을 미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다만 균에만 작용하는 영양분 차단은 내성이 생길 수 있으며, 숙주 세포가 양분 부족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 생균제(probiotics)는 항생제의 대체재로 살아있는 생균등을 섭취하여 병원균과 경쟁을 시켜 수를 줄일 수 있게 한다. 항생제는 몸 속 미생물의 번식 및 작용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몸에 유익한 미생물과 해로운 미생물의 작용을 구분하지 않고 억제한다. 이와 같은 항생제의 작용은 수많은 미생물들과 공존하는 인체 또는 동물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항생제 투여가 대장에 사는 유익한 세균인 유산균을 죽이고, 해로운 대장균의 작용을 촉진하여 대장염 등의 장 질환을 유발한다는 결과도 있다. 페니실린 페니실린(penicillin)은 최초의 항생제이다. 푸른곰팡이로 불리는 "Penicillium notatum"와 "Penicillium chrysogenum"에서 얻고 분자식은 R-CHNOS이다. 대표적인 베타-락탐계열 항생제이다. 1928년 영국 런던 St. Mary's hospital(현 임페리얼 칼리지 소속 병원)에서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했으며 체인과 플로리가 유효 물질을 분리, 정제했다. 이후 1941년 2월 12일, 영국 옥스포드 대학 부속 병원이 세계 최초로 페니실린의 임상 실험에 성공, 이 공적으로 세 사람은 1945년 노벨 생리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발견 이후 페니실린은 합성이 가능하여 널리 사용되었으나, 점차 내성균주가 생겨 다른 항생제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감염증에는 1차 선택약이다. 베타-락탐계열 항생제는 세균 세포벽인 펩티도글리칸의 교차연결 배열을 망가뜨린다. 페니실린의 베타-락탐의 일부분이 펩티도글리칸 분자를 연결하는 트랜스펩티데이스(transpeptidase)와 임의로 결합, 이것이 세균 세포벽의 약화를 야기한다. 이렇게 세포벽이 약화된 세포는 삼투압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세포벽이 터져 내용물이 나와 죽게 된다. 페니실린은 오래된 항생제로 임상사용 초기부터 많은 개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페니실린은 아래 종류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경구투여용 페니실린으로 다른 종류에 비해 높은 혈중농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을(조직에 높은 역가가 필요하지 않는) 때 사용한다. 페녹시메틸 페니실린의 적응증은 다음과 같다: 벤질페니실린은 염산에 의해 불활성화되어 효과가 떨어지므로 경구투여하지 않는다. 페녹시메틸 페니실린과 함께 사용하는 경우, 각개 조직에 대한 역가가 높아지므로 높은 항균효과를 얻을 수 있다. 벤질페니실린의 적응증은 다음과 같다: 프로카인 페니실린이라고도 불리며, 벤질페니실린과 국소마취제인 프로카인의 혼합체이다. 근육주사하면 서서히 벤질페니실린으로 가수분해되며, 비교적 낮은 역가에 해당하는 항균효과가 필요한 경우 사용한다. 프로카인 벤질페니실린의 적응증은 다음과 같다: 페니실린의 경구투여시 생활성화를 높이고 베타-락타메이스의 억제, 스펙트럼 범위를 넓이기 위해 구조적 변경이 이루어진 것들이 반합성 페니실린으로, 광범위한 감염증과 감염 예방에 사용되고 있다. 현대 사용중인 페니실린은 대부분 반합성 페니실린이다. 스펙트럼이 좁은 대신 베타-락타메이스의 기능을 저해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들이다. 스펙트럼은 작지만 일반적 포도상구균의 특정 감염증에 다른 항생제보다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스펙트럼 범위를 넓게 한 것들이다. 아목시실린의 경우 경구투여시 생활성화도 향상시킨 것이다. 베타-락타메이스 억제능력은 없다. 스펙트럼의 범위를 그람양성 세균은 물론 그람음성 세균에게까지 넓힌 것이다. 몇몇은 녹농균("Pseudomonas aeruginosa")에게도 감수성이 있다. 베타-락타메이스 억제능력은 없다. 베타-락타메이스의 활성을 저해시켜 항균효과를 현격히 증강시키고 스펙트럼도 넓힌 것들이다. 내성균주가 많아진 현 시점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약재가 되었다. 젖 젖은 포유류 암컷의 유선에서 만들어지는 액체이다. 유즙(乳汁)이라고도 부른다. 암컷 포유류가 새끼를 기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보통 소, 양, 염소, 낙타 등의 젖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사람의 젖에 대한 내용은 모유를 참조. 소의 젖은 우유(牛乳) 또는 소젖이라 불린다. 어미의 젖에서 나온 것은 모유(母乳) 또는 어미젖이라고 부른다. 젖이란 말은 위에서 언급한 정의와 달리 짐승에게서 난 것이 아닌 물질에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두유(豆乳), 아이스 밀크(ice milk), 아몬드 밀크(almond milk), 코코넛 밀크(coconut mlik, coconut water)를 들 수 있다. 거의 모든 젖먹이 짐승에게서 젖은 모유를 먹임으로써 영아에게 젖을 바로 주며 젖을 따로 저장하여 놓았다가 나중에 주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나 현재로나 일부 문화권에서는 어린 아이에게 모유를 주는 것을 7살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모유 대신 염소의 신선한 젖을 주는 것이 서양 문화에서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전해질 불균형, 대사성 산성 혈액증, 거대적아구성빈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 특히 서양권에서 사람은 사람의 젖을 넘어 다른 짐승의 젖을 유제품으로 이용하기를 지속하였다. 보통은 살균 과정을 거쳐 그냥 마시지만, 소젖은 천 년에 걸쳐 유제품으로, 이를테면 크림, 버터, 발효유, 케피어, 아이스크림, 특히 더 오래가면서도 쉽게 옮길 수 있는 제품인 치즈 등으로 가공하여 왔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가공으로 말미암아 카세인, 유청 단백질, 락토스, 연유, 분유, 또 수많은 다른 음식 첨가물과 산업 제품을 만들어내었다. 2007년 기준, 세계 10대 우유 생산 국가와 그 생산량은 다음과 같다. 자료 출처 -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2007년 통계 소뿐 아니라 다음의 가축들도 인간에게 유용한 유제품으로 이용한다: 러시아와 스웨덴에서는 조그마한 무스 유제품도 존재한다. 짐승의 젖이 사람에게 처음 식용으로 쓰인 것은 2차 제품 혁명 시기인 기원전 5,000년 즈음이다. 소와 같은 짐승들이 처음으로 사육되었을 때에는 고기로만 이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짐승들에게서 난 유제품들은 경작되지 않은 목초지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고기로 이용하려고 죽인 짐승의 음식적 가치는 여러 해에 걸쳐 젖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같은 짐승에게서 젖을 한 해 동안 뽑아낸 가치와 맞먹기도 한다. 젖의 부작용은 터키의 석기 시대의 도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공한 우유가 기원전 6,500년에 소비되었는데 수천 년이 지나서야 성인 인간이 가공하지 않은 우유를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소젖이 병 단위로 처음 배달된 것이 1878년 1월 11일이었다. 이 날은 "우유의 날"로 해마다 기리고 있다. 일리노이주의 하버드 마을은 "우유의 날"로 알려진 축제로 하여금 여름이 되면 젖을 기린다. 우유는 성장에 필요한 칼슘, 단백질 등이 풍부하여 성장기의 어린이, 청소년에게 매우 유익하며, 이를 완전식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유를 소화시키려면 락테이스(lactase)라는 유당 분해 효소가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특히 몽골 인종)이 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효소가 결핍된 사람이 무리하게 우유를 섭취할 경우 설사와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체질에 따라 우유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 젖의 성분은 종에 따라 크게 다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요인에서 차이가 난다. 위와 같은 요인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차이가 난다: 젖은 8 그램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으며 다른 수많은 영양분이 다음과 같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우유를 W와 M, 이렇게 두 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W급은 주로 가게에서 직접 판매하고 소비하는 데 쓰이며 M급은 치즈 제작이나 다른 가공을 위한 간접적인 소비를 위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저지방 우유"라는 제품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지방 함량을 2% 이하로 줄인 우유를 말한다. 일반 우유와 달리 지방 함량이 적어 다이어트,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지방 우유를 만들기 위해 지방을 분리시킨 뒤, 분리된 지방으로 버터나 생크림 등 다른 유제품으로 생산할 수 있다. 아데노신 삼인산 아데노신 삼인산(, ATP)은 근육 수축, 신경세포에서 흥분의 전도, 물질 합성 등 살아있는 세포에서 다양한 생명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유기 화합물이다. 모든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ATP는 종종 세포 내 에너지 전달의 "분자 단위의 에너지 화폐"라고 불린다. 대사 과정에서 ATP가 소비되면 아데노신 이인산(ADP) 또는 아데노신 일인산(AMP)으로 전환된다. 다른 대사 과정들은 인체가 매일 생명활동에 쓰이는 ATP를 충당할 수 있도록 ATP를 재생한다. 또한, ATP는 DNA와 RNA의 전구물질이며, 조효소로도 사용된다. 생화학의 관점에서 ATP는 뉴클레오사이드 삼인산으로 분류되며, 아데닌(질소 염기), 리보스(5탄당), 삼인산의 세 가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ATP는 아데닌의 9번 질소 원자와 리보스의 1' 탄소 원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리보스의 5' 탄소 원자에 삼인산이 연결되어 있다. 물질대사와 관련된 많은 반응에서 아데닌과 리보스는 변함없이 유지되지만, 삼인산이 이인산으로 전환되면 ADP, 일인산으로 전환되면 AMP를 형성한다. 3개의 인산기는 리보스에 가까이 있는 인산기로부터 알파(α), 베타(β), 말단에 위치한 인산기는 감마(γ)로 지칭된다. 중성 용액에서 이온화된 ATP는 주로 ATP로 존재하며, 적은 비율의 ATP가 존재한다. 폴리음이온이며 잠재적으로 킬레이트성 폴리인산기를 특징으로 하는 ATP는 높은 친화력으로 금속 양이온과 결합한다. Mg에 대한 결합 상수는 9.554이다. 2가 양이온인 Mg와의 결합은 다양한 단백질과 ATP의 상호작용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ATP-Mg 상호작용의 강도 때문에, ATP는 주로 인산기의 산소 중심에 결합된 Mg와 복합체로 세포 내에 존재한다. 두 번째 마그네슘 이온은 키네이스의 도메인에서 ATP의 결합에 중요하다. Mg의 존재는 키네이스의 활성을 조절한다. ATP의 염은 무색의 고체로 분리될 수 있다. ATP는 촉매가 없는 pH 6.8에서 7.4 사이의 수용액에서 안정하다. 보다 극단적인 pH에서 ATP는 ADP와 인산으로 빠르게 가수분해된다. 살아있는 세포는 ATP의 농도가 ADP의 농도보다 5배인 평형에서 ATP와 ADP의 비율을 평형으로부터 10배의 크기로 유지한다. 생화학적 반응에서 P-O-P 결합은 고에너지 인산 결합으로 지칭된다. ATP가 ADP와 무기 인산(P)으로 가수분해되면 3.4 kJ/mol 의 자유 에너지의 변화와 함께 30.5 kJ/mol 의 엔탈피를 방출한다. 표준 상태 1M에서 ATP로부터 인산(P) 또는 피로인산(PP)이 분해됨으로써 방출되는 에너지는 다음과 같다. 위의 축약된 화학 반응식은 좀 더 명확하게 쓰여질 수 있다. (R = 아데노실): 전형적인 세포 내에서 ATP의 농도는 1~10 mM로 풍부한 편이다. 산소가 존재하는 대사 과정에서 ATP의 탈인산화와 ADP와 AMP의 재인산화는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ATP는 다수의 서로 다른 세포 내 대사 경로를 통해 생성될 수 있다. 진핵생물에서 세 가지 주요 경로는 (1) 해당과정, (2) 시트르산 회로/산화적 인산화, (3) 베타 산화이다. (1) 해당과정과 (2) 시트르산 회로/산화적 인산화의 조합인 과정은 세포 호흡으로 알려져 있으며, 포도당 1분자당 약 32 ATP를 생성한다. 비광합성 산소 호흡 진핵생물에 의한 ATP 생산은 주로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나는데, 미토콘드리아는 전형적인 세포 부피의 약 25%를 차지한다. 해당과정에서 포도당과 글리세롤은 피루브산으로 대사된다. 해당과정은 두 가지 효소인 포스포글리세르산 키네이스와 피루브산 키네이스에 의해 촉매되는 기질수준 인산화를 통해 포도당 1분자당 2분자의 ATP를 생성한다. 포도당 1분자당 2분자의 NADH도 생성되며, NADH는 전자전달계를 통해 산화되어 ATP 생성효소에 의해 추가적인 ATP의 생성으로 이어진다. 해당과정의 최종 산물로 생성되는 피루브산은 피루브산 산화 과정의 기질이다. 해당과정은 총 10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에너지 투자기(preparatory phase)인 단계 1~단계 5를 거치면서 1분자의 포도당은 2분자의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G3P)로 전환된다. 1분자의 ATP는 단계 1에 투자되고, 또 다른 1분자의 ATP는 단계 3에 투자된다. 해당과정의 단계 1과 단계 3을 "프라이밍 단계(priming steps)"라고 한다. 에너지 회수기(payoff phase)에서는 2분자의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이 2분자의 피루브산으로 전환된다. 단계 7에서 2분자의 ATP가 생성되며, 단계 10에서도 2분자의 ATP가 생성된다. 단계 7과 단계 10에서 ATP는 ADP로부터 생성된다. 해당과정에서 2분자의 ATP가 순생산된다. 해당과정은 나중에 ATP를 추가로 생산하기 위해 피루브산의 산화와 시트르산 회로로 연결된다. 해당과정에서 헥소키네이스는 자신이 만든 생성물인 포도당 6-인산에 의해 직접적으로 저해되고, 피루브산 키네이스는 ATP에 의해 저해된다. 해당과정의 주요 조절 지점은 고농도의 ATP에 의해 다른 자리 입체적으로 저해되고, 고농도의 AMP에 의해 활성화되는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PFK-1)이다. ATP는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에 의해 촉매되는 반응의 기질이기 때문에 ATP에 의한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의 저해는 드문 경우이다.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의 활성형은 2가지 입체 구조로 존재하는 사량체 단백질이며, 그 중에 하나만 기질인 과당 6-인산과 결합한다.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은 ATP에 대해 두 개의 결합 부위를 가지고 있는데, 활성 부위는 2가지 입체 구조에서 모두 ATP가 접근 가능하지만, 저해제 결합 부위에 ATP가 결합하면 과당 6-인산을 제대로 결합시키지 않는 입체구조를 안정화시킨다. 고리형 아데노신 일인산(cAMP), 암모늄 이온, 무기 인산(P), 과당 1,6-이중인산 및 과당 2,6-이중인산을 포함하는 많은 다른 작은 분자들은 입체구조의 평형에서 ATP에 의한 유도 적합 변화를 보상할 수 있고,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을 재활성화 할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에서 피루브산은 피루브산 탈수소효소 복합체에 의해 아세틸기로 산화되며, 아세틸기는 시트르산 회로에 의해 이산화 탄소로 완전 산화된다. 시트르산 회로 1회전당 2분자의 CO, 3분자의 NADH, 1분자의 FADH, 1분자의 ATP가 생성된다. 시트르산 회로에서 생성되는 ATP(또는 GTP)는 석시닐-CoA가 석시닐-CoA 합성효소에 의해 석신산으로 전환되는 반응에서 기질수준 인산화를 통해 생성된다. NADH 와 FADH는 산화적 인산화에 의한 추가적인 ATP를 생성하는데에 사용되며, 각각 NAD와 FAD로 재활용된다. 1분자의 NADH 산화에 의해 약 2.5분자의 ATP가, 1분자의 FADH 산화에 의해 약 1.5분자의 ATP가 생성된다. 세포 호흡을 통해 생성되는 ATP의 대부분은 산화적 인산화를 통해 생성된다. 시트르산 회로 내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진 않지만, 산화적 인산화를 통해 NADH와 FADH를 각각 NAD와 FAD로 전환하는데 O가 사용되기 때문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시트르산 회로도 작동을 멈춘다. 세포질의 NADH로부터 미토콘드리아에 의한 ATP의 생성은 미토콘드리아 내막이 NADH와 NAD에 대해 불투과성이기 때문에 말산-아스파르트산 왕복통로 또는 글리세롤 3-인산 왕복통로를 이용한다. 생성된 NADH를 운반하는 대신에 말산 탈수소효소가 옥살아세트산을 말산으로 전환시키고, 말산은 세포질에서 미토콘드리아 기질로 운반된다. 운반된 말산은 미토콘드리아 기질에 존재하는 말산 탈수소효소에 의해 다시 옥살아세트산으로 전환되고, 이 과정에서 NADH가 생성된다. 아스파르트산 아미노기전이효소는 옥살아세트산을 아스파르트산으로 전환시키고, 아스파르트산은 운반체를 통해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가로질러 막 사이 공간으로 운반된다. 산화적 인산화에서 NADH와 FADH로부터 고에너지 전자가 전자전달계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해 미토콘드리아 기질로부터 막 사이 공간으로 H(양성자)가 능동수송된다. 이러한 양성자의 능동수송은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H의 농도 기울기(pH의 차이)와 전위 차이의 형태로 위치 에너지를 발생시키며, 이는 양성자 구동력을 생성시킨다. 이러한 H의 전기화학적 기울기에 의해 H가 막 사이 공간에서 미토콘드리아 기질로 ATP 생성효소를 통해 확산될 때 ATP가 생성된다. ATP 생성효소가 1회전 할 때 3 ATP가 생성된다. 미토콘드리아에서 합성된 ATP의 대부분은 세포질에서 세포의 대사를 수행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미토콘드리아 기질에서 만들어진 ATP는 미토콘드리아 밖으로 내보내져야 한다. 미토콘드리아 기질 쪽은 상대적으로 음전하를 띄는데 비해 세포질 쪽은 상대적으로 양전하를 띄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 내막을 경계로 한 H의 전기화학적 기울기는 ATP를 미토콘드리아 기질로부터 세포질로 나가도록 돕는다. 미토콘드리아 밖으로 운반되는 1분자의 ATP당 1H가 소모된다. 따라서 1분자의 ATP를 만들고, 미토콘드리아 밖으로 운반하려면 4H가 필요하다. 미토콘드리아 내막에 존재하느 역수송체인 ADP/ATP 전위효소는 막 사이 공간의 ADP와 미토콘드리아 기질에서 새로 합성된 ATP를 서로 교환하는데 사용되는 내재성 막단백질이다. ADP/ATP 전위효소는 3개의 음전하를 미토콘드리아 안으로 이동시키는 대가로 미토콘드리아 밖으로 약 4개의 음전하를 이동시키기 때문에 막전위에 의해 작동된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안으로 인산을 수송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산 운반체는 인산과 함께 H(양성자)를 이동시켜서 H의 농도 기울기를 부분적으로 상쇄시킨다. 해당과정, 피루브산의 산화, 시트르산 회로, 산화적 인산화가 순차적으로 완료되면 포도당 1분자당 약 30~32 ATP가 생성된다. 시트르산 회로는 주로 핵심적인 기질의 이용가능성, 특히 NAD와 NADH의 비율, 칼슘, 무기 인산, ATP, ADP, AMP의 농도에 의해 조절된다. 시트르산은 시트르산 생성효소의 피드백 억제제이며, 시트르산 회로와 해당과정 조절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포스포프럭토키네이스-1(PFK-1)을 억제한다. 호기성 조건에서 관련 효소와 보조 인자가 있으면 지방산은 아세틸-CoA로 전환된다. 이러한 대사 경로를 β 산화라고 한다. β 산화의 각 사이클은 2개의 탄소 원자를 분해한 만큼 지방산 사슬을 짧게 만들고, 1분자의 아세틸-CoA, 1분자의 NADH, 1분자의 FADH를 생성한다. 아세틸-CoA는 시트르산 회로에 의해 대사되어 ATP를 생성하며, NADH와 FADH는 산화적 인산화에서 ATP를 생성하는데 사용된다. 긴사슬 지방산의 β 산화에 의해 수십 분자의 ATP가 생성된다. 산화적 인산화에서 핵심 조절 지점은 사이토크롬 c 산화효소에 의해 촉매되는 반응으로 환원형인 사이토크롬 c 기질의 이용가능성에 의해 조절된다. 이용가능한 환원형 사이토크롬 c의 양은 다른 기질의 양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화학 반응식을 직접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NADH] 대 [NAD]의 높은 비율 또는 [ADP][P] 대 [ATP]의 높은 비율은 많은 양의 환원된 사이토크롬 c 및 사이토크롬 c 산화효소의 높은 활성을 의미한다. 미토콘드리아 기질과 세포질 사이에 ATP와 NADH의 운반 속도에 의해 추가적인 조절이 이루어진다. 케톤체는 미토콘드리아에서 산화될 때 아세토아세트산 분자당 22 ATP와 2 GTP 분자를 생성하는 연료로 사용될 수 있다. 케톤체는 간으로부터 다른 조직으로 운반되며, 아세토아세트산과 β-하이드록시뷰티르산은 시트르산 회로를 통해 환원 당량(NADH and FADH)을 생성하기 위해 아세틸-CoA로 재전환될 수 있다. 간에는 β-케토아실-CoA 전이효소(또는 싸이오포레이스)가 없기 때문에 케톤체는 간에서 연료로 사용될 수 없다. 저농도의 아세토아세트산은 간에서 흡수되어 젖산으로 끝나는 메틸글리옥살 경로(methylglyoxal pathway)를 통해 해독된다. 고농도의 아세토아세트산은 간세포 이외의 다른 세포로 흡수되어 프로필렌 글리콜을 통해 다른 대사 경로로 들어간다. ATP를 필요로 하는 일련의 단계를 거쳐서, 프로필렌 글리콜은 피루브산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발효는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유기 화합물의 물질대사이다. 발효는 세포 호흡에서의 산화적 인산화가 없는 기질수준의 인산화를 포함한다. 포도당이 젖산으로 산화되는 화학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무산소 호흡은 O가 없는 상태에서의 호흡이다. 원핵생물들은 다양한 전자수용체들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전자수용체로는 질산염, 황산염 및 이산화 탄소가 포함된다. ATP는 고에너지 인산의 공여체로서 다른 뉴클레오사이드 삼인산을 사용하는 뉴클레오사이드 이인산 키네이스의 효소군 및 에 의해 촉매되는 몇 가지 보충 반응을 통해 합성될 수 있다. 식물에서 ATP는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에서 합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광인산화라고 한다. 광인산화 과정은 화학삼투적인 방식으로 ATP를 합성한다는 점에서 미토콘드리아에서의 산화적 인산화와 유사하지만 전자전달계를 작동시키기 위한 고에너지 전자를 만드는데 빛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광인산화에서 ATP 생성효소는 산화적 인산화와 동일한 방식으로 ATP를 생성한다. 엽록체에서 생성된 ATP의 일부는 캘빈 회로에서 소비된다. 인체 내 ATP의 총량은 약 0.2몰이다. 대부분의 ATP는 앞서 언급한 과정에 의해 ADP로부터 재활용된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에 ATP + ADP 총량은 상당히 일정하게 유지된다. 사람의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하루에 100~150몰의 ATP의 가수분해를 필요로 하며, 이는 약 50~75 kg 에 해당한다. 사람은 보통 하루동안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ATP를 사용한다. ATP의 각 당량은 하루동안 500~750회(100 / 0.2 = 500회) 재활용된다. ATP는 인산기를 전달하는 효소인 키네이스의 기질 여갈을 함으로써 신호전달에 관여한다. 키네이스는 가장 일반적인 ATP-결합 단백질이다. 키네이스들은 몇 개의 공통적인 접힘을 공유한다. 키네이스에 의한 단백질의 인산화는 미토젠 활성화 단백질 키네이스(MAP kinase) 캐스케이드와 같은 캐스케이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ATP는 또한 G 단백질 연결 수용체 신호전달 경로에서 가장 흔한 아데닐산 고리화효소의 기질이며, 세포 내 저장소에서 칼슘을 방출함으로써 칼슘 신호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는 2차 신호전달자인 고리형 아데노신 일인산(cAMP)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신호 전달의 이러한 형태는 다른 여러 세포 과정의 조절에 관여하지만 뇌 기능에서 특히 중요하다. ATP는 RNA의 합성에 필요한 4가지 기질 중 하나이다. RNA의 합성은 RNA 중합효소에 의해 촉진된다. ATP가 디옥시리보뉴클레오타이드인 dATP로 대체되는 것을 제외하면 DNA의 합성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난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축합 반응들과 마찬가지로 DNA 복제와 전사도 ATP를 소비한다. 아미노아실-tRNA 합성효소는 tRNA에 아미노산을 결합시키는데 ATP를 소비하며, 아미노아실-tRNA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한다. 아미노아실 전이효소는 AMP-아미노산을 tRNA에 결합시킨다. 짝지음 반응은 다음의 두 단계로 진행된다. 아미노산은 에스터 결합을 통해 tRNA의 3' 말단(서열 CCA의 A)에 있는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한다. 농도 기울기에 역행해서 세포 밖으로 물질을 운반하는 것은 종종 ATP의 가수분해와 관련이 있다. 운반은 ATP-결합 카세트 수송체(ABC 수송체)에 의해 매개된다. 인간의 게놈은 약물, 지질, 기타 화합물을 세포 밖으로 운반하는데 사용되는 48가지의 ATP-결합 카세트 수송체를 암호화하고 있다. 세포는 퓨린작동성(purinergic) 신호전달이라고 불리는 과정에서 다른 세포와 연락하기 위해 ATP를 분비한다. ATP는 신경계의 많은 부분에서 신경전달물질로 작용하고, 혈관의 산소 공급 등에 영향을 미친다. ATP는 통로 단백질을 통해 세포막을 통해 직접 분비되거나 세포막과 융합되는 소낭으로 펌핑된다. 세포는 퓨린작동성 수용체 단백질인 P2X와 P2Y를 사용하여 ATP를 감지한다. ATP는 최근 생물학적 향수성(向水性) 물질로 작용하는 것으로 제안되었으며, 프로테옴 전체의 용해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화학 실험실에서는 종종 ATP-의존적인 분자 과정을 탐구하기 위해 생체 외(in vitro) 연구를 수행한다. ATP 유사체는 종종 다른 기질과 함께 ATP와 복합체를 형성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결정하기 위해 X선 결정학을 사용한다. 키네이스와 같은 ATP-의존성 효소의 저해제는 ATP-의존성 반응과 관련된 결합 부위 및 전이 상태를 조사하는데 필요하다. 가장 유용한 ATP 유사체는 ATP처럼 가수분해되지 않는다. 대신에 ATP 유사체들은 ATP-결합 상태와 밀접하게 관련된 구조로 효소를 붙잡아 둔다. 아데노신 5'-γ-싸이오삼인산(adenosine 5′-γ-thiotriphosphate)은 감마 인산의 산소 중 하나가 황 원자로 대체된 매우 일반적인 ATP 유사체이다. 이러한 ATP 유사체는 ATP보다 매우 느린 속도로 가수분해되고, ATP-의존성 과정의 저해제로 작용한다. 결정학적 연구에서 ATP 가수분해의 전이 상태는 바나드산 이온이 결합된 상태에 의해 모델링된다. 일부 효소는 고농도에서 상당한 속도로 ATP 유사체를 가수분해할 수 있기 때문에 ATP 유사체를 사용한 실험의 결과를 해석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 ATP는 카를 로만(Karl Lohmann)과 옌드라시크(Jendrassik)에 의해 1929년에 발견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하버드 의학대학원의 사이러스 피스크(Cyrus Fiske)와 옐라프라가다 수바로(Yellapragada Subba Rao)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두 팀은 인산화물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ATP는 1941년 프리츠 앨버트 리프만에 의해 세포에서 에너지 생성 반응과 에너지 요구 반응 사이의 중개 물질로 제안되었다. ATP는 1948년 알렉산더 토드에 의해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합성되었다. 1997년 노벨 화학상은 아데노신 삼인산(ATP)의 합성의 기초가 되는 효소 메커니즘을 밝힌 공로로 폴 D. 보이어, 존 E. 워커와 이온전달 효소인 Na-K ATPase를 처음으로 발견한 옌스 크리스티안 스코우에게 공동으로 수여되었다. 대한민국의 국장 대한민국의 국장(大韓民國의 國章)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정식명칭은 나라문장이다. 대한민국의 국장은 외국에 보내는 공문서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서, 그리고 그 외 시설이나 물자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현행 도안은 국장 가운데에 태극이 그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 꽃잎 다섯 개가 태극을 감싸고 있다. 꽃잎 아래쪽에 있는 파란 리본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명이 한글로 쓰여져 있다. 제1공화국부터 1963년 이전까지는 태극 주위에 건·곤·감·리 4괘를 원형으로 배치한 형태였다. 현행 디자인은 1963년 12월 10일에 각령 '나라문장 규정'을 통해 개정된 것이다. 이 각령은 국한문 혼용이었다가 1970년 대통령령에 따라 한글로 개정되었으며 현 규정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후 1997년 대한민국의 국기 색상이 변경되었을 때 국장의 태극 및 리본 색상도 함께 변경되었다. 아래는 대한민국 대통령령 나라문장규정 제3조에 명시되어 있는 국장의 용도이다. 1655년 1655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682년 1682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711년 1711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719년 1719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748년 1748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811년 1811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윤지완 윤지완(尹趾完, 1635년~1718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숙린, 호는 동산이다. 이조판서 윤강(尹絳)의 아들이다. 1662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조정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82년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通信使)의 정사(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에는 부교리, 부응교,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어영대장을 지냈고 이후 정경의 반열에 올라 1683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후 어영대장을 거쳐 광주유수, 호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우참찬, 강화유수, 대사헌,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지만 기사환국으로 쫓겨난다. 이후 인현왕후 지지 세력과 장희빈 지지 세력의 경쟁 관계 속에서 한때 유배되기도 하였다.1694년 갑술환국 이후 좌참찬, 어영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이 때를 전후하여 동상으로 인해 한 쪽 다리를 잘라야 했고 이로 인해 일각정승(一脚政丞)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연돈녕부사를 거쳐 1703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북유럽 북유럽()은 유럽의 북부 지역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노르딕 국가가 북유럽에 속한다. 그 밖에도 경우에 따라 아래의 나라들을 북유럽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특히, 영국과 아일랜드는 유엔의 정의에 따를 때 북유럽에 포함된다. 홍치중 홍치중 (洪致中, 1667년 ~ 17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북곡(北谷), 자는 사능(士能), 시호는 충간(忠簡). 1712년 북평사로서 백두산정계비 설립에 기여하였고, 1719년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위해 일본에 다녀오고나서 부제학, 이조참판, 공조참판, 도승지,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서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하지만 경종 시대에 소론의 배척으로 홍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영조 때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영중추부사로 전직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뫼비우스 뫼비우스(Möbius, Moebius)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홍계희 홍계희(洪啓禧, 1703년 ~ 1771년)는 조선의 문신(文臣)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 호는 담와이다. 거주지는 전주(全州)며, 참판 홍우전의 아들이다. 1737년 별시(別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하여 지방관을 지낸 후 중앙으로 올라와 공조참의가 되었다. 1748년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차정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후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749년 충청도관찰사 때 능력을 인정받아, 1750년 병조판서로 발탁되어 균역법 제정을 주관하였다. 1762년에는 그가 속한 노론의 주도하에 사도세자의 난행을 과장하여 영조에게 보고한 결과 세자를 쌀 뒤주 속에서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것이 임오화변이다. 1777년 그의 아들들과 친족들이 홍인한 정후겸 등과 함께 은전군 추대 사건에 가담했다가으로 처형됨으로써 그도 관작이 추탈되었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서인이었고 그는 서인의 분파인 노론 당원이었지만 북인 대북 당원 출신인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탐독하고 그의 견해를 경세를 구제하는 이론이라 평하기도 했다 홍계희는 반계수록에 언급된 정책 중 일부를 추려내 영조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레오시 야나체크 레오시 야나체크( , 1854년 7월 3일 ~ 1928년 8월 12일)는 체코의 작곡가이다. 체코의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의 경계지대에 있는 북모라비아 지방이 낳은 최대의 작곡가인 야나체크는 교원인 아버지의 14형제 중의 10번째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태어나기는 폴란드의 국경과 가까운 푸구발디라는 곳이나 11세 때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지 브르노에 가서 성 아우그스티노회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가, 이 성가대의 지도자로 뛰어난 합창곡의 작곡가이기도 한 그루제코프스키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나 뒤에 합창곡이 오페라와 함께 야나체크의 창작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은 이 선생의 영향이었다. 올드브르노 중학교에서 국립 브르노 사범학교로 진학하여 1872년에 졸업하였으나 그 후에도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1874-1875)와 빈 음악원의 하기학교(1880)에 유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브르노에서 지냈으며 모교 브르노사범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1882년의 28세 때는 브르노 오르간학교를 발족시켜 1920년까지 그 곳 교장으로 있었다. 그 전해인 1919년에는 프라하 음악원의 브르노 분교의 창설에도 협력하여 오르간학교를 발전적으로 해소시켜 이와 합병하여 1925년까지 그 마스터 클라스에서 가르쳤다. 야나체크는 1928년 여름 돌연 폐렴에 걸려 모라비아의 오스트라우의 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야나체크의 작품에서 보통 연주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50세를 넘은 뒤인 만 년의 작품뿐으로, 그 이전의 것은 자신의 손으로 파기된 것이 많다. 매우 특이한 개성으로 27세의 연하인 헝가리의 바르토크보다 한발 앞서 현대적인 민족주의 음악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게다가 작곡의 기초가 된 고향 모라비아의 민요나 방언의 어법의 특수성과 서양인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양적 사상에 따른 구성원리 등 때문에 체코 국내에서도 인정되는 것이 늦어져, 출세작인 오페라 <예누파>(1894-1903)만 해도 브르노에서는 50세 때 인정되었지만 프라하의 국립극장이 이를 채택하기까지는 12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브르노라는 지방도시에 은거하면서 인생의 청춘을 교육에 바친 것도 세상에 알려지는 일이 늦어진 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세계가 이 작곡가의 위대성에 주목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일관된 오페라의 하나하나가 모두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도 채택되기까지에는 그 뒤 30년 내지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조엄 (조선) 조엄(趙曮, 1719년 ~ 1777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시호는 문익이며, 이조판서 조상경(趙尙絅)의 아들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1719년생으로 아버지 조상경 역시 이조판서를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민생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지평 수찬 등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창을 설치해 조세 부담을 줄이는 등 공을 세웠다. 통신정사로 파견되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의 보관법과 재배법을 익혀 최초로 우리나라에 고구마 종자를 전파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구황작물로 활용하도록 했다. 고종 때에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조씨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문장이 뛰어나 '해차록' 등 저서를 남겼으며 경제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고구마 종자를 국내에 보급하였고, 저서로는 '해사일기'가 있다. 강원도 원주목 지향곡면 간현리(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서 태어나 1738년(영조 14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사서(司書)·동래부사(東萊府使)·경상도 관찰사·대사헌·이조판서·제학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김해의 유배지에서 병사할 때까지 영조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국가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52년 정시(庭試) 을과(乙科)에 급제한 이후 중앙의 관직도 지내고 지방에 암행어사로도 나가는 한편 1758년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도 도내(道內) 시노비(寺奴婢) 1만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1760년(영조 36년) 창원·진주·밀양에 3개 지방에 조창의 증설을 건의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세곡 수송의 민폐를 덜고 공물 수납의 공정으로 국고를 충실히 했다. 1763년(영조 39년)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올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국내에 최초로 제주도와 동래에서 재배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부르며,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이를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정조의 즉위 직후 홍국영 등의 무고로 유배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이교 김이교(金履喬, 1764년 ~ 183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이며 본관은 신 안동,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의 아들이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장헌세자를 옹호하는 시파에 속했기 때문에 신유박해 때 유배되기도 하였다. 1806년 풀려나 다시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이후 1811~1812년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 정사로 쓰시마 섬에 다녀왔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맡은 끝에 1831년 우의정이 되었다. 사후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규원사화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 그러나 2003년 3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을 실시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것이 진본이 아니며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규원사화》는 산속의 바위굴에 보관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주로 참조하였으며 《진역유기》는 고려 말기 사람인 청평 이명(淸平 李茗)이 저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진역유기》는 다시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를 참조하여 저술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조대기》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원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문에 해당되며 저술 배경을 적고 있다. 〈조판기〉는 수백만 년간의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一大主神), 환웅천왕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며 1만 1천 년에 해당되는 ‘궐천년’ 간의 일이 설명된다. 탁록을 중심으로 벌인 치우씨와 신농씨의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涿鹿)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때 한 해 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의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 해 만에 12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설명하였다.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세우고 이후의 역대 임금들이 47대에 걸쳐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리는 1천 2백여 년간의 치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달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지금의 지린 시 방면'이라는 북애자의 의견이 포함되었다. 〈단군기〉의 각 임금의 치세 기간은 다음과 같다. 북애자 개인이 품고 있는 주관적인 생각을 풀어 서술하였다.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른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년간 47대 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 《규원사화》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함께 '《환단고기》류'로서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간주되기도 한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위서론에 반박하고 진서임을 주장하여 《규원사화》의 내용의 실제 역사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임은 인정하나 그 내용의 사료적인 가치보다는 조선 후기의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귀중본 《규원사화》의 지질을 비롯한 사항을 심의한 결과,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병도, 조인성, 송찬식 등 한국사학계의 상당수 학자들은 여전히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2003년 3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을 실시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것이 진본이 아니며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 다음은 현재까지 제시되어 있는 규원사화의 위서론 및 반론이다. 민족주의사학과 관련하여 민족 중심의 역사 이해, 사대모화사상의 비판, 북방 중심의 역사 인식, 단군의 민족의 기원으로서의 인식 등과 같은 역사적 인식을 주목하기도 한다. 고조선 고조선(古朝鮮, , ? ~ 기원전 108년)은 한국의 역사상 최초의 고대 국가이다. 본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나, 일반적으로 14세기 말 이성계가 건국한 같은 이름의 왕조(조선)와의 구분을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실 위만이 건국한 위만조선과의 구분을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고려 시대 일연이라는 승려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헌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관련 기록이 적고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직접적으로 고조선의 것이라 암시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의 연대와 강역·역사·문화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이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만주 및 한반도에 있던 고대 국가라고 파악하고 있다.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며,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조선(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古朝鮮)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하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전조선과 후조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로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다.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阿斯達)을 한역한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본관은 경주, 속성은 김(金)씨)이 쓴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신라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다. 《동국통감》〈외기〉에는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 역시 건국 연도를 무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단군의 건국을 다루고 있으나 즉위 연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 현행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2007년 교육부는 최근의 청동기 유물 발굴 결과 《삼국유사》의 건국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술을 ' ~ 건국하였다'로 바꾸기로 한 바 있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 연도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한 것으로 일연 스스로가 주석에 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실제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박광용은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단군을 실제 인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5차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교과서개편준거안〉 작성 과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였다. 1987년 확정된 이 준거안에서는 상고사에 관한 지침으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서 반영토록 하였고, 고조선은 중심지가 계속 이동함에 따라 영역도 바뀌는 ‘이동국가’가 아니라 확정된 넓은 강역을 유지하는 ‘영역국가’로 기술하며 한사군의 존재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각주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결정 과정에는 정치권 및 언론계의 압력이 심하게 작용한 것으로 현대적 학문에 입각한 결정이 아니라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고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단군 신화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박광용은 단군 신화가 한국 역사의 귀중한 사료임에는 틀림없으나 고조선의 지배층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신 이래 구전되어 오면서 수 많은 변형이 있었던 불확실한 사료로서,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신비화 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문동석은 청동기 시대에 시작된 고조선을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24세기로 올려 잡는 것은 민족의 기원을 올려잡으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하였다. 고조선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이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인 《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사료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던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고,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고 장성도 쌓았다고 한다. 이때 고조선이 상실하였다는 지역은 랴오닝 성 일대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패배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한 것으로 보아 표면적인 복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과 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은 연·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에 한나라가 임명한 제후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衛滿)은 이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복색을 하였다고 한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조선을 이어받은 위만의 출신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있는데, 과거 연나라가 정복한 고조선 지역의 주민, 즉 고조선 출신이라는 주장과 연나라 출신의 유력자라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위만의 출신을 연나라(중국인)이며 이를 중국의 식민 지배라 주장하였고 광복 후 일부 학자들은 위만을 고조선의 유민이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학계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의 국호와 국체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사실을 들어 위만의 출신이 어디이든 관계가 없다고 본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위만은 중국에서 철을 가져와 고조선에 널리 전파했다) 중국 문물(대표적인 문물 '철')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각각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다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는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또한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 삼(尼谿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의 한사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철기가 도입된 시기에 관하여 북한에서는 기원전 8∼7세기에 이미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아서 지지 받기 어렵다. 남한에서는 대체로 위만조선 이전에 철기가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철은 기원전 8∼7세기에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에서 생산되었으며, 연철 단계는 기원전 8∼7세기, 고온환원법의 발전된 방법은 기원전 3∼2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燕에서 전파된 발전된 방법 이전에 독자적인 제철기술이 함경도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 지역에서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된것은 사실이며, 기원전 3∼2세기에 보급이 시작되어 사회 전반적인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제작되는 등 철기문화가 사회의 발전 및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청천강 이북지역에 명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후에는 세형동검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여진다.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고조선의 도읍지는 여러 차례 이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처음에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이후 백악산아사달로 옮겨서 1천 5백 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후 주나라 때 기자가 조선왕에 책봉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70년대 이전까지 고조선의 도읍지를 랴오닝 성이라 주장하였으나, 주체사상의 강화 이후에는 오늘날의 평양시가 고조선의 도읍지라고 주장하면서 단군릉이 평양시에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의 입장 변화는 정치적 영향에 따른 것이라 비판된다. 한편 윤내현은 고조선의 도읍지 이동이 총 5차례라고 주장하며 그 위치를 모두 비정하는 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지배적인 학설인 중심지 이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초기에 랴오둥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영토를 대거 상실하고 평양 일대로 중심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중국의 랴오닝 성 지역에 있었다는 소수설도 있다.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고조선이 멸망했다. 왕검성이 있던 곳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어 이후 수세기 동안 중국과 한반도의 중계무역 기지의 역할을 했다. 위만조선의 관명(官名)으로는 박사(博士)·대부(大夫)·상(相)·대신(大臣)·장군(將軍)·비왕(裨王) 등이 보인다. 이들 관직 모두의 구체적인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한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에서 왕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탈해 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같은 이가 그런 예이다. 한나라와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계상(尼谿相) 삼(參) 등 세 명의 ‘상(相)’도 그러한 이들로 추측되는데, 상은 일정한 세력 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지닌 관직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당시 위만조선에는 여러 명의 상이 있었는데, 이름으로 보아 다수가 고조선 인이었다. 상의 휘하에 있던 집단에 대해선 왕실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 미쳤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다는 점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왕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고, 위만조선 왕실의 경우 그 직할 집단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주요 결정은 이들 상들이 참가한 회의체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왕권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중국식 제도에서 비롯된 관직명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관료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정치 조직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집단들의 연맹체와 같은 것이었다. 유력한 수장 휘하에서는 촌락이 여러 개 귀속되어 있었다. 단 수장이 사적으로 지닌 우월한 경제적·군사적 힘이 이들 촌락을 규합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에서, 수장은 이미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력한 수장들을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 위만조선이며, 위만조선의 왕권하에서 수장들은 ‘상’으로 상당한 자치권을 지닌 세력 집단을 대표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을 이룬 이들 집단의 외곽에는 피복속 촌락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삼국 초기의 정치 구조와 연관성을 지닌다.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은 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오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고기》가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설명은 《고기(古記)》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과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고기》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군신화의 내용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거하였으며, 그 아들인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 참성단(塹星壇)은 오늘날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니산 꼭대기에 있으며,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알려진 제단이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예로부터 마이(摩利)·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또 개국신화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짐작케 한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小農) 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관자 규도편에 따르면 특산물로 문피(文皮)가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고조선이 모피 또는 가죽을 매개로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 기록을 근거로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상고할 수 있다. 비파형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토기를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입증하는 고조선의 유물로 보고 있으나, 비파형동검의 분포 및 유형에 따라 고조선이 아닌 동호의 문화에 속하는 지역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한편 고조선의 역사는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기록 내용은 사서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래의 사서들 중 일부는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기도 하며, 설령 진서라도 신화적 요소가 많은 경우도 있다. 고려 시대의 역사가 일연(본관은 경주, 속성은 김(金)씨)이 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따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인간 세상을 다스리길 원해, 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신시라 했다. 태백산에 주를 달아 묘향산이라고 했다. 이후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한다. 단군왕검은 중국 요임금이 즉위하고 나서 50년 뒤인 정사년에 평양에 도읍하여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1500년을 다스렸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은나라에서 기자(箕子)가 동래하여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神)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유무와 기자조선의 성격 그리고 기자의 혈통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고려시대의 역사가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 〈전조선편(前朝鮮篇)〉에 의하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고, 손녀로 하여금 약을먹고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삼국유사의 단군조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단군의 전설에 다양한 판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쓰여진 삼국사절요 외기(外記)에 따르면, 동방 아홉종족에 군장이 없었으나 신인(神人) 단군이 단목(檀木)아래로 내려와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건국연도는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 요(堯) 25)이었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다가, 뒤에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고,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태원 선우씨'의 족보인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와 허목(許穆)의 《동사(東史)》에 따르면 선우씨는 기자조선의 48세의 왕과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마한에 간 뒤의 일인) 마한의 9세의 왕을 지냈다고 하고, <청장관전서> 에는 기자조선의 41세 왕과 8세의 왕이 기록되어 있다. 위서로 판명되고 있는 《환단고기》는 기자조선을 기술하지 않고 있고, 단군조선이 2096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규원사화》의 1195년과 901년의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졌고 단기도 그에 따르고 있으나, 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와 치세의 관한 기록은 다양하다. 태풍 태풍(颱風, ) 또는 열대폭풍(熱帶暴風, TS: Tropical Storm)은 열대 해상에서 발생하는 발달한 열대 저기압(mature trophical cyclone)의 한 종류로,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2 m/s 이상의 강한 폭풍우를 동반하고 있는 기상 현상을 말한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쪽에서 7월~10월에 가장 많이 발생하며, 고위도로 북상하면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크로네시아 일부에 영향을 준다. 최대 풍속이 17.2 m/s 미만이면 열대저압부(TD: Tropical Depression)로 구분하며, 중심부의 난기핵(暖氣核)이 소멸되면 온대저기압(Extratropical Cyclone)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태풍과 같은 열대폭풍은 발생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인도양과 남태평양에서 발생하면 사이클론(cyclone)이라고 하며, 북태평양 중부와 동부, 북대서양 서부에서는 최대 풍속 32.7 m/s 이상의 열대저기압 폭풍을 허리케인(hurricane)이라고 한다. 브라질 동쪽 남대서양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아 명칭이 정의되어 있지 않지만, 브라질에서는 사이클론,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으로 부른다. 각 지역마다 발생 기준에 차이가 있으며, 코리올리 힘의 영향으로 북반구에서는 반시계 방향으로 남반구에서는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태풍은 열대저기압으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어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프랑스에서는 1504년 "typhon"이라고 하였으며, 영어 "typhoon"은 1588년 영국에서 사용된 예가 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는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어원이 소개되어 있는데 초기에는 'toffon' 1588년 문헌에는 'tufan', 'tuffon', 1699년 이후에는 'tuffoon', 'tiffoon' 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풍(颱風)'이라는 단어는 1904년부터 1954년까지 기상관측 자료가 정리된 《기상연보(氣像年報) 50년》에 처음 등장한다. 문헌상 '태(颱)'라는 글자는 1634년 중국에서 간행된 《복건통지(福建通志)》 56권 〈토풍지(土風志)〉에 기록되어 있지만, '태풍'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제 강점기 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는 확실한 기준 없이 '맹렬한 폭풍우'라고만 정의했다. 일본에서는 '태풍(台風)'으로 표기가 제정된 1956년 이전까지 '颱'와 '台'를 혼용하였으며, 기상학자 오카다 타케마츠(岡田武松)가 1907년 논문에 '태풍(颱風)'을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태풍과 같이 바람이 강하고 회전하는 풍계(風系)를 ‘구풍(具風)'이라고 했으며, ‘구(具)'는 ‘사방의 바람을 빙빙 돌리면서 불어온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도 주로 구풍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정종 6년(서기 1040년) 음력 7월 24일 폭우가 내리고 질풍(疾風)이 불어 사람이 죽고 광화문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2 m/s 이상의 열대저기압을 대한민국과 일본의 기상청에서는 태풍으로, 세계기상기구(WMO)에서는 열대폭풍으로 분류한다. 17.2 m/s 미만의 열대저기압은 열대저압부로 구분한다.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저압부가 태풍으로 발달하였다는 선언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지역특별기상센터(RSMC) 에서만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있다. 중심 부근의 10분간 평균 최대 풍속이 17.2 m/s 이상 되었을 때, 열대저압부에서 태풍으로 발달되었다고 판정한다. 기상 위성 사진으로 분석한 열대저기압 강도지수가 일정값 이상(2.5)이며 계통적인 강풍 반경의 존재 여부, 열대저압부의 상하층 조직화 정도, 상층의 발산, 하층의 수렴 등이 종합적으로 검토된 후 기준 이상이라고 판단될 때 태풍으로 선언한다. 발생한 태풍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권한도 지역특별기상센터에 있다. 현재는 기상 위성의 관측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공 위성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항공기가 폭풍의 중심에 접근하여 직접 관측해야만 했다. 기상 위성에는 가시광선 및 야간 관측용 적외선 카메라, 적외선을 흡수하여 수증기를 관찰하는 카메라, 바람과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마이크로파 산란 측정기 등을 갖추고 있다. 관측 범위는 동경 100~180°, 북위 0~60° 이며 대한민국과 일본, 미국, 중국이 기상 위성을 운용하고 있다. 중심기압과 위치, 강도, 크기 등의 분석에는 과거 축적된 기상 위성 사진들을 비교 자료로 활용하는 으로 추정하고, 관측 장비를 기구 방식으로 띄워 수집한 기상 데이터를 지상에 송신하는 라디오존데(radiosonde), 항공기를 이용해 상공에서 관측 장비를 투하하는 낙하존데(dropsonde), 지상의 기상 레이다망을 이용한 관측 등을 병행하여 정확도를 높인다. 대한민국 기상청을 비롯해 미국, 중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 각국의 기상 기관들도 관측 자료를 자체적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풍속, 강우량, 진로 예측 등에서 기관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기상청과 일본 기상청은 세계기상기구가 권고하는 10분간 평균 풍속이 기준이며, 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NHC)는 사피어-심프슨 등급(SSHS)기준의 1분간 평균 풍속이다. (1 m/s ≒ 1.94 knot) 일본 기상청에서는 2000년 이후 부터 약, 중의 강도 구분과 소형, 중형의 크기 구분을 하지 않는다. 한편 태풍의 풍속이 시속100km 또는 태풍 반경이 500km에서 추가적인 세부기준으로 저위험군과 고위험군의 태풍 구분이 가능하다. 태풍은 중심의 눈 주변으로 적란운이 모인 구름 벽(벽운, 壁雲)이 형성되어 있고, 나선 모양의 구름 띠(spiral band, 나선대)가 구름 벽으로 말려들어가는 원형 또는 타원 형태의 소용돌이 모습을 하고 있다. 구름 벽과 구름 띠에서는 강한 소낙성 비가 내리고 띠 사이의 층운형 구름에서는 약한 비가 지속적으로 내린다. 구름 높이는 약 12~20 km이고 중심에 가까울 수록 키가 크고 두꺼운 구름들이 나타난다. 전체 크기는 작게는 직경 200 km에서 큰 것은 2000 km 달하기도 한다. 이동 속도가 느린 전향 이전의 발달기 태풍은 대체로 원형에 가깝다. 바람은 하층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중심을 향해 빨려 들어가 꼭대기 부근에서 시계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풍속이 강한 부근은 중심으로 부터 약 40~100 km 부근이다.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풍속이 증가하며, 기압은 낮고 온도와 습도는 높다. 최성기의 중심기압은 보통 970~930hPa 정도이며 930hPa 이하면 매우 강한 태풍으로 지상 최대 풍속은 50 m/s(=180 km/h)에 달한다. 잘 발달한 태풍의 중심에서는 풍속이 급감하여 비구름과 바람이 없는 고요한 상태의 태풍의 눈(eye)이 존재한다. 태풍의 눈은 태풍에서 기압이 가장 낮은 곳으로 맑은 날씨가 특징이며, 태풍의 위력이 강해질수록 뚜렷해진다. 눈의 크기는 보통 직경 20~50 km 정도지만 직경이 큰 태풍의 경우 100 km가 넘는 경우도 있다. 태풍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 중심역의 오른쪽을 위험반원(dangerous semicircle), 왼쪽은 가항반원(navigable semicircle)으로 구분한다. 북상하는 태풍은 편서풍 등의 영향을 받아 오른쪽이 왼쪽보다 풍속이 강한 편이다. 따라서 위험반원은 남동쪽으로 바람이 가장 강한 구역이며, 가항반원은 북서쪽으로 풍속이 약해져 수증기가 정체되기 때문에 비가 가장 많은 구역이다. 태양열은 지구의 날씨를 변화시키는 주된 원인이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생기며 이로 인해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받는 열량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대륙과 바다, 적도에서는 태양열에 의한 열에너지가 풍부하고, 극지방 같은 고위도 지역에서는 열에너지의 결핍에 따른 열적 불균형이 일어난다.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규모의 대기 순환이 발생하는데, 태풍은 이러한 대기 순환의 일부이며, 해들리 순환(Hadley circulation)의 경로를 타고 고위도로 이동하면서 전지구의 에너지와 물 순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적도 부근의 열대 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공기가 고온 다습하여 대기가 조건부 불안정(conditional instability)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적란운이 쉽게 발생하며, 종종 강한 스콜(Squall)을 동반한다. 이 스콜이 최초로 공기의 작은 소용돌이가 되고, 수렴기류(convergence air current, 收斂氣流)를 따라 북반구의 북동무역풍과 남반구의 남동무역풍의 경계인 적도전선(equatorial front, 赤道前線) 부근에 쌓이게 된다. 소용돌이가 북동무역풍대의 동풍 중에 발생한 수평 파동인 편동풍파동(easterly wave, 偏東風波動)에 의해 한 곳에 모이게 되면 큰 소용돌이가 되는데, 이것이 태풍의 씨앗인 열대요란(Tropical Disturbance, 熱帶擾亂)이 된다. 이 단계에서는 구름들이 산발적인 형태를 띠며, 조직화되면서 열대저기압으로 발달하게 된다. 바람은 공기의 이동을 의미한다. 적도전선에서 기류의 수렴이 강해지면 전향력(코리올리의 힘)에 의해 기압이 낮은 중심을 축으로 순환하게 된다. 온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방향으로,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방향으로 불며 그 차이(기압경도력, pressure gradient force)가 커질수록 풍속은 증가한다. 수증기의 응결에 의해 방출되는 잠열(latent heat, 潛熱)은 태풍의 주 에너지원이다. 열대저기압 중심 부근의 강한 상승 기류를 타고 수렴된 수증기는 적란운을 발달시키면서 강한 비가 내리게 되는데 이때 잠열이 방출된다. 방출된 잠열로 데워진 공기는 상승 기류를 강화시켜 수증기를 재공급하게 되고, 다시 강한 비로 바꾼다. 온도가 높아진 공기가 팽창하면서 상승 기류를 따라 올라가면 하층의 밀도는 감소하면서 중심의 기압은 더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낮아진 기압과 높아진 온도로 인해 중심부가 주변부의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강한 회전력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심력에 의해 하강 기류가 생기면 태풍의 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대류(convection) 과정을 반복하면서 태풍으로 발달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수심 50m의 해수면 온도(SST)가 26.5℃ 이상 되어야 하고, 해수면과 상층 대류권 사이의 풍속 차이가 10 m/s 미만이어야 한다.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한 강한 태풍들은 해수면 온도가 28℃ 이상인 곳에서 급속히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필리핀 동남쪽 해역은 해수면 온도가 높아 태풍이 종종 맹렬한 기세로 발달하는데, 해수면 온도가 높을수록 수증기가 충분히 공급되어 대류가 촉발되기 좋은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해수면 온도가 1℃ 높아지면 대기 중의 습도는 약 7%정도 증가한다. 발생한 열대요란이 태풍으로 발달하는 것은 일부이며 그 기간은 약 4~8일 정도 걸린다. 태풍은 북위 5°~25°(N), 동경 125°~160°(E) 사이의 해상에서 주로 발생하며, 이것은 태평양 전체로 보면 서쪽 부분에 해당한다. 북중미 지역에 종종 피해를 주는 허리케인도 북대서양의 서쪽 부분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대양의 서부에서는 해류의 영향으로 해수면 온도가 높은 것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적도와 인접한 남‧북위 5°이하의 저위도(적도로부터 약 500 km 이내)에서는 기압이 낮은 곳이 생기고, 해수면 온도가 높다고 해도 전향력의 영향이 작아 소용돌이가 되기 어렵기 때문에 태풍으로 발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또한 북위 25°이상이 되면 해수면 온도가 낮아지고, 상공에서 서풍이 강하게 불기 때문에 태풍이 잘 발생하지 않는다. 북반구는 육지가 많아 남반구의 남동무역풍이 적도를 넘어 북쪽으로 불어온다. 때문에 태풍의 주요 발생지인 적도전선은 항상 적도 북쪽으로 기울어져 형성되어 있는데 과거에 태풍이 발생한 장소를 보면, 더운 계절에는 비교적 북쪽에 치우친 지역(북위 20°~30°), 추운 계절에는 남쪽(북위 20° 이하)에 치우친 지역에서 많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적도전선은 북동무역풍과 남동무역풍의 성질 차이가 작아 전선 본래의 성질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지만, 북반구가 여름이 되면 남반구는 겨울이기 때문에 온도차로 인해 전선이 분명해지면서 위치나 강도에 영향을 준다. 1951년~2016년까지 태풍의 발생 횟수는 연간 약 26.1개이다. 또한 해마다 변동이 커서 많은 해에는 40개 가까이 발생하며, 적은 해에는 20개 이하인 경우도 있다. 태풍은 연중 발생하지만 1월부터 4월까지는 매우 적고,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는 7월부터 10월까지가 가장 번번하다.북서태평양은 전 세계에서 열대저기압이 가장 많이 발생하며, 또한 가장 강하게 발달하는 지역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태풍을 포함해 연간 약 80~90 여개의 열대폭풍이 발생한다. 북태평양 서부와 남중국해 사이(동경 100°~180°)에서 태풍이 38%, 북태평양 중부, 동부 및 멕시코 서쪽 연안(180°~서경 90°)에서 17%, 북대서양 서부 및 서인도 제도 부근(서경 80°~30°)에서 11%, 북인도양(동경 45°~100°)의 벵골 만과 아라비아 해에서 각각 5%와 1%,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동쪽 남인도양(동경 30°~90°)에서 10%, 호주 북서부의 남인도양(동경 90°~141°)에서 9%, 호주 동쪽 남태평양(동경 141°~서경 120°)에서 9% 정도가 발생하였다. 1990년대 초까지 남대서양에서는 다른 열대 지역 보다 해수면 온도가 낮아 열대저기압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1991년 4월 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에서 남동대서양에 열대저기압이 발생했다고 보고하였다가 오류로 판명 된 일을 계기로 그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2004년 3월 발생한 사이클론 카타리나는 허리케인 2등급 수준으로 강하게 발달하였고 브라질 남동부 지역에 상륙하여 상당한 피해를 주었는데, 이후 열대저기압 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1970년 부터 2004년 까지 이후 최소 7개 이상의 열대저기압 또는 아열대저기압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지구온난화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브라질 해군(Brazilian Navy Hydrographic Center)은 2011년 부터 열대저기압과 아열대저기압을 지정하고 있다. 온난화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면 극지방과 적도의 열량 차이가 줄어들어 위도에 따른 온도차가 줄어든다. 이로 인해 대기 상하층부의 바람 차이도 줄어들고 그 결과 무역풍과 계절풍이 약해진다. 이 같은 조건에서는 열대저기압의 발생 빈도가 잦아질 뿐만 아니라, 이동 속도도 느려져 열대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강하게 발달하게 되고, 영향을 받는 지역과 범위 또한 확대된다. 기상 학자들은 한 세대 전 보다 5~8% 더 많은 수증기가 증발해 대기에 존재하고, 과거에 비해 열대폭풍의 풍속과 강우량은 증가하면서 이동 속도는 느려지고 있으며, 앞으로 더 위력적인 초대형 열대저기압 폭풍의 발생 빈도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는 연구 결과들를 발표하고 있다. 아열대저기압(Subtropical Cyclone)이 강하게 발달하여 태풍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형태가 태풍에 비해 비대칭 이지만, 위성 사진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해수면에서 수증기를 공급받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하지만 열의 의해 불규칙한 기류가 발생하는 열대의 대류와 달리, 차갑고 건조한 상층 공기와 고온 다습한 하층 공기의 온도차와 압력 차이(경압성, Baroclinic)로 회전력을 얻는다. (열역학적인 측면에서는 이를 이류(advection, 移流)로 구분할 수 있지만, 기상학에서는 이류를 기단의 수평 변화에만 국한하기 때문에 대류로 통칭한다.) 북대서양에서는 아열대폭풍(Subtropical Storm)으로 구분하며, 태풍에 비해 수명은 짧은 편이다. 주로 대류 활동이 동반된 온대저기압이나 절리저기압이 열대 해상으로 남하하여 발달하는 경우가 많으며, 20~25℃의 비교적 낮은 해수면 온도에서도 발생한다. 강풍권역은 더 넓은 편이고, 중심 부근보다 주변부의 바람이 더 강하기도 하며, 외곽에 전선을 동반하기도 한다. 2014년 6호 태풍 미탁(MITAG)의 경우 처럼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의 소멸 후 분석에서 아열대폭풍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아열대저기압이 열대저기압으로 성질이 변해 태풍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유럽 남부의 지중해에서도 태풍과 비슷한 폭풍이 드물게 발생하며, 1990년대 부터 그 빈도가 증가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기상관측 기관이 없어 열대저기압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건조한 특징을 보이는 지중해 기후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tropical-like cyclone)이 열대 해역에서 발생한 열대저기압 또는 아열대저가압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증명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논쟁 중이다. 지중해(Mediterranean Sea)에 발생한 허리케인(Hurricane)이라 뜻에서 메디케인(Medicane)이라고 부르며, 겨울철 온대저기압이 북대서양과 유럽 대륙을 횡단하면서 발생하는 유럽폭풍(European windstorm)과는 구분된다. 지중해와 인접한 흑해와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해(Cantabrian Sea)에서도 관측된다. 태풍이 북쪽으로 진행하는 원인은 위도에 따른 전향력 차이 때문이다. 태풍의 북쪽 반원은 동풍 구역으로 전향력은 이를 끌어당기며 남쪽 반원은 서풍 구역으로 적도 쪽으로 끌어 당기게 된다. 하지만 적도와 가까운 저위도에서는 전향력의 효과가 작기 때문에 태풍은 북쪽으로 끌려가게 된다. 따라서 태풍 북쪽의 동풍이 강해지면 북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열대에 있는 발달기의 태풍은 무역풍을 타고 20~25 km/h 정도의 비교적 느린 속도로 서쪽 또는 서북서로 진행한다. 발생한 태풍 가운데 3분의 1 정도는 그대로 서쪽으로 진행하여 필리핀, 대만 또는 남중국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나머지 3분의 2의 태풍은 북서로 진행하다 북위 20°~30°에 이르면 편서풍의 영향으로 진로를 북쪽 또는 북동쪽으로 바꿔 한반도 쪽으로 향한다. 이 시점을 태풍의 전향(轉向)이라 한다. 태풍은 전향할 때 약 하루 정도 정체하는데, 일단 전향하면 이동 속도는 급속히 증가한다. 여름에는 보통 35~40 km/h 정도이고, 가을이 되면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속도가 더욱 빨라져 드물게는 80 km/h 이상 달하는 경우도 있다. 태풍의 이동속도는 일반적으로 지속성이 있으므로 과거의 이동 속도를 답습하는 경우가 많아 1일 이내는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 할 수 있다. 태풍의 움직임은 강물속의 소용돌이에 많이 비유된다. 강물의 소용돌이는 소용돌이 자체가 회전하면서 강물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태풍도 이와 마찬가지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커다란 소용돌이이며, 주위의 대규모 기류를 따라 이동한다. 북태평양 고기압 주위의 기류가 이에 해당하며, 고기압을 진행 방향의 오른쪽에 두고 그 가장자리(경계면)를 따라 이동한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는 6월에는 서쪽 또는 서북서 방향으로 진행하며, 세력이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하는 7월에는 대만 부근에서 중국연안을 따라 서해로 북상한다. 8월에는 동중국해를 지나 대한해협이나 한반도를 가로질러 동해로 북상하며, 9월에는 일본 오키나와 동쪽 해상을 지나 일본 열도 쪽으로 북상한다. 10월 이후에는 일본 남쪽 해상 멀리 지나간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태풍의 북상을 견인하고 편서풍이 밀어올리는 역할을 하면서 진로에 많은 영향을 준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매일 변동하면서 그 주변의 기류도 변동하고 있기 때문에 기류에 좌우되는 태풍의 진로를 예보하는 것은 실제로는 상당히 어렵다. 태풍은 그 주변의 기류를 타고 이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소용돌이(와류)의 특성에 따른 움직임도 갖고 있다. 대형 태풍이나 이동속도가 빠른 태풍은 원심력 때문에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경로보다도 북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으며, 고리나 갈짓자(之) 형태로 이상 경로를 보이는 태풍도 있다. 또한 두 개 이상의 태풍이 1000 km 이내에 인접해 있으면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기형적인 진로가 나타나는 후지와라 효과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태풍을 이동시키는 기류가 강한 경우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약한 경우에는 두드러진다. 이 경우 태풍의 이동속도는 느려지지만 진로 예측은 매우 어려워진다. 발생부터 소멸될 때까지 보통 1주일~10일, 길게는 20일 정도의 수명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형성기, 발달기, 최성기, 쇠퇴기의 4단계로 구분한다. 일단 태풍으로 발달하게 되면 열대 해상에서 소멸하는 경우는 드물며, 해수면 온도가 낮아져 수증기 공급이 감소하는 고위도 지역으로 이동하면 세력이 약화된다. 상층과 하층의 바람 차이로 상승 기류를 방해하여 구조의 변화를 일으키는 대규모의 연직시어(Vertical Wind Shear)의 영향권으로 이동하거나, 수증기 공급이 중단되고 지표면과 마찰이 생기는 육지에 상륙하게 되면 급격히 쇠퇴한다. 섬과 같은 육지를 횡단하는 경우 중심부가 소멸하였다가 다른쪽에 중심이 발생하여 세력이 옮겨가는 경우도 있고, 지형이 고른 평원지역에 상륙하면 세력을 좀 더 오래 유지하기도 한다. 열대저압부으로 소멸했다가 태풍으로 재발달하는 경우는 있지만,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면 태풍으로써 일생을 마친 것으로 간주한다. 과거 통계를 보면 1904년~2017년까지 한반도에 북상했던 태풍은 모두 349개로 연평균 약 3.1개이다. 북상 시기는 5~10월 이며, 90%가 7월~9월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 기상청과 국가태풍센터에서 발간된 태풍백서에서는 태풍이 비상구역(북위 28°, 동경 128°)에 진입하고 태풍특보가 발효되었을 때를 직접영향으로 정의한다. 비상구역에 진입하지 않았으나, 함께 몰려온 많은 수증기(전면수렴대)가 기류를 타고 전선에 유입되어 집중호우가 발생하는 등 여러 조건들이 충족될 때 간접영향으로 정의하고 있다. 태풍주의보는 강풍, 풍랑, 호우, 폭풍해일 현상 등이 주의보 기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될 때, 태풍경보는 강풍(또는 풍랑) 경보 기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거나 총 강우량이 200mm이상 예상될 때, 또는 폭풍해일 경보 기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될 경우에 발령한다. 2019년 부터 태풍의 진로 예측 발표 간격이 기존 24시간에서 12시간으로 단축되었다. 같은 지역에 여러 개의 태풍이 발생할 경우 혼선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최초로 이름을 붙인 사람은 1900년대 초 호주 퀸즐랜드 기상대 예보관이었던 클레멘트 래기(Clement Wragge)로 알려져 있다. 당시 호주 예보관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정치인의 이름을 붙였다. 전에는 발생 장소의 위도와 경도 등으로 나타냈으나 헷갈려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북서태평양의 태풍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공군과 해군에서 붙이기 시작한 이름이 공식적인 국제적 명칭으로 통용되었고, 1953년부터 1999년까지 괌에 위치한 미국 합동태풍경보센터(JTWC)에서 정한 사람의 이름을 사용했다. 1조에서 4조까지, 한 조에 각각 23개씩 모두 92개의 이름을 정하고 발생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름을 붙였다. 92개의 이름을 모두 사용하면 다시 1조부터 재사용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여성의 이름만 사용하였는데, 이는 미국 작가 의 1941년 소설 ''에서 영감을 받은 미군의 기상 학자들이 자신들의 부인의 이름을 태풍의 이름으로 붙인것이 유래되었다. 이후 성차별이라는 문제제기로 세계기상기구가 개선을 요구하면서 1979년 부터는 남성의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다. 2000년 부터는 일본 기상청(JMA) 산하 도쿄 지역특별기상센터(RSMC)에서 붙인다. 매년 1월 1일을 이후 가장 먼저 발생한 태풍을 제1호로 하고, 이후 발생 순서대로 번호와 이름을 붙인다. 이름은 태풍위원회(ESCAP/WMO Typhoon Committe)의 회원국 14개 기관이 자국어로 된 이름을 10개씩 제안한 것으로, 총 140개의 이름들을 28개씩 5개 조로 나누고, 1조 부터 5조까지 국가명을 기준으로 로마자 순서대로 순환되면서 사용된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2015년 12호 태풍 할룰라의 사례처럼 북태평양 중부나 동부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이나 열대폭풍이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날짜 변경선(경도 180°)을 넘어 태풍으로 전환되는 경우에는 처음 붙여졌던 이름을 그대로 쓴다. 일본에서는 이를 월경태풍(越境台風)이라고 한다. 아주 심각한 피해를 입힌 태풍의 이름은 해당 회원국이 요청을 하면 영구 제외되고, 새로운 이름으로 교체된다. 일본 기상청 산하 기관에서 태풍의 이름을 붙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이름보다는 태풍 번호를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언론 보도에서도 태풍 번호로 호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풍의 영향이 잦은 필리핀 내에서도 공식적인 이름 대신 필리핀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미국 합동경보센터에서는 별도 분석을 통해 자체적으로 태풍을 지정하며, 지역특별센터에서 공식 통보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름 없이 일렬번호만 표시하고 있다. 다음은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열대저기압에 부여하는 140개의 명칭이다. 로마자 이름은 태풍위원회의 14개국 기상 기관이 10개씩 제출한 것이며, 한글 명칭은 국립국어원에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정한 표기이다. 해상에서 바람에 의해 일어나는 파도를 말한다. 보통 풍속이 1~2 m/s 이상이 되면 발생한다. 대한민국 기상청에서는 풍랑주의보는 풍속 14 m/s 이상이 3시간 이상 지속되거나 유의 파고가 3m 이상이 예상될 때, 풍랑경보는 풍속 21 m/s 이상이 3시간 이상 지속되거나 유의 파고가 5m 이상이 예상될 때 발령한다. 태풍의 의해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약 12시간 후에 최고파고에 가까워진다. 대체로 파고의 높이는 풍속의 제곱에 비례하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해상에서 전달되어 온 파도를 말한다. 풍랑이 발생지역을 떠나 해안에 온 경우, 바람이 그친 후 남은 파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너울은 감쇠해 가는 파도로 진행함에 따라 파고가 낮아진다. 너울의 진행속도는 태풍 진행속도의 2~4배 이며, 연안 지방에 여러가지 태풍 전조현상을 일으킨다. 태풍의 중심 부근에서는 다른 방향에서 전해오는 파도가 모여들고, 간섭의 의해 물결의 꼭대기가 극단적으로 뾰족해지는 삼각파(pyramidal wave, 三角波)가 생겨 항해하는 선박은 전복의 위험이 커진다. 진행함에 따라 파장과 주기가 길어져 먼 바다까지 전달되기 때문에 풍랑을 예보하는 것보다 어렵다. 폭풍해일이라고도 하며, 해안의 수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다. 태풍의 낮은 기압으로 인해 수면이 들어올려지고, 여기에 강풍의 의해 해수가 밀려와 발생한다. 특히 태풍 진로 우측 200 km 이내에 발생하며, 만조 때와 겹치거나 수심이 낮고 V자형 만(bay ,灣)일수록 위험이 커진다. 일반적으로 해수면의 상승은 풍속의 제곱에 비례하며, 또한 기압이 1hPa 낮아지면 해수면은 1cm 높아진다. 해상에서 회오리 바람을 동반하는 기둥 모양 또는 깔대기 모양의 공기소용돌이를 말한다. 적란운 또는 적운형 구름에서 지면 또는 해수면까지 거의 수직으로 닿아있으며, 태풍이 접근할 때 대기가 급격히 불안정해지면 발생한다. 크기는 직경 수m~수십m 정도이며, 최대 풍속은 70 m/s 미만이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와 같은 현상이지만 규모는 작다. 태풍백서에 따르면 1904~2009년 까지 태풍의 의한 피해는 사망‧실종이 6,005여명 재산피해액은 14조 232억 원으로 연평균 사망‧실종이 57명, 재산피해는 약 1,336억 원 이다. 미국에서는 5등급 허리케인의 경우 약 2천 명의 사망자와 2,500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대비한다. 태풍이 접근하거나 상륙하게되면 홍수, 침수 및 철도, 도로, 다리, 등의 유실, 산사태 등 폭우의 의한 피해와 간판이나 표지판, 지붕 등이 날아가거나 하는 등 강풍의 의한 낙하시설물 피해가 발생한다. 해수의 염분이 해안 도시에 입히는 재해를 말한다. 강풍이 싣고 온 해염입자의 의한 염풍해와 해일 같은 해수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는 염수해, 염토해 등이 있다. 육상의 농작물과 같은 식물에 접촉되면 잎이 마르고, 수목이 고사하기도 한다. 송‧배전선의 부식 등으로 정전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며, 건물이나 교각 같은 구조물의 콘트리트 균열부위로 염분이 침입하여 내부의 철근 콘크리트가 부식되기도 한다. 태풍의 눈 안에 새나 곤충 등이 갇힌 채 이동되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미조(迷鳥) · 미충(迷蟲)이라고 한다. 해충이나 병균 등이 일시에 많은 개체가 날아와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도 한다. 태풍은 가뭄 해갈 등 수자원의 공급원 역할도 하며, 대기질 개선, 냉해와 폭염완화, 바다의 적조현상과 강의 녹조현상 억제 등 긍정적인 면도 있다. 태풍을 비롯한 열대성 저기압은 세계적으로 해마다 80~100개가 발생하는데, 한반도 부근에는 연평균 3개의 태풍이 지나간다. 태풍은 주로 7~9월에 접근하는데, 장마와 겹치므로 피해가 더욱 커진다. 1959년 9월 중순 통영지방에 상륙한 뒤 영일만 쪽으로 빠져나간 태풍 사라는 영호남과 영동지방에 심한 풍수해를 일으켰다. 이때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만 750명이었으며, 여수와 부산에서 관측된 최대 풍속은 각각 35.5 m/s, 34.7 m/s였다. 가장 큰 재산 피해를 낸 태풍은 1987년 7월 중순에 습격한 태풍 셀마로 서울과 인천을 제외한 전국에 걸쳐 177명의 사망자와 21억 9,517만 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태풍 셀마의 최대 풍속은 속초가 31.1 m/s, 통영이 26.7 m/s, 울진이 27.6 m/s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行政 區域)은 1직할시 2특별시 9도로 이루어져 있다. 기초 행정 구역으로는 시, 군, 구역이 있는데, 직할시와 특별시의 아래에는 구역, 군을 두고, 도의 아래에는 시, 군을 둔다. 시, 군, 구역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는 동, 읍, 리, 로동자구가 있으며, 시와 구역의 아래에는 동, 리를 두고, 군의 아래에는 읍, 리, 로동자구를 둔다. 인구가 50만 명 이상인 함흥시와 청진시는 직할시나 특별시가 아니지만 구역을 두고 있고, 개성시는 특급시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 특별한 사업 목적을 위해 일반 시·군에서 분리한 특별 행정 구역인 지구(地區)가 있는데, 신의주특별행정구, 금강산관광지구, 개성공업지구가 특별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정치적 분단을 이유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대한민국 실효 지배 구역을 자국 영토로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한민국의 '특별시'나 '광역시' 등은 분단 이후에 신설된 거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발매된 지도에는 이러한 부분들을 인정한다.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있고, 부산과 울산이 경상남도에서 분리되어 있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은, 강원도와 경기도를 남북으로 분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미수복 지구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임명하고 있다. 타키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년 - 117년), 고대 로마의 역사가이다. 가이우스(Gaius)라는 이름으로도 기록에서 발견된다. 타키투스의 출생, 사망 연대 및 가족 계보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기사 신분의 집안으로 속주 출신이었다. 일찍이 로마에서 당시의 유명한 수사학자 마르쿠스 아페르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타고난 글재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Gnaeus Julius Agricola)의 사위가 되어 원로원 의원이 되고, 70년대 후반에 로마의 관리로서 경력을 쌓기 지작하여 97년에 루키우스 베르귀니우스 루푸스의 죽음으로 보충 집정관(補充執政官)에 선출되다. 98년에 장인 아그리콜라에 관한 전기를 씀으로써 문필가로서 타키투스는 첫 발을 디딘다. 그리고 비슷한 무렵에 아마 라인강 북부의 풍토와 그곳에 살던 게르만족에 관한 게르마니아를 쓴 것으로 보인다. 타키투스가 역사가로서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저서 《타키투스의 역사》와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110년 혹은 114년을 전후로 출판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저작은 로마 제국의 쇠망을 한탄하고 공화정 시대의 기풍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류가 많다. 이는 타키투스가 당시 로마 본토의 「퇴폐」와는 다소 거리가 먼 속주 출신이자 기사 신분 출신이었던 점, 플라비우스 왕조 치하에서 로마의 풍속이 제재되고 있던 점,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폭군」을 경험한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타키투스의 저작이 자유 언론이 허용되었던 네르바, 트라야누스 치하의 환경에서 서술되어 서술되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또한 자신이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공화정 시대의 전통이 남아있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경향이 강했다. 전체적으로 원로원을 중시하고 우대했던 황제들(특히 트라야누스 황제)에게는 높은 평가를, 원로원을 가볍게 보고 원로원과 자주 대립했던 황제들(티베리우스나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를 내린다. 특히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업적을 인정해주면서도 몹시 신랄하게 비판한다. 때문에 테오도어 몸젠을 비롯한 후세의 역사가들이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때까지 티베리우스는 타키투스가 묘사한 「악한 황제」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퍼져 있었다. 시몬 베유 (철학자) 시몬 아돌핀 베유(, 1909년 2월 3일 - 1943년 8월 24일)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그녀의 오빠인 앙드레 베유는 니콜라 부르바키 클럽의 일원이기도 했던 수학자였다. 시몬 베유는 의사인 아버지 베르나르 베유와 가칠리엔(현재의 폴란드의 한 지역) 출신의 어머니 살로메 라인헤르츠 사이에서 파리의 불바르 드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유대인으로서 모계쪽으로는 거의 유대인 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에 리세(Lycée) 페넬롱에 입학하였고, 1924년에는 리세 빅토르 뒤루로 전학하여 프랑스의 철학자인 르네 르 센 밑에서 공부한 후 다음해 유명한 리세 제4 앙리 에서 가명 알랭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에밀 샤르티에의 지도를 받으며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로의 입학을 위한 준비반에 들어간다. 1927년에 에콜 노르말 입학 시험에 떨어지지만, 다음 해에 합격하여 알랭의 격려와 지도를 통해 데카르트, 플라톤,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열중하다. 1930년에 에콜 노르말을 졸업한 후, 다음 해에 철학으로 아그레가시옹을 땀으로써 리세의 선생 자격을 취득한다. 이 시기에 시몬은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여러 번에 걸쳐 농장에서 농부들 틈에 섞여 일을 하면서 노동의 뜻을 몸소 느끼고 배운다. 1931년에는 노동조합 연합회의(CGT)에 참석함과 동시에 계급투쟁에 관한 수필을 써 잡지 《레포르》(L'Effort)에 발표하며 얼마안가 이 잡지에서 노동조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1932년 여름, 독일에서 체류하며 1789, 1871, 1917 년 혁명의 역사와, 당시 독일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그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안일함을 깨닫고, 관료화되고 혁명의 반역자가 되어버린 소비에트 연방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1933년에는 심지어 소련에서 추방된 레프 트로츠키를 파리에 있는 그녀의 부모의 집에 묵게 하였으며, 트로츠키와 소련과 노동자계급을 주제로 열띤 논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 12월에 시몬은 알스톰 전자회사에 취직하여 다시 노동자로 일을 하지만 허약한 건강 상태 때문에 1월에 한 달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4월까지 철강공장에서 일을 한다. 이와 같은 끈질긴 노동 체험은 1936년까지 계속된다. 1937년 4월에 시몬 베유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도중에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관람하였고, 이후 아시시에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조토가 그린 프레스코를 관람하면서 신적 영감을 받는다. 여기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38년에 두 번째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이를 다시 체험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즘의 역사적 배경을 일리아스에 서술된 폭력을 예로 삼아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장편의 수필인 《일리아드 또는 폭력의 시》(L'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로 정리한다. 이후 나치 독일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가 고수하던 평화주의에 회의를 갖는다. 나치즘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곧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눈에는 공산주의가 희망이 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탄압하는 싸워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1940년에 시몬은 고대 인도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바가바드기타와 우파니샤드를 열심히 읽는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베유 가족은 툴루즈를 거쳐 마르세유로의 피난길에 나선다. 피난의 와중에도 시몬은 자신의 내면적 성찰에 관한 내용을 수첩에 적었고, 그 내용이 그녀의 사후에 《카이에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몬이 이 시기에 마니교, 그노시스의 원전과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발전에 대해 깊이 연구한다. 같은 해에 샤를 드 골이 자유 프랑스를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면서도 나치 독일의 만행과 프랑스 점령에 항의하는 등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해 끝내 베유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에 정착한다. 1942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하였고, 이때 그녀는 뉴욕을 방문하고 그곳에 큰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쓰러진 시몬 베유는 1943년에 켄트주 애시포드에 위치한 요양소에서 사망하였다.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라고 이야기 했던 적이 있다. 바로 이 점이 한 가지 단서가 된다. 사회의 분업화와 체계화의 핵심에는 항상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이분법이 도사리고 있고, 육체노동에 비해 정신노동을 중시하는 가치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체계는 최고의 상급자가 가장 정신적인 노동에, 그리고 최하의 계층은 가장 육체적 노동에 중시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베유는 바로 이 구조를 붕괴 시켜야 한다고 한다. 단순한 결과지만 어떤 상급자라도 모두 유사한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게 되면, 그 사회의 체계는 결코 비대해 질 수 없다. 따라서 베유가 제안했던 인간적인 문명이 실현된다면, 인간 개체 한명 한 명을 작은 수단들로 간주해 온 국가 같은 거대 체계들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시몬 베유의 저서들은 몇몇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후에 출판된 책들이었다. 태극 태극(太極)은 중국의 고대 사상 중 음양 사상과 결합하여 만물을 생성시키는 우주의 근원으로서 중시된 개념이다.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생성론으로 나와 있다. 에서는 태극과 비슷한 문양을 국기 중앙에 그려넣었으며, 과 , 의 국기에서 중앙에 태극문양을 그려넣었다. 황제 황제(皇帝)는 제국(帝國)의 세습 군주의 존호이다. 한자의 皇帝는 임금 황과 임금 제이나, 帝(제)의 경우에는 본래 '임금'이란 뜻이 아닌 신에게 제사를 바치기 위해 차려놓은 제사장을 의미하는 한자어였다. 帝 밑의 巾(수건,건)자는 수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상 밑의 나무를 엮어 만든 선반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帝자는 본래 하늘에 드리던 제사를 뜻했지만 천자와 연관하면서 뜻이 임금으로까지 나중에 확대하게 되었다. 동양에서 황제는 진 시황제에게서 시작되었다. 기존 중국에서 국가원수의 호칭은 왕이었다. 주나라의 천자만이 왕의 직위를 가졌고, 주변 제후들은 오등작에 따라 차등되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점차 왕을 칭하는 나라가 늘어나 모든 국가들이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는 왕과 차별화되는 칭호를 원했고, 삼황오제에서 각기 황과 제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제(帝)는 본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조상신을 일컫는 호칭이었으나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이후 황제의 약어로 사용되었다. 서양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비롯한다. 그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에서 ‘임페라토르()’는 원래 개선장군이란 뜻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변용되었고 영어 ‘엠퍼러()’의 어원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이었으나 점차 황제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독일어 ‘카이저()’와 러시아어 ‘차르()’로 변형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황제나 독립국의 왕의 2인칭 경칭은 폐하(陛下)이다. 이는 “높이 우러러 볼 사람이기에 뜰에서 층계 위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제후(諸侯)의 2인칭 경칭은 전하(殿下)로 “계단 아래 뜰에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즉 군주가 있는 곳이 다를 뿐이고 신하는 언제나 ‘뜰’(뜰층계의 아래)에 자리하게 된다. 중세 한국어에서도 ‘’라 하여 폐하와 전하의 뜻이 로 같다. 다만 그 품격에서 폐하가 전하보다 높았다. 태상황, 태황태후, 황태후 등은 황제를 폐하라 부르지 않는 대신 황상(皇上), 성상(聖上) 등으로 불렀다. 황제의 1인칭은 짐(朕)으로, 본래 일반 1인칭이었으나 시황제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1인칭으로 바꾸었다. 황제는 여러 제후를 책봉하고 연호(年號)를 정했으며 제후국은 조공을 바치고 연호를 받아 썼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를 수직관계와 종속성으로 인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외국 간의 조공책봉은 어느 정도 국력의 차이를 반영하여 형식상 차등적 관계를 설정하기는 하지만, 내정간섭은 없는 상호 인정과 후왕박래(厚往薄來)의 외교 행위로서 당시의 자주적 국제 질서였다. 한국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皇帝)를 칭했다. 다만 제국 선포 이전에도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종종 차용하였다. 임의적으로 황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나 신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때가 있고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해는 각종 기록에서 독자 연호의 사용과 황상, 황후(皇后) 등의 용어가 나타나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고 황제라 칭하지 않았다.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태조와 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 임의로 황제라 부른 기록들이 있다.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황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도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 스스로도 황제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으로 격하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왕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주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 1897년 고종은 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원구단에서 한국의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은 심화됐고, 결국 1910년 일본 제국과의 한일 합병으로 제정이 폐지된다. 일본은 야마토 시대부터 대왕(大王)의 칭호를 사용했고 대략 7세기에 천황()으로 개칭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이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막부가 폐지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독일식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로도 천황제는 존속하였고, 21세기 현재 제호(帝號)를 유지하고 국제적으로 'Emperor(황제)'가 통용 표기되는 유일한 나라이다. 진시황 즉위 이전에는 중국은 왕(王)칭호를 썼다. 기원전 221대에 진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국가원수를 황제라 하였다. 이는 한족이 건국한 왕조뿐만 아니라 몽골과 만주에서 생활하던 여러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세운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칸(Khan) 등의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해지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서 허수아비지만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만주국도 멸망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당나라의 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베트남은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책봉을 받아 황제의 칭호를 대외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대내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묘호와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부터는 대놓고 황제를 칭했고,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19세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어 식민지가 되었어도 명목상 황실은 유지하다가 1945년 완전히 막을 내렸다. 서구에서 황제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칭호에서 유래한 이래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최고 지배자를 일컫는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로마 제국의 전통을 물려받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었고, 아울러 교회의 승인도 필요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황제도 2명이 되었다. 이 중 서로마 제국은 5세기 중후반에 멸망하면서 그 제위(帝位)가 비어 있다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800년 12월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후 오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고 16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습했다. 동쪽의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안정적으로 제위를 유지하였다. 헤라클리우스황제 때부터 라틴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대신 그리스어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 황제)'를 칭호로 사용하였다. 15세기 러시아를 통일한 이반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그 정통성의 계승과 동방 정교회의 수호를 주장하며 스스로 차르(Tsar)에 올랐다. 명분은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의 혼인과 모스크바로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이동한 점이었다. 1721년 표트르 1세는 아예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칭하였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야말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보호자이자 제3의 로마의 황제라고 주장하였으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외에도 비잔티움 제국 및 교황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제가 된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이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황제로 인정되긴 하였으나 이후 약화되면서 10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180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샤를마뉴로부터 위그 카페, 그리고 자신으로 그 정통이 이어진다며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이나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 제국에서 황제를 자칭한 적은 있었으나 공인 받은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영국의 조지 3세는 아일랜드 왕국을 합병했을 때 국내의 황제 칭호 권유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나폴레옹에게 자극받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하여 전무후무한 두 개의 황제를 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해체당했지만 각지에서 황제가 난립하면서 황제 즉위의 원칙은 깨지고 그 가치도 떨어졌다. 독일은 19세기 중후반 여러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된 후 호엔촐레른 왕가의 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라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20세기까지 유럽에서 제호를 썼던 나라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터키의 4국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모두 폐지되었고, 현재 유럽에서 제호를 쓰는나라는 없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 이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전통적으로 파디샤(Padishah) 혹은 샤한샤(Shahanshah)라 하였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흐샤야티야 흐샤아티야남, 즉 '왕 중의 왕'이 축약된 형태이며 보통 황제로 번역한다. 사파비 왕조와 카자르 왕조에서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이슬람교 시아파의 우두머리를 겸했기 때문에, 질룰라(Zill'ul'lah)라는 호칭이 황제의 휘(諱) 앞에 붙기도 하였다. 황후는 샤흐바누(Shahbanu)라 불렀는데 사파비 왕조 이후에는 마흐돌리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친왕은 샤흐자드(Shahzade)라고 불리고 미르자(Mirza)라는 존칭이 붙었다. 내친왕은 샤흐자데(Shahzadeh)라고 불렸으며 베곰(Begom)이라는 존칭이 붙었다. 20세기 팔라비 왕조까지 이어졌으나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폐지되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군주의 의미를 가지는 칭호는 칼리파, 술탄, 에미르 등이 있는데 칼리파가 실권을 가지고 다스렸던 초기 이슬람 제국과 술탄이 다스렸던 셀주크 투르크 계통의 여러 국가들을 제국이라 칭한다. 그러므로 칼리파 및 술탄을 황제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고유의 칭호로서 사용한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뒤 제3의 로마제국을 자처했으므로 로마 황제의 칭호도 함께 사용했다. 페르시아의 파디샤도 자칭했고, 술타네스 셀라틴(Sultanes Selatin, 술탄 중의 술탄)라는 호칭도 사용했다. 또한 압바스 왕조 칼리파의 후손에게 칼리파 지위까지 양도받아 칼리파를 자처하기도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문화권 내에서 황제에 해당하는 칭호를 모두 사용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이후 술탄은 격이 낮아져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페르시아 등지에서는 친왕의 개념으로 쓰였다. 무굴 제국의 황제도 파디샤라고 하였다. 영국은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1877년 인도 제국으로 계승시켜서 영국의 왕이 그 황제를 겸하기도 하였다. 솔로몬으로부터 이어지는 세계 최장수 왕조라 주장하는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는 3세기에 재위한 엘라 아메다 1세부터 네구사 네게스트(Negusa Nagast, 왕중의 왕)라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상징은 예수를 나타내는 왕관을 쓴 사자로 '유다의 사자' 라고 불린다. 1974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 잉카 제국과 아즈텍 제국의 군주는 일반적으로 황제로 호칭된다. 멕시코는 매우 짧은 2번의 제정이 있었다. 제1제정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1822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가 1823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186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보호국으로 삼을 목적에서 막시밀리안 1세를 내세워 제2제정을 열었으나 1867년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공화정이 부활하였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브라간사 왕가가 피난오면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결국 왕실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1822년 독립하여 남아있던 페드루 1세를 황제에 올려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다가 1889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20세기를 기점으로 대한제국, 독일제국 등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 제국들이 제정폐지되어 21세기 현재 남은 황제는 일본의 천황뿐이다. 황제 (동음이의) 황제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김기덕 김기덕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1982년 1982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11년 1911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19년 1919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비류 (동음이의) 비류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대법원 대법원(大法院, )은 대한민국의 최고 법원이자, 3권 분립 기관 중 하나인 사법부의 최고 기관이다.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14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의 심판권은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으로 구성되고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는 전원합의체에서 이를 행사하나, 일정한 경우에는 대법관 3인 이상으로 구성되는 부에서도 재판할 수 있다. 다만 대법관 중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된 1인은 재판에 관여하지 아니한다. 사법행정상의 최고의결기관으로 대법관회의가 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장이다.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여, 임기는 6년이고, 중임할 수 없다. 국회의장, 대통령(혹은 국무총리) 과 함께 삼부요인(三府要人)이라 한다. 대법원은 고등법원 또는 항소법원(고등군사법원을 포함한다)·특허법원의 판결에 대한 상고사건, 항고법원·고등법원 또는 항소법원·특허법원의 결정·명령에 대한 재항고사건과 다른 법률에 의하여 대법원의 권한에 속하는 사건(중앙해양안전심판원의 재결에 대한 소, 선거쟁송에 대한 상고사건 등)을 심판한다. 대법원의 전원합의체에 관하여, 다음 각 호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전원합의체가 아닌 부에서도 사건을 심판할 수 있다. 또한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은 대법원장으로 한다. 전원합의체는 토론 과정이 자유롭고 배석자도 없다. 다만 서열이 낮은 대법관부터 차례로 자기 의견을 내고, 마지막에 대법원장이 입장을 밝힌다. 판단은 투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데 서열이나 나이와 상관 없이 대법관 한 사람은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 조선 인조 인조(仁祖, 1595년 음력 11월 7일 ~ 1649년 음력 5월 8일)는 조선의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이다. 휘는 종(倧), 본관은 전주,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시호는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음력 5월 15일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다. 인조 이후로 명나라처럼 청나라에서도 장목왕(莊穆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청나라와의 외교문서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능양군은 선조의 서손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선조의 첫 손자로 조부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왕궁에서 자랐다. 구성(具宬)의 문인이었으며 신경희의 옥사로 동생 능창군이 사사당하고 아버지 정원군마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수를 다짐, 반정을 일으키고 성공한 후 즉위한다. 이후 중립 외교 정책을 추진했으나 강홍립 파병 등 광해군의 후금간의 외교 관계를 악화 시켜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인조는 1595년 12월 7일(음력 11월 7일)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딸 군부인 구씨(인헌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조선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주에서 태어나게 된 이유는 당시는 임진왜란 난중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실록 즉위일 기록에 의하면 그가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첫 이름은 천윤(天胤)으로 정해졌다. 이름은 이종(李倧)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이라 하였으며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그의 자(字,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 중 천윤(天胤)이라는 자는 당시 국왕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선조가 종(倧)이라는 이름과 함께 친히 직접 지어준 것이다. 나중에 광해군이 누군가에게 이 말을 듣고,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언짢아했다 한다. 할아버지 선조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정원군이 일찍 결혼하여 얻은 첫 손자였다. 선조는 그 자신이 방계출신에 서출인 탓에 첫 손자인 그가 서손(서자 정원군의 아들)이었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하였다.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선조의 이와 같은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훗날 그의 친동생 능창군 종이 사형당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2, 3세가 지나서는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할아버지 선조의 배려로 곧 궁중에서 자랐는데, 의인왕후는 그를 특별히 귀여워하였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어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다른 왕자들이 비교되지 못하였고, 특히 할머니뻘인 의인왕후는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다고 한다. 5, 6세가 되어서는 선조가 직접 그를 품안에 두고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일찍부터 글자를 해독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선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선조는 그의 외삼촌이기도 한 능해군 구성(綾海君 具宬)을 왕손사부로 삼아 어린 능양군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어느정도 자란 뒤에도 그는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왕손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었다. 1601년(선조 34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 당시 관료와 의병장, 장수들을 포상할 때 그를 특별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넣어 책록되었고,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한 관원들을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할 때는 청난원종공신 1등(淸難原從功臣一等)에 각각 녹훈되었다. 해당 원종공신록은 인조가 즉위하면서 소각되었지만 누군가 해당 훈작을 보고 작성한 어휘원종공신첩(御諱原從功臣帖)이 현대까지 전해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가 별세하면서 정원군 일가는 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부모를 따라 경희궁으로 갔다.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씨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다. 인조보다 한 살 위인 한씨는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한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정원군은 1619년(광해군 11)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인 이서, 신경진, 김류와 그의 외척인 구굉, 구인후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을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능양군은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며 정변을 모의하였고 서인과 남인계 인사들의 지지와 자문을 구하였다. 반정을 감행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평산부사 이귀·신경진 등이 거사를 계획한다 하여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동년 겨울에는 이귀·김자점 등이 유폐된 서궁(西宮, 인목왕후를 일컬음)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월 12일(음력 3월 13일)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힙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의 근거자료가 인조시대 때 작성된 광해군 실록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시대에 작성한 인조실록이 그 근거이므로 인조가 자신의 역모를 정당화 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농후할 수 있으나 광해군일기는 정초본과 중초본, 정초본은 역사적 사료 즉 사초이며 중초본은 사초를 엮어서 만든 완성본 이기 때문에 그들이 광해군의 행적을 왜곡했더라면 당연히 사초를 남기지 않고 없에야 마땅하므로 광해군일기는 그만큼 신뢰성이 높다. 한편 인조 반정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는 광해군의 인목왕후 폐모론이었다. 반정 후 형식적으로 인목왕후를 복귀시킨 뒤 그녀의 교서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즉위 이후 그녀에 대한 예우는 소홀하였다.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조선시대에 왕은 집권하면 널리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여 사형수도 사형을 면제해 주었으며 대부분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풀어주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100 여가문을 파멸하고 1,000여명을 연루시켜 당연히 쫒아내는게 마땅하고 북인들은 광해군의 옥사를 이용해 정적을 숙청하고 권신화되어 각종 폭정을 일삼아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 등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가던 인조는 전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공신 세력의 과도한 세력강화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독재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 세력을 중용한다. 인조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발언하였다. 서인 공신 세력의 이같은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던 그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 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여 서인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또한 반정 초기 왕족 출신 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계열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켜 이들을 통해 서인 공신 세력을 견제한다.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성균관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다. 남인계 성균관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불교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고, 서인의 이념이 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인조는 이이와 성혼의 의혹들을 언급하며 문묘 종사를 거절하였다. 이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여론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 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서인계 성리학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과 송시열과 남인계 허목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다. 인조는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고,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은 이를 비판하다가 불이익을 받고 관직 임용이 금지당하기도 했다. 친명배금의 정책을 실행한 인조는 "명과 사대를 다하고 만주에도 관계를 구축하라."라는 식으로 명한테는 대국으로 받들어 지고 후금역시 외교를 다했다. 인조는 광해군의 펼치지도 않은 중립외교 정책을 불사르고 새로운 외교책을 펼쳤다. 실제 1624년 가도의 모문룡이 자신들이 후금을 칠 것이라며 조선인 길잡이를 요구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비변사의 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 조선인들이 산세와 지세를 몰라 길잡이가 될수 없다고 말하라. 그럼에도 명 장수의 고집을 이길수 없다면 그들에게 명나라 병사의 갑옷을 입혀 보내라. " 라고 말하며 후금과의 대립을 최대한 피했다. 출처 : 한명기, 광해군 -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는 다르게 친명정책을 펼쳐 청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때에 1623년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후방 안정을 꾀하고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을 함락하였다. 인조는 부랴부랴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안주성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시키고 평양을 거쳐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에 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 등이 표류하였다. 인조는 친히 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이라는 이름을 내려 조선에 정착시켰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벨테브레이의 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와 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다. 납서는 작게 쓴 글시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다.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다.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멸당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군사는 검단산에서 그리고 충청감사 정대규가 데리고 온 군사는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들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원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심연은 8000명으로 근왕군을 편성했다.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에게 군사를 주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그러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 쌍령에 이르렀을 때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 후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그것은 임금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책을 면하기 위해 오는 척하였던 것이었다. 이후 근왕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조선팔도에는 괴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었다. 옹성 전술을 구사하는 조선군들에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단련된 팔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괴소문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소문을 확대하는 자들에게는 처벌을 공언하였다. 조선인 병사들의 후퇴에 당황해한 인조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조선인 병사 몇 명을 처벌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남한산성 성안의 군사들은 추위에 얼었고 식량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인조는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말을 잡아먹었다. 설상가상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성안에 피신한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과 수종자들도 굶주렸고 기근으로 쓰러져 아사, 동사하는 일도 속출했다. 망월봉에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커다란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다. 홍이포다. 행궁에 머물던 백관들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바빴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홍이포는 현대의 미사일 이상으로 공포의 무기였다. 당황한 인조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열했던 논쟁도 허무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할 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옛 제도를 고수하고 의리를 지키자던 김상헌과 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변해야 된다는 최명길이 각을 세웠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척화와 주화 논쟁이 불붙었을 때 일찍이 결론을 도출했다면 전쟁의 참화를 막을수 있었을 텐데 인조에게는 그러한 덕망이 없었다. 1636년(인조 14) 인조는 청나라 군대를 되돌아가게 하고자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진짜 왕자대군이나 왕자군 대신 영양군 이거의 손자 풍해군 이잠의 차남 능봉수 이이(綾峯守 李人+爾)를 능봉군으로 봉하고 왕제라고 속여서 청나라에 보내고 화의를 체결했다. 청나라 군대는 일부 퇴각하였다. 그러나 능봉군을 가짜 왕자로 꾸미고, 형조판서 심집(沈諿)은 재상으로 속여서 심양에 보냈다가 어느 조선인이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결국 되돌아왔다. 청나라군대는 퇴각을 중단하고 계속 조선 왕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 이후 인조는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쓰였다.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이것도 청나라가 많이 봐준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반합은 장례를 치를 때 염하는 의식에서 차용한 방법으로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괴기스럽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쓰이던 항복의식이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 왜인, 유구인,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 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지방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체류일수, 매매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자, 정묘호란 이후 원칙론을 내세운 산림세력은 북벌을 주장했고 지나친 북벌 여론을 그는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보다 나이 어린 계비는 후일 복상과 예송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에 인조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조정에 파견하였다. 1644년 11월 볼모에서 석방된 소현세자가 귀국하였으나 친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그를 독살한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賜死)하였다.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과 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적 간행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하였다. 1649년 (인조 27년) 손자 연(棩)(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649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을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 효종 앞에서 효명옹주와 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인조와 그의 원비 인렬왕후가 같이 합장된 릉이다. 인조 13년 1635년 12월 9일 산후병으로 42세의 나이로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년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성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인조 27년 1649년 1월 30일 승하한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어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어 영조 7년 1731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옛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인조는 조선 최악의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친명배청주의자인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외교 기조를 실리외교에서 친명외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청에게 항복했던 강홍립, 박난영의 일가친척을 전부 몰살시켰고 척화파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한 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을 가짜 형조판서로 꾸며 회답서를 보냈으나 이 문서엔 명이 내려준 연호를 사용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사신은 4만 필의 옷감과 소 4천 마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화의는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할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다른 일화도 있다.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가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병력을 물리겠다"고 제안하자 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용골대가 본인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세자를 요구했다. 이처럼 인조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서도 꼭 손해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추존왕 원종(정원대원군), 어머니는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 구씨 (연주군부인)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증 영의정 한준겸의 딸인 인렬왕후 한씨이며, 계비는 영돈녕부사 조창원의 딸인 장렬왕후 조씨이다. 1645년초 석방되어 귀국한 소현세자는 부왕과 언쟁, 갈등하다가 그해 갑자기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독살로, 진원군 이세완 내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독살 증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증은 없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에서는 인조에게 대청황제 공덕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꺼려하였으나 결국 이경석이 자처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쓰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치욕적인 상징물로 남게 된다. 핵무기 핵무기(核武器)는 핵분열이나 핵융합에서 발생하는 방대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살상 또는 파괴하는 무기의 총칭이다. 핵분열의 경우 원자 무기(原子武器) 또는 원자 병기(原子兵器)라고도 한다. 가장 작은 핵무기도 재래식 폭탄에 비해 월등한 폭발력을 가지며, 가장 큰 것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핵무기가 실제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두 번 뿐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우라늄 폭탄인 리틀 보이와 1945년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플루토늄 폭탄인 팻 맨이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화인민공화국, 인도, 파키스탄은 수천 번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핵무기의 위력은 일반적으로 'TNT 수백톤의 위력을 가졌다' 라든가, 'TNT 100만톤 이상의 폭발력을 가졌다' 등 같은 규모의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TNT 폭탄의 무게로 나타낸다. 텔러-울람 설계와 같이 단계적으로 설계된 열핵무기의 경우, 핵물질만 충분하다면 이론상 가능한 핵출력은 제한이 없다. 그러나 핵출력의 규모가 커지면 탄두의 질량과 크기도 그만큼 커져서 운반하기 곤란해지고,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을 한참 초과하는 위력의 핵무기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에, 전술적·전략적 효용성을 고려해 과도한 핵출력의 핵무기는 실전용으로 제작되지 않는다. 핵무기는 전략·전술적 측면에서 최우선 과제로 채택되어 개발되었고 발전되어 왔다. 관심의 대상은 특히 핵탄두의 파괴력과 CEP에 있었고, 재래식 방공체제나 조기경보체제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시점에서 볼때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핵탄두의 경우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기준으로 하는데 그 폭발력은 20㏏급이었다. 현재의 핵탄두는 핵분열·융합형으로, 소련의 SS-9가 단일 핵탄두로서는 최대규모인 20~25Mt급인데, 이것은 기준원폭과 비교할 때 무려 1,000~1,250배에 상당하는 위력을 가지며, 미국의 타이탄형은 5~10Mt급이다. 폭발력의 비약적 진전과 함께 MIRV화가 이루어졌다. MIRV화란 1기의 운반수단에 수발에서 수십발 의 핵탄두가 탑재되어 대기권 돌입과정에서 각각 정해진 개별목표를 향해 분리 돌입하는 '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화'로서, 핵탄두는 1Mt급으로 축소되었으나 통상 1운반체에 10발씩 탑재된다고 볼 때 전체적인 파괴력 규모는 실제로 증가된 것이다. MIRV화는 동시에 복수 이상의 목표를 공격할 수 있고, 투사중량(Throw weight)의 감소로 CEP가 크게 향상되었으며, 1운반체 1탄두에 대비한 재래식 방어·경보 체제를 무력화시켰다. 예컨대 핵탄두의 파괴력은 지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데 MIRV화로 동일 목표에 대한 각개 돌입으로 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CEP(Circular Error Probability)란 일정한 수의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목표지점에 도달한 반수 이상의 착탄범위를 원으로 표시하여 반경 m로 환산한 명중 오차 정밀도를 말한다. 1960년 ICBM의 CEP는 400m 수준이었으나 미국의 미니트맨 Ⅲ형에 탑재되는 최신형탄두 Mk/2A가 220m, 피스키퍼(Mx 미사일)는 90m로 향상되었으며, INF인 미국의 퍼싱Ⅱ형은 불과 30m에 이르는 진전을 보였다. 구소련의 경우 SS-19가 300m로 미국에 비해 뒤지고 있으나, INF인 SS-20의 경우 정밀도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략공격 목표에 관해서 하드타깃과 소프트타깃이란 용어가 사용되는데 전자는 ICBM 기지나 군사기지·시설물 등 견고한핵분열을 대응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는 목표물을 뜻하고, 후자는 방어시설이 약하거나 없는 대도시·공업중심지 등 공격자의 손실이 적게 예상되는 목표물을 가리킨다. 가장 대표적인 핵무기는 핵분열을 이용한 것이다. 이 경우에 핵분열 물질로는 보통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사용된다. 우라늄-235나 플루토늄-239 등이 쉽게 핵분열을 일으키고, 이들을 임계 질량 이상으로 모으면 연쇄 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를 원자 폭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농축도 93.5%인 우라늄-235의 임계질량은 크기로 따지면 핸드볼공 정도의 크기(약 17cm)에 해당한다. 이때 핵분열에 의한 폭발은 일반적인 화학반응이 따르는 질량보존 법칙과 에너지보존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우라늄의 미미한 질량 변화로부터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하면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핵무기의 기폭 방법에는 포신형(Gun type)과 내폭형(Implosion type)이 있다. 포신형은 원통 속에 임계량의 우라늄을 2개로 나누어 넣고, 화약의 힘으로 한쪽 우라늄 조각을 다른 쪽 우라늄 조각에 합쳐 임계상태가 되도록 하여 폭발이 일어나게 한다. 반면, 내폭형은 플루토늄 같은 핵분열 물질을 공 모양으로 내부에 배치하고, 주위를 폭약으로 둘러싼 후, 한꺼번에 폭약을 폭발시켜 순간적으로 고르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임계상태에 도달하도록 유도한다. 보다 큰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핵융합 반응을 이용한다. 핵분열 폭탄을 이용하여 중수소나 삼중수소, 리튬 등을 순간적으로 가열/압축하여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다. 이 원리를 이용한 수소 폭탄은 원자 폭탄의 수 백배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다. 그밖에도 여러 종류의 핵무기도 있다. 핵무기 주위를 적당한 물질(코발트나 금) 등으로 감싸서 방사능 낙진의 양을 늘리는 ‘Salted’ 핵무기들도 있다. 그리고 고속중성자를 이용, 생물 살상에 쓰이는 중성자 폭탄도 있다. 전술핵은 위력이 킬로톤 이내인 전술 무기이다. 이는 매우 효율성, 경제성이 있는 전투 수단이다. 재래식 대포로 발사할 수 있는 최초의 전술핵은 미국이 50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1953년 5월 25일 첫 발사실험을 한 'Mk9'라는 핵폭탄이다. Mk9는 280mm 직사포로 발사되며, 전장에서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전술핵의 효시다. 전략핵은 적의 영토 혹은 국가 기반, 대도시를 파괴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핵무기로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과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이 있다. 공중 발사 순항 미사일도 있다. 핵무기(핵폭탄, 원자폭탄)와 원자로는 모두 우라늄의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한다. 천연우라늄에는 여러 가지 동위원소가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인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이다. 천연우라늄의 약 0.7%를 차지하는 우라늄-235는 스스로 핵분열이 가능한 반면, 천연우라늄의 약 99.3%를 차지하는 우라늄-238은 스스로는 핵분열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핵분열 반응의 재료에 스스로 핵분열이 가능한 우라늄-235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느냐에 따라, 핵분열 반응이 원자력발전에 이용되기도 하고 무기개발에 이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핵무기는 우라늄-235가 90% 이상 고농도로 농축되어 있어, 순간적으로 수많은 핵분열이 일어나며 폭발한다. 이에 비해 원자력발전은 원자로에 우라늄-235가 3~5%만 농축되어 있어서 핵분열 서서히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발전과 핵무기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연쇄반응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냐 하는 점이다. 원자로는 핵분열 연쇄반응을 자유롭게 조절하기 위해 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제어봉을 이용하며, 전원이 끊겨 작동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제어봉에 의해 자동으로 정지시킬 수 있다. 원자로는 이밖에도 고농도 붕산수를 냉각수에 주입해 핵분열 연쇄반응을 조절할 수 있다. 핵무기는 에너지(X선)·열·폭풍에 의한 파괴효과를 지니는데, 핵반응에 의해 방출되는 α·β·γ 입자는 광범위하고 오랜 방사능 오염지대를 형성한다. 파괴효과에 영향을 미치는 제요인을 배제하고 저고도에서 1Mt급 탄두를 폭발시킨 경우 9.6km 이내의 목조건물은 완전히 파괴되고, 6.4km 이내의 연와건물도 완전히 파괴되며, 콘크리트·석조 건물도 4.8km 이내이면 전부 파괴된다. 10Mt급의 경우 목조건물은 22km, 연와건물은 14.4km, 콘크리트건물은 10km 이내이면 전부 파괴시킨다. 폭심은 순간적으로 수천도의 고열에 휩쓸려 대화재를 일으킨다. 인체에 대한 피해는 1Mt의 경우 14.4km, 10Mt이면 38km의 지점에서도 피부에 2도화상을 입으며, 방사선에 의한 치사반경은 2.4km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폭발 1분 후에 1Mt급 탄두가 발하는 핵방사선은 라듐 1천만 톤에 해당할 정도로 강렬하다. 또 방사성낙진이나 잔류 방사능으로 원폭풍이 발생해 피폭효과는 지속된다. 대한민국의 국방연구원에서는 1메가톤급 핵폭탄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 상공에서 터질 경우, 폭발지점으로부터 반경 7 km 이내의 모든 사람이 사망하고, 따라서 업무 시간대에 반경 3 km 내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300만 명이 전원 사망할 것으로 예상한다. 2004년 10월 26일 미국 국방위협감소국(DTRA: Defense Threat Reduction Agency)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 상공에서 100kt 규모의 핵탄두가 폭발하면 31만 명이 즉사하는 것을 포함해 총 63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핵폭발에 의한 1차 인명피해는 현장에서 31만 679명이 즉사하고 핵폭풍과 열복사선에 의해 23만 2183명이 중상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사능 낙진에 의한 2차 인명피해는 핵폭발 1분 뒤부터 쏟아져 내리는 방사능 낙진이 북서풍을 타고 수도권 서남부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많은 지역이 피해를 입는 것으로 예측됐다. 대한민국의 국방연구원에서는 20kt급 핵폭탄이 터질 경우에는, 폭발지점으로부터 반경 1.2 km 이내의 모든 사람이 사망할 것으로 보고 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 시에 투하된 미군의 리틀 보이가 20킬로톤급으로서, 보통 핵폭탄의 위력이 히로시마 원폭의 몇 배나 되는가 하는식으로, 그 폭발력을 표시하는 한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국제천연자원보호협회(NRCD)가 2004년 미 국방부에 제출한 한반도 가상 핵전쟁 시나리오에 따르면, 15kt의 핵탄두 1개가 대한민국 국방부와 미국 제8군이 있는 서울시 용산구 삼각지 500m 상공에서 폭발할 경우 반경 4.5km는 잿더미로 변하고 서울 중심부는 물론 경기도 고양시 일산, 성남시 분당, 수원시까지 핵폭풍과 충격파, 낙진으로 파괴돼 60만∼120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날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위협감소국(DTRA)에서는, 북한이 10kt급 핵폭탄을 서울에 투하할 경우 최소 3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최소 18만 명의 사망자와 16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8만 명의 사망자 중 10만 명은 핵폭발 당시 즉사, 8만 명은 낙진 피해로 사망할 것으로 본다. 2010년 5월 3일 미국은 실전 배치돼 있는 장ㆍ단거리 핵탄두가 5,113기(2009년 9월 기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과학자연맹(FAS)은 사용가능한 것 모두 합치면 실제 미국의 전체 핵 보유고는 1만여기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을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에 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핵무기 차르 봄바를 만들었다. 1952년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7년에 수소폭탄의 실험에 성공했다. 결국 프랑스는 1960년 2월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원자폭탄 실험 1968년 수소폭탄 실험 성공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3년 1월 10일 핵개발을 서로 하지 않는 일명 NPT 탈퇴 이후 꾸준히 핵개발을 시도해 2016년 1월 6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2017년 9월 8일 수소폭탄 개발까지 되어 있다고 발표하였다.그러나 주위 나라들의 반발 또한 거세지고 또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를 위반해 사회적으로 고립 되고있는 추세이다. 이스라엘은 약 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인도는 핵확산방지조약(NPT)에 처음부터 현재까지 가입하지 않았다. 인도는 1962년 중국과의 국경분쟁, 1964년 중국의 핵실험 성공,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거치면서 핵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개발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파키스탄 역시 핵개발을 추진함에 따라 인도 역시 1998년부터 개발을 재개했다. 2006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핵확산방지조약(NPT) 미가입국이지만 핵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동맹이었으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겪으며 동맹이 약화됐고 파키스탄이 이때부터 핵개발을 시작했다. 미국은 초기에 반대했으나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자, 암묵적으로 개발을 용인했다. 소련이 철수하자, 미국이 다시 제재를 가했으나 이미 핵 기술은 충분히 개발된 상태였고 현재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1970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박정희가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지만 현대에 들어와 비핵화를 견지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현재 핵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핵개발 능력을 지닌 나라’로 분류되어 있다. 2013년 한미 원자력 협정이 끝나면 핵연료 활동이 중지되며 규정에 따라 미국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게 된다. 2010년 11월 북한의 우라늄농축시설 발표에 대처 방안으로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은 美전술핵 한국 재배치도 검토 할 것이라 밝혔다. 대한민국은 현재까지 핵무기 보유 시도 국가로 되어 있으나 한미간 긴밀히 협의를 통한 철저히 준비할 계획이라 강조했다. 한미 원자력 협정을 앞두고 있다. (개발 시도 당시 ) (개발 시도 당시 ) 리비아는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고도 핵 개발을 추진했다. 파키스탄이 제공한 기술이 바탕이 되었다. 2003년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개발을 포기했다. 최고 법원 최고 법원(最高法院)은 사법부의 최고 기관이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재판의 최종심은 최고 법원에서 판단하며 재심이 이뤄지지 않는 한 판결은 최고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인정된다. 대개 나라의 수도에 설치되어 있지만, 독일과 같이 최고 법원의 여러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을 전국에 분산하여 두는 경우도 있다. 도 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섬 (동음이의) 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비너스 (동음이의) 비너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금성 태양계의 두 번째 행성이다. 베누스 베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에트루리아 신화의 투란(Turan)에 해당한다. 베누스 숭배는 라티움(현 라치오 주 지방)의 아르데아와 라비니움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오래된 베누스 신전은 기원전 293년 8월 18일 지어졌다. 8월 18일은 당시 비날리아 루스티카(Vinalia Rustica)라는 축제일이었다. 4월 1일에는 악에서 보호해주는 ‘웨누스 베르티코르디아(Venus Verticordia)’를 기념하는 축제인 베네랄리아(Veneralia)를 치뤘다. 기원전 215년 4월 23일에는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웨누스 에리키나(Venus Erycina)’를 기리는 신전이 지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웨누스 게네트릭스(Venus Genetrix)’를 모성과 가정 생활의 여신으로 소개했다. 베누스는 서양 미술에서 여러 회화와 조각의 소재가 되었다. 독일의 전설에 따르면 탄호이저(Tannhäuser)라는 시인 기사는 베누스의 지하 거처인 베누스부르크(Venusburg)를 발견하여 베누스의 마법에 걸린 채 그곳에서 일 년을 보냈다고 한다. 유럽의 많은 언어에서 베누스의 이름은 금성의 이름에 쓰이고 있다. 사랑의 여신으로 남녀간 이성간의 사랑 및 성적인 사랑의 신이므로 성적인 문제와 관련된 많은 파생어가 있다. 대표적으로 치구를 비너스의 언덕이라고 하고, 성병을 예전에는 비너스의 병, Veneral disease라고 하였다. 이병도 이병도(李丙燾,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989년 8월 14일)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이며,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호(號)는 두계(斗溪, 杜溪)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 있을 때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1934년,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인 진단학회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국사대관(1948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내무부장관 윤치영의 처남이며, 서울대학교 총장 이장무와 문화재청장 이건무는 그의 손자이다.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추구하여 한국근대사학이 성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조선 시대 후기인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에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泉里)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와 부인 나주 김씨 사이의 오남으로 출생하였다. 12세가 되던 1907년 7월에 가족이 모두 한성부로 이주하여 이후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같은 해 1907년 11월에 부친이 작고하였다. 1907년 이종일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이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는 1909년까지 수학하였다. 15세였던 1910년에 육군 참장 조성근의 장녀 조남숙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3월에 사립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3월 보성전문학교(현재 수송동 조계사 자리) 법과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다. 1916년 4월에 와세다 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에 입학하여 1919년 7월에 졸업하였다. 1919년 10월부터 7년간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중앙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영어 담당 전임교원으로 근무했다. 야간에는 영어강습소에 출강하는 한편, 중앙학교의 전임교원이자 중동학교(야학) 교장인 최규동의 요청을 받고 1920년 4월 부터 1년간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20년 7월에 김억, 남궁벽, 김혁로, 김영환, 나혜석, 민태원, 김찬영,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김원주 등 12인(후에 변영로 참가하여 13인)과 함께 동인지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폐허는 2호까지 출판되었다. 1921년 4월 부터 1년간 경신학교에서도 지리와 역사를 강의하였다. 1922년부터는 주로 한국사상사와 지리도참 등 사상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일하였는데 촉탁(囑託)으로 있는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 류)을 도와 수사관보로 일했고,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임시직인 촉탁으로 해방까지 일하였다. 그러나 실제 조선사편수회 임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활동, 특히 촉탁으로의 활동은 사실상 이름만 올라 있었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 강의를 담당하였다. 1934년 5월 7일에는 한국과 근린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이상백, 조윤제, 김상기, 이병기, 손진태, 송석하, 이희승, 김태준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황국사관에 젖어 있던 일본 사학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한민족 고유의 국명인 ‘진(震)’과 단군의 ‘단(檀)’을 합해 ‘진단학회’로 하였다 는 진단학회 발기식겸 창립총회는 경성부 長谷川町(현 소공동 50번지) "푸라디아느" 다방에서 개최하였다. 같은해 11월 28일에 진단학보 창간호를 간행하면서 "삼한문제의 신고찰(1):진한급삼한고"라는 논문을 투고하고 그자신은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진단학회의 주소를 "경성부 계동 98번지" 자신의 집 주소지로 하였다. 또한 위의 진단학보 창간호에 "하멜표류기"를 번역하여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7일 진단학보 제2호를 발간했다. 1941년 4월부터 3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학강좌 담당 강사로 출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9월 진단학보 제14호의 발행을 끝으로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으로 진단학회가 자진해산한 뒤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다는 주장이 있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친일 어용 역사학회인 조선사 편수회를 계속 존속시켜 나갔다.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같은해 12월 동지들과 서지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지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일본인 교원이 전부 빠져나가고, 조선인만으로 운영되던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국대안의 제정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임명되어 사학과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간행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년 8월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54년까지 맡았다. 1953년 10월에 진단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재편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경성대학과 다른 관공사립전문학교들이 통합되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되었고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5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1956년에 김창룡의 묘비명을 썼다. 1957년 5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Research Council of Havard Yenching Institute)의 이사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이 되었다. 1959년 3월에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4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키는 한편, 대학 총학장의 교수직선제를 채택했다. 그해 8월에 사임하고 9월에 서울대학교대학원장 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4월에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3년 6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재선되었다. 7월에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10월에 3.1문화상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미국 학술원창립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다. 하바드 엔칭 연구소의 초청으로 특강하였다. 12월에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64년 4월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피선되었고 7월에 학술원 회장에 3선, 11월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4선으로 맡았다. 1965년 4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9월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원장이 되었다. 1967년 6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학술원 회장을 5선으로 맡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유학자들의 문집 등과 같은 고전의 국역 사업을 위해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위원회를 이희승, 김두종 등과 함께 발족하면서, 1965년 11월 6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회장에는 박종화가 추대되었고 최현배와 함께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 2월에 민족문화추진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 발족하면서 이사가 되었다. 1970년 4월에는 '삼국유사영역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이 되어 박준선, 성낙훈, 이팔범, 정인섭, 진인숙 등 위원과 함께 삼국유사 영역사업을 시작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회보 '민족문화'를 1966년부터 간행했는데, 그 창간호에 '고전국역의 현황과 전망'이란 글을 게재하였다. 제4호에는 '율곡집', '사변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대한 해제를 게재하였다. 이후 1977년 5월 11일 고전국역의 종합심의기구인 교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행한 고전 번역서 중에는 '연려실기술1'에 대한 번역을 맡았다. 1982년 2월 22일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1988년 4월 1일까지 재임하면서 고전국역자 양성과 고전국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고전국역후원회 결성하였고 민족문화추진회 사업의 장기발전을 위한 재정적 기반 마련하기 위해 정부에 재정지원을 촉구하여 1986년 7월 민족문화추진회 회관을 종로구 구기동에 마련하였다. '우리고전읽기운동'의 추진, 국역연수원에 일반인 대상의 한문강좌 개설, 고전국역상 제정, 한국문집총간 편찬의 업적을 남겼다. 1976년에 학술원 회장 8선이 되었고 이후 1980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1981년에 학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75년 10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다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에는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85년 11월에 민족문화추진회 창립 20주년 및 "두계이병도 이사장구순기념 특집호"(민족문화 제11집) 간행되었다. '두계 이병도 이사장 연보 및 논저목록'에서 연보, 상훈, 저술, 논문 목록, 訟壽의 글을 실었다. 특집호 '권두언'에 '고전의 현대화 작업 20주년을 맞으며'를 게재했다. 1986년 5월 9일 고려대학교 교우회 '교우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고대인'으로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9일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단군조선 실재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1987년 10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을 봉정받았다.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1989년 8월 14일 새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국병원에서 영면했다. 1991년 10월 10일, 진단학회는 중진 역사학자 39인이 기고한 책 "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歷史家의 遺香: 斗溪李丙燾先生追念文集(일조각)" 을 발간하였다. 2008년 4월 29일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사편수회 경력 및 그의 연구활동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4776명에 포함하여 발표했다. 2005년 서울대 학생단체에서 발표한 ‘서울대 친일인물1차12인 명단’, 2005년 고려대 총학이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에 포함되어 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 학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병도는 1950년대 이후의 고대사학계를 이끌어 나갔다.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 논문집에 〈남당고〉를 발표해 합좌제의 원형이 된 남당(南堂)의 실체를 밝히고, 고구려 국호 기원 문제를 해명하는 한편, 위만조선의 전개과정을 통해 위만이 조선계 인물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시작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사 ─고대편─》을 출간하여 고대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에도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와 국가 기원 및 사회 제도까지 연구를 확대하여,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출간하였다. 1977년에는 《삼국사기》에 역주를 달아 《국역 삼국사기》를 출간하고, 고대사·지리 도참과 함께 관심을 쏟고 있던 유학사를 연구한 성과는 1987년에 《한국유학사》를 간행하여 결실을 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며, 철저한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연구 태도와 엄격한 학풍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문헌을 기본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죽을 때까지 연구를 그치지 않았고, 왕성한 연구로 많은 저서와 다양한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면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병도의 제자들이 고대사학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면서 일부 민족사학계 인사 및 일반인들은 그의 후학이 한국사학계를 장악하였다고 비판하고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하여 일본 관학자를 도운 경력이 친일행위로 비판받았으며,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대학교(天理大學校)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제기되어 비판을 받았다. 이병도는 4대 대통령 윤보선과 사돈이다. 윤보선의 가문과는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병도는 윤보선의 삼촌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이병도, 이병묵은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영의 형인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했다. 또한, 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은 윤치오의 아들인 윤승선과 결혼했다. 이완용 이완용(李完用, 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로 평가된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폐망시켰다.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다.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며 , 일본제국에서의 작위는 후작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内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그는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 및 방치되다가 1979년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화장되었다.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석준(본명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는 신씨(辛氏)였다. 그리고 친형제로는 15살 터울의 큰형 이면용(李冕用) 등이 있었다. 그의 먼 직계 조상들은 고관을 역임했는데, 16대조 이교는 판서, 15대조 이방년은 밀직부사, 14대조 이순은 감사를 역임했으며 성종 때의 청백리였다. 11대조 이세명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한(李僴)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과 8대조 이우는 명예직인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제수(除授)되었는데, 그 후 이완용의 직계에선 더는 문무 양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 상태였고 가난했다. 이완용은 10살 때인 1867년에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됐다. 그의 양아버지가 될 이호준에게는 서자(庶子)와 딸만 있었을 뿐, 정실 부인의 아들은 없었다. 이호준은 당대 정계의 거물로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등 최고위 관료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으며, 그의 사위 조성하는 대원군의 측근이었다. 게다가 서자인 이윤용을 대원군의 서녀(庶女)와 결혼시켜 왕실과 이중삼중의 연을 맺은 명가를 만들었다. 더욱이 이호준의 직계는 대대로 노론이며, 인조반정 이후 조선 조정과 유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조판서 지낸 6대조 이만성은 우의정 이숙(李䎘, 1626년 ~ 1688년)의 차남으로 노론의 거성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만성은 어린 시절 숙부 이영(李翎,1615 ~ 1637)에게 입양됐는데, 숙부 역시 예학의 집대성자인 김집의 문하생이고 친조카가 당대 노론의 영수(領首) 이재였다. 특이하게도 이호준의 가계는 약 350년 전인 이승녕(李承寧)의 손자 때부터 후사 문제로 입양을 시작한 이후 8번이나 양자를 들였으며, 정작 어린 이완용의 입양을 원했던 이호준 자신도 어렸을 때 입양 온 양자였다. 유소년기 이완용은 머리가 비상하고 문리를 일찍 깨쳐 집안의 주목을 받았었고, 가난한 집 늦둥이 막내라 부모로서도 입양 결정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호준은 이완용의 친아버지 이석준과 족보상 32촌으로 매우 멀었는데, 입양을 허락해 준 보답으로 미관말직이나마 선공감(繕工監) 감역관(監役官-정9품) 자리를 알선해 줬다. 이석준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몇 년 안 가 별세해 벼슬은 거기에 그쳤다. 이완용이 입양되던 1867년은 병인양요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았고, 조선이 국제적 위협에 노출돼 민심이 한참 흉흉하던 때였다. 삼정의 문란이 계속됐고, 단지 수면 아래로 숨었을 뿐인 막강한 안동 김씨 세도가들과 흥선대원군의 암투가 이어지며 명성황후와 외척 민씨들까지 조정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예방승지(우승지)였던 이호준은 대원군의 최측근으로서 서울 조정을 비울 수 없었고, 더는 적통 승계를 미룰 수 없는 40대 중반이었다. 청소년기의 이완용은 당대 정치계의 거물인 이호준의 후계자로서 늘 다른 대감집 자제들과 비교당했고, 양어머니 여흥 민씨와 의붓 형제들 눈치를 보느라 반드시 여러 번 생각 후 조심히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늘 숫기없이 작은 목소리라 이호준은 어린 이완용에게 종종 "너는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 너무 적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자로서 처세에 대단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는 습관이니 고쳐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동료간에 모인 자리에서도 농담이나 객설에 구애받지 말고 하도록 노력해 보아라"고 타일렀다 한다. 이완용은 친아버지 이석준에게 소학(少學)까지 뗐고 입양 직후에는 서울의 노론계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는데, 누구 서당의 문하생이었는가까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이후 본격적으로 과거 준비에 들어간 이완용은 이호준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전의군의 선비 정익호에게 대학과 논어등 4서를 사사받았다. 13세가 되던 1870년 3월에는 한 살 연상으로 홍문관 부수찬(종6품) 조병익(趙秉翼)의 딸인 양주 조씨와 혼인했으며 16세 무렵에는 명필 이용희를 초빙, 친구와 함께 서예를 익혔는데 이때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전주에 부임해 이완용은 멀리 전주감영까지 문안갔다고 한다. 그의 전주행에는 글선생 정익호와 이용희가 동반할 때도 있었다. 21세 때는 평안북도 태천군의 선비 박세익에게 수년간에 걸쳐 시경, 서경, 주역 등 3경을 반복 강습받았다. 말수가 여전히 적었고 나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야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려 했고 꼼꼼해서 학업 성취도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한다. 이 사이 그의 친아버지 이석준과 양어머니 여흥 민씨가 차례로 사망해 몇 년간 시묘(侍墓)를 하기도 했다.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 별시에 병과(丙科) 18위(전체 28위 해당)로 급제한 후, 주서(注書-정7품)가 됐다. 증광시(增廣試)는 왕실에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만 치르는 과거시험이었는데 이완용이 시험 보았던 당시 축하할 일이란 청나라 개입으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고서 충주까지 피난갔던 명성황후를 청군의 경호속에 무사 환궁시키고, 반대로 대원군이 중국 톈진에 끌려가면서 고종(高宗) 부부(夫婦)가 다시 조정 실권을 차지한 일을 가리킨다. 갑과(甲科)나 을과(乙科) 급제도 아니고 그보다 급이 낮은 병과(丙科)에서조차 1등이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정7품으로 임명됐는데, 이는 이완용의 후견인이었던 아비 이호준이 발 빠르게 대원군과 손을 끊고 이미 민씨 정권과 손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호준과 함께 수구파로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기까지 양무 운동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게 된다. 이완용은 당시 젊은 엘리트라면 출세 가도에서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규장각 대교(待敎-정7품, 겸직가능)를 겸직했고 그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정6품),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정5품) 등 핵심 요직을 거쳐 외직(外職)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로 나갔다. 해방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호준과 이완용 부자가 원래 주군인 대원군과 완전히 손을 끊고 민씨 정권과 결탁한 상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해방영 설치를 주도한 것은 민영환으로, 그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 문제의 별기군 때문에 2년전 대원군에 의해 주살을 당했었다. 또한 민영환을 위시한 수구 내각은 개화파들이 주장해 설치됐던 병조 산하 조련국을 취소시키면서 대신 해방영을 설치했다. 1884년 음력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이완용은 해방영 주둔지에서 개화파의 집권, 그리고 그들의 3일 천하, 민씨 정권의 재집권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민씨 정권과 이미 손을 잡고 수구파가 됐으려니와 이완용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후계 수업에 바빠 개화파가 주장하는 것이 뭔지, 세계 정세나 시대적 당위성은 무엇인지 전혀 인식되어 있지 않았다. 1886년에는 중앙정계로 복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재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해 초보적인 영어, 과학, 경제학 등으로 재교육을 받으면서 비로소 신문물을 접했고, 이 때 뛰어난 성적으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정4품),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정4품) 등으로 승차했다. 이듬해엔 세자시강원(世子施講院) 보덕(輔德-정3품) 에 보임돼 왕세자 순종(純宗)을 가르쳤다. 이완용은 갑신정변 실패후 떨려나간 급진개화파들과 달리 민씨 정권과 등을 지지 않으면서도 신문물을 이해하고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신세대 인재로서 고종의 눈에 들었다.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과거 급제부터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실로 유례없이 빠른 승진이었다. 1887년에는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발령됐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등을 따라 요코하마, 하와이를 거쳐 미국 워싱턴 D.C.에 가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을 설치 후, 이듬해인 1888년초 병으로 박정양과 함께 소환됐다. 박정양은 청나라에 약속한 영약삼단(另約三端) 을 지키지 않아 문책성 인사를 당했는데, 그들은 귀국 후, 미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과 달리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미국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조정 여론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정작 미국 문명의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노예제 등 신분차별철폐, 헌법, 참정권 등의 입헌,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할 그 어떤 의견 표명, 노력도 하지 않았다. 불과 3~4년 전 갑신정변 실패후 신분차별 철폐, 양반 조세, 입헌군주정 도입, 의회 정치 논의를 했던 급진개화파들이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망명객이 돼 어떤 꼴로 고생하고 있는지 뻔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완용은 집권 세력이 자주 바뀌는 불안한 정국에서 이호준과 함께 보신에 급급한 정치적 입장에 섰고, 근대 국가 건설과 국제 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실한 인식이 결여된 상태였다. 1888년 음력 5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임명을 시작으로 이조참의·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1888년 음력 12월에 주차미국참찬관에 재임명돼 이하영 부부, 부인 양주 조씨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다시 워싱턴 D.C.에 갔다가 이듬해 12월에 주미대리공사로 승진 후 총 2년간 근무했다. 주미공사관의 이전을 지휘했고 재임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회담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워싱턴에 체제중이었던 윤치호가 <워싱턴 이브닝 스타紙>등 현지 신문에 실리는 이완용 및 대한 제국 공관 소식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 것이 남아있다.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간 문과 동기 서재필이 거지꼴에 갖은 인종차별을 견디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에서 다시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형조참판)·공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우부승지·내무참의등 각종 요직을 역임했고 대한제국 내각의 대미협상을 도맡았다. 특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 재임당시 미국에서 겪은 것을 바탕으로 근대교육개혁을 주도했는데,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조선의 국립대 격인 성균관의 커리큘럼을 개편해 지리, 산술, 과학등 서양 학문 이수 과목을 신설하고 정기적인 시험 제도의 개정을 주도했다. 이는 정부 주도로 이뤄진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였다 할 수 있었다. 1893년엔 친어머니 신씨(辛氏)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모친상을 지키길 1년여, 이듬해인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태평천국운동을 떠올린 고종과 조정 대신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곡창 지대인 삼남 지방 일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 동학운동의 근대사적 의미는 후일 역사가들의 평가이고 당시 고종과 조정 대신들의 인식으로는 역성 혁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 농민 봉기에 불과했다. 곧 그들은 동학 시위를 흥선대원군과 결탁된 반역 작당 쯤으로 몰아붙였다. 용인에서 친어머니 산소를 지키고 있는 이완용으로서도 위기가 감지됐으나 양아버지 이호준의 처분과 결단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94년 6월 고부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수구파 일색의 조선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호응하여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반도로부터 동시 철수를 주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이 자동 파기되면서 일본이 참전했다. 조정 대신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고 이제 사태는 그들의 손을 떠났다. 경쟁하듯 동학 농민군을 죽이던 청일 양국은 곧 직접 충돌했고, 육해전에 걸친 몇번의 공방전 끝에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의 패전으로 양무 운동식 근대화의 한계가 드러났고, 12년전 명성 황후 환궁때부터 청나라와 결탁 중이었던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다. 이완용 부자 역시 수구 정권의 핵심 인물들로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했으며, 과거 대원군을 버렸듯 다시금 말을 갈아타느냐 아니면 같이 몰락하느냐의 기로에 놓였다. 1894년 8월 청일전쟁에서 청국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승기를 잡은 일본의 비호 아래, 박영효 등 갑신정변 실패 후 도쿄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들이 조선에 돌아왔다. 그들은 청에 의존했던 민씨 정권을 쫓아내고 2차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갑오경장 혹은 갑오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개화파들은 이호준과 이완용을 같이 숙청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완용 부자는 아직 개화파 내각이 불안정하고 또 그들이 단 3일만에 몰락했었던 10년 전 갑신정변의 예도 있으므로, 이완용이 아직 친모 산소를 지키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일단 정국의 혼란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승리를 확정한 일본의 보호 속에 개화파의 개혁이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자, 이완용은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중추원의관으로 내각에 참여한다. 1895년 음력 7월,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났다. 고종과 민씨 외척 등 친위 세력들은 박영효와 개화파에게 명성황후 시해 책모 등 역적 누명을 씌워 조정에서 쫓아냈다. 갑오개혁 당시 박영효의 13만 8천 자(字)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은 고종과 조정 대신 및 지방 민심을 전혀 잡지 못했고, 외형상 개혁이 진행되는 듯 보였던 것은 일본의 눈치를 본 수구파들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러시아에 뺏겼다. 조선 조정에 일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자연히 개화파의 위세도 땅에 떨어졌다. 졸지에 다시 역적들이 된 개화파들은 기약없는 일본 망명길에 올랐고, 조정의 관심은 이제 외교적 위압만으로 일제를 누른 러시아와 미국으로 쏠렸다. 새로운 근대화 모델도 찾아야 했다. 1895년 8월, 고종의 어심(御心)을 읽은 이호준은 국제 경험이 있는 이완용을 보내 러시아에 접근시켰다. 이에 이완용은 정동파에 가담해 러시아 세력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안간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개화파가 조직했던 훈련대 소속 사병들이 민씨 정권의 탄압에 반발, 일본과 공모해 일을 벌였다. 스스로 낭인으로 자처하는 일본 극우들의 칼에 경복궁 건청궁 마당에서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었고 나라의 존엄인 궁궐은 처참하게 유린됐다. 수구파 이완용 부자도 목숨이 위험했는데, 사변 당시 그는 주한미국서기관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했다.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일 개화파 내각을 복귀시키면서 을미개혁을 추진했지만, 직후 러시아가 사태에 적극 개입하면서 다시 물러났다. 고종과 수구 내각은 일본과 개화파를 조선에서 축출하기 위해 1896년(건양 1년), 미온적인 미국 대신 주한러시아공사 카를 베베르와 함께 아관파천을 기획했다. 1896년 음력 2월 11일 이완용 등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고종은 의도대로 아관파천을 단행시켜 러시아 공관에서 왕세자와 1년여를 보냈고 자연히 친일 개화파들은 조정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제 이완용은 외부대신(外部大臣)에 임명되어 대한 제국의 러시아 협상까지 전담하게 됐다. 이 때문에 훗날 그를 친러파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고 당시 손가락질도 받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견제에 적극적이었던 러시아를 이용하기 위한 것 뿐이었고 러시아와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남도 미국에서 유학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러일전쟁 전까지 행적을 보더라도 그는 친미파(親美派)였고, 후일 친일파로 변신한 후에도 러시아어는 고사하고 아는 일본어는 천황폐하만세 뿐이었다. 일본인들과는 영어를 쓰거나 일본어 통역을 항상 대동했다. 이완용은 아울러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등을 겸직, 제국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데 이는 러시아를 이용, 일본을 견제하고 근대화를 이뤄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으려던 고종과 신내각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완용은 과거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1차로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이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의회 제도나 공교육 체계, 그리고 불과 5일만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 갈 수 있게 해준 대륙횡단철도 등 미국식 문물을 경험하면서 친미파가 됐지만, 수구파답게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한 강제 개항 방식에는 그 역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도 당연히 멀리했으며 왕정을 지지했고 공화정 모의를 경계했다. 한편, 일본이 조선 반도에서 영향력을 잃고 러시아의 개입이 본격화되기 직전까지 조선 반도에는 잠시나마 힘의 공백이 생겼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광무 연호와 제위를 허락했다. 이에 수구 내각은 대한제국을 급히 수립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등 각국의 승인을 얻었으며 대내적으로는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는 국모를 죽인 일제에 대항하고 유교 질서를 수호하며 조선인다운 근대화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고 계몽하자는 취지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수구 내각은 갑신정변 때 쫓겨났던 개화파들 중에서도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친미국파에 한해서만 독립협회에 가담시켜 이완용 등과 계몽강연 활동에 나서게 한다. 이완용은 특히 독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독립협회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는데, 다음은 그의 연설 중 일부분이다. 여기서 서로 싸우거나 해치지 말자는 의미는 협회내 대다수인 수구파 출신과 소수 친미 개화파 출신의 단합을 요구하는 의미가 크다. 그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으로, 조선 사대주의 구태(舊態)의 상징으로 지목됐던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그야말로 독립협회 내 핵심요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점차 친미 개화파 계열의 윤치호, 서재필 등이 국민 투표를 통한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며 황실과 유생(儒生)들의 경계와 이목을 끌자 독립협회 내에는 균열이 생기고 계속 파열음이 들렸다. 원래 왕정 지지자였던 데다가 자칫 역모의 죄까지 뒤집어쓸까 저어한 이완용은 협회 명단에 이름만 남긴채 모든 간부직을 자진 사퇴했다. 독립협회의 모토이자 하부 청년조직인 협성회에는 장남 이승구(李升九)도 창립회원으로 활동중이었는데 이완용이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도피 유학까지 보내 버렸다. 얼마안가 아관파천 등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 제국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됐다. 그들은 대한제국 승인 대가로 각종 이권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내정간섭했다. 당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이상 국제 사회에서 위신이 떨어져서는 안됐다. 이완용과 대한제국 내각은 자칫 러시아의 침공 위험을 무릅쓰고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양도 요구를 거부했으며, 군사교관을 보내겠다 일방적으로 통보해왔을 때에도 강력히 거부했다. 황실과 내각은 미국통이었던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의 주장대로 미국 쪽으로 줄을 댔다. 아관파천 때 이완용을 도왔던 주한미국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을 통해 각종 이권을 헐값에 넘겨 어떻게든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해보려 했고, 아울러 러시아 세력 일소 목적의 2차 파천 계획, 소위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제안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외교기조는 고립주의였고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우려,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각종 이권을 매우 헐값에 마구 넘겼음에도 미국이 제 잇속만 차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완용의 능력은 결정적으로 의심받게 됐다. 한편, 러시아는 조선의 대미 접촉에 분노와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1897년 7월 20일 이완용을 학부대신(學部大臣)으로, 재차 9월 1일자로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시켜 중앙 정계에서 축출시켰다. 좌천 이튿날인 9월 2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Speyer, A. de.)는 고종(高宗)에게 '(이권을 넘기지 않으면)궁궐 경비병을 철수한다','제2의 아관파천을 하겠다'는 등 협박했다. 미국인 헤링턴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1898년 3월 11일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전북 관찰사로 좌천됐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그나마도 파직될 뻔했으며 그해 7월 11일에는 아예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년 2월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정1품)이던 아비 이호준이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고종 황제는 총신 이호준의 후계를 잇게 하려고 급히 이완용을 사면복권시켜 궁내부(宮內部)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 올렸다. 이호준은 얼마안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3년 부친상을 위해 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 해 정계를 다시금 떠났다. 이호준은 양아들이나 적장자인 이완용에게 자신의 모든 정치적 지위와 집안 제사를 잇게 했고, 서자이긴 하나 친아들인 이윤용에게는 자신의 장남으로서 막대한 재산을 모두 물려줬다. 이완용은 빈손으로 가솔들을 이끌고 양아버지의 고래등같은 저택을 떠나, 남대문 밖 잠배골(), 즉 당시 한양의 어물전이 몰려있던 칠패시장 근처에 그리 크지 않은 집을 구했다. 잠배골은 현재 아현역과 서울역 사이에 자리한 지역으로 당시에는 번잡하고 못사는 동네였으나 구한말 최초로 설렁탕 전문 식당들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 1904년 2월 이완용은 3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었다. 그는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자리에 올랐다. 인생 최대의 기로였다. 이때까지 이완용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정치적 결단은 이완용이 독자적으로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져가는 시점으로, 당시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승리에 국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시간이 없었다. 일제에 대한 마지막 보루로 대한제국은 다시 한 번 미국을 택했고, 이완용을 재기용해 미국공사관으로 재차 파천할 목적으로 미국과 비밀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이었던 필리핀과 북태평양의 지배를 굳히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할 필요가 있어서, 이미 몰래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체결한 상태였다. 이권을 마구 넘겨줬던 보람도 없이 미국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대한제국은 더이상 빌릴 외세의 힘조차도 없었다. 이완용이 스스로 내린 결론과 정치적 결단은 이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즈음 이완용이 남긴 말이다.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이제 일본의 철저한 대리자로 변신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의 주권을 멋대로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에 이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착복했던 부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엄청난 특권과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원래 친일이었던 개화파, 일본을 경계하던 수구파 가릴 것 없이 조정에 남은 자들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친일파가 되었고 일제에 협조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협박, 을사늑약에 서명하게 했다. 많은 유생들이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벌하라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는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도로 찾으면 된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을사늑약으로 이완용이 과거 1888년 1월 19일 손수 마련했고 1889년 2월 13일에 이전할 때도 직접 참여했었던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이 단돈 5달러라는 푼돈에 일본에 강제 매각됐다. 워싱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일본 등 10여 개의 모든 재외 공관이 일본에 즉시 양도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대한제국과 일제의 강제 병합은 시간 문제였다. 1905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을 겸직하고, 1907년 초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으며, 조선 근대화 작업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에 유임됐다. 1907년 6월에는 일본과 본격적인 강제병합 준비를 위해 내각 체제가 개편됐다. 이완용은 개각 후에도 총리대신 직에 추천됐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토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수락한다. 1907년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면서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다. 하루는 이완용이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의 처형을 순종황제에게 주청했다. 허위는 황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간부 출신으로, 1898년 6월 30일부터 같은 해 11월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동시 해체될 때까지 보부상 등을 시켜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했던 독립협회를 해체하기 위해 각종 사보타주를 가하는 등 황실의 더러운 심부름을 했던 전력도 있었다. 어찌보면 황실로서는 공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사형 주청 사실이 알려지자 옛 황국협회 지지자들과 화가난 민중들이 몰려와 그의 집에 불을 놨다. 그래도 이때는 조기에 진압하여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의 대부분을 지켰다.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취임 초 자신들에게 향하던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역대 당쟁 희생자들로 역적의 오명을 쓰고 축출됐던 남인, 북인등의 복권을 시도한다. 비록 노론이 벽파 시파로 갈린 것도 백여년 전, 그나마도 외척 세도 정치를 지나 아예 조선의 문을 닫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 문벌들의 뿌리가 되는 노론계의 집단 반발이 잠시 있었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 정치를 모방한 사면 이벤트에 국권 침탈을 놓고 고조되던 양반들의 분노를 흩어놓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단, 정여립의 대동계와 서학(천주교) 관련자 등은 배제됐다. 1908년(융희 2년) 4월에는 예정대로 77명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이완용 등의 건의로 사면복권된 명단은 아래와 같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 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을 통해 열강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조선 식민지화를 인정받았다. 이에 일본은 제1차, 제2차 한일 협약과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다.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고종은 1907년(광무 11년)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해당하는 세 명의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해보려 했으나(헤이그 특사 사건) 결국 좌절해야 했다. 일본이야말로 자기들 뜻대로 순풍에 돛단 듯 가는 줄 알다가 불시에 크게 놀라, 일본 내에서도 당시 온건파로 분류되던 이토 히로부미 등을 질책하는 여론이 일어났고, 원래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 한국 병합을 서둘렀다. 일본은 이완용과 친일 단체들을 앞세웠다. 이완용과 일진회(一進會) 송병준 등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를 강요하여 순종이 일본의 각본대로 즉위했다. 고종 퇴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거들을 탄압하고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이완용은 주한주차일본군사령관(駐韓日本軍司令官)이자 통감대리였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 ~ 1924)와 긴밀히 협의했다. 이완용은 수구파 출신이라 아직 일본 정부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데다 송병준의 일진회와 경쟁 관계에 있던 터라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제도, 즉 조선인 앞잡이로 일본 헌병과 함께 항일의병들을 토벌하게 제안까지 했다. 이는 곧 채용돼 곳곳에서 의병들이 학살당했다. 1907년 7월 19일 이완용은 양위에 관한 고종의 조칙이 내려진 당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런데 의식을 주관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아 차질이 생겼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이래 1차로 일본에서 10년을 보냈고, 갑오개혁의 실패로 다시 12년 간을 일본에서 망명하면서 불과 1개월전까지 도쿄에 있었다. 그런 그를 친일파 박제순이 주선해 사면시켰고, 귀국 즉시 금릉위 에 복직되고 궁내부 대신에 막 임명된 참이었다. 이 모든 것은 개화파의 거물이자 왕실 친척인 박영효가 한일병합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서 였지만, 그는 일본과 친일파들의 기대와 달리 양위만은 막고자 조선통감 이토와 이완용 사이에서 무던히 애를 썼었다. 양위가 확정되자 그는 다시 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이완용은 박영효의 공석을 맡아 궁내부대신 서리로서 양위식을 강행한다. 1907년 7월 20일 순종 즉위식으로 공표된 그 시각,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 km 거리도 안되는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1차 화재 때와 달리 서울 시내의 경비력과 치안력이 양위식 때문에 모두 덕수궁 쪽으로 집중됐던 탓으로 시위 및 화재에 미처 대처할 수 없었다. 당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과 집안 패물까지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거의 전재산이 불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그가 집안의 적장자로서 제사를 모셔야될 조상들의 신주까지 몽땅 불 속에 사라지는 바람에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했다고 한다. 성난 군중들의 방화로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그들에게 쫓겨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왜성구락부로 몸만 피했다.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이완용과 친일 관료들은 덕수궁에서 순종 즉위식을 주관 중이었다. 즉위식 당일, 일본에 대한 분노가 이완용에게로 옮아 붙으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화형식은 서울 말고도 전국 각지 백성들이 모이는 곳마다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순종 즉위식 도중 덕수궁으로 몰려온 군중들이 일본 헌병대에 가로막힌채 '이완용을 죽여라'라고 외치는 함성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사태를 깨닫고 당황했다. 그와 내각 관료들은 궁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쩔쩔매는데, 헌병대가 통과시킨 각 신문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을 속속 알려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헌병대의 호위를 붙여 이완용을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통감 관저로 갔다. 왜성대의 통감부는 1926년 광화문에 조선 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 초기 조선총독부 역할을 했는데 이곳에 먼저 피신 와있던 이완용의 부인 조씨는 후일, 피신 첫 1주일간 모든 비용을 이토가 댔다고 회고했다. 1907년 9월 이완용과 그 가족들은 왜성대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가 이제 의붓형 이윤용의 집이 된 옛 대저택으로 돌아갔다. 앞에서 기술한 대로 이호준의 모든 재산은 친아들인 서자 이윤용에게 상속이 됐지만 이완용은 이호준 사망 당시 상속권을 주장하지 않고 집안 제사를 직접 모시는 적자로서 의무만을 다해왔기 때문에, 비록 이윤용이 의붓형이나마 동생 가족의 편의를 성심성의껏 봐줘 더부살이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한다. 1908년 1월 의붓형집에서 서너 달을 지내던 이완용은 겨우 궁리끝에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직접 저동()에 있는 남녕위궁(南寧衛宮)을 자신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정치적 연출로 사태무마를 시도하기까지 이른다. 친일파들은 원활한 합병 절차 진행을 위해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의 거물 박영효에게 정치 참여 의사를 계속 타진했으나 그는 고종 양위 이후 일체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를 압박하기 위해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1860 ~ 1919)은 순종 즉위식에 나타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 조중응은 이완용의 처가쪽 친척이기도 했으며 이완용과 함께 올린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라며 사태를 완전 왜곡했다. 순종은 박영효 체포 상소를 일단 윤허했다. 이에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께 법부에 구속되었다. 이때 구속 수감된 박영효가 갑자기 배탈이 나 고생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토 통감이 그를 달래보려고 직접 약을 보냈으나 그는 한국에 약이 없냐며 물리쳤다. 그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을 역적이라 했을 뿐 나는 무죄다"고 강변했지만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렇긴 했어도 순종 황제는 제주도 밖으로 이동해도 죄를 묻지는 않겠다고 밀지(密旨)를 따로 줬다고 한다. 오래지나지 않아 박영효는 유배형에서 도성 출입금지령으로 감형, 1910년 마산에서 한일 병합의 비보를 듣는다. 그때부터 박영효 역시 조선에 대해 체념하고 후작 작위와 은채공사금 28만원을 받고 조선귀족에 편입된다. 친일파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이완용이 15만원, 박제순이 10만원이었다.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칠조약에 서명하여 내정권을 스스로 일본에 넘겼다. 정미조약 체결의 원흉인 정미칠적 명단에는 이완용의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삼촌인 사돈 임선준(任善準)의 이름 역시 확인되고 있다. 순종(純宗)이 정식으로 황제가 되자 이완용은 왕실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이완용의 추천대로,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황제의 막내 동생 영친왕을 결정했다. 당시 차기 대권의 유력 주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적장손(嫡長孫)이자 자신의 장조카 영선군과 장성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해,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했던 고종의 노욕과 이완용의 정략(政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의 대우와 주목을 받아왔던 영선군과 의친왕은 졸지에 황태자의 신하로 격하되었다. 한편 왕위계승문제에까지 개입한 그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시각은 악화됐고, 그가 권세를 부리며 온갖 참견을 시작하자 양위를 같이 주도하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게 됐다. 황실은 일제와 친일 내각의 거수기로 전락하게 됐으며 친일 내각이나마 조선인들이 다스리던 나라는 한일병합 후에는 총독부가 설치돼 완전히 일본인들에 의해 통치되는 망신과 굴욕을 겪어야 했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의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일본과 교환,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받았고 반(反)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특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일본 정부 요인들과 매국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이 곳곳에서 꾸려졌고 이완용은 언제나 그들의 1번 타겟이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됐다. 이완용은 11월 4일 서울 남산 장충단에서 열렸던 이토 통감 추도회에 침통한 표정으로 참석했다. 추도회는 일본 현지의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과 동시에 거행됐는데, 시종원경(侍從元卿) 윤덕영,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 대표 윤효정 등이 대표로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추도문을 읽는 자리에서 이토 공은 자신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極東平和論)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를 암살한 안중근을 조선인의 이름으로 맹렬히 비난했다. 1909년 12월 22일에는 앞서 17일에 사망한 벨기에의 레오폴 2세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이 이완용을 덮쳐 그의 옆구리와 어깨등을 순식간에 3차례 찔렀다. 그는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는 인력거꾼 마저 찔러 밀쳐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순사의 군도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그 자리에서 절명, 이완용은 곧바로 대한의원으로 후송됐다. 이재명은 이듬해 9월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및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이완용은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 와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쪽의 지병이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하여 평생 동절기마다 크게 고생했고 훗날 사망 원인이 된다. 1910년 8월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에 올려 뻔뻔하게도 황제의 면전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22일에는 스스로 전권위원에 올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조약체결후 곧 관직을 사퇴한 이완용은 조약문 5번 조항의 혜택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당시 일본돈 2원은 조선엽전 1천닢과 같은 가치였다고 한다"), 퇴직금 1,458원 33전, 조선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한일병합 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진행시켰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그해 7월 11일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1915년 10월 13일 조선농회 회두(會頭)로, 16년 7월 30일에는 이무회의 회두로 선출됐고, 1918년 5월 25일에는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됐다. 1919년 1월 15일에 고종 황제가 붕어했다. 시중에 독살설이 떠돌았는데,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고종의 승하(昇遐)와 국제 연맹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호응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역시 민족 지도자들로부터 동참을 요청받았으나 오히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탄압 필요성과 그 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경고문을 연달아 3회 발표하고, 3·1 운동이 불순세력에 의한 불순한 난동에 불과하며,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했다. 1920년에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줬다. 일제 치하에서 그의 입지는 일본 황실로부터 훈장과 작위를 받으면서 더욱더 확고해졌다. 1921년에는 조선인 귀족 명부 관리 기관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총독부 교육조사 및 산업조사위원,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등 친일단체들마다 깊숙히 간여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한반도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다. 1922년 3월 14일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923년 1월 6일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껴맞춰 해석,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을 정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거의 드문 부자(父子) 귀족이 되기도 했다. 이완용과 핵심 친일파들 몇몇은 일제시대 내내 승승장구했던 반면 다수의 귀족들과 나머지 양반들의 형편도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비참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당수의 귀족들이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상금을 받았지만, 일본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일어난 인플레이션으로 가만히 있어도 금방 돈의 가치가 떨어졌고, 그나마도 무위도식하거나 타락해서 방탕한 생활로 몰락해 가는 판이었다 대부분 세습 대토지로 사치를 누려온 그들이었지만,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공산품에 비해 농업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져가기만 해서, 계속 토지에 의존했던 그들 가운데는 이미 파산 지경에 이르러 품위 유지는 물론 생활조차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왕실과 연이 닿았던 이들중에는 창덕궁으로 몰려가 전 황제 고종, 순종 부자에게 가세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용돈을 타서 생활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1909년 이재명의 암살 미수 사건 때 폐에 상처를 입은 뒤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咳嗽)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일본에서 의사들을 불러 그 후로도 계속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으나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몸과는 반대로 그의 재산은 늘어나기만 했는데, 특히 땅 재산은 1억 3천만 평까지 불어났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왕을 제외하고 가장 부자라는 소문까지 있었지만 폐렴과 해소 증상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흉통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1925년에도 가을까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명승지 물염적벽을 유람하고 11월 하순에는 순종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다시 해소가 심해져 12월 5일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의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묘에서 열린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오래전 유실됐던 시조 이공정의 묘를 이완용이 손수 이것저것 챙겨 드디어 개축공사를 끝내고 원래 직접 제사를 지내려하려 했으나, 지병인 기침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 그후 얼마간 집에 들어앉아 요양을 해 어느 정도 호전됐다. 그래서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하게 된다.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조선 귀족 등록관청인 중추원도 새 청사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새 청사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 초대 총독이 입안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전 총독(2대)이 착공한 이래 9년만에 완공을 본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도 참석한다고 해서 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 부축을 받고 귀가 후 밤이 되자 기침이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고, 이내 졸도해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2월 11일 오전 오늘이 고비라는 소식을 들은 순종은 적포도주 한 상자를 이완용의 집으로 보냈다.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이완용은 옛 주인이 보낸 적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69세. 장손 이병길은 일본 유학 중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1926년 2월 12일,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엄수했고, 일황(日皇)이 하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正二位大勳位候爵 牛峯李公之柩)라고 적힌 장례깃발을 앞세워 호화로운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일본 순사들의 호위속에 종로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진 장례 행렬의 규모는 고종 황제 장례행렬을 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날, 매국친일(賣國親日)의 대가로 일본 황실로부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국화대수장은 일본 황실이 현재도 수여하고 있다. 역대 수훈자 목록에서 한국인의 이름은 현재까지 4명이 확인되는데, 영친왕 이은(李垠), 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차남 이우(李鍝) 등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하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란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완용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다. 해당 지역을 묘지로 택한 이유가 일설에 의하면 매국 행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인한 묘소 훼손이 두려웠던 나머지 1926년 당시에는 굉장히 궁벽한 벽지였던 낭산리 임야를 일부러 택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아 급기야 1979년, 직계 후손들이 아예 파묘(破墓)하여 그 유골은 화장했다. 현재 그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뀌어 그나마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1935년 당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됐다. 1945년 해방후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 장손주 이병길은 앞서 말한대로 6.25 전쟁때 행방불명되었으며 둘째 손주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큰증손자 이윤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이완용의 직계후손은 거의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아들 이항구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6.25때 행방불명된 장손자 이병길의 이름도 올라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간 장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조상땅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그들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임야 2만 5천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고, 다시 1998년 7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m(약 712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반환받은 토지는 즉시 제3자에게 매각, 약 30억원의 매매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 환수 재산 반환 소송을 여러 개 준비중이다. 2008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인 옛 대한의원 때 일본인 의사가 작성한 흉부외과 수술 차트가 발견됐다. 해당 기록은 1909년 12월 22일 피습 당일 이완용의 것이라고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가 18일 언론에 밝혔다. 이는 한국 의료 역사상 최초의 흉부외과 기록으로, 단순의료기록이라기보다 검사 측 요구로 재판에 채택된 감정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첫째, 일본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사실이나, 그에게 있어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 국가'로서의 독립보다는 왕실 보존 및 안위 문제로서의 '독립'이란 의미였다. 그 예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온갖 수를 다썼지만, 정작 미국을 본받아야 했던 보통교육, 참정권, 공화정, 노비 철폐 등은 전혀 도외시했고, 근대적 의회 정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가로서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근대 헌법 제정등에 전혀 한 일이 없다. 특히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내놓은 대한국 국제라는 것은 왕권의 전통적 절대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국민 모두를 아우를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둘째, 근대 개혁을 정부 주도로 하려했음에도 그 동력이 될 국가 예산이나 국가 재산 및 세수 확보에도 한 일이 없다. 수백년간 면세를 누려온 양반들, 특히 온갖 혜택을 독점한 문벌 세도가들이라던지, 왕실 종친들에게 사사로이 주었던 국가 전매 사업등, 근대화에 방해가 되는 사회 구조를 놔두고 이완용 등 수구파들이 한 짓은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일 뿐이었다. 여기서 받은 얼마간의 돈은 왕실 재정과 일부 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이권을 넘겨 열강들이 마구 국부를 유출해 가는 통에 정부 재정과 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판 후 대가로 불어난 그의 재산은 현재 추산 수조원에 달했고 가진 땅만 1억 3천만 평이 넘었어도, 을사조약 체결 직전 변명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그 때가서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었고, 후배들과 역사에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 셋째, 그의 리더십으로는 대한제국 정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政敵)들만 자꾸 생겼다. 이완용이 젊은 시절 주미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년간 그를 지켜봐왔던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또한,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가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펴냈는데, 《일당기사》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그가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고 입원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 마저 기록돼 있다. 그런데 친일파 문제를 연구해온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러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며느리와의 불륜설도 잘못된 사실이다. 친일파이자 매국노인 이완용을 배척한 민중들의 감정이 담긴 이야기일 뿐, 술과 이성을 멀리하고 서예와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완용의 손자이자, 자식없이 죽은 큰아들(이승구)을 대신하여 장손으로 입적한 자인 이병길도 친일파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넷째, 위의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은 마찬가지였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왕실과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넷째, 아래의 이른바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나라를 넘기는 조약 문구에 서명을 했음에도 실제로 고종과 순종 모두 그를 특별히 경원하거나 내치지 않았고 특히 순종은 이완용이 와병하는 동안 갖가지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그를 매국노라 매도하긴 쉽지만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지도자가 되어 이완용 같이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어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 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한편,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하마평이 있었다.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어와 서양 학문들이었을 텐데도 매우 우수한 학습 능력을 보여줬다. 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직을 지낸 시절, 각종 국민 계몽 활동에 열심을 냈고 독립신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렸던 과거가 있었고, 당시에 한해서는 그의 독립 의지가 진심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각종 이권 요구를 막아낸 이완용을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자 논설을 통해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이완용과 동시에 과거에 급제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부인과 젖먹이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미국으로 도망가 갖은 고생을 다했었고, 당연히 수구파의 좌장격인 이완용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 터였음에도 칭찬한 것이다. 물론 이완용이 이후,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하는 개화파 계열 독립협회원들을 공격하고 이내 협회내 모든 간부직에서 자진 사퇴하자 둘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수구파들을 대동하여 친일 개화파들과 짬짜미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고 일본에 나라를 팔자 서재필은 더 큰 증오와 멸시를 보내게 된다. 로마 신화 로마 신화 (— 神話; Roman mythology)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부분은 그리스 신화에서 그대로 옮긴 것으로 후기에 지어지고 기록으로 전해졌다. 다른 한 부분은 더 오래되고 종교적인 성격이 더 강했는데 그리스 신화와 매우 다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원시 로마인들에게는 신화다운 신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마의 시인들이 공화정 시대 후기에 그리스 시인들이 읊은 신화를 따라 읊기 전에는 그리스 신화의 티탄 전쟁이나 헤라가 제우스를 유혹한 일화와 같이 그들의 신들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가 없었다. 다만 로마인들에게는 등이 있었다. 간도 간도(間島, )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이섬(사잇섬)으로,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가운데 '사잇섬'이란 말 뜻에 비추어 '간도'가 본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중도(河中島)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두 강의 북안(北岸)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변형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이 지역(북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북옥저와 백산말갈을 복속한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삼국시대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과 6진을 설치했으나, 두 강의 북쪽으로 영토를 밀어올리지는 않았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1644년에 청 제국가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청(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의 위세를 실감한 조선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을 엄금하고 '월강죄'로 다스렸다.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 혼춘하) 등 여러 물길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한 땅이었으나, 만주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간되지 못했다. 게다가 청 제국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150년 가까이 이 땅은 청조 통치자들을 위한 수렵지이자 삼(蔘) 등 약재의 채집지로 독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서슬퍼런 봉금령도 부패와 혼란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00년 조선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청나라 역시 건륭제 말년에 화신의 전횡과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4년) 등 거듭되는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가 아편전쟁(1840년 - 1842년 / 1856년 - 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1년 - 1864년)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의 봉금령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단속을 피해 간도에서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주민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났다.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였고, 1883년에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에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만주 이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현상은 더욱 증가하였다. 20세기 초에도 일본 제국의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항일 운동을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2년에 일본 제국은 만주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간도를 관할하는 젠다오 성(間島省, 간도성)을 설치했다. 간도는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 등이 중국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천지(天池)의 남동쪽 4 km 지점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인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정계비에는 조·청 양국의 경계를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 하고, 정계비는 그 분수령에 세워졌음을 명기하였다.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穆克登)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는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 1800년대 초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강(두만강)의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과 청나라는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 1903년(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년 10월 - 1905년 5월)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07년 8월 23일,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중 변계 조약을 체결하여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0년대에는 한국 사회에서 간도 협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100년이기 때문에 2009년 9월에 그 시효가 완성된다는 일방적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사실인냥 유포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도청 소재지 대한민국의 도를 관할하는 도청 소재지(道廳所在地)는 다음과 같다. 오다와라번 오다와라 번()은 에도 시대 사가미 국 아시가라시모 군을 지배했던 번이다. 번청은 지금의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시에 있는 오다와라 성이다. 덴쇼 18년(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로 사가미 고호조 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멸망되었다. 이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에 들어와서 간토・도호쿠 일대를 압박하기 위해 후다이 다이묘인 오쿠보 다다요를 오다와라 성주로 삼았다. 그 영지는 아시가라카미 군・아시가라시모 군 내의 147개 촌 4만 석이었다. 분로쿠 3년(1594년) 다다요가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 오쿠보 다다치카가 그 뒤를 이어 오다와라 성주가 되었고, 동시에 무사시 국 하뉴에 2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이후 다다치카는 로주가 되어 막부 내 수뇌부로 들어갔으나, 게이초 19년(1614년) 막부 내 수뇌부 간의 권력 항쟁에서 패하여 영지가 몰수되었다. 이때 오다와라 성은 철거되었고, 이후 5년 간은 막부에서 임명한 조반()이 관리하는 번성(. 본성 직속의 성으로 성주가 따로 없는 성)이 되었다. 겐나 5년(1619년), 가즈사 국 오타키 번주 아베 마사쓰구가 5만 석으로 오다와라에 들어왔으나, 4년 후에는 무사시 국 이와쓰키 번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오다와라 성은 다시 번성이 되었다. 대신 간에이 9년(1632년), 시모쓰케 국 모카 번으로부터 이나바 마사카쓰가 8만 5천 석으로 들어왔다. 마사카쓰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유모 가스가노 쓰보네의 아들로, 마사카쓰 이후에는 마사노리·마사미치로 대가 이어졌다. 이들도 모두 막부의 로주에 취임하였다. 이 이나바 가문()의 대에 번의 치세가 확립되었다. 이나바 가문은 조쿄 2년(1685년) 에치고 국 다카다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듬해 조쿄 3년(1686년), 시모사 국 사쿠라 번으로부터 오쿠보 다다토모가 10만 3천 석으로 들어왔다. 다다토모는 오다와라 번 최초의 번주였던 오쿠보 다다요로부터 5대째에 해당하는 오쿠보() 종가 당주였으며, 당시에는 막부의 로주로 있었다. 이후 막말과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오쿠보 가문의 지배가 10대에 걸쳐 이어졌다. 오쿠보 가문의 역대 번주 대다수가 막부의 요직에 진출해 활약했으나, 그로 인해 지출도 겹쳐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호에이 4년(1707년)에 후지 산의 분화로 영내의 넓은 범위에서의 농사가 곤란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번 내 영지 중 피해가 심각한 스루가 국 슨토 군 및 사가미 국 아시가라카미 군・아시가라시모 군・유루기 군・고자 군 등지 내의 197개 촌 약 5만 7천 석이 막부 직할령이 되었고, 이들 각 촌은 부흥된 이후 오다와라 번으로 환수되었다. 그 기간 동안 오다와라 번은 다른 지역을 영지로 받았다. 메이지 2년(1869년) 7월 25일의 판적봉환으로, 오다와라 번은 메이지 정부의 행정구획으로 개편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8월 29일의 폐번치현으로 오다와라 번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오다와라 현이 설치되었다. 그해 12월 25일, 오다와라 현은 폐지되어 오기노 야마나카 현() 및 니라야마 현()과 통합되어 아시가라 현()이 되었다. 아시가라 현은 후에 가나가와현으로 흡수 합병되었고, 폐번치현 이전까지 있었던 오다와라 번의 스루가 국 내의 영지는 시즈오카현으로 편입되었다. 오쿠보 가문 아베 가문 이나바 가문 오쿠보 가문(재봉) 조선 선조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 (재위 1567년~1608년)이다.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다가 1616년 8월 4일 개정되었다. 그의 성은 이(李), 휘는 연(昖), 초명은 균(鈞),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성상(聖上) 즉위전의 작위는 하성군(河城君)이었고, 존호는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 시호는 현문의무성예달효(顯文毅武聖睿達孝) 이다. 묘호와 명나라시호, 그리고 존시를 합치면 선조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승통으로 인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는 생애 후반 계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앉히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 유영경 등이 이를 지지하였다. 이는 그대로 북인의 내부 분열과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1567년 8월부터 1608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 8월에서 이듬해 1568년 2월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청송 심씨가 섭정을 하였고 1568년 2월에서 1568년 3월까지 영의정 이준경이 한 달 간 섭정하였으며 1568년 3월에서 1606년 1월까지 친정하였고 1606년 1월에서 1608년 3월 훙서(薨逝)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세자 신분으로 2년 2개월간 대리청정을 하였다. 선조는 1552년 음력 11월 11일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 초(岹)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균이었으나 이연으로 바꾸었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순회세자가 요절한 뒤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곧 후사로 낙점되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 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하성군 이연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성군이 왕이 된 이유가 담겨있다. 어느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하원군, 하릉군)들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은 현직 왕의 익선관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삼가 물러났고, 이러한 하성군의 겸손한 태도는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진다. 선조의 즉위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가 즉위한 첫 사례였다. 그러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였다는 사실은 평생 선조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이는 계속되었는데, 훗날 1878년(선조 11) 5월 11일에는 덕흥대원군사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놓고 토의하던 중, 경연관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칭했다가 선조는 크게 분노하였다. 선조는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대놓고 지적하자(安嬪是妾母) 불같이 화를 냈는데, 좌의정 홍섬이 겨우 변호하여 선조의 진노를 가라앉힌 일도 있다. 그러나 이후로도 허봉은 창빈 안씨를 가리킬 때 첩, 첩부인이라는 표현을 썼고, 선조는 노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선조는 허봉을 처벌하려 하지는 않았다. 선조는 재위 도중 여러 번에 걸쳐서 생부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명종은 순회세자 사후 자신의 잠재적 후계자로 덕흥군의 3자 하성군을 지목했고, 이를 받아 적은 이들은 후일 누군가 글자의 위조할 것을 염려하여 三이 아닌 參자를 썼다. 하성군 외에도 선왕의 자손은 존재했으나 해안군과 덕양군은 모두 전왕 명종의 이복 형이었다. 명종 22년 (1567년) 음력 6월 28일에 명종이 평소 앓고 있던 병이 위독해졌으므로, 대신들이 입시하였으나 명종이 말을 할 수 없었고, 2년 전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은 일이 있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인순왕후는 왕의 유지를 받들어 하성군의 입궐과 어보 전달을 지시한다. 명종은 생전 그가 총명하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정승 이준경은 '그가 명철하기는 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다. 예의가 바르기는 해도 절대 겸손한 성품은 아니다' 라는 평을 남겼다. 1567년(선조 즉위년) 선조는 음력 6월에 즉위하였다. 그렇지만, 명나라는 바로 선조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칙서를 내려주지 않았으며, 그동안 선조의 지위는 조선국 권서 국사(朝鮮國權署國事)였다. 그해 11월에 명나라는 드디어 책봉고명을 내려, 선조는 정식으로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즉위 초반에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여러번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사림파 선비들이 송나라의 복안의왕과 안희수왕, 전한의 정도공왕에 대한 고사를 들며 이를 반대하여 성사시키지 못했다. 즉위 직후부터 인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의 영향권 안에 머물렀으나, 선조는 사림 출신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고, 또한 그들을 통해 친정을 유도하게 함으로써, 인순왕후를 일선에서 물렸다. 인순왕후 퇴진 직후, 이이 등이 부패한 재상 심통원 을 탄핵하자 선조는 그를 바로 숙청했다. 나아가 이러한 선조의 즉각적인 행동은 심통원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데 대한 감정도 또한 작용했다. 이어 선조는 김효원 일파가 심의겸을 공격하자 심의겸을 외직으로 축출해버렸다. 대비의 친정 일족을 제거한 소년왕의 의외의 거친 면모에, 어린 왕이라는 이유로 선조를 깔보던 신하들은 경악하였다. 선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 사회는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는 주자학의 보급을 장려하였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인사들을 신원복구하였고, 을사사화로 귀양가 있던 노수신·유희춘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인 남곤·윤원형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거나 삭훈(削勳)했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성운 등을 등용했다. 이황을 신뢰하고 그의 정치철학을 적극적으로 따르다가, 퇴계가 죽자 이이를 신임하였는데, 율곡에 대한 정치적 지원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잠저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선조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였고, 1585년에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訓解)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삼경의 음석언해(音釋諺解)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윤두수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이산해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건저 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뉘었다. 선조는 정철을 처벌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동인 내에서도 정철을 죽이자는 주장과 정철을 죽이는 데 반대하는 의견이 서로 나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는 북인, 정철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는 온건파는 남인으로 분리된다. 남인은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동인의 분당에는 우성전의 기생에 대한 파격적인 총애 역시 작용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평소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 선조는 우성전의 상중에 기생이 출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정철과 서인 관련 문제를 선조는 어떻게 처리할지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동인 내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 안건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었다.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 동인의 내분과 파벌 대립이 강화되자 선조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 뒤 선조 집권 후반의 정국은 류성룡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인계열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쏟아져나옴으로서 전란 직후 북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선조대에는 집권당이 서인-동인-남인-서인-북인으로 집권세력을 교체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는데, 이는 후일 환국정치의 모범이 된다. 이와는 별개로 선대 임금이 숙청시켰던 윤임의 5남인 윤흥신을 사면 및 복권시켜줬다. 그 윤흥신은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을 막기 위해 목숨바쳐 싸웠다. 대내적으로 붕당간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여진족과 일본의 외침이 있었다. 1583년 니탕개를 중심으로 회령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경기감사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로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했다. 또한 1587년에도 니응개(尼應介)가 이끄는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듬해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을 시켜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편 선조는 1590년 황윤길·김성일·허성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자신의 천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사신이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이라고 통고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鎭營)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곳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상황에 대해 비어있는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친 행동에 대해 매우 어이없어했다. 센고쿠 시대당시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는데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게 선조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이 이순신·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류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류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선조는 류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위에 적힌 원균의 10살 아들의 모함에 관한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먼저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내용이다. 하지만 3년 전의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위의 언급과 달리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직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 때를 노리고 왕족 서얼인 이몽학은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장정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 이 반란은 결국 홍주 목사 홍가신에 의해 진압되긴 했으나 선조는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선조는 전쟁의 와중에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개탄했고, 동인이 다시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료끼리 헐뜯고 규탄하자 동인을 불신하고 서인 정철 등을 등용한다.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지원군을 더 파견하자는 조정 중신들의 의견과 달리, 정직과 성실로서 상대해야 된다며 뇌물 제공 거부의사를 명백히 밝힌 역관 홍순언을 신뢰, 총애하기도 하였으나, 홍순언은 중인 출신의 역관이라는 이유로 조신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후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과 탄환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하였다(정유재란).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임진왜란 직후 조총과 화승총 기술이 발달했고, 선조는 왜군과 명나라가 남기고 간 군사 무기를 수집을 명하여, 병장기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納粟)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천민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宮房)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왕자·옹주 23명에게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되었던 어전(漁箭)·염분(鹽盆)·시전(柴田)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倭館)을 열어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그이전 선조는 여진족을 정벌하기위해 북벌을 감행하게 되는데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7월 5일(임자) 1번째기사 에 의하면 여진족은 함경도를 넘어 수시로 약탈을 감행하여 백성들이 크게 힘들어하는데 선조는 32년(1599년)7월 5일에 여진족 토벌을 추진하게되고 윤승훈은 크게 반대를 하지만 선조는 끝내 반대의견을 뿌리치고 북벌을 감행함으로써 1600년 4월 기병5천을 중심으로 노토부락 정벌을 감행한다.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4월 14일 초저녁에 좌위, 우위, 중위 3갈래로 나뉘어 좌위는 어유간(魚游澗)에서 중위는 함경북도 무산(豊山)에서 우위는 풍산(茂山)에서 각각 나뉘어 진격한다. 여진족 복병 4~5명이 조선군 척후를 발견했고 이들은 즉시 달아나 온 부락에 침공사실 알렸다. 조선군 기병5천은 적들의 노토부락을 공격하여 여진족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해서 지붕의 풀은 타도 벽은 불에 타지 않았는데 조선의 정예병은 도끼로 다 때려부수고 다시 태워서 방한칸 남기지 않았고 무려 1천채가 넘는 집을 한꺼번에 태우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았으며 땅속에 묻어둔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고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밞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도 태워버리니 그때까지 다른 부락과는 비교가 안되는 넉넉함을 누리던 노토부락 예하 6개 마을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고 여진족은 도망가기에 이른다.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으나, 반면에 여진족은 참수된 군사들만 115명에 이르렀다.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선비들은 선조의 이런 면을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 >선조께선 북로(北虜, 여진) 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는 생전 초상화 그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런데 전란의 혼란 중, 누군가 전립(戰笠)과 군복을 착용한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윤탁연이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왔다. 윤탁연은 자신의 일기인 관북일기 책 속에 선조의 초상화를 보관해두었고, 후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서자의 후손으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가지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결국 왕세자로 승인한다. 중풍으로 인한 증세가 악화되어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남기고, 아침 식사를 겨우 먹은 뒤 55세를 일기로 재위 40년 7개월 간의 치세를 마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마지막 수라를 준비하던 궁녀 중에 김개시가 있었다. 이후 그가 죽기 전에 먹었다는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끝내 임금으로 추존하려다가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 덕흥대원군을의 묘를 덕릉(德陵)이라 불렀는데, 선조는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 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선조는 전쟁 후 전란을 수습하면서 많은 대군(왕자),옹주(공주)들이 넉넉하게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선조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토지 궁방전 정책을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조선 후기에 농민 봉기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궁방전을 관리하는 관리의 만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국가의 권력을 지고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토지에 가서 멋대로 장부에 기록하면서 땅을 빼앗았고 산을 개척하여 토지를 만든 농민의 땅을 국가의 땅이었다는 이유로 빼앗았고 이에 거절하면 관아에 가서 국가의 재산을 뺏은 자라는 명목으로 처벌을 하고 토지를 뺏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 번째로, 백성의 생필품에 대한 비리를 저지른 것 인데 이들은 토지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서 백성들의 필수 품목인 땔감을 패러 갈 때마다 지금 이 산은 왕가의 토지이니 입산 료와 땔감 비를 내라고 협박하는 식의 만행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제 공사를 시키고는 품삯도 안주는 등의 횡포를 저지르자,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세 번째로, 이렇게 뺏은 토지 혹은 강제 동원하여 개간된 토지를 소유하게 된 왕실의 자손들은 왕가의 특혜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고 비리를 많이 저질렀으며 언관들이 이에 대해 아무리 상소를 하여도 왕은 이걸 묵인 시키는 관행이 생겨나면서 결국 조선 국고의 낭비가 이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반기에 들어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 중에 하나로 속하게 되는 잘못된 정책으로 평가된다. 선조가 1608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에 승하하자, 명나라에서 시호를 소경(昭敬)으로 올려주었다. 묘호는 선종(宣宗)이라 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한 공로가 있다는 점과 새 왕통을 시작하는 군주라는 광해군의 뜻이 감안 되어 1616년(광해군 8년) 8월 4일 선종에서 선조(宣祖)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내 경역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목릉은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의 목릉에는 의인 왕후의 유릉(裕陵)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로 능을 건설할 여력이 없었던 탓으로 정자각을 선조의 능침 쪽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훗날 조선의 정치와 경제 등 모든 것의 발목을 잡는 붕당정치를 묵인한 최초의 왕으로 비판을 받는다. 서자 출신의 정통성이 취약한 왕이라는 것 때문에 왕권에 맞서려는 자들과 신권을 누르지 못하여 생긴 일이지만 이를 역이용하여 왕권을 강화를 하려 하였다. 선조 대에 와서 훈구세력을 몰아냈지만 자기 잘못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는데, 대표적 예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던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쓰시마 국주 소 요시토시가 전쟁이 발발하면 중간 상륙지인 자신의 땅인 대마도에 10만 군대를 주둔하면 본인 영토의 경제에 불이익이 될 거라는 것을 인식하여 조총을 조공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 본토의 상황을 돌려서 말을 하여 위험성을 전달했으나 선조는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집중했다. 전에는 율곡 이이가 조선의 각 관아와 성을 둘러본 결과 짓다만 성이 있고 함선은 쓰지 않다보니 더 이상 운영을 못할 지경에 무기는 다 녹이 슬어있고 병졸들이 근무와 훈련조차 태만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껴 10만 양병설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구체적인 방안을 계획하지 않았으며, 신하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재정을 낭비할 수 없다며 이를 무시를 하였다.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었으나 나중에 다시 와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음.) 후일 일본본토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고 통신사가 돌아온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이야기와 전쟁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변변치 않은 왜국, 오랑캐라 여기고 있던 선조는 결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한 동인 측 인물인 김성일의 보고를 믿고 다시 축성 중인 성을 멈추게 하였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니 2년 동안이라도 다시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셈이다. 그리고 선조는 서자 출신 이었기에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함을 엿볼 수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에 대한 견제이다. 임진왜란말기 도성을 버려 선조는 이미 민심이 멀어진 무렵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보와 승전이 날 때마다 백성들은 이순신을 칭송하였으나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선조도 점차 민심이 이순신에게 쏠리고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잘 훈련된 정예 병인 조선 해군과 그 모든 조선 해군을 움직일 수 있는 이순신이 딴 맘을 먹으면 자신의 권좌를 빼앗을 까봐 두려워하여 정유재란발발 전에 명령 불복종과 반역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파직 과 동시에 그 죄로 한양으로 압송해와 형벌을 가하고 그동안의 공적으로 백의종군을 시켰을 정도였다. 말그대로 충신을 시기하고 멀리하였으며 간신만 가까이하는 암군 중 하나였고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주 중 하나로 꼽히는 왕이 바로 선조다. 외에도 인조, 고종, 연산군, 광해군, 중종 등이 있다. 간략히 설명하면 전쟁 시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친 비겁한 왕이었고 무책임하고 사명감이 없었던 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뻔뻔한 왕이자 비겁하고 책임감 없는 지도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청년 시절의 명석함은 40년 재위기간 동안 온데간데 사라졌고 전쟁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남의 탓으로 돌렸으며 왕으로서의 사명감은 없었던 암군에 속한다고 봐야겠다. 선조 (1552 ~ 1608 / 재위: 1567 ~ 1608) - 40년 7개월 통합 개발 환경 통합 개발 환경(統合開発環境, )은 코딩, 디버그, 컴파일, 배포 등 프로그램 개발에 관련된 모든 작업을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서 처리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이다. 종래의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는 컴파일러, 텍스트 편집기, 디버거 등을 따로 사용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하나로 묶어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제공한 것이 통합 개발 환경이다. 최근의 통합 개발 환경(IDE)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응용 프로그램 개발용 고속 개발 도구가 많다. IDE는 초기에는 콘솔이나 터미널을 통해서 개발이 가능했다. 초기 시스템들은 프로그램들이 플로차트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후 천공 카드(또는 종이 테이프 등)로 프로그램을 입력시킨 다음 컴파일러에 제출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IDE를 지원하지 못했다. 다트마우스 베이직은 IDE와 통합된 최초의 언어로 간주된다. 이 IDE는 명령어 기반이었기 때문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출현 이후에 대중화된 메뉴 구동식의 그래피컬한 IDE와 닮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구는 현대의 IDE에 꾸준히 포함되는 편집, 파일 관리, 컴파일, 디버그, 실행 기능을 통합하였다. 마에스테로 I은 Softlab Munich의 제품으로, 소프트웨어를 위한 세계 최초의 통합 개발 환경이었다. 마에스테로 I은 전 세계 22,000명의 프로그래머들이 설치, 사용하고 있다. 플러그인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IDE들 가운데 하나는 소프트벤치이다. 2015년 3월 기준으로 가장 대중적인 IDE로는 이클립스와 비주얼 스튜디오가 있다.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는 통합 개발 환경의 예로, 비주얼 스튜디오, 이클립스를 들 수 있다. 이클립스는 자바를 기본적으로 지원하지만, 파이썬, 펄, 루비, 포트란, C, C++, PHP, 코볼, JSP 등과 같은 언어들도 추가적으로 설치할 수 있다. 각 언어의 추가 설치본은 각자 고유의 디버거를 비롯한 다양한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인조 인조는 다음을 가리킨다. 국제 원자력 기구 국제 원자력 기구(國際原子力機構, )는 원자력을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고 평화적인 목적의 이용을 장려하기 위해 1957년 7월 29일에 설립된 국제 연합 산하 독립기구이다. 본부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 2005년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사무총장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를 계기로 1957년에 유엔 본부의 국제회의에서 채택되어 설립되었다. 이후 1956년 10월에 82개국이 참석한 UN 총회에서 설립 헌장이 승인됐다. 헌장에 기록된 IAEA 주요 활동은 원자력 검증과 안보, 안전, 기술이전 등이었다. 1957년 2월부터 IAEA 준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 같은 해 7월 29일 헌장이 발효되면서 IAEA가 유엔의 독립 전문기구로 창설됐다. 대한민국은 1956년 창설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북한은 1974년에 가입했다가, 1993년 2월 IAEA가 특별핵사찰을 요구한 데 대해 1993년에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1994년 6월에 IAEA 탈퇴를 선언했다. 같은 해 10월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제네바 합의로 복귀를 선언했다. 그러다가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문제가 불거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면서, 2003년 다시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IAEA 및 NPT 탈퇴를 선언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국가이다. 2016년 2월 기준, 168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다른 국제연합기구와는 달리 자체의 헌장과 이사회를 갖는 자치기구이다. 국제연합의 다른 전문기구가 국제연합 헌장에 의거, 경제사회이사회만을 통하여 국제연합과 1개의 제휴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반면, 국제원자력기구는 국제연합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UN Security Council) 및 경제사회이사회(Economic and Social Council)와 중복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 국제연합의 전문기구는 아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1970년에 발효된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기초하여 핵무기 비보유국은 IAEA와 평화적 핵이용활동을 위한 안전협정(safeguards agreement)을 체결해야 하며, IAEA는 핵무기 비보유국이 핵연료를 군사적으로 전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핵무기 비보유국의 핵물질 관리실태를 점검하고 현지에서 직접 사찰할 수 있다. 주요 조직으로는 총회, 이사회, 사무국이 있다. 총회는 모든 회원국 대표로 구성되며, 이사국 선출, 회원국으로서의 특권 및 권리 정지, 신규 회원국 가입 승인과 예산 승인, 국제연합에 제출한 보고서 승인, 국제원자력기구와 국제연합 간 또는 기타 기구와의 협정 승인, 헌장 개정, 사무총장의 임명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사회는 35개국의 이사국으로 구성되며, 국제원자력기구의 임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갖는 의사 결정체로서 국제원자력기구 직무 수행과 정책 결정의 전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사국 선정은 전임위원회가 원자력 관련 기술의 진보에 따라 13개국을 지정(이사회 지정 이사국 또는 지정 이사국이라는)하며, 기타 22개국을 지역적인 구성을 고려하여 총회가 선출한다. 사무국은 총회의 승인을 얻어 이사회가 임명한 사무총장 아래에 다음과 같은 6개의 부서가 있다. 주요 정책과 예산은 이사회와 총회를 거쳐 수립된다. 사무총장은 1981년부터 1997년까지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이 그 이후에는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9년 12월부터는 아마노 유키야가 취임했다. 임기는 4년이다. 사무 총장 아래에 각 국장은 사무 차장을 거느린다. 핵 핵(核)은 어떤 것의 중심을 말한다. 핵()에는 여러 뜻이 있다. 조선 (동음이의) 조선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이십사사 이십사사(二十四史)는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역사서 24종의 통칭이다. 다음 왕조에서 정사로 인정받은 것만을 모은 것으로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중화민국에서 《원사》를 고쳐 쓴 《신원사》 또는 청나라의 역사를 엮은 《청사고》를 합해 이십오사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두 책을 모두 합쳐서 이십육사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십사사 가운데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를 통틀어 전사사(前四史)로 부른다. 이십사사는 청나라의 건륭제에 의해 결정되었다. 중화민국에 이르러 원래 역사를 수정한 《신원사》가 편찬되고 정부에 의해 정사에 추가되어 《이십오사》가 되었다. 그러나 《신원사》 대신 시기에 편찬된 《청사고》를 추가하여 이십육사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 그 호칭이 일정하지 않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61년에 중화민국 정부(중국 국민당)에 의해 청사고를 개정하여 정사로 펴낸 《청사》(淸史)가 편찬되었으나 베이징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중국 공산당)는 책은 중국 국민당의 사관에 의해 《청사고》를 개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2년에 국가 정사 편찬위원회를 출범했으며 2016년에는 자체적인 《청사》를 편찬했다. 장 시벨리우스 장 시벨리우스( , 1865년 12월 8일 ~ 1957년 9월 20일)는 스웨덴계 핀란드 작곡가이다. 음악 활동을 위해 본명인 요한(Johan) 대신 프랑스식 예명 장(Jean)을 사용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요한 루드비그 루네베리의 시처럼 핀란드의 국민성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그는 핀란드 최대의 작곡가일 뿐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 음악풍은 아니지만, 애조를 담은 북유럽의 음악다운 특색을 가지고 있다.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는 1865년 당시 러시아령 핀란드 공국에 위치한 해멘린나의 스웨덴계 핀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를 스웨덴어·핀란드어 애칭인 ‘얀네(Janne)’로 불렀지만, 시벨리우스 본인은 프랑스어 이름 ‘장()’을 썼다. 그의 가족은 그를 핀란드어 학교에 보냈고, 거기에서 그는 펜노만(Fennoman) 운동을 접했다. 그의 음악관과 정치 성향은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9살 때 피아노를 배웠고 15살 때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웠다. 하지만 가족들이 반대하여 1885년에 헬싱키대학 법학과로 진학하였다가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중퇴하고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던 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 졸업 후 베를린과 빈으로 유학을 떠나 노년의 브람스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1892년 헬싱키음악원의 교수가 되었으며 대서사시 «칼레발라»에 의한 교향시를 작곡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핀란디아, Valse Triste, 바이올린 협주곡, 카렐리아 모음곡, 투오넬라의 백조(렘민캐이넨 모음곡의 한 악장)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그는 칼레발라에 영감을 얻은 작품과 일곱 개의 교향곡, 100개가 넘는 가곡, 13개의 연극을 위한 반주 음악, 하나의 오페라 (Jungfrun i tornet - 미완성작품), 현악 사중주를 포함한 실내악 작품, 피아노 소품, 21개의 합창곡집, 프리메이슨 예배음악 등을 썼다. 시벨리우스는 19세기 말 작곡계의 조류를 일부 받아들였지만 음악의 심층적인 구조를 단순화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안토닌 드보르작처럼 관용적인 멜로디와 점차적인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페루치오 부조니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았고, 1891년의 쿨레르보(Kullervo)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그 영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소나타 형식을 거부하고 음악적 단편을 발전시키면서 끝에 장엄한 피날레로 이어지는 구성을 그의 작품에 쓰기 시작했다. 시벨리우스는 조성적인 중심이 있는 음악을 썼다. 그는 길게 이어지는 음 하나(‘페달음’이라 한다.)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화성을 선호했다. 그는 “페달 없는 음악은 종종 길을 잃는다”고 했다. 이런 점 때문에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구스타프 말러와 같은 당대 작곡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후에 그는 Olin Downes의 찬사를 받았지만 Virgil Thomson에게는 비판을 받았다. 1925년 이후로 그는 작은 작품들만을 썼고, 8번 교향곡(9번째)을 썼지만 폐기했다고 했다. 대편성으로 된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교향곡 6번과 7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위한 반주 음악, 그리고 교향시 《타피올라》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후두암 수술을 받은 뒤 교향곡 8번을 끝으로 30년의 여생 동안 시벨리우스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피했고 작곡에서도 거의 손을 뗐다. 그는 낭만주의 작곡가로서 당대에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로서는 유행에 뒤처진 음악을 썼다. 그의 교향곡은 아직까지도 연주·녹음되고 있으며, 아주 유명한 20세기의 교향곡 작곡가 중 하나로 남았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더 수입이 많은 실내악과 연극을 위한 음악을 더 많이 썼다. 그의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으로는 사이먼 래틀, 로린 마젤, 데이비드 앨런 밀러 등이 있다. 1958년 맨체스터 가디언 지는 다른 작곡가들이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안 시벨리우스는 차갑고 맑은 물을 제공했다는 평으로 그의 말년 작품을 회고했다. 수원시 수원시(水原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남부에 있는 시이자 경기도청 소재지이다. 동쪽으로는 용인시, 남쪽으로 화성시, 북쪽으로는 의왕시, 서쪽으로는 안산시와 경계를 접한다. 시청 소재지는 팔달구 인계동이며, 장안구, 권선구, 팔달구, 영통구의 4개 일반구가 설치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 울산광역시보다 인구가 많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있고, 영통구 매탄동에는 삼성전자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수원시는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용인시 수지구 및 기흥구에, 서쪽은 안산시 상록구와 화성시 봉담읍 및 매송면에, 남쪽은 화성시 병점 및 동탄에, 북쪽은 의왕시에 접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가 분기하고 있으며, 경기도 남부의 교통중심지로, 인천과 여주로 통하는 육로의 기점이 된다. 수원시의 면적은 121.04 km²의 주형 분지로 되어 있다. 시가지 중앙에는 해발 143m의 팔달산이 있어 공원을 이루며, 수원화성 터가 둘러져 있으며 사대문과 봉화대, 방화수류정 등 문화재가 곳곳에 있다. 시 외곽 북쪽으로는 백운산과 광교산이 위치해 있어 높은 구릉지역을 형성하며, 서쪽 외곽에는 칠보산 위치해 있어 낮은 구릉을 이룬다. 수원 중심부와 동남 지역으로 평야를 형성되어서, 도시의 시가지 형성 및 수도권 근교의 농산, 원예 등에 도움이 되고 있다. 수원시에는 장안구·권선구·팔달구·영통구의 4개 일반구가 있다. 2019년 2월말 주민등록 인구는 494,237세대, 1,199,495명이다. 수원시의 인구는 2015년 5월말 기준으로 121만3665 명, 45만7535 가구이고, 이 중 대한민국 국민이 117만7376 명, 등록 외국인이 3만6289 명으로 외국인이 수원시 거주 인구의 3%에 해당한다. 2012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0~14세 인구는 15.9%, 65세 이상 인구는 8%이다. 생산 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6.1%(전국 평균 72.8%)이며,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2.6%(전국 평균 22.8%)이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는 102명이다. 수원시의 인구추이 수원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50조5093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업(1차산업)은 11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14조0447억원으로 27.8%의 비중으로 차지한다.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36조4635억원으로 72.2%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경기도의 행정 중심지로서 사업서비스업(11.0%)과 공공행정(7.2%), 건설업(7.0%)과 도소매업(7.0%)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수원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394,141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8.8%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업(1차산업)은 215명으로 비중이 낮다.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38,775명으로 9.8%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355,151명으로 90.1%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사업서비스업(20.1%), 도소매업(13.4%)과 숙박 및 음식업(10.%), 교육서비스업(9.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수원시의 재정자립도는 55.73%로 경기도에서 5번째로 높다. 수원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043,767명이고 주간인구는 952,174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1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89,914명, 유출인구는 202,279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0,772명, 유출인구는 29,472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91,593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수원시는 2017년 12월부터 불법 현수막, 음란·퇴폐·불법대출 전단 단속을 위해 5분~20분마다 전화를 걸어 위반사실을 안내하는 방식을 도입, 2018년 기준 월평균 적발 건수를 전년 같은 기간 대비 74.5% 줄였다. 불법 유동 광고물 자동전화안내 서비스로 2018 제3회 적극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 장려상을 수상했다. 4년제 대학으로 경기대학교 수원캠퍼스,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아주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기지역대학 등이 있고, 2년제 대학으로 동남보건대학교, 수원여자대학이 있으며, 특수대학인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와 봉녕사승가대학, 삼성제조기술대학이 있다. 수원에는 북쪽 광교산과 서쪽 칠보산, 동쪽 청명산이 위치해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한다. 파장동 경수간 도로변의 지지대와 노송지대, 서쪽의 서호와 서호생태수자원센터, 동쪽의 국민관광지인 광교호수공원 등이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팔달문(남문)· 화서문 · 창룡문 · 장안문(북문) 등의 4개의 누문, 작약으로 유명한 화령전, 7개의 수문이 있는 화홍문, 방화수류정, 정조가 주변 경치를 감상하였다는 서장대, 군사훈련장인 연무대, 조선시대 통신수단이었던 봉돈 등이 있고, 또한 장안공원과 팔달공원 등 두 곳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정조의 임시처소였던 화성행궁이 있다. 화성행궁은 1789년 조선 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한 행궁이다.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 정조 18년에서 1796년 정조 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 되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 참배하였으며, 이 기간 중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 복내당, 유여택, 신풍루, 남북군영, 우화관, 득중정 등 600여 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며, 정조대왕이 모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었던 궁이기도 하다. 낙남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들은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영통구 이의동 등지의 광교역사공원에는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沈溫)과 태종 이방원의 서4남 혜령군의 묘가 같이 모셔져 있다. 수원은 갈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수원과 화성 지역에서 나는 한우 암소갈비로 기름을 다듬어낸 뒤 과일과 채소즙을 붓고 소금간을 해 선선한 곳에 충분히 재워서 내는 양념갈비로 유명하며, 갈비의 길이가 4인치나 되기 때문에 흔히 수원 왕갈비라고 불린다. 수원 왕갈비는 포천 이동갈비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갈비요리로 꼽힌다. 수원시에서는 1995년부터 매년 수원음식문화축제를 열어 갈비를 홍보한다. 수원은 축구의 열기가 특히 높은 도시다. 2002년 FIFA 월드컵의 개최도시 중 하나로써, 피스컵, 2007년 FIFA U-17 월드컵 등 많은 국제 경기를 치렀고, 수원시에서는 대한축구협회와 함께 수원컵 국제청소년축구대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또한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K리그 클래식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 FC와 WK리그 수원시시설관리공단 여자 축구단(수원 FMC)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이 중 K리그 클래식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1995년 창단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K리그 클래식 4회, 아시아 클럽 선수권(현재 AFC 챔피언스리그) 2회, 아시아 슈퍼컵 2회, A3 챔피언스컵와 FA컵 4회 등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현재 아시아에서 최강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수원은 김호와 차범근, 서정원 등 스타 감독을 선임하고 수많은 유명 선수들을 보유하여 현재 K리그 클래식에서도 명실상부한 최고 인기 구단이다. 또한 창단 후 거의 매년동안 K리그 클래식에서 최다 관중을 동원하는 등 연고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수원 FC 역시 실업축구 내셔널리그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는 강호로 꼽혔고, 2013년부터는 프로축구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면서 2013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두개의 프로축구단이 운영되고 있다. 2008년에는 여자 실업축구단인 수원시시설관리공단 여자 축구단이 창단하면서 명실상부 축구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2010년에는 수원 FC와 수원 FMC가 각각 내서널리그와 WK리그에서 우승하면서 각 리그에서 최고의 축구단을 보유한 진정한 축구 수도로 변모하였다. 반면, 2007년까지 수원야구장을 사용하던 현대 유니콘스는 현대그룹이 서울 연고 이전을 목표로 잠정적으로 수원에 머물고 있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아 수원시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며 결국 2007년을 끝으로 해단하게 되었다. 또한, 프로농구단 KBL 삼성 썬더스와 WKBL 삼성생명 비추미가 있었으나, 각각 2001년과 2005년에 서울과 용인으로 연고를 이전하였다. 그 밖에, V-리그 남자부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과 여자부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가 수원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3년 한국프로야구 10번째 구단인 kt 위즈가 창단되었다. 2014년 퓨처스리그에 참가하고, 2015년부터 1군 페넌트레이스에 참가했다. 영동고속도로와 용인서울고속도로, 평택파주고속도로가 수원시를 지나는 주요 고속도로이다. 국도 제1호선, 제42호선, 제43호선, 지방도 제309호선도 수원을 통과한다. 1937년 개통된 수원과 인천광역시 송도역을 연결하는 수인선은 762mm 궤간을 사용하는 협궤철도였으나, 경제성이 낮아 1995년 영업 중지 및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2009년 오이도-인천 구간만 재개통되었다. 2019년 12월 한대앞역 ~ 수원역 구간이 개통이 되면 분당선과 수인선을 직결운행할 예정이다. 2010년 11월 1일부터 수원역에서 경부고속철도 KTX 열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신분당선, 분당선,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수원을 지나고 있으며, 향후에는 인덕원-동탄 복선전철, 수원 도시철도 1호선,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C노선이 착공 및 개통될 예정이다. 장안구 장안구(長安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의 북서부에 있는 구이다. 구명은 장안동(長安洞)에 있는 장안문(長安門)에서 유래했다. 장안구가 설치될 당시에는 장안동과 장안문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영통구의 신설로 인해 장안동과 장안문은 현재 팔달구에 소재해 있다. 장안구는 동쪽으로는 팔달구 우만동, 영통구 이의동, 용인시 수지구와, 서쪽으로는 권선구 구운동·입북동, 의왕시 부곡동과, 남쪽으로는 권선구 서둔동, 팔달구 화서1동·화서2동·행궁동과, 북쪽으로는 의왕시 고천동, 용인시 수지구와 인접해 있다. 수원시의 북부관문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수도권으로의 교통량 분산지 역할을 하며, 광교산과 광교저수지, 수원천이 흐르는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있다. 인구는 2016년 5월 31일 기준이다. 권선구 권선구(勸善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남서부에 있는 구이다. 인구는 2016년 1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이다. 팔달구 팔달구(八達區)는 경기도 수원시 중부에 있는 구이다. 경기도청, 수원시청, 수원세무서, 인천경기지방병무청 등 여러 관공서가 위치하고 있다. 팔달구는 수도 서울의 외곽을 차지하고 있는 경기도 수부(首府) 도시인 수원시의 중심권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영통구, 서쪽으로는 권선구, 북쪽으로는 장안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팔달구의 중심에는 수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수원팔경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팔달산이 솟아있고 자연형 하천인 수원천이 도심을 통과하고 있다. 인구는 2014년 11월 30일 기준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세계의 대표적인 성곽인 수원화성을 비롯하여 팔달문, 화서문, 창성사진 각국사대각원조탑비 등 국가지정 문화재와 '팔달문 동종', '봉녕사 불화' 등 귀중한 고적을 보존하고 있는 역사문화 유적의 도시이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야외음악당, 청소년문화센터, 효원공원 등 시민휴식공간과 문화공간이 어우러져 전원, 휴식기능이 있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으뜸 도시로써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영통구 영통구(靈通區, )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동부에 있는 구이다. 인구는 2019년 3월 말 기준이다. 영통구 북부에는 광교신도시가 건설 중이며, 경기도청 신청사가 2020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매탄동에는 지역 경제의 핵심인 삼성전자 본사와 수원사업장이 있다. 또한 영통구의 평균연령은 32세이며, 20세 미만의 청소년 인구가 7만8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28.8%를 차지한다. 북부는 신분당선이 지나가며, 남부는 분당선이 지나간다. 눌지 마립간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 458년, 재위 417년 ~ 458년)은 신라의 제19대 임금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물 이사금이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를 보냈는데,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눌지를 몰아내고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 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는데,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24년 음력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1년 음력 4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 432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433년 미사흔이 죽었는데, 임금이 서불한에 추증했다. 그해 음력 7월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나-제 동맹). 나-제 관계가 좋아져 이듬해 434년 비유왕이 음력 2월에 말 두 필을, 음력 9월에 흰 매를 보냈고 음력 10월에 눌지가 황금과 명주를 보내 답례했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450년 음력 7월 고구려의 한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노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자 그대로 물렀다. 그러나 454년 음력 8월 다시 고구려가 침공했으며, 455년 음력 10월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것을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 수원 화성 수원 화성(水原 華城) 또는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52킬로미터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대한민국의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10월 10일(음력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남문, 서문, 북문, 동문 4개의 성문이 있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그러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 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남수문(南水門)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舖)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시는 수원 화성이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0년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 복원사업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돌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공심돈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수원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동암문(東暗門)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1796년(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1795년(정조 19년) 2월 23일 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현재는 미복원 상태로 있다.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舖舍) 1칸이 세워져 있다. 1796년(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1796년(정조 20년) 4월 16일에 공사 착수, 7월 13일에 상량했으며, 7월 20일에 누각의 준공되었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포루(砲樓)는 포병용 진지로 벽돌로 짓고 포루(舖樓)는 보병용 진지로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포루(砲樓)는 성벽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남포루(南砲樓)는 팔달산 중턱 서남암문 근처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준공되었다. 구조는 동북포루와 거의 동일하다. 여장에는 타구와 전안을 뚫었고, 타구의 안에는 전판문을 달았다. 마루, 지붕 등의 구조는 서포루와 비슷하다. 남포루에는 대포와 혈포가 각 2대, 총안 19개가 설치되어 있다. 동포루(東砲樓)는 봉돈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16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3중층으로, 정면 1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하층과 중층의 벽은 돌출부 3면을 전축했고, 성내측면은 석축으로 했으며, 외부의 포혈과 총안을 두었다. 상층 여장의 타구(垛口) 및 전안(箭眼)은 서포루와 비슷하다.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장안문과 북수문 사이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3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중층이며, 도리는 납도리이고 홑처마의 5량 구조이다. 포루 밖으로는 우진각지붕을 안으로는 박공지붕으로 하였다. 하층의 중간에서 중층 및 상층에 계단을 설치해서 위아래로 돌아다닐 수 있도로 했다. 그 외는 북서포루와 비슷하다.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이며 성 위로는 최상층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포혈, 총안, 여장, 타구, 전안 및 출입문의 구조는 서포루와 동일하다. 서포루(西砲樓)도 북서포루와 마찬가지로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 건물이나 성내의 지반면 위로는 회상층의 1층 누각만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납도리 홑처마이며 3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포루(舖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이것은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아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성제의 하나이다. 화성에는 동북포루(東北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 북포루(北舖樓), 서포루(西舖樓)등이있다. 동북포루(東北舖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동북포루는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3면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었고, 하부 1.46m까지는 석축을, 위에는 전축을 했으며, 상부에 여장을 쌓았다.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창룡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96년 (정조 2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중층으로 3량의 우진각지붕을 갖추었다. 하층 주위의 3면은 여장으로 둘려져 있고, 원근총안(遠近銃眼)을 내었다. 상층 동측 2칸은 마루를 갈고 1칸은 통 2층으로 하여 목조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동이포루(東二舖樓)는 봉돈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층누각 밑에는 총안을 뚫어 놓았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3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납도리를 썼으며, 지붕틀은 5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하층의 총안 등은 동북포루와 동일하다. 북포루(北舖樓)는 서북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5년 (정조 19년) 2월 20일에 준공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내면 3칸의 규모이며, 중층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처마는 홑처마에 민오리집이며, 상층에는 주위에 전판문을 달았다. 서포루(西舖樓)는 서장대 남쪽 서암문과 서삼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18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동측면은 1칸으로 된 중층이다. 내면은 나무사다리를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민도리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물로서 구조와 기능은 치와 비슷하다. 장안문으로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북동적대(北東敵臺)가, 팔달문에는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지만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인멸되어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북서적대(北西敵臺)는 장안문의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북동적대(北東敵臺)는 현안과 총안을 두어 성문과 옹성을 방어하던 곳이다. 남서적대(南西敵臺)는 팔달문 옆 팔달산쪽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남동적대(南東敵臺)는 남수문에서 팔달문 사이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화성행궁은 화성 내부에 위치해있는 궁궐이다. 2007년 6월 8일, 사적 제 478호로 지정되었다. 여민각(與民閣)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됐다.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12월 31일 밤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 만들었다. 1. «KBS 2013 대기획: 의자, 8일간의 축제»-2013년작 다큐멘터리 세계유산 유네스코 세계 유산(유네스코 世界遺産, )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소중한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한 것이다. 1972년 11월 제17차 정기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에 따라 정해진다. 세계 유산 목록은 세계 유산 위원회가 전담하고 있다. 세계 유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 유산과 지구의 역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자연 유산, 그리고 이들의 성격을 합한 복합 유산으로 구분된다. 세계 유산은 다음과 같은 선정 기준에 따라 선정되고 분류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매년 6월말에서 7월 사이에 위원회를 열어 심의하고, 신규 세계유산을 최종 결정한다. 2017년 기준 167개국의 1,073곳이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중 832곳이 문화 유산, 206곳이 자연 유산, 35곳이 복합 유산이다. 많은 세계 유산을 가진 국가들은 이탈리아(53곳), 중국(52곳), 스페인(46곳) 순이다. 또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각 13곳과 2곳의 세계 유산이 지정되어 있다. 지역을 표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동이 동이(東夷)는 중국 역사에서 동쪽에 사는 이민족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동이는 특정 민족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쪽에 존재한 여러 이민족을 '동쪽 오랑캐'라고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다. 동이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했다. 한나라 이전 동이는 현재 중국의 산둥성, 장쑤성, 허베이성 일대에 살던 이민족을 구분 없이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었다. 동이라는 용어는 만주, 한반도, 일본 등 중국의 동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부르는 말로 변했다. 오늘날 한민족(韓民族) 원류를 형성하는 부여, 고구려, 백제, 예맥, 삼한 등이 동이로 불렸으며, 말갈, 선비, 오환, 왜 등도 동이로 불렸다. 일부 한국의 재야사학 인사들은 동이 전체를 한민족으로 간주하고 추앙하기도 하나, 동이 전체를 한민족(韓民族)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타당하지 않으며 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동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이(四夷)'와 같이 이(夷)는 오랑캐 전체를 일컫는 대명사로도 사용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동서남북의 각 방위에 따라 오랑캐를 구분하여 동이·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 불렀다. 동이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은(殷) 시대의 갑골문자로, 이(夷)에 해당하는 갑골문자는 尸(주검 시)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의 어원을 '큰 활을 가진 사람'이라 해석하였으며, '이(夷)'라는 글자가 '대(大)'와 '궁(弓)'이 합쳐서 만들어졌다는 추측이 전통적인 관점이었으나, 갑골문자의 발굴 결과와 다르기 때문에 현재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은 시기 및 그 이전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에서 등장하는 동이는 주로 산둥 성, 허베이 성, 장쑤 성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종족으로, 중국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여러 제왕들을 비롯하여 은나라까지 동이 출신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당시의 동이를 9개의 종족으로 구분하여 구이(九夷)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한서》〈동이전〉에서는 이들 구이를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로 구분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다양한 구분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九라는 글자가 단순히 많다는 의미를 가져 구이는 동이의 수많은 종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용법이다. 주나라 이후 동이는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면 산둥반도의 래이(萊夷)나 장시 성의 회이(淮夷) 등의 작은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이후의 동이는 만주·한반도·일본 열도의 종족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나라 이후의 동이는 이전의 동이와 문화적·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대체로 한민족의 기록은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동이는 동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도 사용되었으며, 한국의 옛 나라들은 자국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나 부족을 동이라 불렀던 흔적이 남아 전해진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라 칭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일본을 동이라 칭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헤이안 시대부터 아이누 민족을 이(夷) 또는 에조(蝦夷)라 칭하며 오랑캐로 취급하였다. 헤이안 시대에 아이누 족을 공격하는 직책을 맡은 대장은 세이이타이쇼군 (정이대장군, 征夷大将軍)에 임명되기도 했다. 《후한서(後漢書)》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들은 열전 부분에서 〈동이전〉이나 기타 이민족의 열전을 편성하고 그 안에서 동이의 역사를 독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이전에 기록된 종족들은 한민족에 해당하는 여러 종족을 비롯하여 왜·말갈·유구 등이며, 주로 한민족의 기록이 중심이 되었다. 위 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의 승려인 일연(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 원판(原版)은 전하지 않으며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인 바, 왕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삼국과 가락국(駕洛國 : 가야)의 왕대와 연대,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신화·전설·신앙 및 역사, 불교에 관한 기록, 고승들에 대한 설화, 밀교 승려들에 대한 행적, 고승들의 행정, 효행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모든 설화는 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유동하던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흘러 다니던 설화의 내용이 일연이라는 개인에 의해 작품화된 셈이므로 고려의 설화문학으로 취급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의 주제는 주로 신라와 불교를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이두로 쓰인 향가 14수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 국문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향가는 《균여전》에만 11수(首)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전적에는 전혀 전하지 않기 때문에 향가 연구에서 삼국유사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제왕운기》와 더불어 단군 신화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으로 고려 후기, 대몽항쟁 과정에서 급부상한 단군 신앙과 동족 의식을 반영한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1 고조선조는 삼국유사의 첫머리이자 단군 관계 사료로써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해당 조에서는 위서와 고기, 당배구전, 통전의 4개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이 4개 문헌 가운데 확인 가능한 것은 당배구전(신당서 권100 열전제25 배구)이며, 나머지는 그 인용 문헌의 기록이 서로 맞지 않거나(통전) 인용했다고 밝힌 문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고기), 혹은 현존하는 기록에서는 인용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단군신화 기록은 서두에 "위서에 이르기를"(魏書云)이라고 적고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자가 있어서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현존하는 《위서》에는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는 일제 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한 단군신화 자체에 대한 일연의 위조설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1946년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상)》에서 삼국유사에는 위지와 후위서라는 별도의 전거가 분명히 있으므로 진수의 위지(전위서) 내지 위수의 위서(후위서)는 아니고 그밖의 조위의 사서로는 왕침이 지은 것이 있다며 이것이 고조선조에서 말한 위서가 아닐까 추단하였으며 정인보의 이 설은 이후 북한 학계에서 주목되어 주류 학설이 되었다. 1954년 최남선은 《증보 삼국유사》 해제에서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위서에 대해 탁발위(북위)의 위서(후위서), 조위의 위서(위지), 내지는 지나(중국) 문적의 범칭일 가능성을 차례로 거론하고 "고기와 위서를 무엇인가고 의심까지 할 수는 있으려니와 망칭과 허구로 단정치 못할 것을 누구든지 생각할 것이오, 더구나 이러한 이유로써 전하는 사실그것의 전통적 근거를 의심하려 함은 고의가 아니면 고견'이라고 혹평하면서도 "이미 실물이 없고 증빙 또한 없는 상황에서 지단하기는 곤란하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후 1930년대 이후 한국 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행했다. 《삼국유사》가 언급한 위서에 대한 연구는 크게 일서설과 의탁설이 있는데 일연이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해당 서적의 이름을 헷갈렸거나 후대의 전승과정에서 서적의 이름이 잘못 표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의탁설은 일연이 단군 전승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위서》라는 공신력 있는 서적의 이름을 의탁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가 1980년 《아시아 공론》에서 주장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그 시대적 배경과 구성>에서 주장하였다. 박대재는 2001년 '삼국유사 고조선조 인용 위서론'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는 북제의 위수가 지은 '후위서(後魏書)'라 불리는 《위서》이고 본래 위수가 편찬했던 대로의 《위서》가 아니라 북송 시대의 교감본이며, 《위서》의 복잡한 개수, 교감 과정이나 《삼국유사》 속의 다른 '위서' 인용 부분 및 일본측에 남아 있는 《한원》의 《위서》 인용 부분에도 현존 《위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북송 교감본 《위서》와 그 이전 고본 《위서》 사이에는 내용상 상당한 출입이 있었을 것이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연이 인용했을 고본과는 달리 단군조선 관계 기사가 들어 있지 않은 (현존하는 것과 같은) 교감본 《위서》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았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진지왕이 재위 4년만에 사망하고 진평왕이 뒤를 이었다고 적었지만, 삼국유사는 진지왕이 황음무도한 정사를 펴다 국인에 의해서 폐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고려 시대에 간행된 삼국유사의 원본은 현전하지 않으며, 조선조 이후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간행본은 크게 조선 초기에 간행된 판본(선초본鮮初本)과 조선 중기 이후에 간행된 판본으로 나뉜다. 송은본은 학산본(鶴山本)이라고도 불리며, 송은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이 소장하던 것을 지금은 손자인 곽영대(郭永大)가 소장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제2책에 해당하는 권3, 4, 5까지의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인데, 푸른 비단으로 개장(改裝)한 표지 위에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는 제첨(題籤)을 하고, 작은 글자로 “乙亥 昔珠”라고 적혀 있다. 본문은 책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내용이 손상된 경우는 보사(補寫)되어 있는데 권3의 첫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잔본이다. 앞부분 6장이 결락된 3권은 50장, 4권은 31장, 끝의 4장이 결락된 5권은 26장으로 도합 107장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책의 광곽(匡郭)의 길이는 후세의 정덕본(正德本)에 비하여 대체로 평균 1cm 내외가 크고, 변란(邊欄)은 모두 쌍변이다. 반면에 정덕본은 쌍변과 단변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왕들의 어휘(御諱)에 대한 피휘대상자, 이를테면 융(隆, 고려 태조의 아버지 세조의 휘)을 풍(豊)으로 대자피휘한 것과 무(武, 고려 혜종의 휘)를 결획피휘한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의 대상자에 피휘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정덕본의 여러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 7년인 임신년(1512년)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보다 앞선, 14세기 말(조선초)에 간행된 현존하는 삼국유사 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조선초기 서지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誤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모사된 필사본이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2 기이(紀異)만 있는 잔본(殘本) 1책으로, 본문 전체 49장 가운데 17장부터 20장까지 4장은 결락이 있어서 영인하여 보완하였다. 표지는 후대의 개장으로 만(卍)자 문양이며 장정은 5침의 홍사(紅絲)로 맨 선장본(線裝本)이다. 앞 표지 이면(裏面)중앙에 “黃馬仲陽月買得 泥山南氏家藏”이란 묵서가 있고, 그 옆에는“黃馬二陽月買得 開 日藏”이라는 부기(附記)가 있으며 뒤 표지 이면에는“니산장(泥山藏)”이란 묵서가 있어, 무오년 2월에 남씨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보면 전체 49장 중 24장은 광곽(匡郭)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1cm 이상 길고, 변란(邊欄)은 정덕본이 쌍변(雙邊)과 단변(單邊)이 혼재되어 있는 데 반하여 모두 쌍변이다. 판심 부분의 어미가 고려본에서 간혹 보이는 좁은 면적의 형태로 되어 있고, 내용면에서는 피휘(避諱)가 일관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 간행본임을 알 수 있으며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의 오류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범어사본은 삼국유사 권제4~5까지 2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4가 31장, 권5는 전체 30장에서 2장(제26-27) 이 결락된 28장의 도합 59장인데 첫장 상단의 묵서 기록으로 보아 광무 11년(1907년) 오성월(吳腥月)이 입수하여 범어사에 기증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광곽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크고 변란도 모두가 쌍변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가 보이고 특히, 고려왕들의 어휘(御諱) 대부분에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초 판본 중 유일하게 권4의 이혜동진(二惠同塵)·자장정률(慈藏定律)·원효불기(元曉不忌)·의상전교(義湘傳敎) 등의 편에 구결(口訣)로 현토(懸吐)가 되어 있으며, 권제5의 제27-30장이 있는 것은 범어사본이 유일하다. 이 범어사본은 2002년 10월 19일 대한민국 보물 제419-3호로 지정되었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른 손보기 교수의 개인 소장본으로 제1책(권1, 2)만 남아 있지만 현존하는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15세기초)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현재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중이다. 석남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했던 것으로 왕력과 제1권만 남은 잔본(殘本)으로 현재 소장처는 미상이다. 모사한 필사본이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종업(趙鍾業)의 소장본으로 권2 1책이다. 원본은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전의 복사본이 영인되어 있다. 권2 49장 중 제 9장이 결락되어 필사로 보충하였고, 49장 후엽이 결락되었다. 니산본과 비교할 때 결획부분이 적게 나타나므로 보다 이른 시기의 인출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중종 7년인 임신년(1512년) 당시 경상감영이 소재하고 있던 경주(慶州)에서 부윤(府尹) 이계복(李繼福)에 의해 삼국사기와 함께 간행된 것을 중종 임신간본(정덕본)이라 부른다. 경주부사 이계복이 쓴 발문에 따르면 경주부에는 삼국본사(三國本史, 삼국사기), 유사(遺事)의 옛 책판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1행 중 겨우 4, 5자만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여, 당시 경주부윤으로 있던 이계복 자신이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유사의 초판본 완질을 구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의 도움으로 그것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판각하여 모으도록 하였다. 이때 원각 판본 가운데 마멸이 심한 부분은 번각본으로 교체하였는데, 정덕본 가운데는 당시 원각판과 함께 마모된 부분을 교체하여 간행했던 번각판이 섞여있으며, 번각판의 경우는 어느 고을에서 새긴 것이냐에 따라서 또 복각(覆刻)과 필서보각(筆書補刻)을 겸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던 관계로 그 글씨체가 달라졌다. 전체 책판 290매 중 약 40매는 구판을 그대로 사용했다. 중종임신본은 현재 한국에 전하는 삼국유사의 판본으로써 가장 완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오자와 결자, 탈자가 포함되었고 전도되거나 체제나 협주 방식이 잘못 기재되고 문장이 서로 뒤바뀐 내용이 많으며 같은 중종임신본끼리도 소장본에 따라서 출입이 잦다는 지적이 있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관되었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중종 임신본을 인행(印行)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하고 있다. 규장각본은 중종 임신간본 가운데 비교적 일찍 발간된 것이다. 이 책은 재야서지학자 황의돈 교수 소장으로 황의돈이 한국전쟁 직후 구입해 소장하다가 전형필의 소유가 되었고, 전형필은 훗날 이 삼국유사 판본을 서울대에 기증하였다. 왕력(王曆)과 권제1~권제5까지 5권을 2책으로 묶은 것으로, 왕력 15장, 권제일 37장, 권제이 49장, 권제3 56장, 권제4 31장, 권제5 30장, 발문(跋文)1장 등 총219장으로써, 현존하는 정덕본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낙장이 없이 완질이 갖추어져 있는 판본이자 다른 임신간본과 비교해 문자의 결락이나 마멸이 가장 적고 인쇄도 선명해 16세기 전기에 인출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다만 내용면에서는 중종 임신간본 간행 당시 선초본의 착오를 수정한 것 못지 않게 새로운 오류를 일으킨 것도 적지 않아서 조선 초기 간본과 문자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며, 약간의 가필도 있다. 형태적인 면으로 볼 때, 본문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표제(表題)에는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 묵서되어 있으며, 표지는 개장한 것으로 격자 무늬 한지에 주사(朱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다. 발문 1장을 제외한 전체 218장 중에서 광곽(匡郭)의 길이가 선초본(鮮初本)에 비하여 평균 1cm 내외 짧고, 변란(邊欄)은 선초본이 모두 쌍변(雙邊)인 데 반하여 이 책을 포함한 중종 임신간본은 쌍변과 단변(單邊)이 뒤섞여 있다. 16세기 전기(前期)에 인출(印出)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면에서는 중종 임신간본 간행시 선초본의 착오를 수정한 것 못지 않게 새로운 오류를 일으킨 것도 적지 않아 조선 초기 간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75년 한국의 민족문화추진회는 이 규장각본을 반으로 축소 영인하여 한국고전총서1 교감 삼국유사로 출간하였다. 이때 이동환(李東歡)의 교감을 두주(頭註)로 붙이고, 두주 형식으로 여러 판본을 대교하거나 인용된 원전의 내용을 찾아서 교감하였으며, 균여전(均如傳) 및 황룡사 구층탑 찰주본기를 부록으로 덧붙였다. 현재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판본이다. 만송 김완섭이 소장하던 완본이다.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이다.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1983년 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을 축소, 영인하였다. 부록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소장 필사본, 즉 석남본 및 송은본의 모사본을 영인하여 수록하였다. 삼국유사의 권제3 ~ 권제5까지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3의 첫부분 10장, 권5의 18장 후면부터 31장(발문)까지 모두 23장이 결락되었다. 표지는 개장(改裝)한 것으로 홍사(紅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며, 최남선의 소장이었다가 후에 고려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중종 임신간본 가운데서 규장각본과 함께 비교적 초기에 인출한 선본(善本)에 속하며, 중종임신본의 서지적인 특징 및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덕본 중에서는 유일하게 구결(口訣)로 현토(懸吐)되어 있어서 독해에 도움을 준다. 2002년 10월 19일 대한민국 보물 419-4호로 지정되었다. 일본 덴리 대학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 편찬 당시 참조한 것으로 알려진 순암수택본 삼국유사와 호사문고(蓬左文庫) 소장본 삼국유사, 간다 집안(神田家) 소장본 삼국유사가 전해지고 있다. 호사문고본과 간다 집안 소장본은 모두 중종 임신간본(정덕본)에 속하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보이는데, 호사문고 소장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바쳐져 쇼군 가문이 소장하였으며, 간다 집안 소장본은 우쿠다 히데이에(浮田秀家)가 가져간 것이다.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가 일본으로 가져간 유점사본 삼국유사의 경우는 고려대 도서관에 보관중인 최남선 소장본(광문회본)과 마찬가지로 3권에서 5권에 이르는 결락본이다. 일본 덴리대 소장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삼국유사는 1916년 이마니시 류가 서울의 인사동에서 구입해 소장했던 것으로 이마니시본이라고도 불리며, 이후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어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5권 완질로 책표지 상단에 '선상공가장서', 하단에 '남부의근추기'라는 장서 도장이 찍혀 있고 조선 중기의 문인 김부의(1525~1582)의 아버지 김연(1487~1544)이 소장했다가 18세기 안정복에게로 건너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순암수택본은 중종 임신간본이 간행된 해에서 32년 정도 지난 1544년에 간행되었는데, 낙장이 없는 5권의 완질본이기는 하지만 심하게 가필되었거나 윤필된 부분이 많고(특히 왕력편에 상당한 내용이 첨가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이나 고려대 만송문고 소장본에서 결락되었거나 오자 또는 결획된 부분을 첨가하거나 바로잡기도 했지만 규장각본이나 만송문고본에 분명히 같은 글자로 나와 있는 것을 첨가하거나 다른 글자로 고치기도 해서 중종임신간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무리한 경우도 없지 않다. 1926년 순암수택본을 축소, 영인하여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총서 제6으로 간행하였고, 고전간행회에서 1932년 순암수택본을 원래의 크기로 영인, 한장본 2책으로 간행하였다. 1964년 일본의 가쿠슈인(學習院)대학 동양문화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에서 고전간행회영인본을 축소, 재영인하기도 하였다.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는, 최남선에 힘입어,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가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야사에 해당하는데, 이는 일연이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존중하면서 《삼국사기》에 채 실리지 못한 단군조선, 가야, 이서국 등의 기록과 수많은 불교 설화 및 향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우선 역사서술의 체재를 삼국사기와 달리하고 있다. 정사로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되어 있으나, 개인의 저술인 삼국유사는 내용별로 편목을 나누어 옛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기술된 옛 이야이기의 주제들은 체재상의 제약없이 저자에 의하여 자유로이 선택된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편목 중에는 중국 고승전의 체제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대로는 아니다. 가령 탑상조 같은 것은 그 예이다.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사로서의 기전체의 성질상 기존 사료의 재편성이 주된 작업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유로웠다. 논자에 따라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비교하기 적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같은 불교사서인 고승전과 비교해야 온당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는 상대, 중대, 하대의 3시기로 구분하며, 성골이 아닌 진골이 집권하기 시작한 태종무열왕부터를 중대로 삼았고 진골과 그 방계왕족간의 왕위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한 선덕왕 이후를 하대로 보았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3시기로 구분하며, 불교식 왕명과 중앙관제를 도입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한 법흥왕을 중고의 시작으로 삼고, 중국식 시호를 받기 시작한 태종무열왕 이후를 하고로 보았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삼국사기의 3시기 구분법을 중심으로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유사의 상고와 중고가 삼국사기의 상대 안에 포함되므로 상고와 중고를 추가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의 고조선 관련 기록에서 환인(桓因)이 원래 환국(桓國)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문정창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 하에서 《삼국유사》 정덕본을 영인하면서, 이마니시 류가 주동이 되어 한국의 역사를 날조하면서 ‘환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책에는 붓으로 덧칠하여 원래의 글자를 바꾼 흔적이 있으며 1904년 일본 도쿄 제국대학에서 출간된 《삼국유사》에는 해당 구절이 “昔有桓國(석유환국)”으로 인쇄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같은 시대에 쓰여진 《제왕운기》에서도 ‘환국’이 아니라 ‘환인’ 또는 ‘상제환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평양 조(條)에서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因’ 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덕본이 판각(1512년)되기 이전에 편찬된 《단종실록(노산군일기)》단종 즉위년(1452년) 6월 28일 기록에는 “《三國遺史》, 有曰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고기》에서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덕본 이전의 《삼국유사》에도 환인(桓因)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쿄 제국대학본 《삼국유사》에도 “昔有桓國(석유환국)”에 이어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할주가 붙어 있어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석은 불교용어로 제석환인은 불교의 신인 인드라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환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다. 최남선은 정덕본보다 고본(古本)인 “송석하본(宋錫夏本, 석남본)”을 비롯하여 “광문회본(光文會本),”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등을 교감하여 정덕본의 “囯”자가 원래 “因”의 이체자(異體字)인 “口 + 土”(口자의 내부에 土 가 들어 있는 형태) 또는 “𡆮”으로 새겨야 하는 것을 실수하여 囯으로 잘못 새긴 오자(誤字)임을 고증하였다. 최남선의 고증 이래 한국사학계에서는 환국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환국 (의사 역사학) 환국(桓國)은 고조선(또는 환웅의 시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일부 의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나라로, 《삼국유사》의 특정 판본과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학계에서는 환국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나 일부 의사역사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내용을 신뢰하며 환국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주장하기도 한다. ‘환국’이라는 단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의 가장 오래된 판본인 〈정덕임신본〉에는 ‘환인(桓因)’이 ‘환국(桓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인해 《약천집(藥泉集)》, 《동사(東史)》 등 조선 중기 이후의 사찬 역사서들 중 일부에 단군신화의 해당 구절이 ‘환국(桓國)’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었다. 《약천집》의 경우 《삼국유사》가 출전이며 다른 사서에서도 등장 형태가 모두 《삼국유사》와 같은 昔有桓國(석유환국)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글자를 잘못 쓴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대부분의 한국사학자들은 이를 환국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사학자 신채호와 재야사학자 문정창 등은 이 구절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환국의 실존 증거라고 여겼다. 《환단고기》에는 환국이 약 90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국가로 묘사된다. 3300여 년 또는 63000여 년 동안 존속하였던 환국의 군주 명칭은 환인이며 환단고기에는 7명의 역대 환인의 계보도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환국이 천해(天海) 동쪽에 있으며 영토 면적이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했고 12개 연방 국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과 환단고기의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환국의 기록을 믿으며 환국이 중국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가 이유립 또는 계연수에 의해 조작된 위서라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다음은 환단고기에서 기록된 역대 환인이다. 다음은 환단고기에서 기록된 환국의 12개의 연방 국가 목록이다. 이들 국명의 일부는 《진서(晉書)》 〈사이열전〉에 위치와 국명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이유립 또는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제작할 때 이를 베꼈을 것으로 본다. 이와는 반대로 일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12개의 연방 국가의 실존을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이들 국가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이 각각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가운데 하나인 수메르 문명과 도시국가 우르를 지칭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군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국조(國祖)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대종교(大倧敎)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단군은 왕검, 왕험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 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 단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경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조선을 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 조선은 한국 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응제시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朗城)을 쌓고 태자 부루(夫婁)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塗山會盟)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으로는 고려 때의 기록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다. 그 이전 기록에는 단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단군이란 글자는 없지만 “선인 왕검”이란 글자가 보인다. 단군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 《삼국유사》는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 왕검이라고 기록한다. 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그는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1122년(주 무왕 13년,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 《제왕운기》는 약간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1028년 또는 1038년 또는 104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의 단군은 ‘박달나무 단(檀)’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기록에 세주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왕검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이다. 인명이 아닌 경우 위만이 도읍하였던 고조선의 수도에 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선인 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 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단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 기록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만이 이러한 기록이 위서가 아닌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다. 단군은 고려 말, 대몽항쟁 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 세종 때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사당을 지어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렸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각축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구심점으로 대폭 강조되어 단군교(檀君敎)와 같은 종교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부각된 단군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종교 및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단군 시대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풀린 《대동사강》, 《규원사화》 등의 위서들이 편찬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제 혹은 친일파들이 단군을 종교적·학문적으로 이용하여 민심을 무마하려 하거나 일선동조론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악용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남한의 단군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 사회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중점을 두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은 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남선은 무당이 ‘단골’로 불리는 것을 주목하여 단군을 제사장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단(檀)을 제터(壇)의 다른 표현이라 하여 단군을 ‘壇君(단군)’으로 표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 지적에 대해 무녀를 당골네라고 부르는 것은 무녀가 서낭당이 있는 고을에 산다고 하여 ‘당골네’로 부르는 것일 뿐, 단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단군 및 단군신화를 고조선에서 정치권력이 성립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건국신화로 보는 것이 기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4년에 단군릉을 발굴할 무렵부터 입장을 바꾸어 단군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고 단군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단군은 한민족이 세운 국가인 고조선의 최초의 왕으로서 출생·건국·무덤이 모두 평양에 있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근처에는 북한이 발굴하여 재건한 단군릉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에 대하여 남한의 역사학계는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가 유행하면서 세간에는 단군의 역대 왕계보가 퍼지기도 하였다. 한편 2007년에 청동기 시대의 연대를 기존보다 더 오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 발굴 결과에 발맞추어 국사교과서의 고조선 관련 부분의 서술에서 고조선의 편년을 조금 더 확정적으로 서술하는 형태로 지침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를 “단군·고조선을 신화에서 역사로 수정”한다는 자극적인 보도를 하여 세간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역사학계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언론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단군은 조선시대부터 환인, 환웅과 함께 국조로 민간에서 숭상되었으며 국가적으로도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특히 황해도 지역에서 단군 관련 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외세의 침탈이 격화되면서 단군에 대한 숭상은 점차 강화되어 환인, 환웅,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대종교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단군을 신앙하는 여러 소수 종교가 나타나기도 한다. 무속에서는 단군을 옥황천존, 삼신제석 등의 천신과 함께 모신다. 《위서(魏書)》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삼국유사》에서 인용되었다. 당요와 같은 시기에 단군이 아사달을 수도로 삼고 고조선을 세웠다. 《고기(古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삼국유사》에서 인용되었다. 당고 즉위 50년에 단군이 평양성을 수도로 삼고 고조선을 세운 뒤 아사달로 도읍을 옮기고 1500년간 다스렸다. 《단군고기(檀君古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인용되었다. 고조선의 임금은 단군(檀君), 부루(夫婁), 금와(金蛙)의 3대만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의 임금은 임검씨(壬儉氏), 부루씨(夫婁氏), 읍루씨(浥婁氏)의 3대만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고 있는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의 기록에는 고조선을 지배하였던 역대 단군 47대의 역년과 상세한 치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서는 47대의 단군 인명은 거의 모두 일치하지만 역년과 상세한 치세 내용은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세상에 공개된 연도가 가장 늦은 《환단고기》에는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에 각각 등장하는 치세 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두 책을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 공통된 47대 단군의 왕호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285년까지 1048년간 지속되었다.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128년까지 1205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는 기자조선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2512년부터 기원전 416년까지 2096년간 지속되었다.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238년까지 2096년간 지속되었다. 단군의 어원을 투르크 및 몽골 지역의 천신을 가리키는 텡그리로 보는 주장이 있다. 일연 일연(一然, 속명(본명) 김견명(金見明), 1206년 7월 18일(음력 6월 11일) ~ 1289년 7월 26일(음력 7월 8일))은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로, 보각국사(普覺國師)라고도 한다. 속성은 전씨, 본관은 옥산(玉山), 속명 김견명(金見明)이며,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나중에 '일연'으로 바꾸었다.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경상북도 경산(慶山)에서 출생하였고 1214년(고종 1) 9세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에 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46년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에 올랐다. 1261년(원종 2) 왕의 부름으로 상경,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었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통을 계승, 1268년(원종 9) 조지(朝旨)를 받고 운해사(雲海寺)에서 선교의 대덕(大德) 1백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개최, 그 맹주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왕명으로 운문사(雲門寺) 주지에 취임, 1281년 왕에게 법설을 강조했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어 원경충조의 호를 받고, 이 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서 고향에 돌아갔다. 다음해 조정으로부터 토지 백경(百頃)을 받아 경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했고 궁궐에 들어가서 구산 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의 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하고, 특히 향가를 비롯한 불교 관계 기사를 수록, <삼국사기>와 함께 고대문학과 역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된다. 이 밖에 <조정사원(祖庭事苑)>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을 지었다. 일연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불교 관련 서적 80여 권을 썼다고 임종에 든 군위군 인각사 일연비문에 적혀 있다. 《삼국유사》가 가장 유명하다.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유사를 모아 고려 충렬왕 때의 명승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이 지은 책. 전 5권 2책. 제1은 왕력 기이(王歷紀異), 제2는 문호왕(文虎王) 내지 가락국기(駕洛國記), 제3은 흥법탑상(興法塔像), 제4는 의해(義解), 제5는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왕력에서 삼국과 가락국의 왕대와 연표를 싣고, 기이(紀異)에서는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국가의 흥폐·신화·전설·신앙 등과 신라 최후의 왕인 경순왕(敬順王)까지의 신라 왕조 및 백제·후백제·가락국에 관계되는 역사 등 62편의 글을 싣고, 흥법(興法)에서는 37편의 글로 신라를 중심으로 불교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의해(義解)에서는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설화 13편을 수록했고, 신주(神呪)에서는 밀교(密敎)의 승려들에 대한 행적 3편을 싣고, 감통(感通)에서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자들의 설화를 실었으며, 피은(避隱)에서는 깊은 학문과 엄격한 도덕률을 지니고 있던 고승들의 이적(異蹟)에 대한 10편의 설화를 싣고, 효선(孝善)에서는 뛰어나게 효행을 한 5사람의 이야기를 수록했다. 특히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향찰문(鄕札文)으로 쓰인 향가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국어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되어 준다. 현재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보이지 않고, 중종 7년(1512)에 당시의 경주 부사 이계복에 의해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현재로는 최고본이며, 활자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1908년에 된 도쿄 문과대학 사지총서본(東京文科大學史誌叢書本)이고, 그 뒤 1921년에 교토 제대 문학부총서(京都帝大文學部叢書) 제6으로 정덕본을 영인했다. 이 밖에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계명구락부본(啓明俱樂部本)·삼중당본(三中堂本) 등과 이병도의 역주본(譯註本)이 있다. 현재 전하는 책이나, 일연비문에는 적혀 있지 않다. 동화 (동음이의) 동화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최종영 최종영 (崔鍾泳, 1939년 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제13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다. 본관 강릉이고,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저작권 저작권(著作權, )은 창작물을 만든이(저작자)가 자기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배타적인 법적 권리로,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정되는 권리이다. 저작권은 만든이의 권리를 보호하여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저작권자는 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다른 사람이 복제·공연·전시·방송·전송하는 등의 이용을 허가하거나 엄금할 수 있다. 저작권은 지식 재산권의 하나로, 인격권과 재산권으로 나뉜다. 저작권의 내용은 나라마다 다르며, 국제법은 베른 협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저작권을 표시하기 위해 ©, (C) 또는 (c) 심볼을 이용하기도 한다. 정신적인 노동에 의해 창조된 것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권리가 인정된다는 노동이론과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면 창작활동이 활성화되어 궁극적으로 사회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유인이론이 저작권 제도의 근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저작권이 발생하는 저작물은 창작적 표현물, 즉 표현 형식이며, 저작물에 담긴 내용(사상·감정—아이디어, 사실, 방법, 주제) 자체는 보호 받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생각과 표현을 구별하기는 어려운데, 저작물 종류나 내포된 아이디어 종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학술 저작은 그 내용을 이루는 과학적 사실·진실을 표현할 방법이 한정되어 있어서, 표현을 넓게 보호하려고 하다 보면 내용 자체의 이용을 제한하게 된다. 반면, 예술적 저작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으므로 그 표현이 상대적으로 넓게 보호되며, 예컨대 상세한 소설 줄거리 같은 것도 저작권 보호를 받는다. 생각·표현 이분법은 미국에서 오래전부터 인정받아 왔다. 일본에서도 받아들여졌고, 한국에서도 1993년에 대법원 판결로 확립되었다. ‘판권, 저작권’이라는 뜻. 무용 저작권은 처음 300여 년 동안 인정되지 않았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표기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무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확립하게 된 것은 1937년 레오니드 마씬느(Léonide Massine)가 와실리 드 바질(Wassili de Basil)을 상대로 한 소송이 그 시작이었다. 저작권은 유럽에서 발달했다.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면서 독자층이 확대되었다. 출판이 활발했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1517년 저작권법이 만들어졌고, 영국에서는 소수에게 출판 독점권을 줬다. 1710년 영국 앤 왕 때 저작권법이 제정되어, 저작권 보호 기간이 정해지고, 기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공유하게 되었다. 1886년 베른 협약이 체결되었고, 뒤에도 여러 번 개정되었다. 1952년에는 베른 협약에 참여하지 않는 나라를 중심으로 세계 저작권 협약 (UCC)이 체결되었는데, 그 뒤 조약에 가맹한 나라들이 베른 협약에 가입하면서 베른 협약이 국제적으로 저작권 기본 조약이 되었다. 1996년, 세계 지재권 기구 저작권 조약(WCT)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는 인터넷 확산에 따라 제기된 전송권과 같은 것이 저작권에 더해져 베른 협약을 넓혀 나갔다. 1993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무역 관련 지재권 협정 (트립스)이 체결되어, 지식 재산권을 무역 규범으로 만들었다. 저작권은 인격권(moral right)과 재산권(economic right)으로 나뉜다. 저작 인격권은 공표권(저작물을 공표할 권리), 성명 표시권(스스로의 이름을 밝힐 권리), 동일성 유지권(저작물을 바꾸지 못하게 할 권리)을 아우른다. 인격권은 만든이에게만 따르며 양도·상속할 수 없다. 보통 저작권이라 하면 저작물을 이용할 권리인 저작 재산권을 가리킨다. 저작물은 지적·문화적 창작을 넓게 포괄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시·논문·강연·각본·음악·연극·무용·회화·서예·도안·조각·공예·건축물·사진·영상·도형·컴퓨터 프로그램·작곡·영화·춤·그림·지도 등이 포함된다. 저작물에는 물리적 매체 뿐만 아니라, 디지털화된 형태 역시 저작물에 해당된다. 즉 문자 형태의 어문 저작물 뿐만 아니라. 컴퓨터로 작성한 건축 설계도면, MP3와 같은 음악 저작물, DVD 영화나 비디오 같은 영상 저작물, 소프트웨어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저작물, 그 밖에 디지털화된 미술이나 사진 저작물 등이 디지털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된다. 저작자는 저작물에 대해 법이 정하는 권리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 저작권과는 별도로, 저작물을 실연하거나 음반으로 만들거나 방송한 이는 그 실연·음반·방송에 대해 일정한 권리를 갖는데 이를 저작 인접권이라 한다. 저작권이 있는 저작물은 저작 재산권자에게 허락을 받아 이용하여야 하며, 허락()을 받으면 그 허락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권리자가 허락 조건을 미리 명시해 놓은 경우에는 따로 허락을 받지 않아도 그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키백과에 실린 글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공동 저작물은 저작권자가 모두 합의해서 행사한다. 저작권이나 인접권은 관리 단체에서 권리자를 대신해 관리할 때가 많다. 일정한 조건 하에선 저작 재산권이 제한되어, 허락을 받지 않고도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다. 공정 이용 조건에는 인용, 보도, 학교, 도서관, 사적 이용 같은 것이 있다. 이때 해당 저작물을 지나치게 이용해서는 안 되며, 세세한 이용 조건은 나라마다 다르다. 저작권이 일부 제한되는 경우는 나라별로 다르다. 공정 이용은 저작물을 별도 허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경우이다. 또한 사실 자체와 사실을 전달하는 시사 보도 등은 저작권으로 보호 받는 대상이 아니다. 법령, 고시·훈령, 판결과 같은 정부 저작물도 공공의 재산이므로 저작권이 없을 수 있다. 최초의 저작권의 법으로는 앤여왕의 법이 있다. 저작권은 저작물을 만들고, 객관화해 밖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저절로 생긴다. 베른 협약은 "무방식주의"라서 저작물을 따로 등록하거나 저작권을 © 기호 등으로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영미 법계에선 저작이 유형물에 고정돼야 하며, 한국 등 대륙 법계에선 고정되지 않아도 된다. 저작 재산권은 일정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베른 협약은 만든이가 죽은 뒤에 적어도 50년까지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상속인이 없으면 소멸) 현재 50년까지 보호하며, 미국은 50년이었으나 70년으로 늘렸다. 대한민국의 경우 한미 자유 무역 협정(FTA) 체결에 따라, 2011년 저작권법 개정을 통해 2013년 7월부터 보호기간을 70년으로 늘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의 저작물이 2013년 6월 30일까지 저작권이 50년으로 소멸되지 않았을 경우 70년의 보호기간을 적용받는다는 것이다. 저작자는 자기 재산권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으므로, 저작 재산권은 유무상으로 양도할 수 있고, 상속도 가능하다. 저작 인격권은 상속되지 않지만, 저작자가 죽은 뒤에도 일부 존속한다. 존속 기간은 재산권 보호 기간보다 길며, 이는 나라마다 다른데, 기한을 두지 않고 보호되기도 한다. 저작권은 시효가 만료되면 그 권리가 없어지며, 그 전에 저작자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할 수도 있다. 저작자 명예를 훼손하거나 저작물 또는 그와 "실질적으로 유사한" 표현물을 허락 없이 이용하면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저작권을 침해하면 피해자에게 민사상 손해 배상 책임을 지며, 형사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저작권을 보호하려는 기업과 이용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고 있다. 리처드 스톨만은 1990년대에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을 제창하여 소프트웨어와 저작물은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피레프트는 저작권 체제 하에서 저작물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저작권을 공유하는 효과를 낳는다. 저작물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허락하는 표준 약관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990년대, 2000년대 미국의 국제적인 시민단체 전자 프런티어 재단(EFF)은 활동가 존 페리 바를로를 중심으로 저작물 교환의 합법화운동 등 법률의 전반적인 개정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6년 파이럿베이 사건으로 설립된 스웨덴 해적당을 필두로 한 해적당 인터내셔널과 독일 해적당은 기술진보에 따라 디지털로 작성된 저작물의 자유로운 복사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저작물에 대한 일반적 접근 기회로 받아들이고 활용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개인적인 용도의 복사와 파일공유의 범죄화를 끝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해적당에 따르면 저작권법의 제약이 없다면 효과적으로 지식의 유통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들은 소비자 적대적인 디지털 권리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DRM)같은 복제 방지장치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적당은 선거구호로“모든이의 지식에 대한 접근”을 사용한 바도 있다. 경제학자 미쉘 볼드린(Michele Boldrin)과 데이빗 케이 레빈(David K. Levine)은 캠브리지 대학 출판사의 새로운 책 '지적 독점에 대항하여(Against Intellectual Monopoly)'을 통해 특허 및 저작권 시스템이 시장에 발명품이 진입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특허법과 저작권법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레빈과 볼드린은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로드했다고 고소당한 학생들과 특허소지자가 생산한 값비싼 의약품을 구입할 수 없어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AIDS 환자들을 특허 및 저작권 시스템의 실패사례로 지적했다. 2018년 6월 20일 유럽연합 의회 법무위원회가 인터넷 상의 저작물 공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승인해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초안 13항에 따르면 용도에 상관없이 저작권이 있는 콘텐츠의 사용하거나 재배포하면 안 된다. 이러한 행위를 허용하는 플랫폼도 처벌받게 된다. 또한 링크를 통해 공유를 하면 저작권자에게 비용을 지급하게 하는 '링크 택스'도 있다. 이에 대해 구글 부사장, 월드 와이드 웹 창시자 팀 버너스 리 등 여러 정보기술 업계 지도자들은 "인터넷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의 저작권법에 따르면, 사진, 회화, 디자인, 영화, 드라마, 게임, 소프트웨어, 만화, 광고, 뮤직비디오, 음악, 가사, 글 등 개인이나 단체, 기업에서 만든 모든 창작물은 저작권을 가지게 된다. (저작권법 제4조제8조제9조) 2009년 한나라당에서는 사이버모욕죄 도입 추진과 함께 저작권법 강화 방안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처벌과 규제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고 개인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까지 불거져 혼란이 가속되고 있으며,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중 83.9%가 저작권법 위반행위에 해당되었고, 정부 기관 홈페이지의 61%가 역시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되는 등 정부 당국자들도 거의 알지 못 할 정도로 제대로 된 홍보나 토론도 되지 않은 가운데 시행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저작권법 개정을 추진했던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에 비난글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나라당 나경원의원은 미니홈피에 올렸던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되는 그림에 대하여 비난을 받고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2011년 영리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은 인터넷 사용자들이 인터넷 정보 공유를 보다 활발히 할 수 있게 하고, 저작권법에 의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하지 않는 "공정 이용"을 허용하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지적재산권관련 이행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정부는 표현의 자유의 침해 우려 등 비난이 거세지자 "저작권법 개정은 헤비업로더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일반적인 인터넷 이용자들은 이전과 똑같이 이용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당국의 단속 대상이 아닌 경우라 하더라도, 다른사람의 사진이나 글 등을 인터넷에 무단으로 올리는 등의 사소한 저작권법 위반행위에 대하여도 법무법인에 의하여 무차별적인 고소고발을 당하는 등 법적인 분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네티즌들의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2016년 3월, 저작권법이 일부개정되었으며, 2016년 9월 23일에 개정된 저작권법이 시행되었다.2016년 9월 23일, 대한민국에서 개정된 저작권법이 시행되었다.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이 되는 저작물이란 (중략) '창작적인 표현형식'을 담고 있으면 족하고, 표현되어 있는 내용 즉 사상 또는 감정 자체의 윤리성 여하는 문제 되지 아니하므로, 설령 내용 중에 부도덕하거나 위법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저작권법상 저작물로 보호된다.(대법원 2015. 6. 11. 선고 2011도10872 판결)' 미국은 50년간의 저작권보호기간을 1998년 "저작권보호기간연장법"(SonnyBono Copyright Term Extension Act)에의해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괄적으로 70년으로 연장되었다. 업무상 저작물에대해서는 공표기준으로 95년 또는 창작후120년중 빠른기간이 도래하는것을 따르게된다. 이러한 기존 저작물을 포함한 일괄적 저작권20년 연장의 내용을 담는 "저작권보호기간연장법"(미국하원의원 소니 보노의 이름을 인용해 "소니보노법"이라고도 한다.) 은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를 위반한 것인지 여부"에대한 위헌심사가 제기되었었던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사안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편 개별적인 저작권의 효력제한사유 이외에도 포괄적인 효력제한사유인‘공정이용’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 저작권법 제107조) 이러한 제도상의 균형 장치는 저작권보호의 수혜자가 저작권을 양수한 제3자가 될수있는경우와 일반 공중의 혜택 수혜와의 이익형량 문제 그리고 기술발전에 따른 저작권의 침해우려등이 다각적으로 고려되는 상황을 잘나타내고 있다. 국제법상 국제협약으로는 (1) 세계저작권협약 (2) 제네바음반협약 (3) 베른협약 (4) WTO 협정 (5)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저작권 조약 (6)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실연및음반 조약 그리고 (7) 그 밖에 미국이 당사자인 저작권 조약 을 동법 "제1장 저작권의 보호대상과 범위 제101조 정의"에서 거론하고있다. 국제법상의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저작권 보호기간 50년은 1886년 스위스 베른에서 체결된 베른협약에 준하고있다. 문학·예술적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베른 협약은 저작권 보호에 관한 기본 조약이다. 그러나 개별국은 특별하게 추가적인 저작권보호기간을 갖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창작자인 저작물은 저작자의 생존 기간 동안 및 그의 사망 후 50년(2013년 7월 1일부터는 70년으로 바뀜)간 보호된다. 그러나 개인이 창작자인 저작물이더라도 창작자의 본명을 쓰지 않고 예명 등을 표시하여 공표하는 이명(異名)저작물이나 아무런 이름도 표시하지 않고 공표하는 무명(無名)저작물은 공표한 때로부터 50년(2013년 7월 1일부터 70년)간만 보호된다. 개인이 창작자가 아니라 법인·단체·기관 등(이하 ‘법인 등’이라 한다)이 창작자가 되는 단체명의저작물 역시 공표한 때로부터 50년(2013년 7월 1일부터 70년)간 보호된다. 또한, 영상저작물은 창작자가 개인인지 법인 등인지를 불문하고 공표한 때로부터 50년(2013년 7월 1일부터 70년)간 보호된다. 또한 자칫 혼동하기쉬운점으로는 2013년6월30일에 저작물의 저작권이 50년으로 소멸되지 않는다면 70년의 보호기간을 적용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1963년도에 창작물로 저작권이 발생했다면 2013년도에 저작권이 소멸하는것이 아니라 2033년에 저작권이 소멸되어 퍼블릭 도메인이 되는 경우이다. 한편 보호기간이 만료되어 퍼블릭 도메인이된 허락 없이 이용가능한 저작물은 공유마당(gongu.copyright.or.kr)에서 확인가능하다. 한편, 저작권 침해와 관련된 형사 제재는 친고죄로서 저작권자로부터 고소가 있어야 한다. 다만, 영리를 목적으로 또는 상습적으로 저작권을 침해한 자, 업으로 또는 영리 목적으로 기술적보호조치 무력화, 권리관리정보 제거 등을 한 자, 저작권 허위등록, 저작자가 아닌 자의 저작자 표시, 저작자 사후의 저작인격권 침해, 무허가 저작권위탁관리업 운영 등의 경우에는 비친고죄이다. 또한 프로그램의 저작권의 침해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복제물을 그 사실을 알면서 취득한 자가 이를 업무상 이용하는 경우에는 피해자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처벌하지 못하는 반의사불벌죄이다. 따라서, 저작권자는 그 권리를 침해하는 자에 대해서 침해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 침해의 정지를 청구하거나, 침해가 예상되는 경우 침해의 예방 또는 손해배상의 담보 및 침해행위에 의하여 만들어진 물건의 폐기나 그 밖에 필요한 조치를 청구할 수 있다 판권은 저작권의 옛 이름으로 일본에서 비롯한다. 일본은 처음 저작권 개념을 들여오면서 "판권"으로 번역해 쓰다가, 1899년 판권법을 저작권법으로 바꾸면서 용어를 바꿨다. 현재는 대한민국 내에서 판권은 출판권의 준말로 쓰인다. 출판의 권리를 의미하는 출판권은 저작 재산권의 일부로서, 저작물을 인쇄해 발행(복제·배포) 할 수 있는 권리이다. 저작재산권 보호기간에 대한 바로알기)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9NBjb47UtsEJ:https://storyum.kr/story/cmm/fms/FileDown.do%3FatchFileId%3DFILE_000000000007609%26fileSn%3D1%26bbsId%3D+&cd=1&hl=en&ct=clnk&gl=kr 대한민국 저작권법 대한민국의 저작권법은 저작권에 대한 기준을 적용한 대한민국의 법률이다. 현재는 사후 70년, 단체 명의의 저작물은 창작후 70년간 보호하고 있다. 이집트 이집트 아랍 공화국(, , , -共和國), 줄여서 이집트(, , , ) 또는 에굽 (Egypt, 埃及)은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로, 시나이 반도를 통해 서아시아와 이어져 있다. 영토 면적은 100만1450 km²로, 북쪽에는 지중해, 북동쪽으로는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과 접하고 있고, 동쪽에는 홍해, 남쪽에는 수단, 서쪽에는 리비아가 있다. 약 9천만 명의 인구 중 90% 이상이 이집트 전체 면적의 약 5%를 차지하는 나일 강변에 거주하는데, 나일 강변의 약 3만6천 km²는 이집트에서 거의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사하라 사막 등 이집트 전체 면적의 약 94.5%를 차지하는 사막 지역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이집트 인구의 절반 가량이 도시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또 이 나라는 중동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이다. 또 경제 면에서도 매우 앞선 나라로서, 국가 생산에서 관광, 농업, 산업, 서비스업 부문이 각각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하여 이집트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이는 투자 유치를 위한 입법, 사회 및 정치 안정, 근래의 무역 및 시장 개방 덕분이기도 하다. 1922년에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며, 1953년 육군 장교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선언하게 된다. 수도는 카이로(아랍어로 '카히라')이다. 이집트 국민의 90%는 이슬람교 신자이며, 10%는 기독교 신자이다. 기독교 중에서는 콥트교 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현대 공용어로는 아랍어(이집트 아랍어)이고, 고대에는 고대 이집트어(문자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국호로는 "Kemet" (kṃt)이 있는데, 이 말은 "검다"는 뜻의 "kem" 에서 나온 말로, 이것은 나일 강의 홍수로 형성된 비옥한 흑토에서 유래했다. 또 "deshret" (dšṛt)이라고도 하는데, "붉은 땅"을 뜻하며 이집트의 사막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이 이름은 이집트 언어의 콥트어 시대에는 "kīmi", "kīmə"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어는 케미아(Χημία, Khēmía)로 나온다. 다른 명칭은 "t3-mry"으로, "강가의 땅"이란 뜻이다. 상하 이집트는 각각 "Ta-Sheme'aw"(t3-šmˁw, "사초(莎草)가 자란 땅"), "Ta-Mehew"(t3 mḥw, "북쪽 땅")이라고 했다. 현대 이집트의 공식 국호는 "미스르"(아랍어 "Miṣr", 이집트 아랍어: Maṣr)이다. 셈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집트를 일컫는 다른 셈어파의 단어와 어원이 같은데(가령 히브리어의 מִצְרַיִם , Mitzráyim처럼), 말 그대로 "두 개의 좁은 땅"을 뜻하는 말이었다.(이집트에 상, 하 이집트 두 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낱말은 "대도시", "문명" 또 "나라", "변경의 땅"도 의미했다. 영어 명칭 "Egypt"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굽토스(Αίγυπτος, 에귑토스)에서 유래하여 라틴어 "애급투스"(Aegyptus, 에귑투스)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형용사 "aigýpti, aigýptios"는 콥트어에 차용되어 "gyptios, kyptios"가 되었으며, 아랍어에서 "qubṭī" 가 되었다가 qubṭ로 변해 다시 영어로 전해져 콥트(copt)가 되었다. 원래 이 말은 후기 이집트어 낱말 "Hikuptah" ("Memphis")에서 나온 말로, 초기 이집트어 명칭 "Hat-ka-Ptah" ("ḥwt-k3-ptḥ)", 멤피스의 프타 신전의 이름인 "프타의 카(영혼)의 집"을 뜻했다)가 와전된 것이다. 스트라보는 아이귑토스(Αίγυπτος) 명칭이 "에게 해의 밑"을 뜻하는 "Aigaiou huptiōs" ("Aἰγαίου ὑπτίως")의 합성어에서 변한 말이라는 민간 전승도 전하고 있다. 이집트의 역사에는 나일 강과 파라오(이집트의 왕)가 빠질 수 없다. 기원전 525년에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에 점령당한 이후, 1936년까지 피정복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이집트는 2천 년 전에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하였고, 아랍인들이 점령하여 지금처럼 이슬람 국가가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짧은 기간 동안 점령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세기 초에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그리스의 독립을 저지하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패배한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이집트는 자치권을 얻는다. 한 때는 수단이나 키프로스까지 진출했다. 그중 키프로스는 훗날 영국의 땅이 되어 1960년에 독립을 맞이한다. 무함마드 알리는 이 시기에 이집트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그는 이집트를 근대화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개혁을 단행한다. 그 중 하나가 수에즈 운하이다.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12년이 걸렸고, 수만명을 넘는 노동자들이 혹사를 당했으며 그 때문에 이집트는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다. 게다가 프랑스의 차관에 의존한 것이라 이집트로써는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훗날 독일 제국이 되는 프로이센을 상대로 50억 프랑의 빚을 갚아야 할 처지였다.(보불전쟁) 이것을 눈치챈 영국이 이집트의 상황을 이용하여 1876년에 보호령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도중에 아라비 파샤가 영국과 다퉜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영국은 1914년에는 이집트를 정식으로 식민지로 병합하려 하였으나 이는 이집트인들의 막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이집트인들 중에는 친독적인 성향을 가진 자도 있었다(당시 독일 제국은 영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과는 적대국이었다). 또한 제1차세계대전 기간이었으므로 영국은 이집트의 반영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오히려 영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는 쪽을 원하였다. 때문에 식민지 병합은 무산되었고, 결국 전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명목상 자주 독립국이지 군권을 비롯한 여러가지 권리가 영국에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이집트에 반환된다. 당시 이집트에 대영제국의 정시 왕령식민지가 아니라 보호국이었으므로 은 독자적인 군주(메메트 알리 왕조 유지)와 내각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올림픽에 진출한 적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때부터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는 1922년에 왕국의 이름으로 독립하였다(문서 중복을 막기 위해 근대 이집트 왕국이라 표기함). 수에즈 운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완전 독립을 한 것이다. 군대는 193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공군도 이 때 창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연합의 회원국으로 가입했으며, 제1차 중동 전쟁도 맞이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집트와 요르단을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침공하여 승승장구했으나,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 국가들은 결국 패배를 맞이한다. 당시 이집트의 국민들은 가난했고, 정치인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이를 틈타 중동 전쟁에 참전한 바 있었던 나세르라는 장교가 1953년에 공화정을 선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단독적인 평화노선을 세우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묵인하고 넘어갔다는 이유로 다른 아랍 국가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그가 암살되자, 아랍 세계의 정상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1981년에 권력을 승계받아 30년째 재임하였으나 2011년 2월 11일, 반정부 시위의 영향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무바라크의 퇴진 이후, 군부가 권력을 잡다가 총선에서 무함마드 모르시가 당선되었다. 모르시는 이집트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해산된 의회재소집을 결정하면서 군부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집트 헌재는 의회해산을 따라야 한다고 발표했지만, 미국은 민주주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집트 헌법재판소가 모르시의 의회재소집은 무효라고 밝혔고, 모르시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이 이집트에 왔을 때 7월 15일에 토마토와 신발세례를 받았다. 2012년 7월 24일에 모르시는 새 총리를 지명했다. 그리고 칸딜 총리는 새내각 구성을 마쳤다. 최근 시나이 반도에서 테러가 일어났고 모르시는 정보국장을 바꿨다. 하지만 시나이 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무슬림형제단과 세속주의세력간에 정치적 충돌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최근 모르시는 국방장관을 해임하면서 모르시와 군부사이에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해임대신에 대통령고문으로 바뀌었다. 2012년 8월 24일에는 모르시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져서 모르시지지자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충돌로 5명이 다쳤다. 모르시는 8월 28일에 기독교인과 여성을 정부관리로 임명했다.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일부가 반무슬림형제단세력의 연대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집트는 새로운 헌법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집트는 법원에서 이슬람무장단체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집트는 새 헌법초안을 작성중인 가운데 일부 조항이 여성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지적에 논란에 일고 있다. 2012년 10월 9일에는 전군부지도자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2012년 10월 12일에는 모르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충돌해서 1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집트 헌법재판소는 10월 17일에 새 헌법 초안의 일부가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집트는 여성뉴스앵커가 히잡을 쓴 것을 계기로 이집트항공도 여자승무원이 히잡을 쓰는 것을 허용하면서 이슬람화에 대한 비판이 11월 13일에 일어났다. 11월 22일에 무르시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헌법초안을 발표하고 12월 15일에 국민투표를 부친다고 발표한 이후 이집트에서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과정에서 반정부시위대와 친정부시위대가 충돌했다. 이집트 사법부도 93년만에 시위에 동참했다. 12월 5일에는 대통령궁부근에서 무르시 찬반세력들이 충돌했다. 12월 8일에 무르시는 헌법 선언문을 폐기했지만, 국민투표는 예정대로 실시한다고 밝혀서 반대파는 반발하고 있다. 1차투표가 끝난 다음 2차투표가 끝나고 64%가 찬성표를 던지고 새 헌법은 통과되었지만, 야권은 반발했다. 무르시는 26일에 새헌법을 승인하는 것에 서명한 뒤 방송연설에서 야권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2013년 1월 25일에 이집트는 혁명이 일어난지 2주년이 되었지만, 시위와 함께 유혈사태가 일어나면서 1월 27일에 무르시는 3곳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월 1일에는 무르시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집트 전역에 발생하면서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충돌했다. 2013년 7월 3일 압둘팟타흐 시시(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무함마드 모르시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이후 쿠데타를 주도한 압둘팟타흐 시시가 2014년 6월 8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집트는 면적이 100만1450 km²로, 전 세계에서 38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이는 중앙 아메리카 전역과 비슷한 넓이이며, 스페인의 2배, 영국의 4.1배, 미국 텍사스주와 캘리포니아주를 합한 크기와 비슷하다.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10배, 한반도의 4.5배 정도의 크기이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때문이 인구는 좁은 나일 강 계곡과 삼각주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의 약 99%가 국토 면적의 5.5%에 집중되어 있다. 이집트는 서쪽에는 리비아, 남쪽에는 수단, 동쪽에는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과 접하고 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두 대륙 사이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에는 수에즈 지협이 있으며, 이곳 수에즈 운하를 통해 홍해를 사이로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한다. 나일 강 유역 외에 이집트 국토 경관의 대부분은 사막이다. 바람 때문에 높이 30m가 넘는 사구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과 리비아 사막의 일부에 속한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이들 사막은 "붉은 땅"으로 불렸으며, 서쪽의 위협에서 파라오의 고대 왕국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최저 해면하 134m의 카타라 저지와 거기에서 칼가를 통과하여 아스완에까지 이르는 대상 저지를 제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표고 200m 이상의 대지 또는 산지이다. 시나이 반도에서 홍해 연안에 이르는 산지는 아프리카 지구대(地溝帶)에 연해 있다. 북서부에는 리비아 고원, 남서부에는 케빌 고원이 있다. 이집트의 도시로는 고대부터 대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아스완, 아시우트, 수도 카이로, 엘 마할라, 엘 쿠브라, 쿠푸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 후르가다, 룩소르, 콤 옴보, 포트 사파가, 포트 사이드, 샴 엘 셰이크, 운하가 있는 수에즈, 자가지그, 알 미냐가 있다. 오아시스로는 바하리야, 엘 다클라, 파라프라, 엘 카르가, 시와가 있다. 보호 지역으로는 라스 모하메드 국립공원, 자라니크 보호구역, 시와가 있다. 이집트는 겨울 외에는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다. 카이로 남쪽에 평균 강우량은 연중 약 2~5mm에 불과하며, 몇 년마다 가끔 내리는 정도이다. 북부의 가느다른 해안 지역은 강수량이 410mm까지 이르기도 하며, 10월과 3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시나이의 산지와 다미에타, 발팀, 시디 바래니 등 북부의 일부 해안 도시에는 눈이 내리며,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드물게나마 내리기도 한다. 서리는 시나이 중부나 중부 이집트에서 볼 수 있다. 평균 기온은 여름에는 27 °C에서 32 °C 사이이며, 홍해 해안에는 43 °C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겨울 평균 기온은 13 °C에서 21 °C 사이이다. 북서풍은 지중해 해안 인근의 기온을 낮추는데 기여한다. 카마신(Khamasin)은 봄에 이집트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황사를 몰고와 사막 기온이 38 °C를 넘기도 한다. 해마다 나일 강에 일정한 홍수가 일어나, 이집트의 토양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어준다. 덕분에 이집트는 연중 내내 수확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인구가 밀집한 이집트의 해안 지대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집트 경제, 농업, 산업에 중대한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기후 전문가에 따르면 인구 증가 압력과 더불어 해수면 상승으로 금세기 말에 수백만 명의 이집트인이 환경 난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1981년 이래, 호스니 무바라크의 가장 유력한 후계 후보로서, 그의 둘째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가말은 대통령 여당인 국민민주당(NDP) 부간사장 겸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장애 요소는 "대통령의 세습"이라는 세론의 반발이 여전히 거세다는 것이다. 2011년 1월 25일부터 2월 11일까지 진행된 이집트 혁명으로 30년간 집권해온 호스니 무바라크가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 세력의 발호에 따른 정치 혼란과 잦은 유혈 사태로 2013년 7월 3일 압둘팟타흐 시시(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무함마드 모르시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이후 쿠데타를 주도한 압둘팟타흐 시시가 2014년 6월 8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 나라의 헌법에서는 건강한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 하는 징병제(복무 기간은 고졸자까지는 3년, 대졸 및 대학생은 1년)를 실시한다고 되어 있다. 다만, 기독교 계통인 콥트교 신자들은 병역면제 대상이 된다. 대한민국과는 1961년 영사급 관계를 수립하였다가 1995년 대사급 관계로 격상되었다. 북한과는 1963년 수교하였다. 이집트와 이란은 1939년 양국에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축출된 팔라비 왕조에 이집트는 도피처를 제공하였다. 또한 1979년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하자 이란은 이집트와 단교를 선언하였다. 이후 이란은 시아파 무슬림 국가의 종주국으로 서방과 대립각을 세웠고, 수니파 무슬림이 많은 이집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친서방 노선을 걸었다. 이집트는 2012년 9월 3일에 친이스라엘성향의 대사를 임명했다. 이집트에서 반미시위가 일어났지만 미국은 경제원조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와는 40년만에 고위군사회담을 가지게 되면서 관계가 풀리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경우 2016년 당시 유학생이 억류되다가 숨진 사건이 있어 외교 관계가 인도에 버금가는 수준인 상태로 악화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집트의 경제는 수에즈 운하 수입과 관광 수입에 의존하는 바가 크고, 정치상황에 좌우되기 쉽다. 이집트의 주요 산업인 농업은 나일 강 계곡과 삼각주 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매우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공업으로는 석유 · 철강석 등이 산출된다.1959년에 국가계획 최고회의가 설치되어 제1차 5개년 계획과 긴급 3개년 계획을 입안하여 공업화와 개발에 의한 국민 소득의 증대를 도모했으나 중동 전쟁 같은 사건으로 차질이 생겼다. 1992년 ~ 1993년에는 규제완화, 토지개혁, 농산물 수출추진 등 제3차 5개년 경제사회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했다.이집트의 농경지는 대체로 나일 하곡·델타·오아시스 등지에 있다. 경지 총면적은 국토의 2.3%에 불과하며, 주민의 4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매우 높으며, 경제 작물로는 면화 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 밀 · 보리 · 쌀 · 콩 · 과실 ·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 · 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면화는 섬유가 긴 종류가 많고 품질은 최고급이며 가장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총수출의 60%를 차지한다. 그런데 면제품은 가격경쟁에 있어서 타국에 앞지름을 당하고 있다. 토지개혁의 결과 대지주의 수는 줄었으나 경지 5페단 미만의 영세농민이 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정부는 이들의 협동화를 추진시키고 있다. 인구의 높은 증가율로 인한 식량 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하여, 농지 조성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심층지하수를 끌어올려 사막을 관개(灌漑)하는 방식과 유수(流水)의 고도이용에 의한 토지개간 방식이 취해지고 있다. 이집트의 공업은 혁명 전에도 섬유공업, 식품공업 등이 있었으나 혁명 후에는 공업화 정책으로 철강, 정유, 기계, 자동차조립, 화학, 건재, 제지 등의 공업이 새로 일어났다.이집트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석유자원은 시나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유전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다. 대부분은 국영정유공장에서 정제되는데 수에즈항을 중심으로 정유공업이 발달했다. 지금도 새로운 석유자원의 탐사가 진행되고 있다.석유 외에 철강·인광·망간 등의 지하자원이 있다. 공업화 추진의 원동력이 되는 전력 생산은 아스완 댐과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에 따라 크게 증가하였다. 북부의 카타라 저지(低地)에서는 지중해의 물을 끌어들여 낙차에 의한 대규모 발전이 계획되고 있다. 소규모(小規模)의 것을 제외하고 교통기관은 전부 국영이다. 자동차교통의 발달에 따라 도로도 정비되고 있으며 철도는 1859년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 철도를 효시로, 카이로를 중심으로 해서 발달해 왔다. 총연장은 광궤(廣軌) 7,102km, 협궤(狹軌) 1,400km이다. 카이로 공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십자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국제항공의 요충이 되고 있다. 국도의 총연장은 2만 6,000km이며, 나일강은 수단에 이르는 내륙수로 교통로로서 농산물과 광산물의 수송을 주로 한다. 보행자들을 위한 육교나 지하보도, 횡단보도 등이 거의 없는 이집트에서는 해마다 교통 사고로 숨진 사람이 8,000명에 이르고 있다. 차량들의 정비 불량과 난폭 운전, 낙후된 교통 기간 시설이 사고의 주범이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절대적 권한을 가지며 결혼에 있어서도 상대자와 혼인자금에 대한 교섭을 갖는 등 여성의 지위가 낮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이런 현상과는 달리 실질적 권한은 아내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교 계율을 지키는 일은 다른 나라처럼 엄격하지 않다. 문화시설은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도시에는 잘 정비되어 있다. 카이로에는 전 인구의 8분의 1이 모여 주택난이 가중되고 있다. 계층간 소득격차도 매우 심해 실업자가 많다. 일자리를 찾아 주변의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으로 나가는 기술 노동자 수도 꽤 많다. 초등학교는 무상이고 졸업시험을 거쳐 중학교나 실업학교로 진학한다. 중동에서 제일,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2007년 7월1일 현재 8천만명)가 많다. 인구 대부분이 나일 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은 이슬람의 전래이후 아랍화되어 그들의 정체성을 아랍인으로 본다. 이는 아라비아 아랍인들과의 혼혈 및 고대의 이집트인들이 아랍문화에 동화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들은 혈통적으로는 대체적으로 동질적이며 인종적으로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동부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기타 소수 민족으로는 아랍계 유목민인 베두인족들과 이집트 남단에 위치한 누비아인과 이집트 서쪽에 위치한 시와인들이 있다. 대다수가 아랍어를 사용한다.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는 아랍어의 구어방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방언으로, 특히 수도 카이로에서 사용되는 방언이 일종의 표준역할을 하고 있다. 이집트 방송의 영향으로 다른 아랍국가에서도 잘 통용되는 편이다. 고대 이집트어의 계통을 잇는 콥트어는 콥트인들의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등,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일상언어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주요 외국어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있다. 일부 외국인의 경우에는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러시아어도 사용된다.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 경험이 있지만, 영연방에는 한 번도 가입한 적이 없다. 한편, 나폴레옹의 짧은 점령기간 외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적은 없지만 프랑스어사용국기구인 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전 유엔 사무총장인 이집트 출신의 외교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가 프랑코포니의 사무총장(1997-2001)을 역임한 바 있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세계 8대 불가사의인 피라미드가 있다. 인구의 90%가 이슬람교 신자이고, 10%는 기독교 신자이다. 이슬람교 신자는 대부분 수니파이고, 기독교 신자 대부분은 이집트의 전통적 기독교인 콥트교에 속한다. ㅋㄲㅊ 이집트인들의 주식은 풀 메다메스와 코샤리이다. 그 외로는 몰로키아, 샤와르마 등이 있다. 이집트는 세계 최초 주요 문명국 중의 하나이다. 예술과 건축을 성문화한 이집트의 벽화는 주로 기록을 목적으로 그려졌다. 이집트 문명은 특히 거대한 피라미드와 엄청난 분묘로 유명한데, 그 중 고대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였던 임호텝이 디자인한 죠세르 왕조의 피라미드, 스핑크스, 아부 심벨사원 등이 유명하다. 현대적이며 동시대적인 이집트 예술은 위사 와세프의 람세스, 하산 화티의 버내큘러식 건축부터 마흐무드 모카타르의 조각상, 그리고 아이작 파노스의 콥트식 도상까지 그 양식이 매우 다양하다. 이집트에는 매년 2월 22일과 10월 22일에 아부심벨 신전에서 아부심벨 축제가 열린다.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 다음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의 달력이며, 이 해의 윤일(2월 29일)은 일요일이다.(예: 2004년·2032년·2060년·2088년) 그리고 이 형태의 달력에서는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과 마찬가지로 공휴일 수가 매우 적다. 자비 마립간 자비 마립간(慈悲 麻立干, ? ~ 479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재위 458년 ~ 479년 3월 12일)은 신라의 제20대 임금이다.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며, 실성 이사금의 외손자이다. 왕비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로, 재위 4년째인 461년 부인으로 맞았다. 459년 음력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쌌다. 신라군은 마립간의 지휘에 따라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적병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음력 5월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 1천여를 생포했다. 이듬해인 463년 음력 2월 또다시 쳐들어와 삽량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립간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매복해 있다가 후퇴하는 왜병을 요격, 크게 이겼다. 이 해 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변경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음력 7월에 군을 사열하였으며,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다. 468년 봄,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을 습격하였다. 이해 음력 9월 하슬라 주민중 15세 이상 되는 자들을 징집해 이하에 성을 쌓았다. 마립간은 이후 방위체계 확립에 주력, 469년 음력 4월의 수해 복구를 위해 음력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했으며, 470년 삼년산성을, 471년 모로성을 쌓고, 473년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474년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475년 음력 7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자, 개로왕이 태자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마립간이 백제에 원군을 보냈으나, 신라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은 이미 살해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신라본기에는 47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는 모두 47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본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476년 음력 6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자, 마립간이 덕지에게 명해 격퇴하게 하여 2백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년 음력 5월에 또다시 크게 군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김미사흔 미사흔(未斯欣, ? - 433년 5월) 또는 미사흠, 미해는 신라 초기의 왕족이자 내물 이사금의 3남으로,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다. 402년 음력 3월 실성 이사금과 왜가 우호를 맺으며 왜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실성 이사금이 죽고 눌지 마립간이 즉위한 뒤인 418년(눌지 2년)에 박제상의 도움으로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에 돌아온 뒤에는 서불한(舒弗邯) 벼슬을 지냈다. 박제상의 미사흔 구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 45 〈박제상전〉에 자세하며,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두 기록의 연대가 다르다. 이 문서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을 따른다. 박제상의 딸과 결혼했다. 구천(仇天)이란 아들을 뒀다. 파호부인이 그의 딸이라는 말이 있다. 고손자는 거칠부이다. 사다함의 6대조가 된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미사흔으로 보는 것이 일본고대사 학계의 주 시각인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거칠부의 아버지는 물력이고 할아버지는 잉숙이며 내물 이사금의 5세손이라 한다. 그런데 경주김씨 족보 및 신라김씨 선원세보에 의하면 미사흔은 거칠부의 할아버지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미사흔과 거칠부의 혈연관계를 언급한 대목이 없다. 미사흔이 거칠부의 친할아버지인지 증조할아버지인지 여부는 다소 불명확하다. 개성특급시 개성특급시(開城特級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의 남부에 있는 도시이며 과거 고려의 수도로서 500여 년간 번영한 고도(古都)이다. 개성은 개경(開京), 송악(松岳), 송도(松都), 송경(松京)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38도선 이남 지역이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경기도의 관할에 속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점령하게 되면서 1955년 1월부터 2003년 9월까지 도(道)급인 개성직할시(開城直轄市)로 승격하였다가 이후 황해북도에 편입 되었다. 개성공업지구가 개성시에 있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30만8440 명이다. 현재의 개성시는 1945년 해방 당시의 개성을 중심으로 개풍군 봉동면, 영남면, 영북면 및 중면의 동강·창내·천덕리와 장단군 진서면 전제·대원·어룡리 및 장단면 서장·덕산리를 합친 지역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개성시를 이적단체(북한)가 점령한 대한민국 영토로 보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인정하였기에 위키백과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점으로 서술하였다. 이 곳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며, 청목령(靑木嶺)이라고 불렸다. 나중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동비홀(冬比忽)과 부소갑(扶蘇岬)으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으로, 부소갑은 송악군(松岳郡)으로 각각 고쳐졌다. 이 지역은 바다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던 호족의 본거지였으며, 그 중 왕씨 일가는 그 대표적인 존재였다. 궁예(弓裔)도 철원(鐵原)을 후고구려의 도읍으로 확정하기 전에는 한때 이곳을 임시 도읍으로 삼았다.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본격적으로 고려의 도읍이 되었다(919년). 고려 왕성이 위치한 곳은 신라 시대의 송악군이었고 개성현은 그에 속한 현이었다. 919년에 개주(開州)가 설치되고 995년에 개성부(開城府)로 개칭되어 송악현을 비롯한 수도 내를 관장하다가 1018년(현종 9) 개성부를 없애면서 송악현은 중앙 정부의 직속이 되고 개성현은 분리되었다. 1062년에 개성현이 개성부로 바뀌고 1308년에 개성부가 수도 내까지 관장하게 되면서 개성의 지위가 역전되어, 마침내 옛 송악군의 자리도 개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개성은 인접한 항구 도시인 벽란도(碧蘭渡)와 함께 국제 상업 도시로 발달하였다. 이후 조선 왕조가 들어서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89년간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도읍이었다. 조선 태조가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후 잠시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1394년에 한양으로 수도가 옮겨졌다. 이후 잠시(1399년 - 1405년) 수도가 개경으로 돌아온 것을 제외하고는, 개성은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도 개성은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1438년 개성에는 개성부(開城府)가 설치되어 개성부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또한, 개성은 특히 상업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다. 이 시기에 개성은 송도(松都), 송경(松京), 중경(中京)이라고도 불리었다. 1895년 6월 23일 23부제가 실시되면서 도제(道制)가 폐지되어 개성부가 잠시 설치되었다가, 1896년 8월 4일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기도로 환원되었다. 1914년 4월 1일 개성군, 풍덕군을 통폐합하여 개성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송도면 안의 12개 리(里)가 13개 정(町)으로 개편되었다. 1930년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고, 개성군은 개풍군(開豊郡)으로 개칭되었다. 광복 후, 개성은 북위 38도선 바로 남쪽에 있기 때문에 미군정 지역이 되고, 1949년에 개성부는 개성시가 되어 대한민국의 최접적(最接敵) 도시가 되었다. 시가지의 북쪽 송악산 정상(488고지)은 북한, 그 남쪽의 475고지는 남한이어서, 1949년 5월 4일에 송악산 5·4 전투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으며, 1954년 10월 30일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55년 1월 개풍군과 판문군을 관할하는 도(道)급인 개성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이때, 고려동 일부는 분리하여 해운동(海雲洞)을 신설하였으며 수창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다. 1958년 6월 서흥동이 남안동에 편입되었으며 덕암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보선동(步仙洞)을 신설하였다. 1959년 2월 개성시 운학리가 운학동(雲鶴洞)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3월 황해북도에 속해있던 장풍군이 개성직할시에 편입되었다. 1961년 3월 장풍군 내 옛 개풍군 영남면·영북면 지역(룡흥리, 삼거리, 산성리)이 개성시에 편입되었고, 만월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송학동(松鶴洞)을 신설하였다. 1967년 10월 태평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역전동(驛前洞)을, 남안동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문동(南門洞)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10월에 개성시 태평동이 내성동(內城洞)으로 개칭되었다. 1983년 11월에 개성시 손하리가 성남동(城南洞)으로, 산성리가 박연리(朴淵里)로 개칭되었고, 운학동이 운학일동(雲鶴一洞)과 운학이동(雲鶴二洞)으로 분리되었으며, 부산동 일부를 분리하여 방직동(紡織洞)을, 판문군 전재리 일부를 분리하여 개성시 은덕동(恩德洞)을 신설하였다. 1988년 7월 룡흥리가 룡흥동(龍興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12월 남산동이 남산일동(南山一洞)과 남산이동(南山二洞)으로 분리되었다. 1994년 3월 덕암리가 덕암동(德巖洞)으로 되었다. 2002년 11월 판문군이 폐지되었고, 2003년 6월 개성직할시의 장풍군과 개풍군이 황해북도로 이관되었다. 2003년 9월 개성직할시가 폐지되고, 개성시가 황해북도로 재편입되어 개성시로 변경되었다. 황해북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개풍군, 북쪽으로는 금천군, 동쪽으로는 장풍군, 남동쪽으로는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조선의 경기도 파주시와 접한다. 1945년 해방 전까지의 개성은 개풍군에 둘러싸이고, 동쪽 일부가 장단군과 닿아 있었다. 1953년 7월 27일으로 개성 시가지의 10km 동쪽(판문점)에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개성 시내와 군사분계선 사이에 개성공단이 있으며, 개성공단은 남조선의 파주시 문산읍에서 1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개성은 아호비령산맥이 인근에 있어 주변에는 산들이 많이 있다. 산으로는 북쪽에 제석산(帝釋山), 천마산(天馬山), 두석산이, 중앙에 송악산(松岳山), 남쪽에 진봉산(進鳳山)과 용수산(龍岫山)이 있다. 송악산 서쪽에는 만수산이 있다. 특히 개성 시가지 주위에 있는 송악산, 자남산(子南山) 등에는 소나무가 많아, 개성을 송도(松都)라고 불리게 하였다. 하천으로는 원교(遠郊)에 임진강과 례성강이 흐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옹진군과 함께 기후가 가장 온화한 지역에 속한다. 시 면적의 55%는 삼림이 차지한다. 주목할 만한 동식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인 개성백송(開城白松)과 크낙새가 있다. 개성특급시의 기후는 일반적으로 냉대동계소우기후 (Dwa)를 띄고 있다. 온난화가 지속되면서 서울특별시와 인접하기 때문에 Cwa 같은 기후 대역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냉대 기후를 띄는 것이 보통이다. 경공업을 주로 하며, 인근 평야 지대에서는 농업, 특히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쌀 외에도 옥수수·콩·수수·메밀도 생산되며, 축산업, 과수업, 양잠도 이루어진다. 개성특급시는 소규모의 메기농장과 개성시인삼농장, 그리고 개성시인삼가공공장이 있으며, 모직물과 편직물 각종 의류들을 생산하는 개성편집물공장과 개성수지공장이 있고, 개성일용품공장과 개성육류공장, 그리고 개성신발공장과 개성목재공장, 개성일용잡화공장 등이 있다. 2006년에는 개성공업지구가 남북한 간의 협상으로 설립되어 대한민국의 일부 중소기업들이 이곳으로 진출하였고,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주민들이다. 개성인삼공장은 기업농장을 운영하고 있고, 개성인삼공장에서 생산되는 "개성인삼"은 가공 혹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평양시로 운송된다. 인삼과 도자기는 해외로도 수출된다. 금융기관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의 개성 지부가 있다. 개성은 고려왕조 500년의 수도로서, 명승고적이 많다. 시내의 대표적인 역사적 유적 및 명승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교외(구 개풍군 지역)에도 왕건릉과 공민왕릉 같은 역사적 유적과 박연폭포(朴淵瀑布) 같은 명승지들이 많다. 개성민속여관은 선죽동에 있으며, 조선시대 때 지어진 많은 전통한옥들과 봉사기관들이 많이 밀집해 있다. 이것은 한국 전쟁 전에는 개성 주민들의 주택이었던 것을 여관시설로 개조한 것이다. 1975년에 김일성이 "우리의 문화와 풍습들을 잘 보존해야겠다."는 지시를 내리자, 이 곳을 "보전거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여관으로 개조하였던 것이다. 기타 관광시설으로는 자남산려관과 개성민속려관이 있다. 개성의 주요 관광지는 한때 대한민국의 관광객에도 개방되기도 했으나, 2010년 현재 개성특급시는 대한민국(남한)으로부터 오는 관광을 중단한 상태이다. 사회문화시설로는 개성학생소년궁전과 개성체육청소년학교가 있으며, 상업시설은 개성백화점이 있다. 지역의 방송국으로는 대남(對南)용인 개성방송, 조선교육문화텔레비죤방송국이, 신문사로는 개성신문사가 있다. 의료기관에는 과거에 남성병원(南星病院)이 있었는데, 지금은 개성시인민병원과 개성시종합진료소가 있다. 1950년 당시의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공립인 개성중학교(開城中學校), 개성고등여학교(開城高等女學校), 사립인 송도중학교(松都中學校), 정화여학교(貞和女學校),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가 있었다. 전쟁 후, 사립 학교들은 남한지역으로 와서 다시 개교하였다. 한편,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만월(滿月), 동현(銅峴), 선죽(善竹), 고려(高麗), 송도(松都), 중경(中京), 남산(南山), 덕암(德岩) 등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현재 개성의 대학으로는 고려성균관, 개성공업대학, 개성예술대학, 안영애대학, 개성체육대학, 송도대학 등이 있다. 2000년 8월, 김정일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합의에 의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이 토지와 노동력을, 대한민국(현대) 측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고, 개성(구 개풍군 봉동면) 일대에 공업단지를 만드는 것이 정해졌다. 2002년 11월에, 북한 측은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 2003년 6월, 약 330만m를 조성하는 제1기 공사가 기공되어 2006년 말에 완공되었다. 다만, 쌍방의 의견 대립등도 있어, 단순하게 순조롭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남북의 송전선이나 서울로부터의 광섬유가 연결되는 등의 큰 진전도 많다. 철도로는 평부선(경의선) 개성역이 있으며, 그 동쪽으로는 대한민국 경의선 도라산역과 연결되는 판문역, 손하역, 봉동역이 있다. 도로시설로는 평양개성고속도로 등이 있다. 개성특급시는 현재 27동 9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명칭은 다음과 같다. 판문군 폐지로 편입된 7개리 1950년 당시에는 다음의 17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효종 효종(孝宗)은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중 하나이다. 조선 숙종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 재위: 1674년 9월 22일 (음력 8월 23일) ~ 1720년 7월 12일 (음력 6월 8일))은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돈(焞),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용상(龍祥), 광(爌), 자는 명보(明譜), 사후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다.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1674년 8월에서 1720년 7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 8월에서 1674년 10월까지 영의정 허적이 섭정하였으며 1674년 10월에서 1717년 3월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 3월에서 1720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숙종은 역대 조선의 국왕들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이다. 숙종을 마지막으로, 강한 왕권을 가진 왕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 또한 45년 10개월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들 중 영조 (51년 7개월) 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며, 영조, 태조, 고종, 광해군, 정종에 이어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숙종은 1661년(현종 2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돈(李焞), 본관은 전주 이씨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 효종은 어느날 밤 꿈에 며느리 김씨의 이불에 뭔가 있는 것을 보고 들춰보니 용이 있었다고 한다. 효종은 꿈을 꾸고 손자가 태어날 태몽이라 여기고 손자의 이름을 용상(龍祥)이라 짓고 손자를 기다렸으며, 이는 숙종의 행장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효종은 손자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2년 전에 먼저 사망하였다. 성인이 된 뒤에 이름을 용상에서 광으로 개명했다가 수양제와 이름 음자가 같다는 이유로 다시 돈 또는 순으로 개명하고 자는 명보라 하였다. 그가 태어난 이후 모후 명성왕후는 다른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는 독자로 성장했다. 숙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모후 명성왕후는 남자형제도 없는데다가 병약한 체구를 타고난 그가 일찍 죽지 않을까 늘 염려하였다. 1667년(현종 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부왕 현종이 급서하면서 즉위하게 된다. 1674년 음력 8월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속깊은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그 어린나이에 누구 간섭없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다. 즉위한 그해에 제2차 예송으로 남인 허목 등의 기년설(만 1년설)을 지지하고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는 서인을 배척하여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그가 즉위 당시 어린 나이라는 점을 들어 모후 명성왕후 김씨는 그의 친정을 반대했지만 숙종은 모후의 반대를 뿌리치고 친정을 시작했다. 한편 명성왕후 김씨는 그의 후궁 희빈 장씨를 경계하여 그를 궁궐 밖으로 추방하게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후일 명성왕후가 열병으로 사망한 뒤 환궁하고, 남인을 등에 업고 서인가의 사람이었던 인현왕후와 정쟁을 벌이게 된다. 숙종이 조선을 다스렸던 기간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시대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파간의 대립 관계가 더 더욱 치열해지고, 1680년 초 부터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이들도 서로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이른바 환국 정치가 주된 현상이 되었다.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으로 돌아온 서인들은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서궁 (西宮: 경운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희빈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희빈 장씨 처소인 취선당에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한 것을 이유로,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그녀를 사사시킨다. 이때 소론은 세자 윤에 대한 옹호여론으로, 노론은 비판여론으로 돌아섰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의 《가례원류》가 간행될 때 정호가 소론 윤증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되었다.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협상하여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청나라와 조선 간의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기도 했으며, 폐한지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자성의 2진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로 하여금 에도 막부 정권과 협상하여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았다. 또한 조선 통신사를 세 차례나 파견(1682년, 1711년, 1719년)하여 왜은 사용 조례를 확정함으로써 왜관 무역을 정비시켰다. 1678년, 안남국(후 레 왕조)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안남왕은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표류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14년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숙종은 4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숙종 시대는 붕당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정책대결 속에서 국가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 초에는 왕권 강화를 주장해 온 남인이 집권하였는데,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사망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복상논쟁에서 왕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大功)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의 승리는 현종 중반 이후 기반을 다져 온 허적 일파의 정치적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 숙종 즉위 초에 집권한 남인은 허적과 윤휴 등 이른바 온건한 탁남이 주동이 되어 북벌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서 ‘도체찰사’라는 새로운 군정기관을 부활시키고, 그 본진으로서 개성 부근의 대흥산성(1676년)을 축조했으며, 한꺼번에 1만8천여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아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평안도 용강의 황룡산성과 강화도의 48개 돈대(망루)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의 재등장은 마침 1674년(숙종 원년) 청나라에서 오삼계의 반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정권의 권력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수세에 몰렸던 서인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영수 허적이 대흥산성의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윤휴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남인들도 축출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 한다. 이 무렵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1683년).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내수외양, 즉 민생안정과 자치자강을 강조하였으며,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한 점에서 정책적 차이가 있었다. 왕은 양파를 연립시켰으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것은 노론으로서,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리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 · 김만기 · 민정중이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했다. 서인 정권은 남인이 장악했던 훈련별대를 정초군과 통합하여 금위영으로 발족시켜(1682년) 5군영제를 완성시켰다. 병권은 대체로 왕이 신임하는 종척(宗戚)들이 장악하여 실제로는 왕이 군대 통수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정부는 민생 향상과 산업 진흥을 위해 양인의 군포를 감해 주고(1703년), 화폐 주조(상평통보)와 화폐 유통을 장려하여 상업을 진흥시켰다. 각 부대도 화폐를 주조하고 상업 행위를 하여 점차 영리기관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기에 농촌에서는 미륵신앙을 가진 하층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노비들이 주축이 된 검계·살주계 등 비밀결사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며, 자연재해까지 겹쳐 사회가 매우 불안했다. 9년간 집권한 노론은 1689년(숙종 15년)에 남인계 출신의 후궁인 장희빈이 낳은 왕자(나중의 경종)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그동안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던 송시열·김수항 등이 보복을 받아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남인 집권기에는 청나라의 내란과 관련하여 강화도에 성을 쌓고, 맞은편의 통진에도 문수산성을 쌓는 등(1694년) 수도방위를 강화하였다.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도 1694년(숙종 20년)에 왕이 마음을 바꾸어 폐위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을 강등시키게 되자 5년 만에 다시 밀려나게 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하는데,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은 서얼·역관·무인·상인 그리고 노비층과도 연결하여 남인 측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거사 자금과 힘을 빌렸다. 1694년(숙종 20년)부터 1720년(숙종 46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빙기(小氷期)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 현상을 가져왔다. 더욱이 1697년(숙종 23년)에는 10여 년 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장길산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이 매우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숙종 대에 대동법을 황해도 지방까지 확대하였으며(1708, 숙종 34년), 서북인을 무인으로 대거 등용하고(1709년), 중인과 서얼을 수령에 등용하도록 조처했다(1697년, 숙종 23년). 특히 1712년(숙종 38년)에는 청과 북방경계선을 확정지어 백두산 아래에 정계비를 세워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삼았다. 여기서 토문강은 다소 애매한 상태에서 정해졌지만, 조선 측은 그 후 이 강을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인식하였다. 백두산 정계는 조선 측의 영토 확장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다. 한편, 수군 출신의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천명하고, 일본은 이를 인정했다(안용복의 증언. 이에 대해 현재 일본 정부는 울릉도 도항 금지라는 사실은 있었지만 독도를 조선의 영토인 것처럼 일본 측이 인정한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있다).(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방정책을 강화하면서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울릉도 지도가 활발하게 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1705년(숙종 31년)에는 노론의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가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명의 태조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창덕궁 안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순신 사당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리고(1707년, 숙종 33년),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하여(1709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숙종 말년에는 남구만의 노력에 의해 세종 때 설치했다가 폐지한 ‘폐사군’의 일부를 복설하여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강화도의 농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고, 강화도 내성(內城, 1704년~1709년), 북한산성(1711년~1712년), 평양성, 안주성 등이 잇따라 축조되어 방위체제가 훨씬 강화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삼남지방에서 양전 사업이 완료되어 총 66만 7,800결을 얻고, 전국의 인구는 680만 명으로 늘어났다(1720년). 숙종 때에는 문화 사업 면에서도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대전속록》, 《열조수교》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국가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가 전란의 피해 복구와 국가 재정비 사업이 일단 마무리되어 중흥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로 볼 수 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그는 장희빈의 사사를 결심한다.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자신을 투기, 괴롭힌다는 호소 역시 장희빈 사사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는 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어머니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숙종은 노론의 때아닌 존호 추상 요청을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해 수락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7월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정유독대'를 실시했다. 숙종과 이이명의 독대 시 오고간 대화내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때 숙종은 이이명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청을 하였는데, 사관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 독대 사건은 후일 신임옥사 때 이이명의 발목을 잡는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정승)을 사인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 (『숙종실록』 43년 7월 28일 기사)” 그러나 예정대로 독대는 진행되었다. 그밖에, 숙종은 조선의 제2대 국왕인 공정왕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으며,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외롭게 죽은 노산대군과, 그 아내 노산대군부인 송씨의 복위를 청하는 주장을 받아들여 단종과 정순왕후를 복위시키고 각각 단종이라는 묘호와 정순왕후라는 시호를 올림(1698년)과 동시에 사육신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으며(1691년), 폐서인되었던 인조 적장남 소현세자의 아내인 소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복위시켰다.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을 완성하였고,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귀중한 책이 편찬되었다. 또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숙종은 생전 어진을 2번 그렸는데 모두 익선관 차림의 복장이었다 한다. 713년(숙종 39) 숙종은 자신의어진을 그리기 위해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을 설치했고, 도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은 이때 왕의 초상화에 '어진(御眞)'이라는 명칭을 짓고 그대로 확정시켰다. 그러나 숙종의 어진 2개는 후대에 불타서 사라졌고, 1926년 열성어진 부 열성어제를 편찬할 때 하응달이 숙종의 어진을 보고 모사했으나 정확도는 떨어진다. 숙종의 어진은 1926년 하응달이 행방불명의 원본을 보고 그린 어진이 전한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서인과 남인간에 당파싸움을 완화하고 왕과 신하들 간에 균형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여기에 등창이 생기고 노환까지 겹쳐 결국 1720년 7월 12일 (음력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5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승하하기 전,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배가 심하게 부풀어오르는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토를 한번 크게 한 뒤 승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사에 의하면 숙종은 원래 좋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재위 중반기부터 밤에 식사를 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낮에는 간단히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밤늦게 주안상과 다과상을 받았으며, 이러한 습관이 지속되자 재위 말기에는 미음조차 삼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좋지 못한 습관이 숙종의 수명을 단축시킨 원인 중 하나이다. 그는 1715년부터 노론 중신 이이명을 불러다가 비밀리에 독대를 하며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이를 근거로 노론은 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묘호 숙종 의 '숙'은 엄격하다는 의미이며, 강덕극취(剛德克就) (강직하고 덕이 있게 앞으로 나아간다) 에서 따 왔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이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희순왕"(僖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고, 그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가장 강한 왕권을 지닌 임금중 하나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숙종의 왕권 강화 정책은 정치 세력을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기에 그가 죽은 후 절대 왕권은 숙종의 치세에서만 끝나게 된다. 조선왕조 중 가장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로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태평안일했으며, 그의 애증의 감정 노출이 심한 것을 당인들이 교묘히 조종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이덕일은 그가 윤증이 제시한 세가지 타협안을 거절한 것을 두고 패도정치 라며 비판하였다. 이덕일에 의하면 윤증이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 (三戚: 김만기·김우명(김석주)·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 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당의통략』)'라고 제시한 것을 숙종이 받아들여야 했다며 비판했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 (김석주) 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 정객에 불과했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거듭된 환국으로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세자 시절 낙죽(우유)을 마시다가 송아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불쌍한 마음에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본래 부드러운 성격이었으나 한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경질을 내었으며, 때로는 극단적인 행동도 곧잘 취했다고 한다. 이러한 울화병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까지 이어졌다. 허견의 옥사 당시 허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윤휴가 엮어져서 사형당한 것에 대해 숙종의 계략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서인은 북벌을 위한 허적의 도체찰사부 복설에 찬성하였으면서도 허적이 역모를 꾸민다며 날조했고, 숙종은 이를 근거로 허적의 도체찰사부 부활의 근거가 된 윤휴의 북벌론을 문제삼아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다.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숙종은 공명첩의 발행 양을 늘리는 한편, 문무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에게 곡식을 풀라고 강제로 명을 내렸으나, 제신들과 지역의 토호들은 그의 명을 따르기를 거절한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1697년(숙종 23년) 4월 경기도 광주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종은 강경책을 발동, 관련자들을 잡아서 처형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한편 숙종은 청나라 조정에 청하여 조선과의 교역량을 늘리고 식량의 지원을 요청한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1697년(숙종 23년)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이 개시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1698년(숙종 24년)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과 흉작은 계속되었고, 동시에 양반들과 토호들의 수탈과 횡포도 심해져 민란과 도주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숙종은 호적제도를 강화하여 인구이동을 통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숙종 (1661 ~ 1720 / 재위: 1674 ~ 1720) - 45년 10개월 2004년 7월 2004년 8월 2004년 4월 2004년 5월 2004년 6월 2004년 3월 2004년 10월 칼레발라 칼레발라()는 핀란드의 국민 서사시이다. 엘리아스 뢴로트가 주로 카리알라 지방에서 수집한 시를 바탕으로 1835년에 32편으로, 다시 1849년에 50편으로 출판하였다. 칼레발라는 핀란드를 시적으로 이르는 말로 '영웅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주요 내용은 천지 창조의 이야기와 예언자 베이네뫼이넨, 대장장이 일마리넨, 전형적인 협객 레민케이넨 등 세 사람이 북쪽 나라 포흐욜라의 로우히 여왕의 딸에게 구혼하러 가는 이야기이다. 장 시벨리우스의 음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현재 영어판을 중역한 형태로 한국어판이 발간되어 있다. 핀란드에서는 매년 2월 28일을 '칼레발라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 도쿠가와 쓰나요시 (, 1646년 2월 23일 ~ 1709년 2월 19일)는 에도 막부의 제 5대 쇼군(재위 1680년 ~ 1709년)이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4남으로 아명은 도쿠마쓰(徳松)이다. 생모는 이에미쓰의 측실 오타마노가타(お玉の方, 후일의 게이쇼인(桂昌院))이다.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동생으로 고즈케 다테바야시 번 25만 석의 번주로 임명되었으나 1680년 이에쓰나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5대 쇼군이 되었다. 쇼호 3년(1646년) 에도 성에서 3대 쇼군 이에미쓰의 4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안 4년(1651년) 4월 둘째 형인 나가마쓰(長松, 후일의 도쿠가와 쓰나시게)와 함께 영지를 부여 받아 오미(近江), 미노(美濃),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우에노(上野) 등지의 15만 석 영주가 되었으며 가신단 또한 구성하였다. 같은 달 부친 이에미쓰가 사망하여 같은 해 8월 형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4대 쇼군으로 취임, 쇼군 선지를 받았다. 조오 2년(1653년) 관례를 치르고 종 3위 주조(中将)에 임명된 뒤 이에쓰나로부터 편휘를 하사받아 「도쿠마쓰」에서 「쓰나요시(綱吉)」로 개명하였다. 메이레키 3년(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다케바시(竹橋)의 저택이 소실되어 같은 해 9월 간다(神田)로 이주하였다. 간분 원년(1661년) 8월 우에노 다테바야시 번(館林)의 지방 번주로서 25만 석의 영지와 성을 소유하게 되어 통칭 다테바야시 재상으로 불렸다. 간분 10년(1670년) 마키노 나리사다(牧野成貞)를 3천 석 봉록의 다테바야시 중신으로 발탁하였다. 엔포(延宝) 8년(1680년) 5월, 4대 쇼군인 형 이에쓰나(家綱)가 후계자 없이 중태에 빠지자 그의 후사로 내정되어 에도 성 니노마루(二の丸)에 들었다. 같은 달 이에쓰나가 40세로 사망하면서 내대신(内大臣) 및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의 직위를 받은 뒤 곧바로 쇼군에 취임하였다. 취임 후 선대 시절의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酒井忠清)를 파면하고 대신 자신의 쇼군 취임에 공이 컸던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를 새 다이로에 임명하였다. 이후 사카이 다다키요는 병으로 사망하였으나 사카이 우타노카미 가문을 개역하고자 결심한 쓰나요시는 측근 오메스케(大目付)에게 사카이 다다키요가 정말 병사로 죽었는지 아니면 자신과 도쿠가와 쇼군가에 불충한 원한을 품고 자결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덤을 파헤쳐서라도(墓から掘り起こせ)」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사카이 다다키요의 죽음에 유독 집착하였다고 한다.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쓰나요시는 이후 사카이 다다키요의 동생 사카이 다다요시(酒井忠能)에게 흠을 잡아 결국 개역시키는 데 머물렀다. 마사토시의 등용 이후 쓰나요시는 당시 이미 처분이 확정되어 있던 에치고 국 다카다 번(高田藩)의 계승 문제의 결과를 뒤집고 각 번의 정치를 감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선대 쇼군인 이에쓰나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리 하여라 님(左様せい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훼손시킨 쇼군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바쿠후의 회계 감사를 위해 간쇼긴미야쿠(勘定吟味役) 제도를 도입하고 유능하지만 신분이 낮아 제대로 기용되지 못한 하타모토(旗本)들의 등용에 힘썼다. 오기와라 시게히데(荻原重秀) 역시 이렇게 하여 등용되었다. 또한 바쿠후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된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 중에서도 일부가 바쿠후로부터 등용되어 중앙에 진출하였다. 또한 센고쿠 시대의 살벌했던 무단 정치(武斷政治)의 기풍을 배제하고 덕을 강조하는 문치 정치(文治政治)를 더욱 강하게 추진하였다. 쓰나요시의 부친이자 3대 쇼군인 이에미쓰(家光)는 장남 이에쓰나의 후계자 지위를 확정하면서 다른 아들들이 쇼군의 지위를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차남 이하의 아들들에게는 유학을 공부할 것을 특히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쓰나요시는 당대의 유학자인 하야시 노부아쓰(林信篤)를 자주 초청하여 경서를 토론하고 사서와 주역을 바쿠후의 가신들에게 강의하였을 뿐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로 유시마 대성당(湯島大聖堂)을 건립하는 등 역대 쇼군들 중에도 가장 학문을 좋아한 쇼군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으로 존왕심 또한 두터웠던 쓰나요시는 그때까지 1만 석에 불과하였던 황실 영지를 3만 석으로 늘렸고 야마토 국 가와치 국 일대의 황실 능을 조사하여 수리가 필요한 66개 능을 복구하였다. 구게(公家)의 영지 또한 대개 쓰나요시 시대에 증액되었다. 그의 치세에 문화적으로 겐로쿠 시대가 열리고 경제도 번성하는 한편 아코 번의 무사들이 하타모토 기라 요시히사의 처소를 습격한 사건도 일어나 전 일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동물의 생명을 중시하는 살생금지령을 발표해 많은 빈축을 샀으며 특히 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누쿠보(犬公方: 개 쇼군)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1933년 11월 23일 ~ )는 폴란드의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이다. 그는 데비카(Debica)에서 태어나 프란치셰크 스콜리셰프스키(Franciszek Skolyszewski)에게 개인 작곡 레슨을 받았다. 후에 크라코프 대학과 크라코프 음악 아카데미에서 아르투르 말라프스키(Artur Malawski)와 스타니스와프 비에호비치(Stanisław Wiechowicz)를 사사했다. 1958년에 졸업하고 나서 아카데미에 남아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르친 사람으로는 이안니스 크세나키스가 있다. 펜데레츠키의 초기 작품은 그가 받은 안톤 베베른, 피에르 불레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원제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과 비슷한 《8분 37초》였다)로, 52개의 현악기를 위한 곡이다. 여기에서 펜데레츠키는 브리지의 반대편의 현을 연주하고 활끝으로 보잉을 하는 등 확장된 연주법을 써서 참신한 텍스처를 만들었다. 그는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서 톤 클러스터를 적절히 사용했다. 그의 《성 루카 수난곡》(1963-6)도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서로 다른 여러 스타일로 쓰였다. 《…애가》에서 보인 것과 같은 텍스처와 바로크 형식이 균형을 맞추고 있고, 더 고전적인 화성이 쓰였다. 〈Stabat Mater〉 부분은 단순한 장화음으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펜데레츠키는 음렬주의를 썼고, 주 음렬에서 BACH 주제를 전통적인 화성과 실험적인 작품을 잇는 다리로 사용했다. 1970년대 중반에 펜데레츠키의 작풍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에서는 톤 클러스터를 쓰지 않고 두 개의 선율음정, 반음과 삼온음을 집중적으로 썼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방법을 안톤 부르크너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이 기법은 교향곡 제2번 《크리스마스》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곡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화성과 선율이 너무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곡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인 〈고요한 밤〉의 선율을 자주 인용하였다. 1980년에 펜데레츠키는 Solidarity로부터 1970년 반정부 혁명 때 희생된 사람을 기리기 위한 그단스크 조선소에 만들어진 조각 작품의 제막식을 위한 곡을 위탁받았다. 그는 《Lacrimosa》라는 곡을 썼고, 후에 이를 《폴란드어 레퀴엠》(1980-4, 1993 개작) 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그의 후기작품 중 유명한 곡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초기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화려한 화성이 쓰였다. 《첼로 협주곡 제2번》과 《Credo》에서 보이듯이 최근에는 그의 작품이 더욱더 보수적 낭만주의 경향으로 가고 있다. 그의 교향곡 제5번 《한국(Korea)》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단악장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민요 《새야 새야》의 선율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였다. 아우구스트 슐라이허 아우구스트 슐라이허 (August Schleicher, 1821년 2월 19일 - 1868년 12월 6일)는 인도유럽어족과 슬라브어를 연구한 언어학자이다. 독일 마이닝겐(Meiningen)에서 태어났다. 1840년 가을 라이프치히 대학에 등록하여 신학을 공부하다가 1841년 튀빙겐 대학으로 옮겨 신학, 철학, 셈어를 공부했다. 2년후 신학을 그만두고 본 대학에 등록해, 라센(Christian Lassen)과 함께 동방 언어를, 디츠(Friedrich Diez)과 함께 독일어 방언을 공부하였다. 1868년 예나에서 사망했다. 파워 맥 파워 매킨토시(Power Macintosh), 이후 명칭 파워 맥(Power Mac)은 애플의 데스크톱 모델이다. 처음에는 모토롤라에서 공급한 파워피씨 CPU를 채용하여 G4 기종까지 출시되었으나, 나중에는 IBM에서 개발한 64비트 CPU인 파워피씨(PPC970FX)를 채용한 파워 맥 G5 1.8, 2.0, 2.5 (GHz) 등이 출시되었고, 2006년 인텔 CPU를 채용한 맥 프로로 대체되었다. 최초의 파워 매킨토시 모델들은 1994년 3월 출시되었으나 파워 매킨토시 기술의 개발은 1988년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래에는 최근에 나온 뉴 월드 기반의 파워 맥 라인이다. 파워북 파워북()은 애플 컴퓨터가 제조 및 판매하였던 매킨토시 노트북 컴퓨터 제품군의 명칭이다. 파워북은 매킨토시 시리즈의 첫 번째 포터블 모델이었던 매킨토시 포터블의 뒤를 이어 만들어진 제품군으로 1991년 10월 첫 파워북 기종인 '파워북 100'이 소개되었고, 그 이후로 68000 시리즈, 파워피씨 시리즈의 프로세서를 사용한 제품들이 판매되었다. 파워북은 컴퓨터 업계의 신기술을 선도적으로 도입하였고 수려한 디자인으로 각종 디자인 관련 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4월 인텔 코어 듀오 프로세서를 사용한 맥북 시리즈로 대체되었다. 초기의 파워북은 모토로라의 68000 시리즈 프로세서를 사용하여 68k 파워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1년 10월 첫 파워북인 파워북 100, 140, 170이 소개되었다. 이 제품들은 컴팩트한 디자인을 갖추었고 처음으로 트랙볼, 트랙패드, 팜레스트를 도입하여 다른 노트북 컴퓨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8k 파워북은 일반적인 용도에 적합한 파워북과 이동성이 강조된 파워북 듀오 두가지 제품군으로 나뉘어 판매되었다. 한편 파워북 100은 매킨토시 포터블의 설계를 바탕으로 소니가 디자인과 생산을 맡았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파워북 550c와 같이 일본에서만 출시된 제품도 있었다. 1994년 애플 컴퓨터는 매킨토시의 프로세서를 파워피씨로 변경하였고 이에 따라 1995년 8월 파워피씨 프로세서를 사용한 파워북 5300과 파워북 듀오 2300c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파워북 5300은 안정성이 좋지 않았고 초기에 사용한 리튬 이온 배터리는 안전 상의 문제로 리콜되는 등의 문제로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후 1996년 10월 시디롬을 내장한 파워북 1400cs가 출시되었고 뒤이어 1997년 파워북 3400c, 서브 노트북인 파워북 2400c가 출시되었다. 1997년 11월 발표된 파워북 G3 "캉가"는 파워북 3400c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캉가는 빠른 속도로 작동하는 백사이드 캐시를 갖고 있어 상당히 높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1998년에는 DVD 드라이브와 화면 크기를 선택할 수 있었던 파워북 G3 시리즈 "월스트리트", "PDQ" 가 출시되었고, 1999년에는 USB 포트를 장착하고 14인치 모델로 단일화된 파워북 G3 "롬바르드", 2000년에는 SCSI 포트를 제거하고 FireWire 포트를 장착한 파워북 "피스모"가 출시되었다. 파워북 G3는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면서 기존에 매킨토시에서 사용하던 ADB와 SCSI를 USB와 FireWire로 대체하였고, 피스모는 아이북에서 먼저 소개된 AirPort를 사용할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 이후의 파워북 G3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단정한 디자인 때문에 '아르마니 파워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1년 1월 티타늄 재질 케이스와 15.2인치 와이드스크린 액정 모니터를 장착한 파워북 G4가 소개되었다. 티타늄 파워북 G4는 두께가 전 모델인 파워북 "피스모"의 절반 정도인 1인치로 슬림한 노트북이었고 슬롯로딩 드라이브를 장착하였다. 2003년 1월에는 알루미늄 재질 케이스를 갖춘 12인치와 17인치 알루미늄 파워북 G4가 발표되었고 9월에는 FireWire 800 포트가 장착된 15인치 알루미늄 파워북 G4가 출시되었다. 알루미늄 파워북 G4는 프로세서 속도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다가 2005년 10월 마지막 파워북 G4가 출시되었다. 이때 프로세서 속도는 12인치 모델이 1.5GHz, 15인치와 17인치 모델이 1.67GHz였다. 파워북 G4는 케이스의 재질에 따라 티타늄 파워북 G4는 '타이북(TiBook)', 알루미늄 파워북 G4는 '알북(AlBook)'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파워북은 파워맥과 달리 파워피씨 G5 모델이 출시되지 않았다. 이는 파워피씨 G5의 발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파워피씨 G5의 성능은 상당히 높았지만 발열이 많아 G5 프로세서를 두개 장착한 파워맥 G5는 수냉식 냉각 장치와 대형 팬을 장착했고 아이맥 G5는 덕트를 설치해 공기 흐름을 조절하였다. 또한 소비 전력 대 성능 비율에서도 인텔 프로세서에 비해 좋지 않았다. 이와 같은 약점은 특히 노트북 컴퓨터인 파워북 G4에 있어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애플 컴퓨터는 2005년 WWDC에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전을 발표하고 2006년 4월에 맥북 프로를 발표하면서 파워북을 단종시켰다. 아이맥 아이맥()은 미국의 애플사의 일체형 PC 브랜드 및 시리즈이다. 과거 매우 다양한 종류의 매킨토시를 만들고 있던 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복귀 이후 소비자들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 제품군을 대폭 단순화시켰는데, 전문가용 제품군인 맥프로(Mac Pro), 일반 사용자용 제품군인 아이맥(iMac), 저사양 제품군인 맥미니(Mac Mini)의 세가지였다. 이 중 아이맥은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같은 가격대의 다른 컴퓨터 기종에 비해 사양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아이맥은 애플의 데스크톱 제품들 중 주력 품목으로서 1998년 8월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현재까지 크게 여섯 단계로 발달되어 왔다. 처음의 아이맥 G3(iMac G3)는 뒤가 둥글고 색상이 들어간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CRT 모니터가 탑재된 형태였으며, 그에 뒤따른 두번째 버전인 아이맥 G4(iMac G4)는 모든 주요 부품이 반구형의 본체에 담긴 채로, LCD 모니터가 지지대에 연결되어 자유롭게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세번째 버전인 아이맥 G5(iMac G5)와 네번째 버전인 인텔 플라스틱 아이맥(Polycarbonate iMac)은 모든 부품이 화면 패널 뒤에 위치하여 매우 단순한 일체형 디자인을 나타내게 되었고, 본체가 위 아래 방향으로만 각도를 바꿀 수 있는 금속 받침대를 갖고 있다. 2007년 중반에 등장한 다섯번째 버전은 알루미늄 아이맥(Aluminum iMac)으로 불린다. 이전 모델과 같은 형태를 공유하나 산화 알루미늄으로 재질이 바뀌었고 보다 얇아졌으며 전면을 덮는 유리 패널을 탑재했다. 2008년 나온 여섯번째 버전은 유니바디 아이맥(Unibody iMac)으로 불린다. 알루미늄을 유니바디 공법(하나의 큰 알루미늄 조각을 가공하여 이음새 없이 본체를 만드는 방법)을 이용하여 제작하여 발열에 유리해지고 디자인적으로도 큰 진보를 보였다. 일곱번째 버전인 가장 최신의 아이맥은 The new iMac으로 불리며, 한국어 이름은 새로운 iMac이다. 2012년 11월 30일 처음 출시되었다. 유니바디 공법으로 만든 알루미늄 바디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디자인은 이전버전과 동일하나 훨씬 얇아졌다. 이 모델부터 DVD 드라이브가 빠졌고, SSD+HDD의 하이브리드 드라이브 개념인 퓨전 드라이브를 장착하게 되었다. 또한 USB 3.0이 아이맥에는 처음 채용되었다. 21.5" 버전과 27" 버전이 순차적으로 공개되었다. 2014년 10월에는 해상도가 무려 5120x2880픽셀에 달하는 아이맥 레티나 5K 디스플레이(iMac Retina 5K Display)가 등장하여 화제를 모았다. 새 아이맥은 라미네이션 기술을 이용해 LCD 패널과 커버 글래스 사이의 공간을 없앴으며, 이로 인해 디스플레이는 더 얇아지고 반사광이 줄어들어 색감이 더 향상되었다. 최초의 아이맥은 윈도의 선전으로 인해 애플이 여러 출시 제품들에서 연달아 실패하고 있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업계의 많은 사람들은 애플이 기존 운영체제를 버리고 인텔과 같은 계열의 PC의 판매를 기대했으나, 애플은 맥 플랫폼의 유지를 위하여 자사의 플랫폼이 유지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때 설계는 조너선 아이브가 담당했다. 당시 로스엔젤레스의 애플 광고 매니저였던 Ken Segall은 이 새로운 컴퓨터의 이름을 'iMac'으로 부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수락했다. 처음에 잡스는 'MacMan'이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Ken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 Ken은 i가 단지 Internet을 의미한다고 했으나, 추후 스티브 잡스에 의해 "individuality(개성)" 와 "innovation(혁신)"을 의미하게 되었다. 아이맥을 시작으로 애플은 자사의 제품에 'i'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애플은 아이맥의 캐치 프라이즈로 'Our of box experience : 유저가 원하는 프로그램의 구동과 인터넷을 함께' 판매를 시작하였다. 2005년, IBM이 PowerPC의 데스크탑 개발의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에 애플은 WWDC에서 x86 아키텍처로 구동되는 새로운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컴퓨터를 선보였다. 이 아이맥은 최초로 인텔 코어를 탑재한 매킨토시 컴퓨터이며, 2006년 1월 10일에 발표된 아이맥과 맥북 프로부터 본격적으로 인텔 코어가 탑재되기 시작했다. 2010년 7월 27일, 애플은 아이맥의 인텔 코어 프로세서 라인업을 업데이트 했다. 21.5" 모델은 인텔 코어 i3 듀얼 코어를 탑재했고, 추가 구매로 i5 듀얼 코어를 사용할 수 있음을 발표했다. 하이앤드 27" 모델은 인텔 코어 i5 쿼드 코어를 탑재했고, 추가 구매로 i7 쿼드 코어를 사용할 수 있다. 애플은 이와 함께 맥북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트랙 패드를 외장형으로 개량한 애플 매직 트랙패드를 함께 공개했다. 또한 추가 구매를 통해 광학적 드라이브 대신 SSD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5월 3일, 애플은 썬더볼트를 탑재한 아이맥을 발표하였다. 코어는 샌디브릿지 i5와 i7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맥북 프로와 함께 소개된 100만 화소급 iSight 웹캠을 탑재했다. 2012년 10월 23일, 애플은 새로운 아이맥을 공개했으며, 보다 얇아진 디자인, 새로운 애플 퓨전 드라이브 탑재, 더 빨라진 아이비 브릿지 인텔 i5와 i7으로 변경되었다. 그래픽 카드 역시 각 라인업에 맞게 교체되었으며, 그럼에도 전체적인 사이즈는 유지하였다. 다만 슈퍼 드라이브는 아이맥에 더이상 탑재하지 않게 되었다. 비교언어학 비교언어학(, )은 같은 기원을 가진 언어들의 관계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역사언어학의 한 분야이다. 언어는 계속 변화하므로 역사언어학에서는 공통의 조어(祖語)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의 계통을 연구하고 고대 조어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같은 조어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들을 통틀어 한 어족(語族)이라고 이른다. 또 같은 어족 내에도 여러 하위 관계가 있을 수 있어 한 어족은 또 여러 어파(語派)로 나뉜다. 영국의 법률가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1746-1794)에 의하여 본격적인 비교언어학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언어 계통의 연구는 19세기의 역사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August Schleicher)가 개척하였다. 이러한 언어 계통을 정립하는데는 비교방법(comparative method)이 사용되는데 같은 계통의 언어를 비교하여 규칙적인 음운·어휘 등의 대응을 통해 어떻게 언어들이 갈라져 생겨났는지를 연구한다. 언어학은 역사언어학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비교언어학은 독일의 프란츠 봅(Franz Bopp, 1791-1867)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16년 산스크리트어의 언어자료를 연구하고 다른 몇몇 인구어와의 문법 요소를 비교하여 언어학계에 공표하였고, 이것은 비교언어학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독립된 학과로서 언어학의 첫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한편, 프란츠 봅(Franz Bopp, 1791-1867)의 연구가 주로 언어 간의 문법 요소 비교로 이루어져 있어 비교언어학 초기에는 비교문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물론, 프란츠 봅 이전에도 산스크리트어가 알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인구어와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이미 18세기에 영국의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1746-1794)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고트어, 켈트어 등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어떤 한 공통어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학문으로 발전하지는 못 하였고 프란츠 봅에 와서야 인구제어의 상호 관련성이 독자적인 연구 대상으로 정립되었다. 언어를 생물을 분류하는 것처럼 계통수에 따라 어족으로 묶고 진화한다고 생각하거나, 언어를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로 크게 구분하는 것은 아우구스트 슐라이허(August Schleicher, 1821-1868)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18세기 중엽 찰스 다윈이 제기한 진화론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슐라이허도 이에 영향을 받아 언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며 일반적인 진화 법칙에 따라 발전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한 언어가 태어나 일정 기간 동안 생존하다가 다른 어린 언어를 낳고 이 언어가 이전 언어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세대가 변하며, 따라서 인간에게 계보가 있는 것처럼 언어도 계통수(Stammbaum)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역사비교언어학을 엄밀화하고 완성시킨 것은 젊은이 문법학파(Junggrammatiker)이며, 이들 중에 헤르만 파울(Herman Paul, 1846-1921)이 있었다. 1870년대에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을 중심으로한 젊은 세대의 학자들은 이전의 보수적인 사상에 도전하였으며, 구세대의 학자들이 이들을 폄하하기 위하여 사용한 "젊은이"라는 표현을 당사자들은 오히려 새로운 연구방법이라는 뜻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재까지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음운변화를 다루며 절대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규칙이 있음을 주장하고 음운변화는 예외 없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였다. 단, 예외가 있다는 그것은 유추(analogy)에 의해 생긴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언어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의 일관성을 굳게 믿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언어학 역사언어학(, )은 같은 기원을 가진 언어들의 관계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다. 때로는 비교언어학을 역사언어학의 한 분야로 간주하기도 한다. 언어는 계속 변화하므로 역사언어학에서는 공통의 조어(祖語)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의 계통을 연구하고 고대 조어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같은 조어에서 갈라진 여러 언어들을 통틀어 한 어족(語族)이라고 이른다. 또 같은 어족 내에도 여러 하위 관계가 있을 수 있어 한 어족은 또 여러 어파(語派)로 나뉜다. 이러한 언어 계통의 연구는 19세기의 역사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August Schleicher)가 개척하였다. 이러한 언어 계통을 정립하는 데는 비교방법(comparative method)이 사용되는데 같은 계통의 언어를 비교하여 규칙적인 음운·어휘 등의 대응을 통해 어떻게 언어들이 갈라져 생겨났는지를 연구한다. 언어학은 역사언어학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음성학 음성학(音聲學, )은 사람의 말소리(와 수어에서 이와 관련 있는 요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말소리갈·발음학·성음학·소리갈·어음론 등으로도 부른다. 언어학의 한 분야로, 말소리가 어떤 발음 기관의 어떠한 작용으로 생성되며, 만들어진 말소리가 물리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또한 어떻게 전달되고 청취 되는지 연구한다. 음운론이 한 언어나 여러 언어 안에서 추상적 말소리 단위의 이론적 체계를 연구하는 데 비해, 음성학은 말소리의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을 분석한다는 점이 다르다. 음성학은 기원전 4세기경에 고대 인도에서 처음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법학자 파니니가 산스크리트어 닿소리의 조음 위치와 조음 방법을 분석했는데, 지금도 브라흐미 문자군에 속하는 여러 문자에서 파니니가 만든 체계에 따라 자음을 분류하고 배열한다. 중세 아랍 세계에서도 비슷한 연구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세종이 1443년 음력 12월에 만들어 1446년 음력 9월에 공포한 훈민정음 창제에 음성학적 개념이 활용되었다. 《훈민정음해례》에 중세 한국어 닿소리와 홀소리 조음 위치와 방법 및 성조에 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17세기경부터 여러 언어의 정서법 개정 제안에 음성학적 개념이 활용되었다. 근대 음성학은 말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슈아 스틸의 《운율론》이나 알렉산더 멜빌 벨의 《보이는 음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9세기에 축음기와 다른 음향기기들이 발명되면서 녹음된 말소리의 음향적 특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음성학이 크게 발전했다. 루디마어 헤르만은 에디슨 축음기를 사용해 자음과 모음의 주파수 특성을 분석했으며, 로버트 윌리스와 찰스 휘트스톤의 모음 생성 이론을 시험했다. 음성학에는 다음 세 가지 주요 하위분야가 있다. 조음음성학, 음향음성학, 청취음성학 분야들과 교차하는 분야로는, 분절음을 다루는 분절음 음성학과 초분절적 요소를 다루는 초분절음 음성학이 있으며, 실험적 방법론을 활용하는 실험음성학이 있다. 음성학은 또한 음성 인식이나 음성 합성 등 전산언어학 분야, 사회음성학 등 사회언어학 분야, 법음성학 등 법언어학 분야 및 발음 교육 등에서 활용된다. 말소리를 음성 기호로 옮겨 적는 것을 전사라 부른다. 음운을 전사할 때는 빗금을, 음성을 전사할 때는 대괄호를 사용하여 표기한다. 국제 음성 기호(IPA)를 사용한 전사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운율 (언어학) 언어학에서 운율(韻律)은 성조, 억양, 강세, 리듬, 음장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운율은 각각의 분절음인 음소가 가지는 특성 외에, 의미상의 차이를 가져오는 소리의 특징들을 말한다. 운율 자질은 분절음이나 분절음보다 더 큰 언어 단위에 얹히는데, 분절음의 음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초분절자질이라고도 한다. 언어에 따라 어느 언어에서는 분절적 자질인 것이 다른 언어에서는 초분절자질이 되기도 한다. 말의 초분절자질을 통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운율은 높이, 크기, 길이의 세 가지 운율 자질에 의해서 결정된다. 강세는 조음의 힘을 말하는데, 같은 모음이라도 강세를 받으면 강세를 받지 않을 때보다 더 강한 조음의 힘으로 발음되어서 더 크게 들린다. 같은 조음의 힘으로 발음되더라도 공명도가 큰 소리는 공명도가 작은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그리고 같은 소리가 같은 조음으로 발음되더라도 높게 발음되면 낮게 발음될 때보다 더 크게 들리며, 길게 발음되면 짧게 발음될 때보다 더 크게 들린다. 언어는 운율 유형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억양 억양(抑揚)은 문장에 얹히는 높이 곡선을 말한다. 문장의 전체나 일부에 얹혀서 특정한 억양 의미를 전달하는 억양형을 억양 패턴이라 한다. 하나의 억양 패턴이 부과되는 단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뉠 수 있다. 성조 성조(聲調)는 말소리의 높이가 어휘 의미의 변별 기능을 수행하며, 음운론의 층위에서 낱말의 각 음절에 자질로서 부과되는 것을 말한다. 운율을 이루는 하나의 개념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휘 의미의 변별 기능을 갖는 성조를 어휘적 성조(lexical tone)라 하고, 문법 기능을 갖는 성조를 특징적 성조(characteristic tone)라고 한다. 중국어를 비롯한 많은 극동 아시아의 성조 언어들은 어휘적 성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간다에서 사용되는 간다어(Ganda)와 같은 많은 아프리카 성조 언어들은 특징적 성조를 가지고 있다. 알타이 제어 알타이 제어() 또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 (Transeurasia語族, Transeurasian languages)은 우랄 산맥에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언어를 설명하고자 하는 어족이며 19세기부터 시작한 긴 시간의 언어학적 연구사료가 남아있는 유명한 학설 가운데 하나이다. 퉁구스어파·몽골어파·튀르크어파로 구성되며 학자에 따라 한국어와 일본어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특히 구스타크 욘 람스테트와 예프게니 폴리바노프, 로이 앤드류 밀러, 마르티너 로베이츠 등은 알타이어족에 한국어군이나 일본어파를 포함시키고 있다. 퉁구스어족·몽골어족·투르크어족·한국어의 언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은 러시아 동부를 여행했던 스웨덴의 국군장교 필립 요한 폰 슈트랄렌베르크가 1730년 쓴 책에서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스 포페는 이를 “몇 개는 알타이 제어에 속하는 많은 언어들을 분류하려고 했던 최초의 시도”라고 평했다. ‘알타이’라는 말이 처음 붙은 것은 1844년으로, 우랄어족을 주로 연구했던 핀란드의 문헌학자 마티아스 카스트렌에 의해서였다. 카스트렌의 알타이 제어는 핀우그리아어와 사모예드어까지 포함하고 있었는데, 오늘날엔 두 언어군이 우랄어족에 속하므로, 카스트렌이 제안한 알타이 제어는 지금의 우랄알타이어족에 해당한다. 퉁구스어·몽골어·투르크어로 이루어진 알타이어족에는 다른 언어가 포함되기도 한다. 한국어가 알타이어라고 주장을 한 사람으로는 유명 언어학자인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와 예프게니 폴리바노프가 있다. 로이 앤드류 밀러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알타이어족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퉁구스어·몽골어·투르크어와 별도로 한국어·일본어·아이누어를 하나의 어족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러한 주장 중의 하나로 조지프 그린버그의 유라시아어족 가설이 있다. 마르티너 로베이츠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포함한) 알타이 제어를 '트랜스유라시아어족' (Transeurasian languages)라 칭하며 한국어와 일본어를 제외한 몽골어족, 튀르크어족, 퉁구스어족을 아울러 '알타이어파'(Altaic languages)라 칭한다. 알타이 제어에 속하는 언어는 일반적으로 다음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젊은이 문법학파 젊은이 문법학파(Junggramatiker), 소장문법학파, 신문법학파(neo-grammarian)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을 중심으로 그 이전 시기의 언어 연구의 성향과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이는 일군의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그 당시에 비교적 젊은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젊은이 문법학파라고 불렸다. 레스킨(Leskien), 브루크만(Brugmann), 오스토프(Osthoff), 델브뤽(Delbrück) 등의 학자들과 이들의 연구방법론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헤르만 파울(Herman Paul)이 이들 젊은이 문법학파의 중심 멤버였으며, 베르너(Verner), 드 소쉬르(de Saussure), 휘트니(Whitney) 등도 이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의 자연과학에서 발휘된 실증주의적 연구의 성과에 자극을 받아 언어학에서도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도입하여 언어학을 정밀과학으로 다듬고자 했다. 이들의 연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만이 과학의 유일한 연구대상'이라는 실증주의적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연구방법론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언어학은 역사과학으로 정의된다. 언어에 대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은 실증주의적 관점에 의해 거부된다. 대신 언어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구체적인 언어자료를 통해서 경험적으로 이루어질 때에만이 비로소 이론적인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언어가 역사과학일 때에만 경험과학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즉, 언어학에서 역사과학과 경험과학의 뜻이 동일시된 것이다. 언어 연구에서 의미의 객관적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관찰가능한 형태가 언어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언어연구에서 형태, 특히 그중 가장 관찰이 쉬운 소리를 주요 관찰대상으로 하였다.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그들은 언어가 독자적인 유기체로 전제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개인적 언어사용만이 언어연구의 유일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언어가 개인적 언어사용과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유기체적 관점을 거부하고 음성변화를 물리적인 법칙과 같은 것으로 보고 필연적이고 인과적인 법칙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들의 연구대상은 언어변화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과 인구어 공통조어를 재구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들은 언어변화의 원인을 음운법칙과 유추에서 찾았다. 베르너의 법칙에 의해 그림의 법칙의 예외현상을 규칙적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 이들은 겉으로 불규칙하게 보이는 음운변화의 모습들도 충분한 자료와 정확한 방법론을 적용한다면 그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음운변화의 법칙이 음성생리학적인 측면에서 이해되는, 인간의 의지가 결여된 무의식적 과정이며 기계적인 법칙으로간주되어 '음운규칙에는 예외가 없다'라는 견해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음운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들로 차용을 제외하고는 심리적인 현상인 유추 하나만을 인정하였다. 인구어 공통조어의 재구에서 그들은 현단계의 언어에 대한 관찰과 그 언어들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 안에서 나타나는 음운변화의 규칙들을 정확히 찾아내고 그렇게 찾아진 음운법칙의 토대 위에서 공통조어를 재구하고자 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런 그들의 태도는 언어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라는 점에서는 그 이전 시기의 연구자들과 동일하나 그 접근방법에서 현재의 언어보다 고대의 언어들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두어 공통조어를 재구하려 하였던 이전 시기의 연구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음운법칙의 규칙성과 무예외성에 대한 믿음은 이들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쳐서 비교방법을 엄밀히 다듬게 하고 음운변화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오게 했다. 오늘날의 역사비교언어학의 연구의 밑바탕이 되는 인구제어에 대한 수많은 구체적인 지식의 축적은 바로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젊은이 문법학파가 그들의 연구에서 보여준 정밀한 방법론과 구체적인 언어사실에 대한 지식의 축적은 젊은이 문법학파가 언어학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들은 인구어족 분화의 최종 단계인 현존방언에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을 보인 학자들이기도 하다. 방언학과 음성학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것 역시 그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첫째, 그들은 언어를 하나의 완전한 체계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언어의 형태적 요소들에 대한 개별적 분석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연구는 개별적인 음성과 형태의 역사가 되었고, 체계에 대한 접근이 결여되어 있었다. 둘째, 그들은 언어의 내용이나 정신적인 측면과 형태, 물리적인 측면과 분리해서 사고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연구에서 인간을 제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셋째, 그들이 내세운 중요한 이론적 전제의 하나인 음운법칙의 무예외성이 끊임없이 논쟁 및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음운법칙을 자연법칙과 같은 필연적인 인과법칙으로 간주하는 것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그들 내부에서도 견해차이가 있었고, 그 결과 이 기계론적 음운법칙에 대한 제한이 점점 뒤따르게 되었다. 그래서 음운법칙을 자연법칙이 아닌 가설적인 원리로 본다든지 음성생리학적인 면보다 발화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면을 통해 음운법칙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젊은이 문법학파 내부에서도 발견이 된다. 넷째, 통시적인 연구에 관심이 집중되어 공시적인 연구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지지 못했다. 그래서 젊은이문법학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게 된다. 언어의 내용이나 정신적인 면과의 관계를 등한시했던 점에 대해 심리학이나 정신사적인 부문에서 극복의 시도가 있었으며, 음운규칙의 무예외성은 방언학의 연구결과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통시적인 면에 기울었던 점은 드 소쉬르에 의해 문제제기를 받게 되며, 결국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대에 언어 연구의 중심이 공시적인 연구로 옮겨가게 된다. 한가지 지적할 만한 것은 이들의 연구가 지닌 약점들에 대해 젊은이 문법학파 내부에서도 극복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이 집대성된 헤르만 파울의 "Prinzipien der Sprachgeschite"(언어사 원리)를 살펴보면 공시적 방법(기술언어학)과 통시적 방법(역사언어학)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언어학에서 지나치게 역사성을 강조하는 점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언어학을 역사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사회과학 및 문화과학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에 대한 적극적인 극복은 역시 그 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몫으로 돌려진다. 후두음 이론 후두음 이론(Laryngeal theory)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인구 조어 모음 체계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 이전 단계인 원시 인구어 단계의 음운구조를 재구한 이론이다. 원시 인구어에 후두음 계열의 소리들이 있었고 이 후두음들이 주위의 모음의 음가를 변화시켜 인구어 모음 체계에 영향을 끼친 후 소멸하였다고 본다. 드 소쉬르의 관찰에 의하면 인구어의 어근들은 주로 모음 e를 취하여 CeC, CeRC, CReC의 형태로 나타난다(C=자음, R=공명음 또는 향음). 이런 기본형태는 그리스어의 pétomai, pepótēmai, eptómēn '날다'의 pét/pót/pt 대응에서처럼 e/o/ø 모음 교체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어근에 장모음이 나타나는 소수의 어근들은 그리스어 phāmi/phōnē/patós '말하다'에서처럼 ā/ō/a 모음 교체를 보인다. 이 어휘들은 일반적인 어근과는 다른 모음 교체 현상을 보인다. 드 소쉬르는 일반적인 모음 교체를 따르지 않는 인구조어의 어근들인 *dhē- '놓다', *stā- '서다', dō- '주다', 등도 원래는 일반적인 어근 구조와 동일한 변화를 보이는 규칙적인 어근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묄러(Möller)는 ē와 ā가 모두 A에서 변한 것이라는 드 소쉬르의 생각에 반대하고 A, O 이외에 장모음 ē가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 되는 E를 설정하여 3개의 장모음에 대응하는 3개의 향음적 요소가 존재했을 것이라며 드 소쉬르의 가설을 수정하였다. 또 그는 a와 o가 항상 eA와 eO의 영계제라는 드 소쉬르의 가설에 대해 인구조어 *agō(I take)의 경우처럼 a와 o가 완전계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함을 지적하면서 모음으로 시작하는 인구어 어근들은 원래 어두에 있던 E, A. O들이 후행하는 모음을 변화시킨 후 소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들 E, A. O의 향음들은 후두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들을 각각 H1, H2, H3으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이후 Saussure와 Möller의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불리게 된다. 묄러에 의해 수정된 견해를 인구조어의 단어들에 적용해 보면*ed-‘먹다’, *aĝ-‘나르다’, *od-‘냄새맡다’, *dhē-, *stā-, dō- 등은 각각 *H1ed-, *H2eĝ-, *H3ed-,*dheH1-, *steH2-, *deH3-의 형태로 재구될 수 있다. 드 소쉬르와 묄러의 후두음의 존재에 대한 가정은 구체적인 실증자료 없이 순전히 이론적 가정을 통해서만 도출된 견해였다. 그래서 구체적인 자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적인 연구가 주된 흐름이었던 당시의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뒷날 히타이트어가 발견된 이후, 쿠리오비츠(Kuryłowicz)가 히타이트어에서 후두음의 흔적이라 생각되는 ‘h’의 존재가 있음을 밝히면서 후두음 이론이 새롭게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위와 같은 히타이트어의 예들은 후두음 이론이 옳음을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예들이라고 볼 수 있게 되어 후두음 이론이 다시 재평가될 수 있었다. 히타이트어에서는 기존의 후두음 이론과 들어맞지 않는 예들도 발견된다. 위와 같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드 소쉬르와 묄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새로운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후두음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기존의 모음체계의 이론만으로는 불충분한 히타이트어의 자료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원시인구어의 모음체계에 대한 재구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 후두음 이론의 큰 장점이자 그 의의가 될 수 있다. 탁명환 탁명환(卓明煥, 전라북도 정읍군, 1937년 7월 8일 ~ 1994년 2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신흥종교, 이단 사이비종교 연구의 전문가였다. 기독교 계열의 이단 연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종파를 지속으로 비판하여 소송, 테러, 살해 협박을 받았고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대성교회 광신자에게 살해당하였다. 탁명환은 1937년 7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리 179번지에서 부친 탁두섭과 모친 안삼례의 3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했다. 1960년 4월 26일 육군에 입대하여 대구 16헌병대에서 헌병으로서 복무하면서 1961년 9월 대구영남신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약 1년 3개월간 수학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복음신보사, 기독신보사 등 개신교계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신흥종교 연구를 시작하여 신흥종교문제연구소(1970년 설립)와 국제종교문제연구소(1979년 설립), 그리고 한국종교문제연구소(1986년 설립)에서 소장으로 일하면서 신흥종교 혹은 이단종교 연구자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개신교계 신흥종교 전문연구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신학대원대학, 서울신학대학, 고려신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월간 『성별』, 월간 『현대종교』 등의 잡지를 발행하여 연구 성과를 교계에 소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5년부터는 ‘사랑실천헌안장기사후시신기증운동본부’를 조직하여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생을 이른바 ‘사이비’ 종교들의 비리와 이단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하다가 개신교계 신흥종파인 대성교회 신자의 피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남 탁지일(부산장신대교수), 차남 탁지원(현대종교 소장), 3남 탁지웅(성공회 신부)가 현대종교를 맡고 있다. 차량 폭탄 테러(1985년) 등의 신변의 위험을 겪었으며, 1994년 대성교회(現 평강제일교회)의 신도의 테러로 노상에서 살해당했다. 2월 18일 신흥종교인 영생교에 대한 문제로 출장을 다녀오던 탁명환은 대성교회의 광신도 임홍천이 탁명환의 아파트 근처에 숨어있다가 칼로 탁명환을 찔렀다. 탁명환은 병원에 옮겨졌으나 곧 사망했다. 검찰에서 밝힌 대성교회 광신도 임홍천의 살해 동기는 탁명환이 1994년 1월에 쓴 목사 박윤식을 비판하는 글을 보고 증오감이 깊어져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밝혔다. 사후 시신은 "의학대학에 실습용으로 써달라"는 유언에 따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기증되었고 각막 두 개는 당시 27세와 37세인 여성에게 각각 기증되었다. 그 뒤 2002년 9월 20일 사망한 탁명환의 아버지 탁두섭도 시신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하였다. 촘스키 위계 촘스키 위계(Chomsky hierarchy)는 형식 언어를 생성하는 형식 문법의 클래스 사이의 위계를 말한다. 노엄 촘스키가 1956년에 제시하였다. 언어는 형식적으로 문장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고, 문장은 형식적으로 기호들의 연쇄로 정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formula_4 {ㄱ, ㄴ, ㄷ, ㄹ, ..., ㅎ, ㅏ, ㅑ, ㅓ, ㅕ, ..., ㅡ, ㅣ}라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은 언어들이 있을 수 있다. 문법은 형식적으로 기호들의 집합에 그 기호들로부터 문장을 만드는 규칙이 부여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formula_8 형식문법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몇가지 기호 사용의 관례가 있다. 이렇게 정의된 형식문법은 생성규칙에 어떠한 제약이 있는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무제약 문법(UG, unrestricted grammar)은 생성규칙(production rule)에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으나, 좌변이 공집합이 되는 경우만은 없다(즉 formula_21에서 formula_22). 이들은 모든 종류의 형식 문법을 포함한다. 이는 튜링 기계가 인식가능한 모든 언어를 생성하는데, 이를 재귀적 열거 가능 언어(recursively enumerable set)라 한다. 문맥 의존 문법(CSG, context-sensitive grammar)은 문맥 의존 언어를 생성한다. 생성 규칙은 formula_23이며, 이들은 항상 formula_21에서 formula_25이다. 선형 구속 오토마타로 인식할 수 있다. 문맥 자유 문법(CFG, context-free grammar)은 문맥 자유 언어를 생성한다. 모든 생성 규칙은 formula_26형태를 갖는다. (formula_27는 하나의 비말단(nonterminal)이고, formula_28는 formula_29에 속하는 문자열.) 푸시다운 오토마타로 인식할 수 있다. 정규 문법(RG, regular grammar)은 오른쪽 정규 문법과 왼쪽 정규 문법의 총칭이다. 다음은 각 생성규칙: 이로부터 모든 정규 언어를 기술할 수 있으며, 정규 표현식과 등가이기에 유한 상태 기계가 인식할 수 있다. 기본 모음 기본 모음(cardinal vowel)은 영국의 음성학자 대니얼 존스(Daniel Jones)에 의해 세계 여러 언어와 여러 방언의 모음을 동일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기술하고 비교하기 위해 고안된 체계이다. 기본 모음은 1차 기본 모음 여덟 개와 과 2차 기본 모음 여덟 개, 2개의 중설 고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1차 기본 모음은 인간이 낼 수 있는 모음을 조음 음성학적으로 양극단을 잡고 그 사이를 청취 음성학적으로 등거리로 구분하여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 모음들에서 원순성을 바꾸어 2차 기본 모음을 설정하였다. 1차 기본 모음들 중에서 우선 입술을 양 옆으로 펴고 혀를 가장 높이 가장 앞으로 내어 낼 수 있는 모음[i]와 입술은 둥글이지도 않고 펴지도 않은 상태에서 혀를 가장 뒤로 가장 아래로 내려 낼 수 있는 [ɑ]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i]와 [ɑ] 사이를 청각적 등거리로 나누어 전설 모음 계열의 [e], [ɛ], [a]를 설정하고, 후설 모음 계열의 [ɔ], [o], [u]를 설정하였다. 2차 기본 모음은 1차 기본 모음에서 원순성을 바꾼 것이다. 1차 기본 모음 중 전설 계열 [i], [e], [ɛ], [a]를 발음할 때와 같은 위치에 혀를 둔 상태에서 입술만 둥글려서 얻어지는 모음이 [y], [ø], [œ], [ɶ]이다. 마찬가지로 1차 기본 모음 중 후설 계열 [ɑ], [ɔ], [o], [u]를 입술만 펴서 발음하여 얻어지는 모음이 [ɤ], [ɯ], [ʌ], [ɒ]이다. 내적 재구 내적 재구(內的再構, )는 역사-비교언어학에서, 어느 한 언어의 특정한 시기의 공시적 자료를 이용하여 그 언어의 역사를 추정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내적 재구는 친족 관계가 있는 다른 언어가 없거나 알려지지 않아 비교 재구를 할 수 없는 경우, 조어에서 그 언어까지의 상세한 언어 변화 과정을 재구하려는 경우, 조어의 선사를 재구하려는 경우 등에 사용된다. 내적 재구는 언어의 역사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흔적을 찾아 언어의 변화 과정을 복원하고 그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원형을 재구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 가장 적합한 것의 하나가 공시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음운적 교체형이다. 형태론적으로는 동일한 요소이면서 형태음운론적으로는 다른 형태로 교체되는 경우, 내적 재구를 위한 주요 자료가 된다. 비교 재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내적 재구를 통해 해명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내적 재구는 조어를 계통적으로 재구하는 데 쓰일 수 없다. 내적 재구는 동계통(같은 어족이나 어파)라는 증명이 아직 되어 있지 않은 두 언어를 비교할 때 아주 중요한 과정이 된다. 상술되었듯, 더 오래된 꼴의 재구는 형태음운론적 교체형을 통해 유추될 수 있다. 다음 라틴어 명사의 단수 주격과 소유격을 비교해 보자. 어근의 마지막 자음에서 /p/-/b/, /k/-/g/가 교체되고 있다. 즉, 유성정지음과 무성정지음 사이의 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교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원래 유성정지음이었고 주격에서 뒤따르는 -s에 동화되어 무성음으로 바뀌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둘째, 원래 무성정지음이었고 생격에서 뒤따르는 -i에 의해 유성음으로 바뀌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두 가지 추정 중 어느 것을 옳은지는 그 언어에서 일어나는 다른 음운 현상을 살펴 보아 결정하여야 한다. 라틴어에서는 다음과 같은 형태들이 존재한다. 즉, 무성음 뒤에 -i가 후행하지만 유성음으로 변하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이다. 위의 추정 중 두 번째 입장을 취하게 되면 유성음화가 어떤 경우에는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첫 번째 추정을 옳은 것으로 취하게 된다. 방언에 적용가능한 역사언어학적 재구 방법은 세 가지 있다. 비교언어학과 방언지리학과 내적 재구이다. 「내적 재구」라는 방법은 한 체계 내의 형태음운론적 변화를 실마리로 옛 음운상황을 재구하는 방법이다. 비교언어학의 진가는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은 시기에 대한 언어상황의 추정에 있다. 더욱이 비교 재구를 통해 내적 재구나 언어지리학과 더불어 변화의 상대년대에 대한 추정이 이주어질 수 있다. 그림의 법칙 그림의 법칙은 독일의 야코프 그림이 그의 저서 《독일어 문법》("Deutsche Grammatik")에서 지적한, 게르만어의 역사적인 변화 과정에서 파열음 계열의 소리들이 보이는 규칙적인 음운 변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그에 따르면, 인도유럽어족에서 게르만어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무성 무기음(Tenuis)은 유기음(Aspirata)으로, 유성 무기음(Media)는 무성 무기음으로, 유기음은 유성 무기음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음운 변화는 고지 독일어에서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된다. 그림은 인구조어에서 게르만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제1차 음운 추이, 게르만어에서 고지 독일어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제2차 음운 추이라고 이름 붙였다. 제1차 음운 추이를 그림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림의 법칙의 예외를 칼 베르너(Karl Verner)가 베르너의 법칙으로 설명하였다. 비교 재구 비교 재구(comparative reconstruction)란 공통의 언어로부터 분기되었다고 믿어지는 둘 이상의 언어들이 있을 때 이들 언어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해서 그 언어들이 분화되기 이전 상태의 언어인 공통조어를 재구하는 연구 방법론을 말한다. 비교 재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층위를 포괄하는 전체적인 조어의 모습을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재구하는 것이나, 현재까지의 비교 재구에 연관된 연구들은 주로 말소리의 비교 재구에 집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교 재구는 일반적으로 말소리의 비교 재구를 가리킨다. 비교 재구를 통해 조어의 말소리를 재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두 가지 가설이 전제 되어 있다. 첫째가 친족성 가설이다. 비교의 대상이 되는 언어들의 유사성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들이 원래 동일한 공통의 언어에서 분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언어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과, 그 변화가 단일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별개의 언어들로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공통조어'라는 개념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둘째는 규칙성 가설이다. 이것은 음의 변화가 개별 단어마다 산발적이고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음의 변화가 있는 경우라면 그와 동일한 환경이 주어질 때에는 개별 단어들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동일한 변화를 겪는다는 생각이다. 이 가설이 전제가 될 때 각 개별어들 사이의 규칙적인 음운대응을 찾아내고 조어를 재구하는 과정이 이론적인 타당성을 얻게 되며 비교대상이 되는 언어들에서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우연적인 유사성을 조어의 재구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서로 친족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되는 언어들이 있을 경우 이들 언어들에서 서로 의미와 형태가 유사한 단어나 형태들을 찾아내어 서로 비교하여 규칙적인 음운대응이 성립하는지를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일차적인 비교의 대상이 되는 단어들은 가장 기초적이고 잘 차용되지 않아서 공통조어에서 각 개별어까지 그대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은 이른바 기초어휘들이다. 또한 문법형태소 역시 중요한 비교재구의 대상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 유사성이 동일 근원에서 유래하지 않는 요소들, 즉 우연이나 차용에 의한 단어들과 대부분의 언어에서 보편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어휘들이 비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음운변화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음운대응에서 반드시 그 소리가 유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대응이 정확하게 확인되기만 하면 된다. 하나의 대응 규칙에 연관된 단어들이 많을수록 그 음운대응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음운대응규칙의 수 역시 많으면 많을수록 친족관계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단 비교 대상이 되는 언어들 사이에서 음운대응의 규칙성이 충분히 확인되면 이들 언어들은 서로 친족관계에 있으며 음운대응이 성립되는 각 단어들은 공통조어의 단일한 단어에서 유래된 동원어(cognate)라고 결론지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친족어들 사이에서 음운대응이 확인되면 이들 언어들에서 나타나는 음의 변화를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조어형을 재구하게 된다. ‘구름’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nephos, 산스크리트어 nabhas, 고교회슬라브어 nebo의 예를 들어 재구과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음은 그 반사형이 모든 개별어에서 동일하므로 *n으로 재구된다. 둘째음의 재구는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여러 다른 자료들을 참조할 때 공통조어의 *e가 산스크리트어에서 a로 변한 것이 확인이 되므로 조어형이 *e로 재구된다. 셋째 음은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는 유기음이라는 점에서, 산스크리트어와 고교회슬라브어는 유성음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공유하고 있다.산스크리트어의 bh가 다른 두 언어의 형태들과 하나씩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재구형을 *bh로 간주할 수 있다. 네 번째의 음은 두 번째의 음과 동일한 이유로 *o로 재구할 수 있다. 마지막 자음은 언어변화에서 없던 음이 새로 생겨나기보다는 있던 음이 특정 환경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어말 자음 탈락이 일어났다 보고 *s로 재구할 수 있다. 따라서 공통조어형은 *nebhos로 재구된다. 이런 절차를 거쳐서 재구된 형태(재구형:再構形)가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여러 면에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재구형과 동일한 역사적 단계에서 동일한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어의 경우 이렇게 문헌상에서 증거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재구형에 대한 유형론적인 고려가 있다. 이것은 재구형이 자연언어에서 실제로 나타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재구형에 대한 유형론적 고려를 통해 비교방법에 의한 재구형을 좀 더 자연스러운 형태로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유형론적인 적합성은 공시적 언어자료에서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특성인 반면에 역사비교언어학에서 실제 관심사는 통시적인 문제인 계통적인 유사성이므로, 역사비교언어학 연구에서는 비교연구가 주가 되며 유형론적인 연구는 비교연구를 보충하는 보조적 역할을 하게 된다. 비교재구는 재구형 그 자체를 도출하는 것만이 그 목적은 아니다. 비교재구는 재구된 가정형태를 통해 다시 현실적 자료를 살피고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비교재구는 도출된 공통조어와 역사상의 언어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교재구를 포함한 재구는 문헌이 없는 시대의 언어의 역사를 이론적으로 복원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재구를 통해 재구된 형태들은 다음과 같은 한계들을 가지게 된다. 첫째로, 비교 재구에 의해 재구된 조어형들은 순수한 이론적 산물이라서 어떤 특정시기의 조어의 형태를 직접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 비교재구는 부분과 부분의 비교이며 재구이지 전체 언어의 비교와 재구가 되지 못하므로 그 시간적, 공간적인 변화의 폭이 얼마나 되는지 한정짓기도 힘들며, 개개의 재구형의 각 부분이 시간상으로 동일 선상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둘째, 재구된 형태는 이론적으로 도출된 추상적인 음가이기 때문에 그 음가의 정확성에 한계가 있다. 셋째, 비교 재구를 통한 재구형의 의미를 추정하기가 힘들다. 언어의 의미변화는 형태변화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개별언어들의 의미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재구된 조어형의 의미를 추정하는 것도 힘들지만 재구형의 의미가 오늘날의 의미와 동일한지에 대해서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재구형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형태적인 재구형에 불과하다. 펌핑 보조정리 펌핑 보조정리()는 형식 언어 이론에서 특정 종류 언어의 속성을 나타내주는 보조정리이다. 대표적으로 정규 언어에 대한 것과 문맥 자유 언어에 관한 것 두 가지가 있다. L이 어떤 형식 언어에 속한다면 그 언어에 해당하는 보조정리가 성립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펌핑 보조정리는 어떤 L이 특정 형식 언어에 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진 언어가 특정 펌핑 보조정리를 성립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에 해당하는 형식 언어에 속하지 않음을 보일 수는 있다. 어떤 언어 "L"이 정규 언어라고 하자. 그러면 자연수 "p" > 0가 존재해서, 길이가 "p" 이상인 임의의 문자열 "w" ∈ "L"를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w" = "xyz"와 같이 분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길이가 충분히 큰 문자열이 정규 언어에 속하려면 반드시 "xyz"의 형태로 표시되어서, "y"를 i번 펌핑한 "xy""z"도 이 언어에 항상 속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엄밀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1 어떤 언어 "L"이 문맥 자유 언어이고 무한하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수 "p" > 0이 존재하여, 길이가 "p" 이상인 임의의 문자열 "w" ∈ "L"를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w" = "uvxyz"와 같이 분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길이가 충분히 큰 문자열이 문맥 자유 언어에 속하려면 반드시 "uvxyz"의 형태로 표시되어서, v와 y를 i번 펌핑한 "uv""xy""z"도 이 언어에 항상 속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엄밀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formula_2 조선 단종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사사 혹은 교살 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다' 라는 뜻의 단종(端宗)으로 묘호가 정해졌으며,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이며, 조선 최초의 왕세손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왕조 27명의 임금들 중 유일하게 국장을 제 때 치르지 못한 왕이기도 하다. 승하한 지 550년 만인 2007년 5월에 단종의 능이 있는 강원도 영월에서 국장이 치뤄졌다. 1452년 6월에서 1452년 7월 14일까지 영의정 황보 인이 1차 섭정하였으며 1452년 7월 14일에서 이듬해 1453년 11월 10일까지 좌의정 절재 김종서가 섭정하였고 1453년 11월 10일에서 1455년 6월 11일을 기하여 퇴위할 때까지 왕숙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섭정하였다. 1441년 8월 9일(음력 7월 23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하여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의 후궁으로 조모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요절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단종은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450년 조부 세종대왕이 죽고 아버지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부왕 문종이 즉위하기 전 할아버지 세종은 세자 문종의 병약함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아들들의 존재를 염려하여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하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였다. 성삼문 등은 세종의 뜻을 받들었지만, 신숙주 등은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아버지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 6월 1일 (음력 5월 14일) 11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고명대신들에 의한‘황표정사(黃票政事)' 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어린 단종의 즉위 이래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수양대군은 종친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7년 유배지인 영월에서 사사되었다.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年7月25日 (음력 閏 6月11日),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 (상왕이 거처하는 곳) 으로 옮겨갔다. 동시에 그의 유모이기도 했던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가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끝에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김문기·유성원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삼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여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1457년 음력 10월 21일의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종때까지 장례나 무덤도 제대로 못한 점으로 보아 세조실록의 기록은 거짓말이고 타살이 확실해보이며,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증거로 의금부의 공사와 처형당시 영월주민들의 증언 기록을 증거로 내세운 것으로 보아 단종 이홍휘가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해하였다고 한다. (교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이 죽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 영월군의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 곳에 가매장하였다.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상을 치루기도 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한을 품고 사망하였으므로 단종은 무속의 신의 한 사람으로 모셔졌다.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세워진 단종의 사당 영모전 외에도 단종은 무속의 신 중 왕신의 한 사람으로 모셔졌다. 영흥11리 마을서낭당과 양주 신혈면(현 서울 은평구) 지역의 일부 무속인은 단종을 무속의 신으로 모셨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사망한 지 241년 만인, 1698년(숙종 24년)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단종은 1457년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능은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사대문 밖 80리 이내에서 벗어난 능 중의 하나이며,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이 설치되어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한 관련자 및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물들을 모신 사당이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현 공주시 반포면)에 세워졌다. 동학사 내 숙모전(肅慕殿)에 단종과 신하들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동학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군의 청령포로 유배를 올 때 여주시-원주시 부론면-귀래면-신림면의 싸리재를 거쳐서 영월로 왔다. 이 때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명의 후송을 받았다고 한다. 싸리재는 또한 의병장 김상태의 활약으로도 유명한데, 호좌의진이라는 의병 부대의 중군부대를 이끌던 그는 영천의 조령, 문경의 갈평, 원주 싸리재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민간과 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진다. 노산군지신(魯山君之神)이라고도 부른다. 영월읍에 있는 영모전(永慕殿) 서낭당을 비롯하여 영월·정선군, 삼척시 등 태백산 인근의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고 있다. 그밖에 양주군 신혈면 지역에도 단종을 무속의 신으로 모시는 무가가 일부 있다. 도쿠가와 이에노부 도쿠가와 이에노부 (, 1662년 6월 11일 - 1712년 11월 12일)는 일본 에도 막부 제6대 쇼군(재위 1709년 - 1712년)이다.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손자이자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조카로, 1709년 쓰나요시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쇼군직을 이었다. 아명은 도라마쓰(虎松), 초명은 쓰나토요(綱豊)이다. 1662년 6월 11일(간분(寛文)2년 4월 25일) 에도 네즈(根津)의 저택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고후(甲府) 번의 번주이자 재상인 도쿠가와 쓰나시게(徳川綱重)이며, 모친은 조쇼인(長昌院)이다. 장남이었으나 당시 19세였던 쓰나시게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 하녀 신분인 26세의 조쇼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였던 탓에 가신 신미 마사노부(新見正信)에게 맡겨져 신미 사콘(新見左近)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의 양자로 성장하였다. 생모 조쇼인은 1664년 사망하였다. 부친 쓰나시게에게 남자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자 9세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1676년 관례를 치른 뒤 백부이자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徳川家綱)로부터 편휘(偏諱)를 하사받아 쓰나토요(綱豊)가 되었다. 1678년 쓰나시게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25만 석 번주의 자리를 계승한 뒤 조모인 준쇼인(順性院)의 보살핌을 받았다. 1680년 쇼군 이에쓰나가 후계자 없이 중태에 빠지자 이에쓰나의 동생 고즈케 다테바야시(上野館林) 번주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와 함께 강력한 쇼군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신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가 3대 쇼군 이에미쓰의 핏줄에 더 가까운 쓰나요시를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쇼군 자리에서 탈락하고 쓰나요시가 5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쓰나요시마저 남자 후계자가 없자 쓰나요시의 사위인 도쿠가와 쓰나노리(徳川綱教)와 다시 후계자 경쟁을 벌였으나 쓰나노리가 요절하면서 1704년 쓰나요시의 정식 상속인으로 인정받고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한 뒤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 거처하였다. 1709년 쓰나요시가 사망하자 48세의 나이에 6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취임하자마자 선대의 악명 높은 살생금지령을 폐지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인기와 기대를 얻었다. 또한 쓰나요시의 총신(寵臣)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를 면직한 뒤 고후 시절의 가신들인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등을 등용하여 문치(文治) 정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악화되는 바쿠후의 재정을 염려하여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재위 3년 만인 1712년 11월 12일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도쿄 미나토 구(港区)의 조조지(増上寺)에 있다. 강제규 강제규(姜帝圭, 1962년 11월 27일 ~ )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다. 1996년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기념비적 작품 《쉬리》를 감독하였다. 2004년 초에는 한국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로 천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배우자는 배우 박성미이다. 강제규는 1962년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태어났다.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강제규는 1981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울극장의 합동영화사에서 시행한 감독 공채에 합격하여 조감독이 되었으며, 1989년에는 대학교 동기 동창인 탤런트 박성미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계속된 생활고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의 영화 산업의 실태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를 가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등의 각본을 쓰면서 감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1996년 설날에 개봉한 진희경과 한석규 주연의 《은행나무 침대》였다. 총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작품은 강제규에게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안겨 주었다. 첫 작품으로 대중의 주목을 끈 강제규의 2번째 작품은 바로 《쉬리》였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 문제를 접하고 이 작품을 기획하였다. 《은행나무 침대》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소재로 하였다면, 이 영화는 남·북 분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24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쉬리》는 8개월 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999년 설 연휴에 개봉되었다. 종영일까지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쉬리》는 당시의 흥행 관념을 완전히 바꾸며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세계적인 대흥행작 《타이타닉》의 대한민국 흥행 기록 450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이 기록은 《친구》가 개봉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으며, 2009년 현재까지 통산 12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일본에 130만 달러로 수출을 한 것은 물론, 뉴욕 국제 영화제에서도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강제규에게 부와 명성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가져다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영화사 강제규필름을 설립하게 된다. 이후 그는 강제규필름을 통해 시나리오 작가, 감독을 모집하고, 제작비를 지원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쉬리》의 대성공 이후 많은 기업들이 '제2의 쉬리' 제작 시 거금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강제규는 한동안 강제규필름을 통한 후배 양성과 영화 각본 작업에만 집중하였으며, '제2의 쉬리'도 언제 제작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2004년 초에 《쉬리》와 마찬가지로 남북 분단(특히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하였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얼마 전인 2003년 말, 《실미도》가 1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였으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다시 한 번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개척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곧바로 이보다 많은 117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다시 한번 역대 최다 흥행 기록을 경신하였다. 흥행 뿐만 아니라, 대종상에서 미술상, 촬영상, 음향상을 수상하였다. 이 외에도 강제규는 이 작품을 통해 제 50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최고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이란의 유명 영화제인 파즈르 국제 영화제에도 초청작으로 상영되었다. 박스 오피스 모조(Box Office Mojo)에 따르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세계적으로 6870만 달러(미국에서는 11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이는 2004년의 전 세계 영화 중 75위, 대한민국 영화 중에서는 최고 기록이다. 구문 분석 언어학에서 구문 분석(構文分析, ) 또는 '파싱'은 문장을 그것을 이루고 있는 구성 성분으로 분해하고 그들 사이의 위계 관계를 분석하여 문장의 구조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과학에서 파싱((syntactic) parsing)은 일련의 문자열을 의미있는 토큰(token)으로 분해하고 이들로 이루어진 파스 트리(parse tree)를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전산언어학, 자연언어처리, 기계번역 등의 분야에서는 전산학의 파싱 기법을 인간 언어를 구문 분석하는 데 적용하려고 한다. 컴퓨팅에서 파서(parser)는 인터프리터나 컴파일러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로, 입력 토큰에 내재된 자료 구조를 빌드하고 문법을 검사한다. 파서는 일련의 입력 문자로부터 토큰을 만들기 위해 별도의 낱말 분석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파서는 수작업으로 프로그래밍되며 도구에 의해 (일부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반)자동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파스 트리 파스 트리(parse tree), 파싱 트리(parsing tree), 어원 트리(derivation tree), 구체적인 구문 트리(concrete syntax tree)는 올바른 문장에 대해 트리 구조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parse라는 단어는 주로 전산 언어학에서 사용된다. syntax tree가 더 종종 사용된다. 파스 트리는 입력 언어의 문법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데 이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쓰이는 추상 구문 트리와 확실하게 구분을 지어준다. 문법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는 Reed-Kellogg의 문장 다이어그램과 달리 파스 트리는 다른 종류의 구성요소를 위해서 별개의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파스 트리는 주로 구성 요소들의 constituency grammars 관계나 독립적인 문법의 독립 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파스 트리는 컴퓨터 언어(프로그래밍 언어)가 해석될 때와 같이 문장이나 자연어를 위해 생성된다. 관련된 개념으로는 transformational generative 문법에서 사용되는 구문 마커나 P-marker가 있다. 구문 마커는 구문 구조로 표시된 언어 표현이다. 이것은 트리의 형식으로 표현되거나 대괄호로 묶인 표현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문 마커는 구문 구조 규칙을 적용하여 생성되고 그 자체는 추가적인 변환 규칙의 적용 대상이다. 구문적으로 모호한 문장은 "파스 포레스트(parse forest)"라고 한다. 구 문법에서 구조 기반 트리는 단말 노드와 비단말 노드를 구분한다. 안쪽에 있는 노드는 비단말 노드로 분류하고, 리프 노드들은 단말 노드로 분류한다. 아래의 이미지는 구 구조 기반 트리를 나타낸다. "John hit the ball" 이라는 영어 문장의 구문 구조를 나타낸다. 파스 트리는 S로 시작하고 각각의 리프 노드(John, hit, the ball)로 종료되는 전체 구조이다. 다음과 같은 약어가 트리에서 사용된다. 트리의 각 노드는 루트 노드나 브랜치 노드나 리프 노드 중 하나이다. 루트 노드는 상위에 브랜치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노드이다. 문장안에서, 루트 노드는 오직 하나이다. 브랜치 노드는 두 개 이상의 딸 노드들을 연결하는 엄마 노드이다. 리프 노드는 다른 노드를 지배하지 않는 말단 노드이다. S는 루트 노드이고, NP와 VP는 브랜치 노드이고, John(N), hit(V), the(D), ball(N)은 모두 리프 노드이다. 리프 노드들은 문장의 어휘 토큰이다. 엄마 노드는 이것의 하위 브랜치에 연결된 적어도 하나의 다른 노드를 가지는 노드이다. 예를 들어서, S는 N과 VP 모두의 부모이다. 딸 노드는 상위 브랜치로 직접 연결된 적어도 한개의 노드를 가진 노드이다. 예시에서 살펴보면, hit은 V의 딸 노드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용어는 종종 이러한 관계에서 사용된다. 의존 문법의 의존성 기반트리는 모든 노드를 말단 노드로 본다. 이것은 그들은 단말 노드와 비단말 노드의 분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더 적은 수의 노드를 포함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구 구조 기반 파스 트리보다 간단하다. 위의 예문의 의존성 기반 파스 트리는 다음과 같다. 이 파스 트리는 구 구조 기반 파스 트리에 존재하는 구 분류(S, VP, NP)가 없다. 구 구조 기반 파스트리와 같이 구성 구조가 인정된다. 트리의 완전 하위 트리는 모두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이 의존성 기반 파스 트리는 구 구조 기반 파스 트리와 같이 주어 명사 "John" 과 목적어 명사구 "the ball" 을 구성 요소로 인정한다. 구와 의존성을 구별하는 것은 광범위하다. 구 기반 파스 트리와 관련된 추가적인 구문 구조가 필요하거나 유익한 지의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구문 마커나 P-markers는 Noam Chomsky 등에 의해 만들어진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에서 소개되었다. 문장의 깊은 구조를 나타내는 구문 마커는 구문 구조 규칙을 적용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추가 변환을 거칠 수도 있다. 구문 마커는 트리 형식으로 표현된다.(위 섹션의 구 구문 기반 파스트리와 같이) 하지만 종종 메모리 공간을 덜 차지하는 "대괄호식" 형태로 표현된다. 예를들어, 위의 구 기반 트리를 따르는 대괄호식 표현은 보통 다음과 같다:formula_1 트리와 마찬가지로 표현식의 정확한 구성과 표시된 세부 사항의 양은 적용된 이론과 쿼리 작성자가 설명하고자하는 요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태양 태양(太陽)은 태양계 중심에 있으며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다. 본래 한국어로 해라고 하며, 태양이란 한자어는 음양(陰陽: "물과 불", "그늘과 볕", "차가움과 뜨거움" 등)가운데 가장 (陽)이라는 뜻이다. 지구를 비롯한 태양 여러 행성과 소행성, 유성, 혜성 등의 천체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지구는 태양을 일정한 궤도로 공전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연중 일정한 궤도를 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궤도를 황도라 한다. 지구는 태양을 공전하는 것 외에도 스스로 24시간에 1회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지구 표면에서 관측자 눈에는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라 일정 시간 동안 하늘을 서쪽으로 횡단한 뒤 서쪽 지평선 아래로 지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의 수명은 약 123억 6500만년이고 핵우주 연대학에 따르면 45억 672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 분광형은 G2V이며 비공식적으로 "노란색 별"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지구에서 황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가시광 복사가 스펙트럼상 초록 부분에서 가장 강렬하다.. 다만 실제로 우주에서 보면 태양은 g형 주계열성이므로 흰색으로 보인다. 이 분광형 표시에 있어서 G2는 태양 표면의 유효 온도가 약 5,778K켈빈임을, V는 우주의 다른 대다수 별과 마찬가지로 태양이 원자 핵융합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주계열성임을 뜻한다. 태양은 중심핵에서 초당 4억 3천만~6억 톤의 수소를 태운다. 태양은 천문학자들에게 있어 한때는 작고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별이었으나 이제는 우리 은하 별들 중에서 밝은 축에 드는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 은하 별 대부분(90퍼센트)은 작고 어두운 적색 왜성이다. 이들은 아무리 밝아도 태양 밝기 10%에 불과한다. 태양의 지름은 약 139만 2천 킬로미터로 지구보다 109배 크며, 질량은 2 킬로그램으로 지구보다 약 33만 배 무거워 태양계 전체 질량의 약 99.86%를 차지한다. 태양 질량 약 4분의 3은 수소, 나머지 4분의 1은 대부분 헬륨이다. 총질량 2퍼센트 미만이 산소, 탄소, 네온, 철 같은 무거운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태양의 뜨거운 코로나는 우주 공간으로 연속적으로 뻗어 있으며, 여기에서 대략 100천문 단위 거리 태양 권계면까지 뻗어 있는, 대전(帶電)된 입자의 흐름인 태양풍이 만들어진다. 태양풍이 만들어 낸 성간 매질 속 거품 구조인 태양권은 태양계 내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이다. 태양은 백색광을 내지만 지구 표면에서 볼 때 파란색 빛이 일으키는 대기 산란 때문에 노란색으로 보일 수 있다. 태양은 지구와 대략 1억 4960만 킬로미터(1천문단위) 떨어져 있으나, 정확히는 매년 1월 근일점에서 가장 가까워지고 7월 원일점에서 가장 멀어진다. 빛이 태양을 출발하여 이 거리를 지나 지구까지 오는 데에는 약 8분 19초가 걸린다. 태양의 절대 등급은 +4.83이나 지구에서 가깝기 때문에 겉보기 등급은 -26.74로 아주 밝게 보인다. 태양은 우리 은하 중심을 약 24,000~26,000광년 거리에 두고, 은하계 북극 방향에서 볼 때 시계 방향으로 약 2억 2천 5백만~2억 5천만 년에 1회 돌고 있다. 우리 은하가 우주 배경 복사(CMB)에 대하여 물뱀자리 방향으로 초당 550킬로미터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태양의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종국적 속도는 컵자리 또는 사자자리 방향으로 초당 370킬로미터가 된다. 태양은 현재 우리 은하 오리온 팔의 안쪽 경계 내 국부 거품 영역의 국부 항성간 구름 속을 여행하고 있다. 태양에서 17광년 이내 가까운 별 50개 중 4.2 광년 떨어진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가 제일 가까운 이웃 항성이다) 태양은 네 번째로 무거운 별이다. 지구에 도착한 햇빛 에너지는 식물의 광합성을 일으켜 거의 모든 지구상 생명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며 지구의 날씨 및 기후를 만든다. 인류는 선사 시대 이래로 태양이 지구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 및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일부 문화권에서는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태양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지식의 발달 속도는 느렸으며 19세기까지도 천문학자들은 태양의 물리적 조성 및 에너지 원천에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현대에도 태양에 대해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며 태양의 불규칙한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태양의 표면은 대부분 수소(전체 질량의 약 74%, 전체 부피의 92%)와 헬륨(약 24~25%의 질량, 7%의 부피), 그밖에 철을 비롯한 니켈, 산소, 규소, 황, 마그네슘, 탄소, 네온, 칼슘,베릴륨, 크로뮴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은 태양계 총질량 99.8632%를 차지하는 G형 주계열성으로 분광형은 G2V이다. 'G2'는 표면 온도가 약 5,860 K으로 맨눈에 보이는 태양은 흰색을 띠게 된다. 그러나 태양빛이 대기를 지나면서 산란되어 노란색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는 청색 광자가 선택적 산란으로 흩어지면서(하늘이 푸른 것은 이 때문이다.) 남은 적색을 상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태양이 낮게 떠 있을 때에는, 주황색이나 적(赤)색을 띠기도 한다. 편평도는 약 900만 분의 1이고 이는 태양의 양극간 지름과 적도 지름이 불과 10킬로미터밖에 차이나지 않음을 뜻한다. 태양은 플라스마가 뭉친 상태로 존재하며 딱딱한 고체가 아니다. 태양은 극보다 적도에서 더 빠르게 자전한다. 이를 차등 회전으로 부르며 태양 내부 대류 및 질량 이동의 원인이 된다(태양 중심부에서 외곽부로 나가면서 급격한 온도 그래디언트를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질량은 태양 북극 방향에서 볼 때 태양의 시계 반대방향 각운동량 일부를 옮겨 각운동량을 재배분한다. 이 ‘실제 자전’ 주기는 적도에서 약 25.6일, 극에서 약 33.5일이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는 위치는 변하기 때문에 적도상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겉보기 자전’ 주기는 약 28일이다. 이처럼 느린 자전에서 나오는 원심력 효과는 태양 적도상 표면 중력 1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행성의 조석 효과는 더 약하여 태양 겉모양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태양은 항성종족 I에 속하며 중원소가 풍부한 별이다. 천문학 분야에서 ‘중원소’ 혹은 ‘금속’은 수소와 헬륨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를 부르는 말이다.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초신성 폭발로 태양의 탄생 과정이 발동되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태양계에 금이나 우라늄과 같은 중원소가 소위 항성종족 II 별들에 비해 풍부하게 존재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원소들은 대부분 초신성 단계에서 에너지 흡수성 핵반응이 일어나 만들어졌거나, 질량 큰 2세대 별 내부에서 중성자 흡수를 통한 핵변환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태양은 암석 행성들과는 달리 명확한 바깥 경계가 없고 태양의 가스층 밀도는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 내부는 그 성질이 명백히 구별되는 층으로 나뉘어 있다. 태양 반지름은 중심부에서 광구 바깥면까지 측정한다. 광구 최외곽층은 단순히 말하자면 가스 온도가 낮아 막대한 양의 빛을 복사할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태양 표면은 맨눈으로 보이는 곳까지 말한다. 태양 내부를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으며 태양 자체도 전자기 복사에 대해서 불투명하다. 그러나 지진학에서 지구 내부 구조를 밝히기 위해 지진이 만든 파장을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진학에서는 태양 내부를 관통하는 초저주파음을 이용하여 태양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시각화한다. 태양 깊은 내부를 연구할 목적으로 컴퓨터 모델링을 이론적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태양핵은 태양 반지름 중 중심에서 약 20 ~ 25 퍼센트 거리의 영역이다. 중심부의 밀도는 물의 150배이며 온도는 13,600,000K이다(반면 태양 표면은 약 5,800켈빈 수준이다). 최근 SOHO의 분석에 따르면 중심핵 부분은 그 위 복사층보다 빠르게 자전하고 있다고 한다. 태양은 일생 대부분의 기간동안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이라는 이름의 핵융합으로 에너지를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수소는 헬륨으로 변환된다. 태양 내부에서 생산된 헬륨 중 2퍼센트 미만은 CNO 순환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심핵은 핵융합을 통해 감지 가능한 수준의 열을 만드는 유일한 장소이다. 태양 중심에서 반지름 24퍼센트 지점까지 태양 에너지의 99퍼센트가 생산되고 반지름 30퍼센트 지점에서 융합 작용은 거의 멈춘다. 30퍼센트부터 최외곽까지 나머지 부분은 중심핵과 핵 바로 바깥 층에서 바깥으로 전달되는 에너지로 가열된다. 핵에서 융합을 통해 만들어진 에너지는 층 여러개를 통과한 뒤 광구에 도착하고, 햇빛 또는 입자들의 운동 에너지 형태로 우주로 달아난다.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은 태양 중심핵에서 매초 약 9.2회 일어난다. 이 반응은 양성자 4개(수소 원자핵)를 사용하기 때문에, 매초 3.7개 또는 약 5.945kg의 양성자를 알파 입자(헬륨 원자핵)로 바꾼다.(태양에 있는 자유 양성자의 총량은 ~8.9개이다) 수소를 헬륨으로 융합하면서 0.7퍼센트의 융합된 질량을 에너지로 방출하므로, 태양은 초당 426만 메트릭 톤의 질량-에너지 전환율로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는 384.6요타와트 또는 초당 9.192메가톤 TNT에 해당하는 위력이다. 이 질량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면서 소멸하지는 않으며 대신 복사 에너지 형태로 전환된다(이는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 원리 개념에 따른 결과이다). 중심핵에서 융합을 통해 생산되는 단위시간당 에너지 생산량은 태양 중심부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다양하다. 모형을 이용하여 측정한 태양 중심부에서 융합되는 힘은 약 276.5와트/m로, 이는 원자폭탄보다는 도마뱀의 신진대사량에 보다 걸맞은 일률이다. 태양이 막대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이유는 단위 부피당 일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태양 자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중심핵에서의 융합 속도는 ‘자기 수정적 균형 상태’에 있다. 융합 속도가 약간 빨라지면 중심핵은 더 뜨겁게 가열되며 중심핵 위층의 무게에 거슬러 근소하게 팽창하고, 융합 속도는 감소하며 섭동 상태는 원래대로 복구된다. 융합 속도가 조금 줄어들면 중심핵은 차가워지면서 조금 쭈그러들고, 융합 속도는 상승하면서 원래 상태로 복귀한다. 융합 작용으로 풀려나온 감마선(고에너지 양성자)은 수 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태양 플라스마에 흡수되었다가 일정치 않은 방향으로 재방출된다(이 때 감마선의 에너지는 흡수되기 전보다 약간 줄어든다). 따라서 감마선이 태양 표면까지 닿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양성자의 여행 시간’은 약 1만 ~ 1만 7천 년이다. 대류권 바깥층부터 투명한 광구 ‘표면’까지 마지막 여행을 한 후 광자는 가시광선 형태로 태양을 탈출한다. 태양핵에 있는 감마선 하나는 우주로 탈출하기 직전에 수백만 가시광선 형태의 광자로 바뀐다. 중성미자들도 핵에서 일어난 융합작용으로 방출되나 광자와는 달리 중성미자들은 물질과 거의 상호 반응하지 않아 태양을 즉시 떠날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태양에서 만들어진 중성미자의 개수는 예상치 1천 분의 1에 불과했다. 최근 중성미자 진동 효과를 발견함으로써 이 불일치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었다. 태양은 이론상 예측된 양과 같은 중성미자를 방출하나 중성미자 감지기들이 방출량의 2/3를 놓쳤으며 이는 중성미자들이 맛깔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태양 반지름 0.25 ~ 0.7배에 해당되는 층에서 태양 내부 물질은 뜨겁고 농밀해지고, 중심핵의 뜨거운 열을 바깥으로 전달하는 열복사가 일어나기에 충분한 환경이 된다. 이 층에서는 열적 대류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반면 내부 물질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냉각된다(700만 켈빈에서 200만 켈빈까지 떨어진다). 이 온도 그래디언트는 단열감률(斷熱減率) 값보다는 작기 때문에 대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열은 복사를 통해 이동한다. 수소와 헬륨 이온은 광자를 방출하는데 이는 매우 짧은 거리를 여행한 뒤 다른 이온에 재흡수된다. 복사층 하단에서 최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밀도는 백분의 일(20 g/cm에서 0.2 g/cm)로 떨어진다. 복사층과 대류층 사이에 소위 타코클라인으로 불리는 전이층이 있다. 여기는 대류층의 단일 회전 및 차등 회전 사이에 미묘한 주도권 교체가 일어나, 연속적인 수평층이 다른 층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곳이다. 이 유체 운동은 복사층 위 대류층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대류층 상층부에서 하단부로 이동할수록 그 움직이는 정도가 줄어들면서 대류층 최하단부(복사층 최상단)에서는 매우 조용한 상태가 되어 복사층의 성질과 비슷해진다. 현 시점에서 복사층에서의 자기적 다이너모가 태양의 자기장을 만들어 낸다는 가설이 정립되어 있다(태양 다이너모 문서 참고). 표면에서 20만 킬로미터 깊이(혹은 태양 반지름 70퍼센트 지점)에 이르는 태양 바깥층에서 태양 플라스마는 밀도가 낮아지고 온도가 내려가 내부 열에너지를 복사를 통해 밖으로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이를 ‘충분히 불투명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결과 상승류가 뜨거운 물질을 태양의 표면(광구)까지 올려보내는 열적 대류가 발생한다. 이동한 물질이 표면에서 식으면 물질은 대류층 바닥으로 가라앉고, 복사층 상층부에서 열을 공급받는다. 눈에 보이는 태양 표면에서 물질 온도는 5700켈빈까지 떨어지며 밀도는 0.2 g/m에 불과하다(이는 지구 해수면상 공기 밀도 1만 분의 1에 불과한 값이다). 대류층에서 일어나는 상승류는 태양 표면에 쌀알 무늬 및 초대형 쌀알 무늬를 형성한다. 태양 내부 중 바깥 층에서 일어나는 이 격렬한 대류 활동으로 ‘작은 규모의’ 다이너모가 생겨난다. 이 다이너모는 태양 표면 전역에 걸쳐 자기 북극 및 자기 남극을 형성한다. 태양의 열적 상승류는 베나르 셀의 원리를 보여주며 그 결과 육각기둥 모양을 형성하게 된다. 광구는 우리 눈이 보지 못하는 태양 표면으로, 태양이 가시광선에 대해 불투명해지는 층 아래 부분에 해당된다. 광구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 가시광선은 우주로 자유롭게 뻗어 나가며 가시광 에너지는 태양을 완전히 탈출한다. 불투명도가 변하는 이유는 가시광선을 쉽게 흡수하는 H 이온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광은 전자가 수소 원자와 반응하여 H 이온을 만들어 낸 결과이다. 광구의 깊이는 수십 ~ 수백 킬로미터로 지구상 공기보다 약간 더 불투명하다. 광구 상층부는 하단보다 온도가 낮기 때문에 태양 그림에서 원반 중심부보다 가장자리(테두리)가 더 어두워 보이는데 이를 주연 감광이라고 부른다. 태양광은 온도 6000켈빈인 흑체와 거의 비슷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 스펙트럼상에는 광구 위 얇은 대기층에서 분산되어 나온 원자 흡수선들이 나타난다. 광구의 입자밀도는 ~10m으로, 이는 지구 대기 해수면상 입자밀도의 1퍼센트 정도다) 광 스펙트럼 연구 태동기 때만 해도 일부 흡수선들은 그때까지 과학자들이 알고 있던 그 어떤 지구상 원소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1868년 노먼 로키어는 이 흡수선들이 있는 이유가 새로운 원소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이 원소에 그리스 신화 헬리오스 이름을 본따 ‘헬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25년 뒤 헬륨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드러났다. 태양 광구보다 높은 고도 전체를 통틀어 ‘태양 대기’라고 부른다. 태양 대기는 전파에서 가시광선, 감마선까지 전자기 스펙트럼 전역을 통한 관측이 가능한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태양 대기는 크게 ‘극저온층’, 채층, 천이영역, 코로나, 태양권의 다섯 부분으로 구별된다. 태양의 희박한 외곽 대기로 알려진 태양권은 명왕성 궤도 너머 태양권계면까지 뻗어 있으며, 태양권계면에서 태양권은 성간 매질에 대해 뚜렷한 충격파 경계를 형성한다. 채층, 천이영역, 코로나는 태양 표면보다 훨씬 뜨거운데, 그 이유는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알페인파가 코로나를 이처럼 뜨겁게 가열시키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이 증거를 통해 드러났다. 태양에서 가장 차가운 층은 광구 위 약 500킬로미터 지점으로 그 온도는 약 4100켈빈이다. 이 곳은 온도가 낮아 일산화 탄소와 물 같은 단순 분자들이 존재 가능한 곳이다(흡수선으로 증명되었다). 극저온층 위 2000킬로미터에 걸쳐 방출 및 흡수선들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 부분을 채층이라고 부른다. 채층은 그리스어로 ‘색’을 뜻하는 "chroma"에서 온 용어로, 일식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 색깔 있는 빛이 번쩍거리는 형태로 보이는 데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채층의 온도는 고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올라가며 최상단에서는 2만 켈빈까지 치솟는다. 채층 상단에서 헬륨은 부분적으로 이온화된다. 채층 위로 약 200킬로미터 두께의 천이영역이 있는데, 천이영역 최하단에서 상단까지 온도는 2만 켈빈에서 100만 켈빈까지 급격히 치솟는다. 이 급격한 온도 상승 원인은 천이영역 내에서 헬륨이 완전히 이온화되어 플라스마의 복사 냉각을 크게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 천이영역은 고정된 고도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며 대신 채층 구조 주변에서 스피큘이라는 이름의 무리 및,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태양홍염을 형성한다. 지구상에서 천이영역을 보기는 쉽지 않으나 전자기 스펙트럼상 자외선에 민감한 관측 기구로 우주에서 태양을 관측하면 쉽게 볼 수 있다. 코로나는 태양에서 확장되어 나온 바깥쪽 대기로 태양 본체보다 부피면에서 훨씬 더 크다. 코로나는 연속적으로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어 태양풍을 형성하며 이는 태양계 전체를 채우고 있다. 태양 표면에서 매우 가까운 저층 코로나의 입자 밀도는 약 10 ~ 10m이다. 코로나와 태양풍의 평균 온도는 약 1,000,000에서 2,000,000 K이지만, 가장 뜨거운 영역의 온도는 8,000,000 ~ 20,000,000 켈빈이다. 이처럼 코로나가 본체 표면보다 훨씬 더 뜨거운 이유를 완벽히 설명하는 이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자기 재결합이 최소한 이러한 온도 상승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태양풍 플라스마로 가득 채워진 태양 주변의 태양권은 태양반경의 20배 정도 되는 곳부터 태양계 바깥 경계면까지 뻗어 있다. 태양권의 안쪽 경계는 태양풍이 흐르는 속도가 알페인파보다 빨라지는 곳이다. 이 안쪽 경계 바깥쪽의 난류 및 동역학적 힘은 안쪽 태양 코로나의 모양을 바꾸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정보는 알페인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양풍은 바깥쪽으로 계속하여 태양권을 뚫고 움직이면서 파커 나선 모양의 태양 자기장을 형성하고, 태양과 50천문단위 떨어진 거리에서 태양권계면과 충돌한다. 2004년 12월 보이저 1호는 태양권계면의 일부로 생각되는 충격파 지대를 통과했다. 보이저 1호 및 2호 둘 다 경계면을 지나가면서 고에너지 입자들의 존재를 기록했다. 태양은 항성종족 1 또는 제3세대 별로, 한 개 이상의 가까운 초신성이 영향을 일으켜 생성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태양계 내부에 금이나 우라늄 같은 중원소가 풍부하다는 것에 근거하여 주장되었다. 이러한 원소들은 초신성에서 에너지를 흡수하는 핵반응이나 2세대 별 내부에서 중성자 흡수를 통한 핵변환에 의해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햇빛은 지구의 주요 에너지원이다.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는 평균 약 1억 4960만 킬로미터로 1AU이다. 직사광선을 통해 단위 면적에 축적되는 에너지의 양을 태양 상수라 하는데, 1 AU 의 거리에서 m당 1368 와트의 값이 된다.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햇빛은 지구의 대기가 약화시켜 맑은 하늘에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비출 때에 m당 1,000 와트 정도가 된다. 이러한 에너지는 여러 자연적인 합성을 통해 동력으로 변환될 수 있다. 식물의 광합성은 햇빛의 에너지를 화학 물질(산소와 탄소화합물)로 바꾸며, 지표면을 데우거나 태양 전지를 이용해 전기로 바뀌기도 한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 연료는 오래전에 광합성으로 햇빛이 바뀐 것이다. 태양의 자외선은 살균에 유용하며, 가구나 물의 소독에 사용된다. 자외선은 살갗을 태울 수도 있으며, 피부에서는 햇볕으로 비타민 D를 합성하기도 한다. 자외선은 지구의 오존층이 약화시키며, 이때문에 위도에 따라 자외선 양이 크게 변하여 사람의 피부색이 달라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구에서 관측할 때에, 태양은 1년 동안 하늘을 가로지르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관측할 때에 태양 위치가 변하는 모양을 살펴보면, 남/북 방향의 축을 따라 ‘8’자를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아날렘마(analemma)’라 한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에 대하여 약 23.5˚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며, 남/북으로의 이동은 계절이 구분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태양이 떠오르거나 서쪽으로 질 때 노루꼬리(그린 플래시)라는 흔치 않은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현상은 서쪽으로 막 넘어간 태양에서 나온 빛이 역전층을 통과하여 꺾여 관측자의 눈에 들어올 때 생긴다. 파장이 짧은 빛(보라, 파랑, 초록)은 파장이 긴 빛(노랑, 오렌지, 빨강)보다 더 많이 꺾이는데, 보라와 파랑색 빛이 좀 더 꺾여서 우리 눈에는 마치 초록색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태양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태양에는 11년의 주기로 강도가 바뀌는 자기장이 형성되어 있다. 태양 자기장은 태양활동이라 불리는 여러 현상들을 발생시키는데, 태양 표면의 흑점이나 태양 플레어, 태양풍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지구의 중위도나 고위도에 오로라를 발생시키며, 라디오 전파나 전력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태양활동은 또한 태양계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태양활동은 또한 지구 외부 대기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태양은 지구와 가장 가까운 항성이고, 과학자들이 심층적으로 연구하였지만, 태양에 대한 의문점은 남아 있다. 근래에는 태양 흑점의 규칙적인 활동주기, 코로나의 물리와 기원, 태양풍의 기원 등이 화제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태양을 큰 양(陽)의 기운만이 모인 것으로 보아 ‘태양’이라 불렀다. 각국 고대문화에서 태양신을 기념하였으며, 스톤헨지 같은 특정 시기의 태양 위치를 표시하는 거석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태양은 임금을 상징하였으며, 흑점이나 일식은 좋지 않은 조짐으로 여겨졌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후로 이러한 태양과 관련된 변화를 관측, 예측하기 위한 관리를 두었으며, 고구려에서는 일(日) 신에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포함한 일상 생활의 기준이 되는 태음태양력 또한 태양과 달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파라오는 태양신 라의 아들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태양은 매우 신성시된 존재였다. 사실 태양신의 지위는 라이외에도 호루스, 아문, 아톤과 같이 주신으로 간주된 신은 모두 태양신으로 불렸을 만큼 이집트에서 태양은 권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태양은 주계열성 단계에 있으며, 나이는 핵우주 연대학 및 항성진화 컴퓨터 모형에 따르면 45억 6720만 년이다. 45억 6700만년 전 수소 분자구름의 빠른 중력 붕괴로 황소자리 T형 종족I 항성이자 3세대 항성인 태양이 탄생했다. 그리고 45억 3200만년전 중심핵에서 양성자-양성자 연쇄 반응을 시작하여 주계열 단계로 진입하였다. 태양은 중심핵에서 수소를 태워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작용을 하는, 주계열성 단계 중반부에 접어든 상태이다. 태양 핵은 초당 물질 4백만 톤을 에너지로 바꾸고 있으며, 중성미자와 태양 복사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속도라면 태양은 일생 동안 지구질량 100배에 해당하는 물질을 에너지로 바꿀 것이다. 태양은 주계열 단계에서 약 109억 년을 머무를 것이다. 태양은 질량이 작아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지 못하는 대신, 적색거성으로 부풀어오를 것이다. 지구가 어떻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태양은 지구 궤도까지 부풀 것으로 예상하지만, 적색 거성 단계인 태양은 질량을 잃은 상태이므로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은 현재 위치보다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러면 지구는 태양에 흡수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태양의 기조력으로 말미암아 태양에 흡수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구가 살아남더라도 바다는 끓어서 기체로 변해 대기와 함께 우주 공간으로 달아날 것이다. 사실 주계열성 단계에서도 태양은 서서히 밝아지면서 표면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점진적으로 태양 광도가 커져 약 7억 년 내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생명체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동식물이 멸종하며 지구내부에서 나오는 온실기체를 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진다. 따라서 온도는 급속히 오르게 되며 동식물이 멸종된 지 1억 년도 채 안 돼서 지구표면은 끓는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닷물이 끓게 되면 대기 중에 수분이 10~20% 차지하게 되며 물이 산소와 수소로 분리된 후 수소는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게 된다. 따라서 8억 년 내로 지구의 바닷물은 모두 증발하여 사라질 것이다. 8억년 후 지구는 물도 없는 황량한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황산과 온실기체로 이루어진 구름이 표면을 덮을 것이며 금성표면처럼 뜨거워질 것이다 더 시간이 가서 태양이 더 밝아지면 결국에는 지구에 있는 것이 다 타버릴 것이다. 태양이 점차 밝아지면서 지구의 남은 대기마저도 날아가게 될 것이다. 64억년 후 태양은 중심핵에서 수소핵융합을 마치고 준거성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71억 년이 지나면 태양은 적색 거성으로 진화할 것이다. 중심핵에 있는 수소가 소진되면서 핵은 수축하고 가열된다. 이와 함께 태양 외곽 대기는 팽창한다. 중심핵이 1억 켈빈에 이르면 헬륨 융합이 시작되고 탄소와 산소가 생성될 것이며, 78억 년 뒤에는 행성상 성운 단계인 점근거성가지에 속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태양 내부 온도는 불안정해지면서 항성 외부로 질량을 방출하게 된다. 적색 거성 단계에서 태양은 극심한 맥동 현상을 일으키며 외곽 대기를 우주 공간으로 방출하면서 행성상 성운을 이루게 된다. 외층이 탈출한 뒤 극도로 뜨거운 중심핵이 남을 것이다. 이 중심핵은 천천히 식으면서 수십억 년에 걸쳐 어두워지면서 백색 왜성이 된다. 이 항성진화 시나리오는 질량이 태양과 비슷하거나 좀 더 무거운 별들이 겪는 운명이다. 만악 지구가 태양의 적색거성 단계까지 버텼다 하더라도 적색거성이 된 태양은 표면온도는 낮지만 지구로 방출시키는 열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서 지구는 뜨거운 열을 견디지 못하고 지표면에 있는 암석마저 녹아내려 지구는 마그마 바다가 된다. 베르너의 법칙 베르너의 법칙(Verner’s Law)은 칼 베르너(Karl Verner)가 1877년 "Eine Ausnahme der ersten Lautverschiebung" (일차 음운 추이의 예외)라는 논문에서 그림의 법칙의 예외가 강세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설명한 것이다. 인구조어의 무성 *p, *t, *k에 대응하는 게르만어의 어중 무성마찰음 ɸ(f), θ(þ), χ(x)은 바로 그 앞에 있는 모음에 강세가 있으면 무성 그대로 유지되고, 강세가 없을 때는 유성음 β, ð, γ; b, d, g로 변한다. 그림의 법칙에 따르면, 인구조어의 무성정지음 *p, *t, *k는 게르만조어에서 f, θ, χ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칙에서 벗어나 b, d, g로 바뀌는 경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라틴어 pater와 고트어 fadar를 비교해 보면, p > f 변화는 그림의 법칙을 따르지만 t > d 변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면 pater가 faþer로 변화했어야 한다. 베르너의 법칙은 그림의 법칙과 어긋나는 이러한 현상을 예외로 내버려 두지 않고 모두 음운 법칙이라는 틀 안에서 설명하고자 나온 것이다. 다음 두 예를 살펴 보면, 그리스어의 phrater가 고트어의 broþar로 변한 것은 유기음이 유성무기음으로 (ph > b) 변하고, 무성무기음이 유기음으로 (t > þ) 변했다는 점에서 그림의 법칙에 잘 들어 맞는다. 하지만 그리스어의 pater 고트어의 fadar가 된 것은 그림의 법칙에 어긋난다. 그림의 법칙을 따른다면 faþar가 되었어야 한다. 베르너는 이러한 예외들을 관찰하여 강세에 따라 변화가 달리진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즉 φράτερ- 의 경우와 같이 해당 자음(τ) 앞의 음절에 강세가 있는 경우에는 그림의 법칙을 따르고, πατέρ- 와 같이 해당 자음 앞 음절에 강세가 없는 경우에는 유성음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베르너의 발견으로 음운 변화는 예외가 없으며 자연의 물리 법칙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된다. 한국의 선사 시대 한국의 선사 시대는 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난 시대로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선사 시대는 유럽이나 지중해 지역과는 달리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정리했던 《세 시대 체계》로 구분하기 어려우며, 고고학적,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연구에 의존한다. 일반적인 역사 및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석기시대에 해당되며, 석기 시대는 발굴되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시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로 나뉜다. 그 영역은 한반도를 위주로 하지만, 그 기원 및 전파와 관련이 있는 러시아, 만주, 랴오닝, 중국 동부의 문화도 함께 연구된다. 지질학적 선사시대는 한반도 과거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는 선캄브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연천의 지질시스템이 이에 해당하며, 서울 주위에서 북동쪽 방면으로 연천군으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며, 각섬석 - 석영 - 장석 편암과 대리석, 석회-규산염, 규암, 흑연 편암, 운모 - 석영 - 장석 편암, 운모 편암, 규암, 안구 편마암, 석류석 함석류석 화강암으로 구성된다. 한반도는 중생대에 활동적인 지질학적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산맥이 형성되었어, 신생대에 가서 점차 안정적으로 되었다. 중생대에 형성된 주요한 곳으로 경상도를 포함하며, 흑운모 화강암, 혈암, 사암, 역암질 안산암, 현무암, 유문암, 그리고 오늘날의 경상도 지방 아래에 덮여 있는 응회암으로 구성되었다. 중석기 시대는 1만여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져서,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구석기시대의 주요 사냥 대상물인 매머드, 쌍코뿔이, 물소 등의 큰 짐승이 사라져서 작은 짐승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짐승을 잡기 위한 무기인 활, 화살촉 등이 등장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플라이스토세의 종말기에서 이후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관련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중석기시대의 설정여부는 학계에서 논란이 많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약 1만(중석기를 포함할 경우) ~ 8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토기이다. 이들은 주로 물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고,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초기 농경 단계로 들어간 곳도 있다. 또 돌쾡이와 돌보습으로 밭을 갈고,돌낫으로 곡물이나 이삭을 따 갈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었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또는 아연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와 공열토기가 주로 쓰였다. 신석기시대처럼 돌쾡이를 사용하여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반달 돌칼로 추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애국가(愛國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이다. 1945년 독립 이후에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한반도에 널리 퍼졌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체제에 맞게 국가를 따로 만들었다. 작사자 박세영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 활동을 하였으며, 당대의 저항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복 후 북으로 건너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를 비롯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작곡자 김원균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2006년 평양음악대학의 이름을 김원균평양음악대학으로 개칭하였다. 4/4박자, 내림 나 장조로 ‘약간 느리고 장중하게’ 부른다.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부터 ‘길이 받드세’까지는 본래 한 번만 부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김일성이 이 노래를 듣고 "우리 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 번만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두 번 반복해 부를 것을 제안해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곡이 수정되었다. 2002년 아시안 게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식 국가의 자격으로 참가하면서 국기 게양식 때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이 곡이 연주되었다. 2007년 5월 30일 조선중앙통신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인 애국가가 재편곡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새로운 국가 악보와 관련 문서를 세계 각국에 전송하였다고 밝혔다. 본 노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국가로 지정되어 있으며, 올림픽 등과 같은 국제적 스포츠 경기 때에는 연주된다. 그러나 이 노래는 명목상에 불과하다. 대내 행사때에서는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연주되었으나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체제에서는 본 노래가 대내 행사에도 비교적 자주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에서는 이 노래의 악보를 '이적 표현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 노래의 악보를 판매하는 행위 등은 원칙상 불법으로 되어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참가한 2002년 아시안 게임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2014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상황임에도 연주된 바 있다. 단종 단종(端宗)은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중 하나이다. 헤르만 파울 헤르만 파울(Hermann Paul, 1846년 8월 7일 ~ 1921년 12월 29일)은 독일의 언어학자로, 젊은이 문법학파의 가장 뛰어난 이론가였다. 빌헬름 폰 훔볼트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스티안 카를 페르디난트 폰 훔볼트 (Friedrich Wilhelm Christian Carl Ferdinand von Humboldt, ; ;, 1767년 6월 22일 ~ 1835년 4월 8일)는 독일의 철학자, 교육학자, 정치가이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하다. 예나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저명한 문학가 실러와 평생 계속될 교분을 맺었다. 문학적 명성을 얻은 훔볼트는 1801년 교황령 주재 프로이센 공사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로마에서도 예술과 문학을 아낌없이 후원하여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1809년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교육장관을 맡게 되었다. 이어 1812년에는 오스트리아 주재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되었다. 빈에 부임한 훔볼트는 1813년 열린 프라하 회의에서 당시 나폴레옹의 아내이며 합스부르크가의 일원인 마리 루이즈(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장녀)의 문제로 참전을 주저하고 있던 메테르니히를 설득하여 오스트리아를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빈 회의에 하르덴베르크 공작을 수행하여 프로이센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언어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외교관 생활 말년(1817년경) 바스크어에 대하여 연구하여 이 분야에 대한 학계의 주목을 환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바 섬의 고대 카위 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생전에 끝나지 못했는데, 그의 동생과 부슈만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척시켜 1836년 간행했다. 그의 남동생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지질학자, 박물학자, 탐험가로 유명하였다. 야코프 그림 야코프 루트비히 카를 그림(, 1785년 1월 4일 ~ 1863년 9월 20일)은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동화 수집가다.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로 《독일어 문법(Deutsche Grammatik)》에서 독일어뿐만이 아니라 게르만어 전체의 문법적인 특징을 비교하였다. 게르만어의 자음과 여기에 대응하는 다른 인도유럽어족의 자음과의 관계에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림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동생 빌헬름 그림과 함께 그림 형제 동화집을 출판하였다. 하나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동생 빌헬름 그림과 함께 괴팅겐에 부임, 그곳 대학의 사서 겸 교수가 되었다. 1841년 동생과 함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초빙으로 학사원 회원이 되고,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위대한 게르만 언어학자로서 근대 언어학을 개척하였다. 그는 언어학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실시하여 음운 변이에 관한 '그림의 법칙'을 수립하여 이 방면에서 획기적인 공적을 올렸다. 또 '독일 문법'에 의해 게르만 어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동생과 함께 게르만 민속 중에서 동화를 찾아내어 <어린이와 가정의 동화>를 집대성하였다. 이는 뒤의 문학 및 조형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그림 동화>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어린이에게 읽히고 있다. 1816-1818년에 걸쳐서 <독일 전설집>을 출간하였는데, 이 2개의 저서로, 세계 최초로 민족 설화를 문학의 형태로 끌어올렸다. 이들 형제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1852년에 시작하여 8년에 걸쳐 집필한 <독일어 대사전> 16권이다. 이 위대한 유업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1세기 이상이 걸려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이 밖에도 저서에 <독일의 문전> <독일의 신화학> 등이 있다. 모음 모음(母音, ) 또는 홀소리는 음성학에서 자음과 차별되는 음운으로, /a/, /e/, /o/, /u/와 같이 성문(glottis) 위의 어떤 특정 지점에서 공기 압력이 형성될 때 열린 성도를 통해 특별한 장애를 받지않고 발음되는 구어의 소리이다. 모음은 자음과 달리, 홀로서도 소리를 낼 수 있는 특성을 가지므로 순우리말로 '홀소리'라고 정의되었고, 하나의 음절을 이루는데 반드시 모음을 필요로하므로, 모음은 한 음절을 발음하고 기록하는데 있어서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한자어에서는 어미 '모'(母)자를 따서 '모음'으로 정의되었다. 모음 소리를 구분하는 조음의 특징은 모음의 '질(quality)'에 의해 결정된다. 대니얼 존스는 〈높이〉(height), 〈전후〉(backness), 〈원순화〉(roundedness)와 같은 공통 요소의 용어로 모음을 설명하기 위해 기본 모음 체계를 개발했다. 이 세가지 인자는 오른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식적인 IPA 모음 다이아그램을 가리키고 있다. 모음의 음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것 뿐만이 아니라 〈연구개의 위치〉(비음), 〈목청의 떨림〉(발성), 〈혀뿌리의 위치〉도 있다. 조음 음성학에서는 모음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기 위해서 우선 자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음 음소의 목록과 각 모음 음소의 변이음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고, 각 모음 음소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기본 사항을 관찰하여 파악한다. 모음의 높이는 입천장 또는 턱 아래와 관련된 혀의 수직적인 위치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i]와 [u]와 같은 고모음(高母音, high vowel)에서는 혀가 입에서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며, [a]와 같은 저모음(低母音, low vowel)에서는 입의 낮은 쪽에 위치하게 된다. IPA는 각각 폐모음(close vowel)과 개모음(open vowel)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며, 턱이 상대적으로 더 열렸는가 또는 닫혔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모음의 높이는 〈조음의 질〉보다는 소리의 특질을 가지며, 오늘날에는 혀의 높이나 턱의 열림정도 보다는 최초의 포먼트(formant)에 의한 상대적인 빈도(F1)에 따라 정의된다. F1 값이 더 높을 수록 모음이 더 작아지며, 높이는 F1에 반비례한다. 혀의 최고점이 형성되는 위치는 어디인가? 이것에 따라 국제음성기호(IPA)는 다음과 같이 분류를 했다. 모음의 전후는 모음 소리를 낼 때 혀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이름지어졌다. [I]와 같은 전설모음은 입의 앞쪽에 위치하며, [u]와 같은 후설모음의 혀의 뒷쪽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모음은 두 번째 포먼트의 빈도(F2)가 아니라 실제 조음운동에 따라 전후로 정의된다. F2 값이 높을수록, 전설모음이고, 전후는 F2와 반비례한다. 한 모음 음소의 특성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서는 이 외에도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위의 네 가지 기준만으로 모음 음소들 사이의 상대적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국제음성기호는 모음의 전후에 따라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비록 영어가 전후의 정도에 의한 다섯 가지 모음을 가지고 있지만, 높이나 원순에 다른 차이없이 다섯 개 모든 것을 구분하는 언어는 없다. 원순이라는 말은 입술이 둥글게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말한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원순은 중, 고후설모음의 보강 특징이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보통 후설모음이 높을수록, 더 둥글어 진다. 그러나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대부분의 우랄어, 터키어, 베트남어, 한국어와 같이 원순과 전후를 따로 다룬다. 예를 들어, 이러한 기준으로 한국어의 여덟 개의 단순 모음 /ㅣ, ㅔ, ㅐ, ㅏ, ㅜ, ㅡ, ㅗ, ㅓ/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모음 운율의 특징은 종종 모음 음질로 독립적으로 설명된다. 비유선형 음성학에서 평행층에 위치한다. 모음 운율의 특징은 보통 모음 그 자체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되며, 음절에 적용된다. 억양(intonation)은 소리의 높낮이(pitch), 강도(intensity) 그리고 말의 속도(speed)이다. 모음의 길이나 음량은 모음의 추상화된 길이를 말한다. 이러한 특징은 운율이 아니라 모음의 음질로 설명된다. 일본어, 하와이어, 아랍어, 라틴어는 장모음과 단모음 사이에 두 음소 비교를 하며 더불어 우랄어족의 언어들은 세 단계로 나눈 길이를 쓴다. 모음이 지속되는 동안 변화가 없는 모음의 소리를 단모음(單母音, monophthong, 홑홀소리)이라고 한다. 단모음은 종종 "순수한", "안정된" 모음으로 불린다. 하나의 특정 조음 장소에서 이동하여 소리가 다르게 나는 모음을 이중모음(二重母音, diphthong)이라고 하며, 연속적으로 세 개의 조음 장소를 이동하여 내는 소리를 삼중모음(三重母音, triphthong)이라고 한다. 모든 언어에는 단모음이 있으며, 많은 언어가 이중모음도 있지만, 삼중모음까지 있는 언어는 비교적 희귀하다. 한국어에도 단모음과 이중모음이 있지만, 삼중모음은 없다. 영어는 이 모든 모음이 다 있는 언어이다. 자음 자음(子音, ) 또는 닿소리는 성문을 벗어나 조음된 소리가 목, 입, 혀 따위의 발음 기관에 의하여 방해를 받으면서 나는 소리이다. 모음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조음 음성학에서는 자음을 기술하기 위하여 모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먼저 자음 음소 목록과 각 자음 음소의 변이음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특성을 관찰하여 기술한다. 위와 같은 특성 중 한국어 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외국어들의 자음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조음 방법과 조음 위치가 가장 기본적인 분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기식, 긴장, 성대 진동이 수반되는지 여부에 따라 세부적인 구분이 이루어지게 된다. 문자로서의 자음은 또한 자음 소리를 내는 알파벳이나 한글의 글자를 뜻하기도 한다. B, C, D, F, G, H, J, K, L, M, N, P, Q, R, S, T, V, X, Z이며, 가끔 W, Y도 포함한다. 돗토리현 돗토리 현, 또는 톳토리현()은 일본 혼슈의 동해 연안에 있는 현이다. 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현이기도 하다. 돗토리 현은 원래 구 호키 국과 구 이나바 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 동쪽에 돗토리 사구()이라고 불리는 모래 언덕이 있다. 옛날의 이나바 국에 속한 지역이다. 옛날의 호키 국의 동반부이다. 옛날의 호키 국의 서반부이다. 돗토리 현은 주요 농업 지대로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품은 주요 도시로 운반된다. 특산품으로는 나시 배, 나가이묘(미), 랏쿄(염부추), 네기(파)와 수박이 있다.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줄여 대한노총(大韓勞總)은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대항하여 등장한 대한민국 초기의 우파의 어용 노동조합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전신이다. 대한민국에는 본래 1945년 10월 10일 허성택을 위원장으로 한 남로당 계열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줄여 "전평"이 있었으나, 전평의 공산주의성격, 남·북한을 합한 인민공화국 수립 제창, 신탁통치 지지운동 등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발을 사게 된다. 그래서 1946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시천교회에서 우파계열 노동조합중 하나로 대한노총이 설립되게 되었다. 대한노총은 1946년 9월에 이르러 전평과의 전면적인 대결구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평은 1946년 제1차 제네스트를 지령, 9월 23일 철도, 9월 24일 행정파업을 감행, 이를 저지하려는 대한노총과의 공방전이 벌어져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10월 1일을 고비로 파업이 일단락되고, 10월 7일 철도노조의 운행이 재개됨에 따라 전평이 약화되고 대한노총은 대한민국 주요도시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평은 이에 1947년 3월 22일 제2차 제네스트를 지령, 폭력을 불사하는 파괴적인 파업을 강행했다. 대한노총은 이에 전면대결로 들어가 유혈사태 끝에 전평을 저지하였고, 전평은 지하로 잠입하게 되었으나 곧 소멸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합법화되었다. 대한노총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반공조직의 성격을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노총은 이승만 대통령과 제1공화국의 어용조직으로 전락, 1959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비호 아래 조직폭력배와 경찰을 투입,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10월, 대한노총의 비민주성에 반발한 민주화 세력들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 ‘전국노협’을 건설하였다. 대한노총은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소멸 위기에 처했다. 대한노총이 이미 노조로서의 성격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노협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전국노협은 대한노총의 ‘대통합’ 요구에 맞춰 한국노동조합연맹, 줄여 ‘한국노련’이 세워졌다.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는 대한민국 남동부 해안에 있는 광역시이다. 서쪽으로 경상남도 밀양시·양산시, 경상북도 청도군, 북쪽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접한다. 태화강이 도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며, 동해안에 울산항과 방어진항, 온산항이 위치한다. 현대중공업, 현대하이스코, 현대미포조선 등의 대기업 본사들과 현대자동차, SK이노베이션, S-OIL 등의 대기업들이 있고, 한국석유공사, 에너지관리공단, 에너지경제연구원, 한국동서발전, 한국산업인력공단, 근로복지공단, 안전보건공단 등 공기업이 있으며, 자동차·조선 및 석유화학 공업이 발달해 있다. 2014년 기준 1인당 GRDP 6억1,102만원 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울산은 대한민국 총 수출의 17.7%를 차지한다. 산업 발달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1997년 7월 15일 광역시로 승격되었다. 특별·광역시 중 관할 면적이 가장 넓지만 인구는 가장 적어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전국 광역시 중 유일하게 컨벤션센터(2020년 완공 예정)와 도시 철도가 없다. 구체적으로 ‘울산(蔚山)’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때인 1413년에 ‘울주(蔚州)’를 ‘울산군(蔚山郡)’으로 개칭하면서 역사상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울주’라는 명칭은 그 이전에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에 처음으로 발견된다. 이외에는 공화(恭化), 흥례(興禮), 하곡(河谷), 굴아화(屈阿火) 등이 울산 지역의 지명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울(蔚)자가 울산광역시의 지명으로 사용된 것은 선사시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과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에 걸쳐 당시 소국인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두의 표기법에 의하면 이는 울산이 된다. 흔히 이두에서는 시(尸)를 ㄹ의 표기로 사용했으므로 우+ㄹ+산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울뫼나라, 울산국 정도로 불리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울은 한국어의 옛말에서 울타리, 혹은 성(城)을 의미한다. 따라서 울뫼나라는 "성으로 둘러싸인 나라"나 "산이 성처럼 둘러싸인 나라"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울뫼나라가 지금에 이어진 것이 울산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역사 이전인 선사시대 무렵부터 울산 지역인 언양읍 인근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반구대암각화는 산짐승과 들짐승을 쫓는 사냥 그림, 가축을 사육하거나 맹수를 방어하기 위한 나무울타리 등이 그려진 벽화인데, 이러한 벽화가 언양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벽화에는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했을 고래잡이 그림도 함께 그려져 있어 당시 울산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보다 정확한 울산광역시의 역사는 삼한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가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울산광역시에는 삼한시대 진한의 소국이었던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울주군 웅촌면 하대마을 주변에서 검단리까지를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며 경상남도 양산시의 웅상읍까지 그 세력이 뻗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주로 하대마을과 검단리를 중심으로 보는 것은 이 주변에서 대대리고분군과 검단리유적 등이 발굴되었기 때문인데, 특히 하대마을에서 발굴된 고분군은 봉분의 규모로 보아 상당한 세력이 있었던 사람의 것으로 생각된다. 우시산국은 몇 유적이 발굴되었을 뿐 정확한 위치나 규모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울산의 중요한 옛 기록으로 보고 있는 것은 울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예전 기록에서 지명의 ㄹ받침은 주로 시(尸)자를 적어 표시했는데, 이 우시산국의 지명은 울산이라는 지명이 당시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곧 우(于) + ㄹ(尸) + 뫼(山) + 나라로 분석되는 울뫼나라, 혹은 울산국 등으로 이미 불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웅촌과 웅상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점에서 울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중구 다운동, 울주군 범서읍 구영리, 굴화리 주변에는 굴아화촌(屈阿火村)이라는 촌락, 혹은 굴지화국(屈知火國)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이곳은 태화강을 끼고 있으며 강이 휘어 있다는 의미로 굴아(屈阿)라는 글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울주군 언양읍 주변에는 진한의 소국이며 거지화촌(巨知火村)으로 불렸던 거지화국(기저국)이, 울주군 서생면 주변에는 읍락의 형태인 생서량촌(生西良郡)이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우시산국은 삼국시대인 기원후 80년, 사로국 탈해 이사금에게 정벌되었다. 이는 거도(巨道) 장군에 의한 것이었는데, 당시 그는 사로국의 국경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접해 있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거도는 굴아화촌 부근에서 말타기 놀이를 몇 해 벌이다가 기습을 펼치는 전술로 두 나라를 복속시키게 된다. 이후 우시산국은 우화(于火)라 부르게 되었고, 서생 근처에 있었던 동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경덕왕 16년에 이르러서는 우풍현(虞風縣)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파사 이사금 때에는 굴아화촌에 계변성, 화성군이 속한 지변현(知邊縣)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 16년인 757년에는 하곡현(河曲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를 임관군의 아래에 두어 통치하였다. 당시 하곡현을 관할했던 임관군은 삼한시대에 모화라 불리던 지역으로, 지금 경주시가 된 모화리에 처소를 두고 있었지만 율포(북구 농소 지역)와 굴아화 등 울산 지역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는 행정구역이었다. 한편, 언양 근처의 거지화촌과 서생 주변의 생서량촌도 사로국에 귀속되었다. 거지화촌은 지금의 양산시 근처인 양주의 관할 아래 거지화현(巨知火縣)으로 두었으며, 경덕왕 16년에 헌양현(巘陽縣)으로 개칭하였다. 거지화촌은 지금의 울주군 언양읍과 상북면 길천리 일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삼한시대에 사로국에 귀속되는 경우 국읍형태의 지역은 주나 군을 두고 읍락단위에는 촌이나 성을 두었는데, 서생의 생서량촌의 경우 읍락단위였음에도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촌 성이 아닌 군을 설치하여 더 큰 지역인 우시산국(우풍현)을 영현으로 두었다. 그리고 하곡현(굴화 지역)의 통제를 받는 일개 촌이었던 계지변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학성동과 복산동 일대로 추정되는 이 지역은 신라시대 말기에 계변성(戒邊城)으로 불렸는데 신학성(神鶴城)으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학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효공왕 5년에 한 쌍의 학이 울어 이 지역의 사람들이 신학(神鶴)으로 불렀다는 것으로 그 기원을 삼고 있으나, 사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호족인 박윤웅의 출생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윤웅의 집안은 신라시대 말부터 울산 지역의 호족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박윤웅 대에 들어 최고 실력자인 호족장으로 확립되었다. 이에 하곡현의 하위 지역이었던 신학성은 신라의 멸망 앞에서 신라와 함께 고려에 투항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미리 투항했으며,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고려가 세워지면서 울산 지역의 행정구역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고려 태조가 울산 지역의 호족장인 박윤웅의 도움을 받아 고려를 건국된 것을 치하하며, 또 지방 호족의 군사적 행동을 막기 위하여 그의 세력 아래 있던 세 현(縣)을 합하여 새로운 행정구역인 흥례부(興禮府)를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조치는 일시적이었으며, 고려 성종때 있었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 울산은 지금의 김해 지역인 영동도(嶺東道)의 김주(金州) 공화현(恭化縣)으로 격하되고 별호로 학성(鶴城)을 부여받는다. 본래 울산 지역은 신라를 거치면서 하곡(굴화 지역)과 동진(강동 지역)을 임관군(경주 모화 지역)이 다스렸고, 동안군(서생 지역)이 우풍(웅촌 지역)을 다스리는 등 분리되어 있었는데 고려가 건국되면서 박윤웅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세 현을 하나로 모으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현재 울산 지역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흥례부는 지금의 광역시 형태로 중앙정부를 축소한 향리를 둘 수 있게 하였으며, 이 시기에 거주지별로 성과 본관이 책정되면서 울산 지역의 토성(土姓)은 박, 이, 전, 목, 오, 윤, 임, 문 가(家)로 정리되었다. 한편 당시에는 토착 세력을 정리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무장을 해제시켰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려에 투항하지 않았던 토착 세력들도 존재했는데, 이 시기 울주군의 범서읍 지역이 천민마을인 부곡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연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울산 지역이 흥례부에서 공화현으로 격하된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세력다툼을 통해 고려에 투항하지 않았거나, 고려 중앙에 거스르는 행위를 해서 천민마을로 지정되지 않았을까 한다. 시간이 지나고 고려 현종 9년에 이르러 새로운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당시 울산은 56주군의 하나인 경상도 울주(蔚州)으로 편제되었으며 그 아래 지금의 언양읍인 헌양현(巘陽縣)과 기장현, 동래현을 속현으로 두게 되었다.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은 작은 부침 속에 고려시대 말까지 전개된다. 고려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성계의 조선이 개국하였다. 조선은 개국 후 얼마간 같은 행정구역 체계를 유지하다가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에 지방행정구역 정비를 단행하였는데, 당시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었다. 울산이 속한 경상도에는 1목, 3도호부, 7군, 17현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울산이 군급(울산군)이었으며 언양은 현으로 편제(언양현)되었다. 당시 지명에 붙어 있던 많은 주(州)가 산(山)이나 천(川)으로 바뀌었으며 울산도 울주에서 울산으로 바뀌었다. 조선 중종 14년인 1519년에 다시 개편된 지방행정구역에서는 경상도가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분리되었다. 울산은 경상좌도에 포함되었으며, 울산군의 행정구역은 계속되었다.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임진왜란에서 울산 지방의 의병 활약이 뛰어나 조선 선조 31년인 1598년에 울산군이 울산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일시로 언양현이 합속되어 판관을 두게 되었다. 광해군 4년인 1605년에 언양현이 울산도호부에서 분리된다. 조선 고종 32년인 1895년에는 전국에 23부제가 실시되었는데 울산도호부는 울산군으로, 언양현은 언양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건양 원년인 1896년에 전국을 13도 1목 9부 329군으로 개편하면서 울산은 3등급의 군으로, 언양은 4등급의 군으로 편제되었다. 당시에는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경상도를 남북으로 분리,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되었고 울산은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1906년에는 경주군 일부를 울산군에 편입해 두북면이 되었으며, 울산군 웅상면을 양산군에 편입하였다. 또 남쪽의 온남면과 외남면 일부를 외동면으로 하여 양산군에 편입하였는데 후에 다시 서생면으로 흡수된다. 대한제국기에 울산에는 울산 최초의 공립학교인 개진학교가 설립되었다. 1903년의 일인데, 1907년 울산공립보통학교로 개명한 뒤 현재 울산초등학교로 남아 있다. 병영에는 1906년에 현재의 병영초등학교인 일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언양에도 영명학교(언양공립학교로 개명)가 설립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전개된 일제 강점기 울산에는 큰 변화가 없이 행정구역상의 소소한 변화가 주로 일어났다. 먼저 1910년 9월 1일에는 현재의 두동, 두서면을 포괄하고 있었던 두북면을 두동면과 두서면으로 각각 분할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에 지금의 언양읍인 언양군을 울산군과 병합하여 25면의 군(郡)으로 만들었다. 속현이나 짧은 시간이 아닌,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울산이 언양과 한 행정구역을 공유하게 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으며 당시의 모습은 지금까지 계속해 유지되어 오고 있다. 한편,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1914년 4월 1일에는 각 면을 합쳐 새로운 이름을 한 면(面)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중구 지역인 부내면(상북면과 내현면의 합면), 지금의 북구 농소동 지역인 농소면(농동면과 농서면의 합면), 지금의 중구 병영동 지역인 하상면(하부면과 내상면의 합면), 지금의 남구 야음동 지역인 대현면(현남면과 현북면의 합면), 지금의 울주군 온양읍 지역인 온양면(온남면과 온북면의 합면), 지금의 언양읍 지역인 언양면(상북면과 중북면의 합면)을 각각 만들었다. 이로써 울산은 19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17년 10월 1일에는 부내면을 울산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28년 4월 1일에는 상남면과 하북면을 상북면으로 합면하여 울산은 총 18개의 면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1931년 11월 1일에는 울산면을 울산읍으로 승격해 1읍과 17면 으로 구성되게 되었으며, 1933년 1월 1일에는 삼동면과 중남면을 삼남면으로 합면하여 1읍 16면으로 편제되었다. 1937년 7월 1일에는 울산군 방어진면(1931년 동면에서 개칭)을 방어진읍으로 승격하여 2읍 15면이 되었는데, 방어진읍은 현재 동구로 동구가 당시에는 울산 시내와 비슷한 수준의 도심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45년 4월 1일에는 지금의 남구 공업탑과 야음동 일대인 대현면(大峴面)을 울산읍에 합면하여 총 2읍 14면 으로 편제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울산이 일제의 군수물자 수송의 최적지로 이용되었다. 울산은 일제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그에 따라 일제의 침략 물자 수송을 위한 많은 시설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울산우편국이 있는데, 울산우편국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우체국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1905년 5월에 지금의 북정동 일대인 울산군 상부면에 울산임시우체소가 개소돼 체신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1910년 10월 1일에 울산우편국으로 개칭되었다. 1911년 4월에는 창원 대구와의 정기채송을 시작했고, 1914년에는 경주와도 정기채송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나 1950년에는 울산우체국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산에 전화가 들어온 것도 당시였다. 1908년 11월에는 울산에 처음으로 전화가 등장하였고, 1910년에는 울산과 방어진 간에 전화가 가설되었다. 또한 1911년 6월에는 양산 서창 언양으로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1914년 7월에는 밀양으로, 같은 해 12월에는 김해까지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그러다 1920년에는 우편국마다 간이교환대가 설치되어 통화가 이루어졌으며 부산까지 시외통화가 가능해졌다. 서울까지는 1930년 들어 전화가 연결되었다. 이외에 울산에 비행장도 건설되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처음 만들어진 국제공항이었다. 일제는 일본의 규슈(九州)지방과 거리가 가까운 울산의 달동 일대 농경지를 강제로 강탈하여 1928년 12월 2일에 울산비행장을 개장하였는데, 이는 여의도비행장보다 5개월 가량 빠른 것이었다. 준공 당시 울산비행장은 남북의 길이가 600m였으며 격납고가 350평, 일본항공 사무소 35평, 공항사무소는 30평이었다. 1931년 8월에는 항공기를 첫 취항하였으며, 일본항공의 울산출장소로 일본 후쿠오카 사이를 오가는 12인승 쌍발 비행기를 매일 1회씩 운행하였다. 이곳에는 세관도 설치되어 운영하였다. 울산에 최초로 일본과 연결되는 국제공항이 건설된 것은 일제의 만주 침략과도 관계가 깊다. 당시 비행기는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어려웠는데 서울이나 만주, 신의주, 중국 대련 등을 거쳐 중국이나 소련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가까운 울산을 경유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기능을 하기 위해 주변이 논밭으로 되어 있는 울산의 삼산 일대는 비행장을 만들기에 적합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울산비행장은 1936년부터 운영난에 빠져 휴항하게 되었으며, 1937년에는 대구비행장으로 그 기능을 옮기게 된다. 1941년에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군사비행장으로 개조하여 일본에서 대륙을 오가는 군수물자의 운반과 연료공급기지로 다시 개항하였다. 1945년에 해방이 된 후에는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관리하다가 유사시를 대비해 일부를 활주로로 남기고 논으로 만들어 농민에게 불하하였고, 1980년대 울산의 도시계획 확장으로 주거단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과 함께 일제가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행정 체계를 그대로 유지했던 것과 같이, 울산의 행정구역도 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광복 얼마 뒤인 1946년 1월 1일에 울산읍으로 합쳐져 있던 지금의 남구 지역이 대현면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울산읍이 태화강 이북의 지역을 관할하던 행정구역이라는 점에서 실질적인 생활권으로 구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38도선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울산 지역도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는 38도선 이북에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이남 지역에 속한 울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큰 전투가 없었다. 다만 울산의 서부 지역(지금의 울주군 지역)에서는 안강 전투로 인해 발생했던 포항과 경주 지역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큰 혼란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생겨났는데 여기서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고시하게 된다. 1962년 1월 27일의 일이었는데, 당시 특정공업지구로 결정된 곳은 지금의 울산 중구 남구 동구 북구 지역의 일부에 해당하는 울산읍 방어진읍 하상면 대현면 전역과 농소면 송정리 화봉리, 범서면 무거리 다운리였으며 지금의 울주군 청량면에 속하는 청량면 두왕리도 특정공업지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일에는 위 지역을 경상남도 울산시로 승격하였다. 지금 울산광역시의 모태가 되는 행정구역인데, 위 지역이 울산시로 승격되면서 잔여 지역인 울산군은 울주군으로 개칭되었다. 울산시 지역에는 세 개의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구 방어진읍 지역에는 방어진출장소를, 구 대현면 지역에는 장생포출장소를, 구 하상면 지역에는 병영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63년 11월 1일에는 구 울산읍 지역에 중앙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972년 7월 1일 울산시의 53개 법정동을 31개 행정동으로 개편해 행정의 편의를 도모했다. 1976년 4월 20일에는 방어진출장소를 제외한 모든 출장소를 폐지하고, 시에서 직접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1985년 7월 15일에는 울산시에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구와 남구를 설치했으며 방어진출장소를 중구에 편입하였다. 이로써 울산은 2개의 구와 하나의 출장소, 40개의 동으로 편제되었다가 같은 해 8월 10일 중구 방어진출장소가 시 직할 출장소로 승격되어 2개의 구와 40개의 동으로 편제되었다. 시 직할 출장소의 지위였던 방어진은 1988년 1월 1일자로 동구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울산은 3개의 구, 40개의 동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수 년간 울산에는 이렇다 할 행정구역의 변화가 없었고, 그 형태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1995년에는 지방자치제의 개정과 함께 도농복합형태의 도시가 각지에 생겨나면서 울산도 울산시와 울산군(1991년 울주군에서 명칭 환원)이 통합되었다. 통합 울산시는 경상남도의 관할로, 지금과는 달리 산하 구가 소속 일반구의 역할만을 하고 있었으며 시역(市域)은 현재의 울산광역시의 시역과 일치하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새롭게 도농복합형태의 도시로 출범한 것은 당시 울산시와 울산군 사이의 생활권이 통합적으로 이뤄졌음을 의미하는데, 통합 울산시의 발족으로 울산은 생활권을 같이 하는 주민들에게 통합적인 행정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울산군(읍·면) 지역을 관할하는 울주구를 설치하였는데, 한국 행정구역 사상 동이 아닌 읍·면만을 관할한 유일한 구였다. 통합 울산시의 발족 이후, 울주구는 인구 증가와 시가지의 발달로 1996년 3월 1일에 당시 언양면과 온산면을 언양읍과 온산읍으로 승격시키는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급기야 1997년 7월 15일에는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었다. 광역시 승격의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인구 100만 명을 넘는 거대 시가 되었다는 점, 인근 지역의 위성도시가 아닌 독자적인 생활권을 담보하는 지역이었다는 점 등의 이유에서 광역시로 승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의 울산직할시 공약과 울산시민들의 직할시 승격운동도 광역시 승격에 큰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구가 100만 명이 넘고 독자적인 생활권이 담보되어도 광역시로 승격되지 않은 도시도 많다. 예를 들어 경상남도 창원시, 경기도 수원시 등. 새로 생겨난 울산광역시는 부산광역시나 인천광역시와 같이 광역시 안에 구와 군을 포함시킨 도농복합도시의 형태였으며, 광역시 승격과 함께 하위 행정구역이면서 일반구였던 구가 자치구(중구, 동구, 남구) 및 군(울주구→울주군)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울주구보다는 울산시의 시역과 생활권을 같이 하는 당시 울주구 농소 지역에 구를 설치하여 북구로 하였다. 이로써 울산광역시는 네 개의 구와 하나의 군을 시역으로 하는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2001년 3월 1일에는 범서면과 온양면을 범서읍, 온양읍으로 승격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산광역시는 대한민국의 동남쪽, 경상남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 북서쪽엔 경상북도 청도군, 남서쪽엔 경상남도 양산시와 밀양시, 남쪽엔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청도군, 밀양시와 인접해 있으나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교통이 좋지 않다. 따라서 울산광역시는 양산시와 경주시,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교류가 활발하다. 동남 해안가에 위치하여 도시의 동쪽으로는 동해와 맞닿아 있다.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종주하여 서쪽은 신불산(1,159m)·가지산(1,241m)·고헌산(1,033m)·운문산(1,188m) 등의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동쪽은 동대산맥이 남북으로 달리면서 방어진 반도를 이루고 있다. 이 서부산지와 동대산맥 사이에 지구상(地溝狀)의 울산평야가 있으며, 동류하는 태화강과 남류하는 동천강(東川江)은 이 평야를 흘러 하구에 삼각주를 퇴적하여 비옥한 농경지를 형성하며 울산만으로 흐르고 있다. 울산만에는 대한민국 국가수출 1위 항만인 울산항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밖에 미포항, 장생포, 울산신항, 방어진항, 정자항 등이 있다. 울산광역시 안에는 태화강과 회야강 등이 큰 물줄기를 이르며 흐르고 있다. 우선 태화강은 울산광역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국가하천으로 중구와 남구 등 중심 시가지를 가로지른다. 총 48km의 이 하천은 사연천과 동천 등 지류가 있다. 태화강은 생활하수와 공업하수가 뒤섞여 수질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으나, 최근 수질개선사업으로 연어가 회귀하는 등 5급수의 수질이 2급수 수준으로 상향되어 태화강 상류에는 갈겨니 꼬치동자개 수수미꾸리 납자루 등 희귀 생물이 다시 서식하게 되었다. 울산광역시의 남쪽에 위치한 회야강도 태화강과 함께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120만명의 울산시민 중 60만명이 태화강의 연선에 거주하고 있다. 하구는 울산만을 이루며 동해로 이어진다. 울산만은 만구의 폭이 약 2 km, 북쪽으로 8 km 가량 만입하여 있는데, 동안에 방어진항, 서쪽에 장생포가 있다. 울산만은 익몰만으로서 수심이 깊어 거선이 출입할 수 있는 양항이다. 이와 같이 큰 국가하천의 존재로 공업용수가 풍부한 점이나 울산만으로 항구의 입지가 좋은 점은 울산이 국내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태화강 하구를 중심으로 자동차공단, 석유화학공단, 조선소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은 울산광역시의 주력 산업시설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태화강의 수질개선으로 태화강에서 수영대회 용선대회 자전거대회 등 국내 외 대회들이 열리고 있다. 행정구역상 울주군 지역에 해당하는 울산광역시 서부 지역은 태백산맥의 줄기가 이어져 주로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가지산, 신불산 등 이 일대의 높은 봉우리들과 산줄기는 수려한 경관으로 인하여 가지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영남 알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서부 지역의 산줄기에는 작천정 계곡, 석남사, 신불산 군립공원 등 많은 관광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외에도 남동정맥에서 갈라져 나오는 삼태지맥, 호미지맥, 남암지맥, 용천지맥 등의 산줄기가 동해까지 깊숙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산이 많은 지세를 가지고 있다. 이들 산줄기는 크게 낮지 않으면서도 험하지 않아, 시민들에게 인기있는 등산 코스가 많다. 북구의 무룡산, 남구의 문수산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울주군의 남쪽 해안에 있는 간절곶은 한반도에서 가장 해가 일찍 뜨는 곳으로, 새해 일출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울산은 난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따뜻한 겨울 날씨를 보인다. 눈은 아주 가끔 오는 정도이다. 2013년 8월 8일 최고기온 38.8℃로 관측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고, 8월 10일에는 울산공항이 비공식적으로 40.3℃를 기록하였다. 관측 사상 최저 기온은 1936년 1월 27일의 -16.7℃였다. 최근에 이를수록 강수량과 연평균 기온이 높아지고 있어 1994년에서 2007년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 가량이며 연평균 기온은 15.11℃이다. 울산광역시는 1995년, 기존의 울산시와 울산군(울주군)을 통합하여 통합 울산시를 발족한 이후 광역시로 승격한 뒤 자치구와 군을 설치하여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중구의 경우 울산광역시의 오랜 중심지로, 예전에는 동해남부선 울산역이 위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던 시가지가 남구로 확장되어 현재는 삼산동과 공업탑, 울산대학교 등이 위치한 남구 지역이 가장 번화한 지역이 되었다. 또한 남구는 석유화학공단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 자치구는 태화강으로 경계를 이룬다. 동구는 울산광역시의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으로, 태화강 하구를 경계로 남구와 맞닿아 있다. 박정희대통령 시절 동구는 현대중공업이 위치하게 되어 조선업이 매우 발달해 있다. 지리적으로 울산의 도심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동구는 백화점, 할인점 등 생활시설을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현대중공업의 사원과 지역 주민을 위한 평생교육시설 등 문화시설이 잘 갖추어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구와 인접한 북구는 현대자동차가 위치해 있다. 북구 농소, 강동 일대는 본래 울주군(울주구)에 속했던 지역이지만,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신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구는 연암, 농소 등의 주거지역 외에도 자동차부품산업단지가 계획되는 등 자동차 관련 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울주군은 울산광역시를 둘러싸고 있는 형세로 되어 있으며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기 얼마 전 편입되었다. 언양읍, 구영/천상/굴화(범서읍), 덕하/상남/율(청량면), 덕신(온산읍), 남창(온양읍), 웅촌면 등은 울산 시내 및 남구, 울주군 등의 대규모 공단 근로자의 배후 주거지역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외에 에쓰오일 등 석유 공단, 신고리원자력발전소, 반구대 암각화, 진하해수욕장, 나사해수욕장, 간절곶 등이 위치하고 있다. 울산광역시의 행정구역은 4구 1군이고, 그 아래로 4읍 8면 44동이 있다. 면적은 1,060.19km이다. 2017년 11월 30일 주민등록 인구는 457,950세대, 1,165,317명이다. 울산시가 설치된 1962년 당시에는 종전의 울산읍사무소(지금의 중앙동 주민센터)를 사용하다가 1969년에 현재위치로 이전하였다. 2009년에 지금의 시청사가 개청하였고 구 청사는 리모델링하여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울산광역시의회의 의원 정수는 22명(지역구19+비례대표3)이다. 2012년 울산의 지역내총생산(GDRP)은 70조648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3.6%이다. 울산광역시의 경제활동은 2차, 3차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주로 대한민국의 국가기간산업에 집중되어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한 울산광역시의 해외수출액은 101,487백만불로,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18.2%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해외로의 수입액은 85,803백만불인데, 이들 대부분은 원유나 동광, 석유화학 등 원자재 수입이 차지하고 있다. 동해에 접한 울산은 과거 연안 어업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장생포는 고래잡이로 유명하였으며(현재는 고래잡이가 금지되어 있어 침체기에 빠져 있다), 방어가 많이 잡힌다고 하여 붙여진 방어진이라는 이름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방어와 고래 외에도 멸치, 갈치, 청어 등의 어획량이 많았다. 그러나 인근에 온산 중화학 공업단지가 조성된 이후로 수질악화 및 산업구조의 변화를 겪으면서, 어획량이 줄고 어업이 상당 부분 쇠퇴하였다. 농업은 울산 지역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2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농업의 비중은 크게 낮아졌다. 최근의 울산 농업은 근교 농업이 주가 되고 있다. 2차 산업이 발달되어 있으나, 시 외곽에는 넓은 농지가 분포하고 있으므로 근교 농업도 성한 편이다. 한편 과수업에서는 울주군 서생면 일대에서 생산되어온 울산배가 지역 특산물로서 이어오고 있다. 축산업은 한우의 사육이 많아서, 울주군 언양읍의 언양불고기가 유명하며,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인근의 봉계한우도 유명하다. 특히 언양과 봉계 지역은 유일한 먹거리특구로 지정되어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1962년에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이래로, 울산은 대한민국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울산광역시남구지역에는 울산석유화학공단이, 울주군지역에는 온산석유화학공단이 위치하며 북구에는 자동차산업단지가, 동구지역에는 조선소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공업지구에서 다루는 공업은 우리나라의 국가 기간산업이며, 그 해외 수출량은 우리나라 총수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동구에 위치한 현대중공업 및 현대미포조선 등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들 조선소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한진중공업이 8만평, 거제시의 삼성중공업이 150만평인 것에 비해 200만평이라는 초대형 규모로 건설되었다. 이에 대형 선박의 건조가 가능해져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북구] 명촌동, 효문동 등지의 북구지역에는 현대자동차와 효문산업공단이 위치하고 있다.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차공장이며 이 지역에는 많은 자동차 관련 하청업체 및 기계산업 관련 공장들이 분포하고 있다. [남구] 상개동과 부곡동 등지의 울산석유화학공단에는 정유화학 관련 공장이 밀집해 있다. 대표적으로 울산석유화학공단에는 국내 최초의 정유사인 SK가 위치해 있다. [울주군] 온산 일대의 온산국가산업공단에는 석유화학 비철금속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울산의 3차 산업은 도·소매업, 운송업, 건설업 등이 주가 된다. 3차 산업의 종사자 수는 가장 많으나, 2차 산업의 큰 비중에 밀려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한편, 울주군 언양읍에서 상북면으로 이어지는 공단지역과 삼남면 삼성SDI 인근에 정보산업단지도 계획되어 있으며, 중구 다운동에 조성중인 정보산업단지 조성을 통해 정보산업의 비중을 높일 계획이다. 울산광역시는 읍에서 시로 승격된 1962년까지도 인구가 21만명에 불과한 지방 소도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시 승격 얼마 전, 당시 박정희 정부로부터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고 이윽고 울산공업센터가 조성되면서 인구 유입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울산광역시는 대규모 항만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해남부선 철도와 고속도로 등 물류 이동이 원활하고, 풍부한 공업용수원을 확보해 공업단지 조성의 적지로 각광받았다. 울산공업센터의 조성이 어느 정도 완료된 1970년대 이후 울산광역시의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 275,361명이었던 인구는 1975년에 368,612명을 기록하였고, 1980년에는 535,348명으로 50만명을 넘어섰다. 공업단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야음동, 삼호동, 덕신 등에 공업단지 조성지역 원주민이 이주한 것에 더해 늘어난 인구가 정착하면서 남구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였고, 동구 및 북구 지역의 공단 인근에도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늘어나던 인구는 1980년대 80만명을 넘어섰으며 1990년대 중반 100만명을 넘어섰다. 인구가 100만명을 넘어선 것과 울산시 울주군의 통합으로 독립적인 생활권을 확보한 점 등을 들어 1997년에는 마침내 광역시로 승격하였다. 광역시 승격으로 북구가 신설되었으며, 울산시의 각 구 군은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점차 인구가 감소하고, 도시 인구의 증가폭도 적어지던 1990년대 이후에도 울산은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 2007년에는 110만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시철도 등 궤도계 교통 시설의 미비는 있으나 대중교통 체계의 미흡 등으로 다른 광역시에 비해 대중교통이용이 불편하나 도로망은 잘닦여있고 널널한편이다. 영화관 박물관 등 문화 시설도 부족한 편이다. 또한 남구 지역의 새로운 개발로 구도심인 중구지역의 공동화 등이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에 울산광역시는 경전철 및 다양한 박물관의 신설, 중구 시가지의 재개발 등으로 대처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극심한 조선업의 불황으로 울산의 주된 산업기반인 현대중공업또한 인력감축과 구조조정을 하게되었고 이로인해 현대중공업의 분사가 이뤄지면서 직원들의 이동이 적지 않았고, 일자리가 없어진 하청업체 직원들이 울산을 떠나면서 이동이 많아지게된다. 또한 저출산문제까지 겹치면서 결국 2015년 120만명의 인구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2017년 중반에는 인구가 118만명으로 감소하게되었다. 이런현상으로 울산시관계자나 언론등 사회에서는 이런 울산인구 절벽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울산은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남초 현상이 심한 곳이다. 2017년 통계청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울산광역시의 전체 인구는 115만 7,077명인데 이 중 남자가 60만 93명이었고 여자가 55만 6,984명으로 성비가 무려 107.7 : 100까지 벌어진다. 구, 군 별로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울산 내 5개 구, 군 모두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았고 그 중 가장 심한 곳은 동구로 이곳의 성비는 무려 114.5 : 100까지 벌어질 정도로 남초 현상이 심하다. 뒤를 이어 울주군 역시 110.5 : 100을 기록하고 있고 북구 역시 108.7 : 100을 기록하고 있다. 중구와 남구도 각각 104 : 100, 104.5 : 100인 남초 상태다. 이는 울산이 전국에서 유명한 공업도시이기 때문에 공장 노동자들이 많아서 그런 것으로 분석된다. 울산에는 2개의 대학교와 3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울산은 도시 규모나 인구에 비해 대학교 및 전문대학 등 고등교육 기관이 부족한 편이다. 고교 졸업생 중 20%가 서울 지역으로, 25.6%가 부산 지역으로 지원하고 17.9%만이 울산 지역의 대학교에 지원하였다.. 울산광역시에는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이 없다. 따라서 타 지역의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울산광역시에서 교원 임용고사를 치러 교사로 임용되고 있다. 교원 임용고사를 치르기 위한 지역 사범대학 출신자의 가산점 혜택은 울산광역시 내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교원대학교를 졸업해야 받을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전KNF, 한국전력기술(주), 한전KPS 등이 출연하여 설립된 한국전력공사 산하 학교법인이 운영하는 원자력전문 대학원대학교이다. 울산대학교는 울산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대학으로, 현대그룹의 故 정주영 회장이 1970년에 설립하였다. 당시에는 공과대학만 있던 울산공과대학이었으나 1985년에 공과대학, 자연과학대학,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조형대학이 설립되어 예술분야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1990년에는 의과대학이 설립되어 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1993년에는 경영대학을, 1997년에는 생활과학대학을 신설하였다. 또한 1998년에는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을 신설하였고 2004년에는 건축대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故 정주영 회장 타계 후 정몽준이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아산스포츠센터와 아산도서관 등 지역을 위한 시설 건립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는 2009년 3월 2일 울산과학기술대학교로 개교한.대한민국 최초의 국립 법인화 대학이다. 광역시로 승격된 지 10년이 되도록 국립대학이 없는 지역이며, 4년제 대학이 단 하나 있었던 울산의 지역민은 국립대학 유치를 희망했고 이에 노무현 전 대통령 공약으로 국립대학 유치가 이루어졌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는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이 개교와 동시에 개설되었으며 학부에는 이공계열과 경영계열의 두 가지 계열만이 개설되어 있다. 이들 계열에는 다양한 트랙이 개설되어 있는데 1학년 때 기초과정을 이수한 뒤 계열구분이 없이 2개의 트랙을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다. 입학사정관제 선도대학으로 잠재력과 가능성을 선발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과학기술의 역량 강화와 고급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산업계와의 협동연구 및 외국과의 교육ㆍ연구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국가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2015년 3월 3일 국회 본회의에서 과학기술원 전환 관련 법률이 통과되고 3월 27일 울산과학기술원법이 공포되어 2015년 9월 28일 울산과학기술대학교에서 울산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하였다. 대현중학교 연암중학교 화봉중학교 학성중학교 무거중학교 삼호중학교 울산제일중학교 울산학성여자중학교 유곡중학교 무룡중학교 울산서여자중학교 방어진중학교 신일중학교 태화중학교 월평중학교 천곡중학교 호계중학교 농소중학교 달천고등학교 울산과학고등학교 현대청운고등학교 우신고등학교 무룡고등학교 화봉고등학교 성신고등학교 삼산고등학교 학성고등학교 효정고등학교 울산여자고등학교 성신여자고등학교 울산공업고등학교 신선여자고등학교 대송고등학교 현대공업고등학교 대현고등학교 남외중학교 울산대공원 동문 인근에 위치한 울산박물관이 2011년 6월 22일 개관하였다. 역사관과 산업사관이 갖추어져 있으며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 울산시의 역사, 유물을 살펴볼 수 있게 돼있다. 시립박물관 이 외에 현재 운영중인 다른 박물관 · 미술관 · 전시관 등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울산광역시의 연극 상영관은 몇 안 되는 시설로 그 수요를 충분하게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영화 상영관은 롯데시네마가 울산에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만들면서 지역토종 영화 상영관이 잠식되어 사라졌다. 울산광역시의 체육시설은 종래까지 남구 공업탑로터리 인근에 위치한 종하체육관이 그 기능을 맡았으나, 2002년 월드컵의 개최로 문수월드컵경기장이 신설되었고 자체적으로 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그 기능을 나누게 되었다. 2013년 12월 31일 현재 울산광역시에는 총 128건의 문화재가 등록되어 있다. 국보 2건(울주 천전리 각석,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을 포함하여 국가지정 문화재는 24건이며, 시지정 문화재는 104건이다. 울주군이 72건으로 가장 많다. 선사시대 문화재에서 근대문화유산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암각화, 전통복식, 건축물, 고문서, 사찰문화재, 고고학 자료 등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울산광역시청에서는 지역 내 관광산업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2002년 12월 24일 울산 12경을 선정하였다. 2013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고속도로 및 국도를 포함하여 울산광역시에 개설된 도로의 총 연장은 3,348.422km다. 도로 포장률은 96.1%이다. 고속도로로는 경부고속도로와 울산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 노선이 걸쳐있으며, 총길이는 62.91km이다. 한편 동해고속도로 울산 ~ 포항구간 건설은 타당성 조사에서 밀려 계속 지연되었으나, 2009년 9월에 착공되어 2015년 12월 29일에 개통되었다. 국도로는 , 7호선, 14호선, 31호선 35호선이 남북을 관통하고, 24호선의 종점이 위치하여 총길이는 185.882km에 이른다. 국가지원지방도는 울주군 상북면에서 인근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으로 이어지는 69호선이 있다. 자동차전용도로로는 7호선, 14호선, 31호선에 있으며 국도 제7호선은 옥동 - 농소간 도로가 개설중이고, 국도가 아닌 일반 간선도로로는 매암에서 전하동으로 가는 울산대교가 2015년 6월 1일 개통하였다. 2014년 3월 10일 현재 울산에는 14개의 업체가 123개의 시내버스 노선을, 8개의 업체가 15개의 마을버스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노선은 간선도로에 집중되어 편성되어 있는 경향이 있으나, 시내순환 지선버스 도입 이후에 이러한 흐름이 개선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타 지역으로 가는 노선은 부산광역시 금정구방면으로 직행좌석버스 2개노선, 기장군 방면으로 일반시내버스 1개노선이 운행하며,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방면으로 일반 2개와 좌석 1개노선, 녹동리 방면 일반 1개노선이 있고, 양산시 통도사시외버스터미널 방면 일반 1개, 좌석 1개노선이 있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 운행하는 시내버스로는 양산 시내버스, 경주 시내버스가 있다. 부산 노포동까지 가는 울산시내버스는 있으나 울산으로 오는 부산시내버스는 서생면까지 운행하는 기장군 마을버스 1개노선이 있다. 고속버스는 남구 삼산동에 있는 울산고속버스터미널에서 발착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대전, 광주, 전주, 동대구, 천안으로 향하는 고속버스가 운행하고 있다. 시외버스는 남구 삼산동에 있는 울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행하는 노선이 가장 많으며, 포항, 안동, 경주, 창원 등을 비롯해 약 40여개의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이 외에 동구에 위치한 방어진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부산, 통영, 동대구행 시외버스 등이 운행하며, 부산, 통영노선을 제외한 모든 노선이 울산시외버스터미널을 경유한다.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울산 시가지로 향하는 울산광역시의 시내버스, 부산광역시와 양산시 등을 잇는 양산시의 시내버스, 전국으로 운행하는 시외버스 노선이 함께 운행된다. 울산시외버스터미널은 도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남구 무거동의 신복로터리와 신정동의 태화로터리, 공업탑로터리 등 중간정차하는 정류소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김해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탑승은 태화강 강변 정류장과 신복 로터리 정류장에서 할 수 있다. 한편 울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는 1일 3회 운행하며, 심야 및 오전에 출발한다. 간선철도로는 동해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장생포선, 울산항선, 온산선 등의 지선이 시역(市域)에 존재한다. 그러나 공업도시라는 특성상, 여객철도보다는 화물철도의 비중이 크다. 여객철도는 태화강역이 중심이며, 호계역이 그 다음의 비중을 차지한다. 2010년 11월 1일 KTX 2단계 개통이 이루어지면서, 울주군 삼남면 신화리에 위치한 울산역이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기존 도심에 있던 울산역의 역명은 태화강역으로 교체되었다. 그와 함께 KTX 울산시티투어와 리무진 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또한 태화강역에서부터 부산광역시의 부전역을 잇는 동해선의 복선 전철화 사업이 2021년에 완료되면, 이 구간은 전동차가 운행되어 울산과 부산을 잇는 광역철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울산은 다른 특별시나 광역시와 달리 유일하게 지하철이 존재하지 않는다. 울산광역시청은 2002년부터 도시 내 교통환경 개선과 대중교통 이용률의 제고를 목적으로 시가지를 운행하는 노면전차 신설을 2014년 말 완공으로 계획하였으나 계획 축소 및 논란으로 사업진행은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후 동해선 전철이 운행될 예정이다. 공업도시로서의 면모가 강하고 국제무역이 활발한 울산의 특성상, 항만교통은 화물에 치중되어 있다. 2013년을 기준으로 울산항의 선박 입항은 2만 5천척으로 대한민국의 12.8%를 점유하며, 항만 물동량은 1억 9100만 톤으로 14.2%를 점유한다. 특히 액체화물 물동량은 1억 5373만톤으로 전국의 34.4%를 점유하고있다.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소속의 울산지방해양항만청과 울산항만공사 등에서 담당한다. 한편 여객 항만 교통은, 인근의 부산과 포항에 밀려 발달하지 못했다. 현재 운항되고 있는 정기 여객 항로는 없으며, 과거 동구 방어동에 위치한 울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일본 고쿠라를 잇는 국제항로가 개설(2002년 4월 25일)된 바가 있으나, 승객 감소로 2004년 7월 27일에 운항이 중단되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남구 삼산동에 1929년에 개항한 울산비행장이 있었다. 울산비행장은 일본 도쿄와 중국 다롄을 연결하는 노선의 중간기착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대구비행장이 개항하면서 울산비행장은 폐쇄되었으며, 현재 비행장이 있던 부지는 주택단지가 되어있다. 2018년 3월 현재 울산공항에서는 김포노선과 제주노선을 운행하고 있는데 현재 취항중인 항공사는 총 3개사이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에어부산) - 대한항공은 현재 제주노선과 김포노선을 각각 운행하고, 에어부산 또한 제주노선과 김포노선을 각각 운행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에어부산과 공동운항]. 울산공항에서는 연내 일본 자매결연도시 국제 부정기편 운항을 추진중이다. 울산공항은 2016년까지 KTX울산역 개통으로 인하여 이용객 수가 감소하던 중 제주항공의 임시취항 때부터 이용객이 증가하더니 에어부산 정식취항 이후로 이용객이 KTX울산역 개통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였다. 현재 울산공항은 한국공항공사 울산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활주로가 국내 타 공항에 비하여 짧은 편이여서 현재는 보잉 737-800~900, cs300, 에어버스 a320,a321등의 항공기가 운행하고 있다. 울산공항의 항공기 이착륙 장면 등을 보기 위해서는 동천강 강변에서 본다면 활주로 처음부터 끝까지도 볼 수 있다. 다음은 울산광역시의 해외 자매도시 및 우호협력도시이다. 중구 (울산광역시) 중구(中區)는 울산광역시의 구이다. 신라시대에는 굴아화현의 일부였다. 굴아화현은 757년에 하곡현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에 우풍현, 동진현과 통폐합하여 흥례부가 되었다. 흥례부는 995년에 공화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018년에 다시 울주로 승격하고, 1413년에 울산군이 되었다. 울산에 면이 설치되면서 중구 지역(1997년에 북구에 편입된 진장·효문·양정동 지역 포함)은 부내면(府內面)이 되었다. 숙종 34년(1708년)에 부내면을 상부내면(上府內面)과 하부내면(下府內面)으로 분리하고, 정조 5년(1781년)에 상부내면을 부내면(府內面)으로, 하부내면을 내상면(內廂面)으로 개칭하였다. 고종 1년(1864년)에 내상면 일부를 부남면(府南面)으로 분리하고, 고종 31년(1894년)에 부내면을 상부면(上府面)으로, 부남면을 하부면(下府面)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울산은 태화강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며, 방어진, 염포, 장생포항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왔다. 서쪽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경상북도 청도군,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경상남도 양산시,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를 접하고 있다.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종주하여 고헌산, 가지산, 신불산, 운문산 등의 준령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고, 태화강 하류에는 현재 신시가지로 변한 삼산평야가 있었으며, 경주 방면인 북쪽에서 내려온 동천은 태화강과 합류하여 울산만으로 흐르고 있다. 울산만에는 국가수출 1위 항만인 울산항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울산본항, 미포항, 장생포항, 울산신항, 방어진항, 정자항 등이 있다. 이들 항만을 중심으로 해안지역은 공업용수가 풍부하고 지반이 경암질로 공장 건설은 물론 산업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울산 지역은 세계적으로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와 진천리 각석 등 이름난 문화재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영남알프스로 유명한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과 진하, 일산해변, 강동, 주전 해변, 대왕암 공원 등 산악과 해안이 공존하는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울산광역시 중구의회의 의원 정수는 11명(지역구9+비례대표2)이다. 현재 중구의 국회의원은 4선의원인 정갑윤이다. 경상남도 울산시 중구에서는 경상남도의원 3명을 선출하였다.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한 이후에는 울산광역시의원 3명을 선출하다가 제5회 지방 선거부터 4명을 선출하고 있다. 울산 중구의 행정 구역은 13개의 행정동, 18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산 중구의 면적은 37km이며, 인구는 2014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92,545세대, 241,407명(외국인 포함)이다. 남구 (울산광역시) 남구(南區)는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의 자치구이다. 태화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중구, 북구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구와 접하고, 남서쪽으로는 울주군으로 둘러싸여 있다. 울산광역시청 청사와 울산 남구청 청사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는 굴아화현의 일부였다. 굴아화현은 757년에 하곡현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에 우풍현, 동진현과 통폐합하여 흥례부가 되었다. 흥례부는 995년에 공화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018년에 다시 울주로 승격하고, 1413년에 울산군이 되었다. 울산에 면이 설치되면서 남구 지역은 대대면(大垈面)이 되었다. 내대면(內大面)과 외대면(外大面)으로 분리되었다가 궁현면(弓峴面)으로 다시 합쳤고, 후에 대현면(大峴面)이 되었다. 고종 31년(1894년)에 여천천을 경계로 내현면(內峴面)과 외현면(外峴面)으로 분리되었고, 1911년에 외현면이 현북면(峴北面)과 현남면(峴南面)으로 분리되었다. 남구 장생포동이다. 과거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포구이다. 장생포 연안은 귀신고래가 많이 서식하는 바닷가라고 하여 울산 극경 회유 해면이라는 이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한 밍크고래,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 종이 다수 서식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고래고기를 먹는 풍습이 없었고, 교통의 미비로 고래고기의 유통 역시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고래잡이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한반도에서 고래잡이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48년 미국에 의해서이다. 장생포에서 고래잡이가 시작된 것은 1899년, 러시아의 태평양어업 주식회사에 의해서였다. 이 회사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포경 허가권을 양도받아 조업을 시작하였으며, 장생포를 고래 해체 작업장으로 이용하였다. 이 때부터 장생포는 포경의 전진기지로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에 포경 허가권은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일제 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장생포의 고래잡이는 일본 포경선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1915년에 한반도 각지의 포경기지가 정비되면서부터는, 장생포가 고래잡이의 중심항이 되었다. 이 때에 생산된 고래고기의 대부분은, 소비량이 많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한반도의 고래잡이는 한국인들에 의하여 스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포경회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 포경선에서 조업을 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 200여명이 출자하여 설립한 조선포경주식회사이다. 이 회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 이들 한국인 종업원들에 대한 체불임금과 퇴직금 몫으로, 일본수산주식회사로부터 목조 포경선 두 척을 양도받아 장생포를 중심으로 조업을 시작했다. 울산 서부지역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울산만을 거쳐 동해로 이어진다. 울산의 지역문화는 전통적으로 태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태화강은 울산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중구 다운동과 남구 무거동을 잇는 삼호교에서 하구까지는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남구의회의 의원 정수는 14명(지역구12+비례대표2)이다. 남구는 국회의원을 2명 선출한다. 현재 남구 갑 선거구의 국회의원은 초대·2대 민선 남구청장 이었던 이채익이고, 남구 을 선거구의 국회의원은 김기현이었으나 김기현은 울산광역시장 출마를 위해 사퇴하고 2014년 7월 30일 보궐선거에서 전 울산광역시장인 박맹우가 당선되었다. 경상남도 울산시 남구에서는 경상남도의원 3명을 선출하였다.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한 이후에는 울산광역시의원 4명을 선출하다가 제5회 지방 선거부터 6명을 선출하고 있다. 울산 남구의 행정 구역은 19개의 법정동과 그것을 관리하는 14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산 남구의 면적은 72.69km²이며, 인구는 2014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32,974세대, 353,362명(외국인 포함)이다. 옛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국내 유일의 고래박물관을 건립하여 1986년 포경이 금지된 이래 사라져가는 포경유물을 수집, 보존·전시하고 고래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해양생태계 및 교육연구 체험공간을 제공하여 해양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2005년 05월 개관했다. 2001년 4월 28일에 개장했으며, 2002년 FIFA 월드컵과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치렀다. 현재 K리그 클래식 울산 현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울산고속도로의 종점이 무거동에 있고, 울산 나들목이 개설되어 있다. 무거동은 남구의 서쪽에 치우쳐저 있기 때문에 중부의 신정동, 달동, 삼산동 일대에서 부산방향으로 갈때는 울주군 청량면의 동해고속도로 청량 나들목이 가깝다. 국도 제31호선이 구의 중부를 지나면서 울주군 청량면과 중구로 연결되고, 국도 제7호선과 국도 제14호선의 중첩구간이 서부의 무거동을 지나면서 울주군 청량읍과 중구로 연결된다. 또한 국도 제24호선(울밀로)의 종점이 무거동에 있으며 울밀로는 울산광역시와 밀양시를 연결하는 도시고속도로 역할을 한다. 울산 도심 철도가 이설되기 전까지 신정동에 동해남부선 남울산역, 달리역이 있었고, 달리역에서 분기한 울산선이 야음동의 야음역으로 연결되고, 야음역에서 울산항선과 장생포선이 분기하여 공단지역에 있는 울산항역과 장생포역으로 연결되었다. 남울산역은 임시승강장, 달리역은 신호장이었고 야음역, 울산항역, 장생포역은 화물역이다. 1992년 8월 20일에 울산 도심구간 철도가 이설되면서 중구 학성동에 있었던 태화강역(당시 울산역)이 삼산동으로 이전하고 상개동에 선암역이 신설되었다. 남울산역, 달리역, 야음역이 모두 폐지되고 울산항선과 장생포선은 태화강역으로 연결되었다. 동구 (울산광역시) 동구(東區)는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의 동부에 있는 구이다. 동구 대부분의 지역을 방어가 많이 잡히는 항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방어진'으로 칭하기도 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인 현대중공업과 자회사 현대미포조선이 위치해 있다. 신라시대 현재의 북구 강동동에 치소를 둔 율포현(栗浦縣)의 일부였다. 율포현은 757년에 동진현(東津縣)으로 개칭하였다가 940년에 흥례부(興禮府)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수로진의 의미로 방어진(防禦陣)이라 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방어가 많이 잡히는 나루터라는 의미로 방어진(魴魚津)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에 사복시 관할의 목장을 두고 방어진목장(魴魚津牧場)이라 하였다. 울산에 면리제가 시행되면서 동면 유등포리, 현종 대에는 유포면(柳浦面, 북구 강동동)에 속해 있다가 숙종 대에 목장 관할 구역을 분리해 동면(東面)이 되었다. 일산동(日山洞)의 지명은 본래 일산(日傘)이었다. 日傘의 뜻은 햇빛을 막는 큰 양산이라는 뜻으로 신라왕이 여름에 일산해수욕장 일대를 찾아 큰 일산을 쓰고 놀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일산해수욕장 우측에 있는 대왕암 공원은 문무 대왕의 왕비가 문무 대왕이 호국의 뜻을 갖고 경주 양남 대왕암에 묻힌 것을 따라 묻힌 곳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573년 인도 아소카왕이 보낸 편지와 황금, 황철을 실은 배가 아곡현(신라 시대 울산의 지명) 사포 지역에 도착했다고 돼있다. 아소카왕의 바람대로 신라왕은 황금, 황철로 장륙존상을 만들어 황룡사에 모셨다. 모형으로 만든 불상은 아곡현의 한 마른 언덕 지역(마골산)에 절을 짓고 모셨다. 이 절이 동축사라고 한다. '동축'은 동쪽의 인도라는 뜻으로 아소카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서축'이라면 신라는 동쪽의 인도 즉 동축이라는 인식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동해안을 끼고 내려오는 동부산지괴의 동대산맥 여러 산들 가운데 마골산이 동구 지역의 주산이 된다. 이 마골산과 엇비슷한 높이의 연봉들이 동구 지역의 서쪽과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면서 방어진 반도를 이루었다가, 동해로 침몰하게 된다. 그리고 동구 지역은 산지가 53%로 전체의 절반이 넘으며, 산으로부터 바다까지의 거리도 짧다. 동구 지역의 산들은 오랫동안에 걸친 외부의 침식을 받아 산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고 완만하여 구릉지대를 연상시킨다. 동구 지역은 길게 뻗은 산자락의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하천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다. 여기에다 낮은 지대는 거의가 공장이나 주거지로 변모하면서 그나마 몇 개 흐르던 하천마저 거의 복개되고 말아, 동구 지역 주민들은 강이나 하천의 존재를 거의 못 느끼지 못하지만, 넓은 동해 바다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울산광역시 동구의회의 의원 정수는 8명(지역구7+비례대표1)이다. 현재 동구의 국회의원은 김종훈이다. 경상남도 울산시 동구에서는 경상남도의원 3명을 선출하였다.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한 이후에는 울산광역시의원 3명을 선출하고 있다. 울산 동구의 행정 구역은 9개동 210통 1,352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36.03km로 시의 3.4%를 차지한다. 울산 동구의 인구는 2014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67,951세대 183,587명이다. 시전체 15.63%를 차지하는데 비해서 면적은 좁은 편이며, 그나마 전체 면적의 36.6%에 해당하는 13.19km가 개발제한구역이다. 북구 (울산광역시) 북구(北區)는 울산광역시의 구이다.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났다고 기록돼 있는 '율포항'를 오늘날 북구의 정자항으로 보기도 하다. 사서에 기록된 '율포' 지명이 변하여 오늘날 유포(정자항의 별칭)가 됐다고 보는 견해를 중요한 한 근거로 한다. 그밖에 박제상과 관련된 유적인 망부석, 치술령 유적 등이 대부분 북구에 있다는 점도 주장의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주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자항에는 '정자항이 박제상이 떠난 곳'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율포항이 정자항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조선 태종 시기인 1418년 개항한 염포는 일본에게 개항한 삼포 중 한 곳이자 오늘날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 지역이다. 왜관을 두어 일본인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염포는 부산포(부산광역시)나 내이포(창원시 진해구)에 비해 일본에서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상대적으로 적게 왕래하였다. «울산염포지도»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염포산 앞 오늘날 성내 일대에 염포 왜관이 있었던 것으로 돼있다. 울산광역시 북구의회의 의원 정수는 7명(지역구6+비례대표1)이다. 현재 북구의 국회의원은 공석이다 북구 설치 후 첫 지방 선거에서는 울산광역시의원 2명을 선출했다. 제3회 지방 선거부터는 3명을 선출하고 있다. 울산 북구의 행정 구역은 8동으로 구분되며, 울산 북구의 면적은 157.344km이며, 인구는 201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65,589세대, 191,196명(외국인 포함)이다. 울주군 울주군(蔚州郡)은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서부에 있는 군이다. 행정구역은 범서읍, 온산읍, 언양읍, 온양읍, 청량읍, 서생면, 웅촌면, 두동면, 두서면,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등 5읍 7면이다.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하에 있는 군 단위 지역들 중에서 달성군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군청 소재지는 청량읍 율리이다. 서쪽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와 경상남도 양산시,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 동쪽으로는 울산 시내와 동해,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이 인접한다. 삼남면에는 경부고속철도 울산역이 있다. 울주군의 전신인 울주구(蔚州區)는 1995년 1월 1일 (구)울산시와 울산군의 통합과 함께 설치되었다. 이 통합은 울산의 광역시 승격을 전제로 추진되었으며, 당시 (구)울산시는 3개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통합과 함께 1개구를 증설하게 되었다. 당시 광역시 추진위원회 등에서는 생활권에 맞게 구의 관할 구역을 북부(중구, 농소), 서부(무거동 등 남구 일부, 범서, 언양권), 남부(남구 대부분, 온산온양권), 동부(동구, 강동)로 조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여러가지 이유로 반영되지 못했다. 결국 구의 관할 구역 조정은 논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구)울산시와 울산군의 합병으로 (통합)울산시가 설치되면서 울산군의 관할 구역에 그대로 구가 설치되었다. 구의 명칭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울산구 35.8%, 서구 33.6%, 울주구 19.2%, 문수구 6.4%, 기타 5%로 나타났으나 3위인 울주구로 결정되었다. 이로인해 (구)울산시와 울산군의 통합은 형식상 대등한 통합이었으나, 울산군이 시에 흡수합병되어 구청으로 격하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울산시 측에서는 “울산군청을 독립된 구청으로 하여 울산군의 기능을 그대로 존치시켜 농어업 정책에 아무런 변화가 없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울산군에서는 “그럼 울주구청장이 울산시장의 영역을 떠나 군수의 권한 행위를 해도 되는건가” 등 일부 반발여론이 있었다. (구)울산시와 울산군의 통합으로 성립된 (통합)울산시는 이후 광역시 승격을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울산의 모든 역량을 광역시 승격 자체에 집중한 탓에 자치구와 군의 관할 구역에 관해서는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6년 4월 20일 (통합)울산시의회에서 광역시승격 건의서를 가결하여 울산시장을 경유, 5월 15일에 경상남도청에 접수되었으나, 이틀 뒤인 5월 17일 경상남도지사는 구·군 설치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완을 지시했다. (통합)울산시는 광주와 대전의 선례에 따라 자치구·군의 개수를 5개로 정하고 6월 11일에 공청회를 열어 자치구·군의 관할 구역을 획정했다. 즉, 구·군 관할 구역 획정이라는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사항이 공청회 한번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렇게하여 중구 일부와 울주구 농소읍·강동면을 관할로 북구를 신설하고 울주구를 울주군으로 한다는 최소한의 구역 조정만 이루어졌다. 울산광역시는 생활권과 행정 구역을 일치 시킬 중요한 기회를 2번이나 놓치고, 울주군은 읍과 면을 포괄할 뿐인 생활권과는 무관계한 행정 구역이 되었다. 또한 이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울산군이었던 역사가 잊혀지고 울주군이 1962년에 설치된 경상남도 울주군이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진 원인이 되었다. 울주군의회의 의원 정수는 10명(지역구9+비례대표1)이다. 현재 울주군의 국회의원은 강길부이다. 경상남도 울주군에서는 경상남도의원 3명을 선출했다.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한 이후에는 울산광역시의원 2명을 선출하다가 제3회 지방 선거부터 3명을 선출하고 있다. 울주군의 행정 구역은 5읍 7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울주군의 면적은 756.05km이며, 인구는 2014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83,191세대, 222,710명(외국인 포함)이다.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는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일본령 조선이 존재했던 기간을 가리킨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약 35년 간 이어진 주요 시대 중 하나이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총독이 조선총독부를 통해 천황의 명을 받아 통치하는 형식으로 식민지배가 이루어졌으며, 정치적 및 외교적으로 전적인 권한은 일본 제국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흔히 통치 정책의 방향을 기준으로 '헌병 경찰 통치기'(1910년~1919년), '문화 통치기'(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일본과 단교하고 양국관계는 끊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여 9월 2일 미군정과 소련 군정 주둔 후 행정권 인수 인계 기간을 거치며 9월 28일까지 유지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일제 강점기(日帝強占期)라는 말을 쓰고 있다. 흔히 일제시대(日帝時代) 등으로 줄여부르기도 한다. 2007년 9월 20일 국회결의안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용어로 대일항쟁기를 채택하기도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일제조선반도식민지파쑈통치()라고 일컫는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의 일환으로 탈아입구를 외치던 일본 제국은 조선이 수교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한반도 침략을 위한 정한론을 제기하였다. 또한 당시 제정 러시아는 남하 정책으로 한반도 진출을 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혼자 이에 맞설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은 인접 지역이 다른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 때문에 초기에는 친일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김옥균 등이 실권을 잡으려는 이번에는 청나라 병력을 사용하여 탄압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고하는 등 국익증진 보다는 세력다툼에 바빴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수립하였고, 1894년 청일 전쟁과 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가시화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 외에도 주권국인 대한제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영일 동맹 및 태프트-가쓰라 밀약 등의 조약을 체결하며, 한국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무력을 동반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데 이어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으로 대한제국의 배타적 권리를 점점 흡수하였다.(이 시기의 자세한 역사는 대한제국이나 개화기 등의 항목을 참조). 국내에서는 일진회와 이완용이 한일 합방에 협력했다. 1909년 7월에 한국의 흡수가 일본 내각에서 결정되었고, 이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명분삼아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자들의 한국 합병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오히려 병합의 추진이 가속화되었다. 윤치호도 당시 이를 두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한일 합방을 더욱 촉진시켰다."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를 '이왕'으로 낮추어 불렀다. 결국 한반도 지역 전체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식민 정부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5년까지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강제 병합 직후 조선총독부는 1910년 9월에 헌병 경찰을 창설하고 무단 통치에 돌입하게 된다. 즉 헌병이 일반 경찰의 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 처분권 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조선총독은 일본군 현역 혹은 일본 예비역 장성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또한 천황의 직속이라 내각이나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총독의 아래에는 행정과 교육, 문화를 담당하는 정무총감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총감이 존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2만여 명의 헌병 경찰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하고 한국인 중 헌병 보조원을 채용하여 헌병들의 업무를 보조케 하여 헌병 중심의 억압 통치를 실시하였다. 헌병 경찰은 치안업무와 함께, 독립운동가 색출 등 민생 전반에 관여하였는데, 여기에 당시 통치의 억압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제도가 조선 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던 태형을 부활시켜 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국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일제는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을 통해 한국인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일본은 제1차 조선 교육령에서 한문 교육 중심의 서당을 폐지하고 초등학교를 설립해 갔다. 기존의 학교는 구제전문학교으로 재편되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재정을 마련하고 일본인의 토지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1912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한부 신고제로 시행, 이를 잘 알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 정부와 왕실의 토지 등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겼다. 침탈된 토지는 일본 이민자들에게 싼 값에 팔렸고 이 때에 종래의 관습적 경작권인 도지권 개념이 무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서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는 회사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여 결국 일본 기업이 대부분의 중요산업을 독과점하고, 일부 한국인이 정미과 피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은 산림령과 임야 조사령, 어업령, 광업령 등을 발표했으며 자원 개발이나 회사 설립 인허가 등을 일본인들에게 유리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자본을 유출시키고, 경제적 지배권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넘어가 한국을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담배과 인삼,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식민지 재정 수입 증대를 꾀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신작로와 간선 철도, 항만 시설을 정비하여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일본으로의 수송 편의를 돕고, 일본 상품의 한국 판매를 효율화하였다. 한편 1920년 17만여 명이던 일본인 거주자들의 숫자는 불어나서 1940년에는 70만 명에 이르렀다. 일부 한국인 지주도 생산성 향상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 그룹의 창립자인 이병철이다. 그는 경남 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나 일제에 쌀을 수출로 얻은 거액의 자금을 밑천으로 1938년에 대구에서 삼성 상사를 설립하였던 것이 오늘날 삼성의 시초이다.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기 시작하였고,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민간의 고등교육을 부정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대우하는 각종 악법들은 잔존하였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또한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는 더욱 더 강화되었으며, '고등 경찰제'와 치안 유지법을 도입하여 독립 운동을 막았다. 또 신문에 대한 검열·삭제·폐간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민족주의에 대한 억압은 지속되었고 이에 반감을 가진 민족주의 세력 내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하여 민족성 개조론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자치 운동 (참정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으로 이 당시에는 일본 제국의 급격한 공업화로 인한, 일본 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었다. 토지를 개량하거나 수리 조합의 역할을 증대하여 한반도의 미곡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오히려 증산되는 양보다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 높아져 한반도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졌다. 거기다 증산 비용을 소작 농민에 전가하여, 총독부가 식민지 지주를 옹호하는 등 식민지 지주제가 심화되어갔다. 이 계획은 1930년대 초반 일본 내부의 쌀 공급 과잉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1930년대 후반 대륙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다시 재개되었다. 또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한 일본 공업 자본의 성장으로 잉여 자본을 통한 식민지 공업화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때 제사, 면방직 등의 경공업 중소 자본의 투자가 증가하였고, 일부 일본 대자본의 투자가 있었다. 한편 한국인 자본의 회사와 공장 등의 성장도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 노동자 수가 증가하였다. 이 때의 임금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은 노동쟁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일제는 만주 사변을 일으킨다. 일제는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 정책도 병참 기지화로 선회하였다. 이 시기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등을 공포하여 사상 통제를 강화하였고 일선동조론을 통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도 이루어졌다. 일제는 대공황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보호 무역 강화로 면방직 원료의 공급이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여 공업 원료를 증산하기 위해 남부에는 면화 재배와 북부의 면양 사육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립하고 광업 분야가 성장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북부 지대에 군수공장을 대거 건립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을 기점으로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국가총동원령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재개되고 미곡공출제가 시행되어, 한국인들은 식량을 배급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원병제와 징용제를 실시하였는데,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폐해는 심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동원할 인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으로부터 조달했으며, 징용과 징발,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징발 독려, 성금 모금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차출해갔다. 1941년까지 약 1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내의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한편,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거나 군수 공장 등지에 보냈으며, 그 중 대부분을 중국과 남양지방의 최전선에 투입하여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 한국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황국신민의 서사의 암기와 신사 참배 및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하였는데, 학교의 한글 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또한 "조선이 일본 영토인 이상 한국어는 일본어 방언이며, 내지 방언뿐이며 궁극적으로 소멸시켜야한다"는 한국어 방언론에 따라 한국어를 강제로 폐기하고 일본어를 모국어화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이 일본인 언어학자들로부터 제출되었다. 1938년 제3차 교육령에서 한국어가 수의(隨意)과목이 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어 사용이 상벌의 대상이 되는 등 '국어(일본어)상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공교육에서 한국어가 추방되기 시작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근거로 일제 당국이 한국어 말살을 도모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한편 1945년 해방 당시 남한의 12세 이상 인구의 78%는 한글 문맹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일본어 강제 보급 정책의 문제성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어가 일상 생활이나 신문 등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1921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능력시험에 합격 한 직원은 승진과 급여 면에서 유리한 대우를 받았었다. 따라서 한국어가 계획적으로 말살된 흔적은 없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 이외의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진행되었음에 비추어, 대부분의 교육과정에서 일본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943년 당시까지도 일본어를 해석하는 한국인은 1,000명당 221.5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료도 있어 명확하지 않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하여 한반도는 독립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즉시 철수한 것은 아니고 미소 군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당분간은 통치 상태를 유지하였었다. 연합군에 의해 한국인 출신의 전범들도 처형되었다. 1946년 통화 사건으로 독립군이 일본군 패잔병을 진압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안악 사건에서 시발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1911년 윤치호, 이동휘, 양기탁, 김구 등 신민회 간부들을 대량으로 검거, 검속하여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김규식, 이승만 등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해외로 망명한다. 그 후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비밀결사의 길을 걷게된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무단 통치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항일 운동이었던 항일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의 무단 통치로 점차 쇠퇴하였다. 대부분의 의병계열들은 간도나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였다. 또한 각종 공직자 채용 시험과 각종 산업시설의 인허가에서도 일본인에게 우대 혜택을 주게 되면서 한국인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탄압과 차별 정책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 형태로 변화하였는데, 교육과 종교 단체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와도 연결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규합하였다. 대표적 단체로는 대한 광복회와 독립 의군부, 송죽회, 조선 국권 회복단 등이 존재한다. 특히 대한 광복회는 의병 출신과 애국 계몽 운동 계열로, 군대식 조직으로 구성되어 대구에서 활동하였는데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상도 관찰사였던 친일파 장승원 등을 처단하는 등 친일 부호를 처단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국권 반환 요구를 시도하고 의병 전쟁을 계획하였는데, 대부분 유생 출신자였다. 이들은 고종 황제의 복위의 복벽주의를 내세웠으며, 신민회 이후의 거의 모든 단체가 공화제를 내세운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송죽회는 평양의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독립 운동 단체 전달하였는데, 교회를 통한 민족 의식 고양과 여성 계몽운동에도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량 서당과 기독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었고,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교육운동도 존재하였다. 개신교 계열 학교들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천주교 계열 학교들은 1920년대부터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북도와 함경남도, 북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종교계열 학교들은 영어, 라틴어, 서양식 기계기술, 수학, 물리학 및 세계사, 성서 구약과 신약 등을 가르쳤다. 일제의 헌병 통치에 의해 많은 의병 부대와 지식인층 등 애국 계몽운동 인사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에 만주의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경학사, 한족회, 부민단 등이 결성되었고,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가 만들어졌다. 북간도에서는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가 설립되었고, 대종교 인사들이 주도가 되어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이 결성되어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이 꾸려졌다.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어 민족 운동이 근거지가 되었다. 이에 13도 의군과 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1914년에 수립되었고, 후에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와 대한 국민 의회 등이 수립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중국 관내의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김구 등이 주축이 되어 신한 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 단체는 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반을 조성하는 도움이 되었다. 미주 지역에서는 안창호가 주도한 대한인 국민회와 흥사단이 결성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따로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군인을 양성하였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은 식민 치하의 한국인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의 침투를 우려하였다. 김성수는 민족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운다. 우선 그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김성수 등은 무명옷을 교복으로 했을 때 인촌은 옷감의 국내 자체생산 및 조달을 생각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한국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인텔리들을 설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김성수는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 출발점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1918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한국의 지식인들, 청년층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 해방 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대규모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윤치호 등 일부 인사들은 이 만세 운동이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음으로써 3·1운동은 시작되었다.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간도·시베리아·연해주·미주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약 2개월에 걸쳐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군 가운데 229개의 부·군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를 벌였으며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 학살·고문·심문·방화 등 무력 탄압으로 3·1운동은 차츰 사그라졌다. 이 운동으로 정부 수립 운동이 활성화 되었고, 항일 무장 투쟁을 촉진하였다. 또 독립 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에 변화가 일어나 복벽주의가 청산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어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또 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학생들이 민족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농민, 노동자, 여성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윤치호 등은 한국인 민중의 희생자를 냈음에도 지도자들이 적극 앞장서지 않은 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요리집과 백화점이 유행하였다. 음식점으로는 명월관, 국일관, 천리구 김동성과 근농 여운홍이 운영하던 백화원, 부민관, 백화점으로는 화신백화점 등이 유명하였다. 명월관은 경성, 부산, 도쿄에 지점이 있었는데 한국인이 운영하던 것이었다. 국일관이나 화신백화점 등은 8도를 중심으로 대도시에 지점을 두기도 했다. 화신백화점 외에도 미쓰코시 백화점 조선지점이 등장하여 1945년 9월까지 경성에 지점을 두었다. 백화점의 등장으로 송상, 만상, 유상 등의 상인들의 활동은 1930년대 이후로 크게 위축되었다. 영화관은 군청소재지, 부청소재지나 읍소재지, 시장이 존재하는 규모가 큰 면에 존재하였다. 교육을 받지 못한 백성들도 말과 단어는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영화관에 출입하였다. 그러나 영화관을 가기 힘든 오지에는 각종 서커스단, 곡예단의 방문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텔레비전은 1920년 이후에 출현하였다. 라디오의 보급은 구한 말 이후 확산되었지만 얼굴과 화면이 등장하는 텔레비전의 구입은 쉽지 않아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마을의 공회당처럼 활용되기 시작했다. 손탁호텔 등 경성부내에 소수 존재하던 서양식 호텔이 경성부의 조선호텔, 신라호텔 등을 시작으로 1920년대 이후 각지의 지방 대도시로 호텔과 모텔이 확산되었다. 호텔, 모텔의 등장과 함께 여관과 여인숙, 민박 등도 확산되었다. 1920년대에 가면 한국인들의 헌병보조원, 일제 관료에 많은 응시생들이 응시하였다.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 수준에 불과했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경쟁률이 10대 1을 웃돌았다. 결국 한국인 공무원, 헌병보조원 수험생이 많아지자 경쟁률은 계속 높아졌다. 3.1 운동 직후에는 만세 운동의 여파로 응시생이 적었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헌병보조원과 판임관 등의 응시자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1926년의 헌병보조원 856명 모집에 9천193명이 지원, 약 10.7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년에는 854명 모집에 1만6천193명이 지원해 19대 1로 경쟁률이 수직 상승했다. 19.6대 1로 정점을 찍은 1935년 이후 순사에 대한 선호는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경쟁률이 10∼20대 1에 도달하였다. 3·1 운동 이후 각 지역의 정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의 독립 운동의 구심점의 역할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후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와 상하이 임시 정부가 해산한 뒤, 13도 국민 대표 회의로 수립된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중국의 프랑스 조계지였던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족시켰다. 임시 정부는 초반에는 대통령제를 표방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외교론자로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임시 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 활동에 소득이 없고, 이러한 외교론의 위기 속에 시도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이 상하이로 알려지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변에 모였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이 이탈하여 민족의 대표기관의 명맥을 잃게되었다. 이후 김구의 활약으로 다시 살아나기까지 임시 정부는 긴 침체기를 갖게 된다. 한편 간도와 만주, 연해주 등지를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 무장 단체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함경남도 혜산 일대와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때 홍범도 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1920년 6월). 또 김좌진(金佐鎭)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 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각 부대들은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독립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시련을 겪은 무장 독립운동 세력들은 다시 결집하고자 민정 및 군정기관 형태인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를 조직해 재정비하고자 하였지만, 1925년 일본제국과 만주군벌 장작림간의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어 만주에서 활동하는 무장 독립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1920년대 말에는 남만주 지역에 참의부, 정의부가 통합하여 국민부가 결성되어 훗날 조선혁명군으로 결성되었으며, 북만주에 신민부는 혁신의회로 통합되어 한국독립부으로 계승된다. 이들은 한중연합작전을 통해 대전자령 전투, 영릉가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은 공황 속에서도 노동 쟁의·소작 쟁의·학생 운동·사상 운동 등 일련의 항일 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3 ·1 운동 이후 최대의 6·10 만세 사건(1926년)과 광주학생운동(1929년)이 일어나 일본에 일격을 가했다. 또한 만주 지방에서는 유망민중이 교민회를 조직하여 자활을 모색하였으며, 많은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국내외에서 일본 요인의 암살, 파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1920년대에는 서양의 문물이 확산되면서 소수 양반가에서만 입던 양복과 드레스, 원피스, 정장 등이 시중에 확산, 중소도시의 중산층과 평민층에게도 확산되었다. 일본식 옷에 반감을 품은 지식인층은 의도적으로 양복을 사서 입기도 한다.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유교적 규범이 수그러든 자리에 사랑과 연애를 적극 받아들였다. 1930년 7월 16일자 한 일간지의 기사에는 이것이 상세히 묘사되기도 했다. 남녀간의 연애 풍조가 적극적으로 확산되고, 언론과 방송에도 보도되자 보수적인 유교사상가와 성리학자들은 일제가 탈선을 부추겨서 한국을 멸망시키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도포와 갓을 쓴 유림들이 방송사와 신문사에 집단으로 몰려가 항의를 하고, 언론사를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외모와 능력을 따지는 계산적 연애를 앞세우는 21세기와 달리 당시 연애는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정사(情死) 사건이라 하였다. 1920년부터 1940년 무렵의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자살, 정사'로 분류되는 기사만 8000건이 넘을 정도로 당시 정사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사랑에 미쳐 죽는 것을 '절대미의 극치'로 칭송했다. 비련의 사건은 상업적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김우진과 투신자살 직전에 남겼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노래로 한 음반은 최초로 10만 장을 돌파할 만큼 전례 없는 판매액을 올렸다. 절세 기생 강명화의 음독자살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경상북도의 부호의 아들 장병천을 사랑한 강명화는 기생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 당하자 자신의 사랑에 대한 순수성을 증명하려 단발(斷髮)에 단지(斷指)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강명화는 장병천의 품에서 약을 먹고, 죽은 애인의 뒤를 이어 장병천도 쥐약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또 돈 때문에 열일곱의 나이에 마흔이 넘은 남자에게 시집갔다가 이혼한 뒤 카페 여급이 된 김봉자와 경성제대를 졸업한 유부남 의사 노병운의 비극적 정사는 1934년 인기 가수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동성애는 극악한 범죄이거나 서양의 금수같은 습성으로 여겨져 심한 탄압을 받거나, 정신과에 입원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 여자로 동성 연인 관계였던 김용주와 홍옥임의 동반 자살 등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신 문물과 연애 사조의 확산과 함께 이혼도 등장하였다. 1920년대 도쿄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구시대 여성을 배우자로 둔 남자들이 신여성과 연애에 빠져 비롯된 현상이다. 1930년대에는 ‘제2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학업을 마친 신여성들이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해 첩이나 후취로 들어감에 따라 이들을 ‘희생자’로 이해한 표현이다. 1921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날로 늘어나는 이혼 소송의 대부분에 대해 “남편의 부족을 들어 여자 편에서 고소함이 다수”라며 경성지방법원에 제기된 사례들을 소개했다. 당시 이혼 사유의 상당수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지 못한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여자가 이혼을 청구한 것이다.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만주로 간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가정이 파탄에 이른 사례도 많았다. 이혼이 급증하자 동아일보는 1924년 신년 지상특집에는 각계 지식인과 저명인사 10명에게 ‘이혼 문제의 가부’를 묻는 기사가 10회 연재됐다. 이혼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음에 아니 맛는 부부간에는 누가 반대를 하던지 단연히 리혼을 하야서 양양한 전도를 그르치지 안는 것이 가할 줄로 안다”(방성옥)거나 “실흔 사람과 엇지 백복의 원인이 된다하는 부부가 되겟슴닛가”(방정환)라며 이혼 결행을 촉구했다.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민족 지도자들은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한반도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또한 일본 유학의 급증과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한 학교 설립에 자극을 받아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은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다가 실패하고 만다. 일본 자본의 침투와 함께 신사상의 출현으로 서양 제품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1920년초부터 김성수, 안재홍, 윤치호, 이광수, 조만식 등은 강연, 계몽 활동을 다니며 국산 물건,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김성수, 이승훈, 김병로 등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은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1919년의 3·1 운동 당시의 집단 시위의 효과를 보고 크게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에 의해 노농 운동이 급격히 발전했다. 1921년 9월 부산의 부두 노동자 5,000여 명의 총파업, 1923년 8월 평양의 양말 공장 노동자 2,000여 명의 파업, 1923년 9월부터 1년이 넘게 전개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 소작 쟁의, 192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원산 총파업, 그리고 1930년 1월 3,0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1개월 동안 전개했던 부산 조선 방직 파업 투쟁 등이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생존권 투쟁이었던 노농 투쟁은 점차 항일 민족 운동화되어 1930년 5월 함경남도 신흥의 장풍 탄광 노동자 300여 명은 노동 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일본인 자본가와 경찰에 맞서 탄광 시설과 사택을 부수고, 총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게 도끼·망치·곤봉으로 맞서 육박전을 벌였다. 1930년 7월 함경남도 단천의 2,000여 명 농민들이 일제의 산림 정책을 반대하여 군청을 포위·습격했다가 여러 명이 일경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자·농민들의 대중 투쟁은 생존권 확보에서 출발한 싸움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지배 구조를 반대하는 항일의 성격을 띤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이었다. 1924년 김성수, 송진우 등의 주도로 자치화 운동을 목적으로 한 단체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1920년대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국내에 널리 퍼져 서울청년회·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 사상 단체가 대거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농 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공산당 건설에 힘을 기울여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했으며, 1924년 4월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결성함으로써 공산주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사회주의 세력은 일제의 치안유지법 하에서 활동을 하기 힘들어지자 공개적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 해외에서 국공합작과 민족유일당 운동과 같은 좌우합작 분위기가 불어오고, 국내에서 천도교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의 계기가 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통해 우경화되었고, 민족주의 세력은 조선 민흥회를 결성하여 좌파 세력과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줘, 민족 유일당의 전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게 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결성했다. 신간회 결성 후 각 지방에서 신간회 지회가 잇달아 결성되었는데, 1928년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 본부와 각 지회는 당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갖가지 대중 운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특히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 대회를 준비하여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일제는 민중 대회 사건을 빌미로 삼아 신간회의 중앙의 핵심 간부 40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부터 신간회의 활동은 움츠러들었고, 1931년 5월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해소되었다. 1920년-30년대에는 봉건과 근대의 가족 형태가 섞이기 시작하였다. 유교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과 반감으로 별거와 독신, 우애결혼 등 대안 가족의 이념과 형태가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 이후 남편이 부인을 집안에서 축출하는 소박 형태의 이혼만이 존재하던 한국 사회에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제기하는 이혼 형태가 점차 급증하였다.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 현상의 하나가 이혼(離婚)이었다. 근대의 제도가 이식되고 신여성, 자유연애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면서 이혼도 증가하였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7년과 1918년의 이혼 건수는 1만542건과 1만498건으로 1만 건을 넘기면서 일제강점기 최고를 기록했다. 이혼 건수의 결혼 건수에 대한 비율은 1910년대 7%였고 1920년대 이후에는 4% 안팎을 유지했다. 당시 이혼은 신문 사설이 비중 있게 다룰 정도로 큰 사회문제였다. 1920년대에는 부부간에 아이를 낳지 않고, 재산은 각자 재산을 갖고 있되 공동부담으로 처리하는 우애결혼이 등장하였다. 이후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고 서로 원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지금 봐도 파격적인 조건의 '우애결혼'은 193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나혜석, 김원주, 박인덕 등의 여성 운동가들은 가부장제를 봉건 사회와 전제정에 비유하여 비판하는 한편, 이혼을 할 자유를 요구하는 강연과 칼럼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반 당시의 사회에서는 이혼을 범죄시, 터부시하였으나 이혼이 증가하면서 1930년대에 가서는 공식석상에서 이혼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게 된다. 1930년대 초에는 자유연애를 부르짖은 신여성들의 대담한 선언으로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외친 시인 김원주를 비롯해 정조란 오직 취미에 불과한 것이라는 '정조취미론'을 내세운 나혜석,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주장한 허정숙 등은 화제가 되었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항거를 넘어 여성도 ‘이것저것 맛 좀 보자’는 주장은, ‘애욕의 순례자’라는 비난을 여성들에게서 듣기도 했다.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박인덕의 이혼 사건과 파리에서 한 자유로운 연애와 염문이 화제가 된 나혜석 등은 연일 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윤치호 등 일부 사회 운동가들은 이혼녀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에 맞서 이들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애정없는 육체의 결합을 미화시킨 허정숙 등의 의견에 대해서는 연일 지탄과 비판 여론이 등장하였다. 1931년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 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인텔리들에게 이를 호소했고, 이들의 호소에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활동을 하게 된다. 1931년 7월 동아일보에서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타파운동을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얻어 ‘브나로드’라는 슬로건 아래 농촌계몽에 나섰다. 이 운동은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술을 가르쳤고, 학생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시국강연·위생강연을 담당했으며,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며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각종 계몽과 칼럼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한국인들의 살 길이고, 실력 양성을 위해서라면 일단 문자와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들 자신이 앞장섰고 심훈, 나혜석, 허정숙, 최용신, 심대영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이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수많은 청년 지사들의 동참으로 한국인의 언어, 문자 식자율은 1910년 10%에서 1936년 무렵에는 65%까지 상승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했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김성수, 송진우와 동아일보 등을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하였지만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1930년대에 들면서 혁명적 노동 조합·농민 조합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노동 조합 활동가들은 지하에서 비합법적인 준비 조직을 결성하고 표면으로는 합법적인 노동 조합, 파업 본부, 노동자 친목회 등을 결성하여 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공장 신문·팜플렛·전단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 최저 임금제, 동일 노동·동일 임금을 선전하고 나아가 민족 해방 운동을 선동했다.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은 공업 시설이 집중된 흥남·함흥·원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1~35년까지 혁명적 노동 조합 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의 수는 전국에 걸쳐 1,759명이나 되었다. 농민 조합 운동가들은 농촌 내의 기존 청년 동맹·여성 동맹·소년 동맹을 혁명적 농민 조합에 편입해 각각 농민 조합의 청년부·부녀부·소년부로 만들어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농민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적 농민 조합의 지도 하에 농민들은 격렬한 반일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함경북도 명천의 농민들은 동과 면마다 계엄대·동지 탈환대·규찰대·연락대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등 투쟁을 대중적 폭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혁명적 농민 조합은 전국 70여 개 군에 조직되었고, 1931~35년에 경찰에 적발된 혁명적 농민 조합 사건은 43건, 검거된 사람은 4,121명에 이르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더욱 엄혹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1936년에는 한규복 등의 인물이 참정권을 얻어낼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 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 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한규복과 박춘금 등은 일본의 전쟁에 조선인들도 일본의 국민이니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본국 정부에서는 이들의 한국인 학병 참여 주장이 한국인 참정권 획득이 목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사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본은 한국인들의 자발적 학병 참여 운동을 막지 않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한국 최초의 독신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와 사회, 유림들과 보수적 지식인들까지 나서서 이를 문제로 지적하며 해결하려 하였다. 독신자의 등장과 30세가 넘어서 결혼하는 만혼자의 증가에 유교성리학자들과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사회의 붕괴를 우려했고 말세라는 여론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1933년 12월 잡지 '삼천리'가 개최한 '만혼타개좌담회'에서 나혜석과 이광수 등이 패널로 참여하여 이 문제를 토론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중반,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국과 유럽 등에게서 유입된 근대적 개인주의 사조의 유입과 여성의 자의식 확산, 경제적 궁핍, 민족적 시련을 경험하면서 가족과 결혼 제도에 대한 극심한 가치관 혼란을 겪었다. 또한 개인주의 사상을 죄악시, 터부시 하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반감, 유교성리학자들과 보수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개인주의와 합리주의, 쾌락주의 사상은 점차적으로 확산되어갔다. 1930년대의 경제공황은 미국과 유럽에도 영향을 미쳤고 일본과 아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제공황으로 실업과 빈곤이 심각했던 1930년대엔 만혼 풍조와 결혼 기피가 사회 현상으로 떠올랐다. 이에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하는 '만혼을 타개하자'는 내용의 좌담회까지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호응도는 낮았고 일시적으로 만혼과 이혼이 줄어드는 듯 하다가 다시 만혼, 이혼, 독신이 증가하게 된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한국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개인적인 정책에서 출발한 것으로 일본 제국 조정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라 일본인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42년 미나미가 조선총독에서 해임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나미 지로에 의해 발표된 이후 창씨개명령은 한국인의 집단 반발 외에도, 일본 내부의 반대와 비난, 조선총독부 내부에서도 총독부 직원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만 해도 창씨개명에 반대하였다. 또한 일본 내지에서도 반대론이 거셌다. 식민지 조선과 일본 내지에서 반대가 얼마나 거세게 일었던지 윤치호는 1940년 7월 5일자 일기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이 경질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 계획을 밀어붙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창씨개명령 시행을 발표하면서 한국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춘원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 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광수는 앞장서서 창씨개명하였다. 이후 그에게는 무수한 협박과 투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 이라고 답하였다. 창씨개명 시행은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반발은 거셌고, 친일 인사들조차 혼란에 빠졌다. 창씨(創氏)의 강압 속에서도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일본 내지 쪽에서는 특히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들이 총독부 후원 기관으로 조직한 '중앙조선협회'가 맹렬한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총독부 내부에서조차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국을 중심으로 반대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창씨개명을 반대했는데,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의 약화를 두려워했던 이유가 컸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내선일체의 완성이라고 선전했으나, 일본의회의 대정부질문에서는 '조선에 본적을 둔 조선인은 일본으로 본적을 옮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일본인도 조선으로 본적을 옮길 수 없다'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분리·차별은 계속될 것임을 드러냈다. 일본인들은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창씨개명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한국인들의 창씨개명 반대 만큼 일본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일본인의 반대 여론이 의외로 높았던 것을 두고 후일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약화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총독부 내부에서도 창씨개명에 반발했는데, 특히 조선총독부 경찰은 한국인이 똑같이 일본식 이름을 쓰게 되면, 그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으며, 내지측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려가 높았다 는 것이다. 1940년 1월 초 총독부는 창씨개명이 한국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한국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한국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한국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고, 결국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한편 한국의 정치 지도자 중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1940년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5월 1일 오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오전 11시 그는 총독부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을 면담했다. 미나미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 형식으로 창씨개명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총독이 한국인을 배려한다며 총독의 뜻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1939년 12월부터 창씨개명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자고 권고한 이광수 조차 총독의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창씨개명을 해도 좋다는 주장에 의혹을 제기한다. 이광수는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대부분이-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이라며 창씨개명 거부 이후의 불이익을 예상, 우려하였다.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창씨개명에 시종 부정적이었던 윤치호 역시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에 가해질 불이익을 염려하였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창씨에 참여하였고 경성부청과 구청, 각 부청과 군청사 등에는 창씨개명을 하러 자발적으로 몰려든 주민들로 인해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반면에, 창씨개명의 강요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나타났다. 한편, 이와 같은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고, 6개월간 신고하도록 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신청률이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더욱 협박하고 강요해 신고 마감 시기까지 80%인 322만 가구가 창씨개명하였다. 창씨계출(創氏屆出) 초기에는 일부 친일파들이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려고 몰려들어 경성부청과 구청, 그 밖의 부청과 군청사 등이 혼잡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창씨개명은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협박·강요하여 신고마감 시기까지 322만 가구, 79.3%로 창씨율을 끌어올렸다. 창씨개명은 1946년 미군정과 소련 군정에 의해 폐지된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위안부와 징용자들을 모집하였다. 이 와중에 직공을 차출한다는 광고를 보고 속임수로 끌려간 이들도 있고 일부는 광고를 보고 자발적으로 위안부나 징용으로 가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일부 일본 여성과 타이완, 중국 대륙, 동티모르, 필리핀, 소수의 네덜란드 여성들이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 혹은 군납 업체에서는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해 신문 광고, 잡지 광고, 방송 광고 등을 통해 모집 광고를 냈다. 하지만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피해자는 최소 4만 명에서 최대3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944년 당시 위안부 모집은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에 있었으며 징모 담당자는 허씨 였다. 다만 군인이 모집할 경우에는 소속 부대와 관등성명이 기입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모집광고를 보고 찾아가기도 했다.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에서는 위안부 모집 광고, 방송 등이 실렸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를 거부한 언론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이 유일하였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징용자와 위안부 차출 혹은 공출, 자원 징용자, 자원 위안부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조선총독부에서도 더이상 한국인 지식인들의 참정권 요구, 자치권 허용 요구를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1940년대 초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팔렘방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고, 팔렘방에 있던 위안부들은 ‘제1명월관’과 ‘제2명월관’ 두 곳에 나뉘어 있었고, 명월관은 일본군에 협조하며 위안부를 관리하는 한국인 형제가 운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도하의 독립 운동은 1920년대 중반 대체로 침체 되었으나, 김구의 주도하에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해외의 동포들이 격려 편지와 자금을 보내왔다.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에게 일본 총독의 암살을 지시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또한 윤봉길을 시켜 상하이 사변 승전 기념 천양절에 폭탄을 던져 적잖은 일본인 사상자들을 발생시킴으로 성공하였다. 이후 두 천황 암살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숨어 다녀야 했으나 난징으로 거처를 옮긴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로 임시 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를 지원하였다. 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간 상해에서 피신하여 1933년에는 장제스와 항일 전선 협력에 합의하였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10월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재직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함과 함께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난징과 창사를 거쳐 1940년에는 충칭(重慶)으로 그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서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태평양 전선에서 확대된 1941년 12월 9일에는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 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국에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1932년 12월 박영효가 귀족원 의원에 칙임된 예가 있었고, 1941년에 윤덕영(尹德榮)과 박중양이 선정되었는데 박중양은 이때 귀족원 의원직을 사양했다. 그러나 박중양은 1945년 4월 3일 두 번째로 귀족원 의원직에 임명되자 이때는 수용한다. 1943년에는 이진호가 칙선되고 있었지만,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까지의 귀족원 의원은 임명되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거절한 인물은 박중양이 유일했다. 1936년 한규복, 박춘금 등의 한국인 참정권 운동을 경계하였지만 1940년 태평양 전쟁 이후 병력, 물자의 부족으로 한국에서 병력, 물자를 공출해가면서 한국인에게도 그에 대한 급부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국 정부에 한국인들에게도 참정권을 줄 것을 요구하여 1945년에 비로소 일본 의회를 통과하였다. 일본 제국 국회의 상원 격이었던 귀족원에 한국인 출신 의원이 선출된 배경은 한국인들의 참정권 요구가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징병제가 일본 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 실시되었던 것에 비해,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원안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족원 의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金明濬), 박상준(朴相駿), 박중양, 송종헌(宋鍾憲), 윤치호(尹致昊), 이진용(李珍鎔), 한상룡(韓相龍) 등이었다. 한편 한국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 1945년 당시 한국인 귀족원 의원으로는 박영효, 윤덕영, 이진호, 윤치호, 김명준, 박중양, 박상준, 송종헌, 이기용, 한상룡 등이 선임되었다. 초기에 박영효, 윤덕영, 이진호, 김명준, 박상준, 송종헌, 이기용, 한상룡 등을 선정하고 1945년에는 박중양, 윤치호를 추가로 선임하였다. 한국인 지식인과 관료들의 참정권 요구에 답변을 회피하던 조선총독부는 자발적으로든, 타발적으로든, 권고에 의해서든 한국인들이 태평양 전쟁에 강제 징집되거나 자원해서 입대하자 이를 계기로 본국 정부에 계속해서 한국인의 참정권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0년부터 총독부의 요구는 결국 1945년 1월에 가서야 통과된다. 한국인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가 법률로써 실현된 것은 1945년 1월의 일본 의회를 통과한 법률 제34호 '중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 율안'과 칙령 제193호 '귀족원령 중 개정안'에 의해서였고, 참정권 부여는 한반도와 타이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사학자 김유리는 참정권 문제 해결이 늦어졌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한반도에 대한 징병 실시가 발표되었던 1942년의 시점에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 발표 시기에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고, 오히려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고 있었던 문제가 2, 3년의 잠복기간을 거친 후 한국인들의 강한 요구라는 구실을 빌어 해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고 비판한다. 원래 귀족원 의원의 피선거권은 일본은 '제국신민인 남자로서 연령 30세 이상인 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부여된 참정권도 일부 제한이 있는 것이었다. 먼저 귀족원 의원의 경우는 한반도와 타이완에 거주하는 만 30세 이상의 남자로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칙임된 사람 10명 이내를 참가시키며, 7년 임기로 하였다. 이 10명의 귀족원 의원 가운데 몇 명씩을 배당할 것인가에 대한 명문 규정은 없었으나, 7명을 한반도에, 나머지 3명을 타이완에 할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귀족원 의원들은 1945년 4월에 鈴木 내각이 성립한 직후의 임시의회에 참가하고 있다. 원래 일본 출신 일본 귀족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와 타이완 출신 의원의 임기를 7년으로 한 것은 또 다른 차별을 만든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건의를 수용한 일본 정부는 시간이 지나면 하원격인 중의원에도 한국인을 참가시킬 계획이었다. 중의원에 있어서는 공선(선거)에 의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있는 만큼 선거의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일본 본국과 조선총독부 모두 보통선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고, 때문에 선거 방법은 제한선거에 의할 것으로 결정되었다. 즉 선거권을 제한하는데 있어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일제는 직접 국세 15원 이상을 납부하는사람을 선거권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이미 실시하고 있었던 지방자치 단체 의원 선거의 경우 보다도 그 자격 기준이 훨씬 더 강화된 것인데, 당시 도회, 부회, 읍회, 면협의회 선거의 선거권도 그 자격 기준이 국세 5원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중의원은 일본 제국 귀족원과 중의원에 안건이 계류중에 있던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되면서 전면 백지화된다.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하여 그해말까지 전(全)만주를 점령하자, 만주에 있던 한국인들은 즉각 무장을 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먼저 양세봉(梁世鳳)· 이청천(李靑天) 등 민족주의자들이 이끌었던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한중연합작전을 전개해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일제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차츰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1932년 봄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던 동만주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유격대를 결성하고 게릴라 활동등 전개해 반일 투쟁에 나섰다. 중국 관내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한빈(韓斌)·김학무(金學武) 등 130여 명이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심리전, 적후방에서 벌이는 첩보 활동 및 선무공작등에 종사했다. 조선 의용대의 주력 부대는 1941년 봄에 황허 강(黃河)을 건너 한국인이 많이 사는 화베이(華北)지방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의용대원들은 이곳에서 팔로군과 협력하여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다. 한편, 중일 전쟁 발발 후 일본군에 쫓겨 자싱·항저우·창사 등지로 전전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했는데, 그해 9월 간부 12명으로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1942년 화베이로 가지 않은 조선 의용대의 잔류 부대를 흡수하여 대열을 늘리는 한편, 1943년 8월 광복군 8명을 미얀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을 도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차츰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한국인의 해외 단파 방송 청취를 엄중히 단속 하였지만 경성 방송국의 직원이 독립 운동 차원에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들은 것이 일본 경찰에 의해 들켜 수많은 방송인들이 옥고를 치른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이 찾아옴으로서 한국의 모든 독립 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일본과 단교했다. 한편, 같은 날 일제강점기 조선의 북쪽 청진시에서는 소련이 일본 제국과 전쟁을 계속 하고 있었으며 8월 16일에 청진시를 해방시켰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2일부로 한국 13도의 관찰사를 도장관으로 명칭을 바꿨다가 1912년부터 도지사로 바꾸었다. 또한 도지사 아래 부지사를 두어 도지사의 업무를 보좌하게 했고, 이방, 호방, 예방 등 각 방을 근대식 각 국과 과로 나누었다. 또한 규모가 큰 부에는 국장급을, 작은 부에는 과장급만을 두어 예하 행정체계를 구성하게 했다. 행정기관은 면리제와 동제,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반제였던 것을 도시지역은 동(洞) 대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町)을 쓰게 하였다. 또한 부 중에서도 규모가 큰 부는 다시 몇개의 동을 묶어 한개의 구(區)로 나누었다. 관료의 채용은 향리가 세습하던 것을 폐지하고 공개채용 시험과 고등관 시험, 판임관 시험 등의 채용시험으로 전환하였다. 관료들의 직위는 군속, 면속으로 칭하고, 기수(서기), 기사, 주사, 사무관, 서기관 등의 직위를 적용하고 차등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의 수사, 검열 등의 편의를 위해 한국인 출신의 순사보조원과 헌병보조원 등의 사무보조원을 채용해서 썼다. 또한 1920년대 부터는 직접 한국인이 순사, 헌병, 훈도 등의 공개채용 시험에 계속 도전, 응시하기도 했다. 3·1 운동의 불씨가 남아있던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 수준에 불과했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경쟁률이 10대 1을 웃돌았다. 1926년에는 856명 모집에 9천193명이 지원, 약 10.7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년에는 854명 모집에 1만6천193명이 지원해 19대 1로 경쟁률이 수직 상승했다. 순사 등에 대한 19.6대 1로 정점을 찍은 1935년 이후 순사에 대한 선호는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경쟁률이 10∼20대 1에 이를 정도로 순사직이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이를 두고 연세대학교의 장신은 "순사는 조선인 사회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법률로 보장된 권한 탓에 해마다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고 지적하면서 "관리의 최말단인 까닭에 지원자의 학력 수준은 보통학교 졸업자가 80% 정도를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출생 신고나 사망 신고는 읍사무소, 면사무소의 호적계에서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글자를 모르는 문맹율이 높아 동네의 이장, 통장, 정장(町長)이 거둬서 읍, 면사무소에 신고하였다. 따라서 출생이나 사망 직후 일주일에서 1개월 이상이 지난 뒤에 출생 신고나 사망 신고 처리가 되었다. 또한 당사자가 가서 출생 신고,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이장, 통장, 정장이 일괄적으로 모아 일주일에 1~2회, 혹은 장날 읍사무소, 면사무소에 나가서 신고하였는데 종이나 필기구에 적어가거나 단순히 구술 암기로 외워서 신고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생년월일이 부정확하거나, 양력과 음력을 헷갈리거나, 사망 날짜가 정확하지 않거나, 출생, 사망신고 당시 이름글자가 바뀌어서 엉뚱한 이름으로 등록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이송이나 옮기던 중 개울 혹은 산사태 등의 사고로 지연되는 일도 존재하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1910년 8월까지만 해도 호적과 성씨가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는 일제의 강요로 억지로 양반가문의 성씨나 주인집 성씨와 이름을 부여받아 호적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적 서류는 태평양 전쟁 기간과 해방 직후 1945년 8월~10월 사이 일제 관공서에 대한 분풀이성 약탈과 파괴, 6.25 전쟁 직후의 화재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호적 서류들은 암기와 필기, 수기로 기록하였고 종이는 잘 찢어졌으며, 먹물로 쓰거나, 잉크도 저질이라 쉽게 번졌으므로 행정서류에는 거짓과 오류로 된 내용도 많았다. 이러한 혼선은 해방 뒤에도 1954년 한국 전쟁 직후까지도 계속되었다. 당시 한국의 각 신문과 잡지, 광고 등의 발행에 제한은 없었으나 엄격한 검열이 진행되었다. 신문과 잡지, 광고는 한글 전용 또는 국한문 혼용체, 일본어와 한자를 섞은 일한자 병용체 등의 광고, 보도가 나갔다. 1940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한글 보도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또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는 한국인 독립운동, 자치 운동 등에 대한 기사들,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소식, 현황도 종종 보도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자치 운동에 대한 옹호 논조를 싣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여러 번 검열, 정간, 폐간, 휴간, 복간 등을 반복하다가 1940년 최종 폐간되었다. 이후 매일신보를 비롯한 소수의 친일 언론이 활동하였다. 1924년부터는 조선방송공사(한국방송공사 KBS의 전신)이 경성에서 개통되어 방송 보도되었다. 라디오는 1930년대 이후 읍면 단위 일반 가정까지 보급되었지만, 텔레비전은 군단위 이하에는 거의 보편적으로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TV 시청률은 극히 저조하였다. 조선에서는 1895 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1906 년 시점에서도 초등학교가 전국에서 40 개교 미만이며, 양반의 자제는 서당에서 사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서당은 삼천 정도 있던 것 같지만, 내용은 한문 교육이 중심이었다. 수학이나 한글 등의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기에 한국인이 저술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들을 몰수하여 사용을 금지시켰고, 그 대신 일본인 저작의 교과서로 대체시켰다. 총독부는 민족교육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교육령' 과 '사립학교규칙' 등을 제정하여 학교의 설치와 교육내용을 총독부가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고등교육 기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서당 들의 등록이 취소되었다. 일본은 대신 전국에 보통 학교 (지금의 초등학교)를 설치했다. 초등학교는 합병 직전에는 40 개 정도였던 것이 1943 년에는 4271 개까지 증가했다. 고등 교육의 측면에서, 1924 년에 경성 제국 대학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은 30 ~ 40 % 정도에 머물렀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에 들어오자 일본어 보급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교육당국은 사립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그 사용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관청에서는 한국 농민의 민원도 공용어인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 사용을 억제하였고, 또한 1935년부터는 한글을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 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제재하였으며, 1938년에는 '국어상용화' 정책으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1938년 한해 전국에 3,660여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농민들에게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또한 한국인을 위압하기 위해 일반관리나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고 수업에 임하도록 하였다. 전시하의 일제는 중학생은 물론이고 국민학생까지‘근로보국‘이라는 미명아래 군사시설공사에 강제로 동원하기까지 하였다. 일제는 일본어 전용 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아래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과 학자들을 체포, 투옥하기도 하였다. 함흥의 여학교 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사전 편찬을 담당하던 조선어학회 회원이 관련되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를 빌미로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관련자들을 구속하였던 것이다. 1944년 일본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의 1700만 인구 중 773만 3000명이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이는 일본 지배 하에서 한국어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으며, 한국인에 대한 교육적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전인 1944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 중 3 %만이 일본인이었으나 종합대학 졸업자의 50%, 단과대, 사범대, 기술전문대 졸업자의 47 %, 중등학교 졸업자의 44 %, 2년제 중학교 졸업자의 73 %가 일본인이었다. 화폐는 1911년부터 일본 엔화 동전이 사용되었다. 1921년 1월 1일부로 광무와 융희라는 연호가 새겨진 동전과 은화들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 그러나 건양, 광무, 융희 연호가 새겨진 대한제국 시기의 동전들은 수량도 많아서 산골 오지에도 널리 분포된 상태였고, 일부 위조된 건양 동전, 광무 동전, 융희 동전이 대량으로 주조되어 유통된 상태였다. 총독부 경제국 당국에서는 1921년 1월 1일부로 대한제국 동전 유통 금지령을 내렸지만, 사실상 이들 건양, 광무, 융희 연호가 쓰인 동전은 1930년경까지 시중에 통용되었고, 당국이나 부청, 군청, 구청, 및 각 은행, 협동조합 등에서도 이를 사실상 묵인하였다. 통용 화폐로는 중국 위안화, 미국 달러화, 센트화가 사용되었다. 유사 이후로 중국 엽전이 보급된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개성과 각지의 상인들이 중국 상인들과 무역하였으므로 1913년 이후에는 중화민국 은행에서 발행한 원화가 유입되었다. 미국의 센트화와 달러화는 1880년대부터 조선에 등장한 미국인 선교사와 의사들을 통해 한반도 각지에 유입되어 사용되었다. 자체 화폐 발행이 불가능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각종 독립운동 단체 등에서는 반쯤 세계 통용화로 쓰이던 일본 엔화와 중국 원화, 미국 센트화와 달러화나 금은과 패물들을 주로 거두어갔다. 일본은 한일병합 이후 곧바로 새로운 토지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10년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 ‘토지조사령’을 발포하였다. 이 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소유권,가격 그리고 지적(地籍)을 확정한다는 명분으로 실시한 것이었는데 까다로운 신고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들이 신고 절차를 밟지 않아 토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동중(洞中) 혹은 문중(門中)의 공유지(公有地)나 역둔토(驛屯土), 궁장토(宮庄土) 등을 비롯한 국유지에 도지권(賭地權)이라는 토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고, 또한 토지소유주의 승낙 없이도 타인에게 자유로이 매매,양도,저당,상속할 수 있는 물권적 권리가 토지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총독부나 유력한 인사들에게 넘어갔다. 그 결과 13만 5천 정보의 역둔토와 4만 6천여 정보의 민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었다. 1930년까지 총독부가 소유한 토지는 전국토의 40%에 해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약 10만 건에 달하는 소유권분쟁이 있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묵살되었다. 토지조사사업과 병행하여 일본인의 농업이민이 10배로 급증하고, 그들의 소유농지는 4배로 증가하여 큰 지주로 성장해 갔다. 총독부의 지세수입도 1919년 현재 1911년의 두 배로 늘고 과세지는 10년 사이에 52% 증가하였다. 소수의 지주들은 이 사업으로 도지권을 갖고 있었던 자작농들은 대부분 몰락하여 소작농과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거나 화전민 혹은 만주 등지로 떠나가는 사례가 많았다. 1918년 당시 소작농과 자소작겸농은 전체 농민의 77%에 달하였으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는 식민지 지주제가 성립되었다. 원래 우리나라는 소작이라는 말이 없었고, 지주와 작인 사이에는 서로 대등한 협력관계라는 뜻의 병작이라는 말이 있었을 뿐이었다.이러한 병작이 소작으로 바뀐 것은 작인의 지위가 그만큼 격하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광산,어장,산림 등 자원에 대한 개발을 강화하였다. 조선광업령(1915)에 의해 한국인의 광산경영을 억제하고, 미쓰이(三井),고하(古河) 등 일본 광업자본이 들어와 인천,갑산 등 주요 광산을 차지했다. 1920년 현재 일본의 소유 광산은 전체의 80%를 넘어서고 한국인 광산은 0.3%에 불과하였다. 어업분야에서는 조선어업령(1911)에 의해 구한국 황실 및 개인소유 어장이 일본인 소유로 재편성되었다. 일본인은 어업기술에 있어서 한발 앞섰기 때문에 어민 1인당 어획고에도 4배 이상의 차이가 나타났다. 또한 산림에 대해서도 1908년의 ‘삼림법’과 1911년의 ‘삼림령’, 1918년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일본인에게 불하하였는데, 전체 삼림의 50% 이상이 총독부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갔다. 특히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목재를 대대적으로 벌채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일본은 우리 민족기업을 억제하기 위하여 ‘회사령(會社令)’(1910. 12)을 다시 공포하여 회사를 설립할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구한말에 설립된 전기,철도,금융 등 큰 기업은 일본의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 등에게 넘어갔고, 인삼,소금,아편 등은 총독부에서 전매하였다. 한국인 기업가는 주로 정미업,피혁업,제분업,요업,방적업,농수산물가공업 등 주로 경공업에 한정되었다. 1919년 현재 전체 공장의 자본금에서 일본인은 91%를 차지하고, 한국인은 6%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후기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일본은 군수품에서 국산원료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는 기술자와 과학자를 총동원하여 갈탄으로 석유를 만드는 방법이나 아주까리씨나 소나무 뿌리를 이용해 윤활유를 만드는 방법 등을 책자로 기록한 《기술총동원요강》을 배포했다. 이런 자력갱생, 자급자족 경험의 유산은 북한 지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대로 계승하게 되었다. 교통 부문에서는 새로운 철도가 신설되고, 간선도로가 보수되었으며 전기와 전신망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은 한국인의 조세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일본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금융 부문도 일본이 장악하였다. 조선은행(1911), 조선식산은행(1918)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금융계를 장악하고, 지방에는 금융조합이 침투하여 서민금융을 통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을 위한 경비는 식민지에서 마련한다”는 원칙하에 재정수입을 높이기 위해 세금을 대폭 강화하였다. 소득세, 수익세, 소비세, 교통세, 부가세, 특별세 이외에 각종 잡부금이 부과되어, 이들 수입은 주로 한국인을 다스리고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또한 공장이나 시설 설립에 대한 인허가에 대해서도 일본인에게는 우대혜택을 주거나 한국인 출신 인사들의 인가 심사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하는 등의 차별을 가하였다. 이를 두고 윤치호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양반의 나라'에서 '인허가의 나라'로 변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무역 또한 일본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수출의 90%, 수입의 65%가 일본으로 집중되었는데, 쌀, 잡곡, 잎담배 등이 주요수출품이었고, 옷감,경공업제품이 들어왔다. 이러한 무역구조가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피지배 한국인들은 국권상실과 더불어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 그리고 조세부담을 져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국민에게 주민세, 거주세금인 지방비, 면비, 교육세금인 학교조합비와 학교비를 거두었다. 1919년 당시 전라남도에서 거둔 지방비 34만원, 면비 43만원, 학교조합비 7만 4천원, 학교비 2만 2천원 등 기본세금은 86만 6천원이었다. 1920년에는 지방비 91만원, 면비 94만원, 학교조합비 41만 8천원, 학교비 51만 7천원 등 기본세금은 278만 5천원으로 급격히 인상되었다. 토지에 대한 세금도 있었다. 토지세금은 지세와 부가세를 거두었다. 토지에 부과하는 부가가치세는 건물, 논농사, 밭농사, 상가 등 목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1919년 윤치호의 아산군 둔포면 농지에 대한 지세는 1919년 지세 1기분 203원 58전, 부가세 1기분 18원 32전, 1919년 지세 2기분 97원 67전, 부가세 2기분 8원 14전이었다. 1920년 지세 1기분 205원 90전, 부가세 1기분은 61원 66전이고, 1920년 지세 2기분은 185원 30전, 부가세 2기분은 61원 77전이었다. 그밖에 후생비와 국방비를 거두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는 국방비로도 부족해 각종 위문금과 성금을 거두었고, 강제적이지는 않았지만 국방헌납금이라는 기부금도 모집하였다. 이러한 세금은 개인이 직접납부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극히 드물었다. 세금은 각지의 은행과 협동조합에서 거두었고, 은행과 협동조합이 있는 면내나 읍내까지 나가기 힘든 시골 벽촌이나 오지에서는 읍사무소, 면사무소에서 조달하거나 이장, 통장, 정장(町長)이 거둬서 읍, 면사무소 혹은 읍내, 면내, 시내의 은행과 협동조합에 납부하고, 손으로 필기한 영수증을 받아서 각 집에 전달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내무부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인구는 5,793,976명이었다. 그러나 대한 제국의 인구 조사는 부정확했다. 농업 기술의 발달과 경작지의 증가 등에도 불구하고 숙종 43년(1717) 11월 14일 실록에 의한 전국의 호수 총계는 155만 7709호, 인구는 683만 9771명, 영조 23년(1747) 12월 28일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호수는 3만 4153호, 인구는 18만 2584명이며 8도의 호수는 172만 5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남 353만 9107명, 여 380만 1211명) 등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내무부의 조사 자료는 사실상 망국으로 전의 부정부패 등으로 행정력이 크게 감소한 결과로 추정된다. 1905년에 체결된 제2차 한일 협약에 의해 그 이후부터 한국의 인구 조사는 일본이 실행하였다. 일본 통치가 시작된 191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는 13,128,780명이었다. 일반적으로 이것도 상당수가 누락된 숫자로 보고 있다. 한국 사학자 중 하나인 이이화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통치가 끝나기 전의 해(1944년)에는 25,120,174명이었다.(일본 내 기록) 인구증가의 이유가 1920년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 17만명이 70만명이라는 막대한 숫자로 증가한 인구를 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평균 수명은 20 대부터 40 대까지 늘어나고 인구는 1910년 추정 1300 만, 1942년까지 32년간 2500 만명이 되었다. 부하(), 지도자(), 양동이인 빠게스(), 거짓을 뜻하는 가라, 구라, 조작된 것을 뜻하는 야매, 구멍을 뜻하는 빵꾸, 엑기스, 추리닝 등의 단어는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나서 활용되던 단어들이다. 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 현상의 하나가 이혼(離婚)이었다. 근대의 제도가 이식되고 신여성, 자유연애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면서 나타난 풍경이다. 기존의 가치관과 유교적 도덕의식에 대한 사람들의 환멸과 회의가 계속되면서 한일 합방 이후 시부모와 남편들에 대한 여자들과의 갈등과 폭력 사건 등이 계속되었고, 이혼율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1920년 이후 한국에는 TV와 라디오, 신문이 보급되면서 외국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허정숙, 김일엽, 박인덕, 김활란 등 지식인층 여성들이 여성 계몽운동을 추진하면서 여자들 역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이후 들어서는 이혼이 등장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드물었지만 1930년 무렵에 가서는 뉴스에 종종 보도가 될 만큼 이혼이 늘어나게 되었다. 1921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날로 늘어나는 이혼 소송의 대부분에 대해 “남편의 부족을 들어 여자 편에서 고소함이 다수”라며 경성지방법원에 제기된 사례들을 소개했다. 당시 이혼 사유의 상당수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지 못한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여자가 이혼을 청구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 외에도 기존 가치관의 소멸로 남성들은 부모나 집안에서 골라준 여성, 원치않는 여성과 굳이 결혼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원치않는 결혼생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굳이 유지해야 하느냐는 시각과 시댁과 시부모의 차별대우를 받으면서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만주로 간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가정이 파탄에 이른 사례도 많았다. 이혼자의 증가와 함께 독신자 수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7년과 1918년의 이혼 건수는 1만542건과 1만498건으로 1만 건을 넘기면서 일제강점기 최고를 기록했다. 이혼 건수의 결혼 건수에 대한 비율은 1910년대 7%였고 1920년대 이후에는 4% 안팎을 유지했다. 이후 이혼율은 1945년 광복 직전까지 매년 1만 건 안팎을 유지하게 되었다. 당시 이혼은 신문 사설이 비중 있게 다룰 정도로 큰 사회문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은 파리에서 천도교 교령 최린과의 스캔들로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공개 발표해 전국을 들끓게 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개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본능적 사랑이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이어 박인덕의 이혼, 허정숙의 이혼 등 여성 해방 운동가들의 이혼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구한말의 성리학자 노인층과 남자 지식인층은 격하게 반발하였지만 이혼 러시는 막지 못했다. 이혼이 급증하자 1924년의 신년 지상특집에는 각계 지식인과 저명인사 10명에게 ‘이혼 문제의 가부’를 묻는 기사가 10회 연재됐다. 이혼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음에 아니 맛는 부부간에는 누가 반대를 하던지 단연히 리혼을 하야서 양양한 전도를 그르치지 안는 것이 가할 줄로 안다”(방성옥)거나 “실흔 사람과 엇지 백복의 원인이 된다하는 부부가 되겟슴닛가”(방정환)라며 이혼 결행을 촉구했다. 도립 의원 등 병원이 차례로 세워져 병원 수는 증가했다. 이 병원의 의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고 일본인을 위한 병원인 면도 있었지만, 조선인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각 군에는 읍이나 규모가 큰 면단위 지역에 병원이 한두 곳 정도 있거나 병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근 읍이나 면, 군청소재지 등으로 나와야만 했다. 운송 수단이 인력거와 자전거, 오토바이 등이 전부였고 자동차 보유율은 읍면에 한 대도 없는 곳이 있을 정도로 극히 미약했으므로 전염병이나 긴급 질환이 발생하면 대부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이송 도중에 사망했다. 위생은 생활면에서의 위생지도 및 집단 예방 접종을 해 당시 한반도에서 유행했던 콜레라, 천연두, 페스트 등 전염병에 의한 유아 사망률이 감소했다. 그러나 출산 후 유아 나 어린이의 사망 치사율은 촌장 통장, 정장이 일괄 적으로 받아 다가 읍, 면사무소에 신고 처리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는다. 또한 대한 제국 시대부터 많은 거지는 돌다리 아래 역 주변 육교 주변에서 생활했다. 위생상태 불량으로 각종 질병과 전염병의 온상으로 취급되었고, 돌다리나 나무, 석재 육교가 붕괴되거나 덩치큰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교량과 육교가 붕괴되면 그대로 사고로 사망하였다. 또한 각종 홍수 때도 거지들은 실종되었으나 아무도 이들을 찾지 않았다. 정확한 인구 수, 통계에 잡히지 않은 거지들은 사망후에도 사망신고 등의 절차 없이 부청, 군청, 읍,면사무소에서 임의로 화장해서 아무데나 뿌렸다. 시부야구 시부야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시부야"라는 이름은 또한 도쿄에서 가장 분주한 역 중 하나인 시부야역 주변의 중심 업무 지구를 가리키기도 한다. 시부야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패션의 중심지로 불리며 주요 유흥가이다. 1885년에 야마노테선의 개설로 시부야구는 도쿄 남서부의 철도의 종점으로써 발흥하기 시작하였고 주요 상업과 오락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부야구는 1889년에 촌이 되었고 1909년에 정이 되었으며 1932년에 도쿄시의 구가 되었다가 1943년에 도쿄도의 구가 되었다. 현재의 특별구는 1947년 3월 15일에 성립되었다. 시부야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충견 하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개는 1923년부터 1935년까지 매일 시부야역에서 주인을 기다렸으며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하치코의 조각상이 역 주변에 세워졌고 하치코 광장은 이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시부야구의 요요기 공원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주요 개최지 중 하나였다. 시부야구는 지난 30년간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장소였다. 몇 개의 유명한 패션 백화점이 시부야에 있다. 시부야 109는 시부야역 주변의 주요 쇼핑센터로 특히 갸루 문화의 기원지로 유명하다. 최신 패션의 장소가 시부야부터 하라주쿠, 오모테산도, 센다가야까지 북쪽으로 뻗어있다. 1990년대 후반에 시부야구는 일본의 IT산업의 중심지로 불리게 되었다. 도쿄 23구의 중앙에 위치하고 나카노구, 메구로구, 미나토구, 세타가야구, 스기나미구, 시나가와구, 신주쿠구와 접한다. 시부야에는 다이칸야마, 에비스, 하라주쿠, 히루, 히가시, 오모테산도, 센다가야, 요요기와 같은 유명한 주거 및 상업 지역이 있다. 시부야는 스크램블 교차로(pedestrian scramble)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스크램블 교차로는 교차로의 모든 차량의 운행이 중단되어 보행자가 빠르게 교차로를 건널 수 있게 해준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시부야역의 하치 동상 앞에 위치해 있다. 하치 동상은 시부야역과 시부야 크로싱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시부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만남 장소 중 하나다. 시부야의 주요 역은 시부야역이다. 카시오, NHK, 동일본 여객철도, 삿포로 맥주, 스퀘어 에닉스, 도쿄 급행 전철, 테이치쿠 엔터테인먼트, 주피터의 본사가 시부야 구에 있다. 구글, 캠벨수프, ABB, 글락소스미스클라인, KFC,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 갭 등의 기업이 시부야 구에 일본 지사를 두고 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 근거는 원작에서 호죠 무츠미의 재학 고교 명에서 알 수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韓國勞動組合總聯盟, Federation of Korean Trade Unions 약칭 한국노총, FKTU)은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으로 발족했으며 굴종과 야합의 역사가 시작된다. 1960년 11월 한국노총으로 개칭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에 창립회원으로 참가했다. 본부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35번지이다. 노동자 대투쟁 직전인 1987년 6월 30일 당시에 2,449개 노조와 90만 6천여 명을 가졌던 한국노총은 12월 말에 각각 3,532개와 1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당해 6월 30일엔 단위노조 5만 62개에 조합원 수 15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2017년 현재 조합원 수는 약 94만명이다. 1946년 3월 1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결성되었다.(위원장 홍윤옥) 당시 민족진영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약칭 ‘독청’)의 ‘노동부’가 분리되어 만든 우익정치결사체였다. 연맹은 5월 1일 해방 후 첫 메이데이를 맞고, 이후 본격적인 조직 결성작업이 시작된다. 1949년 4월 29일 광산노동연맹이 결성되고, 11월 23일에는 ICFTU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가맹회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8일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조합법, 노동위원회법이 공포 및 실시되었고, 노조법이 제정된 후 이승만이 대한노총 총재에서 사퇴하였다. 5월 13일에는 근로기준법이 공포되었다. 1958년 10월 13일 집단지도제에서 위원장제로 규약을 개정하였는데, 합법성의 여부를 두고 관련 분쟁은 지속되었다. 1959년 3월 1일 제1회 노동절 기념행사를 열고, 메이데이를 3월 10일로 바꾸어 개최하였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동서 냉전이 격화되어 미국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9월 첫 번째 월요일로 변경되자 한국에서도 대한노총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로 변경키로 한 것이다. 동년 8월부터 대한노총이 분열되기 시작하여 10월에는 제2노총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되었다.(의장 김말룡) 1960년 2월 18일, 서울노동회관이 개관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여, 위원장 김기옥이 축출되고 5월에는 대한노총간부가 전원 사퇴하였다. 11월 25일에는 전국노동단체 통합대회가 열렸는데, 이 때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이 통합되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을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박정희 등에 의한 군사쿠테타가 발발하여, 5월 19일 노동쟁의가 일체 금지되었고, 이외에도 언론출판 사전검열, 국외여행금지, 유언비어 유포금지 등이 선포되었다. 이에 혁명위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고, 곧 모든 정당 및 노조, 사회단체에 5월 23일부로 해체령이 내려진다. 1961년 8월에는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이 공포되어 한정적이나마 노조활동이 재개되었다.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가 발족하고, 재건조직요강에서 산업별 조직체제를 갖출 것을 선언한다. 곧 전국섬유노동조합, 전국광산노동조합, 전국체신노동조합, 전국철도노동조합, 전국운수노동조합, 전국해상노동조합, 전국금융노동조합, 전국전매노동조합, 전국전력노동조합, 전국화학노동조합, 전국외국기관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노동조합총연맹(약칭 노총), 전국부두노동조합, 전국연합노동조합 등이 조직되고 중앙노동위원회가 발족한다. 1962년 2월 7일에는 각 도마다의 협의회을 결성하였다. 1963년 2월, 노총은 ‘정부관리기업 직원보수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 폐기 및 쟁의권 부활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쟁의 금지조치 철회를 요구한다. 4월 17일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이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자 노총은 ‘위헌노동법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해 투쟁에 돌입한다. 7월 6일에는 전국출판노동조합이 결성되고, 11월 15일 전국자동차노동조합이 운수노동조합에서 분리되었다. 1968년 6월 28일에는 자본시장육성법 제정에 대한 반대투쟁을 벌이고 투쟁위를 구성하여 총파업을 포함한 단계적인 투쟁전략을 수립한다. 1969년 9월 11일 섬유노조 면방분회 파업을 벌이고 방직협회는 직장을 폐쇄한다. 동년 12월에 정부가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국무회의에 상정하자 ‘노동기본권수호투쟁위원회’를 설치, 총궐기대회를 개최한다. 1970년 1월 3일 외투기업 임시특례법 통과에 항의하고 정치참여를 선언한다. 동월 7일 한국경영자총연합회가 설립되었고, 12월 12일 전국관광노동조합이 철도노조에서 분리 결성되어, 한국노총 회원노조가 17개로 증가하였다. 1971년 1월 6일 한국노총 노동상담소가 설치되었다. 1971년 4월 27일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에 노총은 ‘비상시국하의 우리 노동자의 자세를 밝힌다’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국가보위특별조치법에 대한 반대 유인물을 작성하던 중 동아일보에 정보가 유출되어 1면에 보도되자, 중앙정보부에 조선원 사무차장이 연행되어 고문과 협박 끝에 사직한다.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12월 31일 국가동원령이 공포된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 특별선언을 발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쟁의권을 원천 봉쇄한다. 10월 2일에 노총은 정권의 압력에 의해 유신지지 성명을 발표한다. 1974년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4호를 선포하고, 곧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도급제 철폐, 차별대우 철폐, 임금인상, 노조결성 보장 등을 요구하며 분규 중이던 663명을 연행하고 21명을 구속한다. 1975년 2월 7일 한국노총회관 기공식을 가지고 1977년 9월 9일 노총 장학회 법인이 세워진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을 경찰이 강제해산 과정에서 김경숙이 사망하고 노조지부장 최순영 등이 구속되었다. 8월 28일에 노총은 노동관계법 개정, 임금채권 확보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노사협의회법 제정, 근로자 협동조합법, 종합고용대책 수립 등을 건의하였다. 곧 박정희가 사망하고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노총은 국가보위법 철폐를 청원하고 정부의 임금억제조치에 대한 대책 마련을 건의한다. 1980년 다시 전두환 등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7월 19일 노동조합 정화조치로 노총 및 산별노조, 연합단체의 활동이 전면 유보되었다. 곧 노총 위원장, 산별노조위원장 등 11명이 사퇴한다. 곧 노총은 중앙정화추진위원회의를 열고 노조간부 191명에게 정화대상자 및 자진사퇴자를 확정 통고한다. 12월 3일 노동관계법이 전면 개정된다. 1986년에는 최저임금제 입법을 청원하여, 12월 31일 최저입금법이 제정된다. 1987년 노총이 4.13 노총, 4.13 호헌지지에 성명하자 금융노련 산하 13개 노조가 노총의 4.13 호헌지지 반대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곧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포함한 6.29선언이 발표된 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노총은 구속노동자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검찰총장 면담을 가진다. 또한 노총은 노동법 개정 촉구 궐기대회를 열었고, 곧 정부는 개정 노동법을 공포하게 되었다. 1990년까지는 기존 집권층을 지지하였다. 1997년 김대중과 정책 연대를 하여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비례대표를 배출하였다. 2004년에는 녹색사민당을 창당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008년에 한나라당과 연대하기도 하였으나, 2011년에 민주통합당에 참여하여 공약을 정하는데 협력하였다. 1·21 사태 1·21 사태(-事態)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의 군인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군·경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다시 돌아갔다.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1·21 사태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였으나, 1·21 사태 당시 남파공작원이었던 김신조는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투적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 인민대학 교수는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는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를 공개했다. 미나토구 (도쿄도) 미나토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미나토 구에는 48개국의 대사관이 있으며, 혼다, 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자동차공업, NEC, 소니, 후지쯔, 도시바, 모리나가 제과, JCB를 포함한 많은 회사들의 본사가 있다. 시부야구와 마찬가지로 구내 각지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매장이 많으며, 특히 오다이바() 지역이 그 절정을 이룬다. 구는 1947년 3월 15일에 아카사카 구, 아자부 구, 시바 구가 합쳐져 성립되었다. 미나토구는 고쿄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지요다구, 주오구, 고토구, 시나가와구, 시부야구, 신주쿠구와 접한다. 미나토구에는 많은 회사들의 사무실이 있다. 시오도메, 신바시의 시오도메 시티센터는 후지쯔의 투자 관련 사무소와 전일본공수의 본사, ANA의 계열사인 에어 닛폰, ANA&JP 익스프레스의 본사가 있다. 포켓몬의 본사가 롯폰기의 롯폰기 힐스 모리 타워에 있다. 세가 사미 홀딩스의 본사가 미나토구 시오도메 스미모토 빌딩에 있다. 소니 또한 미나토구에 본사를 두고 있다. 소니는 또한 미나토구의 시나가와 인터시티 C동에 시나가와 기술센터와 다카나와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시그마 세븐은 미나토구의 연예기획사이다. TV 도쿄, 일본화물항공과 에이벡스의 본사도 미나토구에 있다. CB&I와 아라마크, 야후! 재팬, 한진과 대한항공, 삼성그룹의 일본 사무실이 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에어 프랑스의 사무실이 미나토구의 신아오야마 빌딩에 있고 에어차이나의 사무실이 에어차이나 빌딩에 있으며 아시아나항공의 사무실이 ATT 뉴타워 빌딩에 있다. 시나가와 역은 실제로는 미나토구에 있다. 대한민국의 노동쟁의 목록 대한민국의 주요 노동운동은 1960년대 이후 노동운동사의 주요 운동 및 사건을 망라한 것이다. 일부 사건들이 누락되었을 수 있다. 수로왕 수로왕(首露王, 42년(임인년) ~ 199년, 42년 ~ 199년) 또는 김수로(金首露)는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신라 유리왕 19년(42년) 가락국 북쪽 구지봉(龜旨峰)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수로도 그 가운데 하나로,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변한(弁韓)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9명의 간이라는 뜻인 구도간(九刀干)들이 수로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가락국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9척(약 2m)의 소년이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나, 신라의 최치원은 그가 천신 이비가지와 정견모주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기록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150세 이상을 생존했다고 한다. 김해 김씨1대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변한의 구야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42년 3월 변한의 구야국 왕들인 9명의 간(干)들에게 하늘에서부터 "너희들의 왕을 내려 보낸다"라는 계시를 주고 왕을 내려보내기 위해선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계시를 들은 가락국 9명의 간들과 2백 3명의 백성들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변한의 구야국 백성들이 모여들며 노랫소리가 커지자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둥근 여섯의 황금 알이 들어있었다. 12일 후 이들 금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수로였다. 9명의 간들은 그를 6가야 중 수도이자 영토가 넓은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주민들은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또한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들을 수집하여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의 내용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이름이 뇌질주일(惱室朱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惱窒靑裔)라고 하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김수로왕)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은 이비가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이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맏형이었다고 한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 중심의 형제설화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석탈해와 재주를 겨룬 뒤 이겨 가락국의 왕 자리를 지켰고, 102년, 파사 이사금의 요청으로 실직곡국과 음즙벌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였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다. 부인은 월지국 혹은 마우리아 왕조 공주로 추측되는 허황옥(許黃玉)이며, 189년까지 무려 158년 동안이나 살았다는 신화적 인물이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태우고 온 15명의 아유타국 선원들에게 450필의 비단을 내렸는데 이는 대단히 많은 물량이며 또한 옷감 450필, 쌀 150섬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배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은 가야가 연안 항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뱃길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물량은 단순한 하사품이라기보다 교역 물량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무대왕 때 수로왕의 위패를 신라의 종묘에 봉향하고 제를 올린 적이 일시적으로 있었다. 문무대왕은 김수로왕의 15대 외손에 해당된다. 이 설에 의하면 김유신 가(家)는 "구형왕 - 무력 - 서현- 유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형왕 - 세종 - 무력 - 서현 - 유신"으로 이어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문무대왕이 외가의 조상인 가락국의 김수로왕 제사에 관한 교서를 내린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따르면 문무대왕은 가야국의 태조 김수로왕을 신라 왕실의 종묘에 합사하도록 특별교서를 내리면서, 자신을 "구형왕 - 세종 - 김무력 - 김서현 - 문명왕후"로 이어지는 외가의 후손으로 칭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무력은 세종의 아들로 구형왕의 손자가 되는데, 이는 김무력을 구형왕의 아들, 세종의 동생으로 보는 통설과는 상반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3월의 재계일(齋戒日)에 구지봉(龜旨峰)에 9간(干:족장 또는 왕)들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 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건국자가 되었다는 신화이다. 특히 이 신화는 하늘의 신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명의 간들이 부족들을 다스리는 부족(9간) 연합사회의 통치자로서 인간사회에 내려왔다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를 환영의 극치인 ‘춤과 노래’로 스스럼없이 맞아들여 왕으로 삼은 영신(迎神)신화라고 해석하고 있다. 거질미왕 거질미왕(居叱彌王, ? ~ 346년 8월 10일(음력 7월 7일)) 혹은 금물왕(今勿王)은 가락국의 제4대 국왕( 291년 3월 16일(음력 1월 29일) ~ 346년 8월 10일(음력 7월 7일))이다. 이시품왕 이시품왕(伊尸品王, ? ~ 407년 6월 1일(음력 4월 10일))은 가락국의 제5대 국왕( 346년 8월 10일(음력 7월 7일) ~ 407년 6월 1일(음력 4월 10일))이다. 좌지왕 좌지왕(坐知王, ? ~ 421년 5월 29일(음력 4월 12일)) 혹은 김질왕(金叱王), 김토왕(金吐王)은 가락국의 제6대 국왕( 407년 6월 1일(음력 4월 10일) ~ 421년 5월 29일(음력 4월 12일))이다. 《삼국유사》의〈가락국기〉에는 좌지왕대의 외척과 관련된 갈등이 있는데, 용녀(傭女)라는 여인을 왕비로 맞고 그 무리를 관리로 임명한 뒤 신라가 꾀를 써 치려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박원도(朴元道)가 왕에게 간해 용녀를 하산도로 귀양보내고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를 아내로 맞았다. 복수부인과 사이에서 취희왕을 낳았다. 취희왕 취희왕(吹希王, ? ~ 451년 음력 2월 3일)혹은 김희왕(金喜王), 질가왕(叱嘉王), 취지왕(吹知王)은 가야의 군주로, 가락국의 제 7대 국왕( 421년 5월 29일(음력 4월 12일) ~ 451년 3월 20일(음력 2월 3일))이다. 좌지왕의 아들이며 질지왕의 아버지이다. 질지왕 질지왕(銍知王, ? ~ 491년 11월 20일(음력 10월 4일)) 혹은 김질왕(金銍王)은 가락국의 제8대 국왕( 451년 3월 20일(음력 2월 3일) ~ 491년 11월 20일(음력 10월 4일))이다. 452년 시조 수로왕과 허왕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허왕옥이 처음 만난 자리에 왕후사(王后寺)란 절을 짓고 밭 10결을 바쳤다. 구형왕 구형왕(仇衡王, 생몰년 미상, ) 혹은 구해왕(仇亥王)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다. 다른 이름은 양왕(讓王)이다. 532년 음력 9월 신라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오니 왕이 친히 맞서 싸우려 했으나, 군사적 열세로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 동생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신라로 들어가 항복을 하였다. 구형왕의 항복 연도는 532년이라고도 하고, 562년이라고도 하는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은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구형왕의 삼남이 김무력(金武力)으로서 신라의 장군으로 봉사(奉仕)했으며,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金庾信)은 신라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을 이룩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년)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김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자, 구형왕의 증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태대각간 태대각간(太大角干) 혹은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은 문무왕 8년인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김유신에게 종전 17관등과 대각간에 한 단계 더 얹어 표창한 관직 이름으로, 상설이 아니라 임시직이다. 미나토구 일본 지명 미나토구(港區)는 다음과 같다. 대각간 대각간(大角干) 혹은 대서발한(大舒發翰)은 신라의 17관등 중 제1등인 각간에다가 대 자까지 붙여서 만든 임시직이다. 각간 각간(角干)은 신라의 17관등(官等)의 제1등으로 이찬의 위이다. 각찬(角粲), 이벌간(伊罰干), 이벌찬(伊罰湌), 서발한(舒發翰), 우벌찬(于伐湌), 서불감(舒弗邯), 일벌찬(一伐湌)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노례왕 9년(32년)에 처음 17관등을 정하면서 제1등으로 제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벌찬 관등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거나 기밀 정무를 맡아 왕의 정치 자문이 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벌찬' 다음으로 '서불한(또는 서발한)' 또는 '각간'(角干)이라는 이칭이 초기에 많이 쓰였는데, 후기에는 각간(角干)이라는 용어로만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중국의 《양서》 및 《남사》, 《북사》와 《수서》, 《당서》 신라전에는 자분한기(子賁旱支)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는 "계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각간,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등의 관직을 두었다"고 가야의 관등으로도 쓰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호족(豪族)들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용어로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고려 왕실의 족보인 《성원록》(聖原錄)을 인용하여 왕건의 외증조부의 이름이 '각간(角干) 두은점'임을 《역옹패설》에서 밝히고 있다. 다이토구 다이토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에도 시대부터 번화가로서 발전한 아사쿠사(), 도쿄의 터미널 역의 하나인 우에노 역()이 다이토 구에 있다. 도쿄 구부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분쿄 구, 스미다 구, 아라카와 구, 주오 구, 지요다 구와 접한다. 스미다 강이 구를 흐른다. 다이토 구는 1947년 3월 16일에 성립되었고 에도 시대의 유곽가인 요시와라가 현재의 다이토 구에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츠구 도쿠가와 이에쓰구(, 1709년 ~ 1716년)는 에도 막부의 제7대 쇼군(재위: 1713년 ~ 1716년)이다.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계통의 종가는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이래로 쇼군직을 이어받을 후계자의 고갈로 난항을 겪었다. 1713년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4남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뒤를 이었으나 병약하여 결국 요절하게 되었고 이로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계는 대가 끊겨, 쇼군 직위는 히데타다 동생들의 가문인 고산케에서 번갈아 이어받아 기슈 도쿠가와가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다음 쇼군이 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재위 1716년-1745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인 요리노부의 자손들로 구성된 고산케 중 하나인 기슈 도쿠가와 가의 당주로, 기이 국 기슈 번의 신판 다이묘였다. 1716년에 요절한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뒤를 요시무네가 쇼군직을 잇게 되었다. 요시무네는 막부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자 교호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치세에 코끼리가 일본 국내에 소개되었다. 산천, 공기, 자연 경관이 좋은 와카야마 출신으로서의 청백한 기질이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를 시작으로 도쿠가와 쇼군직은 요시무네의 방계 후손 즉, 고렌시 가문에서 이어받았다. 그의 묘소(墓所)는 도쿄 다이토 구의 간에이지(寛永寺)에 있다. 조쿄(貞享) 원년(1684년) 음력 10월 21일 기슈 번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사다(徳川光貞)의 4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기슈 도쿠가와 가의 하인인 고세 로쿠자에몬(巨勢六左衛門)의 딸 조엔인(浄円院, 오유리노 가타於由利の方)이다. 기슈 가의 욕실 담당 하녀라는 모친의 낮은 신분 때문에 한동안 가신에게 맡겨져 키워지다 후일 인정받고 입성하였다. 아명은 겐로쿠(源六), 신노스케(新之助)이다. 겐로쿠(元禄) 10년(1697년) 14세 때 로주(老中) 오쿠보 다다토모(大久保忠朝)의 배려로 당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를 알현한 뒤 에치젠 국(越前国) 뉴우 군(丹生郡) 3만 석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실제 이 영지를 다스린 것은 가신이었고 요시무네 본인은 여전히 기이의 기슈 도쿠가와 가의 거성에서 거처하였다. 호에이(宝永) 2년(1705년) 맏형이자 3대 기슈 번주인 쓰나노리(綱教)가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둘째 형인 요리모토(頼職)가 4대 기슈 번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부친인 미쓰사다, 반년 후 요리모토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22세의 나이에 기슈 번 5대 번주로 취임하였다. 이 때 쇼군 쓰나요시로부터 편휘를 하사받아 비로소 요시무네(吉宗)로 개명하였다. 호에이 3년(1706년)에는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伏見宮貞致親王)의 딸 사나노미야 마사코 여왕(真宮理子女王)을 정실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호에이 7년(1710년) 사망하였다. 같은 해 4월 기슈에 입성한 요시무네는 악화된 번의 재정을 개선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번정(藩政) 개혁에 착수하였다. 스스로 무명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절약에 앞장섰으며 통치 기구를 간소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두 형과 부친의 장례 비용, 바쿠후로부터 차용한 10만 냥 금의 부채, 재해 복구비, 번 지폐의 정지 등으로 악화되던 번의 재정이 상당 부문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거성인 와카야마 성 앞에 '소원 상자'를 설치해 백성들로부터 직접 청원과 호소를 들으며 문무를 장려하고 효행을 표창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두 아들들인 장남 나가토미마루(長福丸, 도쿠가와 이에시게), 차남 고지로(小次郎, 다야스 무네타케田安宗武)는 요시무네가 기슈 번주로 있던 시절 태어났다. 교호(享保) 원년(1716년)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徳川家継)가 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래로 내려 온 남자 후계자의 혈통이 끊기자, 히데타다 혈통 이후로 쇼군 계승권이 있던 고산케(御三家)의 당주들 중 한 명인 요시무네가 방계 가문으로는 처음으로 쇼군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요시무네가 쇼군에 취임할 당시 히데타다의 증손이자 다테바야시 번주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松平清武)가 살아 있어 아직 히데타다의 혈통은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기요타케의 영지인 다테바야시 지방 내에서 무거운 조세 부담으로 잇키(一揆)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번주로서의 기요타케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이미 고령에 남자 후계자도 없어 기요타케는 쇼군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요시무네의 기슈 도쿠가와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이에야스의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를 시조로 하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보다 계승 서열이 낮았으나 요시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대상으로 더 가깝다는 명목 하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은 정당화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점들 때문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에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天英院)과 이에쓰구의 생모 겟코인(月光院) 사이를 둘러싼 모종의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8대 쇼군으로 취임한 직후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 시대부터의 소바요닌(側用人)인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등을 파면하여 그때까지 내려오던 소바요닌 중심의 정치에서 쇼군 친정(親政) 정치를 확립하였다. 이후 미즈노 다다유키(水野忠之)를 로주(老中)로 임명한 뒤 기슈 번주 시절의 재정 개선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를 본따 에도 3대 개혁 중 하나인 교호 개혁(享保改革)을 펼쳤다. 당시까지의 문치(文治) 정치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무단(武斷) 정치 중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으며 검소와 검약을 중시하며 무사들의 풍속 개선을 강조하였다. 조세 제도를 개혁, 정면법(定免法), 상미령(上米令) 등을 시행하여 바쿠후의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토지 개발을 장려하였고 아시다카 제도(足高の制)를 통해 지출을 축소하고 관료제도를 개선하였다. 이 외에도 소송 기간을 축소하여 최대한 판결이 빠르게 이루어지도록 한 사법 제도의 개혁과 화재 대책 마련, 오오쿠(大奥)의 재정비, 직소 상자(메야스바코, 目安箱) 설치를 통한 백성들의 의견과 불만 반영, 고이시카와(小石川) 요양소 설치를 통한 의료 정책 개선, 외국 서적 수입 기준 완화 등을 시행하여 사회 여러 부문에서 개혁과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 같은 교호 개혁은 에도 3대 개혁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없었다면 재정 악화로 인한 에도 바쿠후의 붕괴가 더욱 빨리 도래했을 것이라는 의견 또한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공 오민(五公五民, 수확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침)으로 대표되는 세액 증대로 인해 농민들의 부담이 한층 커지면서 요시무네의 임기 말년에는 일본 전역에서 빈번하게 잇키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엔쿄(延享) 2년(1745년) 9월 25일 쇼군위를 장남 이에시게(家重)에게 물려주고 오고쇼(大御所)로 물러났다. 실제로 이에시게는 언어 장애가 심한데다 병약하기까지 해서 이에시게보다 총명한 차남 무네타케(宗武)나 4남 무네타다(宗尹)를 쇼군으로 세우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형제들 사이의 후계자 다툼을 염려한 요시무네는 또한 이에시게의 영명한 아들 이에하루에게 희망을 걸고 있어 장자 이에시게를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체적 결점으로 인해 이에시게가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바쿠후의 실권은 요시무네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장악하였다. 또한 요시무네는 나머지 두 아들들을 관례대로 다른 도쿠가와 분가에 양자로 보내거나 영지를 주어 분가시키지 않고 에도성에서 봉급을 받으며 각각 별가(別家)를 이루도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차남 무네타케가 다야스(田安) 도쿠가와 가문을, 사남 무네타다가 히토쓰바시(一橋) 도쿠가와 가문을 열었다. 여기에 요시무네 사후 개설된 시미즈(清水) 도쿠가와 가문(초대 당주는 이에시게의 차남 시게요시)이 합세하면서 이 세 가문은 고산쿄(御三卿)로 불리게 되었다. 쇼군 은퇴 후 6년 뒤인 간엔(寛延) 4년(1751년) 음력 6월 20일 68세로 사망하였다.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 기원전 582년 경 - 기원전 497년 경)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 학파라 불린 종교 단체의 교주이다. 피타고라스에 관해 알려진 정보가 대부분 그가 죽고 수세기 후에 쓰여진 것이라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드물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아마 어린 시절 이집트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학식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530년 즈음, 피타고라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토네로 이동하여 종교적인 학파를 세웠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가 개발한 종교적 의식과 훈련을 수행하고 그의 철학 이론을 공부했다. 학파는 크로톤의 정치에도 적극 간섭했는데, 이가 결국 그 자신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만나던 건물은 방화당했고 피타고라스는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말년을 메타폰툼에서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 말 피타고라스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종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위대한 수학자나 신비주의자, 과학자로서 흔히 추앙받으며, 특히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정리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뿐 아니라 그에 관한 전설과 혼란으로 그의 실제 공적이 흐려져서, 누가 그의 가르침에 관해 자신있게 답을 주기가 힘들고, 일부는 그가 수학과 자연철학에 기여를 남겼다는 사실에까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피타고라스에게 돌려진 많은 공적은 어쩌면 사실 그 동료나 제자의 공적이었을 것이다. 또 그의 제자들이 모든 것은 수이며 수야말로 궁극적인 본질이라고 믿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피타고라스는 최초로 스스로를 철학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 사람이라고 한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플라톤과, 그를 통해 서양 철학 전체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피타고라스의 생애에 관해 알 수 있는 정확한 사실이 매우 드물고, 그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가 상당히 최근의 것이며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렴풋한 윤곽 정도가 전부이다. 당대의 작가들이 남긴 자료가 부족했고 또 피타고라스 학파(피타고리안)를 둘러싸던 비밀스러움 때문에 허구적인 이야기가 사실의 자리를 대체하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허구적인 구전들은 피타고라스에 관한 상세한 자료들을 남긴 신플라톤주의 작가들을 통해 간절히 전해 내려온 것으로, 신과 관계되거나 신성의 증거로 여겨지는 사실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많은 신화가 생겨났다. 이를테면 아폴론이 그의 아버지라던가, 피타고라스가 초인적인 총명함으로 번득였으며, 넓적다리는 황금으로 되어 있다던가, 아바리스가 황금 화살을 타고 그에게로 날아왔다던가,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나타났다던가 하는 것. 흔히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헤로도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소크라테스가 남긴 언급들은 제하고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와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쿠스가 남긴 자료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자세히 연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관해 독립적인 저술을 남겼는데, 불행히도 현재 전하지 않는다. 대신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디케아르코스, 아리스토크세노스, 헤라클리데스 폰티코스 등이 같은 주제에서 글을 남겼다. 시기적으로 늦은 이들 작가들은 전설상의 이야기나 자신의 의견을 보태지 않았으며, 이것이 포르피리우스와 이암블리쿠스가 사용한 최상급의 출처가 되었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능하다고 보이는 진술만을 고려하려고 했으나, 그렇다해도 만약 그에 관한 모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진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피타고라스가 활동했다는 영역이 극단적으로 방대해진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사모스 섬에서 지중해 및 에게 해 근처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었던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타고라스의 부모는 그로 하여금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여 어려서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우도록 하고 긴 여정의 장삿길에 함께 데려가기도 하였다.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래에서 공부하였고, 스승 탈레스의 주선을 받아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 동안 나일 강 연안의 여러 신전을 다니며 멤피스의 사제들에게서 기하학과 천문학 등을 배우는 한편 그들의 신비사상에 입문한다. 하지만 이 무렵 이집트를 침공해온 페르시아 제국 사람들이 그를 다른 학자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고 간다. 피타고라스는 그곳에서 보낸 약 12년 동안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사들과 서기들로부터 방대한 지식을 전수받는다. 그 후 40년 전에 처음 떠나왔던 사모스 섬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대략 60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피타고라스가 귀환할 당시의 사모스 섬은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독재 아래에 놓여있었다. 이로 인해 기원전 532년 피타고라스는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크로토네라는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아마 피타고라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공부하며 얻은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는 강박관념이 매우 강했을 것이며, 사모스 섬에서 크로토네로 이주하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이였을 것이다. 마침내 그는 크로토네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또는 피타고라스 학교)를 설립하였고 많은 젊은이들을 철학자 또는 정치가로 키웠다. 단체의 회원이 점차 늘어나고 배출된 젊은이들이 크로토네를 비롯한 인민 도시의 정치에 참여하여 중요 직책을 차지함으로써 피타고라스 학파는 6세 말엽에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전파시키려는 회원들의 지나친 노력과 피타고라스의 보수적 정치 경향은 크로토네 시민들로부터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바리스의 군대가 크로토네를 공격해 오자,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의 한 장군이 상황을 역전시켜 오히려 시바리스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교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여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데, 바로 승전 후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이 노획품을 독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분개한 크로토네 시민들은 학교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피타고라스를 보호하려 한 그의 제자 서른여덟 명을 살해한다.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네에서 약간 북쪽으로 떨어진 메타폰툼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사망한 후 그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계속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데에 노력하여 기원전 5세기 말에는 이미 피타고라스 학파와 사상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는 때때로 하나의 종교 단체로 취급되게 된다. 오늘날 흔히 일컬어지는 피타고라스에 얽힌 숱한 일화와 전설들은 이미 이때부터 지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론, 수학, 자연과학, 그리고 미학을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 이 세계를 단 하나의 법칙에 지배되는 정돈된 전체로 입증하려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한 앞에서, 그리고 한계 지을 수 없는 것 앞에서 일종의 신성한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숫자에서 찾았다. 우주에 대한 미학적-수학적 전망은 이렇게 피타고라스에 의해 탄생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음향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혼의 정화가 음악의 목적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음의 협화를 현의 길이의 비례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으며,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이론이 후세에 전해졌다. 또한 순정5도(純正五度)를 반복하여 겹친 음률을 피타고라스의 음계라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조화는 미덕이다. 건강과 모든 선 그리고 신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물들 역시 조화에 따라 구성된다."고 하였다. 피타고라스 종교의 주요 교리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영혼의 윤회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콩을 먹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종교는 국가의 관리권을 획득하였고, 성인들의 규칙을 세웠다. 그러나 갱생되지 못한 사람들이 콩을 동경하는 바람에 반역을 저질러서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피타고라스 종교결사의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혼이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불멸하는 실체이며, 몸이 소멸할 때마다 혼은 다른 동물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이를 혼의 전이설이라 한다. 피타고라스는 자기의 정통적 후계자를 피타고리오(Pythagoreioi)라고 부르고 그를 따르는 자를 피타고리스타이(Pythagoristai)라고 불렀다. 피타고라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학생들에게는 공공 활동 참여가 권장되었다. 이 학교의 졸업생 중 유명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행 일본은행()은 일본의 중앙은행이다. 1882년 6월 일본은행조례가 공포되면서 같은 해 10월 자본금 1000만 엔으로 개업하였다. 초대 총재는 요시하라 시게토시(吉原重俊)이다. 1883년 정부예금 및 국고를 취급하며 업무를 개시하여 1884년 6월 당좌거래 업무를, 1885년 일본은행권을 태환 은화로 발행하는 발권업무를 시작하였다. 1899년 12월에는 기존의 국립은행 및 정부 지폐의 통용이 금지되면서 통화가 일본은행권으로 일원화되었다. 1930년 11월 국채업무 개시, 1943년 내국환 결제 사무를 시작하였으며 1952년 외환관리 등을 위임받았다. 1952년 국제 통화 기금에, 1970년 1월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국제결제은행)에 출자, 가입하였다. 1998년에 시행된 일본은행법에서 규정하는 목적은 첫째, 중앙은행으로서 은행권을 발행하고 둘째, 통화조절을 통하여 물가의 안정을 꾀함으로써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며, 끝으로 금융기관 간의 원활한 결제의 안정성을 확보함으로써 신용 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주요업무는 통화를 발행하고 금융정책을 운영하며 은행의 은행으로서의 기능, 결제제도의 안정을 위한 기능 등을 수행하고, 국고 및 국채 관련 업무와 외환업무 및 국제 금융 관계업무, 그리고 관련 통계의 작성, 분석 및 연구 등의 업무도 담당한다. 임원은 심의위원 6명과 총재 1명, 부총재 2명 외에 감사, 이사 등으로 구성된다. 총재 및 부총재는 양원(兩院)의 동의를 얻어 내각에서 임명하며 임기는 5년이다. 심의위원은 상근임원으로서 경제 및 금융에 관한 식견이 높은 사람 중에서 역시 양원의 동의를 얻어 내각이 임명한다. 현행법상 은행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은 '정책위원회'이며 총재 및 부총재 2명과 심의위원 등의 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책위원회는 월 2회 정례로 개최되며 금융정책 및 업무관련 중요사항을 심의, 의결하는 회합을 수시로 갖는다. 1999년 결산에 따른 자산총액은 106조 2009억 엔, 부채총액은 102조 8496억 엔, 경상이익은 1조 1925억 엔이었다. 2001년 현재 직원 정원은 5,530명. 총재는 2016년 현재 구로다이다. 산하에 지점 33개소와 사무소 13개소 및 해외사무소 6개소가 있다. 1896년 본점 점포를 도쿄의 현 소재지에 신축 이전하고 1973년 신관이 완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사성제 사성제(四聖諦, ) 또는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제(諦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놨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한편, 고타마 붓다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인 십사무기(十事無記)는 사성제와는 달리 지혜(智)깨달음(覺)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배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고타마 붓다는 십사무기(十事無記)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다운 길이 아니며, 반면 사성제는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성제에 대해 늘 말하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사성제라는 실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고타마 붓다 견해는 십사무기 줄거리가 들어 있는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잘 나타나 있다. 고제(苦諦, )는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이다. 즉, 인간은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통찰이다. 고통은 크게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생로병사의 고고(苦苦), 변화하고 무너지는 괴고(壞苦),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에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행고(行苦)등의 3고(三苦)로 분류된다. 3고는 8고(八苦)로 세분되기도 한다.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 생로병사의 고통을 말한다. 생로병사 중 특히 생과 사는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는 배움을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괴고(壞苦)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너지는 고통"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이다.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고통으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도 한다. 오온(五蘊: Paňca Sakandha) 또는 오취온(五取蘊)은 다음과 같다. 집제(集諦, Samudaya Satya)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로,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괴고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번뇌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갈망함) 또는 망집(妄執)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을 고통의 주 원인으로 본다. 멸제(滅諦, Nirodha Satya)는 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 혹은 고통의 원인의 완전한 소멸에 관한 진리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이라 한다. 도제(道諦, Mārga Satya)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를 말한다. 즉, 도제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의 모든 교의는 사실상 도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원시 불교에서는 도제를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인 것으로 설명한다.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도제를 팔정도를 포함하는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의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인 것으로 설명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도제를 37조도품 외에 보살의 원행(菩薩의 願行: 보살의 서원과 수행, 간단히 보살행 또는 보살도)을 담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네 가지를 추가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두산세계대백과사전(斗山世界大百科事典)은 (주)두산에서 서비스하는 백과사전이다. 1982년 동아출판사의 총30권으로 된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으로 시작되었다. 동아출판사는 1985년 두산그룹에 인수되었고, 1996년 완전히 개정된 총30권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이 출간되었다. 그 이후로 사전의 내용을 담은 CD-ROM과 내용을 인터넷으로 서비스하는 사이트는 엔싸이버(EnCyber)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불법복제의 성행으로 종이책과 CD-ROM판의 출간을 중단한 뒤로 인터넷 상에서만 무료로 자료를 제공 포털사이트 네이버, 네이버에서도 그 내용을 그대로 볼 수 있다. 2010년 8월 1일자로 doopedia 두산백과(두피디아 두산백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19년 2월 현재 총 53만 9,890 여개 항목의 문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118만장 이상의 사진 자료에 680만장 이상의 커뮤니티 사진을 보유하고 있다. 매일 약 30건 이상의 신규항목과 100여장의 사진이 등록된다.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은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하는 백과사전이다. 31권에 13만 개의 항목이 있다. 5만 개의 사진이 있고 3,000여 명의 석학에 의해 쓰였다. 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1875년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전주.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1899년~1904년), 수감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일제 하 조선에 귀국하여 교육계몽운동 등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역서-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 등 민주적 절차를 흠결한 두 차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를 요양차 방문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부자였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이승만 위로 두 아들을 두었다가 천연두로 잃자 세상을 크게 비관했다.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이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후일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써서 로버트 T. 올리버 선교사에게 부쳤다. 그러면서 내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너는 6대 독자인 줄을 알라고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런 탓으로 주위에 가까운 친척이 없다. 그런데 만약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종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친척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고 하였다. 로버트 T. 올리버는 이승만의 전기를 쓸 때 '이승만의 가계는 다년간 그를 울분하게 만드는 원인이었고 또 그의 핸디캡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자신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껄끄럽게 여겼다. 아버지 이경선은 계보학자이자 당대의 양반 사대부들처럼 여러번 자신의 족보를 아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나중에 양녕대군이 태조의 아들인지 태종의 아들인지도 구별 못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의 간략한 일대기를 적어 보낼 때 양녕대군을 태조의 아들 이고 정종에게 양보한 것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아버지 이경선은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한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하고 문을 꽉 닫고 살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는 이완용의 아들이었다. 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899년 1월 17일 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을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 한때 강원룡은 이승만의 고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 대통령은 일경에게 잡힌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의 손을 보여주며 '(고종이 아니라) 왜놈에게 붙잡혀 고문당한 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런 거짓말의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그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당한 뒤 고문당한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에도 이박사는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를 상징하다시피하는 이 안면 경련은 독립협회(獨立協會)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고 한다.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민영환과 한규설을 만난 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때 그는 고종을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1904년 11월 4일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D.C.에 도착하였다.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8조)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이승만은 김윤정의 어린 아들을 설득하여 공사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 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을 예방하게 되는데, 고종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이때 이승만은 다른 학교이지만 옆에 붙어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들었다. (프린스턴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는 한 번도 합쳐진 적이 없는 별개의 학교이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 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의 거액(당시 장인환 의사의 미국 변호사 선임비는 4000달러였다.)을 요구했다. 전명운과 장인환 두 의사의 재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를 포함한 한국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지에서 답지하여 7,390달러가 모아졌다. 그리고 미주 한인들은 3000달러를 모아서 이승만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하고 같은날 8월 25일 동방으로 갔다.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 통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법정 변호를 거부한 후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장인환과 전명의 의거는 국내외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파문과 각성의 계기를 주어 민족운동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이 사건을 외면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 대신 통역을 맡은 신흥우를 비롯하여 대다수 한인 기독교인들은 장인환, 전명운의 의거에 적극 관심을 갖고 의연금을 보내는 등 힘을 모았다. 또한 후에 그는 임시정부의 주요 수반이 되었던 까닭에, 그가 전명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 것은 오늘날 비판받기도 한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1년에 중국 상하이와 일본 도쿄를 거쳐, 1912년 초에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12년 4월에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3년에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하였다. 1913년 이승만은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하와이섬의 마운틴 뷰에서 숯 사업을 시작하기도 있다. 한편, 이 무렵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1915년은 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시기로 당시 회장이었던 김종학과 박용만 등 주요 간부들은 자금 횡령 의혹으로 남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그 뒤 홍한식 목사가 새 회장직을 맡는 등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민회 주요 간부직을 접수했다.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 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 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 감리교 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켰다.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예정되고,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우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그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밀지를 보낸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갔다. 이승만이 보냈다는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뜻이 있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반송, 되돌려보냈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일본인에게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 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연사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 임시정부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8월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로 개칭했다. 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 8월 25일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한다.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1919년 8월 이승만은 한국위원회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임시정부 공식대표로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로 개편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망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온 김규식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삼았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하와이 및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 9월 1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라고 하면서 상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기존의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대폭 개정하여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임시 헌법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 내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전임한다고 명시하였고, 제3장에서 임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정무를 총감하며 법률을 공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기존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이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에 발송하였다.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까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 활동을 하고 다녔다. 한편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나, 9월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하면서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체류하지 않았다. 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임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한편,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직을 맡았던 조소앙은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 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듬해 1926년 말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 여운홍, 장택상 등의 도래와 임정 파리위원부를 구미위원부로 흡수하여 구미위원부 산하 주불대표부로 활용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임정 홍보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주불대표부를 통해서 이승만은 유럽의 정치정세 변동과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였다. 구미외교위원부는 1919년 5월 이승만이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집정관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개편하여 만든 것이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묵살하였으며 계속 구미위원부를 가동하였다. 일설에는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는 설이 있었으나 1926년 김현구라는 최측근을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 김현구는 1926년 이후 1929년까지 임정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간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으로서 위원부의 살림을 꾸려갔던 김현구는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편지)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1929년 이후 이승만은 임정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임정 구미위원부를 가동하며 외교,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의 구미외교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는 그에게 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 서신을 여러번 보냈다. 1928년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김구는 재중 한인 동포들과 교민단체의 후원금과 성금 모금에 의존하는 한편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였다.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장제스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정의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한국인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의 임정으로 송금해주었다.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대한독립청원서(大韓獨立請願書)를 제출하였다.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2월 8일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다.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하여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주에 도착했고, 그해 10월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로서 임정에서 탄핵당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임정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를 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 193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고, 10월 8일까지 신혼기간을 보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 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1935년 1월 24일 배우자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1939년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았고, 선교사들에 의해 빼돌려져 체포를 면하고 부산항을 거쳐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 6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 침략을 경고한 《일본을 벗기다》(원제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일본 내막기'라고도 함)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는 이후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해 9월 광복군 창설 소식을 통보받고 축전을 보낸다. 그러나 김원봉 등의 입각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그는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며 김구,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한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월 9일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하였다.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942년 1월 2일 미국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과 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 등을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2년 2월 2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행사 참석 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에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5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하였으며,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 이후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3년초 이승만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2일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정부로 발송해주었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일제 강점기, 1942년에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다.'는 주 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었다.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어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전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로 지냈던 문제안의 증언에 의하면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은 힘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 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켜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임정은 한국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미국국무성의 협조를 기대한다. 임정의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미국국무성 및 국방성과 교류하며 임정의 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5일 이승만의 미국 내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였고, 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다시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를 찾아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월 미국육군전략사무처의 협조를 얻어낸 뒤, 임정에 이를 통보하고 임정으로부터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 1942년 12월 4일 12명의 한인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1944년 8월 2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담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경 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무부 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셉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을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 1945년 5월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김성숙(金星淑)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은 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14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하여(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은 스탈린과 외무부의 비신스키차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승만을 "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하기도 했다. 소련군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로, "이승만이 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근거로 했다. 일본 천황이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14일 밤 11시였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터였다. 이승만은 15일 아침 워싱턴에 사는 한국 교포 30여명을 구미위원부로 불러 축하파티를 열었다. 8·15 광복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기 어려워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9월 5일 국무성 여권과장 루드 쉬플레어 여사를 통해 여권발급허가를 받았고 국방성 스위니 대령의 주선으로 미군작전 지역인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도 일단 얻었다. 그러나 국무성은 곧 주미한국외교대표라는 이승만의 호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권발급허가를 취소해버렸다. 이승만은 즉각 호칭을 포기하겠다는 태도를 밝혔지만 국무성은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계속 여권발급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더 이상 그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왔다.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 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정을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했다. 그러나 이승만 역시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법통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귀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 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 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의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하지 장군도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국 국무성의 편의 제공으로 귀국한 만큼, 미 군정에 대해서나 미국 행정부에 대해서나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0월 16일 오후 허정은 미 군정 당국의 연락을 받고 이승만이 여장을 푼 조선호텔로 찾아갔다. 허정은 이승만과 대좌, 국내 정세를 설명했다. 허정은 '무엇보다도 이 박사가 겨레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좌익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 자리에서 허정은 한민당의 창당을 알리고 그에게 영수 추대를 수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락을 거절했다. 허정은 여러번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한 정당 정파의 리더가 되기는 싫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성품을 알고 있던 허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 중순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한다. 그가 미국에 체류했을 때 이미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허정, 장덕수가 돈암장에 출입했고, 윤치영, 이기붕 등은 그의 비서역을 자처했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여기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 정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후 처벌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했고, 11월 21일 이승만도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친히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가 왜적(倭敵)의 압박 밑에서도 민족의 개명(開明)과 국권(國權)의 회복(恢復)을 위하야 분투항전(奮鬪抗戰)한지 다년(多年)이었는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게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痛念)히 여겨온 바"라며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하여 출세(出世)됨을 우리는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 11월 26일 이승만은 '전체 국민은 총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자'며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11월 30일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였다. 1945년 11월말과 12월 초 돈암장으로 재력가 20여 명을 불러모아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려는 모든 국가지도자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들의 지원을 받는다. 조선에서는 이렇나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면서 경제보국회 결성을 독려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초대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 1945년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을 하였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김구, 김규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공산당을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공산당과의 일체 타협을 거부하였다. 허정은 이를 두고 소련의 찬탁하라는 지시를 받고 바로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사대주의 때문'이라 하였다. 그해 1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무성 담당자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이승만의 미국 도미를 불허하는 미군정의 반대로 이승만의 도미는 난관에 부딪혔으나, 출국을 감행했다. 이때 국내외 우파 단체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이승만의 도미 여비가 마련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이승만을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도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2월 8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설립되자 이승만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이승만과 김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 46년 2월 이승만은 김구를 위원장으로, 김성수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3월 1일 김구와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이화장에 반(半) 연금상태로 묶어두었다. 정문에는 미군 헌병을 세워두고 출입자들을 하나하나씩 체크했으며, 미군정청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미군용 전화도 이화장에서 떼어갔다.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 3월 20일 이승만 집의 전화를 끊었다.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1천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에 선출됐다. 1946년 8월 3일 여운홍의 사회민주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 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위에 도전했다. 그러한 정부의 지위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단순한 과도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승만은 밝혔다. 그리고 여러 정치써클에서 논의된 정부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손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소공위의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한다면 그때는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완강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미소공위 역시 깨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허정에 의하면 당시 '한민당 안에서는 신탁통치를 전제로 하는 미소 공위 참석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민당이 참석하지 않은 채로 그 협정에서 정해진 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된다면 그 후 한민당은 물론이고 우익 진영도 발언권을 상실하므로 일단 참석하여 반대 의사를 관철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이승만이 강력 반대를 하므로 한민당은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민당에 대해서도 미소 공위 참석을 거부하라고 종용했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하지 사령관은 골칫거리를 만났다며 골치아파했다. 이승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소공위는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었다. 허정은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한민당이 미소 공위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허정의 장기간 설득은 통하여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반대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소공위 반대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다. 허정은 이를 두고 '이 박사는 고집이 센 반면에 옳은 말은 깨끗이 받아들이는 담백한 일면이 있었다.'고 했다. 허정은 또 만일 이박사가 끝까지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고집했다면 한민당 등 이 박사 지지 세력은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일단 이 박사의 묵인 끝에 한민당은 미소 공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미군정은 골치아파했다.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의 반전을 꾀한다.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에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 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과감한 발언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부터 '늙은 보수꼴통'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1946년 6월 1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땅에 발못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고나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화답하였다.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 1946년 9월 10일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 미수를 당하였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은 김구·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 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1946년 12월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은 3.1절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김구와 임정의 행위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하였다. 1월~2월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김규식, 장건상, 김붕준(金朋濬) 등 중도우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 이승만이 귀국하던 날, 김구는 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을 전개했다.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격적으로 외치는 이승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하지의 지시에 의해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김구와 함께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전보를 보내 반탁 시위대를 격려하였다.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격려에도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 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9월 21일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0월 18일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는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유엔한위를 마중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그러나 UN위원단 단장인 인도인 메논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8년 3월 17일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이 이승만의 사저로 침투했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 한편 사건 직후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도 암살단의 공모자로 지목했다. 3월에는 총선거 연기설이 확산되었는데, 선거 연기설이 나돌자 이승만은 3월 30일 성명을 발표, 선거 연기설을 비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와의 우정에 금이 간 후 이화장을 찾아온 비서 박용만과 대화하던 중 라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흘렸다. 박용만에 의하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박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더 못했다고 했다. 이날 흘린 이승만의 눈물은 김구선생과 갈라선 이승만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한국의 앞날을 걱정한 온국민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1910~)의 회고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라며 조롱하였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또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을 비난했다. 김선에 의하면 '이박사는 밤낮으로 하지 중장을 욕한다.'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자기(하지 중장을 지칭) 집에 가면 행랑살이 밖에 못할 것이 총선 하는거 자꾸 연기하자 그런다고' 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7월 12일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정부 수립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 이후 헌법 제정과 함께 대통령 선거가 준비된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8월 15일 해방 3주년 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尹潽善)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 광장 앞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부통령도 함께 취임식을 치렀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15일은 단기로 4281년 8월 15일이었다. 8월 26일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우방과 어떤 형태든 외교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러한 정부승인 외교를 위해 조병옥 · 장면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1948년 8월)하였다. 9월 30일 대통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10월 8일 미국 국무성에 미군철수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영부인 및 4명의 수행원(정한경 · 김양천 비서 · 김동성 공보처장 · 이정순 공보국장)이 수행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이날 밤 더글러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11월 6일 여수·순천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제3차 국제 연합 총회(파리, 1948년 12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간신히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12월 12일) 이승만은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대미외교에 있어서 이승만은 국제 연합 총회를 마치고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귀국을 준비 중이던 장면을 대한민국 정부의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 특사)로 임명(12월 27일)하였다. 1949년 1월 2일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 1949년 1월 6일 민족청년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월 7일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1월 8일 일본에 대마도의 반환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월 9일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고, 2월 18일 유엔이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고, 5월 20일 일본에 대한 대일배상요구 관철을 주장하였다.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고 돌아왔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6일 남북통일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에는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 자신의 전기인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그해 6월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개소식에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1949년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한편 1949년 서울지방법원의 '처의 관계부존재확인 판결'을 제기하여 양자 이은수를 파양하였다. 한편 그때까지도 일정부분 생활비를 지급하던 전 부인 박씨와는 6.25 전쟁 이후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하였고, 해방 직후 가졌던 좌익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익,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귀국 초기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선통일, 후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관리를 대거 등용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특위 위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는 등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내용은 "민족 처벌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 등이 결정타가 되어 해산하고 만다. 각 사건은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특경대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 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는 대신 그는 한민당에게 총리직과 내각 각료직의 일부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세력이 강해지자 경계한 이승만은 총리직을 한민당에 안배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는 인사로는 김성수, 조소앙, 이윤영, 이범석 등이 있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총리를 한민당이 아닌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李允榮)을 천거하자 한민당은 집단으로 반대하여 총리서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7월 29일 이범석을 서리로 천거하자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한민당은 이범석을 인준하였다. 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그는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하여 입각시킨다. 내각 인선시 그는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한다. 토지개혁을 통해 그는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정부수립 직전, 한민당에게는 내각 장관직의 절반 또는 총리직을 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재무부 장관 1석만을 부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영향력,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2대 내각에는 한민당이 당명을 바꿔 만든 민국당계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킨다. 1951년 미국의 권고로 한·일관계 정상화 교섭은 남북 휴전 회담이 개시된 직후인 1951년 10월에 미국의 주선 으로 예비 회담 이 있었다 . 그러나, 옛날 일본으로부터 고문 받은 경험이 있는 이승만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명확한 사죄로 7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측은 제의를 거절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취임 이후 그는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2년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 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 중국측의 영해침략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고 부산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황을 전혀 모르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피난을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해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철교 폭파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상당수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북한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소위 잔류파로 분류되어 부당하게 처벌당했다.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북한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자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 수령을 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 참전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20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38선 이북의 수복지역에서 부득이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유엔군은 원산 등의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 남침으로 이미 없어졌으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 진격 전에 정전은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에 체류중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내정하였다. 당초 이승만은 장면에게 인사권을 위임하겠다고 하였으나, "5석 중 3석을 총리가 정하였으니 내무에는 이순용, 국방에는 이기붕을 써 주시오"하고 종용하자 장면은 받아들이고 말았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미국은 소련 및 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 지어졌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였으나 전시 작전권을 UN군에 이양하여 휴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한국전쟁 휴전 후 북한과의 재충돌을 우려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하였다. 중공의 개입으로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한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를 국민방위군 사건이라 한다.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켰다. 전시 중에도 부분적 지방 자치를 실시하는 등 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고, 거창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아사 사건 등으로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용공분자의 음해라는 국민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으나, 국민 방위군 아사자를 목격한 윤보선 등의 진언을 거절함으로써 윤보선 등은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국민 방위군 총책임자 김윤근을 사형시킨다. 민주국민당 의원이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중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하고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이승만은 수도경찰청 인사참모 겸 경기도경찰청 보안과장 최연(崔燕)에게 자유당의 청년조직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최연은 이원국에게 청도관 관원 5천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를 주도하게 되고, 한민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 이승만은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 데모를 획책하고,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한편, 부통령 김성수는 부산정치파동 사건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장문의 항의서한을 남기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으로써 일본의 오래된 야심이 다시 재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 있는 한인 친일분자들은 일본인들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초 이승만은 주미대사 양유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일본 등과는 안보조약을 맺으면서 왜 유독 대한민국과는 그러한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며, 미국 행정부 내 친일인사들은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재무장되면 "한국은 일본에게 또다시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노골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1952년 이승만은 "여성은 이르니 가당치 않다"라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1954년 3월초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직후 양유찬 대사에게 다시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미국이 언젠가는 일본을 위해 한국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월과 11월 한표욱에게도 편지를 보내 "덜레스는 일본을 증강시키기로 작심한 인물", "덜레스는 일본 때문에 한국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월 7일 미군 제315공수사단을 방문하여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일본의 전통적 팽창주의 야욕에 대한 경계와 미국의 일방적인 친일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심각한 우려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닉슨 부통령에게도 여러 차례 전달되었다. 1953년 11월 중순 닉슨이 방한하자 이승만은 아시아인들은 소련과 일본의 결탁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너무 강하게 증강시키지 말 것을 주문했다. 1954년 2월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건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정책은 한국민의 마음을 엄청나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국정부는 일본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한국의 우정어린 경고를 무시하면서, 한국의 입장은 옹호하지 않고 일본의 편만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12월 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54년 3월 5일 그는 국제사회에 국제반공십자군 창설을 제의하였고, 3월 27일에는 일본제 상품의 몰수를 지시했다. 3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의 증강을 미국이 보장하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미국에 통고하는 한편 4월 28일 일본의 반공연맹 가입을 반대하였다. 5월 6일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석한 6.25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해체하고 국제연합 감시하의 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통해 이승만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5월 12일 이승만이 맹렬히 반대하자 대한민국 재선거안을 철회했다. 그 후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여 1956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선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선전하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진보당 사건을 터트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195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을 방문했고 모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콜롬비아대학교에서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3월에는 자유수호에 힘쓴 공로로 미국 금영자유훈장을 받았다. 한편 미국이 일본을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1954년 8월 3일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하고 8월 9일에는 한일회담 재개용의를 표명하는 한편,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8월 30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편파적 정책을 경고하고, 11월 4일 일본의 한국 재침략 망상을 비난했다. 11월 14일 미 국무부가 제안한 일본의 반공동맹 참가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12월 15일 적성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언명하다. 1954년에 제정 되었으며, 영친왕 등 구 황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하여 국유화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당시 자신을 황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영친왕 등의 실제 황실의 후손에게는 '황족' 칭호를 쓰지 말 것이라는 경고까지 날릴 정도로 냉대했었다. 1950년에 이승만은 맥아더와 면담 때, 최초로 영친왕 부부를 만났고, 이때부터 이승만은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인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다. 법 제정 후 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재산법"으로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종황제의 계비인 윤황후는 6·25 때 피란을 다녀온 뒤 원래 살던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릉의 한 집에서 귀양살이처럼 살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상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있던 조항을 1952년 직선제로 개정하여(발췌개헌) 이승만이 중임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改憲)을 준비했다. 1954년 5월 20일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서, 3선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을 후보로 추천하여 다수 당선시켰고, 무소속 의원들도 다수 유인하여 개헌 정지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UN에서 한국 통일을 위한 선거안이 제기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국가 안위에 관한 사안은 국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민투표제를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민투표제를 대표 안건으로 내세우고, 이와 더불어 3선금지조항 폐지·국무원의 연대 책임제 폐지·개별 국무원 불신임 인정·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 부여 등을 골자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리고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김두한(金斗漢)을 제외한 전 의원과 다수의 무소속 의원이 서명에 참여하여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비밀투표를 한 결과(1954. 11. 27),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나타났다. 당시의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이었으므로 이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한 충분한 선은 136명이어야 했다(재적의원 2/3는 135.33…명이므로, 자연인은 136명이어야 함). 따라서 당시 사회자였던 부의장 최순주(崔淳周)는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의원총회에서 이 안을 채택하여 국회에서 재론하기로 하였고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모두 의사당에서 퇴장하였다. 자유당 의원들만 남은 자리에서, 자유당 의원 125명 중 123명이 찬성하여(김두한, 민관식 의원만 반대), 개헌안을 통과된 것으로 결정하고(11월 29일) 이를 정부로 이송하여 결국 개헌안을 공표·발효하였다. 이미 부결선언된 개헌안을 번복하여 가결시킨 행위(위헌), 야당이나 국회의장, 사회자의 의견을 무시한 행위(국회법 위반), 이론적으로도 필요충분한 가결선은 136명이어야 함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은 이론을 적용한 행위(비법리, 비논리 강제 적용) 등은 의회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국민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자유당 정부의 독재적 행태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독재가 연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상대적으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4년 2월부터 이승만은 인도차이나 파병을 계획하고 프랑스와 접촉하였다. 베트남에서 베트콩의 활동이 맹렬하게 진행되는 것을 접한 이승만은 프랑스와 교섭, 한국군의 파병을 제의하였다. 그는 1954년 2월초 국군 1개사단을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미국정부는 물론 프랑스 정부도 이러한 제안에 대해 애초부터 실현성이 없다고 보고 거절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다시 1954년 5월21일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군의 인도차이나 파병을 제안하였다.(「I.N.S. 통신사에 제공한 성명서」,1954년 5월21일,『담화집』2, 33-36쪽)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제안은 곧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베트남의 휴전이 합의됨에 따라 백지화되었다. 한편 1955년 3월 15일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대통령 암살음모자 이성재 외 6명을 검거했고, 10월 7일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관계자 김동훈 등 8명을 체포했다. 1956년 2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자, 2월 5일 직접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였다. 2월 13일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를 보냈고, 2월 21일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을 표명했다. 3월 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승만은 불출마 서한을 전달했다. 56년 3월 5일 자유당이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하자 이승만은 "출마 않기로 작정했다."는 유시를 내렸다. 그러나 3월 6일 국민회·노총·부인회 등이 궐기대회를 갖고 민의를 전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강권하는 집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 집회현장을 다니면서 이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측근들과 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 친위단체들 주최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가 열리고 3월 13일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노총이던 대한노총의 정치파업이 있자 이승만은 3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3월 10일 이승만은 외신 기자들에게 "(국민이) 자살을 원한다면 자살이라도 하겠다"고 말해 민의 수용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3월 11일부터 어용 민의가 전국 각지에서 발동되었다. 영화인, 무대예술인, 댄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우마차 조합에서 우마차 8백대를 동원하여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하는 우의마의를 이승만한테 알렸다. 우의마의 소동으로 서울 거리는 똥바다가 되었다. 3월 12일 이승만은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3월 17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그를 만나 통일방안 협의하였고 일주일쯤 지난 3월 25일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를 발표했다. 3월 20일 이승만은 공보실을 통해 민의는 글로 써서 해도 된다는 말을 다시 전달했다. 3월 23일 이승만은 3백만 명 이상이 날인한 탄원서와 혈서가 들어와 할 수 없이 민의에 양보하기로 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이 담화에서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의 선거 비용으로 백만 환 이상 쓰지 못하도록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3월 28일 이승만은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적격이라고 말했다. 3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81회 탄생 경축식이 정부 및 서울시 주최로 열렸다.(이승만의 생일은 3월 26일이었다.) 자유당은 3월 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자유당 총재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그런데 선거운동기간 중인 5월 5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선거운동의 양상은 급변하였다. 그에 따라 대통령은 당선은 ‘이승만’이 당연시되었으나, 선거결과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무효표가 무려 20.5%에 이르렀고, 특히 서울은 투표자수 608,741명 중에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다 서울의 유권자들은 부통령선거에서는 96.4%의 유효투표율에 야당의 장면 후보에게 76.9%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또 조봉암이 30% 가까이 확보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부담스런 장애물이었다. 이승만은 후보로서 단 한번도 공식적인 정견 발표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서중석은 이를 유권자를 바보 취급하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한 망자존대 의식의 소치였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익희와 조봉암을 비판했다. 5월 3일 신익희는 한강 백사장에서 장시간의 선거 유세를 했다. 신익희는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염을 토하자, 이승만은 그날로 바로 역전 유세 보다 훨씬 강도를 높여 두 후보를 공격했다. 5월 3일 이승만은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는 논산훈련소와 논산, 대선 등 7개 역 플랫폼에서 유세를 벌였다. 그는 역 구내에 가득 모인 군중 앞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고,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류의 언동이다."라고 역설했다.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만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다녀오던 중 열차 호남선 열차 안에서 사망하고, 이승만은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 5월 22일 선거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는 당선공고를 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6월 25일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하였고, 7월 8일에는 환율 고수 및 공무원 인력 감원을 단행하였으며, 7월 26일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했다. 8월 15일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취임식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 등 부통령인 장면은 홀대하였다 한다. 8월 16일 취임 3기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강조하였고, 9월 1일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으며 9월 13일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으나 한국의 UN가입은 무산되었다. 9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했고, 9월 22일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대선 전부터 일본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요구해왔으므로 9월 30일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하는 한편 11월 4일 동해안을 시찰하였다.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 7일에는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들을 예찬하며,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고,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8월 31일 방한한 UP통신의 극동 총국장인 호브라이트씨 부자를 면담하였으며 미국 오클라호마 주지사가 증정한 명예 시민증을 전달받았다. 1957년 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경무대를 찾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이승만은 스탈린식의 사고방식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1959년에 가서야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초안을 짰다. 그러나 4.19로 3개년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월 8일에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난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했다. 앞선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독재체제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였다. 조봉암은 간첩혐의로 사형 당했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의 최측근인 장택상과 윤치영이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이변이 발생한다. 한편 그의 3선, 4선을 출마하기를 원한다며 자유당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3선, 4선 출마를 원하는 관제 시위를 주도했다. 이승만은 이것이 진심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측근들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의 지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믿었다. 국민과 우남을 격리시킨 일부 측근들에 의해 그는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국민의 절대적지지 위에서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고 망상하고 있었다. 소와 말까지 동원한 3선, 4선 출마 권고를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였다. 허정은 '그는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며 그에게는 모순되고 상반되는 두 면이 있었다.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이 어느 면에 중점을 두고 그를 돕느냐에 따라 우남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이념적으로 앞세우고 있던 민주주의의 신념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그를 성심껏 그를 돕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더라면 우남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도 될 수 있었을 것 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유당 일파의 속임수를 얄밉게 생각한 이승만의 최측근 윤치영은 일부러 4대 부통령 선거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기붕의 표를 갉아먹는다. 윤치영에 의하면 '내가 자유당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은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하여 이기붕과 맞서서 결국 장면으로 하여금 당선이 되도록 한 사실이며'라고 밝히기도 했다. 윤치영은 부통령 후보로 나서되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이기붕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호언하였다. 이기붕 일파의 행동을 미워한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인 이윤영 역시 부통령에 출마한다. '이기붕을 떨구기 위해서'였다. 1959년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4대 부통령에 출마했던 이윤영을 밉게 본 이기붕 일파가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승만과의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부통령 후보에 다시 입후보하였다. 주위에서 부통령 입후보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하였다.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낙선하였다. 이후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동안 경무대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승만이 윤치영과 이윤영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3.15 부정 선거가 터진 직후였다. 미국이 한국군의 감군을 직접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1958년에 가서 이승만은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하고, 비밀리에 우익 반군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한편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에게 요청했지만 CIA를 불신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1958년 국방부 장관 김정렬로부터 미국 CIA의 요구에 따라 정보기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받자 그는 당초 거절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 산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1959년 이승만은 라오스의 우익 노사반 장군이 이끄는 반군이 공산군에게 밀리자, 라오스 파병을 계획한다. 이승만은 1959년 라오스 내전에 개입할 의사를 피력하고, 비밀리에 국방부 내의 정보기관인 ‘79호실’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후락은 당시 베트남 대사 최덕신의 도움을 받아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보고에 따라 한국군의 라오스 파병이 깊이 있게 검토되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58년 8월 11일 이승만은 갑자기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야당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법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12월 24일 무술 경관을 국회에 투입하여 야당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의 정문을 폐쇄시킨 채 여당인 자유당만이 출석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비롯해 1959년 예산안 등 10개 법안 27개 의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계속 미국의 한일회담 압력이 들어오자 이승만은 3월 28일 일본 총리 기시(岸信介)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를 표한다. 3월 31일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용의를 표명했고, 4월 26일 멘델레스 터키 총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을 수여했다. 58년 5월 19일에는 일본 총리가 보낸 특사를 면담하였으나 협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58년 6월 29일 AP기자의 서면질문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했고, 8월 5일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 8월 29일 아시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하고 중화민국에 유재흥 국군 연합참모총장을 특사로 파견했다. 9월 13일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충돌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자, 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원자력 연구를 지시하여,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2월 12일 CBS 방송국과의 기자회견에서 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하였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조간에는 무기명 컬럼 여적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에 대한 단평이 게재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면을 지지하였던 경향신문이 이에 따라 폐간되었다. 그해 4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1959년 3월 1일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을 규탄, 일본에 대항한 국내 안전보장이 필요하다 주장했으며 3월 25일에는 미국에 서한을 보내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요구했다. 59년 3월 29일에는 미국 언론에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1959년 4월 초부터 미국과 소련이 정상회담을 계획하자 4월 15일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했고, 6월 8일에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열리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환영과 반공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4일 UPI 기자를 면담하고,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을 강조했으며 59년 6월 25일 미국 적십자사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9월 10일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1959년 12월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을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태는 확대되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1960년 4월 11일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왼쪽 눈에서 박힌 최루탄이 확인되었고, 이는 부정선거 비판여론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언론을 통해 마산 3·15 의거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간주하면서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위는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군부는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한편 학생들을 탄압하자는 측근자들의 제의를 받자 그는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민중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면 된다.' 며 강경 대응론에는 반대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의 뜻을 밝혔다. 그는 불의를 보고 국민이 좌시한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과 3.1운동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때 이승만은 구 비서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는 보고를 듣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 이승만의 하야 권고를 하러 간 허정은 하야 성명을 구술하는 이승만을 문전에서 보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 한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4·19 의거 부상자들이 수용된 병원을 찾아 부상자들을 위문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대통령직 자진 사퇴의 뜻을 표하였다. 이어서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4월 28일 경무대에서 이기붕의 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타살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4·19 혁명은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이화장에 있을 때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으로부터 위로 편지가 왔다. 우남은 답신에서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청년학도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라고 대답하였다.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 김일성은 4월 21일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 4월 26일 이승만 사퇴성명 이후 북한노동당 중앙위 국제부장 박용국은 평양주재 대사들에게 브리핑했다. 브리핑에서 박용국은 "시위대가 탱크병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으며, 부통령인 이기붕의 집을 박살냈고, 전 내무장관인 최인규가 타이완으로 도망갔고, 남조선 경찰들도 동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이 이승만을 남기고 그 정부만 교체하길 원했지만 이승만의 사퇴는 불가피하다 고 발표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입국을 거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했다. 영어에 유창했던 이승만은 실어증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의 간호를 받으며 약간의 한글과 한문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0년부터 심장병이 있던 그는 트리폴리 육군 병원에 자주 진료하였다.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한국 시간 19시 35분에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90세였다. 바로 미국에서 데스마스크를 만든 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 1965년 7월 22일 경기도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 7월 27일 서울특별시 정동 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서울 시가행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 그밖에 내외 귀빈으로 윤보선, 허정, 장면,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이 김포공항에 나와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했다. 시신은 운구차량과 경찰의 호송을 받고 서울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호상기간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시신 귀국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 4·19 혁명 관련 단체들은 이승만의 국민장은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항의 농성을 하였다.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의 부음 소식을 듣고,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7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시신을 영접하였다.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 된다며 반발하였다. 동아일보는 1965년 7월 23일자 사설에서 국장도, 국민장도 불가하다며 정부는 즉시 이승만의 장례에서 손을 떼라 고 항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국장도 국민장도 안 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양자의 의견 조율이 안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하였으나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 화가 난 박정희는 '가족장으로 하려면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두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결정되었고, 박정희는 국무총리 정일권을 보내 추도사를 대독하였으며, 기타 허정, 이범석, 윤치영, 장택상, 윤보선, 장면 등 이승만의 측근들 및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 등이 친히 추도사를 지어 낭독하였다. 해방정국에서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 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 라고 말했다. 또한 허정은 그가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점을 두고 그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 고 평하였다. 장면은 '그 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였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본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승만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는 것이다.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며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 고 평하였다. 허정은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극작가 신봉승은 '오직 조국의 자주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였다.'는 평을 내렸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 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 1970년대부터 윤치영, 박용만 등에 의해 이승만 재평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윤치영은 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의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2001년 이후 결성된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박사는 국민학교 의무교육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2대 국무총리와 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 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고 평가하였다.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로 평가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되 4사 5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다. 이승만의 승인 하에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농림부 장관이었고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조봉암이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건의와 설득을 받아들여 농지개혁을 승인한다. 농지개혁으로 왕조시대 이후 대지주에게 집중된 농토를 실제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인천의 지역 유지이며 인천시의회 제1대 의장인 이명호는 조봉암의 농지개혁에 반발하였으면서도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았다고 한다. 이명호의 다섯째 딸 이양숙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호는 토지개혁으로 그 많은 땅을 빼앗겼으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고. 워낙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는데, 그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으로 임명한 조봉암이 나서서 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는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효과는 남다른 것이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폄하하는 의견도 있으나, 정설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2019년 현재까지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제2의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약의 가장 큰 목적인 전쟁 방지를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국방 역량을 미군이 부담하여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그만큼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의도 존재한다. 즉, 산업화를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하여 이후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안보적 위기가 높은 국가들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은 3% 미만으로 세계 평균과 그리 차이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매년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절감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항시 전쟁 재발의 위험이 존재하는 한반도에 '미국이 전쟁을 막아준다'라는 안정감을 제공함으로써 일명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억제하여 해외 투자자금의 안정적 유치에 크게 기여해 왔다. 미국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이승만의 승부수에 불쾌함을 내비치면서 마지못해 허락해 준 것이었으나, 한국이 최빈국을 탈출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이를 '우리 노선에 참여한 나라는 성공할 수 있다'라는 모범 사례로서 선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조약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일본에서 한반도까지 확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는 중국이 G2로 부상한 2010년대에 들어 더욱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일례로 서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해 한미합동훈련을 할 때마다 중국과 북한의 속은 타들어가지만, 수십년간 맺어온 돈독한 한미관계라는 명분이 있어 함부로 항의하기 힘든 상황이다. 24년 만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연설한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역시 반세기 넘게 이어온 혈맹관계와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성장한 한국의 발전 사례를 강조했다. 물론 역으로 북한 입장에서는 적화통일을 좌절시킨 근원이라 볼 수 있다. 휴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군사적 보호를 담보하여 북한 수뇌부의 침략 의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북한 정권과 종북주의자들이 빼놓지 않고 외치는 요구사항 중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폐기'가 있는 것이다. 전북대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은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고 했다. 강준만은 또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 군인, 관료 출신들을 '반공투사'라 칭송하면서 대거 등용했다는 점과,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들과 책임들, 토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나아갔다는점, 이후 자유당과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점, 집권욕, 고집 등에 대한 비판들이 있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 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써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1919년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감시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후에 다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신채호, 신성모 등 임시정부의 무장투쟁파와 갈등하였고, 박은식 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임정에서 이승만의 편을 들던 인물은 내무부총장 김구, 의정원 의장 최창식(崔昌植) 등 소수였다. 이때,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 거기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임하면서도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상하이에서는 활동이 거의없어 1925년에 탄핵을 당하게 된다. 조소앙은 이승만에게 쿠테타를 종용하는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탄핵하자 이승만은 미국내 재미 한인 교포들에게 임시정부로의 송금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승만의 반대파들이 국민대표자 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의 해산과 재창조 등을 주장하는 창조파, 개조파 등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승만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2년 11월에는 33년에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고, 1934년 국무위원회 회의에서는 신익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신임되었다. 측근이었던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 초기에 그의 신임을 받기도 했던 장면에 의하면 '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 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라고 비판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 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양민학살과 한국전쟁 중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이 제기된다. 또한 경남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최대 백이십만 명 방산비리로 인해 학살된 사건), 한국 전쟁 발발하자마자 한강대교폭파로 인한 민간인 학살 등도 대표적 사건들이다.(이로인해 국제사회에서는 나치독일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조선의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자 라고 불렀다.) 4.19혁명 이후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의 동상이 없었다. 한국자유총연맹은 이승만의 동상 건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2011년 8월 25일 이승만 동상이 서울특별시 장충동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은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 대통령 장기집권과 독재정권 수립을 위해, 1952년의 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개헌,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1960년의 3.15 부정선거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서 두 차례의 개헌은 기립투표와 궤변으로 민주적 개헌 절차를 무시한 채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이승만은 대통령에 세 번 피선되며 장기집권을 실현했고, 이후에도 4선을 위한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또 한 번의 임기연장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다수의 학자들로부터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보수 정치인 김무성 의원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정적 조봉암을 숙청하기 위해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사건 당시 이승만 본인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이 틀림없다. 이러한 위험분자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하는 등 본 사건에 깊숙히 관여한 정황이 있다. 이후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거, 간첩혐의로 사형되었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피해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국가에 권고했고, 2008년 8월 조봉암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하였다. 이로써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에 대한 사형 집행은 이승만 정권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남게 되었다. 1955년 '동아일보 괴뢰 오식 사건'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사건', 1958년 '경무대 똥통 사건'과 '함석헌 필화사건',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역사학자 박한용, 언론인 김삼웅 등 다수의 인사가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19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제스를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내한한 장제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고 딘 디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는 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국(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 훗날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거의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통치하게 된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암살,테러등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대를 잇는다는 개념 자체를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극도로 혐오하였다. 서재필은 문중에서 서재필이 아들이 없음을 염려하여 양자를 세우려고 계획하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일들이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둘이나 살아 있소. 이제 새삼스럽게 양자를 세운다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소이다."하고 거절해버렸다. 이어서 "이런 생각은 모두 고루한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민주사상을 길러가는 것이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할 수 있는 길이오."라며 "부지런히 일이나 하고 착실하게 살기 위한 새로운 힘을 연구하시오."라고 덧붙였다. 서재필은 후사가 끊어진다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문중에서는 서재필이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짐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재필의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미 가족관념을 청산한 인물이었다. 서재필은 서울의 친척집에도 다니지 않고 공무가 끝나면 조선호텔에서 혼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가 귀국하자 서씨문중에서는 들끓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이러한 소란을 몹시 싫어하였다. 서재필은 한국인의 가족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가족주의가 바로 끼리끼리 해먹는 패거리주의를 만드는 원인이며 이방인을 배척하는 근간이라 생각하고 끔찍히 여겼다. 서재필은 지나친 형식 위주의 완고한 족벌의식은 조국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뿐이라고 했다. 서재필의 이러한 풍모를 두고 그의 둘째딸인 뮤리엘이 후에 지적하여 말하기를 '파파는 심플맨이에요.'라고 하였다. 훗날 송건호는 서재필이 형식과 금전과 동양적인 가족 관념을 청산한 크나큰 인물이었다 라고 칭송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재필은 탈조선화 된 인간이라 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성재 이시영의 장례식 때 신익희가 장례위원장이었다. 이시영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승만은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상제에게 조의를 표한 후 돌아서다가 두 손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익희에게 "그래도 성재장은 이런 고몰고몰한 손자들이 있었구려"라고 하였다. 신익희나 그의 비서 신창현에 의하면 이승만은 이시영의 손자들을 보더니 '눈귀에 다시 눈물이 지적지적하였다' 했다. 나중에 신익희는 비서이자 종손인 신창현에게 "그 어른 오랜 미국 생활로 아예 우리나라의 대를 잇는다던가 하는 종법 관념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자기가 아들도 없고 손자조차 없음을 마음속 깊이 한으로 품고 계신 것이 역력히 보이더라."라고 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후사가 없음을 한으로 여겼다고 술회하였다.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전북대학교 신방학과 교수 강준만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라고 답했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으로 "이승만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정은 이승만이 사리에 옳은 말이라면, 누구의 말이라도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우남은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자신보다 20~30세 어린 연하자들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평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인사를 받거나,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 존재를 하고 맞인사를 했다 한다. 허정은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 듣는 성미였다. 또한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머 센스가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다. 고 했다. 조크를 잘 하기로도 으뜸이었다.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 두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한다. 허정은 직접 담화를 쓰지 않고 장관을 해임할 때도 '그 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좀 나가서 쉬게'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고 결단으로 실천하였다.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여부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고 연후에 진부를 가려내는 수가 적지 않았다. 고도 했다. 이승만의 측근이자 중학교 재학때 기독교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웠던 허정은 이승만이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쳤으며 성격이 유머러스했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그는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성품이어서 학관에서는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고 화가 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며 '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성격이 되어 유머를 연발했다.'고 한다. 허정은 이승만이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하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면 자기 뜻을 조금이라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가부장적 카리스마의 일면이 엿보였던 것이다. 허정은 이승만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장점과 단점, 업적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고집, 이때는 확신이요 신념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우리 역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한 것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은 그의 고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고집의 나쁜 일면은 그에게 말년의 불운을 안겨주었다. 그가 자유당에 카리스마적 인물로 군림하지 않고, 진정한 민주 정당으로 육성하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합헌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겨놓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국부(國父)로서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은 내손으로 라는 결코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고집이 결국 슬픈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평소의 이승만은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고, 유머도 잘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집스러운 성격과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놓을 경우, 자신 대신 대통령이 될 인물로 장면과 조병옥을 꼽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두 사람의 도덕성과 능력, 그리고 애국심(특히 미국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야유를 더 받더라도 스스로가 좀 더 오래 집권하면서 나라를 보위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한다. 미국에서 오래 체류한 탓에, 비교적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는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했으며, 심지어 영어로 연설문을 써서 한국어로 번역을 시켰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는 약간의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 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한다.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소설가 미당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 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의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1958년 이승만은 에너지를 발전을 위해 핵력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핵력 공학과 개발을 추진한다. 그러나 핵력 공학과 개발 시도는 2년 만에 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절반도 시공되지 못했던 핵력 공학과 개발 계획은 그대로 백지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하지만 휴전 이후 미국은 북방한계선을 그어 이승만의 북진을 막았다. 이승만은 미국의 개입없이 북진하려면 핵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학생들을 유럽으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의 의도를 알고 독일 등에 망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 1952년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수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마땅한 대안자를 찾지 못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유지하되 그의 주변 측근들 중 강경파를 숙청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미국의 정책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미국은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의 퇴진에 대해 윤치영은 '미국 사람들이 앞장서서 한 짓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증언하였다. 1950년대 말에 있어서는 한때 장면을 대안으로 세웠으나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유당 내 온건파인 이기붕 등을 통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추진하려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정당 정치 자체를 파벌싸움이나 일으키는 갈등의 요인으로 해석하였다. 이승만은 정당정치를 조선시대 당파 싸움 개념의 연장선으로 이해하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의 영수가 되어달라는 허정의 주장에 대해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민족을 단합시켜 한 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오.'라고 답했다. 허정은 이러한 정책을 높이 평했다. 반면 이승만의 정당정치 혐오를 두고 신익희와 윤보선 등은 비판을 가하게 된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 창당 사실을 이승만에게 알리기 위해 신익희와 김성수는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신익희는 이승만이 창당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자 이를 불쾌히 여긴다. 면담은 오래 걸렸고 그 날 오후에 나왔다. 나온 후 김성수는 차에 오르자 마자 벌레 씹은 우거지상을 하고 말이 없었다. 신익희는 "정당은 무엇 때문에 조직하는 건데 이 어른 정당을 조직했다고 인사온 사람보고 정권에는 도전하지 말라니...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두고두고 하시겠다는 말씀이야. 우리들을 아간지(兒看之), 어린아이 보듯 하시는 말씀이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익희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정당 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정당정치를 두고 민주주의 정당 정치를 부인하는 행위라며 비판한다. 윤보선은 '그이는 흉중에 무슨 생각을 품었던지 정당정치의 부당성을 주장해 오다가 6.25 사변 후 갑작스레 자유당을 만들어 정당정치를 표방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의회 정치사상 본궤도를 찾은 셈이 되었다 고 주장하였다. 한편 2대 대통령 때부터 이승만은 민심이 이반되어 권위가 날로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민 대다수를 점유하는 농민, 노동자, 근로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당을 조직하겠으며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한 것을 두고도 반응은 엇갈렸다. 나중에 이승만이 친위 정당인 자유당을 결성한 것을 두고 윤보선은 당연한 정치태도라는 입장을 보인 반면 신익희는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로 하면 당선이 어려우니까 재선을 위해 수를 쓴 것으로 해석하였다. 허정은 귀국 초기의 입장처럼 중립적인 시각을 보이라며 촉구하기까지 했다. 이원순은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관여, 간섭하면서도 일면 사소한 것은 대강 넘겼다고 했다. 그는 정사의 세부에까지만 관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행정부의 자세한 사무에는 초연하였고, 원칙상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정책에 주의를 집중하도록 하였다. 신익희 역시 이승만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증언하였다. 신익희는 취임 초 그를 찾아가 그가 시시콜콜 간섭, 개입하는 것을 염려하여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라며 각 해당부서 소관 업무나 인사권한은 장관, 차관선에서 해결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다른 짓을 할지도 모른다며 응수하였다. 이승만은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라고 하였다. 허정은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 외에도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또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사명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념 또는 아집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우남은 자기 손으로, 그리고 자기만이 한국을 훌륭한 민주국가로 키울 수 있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스스로 설정한 정치적 목표였고 스스로 내세운 사명이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될 때까지 이 사명을 수행하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신뢰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국민의 이러한 신뢰는 그의 정치적 사명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동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보기도 했다. 만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업무 스타일을 그의 최측근 이외의 부하직원들은 피곤하게 여겼고, 이기붕 일파와 자유당은 이승만에게 소와 말까지 동원해가며 국민이 재출마를 희망한다(우의마의)며 그를 속이기도 했다.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국군 세력을 이승만은 경계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이 그와 친밀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의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 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소위 경무대 유시를 근거로 하는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의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내지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였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음모와 교사 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를 두려워하던 이승만은 국군 내 일본군 파벌, 만주군 파벌, 광복군 파벌 간의 헤게모니 쟁탈 갈등을 알고도 묵인했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驅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 그가 독재자라는 견해에 대해 독재자는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에 의하면 이승만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독재자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독재를 했더라도 공적이 있다면 독재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 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 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 할 당시의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했다.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는 "우남께서는 을미사변, 을사늑약, 경술합방을 겪으시면서 해내, 해외에서 영토토 국민도 없이 유한한 몇몇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하시느라 어렵고 위험한 형극의 길을 50여 기나긴 성상을 걷다가 반쪽일 망정 영토, 국민, 주권의 세 요소를 갖춘완전한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셨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남달리 여타유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만 가지 모두가 청황이 부접하고요, 얼얼이 미정한 때에 깊은 근심과 짙은 걱정이 전보다 몇 배 더하실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상해에서, 미 본토에서 독립운동하시던 그 때와는 판이하게 아주 다릅니다."라며 "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 놓으면 모두가 내려 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장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만하신 터수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 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신익희는 그가 독립운동 할 당시의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고 하였다.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은 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측근을 잘 못 기용했다면, 그 책임 역시 임면권자인 대통령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 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49년 3월 26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54년 9월 18일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56년 8월 15일 이 동상의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 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59년 10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우민회관', '우남정' 등 이승만의 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건물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0년 한기총 나라사랑운동본부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 동상 건립 소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의 정체성을 세우고 미국과 손잡고 태평양 기독교문화권을 형성한 우남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펼치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 정신과 정통성 회복을 위해 이 대통령 기념사업과 동상 건립, 건국기념일 제정에 정부가 앞장서 줄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는 동상 건립 모금운동과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 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미국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 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용만과의 갈등 중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 활동에서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온 초기부터 하와이 실력자이면서 군사양성에 열중하는 박용만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박용만 반대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의 운영권 곧 회비관리권을 움켜쥐려고 온갖 공작을 벌였으나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박용만은 다른 농장으로 군영을 옮겨가면서 군사훈련을 거듭했으나 두 사람의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1910년대 중반 무렵 일제는 밀정을 통해 박용만의 군사훈련 사실을 캐냈다.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항의했고 국무장관은 하와이 총독에게 그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1918년 박용만이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박용만은 온갖 음모에 시달리면서 주도권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자금횡령 혐의로 대한인 국민회 간부들을 고소했고, 국민회 간부들은 법정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로 벌인 소송사건이 열 차례나 있었다. 국민회와 이승만파(동지회)가 서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고 국민회 대포회의때 총격이 가해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쟁 속에서 마침내 국민회 주도권이 이승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 대한인 국민회 계열 재미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두고 '협잡배'라 매도했고 돈을 너무 밝힌다고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승만과 국민회가 독립자금 문제로 분란을 겪어 끊임없이 의혹을 받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자 국내외에 걸쳐 많은 독립자금이 들어왔는데, 1919년 미주의 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송금한 내역을 보면 공식적으로 36,000달러였다고 한다. 다음 해 이승만도 많은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왔는데, 1920년도에는 미주에서 200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오늘날 가치로 보면 2억 달러가 된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발족한 뒤, 미주 동포들이 낸 독립자금은 구미위원부에서만 사용하고 임시정부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자금 모금을 두고 다시 주도권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그는,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은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거주했다. 이때 윤치영의 부인 이은혜와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등이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도왔다.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돈암장에서 이주한 후 마포장에 머무를 무렵, 김구 외에 임영신과 윤치영만이 마포장을 통제받지 않고 출입하였다. 이때 이승만이 임영신과 동침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임영신을 마포장에 출입금지 시켰다.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는 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 이 사건 직후 김학규는 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 그러나 김학규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1918년 징집서류에 이승만 본인의 국적을 'Japan'으로 자필서명한 사실이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 이 공개한 자료에 의해 드러났다. 더욱이 동시대 미주한인 대부분의 징집카드 국적란에 'Korea'로 표기되어 있던 것으로 드러나 그의 기회주의적 면모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임진왜란때 활약했던 이순신의 부하 이순신의 후손이고 더 올라가면 양녕대군의 직계후손이다. 첫 배우자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 이봉수를 잃은 뒤,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강석이 사망한 뒤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이 양자 후보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며 양자 입적을 중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뒤 고아원에서 아들 하나를 양자로 들여 은수(恩秀)라고 하였다. 그러나 1949년까지도 은수가 호적상 그의 양자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이승만의 양자는 같은 항렬의 친족인 이승용의 아들 이인수를 들이게 됐다. 신체시 효시는 이승만의 '고목가'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이 1896년 《협성회보(協成會報)》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신체시를 발표하였다는 설이다. 또한 이승만은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옥중기)와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한 일본 내막기 등을 썼다. 그밖에 시집도 냈는데 옥중에서 쓴 시들의 모음집인 체역집 등이 있다. 체역집이라는 시집은 그가 고종 황제의 수구정책을 비판한 혐의 등으로 1899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체포, 구금돼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 지은 한시(漢詩)들을 모은 것이다.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인 장평도정 가문에서도 이승만은 한참 방계에 속하였다. 14대조 부림령 이순(1489 - 1540) 역시 장평도정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고, 12대조 이충의는 셋째 아들, 11대조 전풍군 이원약이 둘째 아들이었으며, 6대조 이징하는 둘째 아들, 5대조 이환은 셋째 아들이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협성회를 통해 이승만을 지도하였으나 해방정국에서 그는 이승만의 정적으로 변신했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YMCA에서 그의 활동을 도왔고, 옥중에 있을 때는 이승만이 준 성경을 보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상재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이승만의 미국 유학비와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였다. 가난한 한인 고학생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끼니와 차비와 숙박비도 지불해주었고, 학생들의 학비까지 직접 건네주기도 했다. 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또한 열녀상(賞)을 부활시켜서 매년 열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58년 11월 5일에는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전 참전 의사를 발표했다. 파병은 1964년에 가서야 첫 파병군이 지원된다.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대단한 미식가였고, 독서가였고, 재담을 즐기고, 낚시, 테니스, 정원 손질, 개를 데리고 산책하기, 서도 등을 즐겼다. 그는 많은 책을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시 짓기도 좋아해서 애국충정에 넘치는 한시를 많이 지었다. 또 한시들 중에는 소, 벼룩, 모기, 빈대, 쥐, 파리, 누에 등을 주제로 하여 읊은 것들도 있다. 옛날에 사용하던 환화에 그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도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은 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서 돈에서 이승만의 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군 (수학) 추상대수학에서, 군(群, )은 결합 법칙과 항등원과 각 원소의 역원을 가지는 이항 연산을 갖춘 대수 구조이다. 여기서 대수 구조는 일련의 연산을 갖춘 집합으로 정의되며, 결합 법칙은 괄호를 넣는 방식이 연산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항등원은 곱셈의 1 또는 덧셈의 0과 같은 성질의 원소이며, 역원은 곱셈에서의 역수 또는 덧셈에서의 반수와 같다. 예를 들어, 정수의 집합과 덧셈의 순서쌍 formula_1은 군을 이루는데, 이는 항등식 formula_2 및 formula_3 및 formula_4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군은 각 원소가 역원을 가지는 모노이드로 정의될 수도 있다. 여기서 모노이드는 결합 법칙과 항등원을 가지는 이항 연산을 갖춘 대수 구조를 말한다. 수학적 대상의 대칭들의 집합은 군을 이루며, 이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등장하는 개념이다. 군을 연구하는 추상대수학의 분야를 군론(群論, )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군론은 대수 방정식 이론과 기하학과 수론에서 기원한다. 군은 모든 원소가 가역원인 모노이드이다. 즉,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이항 연산 가 주어진 집합 formula_7이다. 군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위 정의와 동치이다. 왼쪽 항등원 및 왼쪽 역원을 갖는 결합 마그마 ⇒ 군: formula_18를 왼쪽 항등원이라고 하자. 또한 임의의 formula_11에 대하여, 그 왼쪽 역원 formula_20와 왼쪽 역원의 왼쪽 역원 formula_21를 취하자. 그렇다면, 이다. 즉, formula_24은 항등원이며, formula_20는 formula_26의 역원이다. 공집합이 아닌 결합 유사군 ⇒ 왼쪽 항등원 및 왼쪽 역원을 갖는 결합 마그마: formula_11를 취하자. 그렇다면, 인 formula_18가 존재한다. 임의의 formula_30에 대하여, 인 formula_32가 존재한다. 즉, formula_24은 왼쪽 항등원이다. 왼쪽 역원의 존재는 유사군의 정의에 따라 자명하다. 군의 원소 formula_11의 차수(次數, )는 다음과 같다. 즉, 거듭해서 1이 되는 최소의 지수이거나, 아니면 무한대이다. 간혹, 군 formula_36의 집합의 크기 formula_37를 군의 차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군의 원소의 차수는 만약 유한하다면 항상 군의 크기의 약수이다. 군 formula_36의 부분군 (部分群, )은 formula_36의 부분 집합 formula_40 가운데 다음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즉, 역원에 대하여 닫혀 있는 부분 모노이드이다. formula_46가 formula_36의 부분군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정규 부분군은 부분군 가운데 켤레 작용에 대하여 불변인 것이다. 군 formula_36의 부분군 formula_50이 정규 부분군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정의에 따라, 정규 부분군의 왼쪽 잉여류는 오른쪽 잉여류와 일치한다. 두 군 formula_36, formula_40 사이의 군 준동형 사상(群準同型寫像, )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 formula_54이다. 준동형 formula_57의 핵과 상은 각각 이다. 여기에서 f의 핵은 G의 정규 부분군(f(gug) = f(g)f(u)f(g) = f(g)1f(g) = f(g)f(g) = 1)이며, 상은 H은 부분군임을 알 수 있다. 준동형사상 f가 단사 함수일 필요충분조건은 ker(f) = {1}이다. 주어진 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을 만드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군 formula_7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집합 formula_36 위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이항 연산을 정의하자. 그렇다면, formula_64 역시 군을 이룬다. 이를 formula_36의 반대군(反對群, ) formula_66이라고 한다. 이는 모노이드의 반대 모노이드의 특수한 경우이며, 또 군을 하나의 대상을 갖는 범주로 볼 경우 반대 범주의 특수한 경우이다. 반대군 연산은 함자적이다. 즉, 군의 범주 formula_67 위의 자기 함자 를 정의한다. 아벨 군의 반대군은 스스로와 같다. 즉, 아벨 군 위의 항등 함수는 스스로와 그 반대군과의 군 동형을 이룬다. 모든 군은 스스로의 반대군과 다음과 같은 함수를 통해 표준적으로 동형이다. 범주론적으로, 이는 군의 범주 formula_67 위의 항등 함자 와 반대군 함자 사이의 자연 동형을 정의한다. 어떤 군의 정규 부분군이 주어졌을 때, 그 잉여류들은 군을 정의하며, 이를 몫군(-群, )이라고 한다. 이는 몫공간이나 몫환과 같이, 군에 동치 관계를 줘 몫을 취하는 연산이다. 군 formula_36의 정규 부분군, formula_51가 주어졌을 때, 몫군 formula_76은 그 (왼쪽) 잉여류 formula_77 (formula_11)들의 집합이다. 이 집합에는 다음과 같은 군 연산을 줄 수 있다. 이 연산은 formula_50이 정규 부분군일 경우 정의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몫군 formula_76이 군을 이루는 것을 보일 수 있다. 군들의 집합 formula_83가 주어졌을 때, 직접곱 는 이들의 곱집합에 군의 구조를 준 것이다. 군의 범주에서의 곱이다. 두 군 formula_40, formula_50 및 작용 이 주어졌을 때, 반직접곱 을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직접곱의 일반화이다. 군 formula_36, formula_40가 주어졌을 때, 자유곱 formula_91은 formula_36와 formula_40로부터 생성되는 가장 일반적인 군이다. 이는 (두 군 다 자명군이 아니라면) 항상 무한군이며 비아벨 군이다. 자유곱은 군의 범주에서의 쌍대곱이다. 이 밖에도, 화환곱() formula_94이나 차파-세프 곱() 등이 존재한다. 모든 군의 항등원은 유일하다. (이는 모노이드의 항등원이 유일하다는 정리의 특수한 경우이다.) 군 formula_36의 원소 formula_11가 주어졌을 때, 임의의 원소 formula_30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즉, 군에서는 (일반적인 모노이드와 달리) 왼쪽 역원 · 오른쪽 역원이 서로 일치한다. 군 준동형은 항등원을 항등원으로, 역원을 역원으로 대응시킨다. 즉, 군 준동형 formula_54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군에 대한 기초적인 정리로는 다음이 있다. 군과 군 준동형의 범주 formula_67은 대수 구조 다양체의 범주이므로, 완비 범주이자 쌍대 완비 범주이다. 이 경우, 각종 극한과 쌍대극한은 다음과 같다. 군의 범주에서 모노이드의 범주로 가는 망각 함자가 존재하며, 이는 충실충만한 함자이다. 즉, 두 군 사이의 모노이드 준동형은 군 준동형과 같다. 이 망각 함자는 왼쪽 수반 함자와 오른쪽 수반 함자를 동시에 갖는다. 마찬가지로, 군의 범주에서 집합의 범주로 가는 충실충만한 망각 함자가 존재하며, 이 함자의 왼쪽 수반 함자는 집합을 이로부터 생성되는 자유군에 대응시킨다. 군의 범주에서 작은 범주의 범주 formula_110로 가는 충실충만한 포함 함자 가 존재한다. 이는 군 formula_36를,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모든 자기 사상이 가역 사상인 작은 범주에 대응시킨다. 환의 범주에서 군의 범주로 가는 함자 가 존재하며, 이는 환을 그 가역원군에 대응시킨다. 이 함자는 왼쪽 수반 함자 를 갖는데, 이는 군 formula_36를 정수 계수의 군환 formula_116에 대응시킨다. 군들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를 이루며, 이 경우 을 갖는다. 이 경우, 군의 연산들이 만족시키는 항등식은 다음 다섯 개이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에서, 부분 대수는 부분군, 준동형은 군 준동형이며, 합동 관계는 정규 부분군과 일대일 대응한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에서, 보편 대수학적 중심은 군의 중심과 같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의 부분 다양체들의 예로는 다음이 있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의 부분 다양체들의 집합은 완비 모듈러 격자의 구조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군의 다양체들의 집합 formula_135의 만남과 이음은 다음과 같다. 또한,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들의 부분 다양체들의 집합은 모노이드의 구조를 갖는다. 두 다양체 formula_138, formula_139의 곱은 다음과 같다. 즉, formula_138와 formula_139의 곱은 formula_138의 원소의 formula_139에 대한 군의 확대들의 모임이다. 두 다양체의 곱은 항상 다양체를 이루며, 이 곱에 대한 항등원은 자명군의 다양체 formula_145이며, 또한 모든 군의 다양체 formula_67는 다음과 같이 곱에 대하여 0을 이룬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의 부분 다양체들의 모노이드는 이 두 관계를 제외하고는 자유 모노이드를 이룬다. 즉, formula_149을 갖는 모노이드들의 대수 구조 다양체에서의 자유 원소이다. 군의 대수 구조 다양체의 부분 다양체들의 수는 formula_150에서 formula_151 사이이다. 군 formula_36의 부분군들의 포함 관계에 대한 부분 순서 집합 formula_153은 완비 격자이며 대수적 격자이다. 군 formula_36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군 formula_36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모든 격자는 어떤 군의 부분군 격자로 나타낼 수 있다. 즉, 임의의 격자 formula_160에 대하여, formula_160과 동형인 부분 격자를 그 부분군 격자에 갖는 군 formula_36가 존재한다. 또한, 모든 유한 격자는 어떤 유한군의 부분군 격자로 나타낼 수 있다. 대표적인 군의 종류로는 다음이 있으며, 이것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포함 관계가 성립한다. 이것들 말고도, 다음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군들이 있다. 추가 구조를 가지는 군은 다음이 있다. 아주 많은 예가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지수 함수 는 두 아벨 군 사이의 군 준동형이다. 여기서 formula_173는 덧셈군이며, formula_174은 곱셈군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복소수체에 대한 지수 함수 역시 군 준동형이다. 역사적으로, 군론은 19세기에 방정식 이론 · 수론 · 기하학의 세 갈래로부터 비롯되었다. 방정식 이론의 주요 목표는 고차 방정식을 거듭제곱근만으로 푸는 것이었다. 4차 이하의 방정식은 이러한 대수적인 해가 존재하지만, 5차 이상의 경우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조제프루이 라그랑주와 파올로 루피니, 닐스 헨리크 아벨 등은 고차 방정식의 해를 이해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순열들의 군에 대한 각종 정리들을 발견하였고, 루피니와 아벨은 결국 5차 이상의 방정식의 대수적 일반해의 부재를 증명하였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아벨의 이론을 추가로 발전시켜, "군"()이라는 용어를 정의하였고, 또 군론을 체론과 연관시킨 갈루아 이론을 제창하였다. 또한, 갈루아는 정규 부분군과 가해군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갈루아의 이론은 갈루아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갈루아의 사후 카미유 조르당의 《치환과 대수 방정식에 대하여》(, 1870년)나 오이겐 네토()의 《치환 이론과 그 대수학적 응용》(, 1882년) 등이 갈루아의 이론을 널리 전파하였다. 기하학에서, 사영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으로, 이러한 기하학들의 구조를 이해하는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1872년에 펠릭스 클라인은 이러한 기하들을 그 대칭군을 통해 일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고, 이를 에를랑겐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1884년에 소푸스 리는 오늘날 리 군이라고 불리는 군들을 도입하였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이후 빌헬름 킬링과 이사이 슈어 등이 리 군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합동 산술 및 이차 수체의 덧셈 및 곱셈의 구조를 연구하면서, 다양한 군들의 예를 발견하였다. 이후 레오폴트 크로네커와 에른스트 쿠머는 가우스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쿠머는 데데킨트 군에서 유일 인수 분해가 실패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군인 아이디얼 유군을 도입하였다. 19세기 말에 군론은 수학의 독립적인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서 케일리, 막스 덴, 페테르 루드비 메이델 쉴로브 등은 군론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다졌다. 특히 쉴로브는 1872년에 쉴로브의 정리를 증명하였다. 20세기 초에는 대수적 위상수학의 발달로, 기본군의 개념이 발견되면서 이산 무한군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또한, 임의의 체에 대한 대수군의 이론이 리 군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엘리 카르탕은 반단순 리 대수를 완전히 분류하였다.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프로베니우스와 이사이 슈어 등은 유한군의 지표론 및 군 표현론을 개발하였고, 슈어 직교 관계, 슈어 보조정리 등을 발견하였다. 1972년에 대니얼 고런스틴은 유한 단순군의 분류를 제창하였다. 이후 이 프로그램은 존 그리그스 톰프슨 · 베른트 피셔() · 즈보니미르 얀코 · 엔리코 봄비에리 · 자크 티츠 · 마이클 애시배커() · 로버트 그리스() 등에 의하여 진행되었고, 1983년에 완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괴물군을 비롯한 수많은 산재군들이 발견되었다. 존 그리그스 톰프슨과 자크 티츠는 2008년에 군론에 대한 업적으로 아벨 상을 수상하였다. 군론은 수학의 여러 분야의 기초가 되었으며, 양자역학 등의 물리학 분야에 많이 응용된다. 군이 추상화할 수 있는 대상은 다양하다. 정수나 실수 내에서의 덧셈 연산은 군의 정의를 만족하며, 어떤 도형을 회전하거나 대칭시키는 등의 동작 또한 군이 된다. 폴리크라테스 (사모스) 폴리크라테스()는 기원전 535년에서 기원전 515년까지 사모스의 참주였다. 폴리크라테스는 아이아케스의 아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자기 동생들이 판타그노토스와 쉴로손과 같이 사모스섬을 통치했지만 기원전 535년 경 판타그노토스는 살해하고 막내 쉴로손은 추방시켜 사모스섬을 독차지한다. 권력을 차지한 폴리크라테스는 해군을 육성하고 이집트와 아케메네스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쳐 세력을 확장하고 그 세력으로 레스보스같은 주변의 폴리스들을 공격한다. 여담으로 사모스 섬으로 돌아온 피타고라스가 다시 크로톤으로 이주한 것이 당시 사모스 섬의 참주인 폴리크라테스의 독재 때문이라고 한다. 폴리크라테스가 추방시킨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 반대파들은 크레타 섬에 퀴도니아라는 도시를 건설 한 뒤 스파르타 도움을 요청을 한다. 스파르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사모스섬 공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모스에 원한이 있던 코린토스도 합세하기로 한다. 기원전 532년 스파르타 연합군이 사모스에 상륙해 포위공격을 시작하자 폴리크라테스는 별동대를 이끌고 강력하게 반격한다. 스파르타도 번번히 공격에 실패하고 후퇴를 반복하자 40일뒤 스파르타는 철수한다. 스파르타의 공격까지 이겨내며 기세가 오른 폴리크라테스는 그리스 전체를 지배할 야망을 가지고 세력을 키워나간다. 이런 사모스의 확장에 주변 세력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르디스 지방관이었던 오로이테스는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폴리크라테스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오로이테스는 폴리크라테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캄비세스 2세 가 자신을 죽이려해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폴리크라테스에게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직접 와줄것을 요청한다. 때마침 세력 확장을 위해 군자금이 절실했던 폴리크라테스는 오로이테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이테스의 함정이었다. 기원전 515년 폴리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해군을 이끌고 막대한 재산을 수송하러 마그네시아지역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오로이테스에게 생포된 뒤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다. 폴리크라테스 (아테네) 폴리크라테스(Polycrates, 약 기원전 440년 ~ 기원전 370년)는 고대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수사학자, 변론자이다.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고소문〉의 작자로서 폴리크라테스는 이 고소문을 이미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처형된 몇 년 후 허구로 세간에 유포시킴으로써, 당시의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소크라테스의 제자와 친구들 그리고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 사이에 적지않은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폴리크라테스 (에페소스) 폴리크라테스는 약 4세기 에페소스의 동방교회 주교이다. 부활절 축제일 지정 문제로 로마교회와 의견 대립을 일으킨 것으로 보편적 교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 그레고리력). 추상대수학 추상대수학(抽象代數學, )은 대수 구조를 다루는 여러 수학적 대상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들 대수 구조들로는 군, 환, 체가 있으며, 이들 대상을 다루는 각 영역에는 가환대수와 호몰로지대수가 포함된다. 또 선형대수와 기초 수론을 추상대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추상대수학은 군, 환, 체, 가군, 벡터 공간, 그리고 대수학에 대해서 공부한다. "추상대수학"이란 이름은 20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그 이전까지 추상대수학과 사칙연산, 방정식 풀기, 그리고 실수, 복소수 계산을 다루는 "기초대수학"은 함께 뭉뚱그려서 대수학이라 불렀다. 이에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수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기초대수학과 추상대수학이 다루는 분야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새로이 추상대수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의 저작물에서는 그 구분이 다시 모호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수 구조는 처음에는 수학의 몇몇 다른 영역에서 생겨난 것으로, 공리적으로 상술된 후에서야 추상대수학에서 제자리를 찾아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추상대수학은 수학의 다른 모든 분야와 수많은 관련성을 낳게 되었다. 추상대수학은 다루어지는 대수 구조에 따라 분류된다. 이런 모든 대수 구조에 공통되는 특성은 보편대수학() 및 범주론에서 연구된다. 범주론은 서로 다른 대수 구조들을 비교하고 둘 사이의 대응 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형식적 수단을 제공한다. 다른 수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추상대수학 역시 구체적인 문제와 예시를 통해 발전해왔다. 19세기 말엽까지는 대수 방정식의 이론에 관련된 문제들이 주류를 이뤘다. 몇 가지 예를 아래에 적는다. 추상대수학을 가르치는 다수의 교과서들은 다양한 대수 구조에 대한 공리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공리들을 다 나열하고 나서야 각 대수 구조의 성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이는 각 대수 구조들은 공리가 먼저 성립되고 난 후, 연구가 지속됨에 따라 성질들이 차례차례 발견되어 나아갔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기 쉽다. 사실 역사적으로 대수 구조의 발전 과정은 대다수의 교과서 진행구조와 상반되게 진행되어 왔다. 현재 대수학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대다수의 학문들은 여러 다른 수학 분야의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이던 개념들을 조합한 후, 각 개념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부분들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군론을 들 수 있다. 현대수학과 수리물리학에서 추상대수학의 개념을 특히 많이 차용한다. 예를 들어, 이론물리학에서는 추상대수학의 한 분야인 리 대수를 깊이 사용한다. 대수적 수론, 대수적 위상수학, 그리고 대수기하학을 통해 여러 다른 수학 분야에 대수학을 접목시키기도 한다. 표현론(Representation theory)은 추상대수학에서 다루는 대수 구조와 벡터 공간 위의 선형 변환들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에도 막부의 제9대 쇼군(재위: 1745년 - 1760년)이다. 도쿠가와 이에하루 도쿠가와 이에하루(, 1737년 음력 5월 22일 ~ 1786년 음력 8월 25일)는 에도 막부의 제10대 쇼군(재위 1760년-1786년)이다.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맏아들이다.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아들로 일찍이 영특한 재능을 보여왔다. 할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이에시게를 후계자로 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760년 이에시게로부터 쇼군직을 물려받았다. 조선 통신사를 에도에서 영접(1764년)한 마지막 쇼군이다. 아들 도쿠가와 이에모토가 있었으나 1779년 병사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에 다누마 오키쓰구가 로주로 있었다. 오사카부 오사카 부(, , 대판부)는 일본 긴키 지방 중부에 있는 행정 구역으로, 거주인구(야간인구)는 도쿄도, 가나가와현 다음으로 3번째로 많으나, 낮 인구는 여전히 도쿄 도에 이어 일본 내에서 2위이다. 게이한신 지역의 핵심지역이다. 동쪽으로 나라현, 북서쪽으로 효고현, 남쪽으로 와카야마현과 경계를 접하며 북동쪽으로 교토부와 인접한다. 부청소재지 오사카 시 외에 여러 개의 위성 도시가 있다. 오사카부는 일본 제2의 도시이자 긴키지방의 중심지, 서일본 최대의 도시이다. 도쿄도 다음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수많은 철도 노선과 도로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연결하며, 일본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오사카부는 긴키지방의 경제, 정치, 문화, 산업, 금융, 교육의 중심지이며, 오사카부를 중심으로 한 긴키지방도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 경제권역을 형성한다. 그 외에도 각종 국제행사를 개최했으며, 1970년 아시아 최초로 세계 박람회인 엑스포를 개최, 1995년 APEC 회의 개최, 2019년 G20 정상회의를 개최, 2025년 오사카 세계 등록 박람회를 유치한 국제적인 도시이다. 오사카 부는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1868년에 탄생하였다. 오사카 부는 북쪽으로 효고현, 교토부와 접하고 동쪽으로 나라현, 남쪽으로 와카야마현과 접한다. 서쪽은 오사카 만이다. 요도가와 강과 야마토 강이 부를 통과한다. 간사이 국제공항의 건설 이전에 오사카 부는 일본에서 가장 작은 도도부현이었다. 인공섬에 세워진 공항은 충분한 지역을 합쳐서 세워졌고 오사카 부는 가가와현보다 조금 더 커지게 되었다. 교토부、효고현、나라현、와카야마현 오사카 부는 전자, 전기, 기계, 조선, 식료품, 섬유, 화학, 제약, 방송, 언론 및 엔터테인먼트, 건설 및 주택, 부동산, 유통 및 서비스, 금융 등 각종 산업이 발달하였다. 오사카 부의 GDP는 2004년에 38조 7천억 엔으로 도쿄도에 이어 두 번째이고 작년에 비해 0.9% 증가하였다. 이것은 긴키 지방의 약 48%를 차지한다.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2013~2014년 기준 오사카 부 - 효고 현 고베 경제권의 총 GDP는 6710억 달러로 일본에서는 도쿄권에 이은 2위, 전세계 7위에 올라 있다. 1인당 수입은 300만 엔으로 일본에서 7번째이다. 같은 해에 상업 판매는 601조엔이었다. 오사카 증권거래소는 닛케이 225 선물 지수와 같은 파생 상품을 전문으로 하며 오사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2013년, 도쿄 증권거래소에 합병되었다. 오사카 경제의 특징으로는 중소기업이 산업 생산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2006년에 오사카 부에 기반을 둔 중소기업의 수는 330,737개로 부의 총 기업 수의 99.6%를 차지했다. 이러한 비율은 다른 현들(전국 평균 99.7%)과 비슷하지만 중소기업의 총 제조량은 부 전체의 65.4%를 차지해 도쿄 도의 55.5%, 가나가와 현의 38.4%에 비해 현저히 높았다. 또한 합동 산업 교육을 위해 노력하여 오사카의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모델 중 하나가 인공 위성 개발 프로젝트인 Astro-Technology SOHLA이다. 원래는 히가시오사카 시의 중소기업들이 시작했지만 간사이 지역 전체로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를 통해 정부의 기술적, 물질적 지원을, NEDO를 통해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오사카 부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다. (본사가 오사카, 도쿄 양쪽에 있거나 오사카, 도쿄, 나고야, 후쿠오카 등 여러 곳에 두고 있는 경우도 포함한다.) 전자, 전기,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기계, 자동차, 조선 부문: 파나소닉, 샤프, 스미토모 전기 공업, 스미토모 전기 설비, 히타치, 다이헨, 쿠보타, 키엔스, 다이하쓰, 다이킨 공업, 모리타 홀딩스, 히타치 조선, 나무라 조선, 조지루시 보온병, 글로리아 보온병, 인터넷 식료품 부문: 닛신 식품 홀딩스, 하우스 식품, 니혼햄, 다이도 드링코, 마루다이 식품, 오오츠카 식품, 산토리, 에자키 글리코, 후지 제유 그룹, 후루타 제과 섬유 및 의류, 패션 부문: 도레이, 테이진, 토요보, 스미노에 직물, 쿠라시키 방적, 데상트, 몽벨, 유니티카 화학, 제약 부문: 스미토모 화학, 스미토모 세이카 케미칼, 세키스이 화학 공업, 아라카와 화학 공업, 오오츠카 화학, AIR WATER, 다케다 약품 공업, 시오노기 제약, 고바야시 제약, 대일본 스미토모 제약, 미쓰비시-타나베 제약, 센주 제약 모리시타 진탄, 니프로, 일본 촉매, 일본 페인트 홀딩스, 간사이 페인트, 대일본 제충국, 오사카 소다, 닛토 덴코, Sunstar, 고니시 건설 및 주택 부문: 곤고구미, 다케나가, 다카마쓰 건설 그룹, 제니다카구미, 오쿠무라구미, 아사누마구미, 코노이케 건설, 세키스이 하우스, 다이와 하우스, PANA 홈, 쿠지라 유통 및 서비스, 미용 부문: 이토추 상사, JFE 상사, 야마젠, H2O 리테일링, 타카시야마, 다이마루, 긴데츠 백화점, LIFE, 이나바타, PALTAC, 사카이 이사 센터 금융 부문: 리소나 은행, 간사이 어번 은행, 이케다 센슈 홀딩스, 스미토모 생명 보험, 다이도 생명 보험, 일본 생명 보험, 이와이 코스모 홀딩스, 오릭스 방송, 언론 및 엔터테인먼트 부문: 아사히 신문, 아사히 방송, 마이니치 신문, 마이니치 방송, 산케이 신문, 니혼게이자이 신문, 신니혼카이 신문, 호치 신문, 요미우리 신문, 요미우리 TV, 간사이 TV, 텔레비전 오사카, 오사카 방송, 요시토모 흥업, 쇼치쿠 예능, OSK 일본 가극단, SNK, 캡콤 전력, 전신, 교통, 기타 부문: 간사이 전력, 서일본 전신 전화, 서일본 여객 철도, 서일본 고속도로, 신 간사이 국제 공항, 피치 항공, 한큐 한신 홀딩스, 긴데츠 그룹 홀딩스, 케이한 홀딩스, 일본 판유리, 사쿠라 크레파스 2017년 4월 추계 인구에 따르면 오사카 부의 인구는 8,826,276명이다. 오사카시 오사카 시(, )는 일본 오사카부의 도시로 혼슈 긴키 지방의 요도가와 강 하구 오사카 만에 위치해 있다. 오사카 시는 또한 일본 지방자치법에 따라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사카부의 부청 소재지이다. 오사카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상업 중심지였고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게이한신 도시권의 심장부이다. 주간 인구는 도쿄 23구 다음으로 일본 전국에서 2위, 야간 인구는 요코하마 시 다음으로 3위이다. 1956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다. 간토 지방이 아닌 지방에서는 제일 많으며,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다. 고노하나 구에는 일본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이 있으며, 2007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다. 조몬 시대의 해침에 의해, 오사카 만이 생성되고, 남부로부터 돌출된 우에마치 대지를 사취로 하는 반도가 만들어지고, 동부는 하내 만이 되었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우에마치 지역은 동쪽의 내륙해와 반도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몬 시대 중기에는 이미 사람이 집단 거주하며, 어로·채집 등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니, 이는 기원전 5~6세기의 모리노미야 유적에서 발견된 조개 더미와 굴, 유골로부터 알려지게 된 것이다. 야요이 시대가 되면 반도는 사주가 되어 하내만은 담수화되고, 마침내 하내 호가 되었다. 하내호 주변은 자연환경의 혜택을 입어, 벼농사 등 농경의 발전에 의해 평야에 영구적이며 대규모인 집단 거주가 출현하고, 해운이나 대륙과의 교역의 거점이 되었다. 오사카 만의 끝자락에 있는 요도가와 ・ 의 하구에 돌출된 우에마치 대지가 오사카라는 마을의 원점이다.고훈 시대에 오사카는 일본 서부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 항구로 개발되었다. 오사카 평야에서 발견되는 무덤들의 수가 증가하고 크기가 커지는 것은 정치력이 집중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며 국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5세기에는 난바 이 세워졌다.5, 6세기에 대륙 문물이 전래되고 귀화인들이 들어와 정착하였다. 645년에 고토쿠 천황은 오사카에 를 지었고 이 지역에 수도 나니와쿄를 만들었다. 이곳은 나니와라 불리는 현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 이름은 나니와 구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비록 수도가 655년에 아스카로 이전했지만 나니와는 야마토와 한국, 중국을 연결하는 수륙 교통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남았다.744년에 나니와는 쇼무의 부탁으로 다시 수도가 되었다. 나니와가 수도가 되는 것은 745년에 중단되었고 황궁은 헤이조쿄(현재의 나라 시)로 돌아갔다. 항구의 기능은 나라 시대가 끝날 즈음에 이웃한 지역으로 옮겨갔지만 헤이안쿄와 다른 곳을 연결하는 활기찬 수륙 교통의 중심지로 남았다.무로마치 시대인 1496년에 정토진종의 본거지로서 이시야마 혼간지가 옛 나니와 황궁 부지에 설립되었다. 1570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0년 후에 수도승들은 항복하였고 절은 파괴되었다. 159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城)을 이시야마 혼간지 부지에 축조하였다.1614년부터 1615년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오사카는 1619년에 에도 막부의 직할 영지로 되었다. 그리고 요도가와 강의 치수를 위해 아지 강을 개통하여 베네치아처럼 시내 각지에 물이 흐르는 도시가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오사카는 일본의 경제 중심지로써 인구의 상당수가 상인 계층에 속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면서 오사카는 일본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고 활기차고 중요한 항구로써의 옛 역할을 회복하였다. 대중 문화는 에도의 삶을 묘사한 우키요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사카의 도시 문화는 교토와 에도의 도시 문화와 평행하게 발전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분라쿠와 가부키가 성행했다.1837년에 하급 무사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도시가 많은 빈곤층들을 지원하는데 무관심한 것에 대응하여 농민 폭동을 이끌었다. 쇼군의 관리들이 진압하기 전에 도시의 대략 4분의 1이 파괴되었고 이후 오시오는 자결하였다.막부에 의해 오사카는 효고(오늘날의 고베)와 함께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1868년 1월 1일에 외국과의 교역을 개방하였다.현대적인 지자체는 1889년에 정령 지정 도시로써 설립되었고 처음에 면적은 15 km²로 오늘날의 니시 구, 주오 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후 도시는 세 번에 걸쳐 확장되어 현재의 크기인 222 km²에 이르게 되었다. 오사카 시는 서쪽으로 오사카 만을 향해 열려있다. 다른 면은 오사카부에 속하는 10개 이상의 도시와 효고현의 아마가사키 시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있다. 도시는 오사카 부의 다른 시정촌에 비해 약 13% 정도 더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도시가 1889년에 설립되었을 때 오늘날의 니시 구와 주오 구에 해당하는 15.27 km²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몇 번의 확장을 거쳐 222.30 km²로 커졌다. 1925년의 가장 큰 확장 때 126.01 km²가 확장되었다. 오사카 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쓰루미 구의 37.5m이고 가장 낮은 지점은 니시요도가와 구의 -2.2m이다. 중앙 오사카는 대략적으로, 주요 도로인 미도스지가 끝나는 곳에서 기타(キタ, 北)과 미나미(ミナミ, 南)의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기타는 오사카의 신 중심부로, 기타 구를 포함한다. 대략 우메다의 업무와 상점 지구를 둘러싼 지역이다. 백화점, 극장, 부티크 등이 JR 오사카 역과 우메다 역 주변에 무리지어 있다. 미나미는 난바, 신사이바시, 도톤보리의 쇼핑가가 있는 곳이다. 대게로 유명한 도톤보리 교 주변의 유흥가, 트라이앵글 공원, 아메리카 촌이 미나미에 있다. 기타와 미나미 사이의 요도바야시와 혼마치는 법원과 주요 은행의 본사가 있는 전통적인 업무 지구이다.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의 새로운 업무 지구는 오사카 성 주변에 있다. 업무 지구는 또한 덴노지 역과 교바시 역과 같은 제2의 철도 터미널 주변으로도 형성되어 있다. "나니와의 808다리"는 이곳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일본의 옛 표현이다. "808"은 이곳의 셀 수 없이 많은 다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오사카에는 수많은 강과 수로들이 가로지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많은 다리들이 세워졌고 다리의 주변 지역은 종종 다리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나가호리 수로와 같은 일부 수로는 매립된 반면에 어떤 것들은 아직 남아있다. 오사카 시에는 24개의 구가 있다. 2005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오사카의 주민은 2,628,811명으로 2000년에 비해 30,037명, 1.2% 증가하였다. 1,280,325세대가 있고 세대당 성원 수는 2.1명이었다. 인구밀도는 km²당 11,836명이었다. 간토 대지진으로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와 1930년에 오사카의 인구는 2,453,573명으로 2,070,913명의 도쿄를 제치고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인구는 1940년에 3,252,340명으로 절정에 달했고 전쟁 후에는 1965년에 3,156,222명으로 절정에 달했으나 이후 주민들이 교외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계속 감소하였다. 99,755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가장 큰 집단은 한국인(71,015)과 중국인(11,848)이다. 이쿠노 구의 쓰루바시 지구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한국인 거주지 중 하나로 재일 한국인 27,466명이 등록되어있다. 이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언은 긴키 방언이다. 긴키 방언의 특징 중 하나는 동사의 부정의 접미사 nai 대신에 hen을 사용하는 것이다. 2004년 오사카의 GDP는 21조 3천억 엔으로 예년에 비해 1.2% 증가하였다. 이 수치는 오사카부 전체 생산량의 55%, 긴키 지방 전체의 26.5%를 차지하는 것이다. 2004년에 상업, 서비스업, 제조업이 각각 전체의 30%, 26%, 11%를 차지하였다. 도시의 1인당 수입은 약 330만 엔으로 오사카 부보다 10% 높다. 마스타카드는 오사카가 전 세계의 선도적인 도시 중 19위이고 세계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고하였다. 오사카 대도시권(오사카와 고베)의 GDP는 3410억 달러였다. 오사카는 파리, 런던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배후지를 갖고 있다. 이 수치는 세계의 다른 도시들의 GDP가 훨씬 커진 것에 비해 과거 15년 동안 꽤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역사적으로 특히, 중세와 전근대에 오사카는 일본의 상업 중심지였다. 일본의 첫 번째 중개 회사인 노무라 증권이 1925년에 오사카에서 설립되었고 오사카에는 여전히 선도적인 선물 거래소가 있다. 많은 주요 회사들이 본사를 도쿄로 이전했다. 그러나 파나소닉, 샤프, 산요와 같은 몇몇 주요 회사들은 여전히 오사카에 본사를 두고 있다. 오사카 증권 거래소는 닛케이 225 선물과 같은 파생 상품을 전문으로 하며 오사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스닥과의 합병은 오사카 증권 거래소가 일본의 신흥 기업을 위한 가장 큰 거래소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오사카는 일본의 도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추방된 노동자들에게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였다. 이것은 2008년에 11위였던 것이 9계단이나 뛰어오른 것이다. 오사카는 2007년에 8번째로 물가가 높은 도시였다. 2013년에는 10위 권에 오르지 못했다. 같은 해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가 발표한 2013년 생활물가 연구에서는 세계에서 생활비가 2번째로 비싼 도시로 선정됐다. 오사카의 공립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오사카 시에 의해 운영된다. 이들의 교육 문제의 감독 기관은 오사카 시 교육위원회이다. 마찬가지로 공립 고등학교는 오사카 부 교육위원회에 의해 운영된다. 오사카 시는 한때 많은 수의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있었지만 캠퍼스의 성장과 더 넓은 부지의 필요성 때문에 오사카 대학을 포함해 많은 학교들이 교외로 이전하였다. 인접한 교토부, 와카야마현, 나라현, 효고현 등지로 고속도로 및 국도가 연결되어 있다. 오사카에는 많은 도매 상점과 소매 상점이 있으며 2004년 시 통계에 따르면 그 숫자는 각각 25,228개와 34,707개였다. 이들 중 많은 것들이 주오 구(10,468개)와 기타 구(6,335개)에 집중되어있다. 상점의 유형은 쇼핑몰에서 일본의 재래식 상점가인 쇼텐가이까지 다양하다. 쇼텐가이는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고 오사카의 쇼텐가이는 이들 중 가장 길다. 텐진바시스지 상점가는 오사카 천만궁에서 시작해 남북으로 2.6km에 걸쳐 뻗어있다. 이곳에는 일용품 가게, 의류점, 음식점이 있다. 다른 쇼핑 지역으로 전자 기기와 만화/애니메이션 지구인 덴덴타운이 있으며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필적한다. 또한 우메다 지구에는 한큐 산반가이 쇼핑몰과 전자 기기 상점인 요도바시 카메라가 있다. 오사카는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지역 요리로는 오코노미야키, 다코야키, 우동, 스시가 있다. 다른 쇼핑가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이쿠쿠니타마 신사(生國魂神社)에서 매년 7월 24일과 7월 25일에 열린 덴진 마쓰리가 유명하다. 주오구 (도쿄도) 주오구()는 일본 도쿄도의 심장부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에도 시대에는 각 지방에 가는 길의 기점인 된 다리 "니혼바시"()가 만들어지고 그 주변의 니혼바시 지역은 상업 지역으로서 발전되었다. 현재도 니혼바시 지역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와 미쓰코시 본점, 다카시마야 도쿄점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이 집중하고 있다. 또 일본을 대표하는 고급 상가인 "긴자"(), 전국에서 생선류가 모이는 "쓰키지 시장"도 주오 구에 있다. 주오 구는 도쿄의 중심 지역으로 5개의 특별구(지요다 구, 미나토 구, 다이토 구, 스미다 구, 고토 구)에 둘러싸여있다. 행정적으로 주오 구는 3개의 구역(니혼바시, 교바시, 쓰키시마)으로 나뉜다. 니혼바시와 교바시는 도쿄 역 동쪽의 두드러진 상업 지역으로 긴자, 쓰키지와 같은 유명한 지구들이 있다. 쓰키시마는 도쿄 만에 의해 분리되어있으며 콘도 건물이 주를 이룬다. 2차 대전까지 이 지역은 강과 운하가 교차하던 지역으로 작은 배가 주요 교통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후 이 수로들이 새로운 도로와 건물,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매립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수로들은 특별구 내의 많은 지구들의 경계선의 기준이 되었다. 스미다 강은 구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 주오 구는 도쿄에서 다이토 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리코의 본사 건물이 이곳에 있다. 본사 건물은 25층으로 긴자 지역에 있다. 스미모토 그룹의 본사가 주오 구의 하루미 아일랜드 트리톤 스퀘어 타워에 있다. 미쓰이 부동산의 본사 또한 이곳에 있다. 도쿄팝의 일본 지사가 이곳에 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지오시티의 일본 지사가 니혼바시의 니혼바시하코자키 빌딩에 있다. 조선 명종 명종(明宗, 1534년 7월 3일 (음력 5월 22일)~ 1567년 8월 2일 (음력 6월 28일))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환(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양(對陽). 사후 시호는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며 중종의 차남으로 문정왕후의 유일한 친아들이다. 이복 형 인종(부왕 중종의 적장자)이 후사 없이 붕어하기 3일 전 인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로 모후인 문정왕후의 섭정, 친정 이후에는 외척인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윤백원, 이량, 심연원, 심통원 등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였다. 1545년부터 156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545년부터 1553년까지 모후 문정왕후 파평 윤씨가 섭정을 하였고 1553년부터 156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중종의 차남으로, 이름은 환(李峘), 본관은 전주이며 인종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3번째 왕비 문정왕후이고, 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인 인순왕후이다. 6살 때인 1539년 부왕 중종에 의해 경원대군(慶原大君)에 책봉되었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세자 호(훗날의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명종(경원대군)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에 인종이 훙서 3일 전 경원대군에게 선위하고 경원대군(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 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조선의 26대 임금 고종의 즉위 후 흥선대원군의 섭정 전)까지 지속되었다.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처외숙부 이량(李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량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령을 일삼았으며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외직으로 추방시켰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량은 사화(士禍)를 꾀했으나 자신의 외조카 심의겸(沈義謙)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뜻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고 만다. 1567년 6월 27일 부터 병이 위독하여 대신들이 경복궁 양심당에 입사하였으나 명종은 이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있었다. 대신들과 약방 의원들이 손을 쓰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결국 다음날인 음력 6월 28일 축시(오전 1시~3시)에 이질과 그동안 지속되어 온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적장자인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13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명종이 승하했을 때는 왕실의 적통이 단절되게 된다. 결국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한다. 그가 제 14대 임금인 선조이다. 묘호는 명종(明宗)인데, 명종 자신의 유지에 따랐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에 안장되었다. 명종의 왕자 시절의 이름은 경원대군이다. 중종과 문정왕후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조선 전기의 척신정치가 본격화된다. 문정왕후의 측근 세력이자 외척인 윤원로와 윤원형, 정난정 등이 권력을 장악하며 패권다툼을 벌인 끝에 윤원형이 승리한다. 이후 문정왕후가 병사하면서 이들은 대간들의 탄핵을 받으며 쇠퇴하게 된다. 명종은 그 사이에서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고 모후 문정왕후에게 좌지우지되며 일명 마마보이의 행보를 걷는다. 문정왕후가 병사하며 그나마 친정의 기회가 잠시 생겼으나 고질병인 심근경색이 점차 심해져 후계자로 하성군을 지목하고 젊은 나이에 승하한다. 이로서 명종은 외척들에 의한 척신정치에 휘말린 희생양으로 본다. 명종 (1534 ~ 1567 / 재위: 1545 ~ 1567) - 22년 분쿄구 분쿄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도쿄 구부의 중앙에 위치하며 주거와 교육 중심지이다. 메이지 시대에 학자와 정치가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문학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출판, 인쇄, 첨단 의료 산업이 분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IT 산업이 번성하고 있다. 분쿄에는 대형 병원과 도쿄 돔, 유도의 고도칸, 도쿄 대학이 있다. 일본의 출판사 고단샤와 약국 체인 토모즈의 본사가 분쿄 구에 있다. 스미다구 스미다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시타마치()라고 불리는 전쟁 이전부터의 주택 지역이다. 또 프로 스모의 대회가 열리는 료고쿠 국기관()이 있다. 2019년 4월 1일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268,192명으로 집계됐고, 인구 밀도는 19,361km²였다. 면적은 13.77 km²이다. 스미다 구는 도쿄의 본토 부분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주요 강으로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이 있으며 구의 경계를 일부를 이룬다. 북쪽으로 아다치 구, 북서쪽으로 아라카와 구, 동쪽으로 가쓰시카 구, 남동쪽으로 에도가와 구, 서쪽으로 다이토 구, 남서쪽으로 주오 구, 남쪽으로 고토 구와 접한다. 1947년 3월 15일에 이전의 혼조 구와 무코지마 구가 합쳐져 성립되었다. 대칭군 (군론) 수학에서, 대칭군(對稱群, )은 주어진 원소들을 재배열하는 방법(순열)들로 구성된 군이다. 집합 formula_1의 대칭군은 formula_1에서 formula_1로 가는 모든 전단사 함수의 집합에 군 구조를 준 것으로, 기호로는 formula_4 또는 formula_5로 표기한다. 이 때, 군 연산은 함수의 합성이다. 즉, 두 함수 formula_6와 formula_7를 합성하여 새로운 전단사 함수 formula_8를 얻을 수 있다. 이 때, formula_8는 formula_1의 모든 원소 x에 대해 formula_11로 정의한다. 이 연산과 함께 formula_5는 군을 이룬다. 이 연산은 간단히 formula_13로 쓸 수도 있다.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유한 집합 formula_14의 경우이다. 이 집합의 대칭군 formula_15를 간단히 formula_16으로 표기한다. formula_16의 원소들을 formula_1의 순열이라 한다. "n"개 원소에 대한 대칭군의 표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0는 순열 formula_21에 대응한다. "n"개 원소에 대한 대칭군 formula_16은 크기가 formula_23인 유한군이다. 무한 대칭군의 경우, 크기가 formula_24인 집합 위의 대칭군의 크기는 이다. 대칭군은 오직 formula_26인 경우에만 아벨 군이며, 오직 formula_27일 경우에만 가해군이다. 이것이 아벨-루피니 정리(5차 이상의 다항식은 거듭제곱근으로 풀 수 없음)의 기본적인 이유이다. 대칭군의 두 순열 formula_28이 같은 켤레류에 속할 필요충분조건은 두 순열의 순환() 구조가 같다는 것이다. 즉, 두 순열이 같은 수의 순환들로 구성되고, 각 순환들의 길이가 같을 때 서로 같은 켤레류에 속한다. 대칭군의 낮은 차수의 군 호몰로지는 다음과 같다. 군의 정수 계수 1차 호몰로지는 그 아벨화와 같으며, 대칭군의 아벨화는 다음과 같다. 군의 정수 계수 2차 호몰로지는 그 슈어 승수()의 군과 같으며, 대칭군의 경우 이는 다음과 같다. 대칭군의 자기 동형군과 중심은 다음과 같다. 대칭군은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 등장한다. 갈루아 이론에서, "n"차 대칭군은 일반적 "n"차 다항식의 갈루아 군이다. 리 군의 이론에서, "n"차 대칭군은 일반선형군 formula_31 및 특수선형군 formula_32의 바일 군이며, 슈어 함자()에 따라 특수선형군의 기약표현들은 대칭군의 기약표현과 대응한다. 또한, 대칭군은 콕서터 군 formula_33과 같다. 낮은 차수의 대칭군은 다음과 같다. 순환군 군론에서, 순환군(循環群, )은 하나의 원소에 의하여 생성되는 군이다. 즉, 순환군의 모든 원소는 어떤 고정 원소의 거듭제곱이다. 가법군의 경우 모든 원소는 어떤 고정 원소의 정수배이다. 군의 원소 formula_1가 생성하는 순환군 formula_2은 다음과 같다. 군 formula_4의 차수(次數, ) 또는 위수(位數) formula_5는 집합의 크기를 뜻한다. 군의 원소 formula_1의 차수 formula_7는 그 원소가 생성하는 순환군의 차수이다. 즉, 거듭제곱하여 항등원이 되는 최소 지수와 같거나, 그러한 지수가 없다면 무한대와 같다. 군 formula_4의 지수(指數, ) formula_10는 모든 원소를 거듭제곱하여 항등원이 되는 최소 지수와 같거나, 그러한 지수가 없다면 무한대와 같다. 순환군은 정수군 또는 그 몫군과 동형이다. 무한 순환군은 정수군, 유한 순환군은 정수군의 유한 몫군과 동형이다. 군의 유한 차수 원소 formula_1 및 정수 formula_14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지수가 유한한 군 formula_4 및 정수 formula_14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유한군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약수 관계가 성립한다. 군의 유한 차수 원소 formula_1 및 정규 부분군 formula_46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약수 관계가 성립한다. 군의 유한 차수 원소 formula_1 및 정수 formula_14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항등식이 성립한다. 다음 두 가지를 보이는 것으로 족하다. 군의 원소 formula_59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항등식이 성립한다. 다음 두 가지를 보이는 것으로 족하다. 반대로, 군의 원소 formula_71의 차수를 다음과 같은 꼴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formula_59가 존재한다. 베주 항등식에 따라,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formula_77가 존재한다. 조건을 만족시키는 formula_59를 다음과 같이 취할 수 있다. 다음 두 가지를 보이는 것으로 족하다. 유한 아벨 군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formula_1가 존재한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최대 차수 원소 formula_1를 취하자. 임의의 formula_90에 대하여, 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를 만족시키는 소인수 formula_97가 존재한다. 이 경우, 이므로, 이며, 이는 모순이다. 모든 순환군은 유한 생성 아벨 군이다. 군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순환군의 부분군 역시 순환군이다. 구체적으로, formula_2의 부분군은 다음과 같은 꼴로 나타낼 수 있다. 순환군의 몫군 역시 순환군이다. 유한군 formula_4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순환군 formula_147에 대하여, 다음 세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코시 정리에 따르면, 임의의 소인수 formula_154에 대하여, formula_155인 formula_156가 존재한다. 유한 아벨 군의 분해에 응용되는 한 가지 핵심적인 보조정리는 다음과 같다. formula_4가 아벨 유한 p-군, formula_158가 그 최대 차수 원소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59인 formula_160가 존재한다. 귀류법을 사용하여, formula_4가 최소 크기 반례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62이며, formula_163이므로, 최소 차수 원소 formula_164를 취할 수 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일련의 명제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조선 중종 중종(中宗,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휘는 역(懌),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자는 낙천(樂天)이며,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묘호는 중종(中宗)으로 결정되었는데 연산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하여 중흥시켰다는 의미로 정해진 것이다. 반대로 38년의 재위기간 중에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그저 가운데 중(中)자를 썼다는 해석도 있다.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중종을 연산군 대신 잇는 왕으로써 '조'(祖)를 붙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반대를 받아들여 거두었다. 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다. 1506년 9월 2일에서 1544년 11월 29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506년 9월 2일에서 이듬해 1507년 8월 8일까지 좌의정 박원종(朴元宗)이 1차 섭정하였고 1507년 8월 8일에서 1509년 9월 27일까지 영의정 유순(柳洵)이 2차 섭정하였으며 1509년 9월 27일에서 이듬해 1510년 3월 6일까지 영의정 박원종이 3차 성향 대리청정하였고 1510년 3월 6일에서 1510년 12월 6일까지 영의정 김수동이 4차 성향 대리청정하였으며 1543년 3월 16일에서 친정하였고 1543년 3월 16일에서 1544년 11월 28일 왕세자에게 선위(양위)할 때까지 장남 왕세자 이호(훗날 인종)가 마지막 5차 대리청정하였으며 선위한 다음날인 1544년 11월 29일 승하하였다. 반정으로 집권한 첫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의 전횡에,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하지만, 김안로나 조광조의 숙청 때 중종의 모습은 사관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하거나,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김안로의 처벌)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했듯이 단순히 신권에 의해 휘둘린 왕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공훈삭제와 관련한 공신세력들의 반발과 자신의 왕권의 위협에 대해 우려하여 사림 세력들을 기습적으로 숙청한다. 이 후에는 남곤이 정국을 주도하고, 남곤 사후에는 김안로가 주도하지만, 김안로의 지나친 권력쟁투와 횡포로 인해 위협을 느껴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김안로를 기습적으로 제거한다. 이후에는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은 이(李), 본명은 이역(李懌),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복 형인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여기면서 자라다가, 우연한 기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현왕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지만, 연산군은 어린 이복동생에게는 친절하였다. 그 뒤 진성대군은 신수근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신수근의 아버지는 영의정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정비 거창군부인신씨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했다. 친가로는 이복 형제였지만, 처가로는 처고모부와 조카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신들의 세력은 막강하였고 중종 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그는 이를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1506년 9월 27일 조정은 그의 책봉을 청하는 책봉주청사를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석연치 않은 폐위를 명나라에서는 문제삼았고 조선 조정에서는 연산군이 병으로 왕위를 수행할 수 없어 그가 즉위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은 다시 2차 책봉 주청사를 1507년 7월 22일에 파견하였고, 즉위 1년만인 1507년 8월 22일에 명나라 예부로부터 임시로 국사를 서리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이어 바로 승인이 떨어짐으로서 정식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국왕으로 등극한 중종은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큰어머니 월산대군부인의 친정 남동생이자, 경빈 박씨의 양아버지인 박원종, 희빈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경주 등을 부담스럽게 여긴 그는 당초 박원종과 성희안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다가 이들의 눈밖에 났던 남곤을 등용한다. 이어 훈구 공신들의 질병과 연이은 죽음, 그리고 훈구 공신의 지도자인 박원종, 성희안의 죽음으로 훈구파가 주춤한 틈을 타 사림파 인사를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춘추관 등의 하위직에 등용함으로써 사림파를 다시 정계로 끌어들인다. 중종은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문벌세가를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 등 급진 사림파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은 보다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도학 정치 실현이 목적으로서 목적이 달랐다. 후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조광조)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며 "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고 봤다. 급진 사림파의 개혁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심정, 김전 등 훈구파와 남곤 등의 온건 사림파를 이용, 친위 쿠데타를 계획한다. 또한 사림파의 지치정치, 군신 공치 역시 중종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조광조는 임금 역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류가 되기를 원했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한 사류와 군주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세계 또는 임금 역시 한 사람의 선비가 될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중종은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한다. 일설에는 주초위왕 나뭇잎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에 의하면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이다.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자신 역시 쿠데타로 축출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평소 이복 형제들, 성종의 다른 왕자군이나 기타 왕족들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그날 밤,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파들이 몰락한 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다시 공신들의 세력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다. 중종은 공신들의 권력집중을 차단할 목적으로 외척인 윤여필, 윤여해, 윤지임, 김안로 등을 등용한다. 처음에는 이들에게 내섬서와 장악원 등의 제조 직을 제수했다가 훈련대장 등을 제수하여 도성의 숙위를 맡겼고, 이후 이들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처남격인 윤임, 윤원로, 윤원형 등이 출사하게 된다. 그러나 외척 세력은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여 전쟁의 소용돌이를 만들게 된다.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31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 동안 잠잠하던 남쪽의 왜구가 삼포왜란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4군 6진 지역을 빈번하게 노략질하는 등 오랑캐들의 약탈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중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밖에 《속삼강행실도》(1514),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한편 윤임, 김안로, 윤원형, 윤원로 등의 척신 세력이 발호하였으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다. 그는 치통에 시달렸고 의원이 치아를 발치하면 어떤 치아를 뺀 자리에서는 고름이 나와 멎지 않고 오래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의들은 그의 치통을 잡지 못했다. 38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머물러 있었던 중종은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1543년 3월부터 대리청정을 맡긴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5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능원에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원래 왕릉을 조성할 때는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 학자들로부터 최고의 명당자리를 찿아 능을 조성하는데, 정릉은 조선의 왕릉 중에서 풍수지리가 좋지 않은 자리라는 얘기가 있다. 그 근거로, 비가 올때 물이 능의 가운데 부분까지 침수가 되는데, 이러한 경우는 조선의 왕릉 중에서 정릉이 유일하다. 특히 장맛비가 한차례 지나가면 정릉의 능선은 완전히 침수가 되어 그 물이 재실까지 들어가는 등의 피해가 생기자 1562년 원래 경기도 고양시에 있던 정릉을 현재 성종이 안장되어 있는 선릉 주변으로 이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중종은 재위 전반기의 전체적인 사회 개혁과 사림 정권을 견제할 목적으로 조광조를 기용하였으나 이후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등을 주장하면서 점차 그를 멀리하게 되다가 그를 제거할 마음을 가지게 되고 대신들이 조광조 제거를 위해 일으킨 주초위왕 사건 이후 조광조를 사사시킨다. 외에도 척신들의 권력다툼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그저 왕으로서의 자리만 지켰으며 외척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척신정치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중종 때의 정치는 왕이 중심이라기 보다는 일부 권력을 쥔 권신들이 중심으로 조명되고 있고, 중종이 나오는 사극에서도 중종의 비중은 상당히 적었다. 하지만,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권신들 대부분은 어느 날 밤, 중종의 기습 전략에 의해 하루 아침에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를 당하고 죽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은 조광조와 김안로였다. 이들이 비록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고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신들이 죽은 원인은 중종의 기습적인 습격과 이들을 사사하라는 명령에 있었다. 이는 비록 일부 권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로인해 이들의 권력이 너무나 커졌다고 해도 중종은 이러한 권신들을 기습 전략으로 제거하기 전에는 없던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의견보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대간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등 평소에는 정국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권신들에 대한 처분을 내릴 때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중종의 변신에 대해 대부분의 신하들은 놀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이에 대한 사관의 논평이 있는데, 조광조의 사사결정이 내려졌을 때 사관은 중종에 대해서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논하였고, 김안로의 절도안치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보다 며칠 전에 상이 경연에서 ‘위태한데도 붙들지 않으니 그런 재상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말을 하였고 또 우의정 윤은보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걱정한다는 뜻을 극론하였는데, 이는 대개 상이 김안로의 죄악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교시를 내려 조정에 은미하게 보인 것이다.'라고 논했다. 이는 중종이 권신들에게 휘둘린 연약한 군주가 아닌 그 권신들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이러한 정국 주도 능력을 당시 조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하였지만, 자식, 종친들이나 신하들의 사치를 막지 못했고, 학풍이 땅에 떨어진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선비들을 죽이는 사화를 주도한 왕이기도 했었다. 중종은 왕조와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했었던 임금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북방의 방어에 신경을 써 이계동, 유담년, 이지방 등의 무관을 파견하여 평안도와 간도, 함경도 등의 여진족을 수시로 토벌하게 한다. 연산군 (동음이의) 연산군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아라카와구 아라카와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구의 이름은 아라카와 강에서 유래되었다. "미카와시마"() 역 주변은 도쿄를 대표하는 코리아타운으로 제주도 출신자를 중심으로 한 재일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 아라카와 구는 도쿄의 북동부에 있다. 구의 모양은 길고 좁으며 동서로 뻗어있을 뿐만 아니라 스미다강이 구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구는 북쪽으로 아다치구, 서쪽으로 기타구, 남서쪽으로 분쿄구, 남쪽으로 다이토구, 남동쪽으로 스미다구와 각각 접한다. 그리고 이 안에는 고양이만을 위한 마을인 유야케단단이라는 고양이 마을도 물론 존재한다. 이 지역은 에도 시대에 주로 농경지였다. 1651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가장 큰 사형장인 고주카파라가 현재의 미나미센주 역 옆에 세워졌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이 지역의 강 유역에 공장이 세워져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1932년에 아라카와는 도쿄 시의 35개 구 중 하나가 되었다. 신주쿠구 신주쿠 구(, )는 일본 도쿄도의 특별구의 하나이다. 주요 상업과 행정 중심지로 세계에서 제일 승객이 많은 철도역인 신주쿠 역과 도쿄 도 정부의 행정 중심인 도쿄 도청이 있다. 신주쿠 역 주변에는 백화점, 전자기기와 카메라 상점, 영화관, 식당, 술집이 있다. 많은 국제적인 호텔이 이곳에 있다. 신주쿠 구에는 뉴커머 계열의 재일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2005년 10월 1일에 신주쿠 구에 등록된 외국인의 수는 107개국에 29,353명이었다. 따라서 도쿄도의 특별구 중 외국인 비율이 가장 높은 구이기도 하다. 신주쿠 구는 도쿄 도의 다른 6개 구에 둘러싸여있다. 동쪽으로 지요다 구, 북쪽으로 분쿄 구와 도시마 구, 서쪽으로 나카노 구, 남쪽으로 시부야 구, 미나토 구와 접한다. 게다가 네리마 구가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신주쿠 구에서 가장 높은 곳은 다카다노바바 역과 신오쿠보 역 동쪽의 도야마 공원에 있는 하코네 산으로 44.6m이다. 가장 낮은 곳은 리다바시 지구로 4.2m이다. 옛 구분에 따라 통용되는 지역명이다. 하위 행정구역인 정명(町名)의 수가 많은 것이 특징으로, 인접 특별구들이 2~30개 정도의 정명으로 나뉘는 데 반해, 신주쿠 구에는 현재 95개의 정명이 있다. 이는 도쿄의 특별구 중 가장 많은 수이다. 1634년, 에도 시대에 에도 성의 바깥쪽 해자로써 세워졌고 수많은 절과 신사들이 신주쿠 구의 서쪽 가장자리의 요쓰야 지역으로 옮겨왔다. 1698년에 나이토신주쿠가 이 시기의 고카이도 중 하나인 고슈카이도의 역으로써 개발되었다. 나이토는 다이묘의 저택이 있던 지역으로 현재는 공공 공원인 신주쿠 교엔이 있다. 신주쿠 구는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지진에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신주쿠 구 서쪽은 많은 마천루가 있는 도쿄의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1945년 5월부터 8월까지의 도쿄 대공습으로 신주쿠 역 주변 지역 건물의 거의 90%가 파괴되었다. 현재의 신주쿠 구는 1947년 3월 15일에 요쓰야 구, 우시고메 구, 요도바시 구가 합쳐져 성립되었고, 1991년에 도쿄 도청이 지요다 구의 마루노우치 지구에서 현재의 신주쿠 구의 청사로 이전하였다. 세이코 엡손의 도쿄 사무실이 니시신주쿠의 신주쿠 NS 빌딩에 있다. 아트러스의 본사, 닛신 식품의 도쿄 지사가 신주쿠에 있다. 지역 항공사인 에어트란세의 본사가 이곳에 있다. 신주쿠 구는 도쿄 교통의 중심이다. 신주쿠 역은 매일 약 364만 명의 승객이 통과하여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역이다. 이곳에서 몇 개의 JR 선과 세 개의 지하철 노선, 세 개의 민영 통근선이 교차한다.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는 백제에서 520~534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향로이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군 능산리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똑같은 복제품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원래 능산리 고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건설하던 곳에서 발견되었다.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시점에 물웅덩이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견 당시 백제금동대향로는 진흙 속에 있었고, 바닥에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이 발굴되었는데, 발굴단은 이 섬유 조각이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쌌던 것으로 추정했다. 또, 대향로가 오랜 세월에도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 진흙에 잠긴 진공 상태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1995년의 발굴 조사로 대향로가 발견된 일대가 백제 시대 왕실 절터였음이 입증되었다. 발굴된 목탑 흔적에서 발견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에서 "창왕(위덕왕) 13년(567년)에 정해공주가 이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학계는 이 점에 주목하여 대향로가 단순한 향로가 아니라 백제왕실 의식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된 신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1.8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중국에 서역의 향품이 전해져서 전국시대 말기부터 악취를 없애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나라 안녕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백제의 것과 같은 대형 향로가 없으며, 한나라 때와 같은 금동 제품이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남조시대 유물들 중 비록 실물은 아니지만 백제의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것이 확인되었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天界)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다. 시나가와구 시나가와 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시나가와 구는 다섯 개의 지구로 이루어져있다. 1947년 3월 15일에 시나가와 구는 이전의 시나가와 구에 에바라 구가 합쳐져 성립되었다. 시나가와 구와 에바라 구는 모두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 시의 경계가 바깥쪽으로 확장됨에 따라 1932년에 설치되었다. 에도 시대에 시나가와는 도쿄와 교토를 잇는 도카이도를 출발한 여행자들이 처음 마주치는 역참이 있던 곳이다. 역참으로써의 기능은 오늘날 역 주변에 있는 6000개의 객실을 가진 몇몇 호텔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시나가와에 스즈가모리 형장을 유지하였다. 도카이도 신칸센은 2003년부터 시나가와 역에 정차하기 시작했다. 몇몇 회사들이 시나가와 구에서 운영되고 있다. 시나가와 구에 본사를 둔 기업들로 이스즈 자동차, 일본 항공, JAL의 계열사인 JAL 익스프레스, JAL웨이즈가 있다. 한때 JAL의 계열사로 현재는 일본 항공에 인수되어 없어진 일본 아시아 항공이 JAL 빌딩에 본사를 두었다. 반다이 남코 홀딩스의 본사가 다이요 세이메이 시나가와 빌딩에 있다. 소니는 시나가와 구에서 고텐야마 테크놀로지 센터와 오사키 이스트 테크놀로지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2006년 말에 소니의 본사가 미나토 구로 이전하기까지 본사로 사용되었고 시나가와의 오사키 웨스트 테크놀로지 센터는 2007년에 문을 닫았다. 어도비 시스템즈, 지멘스 AG, 피닉스 테크놀로지스의 일본 지사가 시나가와 구에 있다. 다른 회사들로 IMAGICA, JTB 주식회사, 필립스, 아쿠라, 폴라 코스메틱스, 일본 정공이 있다. 시나가와 역은 실제로는 미나토 구에 있다. 오타 구에 있는 도쿄 국제공항이 가장 가깝다. 쓰촨성 쓰촨성(사천성, )은 중화인민공화국 서부 내륙 지방에 있는 성(省)이다. '사천(四川)'이란 이름은 민강, 금사강, 타강, 가릉강 등 네 개의 하천이 흘러 붙인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천(川)이란 선비족이 말 달리며 불렀다는 칙륵가에 나오는 칙륵천(敕勒川)이나 고국천왕의 '천(川)'처럼 강이 아니라 '평원' 혹은 '땅'의 뜻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사천은 처음부터 사천이 아니라 양천(兩川), 삼천(三川)을 거쳐 사천(四川)이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지역을 파군과 촉군으로 양분하며 양천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당 대종 시기에 검남동도, 검남서도, 산남서도의 세 곳으로 나뉘면서 삼천이 되었다. 송나라 진종 시기에 익, 재, 이, 기 등의 4주를 둠으로써 '사천'이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원나라 때 정식 성(省)으로 등록되었다. 삼성퇴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황하 문명과는 다른 갈래의 독자적 청동기 문화인 사천 문명의 중심지였다.221년 유비가 이곳에 촉한을 세워 263년까지 계속되었다. 주요 도시로는 청두 등이 있다. 약 200만 년 전 사천(四川) 지역에서 인류 활동이 시작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만5천 년 전 문명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삼성퇴 문명(三星堆文明)으로 대표되는 고도로 발달한 고촉 문명이 형성되었다. 진(秦) 왕조가 쓰촨을 통치한 이후 쓰촨은 점차 중원(中原) 문화에 유입되기 시작하여 중국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대 역사 연구에 따르면, 약 200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초기 사천에서 인류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7~8천 년 전 사천 지역은 점차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였다. 약 4~5천 년 전, 사천 지역은 고대 전설(傳說)시기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는 유적의 고고학적 발굴과 구두로 전해지는 전설이 늦어도 상대(商代)에는 성도 평원(成都-)이 이미 노예사회에 진입했음을 증명한다. 개명 왕조는 광도(廣都)에 도읍을 세웠는데 초기 국력이 강성하였다. 기원전 4세기, 개명 9대 왕조는 화하(華夏) 시기의 예법 제도를 따르기 시작했고, 도성을 광도에서 성도로 옮겼다. 진(秦) 혜문왕(惠文王) 9년(기원전 316년), 진은 천하 통일을 준비하였고, 돌소(石牛)로 길을 내어 촉을 토벌하였다. 촉을 점령한 진은 촉(蜀)과 한중(漢中) 두 군(郡)을 세웠다. 사천 지역에서는 점진적으로 진의 제도가 실시되어 봉건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진 소양왕(昭襄王)에서 장양왕(莊襄王) 시기(기원전 227~247년), 촉군태수(蜀郡太守) 이빙(李氷)은 촉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중대 조치를 취하였다. 그 예로 두장옌(都江堰)을 건설하고, 검강(檢江)과 비강(郫江) ― 現 난허(南河)와 진장 강(錦江)사이 ― 의 수로를 열어 성도 평원을 날로 풍요롭게 하여 진시황의 중국 통일에 중요한 물질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서한(西漢) 시기 이후 쓰촨 지역은 사회, 경제, 문화가 빠르게 발전하여 번영의 수준이 관중 지역을 넘어서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리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한 경제(景帝)의 즉위시기, 촉군태수에 오른 문옹(文翁)은 성도에 중국의 첫 번째 관영 학당인 문옹석실(文翁石室)을 세웠고 이때부터 촉 지역은 학문이 대성하여 제노(齊魯)지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서한 시기 말, 익주(益州)를 점거한 공손술(公孫述)은 국호를 성가(成家)라 하고 성도에 도읍을 세웠다. 동한(東漢) 말(189~214년), 익주는 또다시 유언(劉焉) 부자(父子)에 의해 할거되었다. 이후 유비(劉備)는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촉한'(蜀漢, 221년 ~ 263년)이라 한다. 촉한의 영토는 오늘날의 충칭(重慶), 쓰촨(四川), 윈난(雲南)지역 대부분, 구이저우(貴州)지역 전체, 산시(陝西)와 간수(甘肅)지역 일부를 포함한다. 이로써 위(魏), 촉, 오(吳) 삼국이 병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촉한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은 온 마음을 다하여 정치를 돌보아 촉나라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촉한의 마지막 군주 염흥(炎興) 원년(元年)(263년), 촉이 위에 의해 소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염(司馬炎)이 진(晉) 왕조를 세웠다. 서진(西晉) 후기인 영흥(永興) 3년(306년), 이웅(李雄)은 성도에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동진(東晉) 함강(鹹康) 4년(338년), 이웅의 조카 이수(李壽)가 다시금 국호를 '한(漢)'으로 고쳤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를 합하여 '성한(成漢)'이라 한다. 성한은 '십육국'(十六國) 중 가장 일찍 세워진 국가로 전성시기 그 영토가 쓰촨 분지 및 주변의 일부지역까지 미쳤다. 동진 영화(永和) 3년(347년)에서 수 개황(開皇) 원년(581년), 쓰촨 지역은 수 왕조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동진, 전진(前秦), 초종(譙緃), 남조(南朝)의 송(宋)·제, 양, 북조(北朝)의 서위(西魏), 북주(北周)의 순으로 총 8개의 정권의 통치를 받았다. 정치가 불안했기 때문에 전란이 빈번했고 사회 경제가 정체되어 있었다. 수당 시기, 쓰촨 지역은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는 전성 시기를 맞이하여 '양일익이(揚一益二; 揚은 지금의 장난(江南) 지역)'라 하였다.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당 현종은 촉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에도 다시 여러 당의 군주가 촉으로 피신하였는데, 예를 들어 당 덕종은 주비의 난, 당 희종은 황소의 난으로부터 피신하였다. 당 천우 4년(907년), 당 왕조가 멸망하고 왕건(王建)과 맹지상(盟知祥)이 각각 18년과 31년에 연이어 쓰촨 지역에 전촉과 후촉 정권을 세웠다. 전촉과 후촉 모두 전기에 ‘휴양생식(休養生息)’정책을 채택하여 중원전투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천 일대는 전국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이 되었다. 북송시기 건덕 3년(965년) 송나라 군이 후촉을 멸하였다. 송원시기 사천 지역에서는 왕소파(王小波)의 난, 이순(李順)의 난 등 대규모 농민 봉기이 수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여전히 안정되어 있었던 쓰촨 지역은 사회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양송(兩宋)지역은 금과 몽골을 저지하는 후방이 되었다. 원 초기 사천 지역은 반세기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경제가 크게 파괴되었다. 명 홍무(洪武) 4년(1371년), 명 왕조는 군사를 일으켜 사천 지역을 명 왕조의 영토로 유입시켰다. 명 말기 장헌충(張獻忠)의 봉기군이 쓰촨 지역에 들어와 대서 정권(1644년 ~ 1646년)을 세우고 성도를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청 초기 30여 년간 사천은 줄곧 전란에 휩싸여있었고 강희 20년(1681년)에서야 비로소 안정된 시기에 접어들었다. 가경(嘉慶) 원년(1796년), 사천, 하북(河北), 산시 지역에서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하였고, 봉기는 9년 지나서야 비로소 진압되었다. 송 말기에서 청 초기, 사천 지역은 전대미문의 전란 속에서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은 명초와 청초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민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라 한다. 두 차례의 이민 운동으로 인구가 부족한 사천은 대량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고 이로써 사회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1840년, 아편 전쟁이 중국 근대사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1895년에 이르러 이홍장(李鴻章)과 일본 정부 대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천의 문호 충칭을 무역항으로 개방하도록 규정하였으니 이때서야 진정한 근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자연히 사천 사회의 경제가 점차 붕괴되고 반식민지화되자 민족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1860년대, 석달개(石達開)가 쓰촨에 진입한 후 또다시 성도 교안 사건과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사천에서 발발한 보로운동(保路運動)은 신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11년 성도는 독립된 군 정부를 세웠다. 1912년 쓰촨은 정식으로 중화민국의 한 개 성(省)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천은 장장 21년간의 군벌혼전시기에 빠졌는데, 1933년에 이르러 류샹(劉湘)이 장제스가 사천 성에 진입하려는 반란을 차단하고 이를 평정하였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연해(沿海)․연강(沿江)지역의 각종 공업, 광업 기업, 고등 교육 기관, 문화 단체가 잇달아 사천 지역으로 옮겨왔고, 사천 지역은 다시금 중국의 후방이 되었다. 동시에 300만 사천 군이 사천 지역으로부터 출병하여 항전함으로써 항일전쟁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49년 12월 10일,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를 데리고 청두에서 타이완으로 날아갔다. 그 후 사천과 서강(西康) 지역은 연이어 정권이 교체되었다. 1950년에는 천동(川東)・천서(川西)・천남(川南)・천북(川北), 네 행서구(行署區)가 설치되었으나, 1952년 이들은 합쳐 사천 성이라는 행정구획을 회복하였다. 1954년 7월 기존의 중앙직할시(直轄市) 충칭시가 사천 성으로 편입되어 성할시(省轄市)로 바뀌었다. 1955년, 시캉 성이 폐지되고 금소강(金沙江) 이동(以東)지역이 사천 성으로 분리 편입되었다. 1997년 충칭시, 만소시(萬縣市), 배령시(涪陵市), 금강(黔江) 지역이 사천 지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충칭직할시가 재건되었다. 중국 남서부 지역 창 강 상류에 위치한 쓰촨 성(四川省)은 북위 26˚03′-34˚19′, 동경 97˚21′~108˚31′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성 전체 길이는 가로 1075km, 세로 921km 이며 면적은 약 491,147km이다. 중국 34개 1급 행정단위 중 면적이 5번째로 크며, 23개 성(省) 중에서는 칭하이 성(青海省)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 대한민국(남한) 전체면적의 약 4.9배에 해당하며, 중국 전체면적의 약 5.07%를 차지한다. 크게 서부의 티베트 고원과 동쪽의 쓰촨 분지로 나뉘고 충칭, 산시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윈난 성, 구이저우 성과 티베트 자치구와 인접해 있다. 쓰촨 성(四川省)은 룽먼 산(龍門山)-다량 산(大涼山)을 경계로 동부 쓰촨 분지와 분연산 지역(盆緣山地區) 및 서부 천서고산고원(川西高山高原)과 천서남산지(川西南山地)로 나뉜다. 쓰촨은 지형이 매우 복잡하고, 칭짱 고원(青藏高原), 헝돤 산맥(橫斷山脈), 윈구이 고원(雲貴高原), 친링 산맥(秦嶺)-다바 산맥(大巴山)산지 등을 포함해 대 지형을 형성한다. 중국 지형의 제1, 2계단에 걸쳐있고,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기울어진 서고동저 형태를 취한다. 천서지역 다쉐 산맥(大雪山脈)의 (貢嘎山)은 해발이 7,556m로 전 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북부의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阿壩藏族羌族自治州) 내의 황하 유역을 제외한 그 밖의 사천성(四川省)은 모두 창 강 유역에 속한다. 창 강을 따라 사천 성의 제일 큰 하류를 지나 상류하면 사천과 티베트를 경계 짓는 금사 강(金沙江)에 이른다. 주요 지류는 야룽강(雅礱江), 다두허(大渡河)과 칭이강(青衣江)을 포함한 민강(岷江), 타강(沱江), 자링강(嘉陵江)(부강(涪江), 거강(渠江) 포함), 츠수이허(赤水河) 등이다. 쓰촨 성은 수력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지역 중의 하나이며 대량의 수력발전소를 가지고 있다. 사천성 호수의 대부분은 빙식호(冰蝕湖), 용식호(溶蝕湖), 언색호(堰塞湖)를 위주로 하여 서부와 북서부 고산고원 지역에 주로 분포해 있다. 성 전체의 크고 작은 호수를 합하면 모두 1000개가 넘는다. 잘 알려진 호수로는 공해(邛海), 루구호(瀘沽湖) 등이다. 사천 북부의 약어개(若爾蓋)는 중국의 중요한 습지 지역이다. 아열대(亞熱帶) 기후에 속하는 사천(四川)은 지형과 다른 계절풍(季風)에 의해 교대로 영향을 받아 다양한 기후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동부의 사천분지(四川盆地)는 아열대 습윤기후에 속한다. 서부의 고원지역은 지형에 영향을 받아 기후가 수직적인 기후 변화가 일어난다. 이 지역부터 남부지역 까지의 북부 기후유형은 아열대에서 점차 과도기적인 아한대(亞寒帶)기후에 속한다. 기후는 수직방향으로 아한대(亞寒帶)에서 영동대(永凍帶)까지 여러 가지 기후 유형이 나타난다. 사천분지(四川盆地)의 연간 일조는 300~1600 시간이며, 전국 일조량의 최소 지역 이다. 동부 사천분지(四川盆地)의 매년 평균 기온은 14~19℃으로 중국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역(창 강 중・하류] 등) 보다 1℃ 가량 높다. 제일 한랭한 1월 평균 기온은 3~8℃이고 제일 무더운 7월 평균 기온은 25℃~29℃이며 봄철 및 가을철 기온은 연평균 기온에 가깝다. 쓰촨 지역은 4계절이 뚜렷하고, 연중 280~300일은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 천서고원(川西高原) 대부분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8℃이하다. 그중 1월 평균 기온은 -5℃ 안팎이고, 7월 평균 기온도 10℃~15℃ 밖에 되지 않아 1년 내내 여름이 없고, 겨울이 길다. 천서남산지(川西南山地)의 연평균 기온 또한 지형에 따른 차이로 인해 골짜기 지역 온도가 15℃~20℃, 산지는 5℃~15℃로 낮은 편이다. 동부 사천분지(四川盆地) 연강수량은 900~1200mm이고, 그중 분지 주변 산지의 강수량이 분지 안쪽보다 높다. 분지 중에서도 서연산지(西緣山地)가 연강수량이 제일 높으며 강수량이 1300~1800mm에 이른다. 계절상으로 말하면 사천의 겨울철 강수량은 낮은 편으로, 연간 총 강우량의 3~5%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여름철 강수량은 높아 연간 총강수량의 80%를 차지한다. 겨울엔 건조하고 여름에는 비가 온다. 사천고원의 대부분 지역의 강우는 적다. 연강수량은 600~700mm이고 그중 진사 강 하곡의 강수량은 400mm밖에 되지 않아 사천성에서 제일 강우량이 낮다. 우기는 6~9월에 해당하며 일 년 총 강우량의 70~90%를 차지한다. 11~4월은 건기이다. 천서남산(川西南山)지역은 다른 곳과 강수 차이가 크고 건조하고 습한 계절의 차이가 뚜렷하다. 성도,간칭으로 “융”(蓉)이라고 도 한다. 아시에서 처음으로 국제“미식의 도시”(美食之都)로 이름이 났고 고대로 부터”천부지국”(天府之国)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얻었다.. 이백(李白)의 시편 에는 “아홉개 하늘은 성도에서 나왔고 천만개의 문은 그림으로 들어 오너라” (九天开出一成都,万户千门入画图) 진절하게 금관성(锦官城)의 부유와 수려함을 묘사 하였다. 사천의 전통극은 절기하고 풍부하며 례로 타거(托举), 개혜안(开慧眼), 얼굴 변하기(变脸), 불뿜기(喷火), 칼숨기기(藏刀)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끓이지 않 았다. 성도는 2010년 2월 28일에 “미식의 도시”로 칭호를 수여 받았다. 성도의 유명한 소식(著名小吃)은 마퍼 두부(麻婆豆腐), 쌍류 토끼 두(双流兔头), 부처폐편(夫妻肺片), 단단면(担担面), 용 초수(龙抄手), 종 물 만두(钟水饺), 한 만두 떡(韩包子), 삼대 포(三大炮), 뢰탕원(赖汤圆)등 이다. 성도의 가장 좋은 여행 시간은 3월, 4월, 5월, 6월, 9월, 10월, 11월 이며 청성산(青城山), 서령 설산(西岭雪山), 구룡구(九龙沟), 구봉산(九峰山), 천대산(天台山), 용지 산림공원(龙池森林公园) 등은 모두 성도의 가장 이상적인 피서 명승지 이다. 성도에서 북쪽으로 올라 가다 보면 도강언(都江堰), 구채구(九寨沟)로 도달할 수 있고 서쪽의 천장 도로(川藏公路)를 따라 올라 가면 라싸(拉萨) 로 통하며 촬영 성지인 경로에는 신도교(新都桥) 해라구 빙천(海螺沟冰川), 임지(林芝) 등지 망강(芒康)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매리설산(梅里雪山), 샹그리라(香格里亚), 려강(丽江)등 주요 여행 경치 지역이 나타 난다. 덕양은 역사가 유구하고 파촉문화 발원지 중의 하나이며 여행자원은 하늘의 두터운 특혜를 가져 독특하다. 국내외 에서도 유명한 국가 중점 문화물 보호 단위(国家重点文物保护单位) 이며 국가 처음으로의4A 급 풍경 명승지의 고대 촉국의 삼성퇴(三星堆)유적지; 보존이 완호하며 건축이 정밀하고 아름다운 제3대의 서남지구 제일 큰 덕양공묘(德阳孔庙); 웅위롭고 장관한 이빙릉(李冰陵),고대 24효 중의 하나인 ‘일문 삼효”(一门三孝)이야기의 발원지, 그리고 백마관 방통(庞统)사묘, 장비 점장대(点将台), 환말구(换马沟), 락봉파(落凤坡), 용통 혈문(庞统血坟), 금우촉도(金牛蜀道), 제갈량쌍충사(诸葛双忠祠), 장임묘(张任墓)등은 삼국문화와 가를 수 없는 중요한 조성 부분이다. 5절4해(五绝四海)로 유명한 형화산풍경 명승구(蓥华山风景名胜区), 크게 깔려 있는 원시산림과 팬더(熊猫),들코웡수이(金丝猴)등 진귀한 동식물로 일체로 한 구정산(九顶山)풍경 명승구와 구정산(九顶山)팬더자연 보호구; 성급 산림공원—운호 산림골뤈, 검남춘(剑南春) 산림공원, 외라산 풍경구(崴螺山景区); 동호산 공원(东湖山公园), 방호 공원(房湖公园)과 계광저수지등이 있으며 ‘동방 예술의 찬란한 보배, 인류지혜의 소중한 성과”(东方艺术的瑰宝,人类智慧的结晶) 의 덕양석각(德阳石刻), 기호등 현대문화오락 풍경구(旌湖等现代文化娱乐景区), 전국청소년 교육기지—황계광(黄继光)기념관과 계광의 고향 등 홍색 여행구(红色旅游区), 전국 유일한 관음보살 금강 도장(观音菩萨金刚道场)—중강 백탑사(中江白塔寺). 중국의 우수여행의 도시인 반지화(攀枝花) 는 여행자원이 독특하여 용동(溶洞), 폭포(瀑布), 온천(温泉), 원시산림(原始森林), 고산초전(高山草甸), 지하해자(地下海子), 세계 제3의 고바(高坝), 상아 위조강성(象牙微雕钢城)을 한 일체제: 국가,성급산림공원의 여러곳은 식물학자들께 천당이라고 불리며 그중 반지화 소철국가급 자연보호구(苏铁国家级自然保护区)내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큰 원시 소철림(苏铁林)에는 철수(铁树)가 매년 꽃피여 기이한 경관(奇观)이라고 한다. 그리고 식물들이 립체적으로 대흑산(大黑山)에 분포되었고 “중화 기동”(中华奇洞)이라 불리는 미이 용탄용동(米易龙潭溶洞); 희귀한 동기온천(氡气温泉) ; 세상에서 겅탄하는 반강(攀钢)과 웅기한 2탄고협 평호(二滩高峡平湖); 기이하고 흥미롭고 놀랍 지만 무탈한 “만리장강의 제일 표류”(万里长江第一漂).열대과일, 수산품및수정(水晶), 마노(玛瑙), 비취(翡翠)등 보석과 “견중 기품”(砚中奇品)의 자각견(苴却砚)등 다채롭고 풍부한 여행상품들이 있다. 복숭아 꽃축제桃花节(), 해빛 여행(阳光之旅), 발수절(泼水节), 용주절(龙舟节), 풍쟁절(风筝节)등 여행프로젝트와 축제 경축행사를 개척 하였다. 청산에 둘러싸여 있고, 온 시야가 짙푸르고, 맑고 푸른물의 경치, 청의강 등 4갈래의 강은 도시구역을 지나 흘러 야안이 독특하게 부드럽고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도록 한다. 물이 도시속에, 도시가 산속에, 도로가 녹색속에, 사람이 꽃속에 있는 우성(雨城)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조화되고 융화되며, 편안한 느낌을 선사한다.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에 고목이 즐비하고, 색채가 풍부하고, 강과 호수의 잔물결이 빛에 반짝이고, 도시가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에 잠겨, 번화하면서 소란스럽지 않고 화려하면서 요염하지 않고 속되지 않다. 도시구역은 전체가 독특한 청산이 짙푸르고, 녹수에 파도가 출렁이며 고목이 즐비하고 시와 같은 우아한 빗물, 명성이 그림과 같은 매력과 풍채를 풍기고 있다. 야안은 중국우수관광 신흥도시이다. 줄곧 “천서요로(川西咽喉)”,“서장문호(西藏门户)”,“민족회랑(民族走廊)”이란 명칭을 지니고 있으며, 사천관광 서(西)환상선과 샹그리라 환상선의 관광객 래원의 관건이고, 교통요로와 중요문호이다. 야주랑교, 야안대교, 청의강대교 등을 대표로 하는 10여개 다리는 조형이 독특하고 풍격이 특이하고, 정교하고 새롭고, 소박하며 우아하다. 이 다리들은 남북 시 구역을 함께 연결시킨다. 강을 따라 분포된 부동한 테마로 건설된 도시 레저공원은 수목이 즐비하고 온통 녹색으로 물들어 정교하고 아름다워, 자연스럽게 교묘하면서도 풍성하고 심오함으로 이 역사 문화명성의 역사인문, 자연풍모, 민속풍속을 한껏 표현한다. 면양은 세계에서도 큰 명성을 갖고 있는 위대하고 랑만적인 시인—이백(李白)의 고향이며 고대 명으로는 “부성”(涪城) ,”면주”(绵州)라고 했다. 면양시 내의 지형은 산지가 많고 기후가 따뜻하며 사계절이 분명 하고 1년중 4-10월 모두가 여행 하는 좋은 계절 이다. 그리고 면양시 는 천서북에 위치하여 구환선(九环线)<구채구여행 순환 코스>에서 한개의 빛이 찬란히 눈부시는 명주이고 시내의 인문과 자연 경관이 아주 많아 여행자원이 풍부하고 소수민족 풍경은 한갈래의 독특한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루어 국내외의 많고 많은 여행객들을 계속 흡수하여 여행하고 래저와 휴가를 즐기수 있도록 하였다. 면양 특색의 소식(小吃):재동소 떡(梓潼酥饼), 재동편분(梓潼片粉), 춘권(春卷), 량점점(冷粘粘), 재동양완(梓潼镶碗), 채두화(菜豆花), 석량분(席凉粉), 관관탕(罐罐汤), 정이황(疋二黄), 관관계(罐罐鸡), 과괴(锅魁)등 이고 최고의 소식(小吃)은 이전에는 항상 깊숙한 골목 거리에 숨겨져 있어 지만 현재의 면양 소식(小吃)은 이미 깊숙한 골목 거리에서 나와서 체이점으로 발전 하여 전국에 펼쳐 나섰다. 광무산(光雾山) 풍경구는 “산기(山奇),석괴(石怪), 곡유(谷幽), 수수(水秀), 봉험(峰险)” 5대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공산(空山)국가삼림공원은 과보령(挂宝岭)원시풍경유람구, 천향봉(天香峰)삼림문화놀이터, 응조령(鹰爪岭)삼림캠핑놀이터, 공산파 카르스트(空山坝岩溶)풍경유람구, 후자암 협곡(猴子岩峡谷) 풍경유람구 등 5대 관광구로 구성된다. 중봉동(中峰洞)이 가장 유명하며 불광동(佛光洞)이라고도 하며, 중국종유동협회회장 주쉐원(朱学稳) 이 중봉동(中峰洞)을 “천하제1동(天下第一洞)”이라 불렀다. 중봉동( 中峰洞)은 “여수동천(诺水洞天)” 으뜸이며, 신기절묘한 “여수동천”이고, 원시적이고 유심한 “림강려협(临江丽峡)”이고, 경치가 아름답고 화려한 “공산천분(空山天盆)”이 서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저명한 여수강(诺水河) 국가급 풍경명승구를 구성하였다. 파중은 사천성의 시급도시로 쓰촨 분지 동북부, 대파산계 미창산 남쪽기슭에 위치하여, 전국 제2대 소비에트지역-천섬혁명근거지의 중심과 수부(首府)로 원래부터 있던 “홍군의 고향”,“사천동북부 산소카페(川东北氧吧)”이다. 파중은 역사가 유구하고 상고시대에 벌써 인류활동이 있었기에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여수강(诺水河) 풍경구는 대체로 “여수동천(诺水洞天)”,“림강려협(临江丽峡)”,“공산천분(空山天盆)”,“마파석림(麻坝石林)” 4대 독립된 관광구로 나눈다, 호형 구조로 분포되고, 모택동 동지가 “전국제2대 소비에트지역”-천섬소비에트지역이라 부른 수부(首府) 퉁장현과 한갈래 환형 경관을 이루고 있어, 진파산구역 제1명승지라 할 수 있다. 미산시(眉山市)는 사천성에 속하고 고대에는 미산을 미주 라고 했으며 대 문호인 소동파(大文豪苏东坡)의 고향이다. 미산시의 주요 여행 풍경지는 삼소사(三苏祠), 삼소기념관(三苏纪念馆), 와우산국가산림공원(瓦屋山国家森林公园), 흑룡탄 저수지(黑龙滩水库), 팽조산<선녀산>(彭祖山<仙女山>),팽산강 입구 한애묘(彭山江口汉崖墓), 우각채 대불(牛角寨大佛), 중암사(中岩寺), 중국 죽예성中国竹艺城(), 동파호 공원(东坡湖公园), 용곡산(龙鹄山), 수천화월(水天花月)등이 있다. 미산시의 전통미식 특산과 공예상품이 많고 많다. 유명한 인수 흑용탄 첸위씨(仁寿黑龙滩全鱼席), 들깨떡(芝麻糕), 왕양진 간파 소고기(汪洋镇干巴牛肉), 회과 양고기(回锅羊肉), 회과 물고기(回锅鱼), 문공비파(文宫枇杷), 조가 배(曹家梨), 동파 송화단(东坡松花蛋), 동파구의 동파주자(东坡肘子),동파육(东坡肉),동파 물고기(东坡鱼), 용안소(龙眼稣), 미산 네이블 오랜지(眉山脐橙), 과 국우 삼소주(国优三苏酒); 팽산의 팽조주(彭山的彭祖酒), 달피 오리(甜皮鸭), 홍야의 야어(洪雅的雅鱼), 등초유(藤椒油), 와산춘주(瓦山春酒), 도천 고산녹차(道泉高山绿茶)와 각종 야식(各种野餐); 청신의 강단(青神的江团), 한양계(汉阳鸡), 중암 통양구이(中岩烤全羊), 천신귤감(青神椪柑), 단릉의 동파(丹棱的冻粑), 부지화(不知火), 조우빠량(曹八娘), 유계육(刘鸡肉), 대야비파(大雅枇杷),……그 중 도파주자(东坡肘子), 동파 물고기(东坡鱼),동파 송화단(东坡松花蛋), 들깨 떡(芝麻糕)은 국내외로 이름이 떨처져 있다. 자양은 현재 “서부차성(车城)•에너지절감도시•녹색자양”으로 적극 건설해 가고 있다. 쓰촨 분지 중부에 위치하여, 사천이 유일하게 동시에 청위간 성유쌍핵(成渝“双核”)을 연결하는 중심도시이다. 자양은 위치적인 우세가 뚜렷하다. 성안유(成安渝), 내자수(内资遂), 수자미(遂资眉), 성도 제2요성(第二绕城) 고속도로와 성유(成渝) 철도여객 전용선 등 종합교통항목의 신속한 건설과 함께 “여러 선로가 성유(成渝)과 연결되고 내외로 대통하는” 종합교통구조가 이제 곧 형성될 것이다. 자양은 현재 성도 교통중심주축의 중요구성부분과 성유(成渝)경제구역내 중요교통 2등급 중추이다.안웨(安岳)는 전국에서 유일한 레몬생산기지 현으로, 중국 레몬 고향이다. 주로 재배하는 품종은 여우리커(尤力克)로 20세기 20년대 미국에서 인입하여, 과학기술 작업자의 반복된 선별을 거쳐 생산량이 많고 품질이 좋은 레몬 새 포기들을 길러낸다. 잰양(简阳)양탕은 10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중국제1탕(中国第一汤)”이라 불린다. 그 육질이 부드럽고 지방이 많으면서 느끼하지 않다. 그 국탕은 유백색이며, 신선하고 향기로운 맛이 강하여 사람들이 아주 좋아한다. 사천러즈(四川乐至)는 천이(陈毅) 원수의 고향으로서, 여기에는 곳곳에 홍색혁명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곳곳에 “천하제1구이”로 불리는 “러즈불고기(乐至烤肉)”가 있다. 자양은 인문고적이 비교적 풍부하고 “조각기술이 뛰여난 자죽관세음(紫竹观音)은 “동방의 비너스”라고 불린다. 그외, 자양의 반월산대불(半月山大佛), 하동대불(河东大佛),간양석경산(简阳石景山)의 “인두석(人头石”, “장비영(张飞营)”, 러즈(乐至)의 천이 옛집(陈毅故居), 보국사(报国寺) 등 명승인문 고적이 있다. 간쯔장족자치주(티베트어:dkar-mdzes bod-rigs rang-skyong khul), 사천성의 지목 자치주로서 서,북,남쪽은 각기 서장,청해,운남 등 성 구역과 인접하며, 면적은 153002km2, 관하 18개현, 인구는 약 88만, 그중 장족은 77.8%를 차지하고, 주정부는 캉딩현에 주재한다. 전체 주 구역은 청장고원 동남변두리에 위치하며, 산천은 남북종열식 배열을 나타낸다. 궁가산 등 유명한 대산이 있고, 금사강(金沙江), 대도하(大渡河), 야룽강(雅砻江) 등 주요 하류가 있다. 설산, 고원, 협곡, 초원,자연풍경이 다채롭다. 삼림, 지하자원, 자연자원이 아주 풍부하다. 간쯔주 경내에는 풍부한 수력자원과 지열자원이 있다. 판다, 레드 판다, 들창코원숭이, 빠이춘루([白唇鹿]:중국특산의 양볼과 입 언저리의 털이 새하얀 사슴) 등 야생동물이 있다. 진귀한 중약재로는 천마, 동충하초, 패모, 당귀, 황기 등이 있다. 광산자원으로 금,은,동,철,몰리브덴,리튬,대리석,황강암 등이 있다. 간쯔주에는 궁가산 관광지, 해라구 관광지, 전만강(田湾河) 관광지, 무거춰(木格措) 관광지, 오수해(伍须海) 관광지, 이랑산(二郎山) 관광지, 타궁(塔公) 관광지, 노정교(泸定桥),더거인징위웬(德格印经院), 타궁사원(塔公寺),백리사(白利寺),리탕사(理塘寺) 등 풍경 명승고적이 있으며, 해라구(海螺沟)는 국가4A급 풍경명승구로, 근년에 국제1류 우수 관광지로 만들 것이며, 도성.아정(稻城.亚丁)은 최후의 샹그리라로 칭송되고 있다. 경내에 사원이 즐비하다. 캉딩(康定)의 포마산(跑马山), 무거춰(木格措)는 해.내외로 유명하다. 단바(丹巴)는 미인곡(美人谷)이라는 명성이 있다, 또한 “천조지국(千碉之国)”이라는 명칭도 있다. 노정철삭교(泸定铁索桥)는 중국혁명사에서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더거인징위웬(德格印经院)은 티베트문화(藏文化)의 보고이다. 더거(德格), 스취(石渠), 써다(色达)는 거싸얼(格萨尔)의 고향이다. 타궁초원(塔公草原)은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되게 한다. 풍경이 아름답고, 경치가 사람을 미혹시키며, 관광객의 낙원이다. 작가 천윈허(陈运和)는 이에 기초하여 비로소 《캉딩정가(康定情歌)》,《캉딩,정가의 고향(康定,情歌的故乡)》 등 시문을 써냈다. 내강은 “천중의 허버이고 천남의 인후 이다”(川中枢纽,川南咽喉)는 명칭을 갖고 있어 한개의 진주가 중국대지에 깔려 있는듯 하다. 2012년 4월 26일 내강의 우선으로의 민생 공정()—“내강신성”(内江新城)은 정식으로 건설되었다. “내강신성”(内江新城)은 전통문화자원을 발굴하여 “청결의 내강”(清洁内江)을 만들어 (시용정결,市容整洁,규범유서,规范有序、환경우미,环境优美,공기청신,空气清新) “창통내강”(畅通内江) <인차창행,人车畅行,화물창류,货物畅流,요소창달要素畅达,내외창통,内外畅通>, ”산림내강”(森林内江),<성재림중,城在林中,로재녹중, 路在绿中,방재원중, 房在园中,인재경중,人在景中>로 3대 명함이 되었고 더욱 빨리 내강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것이다. 수녕은 중국 관음문화의 고향이고 선후로 “세계녹색의 도시”칭호를 얻었다. 중국 도시의 공익자선 7개별의 도시, 생태 시범구, 녹색경제 시범도시, 전국 녹화 모범 도시, 유통영역 현대물류 시범 도시, 국가 원림 도시, 중국 인거 환경범례상(中国人居环境范例奖),국가 위생도시, 중국 생태시, 중국 우수 여행도시, 중국 관음문화 고향, 전국 사회 치안 종합 치리 우수 도시(全国社会治安综合治理优秀市),곡예의 고향(曲艺之乡), 시주의 고향(诗酒之乡), 서예의 고향(书法之乡)이다 여행의 풍경지는 광덕사(广德寺), 령천사(灵泉寺), 중국사해(中国死海), 송자박물관(宋瓷博物馆), 탁통우물(卓筒井), 관음호 휴가구(观音湖度假区)등이 있다. 수녕의 미식을 말하자면 빈강로의 미식의 거리를 빼놓을수 없이 애기 걸이 이기도 하다. 한면으로는 미식을 즐기고 한면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노라면 갈곳이 어디로 사라 졌듯이 상불케 하는 지역 이기도 하다. 이 거리는 중앙 상무구()의 상업 보행 거리와 쌍쌍이 제1차”사천성 특색 상업거리”로 칭호 받았다. 남충은”천북의 심장”(川北心脏)과 “천북의 중진”(川北重镇)의 명칭을 갖고 있으며 성도와 중경 3도시 함께 3성 정립(三城鼎立)태세를 형성 하고 있다. 남충은 풍부한 물산, 기후가온윤, 역사가 유구하여 인재들이 속출하며 인문이 훌률하면서 많이 모여 있고 환경이 아름다워 거주와 여행에 편리하다. 풍부한 자원,과학과 교육이 흥행, 구위가 우월(区位优越), 교통이 편리(交通便捷), 경제활약(经济活跃), 시장번영(市场繁荣),하여 가릉강(嘉陵江)변의 빛이 찬란한 명주로 불리고 온 세상에서 명성이 두두 알려 져있는 비단의 도시 오랫동안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과일의 고향, 선후로 중국 우수 여행 도사, 국가 원림도시등 명칭 세계삼국문화 연구 토론회()의 영구 회의지로 선정되었다. 남충은 중국 우수 여행 도사, 국가 원림도시,전국청결능원 시범도시(全国清洁能源示范城市), 춘추 이래 력대로 도(都),주(州), 군(郡), 부(府), 도(道)의 치소(治所)이며 해방초기 천북행서구(川北行署区)의 주재지 이다. 광원은 삼국문화의 상세한 내력이 풍부하고 삼국문화가 한데 모인 지역이며 140여곳 삼국유지 유젹이 있고 삼국의 위촉(魏蜀)전쟁의 주 전쟁터와 제갈량이 6차로 기산에서 나온 주요통로 이다. 광원은 풍부한 여행산품을 갖고 있다. 유명한 백화석각(白花石刻), 검문지팡이(剑门手杖), 근조(根雕), 진사걸담(真丝挂毯), 마유자수(麻柳刺绣), 사마지담(丝麻地毯), 사주수품(丝绸绣品), 검문수건(剑门毛巾), “여황의 고향” 올리브유(橄榄油)의 여러가지 산품등 여행 상품, 흑 버섯(黑木耳)이 있고 고사리(蕨根),화화(黄花), 향고,표고버섯(香菇), 죽손(竹荪), 더덕(沙参), 천마(天麻),림충(林仲)등 산진약재(山珍药材)가 있으며 또 창계설리苍溪雪梨(), 창계 키워(苍溪猕猴桃), 창계홍심과(苍溪红心果)조천산호두(朝天山核桃), 광원감유(广元柑柚),등 과일들이 있다. 광원소식 3봉의 꽃(广元小吃“三朵花”), 호두나무떡(核桃饼), 증량면(蒸凉面),쏸차이, 산채 콩꽃 밥(酸菜豆花饭) 달주는 고대때에 통주라고 칭하였다. 사천의 대외 개방의 “동대문”이며 지형 지세가 홍콩과 비슷 하여 력대로 상업이 번영하였고 부자와 상인들이 많이 모여 “작은 홍콩”(小香港)이라고 했다. 달주는 명산 대천, 호수와 강의 풍경, 화초 수목,비금주수(飞禽走兽)등 자연 풍경은 다채롭고 아름다워 명나라시기의 유명한 지리 학자 서하객(徐霞客)은 “서남의 기이한 명승”(西南奇胜)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주요 명승의 고적은 통주구의 신검원(神剑园),련화호(莲花湖), 용조탑(龙爪塔), 알운정(嘎云亭), 봉황산(凤凰山),우의 원진기념관(元稹纪念馆); 달주구의 석교 고진(石桥古镇), 진불산(真佛山), 태평채(太平寨), 철산산림공원(铁山森林公园); 개강현(开江县)의 패방(牌坊), 금산사(金山寺); 만원시(万源市)의 화악산(花萼山), 관음협(观音峡), 팔대산(八台山)과 만원보위전(万源保卫战)진렬관; 선한현(宣汉县)의 라가바 유적(罗家坝遗址), 백리협(百里峡), 왕위조(王维舟)기념관과 홍4방면군 제33군 기념비;거현(渠县) 성바유적城坝遗址), 토계한궐(土溪汉阙), 문묘(文庙), 삼회 문봉탑(三汇文峰塔), 대죽현의오봉산(大竹县的五峰山), 죽해공원(竹海公园)등 이다. 낙산은 자연 자원이 풍부하여 “천하의 산수는 촉에서 보고 촉의 아름다움은 가주에 있다”(下山水之观在蜀,蜀之胜曰嘉州)는 아름다운 명칭을 갖고 있으며 국가5A급풍경구2곳, 4A급풍경구4곳, 국가급 풍경명승구, 자연보호구, 산림공원, 습지공원2곳, 지질공원, 광산공원 각1곳이 있다. 이미 25종의 광산자원이 탐사되어 알려져 있고 암염(), 린광()등 풍부한 자원과 전국에서 노(정)염의 주 생산지 이고 마변린광()의 저장량은 전국8대 린광에서 제4위로 된다.경내에는 가로 세로 흐르는 하천이 있고 민강()),대도하(),청의강(), 과 많고 많은 중소하류들이 있어 수능자원이론으로 묻힌 잠재량은 800만킬로와트이고 현재 전력 운행 장비는 332만 킬로 와트 당 이다. 자공은 “천부의 지국”("天府之国)---사천성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요롤고 부유한곳은 역시 촉중이 제일이다.”(富庶甲于蜀中)와 “사천성에서 정화스러운 지역이다”(川省精华之地)하고 풍부한 역사문화를 지극히 담겨있다. 그리고 독특하고 우아한 인문경관과 자연경관, 그 특유한 풍채와 격운(格韵)으로 중국 도시속에 우똣 서있다. 또 천년의 염도(千载盐都)의 큰 영예와 “공룡의 고향” (恐龙之乡)이라고도 하고 남국의 등성(南国灯城)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으며 산을 의지하고 물이 가까이 있어 유아한 환경으로 사람들께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 “천년의 염도”(千年盐都),공룡의 고향”(恐龙之乡),남국의 등성(南国灯城)이라는 명성이 두루 알려져 있으며 “공룡(恐龙), 정염(井盐)과 등회(灯会)는 자공의 “3개의 대 절묘”(大三绝)이고 공선(龚扇), 날염(扎染)과 전지(剪纸)는 자공의 “3개의 소 절묘”(小三绝)이며 천년의 염도(千载盐都), “공룡의 고향” (恐龙之乡), 남국의 등성(南国灯城), 강씨 여사의 고향(江姐故里)등 아름다운 명칭으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려 졌다. 자공의 등회”自贡灯会”는 국가 여행 관리국으로 부터”중국 민간 예술여행”(中国民间艺术游), “중국백성 생활여행”(中国百姓生活游) 선정되었고 대형 민속문화행사 자공 등회(自贡灯会)축제를 국내외 상대로 열어 국내외 1.5억의 여행객들을 받아 들었으며 “고품격의 예술”(高品味的艺术), “움직이는 문화 여행 자원”(流动的文化旅游资源), 민족 전통문화의 자호감(民族传统文化的骄傲) 이라고 도 한다. 여행자원: 풍경 지점 풍경구:로주노교(泸州老窖)풍경구,황초(黄荆)풍경구, 태평고진(太平古镇), 방산풍경구(方山景区), 납계천선동 풍경구(纳溪天仙洞景区), 합강불보 풍경구(合江佛宝景区), 합강요바 고진(合江尧坝古镇), 로현 옥섬 풍경구(泸县玉蟾山景区) 소식(): 사천 샤뱌샤브(火锅)는 장강과 타강의 엇갈리 곳 사천 남쪽의 중진(重镇)로주에서 시작되어 샤브샤브 업이 흥성 번창 하면서 많은 브랜드 샤브점(火锅店)을 만들어 졌다. 물고기샤브(鱼火锅)는장강의 신선한 황랄정(黄辣丁), 사괴어(沙锅鱼), 반탕어(半汤鱼), 가상마랄(家常麻辣), 신선하고 맛있으며 그 화는 업어 사천 남의 풍미는 돌출 하다. 로주노교(泸州老窖), 로주 랑주(泸州郎酒), 로주 화주(泸州花酒), 선시의 간장(先市酱油), 호국의 진초(护国陈醋), 로주의 계원(泸州桂圆), 은침미(银针米), 합강 여지(合江荔枝), 로주 백떡(泸州白糕), 적아파(猪儿耙), 로주 황파(泸州黄粑), 로주량떡(泸州凉糕), 고린마랄계(古蔺麻辣鸡),은가파료조(殷家坡醪糟), 로주홍산(泸州红伞), 납계포당(纳溪泡糖), 백과계(白果鸡), 관음 월모계탕(观音月母鸡汤), 합강 고어(合江烤鱼), 로제화(卤蹄花). 광안시 广安市 광안은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총설계사 등소평(邓小平)의 고향이다. 1998년 7월 31일 정식으로 광안시로 설립되었다. 광안시의 관할지역은 광안구(广安区), 전봉구(前锋区), 인수현(邻水县), 악지현(岳池县) 및 무승현(武胜县)과 화잉시(华蓥市)를 포함 되어 있다. 광안은 기후가 땃뜨하고 열량이 충족하며 우량이 풍유 하여서 공기의 습도 크고 일조가 적어 서리내리는 시기가 짧아 풍력이 매우 적다. 화잉시는 천중 구릉구에 위치 해있고 지표는 기복이 크지 않아 협곡이 가로 세로 분갈 되어 있다. 가릉강, 거강은 곡절 회환(曲折回环)하여 심절기함(深切基岩), 증폭곡류(增幅曲流)의 형식으로 남에서 장강에 흘러 든다. 화잉산맥의 동쪽에 있는 인수현(邻水县)은 사천동쪽 평행령곡구에 위치 되어 동라산(铜锣山), 명월산북쪽으로 뻗어 동쪽과 평행 분포되었으며 대홍하(大洪河), 어임하(御临河),북쪽에서 남으로 장강에 진입 한다. 광안 토종특산: 광안염피단, 광안송침차, 백시 유, 용안 유, 화잉산 산진, 고현 두부 간 등 량산이족자치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이족 거주지역이다. 경내에는 한족, 이족, 장족, 몽고족, 나서등 10여개의 세세대대로 거주한 민족이 있다. 전주는 1개시와 16개 현 으로 그중 목리(木里)는 장족 자치현 이다. 첮 도시 서창시는 성곤철로(成昆铁路) 중단에 위치되어 있어 고대로 부터 운남과 동남아로 가는 “남방의 비단길” (南方丝绸之路) 에 중요한 마을 이다. 여기의 겨울은 큰 추움이 없고 여름 철은 무덥지 않아 사계절이 봄과 같다. 평균기온은17℃ 로써 봄의 도시 곤명 (평균기온 14℃)같은 아름다움을 나타 내여 “만가지 천가지 시들지 않는 꽃과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사계절이 모두 다 봄이다.” (万紫千红花不谢,冬暖夏凉四时春)는 이름이 있다. 주의 소재 도시 서창시는 안녕하(安宁河) 유역에 위치 되어 있다. 해발이 비교적 높아 하늘은 깨끗하고 청량하며 영롱하고 투명한 달은 반짝반짝 빛난다 하여 “달의 성” (月城)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지니고 있으며 또 세계적으로 이름난 중국 항공항천(航 空航天) 도시 이다. 다채롭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행자원. 량산의 자연 풍경은 수려하고 아름 다우며 자연, 인문경관은 각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별다른 특색의 민족 민속풍습은 사천성 여행자원 중 가장 풍부한 하나 지역이다. 대표적인 경치구역160개 경치점은 여행관광과 개발 가치가 아주 좋은 곳이다. 지금의 로고호, 공해---라계산은 2개의 국가급 풍경 명승구 이고 마호, 이해, (彝海) 용주산(龙肘山)---선인호는 3개 성급 풍경 명승지 이며 이해 즉 홍군 장정시기(长征时期) 유백승(刘伯承) 원수와 이족 두령 소엽단(小叶丹)이 동맹을 체결한 유적지 이기도 하다. 미고 대풍정(美姑大风定) 국가급 자연 보호구와 면녕야륵등 성급 자연 보호구가 있으며 현대의 새 과학 경관인 서창위성 발사센터가 있다. 청아 하고 유야한 노산(泸山),신기한 토지와 산림, 대자연의 공모산, 백만 무의 비행기로 파종한 산림,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족 역사문화를 전시한 량산 이족 노예사회 박물관이 있고 성급 역사 문화의 명도시 서창, 회리, 종교성지 영산사, 목리대사, 그리고 로고호 모쉐인 풍습, 독특한 특색을 갖고 있는 이족 제사절 큰 행사, 관혼상제(婚丧嫁娶) 등 민속민풍, 전국의 4대 비림중 하나인 서창 지진 비림(地震碑林), 춘추전국 대석묘(春秋战国大石墓), 박십와흑암화(博什瓦黑岩画), 대천석각(大箐石刻),당송탑루(唐宋塔楼), 명청묘우(明清庙宇), 등등이 있다. 이족의 아름답고 뛰여 난 식기와 타타육(砣砣肉)은 극히 매력적인 민족 문화의 자원 이다. 량산은 하나의 다 민족 지구이며 각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고박한 풍속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족, 장족, 보이족, 리수족 등 10여개 민족의 세세대대로 거주한 생활습관과 풍속이 풍부하고 다채롭다. 이족의 타타육(砣砣肉),간간주(杆杆酒)장족의수유차(酥油茶) 모쉐인의”소리마주”(苏里玛酒)는 별다른 풍미 이고 이족의 “화파절” (火把节),회족의”고엘방 절” (古尔邦节), 리수족의”우왕회” (牛王会), 보이족의”6월6” (六月六)행사는 아주 흥성 흥성하였다. 대량산 지구의 “필모문화”(毕摩文化) 환상적이고 변화 무쌍 하며 이족의 옷차림, 아름답고 절묘한 노래와 춤; 이족의 “신부 업기”(背新娘),모쉐인의 “아주”(阿注)혼인은 별다른 흥취를 가져다 준다. 아바주(阿坝州)는 산 좋고 맑은 물, 길고 넓은 초원, 우뚯하고 줄줄한 설봉, 가로 세로 된 하천, 그 성대하고 드높은 기세, 넓고 광대 하면서 깊숙히 그윽함으로 함께 모여져 있다. 여기는 지형이 복잡하며 골짜기와 산곡이 교차되어 있고 다양한 기후로 인해 독특한 지리환경으로 구성됐다. 세계에서 이미 볼수 없는 동식물 자원들이 보류되어 있다. 례로 팬더(熊猫), 공동나무(珙桐) 등 살아있는 화석(活化石): 공업 문명중 찾아 볼수 없는 보류되어 있는 조용하고 고요하며 고박 수려한 자연경관, 례를 들면 구채구, 황룡등 세계자연유산 이다. 세계여행 전문가들은 아바주를 세계 생태여행중의 가장 우수한 목적지로 칭하였다. 카메라를 들고 그 촬영하는 매 한장의 사진은 아름답고 이쁜 엽서라고 할 수 있다. 아바주는 사천성의 두번째로 큰 장족 지구와 우리나라 강족의 주요 거주지구 로써 2011년 2개 국가5A급 풍경구(国家5A级风景区), 8개의 4A급 풍경구(4A级风景区)를 건립하였고 구채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혜의 경치구” (智慧景区)되면서 성공적으로 102개의 정품 여행 촌과 마을을 구성하였다. 지진 유적여행, 민속 문화여행, 시골여행등은 급속히 발전 하면서 종합적인 마케팅의 실제적인 효율이 보였고 여행시장의 규범화와 서비스 품질은 날이 가면 갈수록 높아져 전역에 백가지 꽃이 함께 피는 보기좋은 분위기를 형성 시켰다. 높은 수준의”중국 사천 국제 문화 여행 축제”(中国四川国际文化旅游节)등 중대한 행사를 통하여 전면적으로 일류의 경치구, 일류의 품위, 일류의 관리와 일류의 성과를 새롭게 건설하였다. 쓰촨은 여행자원이 풍부하고, 그 자연이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큼 아름다워 갈수록 관광객이 많아지는 추세다. 2004년 쓰촨 성 여행 총수입은 566.23억 원을 기록해 전국 성 GDP의 8.6%를 차지했다. 사천은 북경, 상해, 광주에 이어 4번째로 72시간 무비자 국경통과 도시이면서, 25개 국내외 직항 항공편이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다. 2013년 방문객은 약 210만명이며 이중 한국인 방문객은 약 12만명으로 전년대비 6천명 증가하는 등 한국인 여행객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쓰촨에는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5곳의 문화유산이 있다.(아래 표 참조), 연합국에서 포함시킨 잉여생물권계획으로는 자연보호구 4곳, 국가4A급 여행경구 17곳, 국가급풍경명승구 15곳, 국가급자연보호구 17곳, 국가급산림공원 25곳, 세계 지질공원 1곳, 국가급지질공원 8곳,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62곳, 중국역사문화명성 7자리, 중국우수여행지시 10자리가 있다. 중국 내에서 쓰촨이 보유한 여행자원의 순위는 높으나, 2004년 쓰촨성 여행 총수입은 전국 9위에 그쳐 쓰촨이 가진 풍부한 자원과 견주지 못한 서열을 기록했다. 쓰촨성은 관광객을 늘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사천은 역사적으로 "풍요의 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현재 중국의 주요 농업 기반 중 하나이다. 1999년에 쌀과 밀을 포함한 곡물의 생산량이 중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상업 작물로는 귤, 사탕수수, 고구마, 복숭아, 포도 등이 있다. 사천은 또한 중국에서 돼지고기 생산량이 가장 많고 누에고치 생산량은 2위를 차지했다(1999). 사천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 132가지가 넘는 지하 자원이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중 바나듐, 티타늄, 리튬을 포함한 11가지는 중국 제1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쓰촨 지역에서만 중국 전체 철 생산량의 13.3%, 티타늄 생산량의 93%, 바나듐 생산량의 69%, 코발트 생산량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사천은 중국의 주요 공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중공업 부문으로는 석탄, 에너지, 철강이 있고 경공업 부문으로는 건자재, 목재 가공, 식품과 비단 가공이 있다. 청두와 몐양은 직물과 전자 제품 생산의 중심지이다. 더양, 판즈화, 이빈은 각각 기계, 야금, 포도주의 중심지이다. 2000년에 중국 전체 포도주 생산량의 21.9%가 쓰촨에서 생산되었다. 전자, 정보산업(소프트웨어), 기계, 야금(자동차를 포함), 수력 전기, 제약, 식품, 음료 산업의 국내외 투자의 장려에 의해 사천은 현대 최첨단 산업 기반으로의 커다란 진전이 있었 자동차 산업은 쓰촨 성 기계 산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자동차 제조 회사의 대부분은 청두, 몐양, 난충과 루저우에 위치한다. 사천 다른 중요한 산업으로 우주 항공 산업과 방위 산업을 포함한다. 수많은 중국의 로켓과 위성들이 시창 시에 위치한 시창 위성발사센터에서 진수되었다. 사천의 아름다운 풍경과 풍부한 역사적 유적들은 성을 또한 관광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싼샤 댐이 쓰촨 분지의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호북 성 주변의 창 강에 건설되었다. 이 계획은 대체 에너지 자원을 향해 이동하고 공업과 상업 기반을 더 개발하려 노력하는 일부로부터 환영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침수 지역 주민들의 이주와 고고학 유적들의 손실, 생태학적 피해와 같은 잠재적인 해로운 효과들을 비판했다. 사천 성의 2008년 명목 GDP는 1조 2500억 위안(1830억 달러)였고 1인당 GDP는 15378위안(2252달러)이었다. 2008년 도시민의 1인당 순이익은 4121위안(603달러)으로 2007년에 비해 16.2% 증가하였다. 도시민의 1인당 가처분소득은 평균 12633위안(1850달러)으로 2007년에 비해 13.8% 증가하였다. 사천 상업국에 따르면 2008년 성의 총 외국무역액은 220억 4천만 달러로 53.3% 증가하였다. 수출은 131억 달러로 52.3% 증가했고 수입은 89억 3천만 달러로 54.7% 증가했다. 이러한 성과는 중국의 외국 무역 정책의 변화, 위안화의 절상, 상업적인 유인책의 증가와 생산 비용의 증가 덕분이다. 18개의 도시들과 현들은 꾸준한 비율로 증가하는 것으로 보였다. 청두, 쑤이닝, 난충, 다저우, 아바, 량산이 40% 이상 증가한 반면에 러산, 네이장, 루저우, 메이산, 쯔양, 이빈은 20% 이상 증가했다. 쯔궁, 판즈화, 광안, 바중, 간쯔의 외국 무역액은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2007년 12월 말에 쓰촨 성 정부는 최저임금을 12.5% 올렸다. 월평균 최저임금은 400위안에서 450위안으로 올랐고 시간제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4.9위안이 되었다. 정부는 또한 4단계의 최저임금을 3단계로 줄였다. 최고 등급의 최저임금은 월 650위안, 시간당 7.1위안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법은 각 성들이 최저임금을 독자적으로 정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으나 최저한계선은 월 450위안이다. 2004년 사천 성의 총인구는 8724.6 만 명에 도달했다. 사천 지역의 인구 절대다수는 한족(95%)이고 소수 민족이 인구의 5%를 차지한다. 소수 민족의 인구수는 415 만 명에 달하고 전국의 제 8위를 차지한다. 그중 인구수가 많은 소수민족을 순서대로 비교해보면 이족(212만), 티베트족(127만), 강족(30만), 묘족(15만), 회족(11만) 순서이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1000만 가량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 쓰촨에는 쓰촨분지의 지리적인 요소의 영향으로 분지의식이 존재한다. 쓰촨 문화는 그 외 지방문화와는 다르다. 쓰촨 사람의 방언을 쓰촨어 라고 부른다. 그 언어는 관화방언에 속한다. 대량의 발음은 보통어와 비슷하다. 그러나 말투의 기본은 같지 않다. 쓰촨방언은 조금 특별한 어휘를 가지고 있다. 한어방언에 비추어 볼 때 쓰촨 방언은 5개의 방언조각을 포함한다. 성유조각(성도와 중경지방), 관적조각(관현지방), 검북조각(귀주), 곤귀조각(귀주지방)과 월북조각(광동지방)이 이에 해당한다. 4가지 조각은 관화방언, 서남관화에 이고, 월북조각(광동성)에 속하는 객가어가 있다. 그중 성유조각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성유조각의 고대 중국어 4성 발음이 지금의 제2성으로 귀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쓰촨 성은 도교 문화가 발달했다. 동한(東漢)의 순제(順帝) 원년(元年; 142년), 장릉(張陵)이 노자를 교주로 삼아 "태상노군(太上老君)" 이라 칭하고,‘도덕경(道德經)’을 기본경전 으로 하여 청두시(成都市) 대바현(大邑縣) 학명산(鶴鳴山)에서 도교를 창시했다. 장릉(張陵)을 가리켜 “장도릉(張道陵)” 또는 “장천사(張天師)”라고도 했으며, 도교는 초기에 “천사도(天師道)” 또는 “오두미교(五鬥米道)”라 불렸다. 불교가 사천 분지로 유입한 초기 연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지방지(地方志)의 기록으로는 한대 고사(古寺)시기로 추정하여 동한(東漢)시대에 이미 불교가 사천 에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동보(東晉) 애상(哀帝) 성녕(興寧) 3년(원년 365년)에 중원(中原)에서 온 법화(法和)라 하는 한 승려가 사천 에 와서 불교의 발전을 위해 기초를 닦는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쓰촨 서부 지역의 장족집거구(藏族聚居區) 에서는 토착화된 불교인 라마불교를 믿는다. 대부분의 주민이 한족이며 티베트족, 이족, 창족, 나시족 등 소수 민족도 거주한다. 기관 기관에는 다음 뜻이 있다. 날개 (동음이의) 날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폐포 (수학) 수학에서, 어떤 집합의 그 위의 관계에 대한 닫힘()은 그 집합의 원소와 관계가 있는 원소가 항상 그 집합에 속한다는 성질이다. 어떤 집합의 어떤 성질에 대한 폐포(閉包, )는 그 집합을 포함하면서 그 성질을 만족시키는 가장 작은 대상이다. 여기서 다루는 성질은 보통 닫힘 성질이다. 폐포의 기호는 formula_1 또는 formula_2. 다음이 주어졌다고 하자. 만약 formula_3의 부분 집합 formula_18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19가 formula_20에 대하여 닫혀있다()고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위 조건을 만족시키는, formula_4 위의 'formula_5항 관계'의 집합 formula_27가 주어졌을 때, formula_18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면, formula_27에 대하여 닫혀있다()고 한다. 다음이 주어졌다고 하자. formula_3의 부분 집합 formula_18의 formula_40에 대한 폐포 formula_41는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집합이다. 폐포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존재한다면 유일하다. formula_40가 어떤 관계(또는 관계 집합)에 대하여 닫혀있는지를 나타내는 성질일 경우, 폐포는 반드시 존재하며, formula_19에 formula_19의 원소와 관계 있는 원소들을 추가하고, 이렇게 얻은 집합의 원소들과 관계 있는 원소들을 추가하는 과정을 계속하여 얻는다. 위상 공간 formula_48의 부분 집합 formula_49가 다음 formula_50항 관계 formula_20에 대하여 닫혀있다면, formula_48의 닫힌집합이라고 한다. 임의의 formula_53에 대하여, 여기서 formula_55는 극한점의 집합의 기호이다. 즉 닫힌집합은 극한점을 취하는 행위에 대하여 닫혀있는 부분 집합이다. formula_48의 부분 집합 formula_49에 대하여, 최소 닫힌집합 formula_58를 formula_59의 폐포라고 한다. 비슷하게, 점렬 닫힌집합과 점렬 폐포를 정의할 수 있다. 점렬 닫힌집합은 다음과 같은, 점렬 극한을 취하는 formula_60항 관계 formula_20에 대하여 닫혀있는 부분 집합이다. 임의의 formula_62에 대하여, 군 formula_64의 부분 집합 formula_65가 군의 연산 집합 formula_66에 대하여 닫혀있다면, formula_64의 부분군이라고 한다. formula_68에 대하여, 최소 부분군 formula_69를 formula_3로 생성되는 군이라고 한다. 대수적으로 닫힌 체 formula_71의 부분체 formula_72이 formula_71 속에서 formula_74 위의 다항식의 근을 구하는 행위에 대하여 닫혀있다면, formula_74 역시 대수적으로 닫힌 체이다. 부분체 formula_72의 대수적 폐포 formula_77는 최소 대수적으로 닫힌 체 formula_78이다. formula_74이 formula_71의 부분체라는 제한을 없앨 경우, 대수적 폐포는 유일하지 않으며, 대신 동형 아래 유일하다. 집합 formula_48가 (모든 집합의 모임 formula_82 위의) 원소 관계 formula_83에 대하여 닫혀있다면, 추이적 집합이라고 한다. 집합 formula_48에 대하여, 최소 추이적 집합 formula_85를 formula_48의 추이적 폐포라고 한다. 집합 formula_3 위의 이항 관계 formula_88가 formula_89 위의 일항 관계 formula_90에 대하여 닫혀있다면, 즉, formula_91이라면, 반사 관계라고 한다. 이항 관계 formula_88에 대하여, 최소 반사 관계 formula_93를 formula_20의 반사 폐포라고 한다. 비슷하게, 대칭 관계 · 대칭 폐포 · 추이적 관계 · 추이적 폐포 · 동치 관계 · 동치 폐포를 정의할 수 있다. 폐포 (위상수학) 위상수학에서, 어떤 위상 공간의 부분 집합의 폐포(閉包, )는 그 집합을 포함하는 가장 작은 닫힌집합이다. 그 집합에 속하는 점과 그 집합의 극한점으로 구성된다. 위상 공간의 부분 집합 formula_1의 폐포는 formula_2 또는 formula_3와 같이 표기한다. 서로 다른 위상에서 정의되는 서로 다른 폐포를 구별하기 위해 아래 첨자를 덧붙여 formula_4와 같이 쓸 수도 있다. 만약 예를 들어 거리 함수 formula_5에 의해 유도된 위상이라면, 대신 formula_5를 첨자로 써도 된다. 위상 공간 formula_7의 부분 집합 formula_8의 폐포점(閉包點, )은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점 formula_9이다. 위상 공간 formula_7의 부분 집합 formula_8의 폐포 formula_15는 formula_1의 모든 폐포점의 집합이다. 다음과 같은 성질들이 성립한다. 폐포를 취하는 연산은 유한 합집합을 보존하지만, 무한 합집합이나 교집합을 보존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표준적인 위상인 순서 위상을 갖춘 실수선 formula_37 위에서 다음과 같은 집합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다. 닫힘 닫힘 또는 닫힌 또는 닫혀있다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갖는다. 내부 (위상수학) 위상수학에서, 내부(內部, )는 원래의 집합에서 경계를 제외하여 얻는 집합이다. formula_1의 내부의 기호는 formula_2 또는 formula_3이다. 위상 공간 formula_4의 부분 집합 formula_5의 내부 formula_6는 formula_1를 근방으로 하는 점들로 구성된 집합이다. 즉, 다음 조건을 만족시키는 점 formula_8들의 집합이다. 내부의 원소를 내부점(內部點, )이라고 한다. 위상 공간 formula_4의 부분 집합 formula_5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반대로 formula_2는 formula_1의 모든 열린부분집합의 합집합이며, 또한 formula_1의 최대 열린부분집합이다. 내부와 폐포의 포함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내부와 폐포는 쌍대 개념이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위상 공간은 그 어떤 부분 집합의 내부와 경계와 외부로 분할할 수 있다. 내부는 유한 교집합을 보존한다. 그러나 무한 교집합 · 유한 합집합 · 무한 합집합은 보존하지 않으며, 이러한 연산과의 관계식은 다음과 같다. 위상 공간 formula_25의 기저 formula_26가 주어졌을 때, 부분 집합 formula_5 및 점 formula_8에 대하여, 다음 조건들이 서로 동치이다. 즉, formula_2는 formula_1에 포함되는 기저 원소들의 합집합이다. 실수선 formula_34의 표준적인 위상은 순서 위상이며, 이는 모든 열린구간을 기저로 한다. 이 경우 내부를 취하는 연산이 무한 교집합을 보존하지 않는 예를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또한 내부를 취하는 연산이 합집합을 보존하지 않는 한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외부 (위상수학) 외부는 한 집합 formula_1의 formula_1와 만나지 않는 모든 열린 집합의 합집합이다. 한 집합의 외부는 그 집합과 만나지 않는 가장 큰 열린 집합이다. 두 집합이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두 집합이 겹치는 부분이 없다는 뜻이다. 즉 두 집합의 교집합이 공집합이라는 뜻이다. 집합 formula_1의 외부는 formula_4 또는 formula_5로 나타낸다. formula_6가 위상 공간이고 formula_7일 때, formula_1의 외부 formula_4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량강도 폭발 사고 량강도 폭발 사고(兩江道 爆發 事故) 또는 김형직군 폭발 사고(金亨稷郡 爆發 事故)는 2004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김형직군 월탄리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를 말한다. 3.5km ~ 4km 정도의 먼지구름이 발생했으며, 이 구름이 미국의 군사위성에 의해 촬영되었다고 하나, 진위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보통의 구름을 오인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9월 13일 백남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은 이것이 수력발전소를 위한 댐 건설중에 벌어진 사고라고 발표했다. 이튿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사전통보가 없었다며 사실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대한민국과 미국의 언론은 핵무기 실험 또는 북한의 반정부 단체와 관련된 폭발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대한민국의 인공위성인 아리랑 1호가 폭발 현장의 인근 지대를 촬영했으나, 별다른 폭파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는 뚜렷한 분석이 나오지 않았다. 9월 15일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북조선의 해명이 미국 정부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했다. 또한 평양 주재 각국 외교관들의 현장 사찰 후, 폭발의 크기가 과장되었으며, 위치도 처음 대한민국과 미국이 추정하였던 위치와는 떨어진 거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개봉한 미국 영화 에너미 라인스 2 - 악의 축에서, 2004년 북한 량강도의 대형 폭발사고로 인한 버섯 구름의 생성은, 미국 네이비 씰과 한국 특수부대 요원들이 지하 사일로에 저장되어 있던 북한의 3단 토폴급 ICBM 핵미사일을 비밀리에 폭파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픽션으로 토폴 미사일은 러시아제 ICBM으로서, 과 이 있는데, 이 중 지하 사일로 방식은 토폴-M이다. 토폴-M은 사거리 11,000 km인 고체 추진 3단 로켓의 핵미사일이다. 550킬로톤급의 핵미사일을 탑재한다. 나가사키 시에 투하된 팻 맨 핵폭탄(20Kt)의 27.5배 위력이다. 경계 (위상수학) 일반위상수학에서 위상 공간 formula_1 의 한 부분집합 formula_2의 경계(境界, )란 E의 가장자리를 둘러싸는 테두리를 말한다. 위상 공간 formula_1의 부분공간 formula_4의 경계 formula_5는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점 formula_6들의 집합이다. 경계는 다음과 같이 폐포 연산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formula_12은 폐포, formula_13는 내부를 의미한다. 경계와 집합 연산 (합집합과 교집합)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있다. 장정진 장정진(1953년 1월 24일 ~ 2004년 10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 역으로 유명하다. 2004년 9월 13일 KBS 2TV의 프로그램 《일요일은 101%》 〈골목의 제왕〉 코너를 녹화하면서 가래떡을 먹는 도중 질식, 저산소성 뇌경색으로 뇌사상태가 되었다가 10월 11일 오후 6시 23분경에 다발성 장기 부전에 의한 심정지로 별세하였다(향년 51세). 결국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일요일은 101%는 폐지되었으며, 2004년 11월 7일부터 해피선데이가 방영되었다. 장례는 서울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에서 KBS 성우극회장으로 치뤄졌으며 성우 김환진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충청남도 천안시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본인(장정진)의 사고 이후 KBS가 가학적 프로그램을 대거 폐지했으며 MBC도 몸으로 게임을 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대단한 도전 코너를 없애는 등 위험 요소가 있는 코너들이 많이 사라졌다.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National Security Act)은 194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제국의 치안유지법을 기반으로 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또 과거 일제강점기의 보안법도 합병을 한 듯 보인다. 준말로 국보법(國保法)이라고도 한다. 특히 박정희 등에 의한 5.16 군사정변 직후 만들어진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법률 제6조의 내용이 제6차 개정에서 국가보안법에 흡수된 반공법으로 이어지면서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는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는 비판이 있다. 1993년부터 2002년 8월 31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 2891명 중에 경찰청 소속의 보안수사대에서 2355명을 구속한 가운데 2008년부터 2017년 7월까지 경찰 531명, 국가정보원 187명, 군 검찰 등 기타 23명, 기무사 8명으로 10년간 739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이 중에서 간첩, 반국가단체 구성, 반국가목적행위 등 3대 안보 위해사범은 10년동안 56명, 이적단체 구성죄와 찬양고무죄는 543명이다, 이렇게 입건된 피의자는 법원의 1심에서 전체 701명 가운데 136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집행유예 357명, 무죄 122명, 기타 84명이다. 같은 기간 124명이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 77명, 재심청구 취하 13명, 재심청구 기각 12명, 자유형 확정 2명, 기타 19명이다. 한편, 수원지방법원 김도요 판사는 2017년 8월 4일 7차례에 걸친 헌법재판소 위헌법률 심판에서 '합헌'으로 판결받은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찬양고무죄 등과 제5항 이적 표현물 반포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여 8번째 위헌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 2018년 3월 29일에 국가보안법 제14조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종국 결정을 하면서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가운데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한 자’에 관한 부분 및 ‘제7조 제5항 가운데 제1항 중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소지·반포한 자’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심판대상조항 중 ‘찬양·고무·선전’ 및 ‘반포’ 부분은 전원일치로, ‘소지’ 부분은 4(합헌):5(이진성, 김이수, 강일원, 이선애, 유남석 위헌 판단)으로, ‘동조’ 부분은 8(합헌):1(김이수 위헌 판단)으로 합헌 결정을 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하는 등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각종의 행위를 처벌할 목적으로 12월 1일에 법률 10호로 제정하여 당일 시행하였다. 1949년 12월 19일에 건국사업을 적극 방해하고 있는 좌익공산분자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국가를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대음모죄에 대하여 사형 또는 무기형을 과할 수 있도록 하여 법의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50년 1월 9일에 시행했다. 1950년 4월 21일에 형사절차 규정 중에서 단기 4년이하의 사건은 1인의 판사가 심판할 수 있게, 구류갱신은 각 심급마다 2회 초과할 수 없게, 보도구금과 형의 집행이 경합되는 경우, 2년을 초과하는 자유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는 그 형만을 집행하고 2년이하의 자유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는 보도구금의 집행을 먼저 하고 그 집행을 종료한 때에는 형의 집행을 면제하게 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50년 5월 12일에 시행하였다. 1953년, 대한민국 최초의 형법 제정에 참여했던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형법 개정 이후 국회에 나와 "국가보안법 주요 내용 대부분이 새 형법에 담겼으므로 국가보안법은 폐지해도 된다"며 권고했으나 의원 중 한 사람의 "지금은 전시이니 유명무실한 대로 그냥 두는 것도 무방하지 않으냐"는 의견에 따라 유지된다. 1958년 12월 24일의 2·4파동으로 인하여 논란이 있은 끝에 1958년 12월 26일에 북의 전쟁에 의하지 아니한 침략을 의미하는 위장평화통일 공작을 주임무로 하는 간첩과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범죄를 충분히 단속할 수 있는 법조항이 결여되어 국헌문란행위와 같은 중대한 범죄를 방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권옹호에도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북의 흉계를 철저히 분쇄하거 인권옹호에도 만전을 기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59년 1월 16일에 시행하였다. 1960년 1월 10일에 선량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규정과 형법, 국방경비법, 해양경비법 등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삭제하고, 파괴활동을 일삼는 공산분자들만을 단속규정함으써 선량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당일 시행하였다. 1962년 9월 24일에 미전향자에 의한 반국가적 범죄가 반복되고 있어 그러한 반복적인 범행에 대하여는 최고를 사형으로 하여 재범을 미연에 방지하고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62년 10월 25일에 시행하였다. 1980년 12월 31일에 반공법과 그 성격이 유사하고 중복된 조문이 많아 반공법을 폐지하여 통합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을 침해하는 범죄의 처벌·예방에 일원화를 기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당일 시행하였다. 1987년 12월 4일에 군법회의법 개정에 의하여 군법 적용 대상자에 대하여 군법회의를 군사법원으로 변경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88년 2월 25일에 시행하였다. 1990년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축소적용'하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한정 합헌 판결을 했다.(헌법재판소 89헌가113) 1991년 5월 31일에 「국가보안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성립하고, 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등의 구성요건에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 결정취지를 반영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와 불고지죄의 성립범위를 반국가단체 구성, 목적수행, 자진지원 등의 죄에 한하여 인정하여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입법목적과 규제대상을 구체화하고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과의 적용한계를 명백히 하면서 처벌대상을 축소함으로써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른 대북정책의 효율적인 추진을 적극 뒷받침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당일 시행하였다. 1992년 4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위반 사범에 대한 "구속기간 연장이 지나치게 인권을 제약한다"고 하여 위헌결정을 하여 동 규정을 무효로 했다.(헌법재판소 90헌마82) 1994년 1월 5일에 군사법원법 개정으로 군사법원 관할관을 군 판사, 군사법원 검찰관을 군 검찰부 검찰관으로 반영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94년 7월 1일에 시행하였다. 1997년 7월 14일에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라 벌칙 조항에서 '년(회)이상'을 '년(회) 이상'으로 변경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97년 1월 13일에 시행하였다. 1997년 12월 13일에 타법 개정으로 제17조 "노동쟁의조정법 제9조"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제39조"로 반영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1998년 1월 1일 시행하였다. 2011년 9월 15일에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법률에 개정에 의하여 공상군경 또는 순직군경의 유족으로 보아 보상할 수 있다는 보상 범위에서 「보훈보상대상자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재해부상군경 또는 재해사망군경의 유족을 추가할 목적으로 개정하여 2012년 7월 1일 시행하였다. 2016년 1월 6일에 제25조에서 군 검찰부 검찰관을 군 검찰부 검사로 개정하여 2017년 7월 7일에 시행하였다. 입건 현황 1980년에서 1986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보안사 광주분실, 보안사 서빙고분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 서울시경 옥인동 분실, 서울시경 홍제동 분실, 서울시경 장안동 분실, 부산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된 신귀영, 석달윤, 박동운, 나진, 송기복, 함주명, 박박, 오주석, 양동화, 황대권, 김성만, 김양기 등 12명에 대해 44일에서 117일을 불법 구금하였다. 1995년에 반국가단체, 이적단체 구성 등으로 구속 184명 불구속 19명 이첩 3명,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찬양.고무 등으로 구속 53명 불구속 11명 이첩 7명. 회합.통신 등으로 구속 6명, 불구속 1명, 이첩 1명 1996년에 반국가단체 구성 등으로 구속 180명 불구속 20명 이첩 9명,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찬양.고무 등으로 구속 121명 불구속 18명 이첩 6명, 회합.통신 등으로 구속 6명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18년 7월까지 12명 입건하여 2명 기소, 11월말까지 4건 5명 기소하였다.(서울중앙지검에서 2건 3명, 수원지검과 의정부지검에서 각 1건 당 1명씩 기소) 2018년에 총원 20명 입건하여 4명을 구속하고 기소 6명, 불기소 5명 미제 9명이다. 2015년에 1심 선고 피고인 전체 58명 중 무죄 11명, 실형 12명 2016년에 56명 중에 무죄 5명, 실형 21명이었던 것이 2017년에는 66명 중에서 무죄 19명 실형 10명으로 무죄선고율이 증가하고 실형선고율은 감소했다. 이에 대해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2016년에 비해 2017년 우리 사회의 개방성이 확대된 추세와 관련해 볼 수 있다"는 분석을 하면서 “국가보안법 사건의 대부분이 ‘이적성’ 문제인데, 이에 대한 판단은 사회 전체의 개방성과 관련있다 경직돼있던 사회 분위기가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까지 정권이 교체되는 등의 과정에서 개방적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판사들이 조금 더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게 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존립이나 안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선전,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한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법으로 이적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적단체로 인정된 후에 이러한 단체에 가입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진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사항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국가보안법 제2장 제7조 1,3,4항) 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결하기 전에 가입한 회원은 뚜렷하게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처벌할 수 없으며 이적단체로 인식되더라도 바로 단체를 강제해산시킬 수는 없다. 일례로 범민련과 한총련은 1997년 판결 이후로도 계속 활동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범죄단체의 해산 등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이적단체 해산법'을 입법 발의하여 국가보안법에 따라 반국가단체로 판결을 받은 단체들에 대해서는 해산을 시킬 수 있도록 하고, 대체 조직의 설립도 금지하도록 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어 2014년 현재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1년 넘게 계류하고 있다. 대검찰청은 1974년부터 1994년까지 전국 각급 법원에서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인정한 도서 등을 수록하여 ‘판례상 인정된 이적표현물’이라는 제목으로 공안자료집 제4권(1974년~1987년) 제8권(1988년~1989년) 제14권(1990년~1991년) 제18권(1992년~1994년 10월)을 발간했다. 앞선 네 권의 공안자료집을 종합·정리하고 1995년까지 인정된 이적표현물을 추가하여 1996년 6월에 발간한 공안자료집 제20권에는 맑스와 엥겔스의 <자본>, <공산당선언>,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E. H. 카의 <러시아 혁명>,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전태일 평전>, 조영래 변호사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송건호 등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김지하의 시집 <오적>, 권운상의 소설 <녹슬은 해방구>,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가족의 기원>, <가치법칙과 역사적 유물론>, <가버린 부르조아 세계>(이상화), <간부 수련회 자료집>(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 연합회), <갑오농민전쟁>(박태원), <강의 노동자의 경제학>,<강좌철학>(윤영만), <강좌 혁명전통>, <강철서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오스트 로프스키), <개발과 저개발>(지오 프리케이), <개발과 혁명>(정근식), <껍데기를 벗고서>(백기완, 리영희 공저), <게오르그 루카치>, <경대문화 88년 여름호>, <경제사 입문>(김준호), <경제 사전>(이성과 현실), <경제사 총론> 등 도서 1072종, 유인물 1584종, 기타 121종 등 모두 2777종이 수록되어 있다. 1968년부터 1990년까지 사형이 확정된 593명 가운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3명, 반공법 위반으로 29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254명이 사형집행되었다. 미합중국 국무부 장관이 "미국은 1993년도 국무부 인권보고서에서도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남용될 우려가 있음을 강조했다"며 "우리는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더이상 이같은 법이 필요없게 되길 바란다"고 말하는 등 일관되게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지적하였으며 199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은 더 심한 형법 규정이 있다"는 이유로 폐지보다 국가보안법 개정을 언급하였고, 국제사면위원회는 국가보안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11월 5일, 유엔 인권이사회는 "국가보안법 7조의 ‘반국가단체 찬양’ 조항이 처벌 대상행위가 불합리하게 넓어 유엔이 정한 표현의 자유에 관한 규약을 위반하고 있어 긴급히 개정해야 한다"며 "석방의 전제조건으로서 일부 보안법 위반자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준법서약제도는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고 하면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점진적으로 폐지돼야 한다"고 정부에 공식 권고했다. 2004년초 국가보안법 개정 또는 폐지를 지지하는 여론이 활발히 형성되었으며, 8월에는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하였다. 2004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보안법은 몇 개 조문의 개정으로는 근본적 문제점을 치유할 수 없고, 법률의 자의적 적용으로 인권을 침해해왔으며 법 규정 자체의 인권 침해 소지로 인해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켜온 만큼 전면 폐지하는 게 시대적 요구"라고 하면서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에 2004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은 MBC TV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하여,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면서 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애매한 규정이 악용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이 법률의 폐지·개정안을 논의하였으나 한나라당의 반대 의견으로 유보되었다. 이듬해 5월, 여·야의 국가보안법 폐지·개정안이 각각 상정되었으나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8년 5월에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막기 위한 개정을 권고하였고, 한국 정부는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국가보안법의 개정 또는 폐지 여부에 관해 국가적 컨센서스를 얻고자 계속 노력할 것'이라 답변하였으나 국가보안법 남용으로 인하여 국내,외에서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2011년 6월 프랭크 라 뤼 유엔 의사 및 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임기말인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제2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s for the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 NAP) 권고안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을 철회하면서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2012년 르 몽드는 한국의 우파 정부가 군사독재 정권이 이용해왔던 국가보안법을 좌파에 대해 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2년 6월 프랑스의 유명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박정근 사건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 조명했다. 두 면에 걸친 기획기사에서 리베라시옹은 박정근이 해학적인 의미로 친북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렸음에도 이를 농담이었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최대 6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좌익인사와 노동운동가, 통일운동가, 방북 인사를 공격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독립 연구기관 한국정책연구소 크리스틴 안 연구원의 말을 인용해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이 진보 좌파 공격에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과거 5000여명에 이르던 보안경찰이 2000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공안검사가 소외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미스터 국보법'으로 불린 황교안이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2013년 8월에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이석기 사건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분이기를 이용하여 2014년 21곳이던 일선 경찰서 보안과가 2015년 41곳으로 늘었고 2017년말까지 50곳을 더 늘리는 등 3년 새 70곳을 신설할 계획을 세우는 방법으로 국가보안법 보안 수사를 강화하였다. 황교안은 이후 2015년 6월에 국무총리, 2017년 3월에 대통령 탄핵과 함께 대통령 권한대행에 이르렀다.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헌법재판소장 박한철와 함께 국가보안법을 다루는 공안검사 출신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였다. 특히 민혁당 사건, 동아대 자주대오 등 다수의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변호를 했던 문재인은 황교안 총리 지명에 대해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했으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17대 국회에서 여야 간 의견이 모였는데 그때 못했던 것이 굉장히 아쉽다"면서 "찬양·고무 관련 조항인 국보법 7조는 악법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가 포함된 개혁안을 제시하고 "보안 수사 인력 조정 계획을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은 경찰청이 2017년 580명이던 경찰의 보안수사대 인력을 2018년 8월 기준 479명으로 줄이고 전국 보안경찰 인력도 10% 수준으로 감축하면서 전국 27개의 보안수사대 청사(분실)를 경찰청과 지방경찰청 청사로 이전토록 결정하면서 보안 인력을 일선 치안 현장에 배치하는 등의 개혁 조치를 취했으나 이에 대해 보수 진영에서는 안보 수사기관 무력화라고 비판하였다. 2012년 10월 김정일 생일축하 이메일과 북한 공작원에 편지를 전달한 사건에 대한 '찬양고무죄 VS 표현의 자유 그리고 그 한계'의 논란에서 대법원은 국보법 위반으로 최종 판결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씨가 쓴 편지는 비록 생일 축하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김정일 체제와 그가 제시·추진하는 통일 노선을 비롯한 정책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치켜세우고 이에 찬성해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써, 김씨가 이러한 편지를 작성·전송한 행위의 앞뒤로 상당히 오랫동안 북한 대남공작원인 장모씨와 관련된 국가보안법 위반(편의제공 및 회합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아래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제정된 다른 나라의 법률이다. 구체적인 법률 조항, 해석과 적용, 그리고 제정 배경이 다르므로 단순히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국가보안법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예를 들어 국가 안전이라는 비슷한 취지이나, 국가위원회가 폐지 권고를 낸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 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중에는 폐지되거나 사실상 사문화되었다고 보는 법률도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은 바이올린 독주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다. 협주곡의 형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바로크 시대부터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많은 작곡가들이 썼으며, 이중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멘델스존, 베토벤, 브루흐, 브람스, 비발디, 시벨리우스, 차이콥스키의 작품이 있다.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1835년 7월 10일 ~ 1880년 3월 31일)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비에니아프스키는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당시, 루블린주 루블린 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1847년에《Grand Caprice Fantastique》 작품번호 1을 출판했다. 총 24개 작품이 출판되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이사벨라 햄프턴과 약혼했지만, 이를 이사벨라의 부모가 반대하자 《Légende》 작품번호 17을 썼고, 그것으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아 1860년 결혼했다. 1860년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1872년까지 살았다. 그곳에 있는 Russian Musical Society에서 그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오케스트라와 현악 사중주 활동을 했다. 1872년부터 1874년까지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했다. 1875년에는 브뤼셀에 있는 콘소바토리에서 앙리 비외탕의 후임으로 바이올린 교수를 지냈다. 몇 해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콘서트를 몇 년간 가지지 못했다. 1879년 4월 오데사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갖고 이듬해에 사망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여겨지고 있다.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해서 그의 작품은 어려운 기교를 가지고 있어 바이올린 레퍼토리로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는 사후에 얻은 명성이 많다. 1952년과 1957년, 폴란드 우편 직인에는 그의 얼굴이 도안되었다. 1979년 주화된 100 즈워티 동전에는 그의 얼굴이 있다. 체코브카 강에 있는 한 도시에는 비에니아프스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흔히 ‘Russian bow grip’이라고 불리는 기법은 ‘Wieniawski bow grip’이 더 올바른 이름이다. 이는 비에니아프스키가 그의 학생들에게 악마의 트릴을 연주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지도했던 기법이기 때문이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콘서트 순회 중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그의 시신은 바르샤바의 포와즈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첫회의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콩쿨이 1935년 바르샤바에서 열렸고, 1952년부터 5년마다 국제 콩쿨이 열리고 있다. 앙리 비외탕 앙리 프랑수아 조제프 비외탕(, 1820년 2월 17일 ~ 1881년 6월 6일)은 벨기에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벨기에 바이올린 명수이며 작곡자로 통하는 비외탕은 1820년 2월 17일 벨기에의 베르비에르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친은 피아노 조율사이며 악기 제조사로 일하는 사람으로 대대적인 음악 집안이었다. 6세 때 관현악 반주로 출연하여 신동으로 이름을 올렸고, 당시의 유명한 바이올린 명수인 샤르를 드 베리오에게 인정을 받았다. 1828년부터 프랑스 파리의 여기저기에서 연주를 하며 명성을 얻었고, 이후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면서 유명 음악인 제히터에게 화성학과 대위법 등을 배웠으며, 라이하에게 사사하여 작곡을 배운 뒤 유명 작곡가가 되어 명성을 떨쳤다. 1846년부터 1852년까지 페테르부르크 궁정 전속 독주자 및 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하고 1871년부터 1873년까지 브뤼셀 음악원 교수를 역임했으며, 중풍이 오면서 활동을 그만두었다. 1881년 6월 6일,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바이올린 주자로서도 당시 최고의 명성을 차지하고 있었던 비외탕의 작품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기교를 구사한 탁월한 가락과 음색이 풍려함이 그의 뚜렷한 특색이다. 7개의 협주곡과 소나타를 작곡했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한 3개의 카덴짜 등이 있다. 연개소문 연개소문(淵蓋蘇文, 미상 ~ 665년 5월)은 고구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일명 개금(蓋金)으로도 불린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사서와, 이를 토대로 재편집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에는 중국 당나라 고조(高祖)의 휘(諱) 이연(李淵)의 '연(淵)'자를 피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하였다. 일본의 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라고도 표기되어 있어, 한국의 고대 인명의 유추에 단서가 된다. 642년부터 664년까지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淵蓋蘇文은 실제로 '얼가솜/얼가소미'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얼' + '가소' + 받침 미음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가소' + 접사 '이'가 결합하여 '가쇠/개쇠'로 불린 것을 蓋金(개금)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淵을 '얼'로 불렀으리라는 것은 일본어 표기 伊梨柯須彌(이리카스미)를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文(글월 문)은 받침 미음으로 사용되었다. 연태조의 아들로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에 투항하여 당의 관직을 받은 연남생의 묘지명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 즉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관직을 세습했다고 되어 있다. 《당서》에는 막리지를 「당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원전이 된 《구당서》와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東部大人, 혹은 서부西部) 및 대대로를 지낸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자리를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반대가 심하여, 그 자신이 직접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애걸한 끝에 겨우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영류왕 14년(631년)에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을 때, 왕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장성 축조를 감독하도록 했다.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성품을 두려워하던 끝에 죽이려 모의했으나, 연개소문은 이것을 사전에 눈치를 채고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대신 1백여 명(《일본서기》는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명」)을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장(臧)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그의 쿠데타에 대해 도현신 작가는 《어메이징 한국사》(서해문집)에서 영류왕의 당나라에 대한 저자세 외교에 대한 반감이 원인인 사건으로 읽는다. 당나라 사신 진대덕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긴 사건을 기념하는 승전탑을 허물고,전사자의 유골을 모아 장례를 치뤄서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고구려군에 잡힌 수나라 군사들을 만나며 고구려의 실정을 조사하였음에도 항의하거나 추방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서 연개소문이 상징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옹립한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잃고,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당항성(唐港城)을 공격당했다.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러 왔을 때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로서 그를 영접하기도 했다(《삼국사기》 김유신전). 고구려 조정은 김춘추의 군사 요청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신라가 차지한 장수왕 시절의 옛 고구려 영토 반환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귀국하는 즉시 영토를 반환하겠다」는 거짓을 적은 편지를 보장왕에게 바치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보장왕 2년(643년) 3월에 연개소문은 당의 숙달(淑達) 등을 초청하고 《노자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고구려에 도교를 수입하여 불교 세력의 견제를 꾀했고, 평양에 새로 용언성(龍堰城)을 쌓았다. 이 무렵 당에서는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에 대해 '신하로서 왕을 시해한 죄'를 물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칠 계획을 모의하고 있었지만, 당 태종은 일단 고구려에 대해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연개소문의 도사 파견 요청을 수락하는 한편 윤6월에 보장왕을 상국(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구려왕으로서의 지위 계승을 공인해주기도 했다. 한편 고구려에서 군사를 얻는데 실패한 신라는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당은 보장왕 3년(644년)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고구려에 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상리현장이 고구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해 두 개의 성을 차지한 상태였고(《삼국사기》) 보장왕의 명으로 소환된 그는 상리현장에게, 과거 수나라가 과거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노려 빼앗아간 고구려의 옛 영토 5백 리를 돌려줄 때까지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며 당의 요구를 거절했다. 보장왕 9년(650년) 6월,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책에 반대해오던 반룡사(盤龍寺)의 보덕이 고구려를 떠나 백제의 완산(完山) 땅의 고대산(孤大山)으로 망명하였다. 보장왕 13년(654년) 겨울 10월에 고구려에서는 안고(安固)를 보내 말갈 군사와 합세하여 당의 조종을 받던 거란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14년(655년) 2월부터 당 고종은 신라 김춘추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명분으로,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군 1천 명을 상대로 교전을 벌였고, 17년(658년) 여름 6월에 당의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 설인귀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다. 보장왕 19년(660년) 7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고, 고구려에서는 10월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당은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과 좌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 그리고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며, 가을 8월에는 평양 방면으로 진군한 소정방이 고구려군을 패강에서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수도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9월, 아들 연남생을 압록강에 보내어 요동 방면의 공격을 맡고 있던 글필하력의 군대를 막게 했지만, 글필하력은 얼어붙은 압록강 위를 걸어 고구려군을 공격해 3만 명의 고구려군이 전사하고 연남생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는 등의 참패를 겪었다. 하지만 글필하력은 직후 철륵족이 일으킨 반란으로, 부여 방면에서의 고구려 공격을 맡았던 소사업과 함께 철륵 진압에 투입된다. 이때의 전투에 관해 일본측 자료인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 12월의 기록에, 고구려군이 당군의 침공을 격퇴하여 당군의 보루를 빼앗고, 두 곳만 남겨둔 채 밤에 야습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군 병사들이 웅크려 우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다는 고구려측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김인문열전에도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군사와 말이 많이 죽거나 다쳤으며 군량을 조달받을 길도 끊어졌다(士馬多死傷, 糧道不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김인문은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당군에 있었고 그가 당으로 돌아갈 때에도 동행했으며, 661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군량을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동행). 보장왕 22년(662년) 봄 2월(《삼국사기》는 정월), 옥저 방면의 고구려 공격을 맡았던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백주자사(白州刺史)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강가에서 연개소문의 군대에 포위되어, 10만 명에 달하는 전군이 몰살당하고 방효태 자신도 13명의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사수 전투). 평양을 포위했던 소정방도 2월 6일에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수송해준 군량을 받고 폭설을 이유로 곧장 철수하였으며, 당의 고구려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고구려-당 전쟁 참조) 이후 연개소문은 666년에 사망하였다. 현존하는 연개소문의 기록인 《삼국사기》 천개소문(연개소문) 열전은 모두 《당서》의 내용을 편집한 것으로, 중국 측에 의해 변조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연개소문의 성씨는 원래 연(淵)이지만 《구당서》와 《신당서》가 당 고조의 휘를 피해서 천(泉)으로 그의 성을 표기한 이후 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후손이 천(泉)씨로 표기된 바 있다. 18세기 조선의 사학자 안정복은 저서 《동사강목》 고이편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고구려의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가 내항(來降)하였다."고 한 기록과 《통고(通攷)》에 "정토는 소문의 아우이다."라고 한 점을 들어 「천개소문」이 아닌 「연개소문」이며, 중국인들이 도연명(陶淵明)을 「천명(泉明)」으로 표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천(泉)자로 썼음을 밝혔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스스로 '물 속에서 태어났다'며 사람들을 현혹시켰다(自云生水中以惑衆)"고 하였는데, 이것은 『천남생묘지명』에서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본래 샘에서 나왔으니, 신께 의지해 복을 받았고 태어난 곳을 따라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遠系出於泉, 旣托神以隤祉, 遂因生以命族)"고 찬미조로 적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천남생묘지명』과 『천남산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로 모두 고구려에서 막리지를 역임하였으며, 묘지명은 그들의 임무를 중국 역사의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에 빗대어 찬미하고 있다. 형제로 이름이 확인된 것은 연정토(淵淨土)가 유일하며, 민간전설에서 연개소정이라는 연개소문의 여동생이라는 인물이 지켰다는 청석관(靑石關) 유적이 중국의 요령성 개주 시에 남아있다. 중국의 《당서》와 한국의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에게 연남생(淵男生)과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전하며, 연개소문 사후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연남생은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쫓겨 국내성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당으로 도망쳐 고구려 공격에 앞장서는 등,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고구려에 남아있던 연남산은 보장왕 27년(668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함락될 때 보장왕과 함께 항복했으며, 연남건은 평양성을 사수하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하여 성을 빼앗기고, 나당 연합군에게 붙잡혀 검주(黔州)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다. 연남생은 고구려 멸망 뒤 당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변국공(卞國公)을 제수받았고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현도군공(玄菟郡公)의 지위에 이르렀으며 의봉(儀鳳) 2년 677년 12월에 46세로 졸하였다. 연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의 벼슬을 받았으며 701년에 죽었다. 전통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왕을 죽이고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기울게 한 역신(逆臣)'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고구려와 적대했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사자인 중국에 의해 기록된 연개소문 관련 기록은 연개소문에 대해서 잔인하고 거만하며 흉폭했다는 단어를 써가며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유교적 입장에서 서술된 《당서》와 그것을 전재한 《삼국사기》의 천개소문전은 그가 "백여 명에 달하는 대신들을 죽이고, 대궐로 쳐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그 시체를 토막내어 시궁창에 버렸다", "귀족이나 무관을 엎드리게 한 후 말을 오르내렸다" 는 등 그의 교만하고 난폭한 모습들을 기술하였고, "바른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였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스스로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대역죄를 짓기에 이르렀다", "왕을 시해한 역적으로서 몸을 보전해 집에서 죽은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생김새는 웅위하였고 의기가 호방하였다(儀表雄偉意氣豪逸)"고 전하는 한편으로 송의 신종(神宗)과 왕개보의 문답 가운데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신종에게 “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왕안석의 발언을 들어 연개소문을 재사(才士)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다만 조선 초의 최보는 《동국통감》에서 이러한 왕개보와 김부식의 의론에 대해서 "춘추春秋의 대의를 모른 말"이라며 비판하였다). 일본측 자료인 《도지 가전(藤氏家傳)》에는 661년 백제 부흥 운동을 지휘하던 나카노오에(中大兄)의 입을 통해 「전해 들으니 대당(大唐)에는 위징, 고려(고구려)에는 개금(연개소문), 백제에는 선중(善仲, 성충), 신라에는 유순(有淳, 김유신)이 있어, 각기 그 나라를 맡아 이름을 만리까지 떨쳤으니 이는 모두가 그 땅의 준걸(俊傑)로서 지략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한다.」 고 말하는 기술이 있어(이것은 물론 《도지 가전》의 주인공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를 찬양하기 위한 수식의 하나이다), 《도지 가전》이 성립된 나라 시대까지 일본내에서 연개소문은 백제의 선중(성충)이나 신라의 유돈(김유신)은 물론,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명신(名臣)」으로 알려진 위징에까지 비견될 정도의 「준걸」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그가 원래 수나라의 비장이었던 양명(羊明)이라는 자의 환생으로, 《고려고기(高麗古記)》라는 책을 인용하여, 수(隋)가 고구려를 칠 때 군중에서 죽었던 양명이 죽기 전에 "고구려의 총신(寵臣)으로 환생하여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하고 죽었고, 맹세한 대로 환생한 것이 바로 연개소문으로, 당에서 도사들을 끌어들여 고구려 산천의 지맥을 약화시키고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개조하면서 천리장성과 같은 부역을 일으켜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일화를 적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정책적으로 도교를 수용하면서 불교를 상대적으로 멀리한 것에 대한 불교 세력의 왜곡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경향은 변하지 않았고, 드물게 "안시성 하나로 천하의 대병에 맞서낸"(홍식洪湜), "적수가 없는 효웅"(홍서봉) 등의 평가가 있을 뿐이었다. 유교 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 시대까지 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인물로 평가받던 연개소문의 평가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된 것은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20세기였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한국의 《강도지(江都誌)》(1932년)에는 연개소문이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전승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저술된 강화도 관련 향토지 6종을 모아 발간한 것인데, 강화도의 고려산 북쪽에 위치한 시루미산에서 연개소문이 태어났으며 시루봉 중턱에 연개소문이 살던 집터가 있었고, 연개소문이 말을 달렸다는 치마대(馳馬臺),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오련정(五蓮井) 등의 지명에 대한 전승이 《강도지》에는 수록되어 전한다. 1993년에 《강도지》의 내용에 근거하여 하점면 지석묘 앞의 고인돌 공원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지』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해당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당의 전기소설 가운데 하나인 《규염객전(虯髥客傳)》은 저자가 장설(張說) 혹은 두광정(杜光庭)이라는 설이 있는데, 당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당 태종의 군사 고문이자 《이위공문대》의 저자로도 알려진 이정(李靖)과 홍불녀(紅拂女) 그리고 규염객(虯髥客)이라는 사내, 세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작품은 《도장(道藏)》 공자(恭字)의 〈신선감우록(神仙感遇傳)〉과 송의 《태평광기(太平廣記)》권193, 명의 고원정(顧元慶)의 《고씨문방소설(顧氏文房小說)》, 루쉰(魯迅)의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전국 각지에 번진 세력이 할거하고 전국 각지에서 전란이 빈번했던 만당(晩唐)의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이 작품은 널리 퍼지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증보 내지 윤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명의 잡극 《규염옹(虯髥翁)》과 장봉익(張鳳翼)의 전기소설 《홍불기(紅拂記)》 등의 원작이 되었으며 중국의 소설가 김용은 《규염객전》을 '무협의 원형’이라고 평가하였다. 《규염객전》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수 말엽 장중견(張仲堅)이라는 사람의 수염이 규룡(虯龍)을 닮았다 해서 규염객이라 불렸는데, 웅대한 재주와 지략이 있었던 그는 수 말기의 혼란한 시대에 천하를 장악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홍불이란 기생을 이끌고 영석(靈石) 지방을 지나던 이정과 만나, 이정과 함께 태원(太原)에 갔다가 훗날 당 태종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세민을 만나게 되고, 그가 영주(英主)가 될 것을 알고는 천하를 차지할 계획을 단념하고 대신 자기의 집과 재산을 이정에게 주면서, “앞으로 10년 뒤에 동남쪽 수천 리 밖에서 이상한 일이 생길 것이니, 그때가 바로 내가 뜻을 이루는 때일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 뒤 정관(貞觀) 연간에 부여 땅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나라의 왕을 죽이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고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정은 그 사람이 다름아닌 규염객임을 알고, 홍불과 함께 동남쪽을 향하여 술을 뿌리며 축하하였다. 사람들은 이정이 지은 《이위공문대》 속의 병볍은 대부분 규염객이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전했다고 한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였던 이덕무와 홍대용은 소설 《규염객전》 속의 등장인물 규염객은 바로 연개소문이라고 지적하였는데, 20세기 초 단재 신채호는 이 《규염객전》과 함께 《갓쉰동전》이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한국의 고소설(古小說)을 서로 분석하여, 규염과 갓쉰동은 마찬가지로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이고, 연개소문이 젊어서 중국 대륙을 염탐했던 흔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갓쉰동전》의 주인공인 '갓쉰동'은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蓋蘇文)'을 중국 발음으로 '카이쑤원'이라고 읽는 것을 거꾸로 한국어로 음사하여 개(蓋)를 ‘갓’으로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은 것으로 《갓쉰동전》은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가지고 쓴 소설이라는 것이 단재의 주장이다. 《갓쉰동전》의 존재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재 신채호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베이징(北京)의 조양문 바깥 7리 지역을 비롯해 산하이관(山海關)부터 베이징까지 '황량대(謊糧臺)'라는 이름의 유적이 10여 곳이 남아 있는데, 현지에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군의 내습에 대비해 모래를 잔뜩 쌓아 군량창고처럼 보이게 해놓고 고구려군이 오면 공격하던 곳이라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 황량대가 베이징 근교까지 걸쳐 있는 것은 연개소문이 베이징까지 당 태종을 추격한 증거라고 단재 신채호는 주장하였다. 또한 요동 지역을 벗어나 산동이나 직예 등지에 '고려'라는 지명이 남아있으며, 베이징 정안문 바깥에 위치한 '고려영(高麗營)'이라고도 불리는 '고려진(高麗鎭)', 하북성 하간현 서북쪽 '고려성(高麗城)' 등의 지역을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점령했던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고려진'과 '고려영'이라는 행정구역명은 오늘날까지 베이징 북부 지역에 남아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國家情報院, , 약칭: 국정원, NIS)은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자재·시설 및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 「」 중 내란의 죄, 외환의 죄, 「」 중 반란의 죄, 암호 부정사용의 죄, 「」에 규정된 죄, 「」에 규정된 죄에 대한 수사, 국정원 직원의 직무와 관련된 범죄에 대한 수사, 정보 및 보안 업무의 기획·조정의 직무를 수행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1999년 1월 21일 국가안전기획부를 개편하여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원장은 장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차장은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으로 보한다. 국가정보원의 조직, 소재지, 직원 수 등의 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예산은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해, 본부 소재지는 언론을 통해 동 단위까지 공개되어 있다. 정보기관의 자세한 조직은 비밀이지만 언론에 공개되는 조직이 있는데, 장관급인 원장과 차관급인 차장 3인과 기획조정실장 등이다. 그 외에 차장보와 감찰실(또는 감사실)장도 대외에 공개된다. 주요 도(道)와 시(市)에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지부장과 본부의 국장은 1급 또는 2급공무원이다. 직원은 공개 요원(백색 요원)과 비공개 요원(흑색 요원)으로 구분된다. 일부 언론 또는 대외에 공개되는 직원은 단장급 이상이다. 실장은 차관보급 또는 1급이고 부실장과 국장은 1급, 단장과 심의관 및 부국장은 2급, 부단장과 과장은 3급, 팀장은 4급으로 보통 임명된다. 그러나 예하 시도지부는 급지에 따라서 지부장이 차관보 및 1급 또는 2급으로 임명되기 때문에 예하 기관의 국장, 부국장, 단장, 부단장, 과장 등은 급지에 따라 1계급 아래의 인사로 보직되기도 한다. 정보관과 정보원은 일부 공개요원 외에 대부분 비공개다. 언론에 알려진 1급 실국장급 조직은 해외조사실(1국), 국제정책실, 국정원장 비서실, 전략실, 국익전략실(7국), 국익정보국(8국), 대공정책실, 해외공작국, 대외협력보좌관실, 대북전략국 등이 있다. 7국은 국내정보분석, 8국은 국내정보수집을 맡았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7국과 8국을 부서폐지했다. 국 아래에 2급 단장이 여럿 있다. 국가정보원의 규모는 비공개이다. 2005년에는 예산 규모가 일부 공개됐는데, 국가정보원 이름의 예산과 다른 부서 항목으로 숨겨놓은 예산이 있었다. 당시 국가정보원 이름으로 된 예산은 7000억 원, 다른 부서 예산에 숨겨둔 은닉예산은 2000억 원이었다. 원장, 차장, 실장 등 공개된 직위에 있는 직원의 월급도 비공개이다. 1990년대 이후 국가정보원 현직자 혹은 국가정보원 퇴직자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낸 일부 여성은 남편을 상대로 재산분할, 월급공개, 위자료 등의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한 사례가 존재한다. 총수입·총지출 기준 2019년 재정 규모는 다음과 같다. 2007년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3년간의 조사를 거쳐 국가정보원이 관련된 과거 의혹 사건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주요 조사대상이었던 7대 의혹사건은 아래와 같다. 제2공화국 때의 정보 기관인 중앙정보위원회 등과의 연계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61년 봄부터 장면 총리는 십여 차례나 쿠데타 기도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 그래서 겨우 1961년 3월이 되어서야 또다른 정보기관인 시국 정화 운동 본부라는 직속 정보 기관이 설치 되었지만 별다른 역할은 못했다. 정보위와 시국정화단은 1961년 5월 20일 통폐합되어 중앙정보부로 발족된다. 그러나 관련이 없다는 반론도 있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면서 중앙정보연구위 조직을 인수하거나 참고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후락이) 정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장면 총리가) 옆에 놓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정보기능이 아니라 사적인 활동 수준이었다 ”는 것이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야당 정치인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도감청한 사건을 말한다. 2002년 10월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형근에 의해 폭로되었으며, 3년간의 수사 결과 2005년 8월 도감청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2003년 3월 11일, 당시 국가정보원 ㅈ 기획조정실장과 ㄱ 총무국장이 점심 식사를 위해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를 같이 빠져나갔는데 웬일인지 ㄱ 총무국장이 벌겋게 술에 취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전북 출신의 총무국장과 강원 출신의 기획조정실장 간의 갈등 끝에 총무국장이 기획조정실장의 출입을 막는 사태가 벌어졌다. ㄱ 국장은 대뜸 청사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ㄱ 방호과장에게 "기획조정실장 절대 들여보내지 마라. 출입 통제하라"라고 말한 뒤 차를 타고 사무실로 곧장 들어가버렸다. 총무국장은 국가정보원 살림을 책임지는 기획조정실장의 바로 아래 직급이다. 한참 뒤 저녁이 다 되어 술이 깬 총무국장은 다시 방호과장에게 기획조정실장이 돌아왔는지 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사정을 알아 보니 사태를 전해 들은 기획조정실장이 방호과장 눈을 피해 기획조정실장 차량이 아닌 다른 차량을 타고 청사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위 간부들이 근무시간 중에 음주를 하고 서로 암투를 벌인 것은 순식간에 외부로 유출되어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 같은 소문은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도 퍼져나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고 한다. 2009년 5월 국가정보원 수사국의 윤아무개 단장(2급)은 징계를 받았다.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제주 4·3 진압은 정부 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라고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감찰실은 이 발언을 '좌파적'이라고 몰았고, 원세훈 원장은 윤 단장을 대기발령시켰다. 윤 단장은 수사국에서도 손꼽히는 베테랑이었다. 국가정보원 직원들은 "간첩 조직 수사와 관련해서는 윤 단장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수사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황당한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그 이후 국가정보원에서는 '점심때 다른 직원들하고 밥도 먹지 말아야 하냐'는 푸념이 흘러나왔다"라고 했다. 대기발령을 받은 윤 단장은 결국 국가정보원을 떠났다. 수많은 간첩 조직을 수사해온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가 '좌파'로 몰려 쫓겨난 것이다. 2009년 9월 수사국에서 파트장(4급)을 맡고 있던 강 아무개 씨는 부하 직원의 보고 내용을 검토하던 중 '지난 좌파 정권 10년'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불법으로 세워진 정부도 아닌데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강씨는 "지난 정권 10년으로 문구를 바꾸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한 직원이 강씨의 발언을 감찰실에 전했고, 그는 결국 지역 출장소로 좌천됐다. 2009년 5월 수년간 일본 파견근무 중 한국인 여성과 간통한 모 직원의 간통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2009년 5월 29일 국가정보원 중간 간부인 이 아무개 씨는 징계위원회에 불려가 계급 '강등'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 직원은 반발했고 이에 원세훈 당시 원장은 해임으로 대응했다. 이 모 직원이 알고 지내던 한 여성이 '혼인빙자간음'으로 국가정보원에 민원을 넣었다. 사건은 외부로도 알려져 문제가 확산되었다. 국가정보원은 이씨가 일본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 이 여성에게 인터넷 등에 이미 공개되어 있던 일본 도쿄 총련 사무실 위치 등을 말한 것에 대해서 비밀누설죄까지 덮어씌웠다. 하지만 이 모 직원은 반발했고, 이에 원세훈 원장은 '강등'이 너무 가볍다며 징계위원회 재소집을 명령했다. 결국 이씨는 10여 일 뒤 2차 징계위원회에서 해임됐다. 2015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한 대검찰청 중수부장 이인규는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수사 중 '논두렁 시계' 이야기는 국가정보원이 여론몰이를 한 것이라고 밝혀서 논란이 되었다. 이 당시 국가정보원은 검찰에 고가의 시계를 사용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인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는 고가의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 등의 진술을 한적이 없으며, 그러한 언론보도는 국정원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 밝혔다. 당시 국정원의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말하였다.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국민장을 치루는 가운데 국정원은 고인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게시물을 인터넷에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 이후에도 국정원은 고인을 모욕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시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깍아내리는 여론 공작을 하였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재직 중 자신을 비판하는 직원에 대한 실시간 해고 조치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1년 9월 29일 국가정보원 5급 직원인 김 아무개는 술자리에서 원세훈 당시 원장을 폄훼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김모 사무관은 2010년 11월 국가정보원 직원 10여 명과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는 다른 직원들에게 한 말이 문제가 되었다. 김 행정사무관은 "원세훈 전 원장은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 할 때 똘마니 하다가 여기 와서 뭘 알겠냐"라는 말을 했다. 이때 국가정보원 내에서 '원 전 원장이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김 사무관의 이명박 똘마니 발언은 직원들과 현장에서 이를 들은 개인들을 통해 외부로 확산되었다. 국가정보원은 김씨의 발언을 문제 삼아 상관을 모욕했다며 징계위원회를 열어 해임 처분을 했다. 2011년 2월 16일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T-50 고등훈련기 등의 구입 협상을 위해 서울의 한 호텔에 묵던 중 숙소에 괴한이 침입한 사건이다. 당시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특사단의 숙소의 침입하여 노트북을 만지고 있는 것을 특사단 일원이 발견하고 서울남대문경찰서에 신고하였다. 그러나 괴한들은 조선일보의 보도로 국가정보원 직원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과 인도네시아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 및 T-50 수출 결렬 등의 우려가 나왔으며 국가정보원의 정보수집능력 부족 논란이 일었으나 인도네시아가 대한민국의 T-50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있다. 박원순 변호사는 2009년 6월 위클리경향 인터뷰에서 "국가정보원이 시민단체와 관계를 맺는 기업 임원까지 전부 조사해 시민단체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불법사찰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국가정보원은 "박 변호사가 허위 사실을 말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내기도 하였다. 이후 국가정보원이 특정 민간인에 대한 불법 사찰에 대한 의혹이 터져나오면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2013년에는 국가정보원이 광주광역시 지역의 대안학교 교직원을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정보원은 수사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인터넷 여론 조작을 통해 18대 대선에 불법으로 개입하였다는 의혹을 받았다. 현재 여러 사이트에 대한 여론 조작이 확인되고 이를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지시한 사실과 정치 개입목적의 여론 조작 지시와 여론 조작 활동을 2009년부터 이어온 사실이 확인되었고 원세훈 원장은 공직선거법 위반과 국가정보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2013년 2월에는 공익 목적으로 여직원 이하 직원들의 선거부정을 폭로한 국가정보원 김모 국장 등 3명의 직원을 파면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가정보원에서는 내부고발자로 지목된 인사들을 파면조치하였다. 국가정보원이 여직원의 선거개입 의혹을 제기한 내부고발자 직원 3명은 2월 20일 여직원 대선개입을 제보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였다. 이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2월 20일 논평을 내고 내부고발자로 지목된 인사들이 공익제보자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정권의 하수인이었음을 드러내는 처사로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은 이날 논평을 통해 "국가정보원의 명예와 신뢰를 실추시킨 직원을 비호하고, 공익신고자보호법 제7조 '공직자의 공익신고 의무' 조항에 의해 공익침해행위에 대한 신고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내부공익제보자들을 파면한 것은 동법 제15조 '불이익조치 등의 금지' 조항을 위반한 명백한 위법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국가정보원은 A씨와 B씨를 직무상 취득한 비밀 누설죄, 정치 관여 금지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였으며, B씨를 파면했다. 또한, 민주통합당은 '국가정보원법 등 위반' 혐의로 국정원 직원과 동조하여 글을 단 이 모 씨를 고발함에 따라 이 모 씨는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공익 제보자를 해고한 행위를 비판하였다. 2013년 2월 20일, 민주통합당은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고 제보한 직원을 파면한 것을 밝혀내고 이에 항의하였다. 국가정보원은 '2012년 총선 예비후보였던 국가정보원 전 직원 A씨가 현직 직원 B씨와 공모해 대북 심리전 부서의 조직과 편제, 인원, 담당 업무 등의 정보를 수집했고 이어 김 모 씨를 미행해 개인 거주지를 확인한 뒤 민주통합당에 제보했다'라고 밝혔다. 한편 파면된 B씨는 자신은 A씨에게 정보를 준 적이 없다며 소청심사를 신청하였다. 심지어 국정원 조직의 비리를 외부에 제보한 것이 아니라 국정원 예산을 횡령한 다른 직원을 국정원 내부에 제보했음에도 징계를 당한 경우도 있다. 국가정보원은 원세훈이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을 지시한 이후 안보 관련 신고자들을 초청해 안보교육 활동을 했다. 국가정보원은 대선 개입 논란이 제기된 후에도 2013년 5월 24일 국가정보원이 일간베스트 회원을 초청하여 안보강연을 강행했다. 2013년 10월 30일에는, 국정원이 한국외식업중앙회 전북지회에 압력을 넣어 전북지역의 식당 운영자들에 대한 위생교육에 탈북여성이 강사로 나서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교육을 강제로 받게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2년과 2013년에 불거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논란에 대해 국가정보원이 2013년 6월 20일 새누리당 소속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들에게 열람시킨 행위, 6월 24일 국가정보원은 회의록 전문을 국회 정보위원에게 제공한 행위에 대해 논란이 있다. 한편 새누리당 측에 2012년 대선 이전 국가 기밀상태에서 대화록을 유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발췌문과 대화록 전문은 2013년 6월 말에 공개되었다. 문건을 확인한 결과 발췌본은 원문과 다르게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을 낮추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높임말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있어 고의적인 왜곡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한편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대화록은 2008년 1월에 작성된 것인데, 당시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국가정보원의 국가기록물은 대한민국의 다른 국가기록물과 다르게 50년까지 이관하지 않을 수 있다. 이후에 이관하지 않으려면 국가기록원에 신청하여 심사를 받아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만든 기록물 중에는 50년이 경과한 기록물이 있지만 국가정보원은 국가기록원의 이관 요구도, 이관 연장 신청을 통한 심사도 거부하고 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퇴 논란과 혼외아들로 지목된 채군의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국정원 직원, 정보관(IO)이 개입된 의혹이 있다고 밝히는 수사가 진행중이다. 중국 정부가 2014년 2월 13일 국가정보원이 검찰을 통해 법원에 제출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관련 중국 공문서가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공식 확인하며 위조 경위에 대해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대검찰청이 감식한 결과 검찰측이 제출한 문서와 변호인단이 확보한 문서가 서로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검찰청은 검찰측이 제출한 문서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에 방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2014년 3월 5일 국정원 협조자의 4장의 유서에서 자신이 구해온 중국 측 1개의 문서(정황설명서에 대한 답변서)가 위조된 것이라고 밝히고 국정원을 원망하는 글을 남겼다. 사실상 국정원 측 증거 문서 3건 가운데 1건은 사실상 위조됐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또한 유서 내용 중 국정원의 큰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3월 14일 검찰 수사팀은 국정원 협조자에 대해 모해증거인멸죄·사문서위조행사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3월 15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유씨가 받고 있는 핵심 혐의인 간첩죄와 관련해 검찰이 재판부에 주요 증거로 제출했다 위조로 판명된 것인 만큼 국보법 무고·날조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3월 9일 서울시 간첩 사건 증거조작 사건 수사에서 국정원의 독촉에 가짜 영사 확인서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국정원 소속 영사는 "처음엔 확인서 작성을 거부했지만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본부의 거듭된 지시'로 어쩔 수 없이 가짜 확인서를 만들어 보내줬다"고 진술하였다. 수사팀은 영사를 사문서위조행사죄 등의 혐의로 입건하였다. 3월 12일 국정원 대공수사국 팀장이 가짜 ‘영사확인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되어 수사 중이다. 검찰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대공수사국장실은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이 제출해달라는 서류만 제출했다고 국정원은 밝혔다. 다른 문서와 나머지 문서 2건에 대한 사건도 확대대고 있으며, 따라서 국정원, 외교부, 법무부(검찰)의 관련자에 대한 강제 수사와 대 국정조사와 특검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2017년 10월 31일, 검찰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매년 국가정보원이 특수활동비 중 10억원을 청와대에게 건넸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하고 안봉근 전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비서관과 이재만 전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을 긴급체포하였다. 또한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전 국정원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안봉근, 이재만 전 비서관의 자택 등 10여곳을 압수수색했다. 2017년 11월 1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3부(양석조 부장검사)는 안봉근과 이재만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수수, 국고손실)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수사 결과 이들은 2013년부터 2016년 7월 무렵까지 이헌수 전 국가정보원 기조실장 등 고위 간부들로부터 매월 1억원가량씩, 총 40억원가량의 특수활동비를 수수하였으며, 2016년 초 4·13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가 비밀리에 실시한 여론조사 비용 5억원을 국가정보원에 대납하게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안봉근은 이와 별도로 이헌수 등으로부터 1천만원 이상의 돈을 별도로 받은 것이 파악되었다. 2017년 11월 2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이재만, 안봉근에게 전달된 돈은 특수활동비 중 특수공작사업비라고 밝혔다. 2017년 11월 3일 권순호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며 안봉근과 이재만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2018년 1월 3일 검찰은 최경환 전 의원을 대상으로 2014년 7월부터 2016년 1월까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별활동비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영장을 발부하였다. 2018년 1월 14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송경호 부장검사)는 김백준 전 대통령실 총무기획관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수수, 국고손실) 혐의로, 김진모 전 대통령실 민정2비서관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수수), 업무상횡령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2018년 2월 4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는 김진모를 구속기소했다. 김진모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 5천만원을 받아 장석명 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류충열 전 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 등을 거쳐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전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2월 5일에는 김백준을 구속기소했다. 검찰 수사 결과 김백준은 2008년 5월 경 부하 직원을 보내 청와대 근처 주차장에서 국가정보원 예산 담당관으로부터 현금 2억원이 든 여행용 캐리어 가방을 받는 등 4억원의 불법 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전두환 전두환(全斗煥, 1931년 3월 6일 (1931년 음력 1월 18일) - )은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60년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3일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 2,3,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하였으나, 활동 과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재직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7년 뒤인 1995년에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되었다. 사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이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만에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1931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규곤(1916년생), 기환(1929년생)과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선학(1925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그의 가계는 몰락한 양반으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권율의 명령을 어겼다며 처형당했고 이후 무관이 몇 명 배출됐지만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그리고 의리가 강해 전두환이 9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지냈다.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했다. 5세 되던 해 그의 가정은 합천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7세 되던 1937년에 희도소학교에 입학했다.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 때 소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하면서 10대 초반인 그는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낫토 배달,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 같은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부양하기도 했다. 생계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1941년 4월 다시 가족과 함께 남행열차를 타고 귀국하여 대구로 내려와 바로 희도국민학교에 복학하여 1944년 3월 25일 15세에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만주 망명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1년 늦게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생이 된 전두환은 권투를 시작했고 중학교 권투부 부원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갈 때마다 어깨에 권투장갑이 매달려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킬로미터 거리였지만 그는 왕복 20km의 길을 직접 걸어서 통학하였다. 키가 작았던 그는 중학생 당시 별명이 몽땅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그는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학교 동창이던 백순달은 그가 걸어서 다녔다고 하였다.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는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0년 2월 10일에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의 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형 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학하지 않았고, 중앙로의 병사구 사령부에 붙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시하였다. 2백명 선발에 2천 4백명이 몰렸는데 합격,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합격한 그는 1951년 진해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은 교번 152번으로 교육연대 2중대 2구대에 소속되었다. 육사 1학년 여름에 비상이 걸려 M1소총을 들고 완전 군장을 갖추고 24km를 구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체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이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장교의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판정되어 유급 조치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진해 육군대학에서(마진터널)을 거쳐 창원군 상남을 지나 큰 고개를 넘어 다시 진해로 돌아오는 60리의 구보였다. 몇몇 생도들이 쓰려졌다. 이때 전두환은 한손으로는 한 동료의 옆구리를 잡아 이끌고 또 한손으로는 그의 M1 소총과 (배낭)을 움켜쥐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는 미담을 퍼트리기도 했다. 성적은 하위였지만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축구부원이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축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1983년 5월 K리그 개막 경기에 직접 참관을 비롯하여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서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운동선수라는 이력과는 별개로 전두환은 싸움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전두환은 대구공업고등학교시절부터 대구 지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육사에서 동기인 노태우, 정호용 등과 만나 인맥관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친구이며 이는 군생활과 정계진출 내내 그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평생동안 친구로 지내게 된다. 한가지 특이사항이라면 전두환이 지나갔던 이력의 상당부분을 노태우가 따라갔고 심지어는 전두환의 후임 대통령이 노태우가 되었다. 1955년 9월 30일에 전두환은 육사를 11기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육사 생도 시절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차녀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가장 돈이 많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집에 살았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하였다. 1955년 3월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 25보병사단 소대장에 보임되고, 그해 9월 30일 광주 육군보병학교 초군반(초등군사반)에 입교하였다. 이때 그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4년 동안의 생도시절에 나는 축구와 권투를 한 탓인지 학과성적이 좀 뒤진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관들의 기대를 그리 모으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미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똑같은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입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가 육사 성적이 좋지 않았으므로 동기들 대부분에게 묵살당했다. 초군반 수료를 마치고 육군 제 21보병사단으로 배속되었다. 1957년에는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교육장교로 전속되고, 그 해 10월 중위로 진급하였다. 그 후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이 되었다. 1959년 1월 3일 육군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4월 20일 육군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59년 5월에 육군 공수특전단 본부로 배속되었다가 미국에서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1959년 6월 12일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유학을 갔다. 통역장교를 포함한 총 5명의 대한민국 육군장교들이 같이 유학 갔고 노태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와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 두 과정을 차례로 수료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에도 역시 다른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에 입교하여 1960년 6월에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뒤이어 1960년 6월 25일 미국 육군보병학교의 유격훈련 교관교육 과정에 입교하였다. 특수전학교 과정에는 노태우를 비롯한 4인의 한국 장교들과, 레인저 스쿨 과정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5인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지만, 이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으로서는 홀로 교육받았다. 영어에 서툴렀지만 통과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 유격훈련 교관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0년 12월 16일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참모로 보임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1961년 4월초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되고, 4월 10일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로 발탁되었다. 그곳에서 1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예비장교훈련단(ROTC) 창단을 서두를 때 예비장교훈련단 준비위원으로 발탁 되었다. 그리고 그 예비장교 훈련단 참모장 이명재 소장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담당 교관요원이 되었다. 이어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총애을 받았다. 5·16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 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 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 등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육사 교장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출세가도의 기반을 마련한다. 오치성, 박창암 등은 육사를 '혁명대열'에 끌어넣는 것이 이들의 긴급 임무였다. 박정희는 이들을 급히 육군사관학교로 파견하였다. 쿠데타 군 측에서 온 오치성과 차지철은 육사 간부장교들과 생도대표에게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도대표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생도대표들과 북극성회 간부들이 가진 시국대책회의에서는 쿠데타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북극성회는 육사 11기 이후 졸업생이 참여하는 순수한 동창회였다. 주로 성적우수 졸업자들로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간부를 맡았다. 전두환 등의 하나회계는 성적우수자가 없었으며 교수요원도 없었다. 전두환은 그러나 교수부 동기생들을 통해 북극성회와 생도대표들의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은 육군본부에서 이상훈(육사11기, 노태우 정부 때 국방장관 역임) 등과 함께 정규육사 출신들이 모여 박정희 주도의 군사 쿠데타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 등은 육군본부로 가 육본에 설치된 군사혁명위 본부에 들어가다가 김종필과 마주쳤다. 전두환은 김종필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5월 17일 자정 전두환 등은 그날 밤 차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육사로 갔다. 그러나 육사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쿠데타 반대 분위기였고 더구나 강영훈 교장이 일절 움직이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린 상태였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명령불복종에 반란행위였다. 그런데 5월 17일 저녁 육사 교장 강영훈이 육군본부로 간 것을 알고 전두환은 뒤쫓아 갔다. 육본의 쿠데타 본부에서 강영훈은 장도영과 박정희로부터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독촉받는다. 그러나 강영훈은 "생도들 중에도 찬반이 갈려 있어서 어렵다"면서 "억지로 시가행진을 시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다"고 반대의사를 폈다. 이때 전두환은 막 육본에 도착했다. 전두환은 쿠데타 주모자들인 박창암· 박치옥 대령에게 "강영훈 교장이 육사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혁명 지지시위가 방해받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박창암, 박치옥에게 보고한 것은 그때까지 들었던 강영훈의 상황 설명과 딴판이었다. 강경파로 후에 혁명검찰부장을 맡았던 박창임은 강영훈과 전두환을 대질시키자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 반혁명으로 찍히기 전의 고위장성과 새파란 대위급 장교를 대질시키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쿠데타의 최고지도자이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게 물었다. 이때 안에서 강영훈과 면담하던 박정희가 나왔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지시했다. 박정희는 즉석에서 "강영훈 교장의 얘기가 전두환 대위랑 이 사람들과 달라요. 강 교장을 조치하시오."라고 하고 전두환 등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창암은 즉각 강영훈을 구금했다. 야전군사령부에서도 이한림의 '쿠데타 묵인'소식이 들려왔다.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북극성회 간부들은 쿠데타 반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은 장교단과 함께 교문을 나서 동대문으로 향했다. 생도 800여 명과 육사 소속 장교 및 졸업생 2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동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소공동과 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육사생도 시위대의 직각보행을 본 서울 시민들은 구경하다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것으로 쿠데타가 국민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비쳐졌다.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의 각종 주한 기관들, 즉 대사관과 8군과 CIA가 '민심 우호적'이라는 보고서들을 띄웠다. 이 공로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권위적인 태도로 권력의 맛을 즐기기시작했다. 1961년 5월 21일 군사혁명위원회 민원담당비서관으로 차출되었고, 6월에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그는 9월 13일 최고회의 민원담당비서관에 다시 발탁되었다. 현역 육군 대위이던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담당비서관과 동시에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을 겸직하였다. 그해 11월 중앙정보부 제2국 정보과장이 되었다가 12월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으로 보직변경되었다. 1962년 12월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전두환 대위를 불러들였다. 전두환은 최고회의 민원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물 포섭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 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그는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계속 사양하였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권유를 받고 상의한 사람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이던 윤필용이었다. 그는 윤필용에게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의장 각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다시 전두환을 불렀다.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라는 전두환의 이 말이 박정희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그 후 전두환은 육군 중령으로 승진, 1963년 1월 7일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을 거쳐, 1963년 9월 15일 육본 인사참모부로 전속되었다. 1964년 7월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 1965년 6월 27일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1966년 8월 11일에는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에 임명되고, 1967년 8월 11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서독 시찰 중 아버지 전상우의 부음을 접한다. 1968년 1월 귀국 후 다시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했지만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대리를 지냈다. 1969년 4월 14일, 전두환 중령은 육사11기 이후의 동창회인 북극성회(北極星會)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일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이 되었다.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되어 1년간 근무했다. 1970년 11월 22일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다. 1971년 1월 30일 박쥐 25호 공수낙하 작전을 개시하였다가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 수색을 하였으나 병사는 찾지 못했는데, 기적적으로 이 병사는 홀로 살아서 돌아왔다. 2월 2일부터 2월 20일까지는 쑤이까이 및 망망 계곡에 숨어있는 베트콩을 섬멸하였다. 3월 7일 29연대 3대대의 12중대 중대원 176명 가운데 한꺼번에 9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나 부상당하여 후퇴하였다. 우기(雨期) 중인 6월 22일 박쥐26호 작전을 개시하여 베트콩 2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소화기 115정, 공용화기 13문, 수류탄 42개, 실탄 2191개, 포탄 31개등을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노획이라 보고해 전두환 대령은 특별히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1년 화랑, 충무, 을지무공훈장 등 3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파병기간 중 패전도 없었는데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은 크게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암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 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11월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일본에서 3대오물로 유명한)츠지 마사노부라는 일본군 대위가 있었다. 그는 동남아 일대를 돌며 나쁜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어, 돌아다닌 나라의 지형과 풍속을 그는 소상이 머리에 넣고 왔지, 전쟁이 일어나자 그 대위의 정보만으로 일본은 초기의 태평양전쟁을 수유히 수행했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왔다. 귀국 후 11월 30일 장군 보직인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에 파격적으로 임명되고, 1973년 1월 1일 (임)준장(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했다. 1974년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에 진급됐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가 되었다가 1978년 1월 23일 육군 제 1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또한 그해 6월 10일 1사단장 재직 당시 한 GP 근무자로부터 폭발음이 들렸다는 보고를 받고 주변지역의 땅을 파 7월 4일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윤필용의 비호속에 손영길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 갔지만, 육사 동기이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 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 강창성에 의해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돼 위기에 몰렸다. 윤필용(尹必鏞) 사건이 터졌을 때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모반 혐의로 수십 명 연행되었다.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다녀온 뒤 이 무렵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이 되어 있던 전두환 또한 화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전두환도 윤필용이 후원해주던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대통령에게 강력히 건의해 풀려날 수 있었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남으로해서 그는 오히려 손영길(孫永吉) 준장 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하나회의 1인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76년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에 임명되었다. 1976년 6월 14일 전두환은 차지철의 발탁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때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 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으로 박희도를 추천했다. 차지철은 배은망덕한 사람은 싫어하였고, 입이 무거운 전두환을 높이 사 특별발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더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면서 차지철은 그를 견제하게 된다. 그는 차지철 밑의 차장을 보좌하는 차장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상관인 차지철을 존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리고, 육사가 아닌 광주포병학교 출신의 그를 깔보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차지철과 박종규의 배려로 노태우도 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발탁되었다. 전두환은 작전, 보안차장보로 노태우는 행정차장보로 발탁되면서 기적적으로 중앙으로 복귀했고, 전두환은 브리핑을 잘 하여 박정희의 신뢰를 얻으면서 예편위기를 넘겼다. 점차 전두환은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실세가 된다. 때문에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의 입지에 방해가 되는 상대방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래서 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차지철쪽은 직설적이고 괄괄한 데에 비해 전두환쪽은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훗날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 전두환이 나서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뒷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 이러한 뒷배경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8년 1월 23일 육군 제1보병사단장으로 전출되었다. 육군 1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 작전차장보에 노태우를 강력 추천하여 임명하고 부임하였다. 이때 다시 한번 예편위기에 몰렸지만 제3땅굴을 발견하여 신뢰를 얻었다. 1979년 3월 5일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명되자 부하에게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보안사가 계엄하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연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해 여름까지 강구된 것이 합동수사본부 설치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게 되면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할 수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전두환은 “취할 수 있는 긴급조치가 꽤 많군” 하면서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 1979년 10월 27일 비상 사태에 의한 혼란 중에 전두환은 당시 육참총장 정승화의 지시를 받아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군내 인맥을 동원, 중정 요원들과 격투끝에 이들을 제압시키고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체포전에 돌입한다. 10월 27일 오후, 그는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김재규, 박흥주(현역 대령, 중정부장 비서관), 박선호(前 해병대 대령, 중정 의전과장)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했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어 그는 언론에 수시로 브리핑을 하며 수사 결과, 취조 과정을 공개하였다. 전두환은 체포된 김재규를 면담하고 그대는 역적이고 배신자이니 어쩔수 없이 죽어야 된다고 했다. 전두환은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에게도 사정을 양해했다고 한다. 김항규에 의하면 "전두환 장군은 "나는 군 선배로서의 김재규 장군은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김항규에게 미국의 "카터나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찾아와도 형님은 살릴 수 없다."고 했다. 11월 6일 계엄사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11월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월 6일 전두환은 육군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제안한 수사계획서에 따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 및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육군 소령과 병사 2명이 신군부 병사들이 쏜 총격에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곧 체포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한때 하나회 회장이었던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이나 그 고문이었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은 하나회의 리더 격인 전두환에게 풍부한 활동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전두환은 이 자금을 혼자 착복하지 않고 다시 회원들에게 통크게 배분했다.(지동욱, <한국대통령열전>, 주코 신서(일본), 2002) 이런 태도가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함께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여들게 했다.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12월 13일 전두환은 지시를 내려 정승화,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를 체포, 연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 등이 부상을 당하고,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의 부관 김오랑 소령(당시 소령, 사후 중령 추서)이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승화와 정병주는 즉시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헌을 잡아오라' 하였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특전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 벙커에 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규하는 드디어 재가한다.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한편 전두환은 영어 실력도 있었으므로 직접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을 설득하려 들었다. 전두환은 글라이스틴을 만난 자리에서 “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이 같은 멘트 또한 허화평 등이 연구해서 올린 <5·16교본>에 들어 있었던 대사다. 전두환이 돌아간 뒤 글라이스틴은 서류철을 뒤져 1961년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보낸 김종필의 대사 기록을 찾아냈는데 전두환의 말과 김종필의 말이 놀랍게 일치했다고 미국의 한 한국학 교수가 지적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는 미국 본국에 이를 보고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신원조회 결과 전두환이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이 확인되자 5.16 때와는 달리 방관하는 입장을 취한다.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이던 카터 B 매그루더 장군을 찾아온 김종필은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이 기록은 매그루더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마크 피터슨, <신동아> 1989년 5월호)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신군부가 5·16의 선례를 깊이 연구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만큼 전두환은 이 거사의 결론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정변에 성공한 뒤 전두환은 12월 13일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중정 차장보를 겸임하였다. 1980년 2월 보안사는 정보처 아래 언론반을 설치했다. 그는 보안사 언론반과 중앙정보부의 부하들을 통해 국내외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보안사 언론반은 전두환의 지시 아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하려는 목적에서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을 실행했다. 1980년 3월부터 그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자신을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 신현확은 겸직규정이 없다는 점과 전두환이 현역군인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10.26 이후 이희성이 이미 현역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리에 임명되었던 전례가 있었고, 12.12 이후에는 이희성이 정승화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면서 빈 자리가 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4월 14일에는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동시에 그는 전직 중앙정보부 직원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임명했던 실국장, 단장급 간부들에게 일괄 사직서를 받아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겸직하던 그는 보안사령관으로 다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되었다. 19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내 정세 불안을 해소한다며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인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이학봉은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을 연행할 계획을 세웠다. 전두환은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유학성 등 신군부 핵심 세력과 논의를 하여 '시국수습방안' 실행 동의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의 한반도 담당반장과 한국 담당관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명분이였던 '북괴남침설'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같은 해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운집해 데모를 했다. 5월 12일에는 계엄 해제안이 국회에 상정이 됐고, 여야 총무는 5월 20일 10시 개헌안과 비상계엄 해제에 대해 논의를 하기 위해 임시국회를 개회하기로 합의했다. 전두환은 이들 학생들을 즉시 체포하려 했지만 5월 16일 10~20만 명의 대학생들은 당시 군, 경찰 고위층의 자제였던 어느 학생운동권 학생에 의해 입수한 군과 경찰의 투입정보를 접하고 즉시 감쪽같이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갔다. 전두환의 학생운동권 일망타진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전두환은 사전연행계획에 따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영장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일시 정지시켰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내렸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은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 김대중 체포에 항거하는 시위를 했다. 시위가 거세지자 이에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하여 진압했고 이로 인해 사태가 확산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국회에 배치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의원의 등원을 강제로 저지해, 오전 10시에 개회하기로 예정된 임시국회가 무산됐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에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됐다. 5월 27일 신군부는 무력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해 유혈 진압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의 완강한 부인으로 인해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됐다. 12.12 사태로 이미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으로서는 선거에 의해 반유신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 거의 대부분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특권을 누려온 존재들로서, 군대의 요직을 역임하고, 요직과는 별도로 박정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민주화는 곧 자신들의 특권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신군부는 권력 접수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5월 26일 최규하에게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규하는 이들의 비상기구 설립 요구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국보위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 였다. 국보위는 허화평이 보고한 <5·16교본>에 따라 1961년의 국가 재건최고회의를 흉내 낸 기구였다. 5월 27일 전두환은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6월 초 국보위 위원에 피선됐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전두환 등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토록 했다. 최규하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하였다. 7월에는 충청북도 일대에 수해가 발생하자, 7월 23일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 위원장 이광로(李光魯)를 대동하고 충청북도 청주시와 보은군, 경상북도 문경군의 점촌읍, 마성면 등 수해지역을 시찰, 김종호(金宗鎬) 충북도지사와 김무연(金武然) 경상북도지사 등으로부터 수해상황을 보고받고 돌아왔다. 한편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된 전두환은, 박정희의 전례에 따라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전역한 다음 유신체제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최규하는 한달 사이에 전두환의 어깨에 두 별을 달아주었다. 5월 28일부터 그는 대한민국 국내의 경제학자들을 특별 과외 강사로 초빙하여 경제에 대한 것을 배웠다. 전두환은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경제학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들에게 수시로 도움을 청했다. 1980년 5월 말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자 그는 스탠퍼드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의 김재익(金在益)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공부를 시작했다. 김재익이 경제의 기본 원리부터 당면문제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감복한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이때 김재익이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락 조건을 말하자 전두환은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하고 내맡겼다는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 후에도 김기환(金基桓)·사공일(司空壹)·차수명(車秀明) 등으로부터 경제 과외수업을 계속해나갔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지난날 영어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기상시각인 5시30분까지 혼자 공부하던 때처럼. 그는 빨리 습득하고 적응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몇 달간 경제공부에 전력을 집중하고 나니 "나 나름대로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끌고 나갈 방향과 시책이 정립되더라"라고 그는 회고했다. 1980년 초 전두환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각서를 썼고,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했다. 1980년 8월 6일 육군 대장(大將)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보안사에 의해 검열과 조종을 받았던 한국 언론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 인사들의 발언의 진의를 훼손한 오보였다.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고 8월 22일 전두환이 군대에서 전역했다. 8월 23일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서 사임하고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8월 25일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두환을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8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9월 1일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초 그는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집권 당시 개발 중이던 핵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 해 9월 국가보안법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했고,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10월 17일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와 함께 정당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을 강제 해산시켰다.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 설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특유의 미소로 화답하였다. 1987년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서도 김수환은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역시 전두환은 말없이 미소로 답하였다. 전두환은 5공의 신헌법 확정과 함께 국보위를 해체하고 대신 국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을 설치했다. 여기에서 1980년 11월 3일 정치풍토쇄신법을 제정하였다. 한편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폐지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이를 일축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용했다. 동시에 경제 관료들의 채용을 추진했다. 1980년 유신 체제 이후 시행됐던 통행금지령과 심야 영업 금지령을 해제했으나, 심야범죄가 증가하면서 통행금지령 폐지를 취소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에 김재익을 등용했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전두환은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면서,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 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김재익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서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군부 세력은 김재익을 견제했다.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것은 제5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재익 등의 경제 관료들은 군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경제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81년 1월에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에 추대됐다. 이어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도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국민당의 김종철(金鍾哲)은 기호 1번, 기호 2번은 김의택(金義澤), 3번은 민한당의 유치송(柳致松)이었고 전두환은 기호 4번을 차지했다. 전두환은 헌법 개정 과정에서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로 바꾸었고, 입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등 형식적으로는 민주화를 따르는 듯 했다. 그러나 '1인 장기집권' 대신 사실상 '1당 장기집권'을 고수하였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서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좀 변형시킨 뒤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전두환 정부는 사실상 1당 독재 체제를 고수했다. 이 때문에 야당은 언제나 민정당의 통제를 받았고,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할때조차 통제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야권 후보들의 까다로운 입후보 절차는 물론이요, 야권을 지지하는 선거인들은 조금밖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민정당에게 표가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두환은 9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당선된다. 전두환은 제4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주요 정책들은 제5공화국 시절에 펼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는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제5공화국 시절 그는 당시 헌법의 주요 정책 강령으로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을 구호로 내걸었 으며, 재임기간 물가안정, 범죄 소탕, 경제 성장, 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달성 등을 이룩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파 억압 및 인권 유린 등으로 국민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군부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전두환 정부는 12대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일부 정치인에게 정치규제조치를 해지했다. 구 정치인 중 일부는 각자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1981년 2월 25일에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장충체육관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인단이 90.6%의 참석했고, 전두환은 2500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2위 민한당의 유치송 후보를 누르고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에 단임)에 당선됐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해서 민정당의 당권을 대리하게 했다. 4월 13일 전임 대통령 최규하 등 전직 삼부요인과 각계 원로 25명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 국정자문회의를 발족시켰다. 국정자문회의 치사에서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참여의 깃발이 높이 게양됐다. 국정자문회의는 이러한 국민 총 참여와 화합을 촉진하는 표상"이라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아내 이순자를 대동하고 동남아시아 5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12대 대통령 취임 후에 그는 박정희 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시행한 통행금지령을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함과 동시에 7년 단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실세들을 권력형 부조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부조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했다.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했다.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 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강제로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제출됐다. 1982년~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했고, 이는 일본과 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됐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는 레이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1983년 11월에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했다. 2004년 9월 8일 미국의 AP통신도 미국 고위관리의 증언을 인용하여 비슷한 보도를 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당성이 미비하고 집권 기틀이 부족하였던 전두환은 미국의 지원과 정권의 정당성을 승인받기 위해 핵개발 포기를 선택했다. 또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악화되었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꾀했고 카터 대통령의 미 행정부의 박정희 집권 시절의 핵개발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1981년 1월 12일 전두환은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1982년 1월 22일 전두환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하였다. 1981년 4월 10일 전두환은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부랑인 보호시설이 급증했다. 1981년 보호·감호법을 제정했다.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도를 시행, 시행하고 같은 해 강원도 춘천시 춘천교도소에 보호감호시설을 설치했다. 춘천교도소 보호감호소는 뒤에 198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이전했다. 1982년 10월 26일 강원도의 이승복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날 전두환은 "총칼 앞에서 어린 학생이 자기 심정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이냐"고 이승복의 용기를 칭송하며, "이승복 기념관의 준공을 계기로 어린이들 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까지 이승복 군의 반공정신이 파급되어 우리 2세들에게 국민정신교육과 반공교육의 일대 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삼청교육대를 통해 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계 인사, 반체제 인사, 5.18 민주화운동 참가자, 범죄자, 깡패, 건달, 무직자, 노숙자 등을 잡아들여 특수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삼청교육대에 연행된 절대다수가 전과가 없거나 초범인데도 불구하고, 삼청교육대 특수훈련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해 인권탄압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녹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운동권 성향의 대학생들의 사상개조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으로부터 도미 치료차 미국 여행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받았다. 전두환은 곧 김대중의 미국 여행을 허락했다. 이듬해 1983년 3월 22일, 민정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민정당의 행사에는 꾸준히 참여했지만 당권은 사실상 노태우에게 위임해 운영했다. 1983년 5월 18일 5·18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김영삼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1981년 3월 26일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1983년부터는 각 학교 두발, 복장자율화를 실시했지만, 보수단체와 교수들,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1985년에 두발·복장자율화를 폐지했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1960·1970년대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외채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장영자사건, 명성그룹사건, 국제그룹해체 등 많은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부의 긴축정책과 국제 원유가(原油價)의 하락, 달러가치의 하락, 금리의 하락 등 3저현상이 지속되어 물가가 한 자리수로 잡히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 전자, 기타 반도체 첨단산업이 활기를 띠고 성장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현재 수입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자본의 투자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다.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은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나, 값싼 외래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양곡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래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 농민의 절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했다.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또는 방조 의혹은 이 시기 학생운동의 한 테마였다. 일본과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서유럽과는 정치적 이슈가 크지 않았고,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하였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역대 정권으로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3분, 버마의 수도 랑군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 부상자가 46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후 군 내부에서 북한에 무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 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북측의 전략적 제안이었던 식량지원을 남측이 수용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것이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역시 같은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전두환은 허담 밀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1987년 11월 29일 - 북한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어서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1982년 3월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통해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정부는 1988년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시기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양국간의 위상조명과 관계 재정립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바, 이는 한국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군사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지금까지의 정치적·경제적 대미 의존성이나 불평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1980년대 양국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가진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또 1982년 8월 15일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그는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反日)이나 '배일'(背日)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한국은 친미·친서방 외교기조를 유지해 오면서도 서유럽 국가들과는 다소 소원한 듯한 감이 있었다. 서유럽국가들이 친미권·독자노선권으로 나뉘어 친미권의 경우는 한국이 직접 접촉을 시도하지 않아도 국제정치 현안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해왔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편중되어 있었고 독자노선권은 소·중·북한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국가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서유럽국가들과 한국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1980년대 한국은 수출시장 다변화정책의 일환으로 EC시장을 공략했고 그 결과 양측간에는 통상마찰이 빚어졌다. 따라서 1980년대 한국의 대서구 외교는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되었다. 아일랜드와는 1983년에 수교하였다. 아프리카 대륙 각국 순방, 아시아 6개국 순방 등을 다녔다. 1983년 아시아 6개국 순방 중 버마(미얀마)의 랭군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을 당하여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1980년), 레바논(1981년), 파키스탄(1983년), 브루나이(1984년), 부탄(1987년)과 수교하였다.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달래고,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돌리려고 이른바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실시했다. 3S는 공식적인 명칭 같은 것이 아니라 인구에서 회자되다가 굳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 기사에도 이 단어가 인용됐다. 1983년 11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정수 의원이 당시 프로 스포츠의 지나친 열기를 지적하며 "전형적인 3S 우민 정책이 아닌가"라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 1984년의 한 신문 사설은 "백성들에게 최면을 거는 수단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현대국가에서는 이른바 3S정책이 이용되고 있다"라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가 축제 분위기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1981년 일본 우익 거물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고문)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했다. 계속하여 급조된 프로야구-프로축구 출범, 칼라 TV 방송 전격실시, 영화 및 드라마 성적 표현 검열완화, 교복자율화 등이 이어졌다. 1981년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축제를 벌였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 1983년 10월 제5공화국 내각은 전두환 대통령을 대동하고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 연습 중이던 이범석, 서석준,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다만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인원 중 이기백은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이였기 때문에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각종 휘장 및 약장이 방탄복 역할을 해서 목숨을 건졌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전두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랑군 시내로 빠져나갔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미얀마 경찰에 검거된 조선인민군 상위 신기철은 격투 중 현장에서 사살됐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해졌다. 인민군 대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 전두환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비행기편으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되었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계속 추진하였다. 1984년 8월 20일 전두환은 갑자기 남북간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제의, 대북기술·물자 무상제공도 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1985년 1월 9일 전두환은 서울·평양 상주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하고 1985년 9월 20일부터 9월 24일 대대적으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방문(상봉가족 65가족 92명)을 하였다. 1984년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윤보선으로부터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받았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를 내렸다. 같은해 5월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 당시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가 교황을 영접했다. 전두환은 특별지시로 교황의 임시 경호원을 설정했으며, 교황과 회담 후 교황은 서울 시내를 순방한후 3일만에 바티칸으로 되돌아갔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가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 60억 달러의 융자를 요청했다. 일본은 논란 속에 60억 달러의 지원을 결정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차관을 받았다. 1984년 11월에는 포울 슐뤼터(Poul Schlüter) 덴마크 국무총리, 조앙 비에이라 기니비사우 대통령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방한을 연이어 받았다. 1985년 보안사에서 국회를 해산하려는 명분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85년 2월 10일 실시된 12대 의원 총선결과 의석수로는 민정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약간 상회했으나 야당인 신민당과 민한당이 합한 득표수는 14% 정도 민정당보다 많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이었던 한용원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친위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한용원은 친위쿠데타까지 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고했다. 1986년 4월에는 구주 4개국을 순방,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1986년 4월 30일 개헌가능성을 열어두었던 전두환은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 등을 보며 개헌 요구가 심해지자 11월 7일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으나 이틀 전인 11월 5일 김대중 신민당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계획을 거두게 된다. 전두환은 취임 초부터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주영복 등의 강력 반대로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전두환은 그래도 자기시절에 지방자치제 입문이라도 해 놓았다는 업적을 의식하고 일부 지자체에 대한 실험적 자치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주영복은 이것조차도 반대했다. 주영복은 "통치권위에 도전적 요소가 될 수도 있고 국민의 긴장감도 이완된다"는 이유를 들어 전통에게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계속된 반대에 전두환은 지방자치제를 포기하게 된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대회가 개최된 경기장과 시설은 1988년 하계 올림픽과 같은 것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이 대회가 2년 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한 시험 무대로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 대회에는 27개 나라에서 3,345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27종목이 치러졌다. 유도 및 태권도, 여자 사이클, 여자 사격이 처음 실시되었고, 83개의 아시아 신기록과 3개의 세계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참가국은 아시아경기연맹 36개 회원국 중 27개국 4,839명(임원 1,419명, 선수 3,420명)이 참가함으로써 아시아게임 사상 최대 규모였다. 불참 국가는 북한이 대표적이며 이에 동조한 라오스, 몽골, 베트남, 남예멘, 시리아, 캄보디아의 7개국 그리고 미얀마, 브루나이, 아프가니스탄 등 국내 사정으로 참석을 못한 3개국으로 총 10개국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북한의 혈맹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은 참가했는데 이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차기 대회 개최국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1987년 3월 3일 제12대 대통령 취임 6주년을 맞이하였다. 전두환은 그 날 이순자 여사와 함께 삼부여인 공로의원, 국회와 민주정의당 간부들, 그리고 군 참모총장들에게 오찬을 베풀고 환담을 했으며, 지난 6년간을 회고하면서 모든 공직자들은 중요요청을 인식하여 역사 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안정기반을 다지는 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날 그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 유린 등에 비판을 받아 왔다. 국내에서도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는 훗날 민중봉기와 시국수습방안 등으로 이어진다. 그는 노태우를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임하고, 노신영, 노재봉, 정호용, 허화평 등을 잠재적 후계자 후보군으로 낙점해두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이후, 그때까지 당대표를 맡고 있던 노태우가 최종 후계자로 낙점된다. 한편 한번은 청와대에서 회의가 있을 예정이어서 회의 테이블에 자리 지정을 담당자들이 하게 되었다. 이때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라 그렇지 않아도 후계구도도 있고 해서 전통과 나란히 의자를 배치했다. 이때 회의장을 둘러보던 전두환이 "이게 누구 자리냐"하고 물었다. "노대표 자리입니다"하니까 "의자 빼!" 하고 일갈하였다 한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에서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이 조치가 국민들이 환호할 것임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국민들의 화를 키우는 원인으로만 적용했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과 맞물려서 6월 10일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6·10 항쟁이 일어났다. 전두환은 군대를 재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진압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미국으로부터의 민주화 수용에 대한 압력 등은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두환의 측근들은 그에게 강경진압을 주문했으나 민정당 의원들은 민의가 터져나온 것이라며 진압불가 입장을 폈다. 내무부 장관 김용갑은 6.10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유혈사태가 번질 수 있음을 주문했다. 강경진압을 외치는 측근세력과 진압에 부정적이던 여당의원 양측의 대립 끝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전두환은 내무부 장관 김용갑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선제를 수용한다. 이후 시국 수습을 위해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이 발표됐다.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했고, 7월 9일 그는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6.29 선언이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KAL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공작원에 의하여 공중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로 논란을 불러왔다. 뿐만 아니라 곧 치러질 대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당시 4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나 다름 없었고, 결국 김영삼은 대선에서 여당의 노태우에게 패하였다. 1987년 7월 10일,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노태우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 날에 민주정의당 명예총재가 되었다. 집권 초기에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 뒤 노신영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고 했으나 한편 전두환이 노신영을 후계자로 결정하자 군부에서 반발하였다.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였다.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 1988년 1월에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2월 24일 20분간 공식 고별행사를 하였고 이는 방송으로 보도됐다. 유명 시인들의 예찬과 미화 중 전두환은 상석에서 흡연했다. 1988년 3월 4일에는 그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었다. 이는 그해 1월 29일에 추천 수속이 끝난 것이었다. 유럽의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재임 중 발생한 안전보장상의 중대한 위기, 83년의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미수 사건, 87년의 KAL기 폭파추락사건 등을 평화적으로 해결, 한반도의 평화유지에 공헌했다는 점 을 들어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88년 2월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은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이순자와 함께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로 내려간 후 11월 29일에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12월 31일에 국회 증언대에 섰고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강해실력이 웬만한 승려보다도 뛰어남을 자랑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명예총재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민자당 내 김영삼과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이 있자 그는 명예총재직 제의를 사양했다. 1992년 10월,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됐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 만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으로 대응했다. 검찰은 1995년 8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공소시효 정지 규정 등을 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다. 검찰은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면서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했다. 1995년 12월 2일 전두환은 자신이 1989년 12월 15일에 있었던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서 나온 결정에 따라 그해 12월 31일에 13대 국회의 증언대에 올라 과거 문제의 매듭을 지었고 김영삼 정부는 과거 모든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고 자신은 검찰의 소환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고 12·12 를 포함한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여타의 사람들에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한다고 했다.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으며 1996년 1월 24일 검찰은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전두환은 처음에는 의혹에 대해 웃음과 무답변으로 넘어갔지만, 1995년 12월 그는 정치보복론을 주장하였다. 김영삼이 취임 직후부터 TK인맥을 해고하고 PK인맥으로 채워버렸다. 하나회가 물러간 자리에는 PK의 군홧발이 점령했다. 모든 곳이 다 그랬다. TK를 몰아낸 자리에는 영락없이 PK가 들어섰다. 김영삼이 개혁의 깃발을 든 사정의 칼날이 겨눈 것은 영락없이 그의 정적이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라도 그의 정적은 칼을 맞았고, 친분이 있는 사람은 구제되었다. 김영삼에게는 금융실명제마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해가자 전두환은 김영삼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대구, 경북 사람들에게는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전두환은 치졸한 정치보복이라고 김영삼을 공격하였다. 전두환은 징역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대구, 경북에서는 정치보복으로 '고난받는 영웅'으로 부활했다. 1999년 당시 대구, 경북 주민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0% 이상이 ‘5공신당’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1995년 12.12 5.18 재판과정 중 그는 5.18의 진압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그의 광주 좌파 발언이 알려지자 시인 공선옥 등은 그에게 인간이 되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됐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당시 그의 수인번호는 3124번이었다. 그러나 수시로 안양교도소에는 면회객이 줄을 이었고 교도관들도 전두환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수인번호로 호출하지 못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이후 김영삼에 대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과 반감은 계속됐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이후 친전두환 인사와 제5공화국 가신 세력에 의한 5공신당 창당이 시도됐으나 시민, 사회단체들의 반발과 정부의 압력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편 투옥 직후 전두환은 김영삼의 정치보복, 정치탄압이라며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이를 두고 극작가 신봉승은 어리광, 땡깡이라며 조롱하였다. 12.12 사태와 5.18과 같은 또다른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던 전두환 대통령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누리다가 백담사에 유배되었다'며 '그 후 또다시 구속, 수감되어서는 어처구니없게도 5공의 정통성을 수소한다는 구실'로 구치소에서 단식을 하는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 고 조롱했다.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사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했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았던 훈장(태극무공훈장) 등을 박탈당했다. 1994년 이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건과 5·18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당했다. 1996년 2월 3일, 전두환은 5공 신당 창당에 여야 정치인 200여명에게 5백억원 이상을 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 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 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하려 했던 것은 그가 정부의 대북특사 역할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그동안에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1999년 7월 그는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올 것을 제의하였다. 전두환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려고 한다"며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께 건의하고 북측과도 협의해 본인의 희망사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두환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방북의사를 타진해 왔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金日成)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히면서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제안했다. 전두환은 안현태(安賢泰) 전 대통령 경호실장을 통해 방북 희망과 김정일(金正日) 총비서 면담 의사를 서한으로 전달해 왔었다. 그러나 임동원은 "당시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서해교전 직후 등 시기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전 전대통령측에 전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임장관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어 全전대통령의 방북이 시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을 全전대통령에게 보내 그같은 입장을 설명했다. 2001년 11월 22일,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내외의 오찬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유럽 순방 결과를 설명한뒤 경제 경쟁력 강화, 민생 안정, 남북관계 개선 등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전두환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2002년 7월 1일 국군수도병원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서해교전 희생자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였고, 유가족들을 찾아 조문하였다. 반면 당시 대통령이였던 김대중은 전사자들의 발인에 불참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 시간에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대 독일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2002년에는 제5공화국 당시 녹화사업에 청와대 고위간부 개입설과 전두환이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다. 이 녹화사업은 전두환의 지시와 녹화사업은 당시 보안사, 치안본부, 검찰, 안기부, 문교부, 대학 등이 총동원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2002년 2월 19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대공처장(대령)이었던 최경조가 2001년 12월 "82년 청와대에서 보안사 간부들이 만찬을 할 때 전씨가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 때문에 군내에 불온낙서 등이 빈발하고 있다는 등의) 군내 상황을 듣고 있다가 '야, 최경조, 너 임마 뭐하는거야'라며 혼을 냈고, 그 말을 듣고 보안사가 정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교육계획(녹화사업)을 세웠다"라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최씨는 이어 "(대통령의) 대책을 수립하라는 이야기 속에 지시가 다 들어있는 것으로, 구상은 (내가) 직접 했다"면서 "입안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맡았다"고 말했다. 2003년 2월 대한민국의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이 인터뷰는 운동권과 시민단체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같은해 7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한상범은 전두환의 소환조사를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한상범의 소환 조사를 거부했다. 2002년 8월 10일 녹화사업 개입여부에 대한 소환조사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8월 28일 개그맨 이주일의 빈소를 방문했다. 오후 5시 20분께 장세동 전 경호실장과 앞서 도착한 박종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의 안내로 분향소에 도착, 간단한 묵념과 함께 헌화했다. 이어 1호 접객실로 옮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이주일씨가 화장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군대시절부터 화장하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며 "나도 죽으면 화장하겠다"고 즉석 화장 서약을 했다. 9월 30일 서울 강서하키장에서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남자하키 A조 예선 한국-일본전에 아내 이순자, 측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20여명과 참관하여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고,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인사했다. 경기가 끝난 후 한-일전에서 첫승을 거둔 대한민국 남자하키팀 국가대표 선수들을 면담, 격려했다. 10월 녹화사업 관련 전두환이 직접 지시를 내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됐고, 10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2년 8월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80년대 초 '녹화사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문서를 처음 공개했다. 80년대 초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프락치로 활용한 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 '녹화사업'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 참여정부 무렵 그의 팬클럽이었던 '전두환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약칭 전사모)'가 활성화 되면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6년 9월 26일 재산 상속에 대한 증여세가 80억원이 부과되자 그는 차남 전재용과 증여세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8월 29일 한나라당·이명박 등의 방문 시에는 자신이 대신 인질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발언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납치극과 관련 자신은 이제 많이 살았다. 난 특수훈련도 받아서 인질 대신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활하기도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일부 네티즌들의 비판이 있었고, 권영길은 전두환 덕분에 웃었다는 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6년 10월 22일, 10대 대통령 최규하가 사망하자 10월 23일 최규하의 빈소에 조문했다. 2008년 2월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취임식에 초대됐고, 4월 17일 언론 인터뷰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인상 나쁘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농담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이 대통령이 국민이 바라는 염원을 잘 파악해서 국정을 잘 이끌어갈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주리라 믿는다"며 독려했다. 5월 10일 아나운서 윤현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2008년 7월 22일 인사차 방문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 등 정치인들의 예방을 받고 회견했다. 회견 중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곡물을 하루에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촛불 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자 이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들어 군에서도 불문율로 연대장 이상이 되면 100일은 봐주는 고사를 들어 대통령은 상당히 오래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명박을 변호하기도 했다. 정치권은 코미디 같은 제안이라 말했고, 그날 오후 진보신당은 논평을 내고 전두환의 제안을 헛된 개그라고 비판했다. 2009년 2월 18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 마련된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검은색 정장과 중절모 차림으로 경호원 10명을 대동하고, 김운회 주교의 안내를 받으며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쪽으로 갔고, 관 앞에서 합장하고 나서 그만 평소 자신의 습관대로 계속 뒷짐을 진 채 관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난 조문 시간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고 대성당 밖으로 나오자 김 추기경과의 인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전두환은 "인연이 깊다"라며 김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만 했을 뿐 신군부에 저항했던 김 추기경의 민주화 행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그에게 "30년 악연이라는데…….", "서운한 감정은 없느냐?", "김 추기경과 악연인 것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개인적으로 찾아오라"라면서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 5월 23일 17대 대통령 노무현이 투신 자살했을 때 전두환은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했다. 전두환은 노무현의 투신 자살에 대해 "꿋꿋하게 버티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했다. 2009년 8월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이희호 여사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라며 "자꾸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도 "이 병원에서 완쾌한 바 있다"면서 "의료진들이 워낙 저명한 분들이니 잘 하실 것"이라며 "틀림없이 완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때 그는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10번 정도 청와대에 초대 받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외국 방문 후에는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 및 선물도 섭섭지 않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전직 대통령의 의견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10월 19일 오전 11시경 부인 이순자 여사를 동반하고 전 안기부장 장세동, 전 감사원장 황영시, 전 국방장관 이기백 등 일행을 대동하고 함께 관광버스편으로 평화의 댐 관리사무소에 도착, 김명림 수자원공사 강원지부장과 정갑철 화천군수, 오정석 육군 제2군단장 등의 영접을 받고 환담을 하였다. 이후 평화의 종을 타종하는데 참석하고 댐 주위를 둘러보았다. 2010년 1월 18일 대통령 이명박으로부터 생일축하난을 받았다. 그 후 1672억 추징금 중 300만원을 납부하였다. 이번 미납액 일부 변제로 추징시효는 2013년 10월까지 연장됐다. 2013년 2월 25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했고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전두환 추징법은 추징 시효를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불법 재산을 취득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불법 재산에서 유래한 재산을 가진 제3자를 상대로 추징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검찰에 의하여 일가의 수백여점의 미술품이 압수되었고, 해당 미술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경매는 2차례에 걸쳐 열렸고, 모든 작품이 100%로 완판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3권의 회고록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2017년 8월 4일 법원은 제1권 <혼돈의 시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표현 33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회고록을 출판하거나 판매, 배포하지 말라고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였다. 채무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들 전재국 씨가 책이 서점에서 판매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엔 5.18 기념재단 등에 1회당 5백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그 후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이 2017년 10월 회고록 1권에 문제가 된 33개 부분을 검은색 잉크로 씌운 뒤 재출간하자, 5월 단체들은 2차 소송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8년 5월 15일 광주지방법원은 다시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이때 1차 소송 당시 5·18과 관련된 33개 허위 사실 외에 36개 내용도 거짓 내용으로 추가 인정되었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받게 되었고, 전 전 대통령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고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재판에 갈 수 없다며 불출석하였다. 2018년 8월 27일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판에서 재판을 맡은 김호석 판사는 "2013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회고록은 2017년 4월에 발매됐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지적했고, 변호인을 맡은 정주교 변호사는 "회고록 준비는 오래됐다"며 "2013년에 가족들이 이상 상태를 보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고, (알츠하이머를)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서훈이 취소된 훈장 2006년 국무회의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키로 의결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을 비롯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일까지 반환은 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았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두환은 6년이 지난 현재도 취소된 훈장은 반납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국무회의에 의결을 통해 환수키로 의결했지만 적극적으로 환수노력을 하지 않는 행안부를 비판했다. 정권 차원에서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여 인권을 침해했다. 한편 1989년 12월 삼청교육대 피해자인 이택승 등으로부터 고소를 당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이택승 등은 1989년 12월 최규하, 전두환, 이희성, 김만기(당시 국보위 정화분과위원장) 등을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뒤인 1992년 서울지검으로부터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받았다. 1994년 당시 총무처 장관인 서석재에 의해 전직 대통령 비자금 의혹이 제기됐다. 서석재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발언 파문 초기에 전두환은 새벽에 약수터를 오르며 웃음과 무응답으로 서석재의 발언을 일축했다. 그러나 1995년 민자당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4천억, 노태우 4천억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자 전두환은 강하게 부인했다. 서석재, 박계동의 공식 폭로에 의해 국회에는 진상조사단 구성에 여야가 합의해서 국회 진상 조사단 및 검찰·경찰 합동 수사팀이 구성됐다. 수사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는 5천억 원 이상의 비자금을 수뢰한 것으로 확인됐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 문제와 12·12 군사 정변 주동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뒤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말 화합이라는 명목으로(당시 반DJ세력인 YS세력과 tk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의 주선으로 사형 형집행은 면죄되고 곧 풀려났다. 풀려난 후 복권됐다. 이후 전두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 재산은 29만원이라고 하여 회자화되기도 했다. 2009년 전두환의 미추징 비자금은 정확히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13년 현재 검찰이 전두환의 차명재산으로 의심되는 자녀 명의의 부동산 등 100억원가량의 자산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가 최규하를 직접 위협했다는 설과 사람을 시켜서 압력을 가했다는 설이 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김정렬에게 부탁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 하야를 종용했다는 의혹도 있다. 최규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던 신현확 전 총리는 1995년 12월 16일 검찰 진술에서 "81년 김정렬씨에게 최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한 사실이 있다고 분명히 들었다"고 진술했다. 실제 김정렬씨는 최대통령이 설악산으로 하계 휴가를 떠나기 직전 청와대를 방문하여 그와 독대하였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직접 최규하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가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있다. 1980년 8월 16일 당시 최규하는 압력에 못 이겨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광주학살을 무마하기 위해 전두환 정부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영남출신의 군인중심인 하나회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민주진영에서는 민주정의당 집권세력의 농간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여당이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지역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고위관료의 경우 5공화국에서는 지역간 격차가 더욱 심해쳐 영남출신이 43.6%로 늘어난 반면 호남출신은 9.6%에 불과했다. 제5공화국 시기 한국 50대 재벌 중에 영남출신 소유주가 23개인 반면, 호남출신 소유자는 4명에 불과했다. 85년 전북과 전남의 도시화율이 각각 43%와 40%인데 반해, 경북과 경남은 각각 57%와 75%로 큰 격차를 보였다. 도시화가 뒤진 호남지역은 지역개발이 낙후되고, 지역발전을 위한 경제활동 기반이 취약해 지역격차가 더욱 심화됐다. 2008년 일해공원 건립을 놓고 5.18 관련 단체 및 부산, 경남의 시민단체들이 반발, 전사모, 보수단체 등과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일해공원 반대투쟁위원회 등이 구성되어 활동했고, 일해공원 예정지 내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 등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일해공원은 건립됐다. 2009년 5월, 전두환의 지지모임인 '전사모'는 전두환 기념 시설 건립을 추진했으나 2009년 6월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5.18 단체들과 법정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전두환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전사모측의 주장과 범죄인 신분의 전두환의 상징물은 안 된다는 반대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다. 전두환은 2003년 자택의 경호동 건물이 법원에 의해 강제 경매되면서 발생한 양도소득세 중 일부에 대해 2010년, 서대문세무서가 부과한 세금 3017만원을 미납하고 있다. 체납 금액은 장기간 체납으로 인해 4000여 만원으로 증가된 상태이며, 서울특별시청에 의해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 오를 예정이다. 1987년 전두환은 박흥주의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총무처와 국방부에서는 현행법을 고치지 못하는 이상 어렵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의리를 모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박흥주 대령에 대한 것을 다시 접하게 된 전두환은 박흥주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복권을 여러번 시도했다. 재판 당시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던 박흥주는 사후 연금을 받지 못했다. 박흥주의 딸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다. 박흥주의 처는 국방부에 가서 연금청구를 했으나 현역군인으로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을 땐 연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않는다.(군인연금법 33조)는 급여제한 규정이 있어 불가능하다는 회신만 받았다. 87년 겨울 어느날 전두환 대통령은 안현태 경호실장을 불렀다. 전대통령은 "우리 나라 군인들 중에 박흥주 대령이 훌륭했었다고 알고 있다. 요즘 그 유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안현태 실장은 박흥주와 가깝게 지냈던 육사 동기생(18기)들을 찾아보았고 육군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배모 사단장을 찾아냈다. 배 사단장은 수소문 끝에 박흥주의 지인 H모에게 연락을 했다. 박흥주의 측근인 H모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 안양 근처에 있는 자신의 사단을 방문해 달라고 해서 갔더니 배 사단장은 "각하의 지시로 박대령의 유가족을 도와야겠다"며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대령의 부인은 강남에서 조그만 분식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도움은 필요없다. 김재규가 연금이 나오는 등 실질적으로 예비역중장 신분이 회복된 상태인만큼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박대령도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했다. 배사단장은 그렇게 보고하겠다고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배사단장은 자신의 부인과 함께 분식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안실장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즉석에서 'OK'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안실장이 총무처와 국방부 등에 연금지급과 복권문제를 협의했으나 현행법을 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며 몹시 서운해 했었다. 배 사단장은 청와대에서 보내준 것이라며 금일봉을 놓고 갔다. 전두환은 보훈처장이 자신의 부탁을 끝내 거절한 것을 서운해 하면서도 보훈처장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였다며 경질하지 않았다. 예비역 중장인 김재규, 예비역 대령인 박선호와는 다르게 박흥주는 10.26 사태 이후 재판 당시 현역 대령 신분이었으므로 법의 적용을 받았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자신이 북조선에 특사로 다녀오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하였다.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북한이 일으킨 아웅산 테러 사건(83년10월) 등 남북관계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밀사교환을 통한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85년)을 실현시킨 바 있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기여할 기회를 달라고 김대중 정부에 호소하였다. 1999년 5월 "우리 정부가 허락하고 북한이 받아준다면 북한의 이곳 저곳을 자유스럽게 방문해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1999년 5월부터 김대중에게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金正日)노동당 총비서와 면담하려 했던 것은 그가 정부의 대북특사 역할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그동안에도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북특사를 맡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동원에 의해 거절당했다. 전두환은 1999년 7월 당시 자신은 '남북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다'고 신념을 밝혔다. 1999년 7월 그는 김대중에게 자신이 대북 특사로 다녀오고 싶다고 다시 여러번 청와대에 건의하였다. 전두환은 당시 통일부 장관 임동원에게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려고 한다"며 "대통령 각하와 국무총리께 건의하고 북측과도 협의해 본인의 희망사항이 성사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대북특사 역할을 통해 공식 활동을 재개하고 통일에 기여한 민족의 원로로 남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전두환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85년 허담 노동당 비서와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의 서울-평양 교차방문을 통해 김일성(金日成)주석과 남북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며 남북간에 다양한 비정규 대화선(對話線)을 가동할 것을 당시 국민의 정부에 제의하였다. 일각에서는 그가 지미 카터 前미국대통령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카터는 94년 6월 북핵 위기 때 김일성(金日成)과의 면담을 통해 북핵위기를 해소하고 그해 11월 제네바 북-미 합의의 길을 닦았다. 전두환은 자신도 지미 카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끝내 거절당했다.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정승화는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전두환을 가리켜 '전두환 역도 또한 미국이 오래전부터 손때묻혀 키운 친미분자'라고 평가했다. 전두환 당시 야당인사이자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그가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이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됐다. 사촌 전순환(全淳煥)은 기업인으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고, 사촌 전우환(全禹煥)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갑자기 양곡가공협회장이 되었으며, 새서울용역 감사가 되었다. 그러나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세 아들 재국, 재용, 재만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출판 업체 시공사의 대표이다. 둘째 재용은 탤런트 박상아와 결혼했고, 셋째 재만은 이윤혜와 결혼했다. 이윤혜는 한국제분 사장이었던 운산그룹(동아원) 회장 이희상의 장녀이다. 최근 미국 나파밸리의 포도밭에서 출시한 두 종류의 동아원 와인이 G20정상회담의 만찬주로 사용되어서 화제가 됐다. 장녀 효선은 서경대학교 교양과정부 조교수(교양영어 담당)이다. 닮은 연예인(박용식)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계에서 금칙어가 됐다.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전두환은 고등학생때부터 가톨릭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세례명: 성 베드로). 대통령임기동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한국에 초청하거나 개신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점 등을 들어 기독교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퇴임후 강원도 백담사에 간 것은 종교를 위장하기 위함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lPlTHS3SK0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 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무르며, 백담사 생활을 한 지 1년 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불교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했던 1980년 9월 10일 직후인 10월 27일에 10·27 법난 을 일으키며 집권 신군부 세력이 불교계를 탄압한 일이 있는데, 그 사건을 일으킨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신군부를 반대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가 전두환 지지 성명에 반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하는 등 신군부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전두환의 별명은 '돌' 또는 '똘'이다. 그의 머리가 유난히 빛나는 것에 대한 비꼼의 의미도 담겨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을 말할 때 우스개 삼아 '이, 윤, 박, 최, 돌, 물, 깡'이라 부른다 한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대통령까지는 성을 그대로 부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별명이다. 즉 '전두환 = 돌', '노태우 = 물', '김영삼 = 깡'이다. 당시 세간에선 그를 '무식한 돌머리'라고 했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지만 그는 영어를 잘 못했고, 학식도 짧았다. 일설에는 그래서 미국에 간 그가 IQ측정기에 머리를 집어넣었더니 "돌 넣고 장난하지 마시오"라는 경고음이 나왔다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널리 유행했다. 당시 시중에 '돌머리' 유머가 돌면서 전두환의 '머리 나쁨'은 사실인 것처럼 유포되었지만, 당시 일선에서 뛰었던 한 언론인은 그 풍문을 부인하면서 실제로 "전두환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직관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증언했다. 1980년 이후 각 방송사의 오후 9시 뉴스 시작 때 "...땡!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두고 '땡'과 전두환의 '전'을 따서 만든 이름이 땡전 뉴스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 뉴스는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심지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있었던 1983년 9월 1일, 소련군이 비행기를 격추시켜 250여명이 사망한 중대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뉴스 시작에도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과 "한편 이순자 여사는"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전두환 대통령의 호는 '일해'였으나 전두환의 호가 '오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순자 여사의 호가 '한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2007년을 전후해 술을 줄였다. 2007년 1월 5일 인사차 방문한 당시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과의 1시간 공개 면담에서 "주량이 3분의 1로 줄었다. 나이 드니까 도리 없어"라며 절주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운동은 뭘 하시느냐'고 묻는 이 시장에게 "나이 들면 골프가 가장 좋아, 그런데 주변에 한 사람 두 사람 골프치는 사람이 없어져, 세상 떠나고 아프고"라면서 적적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애연가이기도 했던 전두환은 1987년 자신의 퇴임식 등 공식 석상에서도 흡연을 하기도 했다. 촉한 촉한(蜀漢, 221년 ~ 263년)은 중국 삼국 시대 때 유비(劉備)가 지금의 사천성 지역에 세운 나라로 정식 국호는 한(大漢)이나 역사상 구분을 위하여 촉한이라고 부른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으로도 부른다. 연강 원년(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가 헌제를 내쫓고 조위를 건국하자, 당시 익주를 점거하고 있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221년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연호를 장무(章武)라 하였다. 수도는 성도(成都)이다. 선주(先主) 유비는 자신의 의동생인 관우를 죽인 오를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릉에서 육손에 계책에 크게 패하면서 백제성에 눌러앉게 되고, 결국 사망하였다. 유비 사후 후주(後主) 유선이 즉위하였고, 연호를 건흥으로 고쳤다. 승상 제갈량은 남만을 토벌해 맹획을 일곱번 사로잡고 놓아주었는데, 이에 맹획이 항복하고 남만은 평정되었다. 또 제갈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이 때 올려진 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이다. 하지만 진지 · 황호와 같은 간신의 전횡과 연이은 북벌 실패로 인해 촉한 궁중의 정치를 제대로 처리할 사람이 없고 많은 힘이 소모되어 점점 쇠망의 길을 걸었으며, 특히 황호가 정권을 장악한 경요, 염흥 연간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제갈량-장완-비의-진지-동궐 이두 이두(吏讀, )는 한자에 의한 한국어 표기법의 한 가지이다. ‘이서(吏書)’, ‘이도(吏道·吏刀)’, ‘이토(吏吐)’라고도 불린다. 삼국 시대부터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 고대 한국어를 분석하기 위한 자료의 하나이다. 이투(吏套, )라고도 한다. 광의의 이두는 구결, 향찰 등을 포함하여 한자를 빌려 이뤄진 한국어 표기법 전체를 가리킨다. 협의의 이두는 이두문에 나타나는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 이두문이란 이서(吏胥)들이 행정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한 한자 표기의 산문을 이르는데 같은 문체로 쓰인 민간의 글도 이두문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협의의 이두에 관해 언급한다. 이두의 성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강 삼국 시대에 시작하여 남북국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자료에는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나오지만 진평왕 때의 서동요나 진흥왕의 순수비문에 쓰인 것이 있어 설총이 창작한 것은 아니고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5세기부터 고구려에서는 한문을 한국어 어순으로 재배치하거나, ‘之’자를 문장의 종결어미로 사용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6세기 말 이후 차자 표기법 (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하였고, 신라에서는 반대로 6세기 말부터 7세기로 접어들면서 표기법상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유독 신라에서만 이두가 발전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시각이 있다. 국어학계 일각에서는 무열왕이 즉위한 7세기 중반까지 당나라의 서신에 쓰인 한문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인이 드물었다는 <삼국사기>의 서술을 두고,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한자를 100여 년 늦게 도입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한문 이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국어 표기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역사학계는 다른 시각이 제기되고 있는데, 2016년 윤선태 교수는 "오랫동안 구두 전달 위주로 행정 명령을 내린 신라의 특수성이 한자 도입 이후 문서에도 반영돼, 구어체를 살릴 수 있는 이두 개발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며, 월성 해자 목간 등에서 발견되는 이두의 내용과 어휘를 보면 일상적인 구두 전달 체계를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두문에서는 명사, 동사 어간 등 단어의 실질적 부분에서 주로 한자어가 사용되고, 조사(助詞)나 어미(語尾) 등 문법적 부분에서 주로 이두가 사용되었다.(명사, 동사 부분에서 이두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한반도에서는 한자를 도입한 뒤에 한동안은 정규 한문만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그 후 한국어 어순에 맞춰 글을 쓴 서기체(誓記體)와 같은 의사한문(擬似漢文)이 나타난다. 이두는 이와 같이 한국어 어순으로 쓰인 의사한문에 문법적 요소가 더 보완되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두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한자 독법은 옛날부터 있는 관습적인 독법이 내려와 있다. 그 중에는 중세 한국어와도 다른 독특한 것도 있다. 예) 처격 ‘良中(-아)’에 대해 중세국어 ‘-애/-에’ 아래는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1415년)에 나타나는 이두의 예이다.(밑줄이 이두 부분) 형태소 형태소(形態素, )는 언어학에서 (일반적인 정의를 따르면) 일정한 의미가 있는 가장 작은 말의 단위로 발화체 내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더 분석하면 뜻이 없어지는 말의 단위이다. 음소와 마찬가지로 형태소는 추상적인 실체이며 발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 형태소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 또는 기능에 따라 크게 문법형태소(=형식형태소)와 어휘형태소(=실질형태소)로 나눌 수 있다. 형태소는 그것이 말에서 쓰일 때 의존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의존형태소와 자립형태소로 나눌 수 있다. 형태소는 그것이 다른 형태소와 결합하여 하나의 낱말(단어)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경우 근원형태소라고 한다. 어떤 형태소가 다른 형태소와 결합하는 관계가 제한적이면 불구형태소(=특이형태소)라고 한다. “한나가 책을 보았다.”을 예로 들어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가번 가가 번()은 일본 에도 시대 가가・노토・엣츄 3국을 지배했던 초대형 번으로, 그 지배 영역은 지금의 이시카와현에서 도야마현에 이르는 대부분의 지역에 속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가 100만 석'()로 불린다. 메이지 2년(1869년)의 판적봉환으로 번의 명칭을 가나자와 번()으로 공식화하였다. 가가 국 이시카와 군(현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에 있던 가나자와 성()에 본거지를 두었다. 번주는 도자마 다이묘인 마에다씨()이었으나, 과는 인척 관계가 강해 신판 다이묘에 가까운 지위가 주어졌고, 마쓰다이라성과 세 갈래 접시꽃(아욱잎) 무늬의 가몬을 하사받았다. 3대 번주 마에다 미쓰타카의 대부터 이후 역대 번주들은 정이대장군의 편휘()를 하사받았다. 또,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도 102만 5천 석(영지 분할 이전에는 120만 석)의 최대 영지 규모를 자랑했고, 최종적인 관위도 종3위, 산기()로, 그 가격()도 고산케와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등의 고카몬()이 속해 있던 오로가()급 자리에 해당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고산케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가가 번의 지번에는 다음이 있다. 을파소 을파소(乙巴素, ? ~ 203년)는 고구려의 재상으로 고국천왕, 산상왕을 섬겼다. 유리왕 때 신하인 을소의 증손자고 입관 전에는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가난한 농부였다.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고국천왕 13년인 191년, 외척인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이후 이후 고국천왕이 4부에 영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4부에서는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고, 안류가 다시 유리왕 때 재상이었던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은 그를 중외대부(中畏大夫)와 우태(于台)로 임명하였다. 을파소는 이 관직이 자신이 뜻하는 바를 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저로써는 감히 왕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이를 가려내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이루소서”라 하니, 왕이 그 뜻을 알고 국상(國相, 재상)으로 임명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이 을파소를 경계하자 왕은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냈다. 이후 을파소가 지극정성으로 국사에 임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정이 안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은 안류를 불러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치하하며 대사자(大使者)에 임명하였다. 3년 뒤인 194년, 7월에 서리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왕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한편, 관리들을 시켜 봄~가을의 기간동안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분명히 나오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고국천왕이 죽은 이후 산상왕 대에도 을파소는 국상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산상왕 7년인 203년, 왕이 아들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을파소는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으니, 기다리십시요"라고 진언하였다. 그 해 8월 을파소가 죽자 많은 이가 슬퍼하였다. 국상직은 고우루(高優婁)가 계승하였다. 조선의 역대 국왕 조선의 국왕의 칭호는 대개 묘호로 불린다. 묘호를 올릴 때 공(功)이 있는 경우에는 '조(祖)'를, 덕(德)이 많은 경우에는 '종(宗)'을 쓴다고 하지만 조선의 경우 태조를 제외한 다른 '조'는 당시 집권 세력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 10대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은 각각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종묘에 오르지 못하였고 시호나 묘호 또한 받지 못하였고, 군호로만 불린다. 태조부터 추존왕 원종까지의 15명의 왕(목조, 익조, 도조, 환조, 단종, 연산군, 광해군 제외)은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아 이를 조선왕조에서 자체적으로 추증한 시호의 앞에 붙여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 16대 왕 인조(仁祖) 이후 12명의 왕과 추존왕 진종, 문조 등은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저히 숨기고 청나라를 의식하고 쓰여진 시장(諡狀)과 대청(對淸) 외교문서를 제외하고는 이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순종의 경우에 편의상 조선의 마지막(27대) 임금이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국왕이었던 적이 없다. 태조 이성계의 4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당초 조선 건국 후 목왕, 익왕, 도왕, 환왕의 시호로 추존되었다가 태종 때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묘호를 받고 시호를 받았다. 장조는 본래 조선에서는 장종이었다. 정조가 진종의 양자로 갔으므로 장조는 법통상 정조의 숙부로 취급되다가 고종 즉위 후 1898년 고종에 의해 왕으로 추존될 때는 장종으로 추존되었다가 대한제국 수립 후 장조로 개칭되었다. 익종은 헌종 때는 익종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 즉위 후 1899년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가 익종에서 문조로 개칭되었다. 홋카이도 홋카이도( , ほっかいどう)는 일본의 47개 도도부현 중 하나로, 일본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섬이다. 또한, 같은 섬 및 수반되는 섬을 관할하는 지방 공공 단체(도(道))이다. 면적은 78,515 km²로 일본 전체 면적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면적(100,363 km²)의 4분의 3 정도 크기이다. 홋카이도의 본섬(77,983.9 km²)은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주요 4섬 중 하나이다. 지방 공공 단체로서의 홋카이도는 47개 도도부현 중 유일한 '도(道)'로, 도청 소재지는 삿포로 시이다. 8세기 후반에 성립된 고키시치도의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도카이도() 등의 도 이름을 모방한 것으로, 명명자는 에도 막부 말기에 에조치를 탐험한 로 알려져 있다. 마쓰우라는 아호를 홋카이도진(北海道人)이라고 지을 정도로 에조치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1889년 그는 에조치를 대체할 명칭으로 홋카이(北加伊), 가이호쿠(海北), 가이토(海島), 도호쿠(東北), 지시마(千島), 히다카미(日高見)의 6가지 후보를 제안했다. 마쓰우라는 의견서에서 가이(加伊)는 선주민인 아이누인들이 이 섬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가이를 같은 발음의 가이(海)로 바꾸어, 고키시치도의 명칭을 모방해 홋카이도(北海道)로 정했다. 홋카이도는 위도 41도~45도에 위치해 있다 홋카이도 본섬은 면적이 77,983.9 km²으로 일본 열도에선 혼슈 다음으로 2번째, 세계에선 21번째로 큰 섬이다. 아이슬란드 섬보다는 작지만, 사할린 섬보다는 크다. 남쪽의 혼슈(아오모리현)와는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세이칸 터널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북쪽은 소야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사할린 섬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쿠릴 열도와 마주해 있다. 서쪽은 동해, 남동쪽은 태평양, 북동쪽은 오호츠크 해에 접해 있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평평한 산지는 표고 300m 이하의 평지, 그리고 현저히 발달한 해안단구는 홋카이도 지형의 큰 특색이다. 삿포로 시와 도마코마이 시를 연결하는 선을 경계로 주부와 남서부로 크게 나뉘며, 남북으로 달리는 중앙산지와 동북방에서 이와 교차되는 산지가 주부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중앙산지를 경계로 주부는 동부와 서부로 나뉘며, 동부에서는 다이세쓰()·도카치() 화산군과 시레토코()·구차로()·메아칸()의 화산군이 동부화산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서부에서는 중앙산지와 데시오()·유바리() 산지 사이에 돈베쓰 평야()·나요로 분지()·가와카미 분지(川上盆地) 등이 연속하여 중앙저지대를 형성하고, 이시카리 강()은 이시카리 산지에서 가와카미 분지·이시카리 산지를 흐르고 데시오 강()은 기타미 산지()에서 나요로 분지·데시오 평야를 흘러 각기 동해로 들어간다. 한편 오쿠리시 섬()·오시마 섬()·고지마 섬()은 북방의 리시리 섬·레분 섬·데우리 섬과 더불어서 동해의 도열(島列)을 형성하고 있다. 북위 41도~45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서안 해양성 기후(Cfb)를 볼 수 있는 도난 지방의 일부 연안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전역이 냉대 습윤 기후(Dfa, Dfb, Dfc)와 같이 매우 한랭한 기후가 나타난다.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크고 겨울에 눈이 내리면 굳어져서 잘 녹지 않는다. 도내 전역이 폭설 지대이고 일부 지역은 특별 폭설 지대로 지정되어 있다. 도호쿠, 도토는 추위가 매우 심하고 연안부를 제외한 거의 전역이 가장 추운 달의 평균 기온이 영하 8도 이하이고 영하 20도 이하까지 내려가는 일이 많다. 가끔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최북단인 벤텐 섬에서는 툰드라 기후가 나타난다. 지역적으로 동측 기후(오호츠크형·홋카이도개형)·태평양측 기후(동부 홋카이도형)에 속한다. 소야 지방·루모이 지방·이시카리 북부·시리베시 북부·시리베시 서부·몬베쓰 지방·아바시리 서부·아바시리 동부·네무로 지방·구시로 남동부·구시로 남서부·도카치 중부·도카치 남부·이부리 지방·히다카 지방·도시마 지방·히야마 지방은 해양성 기후를, 가미카와 지방·소라치 지방·이시카리 중부·이시카리 남부·히야마 지방·기타미 지방·아바시리 남부·구시로 북부·구시로 중부·도카치 북부는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홋카이도에는 14개 진흥국이 있다. 진흥국은 도청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그 관할 지역의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홋카이도 진흥국 설치 조례에 따르면 지청의 관할 지역은 군 지역에만 해당하며 시 지역은 포함하지 않는데, 실제로는 규칙 등에 따라 시 지역에서도 지청의 업무는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청의 관내는 시 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도청이 있는 삿포로시에도 이시카리 진흥국이 설치되어 있으며, 도청은 각 진흥국과의 사무 조정이나 의회와의 조율, 행정 방침의 결정 등을 담당하고 있다. 홋카이도 내 총생산의 산업별 구성비는 1차 산업이 3.3%, 2차 산업이 22.4%, 3차 산업이 76.7%이다(2000년). 일본 전체와 비교해서 1차 산업, 3차 산업의 비율이 높고, 2차 산업, 특히 제조업의 비율이 작다. 그러나 농업은 홋카이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의 총 경작 가능한 땅의 4분의 1이 홋카이도에 있다. 쌀, 보리, 감자, 고구마, 양파, 호박, 메밀, 우유, 소고기의 생산량은 전국에서 1위이다. 홋카이도의 삼림은 또한 일본 삼림의 22%를 차지해 임업이 상당한 규모를 이룬다. 그 밖에도 홋카이도는 수산물의 생산량이 전국 1위이다. 관광업은 홋카이도의 중요한 산업으로 특히 시원한 여름 덕분에 본토의 더위와 습기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겨울에는 스키를 포함한 동계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홋카이도에 거주하던 민족으로는 아이누족이 있다. 이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과 비교해 월등히 체격이 좋고 체모가 많으며, 눈이 깊고 콧대가 선명한 외모 때문에 코카소이드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의 형질인류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몽골로이드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중세 이래로 일본으로부터 많은 일본인이 홋카이도에 건너와 살았으며, 에도 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어업 경영자와 임노동자로 대거 유입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개척 농민, 둔전병 등의 형태로 일본인이 많이 들어와 현재는 일본인이 민족구성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이누족 이외에도 홋카이도에는 오로크족(윌타족), 니브흐족(길랴크족), 오로치족, 타타르족, 탈리시족, 바시키르족도 살고있다. 홋카이도에는 37개의 대학(7개의 국립 대학, 5개의 공립 대학, 25개의 사립 대학)과 34개의 단기 대학, 5개의 고등전문학교가 있다. 홋카이도의 국립 대학은 다음과 같다. 삿포로에서는 1972년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홋카이도에는 이하의 스포츠팀들이 있다. 대한제국 고종 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1864년 1월 21일(음력 1863년 12월 13일) ~ 1897년 10월 12일)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이다. 휘는 형(㷩),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兒名)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연호는 건양, 광무이다.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헌종의 모후인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부(三從叔父)인 추존 임금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효명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기 10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는 민씨 일가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개항한 이래 청-일-러 3국의 3파전 속에서 국권(國權)을 보존하려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이완용과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로 퇴위(退威)되었고, 1910년에는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다시피 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한 뒤,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 기록으로 전한다. 고종 황제 독살설은 3·1 운동(전국적인 대규모 평화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 폐하께서 사용했다고 알려진 옥새가 발굴되었다. 2009년 일본 국회 헌정(憲政)자료실에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황제폐하가 즐겨 마셨던 식혜에 독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순목대원비)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사저 운현궁은 안자의 후손이 아니라 인조의 인평대군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뒤에 고종 때 장종으로 추존)의 서자 은신군은 자신의 작은할아버지 연령군의 양손자이자 낙천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했고, 다시 순조는 아들이 없던 서삼촌 은신군에게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7대손 진사 이병원의 차남 이채중을 사후 양자로 입양하였다. 이로써 남연군은 인조의 8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지만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영조의 양증손자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획득했다. 고종에게는 생모 순목대원왕비 소생인 친형 흥친왕 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다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복 형 이재선과 이복 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은신군의 이복 형이던 의소세자와 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지고 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회평군과 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이 있었으므로 흥선군은 효명세자빈(훗날의 조대비)전을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헌종 이환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사가 없던 신정왕후는 그런 흥선군의 조건을 수용하고 결탁을 한다. 조선의 제25대 임금 철종이 후사가 없이 1863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의 후원(실은 둘이 안동김씨 세력 몰래 밀약으로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을 왕으로 올림)으로 1864년 1월 21일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의 왕위를 위한 꾸준한 계획을 세웠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은밀하게 밀약을 맺었다 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인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재황을 안동 김씨 가문의 딸과 혼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하나는 김병학의 딸이었고, 다른 한명은 김병문의 딸이었다. 이런 밀계로 흥선군은 안동 김씨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흥선군은 조대비(신정왕후 조씨)를 찾아가 물밑 교섭했다. 조대비의 아들은 헌종이었으나 그는 후사없이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전계군(나중에 대원군으로 추증)의 아들인 강화도령 덕완군 이원범이었다. 철종이 헌종보다 윗 항렬이므로 헌종의 양자가 될 수 없었고, 익종에게도 동생뻘이기 때문에 익종의 양자가 될 수도 없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는 이 점을 보고 철종을 간택하여 순조의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앉히게 도와준다면 조대비의 양자로 보내겠다는 밀계를 맺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대비와 조성하, 조영하, 정원용 등은 비밀리에 옥새를 접수한 뒤, 흥선군의 적실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대왕으로 입승대통(立承隊筒)한다는 교서를 재빨리 발표한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본색을 드러내어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모두 장악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으로 구 안동 김씨와 김씨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거의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풍양 조씨 세력 역시 궁궐에서 모두 축출한다. 이들 외척들은 고종이 군주인지 흥선대원군이 군주인지 알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유포시켜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기도 한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적인 분쟁을 2차례 겪었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나서 쇄국정책을 펼치고 척화비를 전국 방방 곡곡에 설치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적으로 철폐(서원철폐)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겼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함으로써 기능을 상실케 하여 원래 있던 의정부와 6조에 권력을 집중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1866년 몰락하던 남인 출신의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후의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 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대원군은 소년 시절 김정희와 홍대용 학파 인물들로부터 전해 들은 열기구를 본따, 열기구를 만든 뒤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들여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녹여서 붙였으나 열기구는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모든 군사와 정무는 어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1869년 1월 31일(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부산)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군사 도발)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압박하고, 결국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신식 군대)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11월 4일(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이는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였음).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에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의 외교 고문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이름했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미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였는데, 이 때 처음으로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제정했고, 이듬해 3월 6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했다.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왔다. 1883년 최초의 근대적 국가 기술 표준 기관인 전환국 소속 분석시험소를 설립하고 화폐의 주조 및 금속광물의 분석ㆍ가공ㆍ제련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부마)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명성황후의 외교 군권으로 조종하는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불법 점령하는 사건(거문도 사건,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1893년 고종은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고, 영국인 대위 콜웰(William H. Callwell)과 하사관 커티스(James Curtis)를 교관으로 초빙하여, 강화도에 최초의 근대적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했다. 통제영학당은 사관생도 50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여, 영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쳤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음력 12월 12일(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흥친왕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895년 5월 13일(음력 4월 19일) 종신 유형에서 10년 유형(流刑)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8월 2일(음력 6월 12일)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에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 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 1895년 10월 8일 민왕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일본은 1895년 낭인(자객. 여기에 주한일본공사인 미우라도 같이 동조)을 보내 민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친일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유길준과 개화파, 한국 군벌 등이 일본인 낭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민왕후를 찾아내는 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민비 살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2대대장 이두황·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 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의 시체를 소각하는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민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나중에 윤치호는 입궐하여 왕후 민씨 시해 사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면서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주회, 이진호, 윤석우, 구연수 등의 존재를 폭로하였다. 여기에 개화파 정치인인 유길준도 민비 살해에 가담했노라고 폭로하였다. 왕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고종은 충격을 받았다. 박은식 역시 민비 살해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민비 살해(시해)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크게 배신감을 느껴 나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빈소(장례식)에 찾아가지 않았다. 1896년 2월 11일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 왕태자 척(훗날의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사업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 '광무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갑신정변을 주도한 일파 중 한명)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9년에는 이미 방콕, 교토 등에 다니고 있던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1898년 1월 8일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사망했다. 이어 2월 22일 흥선대원군이 죽었다. 고종은 을미사변 사건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이라 봤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고, 흥친왕 이재면은 혹시나 자신도 죽임당할까봐 대원군의 부음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러나 상여가 노제를 한 뒤 서문(西門)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상여가 공덕리로 가는 것을 보고 서대문 밖까지도 쫓아갔다고도 한다. 1899년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고종의 정부을 전복하는 것)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 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면 이번 쿠데타에 이준용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이었다. 그 해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개시할 때 쯤에 벌어진 장윤상 발언 사건과 어용선 사건은 고종 정부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전 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년 1월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왕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4월 12일 소문의 발원자인 장윤상은 교살형에 처해졌고,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유로 유학 신현표와 전 순검 이지현은 태 1백 대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3월에 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그를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반정부 인사들이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나 움직임은 고종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장윤상 사건과 어용선 사건이 처리된 직후인 1899년 6월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의 옹립을 기도했다는 고발에 따라 윤태영 등 3인이 체포되었는데, 이는 고종 정부가 이준용 추대 모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00년 안경수, 권형진을 처형 직전 양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이에 고종 정부의 고관들인 김성근, 신기선, 조병식, 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년 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되풀이하여 올렸다. 그러나 고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궁내부협판 겸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궁내부 특진 관직을 박탈했다. 그러자 평리원과 학부에서 외부에 조회하여 1900년 6월 19일에 주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6월 20일 이하영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서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년 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의친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정치 망명객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 부로 파견했지만 실패한다. 이준용 역시 양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거구에 비교해서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이준용 제거 계획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에 있는 주변 시내를 장악하고 군대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군대가 해산이 된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통감은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는 이를 억압하였다.(을사의병 참조) 1905년 12월 1일 윤치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 강원도 삼척군과 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호머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 고종의 무효선언 발표는 훗날 대한민국에서 을사조약의 무효, 불법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強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훗날 고종의 무효선언서의 존재를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수교하는 조건으로 을사조약 무효, 파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후일 정상수 명지대 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나타내는 독일어 전보를 발견하였다. 을사 조약과 이전인 1904년부터 이토 조선통감은 고종에게 이준용의 귀국을 허락하라고 강요하였다. 자신의 지위를 빼앗으려 여러 번 쿠데타를 일으켰고, 명성황후 암살의 가담자라고 확신하고 있던 고종은 이준용의 귀국 요구를 불쾌히 여겼다. 그러나 통감은 계속 이준용의 귀국을 허락하라고 고종에게 강요했고 고종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수시로 고종에게 이준용 귀국을 요구한다. 통감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이준용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혹세무민하며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통감은 이준용에게 일단 부산에 당도해 있으면 자신이 박영효의 경우처럼 힘써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토는 내각 회의를 통해 안경수, 권형진의 의옥사건에 대한 이준용 연루건이 무죄임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이준용은 사복 일본인 경부 1인과 순검 2인의 보호하에 7월 14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이는 정식 귀국이 아닌 밀입국이었다. 융희제 즉위 전날인 1907년 7월 19일 경성부에 도착한 이준용은 신변 안전을 위해 정운복과 함께 진고개의 일본인여관에서 1박한 후에 운현궁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타의로 한국을 떠났던 이준용은 12년 7개월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한국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 체류 중 이준용은 제때 진료받지 못하여 신장병과 심장병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고 결국 이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편 황태자 척에게 아들이 없는 점을 주목한 일본 정부는 태자 책봉이 유력한 의친왕 강이 반일 성향과 자주 독립 의지가 강하여, 그 존재를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또한 엄귀비는 아들 황자 은(훗날 영친왕)의 황태자 책봉을 원하고 있었고 황태자 척이 심한 병으로 아들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고종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준용이 귀국하게 되면서 병약한 아들과 어린 아들들의 존재 때문에 고종의 염려와 불안은 극도로 고조된다. 황태자 척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우려한 고종은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병약한 황태자 척의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생모인 엄귀비의 간청과 일본의 영친왕 지지 등 여러 중론을 접하게 되면서 결국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을 잠재적 후계자로 낙점하게 된다. 고종은 1907년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하여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로 인한 외교권이 강제로 박탈된거에 대해 항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통감은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다는 구실로 고종을 압박하여 1907년 7월 19일 양위식(고종의 강제 퇴위)으로 황권이 황태자 척에게 양위당하고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이 헤이그에 보냈던 특사 헐버트에게 비밀리에 자신이 상해의 덕화은행에 맡긴 예치금을 찾아오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고종의 내탕금은 일본에 의해 이미 사라지고 난 뒤었다. 이처럼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을 침탈하는 등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이를 막기 위해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한편 1905년 4월 29일 근대적 형법전인 《형법대전》을 편찬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것을 1906년 2월 2일 법률 1호로 제1차 개정하고, 1908년 7월 23일 법률 19호로 제2차 개정하였다. 이 제2차 개정에서 총 880개조였던 법률 가운데 100개조를 개정, 252개조를 삭제하여 원래 모습을 없애 버렸다. 결국 1910년 《한국법전》에 형법으로 개명 삽입하였다. 일본 제국은 《형법대전》이 민권 신장의 성과였으므로 도리어 삭제해 버렸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제로 영친왕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영친왕은 융희제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영친왕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점과 일본의 영친왕 지지를 내심 못마땅해 했지만 이준용의 존재는 그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이준용을 미워했던 그는 왕자 출신이 아닌 왕의 생가 형제와 조카들에게 내리던 군호(君號)의 작위를 친형 이재면에게는 자신의 즉위 37주년이 되는 해에 내렸고, 이복 형 이재선에게는 어떠한 작위도 내리지 않았다. 조카 이준용에게도 어떠한 작위조차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영친왕의 태자 책봉으로 지위가 격하된 뒤에도 이준용은 황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나 한일 합방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고종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의 작위를 받고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고종 이하 흥친왕, 의친왕, 영친왕, 영선군 등이 일본제국의 황족 자격으로 황적에 편입되었다. 일부 일본 극우 귀족이 망국의 황족을 황족으로 대우해야 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자 메이지 천황은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 황족 가의 딸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1912년 5월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그는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일본 황적에 올리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장관 모두 덕혜는 사생아이므로 황적에 올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성대한 백일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나 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일본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덕혜옹주로 하여금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죽었다.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자살설, 그날 식혜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그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이는 사실 무근이라는 반론도 있다. 한편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독살설을 불신했지만 궁궐에 출입하던 인사들을 만나면서 독살설 쪽으로 심증을 굳히게 된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면서 이는 김규식의 편지서신과 함께 3·1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승하 당일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갑자기 뭔가를 마시다가 쓰러졌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 고 했다.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이문용(李文鎔)은 고종과 상궁 염씨 사이에서 본인이 태어났다고 주장하였지만 검증된바 없으며 관련 기록도 전무하다. 소설가 유주현이 이문용을 고종의 딸로 묘사한 장편소설 《황녀》를 발표하고, 1974년 같은 제목의 MBC 일일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었다. 드라마 때문에 황녀로 알려지자 1975년부터 전주 경기전 내 조경묘 수직사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황실 구성원들과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과 《승정원일기》에서조차 기록이 없는 이문용은 고종의 친딸이 아니라고 부정하였고, 당시까지 생존하여 있던 상궁도 이문용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민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 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위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 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 또한 1895년에 한성신문 기자로서 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 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비슷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이 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 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 개화파나 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 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의 언론인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 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 11월 25일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즉위 초반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즉위 중반에는 민비(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과 즉위 후반에는 민비가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때 그의 신하였던 윤치호는 '용모가 상당히 출중했다.'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의 찰스 1세와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윤치호 일기에서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그런 나라의 임금이면서도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며, 유교적 기준에 의하면 고종은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윤치호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즉, 윤치호는 사람들은 황제를 “너무나 증오해서 그를 망신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사람들의 혐오감이나 정의감을 만족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 해링턴(Harrington)은 한국 최초의 외국인 어의이자 미국 개신교회 선교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톨레도에서 쓴 1903년 10월 14일자 일기를 근거로 삼아 고종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해링턴의 의견은 1903년 10월 14일자 일기 내용은 그저 알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이었을 뿐, 모든 분야에서 유약하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는 데에서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알렌이 고종에 대해 쓴 다른 날짜의 일기, 예를 들면 1885년 2월 3일(화요일)(1884년 음력 12월 19일)자 일기에서도 “대단히 진보적인 조치”(This is a very advanced step)라고 하거나, 1886년 양력 9월 11일(토요일)자 일기에서 “국왕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The King is no fool)라고 하였지만 해링턴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의 주선으로 경복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조선의 왕은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며,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이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에게 강인한 성격이 있었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현존하는 고종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 가운데 가장 자세하면서도 가장 호의적이지만, 비숍의 평가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일본에서 고종이 암울하고 유약한 군주였다는 소위 “고종 암약설”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었으나 그는 일본에 적극 저항하지 않았고,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의 황적에 편입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직책과 일본 왕 메이지 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했다.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수시로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민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나 매과(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까지 기승을 부렸다 고 한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년 1월 24일(음력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음력 2월 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그의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이다.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 및 정리를 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 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 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당하였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 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명성 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명성 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 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의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쇄국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과정,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1년 1월 24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 소안동계(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안동궁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 진사 증 의정부영의정 이병원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후사가 없이 사망한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남연군의 작위를 받았다. 어머니 여흥민씨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노봉 민정중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증 의정부우의정 민경혁의 딸이었다. 흥선헌의대원왕신도비명과 흥선대원군묘지명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민씨의 꿈에 신선이 동자 하나를 데려와 그에게 주며 잘 기르라 부탁하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 한다.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후일 그가 난초나 매화, 대나무 등 사군자 그림, 특히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석파란 등을 그린 것은 모두 김정희에게서 배운 미술로 인한 것이었다. 17세 때에는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었다. 소년 이하응은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13세에 외가의 먼 일족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결혼하였다. 여흥부대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외6대조 민정중의 동생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의 딸이다. 여흥부대부인에게서는 딸 1명과 장남 완흥군 이재면, 차남 재황(왕으로 즉위)이 태어난다. 그밖에 소실 계성월에게서는 완은군 이재선과 서녀로 우봉 이씨 이윤용에게 출가한 딸 1명을 더 얻는다. 그밖에 기녀 출신으로 오래 그를 시중든 추선(1885년 사망)과 평민 출신으로 서씨 성을 가진 첩(1914년 1월 7일 사망)이 더 있었다. 1834년(순조 34년) 흥선부정(興宣副正)에 봉작되고 자신대부(資信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835년 보신대부(保信大夫)로 승진, 1836년에는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1841년 (헌종 7년) 창의대부(彰義大夫)로 승진한 뒤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고,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효현왕후(孝顯王后)의 국상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여 소의대부(昭義大夫)로 승진한 뒤 다시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였다. 1844년(헌종 10) 승헌대부(承憲大夫)와 숭헌대부(崇憲大夫)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다시 가덕대부(嘉德大夫)로 승진했다. 1845년 의덕대부(宜德大夫)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다시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승진했다. 1846년 수릉(綏陵)의 이장 때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 수빈관(守殯官)이 된 후 도감(都監)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가 다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임명되었다. 이후 비변사당상을 거쳐 1847년(헌종 13년)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로 선발되었지만 가지 않았고, 같은 해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그해 청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주원(厨院) 제조 겸 전의서, 사포서, 전설서, 조지서 제조에 겸임 임명된 뒤 동지사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을 다녀왔다. 그해 다시 종친부 유사 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1847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할 때,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하였다.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해 흥선군은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였다. 종친부 유사당상 재직 중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흥선군은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매각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으나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다른사람을 고용해 난을 그린 뒤 자신의 낙관을 찍는다는 소문도 유포되기도 했다. 심의면 등은 흥선군을 궁도령이라 부르며 조롱하였는데, 이 일로 고종 즉위 후 불이익이 가해졌다. 이때 그를 보필하던 인물은 김병학과 김병국 형제로 이들은 안동김씨 이지만 대원군 집정 후 불이익을 면하게 되었다. 판소리 서편제의 대가인 판소리 달인 박유전도 흥선군과 가깝게 지냈다. 후일 박유전은 흥선군이 집정이 되자 특별히 무과에 급제하게 된다. 그러나 고종 친정 후 명성황후 일파의 보복을 피해 호남에 숨어 살았다. 그 뒤 1895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한양으로 올라왔다가 1910년 한일 합방 후 그는 나라 잃은 가객이 노래 부를 수 없다며 전라도 어느 땅에 칩거하다가 겨울에 굶어죽었다 한다. 이후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궁궐에 무상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하여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고, 청년기의 이하응은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고의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며 생활했다. 투전에 가담하기도 했고 세도 가문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도 서슴지 않았다. 소설가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에서 당시 흥선대원군의 모습에 대해 겉모습은 술에 취해서 사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대장부로서의 기개가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식은 전조각에다가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닦아 크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까지도 감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의 가난하고 빈궁한 생활에 안동김씨 세도가는 그를 멸시했고, 사영 김병기는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하였다. 사영 김병기 외에도 안동김씨 집안의 문객으로 출입하던 심의면, 안동김씨 세도가문과 적당히 거리를 두던 문신 출신 천문학자 남병철은 대놓고 흥선군을 멸시했다. 이 중 심의면에게 앙심을 품은 흥선군은 1863년 음력 12월 집권하자마자 심의면의 벼슬을 해임해버린다. 윤효정에 의하면 그는 이용은에게 면박을 당하고는 오랫동안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한다. 어느 대감 집의 연회에서 이용은을 만났다. 이용은은 큰 소리로 흥선군을 나무랐다. 이용은은 그에게 '종실의 군이라고 하는 사람은 능묘에 제사를 지내는 일에나 연고가 있을 것이고, 궁중에 조용히 머무르며 그 체면을 유지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대감은 어째서 집에 머무는 날 없이 그리도 함부로 날뛰면서 돌아다니시오? 다시는 양반 재상 집에 출입하지 마시오."라 하였다. 호된 질책에 흥선군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욕한 이용은을 미워해 마음에 새겨두었다. 윤효정은 흥선군이 김병기에게 청탁을 했다 한다. 흥선군은 일부러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는 마음 속으로는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 흥선군은 똑같이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멸시하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남병철을 지목했다. 한때 김병기는 흥선군의 의도를 의심해서 왕의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장남의 과거 합격 자리를 달라고 천연덕스럽게 청탁했다. 흥선군의 집권 전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였던 것은 김동인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파락호가 되어 찌그러진 갓을 쓰고, 시장터나 돌아다니며 민중과 어울려 살지는 않았다. 단지 인간관계가 넓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안동 김씨의 왕족 숙청을 피해 건달 행세를 해야 했던 비참한 시절인 파락호 시절에 흥선군은 춥고 배고팠다. 심지어는 홍종의 집의에게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훨씬 신분이 낮은 하인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뛰어난 통찰력으로 건달 행세 속에 가려진 정치적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쌀장수 이천일은 다친 흥선군을 치료해주었고, 대원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에 행차를 하셨습니까”하고 물었고,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 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걸기(乞氣)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네”하고 대답했다. 이천일은 “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牌紙 쪽지) 한 장이면 족하실 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조처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황송해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 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보내왔다. 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 돈 천꾸러미, 장작나무 50바리, 정육 100근, 서초(西草, 평안도에서 나는 담배) 30근이나 되었다. 이를 받은 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라고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1864년 1월 16일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니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아들 고종이 임금이 되었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뜬 것이다. 즉 막중한 실세가 된 것이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날듯이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갔으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 두터운 은혜를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때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남편에게 잘해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칫상을 내어오게 하니 천일은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 뒤 큰 은반에 홍로주(紅露酒)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천일은 대원군 집정 후 선혜청 고직(庫直)에 임명되었다. 흥선군(이하응)이 기녀 춘홍의 집을 드나들던 어느날 금군병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어졌다. 이장렴이 뺨을 때리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창기에게 외상술이나 먹어서 되겠느냐 하며 호통을 외쳤다. 후일 대원군이 된 이하응(흥선군)은 이장렴을 이 운현궁으로 불러 "그대는 아직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느냐?"하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 대감께서 기녀의 집에 드나드실 때처럼 행동하신다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리게 했다. 한편 도정궁 이하전이 사사된 뒤 그의 소행으로 알고 운현궁에 자객으로 침투했던 이상지 역시 그를 돕게 된다. 이후 사복시 제조,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궁궐에 무상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하여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흥선군은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매각하기도 하였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으나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했다. 흥선군의 집은 뒤에 덕성여대가 들어선 곳 근처의 큰 기와집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계는 어느정도 부유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전 국민의 0.1% 안에 드는 부자였음을 증명한다는 시각 까지도 있다. 충청도 화양동의 만동묘에 갔을 때는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그를 부액(부축)하려 하자 화양동 서원의 한 유사가 그것을 말리며 나무라 하였다. 다른 안동김씨 인물들은 흥선군을 구박하거나 쫓아냈지만 김좌근은 쫓아내지 않고 귀찮아하거나 약간의 돈을 주어 내보냈다. 생계가 궁했던 흥선군은 매란국죽 등을 그려서 양반 사대부가와 중인가문, 역관 등에게 팔았는데, 중인과 역관들을 통해 석파란의 명성이 청나라와 일본에도 알려졌다. 한편 대원군은 이호준과도 교분을 쌓게 되었다. 이호준은 첩에게만 아들 이윤용이 있었고 정실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흥선군은 이들 형제를 신임하여 이윤용에게 자신의 첩이 낳은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이완용·이윤용 형제는 친일파가 되는데, 그 빌미를 흥선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흥선군은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와 그의 사촌동생 조영하와도 접촉하였는데, 조성하와 조영하는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승감을 찾지 못하던 조대비에게 그를 소개하고, 흥선군은 그들을 통해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조대비에게 접근하게 된다. 그는 숨은 능력을 감추기는커녕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비록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그는 왕족에게 주는 관직을 계속 맡았다. 왕족이 맡는 관직 중에서 유일하게 실무가 있는 관청이 왕족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종친부인데, 대원군은 1847년부터 계속해서 종친부의 유사당상을 지냈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 조대비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주겠다고 약속하여 동맹을 형성했다. 사돈인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 조영하와도 가깝게 지냈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안동 김씨 문중에 반감을 가졌으면서도 일부 안동 김씨 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안동 김씨 문중에서 흥선군과 줄이 닿은 사람은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 집안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 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 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886년(고종 23) 박제형(朴齊炯)이 쓴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의하면 흥선군은 아들 이재면을 과거에 급제시키려고 자기 집 재물을 저당잡혀 일부러 잔치를 벌였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박제형에 의하면 "흥선군의 맏아들 이재면은 똑똑하지 못했다. 흥선군은 그 아들을 과거에 급제시키고자 했으나 꾀를 낼 수가 없었고 기회도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부인 민씨(閔氏)와 작전을 꾸몄다. 그래서 비녀와 옷가지를 전당 잡혀 생일잔치를 차리되 기생과 악단까지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병기는 이하전 사사와 이세보의 유배 이후 흥선군이 신정왕후와 오랫동안 만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흥선군에게 왕위 계승권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김병기는 흥선군을 멸시하면서도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끝까지 바보행세를 하며, 장남 이재면이 부족한데 관직이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 사업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철종 말년, 도정궁 이하전이 계속 탄핵당하다가 1862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사사당하고, 얼마 후 경평군 이승응(景平君 李昇應)도 탐학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때 종실들은 죽음에서 면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고, 흥선군은 더욱 몸조심을 했다. 철종이 병석에 눕자 누가 차기 대권을 잇느냐가 화제가 되었다. 김좌근과 김흥근은 철종이 병석에 눕자 만나서 비밀리에 숙의했다. 김좌근과 김흥근이 내린 결론은 "만일 흥선군이 대원군이라는 위치를 믿고 국정에 간섭해서 그 위세로 나라의 법을 변경하면 이 일을 감히 누가 막을 자가 있겠소? 그리 되면 나라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종묘사직에 위험이 미칠 것이다."라는 것이다. 윤효정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놓고, 그들의 예상대로 됐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합리적인 반대 이유는 묵살되었다. 윤효정은 이를 두고 김좌근과 김흥근 두 정승의 통찰력과 먼 훗날을 염려하는 마음이라 평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둘의 만남을 전해듣고 앙심을 품게 된다. 다른 이들은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며 그가 집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흥선군에게는 아들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그와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김흥근은 차라리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신의 차남인 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1864년 1월 16일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을 보필하라며 형식상으로 수렴청정을 행하니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일문을 축출하고 문벌과 사색당파를 배제한 인사등용을 하였으며, 영의정에 조두순, 좌의정에 김병학, 훈련대장 겸 포도대장에 이경하를 임명했다. 한편 집권 후 안동 김씨의 영수격이며 순원왕후의 동기간인 영의정 김좌근이 사임하였다. 1864년 판서와 좌찬성을 역임한 김병기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김병기 등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일부 포섭하면서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 김병국 등 안동 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좌근과 김병기는 그가 집정하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조대비는 김좌근 등의 반발을 무릎쓰고 흥선군의 정치 참여를 공식화했다. 명목상은 조대비가 수렴청정, 곧 섭정을 하지만, 실제로는 흥선군이 권력의 일선에 등장하였다. 조선 500년의 금기를 깨고 종친들을 요직에 등용하였으며, 서얼의 관직 진출도 확대했다. 정조 사후 확정된 노론의 일당 독재도 깨트리고, 소외되어 있던 다른 당파를 이전보다 고르게 등용했다. 특히 그는 1801년 이후 요직에 오르지 못한 남인계 인사를 중용했다. 서애 류성룡의 후손인 남인 류후조(柳厚祚)를 발탁하는 등의 파격 인사를 단행한다. 그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집정하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또한 그동안 세도를 누려온 안동 김씨 일족들을 대부분 몰아내고, 파벌과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 행정을 펴나가려 노력했다. 대원군은 타락하고 훼손된 낡은 왕조를 재가동시키고자 했지만, 왕조에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편 김좌근 등은 그에게 왕의 아버지로서 대군의 예에 준하는 예우를 한뒤 정치참여는 불가하게 하였으나, 흥선군 스스로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고 예우는 받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실무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식 호칭은 대원군으로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이므로 존봉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사적인 호칭으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합하(閤下)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왕의 교서 대신 '대원위분부'라고 시작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권 전에 화양동 서원에 갔다가 모욕당한 일을 기억하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을 모욕한 화양동 서원 유사를 잡아 죽였다. 이때 화양동서원의 고지기를 불러 "내가 지금 화양동 서원에 가도 부액을 못하게 하겠느냐?"고 추궁하였으나 고지기는 그자리에 다시 와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대원군은 그 고지식한 고지기는 살려주었다. 한편 안동 김씨가문에 빼앗겼던 세력을 되찾아오고자 했던 조대비는 고종의 비를 자신의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로 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해야 했다. 1865년 대원군은 왕비 간택을 시도한다. 그 중 민치록의 딸 민자영이 최종간택되었다. 그가 명성 황후를 간택한 배경에 대한 설은 두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대원군이 사람을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닌데 명성 황후의 본성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장차 자신의 최대의 정적이 될 것이 틀림없으나, 그래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족관계에 있어서 민규수만한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설마 장차 자기를 없애려고 들기야 하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눈감고 왕비로 간택했다는 설 이다. 두 번째는 사실 당시에는 명성 황후가 대원군이 만족해할만 한 아주 얌전한 규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부인 여흥부대부인이 적극 추천했다는 주장도 있다. 윤승운 화백이 2000년 어린이 잡지 생각쟁이에 연재한 역사만화에 의하면 대원군은 명성 황후를 보고는 호랑이같은 기개에 놀랐다고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 야망이 큰 인물임을 한 눈에 알아본 것.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를 두려워한 그는 일부러 아버지도 없고 형제나 혈육이 없는 민자영 규수를 최종 왕비로 낙점했다. 이렇게 해서 왕비가 된 명성황후였으나 처음 중전이 됐을 때의 명성황후는 첫인상 그대로 얌전하고 온순한 중전이었으나,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1868년(고종 5년)에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을 때부터라고 한다. 고종 3년, 궁인 이씨가 고종의 첫아들인 완화군을 낳았을 때 대원군은 도에 넘칠 정도로 몹시 기뻐했고, 이로써 종묘사직이 더욱 튼튼해졌다고 하며 고종에게 기쁨을 털어놓았는데, 그때 옆에 있던 명성황후를 거의 무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에 명성 황후가 원자를 낳았으나 생후 수일만에 죽자, 명성 황후는 임신 중에 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너무 많이 달여 먹었기 때문에 어린애가 죽었다고 할 정도 였으니, 이 무렵의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얼마나 싫어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케 한 구미 열강은 한국에 대한 개항 압력을 점점 노골화하였으나 대원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1866년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없앴고, 그 직후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및 미국(1871년, 신미양요)과 강화도에서 각각 군사 분쟁이 일어났으나 대원군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교섭은 중단되었다.(→조선의 대외 관계) 그리고,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한편 양요가 일어났을 때 한양에서 도주한 양반은 관리 임용에서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 1869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년)과 대정봉환(1867년)를 알리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한편 증기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동강에 가라앉았다는 말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그것을 건져다가 한강에 옮겨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증기선 복제 계획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김기두 등 기술자를 시켜 국가의 경비 수십만 냥을 들이고, 조선 정부에서 보유한 동과 철을 거의 다 들여 1876년 무렵에 제너럴셔먼호와 똑같은 형태의 선박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증기기관의 연료로는 목탄을 썼다. 그러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고친 뒤에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자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나름대로 구미의 신기술에 호기심이 있던 그는 격침당한 제네럴 셔먼 호의 증기 엔진을 선공감에 주어 그 원리를 이해해보도록 지시했으나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또한 서양 소총의 총탄을 화승총에 넣고 실험하게 하여 방탄복을 만들었는데, 솜을 압축하여 두껍게 갑옷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개발한 압축한 솜을 겹겹이 넣은 이 방탄복은 오히려 신미양요 때 병사들이 불에 타죽는 원인이 된다. 한편 신미양요 당시 압축한 솜을 겹겹이 넣은 방탄복을 입었다가 불에 타죽은 병사들에 대해 당시 참전했던 미군 병사의 일기와 기록을 통해 전한다. 고종이 즉위하자 마자 불굴의 투지를 지닌 오만하고 개성이 강한 그는 왕의 교서 대신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고 시작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이경하(李景夏)를 신뢰하여 집권 직후 이경하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자신의 측근이던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 세칭 천하장안으로 불리던 인사들을 배치하여 정보 탐지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안기영 등을 신임하였다. 화서학파를 이룬 노론계열 인사 이항로 역시 대원군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항로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반대하다가, 철폐령 이후 대원군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은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를 자임하게 된다.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조성하와 조영하 역시 초기에는 신임하였으나 섭정을 겸하면서 조씨 일족을 요직에서 배제하여 소원해졌다. 이들 역시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실학에 관심이 있었고, 노론 외에 노론 실학자와 남인, 소론과 300년간 정권에서 배제당한 북인계 인사들도 중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1863년 12월 김좌근과 안동김씨 척신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군에 준하는 예로써 가마를 타고 보국숭록대부 이상은 시생을 이하는 소인으로 칭한다 하여 대원군을 우대하되 현실정치에는 나서지 못하도록 제약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특혜를 거부하고 일반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겠다고 고집하여, 정권불간섭을 전제로 한 우대를 거절하였다. 이후 그의 사저는 왕이 출생한 곳으로서 궁궐로 불리게 됨에 따라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색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중용하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색이던 조정에 다른 노론계 인사들과 소론계 인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한 연회에서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궁궐의 기둥을 세워 산보다 더 높이 하겠다고 선언, 이 뒤로 남인계 인사인 류후조와 북인계 인사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자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이항로 등은 반발하였다. 또한 정도전에 대한 복권여론을 주도하고, 유종공종이라는 사액 현판을 내리기도 했다. 정몽주를 종주로 여기고 그 학통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각지의 노론, 소론계 인사들은 처음의 노론, 소론인사 중용에 찬성하였으나, 남인, 북인도 중용하고 정도전에 대한 복권 의사를 피력하자 즉각 반발한다. 고종의 즉위 교서에서 밝힌 바 ‘모두 더불어 유신(維新)을 단행’해야 한다는 요구와 조대비가 형식상의 수렴청정을 하며 흥선대원군에게 힘을 실어주자, 그는 곧바로 개혁에 착수한다. 그는 곧 시경 문왕편의 고사를 언급하며 함여유신(咸與維新)을 선언한다. 우선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당쟁의 원인이며 국가 재정에 피해를 주던 서원도 47개소만 남겨 두고 대폭 정리하였다. 서원 정리는 착취로 고통 받던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黨派)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사 업무를 맡게 하여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하였다. 대원군이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자연스럽게 퇴출당했다. 영의정 김좌근이 사직하고 판서를 역임한 김병기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당했다. 김좌근의 후임으로는 조두순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안동김씨 일가를 모두 퇴출시킨 것은 아니다. 대원군과 사돈 약속을 맺었다는 김병학, 김병국의 경우 안동 김씨들이 퇴출당하는 과정에서도 정승을 역임하는 등 그와의 밀월관계를 지속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의 부활과 비변사의 유명무실화로 조선 중기 이후 군사와 행정기능이 한곳으로 집중된 것을 다시 분산시켰다. 법치 질서의 재정비를 위해서도 노력하였고, 세도정치의 혁파와 탐관오리 일소에 노력하였으며,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학대를 엄금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六典條例)》 등과 《삼반예식(三班禮式)》, 《양전편고》, 《오례편고(五禮便攷)》 및 《종부조례(宗府條例)》 등의 법전을 편수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완비하려 했으며, 의복제도를 개량하는 등 사치를 엄금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는 폐단이 많았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확보와 민심 안정을 꾀했다.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고,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지방관직에 대한 매관매직을 금지하였고, 유명무실화된 암행어사를 다시 파견하여 지방관들의 비리행위를 조사하였고, 지방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였고,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직접 보고받는 등 철저하게 실시했다. 5척 단신인 흥선대원군은 기강을 확립한다고 길게 늘어진 양반들의 도포 자락을 짧게 자르게 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도포 자락에 뇌물을 숨겨서 왕래한다고 해서였다. 긴 담뱃대도 대를 짧게 잘라 피우게 하였으며 긴 갓도 줄이는 등 의식 개혁운동을 시행하였다. 신복룡의 견해에 따르면,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우선 중화사상의 탈피와 이를 통한 자주 의지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로 척신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약해진 왕권의 강화이며, 셋째로 안민과 국제적 공존을 위한 쇄국 정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이러한 개혁정책은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진주민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경복궁의 중건은 헌종 때 수리할 것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모자라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간언을 듣지 않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였고, 대장군 이경하에게 감독을 맡기고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결두세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 명을 작업에 동원했다. 또한 춤꾼과 기녀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열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3월에 방화로 추정 되는 불이 나 경복궁 중건에 쓸 재목이 모두 타버리자 사람들이 놀라 공사를 중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대원군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더욱더 재목을 채집할 것을 요구하여 공사를 독촉하였다. 그리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도성 4대문을 통과할때 통행료인 문세를 받았다. 또한 다시 당백전, 원납전 등을 주조하여 공사비를 조달, 동원했다. 재목이 부족하자 또 각처의 무덤가에 있는 나무까지 벌채하고는 "이것은 국가의 성스러운 일이니 그대 집안 선대가 영험이 있다면 필시 즐겨하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사비는 8천만 냥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부역에 신중을 기하고 관리와 일반 백성 및 종친(宗親)들에게 고루 원납전을 바치게 하였으므로 자진하여 부역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대원군도 이들을 위해 위로금도 지급하고 무동대(舞童隊)·농악대(農樂隊) 혹은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격려·고무하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큰 재목(材木)이 필요하여 능(陵)의 산림에서도 나무를 베어다 썼는데, 다음 해 음력 3월에 재목장에 큰 불이 나서 건축 작업 전체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1866년 3월 화재가 발생,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공사를 시작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불러 면전에서 크게 질책하며 극형에 처하도록 했으나 여러 조정 대신들의 간언으로 원상 복구의 책임만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경하와 흥인군은 목재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며 오히려 죄를 청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을 위해 대원군은 무리수를 둔다. 막대한 자금 조달을 위해 원납전 징수, 매관매직, 거기에 당백전이라는 악성화폐까지 유통했다. 매관매직도 어려워지자 거리에 병사를 풀어서 토끼몰이하듯 사람을 잡아 원납전을 받고 놓아주었다. 또한 도성 4대문과 4소문에는 통행세를 거두어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당시 고종이 거주할 만한 궁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복궁은 없어진 궁전을 새로 완전히 지은 것이 아니다. 후일 서울역사박물관부지에서 북쪽으로 사직터널 앞까지 뻗어있던 경운궁을 일부 헐어서 옮겼다. 새로 지은 건물과 옮긴 건물의 비율은 정확하지 않지만 상당수의 건물이 옮겨졌다. 경복궁 중건으로 소모된 재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다. 종래는 상민들에게만 부과하였으나 양반에게까지 확대해서 징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양반들의 불평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의 반발에 꺾이지 않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1호당 2냥씩을 균일세로 부담케 하여 그 실시를 강행했다. 양반과 상민을 가릴 것 없이 군포를 징수하자는 주장은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 1600년대부터 노론 실학파나 일부 남인 계열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의 존엄을 해친다는 반대 때문에 묵살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은 200여 년 만에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대원군은 김기두(金箕斗)와 강윤(姜潤)에게 지시하여 군용품으로 포군(砲軍)용 철모·목탄증기갑함(木炭蒸汽甲艦)·수뢰포(水雷砲) 등의 군사무기를 개발, 제조하게 했다. 그리고 서양 군대의 총탄을 막기 위해 솜으로 제조한 배갑(背甲)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무겁고 두꺼운 배갑은 쉽게 벗을수 없어 조선병사에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1860년대 말 대원군은 학우조비선(鶴羽造飛船)이라는 이름으로 비행선을 개발하게 하였다. 서양의 열기구를 목격한 그는 배에 열기구 비슷한 것을 연결, 열기구에는 학과 기러기, 두루미의 깃털을 붙이기로 하고, 군기감에 명하여 학우조비선을 개발했다. 학우조비선은 학과 두루미의 깃털을 모아 아교로 연결하여 배에 붙인 것으로, 배가 포탄에 맞더라도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할 목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배가 물에 닿으면서 아교가 모두 녹아 조비선 개발은 실패하고 말았다. 한강변에서 시연 도중 햇볕에 열기구와 깃털 사이를 붙인 아교가 녹으면서 실패하였다. 학우조비선을 개발하기 위해 학, 두루미, 기러기들을 잡아들여 깃털을 강제로 잡아 뽑았다. 솜과 목면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만든 갑옷 역시 여름에 통풍이 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그는 삼군부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친위군으로 양성하였다. 삼군부의 무장을 발탁할 때는 척족 출신을 완전히 배제하고 무과 출신의 전문 군인과 종친, 대원군이 신뢰하는 무장 등이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전문 무장을 양성했다. 무반을 차별하는 오랜 관행에 도전이라도 하듯 대원군은 무부(武夫), 진짜 군인들을 우대하고 중용했다. 이때 보인 군인들에 대한 각별한 예우는 후일 별기군 창설후 멸시당하던 구식 군인들에게 대원군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는 정치와 군사를 분리시킨 뒤 군사력 육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소수의 권력 독점을 배제하고, 행정과 군사를 분리해 국가 행정 기구의 조직력과 기능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대원군의 구상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삼군부를 자신의 친위군대로 양성하여 대원군 자신과 왕실을 호위하게 했다. 사상적으로 중농적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흥선대원군은 위민정치의 부흥을 위해서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위민정치의 구체적 실현으로써 그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고 안정을 꾀하는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토지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땅을 찾아내고 지역 토호와 유지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였는가 하면, 토지조사를 통해 부분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는 사창제로 개혁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감찰의 목적에서 타락한 도장(導掌)·궁차(宮差) 등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여 궁방전을 억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유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원이 당쟁과 연계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 병폐가 잇따르자 집권 직후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1871년 5월 9일 서원 철폐령으로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등 전국에서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8백여 개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대원군은 서원을 헐고 신주를 묻으라며 위패 처리에 대한 지시까지 직접 내린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에서 모시던 선현들의 위패는 모두 옹기 등에 의해 싸여져서 서원 근처에 매장되었다. 서원 철폐는 지방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으나 흥선대원군은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를 위협한다 해도 이 정책은 끝까지 밀고 나가겠으니 그리 알라."며 강행하였다. 서원 철폐령을 취소해 달라는 전국 유림들의 집단 상경집회가 있었으나 이때마다 대원군은 유림들의 집회를 강제 진압하고, 유림들을 강제로 노량진 밖으로 축출함으로써 유학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대원군을 지지하던 이항로 등도 이때부터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항로의 문인 최익현은 민씨 정권과 손잡고 대원군을 탄핵하기에 이른다. 1864년 4월 4일(고종 1년 음력 2월 28일)에 아라사에서 사람 몇 명이 두만강 얼음을 타고 함경도로 내려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오자 거절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권》 흥선대원군은 국경을 맞댄 아라사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해 아라사를 막아준다면 천주교 선교를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는지 천주교 신자를 모두 잡아들여 사형에 처한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이에 관해 김병학, 김병국 형제가 흥선대원군을 압박해 흥선대원군을 정치적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학설이 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강경한 통상거부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는 외국의 통상 요구에 불응하였고 양화 교역을 엄금하였다. 영국 상선과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충청도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오페르트는 그 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덕산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책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대원군의 통상 거부 의지는 보다 강경해졌다. 그는 서양인을 오랑캐라 하고 배척하면서 각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다.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배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1868년 3월에 미국 군함 셰년 도어 호는 셔먼호 사건을 문책하러 평양에 나타났다. 미군이 물러가자 대원군은 조선 병사가 미군을 격퇴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3년 뒤인 1871년 미국은 해당 문책사들을 해임하고 대원군을 굴복시키고 조선 통상을 강요하고자, 5척의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흥선대원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한성부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 조정에서 통상을 거부하고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1871년 5월 철수했다. 양요들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굳어졌으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척화정책을 추진한다고 해도 척화비는 세울 필요는 없었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간결한 문구가 전부 였다. 조선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포고령도 전국 방방 곳곳에 배포할 수 있는 수준의 행정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척화를 둘러싸고 국민의 여론이 아직 크게 갈라진 것도 아니었다. 서양과 통교하자는 사람은 당시 조선 전국을 뒤져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대였다. 진짜 목적은 기왕이면 척화에 대한 국민 의식을 고양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임용환에 의하면 대원군은 척화라는 이슈를 국가적 이벤트로 만든 것 이라는 것이다. 척화비는 전국 각지에 세워졌으나, 이때 세운 척화비는 흥선대원군 실각(1873년) 직후와 한일 합방(1910년) 직후에 파괴·매장되었다. 요들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 정치와 쇄국 정치는 결과적으로 많은 반발을 일으켜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유림 세력의 담합을 유도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한편으로 대원군에 의해 숙청되었던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 및 노론 세력과 손잡고 실력을 비밀리에 키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크게 반감이 있지 않았다. 그는 베르뇌 주교(천주교 조선교구장) 등의 선교사를 통해 남하 정책을 실시하는 제정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자 남종삼과 수차 회동하여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때마침 청나라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과 이전부터 싹텄던 위기의식에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가 가미되어 정책을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우호정책에서 강경 정책으로 바뀐다. 우선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용가치가 없었고, 지배 계급에게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해석 되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미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생길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종교를 앞세워 열강 세력이 침투하는’ 문제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66년 남종삼 등을 비롯, 8천여 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처형당했다.(→병인박해) 1866년부터 처형당한 천주교인의 수는 1~2만명을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들어와 포교하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화를 면한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하여 베이징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박해는 1872년까지 이어졌다. 프랑스는 조선정부의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였다. 보복 원정에 나선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한 뒤 서울근교 서강까지 진출했다. 그해 11월 프랑스 해군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려다가 6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었는데,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피해규모가 사망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조선 군대와의 교전에서 큰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로즈 사령관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군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공식 기록에선 프랑스군의 피해는 병인양요 전 기간중 3명의 사망자와 3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을뿐이며 오히려 조선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국방을 더욱 굳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의 일부 지도자들과도 연결을 취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이 없었다. 대원군은 깊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람보다 자신감을 표출하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리고 당색과 신분을 넘어 이런 인물들을 과감하게 등용해서 현장에 투입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와 자신감은 현실에 대한 무지나 아부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무지해서 큰소리를 쳤던 사람들은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아첨으로 지방관 자리를 얻은 인물은 더 큰 탐욕과 부정을 저질렀다. 그는 민씨 척신가와 동맹을 맺었다. 가장 심각한 인사실패는 민씨가와의 동맹이었다. 대원군이 겉보기에는 당색과 신분을 초월한 혁명적 인사를 진행하는 동안, 관계의 한 쪽은 민씨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중에 양쪽은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실수는 대원군 자신을 몰락시켰고, 조선을 사상 최악의 족벌 정치와 부정 부패로 몰아갔다. 모든 군사와 정무는 왕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와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 '고 하였다. 대원군은 국왕의 고유권인 인사권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처결하였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이에 명성황후와 조대비는 고종에게 그의 나라인지 대원군의 나라인지 반문하였다. 1873년,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1873년 11월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은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에 은둔하였다가 인왕산, 수락산 등을 방문한 뒤 양주군 시둔면 곧은골 별장으로 칩거했다. 곧은골은 1914년 가능리, 후대의 가능동에 흡수되어 직동 부락이 되었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민씨 집안은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력남용과 함께 부정 축재가 심하였고, 일가가 권력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점점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대원군과 안동 김씨 김병학의 밀월 관계는 쉽게 잊어버리고, 대원군이 안동 김씨들에게 천대와 굴욕을 당하고 살았으며, 세도정치의 재발을 염려해서 가난하고 몰락한 집안 출신인 명성황후 민씨를 며느리로 간택했다는 이야기만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大院位分付)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雷霆湯火, 무서운 천중과 끓는 물과 달구워진 쇠붙이)같아 관리나 일반 백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대원군은 큰아들 이재면을 왕으로 삼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재면과 이재선을 보던 중 나중에 이준용에 주목하게 된다.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이래 백성들의 주구를 감당할 길이 없어 오히려 대원군의 치정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명성황후의 온건 개항 정책에 반발한 조선 유림들은 다시 대원군 지지로 돌아선다. 쇄국정책을 펼쳤던 점이 조선의 유림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초기에는 명성황후의 고종 친정 정책에 지지를 보냈던 이항로-최익현 계열의 노론 화서학파는 명성황후의 온건 개화 정책을 비판하며 대원군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후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로 앉히려 하였다. 여기에는 이준용을 앉히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원군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고종과는 달리 이준용의 호탕한 성격도 대원군과 상통하는 면도 있었다. 한편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를 노린다는 소문도 돌았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장씨를 체포해서 국문, 처형했고,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76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 이항로, 기정진, 유인석 등 유학자들의 지지 외에도 민씨 정권의 재정 탕진 역시 대원군의 재집권 명분을 쥐여주었다. 황현에 의하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직, 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1874년부터 단계적으로 각지에 철폐된 서원들에 대한 복설과 부활조치가 감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인 천하장안은 최익현을 제거하려 했지만 곧 명성황후가 그를 유배보내면서 실패한다. 사색당파를 가리지 않은 인사정책도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1874년 봄 운현궁에서 나온 대원군은 양주군 직동으로 내려갔으나 고종의 대우는 매우 인색했다. 이에 민승호가 집권하여 청반에 있던 남인들을 완전히 도태시켰다. 어사들을 파견하여 남인, 북인 및 대원군의 빈객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사람들의 파직을 거론하여 이들이 거의 다 사직했다. 이때부터 남인들도 더욱 쇠퇴하여 어머니를 잃은 듯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과 팔도 유생들은 서로 줄을 이어 대궐문 앞에서 규탄과 원망을 하였지만 고종은 이들마저 모두 물리쳤다. 1874년 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해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주했다. 이때 민승호의 집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1874년 11월 민승호의 집에 폭발 사건이 벌어졌다. 대원군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민승호는 수재(조부모나 부모상을 당하면 그 자손된 사람 가운데 관리는 그 직을 사양하고, 선비는 과거 응시를 중단하고, 평민은 혼사를 중지하고 근신하면서 만 28개월 동안 복상하던 제도)하여 산승을 불러 아들을 위해 조용한 곳에서 기도를 드리게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외부로부터 함 한 개가 들어왔는데 기도를 드리던 중이라 나중에 열어본다며 미뤄두었다. 민승호 집에 함을 전달해준 사람은 이미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민승호는 의심했다. 그러나 기도가 끝나고 밀실로 함을 옮긴 뒤 민승호는 혼자 함을 살폈다. 함에 구멍이 있었고 자물쇠와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무심코 함을 열려고 하던 순간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불이 일어났다. 당시 그의 아들은 10세였고 그 할아버지(민치구)와 함께 서있던 채로 죽고 말았다. 이때 민승호의 양어머니였던 감고당 한산이씨 역시 현장에 있다가 죽고 말았다. 민승호 역시 온몸이 시꺼멓게 타고 말 한마디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죽을 때 운현궁을 두, 세 번 가리켰다고 한다. 그 후 살인청부를 내린 사람으로 대원군을 지목했지만 끝내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슬퍼했으며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원망했지만 복수하지 못했다. 때마침 흥인군의 저택에도 누군가 방화, 불이 났는데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흥인군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민승호 암살이나 흥인군집 화재 사건은 모두 대원군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비밀스럽게 조사를 했다. 얼마 뒤 장씨 성을 가진 남자를 붙잡았는데, 그는 신철균의 문객이었고, 신철균은 예전 대원군의 문하에서 나온 사람이라면서 죄를 씌웠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의금부는 용의자로 지목된 장씨 성의 사나이를 체포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철균 집의 문객이었다. 장씨를 체포해서 국문, 처형했고, 신철균 역시 잡아다가 공초를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1876년 화적(火賊)의 주모자로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 1881년 9월 13일 대원군 계열의 인사였던 안기영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재선 추대 음모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안기영, 이재선 등은 처형당했다. 이재선의 모역 사건에는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불문율에 붙여졌다. 세도정치를 거부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세도가의 대상을 안동김씨나 풍양조씨에서 자신의 처가인 여흥민씨로 바꾸었을 뿐이고, 그 여흥민씨 세력이 유림과 손잡고 대원군을 축출(1874년)하기 시작하면서 민씨가와 대원군의 협력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상을 바꾸었을 뿐 이라고 보았다. 대원군이 (집안에 재산이 있던 왕족으로) 가난한 파락호가 아니었듯이, 명성황후 민씨의 집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한 양반가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여덟 살 때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흥 민씨가는 조선 시대에 왕비를 세 번이나 배출한 명문가 였고, 명성황후는 그 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민유중의 직계 자손이다.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또한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구의 딸이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삼았다.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부대부인 민씨와 언니 동생뻘의 같은 항렬이며. 민승호와의 인연도 남달랐다. 민씨와 명성황후는 가까운 사이였고, 고종도 어려서 명성 황후를 알아서 안국동 이모 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즉 대원군은 철종의 처가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의 처가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초창기에는 민씨 정권의 세도를 일부 용인했으나, 권력을 독식하려던 민씨 일족이 대원군을 축출하면서 다시 권력을 획득하려는 대원군과 독식하려는 민씨 가문 간의 권력쟁탈전이 발생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허욱 등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에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이때 명성 황후는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명성황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민겸호는 당황했고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말이 끝난 직후 민겸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고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민겸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전마마는 어디 계시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마침 이를 본 어떤 궁인이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찢어 땅에 팽개쳤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후에 홍계훈으로 개명했다.)가 '그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동생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마라'고 소리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봉기군의 추대로 입궐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1882년 6월 고종에게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공식으로 선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과 내통한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자신도 이홍장 일파에게 납치되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되어, 1개월 만에 실권하였다. 군란이 진압된 다음에 허욱 등은 죽음을 당하였다.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보정부(保定府)에 감금되었고 흉선대원군(凶鮮大院君)이라는 멸시와 홀대를 감수하며 견뎌야 했다. 1882년 7월 12일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 등은 흥선대원군의 접대를 받았다. 그날 접대를 받고 돌아갔던 오장경과 마건충은 다시 군사문제로 회담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天津)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아야 한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거절하자 교서를 읽은 뒤 강제로 보교에 태워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으로 납치해 갔다. 이후 배를 타고 톈진에 도착, 흥선대원군은 4년간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생활하였다. 보정부는 톈진 시 변두리에 위치한 관청으로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150 km 지점의 외진 지역에 있었다. 청나라 장수 이홍장 등과 국제정세에 대하여 격론을 벌였고 납치주동자 마건충에게는 "되놈!"이라고 호령하면서 그 기백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황달을 앓기도 했고, 대원군은 그곳에서 난초를 그리며 소일하였다. 난을 치며 분노와 한을 삭이고, 정치적 시련을 예술로 극복하려 하였다. 난을 잘 쳤던 흥선대원군이기에 중국에서도 그의 난초는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다. 1882년 12월 장남 이재면이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였다. 조선에 체류하고 있을 때, 반대파로부터 그의 작호를 풍자한 흉선군(兇宣君)이라는 별명도 붙여졌다. 청나라에서는 흉악한 조선의 폭군이라는 뜻의 흉선군(兇鮮君)이라는 칭호로 그를 비하, 조롱하였다.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악랄한 시아버지라며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조롱과 모욕을 감수하였다. 청나라 군인과 문인들의 굴욕과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비밀리에 국내에 편지 서신을 보내 자신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는 1973년 10월 4일 대한민국 월간 문학사상 자료 조사연구실에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편지를 쓸때 그는 순 한글체로 썼는데, 이는 한자나 영어로 썼다가는 발각되었을 때 청나라의 군인들이 해석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톈진의 보정부에 감금된 뒤에도 몰래 비밀리에 편지를 써서 인편을 통해 고국으로 부쳤다.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은 흥선대원군이 민승호 일가를 폭탄테러로 죽였다고 단정하고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대원군은 바로 비밀편지를 작성하여 아들 이재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이재면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톈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노서아 공사에게 대원군 귀국 반대에 후원해 줄 것을 청하는 밀서를 보내기도 했고, 민영익 등은 대원군의 귀국을 강하게 반대하며 반발하였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그해에 과거에 급제한 신진관료 김명규(金明圭)는 문의관(問議官)으로 톈진(天津)에 가서 대원군의 귀국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1885년 초 원세개는 대원군의 귀국을 주선한다. 1885년 4월 이재면은 귀국하였고, 1885년 8월 이재면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같은 달 원세개의 주선으로 배를 타고 이재면의 시종을 받고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기생 출신 애첩인 추선의 죽음을 보았고, 이후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노렸다. 고종은 형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보려 인천항까지 나왔으나 그는 오랜만에 보는 고종의 얼굴을 외면하였다. 그러나 추선의 죽음 소식을 접하자 노상에서 대성통곡하였다. 이후 그는 고종이 명성황후에게 휘둘린다고 단정하고 고종 폐위를 기도한다. 고종을 폐위시킨 뒤 아들 이재면이나 서자 이재선을 옹립하고, 다시 섭정으로 재집정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대원군은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재선과 이재면을 옹립하려던 추대기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흥선대원군은 장손인 이준용을 추대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용 추대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유순한 성격의 이재면이나 고종과는 달리 괄괄하고, 한번의 꾸지람에도 기죽지 아니하며 적극적인 손자 이준용의 성격과 태도에 기대를 걸게 된 대원군은 이후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속 시도한다.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흥선대원군은 전봉준 등과 연락하며 동학 농민군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났다고 기술하였다. 민승호일가 폭사 사건 이후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대원군은 수시로 자객과 폭탄 테러 위협에 시달림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축출할 계획을 시도한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흥선대원군과의 면담을 마친 뒤 전봉준은 다시 길을 떠나 전라북도 고부로 내려간다. 한성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 전봉준은 강연을 다니며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과,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새로운 세상이 일어설 것이라는 것과, 흥선대원군이 자신들을 일부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고 했다. 전봉준은 사람을 모았고, 그가 흥선대원군과도 연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893년 3월 무렵 원평에 장소에는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자발적인 지원과 기부를 통해 이들의 숙식을 해결하였다. 동도문변(東徒問辨)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부패·반침략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893년 3월 말경에 충청북도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 집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은군은 당시 동학의 교조인 최시형이 종종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도들의 일부는 그보다 앞선 2월 경 한성부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를 올렸다.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계속된 상소의 내용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 처벌 등이었다. 전봉준은 이들의 상소가 성공하면 호응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들과 호응하기로 한 보은집회가 취소되면서 한성부에 올라간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1만 여 명 이상의 많은 인파의 대규모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전봉준이 떠난 직후 일어난 이 시위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의 집회를 주목하게 된다. 1893년 3월 한 달 동안 1만여 명에 가까운 인파를 동원한 전봉준의 능력은 흥선대원군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894년 봄 동학 농민 운동 발생 당시 일부 동학군 지도자와 결탁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그에 의하면 동학군 중 온건파 지도자들이 그를 섭정으로 복위시킬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포섭한 동학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손화중도 있었다. 손화중의 부인인 유씨가 임종 직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손화중도 대원군을 만나고, 그의 서신도 받았다고 한다. 손화중의 부인 유씨에 의하면 손화중은 '동학 농민 운동 중에 서울을 다녔는데, 대원군하고 직접 상면을 했다'고 한다. '그때 대원군의 서신도 받아 갖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다.'는 증언을 했다. 갑오경장 초기에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 폐서에 착수하였다.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24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을 비롯한 일본 공사관 요원들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에 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좌절당하였다. 그는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공격, 폐서인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일본 영사관에서 호응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연관성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1894년 9월 상순 허엽, 이병휘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나자, 위기를 느낀 대원군은 개화파인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이어 개화파 암살을 고종주, 김국선 등에게 담당시켰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축출 및 이준용 추대 쿠테타가 실패한 것이 개화파들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김국선은 서울 창의문 내 신당에 살고 점술이 직업인 심원채로 하여금 무리를 모으게 하여, 전동석 이하 여러 사람을 모았다. 전동석과 심원채는 사제간이었다. 조용승, 윤진구, 정조원 등 은 이 일을 찬조하여 그 비용을 마련하였다. 거사와 관련하여 대원군으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고종주에게 서간이 보내졌다. 1894년 9월 14일에 보낸 1차 서간에서는 김학우, 김가진, 김홍집 3인이 거명되지 않았고, 창의문 용사가 많이 모여 개화당을 진멸할 수 있다고만 하였다. 9월 20일에 보낸 2차 서간을 통하여 비로소 3인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리고 9월 27일 보낸 3차 서간에서는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전달할 때 김국선이 구전으로 이완용, 이윤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권모 등을 지목했다. 이 서간에서는 기회를 놓치면 성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4차 서간을 지시에 따라 전동석에게 전하여 돌려보게 하였다. 대원군의 4차 서간은 9월 30일에 보내졌다. 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암살 대상이 된 개화파들의 동태를 살펴오던 이들은 김학우의 주변에 계엄이 없음을 탐지하고 심원채가 모은 장사, 검객을 동원하여 거사에 착수하였다. 자객들은 1894년 10월 3일 밤 김학우의 서울 전동 사저를 습격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김학우를 죽이고 그의 친구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어 다른 개화파들을 죽이려 했지만 경무청의 기찰이 엄해 착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암살을 통한 개화파 제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894년 7월 초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제3차 집권하였다. 이때 그는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 을 하였으나,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 소신을 피력하자, 일본은 그에게 은퇴를 강요한다. 그와 동시에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다시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 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 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 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고종이 평양의 청장들에게 보낸 밀서를 일본 측이 문제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었다. 이에 대원군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에게 자신이 추진한 항일 운동에 대해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였다. 결국 이준용 추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했다. 1895년 3월 24일 이준용이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이준용을 구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절박한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 공사와 각국 영사들이 이준용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나서서 결국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은 일본영사관 영사로 임명되어 떠나게 됐다. 농민전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한 대원군파의 시도는 좌절되고 대원군은 정계은퇴를 강요당했을 뿐 아니라, 1895년 4월 29일 발표된 대원군존봉의절에 의해 사실상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대원군존봉의절에는 '대문에 총순, 순검으로 입직케 한다', '대소신민이 칙명 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알현치 못한다', '출입할 시에는 궁내부에 먼저 알려 궁내부관원으로 배종케 하고 입직하는 총순, 총검도 경위케 한다'고 하여 대원군과 외부 인사의 접촉을 사실상 차단했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의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후에 유길준은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대원군이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아 거사를 단행한 것이 가장 큰 실수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1895년 초 김홍집, 유길준 등의 급진적 개화파를 포섭, 내통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 계열, 민씨 일족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처지였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민겸호, 민영목, 흥인군 등을 사살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김옥균의 암살을 획책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원군은 개화파를 제거하려 하였지만 고종, 명성황후와 개화파 간에 사이가 틀어지면서 대원군은 이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급진 개화파는 대원군에게 명성황후가 개혁가들을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알려왔고, 대원군은 명성황후 및 온건 개화파, 근왕세력과 등을 돌리게 된 유길준 등의 급진 개화파를 포섭했다. 개화파와 손잡은 그는 명성황후 제거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다녔다. 위정척사파, 동학 농민군, 개화파 일부와 손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본격적으로 명성황후 폐출 작업에 착수한다. 청나라와 일본 공사관의 청나라 외교관, 일본 외교관을 설득하여 명성황후의 패륜성을 지적하며 그를 폐출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했는데 이들은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오카모도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밀리에 일본 공사관을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그가 수시로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었다 고 지적했다. 8월 16일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에서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 서명을 받아냈다. 각서는 거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한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아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이 각서에 자필 서명하는 자리에는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도 함께 있었다. 대원군은 출발에 앞서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고유문은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의 강요가 아닌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적은 성명서였다. 일본에서 명성황후 암살을 계획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거사 고유문이 발표되면서 첩보를 입수한 조선의 식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자객이 파견되자 사람을 보내 그들을 돕도록 했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양력 10월 8일을 전후하여 친일적 성향으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성향에 대해 단지 ‘반일 성향이 아니었을 뿐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1895년 가을 그는 일본 영사관을 찾아 일본 공사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유길준에 따르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살해됐다는 것은 경복궁 내 강령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군에게 즉각 보고됐다. 대원군은 겁에 질린 고종이 그를 부르는 형식을 빌려 이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들과 대면하게 된다.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향하던 바로 그 시각, 명성황후의 시신은 홑이불에 싸인 채 대궐 소나무 숲으로 옮겨져 석유가 뿌려진 가운데 초가을의 새벽 하늘로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대면한 자리에서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시해된 뒤 손자 영선군 이준용은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이준용의 석방 직후 흥선대원군은 즉시 강화군 교동도로 사람을 보내 을미사변의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준용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강화군 교동도에 머무르다가 한성부로 갔다.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의심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일본 낭인에 의한 명성황후의 암살에 대해 그는 간판마담으로 끌려간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유길준, 박은식 등은 그를 의심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유길준은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보낸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한편 유길준 역시 명성황후 살해 당시 협력한 조선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 정침(正寢)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윤 3월 26일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고종은 을미사변 사건의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이라 봤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이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고, 흥친왕 이재면은 혹시나 자신도 죽임당할까봐 대원군의 부음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러나 상여가 노제를 한 뒤 서문(西門)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상여가 공덕리로 가는 것을 보고 서대문 밖까지도 쫓아갔다고도 한다.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아소당 뒤뜰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898년 5월 16일 한성부 성저십리 서강방 상수일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합장, 이장되었다. 1908년(융희 2년) 1월 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雲川面 大德洞) 산 동쪽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1907년) 11월10일에 시작돼 융희 2년(1908년) 2월1일에 마무리됐다. 1966년 6월 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되었다. 외모에 대해서는 '형형한 눈빛과 매섭고도 날카로운 하관 '이라 한다. 헐버트(H.B Hulbert)는 자신의 저서《대한제국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헐버트에 의하면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작가 김동인은 역사소설《운현궁의 봄》에서 대원군은 지배계급의 횡포로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대원군이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민중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김동인은 대원군을 호랑이같은 사내대장부이면서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딜줄을 아는 속깊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원군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는 기녀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 이라는 평가가 있고, 반면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곧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 침공(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 등 서구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자구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또한 대원군이 중시했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게 하려는 국제적 공존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이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보낸 치서(致書)에서도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발전과 부흥의 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 와 '왕권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 가도 엇갈린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천주교인에 대한 대량학살과 동학 탄압, 서원 정리 과정에서의 유학자 탄압 역시 인권탄압과 종교탄압이라는 비판이 있다. 손자인 순종은 '태황제(고종)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은 황제의 본생부로서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의 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요행의 문로를 막고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고 평가했다. 현재,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다. 윤효정은 자신의 저서에 그의 어려운 생활을 설명하면서도 김병기에게 청탁하는 것을 두고 '몰지각하며 비열하다'는 평을 짤막하게 내놓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조선의 발전을 저해하였다고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양이(攘夷) 의식에 따르는)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정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라는 것이다. 역사가이자 유학자인 황현은 대원군의 월권행위와 독재를 지적, 비판했다. 황현에 의하면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내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명령을 발령할 수가 없었다. '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대원군)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는 것이다. 군주도 아니고 인사부서인 이조의 장이나 정승이 아닌 대원군에게는 인사 임명 권한은 없었다. 대원군 집권시 전국 각지에는 대원군에게 감사하는 선정비도 세워졌다. 여러 고을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 자신이 직접 세운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선정비 건립 자체가 불법이었고, 이를 대원군이 몰랐을 리도 없다. '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개혁 정치의 핵심이자 목적인 불법적 관행을 제거하여 국가의 법체를 회복하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국왕의 아버지 라는 지위를 이용한 권력이었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선정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과시했다. 임용한은 선정비와 척화비를 보면 독재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재자로 변해갔다 고 평가했다. 매천 황현은 그가 권력남용을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권력남용의 근거로 매천 황현은 대원군이 10년간 집정할 때의 위엄으로 '대원군분부'란 다섯 자가 곳곳에 퍼져 뇌정탕화(무서운 천중과 끓는 물과 달구워진 쇠붙이)같아 관리나 일반 백성들은 항상 관청의 법률에 저촉될까봐 노심초사했다. 이에 따라 대원군의 실각을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암살을 사주, 협력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는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일본 공사관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명성황후가 반일성향으로 변신하자 명성황후 제거작업에 착수한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유길준은 그가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여 대원군의 개인적 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 국가 외교관들은 명성황후시해와 관련해 일본측의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이 사건의 주범이 대원군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원군을 기피인물로 삼았다. 흥선대원군이 왕비 암살에 어느정도 영향을 행사했다고 본 윤치호는 대원군을 대완근(大頑根), 이역(李逆), 이친(李親) 이라 불렀다. 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은 "대원군은 그 지위가 군주와 같아 대권이 손안에 들고 모든 관료가 그 지휘를 따르면 만백성이 그 위세를 우러러보고 명령하고 행하고 금하면 그쳐 후세의 이윤이나 주공과 같이 될수도 있다"고 하였으며"대원군이 섭정함에 주의 사정과 제반 조건이 중흥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학식의 부족함이 애석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그를명성황후 살해의 동조자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황현 역시 매천야록에서 그를 명성황후의 암살 협력자로 지목했고, 유길준 역시 그를 명성황후 살해 조선인 고위 협력자로 지목했다. 인재 채용에 있어서 폭넓게 지지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소극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소설가 장덕조는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復心人物)과 골육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하였다. 편협하고 용렬하다는 비판도 있다. 본심을 숨기고 안동 김씨 문중을 찾아가 굴욕을 자처한 뒤 권력을 획득한 점 등 권력욕의 화신으로도 평가된다. 그는 일부러 김좌근에게 양아버지라 하면서 그에게도 용돈을 얻어 썼고, 김병기는 그를 심하게 무시했다 한다. 쿠테타를 일으켜 아들 고종을 몰아내고 이재면을 추대하려 한 점, 1881년 8월의 이재선 역모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앉히려다가 실패한 점,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한 점, 일본 공사관에 찾아가 명성황후를 제거하는데 협력해줄 것을 계속 요청한 점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집권 후 사적인 보복을 한 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원을 철폐하려고 7년여를 기다린 일에 대해서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평가와 '완고하고 고루하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령 당시 자신의 외6대조 노봉 민정중을 배향한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 연곡서원(淵谷書院) 역시 예외 없이 철폐하라 명하였다. 고종의 친정 선언 직후인 1873년 12월 10일 명성황후의 침전에 폭약을 설치해 경복궁에 대화재를 일으킨 세력의 배후 인물로 흥선대원군이 의심받았다. 한편 대원군은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874년 11월 민승호가 정체불명의 불교 승려로부터 선물로 받은 꾸러미가 폭발, 민승호 부자와 감고당 이씨가 그자리에서 폭사한다. 소포 폭탄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흥선대원군의 복수극이 분명했다. 민승호와 그의 아들, 민치구의 부인 등이 그자리에서 즉사했고, 민승호의 양어머니이자 명성황후의 친어머니 감고당 이씨는 몇시간 뒤에 사망했다. 명성황후는 이를 흥선대원군의 소행으로 여겨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한편 민영익 역시 폭사의 배후를 흥선대원군으로 보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임오군란을 전후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대에 그가 하수인을 사주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러나 1881년 이재선을 추대하려던 이재선의 역모 사건에는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허욱, 권정호(權鼎鎬), 이철구, 이두영(李斗榮)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의 사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부이므로 흥선대원군은 처형하지 못했고, 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와 이두영, 이철구 등을 능지처참시키고, 고종의 이복 형인 이재선은 제주도 제주목으로 유배보냈다가 사사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지어졌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집에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무능하면서 욕심 많은 흥인군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어머니와 둘째 형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어, 이는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흥선대원군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보다 무능력하면서 욕심이 많던 셋째 형 흥인군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1867년 3월 경복궁 공사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대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흥선대원군은 흥인군을 경복궁 중건 때 영선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당시 1년만에 전각과 재목이 방화로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형 흥인군을 책임을 물어 처형하려고 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형을 못마땅히 여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0년 동안에도 한 발짝 내딛을 땅조차 빌려준 적이 없어 흥인군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민승호는 흥인군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의 동정을 엿볼 심사로 친밀감을 표했다. 그리고 명성황후에게도 그 속 뜻을 설명했다. 흥인군과 흥선대원군의 감정대립을 이용, 민승호가 그를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다시 흥인군을 이용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염탐하려 하였다. 흥인군은 재물을 탐하는 나쁜 버릇이 심했다. 그는 이 한 때의 요행으로 작은 세도를 얻어 대부호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다. 이러한 흥인군의 행동거지를 눈치 채지 못할 흥선대원군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예민한 촉수로 이미 흥인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단속하면서, 거꾸로 흥인군을 통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탐문했다. 그러자 애초 민씨 일파가 계획했던 대로 운현궁의 동태는 알 길이 없어지고, 의정 대신이라는 지위는 흥인군의 재물 욕심을 채워 주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임오군란 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난병이 흥인군 저택 을 포위하자 이최응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밤새 잠을 못 자고, 6월 10일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별안간 떠들썩하는 바람에 급히 일어나 뒷담을 뛰어 넘으려 하였다.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 이는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과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도 인용되었다. 그는 대원군의 형으로써 민씨 일파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였다. 이재선 모역 사건의 배후가 흥선대원군이라는 의혹이 있다. 이재선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흥선대원군이라는 말도 있었다.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재선을 부추겼고, 이윤용, 황현 등은 이를 간파했다. 쿠데타 계획이 구체적으로 정해지면서 이재선 역시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했다. 이재선은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할 때 "큰사랑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큰사랑이란 바로 흥선대원군을 지칭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재선은 강달선으로부터 ‘벌왜’ 계획을 듣고 곧바로 흥선대원군에게 알렸으며, 흥선대원군은 ‘벌왜’를 이용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고 시도했다고 추정된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계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81년 7월부터 유림들이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것을 접한 대원군은 오히려 이재선을 독려했다. 흥선대원군은 “네가 벌왜를 주장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 흥선대원군 역시 어리석은 이재선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도 별도로, 유림의 접촉 전에 30여명과 모여서 사람을 동원, 정변을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거사를 하루 앞둔 8월 20일 한밤중에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은 한자리에 모여 거사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정했던 거사자금과 쿠데타군이 거의 모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1천 명으로는 어렵다는 의견이 사전에 나왔고, 승산이 없다고 본 일부는 비밀리에 이탈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병력들은 이탈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쿠데타 주도자들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유생들을 선동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거사시간은 해시(亥時, 오후 9~11시)로 잡았다. 8월 21일 아침 7시쯤 흥선대원군에게 전달됐다. 보고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그 결과 강달선 등은 정말로 쿠데타군을 거의 모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금품을 갈취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한 사기꾼’으로 몰아 체포했다. 이들을 체포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은 만약의 경우 쿠데타 모의가 누설되더라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었다. 그간 자신이 이들과 접촉한 이유는 역모를 정탐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대원군은 실패를 예상하고 역모세력의 입막음을 시도했다. 다른 죄명을 씌워 형조에 넘긴 것이다. 이재선은 8월29일 포도청으로 자진출두했다. 이재선은 억울하다고 하소연했고 증거가 없음을 빌미로 풀려났다. 그러나 비밀은 곧 들통나 1881년 8월 29일, 이재선을 비롯한 관련자 30여명이 체포됐다. 9월 3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광주산성의 장교들이 의금부에 자수했고, 이윤용은 입궐, 고종과 명성황후를 직접 찾아가 고변하였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달 외 30명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자백했다. 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관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정신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관련자들과 대질신문을 통해 하나둘 진상이 밝혀졌다. 이철구 등 일부만이 이재선이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조사 결과 쿠데타의 주모자는 이재선으로 귀결됐고, 흥선대원군은 빠져나갔다.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이들 중에는 이윤용도 있었다. 이윤용의 첫 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였으며 계성월 소생이었다. 이재선의 동복 친누이였다고 한다. 이윤용은 이재선의 처지나 흥선대원군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이윤용이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이윤용은 치를 떨었다. 이윤용의 생각대로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모두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다. 성공한다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다. 반면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을 세웠다. 이재선은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이 왜 자신을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의 모의에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대권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 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운현궁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양전(고종, 민비)에 고해 바쳤다. 1894년 대원군은 4회의 서신을 직접 보내 개화파 암살 지령을 내렸다. 1894년 9월의 개화파 제거 계획은 비록 법무협판 김학우 한 사람을 암살하는 데 그쳤지만, 이 사건이 대원군파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는 의혹이 강하게 일면서 조희연, 안경수, 김가진 등 개화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공포를 느끼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직무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안경수, 김가진 같은 사람은 지방관으로 전임하기를 원하 였다. 1895년 5월 23일 김학우 암살에 관여한 인사들 가운데 주동자였던 고종주, 전동석, 최형식은 특별법원에서 각각 모반죄와 모살죄로 교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으며, 하수인이었던 고치홍, 이여익, 서병규, 이영배, 김한영, 장덕현, 최형순 등은 모살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아 백령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처럼 대원군파는 정국을 바꾸기 위해 김홍집, 김가진, 김학우, 이완용, 안경수, 유길준, 박정양 등 개화파의 중심 인물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김학우만을 암살하는 데 그쳐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화파 제거 계획은 대원군의 지휘하에 고종주, 김국선 등이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전 도정궁 이하전 제거에 가담하거나 조장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대원군의 작가 유주현에 의하면 그를 이하전 사사를 뒤에서 공작한 배후로 의심한 이상지가 1863년 무렵 운현궁에 자객으로 들어왔다가 천하장안에게 발각되었다는 설을 채록, 자신의 작품에 기술해 놓았다. 박제형(朴齊炯)의 근세조선정감에 의하면 남병철은 흥선군이 이하전 사사에 관해 의심했다 한다. 박제형에 의하면 "안동 김씨 세도가와 의령 남씨 남병철은 흥선군을 깔보고 만나기만 하면 조롱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이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다. 하루는 흥선군이 남병철의 집에 갔는데 이날 남병철이 조용히 흥선군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이하전의 역모를 알고 있었지?”라고 했다. 흥선군은 깜짝 놀라서 일순간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그대는 어찌해서 이러한 나쁜 연극을 꾸미는 것이오?" 했다. 남병철은 크게 껄껄 웃으면서 "시백(時伯)은 어찌 그리 담이 작소."라고 했다." 한다. 박제형은 또 "벌써 남병철은 슬기로운 눈총으로 흥선군의 속마음을 알아차려 한번 시험해 본 것이었다. 흥선군은 그만 진땀이 나서 등을 다 적셨다. 집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십년감수했다"고 했다 한다. 이하전이 사사된 것에 흥선군도 일부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파락호 시절 그가 가난한 종친으로서 안동 김씨 일문에 신세를 지러 드나들 때 심의면 등은 궁도령이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는 이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1863년 권력을 잡은 뒤 심의면 등을 처단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1864년 섭정에 오른 뒤 심의면은 파면되었고, 심의면과 그의 아들들은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어느 안동김씨 가문에서 자신을 궁도령이라고 조롱하고 비웃은 심의면에 대해 앙심을 품고 보복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병기에게는 고의로 바보행세를 했으나 김병기는 그를 의심했다. 섭정이 된 뒤 김병기의 연회에 방문, 국수를 먹더니 탈이 난 것처럼 연극을 했다. 김병기에게 독살을 기도했느냐는 눈총이 가해지자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대원군이 토한 음식을 맛보았다. 쓰러지는 시늉을 하던 대원군은 바로 일어나 장난이라 하며 되돌아갔다. 즉위 직전에 화양동서원 만동묘의 묘지기들 중 일부를 장살시켰다는 의혹도 있다.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화양동 서원에 놀러 갔다가 서원지기와 시비를 벌였다. 의관도 정제하지 않고 서원내에서 부채질을 하자 서원지기들은 그를 발로 그를 차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뜨렸다. 대원군은 이 수모를 기억했다가 권력을 잡자, 아직 그때까지 살아있던 화양동 서원의 서원지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중 지금도 내가 똑같이 행동을 하면, 그렇게 행동하겠느냐는 질문에, 지금 오더라도 똑같이 대하겠다고 한 서원지기는 살려 돌려보냈다 한다. 그는 자신이 양반집에 출입하지 말라고 한 이용은에 대해서도 원한을 품고 있었다. 형 흥인군의 집에 불이 난 것이나,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이 도망치다가 고환이 터져서 도망치지 못하고 살해된 것도 흥선군의 짓이라는 설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한편 그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년 2월 21일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라는 것이다. 경복궁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면적은 432,703m이며, 동서 500m, 남북 700m 규모로 남아 있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실화로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 동원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고 한다. 1592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 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고자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을 난민들이 불태웠다고 하는데, 이에 관해 논란이 있다. 류성룡의 《서애집》에는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으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 들은 것으로,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은 왜군과 조·명 연합군의 전투가 거듭되면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5월 7일(음력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1895년 을미사변),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1910년에 한일 강제 병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1950년대에 대통령 이승만의 낚시터로 경회루 북서쪽에 조선시대 기법의 목조건물 하향정(荷香亭)을 설치했으며,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출동한 30사단 1개 대대병력이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로 명칭을 바꾼 뒤 태원전 권역에 머물렀다. 30경비대대는 주둔 후 천막막사를 사용하였으나, 1965년 경복궁 서북쪽 일대에 간이건물 20동과 콘크리트 블록 5동 등 반영구막사를 건설했으며 30경비대대 구조물은 1996년 철수까지 이용되었다. 1963년 1월 21일 경복궁 일대를 사적 제117호로 지정 보호하였으나, 그 해 10월 문화재관리국이 한 해 3백만원의 입장료 수입으로는 현상유지도 힘들다며 경회루 동쪽 약 7천평의 잔디밭을 헐어 골프장과 휴게시설·식당·주점·잡화점 등의 신축 계획을 발표했고 이는 여론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66년 1월 8일 정부는 선원전 영역에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한 건물 외형을 조건으로 하는 국립종합박물관 현상설계를 공고했다. 같은 해 착공하여 1972년 완공했으나 고종 2년(1865년) 건립돼 해방 이후에도 남아있던 건물인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등 9동 106칸의 전각을 철거했다. 1970년 5층 철근콘크리트조로 제2별관을 건설하였으며 후에 문화재연구소로 활용되다 2004년 철거되었다. 1979년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후생관을 완공하였고, 문화재관리국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구로 이전하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을 옮겨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2년에는 '역사상 수난의 현장에 대한 교육시설계획' 방침에 따라 건청궁 영역에 한식목조건물로 을미사변기록화전시각(2007년 건청궁 복원 시 철거)을 설치했다. 1990년에 들어서 2030년 완료를 목표로 경복궁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건립되어 공진회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1995년 철거하였으며, 1926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1997년 철거, 1935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1999년 철거,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 수정전 남측의 한식 건물인 무명각을 1998년 철거했다. 다만 조선총독부 박물관 창고로 건립(1915년)된 부속 건물은 현재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2010년 기준으로,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m(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2010년 9월 이후 광화문 권역이 완전 개방되었다.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이 추진 중으로 1차 복원이 중심 건물들로 경복궁의 뼈대를 갖추는 것이었다면,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 지난 1990년 시작하여 당초 2009년 완료될 예정이었던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은 총 1789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강녕전 등 93동 1만743.85m(3250평)를 복원할 계획이었다. 사업기간을 1년 연장한 2010년 기준으로 1572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89동 8987m(2720평)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하여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하여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사업기간 중 옛 조선총독부 청사와 옛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전통공예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 데서 나타나듯 일제의 유산인 네거티브 문화재를 철거하고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宮制)를 완비하는 것이 1단계 종합정비 사업의 목표였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 경복궁 중심축의 복원이 추진되었다. 구체적으로 침전 권역(1990∼1995) 사업을 통하여 강녕전 등 12동의 건물이 복원됐으며 동궁 권역(1994∼1999) 사업 당시 자선당 등 18동의 건물이 세워졌다. 또한 흥례문 권역(1996∼2001) 사업 당시 흥례문 등 6동의 건물이, 태원전 권역(1997∼2005) 사업으로 태원전 등 25동의 건물이 각각 복구되었다. 끝으로 광화문 및 기타 권역(2001∼2010) 사업으로 광화문과 건청궁 장안당 등 28동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1차 복원 정비 사업이 완료된 후 2011년 부터 2030년까지 20년 계획의 제2차 경복궁 종합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계획기간을 6단계로 구분하여 단계별 세부시행계획을 수립 및 추진하며, 총 254동을 복원하고 총 사업비는 약 5,4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 전각을 전면 복원하며 상대적으로 복원 의미가 떨어지는 지역으로 판단한 102곳은 기단 및 초석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사업이 완료되는 2030년 까지 전체 379동으로 원래 규모의 75.8% 수준으로 복원하며, 5단계 선원전 일대 복원에서는 복원지의 대부분인 73동을 기단·초석으로 복원해 미복원한 상태로 둔다. 2013년 5월 중 문화재청은 예산의 효율적 활용이 필요하며, 관람객 동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2010년에 수립된 기존의 계획을 대폭 삭감하는 "경복궁 2차 복원정비계획 조정안" 연구 용역에 착수했다. 권역별 대표 건물만 복원하고 부속 건물은 복구하지 않으며, 국립고궁박물관 철거 계획도 빠지는 것이 주 내용이다. 2015년 소주방 영역(내•외소주방등 18동)이 복원되었다.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오문(午門)이었으나, 세종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춘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근정문에 이르기 전 서쪽에 있는 작은 건물로 승정원에서 발행하는 관보의 성격을 띠는 기별지를 발행하는 곳이었다. 매일 아침에 각 관청의 기별서리들은 기별청에서 승정원에서 적어온 기별지를 베껴서 가지고 돌아갔다. 지방의 경우에는 기별군사라는 전령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기별지에는 다양한 소식이 실렸는데 주로 임금이 받은 상소문과 그에 대한 답, 조정의 인사 내용, 과거 시험의 날짜 등이 적혀있었다.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ㆍ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천추전(千秋殿)은 왕의 소편전(小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하였다. 때문에, 온돌이 없는 사정전과는 달리 천추전에는 온돌이 설치되어있다. 만춘천과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 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나, 중건되면서 격리된 형태로 변했다. 만춘전(萬春殿)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천추전과 좌우대칭을 이루며, 주로 봄에 사용된 건물이였다. 천추전과 마찬가지로 온돌이 설치되어있다. 다만, 천추전과 달리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세종 때 만춘전에 일성정시의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 즉 왕의 할머니의 거처이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녕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연산군, 인종, 영조 등이 거처한 곳이다.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 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폐비 윤씨가 거처하였고 연산군이 태어난 곳이며,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인성왕후, 정순왕후, 철인왕후 등이 거처하였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본래 교태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재건하였으나,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 중건 때의 것이다.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 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보물 811호인 아미산 굴뚝이 있다.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적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보물 809호인 자경전(慈慶殿)은 왕비의 정침(正寢)인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로 높여져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교태전에서 옮겨와 주로 머물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 현재의 자경전은 조대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한 것이다. 전면 마당 동ㆍ남ㆍ서쪽에는 각각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자경전 후정 담의 중앙부에는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고 십장생 무늬로 장식하였다.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전으로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신정왕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때 대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의 경회루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 태종은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 대 방지(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고종은 건청궁을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돼 있다.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 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 2007년 복원 이후 목재가 썩는 등의 현상이 보였고, 조사 결과 지붕이 잘못지어져 누수되는 것으로 알려져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다. 장안당(長安堂)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사랑채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 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곤녕합(坤寧閤)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의뢰해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궁중유물기준에 따라 복원한 자개침대 등 궁중생활용품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복수당(福綏堂)은 별채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궁인들의 거소로 추정된다. 관문각(觀文閣)은 고종의 서재로,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 관문당이었다. 그러다 1891년에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개축되었다.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로, 2층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문각은 양관이라 불리며 주로 외국인을 접견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와 부실 공사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부실공사로 1901년 헐리게 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알려지지 않아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건청궁 복원 사업이 진행될 때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 터만 복원되었다. 1992년 1월 관문각의 존재가 사진첩 등을 통해 확인되었다.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궁처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태원전(泰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고종때 태원전의 건축이유는 왕의 적통이 아니라 입양된 고종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건설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이다.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궁 안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은 제사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의 장자 단종과 연산군의 장자 이황 이 태어났으며, 덕종, 세자 시절의 연산군, 연산군의 세자 이황, 인종, 순회세자, 효장세자 등이 거처하였다. 또한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으나 복원이 되었다.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빈이 살았다. 일제시대 당시, 건물전체가 일본에 건너가 이왕가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터만 남아 버려져 있던 것을 1995년에 반환받아 현재 건청궁 옆으로 옮겨두었다. 현존 건물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1915년 자선당과 함께 철거되었다. 2009년 5월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9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열렸다. 여야 지도부와 전직 대통령 등 정치권 인사들을 비롯하여 수십만 명의 시민이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2010년 11월 9일에 처음으로 야간 개장이 실시되었다. 이후 정례화되어 연 2회 실시되었으나, 입장객의 제한없이 개방하자 하룻밤에 4만여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특히, 술판을 벌이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부 관람객들의 태도때문에 논란이 크게 일며, 문화재청이 대책없이 성급하게 추진했다고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2014년부터는 하루 최대 관람 인원을 1500명으로 제한하고, 월 4회 총 48일간 실시될 예정이다. 경복궁은 다른 궁과 달리 화요일에 정기휴관을 실시한다. 대한제국 순종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5일)은 대한제국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대한제국은 출범 당시 대한국 국제에 따라 조선 왕조의 법통을 이었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사실상 한국 황실의 혈통도 마찬가지로 조선 왕조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의 제27대 군주로 취급하기도 한다.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 중 이왕가의 수장인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순종은 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로 명성황후 여흥 민씨 소생이며,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으며 후사는 없었다. 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 이척은 2세 때였던 1875년 3월 8일을 기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5년 10월 8일, 모후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부왕 고종과 함께 일본 낭인과 한국인 협력자들에 의해 건청궁 (경복궁) 장안당에 갇혀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의 왕세자 작위를 이복 서제 의화군 이강에게 선양하겠다며 왕세자 작위를 사양(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하려 하였지만 부왕 고종의 만류로써 왕세자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일단락성 사건으로 겪으며 같은 해(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10월 12일을 기하여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그 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의 맛이 이상함을 알고는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해서 이가 다빠져 틀니를 끼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홍륙의 유일한 세력 기반이 고종이었던 사실과, 김홍륙이 유배 당시에도 지속 성향 관련 형식으로 고종의 안위를 물었던 사실을 고려하여 보자면 실제로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정적들인 친일파가 김홍륙에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07년 1월 21일 부황 고종에게 대리청정 위임을 받았고 이어 같은 해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았다. 1907년 7월 19일을 기하여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대리청정이었던 황태자 이척이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고(고종 양위 사건), 보위 등극과 동시에 대한제국 육군 대장 예편과 아울러 원수에서 대원수로 승급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 혹은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다. 순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이복 남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복 동생 중 그 당시 나이가 가장 어렸던 영친왕을 황위계승자(황태자)로 봉하였다. 그러나 이복동생 중에는 의친왕도 있었고, 의친왕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시켜서 황태자로 임명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영친왕을 태자로 봉했는가의 배경은 아직까지도 대한제국 역사의 미지수이다. 좌우간 1907년 8월 7일을 기하여 황위계승자 1순위급 후보였던 의친왕이 대리청정 직위에서 물러나고 10일 후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계승자(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즉위한 해인 1907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하였다. 이 무렵 일본이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토는 1909년 안중근에 의하여 청나라 만저우 지방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 한편 같은 해인 1909년 기유각서 사건으로 인하여 황제 순종의 실권은 제2대 대한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박탈되고 순종은 이듬해인 1910년까지 허수아비 군주의 신세가 되었다. 뒤이어서 제3대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고 급기야 한국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실권을 하며 1910년 경술한일합방늑약으로 인하여 사실상 일제가 한반도에 무혈입성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게 되었다. 1910년 일본 제국은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였으며, 아울러 역사상 왕조는 끝맺음하게 되었다.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아버지 고종의 뒤를 이어 그는 원치 않는 왕위를 이어받지만 이미 일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무렵이었다. 그는 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도쿄를 방문해 일본 군주를 알현할 것을 압박받는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의를 다해 마땅한 일이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인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순종 실록』의 부록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7년 6월 8일: 남대문역에 직접 나가서 특별열차를 타고 도쿄로 행하였다. / 6월 14일: 황궁에 나아가 천황과 황후를 봉황문에서 알현하고 현소에 참배하였으며, 이어 동궁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1926년 4월 25일을 기하여 심장마비로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아버지 고종황제의 홍릉 근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3.1 운동처럼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계파와 사회주의 계파가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순종이라는 묘호(廟號)는 1926년 5월 1일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제안한 순종, 경종(敬宗), 성종(誠宗) 중 수망(首望)대로 결정했다. 순종에게는 아래에 언급된 형제/자매 외에도 여러 친형제와 서형제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 고종#가족 관계를 참고하기 바람. 의친왕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다섯째 아들(서자)이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다.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 소생으로 출생한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휘는 강(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이듬해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병탄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뒤에 강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의 혐오를 사서 궐 밖으로 축출되었지만 청년 시절 의친왕 이강은 적모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다시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11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 아명(兒名)은 김숙(金淑), 1881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단락된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우사 김규식 등을 만나며 친분 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우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897년 10월, 의화군에서 의왕에 책봉된 그는 1900년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됨에 따라 의왕에서 의친왕에 진책되었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순헌황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1907년 부황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했다. 이때에도 그는 황태자 책봉의 기회를 박탈되었다. 이복 적형 순종이 즉위한 직후 1907년 7월 27일에서 1907년 8월 7일까지 이복 형 순종 황제의 대리청정을 잠시 맡았지만 여전히 황위계승 순위에서 서서히 멀어졌고 1907년 8월 7일을 기하여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순헌황귀비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형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그는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하여 이강 공이 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동농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주선하였다. 그 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보복을 당했다.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1919년 재판에 회부됐으며, 그는 같은 해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거절·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족에서 강제로 물러났으며,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23일 임정 요인들이 환국, 김구·김규식 등과 면담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1947년 3월에서 1949년 8월까지 2년 5개월간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 직위를 역임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 표현을 삼갔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다시 서울로 되돌아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황족으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없는 조건이 붙었다. 1955년 8월 9일 천주교로 개종, 병석에서 장면(張勉) 부통령(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 의친왕의 세례명은 비오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연금된 뒤에는 실의에 빠져, 이수길에 의하면 집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한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황족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재조명의 기회가 없었다. 능은 부황인 고종 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1975년 생모 김금덕(의친왕 이강의 측실)의 위독 소식을 듣고 귀국한 그의 다섯째 딸 이해경은 30년 넘게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의친왕이 임시정부 요인, 대동단 등과 비밀리에 서신연락을 주고 받은 점 등이 발굴되어 연구진행 중에 있다.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李源)은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이었던 황태손 이구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황태손 이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 자리를 계승하였다. 의친왕과 의친왕비 연안 김씨에게서는 슬하의 자녀가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친왕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이다.일부 측실은 황손을 의친왕에게 맡기고 재혼한 여성들도 있었으며, 의친왕비 김씨는 황손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근처에 생모가 양육하는 황손 몇 인을 제외하고는 사동궁(寺洞宮, 현재 종로구 인사동)에 대가족 형태로 거주하였다. 사동궁(寺洞宮)은 의왕의 사저(私邸, 저택)이며 동시에 의왕궁(義王宮), 의왕부(義王府)이다. 의친왕은 사격술과 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과 권총술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의친왕 숭모회(大韓帝國 義親王 崇慕會)는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르기 위해 2006년 설립된 단체로 의친왕의 제향을 주관하는 공식 단체이다. 초대 대표위원장으로 효령대군 19대손 이재용(李宰容)을 선임하고, 현재 의친왕 제향은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의친왕묘에서 의친왕의 후손 및 종현, 일반인들이 참반한 가운데 제향을 받들고있다. 2013년 4월에 공식적으로 의친왕숭모회는 해체되고, 봉행하던 의친왕 제향은 2013년부터 후손들이 지내고 있다. 의친왕은 죽기 전에 로마 가톨릭교회 귀의를 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다. 1955년 8월 9일을 기하여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교우이던 구왕실(舊王室) 서무계장과 부통령을 지낸 장면 등과 연락, 8월 15일경 그들의 영향으로 서울 가회동성당 박우철 신부를 불러다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8월 16일에 영면했다. 구리시 구리시(九里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중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동북이 왕숙천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접하고, 서쪽으로 아차산(287m)과 용마봉(348m), 망우산을 경계로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랑구, 노원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와 경계를 이룬다. 1914년 4월 1일에 양주군의 구지(九旨)면과 망우리(忘憂里)면이 합쳐져 구리면이 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6년 1월 1일에 구리시로 승격하였다. 시청은 교문동에 있다. 경기도의 중동부에 위치한다. 위도와 경도로는 북위 37˚33′10″~37˚39′50″, 동경 127˚06′05″~127˚10′25″에 놓여 있다. 서북부에는 광주산맥의 줄기가 있다. 서쪽에는 북한산, 도봉산처럼 낮은 산들로 이루어져있고, 동쪽에는 왕숙천, 남쪽에는 한강이 인접 행정 구역과 경계를 만들고 있다. 하천은 모두 17개로 총연장은 23 km이다. 1924년부터 1992년까지 약 10여년간 11.7℃이다. 경기지역보다 높다. 1월이 제일 추운 -4.1℃이며 8월이 제일 더운 25.9℃이다. 구리시의 행정 구역은 8동 288통으로 나뉘며, 면적은 경기도의 0.31%에 해당하는 33.31 km²로 남양주시 진건읍, 충남 홍성읍의 면적과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시, 군 중 면적이 가장 좁다. 인구는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19만3763 명, 7만4499 가구이다. 구리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동은 동구동이고, 서울특별시와 남양주시 별내동 사이에 위치한 갈매동이 공공택지지구로 개발되어 2016년 6월부터 해당 동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구리시의 지역내 총생산은 6조 2670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0.9%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립어업(1차 산업)은 13억원으로 0.02%의 낮은 비중을 차지하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천50억으로 8.06%의 비중을,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5조 7617억원으로 91.92%의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8%)과, 금융 및 보험업(11.1%), 건설업(10.95%), 공공행정(7.49%)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구리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57,044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1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4,023명으로 7.1%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53,020명으로 92.9%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22.8%). 숙박 및 음식점업(13.6%)과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9.0%), 교육서비스업(8.5%)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구리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82,492명이고 주간인구는 162,292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89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9,325명, 유출인구는 45,080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423명, 유출인구는 7,868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20,200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동구릉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서울의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소각장의 굴뚝을 이용하여 지상 100미터 높이에 전망대와 레스토랑을 설치하였고, 부속시설로 실내수영장, 사우나, 축구장, 풋살 경기장 등이 있다. 공원에 조성된 꽃단지에는 5월에 유채꽃이, 9월에 코스모스가 핀다. 약 3만 2천평의 면적에 3.6km의 산책로가 있고, 야외무대에서 각종 음악회, 전시회 등이 주말에 열린다. 아차산은 해발 348m의 야트막한 산으로, 일대에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루 20여개가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군사유적으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4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양한 나무와 꽃이 있고 나비류, 수서곤충류, 장수풍뎅이를 비롯한 육상곤충류, 각종 민물고기와 수생식물, 식충식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팔정도 8정도(八正道, , , ), 8성도(八聖道) 또는 8지성도(八支聖道)는 사성제 가운데 마지막의 도제에서 가르치는, 깨달음(멸제)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수단 또는 실천 덕목"이다. 7과 37도품의 마지막 그룹인 제7과의 수행법이다. 8정도의 반대를 8사(八邪) 또는 8사행(八邪行)이라 한다. 8정도를 청정한 수행 또는 실천이라는 뜻에서 범행(梵行)이라고도 한다. 8정도를 구하는 것을 범행구(梵行求)라고 한다. 팔리어에서 길(道)은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길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길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덟 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길이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는, 서로 포섭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팔정도의 영어 번역어도 ' (고귀한 팔중의 길)'라고 하여 길(Path)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도 단순한 여덟(eight)이 아닌 팔중(eightfold, 八重)으로 표현하고 있다. 팔정도의 여덟 구성요소 또는 여덟 개의 길은 다음과 같다. 8정도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4성제 중 마지막 도제(道諦)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설명된 것이다. 고집멸도의 4성제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8정도가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 즉 열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나열한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8정도를 크게 계(戒)정(定)혜(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정사유가 혜에 속하며, 정어정업정명이 계에 속하며, 정정진정념정정이 정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계정혜는 서로를 도와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는 것이지만, 크게 보아 계에 의지하여 정을 득하고, 정에 의지하여 혜를 득한다고 본다. 8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견(正見, , )은 바른 견해라는 뜻이며, 엄밀한 뜻으로는,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뜻한다. 이러한 뜻의 정견은 8사행 가운데 사견(邪見)의 반대이며, 또한 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의 5견(五見) 가운데 사견의 반대이며, 10악(十惡) 가운데 사견의 반대이다. 이 경우, 정견은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12연기4성제3학6바라밀로 대표되는 인과의 법칙 즉 연기법이라는 이치 또는 진리를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모든 선법(善法)을 세간법과 출세간법으로 나눌 때, 12연기4성제3학6바라밀은 출세간법에 속한다. 즉 무루의 선법, 달리 말하면, 성인의 선법 즉 성인이 수행하는 선법 또는 완전한 성인 즉 부처가 되게 하는 선법에 속한다. 정견은, 보다 넓은 뜻으로는, 5견(五見)을 멀리 떠난 상태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불교에서 인정하는 바른 세계관 또는 인생관 모두를 가리킨다. 즉 정견은 4성제와 연기법을 비롯한 모든 불교의 진리들에 대한 유루무루의 지혜들을 통칭한다. 이 경우의 정견은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의 반대이다. 이 경우, 정견은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갖가지 부정견을 약화시키거나 멀리 떠난 상태를 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비바사론》《구사론》 등에 따르면 이 후자의 보다 넓은 뜻으로서의 정견은 크게 유루정견(有漏正見)과 무루정견(無漏正見)으로 나뉜다. 유루정견은 세간정견(世間正見) 또는 세속정견(世俗正見)이라고도 하는데, 유루의 정견으로 유루혜에 속하며 다시 문혜사혜수혜의 3혜 또는 3혜에 생득혜를 더한 4혜로 나뉜다. 이들 유루혜는 범부의 지혜이며, 부정견 등의 번뇌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번뇌를 끊지는 못하는 지혜이다. 무루정견은 출세간정견(出世間正見)이라고도 하며 유학정견무학정견으로 나뉘는데, 무루의 정견으로 무루혜에 속한다. 무루혜는 성인의 지혜이며, 부정견 등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지혜이다. 계율을 바탕으로 하여 유루혜 즉 문혜사혜수혜의 3혜를 닦는 것은 무루혜를 증득하는 길이 되며, 따라서 범부가 닦아야 할 바이다. 정견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바르게 이해 하는것만을 말합니다 정사유(正思惟) 또는 정사(正思)는 올바른 사고방식 또는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리킨다. 즉, 항상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바르게 사유(思惟)하고 나 자신의 본분은 무엇인가, 나 자신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어(正語)는 올바른 언어적 행위를 가리킨다.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고방식에 입각한 말은 올바른 말이 되며, 구체적으로는 행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거짓말(妄言망언), 욕설(惡口악구), 중상(兩舌양설), 쓸데없는 말(綺語기어)의 4가지를 행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으며, 행해야 할 것으로는 성실하고 정다운 말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정업(正業)은 올바른 신체적 행위를 가리킨다. 살생(殺生)도둑질(偸盜)불륜(不倫) 등 잘못된 행위를 떠나 선행(善行)을 쌓는 것이다. 정명(正命)은 올바른 생활을 가리킨다. 신(身: 몸)구(口: 입)의(意: 마음)의 3업을 바르게 하여, 사성제연기의 법칙인과의 법칙 등의 이치와 진리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명의 반대를 사명(邪命) 또는 사활명(邪活命)이라 한다. 정정진(正精進) 또는 정근(正勤)은 올바른 노력 또는 올바른 용기를 가리킨다. 용기와 노력을 가지고 길을 나아감으로써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념(正念, , ) 즉 바른 기억은 세심한 염(念, , , , 깨어 있음) 즉 주의력을 가지고 수행에 임하며, 또한 생활에서는 자신과 주변의 입장에 대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태도로 일에 임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무착의 《대승아비달마집론》, 세친의 《대승오온론》, 호법 등의 《성유식론》 등에 따르면 정념(正念)의 반대는 망념(妄念: 미망한 집착하는 생각)이 아닌, 실념(, ) 또는 망념()이며, 이 두 낱말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모두 '잊어버린 기억, 잊어버린 께어있음, 또는 잊어버린 마음챙김'인데 모두 '정념(正念)을 잃음'을 뜻한다. 정념은 서양에서 마음챙김(MBSR)이란 명상법으로 유명하다. 정정(正定)은 올바른 선정(禪定)을 가리킨다. 선정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해짐에 따라 이에 의해 사물을 정확하게 보는 정견(正見), 즉 올바른 견해 또는 지혜가 발현되며 이에 따라 정업(正業)정명(正命) 등의 올바른 행동과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대승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선정 바라밀은 지혜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직접적인 수단 또는 원인이다. 명성황후 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 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한테 겨냥하는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당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친일 성향을 띤 급진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과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에 의해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명성태황후 민씨는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인데, 1874년 권력을 쟁취하려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폭탄으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대고모뻘로, 5대조 민진후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나가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했다.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했으나 그녀의 집안은 빈곤하였고, 경기도 여주의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지냈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즈음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명성황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아버지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 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씨 일가와 힘을 모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 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에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 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흥선대원군 세력의 최익현 공격을 우려하여 일시적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등용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 고 한다.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우호세력을 중용하여 세력을 강화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보내려 파면하였다.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에 죽을 위험에 달하였으나, 미리 변장을 해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임오군란 동안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군인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비는 경복궁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명성황후가 궁으로부터 도망다니며 빠져나와 있는 동안,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임오군란의 6월 10일의 난군들에게 피습 당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한 그는 흥선대원군을 바라보고, "대감 내를 부디 목숨만은 지켜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그대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계단으로 내던져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을 총검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라고 매우 외치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잔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궁인이 이를 보고는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홍계훈의 오타이다.)가 '그 여인은 내 누이로, 상궁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이 와중에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로 은신했으며, 궁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李最應)과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피습당했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라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김윤식에게 청나라 천진(天津)으로부터의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명성황후는 궁궐에 있는 동안 고종을 움직여 하여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여 공업·무기제조법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전래되면서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을 접한 그녀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 후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시에 사람을 보내 개화승려 이동인(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밀명을 내린 뒤 일본에 파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화파 김홍집은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斥邪) 상소 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역모를 계획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인물인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이재선(李載先) 즉 대원군의 서자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은밀히 전개했으나,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당했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성황후인물들은 대원군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위협을 받고, 명성황후는 은신한 반면 많은 인물들이 피습당했다. 일본 공사관도 피습됐다. 일본은 중국(청)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인 보호"의 명목으로, 도주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군은 일단 협의를 먼저 요청하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가, 이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중국인 제독 오장경(吳長慶)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일 이후 명성황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임오군란이 가라앉은 이후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 등을 필두로 한 친청 세력에 의한 개화파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에 위협과 불안을 느끼며 난과 거사를 꿈꾼다. 이에 민태호와 민영목 등은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의 표적이 되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군인 난입 때에 피습당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의 주위에 일본 군인 1개 중대가 보초로 둘러진다. 정권을 장악한 급진 개화파들은 즉시 자신들의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고, 각국 공사관에 이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경기 감사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연금되었던 경우궁의 보초를 맡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겐 우리들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부탁했고, 다케조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명성황후와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바꾸도록 했다. 그 해 고종은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와 6백 명의 군인들의 면회 요구를 받았고, 김옥균은 이를 저지하려하여 그들간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중국 군인들이 배로 늘어났고, 일본인 군인들은 혼란 와중에 민심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았다. 일본인 군인 2백 명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정부군 8백 명도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런 때에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 명성황후는 이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의존하게 된 반면, 일본은 공사관의 화재와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로 한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더욱 약화되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는데, 남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청나라와 일본 등 열강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 명성황후는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이러나 밀약은 먼저 중국에 발각되어, 1885년 2월엔 묄렌도르프에게 영장이 발부되고 대원군은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되었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이런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명성황후와 밀약을 또 맺으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조정의 실력자였던 조정 내의 민씨 일가 척족의 대다수가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의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 내관 유재현은 명성황후의 개인 비서였으나, 그 조차도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한다. 그 때 미국인 의원인 호러스 뉴턴 앨런(한국이름 안련)은 양조카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해주어 생명을 건져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매우 경계하게 된다. 1892년 봄엔, 운현궁으로부터 화약이 터지고 또 화약이 여러 건물에 장치된 것이 발견됐다. 다행히 이 폭탄들은 점화되지 않은 채로 발견됐다. 명성황후는 이 일에 대한 음모론의 표적이 되어, 그 전날, 명성황후의 양오빠인 민승호에게 대원군이 폭약을 보내 일가를 죽게 만든 일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을 꿈꾸지 않았겠느냐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세간의 소문을 빌어 명성황후가 운현궁 테러의 배후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운현궁의 폭탄 테러는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추측성 유언비어를 옮겨 놓은 것이다.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민승호일가의 폭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대원군은 그 뒤 무명의 자객에 의한 암살과 폭탄 테러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그는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명성황후와 고종을 내쫓을 계획을 꾸민다. 이와 같이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성황후는 정부와 권력의 안정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이 와중에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비록 민중을 거짓말로 홀렸다는 죄목을 받은 최제우가 처형되었으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재기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농민들이 2만여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 동학의 불한당들.)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휴전했다. 그러나 조선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주둔하며 군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씨 일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갑오경장 초기에 명성황후와 고종 폐위 음모를 꾸미던 대원군과 이준용은 먼저 명성황후 폐위를 전초작업으로써 착수하였다.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이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스기무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에 대한 감찰과 간섭을 강화하려 흥선대원군은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였다. 고종은 7월 초 갑오경장을 단행한다. 이때에도 명성황후 폐위의 정당성을 믿는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관을 방문하여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음모는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주업이었으나 일본 영사관에선 호응하지 않아 좌절된다.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원군은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했으며,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는 무너졌다. 대원군 일가는 그러나 달포 만에 일본의 의도로 끌어내려진다. 대원군의 대신으로 김홍집 내각이 일본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지며, 이 정부는경장사업(更張事業)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민씨 일족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徽)로 개명)을 필두로 은 모두 유배되었고, 명성황후도 위기 중에 폐위 위기를 아슬아슬히 넘겨 홍순형(洪淳馨) 경기도 감사의 집에 은신한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모여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12월의 패배로 봉기는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마지막을 맞으며,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도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4월 24일 처형되었다.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부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 뿐이나 대원군은 전봉준에게 매우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세간엔 돌았다.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일본공사와 협의하며 일본에게 약간의 도움을 부탁하였다. 명성황후 즉,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되는 음모가 꾸며지는 때였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제거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으리라는 일본 공사 오카모토의 언약을 받았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에 미우라 고로 와 명성황후 제거의 모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일본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등이 대원군의 도움을 받으려 대원군에게 다가갔으나, 대원군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원군이 운현궁에 있을 때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설득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이때 일본 공사관을 비밀리에 자주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기를 수시로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길준은 왕후 제거에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래도 왕후 제거 계획에 관해 유길준은 대원군에 협력했는데, 이준용을 두고 박영효와 서광범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된 의도적인 고문치사를 계획하는 중에 유길준의 갑작스런 왕후 제거 계획 가담 소식에 당황한다. 조선은 1895년 4월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바꾸고 물러나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했고, 내정의 내각엔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명성황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명성황후는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 내각을 퇴출했다. 1895년(고종 32년) 7월 왕후를 암살할 계획이 박영효에 의해 꾸며진다. 조선의 개화 이후로 고종은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고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아 고종은 단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우려했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명성황후를 암살할 음모가 박영효의 단독에 의해 계획됐다. 박영효는 왕후의 능력과 권모를 두려워해 왕후가 암살되어 화근을 뿌리 뽑아야 된다고 여겨, 1895년 7월로 날짜를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유길준을 박영효는 제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이에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임금에게 알렸다. 유길준의 밀고를 박영효는 알아채어 양복으로 바꿔 입고 변장하며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 을 빠져 나와 한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기선 을 타고 달아났다. 그의 일당인 이규완, 신응희(申應熙) 등도 따라 달아났다. 1895년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와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였다.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 그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은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그들에 의해 결행에 들어갔다. 대원군이 은거했던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 군인, 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을 모았다.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대원군은 제 자필로, 일본의 강요도 없이 적어놓았다. 대원군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조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유길준에 따르면,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고, 명성황후의 죽음과 암살을 위해 대원군은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내기로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했다.'고 한다. 일본 낭인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선, 구연수, 이주회 등이 이끄는 조선인 궁궐수비대 예하 각 대대 병력의 길안내를 받으며 반나절도 안돼 도성에 인천으로부터 잠입했다. 경복궁에서 이들을 마주친 홍계훈 경비 대장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 홍계훈과 경비대원들은 일본 낭인들,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군인들의 발포에 맞아 죽는다. 명성황후가 있던 궁궐에는 홍계훈을 죽인 낭인들이 들어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외침을 들은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은신했는데, 궁녀와 내관들은 낭인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있었다. 이경직 내부대신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와 궁녀들 앞을 가로막아 가리니 두 팔이 잘려 죽음을 맞는다. 궁녀들과 함께 있던 명성황후는 대궐에 다다른 낭인들을 만난다. 명성황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검에 베여 죽었다 한다. 명성황후의 죽은 몸은 그 뒤 석유가 뿌려진 다음 불태워졌다. 이 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43세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경복궁내 강녕전에 머물던 대원군이 휴식을 취하던 중에 보고됐다. 놀라고 두려운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 이 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버지와 대면한다. 이런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발길을 옮기던 때에, 명성황후의 주검은 대궐 홑이불에 둘러싸인 채 대궐 솔나무 숲으로 옮겨져 기름이 부어진 가운데 가을의 바람에 한줄기 연기가 되어 날려가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유골의 일부만이 누군가에 의해 주워져 닦이운 뒤에 고종에게 전달된다. 고종을 대면한 자리의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그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또 정권을 장악한다.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1895년 10월 문석봉은 김해로부터 나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쳤다. 이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로 "빈"(嬪)으로 올라갔다. 국모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 생전 마지막 작호인 왕후로 복작됐다. 1897년 음력 1월 6일 문성의 시호를 받고 문성왕후가 됐으며,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 그러나 뒤에 시호의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음력 3월 2일 명성왕후로 개칭됐다. 같은 해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그녀 역시 황후에 추존되어 명성황후가 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가 되었는데 왕후에게 2자호를 썼던 조선의 오랜 풍습의 영향 아래 흔히 명성황후로 불린다.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민중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장교들과 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이 때에 백범 김구(이 때의 이름은 김창수, 金昌洙)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다가 1895년 초 귀국하며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이에 대해 뒷날 그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일본인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그 일본인이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그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그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자료로부터 그가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자객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 명성황후 암살의 국내 고위급 협력자로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거물 협력자로 지목했다.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당시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파견와 있던 일본인 다치스카 에이조(立塚英藏)는 낭인들이 왕비를 시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다치스카 에이조는 스에마쓰(末松) 일본정부 법제국장(法制局長)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낭인들이 왕비의 시신을 자른 뒤 국부검사를 했다고 기록하였다. 다치스카는 보고서에서 '왕비를 끌어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 검사를 하고, 다시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니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함이라'고 하였다. 2013년 7월 1일, 1896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 실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앞으로 보낸 비밀문서의 내용을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가 한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한 내용은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아주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 로바노프는 일본군이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처럼 일본군도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였다. 한편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 1895년 10월 9일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니콜라스 오커너에게 “일본인들이 서너 명의 궁녀를 죽였다. 그리고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어 10월 22일에는 오커너에게 베베르가 자신을 방문해 왕비의 생존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당했다는 게 한국 역사학계의 정설이나 정상수 교수는 "독일과 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명성황후의 시해를 당연시할 게 아니라 새로운 사료 발굴로 진실을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에 대한 역사학자의 여러 반응으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이번 문서는 일본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외교가 풍문에 관한 새 자료 정도로 봐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에 대해 “명성황후 생존은 을미사변 뒤에 일어난 여러 사실을 보면 있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한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것은 수긍하지만, 라돌린 문서가 아관파천 즈음에 나온걸 보면 러시아 공사관 대피를 원한 사람이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의 벗 윤치호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재필은 명성황후가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평가하였다. 1947년 군정기 때의 한 회고담에서 서재필은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민비 앞에 나가면 으레 민비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민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라며 그녀가 사태 분석에 기민했다 고 평하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 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황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척족정치의 악순환을 거듭케 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 평론가는 비슷한 시기 청제국을 쇠퇴시킨 서태후와 동급을 취급하기도 한다. 보통 그들은 서태후와 명성황후를 19세기 동양의 최악의 황후라고 비판한다.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지적,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국고 탕진에 대한 다른 자료는 없을 뿐더러, 내수사에서 관리하는 자금은 국고이지도 않았다. 내수사는 국고는 관리하지 않고, 국왕 및 왕실의 재산만 관리한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뒤 황후는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시켰다. 이 중 민겸호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서 주어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문정공 송준길은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며 민유중은 송준길의 사위이다. 명성황후는 송준길 집안에 대해서는 가까운 외가의 의를 지켰고, 정씨 집안을 추대해서 역시 외척같이 각별히 생각해 왔다. 명성황후는 정경세를 부르기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송씨, 정씨 두 집안의 후손들은 크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이때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친골육지간이지만 사이가 나빠져, 아버지 대원군을 혐오했던 것 같았다. 이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내전(왕비)는 돈목을 감소시키고 대전(임금)은 돈목을 증가시키면 좋겠다."는 것이다. 명성황후에 대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좋게 평가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민간인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명성황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임을 전해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명성황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국 공사관 서기인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명성황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편,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황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 나가사키현 나가사키 현(, )은 일본 규슈 지방 서쪽 끝에 있는 현이다. 고토 열도(), 쓰시마 섬(), 이키 섬()을 포함한다. 동쪽으로 사가현과 접하고 있으며 나머지 주변은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많으며 그 수는 971로 전국 도도부현 가운데 가장 많으며, 도서부의 면적이 전 면적의 40% 가량이 된다. 해안선의 길이는 4,137km로 47개 도도부현 중 1위이다. 2위인 홋카이도는 2,978km로 나가사키 현과 큰 차이가 난다. 면적이 홋카이도의 20분의 1에 불과한 나가사키의 해안선이 이렇게 긴 이유는 크고 작은 섬들이 상당히 많은 것과 리아스식 해안으로 인해 해안선이 복잡하게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나가사키에는 83개에 이르는 항만이 소재한다. 나가사키 현 내의 모든 지역은 해안선으로부터 15km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남서쪽에서 난류인 쓰시마 해류()가 흘러오기 때문에 기후는 온난하고 기온차도 적다. 겨울에는 동중국해에 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흐린 경우가 많다. 또 그 영향으로 눈이 많이 오는 편이다. 그러나 현 최북단의 쓰시마 섬에서는 한반도가 바로 윗쪽에 있기 때문에 바다에서 발생한 눈구름이 한반도에 의해 차단되어 눈구름이 발달하지 못하여 눈이 상대적으로 적게 내린다. 생물학적으로는 해안에 볼 수 있는 용나무등의 아열대성 식물은 나가사키 현의 온난한 기후를 반영하고 있다. 그 밖에도 대륙에 가깝기 때문에 쓰시마 산고양이()나 짱뚱어 등의 대륙계 생물종이 많고 각지의 낙도에서 수많은 아종, 변종이 확인된다. 시마바라 반도()는 활화산 지대이기 때문에 온천이 많다. 1990년~1995년의 운젠타케()의 분화는 시마바라 시()와 후카에 정()을 중심으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동중국해에 접했기 때문에 태풍 상륙이 잦은 편이다. 옛날에는 히젠 국(, 사가현과 이키·대마도를 제외한 나가사키 현 전역), 쓰시마 국(), 이키 국()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히젠의 중심지는 사가 현 사가 시()에 있었다. 17세기 에도 막부에 의한 해금령이 발표되면서 일본과 여타 국가와의 교섭이나 상업 활동은 나가사키 현 일대에서만 허용되었다. 조선, 중국, 네덜란드와의 교역만이 허용되었다. 1637년 농민들과 천주교도들에 의해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나가사키 현의 천주교 비율은 여타의 지역에 비해 훨씬 높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였던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미국 공군 B-29 폭격기에 의해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폭 피해지가 되었다. 현청 소재지 나가사키 시는 역사를 자랑하는 항만 도시로서 관광객이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 전함 무사시를 건조한 조선업 도시이기도 하다. 사세보 시는 옛날 부터 군항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해상 자위대나 미 제 7함대의 기지가 있다. 남부에는 중세 유럽 도시를 본따 만든 하우스텐보스가 있어서 한국이나 대만으로부터의 관광객도 많다. 그 외 지역은 탄광, 저인망 어업 등이 번창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경쟁력을 잃어 쇠락하였다. 덧붙여 이키·쓰시마 지구는 행정 구역은 나가사키 현이지만 후쿠오카와의 왕래가 더 편한 탓에 경제권은 후쿠오카에 속한다. 나가사키 현의 남녀 성비는 87.3으로, 여자가 더 많다. 그누텔라 누텔라 또는 그누텔라(Gnutella)는 중앙 집중식 서버를 두지 않고 P2P 파일 공유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위한 분산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이다. 2000년 초에 AOL의 자회사인 널소프트의 저스틴 프랑켈(Justin Frankel)과 톰 페퍼(Tom Pepper)가 첫 번째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 해 3월 14일 Nullsoft에서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었으며, Slashdot에 소개된 첫 날 수 천명이 프로그램을 내려 받았다. Nullsoft의 모회사인 아메리카 온라인(AOL)이 당시 음악/미디어 쪽의 거인인 타임 워너와 합병하려던 차였기 때문에 배포된 다음날 내려 받기는 중지된다. 하지만 이미 비밀은 누출되어 버린 뒤였다. Nullsoft가 올렸다가 지운 그 코드를 해커들이 낚아채서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소프트웨어로 만들었다. 그 결과 불과 몇 주일 만에 웹 상에는 여러 종의 상호호환적인 누텔라 유사품이 등장한다. 누텔라는 냅스터와 달리 중앙에서 개입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2001년초 냅스터의 법정 공방으로 P2P 네트워크가 유명세를 타게 되고 누텔라는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초기 프로토콜의 확장성 문제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다운로드가 어려워지는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개발자들이 확장성 문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누텔라를 개발하며, 새로운 피어간 경로 설정 기법인 "ultrapeers" 개념을 제시한다. "누텔라"는 특정한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의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 클라이언트들에게 사용되는 일반적인 프로토콜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곳곳에서 새로운 클라이언트와 프로토콜들이 개발되고 있으므로, "누텔라"가 미래의 P2P 표준이 될 것이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Frankel과 Pepper는 누텔라를 개발하는 동안 Nutella(spread의 한 종류)를 많이 먹었고 소스를 GNU GPL 라이선스 하에 배포해서 "Gnutella"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누텔라는 GNU 프로젝트와 연관이 없다. 누텔라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텔라 소프트웨어 패키지 중 하나를 웹을 통해 다운로드한 다음 프로그램을 설치한 뒤, 누텔라 네트워크 상의 적어도 하나의 다른 노드를 찾아 연결하면 된다. 누텔라 노드를 찾는 방법은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에 미리 등록되어 있는 노드를 이용하는 방법, "Gwebcache"를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IRC 채팅방에서 찾는 방법이 있다. 새로 누텔라 네트워크에 접속하고자 하는 노드 A와 기존에 누텔라에 접속해 있던 노드 B가 존재한다고 하자. 노드 A가 노드 B와의 연결을 완료하면 노드 B는 누텔라에 연결된 노드들의 주소를 노드 A에게 전송한다. 노드 A는 일정 수준 이상의 노드들(사용자가 상한선 결정)과 연결될 때까지 수동으로 설정한 주소와 다른 노드들이 전송해 준 노드들의 목록을 이웃으로 추가해 나간다. 연결을 시도해서 연결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노드만을 이웃으로 인정한다. 파일을 찾기 위해서 키워드를 치면, 그 요청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웃 노드로 보내진다. 이 메시지를 받은 컴퓨터는 먼저 자신의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를 뒤진 다음 맞는 것이 있으면 그 사실을 노드 A에게 알려주고 요청을 또 다른 노드로 다시 전송한다. 이걸 받은 노드는 또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그 결과, 단 한 번의 요청이 순식간에 수천 대의 컴퓨터로 퍼져나갈 수 있다. 노드 A가 요청한 파일을 가지고 있는 노드는 노드 A와 직접 통신하여 전송여부를 결정한다. 만일 요청한 파일이 여러 노드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노드 A는 분할 다운로드를 수행하여 다운로드 속도를 높인다. 한 번 이웃으로 등록된 노드들은 프로그램 종료후 다음에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누텔라는 프로토콜이다. 누텔라 0.4 버전은 다섯가지의 패킷 유형을 제공한다. 패킷 유형들은 주소 누텔라 네트워크를 찾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파일 전송은 HTTP를 통해 이루어진다. 현재 누텔라 프로토콜의 개발은 (Gnutella Developer Forum)에서 주도하며, 소프트웨어 벤더와 GDF의 개발자들에 의해 프로토콜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개선 내용은 지능적인 질의 경로 설정, SHA checksums, 여러 노드로부터 동시에 내려받기(swarming)등이 있다. 현재 누텔라 프로토콜 개발 웹사이트에서는 누텔라 0.6 스펙을 마지막으로 프로토콜을 완성하려고 하고 있다. 0.4 버전은 오래된 프로토콜이지만 아직도 사용되고 있으며,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2003년 1월, 는 검색을 위해 TCP가 아닌 UDP를 사용하는 누텔라2 프로토콜을 발표했다. 누텔라 2는 패킷 포맷에 XML 기법을 적용하고 많은 확장 기능들을 포함한다. 하지만 누텔라2를 지원하는 다른 클라이언트는 Gnucleus뿐이며 누텔라 개발자들은 GDF의 승인을 받지 않은 누텔라 2를 인정하지 않는다. PNG 포터블 네트워크 그래픽스(Portable Network Graphics; PNG)는 비손실 그래픽 파일 포맷의 하나이다. 특허 문제가 얽힌 GIF 포맷의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PNG는 공식적으로는 "핑"()이라고 읽지만, 대부분은 "피엔지"라고 영어 철자 그대로 읽는다. PNG 포맷은 컬러 팔레트 화상과 그레이스케일 화상, 그리고 풀 컬러 화상 방식을 모두 지원한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이미지 표시를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기 때문에 CMYK 등의 색 공간은 지원하지 않는다. 파일 확장자는 codice_1 또는 codice_2를 쓰며, MIME 타입은 codice_3으로 적는다. PNG 포맷을 만들게 된 배경은 1995년, 유니시스 사가 GIF에 사용되는 LZW 데이터 압축 알고리즘에 대해 소프트웨어 특허를 적용할 것이라고 공고하면서이다. 이 알고리즘은 미국 특허 4,558,302번으로 등록되어 있고, 다른 여러 나라에도 등록되어 있다. 또한 256 색만을 저장할 수 있는 GIF는 한계가 있으므로 컴퓨터 성능이 좋아지면서 문제가 되어 왔다. 1999년 8월, 유니시스가 자유 소프트웨어(프리웨어)와 비상업 소프트웨어(Non-Commercial License Software, FMOD)에 대한 무료 특허 정책을 거둬들이면서 PNG는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PNG 파일은 8바이트의 신호로 시작한다. 헤더 뒤에는 이미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일련의 청크(chunk)가 온다. 청크는 그 자신을 "중요" 또는 "보조"로 선언한다. 프로그램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조" 청크는 그냥 무시된다. 이런 식으로 청크를 통한 계층 구조는 디지털 컨테이너 포맷과 같은 개념으로, PNG 포맷이 구버전과 호환되면서 쉽게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와 같은 구조가 MNG, JNG, APNG 포맷에도 사용된다. 청크는 네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길이(4바이트), 청크 타입(또는 이름)(4바이트), 청크 데이터(길이 바이트), 그리고 순환 중복 검사(순환 중복검사/체크섬, 4바이트). CRC는 길이를 제외한 청크 타입과 데이터로 생성된 network-byte-order CRC-32이다. 청크 타입은 ASCII 문자 네개로 구성된다. 대소문자는 구분된다. 이들의 대소문자 여부가 디코더에게 청크를 인식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 첫번째 문자는 이 청크가 "중요"인지 "보조"인지 알려준다. 대문자일 경우 "중요"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보조"이다. 중요 청크는 파일을 읽는데 필수적인 정보를 갖고 있다. 디코더가 해석할 수 없는 중요 청크를 받으면 파일 읽기를 중단하고 사용자에게 경고를 전달해야 한다. 두번째 문자는 청크가 "퍼블릭"(PNG파일 표준에 포함되어 있거나 특수목적 퍼블릭 청크의 레지스트리에 포함되어 있음)인지 "프라이빗"(표준이 아님)인지 판별한다. 대문자는 퍼블릭이고 소문자는 프라이빗이다. 이는 프라이빗과 퍼블릭 청크의 이름이 충돌하는 것을 막아준다.(단, 같은 이름의 프라이빗 청크는 충돌할 수 있다) 세번째 문자는 PNG 표준에 따라 대문자여야 한다. 미래의 확장을 위해 남겨둔 문자로, 디코더는 이 문자가 소문자일 경우 해석 못하는 것으로 처리해야 한다. 네번째 문자는 청크를 해석하지 못할 경우 복사가 안전한지 판별한다. 소문자일 경우 파일에 변경이 있어도 안전하게 복사될 수 있다. 대문자일 경우, 파일 변경이 중요 청크를 변경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복사될 수 있다. 디코더는 PNG 파일을 읽고 렌더링하기 위해서 중요 청크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codice_5는 컬러 타입 3(인덱스드 컬러, 설정된 색만을 표시한다)에는 필수적이다. 컬러 타입 2와 6(트루 컬러와 트루컬러 + 알파 채널)에는 선택사항이다 그리고 컬러 타입 0와 4(그레이스케일과 그레이스케일 + 알파 채널)에는 나타내서는 안된다. PNG가 GIF보다 최신의 압축 알고리즘을 사용하지만, GIF보다 더 큰 파일을 만든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는데, PNG 파일의 크기를 줄이는 OptiPNG나 pngcrush와 같은 오픈 소스로 MS-DOS에서 유닉스나 리눅스 등의 다양한 환경을 지원하여 제공하고 있다. 사진과 같은 이미지에 대해서는, JPEG가 사진에 특화된 손실 압축 알고리즘을 사용하므로 PNG에 비해 더 작은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JPEG 압축은 양자화의 영향으로, 바라지 않던 잡티가 낄 수 있다. 문자나 날카로운 경계가 있는 그림은, JPEG에서 생기기 쉬운 뭉개짐 없이 JPEG보다 압축을 더 잘 할 수 있는 PNG를 쓰는 것이 더 낫다. 또한, PNG는 비손실 압축이므로, 나중에 고화질의 재편집을 해야 한다면 PNG로 저장해 놓는 것이 낫다. JPEG를 사용할 때는 저장을 하면 할수록 계속 손실이 누적될 수 있다.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 )는 힌두교의 이론적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문헌들의 집성체이다. 우파니샤드는 또한 베다의 끝 또는 베다의 결론이라는 뜻에서 베단타()라고도 불린다. 힌두교 경전은 크게 신으로부터 계시된 지식을 뜻하는 슈루티와 스승에서 제자로 전승된 지식을 뜻하는 스므리티로 나뉘는데, 전통적으로 우파니샤드는 슈루티에 속한다. 하지만,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정수(精髓)를 해설하는 주해서이기 때문에 슈루티의 엄밀한 정의에 따를 경우 슈루티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우파니샤드는 《브라마나()》와 《아란야캬()》의 결론부에서 발견되었으며, 모든 우파니샤드는 구전으로 전수되어 내려왔다. 총 200편 이상의 문헌이 우파니샤드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최초의 10편 내지 13편 정도가 가장 오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무키아 우파니샤드() 또는 고(古)우파니샤드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 낱말 무키아(Mukhya)는 "주된주요한으뜸의뛰어난"의 의미를 가진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브라흐마 수트라》를 통칭하여 프라스타나트라이이()라고 하는데, 《바가바드 기타》와 《브라흐마 수트라》와 더불어 무키아 우파니샤드는 후기 인도 철학의 여러 학파들(베단타 철학)의 사상적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들 학파들에는 힌두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두 일원론 학파인 아드바이타 베단타 학파와 비시슈타아드바이타 베단타 학파가 속한다. 역사가들은 주요한 우파니샤드들이 불교 발생 이전 시대부터 기원전 1~2세기까지 긴 기간에 걸쳐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주요하지 않은 우파니샤드들의 경우 이보다 훨씬 후대인 중세와 근대 초기에서 성립된 것들도 있다. 이와 같이 대체적인 성립시기는 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개별 우파니샤드의 정확한 성립연대에 대해서는 권위자들 사이에도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다. 영국 시인 마틴 세이모어 스미스(1928~1998)는 자신이 작성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0권의 책 목록에 우파니샤드를 포함시키고 있다. 우파니샤드를 중시한 서양 철학자와 사상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쇼펜하우어, 에머슨, 소로가 있다. 우파니샤드의 교의와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한 학자들도 있다. 산스크리트어 낱말 우파니샤드(उपनिषद्, Upaniṣad)는 "가까이"를 뜻하는 우파(upa-), "적당한 장소에서" 또는 "아래에서"를 뜻하는 니(ni-), "앉다"를 뜻하는 샤드(ṣad)에서 유래한 낱말로,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가까이에 앉는다"로, 가르침을 받기 위해 스승의 가까이에 앉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스승의) 발 아래에 앉는다 또는 하석에 앉는다" 혹은 "(스승을) 둘러싸고 앉는다"를 뜻한다. 모니어윌리엄스(: 1819~1899)가 편찬한 19세기 후반의 사전에는 "인도인 권위자들에 따르면 우파니샤드는 '지고한 영에 대한 앎을 드러냄으로써 무지를 쉬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부연하고 있다. 샹카라는 《카타 우파니샤드》와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대한 자신의 주해에서 "우파니샤드"라는 낱말을 자아를 아는 것을 뜻하는 "아트마비드야(Ātmavidyā)" 또는 브라흐마(브라만을 뜻함)를 아는 것을 뜻하는 "브라흐마비드야(Brahmavidyā)"와 동일한 낱말로 취급하고 있다. 막스 뮐러(1823~1900)는 우파니샤드들 자체에서 발견되는 "우파니샤드"라는 낱말에 대한 기타 다른 정의로는 "밀교적 교의(esoteric doctrine)", "비밀 교의(secret doctrine)", "밀교적 해설(esoteric explanation)", "비밀한 해설(secret explanation)", "참된 교의(true doctrine)"가 있다고 하였다. 알려진 우파니샤드로는 총 200권 이상이 있다. 이들 우파니샤드의 집성물 중, "구원" 또는 "구제"라는 뜻의 《묵티카(Muktikā)》는 108권의 우파니샤드를 집성한 것으로 이 숫자는 힌두교의 염주인 말라()에 있는 염주알의 총 개수와 동일하다. 현대 학자들은 《묵티카(Muktikā)》의 최초의 10권, 11권, 12권 혹은 13권의 우파니샤드들을 주요한 우파니샤드들, 즉 무키아 우파니샤드(Mukhya Upanishads)라고 보고 있으며 나머지 우파니샤드들은 무키아 우파니샤드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어떤 우파니샤드가 샹카라와 같은 권위 있는 철학자들에 의해 주해되거나 인용되는 경우, 그 우파니샤드는 "하나의 무키아 우파니샤드"로 분류되며 대다수의 힌두교인들은 그것을 슈루티로 받아들인다. 무키아 우파니샤드는 구우파니샤드라고도 한다. 《묵티카(Muktikā)》의 신우파니샤드들은 인도 남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주제에 따라 (사만야) 베단타요가산야사비슈누시바샥티 우파니샤드의 6그룹으로 나뉜다. (사만야) 베단타 우파니샤드()는 철학적 성격의 것이고, 요가 우파니샤드는 요가 수행과 관련된 것이고, 산야사() 우파니샤드는 영적 포기의 삶에 관한 것이고, 비슈누 우파니샤드는 비슈누에 대한 헌신에 관한 것이고, 시바 우파니샤드는 시바에 대한 헌신에 관한 것이고, 샥티 우파니샤드는 여신 샥티에 대한 헌신에 관한 것이다. 신우파니샤드들은 종종 종파주의적인데 그 이유는 힌두교의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소의(所依)하는 우파니샤드들이 슈루티에 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정통성, 정당성 또는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분류법은 해당하는 《브라마나》별로 우파니샤드들을 분류하는 것이다. 아이타레야(), 카우시타키(),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는 모두 거의 동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나머지 우파니샤드들은 베다 산스크리트어(기원전 1500~500)에서 고전 산스크리트어(기원전 4세기에 성립)로 전이하는 시기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군조선 단군조선(檀君朝鮮)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전해지는데, 그 개국 기원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魏書)에는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개국한 국가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왕조 또는 지배자에 따라 구분하여 단군이 다스렸던 첫 번째 시기를 지칭한다. 단군이 나라를 세워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전조선(前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근대 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개 시기로 구분하였다. 단군조선은 단군이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平壤)에서 건국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약 1000여 년 동안 단군조선을 다스리다가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 또는 기자가 오기 164년 전인 기원전 1286년에 왕위를 떠났다고 하기도 한다.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단군조선이 소멸되었다는 내용 역시 인정되지 않으며 위만조선이 성립되는 기원전 194년까지의 역사를 모두 단군조선 및 고조선의 역사로 보고 있다. 초기 단군조선의 강역은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주장과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평안도 및 황해도)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또한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경우에는 "난하 요서설" 등을 근거로 요서 일대를 단군조선의 강역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단군조선(고조선)의 유물로 추정되는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동검을 통해 추측되는 강역은 랴오닝 성과 한반도 북부 지역이다. 단군조선의 유물이 두 유물인 것은 확실시되고 있으나 두 유물의 출토지가 모두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현전하는 중국의 조선에 대한 기록으로는 기원전 7세기 무렵의 문헌인 《관자》에 등장하는 것이 가장 오랜 것이다. 기원전 323년 중국 전국시대의 연과 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서기전 3세기 초에 연의 공격으로 2천여 리의 강토를 상실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이 무렵에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 있다.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2세기 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부(否)가 형식적으로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 말기의 혼란기에 중국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으며 특히 기원전 195년, 위만의 망명을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단군조선은 국가의 시조로서 중요시되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지배자인 단군과 기자는 국조(國祖)로서 제사를 지냈으며 단군조선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에 못지 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문자 기록이 미비했던 시기의 고대 국가였던 탓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나마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로 인해 중국 은·주에서 도래한 기자가 시조로 선호되면서 사대부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편찬된 많은 역사서들은 대부분 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기자조선 또는 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사학을 주창하며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가 되는 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등을 모두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2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을 랴오닝 성 중심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을 발굴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입장 변화를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최근 2~3년 사이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어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고조선 건국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거의 일치하여 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2007년 2월 23일에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좀더 명시적인 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담은 서술 지침을 발표하였다.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檀君朝鮮《東國通鑑·外紀(동국통감·외기)》〈徐居正·崔溥 等 共撰(서거정·최부 등 공찬)〉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기타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위서(魏書)에 기록하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신화라고도 부르는 이 건국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사회상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20세기 초에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부도지》 등이 역사서의 형식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들이 있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炤知 麻立干, ? ~ 500년, 재위; 479년 ~ 500년)은 신라의 제21대 왕이다. 조지(照知) 마립간 또는 비처(毗處)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만,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佛經)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자비 마립간과 서불한 미사흔의 딸 김씨의 장자이며, 왕비 선혜부인은 이벌찬 내숙의 딸이다. 2년(480년) 11월에 말갈이 북쪽을 침범하였다. 이후 신라는 전쟁준비에 들어가 3년(481년) 2월에는 왕이 친히 비열성에 행차해 군사를 정비하기도 했다.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북쪽 변경을 침입, 호명성 및 일곱 성을 빼앗고 미질부로 진군했다. 신라는 백제와 가야에 원군을 요청, 고구려와 말갈을 막아내, 퇴각하는 것을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를 베었다. 4년(482년) 5월에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다. 6년(484년) 7월 고구려가 다시 북쪽을 침공, 백제군과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크게 쳐부쉈다. 7년(485년) 2월에는 구벌성을 쌓아 군사를 정비하고, 8년(486년) 정월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일선 지역의 장정 3천을 징발해 삼년산성과 굴산산성을 고쳐 쌓았다. 4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고, 침입을 막아낸 8월 낭산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9년(487년) 소지마립간은 신궁(神宮)의 건설을 시작하였다(~497년 2월). 신궁이 설치된 나을(蘿乙)은 시조 혁거세왕이 처음 태어난 곳이라 한다. 3월에는 곳곳 관부에 명해 도로를 수리하게 하고 음력 7월에 월성을 보수했다. 그러나 이 해 10월 또 다시 우레가 있었다. 10년(488년) 정월, 마립간은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2월 일선군에 행차해 빈민을 구제하고 3월에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군의 죄수들을 2대 사형죄를 제하고는 용서했다. 11년(489년) 정월에는 하는 일 없는 백성들을 몰아다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실업자 대책이었다. 11년(489년) 9월 고구려가 북쪽을 다시 침범해 10월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12년(490년) 음력 2월 비라성을 재건, 국방을 손보고 음력 3월에 수도에 시장을 개설,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는데 이는 역시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경제진흥책이다. 15년(493년) 3월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여,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7월에는 해안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 왜로부터의 방비를 강화했다. 17년(495년)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해 원군을 청해오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18년(496년) 음력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 실죽이 나가 맞아 싸웠다. 19년(497년) 4월에는 왜가, 8월에는 고구려가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22년(500년) 날이군에 행차했다가 벽화부인을 아내로 얻었고, 이 해 11월 죽었다. 《삼국유사》에는 한국의 정월 대보름 풍속에 관련, 비처왕(소지왕)이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비처왕 즉위 10년 무진(488년), 왕이 천천정(天泉井)에 거동하였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했다. 왕은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는데, 기사는 남쪽의 피촌(避村) 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어쩔 줄을 몰라 그 주변만 맴돌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기사에게 글을 주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자,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그냥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며 글을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서민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왕이 마침내 그것을 열어 보니,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서 숨어있던 중과 궁주(宮主) 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왕 모르게 거문고 갑 안에 숨어서 간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들을 사형에 처했고, 이후 신라에서는 해마다 정월 상해일(上亥日) · 상자일(上子日) · 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으며 특히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약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신라에서는 「모든 일을 특별히 조심하고 꺼린다」는 뜻의 달도(怛忉)라 불렀으며, 오늘날 한국의 정월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서 약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설화는 신라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佛敎) 사이의 갈등, 불교의 수용을 둘러싼 신라 왕실과 귀족 집단의 대립의 표현, 내지는 김씨 왕족의 소지왕에 반대하는 왕실 내부 세력에 대한 제거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한편 소지왕 9년(487년)에 새로 지었던 신궁(神宮) 설치와 관련된 갈등을 알려주는 설화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소지왕이 거동하였던 천천정에 대해서 나희라는 「천천(天泉)」이란 신궁이 지어진 곳, 즉 시조 혁거세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어났다는 나정(蘿井)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며, 시조의 탄생이 하늘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서 나정이 「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소지왕은 신궁을 설치하고 난 뒤 이곳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거동하였으며 제사에서 받은 신탁으로 궁내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채미하에 따르면 신라에 신궁이 지어지기 전에는 시조 혁거세왕을 모시는 「시조묘(始祖廟)」가 존재했고 이것은 박씨 이후 석씨와 김씨가 함께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시대에도 박씨 왕족의 「족조(族祖)」로서뿐 아니라 「사로국(신라)」이라는 국가 전체의 「건국조」,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의 아들이자 「천신(天神)」으로서 신라 전체의 숭모를 받았고,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통합한 왕국으로 성장하면서 기존 소국들의 제천이 사로국의 제천으로 통합된 뒤에는 기존 시조묘 제사의 대상이던 혁거세왕의 격이 사로국뿐 아니라 신라 연맹체 전체의 국조로서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조묘 제사는 당시 정치세력 집단의 제사체계를 초월해 신라 전체의 소속 구성원의 일체감과 단결의 구심점이었으며, 새로이 즉위한 왕들은 시조묘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그의 통치가 정당한 것임을 안팎에 공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던 시대가 끝나고 내물왕(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면서, 내물왕에서 소지왕에 이르기까지 부계 장자 계승이 실현되고, 이들 왕비 역시 김씨 출신에서 나오는가 하면 부왕(副王)이라고 할 수 있는 갈문왕의 지위 역시 왕의 형제나 가까운 부계 친족이 부자 세습을 하는 등 김씨 왕실의 정치 권력이 강화된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김씨 왕실은 국조 혁거세왕에 대한 제사도 독점하고자 했고, 시조묘와 구별되는 새로운 제사 체계를 구상하는 와중에 소지왕에 의해 신궁이 세워지게 되었다. 기존의 혁거세왕의 능 또는 능 인근에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시조묘와는 달리 혁거세왕이 처음으로 태어난 곳, 탄강(誕降)한 곳에 세워졌는데, 시조묘 제사가 왕실뿐 아니라 여러 세력 집단의 장들이 다함께 국조이자 천신인 혁거세왕에 대해 올리는 제사였다면 신궁은 김씨 왕실만이 올리는 제사였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신궁 설치를 놓고 소지왕과 대립하였으며 이러한 양상이 사금갑 설화에 반영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언어유형학 언어유형학(, ) 또는 단순히 언어유형론은 언어학에서 단순하게는 세계 여러 언어들을 조사하여 그 유형을 분류하는 연구를 말한다. 더 나아가서, 유형론은 단순한 조사와 분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일반화하여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보편적인 성격을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언어학의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유형론은 이러한 ‘언어의 유형을 연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형론적 연구는 형식적 혹은 논리적 연구에 맞서는 것으로 언어의 기능, 인식 구조, 화용적 성격, 역사적 성격을 중요시여기는 방법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 형식적 문법 연구가 이론내적 개념을 기반으로 하며 언어 외적 요소를 배제하려는 것인데 비하여, 유형론은 언어 외적인 실세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끌어 들여 언어 현상을 설명하려는 방법론이다. 격 언어학에서 격(格) 또는 자리는 명사에 관련된 문법 범주의 하나로 해당 명사가 문장에서 어떤 통사적 기능을 하는지 표현해 주는 것을 말한다. 서구 언어학의 전통적에서는 명사와 형용사에 관련된 문법 범주로 성, 수, 격이 논의되어 왔다. 이것은 인도유럽어족의 특성에서 나온 분석이다. 고전 인도유럽어인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명사와 형용사는 형태가 변화하여 성, 수, 격의 문법적 의미를 표현했으며 현대의 인도유럽어들에도 이러한 현상이 남아있다. 이러한 명사의 형태 변화를 곡용이라고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격은 이러한 인도유럽어족의 현상에서 보듯이 명사의 곡용을 통해 표현되는 문장에서의 기능, 대표적으로 동사와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문법 의미를 말한다. 그러나, 격이라는 용어는 명사의 곡용이 없는 언어에 대해서도 널리 사용된다. 한국어의 조사와 같이 문법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표지가 나타나는 경우에도 격으로 지칭하며, 영어의 경우에서처럼 명사의 형태 변화는 전혀 없지만 문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통사적 기능이 정해지는 경우에도 격이라고 한다. 한국에 잘 알려진 외국어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여기서 더 나아가, 라틴어의 곡용과 같은 형태론적 요소나, 한국어의 조사와 같은 형태-통사론적 요소, 또는 영어의 명사의 위치와 같은 통사론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명사의 문장 내에서의 기능 또는 역할을 의미상으로 구분할 수 있을 때 그 문법 의미를 격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격은 형태와 의미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특히 한국어에 대한 논의에서는 매우 다양한 용어가 사용된다. 격 대신에 자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전통도 존재하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 사용되는 용어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용어는 별표()를 붙여 표시하였다. 보빙사 보빙사(報聘使)는 1883년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로 1883년 주한(駐韓) 공사 루시어스 푸트(Foote, L. H.)가 조선에 부임하였다. 이에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의 세력을 견제한다는 뜻에서 1883년 정사(正使)에 민영익(閔泳翊), 부사(副使)에 홍영식(洪英植), 서기관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은 변수(邊樹, 邊燧)·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사들을 대동시킨 친선 사절단을 서방 세계에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과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宮岡恒次郎)의 인도 하에,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미대륙을 횡단한 다음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Arthur, C. A.)와 2차례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고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보여준 조선식 전통 예법인 절은 소소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어 세계박람회·시범농장·방직공장·의약제조회사·해군연병장·병원·전기회사·철도회사·소방서·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특히, 워싱턴에서 내무성 교육국국장 이튼(Eaton, J.)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소개받았다. 뒤에 교육국사(敎育局史)와 연보를 기증받았다. 그밖에 우편제도·전기시설·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뒤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등의 실현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뒤에 주한미국공사 푸트를 통하여 육영공원 교사선발을 국장 이튼에게 의뢰,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생 헐버트(Hulbert, H. B.)·번커(Bunker, D. A.)·길모어(Gilmore, G. W.)의 3명이 파한되었다. 또한, 볼티모어시에서 가우처(Goucher)여자대학 학장인 가우처를 만나 뉴욕 감리교 선교부에 조선에 대한 선교기금을 희사하게 하여 선교사 파견의 교두보가 되었다. 이어 스미스소니언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약용식물의 표본을 기증하여 최초의 문화교류를 기록하였고, 귀국할 때 타작기·벼베기기계·저울 등 농기구 18품을 구입하여왔다. 보스턴 등지를 순회하고 1884년 5월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지를 여행한 다음 귀국하였다.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인 유길준은 보스턴에 남아 유학하였다. 후쿠이번 후쿠이 번()은 에도 시대 에치젠 국에 있던 번으로, 지금의 후쿠이현 레이호쿠 중심부를 지배하였다. 번주는 에치젠 마쓰다이라가로, 그 가격()은 신판 다이묘 중 고카몬급에 해당한다. 최종적인 영지 규모는 32만 석이었다. 에치젠 번(越前藩)으로도 불린다. 또, 기타노쇼(北ノ庄)라는 지명이 「후쿠이」로 개칭되기 이전, 즉 3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마사 이전의 유키 히데야스·마쓰다이라 다다나오 시대를 이유로 기타노쇼 번(北ノ庄藩)으로도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번청은 후쿠이 성(지금의 후쿠이현 후쿠이 시)이다. 다카다번 다카다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에치고 국 내에 있던 번으로, 지금의 니가타현 조에쓰 시에 위치했다. 후쿠시마 번()으로 불렸으며, 분고 국의 다카다 번과 구분하기 위해 에치고 다카다 번()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번청은 다카다 성이다. 센고쿠 시대에 에치고 국은 우에스기 겐신의 영국(領國)이었으나, 겐신의 뒤를 이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게이초 3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아이즈로 전봉되면서, 대신 에치고에는 히데요시의 가신 호리 히데하루가 30만 석 영주로서 입봉하였다. 히데하루는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해,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선동한 에치고 잇키를 진압한 공로로,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 지배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게이초 11년(1606년), 히데하루는 31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이 때문에 호리 가문은 11살 어린 나이인 히데하루의 아들 호리 다다토시가 계승하였다. 게이초 12년(1607년), 다다토시는 에치고의 본성인 가스가야마 성을 폐지하고 후쿠시마 성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다다토시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정무를 집행할 리가 없었고, 실질적인 정무는 히데하루의 숙부로 명신으로서 유명한 호리 나오마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초 13년(1608년) 2월 26일, 나오마사가 사망하자, 호리 가문 내에 내분이 발생한다. 나오마사의 두 아들인 호리 나오쓰구와 호리 나오요리가 번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다다토시는 둘 중 나오쓰구 쪽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분쟁은 게이초 15년(1610년)에 들어 격화되었고, 같은해 2월에는 마침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중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오쓰구가 정토종과 일련종의 승려를 논쟁시키고, 논쟁에서 패배한 쪽의 승려들을 모두 처형한 일이 발각되면서, 이에야스는 격노하여 다다토시가 유약하여 참언하는 신하에게 미혹하고, 대국에 봉해질 그릇이 아니라 하여, 다다토시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를 무쓰노쿠니 이와키()로 유배보냈다. 나오쓰구도 영지를 몰수당한 뒤 데와 국 모가미()로 유배되었다. 나오요리는 징벌조로 4만 석으로 영지를 삭감당하고 시나노 국 이야마 번으로 전봉되었다. 그리고 호리 가문이 영지를 몰수당한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여섯 번째 아들인 마쓰다이라 다다테루가 가와나카지마 번 12만 석 영지에다가 에치고의 새 영지인 63만 석을 받아 75만 석의 태수(太守)로서 부임하게 되었다. 그 후 다다테루는 게이초 19년(1614년) 다카다 성을 축성하고 후쿠시마 성을 폐지했다. 엄밀하게는 이때가 바로 '다카다' 번의 시작이다. 그러나 다다테루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사이가 소원했고, 이 때문인지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다다테루의 군대가 오사카를 향해 행군하던 중 오미 국 모리야마()에서 히데타다 직속의 하타모토 두 명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여름 전투가 끝난 뒤 조정에 전승을 보고하기 위해 이에야스와 함께 조정에 나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다테루는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원인이 되어 이에야스가 사망한 후인 겐나 2년(1616년) 7월 6일, 다다테루는 히데타다의 명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고, 이세 국 아사쿠마()에 유배되었다. 다다테루가 영지를 몰수당한 뒤로 도쿠가와 사천왕의 필두였던 사카이 다다쓰구의 적자 사카이 이에쓰구가 고즈케 국 다카사키 번으로부터 10만 석 영주로서 다카다에 입봉하였다. 하지만 이에쓰구는 겐나 4년(1618년)에 사망하였고, 대신 그 아들 사카이 다다카쓰가 그 뒤를 이었으나, 이내 시나노 국 마쓰시로 번으로 전봉되었다. 그 대신 마쓰시로로부터 마쓰다이라 다다마사가 25만 9천 석의 영주로서 다카다에 들어왔다. 그런데 큰형인 에치젠 국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난행 사건으로 히데타다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당하였기 때문에, 다다마사는 이내 형의 뒤를 이어 후쿠이 번주가 되었다. 그 대신 다카다에는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종가인 다다나오의 아들 마쓰다이라 미쓰나가가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미쓰나가도 일족 중신들 사이에서 후계자를 둘러싼 에치고 소동()이 벌어져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 후 다카다 지역은 당분간 막부 직할 상태에 놓였다가, 마침내 사가미 국 오다와라 번에서 이나바 마사미치가 10만 3천 석으로 다카다 번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마사미치는 곧 시모사 국 사쿠라 번으로 옮겨갔고, 그 대신 도다 다다자네가 들어왔지만, 다다자네 또한 시모쓰케 국 우쓰노미야 번으로 전봉되었다. 이어서 이세 국 구와나 번으로부터 마쓰다이라 사다시게가 쇼군 쓰나요시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11만 3천 석으로 다카다에 전봉되었다. 사다시게로 시작되어 5대에 걸친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번 통치는 매우 엄하여, 잇키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결국 5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요시가 좌천을 당하여 무쓰 국 시라카와 번으로 전봉되었다. 사다요시 대신 하리마 국 히메지 번으로부터 15만 석 영지를 받고 들어온 것은 사카키바라 마사나가였다. 마사나가는 아버지 사카키바라 마사미네가 요시와라에서 유흥에 심취하다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노여움을 삼에 따라 징벌조로 전봉을 당한 것이다. 비록 고쿠다카는 15만이었지만, 무쓰 국 아사카와()에 원격 영지를 갖고 있는 등, 액면대로 수입을 얻는 것이 매우 곤란하여, 그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사나가의 손자로서 명군으로 알려진 사카키바라 마사노리의 대에 이르러 원격 영지를 인접 지역으로 교환하게 되는 등 번 통치도 안정을 찾았다. 그 후 사카키바라 가문은 6대에 걸친 통치를 행하였다. 보신 전쟁에서 다카다 번은 당초 애매한 태도를 보였으나, 신정부군이 접근해오자 영지 내에 있던 막부측 보병대를 추방하고 신정부에 공순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에 나가오카 번, 아이즈 번 토벌에 선봉으로 나설 것을 명령받아 도호쿠 지방 각지를 전전하였다. 신정부에 대한 공순을 거부한 번사들은 탈번한 뒤 신목대(神木隊)를 조직하고, 나중에 창의대(彰義隊)와 합동하였다. 보신 전쟁이 종결된 후, 항복한 아이즈 번사 1,742명이 다카다에 수용되었다. 수용된 아이즈 번사에 대한 신정부군의 지급 비용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다카다 번에서는 구막부군에 대한 동정이 강하여, 번의 창고에서 금과 곡식을 내어 이를 보충해서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인해 다카다 번은 폐지되었다. 호리 가문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 사카이 사에몬노조 가문 후다이, 10만 석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다다마사 계통) 신판, 25만 9천 석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다다나오 계통) 신판, 26만 석 막부령 이나바 가문 후다이, 10만 3천 석 다하라 도다 가문 후다이, 6만 8천 석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11만 3천 석 사카키바라 가문 후다이, 15만 석 마쓰시로번 마쓰시로 번()은 일본 에도 시대 시나노 국 하니시나 군 마쓰시로(현 나가노현 나가노 시 마쓰시로 정)에 있던 번이다. 시나노 국 내에 있던 여러 번들 중에서 영지 규모가 가장 큰 번으로, 마쓰시로 성을 거성으로 삼아 가와나카지마의 4개 군을 지배하였다. 마쓰시로 번이 세워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번으로, 성지()는 다르지만 마쓰시로 번과 동일한 영지를 지배했던 가와나카지마 번()도 있었다. 본 기사에서는 이 가와나카지마 번에 관한 사항도 서술한다. 모리 가문(森氏)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사카이 사에몬노조 가문 사나다 가문 대한민국 제5공화국 대한민국 제5공화국(第五共和國)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존속했다. 10·26 사건으로 새로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병력을 동원하여 군사권을 차지했고,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로 정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이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제5공화국 헌법을 공포했다.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는 제12대 전두환이 선출되었으며,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 선진조국창조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제5공화국은 제4공화국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제5공화국은 영구집권이 가능한 제4공화국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를 고수했으며,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이후 6월 민주 항쟁과 6.29선언을 통한 개헌으로, 국민이 직접 뽑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 제6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제5공화국은 소멸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으나 곧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3월 보안사에서는 정보처를 부활하고,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가 정치에 나서는 것을 정당화 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K공작계획을 실시했다. 1980년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어 국내의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리고,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체로 실시된 간선제에 따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7일에는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됐으며, 1981년 3월 3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되어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전두환이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 정권이 시작되었다. 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제5공화국 정권은 형식 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 일단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늘린 대신 영구집권이 가능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연임제 대신 중임 제한을 기본으로 하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단임제를 택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 중에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국회의원을 임명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을 삭제했으며, 국회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유신체제 당시에는 야당인사의 대선 출마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나 (명목 상으로는 허용했으나 정부기관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5공화국은 야권의 출마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유지를 위한 확고한 보장을 위해,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변형시켜 새롭게 대통령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처럼 간선제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사회복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설치하고(헌법 제32조), 경제 질서에 대한 공법적 규제를 확대했다. 기본권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제3공화국의 조항 수준으로 회귀했고, 행복추구권(헌법 제9조)이나 연좌제의 금지(헌법 제12조 3항), 사생활의 보호(헌법 제16조), 환경권(헌법 제33조) 등의 조항도 신설됐다. 헌법 개정에는 국민 투표를 통한 개정만 가능하도록 규정해 절차를 일원화시켰다(헌법 제131조). 제5공화국은 김영삼, 김대중 등을 비롯한 주요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채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의 이른바 관제야당을 내세워 정당정치를 형식화하는 등 사실상의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야당 참여자를 미리 선별했을 뿐 아니라, 일부 운영비를 보조하고 전국구 후보들의 당비 헌금 한도액(1억원)까지 친절하게 정해줬다. 정치규제자의 친인척, 친 김대중 인사, 해직 언론인 등은 공천에서 제외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기도 했다. 대선 때는 야권의 입후보를 허용하면서도, 정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5공화국은 임기 내내 정권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등 정통성 없는 정권 창출 과정에 대해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김영삼은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 이러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제5공화국은 사회 정책 면에서 규제해제를 지향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야간통행금지의 해제와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의 스포츠산업의 활성화 등이 대표적이었다.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과 컬러TV방송도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회복되어가던 국제적 경제에 힘입어 물가안정, 경제 성장, 서울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유치 및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재달성 등의 경제적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암울했던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난을 해소하였다. 후대에 이 정책들은 3S 정책으로 통칭되게 된다. 삼청교육대라는 이름 아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던 폭력범 내지 범죄자들을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일률적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경찰서의 오행으로 오늘 날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조명받는 곳이기도 하다. 80년대 중후반 경,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제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여러 정당들이 창당되었다. 그 가운데 1985년 민주화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한민주당이 창당되었고, 부패정치인으로 몰려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구 민주공화당계 인사들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12대 총선 투표 날짜를 예년과 달리 겨울인 1985년 2월 12일로 정했는데 이는 신한민주당의 창당 날짜와 최대한 가까운 시기에 총선을 치러서 야당 돌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당시의 선거제도 자체가 여당에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어(정부는 야권 후보로 의미 없는 후보를 내세우기도 했고, 야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여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는 어렵지 않았으나, 명목상의 야당이었던 민한당과 국민당이 밀리고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될 경우에는 정국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안기부의 분석 결과, 신한민주당은 최대한 좋은 여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12 ~ 13석을 얻는데 그치고 특히 종로·중구 선거구에서는 민정당 이종찬과 민한당 정대철이 각각 1위와 2위로 당선,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3위로 낙선할 것으로 예상되어 전두환은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는 단순한 이변을 넘어선 '돌풍' 그 자체였다.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된 신생 정당 신한민주당이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키며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고, 특히 종로·중구에서 예상을 깨고 이민우가 2위로 당선된 것이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지역구에서 제1당이었던 민정당에 전국구 의석중 2/3을 배분한 결과로 사실상 민정당이 패배한 선거였고 전두환이 우려한대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전두환은 격노하였고 잘못된 선거 분석을 내놓은 노신영 안기부장을 질책한 후 사실상 경질하였다.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먼저 단행할 경우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양김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파가 이민우 구상에 대해 반발하였고, 이철승·이택돈 등의 내각제 개헌파가 이에 반박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 여파로 신한민주당에서 탈당한 인사들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학생 시위에 참가했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4월 13일, 정부는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골자로 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하였다. 그러자 야권·재야가 재결합하고 학계·종교계 등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농성이 잇달았다. 이후 5월 27일 각계를 망라한 각종 단체가 총결집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대정권투쟁에 돌입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10 민주화 장정대회'를 개최, 6월 항쟁의 대막이 올랐다. 1987년 6월 10일,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한 정부는 무한정한 공권력을 투입하여 원천봉쇄를 시도했으나 서울·부산·광주·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 노태우를 내세워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하고, 이를 통해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된다. 그 결과 1971년 이후 16년만에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 형태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속에서 5공 주역이었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제6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종식됐으나 사실상 1993년까지 연장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1960·70년대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외채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장영자 사건, 명성그룹 사건, 국제그룹 해체 등 많은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부의 긴축정책과 국제 유가의 하락, 달러 가치의 하락, 금리의 하락 등 3저현상이 지속되어 물가가 한 자리수로 잡히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전자·기타 반도체 첨단산업이 활기를 띠고 성장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와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현재 수입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자본의 투자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다.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은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나, 값싼 외래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양곡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래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했다.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또는 방조 의혹은 이 시기 학생운동의 한 테마였다. 일본과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서유럽과는 정치적 이슈가 크지 않았고,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하였다. 남한과 북한은 각각 통일방안을 제시했으나 모두 자신에 유리한 조건을 내세운 것으로, 결국 선전적인 의미를 갖는 데 지나지 않았다. 북한은 남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1985년 9월 20일 쌍방 151명의 이산가족이 판문점을 넘어 3박 4일간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다. 1983년 10월 북한의 테러에 의해 랑군의 아웅산 묘역에서 부총리 등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웅산 테러는 대통령과 정부각료들을 겨냥한 북의 대정부테러였다는 점에서 매우 크게 다루어졌으며 실제 사망자도 발생했다. 1987년 12월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은 북한이 1988년 서울올림픽 방해를 위해 일으킨 대민테러라는 점에서 크게 다루어졌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역대 정권으로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3분, 버마의 수도 랑군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 부상자가 46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후 군 내부에서 북한에 무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1984년 9월 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 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및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 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북측의 전략적 제안이었던 식량지원을 남측이 수용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것이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역시 같은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전두환은 허담 밀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1987년 11월 29일에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가 KAL기 폭파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어서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1982년 3월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통해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정부는 1988년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시기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양국간의 위상조명과 관계 재정립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바, 이는 한국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군사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지금까지의 정치적·경제적 대미 의존성이나 불평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1980년대 양국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가진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또 1982년 8월 15일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그는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反日)이나 '배일'(背日)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한국은 친미·친서방 외교기조를 유지해 오면서도 서유럽 제국과는 다소 소원한 듯한 감이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친미권·독자노선권으로 나뉘어 친미권의 경우는 한국이 직접 접촉을 시도하지 않아도 국제정치 현안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해왔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편중되어 있었고 독자노선권은 소·중·북한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국가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서유럽 국가들과 한국은 서로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1980년대 한국은 수출시장 다변화정책의 일환으로 EC시장을 공략했고 그 결과 양측간에는 통상마찰이 빚어졌다. 따라서 1980년대 한국의 대서구 외교는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되었다. 아일랜드와는 1983년에 수교하였다. 아프리카 대륙 각국 순방, 아시아 6개국 순방 등을 다녔다. 1983년 아시아 6개국 순방 중 버마(미얀마)의 랭군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을 당하여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1980년), 레바논(1981년), 파키스탄(1983년), 브루나이(1984년), 부탄(1987년)과 수교하였다. 1980년 9월 1일 취임식을 가진 전두환은 남덕우 국무총리를 필두로 하여 신병현 부총리와 11개 부처 장관을 임명했다. 1981년 2월 25일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전두환은 3월 10일 교통부 장관과 체신부 장관을 임명했다. 4월 8일에는 노동부 장관과 정무 제1장관직을 신설했다. 1982년 1월 3일 경제 부처를 중심으로 개각을 단행했다. 5월 21일 11개 부처 장관을 교체했다. 6월 24일 국무총리와 3개 부처 장관의 임명이 연이어졌다. 1983년 10월 14일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때문에 생긴 공백으로 개각을 발표한다. 1985년 2월 18일 총선거에서 신민당이 약진하자 쇄신 차원에서 12개 부처 장관을 경질했다. 1986년 1월 7일 8개 부처 장관이 교체된다. 8월 26일 민정당의 당직 개편에 이어 10개 부처 장관을 새로 임명했다. 1987년 5월 26일 국무총리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3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중규모 개각을 시행했다. 7월 14일 6.29 민주화 선언으로 민정당 총재직에서 물러난 전두환은 국무총리와 8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마지막 개각을 단행했다. 박영효 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개화파이다.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친척 매제가 되며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랬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쫓겨갔다. 일본 망명 기간 고종의 폐위를 기도했다고 모함을 받았지만 외려 1907년 고종 황제 양위를 막으려다 친일파들의 손으로 투옥, 유배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본 정부에게 받은 은채 공사금 28만원으로 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했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 고문도 지냈다. 이 때문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할 때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 노론으로 북학파 박규수(朴珪壽),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 1861년 생원 박원양(朴元陽)과 이윤행(李潤行)의 딸 전의 이씨의 아들 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광해군 때 의금부판사를 지냈던 오창 박동량의 후손으로, 인조 반정 이후 200여 년의 노론 집권 기간 동안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의 일익을 담당했다. 북학파 박지원, 박규수 , 개화당 동지 박정양, 후일 갑오개혁 실패 후 망명객이 된 박영효를 사면복권시키는 박제순 역시 모두 같은 일족이었다. 그의 친부 박원양은 세 번 결혼했는데 그는 마지막 후처인 전의 이씨의 소생이었다. 위로는 누나 두 명, 형 박영교(朴泳敎)와 박영호(朴泳好)가 있었다. 증조부인 박해수(朴海壽)는 음서로 통훈대부 품계에 진안현감을 지냈고, 조부 박제당(朴齊堂)은 벼슬이 없었으나 아버지 박원양은 생원시에 합격 후 박영효가 8세가 되던 해에 음서로 현감을 지냈다. 대과에 급제하진 못했으나 현감 재직시 선정을 베푼 것이 암행어사의 눈에 띄어 음서직으로는 드물게 승진까지 했다. 박영효는 형 박영교를 따라 당시 홍문관 제학이던 박규수의 문하생이 됐다. 박규수와 유대치에게서 새 문물에 대한 정보와 개화사상을 배우고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함께 개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깨닫게 됐다. 어윤중, 김옥균, 김윤식,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동문수학했던 이들과 후일 개화당을 지었다. 당시 수석 역관 자격으로 박규수의 청나라 행 사신단에 있었던 오경석에게서도 배웠다. 수도승 자격으로 일본에 자주 드나들던 이동인이 들여온 망원경과 지구본을 보고 충격을 받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청나라 및 외국의 개화서적을 동문수학들과 돌려보면서 개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4월, 11세 때 철종의 일점 남은 혈육이자 고종의 사촌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부마를 낙점하게 되자 우의정으로 승진한 스승 박규수와 수원부 유수 신석희(申錫禧)의 추천으로 간택됐다. 옹주와의 혼인으로 그는 금릉위(錦陵尉)의 봉작과 상보국숭록대부 품계를 받고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고종의 친형 이재면의 품계보다 높았다. 아버지 박원양은 곧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죽은 조부 박제당은 숭정대부 겸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증조부 박해수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에 추증됐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옹주와 사별하고 3년상을 지켜야 했다. 당시로서는 부마의 재혼과 축첩이 불법이라 그에겐 후사가 없었다. 후일 그를 불쌍하게 여긴 고종의 특별 배려로 궁녀 몇 사람이 하사돼 이들에게서 서자, 서녀들을 얻게 된다. 1878년 4월 오위도총부도총관, 1879년 혜민서제조를 거쳐 1880년 판의금부사에 임명된다. 1881년 8월 다시 혜민서 제조가 되었다가, 다시 판의금부사에 재임명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선발된다. 1882년(고종 19년)의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과 비공식사절인 민영익, 김옥균 등을 대동하고 배편으로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도일했다. 도일 당시 그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도안, 제작했고, 이는 후에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가 됐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 조약의 비준 완화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 지불방법과 지불 액수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도착, 도쿄에 체류하며 박영효 일행은 일본 정부의 고관을 만나 협상 및 사과 국서를 전달한 뒤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일부 내용을 정정하는 협상을 타결지었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에서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과도 접촉해 국제정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兵事)·재무(財務)·흥산(興産) 등의 개화상황을 견학, 시찰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김옥균, 윤치호, 서광범 등과 의논하여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 신학문을 배우고 귀국하게 하여 국내에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교섭을 일본 정부와 추진하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11월 일본에 더 남아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윤치호 등 다른 동지들을 남겨두고 단독으로 귀국했다. 일본 조야(朝野)를 시찰하고 돌아와 그는 개혁을 기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들의 정권 장악으로 실패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親淸事大)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는 12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천거됐다. 1883년 1월 27일(1882년 음력 12월 19일)에 그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들여와 한성부판윤 재임 기간 중 조선에 보급했다. 한성부에 치도(治道)·경순(警巡)·박문(博文)의 3국을 신설하고 도로의 확장과 포장 등 도시 정비와 색깔있는 옷의 장려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 등 수구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 3국은 폐지되었고, 도로 확포장 등 도시계획 사업도 전면 중단되었다. 한성부에 치도국(治道局)·경순국(警巡局)·박문국(博文局)의 3국을 신설하여 행정업무, 경찰·치안업무, 인쇄 홍보업무를 분장하게 하고 도로의 확장과 정비, 서양 양복과 색깔있는 옷의 장려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민태호, 김병시 등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 3국은 폐지되고 그의 개혁안도 모두 무산되었다. 이어 그는 한성부에 신문국을 설치해 신식 신문의 창간을 계획하였으나 자금 조달 문제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유학자들로부터 줄기차게 탄핵을 받다가 1883년 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1883년 4월 19일(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 신문사 창간 계획은 계속 추진하였지만 그해 음력 3월 광주부 유수로 가게 되면서 신문 발간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만다. 1883년 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광주유수로 발령된 그는 수어사를 겸하며 정조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했으나 다시 비난 여론이 들끓자 그해 12월 다시 광주유수직마저 사퇴하고 재야로 물러앉았다. 단기간 국내 유람을 다녀온 뒤,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꾸준히 연락, 그의 지원과 자문으로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한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로 창간되었다. 한성순보를 창간한 그는 김옥균, 윤치호, 서재필 등을 필진으로 위촉했다. 그를 근친으로 보고 총애하던 고종은 영혜옹주 사후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첩을 축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궁궐의 상궁 범씨를 비롯한 몇인의 궁녀들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박영효는 상궁 범씨에게서 아들 박진서와 박일서를 보았고, 둘째 아들 박일서의 딸이 바로 뒤에 의친왕의 왕자와 결혼하는 박찬주이다. 한성부판윤으로 있을 때부터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등 개화당 요인들과 꾸준히 만나서 협의, 1884년 음력 10월의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내빈으로 참여한 척신파 대신들의 제거를 결의한다. 이 과정에서 척신 계열이었던 민영익 등과 갈등하여 돌아서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으나 그는 예정대로 감행하기로 한다. 그는 일본측에도 연락하였는데 일본 역시 1882년 이후 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나라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와 아시아권에서의 패권을 확보하려 하였으므로 그의 주장에 동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재조선일본공사를 통해 지원을 약속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초 조선 주둔 청나라 부대가 청·프 전쟁에 증원돼 베트남으로 상당수 파병됐다. 청이 전쟁으로 조선에 신경쓸 수 없는 이 때가 호기라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부추김과 거병하면 일본군이 돕겠다는 확약만 믿고 개화당은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수구파 인사 몇을 제거하고 고종 부부를 납치해 경우궁에 유폐 후 정국을 장악했다. 개화파는 급히 내각을 꾸리는 한편 박영효도 친군전후영사 겸 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을 맡아 군과 치안 장악을 꾀했으나 외척 민씨들의 구원 요청을 받고 달려온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한다. 개화파들의 가족들이 곳곳에서 주살을 당할 때 그의 형 박영교도 홍영식 등과 유폐시킨 고종 내외를 지키다가 청군에 살해당하였다. 정변 실패 소식을 들은 박원양은 박영교의 장남인 장손주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려 했지만 바로 들이닥친 의금부 나졸들에 의해 체포되고 그의 어머니 전의 이씨는 살해당하였다. 11월 이조(吏曹)의 탄핵으로 아버지인 대호군(大護軍) 박원양(朴元陽),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한 형 사사(司事) 박영호(朴泳好)는 즉시 삭탈관직됐다. 투옥된 박원양은 곡기를 입에 대지 못하고 아사했다. 백범일지나 조병옥 회고록에 따르면 박원양이 거적떼기를 뜯어 먹을 정도로 굶다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찍 이일영에게 시집간 큰 누나와 김철현에게 시집간 둘째 누나는 출가외인이라 위기를 모면했고, 둘째 형 박영호는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몇 년을 공사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경우궁에서 살해된 맏형 박영교의 아들 중 박태서(朴泰緖) 만이 유모가 품고 피신해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들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반남 박씨들도 급히 항렬자를 '영'(泳)에서 승(勝)으로 바꿨다. 물론 자기 이름을 고수하는 자도 있긴 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이들을 급히 피신시켰다.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란교, 서광범, 변수(邊樹)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변복 후, 인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했다. 인천주재 주조일본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이었다. 12월 12일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쫓아오자 일본인으로 꾸미고는 제물포항의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 호(千歲丸)로 숨었다. 이튿날 대한제국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 등을 대동한 묄렌도르프의 추격대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역적 일행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배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행은 품고온 독약병으로 자살을 각오했다. 우물쭈물하던 다케조에가 배로 되돌아와서는 일행에게 역시 내릴 수밖에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내 일본인 승객들이 혀를 차며 꾸짖는 한편, 선장 츠지 가츠사부로(辻勝三郞) 역시 공사만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하선시키자 하면 이들을 죽이자는 것 밖에 더 되느냐며 질타했다. 다케조에가 우물쭈물하자 츠지 선장이 직접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국제법 상 선박은 해당 국가의 영토로 치외법권이며, 수색을 강행하면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추격대를 물리쳤다. 개화당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개화당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교류가 깊었던 전 일본 총리 이노우에 가오루는 후일 회고록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박영효 일행과 나가사키 항에서 헤어질 때 일본식 이름을 각각 지어줬다 회고했다. 곧 그들에게 들이닥칠 자객을 염려해 이같이 했다고 한다. 박영효에겐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이규완은 아사다 료(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어줬다. 그는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김옥균 등과 함께 도피, 윤치호와 김옥균은 중국으로 건너가고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5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후일 허정에 의하면 양반가 출신이라는 자존심과 막노동을 하는 것을 힘들고 불쾌하게 여긴 것이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한 원인이라 했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 그는 며칠동안 개혁의 실패와 동지들의 희생에 슬퍼하며 통곡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으로 조선에서 보낸 자객을 피하기 위해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 하에 은신해 있었다. 망명생활 중 그는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泳春)로 개명(改名)하고, 메이지 학원(明治學園) 영어과에 입학한다. 1888년 메이지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橫濱)로 건너가 미국교회에 출석하며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1888년(고종 25년) 초 일본에 체류하던 그는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 또는 '개화상소'라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3년간의 추적 끝에 부쳐진 편지의 주소지를 알아낸 수구파 대신들은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이일직(李逸稙), 권동수(勸東壽), 권재수(勸在壽) 등 수십여 명이 그를 암살하기 위한 자객으로 보내졌으나,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일본 정부 측의 암살단 도착 소식을 접한 뒤 바로 피신하여 암살기도는 미수에 그쳤다. 일부 자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일부는 다시 조선으로 도피했다. 1893년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후원금과 협조를 얻어 교포학생 교육지원을 목적으로, 유학생들의 기숙사 겸 학교인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자객들의 출몰로 아르바이트 조차 구할 수 없었던 그는 조선에 있던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자금 지원 외에도 직접 노동과 고국의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후원금을 조달하여 운영하였다. 망명 직후 김옥균은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의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신타로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그는 자중하였지만 도야마 미쓰루의 권고로 다시 여자를 찾았다. 조선에서 자객이 파견되자 도야마 미쓰루는 김옥균에게 일부러 술과 여색에 탐닉하라고 권고했다. 박영효는 김옥균에게 처신을 바로하라고 충고했지만 김옥균은 이를 거절했다. 김옥균의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그는 김옥균의 여자 관계를 두고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도 비판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박영효는 온순하고 침착한 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였으나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한 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 조선에 있을 대에는 박영효의 문벌이나 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으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두고 서광범, 서재필만 데리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도 김옥균과 박영효의 기질 차이로 이해하였다. 1893년 말, 조선 정부 내 수구파 대신들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李逸稙)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그는 일본인 사무라이를 경호원으로 고용하여 대동하고 다녔다. 1894년 2월초 김옥균이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2월 도쿄에서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인 이일직(李逸直)과 권동수(權東壽) 등의 습격을 당했으나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3월초 그가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과 홍종우(洪鍾宇)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자신을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김옥균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며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94년 2월말 이일직은 박영효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가 민첩하게 일본인의 집에 숨는 바람에 그를 찾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의 수사 결과 이들을 지휘한 민영소의 사주가 밝혀지기도 했다. 이일직 등의 계속된 추적을 피해 후쿠자와와 이노우에 등이 보내준 가면과 가발 등으로 변장한 뒤 일본인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1894년(고종 31년) 7월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자 그해 8월에 귀국한 뒤 12월에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7개월가량 재임했다. 일본의 후원과 압력으로 귀국한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점진적인 개혁을 펼치려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2차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 행정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그해 11월 다시 금릉위의 작위를 돌려받았다. 1895년 3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 가오루의 권고를 무시하고 연립정파였던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년 3월에는 김학우 암살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체포했다. 박영효는 서광범과 함께 이준용을 의금부 지하 감옥에 감금한 뒤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거리 시위와 일본영사관, 청나라영사관 등을 찾아다니며 손자 이준용의 석방, 구명운동을 벌였고, 박영효와 서광범의 이준용 심문 과정에서 악형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여론의 악화를 초래했다. 관제 개정 이후 그해 4월 다시 내무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명성황후 암살 음모 폭로로 1895년(고종 32년) 7월 초 반역 음모사건(고종 양위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고, 연이어 같은 시기에 왕비시해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이규완(李圭完)·우범선(禹範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 공사관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7월 초 박영효는 명성황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개화 이후로 고종은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여 고종은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명성황후는 이를 분하게 여겨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계획하여 러시아와 결탁하니, 박영효는 이를 우려하였다.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박영효는 단독으로 계략을 세워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한편 명성황후는 1894년 여름부터 급진개화파를 사살할 계획을 세운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의 개화당 살해 계획을 폭로하였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밝혔다. 왕비의 급진개화파 살해 기도를 접한 개화파는 개혁정책 외에도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 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895년 7월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 을 요청하였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근하다고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그런데 유길준은 바로 박영효의 왕비암살 계획을 임금에게 밀고했다. 박영효는 일이 유길준에 의해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바꿔 입고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용산에서 증기선을 타고 도주한 것이다. 그의 일당 신응희(申應熙), 이규완 등도 따라 도주하였다.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폭로한 유길준은 그무렵 따로 대원군과 이준용의 왕비 암살 모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한편 자신의 거사를 폭로한 인물이 정치적, 사상적 동지로 믿던 유길준이라는 것을 알게된 뒤 박영효는 같은 개화파 인사들조차 불신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7월 말 도쿄에 도착한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 구석의 판자촌에 은거하였다. 이노우에와 후쿠자와는 특별히 경호원을 보내 박영효를 지켜주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계속 자객을 파견하였고 그는 외부 출입을 삼가하였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협력자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을미사변에 그가 직접 가담한 혐의가 보이지 않자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 회의에서 박영효를 불러들여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거절했다. 도리어 박영효의 정계복귀를 꾀했다는 이유로 고종과 척족 대신들은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독립협회의 해산 이후 그는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해야 된다고 결심하여 무력 쿠테타를 계획한다. 윤치호, 서재필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던 그는 이들과의 연락과 사람을 국내에 들여보내 국내외의 정세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입수한다. 그가 일본 체류중이던 1897년에도 김운락(金雲洛), 채광묵, 김석구 등이 계속해서 박영효, 유길준, 이진호, 이두황 등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는 경비와 경호를 강화하고 경계하는 한편, 일본 도쿄 내에서도 조선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국내의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1900년(광무 7년) 7월에 고베(紳戶)에서 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김창한(金彰漢) 등을 불러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고종황제를 양위시킨 뒤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국내에 있던 한규설과 윤치호, 윤석준(尹錫準) 등에게 자금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했지만 의금부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다. 그의 정계복귀공작과 고종 폐위 기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일본인 경호원을 고용한 뒤 은거한다. 1904년 3월 고종은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고종이 지명한 요인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종에게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이행하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 체류 중 을사늑약 소식을 접한다. 1907년(융희 1년) 오랜 망명 끝에 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해 부산에 정박, 비밀리에 체류하고 있던 중 6월 7일 한성으로 올라가 궁내부 일본인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고 한편으로는 먼 일족인 박제순 등과도 교류, 박제순 내각의 알선으로 6월 13일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으로 사면을 받고 정식으로 귀국하였다. 이어 금릉위에 복작되었다. 그해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바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그는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했다. 남정철(南廷哲), 이도재(李道宰) 등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반대, 양위파와 갈등하였으며, 그해 8월 황태자의 대리 진하행례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이완용 일파의 탄핵을 받고 남정철, 이도재 등과 함께 곤장 80대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하인이나 노비 대신 그가 직접 형을 당하여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후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을 하다가 순종 즉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신 암살 음모사건으로 재판에 회부,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였다. 7월 조선의 개화인사들과 일본의 개화파 인사들 간에 친목 도모의 목적으로 설치된 한일동지회(韓日同志會)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구한말의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의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이 각자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역적’(동학·의병)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봤다. 갑신정변 당시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의지는 모두 좌절됐고, 그는 민도가 낮아서 개혁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박영효는 낮은 민도를 해결할 방법이란 경찰 치안과 군대에 의한 통제만이 답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이들의 강력한 경찰권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반발없이 제대로 채택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경무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이 서너명 이상이 모여서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식민화 훨씬 이전인 1901년 6월 22일의 일이었다. 순종 즉위 직후 다시 조정에 출사한 박영효는 1907년 7월 29일 궁내부대신에서 면직되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칙임관(勅任官) 1등에 임명된다. 고종 양위식 직후 일본군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내부 대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다. 순종은 물론 그대로 허락했다. 순종이 한일병합 때까지 3년여 황제로 재위한 동안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지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한결 같은 답변이었다. 순종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완을 지사할만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토가 기를 쓰고 그를 황제로 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완용의 상소에 따라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께 법부에 구속되었다. 이때 감옥에 갇힌 박영효가 배탈이 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가 그에게 약을 보냈으나 박영효는 한국에도 약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박영효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하자 "총리대신 이완용 씨를 역적이라고 말했을 뿐 죄지은 것이 없다"고 호통을 쳤지만 결국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8월 23일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금당했다가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된 그는 1908년말 유배에서 풀려난다. 유배살이 중 그는 1908년 7월 한성재목신탄주식회사에 투자, 대주주가 되었다. 1908년 유배에서 풀렸으나 서울 상경이 금지되었고, 1909년 6월 이준용이 세운 신궁봉경회의 총재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는 경성부로 돌아올 수 없었고 사람을 보내 경성 주변의 정세를 파악한다. 1910년 비밀리에 육지 상륙을 기획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한다. 1910년 8월 경상남도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 병합을 맞았다. 마산 체류 중에 한일 합방 소식을 접했다. 체념한 그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후 후작 작위를 받고 일본이 자신들의 귀족인 화족(華族)과 구별해 만든 조선 귀족에 편입됐다. 1911년 1월 은사공채금 28만원을 받고 2월 후작 작위를 받았다. 1925년판 반남박씨 족보에 해당 사실이 기재돼 있다. 1911년 조선귀족들의 친목단체인 조양구락부유지회 창립 발기인이었다. 7월 한문, 교양, 문자, 고전 등의 보급과 간행을 목적으로 문예구락부 회장으로 선출됐으며, 9월 조선귀족회 회장에 올랐다. 1912년 1월 이문회의 발기인이었다.(28년 회장취임) 동년 2월 권업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회사 성립 후 대주주가 됐다.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9월 메이지[明治] 천황의 장례식에 귀족대표로 참석했다. 한일합방 후 정치 활동은 별로 하지 않았고 대부분 기업과 은행, 토지 매입 등의 활동을 했으며 조선은행의 주요주주였다. 가끔 독립운동에의 참여나 자금을 요청하는 지사들이 찾아와도 그는 자금력이나 경제적 실력 양성이 우선이라며, 조선이 아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뭘로 일본에 저항하느냐며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 한다. 후작을 받았지만 조선총독부의 각종 정치 행사에는 소극적이거나 불참, 회피했고, 그 예로 1913년부터 중추원 부찬의와 찬의 등을 제안받으나 모두 거절한다. 1913년 4월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고 8월 녹지조림과 농장 경영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바로 보식원의 조합장에 선출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서 동래-대구 간 철도를 놓을 때 민자 유치를 계획하자, 7월 지사들과 함께 조선경편철도회사에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5년 1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물산공진회 경성지부에서 활동했다. 1915년 5월에는 자신의 사저 250원을 물산공진회에 기부하였다. 그해 9월 박람회 명예고문에 위촉되었다.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에 피선되었다. 1918년 5월 조선귀족회 회장직을 사퇴,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의 이사가 되었다.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국장 고문 겸 석비전면서사원에 임명되어 고종의 비문을 작성하였다. 1919년 3월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로 서명을 요청받았으나 실패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에게 3.1 운동의 진압이나 해체를 촉구하는 담화나 서신 작성을 의뢰하였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그 뒤 3·1운동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19년 5월 경성방직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 설립과 함께 경방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6월에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12월 조선경제회 회장, 1920년 2월 경성상공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0년부터 그는 민립대학 기성회, 조선인 민영 병원 설립운동에 동참하였다. 1920년 4월 김성수 등의 주도로 결성된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으며, 그 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20년 5월에는 노동대회 총재에 선출되었는데 이 일로 조선총독부의 요시찰인물이 된다. 바로 6월에 동아일보 사장직을 사퇴한다. 이어 조선산업은행 발기인으로 창립위원장을 맡았다. 1920년 10월 경성부 사립피병원 창립기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병원설립 기성회 조직 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2월 신민공사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출되고, 3월에는 사회단체인 사민회 총재와 유민회 총재에 위촉되었다. 유민회는 3.1 운동 이후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계속 협력, 협조를 요청했고 그는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 직책에 취임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인다. 1921년 4월 중추원고문에 선임되고, 6월 공직을 맡게 되면서 산림회원으로 활동이 불가능했지만 조선산림회 고문에 위촉되고 명예회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조선인 임시 산업대회의 위원장으로 행사를 주관했고, 9월 범태평양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10월에는 경성도시조사계획조사회 고문에 위촉되고 11월에 경성부에서 개최된 조선불교대회의 고문으로도 위촉되었다.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장례위원이 되고,바로 장례위원장이 되어 장례식을 주관했다. 4월에는 제1회 조선미술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뒤, 1923년 4월 제2회, 24년 4월 제3회, 25년 제4회 미술심사위원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였다. 1922년 4월 조선건축회 명예회원이 된 뒤, 6월 사회단체인 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장이 되었다. 그해 9월 중추원고문직을 사퇴하고 야인이 되어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사회단체인 조선협회 고문이 되었으며, 조선문제 간화회 간사가 되었다. 1922년 10월 조선흥업은행 창립발기인으로 11월에는 조선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1월 고학생구제방법연구회의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이후 조선서적인쇄사의 주주가 된다. 1923년 5월 범태평양조선협회의 회장으로 추대되고, 9월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내 조선인들에 대한 인심이 악화되자 조선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설득과 담화 호소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1923년 9월 관동진재의연금모집조성회를 조직, 관동 대지진으로 희생된 일본인들의 위문과 구호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일본내 악화된 조선인에 대한 여론악화를 수습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10월에는 간토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에 교부되는 일본 정부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자, 조선예산불감축운동을 주관하였다. 이어 조선예산불감축 시민대표위원회 일본파견 실행위원에 선출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일선 동조론에 대해 허위사실이며 사실무근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신궁봉경회에 참여할 때도 나타났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일선동조론에 동조하게 된다.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동조론에 호응, 동민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곧 동민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5월에는 조선구제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11월에는 조선사문학회(유교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5년 불교연합단체인 조선불교단이 설립되자 고문에 위촉되었다. 25년 6월에는 경성흥산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2월 정3위에 승서되어 다시 관직에 나갔다. 1926년 다시 중추원 찬의에 선출되었으며, 3월 교육협성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4월에는 순종이 붕어하자 순종 국장식 장의위원이 되고, 5월에는 장의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7월에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취체역에 선출되었다. 10월 조선문헌협회에 후원금을 내고 특별찬조원이 되었으며, 11월에는 경성방송국 JODK 취체역에 선출되었다. 그해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어 이완용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추원의 부의장직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해 말 다시 공석인 조선귀족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1월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장례식에 조선 귀족 대표로 임명되어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그해 3월에 귀국하여 조선농업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 조선산업주식회사의 사장에 취임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중추원 부의장직을 사퇴하려 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그에게 1928년 2월 조선귀족세습재산심의위원회 위원, 조선귀족 편입 심사위원에 임명한다. 같은 달 조선박람회 경성협찬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선출되고, 9월에는 조선박람회 총재에 선출되었다. 1928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6월 조선비행학교 창립 위원회 위원이 되고, 7월 비행학교 창립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7월 왕공족심의위원회 심의관에 임명되고, 8월 조선금융제도조사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달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유유아 심사회 고문에 위촉되고, 11월에는 쇼와 천황 즉위식에 첩인 박씨를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건너가 즉위식에 참석하고 귀국, 대례기념장을 특별히 받았다. 1929년 1월 광영산업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4월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해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8월 의주광산회사 대표취체역 사장이 되었다. 1929년 9월, 도박과 아편 등으로 몰락해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단체인 창복회에 가입, 동회의 이사로 피선되었다. 192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20주기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다. 1930년 5월 사단법인 조선공업회 고문이 되고, 6월 화순무연탄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 되어 운영하였으며, 9월 조선임산공업주식회사 대표취체역이 되었다. 10월 조선식산은행 이사직을 사퇴하면서 동시에 조선식산은행 고문에 위촉되었다.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 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31년 11월 만몽재주 동포후원회 고문,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에 추대되고, 12월 조선공민교육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3월 조선간이생명보험 사업 자문위원회 위원, 4월 재단법인 금강산협회 부회장이 되었다. 1932년 5월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 부총재가 되고, 6월에는 공자의 도를 되살리고 신학(기독교)을 배척한다는 취지로 조직된 유림단체 대성원에 가입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7월 신흥만몽박람회 명예부총재가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일본귀족원 의원(1932년),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선전 심사위원, 조선농회 부회장 및 조선농회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일관했다. 1932년 12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됐다. 같은 달 조선나예방협회 발기인, 이듬해인 1933년 7월엔 중앙진흥협회 발기인이 됐고 8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고문 위촉, 10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으로 발족 후 고문에 임명됐다. 10월에는 경성부에서 당시 불교계가 연 이토 히로부미 25주기 추도재에 참석했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 재단법인 조선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 발기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7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자문위원회 고문, 11월 일만면화협회 조선지회 고문이 됐다. 1935년 10월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동상건설회 발기인이 됐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됐다. 1937년 4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이사 겸임이었다. 그해 10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피선됐고, 1938년 4월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발기인이 됐다. 10월에는 조선식산은행에서 은퇴하며 20년 근속 표창을 받았다. 미남 왕족으로 네티즌들 사이에 알려진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일본 왕실, 귀족과 결혼을 거부하고 의친왕도 일본 며느리 불가론을 주장해 문제가 되자 그가 타협안으로 자기 손녀를 추천했다. 또는 이우 공이 이미 그의 손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이우와 결혼했다. 1939년 금강산 협회 이사가, 2월엔 경성부 육군지원병지원자후원회 고문에 추대됐고, 4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고문에 선임됐으며, 그해 7월 조선귀족회 통상총회의 이사로 선출됐다. 1939년 사망 당시 후작·중추원부의장으로서 일본 귀족 서열 정 2위 훈 1등이었다. 사후 작위는 장손 찬범에게 계승됐다. 향년 78세. 1939년 11월 일본의 사회단체인 흑룡회가 선정한 일한합방 조선측 유공자 추도회를 할 때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과 함께 합병 공로자로 추천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의 묘소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박영효의 묘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찬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 그 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옆에는 서자 박일서, 서손 박찬범의 묘소가 옆에 있다. 1962년 계몽,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감안되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후작 등을 제수받고,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제수한 중추원과 관직을 역임한 점이 감안되어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 수록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박영효는 가족관계가 복잡하여 족보상으로 박묘옥, 박진서, 박일서의 2남 1녀를 자녀로 두었다. 정실인 영혜옹주가 혼인 후 3개월 만에 사망하자 고종은 궁녀를 보내 박영효의 후실로 삼게 하였다. 범씨의 소생으로 자녀 가운데 죽은 줄만 알았던 박흥원(朴興元)은 서울 봉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그의 아들 박혜륜(朴彗輪) 역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박묘옥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두었다. 장손녀 박찬주는 의친왕의 차남이자 영선군의 양자인 이우와 혼인하였고, 장손자 박찬범은 의친왕의 삼녀 이해춘과 혼인하였다. 박영효를 연구한 재일사학자 김경해는 범씨를 박영효의 세번 째 부인으로, 박찬주를 네번 째 부인의 손녀로 소개하였다. 박영효는 반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며, 뉴라이트 등은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급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 밖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어 지탄받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에 의하면 그가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귀국하게 된 이유가 양반가의 자손이란 자존심 때문에 노동을 하기 싫어해서 라고 회고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박영효나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 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 는 것이다. 그는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도안, 제작했고, 이는 후에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가 됐다. 어윤중은 아버지 박원양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제6공화국(第六共和國)은 대한민국에서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년 10월 29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로 하여 민주적으로 개정된 헌법 제10호에 의해 성립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헌정체제이다. 현임 대통령은 2017년 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이며, 국무총리는 이낙연이다. 일각에선 일본의 55년 체제를 빌려와 1987년 체제 또는 87년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신군부 출신의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기간 북방 정책을 추진하고, 유엔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고위급회담과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의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1992년 두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금융실명제 등의 비리 일신 정책과 지방 자치제를 펼쳤으나, 예산 낭비와 여전히 존재하는 부정부패·비리, 측근들의 권위남용, 그리고 경제리스크 부실 대응으로 인해 임기말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1997년 세번째 대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이 당선되어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에 성공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제2의 건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경제 회복을 추진하였다. 또한 햇볕정책, 금강산관광, 개성공업지구, 남북 철도 연결 사업 등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관계를 호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2002년 네번째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이 당선되어 진보정권의 연장을 이루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다. 노 대통령은 임기 초반에 야당과의 갈등으로 2004년 대통령 탄핵 소추를 맞이하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며, 탈권위적 자세와 파격적인 언행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7년 다섯 번째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당선되어 보수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이명박 정부는 747 공약과 실용주의, 경제 발전을 추구하며,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사대강 복원사업과 자원외교를 추진하였다. 정권 초부터 촛불 시위 등의 정부에 대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국방안보에 단호한 의지를 표명,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2012년 여섯 번째 대선에서는 새누리당의 박근혜가 당선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행복한 국민, 행복한 한반도, 신뢰받는 모범국가로 '희망의 새 시대'를 국정 철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불통의 국정운영과 세월호 침몰 사고와 메르스 사태로 드러난 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임기 내내 큰 사회적 비판과 불신을 받아왔다. 결정적으로 2016년 말 대통령의 권한을 사적으로 악용하였음이 드러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면서, 대규모 촛불시위를 거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박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 및 파면되었다. 박 대통령의 권한정지와 함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확립, 제6공화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과도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2017년 일곱 번째 대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당선, 10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문재인 정부는 소통과 통합을 주요 정책기조로 삼고,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라는 표어를 국정 철학으로 삼았다. 1979년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은 제4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10·26 사건 수사와 12·12 군사 반란,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전두환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되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이후 제8차 헌법개정을 통해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의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된 7년 단임의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행정수반의 지위를 갖는 것을 골자로 하는 등 형식적인 민주주의 절차를 따랐으나 국회해산권, 비상조치권, 헌법개정안 제안권 등이 제4공화국에 이어 대통령의 독자적인 권한으로 유지되면서 대통령에게 편향된 권력 구조를 보이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전부터 신군부에 의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으로 논란이 되었고, 출범 이후에도 언론 강제 통폐합, 정당 활동 제한으로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였다. 그렇기에 천부인권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의 저항 역시 계속되었다. 그리고 7년 간 해방 이후 최초의 동맹 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경제발전에 따라 점차 커져갔다. 이후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자 연일 시위가 그치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에서도 전두환 정권은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간접 선거로 치룰 예정이었던 대통령 선거의 민주정의당 후보로 1987년 6월 10일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지명하고자 하였다. 시민들은 이 날을 기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런 와중에 6월 9일 연세대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와 동시에 전국적인 시위(국민평화대행진)가 집회되었다. 결국 정권의 의중대로 1987년 6월 10일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이한열 군의 사망으로 집회된 국민평화대행진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6월 민주항쟁)가 일어났다. 그로 인해 제5공화국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는데, 이때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사면·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사항 등의 민주화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그의 6·29 선언은 고독한 결단이라고 선전되고 연출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였지만 전두환의 확고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노태우의 개별적 자율성은 없었다 고 평가된다. 한편 이를 통해 강성 군부세력과 구별되는 온건 군부세력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군사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강경파 군부와의 차별 및 군사 정권 인사들의 지지를 동시에 획득하였다. 1987년 새 헌법(제6공화국 헌법)이 통과되었고,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첫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1988년 2월 25일 취임식과 함께 업무 수행을 시작하면서 제6공화국이 개막되었다. 제6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개최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마치고 국민경제는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1996년에는 경제성장과 발전의 결과로써 국제사회의 선진국들 간 경제기구인 OECD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97년 급작스럽고, 압축적인 경제성장의 후유증과 정경유착, 외환보유고의 부족 등 다양한 요인이 중복하여 영향을 끼치며 1997년 외환 위기가 찾아왔고, 국민 소득은 다시 10,000달러 아래로 추락하였다. 원-달러 환율은 급상승하였고 실업률이 대폭 증가하는 등 경제적 부도라는 일련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금 모으기 운동 등의 다양한 국민적인 단합활동과 정부의 신자유주의 수용 등 정책과 의식 면에서 경제를 개선하며 2001년에는 4년만에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제6공화국 헌법은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해 개정된 헌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고 중임할 수 없다. 헌법이 발효됨에 따라 국정감사권 부활 등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1987년 10월 2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되어 현재까지 개정 없이 이어지고 있다.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제9차 헌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전문과 본문 10장 130조, 부칙 6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의 다른 헌법과 비교할 때 특징적인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기본권의 보장이 강화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국회해산권을 가지지 않으며, 비상조치권이 아니라 긴급명령권, 긴급재정·경제처분 및 명령권을 갖는다. 국회는 국정감사권을 가지며, 회기 제한이 사라졌다. 이러한 국회의 권한 증가를 통하여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 당시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삼권분립을 법제적으로 완성하게 되었으며 국회 임시회의 소집 요건의 완화로 대통령의 권한이 약화되고 국회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헌법재판의 경우 헌법위원회가 폐지되고 헌법재판소가 설치 및 강화되어 헌법재판과 탄핵의 심판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지방자치의 경우 5·16 군사정변 이후 비상조치법으로 인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던 탓에 여러 지방자치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조항이 추가되었고 이는 1991년 지방선거와 현재의 전국동시지방선거 등 지방자치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盧泰愚政府)는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성립된 제6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이다. 제5공화국과 비교하기 위해 이 기간만을 제6공화국으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노태우는 민정당 대표 시절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으며, 같은해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되었다. 노태우는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재임 초기인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이후 노태우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외교을 추진하였다. 남북 관계에도 재설정 기조를 가지고 이전보다 적극적인 남북 교류를 추구하였다. 1991년에는 유엔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함께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같은해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통해 핵전술 무기를 철수시키면서 북핵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으로 군부 출신이라는 점으로 인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되면서 정치적 불안정성이 심화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의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결의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문민정부(文民政府)는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인 김영삼 정부의 다른 이름으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성립된 제6공화국의 두번째 정부이다. 1992년 3당 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은 집권 초기 개혁 드라이브에 나섰다.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단기간에 법제화하여 비리 일신 정책을 펼쳤고,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1995년부터 전면 실시하였다. 과거 청산도 주요 정책으로 삼아 1993년에는 하나회 해체, 1995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반란죄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하였으며, 1995년 광복 50주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철거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한편 남북 관계의 경우 집권 초인 1994년부터 북측의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로 전쟁 위기가 감돌았고,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 김일성 조문 문제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1996년에는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같은 북측의 도발도 이어졌다. 사회적으로는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등의 대형 사고로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임기 막바지인 1997년 한보그룹 부도를 시작으로 외환위기를 맞아 IMF로부터 긴급자금을 지원받는 IMF 사태가 도래, 향후 수년간 많은 기업들과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아들 김현철 비리 등 각종 비리에 휘말려 치명타를 입으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불명예 퇴진을 겪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國民의政府)는 제6공화국의 세 번째 정부인 김대중 정부의 다른 이름으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성립된 제6공화국의 두번째 정부이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DJP 연합'을 이루어 단일 후보로 내세운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며, 1998년 2월 25일 취임과 함께 출범해 2003년에 막을 내렸다. 국민의 정부는 임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외환 위기의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외환위기를 극복, 2001년에는 IMF 관리체제 종식 선언을 하게 되었다. 또한 국민 PC 정책과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 IMT-2000 등 정보통신 기술분야의 발전도 꾀하였다. 2002년에는 한일 FIFA 월드컵을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무엇보다도 튼튼한 안보를 기초로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더욱 적극 추진하는 이른바 '햇볕 정책'으로 남북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1998년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한 것을 신호탄으로, 2000년 6월 15일에는 사상 첫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개성 공단 사업을 개시하고,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나거나 같은해 올림픽 남북 동시입장 등의 이벤트로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협력이 급진전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간의 평화적 관계 수립을 위한 공로로 사상 첫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임기 중 최규선 게이트 사건, 윤태식 게이트 사건, 옷로비 사건, 새롬기술 사태, 이용호 게이트 사건 등의 비리 사건이 터지고, 이용호 게이트는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까지 하는 등 도덕성 문제는 여전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대북 송금 사건과 임기중 벌어진 제1연평해전 (1999년), 제2연평해전 (2002년) 등의 군사적 갈등으로, 대북 정책으로 안보 면에서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판과 논란도 컸다. 참여정부(參與政府)는 제6공화국의 네 번째 정부인 노무현 정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무현의 취임과 함께 2003년 2월 25일에 출범하여 2008년 2월 25일에 막을 내렸다. 참여정부는 주요 국정 목표로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고, 권위적 정치문화의 극복과 지역구도 청산, 지방분권, 지역균형 발전적 등에 노력을 기울였다. 주요 정책으로는 행정수도 이전계획을 추진하였으며, 한미FTA, 4대 개혁 입법 등을 추진하였고, 과거사 정리위원회 설치로 역사 바로잡기를 이어갔다. 한편으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하여 남북관계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개성공단 조성 완료와 남북철도 연결을 거행하였으며, 2007년에는 두번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2006년 북측의 사상 첫 핵실험 성공으로 위기 분위기가 조성되자 6자회담을 통한 적극적인 북핵외교를 추구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에는 실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비교적 정권 내내 혼란했던 시기로, 2003년 대북송금사건 특검과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정권 초부터 야당과의 갈등이 극한에 달했고, 결국 2004년에는 헌정 사상 최초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파국을 맞았다. 탄핵 직후 치뤄진 제17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고 대통령 본인도 탄핵이 기각되면서 안정적인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이후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의 참패로 국정동력은 힘을 잃었다. 사회적으로도 정몽헌 자살, 김선일 피살, 황우석 사건, 바다이야기, 아프간 피랍 사태 등의 큰 파문이 발생하였다. 경제 정책의 경우 실질적인 성과가 없고 좌우 진영에서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부동산 대책의 경우는 수차례 정부 대책을 세웠으나 폭등을 막지 못해 '집값 대란'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체감 경제 지수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만 부동산 대책으로 인해 투기 심리가 위축되는 동시에 주식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종합주가지수와 코스닥 지수는 역대 최고치의 성장을 보였다. 또한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역시 5년 연속 흑자를 이어갔고, 수출 실적도 최고를 달성하였다. 1인당 국내 총생산 역시 2만 달러대를 돌파하였다. 이명박 정부(李明博政府)는 제6공화국의 다섯 번째 정부이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8년 2월 25일에 출범하여 2013년 2월 25일 막을 내렸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당시 '작은정부 구축'을 위해 정부조직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하여 개편안을 발표하였으며,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큰 뼈대로 한 '경제살리기'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정권 극초반인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으로 불거진 촛불 시위로 최저 7.4%의 지지율 을 기록하는 등 정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으며, 시위에 대한 과잉 진압과 언론 탄압 의혹, 소통 부족 논란에 휩싸였다. 또한 국책사업으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과다한 국세가 지출되었고, 부적절한 치수 사업으로 오염과 부작용에 대한 문제점이 계속되었으며, 자원외교 역시 이명박 정부의 실책으로 비판받는 국책 사업중 하나였다. 남북 관계의 경우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과 잇다른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급속히 냉각되었으며,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그로 인한 5.24 조치 시행, 그리고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극한으로 치달았다. 박근혜 정부(朴槿惠政府)는 제6공화국의 여섯 번째 정부이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는 2013년 2월 25일 취임하였다. 재임 중에는 창조경제를 경제 추진 원동력으로 주창하였다. 그러나, 국민과의 소통에 관한한 전임 정부와 같은 비판을 받았다. 세월호 침몰 사건과 정윤회 문건 파동이 주요 사건으로 있었다. 2016년 10월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와 연관된 스캔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이 점차 크게 부각되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발전하였으며, 주한미군 사드 배치, 한일 위안부 협상 그리고 대한민국 문화계 블랙리스트까지 엄청난 파문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2016년 12월 9일 헌정사상 두번째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을 인용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대통령 공백 기간 동안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문재인 정부(文在寅政府)는 제6공화국의 일곱 번째 정부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하였다. 민영익 민영익(閔泳翊, 1860년~1914년 중국 상하이)은 조선의 정치인이다. 처음에는 온건 개화파 정치인이었다가 갑신정변 전후로는 조선 말기 민씨 외척 정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경기도 출신이며 명성황후의 친정 일족이었다. 자(字)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雲楣) 또는 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본관은 여흥이다.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의 딸이 숙종 계비로 책봉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흥선대원군의 본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있었으나 그녀는 민태호, 민규호와 촌수가 멀었고, 대원군 역시 척신을 미워하여 별 혜택을 볼 수 없었다. 결국 민태호의 부친, 즉 민영익의 조부의 초상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시신을 짚자리로 말아 출상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간고했던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 민비 책봉 이전 몇 안 되는 과거 합격자였던 그의 숙부 민규호는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1870년 그의 부친도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유년기를 몰락한 양반집안의 후예로 보냈던 민영익도 10대에 접어들면서 권문세가의 후예로 신분이 상승했다. 1874년 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집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가 폭발해 사망했다. 비록 양자였지만 민승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태어나 민치록에게 입양된 명성황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비는 가까운 친척을 배척하고 촌수가 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자 민태호는 반대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 형을 협박했다.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세도를 부리던 민승호가 갑자기 폭사하자,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동시에 폭사했으므로 민씨 일족들은 자신의 아들을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세우기 위해 각자 암투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민비는 만약을 대비하여 오빠의 사후 양자로 민영익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상태였다. 민태호는 아무리 일가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양자로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민규호 등과 민비의 거듭된 설득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민태호는 품에서 아들을 잃은 대신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민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민영익을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친하게 대했다. 고종 때인 1877년 문과 급제 후 동도서기적 개화 정책을 지지하면서 별기군의 운영 책임을 맡았다. 이조참의·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1881년)·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通理衙門事務)를 역임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왼쪽 얼굴을 칼에 맞아 크게 다치고 오른쪽 귀가 잘리고 칼 15방을 맞았지만 알렌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고 구식 군대의 공격으로 가옥이 파괴되었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 사죄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권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다가 23세이던 1883년 5월 푸트 주한(駐韓) 미국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자 그해 7월 고종은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답례 사절)를 파견한다. 민영익은 보빙사의 정사 및 전권대신이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고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주 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과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중도 개화파의 후원자였으며, 1883년 보부상을 단속하는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이 되기도 했다. 1884년 10월에 친군영(親軍營)이 실시되면서 우영사(右營使)를 역임했다. 친일적 급진 개화파와 갈등이 생겨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감행할 때 가장 먼저 자객의 기습으로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회생하였다.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그 뒤 1885년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 판서, 한성 판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886년 조선 정부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하여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이를 밀보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여 홍콩으로 망명했다. 뒤에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부사·1894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성립하자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1910년 한일 합방 소식을 들었음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상하이에서 체류하다 1914년 죽었다. 그는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측의 권유로 주(駐)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 행서를 잘 썼으며 묵란도에도 능하였다. 김소월 김소월(金素月, , 1902년 9월 7일 (1902년 음력 8월 6일)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 강점기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공주(公州)다.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음독자살한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 중 한명이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평안북도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옥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고 일본의 압박으로 부인과 동반자살 기도까지 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32세였다. 1977년 사후 43년 만에 그의 시작 노트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실린 시 가운데 스승 김억이 이미 발표한 게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1986년 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국 가곡의 20%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며 그 수에서 가곡시인 중 1위를 차지하였다. 민요조의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조연현은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면서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이라고 평했고, 조병춘은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이라고 했다. 김현은 김소월의 시가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고 했으며, 유종호는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이라고 했고, 김용직은 김소월을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라고 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사 (품사) 명사(名詞), 또는 이름씨는 구체적인 대상이나 추상적인 대상의 이름을 나타내는 품사이다. 조사와 결합할 수 있고 관형어의 꾸밈을 받는다. 그리고 문장에서 형태 변화가 없는 불변어이다. 문장 내에서 주어,목적어,보어의 역할을 한다. 영어의 명사는 라틴어의 이름 혹은 명사를 뜻하는 'nōmen'에서 왔다. 또한 로망스제어의 언어에서 명사(프랑스어의 nom, 스페인어의 nombre 등)는 명사와 이름,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보통명사(common nouns)는 일반적인 사물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유명사(Proper nouns)는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가리킨다. 보통 인명, 지명, 천체의 이름, 군대의 이름, 신문 이름 등에 많이 쓰인다. 한국어에서 자립명사는 스스로 뜻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말의 도움 없이 쓰이는 명사를 가리킨다. 보통 명사와 고유 명사 모두가 여기에 해당한다. 보통 영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의존명사는 독립성이 없어서 홀로 쓰이지 못하고 다른 말에 기대어 쓰이는 명사를 가리킨다. 추상명사(abstract nouns)는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를 말한다. 구체명사(Concrete nouns)는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는 모양을 가진 명사를 말한다. 가산명사(Countable nouns)는 셀 수 있는 보통 명사를 말한다. 불가산 명사(uncountable nouns)는 물질, 재료, 원소 등 셀 수 없는 명사를 말한다. 물질 명사, 추상 명사, 고유 명사 등이 이에 속한다. 집합명사(Collective noun)는 하나 이상의 독립된 개체가 모여있는 명사를 말한다. 파이썬 파이썬()은 1991년 프로그래머인 귀도 반 로섬(Guido van Rossum)이 발표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로, 플랫폼 독립적이며 인터프리터식, 객체지향적, 동적 타이핑(dynamically typed) 대화형 언어이다. 파이썬이라는 이름은 귀도가 좋아하는 코미디 〈Monty Python's Flying Circus〉에서 따온 것이다. 파이썬은 비영리의 파이썬 소프트웨어 재단이 관리하는 개방형, 공동체 기반 개발 모델을 가지고 있다. C언어로 구현된 C파이썬 구현이 사실상의 표준이다. 파이썬은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사용자층을 보유하고 있다. 동적 타이핑(dynamic typing) 범용 프로그래밍 언어로, 펄 및 루비와 자주 비교된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쓸 수 있고, 라이브러리(모듈)가 풍부하여, 대학을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 연구 기관 및 산업계에서 이용이 증가하고 있다. 또 파이썬은 순수한 프로그램 언어로서의 기능 외에도 다른 언어로 쓰인 모듈들을 연결하는 풀언어(glue language)로써 자주 이용된다. 실제 파이썬은 많은 상용 응용 프로그램에서 스크립트 언어로 채용되고 있다. 도움말 문서도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며, 유니코드 문자열을 지원해서 다양한 언어의 문자 처리에도 능하다. 파이썬은 기본적으로 해석기(인터프리터) 위에서 실행될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현대의 파이썬은 여전히 인터프리터 언어처럼 동작하나 사용자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파이썬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바이트 코드(Byte code)를 만들어 냄으로써 다음에 수행할 때에는 빠른 속도를 보여 준다. 파이썬에서는 들여쓰기를 사용해서 블록을 구분하는 독특한 문법을 채용하고 있다. 이 문법은 파이썬에 익숙한 사용자나 기존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들여쓰기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는 사용자에게는 잘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다른 언어의 사용자에게서는 프로그래머의 코딩 스타일을 제한한다는 비판도 많다. 이 밖에도 실행 시간에서뿐 아니라 네이티브 이진 파일을 만들어 주는 C/C++ 등의 언어에 비해 수행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사업 분야 등 일반적인 컴퓨터 응용 환경에서는 속도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빠른 속도를 요하는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프로토타이핑한 뒤 빠른 속도가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C 언어 등으로 모듈화할 수 있다(ctypes, SWIG, SIP 등의 래퍼 생성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다). 또한 Pyrex, Psyco, NumPy 등을 이용하면 수치를 빠르게 연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 공학 분야에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점차적인 중요성의 강조로 대한민국에서도 점차 그 활용도가 커지고 있다. 파이썬은 1980년대 말 고안되어 네덜란드 CWI의 귀도 반 로섬이 1989년 12월 구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역시 SETL에서 영감을 받은 ABC 언어의 후계로서, 예외 처리가 가능하고, 아메바 OS와 연동이 가능하였다. 반 로섬은 파이썬의 주 저자로 계속 중심적 역할을 맡아 파이썬의 방향을 결정하여, 파이썬 공동체로부터 '자선 종신 이사'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 같은 예로는 리눅스의 리누스 토발즈 등이 있다. 파이썬 2.0은 2000년 10월 16일 배포되었고, 많은 기능이 추가되었다. 그중 전면적인 쓰레기 수집기(GC, Garbage Collector)탑재와 유니코드 지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개발 절차 그 자체로, 더 투명하고 공동체 지원을 받는 형태가 되었다. 파이썬3000(혹은 파이썬3k)이라는 코드명을 지닌 파이썬의 3.0버전의 최종판이 긴 테스트를 거쳐 2008년 12월 3일자로 발표되었다. 2.x대 버전의 파이썬과 하위호환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파이썬 3의 주요 기능 다수가 이전 버전과 호환되게 2.6과 2.7 버전에도 반영되기도 하였다. 파이썬 공식 문서에서는 "파이썬 2.x 는 레거시(낡은 기술)이고, 파이썬 3.x가 파이썬의 현재와 미래가 될 것"이라고 요약을 했는데, 처음 배우는 프로그래머들은 파이썬 3으로 시작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2.x대 버전 과의 차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이썬은 다양한 프로그래밍 패러다임을 지원하는 언어이다.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과 구조적 프로그래밍을 완벽하게 지원하며 함수형 프로그래밍, 관점 지향 프로그래밍 등도 주요 기능에서 지원 된다. 파이썬의 핵심 철학은 와 같이 "PEP 20" 문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파이썬은 언어의 핵심에 모든 기능을 넣는 대신, 사용자가 언제나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사용하면서 확장해나갈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이것은 펄의 TIMTOWTDI("there's more than one way to do it" -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가 아니다') 철학과는 대조적인 것이며, 파이썬에서는 다른 사용자가 썼더라도 동일한 일을 하는 프로그램은 대체로 모두 비슷한 코드로 수렴한다. 라이브러리는 기본 기능에 없는 많은 기능을 제공한다. 또, 파이썬에서는 프로그램의 문서화가 매우 중시되고 있어 언어의 기본 기능에 포함되어 있다. 파이썬은 원래 교육용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읽기 쉽고, 그래서 효율적인 코드를 되도록 간단하게 쓸 수 있도록 하려는 철학이 구석 구석까지 침투해 있어, 파이썬 커뮤니티에서도 알기 쉬운 코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파이썬에는 「건전지 포함("Battery Included")」이란 기본 개념이 있어, 프로그래머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와 통합 환경이 이미 배포판과 함께 제공된다. 이로써 파이썬의 표준 라이브러리는 매우 충실하다. 여기에는 정규 표현식을 비롯해 운영 체제의 시스템 호출이나 XML 처리, 직렬화, HTTP ,FTP 등의 각종 통신 프로토콜, 전자 메일이나 CSV 파일의 처리, 데이터베이스 접속,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HTML, 파이썬 코드 구문 분석 도구 등을 포함한다. 서드파티 라이브러리도 풍부하며, 행렬 연산 패키지 넘피(NumPy)이나 이미지 처리를 위한 필로우(Pillow), SDL 래퍼인 파이게임(PyGame), HTML/XML 파싱 라이브러리인 뷰티풀수프(Beautiful Soup) 등은 잘 알려져 있다. 다만, 가장 낮은 수준의 라이브러리까지 포함하면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쉽지 않으므로, 최근 파이썬 패키지 인덱스, 곧 PyPI (Python Packages Index)로 불리는 라이브러리의 저장소(repository)를 관리하는 공식 기구를 새롭게 도입하게 되었다. 2018년 1월 기준으로 파이썬 패키지 인덱스는 125,762 개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패키지를 관리하고 있다. 파이썬의 문법에서 가장 잘 알려진 특징은 들여쓰기를 이용한 블록 구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보통 C 등에서 쓰이는 괄호를 이용한 블록 구조를 대신한 것으로 줄마다 처음 오는 공백으로 눈에 보이는 블록 구조가 논리적인 제어 구조와 일치하게 하는 방식이다. 아래는 C와 파이썬으로 재귀 호출을 사용한 차례곱을 계산하는 함수를 정의한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파이썬과 "정리되어 들여쓰기가 된" C 언어와는 차이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쪽의 C 형식은 가능한 여러 스타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C로는 똑같은 구문을 다음과 같이 쓸 수도 있다. 파이썬으로는 이렇게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파이썬에서 들여쓰기는 한 가지 스타일이 아니라 필수적인 문법에 속한다. 파이썬의 이러한 엄격한 스타일 제한은 쓰는 사람에 관계 없이 통일성을 유지하게 하며, 그 결과 가독성이 향상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그램을 쓰는 스타일을 선택할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란 의견도 있다. C와 다르지만 아래와 같이 줄바꿈을 하지 않고 사용할 수도 있다. 파이썬은 다음과 같은 자료형들을 갖고 있다. 또 많은 객체 지향 언어와 같이, 사용자가 새롭게 자신의 형을 정의할 수도 있다. 파이썬은 동적 타이핑의 일종인 덕 타이핑을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변수가 아닌 값이 타입을 가지고 있고, 변수는 모두 값의 참조(C++의 참조)이다. 첫 파이썬 버전은 매킨토시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동작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iOS에서는 동작하지 않는다. 또한 동작이 되도록 만들 가능성도 적어보인다. 원래 파이썬은 미국 지역에서 개발되었기 때문에, 한글이나 한자와 같은 2바이트 문자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이썬 2.0 에서 유니코드 문자형을 새로 도입하여 여러 나라의 언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스크립트 언어와 달리, 파이썬에서는 문자의 인코딩과 내부 유니코드 표현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유니코드 문자는 메모리에 저장되는 추상적인 개체이다. 화면에 나타내거나 파일 입출력을 할 때는 변환 코덱의 힘을 빌려서 특정 인코딩으로 변환한다. 또, 소스 코드의 문자 코드를 인식하는 기능이 있어, 다른 문자 코드로 쓰여진 프로그램의 동작이 달라질 위험을 줄여 준다. 파이썬 2.4 에서는 한중일 코덱이 표준으로 배포판에 포함되었으므로 이제 한글 처리에 문제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윈도우 판의 IDLE에서 한글 입출력을 잘 지원한다. 파이썬은 많은 제품이나 기업 및 연구기관에서 쓰이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파이썬은 들여쓰기에 대해 비평을 받아왔다. 파이썬의 들여쓰기는 비정규적이고 자동화가 불가능하다. 또, 공백의 양에 따라 워드의 의미가 바뀔 수 있다. 들여쓰기에만 의지할 경우 잠재적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감지하지 못하는 논리적인 버그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셸 셸(shell, )은 운영 체제 상에서 다양한 운영 체제 기능과 서비스를 구현하는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셸(껍데기의 영어 단어)은 사용자와 운영 체제의 내부(커널)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감싸는 층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셸은 일반적으로 명령 줄과 그래픽 형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명령 줄 셸은 운영 체제 상에서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를 제공하는 반면에, 그래픽 셸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제공한다. CLI와 GUI 기반 셸의 상대적 장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다. CLI 지지자는 CLI 셸 상에서 일반적인 수행(파일 이동 등)을 훨씬 빠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GUI 지지자는 GUI 셸의 상대적 사용성과 간편함을 내세운다. 일반적으로 성능을 중시하고 숙련된 관리자의 작업에 주로 사용되는 서버의 경우는 CLI가 많이 쓰이며 반면 일상적인 업무에 사용되는 컴퓨터엔 GUI가 많이 사용된다. 최초의 유닉스 셸인 켄 톰프슨의 sh는 멀틱스 셸을 따라 모형화한 것이었다. 본 셸은 첫 유닉스 셸에서 파생한 것이다. 본 셸의 뒤를 이어서 등장한 셸은 C 셸(csh)이다. C 셸은 버어클리의 빌 조이(Bill Joy)에 의해서 작성되었으며, 셸 스크립터를 작성하는 언어가 C 언어를 닮았기에 C 셸이라고 불린다. 다음으로 나타난 셸은 TC 셸(tcsh)로서 C 셸의 기능에다 명령어-완성(command-completion)기능을 추가시켜 만든 퍼블릭 도메인 버전이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 체제의 셸은 상호 작용과 일괄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일괄 방식의 경우 여러 명령어를 나열하여 둔 텍스트 파일의 이름을 지정함으로써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셸을 이용하는 일괄 방식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구조, 조건, 변수 등을 동반한다. 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년 4월 5일 ~ 1679년 12월 4일)는 잉글랜드 왕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최초의 민주적 사회계약론자이다. 서구 근대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책 《리바이어던》(1651)의 저자로 유명하다. 홉스는 자연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상정하고, 그로부터 자연권 확보를 위하여 사회계약에 의해서 리바이어던과 같은 강력한 국가권력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588년 잉글랜드 윌트셔 웨스트포트에서 교구 목사(Vicar)의 아들로 태어났다. 홉스는 가난한 집안의 칠삭둥이였다.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았지만, 부유한 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홉스는 말름스버리 학교(Malmesbury school)에 입학하여 언어에 뛰어난 자질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열네 살에 옥스퍼드 대학의 청교도적 학풍을 자랑하는 마그덜린 단과대학(Magdalen Hall)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5년간 공부해 학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마그덜린 단과대학의 교장이자 진취적인 청교도인 존 윌킨슨는 홉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홉스는 캐번디시가 가정교사로 지내면서 그 집안의 후원으로 유럽을 여행하며 폭넓게 학문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1629년부터 1631년 사이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 기하학의 논증 방법을 자기 학문의 주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1608년부터 1610년 사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와 갈등 있었고, 보일의 실험주의를 비판했다. 또 보일의 진공 실험을 비난하며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기도 했는데, 이 일로 결국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열렬한 절대군주제 지지자였는데, 당시 영국에서 장기의회가 결성되자 프랑스로 도피 생활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90세 나이에도 저서를 출판할 만큼 만년에도 왕성하게 학문 활동했다. 그는 1679년 12월 초, 대학 졸업한 후 망명기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의지했던 캐번디시가 한 저택에서 91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홉스는 사회계약에 대해 명확하고 자세하게 말한 최초의 근대 정치철학자이다. 홉스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이기적 본성을 지닌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한없이 추구하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한다. 그는 서로 다투던 자연상태 속의 인민이 그들 개인이 가지던 개인의 권리를 양도하여 주권을 창조했다고 보았다. 국가에 의해 개인의 권리는 억류되었고, 그의 방어와 좀 더 기능적인 사회를 위해 그의 권리가 돌아왔으므로 사회계약은 실용주의적 자기 이익 추구의 바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홉스는 국가의 이름을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국가가 사회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리바이어던은 당시 영국 왕당파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신념)였다. 이 책은 유럽에서 망명 중이던 찰스 2세에게 헌정되었으나, 거절 당했다. 찰스 2세와 그 주변 참모들은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절대왕권을 옹호한 홉스의 추론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보존을 위해 맺은 계약으로 왕이 권력을 얻는다면, 왕의 권력은 아래로부터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는 왕이 교회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집중된 권력을 가져야한다고 했었지만, 왕은 권력이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홉스의 논리 대신에 왕권은 신이 부여한다는 왕권신수설을 그들의 논리로 채택하였다. 왕권신수설은 위로부터의 권력형성을 의미하며, 권력 형성 과정에서 시민은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홉스의 책에서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추론 방식에서 나타난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홉스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던, 존 로크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홉스의 주장에서 권력은 미래의 명백한 만족을 획득하기 위한 현존 수단이다. 권력은 자연적 혹은 원초적 권력과 도구적 권력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적 혹은 원초적 권력이란 어떤사람의 '육체 혹은 정신'이 다른 개인보다 뛰어난 데서 나오는 권력을 지칭한다. 도구적 권력이란 원초적 권력의 행사에 의해 획득되는 권력으로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홉스는 자연적 권력이던 도구적 권력이던 그것들 모두를 개인이 가진 능력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권력은 개인이 바라는 것을 획득할 수 있는 잠재력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은 상대적이다. 권력은 공통성이 거의 없는 일련의 자질과 능력으로 환원된다. "인간 권력의 최상의 형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권력이 합의에 의해 자연적이든 혹은 시민적이든 한 개인에게 부여되어, 그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권력을 사용하는 것에 있다. 그것이 바로 국민의 권력이다" 홉스는 당시 과학과 인간의 이성을 억압하던 가톨릭 교회를 비판했다. 또한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맞게 성경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조르다노 브루노를 화형시키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소에 기소한 가톨릭 교회를 《리바이어던》을 통해 비판했다. 몽테스키외는 홉스와 스피노자의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의 영향을 받아 법의 연구를 가치판단으로부터 "순수화"시키고 체계적인 경험적 관찰에 기초시키려 시도한 점에서 법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주목되고 있다. 조르조 바사리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년 7월 30일 - 1574년 6월 27일)는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11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다. 1524년 피렌체로 가서 안드레아델 사르토(피렌체파 화가. 초상화에 뛰어나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젤로의 제자로서, 메디치가(피렌체의 지배자)의 원조를 받으면서 회화, 조각,건축에 종사한 예술가이다..1529년 로마를 방문한 라파엘로와 그 밖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고대 로마의 유적을 소묘해 가면서 예술적 영감을 쌓아갔다. 건축가이자 화가로 활동했다.당시 메디치가의 수장이었던 코시모 1세의 힘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수한 프레스코화(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진 벽화)를 제작하였고 우피치 궁(우피치미술관) 설계 등의 대작들을 연달아 수행했다.화가로서 바사리는 화려하고 지적이지만 독창성은 부족한 보수적인 미술가였다. 그러나 건축가로서는 간결하고 강건한 건축물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정작 역사상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작업은 1550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 명의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의 《미술가 열전》출판이다.개정 작업을 시작, 이탈리아 전국을 일주하면서 취재를 거쳐 1568년에 개정판이자 결정판을 내었다. 그가 남긴 이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평전은 후세의 미술사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고 있다. 그는 코시모 1세가 권좌에서 물러나 사망한 몇 달 후1574년 숨을 거두었다. 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 (1550-1568) 바사리는 자신의 책 제 1부'서설'에서 고대의 재생을 논하며 당시의 시대를 규정짓기 위해 'Rinascimento'(Renaissanc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는 현재 우리가 쓰는 '르네상스 시대' 라는 역사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 문화가 재생하였다' 라는 평면적 의미였다. 현대 우리가 쓰는 역사적인 의미는 스위스의 미술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만들어 낸 개념이다. 바사리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Le Vita De' Piu Eccellenti Architetti, Pittori, et scultori(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명이 남긴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을 수록한 이 책은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바사리는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책에 등장하는 여러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직간접적으로 널리 교류했다. 그 덕택에 바사리는 좀 더 생생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훗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오류로 밝혀진 부분들도 적지 않지만, 그가 생존했던 시대의 상황과 혼자서 200여명에 대한 평전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그가 남긴 오류가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 저술을 통하여 후세에 남긴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은 당시의 예술 기법을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집대성한 '기법론'을 추가하였다는 점이다.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조각가,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측면을 오늘날 파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Le Vita De' Piu Eccellenti Architetti, Pittori, et scultori'는 1986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초역,출판된 바 있다. (이근배 역, 탐구당 간행). 이 완역본의 축약본을 2000년에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한명 출판사에서 재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탐구당본과 한명 출판사 본 모두 현재는 품절된 상태로, 도서관 혹은 헌책방에서만 구할 수 있다.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누스를 거세하는 장면을 플로렌스의 Palazzo Vecchio (Ducal palace)에 벽화로 남기고 있다. 큰 낫을 들고잇는 이가 크로노스이며 스러져있는 이가 우라노스이다. 우리노스 뒤편으로 보이는 천구의는 우라노스를 의미한다. 우라노스는 하늘의 신이기 때문이다. 오타구 오타구()는 일본 도쿄도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총 면적은 59.46km²로 특별구 중 가장 넓다. 오타구의 중심은 오타 구청과 오타 우체국이 있는 가마타역과 게이큐 가마타역 주변에 위치한다. 오타구는 1947년 3월 15일에 오모리구와 가마타구가 합쳐져 세워졌다. 1931년에 하네다정의 하네다 비행장의 설립으로 시작된 도쿄 국제공항은 현재 일본 수도권의 주요 국내 공항이다. 이곳은 미국 육군의 통제 하에 하네다 육군 비행장이 되었다. 같은 해에 연합군은 공항의 확장을 지시하고 주변의 주민들을 쫓아냈다. 연합군의 점령이 끝난 후에 미국은 1952년에 일본에 시설의 일부를 반환하였으며 1958년에 반환이 완료되었다. 오타의 하네다 공항은 도쿄 올림픽 때 도쿄의 교통을 위한 주요 국제 공항이었다. 23구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시나가와구, 메구로구, 세타가야구와 접하고 동쪽으로 고토구와 접한다. 다마강은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와의 남쪽과 서쪽 경계를 이룬다. 전일본공수의 계열사인 에어 재팬, 에어 니폰 네트워크, 알프스 전기, 캐논, 이케가미 쓰신키, 남코, 세가, 스카이마크 항공, 도쿄 인의 본사가 오타구에 있다. 쿠 클럭스 클랜 쿠 클럭스 클랜(, KKK, )은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반(反) 로마 가톨릭교회, 기독교 근본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표방하는 미국의 극우 비밀 결사 단체이다. KKK단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원은 원 (circle) - Ku Klux (그리스어로 키클로스 kuklos (κύκλος)과 집단 (clan) - Klan의 합성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들은 흰색 천으로 온 몸을 감싼다. 이는 자신들이 백인임을 과시하고 상대방을 주눅들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단체는 남북 전쟁이 끝난 후인 1865년 미국 테네시주 펄래스키에서 여섯명의 은퇴한 남부군 장교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 단체의 주 목적은 흑인들의 정치적 진출을 막는 것과 흑인들을 백인과 같이 지내지 못하도록 따로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주요 활동은 흑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 즉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반대되는 자들을 테러, 폭력과 협박 등의 수단을 사용하며 위협하는 것이다. 약칭 KKK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남북 전쟁(1861년~1865년)후 연방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급진파들은 해방된 흑인들을 정치 세력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내전 이전의 백인들의 권력 구조를 분쇄하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반발해 1865년 12월 24일 남부 연합 군인들은 테네시주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갖고 남부의 재건을 목표로 급진적인 지하 저항세력의 중추조직 KKK를 결성하였다. 주도자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기병대장으로 맹활약했던 네이턴 베드포드 포레스트였다. 이들은 남부 각주에서 해방된 흑인들, 심지어 노예 해방을 지지하는 백인들을 기습하여 집단 폭행 등의 폭력을 일삼았다. 또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여 흑인들이 투표권까지 획득하자 이에 KKK단은 흑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말라고 협박, 폭행까지 하기도 하였다. 철저한 위계질서를 지키며, 준(準)종교적 의식을 올리고, 얼굴을 흰 두건으로 가린 이 비밀 결사 조직은 처음에는 위협과 공갈, 협박으로 백인의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세력이 확장되자 그들은 흑인과 흑인해방에 동조하는 백인들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보다 끔찍한 테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폭력행위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1870년 무렵 그들의 폭력을 단속하기 위한 연방법이 제정되어 KKK단은 형식적으로 해체되었으나 1915년 조지아주에서 KKK단은 백인지배원리를 내세우면서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소수집단 모두를 적대시하는 활동을 재개하였고, 그 후 1960년대에 들어서 흑인과 자유주의자들의 민권운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재등장하여 오늘날에도 백인의 인종적 지배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아일랜드,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인들의 이민이 급증하자 KKK단은 조직을 개편하여 반 흑인뿐 아니라 반 가톨릭, 반 유대주의를 강령으로 삼고 남부를 중심으로 반(反) 이민 경향이 있는 지역 등에 침투함으로써 수백만 회원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이민들의 등장이 개신교와 백인들의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캐나다에까지 진출을 시도했으나 캐나다인들은 미국과 달리 이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민권운동가들의 계속적인 인종차별폐지운동과 연방정부의 단속 재개와 함께 남부의 정세가 인종 문제에 관대해지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현재는 그 활동이 미미하며 규모도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네오 나치로 흡수되고 있는 실정이다. 1915년 추수감사절 밤 조지아주 애틀란타 근교의 스톤 마운틴()에서 의사이자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J. 시몬스 가 조직하였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국가의 탄생()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설립 회원들은 대부분 메리 페이건 살인 사건에서 비롯된 메리 페이건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민자가 증가하는 시기였는데, KKK단은 흑인과 함께 이민자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천주교와 유대교 신자로, 천주교와 유대교가 KKK단의 주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메인주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주교 학교와 유대교 학교를 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1920년에는 회원수가 400만명에 이르러 제1기의 규모를 능가하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개신교 목사 회원이 4만 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남부에 한정되었던 제1기와 달리, 제2기는 전국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텍사스주에서는 KKK단원이 상원의원에, 조지아주, 앨라배마주,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에서는 KKK단을 지지하는 주지사가 당선되었고, 콜로라도주, 아칸소주, 오클라호마주, 인디애나주, 오하이오주에서는 KKK단이 지방 의회를 장악하였다. 1925년에는 본부를 워싱턴 D.C.로 옮기며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1928년 연방의회 의사당 앞 펜실베이니아 가 행진은 제2기 KKK단의 위세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기 회원은 500만에 이른다. 대공황과 제2차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시들해졌다. 미국 나치당에 흡수된 경우도 많다. 70년대 이후 FBI가 전면 소탕 작전에 나서면서 현재는 사실상 와해된 상태이다. 아랍 연합 공화국 아랍 연합 공화국(, UAR, ) 또는 통일 아랍 공화국은 1958년 2월 22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하여 수립된 나라이다. 1961년 9월 28일에 시리아가 탈퇴했고 1971년 9월 2일을 기해 소멸되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를 계기로 아랍 세계,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범아랍주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아랍 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권의 통일 국가 수립을 구상했다. 시리아의 바트당은 이집트와의 단일 국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1958년 2월 22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시리아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과 함께 단일 국가 수립에 합의하면서 수립되었다. 이는 아랍권 국가의 통일을 실행에 옮긴 최초의 성과이다. 1961년 9월 28일 이집트가 아랍 연합 공화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시리아 군부, 시리아 바트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리아는 아랍 연합 공화국에서 탈퇴하게 된다. 시리아가 아랍 연합 공화국에서 탈퇴한 뒤에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시리아의 아랍 연합 공화국 복귀, 또는 다른 아랍권 국가의 추가 가입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국호를 계속 아랍 연합 공화국으로 두었지만 시리아의 아랍 공화국의 복귀, 아랍권 국가들의 아랍 연합 공화국 추가 가입은 성사되지 않았다. 1971년 9월 2일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국호를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바꾸기로 결정하면서 아랍 연합 공화국은 소멸되었다. 아랍 연합 공화국의 교육 법제는 학교제도의 근대화와 초등교육 의무제를 규정하고 6세에 시작하도록 하였다. 공립학교는 전부 무상교육이었다. 교육행정은 지방분권화되어 문부성(文部省)은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지방교육 행정당국에 위임하였다. 학교체제는 6년제의 초등학교, 3년제의 하급 및 상급 중등학교, 고등교육기관 등으로 되었다. 또 중등학교는 하급·상급 외에 보통과정과 직업과정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초등교원 양성학교는 하급보통중등학교 졸업 후 5년간의 과정을 이수하게 되어 있었다. 중등교육 단계를 졸업한 자에게는 대학입학 자격이 부여되었으며, 기술계 중등교육 수료자는 고등기술교육기관으로 진학할 수 있다. 아랍연방의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국립대학이 4개교, 공·사립을 합한 대학이 32개교, 그 밖에 15개교의 고등교원 양성기관이 있었다. 또 1천 년의 전통을 가진 알아즈하르 대학교가 있는데, 그 하부기관으로는 보통교육체제와 초등·중등학교 체제가 있었다. 아랍 연합 공화국 정부는 1961년에 고등교육성(高等敎育省)을 발족시키는 등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부성은 공립학교 및 보조금을 받는 사립학교의 커리큘럼을 규정하였으며, 여성교육은 몇 개 교과를 제외하고는 남성과 같은 교육과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아랍인은 유치원을 포함한 400여 개 국립학교에 약 7만 5천 명의 학생을 수용하였고, 종교 단체나 기타 기관에 의해 경영되는 90여 개 사립학교에 만 4천 명을 취학시켰다. 당시의 취학률은 소년이 95%, 소녀가 75%로, 위임통치시의 각각 65% 및 15%에 비하여 많은 발전을 하였다. 교토부 교토부(, )는 일본 긴키 지방에 있는 행정 구역이다. 한국 한자음은 경도부라고 읽는다. 동쪽으로 후쿠이현, 시가현, 미에현, 남쪽으로 나라현, 북서쪽으로 효고현과 접접하고 있으며, 오사카부와도 닿아 있다. 부청 소재지인 교토 시는 794년부터 1867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역사적인 수도였다. 교토의 역사는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고 있고, 544년서부터는 좋은 날씨와 성공적인 수확을 위하여 아오이 마쓰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교토는 처음에 일본의 수도가 아니었다. 일본의 처음의 수도는 나라였다. 741년에는 쇼무 천황이 수도를 '구니쿄'라고 나라와 교토 사이에 있었던 도시에 천도하였다. 784년에는 수도를 나가오카쿄로에 이동하였고, 794년에는 헤이안쿄에 이동하였다. 여기서 헤이안쿄로의 천도는 현대 교토 역사의 시작이었다. 오늘날에도 교토의 거의 모든 거리, 가옥, 상점, 절과 신사가 예전의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1192년에는 정치적인 권력이 가마쿠라로 이동하고 사무라이 일족은 가마쿠라 막부를 세웠으나 여전히 일본의 수도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333년에 겐무 신정으로 잠시 천황이 복원되었지만 다른 사무라이 일족이 3년 후에 교토에 막부를 세웠다. 1467년에는 교토 안에서 오닌의 난이 발생해 거의 모든 도시들이 불타 없어졌다. 일본은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다음에 1603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수도인 도쿄)에 막부를 세웠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복원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된 메이지 천황그 때부터 일본의 수도를 도쿄로 정하였다. 이후 율령국 체제의 개편으로 예전의 단고 국, 야마시로 국과 단바 국의 동부가 합쳐져 오늘날의 교토 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많은 도시들이 폭격으로 인해 파괴 되면서도 교토만은 그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교토 부는 일본과 혼슈의 거의 중앙에 위치한다. 면적은 4612.71km²로 일본 전체 면적의 1.2%를 차지하고 도도부현 중에서 31번째 크기이다. 북쪽으로는 동해, 후쿠이현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오사카부, 나라현과 접한다. 동쪽으로는 미에현, 시가현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효고현과 접한다. 현은 가운데가 단바 산맥에 의해 분리되고 이것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기후가 아주 다르다. 후쿠이현、미에현、시가현、오사카부、효고현、나라현 교토 시는 주로 관광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교토 부 북쪽의 단고 반도는 어업과 수상교통이 이루어지고 중앙은 농업과 임업이 이루어진다. 닌텐도와 교세라, 와코루의 본사가 교토시에 있다. 교토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문화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교토는 1000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고 도쿄로 수도가 옮겨진 후에도 일본의 문화 수도로 남아있다. 교토에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일본 전국 각지에서 온 수학여행객들로 붐비고, 오사카 근교의 대학생들이 교토 근교로 MT 가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교토 시는 일본의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로 먼곳에서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나라와 더불어 인기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여행 장소이다. 교토에서 열리는 축제로는 544년부터 시작된 아오이 마쓰리와 869년부터 시작된 기온 마쓰리(기원제), 에도 시대부터 시작된 이네 마쓰리, 1662년부터 시작된 고잔노 오쿠부리, 1895년부터 시작된 지다이 마쓰리가 있다. 절과 신사마다 여러 축제가 열리고 그중 많은 것들이 대중에 공개된다. 교토시 교토 시(, , )는 일본 혼슈 중앙부에 있는 일본 10대 도시중 하나이다. 한국 한자음은 경도시라고 읽는다. 인구는 약 150만 명이고 예전에 일본의 수도였다. 현재는 교토부(京都府) 중앙부에 있는 부청 소재지이고 게이한신 도시권의 일부이다. 현재는 헤이안 시대의 문화가 남아있는 절, 신사, 역사 유적지와 벚꽃, 단풍의 명소가 많은 관광 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반면에 교세라, 시마즈 제작소와 같은 첨단 기술을 갖는 기업이나 닌텐도, 와코루와 같은 업계 상위 기업의 본사도 모여 있는 산업 도시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으며 독자적인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지방색이 분명하여 교토 시민들은 이 곳에 3대가 살지 않았으면 토박이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이다. 교토(京都)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야코(수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BC 10000년경부터 나타나지만 6세기 전까지 이 지역의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교토에는 6,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도래인들이 정착하였다. 8세기에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의 직무에 관여하게 되었고 천황은 불교의 영향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간무 천황은 당시 야마시로 국의 가도노 군 우다 촌을 수도로 선택하였다.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헤이안쿄(平安京)라 하였고 일본의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토는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수도를 도쿄로 이전하기까지 일본의 수도로 남아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를 거쳐 꾸준히 성장하던 교토는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상당 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특히 무로마치 중기에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별장이 있던 교토의 히가시야마의 이름을 딴 히가시야마문화의 발전으로 노, 다도, 화도, 렌가, 정원 등이 발달하였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교토 소사대(京都所司代)를 두어 교토를 다스렸다. 교토는 에도, 오사카와 함께 3도(三都)라 불렸다. 1869년 메이지 정부가 도쿄로 천도함에 따라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오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문화 도시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새 천황의 정식 즉위식은 계속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말에 원자 폭탄의 목표로 일본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교토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의 국방 장관 헨리 스팀슨은 유서깊은 고대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여 공격 목표를 교토에서 나가사키로 수정하였고 교토는 그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토는 마치야로 불리는 전통적인 주택 같은 전쟁 이전의 건물들이 여전히 풍부하게 남아있는 일본의 몇 안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화로 교토 역 복합단지와 같은 새로운 건축물들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교토는 계속 파괴되었다. 1956년 9월 1일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다. 1997년에 교토는 온실 가스 배출의 감축에 대한 회의인 교토 의정서를 개최하였다. 교토는 도시가 세워진 이래 잠시 동안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나 16세기 말에 오사카와 에도에 추월당했다. 전쟁 이전에 교토는 고베, 나고야와 가장 큰 도시의 4위, 5위 자리를 교환했다. 1947년에 3위로 복귀하였으나 이후 다시 떨어졌다. 1960년대에 5위로 다시 떨어졌고 1990년대에는 7위까지 떨어졌다. 교토는 계곡에 위치해 있고 야마시로(또는 교토) 분지의 일부이고 산지의 동부는 단바 고지로 알려져있다. 야마시로 분지는 동쪽, 서쪽, 북쪽의 삼면이 10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여있다. 이러한 내륙적 위치 때문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분지에는 남쪽으로의 우지 강, 서쪽으로의 , 동쪽으로의 가모가와 강의 세 개의 강이 흐른다. 교토 시의 면적은 827.9 km²로 교토 부 면적의 1.9%를 차지한다. 원래의 도시는 중국의 전통적인 풍수에 따라 고대 중국의 수도 장안(현재의 시안 시)을 모델로 해 배치되었다. 황궁은 남쪽을 바라보고 결과적으로 우쿄(수도의 오른쪽 부분)는 서쪽에, 사쿄(수도의 왼쪽 부분)는 동쪽에 놓였다. 오늘날의 나카교 구, 시모교 구, 가미교 구의 거리는 여전히 바둑판 양식을 따른다. 오늘날 주요 업무 지구는 옛 황궁의 남쪽에 위치해있고 인구가 적은 북쪽 지역은 녹지가 많이 남아있다. 주변 지역은 도시 중심의 같은 바둑판 양식을 따르지 않는다. 교토 시에는 11개의 구가 있다. 교토의 주요 산업은 IT와 전자 산업으로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기업은 닌텐도, 인텔리전트 시스템스, 도세, 오무론, 교세라, 시마즈, 로옴, 호리바, 일본 전산, 니치콘, GS 유아사, 무라타 기계가 있다. 무라타 제작소의 본사는 교토 시의 교외인 나가오카쿄 시에 있다. 관광업 또한 교토 경제의 커다란 기반을 형성한다. 도시의 문화 유산은 일본의 학생들과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교토를 방문하게 만든다. 2007년에 도시 정부는 6년 연속 교토의 방문객 수가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발표했고 지역 브랜드 조사에서 일본에서 두 번째로 매력적인 도시로 선정되었다. 일본 전통 수공예품 또한 교토의 주요 산업으로 이들은 작은 공장의 장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교토의 기모노 직조는 특히 유명하고 도시는 최고의 기모노 생산 중심지로 남아있다. 과거에 활발했던 이러한 산업들은 전통 상품 판매의 침체로 최근에 쇠퇴하고 있다. 사케 양조는 교토의 전통 산업이며, 월계관은 주요 사케 양조회사로 교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 교토에 본사를 둔 다른 기업으로는 의복 회사인 와코루와 배송회사인 사가와 급편, 개라지 키트 제조사인 볼크스가 있다. 교토 시는 학생의 거리로서도 알려져 시내에 38개의 대학, 단기 대학이 있다. 이러한 대학 간의 상호 교류를 깊게 하고 경제계와의 제휴를 강화하기 위한 재단법인 대학 컨소시엄 교토가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2003년 이후 매년 10월 상순에 교토 학생 제전을 개최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일본의 궁정 시인들은 교토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비단에 그려진 교토의 모습을 보면 초록색 산 아래에 차를 마시는 누각이 그려져 있다. 누렇게 바랜 옛 연대기를 보면 8세기와 9세기에 교토에서 일본을 다스렸던 왕들이 예술을 장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수도로써 11세기 동안 전쟁, 화재, 지진 등을 겪었지만 교토는 2차 대전의 원폭을 피할 수 있었다. 2000개가 넘는 절, 신사와 더불어 황궁, 정원, 건축물들이 손상되지 않은 채 가장 잘 보존된 일본의 도시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절 중 하나인 기요미즈데라는 산의 경사에 기둥을 세워 지지한 웅장한 목조 사찰이다. 긴카쿠지는 황금 누각의 절이고 긴카쿠지는 누각의 절이며 료안지는 석조 정원으로 유명하다. 헤이안 신궁은 1895년에 세워진 신사로 황실을 찬양하고 교토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살았던 황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교토 어소와 센토 어소를 포함하는 교토 교엔은 오랜 세기 동안 일본 천황들의 거처였다. 가쓰우라 이궁은 일본에서 가장 정교한 건축상의 보물 중 하나이고 슈가쿠인 이궁은 일본 최고의 정원 중 하나이다. 고도 교토의 문화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이들은 가모 신사(가미와 시모), 교오고쿠지(도지), 기요미즈데라, 다이고지, 닌나지, 사이호지(고케데라), 덴류지, 로쿠온지(킨카쿠지), 지쇼지(긴카쿠지), 료안지, 혼간지, 고잔지, 니조 성이 포함되고 주로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세워졌다. 도시 바깥쪽의 다른 유적지들 또한 등재 되어 있다. 교토는 맛있는 일본 음식과 요리가 풍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다로부터 떨어져있고 많은 절들의 도시라는 교토의 특수한 환경은 교토 지역만의 다양하고 특수한 요리들을 발전하게 했다(교야사이 京野菜). 전통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기모노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 국보의 약 20%, 중요 문화재의 약 14%가 교토 시내에 있다. 1994년에 지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는 교토 부의 교토 시, 우지 시와 시가현의 오쓰 시에 소재하는 17곳을 포함한다. 이 중 임진왜란 당시 귀무덤 미미즈카, 장보고 기념비가 있는 엔랴쿠지, 그리고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가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등 한국인과 관련이 깊은 관광지가 많다. 교토는 1,000년 이상 열린 전통 축제들로 유명하다. 3대 축제 중 가장 먼저 열리는 아오이마쓰리는 매년 5월 15일 열린다. 7월 한 달 동안은 기온 거리에서 기온마쓰리가 열린다. 특히 7월 17일에 열리는 퍼레이드가 유명하다. 가미교구 가미교 구()는 일본 교토부 교토 시에 있는 구의 하나이다. 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일찍이 교토의 북측으로 해당했다. 동쪽에는 가모가와 강이 흐른다. 교토 부청도 이 구에 놓여 있다. 사쿄구 사쿄 구()는 일본 교토부 교토 시를 구성하는 11개 구의 하나이다. 1929년에 가미교 구로부터 분구해 성립하였다. 교토 시의 동북부를 차지하고 동쪽은 시가현 오쓰 시에 접하고 남쪽은 산조도리를 사이로 히가시야마 구, 야마시나 구에, 북쪽은 난탄 시, 시가 현 다카시마 시에 접하고 있다. 구내에는 가와바타도리, 히가시오지도리, 시라카와도리 등의 대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구 남부는 주택지나 문교지구가 돼 있고 구 북부는 산간지에서 임업이 번성한다. 유명한 절과 신사는 긴가쿠지·난젠지·시모가모 신사·헤이안 신궁이 있다. 또 북부에는 구라마 사·기후네 신사·산젠인·슈가쿠인 이궁 등이 있다. 그 밖에 키타시라카와의 산간부에는 시라카와 모래라는 특산품도 있다. 협정 세계시 협정 세계시(協定世界時, , ) 또는 UTC(협정 세계표준시)는 1972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국제 표준시이다. UTC는 국제원자시와 윤초 보정을 기반으로 표준화되었다. UTC는 그리니치 평균시(GMT)에 기반하므로 GMT로도 불리기도 하는데, UTC와 GMT는 초의 소숫점 단위에서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상에서는 혼용되어 사용된다. 기술적인 표기에서는 UTC가 사용된다. 국제 전기 통신 연합은 협정 세계시에 대한 통일된 약자를 원했다. 그런데 영어권의 사람들과 프랑스어권의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언어로 된 약자인 CUT()와 TUC()를 사용하길 원했다. 이 분쟁은 결국 두 언어 모두 C, T, U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UTC라는 약어를 탄생시켰다. UTC는 또한, 세계시(UT)와 그 변형 약어들("UT0", "UT1", "UT1R" 등)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약어이기도 했다. "UTC"는 보통 ""이나 ""의 약자라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협정 세계시는 그레고리력의 표기를 따른다. 율리우스일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1일은 24시간으로 나뉘며, 1시간은 60분으로 나뉜다. 1분은 60초로 나뉘는 것이 보통이나 약간은 가변적이다. 협정 세계시의 하루는 보통 86,400 SI 초이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 주기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시 UT1과 0.9초의 차이가 생길 때 협정 세계시에서는 하루의 마지막 1분을 59초나 61초로 해서 이 차이를 수정한다. 이렇게 수정되는 초를 윤초(閏秒)라 한다. 퀘벡주 퀘벡주(, )는 캐나다 동부에 있는 주로 프랑스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쓰이며 캐나다에서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유일한 주이다. 캐나다에서 가장 넓은 주이자 두 번째로 인구수가 많은 곳이다. 퀘벡은 그 언어, 문화 및 기관에 의해, 캐나다 연방 내에서 독자적인 하나의 민족을 이룬다. 동쪽으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남동쪽으로 뉴브런즈윅주, 남쪽으로 미국의 메인주, 뉴햄프셔주, 버몬트주와 뉴욕주, 그리고 서쪽으로 온타리오주와 맞닿아 있다. 캐나다 인구에서 25%가 프랑스어를 쓰고 있으며, 1974년 퀘벡 주정부가 공용어로 지정했다. 2012년 9월 4일에는 퀘벡 주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이 퀘벡 주 의회선거에서 승리했다. 2006년 기준으로 79.6 %의 주민이 불어 모국어 화자인 프랑코폰(francophone), 8.2%가 영어 모국어 화자인 앙글로폰(anglophone)이다. 앙글로폰 주민들은 주로 몬트리올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윌프리드 로리에, 루이 생로랑, 피에르 트뤼도, 장 크레티앵 등의 프랑스계 총리들이 이 주 출신이다. 공식적인 주 가는 없으나, 질 비뇨가 1975년 작곡한 나라의 사람들이여()가 민족의 노래로서 널리 불리고 있다. 퀘벡 지방에는 그 지역을 덮은 빙관이 사라진 후, 수천년 전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정착하였다. 첫 유럽인들이 도착하였을 때 이누이트 족과 몇몇의 인디언 종족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이누이트 족은 멀리 북부에, 주로 운가바 만의 서부와 허드슨 만을 다라 살았다. 인누 족 인디언들은 퀘벡의 남부와 동부에 살았다. 동부에 살던 이들은 가끔 나스카피 인디언들로 불리었다. 생모리스 강과 오늘날 생 일의 사이에 살던 인누 족은 프랑스인들에 의하여 산지 사람이라고 불리었다. 크리 족 인디언들은 인누 족과 이누이트 족 사이와 제임스 만의 남부를 돌아다녔다. 다른 종족들은 알곤킨 족, 맬리시트 족과 미크마크 족이었다. 1534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는 현재 세인트로런스 만으로 항해하여 들어가 퀘벡 지방을 프랑스를 위한 주장을 하였다. 이 지방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제국의 근원이 되었으며, 뉴프랑스라고 불리었다. 1763년의 파리 조약은 퀘벡의 통치를 영국에게 주었다. 1791년 영국은 퀘벡을 2개의 식민지들로 나뉘었다 -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 영국인 정착자들은 어퍼캐나다에, 프랑스인 정착자들은 로어캐나다에 대부분을 형성하였다. 1837년부터 1838년까지 영국의 통치에 반란이 일어난 후, 1840년의 연합의 법령이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캐나다 식민지로 합쳤다.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령은 캐나다 자치령을 창조하였다. 캐나다 식민지는 자치령에서 2개의 원래 주들이었던 온타리오 주와 퀘벡 주가 되었다. 영어에 추가로 프랑스어는 퀘벡 주의 2가지 공용어들 중의 하나로 인정되었다. 이 법령은 주에 교육과 민법에 직접 통제를 주었다. 1867년 보수당 소속의 피에르-J-O. 쇼보가 퀘벡 주의 초대 지사가 되었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영국의 통치에 원망하였다. 연방 시스템은 1867년에 세워져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을 승인한 권리들은 일시적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였다.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령은 캐나다의 2개의 주요 종교 단체의 학교 권리들을 보증하였다. 퀘벡 주에서 영어를 쓰는 소수의 개신교는 그 학교들을 위한 주의 기금들을 받았다. 그러나 퀘벡 주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곧 다른 주들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로마 가톨릭교회, 프랑스어 학교들을 설립하는 데 공공의 기금을 쓰는 것으로부터 방해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프랑스계와 영국계 캐나다인 사이의 관계들은 1885년 서스캐처원에서 메티스(유럽인과 인디언의 혼혈)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더욱 악하게 자라났다. 그들의 지도자 루이 리엘은 항복하고 그해 후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불공평하게 살해된 리엘을 영웅으로 숙고하였다. 많은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여겼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쓰는 캐나다인 사이의 긴장이 1899년에 다시 치솟았다. 그해 영국군은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보어 전쟁에 참전하러 갔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앵글로 보어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 영어를 쓰는 캐나다인들 중에 어떤이들은 영국군을 돕는 데 군대를 보내는 것이 캐나다의 임무라고 숙고하였다. 캐나다 자치령의 첫 프랑스계 캐나다인 총리인 퀘벡 주의 윌프리드 로리에 경은 지원자들을 장비하고 그들을 남아프리카로 보내는 데 정부의 기금들을 썼다. 로리에 경의 전 동맹자 앙리 부라사에 의하여 지도된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영국군을 위한 성원을 마련하는 데 반대하고, 캐나다인들이 캐나다에 먼저 충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1900년 경에 빠른 산업화의 시기가 퀘벡 주에서 시작되었다. 1912년 퀘벡 주는 크기에서 거의 두배로 되었다. 그 북서부 경계들은 허드슨 만과 허드슨 해협으로 뻗어나갔다. 지방의 천연 자원의 번창에 흥미와, 그리고 퀘벡과 뉴펀들랜드는 퀘벡-라브라도르 경계에 논쟁을 일으켰다. 1927년 뉴펀들랜드의 호의에 영국의 당사자 의회는 논쟁을 가라앉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 사이에 또 다시 긴장이 전개되었다. 처음으로 국가는 전쟁의 수고 뒤로 합쳤으나 곧 어떤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모병하지 않는 것에 고발하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영국계 캐나다인 지원병들의 대부분이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법원들이 온타리오 주의 학교들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을 폐지하는 데 주에 의한 결정을 찬성할 때 문제들은 더욱 악화되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영국의 후원자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그들에게 동등의 권리들을 부인할 때 왜 그들이 영국을 위하여 싸워야 하냐는 의문을 하였다. 1917년 캐나다는 육군에 남자들을 징병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육군은 퀘벡 시에서 징병 반대 폭동을 억제하는 데 쓰였고, 퀘벡 주를 캐나다로부터 갈라지게 하는 것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있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프랑스계 캐나다인 군인들은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복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산업은 지속적으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시골 지역들에서 온 더 많은 주민들이 도시들에서 직업을 찾았다. 이때까지 많은 이들은 온타리오주 혹은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지도자들은 영국계 캐나다인과 미국인들에 의하여 통제된 산업적 확장을 원망하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비지니스들에서 쓰이는 주요 언어가 영어인 도시들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가 생존하지 않을 것 같은 위협에 놓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새로운 산업이 향상된 생활 수준을 제공한 이유로 이 위협을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퀘벡 주는 연합국들에게 거대한 가치였다. 주는 큰 노동력, 풍부한 전력과 석면, 구리와 아연의 큰 매장량을 가졌다. 퀘벡 주의 산업적 생산은 거의 3배로 늘어났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프랑스계와 영국계 캐나다인들 사이에 또 다시 긴장이 전개되었다. 1944년 자유당 아래의 연방 정부는 퀘벡 주민들에게 하지 않을 약속에 불구하고 해외에서 복무를 위한 군사 징병을 세웠다. 결과로서 퀘벡 주의 투표인들은 1944년 권력으로 연합 국민당을 선출하였다. 모리스 뒤플레시 주지사 아래의 새 정부는 퀘벡 주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정치적 권리들을 강조하고 연방 정부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따라간 퀘벡 주에서 경제적 번창이 1950년대와 1960년대로 뻗어나갔다. 1950년 아브르생피에르 근처에서 광산들이 티타니움 광석인 일메나이트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큰 석면의 매장량들이 운가바 반도에서 발견되었다. 1960년 자유당이 퀘벡 주 정부의 통치를 이기고, 장 르사주가 주지사로 되었다. 그는 주의 많은 개혁들의 이유로 퀘벡 주의 조용한 혁명으로 불린 시기였던 1960년부터 1966년까지 이 직에 근무하였다. 새로운 노동 법전은 노동 연합을 형성하는 데 더욱 쉽게 만들었다. 새로운 교육부가 설립되어 고등학교, 대학교 등의 수를 늘였다. 1960년대 동안에 퀘벡 주와 다른 주들은 공동 연방과 주립 사회 프로그램과 세금의 분배와 함께 불만스러워졌다. 퀘벡 주는 이 프로그램들을 취소하고 연방적 관리없이 세금의 나눔을 관리하는 데 주의 권리를 작용시켰다. 그러고나서 퀘벡 주는 연금 계획, 사회적 안정 프로그램과 학생 기부금들의 통치를 얻었다. 1963년 주는 퀘벡 주에서 개인적으로 소유된 전자 회사들을 모두 매입하였다. 1960년대는 또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퀘벡 주민들 중에 국가주의적 느낌의 급증을 보았다. 그들의 다수는 퀘벡 주를 캐나다 연방으로부터 분리하여 갈라진 국가를 형성하기를 원하였다. 어떤 퀘벡 주민들은 분리를 촉진하는 데 시위 운동을 이용하였고, 약간의 과격파들이 폭탄 투하를 이용하였다. 1968년 많은 분리주의자들은 군단들에 가입하여 퀘벡당을 형성하였다. 주의 입법자 르네 레브스크가 당을 지도하였다. 1970년 10월 혁명적 분리주의자 단체인 퀘벡 해방 전선의 일원들이 영국의 무역 위원 제임스 R. 크로스와 퀘벡 주의 노동부 장관 피에르 라포르트를 납치하였다. 캐나다의 총리 피에르 트뤼도는 공무원들과 공공 건물들을 보호하는 데 수천명의 연방군을 퀘벡 주에 보냈다. 주의 경찰은 대략 450명의 주민들을 체포하였다. 라포르트는 후에 살해되고 4명의 퀘벡 해방 전선 일원들이 범죄와 함께 고발되었다. 그들은 다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로 보내졌다. 트뤼도 총리와 퀘벡 주의 권위자들은 크로스의 석방을 위하여 크로스의 납치자들을 쿠바로 갈 수 있도록 하였다. 1972년 퀘벡 주에서 캐나다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이 일어났다. 200,000명 이상의 공공 피고용인들이 임금과 거기에 관계된 문제들에 논쟁에서 자신들의 직업을 잃었다. 11일 간의 파업은 대부분의 학교를 폐문하고 병원 서비스와 정부 운영들을 제한시켰다. 1974년 국립 회의는 프랑스어를 퀘벡 주의 단 하나의 공용어로 채택하였다. 이 법령은 학교에서 프랑스어의 교훈을 격려하고, 프랑스어를 퀘벡 주의 비지니스와 정부의 주요 언어로 만들었다. 1976년 퀘벡 주의 입법부에서 퀘벡당이 110개의 의석에서 71개를 이겨 정부의 통치를 차지하였다. 1977년 입법부는 프랑스어의 헌장을 채택하였다. 헌장은 퀘벡 주의 생활의 모든 지역들에서 프랑스어를 주요 언어로 만드는 데 프로그램을 집행하는 도움을 주는 데 최종 기한과 벌금들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대법원은 헌장의 일부들이 비헌법적이었다고 다스렸다. 1980년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레브스크 정부는 캐나다의 나머지와 함께 주권 협회를 협상하는 데 권위를 위하여 투표인들에게 의문하였다. 이런 협회는 퀘벡 주에게 정치적 독립을 주려 하였으나 캐나다에 결합시키는 데 그 경제를 유지한다. 하지만 투표인들은 제안을 거절하였다. 1981년 캐나다의 헌법에서 번영한 변화들은 많은 프랑스어 사용의 퀘벡 주민들을 전복시켰다. 그들은 제안이 퀘벡 주의 프랑스인의 특성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982년 제안은 퀘벡 주를 제외한 모든 주의 입법부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개정된 헌법의 일부가 되었다. 레브스크는 1985년 9월 29일 당수로서, 그해 10월 3일에는 주지사로서 사임하였다. 그는 자신의 법무와 정부간 관계의 장관을 지낸 피에르 마르크 존슨에 의하여 뒤를 이어졌다. 그해 12월 자유당은 입법부에서 의석들의 다수를 이겼다.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주지사를 지낸 로베르 부라사가 다시 주지사가 되어 1994년 퇴임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1987년 4월 퀘벡 주 미치 레이크에서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와 주의 첫 장관들은 새로운 헌법적 개정을 위한 계획을 개발하였다. 개정은 만약 통과된다면 퀘벡 주를 캐나다 안에서 뚜렷한 사회로서 인정할 것이었다. 멀로니 총리와 주의 지도자들은 그해 6월에 미치 레이크 협정으로 알려진 제안된 개정을 찬성하였다. 효과적으로 들어가는 데 협정은 1990년 6월 23일 안으로 모든 10개의 주들의 회의들에 의하여 비준되어야 했다. 하지만, 매니토바주와 뉴펀들랜드 주는 그것을 비준하는 데 거절하였다. 협정의 실패 이후에 많은 퀘벡 주민들은 캐나다의 나머지로부터 퀘벡 주를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 국가적 정부에 기본적인 변화들이 첫째로 퀘벡 주를 캐나다의 일부로서 간직하는 데 다시 숙고 아래에 있었다. 가능한 변화들은 주들에 어떤 연방적 권력들의 이동이었다. 그해 10월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퀘벡 주와 5개의 다른 각 주들에서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이 제안된 변화들에 대항하는 투표를 하였다. 입법부 선거가 열리자, 분리주의적 퀘벡당이 의석의 대다수를 이겨 그 지도자 자크 파리조가 주지사로 되었다. 1995년 10월 퀘벡 주 정부는 퀘벡 주를 위한 독립에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제안은 좁게 패하여 퀘벡 주는 캐나다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파리조는 그러고나서 주지사와 당수로서 사임을 하였다. 1996년 1월 뤼시앵 부샤르가 파리조를 주지사와 당수로서 뒤를 이었다. 1995년 후순과 1996년 초순에 캐나다 국회는 국가의 단일성을 자극하는 데 목표가 된 결의들을 통과시켰다. 하나의 결의는 퀘벡 주의 유일한 언어, 문화와 민법을 인정하였다. 다른 결의는 퀘벡 주와 캐나다의 다른 4개의 부분들에게 캐나다 헌법에서 변화에 거부권을 주었다. 2001년 베르나르 랑드리는 퀘벡당의 지도자와 주지사로서 부샤르의 뒤를 이었다. 부샤르와 랑드리 아래에서 주 정부는 자유당 총리 장 크레티앵에 의하여 이끌어진 연방 정부와 많은 논쟁들을 가졌다. 2003년 장 샤레스트에 의하여 이끌어진 주의 자유당은 정부의 통치를 이겼다. 2007년 선거에서 자유당원들은 입법부에서 자신들의 대다수를 패하였으나 의석들의 가장 높은 수를 이겼다. 이듬해 열린 주의 선거에서 자유당원들은 국립 회의에서 대다수를 다시 얻었다. 다만 높은 세금으로 인해 생산을 하는 나이의 젊은이들의 탈 퀘벡이 가속화 되었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줄어드는 주가 되었고, 덕분에 노인들이 많아져 세금은 점점 더 높아진다. 그래서 2011년부터 퀘벡 북부 발전 계획을 내놓게 되나, 이는 남은 천연자원을 모두 캐서 팔자는 전략이지 미래 발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퀘벡 및 캐나다 전체는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로 20년전에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살기 좋았던 곳이 지금은 높은 세금으로 인해 물가가 유럽을 따라가고 있다. 1980년 5월 20일, 퀘벡의 입법권, 징세권, 외교권 등 국가로서의 주권 획득을 골자로 하는 분리 독립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같은 날 저녁, 퀘벡당의 창시자이자 당시 퀘벡 정부의 총리였던 르네 레베크(René Lévesque)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 예언은 실현되어, 1995년 다시 한번 투표가 실행되었다. 또, 당시 캐나다의 총리이던 장 크레티앵(Jean Chrétien)은 퀘벡 출신이기 때문에, 퀘벡이 독립하게 되더라도 크레티앵이 캐나다의 총리로 남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도 오고 갔다. 결과는 약 1% 근소한 차이로 무산되었다. 서비스업은 퀘벡 주의 국내총생산의 대략 3분의 2, 고용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 산업들은 몬트리올과 퀘벡 시의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에 집중되어 있다. 몬트리올은 캐나다의 지도적인 금융의 중심지들 중에 토론토 만에 이어 두번째로 랭킹에 들어와있다. 몬트리올 은행, 캐나다 국립 은행과 캐나다 왕립은행 같은 주요 은행들이 도시에 큰 운영들을 가지고 있다. 몬트리올은 또한 캐나다에서 3개의 가장 큰 대학들의 본고장이다 - 콩코르디아 대학교, 맥길 대학교와 몬트리올 대학교. 세계에서 가장 큰 기술 연구 회사들의 몇몇이 몬트리올에 지를 두었다. 주와 지방 정부의 고용인들의 대부분은 몬트리올과 퀘벡 시에서 일한다. 많은 서비스 산업들은 또한 몬트리올 지역의 외부에서도 찾아진다. 라발 대학교는 퀘벡 시에 있다. 몇몇의 연방 대리들은 자신들의 본부들을 가티노 지역에 두었다. 퀘벡 소비자 신용 조합은 레비에 본부 두었다. 주의 막대한 원료와 수력 발전은 산업들이 발전하는 도움을 주었다. 퀘벡 주의 공장, 제재소와 정재소들은 캐나다의 총 산업 생산의 가치의 대략 4분의 1을 차지한다. 퀘벡 주의 생산의 대부분은 캐나다의 제조업 중심지들 중에 토론토에 이어 단 하나의 두번째로 랭킹에 든 몬트리올 지역들에서 일어난다. 몬트리올은 캐나다의 항공 우주 산업의 주요 중심지이다. 벨 헬리콥터 텍스트론, 봄바디어 에어로스페이스, 프랫 앤드 휘트니 캐나다와 롤스로이스 캐나다와 같은 항공 우주 회사들은 몬트리올 지역에서 많은 이들을 고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상업적 인쇄 회사들 중의 하나가 몬트리올에 본부를 두었다. 도시는 또한 약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식품 가공업 공장 지대들은 몬트리올과 퀘벡 시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퀘벡 주는 음료, 낙농제품과 정육을 생산한다. 지도적인 음료들은 맥주, 커피, 청량음료과 차를 포함한다. 낙농제품들로는 치즈, 우유와 요구르트를 포함한다. 돼지고기와 가금육은 중요한 정육 생산품들이다. 산업은 또한 제과류, 과일과 채소 통조림, 사료와 스낵 제품의 큰 양을 생산한다. 주는 캐나다의 알루미늄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사그네와 세인트로런스 강들에 따라 놓인 알루미늄 공장들과 콩트르쿠외르에 있는 제철소는 퀘벡 주의 주요 금속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퀘벡 주는 또한 종이 생산에서 지도적인 주들 중의 하나이다. 농장 지대는 퀘벡 주 내륙 지역의 작은 부문을 덮고 있다. 대부분의 농장 지대는 세인트로런스 강을 따라 놓여 있다. 축산물은 주의 농산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낙농의 생산은 퀘벡 주 농장 소득의 가장 큰 부분을 위하여 차지한다. 퀘벡 주는 우유 생산과 젖소의 수에서 지도적인 주들 중에 랭킹으로 들어와있다. 우유의 거의는 버터, 치즈, 아이스크림, 분유과 요구르트의 제조자들에게 간다. 농부들은 우유의 나머지의 대부분을 마시는 데 파는 편이다. 돼지는 퀘벡 주에서 사육되는 가장 가치적인 식용 가축이다. 몬트리올과 퀘벡 시를 둘러싸는 시골 지역들은 돼지의 가장 큰 수를 기르는 편이다. 육우와 가금류의 대부분은 주의 남부에서 기른다. 온타리오주 만이 퀘벡 주보다 더 많은 닭과 달걀을 생산한다. 퀘벡 주의 농부들은 양과 칠면조를 기르는 편이다. 주의 가까이 모든 농부들은 채소를 재배한다. 중요한 채소는 브로콜리, 양배추, 당근, 상추, 양파와 감자를 포함한다. 자라나는 장식용 식물도 또한 중요한 농업 활동이 되었다. 퀘벡 주의 가장 중요한 과일 사과는 주로 몬트리올 지역에서 재배된다. 농부들은 또한 딸기, 블루베리, 크랜베리와 라스베리를 재배하기도 한다. 옥수수는 퀘벡 주의 중요한 밭의 수확물이며, 주는 캐나다의 지도적인 옥수수 생산지들 중의 하나이다. 옥수수의 대부분은 주의 극남부 지역에서 재배된다. 퀘벡 주의 농부들은 또한 보리, 귀리, 콩과 밀을 재배하기도 한다. 곡식의 거의는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 퀘벡 주는 메이플 시럽의 지도적인 생산주이다. 세계의 메이플 시럽, 설탕과 태피의 대략 3분의 2는 퀘벡 주에서 왔다. 금, 철광석과 니켈은 퀘벡 주의 지도적인 미네랄 산품들이다. 퀘벡 주는 캐나다 금의 대략 5분의 1을 생산한다. 금광들은 루앵-노랑다와 발도르 주위에서 운영된다. 라브라도르 경계 근처에 있는 페르몽 지역은 퀘벡 주의 철광석 대부분을 공급한다. 니켈은 운가바 반도에서 체굴된다. 퀘벡 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티타늄 생산지들 중의 하나이다. 그 광물은 앨러드 호 지역에 있는 석회석으로부터 얻어진다. 석면, 시멘트, 구리, 석회암, 니오븀과 아연도 또한 퀘벡 주에서 중요한 미네랄 산품들이다. 주요 석회암의 매장량들은 이스턴 타운십과 세인트로런스 강과 오타와 강 유역에 있다. 어업 게와 가재는 퀘벡 주의 가장 가치적인 잡이이며, 주의 총 수산업 소득의 대략 4분의 3을 차지한다. 다른 중요한 잡이들은 그린랜드 가자미목과 새우를 포함한다. 2006년 캐나다 인구 조사국은 퀘벡 주의 인구가 7,546,131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인구는 2001년으로 본 7,237,479명에서 대략 4 퍼센트나 증가하였다. 퀘벡 주민의 대략 5분의 4는 도시 지역들에 산다. 이중에 대략 절반은 몬트리올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산다. 퀘벡 주는 2006년 조사국에서 통계 캐나다에 의하여 밝혀진 5개의 다른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이 있다. 그 지역들은 오타와-가티노, 퀘벡, 사그네, 셔브룩과 트루아-리비에르이다. 몬트리올은 퀘벡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캐나다에서 두번째로 가장 큰 도시이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만이 더 큰 인구를 가졌다. 추가로 몬트리올은 메트로폴리탄 지역 인구에서 토론토에 이어 두번째로 랭킹에 들어와 있다. 몬트리올은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퀘벡 주의 다른 큰 도시들은 가티노, 라발, 롱그윌과 퀘벡 시를 포함한다. 퀘벡 주민의 대부분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 거의에 가까운 이들은 퀘벡이 프랑스의 식민지였을 때에 1600년대와 1700년대 동안에 퀘벡 지방으로 온 정착자들의 후손들이다. 1763년 퀘벡은 영국의 통치 아래로 들어왔으나 많지 않은 영국인 정착자들이 1800년대 초반까지 도착하여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경제와 정치적 권력의 거대한 취급을 가졌다. 하지만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생활의 방향들을 따랐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퀘벡 주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영국계의 주민들은 나머지의 거의를 형성한다. 거기에는 대략 65,000명의 아메리카 인디언과 대략 11,000명의 이누이트들이 있다. 30,000명의 다른 주민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계통이다. 프랑스어는 퀘벡 주민의 절반 이상에 의하여 쓰여지는 언어이다. 인구의 대략 5분의 2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쓴다. 나머지의 대부분은 영어 만을 쓰는 편이다. 퀘벡 주 인구의 90 퍼센트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들은 중국, 프랑스, 아이티, 이탈리아, 레바논과 다른 나라들에서 왔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 인구의 대략 85 퍼센트를 차지한다. 다른 큰 종교 단체들은 캐나다 성공회와 이슬람과 유대교 신앙들의 일원들을 포함한다. 고려 태조 고려 태조(高麗 太祖, 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後三國 時代)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장군(將軍)이자 고려(高麗)의 초대 황제 재위:918년 7월 25일~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字)는 약천(若天),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황제(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皇제)호()년호수는)이고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융(王隆)과 그 부인 한씨(韓氏)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將帥)가 되었다. 후백제(後百濟)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서부 지역에서 견훤(甄萱)의 군사(軍事)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尙州) 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羅州)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충청도(忠淸道) 지역과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상주(尙州)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羅州)를 공략하여 후백제(後百濟)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弓裔)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弓裔)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甄萱)이 경주(慶州)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公山 棟藪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高敞 戰鬪)와 병산 전투(炳散 戰鬪)에서 후백제(後百濟)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甄萱)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新羅)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敬順王)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그는 경순왕(敬順王)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 와 부인 박씨(夫人 王氏) 를 내려주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敬順王)을 경주(慶州)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高麗)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渤海)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왕건(王建)은 877년 1월 31일 송악(松嶽)의 남쪽 자택 에서 송도의 신흥 호족 왕륭(王隆)과 그의 부인 한씨(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악(松嶽)의 유력 호족이었던 아버지 왕륭은 후일 궁예가 거병하자 궁예의 휘하에 의탁하였고, 후고구려의 (後高句麗)금성태수(金城太守)를 역임하기도 했다. 왕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하여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태조가 17살이 되자, 도선대사가 다시 송악으로 왕건을 찾아와 ,그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가르쳤다. 그의 가계는 증조부 이전은 다소 불확실한데, 언제부터 그가 왕씨(王氏) 성을 사용했는가는 불확실하다. 증조모 진의(정화왕후로 추존)는 고구려 유민인 강호경(康虎景)과 강충(康忠)의 후손으로 신천의 호족인 강씨(康氏) 가문이었다. 고려 때 관찬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그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 하며 이름은 왕건이다. 다만, 전설적인 면이 강하여 사실성은 의심받고 있다. 고려 왕실 공식 족보인 고려 성원록, 왕대종족기에는 작제건이란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증조부와 조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따로 기술하지 앟고 있다.신천 강씨 일족은 태조의 증조부의 외가쪽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의 외5대조인 강충(康忠)에게 한 승려가 지나가다 부소산 남쪽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 곧 군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승려의 예언에 따라 강충은 송악 부소산 근처에 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고려사 태조 총서에 도선대사의 왕건의 탄생에 관한 예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다시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당시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왔다.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저택을 보더니,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을 심었을꼬?’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알려주자 세조가 급히 좇아가 만나보고는 마치 진작부터 안 듯 친밀해졌다. 그리고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조사하고 천문과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 지맥은 임방(북쪽 지역.)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시오’ 그리고는 봉인한 봉투를 만들고 그 겉봉에다가,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께 바치나이다.’라고 썼다. 그 때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17] 3년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고려사에서는 왕건이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고 적었다.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에 대한 설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왕건과 작제건을 신성화 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설화이며 신화로 알려져 있다. 895년(신라 진성여왕 9년) 왕륭과 왕건 부자는 중부 지방의 강자로서 세력을 떨치던 궁예를 찾아가 미련없이 송악을 바치고, 그 밑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태조는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95년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간 그는 898년효공왕 (2년) 궁예 진영의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898년 효공왕 시대) 정기대감에 오른 태조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으로 연이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며, 900년까지 광주와 국원, 당성 등지를 평정하였다. 왕건은 병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덕망이 높고 추종자도 많았다. 왕건의 이러한 성품은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고, 싸움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의하면 898년 궁예로부터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되어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쳤다고 되어 있으나 이겼다라든지 함락시켰다라는 승전에 관한 표현들이 전혀 없어 왕건의 첫 전투는 별 소득이 없는 실패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당성(唐城),청주(靑州),괴양(槐壤) 등을 평정하는데 성공해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0년부터 황해 해상을 통해 후백제의 견훤과 교전하였다. 특히 송악의 해양 세력을 이끌던 그는 후백제의 견훤과의 대결에서는 903년 전라남도 지역으로 진격하여 나주 등지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게 하였으며, 또 신라 지역인 경상도 양주 지역의 양주 장수(良州 將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당해 궁예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김인훈을 구하는 활약도 하게 되어 이 공로들로 알찬(閼粲)에 승진하였다. 육지에서도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이도학씨의 주장에 따르면왕건의 나주 점령은 909년이 맞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유는 903년 나주를 점령했다면 6년간 아무 기록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909년 왕건의 나주 지역 공략과 이듬해인 910년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에 대해서 박종기 씨는 '고려사의 재발견' 29P에서 견훤이 중간에 나주를 다시 탈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이후 궁예가 909년 왕건을 보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승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주 전투의 경우 909년 이후에도 계속 되어 910년 견훤의 재탈환 작전의 일시적인 실패와 이후 재점령, 다시 911년 왕건의 나주 재점령과 912년 궁예 자신이 직접 견훤과 덕진포(德津浦)에서 싸워 이겨, 이후 후고구려와 고려의 영토로 확정되었다가 929년에 다시 견훤이 재탈환했고, 이후 935년 4월 왕건의 명령으로 출정한 유금필의 정벌로 다시 나주를 수복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몽탄(夢灘)면의 지명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왕건은 '나주 공략'에서 이겼다고는 해도 역사서들과는 달리 견훤과 싸우면서 고전했음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왕건은 906년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운 끝에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를 공격하고 나주시 금성을 정복하였다. 또한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변방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의 지위에까지 올라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궁예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모든 정사를 맡겼다. 그는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는데도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후백제는 태봉과 신라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태봉이 나주를 점령하여 후백제 세력을 위축시키자 그 공로는 궁예와 왕건에게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왕건은 궁예에 이어 명실상부한 태봉국의 제2인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한편 북원의 성주 양길은 후백제와 동맹을 맺고, 후백제의 견훤은 양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후고구려를 협공한다. 왕건은 군사 일부를 북원성으로 보내 양길군과 대적하게 하는 한편 직접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목포, 신안, 나주 일대를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나주의 유력 호족이며 오부돈의 아들인 오다련군 일파를 포섭한다. 후백제의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고 오다련군 등 서남의 귀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갑판 선상에서 시내 위를 바라보던 왕건이 오색(五色)의 운기를 보고 달려갔다가 빨래하고 있는 오씨를 보았다. 그가 나주에 이르러 한 우물가에 있던 처녀에게 물을 달라 하였는데,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버들잎을 하나 띄워서 주었다. 이유를 묻자 그가 빨리 마시고 체할 것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주의 호족 오다련군을 만나게 되었고, 오다련군은 그의 사람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 오씨를 그와 결혼시킨다. 그 둘 사이에서 아들 무(뒷날의 혜종)이 태어나지만 그는 곧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본래 신분이 낮은 나주 호족의 딸이었으나, 태조를 만나 혜종을 낳고, 대광(大匡)인 박술희(朴述熙) 등의 비호를 받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도 나주 지역에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太子)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당초 궁예가 현재의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 과 그 일대의 경기도 북부,황해도,평안남도 지역의 옛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패서 지역 호족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는 뜻을 이루자 905년 다시 철원(구철원 북쪽 30리에 있는 풍천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 지역의 1천 가구를 철원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 세력 외에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것은궁예의 후고구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들을 자극해 이때부터 궁예와 패서 지역 호족들간의 갈등은 궁예의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예와 왕건의 활약으로 태봉국은 후삼국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건의 지위도 점차 격상되어 913년 파진찬 겸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왕건의 지위가 시중에 이르자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자신의 추종자가 늘면서 시기하는 자들도 함께 늘어나자 왕건은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궁예는 평소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하였다. 터무니없는 관심법을 근거로 그는 이미 수많은 장수와 신하들을 죽인 상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다. 심지어는 여자의 음부를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도록 하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태를 수도 없이 목격한 왕건은 궁예의 느닷없는 역모설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나 왕건은 그런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처했다. 그러나 의심하는 한편으로 궁예는 왕건에게 충성심을 시험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그때 궁예는 자신이 처형한 자들로부터 몰수한 금은과 보물, 진귀한 물건, 가재도구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왕건을 보자 궁예는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그러나 이 말에 왕건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물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집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왕건이 매우 난처한 상황에서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왕건은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왕건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궁예는 이렇게 말하면서 왕건에게 상으로 주연을 베풀었다. 이어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는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이 거짓으로 역모 혐의를 인정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러나 궁예의 이같은 행동은 왕건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궁예는 호족들과 계속 갈등하였고, 호족 세력에 염증을 느낀 궁예는 왕후 강씨와 두 왕자를 살해한다.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은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혁명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918년 이들은 그를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신혜왕후 류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 918년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김락, 염상, 견권 등의 추대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추대되어, 918년 음력 6월 15일 철원궁(鐵原弓)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하고, 새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정하였다. 919년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松嶽)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대내적으로는 궁예가 저지른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빈민 구제 기구인 흑창을 설치하고 세금을 낮추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고려에 반대하는 호족들을 줄이기 위해 정략 결혼을 통한 호족 세력과의 융합에도 주력하여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정권의 토대를 단단히 구축해 갔다. 또한 구 고구려세력들의 염원이었던 북진 정책을 내세웠고 불안한 시대 민심을 수습고자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왕건은 서경(西京)을 매우 적극적으로 개척해 수도인 개성보다 더 정성을 기울였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힘으로 신라지역을 공략하려던 궁예와는 달리 강성한 백제세력에게 시달리던 신라와의 우호정책을 통해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대결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고려는 처음에는 927년 공산 동수 전투를 계기로 한동안 패배를 거듭했으나, 930년 고창 전투를 계기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해 점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환선길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사서들의 기록들과는 달리 많은 학자들은 환선길 형제의 반란은 왕건의 역성혁명 성공후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환선길의 난을 진압한 직후에는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역모 혐의가 탄로나자 이들은 무사히 달아난 배총규를 제외하면 모두 체포되었다. 왕건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지만 청주 출신 수하 현률이 왕건을 만류해 왕건은 이들을 용서하고 회유를 하는 것을 고려하다가 이들을 처형하는 것이 옳다는 염상의 건의를 듣고 모두 처형한다. 철원에서 즉위한 뒤 다시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철원 지역에서는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는 불안감 때문에 송도로 옮겨가게 된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었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건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고토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즉위 초반 지역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지 호족의 딸들을 후궁로 맞이하였고, 아들들을 특별히 송도에서 수학하게 하였는데 이는 혼인관계를 통해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것과 자제들을 볼모로 삼아 각지의 호족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후백제와 연계하여 저항하는 북원 근처의 비적, 호족 세력의 반발을 해결해 나갔다. 즉위 초반 궁예의 부하로 그에게 반발한 환선길의 반란, 이흔암의 반란에 부딪쳤다. 또한 명주의 성주 김순식 역시 그가 궁예를 몰아냈다는 점을 비판하며 그에게 항거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김순식을 포섭하는데 성공하고 후에 왕씨 성을 그에게 사성한다. 개국 초기 그의 입지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태봉은 궁예를 구심점으로 이뤄진 호족국가였는데, 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호족들간의 결집력은 약해졌다. 태조는 이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고, 외부적으로는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만 했다. 또한 발해를 침공하는 거란족이나 중국 국가들의 움직임도 예의주시하였다.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의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한 궁예가 예전에 시행하던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아들들과 자제들을 송도로 올려보내 유학하게 함으로써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하기도 했다. 임춘길 등의 역모 계획이 발각되었고 왕건은 처음에 이들을 처형하려 했으나 현률은 그를 계속 설득했고 나중에는 청주성주와의 관계를 보고하게 된다. 현률은 역모 일당 중 경종이 청주성 성주 공직의 처남이라고 밝히면서 그를 죽이면 매곡성이 반기를 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공직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모 혐의자들을 죽이지는 말고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건은 현률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놓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군대장군 염상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염상은 형벌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되며 예외를 두면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염상은 경종이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원래 궁예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비책이었다. 청주 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볼모를 데려가는 것은 반역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왕건은 염상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참형에 처한다. 왕건은 또 다른 정적인 공주 출신 이흔암을 제거한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 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흔암은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그 곳 성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궁예 또한 그를 매우 총애했다. 따라서 그는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왕건은 이흔암의 그런 태도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가 웅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해 문책하지는 않았다. 궁예 시절 자신과 같은 지위의 장수였을 정도로 대단했던 그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강한 인물이였던 것이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대형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몰래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 재산을 몰수했으나 그 도당들의 죄는 불문에 붙혔다. 신라는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 왕건이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과 신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했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 신라의 장군 출신인 까닭으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을 더 믿을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내비쳤다. 태조가 동경을 방문할 때면 경애왕과 경순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회유하였다. 경애왕이 견훤에게 살해된 뒤에는 고려에게 의존했고 왕건 역시 신라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왕건은 고국인 신라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신라를 계승했다는 이미지를 내세움과 동시에 견훤이 신라의 장군 출신인데 자기 조국에 반역을 저지른 인물임을 강조, 자신이 정통성을 갖춘 지도자임을 대내외에 공언하였다. 또한 발해의 계승자로도 천명하여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국가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927년 9월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왕건을 지지했다.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태조의 즉위 초 후백제는 태조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을 침략하자 왕건이 신라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후백제와의 우호는 깨지게 된다. 여기에 후백제에서도 그가 후고구려의 장군 시절 빼앗은 나주 지역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후백제와의 관계는 악화, 전쟁을 하게 된다. 그의 유화정책에 견훤도 초기에는 호의를 보였다.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간의 교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견훤은 내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내부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즉위 직후 반란 진압과 정적 처리, 그리고 북방 민족의 침공에 대한 대비로 바빴던 태조 역시 후백제와 갈등하여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했다. 920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을 점령함에 따라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합천의 대야성이 무너지자 후백제군은 이 여세를 몰아 구사성과 진례군(경남 김해.)까지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리자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 이 불안이 그에게 호재가 되었다. 불안을 느낀 경상북도의 일부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했고, 또 이때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에서 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왕건이 군대를 보내자 견훤이 퇴각해 신라가 한층 고려에 우호적이 되고 고려에 의지하는 효과가 생겼다. 고려사 박수경 열전을 보면 이때의 고려 지휘관은 박수경으로 추정이 되고 박수경 열전에는 왕건의 명령을 받아 신라로 간 박수경이 거듭해서 견훤군을 패배시켰다고 적고 있어 이때 견훤군은 박수경에게 패해서 물러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는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오늘날의 공주)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두고 견훤이 겉으로는 왕건과 화친하였으나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고 비난하였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중, 애선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냈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거센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당초 조물성 전투는 여러 사서들에서도 나오듯이 후백제군이 매우 강해 고려가 불리한 상황이였다. 이때 왕건은 자신의 친정군을 제외한 전 군대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황보제궁이 이끄는 상군과 왕충이 이끄는 중군이 모두 패하고 박수경과 은영이 지휘하는 하군만 승리해 왕건 자신의 친정군과 박수경과 은영의 하군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사이에 유금필이 왕건을 구원하러 달려오면서 전세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견훤과 왕건은 서로 화친을 하기로 결정하고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송도에 왔던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깨지게 된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인질로 잡고 있던 왕신을 죽인 후, 공주성을 기습하여 웅주와 그 주변 일대를 모두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록에는 없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을 보면 왕건은 927년 3월 '운주'를 쳐서 함락시키고 이어서 웅주까지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934년 '운주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견훤의 출정은 운주와 웅주 지역을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926년(천수 9)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무너져 망명해 온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하고, 신라를 공격한 후백제를 신라와 협공하였다. 그가 고려군을 이끌고 후백제와의 전쟁상태에 돌입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침입하여 발해를 멸망시켰고, 수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몰려든 덕택에 왕건은 병사들의 수를 더 늘릴 수 있었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927년(태조 10) 음력 9월초 견훤은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로 기습하였다. 한참 싸우던 견훤군의 갑작스러운 퇴각에 태조는 경북 북부지역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경주를 기습한 견훤은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가 보낸 고려군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해 말머리를 돌려 대구의 공산(팔공산)에서 태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그러나 견훤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서 왕건은 병력을 대부분 잃고 겨우 후퇴한다. 음력 9월 공산 전투에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출정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이는 후백제의 계략이였고, 싸움의 진행 중 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역매복으로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왕건의 옷을 빼앗아 입고, 왕건은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는 부득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고 빠져나간다. 태조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태조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5천명, 학자들에 따라서 1만~2만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나중에 공산 전투의 고려군 전사자들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다. 공산 싸움에서 패퇴한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벽진군을 공격해 고려의 장군 색상을 전사시키고, 오어곡성과 의성부를 함락시키는 등 공산 전투 이후 후백제 군은 929년 10월 상주 가은현에서 소판 아질미와 장군 희필에게 패한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경상도 지역에서 승승장구 하게 된다. 그러나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군의 침략과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다시 대거 왕건에게 귀순, 고려로 발길을 돌렸다. 경북 호족들의 투항과 견훤 군사의 노략질 등으로 경북 지역의 민심이 왕건에게로 향하면서 그는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또한 발해가 멸망하고 후발해, 정안국이 세워졌지만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이 계속 고려로 유입되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민심을 수습하게 되었다. 927년의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29년 7월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부장인 홍술이 전사했다. 그러자 왕건은 직접 출정을 단행한다. 929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향한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그곳의 지휘관들인 소판 아질미와 장군 희필의 활약으로 패배했다. 이후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이 고창은 고려군에게 있어서 견훤의 고향은 상주 가은현과 더불어 경상북도에서 고려의 가장 중요한 보루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처음에는 견훤군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하였기에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고려군은 강공훤과 홍유가 최악의 경우 고창을 사실상 포기하고 퇴각하는 것이 옳고, 이 경우 죽령은 견훤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는 샛길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왕건에게 진언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의 최대의 명장인 유금필이 나서서 중국 전한(前漢.)의 조착의 발언인 '병기는 흉기요. 전투는 위태로운 일이니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서 승부를 결정할 수 있다.'를 인용하면서 싸우기도 패할 걱정부터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니 진격해 고창을 구원할 것을 왕건에게 강하게 주장했고, 왕건은 이를 받아들여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에서 유금필의 활약으로 대승리를 거둔다. 이 '고창전투'는 고창전투의 서막인 929년 12월 '저수봉 전투'부터 시작해 930년 1월의 '고창병산전투'까지의 1개월여간의 대회전 끝에 견훤은 8천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심대한 피해를 입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신의 참모인 시랑 김악이 고려군에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이 고창 전투의 승리는 그곳 유력 호족들인 김선평,권행,장길의 막판 고려군 참전의 공이 크지만 이들은 1개월여간에 계속 관망만 하고 있다, 승기가 고려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아니면 최소한 전투가 백중세인 것을 감안해 출정해 고창 전투에서 이들의 활약이 과장된 면이 크다. 그외에 고창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요인들은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것과 이후 여러 전투들에서 고려군들이 계속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틀 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과 동해안 지역의 호족들과 후백제의 신하였던 매곡성 성주 공직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후백제는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또 고려가 공산 전투 이후 육전에만 신경을 쓰는 헛점을 간파해 해군을 통한 고려 본토 기습에 나서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고, 최근 이도학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개경에도 상륙해 일시적으로 고려 왕궁을 점령하고 왕건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박수경의 사력을 다한 구원으로 왕건은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 해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충남 대우도.)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격파당했고 이후 다시는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내해와 섬들, 육지를 침략하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 대한 정사들인 삼국사기 견훤 열전,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전,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932년 9월과 10월 이후 후백제 해군의 고려 내해와 섬들,내지의 침공 사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935년 4월,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긴 나주 지역을 탈환해 고려 해군은 후백제 해군에게 당한 피해를 완전히 복구함은 물론 오히려 역습까지 가능할 정도로 다시 크게 성장했고, 또 상귀와 상애 등이 해군으로 고려 수도 개성 근처의 해안 지역들과 전함들과 물자를 유린했던 그 해 932년 7월에 왕건의 친정으로 단행된 '일모산성' 공격이 11월에 완료되어 일모산성은 함락되어 오히려 본토의 내지를 잃기까지 해서 해전에서의 일시적 승전들이 빛이 바래게 되었다. 고창 전투의 대승리의 기세를 이용하여 태조는 고려에 투항해온 재암성 성주 선필의 주선으로 금성을 방문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가 경주를 방문하자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져 강릉과 울산의 110여개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 왕건은 신라 경순왕을 위로하는 한편 후백제군의 잔인함을 규탄하고 그가 신라의 장수였는데 조국을 배신하였다며 견훤을 규탄하였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해 왕건은 그해 7월에 군대를 거느리고 일모산성을 직접 공격해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켰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후백제는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또 고려가 공산 전투 이후 육전에만 신경쓰는 헛점을 간파해 해군을 통한 고려 본토 기습에 나서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충남 대우도.)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격파당했고 이후 다시는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내해와 섬들, 육지를 침략하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 대한 정사들인 삼국사기 견훤 열전,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932년 9월과 10월 이후 후백제 해군의 고려 내해와 섬들,내지의 침공 사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긴 나주 지역을 탈환했다고 나오고, 그 해인 932년 7월부터 왕건이 친정을 해서 공격하기 시작한 충청북도 남부의 중요한 요충지인 '일모산성'이 11월에 끝내 함락당해 오히려 본토의 일부까지 잃어 932년 9월과 10월의 승전들이 빛이 바래게 되었다. 이후 933년 5월엔 수천명으로 추정되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의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근처까지 신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당시 의성부(경북 의성)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고, 유금필은 당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중 급히 추려 출정한 결사대 80명의 병력과 사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위치한 여울)을 건너 신검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사대의 지휘관인 유금필은 두렵지 않고 그의 부하 병력들만 매우 두려워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유금필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부하 병력들보다 유금필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해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고, 이후 유금필과 그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에 사탄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신검의 후백제군이 자도에서 유금필과 그가 거느린 80명의 결사대를 공격했지만 금달,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고 그외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사로잡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다시 당했고, 자도에서의 유금필군의 전설적인 승전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유금필에게 매우 크게 감탄했다. 이후 개선한 유금필을 맞이하게 된 왕건은 옥좌에서 내려와 유금필의 손을 잡으며 '그대가 세운 전공은 옛적에도 드물었으니 내가 이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에 유금필은' 나라의 어려움에 자신을 잊고, 나라의 위급함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당연한 도리인데, 성상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라고 왕건의 극찬을 물렸으며, 이에 왕건은 유금필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고 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934년 9월, 왕건이 운주 일대를 빼앗을려고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명을 뽑아 운주로 진군했지만 고려군의 기세가 강성해 승산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군이 자신의 영토를 빼앗을려고 진군해 왔는데도 화의를 청해, 평소의 패기 있고 자신만만해 하던 견훤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근본적으로 929년 '고창 전투'의 서막인 '저수봉 전투'때부터 지금까지 고려군에게 전체적으로 패배를 거듭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후백제군과 견훤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고려군에게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견훤의 이런 약해진 모습을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에게 견훤군을 공격할 것을 요청해 왕건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유금필은 강력한 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해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대패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고, 후백제군 30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웅진 이북의 30여개의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전쟁 과정에서 견훤이 경주를 침략함에 따라 신라 백성들의 감정은 왕건에게 더욱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왕건은 신라에 욕심이 없다는 듯 제스처를 취했고 신라는 더욱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후 신라를 침략하는 후백제와 교전하며 신라를 지원하였다. 신라 경순왕은 결국 고려에 투항할 의사를 피력하고, 마의태자 등 일부의 반대에도 왕건에게 귀순한다. 경순왕의 귀순은 그에게 명분을 안겨 주었는데, 일찍이 태조는 견훤과 더불어 경쟁적으로 신라 왕실을 높인다는 점을 내세웠고,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신라의 계승자라는 점과 견훤을 반란자로 지목함으로써 통일전쟁의 명분을 찾으려 했다. 935년(천수 18)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그해 3월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9월 야산으로 고려에 입국한다. 그는 도망온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상부(尙父)의 예로써 받아들였다. 그 뒤 견훤은 어느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등창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자진 항복해 온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축출한 점을 들어 후백제를 반역집단으로 규정,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이때 이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왕무(王武.)와 강공훤과 명주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김순식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명주의 김순식이 고려군에 들어와 싸운 것은 기록상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일리천'에서 싸워 대패시켰고, 이후 신검군은 황산을 거쳐 탄현을 넘어 퇴각한 후 마성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해와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그 후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들을 포섭, 융화·결혼 정책을 쓰고 귀족은 예로서 대접하였고, 사심관·식읍(食邑)·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 등을 주어 회유하였다. 한편 숭불정책을 써서 불교를 국교로 삼아 사원을 지었고 승려를 우대하였으며, 신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학(敎學)·사상(思想)·민간신앙을 적극 보호하였고, 도참(圖讖)을 믿어 보호하였다. 《정계(政戒)》, 《계백료서(誡百療書)》 등을 내어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때 저술한 정계와 계백료서는 후에 실전되었다. 호족들의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결혼 정책을 펼쳤다. 각지의 유력 호족들의 딸과 누이를 왕후나 후궁으로 삼는 것이었다.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으나 후고구려 역시 호족 연합체였고 발해계 유민, 신라계 세력, 후백제계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존재했다. 태조는 이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하던 중 결혼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게 된다. 통일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신라처럼 각지의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 정주의 류씨, 충주의 유씨, 황주의 황보씨, 경주의 김씨, 평산의 유씨, 광주의 왕씨, 신천의 강씨, 평산의 박씨, 의성의 홍씨 등 유력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왕후나 제3,제4왕후와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또한 후백제계 세력인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들 역시 후비로 맞이하여 후백제계열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했고, 왕건은 935년 신라 항복 이전에 신라 경순왕의 소개로 경순왕의 사촌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와 결혼하는 한편,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 유씨와 서녀 부인 왕씨를 신라 경순왕에게 보내서 사위로 삼는 등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그때까지도 성씨가 없던 부하장수나 장졸들에게 성씨를 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딸, 누이 등이 없던 호족들의 존재와 딸, 누이들과의 결혼으로 안심할 수 없었던 태조는 호족들의 아들, 동생, 조카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송도로 올려보내게 하여 일종의 정치적 인질, 볼모로 잡아두고 있었다. 이는 자신과 결혼한 호족들에게도 집안의 남성을 송도로 올려보내게 함으로써 다른 호족들의 반발을 막기도 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장군들 역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태조는 반란의 기미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개국공신이기도 한 부하 장군들에게서 사병들을 압류하였으나 호족들의 사병들은 압류하지 못했고 소수의 관군만으로는 완벽하게 호족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혼인 정책은 그가 죽고 난 뒤 고려를 왕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제들을 전면에 내세운 호족들의 왕권 경쟁으로 고려 왕실은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태조는 이복 남매들끼리의 족내혼을 추진한다. 자녀들이 송도에 올라왔으므로 호족들은 반란을 기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호족은 왕실의 외척이라는 신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태조는 이들 호족들이 자신의 외손, 자기 가문의 외손을 후계자로 앉히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자신의 자녀들끼리 족내혼을 시킨다. 그러나 유력 왕위 계승권자였던 태자 무, 태자 태, 태자 요를 족내혼을 시키려 하자 호족들이 반발하였다. 이복형제들을 등에 업은 호족들의 움직임도 경계하는 한편으로 이복남매간의 족내혼을 허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한다. 또한 이러한 족내혼은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치이기도 했다. 통일된 국가의 국론 단결을 위해 그는 고구려 계승론을 적극 국가 이념으로 선언하였다. 우선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이러한 국시 아래 왕건은 고구려의 옛 수도 서경을 매우 중시하여 그곳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 땅을 되찾으려는 북진 정책(北進政策)의 전진 기지로 삼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고, 수도인 개경보다 더 관심과 애정을 보여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짓고 난 후 삼국통일을 한 것을 염두에 두고 개경과 서경에 탑을 지었을때 서경의 탑을 개경보다 훨씬 높게 지었으며 거의 매년 서경 지역으로의 순행에 나섰고, 장래에 천도를 하겠다는 계획까지 밝혔다. 그러나 서경으로 천도하지는 못했다.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渤海)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 북진 정책을 추진한 결과 왕건이 사망할 무렵에는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의 일부분을 수복하였다. 태조는 고구려-발해 계승론 외에도 불교의 장려를 통해 사상적 통일, 단결을 꾀하려 하였다. 민족화합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여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공식 국교(國敎)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태조 자신이 매일 불당에 방문하여 부처에게 불공을 함으로써 직접 모범을 삼았다.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신라 출신의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940년 12월에는 충청도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동년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하여 공신들의 모습을 화상으로 그려 벽에 붙였다. 또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최, 해마다 이 대회를 열 것을 명하여 매년 무차대회를 열어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 이는 효과를 발휘하여 불교 신앙은 다시 민간으로도 폭넓게 확산되었고 국민들의 사상적 단결을 이끌어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942년,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낙타를 선물해 왔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신의가 없는 나라라고 하여 사신을 귀양보내고 낙타를 만부교에 메어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하였다. 2차로 거란이 사신을 파견했을 때도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왕건은 유언을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경계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중국의 오대 십국에 꾸준히 사절을 파견, 중국의 제국들과 외교활동을 하며 거란과 여진족까지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펼친다. 943년(태조 26년) 임종을 눈 앞에 두고 고명대신인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는 귀감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는 태자 무를 일찍부터 정윤으로 정하였으나 태자 무의 외가는 세력이 미약한 점을 염려하였다. 그는 박술희를 불러 고명 대신으로 정하고 태자 무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자 왕건은 빙긋이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943년 음력 5월 29일 병사하였다. 임종 당시 왕건의 향년 67세였다. 능은 개성(開城))에 위치한 현릉(顯陵)이다. 이는 그의 제1비 신혜왕후(神惠王后)가 묻힌 곳에 함께 합장된 것이다. 태조(太祖)의 뒤를 이어 차비(妃)인 장화왕후(莊和王后)에게서 난 아들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혜종(惠宗)이다. 그가 죽으면서 직접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친술하여 남겼다고 하는 훈요십조는 고려 현종이전까지 즉위한 후왕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신라계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고려 현종 때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보통 왕건의 성씨에 대해서 처음부터 왕(王)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사학자 박은봉은 이는 오해라고 반론한다. 그에 의하면 《고려사》 어디에도 왕건의 아버지 왕륭과 할아버지 작제건의 성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박은봉은 왕건이 출세한 뒤 자신의 이름 첫 자인 왕(王)을 성씨로 삼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는 왕씨들을 모아다가 이주시키겠다 또는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이유로 배에 태운 뒤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배를 난파시켜 익살시켰고, 아직 육지에 남아 있는 왕씨들도 대부분 죽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야사모음집인 연려실기술과 생육신중 한 명인 남효온의 추강집에서는 왕건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너가 내 후손을 몰살시켰으니 너에게 오래지 않아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저주했고, 이에 놀라 깨어난 이성계는 급히 왕씨의 극히 일부를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자식들을 이복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강의석 강의석(姜義錫, 1986년 8월 25일~ )은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가 출신 인권 운동가, 시민운동가이다. 고교시절 종교 자유 투쟁을 벌인 데 이어 양심적 병역거부 활동 등을 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시위와 소송에 연관되어 제적당했다. 2004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 10월 16일부터 10월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광고등학교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해 6월 16일 학교 교내 방송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가 퇴학당했으며,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종교 선택의 자유, 퇴학 무효를 청원하여 이끌어냈다. 이 소송은 결국 2010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승소하였다. 7월에 고등학교 복학 이후에도 학교 측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요구하며 두 차례에 걸쳐 학교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휴학하며 시민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고 대학은 중퇴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한민국 헌법상 병역의 의무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군대 반대 퍼포먼스와 각종 집회 등을 주도하였으며, 2008년 9월 30일에는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무언 퍼포먼스를, 10월 1일에는 군대의 폭력성을 지적하고자 국군의 날 기념 행사장에 누드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다가 2011년 미등록제적 형식으로 그만두었다.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인권침해를 비판하여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일 병역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 수감됐으며, 실형을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을 받았다. 투옥 중에는 수감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는 또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의 병역면제(엄밀히는 예술체육요원) 혜택에 대해 서민 남성들은 군대 가야 하는데 체육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병역면제를 받는다며 모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 출신이다. 강의석은 1986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회사원 아버지 강재정과 약학자 어머니 백완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1999년 3월 서울 동대문구의 성일중학교를 거쳐 2002년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강의석은 서울 동대문구 대광고등학교의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종교 강요에 대한 반발로 학생운동가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인 2004년 6월 학교가 학생들에게 개신교 예배를 강요하는 데 반발하여 시위하였다. 이후 그는 학생운동가가 되어 종교의 자유와 사회 비판을 시작하였다. 한편 예배 반대 시위를 한 이유로 그는 곧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강군의 학교생활은 시작부터가 고민이었다. 대광고를 배정받았을 때 종교가 없는 그는 ‘기독교학교’라는 것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그나마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학교 소개를 본 뒤, “인성교육이 목적이지 설마 종교를 강요하겠나” 하는 생각에 대광고의 교복을 입기로 했다. 2002년 3월 고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학교에서) 기독교 이념에 따라 교육을 받겠다는 ‘선서’를 해야 했을 때, 강군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2002년 대광고등학교 1학년 말 학생회 부회장 선거에 나가려 했을 때 또 다시 ‘종교’가 걸림돌이 됐다. 입후보 자격에 ‘교회를 1년 이상 다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교목담당 교사에게 “학생회 선거에 종교규정이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기독교를 종교가 아닌 서양철학으로 공부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1년 정도 교회를 다니기로 했다. 갈등끝에 “학생회 활동을 통해 공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종교적 갈등은 더욱 깊어갔다. 입학식 때 한 ‘선서’가‘학교와의 약속’이자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는 생각에 섣불리 깨는 것도 어려웠다. 2003년 2학기 때 학생회장이 된 강군은, 대의원회의를 통해 학생회 선거에서 종교규정을 삭제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학교 쪽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종교 자율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2002년부터는 푸드뱅크 등에도 참여하여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2004년 6월 16일 아침, 강의석은 학내방송을 통해‘종교자유 선언’을 했다. 대광고등학교 학생회장 신분이자 6월 첫째 주까지도 예배에 성실하게 나와서 활동하던 그의 돌발 계획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학교에 들어와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여러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고3이 되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고민이 더욱 커졌고, 자신의 뜻과 거슬러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자문도 해보았다고 한다.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 뒤, 드디어 16일부터 ‘학교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1인시위에 들어갔다. 비기독교인인 그에게 매주 학년 전체가 참석하는 예배와 아침마다 하는 학급예배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또, 이날부터 한 달 예정으로 학교수업이 끝난 오후 6시부터 1시간 동안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였다. 당시 그는 인터넷 카페(cafe.daum.net/whdrytkfkd)를 통해 서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국가인권위원회 진정도 검토하기도 하였다. 그는 “학교도 기독교인만 들어오면 교육이념에 맞는 훌륭한 교육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이 들어오는 이상 이에 대한 종교적 배려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번 결정으로 무엇을 잃는다는 두려움보다 얻을 것이 더 많다는 기쁨이 앞선다”며 “만약 전학을 가더라도 학교에서의 종교자유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학교에서는 ‘개인적 문제’로 교내방송을 사용했다는 이유와 건학이념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강군에 대한 징계 의사를 내비쳤다가 지난 18일 징계위원회 대신 선도위원회를 열어 전학을 권유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에 그는 학교를 상대로 퇴학 처분에 무효 소송과 가처분 신청을 내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강의석은 7월 7일에도 대광고등학교 생활지도부장으로부터 '시험기간 중 교내ㆍ외 시위를 하지 않겠다. 7월 13일까지 타 학교로 전학을 가겠다'는 문서를 쓰고,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의석은 지난달 16일 학내방송을 통해 '종교자유 선언'을 한 이후 학교측으로부터 수차례 전학 압력을 받아왔다. 강의석은 학교의 제적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학하지 않기로 결정해 논란이 확산되었다. 그의 부모는 당초 입장을 바꾸어 전학하지 않겠다는 뜻을 학교측에 전달하고 선처를 호소하였다. 학교측은 아직 구체적인 징계절차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면서 제적여부는 교칙에 따라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참교육학부모회와 전교조 등 교육단체들은 내일 학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징계방침 철회와 학내 종교자유 보장을 촉구하였다. 7월 8일 오전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학교에 등교했으나 시험 도중 불려나가 학교 징계위원회로부터 제적통보를 받은 후 대광고등학교로부터 퇴교조치당했다. 강의석은 7월 8일 오전 기말고사를 보던 중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지금 짐 챙겨서 나와라. 오늘부로 제적됐다. 자세한 내용은 우편으로 발송될 거다"라는 말을 듣고 퇴교당했다. 강의석은 대광고등학교로부터 제적 통보를 받은 직후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글을 올려 "제적당할 경우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주위 말씀에도 학교측이 최종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내려줄 것이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며 "학교라는 공간조차 부조리함으로 가득차 있고 믿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강의석 학생은 "제적 뒤의 일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낼 생각"이라고 밝혔다. 또한 일부 교육단체들 역시 "이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며 반발했다. 민주노동당,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권운동사랑방 등으로 구성된 '강의석 학생 부당 징계 저지와 학내 종교 자유를 위한 연대회의'는 "학교의 잘못을 학생에게 떠넘기고 있다"며 "학교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연대회의' 차원에서 대응하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 이원영 보좌관은 "지금까지는 강의석 학생의 요청에 따라 적극적인 대응을 안 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강력 대응 의지를 밝혔다. 이후 강 군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서울북부지방법원에 퇴학무효 소송을 내는 등 외로운 투쟁을 지속하다 지난 9월1일 법원으로부터 퇴학무효 가처분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후 그는 8월 11일부터 9월 25일까지 단식으로 투쟁했고, 학원은 예배선택권을 보장하기로 했다. 2004년 7월 그는 국가인권위에 학교장을 상대로 진정을 했다. 그리고 7월 27일 인권위의 중재로 강의석 학생과 부모, 대광고 교감을 비롯해 서울시교육청 중등교육과 최승택 장학사가 참여한 가운데 '학생회 회장, 부회장은 교회를 다니는 자만 해야하는 현 학생회칙을 개정하고, 정규 교과시간 이외의 종교활동 문제 등에 대해 교단과 기독교연합회 등과 연계, 협의·검토하여 근본적인 해결을 강구한다'는 내용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애초 인권위가 마련한 합의서에서 '지금까지 야기되었던 문제에 대해 상호 간에 원만히 협의하여 대외적으로 사과하고, 강의석 학생을 재입학 조치한다'는 내용이 빠지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4년 겨울,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2005학년도 수시모집에 지원하여 합격했고, 2005년 1월 퇴학 무효 소송에 승소함에 따라 합격이 최종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광고등학교에서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종교의 자유 관련 투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강의석군 징계 철회와 학내 종교자유를 위한 연대회의'가 구성되어 그의 활동을 도왔다. 그는 학내 예배 선택권을 요구하며 2004년 8월 11일부터 46일간 단식을 벌였다. 8월 11일부터 그는 음식물 일체를 거부하며 물만 마시고 있는 강군은 학생들의 종교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완강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9월 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항의한데 대해 학교가 거짓으로 본질을 흐리는데 항의하고, 이 운동에서 나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식을 시작했다"며 "학생들의 예배권 선택이 보장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단식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제적처분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가 교목실장에서 직위 해제된 뒤 대광중학교로 옮긴 류상태 교사는 2일 "8월 11일부터 단식을 시작했는데, 이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해질 것이 우려된다"며 "의석군의 단식을 푸는데 학교와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또, 송원재 전교조 대변인은 "학교측은 재판부의 판결 취지에 대해 인정하고 강의석 학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교육적 태도"라며 "개인의 희생과 고통을 통해 종교자유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얻은 만큼 단식을 바로 중단하길 간절하게 호소한다"고 부탁했다. 그는 단식 농성을 하면서 자신의 단식투쟁을 기록한 '바보일지'를 기록하였다. 그는 단식을 하면서 자신의 일기 ‘바보일지’에 “약속은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썼다. 탁준호 대광고 교장은 당시 한 개신교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광고는 학생 본인이 예배를 원하지 않으면 안가면 된다"며 "예배를 거부하는 학생은 학부형을 불러 분명한 의사를 확인하고 예배 참석을 면제해준다"고 발언한 바 있다. 당시 그의 지지자들은 탁 교장의 해당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탁 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2004년 9월 1일 법원의 ‘퇴학무효 가처분’ 결정으로 학교 복귀와 함께 예배 선택권을 부여받았지만, 그는 ‘전교생의 예배 선택권’을 주장하며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 카페에는 강군을 지지하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학교 종교 자유’를 놓고 100일 넘게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강군에게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한달 넘게 단식을 하는 자식을 보다 못한 강군의 부모가 응급차를 부르자 입을 떼지도 못할 정도로 쇠잔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했다. 9월 4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달 11일부터 물만 마시며 단식하고 있다”며 “2일부터 수업을 듣고 있지만 학생들의 예배 선택권을 보장받을 때까지 단식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일 종교 자유의 문제에 대한 학교와 학생 간의 대화의 장을 마련해줄 것을 학교에 요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30일 넘게 단식하면서 그는 물과 음료수만을 마시면서 버텼다. 그의 단식은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노컷뉴스, 프레시안, 한국일보, 국민일보를 비롯한 대형 언론들과 기독교계열 신문에 의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는 9월 25일에 1차 단식을 풀었다. 9월 22일 당시 그는 학교에 등교는 했으나 건강 상태가 악화돼 휠체어에 의지해 있는 상태였다. 9월 25일 오전 8시경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으로 옮겨져 10시부터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입원하였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병실에서도 수능시험 공부를 계속 하던 그는 "머리 맡에 놓인 초콜릿의 유혹이 강렬하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9월 29일 병상에서 밀린 수능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그는 "단식을 푼 지 5일 만에 몸무게를 15㎏ 정도 회복했다"며 "단식기간 중 모두들 잠든 밤에 내 머리맡에 놓인 초콜릿이 가장 큰 유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한 권리였기에 내 목소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고, 그 희망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며 "'권리를 일깨워줘 고맙다'는 한 친구의 문자 메시지에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10월 16일, '학교 예배선택권'을 요구하며 46일에 걸친 장기단식을 벌인 결과 학교측의 약속을 믿고 8월 25일 단식을 풀었던 강의석(18. 대광고 3)군이 다시 단식을 들어갔다. 학교가 문서로 약속을 한 지 3주가 지났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데다가 약속을 파기하려는 노골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한 대응이다. 인터넷 카페 '미션스쿨 종교와자유'(cafe.daum.net.net/whdrytkfkd)에 올린 글에서 "학교 쪽이 전교생에게 예배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합의를 하고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며 "문서로 작성한 합의 내용을 학교 쪽이 적극적으로 합의를 이행할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0월 20일 오전 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예배선택권 안내문을 나눠주려다 학교 측의 제지를 받고 항의하던 중 손발 마비 증세가 나타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날 오전 7시 50분쯤 예배선택권 보장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학교측의 제지를 받았으며 이후 마비증세가 나타났다. 바로 그는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학내 예배 선택권 보장을 약속한 합의안 이행을 요구하며 다시 단식에 들어갔던 강의석은 학교의 합의안 이행 움직임에 1주일만에 단식을 풀었다. 10월 22일‘미션스쿨종교자유(cafe.daum.net/whdrytkfkd)’에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종교수업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의 예배 불참 여부에 대한 조사와 함께 그 절차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이뤄지고 있다”며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예배 불참 신청을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기쁘다. 오늘부터 단식을 풀겠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는 수능시험 공부에 전념하고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겠다”며 평범한 고3 수험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25일 오전 10시 서울 안암동 고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뒤, 입원절차를 밟고 회복하였다. 그는 학교에 복학하였지만 대광고등학교에서 내린 퇴학처분 자체를 무효화하겠다 선언하고 학교법인 대광학원을 상대로 낸 퇴학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나중에 2005년 1월 21일에 가서야 학교법인 대광학원을 상대로 낸 퇴학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9월 14일 단식 농성 34일차 되던 날, 국회에서는 그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학내 종교자유를 주장하며 3단식을 하고 있는 강의석군 지지 서명운동에 23명의 국회의원들이 동참했다. 최순영 민주노동당(국회 교육위원회) 의원은 “지난 8월부터 국회의원과 보좌관 등을 상대로 실시한 ‘학내 종교자유 지지 서명’에 국회의원 23명, 보좌관·비서관 111명이 참여했다”고 13일 밝혔다. 서명에 참여한 의원은 최순영 단병호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과 이원영 김태년 김성곤 열린우리당 의원, 배일도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손봉숙 민주당 의원 등이다. 최 의원 쪽은 이들의 서명을 학내 종교자유 운동을 펴고 있는 강군에게 전달했다. 9월 11일 대광고 일부 교사들은 1명씩 교대로 24시간 동안 릴레이 단식을 벌이며 강 군의 단식 중단을 종용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교무실 책상 앞에 '제자를 살립시다'라고 적힌 푯말을 세운 뒤 매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릴레이 단식을 벌였다. 교사 릴레이 단식에는 13일까지 12명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밖에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벌이고 있는 강 군 단식 중단 촉구 서명운동에는 12일 기준으로 모두 35명의 교사들이 서명을 했으며, 13일부터 대광중학교로도 서명운동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대광고, 대광중의 교사들이 두루 동참하였다. 박상준 대광고 교사는 12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강 군은 한 달이 넘도록 단식을 하면서도 정상적으로 등교해 힘겹게 정규수업을 받고 있다"며 "이에 교사된 입장에서 더 이상 제자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같은 릴레이 단식을 벌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교사들의 제자 살리기 단식 농성은 그가 단식을 푸는 9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2004년 10월 29일 그는 2005학년도 서울대 수시 2학기 1단계 전형에 합격했다. 29일 서울대에 따르면 강군은 이번 서울대 수시 2학기 전형에서 20명 모집에 1 94명이 지원해 9.7대 1의 경쟁률을 보인 법대에 지원, 1단계 전형을 통과했다. 2004년 12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하였다. 서울대는 16일 오후 수시2학기 모집전형 최종합격자로 강의석 군을 선발했다고 밝혔다. 6일 오후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막상 지원을 해놓고도 3학년 성적을 제출하지 못해 내내 가슴을 졸였고, 그래서 2차 면접·구술시험 때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며 "스스로도 무척 기쁜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동안 자식 걱정에 애를 태웠던 부모님들이 더 기뻐하는 것 같다"고 벅찬 감회를 피력했다. 그는 "법대에 지원했던 이유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법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또 그와 연관된 공부를 좀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사법시험보다는 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부에 더욱 치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2005년 1월 9일 부산에서 출발, 학내 종교자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국토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국토 대장정은 1월 31일에 마쳤다. 한편 그때까지 계류중이던 대광고등학교 퇴학 무효 소송에서 승소한다. 2005년 1월 21일 강의석(19)군이 학교법인 대광학원을 상대로 낸 퇴학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최종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는 2004년 12월 2005학년도 서울대 법대 수시모집에 합격했으며, 이번 승소로 서울대 법대 합격이 최종 결정됐다. 1월 21일 서울북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이성훈)는 “학생에게 종교와 표현의 자유 등 인권이 보장돼야 하고, 종교교육이 허용되는 사립학교라도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범위에서 교육이 가능하다”며 “학교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 의사에 반해 종교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는 “이번 판결로 강군이 고교 졸업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법대 입학에 문제가 없다”고 결정했다. 2005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006년 그는 등록을 거부하고 제적당했다. 2005년 4월 1일 중증장애인 요양원 설립을 위한 콘서트가 열린다. 전국노동자회, 사회당, 행동하는 의사회, 사회비판아카데미로 구성된 인연콘서트의 사회자로 출연하였다. 4월 그는 대학 휴학을 신청하였다. 5월 20일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냥 쉬고 싶어서 휴학했다”면서 “언제까지 쉴지는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0년 2학기 때 등록을 하지 않아 서울대에서 다시 한번 제적됐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일부 기독교 계열의 학교였던 자신의 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비롯, 종교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취향을 인정하지 않고 재단측의 종교를 강제적으로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런 사학 재단이 강요하는 종교 생활이 인간 개인의 영적 위안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며 꾸준히 의혹,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의 활동에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시민운동가들의 지지와 함께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반감을 동시에 불러왔다. 이후 2004년 이후 종교계열 사립 학교의 종교 교과목 강요가 문제시되면서 종교 과목을 강요하는 일은 서서히 감소하였다. 2005년 7월부터는 종교 자유 소송과 동시에 체력 트레이닝을 받았다. 2005년 8월 26일~8월 28일에는 '미션스쿨 종교자유 카페' 회원들과 함께 인터넷 검색 시위를 벌였다. 8월 28일,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 순위에 ‘종교 자유’가 단숨에 2위에 올랐다. 강씨를 비롯한 ‘미션스쿨 종교자유 카페’ 회원들이 한꺼번에 이 포털에 접속해 동시에 ‘종교 자유’를 검색하는 이른바 ‘검색 시위’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그는 소송과 종교 자유 시위를 진행하는 동시에 헬스 클럽을 다니며 각종 체력 트레이닝을 받고, 2005년 9월부터는 정식으로 권투 지도를 받고 아마추어 권투선수 자격을 획득했다. 9월 10일 강의석(19·서울대 법학과 1)은 다시 대광고 교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강씨는 인터넷 카페 ‘미션스쿨 종교자유’ 회원 4명과 함께 각자 모교의 교복을 입고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은 광고노래 ‘우유송’에 가사를 바꿔 “종~교 자유, 주세요!”를 외치며 서울 명동에서 대학로까지 행진했다. 9월 13일 프로복서가 되기 위해 한국권투위원회의 프로 테스트를 받았다. 이후 아마추어 권투 선수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2005년 10월, 그는 대광고등학교의 재단 대광학원과 서울시교육감을 상대로 종교 활동을 강요한 것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강의석은 사태가 일단락된 지 1년만에 다시 학교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 이번에는 학생 인권침해 현실을 방기해 온 서울시교육청도 피고에 포함시켰다. 2007년 10월 서울중앙지법은 학교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인정하며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으나, 서울시교육청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서는 고의나 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9일의 항소심에서는 패소하였다. 5월 9일, 항소심에서 고등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학교 측의 손해배상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7일, 그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1심 재판부는 그의 기본권이 침해됐다며 학원 측은 강 씨에게 1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2심에서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했고 이후 대법원은 강씨가 학교법인 대광학원과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2010년 4월 22일, 대법원은 미션스쿨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하고 강의석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에 사실상 종교교육을 강요했고, 지속적인 원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교육에 참여시켰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였다. 10월 17일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성기문)는 7일 강의석씨가 학교법인 대광학원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파기환송심에서 1500만원을 지급하라는 1심과 같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한편 그가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됐다. 2010년 11월 16일 그는 학교 등으로부터 승소한 뒤 받은 돈을 자신이 다니던 대광고등학교에 기부하려 하였다. 학내 종교자유를 주장하다 퇴학당했던 그는 6년여의 소송 끝에 원고 일부승소 판결로 학교 측으로부터 받아낸 손해배상금 1500만원 전액을 장학금으로 다시 기부하려 했지만 학교 측이 거절했다. 이에 강의석은 거절당한 장학금을 인권단체인 인권실천시민연대에 기부했다. 2005년 9월 그는 한국권투위원회 테스트를 통과해 프로 권투선수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권투 선수가 될 마음은 없었고, 종교 비판과 시민 사회 운동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후 재학 중이던 서울대학교에서 2008학년도 1학기를 휴학하고 사람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며 택시 운전기사를 했으며, 4월말부터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다가,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권투를 하다 머리를 다쳐 징병검사에서 공익근무요원 판정처분(신체등위 4급)을 받았다. 위와 같은 행적에 대해 그는 경향신문에서 운영하는 경향iTV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권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권투를 해온 것이며, 대학생이 되어 갑자기 권투에 입문한 것도 아니고, 병역특례를 받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택시기사와 호스트바에 대해서는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젊은 날의 방황이라고 하였다. 군대 신체검사 당시 4급 판정에 관해서는 원래 두개골이 선천적으로 약했는데 권투선수를 하며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발견한 것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2008년 5월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 인턴으로 채용됐던 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최종 채용에서는 탈락하였다. 그는 “택시 운전일을 하고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특별인턴 제도를 만들어 채용할 의향이 있는데 혹시 해볼생각이 없냐고 전화가 왔다”며 “한달동안 두차례 청와대에 들어가 사전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그해 6월 “같은달 있었던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청와대에서 특별인턴 채용이 (더이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두 번의 사전모임에서 정확히 어떤 업무를 하게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곧 인턴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2008년 초부터 그는 한국의 군대는 인간의 개성과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곳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칼럼과 강연, 기고를 통해 강제로 병역을 부과하는 것과 군대의 폭력성을 비판하였다. 이후 강의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군대의 불필요성에 대해 논하다가, 《대학내일》에 그와 관련된 글을 기고하며 병역특례를 받은 수영선수 박태환을 언급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글로 논란을 이끌었다. 이 글에 대해 이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장을 지낸 한 학생이 서울법대 내의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경향iTV 주최로 토론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서울법대 학생은 "강의석의 운동방식은 평화주의자의 방식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다"라는 요지의 비판을 하였고, 강의석은 "군대 폐지라는 주장의 내용은 잘못된 것이 없다. 내가 언론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언론에 이용당했다. 고등학생 때에도 종교자유를 위해 많은 친구들과 여러가지 활동을 했는데 단식투쟁과 서울대 입학과 같은 사건만 부각되었다. 이번에도 언론에서 선정적인 부분만 집중 보도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군대 내부에서 가해지는 각종 구타 및 가혹행위, 얼차려 등을 지적하며 폭력적인 것에는 평화적으로 대응할 이유가 없으며, 엥똘레랑스에는 엥똘레랑스로 대처해야 한다며 반박하였다. 토론회 이후 강의석은 〈대학내일 437호〉에 ‘군대가 존재하지 않아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하였다. 이는 많은 보수 단체의 반발과 비판을 불러왔고, 그에게 평소 악감정을 가졌던 기독교 성향의 네티즌들도 그를 공격, 비방하였다. 한편 강의석은 박태환에게 보내는 칼럼을 통해 10월 1일에 군대 폐지 누드 시위를 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2008년 9월 30일 오전 8시부터 그날 저녁까지 그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에서 군대 반대 퍼포먼스를 하였다. 테헤란로변 인도에서 상의를 벗고 붉은색 페인트로 온 몸에 칠한 뒤, 다시 노란 페인트로 자신의 몸 앞에는 직접 ? 군대 꼭 필요하나요? 라는 글과 등에는 지나가는 행인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없애야 합니다 라고 썼다. 9월 30일 아침 출근시간대부터 그는 상체를 붉게 칠한 상태로 상체누드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 강남구 테헤란로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였다. 10월 1일 국군의 날 군사 퍼레이드 때 누드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 날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대대적인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펼쳐졌다. 서울대생 강의석은 이때 “전쟁을 반대한다”며 알몸으로 군인들의 행진을 막아섰다. 퍼레이드 도중 거리에 그는 알몸으로 뛰어들어 “전쟁을 반대한다”고 외친 뒤, 과자로 된 소총으로 전차에 총격을 가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이 퍼포먼스로 전차 퍼레이드가 약 30초간 중단되었고, 경찰에 체포되어 음란공연혐의를 적용받았다. 그는 9월 중순 퍼포먼스를 사전 예고하였으므로 대한민국 국방부 측에서는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국군 퍼레이드 전에는 테러를 대비한 사전 수색이 있었지만 그는 근처의 한 가로수 주변의 땅을 파고 참호처럼 만든 뒤 숨어 있었다. 강의석은 퍼레이드 시작시간 10시간 전에는 퍼레이드를 하는 의장대가 지나가는 곳 근처 중앙분리대 관목 사이에 굴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퍼레이드가 통과할 때 나체 차림으로, 소총 모양의 빵을 들고 나와서 공중에 쏘는 척 하다가 빵을 먹었다. 기자들이 주목하여 플래시가 터지고, 곧 나타난 헌병대원들과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져 나갔다. 대광고등학교 시절 그의 스승이자 당시 그를 지지했던 류상태(전 목사, 당시 대광고등학교 교목실장)는 머니투데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강의석의 군대 폐지 주장에 공감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2012년 고함20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2008년 당시 군대 반대 퍼포먼스를 기획한데 대해 "우리나라 사람이 전부 전쟁에 미치고 살상무기에 미친 사람이 아니란 걸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국가대표 선수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것은 지나친 특혜라고 주장해 왔다. 박태환이 올림픽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이로 인하여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자 강의석은 박태환에게 군대 가라며 ‘대학 내일’ 434호에 기고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마린보이, 난 자칭(!) ‘영화감독’ 강의석이야. 2009년 2월 완성될 블록버스터 다큐 ‘군대?’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예정”이라며 “그렇게 되면 ‘국위선양’의 이름으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게 되겠지만 나는 그 혜택을 거부하고 감옥에 갈 생각”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메달을 이유로 병역을 피하는 것은 부당한 병역 회피이며, 악조건에서 태어나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서민 남성들의 처지를 돌아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월드컵 대표선수 비판과는 달리 박태환 비판 이후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곧 최진실 자살 사건으로 강의석에 대한 비판 여론은 묻혀졌다. 10월 2일에는 "평화는 맛있다!"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총 모양의 튀김과자를 만들어 접시에 담은 뒤 거리에서 평화를 원한다는 뜻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다큐멘터리 《군대?》를 제작하려 했다가 그만두었다. 2010년 11월, 그는 2010년 12월 30일까지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공익근무요원소집 통지서를 받았다. 병무청은 그에게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라는 통지서를 보냈지만 이를 거부해 검찰에 기소됐다. 죄명은 '입영 거부'였다. 그는 전쟁은 폭력이라며 폭력 행위에 가담할 이유가 없다고 병역 거부의 취지를 밝혔다. 한편 2011년 4월 18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검사 차경환)는 공익근무요원 소집 입영통지서를 받고도 이행하지 않은 강의석을 병역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그에게 법정 투쟁을 해보라고 권고했지만, 4월 20일 그는 저항하지 않고 따르겠다고 밝혔다. 병역 거부로 기소된 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계기로 ‘교도소행’을 택하겠다”고 밝혔다. 20일 언론매체와 인터뷰에서 "감옥에 가기로 했다. 다녀오고 난 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나같은 이유로 감옥에 가고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역부족인 것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법원 결정이 나와도 항소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2011년 초에는 곧 있어야 할 곳이라는 이름으로 쇠파이프를 여러개 세워두고 그 안에서 자신이 갇혀 있는 형상의 무언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는 군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거듭 지적했다. 2011년 4월 18일, 검찰은 강의석씨를 병역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2010년 11월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공익근무요원소집 입영통지서를 받고도 이행하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강씨는 대학 입학 이후 줄곧 병역 거부 입장을 밝혀 왔었다.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비인간적인 점, 군대 내에서 병사들의 인권과 처우가 존중되지 않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병역 거부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4월 병역 거부를 선택하고,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도 자퇴서를 제출하였다. 2011년 4월 20일 강의석은 머니투데이에 "당장은 감옥에 들어가야 하고, 나중에는 사업을 할 생각이라 굳이 학교를 계속 다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자진해서 제적을 택했다"고 자퇴이유를 밝혔다. 그는 법원 결정이 나오더라도 항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강씨는 “지금 상황에서 항소는 ‘액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주변에서는 대법원까지 가서 상황을 더 알리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참고 힘을 더 모으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야 앞으로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2011년 6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강의석을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여 법정 구속 수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권기만 판사는 2일 종교수업 반대운동으로 알려진 강의석(25)씨에게 입영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를 인정,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 과정에서 강의석은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이로 인해 재판부는 강의석이 신념에 갈등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신념 형성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이를 실현할 자유는 제한될수 있다'고 판결했다. 강씨는 “군대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며 입대를 거부하다 지난해 6월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2011년 9월 14일 그는 구치소 내 '수용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강씨는 '종이 재질인 간이책상을 플라스틱이나 나무 소재로 바꿔달라', '현행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등의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일주일째 단식을 이어갔다. 투옥 이후 그는 차가운 감옥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였다. 비록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는 변함없다며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시중에서는 범죄자 주제에 무슨 인권이냐는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그는 범죄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받아쳤다. 또, 범죄에 대한 대가는 처벌로서 치루고 있으며,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중인데 다른 사람들이 왈거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형량을 사는 죄인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 주장했다. 9월 14일부터 그의 단식 농성이 계속되자 언론에 보도되었고, 일각에서는 범죄자가 범죄의 대가로 처벌을 받지만 범죄자 역시 인권을 가진 존재라며 동정, 옹호 여론이 나타나가 시작하였다. 이에 9월 20일 서울구치소 측은 개선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언론에서는 강의석의 지인들의 말을 빌려 “강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9월 20일 강의석을 면회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말을 인용해 '강의석이 구치소 내 전반적인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7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오 사무국장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갇혀 있는 이들에겐 절박한 요구일 수 있다"고 전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면담 이후 인권 단체와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추진하는 인권 운동가, 시민단체 회원들의 방문이 계속되었다. 그의 재소자, 범죄자 인권 투쟁과 단식 농성에 대해 시중의 여론은 찬반으로 나뉘었다. 그를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강의석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도 살아갈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조도나 운동은 인권 차원에서 요구할만한 사안이다", "저렇게 해서 수감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인권향상이 되는 것이니 응원한다"라며 그의 단식 투쟁을 지지했다. 반면 또 다른 네티즌들은 "참 가지가지 하네. 강의석은 아무래도 관심병 환자인 듯", "무슨 고시원 입주했나요?", "서울구치소는 전국 교정기관 중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저기서 저렇게 힘들다고 단식하다니 좀 오버하는 것 같다", "옥중에서도 할 거 다 하게 해주면 징벌로서의 의미가 있나 싶네요"라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기도 했다. 2012년 1월 27일 다시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 1월 27일부터 수감자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가 2월 8일 쓰러졌다. 2월 6일 단식중이던 강씨를 면회하고 온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상임활동가는 “표정에 핏기가 거의 없었지만 제 얼굴을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단식 중 강씨의 상태를 전했다. 강씨는 혹한의 독거 수용실에서 물과 소금만으로 버텼다고 밝혔다. 결국 2월 8일 몸이 쇠약해져 쓰러져 링거를 맞았고 2월 9일 단식을 중단하였다. 결국 병원에 입원된 뒤 단식을 중단 했고 서울구치소에서 신설 교도소인 전남 해남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구치소 관계자는 겨울에 기온이 크게 떨어져 수용자 뿐 아니라 교도관들도 괴로웠고, 다른 재소자들은 문제 삼지 않았는데 홀로 제기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구치소 내의 찬공기와 추위, 비위생상태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고 일부 재소자들은 그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2년 8월 14일 오전 가석방돼 출소했다. 그가 출소하자 해남교도소에는 인권 운동가와 반전 운동가들이 직접 그의 마중을 나왔으며,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8월 14일 당일 강의석은 구속노동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앞으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예컨대 감옥 가이드북 출간이나 감옥 면회 운전기사, 수용자 책 지원 사업 등을 해볼 생각"이라고 적은 것으로 전했다. 2005년, 이창환과 함께 kbs1 "tv문화지대"의 "낭독의 발견"이라는 코너에 출연했다. 세계최연소 독일 국회위원 안나뤼어만이 참여한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청소년 참여 포럼'에 참여했다. 2008년 1월 13일 tvN 이색뉴스쇼 'SMASH'의 요원(리포터 겸 기자)으로 발탁됐다. 이후 그는 기자이자 리포터로도 활동하였다. 2009년 말부터 심부름 사이트인 강의석닷컴(강의석.com)을 운영한 바 있으나 폐쇄되었다. 주요 영업 내용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삿짐 나르기와 떡볶이 판매, 그리고 각종 심부름 등이다. 2009년 강의석은 잡리스, 이계덕 등과 함께 영화감독 및 음반제작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으며, 신해철이 진행하던 TVN 이색뉴스쇼 등에서 요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2010년 4월 1일, "친구의 누나에게"의 제목으로 디지털 싱글을 발매하였다. 강의석은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2013년 1월에는 강민경의 면도기 광고를 성인용품 광고로 패러디하였다. 그는 1월 21일 유튜브에 ‘강민경 광고 2편’이라는 제목의 50초짜리 동영상을 게재했다. 이 동영상은 최근 논란이 됐던 강민경의 면도기 CF를 패러디 한 영상이다. 강민경의 영상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니트와 쇼트팬츠 차림을 한 강민경을 남자친구가 소파 위로 밀치는 모습이 연출돼 선정성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방송과 토론 등에 참여하였다. 2013년 4월 고교생 종교의 자유를 소재로 한 영화 <미션스쿨> 제작에 나섰다. 그는 2013년 4월부터 단편 영화 제작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때 허경영을 자신이 촬영하는 영화의 카메오로 섭외하기도 했다. 2004년 7월 자신을 제적한 대광고등학교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이후 대광고등학교에서 인권위의 제안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에 강의석 학생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지만 전반적으로 아쉽다"며 "학교는 너무나 당연하게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오히려 (자신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의 종교 자유 투쟁을 기점으로 종교계열 사립학교의 종교 강요에 대한 통계가 시민단체들에 의해 요구되었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준)이 2005년 5월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해 얻은 자료에 따르면, 종교재단 설립학교 가운데 특정 종교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학교는 중학교의 92%(38개교 중 35개교), 고등학교의 86%(64개교 중 55개교)에 달했다. 한편 강의석의 종교 투쟁을 계기로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종교과목 외에도 다른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복수편성하라는 교육부지침(교육부고시 제1997-15호)'라는 지침을 새로 하달하기도 했다. 종교과목 외에도 다른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복수편성하라는 교육부지침(교육부고시 제1997-15호)을 어긴 학교 역시 중학교 50%, 고등학교 33%에 이르렀다. 연구원은 "종교의식 참여나 종교과목 수강에 대해 학생 동의를 얻는 과정이 요식절차에 불과하거나 이마저도 거치지 않은 학교가 대부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에게 병역 면제의 특혜를 주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군대에 끌려가지만 그들은 국가대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제된다며 이는 또다른 특혜라는 것이다. 2008년 9월 강의석은 ‘대학내일’ 434호 학생논단에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제목의 글에 "메달이 징병면제란 이름으로 선수들의 공적을 위한 하사품이 된다"며 병역특례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국위 선양을 했다고 병역을 면제 해주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박태환에게 함께 군대 반대, 반전 평화 퍼포먼스를 같이 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박태환에게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비무장은 아름답다’는 누드 시위를 함께 해보지 않겠니”라며 양심병역거부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한국 야구가 세계 정상이 되는 과정에서 이승엽이 '병역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대호는 병영면제 혜택이 걸린 준결승이 더 떨렸다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강의석은 또 박태환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도 소중하지만, 나도 딱 너만큼 소중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체육선수들이 국가대표라는 이유로 부당한 특혜를 받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11년 4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생각하면 답답하다.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이유로 감옥에 가고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역부족인 것을 느꼈다” 고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존중하지 않는 점을 한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는 병역을 폭력으로 보고 병역 이행을 거부하기로 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언론사들 인터뷰에서도 그는 같은 소신을 되풀이했다. 2011년 4월 20일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군대 제도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여러 대안도 생각해봤지만 현실적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군대에 안 가면 감옥을 가야 하는 불이익을 매년 1000명이 감수하는 것이 우리 사회”라며 “이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과연 유일한 대안인가에 대해 사회가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 그는 법원 결정이 나오더라도 항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강씨는 “지금 상황에서 항소는 ‘액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주변에서는 대법원까지 가서 상황을 더 알리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참고 힘을 더 모으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야 앞으로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의 자유를 위해서, " 미래에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하게 여겨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쟁을 지속한다고 밝혔다. 그는 2004년 8월 10일 저녁 자신이 운영하는 다음카페 '미션스쿨종교사랑'에 남긴 글에서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맛난 밥을 먹고 싶다"며 "자유를 얻기 전에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그 뒤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겠다"고 쓰기도 했다. 그는 "푸드 뱅크 봉사활동을 하며 음식점에서 경로당에 가져다 드릴 떢복이와 순대를 받았을 때,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시켜 먹는 자장면과 돈까스를 볼 때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하지만 미래에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하게 여겨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식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밥도 안 먹으니 시간이 많이 남아 요즘엔 20시간 정도씩 공부를 하고 있다"며 "저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을 기억해서라도 더 노력할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강의석 씨는 2013년 1월 21일 '강민경 광고 2편'이라는 제목으로 50초짜리 동영상을 올렸다. 이는 최근 질레트 홍보 CF에 자신이 찍은 영상을 이어붙인 영상물로 강민경의 목소리를 합성해 마치 한 방의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는 가수 다비치 강민경이 출연한 모 면도기 회사 광고의 일부 내용을 편집, 복사하고, 자신의 퍼포먼스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과 합성하여 합성 동영상을 만들었다. 강의석은 "오빠가 지켜줄게"라고 말한 뒤 피임기구를 꺼내고 "잘하네"라며 표정연기를 했다. 마치 성행위를 이어가는 듯한 행동과 강민경의 목소리 짜깁기가 이러한 영상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패러디 광고에는 음향 효과 없이 제작되었다. CF는 강민경이 숏팬츠의 하의 실종 패션과 어깨를 드러낸 니트 차림으로 남자친구의 옷을 잡아 당기는 등 선정적인 내용으로 논란이 일었다. 마치 강민경이 면도를 해주고 말끔해진 남자친구를 위해 뽀뽀를 해주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상황이다. 특히 CF에는 강민경의 작은 숨소리조차 세밀하게 담겨 있어 바로 옆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 풍자 광고는 선정성 논란에 휘말렸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패러디의 선정성, 음란성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한국 사회가 성에 대해서 즐길 것은 다 즐기면서 풍자 패러디 하나만을 꼬집는 것은 위선적이라고 지적, 반박하였다. 강의석은 비판 여론에 대해“선정성보다는 여자가 남자 면도해 준다는 가부장적인 컨셉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기껏해야 둘이 뽀뽀하는 건데 이것도 못 봐 준다면 표현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라고 밝혔다. 또 그는 강민경이 직접 면도해주는 설정이 가부장적 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성적인 것을 금기시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2013년 1월에는 한국 사회의 성 금기시 문화를 풍자하고자, 패러디 퍼포먼스를 벌인 뒤 강민경의 필립스 면도기 광고 장면 일부 합성하여 유튜브(Yutube)와 인터넷에 올려서 화제가 되었다. 강의석은 2013년 1월 23일 자신의 동영상사이트 '유튜브'에 올린 패러디 영상에서 자신을 강민경의 상대역으로 편집해 "오빠가 지켜줄게", "잘하네"라고 말하면서 피임기구를 꺼내는 등의 모습을 절묘하게 연출했다. 패러디물을 인터넷에 올린 뒤 그는 자신은 강민경을 모독할 의사는 없다고 주장한 뒤,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근엄한 척, 점잖은 척 하면서 뒤에서는 외도와 술집, 유흥 문화 등이 발전한 것을 지적하며 위선적이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또, 근엄함을 가장하여 성 문화를 쉬쉬하고 있짐나 초등학생들도 알 것 다 안다며 무조건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성교육이나 현실적으로 할 것을 역설했다. 이어 그는 "남녀 단둘이 있으면 할 게 뭐 있나? 선정성보다는 여자가 남자 면도해 준다는 가부장적인 컨셉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기껏해야 둘이 뽀뽀하는 건데 이것도 못 봐 준다면 표현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거 쉬쉬하지 말고 피임교육이나 확실히 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여성이 남성에게 면도를 해 주는 것은 가부장적인 것이 아니냐며 남성은 손과 발이 없느냐 왜 여성이 면도를 해줘야 하느냐고 주장했다. 혼자 면도해야 하는 독신 남성들을 배려하지 않는 점, 네티즌들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으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가부장제를 연상시키는, 혹은 가부장제 비슷한 환상, 낭만을 품게 하는 것이나 바로잡으라고 반박을 가했다. 그는 영상 뿐 아니라 "남녀 단둘이 있으면 할 게 뭐 있나. 선정성보다는 여자가 남자 면도해 준다는 가부장적인 콘셉트가 더 문제인 것 같은데. 기껏해야 둘이 뽀뽀하는 건데 이것도 못 봐 준다면 표현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초딩들도 다 아는 거 쉬쉬하지 말고 피임교육이나 확실히 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게재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거듭 강민경을 모욕할 의사는 없으며, 성 문화를 금기시하면서도 은밀히 즐기는 한국 사회의 위선과 이중잣대를 지적했다. 강의석의 면도기 광고 패러디물은 성행위를 연상케하는 내용이 포함돼 온라인에서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대해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강민경을 모욕하거나 성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든 광고가 아니다"라며 "강민경의 면도기 광고가 선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 사회가 성에 대해에서 너무 억누르고 금기시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해당 광고를 제작하게 됐다"고 패러디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변희재는 이를 언론 플레이라며 질타했다. "실력 없이 언론플레이로 뜨게 되면 이렇게 귀결된다는 좋은 사례가 될 겁니다"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감옥 재소자들 역시 하나의 사람이며, 비록 죄인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인간답게 형벌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차가운 감옥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였다. 비록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는 변함없다며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2011년 9월 14일 그는 구치소 내 '수용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 수감 중 그는 '종이 재질인 간이책상을 플라스틱이나 나무 소재로 바꿔달라', '현행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등의 수용자 처우 개선 을 요구하며 단식하였다. 서울구치소 측에서 조치가 없자 그는 일주일간 단식 농성을 진행하였다. 9월 19일 강씨를 면회한 지인에 따르면, 그는 9월 14일부터 처우를 개선해 달라며 단식하였다. 강씨의 요구사항은 ‘간이책상을 플라스틱 또는 나무재질로 바꿔줄 것’ ‘생활거실 조명을 밝게 해줄 것’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변경해줄 것’ 등이었다. 당시 구치소 측은 강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논의해보겠다는 답변을 지인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측에서 조치가 없자 그는 계속 단식을 진행하였다. 당시 강씨를 면회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처장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절박할 수 있다”며 “구치소 측에서도 개선방안을 논의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9월 20일 한 매체는 강의석의 지인들의 말을 빌려 “강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9월 21일 그의 1차 단식 농성 진행 직후 각 교도소와 경찰서의 유치장의 시설에 대한 점검, 정비 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012년 1월 27일 그는 다시 재소자의 인권 문제를 지적했다. 1월 27일부터 그는 옥중 단식에 돌입했으나 단식농성 13일만인 2월 8일 저녁 쓰러졌다. 강씨는 단식 13일째인 8일 몸이 쇠약해져 쓰러져 링거를 맞았고 현재는 단식을 중단하였다. 교정당국은 강씨를 신설 교도소인 전남 해남교도소로 이송하였다. 한편 인권연대는 2월 9일 강씨가 수감자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달 27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가 어제 저녁 쓰러졌으며 현재 회복중이라고 밝혔다. 그의 2차 옥중 단식 농성 이후 인권연대 외에도 여러 인권 운동가들과 외신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하여 그를 면담하고 돌아갔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수감자 처우 문제는 △웃바람 등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수용실 안 추위 △잠을 방해하는 조명 △책상과 의자 지급 요구 등이다. 강씨는 이광열 활동가를 만나 “온도계로 실내 온도를 재봤더니 아주 추울 때는 8℃, 평상시에는 10℃ 정도”라며 “재소자 불만에 구치소가 한개에 1400원 하는 핫팩을 판매하고 있지만 한달에 왠만한 가정집 가스비에 맞먹는 4만 2천원이 들어간다”였다. 또 그는 보안을 이유로 밤에 켜놓는 불의 밝기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법무시설기준규칙’은 조도 규정을 취침전 300럭스(LUX) 이상, 취침 뒤 60럭스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구치소 현실에 대해 강씨는 “밤에는 형광등 램프 두 개 가운데 하나를 꺼주는 게 고작”이라며 “잠을 이룰 수 없어 까맣게 칠한 종이로 전등을 가린 적도 있지만 규율 위반이라며 징벌조사방에 끌려갔다”고 말했다. 그는 구치소에서 필요 이상으로 재소자 물품에 관여하고, 구치소가 차갑고, 거친 환경, 그리고 밝지도 못한 조명 등 재소자의 생활을 배려하고 있지 않음을 역설했다. 시중에서는 재소자에게 무슨 인권이냐는 비아냥이 있었지만, 그는 재소자도 재소자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인간이라고 맞섰다. 그는 또 책상, 의자 지급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하루 종일 갖혀 주로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는 강씨는 책상과 의자 없이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허리 통증이 왔지만 이에 대해 구치소의 의사는 엉뚱하게도 “살을 빼라”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2차 농성 당시, 그는 재소자의 수감 생활을 불편하게 해놓고 그것 때문에 병을 얻게 되었는데도 살을 빼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라며 그는 저항을 선언했다. 구치소는 안전을 이유로 종이 박스로 짠 상만 지급하고 있다. 그는 교도관들이 제소자들에 대한 처우와 폭언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2013년 10월 1일(국군의날 기자회견을 열고 세종대왕과 광개토왕을 침략자라고 비판했다. 이어 강의석은 "자신의 국경을 확정지으려 전쟁을 벌인 세종대왕인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우리를 반성할 수 있는 날이 국군의 날이 돼야한다고 생각한다"며 비판의 이유를 밝혔다. 2004년 그가 학내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시위할 때 '강의석군 징계 철회와 학내 종교자유를 위한 연대회의'(아래 연대회의)가 구성되어 그를 도왔다. 2004년 7월 국가인권위의 복학 권고 조치 이후, 7월 30일 성명을 통해 강의석 학생이 제기한 내용을 학교측이 어느 정도 수용한 합의안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강의석 학생의 복학 조치나 근본적 해결책에 관한 명확한 약속이 담기지 않은 점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연대회의는 "합의서에는 강의석 학생과 학부모에게 진술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던 부당한 제적 조치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며 "학교측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교육권까지 박탈한 강의석 학생에 대한 사과와 복학 조치에 대해 합의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대회의는 강의석의 복학과 졸업 때까지 그를 지지하며 지원하고, 반대 의견에 대한 변론과 보호 등의 조치를 취해주었다. 이어 연대회의는 △대광고측이 강의석 학생에 대한 복학 조치를 취할 것 △개별 진정사건 처리가 아니라 인권위가 입법·제도·정책적 개선책을 제시하는 정책 권고를 내놓을 것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이 종교계 사립학교에 대해 철저하게 감독하고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연대회의의 꾸준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강의석은 대광고등학교에 복학했고,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의 수시전형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또한 2004년 9월 20일 그의 가출을 전후해서 한편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등 20여가 단체가 참여한 ‘학교종교 자유를 위한 시민연합’은 20일 발족식을 갖고 ▲모든 종교계 학교는 특정 종교 교육을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하지 말것 ▲대광고는 강의석 군의 제적을 취소하고, 강군이 요구하는 ‘예배 선택권’을 수용할 것 ▲강의석 군은 즉시 단식을 풀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에 임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2004년 제1차 단식 농성은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 시민사회단체의 지지 외에도 국회에까지 상정되어 국회의원 34명의 지지를 얻어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최순영은 사립학교의 종교 강요 실태를 조사하여 국회와 언론에 공개했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2004년 9월 14일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전국 사립고교 종교교육, 종교활동 현황’을 분석한 결과 특정 종교를 건학정신으로 설립한 사립고교는 모두 2백36개교였으며, 이 가운데 13%인 30개교가 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종교활동을 강요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최 의원실에 따르면 전국의 2백36개 종교재단 고교 가운데 1백14개교는 선택중심교육과정에서 종교과목을 선택해 가르치고 있었으며, 서울 강원 전북 경북 전남 등 5개 시·도 26개교는 교육인적자원부의 방침을 어기고 종교 이외의 과목을 복수로 편성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 학교들은 또, 67%인 1백57개교가 학교나 학년단위로 예배 미사 법회 등의 종교활동을 실시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 13%인 30개교는 학생들을 강제로 참가시켜 종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종교 수련회는 2백36개교 가운데 67개교가 실시하고 있었고, 대부분인 65개교는 자율참가를 하고 있었으나 서울 소재 2개교는 학생들을 강제 참가시키고 있었다. 종교재단 고교를 종교별로 분류해 보면 2백36개교 가운데 전체의 68.6%인 1백62개교가 기독교였고, 가톨릭은 38개교(16.1%), 불교 12개교(5.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8개교(3.4%), 통일교 3개교(1.3%) 등이었다. 교육부의 방침을 어기고 종교 이외의 과목을 복수로 편성하지 않은 학교는 기독교 학교가 21개교로 가장 많았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3개교, 통일교 1개교, 기타 1개교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 의원실은 “이같은 결과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대해 집단적으로 ‘종교활동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침해한다’고 강력 반발하고 있는 종교재단 학교들이 정작 자신의 학교에서는 ‘종교활동의 자유’를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라며 “교육부와 각 교육청 또한 극히 형식적으로 장학지도를 하거나 제대로 된 지도감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사립 학교의 종교 강요 실태가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침해 문제가 화두가 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최순영 국회의원의 실태 발표와 같은 무렵 강의석 역시 자신의 카페 회원들을 통해 학생,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벌였다. 9월 14일 오후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대광고 3학년 12개반 3백69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예배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학생의 예배선택권과 관련해 응답자의 48.5%는 ‘학생에게 선택권을 주어 완전히 자율적으로 참석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또, 34.7%는 ‘의무적으로 참석하되 강요적인 요소는 배제했으면 좋겠다’는 절충안에 동의했다. 반면 ‘지금처럼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은 6.5%에 불과했다. 강의석과 카페 회원들의 설문에 따르면 학급예배에 대해서는 ‘계속하되 강요적인 요소는 배제했으면 한다’는 응답이 45.8%로 가장 많았고, ‘폐지하자’는 의견은 26.6%였다. 현행 유지를 원한 응답자는 15.4%였다. 종교과목과 관련해서는 ‘단독개설’(35.5%)이 ‘복수개설’(25.5%)보다 많았으나 응답자의 39%가 무응답층을 형성해 학생들이 아직까지 개인 입장 정립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결국 9월 23일 서울시교육청이 학생들에게 종교 자유를 신장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화답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 어린 학생의 외로운 투쟁이 마침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종교자유 신장 신경쓰겠다"고 밝혔다. '강의석 사태'에 침묵해온 서울시교육청은 22일 마침내 "종교학교가 내년부터 연간 교육 계획을 제출할 때 정규 과목 이외 종교 활동 계획을 첨부하되 학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대체 활동 방안을 명시하도록 지침을 내릴 방침"이라고 밝혔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그 동안 교과 활동 이외의 종교 활동에 대해서 교육 계획서에 명시하라고 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앞으로는 반드시 명시토록 하고 장학 지도를 통해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지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4년 9월 16일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그를 정신과 병원으로 입원시키려는 시도가 있자 그는 그 길로 가출하였다. 대광고등학교 교목 류상태 목사와 그의 부모가 그를 찾아다녔다. 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에 따르면 "강군은 16일 새벽 6시경 집을 나간 뒤 학교에 오지 않고 연락도 두절된 상태"라며 "지금 강군의 부모님과 함께 친구집 등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류상태 목사는 "강군의 단식이 40일 가까이 진행되면서 주위에서는 강제로라도 입원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며 "이를 전해들은 강군이 강제로 자기 의지가 꺾이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행적을 감춘 것 같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오랜 단식으로 혈압이 급격히 낮아지는 등 건강이 극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보다 못한 부모님이 의료진을 불러 치료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부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16일 새벽 5시까지 치료 문제로 의석이와 실갱이를 벌였다"며 "새벽 6시쯤 핸드폰도 방에 놓고 나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9월 19일 당시 가출인 신고만 된 상태로 경찰은 가출인 신고 전산망인 '182'에 강 군의 신원을 등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사 3개팀 18명을 동원, 강군의 행방을 수색하였다. 서울 청량리경찰서 관계자는 19일 "단순 가출인이지만 강군이 단식을 오래한 특 수 상황인 만큼 형사들을 투입했다"며 "이를 서울경찰청에도 보고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청량리서 형사 6명이 18일 그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정동진과 상원사 등을 직접 방문해 강군의 행방을 찾았으나 강군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제적 통보를 받은 6월 하순에도 강원도 상원사 등에서 사흘간 머문 적이 있다. 경찰은 또 강군이 주도하는 종교자유 모임 '로이'의 구성원들과도 접촉하고 강 군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통해 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확인하지 못했다. 9월 21일, 단식 37일째인 지난 16일부터 닷새째 행방이 묘연해 경찰이 강군 찾기에 나섰다. 그의 부모는 9월 17일 서울 청량리경찰서에 가출신고를 했고, 경찰은 가출인 신고 전산망인 ‘182’에 강군의 신원을 등록한 뒤 형사 3개팀 18명을 동원, 강군의 행방을 찾았다. 서울 청량리경찰서 관계자는 20일 “강군은 단순 가출인이고 학교측과 종교자유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만큼 경찰이 개입할 부분이 별로 없다”며 “다만 강군이 단식을 오래한 특수 상황인 만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형사들을 투입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강군이 지난 6월 말 학교에서 제적당한 직후 찾아갔던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과 상원사 등에 지난 18일 형사 6명을 보냈으나 강군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강군의 학교와 인터넷 카페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그가 집에 두고 나간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추적하였다. 경찰 관계자는 “추석 연휴 특별 경계강화 등으로 인력을 계속 배치할 수 없어 2개팀은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9월 20일 전국 수배 끝에 경남 고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고성경찰서 직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경남 고성경찰서는 가출인으로 수배된 강군을 오늘 오후 고성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발견해 경찰서로 데려갔다. 이어 곧 서울 청량리서를 거쳐 집으로 인계되었다. 그의 운동권 활동에 대해 언론인 변희재는 친노종북의 아이돌이라며 비판하였다. 2013년 1월 언론인 변희재는 그의 활동을 지적하며, “친노종북의 아이돌 스타였던 강의석. 다비치 강민경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패러디물을 유투브에 올렸군요”라며 “실력 없이 언론플레이로 뜨게 되면 이렇게 귀결된다는 좋은 사례가 될 겁니다”고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 《88만 원 세대》의 공저자 중 한명인 박권일은 강의석에 대해 ‘영악한 처세가’와 ‘포스트모던한 주체’라는 두 가지 주체로서 비판했다. ‘영악한 처세가’로서의 강의석은 고등학교 때의 학생 운동경력을 훈장 삼아 대학에 진학하고, 비주류적 방식으로 또래와의 경쟁우위에 서려는 어린 권력자적 모습을 심심찮게 보였으며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만찮은 언론플레이 능력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포스트모던한 주체’에서의 강의석은 ‘세계평화’을 고민하다가 ‘개인의 행복’을 찾게 되었다는 중간 단계가 소거된 포스트모던적 행태를 보인다며 그의 행보는 정치사회적 공간이라는 고리가 잃어버린 행보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편 사회와 조직의 이름으로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해도 되느냐는 의견들도 나타났다. 2008년 9월 30일과 10월 1일의 서울 테헤란로 군대 반대 퍼포먼스 당시 그는 손수 제작한 쿠키를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평화는 맛있다" 라는 주제로 사진을 촬영하여 게시하였다. 그는 밀가루로 권총 모양, 소총 모양, 전차, 장갑차, 탱크 모양으로 얇게 쿠키를 만든 뒤, 튀김으로 만들어서 쟁반에 담은채로 시위 직전에 사전에 준비해왔다. 그는 또, M16 소총 모양의 빵을 직접 제작, 10월 1일 퍼포먼스 직전에 소지하고 숨어 있었다. 그의 재소자 인권 문제 제기는 논란을 불러왔다. 2012년 2월 그를 다시 면담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21세기에 춥다는 이유로 단식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교도소에 수용자를 집어 넣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 뒤에 어떻게 교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낮은 사회적 관심이 이런 문제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또 편지 검열에 대해 “외부의 사람과 추가적인 범행 모의나 증거인멸 등을 막는다는 취지인데 단순히 단식중이라는 사실 전달을 막는 데 활용하는 것은 과도한 검열”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의 해남교도소 이송에 대해 이광열 활동가는 “비록 강씨가 이송을 원해왔지만 겨우 단식을 끝냈는데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바로 이송을 한다니 납득할 수 없다”며 “서울에 있는 부모님 면회 등에서 큰 불이익으로 작용해 보복성 조처인지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서울구치소 쪽은 이송 요청에 따라 절차대로 진행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의 재소자 인권 선언 이후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견해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한 네티즌이 지난 2008년 9월 20일에 “서해교전에서 전사하신 분들도 개죽음 당한 것이냐”며 강의석을 비판하자 강의석은 “응 개죽음 당한 거야”라고 댓글을 달았으며, 또한 강의석은 ‘서해교전 전사자들은 개죽음을 당했는가’ 제목으로 “그들의 행위는 애국이 아니다. 그들은 아무 보람 없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죽음을 사전적 의미로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개죽음’이라고 묘사하여 파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강의석의 미니홈피는 일시적으로 폐쇄되었고 유가족들이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강의석은 이에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2013년 1월 22일 대한민국의 그룹 다비치 소속 연예인 강민경(다비치)의 질레트 면도기 동영상 광고를 편집하여 성관계시 콘돔을 쓰자는 취지의 광고를 유튜브에 올려 물의를 일으켰다. 이 동영상에서 강의석은 CF 속 강민경을 상대로 "민경아 오빠가 지켜줄게"라며 피임기구를 꺼내고 "잘 하네“라는 말 등으로 성행위를 연상케했다. 강의석의 게시물을 접한 누리꾼들은 “강민경을 성희롱한 것이다”고 비난했다. 이에 언론인 변희재는 "친노종북의 아이돌 스타였던 강의석. 다비치 강민경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패러디물을 유튜브에 올렸군요"라며 "실력 없이 언론플레이로 뜨게 되면 이렇게 귀결된다는 좋은 사례가 될 겁니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강의석은 본인이 만든 패러디 영상이 논란이 되자 “아니 남녀 단둘이 있으면 할 게 뭐 있나? 선정성보다는 여자가 남자 면도해 준다는 가부장적인 콘셉트가 더 문제인 것 같은데. 기껏해야 둘이 뽀뽀하는 건데 이것도 못 봐 준다면 표현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초딩들도 다 아는 거 쉬쉬하지 말고 피임교육이나 확실히 했으면 좋겠다”고 밝힌 바 있다. 강의석은 영화를 촬영하는 데 허경영을 동업자로 삼았다. 강의석이 촬영하는 영화에 허경영이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군 반대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청년들에 의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과 그의 병역 거부를 양심의 자유를 지키려는 행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강의석의 해프닝은 분단 현실 앞에서 벌린 몰지각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행한 예단인지 모르겠으나, 과거 전방입소를 거부하며 분신자살을 했던 청년들이 있었고, 손가락을 잘라 군 입대를 거부했던 청년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군인 교도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입장에서 자신의 청춘을 썩히고 있는 청년들은 년간 600여명이나 있듯이,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이다.'라는 시각이 있다. 또한 '바로 강의석의 행위를 양심의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시각도 있다. 또한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04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강씨는 “학교가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도 종교를 강요하고 있다”며 ‘헌법 20조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예외다?’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이 시위로 강씨는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했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던 주제인 미션 스쿨 학생의 종교자유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일으켰던 사례로 기록된다. 그는 영문명 의석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We Suck으로 번역하였다. 대광고와 서울시를 상대로 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2010년 10월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손해배상금으로 받은 2500여만원은 모두 시민단체인 인권연대에 기부했고, 이 단체는 강씨의 기부금으로 ‘종교자유 인권상’을 제정했다. 2010년 4월 1일에는 노래 '친구의 누나에게'라는 1집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바티칸 시국의 국가 교황 행진곡은 1869년 4월 11일 교황 비오 9세의 성직 서품 25년제를 축하하여 샤를 구노(1818-1893)가 작곡한 기악곡의 이름이다. 1950년 대희년을 시작하면서(1949년 12월 24일), 이 곡은 이전의 교황 찬가를 대신하였으며, 이후 교황 찬가(Inno Pontificale)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 곡은 또한 이탈리아어로 교황 찬가 겸 행진곡(Inno e Marcia Pontificale, 인노 에 마르키아 폰티피칼레)으로 불리게 된다. 바티칸 시국의 웹사이트에서 “교황 축가 이야기”에 들어가보면, 작곡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위 사이트에서는 이 곡이 바티칸 시국의 국가가 아니라 교황을 찬양하는 음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성좌 웹사이트의 Inno Pontificio e la sua storia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곡의 가사는 서로 다른 작사가들에 의해 여러 가지 언어로 작사되어 있다. 두 종류의 가사 본문은 성좌 웹사이트의 Inno Pontificio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9년, 성 베드로 대성전의 오르간 연주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몬시뇰 안토니오 알레그라(1905-1969)는 이 곡에다가 아래와 같은 가사를 덧붙였다: 1991년, 사보나의 몬시뇰 라파엘로 라바냐(1918년생)는 4부 합창 성가대를 위해 알베리코 비탈리니가 편곡한 노래에 라틴어 가사를 덧붙였다: 이회창 이회창(李會昌, 1935년 6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대법관 출신 정치인이다.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고, 부친과 선대의 고향인 원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1960년 서울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임용되어 1993년 대한민국 대법원 대법관으로 퇴직하였다. 법관 초기 조용수 오판 사건의 판사 가운데 한명으로 참여하였으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권의 요청을 거절하는 등 기피인물로 선정되어 1986년 4월 대법관직에서 퇴임당하였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복귀하였으나 노태우 정부의 선거 개입과 부정선거를 질타하고 법관직을 사퇴하였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3년 12월 16일까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12월 17일부터 1994년 4월 21일까지 제2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2번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2007년 11월 7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 후보로 제17대 대선에 출마하였다. 2008년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당 총재와 대표를 역임하였다. 호는 경사(徑史)이다. 1935년(쇼와 10년) 법관 집안 출신으로 검사 출신인 이홍규(李弘圭) 옹과 김사순(金四純) 여사 사이에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그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의 넷째 동생인 고려 말 위위시주부동정(尉衛侍主簿同正)을 지낸 이영습(李英襲)의 23대손이었다. 일설에는 왕족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때 돌았으나 이영습은 이성계의 종고조부로 이회창은 왕실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이영습은 고려 대장군 이양무의 넷째 아들이자, 이준의·이의방 형제의 종손(從孫)이었다. 그러나 이영습의 후손들은 왕실의 직계가 아니었으므로,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주부공 이영습의 증손자인 이세분(李世芬)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냈다. 주부공의 6대손이자 이회창의 17대조인 우계당(牛溪堂) 소생(紹生)은 단종 때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예산군 대흥면 우정촌(현 교촌리)에 은거했다. 이것이 이회창의 가문이 예산에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이후 몰락했지만, 그의 집안은 구한 말에 다시 부호가 되었으며, 예산의 금오산 일대 중 대부분이 그의 집안 재산이었다. 이회창의 할아버지 이용균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름있는 저명한 한학자였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仲父, 중부) 이태규는 한국 최초의 화학 분야 전공 이학박사이다. 이태규는 이회창의 둘째 숙부로 1992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아버지 이홍규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강점기 후반 검찰서기로 임용,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8·15 광복 이후 검사로 임용되어 법관으로 근무했다. 이회창은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고, 부친 이홍규와 선대의 고향인 원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아버지 이홍규는 해방 직후 검사로 활동했는데, 퇴직 이후에는 공증인과 변호사로 활동했다. 어머니 김사순의 여동생인 김삼순은 저명한 학자였고, 외삼촌인 김홍용(金洪鏞), 김문용(金汶鏞)은 2대 국회의원, 김성용(金星鏞)은 제6대, 제7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친의 발령지에 따라 이주하여 서너살땐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살았다. 유년기의 이회창은 말수 적고 얌전한 아이였었다. 유년기에 그의 부모는 외가가 있는 광주로 이주하여 광주광역시에 있는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 '중학입학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졸업 후 광주시 광주서중학교에 합격하였으나 법관이었던 아버지 이홍규가 청주시로 발령되어 충청북도 청주중학교로 전학갔다. 그 뒤 다시 경기중학교로 전학갔다. 17세때는 아버지가 모함으로 구속되자 소년가장이 돼 가족을 부양하면서 주린 배를 찬물로 채웠다 한다. 6·25전쟁 직전 경기중 4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였던 아버지 이홍규가 '남로당원을 무혐의로 풀어 줬다'는 이유로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직접 목격한 뒤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의 도움으로 곧 풀려났다. 이런 연유로 아버지 이홍규는 장면의 인도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교하였고, 그의 집안은 가톨릭 가정이 되었다. 아버지 이홍규는 한 자유당 간부의 청탁을 거절한 일로 이 자유당 간부로부터 좌경, 용공으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으나, 장면의 후원으로 아버지 이홍규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홍규가 내사를 당하는 동안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되다시피 했고, 청소년기의 이회창은 방황하였다. 경기중학교 졸업 후 이회창은 경기고등학교로 입학했다. 중고교 시절의 이회창은 주로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그 뒤 아버지 이홍규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복귀했다. 1956년 당시 부통령 장면이 시공관에서 피격되자 적극적으로 수사하여 배후를 찾아낸다. 이홍규는 9·28 사태 수사에 공을 세워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파헤쳐 척결검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여 올라프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 내내 상위권 성적이었으며, 졸업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57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학구파였던 그는 학창시절 내내 학업에 정진하였고, 동시에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서울대학교 법대 재학 중인 195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곧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1957년 6월 공군 장교로 임관, 공군본부 법무감사관실 법무관을 지내고 1960년 공군 예비역 대위로 예편하였으며, 제대 후 법관으로 임용되었다. 1960년 초, 이회창은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당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1심의 재판부에 배석판사로 참여했다. 법관 시절 개인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쓴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실력이 있으며 자세도 바르어서 소장 법관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는 평가도 있다.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 선배 판사의 소개로 한인옥과 결혼하였다. 한인옥의 아버지 한성수는 법조계의 거물로 1960년대 대법관을 지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한다. 그는 10월 유신에 적극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10월 유신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당시 판사와 대법관들은 10월 유신의 찬성과 반대를 놓고 둘로 나뉘어 있었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법관시절 군사정권하에서는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에서 정부측 압력과는 상반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1965∼70년 서울고등법원 판사, 1971∼73년 사법연수원 교수, 1973∼75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81년 서울고등법원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기피인물로 낙인찍혔으나,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때 그는 판사로 임용된 노무현을 만났는데, 둘은 뒷날 대통령 선거에서 라이벌로 맞붙는 악연이 되기도 한다. 1980년에는 법원행정처 조사국 국장과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다. 1981년 최연소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사법적극주의나 법관에 의한 법형성의 강조, 정권의 입맛과 배치되는 소수의견으로 유명하였으며 법관 재직 중 권부와 타협하지 않아 '대쪽판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대한변호사협회의 학술지인 《인권과 정의》에서 특집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각 분야별 판례 20선"를 선정했을 때, '주요 대법원 판례 민법총칙 분야 20선'에 그가 대법원에 재직하면서 참여한 판례가 포함되었다. 다음은 주요 대법원 판례 민법총칙 분야 20선에 선정된 판례 중 일부이다. 주류 법관치고는 소수의견도 자주 냈고, 군사정권의 사사로운 청탁을 거절하여 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관 재직 중 사사로운 청탁이나 뇌물을 거절하였고, 유흥업소에 한차례도 출입하지 않아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그를 함부로 해임할 수 없었고, 동료법관들로부터 신망을 얻기도 했다. 1986년에는 불온 유인물 소지로 신고된 사람에 대해 영장없이 압수수색하고 불법구금한 진주경찰서 정보계장 김태진(64) 등 경찰관 3명에 대한 고발사건에서 재정신청 항고심 사건 주심을 맡아 "적법절차를 따르지 않고 구금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이며 영장없이 6일간 구금한 것은 직권남용"이라며 사건을 대구고등법원으로 다시 보냈으나, 대구고법에서의 환송사건과 대법원에서의 재항고심 과정에서 자신의 판단과 다르게 기각된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의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연임이 안 된 채 1986년 4월 대법관직에서 퇴임하였다. 그 뒤 제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1988년 7월 복직, 대법원 대법관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같은 달인 7월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 선관위원장을 겸임하였다. 임명된 그는 당시 동해시와 영등포 재선거에서 당선자 대부분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여 당시 만연된 불법 선거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 1989년 민정, 평민, 민주, 공화 4당의 입후보자 전원을 불법 선거혐의로 고발했다. 갖가지 부정선거 사실을 고발, 재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 등 민자당 내 서한을 공개적으로 문제시하였으며, 또한 김영삼 민주당 총재에게 서면으로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이회창은 노태우 대통령의 서한이 당시 여권 내에서 크게 문제가 되자, 1년 4개월만인 1989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경고서한을 보내고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편 노태우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민주정의당으로 영입하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 뒤 그는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적표현물의 소지·제작·배포행위를 처벌토록 한 국가보안법 제7조5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1990년 4월 한정 합헌결정을 내린 이후 판례 변경방향을 검토해온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주심을 맡은 이회창은 1989년 3월말 자유경제체제의 붕괴와 임금제도의 최종적 폐지를 주장하는 내용의 「임금과 기초이론」이라는 책을 구입,탐독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주)현대정공 노조 홍보부장 김상명피고인(31)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이 책은 대한민국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내용으로 표현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며 10대3의 다수 의견으로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지만 『국가보안법의 적용범위는 「반국가단체에 동조하는 모든 행위」에서 「객관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목적이 있었는지 여부」로 한정해야 한다』며 목적범의 범위를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내용」으로 규정하여 "학문탐구나 이익추구,호기심 등만의 이유로 이적표현물을 소지·배포했을 경우 처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측면에서 피고인에 대해서『김 피고인은 순수한 학문탐구나 영리추구 등의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증명도 없이 이적행위를 하려는 것으로 추정할수 밖에 없다』고 원심 확정이유를 밝혔는데 이때 이회창 등 3명은 『이적행위 목적여부는 검사가 입증해야하며 다른 증명이 없다고 이적행위를 하려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했다. 1992년 3월에는 노동조합 간부에 대해 제기된 국가보안법 7조5항(이적표현물 제작·소지·배포 위반 상고심에서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수도 있다는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다수의견과 달리 “이같은 판단기준은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하여 어느 정도의 표현이 법에 의하여 규제되고 처벌대상이 되는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며 “불법성의 판단기준이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한다”고 하면서 “피의자의 고의성만을 판단해 처벌하게 되면 헌법상 보장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유해한 사상과 이념이라 할지라도 가급적 자유경쟁의 시장에서 비판되고 도태되는 과정을 거치게 해야 한다. 이적행위의 요건이 전혀 특정되지 않아 구성요건적 행위의 정형성이 결여됨으로써 죄형의 명확성을 요구하는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 북한의 선전내용을 찬양·고무하는 행위라도 대한민국의 존립을 파괴할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이 있는 행위라고 보기 어려울 때는 불법성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며 법 운용 상의 위헌요소와 인권침해 가능성을 지적하며 법 적용범위를 엄격히 할 것을 주장하는 소수의견을 냈다. 이는 1995년 사회민주주의청년연맹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최형록이나 전국연합 상임의장 이창복 사건 등에 있어 소장판사들이 일부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리는 근거가 되어 사법부 내에서 국가보안법 위헌논쟁을 불러왔다. 하지만 정계 입문하고 나서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밝힌 국가보안법 개정방침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1993년 2월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 직후 영입 제의가 들어왔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1993년 3월 김영삼 정권(문민정부)에서 감사원장에 임명되었다. 김영삼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법원장을 바라보던 당시 이회창이 사임한 것을 놓고 일각에서는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했다. 감사원장 취임 초 이회창은 감사원장 공관 입주를 거부했으며, 권위혁파와 권위주의적인 이미지 개선에 치중하였다. 한편‘성역’으로 일컬어지던 청와대 비서실이나 국방부의 율곡 사업, 평화의 댐에 대한 감사를 강행하며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등에 대한 서면조사를 하였다. 이어 율곡사업 비리에 대한 감사로 전직 국방부장관 2명을 포함, 전직 해.공군참모총장, 전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6명을 수뢰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감사원장 재직 중 성역을 허물기도 했다. 감사원장 재직 중 그 동안 관행으로 금기시되어 왔던 청와대·안기부 등에 대한 감사와 '평화의 댐'·율곡사업 비리 감사 등 엄정한 직무수행과 선관위원장과 감사원장 당시 강직함이 회자되어 속칭 '대쪽'이라는 그의 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보통 대통령의 측근이나 정권의 실세가 아닌 임명직 총리의 경우 정권의 얼굴마담이나 방탄조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회창은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강한 총리로 직무를 수행하려 하였다. '법치'를 내세우던 그는 국무총리 재직 중 당시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2인자였던 내무부 장관 최형우(좌동영-우형우로 불리던 김영삼의 최측근이자 상도동계의 좌장)를 면전에서 거침없이 호통쳐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헌법에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노력하였다가 김영삼 대통령과 수시로 충돌, 이회창을 부담스러워한 김영삼 대통령은 그를 사임 형식으로 해임하려 했다. 해임이 예상되자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국무총리 취임 127일만인 1994년 4월 사표를 냈다. 이러한 행동들로 ‘대쪽’이라는 별명을 국민들에게 다시 각인시켰며 당시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 사건을 두고 박원순 변호사는 "이 전 총리의 청빈하고 엄정한 이미지가 행정부를 개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며 "이 전 총리의 사퇴는 현 정부가 행정의 법치주의를 포기했다는 반증"이라고 비판했으며 문재인 변호사는 "김 대통령의 인사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이 총리가 물러난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며 "그동안 이 총리가 법치주의에 근거한 합리적 행정 구현에 노력해왔음에 비추어 볼 때 총리로서 자신의 직무상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려는 것이 사임의 배경이 된 데에 대해 현 정부를 강력히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뒤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하여 활동하다가 1996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을 신한국당에 영입했고, 1997년 3월에는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했다. 이후 이회창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한나라당내 민주계가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원인이 됐다. 이후 신한국당내 경선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은, 야당인 국민회의가 폭로한 병역공방으로 지지율이 폭락하자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곳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9월 30일에는 신한국당 신임 총재로 이회창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악화된 국내 경제상황과 흉흉한 민심, 기아자동차 부도사태 등으로 신한국당의 지지도는 최악으로 치닫고 여당인 이회창의 지지율도 경쟁자인 김대중에게 크게 뒤지게 된다. 게다가 이인제가 경선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독자출마를 강행하면서 신한국당은 어려운 국면을 타개할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김대중후보의 670억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다.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신앙고백을 하면서까지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 이외에는 받은 돈은 없다며 국민을 기만했으나 이 모든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며 김대중 후보를 공격했다. 야당인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신앙 간증까지 하면서 20억원 이상은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고, 20억원 이상 받은 사실이 없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광주 현지여론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사실로 드러나면 큰일이다"라며 충격에 휩싸였고 다음날인 신한국당은 이것이 20+α 물증이고, 김대중 총재가 20억 +α외 6억3천만 원은 받은 적 없다며 우겨대자 신한국당은 20억+A의 입출금 계좌와 수표의 일련번호를 공개했다. 다음 날에는 김대중후보가 야당총재직을 이용해 134억 7천만원을 챙긴 사실까지 폭로하여 정국은 큰 혼란에 빠진다. 김대중 비자금 공방은 10월 14일 김대중 친인척 명의의 378억 비자금 폭로로 극한 대치로 치달았다. 당시 김대중 비자금 폭로의 최선봉장이었던 강삼재 의원은,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되더라도 대통령 자격 없고 당선 되더라도 걸어내려와야 될 것" 이라며 공격했고 김대중 지지자들은 강삼재씨 집에 24시간 넘게 살해협박까지 하며 신한국당사를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전화까지 걸려왔다. 10월 17일에 열린 한국일보 초청 토론회에서는 김대중후보와 이회창후보의 비자금 공방이 오고갔다. 이회창은 "야당총재(김대중)한테 뭐하러 기업들이 뼈빠지게 돈을 갖다주겠습니까?, 아무 조건 없고 받을 특혜가 없다면 뭐하러 돈을 갖다주겠습니까"라고 비난했는데 김대중은 "조건있는 돈은 받은 일이 없고 받은 돈은 모두 공적으로 썼고 은닉한 재산 없다"며 비자금 의혹을 전면 부인한다.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씨가 당선되더라도 도덕적인 힘이 나올수 있겠습니까"라며 김대중 후보를 비난했다. 결국 10월 20일, 김대중후보의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었으나 다음날이던 10월 21일, 검찰은 김대중의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한다. 당시 김대중의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배경에는 악화된 경제상황 및 흉흉한 민심과 기업체들의 부도사태등등 검찰 내부에서 비자금 수사를 개시한다면 호남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인 저항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제2의 광주사태를 우려하여 수사를 중지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당시 검찰총장인 김태정 검찰총장의 고향이 호남출신인 것도 수사를 중지시킨 변수가 됐다. 검찰이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중지하자 이회창은 검찰의 재수사를 요구했고, 김영삼 대통령의 잘못이 크다며 김영삼의 탈당을 요구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7일,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한다며 담화문을 발표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한다. 소수 야당이던 민주당과의 합당 및 후보 단일화를 추진한 끝에 마침내 11월 13일 총재 조순,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라는 합의를 도출해내 11월 21일 양당 합당합동회의를 통해 새로 출범한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IMF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책임론으로 낙선했다. 김영삼은 아들 현철을 그를 차기 국회의원 이나 정치인 등으로 염두에 두었으나 신한국당의 신임 총재로 취임했던 이회창은 김영삼측의 생각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일로 김영삼과 이회창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의 발단이 되어 알력으로 작용하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회창은 1997년 대선에 도전하였으며 경선에서 이인제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나, 이인제가 신한국당의 경선결과에 불복하고 국민신당을 만들어 탈당하고, 김영삼의 최측근이었던 서석재 등도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이인제의 국민신당에 입당하여 이회창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후 김대중이 자유민주연합 김종필과 연대하여 DJP연대를 하였고, 김영삼 정부 말기의 IMF 구제금융 사태가 언론에 집중으로 부각되면서 김대중에게 패하여 2위에 머물렀다. 1997년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이회창은 몇십 년 만에 야당의 위치가 된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조순과 더불어 당을 이끈다. IMF 구제금융사건과 계속되는 지지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바꿨음(1997년 11월 21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패배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회창은 IMF 구제금융사건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김영삼이나 노태우, 전두환 등 군사정권과 친밀했던 인사들과 거리를 둘 것을 주장했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당시 한나라당 지도층을 비판했다.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98년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었다. 한나라당은 이것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과 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30여 년 만에 등장한 새로운 집권세력에 기대를 하고 있었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에서 한나라당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로 등장한 것을 전후로 김대중의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을 이용해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40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김영삼과 심한 갈등으로 상도동계와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과 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2000년 이후 상도동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 2001년 2월 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볼테르의 말이라며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할 권리는 보호할 것'이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할 것"이라며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중단을 촉구했다. 이때 민주노동당은 논평을 내어 "볼테르의 말은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 정확하다"고 하면서 "볼테르의 말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 명언중의 명언"이라며 "한나라당이 그렇게 옹호해온 국가보안법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며 "앞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는 권고를 받았다. 김대중 정부 내내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수시로 제출하고 군사정권때 정권 차원에서 유포한 반김대중 정서에 기대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수도권 등지의 젊은 세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선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 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해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이회창은 대선이 끝난 이후 정치계 은퇴를 공식 선언한다. 2007년의 이명박과는 다르게 이회창은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병풍 관련 의혹이 1년 이상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지지부진 했으나, 병풍 의혹은 그의 이미지를 상대적으로 실추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제대로 된 당내 경선을 치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총재를 거쳐 대선 후보가 된 것이기 때문에, 당내에서 미리 비판이 나와 자정작용을 할 수 없었다는 점도 있다. 또한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을 공천해 주는 것을 거부한 것 역시 상도동계의 분노를 촉발시켜 지원을 끊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의 경선 불복종과 탈당, 군사 정권 계열인 김윤환의 탈당 역시 지지층 이탈과 표 분산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선거 직전 김대중과 박지원 등의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민주화 운동권 세력의 불안을 가속화시켜 결집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요인들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패배한 한 이유들로 거론되고 있다. 이회창이 정계를 떠난 이후 그의 자리였던 한나라당 총재 자리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에서부터 활동해온 서청원과 최병렬, 그리고 박정희의 딸이자 정치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박근혜에게 이어졌다. 노무현의 당선 이후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이에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점으로 원내 제2당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한나라당에 관련된 발언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실정과 여러 가지 측근 비리 사건을 틈타 지방선거에서 대승했을 때에도 어느 지역구에 출마한다거나, 한나라당에 관련된 발언을 일체 삼갔다. 2007년 들어 박근혜와 이명박이 제17대 대선 행보를 시작했었을 때, 이회창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은 후보에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고, 특정인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가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면서 번복한 것은 국민을 기망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이 있자,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김대중의 정계은퇴 선언과 2년만의 복귀를 예로 들어 반론하였다. 논란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공식 입후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명박이 한나라당의 2007년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이회창의 측근을 중심으로 이회창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 보도되었다. 이회창이 이명박 후보의 각종 비리 의혹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으며, 자신과 비교적 정치 성향이 비슷한 박근혜를 끌어들여 대선판을 재편성하겠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회창 본인은 이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지만, 이회창의 지지자들은 2006년 5월에 있었던 박근혜 커터칼 테러 사건 등을 들먹이며 소위 '스페어 후보론'을 내세워 이회창의 출마가 임박했음을 선전했다. 드디어 2007년 11월 7일,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기호 12번)가 되었다. 그가 뒤늦게 11월에서야 세 번째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2002년 대선 이후 정치적 행보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출마하지도 않은 자신의 지지도가 당시 범여권의 정동영 후보를 앞지르고 있었다는 점,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했다는 점, 이명박의 비리 혐의와 자신과 다른 정치 성향에 불만이 있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이회창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대선 직전까지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하였으며,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경제만 강조한다면서 "좌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등장 이후 50% 이상을 유지하던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한때 30% 중반까지 떨어졌지만, 그는 더 이상 특별한 돌풍을 일으키지 못한 채,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에게도 크게 뒤처진 15.1%의 지지율(3위)로 낙선했다. 그가 대선 레이스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 강조한 정책이 바로 국가 안보와 법질서 확립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햇볕정책에 부정적이고, 다른 후보들에 비해서 안보와 질서를 강조하는 면에서는 이회창과 비슷했지만, 경제에 역점을 두고 다른 정책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회창으로부터 "좌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한편 "정통 보수 정당"을 창조하기 위해 대선 이후에도 바쁜 행보를 계속하였다. 2008년 2월 1일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자유선진당을 창당했으며, 2008년 2월 12일에는 비슷한 정치성향의 국민중심당과 합당을 선언하였다. 이후 자유선진당은 제18대 총선에서 기존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처럼 충청도 지역의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여 총 18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이는 기존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보다 한층 뛰어난 결과였지만, 국회 내의 교섭단체가 될 20명에는 2명이 모자란 결과이기도 하다. 이후 자유선진당은 2명의 국회의원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 무소속과 한나라당을 탈당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의원들을 접촉하였으나 성과가 없었고, 대신 창조한국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한다. 한편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방식에 많은 비판이 있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을 재개하기로 한 협상은 노무현 정부에서처럼 전문가 회의를 거치지도 않았고, 훨씬 완화된 검역조건을 가지고 1주일만에 합의되어 각종 논란을 낳았다. 이회창은 이 논란에 대해 미국산 수입재개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나, 협상이 졸속으로 진행되었다며 재협상을 주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TV토론회에 나오라", "선진당이 쇠고기 궐기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식으로 강도높은 비판을 하였지만,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서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2009년 8월 25일 이회창은 나로호 발사 실패와 관련해 "너무 조급증을 내서도 안되고, 우리의 과학기술을 과대 포장해서도 안된다"며 "이렇게 실패하고 재도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유인 위성의 발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8월 26일 이회창은 심대평 대표에 대한 총리 기용설과 관련, "앞으로 이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5역회의에서 "심 대표의 총리 기용 여부와 관련해 마치 당에 내분이 일어나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정치연대의 틀 없이 선진당 소속 의원이 내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기존 원칙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또한 "당직자들이 개인 의견을 말하는 것은 당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외부의 추측과 풍문 때문에 쓸데없이 우리당 스스로 내분과 같은 양상으로 비쳐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후 8월 30일 자유선진당 심대평 대표가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불만을 제기하면서 탈당하였다. 심 대표의 탈당으로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함께 구성한 교섭단체(선진과 창조의 모임)가 붕괴되었다. 탈당에 대해 이회창은 "어려움을 함께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돼서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고 말했다고 박선영 대변인이 전했다. 9월 3일 그가 자유선진당 세비기금 전달차 들른 대전 서구 둔산동 오페라웨딩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유선진당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잃었다고 해서 생명줄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며 "우리는 17석을 갖고 최대한 맡은 일을 해낼 것이고,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심대평 대표의 국무총리 입각 반대 배경에 대해 "심 전 대표가 국무총리에 입각하는 것은 현 정권의 한복판에 들어가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 했을 때 선진당이 그동안 반대해 온 '4대강 살리기 사업' 등을 강하게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했다. 그는 그러면서 "선진당이 미디어법 등 개별사안에 대해 다른 정당과 정책적으로 공조하는 것과 총리 입각 등 큰 틀에서 공조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했다. 자유선진당이 이회창 총재한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일선에 후퇴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총재 자리에서 사퇴하라는 얘기는 여기와서 처음 들어봤다"고 일축한 뒤 "나는 그동안 모든 일을 철저하게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모든 일을 결정해 왔다는 것에 대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심 전 대표에 대한 복당 요구가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대해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다. 직접 찾아뵙고 싶었지만 잘 안됐고, 전화연락도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진심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밖에 이 총재는 무소속 이인제 의원과 염홍철 전 대전시장의 영입 여부에 대해 "이 자리에서 특정인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만큼 언급하지 않겠다"며 말을 아꼈다. 2009년 12월 7일 불교방송 ‘김재원의 아침저널’에 나와 “4대강은 이 대통령 임기 중에 완성해 이명박 작품으로 만들려는 것이지만 세종시는 노무현 정권에서 여야가 합의해서 됐기 때문에 그렇게(MB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며 이같이 말하고 “그래서 지금 세종시에 돈 들이고 뭐 할게 아니라 4대강정비사업에 올인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 총재는 “세종시 수정론에 찬성하는 많은 분들, 특히 지식인층에서 많이 있는데 이분들이 하나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며 “세종시는 다 노무현 말뚝이다, 그러기 때문에 노무현 말뚝을 뽑아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수도 이전 반대에서 상황이 바뀌니까 찬성으로 돌아섰다’고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데 대해 “헌법재판소가 부처 일부를 이동하는 것은 수도 분할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 대통령은 헌재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수도 분할이란 말을 쓰고 있다”며 “이것은 전혀 내용을 모르거나 알면서 일부러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언론에 대해“지금 방송은 물론이고 주요 신문 한 번 펴보라”며 “칼럼이나 수정론자들을 와이드 인터뷰해서 대서특필하고 있다. 언론이 각자의 방향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알 권리가 있는 국민에게 보도하는 과정에서는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언론을 행태를 비판했다. 정부의 전방위 세종시 여론설득 작업에 대해 이 총재는 “비충청권의 민심을 바꾸어서 그것으로 (충청권을) 압박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옳고 정당한 일이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것이라면 당당하게 해야지, 그렇게 야바위꾼 동원하듯이 왜 그런 여론몰이를 하느냐”고 비난했다. 2009년 1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처벌 수위가 심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실정법에 위반되면 처벌하는 형식적 법치주의는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의 유물이며 우리는 사회적 정의에 부합여부를 가려서 처벌을 정하는 실질적 법치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두 가지 허위 사실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처벌하는 건 실질적 법치주의에 반한다며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처벌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였다. 이에 1월 13일 한나라당의 홍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어느 야당 총재를 지칭하며 박씨 사건은 형식적 또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민의 기본권엔 내재적인 한계가 있으며 정부비판이 잘못이 아니라 거짓말로 우리가 불가피하게 쓰지 않아도 될 20억 달러를 환율 안정을 위해 썼다는 데 있다며 반박하였다. 이어 내재적인 한계를 넘어선 행동을 했기 때문에 책임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0년 6월의 재보궐선거에서 패하자 그는 책임지고 대표직 사의를 발표했다. 한편 2011년 1월초에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한국선박을 구하러 한국의 청해부대 파견 시, 일부 언론들과 네티즌들의 발표와 전달에 대해 공개는 자제해야 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2012년 5월 자유선진당을 탈당하였다. 2012년 11월 24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로 새누리당에서 비대위원장 후보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잠시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인명진이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7년 1월 26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에 입당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지지를 선언하였다. 2017년 8월 22일에는 3년여간 집필해온 회고록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이회창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는 박 전 대통령 자신과 옛 새누리당에 있다고 지적하였으나 대한민국 보수주의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좌파가 선호해온 정책이라도 그것이 정의에 반하지 않고 보수의 이념과 정체성에 저촉되지 않으며 국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과감히 끌어 안아야 한다"면서 '개혁적 보수주의'를 강조하였다. 2018년 7월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추천론이 돌았다. 안상수 비대위 준비위원장은 "여러 곳에서 이 전 총재를 추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른 (비대위원장) 후보군들과 함께 논의 중"이라며 이 전 총재도 비대위원장 후보 중 하나로 검토하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전 총재는 한국당 비대위원장설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총재의 측근은 3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유한국당에서 군불을 때는 모양인데 이 전 총재가 굉장히 언짢아 했다"면서 "한국당으로부터 연락도 없었지만, 그런 요청이 오더라도 비대위원장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이다. 군사정권 재직 중 박정희·전두환 정부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 판결을 내린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에서는 그를 수시로 해임하려 하였으나 비리, 수뢰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쉽게 해임할 수 없었다. 40년간의 법관생활 중 뇌물수수를 하지 않은 점, 성추문 등에 휘말리지 않은 점 등 청렴성과 강직함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김영삼 정부에 발탁되었음에도 공정한 직무수행을 하려 노력한 점과 김영삼의 측근인 최형우 등에게 거침없이 책임추궁을 한 점 등도 높이 평가된다. '창자를 뽑아버리겠다' 발언과 기자들에게 "똑바로 안쓰면 다 죽을줄 알아", "고대를 나와서 어떻게 기자를 하느냐" 등의 막말 발언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불교 조계종 원로승려 정대는 이런 이회창을 보고 "그가 집권하면 희대의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2008년 2월 자유선진당이 창당할 때, 국민중심당의 심대평은 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심대평을 국무총리로 영입하려 한다는 설과 관련하여 양자간의 갈등 의혹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회창은 이러한 의혹을 여러 차례 부인하였지만, 2009년 8월 30일, 심대평이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설득이 통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적 당운영으로 당 지지율을 2%대에 머무르게 하는 이회창 총재와 당을 같이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며 탈당을 선언하며 양자간의 갈등이 현실화되었다.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집행 당시 혁명재판소 배석판사였던 탓에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군사정부에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회창 자신은 법관들 중 혁명재판소에 보낼 인원을 고를때 나이가 어린 순으로 혁명재판소에 차출된 탓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입장에 있었던 한복 서울지방법원장이 차출을 거부했다가 직무정지 명령을 받았고, 당시 사법연수원생으로 조용수의 관선 변호인으로 배석됐던 강신옥은 "나는 이 재판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다가 판사발령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어 이를 비교하여 그를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 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은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 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 대해 찬성하는 방향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7월 22일에는 법무부가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실무검토를 마쳤고 광복절 무렵에 사면될 수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언제든지 사면시킬 수 있다"고 "준비되었다"는 법무부의 입장을 보도했는데, 결국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만 있으면 대선 이전에 준비가 완료되었던 셈이다. 법무부는 대통령 특별 사면의 경우 법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추징금 문제를 집중 검토했다. 노태우 씨의 경우는 추징금에 해당하는 재산을 대부분 보전 처분해 상관이 없지마는, 전두환 씨는 추징금 2,295억원의 10% 정도만 확보되어 있고 전두환의 경우 재산 추적에 진전이 없어, 나머지 2천억 원에 대해서는 집행 불능 결정을 내리고 이를 사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법무부는 사면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라 수감자의 건강이 나쁘거나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적용하는 형집행 정지도 검토했다. 그러나 형 집행 정지는 명분이 약하고 언제든지 재수감 될 수 있어 전, 노씨 두 사람이 거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법무부는 보고 있다. 가석방은 형기의 1/3분을 마쳤을 때만 가능해 당초부터검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전,노 씨를 풀어주는 길은 특별 사면밖에 없지만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이미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준비는 대선이전에 완료되었고 김영삼과 정부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사면될 수 있었던 형국이었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보수세력의 연합과 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 줘야 된다고 요구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전두환 노태우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사회 각계에서도 개탄의 분위기가 쏱아졌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9월 12일, 당초 전두환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다시 말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한다. 이렇게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 대해 이회창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때 나오시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랬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9월 24일, cbs와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는 곳 경쟁자인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2월 18일 대선에서 이회창은 김대중 후보에게 39만표차로 떨어져 낙선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로 사면 복권되었다. 일명 '차떼기 의혹'으로도 불린다. 1997년 대선 당시에 집권당이 세무 권력을 동원해 기업들에게 불법적 정치헌금을 모금하였으며 2002년 대선에서도 다시 비슷한 방법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모았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측근이였던 서정우 변호사는 엘지그룹에 대선자금 지원을 요청하였고 엘지그룹에서는 경부고속도로의 만남의 광장 휴게소에 150억 원이 넘는 현금을 실은 2톤 트럭을 세우고 서정우 변호사는 이를 받아 직접 운전하여 한나라당에 전달하였다. 이외에 현대자동차도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에 걸쳐 109억 원을 전달하였고 SK 그룹은 100억 원, 한화그룹은 40억 원, 그리고 삼성그룹은 채권 325억 원과 현금 40억 원을 전달하였다. 2002년 이 사건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의 비밀 선거자금모집이 드러나게 되었고 한나라당이 847억9천만 원의 불법선거자금 모금을 한 것이 밝혀졌다. 이때 정치인 30여 명 기업인 20여 명이 기소됐으며 차떼기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대선에 뛰어들면서 차떼기를 하고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154억 원에 대한 처리 의혹을 한나라당측에서 제기하고 있다. 2002년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의 반민족행위자 708명 명단 발표 당시 한나라당 총재로 있던 그는 명단 발표에 대해 "우리 근대사의 족적을 남긴 분들이 포함됐다. 이런 분들을 이제 와서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친일파 관련 발언은 친일파를 직접적으로 옹호했다고 보기 힘들며 아버지 이홍규 옹이 친일파 의혹을 받은데 대한 대응이라는 반론도 있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의 두 아들 (이정연, 이수연) 모두가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의혹이 일어났고 특히 이회창의 장남의 경우 최초 병무청 징병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추후 정밀신체검사에서 신장 178 cm/45kg으로 군입대 면제를 받은 것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병역비리 관련 스캔들을 병풍이라고 한다. 이 병역 비리 관련 시비는 2002년 대선에도 다시 이슈가 되었다. 병역비리 전문가인 김대업은 이정연의 군면제에 비리가 개입되었다며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한 대책회의가 1997년에 있었고 전태준 전 의무사령관이 장남의 신검부표를 파기토록 지시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김대업과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일요시사 등을 상대로 허위보도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여 소송을 제기 하였다. 대법원은 김대업의 주장을 진실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며 대선에 영향을 주려 시도한 피고측의 악의가 의심된다고 하여 1억원의 배상을 판결하고 김대업은 5천만원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또한 김대업은 이와 관련한 형사사건에서도 명예훼손 및 무고, 공무원자격 사칭등으로 2004년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아 1년 10월의 실형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의혹은 이회창이 1997년과 2002년의 대선에서 민심을 잃어 패배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병풍 스캔들을 조직적인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의혹의 당사자인 이회창의 장남 및 이회창의 처 한인옥 등에 대해선 검찰에서 직접적인 조사를 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병역 비리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병풍 테이프는 조작된 것이며 여당의 정치공작의 희생양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정치공작의 여부를 떠나 병역문제에 매우 민감하여 병역기피를 큰 범죄로 인식하는 상당수의 유권자가 이 때문에 대선때마다 이회창을 외면했고 그래서 이회창이 두 차례의 대선에서 초기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1997년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 후보측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북한측 인사와 접촉하여 판문점 내에서 총격시위를 요청하였다는 의혹이다. 2001년 4월 오정은(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4년을 선고받았고, 한성기(진로그룹 회장 고문), 장석중(대북 사업가)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검찰은 이회창 후보의 친동생인 이회성씨가 핸드폰으로 베이징의 한성기씨와 통화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이회성씨는 한성기씨에게 여비 명목으로 500여만원을 전달하였다. 한나라당은 이를 일부 인물들에 의한 해프닝적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회창 후보의 친동생 이회성과 이 후보의 최측근 서정우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대선 비선조직인 부국팀이 병역문제로 대선자금이 잘 걷히지를 않자 국세청을 동원한 대선자금 모집을 이회창 후보에게 보고한후 1997년 10월 하순 부터 대선직전까지 국세청 차장 이석희와 선거 자금을 불법으로 모은 사건. 부국팀은 9월에 차수명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으로부터 기탁금 고액미납자 명단을 건네받아 미납기업들을 상대로 기탁금 납부를 독촉하였는데 이때 국세청과 한나라당이 대선자금 모금을 위해 조직적으로 공모한 사건이다. 또한 이 자금을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관리하던 차명계좌에서 사적으로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2003년 4월 8일 검찰은 23개기업으로부터 166억3천만원을 모금한 혐의로 이석희를 기소하였다. 이때 검찰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모금하던 임채주 당시 국세청장에게 전화를 하여 격려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은 미국 도피중 2002년 2월 16일 미국 FBI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회성은 1998년 구속되었다. 1999년 4월 이회창은 같은 당 국회의원의 친척 소유인 송파구 장미아파트로 위장전입하였으며 해당 주소에서 투표를 하였다. 주민등록법 위반 및 당시 선거법 위반 행위이나 처벌 받지 않았다. 1999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이회창은 송파구 신천동 7-28 현대타워아파트 706호에 전입 신고했는데, 이회창은 단 하루도 그 집에 살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그 후 99년 11월 아시아선수촌에 있는 딸의 아파트에서 마치 그곳에 사는 것처럼 기자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하였으나 실제로는 1998년 4월부터 타인 소유의 가회동 115평의 빌라에서 거주하였다. 2002년 빌라게이트에서 이회창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집이었다고 사과하였다.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 설훈 의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한 의혹으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측근 윤여준씨를 통해 최규선씨로부터 20만 달러를 받고 정책특보로 임명했다는 의혹이다. 그는 이와 관련한 녹취 테이프가 있으며 이를 입증할 증인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병풍등 다른 사건들과 함께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혀 대선에서 패배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이후 이뤄진 조사에서 설훈의원은 녹음테이프등 관련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선거법 및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 6뤌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등을 박탈당하였으며 관련된 민사소송에서도 1억원을 배상해야 했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 또한 조직적인 정치공작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2002년 3월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당시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일가가 가회동에서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으며 이에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공박하였다. 115평 빌라의 3개층을 공짜로 자식과 살고 있었던 이회창은 같은 해 3월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회창 총재에 반대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으며 빌라 게이트는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지율을 역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지역감정 문제에 대한 공방에 "영남출신 대의원들이 비영남인 저를 뽑아준 이 정당이 지역주의입니까? 90 몇 %를 차지하고 전혀 다른 지역 출신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정당이 지역주의 정당입니까?"라는 발언으로 지역감정을 유발한다. 또 12월 16일 서울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는 "여러분이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켜서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생각하신다면은 그러면 이인제나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던지십시요."라는 위험수위를 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다음날인 12월 17일 부산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는 "이분(이인제)에게 던지는 표는 이것은 바로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는 죽은 표가 될 뿐 아니라 바로 우리가 걱정하는 김대중 총재를 위한 표가 될 것입니다"라는 발언으로 반호남정서를 유발하는 발언을 한다. 기체 법칙 기체 법칙은 기체의 열역학적 온도(T)·압력(P)·부피(V)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법칙이다. 이 셋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법칙으로 보일의 법칙·샤를의 법칙·게이뤼삭의 법칙이 있으며,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보일-샤를의 법칙이 나온다. 여기에 아보가드로의 법칙을 적용하면 이상 기체 법칙이 만들어진다. 이를 정확히 만족하는 기체를 이상 기체라고 부른다. 판데르 발스 상태방정식은 이 식을 실제 기체에 적용하기 위해 바꾼 것이다. 기체 분자 운동론과 그레이엄의 법칙은 기체의 압력·부피·온도 사이의 관계를 분자 단위로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도 기체 분압에 관한 돌턴의 법칙이 있다. 장보고 장보고(張保皐, 787년~846년)는 청해진(현 전라남도 완도) 출생으로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무장이자 해상 호족이다.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 출생으로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알 수 없으나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타고 났다. 그의 이름 장보고도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적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신당서》 및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장보고는 해적 토벌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둥 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에 머무르며 구법행을 했던 일본의 승려 엔닌은 자신이 당에 체재하는 동안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현지 신라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구법행을 완수할 수 있었고, 장보고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한 뒤 엔닌은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자신이 체재했던 등주(登州)의 신라인 사찰 적산법화원을 본떠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 도교의 신인 태산부군泰山府君)을 모시는 적산선원의 건립을 발원하기도 했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김제륭도 재위 3년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이 스스로 민애왕으로 즉위하자,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846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명을 받은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장보고와 정년이 원래 지기였고, 당에서 무령군중소장이 된 사실을 소개한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의 저본은 중국 당나라 두목(杜牧)이 지은 장보고전, 즉 《신당서》권220 신라전이다. 장보고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 높은 관위(청해진대사)를 얻은 뒤, 반대로 관직에서 물러나 한미하게 지내던 정년이 장보고를 믿고 그를 찾아갔을 때에 정년을 예를 갖추어 환대한 것, 환영 연회를 벌이던 도중에 국왕이 살해당하고 수도가 혼란에 빠진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가 기꺼이 정년에게 군사 5천을 내어 주어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진압할 수 없다.”며 반란을 토벌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게 했으며, 이 공으로 장보고는 재상에 등용되고 정년이 청해진대사를 이어받은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나아가 두목이 장보고와 정년의 교제를 안녹산의 난 때의 곽분양(郭汾陽, 곽자의) ㆍ 이임회(李臨淮, 이광필)의 교제에 빗대어 인의(仁義)의 사람이라 칭찬한 것을 전하면서, 《신당서》열전을 편찬한 송기(宋祁)의 평으로 국난의 시기에 의(義)를 품고 국가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서 진(晉)의 기해(祁奚)와 당의 곽분양, 그리고 장보고를 거론하고 "어찌 동쪽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하고 있다. 이를 다시 《삼국사기》에 기재한 김부식은 신라본기와의 기사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장보고에 대한 두목과 송기의 평가를 지지한다. 또한 김유신전의 말미에서도 김유신의 공적을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도 고구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무용을 함께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 조선조의 안정복에게까지 이어졌다.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 전반, 산동 반도의 항구도시였던 적산(赤山), 지금의 룽청 시(荣成市)에는 장보고와 연계한 당시 많은 신라 상인이 거류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세웠는데, 이 무렵 당 조정의 명령으로 서둘러 귀국해야만 했지만, 당에 남아서 천태종을 배우기로 결의한 일본의 입당청익승(入唐請益僧) 엔닌을 위해, 그를 적산법화원에 머물도록 배려하고, 현지의 중국 관인들과 교섭해, 공험(公驗, 여행허가증)을 얻어내주기도 하는 등~ 엔닌의 9년 6개월에 걸친 구법행(行)을 물심 양면에 걸쳐서 지원했었다. 오늘날 일본 교토시 북쪽 히에이 산에 위치한 적산선원에 모셔져 있는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은 엔닌의 제자가 엔닌의 뜻을 이어 신라인들이 섬기던 신을 모시기 위해 닌나 4년(888년)에 세운 것이다. 흔히 도교의 최고신인 태산부군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신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 신이 장보고를 모티브로 한 신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적산대명신과 함께 엔랴쿠사 경내에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을 모신 신사도 존재하고 있는데, 현재 일본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조사(園城寺)에도 마찬가지로 이 신라대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남아 있다. 엔닌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했다가 돌아오던 승려 엔친(圓珍)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붉은 옷을 입고 흰 활을 들고 나타나’ 풍랑을 잠잠하게 가라앉혀 엔친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가 가지고 돌아오던 경법(經法)을 영원히 수호할 것을 맹세한 신이었다 하여 엔친이 가지고 온 경전과 법구를 이 온조사에 보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센고쿠 시대 다케다 집안의 시조로 추앙되었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이곳에서 관례를 올리고 신라사부로(新羅三郞)를 칭한 이래 다케다 집안에서도 이 신라대명신을 가신(家神)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신라선신당 건물은 조와 3년(134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기부한 것이다. 앞서 엔닌이 당나라에서 오대산의 하나인 북대엽두봉(北台葉頭峰, 해발 3,058미터)에 올랐을 때 얻은 향나무로 만든 문수상을 귀국한 뒤인 죠간 3년(861년) 10월에 엔랴쿠사 경내에 따로 문수루(文殊樓)을 지어 모셨는데, 이 문수루는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히에이 산을 불태웠을 때 소실되고 현재는 재건된 것이다. 이 문수루 옆에는 현재 장보고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장도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송징장군(송징)을 주신(主神)으로 정년장군(정년)과 혜일대사를 좌우에 모신 사당에서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2년부터 장보고를 함께 합사하여 당제를 거행한다. 완도군은 장보고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해양개척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 문화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전 국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해양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서 청해진 옛 터에 장보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장보고기념관은 대지면적 14,472m², 건축면적 1,739m², 전시면적 730m²의 지상 2층 철근콘크리트 건축물로 1층에는 중앙홀, 영상실, 기획전시실, 수장고, 휴게실이 있고, 2층에는 상설전시실인 1전시실, 바닷길, 2전시실이 있다. 1층 중앙홀에는 청해진선박연구소 마광남 소장이 제작하고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에서 기증한 '장보고 무역선(Trade ships of ChangPoGo)'이 실물의 1/4크기로 제작 전시되어 있고, 중국공예미술대사(中國工藝美術大師) 육광정(陸光正)씨가 피나무로 제작한 '해상왕장보고(海上王張保皐)'라는 작품명의 대형 목조벽화(가로8m × 세로2.2m)가 전시되어 있다. 2층 상설전시실은 '뿌리', '청해진의 생성', '해상제국', '항해' 등 주제별로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 구역마다 주제에 맞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잠수함인 장보고함은 독일제 209형 잠수함으로, 모두 아홉 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장보고급으로 불리고 있다. 다케다 신겐 다케다 신겐() 또는 다케다 하루노부()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가이 국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센고쿠 다이묘이다.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적자 혈통에 해당하는 가이 다케다 집안의 제19대 당주. 하루노부(晴信)는 그의 휘이며 신겐이란 출가한 뒤에 얻은 법명이다. 통칭은 다로(太郞).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대대로 가이 국의 슈고를 맡아왔다. 가이를 통일한 아버지 노부토라의 뒤를 이어 이웃한 시나노(信濃)를 숱하게 침공했으며, 이 과정에서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 다섯 차례에 달하는 이른바 '가와나카지마(川中島) 싸움'을 통해 시나노를 거의 평정하고, 가이 본국에 더해 시나노·스루가(駿河)·고즈케(西上野)·도토미(遠江)·미카와(三河)와 미노(美濃)의 일부를 다스렸으며, 아들 카츠요리의 대에 이르기까지 가이 다케다 집안의 영토를 넓혔다. 만년에 세이조(西上) 작전 중에 미카와에서 병을 얻어 시나노에서 죽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료군칸》(이하 《군칸》)에 그려진 전설적인 신겐상이 세상에 널리 퍼졌으며,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군기를 사용하며 사람들로부터 '가이의 범', 또는 용의 주인(朱印)을 사용한 데에서 '가이의 용'이라고도 불렸으며, '무적'으로 불리던 기마 군단을 이끌었고 또한 우에스기 겐신과는 호각을 다투었다는 그의 인물상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종3위(從三位)에 추대되었다. 1521년 음력 11월 3일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적자로서 가이 국 세키수이지 성(積翠寺城; 현 요가이 산성(要害山城))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가쓰치요(勝千代)이다. 아버지는 가이겐씨의 명문 다케다가의 제18대 도슈(当主) 다케다 노부토라로 가이를 통일한 전국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용장이다. 신겐이 태어난 1521년에 가이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명을 받고 구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가 이끄는 15,000명의 군에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다케다 군은 신겐의 탄생으로 사기가 올라 이마가와 군을 격퇴시켰다고 전해진다. 1525년에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노부시게를 편애하고, 그에 따라 하루노부의 성격이 서서히 거칠어졌다고 한다. 고요군칸(甲陽軍鑑)에는 1538년 정초에 아버지 노부토라는 하루노부에게 술잔을 주지 않고,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준 일화가 있다. 처음 아내를 맞이한 것은 1533년 아버지의 정략에 따라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딸을 맞이한다. 둘 사이에는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1534년 아내는 임신을 했지만, 사산하고 그녀도 죽었다. 이 때문에 계실로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의 딸을 맞이하게 된다. 1536년에 이마가와 우지테루(今川氏輝)가 죽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대를 이어면서 이마가와씨와 화친하고, 요시모토의 알선으로 타로(신겐)는 산조 긴요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같은 해에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로부터 이름을 받아 하루노부로 개명한다. 첫 출진은 시나노의 운노구치 성(海の口城)의 성주 히라가 젠신(平賀源心)을 공격한다. 1541년 하루노부 21살 때 슈쿠로(宿老)로 있는 자국내 유력한 영주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信方)와 아마리 도라야스(甘利虎泰) 그리고 오부 도라마사(飯富虎昌) 등으로부터 옹립되어 아버지를 스루가로 추방한다. 그리고, 다케다가 제19대 도슈로 가독을 상속한다. 노부토라 추방의 이유는 후세의 사료에는 악행때문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진위는 불명확하다. 노부토라는 각방면에서의 계속된 전쟁과 자국내 영주 세력을 통제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화정책으로 인해 부하들의 모반을 초래하게 된다. 아버지 노부토라의 추방과 하루노부의 가독 상속은 가이의 자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부토라를 추방한 직후, 시나노의 스와 우에하라 성(諏訪 上原城) 성주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와 하야시 성(林城) 성주로 있는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가 가이에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격퇴한다. 그리고, 1542년 6월, 하루노부는 거꾸로 스와를 공격한다. 마침 스와씨 내부에서는 스와 요리시게와 다카토 요리쓰구(高遠頼継)에 의한 스와종가를 둘러싼 정쟁이 일어 났기 때문에 하루노부는 이것에 개입, 다카토 요리쓰구와 손을 잡고 스와 가의 요리시게 일가를 멸문시킨다. 그리고 스와를 평정한다. 계속해서 같은 해 음력 10월, 스와령 분할 문제로 다카토 요리쓰구와 대립하고, 다카토 군을 고부치자와(小淵沢)에서 격파한다. 1543년 시나노 나가쿠보 성(長窪城) 성주 오이 사다타카(大井貞隆)를 공격해 자결로 몰았다. 1545년 4월, 우에 이나(上伊奈)의 다카토 성(高遠城)을 공격해 다카토 요리쓰구를, 계속해서 음력 6월에는 후쿠요 성(福与城) 성주 후지사와 요리치카(藤沢頼親)도 멸문한다. 1547년 시가 성(志賀城)의 가사하라 기요시게(笠原清繁)를 공격한다. 그때 가사하라 군에는 고즈케(上野)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의 원군도 있었기에 고전하지만, 음력 8월6일 오타이하라 전투(小田井原の戦い)에서 다케다 군은 우에스기=가사하라 연합군에 대승한다. 그런데, 하루노부는 적병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3천 명의 적병을 전부 학살한다. 더욱이 여자 아이를 인질 노예로 하는 등 가혹한 처분을 했다. 이 사건의 의해 시나노국의 영주들은 하루노부를 믿지 못하게 되고, 시나노 평정을 크게 퇴보시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분국법으로 있는 신겐가법(甲州法度之次第(信玄家法))을 정한다. 1548년 음력 2월, 하루노부는 시나노 북부에 세력을 자랑하는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와 우에다하라(上田原)에서 격돌한다(우에다하라 전투(上田原の戦い)). 그러나, 병력의 우세로 있는 다케다 군이 무라카미 군에 패해 슈쿠로인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를 비롯 많은 장병을 잃는다. 하루노부 자신도 부상당해 고후(甲府)의 유무라 온천(湯村温泉)에서 30일간 치료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음력 4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스와로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7월에 시오지리고개 전투(塩尻峠の戦い; 가쓰쓰루고개 전투(勝弦峠の戦い))에서 오가사와라 군에 대승한다. 1550년 음력 7월, 하루노부는 오가사와라령을 공격한다. 이미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저항할 힘이 없어 하야시 성을 버리고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밑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해서 나카 시나노(中信濃)는 다케다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이 기세로 하루노부는 9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인 도이시 성(砥石城)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 전투는 후세에 도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고 전해지며, 다케다 군은 대패를 경험하고, 요코타 다카토시(横田高松)와 오야마다 노부아리(小山田信有)를 비롯 천 명 이상의 장병을 잃는다. 그러나 1551년 음력 4월,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 또는 사나다 유키쓰나(真田幸綱)의 책략으로 도이시 성을 함락하고, 이를 계기로 다케다 군은 순탄하게 우위에 서게 되었다. 1553년 음력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쓰라오 성(葛尾城)을 버리고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 우에스기 겐신)의 밑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해서 히가시 시나노(東信濃)도 다케다가의 지배하에 있기 되고, 하루노부는 기타 시나노(北信濃)를 제외한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1553년 음력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요청을 받은 나가오 가게토라는 5천의 군을 이끌고 시나노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한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하루노부와 가게토라는 서로 대치만 한 채 5월에 양군은 함께 철퇴한다. 8월, 가게토라의 지원을 받은 오이 노부히로(大井信広)가 모반을 일으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즉각 진압한다. 1554년 봄, 나가오 가게토라에 대항하기 위해, 하루노부는 장남 요시노부(義信)의 정실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며느리로 맏이해 이마가와씨와 동맹을 맺는다. 또, 자신의 딸은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장남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에 시집보내 고 호조씨와도 동맹을 맺는다. 이마가와씨도 다케다가의 중개로 호조씨와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고소슨 삼국 동맹(甲相駿三国同盟)이다. 1555년 음력 4월, 다케다 군과 나가오 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다.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전과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양국은 음력 10월에 화친하고 철퇴한다. 하루노부는 나가오 군이 에치고로 철퇴하자마자, 겸사겸사 가게토라에게 의지하여 반항하고 있는 기소 요시야스(木曽義康), 기소 요시마사(木曽義昌) 부자를 공격, 굴복시킨다.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진출한다. 1557년 나가오 가게토라가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해 옴에 따라, 재차 다케다 군과 나가오 군이 대치하기 시작한다.(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양군 모두 전과 없었고, 더욱이 가게토라가 없는 사이에 가가(加賀), 엣추(越中)에서 잇코잇키(一向一揆)가 일어났기 때문에 나가오 군은 철퇴한다. 1559년 음력 5월 하루노부는 출가해서 신겐으로 개명한다. 1561년 음력 9월10일, 다케다 신겐 군 2만과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 우에스기 겐신) 군 만3천이 4번째 가와나카지마에서 전투를 벌인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 전투는 지금까지의 가와나카지마의 전투 중 최대 규모의 전투이다. 양군 합쳐 6천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 모로즈미 도라사다(諸角虎定),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 사에구사 모리나오(三枝守直) 등 유력 무장을 다수 잃었다고 전해진다. 1564년에도 우에스기 군과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지만, 충돌 없이 끝난다 (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후, 신겐은 공격 방향을 고즈케(上野)로 전환하지만,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옛 신하였던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의 선전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나, 1561년 나리마사가 죽자 다케다 군은 대를 이은 나가노 나리모리(長野業盛)를 격렬하게 공격, 1566년 음력 9월에는 미노와 성(箕輪城)을 함락하고 고즈케 서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1560년 음력 5월, 다케다가의 맹우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전사함에 따라, 이마가와가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겐은 이마가와씨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한 적자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가 격렬히 반대한다. 신겐은 1565년 오부 도라마사를 할복시키고, 1567년 음력 10월에는 요시노부를 폐적시키고 자살로 몰고 간다 (병사설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1568년 음력 12월,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공동으로 스루가로 침공을 개시한다. 이마가와 군도 저항했지만, 마쓰노 산(松野山)에서 오기 기요타카(荻清誉)를, 삿타 산(薩垂山)에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를 격파하고 이마가와야카타(今川館)로 입성한다. 그러나, 이마가와씨와 친척 관계로 있는 호조 우지야스가 이마가와씨의 원군으로 온다. 더욱이 스루가 정복을 기획한 이에야스도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고 신겐을 적대했기 때문에 호조=도쿠가와 연합군과의 싸움의 불리함을 깨닫고, 1569년 요코야마 성(横山城)에 아나야마 노부타다(穴山信君)를 남겨놓은채, 음력 4월 다케다 군 본대는 일단 가이로 철퇴한다. 음력 9월, 신겐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조씨를 억누르기 위해 고즈케,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로 침공한다. 음력 10월1일에는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하지만, 4일 후에 재빨리 포위를 풀었다. 호조 우지야스는 호조 우지테루(北条氏照), 호조 우지쿠니(北条氏邦) 등을 다케다 군의 가이에로의 퇴각로에 포진시키고, 오다와라로부터는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를 출진시켜 양동작전하는 구상을 했지만, 음력 10월8일 미마세 고개(三増峠)에서 다케다 신겐 군과 우지테루, 우지쿠니 군이 격돌, 다케다 군이 대승한다 (미마세고개 전투(三増峠の戦い)). 이렇게 호조 우지야스를 제압한 후, 1570년 음력 7월 재차 스루가를 침공, 완전히 평정한다. 1568년 음력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上洛)을 달성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한다. 하지만, 요시아키와 노부나가는 대립하게되고,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멸문하기 위해, 신겐에게 노부나가 토벌 어내서를 발행한다. 신겐도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를 우려했기 때문에 1571년 음력 2월 노부나가의 맹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도토미, 미카와를 침공한다. 신겐은 음력 5월까지 오야마 성(小山城), 아스케 성(足助城), 다미네 성(田峯城), 노다 성(野田城), 니렌기 성(二連木城)을 접수한 후에 가이로 귀환한다. 1571년 음력 10월 3일, 호조 우지야스가 오다와라에서 죽고, 대를 이은 적자 우지마사는 "다시 다케다와 화친해라" 라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동생 호조 우지타다(北条氏忠), 호조 우지노리(北条氏規)를 인질로서 가이로 보낸다. 그리고, 음력 12월27일에는 신겐과 고소동맹을 맺는다. 이 시기 다케다가의 영토는 가이 일국외 시나노, 스루가, 고즈케 서부, 도토미, 미카와, 히다(飛騨), 엣추의 일부까지 약 120만 석에 달한다. 노부나가는 1565년 히가시 미노(東美濃)의 영주 도야마씨의 여자를 노부나가의 양녀로 해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 시집보내서 신겐과 동맹을 맺는다. 이 양녀는 다케다 신겐의 적손을 출산한 후 죽었지만, 계속해서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와 신겐의 딸 마쓰히메(松姫)가 약혼했다. 도쿠가와씨와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면서도 오다씨와 다케다씨는 계속 동맹관계에 있었다. 1572년 음력 10월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해서 노부나가와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을 하기 위해 고후(甲府)를 출발한다. (단, 신겐은 노부나가에게 우호적 서찰을 계속 보내는 등, 더욱 더 동맹관계를 계속유지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 약 3만의 전군중, 3천을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에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야마카타 마사카게(山県昌景)에게 5천을 주어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보내고, 스스로는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와 함께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아오구즈레 고개(青崩峠)로부터 도토미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것은 고호조가의 원군 2천도 가세해 2만2천이었다.). 신겐이 이끄는 본대는 음력 10월 13일 다다라이 성(只来城), 아마카타 성(天方城), 이치노미야 성(一宮城), 이이다 성(飯田城), 가쿠와 성(各和城), 무카사 성(向笠城) 등 도쿠가와의 성들을 하루 만에 접수한다. 야마카타 마사카게 군은 가키모토 성(柿本城), 이다이라 성(井平城)을 접수하고 신겐의 본대와 합류, 아키야마 노부토모 군은 음력 11월까지 히가시 미노의 요충지인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접수한다. 이때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일향종(一向宗) 등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3천의 원군만을 보낸다. 이에야스는 음력 10월14일, 다케다 군과 도토미의 히토코토자카(一言坂)에서 싸우지만, 병력차와 신겐의 교묘한 전술에 패한다 (히토코토자카 전투(一言坂の戦い)). 음력 12월19일에는 도토미의 요충으로 있는 후타마타 성(二俣城)을 함락시킨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하마마쓰(浜松)에서 농성을 생각하지만, 다케다 군의 움직임을 봐서 병사 만천을 이끌고 출진,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음력 12월22일 신겐과 일대 결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병력차와 함께 신겐의 전술앞에 대패하고, 도쿠가와 군은 많은 장병을 잃고 패주한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이에야스는 도주할 때 공포에 질려 말위에서 변을 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맹우 아자이 나가마사의 원군으로 기타 오미(北近江)에 진을 치고 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철퇴를 알게 된다. 신겐은 격노하여, 요시카게에게 문서를 보낸다 (이노 문서(伊能文書)). 그러나 요시카게는 그 후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신겐은 군대의 움직임을 멈추고 해를 넘긴다. 하지만, 다시 1573년 음력 1월에 미카와를 침공하고 음력 2월10일에는 노다 성(野田城)을 접수한다 (노다 성 전투(野田城の戦い)). 노다 성을 접수한 직후부터 신겐의 지병이 악화되어, 다케다 군은 돌연 진격을 멈춘다. 이 때문에 신겐은 나가시노 성(長篠城)에서 요양하지만, 별진전이 없어 음력 4월 초순에는 결국 가이로 철퇴를 결의하게 된다. 음력 4월 12일, 가이로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국 고마바(駒場)에서 병사한다. 향년 53세, 묘소는 야마나시현 고슈 시의 에린지(恵林寺)이다. 신겐의 유언에 관해서 신뢰할 수 있는 동시대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세의 사서나 이야기 등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 정말 신겐의 유언인지 믿을 수 없다. 다케다씨의 본거지로 있는 가이는 평야가 적어 년공수입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황무지 개간을 적극적으로 실시한다. 그때까지 하천의 범람으로 농지로 쓸 수 없었던 토지도 농경이 가능하도록 신겐쓰쓰미(信玄堤)라고 불리는 제방을 쌓고, 하천의 흐름을 바꾸어 개간했다. 일본에 첫 금화인 고이시긴(碁石金)을 제조했다. 가이에는 풍부한 매장량의 금광이 존재하였고, 포르투갈, 스페인인들의 왕래에 의해 굴삭기술과 정련수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막대한 양의 금을 산출하고, 이렇게 모은 금을 치수사업과 군사비로 사용했다. 또 오다 노부나가와 우에스기 겐신에 적대하는 세력에게 지원하는 등, 외교면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단, 고이시긴은 통상 유통에서 그다지 사용하지 않고, 또 금광의 채굴에 관해서도 다케다씨는 직접지배를 하지 않고, 금광채굴자라 불리는 기술자 집단에 소유권 명목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 말대로, 신겐은 그의 생애에 단 한번도 가이국내에 새로운 성을 만들지 않고, 해자 하나의 쓰쓰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에 살았다. 단, 배후에는 가까운 성인 세키수이지 성(積翠寺城)이 있는 전형적인 전국무장의 거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이말은 후세의 창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능히 신겐의 이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승자에게 교만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신겐 사후 연전연승을 한 가쓰요리가 나가시노에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된 것을 생각하면 실제 설득력이 있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고요군칸(甲陽軍鑑)의 각색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손자병법에 기록된 말로, 종종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신겐은 이것을 군기로 사용했다. 또, 그의 군기는 에린지(恵林寺)의 주지 가이센 조키(快川紹喜)의 책으로 전해진다. 지병은 폐결핵, 폐렴 혹은 위암 혹은 식도암에 의한 병사설이 유력하다. 도쿠가와 군의 총탄에 의한 상처가 원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다케다 군이 미카와국 노다 성을 포위중 신겐이 성으로부터 들리는 피리소리에 취해 있을 때, 저격당해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마쓰다이라키(松平記) 등 도쿠가와측 사료 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 도쿠가와 일족이 신겐을 전사시키고 싶어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흡혈충의 기생에 의한 체력 저하라는 설도 있다. 다케다 신겐이 죽을 때, 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고요군칸에도 같은 기술이 있다. 이 때문에 스와 호에 오래전부터 신겐의 수중묘 전설이 있다. 1986년, 일본 국토지리원의 해상자위대에 의해 해저지형조사에서 호수 바닥 한쪽 면에 25 m 정도의 마름모꼴 형태의 물체가 발견되었다. 그것이 신겐의 수중묘가 아닐까 생각되고, 신슈 대학(信州大学),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니혼 텔레비(日本テレビ) 등 복수 단체가 10수년에 걸쳐 조사를 했다. 전자파심지기에 의해 묘라고 여겨지는 물체가 확인되었다고 보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수수께끼의 마름모 형태는 호수 바닥의 움푹패인 땅의 그림자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문제의 마름모 형태가 자연 상태에서 만들어졌다는 볼 수 없는 정도이고, 호수 바닥의 진흙이 시야를 가려 현지조사가 곤란해서,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수중묘의 전설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현재에도 많다. 최근, 신겐은 노신의 꼭두각시로, 아버지 추방은 가이국의 유력영주들의 쿠테타였다는 설이 있다. 이 이유는 신겐이 16세에 처음 출진했다는 날은 고하쿠사이키(高白斎記)에 이마가와가의 가독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학회에 따르면 20세에 처음 출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센고쿠 다이묘로서는 너무 늦은 시기라, 이와 같은 설이 나온 것 같다.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후손인 가와치 겐지(河内源氏)계의 미나모토 노 요시미쓰(源義光;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郎義光))를 조상로 해서, 대대로 가이슈고를 역임한 가이 겐지(甲斐源氏)라고 불린다. 신겐은 이 다케다 씨의 제19대 당주이다. 다케다 가는 겐페이 시대(源平時代)에는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와 함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 토벌의 명령을 받는 등, 예부터 무용이 출중한 집안이다. 신겐의 처는 좌대신(左大臣)으로 있는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의 딸 산조노가타(三条の方, 정실) 외,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의 딸 등, 다수의 부인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사료적으로 확실한 것은 산조노가타, 스와고료닌(諏訪御料人), 네즈고료닌(禰津御寮人), 아부라가와 부진(油川夫人), 이 네 명이다. 현재로는 신겐의 처는 이 네 명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 다케다 가의 후손으로는 사에구사 가(三枝家)가 유명하다. 고요 오명신(甲陽 五名臣)은 다케다가의 아시가루 대장을 가리킨다. 주로 다케다 노부토라 시절부터 하루노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들이다. 대를 이어 다케다 가쓰요리를 지지했던 4명의 무장을 말한다. 다케다 노부토라, 다케다 신겐 때: 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겐신(, 1530년 음력 1월 21일(2월 18일) ~ 1578년 음력 3월 13일(4월 19일))은 센고쿠 시대의 무장, 다이묘이다. 출가 전 이름은 나가오 가게토라()이고, 이후 개명을 통해 우에스기 마사토라(), 우에스기 데루토라()란 이름을 가졌고, 출가 후엔 우에스기 겐신으로 불렸다. 어릴 적 이름은 도라치요이다. 형을 대신하여 당주에 자리에 앉아 주변의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나가 등의 쟁쟁한 센고쿠 다이묘들과 전쟁을 벌였다. 스스로 비사문천의 화신이라 믿어 전장에서 뛰어난 군략을 보여 에치고의 용 혹은 군신이라 불렸다. 교로쿠 3년(1530년) 음력 1월 21일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로 산조 나가오 가문(三條長尾家)의 나가오 다메카게의 넷째 아들(또는 둘째, 셋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로 가스가 산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같은 에치고 스요시 성(栖吉城)의 성주로 고시 나가오 집안(古志長尾家)의 나가오 후사카게(長尾房景)의 딸 도라고젠(虎御前)이다. 아명인 도라치요(虎千代)는 그가 태어난 해가 인(寅)의 간지에 해당하는 해였던 데서 연유한다. 당시 에치고 국은 내란이 격화된 하극상의 시대로 아버지 다메카게도 다른 무장들처럼 싸움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에치고 슈고였던 우에스기 후사요시(上杉房能)를 자결로 몰아갔고, 관동관령 우에스기 아키마사(上杉顯定)를 나가모리하라(長森原)의 전투에서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차기 슈고가 된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定實)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위세를 떨치면서 에치고 국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도라치요가 태어난 직후인 교로쿠 3년 10월에는 조조 성(上條城) 성주 우에스기 사다노리(上杉定憲)가 옛 우에스기 집안의 세력을 규합하여 다메카게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병란에는 아가노 강(阿賀野川) 북쪽에 할거하던 아가키타슈(揚北衆) 등뿐 아니라 동족인 나가오 일족의 우에다 나가오 집안(上田長尾家)의 당주 나가오 후사나가(長尾房長)마저도 호응하였다. 에치고 나가오 집안(越後長尾家)은 부도하라군(蒲原郡) 산조(三條)를 영지로 거느리고 후나이(府內)에 거주하던 산조 나가오(후나이 나가오라고도) 집안, 고시 군(古志郡)을 근거지로 하는 고시 나가오 집안, 우오누마 군(魚沼郡) 우에스기장(上田庄)을 지역 기반으로 삼은 우에다 나가오 집안, 이렇게 세 집안으로 나뉘어 슈고다이의 지위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그러나 결국 산조 나가오 집안이 슈고다이의 자리를 독점하게 되자, 우에다의 나가오 후사나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사다노리의 병란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다메카게는 산부이치가하라(三分一原)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우에다 나가오 집안과의 항쟁은 새로 우에다 나가오 집안의 당주가 된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의 모반이나 오다테(御館)의 난으로까지 이어지는 등 계속되었다. 덴분 5년(1536년) 8월에 다메카게는 물러나 은거하고 가문은 도라치요의 형인 하루카게(晴景)가 이어받는다. 도라치요는 성 아래 린센지(林泉寺)에 입문해, 주직(住職) 덴시쓰 고이쿠(天室光育)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친아버지와의 사이가 소원했던 도라치요였기에 다메카게를 피하는 방법의 하나로 절에 들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덴분 11년(1542년) 12월, 다메카게는 병사하고, 적대 세력이 가스가 산성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도라치요 등은 투구와 갑옷을 입은 채 장의를 준비할 정도였다. 형 하루카게에게는 에치고 국을 다스릴 재능이 모자랐고, 슈고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복권하여 우에다 나가오 집안과 우에스기 사다노리, 아카키타추 등의 슈고파가 주류 파벌로서 구니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판국이었다. 도라치요는 덴분 12년(1543년) 8월 15일에 성인식을 하고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라고 개명한 뒤, 9월에는 하루카게의 명을 받아 고시군지(古志郡司)로서 가스가 산성을 출발해 산조 성(三条城), 나아가 도치오 성(栃尾城)으로 들어간다. 그 목적은 나카고리(中郡)의 반 슈고다이 세력을 평정하고 나가오 집안의 영지를 통치하며, 나아가 시모고리(下郡)의 아가키타슈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에치고에서는 슈고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의 아들 도키무네마루(時宗丸, 다테 사네모토伊達実元)를 양자로 들이는 문제로 인해 내란이 일어났고, 에치고의 고쿠진슈(國人衆)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가게토라가 성인식을 치른 이듬해인 덴분 13년(1544년) 봄, 병약한 하루카게를 가볍게 보던 에치고의 호족이 모반을 일으켰다. 15세의 가게토라도 애송이 취급해 얕잡아보던 인근 호족들은 도치오 성을 공격해 왔고 가게토라는 소수의 병사를 둘로 나누어 한쪽이 가라카사마쓰(傘松)에 진을 치고 있던 적의 본대의 배후를 급습하게 한 뒤,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성에서 본대를 돌격시킴으로서 마침내 궤멸시켰다(도치오 성 전투). 가게토라의 첫 전투였다. 덴분 14년(1545년) 10월, 슈고 우에스기 집안의 노신으로 구로타키 성(黒滝城)의 성주로 있던 구로다 히데타다(黒田秀忠)가 나가오 씨에 대한 모반을 일으켰다. 히데타다는 슈고다이 하루카게가 있던 가스가 산성까지 공격해 왔고 가게토라의 형 나가오 가게야스(長尾景康) 등도 이때 죽었으며, 그 뒤 곧장 구로타키 성으로 돌아가 농성하였다. 가게토라는 형을 대신해 우에스기 사다자네로부터 토벌 명령을 받아, 총대장으로서 공격을 지휘하여 히데타다를 항복시켰다(구로타키 성 전투). 그러나 이듬해인 덴분 15년(1546년) 2월에 히데타다는 다시 거병하였고 가게토라는 이번에도 또다시 출전하여 구로다 씨를 멸문시키고 만다.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하루카게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에치고의 고쿠진 일부가 가게토라를 옹립하면서 하루카게에게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하루카게와 가게토라의 관계는 험악해지게 된다. 덴분 17년(1548년)에 이르러서는 하루카게를 대신해 가게토라를 새로운 슈고다이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그 중심에는 아가키타슈(揚北衆)의 톳사카 성(鳥坂城) 성주 나카조 후지스케(中条藤資)와, 기타시나노(北信濃)의 호족으로서 가게토라의 숙부이기도 했던 나가노 성(中野城) 성주 다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賴)가 있었다. 여기에 도치오 성에서 가게토라를 보좌하던 혼조 사네요리(本庄実乃), 가게토라의 외가인 스요시 성주 나가오 가게노부(長尾景信), 요이타 성(与板城) 성주 나오에 사네쓰나(直江實綱), 산조 성의 성주 야마요시 유키모리(山吉行盛) 등이 협조해 가게토라를 지지하는 하나의 파벌이 형성된다. 이에 맞서 하루카게를 지지한 것은 우에다 나가오 집안의 사카도시 성(坂戸城)의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나 부도하라 군 오쿠야마장(奧山莊)의 구로카와 성 성주 구로카와 기요자네(黑川淸實) 등이었다. 이들의 대립은 그 해 12월 30일, 슈고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조정을 바탕으로 하루카게가 가게토라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양도한 뒤 은거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고, 가게토라는 나가오 씨의 본거지 가스가 산성에 입성하고 19세의 나이로 가문을 상속받아 에치고의 슈고다이가 되었다. 2년 후인 덴분 19년(1550년), 사다자네가 후계 없이 죽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가게토라의 에치고 국주(國主)의 지위를 인정한다. 12월에는 일족인 사카도시 성주 나가오 마사카게가 가게토라의 가문 상속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원인은 가게토라가 에치고의 국주가 되면서 하루카게를 지지했던 마사카게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진 것과, 오랫동안 우에다 나가오 집안과는 대립하는 관계였던 고시 나가오 집안이 가게토라를 지지하면서 일족 내에서의 발언권이 세진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가게토라는 덴분 20년(1551년) 1월에 마사카게측의 홋치 나가요시(発智長芳)의 거성인 이타기 성(板木城)을 쳐서 이기고, 8월에는 사카토 성을 포위하여 반란을 진압한다(사카토 성 전투). 항복한 마사카게는 가게토라의 누나 센도인(仙桃院)의 남편이라는 이유 등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 가게토라의 중신으로 우대받게 된다. 마사카게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에치고 국의 내란도 일단 수그러들었고, 에치고는 통일되었다(하지만 우에다 나가오 집안과 고시 나가오 집안의 적대관계만은 뿌리깊게 남아, 훗날 오다테의 난에서 우에다 나가오 집안은 마사카게의 친자식인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고시 나가오 집안은 우에스기 가게토라에게 가담했다. 결과는 고시 나가오 집안의 패배와 멸망이었다). 가게토라의 나이 22세였다. 덴분 21년(1552년) 1월, 사가미 국의 호조 우지야스의 공격을 받아, 고즈케(上野) 히라이 성(平井城)의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성을 버리고 에치고로 도망쳐 와서 구원을 요청한다. 가게토라는 노리마사를 받아들여 관저에 들이면서 우지야스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4월 23일에 가게토라는 종5위하 단조소히쓰(彈正少弼)의 관직을 수여받았다. 8월에 가게토라는 곧장 히라코 손자부로(平子孫三郞), 혼조 시게나가(本庄繁長)를 간토로 보내어, 고즈케의 누마타 성(沼田城)을 치고 호조군을 격파한다. 호조군을 이끌고 있던 호조 겐안(北條幻庵)은 고즈케에서 물러나 무사시 국의 마쓰 산성(松山城)으로 달아났고, 에치고군이 히라이 성과 히라이 가네 산성(平井金山城)까지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노리마사는 히라이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치고의 이웃국인 고즈케로 힘을 뻣친 호조 가문은 에치고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에 가이의 다케다 하루노부(훗날의 다케다 신겐)가 시나노를 침공해 왔고, 영토에서 쫓겨난 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가 또다시 가게토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나아가 덴분 22년(1553년) 4월에는 시나노 국 하니시나 군(埴科郡)의 가쓰라오 성(葛尾城)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도 하루노부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가쓰라오 성을 탈출해 가게토라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요시키요는 가게토라로부터 5천의 원군을 받아 무라카미 집안의 영지를 다케다군으로부터 되찾고자 출진했고, 같은 달에 다케다군을 하치만(八幡) 전투에서 격파하고 다케다군을 무라카미 영지에서 내쫓고 가쓰라오 성도 되찾았다. 그러나 물러난 듯 했던 하루노부는 다시 7월에 친히 대병력을 인솔하여 무라카미 영지를 침공했고 요시키요는 다시 에치고로 도망쳐 왔다. 마침내 가게토라는 하루노부 토벌을 결의하고, 8월에 친히 군대를 인솔해 시나노 국으로 출진했다. 30일에 후세(布施)의 전투에서 하루노부군의 선봉을 격파한다. 9월 1일에는 야하타에서도 다케다군을 물리쳤으며, 다케다 영내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아라토 성(荒砥城)·아오야기 성(青柳城)·고쿠조 산성(虚空蔵山城) 등, 다케다의 여러 성들을 항복시켜 나갔다. 이에 하루노부는 시오타 성(塩田城)에 본진을 두고 결전을 피했고, 마침 교토로 상경할 예정이었던 가게토라도 굳이 더 나아가지 않은 채 9월에 에치고로 돌아왔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9월 상경해 고나라 천황과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한다. 교토에서 입궐하여 고나라 천황을 배알한 자리에서 가게토라는 천황으로부터 어검(御劍)과 천배(天盃)를 하사받고 "적을 토벌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또한 이 상경 때 사카이(堺)를 유람하며 고야 산(高野山)을 참배하고, 교토로 돌아와 전임 다이도쿠지(大德寺) 주지 데쓰슈 소쿠(徹岫宗九) 아래서 참선하여 '소신(宗心)'이라는 법명을 하사받았다. 다만 이 기록은 《언계경기(言繼卿記)》나, 에도 말기에 편찬된 무로마치 막부의 역사서 《후감(後鑑)》 등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에스기 집안의 족보에만 전한다. 덴분 23년(1554년) 가신 기타조 다카히로(北條高廣)가 다케다와 짜고 모반을 일으켰으나, 덴분 24년(1555년)에 직접 출진해 다카히로의 거성인 기타조 성(北条城)을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이를 진압한다(기타조 성 전투). 다카히로는 간신히 사면되고 다시 가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이 하루노부는 젠코지 벳토(善光寺別當) 구리타 가쿠주(栗田鶴寿)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아사히 산성(旭山城)을 지배하에 두었고, 이에 맞서 가게토라는 동년 4월에 다시 시나노로 출병, 하루노부과 가와나카지마의 사이 강(犀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또한 스소바나 강(裾花川)을 사이에 두고 아사히 산성과 마주보는 가쓰라 산성(葛山城)을 쌓아 아사히 산성의 다케다군을 견제하게 했다. 가게토라는 사이 강의 도하를 시도하는 등 공세를 펼쳤으나, 소규모 전투만을 거듭할 뿐 결판은 좀처럼 나지 않았고 아무런 진척도 없이 5개월 동안을 대치하던 끝에 결국 최종적으로 하루노부가 가게토라에게 신청하는 형식으로,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 아래 화친하고 물러났다. 다케다측의 아사히 산성을 부수고 다케다가 빼앗았던 가와나카지마의 영지도 본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가게토라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런데 고지(弘治) 2년(1556년) 6월, 가신들간의 영토 싸움을 조정하느라 심신이 완전히 지쳐 버린 탓인지 가게토라는 돌연 출가를 선언하고, 고야 산(일설에는 히에이 산)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 하루노부와 밀통한 가신 오쿠마 도모이에(大熊朝秀)가 반기를 들었고, 덴시쓰 고이쿠나 나가오 마사카게 등의 설득으로 출가를 단념한 가게토라는 다시 에치고로 돌아와 엣추로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에치고로 침입하려던 도모히데를 쳐부수었다(고마가에리 전투). 고지 3년(1557년) 2월, 하루노부는 맹약을 깨고 나가오측의 가쓰라 산성을 공략했다. 나아가 시나노와 에치고의 국경 부근까지 진군하여, 가게토라측의 시나노 호족 다카나시 마사요리의 거성 이야마 산성(飯山城)을 공격했다. 마사요리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가게토라는 마침 시나노와 에치고의 국경을 막은 폭설로 출병이 늦어졌고, 4월에야 다시 가와나카지마로 출진하여(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다카이 군(高井郡) 야마다 성(山田城)과 후쿠지마 성(福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가누마 성(長沼城)과 젠코지를 탈환, 요코야마 성에 진을 친 가게토라는 나아가 앞서 헐렸던 아사히 산성을 다시 쌓아 본영으로 삼았다. 5월에 가게토라는 다케다 영내에 깊숙이 침공하여 하니시나 군(埴科郡)과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의 경계인 사카키(坂木)의 이와하나(岩鼻)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가게토라의 힘을 잘 알았던 하루노부는 후카시 성(深志城)에서 더 진군하지 않고 그와의 결전을 피했다. 7월, 다케다군의 별동대가 나가오측의 아쿠모 군(安雲郡) 오다니 성(小谷城)을 공략하고, 나가오군은 배후를 위협당하자 이이 산성까지 군사를 빼내어 다카이 군의 노자와 성(野沢城)·아마가사리 성(尼巌城)을 공격했다. 8월에 양군은 모토도리 산성(髻山城)에서 가까운 미즈우치 군(水内郡) 우에노가하라(上野原) 들판에서 교전하지만 이마저도 결정적인 싸움은 아니었다. 고지 4년(1558년), 쇼군 요시테루로부터 상경 요청을 받은 가게토라는 이듬해 상경할 뜻을 전달했는데, 이듬해인 에이로쿠 2년(1559년) 3월, 가게토라가 에치고를 떠나 자리를 비운 때에 다카나시 마사요리의 본성·나카노 성이 다케다측의 고사카 마사노부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가게토라가 시나노에 출병하지 못하는 시기를 노려가며 하루노부는 차츰 젠코지 일대를 차지해가고 있었다. 에이로쿠 2년(1559년) 5월, 가게토라는 전년에 했던 약속대로 교토로 상경해서 오기마치 천황과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한다. 가게토라는 그때 요시테루로부터 관령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된다.(우에스기의 칠면허七免許). 《후감》은 《간토간레이기(關東管領記)》, 《간토병란기(關東兵亂記)》(소슈병란기相州兵亂記), 《가스가 산 일기(春日山日記)》(우에스기군기上杉軍記) 등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뽑아 기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내리(內裏) 수리에 필요한 자금을 바쳤다고도 하나, 조정의 기록인 《어탕전상일기(御湯殿上日記)》 에이로쿠 3년(1560년) 6월 18일조에 "에치고의 나가오(가게토라)가 내리(內裡) 수리의 임무를 청했다"는 기술만 있을 뿐, 기록에 따라 시점이나 내용에 차이를 보인다. 가게토라와 쇼군 요시테루의 관계는 친밀했지만, 이 즈음에 요시테루가 가신 오다치 하루미쓰(大舘晴光)를 보내 나가오 가게토라,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이 세사람이 화친해서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세력을 몰아 내주기를 바랐지만, 세 사람의 생각 차이가 심해 실현되지 못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음력 3월, 엣추의 시나 야스타네(椎名康胤)가 진보 나가모토(神保長職)의 공격을 받아서 가게토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가게토라는 처음으로 엣추로 출진하여 곧바로 나가모토의 거성 도야마 성을 함락시킨다. 나아가 나가모토가 달아난 마스 산성(増山城)까지 함락시키고 야스타네를 구원했다. 그 해 5월에는 마침내 호조 우지야스를 토벌하기 위해 에치고에서 간토로 출진해 미쿠니 고개(三国峠)를 넘고, 고즈케 국으로 들어간 가게토라는 오가와(小川)·나구루미(名胡桃)·묘간(明間)·누마타(沼田)·이와시타(岩下)·시라이(白井)·나와(那波)·우마바야시(・厩橋) 등 호조측의 여러 성들을 차례대로 공략하고, 우마야바시 성을 간토에서의 거점으로 삼아 이곳에서 한 해를 보낸다. 앞서 간토의 여러 무장들에게 고호조씨 토벌을 외치며 참전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띄운 적도 있었기에, 가게토라의 공세를 지켜본 간토의 여러 무장들은 차례대로 가게토라에게로 몰려왔고 군사의 수는 나날이 늘어났다. 가게토라는 에이로쿠 4년(1561년)이 되자마자 군을 인솔하여 고즈케 국에서 무사시 국으로 진격, 후카야(深谷)·시노부(忍)·하뉴(羽生) 등의 성을 차례대로 차지하고, 우지야스의 거점이었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목표로 사가미 국까지 침공해 2월에는 가마쿠라를 함락시켰다. 우지야스는 가게토라를 상대로 야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사가미의 오다와라 성이나 다마나와 성(玉縄城), 무사시의 다키 산성(滝山城)이나 가와고에 성(河越城) 등으로 물러나 농성을 벌였다. 3월에 가게토라는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끼고 우쓰노미야 히로쓰나(宇都宮広綱), 사타케 요시아키(佐竹義昭), 오야마 히데쓰나(小山秀綱), 사토미 요시히로(里見義弘), 오다 우지하루(小田氏治), 나스 스케타네(那須資胤), 오타 스케마사(太田資正), 미타 쓰나히데(三田綱秀), 나리타 나가야스(成田長泰) 등의 옛 우에스기 가신들을 중심으로 한 10만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오다와라 성 전투). 또 오다와라로 향하는 도중에 간토 구보(關東公方)의 거처로서 당시 간토의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던 고가 고쇼(古河御所)를 제압하고, 고호조씨에 의해 간토 구보로 옹립되었던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義氏)를 내쫓은 뒤 후 아시카가 후지우지(足利藤氏)를 대신 고가 고쇼로 맞아들였다. 전투에서 오다와라 성의 연지문(蓮池門)으로 돌입하는 등의 공세를 펼쳐 칩거 상태의 우지야스를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고 있던 다케다 신겐이 가와나카지마에서 군사행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이며 가게토라의 배후를 견제해왔고, 가게토라가 간토에서 우지야스와 싸우는 동안 실제로 가와나카지마에 가이쓰 성(海津城)을 완성시키고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아 시나노 젠코지 일대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장기에 걸친 출병을 유지할 수 없었던 사타케 요시아키 등이 철병을 요구하며 무단으로 진을 퇴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호조씨의 본거지 오다와라 성까지 쳐들어갔음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한 채 1개월 후에 가마쿠라로 철퇴했다. 이후 에치고에 귀환하던 도중인 4월, 무사시 국의 중부 벌판을 제압하는 요충지인 마쓰 산성을 공격해서 호조측의 성주 우에다 도모나오(上田朝直)의 항전을 물리치고 성을 함락시킨다(마쓰 산성 전투). 마쓰 산성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쇼쇼(城将)로 남겨두고, 우마야바시 성에는 죠다이(城代)로 의동생 나가오 가네타다(長尾謙忠)를 두고 귀국했다. 가게토라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요청으로 가마쿠라부(鎌倉府)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에이로쿠 4년(1561년) 윤3월 16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씨(山內上杉氏)의 가독과 간토간레이직을 상속받아 이름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로 바꾼다. 원래 우에스기 집안은 쇼군 집안인 아시카가 종가의 외척으로 명문 지위에 있었고, 간토간레이직은 그러한 인연 덕분에 대대로 우에스기 집안이 맡아온 직무였다. 나가오 집안은 우에스기 집안의 가신인 데다 우에스기 집안의 본성이 후지와라 씨인데 비해 나가오 집안은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였다. 우에스기와는 본래 성도 다른 데다 지위도 우에스기의 가신에 불과했던 나가오 집안의 가게토라가 우에스기 집안의 가명을 이어받기에 이른 배경에는 평소부터 우에스기 집안에 양자를 들이려 했던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예전 우에스기 집안에서 양자를 들인 적이 있는 사타케 집안으로부터 양자를 들여오는 것을 거절당하여 고뇌하던 끝에 에치고의 실력자인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잇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다만 《번한보(藩翰譜)》에는 마사토라 자신이 우에스기 요리나리(上杉頼成)의 남자쪽 자손이라는 기술이 있다. 《오닌무감(應仁武鑑)》이나 《하기와라 가보안(萩原家譜案)》에도, 우에스기 요리나리의 아들이 나가오 후지카게(長尾藤景)로 나가오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 취지가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계도에서는 우에스기 집안에서 양자를 맞이한 나가오 집안은 시모우사(下総)로 분가한 나가오 집안이지 에치고 나가오 집안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계도가 대부분(가게타메景爲 혹은 가게요시景能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실제 혈통은 이어져 있지 않아도 나가오 집안도 사타케 집안처럼 우에스기 출신의 양자를 맞이한 가계가 되는 이 무렵부터 다케다 세력은 시나노 북부를 침공해오고 있었다. 《고료군칸》에 따르면 간토로 귀국한 뒤인 에이로쿠 4년(1561년) 8월, 마사토라는 1만 8천의 군사를 인솔해 가와나카지마로 출진한다(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때 마사토라는 마바리대(荷駄隊)와 군사 5천을 젠코지에 남겨두고 1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다케다 영내에 깊숙이 침공하여, 사이조 산(妻女山)에 포진했다. 이때 가와나카지마에서 다케다 군과의 치열한 결전을 벌여, 다케다 군의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모로즈미 도라사다(両角虎定)·하쓰시카노 겐고로(初鹿野源五郞)·사에구사 모리나오(三枝守直) 등의 많은 적장을 전사시키고 총대장 신겐도 겐신과의 1대 1 대결에서 부상을 입는 등, 다케다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하지만 우에스기 군의 피해도 커 사실상 전투의 소득은 없었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계기로 시나노 북부를 둘러싼 다케다와 우에스기의 전쟁은 수습되었고, 에이로쿠 말년에는 양자간의 사이를 비롯한 도고쿠 및 기나이의 정세가 크게 바뀌게 된다. 11월에 다케다는 니시우에노(西上野) 침공을 개시했고, 호조 우지야스도 간토에서 다케다와 협조해 반격을 개시하여 마사토라에게 빼앗겼던 무사시 국의 마쓰 산성을 탈환하고자 했다. 이에 마사토라는 11월에 다시 간토로 출진하여 무사시 국 북부에서 우지야스와 겨룬다(이쿠노 산의 전투). 그러나 가와나카지마에서 큰 손해를 입은 영향 탓인지 패퇴하고 말았다(내각문고 소장·오바타 가 문서). 다만 이 전투에서 마사토라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쿠노 산의 전투에서는 졌지만, 마쓰 산성을 공격하는 고호조군을 철퇴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 뒤 마사토라는 고가 고쇼 부근에서 잠시 물러났다(고노에씨 서신近衛氏書状). 전투의 결과 나리타 나가야스나 사노 마사쓰나(佐野昌綱)를 비롯한 무사시 국의 동족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고호조측에 항복해 버렸다. 마사토라는 자신을 배반한 마사쓰나를 다시 복종시키기 위해 시모스케(下野)의 가라자와 산성(唐沢山城)을 공격하지만, 간토 제일의 산성이라 불릴 정도로 난공불락이었던 이 성을 공략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후 마사토라는 가라사와 산성을 두고 마사쓰나와 몇 번이나 공방전을 펼치게 된다(가라자와 산성 전투). 12월, 마사토라는 쇼군 요시테루의 이름을 받아 데루토라(輝虎)라고 개명한다. 그는 에치고에 돌아가지 않고 고즈케의 우마야바시 성에서 해를 보냈다. 간토의 전선은 당초 대군을 일으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는 등 데루토라가 우세했지만, 다케다와 고호조 양측으로부터 연달아 공격받으면서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에이로쿠 4년에는 여태껏 신겐의 고즈케 국 침공에 맞서 항전을 벌여왔던 미노와 성(箕輪城)의 성주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가 병사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겐은 고즈케 국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 동시에 호조 우지야스가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어 마쓰 산성을 탈환하는 등 북쪽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이에 간토의 여러 무장들은 데루토라가 간토로 출병해 오면 우에스기에 항복하고 따를 뜻을 보였다가도, 데루토라가 에치고 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다시 고호조측으로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신겐과 동맹을 맺어 간토로 세력을 늘려가는 우지야스에 맞서 데루토라는 아와 국의 사토미 요시타카(里見義堯) · 요시히로(義弘)와 동맹을 맺었다. 에이로쿠 5년(1562년), 고즈케의 다테바야시 성(館林城) 성주였던 아카이 씨(赤井氏)를 멸망시키지만, 사노 마사쓰나가 농성하는 가라자와 산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7월에는 엣추 국으로 출진하여 시이나 야스타네를 압박하던 진보 나가모토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나가모토는 데루토라가 에치고로 돌아간 뒤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데루토라는 9월에 다시 엣추 국으로 돌아와 나가모토를 항복시켰다. 그런데 간토를 비워둔 사이 무사시 국의 우에스기측 거점이었던 마쓰 산성이 재차 고호조측의 공격을 받았다. 신겐의 원군 5만까지 가세하여 대병력을 이룬 이 연합군에 비해 마쓰 산성의 우에스기 군세는 몹시 적은 병력이었다. 이미 에치고 국에서 간토로 가는 국경이었던 미쿠니 고개는 폭설로 봉쇄되어 있었음에도 데루토라는 마쓰 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쌓인 눈들을 뚫고 고개를 넘어 12월에 고즈케 국의 누마타 성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군사를 모아 구원에 나섰지만, 간발의 차이로 에이로쿠 6년(1563년) 2월에 마쓰 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반격에 나선 데루토라는 무사시로 쳐들어가서 오타 도모오키(小田朝興)가 지키고 있던 기사이 성(騎西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도모오키의 형으로 무사시 시노부 성주 나리타 나가야스를 항복시킨다. 그리고 고즈케로 가서 4월에 가라자와 산성을 공격, 사노 마사쓰나의 항복을 받아낸다. 오야마 히데쓰나가 지키고 있던 시모스케의 오야마 성(小山城)을 공격하고, 나아가 시모우사 국까지 진출하여 히데쓰나의 동생인 유키 성(結城城) 성주 유키 하루토모(結城晴朝)를 복속시키고 간토의 여러 성들을 차례차례 공략해 나갔다. 또한 이 해에 다케다와 고호조의 연합군에게 고즈케의 우마바야시 성을 일시 빼앗겼으나 다시 탈환하여 호조 다카히로(北条高広)를 쇼다이(城代)로 앉혔다. 윤12월에 고즈케의 와다 성(和田城)을 공격한 뒤, 그 해도 똑같이 우마바야시 성에서 지샜다. 에이로쿠 7년(1564년) 히타치 국에 들어간 데루토라는 1월에 오타 우지하루의 거성 오타 성(小田城)을 공략하였다. 2월에는 다시 데루토라에게 반역한 사노 마사쓰나를 항복시키기 위해, 시모스케 국으로 출진해 가라자와 산성을 공격했다. 이 때의 전투는 총10회에 이르는 가라자와 산성의 공방전 가운데서도 최대의 격전이었다. 데루토라의 총공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항전하던 마사쓰나는 결국 사타케 요시아키나 우쓰노미야 히로쓰나의 의견에 따라 항복했고, 데루토라는 요시아키나 히로쓰나에게 마사쓰나의 목숨은 구해주겠다고 허락했다. 3월에 고즈케 국의 와다 성을 공격하려다 다케다군이 시나노 국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에치고로 돌아와야 했다. 에이로쿠 7년(1564년) 4월, 다케다 신겐과 손잡고 에치고로 쳐들어온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를 격파하였다. 그 사이 신겐에게 시나노 국 미즈우치 군의 노지리 성(野尻城)을 빼앗기기도 했으나 곧 탈환했고, 8월에는 신겐과 다시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다(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그러나 신겐이 본진을 시오자키 성에 두고 데루토라와의 결전을 피했기 때문에, 60일에 이르는 대치 끝에 에치고로 철수했고, 끝내 결판을 내지 못한 채 다섯 차례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끝이 났다(이후 데루토라와 신겐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데루토라는 이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시나노 슈고를 겸한 신겐의 사명이기도 했던 시나노 통일을 좌절시켜, 신겐의 에치고 침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토적으로는 시나노의 북부 일부만을 장악, 무라카미 가문과 다카나시 가문 등의 옛 영지는 회복할 수 없었다. 10월, 다시 고호조씨에 가담한 사노 마사쓰나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인질을 데리고 귀국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3월, 간토 중부의 요충지 요충·세키야도 성(関宿城)이 호조 우지야스의 공격을 받았다(제1차 세키야도 전투). 우지야스는 이와쓰키 성(岩付城)이나 에도 성(江戸城)을 거점으로 도네 강(利根川)의 수계 등 간토에서의 수운 요충지인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애썼다. 데루토라는 세키야도 성주 야나다 하루스케(簗田晴助)를 구원하기 위해 시모우사 국에 침공,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 사타케 요시아키의 적남)도 세키야도 성에 원군을 보냈다. 때문에 우지야스는 공성전을 중지하고 데루토라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물러났다. 6월에 신겐은 다시 고즈케 서부에 대한 공세를 펼쳐 우에스기측의 구라가노 나오유키(倉賀野尚行)가 지키던 구라가노 성을 공략했다. 신겐의 공세를 막기 위해 데루토라는 9월에 대군을 인솔해 다케다군의 고즈케의 거점·와다 성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이 해 2월에는 에치젠의 슈고·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가 잇코잇키(一向一揆) 전투로 고전하면서 데루토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온다. 게다가 5월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미요시 요시쓰구(三好義繼)·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의 모반으로 살해된다(에이로쿠의 변). 에이로쿠 9년(1566년), 데루토라는 히타치 국으로 출병, 다시 오타 성에 들어온 오다 우지하루를 항복시키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걸친다. 또한 데루토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아와의 사토미씨가 고호조씨의 공세에 몰리자 이를 구원하고자 시모우사 국까지 깊숙히 침투해, 호조씨를 따르던 지바 씨(千葉氏)의 거점 우스이 성(臼井城)까지 바싹 쳐들어갔다. 하지만 성 자체는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고도 하라 다네사다(原胤貞)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은 참모 시라이 뉴도 세이잔(白井入道淨三)의 지략으로 결과적으로는 철퇴해야 했다(우스이 성 전투). 우스이 성 공략에 실패한 영향으로 데루토라에게 항복했거나 가담했던 간토의 호족들이 차례차례 고호조씨에게 붙어버렸다. 9월에는 고즈케 가네야마 성(金山城)의 성주 유라 나리시게(由良成繁)가 데루토라를 저버리고 돌아섰다. 같은 달에는 서부 고즈케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미노와 성이 신겐의 공격으로 함락되고(성주 나가노 나리모리는 할복), 서부 고즈케 전역에 다케다 세력이 성장했다. 간토에서는 호조 우지야스·다케다 신겐의 두 세력과 동시에 싸우게 되어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데루토라는 간토 진출을 목표로 하는 히타치의 사타케씨와도 대립하게 된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데루토라는 사노 마사쓰나를 항복시키기 위해 다시 가라자와 산성을 공격했고, 한 번 격퇴당하기도 했지만 다시 공세를 펼쳐 3월에 마사쓰나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우마야바시 성의 쇼다이를 맡고 있던 우에스기 집안의 가신 기타죠 다카히로마저 고호조씨와 밀통해 모반을 일으킨다. 데루토라는 4월에 다카히로를 물리치고 우마야바시 성을 탈환해 고즈케에서의 우에스기측의 거점을 다시 수중에 넣어 열세의 만회를 도모했다. 이때 데루토라는 고즈케·무사시·히타치·시모스케·시모우사 등을 전전했지만, 간토에서 그의 영토는 주로 동부 고즈케에 머물러 있었다(단 그가 사망할 당시, 고즈케·시모스케·히타치의 호족 일부는 우에스기측). 에이로쿠 11년(1568년) 엣추의 잇코잇키와 시이나 야스타네가 다케다 신겐과 내통하고 있는 엣추를 제압하기 위해 엣추 마쓰쿠라 성(松倉城), 엣추 모리야마 성(守山城)을 공격했지만, 음력 5월 신겐과 내통한 중신 혼조 시게나가(本庄繁長)의 모반 때문에 에치고로 돌아간다. 음력 11월, 시게나가의 모반을 진압, 12월, 다케다과 단교한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구원을 요청한다. 12월에는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의 중개로 혼조 시게나가의 적자 혼조 아키나가(本庄顕長)를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해서 시게나가의 귀국을 허락한다. 1569년 음력 3월, 다케다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데루토라는 호조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월상동맹(越相同盟)). 1570년 우지야스의 7번째 아들로 있는 호조 우지히데를 양자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우지히데가 맘에 들어 자신의 이름이었던 가게토라라는 이름을 주는가 하면 일족으로서 후대했다고 한다. 12월에는 법명을 겐신(謙信)으로 정한다. 1571년 우지야스가 죽고, 대를 이은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는 우에스기와의 동맹을 파기, 다케다 신겐과 다시 화친했기 때문에, 양 군대는 도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8월, 북국(北国)으로 공격 방향을 돌려 엣추의 잇코잇키세력으로부터 도야마 성을 빼앗는다. 11월, 신겐과 교전상황에 들어간다.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제의를 받는다. 그 후 엣추로 출진하지만, 신겐과 내통 반란을 일으킨 잇코잇키에 괴로워하며, 연말까지 잇코잇키와 싸움끝에 그들을 제압한다. 1573년 숙적 다케다 신겐이 병사하고 다케다씨의 위협이 수그러들자 엣추의 과반을 제압한다. 같은 해 우지마사가 고즈케를 침공하자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1574년 간토으로 출진 가나야마 산성, 기사이 성(騎西城), 하뉴 성(羽生城) 등 관동의 여러성을 차례차례 공략한다. 연말에는 삭발을 하고 호인다이오쇼(法印大和尚)를 맡는다. 1575년 1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단조쇼히쓰을 양도한다. 덴쇼 4년(1576년), 모리씨 아래서 몸을 의지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반노부나가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고, 5월 무렵부터 요시아키의 중개로 가이의 다케다 씨와 사가미의 고호조씨와의 고소에쓰 잇카(甲相越一和)가 시도되었다. 이 무렵 겐신은 노부나가와의 싸움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혼간지(本願寺)의 겐뇨(顕如)와 강화를 맺었고 이로써 노부나가와의 동맹도 깨졌다. 이미 노부나가는 덴쇼 3년에 혼간지를 치고 나아가 에치젠까지 침공했으므로, 겐뇨와 에치젠의 일향종 승도들은 겐신에게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겐뇨는 겐신을 괴롭혀온 잇코잇키의 지도자이기도 했기에, 이로써 겐신이 교토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고소에쓰 잇카는 성립되지 못했지만,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와도 화친을 하고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등, 새롭게 겐신을 맹주로 하는 반(反)노부나가 포위망이 구축된다. 10월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노부나가 토벌을 요구받고 상경을 서둘렀다(덧붙여 이 시기에 오다 노부나가는 이미 조정으로부터 나이다이진을 거쳐 고다이진으로까지 임명된 상태로 조정의 입장에서 '역적'에 대한 토벌이라기보다는 단지 힘이 쇠한 아시카가 쇼군가, 무로마치 막부 내의 무사들끼리의 사적인 분쟁일 뿐이었다). 쇼군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상경하기 한 달 전인 9월, 겐신은 이름뿐인 간레이 하타케야마씨(畠山氏)가 슈고로 있던 엣추를 공격해 잇코잇키 지배 아래 놓여있던 진보 우지하루(神保氏張)의 도야마 성, 모리야마 성 등을 차례대로 접수하고, 엣추의 슈고다이 시이나 야스타네의 하스누마 성(蓮沼城)을 함락시키고 야스타네를 죽임으로서 엣추를 평정한다. 상경을 서두른 겐신의 다음 목적은 노토(能登)로, 노토의 거점으로 하타케야마 가문의 거성이었던 나나오 성(七尾城)을 제압하는 것은 군세를 에치고에서 교토로 진군할 때 병참선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당시 나나오 성의 성주는 센고쿠 다이묘 하타케야마씨의 어린 당주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畠山春王丸)였으나 실권은 중신인 조 쓰구쓰라(長續連) · 쓰나쓰라(綱連) 부자였다. 나나오 성 내에서는 노부나가를 따르는 쓰구쓰라 부자와 겐신을 의지하려는 유사 쓰구미쓰(遊佐続光) 사이의 주도권 싸움으로 내부 대립이 있었다. 겐신은 먼저 화평한 뒤에 나나오 성을 접수하고자 했지만, 하타케야마측은 회의 끝에 결사항전을 결정했다. 덴쇼 4년 11월부터 겐신은 노토로 출정해 구마키 성(熊木城), 아나미즈 성(穴水城), 가부토 산성(甲山城), 쇼인카와시리 성(正院川尻城), 도기 성(富来城) 등 노토의 주요 성들을 차례대로 공략하며 나나오 성을 포위했다(제1차 나나오 성 전투). 그러나 나나오 성은 세키도 산(石動山) 산줄기를 따라 북쪽의 마쓰오 산(松尾山) 위에 쌓아올린 난공불락의 거성으로 힘으로 밀어붙이기는 곤란했고, 우에스기군은 공격을 위해 옆에 세키도 산성을 쌓기도 했지만 공격하다 지쳐 해를 넘겼다. 덴쇼 5년(1577년) 간토에서 호조 우지마사가 에치고, 고즈케를 침공했기 때문에 가스가 산성으로 일시 철퇴한다. 이 사이 하타케야마 군에 의해 우에스기 군이 전년에 빼앗았던 노토의 여러 성을 함락당하는 가운데, 아시카가 요시아키나 모리 데루모토로부터 속히 교토로 올 것을 재촉하는 밀서가 잇따랐다. 반전을 결의한 겐신은 윤7월 다시 노토에 침공해 여러 성들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나오 성을 다시 포위한다(제2차 나나오성의 싸움). 때마침 성내에 역병이 돌아서 꼭두각시 고쿠시였던 하타케야마 하루오마루까지도 병사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기운이 만연하고 있는 가운데 수비대장이었던 조 쓰구쓰라는 오다 노부나가의 원군에 희망을 걸면서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9월 15일, 전쟁에 염증을 느낀 유사 쓰구미쓰가 겐신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켜,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쓰구쓰라는 살해되고 마침내 나나오 성은 함락되었다. 이틀 뒤인 17일에는 가가 국의 국경에 있던 스에모리 성(末森城)까지 함락시키면서 노토도 완전히 우에스기의 지배하로 들어온다. 이때 겐신은 명문인 하타케야마 집안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유력한 고쿠진을 단속한 다음 하타케야마 요시하루(畠山義春)를 노토의 고쿠시로 세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또한 전투 뒤에 하타케야마 요시타카(畠山義隆)의 아들을 양자로 한다고 적힌 겐신의 편지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 말한 것은 하루오마루 자신이지만 실제로는 하타케야마 요시쓰구(畠山義続)의 아들이기도 하다(또한 하루오마루에게 남동생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나 정설은 아니다). 겐신이 나나오 성을 공격하고 있던 덴쇼 5년(1577년), 조 쓰구쓰라의 원군 요청을 받은 노부나가는 나나오 성을 구원하기 위한 군세의 파견을 결정하고 겐신과의 전투를 단행했다. 시바타 가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등 3만 여 명의 군세가 8월에 에치젠 기타노쇼 성(北ノ庄城)에 모였고, 8일에 에치젠을 출발해 나나오 성으로 향했다. 가가 국(加賀國)에 들어 서서 잇키잇큐 세력과 교전하면서 진군하는 도중 총대장의 가쓰이에와 의견이 맞지 않던 히데요시가 자군을 먼저 빼버리는 등 보조에 혼선이 생기고 있었다. 9월 18일, 가쓰이에가 인솔하는 오다군은 데토리 강(手取川)을 건너 미즈시마에 진을 쳤지만, 이미 나나오 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겐신은 나나오 성으로 오는 오다 군을 쫓아 공격하기 위해 일찌감치, 9월 17일에 스에모리 성을 함락시키고 음력 9월 18일에는 마쓰나미 성(松波城)까지 쳐서 함락시킨 상태였던 것이다. 오다군이 데토리 강을 넘어 가가 북부에 침입한 사실을 알자마자 겐신은 대군을 인솔해 단번에 남하했고, 가가 국에 들어와 가호쿠 군(河北郡)과 이시카와 군(石川郡)을 눈깜짝할 사이에 제압하고서 마쓰토 성(松任城)까지 진출했다. 9월 23일에야 오다군은 겐신이 이미 나나오 성을 함락시켰다는 것과 겐신이 이끄는 군대가 오다군과는 지척의 거리인 마쓰토 성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고, 당황한 가쓰이에는 철퇴 명령을 내렸지만, 이에 맞선 우에스기군은 23일 밤, 데토리 강을 건너느라 허둥대던 오다군을 추격해 격파한다(데토리가와 전투). 이 싸움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덴쇼 5년(1577년) 12월 18일, 겐신은 가스가 산성으로 귀환하고, 12월 23일에는 다음 원정을 위한 대규모 동원령을 포고했다. 덴쇼 6년(1578년) 3월 15일에 원정을 개시할 예정이었지만, 예정일을 6일 앞둔 3월 9일, 겐신은 원정 준비 중 가스가 산성에서 쓰러져, 3월 13일 미시(오후 2시)에 급사하고 만다. 향년 49세. 쓰러지고 난 뒤의 혼수상태와 관련해 겐신의 사인은 뇌일혈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겐신의 유해는 갑옷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여 항아리 안에 넣고 옻칠로 밀봉했다. 이 항아리는 우에스기 집안이 요네자와(米沢)로 옮겨간 뒤에도 요네자와 성 혼마루 한쪽에 안치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역대 번주가 잠든 어묘(御廟)로 옮겨졌다. 양자로 삼았던 가게카쓰·가게토라 둘 중 어느 쪽을 후계로 삼을지를 분명히 발표하지 않아, 사후 미타테의 난이 발발하여 혈족끼리의 격렬한 내란으로 우에스기의 세력은 크게 쇠약해지고 말았다. 미완에 그친 원정에서 그가 상경해 오다 노부나가를 타도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간토를 재침공하려 했는지는 불명확하다(최근에는 간토 침공설이 유력하다.). 2007년 4월 4일에 방송되었던 일본 NHK의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その時歴史が動いた)」에서는 앞서의 두 설을 절충해 "우선 간토를 침공한 뒤에 노부나가를 타도하기 위해 교토로 상경"하려 했다는 설이 제시되기도 했다. 겐신은 살아 생전 여자에 가까이 가본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체격이 좋은 여자라는 설이 있다. 우에스기 겐신을 모셨던 무장들로, 특히 평가가 높은 25명을 선출되었던 것으로 1669년 막부에 제출된 우에스기 장자서(上杉將士書)에 게재되어 있다. 인디언 서머 인디언 서머()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을 일컫는 말로,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일주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종종 서리가 내린 후에도 이런 현상이 생긴다. 비유적으로 절망 가운데에 뜻하지 않는 희망적인 것을 뜻하는 데에 쓰인다. 북미권에서 두 세기 이상 쓰인 말이지만 그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인디안 썸머 《인디안 썸머》는 2001년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이다. 제목은 인디언 서머에서 따왔으며, 감독과 각본은 노효정이 맡았고, 박신양과 이미연이 주연하였다. 2002년 싸이더스에서 제작하고 아이 픽쳐스가 제공한 법정 멜로 드라마 영화이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한 여인과, 여인의 국선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런 법정 드라마이다. 남편 성종훈을 살해한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피고인 이신영(이미연)은 마치 죽음을 기다린 모습이 보이며, 자신을 위한 모든 변호를 거부한다. 이런 그녀의 국선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서준하(박신양)는 그녀가 변호를 거부하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항소심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항소심 재판에서 신영을 본 준하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보게 되고, 출세를 위한 국외 연수마저 포기 한 채 그녀의 재판에 매달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쓴다. 준하는 그녀와 흔적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항소심에서 신영은 무죄판결을 받고, 그녀는 그렇게 교도소를 나오게 된다. 얼마 후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나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신영의 항소심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준하는 위조 여권을 만들어 신영을 구하려 하지만, 신영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준하를 자신의 변호인에서 그만두고, 변호인 교체 후 스스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신영은 최종법정에서 준하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깃코만 깃코만 주식회사(キッコーマン株式会社)는 1917년에 설립한 일본의 식품 회사이다. 지바현 노다 시에 본사가 있다. 도 (행정 구역) 도(道)는 행정 구역의 이름이다. 중국에서 유래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에서 도를 행정구역으로 쓰고 있다. 도는 가장 상위의 행정구역에 부여되어 왔으며, 지역 및 시대에 따라서는 차이도 존재한다. 영어로는 circuit로 번역되나, 이는 유럽의 순회 재판소, 선교구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현재 한국에서는 province로, 일본의 도는 현과 마찬가지로 prefecture로 번역한다. 도는 처음에 중국에서 한나라 때 이민족의 거주지역에 붙여진 명칭이었으나, 당나라 때에는 10개의 도가 최고행정구역으로 설정되었고, 도 밑에 주(州)·부(府) 등을 두었다. 그 후 원나라 때 성(省)이 최고행정구역으로 설정되면서 도는 성의 하위 행정구역이이자 주·부의 상위 행정구역으로 중간 행정계층이 되었고, 명나라·청나라 때에도 이어졌다. 도는 1928년 중화민국에 의해 폐지되어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부여에서 사출도(四出道)로 그 이름이 나오며, 수도를 제외한 전국을 네 부분으로 나눈 것이었다. 그 후 고려 성종 때 광역 행정구역으로 10도를 두면서 다시 도 명칭이 생겼고, 현종 때 전국을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와 동계·북계로 나누어 5도 양계로 정비했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도제는 도와 동격인 목(牧)이 존재하고 하부 행정구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등 불완전한 것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때 지방 최고행정구역으로서의 도제를 실시하고 하위 행정구역을 두고 모든 하위 행정구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도제를 확립했다. 조선 시대의 도제는 전국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의 팔도로 나누어 대략적으로 지금과 유사한 경계와 명칭이 정해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광역행정구역의 기원이 되었다. 8도는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었다가 1년 여 만에 도제를 부활했으며, 기존의 충청도·전라도·경상도·함경도·평안도는 남북으로 나누어 전국을 13도로 구분했다. 13도제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지다가 남북 분단 후 대한민국 쪽에는 전라남도에서 제주도를 분리·신설하여 9도가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쪽에는 5도와 경기도·강원도의 일부가 포함되었으나, 이후 황해도를 남북으로 분리하고 일부 지역 경계를 조정하여 대한민국의 강원도와 다른 강원도를 추가하고 자강도·량강도를 신설, 9도가 되어 남북한 모두 9개 씩의 도가 존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제주도를 2006년 자치권의 범위를 확대한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자강도, 량강도의 9도가 있다. 일본에서는 도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7세기 덴무 천황 때 수도와 주변을 5국, 그 외 전국을 산천과 바다를 경계로 7도로 나눈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를 고키시치도()라 불렀다. 고키시치도의 7도 중 대륙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규슈 지역의 사이카이도()를 제외하면 행정구역이 설정된 것은 아니고, 이후 번을 중심으로 한 봉건 제후들의 세분화된 통치가 이어졌으나, 19세기까지 일본의 지역 구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69년 에조치를 홋카이도()로 개명하면서 도가 하나 추가되어 고키하치도()라 부르게 되다가, 1871년 폐번치현으로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현()으로 정비하면서 고키하치도를 병행하여 사용하다가 1885년 고키하치도를 폐지하면서 도가 사라졌으나, 1886년 구 홋카이도 지역을 관할하는 홋카이도청이 설치되어 홋카이도는 부활하여 현재에 이른다. 오늘날 일본의 도는 홋카이도에만 공식적으로 그 명칭이 남아 있으나, 도카이도()·호쿠리쿠도() 등의 이름은 지역 구분 등에 종종 쓰이고 있다. 도쿄도의 '도'는 로 표기하며, 별도의 행정구역이다. (도도부현, 참조) 조선 병탄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역에 대해서는 13도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이 도는 일본의 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갈릴레이 (동음이의) 갈릴레이(Galilei)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발트 지방 발트 지방은 북유럽의 발트해 동쪽의 연안 지방을 말한다. 발트 3국이 형성되어 있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로마 제국의 지방주인 히스파니아 울테리오(현재의 스페인)의 수도 코르두바에서 귀족 마르쿠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헬비아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이모를 따라 로마에서 이모에게 업혀 성장했다. 아버지 권유에 따라 정치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다. 이 시기에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 아탈로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소티온에게서 철학을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무대에 나설 나이가 되었을 때 심한 천식으로 인하여 당시 이집트 지방 지사를 하고 있던 이모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의 집에서 약 6년간 휴양 생활을 했다.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황제 칼리굴라와 충돌했다. 황제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변론 때문에 그만두었다. 41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조카딸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부적합한 환경에서 그는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 Consolationes〉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의 영향력 덕분에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신임 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Sextus Afranius Burrus) 등 강력한 친구 집단을 만들었고 훗날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되자 세네카와 부루스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들의 친구들은 게르마니아와 파르티아 국경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권을 장악했다. 네로는 세네카가 초안을 쓴 첫 대중연설에서 원로원에 자유를 주고 자유민과 여성의 영향력을 끝장내겠다고 약속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Agrippina the Younger)는 자기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그밖에도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네카와 부루스는 비록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 출신이었지만 로마 세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재정·법률의 개혁을 단행했고 노예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인 태도를 장려했다. 62년에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권력을 더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은퇴를 허락받고 남은 해 동안 매우 뛰어난 철학책 몇 권을 썼다. 65년에 세네카의 적들은 그가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자살을 명령받고 꿋꿋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플라톤, 퀴닉 학파, 에피쿠로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현자는 삶을 갖는 동안만 산다고 생각하지 않고, 삶이 필요한 동안만 산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인간은 육체에 구속되어 있지만 올바른 이성에 의해 인간답게 살아가며, 죽음으로써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난다. 철학이란 바로 이와 같은 선(善)을 추구하는 처세의 학문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로마 문학 사상 가장 패기 있는 독창적인 문호의 한 사람으로, 언제나 도의를 부르짖으며, 윤리 문제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매우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마음의 안정에 대하여> 등 편지의 형식을 빌려 위로의 말이나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한 생각을 쓴 것과 자연 과학론이나 도덕론,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주로 한 비극 10편 등이 있다. 그의 저작은 주로 철학적·윤리적, 때로는 자연과학적 에세이집과 친구 소(小)루킬리우스에게 보낸 <서간집>(63-65), 그리고 비극으로 대표되는 문학작품 등으로 대별된다. 에세이집에는 <노여움에 대해서> <행복론> 등 12편의 <대화>와 7권으로 된 <자연현상 연구>가 있다. <서간집>은 전20권 124통으로 인생의 제반 양상에 관한 스토아풍의 실천윤리에 대한 것이다. 비극작품으로는 9편이 있으며, 이것들이 현존하는 로마 작품의 전부이다. <헤라클레스> <트로이아의 여인들>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등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과 <오이디푸스> <오이타의 헤라클레스>와 같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 그리고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의 라틴어극도 있으며, 그 밖의 2편도 그리스 비극의 테마를 편성하여 만들어져 있다. 모두가 극심한 수사적 과장이나 묘사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그와 반대로 등장인물의 성격표현이나 심리적 일관성이 빈약하므로, 과연 극장에서의 상연을 의도해서 만들어졌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폼페이의 벽화 등에서 엿볼 수 있는 당시의 호화로운 극장의 묘사적 분위기와 합치하는 점도 있고, 혹은 세네카의 수사적 기교가 가득찬 대사 등이 그 당시의 취향에 부응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이후 고전극시대에 이르는 서구제국의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45)의 죽음에 즈음하여 지은 정치적 풍자시 <아포콜로킨토시스>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라틴 시화집>은 그의 단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걸걸중상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의 장수이자 고구려의 부흥을 이끈 지도자이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과 대야발 형제의 아버지이다. 대당 항쟁 때, 그는 속말말갈의 지도자 걸사비우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였으며, 측천무후로부터 진국공(震國公)에 봉작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대조영 등과 함께 발해 건국을 주도했으나 발해가 건국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에서 시조로 받드는 인물이다. 대중상의 출신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고구려의 장수로 전해진다. 그의 선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후에 고려로 귀순한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그를 시조로 하여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다.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이후 당나라는 거의 매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항상 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고구려의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간에 큰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고구려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고, 이때 권력 싸움에서 진 연개소문의 장자인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해왔다. 667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이듬해인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민을 여러 지역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여러곳으로 분산하여 끌고 갔는데, 걸걸중상 부자도 요서(遼西)의 영주(營州)로 끌려갔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이를 부인하며 이 시기에 걸걸중상 세력이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696년 거란의 가한 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걸걸중상 부자는 이 때를 틈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이후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로 이고 만주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활동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들을 달래고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말갈의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자 중랑장 섹구와 함께 거란족 출신의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를 보내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을 토벌하고, 탈출한 고구려 유민을 추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해고 대군의 공격을 받고 걸사비우와 함께 사망했다. 혹은 걸사비우 전사 이후 고구려 유민과 남은 말갈족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망 당시 그의 정확한 연령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7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된다. 고구려 유민들은 대중상과 걸사비우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계속 고구려 영토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군대들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추격군과 큰 전투를 치른다. (천문령 전투) 대조영은 이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다. 이후, 대조영은 도읍을 동모산(東牟山)으로 정하고 국호도 발해(渤海)로 하였다. 걸걸중상의 이름을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설과 논란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대씨·태씨 족보와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현대의 3자식(三字式) 이름과 대조영의 성씨에 맞춰서 대중상이라 하기도 하는데, 사서로 인정되지 않는 족보를 제외하면 모든 기록에서 이름이 걸걸중상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이다.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관계에 대해서 중국과 한국, 일본의 학자들이 여러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걸걸중상이 대조영과 무관한 사리라는 관명을 가진 거란인 호족이라는 학설,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부자 사이로, 고구려에 귀화 내지 복속된 말갈인이라는 학설, 《구당서》에서 걸걸중상은 대조영에게 동일인물로 둔갑되었고 이런 즉, 걸걸중상은 고구려 종족인 대조영의 말갈식 이름으로, 걸사비우의 말갈과 우호적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학설 등이 있다. 대한제국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大韓帝國 愛國歌)는 대한제국의 국가였다. 독일 제국의 해군 소속 음악가였던 프란츠 에케르트가 한국 민요 "바람이 분다"의 선율에 의거하여 작곡하였으며, 1902년에 국가가 되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국가를 작곡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이 곡은 금지곡이 되었고, 기미가요가 공식 국가가 되었다. 기미가요도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하였다. 1945년 한국이 독립하고 1948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각자 다른 노래를 대한민국의 국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선정하여 대한제국 애국가는 더이상 부르지 않게 되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몇 차례의 가사 변화가 있었다. 이 가사는 을사조약(1905)과 한일신협약(1907) 이전인 1902년에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작곡되었다. 이 노래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전에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 사람들 중에서 악보나 멜로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1925년 호놀룰루에 있는 한미클럽에서 새로이 악보를 작성하였다. 김정호 김정호(金正浩, 1804년~1864년)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이며, 호는 고산자(古山子) 이다. 황해도 토산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 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역사학연구소에서 저술한 《교실밖 국사여행》(사계절출판사)에서도 김정호가 답사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 조선은 중앙정부가 행정을 편리하게 하려고 지도와 지리지를 많이 저술하였으므로, 김정호는 기존 지리학 문헌들을 연구하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진 않았다.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신헌 등이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는지라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조지 불 조지 불( , 1815년 11월 2일~1864년 12월 8일)은 영국의 수학자, 논리학자이다. 논리대수인 불 대수를 창안해, 기호논리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조지 불은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주 링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를 제조하는 상인이었지만, 학구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교육에 관심이 많아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어학을 배웠다. 수학과 과학에 특히 관심이 있었던 그는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그러나, 조지 불의 비상한 수학 재능은 어린 시절에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조지 불은 빈민 자녀들을 위한 내셔널 스쿨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라틴어 ·그리스어를 독습하고 16세부터 4년 동안 국민학교의 보조 교원을 지냈고 20세 때부터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했다. 이후 P.S.M.de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J.L.라그랑주의 《해석역학》을 익힌 후 변분법(變分法)에 관한 하나의 발견에 도달하였고, 계속하여 불변식론(不變式論)을 연구하여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수학상의 업적으로는 1841년 처음으로 대수적 불변식론의 기초를 닦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를 《케임브리지 수학잡지》에 기고하여 많은 수학자를 알게 되었고, 대수학 전개의 중요한 일익을 맡은 영국학파 속에서 그 지위를 굳혀나갔다. 이후 1849년 퀸스칼리지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미분방정식과 계차(階差)방정식에 관해서도 큰 공헌을 했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의 창시와 논리대수(Boole 代數)의 전개였다. 논리 또는 추론을 수학적으로 다루려고 한 이 연구는 마침내 《논리와 확률의 수학적 기초를 이루는 사고(思考)의 법칙 연구 An investigation into the laws of thought on which are founded the mathematical theories of logic and probabilities》(1854)라는 불후의 노작(勞作)으로서 결실을 맺었다. 부인 역시 결혼 후 수학 저술을 했다.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아랍에미리트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은 서남아시아의 아라비아 반도 남동부에 페르시아만을 끼고 있는 나라로, 7개 토후국(아부다비 토후국, 두바이 토후국, 샤르자 토후국, 아지만 토후국, 움알쿠와인 토후국, 라스알카이마 토후국, 푸자이라 토후국)으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오만과 국경을 접한다. 수도는 아부다비로서, 이 나라의 정치, 산업, 문화의 중심지이다. 국내 최대 도시는 두바이이다. 이 나라는 걸프 협력 회의 창립 회원국이며, 아랍 연맹의 회원국으로, 국제 연합, 이슬람 회의 기구, 석유 수출국 기구, 세계 무역 기구에도 가입하였다. 아랍에미리트 연합국(Arab Emirates 聯合國, , , (아랍 酋長國 聯邦))은 아랍에미리트 연방(아랍 에미리트 聯邦), 아랍 토후국 연합(아랍 土侯國 聯合)이라고도 부르며, 약칭은 'UAE'이다. 이슬람 정착 이전 현재의 아랍에미리트 지역에는 아랍족들이 부족을 구성하며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가 지배할 때 이슬람이 확실히 정착되었으나 페르시아 만 건너 이란의 영향으로 시아파가 침투하였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지배했으나 17세기에 영국이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점차 이 지역을 보호령화시켰다. 그러나 번왕국들은 모두 국내 지배를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18세기까지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이 유럽 국가의 선박들을 자주 습격했기 때문에 해적 해안(海賊 海岸, Pirate Coast)이라고 불렀다. 1820년 1월 8일 영국과 아라비아 반도의 셰흐들 사이에 체결된 해상 조약에 따라 휴전 오만이 수립되었고 1853년에는 영국과의 항구적인 해상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1971년 12월 2일에 영국이 정권을 이양할 때 바레인과 카타르는 분리 독립했으나, 나머지 7개 번왕국은 연합을 결성하여 독립하였다. 북쪽은 페르시아 만에 접해 있다. 바다에 접해 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사막에 위치해 있으며, 건조한 사막 기후를 보이는 곳이다. 아랍에미리트는 세계적으로 석유를 사우디아라비아만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 지대이나, 페르시아 만 연안부는 평탄하고 염분이 많으며,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의 알아인 지방은 풍요로운 오아시스 지대이다. 북동부의 무산둠 반도 동부에는 남북 80km에 걸치는 아하다르 산맥이 있으며, 최고봉은 약 3,000m이다. 페르시아 만 연안의 해안선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바다는 멀리까지 수심이 얕고 먼 바다에는 많은 섬과 산호초가 떠 있다. 고온 건조한 사막 지대이다. 여름에는 50℃까지 올라간다. 아랍에미리트는 인구 구성 중 이주민의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로, 에미리트인은 전체 주민의 약 19%이다. 에미리트인 외의 아랍인과 이란인이 23%, 인도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인이 50%, 동남아시아 및 유럽 등의 이주민이 8%를 차지한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이지만, 영국으로부터 비교적 최근에 독립했고 외국출신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가 두루 쓰인다. 이슬람교가 국교이나 이주민을 중심으로 힌두교, 기독교 등이 신앙되고 있으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카타르, 오만과 함께 기독교회의 설립이 허용된 나라들 중 하나이다. 이슬람교 때문에 음주가 극히 제한돼 술은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한 호텔에서만 팔고 있다. 이슬람교 신자가 전체의 77%를 차지하며, 기독교가 10%이며, 그 밖의 종교는 10% 미만이다. 아랍에미리트는 7개 토후국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합 국가이다. 이 일곱 토후국들은 아부다비 토후국, 아지만 토후국, 두바이 토후국, 푸자이라 토후국, 라스알카이마 토후국, 샤르자 토후국, 움알쿠와인 토후국이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7개의 전제군주제 토후국(에미리트)이 연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체제이다. 7개의 각 토후국은 각 국가의 수장(국왕)이 직접 지배하며, 중앙 정부는 7개국 수장으로 구성된 연방최고회의에서 선출된 대통령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관례상 수도 아부다비 국왕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최대도시 두바이 국왕은 총리로 지명된다. 각 토후국은 연방정부의 장관을 추천할 수 있으며 치안, 과세 등 독자적인 행정을 운영한다. 외교, 군사, 통화, 우편 등 일부만 중앙정부에서 행사한다. 아랍에미리트의 정치 체제는 1971년 독립 당시의 아랍에미리트 헌법(Constitution of the United Arab Emirates)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여러 정치 조직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아랍어, 영어가 공용어이다. 현재 대통령은 칼리파 빈 자예드 알나하얀이고, 총리는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이다. 2008년 아랍에미리트의 국내총생산(GDP)는 2,621.5억달러, 1인당 GDP는 55,028달러이다. 2008년말 인구는 476.4만명이다. 2008년중 물가상승률은 12.26%이며 경상수지는 410.9억달러로 GDP의 15.7%를 차지한다.(IMF World Economic Outlook 참고) 아랍에미리트는 2016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8번째로 규모가 큰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동 지역에서 경제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이다. 현재 환율로 GDP가 36번째 규모이며,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이 54,607 달러이다. 이 나라는 1인당 구매력 40위이며, 인간 개발 지수도 아시아 대륙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며, 전 세계 기준으로 31위이다. 국제통화기금에서는 아랍에미리트를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두바이의 대중교통은 '도로교통국 (Roads and Transport Authority, RTA)'에 의해 관리된다. 최근에 RTA는 300 버스들을 독일의 MAN AG라는 회사로부터 사들였다 버스 시스템을 운영중이다. 이는 두바이 도시의 대두되고 있는 교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RTA는 두바이 지하철 체계를 개발하고 있다. 첫 번째 지하철 노선은 2009년 9월에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개발 중인 옐로 노선은 인공섬인 팜 아일랜드 (Palm Islands)을 통과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두바이가 새로운 통행료 징수 시스템을 2007년 7월에 개발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사리크(아랍어로 투명하고 매끄러움을 뜻한다)라 불린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통행료 부스가 없고 최신의 기술을 활용을 한다. 또한 차량들은 통행료 부스를 고속으로 통과할 수 있다. 이 부스를 지날 때마다 RFID 기술이 활용되어 AED 4가 운전사의 선불 계정으로부터 차감한다. 1985년에 두바이는 자국의 항공사 에미레이트 항공을 창립하였으며, 2007년에 이 항공사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성장하는 항공사 중에 하나가 되었다. 두바이에 거점을 두고 있는 에미레이트 항공은 세계적으로 큰 항공사 중 하나이며, 아부다비에 거점을 두고 있는 에티하드 항공은 아랍에미레이트에서 2번째로 큰 항공사이다. 1980년 6월에 대한민국과 정식으로 수교하였고, 대사관은 아부다비에 있고 총영사관은 두바이에 있다. 2009년 12월 27일 대한민국에게 원자력발전소를 발주했다. 한국인은 대사관 가족을 포함하여 약 3350명이 살고 있으며 인천국제공항에서 하루 1편의 두바이행(KE951) 대한항공과 하루 1편의 두바이행(EK323)에미레이트 항공, 아부다비행(EY875) 에티하드 항공 1편이 아랍에미리트로 취항한다. 그리고 최근 임종석비서실장과 접촉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과시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2018년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국빈 방문 하였다. 아랍에미리트는 일본과 대체적으로 우호적이며 아랍에미리트와 일본은 무역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이며, 미국, 이스라엘, 쿠웨이트, 그리고 쿠르드 자치 지역과도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카타르와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이란,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과는 적대적인 관계이다. 대한민국의 대학 목록 다음은 대한민국에 있는 대학 목록이다. 가야대학교 가천대학교 가톨릭관동대학교 가톨릭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강남대학교 강릉원주대학교 강원대학교 건국대학교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건양대학교 경기대학교 경남대학교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동대학교 경북대학교 경상대학교 경성대학교 경운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경일대학교 경주대학교 경찰대학 경희대학교 계명대학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신대학교 공군사관학교 공주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광신대학교 광운대학교 광주대학교 광주가톨릭대학교 광주과학기술원 광주교육대학교 광주여자대학교 국군간호사관학교 국민대학교 군산대학교 극동대학교 금강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김천대학교 꽃동네대학교 나사렛대학교 남부대학교 남서울대학교 단국대학교대구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대구교육대학교 대구예술대학교 대구한의대학교 대신대학교대전대학교 대전가톨릭대학교 대전신학대학교 대진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동덕여자대학교 동명대학교동서대학교 동신대학교 동아대학교 동양대학교 동의대학교 루터대학교 명지대학교 목원대학교 목포대학교 목포가톨릭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배재대학교 백석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 부산가톨릭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 부산장신대학교 삼육대학교 상명대학교 상지대학교 서강대학교 서경대학교 서울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서울장신대학교 서울한영대학교 서원대학교 선문대학교 성결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세명대학교 세종대학교 세한대학교 송원대학교수원대학교 수원가톨릭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순천대학교 순천향대학교 숭실대학교 신경대학교 신라대학교 신한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아주대학교 안동대학교 안양대학교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영남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영산대학교 영산선학대학교 예수대학교 예원예술대학교 용인대학교 우석대학교 우송대학교울산대학교 울산과학기술원 원광대학교 위덕대학교 유원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을지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인제대학교인천대학교 인천가톨릭대학교 인하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전주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 제주대학교 제주국제대학교 조선대학교 중부대학교 중앙대학교 중앙승가대학교 중원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 차의과학대학교 창신대학교 창원대학교 청운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당대학교 총신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충남대학교 충북대학교 침례신학대학교 칼빈대학교 케이씨대학교 평택대학교 포항공과대학교 한경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교원대학교 한국교통대학교 한국국제대학교 한국기술교육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한남대학교 한동대학교 한라대학교 한려대학교 한림대학교 한밭대학교 한서대학교 한성대학교 한세대학교 한신대학교 한양대학교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한일장신대학교 해군사관학교 협성대학교 호남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호원대학교 홍익대학교 가야대학교 가야대학교(加耶大學校, )는 경상북도 고령군과 경상남도 김해시에 캠퍼스를 둔 사립 대학교이다. 1993년 3월 13일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가야요업대학으로 설립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에 가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3년에 김해캠퍼스를 신설하고 대학 본부도 경상남도 김해시 삼계동으로 옮겨서 고령캠퍼스에는 자율전공학부와 행정대학원(사회복지학과)만 남아 있었다가 2012년에 김해시로 완전히 이전했다. 다음은 2018년 가야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단과대학은 구성되어 있지 않다. 기야대학교는 일반대학원 1개원, 특수대학원 3개원을 설립하여 석·박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가톨릭대학교(-大學校, )는 1855년에 개교한 대한민국의 천주교 계통 사립 대학으로, 한국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교이자 고등교육기관이다. 건학이념은 '인간존중의 대학'으로 1995년에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 3개의 교정으로 이루고 있다. 현재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가톨릭대학병원 서울성모병원을 포함 현재 대한민국 대학교에서 가장 많은 8개의 종합병원을 소유하고 있다.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에 성심교정이,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성의교정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성신교정으로 총 3개의 교정으로 운영 되고있다.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원주대학교(江陵原州大學校, )는 강원도 강릉시와 원주시에 소재한 대한민국의 국립 종합대학이다. 각각 1946년, 1967년 개교한 강릉사범학교와 원주간호고등기술학교를 모태를 두고 있는 강릉대학교와 원주대학이 2007년 3월에 통합하여, 2009년 3월 강릉원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영문 약칭은 GWNU이며, 국문 약칭으로는 강릉대(江陵大), 원주대(原州大) 혹은 릉대(陵大) 등이 쓰인다. 제163 학생군사교육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강원권 유일의 치과 대학 병원인 강릉원주대학교치과병원이 강릉시에, 강릉원주대학교부설유치원이 원주시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교육역량개발원, 평생교육원 등 35개의 부속시설과 인문학연구소와 동해안생명과학연구소 등 9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있다. 2017년, 강원대학교와 국립대학으로써는 최초로 연합대학 체제를 구축했다. 두 학교는 학점, 수업 등 교육적인 부문과, 인프라 등 시설 부문에서 다양하게 교류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강원권 공동교육혁신센터를 설립하고, 교수법을 공동 연구하고 양 대학간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2007년 강릉대학교와 원주대학이 통합한 대학이다. 강릉대학교는 1946년, 미 군정기,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에 의해 공립으로 설치되어 국립으로 이관된 강릉사범학교를 모태로 하여, 강릉교육대학 등으로 개편하다가, 초급대학을 거쳐 강릉대학으로 개편되며 발전하였다. 원주대학의 경우, 1967년 공립으로 설립된 원주간호고등기술학교가 모태이며, 전문학교를 거쳐 1979년 원주간호전문대학으로 개편되어 발전을 시작했고, 1982년 국립으로 이관되며 원주전문대학으로, 1999년에 원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다. 강릉사범학교 개교부터, 강릉교육대학으로 개편되어 운영되기까지를 태동기라고 한다. 광복 후 일본인 교원들이 귀국함과 동시에 초등학교 취학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미군정의 문교당국은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사범학교 10개교를 개편하기로 결정한다. 3개 학교는 중등교원 양성을, 7개 학교는 기존처럼 초등교원 양성 방침을 확정했고, 강릉, 개성, 부산, 충주 등에 사범학교를 공립으로 설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46년 9월 공립 강릉사범학교가 병설중학교와 함께 지금의 명주동의 명주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 현 교사에 설치었고, 폐교되기 전까지 15회에 걸쳐 초등교원 2,047명을 배출했다. 1950년 4월 1일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면서 당시 강원 영동지역의 유일한 국립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에 따라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고, 부산에 피난 특설학교를 설치하여 학사를 유지했다. 부산에 설치한 특설학교는 전쟁중 계속 이어졌고, 이윽고, 1957년 7월 9일 전쟁으로 훼손된 구 교사 대신 현 강릉해람중학교 자리의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1957년 4월 8일에 부속국민학교가, 1961년 4월 5일, 병설고등학교 등을 설치하며 성장하는 듯 했으나, 초등교원양성제도 개편에 따라 1962년 1개도에 1개의 2년제 교육대학이 설치되는 것으로 결정되며 상황이 바뀐다. 강원도에서는 1939년 설치된 춘천사범학교가 춘천교육대학으로 개편되는 것으로 결정되고, 강릉사범학교는 1962학년도 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한 뒤 1963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 그러나 1966년, 강릉지역에서 강릉교육대학 유치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유치추진위는, 영동지방에도 교육대학 설립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끈질기게 대한민국 문교부에 지속적으로 건의하였고, 마침내 1968년 8월 5일, 강릉교육대학으로 다시 개교한다. 강릉초급대학 시절부터, 강릉대학시기를 성장기라고 한다. 영동지역의 초등교원 양성 기관이었던 강릉교육대학이 1978년경 폐교되고, 전문대학의 일종인 강릉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초급대학과 전문학교 등이 전문대학 학제로 통합·개편이 결정된 1979년, 강릉초급대학은 전문대학이 아닌, 같은 해 1월 18일에 학제가 4년으로 개편된 단과대학인 강릉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80년대 수립된 강릉대학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강릉시 초당동에 있던 캠퍼스를 현재의 교사가 위치한 지변동으로 이전하였고, 1982년에 학교 호수인 해람지를 준공했다. 1983년부터 1990년경까지 캠퍼스 조성에 힘썼으며, 1987년 대학원 설립, 1990년 학내 민주화에 따른 학장 직선제 실시 등 점차 단과대학을 넘어 종합대학으로의 변화를 준비했다. 강릉대학교로 개편되어, 세기말인 1999년까지를 발전기라고 한다. 1991년 3월 1일 종합대학인 강릉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같은 해 경영정책과학대학원을 설치했고, 1992년 제163 학군단 창설하였다. 2년 뒤, 1994년 대한민국에서 11번째로, 마지막 치과대학이 강원권에서 유일하게 설치되었다. 1997년 강릉원주대학교치과병원이 개원하여 강원권 유일의 대학치과병원이 되어 진료 업무를 시작했다.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캠퍼스 건물을 준공하는데 집중하였으며,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강원 영동권 최대 규모 대학의 면모를 갖추게된다. 새천년인 2000년부터, 원주대학과 통합한 강릉원주대학교 출범 이후, 현재까지를 도약기라고 한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어학당, 교육지원센터, 창업보육센터 등 다양한 시설들이 준공되었으며, 국내 대학들은 물론 해외 대학들과의 학술교류 협정 체결이 이루어졌다. 2000년대,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 등의 국립대학 구조개혁 정책에 따라, 1967년 설립된 원주시 소재 국립 전문대학인 원주대학과 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2005년 10월 5일에 통합 기본 합의서에 각 총·학장이 서명했고, 2006년 심사를 거쳐, 2007년 통합이 확정되었다. 통합에 따라, 통합강릉대는 교명제정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교명을 의결하기 위해 논의에 들어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강릉시, 원주시 시민단체 등 많은 주체들의 알력 싸움으로 인해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이후 2009년 3월 1일, 강릉원주대학교로 개교하고, 강릉캠퍼스가 되었다. 통합으로 새롭게 출범한 강릉원주대학교는 양적 성장을 이어가면서도, 대학의 질적 성장에도 집중하여, 2010년 대학교육역량강화사업과 2012년 산업협력선도대학(LINC) 사업 등에 선정되었고, 공학교육혁신센터, 여대생커리어개발센터 등에 선정되는 등 성과가 있었다. 이런 성장을 토대로,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남과 함께, 다양한 국책사업 등을 수행하게 되며, 특히, 해양 바이오 산업에 특화된 강릉원주대학교는 별도의 사업단을 설립하여 전문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는 국가와 지역민에게 봉사하는 대학 등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개교 7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현재 반선섭 총장이 역임하고 있다. 원주대학은 1967년 3월 4일, 원주간호고등기술학교가 공립으로 설립이 인가되어 개교하였다. 이후, 1972년 12월 18일, 원주간호전문학교로 개편되고, 7년 뒤인 1979년 1월 1일에, 전문대학으로 재개편하여 원주간호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다. 이때까지 간호학 특성화 교육기관이었지만, 1981년 10월 16일, 유아교육과가 신설되면서 1982년, 원주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국립으로 이관되며 본격적인 발전기에 들어선다. 다음해, 원주시 원인동 일원에서 지금의 교사가 위치한 흥업면으로 옮기며 교사를 확장시킨다. 이후 공단 등이 발달하여 지역에 인재를 공급해야 하는 국립 대학에 대한 지역적 기대에 따라 공업 관련 전문학사 과정을 편제시켜 나갔고, 1999년 3월 1일, 원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2007년 3월 1일, 강릉대학교 문화산업대학으로 통합, 승격되었으며, 2009년 3월 1일, 강릉원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원주캠퍼스로 자리잡았다. 강릉원주대학교는 학교를 홍보하려는 목적과,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소규모 공연시설을 제공하고, 초당 두부에 대해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홍보관은 2013년 3월 16일에 개관한 강릉원주대학교의 기구이다. 강릉시 초당순두부길 86에 위치하며, 교사 자료실이 위치한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과는 별개의 조직이다. 강원 영동지역에서 문화가 있는 날 등을 맞아 행사를 열기도 하며, 두부 만드는 체험장을 마련하여, 강릉지역 관광객 유치에 한몫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해람지에서 시작하는 강릉 바우길 16코스 학이시습지길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강릉사범학교, 강릉교육대학 시절에는 교장이, 강릉초급대학을 거쳐 강릉대학 체제가 유지될 때까지 학장이 임명되다가, 종합대학인 강릉대학교로 승격 이후 사회과학대학의 이참수 박사가 처음으로 총장에 임명되었다. 강릉원주대학교 총장은 교수 등 교직원들의 업무를 감독하고, 교무를 총괄하며 학생을 지도하고 학교를 대표한다. 2015년 10월부터 간선제로 총장임용 후보자를 선출하고,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임명된다. 임기는 4년이다. 2017년 현재, 사회과학대학의 반선섭 박사가 총장 직무를 수행중이며, 임기는 2020년까지 유지된다. 강릉원주대학교는 자유, 진리, 창조의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창의도전, 소통협력, 자기주도성을 갖춘 해람인(解纜人)을 인재상으로 설정하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전공과정은 전공기초, 전공필수, 전공선택, 심화전공 등의 단위로 과목을 개설하며, 교양 과목은 해람기초교양, 균형교양, 특별교양 등으로 편성하고 있다. 졸업학점은 130학점을 기본으로 하며, 일부 학과의 경우 졸업학점을 별도로 지정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의 학부과정 단과대학은 9개 대학이 설치되어 하위로 55개 전공이 설치되어 있다. 일반대학원 1개원, 특수대학원 3개원이 설립되어 있으며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강릉캠퍼스는 종합대학인 강릉대학교가 전신이다. 구 강릉대학교는 강원 영동지역의 유일한 국립 종합대학으로, 기초학문 보호 양성 의무와, 영동지역 거점 대학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지역의 기대가 있었다. 그러한 역할이 통합 이후까지 이어져 한국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의 어학과 문학을 연구하고, 철학, 한국사학 등의 기초 학문 양성과, 영동지역과 접경한 동해를 이용한 해양 바이오 산업에 특화된 생명과학 분야와 기상과학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진다. 이 외에, 사회과학, 공학 분야의 학문의 교육과정이 편제되어 있으며, 강원도 일반대학 중 같은 국립대학인 강원대학교와 유이하게 순수예술 학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강원도 유일의 치과대학이 강릉캠퍼스에 편제되어 있으며, 수련병원인 치과병원이 설치되어 있다. 치과대학의 치의예과의 경우 75학점, 치의학과는 159학점, 치위생학과는 138학점을 이수해야 졸업 요건을 만족한다. 원주캠퍼스는 전문대학인 원주대학이 전신이다. 구 원주대학은 국립 간호·보건 특성화 대학으로서, 소재한 원주시에 간호인력과 보건 기초 산업 인력 제공에 힘써야 한다는 지역의 기대가 있었다. 그러한 역할이 지금까지 이어져 통합 후 강릉대학교 문화산업대학 설치 이후에도 원주캠퍼스는 간호·보건·복지 분야 학문 연구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이 외에도, 지역의 공단 인력 제공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공학 분야의 학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의 유일한 교육과인 유아교육과가 원주캠퍼스에 편제되어 있으며, 수련을 위한 부속유치원이 설치되어 있다. 보건복지대학의 간호학과, 유아교육과는 각각 136학점, 140학점을 이수해야 졸업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본다. 강릉원주대학교의 대학원 과정은 4개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일반 1개원, 특수 3개원으로 구성한다. 일반대학원의 경우 캠퍼스 별로 편제된 학과에 차이가 있으며, 석사과정 61과정, 박사과정 44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협동과정으로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과 연계하여 설치하고 있으며, 대학 특성화에 맞게 해양바이오,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진다. 특수대학원으로 경영정책과학대학원, 교육대학원, 산업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27개국 73개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하고 있다. 각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파견하거나, 유치하는 등 학생을 통한 교류가 주로 진행된다. 공동 연구 등을 진행하기도 하며, 바이오 산업과 관련한 연구 사업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강릉원주대학교는 대한민국내 대학간 학생 교류 및 학점인정에 관한 협정에 따라 2019년 기준, 22개 대학에서 이수한 일정량의 정규 학기 학점을 정상 이수 학점으로 인정하고 있다. 쌍방 인정으로, 아래 대학의 학생도 강릉원주대학교에서 수학이 가능하다. 다음은 교류 대학 일람과 근거 규정이다. 모두 국·공립 대학이다. 교내장학금으로는 학비감면장학금, 특별면제장학금, 봉사장학금, 국제화장학금 등 다양한 장학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2017년 기준,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캠퍼스의 재학생 1인당 장학금 수혜금액은 2,931,000원이며, 원주캠퍼스 기준 2,873,000원이다. 강릉원주대학교는 명실상부, 강원 영동권 최대의 대학으로써, 강원 영동지역 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강릉원주대학교의 바이오에 특화된 생명과학 연구 성과는 강릉시 뿐만 아니라, 환동해권에 위치한 각 지역들에게 각각의 해양 산업 부문에서 패러다임을 불러오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규모면에서도 영동권 최대의 대학이지만, 2018년 실시된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영동권(강릉캠퍼스)에서는 강원대학교와 유이하게, 영서권(원주캠퍼스)에서는 강원대학교, 한림대학교와 함께 자율개선대학에 선정되는 명예를 누렸다. 특히, 캠퍼스가 소재하고 있는 강릉시와 원주시 관내 일반대학중, 유일하게 자율개선대학에 선정되어, 질적인 측면 역시 내실 있는 대학임을 알렸다. 강릉원주대학교는 2006년 8월, 2년 연속 해외 대학원 진학생 두 자릿수 기록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2016년, QS와 중앙일보가 공동으로 실시한 2016 아시아대학평가에서 ‘의대 없는 중소 규모 종합대학, 학생 수 1만 2,000명 미만’ 그룹에서 국내 국립대학 중 1위, 전체 6위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2015년부터 꾸준히 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랭크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등은 이학·공학 계열 연구를 전담 수행할 수 있는 주요 50여개 연구중심대학으로 강릉원주대학교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지역중심국·공립대학 18개교중 서울시립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금오공과대학교, 부경대학교 등 4개 대학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특히 강원권 모든 일반대학 중에서는 강원대학교와 함께 유이하게 포함되었다. 1990년대 국가적으로 치과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으로 추가적인 인력 수급을 위해 전국에서 11번째로 설립된 강릉원주대학교 치과대학과 치과병원은 지난 20년간 700명 이상의 우수한 치과 의사를 배출하여, 국민의 구강 보건 향상을 위한 인재 양성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강원권 유일의 치과대학병원인 강릉원주대학교치과병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강원 영동 지역에는 전문적인 치과 병원이 없었고, 상대적으로 수도권과 가까운 영서권(원주, 춘천 등)과는 달리, 거리가 멀다는 이유 때문에, 강원 영동권의 치과 의료 환경은 열악했다. 그러나 치과 병원이 개원함으로써 강원 영동권 거주민들의 치과 의료 혜택 수혜에 기여했다. 환자는 강릉시 외에도, 강원 동해, 삼척, 태백, 영월, 평창, 정선, 속초, 양양, 고성, 인제, 홍천 등 강원 영동권에 국한되지 않고 경상북도 울진, 봉화 등에서도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릉원주대학교치과병원은 지역의 취약 계층에 대한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고, 최근, 강원도 장애인 구강 진료 센터를 개소하여 장애인들이 더욱 편하고 저렴하게 치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몽골,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지속적으로 의료 봉사단을 파견하여 국격을 높이는 등의 활동을 통해 국립 대학 치과 병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대기 과학 분야 연구 활동이 왕성한 편이다. 특히, 타 지역에 비해 험준하여 위험 기상이 자주 발생하는 강원도에 위치하여 기상재해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대기 과학 관련 학과인 대기환경과학과가 강릉캠퍼스 자연과학대학에 편제되어 연구와 관련 인력양성을 주도하고 있다. 한편, 강릉원주대학교는 대한민국 최초로 복사 현상과 기상 관측 위성에 대해 연구하는 복사·기상연구소를 개소하여 관련 학문인 기상학과 인공위성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이러한 연구력을 인정한 강원지방기상청은 강릉원주대학교 대기환경과학과와 강원 영동지역의 정확한 날씨 예보와 위험성 기후 예측에 대해 협업하고 있다. 기상재해에 대해 예보하고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국립기상과학원 산하 재해기상연구센터가 2012년부터 원활한 관·학 연계를 위해 강릉캠퍼스 내에 입주하였고, 이에 따라 위험기상 예측에 관한 합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급변하는 해양 생태계에서 다시마 등 해양 조류 생태 복구에 관한 연구 진행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조류 자원 교류 진행을 위해 남북해조자원교류원을 설치·운영중에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강원대학교와 함께 2019년 강원도 산불의 산림 파괴 정도와 지역사회가 받은 피해의 심각성에 대해 공감하며, 대규모 산불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 구축과 산림 복원을 위한 사업과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제2차 혁신도시 계획이 대한민국 정부 등에서 나오면서 강원도내 학술기관(종합대학)으로서는 최초로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강릉시의회와 공동으로 관련 포럼을 개최하고, 사회과학대학을 중심으로 연구 진행과 더불어 강릉시와 협업하여 혁신도시 유치전에 함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릉원주대학교는 2012년, 산학협력선도대학(LINC)사업에 참여했고, 우수한 성과를 내어 2017년, 후속 사업인 LINC+ 사업 참여도 선정되었다. 기존 대학들의 산학협력 사업과는 다르게, 소상공인, 농부, 어부 등 다양한 계층과 협력하고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19년, LINC+ 2단계 육성사업에도 선정되어 사업을 계속하여 진행하게 된다. 2014년, 지방대학 특성화 사업(CK-1)에 선정되었고, 동해안 해양바이오산업 창조인재육성사업단을 창단하여 해양바이오 산업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고, 관련 단과대학인 생명과학대학을 중심으로 국고지원을 받고 있다.이런 해양바이오 산업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2018년부터 강릉원주대학교 동해안생명과학연구소는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이공분야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에 최종 선정돼 약 56억원을 지원받아 ‘해양생물 유래 천연 소재의 면역치료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공계 분야의 대학 연구력과 기술력을 인정 받아, 2018년부터 이공계 계열 졸업자를 학교가 고용하여 관련 기술을 심화 교육시키는 청년 TLO 육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2007년부터 해람해외봉사단을 창단해 몽골, 네팔 등의 국가에서 교육봉사, 치과진료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7년 파견한 해람해외봉사단의 프로그램이 한국대학사회봉사협의회가 선정한 최우수 프로그램으로 뽑히는 일도 있었다.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 역시 활발한데, 2017년부터 사회봉사 기능을 강화하고자 기존의 기관을 확대·개편하여 나눔문화센터를 신설하고, 해람 프로보노 봉사단을 창단하여 교직원, 학생과 동문 등의 대학의 전문성을 살린 인적 자원으로 대학과 지역의 상생 발전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친화적 국립 대학 모델을 구축하고, 지역 현안 해결에 힘써, 지역속의 대학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다음은 강릉원주대학교의 위상 및 활동과 관련한 기타 지표들이다. 강릉원주대학교의 학생 조직을 이끄는 총괄조직이다. 강릉캠퍼스 학생회관 2층에 사무실이 있으며, 강릉캠퍼스 학생이 정회장 1인, 부회장 1인, 원주캠퍼스 부회장 1인으로 구성한다. 캠퍼스가 분교가 아닌 이원화 캠퍼스체제이다 보니 1대학 1총학생회 논리에 따라 지금과 같이 설치하고 있다. 다만, 대학 학생사회를 중심으로 캠퍼스별 총학생회 설치 요구가 나오고 있다. 불미스러운 회계 문제를 겪은적이 있으며 총학생회 개혁 등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을 보았다. 하부조직으로 각 단과대학 조직이 있으며, 총동아리연합회, 졸업준비위원회 등 학생복지를 위한 상설기구도 두고 있다. 감사기구로 총대의원회를 두고 있다. 2018년 현재 제34대 총학생회 그리다가 임기중에 있다. 신문사, 방송국, 영자신문사, 교지편집국 등 4개 단위로 구성되며 학생 스스로 방송매체를 통한 기사작성, 편집교육, 방송 제작 등의 실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강릉캠퍼스 내에 신문사, 강릉방송국, 영자신문사, 교지편집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윈주캠퍼스에 신문사와 원주방송국이 위치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의 교내 동아리는 총동아리연합회 산하 중앙 동아리와 각 학과에 소속된 학과 동아리로 나눌 수 있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중앙 동아리는 강릉캠퍼스에 7개 분과 53개, 원주캠퍼스에 5개분과 20개의 동아리로 총 73개의 동아리가 개설되어 있다. 대동제(大同祭) 혹은 비령제(飛嶺祭)는 강릉원주대학교 축제이다. 5월경 개최되며, 각종 단과대학, 학과와 동아리 등에서 준비한 체험, 먹거리 부스와 도서관, 학생생활관 등 다양한 곳에서 관련 행사를 개최한다. 학생들의 참여로 다양한 무대와, 유명 연예인들이 초청되어 공연을 펼치거나, 강연 등의 행사도 함께 개최된다. 연 1~2회 개최되고 있으며, 간혹 비령가요제가 함께 개최된다. 강릉원주대학교에서 활동하는 동아리의 활동 현황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전시 위주로 진행되는 강릉원주대학교의 문화 행사이다. 2017년까지 강원 영동지역 대학들이 대학간 교류와 화합 도모를 위한 목적으로 동아리 스포츠 교류전을 개최하였으나, 2018년부터 가톨릭관동대학교 등이 불참하면서 강릉원주대학교-강원대학교(강원대학교-강릉원주대학교) 동아리 스포츠 교류전이 2018년 11월 8일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체육관에서 농구, 배구, 족구, 배드민턴, 축구 등의 종목으로 개최되었다. 2007년부터 2년간 강릉원주대학교가 지금의 교명으로 변경하기 이전의 학내 교명 변경 문제를 두고 벌어진 사건들이다. 강릉대학교와 원주대학은 2005년 통합 기본 합의에 조인할 때 통합대학 교명 변경을 조건으로 의결한 바 있다. 다만, 강릉시 지역사회와 강릉캠퍼스를 중심으로 지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관철되었고, 원주시 지역사회와 원주캠퍼스는 대학본부가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다며 학내·외 구성원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분쟁이 발생한 사건이다. 2005년 10월 5일, 강릉대학교 한송 총장과 원주대학 황병수 학장은 교육인적자원부의 국립 대학 통합 정책에 따라 이원화 캠퍼스 체제의 한 대학이 될 것을 결정했다. 2006년 당국의 심의를 거쳐 2007년 양 대학은 강릉대학교로 통합되게 된다. 교명 변경 잡음은 통합 직후 발생했다. 구 원주대학 관계자들과 원주대학 총동문회, 기성회, 총학생회 등이 교명 변경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릉시 지역사회와 강릉대학교 관계자중 일부는 강릉의 지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 강했다. 강릉대와 원주대가 통합할 즈음인 2008년까지, 통합된 국립 대학의 교명은 보통 거점국립대학의 교명으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강릉대학교와 원주대학의 경우는 지역중심국립대학과 전문대학의 통합에 해당하는데, 이 때는 종합대학(일반대학)의 교명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강릉대와 같이 지역중심국립대학인 공주대학교의 경우, 예산농업전문대학과 천안공업대학과 각각 1992년, 2005년에 통합했지만, 교명은 공주대학교 단독으로 유지했다. 한국교통대학교처럼 교명을 완전히 변경한 경우가 있지만, 주축이 되었던 충주대학교는 종합대학이 아닌 산업대학이었다. 즉, 완전히 다른 교명을 설정하는 것은 과거에 유례가 없었고, 2019년 기준, 현재까지도 없다. 당시 강릉대학교 소속 학생과 직원 등 관계자들, 지역사회 등에서 교명 변경 결정 사항을 이해하기 힘들어한 까닭이다. 학내 캠퍼스간 문제에 끝나지 않고 강릉시와 원주시 지역사회 및 시민단체 등도 교명 변경 분쟁에 참여하면서 불씨가 커졌다. 강릉지역의 경우, 강릉상공회의소 등에서도 나서 학교에 이의를 제기했고, 원주지역의 경우 시의회가 나서 학교에 교명 변경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차기 총장 선거와도 맞물리며 분쟁이 더욱 심화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송 총장은, 강릉 지역 여론을 수렴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밝히며, 어찌 되었든 원주대학과 약속한 기일 안에 교명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강원제일대학교를 1순위로 하는 교명 변경안을 교육부에 제출했다고 말했다. 이 변경안에는 강일대학교와 명원대학교 등이 각각 2순위, 3순위 교명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쟁이 해결을 보지 못하는 사태애서 ‘원주·강릉 통합국립대 교명 합의이행을 위한 원주권 추진위원회’는 통합한 해 7월, 원주캠퍼스 후문과 정문의 "강릉대학교 원주캠퍼스" 현판을 제거하는가 하면, 강릉 지역사회는 교명에서 강릉 지명을 유지하지 못할 시, 대학 통합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나가는 등 사태는 일파만파 커져갔다. 이와 반대로, 원주 지역사회측은 통합 약정 당시 약속했던 '신규 교명에 지명 미포함' 약속을 지킬 것을 강릉대학교측에 요구했지만, 강릉대학교 측은, '강릉대'와 '원주대' 교명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지, '강릉원주'나 '원주강릉' 등 다른 조합의 교명은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 밝혀 파장이 일었다. 결국 학교측이 제시한 3개안중 어느 하나로 결정되지 못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추진위가 합의를 통해 교명을 확정한 뒤 변경을 신청하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곧 바로 승인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실상 이번 분쟁에 대해 한 발 물러선 방관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당초 "자율적인 대학의 교명 변경 신청이 있을시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한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의 발언과 대비되는 입장인 것이다. 결국 2007년 12월, 대학 본부는 학교 각 구성원이 동수로 이루어진 교명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8년 4월 즈음 교육 당국에 교명변경신청서를 다시 제출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대학본부는 '신규 교명에 지명 미포함' 약속은 이번 교명 변경 심사 탈락으로 깨졌다면서, 사실상 지명을 교명으로 포함하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밝혀, 원주 지역을 배려하지 않는 입장을 내놓아 다시금 논란이 일었다. 2008년 3월 26일, 교명변경추진위원회는 절차를 통해 강릉원주대학교를 교명 변경안 1순위로 선정했으며, 이듬해 3월 1일 교명 변경이 승인되어 지금의 강릉원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6년, 강릉원주대학교 총학생회 업무를 수행하던 청춘인 조직에서 발생한 학생회비 차익 횡령 사건이다. 당초 총학생회에서는 1,800만원 가량 횡령했다고 시인했으나, 경찰 조사 과정 등에서 실제로는 약 2,600만원을 횡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자인 총학생회 전 임원이 총사퇴했으며 총대의원회의 무능이 드러나면서 제33대 총학생회 청소부가 취임하기 전까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꾸려졌다. 한편, 청춘인의 총학생회장인 신씨는 최종 공판에서 벌금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강릉원주대학교는 강원도 소재 국립대학으로, 강릉시와 원주시에 각각 캠퍼스를 두고 있다. 강릉캠퍼스의 경우 시 중심가인 시청 근처 평탄한 지형에 자리잡아 해람지 등 호수와 조형물이 다수 설치되어있고, 원주캠퍼스는 상대적으로 고저차가 큰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계단이나 언덕 등이 많은 편이다.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캠퍼스는 지변동에 위치해있으며 약 66만m의 교지가 있다. 강릉시청, 강릉소방서 등과 인접해있는 시 중심가에 위치해있으며, 강릉시외버스터미널, 강릉고속버스터미널 등이 가까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오죽헌이 캠퍼스 인근에 위치하며, 내부에 선사시대 지변동 유적이 위치해있다. 또, 학교의 인재상에서 이름을 딴 해람지라는 호수가 위치해있으며 강원권 거점 치과대학병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치과병원이 강릉캠퍼스에 소재하고 있다. 강릉캠퍼스의 학생 생활관은 남학생 1,047명, 여학생 1,057명 국제교류 학생 65명과 기혼자 20명 등 총 2,189명을 수용할 수 있는 7개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도서관은 강릉캠퍼스의 중앙도서관과 원주캠퍼스 도서관으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총 장서 수는 2017년 기준 808,681권이며, 이는 학생 1인당 약 93권에 해당한다. 열람석의 경우, 중앙도서관 열람실, 치의학분관 열람실, 단과대학 열람실 등 총 1,330석의 열람석을 운영하고 있다. 치의학 및 치의학 관련 학문에 관한 연구와 강원권 거점 치과병원으로서 치과 질환 진료를 위해 1997년 «국립대학치과병원 설치법»에 의해 개원했다. 의과대학이 설치되지 않은 채 치과대학과 치과대학부속병원을 설치해야 하는 전국에서 유일한 경우로, 대학 부속병원을 거치지 않고 독립법인으로 설치된 최초의 병원이다. 강릉캠퍼스에 위치하며 구강내과 등 10개 진료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1979년 3월 1일 개관한 강릉원주대학교 박물관은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반유물 1,505점, 매장문화재 4,988점 등 총 6,493점을 소장하고 있다. 선사문화실, 역사문화실, 민속실, 교사자료실 등 4개의 자료실로 구성되어 상설전시하고 있다. 영동지역 유일의 국립종합대학 부속 박물관으로써, 강릉시 지역을 중심으로 선사시대 유적 발굴 및 연구 진행에 있다. 또한 원주시에 위치한 강원감영 등, 원주시 유적들도 발굴 및 조사 작업을 진행중이다. 교사자료실에는 강릉사범학교의 역사부터 현재 강릉원주대학교에 이르기까지의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어 학교 홍보의 장이 되고 있다. 해람문화관은 부지면적 19,800m², 연면적 4,820m²의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 종합 공연관이다. 객석 1층, 2층 총합 1,076석이 구비되어 있다. 강릉캠퍼스 내에 위치하며, 강릉시의 규모가 가장 큰 종합 문화 시설이다. 재해기상연구센터는 국립기상과학원 관측예보연구과 산하 소속기관이다. 재해기상 방재와 특성 분석 등을 위해 설립된 연구소이며, 원활한 연구 연계를 위해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캠퍼스에 입주해 있다. 학이시습지길은 강릉시의 바우길의 구간중 하나다.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와 이름 붙였다. 대한민국 트레일 최초로 대학과 지역이 합심하여 탐사한 길로, 강릉원주대학교의 해람지에서 시작하여 오죽헌과 선교장, 김시습 기념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지나, 강릉원주대학교 홍보관에 도착하는 경로로 진행된다. 전체 경로는 약 10.5km에 이른다. 강릉시 초당동 일대에 조성되었던 강릉대학교의 캠퍼스이다. 1980년, 강릉대학이 현재의 지변캠퍼스로 옮기기 전까지 사용된 캠퍼스이다. 현재는 강릉사범학교의 병설고등학교였던 강릉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학교가 부지만 제공하여 강원도교육연수원 본관이 설치되어 있다. 남은 부지를 활영하여, 이 일대에 2013년 3월에 강릉원주대학교 홍보관을 개관한 바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원주캠퍼스는 흥업리에 위치해있으며, 약 12만m의 교지가 있다. 남원주역 등이 2019년 개통 예정으로, 교통이 개선될 예정이다. 인근에 흥업면 행정복지센터, 흥업사거리 등 번화가가 위치해있으며, 인근에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한라대학교 등이 위치해있다. 상대적으로 고저차가 있는 지형에 위치해있어, 언덕, 계단 등이 강릉캠퍼스에 비해 많은편이다. 전국 국립 유치원 3개원중 하나인 강릉원주대학교부설유치원이 원주캠퍼스에 소재하고 있다. 원주캠퍼스의 학생 생활관은 남학생 232명, 여학생 285명, 기혼자 20명 등 총 628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원주캠퍼스의 학생 복지 시설을 보충하기 위해 농협은행 ATM기가 원주캠퍼스 대학본부동에 위치하고 있다. 강의에 사용되는 교재 등을 판매하는 교내서점 역할은 캠퍼스 후문쪽 서점에서 담당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원주도서관은 중앙도서관의 분관이다. 1971년 개관한 원주간호고등기술학교 도서실을 모태로 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9년 9월에 완공되어 입주했다. 조직상으로 분관이지만, 강릉캠퍼스에 위치한 타 분관과 다르게 지리적 위치의 차이 등으로 일부 기능을 제외하고, 독립된 형태로 운영된다. 열람석의 경우, 원주캠퍼스 도서관은 2개의 열람실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2월 27일에 원주전문대학부설유치원으로 개원한 이후 교명 변경 직후 강릉원주대학교부설유치원으로 원명을 변경하였다. 원주캠퍼스 내부에 위치하며 총4개학급 55명의 원아가 재원중이다. 대한민국 3개 국립 유치원중 한 곳이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은 산업단지의 개발 및 관리와 기업체의 산업활동을 위하여 설립된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다. 원주지사의 역할도 수행하는 강원지역본부가 원주캠퍼스 과학기술대학3호관 5층에 위치하고 있다. 강릉원주대학교는 강원도와 원주시에 재원을 받고,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부지를 제공 받는 등, 총 국비 330억원을 지원 받아 문막반계산업단지 내에 캠퍼스 설립을 추진한다. 2022학년도 신입생부터 모집할 예정이다. 강릉원주대학교가 설립·소유·운영 등에 있는 시설에는 캠퍼스 외부에 위치한 시설도 있다.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한 홍보관과, 사천면 사천진리에 위치한 해양생물연구교육센터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원주시 지정면에 강릉원주대학교가 부속기관으로 두고 있는 강원임베디드소프트웨어연구센터의 분원이 위치한다. 강원대학교 강원대학교(江原大學校, )는 1947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며 강원권의 거점국립대학교이다.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시 효자2동에 위치한 춘천 캠퍼스, 강원도 삼척시 교동에 위치한 삼척 캠퍼스와 삼척시 도계읍에 위치한 부속 캠퍼스인 도계 캠퍼스로 구성되어 있다. 21개 단과대학과 1개 일반대학원, 2개 전문대학원, 7개 특수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군단으로서 제127학생군사교육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두고있다. 교훈은 실제로부터 진리를 탐구하라()라는 의미인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강원권의 대학으로서는 유일하게 법학전문대학원과 의학전문대학원, 수의과대학, 약학대학이 설치되어 있다. 2017년, 강릉원주대학교와 국립대중 전국 최초로 연합대학 체제를 구축했다. 두 학교는 학점, 수업 등 교육적인 부문과, 인프라 등 시설 부문에서 다양하게 교류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강원권 공동교육혁신센터를 설립하고, 교수법을 공동 연구하고 양 대학간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 다음은 2018학년도 강원대학교에서 운영 중인 학과 과정을 나열한 것이다. 강원대학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 inquirere veritatem ex praxe)를 교시(校是)로 삼으며 실사구시가 함축하고 있는 진리관과 방법론을 따라 학문과 예술과 기술을 연구하고 가르침으로써 인류 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한다. 한편, 2012년 신승호 총장이 취임하며 비전 2016을 선포하며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에 걸친 르네상스 KNU 발전계획을 수립했다. 강원대학교 교육과정은 강원대학교 학칙 제53조 및 학사운영규정 제7조에 근거하여 편성한다. 대학의 교육이념인 ‘실사구시형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자 실용학문을 개설 운영하도록 하며, 다양한 학문 분야들이 연계된 융복합 연계전공 및 이를 지원하기 위한 특화교양 영역을 설치하여 실용 위주의 교과목을 편성하여 운영한다. 교육과정은 기초교양, 균형교양, 특화교양, 대학별교양, 전공필수, 전공선택, 자유선택, 교직과정으로 구성한다 .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130학점으로 하되 공과대학과 사범대학은 140학점, 수의과대학 수의예과는 76학점(수료), 수의학과는 160학점, 약학대학은 160학점, 의과대학 간호학과는 140학점, 건축학전공은 170학점으로 한다. 전공교육과정은 학과(전공)별로 편성하며 복수전공, 부전공, 연계전공, 교직과정, 평생교육사과정도 존재한다. 최소전공인정학점제를 시행하는 학과(전공)의 학생 중 단일전공자 및 부전공자는 본인의 기본전공 전공선택 교과목 중에서 전공심화 학점(27학점)을 추가로 이수 하여야 하며 전공별 최소전공학점은 다음과 같다. 교양교육과정은 기초교양, 균형교양, 특화교양, 대학별교양으로 구성된다. 기초교양인 글쓰기와 말하기, 의사소통영어1, 의사소통영어2는 전학과 공통으로 필수이수해야하며 균형교양은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 사회와 문화 중 두 분야, 과학과 기술, 수리적 사고, 예술과 건강 중 두 분야를 선택해 각각 한 과목씩을 필수로 이수해야한다. 또한, 특화교양은 1~4학점, 대학별교양 과목과 이수 학점은 각 대학(학부), 학과가 지정한다. 졸업에 필요한 조건으로 외국어, 컴퓨터 2개 분야 중 1개 분야 이상을 선택하고 선택한 분야는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며 기준은 대학(학부), 학과(전공)별로 상이하다. 외국어 인증에는 NEAT, TOEIC, TEPS, TOEFL (CBT, PBT, IBT)(영어), Start Deutsch2, ZD(독일어), DELF(프랑스어), HSK(중국어), JLPT, JPT(일본어)등이 있고 컴퓨터 인증에는 전산회계, AutoCAD, 컴퓨터활용능력 2급, 워드프로세서 1급, 문서실무사, MOS Core, PC정비사, 전산회계운용사, 기계설계제도사, 전산세무, ICDL, ICDL Start 등이 있다. 졸업인증관리는 “졸업자격인증분야선택”에서 선택한 분야를 학생 스스로 관리하며 시험신청 및 고지서 출력, 확인평가, 결과내역 등을 조회할 수 있다. 공학교육인증이란 산업체가 요구하는 실무능력과 창의성을 갖추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로, 이는 해당 프로그램(전공)을 이수한 졸업생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공학실무를 적절하게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증해주는 인증제도이다. 공학교육인증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공학교육에 새롭고 창의적인 접근방법을 접목하며, 인증된 프로그램을 사회에 공지하여, 궁극적으로 공학교육의 발전과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강원대학교에서는 2016학년도 기준 한국공학교육인증원(ABEEK)의 공학교육인증을 받은 공과대학 10개 학과(전공)에서 공학교육인증제도에 의한 인증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다. 강원대학교는 성적우수장학금, 저소득층 장학금, 우선면제 장학금, 학과장특별 장학금, 학과장특별 장학금, 장학사정관제 장학금, 부서지원(RA) 장학금, 특별 장학금 등 다양한 장학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2015학년도 기준 재학생 1인당 장학금은 2,492,600원으로 2015학년도 강원대학교 1인당 평균등록금의 약 61.5%에 달한다. 제 1 학생회관인 천지관 3층에 총학생회실이 위치해 있으며 2017학년도 기준 제 50대 오늘愛 총학생회가 활동 중이다. 신문방송사는 대학언론의 창달과 학술 및 교양 증진을 도모하고 교직원 학생 동문 및 지역사회 간에 공동의 장을 마련하고 학술적, 교육적, 사회․문화적 기능을 담당하며 국문판 “강대신문”과 영문판 "The Bell"을 발행하며 각종 교양, 시사, 오락, 뉴스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강대방송”을 편성 운영하고 있다. 또한 1978년 강대문화상을 제정하어 대학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문학부문에 소설, 시, 수필, 평론 부문이 있으며 비문학부문에는 사진과 만화 부문이 있고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원대학교 출신 작가 60여명 중 절반이 강대문화상 수상자이다. 실사구시 문화구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4년 9월부터 매월 1회 독서토론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강원대학교 방송국 방송제는 매년 대동제 기간에 개최하며 학우들에게 방송국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어떤 영상을 만드는지 알린다. 또한 재밌고 의미있는 영상으로 학우들에게 다가감으로써 방송국을 알리고 홍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교내 동아리는 총 동아리 연합회에 소속된 중앙동아리와 단과대학 및 학부 또는 학과에 소속된 과동아리로 나뉘어 있으며 2016년 기준 춘천 캠퍼스 87개 동아리, 2,869명 회원, 삼척캠퍼스 75개의 동아리, 2,063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5월 경 강원대학교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교내 축제인 대동제가 열리며 주점과 플리마켓 등과 함께 동아리 공연, 가요제 및 유명 연예인 초청 공연 등으로 구성된다. 한 학기에 한번씩 열리는 KNU컵은 2015년 9회를 맞았으며 각 단과대학별로 축구, 농구, 족구, 피구 한 종목당 한 팀씩 출전하여 대운동장과 한울관에서 이뤄지는 토너먼트 형식의 대회이다. 총학생회가 주최하는 백령체전은 강원대학교 체육대회로 종목으로는 축구, 농구, 족구, 발야구, 피구, 줄다리기, 계주 등이 있으며 매년 개최되는 종목이 다르다. 대동제 기간에 준결승전과 결승전을 치루고 대동제의 메인 무대에서 시상한다. 2008년 11월 12일과 13일에 춘천종합운동장과 춘천호반체육관에서 열린 강한전은 스포츠 교류를 통해 두 대학간 협력 및 시민 화합의 장을 조성하기 위해 2007년 춘천시와 강원대학교와 한림대학교가 관학상생협력을 맺고 마련한 정기전이다. 축구와 농구 두 개의 경기만을 개최했으며 전문적인 선수가 출전하는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과 달리 아마추어 선수들가 출전한다. 하지만 2008년 제 1회 열린 강한전은 이듬해부터 열리지 않은 일회성 행사가 되었다. 2017년까지 강원 영동지역 대학들이 대학간 교류와 화합 도모를 위한 목적으로 동아리 스포츠 교류전을 개최하였으나, 2018년부터 가톨릭관동대학교 등이 불참하면서 강원대학교-강릉원주대학교(강릉원주대학교-강원대학교) 동아리 스포츠 교류전이 2018년 11월 8일 강릉원주대학교 강릉체육관에서 농구, 배구, 족구, 배드민턴, 축구 등의 종목으로 개최되었다. 강원대학교 도서관은 춘천캠퍼스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본관과 별관, 법학도서관, 의학도서관, 삼척캠퍼스에 위치한 삼척도서관, 도계도서관으로 구성되어있다. 열람석의 경우 2015년 3월 31일 기준 춘천 캠퍼스에 자료열람실 615석, 일반열람실 1,158석, 법학도서관 240석, 의학도서관 80석, 단과대학 및 학과 열람실 1,291석, 학생생활관 200석이 구비되어있으며 삼척캠퍼스에 940석, 도계캠퍼스에 541석이 구비되어있다. 1953년 중앙도서관의 전신인 춘천농과대학 부속도서관을 개관했으며 1973년 현 박물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1984년 현 도서관에 3과 9실 체제로 3600평 규모로 신축개관하였으며 1999년 의학분관 개관, 2000년 법학분관을 설치하였다. 2009년에 의학분관을 이전개관하고 법학분관을 신축개관하며 법학분관을 법학도서관으로, 의학분관을 의학도서관으로 개칭하였고 생명공학 분야 외국학술지지원센터로 선정되었으며 '2014년도 외국학술지지원센터사업 운영평가'에서 3년 연속 최우수기관(S등급)에 선정됐다.장서량은 2015년 3월 31일 기준 1,252,251권이다. 1층에는 제 1보존서고, 서양서 단행본실, 논문자료실이 있고, 2층에는 정보봉사실, 종합정보검색실, 참고도서실, 그룹스터디실, 3층에는 정기간행물실, 외국학술지지원센터, 4층에는 멀티미디어실과 제 1열람실, 제 2열람실, 휴게실, 그룹스터디실이 있으며 5층에는 장서실이 있다. 1964년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도서관으로 개관하여 1982년 현 캠퍼스로 이전하여 1985년 도서관 준공 후 1986년 이전하였다. 1999년 중앙도서관 개관하였으며 2009년 제 2캠퍼스인 도계 캠퍼스에 분관을 개관하였다. 장서량은 2015년 4월 30일 기준 405,779권이다. 삼척도서관의 경우 1층에는 이용자 서비스센터, 일반열람실, 논문•연속간행물실, 2층에는 인문•사회자료실, 보존자료실, 사무실, 과제도서실이 있으며 3층에는 과학•예술자료실, 4층에는 어문학자료실, 멀티미디어실, 위성방송실이 있고 도계도서관의 경우 1층에는 주제자료실, 보존자료실, 2층에는 이용자 서비스센터, 관장실 및 사무실, 주제자료실, 멀티미디어실이 있으며 3층에는 영상그룹스터디룸, 그룹스터디룸, 일반열람실, 휴게실이 있다. 편의 시설로는 제 1생활관의 경우 제 1 학생식당 1층에 편의점과 세탁실, 탁구장, 체력단련실, 휴게실, PC실, 독서실이 있고 제 2생활관의 경우 세탁실과 체력단련실, 휴게실 및 PC실, 독서실, 세미나실이 있고 국제생활관과 국제인재양성관의 경우 휴게실 및 PC실, 체력단련실, 세미나실, 세탁실이 있으며 BTL 생활관의 경우 편의점과 세탁실, 체력단련실, 휴게실, PC실, 독서실이 있다. 다산관과 예지원은 향토학사로 강원도 지방자치단체인 각 시.군 및 경기도 가평군에 거주하는 학생만이 거주할 수 있으며 국지원과 난지원, 예지원은 여학생만이, 다산관은 남학생만이 입사할 수 있다. 율곡관, 퇴계관, 국지원, 난지원은 4인실, 다산관, 예지원, BTL 생활관은 2인실로만 구성되어있으며 국제생활관은 2인실, 4인실, 가족실, 게스트룸으로, 국제인재양성관은 2인실과 가족실로 구성되어있다. 강원대학교 춘천캠퍼스 학생생활관은 2015년 기준 총 1,822실로 최대 4,322명 수용가능하며 입사율은 24.2%이다. 2015년 한서관과 의암관이 안전진단결과 E등급을 받아 철거할 예정이며 율곡관은 2016학년도부터 법학전문대학원생 전용 기숙사로 변경되어 타과 학생들은 이용이 불가능하다. 또한, 제 2 BTL 생활관을 착공하여 2018년 준공할 예정이다. 삼척캠퍼스 생활관은 2015년 기준 총 739실, 최대 3,192명 수용가능하며 삼척캠퍼스와 그의 부속캠퍼스인 도계캠퍼스의 생활관 입사율은 46.5%이다. 춘천캠퍼스에는 제 1 학생회관(천지관) 1층, 제 2 학생회관(백록관) 1층, 석재복합신소재제품연구센터 4층, 제 1 기숙사 식당, BTL 학생생활관 남자동 1층에 있다. 제 1 학생회관과 제 2 학생회관 식당은 강원대학교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며 교직원 식당도 함께 있고 2016학년도부터 무인자판기를 통해 식권 구입이 가능하다. 석재복합신소재제품연구센터 식당은 민간업체(2016년 기준 (주)한우기업)가 운영하며 태백관 교직원 식당은 만성적자로 2013년 1학기 말에 폐쇄되었다. 1970년 설립 후 1999년 신축 건물로 이전했고 공자학원이 있다. 영어특강 및 한국어 연수과정이 있으며 번역서비스를 제공한다. 강원 최대의 종합 공연장으로 대지면적 6천여평, 연면적 2천여평으로 지상 2층 건물로 1600석이 구비되어 있으며 부속단체로는 백령윈드오케스트라, 백령작곡연주회, 백령피아노연주회, 백령관현악단, 백령오페라단이 있다. 교육·연구·진료를 통한 의학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2000년 5월 18일 200병상 규모의 지방공사 춘천의료원을 인수하여 설립된 국립대학병원으로 교육부 산하 기타공공기관으로 총 34개의 진료과가 있으며 강원도 춘천시 백령로 156에 위치하고 있다. 1979년 개설 후 1985년에 정식으로 개관하였으며 2001년에는 자연사 박물관을 통합하였고 국가귀속수탁유물 7,127점, 위탁유물 477점, 일반소장유물 9,273점, 총 16,877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상시 공개함으로써 학생과 일반인들이 역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있다. 한편 구한말 춘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의병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게끔 관계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구국의 실천적 의지를 알고 배울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도내를 중심으로 각종 유적들을 조사하여 연구보고서를 발간함으로써 학술자료를 제공함은 물론 우리 문화를 복원, 보존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2004년에 확장 개관한 강원대학교 역사관은 강원대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꾸몄으며 국내 유일의 동충하초 전시실과 더불어 강원대학교를 대외에 알리는 홍보의 장이 되고 있다. 교내 동문지역에 위치한 강원대학교 백령스포츠센터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2015년 12월 14일 개관하였다. 지하 1층에는 교직원, 학생 및 지역주민을 위한 생활체육프로그램이 위치하고 지상 1층에는 교육시설 및 강의실이 배치되며 지상 2층은 수영장과 체육관, 전시장, 지상 3층과 4층에는 교수연구실이 있다. 2015년 12월 1일부터 12월 12일까지 재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휘트니스센터와 수영장을 무료로 시범운영할 예정이었으나 수영장 보수공사로 휘트니스센터만 시범운영을 하였으며 2016년 2월 15일 수영장도 정식 개관하였다. 강원도 양양군 선사유적로 712-9에 위치해 있으며 객실은 6평 일반온돌 18실, 12평 일반온돌 5실, 6평 침대 특실 5실이 있고 100석 규모의 강당과 공동화장실과 공동세면장이 있다. 강원대학교는 2015년 11월 기준 대학교간 39개국 140개교, 단위기관별 34개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현재 매년 40명 내외의 교수들이 장단기 해외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학생들도 유학, 어학연수 등 국제경험을 쌓기 위한 해외연수기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외에 국제교류본부에서 연중 다양한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교육과정에 외국대학 연수를 신설하는 학과가 늘어나고 있다. 건국대학교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있는 서울캠퍼스(본교)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글로컬캠퍼스(분교)로 이루어진 사립대학이다. 1931년 유석창이 사단법인 민중병원으로 설립, 1946년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였고, 1949년 9월 재단법인 정치학원과 대학기관인 정치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59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현재 교명으로 개칭하였다. 약칭은 건대(建大)이다. 2016년 기준으로 60개국 481개 학교와 자매결연, 복수 학위 및 교환학생 등의 국제 교류를 하고 있다. 인문, 이공, 융합, 의예, 수의예, 예체능 관련 학과가 종합적으로 편제되어 있으며, 각 캠퍼스의 전략 학과와 전략 학부를 운영하고 있다. 1931년 5월 12일 상허 유석창이 서울특별시에 사단법인 민중병원을 모태로 한다. 1946년 5월 15일 오성학교 교사 395평(현 낙원동 건국빌딩)의 건물에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였다. 1949년 9월에 재단법인 정치학원과 대학기관인 정치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모진동에 70만평의 캠퍼스를 마련, 1959년 2월 재단법인 건국대학원과 종합대학인 건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80년 1월 5일에는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를 설립하였다. 그 이후 1986년에는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의과대학이 설립되었고, 그 이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건국대학교병원(충주병원)이 개원, 2005년 의과대학과 함께 의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하여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건국대학교병원을 개원하게 된다.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세계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추구하여 대한민국 중원에서 성장하는 캠퍼스로 만들기 위해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로 명칭을 변경, 선포하였다. 2016년 12월 현재 총장은 민상기이다. 민중병원 개원부터 건국대학교 설립이전까지를 요람기라고 한다.1931년 5월 12일 상허 유석창이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을 창립하여 의료제민의 가치 아래 학원의 모태가 설립되었다. 그 해 1934년 사회영 민중병원으로 개칭하였고 1946년 5월 15일 조선정치학관으로 개교하였다. 그 후 1956년 10월 19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모진동에 신축교사로 대학을 이전, 1959년 2월 26일에 종합대학 건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종합대학 건국대학교 승격부터 건국대학교 충주분교(현 GLOCAL캠퍼스)전까지 성장기라 한다. 1961년 11월 학교법인 유석창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1963년 전국 농업 기술자 협회를 설립하였다. 1964년 축산대학의 발전을 알릴 건국우유처리장이 준공되었다. 1967년 건국대학교부속 중학교가 설립되었고,1969년 건국대학교 종합운동장이 준공되었다. 1972년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유석창이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학교법인 유일윤 이사장이 취임하였고, 건국대학교 실내체육관을 준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3년에는 서울 국제학교를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사범대학설립을 인가 받았다. 그 뒤 문교부로부터 대학교육 개선을 위한 실험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1976년 본관 건물을 준공하였다. 1979년 학생회관이 준공되었다. 건국대학교 여러 방면으로 가지가 성장하는 시기가 되었다. 건국대학교 충주분교(현 글로컬캠퍼스)를 설립한 이후부터 개교 30주년까지를 발전기라 한다. (여기서부터 서울캠퍼스와 글로컬캠퍼스의 역사를 따로 분류) 서울캠퍼스는 1988년 국가고시기관인 일우헌을 설립하였다. 1989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인정받은 상허기념도서관을 준공하여, 상허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80년 현 글로컬캠퍼스의 모체인 건국대학교 충주분교를 문교로부로부터 조건부로 인가를 받아 설립하게 되었으며, 1980년 개교하였다. 원래는 일반 대학교의 대학처럼 건국대학교 충주대학의 인식이었다. 허나 인원 증대, 많은 과들이 설립되고 난 이후 1984년 충주대학을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으로 분리하였다. 그 뒤 1986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의과대학을 설립인가(40명정원)을 받았다. 1987년 충주캠퍼스의 도서관인 중원도서관을 준공하였다. 이때 건국대학교는 충주캠퍼스(현 글로컬캠퍼스)의 개교와 함께 충주캠퍼스 의과대학유치라는 가장 큰 성과를 맛보게 되었고, 아시아에서 제일 큰 도서관인 상허기념도서관을 준공하여 대대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개교 30주년 부터 개교 50주년 이전까지를 도약기라 한다. 1990년 학교법인 건국대학원을 건국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993년에는 교책연구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2001년 현 건국대학교 이사장인 김경희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2005년에는 기존 UI를 변경, 건국대학교의 새로운 UI(University Identity)를 선포하였다. 또한 2006년 종합정보시스템을 구축하여 서울캠퍼스와 충주캠퍼스의 학사생활에 있어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2007년에는 대단위의 직제개편으로 건국대학교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서울캠퍼스는 1996년에는 사회교육원을 신설하게 되며, 그해에 대학종합평가 결과 우수대학으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또한건축대학원과언론홍보대학원을 개원하게 되어 우수한 대학원생을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해 교육개혁평가서에서 대학의 세계화, 정보화부분에서 우수대학으로 인정되었다. 1997년 정보통신분야의 발달로 건국대학교는 액정연구센터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1999년에는 수의과대학을 신설하고, 축산농업생명과학대학을 농축산생명과학대학으로 통합, 생활문화대학을 디자인문화대학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건축전문대학원을 신설하였다. 새천년 새시대가 열린 2000년에는 새쳔년관과 문과대학 교수연구동을 준공하였으며, 부동산대학원을 신설하였고, 건축대학, 정보통신대학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수의과학연구소와 서울유럽연구소를 설립하였다. 2002년에는 수의과대학 부속동물병원 준공, 사범대학, 공예관 증축, 축산대학 육가공실습장 준공이 이루어졌다. 2003년에는 국제학사·생명과학관을 준공하였고, 디자인문화대학을 증축하였다. 2004년에는 농업자원개발연구소를 생명환경 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장비동을 증축하였다. 부족한 학생회관 건물때문에 불편을 겪었던 건국대학교는 제 2학생회관을 준공하였다. 2005년에는 산학협동관을 준공하였고, 민자기숙사인 쿨하우스를 착공하였다. 2006년에는 수의과대학을 증축하였고, 법과대학 증축하였다. 상허연구관, 쿨하우스가 준공되었다. 건국대학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학연 협력 협정식을 가져 21세기의 산업중심인 항공분야를 새로이 개척하였다. 2008년 기네스 등재 최연소 교수인 알리아 사버를 임용하였고, 또한 노벨물리학상, 노벨의학상을 받은 노벨상 석학교수들을 초빙하였다. 건국대학교 발전을 위해 KU나누미를 첫 개통하였고, 외국인을 위한 외국인 전용숙소인 글로벌홀을 개관하였다. 행정조직을 대단위로 개편하였고, 학령인구감소를 대비, 입학정보관을 개관하였다. 경영전문대학원을 설치하였다. 2009년 로스쿨을 인가받은 건국대학교는 법학전문대학원을 신설하게 되었다. 1991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개원하게 된다. 1992년에는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에 기숙사를 새로 짓게 되었으며, 강의실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종합강의동을 준공하였다. 2005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는 의과대학을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 충주캠퍼스 의학전문대학원 부속병원인 건국대학교병원(서울)을 개원하였다. 2008년 충주캠퍼스에 교수연구동을 준공하였다. 이 시기에는 건국대학교가 더욱 발전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된다. 많은 건물을 준공하고, 개관하며, 직제를 개편 행정시스템을 개편을 통해 비상하기 위해 대대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개교 50주년부터 현재까지 비상기라 한다. 건국대학교는 세계화와 지방화를 동시에 꿈꾸는 건국대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2010년에는 건국대학교 통일문학연구단을 출범하여 통일시대를 바라보았고, 건국대학교 인터넷방송국을 개국하였다. 2013년에는 새롭게 학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서울캠퍼스 이과대학의 생명과학과를 기존의 특성화학부와 통합한 생명특성화대학이 출범했으며, 동시에 서울캠퍼스 공과대학에서는 기계공학부, 기존의 전기공학과를 제외한 나머지 학부를 모두 학과로 전환하였다. 2014년에는 400억원이 넘는 예산으로 지어지는 공과대학건물이 착공되었다. 건국대학교는 2016년 교육부의 대학평가를 위해 서울캠퍼스 단과대학에 소속된 모든 학부제를 학과제로 변경하고, 서울캠퍼스 기존 15개 단과대학 73개 전공(학과)에서 2016학년도 입시부터 63개 학과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한다.건축대학은 3개 전공에서 1개 학과(건축학과)로, 정보통신대학은 6개 전공에서 3개 학과(인터넷미디어공학과, 컴퓨터공학과, 전자공학과)로, 예술디자인대학은 8개 학과에서 6개 학과로 통합, 상경대학은 기존 4개 전공(학과)을 3개 학과(경제학과, 국제무역학과, 응용통계학과)로, 경영대학은 3개 전공(학과)을 2개 학과(경영학과, 기술경영학과)로 통합했다. 2015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서울캠퍼스는 최고등급인 A등급을 받았다. 충주캠퍼스는 2010년 유학생을위한 한국어교육센터를 설립하였으며, 2011건국대학교는 충주캠퍼스 명칭을 글로컬캠퍼스로 변경 글로컬캠퍼스를 국제적인 인재양성과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대학으로 새롭게 출발시켰다. 또한 대규모의 학문규모 단위조정과 학제 개편이 이루어 졌다. 2013년에는 다시한번 대규모의 학문규모단위조정과 학제개편이 이루어졌다. 글로컬캠퍼스는 기존 인문과학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커뮤니케이션문화학부로 명칭 변경, 다이나믹미디어학과 실설, 국제비지니스대학을 신설해 영어영문학과 편입, 자율전공학부 폐지, 글로벌학부 폐지,응용생화학전공과 응용화학과를 통합해 의생명화학전공이라는 과를 신설하는 등 38개 단위에서 2013년 34개 단위로 변경하는 대대적인 학과 통폐합을 하였다. 2015년에는 건국대학교 100억원이라는 예산을 투자하여 글로컬캠퍼스에 글로컬강의동을 착공시켰다. 건국대학교는 1931년 설립 이후 20여만여명 동문을 배출해 내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특히 축산, 금융, 부동산 부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의학, 수의학, 항공우주 등 미래 고부가 가치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2018 US news 기준으로 세계 788위를 기록하였다. 2011년 현재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는 15개 단과대학이,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에는 6개 단과대학이 설치되어 있다. 2009년부터 법학전문대학원이 개원되면서, 현재 서울캠퍼스 법과대학, 글로컬캠퍼스 법학과에서는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있으며, 대신 서울캠퍼스에서는 자유전공학부를 신설, 글로컬캠퍼스는 경찰학을 신설하여 기존의 법학과 신입생 정원을 대체하고 있다. 이후 2013년에는 학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서울캠퍼스 이과대학의 생명과학과를 기존의 특성화학부와 통합한 생명특성화대학이 출범했으며, 동시에 서울캠퍼스 공과대학에서는 기계공학부, 기존의 전기공학과를 제외한 나머지 학부를 모두 학과로 전환하였다. 글로컬 캠퍼스는 기존 인문과학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다이나믹미디어학과로 명칭 변경, 국제비지니스대학을 신설해 영어영문학과 편입, 자율전공학부 폐지, 글로벌학부 폐지,응용생화학전공과 응용화학과를 통합해 의생명화학전공이라는 과를 신설하는 등 38개 단위에서 2013년 34개 단위로 변경하는 대대적인 학과 통폐합을하였다.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조직을 이끄는 총괄조직이다. 학생회관에 사무실이 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49대 총학생회 '청春어람'이 운영중에 있다. 건국대학교 중앙동아리 관련조직. 매년 새 회장을 선출하며, 중앙동아리 운영 및 승인, 사업에 대한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구기레저분과, 무예분과, 봉사분과, 어학분과, 연행분과, 인사분과, 자과분과, 종교분과, 창작비평분과가 있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학생조직을 이끄는 총괄조직이다. 글로컬캠퍼스 학생회관에 사무실이 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29대 총학생회 좋은친구가 운영중에 있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중앙동아리 관련조직. 매년 새 회장을 선출하며, 중앙동아리 운영 및 승인, 사업에 대한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 예술분과, 창업분과, 취미교양분과, 봉사분과, 레저분과, 체육분과, 종교분과, 학술분과가 있다. 감사위원회는 건국대학교의 깨끗하고 투명한 학생회 운영을 도모하고 학생회비 및 기타보조금의 올바른 사용 및 각 기구의 신뢰성 있는 사업 진행과 원활한 행정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감사를 실시하는 기구이다. 학우 여러분의 소중한 학생회비가 언제 얼마나 또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되는지 파악하여,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감사 기준에 의거하여 정기적인 감사를 진행한다. 또한 각 기구의 공약 · 사업 · 정책부분에 대해서도 세밀하고 심도 있는 감사를 시행하여 각 기구와 학우들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한다. 건국대학교의 학생 언론은 서울캠퍼스의 건대신문, 학원방송국, 영자신문, 글로컬캠퍼스의 건대학보, 뿐만아니라 전체 캠퍼스를 아우르는 건국대학교 웹진인 DREAM KONKUK이 발행되고 있다. 2013년 낭만건대 총학생회가 출범하면서 '쿵' 이라는 새로운 커뮤니티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이전의 커뮤니티였던 '건이네'를 대체한다. 2009년 건국대학교 '캠퍼스존' 이 운영을 시작하여, 현재 가장 활동이 많은 커뮤니티 사이트이다.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대학주변의 원룸이나 상가 정보와 시간표, 강의평가와 같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모바일에서는 플레이스토어나 앱스토어에 '캠퍼스존'이라는 전용 앱을 통해 이용하거나 모바일 웹 사이트로 접속하여 이용할 수 있다. 건양대학교 건양대학교(, )는 충청남도 논산시와 대전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사립대학이다. 의과대학과 병원은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에 위치한다. 다음은 2018년 기준 건양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건양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건양대학교는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에 캠퍼스를 둔 사립 일반대학이다. 창의융합캠퍼스의 경우 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교통 등 접근성이 좋은 편이고, 메디컬캠퍼스는 외곽에 도심 외곽에 위치하고, 대학 병원 등으로 인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창의융합캠퍼스의 경우 내동에 위치해있으며, 약 20만m의 교지가 있다. 메디컬캠퍼스의 경우, 관저동에 위치하며, 창의융합캠퍼스보다 다소 작은 17만m의 교지가 있다. 2000년 개원한 대전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건양대학교 부속 종합병원이다. 대전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되어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계룡시, 공주시 외 4개군과 전라북도 일부를 관할한다.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慶北大學校, )는 1946년 5월 28일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으로 개교한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며, 대구광역시를 거점으로 하는 국립 대학이다.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위치한 메인캠퍼스와 중구 동인동, 삼덕동에 위치한 의·치대 간호대학캠퍼스, 그리고 경상북도 상주시 가장동에 위치한 상주캠퍼스가 있다. 의치간 캠퍼스늘 산격동과 단일교지이며, 상주캠퍼스는 제2캠퍼스로 구분된다. 영문 약칭은 KNU이며, 비공식적 국문 약칭으로 경대(慶大)가 흔히 사용된다. 8.15 해방은 우리들에게 일제로부터 빼앗겼던 모든 것을 광복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36년간의 역사를 되찾고 박탈당한 국권, 말살되려던 민족, 사라져 가던 민족문화 등을 되찼았다. 그리고 세계사 발전에 발맞추어 잃었던 왕조 대신 민주공화국을 세웠으며, 구미 선진문화와 접촉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여러 제도와 가치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8.15 해방은 이와 같은 광복의 기회를 제공한 반면 우리 민족에게 감당키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국토의 남북 분단(38선)과 민족분열, 정치적·사회경제적 혼란 등이 그것이다. 해방 후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우리 민족 최대의 과업은 해방의 국제적 타율성을 극복할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이 민족적 과업은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걸음 한걸음 추진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은 초미의 급무로서 교육분야, 특히 대학교육이 담당해야 할 문제였다. 1945년 9월 16일 미군정청 학무국은 교육에 관한 제반 문제를 심의·결정하기 위하여 7명의 위원(김성달(초등교육), 현상충(중등교육), 유덕겸(전문교육), 백낙준(교육전반), 김활란(여자교육), 김성수(고등교육), 최규동(일반교육))으로 구성된 한국 교육위원회를 자문기관으로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한국민주교육의 정초작업을 담당한 기구였다. 이 위원회는 해방후 교육의 공백을 시급히 메꾸며, 일제가 남기고 간 학문적 후진성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을 부활시킴으로써 국가유위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각급학교의 책임자가 임명되고 기존 전문학교가 승격 혹은 개편되었다. 그리하여 미군정청 학무국은 일반명령 제4호로써 그 해 10월 1일을 기하여 중학교 이상 각급학교의 개교를 지시하였다.(9.28) 대구의학전문학교가 대구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개교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다시 민주교육의 실현을 위하여 교육심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기구는 우리나라의 교육이념과 새로운 교육(학교)제도를 연구,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심의회는 1946년 3월 7일 새로운 교육제도를 채택하여 9월 1일부터 시행키로 결정하였다. 한국 교육사상 국민 의무교육과 남녀공학제의 원칙이 도입되어 부분적으로 교육의 민주화가 실현된 것도 이 때 채택된 교육제도에 의해서였다. 일제 이래의 3학기제도는 2학기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8월에는 국립대학 설치령이 발표되었다. 이 새 교육제도와 국립대학 설치령에 의하여 9월 신학기부터 이 고장 대구에서도 처음으로 현대적 국립대학이 설립되었다. 9월 5일에 대구농업전문대학교가 '국립대구농과대학'으로, 10월 15일에는 대구사범학교가 '국립사범대학'으로 각각 승격, 개편되었다. 경북대학교 역사의 첫걸음은 전년도에 승격된 대구의과대학과 함께 3개의 단과대학으로 시작된다. 이 초창기의 대학들은 개교를 하자마자 10.1사건(1946)에 휘말려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으며, 6.25 동란(1950)으로 교사가 군용화되자 이동식 강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련을 겪었다. 이것은 모두 당시의 사회·정치 상황이 학원에 미친 영향이었다. 또 교육이념의 부재, 교수 부족, 교육여건의 빈약 등이 겹쳐 이들 대학들이 국립대학으로서의 기능과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아직도 성장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요람 속의 대학'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학이 가지는 의의와 사명만은 막중하였다. 그들은 고대 국학의 부활, 민족문화의 재건과 창달, 인재양성 등을 담당하여야 한다는 중차대한 임무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개의 단과대학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경북도민의 고등교육에 대한 열성은 나아가서 종합대학교 건설 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이 지역에서의 종합대학교 건설 운동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즉, 1945년 11월에 종합대학교 기성회가 조직된 바 있었는데 1946년 8월 27일 군정청 학무국이 '국립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경북에서도 관민합동으로 설립기금을 마련하여 1946년 11월 종합대학교 설립인가를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 그 첫번째이다. 그러나 이 허가신청은 1947년 3월 7일에 기각되고 말았다. 유지재단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두번째 종합대학교 설립 운동은 6.25 동란중인 1951년 4월부터 일어났다. 동란중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시설이 파괴되자 부산에 피난중이던 정부는 각 도에 국립종합대학교 설립 계획을 세워 당국에 교지 등 설립기금을 자체 조달토록 권장하게 되었다. 이에 경북에서도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기존 국·사립 단과대학이 합동하여 '국립종합대구대학교건설위원회'를 만들어 종합대학교 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이 설립 운동은 전 경북도민이 참여한 거도적인 운동이었다. 고병간(의대), 손계술(사대), 김인식(농대, 후에 이의배) 등 3개 대학장과 국립종합대학교 건설위원회(위원장은 경북도지사)가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경북도 당국은 가능한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전도민의 설립 기금을 각출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리고 미8군 당국은 교사 신축 자재 등을 조달하면서 본교 건설을 지원하였다. 실로 경북대학교는 상기 4자의 합동산파역에 의하여 비로소 탄생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1년 10월 6일 '국립경북대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대구사범대학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 경북대학교 총장(慶北大學校 總長)은 경북대학교 교무를 통할하고 소속 교직원을 감독하며, 학생을 지도하고 학교를 대표한다. 총장임용추천위원회에서 선정하고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용하며, 임기는 4년이다. 괄호의 숫자는 학과 창설연도이다. 총학생회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학생자치활동을 통하여 자유로운 진리탐구와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대학문화를 건설하고 회원 상호간의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대학의 자율적인 발전을 도모함과 아울러 실천을 통한 학생회 본래의 이념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 자치기구입니다. 총동아리연합회는 중앙아리들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활동을 통해 건전한 대학문화를 선도하며 동아중앙인들의 복지 및 동아리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생 자치기구입니다. 각 동아리와중앙연합회는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경북대학교 도서관은 1952년 농과대학, 사범대학, 의과대학 보유자료 8,866책으로 업무를 시작하여 1953년 5월 130평의 목조가건물에서 정식개관하였다. 1956년 현재의 박물관인 건물을 도서관으로 신축이전하였고 1982년 현재 위치의 중앙도서관 개관, 1990년 신관열람실 개관, 2000년 중앙도서관을 증축하였으며 2016년 9월 현재 대구캠퍼스의 중앙도서관 외에 의학분관, 치의학분관, 법학분관과 상주캠퍼스 분관을 두고 연면적35,961m, 5,081석의 열람석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거점 대표 대학도서관이다. 보유장서는 300만권이 넘으며, 전국 대학교 도서관 보유장서 순위가 서울대학교 다음으로 2위이다. 경북대학교 도서관은 지속적으로 학술자료를 확충하여 1997년 장서 100만권, 2004년 장서 200만 권을 달성하였고 2006년에는 전국 최초로 외국학술지지원센터(전기·전자·컴퓨터·정보공학분야)로 선정되었다. 2016년 9월 현재 320여 만권의 장서, 48,000여 종의 인쇄 및 전자저널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6만여 책의 고서와 2만 여점의 고문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대불정수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보물 제271호) 등 귀중한 고문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96년 2월에는 학술정보시스템 ‘KUDOS(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Library Doucument Retrieval and Online System )’를 구축을 시작으로 전자자원의 편리한 이용을 위한 통합검색 디스커버리 도입, 모바일 서비스 제공 등 디지털 환경에서의 학술정보 이용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2016년 8월에는 학술정보시스템을 웹기반으로 업그레이드 하였다. 그리고 국내외 대학도서관 및 기관들과의 활발한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중국사회과학원 도서관과의 학술자료 및 인적 교류, 전개하고 있다. 또한 지역주민에게도 도서관 자료와 시설을 개방하여 지역사회의 문화 및 학술정보센터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2011년 중앙도서관 앞 정원에 금란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건설됐다. 건축학부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공사로, 금란정의 완공으로 경북대학교는 서울대학교, 명지대학교, 강원대학교에 이어 국내대학교 중 4번째로 전통 정자를 갖춘 대학교가 됐다. 2016년 9월 현재 자료공간 및 이용자 공간 부족으로 중앙도서관 북쪽으로 연면적 6,000m 규모로 증축공사가 진행중이다. 경북대학교 국제교류원은 2001년 9월, 국제화 개방화시대에 국제교류를 확대하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국제화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전문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개원하였다. 외국대학 교환학생 파견
해외인턴십 프로그램
외국대학 복수학위 프로그램
Global Summer School 프로그램,
개별어학연수 학점인점
KNU International Graduate Scholarship(KINGS)
해외우수교수초빙 영어계절학기수업 운영
KNU International Writing Center 운영
글로벌챌린저 프로그램 기초교육원은 2007년 8월 수준 높은 기초교양 교육과정을 구축하여 학생들에게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기초교양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폭넓은 지식과 종합적인 사유능력을 함양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글로벌플라자는 2012년 3월에 준공된 건물이다. 대학의 기초학문 육성 및 연구력 향상을 위한 공간 확충 컨벤션시설, 전시ㆍ홍보시설, 휴게 공간 등 교육지원 시설의 집적화 현대화 연구 및 산학협력 강화를 통한 교육연구기능 확보로 글로벌 이미지 제고 건물의 고층화 집약화를 통한 공간의 효율적 활용 및 부족한 주차 공간 확보 등을 목표로 건설됐다. 건설 초기에는 학생회 및 일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등록금 인상 및 학생권 침해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2009년 5월에 실시한 글로벌 플라자 건립 찬반투표에서 투표인 4천143명 중 찬성 87명, 반대 3천273명 등 반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정보전산원은 1976년 4월에 설립하였다. 대학의 학사·행정 통합정보시스템 구축 및 운영, 정보시스템 서버 및 정보통신망 운영, 정보보안관리, 홈페이지 관리 및 포털시스템관리, 각종 부가서비스관리를 한다. 과학영재교육원은 1998년 6월에 지역 과학영재를 위한 교육환경 조성, 연계성 있는 과학영재 교육 기회제공, 국가 및 지역에 공헌하는 과학영재 육성, 과학영재의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서류심사(원서, 융합인재기술서, 추천서, 학교생활기록부 등) 및 심층면접(창의적 문제해결력)을 통해 11~12월경에 선발한다. 정보영재교육원은 2003년 1월에 설립되었다. 정보영재의 특성을 개발을 목적으로 대구광역시 소재 중학생을 대상으로 서류전형, 영재성 및 창의성 검사, 기초수학능력 평가, 기본지식 및 정보능력 평가, 창의적 문제 해결력 검사의 평가를 통해 11~12월경에 선발한다. 영어영재교육원은 2007년 5월에 영어습득에 영재성을 보이는 초·중등학생에게 영어사용의 기본 기능 습득과 비판적·창의적인 생각과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는 능력 함양, 뛰어난 영어사용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체육진흥센터는 1972년 교직원 및 학생들의 체육진흥과 체육활동을 조장·발전시키기 위한 경북대학교 체육진흥 관리위원회규정(1972.1.15제정) 제6조에 의하여 체육활동 및 체육진흥의 전문적인 수행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체육진흥센터라는 명칭은 2005년 8월 1일자로 기존 체육부에서 바뀌었다. 전체적인 체육진흥센터 이용료는 저렴한 편이다. 문화관에는 455석 규모의 식당이 있다. 신축생활관은 2014학년도 2학기부터 개관을 했으며, 생활실마다 개별화장실이 구비되어있다. 나머지 생활관은 모두 공용화장실과 공용샤워실이다. 상주캠퍼스 재학생 3,200여명중 40%를 수용 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이다. 보건진료소는 1961년 4월에 설립되었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1959년 5월 28일에 개교 13주년을 기념하여 설립되었다. 건물 5488제곱미터(8개 전시설, 학예연구실, 보존과학실, 도서실, 항온항습실)와 야외전시장인 월파원 13824제곱미터에 보물 7점을 포함한 64000여점의 유물과 38,000여 점의 발굴유물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대구캠퍼스 본관 앞편에 있다. 상주캠퍼스 복합관 3,4층에 경북대학교 박물관 분관이 위치하고 있다. 경북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은 경상북도 군위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립대학에서 설립한 자연사박물관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2004년 5월 6일 개관하였다.
전시공간은 공룡화석관, 야생동물관 등 7개의 실내 전시실과 옥외 생태습지를 갖추고 있으며 수장고에는 화석, 광물, 동물박제, 곤충, 어류 및 식물 등 표본 약 6만 여 점이 수장되어 있다. 주요 표본으로는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공룡알 화석, 한반도에서 멸종된 따오기와 늑대 박제 등이 있으며 특히 학술적으로 가치가 뛰어난 모식표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관람은 설날과 추석 연휴를 제외한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무료 이용 가능하고 단체관람은 사전에 예약할 수 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글로벌 시대에 문화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2006년 5월에 개관했다. 경북대 북문 앞 DGB문화센터 2층에 자리하고 있는 미술관은 3개 전시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근, 현대 미술품을 중심으로 전시와 연구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지역대학에서 최초로 설립된 경북대학교 미술관은 전시 및 다양한 학술행사와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여 학내 구성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문화체험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예술 전문기관으로서의 전문성과 함께 음악, 건축,문학 등의 장르간 상호 연계를 통한 통합적인 복합문화공간이 되고자 한다. 수의과대학 부속 동물병원은 대구캠퍼스와 상주캠퍼스에 설립되어 있다. 대구캠퍼스 내에 수의과대학 부속 동물병원은 32채널 도시바 CT장비를 도입했다.(2014년) 동물 의료용 CT장비로는 최고수준이다. 상주캠퍼스 생태환경대학 부속목장에 수의과대학 부속 동물병원분원이 설립되었다.(2013년) 소, 돼지, 말 등의 대형 가축을 대상으로 하는 대동물전용병원으로 전국 수의과대학중 최초이다. 연면적 1493m, 지하 1층ㆍ지상 2층 규모이며, 대동물진료시설, 영상진단실, 임상병리검사실, 병리부검실, 수술실, 입원실, 집중치료실 등 진료시설과 강의실, 연구실 등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신문방송사는 학내외 소식을 공정하게 보도함으로써 대학 구성원들의 여론을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어학교육원은 1964년 2월에 설립되었다. 외국어 및 한국어 강좌 운영, 교내 기관(학과) 및 외부기관(기업, 공공기관 등) 맞춤형 강좌 운영, 외국어 학습 전반에 걸친 상담 및 지도, 어학교재 개발, 학술강연회 등 어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출판부는 1973년 9월에 설립되었다. 전공 및 교양 도서, 보전 및 연구 가치가 있는 고서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전문 연구 성과물의 저술 장려 및 출판을 통해 대학 교육 및 연구·학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각 종 시리즈물을 연간 50종 이상 출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역, 문화, 대중이라는 콘셉트로 새로운 출판 기획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수련원은 1985년 11월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표읍에 설립되었다. 테크노파크는 1996년 5월 지역산업·경제 진흥 거점기관 및 글로벌기업육성 전문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공동실험실습관은 1989년 3월에 고가의 실험·실습기자재를 효율적으로 관리·운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동문지구에 설립되어 있는 교원, 교직원, 학생의 복지를 위한 건물이다.
1층에는 생협 쇼핑플라자, 신한은행, 서점이 있고
2층에는 학생식당, 매점, 우체국이 설립되어 있다.
3층에는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실, 경북대학교 생활협동조합 학생위원회실, 열린글터, 복현교지, 교수회 등 자치기구들이 들어서 있으며
4층에는 인재개발원과 잡플라자, 컴퓨터실이 있어 학생들이 진로상담을 받거나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채워져있다. 상주캠퍼스에는 기존에 있던 복지회관과 2012년에 완공한 복합관이 이어져있다. 복지회관에는 생협 쇼핑플라자, 서점, 복사&인쇄실, 인재개발원 상주분원, 취업상담실, 보건소가 위치하고 있다. 보건소의 경우 기존 2층에 위치하면서 근로장학생으로만 운영했으나, 2016년 1학기부터는 3층으로 확장 이전되면서 간호공무원이 근무하고 있다. 복합관에는 생협 패스트푸드점, 커피전문점, 박물관분관, 정보검색실이 위치하고 있다. 대구캠퍼스 내에 5개의 학생식당과 2개의 기숙사 식당이 있다. 복지관 식당은 복지관 2층에 위치해 있으며, 주로 2,800원에서 4,000원 대의 식사를 판매한다. 점심, 저녁 식사 시간대에는 1종의 라면만 판매를 하고 그 외에는 다른 종류의 라면도 팔고 있다. 최근에는 신용 카드로 학생 식당의 식권을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경북대학교는 재학생들의 휴식처이자, 지역주민들에게는 오랫동안 지역의 명소였다. 매년 5월이면, 학교 최대의 축제인 대동제가 열린다. 대동제 기간에는 백양로에서부터 법대 주차장까지 학과 및 동아리에서 주막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2018년에는 교육부의‘대학생 주류 판매 관련 주세법령 준수 안내 협조’ 공문에 따라 주막을 설치하지 않고, 대동제 기간을 이달 23~25일 사흘에서 24~25일 이틀로 단축해서 운영했다. 러브로드는 일청담과 정문을 잇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우거진 길이다. “사시에 합격한 법대 남학생이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했던 여학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여학=생이 러브로드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때부터 이 길을 함께 걷는 커플들은 헤어지게 된다”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러브로드 남쪽 학생주차장 옆에는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1975년에 도로망 확충과 함께 길을 따라 벚나무를 심으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4월에는 벚꽃이 만개해 캠퍼스 내에 지역주민과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경북대학교 가로수길(백양로)은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울창하게 터널을 이룬 낭만적인 산책길이다. 경북대학교 제1과학관과 농구장 사이, 약 220m 길이이며, 2011년 드라마 사랑비에서 윤아와 장근석 두 주인공이 우산을 쓰고 걷던 길이다. 정문에 위치한 공원으로 2010년에 조성된 공원이다. 정문에서 학생 주차장 주변까지 조성된 산책로에는 다양한 꽃들과 느티나무, 단풍나무, 이팝나무 등이 심겨져 있다. 봄, 가을에는 돗자리를 펴고 휴식하는 학생들로 붐빈다. 일청담은 1960년대 초 기존에 있던 농대 실습장이 옮겨가면서 만들어졌다. 연못은 교화인 감꽃모양이며, 못 중간에 분수탑이 있다. 일청담 주변으로는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한다. 학생 및 지역주민들이 많이 찾는 벚꽃 명소 중 하나이다. 일청담에는 생일을 맞은 학생들을 못에 빠뜨리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술에취한 학생이 일청담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었다. 공대 식당에서 공대 3호관과 11호관, 12호관 중간에 위치한 연못이다. 지도못이라는 명칭은 한반도 모양으로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 못안에는 작은 분수가 있는데 경북대학교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만오원은 제1과학관 앞에 위치한 연못이다. 정자와 아치형 다리가 놓여져 있다. 원래 늪이던 곳에 자연대학이 세워지면서 근처 물이 고여서 생긴 연못이다. 자연대(생물학과, 물리학과 등) 학생들이 실험 때 사용한 물이나 실험용 박테리아를 못에 버려 수질이 나빠졌다는 소문이 있으며, 이로 인해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만오원이라는 명칭 대신, '박테리아 연못'이라는 별명으로 이 연못을 부른다. 경북대학교 근방에는 동대구역과 대구역이 위치해있다. 동대구역에서 경북대학교까지 순환2-1번과 937번 버스가 지나간다. 순환 2-1번은 경북대학교 쪽문과 후문방면의 대현로를 지나가며, 937번 버스는 경북대학교 정문과 동문 쪽 경대로 방면으로 지나간다. 경북대학교 북문방면으로 통행하는 버스는 없으나, 413번, 937번 버스가 복현오거리를 지나간다. 상주캠퍼스는 시내, 고속/시외버스(청주,대구,김천행)이 운행된다. 경북대학교 대구캠퍼스는 대구 시내에 근접해 있으며, 다양한 노선의 버스가 운행 중이다. 경북대학교 북문 버스정류장은 경북대학교에서 가장 승하차 승객이 많은 버스정류장이다. 2019년 3월 현재 대구시내버스 300번, 306번, 410-1번, 706번, 719번, 급행6번, 523번 버스가 정차한다. 이들 버스는 경북대학교에서 반월당역, 서문시장역, 수성구청역 등 대구 주요 지역을 운행한다. 대구캠퍼스 인근에는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신천역이 있다. 신천역의 부역명이 경북대입구이지만, 경북대학교 정문까지 1.4km 정도 떨어져있어 직접적인 역세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학기 중에는 신천역 8번출구 앞에서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및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가 있다. 삼덕캠퍼스 인근 옛 대구사범학교 자리에 있다. 경상대학교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 )는 대한민국 교육부 소속 국립 대학이자 경상남도의 거점국립대학교이다. 영문 이니셜은 GNU이며 진주농과대학에서 출발해 생명과학, 농학, 수학, 항공우주, 나노신소재 등의 특성화 분야를 두고 있다. 진주·사천 일대에 기계·전자·소재 등의 첨단기술이 융복합된 고도 산업인 항공우주산업 중심의 항공국가산업단지, 항공정비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음에 따라 인근 지방국립대학교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남부내륙철도가 최종 완공되었을 때엔 수도권 및 중부 지방과의 교류·협력이 증가할 것이다. 최근 국내 최대 기계산업 집적지이며, 경남 제1의 경제성장 동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창원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연구개발-인력양성-고용이 선순환되는 본부대학 기계융합공학과(창원산학캠퍼스)가 2017년 3월 신설되었다. 경상대학교는 경상남도의 거점국립대학교이다. 1948년 10월 개교한 경남 도립 초급 진주농과대학이 전신이다. 1968년 3월 도립에서 국립대학으로 설립 변경하고, 1972년 7월 ‘경상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80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교명을 경상대학교로 바꾸었다. 캠퍼스는 진주시에 2곳, 통영시에 1곳, 창원시에 1곳으로 분산되어 있다. 1948년 농학과 1개 학과로 개교한 뒤, 1953년 정규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55년 수의학과를 신설하고 부속 가축병원을 설치하였다. 1971년 대학방송국과 축산진흥연구소를 설치하고, 1975년 대학원 석사과정을 설치하였다. 1987년 의과대학 부속병원, 1989년 중등교육연구소, 산업의학연구소, 법학연구소를 각각 열었다. 1995년 통영수산전문대학을 흡수하고, 2004년에는 대학원 석·박사통합과정을 개설하였다. 2009년 의학전문대학원이 2단계 BK21사업 신규사업단에 선정되었다. 'BK21'이란 세계적 수준의 대학원 육성과 우수한 연구인력 양성을 위해 석·박사과정생 및 선진연구인력(박사후 연구원 및 계약교수)을 집중 지원하는 교육인적자원부의 고등교육 인력양성 사업을 말한다. 2018년 기준 14개의 단과대학(본부대학, 의과대학,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경영대학, 공과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수의과대학, 간호대학, 해양과학대학, 약학대학), 9개의 대학원(의학전문대학원, 경영대학원, 행정대학원, 교육대학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항공우주특성화대학원, 보건대학원, 식의약품대학원, 토지주택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부속기관으로 기초교육원, 도서관, 박물관, 학생생활관, 신문방송사, 출판부, 과학영재교육원, 국어문화원 등을 운영 중이다. 그밖에 사회과학연구원, 경남문화연구원, 인문학연구소, EU연구소, 인권사회발전연구소를 비롯하여 20개의 연구소가 있다. 진주경상대학교 병원 본원은 대지 면적 58,449m, 건물면적 73,180m으로 1,390여명의 직원이 종사하고 898허가 병상을 운용하고 있는 경남 지역 거점 병원이다. 교육부 산하 기타공공기관으로 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로 79(칠암동 9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창원경상대학교 병원 분원은 2016년 6월 10일 개원, 연면적 109,593.53m에 지하 3층 - 지상 13층, 701병상 규모의 의료동과 지하 1층 - 지상 2층, 8분향실의 장례식장을 두고 있다. 창원시 성산구 삼정자동에 위치하고 있다. 경상대학교 창원산학캠퍼스는 2017년 8월 9일 교육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최근 기계융합공학과가 신설되었다. 창원시 의창구 팔용동 창원 국가산업단지 내 위치하고 있다. (상세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차룡로48번길 54) 경상대학교는 1948년 10월 20일 경남도립 초급 진주농대로 출발하여, 1952년 2월 2일 정규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다가 1963년 부산이 경남에서 분리됨에 따라 경남의 국립대인 부산대학교도 경남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에 국립대가 없어진 경남 지역민들이 수년에 걸쳐서 진주농대의 국립대 승격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1968년 3월 1일 ‘진주농대’는 도립에서 국립으로 설립 이관되었다. 진주농대는 국립대가 된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회에 걸쳐 문교부에 ‘경남대학’으로 교명변경을 신청하였으나 인가되지 않았다. 한편 마산대학을 인수한 삼양학원은 1970년 2월 18일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을 이사장으로 앉히게 되고 뒤이어 5월 20일에는 삼양학원의 이름을 경남학원으로 변경한다. 이어 문교부의 승인을 거쳐 1971년 12월 31일 교명을 ‘경남대학’으로 변경하게 된다. 뒤이어 6개월 뒤인 1972년 7월 11일 문교부는 진주농대의 교명을 경상대학으로 변경하는 인가를 내린다. 1980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경상대학교는 2004년과 2005년에도 교육부와 국회 등을 통해 교명을 ‘경남국립대학교’로 변경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2009년 6월 11일, 경상대학교는 교육과학기술부에 교명 변경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경남대학교가 《경남국립대학교》 등록서비스표에 대해 무효 소송을 제기하여 교명 변경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경상대는 ‘경남대학교’가 등록한 3단으로 구성된 복합 상표가 “현저한 지리적 명칭, 그 약어 또는 지도만으로 된 상표”에 해당돼 상표법 제6조 제1항 제4호의 규정에 상표등록을 불허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무효 심판을 제기했다. 이후에도 경상대학교에서는 전국 710km 구간을 자전거로 달리며 경남국립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해 줄 것을 촉구하는 홍보활동 하고, 진주남강유등축제를 찾은 관광객을 상대로 ‘경남국립대학교’로의 교명변경지지 서명 운동을 펼치는 등의 교명 변경 관련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2010년 10월 5일 특허심판원은 ‘경남국립대학교’라는 교명이 이전에 등록된 '경남대학교'와 유사하여 혼동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교명 변경 관련 청구를 기각했다. 경상대학교는 이 판결에 불복하여 2심 특허법원에 소를 제기할 예정이다. 2012년 9월 15일 대법원은 경남국립대학교는 “경남대학교의 교명 권리 범위에 속한다”며 원심을 뒤집을 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며,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경남대학교가 최종적으로 교명 승소를 했다. 학령인구 감소 및 지방대 경쟁력 약화 등에 대처하기 위해 경남과학기술대학교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경상대학교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두 대학은 '2017년 국립대학 혁신지원사업(PoINT)유형Ⅱ'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국립대학 간 선택과 집중, 인적·물적 자원 및 교육과정 공유 등 상호협력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기 위한 교육부의 핵심 정책이다. 주요 내용은 두 대학간 연합대학 구축이다. 이상경 경상대 총장은 취임 1주년을 맞아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같은 지역 내에 있는 경남과기대와 연합 후 대학통합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장은 동일 지역인 진주시에 있는 국립대인 경남과기대와 연합대학을 구축한 후 2021년까지 대학 통합을 완성할 계획이다. 이상경 경상대 총장 "2021년까지 경남과기대와 통합 추진" 경성대학교 경성대학교(慶星大學校, )는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3동에 있는 사립 종합 대학이다. 친일 목사 김길창 박사에 의해 1955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설립되었으며, 2019년 현재, 총장은 12대 송수건 총장이다. 교훈은 ‘진리·봉사·자유’ 이며, 매년 5월에 ‘용연축전’과 10월에 ‘용연학연제’를 개최하고 있다. 체육분야에서는 야구·탁구·수영·육상·레슬링 종목에서 국가대표급 선수를 배출하고 있으며 활동이 활발하다. 1955년 5월에 김길창 목사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자 양성을 목적으로 경남사범대숙을 설립하였다. 당시 학교는 야간부 4년제로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수학과, 가정학과 등 4개학과가 개설되었다. 서대신동 3가 184번지를 첫 교사로 하여 초대 총장으로 김길창 목사가 취임하였다. 1963년,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으로 개편 인가를 받아 음악과, 미술과, 체육과, 보육과 등 4개 학과로 개편되어 부산 중구 대청동1가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그 해 재단법인 경남대학교육원을 한성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2부(야간) 3개학과를 신설하여 의상과, 음악과, 보육과를 신설하였다. 1966년 영도구 영선동 신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67년 도서관을, 1972년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973년에 이르러 현 캠퍼스인 대연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79년 4년제 대학으로 개편인가 및 부산산업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본 캠퍼스에 있는 도서관은 1982년 처음으로 개관하였다. 198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1988년 경성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경운대학교 경운대학교(慶雲大學校, )는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립대학이다. 학교법인 숭선학원이 1997년 3월 한국산업대학교로 개교한 뒤 1998년 8월 경운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9년 10월 학부제를 시행하였고, 2000년 산업정보대학원을 개원하였다. 2001년 대학종합평가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고, 2002년 3월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창업보육센터로 지정되었다. 2004년 산학협력단을 법인으로 설립하였고, 2006년 사회복지대학원 개원을 인가받았다. 2012년 일반대로 전환하였다. 부속기관은 전산정보센터·평생교육원·벽강중앙도서관·건설단·생활관·동해연수원·제주연수원이 있고, 부설기관으로는 학사행정서비스센터·취업정보센터·교육방송국·대학신문사·교지편집국·국제교류센터·어학교육원·새마을아카데미가 있다. 이밖에 부설연구소로 환경생명정보연구소·새마을연구소·학생생활연구소·산업기술연구소·사회과학연구소·한국입체사진영상연구소·건축문화재연구소·전통무예연구소·군사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멀티미디어 및 IT분야에서 많은 국책 사업들을 유치해 산학협력단 활동이 활발하다. 가상스튜디오센터, 첨단모바일산업지원센터, LINC사업단, RIS사업단, NURI사업단, 멀티미디어 생산기지 등의 지역 전략핵심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벽강장학금, 추천장학금 외 19종의 교내장학금과 21종의 교외장학금을 운영하고 있으며, 제니스·해돋이 등의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다. 매년 5월에는 숭선축제가 열린다.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명 강동로 730에 있다 2019학년도 기준 4개 단과대학에 22개 학과(부)가 설치되어 있다. 경인교육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京仁敎育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국립 교육대학이다. 1946년 경기도립 개성 사범학교로 개교했고, 몇 차례 교명의 변경 끝에 경기캠퍼스 건설을 계기로 2003년에 '인천교육대학교'에서 경기도의 '경'자와 인천의 '인'자를 한 자씩 따서 '경인교육대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경인교육대학교는 두 개의 캠퍼스로 이루어져 있다. 인천캠퍼스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캠퍼스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별도로 부설 초등학교가 있다. 경인교육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문의 심오한 이론과 응용법을 교수, 연구하고 아울러 학생들로 하여금 사표로서의 지도적 인격을 도야케 함으로써, 이들을 유능한 초등교원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본 대학교의 모체는 1946년에 설립된 경기도립 개성사범학교이다. 6.25 동란으로 개성 수복이 불가능하여 1952년에 교명과 위치를 변경해서 국립 인천사범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후 초등교원의 자질 향상을 위해 인천사범학교는 2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다시 교직의 전문성 제고를 위하여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초등교원의 평생교육 실현을 위해 교육대학원이 개원되었다. 2003년 3월 1일 교명이 경인교육대학교로 변경되었으며, 2005년 3월 1일 경기도 안양시에 경기캠퍼스를 개교하였다. 본 대학교는 사범학교 설립이래 약 22,000여명의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 배출하였다. 이러한 본 대학교의 연혁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인교육대학교의 모든 학부생은 초등교육과에 속한다. 단 교과별 전문성을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세분된 전공을 두고 있다. 경인교육대학교는 교육전문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석사까지만 배출하는 교육대학원과 달리 교육전문대학원은 박사과정까지 운영한다. 야간제와 계절제를 운영하는데 야간제는 인천캠퍼스, 계절제는 경기캠퍼스에서 운영된다.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高神大學校 神學大學院) 혹은 고려신학대학원(高麗神學大學院, )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장로교계 사립 대학의 대학원이다. 특수 대학원으로 고신대학교가 설립하고 있다. 고려신학원은 특수대학원 과정으로, 석사 과정만 운영한다. 다음은 2019년 기준 고려신학원의 교육편제 일람이다. 고신대학교 고신대학교(高神大學校, )는 부산광역시 영도구와 서구,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장로교 계통의 사립대학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가 직영하는 교육 기관이다. 현재의 고신대학교는 1946년에 설립된 목회자 양성 기관인 고려신학교를 시초로 1955년 4년제 대학과정인 칼빈학원을 설립하였다. 1970년 12월 대학설립인가를 취득하여 계속 발전해 오다가 1980년에 고신대학으로 변경하였으며, 1993년 교명을 현재의 고신대학교로 변경하였다. 2018년 기준, 고신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2018년 기준, 고신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고신대학교는 법적으로 단일 캠퍼스로 공시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3개의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고신대학교 본교가 위치한 영도캠퍼스는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으며, 동삼 1동과 동삼 3동에 걸쳐 있다. 동삼 1동의 서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학대학·보건복지대학·글로벌문화융합대학 등이 위치해있다. 고신대학교 송도캠퍼스는 부산광역시 서구에 위치하며, 의과대학, 의과대학 부속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의학도서관, 간호대학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은 부산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6년제 의과대학으로,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부속병원으로 두고 있다. 의예과 2년과 의학과 4년의 학제를 가지고 있다. 1980년 고려신학대학이 고신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의예과 신설 인가를 받은 후, 1981년 고신대학 의학부가 개교하여 첫 입학생을 받았다. 1993년 고신대학의 이름이 고신대학교로 바뀌면서 의학부의 명칭 또한 고신대학교 의학부가 되었다. 2003년 고신대학교 의학부가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신대학교 천안캠퍼스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으며, 신학대학원(고려신학대학원)이 위치한다. 고신대학교는 의과대학이 위치한 송도캠퍼스에 고신대학교 부속병원인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두고 있다. 26개 진료과, 16개 병동, 병상수 976병상을 갖추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 피난민과 병마에 시달리는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1951년 6월 21일 장기려 박사, 전영창 선생, 한상동 목사에 의해 설립된 무료병원인 복음진료소가 기원으로, 고신대학교와는 독립된 기관으로 출발하였으나 1970년 고려신학대학 설립 인가와 동시에 복음병원이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수익 기관으로 편입되었다. 개혁주의 학술원은 2006년 5월 30일에 설립된 신학학술원이다. 역사적 개혁신학의 연구와 부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등재 후보지 <갱신과 부흥>이 발행되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 )는 대한민국 공군의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설립된 사관학교이다. 줄여서 공사라고도 불리며, “성무대”(星武臺)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현재 교장은 박인호 중장이다.제주도와 진해, 서울을 거쳐 현재의 캠퍼스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쌍수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삼군 사관학교 가운데 최초로 1997년에 여자생도가 입교하였다. 공군사관생도들은 일반학, 체육, 군사훈련 등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생도들은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공군 소위로 임관하며, 군사학사 외에도 전공에 따라 학사 학위를 수여 받는다. 1학년은 전공 수업이 없으며 국어, 수학, 물리, 화학 등의 기초 학문을 수강하며, 2학년 2학기부터 실질적인 전공 수업을 시작한다. 1학기가 끝난 후에는 4주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세부적으로 1학년은 기본군사훈련, 2학년은 유격, 3학년은 공수훈련, 4학년은 1~3학년 훈련지도를 각각 실시한다. 2학기가 끝난 후에는 4주간의 동계 휴가 후 EOZ라고 불리는 동계영어집중교육과 졸업식 준비를 실시한다. 공군사관학교에서 제공하는 전공 과정은 다음과 같으나 매년 학제 개편으로 인해 일관된 커리큘럼을 운영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공학사 과정 중 산업공학이 폐지될 예정이다. 공군사관생도들은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한다. 조종분야의 공군사관생도들은 졸업 후 초등, 중등, 고등 훈련 과정에 입과하게 된다. 하지만 비행훈련에 입과한 조종사들이 모두 조종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비행교육 중 탈락하게 되는 경우 조종사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반면 정책분야의 공군사관생도들은 임관 시 각 특기로 나뉘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공주대학교 공주대학교(公州大學校, )는 대한민국 충청남도에 있는 국립 대학이다. 대학본부는 충청남도 공주시이며 천안시와 예산군에 캠퍼스가 위치하고 있다. 1948년 7월 31일에 주한미군정청 문교부에서 설립을 인가해서 충청남도립 공주사범대학으로서 그해 말에 개강했다. 이때 교사와 시설은 훗날 공주교육대학교의 전신이 된 공주여자사범학교 건물을 함께 썼다. 처음에는 국문과, 수학과, 가사과 밖에 없었지만 〈국립학교설치령〉의 개정과 더불어 꾸준히 교과 수가 늘어서 1989년까지 15개 학과와 9개 전공이 개설되었다. 공주사범대학은 그해 11월 13일에 시행령 〈양성 25413-515〉에 따라 일반대학으로 개편하면서 12개 학과로 구성된 일반학부를 만들었고, 1990년 3월 1일에는 〈국립학교설치령〉 개정령(대통령령 제12941호)에 따라 이름이 공주사범대학에서 공주대학으로 바뀌었다. 이 시행령이 대통령령으로 1991년에 다시 개정되면서 공주대학은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 지명을 교명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공주대학교의 캠퍼스가 공주시 바깥 충청남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은 충청남도의 몇몇 대학들이 공주대학교와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1992년에 예산군에 있는 예산농업전문대학이 공주대학교에 통합되었고, 2001년에는 공주시 옥룡동에 있던 공주문화대학이 통합되어 공주대학교 영상보건대학이 되었다. 2005년에는 천안시에 있는 천안공업대학이 공주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통합·개편되었다. 공주대학교는 공주시의 지명을 따서 이름으로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주시 바깥 여러 곳에 캠퍼스가 흩어져 있다. 따라서 공주대학교라는 교명이 부적절하다는 지적과 더불어, 예산군이나 천안시 등 공주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지역에서 이 대학교가 다른 곳 지명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지방 대학교라고 생각하여 지역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의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공주대학교내 일부에서는 학교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 공주대학교의 김재현 총장은 공약으로 내건 공주대 교명변경을 독자적으로 실행했고, '가운데’라는 뜻이 담긴 '가온대학교'나 대전·충북 등 인근 국립대와의 통합을 염두에 둔 '충청연합대학교' 등의 이름이 검토되었다. 하지만 공주시의 이름을 딴 국립대가 공주시의 발전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해 공주대학교를 성원했던 공주시민들과, 공주대 졸업생으로서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주대 총동창회, 공주대 사범대학을 위시한 일부 학과 등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2006년 12월 10일 공주대는 '교명변경 공청회’를 열려고 했으나 학생대표와 시민대표가 참여하지 못하는 데 반발한 공주시민 등 100여명이 단상을 점거해 공청회가 시작도 못하고 무산됐다.. 공주대학교의 교명변경 논란은 학교에 아무런 공고를 하지 않은 채 교명변경을 하기로 천안시와 약조를 미리 한 뒤 지원금을 받았다는 김제현 총장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연일 대학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2007년11월 16일 교수와 지역인사들은 현재 단식 투쟁에 돌입하였다. 반면 이런 반대의 움직임 속에서도 공주대학교의 교명변경은 계속 추진되어 '한국대학교'가 최종 선정되었으나, 교육과학기술부가 나라의 이름이 들어간 명칭은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려하였다.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 계획의 위헌 판결 이후 다시 추진되는 행정도시 건설 계획에서, 행정도시 안에 셋 정도의 대학교를 입주시킨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공주대학교를 비롯해 충남대학교, 충북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등 충청도의 국립대학교만 네 곳이 입주 의사를 밝혔지만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행정도시에 국립대의 입지를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행정도시건설청은 이에 따르기로 했다. 교육부가 내세운 이유는 입주 대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이 어렵고 복잡해지고, 기존에 충청도 곳곳에 지어 둔 시설과 설비 인프라가 낭비되며, 입학 정원을 줄이고 대학을 통·폐합하는 현 정책 방향과 상충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충남대와 공주대는 2005년 11월 25일 두 대학의 통합을 추진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지만 세부적인 통합방향과 내용에 대한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해 통합논의는 중단된 상태였다. 결국 충남대 양현수 총장이 “총장직을 포함한 모든 희생과 양보를 감수하고서라도 (통합을) 재추진하겠다”고 말해 통합이 다시 논의되고 있다. 서만철 前 총장이 충청남도교육감 선거 출마를 위해 총장직을 사퇴하였고, 이에 따라 공주대에서는 차기 총장을 선정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곧이어 김현규 경영학과 교수를 7대 총장으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교육부에서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총장 후보자에 대한 임용제청을 거부하였고 이후 김교수가 임용제청 거부 취소 소송에서 승소하였으나 교육부는 항소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학교는 총장 권한대행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학교측에서 시행하려는 각종 사업은 차질을 빚고 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공주대를 비롯한 일부 국립대의 총장후보 임명제청 거부에 대해 그 사유를 밝히겠다고 하였으나 현재까지도 그 사유를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 2012년 5월 13일 전임강사로 채용되기 위해 심사위원 등에게 7천만원을 건넨 혐의(뇌물공여 등)로 공주대학교 음악교육과 황OO(45) 교수를 구속하고, 임용 심사과정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뇌물수수 등)로 이 학과 교수와 퇴직 교수 등 5명을 수사 중임을 대전지방검찰청이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국무총리실에서 이런 내용의 교수 임용 비리 의혹이 있다고 고발해 수사했으며, 지난 주 학교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고 황 교수를 구속했다"며 "퇴직 교수에게도 금품이 건너간 정황이 있어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2008~2009년 이 대학이 음악교육과 피아노 전공 전임교수 채용 공고를 내자 학과장에게 2500~3000만원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임용된 뒤에도 동료 교수들에게 감사 인사 명목으로 100만~2000만원을 건네는 등 모두 7000만원을 준 혐의를 사고 있으며 심사를 맡은 이 교수 등 2명은 당시 학과장을 통해 채용에 응시한 44살 황 모 씨로부터 각각 5천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이 교수 등은 미리 협의해 지원자들에게 같은 점수를 주거나 다른 심사위원의 심사표를 대신 작성해 황씨를 밀어준 것으로 드러나 구속기소되었다. 앞서 국무총리실은 2010년 말~2011년 초 이 대학이 음악교육과 전임강사를 뽑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특정 지원자를 채용하기 위해 담합했고, 심사위원들에게 대가성 뇌물이 전해졌다는 제보에 따라 이 학교를 감사했다. 국무총리실은 2012년 2월에도 이 학교에 대해 재조사를 벌인 바 있다. 이에 대해 공주대 쪽은 "음악교육과 교수들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어 학사 일정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조처했다"며 "검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관련 교수들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창호 교무처장은 "남아있는 1학기 수업은 시간강사로 대체해 잘 마무리할 계획이며, 다음 학기는 겸임교수와 남아있는 전임교수 2명을 통해 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할 것"이라며 "구속된 교수들은 모두 직위해제 됐으며 빠른시간 내에 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수위를 결정할 것이다. 2012년 2학기에는 신규교수 채용 공고를 내서 내년 3월부터는 전임교원이 충원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관동대학교 가톨릭관동대학교(가톨릭關東大學校, )는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계열의 사립 대학이다. 1955년 개교한 관동대의숙을 시초로 두고 있는 관동대학교가 전신이다. 학교법인 관동대학이 학교법인 명지학원과 합병하면서, 명지대학교와 같은 학교법인 산하 종합대학으로 있었다. 다만, 2014년 6월 30일부로 명지학원에서 재정난을 이유로 관동대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을 포기했고,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에서 학교를 인수하여 2014년 8월 31일 학교법인 명지학원 관동대학교 폐교, 2014년 9월 1일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 가톨릭관동대학교가 개교했다. 가톨릭관동대학교의 학사학위 과정은 9개의 단과대학 아래 48개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가톨릭관동대학교는 일반대학원과 4개의 특수대학원이 설립하여 석사, 박사 학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은 인천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대학병원이다. 2014년 2월 17일 국제성모병원으로 개원하고, 같은 해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에서 관동대학교를 인수하고, 가톨릭관동대학교를 개교하자 대학 부속 병원으로 승인했다. 강원도 강릉시의 캠퍼스 내에 위치한 가톨릭관동대학교 체육관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관동 하키 센터(Kwandong Hockey Cente)로써, 아이스 하키 종목이 강릉 하키 센터와 나눠 개최되었다. 기존 체육관 부지에 재건축하였으며,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광운대학교 광운대학교(光云大學校, )는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위치한 사립대학교이다. 국문 약칭은 광운대(光云大)가 쓰이며, 영문 약칭으로 KW 혹은 KWU가 쓰인다. 설립재단인 학교법인 광운학원의 설립자인 조광운의 이름을 따서 교명이 붙었다. 제142학군단이 설치 되어 있으며, 정보과학연구원과 소프트웨어중심사업단 등 대학 특성화에 따른 연구 기관과 사업단을 설립하여 운영중에 있다. 대한민국의 종합대학중 하나로, 2019년 현재, 현재 학사 과정은 7개 대학으로 운영되고 있고, 7개의 대학원을 설립하여 석·박사 과정을 제공 중에 있다. 광운대학교는 1934년 조광운이 설치한 조선무선강습소가 모태이다. 해방 이후인 1964년, 광운전자공과대학으로, 정식 고등교육기관으로 설치되었으며, 1987년 종합대학인 광운대학교로 승격하게 된다. 조선무선강습소 개소부터, 대학기관인 광운전자공과대학으로 설립되기 이전, 조선무선공학원으로 운영되기 까지를 창립기라고 한다. 1920년경,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본토로 건너가 근현대의 문물의 가치를 알아본 조광한은, 1923년 한반도에 귀국하여 얼마간의 자본으로 전기상회를 설립한다. 조광운은 전기와 전자제품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보고, 관련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기술인력 양성의 필요성에 주목하였고, 1934년부터 상회 내에서 전기와 전파에 대한 자체적인 교육이 시작되게 되었는 데, 이것이 조선무선강습소의 시작이다. 일본인 강사까지 초빙하여 체계적인 교육이 될 수 있도록 했고, 교육과정 기간은 1년으로 했다. 다만, 시대적 여건과 사회적 인식 상, 정식 교육기관급 규모의 교육을 실시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1940년, 강습소를 조선무선공학원으로 개편시킨다. 이는 유능한 강사진을 확보하고,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45년 일제강점기가 해제되고, 정식 교육기관으로 등록을 위해 조광한 등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47년. 자본을 모아 재단법인을 출연하고, 당해 4월, 조선무선중학교(조선무선초급중학교)를 개교한다. 설립한 학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법인 역시 규모가 커졌고, 최고교육기관 설립을 꿈꾸던 법인은 1962년, 대학설립 신청을 교육 당국에 제출한다. 당해 3월 31일 설립 허가가 떨어져 현재 광운대학교의 직접적인 모태인 동국전자초급대학을 설립했다. 학교가 발전함에 따라 현재의 광운대학교 교사 위치에 동국전자공과대학 설립을 1963년 교육당국에 신청하여 이듬해 설립 허가를 받는다. 이에 따라, 동국전자초급대학은 야간대학으로 전환되어 운영되었으며, 명칭 역시, 동국전자공과대학 병설 동국전자초급대학으로 변경되었다. 병설 초급대학은 이후 동국전자공과대학이 광운전자공과대학으로 변경되고 2년 후인 1966년까지 초급대학으로써 교육에 전념했다. 동국전자공과대학이 설치되고, 교명을 광운전자공과대학으로 변경하면서, 종합대학인 광운대학교로 승격하기 이전, 광운대학 시절 까지를 발전기라고 한다. 동국전자공과대학 설립 절차를 거쳐, 4년제 공학 특성화 대학으로 교육편제가 안정화된 1966년부터, 대학은 3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교육기관의 특성화와 고도화를 꾀한다. 공학 전 분야에 걸친 체계적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이상으로 잡았고, 대학 발전의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2년까지 2차 3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을 준비하는 등, 대학 발전을 위해 대학본부와 법인에서 온 힘을 쏟았던 시기가 이 발전기이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사정으로 당장의 종합대학 승격은 요원해 보였는데, 이에 대학본부는 학내 기획실을 설치하고, 1970년부터 기존의 3개년 계획을 확장시켜, 5개년, 10개년 계획 등으로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학 캠퍼스의 시설부터,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대대적인 발전이 도모되었다. 이에 따라 1976년 광운공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1981년이후 박정희 정부의 유신 조치 등이 해제되는 등, 대내외적 승격 요구가 있자, 본격적으로 종합대학 승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1981년부터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1986년까지 종합대학을 준비하였고, 더 이상 공학계열 특성화 단과대학이 아닌, 다양한 학문이 편제되고, 연구가 진행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기 위해, 1983년부터 광운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dlgn 1983년 들어, 학내 자유화 물결에 따라 각종 학생 복지를 위해 조치를 취했고, 부조리한 문제점을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합대학인 광운대학교부터, 2003년까지를 도약기라고 한다. 1987년 10월 19일, 교육 당국으로부터 종합대학으로 승격을 허가받고, 광운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승격 이후, 제2캠퍼스 설치 계획과 발전 계획을 수립하여 학교의 본격적인 도약을 준비했다. 종합대학으로서, 해외 대학과의 교류를 확충하고, BK-21사업 등 국책 사업에 선정되는 등 발전 성과가 있었다. 이 외에도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학내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학본부는 학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광운대학교의 모태인 조선무선강습소부터, 직접적인 전신인 동국전자공과대학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광운대학교의 전자·정보통신·공학 분야의 연구력을 이용하여, 정부통신분야의 특성화를 꾀하게 된다. 종합대학 시기에 이루어진 이 시도는,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2003년까지 계속 되었고, 현재의 광운대학교가 대한민국 정보통신 연구 분야에서 선구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한편, 2000년 9월 7일, 새천년을 맞이하여 신규 UI를 선포했다. 광운학원 창립 70주년인 2004년부터, 현재까지를 성장기라고 한다. 학교법인 광운학원은 창립 70주년을 맞아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으로 학교 발전을 견인할 것을 다짐했다. 한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광운대학교는, 2007년 중앙일보 전국 대학 평가에서 총계 38위를 차지하는 등, 학교의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2008년 교육역량강화사업, 2005년 수도권 대학 특성화 지원사업 등 교육부가 실시하는 국책사업도 지속적으로 선정되는 등, 대학의 경쟁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2014년으로 개교 80주년을 맞이하였으며, 2019년 현재, 유지상 박사가 총장직을 역임중이다. 동국전자공과대학 시절부터, 4년제 단과대학인 광운대학까지 학장이 임명되다가, 종합대학인 광운대학교로 승격 이후 총장이 임명되고 있다. 광운대학교 총장은 교수 등 교직원들의 업무를 감독하고, 교무를 총괄하며 학생을 지도하고 학교를 대표한다. 임기는 4년이다. 광운대학교는 전자·정보 공학 특성화 교육기관을 모태로 둔 대한민국의 종합대학이다. 그러한 만큼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과거 종합대학의 지위에 걸맞게 자연과학, 인문사회 등 일부 순수학문에 대한 연구와 교육과정 역시 편제되어 있다. 광운대학교는 2019년 기준 7개대학을 설립하여 학부 과정을 운용하고 있다. 전자, 소프트웨어, 공학 계열에 특성화에 맞추어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광운대학교는 일반대학원과 특수대학원 6대학원을 설립하여 총 7개 대학원 과정을 설치하고 있다. 광운대학교의 학생 조직을 이끄는 총괄조직이다. 과거에 학생 운동권의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측 인사들이 총학생회에 당선되는 일이 잦았으나, 현재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다수 당선되고 있다. 2019년 현재 제46대 총학생회 파노라마가 임기중에 있다. 광운대학교는 서울특별시 노원구의 사립 대학으로, 월계동에 위치한다. 캠퍼스는 75,836m²로, 그 규모에 비하여는 다소 작은 편이다. 다만 시내 지구에 캠퍼스가 위치하여 교통편과 기반 시설 등은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캠퍼스 근처에 수도권 전철 1호선 광운대역이 위치하며, 주거지역과 밀접한만큼 교육기관이 다수 위치한다. 같은 법인 내 기관인 광운중학교, 남대문중학교,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등이 근처에 위치한다. 캠퍼스 내 시설의 경우, 전자정보공과대학과 공과대학은 비마관과 참빛관을 주로 사용하며, 새빛관의 경우 소프트웨어융합대학이, 한울관은 인문사회과학대학, 누리관은 경영대학 등이 주로 이용한다. 최근, 광운대학교 개교 80주년을 맞이하여 캠퍼스 미관 개선을 목적으로 녹지 조성을 위해 광운스퀘어를 조성한 바 있다. 광운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966년 개관한 광운전자공업대학 도서관이 그 모태다. 2018년 기준으로, 광운대학교 중앙도서관이 보유한 장서는 총 701,052권에 달하며, 이는 재학생 1인당 약 73.8권에 달하는 수치다. 광운대학교 공공기숙사 빛솔재는 A동과 B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생활관이다. 총 491실 977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국방대학교 국방대학교(國防大學校, 약칭: KNDU)는 1955년에 설립된 국방부 산하의 국립 대학이다. 국방부 장관의 관장하에 운영되며, 군(軍)대학을 이수한 고급장교와 학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일반직 국가공무원 또는 정부관리 기업체의 간부 중에서 학생을 선발한다. 충청남도 논산시에 위치해 있다. 고등교육법 제30조에 따라 설립된 대학은 아니다. 2018년 현재 교육과정은 1년의 안보과정과 학위과정으로 대학원 과정이 있어 사실상의 대학원대학이다. 군산대학교 군산대학교(群山大學校, )는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다. 군산대학교는 미룡캠퍼스와 새만금캠퍼스 등 2캠퍼스를 포함한 행정기구 및 인문대학, 예술대학, 사회과학대학, 산학융합공과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해양과학대학 등 7개의 단과대학에 11개학부(18개전공) 29개학과를 두고 있다. 대학원은 석사과정 4계열, 2학부, 36학과, 박사과정 4계열, 2학부, 20학과, 3개 협동과정 8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특수대학원으로서 산업대학원, 경영행정대학원, 교육대학원에 석사과정을 두고 있다. 1개의 교육기본시설, 6개 지원시설, 18개 부속시설, 19개 연구시설, 1개 법인 및 1개의 학교기업을 갖추고 있다. 군산대학교는 1947년 2월 군산사범학교로 출발하여 군산교육대학, 군산여자초급대학을 거쳐 199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되었다. 교명을 군산대학교로 하고, 군산시 흥남동 캠퍼스에서 개교하였다가, 대학의 양적 팽창에 따라, 1983년 현재의 미룡동에 25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캠퍼스를 이전했다. 1992년 군산수산전문대학이 군산대학교 해양산업대학으로 승격·통합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교시는「진리탐구」 「문화창조」 「사회봉사」로, 이를 구현하는데 대학 교육의 중점을 두고 있다. 남서울대학교 남서울대학교(南서울大學校, )는 이재식 박사와 공정자 박사에 의해 충남 천안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개신교 정신을 바탕으로 1994년 개교했다. 남서울대학교는 4개 단과대학에 각 학과가 편제되어 있으며,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약 1만여명이 재학하고 있다. 남서울대학교는 1993년에 남서울산업대학교로 설립되었다. 4년제로 교육과정이 편제된 산업대학 형태로 설치되었으며, 1998년 남서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교세를 확장해 나가다 이윽고, 2012년 일반대학으로 전환되었다. 1993년 12월 21일에 학교법인 성암학원에 의해 남서울산업대학교로 설립인가가 되었다. 전자계산학과, 전자공학과, 정보통신공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유통학과, 경영학과, 영어과, 일본어과 등 8개 학과에 840명이 편제되었다. 1995년 3월 1일에 건축학과와 환경조형학과, 스포츠경영학과, 중국학과가 신규 편제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에는 멀티미디어학과, 산업공학과, 광고홍보학과가 신설되고, 1997년 3월 1일에는 지리정보공학과에서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998년 애니메이션학과, 호텔관광경영학과, 세무회계학과, 아동복지학과가 신설되었으며, 5월 1일에 남서울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99년 3월 1일에는 운동건강관리학과, 국제통상학과, 보건행정학과가 신설되어 학교가 점점 양적으로 팽창해 나갔다. 2001년 3월 2일에는 특수대학원인 디지털정보대학원을 개원했다. 2003년 3월 1일에는 관광경영학과, 치위생학과가 설립되었고, 2006년 2월 6일에는 필리핀에 국제교류협력센터를 개소하였으며, 3월 1일에는 사회복지학과와 물리치료학과가 신설되었다. 2007년 3월 1일에 부동산학과가 신설되었으며, 3월 3일에 특수대학원의 일종인 아동행동치료대학원을 개원하였다. 2008년 1월 3일에는 인도에 국제교류협력센터를 개소하였으며, 3월 1일에 건축공학과, 노인복지학과, 간호학과, 임상병리학과를 신설하고 건축학과를 5년제로 학제개편하였으며, 4월 18일에는 서울 대학로에 아트센터를 개관하였다. 2011년 6월 27일에 산업대학에서 일반대학 전환을 인가 받았다. 같은 해 12월 12일, 학군단 설치를 인가 받았다. 2012년 3월 1일에 일반대학원을 개원했다. 2018년 실시된 교육부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 결과에서 역량강화대학에 선정 되었다. 2018년 기준 남서울대학교는 4개 대학 등으로 학부 과정이 구성되어 있다. 남부대학교는 2018년 현재, 일반대학원과 특수대학원 1개원을 설립하여 석·박사 학위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칼슨뉴만 대학교, 도쿄가쿠게이 대학 등 13개국 45개 대학과 학술 교류협정을 맺었다. 2018년 기준, 남서울대학교의 총동아리연합회 소속 중앙동아리로 29개가 설치되어 있다. 교내 언론 기관으로는 방송국(NSBS)과 신문사(남서울학보)가 있다. NSBS는 1994년 임시 개국하여, 1995년에 정식 개국한 이래, NSBS 남서울 가요제와 방송제를 주관하고 있으며, 남서울학보는 1996년 11월 6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연간 6회 8면을 발행하고 있다. 남서울대학교는 충청남도 소재 사립대학으로 천안시 서북구에 캠퍼스가 소재하며, 약 46만m의 교지가 있다. 캠퍼스 주변에 등산로 등 산지가 있고, 근처 매주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다만, 시외·고속버스 정류장인 남서울정류소가 캠퍼스 내 위치하고, 수도권 전철 1호선 성환역이 인근에 있어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인근에 주택가와 복지관, 문화회관 등이 위치하며, 성환버스터미널, 성환중학교 등이 위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전문대학 목록 다음은 대한민국에 있는 전문대학 목록이다. 가톨릭상지대학교 강동대학교 강릉영동대학교 강원관광대학교 강원도립대학교 거제대학교 경기과학기술대학교 경남도립거창대학 경남도립남해대학 경남정보대학교 경민대학교 경복대학교 경북과학대학교 경북도립대학 경북보건대학교 경북전문대학교 경인여자대학교 계명문화대학교 계원예술대학교 고구려대학교 광양보건대학교 광주보건대학교 구미대학교 국제대학교 군산간호대학교 군장대학교 기독간호대학교 김포대학교 김해대학교 농협대학교 대경대학교 대구공업대학교 대구과학대학교 대구보건대학교 대덕대학교 대동대학교 대림대학교 대원대학교 대전과학기술대학교 대전보건대학교 동강대학교 동남보건대학교 동부산대학교 동서울대학교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동아보건대학교 동양미래대학교 동원과학기술대학교 동원대학교 동의과학대학교 동주대학교 두원공과대학교 마산대학교 명지전문대학 목포과학대학교 문경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백석문화대학교 백제예술대학교 부산경상대학교 부산과학기술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 부산예술대학교 부천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 상지영서대학교 서라벌대학교 서영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 서울예술대학교 서일대학교 서정대학교 서해대학교 선린대학교 성덕대학교 세경대학교 송곡대학교 송호대학교 수성대학교 수원과학대학교 수원여자대학교 순천제일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 신구대학교 신성대학교 ·신안산대학교 아주자동차대학교 안동과학대학교 안산대학교 여주대학교 연성대학교 연암공과대학교 연암대학교 영남외국어대학 영남이공대학교 영진전문대학교 오산대학교 용인송담대학교 우송정보대학 울산과학대학교 웅지세무대학교 원광보건대학교 유한대학교 인덕대학교 인천재능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 장안대학교 전남과학대학교 전남도립대학교 전북과학대학교 전주기전대학 전주비전대학교 제주관광대학교 제주한라대학교 조선간호대학교 조선이공대학교 진주보건대학교 창원문성대학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청암대학교 춘해보건대학교 충남도립대학교 충북도립대학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충청대학교 포항대학교 한국골프대학교 한국관광대학교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복지대학교 한국승강기대학교 한국영상대학교 한림성심대학교 한양여자대학교 한영대학 혜전대학교 호산대학교 영남외국어대학 영남외국어대학(嶺南外國語大學, Youngnam Foreign Language College)은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영남외국어대학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한국영상대학교 한국영상대학교(韓國映像大學校, Korea University of Media Arts)는 대한민국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표어는 창의(創意, Originality), 성실(誠實, Sincerity), 박애(博愛, Philanthropy)이며, 끼·꾼·꿈을 대표로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지식인을 육성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2·3·4년제 전문대학이다. 1993년 웅진전문대학으로 개교했으며 1998년 '공주영상정보대학', 2011년 '공주영상대학교'로 2013년 3월 현재의 한국영상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부속기관으로 도서관, 학보방송사, HD미디어센터, 전자계산소, 취업지원센터, 사회봉사단 등이 있고, 부설기관으로 평생교육원, 국제교육원, 초경량무인비행교육원, 부설유치원이 있으며, 연구소로 차세대영상콘텐츠랩을 운영한다. 교내 26종 교외 21종의 장학금이 있으며, 해외 현장학습 및 취업 지원을 위해 방과 후 외국어 학습, 어학사관학교, 해외 어학연수 등을 운영한다. 또한 미국 브루클린대학, 영국 솔렌트대학과 3+1 학사학위 취득 협약을 체결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한국영상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한국영상대학교는 세종특별자치시의 전문대학으로, 금암리에 위치하며 약 57만m의 교지가 있다. 영상 특성화 대학으로, 캠퍼스 내 소극장, 대극장 등이 위치한다. 캠퍼스는 산중에 있어 언덕 등이 많고 고저차가 크며, 도로교통 시설을 제외하면 기반 시설은 열악한 편이다. 개교와 동시에 개관하였으며, 2017년 기준, 보유 장서는 112,680권이다. 구미대학교 구미대학교(龜尾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1992년 구미전문대학으로 개교하였으며, 2012년 구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다음은 구미대학교의 2018년 기준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경북 구미, 김천 지역 대학 총학회장의 억대 교비 횡령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북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2013년 6월 12일 구미대학교 전 총학생회장 김모(31)씨 등 3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 수사 결과, 김씨를 비롯해 김모(38) 조모(33)씨 등은 학생들에게 지급해야 할 장학금과 교비 운영자금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또, 구미대학교 스포츠 관련 학과 K교수는 2017년 말, 학과 학생 2명의 동계훈련 비용 250여 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구미대학교는 2013년 9월 ‘학생자치기구 운영 규정’을 개정, 학생들의 선거로 뽑던 총학생회장을 대의원회의 추천을 받아 총장이 임명하는 ‘추천 임명제’로 바꿨다. 총학생회장을 총장이 추천을 받아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꾸자 학교 안팎에서는 학생들의 자율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구미대학교 스포츠 관련 학과 K(50) 학과장이 2017년 말, 자신의 학과 사무실에서 재학생 5명의 멱살을 잡고 정강이를 발로 차는 등 수 차례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혐의사실을 확인하고 K교수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K교수는 경찰 조사에서 "학생들이 SNS에 '우리 대학은 좋은 대학이 아니다', '우리 학과에 입학하면 후회할 것이다'라는 글을 올려 홧김에 때렸다"고 진술했다. 또, 구미대 스포츠관련 학과 MT(수련회) 행사에서 1·2학년 여학생들에게 머리를 바닥에 박게 하는 속칭 원산 폭격을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3월 26일 조교 겸 4학년생인 A양과 다른 4학년생 B양은 “교수님이 얘기 중인데 떠들고, 신입생들 간에 갈등이 있는데도 2학년생은 이를 다독이지 않아 분위기가 엉망”이라며 이어 조교 A양은 1·2학년 여학생들에게 “모두 머리 박아”라며 원산 폭격을 시켰다. 이 같은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자 2018년 3월 30일, 조교 A양은 1·2학년 여학생들을 불러 모아 “누가 말을 꺼냈느냐”며 추궁하기도 했다. 학교 측은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한 후 가해 학생들에게 제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포대학교 김포대학교(金浦大學校, Kimpo University)는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김포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高等學校)는 대한민국의 교육 과정에서 중학교와 함께 중등교육과정의 하나를 이룬다. 고등학교 과정은 총 3년으로 이루어지며, 중학교 교육을 기초로 하여, 입시에 필요한 중등 교육 및 취업에 필요한 실업 교육을 배우는 학교이다. 고등학교는 중학교 과정을 마친 자들을 전산 추첨 혹은 학교장 모집 및 선발 방식으로 뽑는다. 전산 추첨 방식 : 일반 고등학교 및 평준화 학교 학교장 모집 및 선발 방식 : 비평준화 학교, 특수 목적 고등학교,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 입학에 필요한 자료로는 지역•학교에 따라서 학교생활기록부, 고입선발고사 성적 자료 등이 있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 면접, 실기 등을 활용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유형은 다음과 같다. 사립 고등학교 중 학교 설립 주체자의 종교적 색채가 반영되어 있는 종교계 학교도 있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공통 과정으로 수업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인문사회 과정(통칭 문과. 예체능계 학생들은 문과반에 편성된다.)과 이학공학 과정(통칭 이과)로 나뉘어 수업하게 되고(2014년 이후로는 공통 과목이 사라진다.), 위 수업 시간은 50분이다. 대부분 정규수업 후 보충 수업이나 야간 자율 학습을 한다. 인문 계열에서 과학과목을 안배우거나, 자연 계열에서 사회과목을 안배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집중계열일 뿐이다. 서울특별시의 고등학교 목록 다음 목록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고등학교 목록이다. 가락고등학교 가재울고등학교 강동고등학교 강서고등학교 강서공업고등학교 강일고등학교 개포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 경기기계공업고등학교 경기상업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경기여자상업고등학교 경동고등학교 경문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경복비즈니스고등학교 경복여자고등학교 경성고등학교 경신고등학교 경인고등학교 경일고등학교 경희고등학교 경희여자고등학교 계성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고명경영고등학교 고척고등학교 공항고등학교 관악고등학교 광남고등학교 광문고등학교 광성고등학교 광신고등학교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 광양고등학교 광영고등학교 광영여자고등학교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구로고등학교 구암고등학교 구일고등학교 구현고등학교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금옥여자고등학교 금천고등학교 금호고등학교 남강고등학교 노원고등학교 누원고등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당곡고등학교 대경상업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대동세무고등학교 대성고등학교 대신고등학교 대영고등학교 대원고등학교 대원여자고등학교 대원외국어고등학교 대일고등학교 대일관광고등학교 대일외국어고등학교 대진고등학교 대진디자인고등학교 대진여자고등학교 덕성여자고등학교 덕수고등학교 덕원여자고등학교 덕원예술고등학교 덕일전자공업고등학교 도선고등학교 도봉고등학교 독산고등학교 동구마케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명여자고등학교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 동북고등학교 동산정보산업고등학교 동성고등학교 동양고등학교 동일여자고등학교 동일여자상업고등학교 동작고등학교 둔촌고등학교 등촌고등학교 리라아트고등학교 마포고등학교 면목고등학교 명덕고등학교 명덕여자고등학교 명덕외국어고등학교 명일여자고등학교 명지고등학교 목동고등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 문일고등학교 문정고등학교 문현고등학교 미래산업과학고등학교 미림여자고등학교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미양고등학교 반포고등학교 방산고등학교 배명고등학교 배문고등학교 배재고등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백암고등학교 보성고등학교 보성여자고등학교 보인고등학교 불암고등학교 삼각산고등학교 삼성고등학교 상계고등학교 상명고등학교 상명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상문고등학교 상암고등학교 상일미디어고등학교 상일여자고등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서문여자고등학교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서울공업고등학교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울관광고등학교 서울국제고등학교 서울금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서울디지텍고등학교 서울로봇고등학교 서울문영여자고등학교 서울문화고등학교 서울미술고등학교 서울방송고등학교 서울세종고등학교 서울아이티고등학교 서울여자고등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영상고등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울외국어고등학교 서울전자고등학교 서울체육고등학교 서울컨벤션고등학교 서울항공비즈니스고등학교 서일국제경영고등학교 서초고등학교 석관고등학교 선덕고등학교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선사고등학교 선유고등학교 선일여자고등학교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선정고등학교 선정국제관광고등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성남고등학교 성덕고등학교 성동고등학교 성동공업고등학교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성보고등학교 성수고등학교 성수공업고등학교 성신여자고등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성암국제무역고등학교 세그루패션디자인고등학교 세명컴퓨터고등학교 세종과학고등학교 세현고등학교 세화고등학교 세화여자고등학교 송곡고등학교 송곡관광고등학교 송곡여자고등학교 송파공업고등학교 수도여자고등학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수락고등학교 수명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신광여자고등학교 신도고등학교 신도림고등학교 신림고등학교 신목고등학교 신서고등학교 신일고등학교 신정여자상업고등학교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 신현고등학교 압구정고등학교 양재고등학교 양정고등학교 양천고등학교 언남고등학교 여의도고등학교 여의도여자고등학교 염광고등학교 염광여자메디텍고등학교 영동고등학교 영동일고등학교 영등포고등학교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의료과학고등학교 영신간호비즈니스고등학교 영신고등학교 영신여자고등학교 영일고등학교 영파여자고등학교 영훈고등학교 예림디자인고등학교 예일디자인고등학교 예일여자고등학교 오금고등학교 오류고등학교 오산고등학교 용문고등학교 용산고등학교 용산공업고등학교 용화여자고등학교 우신고등학교 원묵고등학교 월계고등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 은광여자고등학교 은평고등학교 은평메디텍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병설미디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이화·금란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인덕공업고등학교 인창고등학교 인헌고등학교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자양고등학교 자운고등학교 잠신고등학교 잠실고등학교 잠실여자고등학교 잠일고등학교 장충고등학교 장훈고등학교 재현고등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정의여자고등학교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 중경고등학교 중동고등학교 중산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 중화고등학교 진관고등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진선여자고등학교 창덕여자고등학교 창동고등학교 창문여자고등학교 청담고등학교 청량고등학교 청원고등학교 청원여자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태릉고등학교 풍문고등학교 하나고등학교 한가람고등학교 한강미디어고등학교 한광고등학교 한국삼육고등학교 한서고등학교 한성고등학교 한성과학고등학교 한성여자고등학교 한세사이버보안고등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한영고등학교 한영외국어고등학교 해성국제컨벤션고등학교 해성여자고등학교 현대고등학교 혜성여자고등학교 혜원여자고등학교 혜화여자고등학교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홍익디자인고등학교 화곡고등학교 화곡보건경영고등학교 환일고등학교 효문고등학교 휘경공업고등학교 휘경여자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휘봉고등학교 강서고등학교 강서고등학교(江西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경문고등학교 경문고등학교(慶文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 이다. 경복여자고등학교 경복여자고등학교(慶福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경성고등학교 경성고등학교(景城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경신고등학교 (서울) 경신고등학교(儆新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설립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경희고등학교 경희고등학교(慶熙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계성고등학교 (서울) 계성고등학교(啓星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高麗大學校 師範大學 附屬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고척고등학교 고척고등학교(高尺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광신고등학교 광신고등학교(光新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光新情報産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광영고등학교 (서울) 광영고등학교(光榮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예림디자인고등학교 예림디자인고등학교(藝林디자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금옥여자고등학교 금옥여자고등학교(金玉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남강고등학교 남강고등학교(南崗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단국공업고등학교 단국공업고등학교(檀國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경상업고등학교 대경상업고등학교(大京商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광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大光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성고등학교 대성고등학교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대신고등학교 대신고등학교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원여자고등학교 대원여자고등학교(大元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일고등학교 대일고등학교(大一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일관광고등학교 대일관광고등학교(大一觀光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일외국어고등학교 대일외국어고등학교(大一外國語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사립 외국어고등학교이다. 대진고등학교 (서울) 대진고등학교(大眞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진여자고등학교 대진여자고등학교(大眞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대진디자인고등학교 대진디자인고등학교(大眞디자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덕성여자고등학교 덕성여자고등학교(德成女子高等學校)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덕원여자고등학교 덕원여자고등학교(德源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덕원예술고등학교 덕원예술고등학교(德源藝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구마케팅고등학교 동구마케팅고등학교(東丘마케팅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東國大學校 師範大學 附屬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同德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디자인고등학교 서울디자인고등학교(서울디자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명여자고등학교 동명여자고등학교(東明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북고등학교 동북고등학교(東北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2019년 3월1일 김찬중 입락 동성고등학교 동성고등학교(東星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양고등학교 동양고등학교(東洋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일여자고등학교 동일여자고등학교(東一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리라아트고등학교 리라아트고등학교(리라아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논어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현재 《논어》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의 6대 경제(BC 188 - BC 157 - BC 141) ~ 7대 무제(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인다.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 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이중 대표적인 학이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논어》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고주"라 하고 주희의 《논어집주》를 "신주"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의 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 그리고 이토 진사이 등 일본 유학자들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禮、義、忠、仁)" 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거의 2천년 동안 《논어》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265-420)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와 , 그리고 의 번역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교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볼테르는 계몽철학자로서 '《논어》'야말로 당대까지의 허황된 형이상학이나 신학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철학서라고 칭송하며 자신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둘 만큼 공자를 존경하였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사서오경 사서오경(四書五經, ) 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와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 송나라에 이르러 성리학 체계가 성립하면서 주희가 《예기》에서 일부를 〈대학〉과 〈중용〉의 두 편으로 발췌하면서,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 체계를 확립했다. 악경(樂經)을 포함하여 육경이라고도 하는데, 악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오경은 송나라 시기에 확립된 정주학 이전에 이미 고전이 되었고, 사서 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백제가 오경박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리학에서는 이전의 오경보다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와 제자백가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맹자의 '맹자'를 더 중요하게 여겨 논어와 맹자를 4서에 포함 시키고 대학과 중용과 함께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신성일 신성일(申星一, 1937년 5월 8일 ~ 2018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며,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명은 강신영(姜信永)이고 본관은 진주(晋州), 호(號)는 우석(隅石)이다. 데뷔 당시 소속한 신필름의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을 담고 신성일(申星一)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과 예명을 합친 강신성일(姜申星一)로 개명하였다. 폐암 투병 끝에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 화순전남대학교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어렸을 때는 경상북도 영덕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60년《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맨발의 청춘》을 비롯한 수편의 청춘 멜로 영화에 엄앵란과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그 후 1964년 엄앵란과 결혼했다. 1975년 이후 엄앵란과 별거했으나 이혼하지는 않았으며, 경상북도 영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일가를 지어 살았다. 2003 ~ 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그의 아들은 영화 배우 및 제작자인 강석현이다. 1978년 제 10대 서울특별시 용산·마포 중선거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나, 17대에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려 하다 출마를 포기하였다.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과 관련하여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2005년에 징역 5년에 추징금 1억 8,700만원을 선고받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007년 2월 12일 특별사면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31일 특별 복권됐다. 2017년에 그는 폐암에 걸렸다고 고백했다. 2018년 11월 3일 밤 8시 경, 인터넷 기사 및 뉴스를 중심으로 신성일이 별세했다는 내용과 함께, 빈소가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에 대하여 가족 측은 신성일은 위독하지만, 아직 살아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약 7시간 뒤인 4일 새벽 2시 30분 경, 병마와 싸우지 못하고 81세를 일기로 끝내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그가 영화계에 남긴 업적이 많고 공로한 바가 커서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경상북도 영천시 선영에 안장됐다. 2018년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낸 게 그가 대중들에게 보인 마지막 모습으로 남았다. 마지막 영화 작품은 2013년에 개봉한 이 됐다. 국회의원 후보 출마 당시 본명인 강신영이라는 이름을 쓰자 유권자들은 강신영이 누구인지 몰랐고 낙선을 하자 이후 강신성일로 개명 하여 출마 하게 되었다. 김현철 김현철은 다음 사람등을 가리킨다. 김현철 (1959년) 김현철(金賢哲, 1959년 3월 8일 ~ )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의 차남이다. 1959년 3월 8일에 서울에서 아버지 김영삼과 어머니 손명순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이다. 1983년 김정현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1984년 25세에 대학을 나온 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에 취직하여 근무하였으나 아버지 김영삼의 대선을 돕기 위해 1987년에 퇴사하고 정계에 투신하였다. 제13대 대선에서는 외곽에서 선거를 도왔고 제14대 대선에서 아버지 김영삼의 당선에 기여하였다. 1996년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는 여론 조사와 선거 전략을 담당하였다. 2008년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으로 정계에 복귀하였고 2012년 거제에서 제19대 총선에 출마를 결심했으나 새누리당에서 공천탈락에 불복하고 새누리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 출마를 고려하다 결국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2009년에는 고려대학교 지속발전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2013년에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에서 특임교수로 2014년까지 활동하다 2015년에는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의 특임교수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고 2019년부터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현재는 김영삼기념도서관의 기념사업회인 (사)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로 활동하면서 동작구청에 기념도서관을 기부채납하고 2020년 3월경에는 기념관을 정식 오픈할 예정이다. 2012년 18대 대선 때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비판하며 문재인 지지 선언을 하였고, 5년 뒤인 2017년 5월에는 문재인 19대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고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2019년 1월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고, 문재인 정부의 대북·일자리·탈원전 정책을 비판하였다. 1997년 5월 17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1999년 6월 징역 2년, 벌금 10억 5천만원, 추징금 5억 242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8월 12일 잔여형기가 면제되어 사면되었다. 2004년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긴급체포되었고 검찰 수사 도중 자해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AODV AODV는 Ad hoc On-demand Distance Vector의 약자로서, 애드 훅 네트워크에서 동적 소스 라우팅(DSR, Dynamic Source Routing) 프로토콜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제안된 프로토콜이다. 이 라우팅 프로토콜은 애드혹 네트워크를 위한 아주 가벼운 라우팅 프로토콜로서, IETF의 RFC 3561에 정의되어 있다. 보다 적은 메모리를 사용하면서 라우팅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라우팅 프로토콜이다. 특히 이 라우팅 프로토콜은 데이터 전달 시에만 사용되는 주문형 라우팅 프로토콜로 데이터를 전달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으므로 라우팅에 의한 부하가 적다. 애드혹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무선 노드가 데이터를 전달하기 위해서 라우팅 경로를 요구하는 경우에 라우팅 경로를 찾기 위해서 사용된다. 따라서 기존에 데이터를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적이 있다면 라우팅 경로를 다시 찾을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사용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라우팅 경로를 찾기 위해서 소스노드가 RREQ라는 라우팅 경로를 찾기 위한 메시지를 네트워크에 플러딩한다. RREQ를 받은 노드들은 이웃 노드들에게 다시 RREQ를 플러딩 하고 목적지 노드가 RREQ 메시지를 수신하였을 경우 RREP 메시지를 RREQ 메시지를 보낸 소스 노드로 RREQ가 전송된 역방향의 루트를 통해 전송하고 이 RREP 메시지를 받은 소스노드는 RREP가 전달되어온 경로를 통해 데이터를 목적지 노드로 전달한다. ISDN ISDN은 종합 정보 통신망(, )의 준말이다. 1988년 CCITT 레드북에 처음 정의되었다. 모든 정보를 디지털 신호로 만들어 하나의 네트워크를 통하여 문자, 그림, 음성, 화상, 비디오, 팩시밀리, 전신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신망이다. ISDN에 들어가는 수준의 인터페이스는 기본 속도 인터페이스(BRI)이며 192 킬로비트의 서비스를 표준 전화 구리선을 통해 전달한다. 144 킬로비트 속도는 2 x 64킬로비트 Bearer (줄여서 B) 채널과 하나의 16 킬로비트 데이터 (줄여서 D) 채널로 나뉜다. 여기에 오버 헤드 48킬로비트를 포함하여 기본 192 킬로비트의 전송 용량을 제공한다. 인터페이스는 3 개의 다른 네트워크 인터페이스를 지정해 놓고 있다: (S와 T 지점은 일반적으로 NT1 위의 'S/T'라는 이름을 붙여 추가한다) 김현철 (희극인) 김현철(1970년 8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자 개그맨이다. 본관은 안동. 김현철은 충암고등학교(89년)와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한 뒤 1994년 SBS 개그 콘테스트에 응시해 수상을 하였고, 2년 뒤 1996년 MBC 공채 코미디언으로 선발되면서 본격적으로 개그맨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초기에는 방송 출연 빈도에 비해 무명이었지만, MBC 《코미디 하우스》를 통해 부정확한 발음, 어눌한 말투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보다는 각종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과 교양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꾸준히 출연하였다. 그러나 《무한도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가 방송에서 욕설을 한 것이 드러나 한동안 자숙 기간을 가졌다가 2007년 다시 《무한도전》에 출연하였으나 제7의 멤버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MBC 《세상을 바꾸는 퀴즈》에서 《PD수첩》을 패러디한 "PD공책" 개그로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였으며,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사랑 나눔 코너 〈단비〉에서 고정 연기자로 활약하였다. 이후 〈단비〉의 후속 프로그램, 〈오늘을 즐겨라〉에 고정 연기자로 출연했다. 2013년 5월 17일 결혼하였으며, 2014년 6월에는 딸이 태어났다. 2014년 7월 28일에 은평인터내셔널유스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특별 선임되었다. 앞서 1994년에는 SBS TV의 《좋은 친구들》의 첫 코너인 〈제3의 사나이〉에서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 서곡을 지휘하는 모습이 보였다. SBS 라디오의 프로그램인 《이숙영의 러브FM》에서 〈김현철의 어설픈 클래식〉 코너를 진행하여 서양 고전 음악의 길잡이 역할도 하고 있다. 김현철 (가수) 김현철(1969년 6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작사가,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89년 1집 수록곡 《춘천 가는 기차》, 1993년 3집 수록곡 《달의 몰락》등의 노래를 통해, 고급스러운 음악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고, 이후 계속 히트곡을 발표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를 풍미한 동아기획에서 활동했던 뮤지션들 중에 대표적인 가수이며, 다른 많은 가수들의 음악에도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소라 등의 음반을 프로듀싱하여 히트시킨 제작자이며, 현재는 FE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를 맡아 연예인 기획사의 경영자로도 활동중이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1년간, 2013년부터 2018년까지 MBC FM4U의 《오후의 발견》을 진행했다. 현재는 6개월 만에 동 채널로 복귀하여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후임으로 《FM 골든디스크》를 진행하고 있다. 최충 최충(崔沖, 984년 ~ 1068년 10월 13일(음력 9월 15일))은 고려 전기의 문신(文臣)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아전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이다.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에 유학 열풍을 일으켰다.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의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종 즉위 후 법령을 개정하여 고려 멸망시까지 고려의 국법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총 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다.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의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 등을 비롯한 야인들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은퇴 후에는 학당인 구재학당에서 유학자들을 양성했는데 이후 개경의 사학십이도의 모범이 되었다. 별칭은 해동공자(海東孔子)이다. 1050년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1053년에는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1055년에는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에 특별 서훈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아버지 최온(崔溫)은 해주(海州)의 주리(州吏, 아전)였으며, 사후에 아들 최충이 귀해지자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받았다. 최충은 984년 서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경상도 금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개경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호는 성재, 월포, 방회 등을 사용했고 자는 호연이다. 1005년(목종 8)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우습유(右拾遺)에 올라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였다. 현종 때 습유보궐·우습유·한림학사·간의대부 등을 지내고, 덕종 초에 우산기상시·동지 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형부 상서·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정종(靖宗) 때 상서좌복야·참지정사·판서북로 병마사·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고 1013년 국사수찬관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변방에 병마사로도 나갔다. 식목도 감사로 재직할 당시 내사시랑 왕총지와 함께 왕에게 과거 급제 문제를 진언하였다. 최충의 전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최충의 진언은 당시 문하시랑으로 있던 김원충과 판어사 김정준에 의해 논박당한다. '그의 씨족 등록이 안된 것은 그의 조부나 부친의 과실이지 본인의 죄는 아니며 또한 그가 다년간 글공부에 노력한 공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영예를 얻었으니 그 스스로에게는 어떤 허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직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라며 논박했던 것이다. 문종은 이 두 의견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문종은 최충과는 달리 가끔 예외를 인정하고 인품과 실력을 중시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의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문종 즉위 후에는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나라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참고하여, 이 글들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고사를 참고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원사(刑部尙書中樞院使)로 내직으로 돌아왔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 수국사(參知政事 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임명되어 변경에 나가 영원진(寧遠鎭)·평로진(平虜鎭) 등 변경에 진(鎭)을 구축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다시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守司徒 修國史)가 된 뒤 상주국(上柱國)의 훈위를 받고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문종이 즉위하여 문하시중이 되자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는데 참여하였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47년 문종의 즉위 직후 평장사에서 문하시중으로 특진한 뒤 도병마사가 되었고, 대흉년을 만난 서북(西北) 지방 백성이 부역에 시달리는 것을 금지케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의 변경 침입에 대해 강경책을 쓰도록 주장하여 시행되었다. 문하시중에 임명된 그에게 가장 먼저 부여된 일은 형법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었다. 문종은 즉위년 8월 경신일 아침 조회를 마치고 시중으로 있던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을 불러 정치적 당면 과제를 질문하였다. 최충은 법제도의 확립이 정치의 관건이라고 역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중 최제안이 곧 죽고 최충이 후임 시중으로 오른 후 곧바로 법제 개편 작업에 돌입 한다. 1047년 왕은 최충과 율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시중 최충은 왕의 명령을 받고 율사들과 함께 형법 검토작업에 들어간다. 당시까지 허술하게 되어 있던 많은 법규들이 고쳐지고, 죄수에 대한 신문을 할 때 반드시 형관 3인이 함께 들어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이 마련되었다. 문종은 이외에도 많은 법제를 신설하고 개편하는데, 여기에는 최충의 조언이 많이 작용한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시중에 올라 있던 최충은 한때 도병마사로 북방에 나가 있었던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문종에게 여진족 포로의 석방을 건의한다. 최충의 이같은 건의에 따라 동여진의 추장을 비롯한 86명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가 내려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가 내려졌다. 문종은 나이 일흔이 넘어 퇴직을 청하는 최충을 극구 만류하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최충은 사양하고 사퇴하였다. 문종의 배려에도 최충은 연로하였고, 국법으로도 나이 일흔이면 당연 퇴임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태사 겸 문하시중에 임명되면서 동시에 치사(致仕)가 허락되었다. 이에 문종은 다시금 조서를 내렸다. 최충을 존경한 문종은 그가 퇴직한 이후에도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문의하도록 하였다. 이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이 내려졌다. 1053년(문종 7) 중서령(中書令)으로 퇴관한 후로는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최충은 시중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하고 있던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총 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다. 학도들이 운집해 오자 1055년 송악산 밑에 사숙(私塾)을 세우고 유학을 강의했으니 바로 구재학당으로 후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린다. 구재학당에서는 우수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이후 다른 유학자들이 이를 본받아 사학을 개설하고 문헌공도를 포함하여 12공도라 하였다. 사학십이도 중 역시 으뜸은 최충의 문헌공학도였다. 최충의 시호를 따서 사후에 붙여진 이 학도의 수는 그의 사후에도 수백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 주도하에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대대적인 유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학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최충의 행적이 흡사 고대 중국의 공자에 비견된다 하여 그에게는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별칭이 붙었다. 1055년 70세 이상의 고령인데도 특명으로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된 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에 서훈되었다. 강감찬, 황보유의, 왕가도 등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문하생으로는 김양감, 이주좌 등이 문인으로 배출되었다. 1068년 9월 15일에 개경에서 생을 마감하니 향년 85세였다. 최충의 아들 최유선은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서 아버지 최충을 계승하여 유림의 영수로 지냈으며, 최사추, 최사제 등 그의 아들들 또한 문재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다. 최충은 많은 책들을 남기긴 하였으나 무신정권 시절에 거의 사라졌고, 몇 개의 시구와 금석문이 남아있을 뿐이다.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 등이 현재 전한다. 그 뒤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가 그 후에 선종의 사당에 함께 배향(配享)했다.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비록 악한 적이라고 해도 힘으로만 누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그의 판단에서는 실리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인간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것은 차짓 원한을 사게 할 수 있으니 차라리 풀어주어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편이 적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 역시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체제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에 충실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동쪽 나라의 공자라는 뜻'의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일컬음을 받았으며 고려의 유학을 진흥시켰다.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 시조 2수가 《청구영언》 등에 전한다. 그 중 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문종은 생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충을 가장 신임했다. 그것은 자신이 혹 가질지도 모르는 편견을 객관적으로 잘 지적해줄 수 있는 신하가 최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 1913년 1월 25일~1994년 2월 7일)는 폴란드의 작곡가로 20세기 유럽의 주요 작곡가 중 하나였으며, 특히 그의 후반기 30년간의 작품들은 그로 하여금 폴란드의 탁월한 작곡가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어린 시절,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으며, 그의 초기 음악은 폴란드 민속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웅장하고 풍부한 분위기의 텍스처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고유의 작곡 스타일을 발전 및 확립했다고 평가된다. 이 시기의 그의 음악은 음정 간격들이 작은 그룹들을 형성하고 그것들로부터 하모니를 구축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우연성 기법을 사용하여 파트 간의 리듬이 우연적 요소에 의해 결합하도록 했다. 그는 작곡가인 동시에 뛰어난 지휘자였으며, 4개의 교향곡과 오케스트라를 및 여러가지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들을 작곡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폴란드 귀족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유제프 루토스와프스키(Józef Lutosławski)는 폴란드 민족민주당(Polish National Democratic Party)의 당원으로서 활동했으며, 당주인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와의 친분이 두터웠다. 조제프는 루토스와프스키가 5살이 되던 해 사망했다. 아버지 사후에는 친척들이 루토스와프스키의 유년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버지의 이복동생이던 빈첸티 루토스와프스키(Wincenty Lutosławski)로, 철학자인 그는 문학적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플라톤의 저술을 연대별로 해석하는 일에 집중했다. 플라톤 철학은 루토스와프스키의 사유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플라톤이 그의 저술에서 논증 방식으로 사용한 ‘변증법’은 루토스와프스키의 음악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토스와프스키는 3형제 중 막내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태어났다. 1915년, 독일제국의 군대가 러시아령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 들이닥쳤다. 루토스와프스키 일가는 아버지 유제프의 정치적 근거지였던 모스크바로 피난을 떠났다. 유제프와 드모프스키의 계획은 차르로 하여금 폴란드의 안전을 서면보장토록 하는 것이었으나, 볼셰비키 혁명군이 차르의 퇴임을 종용함에 따라 자연히 혁명군과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유제프는 혁명군에 잡혀, 1918년 9월, 처형을 당했다. 종전 후, 루토스와프스키 일가는 가문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폴란드로 돌아왔으며, 6살이었던 루토스와프스키는 그때부터 바르샤바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카롤 시마노프스키(Karol Szymanowski)의 “세 번째 교향곡(Third Symphony)”은 당시 어린 루토스와프스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926년 루토스와프스키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27년에는 시마노프스키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바르샤바 음악원(Warsaw Conservatory)에 비정규 학생으로 입학하지만 학업 문제로 곧 음악원을 자퇴하였다. 1931년 그는 바르샤바 대학교(Warsaw University)에 수학 전공으로 등록했으나, 1년 뒤인 1932년에 정식으로 음악 학교에 작곡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그의 담당 교수는 비톨트 말리셰프스키(Witold Maliszewski)였는데, 그는 림스키-코르샤코프(Rimsky-Korsakov)의 제자이자 오데사 음악원(Odessa Conservatory)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루토스와프스키는 음악적 구조, 특히 소나타 형식의 동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932년, 루토스와프스키는 작곡과 피아노에 집중하기 위해 바이올린 레슨을 중단했으며, 이듬해에는 수학 전공도 포기하였다. 1936년 피아노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1937년 작곡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9년, “교향적 변주곡(Symphonic Variations)”을 완성하였으며 지휘자인 그제고쉬 피텔베르크(Grzegorz Fitelberg)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그는 파리로 유학을 가려했으나 독일이 폴란드 서부를 침공하고 소련이 동부를 침공함으로써 좌절되었다.(폴란드 침공 항목 참조) 징집된 그는 전투 중 독일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400km를 걸어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그 후, 루토스와프스키는 생계를 위해 캬바레에서 일했으며, 동료 작곡가인 파누프니크(Andrzej Panufnik)와 함께 간간히 카페에서 피아노 듀오 연주도 도맡아 했다. 그들이 연주한 음악의 장르는 매우 폭 넓었는데, 파가니니의 음악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곤 했고, 당시 나치가 금지한 폴란드 민속 음악을 연주하고 저항 음악을 작곡하는 등 위험이 따르는 일까지 서슴없이 했다. 나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집회를 금지했기 때문에 당시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는 카페가 유일했고, 루토스와프스키가 일하던 카페에도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다누타(M. Danuta Boguslawska)도 있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가 발생하기 며칠 전 루토스와프스키는 어머니와 함께 바르샤바를 떠났는데, 그때 그의 작품들 중 일부밖에 챙기지 못했고 결국 나머지 작품들은 봉기의 전투 도중에 소실되었다. 파누프니크와 함께 편곡한 약 200여 곡이 소실되었고, 오직 루토스와프스키의 “파가니니 변주곡(Paganini Variations)”만이 보존되었다. 그해 4월, 폴란드와 소련 간에 협약이 발효되자 그는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열중했다. 동시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 자신이 ‘실용적 음악’이라고 명명한 음악들을 작곡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르샤바 모음곡(Warsaw Suite)”이다. 이는 전후 바르샤바의 재건을 그린 무성 영화를 위해 쓰여진 음악이다. 그 외 “폴란드 캐롤(Polish Carols)”, “피아노 소품곡(Piano Pieces)”, “민속적 멜로디(Melodie Ludowe)” 등을 작곡했다. 1945년, 루토스와프스키는 새로 조직된 ‘폴란드 작곡가 연맹(Związek Kompozytorów Polskich, 이하 ZKP)’의 서기관으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에는 다누타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사이가 좋았으며, 아내의 필사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작곡가인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뿐더러, 그의 후기 작품의 기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7년, 스탈린주의의 정치적 분위기에 합세한 ‘폴란드 통일 노동당(Polish United Workers' Party)‘은 사회적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을 채택했고, 당국은 현대 음악을 불순분자로 취급하여 배척하였다. 스탈린 본인으로부터 직접 예술에 대한 검열 지시가 떨어졌으며, 1948년에는 ‘즈다노프(Zhdanov) 칙령’을 통해 검열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 즈음, ZKP는 당국의 검열에 순응하는 음악가들이 득세하였고, 실망한 루토스와프스키는 위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사회적 리얼리즘에 대해 극도로 반대하였다. 결국, 그의 “첫 번째 교향곡(First Symphony)”은 형식주의라는 명목으로 소련 당국으로부터 금지당했으며, 그와 같은 상황은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 1954년 루토스와프스키의 친구인 파누프니크는 검열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루토스와프스키는 작품 활동을 즐겨했다. 그러나 1954년,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의 작품인 “아이들의 노래(Children’s song)”가 총리로부터 수상했다. 실망한 루토스와프스키는 “당국이 치켜세운 내 작업은 생계를 목적으로 작곡했던 곡들이었다. 나는 내가 단지 볼품 없는 곡들을 먹고 살기 위해서 써 왔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창작 행위를 마치 외부인과 같은 태도로 계속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Orchestra)”은 그를 예술 음악에 있어 중요한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곡은 1950년 비톨트 로비츠키(Witold Rowicki)로부터 위촉된 것으로, 재결성된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이 작품으로 두 개의 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은 러시아 및 근방의 문화적 전체주의가 다소 해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1956년에는 음악에 대한 검열 분위기가 점차 해소됨에 따라 “바르샤바 가을 현대 음악제(Warsaw Autumn Festival of Contemporary Music)”가 개설되었다. 이 축제는 원래 2년에 한 번씩 열릴 예정이었으나 1958년부터는 매년 열리게 되었다. 1958년 그의 “애도의 음악(Muzyka zalobna)”이 초연되었는데, 원래 이 음악은 바르톡의 10주기를 헌정하기 위해 쓴 음악이었지만, 완성하는데 예정보다 4년이나 더 걸리게 되었다. 이 음악으로 하여금 그는 국내의 ZKP는 물론 유네스코로부터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곡과 “5개의 노래(Five songs)”는 그가 수년간 거쳐 연구하고 실험한 그만의 12음기법이 도입됨에 따라 화성법과 대위적 사유에 있어 의미있는 발전을 보여 주었다. 한편, 그는 작곡 기법에 있어 그만의 새로운 특징을 확립했다. 여러 파트에서의 무작위성이 정확히 동시에 발생하게 하는 수법으로 “베네치안 게임(Jeux vénitiens)”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테크닉은 이후의 그의 모든 작품에서 사용되었고, 그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녹아들게 되었다. 1957년부터 1963년까지 그는 진지한 작품들은 물론, 동시에 가벼운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는 그의 필명인 '데르비드'(Derwid)를 사용했다. 대개 왈츠나 탱고와 같은 무곡들이었는데, 이러한 작품들을 루토스와프스키가 전시에 캬바레 음악으로 생계를 꾸린 것을 감안했을 때 그렇게 무리도 아니었다. 1963년, 루토스와프스키는 자그레브 음악 비엔날레(Music Biennale Zagreb)로부터 위촉받은 작품으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위한 “앙리 미쇼의 세 편의 시(Trois poèmes d'Henri Michaux)”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해외로부터 위촉받은 그의 첫 작품이었으며, 그의 국제적인 명성에 이바지하였다. 이 작품으로 그는 2등상을 수상했고, 체스터 뮤직(Chester Music)과 국제 출판을 계약하게 되었다. 1965년, 그의 현악 4중주가 스톡홀름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오케스트라적 연작 가곡인 “얽힌 단어들(Paroles tissées)”이 초연되었다. 이 곡은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Pears)에게 헌정되었으며, 올드버러 음악제(Aldeburgh Festival)에서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올드버러 음악제는 루토스와프스키의 절친한 친구인 벤자민 브리튼(Bejamin Britten)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연주회였다. 얼마 후, 루토스와프스키는 그의 “두 번째 교향곡(Second Symphony)”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두 번에 거쳐 초연되었으며, 1966년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가 제2악장 ”Direct”를 지휘하였고, 이듬해 제1악장 “Hésitant”가 완성되자 작곡자 본인이 지휘하여 카토비체(Katowice)에서 곡 전체가 초연되었다. 루토스와프스키의 두 번째 교향곡은 그 구조와 혁신적인 기법에 있어서 전통적인 교향곡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지만, 교향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대한 스케일과 극적인 전개를 보여 주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1968년 이 작품은 유네스코 산하의 IRC(International Rostrum of Composers)로부터 1등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그로서는 3번째 국제 수상으로, 그의 국제적인 명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두 번째 교향곡”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책(Livre pour Orchestre),” 그리고 “첼로 협주곡(Cello Concerto)”은 루토스와프스키가 정신적인 고통을 겪던 기간에 작곡된 곡들이다. 1967년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폴란드는 엄청난 사회적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공산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정계로부터 적대적인 대우를 받았다. 루토스와프스키 본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으나, 그의 창작 활동에 어느 정도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곡하고 로스트로포비치(Rostropovich)가 지휘한 첼로 협주곡은 대단히 큰 성공을 불러왔다. 1970년대 폴란드는 더 큰 격동에 휩싸였다. 1978년에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올랐지만, 그 이후 폴란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불행한 시기가 찾아왔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예술가들의 연대 보이콧 행위에 참여하여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프로로서의 대외활동을 자제하였다. 1980년대 중반 루토스와프스키는 “Łańcuch(Chain)”이라고 불리는 3편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제목은 서로 다른 다양한 음악적 구조가 체인의 연결고리처럼 중첩되어 진행되는 음악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Chain 2”는 안네 소피 무터(Anne-Sophie Mutter)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파울 자허(Paul Sacher)에 의해 위촉된 곡이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안네 소피 무터를 위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파르티타(Partita for violin and piano)”에 새로운 간주를 포함하여 오케스트라로 재편곡한 바 있다. 1985년,“세 번째 교향곡(Third Symphony)”은 루토스와프스키에게 루이빌 대학(Univ. of Louisville)에서 제공하는 그라베마이어 상(Grawemeyer Prize)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겨다주었다. 이 상은 작곡가에게 명예만을 선사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미화 $150,000에 달하는 매우 큰 상금마저 수여하였다. 애초에 이 상의 목적이 예술가로 하여금 경제적 걱정 없이 진지한 작품을 창작하는데 몰두하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사회 환원의 발로로 그 금액을 젊은 폴란드 음악가들의 해외 유학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사용하겠다고 공언했다. 뿐만 아니라 작품 “Chain 3”로 인한 수임료마저 장학 기금에 보태서 사용하였다. 1990년대에 즈음하여 루토스와프스키는 그의 “네 번째 교향곡(Fourth Symphony)”과 오케스트라적 연작 가곡 “소프라노를 위한 샹트플뢰와 샹트파블(Chantefleurs et chantefables for soprano)”을 작곡하는데 몰두했다. 후자의 경우 1991년 런던에서 초연되었으며, “네 번째 교향곡”은 1993년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같은 해, 루토스와프스키는 폴라음악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그는 미국, 영국, 핀란드, 독일, 캐나다, 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구상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러나 이듬해 초, 그는 암 판정을 받았고, 수술 후에 그는 극도로 쇠약해져 1994년 2월 7일 사망했다. 시신은 화장되었다. 사망 바로 전, 루토스와프스키는 폴란드의 최고 영예인 (Order of the White Eagle)을 수여 받았는데, 그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후의 폴란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후로 두 번째 수상자였다. 루토스와프스키의 헌신적인 아내 다누타는 그의 죽음 얼마 후에 사망하였다. 테오도르 뒤부아 프랑수아 클레망 테오도르 뒤부아(, 1837년 8월 24일 ~ 1924년 6월 11일)는 프랑스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 교육가이다. 뒤부아는 Marne의 Rosnay에서 태어났다. 그는 Reims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인 Lousi Fanart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서 앙브로즈 토마에게 작곡을 배웠다. 1861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하였다. 1868년에 성 마들렌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고, 1871년에는 세사르 프랑크의 후임으로 성 크로틸드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877년에는 다시 성 마들레느 교회로 돌아가 카미유 생상스의 후임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871년부터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그의 제자 중에는 폴 뒤카가 있다. 1896년에 토마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모리스 라벨의 로마대상 수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905년에 로맹 롤랑에게 비판을 받은 이후로 사임해야만 했다. 가브리엘 포레가 후임을 맡았다. 뒤부아는 많은 오페라, 오라토리오와 세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오라토리오 《Les sept paroles du Christ》(1867)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작품이 연주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한편 그의 음악교재가 더 널리 쓰이는데, 《대위법과 푸가 교본(Traité de contrepoint et de fugue)》과 《화성학 교본(Traité d'harmonie théorique et pratique)》이 현재에도 쓰이고 있다. 폴 크레스톤 폴 크레스톤(1906년 10월 10일 - 1985년 8월 24일)은 미국의 서양 고전음악 작곡가이다. 뉴욕시에서 태어나서 작곡을 독학했다. 그의 음악관은 조성음악을 지향하면서 리듬적 요소를 중요시했다. 그는 여섯 개의 교향곡과 다수의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바이올린 협주곡 두 개, 마림바 협주곡, 아코디언, 알토 색소폰, 그리고 트롬본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타지아가 그것이다. 그의 곡 중 많은 작품이 월트 휘트먼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크레스톤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가 가르친 사람으로는 작곡가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 와 재즈 음악가 러스티 데드릭(Rusty Dedrick) 그리고 찰리 퀴너(Charlie Queener)가 있다. 크레스톤의 저서로는 《Principles of Rhythm》(1964) 과 《Rational Metric Notation》(1979)이 있다. 1985년 1985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84년 1984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81년 1981년(1981年)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앙리 푸앵카레 쥘 앙리 푸앵카레(, 1854년 4월 29일~1912년 7월 17일)는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며, 과학철학자이다. 수학, 수리물리학, 천체역학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기본 원리를 확립한 업적을 남겼다. 한국어로 "포앙카레", "뽀앙까레"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1854년 4월 29일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났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샤를 에르미트의 가르침을 받았고, 1897년 파리 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79년에 캉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881년에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교의 천문학 교수로 이전하였다. 1887년 32세의 나이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1906년부터는 회장직을 역임했다. 1909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1912년 7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정치인 레몽 푸앵카레의 사촌이다. 푸앵카레는 과학의 이론을 컨벤션(편리성에 근거를 둔 규약)이라고 하는 주장하였다. 수학의 진리, 예컨대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경험과 선천적인 것에 호소하여 어느 쪽이 참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 명제는 단순한 규약·약속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의 진위성(眞僞性)을 묻는 것은 미터법의 진위성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유가 없으며, 단지 우리가 응용할 때 보다 편리한 쪽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규약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임의의 것이 아니라 응용되는 측면에 따라 스스로 규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수학이라면 그것이 응용되는 경험적 세계의 구조에 따라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물리학 등 실험과학의 이론도 규약적 성격을 가지며, 이러한 과학의 고도 원리는 이미 직접 실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므로 역시 규약이라 보아도 좋다. 이 컨벤셔널리즘(규약설 또는 편의주의로 번역된다)을 중심으로 하는 프앵카레의 과학론은 현대에도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대수적 위상수학에서 호몰로지의 개념을 정의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푸앵카레 추측을 제기하였다. 삼체 문제에 대한 연구로 결정론적 복잡계를 발견하여, 현대적인 혼돈 이론의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루벤스는 1577년 독일의 베스트팔렌(Westfalen,오늘날의 노트르라인베스트팔렌 주)이라 불리는 지방의 지겐(Siegen)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안트베르펜의 법률가인 장 루벤스(Jan Rubens)와 마리아 피펠린크스(Maria Pypelincks)로, 그의 아버지는 칼뱅주의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알바 백작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 대한 박해와 종교적 소란을 피해 1568년 안트베르펜에서 쾰른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장 루벤스는 William the Silent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작센의 안나의 연인이자 변호사 및 고문직을 맡고 있었는데, 1570년 그녀의 궁전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인 장 루벤스가 그녀와의 불륜이 들통나 감옥에 갇히게 된 후 1577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태어났다. 루벤스의 가족은 1년 후 쾰른으로 옮기게 되었다. 1589년, 아버지가 죽은 지 2년이 지나고 루벤스는 형과 어머니와 함께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했으며 라틴어를 가르치는 가톨릭학교를 다녔다. 종교는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그는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형식의 미술 분야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안트베르펜에서 루벤스는 인문학과 라틴어, 그리고 고전 문학을 배웠다. 14살이 되던 해에 그는 Tobias Verhaeght의 지도 하에 미술 실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도시에서 유명했던 두 명의 매너리즘 화가 아담 반 누트(Adam van Noort)와 오토 반 빈(Otto van Veen)에게서 미술을 지도받았다. 루벤스는 한스 홀베인이나 마르카토니오 레이몬디의 판화, 그리고 라파엘로 등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작하면서 공부했다. 루벤스는 1598년 공부를 마치고 '성 루크 화가조합(Guild of St. Luke)' 에서 조합장 및 교사직을 맡게 된다. 1600년에 루벤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요람인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잠시 머무르며 티치아노와 베로니스, 그리고 틴토레토의 작품을 감상했으며, 이후 만토바 공작 빈첸초 1세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의 성이 있는 만토바에 정착했다. 베로니스와 틴토레토의 색감과 구도는 루벤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성숙기의 스타일은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빈첸초 공작의 후원을 받으며 1601년 루벤스는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작품과 이탈리아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공부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과 그의 아들(Laocoon and His Sons)"이 특히나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와 함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당시 큰 화제가 되고 있었던 매우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작품을 그리는 카라바조의 작풍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후 루벤스는 "그리스도의 무덤"이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모작했으며 그의 후원자인 빈센조 백작에게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루브르 박물관)"을 구입하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또,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 있는 도미니칸 교회에서 "로자리오의 마돈나(Kunsthistorisches 박물관, 베니스)"를 구입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로마에서 머물 무렵, 루벤스는 처음으로 그의 세 폭 제단화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St. Helena with the True Cross"로, 로마의 교회 예루살렘의 산타 크로스를 위해 그려졌다. 루벤스는 1603년, 외교 임무를 맡아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는 펠리페 3세에게 보내는 빈센조 백작의 선물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에 머물며 그는 펠리페 2세가 모았던 수많은 라파엘로와 티티안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루벤스는 또한 마드리드의 프라도에 머물면서 말을 타고 있는 러마의 백작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이 작품은 티티안의 작품 "Charles V at Muhlberg" (1548년작, 마드리드의 프라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이 여행은 그가 예술과 외교술의 재능을 함께 발휘했던 첫 번째 여행이었다. 루벤스는 1604년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4년간은 만투아와 로마의 제노바에서 지냈다. 제노바에서 루벤스는 "Marchesa Brigida Spinola-Doria"(내셔널 미술 전시관, 워싱턴 D.C.) 등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이 때의 작품들은 훗날 안토니 반 다이크나 조슈아 레이놀드, 그리고 토마스 게인즈보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루벤스는 도시의 성들을 삽화 형식으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606년에서 1608년,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는 당시 도시에 새로 지어진 가장 세련되고 유명했던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 교회(Santa Maria in Vallicella or, Chiesa Nuova)를 위해 제단화를 그리게 된다. 작품의 주제는 당시에 그 지역에서 가장 칭송받던 성인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성모 마리아와 그의 아들을 숭배하는 모습을 그리기로 결정된다. 첫 번째 작품은 한 폭만을 사용하여 그린 제단화였으나, 세 폭에 그려진 두 번째 작품으로 교체되었다. 이 두 번째 작품은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을 재현했으며 제거가 가능한 구리 덮개가 곁들여졌고, 중요한 축제일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이탈리아에 미친 루벤스의 영향은 굉장히 거대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Pietro Paolo Rubens"라는 서명을 한 편지와 서신을 여러 장 썼다. 편지에서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쓰고 있으나, 그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1608년 루벤스는 그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안트베르펜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루벤스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이 시기는 1609년 4월 9일에 체결된 "안트베르펜 조약(Treaty of Antwerp)"에 따라 도시가 다시 번창했던 때로, "12년의 휴전(Twelve Years' Truce)"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계속 머무르려고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9월에 루벤스는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7세 대공과 그의 아내 이사벨라에 의해 왕실화가로 지명받게 된다. 그는 특별 허가 조치를 얻어 브뤼셀이 아닌 안트베르펜에서 화실을 운영할 것을 허락받았고, 다른 손님을 받는 것도 허락을 받게 되었다. 루벤스는 대공의 아내 이사벨라가 죽기 전 1633년까지 그녀와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그는 화가 직무만이 아니라 대사나 외교에 관한 임무를 맡아 하기도 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장 브란트(Jan Brant)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Isabella Brant)와 1609년 10월 3일에 결혼함으로써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을 더더욱 굳건히 했다. 1610년, 루벤스는 그가 직접 설계한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현재 Rubenshuis 박물관으로 알려진 이곳은 안트베르펜의 중심지에 지어졌으며 이탈리아의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은 빌라로, 루벤스와 그의 견습생들이 작품을 그리던 작업실과 그의 개인 작품들을 모아둔 방과 도서관 등 광범위한 루벤스의 직업 및 취미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 즈음, 루벤스는 수많은 제자들, 실습생들과 함께 새로운 화실을 지었다. 당시 그의 제자 중에서는 오늘날 가장 유명한 바로크 시대의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인 플랑드르의 안토니 반 다이크가 있었다. 반 다이크는 자주 루벤스와 합작을 하공 했는데, 그 외에도 도시 내의 여러 전문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는 동물화가인 프란스 스나이더가 있었는데, 스나이더는 "Prometheus Bound"의 독수리 형상을 그린 인물이다. 또한 루벤스는 그의 친한 친구이자 꽃을 그리는 식물화가 장 브루겔과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루벤스가 그렸던 세 폭 제단화인 "The Raising of the Cross(1610)"와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1-1614)"는 성모 마리아 성당을 위해 그려졌는데, 이 작품들은 루벤스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는 데 기여하였다. 예를 들어 "The Raising of the Cross"는 베니스의 Scuoladi San Rocco에 있는 틴토레토의 "Crucifixion"과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인 인체, 그리고 루벤스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교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자주 사용되곤 한다. 루벤스는 그의 친구이자 Plantin Press의 소유주인 Balthasar Moretus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의 책 표지나 삽화, 프린트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 루벤스의 이름은 유럽 전역을 걸쳐 알려지게 된다. 몇 번의 획기적인 에칭을 제외하고 그는 드로잉은 모두 그가 직접 그렸으며 프린트 작업은 Lucas Vorsterman과 같은 다른 전문가에게 맡겼다. 그는 그가 원했던 좀 더 박력 있는 스타일을 가르쳤던 Hendrik Goltzius에게서 배운 동판화가들을 여럿 고용했다. 루벤스는 또한 나무 동판화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활시킬 수 있었던 기술이었다. 루벤스는 그의 프린트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얻었는데, 그의 작품이 프린트로 여러 장 복사되던 네덜란드에서는 저작권에 대해 좀 더 확고히 했다. 덧붙여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도 그는 프린트에 자신의 저작권을 명시하도록 했다. 1621년, 프랑스의 왕비이자 국모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는 루벤스에게 파리의 룩셈부르크 성에 전시될 그녀와 그녀의 남편 프랑스의 앙리 4세의 삶을 그린 그림 시리즈를 각각 두 개 주문한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시대(루브르 박물관)"는 1625년 전시되으며, 그가 그린 두 번째 시리즈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마리 드 메디시스 왕비는 1630년 그녀의 아들이었던 루이 13세에 의해 추방당하게 되며 1642년 루벤스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쾰른의 바로 그 집에서 죽었다. 1621년에 체결되었던 "12년의 휴전"이 만기된 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는 루벤스에게 여러 번의 외교 임무직을 강제로 맡기곤 했다. 1624년 프랑스 대사는 브뤼셀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루벤스는 황녀의 명에 따라 폴란드 왕자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와 있다." (브와디스와프 바사 4세 (Władysław IV Vasa) 왕자는 황녀의 손님으로 1624년 9월 3일에 브뤼셀에 머물고 있었다.) 1627년에서 1630년은 외교관으로서의 루벤스가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시기다. 그리고 루벤스는 스페인과 영국 왕실을 오가며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던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평화를 위해 일했다. 그는 또한 북부 네덜란드 지방에 외교관과 화가로서 여러 번 방문했다. 왕실에서 그는 종종 조신들은 미술이나 작품의 거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선입견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신사로 통했다. 이 때에 루벤스는 두 번의 기사 칭호를 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1624년 스페인의 펠리페 4세에게 받았고, 그 후 1630년,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받았다. 루벤스는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1629년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루벤스는 1628년에서 1629년에 8개월간 마드리드에서 지내게 된다. 여기서는 외교관 임무 외에도 펠리페 4세의 명령 하에 서너 개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개인적인 고객에게 작업을 주문받기도 했다. 그는 또한 티티안의 작품에 대해 새로이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마드리드의 "Fall of Man"(1628-29)이라는 작품의 모작도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왕실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친구가 된다. 둘은 다음 해에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으며, 벨라스케스는 결국 혼자 여행해야 했다. 안트베르펜에서 그가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이후 루벤스는 런던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는 1630년 4월까지 그곳에서 머물면서 "Allegory of Peach and War"(1629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이 작품은 루벤스가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을 원했는지 잘 표현하고 있으며, 루벤스는 이 그림을 찰스 1세에게 선물로 주었다. 루벤스의 세계적인 명성이 귀족들과 수집가들에 의해 계속해서 자라날 무렵, 루벤스와 그의 화실은 계속해서 안트베르펜의 고객들에게 명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안트베르펜의 성당에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승천(Assumption of the Virgin Mary)"(1625-26)도 있다. 루벤스는 그의 노년기를 안트베르펜에서 보냈다. 그는 여전히 세계 각지의 고객에게 작품을 그려주었다. 이 때에 그가 그린 작품으로는 화이트 홀에 위치한 이니고 존의 성의 연회장 천장에 그린 작품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자기 자신의 화가로서의 방향을 탐구하는 데에 더 몰두했다. 1630년, 그의 아내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날 53세였던 그는 16살의 소녀 엘렌 푸르망(Helene Fourment)과 결혼한다. 엘렌은 1630년대 이후의 루벤스의 작품세계에게 관능미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었고, 그는 이 영감을 살려 "The Feast of Venus"(Kunsthistorisches Museum, 비엔나), "The Three Graces"(마드리드의 프라도), 그리고 "The Judgement of Paris"(마드리드의 프라도)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스페인의 왕실을 위해 그린 이후의 작품에서는 비너스의 모습에서 루벤스의 어린 아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 "Helene Fourment in a Fur Wrap(Het Pelsken이라고도 불린다)"에서 루벤스의 아내는 고전 조각상인 "푸디카의 비너스(Venus Pudica)"나 "메디치의 비너스(Medici Venus)"를 연상시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1635년, 루벤스는 안트베르펜 밖에 있는 the Château de Steen (Het Steen)에서 사유지를 구입하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Château de Steen with Hunter"(내셔널 갤러리, 런던)나 "Farmers Returning from the Fields"(Pitti Gallery, 피렌체)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이렇듯 그의 후기 작품들은 화가 자신의 내면을 담아낸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 많이 있다. 루벤스는 또한 대 피테르 브뢰겔의 네덜란드 고유 방식의 작풍에서 영감을 얻어 "Flemish Kermis"(1630. 루브르 박물관, 파리)를 그렸다. 루벤스는 통풍으로 1640년 5월 30일 6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안트베르펜의 성 야곱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3명은 이사벨라에게서 그리고 5명은 엘렌에게서 태어났다. 가장 어린 자녀는 그가 죽었을 때 단지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루벤스는 다작을 하던 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위탁받아 그린 그림들의 대다수는 종교적인 주제나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 역사화, 그리고 사냥을 하는 모습 등이 있다. 루벤스는 또한 자신의 친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자화상 또한 여럿 그렸으며 노년기의 그는 풍경화를 많이 그리게 된다. 루벤스는 태피스트리나 프린트를 디자인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집 또한 그가 직접 설계하였다. 루벤스는 1635년 왕자이자 추기경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의 명에 따라 안트베르펜에 Joyous Entry를 위한 일회성 실내장식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역사화·종교화·풍경화·인물화 등 각 분야의 작품이 있는데, 모두 생기가 넘친다. 선은 힘차고 색채는 풍부하고 화려하며, 구도도 웅대하여 야성적·관능적 표현에 뛰어났다. 그러나 힘찬 역동성에 반해 세밀함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 루벤스는 연습을 위해 오일을 이용한 스케치를 자주 하였으며 나무 패널을 이용해서 작품을 그린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물론 캔버스도 자주 사용하였으며 특히나 작품이 먼 곳으로 이송되어야 할 때에 자주 사용하였다. 세 폭 제단화같은 경우 루벤스는 종종 석판 위에 그림으로서 반사광을 해결하였다. 루벤스의 풍만한 여성의 육체에 대한 맹신은 훗날 'Rubensian'이나 'Rubenesque'와 같은 신종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Rubensiaans'이란 단어는 그 때의 풍만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특히나 네덜란드에서 자주 쓰이게 되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플랑드르파의 거장이며, 동시에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현재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저택은 그대로 루벤스 미술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루벤스가 직접 그린 작품과 루벤스가 한 부분만 그린 작품(얼굴이나 손과 같은 부분), 그리고 루벤스가 지시하고 감독하여 그려진 작품이다. 루벤스는 당시의 관습처럼 큰 화실에 여러 명의 견습생과 학생들을 두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안토니 반 다이크도 있었으며 그는 훗날 그의 스승만큼이나 유명한 화가가 된다. 루벤스는 또한 프란스 스나이더나 제이콥 조디안과 같은 다른 전문가에게 동물화나 정물화를 그려주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2002년 7월 10일 소더비 경매에서는, 새로 발견된 루벤스의 작품 "Massacre of the Innocents"가 케네스 톰슨에게 7천 6백 2십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이것은 소더비 경매 역사상 현재까지의 서양 고전 예술작품에 대해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근 2006년에서는 새로 발견된 또다른 루벤스의 명작 "The Calydonian Boar Hunt"(1611 혹은 1612)가 파리의 Getty Collection에 팔리기도 했는데, 이때 정확한 가격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고전 미술 작품의 전문가가 밝혀내기 전까지 루벤스의 학생의 작품이라 여겨져 왔었다. 대구교육대학교 대구교육대학교(大邱敎育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국립 교육대학이다. 1950년에 대구사범학교로 시작했다.부설 초등학교가 대구 달서구와 경북 안동에 있다. 덕성여자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德成女子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대학교이다.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캠퍼스를 두고 있으며, 종로구에 평생대학원과 법인 등이 위치하고 있다. 1920년 차미리사가 설립한 근화학원(槿花學園)이 덕성여대의 모태이다. 덕성여자대학교의 모태가 된 근화학원은 차미리사 선생이 설립하였다.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이 필요하며, 특히 여성 교육이 시급하다 여겼다. 이에 3.1운동의 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1920년 여성 교육을 위한 〈조선여자교육회〉를 결성하였고, 그 해 4월 19일 종교 예배당을 빌어 〈여자야학회〉를 설치하여 소외 받은 여성들을 가르쳤다. 학부 과정에는 6개 단과대학, 37개 학과가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同德女子大學校, )는 1950년 학교법인 동덕여학교(현 동덕여학단)에서 4년제 단과대학으로 설립하여 198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23-1에 위치하고 있는 4년제 사립대학이다. 8개의 단과대학, 1개의 독립학부, 37개의 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2019년 기준) 동아대학교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 )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서구에 캠퍼스가 있는 사립 종합 대학교이다. 1946년 11월 1일에 남조선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년 후인 1947년 12월 30일에는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동아학숙과 동아대학 설립을 인가받고 정식으로 교명을 동아대학으로 변경했다. 1958년 대학원을 개원하였고 1959년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대신동캠퍼스라고 하기도 한다. 1951년에 조성되었으며 하단동의 승학캠퍼스에 대학본부가 이전하기까지 동아대학교의 중심 캠퍼스였다. 구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고 뒤편에 대신공원이 있다. 구덕캠퍼스는 대신공원의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일년내내 깨끗한 공기와 좋은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캠퍼스 넓이는 45,542m에 달한다. 의과대학이 있고 캠퍼스 앞에는 의료원이 위치해 있다. 주소는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3가 1번지 이다. 하단캠퍼스라고 하기도 한다. 승학산 기슭에 자리잡아 철새도래지인 을숙도와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다. 캠퍼스 넓이는 704,917m에 달한다. 대학 본부가 있으며 인문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건강과학대학, 생명자원과학대학, 공과대학, 디자인환경대학, 예술체육대학이 있다. 주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2동 840번지 이다. 부민동캠퍼스라고 하기도 한다. 부산광역시의 구 도심에 위치해있으며 옛 부산지방법원과 부산지방검찰청이 있던 곳이다.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청으로 쓰이던 건물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사회과학대학, 경영대학, 글로벌비즈니스대학, 석당인재학부, 중국일본학부, 법학전문대학원, 평생교육원이 있다. 주소는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2가 1번지 이다. 승학캠퍼스 구덕캠퍼스 부민캠퍼스 도서관, 정보전산원, 체육부, 복지시설관리부, 박물관, 석당학술원, 한림생활관(기숙사), 교양교육원, 공학교육혁신센터, 다우미디어센터 , 보건진료소, 평생교육원, 공동기기센터, 창업지원단 산학협력연구센터, 창업보육센터, 기술이전센터, 글로벌인재개발센터, 미디어디바이스연구센터, 신소형재가공청정공정개발연구센터, 컨테이너 화물안전수송기술개발 클러스터 사업단, 고기능성 벨브기술 지원센터, SKtelecom산학협력 차세대디스플레이 연구센터, 미토콘드리아 허브제어 연구센터, Medi-Farm 산업화 연구단, 에코디자인 사업단 동아시아연구원, 의과학연구원, 환경문제연구소, 경영문제연구소, 스포츠과학연구소, 기초과학연구소, 독일학연구소, 건설기술연구소, 해양자원연구소, 관광·레저연구소, 생산기술연구소 조형연구소, 생활과학연구소, 농업생명과학연구소, 정보기술연구소, 교육연구소, 동아항노화연구소, 그린에너지기기연구소, 신재생에너지전력변환시스템연구소, 영어교육연구소 국제통상연구소 법학연구소 한림 정수봉 박사의 호를 따 한림도서관이라고도 한다. 승학캠퍼스에 한림도서관이 있으며 구덕캠퍼스에 석당도서관이 있었으나 2009년 사회과학대와 경영대가 부민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폐쇄되었고 현재는 의학도서분관이 있으며 부민캠퍼스에는 부민도서관과 법학도서분관이 있다. 1957년에 개관하였다.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와 함께 대학 3대 박물관으로 불린다. 2009년 5월 19일에 구덕캠퍼스에 있었던 박물관을 부민캠퍼스(구 경상남도청 건물)로 이전하여 개관하였다. 국보 개국원종공신녹권(제69호), 동궐도(제249호)와 보물 융기문토기(제597호) 외 53점 등 총 27,584점(2017년 3월 29일 기준)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 대학 박물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이며 50,000원 지폐 뒷면의 초충도수병도(보물 제595호)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박물관 인근에 대한민국에 하나 남은 미제 전차를 전시하고 있으며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부지 뒤에 있는 임시수도기념관과 연계하여 견학코스를 만들고 있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홈페이지 루터대학교 루터대학교(루터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개신교 계열 사립대학교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소속으로 교명은 마르틴 루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018년 기준 루터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루터대학교는 일반대학원 1개원을 설립하고 있으며, 3개 전공과정을 편성중이다. 루터대학교는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사립 대학으로, 캠퍼스는 상갈동에 소재하며 약 9만m의 교지가 있다. 도심지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인근에 상갈역과 기흥역이 위치하여 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상갈동 주민센터 외 주택가가 밀집되어 있는 관계로, 교육 시설이 다수가 존재하며, 상갈초등학교, 보라초등학교, 신갈고등학교 등이 있다. 주변에 경기도박물관과, 백남준아트센터 등이 위치한다. 목포가톨릭대학교 목포가톨릭대학교(木浦가톨릭大學校, )는 전라남도 목포시에 위치한 가톨릭계열 대학이다. 1967년 골롬반 간호학교로 개교하여 1999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목포가톨릭대학교는 2018년 기준, 단과대학 구분 없이 3개 학과만 운영하고 있으며, 설립된 대학원 과정은 없다. 목포대학교 목포대학교(木浦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국립종합대학이다. 1946년 목포사범학교로 개교했다. 1964년에 목포교육대학으로 바뀌었으며, 1978년 목포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79년에 4년제 국립목포대학으로 승격 개편되었으며 1990년 종합 대학인 국립목포대학교로 승격하였다. 목포해양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木浦海洋大學校, )는 전라남도 목포시 해양대학로 91에 있는 국립 대학이다. 1950년에 개교한 목포수산상선학교가 모체이다. 교훈은 진리탐구, 성실봉사, 해양개척이다. 대학원(일반대학원, 해양산업대학원), 2개 단과대학(해사대학, 해양공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지원시설은 실습선, 승선생활관, 마린시뮬레이션센터, 도서관, 기관공장 등이 있고, 연구시설에 해양산업연구소, 기계전자기술연구소 등이 있다. 다음은 목포해양대학교의 2018년 기준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목포해양대학교의 2018년 기준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새유달호와 새누리호 그리고 세계로호 총 세 척을 보유하고 있다. 해사대학 학생들의 승선 실습 및 해상안전훈련 시설로의 활용이 주 목적이며, 관련 인력으로 실습감을 주축으로하는 지도교수 및 조교가 지정되어 있는 외에 운항을 담당하는 선장을 비롯한 승조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승선 실습을 통해 한국 국내를 비롯하여 미국,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러시아,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호주 등의 주요 항구를 방문하고 있다. 밀양대학교 밀양대학교(密陽大學校, Miryang National University)는 1923년 설립된 밀양공립농잠학교(3년제)를 모태로 하는 국립 산업대학이었다. 이후 2006년 부산대학교에 통합,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로 변경되었다. 식물자원학과, 동물자원학과, 원예학과, 바이오정보과학부, 식품환경공학부, 컴퓨터공학부, 정보통신공학부, 토목공학과, 건축학부, 신소재공학부, 조경학과, 기계공학과, 응용고분자공학과, 생명공학과, 패션디자인학과, 사회과학부, 회계정보학과, 교양과정부, 애니메이션학과, 레저스포츠학과, 자율전공학부 식물자원학과, 동물자원학과, 원예학과, 잠사곤충생물학과, 생물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환경공학과, 조경학과, 컴퓨터공학과, 정보통신공학과, 기계공학과, 재료공학과, 응용고분자공학과, 식품과학과, 행정학과, 통상경제학과, 회계정보학과, 패션디자인학과 불국사 불국사(佛國寺)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신라시대인 경덕왕에서 혜공왕 시대에 걸쳐 대규모로 중창되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수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불타버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15년 528년에 왕모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해 봉안하였다고 한다. 문무왕 10년 670년에는 무설전을 새로 지어 이곳에서 화엄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모습, 오늘날 불국사의 상징물로 알려진 석탑(석가탑·다보탑)이나 석교 등의 축조를 포함한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진 것은 신라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 권5 〈제9 효선〉(孝善第九) 〈대성효이세부모 신문대〉(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에는 김대성을 신라 신문왕 때, 혹은 경덕왕 때의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경덕왕 때의 사람이며 불국사의 창건도 경덕왕 10년의 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십이연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김대성 자신의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 석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공사를 마치기 전에 죽자 국가에서 나서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 보다는 긴 세월동안 여러세력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1963년 3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2조」 [별표1]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기준에 따라 「사적」으로 재분류됨에 따라 2009년 12월 21일 이를 해제하고, 동 일자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502호로 재지정되었다.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국사다보탑(국보 20호), 불국사삼층석탑(국보 21호), 불국사 연화교칠보교(국보 22호), 불국사 청운교백운교(국보 23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등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학술적·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의 배치를 보면, 대웅전은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하였고, 그 앞에 석등이 있으며, 다시 그 앞의 동서에 각각 석탑 1기가 서 있다. 동쪽 다보탑의 기묘하고 정밀한 형태는 유례가 드물고, 서쪽 석가탑은 예로부터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즉 이 탑의 축조를 맡은 백제의 석공인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남편을 찾아왔으나 탑이 완성되기 전이라 만날 수 없었다. 조언하기를 불국사 아래에 있는 영지(影池)에 그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그곳에 가서 기다리다가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 , )는 대한민국의 사립 여자 대학교이다.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교(문교부 제1호 종합대학교 인가)이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캠퍼스를 두고 있다. 주로 이대(梨大)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이화대학이라는 교명은 1886년초 고종 황제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교육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경영하던 여학교에 하사한 이화학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이화라는 명칭은 1887년 고종황제가 칭호 하사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4년에는 교복을 입게 되었고 대한민국 여성 고등교육의 효시이다. 1925년 대학기관으로 성장하려던 이화의 노력은 일제의 억압 정책으로 시련을 겪게 되었고, 전문학교로 변경되었다. 최초 졸업식은 1927년 3월 18일이다.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이화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33년에는 이화학당과 이화학원으로 재단이 분리되었고, 1943년 8월 7일 재단법인 이화학당으로 설립등기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화는 신촌 캠퍼스로 이전하여 종합대학교로 향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와서 두 번의 강제 개명을 당하여 1943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청년 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변경되었으며 1945년에는 이화라는 이름이 민족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하여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존재하는 동안 일본인 졸업생은 없고 2명만 재학했던 것으로 알려질 만큼 민족적 색체가 짙은 학교였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경성여자 사범학교는 일본인 학생이 입학하거나 졸업을 하였다. 일본인과 조선인 통틀어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신진순이 이화여자 전문학교 출신이며, 모윤숙과 조정숙, 이남덕, 고옥남이 경성제국대학 선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이화전문학교는 대학기관으로 승격하여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 이르고 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이화는 대한민국 대학 사상 최초로 종합 대학교의 꿈을 실현하였으며, 이화는 해방 직후 문교부 1호로 종합 대학교 인가를 받아 냈다. 대부분의 단과대학 및 연구 시설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번(대현동 11-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임상치의학 대학원의 경우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부속 목동병원이 있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안양천로 1071번(목동 911-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의과대학 본과와 간호대학 고학년 교육은 이대서울병원에 위치한 캠퍼스에서 이뤄진다. 4년제 학부 학부 과정에는 14개의 단과대학들이 있다. ※ 의과대학은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변경되면서 2005년부터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았으나 의학전문대학원 제도의 점차적 폐지로 인해 2015학년도부터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법과대학은 2009년부터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있으며 법학전문대학원으로 변경되었다. 이화여대 공과대학 은 세계 최초로 설립된 여성 공과 대학으로, 1996년 7월 신축된 공학관은 3000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에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1996년부터 학부제를 도입하여 2007년에는 정보통신공학부, 건축학부, 환경·식품 공학부의 3개 학부, 컴퓨터정보통신공학전공, 전자정보통신공학전공, 건축학전공(5년제), 건축공학전공(4년제), 환경공학전공, 식품공학전공의 6개 전공으로 개편되었고, 2008년에는 정보통신공학부가 컴퓨터·전자공학부로, 컴퓨터정보통신공학전공이 컴퓨터공학전공으로, 전자정보통신공학전공이 전자공학전공으로 개명되었다. 현재 1100여명의 학부생과 150여명의 대학원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2010년 기준), 2008년 9월에는 신공학관이 신축되어 공학 도서관, 열람실, 학생 식당 등 학생들을 위한 복지가 더 좋아졌다. 2015년 현재, 컴퓨터 공학과, 전자공학과, 건축학부의 건축학 전공 과 건축공학 전공, 그리고 환경-식품 공학부의 환경공학 전공 과 식품공학 전공, 2015년부터 신입생이 입학하는 화학신소재공학부로 구성되어있으며, 2012년에 신규 설립된 대학원 대기과학공학과 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원 과정에는 일반대학원, 5개 전문대학원(국제대학원, 통역번역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9개 특수대학원(교육대학원, 디자인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신학대학원, 정책과학대학원, 공연예술대학원, 임상보건과학대학원, 임상치의학대학원, 외국어교육특수대학원)이 있다. 2000년 5월에 새 건물이 완공되어 이화의 교직원, 학생들, 동창 가족들 및 일반인들이 매 주일 오전 11시에 대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각 연령별 교회 학교가 모이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의 사회과학대학 소속 사회과학부와 언론홍보영상학부, 정책과학대학원, 사회복지전문대학원과 교수연구실 등이 모여있는 건물이다. 지하 1층 카페에서는 김밥, 음료, 빵 등을 판매한다. 2004년 3월 1일 대학 내에 '이화여자대학교 산학협력단'을 설립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산학협력단은 본관 214호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내외 연구자들의 연구비와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은 1935년 4월에 개관하였다. 회화, 도자, 공예, 복식, 민속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주요 소장품으로는 대한민국 국보 제107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가 있다. 박물관은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기증전시관, 담인복식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지「이화(梨花)」는 이화여자대학교 내의 자치 언론 기구이다. 1929년 2월 국판 189페이지로 창간되었으며, 창간 후 초기 상당 기간 동안은 종합문예지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문예지의 성격을 벗어나 현재까지 이화여자대학교의 언론단위로서 활동해오고 있는 중이다. 교지「이화」는 학내사안, 사회문제, 여성문제 등의 분과를 기본으로 하여 대학생으로서, 여성으로서, 이화여대생으로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자치언론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교지「이화」는 이화학우들이 내는 3,000원의 교지대금으로 발행되며 학교로부터의 지원은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발행주기는 학기에 한 번씩 1년에 두 번 봄호(8,000부), 가을호(8,000부)를 발행하고 있다. 일제시대 위안부 동원에 앞장섰던 친일파 김활란이 초대 총장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최초 설립자는 메리스크랜튼여사이다. 종합대학으로 인가받아 승격되기 전까지 포함해서 7대 총장으로 봐야 맞다 김활란 초대총장의 세례명을 딴 헬렌관, 김활란 동상 등이 캠퍼스 내에 있어 교내외적으로 비판이 있다. 2005년 3월 25일에는 이화여대 학생들이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김활란의 친일 행적들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 학내 친일청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화여대 친일청산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파주시 캠프 에드워즈부지에 파주캠퍼스를 건설할 예정이었으나 토지비용문제로 MOU를 파기하여 논란이 있다. 드렁큰 타이거 드렁큰 타이거 ()는 1990년대 초에서 대한민국에서 결성하여 1999년부터 2018년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힙합 래퍼 그룹이다. DJ 샤인의 탈퇴 이후 타이거 JK가 공연할 때 늘 백업으로 비지와 팔로알토가 참여하였다. 드렁큰 타이거는 원래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직후 미국 웨스트 코스트 L.A의 랩의 뿌리 힙합 축제에서 데뷔, 고등학교 시절부터 힙합 방송을 비롯한 크고 작은 무대에서 랩 실력을 뽐내던 타이거 JK에 의해 시작되어 힙합계의 여러 동료들이 참여하는 타이거 클랜을 가리키도 하며 한국에서의 첫 활동은 타이거 JK를 주축으로 미국의 Sucram이 멤버로 활동하였고, 1999년, 두 번째 귀국부턴 타이거 JK를 주축으로 DJ 샤인이 합류해 활동하였다. 2005년, 1집부터 5집 음반까지 활동한 DJ 샤인은 탈퇴 후, 타이거 클랜은 타이거 JK를 주축으로 필리핀계 Roscoe Umali를 비롯해, Xrae 그리고 한국인 DJ James Jhig, Mango Fresh, MQ, Kevin gunheehan, David Kempo Han 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정통 힙합 전파에 공헌해 온 드렁큰 타이거의 힙합 운동은 더 크게 무브먼트 (Movement) 크루로 범위를 넓혀왔으며,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힙합 작품을 발표한 아티스트이며 한국대중음악상, 골든디스크, MKMF를 비롯한 각종 상을 수상하였다. 2017년 1월 2일, 마지막 정규 앨범 발매를 끝으로 해체를 결정했다. 2018년 11월 14일, 마지막 정규 앨범 《》를 발매하였으며, 이를 끝으로 드렁큰 타이거의 활동이 20년 만에 마무리 되었다. 2019년 5월 16일, "I Love You Too (Feat. 윤미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1999년, 드렁큰 타이거는 타이거 JK와 DJ 샤인으로 이루어진 힙합 듀오였다. 그러다가 2000년, 2집 부터 DJ James Jhig이 DJ로 드렁큰 타이거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한국에 오기 전부터 JK와 같이 활동하려 했던 외국의 Roscoe Umali와 무브먼트의 객원 멤버 MQ도 2집 때부터 부각되었다. 그들은 4집 앨범까지 참여했으나, 각자의 사정으로 그 이후의 앨범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타이거 JK와 DJ 샤인 둘만 남아 5집을 발매하게 되는데, 그 5집 마저 DJ 샤인은 개인 사정으로 "백만 인의 콘서트" 단 한 곡만 참여했고 거의 타이거 JK 혼자 작업을 했으며 타이거 JK의 솔로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당시 드렁큰 타이거의 불화설이 돌았으나, DJ 샤인은 직접 공식 홈페이지에 'JK와의 우정은 변함이 없다'라는 식으로 해명을 하였다. 그러나 2005년, 6집이 나오기 전에 DJ 샤인이 돌연 드렁큰 타이거를 탈퇴하였고, 6집 부터는 타이거 JK의 솔로 체제가 되었다. 2018년, 마지막 정규 앨범을 끝으로 드렁큰 타이거의 활동이 20년 만에 마무리 되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흑인 랩퍼 아이스 큐브는 Black Korea란 곡을 발표했다. 흑인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정작 흑인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는 한국인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흑인들을 비롯한 많은 MC, DJ들이 참가하는 힙합 페스티발 공연장에 한국인 랩퍼가 소개되자 관중석에선 야유가 터져 나왔다. 고3의 어린 소년 타이거 JK, 그는 당당하게 흑인들과 맞서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내용의 "Call me Tiger(나를 호랑이라고 불러라.)."라는 노래를 불러 즉흥랩 상을 받았다. 그 소년은 거기서 다른 한국 사람 DJ 샤인을 만났다. DJ 샤인도 뉴욕 각종 클럽에서 DJ로서의 실력을 인정 받아 곳곳에서 초청받아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서로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만났다가 둘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금방 친해져서 힙합 그룹을 만들었다. 2000년 5월, 드렁큰 타이거의 멤버 타이거 JK는 필로폰을 흡입한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JK가 구속된 것은 이미 구속기소돼 있던 업타운의 멤버가 `JK와 함께 수 차례 필로폰을 흡입했다`라고 증언한 것 때문으로 알려졌다. 드렁큰 타이거 JK의 마약 사건은 국내 힙합인들은 물론 미국 힙합 사회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킨 `뜨거운 감자`였다. 당시 JK는 `필로폰을 흡입했다고 하는 때에 나는 한국에 없었다.`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고, 소변·모발 검사에서도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다. 사정이 이런데도 JK는 2000년 5월 4일,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36일간 수감된 후 6월 8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구속 당시 팬들은 JK의 부친이며 공륜 음반 심의 위원을 지낸 팝 칼럼니스트 서병후와 함께 구명 운동 및 항의 집회를 가졌다. 또, 세계적 인터넷 방송국 `Heavy.com`은 라는 3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으며, 외국 힙합 잡지들은 이와 관련한 특집 기사를 게재했고, 우 탱 클랜과 교류가 많았던 유명 힙합가수들이 `Free JK`라는 싱글을 발표해 국제적인 파문으로까지 이어졌다. 캐패도나 등 우 탱 클랜과 친하게 지내며 같이 작업하는 뮤지션이나 팬 등등을 '우팸'이라 일컬었던 것을 국내에서 우 탱 클랜으로 와전, Free JK가 우 탱 클랜의 곡이라고 와전되기도 했다. 그 당시 드렁큰 타이거는 업타운이 거짓 증언하였다고 자백한 녹취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공개·앨범에 실으려고 하였으나 JK의 무죄가 입증되자 결국 공개하지 않았다. JK는 "미국은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이지만 한국은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유죄이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1999년, 타이거 JK와 함께 드렁큰 타이거를 결성한 DJ 샤인은 드렁큰타이거로 활동하기 전후에도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는 타이거 JK와 함께 드렁큰 타이거로 2003년에 4집까지 활동하다가 갑작스레 탈퇴를 하고 5집에 단 한곡만 콜라보를 남기고, 드렁큰 타이거를 나가게 된다. 그 후 DJ 샤인의 탈퇴 사유에 대해 많은 뜬 소문들이 올라왔고, 그 당시 언급된 탈퇴 사유로는 어머니의 병환, 음악적인 회의, 그리고 평소에 사업에 관심이 많은 터라 사업에 열중하기 위해 탈퇴를 하였다는 등의 말이 대표적이였다. 또한, 2009년 6월 11일에 방송된 TV 프로그램 MBC 라디오 스타에서는 힙합 그룹 에픽하이가 출연, 최고의 힙합곡으로 그룹 드렁큰 타이거의 노래를 꼽자 진행 MC인 김구라가 "드렁큰 타이거에서 왜 DJ 샤인이 탈퇴한지 아느냐"며 그룹 멤버 중 타이거 JK가 DJ 샤인보다 인기가 많은 것이 탈퇴의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에 윤종신, 김국진, 신정환 등 다른 MC들이 "소스가 정확한거냐?"라고 묻자 김구라는 "무명의 정보원이 알려주었다."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가 왜 드렁큰타이거를 나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006년 2월, 타이거 JK는 생애 엄청난 고비를 맞게 된다. 바로 100만명 중에 1명에게 발생한다고 하는 척수염에 걸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허리디스크인 줄 알았지만, 엄지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도 다리털을 뽑아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고, 체온도 갑자기 뜨거워졌으며, 끝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자, 척수염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척수염으로 인하여 신경이 마비되었고, 당시 척수염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하였던 스테로이드제가 심한 부작용에 걸려서, 2주만에 무려 30~40kg나 체중이 불었다. 소속사는 물론, 가족까지도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는 마비로 인하여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무브먼트 공연 활동을 하였고, 움직이면 뼈가 약해지지만, 그는 물을 마시면서 의정부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병이 조금씩 쾌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윤미래(당시 결혼 前)가 옆에 돌봐줘서 끝내 투병 생활에 이겼다. 하지만 완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약을 먹고, 단어는 생각이 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고 한다. 2009년 6월, 드렁큰 타이거의 8집 발매에 앞서 라킴, Dilated Peoples의 Rakaa, 일본의 랩퍼 Zeebra 등 해외 유명 랩퍼의 참여소식이 대한민국 힙합계를 흔들어놓았다. 또한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흔쾌히 앨범에 참여해 주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타이거 JK와 콜레보를 한 Rakim이 타이거 JK와 한국 힙합 팬들에게 전해온 편지 내용이다. 2017년 1월에 필굿뮤직은 타이거 JK가 드렁큰 타이거의 마지막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가수로서의 은퇴는 아니며 필굿뮤직의 수장이자 MFBTY의 멤버로서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11월, 마지막 정규 앨범 《Drunken Tiger X : Rebirth Of Tiger JK》를 발매하였으며, 이를 끝으로 드렁큰 타이거의 활동이 20년 만에 마무리 되었다. 2000년 드렁큰 타이거 2집에 수록된 "The Movement"라는 곡을 시작으로 무브먼트라는 크루가 생겨났다. 당시 곡에 참여했던 래퍼는 드렁큰 타이거를 비롯하여 윤미래, CB Mass, 김진표 a.k.a. JP 등이었는데, 무사파(리쌍, 타이거 JK, 윤미래, Bizzy 등)의 멤버들이 무브먼트의 창립 멤버라고 알려져 있다. 2006년 2월에 정글 엔터테인먼트 설립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2013년 7월에 독립하여 FeelGhood Music 레이블을 설립하고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십육진법 십육진법(十六進法, hexadecimal)은 십육을 밑으로 하는 기수법이다. 보통 0부터 9까지의 수와 A에서 F까지의 로마 문자를 사용하고, 이때 대소문자는 구별하지 않는다. 이진법 표기의 4자리와 십육진법 한 자리가 일대일 대응하며, 2진수가 많이 쓰이는 컴퓨터에서 2진수를 대신해 많이 쓰이고 있다. 1바이트는 8비트, 즉 2진수 8자리이므로, 16진수 두 자리로 표현할 수 있다. 수학식에서 16진수의 뒤에 아래첨자 (16)을 붙여 일반적인 십진수 표기법과 구분할 수 있으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등에서는 16진수의 앞에 구분자로 0x, x, $, &H 등을 붙여 구분한다. 십육진 소수를 여러의 소인수를 가지는 위치 기수법으로 변환하는 경우에는 십육진수에 그 역수를 곱한 수치가된다. "10"이되는 십육에는 약수에 홀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십육진수로는 3 분할 및 5 분할 등 홀수 분할 수 없다. 단위 분수는 2의 거듭제곱를 제외하고 모든 무한 소수가된다. 따라서 소수의 전개는 "3의 배수"진법 (육진법 등)이나 '5의 배수 "진법 (십진법 등)보다 훨씬 불편하다. 비트 비트(bit, binary digit)는 하나의 비트는 0이나 1의 값을 가질 수 있고, 각각은 참, 거짓 혹은 서로 배타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바이트는 비트가 여러 개 모인 것으로, 원래는 크기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현재는 대개 1옥텟인 8비트가 1바이트이다. 4비트는 니블(nibble)이라 부르며, 두 바이트는 일부 전자통신기기에서 워드(word)를 가리킨다. 데이터의 부호화는 별개의 부호로써 베이컨의 암호에 사용되었다 (1626). 데이터의 부호화는 별개의 비트로써 Basile Bouchon과 Jean-Baptiste Falcon (1732) 이 발명하고, 조셉 마리 자카드 (1804)가 발전시킨, 그리고 나중에 Semen Korsakov , 찰스 배비지 , 허먼 홀러리스 , IBM 과 같은 초기 컴퓨터 제조사들에 채택된 천공 카드 에 사용되었다. 다른 모습으로 천공 테이프 가 있다. 이러한 모든 체계에서, 도구(카드나 테이프)는 개념적으로 각기 배열된 구멍이 뚫렸거나 혹은 아님에 따라 정보의 한 비트를 가지게 된다. 비트에 따른 글의 부호화는 모스 부호(1840) 와 전신 인자기와 주식 시세 표시기(수신용 테이프)(1870) 같은 초기 디지털 통신 장치들에 사용되었다. 1928년 랠프 하틀리는 정보의 대수적 측정의 사용을 제안했다. 처음으로 클로드 섀넌이 그의 1948년도 학술지인 "A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에서 bit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존 튜키가 쓴 Bell Labs의 1947년 1월 9일에 쓰인 메모에 적힌 "binary digit(이진 숫자)" 대신 단순하게 줄인 "bit" 을 근거로 하였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버니바 부시가 1936년에 그 시절의 기계적인 컴퓨터들에 쓰인 천공 카드가 "정보의 비트"를 저장했다고 썼다. 콘라트 추제에 의해 이진법으로 표현된 수를 사용하는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최초의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존 폰 노이만 존 폰 노이만( , , , 1903년 12월 28일 - 1957년 2월 8일)은 헝가리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수학자이다. 양자 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 과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연산자 이론을 양자역학에 접목시켰고, 맨해튼 계획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으며, 게임 이론과 세포 자동자의 개념을 개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기 복제 구조에 대한 수학적 분석]은 DNA가 발견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NAS)에 제출한 짧은 글에서 그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essential) 생각했던 나의 연구들은, 1926년에서 1929년 사이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연구한 양자역학, 다양한 구조의 연산자 이론, 그리고 프린스턴에서의 에르고딕 정리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폰 노이만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에드워드 텔러 등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일했고, 내폭형 핵무기 (Implosion-type Nuclear Model)에 사용되는 폭축렌즈(Explosensive Lens)를 발명하는데 수학적으로 공헌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내 일반자문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위원이 되었다. 그는 많은 기관의 컨설턴트직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엔 미합중국 공군, 미국군 특수무기 프로젝트,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연구소 등도 있었으며 에드워드 텔러, 스타니스와프 울람 등의 요인들과 함께 그는 핵물리학에서 열핵 반응 연구와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190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다페스트(현재는 헝가리의 수도)에서 유대인 은행가 막스 노이만(영어: Max Neumann, 과 컨 머르기트() 부부의 3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헝가리식 이름은 노이먼 야노시 러요시( )이며 가족들은 그를 연치(Jancsi)란 별명으로 불렀다. 폰 노이만의 아버지인 막스는 법학과 박사학위를 가진 은행가로 은행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력을 쌓은 사람이었다. 막스의 가족은 1880년대에 북부 헝가리에서 부다페스트로 이사오게 되었고 폰 노이만의 엄마인 컨의 가족 3대가 부다페스트의 컨-헬러 사무실이라는 건물 위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 둘이 결혼하게 되면서 노이만의 부모님은 18개의 방이 있는 꼭대기 층에서 살았다. 1913년, 그의 아버지가 작위를 삼으로서 그들 집안의 신분은 귀족으로 상승하였다. 루마니아의 도시인 Marghita라는 뜻을 가진 Margittai를 귀족의 이름으로 인수했지만, 가족은 도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어쨌든 이로 인해 폰 노이만의 헝가리식 이름은 마르기타이 노이먼 야노시(Margittai Neumann János), 독일식 이름에는 폰이 붙어 요한 폰 노이만(Johann Von Neumann)이 되었다. 헝가리에서 공식적인 교육은 10세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대신 가족들은 노이만과 형제들에게 여자 가정교사를 들였는데, 막스는 자식들이 헝가리어 외에도 다른 언어들을 배워두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조기교육시켰다. 8 세의 나이에 폰 노이만은 미분과 적분에 대해 잘 아는 상태가 되었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도 능해졌다. 특히 역사학에도 흥미를 가져 46권으로 이루어진 빌헬름 옹켄의 세계사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더 많은 책을 수용하고 자식들의 공부에 편의를 주고자 노이만의 부모는 방 하나의 천정을 개조해 개인 도서실으로 만들었다. 1911년도에 폰 노이만은 8세의 나이로 (Fasori Evangélikus Gimnázium)이라는 루터교 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부다페스트 내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는 동시대에 유명한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시어도어 폰 칼만, 게오르크 카를 폰 헤베시, 레오 실라르드,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 그리고 폴 에르뒤시가 있고 그들은 나중에 "화성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폰 노이만의 1년 선배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는 훗날 어째서 그 시대의 헝가리에서 많은 천재들이 배출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폰 노이만이 유일한 천재"라고 답하기도 했다. 한편 김나지움의 교사였던 라즐로 라스(László Rátz)는 노이만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아버지인 막스와 상담을 가졌다. 상담내용은 노이만에게 같은 또래 나이대의 수학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다 어려운 고급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막스는 노이만이 그의 나이에 맞는 학년대의 친구들과 공부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더 높은 수준의 고급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를 고용하되 학년과 반은 그대로 다니는 것으로 합의했다. 23세의 나이로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시에 스위스에서 화학을 공부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베를린에서 강사생활을 하였다. 1930년에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연구소의 최초 교수진 4명 중 하나가 된다. 그는 1933년부터 죽을 때까지 고등연구소의 수학교수로 활동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폰 노이만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앨런 튜링이 고등연구소의 방문연구원으로 연구했으며, 폰 노이만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마친다. 이 방문은 튜링이 1936년 발표한 유명한 논문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을 발표한 직후였다. 폰 노이만은 튜링의 아이디어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가 10년후 만든 IAS 머신의 제작에 그 아이디어를 적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폰 노이만은 게임 이론의 아버지이며,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1944년 고전 《게임과 경제행동 이론》(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을 썼다. 그는 또한 냉전기간 동안 미국의 핵 정책을 주도했던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란 개념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계획의 일원으로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한스 베테·빅토어 바이스코프와 함께 일했다. 1900년 세계 수학자 대회에서, 다비트 힐베르트 는 수학 발전의 핵심적인 23개의 문제들을 발표했다. 그 중 6번째 문제는 물리학의 공리화였다. 1930년대까지 새로운 물리 이론들 중에서는 공리적 접근 방식을 따랐던 것은 양자역학뿐이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결정론적 세계관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철학적·기술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왔으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역학 접근방식이 접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집합론의 공리화를 끝낸 이후, 폰 노이만은 양자역학의 공리화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1926년, 폰 노이만은 N개의 입자를 양자 역학으로 다루는 문제가 무한차원 힐베르트 공간 내의 의 한 점으로 나타나며, 이는 고전역학에서 6N 차원의 위상 공간에 대응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3N 개는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3N 개는 운동량을 나타내기 위해 쓰임) 거기에 더해 위치, 운동량 등의 물리량은 이 점에 연산자를 작용시켜 얻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을 다루는 물리문제는 힐베르트 공간 내의 에르미트 연산자를 연산자끼리 계산하는 방식으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유명한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 연산자와 운동량 연산자를 곱했을 때, 곱하는 순서가 바뀌면 계산 값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e.g. p 를 x 축에 대한 운동량, x 를 x축에 대한 위치 라고 할 때, px - xp ≠ 0)으로 설명 가능하다. 이 접근 방식은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접근방식을 포괄하며, 노이만은 1932년 "양자역학에 내재된 수학이론"을 완성한다. 물리학자들은 폴 디랙이 1930년에 완성한 브라-켓 접근방식을 선호하나, 수학자들은 노이만의 접근방식이 아름답고 완전하다고 평가한다. 폰 노이만은 그의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게임 이론의 기초를 다졌다. 1928년 그의 미니맥스 이론을 증명했으며, 이는 완전한 정보와 제로섬 게임을 기반으로 두 사람이 두 가지의 전략을 갖고 있을 때, 각자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1944년에는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쓴 책 《게임 이론과 경제적 행동》(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를 출간함으로써 불완전한 정보와 참여자가 두 명 이상일 경우를 고려했다는 점에서 미니맥스이론을 스스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뉴욕 타임즈 표지에 소개되었을 만큼 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공중의 관심이 굉장히 높았다. 이 책에서 폰 노이만은 경제 이론이 함수해석학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며, 특히 볼록집합과 위상 고정점 정리를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이론이 전통적인 미분학을 뒷받침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민식 최민식(1962년 5월 30일 (음력 4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최민식의 본관은 전주이며,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숭덕초등학교, 삼선중학교, 대일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영화 《구로 아리랑》로 영화 배우로 데뷔하였다. 이후 TV 드라마 《야망의 세월》(1990), 《서울의 달》(1994) 등과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넘버 3》(1997), 《조용한 가족》(1998), 《쉬리》(1999), 《해피엔드》(1999), 《파이란》(2001)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였다. 주로 TV 드라마에서 활약했던 최민식은 전국 600만 관객수를 동원하며 큰 화제를 모은 1999년 강제규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 《쉬리》에서 북에서 침투한 살인병기 박무영 역을 연기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악역임에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2001년에는 송해성 감독의 로맨스 영화 《파이란》에서 3류 양아치 강재 역을 맡아 장백지와 멜로 호흡을 맞춘 그의 연기가 평단의 호평을 받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청룡영화상,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첫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이듬 해, 2002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으로 제55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 되었다. 2003년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가 제56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 되면서 다시 한번 칸 레드카펫을 밟았고, 영화는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하며 해외에서도 연기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존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15년 동안 사설 감금방에 갇혀 살아야했던 오대수 역을 연기하였고, 극한에 처한 처절한 인간심리를 최고의 연기로 풀어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춘사영화상, 청룡영화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디렉터스 컷 시상식,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미국 빌리지 보이스 선정 최우수 연기자 40위 등의 국내외 영화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고, 명실상부한 최고의 배우 반열에 올랐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최민식은 이후 《꽃피는 봄이 오면》(2004), 《주먹이 운다》(2005), 《친절한 금자씨》(2005) 등의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다. 2009년 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으로 4년여만에 스크린에 컴백한 그는, 《악마를 보았다》 이어 출연한 2012년 영화 《》로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등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복귀 하였다. 특히 청룡영화상에서는 신영균, 문성근, 송강호와 함께 3차례의 남우주연상으로 최다 수상을 기록한 배우이기도 하다. 이후 그는 《신세계》(2013)에 이어 2014년 개봉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이 1761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 되었다. 같은 해에는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루시》로 헐리우드에 첫 진출하였으며, 《대호》(2015), 《특별시민》(2017) 등에 작품에 출연하였다. 《침묵》(2017)에서는 이하늬와 멜로영화를 선보였다. 그리고리 페렐만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페렐만(, 1966년 6월 13일~)은 러시아의 수학자이다. 리치 흐름(Ricci flow)의 전문가로, 리만 기하학과 기하학적 위상수학 분야를 연구하였다. 수학계의 중요한 난제들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렐만은 1966년 6월 13일 소비에트 연방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고, 레닌그라드 239번 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1982년에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소련 국가 대표로 출전해서 만점으로 금메달을 받은 경력이 있다. 이후 같은해에 레닌그라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 레닌그라드의 스테클로프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까지 미국의 여러 대학들을 방문하면서 연구하다가, 1995년 스탠퍼드 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 등을 포함한 미국 유수 대학들의 교수 영입 요청을 거절하고, 자기가 처음 연구를 시작한 스테클로프 연구소로 돌아갔다. 19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수학회에서 수여하는 상을 수상하였다. 페렐만은 1994년에 리만 다양체에 대한 영혼 추측을 증명하였고, 이 공로로 1996년 유럽 수학회에서 수여하는 상을 수상하였지만, 수상식에 참석을 거부하였다. 2002년 11월 페렐만은 arXiv에 3차원 다양체의 기하화 추측 및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하는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푸앵카레 추측은 1904년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에 의해서 제기된 추측이며, 기하화 추측으로 함의된다. 페렐만은 기하화 추측을 리처드 스트라이트 해밀턴이 발표한 리치 흐름()을 사용해서 증명하였다고 한다. 리치 흐름은 3차원 리만 다양체를 더 대칭적으로 만드는 변환인데, 이 경우 유한한 시간 뒤에 다양체에 특이점이 발생하게 된다. 페렐만은 이러한 특이점의 성질과 구조를 분석하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고, 이 기법을 사용해서 기하화 추측의 증명을 완성하였다. 2000년 클레이 수학연구소는 푸앵카레 추측을 7개의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로 채택하고, 상금 100만 달러를 걸었다. 페렐만의 논문 발표 이후, 2010년 3월 20일 클레이 수학연구소는 페렐만에게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공로로 100만 달러를 수여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페렐만은 이를 거부하였다. 2006년에 페렐만은 필즈상을 수상하였으나, 페렐만은 수상식에 참석을 거부하였다. 2011년에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 추대를 거부하였다. 제임스 칼슨 클레이 수학연구소장은 "페렐만이 적절한 시기에 참석 여부를 알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페렐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동거하며, 어머니의 연금을 통해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산 (벡터) 벡터 미적분학에서 발산(發散) 또는 다이버전스(Divergence)는 벡터장이 정의된 공간의 한 점에서의 장이 퍼져 나오는지, 아니면 모여서 없어지는지의 정도를 측정하는 연산자이다. 예를 들어 마개를 열어 물이 빠지고 있는 욕조 안의 물의 각 지점에서의 물의 속도로 주어지는 벡터장의 경우, 물이 빠지는 마개가 있는 지점의 다이버전스 값은 음이 된다. (이때 물이 빠지는 하수구 방향의 속도는 생각지 않고 물이 마개지점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 이외의 지점에서의 발산 값은 물이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으므로 0이 된다. 다이버전스는 부피에 비해 작은 영역의 표면을 지나는 벡터장의 순흐름이다. 닫힌 평면의 면적분은 밖으로 빠져나오는 벡터 플럭스(flux)의 합을 나타낸다. 즉, 여기서 formula_2는 R에서 점 p를 포함하는 임의의 부피가 되고, formula_3는 주어진 부피의 표면적이 된다. x, y, z 가 3차원 유클리드 공간을 나타내는 직교 좌표계라 하고, i, j, k를 각각에 해당하는 단위벡터라고 하자. 연속이고 미분가능한 벡터장이 으로 정의되어 있을 때, 벡터장의 발산은 각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스칼라 값을 갖는 스칼라 함수가 된다. 발산은 또한 formula_5 으로 많이 쓰고, 나블라 연산자(혹은 델 연산자, formula_6)와 벡터장 사이의 도트는 벡터 간의 내적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formula_7를 하나의 벡터로 보고 각 성분을 좌표의 편미분으로 생각하면 정의와 부합한다. 치올콥스키 로켓 방정식 치올콥스키 로켓 방정식(Tsiolkovsky's rocket equation)은 "중력과 저항등 외력이 작용하지 않을때" 의 로켓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이다. 처음 유도해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이름을 담고 있다. 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formula_2은 가속할 때의 로켓의 질량이고, formula_3은 연료를 뺀 빈 로켓의 질량, formula_4는 로켓의 초기속력, formula_5은 로켓의 최종속력, formula_6는 로켓추진체의 분사속력이다. 이 방정식은 운동량 보존법칙 의 변형이다. 일반적인 경우 formula_8 이므로 formula_9 으로 뉴턴의 제 1법칙(관성의 법칙)을 나타내는 방정식이 된다. 그러나 로켓의 경우 formula_10 이므로 운동량 보존법칙을 나타내는 식을 변형하면 "치올콥스키 로켓 방정식"이 유도된다. 곱의 미분 양변에 적분기호 비록 실제상황보다 극히 간단한 가정을 하지만, 로켓 방정식은 로켓 비행에 있어서의 핵심적인 물리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로켓 궤도 역학에 있어서 formula_15는 궤도의 이동이 얼마나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를 나타내주는 양이 된다. 식에서 알 수 있듯이 큰 formula_15를 얻기 위해서는 formula_2 이 크거나 (formula_15에 비해 지수함수 적으로 커져야 함), formula_3이 작아야 하거나, 아니면 분사속도 formula_6 가 매우 높아야 하거나, 이들 셋이 잘 조합되어야 한다. 실제에서는 거대한 로켓을 만들고 (formula_2을 키움), 다단계 로켓을 만들고 (formula_3을 줄임), 분사속도를 높게한다. 아폴로 우주 계획에서 사용되었던 새턴 5호 로켓이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좋은 예가 된다. 도시샤 대학 도시샤 대학(, )은 일본 교토부 교토시와 교타나베시에 위치한 명문 사립 대학이다. 간사이 지방의 4대 사립 대학인 간칸도리쓰 중 하나이다. 1875년 메이지시대 6대 교육자중의 한명인 니지마 조가 세운 도시샤 영어학교를 전신으로 한다. 창립자인 니지마 조의 유지를 받들어 각국의 유학생을 활발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 중국, 대만, 영국, 베트남, 터키에 국제사무소를 운영중이다. 한국에서는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이 유학했던 학교로 유명하고, 이마데가와 캠퍼스에는 두 시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와세다 대학과 국내 교환유학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대학의 약칭은 도다이() 또는 도시샤(). 메이지 시대 6대 교육자 중의 한사람인 니지마 조 에 의해 1875년에 설립 된 도시샤 아카데미를 전신으로하는 대학이다. 기독교 개신교 계통의 학교지만, 일반적인 미션 스쿨 과는 성격이 다르고, 기독교 전도를 주된 목적으로하지 않는다. (교육 자체를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음) 건학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양심'이다. 니지마 조는 건학의 목적으로 '양심 교육'을 내걸었다. 지식 교육에만 치중하지 않도록 기독교를 기반으로 '덕'을 병행하여 진행함으로써 '양심에 기반한 지식을 갖춘 사람'을 배출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 양심 교육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교육 이념으로서 현재까지 「기독교 교리」,「자유주의」,「국제주의」를 통한 '국가의 양심'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시샤(同志社)라는 교명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모여 만드는 결사"라는 뜻이다. 3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도시샤의 휘장은 국가 또는 땅을 의미하는 아시리아 문자를 도안화한 것이다. 도시샤대학 출신인 고대 오리엔트 학자이자 시인인 유아사 한게쓰가 디자인했다. 제정 이래 교육의 삼위일체를 목표로 하는 도시샤의 교육이념(지, 덕, 체)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도시샤의 교색은 자주색과 백색이다. 티리언 퍼플과 에도 퍼플의 중간색인 도시샤의 로얄 퍼플은 창립자인 니지마 조가 유학한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의 교색과 같은 색이다. 교기는 바탕이 로얄 퍼플이고 휘장은 백색이다. 일본 대부분의 사립 대학이 그렇듯이 학생의 개성을 존중 하는 분위기를 띄지만, 도시샤 대학은 그 중에서도 미션계 특유의 자유로운 교풍으로 유명하다. 간칸도리쓰 대학들은 각각 교토 시 , 오사카부 , 효고현 에 위치해 있는데, 재밌는것은 이 네개 학교의 교풍이 제각각 이라는 것이다. 도시샤 대학과 리쓰메이칸 대학은 같은 교토 시에 위치 해 있지만 리쓰메이칸 대학의 활기차고, 열혈대학 같은 이미지에 반해, 도시샤 대학은 문학소년, 도련님, 아가씨의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학풍으로만 보자면 리쓰메이칸 대학은 와세다 대학과, 도시샤 대학은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학풍과 비슷하다. 도시샤 대학은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 관광 도시인 교토 시 가미교 구와 그 위성 도시인 교토 부 교타나베 시에 캠퍼스를 가진다. 또한 2005년에는 교토 부 소라쿠 군 세이카 초에 새로운 캠퍼스를 세우기 위하여 부지를 취득하였다. 이마데가와 캠퍼스는 도시샤 대학의 탄생지이며, 150년에 가까운 본 대학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캠퍼스내의 예배당, 쇼에이칸, 유슈칸, 해리스이화학관, 클라크기념관은 국가 중요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는 메이지의 건조물이며, 그 후 다이쇼나 쇼와 초기, 최근에 세워진 건물과 아름다운 조화를 보이고 있다. 마치 메이지 이후의 대학교육의 발자취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마데가와 캠퍼스, 신마치 캠퍼스, 카라스마 캠퍼스, 무로마치 캠퍼스, 케이시칸을 모두 포함한다. 주로 문과계열 학생들이 다닌다. 1986년 교토 남쪽에 최첨단 설비로 개교한 교타나베 캠퍼스는 오사카 및 나라의 경계에 가깝다. 이 지역은 문화유산 및 역사 유적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동시에 간사이 문화학술연구도시 등 하이테크 공업도시도 자리잡고 있다. 또한 문화정보학부, 이공학부, 생명의과학부, 스포츠건강과학부 및 심리학부의 학부 및 대학원생 전원이 교타나베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다. 교타나베 캠퍼스, 각켄토시 캠퍼스, 다타라 캠퍼스를 포함해 '교타나베 교지' 라고 부른다. 도시샤 대학교는 1875년 조합교회 신자인 니지마 조가 교토 시에 창립한 도시샤 영학교(同志社英学校)가 전신이며, 전문학교 시절을 거쳐서 1920년에 시행된 대학령에 따라서 공식적으로 서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인정되었다. 패전 후, 1948년에 새로운 교육 제도에 의한 신제대학으로서 다시 출발하였다. 도리츠전(同立戰)은 도시샤 대학과 리츠메이칸 대학의 스포츠 대전이다. 리츠메이칸 대학에서는 리츠도전(立同戰)이라고 한다. 원래는 야구 경기를 지칭했지만, 아이스하키,럭비,미식축구 등 다른 스포츠 경기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매년 열리는 도리츠전의 야구 경기는 매년 봄과 가을에 '간사이 학생 야구 연맹'의 리그전의 마지막 일정으로, 칸칸전(関関戦) - 간사이 대학 VS 간세이가쿠인 대학 과 함께 '전통의 일전(一戰)'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 연맹의 발족 후 칸사이 대학 스포츠계의 인기 이벤트로 입장이 점차 많아지고, 그 중에서도 교토의 양대 사학 대결인 도리츠전은 일반 시민에게도 많은 팬을 낳는 등, 인기 카드로 교토 시민에게 사랑받고있다. 1875 8명의 학생과 니지마 및 J. D. 데이비스의 두 명의 교사로 데라마치 캠퍼스에 도시샤영학교를 설립. 1876 데라마치에서 이마데가와로 캠퍼스 이전. 1877 교토부로부터 도시샤여학교의 설립 인가 취득. 1879 도시샤영학교로부터 15명의 학생이 첫 졸업. 1883 교칙 제정. 1884 캠퍼스내 최초의 벽돌 건축인 쇼에이칸(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 준공.. 1886 도시샤 채플(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 준공. 1887 쇼자쿠칸(현 유슈칸)에서 도서관 개관(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 도시샤병원 및 교토간병부학교 설립. 유슈칸 1888 ‘도시샤대학 설립 취지’를 주요 잡지 및 신문에 발표. 1890 니지마 조가 46세의 나이로 영면. 미국인 실업가인 J. N. 해리스의 $100,000 기부로 해리스 이화학관(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 준공. 해리스이화학교 설립. 1893 도시샤 휘장 제정. 1894 클라크신학관(현 클라크기념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의 개관식 거행. 1909 도시샤 교가를 공식 채택. 1912 전문학교령에 의한 도시샤대학(신학부, 정치경제부, 영문과) 및 여학교 전문학부 개교. 1920 대학령에 의한 도시샤대학(문학부, 법학부, 대학원 및 예과) 개교. 1940 유슈칸 앞 안뜰에 조셉 하디 니지마 기념비(양심비)를 건립. 1944 도시샤공업전문학교 개교. 1948 신제대학령으로 대학(신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개설. 1949 상학부와 공학부 신설. 1950 대학원 석사과정(신학 연구과, 문학 연구과, 법학 연구과, 경제학 연구과, 상학 연구과) 개설. 1953 대학원 박사과정 개설. 1955 공학 연구과 석사과정 개설. 1975 설립 100주년 기념식 거행. 1986 다나베 캠퍼스(현 교타나베 캠퍼스) 개교, 도시샤대학 및 도시샤여자대학의 수업 개시. 1991 아메리카 연구과 석사과정 개설. 1995 종합정책과학 연구과 석사과정 개설. 1999 일본어교육센터 설치. 2000 시가현 기타코마쓰에 도시샤비와코수련센터 준공. 2004 정책학부, 공학부 정보시스템디자인학과, 환경시스템학과 개설, 사법 연구과, 비즈니스 연구과 개설. 2005 문화정보학부 개설. 문학부 및 문학 연구과 개조. 사회학부 및 사회학 연구과 개설. 2006 도시샤초등학교 개교. 문화학술연구도시 캠퍼스 개설. 2007 문화정보학 연구과 개설. 2008 공학부를 이공학부로 명칭 변경. 생명의과학부 및 스포츠건강과학부 설치. 2009 심리학부 및 심리학 연구과 개설. 2010 글로벌스터디 연구과 개설, 스포츠건강과학 연구과 개설 2011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학부, 도시샤국제학원 초등부 개설 2012 뇌과학연구과 개설 2013 글로벌지역문화학부 개설 2014 비지니스 연구과 글로벌 경영 연구 전공 개설 2015 도시샤 교타나베 채플(코토바칸・히카리칸) 준공 도시샤 대학에서 활동하는 단체는 '학생 지원센터 등록단체' '학우단 공인단체'와 '그 외'로 나뉜다. 신입생 입학시기는 각 단체의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있으며, 각 단체는 학교 부지 내에 설치한 부스에서 신입생의 참가를 권유하고 있다. - 학생 지원 센터에 단체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면 등록 단체로 인정된다. 그러나 인원수나 고문을 둬야 하는 등의 조건이있다. 복사기 및 회의실 등 다양한 학교의 비품을 사용할 수있게된다. 약 240 단체 - 학생 지원센터 등록단체를 거쳐 심사를 통과하면 될 수 있다. 등록 단체의 혜택 외에 BOX라고 하는 부실의 제공, 보조금 등 대학의 지원이 많아진다. 약 170단체 도시샤 대학의 학원제는 이마데가와 캠퍼스에서 열리는 '도시샤 EVE'와 교타나베 캠퍼스에서 열리는 '도시샤 교타나베 축제'가있다. 어느쪽 축제도 지역주민에게 개방된다. 를 참조하십시오. - 저명한 한국인 서울 사무소는 2011년 4월에 설립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 69 YMCA 408 호 도시샤대학 서울 사무소 우: 03164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콘스탄틴 예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 1857년 9월 5일 - 1935년 9월 19일)은 폴란드계 러시아인 로켓 과학자이자 러시아의 우주 계획의 선구자이다. 러시아의 랴잔주 이제프스코예(Izhevskoye)의 중산층 가족에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유약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16살 때까지 집에서 교육받았다. 치올콥스키는 우주여행과 로켓 추진의 여러 부분에 대해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인류 우주 비행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우주 엘리베이터의 개념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은 1903년 발표된 《반작용 모터를 이용한 우주 공간 탐험(Исследование мировых пространств реактивными приборами)》이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로켓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논문으로 여겨진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이디어는 러시아 이외의 과학계에 소개되지 못하고, 로켓 추진 분야는 몇십년 후에나 독일 등의 과학자들이 그의 연구와는 무관하게 같은 계산을 해냄으로써 발전하게 된다. 그의 업적은 후에 유럽의 로켓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소련이 우주 개발 경쟁에 앞서 나가면서 자극받은 미국인 과학자들의 관심을 받는다. 치올콥스키는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의 비행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라이트 형제와 동시에 유사한 계산을 독립적으로 해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기계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고, 그의 관심을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프리드리히 찬더(Friedrich Zander)는 치올콥스키의 연구에 대해 심취해 있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 힘을 쏟았다. 1924년 그는 소련 최초의 우주항해 협회(? Cosmonautics Society)를 설립했으며, 후에 OR-1과 OR-2라는 액체 추진 로켓을 만들어 냈다. 1924년 8월 23일 치올콥스키는 공군 사관학교(? the Military-Air Academy N. E. Zhukovsky)의 첫 교수로 선출되었다. 1857년 9월 5일, 모스크바 근교의 이제프스코예에서 태어난다. 성씨는 본래 폴란드어로 Ciołkowski(치오우코프스키)이었다. 아버지는 혁명 운동에 종사했기 때문에 러시아로 추방된 폴란드의 애국자였고, 어머니는 교양 있는 러시아인이었다. 다항식 수학에서, 다항식(多項式, , )은 문자의 거듭제곱의 상수 배 여럿의 합을 표현하는 수식이다. 예를 들어, , , 은 모두 다항식이다. 다항식의 근과 다항식환 등은 대수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다항함수(, 다항식으로부터 유도되는 함수)에 의한 근사는 다항식의 해석학에서의 응용이다. (일변수) 다항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표현식이다. 다항식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문자를 변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은 를 변수로 하며, 따라서 에 대한(관한) 다항식()이다. 다항식은 변수의 개수에 따라 일변수()와 다변수(), 이변수(), 삼변수 등 다항식으로 나뉜다. 더해져서 다항식을 이루는 작은 구성원들을 다항식의 항()이라고 한다. 변수를 포함하지 않는 항을 상수항이라고 한다. 하나의 항만으로 이루어진 다항식을 단항식, 개 항으로 이루어진 다항식을 항식(이항식, 삼항식() 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은 , , 을 항으로 하는 삼항식이다. 은 단항식이다. 항 안에서 변수의 거듭제곱에 곱하는 수를 계수라고 한다. 곱하는 수가 없는 항의 계수는 1이고, 빼는 항의 계수에 빼기 부호도 포함된다는 데 주의하자. (이는 곱하기 1과 뺄셈의 의미에 부합한다.) 예를 들어 의 세 항의 계수는 각각 1, -2, 3이다. 다항식은 계수의 유형에 따라 정계수, 유리계수, 실계수, 복소계수 다항식 등으로 나뉜다. 이 밖에 임의의 (무한 또는 유한)체, (가환 또는 비가환)환의 원소도 계수가 될 수 있다. 다항식의 항에서 특정 변수를 거듭제곱한 지수를 그 항의 그 변수에 대한 차수라고 한다. 항의 모든 변수에 대한 차수의 합을 그 항의 차수라고 하고, 을 차수로 하는 항을 차항(일차항, 이차항 등)이라고 한다. 다항식 안에서 차수가 가장 높은 항(최고차항)의 차수를 그 다항식의 차수()라고 하고, 을 차수로 하는 다항식을 차 다항식(일차 다항식, 이차 다항식 등)이라고 한다. 나타나지 않은 변수는 0차(따라서 상수항은 0차항이다), 지수가 없는 변수는 1차라는 데 주의하자. (이는 0제곱과 1제곱의 의미에 부합한다.) 예를 들어 에서, 항 의 차수는 2이며, 이는 가장 높은 차수이다. 따라서 다항식의 차수는 2이다. 은, 이 차항이자 최고차항이므로, 3차 다항식이다. 같은 다항식에 변수 및 각 변수의 차수가 같은 항이 여럿 있다면, 이들을 동류항이라고 한다. 동류항이 있는 다항식은 정리가 안 되었다고 여겨지며, 계수를 더해서 하나의 항으로 만들어야 한다. 에서 와 는 동류항이며, 이들을 모아 정리한 다항식은 곧 이다. 항의 개수나 최고차항을 생각할 때, 동류항은 이미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계수가 0이면 항으로 쳐주지 않아야 한다. 상수항만으로 이루어진 다항식 을 상수 다항식()이라고 한다. 그 상수가 0인 경우 영다항식()이라고 한다. 0이 아닌 상수 다항식은 (유일한 유형의) 0차 다항식이다. 영다항식은 계수가 0이 아닌 항이 존재하지 않아서, (유일하게) 차수를 정의하지 않거나, 로 따로 차수를 규정한다. 다변수 다항식의 경우, 동류항을 정리한 후에도, 차수가 같은 항이 여럿 있을 수 있다(최고차항도 여럿 있을 수 있다). 차수가 같은 항들만으로 이루어진 다변수 다항식을 동차 다항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에 대한 다항식 은 동차 다항식이다. 최고차항의 계수가 1인 일변수 다항식을 일계수 다항식(또는 모닉 다항식)이라고 한다. 다항식의 항은 항의 차수를 이용하여 단정하게 배열된다. 일변수 다항식의 배열법으로는 내림차순(강멱, , 항을 차수가 낮아지는 순으로 배열)과 오름차순(승멱, , 항을 차수가 높아지는 순으로 배열)이 있다. 이미 내림차순으로 배열된 은 오름차순으로는 이다. 일변수 다항식의 최고차항은, 내림차순 배열에서 처음 오는 항, 오름차순 배열에서 마지막으로 오는 항이다. 다변수 다항식 항의 배열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방법은 변수의 차수의 튜플의 사전식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이다. 는 에 대한 다항식의 사전식 순서 배열의 예이다. 여기서 사용한 사전식 순서는 이다. 위의 예처럼, 사전식 순서에서 최고차항은 중간에 위치할 수도 있다. 두 번째 배열법은 다항식을 동차항의 합으로 나눠 전개하는 것이다. 이때 동차항의 배열 순서는 일반적으로 여전히 사전식 순서를 따른다. 이원 이차 다항식을 와 같이 배열한 것이 한 예이다. 다항식은 함수와 비슷하게 , 등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의한 다항함수와의 혼동은 많지 않다. 다항식 의 차수는 로 표기한다. 일반적인 일변수 다항식은 와 음이 아닌 정수 , 그리고 개의 상수 을 써서 등으로 나타낸다. 이때 는 차항 계수이고, 이 중 은 상수항이다. 가 영이 아닌 다항식인 경우, , 즉 이게끔 한다. 일반적인 다변수 다항식은 과 유한 개의 튜플 을 써 로 나타낸다. 다중지표 표기법을 이용하여 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체 의 원소를 계수로 하는 (즉 위의) 다항식의 집합이 다항식의 덧셈과 곱셈 아래 이루는 환을 로 표기한다. 환 위의 다항식의 환은 , 다변수 다항식의 환은 , 로 표기된다. 정 · 유리 · 실 · 복소계수 다항식이 이루는 환은 각각 로 표기한다. 다음은 다항식의 여러 가지 서로 동치인 정의들이다. 그 밖에도 대수 구조의 성질에 기반한 다항식의 여러 정의법이 존재한다. 프랑수아 비에트가 미지수로 알파벳을 사용한 이래로, 저명한 수학자 데카르트가 그의 저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서 다항식을 특정한 문자 x, y, z를 이용하여 나타내었고, 그 이후로 여러 나라의 수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수와 식'을 나타내는데 문자 x, y, z를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는데, 이중에 왜 하필 x를 유난히 많이 사용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 않다. 어쨌거나 현대에 이르러서, x는 특정한 문자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문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다항식은 수와 비슷하게 덧셈, 곱셈을 비롯한 여러 연산을 할 수 있다. 다항식은 나눗셈을 제외한 사칙연산에 대해서 닫혀있지만 일반적으로 나눗셈에 대해서는 닫혀있지 않다. 두 다항식을 더하는 것의 관건은 비슷한 항끼리 합쳐주는 것이다. 이때 계수는 서로 더하고 문자와 지수 부분은 그대로 둔다. 이는 분배법칙을 반영한다. 비슷한 항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들은 임의로 한 군데 모아 합칠 수 있다. 이는 덧셈의 교환법칙과 결합법칙을 반영한다. 예시: 만약 이면, 다변수 다항식의 예: 다항식의 곱셈은 분배법칙을 이용해 괄호를 없애는 방향으로 전개하는 것이 관건이다. 두 항을 곱할 때, 계수를 곱해주고 지수를 더해준다. 예: 앞선 와 의 곱은 다변수 다항식의 예: 일반적으로 다항식의 나눗셈은 다항식의 나눗셈 정리나 조립제법의 방법으로 한다. 미분 다항함수는 모든 x에 대하여 연속이며 미분가능하다. 다항함수는 다항식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 일변수 함수 는 모든 항들에 대해서, 은 자연수이고 상수,계수이다. 실수로서 그 실수 해를 갖는 함수를 정의하면, 이고, 이것은 일변수 다항함수이다. 다수의 미정의 계수들로 이루어진 다변수 다항함수들도 이와 유사하게 정의된다. 다항식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함수 formula_14 역시, formula_15에서 다항함수이다. 왜냐하면, formula_16항들에 대해서 formula_15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formula_18이다. (체비쇼프 다항식참조) 다항함수은 많은 중요한 성질들을 갖는 다른 함수들 즉, 연속함수, 매끄러운 함수, 전해석 함수, 계산 가능 함수들 처럼 그 들중의 하나이다. 전주시 전주시(全州市)는 대한민국 전라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시이자 전라북도청 소재지이다. 시의 거의 대부분은 완주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으로 김제시, 서북쪽으로 익산시와 접한다. 시청 소재지는 완산구 서노송동이다. 행정 구역은 2구(완산구, 덕진구) 35행정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감영 소재지로서 호남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전주 풍패지관, 경기전, 풍남문, 전주한옥마을 등의 명소가 있다. 지방자치법 제175조에 따라 특례를 둘 수 있는 기초자치단체이며, 전국대도시시장협의회의 회원시이다. 전주(全州)는 마한시대 이래 호남지방의 규모가 큰 읍으로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한다. 원(圓)은 '온'의 차음(借音)이어서 백제 때에는 완산(完山)으로 불렸는데, 전주라는 지명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행정구역 명칭을 개혁하면서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 등을 거느리게 하였다. 완산과 전주라는 이름에는 모두 비슷한 뜻을 지닌 '완(完)'과 '전(全)'이 들어있는데 이는 모두 '온전하다'는 뜻의 순한국말 '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을 완산과 비슷한 차자(借字)로 보아 전주에 비정하는 학설도 있다. 전주를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는 '비사벌'이 있다. 《삼국사기》는 지리지 백제편에 완산은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고 주(註)를 달고 있는데, 같은 책 지리지 신라 양주편에는 이 지명이 본래 화왕군(火王郡: 현 경상남도 창녕군)을 일컫는 이름이라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에 "16년,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였다."는 대목을 헷갈려 전주의 옛 이름을 '비사벌'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동경 126°59′∼127°14′, 북위 35°43′∼35°53′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206 km²이다. 완주군이 시 경계의 대부분과 맞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김제시와, 북쪽으로는 익산시와 접하고 있다. 북동으로부터 남서로 노령산맥의 지류인 기린봉, 고덕산, 남고산, 모악산 등이 뻗어 있으며, 시 곳곳에 200m 내외의 황방산, 가련산, 건지산, 완산칠봉 등이 자리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산이 남쪽에서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만경강의 제1지류인 전주천은 시 남동쪽에 있는 관촌평야에서 기원하여 시역을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관통하여 흐르며, 덕진구 전미동에서 소양천과 합류해 만경강 본류를 이루어 시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전주천의 지류인 삼천은 시의 남동쪽을 지나는 노령산맥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완주군 구이면에서 들어와 시의 서쪽을 북쪽으로 흐르다 덕진구 팔복동(추천)에서 전주천에 합류한다. 최근에는 시가지를 흐르던 노송천의 복원계획이 발표되었다. 시가지의 대부분은 전주천 충적토상(沖積土上)에 건설되어 대체로 평탄하며 전주천변을 중심으로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주의 연평균 기온은 13.3℃이고, 연강수량 1313.1mm이다. 전주시의 행정 구역은 2구 35행정동 83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205.53 km²이고, 인구는 2018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65만1091 명, 26만6541 가구이다. 완산구는 전주천과 서산(西山, 화산공원)을 경계로 과거 전주부 시절부터 도심이었던 원도심과 도청이 있는 서부 신도심으로 구분된다. 원도심 지역은 역사·문화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으며, 서부 신시가지는 행정과 상업 기능이 밀집된 행정·주거지역으로 개발되고 있다. 전주시청은 원도심에, 전라북도청, 전북지방경찰청 등 전라북도의 행정기관은 신도심에 위치해있다. 덕진구는 원도심과 가까운 진북동, 인후동, 금암동, 덕진동 등 일대가 먼저 개발되어 1970년대부터 부도심 역할을 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신흥주거지인 송천동을 중심으로 한 전주 북부권 개발이 진행 중이다. 전주시 덕진구 혁신동, 완주군 이서면 갈산리·금평리·반교리 일대 9.9 km²에 2009년 착공하여 2017년까지 국민연금공단, 농촌진흥청, 대한지적공사,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12개 이전 대상 공공기관이 모두 이전을 완료하였다. 전국 10개 혁신도시 중 최대 규모이며, LH와 전북개발공사가 총 1조5229억원을 투자해 인구 3만명 대의 신도시를 세울 예정이다. 전주 북부권 핵심 개발사업이다. 에코시티로 부르기도 하는데, 전주시 송천동에서 35사단을 이전하고 송천동·전미동·호성동 일대의 1.99 km²를 택지 등으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송천1동에 있던 35사단이 2013년 12월에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로 이전하였고, 송천2동에 있는 206항공대대도 이전할 예정이다. 총 2515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인구 3만명 정도의 신도시를 세울 예정이며, 2013년 9월 부지 개발을 착공하였다. 서부신시가지 인근의 전주시 효자동·삼천동 일대 0.67 km²를 개발하는 사업으로, 서부신시가지 배후지역으로서 직주근접형 정주공간을 조성하고 서남부지역의 도시자족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추진되는 사업이다. 2019년에 준공하였으며 주택공급 규모는 총 4539가구로 인구 1만3617명을 수용하게 된다. 혁신도시 인근의 전주시 만성동 일대 1.45 km²를 개발하는 사업이다. 5500억원을 투입할 예정으로 법원·검찰청 등이 입주할 법조타운 및 1만7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공동주택과 공원을 조성한다. 이 사업은 2008년 한국토지공사가 맡아 2013년 부지조성사업이 준공될 계획이었으나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합병해 LH가 출범하면서 자금난에 부닥치자 2009년 실시설계용역 단계에서 멈추었다가, 2013년 9월 착공해 2018년에 준공하였다. 전주시 효자동 일원 2.53 km²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전라북도의 경제, 사회, 문화, 행정 등 중심기능을 담당할 중핵도시와 미래형 신시가지 조성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사업비로 4,560억원이 투입되었으며, 2008년에 준공되었다. 현재 서부신시가지에는 전라북도청, 전북지방경찰청, KBS전주방송총국, 호남지방통계청, 전북지방중소벤처기업청, 전북지방우정청 등의 관공서와 주요시설이 들어서 있다. 전주시는 갑·을·병 선거구 등 총 3개의 선거구가 있다. 16대 국회까지는 2개 선거구였으나, 2004년에 완산구 선거구가 완산구 갑·을 선거구로 분리되어 3개 선거구가 되었다. 풍남문은 보물 제308호이다. 전주를 상징하고 있는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때 창건되었다가 조선 영조 때 소실되어 문루를 보수하여 남문을 풍남문, 서문을 패서문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전주가 이씨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는 의미에서 풍패(豊沛)를 각각 머리 글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전주 풍패지관는 보물 제583호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조선 초 전주부성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1473년(성종 3년)에 전주부윤 조근이 전주사고를 창설할 때 남은 재력으로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는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전패(殿牌)를 모시고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勅使)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高官)이 부임하면 먼저 이 곳에 들러 배례(陪隷)를 올렸다. 경기전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39호로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태조의 영정(국보 제317호)을 봉안한 전각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4년(광해군 6년)에 중건되었다. 전주 한옥마을은 경기전 앞을 지나는 길인 태조로를 중심으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의 도심지에 650여채의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전주 전통술박물관에선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들을 접할 수 있고, 전주 전통한지원에선 닥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전통문화센터, 한옥생활체험관, 공예품 전시관, 기전전통 문화원, 한방문화센터, 전통찻집 등이 있다. 전동성당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전동 경기전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4년에 준공되었다. 건축면적 약 624m이며, 호남지역 서양식 근대건축물로써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사적 제228호에 지정되었다. 조경단은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3호로 덕진에서 약 1 km 들어간 건지산에 있다. 1899년(광무 3년) 5월에 이곳에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전주 이씨 시조의 묘소를 정하고‘대한조경단’이라 하였다. 전주는 예전부터 천혜의 자연환경 덕택에 음식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지역이다. 2012년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음식창의도시에 선정되었다. 전주비빔밥, 전주한정식, 오모가리탕, 콩나물국밥 등이 유명하다. 전주에는 막걸리 골목이 여럿 있는데 삼천동과 효자동 쪽은 막걸리 한 주전자에 화려한 '기본 안주'가 따라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건축물 객사 주변의 거리로, 전주의 도심을 대표하는 번화가이다. 완산구 고사동에 위치해있다. 전주 영화의 거리도 객사길에 위치해 있다. 전북대학교 구정문 주변에 위치한 대학로이다. 전주에는 2013년 기준 919개의 의료기관이 있다. 전주에 위치한 상급종합병원, 종합병원, 대학부속병원 등의 주요 의료기관은 다음과 같다. 국도 17호, 21호, 26호선 등이 시내를 통과하며, 1번 국도, 27번 국도는 시내를 우회한다. 동산동에 있는 전주 나들목이나 완주군 이서면에 있는 서전주 나들목에서 호남고속도로에, 완주군 용진읍의 완주 나들목이나 소양면의 소양 나들목에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지선에, 금상동에 있는 동전주 나들목과 완주군 상관면에 있는 상관 나들목에서 순천완주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다. 덕진구 금암동에 있는 전주고속버스터미널과 전주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해 전국 곳곳으로 버스가 운행된다. 전라선(全羅線)이 완주군 삼례읍에서 들어와 동산역, 송천역(폐역), 전주역, 아중역(폐역) 등을 지나 북동쪽으로 돌아 나가며, 옛 전라선의 일부가 화물전용선인 북전주선(北全州線)이라는 이름으로 분기하여 팔복동에서 끝난다. 종전에는 군산역과 임실역 사이에 하루 네 차례 통근열차를 운행했으나, 2008년 1월에 장항선과 구 군산선 일부가 연결되면서 통근열차 운행은 중단되었다. 항공 교통의 경우, 과거에 전주 비행장을 이용해 여객기가 운행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중단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는 군산공항이 있다. 대중교통 수단으로 시내버스가 전주시, 완주군 삼례읍, 봉동읍, 용진읍, 소양면, 구이면, 김제시 금구면, 백구면, 임실군 관촌면 등을 연결한다. 전주시는 시내 경전철 사업을 추진하다가 2007년에 중단했다. 전주시 인문계 고등학교는 평준화를 시행하고 있으며, 매년 12월 중학교 졸업예정자/졸업자 및 고등학교 입학자격 획득자를 대상으로 선발고사를 실시해 선발고사 180점+내신 70점으로 입학정원만큼을 선발한다. 전문계 고등학교 및 기타 고등학교는 학교장의 추천을 통해 내신성적으로 입학인원을 선발한다. 국립 대학교 사립 대학교 전문대학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 소속인 전북 현대 모터스가 전주 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삼고 있으며, K3리그 소속인 전주 시민축구단이 전주대학교 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삼고 있다. 2008년에는 전주 온고을 FC가 전주덕진체련구장을 홈구장으로 하여 챌린저스리그에 참가하였으나 2009년부터 불참하였다. 여기서 클래식팀인 전북현대모터스는 2018년 우승으로 지난 시즌 2017년도 우승에 이어 2년 연속우승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전북은 별이 6개가 되었다. 여자축구도 있으며 풋살팀도 있다 프로농구 KBL 소속인 전주 KCC 이지스는 전주 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삼고 있다. 전주 KCC 이지스는 2010~2011시즌 챔피언에 등극하여 KBL 최다 우승인 5회 우승 기록을 보유 중이다. 프로야구는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었으나 모기업의 부도로 2000년 1월 7일 퇴출되었다. 원주시 원주시(原州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서남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영월군, 북쪽으로 횡성군, 서쪽으로 경기도 여주시, 양평군, 남쪽으로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와 접한다.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 광주원주고속도로가 교차한다. 철도 교통으로는 중앙선과 경강선KTX(원주~강릉)가 지나가고, 2024년에 경강선 일반철도(여주~원주)가 개통된다. 신라시대에는 소경(小京)을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도호부, 조선시대에는 강원도 감영 소재지였다. 1938년에 원주군 원주면이 원주읍으로, 1955년에 원주시로 승격하였으며 나머지 지역은 원성군으로 분리하였다. 1989년에 원성군을 원주군으로 바꾸고, 1995년 1월에 원주군과 원주시를 통합하여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면적은 867.3 km이고, 인구는 35만1천명이다.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한국광물자원공사, 대한석탄공사, 한국관광공사, 대한적십자사, 국립공원관리공단, 도로교통공단,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이 옮겨 왔다. 명소로는 치악산이 있다. 시청이 있는 곳은 무실동이고, 행정구역은 1읍 8면 16동이다. 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기업도시와 혁신도시를 동시 보유하고 있다. 원주지역에서 발굴하고 있는 유물에 따르면 원주에는 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며, 삼한시대에는 부족연맹국가의 하나인 마한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했다. 백제 근초고왕 때 마한을 백제가 완전 복속함으로써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강원도 지역에서 유일무이한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어 469년에 평원군(平原郡)이 설치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나제동맹으로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함으로써 신라가 영토에 편입하는 등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격전장이었다. 678년 (문무왕 18년)에 지방행정제도를 9주 5소경으로 완비함에 따라 북원소경(北原小京)이라 부르고, 757년(경덕왕 16년)에 북원경(北原京)으로 명칭을 바꿔 불렀다. 9세기 말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라 말기의 호족의 한 세력이던 양길(梁吉)은 원주지역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강원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1946년까지 인구 2만의 소읍이었고, 한국 전쟁으로 도시의 태반이 파괴되었다. 그 뒤 제1야전군사령부, 제1군수지원사령부, 미군부대인 캠프 롱이 상주하게 되면서 군사 도시로서 빠르게 복구 되었다. 1955년 9월 1일에 시로 승격되었다. 강원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시의 동남 경계에 백두대간이 뻗어 있고, 그 중에 치악산(雉岳山, 1,228m)이 높이 솟아 있다. 지형은 이 곳에서 점차 서쪽으로 낮아져 섬강(蟾江:한강의 지류)의 지류 원주천 유역에 이르러서는 평탄지를 이루고 있다. 연안에는 사력층이 약간 발달되어 있으며 전역이 화강암 지대이다. 원주시의 행정 구역은 1읍 8면 16동이다. 면적은 872.56 km²이고, 인구는 2019년 8월 기준으로 내국인계(347,762명), 외국인계(3,566명), 외국인포함(351,610)명이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2개 (원주갑, 원주을)로 나뉘어 있다.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원주시, 횡성군을 치악산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원주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원주시의 인구는 1966년 10만 4천, 1975년 12만 1천, 1995년 23만 8,027명으로 증가하였으며, 2007년 10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현 2019년 10월기준 35만 1,610명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공업이나 농업보다는 3차 산업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는 원주가 군사 도시로서 순 소비도시임을 나타내고 있다. 섬강 유역의 침식분지인 원주평야는 강원도의 주요 산미지대를 이루고 있어 이 평야에 위치한 원주는 논농사가 발달하여 왔다. 그리하여 쌀이 주산물이다. 경지 면적은 논의 비율이 높다. 주요 농산물은 쌀·채소·저류·보리·콩·옥수수·누에고치·한우·담배·꿀·약초 등이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연변에 밤나무·과수·잠업·낙농 등의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농지면적은 공장·주택·공원용지로 전용되어 감소 추세이다. 1970년 원주 경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섬유·화학·식품·기계·펄프·의료기구·농기구를 비롯하여 여러 제조업 공장이 가동하게 됨으로써 소비 편중에서 벗어나 경공업 도시로 변모되고 있다. 중앙시장·역전시장·남부시장 등 5개 시장이 있으며 생필품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상품을 서울에서 반입하므로 서울보다도 가격이 20∼30%나 비쌌으나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그 가격차는 훨씬 좁혀졌다. 가발·목가공품·갈포·견수방·운동구 등은 주요 수출품이다. 특산물로는 치악산 복숭아, 원주배, 원주토마토, 원주버섯, 친환경농산물, 원주화훼, 원주 한지, 감자(노유), 옻칠기 공예가 발달했다. 치악산은 원주시와 횡성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해발 1,288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 내린 치악산은 남대봉(1,181m)과 매화산 (1,085m) 등 1천여 미터의 고봉들이 연이어 있고 곳곳에 가파른 계곡들과 산성(금대산성, 영원산성, 해미산성)과 사찰(구룡사·상원사·석경사·국형사·보문사·입석사), 사적지가 산재하고 있다. 구룡사(龜龍寺)는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절로 치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에 위치한 남대산(1181m) 기슭의 상원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050m)에 자리잡은 절이다.절은 100여 평 남짓한 석반 위에 세워졌고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의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법당 앞 암석들에는 한반도에서 아주 희귀한 커다란 계수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이 절의 풍치와 위엄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은혜 갚은 꿩과 구렁이의 전설이 어려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신라 때 창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론면에 있는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여주의 고달사지와 함께 한국 최고의 폐사지이자 문화유산 답산의 명품 코스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 국사가 머물렀고 대찰의 면모를 이루며 영화롭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석물의 흔적만이 옛 영화를 어림짐작하게 한다. 국가지정 문화재로 국보 제59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와 보물 제78호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등 다수의 국가지정·도지정 문화재가 있다. 강원도에서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영동과 수도권 지역을 이어주는 물류 요충지 구실을 하고 있다. 원주가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교통의 요충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강릉·홍천·춘천·충주·안동·대구·영월·평창·정선 등에 통하는 도로망의 초점이 되어 있으며 1942년 중앙선 개통이 더욱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들 도로망은 중앙선을 배양하고 있어 남부 강원도의 문호로 물자의 집산이 성하여 시황은 매우 좋은 편이다. 도로는 서남부의 중심을 이루는 원주를 중심으로 하여 강릉·안동가도로 분기하고, 여주·충주·평창·횡성 등에 이르는 도로를 잘 바로잡아서 강원도의 서남쪽 문호를 이루어 매우 편리하다. 특히 1975년에 개통한 영동고속도로는 수도권과 원주를 사통팔달로 이어주면서 주민들의 경제 생활에도 커다란 변모를 가져오게 되었다. 영동·중앙고속도로와 5번 · 19번 · 42번 국도, 49번 · 84번 · 88번 국지도, 396번·401번·402번·404번·599번 지방도가 시를 중심으로 동서 또는 남북으로 통한다. 2016년 11월에 광주원주고속도로 를 완공하면서 원주에서 서울까지는 54분 거리로 단축되었다. 중앙선이 시를 꿰뚫고 있으며 원주역이 시의 중심 역의 기능을 맡고 있다. 동화역, 원주역, 신림역에 여객열차가 멈추며, 여객 열차가 멈추지 않으면서 화물 취급이나 운전 취급을 하는 역으로 만종역, 유교역, 금교역, 치악역, 창교역, 연교역이 있다. 2012년에 중앙선이 기존의 용문역에서 서원주역까지 복선 전철화 되었고, 원주시와 강릉시를 잇는 강릉선 구간이 2017년 12월 22일 개통하여 KTX-산천이 만종역에 정차하며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2019년 서원주역-제천역 중앙선 복선전철사업을 완료하면 원주역은 폐역하고 무실동 남원주역으로 이전한다. 최근 여주-원주 복선전제 단선전철사업 예비타당성 조사가 통과되어 향후 월곶-판교, 성남-여주 복선 전철이 연결되어 인천행 간선철도와 판교행 수도권 전철을 운행할 예정이다. 소초면에 군 비행장이 위치해 있는데, 원주공항의 민항기 계류장 및 활주로로 사용된다. 다만 원주공항의 공항청사는 횡성군에 소재하여 횡성군에서 탑승/하차 수속을 밟아야 한다. 하루 1회씩 운항하는 대한항공의 여객기를 통해 제주와 연결한다. 강릉시 강릉시(江陵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동해안 중부에 있는 시이다. 서울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영동 지방 최대 도시이다. 서쪽으로 태백산맥이 뻗어 있고, 동쪽으로 동해가 펼쳐져 있으며, 해안선 길이는 64.5km이다. 겨울에는 한랭한 북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어 오면서 푄현상을 일으켜 같은 위도의 서해안보다 기후가 온난하고 연교차가 작은 해양성 기후에 가깝다. 연안은 수심이 깊고 계절에 따라 한류와 난류가 흘러 어족이 풍부하다. 경포대와 오죽헌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강동면에는 바다에서 제일 가까운 기차역인 정동진역이 있다. 해마다 음력 5월에는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가 열린다. 고등 교육기관으로는 국립 대학교인 강릉원주대학교와 사립 대학교인 가톨릭관동대학교, 공립 대학교인 강원도립대학 등이 있다. 시청은 홍제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읍 7면 13동이다. 본래 동예이자 남말갈, 예국(濊國)의 땅으로 하슬라(河瑟羅)라고 불렸다. 일대가 비옥해 살기 좋았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곳을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고 불리고 예국을 속국으로 삼아 이곳을 지배했다. 639년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고 (신라 선덕여왕 8) 소경(小京)으로 삼아 북빈경(北濱京)이라 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658년(신라 태종 무열왕 5년) 무열왕이 "이곳은 말갈과 인접해 있다"라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아슬라주를 만들어 도독을 파견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칭하였다가 776년(혜공왕 12)에 복구하였다. 고려 태조 때 명주라 다시 개칭되고, 성종 14년(995) 삭방도(朔方道)의 행정 중심지로 함남북과 영동 일대와 영서의 춘천 이북 등지를 관할하였다. 1178년 이를 폐하고 함남과 명주군 일대를 임해(臨海) 명주라 개칭하고 원종 4년(1263) 강릉도라 고쳤으며, 그 후 다시 함남 쌍성(雙城)지방과 합하여 강릉삭방도라 하였다. 공양왕 때 함경도를 분리하고 강릉도라 다시 칭하였으나 항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 되어 왔다. 조선 초에는 원양도(原襄道)·원춘도(原春道)라 칭하다가 세종 5년(1423) 강원도라 하고 춘천부와 강릉부로 나뉘었다. 이듬해 1부가 폐지되어 행정 중심을 춘천에 옮기고 강릉군만 관할하게 되었다. 영동 해안의 중앙에 위치하며 배후에 태백산맥의 오대산(五臺山, 1563m)·황병산(黃柄山, 1,407m)·대관령(大關嶺, 832m) 등을 지고 전면에 동해를 바라보는 남대천 좌안에 발달하였다. 부근 일대는 남대천이 퇴적한 동해안 유수의 대평야이며 산자수명한 곳으로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강릉시엔 경포대가 있는 것으로 알러져 있는 경포호라는 호수 하나가 존재한다. 동쪽은 동해에 접해 있고, 서쪽은 평창군, 남쪽은 동해시, 북쪽은 양양군에 접해 있다. 한반도의 허리인 태백산맥 동쪽 중앙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동해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홍천군 내면, 평창군 진부면 및 대관령면과 각각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동해시, 정선군 임계면과 맞닿아 있으며 북면에 북쪽으로는 양양군 현북면과 현남면과 닿아 있는 등 강원도내 5개 시, 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강릉시의 해안선은 64.5km로 강원도 해안선 318km중 20.2%를 점유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오대산, 대관령, 석병산 등 1,000m이상의 높은 태백산맥과 접하고 있으며 서에서 동으로 3개의 산맥이 뻗어 있으며 그 중앙에 남대천이 흐른다. 강릉시 총 면적은 지난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의 통합으로 2015년말 현재 1,040.4km로 강원도 16,873km의 약 6.2%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밀도는 1km당 209명(2015년말 기준)이며 강원도 평균 인구밀도 91.4명 보다 2.3배 정도 높으며, 강원도내 타 시군과 비교하면, 속초시(786.8명), 동해시(528명), 원주시(372.3명), 춘천시(245.8)에 이어 5번째로 인구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강릉시는 전체면적 중 임야가 80.5%(837.36km), 논이 4.9%(51.17km)로 구성되어 있어 산지를 제외한 이용가능 지역은 상당히 적어 도시성장의 제약이 되고 있다. 강릉은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에 속한다. 또한 강릉은 동쪽으로 동해와 접해있어 해양성 기후에 가까운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위도에 비하여 겨울철은 온난하고 여름철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어서 연교차가 작은 편에 속한다. 연 평균 기온은 13.1℃, 1월 평균 기온은 0.4℃, 8월 평균 기온은 24.6℃이고, 연 평균 강수량은 1464.5mm이다. 특히 겨울철에 서해안보다 온난한 원인으로 북서계절풍이 태백산맥을 넘어 발생하는 푄 현상도 한몫하고 있다. 강수량은 다른 지방에 비하여 여름에 적고, 봄·가을·겨울에 많은 것이 특징이며 영서 지방보다 많은 편이다. 간혹 북동기류의 장시간 유입시 겨울철은 대설, 여름철은 지속적인 강우와 저온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특히 1956년 적설량은 120cm 이상을 기록하여 인명피해를 내고 교통 통신이 일시 마비된 일도 있다. 겨울과 봄철에는 강풍과 함께 건조하여 산불이 발생하면 대형 산불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보통 강릉 지역은 내륙지방이나 서해지방보다 겨울철에 온도가 더 높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해안지방은 내륙지방보다 기온이 더 높다. 바다의 온도가 육지의 온도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서해지방보다 겨울철에 온도가 더 높은 이유는 두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태백산맥이 시베리아의 북서계절풍을 막아주어서 차가운 바람이 차단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동해의 수온이 서해의 수온보다 더욱 따뜻하기 때문이다. 홍천군, 평창군, 강릉시 경계 지역에 오대산 국립공원이 소재하고 있다. 강릉시 면적의 80.4%가 임야이다. 강릉시 대부분의 하천은 동해로 흐르는 하천이다. 강릉시를 유역으로 하는 하천으로는 연곡천, 사천, 남대천, 섬석천, 경포천, 군선강, 시동천, 주수천, 정동천, 낙풍천이 있다. 강릉시의 행정 구역은 1읍 7면 13행정동(39법정동), 146행정리(65법정리), 326통 2656반이다. 강릉시의 총 면적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의 통합으로 1,040km이고, 강원도 면적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2012년 2월말 기준으로 217,986명, 90,891 세대이다. 남녀 성비는 0.99이다. 강릉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이다. 1990년 자료까지는 강릉시+명주군 자료이다. 명승지인 소금강과 대관령, 해수욕장으로 주문진·연곡·사천·안인·등명·옥계 해수욕장 등 총 40여곳의 해수욕장이 있어 연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든다. 부근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를 비롯하여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객사문(국보 제51호)·당간지주·금란정·경호정·해수욕장 등 많은 관광자원이 있어 전국적인 관광휴양지로 되어 관광객이 끊임 없다. 매해 1월 1일 새해엔 경포대와 정동진에서 해돋이 축제가 열리며, 해마다 음력 5월에는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가 열리는 등 다양한 지역 축제도 열린다. 강릉시 내엔 15개 박물관이 소재한다. 일반 전시관에는 1관 커피 역사문화관, 2관 커피 로스터 & 그라인더관, 3관 커피 추출관, 4관 커피나무 재배관, 5관 커피 시음관이, 특별관에는 스털링실버 커피앤틱관, 커피컵 컬렉션관이 있으며 그 외에 커피 체험관, 커피 교육관, 뮤지엄 카페 등의 시설이 있다. 강릉시엔 총 128개의 유, 무형문화재가 소재해 있다. 그 중 국가지정문화재는 34개이며 도지정문화재는 58개이다. 강릉시의 국보로는 강릉 임영관 삼문이 있다. 이 문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임영관 삼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 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이다. 한국 건축물 중에서 오래된 축에 속하며, 조선시대 양반집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희귀한 사례인 등을 인정받아 보물 165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성왕 13년(851)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강릉 굴산사지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44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절터 내부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보물 제85호 승탑과 보물 제86호 당간지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대표적인 국보/보물급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강릉 임당동성당은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지 중 하나이다. 1950년대 강원도의 성당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457호로 등록되었다. 강릉시에 소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로는 등명락가사, 금강사, 법왕사, 보현사, 용연사, 현덕사가 있다. 강릉시에는 정동진 해변 외에도, 안목해변, 경포해변, 강문해변, 사천해변, 주문진해변, 옥계해변, 영진해변, 송진해변 등등 총 18개의 해변이 존재한다. 한편 동해안에 잘 발달된 해안 지형인 석호는 강릉시에도 잘 발달되어있는데, 대표적으로 경포호, 향호 등이 있다. 강릉시에선 강릉시의 특선음식을아 '강릉특선음식 10선'을 지정하였다. 이 음식은 삼계 옹심이, 째복 옹심이, 크림감자옹심이, 초당 두부 밥상, 초당두부탕수, 두부삼합, 두부샐러드, 바다해물밥상, 해물삼선비빔밥, 해물뚝배기이다. 강릉종합운동장을 주 경기장으로 사용하는 축구 클럽 강원 FC가 K리그 클래식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나 2017년 시즌 이후 사용이 종료되었다. 또한 이 운동장은 내셔널리그의 강릉시청 축구단이 홈구장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1976년부터 단오절마다 개최되는 강릉제일고등학교와 강릉중앙고등학교 축구부의 경기인 농상전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2016년에 강릉 하키 센터를 연고지로 하는 대명 킬러웨일즈가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피겨 스케이팅,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컬링 경기가 개최되었으며, 2014년 7월 17일엔 강릉시 교동에서 강릉 빙상경기장 착공식이 있었다. 강릉 빙상경기장들은 2016년 말에 완공되었다. 강릉의 빙상경기장들이 완공된 이후 2017년 세계 종목별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2017년 U-18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 2017년 4대륙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2017년 세계 주니어 컬링 선수권 대회와 2017년 세계 휠체어 컬링 선수권 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강릉시의 '강릉 코스탈 클러스터'에서는 2018년 동계 올림픽의 피겨 스케이팅,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컬링 경기가 개최되었으며, 2018년 동계 패럴림픽의 휠체어 컬링, 아이스 슬레지 하키 경기가 열렸다. 빙상 경기가 열린 올림픽 스타디움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강릉시 유천택지개발단지에 강릉 올림픽 선수촌 및 미디어촌이 건설되어 올림픽 운영을 지원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삼지연 관현악단의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성공 기원 특별공연"이 2018년 2월 8일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렸다. 평야지대가 비교적 넓고 온난하며 강수량이 많아 농업이 활발하다. 그러므로 강릉을 차지하여 농업 도시의 색채를 띠고 있으며, 공업은 미약하고 3차산업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강릉시엔 총 6개의 산업단지가 있다. 그 중 강릉과학산업단지는 일반지방산업단지로 지정되어 있다. 비옥한 충적평야가 있고 기후가 온난한 까닭에 쌀농사의 비율이 높으며, 그 외에 각종 농산물이 나며, 소·꿀 등의 집산이 성하다. 배후에 태백산맥의 거악(巨岳)을 지고 있어 남한의 임업 중심이 되어 있다. 임야 면적은 8만 4,165㏊이며, 입목지는 99%이다. 임산물로 밤·대추·버섯·산나물이 나며, 제재업과 축산업도 성하다. 주문진항은 천연적인 양항으로 속초항과 더불어 동해 북부지방의 어업중심지를 이룬다. 근해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어족이 풍부하다. 주요 어획물은 오징어·명태·꽁치 등이고, 그 밖에 해조류 미역 채취량이 많다. 이 수산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설시장인 주문진수산시장이 있다. 강릉시엔 국가어항으로 사천진항, 강릉항, 금진항 3곳이 존재한다. 지방어항으로는 소돌항, 영진항 2곳이 존재한다. 부근 일대에 무연탄과 흑연·금의 매장이 풍부하고 공업에 있어서 대규모 공장으로는 제사공장이 있을 뿐 그밖에 중소 공장이 약간 있다. 1973년의 영동 화력 발전소 건설로 점차 공업도시화되고 있다. 대전동·사천면 방동리 일원 51만 4,000평의 부지에 2015년까지를 목표로 강릉과학산업단지를 착공했다. 이곳에 연구단지, 산업단지, 유통 및 건강체험단지, 지원시설단지, 공원단지 등이 들어섰다. 영동 지방의 상업 중심지로서 공산품·생필품 등이 대체로 이 곳을 경유, 각 소비지에 공급되는데 대부분이 서울에서 반입된다. 1975년 서울·강릉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상품 교류가 크게 변모되었으며 공설시장은 중앙시장, 성남시장, 동부시장, 서부시장 4곳이 존재한다. 자연산 돌각·돌미역·젓갈류·오징어·황태·한과셋트·과줄·찹쌀흰강정 등이 유명하다. 고속도로는 인천과 강릉을 연결해 주는 영동고속도로와 속초시와 삼척시를 연결해주는 동해고속도로가 있다. 국도는 고성군에서 부산을 잇는 국도 제7호선(아시아 고속도로 6호선())이 있다. 그리고 국도 제59호선, 국도 제35호선, 국도 제6호선 등이 있다. 서울특별시에서 약 2시간 30분 걸린다. 철도는 영주시와 강릉시를 잇는 영동선이 지나가며, 역으로는 강릉역, 안인역, 정동진역, 옥계역이 있다. 과거에는 정동진역과 강릉역에 새마을호가 정차해 청량리역에서 5.5시간 걸렸으나 현재는 새마을호 운행이 중단되고 무궁화호만 운행해 시간이 6시간 걸린다. 2017년 KTX 경강선이 개통되어 강릉역이 필수정차역으로 지정되었다. 이 덕분에 강릉역과 청량리역간 소요되는 시간이 기존 6시간에서 개통 이후 KTX 운행시 최소 90분으로 단축되었다. 항공 교통으로 강릉공항이 운행되었으나 2002년 양양국제공항에 여객운송권을 넘기고 민간공항으로의 기능을 폐쇄하였다. 영동고속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으며, 동해고속도로가 시를 남북으로 관통해 지나간다. 강릉시엔 3개 권역을 바탕으로 수백 대의 버스가 강릉 각지를 운행하고 있다. 강릉시청에서 관리하며 운영은 각 운송회사에서 담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강원도 최대 규모인 강릉고속버스터미널에서 6개 노선의 고속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강릉시엔 총 589대가 택시 면허를 받아 영업을 하고 있다. 강릉시 택시의 기본요금은 2km까지 2,800원이다. 이후 2km부터 6km까진 152m당 100원이 부과되며, 6km 이후부턴 152m당 200원이 부과된다. 다만, 주문진권, 강동면, 옥계 지역은 예외지역으로 지정되어 복합할증 45% 인상이 적용된다. 강릉항의 강릉항 여객터미널이 강릉-울릉 여객선을 취급하고 있다. 경주시 경주시(慶州市)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동남부에 있는 시이다. 신라의 건국 초기(기원전 57년)부터 신라 멸망(935년)까지 서라벌(徐羅伐), 금성(金城)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으며 992년(약 1000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다. 현재의 이름인 '경주'로 불린 것은 935년(고려 태조 18년)이다. 이후 동경(東京), 계림부(鷄林府) 등으로 바뀌었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경주로 바뀌었으며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경주에는 사찰, 유적, 석탑 등 많은 신라시대 문화재 뿐 만 아니라 경주 양동마을 등 조선시대 양반마을이 보존되어 있으며, 불국사, 석굴암과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산성 등 5곳의 경주역사유적지구, 그리고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시청 소재지는 동천동이고, 행정구역은 4읍 8면 11동이다. 경상북도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울산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경상북도 내에서는 북쪽은 포항시와, 남서쪽은 청도군과, 북서쪽은 영천시와 닿아 있으며, 동쪽은 동해에 접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하단부에 위치한 침식 분지 지형이자, 해발 100m 이하의 저지대와 100~200m의 구릉성 산지가 대부분인 형산강지구대에 속한다. 서쪽에는 단석산계, 동쪽에는 동대산계가 있으며 두 산계에 따라 해안, 평원, 산악지방으로 구분된다. 중앙인 평원지방에는 형산강이 포항시 방향으로 흐르며, 그 주위로 충적평야인 형산강평야가 좁고 길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경주 시가지가 있다. 비교적 낮은 산맥들이 구석구석에 펼쳐져 있으며,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자리잡은 태백산맥이 높은 편이다.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1013m의 문복산이며 청도군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경주시의 서쪽이자 태백산맥의 동쪽의 봉우리들은 주사산맥에 속해 있고, 동쪽의 산들은 동대산맥과 기타 작은 산맥들에 속해 있다. 시가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구미산, 남서쪽으로 단석산, 남쪽으로 남산(금오산), 동쪽으로는 높이 745m의 토함산 등의 산이 있으며, 비교적 작은 산으로 소금강산, 명활산, 낭산 등이 있다. 하천의 방향은 산맥에 따라 나타난다. 동쪽의 동대산맥에서는 동해로 흐르는 작은 하천과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나뉘며, 시의 중앙부에서는 형산강으로 유입되어 포항시의 영일만으로 흘러간다. 남부지역의 하천은 태화강으로 향하여 울산만으로 빠져나가며, 태백산맥 너머 서부지역에는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동창천이 있다. 북쪽의 포항과 남쪽의 울산을 사이로 33km의 해안선이 있다. 큰 섬이나 만은 없으며 해안은 하천에 의해 조금씩 만입되어 있다. 이 때문에 큰 항구는 없으나 어업 등을 위한 12개의 소규모 항구가 있다. 경주시는 서울특별시와 약 370 km 떨어져 있으며, 경상북도의 예전 도청 소재지인 대구광역시에서 동쪽으로 약 55 km 떨어져있다. 2018년 현재 경주시장은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를 통해 당선된 주낙영이다. 경주시의회의 의원 정수는 21명(지역구18+비례대표3)이다. 2018년 현재, 국회의원은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김석기 의원이다. 경주시에서는 경상북도의원 4명을 선출한다. 경주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324.41km로, 경상북도에서 안동시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기초자치단체이다. 도시 지역인 시내 행정동(洞) 면적은 221.3km이다. 행정구역은 4읍 8면 11행정동으로 구성되며, 그 아래 186법정리·동, 301행정리, 332통, 3,200반으로 나뉜다. 시청 소재지는 동천동이다. ※세대 및 인구는 2015년 2월 기준. 신라시대 경주의 인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라 하여 90만에서 120만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대 사라센 제국의 바그다드, 당나라의 장안과 함께 당시 세계 3대도시에 속했다. 이는 인구 25만명으로 추산되는 발해의 상경용천부의 5배 이상의 수치로 만주지역을 제외한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국력을 상징한다. 1945년 광복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경주군의 인구는 22만 2천명이었고, 1955년에 승격 당시에 경주시·월성군의 인구는 22만 9천명이 증가하였다. 1960년대과 1970년대 이후에 울산공업단지와 포항제철의 발달로 인한 도시화에 따라 전출자가 많이 생겨나서 일시적으로 인구증가율 감퇴를 보였다. 이후 인구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반복하는데 장기적으로는 인구가 감소중이다. 2017년 현재는 25만 8천여 명이다. 2013년말 기준 인구는 111,053세대 내국인 254,136명, 외국인 9,147명이고, 면적은 1,324.41km이다. 경주는 대한민국의 주요 관광지로, 도시 곳곳이 유적지나 고대 유물들로 채워진 거리 박물관이다. 가는 곳 마다 그 옛날 문화의 정수를 담은 사찰, 석불 등 많은 사적지와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찬란했던 그 때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왕조의 영화를 더듬을 수 있다. 신라 천년의 고도를 자랑하는 경주시는 최근 국제회의나 엑스포 축제를 성공리에 개최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국제적 위상까지 성공적으로 끌어올렸다. 주요 명승 고적으로는 양북면 범곡리에 있는 석굴암 석굴을 비롯해 불국사와 나원리 오층석탑,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포석정지, 부산성지, 흥덕왕릉, 원원사지, 관문성지 만리성, 옥산서원, 영지 등이 있다. 문화재 보유율이 전국의 5.5%, 경상북도의 30%로 총 합계 3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의 국보 30점, 보물 76점, 사적 72점, 중요민속자료 16점, 기타 6점이며, 도지정의 유형문화재 28점, 무형문화재 1점, 기념물 17점, 민속자료 4점이 있다. 그 외 문화재자료 39점, 비지정문화재 107점으로 방대한 양의 문화재가 있다.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등재했고, 2000년에는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룡사 지구와 함께 경주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되었다. 1998년에 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시작해, 매년 4차례씩 열어 1998·2000·2003·2007년 등이 개최하였다. 다만 유네스코가 1979년 경주를 세계 10대 유적지로 선정했다는 것은, 당시 일부 언론에서 오보를 낸 것이 백과사전에까지 등재되며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진실이 아니다. 2008년에 경주시민축구단이 창단하였고, 같은 해 4월 26일과 5월 3일에 문화방송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 "경주 보물찾기 특집"편이 방영하기도 했다. 2009년에 선덕여왕을 소재로 한 사극 드라마의 신라밀레니엄파크 촬영지로 각광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8일에 천년의 꿈, 경주의 빛 타임캡슐 매설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8년부터 제정해 6월 8일 경주시민의 날이 매년 개최하고 있다. 2010년 5월 15일부터 5월 16일까지 제4차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가 열렸고, 같은 해 7월 31일에 하회마을과 함께 양동마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같은 해 9월에 제30차 유엔식량농업기구 아태지역 총회, 10월에 G20 재무장관 회의를 참석하였다. 2011년 4월에 를 개최하였다. 경주에는 국보 67, 보물 92, 사적 76, 천연기념물 3, 중요민속자료 30 등의 문화재가 있다. 경주에는 도서관 6개 소가 있으며, 공공·읍민 및 대학도서관이 있으며, 다음과 같다. 경주에는 박물관 4개 소가 있으며, 다음과 같다. 사정동에 위치한 서라벌문화회관은 시내에서 유일한 예술 공연을 위한 공연장이다. 그러나 무대 규모나 관람객 수 면에서 규모가 작아 공연 유치 및 관람객 수에 한계가 있어 경주시는 현재 경주문화예술회관을 새로 건립하고 있는 중이다.서라벌문화회관 근처에는 경주평생학습문화센터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여성들을 위한 강연회나 교육을 실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보문관광단지 내에 대구가톨릭대학교 기존의 어학원과 연계한 경주영어마을이 조성되었다. 경주에는 전통적으로 불교와 유교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다. 불교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심으로 교세가 강하며 개신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주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소속되어 있다. 경주에는 천주교 성동성당이 있다. 신문사는 지역 신문인 황오동에 위치한 경주신문과 동천동에 위치한 서라벌신문이 주간지로, 대구·경북 지역인 황성동에 위치한 경북신문이 일간지가 발행한다. 대학 신문인 경주대학보, 동대신문, 서라벌대학보, 위덕대신문 등이 있다. 방송사는 경주, 청도, 영천, 경산 지역인 성건동에 위치한 헬로TV 신라방송이 있다. 2011년 기준으로 경주에서 열리는 축제이다. 생산 취업 인구 중 농업인구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은데, 이를 농업도시로서의 성격과 관광지로서의 지위가 높은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경지 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19%로 적으나 도시 근교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하여 있다. 특히 촉성 재배(참외·토마토)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서울을 비롯하여 주요 도시에 많은 양을 공급한다. 관광 도시이기 때문에 관광 수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형산강이 합류하는 경주 분지에 자리잡은 경상북도 남부 지역의 문화재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공업보다는 농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은 도시이다. 경지 면적 25,763.1㏊ 중에서 논 17,659㏊, 밭 8,104㏊로서 논이 훨씬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채소·사과·감·소·닭 등이다. 갈탄의 매장이 있고 고령토·불석·규조토를 비롯 납석 광선도 생산한다. 이 지방 특산물인 법주는 외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제면·유기:특산물, 공업에 있어서도 가내 수공업으로 유기·창호지·무명·베죽·제품 등과 수산 가공업으로 한천·통조림 등이 있다. 용강공단에는 약 67개 공장이 입주해 있다. 월성군(현:경주시)에서 생산되는 창호지는 경주지로 알려져 있다. 황남빵·교동법주-감포-멸치젓·감포미역·안강찰토마토·산내더덕·감포전복·신라토기·모조금관·기마인물토기·은잔·두산명주·서라벌향수·넥타이 등이 유명하다. 경주의 경제구조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서비스 분야이며,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은 경주공설시장(중앙시장) 과 성동시장 등이 시내 한복판에 있다. 그 외의 건천, 감포, 안강, 불국사 등지에도 시장이 존재한다. 2001년 11월에 경주에서 최초로 대형 할인마트인 홈플러스가 문을 열었다. 개점 당시의 홈플러스 경주점이 문화유적지에서 상업시설을 짓는데 따르는 법적 제한이 많고, 상권이 작아 슈퍼스토어형 모델 점포로 지어졌으며 주차장은 지상 1층에 연결되어 있다. 시중은행 가운데 경주에 지점 · 출장소를 둔 은행은 신한은행 (경주·경주법원·동국대 경주캠퍼스)· SC제일은행 · KEB하나은행 · 우리은행 · 국민은행 (경주·서라벌) · 기업은행 · 대구은행 (경주·경주시청·황성·용강)이 있다. 농협은 농협중앙회 경주시지부와 단위농협 9개(경주, 산내, 동경주, 불국사, 신경주, 양남, 외동, 천북, 현곡)가 있다. 수협은 1개 지점(감포), 2개 지소(경주 · 황성)가 있다. 경주시에는 인구에 비하여 많은 병·의원이 밀집해 있으며 종합병원 2개소(경주동산병원, 동국대학교 경주병원)가 있다.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에는 경주향교를 비롯해 서악서원, 옥산서원도 있다. 1907년에 개교한 공립 경주보통학교가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여러 재단법인 수봉교육재단 설립의건 인가의 경주공립고등보통학교 가 세워졌다. 1979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가 경주 역사상 최초의 대학교로 설립되었다. 1981년 1월 설립자인 김일윤이고, 학교법인 원석학원의 설립하여, 같은 해 3월 경주실업전문대학 을 개교했다. 2000년대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학교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2008년에 금장초등학교와 화랑중학교 등이 세워졌다. 2009년 이후 인구감소로 학생 수가 없어서 강동초등학교 왕신분교장, 전촌초등학교, 오릉초등학교, 왕신분교, 대본초등학교, 화천분교장, 양북초등학교 송전분교장, 의곡초등학교 우라분교장 등이 폐교되었다. 경주 내부의 초등교육인 초등학교는 47개교, 중등교육인 중학교 20개교, 일반계 고등학교 9개교, 전문계 고등학교 11개교가 있다. 대학교와 대학원이 각각 3곳이 있으며 전문대학은 서라벌대학 1곳, 특수학교는 1983년 설립돼 지적장애·지체부자유 학생을 전담하고 있는 경희학교가 있다. 유치원은 총 64곳이 있다. 2007년을 기준으로 경주시는 공공체육시설로 2개의 종합경기장, 2개의 실내체육관, 2개의 테니스장, 1곳의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에워싸인 황성동 황성공원은 1,022,350m의 면적 내에 각종 공공체육시설을 구비한다. 과거 이곳은 신라시대 때 풍수사상에 따라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인 독산에서 유래하며, 화랑들의 훈련장이자 각종 놀이가 행해진 여가 활동장이었다. 왕들의 사냥터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제26대 진평왕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황성공원은 1975년 도시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종합경기장인 경주시민운동장과 7개의 축구장으로 구성된 축구공원과 1개의 풋살구장, 1개의 실내체육관, 전통스포츠를 위한 국궁장인 호림정과 1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씨름장 등이 각각 있다. 게이트볼장과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연습장을 갖추고 있으며, 산책로를 따라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돌 수 있다. 경주시민운동장은 1982년에 개장하였으며, 약 2만명의 관객을 수용한다. 이곳은 대한민국 아마추어 축구 리그 중 최상위 수준의 K3리그에 속해있는 경주시민축구단의 홈구장이다. 경주시민축구단은 2008년 3월 7일 창단되어 2008년 K3리그에 참가하였다. 이 곳에서 2005년 5월 7일부터 이틀간 ‘제4회 여성부장관기 전국여성 축구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한편 경주시민운동장에서 매년 동아경주마라톤대회가 매년 10월 중순 일요일에 열린다. 화랑대기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는 매년 8월 초중순에 열린다. 코오롱 구간 마라톤 대회는 매년 3월 말에 열린다. 경주시는 대한민국에 4개의 여자 필드 하키 실업팀 중 하나인 경주시청 하키 팀의 연고지로, 안강운동장 하키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경주시청 여자하키팀은 1984년에 창설되었으며, 경주시의 체육청소년과가 관할한다. 하키팀의 창단 이후 약 10년 성적부진으로 인해 해체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점차 성적이 개진되어 2000년도에는 종별선수권 대회와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02년 8월을 기준으로 그해 1번과 우승과 3번의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 2008년 8월 제51회 전국종별하키선수권대회서 우승을 거두으며, 그해 3월 2008년 전국춘계남여하키대회와 6월 협회장기 전국하키대회에서 각각 3위 등을 차지하였다.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이 경주역에서 만난다. 한편 한국고속철도 신경주역은 2010년 11월 1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노선은 직통 노선이지만 이 가운데 수도권 방면 노선은 일부 포항이나 대구, 부산을 경유하기도 한다. 시내·좌석버스는 85개의 노선, 169대를 운행하고 있다. 그 외에 울산시내버스가 외동읍 모화리까지, 포항시내버스가 감포읍, 안강읍, 강동면까지, 영천시내버스가 서면 아화리까지 운행한다. 경주시에는 공항이 입지하고 있지 않으며, 인근의 포항공항, 울산공항을 통해 김포나 제주와 연결된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행 항공편을 이용하려면 대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을 이용해야 하고 장거리 국제선을 이용하려면 인천국제공항으로 가야 한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김해국제공항으로가는 리무진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울산행 시외버스(불국사·입실 경유)가 울산공항을 경유한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1일 4회 운행한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경운기 전용 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경주시의 자매결연, 우호교류 도시는 다음과 같다. 상주시 상주시(尙州市)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서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구미시·의성군, 서쪽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괴산군, 남쪽으로 김천시, 북쪽으로 문경시·예천군과 접한다. 조선 초기에는 경상감영의 소재지로서 경상도의 수부역할을 하였으며, 경주시와 함께 경상도의 어원이 된 유서 깊은 도시이다. 농특산물은 곶감,명주, 쌀이고, 자전거의 도시로 유명하다. 시청은 남성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읍 17면 6동이다. 경상북도의 서부, 소백산맥의 산록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부산지와 서부산지가 남북으로 뻗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남천과 북천이 이루는 넓은 들판에 위치하였다. 동부에는 갑장산, 서부에는 천봉산이 있다. 시내는 주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의 지질로 되어 있다. 북부에는 속리산(俗離山:1,057m)과 남쪽에는 백화산(白華山:933m) 등 1,000m 내외의 고준한 산이 솟아 있으나 일반적으로 동남부는 저평하여 경지가 넓고, 특히 동쪽을 흐르는 낙동강 유역은 넓고 비옥한 지대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1,254.78km이고, 인구는 101,208명(2017.7)이다. 상주시는 경상북도 서북부 내륙지방에 위치한 관계로 대륙성 기후에 접근하고 있으며, 삼한 사온이 뚜렷하다. 연 평균 기온은 12~13℃정도로 최한월 1월과 최난월 8월의 평균기온이 -3℃ , 26℃내외로 서북부 산간지대로 갈수록 겨울철 기온이 낮아진다. 연간 강우량은 1,050mm내외로 낙동강 유역 대부분의 내륙지방이 1,000mm 정도에 비하여 다소 높은 편이다. 1998년도에는 1,873mm를 기록하여 극심한 기상재해를 입었다. 천기일수 현황을 살펴보면 최근 10년간 맑은 날이 연 평균 156일에 달하고 있으며 넓은 평야와 적정한 강우량, 여름철 높은 기온, 많은 일조량등 농작물 재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상주시의 행정 구역은 1읍, 17면,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1,254.78km이다. 인구는 2017년 12월 기준 47,048 세대, 100,947명이다. 상주 곶감은 삼백의 고장 상주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특산물로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이상을 차지하는 상주시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그 외에도 상주의 일품쌀, 삼백쌀과 더불어 인공수정 및 등록 한우와 같이 보증된 순 한우에서 태어난 송아지만을 엄선하여 키운 상주 한우와 당도가 높은 상주 사과 그리고 일교차가 커서 당도가 높고 특유의 향이 진한 상주 포도도 과즙이 많으며 육질이 연하고 당도가 높아 주요 수출품인 상주 배, 오이, 복숭아도 이 고장의 특산물이다. 그리고 상주의 삼백이란 쌀, 곶감과 명주를 총칭하는 말이다. 상주시는 대한민국의 중소규모 도시 중 프로축구 구단이 연고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국군체육부대 소속이다 상주 베리 축제 - 상주는 베리류 주산지로 오디∙복분자∙블루베리를 직접 맛볼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서 베리류 수확체험, 깜짝경매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역대시장 보기 김기범은 중간에 직무정지 기록으로 제외됩니다. - 1999. 7. 16 - 축제 및 체육대회 상호방문 - 2005. 1. 31 - 연꽃쌀 등 농산물 판매 - 2006. 12.15 - 의료봉사 및 농특산물 직거래 - 2007. 11. 6 - 농특산품 판매 및 체험활동 - 2008. 5. 7 - 농특산품 판매 및 체험활동 - 2008. 11. 27 - 농특산품 판매 및 체험활동 - 2009. 4. 20 - 도·농간 친선활동 - 2009. 10. 26 - 친선교류활동 및 농특산품 판매 - 2011. 11. 22 - 농특산품 판매 및 체험활동 - 2012. 6. 26 - 경제, 문화분야 등 상호교류 - 2014. 11. 12 - 농특산품 판매 및 체험활동 - 2015. 6. 24 - 마을단위 문화교류사업 추진 - 2015. 11. 27 - 농특산품 판매 및 체험활동 나주시 나주시(羅州市, )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영산강이 흐르며, 나주평야가 펼쳐진다.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빛가람동(구 금천면, 산포면) 일대에 한국전력공사, 한국농어촌공사,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이 이전되었다. 무안광주고속도로가 지난다. 시청 소재지는 송월동이고, 행정구역은 1읍 12면 7동이다. 북동쪽으로 광주광역시, 북서쪽에 함평군, 남서쪽에 무안군, 남쪽에 영암군, 동쪽에는 화순군과 인접해 있다. 전라남도의 중서부 나주평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질은 전역이 화강암 지대이다. 영산강이 나주시의 중앙을 관통하고, 서쪽은 구 나주읍, 동쪽은 구 영산포읍이다. 시의 북서쪽에 금성산(452m)이 있고, 주변에는 영산강의 범람원이 넓어서 홍수 피해가 많았다. 화순군 여첩산에서 발원한 신탄천은 시의 동부를 흐르다가 구 나주읍에서 영산강에 합류하는데 도중에 남부 산지로부터 발원하여 북류하는 여러 계류(溪流)를 합한다. 이 강들은 관개에 크게 이용된다. 나주시의 행정 구역은 1읍 12면 7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주시의 면적은 608.42km이며, 인구는 2018년 12월을 기준으로 57,274세대 113,839명이다, 이 중 전체 인구의 27%정도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빛가람동에 살고있다. 넓고 비옥한 평야와 온화한 기후 등 좋은 영농조건으로 해서 농업생산이 많으며, 이른바 삼백지방(三白地方)이라 하여, 예로부터 쌀·누에고치·면화의 산지로 유명했다. 총가구의 약 56%가 농가로서, 쌀·보리·고구마 외에 채소류·과일류의 원예농업이 활발하고, 그 밖에 인초(고사리)·양송이 등의 산출이 많다. 영산강 범람원은 과수원으로 이용되어 배를 비롯한 복숭아·포도·사과·감 등의 과일 생산이 대단히 많다. 특히 나주는 일찍부터 품질이 우수한 나주배의 산지로 유명하여, 연 생산량 7,995t을 올림으로써 전국 제1의 배 산지가 되었다. 또 왕곡면·산포면·남평면에서는 시설원예 농업에 의한 오이·고추·무·배추 등의 산출이 많고, 그 밖에 마늘·양파·생강 등도 많이 난다. 한편, 금천면에는 약 3만 마리의 오리를 사육하는 오리사육장이 있고 한우·젖소·돼지 등을 사육한다. 시의 대표적인 근대적 공장은 1962년 준공된 호남비료 나주공장이다. 호남 곡창지대의 비료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영산강의 공업용수, 화순탄광의 무연탄 및 호남선의 수송력 등 유리한 입지조건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는데, 당초에는 충주비료공장과 더불어 한국의 2대 비료공장의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생산시설이 구식이어서, 공업용수의 과다 사용과 생산단가의 상대적 고가 등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었고, 아울러 국내 비료생산의 증대에 눌리게 됨으로써, 1981년에 조업을 중단하고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개편되었다. 광산물로는 공산면의 덕음광산에서 연간 금과 은의 생산이 있고, 산포면과 봉황면에서 고령토가 산출된다. 금천면에 과실 통조림공장이 있고, 그 밖에 명주·죽세공품·목공예품(소반) 등을 제조하는 전통적인 가내수공업이 영위되고 있다. 나주배·도자기·모필 등이 유명하다. 그외에도 장어, 홍어 등이 유명하다. 민선 1기 (1995.7 ~ 1998.6) 나인수 민선 2기 (1998.7 ~ 2002.6) 김대동 민선 3,4기 (2002.7 ~ 2010.6) 신정훈 민선 5기 (2010.7 ~ 2014.6) 임성훈 민선 6,7기 (2014.7 ~ 현직) 강인규 호남선 나주역을 비롯하여 도로 교통의 발달로 영산포의 항구 기능은 잃었으나, 광주·목포 간의 고속화 국도, 무안광주고속도로(나주IC, 문평IC)를 비롯한 간선 도로에 의해 광주·목포·영암 등지로 연결되는 육로의 요지를 이루고, 따라서 전라남도 지방 서부 평야 지대의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구나주읍을 대표하는 석조물로서 북문외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원래 금성산 기슭의 심향사에 있었는데, 그 위치가 북문 밖이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으며, 보물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나주읍의 북동쪽 노변에 세워진 나주동문외석당간은 당간 전체가 잘 보존되어 귀중한 유물이 되고 있다. 팔각의 화강석재 5장을 연결시켜 세운 간주 위에 옥간석과 보주가 얹혀 있으며, 높이는 11m이다. 구나주의 지형이 배의 모양이기 때문에 그 안정을 빌기 위해서 돛대 형태를 본떠서 세웠다는 풍수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영산포는 과거 영산강의 가항종점으로 조기·멸치·소금·젓갈류 등 해산물과 제주말 및 일대의 농산물 집산지를 이루어, 상업도시로 크게 번영하였던 곳이다. 그 밖에 문화재로는 나주의 금성관과 김천일 정렬사지, 미천사원 등이 있다.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는 고고자료를 보존하고 전시하며 호남지역 발굴매장 문화재에 대한 수장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충주시 충주시(忠州市)는 대한민국 충청북도 북부에 있는 시이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있으며, 남한강 유역에 침식분지가 발달되어 하안단구 지형을 이룬다. 동쪽으로 충청북도 제천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남쪽으로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시 및 경기도 여주시와 접한다. 중앙탑면에는 삼국 시대 유물인 충주 고구려비가 있다. 시청 소재지는 금릉동이고, 행정구역은 1읍 12면 12동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의 행정 구역 개편의 역사는 충주시의 행정 구역#역사를 참조) 충주시는 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 제천시, 서쪽으로 음성군, 남쪽으로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시, 경기도 여주시와 경계를 이룬다. 도로는 문경시를 제외한 이들 모두와 개설되어있으나 문경시와는 하늘재 산책로로 이어지며 자동차로는 괴산군 연풍면을 경유해야 한다. 동남쪽으로 소백산맥의 여맥인 계명산, 남산, 대림산, 월악산과 서쪽으로 둘러싸인 산간분지로 형성되고 남한강과 달천 및 요도천이 충주시를 관통하여 예로부터 수운이 편리하고 수자원이 풍부한 내륙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위도상으로 볼 때 대개 북위 37도 16분 ~ 36도 18분을 차지한 중위도 지역으로 온대 계절풍 지대를 형성하여 사계의 구별이 뚜렷하며 한서의 차가 심한 기후로 계절에 대한 감각과 한대, 열대 등 이질적인 풍토에도 순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충주시의 행정 구역은 1읍 12면 12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주시의 면적은 983.7 km²이다. 인구는 2016년 5월 31일을 기준으로 88,043세대, 212,193명이다.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충주시, 제천시, 음성군을 충주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충주호는 1985년에 지어진 충주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면적 67.5 km, 평균수심 97.5 m이며 길이 464 m, 저수량은 27억 5000톤이다. 수안보온천(水安堡溫泉)은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있는 대한민국의 천연 온천수이다. 이 수안보온천은 조선왕조실록 등 자료에도 나오며, 다른 온천이 개발되기 전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였다. 충주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10조8852억원으로 충청북도 지역내 총샌산의 10.6%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4092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5조2670억원으로 48.3%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5조2089억원으로 47.8%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건설업(11.1%), 공공행정(7.1%)과 교육서비스업(4.3%)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충주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73,218만 명으로 충청북도 총중사자 수의 11.8%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 은 567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16,048명으로 21.9%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 56,603명으로 77.3%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충청북도 전체의 비중(28.9%)보다 낮고 3차 산업은 충청북도 전체 비중(70.8%) 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문화서비스업(8.6%), 도소매업(14.0%)과 숙박 및 음식업(12.4%), 교육서비스업(10.2%)이 큰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청주시 청주시(淸州市)는 대한민국 충청북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자 충청북도청 소재지이다. 남쪽으로 대전광역시, 서쪽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서북쪽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북쪽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북동쪽으로 증평군, 동쪽으로 괴산군, 남동쪽으로 보은군과 접한다. 청주는 삼한시대때 마한의 땅이었다. 백제 시대에 이르러 상당현(낭비성 또는 낭자곡)이라 칭해졌다. 군사적 요충지여서 한반도 남부를 통합한 신라는 5소경 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시켜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청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0년)때다. 고려 우왕 3년(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간행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청주는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됐다. 하지만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발전의 전기를 맞게 돼 1908년에는 관찰사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청주군과 문의군이 청주군으로 통합되었고, 1920년 충북선 개통은 지역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1946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에 의해 청주읍이 청주부로 승격되면서 청주군에서 분리되었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청주시로 승격됐다. 그 후 행정동 분동, 청원군 편입 등을 거쳐 1989년 7월 2개의 출장소(동부·서부)가 설치됐고, 1995년 1월엔 출장소가 구(동부→상당, 서부→흥덕)로 승격돼 구 청주시를 이루고, 2012년 6월 주민 투표를 통해 청주시·청원군 통합이 확정되어 2014년 7월 1일 3읍 10면 30동을 관할하는 도농복합시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시청 소재지는 상당구 북문로3가이고, 4개의 일반구가 설치되어 있다. 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무심천과 직지대로의 흥덕대교를 十자 경계로 동남부는 상당구, 동북부는 청원구, 서남부는 서원구, 서북부는 흥덕구이다. 통합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청원군 예산이 줄고 청주시 빚만 떠안는다거나, 세금이 대폭 오른다거나, 혐오시설이 집중적으로 들어온다거나, 대표적인 농업 브랜드 청원생명이 사라진다거나, 농촌지역 교육 혜택이 줄어든다거나 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던 청원군이 반대하여 통합이 1994년부터 세 차례나 무산됐지만, 지자체는 주민 참여와 6·2 지방선거 과정의 공약을 토대로 양쪽 시·군민협의회가 시장·군수, 도지사와 논의를 거쳐 만든 ‘청원·청주 상생발전방안’을 통해 통합을 추진했다.2012년 6월 청원군 주민을 대상으로 발의된 주민투표에서 전체 유권자의 36.75%가 투표에 참여하였고, 투표자의 79%가 시·군 통합에 찬성하여 자치단체 통합이 확정되었다. 충청북도 청주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라, 2014년 7월 1일 청원군이 폐지되고 청주통합시가 출범하였다. 통합과 함께 기존의 상당구, 흥덕구에 청원구, 서원구가 추가 설치되어, 4개의 일반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통합 직후인 2015년 시의 CI를 교체하는 내용을 담은 '청주시 상징물 등 관리 조례 일부 개정안'을 놓고 시의회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거나, 청주·청원 간의 인사나 민간단체 사이에 통합 갈등이 벌어진 사례가 있고, 이후에도 2매립장 조성사업 관련 사례 등의 갈등도 존재했다. 도시 중심부를 금강의 지류인 무심천이 남에서 북으로, 미호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이들은 흥덕구 문암동, 청원구 정하동과 오창읍을 두고 'T'자 형태로 합류한다. 또한 이들 하천의 여러 지류가 도시 곳곳을 흐른다. 동남부에는 구녀산, 양성산 등 높은 산들이 위치해있고 서쪽은 대체로 낮은 구릉이나 평지를 이루고 있다. 1946년 6월 1일 청주군 청주읍이 청주부로 승격하였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청주부가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도농 통합 이전, 도시 지역에 해당하는 청주시 면적은 2012년 기준 153.45km으로, 그 중 상당구가 69.03 km², 흥덕구는 84.42 km²였다. 행정구역은 2구 30동(82개 법정동)였다. 통합 이전의 청주시 인구는 2014년 4월말을 기준으로 67만4341 명, 26만1198 세대이며, 그 중 상당구는 24만8321 명(전체인구의 37%), 흥덕구는 42만6020명(전체인구의 63%)이다. 1963년과 1983년 청원군 일부가 청주시로 편입되어 전체면적이 8.4배 증가하였다. 2003년에는 대통대반제 시행으로 통반이 현저히 감소하였고, 2012년 말 기준 통반은 1,004개통에 4,982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4년 7월 1일 청원군과 통합하여 도농복합시가 출범하였으며, 청원구, 서원구가 새로 설치되어 4개의 일반구를 두고 있다. 행정구역은 3읍, 10면, 30행정동이다. 2017년 11월말 주민등록 인구는 345,527세대, 835,669명이다. 기존의 상당구청이 폐지된 청원군의 군청 건물로, 기존의 흥덕구청이 대농지구 신축 건물로 각각 이전해 임시 청사로 사용한다. 서원구청과 청원구청이 새로 신설되었고, 각각 이전된 흥덕구청과 상당구청의 건물을 사용한다. 상당구청은 상당구 남일면 효촌리에 신설하였고 흥덕구청은 흥덕구 강내면 사인리에 신설할 예정이다. 제20대 국회의원 1980년대 이후로 2차 산업과 3차 산업이 증가하면서, 농업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다. 경지면적의 대부분이 논이며, 벼농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흥덕구 송정동에 위치한 청주산업단지가 1969년 착공된 이래 5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발되었다. 오창읍에는 오창과학산업단지, 오송읍에는 오송생명과학단지가 조성되었다. 특정 업종에 특화되지 않아 여러 종류의 경공업 업종이 혼재되어 약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업체들이 입주해 있다. 주로 섬유·도자기·가전제품 등을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청주에 공장을 두고 있는 주요 기업으로는 SK하이닉스, 매그나칩반도체, LG전자, LG화학, LG생활건강, LS산전, 셀트리온, 한국도자기, 롯데햄·롯데우유, 정식품, 한국네슬레, 국보제약, 맥슨텔레콤, 삼화전기, 심텍, 조광피혁, 지트론, 한국야금, 해태제과, 동아오츠카 대원건설, 깨끗한나라 등이 있다. 성안길은 지하상가에서 육거리시장으로 이어지는 청주시의 대표적인 번화가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상당구 북문로1가 사직대로에서 석교동 청남로 사이에 걸쳐 있다. 사직대로와 교차하는 대현프리몰 입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서문로, 율곡로, 서문1로, 남사로, 남문길, 가구점길, 망선로, 은행나무길, 석교로, 석교2로, 새벽시장길과 교차하며 내려오다 청남교 사거리에서 멈춘다. 명칭은 청주읍성(淸州邑城)의 안에 있는 큰 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과거에는 청주읍성 안의 남문과 북문을 가로지르는 중심축이었으며 개화기 이후 이 길을 따라 주요 관청과 은행, 상점들이 밀집하여 충북 광역행정과 금융의 중핵기능과 함께 도심 상업지구로 발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본정통(本町通)이라는 명칭이 일본식 지명이라는 자각과 함께 1990년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바른지명찾기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본정통을 대신하여 성안길로 부르게 되었다. 성안길은 이 길의 중간쯤이자 청주읍성의 남문이 있던 국민은행 남문지점을 기점으로 북쪽구역과 남쪽구역이 서로 다른 특징을 이룬다. 북쪽구역은 상당구청, 청주우체국, KT청주지사 등 행정기관과 각종 시중은행의 청주지점 등 금융점포가 산재하여 있으며 롯데 영플라자, 롯데 시네마, CGV 청주, 주요 의류 브랜드들의 매장, 패스트푸드점, 커피숍 등이 밀집하여 도심 상업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과거 읍성의 남문 밖에 해당하는 남쪽구역은 일찍이 5일장이 발달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거래가 활발했던 지역으로, 석교동시장을 필두로 육거리시장이 자리한 청주의 전통 상권이자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청남대는 1983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건립하여 2003년에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일반에 반환할 때까지 20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문의면 신대리에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 시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정이라 불리며 철도가 지나다니는 곳이었지만 현재는 청주읍성 내부의 길이라 해서 성안길 이라고 불린다. CGV와 롯데시네마 등 영화관이 있으며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가 있다. 상당구 수동에 위치해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집을 짓고 위치한 산동네로 뒤에는 우암산이 있는데 그 곳에는 수암골 전망대가 있어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전망대를 타고 내려가면 청주대 학생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만든 벽화거리가 있는데 굉장히 친근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한다. 문의면 문산리에 있다.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을 기리기 위해 청주시 내 각종 문화재들을 수집 전시하였으며, 옛 전통 마을의 모습을 복원하여 역사 학습, 전통 문화 학습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다.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근처에 초정약수 스파텔이 있다. 내수읍 초정리에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생활했던 전통 가옥을 중심으로 운보 미술관과 야외 수석 공원, 연못, 정자 등이 있다. 운보 김기창의 미술품 관람과 더불어 자연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내수읍 형동리에 있다. 허브(herb)를 주제로 하여 2만여 평의 대지에 허브전시장, 온실정원, 식당 등을 조성하였다. 남이면 부용외천리에 있다. 근로자에게 지급하여야 할 임금 83,258,320원을 체불하여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 임금체불사업주로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청원구 내수읍에 청주국제공항이 있다. 흥덕구 오송읍에 있는 오송역은 경부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가 분기하고, 충북선 철도와 교차하는 청주에서 가장 큰 역이다. 모든 역은 충북선의 역으로, 오송역, 청주역, 오근장역, 청주공항역, 내수역이 있다. 이 중 내수역은 내수읍에 위치해 있으나, 철도 이용 수요가 적어 폐쇄되어 현재는 무정차간이역으로 전락하였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청주공항역까지 연장운행되는게아닌 EMU-250이 운행할예정이다 이 때 북청주역(가칭)이 청주역과 오근장역 사이에 위치한 흥덕구 문암동 일대에 신설될 계획이다. 중부고속도로 서청주 나들목과 오창 나들목, 증평 나들목이 청주시에 위치해 있고, 경부고속도로 옥산 나들목과 청주 나들목, 그리고 남청주 나들목이 지나며, 당진영덕고속도로 문의 나들목이 있다. 국도 제17호선, 국도 제25호선, 국도 제36호선이 연결되어 있다. 도시 내부에는 제2순환로를 비롯한 주요 도로들이 있다. 청주에는 2013년 기준 약 780개의 의료기관이 있다. 청주시에 위치한 상급종합병원, 종합병원, 대학부속병원 등에 해당하는 주요 의료기관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경상도(慶尙道)는 경상남도, 경상북도와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일대를 관할했던 행정 구역으로 영남 지방(嶺南地方)에 해당한다.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앞글자를 따서 경상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상도 감영은 상주에서 1601년 대구로 이전되었다. 1895년(고종 32년)에 진주부, 동래부, 대구부, 안동부로 분할되어 폐지되었다. 신라는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경주에 월성을 쌓고 왕궁을 짓고 나라를 통치하는 중심이 되었다. `경상도(慶尙道)`는 고려 충숙왕 원년(1314)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그 이름 첫 자를 따서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하였다. 신라 천년의 수도요, 고려 동경이던 역사 도시인 경주와 교통의 요충지인 상주의 중요성을 감안해 만든 지명이다. 그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 때도 변함없이 그 이름을 유지해왔다. 특히 `조선인재의 절반이 영남에 있다 (朝鮮人才 半在嶺南)` 는 말처럼 영남학파중심의 유명한 정치가, 학자,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돼 조선국 전반을 좌지우지하며, 그 정점(頂點)에서 영향력을 행사해나갔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좌(左), 우(右)도로 나누워지고 고종 32년(1896)에 경상남도와 분할되기까지 경상도는 낙동강과 함께 7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경상도는 고대 진한과 변한의 영역이었다. 낙동강의 동쪽 지역에는 진한의 12개 소국이 존재했고, 낙동강 서쪽에 변한의 12개 소국이 자리하였다. 진한의 소국 가운데 현재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가 성장하면서 점차 진한 소국들을 합병하였으며 4세기 내물마립간 시기에 낙동강 서쪽 및 경상북도 지역을 장악하였다. 변한의 소국들은 점차 통합되어 2~3세기 무렵 가야의 6개 소국 연합체를 구성하였다. 가야 연맹은 5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여 백제, 신라의 침탈을 받았으며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을 시작으로 562년에 모두 신라에 정복되었다. 6세기 진흥왕 때 경상도 대부분을 장악한 신라는 완산주(完山州), 사벌주(沙伐州) 등의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685년 경, 신문왕이 9주를 정비하면서 경상도 지역에는 사벌주(沙伐州), 삽량주(歃良州), 청주(菁州)의 3개 주가 설치되었다. 757년에는 지명을 한식(漢式)으로 고치면서 사벌주를 상주(尙州), 삽량주를 양주(良州),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9세기 이후 신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각지에서 호족 세력이 발호하였는데 경상도 지역에는 상주의 아자개, 김해의 소율희 등의 호족이 강성하였다. 10세기 초에 후삼국시대가 전개되면서 신라는 경주 인근의 일부 지역만 유지하였고 경상도 북부는 후고구려, 서부는 후백제가 각기 경영하였다. 935년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경상도 일대는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태조는 신라를 합병한 뒤(935년)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동남도 도부서사(東南道 都部署使)를 두었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영남도(嶺南道 : 동경유수관 경주), 영동도(嶺東道 : 상주목), 산남도(山南道 : 진주목)를 설치하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졌고, 고려 현종 대에 5도양계가 정비되면서 3도를 합쳐 경상도가 설치되었다. 고려 예종 원년(1106년)에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가 되었다가 명종 원년(1171년)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晋陜州道)로 분리, 명종 16년(1186년) 경상주도로 합쳤다. 이후 1204년(고려 신종 7년))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고 고쳤고, 그 뒤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의 명칭을 거쳐 충숙왕 원년(1314년)에 다시 경상도가 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 상주목 산하의 보은, 옥천, 청산, 영동, 황간 등이 충청도에, 무풍이 전라도에 편입되어 영역이 축소 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으로 순흥도호부가 폐지되고 그 영역이 인군 군현으로 분할될때 일부가 충청도 단양, 영춘, 강원도 영월에 편입되면서 경상도의 영역이 조금 더 축소되었다(순흥이 복설되면서 대부분 다시 편입되었다).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감영은 조선 초기 경주에 두었다가 1408년 상주로 이전하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분리했을때 좌도 감영을 경주에, 우도 감영을 상주에 각각 두었다가 다시 합치면서 감영을 상주에 두었다. 임진왜란으로 상주가 함락된 후 성주, 칠곡, 안동등을 떠돌다가 1601년 최종적으로 대구에 정착하면서 대구는 경상도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23부제가 도입되면서 기존 경상도 지역에 진주부, 동래부, 대구부, 안동부로 분리되었다가,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어 부가 폐지되고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설치되었다. 고려사 지리지를 기준으로 경상도는 1경, 2목, 2부, 30군, 92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경상도의 행정 구역은 《경국대전》에 따른 행정 구역에 따른다. 전라도 전라도(全羅道)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 일대를 관할했던 행정구역으로 호남 지방(湖南地方)에 해당한다.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글자를 따서 전라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감영 소재지는 전주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로 분할되어 폐지되었다. 북쪽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청도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와 접한다. 전라도는 고대 마한(馬韓)의 영역이었다. 마한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目支)[1]·백제(伯濟)[2] 등 54개국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百濟)국이 마한세력을 통일했다. 신라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천관우의 위치 비정에 따르면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19개 국이 전라도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노령산맥 이북의 마한 소국들은 1세기 무렵에 백제 온조왕과 다루왕에게 통합되고, 노령산맥 이남에 잔존한 마한세력은 백제의 영향 아래 침미다례라는 연맹을 형성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가야가 순천, 여수 등지를 침략하고, 남원 일대에 기문 지방이 형성되었다. 후에 국력을 회복한 백제가 침미다례를 탈환하고 가야세력을 축출하여 전라도 지역은 완전히 백제에 통합 되었다. 백제는 지방행정단위인 5방(方)중에 현재의 전라북도 지역에 고부군을 치소로 중방(中方), 전라남도 지역에 장성을 중심으로 남방(南方)을 설치하였다. 백제 말기에는 무왕이 고향인 전북 익산을 천도지로 선정하고 미륵사를 창건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영토에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되고, 전라도 지역에 6개 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으로 인해 웅진도독부의 행정 구역은 제구실을 못했으며,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무시하고 지금의 나주를 치소로 발라주(發羅州)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신라는 685년 경에 전국을 9주로 정비하면서 발라주의 치소를 지금의 광주로 이전하면서 무진주로 개칭하고, 전북지역에는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완산주에는 10개의 군, 31개의 현, 그리고 남원경이 설치되었며, 무진주에는 14개의 군, 44개의 현이 있었다. 757년에는 완산주를 전주(全州),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고쳤다.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신라가 내분 등으로 혼란에 빠지자 각지에서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는데 892년에 견훤이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성장하여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석권,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3년에는 나주를 중심으로 서남부 해안 지방을 왕건이 손에 넣어 후고구려의 영토로 삼기도 했다. 936년에 고려에 의해 후백제가 멸망하고 전라도 지역은 고려에 통합됐다. 고려 초기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전라도 지역에는 전주목(全州牧), 나주목(羅州牧), 승주목(昇州牧 : 순천)이 설치되었다. 태조 왕건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 혜종에게 제 2대 왕위를 물려줬으며 995년에 성종은 전라북도 일대를 강남도(江南道), 전라남도 일대를 해양도(海陽道)로 정하였으며 1018년에는 현종이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전주와 나주의 첫글자를 딴 전라주도(全羅州道)를 설치하여 전라도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였다. 전라도는 2목(牧), 2부(府), 18군(郡), 82현(縣)을 관할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전라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전주에 경기전을 지어 선조들을 모셨다. 또한 태종 9년인 1409년에 전라도 관찰사 윤향(尹向)의 건의로 속현과 향·소·부곡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폐지되었다. 1645년(인조 23년)에 나주에서 향리가 목사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나주목을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하고 나주대신 남원을 따서 전남도(全南道)라 하였다. 1654년(효종 5년)에 금성현은 나주목으로, 전남도는 전라도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1년 후 1655년 나주에서 전패(殿牌)가 파손되는 사건이 일어나 다시 금성현으로 강등되고 전남도가 되었다. 광남도(光南道) 등으로 개칭했다가 되돌렸다. 1728년(영조 4년)에는 이인좌의 난(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전주 이씨 임영대군 후손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자 나주목이 또다시 현으로 강등되고 광주를 따서 전광도(全光道)로 변경되기도 했으나 1737년에 곧 다시 전라도로 돌아왔다. 1895년에 23부제로 행정구역 제도가 바뀜에 따라 전주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로 분리(금산군은 공주부에 편입되었다)되어 전라도는 폐지되었다. 1년 후인 1896년, 13도제로 다시 바뀌면서 전라북도(금산군이 다시 편입되었다)와 전라남도로 나뉘었다. 고려사 지리지를 기준으로 전라도는 2목, 2부, 18군, 82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전라도의 행정 구역은 《경국대전》에 따른 행정 구역에 따른다. 최희섭 최희섭(崔希涉, 1979년 3월 16일 ~ )은 KBO 리그 전 KIA 타이거즈의 내야수이자, 현 KIA 타이거즈 3군 코치 겸 MBC 스포츠플러스 메이저 리그 해설 위원이다. 대한민국 선수로서는 최초의 메이저 리그 타자이다. 송정동초, 무등중,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고려대 법학과(1998학번,중퇴)에 입학했다. 1999년에 고려대 법학과(1998학번)를 중퇴하고 미국 메이저 리그 팀 시카고 컵스에 입단하였다. 그로 인해 대한야구협회에서는 협회의 사전 동의 없이 대학 재학 중 계약한 김병현과 최희섭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를 내려 대한민국 무대에서 뛸 수 없게 되었다. 3년 동안 마이너 리그 생활을 거친 뒤, 2002년 9월 3일 시카고 컵스 선수로서 처음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장했다. 그 전에 최경환이 타자로 미국에 처음 진출했지만 메이저 리그에는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인 타자로 메이저 리그 무대에 선 것은 그가 최초였다. 메이저 리그에 승격하기 전, 25홈런 이상을 때려줄 것이라는 기대 받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2003년 6월 내야플라이를 잡으려다가 캐리 우드와 부딪혀, 뇌진탕을 겪었고 이후부터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결국 2003년 시즌 후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었다가 시즌 중인 2004년 7월 30일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주전 자리를 확보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한 채 2006년 스프링캠프 도중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고, 25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시즌 개막을 맞았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하여 병역을 해결하였지만, 2006년 시즌 도중 메이저 리그의 40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007년 웨이버 공시로 풀린 후 그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스플릿 계약을 맺었으나, 결국 메이저 리그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2007년 5월, 해외진출선수 특별지명회의에서 자신을 지명한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기 위해 그는 탬파베이 레이스 구단 측에 방출을 요구하였고 탬파베이 측에서 승인했다. 그를 다시 지명한 연고 팀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대한민국에서 프로 생활을 재개하였다. 2007년 4월 2일 해외진출선수 특별지명회의를 통하여 다시 고향 팀에 지명되어 대한민국 활동의 봉인이 완전히 해제되었다. 2007년 5월 10일 계약금 8억, 연봉 3억 5000만, 옵션 4억 총 15억 5000만원에 고향 팀 KIA 타이거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5월 19일 잠실 두산 전에서 첫 경기를 치르며 KBO 리그에 데뷔했다. 그러나 2군 강등 직전에 치른 4경기 동안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2008년 시즌 동안 188타수 43안타로 0.229의 시즌 타율을 보이는 등의 극심한 부진으로 2008년 9월 10일 2군으로 강등당했다. 대한민국 무대 복귀 후 리그에 적응하지 못해 메이저 리그 시절만큼 보여 주지 못하자 2009년 시즌 전 체중 감량 등 하드 트레이닝으로 재기를 다짐하였고, 때마침 2009년에 친정 팀으로 돌아온 김상현과의 콤비를 이루어 해태 타이거즈 전설의 "KKK포"(김성한, 김봉연, 김준환)를 본뜬 "CK포"로 막강 화력을 자랑하며 고향 팀을 12년 만에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김상현에 이어 3할 30홈런 100타점을 이루었으며 정근우와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고 한국시리즈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부상으로 고전하던 최희섭은 2014년 시즌 종료 후 은퇴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으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어 2015년에도 뛰었다. 하지만 그동안 좋지 않았던 허리 부상이 재발하게 되면서 다시 부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그러던 2015년 10월 20일 고향 팀 KIA 타이거즈에서 은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2007년 12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결혼할 예정이었던 일본인 약혼녀 야스다 아야와 결혼을 앞두고 11월 26일에 파혼하였다. 파혼의 이유는 성격 차이와 결혼 이후 사회 활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알려졌다. 특히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팀으로 오게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 복귀 첫 해에 부진하였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최희섭은 이후 2010년 12월 6일에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유미와 결혼하였다. 형저메 사건은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잡지 스포츠 2.0을 통해 게재되면서 발생된 사건이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최희섭을 직접 본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는 '기대보다는 별로'라는 반응을 보였고 이는 최희섭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즈음 이승엽이 최희섭에게 타격과 관련한 조언을 했다. 그러나 이승엽의 조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담히 듣고 있던 최희섭이 "형 저 메이저 리거예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사가 실린 후 한동안 최희섭은 '형저메'라 불렸다. 이후 그가 사건과 관련해 입장을 표명했고, 이와 같은 내용이 불거지면서 직접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작성한 게시물에서 저러한 일이 없었다면 내 기자 생명을 걸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러나 실상 박동희 기자는 현장에 없었다. 2009년 최희섭은 당시 "형저메" 발언은 김태균을 격려하기 위한 농담이었는데 심각한 말로 전해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별명은 이후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바깥쪽 최희섭 포스터에다가 '형 저 매일 홈런쳐요'라는 문구로 패러디되어 붙여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타격이 살아나고 출루율도 좋아지자 또 다르게는“형, 저 매일 걸어나가요”라는 의미로도 패러디되었다. 이승엽과는 나가사키에서 열린 2009년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서 다시 만나 산행 훈련을 같이 하자고 할 정도로 관계가 돈독해졌다. 2009년 6월 8일자 고려대학교 스포츠 매거진 SPORTS KU와의 인터뷰에서 최희섭 스스로 "형저메" 발언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한 바가 있다.그러나 2016년 1월 17일 KBS1 스포츠 2.0 운동화에 출연 자신은 결코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며 또다시 야구팬들을 우롱하였다. 최희섭은 KIA타이거즈 구단과 연봉 협상 과정에서 마찰을 겪은바가 있었다. 최희섭이 2009년 이후로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또 한시즌 경기를 거의 통채로 못뛸 정도로 부상에 시달리자 기아구단은 최희섭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연봉삭감을 통보했다. 그에 맞서는 최희섭은 메이저리거의 마지막 자존심에 2억이상을 요구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아측에서 그것에 응하지 않자 최희섭은 팀을 이탈 하였고 종적을 감추었다. 네티즌은 최희섭이 등산을 하고 있다며 야구선수인지 등산가인지 모르겠다고 비꼬았고 '형저메'를 패러디하여 '형저뫼'라는 말을 만들어내였다. 연봉 협상 뿐만 아니라 그의 각종 행사 불참과 선감독의 최희섭 전력구상 제외 소식도 최희섭과 구단의 갈등의 원인이 된것으로 보인다.그가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얼마뒤 그가 넥센으로 트레이드 될것이라는 루머도 퍼지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해에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백의종군하여 연봉 1억 5000만원에 다시 재계약하여 복귀하였다. 최희섭은 2012년, 신년의 시작과 함께 KIA 타이거즈 구단의 지정 병원에 감기를 이유로 입원한 뒤부터 모든 신년 일정에 불참하여 팬들의 비난을 샀다. 또한 KIA 타이거즈 선동열 감독까지 인터뷰 등의 자리에서 2012년의 팀 전력 구상에서 최희섭을 제외할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되는 구단과의 심각한 마찰을 빚었으며, 최희섭은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으나 KIA 측에서는 최희섭의 잔류로 포커스를 맞췄다. 앤서니 기든스 앤서니 기든스 남작(, 1938년 1월 18일 ~ )은 영국의 사회학자이다. 70년대 이후 발표한 구조화 이론()과 《제3의 길》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학장()을 지냈으며, 학교의 면모를 일신하여 옥스퍼드, 케임브리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자신이 간추린 대표적 간행물의 목록은 그의 출판물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출판사 폴리티()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기든스는 1938년 1월 18일 영국 런던 북부 에드먼턴()에서 런던여객운송본부() 직원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민첸든 그래머스쿨()을 다녔다. 기든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해 헐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1961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레스터 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사회심리학을 가르치며 연구를 진전시켰는데, 이곳에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를 만나 영향을 받았다. 1970년 이후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학장을 거쳐 현재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명예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당시 영국 대학에는 사회학과가 많지 않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도 사회학과가 없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기든스가 영국의 사회학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기든스는 197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격적으로 연구와 저작에 집중했다. 기든스는 3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으며 《New Statesman》에 정기 기고를 하는 등 저널리즘 활동도 왕성하게 해 왔고, 1985년에는 출판사 폴리티()를 설립하여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폴리티는 매년 80권 이상의 책을 발간하면서 영국에 하버마스,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등과 같은 독일과 프랑스 지식인들을 소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기든스는 명예 박사학위를 15개 받았으며, 그의 저서 《Sociology》는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60만 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2004년에는 노동당 소속으로 상원에 진입하면서 종신남작(life peer)에 임명되었다. 사회관계가 구조의 이중성이 작용한 결과 시간과 공간 속에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하는 이론으로, 기든스에 의해 적용된 사회학 이론을 말한다. 이 접근방법에서는 행위주체와 구조가 사회학적인 설명에서 어떤 우위도 갖지 못한다는 점이 이 이론이 의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든스가 얼마나 자신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 자신의 연구가 개인행위자에 대한 편견을 지속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설날 설날은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세계는 그레고리력(양력)을 표준 달력으로 쓰기 때문에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다. 따라서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기념한다.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으며, 현재는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명절로써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 설날은 설, 원일 (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이라고도 하며,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이라 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일컫는다. 영어로는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New Year’s Day라 한다. 다만, 음력 1월 1일은 Lunar New Year’s Day, 또는 Chinese New Year’s Day라 한다. 대한민국은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법정공휴일이다. 양력 1월 1일의 달력상 명칭은 신정이며, 보통 새해 첫날, 또는 양력설이라고 부른다. 음력 1월 1일의 달력상 명칭은 설날이고, 보통 설날, 구정, 음력설이라고 부른다. 음력설은 추석과 더불어 2대 명절 중 하나로, 이 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께 세배를 하는 것이 고유의 풍습이다. 한국에서는 1896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양력 1월 1일이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이지만, 음력을 썼던 전통에 따라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한다. 설날은 해(年)의 한 간지가 끝나고 새 간지가 시작되는 날로, ‘설’은 ‘설다’, ‘낯설다’, ‘익숙하지 못하다’, ‘삼가다’ 등의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에서는 1985년부터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하였고, 1989년부터 민속의 날을 '설날'로 이름을 바꾸고 설날을 3일 연휴(음력 12월 30일부터 음력 1월 2일까지)로 하고 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음력 1월 1일 음력설을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묵은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한 해의 첫날이라는 새해 첫날의 의미는 양력 1월 1일인 양력설이 더 강하다. 북한은 양력 1월 1일을 설날로 간주하며 중요한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다만, 전통을 중시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67년부터 음력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북한은 음력 1월 1일을 단지 휴식일로 간주하고, 새해의 첫 날이라는 의미는 양력 1월 1일에 두고 있다.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북한에서는 설날이라 부르며 더 중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명절로써 기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양력 1월 1일 양력설을 공식적인 새해 첫날로 간주하고 원단(元旦)이라고 부른다. 음력 1월 1일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하고, 춘절( )이라고 부르며 가장 큰 명절로 기념하고 있다. 양력설인 새해 첫날에는 카운트다운 행사와 해맞이, 불꽃놀이 등의 축제가 벌어지며, 보통 새해 인사를 나눈다. 음력설인 춘절에는 대규모 귀성객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등 한국의 음력설과 비슷한 모습을 보내는데, 국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보통 1주일 이상을 휴일로 한다. 중국에서 춘절은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가 강하며, 중국도 양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새해의 첫 날이라는 의미는 양력 1월 1일에 둔다. 양력설과 음력설(춘절)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에서도 국경일이며, 그 밖의 나라에 사는 화교들도 명절로 즐긴다. 일본의 설()은 양력 1월 1일이며, 설날은 일본의 연중 최대 명절이다. 이는 서양의 설이 양력 1월 1일인 점을 그대로 답습한 메이지 유신에 따른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음력 1월 1일이었다. 이 날 일본인들은 조니()라고 불리는 떡국을 먹는데, 한국의 떡국과는 달리 찰떡을 사용하며, 국물도 간장국이나 된장국을 사용한다. 또한 한 해 동안의 무사안녕을 위해 기모노를 입고 신사나 절을 참배하는데, 이를 하쓰모데라 한다. 법으로 정해진 설 연휴는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이지만, 대부분 일본의 기업, 관공서들은 연말인 12월 29일부터 1월 3일까지 연휴이다. 음력 1월 1일은 일본에서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평일이다. 유럽 국가들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새해 전야부터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까지를 설날로 기념하여 축제를 연다. 유럽의 영향을 받은 미국 등 아메리카 국가들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오세아니아 국가들도 비슷하다. 이것이 서양에 있는 나라에 설날 같은 것이다. 이슬람권에서는 음력인 이슬람력을 사용하여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하고 있다. 아랍어로는 라스 앗싸낫 알히즈리야(, Ras as-Sanah al-Hijriyah)이라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이슬람의 설날이다. 클럭 속도 클럭 속도() 또는 클록 주파수는 컴퓨터 프로세서의 동작 속도이다. "초당 사이클"로 측정하며 헤르츠(Hz) 단위를 사용한다. 클럭 속도가 반드시 컴퓨터의 속도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말하면 컴퓨터의 성능을 측정하는 경우 CPU의 클럭 속도가 중요하지만 다른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구성에 의해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프론트 사이드 버스의 속도, 램의 클럭, CPU 버스, L1/L2/L3 캐시의 양에 따라 컴퓨터 속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좀 더 정확한 평가를 위해 벤치마크를 사용한다. 숫자가 높을수록 빠른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 1990년대 초에 대부분의 컴퓨터 회사가 CPU의 클럭 속도로 컴퓨터 속도를 광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2000년에 인텔의 경쟁자 AMD는 CPU의 클럭 속도 대신 모델 번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인텔의 어느 정도 높은 클럭 속도가 AMD의 조금 더 낮은 클럭 속도와 동등한 속도를 냈기 때문이었다. 2004년에 인텔도 또한 이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 까닭은 펜티엄 M 모바일 CPU와 펜티엄 4의 속도에 대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크리스티나 김 크리스티나 김(Christina Kim, , 1984년 3월 15일 ~ )은 미국 LPGA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 골프 선수이다. 키는 167cm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태어났으며, 오크그로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광개토왕 광개토왕(廣開土王, 374년 ~ 412년, 391년 ~ 412년)은 고구려의 제19대 군주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374년, 고구려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384년에 백부인 소수림왕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고국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후인 386년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391년, 아버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392년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는 약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호는 영락(永樂)이다. 광개토왕은 392년 7월에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해서 석현성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8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해 오자,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승기를 탄 고구려는 10월에 백제 북방의 천혜의 요새이자 중요지인 관미성을 20일에 걸친 포위 끝에 쳐서 함락시켰다. 이 해 12월 백제 진사왕이 구원에서 사망하고 아신왕이 즉위하였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393년 8월에 아신왕은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목책에 이르렀다. 그러나 치욕을 씻기 위한 도발이었기에 이내 회군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고구려는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396년 고구려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개선하였다.(→고구려 백제 전쟁) 백제와의 전쟁과 더불어,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395년에는 염수(鹽水) 로 진출하여 거란족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398년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다. 이후 백제가 왜(倭)에 태자 전지를 보내는 등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적할 준비를 한다. 광개토왕은 399년에 평양(平壤)으로 순행하였다. 백제와 왜는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때 왜군은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왜군을 격퇴시킨다. 학계에서는 이때 금관가야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져, 금관가야가 주도하던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하고 대가야가 주도하는 후기 가야 연맹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면서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한다. 이후 고구려군은 백여 년 동안 신라 땅에 머물려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하는 보호국이 된다. 404년에는 대방(帶方)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군을 궤멸시켰다. 한편 광개토왕은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400년 2월에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후연 왕 모용성은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한다. 이에 광개토왕은 보복전을 펼쳐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404년에도 후연을 정벌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연군(燕郡)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연군은 지금의 베이징 근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기록에 따라 베이징 일대까지 정복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점령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407년에는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을 점령하였다.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408년에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광개토왕은 내치에도 힘썼다.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는 9개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409년에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또한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412년에 서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13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수왕은 414년에 능비를 세우고 유언에 따라 수묘인을 두어 왕릉을 관리하게 하였다.1880년도에 발견된 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의 활발한 정복 사업이 기록되어 있으며, 평생에 걸쳐 64개 성과 1,400촌을 공취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능과 생전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능비(陵碑)가 414년에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 현에 남아 있다.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장수왕 장수왕(長壽王, 394년~491년, 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은 고구려의 제20대 국왕이다. 광개토왕의 태자로 휘는 거련(巨連, 巨璉)이며, 《위서(魏書)》에는 이름이 연(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는 부련왕(夫連王)이라 한다. 394년 출생하여 491년 사망할 때까지 98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붙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어갔으며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정책을 추진하였고 중국의 남북조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안정을 구가한 국왕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09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412년 음력 10월에 광개토왕이 죽자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연가(延嘉), 연수(延壽), 건흥(建興) 등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일부 발견되고 있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14년에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여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렸으며, 423년(추정)에는 충주고구려비를 세워 고구려의 위상을 널리 선포하였다.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여서 국내성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남조(南朝)의 여러 왕조들과 북조(北朝)의 북위에 모두 화친을 맺고 조공을 바치는 등거리 외교를 통해 정세를 안정시켰다. 북위와는 풍홍의 망명이나 후궁을 보내는 문제로 일시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꾸준히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고구려 및 장수왕의 국제적 위상은 매우 높았으며, 장수왕은 높은 직위로 책봉을 받았고 고구려의 사신 또한 높은 대우를 받았다. 북위는 고구려의 조공을 특별하게 우대하여 472년에는 타국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조공을 할 수 있게 하였다. 435년, 북연왕 풍홍이 밀사를 보내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장수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당할 때 군대를 보내 풍홍 및 그 일족들을 구출하였다. 고구려로 도망쳐온 풍홍은 스스로의 세력을 믿고 행패를 부렸으며 이에 장수왕은 풍홍의 태자를 인질로 잡고 시중드는 인원도 몰수하였다. 이에 풍홍은 송나라에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수왕은 군대를 보내 풍홍을 살해하였다. 이때 송나라 사신 왕백구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장수 고구가 죽고 손수가 생포되었는데, 장수왕은 다시 왕백구를 붙잡아 송으로 압송하였다.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망칠 수 없었던 송나라에서는 왕백구를 감옥에 가둬 고구려의 눈치를 본 후 석방하였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안정된 가운데 장수왕은 백제를 정벌하는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454년부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공하기도 하였다. 472년,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전면전을 준비하는 한편 승려 도림(道琳)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내정을 정탐하였다.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사고 개로왕에게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사주하여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이러한 물밑작업을 마친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살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489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호명성 등 7개 성을 함락시키고 미질부까지 진격하였다. 이러한 정복 전쟁을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말년의 장수왕은 정복 전쟁을 그만두고 내치에 힘썼으며, 중국과의 외교 관계도 계속 우호적으로 유지하여 안정을 구가하였다. 그리고 491년 음력 12월,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북위 효문제는 특별히 직접 애도를 표했으며 관작을 추증하고 강왕(康王)이라 시호를 내렸다. 일설에는 468년 경 장수왕이 유연과 지금의 내몽골 대흥안령 산맥 인근에 위치한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려 하였다고도 한다. 지두우는 좋은 말의 산지였으므로, 이후 고구려군이 전쟁을 치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토니 블레어 앤서니 찰스 린턴 "토니" 블레어(, 1953년 5월 6일 ~ )는 영국의 정치가이다. 1994년 7월부터 2007년 6월까지 영국 노동당의 당수이기도 했다. 노동당을 이끌고 1997년 총선에서 크게 이기며 영국 보수당의 18년간의 집권을 끝내며 존 메이저 총리를 교체했다. 그는 노동당 출신으로 당을 선거에서 3연속(1997년, 2001년, 2005년) 승리로 이끈 유일한 정당인이다.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세 번째 아내였던 웬디 덩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머독의 별장에서 2012년 10월 만남을 시작으로 수차례 밀회를 가져 머독 부부의 이혼을 가져왔다. 1953년 5월 6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레오 블레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는 잉글랜드의 한 연극 배우의 사생아로 태어났고, 에든버러의 한 조선소 노동자에게 입양되었다. 출생당시 토니에게는 이미 빌이라는 친형이 있었다. 부친인 레오가 후에 더럼대학의 법학 교수가 되자 가족 모두가 잉글랜드 북동부인 더럼 시로 이주하여 한때 그곳으로 살기도 하였다. 그런데 레오가 갑자기 뇌졸중에 걸린 여파로 의원직으로 진출하려던 그의 야망은 좌절되고, 경제적 사정도 기울어져 가족 전체가 에든버러로 이주하게 되었다. 1966년 13세이던 그는 '스코틀랜드의 이튼'이라 불리던 페테스 중등학교(Pettes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숙학교의 엄한 규율에 답답해하였고 여러모로 학교 측과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1997년 집권 이후, 국내 정치는 비교적 많은 개혁성과가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의 자치권을 보장하여 수백 년 만에 각각 지방의회가 재구성되었고, 수백 년동안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았던 북아일랜드지방에서 정치지도자간 협상을 통해 폭력투쟁을 종식시킨 '벨파스트 선언'을 이끌어냈으며, 끊임없이 개혁 요구가 있었던 귀족 중심의 상원을 이탈리아(상원)식의 각종 직능단체 대표 중심으로 꾸준히 바꿔나가면서 보수적인 정치풍토를 상당부분 개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에서도, 그의 행정부는 전 세계적 침체국면을 뚫고 착실한 개혁정책을 펴 연평균 3%내외의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개혁적인 정당인 미국 민주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등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최근에는 2007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선거 당시 세골렌 루아얄후보진영의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2000년 7월 16세 된 장남 유안 블레어 등이 음주운전 혐의로 입건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블레어는 휴양도시 브라이튼에서 개최된 흑인 종교지도자들의 집회에서 연설도중 자녀양육을 언급한 부분에 이르자 사과하고, "이 부분은 오래전에 작성된 것"이라며 좌중의 웃음을 자아낸 뒤 '총리보다 부모 노릇이 더 힘들다'며 총리이기 이전에 가장으로서의 고민을 토로한 바 있다. 전임 총리 중 마거릿 대처의 아들의 고속질주 후 실종됐다가 구조된 사건, 내무부장관 잭 스트로와 세실 파킨슨 보수당 상원의원의 자녀들의 마약복용문제 등과 함께 언론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날 사고를 일으킨 이유는 전날 밤 대입수능시험을 마친 뒤 술을 과하게 마시고 음주운전 후 런던 시내 웨스트엔드 중심부 광장에 쓰러진 채 발견돼 엠뷸런스에 후송되어 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이 도래하자 블레어 행정부 핵심정책의 많은 부분에서 해외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특히 친미국적인 정책으로 국내외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2001년 아프가니스탄과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영국 군대를 파견하는 등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여러 대외 정책을 앞장서서 지지하였다. 보수당마저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으며, 블레어가 너무 미국에 끌려다닌다고 비판하였다. 중동지역의 민주주의 확대 및 인권신장과 더불어, 전통적 강세를 보이는 영국의 석유 및 금융산업 등의 보호가 그의 명분이었으나, 참전을 위해 작성한 정부 자료들이 과장되는 등 추진과정상의 문제점들이 전 세계에 폭로되면서, 미국 신보수주의(네오콘)세력의 주도권에 지나치게 끌려다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그에게, 진보진영 및 이라크전에 비판적인 다수의 국민들과 세계인들은 그를 '부시의 푸들'(Bush's Poodle)이라고 혹평했다. 2005년 12월 총리는 EastWest 연구소의 "2000년대의 국가 수반" 상을 받았다. 2006년 9월 7일에 토니 블레어 총리는 2007년 9월에 열릴 영국 노동 조합 회의 시기에 맞춰 사임하고 당 지도자로 복귀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으나, 정확한 사임 시기를 못박지는 않았다가, 2007년 5월 스코틀랜드 지방선거에서의 패배 직후 27일에 물러나겠다(노동당수직은 6월 전당대회에서)고 선언했다. 총리 취임 10년 만이었다. 후임자로는 재무부장관이자 이라크전에 회의적이었던 대중정치인 고든 브라운이 지명되었다.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피터 맨덜슨은 흔히 노동당을 영국 정치의 중심으로 이끌었다고 일컬어지며 옛 국유화 정책을 시장 경제로 전환한 그의 정책을 일컬어 "신 노동당(New Labour)"이라 부른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현대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이라 부른다. 정통좌파지향의 비판자들('구 노동당(Old Labour)' 계열의 사람 포함)은 그가 영국 노동당의 기본 이념을 배반했다고 느끼며, 블레어 정부가 소득의 분배 등 전통적인 노동계의 관심에서 벗어나 너무 우편향으로 치우쳤다고 보기도 한다. LPGA 여자프로골프협회 또는 LPGA()는 흔히 1950년에 설립된 미국의 협회를 가리키며, 13명의 여성 골프선수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LPGA는 매년 2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되는 최상급 여성 골프선수를 위한 대회인 LPGA 투어를 주관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의 협회원들은 골프강사이다. 비록 초창기에는 LPGA 투어를 미국인 선수들이 주도했지만, 현재로서는 많은 타 국가의 선수들도 뛰어난 실력을 보이고 있다. 아카데미상 아카데미상()혹은 오스카상()은 미국의 영화 시상식이다. 주로 이 상은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가 수여한다. 전년도에 발표된 미국의 영화 및 미국에서 상영된 외국 영화를 대상으로 우수한 작품과 그 밖의 업적에 대하여 매년 2월 마지막 일요일(단, 동계 올림픽과 겹칠 경우에는 3월 첫 일요일)에 시상한다. 그 동안 수상부문과 부문별 명칭은 여러 차례 변동이 있어왔다. 이를테면 제83회 아카데미상시상식에서는 모두 24개 부문의 경쟁부문 시상식과 2개 부문의 특별명예상 시상식이 있었다.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1929년 5월 16일 할리우드의 루즈벨트 호텔에서 27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당시의 아카데미상은 고작 20여 명의 멤버로 구성된 위원회가 12개 부문의 수상작을 선출하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32년에는 100명의 위원들이 선출에 임하는 대규모 시상식으로 성장하였다. 처음 15년간은 호텔에서 거행되다가 1944년부터 극장 상영에 이익이 되도록 시상식을 극장에서 거행하였고, 1969년부터는 LA 카운티 뮤직 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론'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88년부터는 슈라인 오디토리움(Shrine Civic Auditorium)과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2002년에 할리우드에 코닥 극장에서 아카데미 전용 시상식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953년부터 NBC-TV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탔으나 현재는 ABC-TV에서 방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CJ E&M계열의 영화전문 채널 채널CGV에서 독점 생중계로 방송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코닥 극장의 명칭이 돌비 극장으로 바뀌어 진행된다. 오스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사의의 난 조사의의 난(趙思義-亂)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일컫는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과 방석(芳碩)이 희생되었다. 안변 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태조 이성계의 계비)의 조카 강현은 그 원수를 갚는다면서 태종(이방원) 때인 1402년 태상왕 태조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하였다. 조정에서 박순(朴淳), 송류(宋琉)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李天佑)를 격파하였으나 그 후 관군이 군을 재정비하고 재공격을 가하자 반군은 무너졌고 조사의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의 고사(古事)가 바로 이 사건에서 연유되었다. 성남시 성남시(城南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부에 있는 시이다. 서울의 위성도시 중 하나로서 서울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26Km 거리에 있는 시이다. 광주산맥에 둘러싸여 있으며 탄천을 따라 형성된 분지지형이다. 시청은 중원구 여수동에 있고,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의 3개의 일반구가 설치되어 있다. 1973년 7월 1일 광주군 대왕면·낙생면·돌마면 일원과 중부면 중 단대리·상대원리·탄리·수진리·복정리·창곡리를 관할로 성남시가 설치되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라 1980년대 들어 성남시는 인구 기준 전국 10위 도시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비약적으로 증대하는 행정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성남시조례 제 858호(1988. 6. 3 공포)에 따라 1988년 7월 1일 기존의 돌마출장소, 대왕출장소, 낙생출장소를 폐지하고, 성남시 수정출장소 및 중원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9년 5월 1일에는 성남시 조례 제 931호에 따라 수정출장소, 중원출장소 2개 출장소를 각각 수정구, 중원구로 승격하였다. 1989년 4월 27일 성남시 남쪽지역의 소위 '남단녹지'를 중심으로 한 540여만 평 규모의 분당 지역 일대에 10만 6천호의 주택을 건설하여, 42만 인구를 수용하는 분당신도시 건설 계획이 공식 발표·착수되었다. 이에 따라 성남시 조례 제971호 (1989. 6. 20 공포)에 의거 1989년 6월 1일 분당지구개발지원사업소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해 1991년 9월 17일 중원구에서 분당구가 분구되어 현재의 3구에 이르고 있다. 2009년 11월 18일 중원구 여수동으로 시청을 이전하였다. 2015년 12월 7일, 위례신도시 건설에 따라 서울특별시 송파구 및 경기도 하남시와 행정 구역 경계를 조정하였다. 성남(城南)이란 이름은 성(남한산성)의 남쪽에 있다는 뜻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정부와 서울특별시의 일방적 행정행위에 항거하여 1971년 8월 10일부터 8월 12일까지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광주대단지) 개발 지역 주민 수만 명이 공권력을 해체시킨 채 도시를 점령하고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시의 판자촌 주민들을 지금의 성남 수정구와 중원구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광주대단지란 서울시의 빈민가 정비 및 철거민 이주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위성도시로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이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3만 명의 시위대가 몰렸으나 그날 5만명이 성남출장소를 점거한 뒤 10만 명 이상으로 시위 참여 시민이 폭증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내무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 경기도지사를 파견하여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요구조건을 수용함으로써 3일만에 진정되었고 이후 정식으로 성남시가 설치되었다. 동쪽으로 남한산(522m)과 청량산(479m)·검단산(535m)·불곡산(312m)의 긴 산줄기를 경계로 하남시·광주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청계산(618 m)을 경계로 과천시와 의왕시를 접하며, 북쪽은 서울특별시 송파구·강남구·서초구, 남쪽은 용인시와 접한다. 광주산맥에 둘러싸여 탄천을 따라 남북으로 긴 협곡 분지 지형이며, 1989년 성남시 남부에 건설된 분당신도시 및 2000년대에 건설된 판교신도시는 성남 구시가지와 그린벨트로 생활권이 단절되어 있어 시가지와 생활권이 양분되어 있다. 성남시의 행정 구역은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로 구분된다. 면적은 141.72 km이다. 2017년 12월말 주민등록 인구는 396,403세대, 967,510명이다. 성남시의 국회의원 선거구는 수정, 중원, 분당갑, 분당을의 4개이다. 성남시의 인구는 2015년 현재 969,675명이며 인구밀도는 6.915명/km이다. 0~14세 인구는 16.7%, 65세 이상 인구는 11.3%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5%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높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2.3%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낮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1%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9.5로 여자가 다소 많다. 성남시의 인구추이 박정희 정권 시절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원에 광주대단지라는 이름으로 새로 개발되기 시작한 성남시는, 수도 개발권에 있는 주거 도시라는 특수여건에 힘입어 방대한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계천 일대 판자촌 철거 사업으로 거주하던 주민들을 성남시로 강제 이주시켜 많은 사람들이 성남시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 현재 성남시는 각종 IT산업 및 첨단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경기도와 함께 공업단지에 입주한 업체에 세제혜택을 주어, 테헤란 밸리 기업의 수요와, 분당신도시에 입주한 각종 공기업의 수요와, 각종 IT산업 및 첨단산업에 관련된 대기업과 이에 관련된 기업의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공업단지에 그러한 산업들이 가능한 아파트형 공장 등 인텔리전트 빌딩 형태의 현대식 공장들이 많이 입주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3개의 공업단지에 2차 및 3차 산업에 종사하는 각종 기업이 많이 입주해 새로 신축되는 인텔리전트 빌딩의 수와 분야별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산업으로는 금융·서비스·전자·통신·화학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중원구 상대원동의 제2·3공업단지는 최근 ‘성남하이테크밸리’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수정구 신흥동의 제1공업단지는 성남시 수정구·중원구 생활권에서 모란역세권에 이은 제2의 도심지가 되었으나 토지용도의 문제로 인해 오랫동안 개발되지 못하여 현재까지도 공터로 남아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시 발전을 저해해 왔던 '비행안전구역 고도제한 완화'에 힘입어 '성남신흥(1공업단지) 도시개발구역지정 및 개발계획승인'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인근의 희망대공원과 연계된 첨단 고층아파트 주거지역과 백화점, 쇼핑몰과 같은 상업시설이 위치해 있는 활기찬 도심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대규모 재개발을 진행 중이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 당시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에 의해 계획된 5대 신도시 중 하나로 조성되었던 분당신도시 개발 시 신도시의 자족기능을 높이기 위하여 야탑동 148번지 일원에 ‘분당테크노밸리’를 조성하여 현재 기업들이 입주하여있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외곽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교적 주변 도시들과의 접근성이 편리한 분당선 역세권에 형성된 상업 지구에 비해 많이 활성화되지는 못하였지만 각종 중견기업들이 입주하여 운영되고 있다. 분당신도시의 초기 도시계획을 살펴보면 당시 ‘백궁지구’였던 정자동 탄천 서쪽 일대 정자역세권 상업 지구를 대규모 ‘벤처밸리’로 지정하여 분당신도시의 CBD 기능을 살리고 도시의 자족기능을 높이기 위한 계획이 존재하였으나 (이에 따라 네이버 본사와 SK그룹의 일부 계열사가 분당신도시로 이전하였다) 대신 2000년대 초반 강남발(江南發) 부동산시장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및 거주용 오피스텔 열풍의 영향으로 정자역세권 일대의 상업 지구에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및 거주용 오피스텔이 대거 건설되었다. 분당신도시의 입주가 15년차에 접어들고 안정세에 들자 정부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와 인접하고 분당신도시와 붙어있어 개발압력이 심했던 경부고속도로 판교 나들목 인근에 2기 신도시인 판교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신도시의 자족기능과 우수한 입지조건을 살리기 위해 판교 나들목 근처에 도시지원 시설용지를 지정하여 판교테크노밸리를 계획하였다. 그곳에 각종 IT·BT·CT·NT 및 첨단 융합 기술 연구시설 및 첨단 인프라 시설, 연구지원시설 등의 개발을 계획, 착수하여 현재 유수 관련 기업들이 입주해있고 많은 사무용 인텔리전트 빌딩을 건축 중에 있으며 개발은 2013년에 완공됐다. 2018년 기준 성남시의 재정자립도는 63.53%로 경기도에서 2번째로 높다. 판교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주요 IT기업들이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성남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46조6685억 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6.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90억 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9조1880억 원으로 19.7%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37조 4716억 원으로 80.3%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분에서는 서울시와 가까운 지역으로써 교통이 편리하고 주거기능이 발달하여 사업서비스업(12.1%)과 건설업(10.0%), 부동산업 및 임대업(9.2%)과 도소매업(7.9%)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성남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928,009명이고 주간인구는 836,338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0으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01,649명, 유출인구는 181,598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4,991명, 유출인구는 26,713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91,671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앙상블시어터 등 3개의 극장과 미술관 본관, 큐브미술관으로 나뉘어있는 전시장과 아카데미, 음악분수와 야외광장, 편의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사적 제57호2014년 6월 22일(세계문화유산 지정)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으로 추정되며, 군수 물자를 저장하는 특수 창고를 설치한 중요한 거점성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이면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병자호란 시기 최후의 항전지였다. 은 1600년 전 한성백제시대 석실분 밀집 지역으로 삼국시대의 동북아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인 한성백제 유적 9기와 고구려의 남하 증거인 2기의 석실분을 보유한 박물관으로서 성남의 역사를 보여 주는 박물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잔디광장, 상록수광장, 역말광장, 황새울광장, 야외공연장과 복원된 지방문화재인 고인돌 정원, 수내동 가옥 등으로 구성된다. 서울 중앙부로부터 20 km 반경, 수원시 21 km 반경에 있으며, 철도는 없으나 분당선의 각 역을 통하여 관내 교통과 연계되고 있다. 도로교통은 경부고속도로와 용인서울고속도로가 시의 서남부를 통과하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주축으로, 잠실방면의 도로와 광주-안양간 도로, 서울 지하철 8호선과 분당선 전철이 통과해 타 지역과의 소통이 편리하다. 그리고 기존 한국철도공사 분당선의 혼잡도 완화와 표정속도 증가를 목적으로 정자역에서 판교신도시를 거쳐 강남역을 잇는 신분당선이 2011년 10월 28일 개통하였다. 성남시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프로축구단이다. 성남 일화 천마를 성남시에서 인수하여 시민프로축구단으로 재출범하였다. 1989년 일화 천마 축구단으로 창단되어 초기엔 서울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이었지만,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의하여 1996년 천안으로 옮겨갔으며, 다시 2000년 성남으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정착하였다. 홈경기장은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있는 탄천종합운동장이다. K리그 7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아프로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등 각종 대회에서 총 18회 이상의 우승을 한 아시아 최고의 축구단 중 하나이다. 경기도 성남시 야탑동 소재 야구학교가 2017년 11월 경기도 성남시를 연고로 하는 독립 리그 야구단을 창단 한다고 발표하였다. 관련 뉴스 http://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3&aid=0008243151 2009년 성남시는 새로운 성남시청사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 비용이 무려 3222억원에 달한데다, 에너지 효율도 매우 낮은 것으로 드러나 각 언론들과 정치권, 시민단체 들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명박 대통령도 "호화청사를 뜯어고쳐서라도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며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새로 건설된 성남시청사는 전라남도나, 전라북도의 청사보다 큰 것이며, 서울시의 청사와도 맞먹는 수준이다. 후에 성남시는 복지예산도 대폭 삭감한 것으로 드러나 야당 시의원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자체들의 호화 청사 논란 가운데 감사원은 지차체들에 대해 감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사과를 하기도 하였으며, 한나라당은 지자체들의 호화 청사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운다고 밝혔다. 이러한 호화 청사를 짓던 당시 시장직을 맡았던 이대엽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하였다. 이후 성남시의 호화청사와 관련된 수사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충성맹세 등 갖은 비리들이 드러났다. 한편 성남시는 2010년 7월 12일에 판교특별회계에서 빌려쓴 돈 5천 2백억원을 단기간에 갚을 수 없다며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로는 최초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다. 그로인해 2010년 12월 30일 성남시는 성남시 소속 스포츠 팀 15곳 중 12곳을 해산시켰다. 이 조치로 80여 명의 선수들과 감독들이 해고당했다. 중원구 중원구(中院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성남시의 동부에 있는 구이다. 서울 잠실역에서 약 10km 떨어져 있다. 구 이름은 '중동'(中洞, 현재의 중앙동)과 '대원동'(大院洞, 상하로 갈라짐)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2014년 11월 30일을 기준으로 인구와 면적은 다음과 같다. 분당구 분당구(盆唐區)는 성남시 남부에 있는 구이다. 북으로는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와 접하고 있고 서로는 의왕시, 동으로는 광주시, 남으로는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1989년 노태우 정부의 분당신도시 개발계획으로 인하여 1992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판교신도시를 개발하고 있다.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분당구의 인구는 50만7054 명인데, 이는 성남시 인구의 51.11%에 이른다. 분당선과 신분당선으로 서울특별시와 연결되어 있다. 분당구라는 명칭은 중심이 되는 마을인 분당동에서 가져왔다. '분당'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분점리(盆店里:동이정)와 당우동(唐隅洞:당모루) 등의 마을을 합치고, 두 마을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역사적으로 광주군의 돌마면 일부(지금의 분당동·수내1동·수내2동·수내3동·정자1동·정자2동·정자3동·서현1동·서현2동·이매1동·이매2동·야탑1동·야탑2동·야탑3동)와 낙생면(지금의 금곡동·구미동·구미1동·판교동·삼평동·백현동·운중동)을 합친 것이며, 지리적으로는 용인군 수지면의 일부(현재의 구미동)도 포함한다. 안양시 안양시(安養市, )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과천시, 남쪽으로 군포시와 의왕시를 접하고, 서쪽으로 광명시와 시흥시, 안산시를 접하며, 북쪽으로 관악산(629m), 삼성산(481m)을 경계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금천구를 접한다. 중앙은 낮고 평탄하여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분지 지형을 이룬다. 시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정조가 부왕인 장조의 수원 화산능에 참배하고자 만안교를 건설했는데, 여기서 '안(安)'자를 취하고, 그 정성을 길이 일깨워 살린다는 의미로 '양(養)'을 취하여 안양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인데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안양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 정조 때 건설된 만안교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두 번째는 현 만안구 삼성산에 위치한 안양사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설득력이 높은데, 안양의 연원은 안양사의 창건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안양(安養)은 본래 불교 용어로 극락(極樂)을 의미하며, 이 안양사가 있는 곳이라 하여 '안양'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안양시는 경기도의 중부에 위치하여 서울에서 남으로 약 25km 지점, 인천에서 동남방으로 약 44km 지점에 위치한다. 안양시는 행정구역상으로 1개 특별시, 5개시와 접하고 있다. 동쪽은 과천시와 의왕시가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광명시와 시흥시가, 남쪽은 군포시와 안산시가, 북쪽은 서울특별시 금천구와 관악구가 접하고 있다. 안양시의 동단은 북위 37°23′49″, 동경 126°59′07″로서 이는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과 의왕시 포일동의 경계부가 되며, 서단은 북위 37°24′18″, 동경 126°52′22″로서 박달동과 광명시의 가학동이 경계를 이루는 청덕산 능선에 해당한다. 또한 남단은 수리산 능선인 북위 37°21′16″, 동경 126°54′15″로서 이는 안양9동과 군포시 대야동의 경계를 이루며 북단은 북위 37°26′52″, 동경 126°55′56″로서 석수1동과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이 경계를 이루는 삼성산의 능선이 된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안양시는 서남쪽에 수리산(474m)과 수암봉(395m), 북쪽에 관악산(629m), 삼성산(455.8m)이 솟아 있으나 대체로 준평원의 잔구지역이다. 산계는 주로 북동방향으로 발달해 있으며, 수계의 발달은 불규칙한 편이나 북사면에는 비교적 깊은 하곡이 형성되어 있다. 산계와 수계의 발달은 전역에 걸쳐 대체로 불규칙한 편으로 서울시측 사면과 안양시측 사면에 각각 3곳의 계곡이 발달해 있다. 그 중앙에 평야 지대가 발달하여 타원형의 분지를 이룬다. 수리산은 안양시의 안양동과 군포시 및 안산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89m이다. 수리산의 기반은 흑운모호상 편마암 및 백운모 편마암이 주를 이루며 곳곳에 규장암이 흘러들고 있다. 안양시의 대부분이 화강편마암의 사질토양으로서 비옥도가 높다. 학의천이 시의 동단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비산동에서 안양천과 합류, 시의 중앙부를 관통하면서 북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안양시의 두드러진 지형적 특징은 안양천 주변에 발달한 하천퇴적지형과 관악산, 수리산 등의 산지지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하천퇴적 지형과 산지 지형 사이의 기복의 차이는 비교적 큰 편으로 최고점인 관악산 정상과 최저점인 안양천 하상과는 고도차가 600m 이상에 이른다. 대표적인 하천퇴적 지형으로는 학의천과 안양천이 합류하는 달안들(옛지명) 부근의 충적지형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는 범람원의 저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자연제방, 배후습지 등이 발달하고 있으나 현재에는 대부분 인공적으로 변형, 평촌 신도시가 들어서 있는 상태이다. 경기 남부지역에 속하는 안양의 2010년 연평균기온은 12.2℃로 경기 북부지역의 연평균 기온 10.9℃와 다소 차이를 보였으며 한서의 차가 커서 연교차가 31.3℃에 달한다. 또한 2005년(12.0)도부터 상승하던 연평균기온이 2008년(12.8)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안양의 2010년도 연간 강수량은 1,538mm로 경기지역의 평균치 1,677mm 보다 다소 낮다. 2002년에서 2010년까지 강수량 추이를 보면 최대 1,538mm(2010년)에서 최소 1,137mm(2004년)로 그차이는 401mm에 이른다. 또한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겨울철의 건계와 장마전선의 북상에 따라 형성되는 여름철의 우계와의 구별이 뚜렷하다. 강수량은 여름철에 집중하여 6월에서 9월까지 4개월간의 강수량이 연간 강수량의 81%에 이른다. 특히 북태평양으로부터 많은 수증기가 유입되거나 열대지방에서 고온다습한 남서기류가 장마전선으로 유입될 때에는 1일 강수량 100mm이상의 집중호우가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안양시의 행정 구역은 2구 31동 559통 3,225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양시의 면적은 58.46 km이며, 이 중 녹지지역이 62.26%에 해당하는 36.40 km이며, 개발제한구역은 51.6%이다. 2017년 11월 30일 주민등록 인구는 223,327세대, 588,619명이다. 2003년에 인구가 60만명을 넘었는데, 2000년대 후반부터 점차 줄어들어 2015년 3월에 60만명 아래로 하락했다. 안양시의 인구 구조는 2009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7.9%, 65세이상 인구는 7.1%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5.0%로 전국 평균72.8%보다 비율이 높고 유소년 인구부양비는 24.0%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 인구부양비는 9.0%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9.6로 여자가 다소 많다. 안양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30조 4293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4.2%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농림어업은 약 18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2차 산업의 광업 및 제조업은 7조 1359억원으로 23.4%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3차 산업의 해당하는 상업과 서비스업은 23조 3547억원으로 76.6%의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경기도의 교통의 중심지로서 3차 산업 부문에서는 건설업(11.28%)과 사업서비스업(10.67%), 도소매업(8.48%)과 출판, 영상, 방송통신 및 정보서비스업(8.23%)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안양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235.143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4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35,364명으로 15%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199,775명으로 85%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6.8%), 사업서비스업(13.4%)과 숙박 및 음식업(9.5%), 교육서비스업(8.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만안구에 있는 안양예술공원의 옛 이름은 안양유원지였다. 유원지 일대의 자연환경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복구하고자 인공폭포, 야외무대, 위락시설, 광장, 산책로를 조성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또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공원 곳곳에 국내외 유명 작가의 예술작품 52점을 설치하고 안양예술공원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또한 2013년 안양시 승격 40주년을 맞아 평촌 중앙공원, 삼덕공원에서 축제가 열리기도 하였다. 경부선과 과천선이 지나며, 각 역에 수도권 전철이 운행한다. 이 중 경부선은 만안구를 지나며, 과천선은 동안구 평촌신도시의 중앙을 관통해 지난다. 안양역에서는 일반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안양 KGC인삼공사(Anyang KGC Pro Basketball Club)는 2010년 KT&G 카이츠를 인수하여 창단하였다. 전신 구단으로는 안양 SBS 스타즈 농구단으로 1992년부터 존재해 왔다. 2008-2009 시즌에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며 7위로 플레이오프에 탈락했다. 2010년 모기업인 KT&G가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에게 스포츠단 지분 100%를 옮기면서 팀명과 엠블렘을 변경하여 2010-2011 시즌부터 참가했다. 팀 명을 한 시즌만에 안양 KGC인삼공사로 교체하였고, 기존의 박찬희, 이정현과 함께 군에서 전역한 양희종, 김일두, 김태술과 드래프트 1순위의 오세근을 영입하여 빠른 농구를 앞세워 정규리그에서 1997년 원년 이후 15년만에 정규리그 준우승을 하였고,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정규리그 3위 부산 KT 소닉붐을 이기며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였다. 당시 2006~2007 시즌부터 2위팀은 3위팀에게 발목이 잡혔는데, KGC는 6년만에 2위팀의 챔프전 진출 및 팀 창단 첫 진출을 하였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정규리그 우승 팀인 원주 동부 프로미를 4대 2로 꺾고 팀 창단 첫 우승을 하였다. 오세근은 플레이오프 MVP를 받았다. 만안구 만안구(萬安區)는 경기도 안양시 서부에 있는 구이다. 1992년 10월 1일 안양시(安養市) 구제 실시로 일반구로서 신설되었다. 북쪽으로는 서울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동쪽으로는 안양시 동안구, 과천시, 의왕시, 서쪽으로는 안산시, 시흥시 남쪽으로는 군포시에 접한다. 조선 정조대왕이 1795년에 만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으로 삼성천에 다리를 축조하여 만안교라 칭하였으며, 이 전래를 따라 1989년 5월 1일 안양시 지명위원회에서 구의 명칭을 만안이라 명명하였다. 의정부시 의정부시(議政府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위성 도시로 서울특별시의 군사기능을 담당한다. 경기북부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 경기도청 북부청사, 경기도교육청 제2청사, 의정부지방법원 등이 있다. 남쪽은 서울특별시 노원구·도봉구, 서쪽과 북쪽은 양주시, 동남쪽은 남양주시, 동북쪽은 포천시와 접한다. 의정부시의 명칭은 둔야면 의정부리로부터 시작하였다. 둔야면(1938년에 양주면으로 개칭) 의정부리에 1911년 개통한 경원선의 철도역인 의정부역이 생긴 이후 이 역을 중심으로 의정부 도심이 점차 형성되었고, 이후 행정구역명과는 별개로 철도역의 이름을 따라 의정부라는 지명이 널리 쓰였다. 1922년에 주내면 유양리에 있었던 양주군청이 옮겨오면서 양주군의 행정중심지가 되었고, 1942년 10월에 의정부읍이라는 이름으로 승격하면서 지역의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둔야(芚夜, 둔배미)와 의정부리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의 둔전(屯田)이 설치되어 유래하였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의정부시는 남쪽으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도봉구와 시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양주시 양주1동과 포천시 소흘읍, 서쪽으로는 양주시 장흥면, 동쪽으로는 남양주시 별내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관할 면적은 81.54 km²에 이른다. 의정부시는 서울 북쪽의 관문 도시이자 경기북부의 교통·산업·경제·문화·교육의 중심 도시이다. 경원선(수도권 전철 1호선 운행)과 평화로가 시가지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서울 시계로부터 녹양동까지 국도 제3호선 우회도로가 사패산 서쪽 기슭을 감싸돌고 있다. 국도 제43호선는 천보산 분수령을 넘어 철원군 방면으로 연결되는 등 한수이북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의정부시는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부각되어 왔다. 시의 외곽에 도봉산, 수락산, 천보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의정부시의 행정 구역은 14행정동, 610통이고, 전체 면적은 81.54 km²이다.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44만1584 명, 17만9505 가구이고, 동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의정부시의 인구는 2011년 현재 430,994명이며 인구 밀도는 5,286명/km이다. 0~14세 인구는 17.6%, 65세 이상 인구는 9.4%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3.0%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높고, 유소년 인구부양비는 24.2%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 인구부양비는 12.9%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8.1로 여자가 다소 많다. 의정부시의 인구추이 2014년 의정부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107,774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6,846명으로 6.4%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100,928명으로 93.6%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7.4%), 숙박 및 음식점업(13,1%)과 교육서비스업(11.6%),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11.0%)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의정부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410,917명이고 주간 인구지수가 88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4,042명 유출인구는 82,951명이다.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1,164명, 유출인구는 12,854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50599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원미구 원미구(遠美區)는 부천시의 중부에 있던 구이다. 중동신도시와 상동택지지구가 조성되어 있다. 구의 이름은 구청소재지인 원미동에서 따왔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이 통과하고,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이 구의 남부를 지나며 옛 소사구와의 경계를 이루었다. 서울특별시 구로구 및 인천광역시 부평구와 경계를 이루기도 했다. 2016년 7월 부천시가 책임읍면동제를 실시하면서 부천시의 모든 일반구는 폐지되었고, 이때 원미구 또한 폐지되었다. 소사구 소사구(素砂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시 남부에 있는 구였다. 2016년 7월 4일 책임읍면동제의 시행으로 인해 소사구가 폐지되었다. 부천시의 구시가지에 해당하며, 주요 교육 기관이 자리 잡고 있다. 구의 남부에는 성주산이 솟아 인천광역시 부평구, 시흥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북부는 경인선 철도를 따라 원미구와 구분된다. 종교 취락으로 유명한 천부교의 신앙촌이 범박동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범박동이 재개발됨으로써 신앙촌은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면적은 12.83km (시의 24%)이며, 개발제한구역은 4.04km(구 전체의 31.5%)이다. 오정구 오정구(梧亭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시 북부에 있었던 구였다. 오정구의 면적(km), 인구(명)는 다음과 같다. 광명시 광명시(Gwangmyeong City 光明市)는 경기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다. 조선시대부터 서울특별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시흥군에 속하였다가 1981년에 시흥군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광명시는 동쪽으로 서울특별시 금천구, 북쪽으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서쪽으로 시흥시와 부천시, 남쪽으로 안양시와 접하고 있다.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구름산과 도고내 고개가 시역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낮은 평야지대이다. 일직동에는 KTX 광명역이 개통되었다. 시외 전화번호는 서울특별시와 같은 02를 사용한다. 시청은 철산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8개 동이다. 지금의 영등포, 금천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장수왕 이후로 잉벌노현(仍伐奴. 순우리말 '늠내')에 속했으며 통일신라때 곡양(穀壤)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때는 금주(衿州)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명칭이 금주에서 금천(衿川)으로 바뀌었고 태종 14년(1413년)에 과천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고, 또 양천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한 해 만에 혁파하였다. 태종 16년(1415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 과천과 병합했다가 얼마 못 가서 복구하였다. 이후에는 금천(衿川)이라고 하였는데, 금천현은 현내면, 동면, 서면, 남면, 상북면, 하북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의 광명시 지역은 금천현 남면과 서면에 속했는데, 남면은 지금의 광명시 서부, 서면은 지금의 광명시 동부에 해당된다. 참고로 현내면은 지금의 금천구, 상북면과 하북면은 지금의 영등포구, 동면은 지금의 관악구와 동작구 일부에 해당한다. 1795년(정조 19)에 금천현이 시흥현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윤 5월 1일,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개편되어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고, 이듬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시흥군 남면과 서면이 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여러 마을의 지명이 통폐합 되어 지금의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노온사동, 가학동, 소하동, 일직동이라는 지명으로 굳혀졌다. 인근의 영등포 지역이 1936년, 1949년에 차례대로 경성부(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인접지역인 지금의 금천지역(당시 시흥군 동면)이 1963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이외에도 광명시와 인접한 고척동, 개봉동, 천왕동은 이 시기에 서울로 편입되었다. 현대적인 광명시의 역사는 1963년 9월 17일 시흥군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건설부 고시 제547호) 에 편입되면서 주택지구로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광명리(지금의 철산1동인 철산리 일부 포함)는 서울 개봉지구의 일부로서 시가지로 개발되었고 그 대표적인 주택단지가 현재의 광명동 한진아파트 단지 자리인 광명아파트 단지였다. 철산리는 서울 구로공단을 배후로 하는 택지지구로의 개발이 계획되었다가 시 승격 이후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광명지역은 서울특별시의 통화권(지역번호 02)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1970년에 광명리, 철산리 지역이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는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가 되었다. 1979년에는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다. 이 일대를 당시 서울의 신생 자치구인 구로구에 편입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등 서울특별시로 편입시키는 안이 여러 번 고려된 적 있었으나 서울집중억제 정책으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서울 편입 논란의 근원이 되고 있다. 서울 편입 무산으로 결국 1981년에 시흥군 광명출장소 지역을 포함한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시 승격 이후에 서울특별시를 배후로 하는 본격적인 베드타운으로 성장하여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며, 2010년 전후로 소하동에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광명시는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서울특별시, 서쪽은 시흥시와 부천시, 남쪽은 안양시와 접하고 있다. 광명시는 동서간 6.55 km, 남북으로 10.32km를 뻗어있으며, 전체 면적은 38.5km이다. 광주산맥의 끝 부분에 해당하는 구름산과 도고내 고개가 시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해발 30~290m 내외의 낮은 평야지대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하안동 지역에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의 월경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서울안천초등학교와 안천중학교, 서울금천경찰서 관할의 지구대 1개소, 독산1동 주민센터 분소까지 소재하고 있다. 반대로 서울 구로동 지역에는 철산동의 월경지가 있는데, 유수지와 모 대기업의 물류센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광명시의 행정 구역은 18개동 487통 3,115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구는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33만9484 명, 12만7461 가구이다. 광명시의 면적은 38.5 km²(전·답 7.8 km², 임야 14.1 km², 대지 7.1 km², 기타 9.5 km²)이다. 광명시의 인구는 2012년 6월에 35만5658 명으로 정점에 이른 후 완만하게 감소하고 있는데, 이는 서울특별시의 인구 추세와 비슷하다. 광명시의 인구는 2016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 광명시의 농업인구는 1960년까지 전체인구의 70%를 차지하였으나, 시 승격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한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도시화가 더딘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하우스 재배 등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고등채소와 과실류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전체 인구의 1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반면, 도시화와 더불어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1985년도 전체 산업별 취업자 중 제조업 종사자 비율이 50.7%였으나, 1990년에 80.6%로 급증하였다. 업종별로는 조립금속, 기계장비 제조업이 주종을 이루고 섬유류, 화학섬유 공업도 발달해 있다. 현재 약 300여 업체가 광명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기업의 중공업 공장과 자동차 공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중소기업들이다. 지역적으로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서울 구로디지털산업단지와도 인접해 있다. 철산역 인근 상권은 경기도 내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변의 서울 남서부 등지에서 몰려드는 유동인구가 많다. 반면에 광명시 상권이 영등포나 목동의 상권에 종속적인 경향도 존재한다. 광명사거리역 인근에는 상설 재래시장인 광명시장이 상권을 쥐고 있으며, 그 주위에 여러 옷 상점이 밀집해있다. 2010년 이후에는 소하동에 이마트 광명소하점과 코스트코 본사 및 광명점, 이케아가 들어섰다. 광명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12조 9172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26억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조 7231억원으로 44.3%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7조 1915억원으로 55.7%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위성도시로서 도소매업(8.46%)과 건설업(8.31%), 부동산업 및 임대업(5.21%)과 사업서비스업(4.08%)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광명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85,844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1.9%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2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5,324명으로 17.9%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70,518명으로 82.1%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9.5%), 숙박 및 음식점업(11.0%)과 교육서비스업(9.7%), 보건업 및 사회복지 서비스업(8.5%)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광명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323,653명이고 주간인구는 256,09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79로 더 주간인구가 더 적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2,205명, 유출인구는 87,979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312명, 유출인구는 13,102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67,563명 더 많다.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광명역에서 KTX를 이용할 수 있다. 추후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이 KTX 광명역까지 연장하려는 장기적 계획이 수립되어 있으며, 경강선 (월곶-판교선)과 신안산선도 KTX 광명역을 경유하는 노선을 계획 중에 있다. ITX-새마을,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등의 일반 열차를 이용하려면 영등포역으로 가야 한다. 1999년(시범 통합), 2004년(영구 통합)에 서울특별시 구로구, 금천구와 동일한 택시사업구역으로 통합되어 택시요금체계는 경기도의 것이 아닌 서울특별시의 것을 따른다. 철산대교는 서부간선도로 및 서해안고속도로와 직결되어 있어 출퇴근 시간마다 심각한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수출의 다리로 인한 병목현상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증 문제로 철산대교는 수도권 지역 교통정보 방송에 단골로 나오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내 교통체증 비용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는 경부선 서울시내 구간 지하화의 찬성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베드타운으로 관내에 학교가 많이 소재하고 있으며, 소하동 택지지구 개발로 여러 학교들이 추가로 신설되었다. 1997년 충현고, 광문고 신설이전까지는 고등학교 부족 문제가 심각했으며, 이로 인한 중학생의 관외 전출 및 인근도시로의 통학이 문제가 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2000년대 중후반까지 이어졌다. 일부 서울 접경 지역(고양시 덕양구 대덕동·북한동, 구리시 아천동 등)과 다르게 광명시의 학군은 서울특별시의 학군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었으나, 2013년부터 안산시, 의정부시와 함께 평준화 지역으로 전환되었다. 가학광산은 1912년부터 1972년까지 금과 은, 아연과 구리 등을 채굴하던 수도권 최대의 금속 광산이었다. 폐광 이후, 한동안 소래포구의 젓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광명시는 2011년 동굴과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광명시의 상수도는 광명시에서 관할하는 노온정수장이 맡고 있다. 해당 정수장은 팔당호에서 취수한 원수를 사용한다. 광명시는 1990년까지는 서울특별시의 수돗물 급수지역에 속했으나 1988년 인천직할시 주도로 노온정수장이 준공되면서 1990년에 서울특별시 급수지역에서 분리되어 인천광역시 수돗물 급수지역에 편입되었다. 노온정수장은 광명시만 관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과거 인천광역시 산하의 광역 정수장이었다보니 급수지역에는 광명시 뿐만 아니라 부천시 일부, 시흥시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 노온정수장의 관할이 인천광역시상수도사업본부에서 광명시로 넘어간 것은 2009년의 일이다. 광명시 중에서 현재 서울시 수돗물이 공급되는 곳은 광명대교 인근 철산1동 월경지 뿐이다. 예전에 생활하수는 목감천, 안양천으로 그대로 방류되었으나 1987년 서울특별시 안양천하수처리장(현 서남물재생센터) 준공 이후로 1988년 9월 7일 광명시가 서울특별시 하수처리구역에 편입되어 제2경인고속도로 이북 지역에서 배출되는 하수는 서울특별시에서 위탁처리하고 있다. 일직동은 안양시 박달하수처리장 처리구역이며, 학온동은 하수처리구역이 아니다. 시 승격 이전에는 서울특별시의 단순한 근교 시외 베드타운이 아닌 서울특별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잠정적인 서울 편입 예정지로서, 광명리(현 광명동) 일대와 철산리 일부가 개봉택지지구의 일부로 개발되었고, 철산리(현 철산동) 일대와 하안리 일부는 구로공단 배후 거주지로 계획된 역사가 있다. 광명시 하안동 소재의 서울특별시립 근로청소년회관과 근로미혼여성 임대주택은 이러한 시절의 흔적이다. 현재도 광명시는 부천시·안산시·시흥시 등 경기도 서부권이 아닌 서울특별시 서남권(구로구·금천구·영등포구·양천구)과 하나의 생활권에 속해 있으며, 전화, 택시, 시내버스, 지하철, 하수처리 등에서 서울특별시의 인프라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광명시가 금천구와 고용박람회를 공동개최 했을 만큼 서울 금천구와 동일한 경제권(지역노동시장권)을 이루고 있다. 반면 법원, 검찰청 등 사법서비스는 가까운 서울시 양천구의 서울남부지방법원·검찰청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거리가 먼 안산시의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검찰지청을 이용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광명시에서는 생활권과 행정구역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시에 편입해야 한다는 논란이 오랫동안 지역사회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고, 최근에는 잠잠해졌지만 경기도의 다른 기초자치단체와의 통폐합 문제가 불거진다면 언제라도 다시 점화될 수 있는 지역 쟁점사항이다. 2015년 여론조사에서도 서울 편입을 원하는 주민여론이 압도적인 것으로 나왔다. 철산동과 서울 독산동의 안양천 월경지 문제는 1995년 경계조정 당시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까지 남아 있다. 2009년 전직 광명시장 출신의 광명갑 국회의원 백재현이 서울 편입 법안을 발의한 바 있으나, 광명시의 서울특별시 편입이 서울특별시 교통 정책으로 인한 버스 감차문제, 서울 집중심화, 도시의 자족기능 및 광명지역의 자치성 저해 등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반대론이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안에서는 광역자치단체 경계 조정이라는 제도적 문제 때문에 광명시의 서울 편입이 고려되지 않았고, 오히려 역사와 생활권이 이질적인 부천시와 통폐합하는 방안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12대 부터 임기기간을 4년으로 정함) 평택시 평택시(平澤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서남부에 있는 시이다. 1995년 5월 10일 송탄시와 평택시, 평택군을 통폐합하여 도농복합형태의 평택시가 출범하였다. 동쪽은 용인시와 안성시, 북쪽은 오산시, 화성시와 접하고, 남쪽은 아산만을 경계로 남쪽으로 충청남도 아산시, 천안시, 당진시와 경계를 이룬다. 행정구역은 4읍 5면 13동이다. 시청은 비전동에 있다. 평택시는 크게 남부, 북부, 서부의 3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북부 3면·7동(옛 송탄시 지역 등)의 민원을 담당하는 송탄출장소가 서정동에, 서부 3읍·2면의 민원을 담당하는 안중출장소가 안중읍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평택시는 경기도의 남단에 위치하며, 동쪽은 안성시에 남쪽은 충청남도 천안시, 아산시에 접하며, 서쪽은 아산만, 서북은 화성시, 동북은 오산시, 용인시에 접하고 있다. 동서간으로 33.4 km이며, 남북으로 32.9 km의 길이이다. 지질은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기반암은 주로 화강암이며 하천 연변에는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 침식평야와 충적평야로서 전 지역이 고도 64미터 이하이다. 시 동북부는 대체로 구릉이 많으며 무봉산·천덕산·부산 등의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으로 갈수록 낮다. 남부는 동쪽 안성시와 북쪽 화성시 지역으로부터 각각 흘러내려오는 안성천과 황구지천이 아산만으로 흐른다. 연안은 광막한 평야로 경기의 곡창을 이루고, 서부는 다소 구릉의 기복이 있으나 높은 산은 없다. 평균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1월 평균 기온은 -4.5 °C로, 경기도에서 가장 따뜻하며 8월 평균 기온은 26.4 °C로 경기도에서 가장 덥다. 연평균 강수량은 1,100mm, 7월 평균 강수량은 283.4mm, 8월 평균 강수량은 207.3mm로 평균 강수량이 경기도에서 가장 적은데 이는 지형성 강우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적기 때문이다. 평택시의 행정 구역은 4읍 5면 14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부에는 송탄출장소를, 서부에는 안중출장소를 각각 두고 있다. 평택시의 면적은 458.12 km²이고, 인구는 2017년 6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476,353명(남 243,730, 여 232,623), 200,333가구이다. 2010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평택시는 0~14세 인구가 19.3%, 65세 이상 인구가 9.6%를 차지한다. 생산연령 층인 15~64세 인구는 71.1%를 차지하여 전국 평균(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7.1%로 전국 평균(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3.6%로 전국 평균(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 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4로 남자가 다소 많다. 2007년 6월에 인구가 40만명을 돌파했으며, 이후 꾸준히 인구가 늘어 2015년 12월에 46만명을 넘어섰으며 2019년 5월 50만명을 돌파했다. 평택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376,891명이고 주간인구는 399,485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06으로 높다.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48,184명, 유출인구는 25,922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6,509명,유출인구는 6,177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22,594명 더 많은데 이는 산업시설이 많이 이전해온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평택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59조3034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5339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46조2328억원으로 78%의 비중을 차지한다. 상업 및 서비스(3차산업)은 12조 5367억원으로 21.1%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최근 대규모 산업단지 건설로 인하여 건설업(3.1%)과 도매 및 소매업(2.5%), 사업 서비스업(2.1%)과 전기, 가스, 증기 및 수도사업(2%)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평택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195,771명으로 경기도 총 종사자 수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406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78.129명으로 39.9%를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117.236명으로 59.9%를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27.1%)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1.3%), 숙박 및 음식업(9.2%)과 사업 서비스업(6.4%), 운수업(5.8%), 교육서비스업(5.8%)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경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각 역에는 수도권 전철이 운행하며, 서정리역과 평택역에서는 간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폐교됐던 구. 서탄초등학교 금각분교를 평택시민과 수도권 주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체험학습장으로 단장해 운영하고 있고 8개교실과 창고를 개조해 회화. 도예, 목공예, 석화공예, 웃다리박물관 등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전문 문화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하면서 일반 시민들을 위한 강좌와 체험학습을 진행한다. * 지영희국악관 1층 농경유물 역사관에는 계절별 농기구 및 생활소품 등 총 11종 160여점의 농경생활유물 전시, 평택농악(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디오라마, 한 해 동안 농가에서 해야 할 일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농가월령가를, 2층 세계농업과 평택농업의 미래 전시관에는 평택쌀과 배의 역사 및 품종별 전시 및 다양한 쌀·배 가공품 전시, 세계농업을 소개하는 멀티큐브, 천연염색으로 만든 오방색 전통직물과 다양한 천연염색염료 나비의 생활사 등을 전시하고, 야외전시장도 마련되어있다. 자연테마식물원은 171종 5,200본에 이르는 다양한 식물 및 다양한 볼거리로 연중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4월말 ~ 5월초 매년 대규모 꽃축제가 개최된다. * 시민건강걷기대회(4월경) 동두천시 동두천시(東豆川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북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포천시, 서쪽과 남쪽은 양주시, 북쪽은 연천군에 맞닿아 있다. 시청을 기준으로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47km 거리에 있다. 대한민국 북부 전방에 위치하여 국방 안보상 중요한 도시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전쟁 이후, 동두천시 총 면적의 39%에 주한미군이 주둔해 왔으며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할 예정이다. 2006년 수도권 전철 1호선 전철의 개통과 국도 제3호선 신평화로가 신설되었고,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세종포천고속도로가 건설이 예정되어 있다. 동두천시는 경기도 북단에 위치한 도시로, 동쪽은 탑동동이 포천시에 접하며, 서쪽은 상패동이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에 접해있다. 남쪽은 송내동이 양주시 봉양동에 접하며, 북쪽은 하봉암동이 연천군 전곡읍과 접해 있다. 면적은 동서간으로 12.9km, 남북으로 15.3km이며 총면적은 95.66km이다. 일대는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산들은 광주산맥이 태백산맥의 철령부근에서 갈라져 서울 근처에 이르는 산으로서 동두천 일대에 험준한 산지는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동쪽으로는 국사봉을 주봉으로 왕방산, 해룡산이 둘러 쳐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천보산의 회암령에서 서북으로 칠봉산이 솟아 그 지맥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남쪽으로 높고 잦은 봉우리를 보여준다. 서쪽으로는 마차산이 에워싸고 북으로 뻗으며 옥녀봉이 북계를 이루고 있다. 동두천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해, 기온 연교차가 큰 북부 대륙성 기후와 남부의 난온대 기후가 같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특히 겨울의 기온은 북서계절풍이 불어 위도에 비해 아주 낮은 기온을 보여준다. 연평균 기온이 11.7℃ 내외이고 1월 평균기온은 -3.5℃이며, 8월 평균기온은 24.4℃로 연교차가 30℃가 넘는다. 가장 추운 달과 가장 더운 달의 기온차가 매우 커서 여름철은 열대기온을 이루는가 하면, 겨울철은 한대기온을 이룬다. 여름철은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의 지배로 고온이 되고, 겨울철은 한랭건조한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으로 저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527.3mm이고, 연평균 상대습도는 67%, 연평균 일조시간은 7.6시간이다. 평균 초설은 11월 20일경이고, 마지막 눈은 3월 20일 전후이며, 처음으로 결빙되는 시기는 10월 20일경, 얼음이 마지막으로 녹는 시기는 4월 초순으로 경기도의 평균치와 거의 같다. 동두천시의 행정 구역은 8동, 149통, 1,183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두천시의 면적은 경기도 면적의 0.9%에 해당하는 95.66km이며 이 중 미군 공여지가 전체 면적의 42%인 40.63km에 이른다. 군사시설보호구역은 전체 면적의 24%인 22.99km이다. 동두천시의 인구는 2012년 12월 31일 현재 40,886세대, 97,175명이며, 인구 밀도는 974.4명/km이다. 0~14세 인구는 17.3%, 65세 이상 인구는 12.4%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0.3%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4.6%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7.7%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높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0.5로 남자가 다소 많다. 동두천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3조1582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0.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농림어업(1차산업)은 332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8140억원으로 25.8%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2조3110억원으로 73.2%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전기, 가스, 증기 및 수도 사업(12.1%)과 도매 및 소매업(8.1%),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7.6%)과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6.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동두천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26,559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0.6%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6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5,322명으로 20%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21,231명으로 79.9%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숙박 및 음식점업(14%)과 도소매업(13.4%),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11.5%)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동두천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89615명이고 주간인구는 8330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3으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8213명, 유출인구는 13612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287명, 유출인구는 2203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6315명 더 많은데, 이는 안산에서 인천과 가껍거나 교통이 편리하다 소요산은 경기의 작은 금강산(소금강, 小金剛)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서울특별시에서 북쪽으로 44km지점에 있으며, 동두천시청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5 km 지점에 있다. 높이는 536m이다. 소요산 입구에 위치한 소요산역은 1호선의 시발역이다. 동두천시의 '무주구천동'이라고 불리며 동두천 시내에서 동쪽으로 7 km 가량 떨어진 왕방산과 그와 이어진 국사봉 사이로 길게 이어져있는 6km가량의 계곡이다. 일대에 광암동과 왕방부락이 있으며 왕방계곡으로도 불리며, 경기도 향토지적재산으로 선정되었다. '탑동계곡'의 '탑동'이라는 이름은 주변에 고려 말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3층 석탑은 일제강점기에 유실되어 함께 놓여있던 석불만이 남아있다. 동두천은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이 국내 최초의 록 밴드 애드훠(ADD4)를 결성하고 활동한 곳으로 록과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으로 평가 받고 있다. 미군의 문화적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출발한 쇼단 문화는 역설적으로 이 지역에서 걸출한 음악인들을 많이 배출하게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중현(애드훠), 유현상(백두산), 인순이, 나미, 페티김, 현미 등이 있다. 1999년 1회 공연을 계기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두천록페스티벌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록 페스티벌이며 매년 8월 중에 열린다. 미군기지(캠프 님블), 소요산, 동두천종합운동장(어등산레포츠공원) 등지에서 개최된다. 동두천록페스티벌은 사실 상 쇼단의 역사를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로 재편하고 한국 대중음악 1세대를 기념하는 공연이다. 페스티벌 초창이, 신중현은 페스티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2004년 1회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5월 청소년의 달을 기념하여 개최된다. 1, 2부로 진행되며 1부는 경연대회, 2부는 유명 가수들의 축하공연으로 꾸며진다. 동두천 청소년들의 끼를 북돋고 동두천의 음악적 감수성을 고취시키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동두천시 면적의 대략 70%는 임지이다. 시민들은 산에 익숙하고 산에 정겹다. 매년 시월 중 소요산, 지행동 차없는 거리, 시민회관 공연장, 전시장 등에서 개최되는 축제. 동두천 시민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축제이다. 2007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두천시에서 개발한 35km의 임도를 이용해 매년 8월 중에 열리는 산악자전거 대회이다. 집결지는 종합운동장이다. 2011년 대회부터는 국제대회로 개최되고 있다. 시의 면적의 39%에 해당하는 32.31 평방 킬로미터가 주한 미군에 공여되어 있고 미군 제2보병 사단의 광대한 기지가 존재한다.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의 수장(혹은 국방부 장관 등)은 임기 중 1회 이상 동두천 미군기지를 방문하고, 한국의 대통령 혹은 그에 상당하는 고위급 인사가 종종 동두천 미군 기지를 방문한다. 미군 기지 훈련장 종전까지 운영되어오던 5개의 캠프와 한 개의 훈련장의 철수 계획은 다음과 같다. 1952년 이후 동두천에 주둔해 온 주한미군의 부대가 '2016년 중 평택 이전'을 확정 지음에 따라 동두천시 관내 미군 공여지에 대한 개발 계획이 본 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2011년 1월, 국무총리실에는 '동두천 발전 테스크포스(TF)'가 설치되었다. 동두천은 지난 60여 년 간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크게 공헌한 점이 분명함으로, 그에 마땅한 지원을 하는 것이 타당하나, "타 지역과의 형평성"(행정안전부)을 이유로 '동두천지원특별법'이 장기 표류하고 있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무관심에 반발하여 2010년, 동두천은 시 면적의 43%에 달하는 미군 공여지를 모두 '공원화 하겠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국무총리실 TF팀은 이런 동두천시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한다. 현재 확정된 공여지 개발계획으로는, '캠프 님블'(2006년 반환) 내에 아시아 최대 침례신학 대학인 침례신학대학교의 캠퍼스 설립이 있다. 종전 캠프 님블 부지 약 4만 8000m(약 14,500평) 가운데 도로와 공원 부지를 제외한 약 2만 5000m(약 7,500평) 규모에 들어서게 될 침례신학대학교 동두천 캠퍼스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부지 환경오염 정화작업이 마무리(2011년 말 예정)하고, 행정절차를 거쳐 2012년 상반기부터 착공에 들어가 2013년도에 1학부 1대학원 정원 380명으로 시작으로, 2017년까지 4학부 7전공(대학원 포함) 1,300명으로 정원을 늘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12년 5000m 규모의 제1강의동을 완공하고 이후 2016년 말까지 추가 건물을 완공해 캠퍼스 설립을 완료할 계획이다. 지식경제부는 2010년 12월 29일에 '5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발표하고, 동두천에 LNG복합화력발전소 건설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그간 동두천에 발전소 건립을 추진해 온 (주)한국서부발전과 (주)삼성물산은 현 광암동 캠프호비 외곽 20만m 부지에 1조3천440억원을 들여 설비규모 1천500MW(750MW×2rl)의 가스터빈 복합발전 방식의 동두천LNG발전소를 건립한다. 2012년 착공, 2014년 6월 완공 예정이다.현재 완공되었다. 동두천시는 관내 광암동 일대 짐볼스 훈련장(2006년 반환)을 대규모 복합 레저스포츠단지로 개발하고자 2011년 3월, 민자사업을 공모한다고 동년 1월 19일 발표했다. 시는 제안서 접수 후 전문가 검토를 거쳐 2011년 안에 사업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사업 대상 부지는 짐볼스훈련장 571만m로, 부지의 70% 이상이 생태 1등급의 산악지형으로 구성돼 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민선5기 취임사에 밝힌 '경기도립 통일대학(가칭)'을 동두천에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다. 공약의 주체인 도지사 역시 동두천에의 '경기도립대학교' 설립을 적극 지지함에 따라, 동두천에의 설립이 유력해지고 있다. 동두천시에서는 2010년 8월 10일, '통일대학'을 유치에 관한 건의서를 경기도에 제출한 바 있다. 또한 '유엔평화대학' 설립 역시 추진되고 있다. '유엔평화대학'은 유엔총회 결의와 유엔평화대학설립조약에 의해 설립될 국제기구 겸 국제대학원대학이다. 또한 2010년, 정부에서는 '접경지역 초광역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이 대학의 설립을 포함하여 국가시책으로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와 동두천시에서는 이 대학의 설립이 통일대학과 함께 동두천을 국제평화와 통일한국의 연구ㆍ교육도시로 만드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동두천시에 등록된 외국인은 1997년 521명이었으나 2002년 1,562명으로 5년간 세배가 늘었다. 2009년 6월말 현재, 총 외국인은 2,558명이고 이 중 여성이 1,411명인데, 이중 필리핀 국적 여성이 722명(남성 105명)으로서 50%를 차지한다. 필리핀 국적 여성은 미등록자를 합하면 더 늘어나는데, 대부분 보산동에 있는 클럽에서 일하고 있다. 캠프 케이시 정문쪽인 보산동에는 45곳, 후문쪽인 광암동에는 15곳의 클럽이 성업 중이다. 1990년대 이래 줄지도 늘지도 않은 규모이다. 러시아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빠져나갔고 필리핀 여성들이 자리를 채웠다. 경기 동두천양주교육지원청에서 관할하고 있는 교육시설 현황은 고등학교 11개교, 중학교 15개교, 초등학교 41개교. 4년제 대학이 2개가 있다. 안산시 안산시(安山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서해안에 인접한 시이다. 북쪽으로 시흥시와 안양시, 동쪽으로 군포시와 의왕시, 수원시, 남쪽으로 화성시와 접하고 있으며 대부도는 월경지이다. 대부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의 선재도와 연륙교가 연결되어 있으며, 최남단에 위치한 풍도는 지리적으로 충청남도 당진시 및 서산시에 근접한다. 반월국가산업단지, 시화국가산업단지를 배경으로 공업 도시로 발전하여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들어와 있다. 원곡동 일대를 다문화 특구로 지정하기도 하는 등 외국인 노동자들의 다문화 지역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고속국도나 수도권 전철 등으로 서울 등지와 접근성이 높아졌으며, 시화산업단지 개발로 공업지역 확장과 함께 고잔신도시 등을 개발하였다. 2009년 11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지방 정부 최초로 시청을 24시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자치법 제175조에 의거 특례를 둘 수 있는 특정시이며 전국대도시시장협의회 회원시이다. 안산에서는 매년 거리극 축제가 열린다. 안산(安山)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쓰였다. 신라 시대 장구군(獐口郡)으로 불리던 것을 고려 시대인 940년 안산군(安山郡)으로 개칭하였고, 1018년에는 안산현(安山縣)이 되었다. 1906년 9월 24일 광주군의 북방면, 성곶면, 월곡면이 안산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 안산군이 폐지되면서 '군자면'과 '수암면'이 시흥군으로 편입되고 광주군에서 8년 전에 편입되었던 북방면, 성곶면, 월곡면은 '반월면'으로 개칭되어 수원군에 편입되었다. 1976년 이곳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할 때나 1979년 반월지구출장소를 설치할 당시에만 해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은 가장 인지도가 높은 반월(半月)이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반월지구출장소의 시승격을 추진할 때도 도시의 명칭은 반월시로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월공업도시 기공식 당시 행사에 참석하였던 국회의원 오학진(吳學鎭)은 "전체 면적의 1/3밖에 안되는 반월면을 도시 이름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원래 지명인 안산군(安山郡)을 따서 안산시로 이름을 지어달라"고 언급한 바 있고, 시승격 추진 당시 시흥군 수암면에 거주하던 향토사학자 유천형(柳天馨), 이승언(李承彦) 등은 '반월시라는 명칭은 역사적 정통성이 없이 일제가 임의로 만들어 붙인 이름'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이 승격되는 도시의 명칭은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안산시로 해야 한다고 정부에 수 차례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검토한 결과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하여 최종적으로 반월지구의 명칭을 안산시로 확정, 1986년 1월 1일 승격시켰다. 고대부터 좋은 수산물과 소금으로 유명한 어촌이였으며, 일찍부터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남부 지역과 함께 하나의 지역으로써 마을과 어시장이 형성되어 수리산 서쪽에 해당하는 현재의 상록구 안산동 지역인 수암 지역을 중심으로 중부 지방의 주요 고을로 발전했다. 특히 중국으로 가는 주요 포구 중 하나인 마포의 길목에 위치했으며 관내에도 잿머리 포구에서 무역이 시작되었고, 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사대부들이 자리 잡았던 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은 ‘안산(安山)’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조선 초기부터 연성(蓮城)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또한 조선 시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이 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는 염전(鹽田) 지역이었던 곳을 간척하여 1976년 이후에 조성하기 시작한 반월국가산업단지와 배후 지역인 시흥군의 수암면, 군자면과 화성군 반월면 일부가 인구 약 30만의 계획도시인 반월신공업도시로 조성되었으며, 1986년 1월 1일 시로 승격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의 옛 이름인 ‘안산’을 시명으로 택하게 되었다. 안산에 인류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며, 초지동 일대, 대부도, 인근 시흥시의 오이도와 시화호 등에서 여러 조개더미 유적과 선사 유적 군락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선부동과 월피동 일대에서는 지석묘를 비롯하여 10기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또한 1995년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중 화성군 인접 지대에서는 석영제의 구석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안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지석묘들은 대부분 남방식 고인돌이지만 선부동의 지석묘는 탁자식이며, 인접한 광명시 가학동에서도 탁자식 지석묘가 발견되는 등, 안산은 일명 남방식과 북방식 지석묘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문화적 경계 지역의 일부이다. 원삼국 시대와 삼한 시대에 안산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대 국가의 성립 증거는 많지 않다. 안산과 시흥 지역에서 나타는 고고학 유물들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때문에 삼한 시대의 국명에 관한 연구에서도 안산 지역은 소외되고 있다. 진수의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마한(馬韓)에 50여 개의 군장 국가가 있던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중 안산 지역과 가까운 곳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는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수원 지역의 모수국(牟水國)이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에 속해 있었지만, 백제 영토 시대의 기록은 얼마 남아있지 않으며, 단지 고구려 장수왕 시대에 안산 지역이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장항구현(獐項口縣)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가, 551년 성왕에 의해 다시 백제의 영토로, 2년 뒤에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경덕왕 때에는 안산현(安山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신라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성태산성이 시내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후삼국 시대에는 사료의 기록을 통해 신라 효공왕 4년(900년) 즈음까지는 태봉국(후고구려)으로 이 지역이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태봉국의 궁예가 왕건에 의해 추방되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초 장구군은 안산군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군으로서의 지위는 변동되지 않았다. 광종 23년 (972년)에 서희가 송나라로 출발하였을 때 안산을 이용하였으며, 여기서 서희가 겪은 설화에서 잿머리 성황제가 유래하였다. 그 후, 성종 14년에는 10도(道)제의 정비에 따라 안산 지역은 관내도(關內道)에 예속되었다. 헌종 9년에는 행정구역의 정비에 따라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되어 수주(水州, 수원)에 예속되었다. 문종 23년 이후부터 안산현은 경기에 예속되어,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의 지휘를 받게 되어 개성부를 거쳐 중앙 정부와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원종 12년 (1271년) 몽고군이 대부도와 시흥의 소래산 등지로 침입하였을 때, 대부도 별초와 민병대들은 부사 안열(安悅)의 지휘 하에 몽고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군공을 인정받아 안산현이 소속되어 있던 수원부는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충렬왕 33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고, 지사가 임명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지사는 고려 말까지 파견되었으며, 공양왕 2년 (1390년) 경기도가 좌·우도로 분할됨에 따라 경기좌도에 예속되었다. 이 시대에 안산 잿머리(城頭)의 포구는 큰 배들이 오갈 수 있는 외항으로 축조되었으며, 무역을 위해 여러 중국인들이 체류하였다. 안산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경기좌도에 속해있었다. 태조 5년 (1396년) 궁중에 해산물을 진상하는 기관인 사옹원분원이 직할하는 안산어소가 설치되었으며, 태종 2년 (1402년) 경기좌·우도의 통합이 이루어진 후에도 안산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태종 13년 (1413년) 전국을 8도로 재편성하면서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종4품의 군수와 정9품의 훈도가 파견되었다. 안산이라는 지명 외에 세조 때부터는 연성(蓮城)이라고도 흔히 불렸다. 이는 세조 9년 (1463년) 문신 강희맹이 명나라 남경에 갔다가 귀로에 연꽃씨를 가지고 와, 안산의 관곡지(官谷池)라는 연못에 시험 재배한 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목내동 부근에 관아(館衙)가 설치되었으며, 1441년 수암동으로 이전하였고 다시 1669년에는 관아의 위치를 안산읍성 내로 이전하였다. 조선 시대의 안산 지역에는 여러 사대부들이 살았는데, 초기에는 강희안과 강희맹 형제, 중기에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와 장유, 후기에는 이익과 강세황 등이 안산에서 활동했다. 1895년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었을 때는 시흥군 및 과천군과 함께 인천부에 예속되었으나, 다음해 13도제로 대체된 이후에는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다. 1906년 9월 24일에는 측령 제49호로 지방구역 정리건이 반포됨에 따라 광주군의 견아상입지(현재의 상록구 일동·이동·사동·본오동·반월동 등 구 반월면 지역)가 안산군으로 이속되었다. 현재 안산시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는 풍도에서는 조선 말 청일 전쟁에서 일본과 청나라 간에 풍도해전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시흥군 수암면, 군자면으로 전환되었으며, 일부 지역(반월면)을 수원군에 양도하였다. 1937년에는 안산을 관통하여 수원과 인천 간을 연결하는 수인선 협궤 철도가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72년 대한민국 정부의 철도 노선 정리와 1988년 안산선 전철 개통 이후 운송이 급감하다가, 1995년 12월 31일을 끝으로 운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안산시의 공업 위성도시화가 가속되기 시작하여, 1976년 12월 시흥군과 화성군의 일부였던 안산 일대에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하였으며, 1979년 8월 31일에 경기도 반월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986년 1월 1일에는 출장소에서 지금의 안산시로 승격되었다. 2002년에는 상록구와 단원구 등 2개 구를 새로 설치하면서 구제(區制)를 실시하였다. 안산 신도시의 활동공간은 주거·생산·소비·휴양 공간으로 구분하고, 이들 상호간의 연계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주거기능을 중심으로 한 거주지역과 상업지역을 한데 묶어 주거생활권으로 함으로써 소비공간을 근접시키고, 공업지역의 생산공간을 집단화시켜 주거공간과 완전 분리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이들 공간 사이에 휴양공간을 배치함으로써 도시의 공간 구조에 질서를 부여토록 하였으며, 생산공간과 주거생활공간은 일상생활도시, 즉 자기완결도시로서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통근거리를 3~8km로 구분했는데, 이들은 3개 생활권(군자·수암·반월)을 중심으로 한 생산기능 간의 거리로써 배분된 것이다. 1977년 3월에 착공한 안산신도시 개발사업은, 1단계 사업을 1993년에 완료하고 시화방조제 축조에 따라 유수지 기능을 상실한 녹지지역을 2000년까지 2단계로 개발하여 기존 도시의 기능을 보완할 계획이었다. 안산신도시는 서울을 중심으로 남서부방향으로 반경 35km안의 수도권에 위치하며, 수원과는 14 km, 인천과는 20 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신공업도시로서 서울에 있는 공장수용, 서울의 인구분산과 주택문제 해결, 자족적 독립도시 건설, 서해안개발의 거점확보와 서울유입 인구를 흡수하는 도시로 개발, 신도시 건설의 선도적 역할을 목적으로, 당초 안산신도시는 계획 면적을 42,148,950m 로 잡고 이 가운데 주택지와 공업단지로 개발할 면적은 계획 면적의 41.0%에 해당하는 17,289,334m 이었으며, 59.0%에 해당하는 24,859,616m 는 공원녹지 또는 농지로 보존키로 하였다. 계획 인구는 1차적으로 20만 명으로 잡았으나 도시 발전 추세에 따라 유보농지 7,933,920m 와 일부 녹지의 전용을 전제로 30만까지 수용할 계획이던 것을 변경하여 안산신도시는 2단계 건설사업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된 신도시이다. 안산 반월신도시는 계획할 당시 최초로 도시설계(urban design)를 실시하였다. 도로망 체계는 도시내 교통과 지역간 교통을 완전 분리하고, 시가지내에는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도로가 따로 설치되어 있어, 시민의 안전과 이용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설치되었다. 건설 과정을 보면 녹지의 경우 해안 쪽은 표고 25m 이상, 내륙 쪽은 35m 이상의 구릉과 산림은 보전키로 하고 일부 공장은 설상 배치토록 하였다. 교통체계는 도시 내 교통과 지역간 통과교통을 완전 분리하고 간선도로는 3교차를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시가지 내에는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도로를 계획하였고, 공동구를 설치한 것도 우리 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하수도도 우수와 오수의 분리식을 채택하였다. 이 밖에 노선상업지역을 지양하고 지번 또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거표시제도를 적용·실시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계획들로 평가받았다. 안산신도시 2단계 사업은 개발면적 8,891,000m, 수용인구 140,000인, 수용세대 37,800세대(공동주택 35,437세대, 단독주택 2,363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토지이용 현황은 주거지역 18.9km, 상업지역 2.6km, 공업지역 10.2km, 녹지지역 27.5km로 각각 나뉘어 있으며, 녹지공간의 충분한 확보와 도로, 상·하수도, 기타 모든 도시기반 시설의 계획적인 시행으로 지역주민에게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한편, 안산신도시 건설사업은 충분한 공원녹지를 갖춘 전원도시 성격의 이른바 자기완결형 자족도시를 목표로 하여 이루어져 총 59.20km을 개발했는데, 1단계로 1993년까지 6,551억원을 투자하여 50.22km의 신도시를 개발하였으며, 2단계로 2000년까지 17,430억원을 투자하여 나머지 8.98km을 개발했다. 안산시는 경기도 서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는 중부 지역에 자리잡은 도시이다. 경도 및 위도 상으로는 동경 126도 28분 01초 ~ 126도 56분 29초, 북위 37도 04분 40초 ~ 37도 22분 26초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시의 남쪽에는 대부도와 풍도가 있다. 동쪽은 수원시 권선구, 군포시, 안양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화성시, 북쪽은 시흥시와 접하고 있다. 대부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과 접하고 있고, 풍도지역은 충청남도 당진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144.92km이며, 해안선의 총 길이는 84.5km이다. 행정구역 상으로 속한 도서 지역은 총 14개로, 유인도가 2개, 무인도는 12개이다. 안산시가 포함되어 있는 경기만 일대는 한반도의 중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뻗어나간 광주산맥의 서남단에 위치한 해안 지역으로서, 내륙은 구릉선 산지가 발달한 노년기 지형의 특성이 뚜렷하고, 해안에는 이들 구릉성 산지의 절단과 해식애(海蝕崖)의 발달이 현저한 암석 해안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안산시의 동부는 편암 및 편마암류로 구성된 산지 지역으로, 주릉은 남북 방향으로, 지릉은 북동 방향으로 발달해 있다. 석영편암층이 분포한 지역은 험준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반면, 안산시와 시흥시 부근의 서부 해안 지역은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며, 침식 해안을 이루고 있다. 안산과 시흥 신도시 건설 이전에는 활발한 간척 사업으로 인하여 넓은 갯벌지지대가 육지화되어 염전 지대와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 이후 대부분의 구릉성 산지는 평지화되어 시가지를 이루고 있으며, 시화방조제 건설에 따라 인공적인 시화호가 형성되었다. 북동쪽으로 수리산이 시외곽에 있어, 해발 고도 400미터 이내의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서북 외곽쪽으로 군자산, 시내 북쪽으로 광덕산, 동쪽으로는 노적봉 등의 해발 고도 200미터 이내 구릉지역으로 남서쪽으로 갈수록 낮은 구릉 및 간석지 등의 해안지역이 나타난다. 하천은 신길천, 화랑천, 안산천, 반월천 등이 있는데, 대체로 지방하천으로써 안산시 외곽의 구릉지대에서 발원하여 남남서 혹은 남서 방향으로 시화호, 경기만을 거쳐 황해로 흐른다. 안산시는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여, 온난한 남부 지방과 대륙성의 북부 지방의 중간에 있는 점이 지대에 속해 있다. 또한 안산시는 수심이 얕고 내륙성인 황해와 접하고 있으며, 지형상으로는 경기도의 저평한 평야 지대에 속하는 소규모 구릉성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 기온이 연안을 따라 낮은 특색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안산시는 Cfa로부터 Dwa로 옮아가는 점이 지대로서 한국의 소기후 구분상 중부서안형(DMW)에 속해 있다. 안산시는 해안을 따라 바닷물의 영향을 받은 해양평탄지토양과 내륙의 내륙평탄지토양, 구릉 및 산악곡간지토양, 저구릉지토양, 산록지토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양 분포를 살펴보면 고도별로 해면으로부터 고도 10m에 이르는 해안 지역에는 염류도가 높고 염기성을 띠는 간석지토양이 주로 분포하고, 10~40m의 저평한 하천 유역 지대를 따라서는 충적토양이 분포한다. 또한 고도 40 ~ 150m 사이에서는 적황색의 구릉지토양이, 200m 이상 지대에서는 토층이 얇은 암쇄토와 암석 노출지가 분포해 있다. 지형상 도서 해안지형과 내륙지형으로 나뉘며 식생의 분포도 이러한 형태를 나타내는데, 내륙지역의 나대지와 야산은 대도시 주변의 전형적인 식물상을 보인다. 나대지에는 은행나무, 무궁화 등 식재림과 독새풀, 개피, 냉이 등 음지성 초본이 나타나며 야산에서는 소나무, 상수리나무, 해당화, 제비꽃, 양지꽃 등 소관목과 초본이 하층식생을 이루고 있다. 서부의 해안지역의 식물상은 해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육지식물상과 차이가 거의 없으며, 해안 뻘에서는 염수성 식물이 자생하지만 시화방조제 건설로 인한 뻘의 감소로 염수성 식물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 지역은 중국과 공통된 해루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인천광역시 남동구로부터 연결되는 영동고속도로를 비롯한 여러 도로망이 안산시를 관통하게 되면서 많은 외래 식물이 유입되고 있다. 2002년 11월 1일 안산시는 인구 50만 이상의 조건을 충족하여 상록구와 단원구를 설치하였다. 안산시의 행정 구역은 25개동 1,187통 5,884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산시의 면적은 149.06km(상록구 : 57.83km 단원구 : 91.23km)이다. 2018년 3월말을 기준으로 안산시의 주민등록인구는 668,184명이며 276,182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등록외국인은 54,468명으로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최다이며, 외국인 포함 안산시의 총인구는 722,652명이다. 안산시의 인구는 2017년 현재 670,000명이며 인구 밀도는 4,804명/km이다. 0~14세 인구는 19.1%, 65세 이상 인구는 6.1%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4.8%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높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5.6%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8.2%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5.2로 남자가 다소 많다. 2002년부터 상록구에 두 곳(갑, 을), 단원구에 두 곳(갑, 을)의 선거구를 배정받았다. 상록구 갑구는 사동, 사이동, 해양동, 본오1동, 본오2동, 본오3동, 반월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록구 을구는 일동, 이동, 부곡동, 월피동, 성포동, 안산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단원구 갑구는 와동, 원곡동, 신길동, 백운동, 선부1동, 선부2동, 선부3동으로, 단원구 을구는 고잔동, 중앙동, 호수동, 초지동, 대부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도의회 의원 선거구는 8개로 짜여져 있으며 8명을 선출한다. 또한 안산시의원 의원 선거구는 상록구와 단원구로 나눈 뒤, 다시 8개의 선거구로 쪼개어 18명의 의원과 3명의 비례대표를 선출한다. 안산시의 역대 선거 투표율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들 중에서는 낮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년)에서는 57.1%, 제5회 지방 선거(2010년)에서는 46.3%,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2012년)에서는 47.4%,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2012년)에서는 72.3%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특히 1995년 첫 지방 선거 때부터 2008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의 투표율은 모두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 1986년 시로 승격되어 시청이 설치된 안산시의 시장직은 첫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 1995년까지 관선제 시장이 도맡았으며, 1995년부터는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시장을 선출하기 시작하였다. 민선1·3기 송진섭 시장, 민선2기 민주당 박성규 시장, 민선4기 박주원 시장 대에 이르기까지 안산시의 시장직은 새정치국민회의, 민주당, 신한국당·한나라당이 장악하였으나, 잇따른 시장의 뇌물 혐의로 불명예를 안았다. 현임 민선7기 시장은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선출된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윤화섭이다. 안산 지역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의 국립교육기관으로 향교가 존재했다. 안산향교는 1308년 충렬왕 34년 직후 건립이 추정되며, 조선시대 1569년 선조2년에 안산관아지 인근으로 이전되어, 1944년 시흥향교(현재 과천향교)로 통합때까지 안산향교는 안산 지역의 유교 교육과 학문의 큰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까지 건물은 잘 보전되어 폭격으로 소실된 안산국민학교의 임시 교사 역할 및 창고도 활용했지만 1957년 철거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최초의 근대식 교육 시설로써는 1899년 9월 대한제국시기에 안산군공립소학교(현 안산초등학교)가 개교되었다. 이 학교는 현재의 안산시·시흥시·광명시·군포시·의왕시·과천시·안양시 등이 포함된 경기도 서남부지역의 공립소학교로써 가장 먼저 생긴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이후 안산 지역에는 일제의 조선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따라서 1922년에는 대부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23년 5월에는 반월공립보통학교, 1923년 7월에는 군자공립심상소학교, 12월에는 군자공립보통학교가 각각 세워졌다. 광복 후에는 당시 안산 지역의 초등학교 수는 7개 학교였으며, 미군정기에는 군서공립국민학교와 화정공립국민학교의 2개 학교가 추가로 세워졌다. 현대 시대에는 안산지역의 도시 발전과 함께 많은 수의 초중고 학교들이 설립되었는데, 2009년 3월 기준으로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초등학교는 총 53개교이며, 전체 1,832학급에 총 61,302명의 학생 수를 기록했다. 현대시대에는 고등교육기관으로써 1973년에 구 일동 지역에 2년제 대학인 안산대학교(당시 안산1대학)가 개교한 이래, 1978년에 한양대학교 반월분교(현재의 ERICA 캠퍼스)가, 1994년에는 신안산대학교(당시 안산공과대학)가 개교했다. 2001년에는 서울예술대학이 서울 예장동 기존 캠퍼스에 드라마 센터만 남기고 대학 본부를 단원구 고잔2동으로 이전하였다. 고등학교 진학 제도는 광명시, 의정부시 등과 함께 과거에 비평준화 진학 제도를 채택하여 이러한 제도는 평준화 지역에 비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과 통계가 존재하기도 했으나, 송진섭 전 시장은 임기 중에 안산시의 고교 비평준화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광명시, 의정부시와 함께 안산시를 고교 평준화 지역으로 바꾸는 것을 추진했다. 최근에는 전국연합 학력평가를 앞두고 일선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혹행위를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경기도교육청이 2011년 학과개편안을 승인함에 따라 2011년부터 안산여자정보고등학교는 ‘공연콘텐츠과’의 신설과 함께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일반계 고등학교인 안산고등학교는 1학급이 줄어들었다. 또한 조두순 사건과 부산에서 일어난 김길태 사건으로 초등학생 및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범죄가 대두하자 시는 아동성폭력 방지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안산시는 2013학년도부터 평준화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며, 학교난 해소의 일환으로, 두 곳의 고등학교가 2013년에 새로 개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등학교 확충 정책에도 불구하고 학급 과밀 현상은 여전히 안산시의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 2012년 현재를 기준으로, 안산시의 고등학교 학급 당 인원 수는 평균 37명으로, 수원시, 용인시와 함께 경기도 안에서 4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산시는 정부의 계획에 따라 안산스마트허브의 배후에 세워진 공업 중심의 계획 도시이기 때문에, 농업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고 제조업의 비율이 높다. 안산 산업의 중입이 되는 공업은 시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정부가 안산 지역에 집중적으로 양성해왔기 때문에 공업 종사 인구가 매우 많으며, 안산스마트허브(반월공단)와 시흥과 안산에 있는 시화스마트허브(시화공단)의 2개의 국가산업단지와 지방산업단지인 반월도금단지가 있다. 안산·시흥스마트허브에서 주로 생산되는 것은 조립 금속이고, 그 다음으로 정밀 화학·자동차 부품·전자 부품 등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반월·시화 공단의 70% 이상을 대기업의 하청을 맡는 중소기업이 차지하자 1999년에는 기술집약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사동에 경기테크노파크를 유치, 2003년 5월 개장하였다. 2018년 기준 안산시의 재정자립도는 57.78%로 경기도에서 4번째로 높다. 2014년 안산시 산업의 총 종사자 수는 314,120 명으로 경기도 총 종사자 수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51명으로 비중을 거의 차지하지 않으며,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29,570명으로 41.2%의 비중을 차지하며,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184,499명으로 58.7%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 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 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9.3%), 사업서비스업(13.7%), 숙박 및 요식업·보건업·사회복지서비스업(10.1%)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거지 인근 상업지역에는 홈플러스, 이마트, 롯데마트 등의 대형 할인마트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으며, 2001년에는 고잔 간척지에 로데오 거리 형태로 안산의류상설시장이 조성되었다. 특히 고잔2동(중앙동) 중앙역 인근 상업지역은 안산지역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안산시에 위치하는 주요 의료기관은 다음과 같다. 안산 지역의 주요 철도로 안산선이 있다. 안산선은 수도권 광역철도로, 현재 수도권 전철 4호선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4호선의 안산선 구간이 안산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기 때문에 동서 간의 왕래가 편리하다. 경부선, 장항선 등 일반 여객철도를 이용할 경우에는 인근 다른 도시의 철도역인 수원역과 KTX 광명역, 안양역을 이용해야 한다. 이들 역들은 안산 곳곳에서 출발하는 대중교통 버스로 연계된다. 그러나 2016년, 인천발 KTX 사업을 통해 초지역이 KTX 정차역으로 지정되면서 기존에 광명역이나 수원역을 이용해야하는 불편함을 해소시켜줄 것이다. 초지역의 KTX 정차역 사업은 2018년 착공하여 2021년 완공될 예정이다. 이 지역의 최초의 철도 교통은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37년 개통한 협궤철도인 수인선이다, 수원역과 인천역을 잇는 중간의 경유지로써, 군자역, 사리역 부근에는 어시장이 활발히 형성될 정도로 그 당시 주변 농어촌민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나, 도시 형성과 발전 과정 중에 협궤열차는 점점 쇠퇴하였다. 1977년의 수인산업도로 개통 등 도로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1988년 안산선 개통으로 수인선의 승객이 급감하여, 1996년 1월 1일 협궤철도인 수인선의 영업운행이 중단되었다. 한편, 안산시 승격 초기인 1988년에 안산선 안산역~금정역 구간이 개통되었을 무렵 초기 안산선은 서울역, 청량리역 등 안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경부선 국철의 지선으로 운행했었다. 1994년부터 서울 지하철 4호선 및 과천선과 직결 운행을 하게 되었고, 2000년부터는 안산선 전체가 수도권 전철 4호선으로 편입되었다. 2003년 4월 30일을 끝으로 경부선 국철과의 직결 운행도 중단되었다. 안산선은 크게는 안산을 서울시와 인근 수도권을 연결하는 광역철도인 동시에, 안산 도시 내에서도 작게는 도시 교통의 주요 동서축에 담당하는 도시철도의 역할도 한다. 2000년에는 오이도역까지 연장되어 시흥시 남부인 시화 지역과도 연결되었다. 한편, 1996년 이후 운행이 중단된 협궤철도였던 수인선은 복선전철로 개량되며, 2012년 6월 30일 오이도역~송도역 1차로 개통으로 수도권 전철 4호선과 오이도역에서 환승해서 인천지역까지 연결되었고 2016년 2월 27일 송도역에서 인천역까지 노선을 연장하여 인천간 이동을 편리화하였다. 수인선이 2020년 상반기에 전구간이 최종적으로 개통되면 한대앞역~오이도역 구간은 기존 안산선의 역과 선로를 공유하며 수인선의 열차는 분당선 수원역과 직결 운행 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2018년 6월 개통한 수도권 전철 서해선은 반월국가산업단지와 초지역, 선부동을 지나가 북쪽으로 시흥시, 부천시와 연결된다. 더불어 안산, 시흥과 광명역, 서울 여의도를 연결하는 신안산선이 2019년부터 착공하여 2025년 완공될 예정이다. 안산의 외곽지역으로 서해안고속도로, 평택파주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평택시흥고속도로가 통과하며, 안산 지역의 국도는 국도 제39호선, 42호선, 77호선, 47호선이 있다. 국도 제42호선의 일부인 수인산업도로가 안산 동부 지역을 지나가며 안산시의 주요 도로인 중앙대로, 용신로, 삼일로, 해안로 등의 도로들과 직접 연결된다. 이 때문에, 다수의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노선이 수인산업도로를 이용하여 운행되고 있다. 안산 지역에서 첫 번째 고속도로 등장은 현 영동고속도로의 연장선인 당시 신갈안산고속도로가 1991년 11월 29일 개통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임시로 안산 나들목이 수인산업도로와 직접 연결되다가 현 양상동 위치로 옮겨졌다. 과거의 서해안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능해 나들목 ~ 안산 나들목 구간이 1994년 7월 6일 개통되었으며 서안산 나들목이 설치 되었다. 1995년 11월 28일 서울안산고속도로 개통에 이어서 1996년 12월 17일 서해안고속도로 일부 구간 (안산 분기점 ~ 서평택 나들목 / 포승 임시 나들목)이 개통되면서 신갈안산고속도로와 안산 분기점이 형성하게 되었다. 2001년 8월 25일 고속도로 개편으로 서울안산고속도로가 서해안고속도로로 개편되고, 기존 서해안고속도로의 서창 분기점 ~ 안산 분기점 일부 구간과 신갈안산고속도로가 기존의 영동고속도로와 함께 영동고속도로로 개편하게 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안산 분기점이 존재하며, 영동고속도로 서안산 나들목 및 안산 나들목을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다.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진입 시에는 서안산 나들목과 안산 나들목보다는 반월 인근의 군포시에 있는 군포 나들목이 비교적 많이 이용되며, 서해안고속도로 하행선 이용시 화성시에 있는 매송 나들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제2서해안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평택시흥고속도로가 2013년 3월 28일에 개통함에 따라 남안산 나들목이 안산스마트허브 (반월국가산업단지)와 연결되어 안산 서부 지역에서 인천 방면 및 서평택 방면의 진출입이 더 용이해졌다. 평택파주고속도로가 2016년 4월 29일에 개통되었으며 동안산·당수 나들목도 새로 신설되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안산시를 지나가나 안산시로 진출입하는 나들목은 없다. 국도 제39호선은 인근 부천시, 시흥시, 화성시, 평택시로 연결되며, 국도 제42호선은 인근의 인천광역시과 수원시를 연결한다. 안산 시가지 형성 전에도 안산동 읍내 일대에는 수원, 서울(금천), 인천 방면의 도로가 교차 되었으며, 자연부락의 여러 마을들이 비포장 도로와 연결되었다. 1977년에는 국도 제42호선의 일부인 수인산업도로의 개통 등으로 인해 안산 지역은 본격적으로 도로 교통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특히 도시 형성 전부터 수인산업도로를 통해 태화상운 소속의 시외버스가 인천과 수원을 연결함에 따라 인근 도시 지역을 연결함으로써 본격적인 대중 도로 교통이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반월신공업도시 (현 안산시) 조성으로 격자와 방사선 형의 시가지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안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인천국제공항 및 전국 주요 도시를 운행하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들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천안, 동서울, 평택 안중 등으로 가는 일부 노선은 상록수역 인근 정류장을 경유한다, 안산역 버스환승센터에서는 안산시내, 반월산업단지, 시화지구와 더불어 서울(여의도, 강남) 및 인근 도시들(수원, 시흥, 부천, 인천, 안양, 성남)로 연결되는 상당수의 도시형버스, 일반좌석버스 및 시외버스등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 및 김포공항으로 가는 공항시외버스도 경유한다. 안산역, 안산종합버스터미널, 상록수역 등 인근 버스정류장들에서 강남역, 수원역 등 서울 및 수도권 주요 교통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안산시의 대부분은 간척 사업을 통해 확보된 지역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바닷가는 많지 않다. 특히 시화방조제 건설 이후 천연 해안이 급격히 줄어들어, 대부도를 제외한 안산시내에는 해수욕장이나 해안 절벽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산시는 시화방조제 사업 이후 조성한 시화호와 시화호 갈대습지 등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화호는 수질 오염으로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한국수자원공사와 안산시의 주도로 조성된 갈대습지공원 등으로 수질이 차차 개선되어가고 있다. 내륙쪽으로는 반월저수지나 수리산의 한갈래인 수암봉이 있으며, 수암봉에서 수리산의 태을봉 능선을 거쳐 군포시, 안양시, 시흥시로 갈 수 있다. 안산시에는 총 38개의 지정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 21개는 안산시가 지정한 향토유적이고, 나머지 17개는 경기도 지정문화재이다. 별망성지(경기도 기념물 제73호, 단원구 초지동)는 조선 초기 남양만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돌로 쌓아 만든 성의 터로 군영지로도 쓰인 흔적이 남아있다. 이 별망성지는 임진왜란과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1988년 복원한 것이다. 또한 수암봉 어귀에 있었던 안산읍성의 터도 경기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어있다. 조선 시대의 문인과 유학자들과 관련된 유산들도 많다. 덕흥대원군의 외조부 안탄대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83호, 단원구 성곡동), 한응인의 영정과 유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상록구 사사동), 안산 출신의 유학자 이익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40호, 상록구 일동) 등 문인들의 묘지 뿐만 아니라, 단종의 폐위를 반대했던 김충주와 관련된 고송정지(경기도 기념물 제101호, 단원구 화정동),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던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을 기리는 정문(旌門) 다섯개를 모은 오정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 단원구 화정동)도 있다. 이 밖에 사세충렬문(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호, 와동)도 경기도가 지정한 유형 문화재에 속한다. 한편, 구 대부면사무소(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7호, 단원구 대부북동)는 일제 강점기 때 민간이 기증하여 1933년부터 쓰인 건축물이다. 내부 벽체는 모두 철거되었지만, 앞쪽의 일본 건축 양식이 들어간 현관이나 한옥 양식의 골조 등은 보존되어있어, 한옥 양식과 일본 건축 양식이 혼재해있다. 안산시가 지정한 향토문화재로는 인물들과 직접 관련된 16개와 잿머리 성황당, 선부동 지석묘군, 지금의 부곡동 일대의 8경을 묘사한 부계팔경도, 1920년대에 그려진 부계전도, 대부도 자선비 등 5개가 있다. 1984년부터 잿머리 성황당에서 《잿머리 성황제》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1987년부터는 안산시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주최로 별망성지에서 《별망성예술제》를 열고 있으며, 1991년부터는 단원 김홍도를 기념하는 《단원미술제》를, 1996년부터는 성호 이익을 기념하는 《성호문화제》를 시행하여 각종 백일장, 사생대회, 연주회 등 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2005년부터 매년 5월마다 광덕대로 안산문화광장에서 《안산국제거리극축제》를 열어 거리극 공연 및 예술 공연을 유치하고 있으며, 대부도에서는 특산물인 포도의 소비 증진을 위해 격년제로 9월마다 《대부포도축제》를 열고 있다. 하지만 《대부포도축제》는 아직까지 흥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대부도 바다향기테마파크에서 제 1회 대부바다향기튤립축제와 더불어 안산 M 밸리 록 페스티벌을 유치하여 CJ E&M과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다. 박물관 및 전시관으로는 문화예술의전당 외에 최용신기념관, 성호기념관, 경기도미술관, 안산향토사박물관, 안산어촌민속박물관, 누에섬등대전망대, 행복예절관, 안산식물원, 그리고 2013년 중 성포동으로 이전할 예정인 단원전시관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원곡동에는 국경없는 마을이 조성되어 있는데, 세계 56개국의 6만여명의 외국인과 150여개의 외국인 업소들이 밀집해있다. 안산시는 경기도에서는 성남시 다음으로 인구 1인당 도시공원 시설면적이 많으며, 시설 공원면적으로는 도시구역에서 47%의 높은 공원확보율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단원구의 안산호수공원, 화랑유원지와 상록구의 성호공원, 시화호갈대습지공원이 있다. 안산시는 각지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08년 6월 7일부터 시티투어 버스를 매년 일정 기간 동안 운행하고 있다. 이 시티투어 버스에는 중앙역 광장을 시종점으로 하는 4개의 경로가 있는데, 성호기념관과 시화방조제를 주요 경유지로 하는 제1코스, 갈대습지공원과 선감도를 주요 경유지로 하는 제2코스, 성호기념관과 갈대습지공원, 최용신기념관을 주요 경유지로 하는 제3코스, 성호기념관, 갈대습지공원, 선감도를 경유한 뒤 행복예절관 체험 활동을 포함하는 제4코스가 있다. 이밖에 시티투어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관광지들에서 체험 행사를 열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대부도의 갯벌·염전 체험 행사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행사들의 대부분은 수확 시기가 정해진 경우가 많아 특정 기간에만 운영된다는 한계가 있다. 안산 별빛마을 애니멀에는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동물 부엉이, 코끼리, 기린, 사자, 팬더, 반달곰, 백호, 고릴라, 미어켓, 악어, 홍학, 얼룩말, 하마 등 200여 마리의 동물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조각이 사파리를 연상케 한다고 한다. 하트빌리지(Heart village)에는 수백 개의 로맨틱 한 하트들이 존재한다. 특히 웨딩, 프로포즈 콘셉트의 조형물과 포토존이 많아 연인 혹은 가족끼리 구경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위치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인로 1723 별빛마을 포토랜드이다. 안산시를 방문하는 관광객 수를 정확히 집계한 자료는 없지만, 《안산통계연보》에서 추산한 추이에 따르면 1999년 이후 관광객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가 2002년을 정점으로 외국인 관광객 수는 소폭 증가하고, 내국인 관광객 수는 대폭 감소했다. 하지만 유료관광지는 2005년 이후 관광객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2008년도에는 32만 5,449명이 유료관광지를 찾았다. 2002년까지 증가하던 관광수입은 2003년 이후 조금 떨어졌다가, 2005년부터 다시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2007년에 190억원을 웃돌았다. 하지만 2008년에는 55억원을 기록하였다. 1990년대 이후 안산시의 곳곳에 크고 작은 체육 시설이 조성되고 있다. 안산종합운동장은 2003년 초부터 건설을 시작, 2006년 11월에 준공하고 2007년 3월 28일 “안산와~스타디움”이라는 명칭으로 개장하였다. 2007년 5월 12일에는 안산 돔구장의 건립에 관해 안산시와 KBO가 양해 각서를 체결하였으며 2012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었으나, 2010년 5월 이후 사업이 중단된 상태이다. 한편, 미국 프로 야구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의 소유주 케네스 영은 안산 돔구장을 근거로 하는 프로야구단의 창단을 추진하고 있다. 2013년 7월 13일에는 본오3동 1111번지에 상록수 체육관이 준공되어 국내·외 경기와 각종 행사 등 다양한 문화행사 개최가 가능하고 다채로운 생활체육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본오동 지역주민의 스포츠 참여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최근 2014년, 안산 와~스타디움과 상록수체육관에서 2014년 인천 하계 아시아 경기대회 축구와 배구경기를 유치하기도 하였다. 과거 WKBL(한국여자농구 리그) 신한은행 에스버드 농구단이 연고지가 안산에 있었지만 2014년 연고지를 인천으로 이전하였다. 아래는 안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 스포츠단이다. 시정 언론으로 브라보 안산 방송(BATV), 브라보 안산 신문이 있다. 또한 지역 신문으로 안산타임스, 안산신문, 반월신문 등이 존재한다. 상록구 상록구(常綠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동부에 있는 구이다. 동쪽으로는 군포시·안양시, 서쪽으로는 단원구, 남쪽으로는 수원시, 북쪽으로는 시흥시와 접한다. 서울에서 30㎞ 반경 남서부에 위치한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공간 배경 및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 되었던 계몽운동가 최용신이 실제 활동한 지역이 상록구 중앙부의 본오동 일대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참고로 상록구에는 소설 제목인 《상록수》에서 유래된 한국철도공사 안산선의 역인 상록수역도 존재한다. 상록구의 지형은 내륙 쪽으로 비교적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북부에는 광덕산과 마산의, 남부에는 나봉산과 칠보산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이어진다. 단원구 단원구(檀園區)는 안산시의 구이다. 안산시청과 안산시의 종합경기장인 안산와~스타디움이 위치해 있어 안산시 공공시설, 문화의 중심지이며 안산시를 가로지르는 안산선을 중심축으로 남부의 고잔신도시를 포함한다. 구 이름은 조선 시대의 풍속 화가 김홍도의 호인 단원(檀園)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 반월국가산업단지가 위치해 있어 아래의 목록 외에도 수많은 제조업 중소기업들이 이곳에 있다. 하지원 하지원(, 1978년 6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하지원()은 1978년 6월 28일 충청남도 보령시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1남 3녀 중 둘째로 남동생은 배우 전태수이다. 하지원은 서울화양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모든 과목에서 수를 받을정도로 학업이 우수했다. 당시 생활기록부에 적힌 담임선생님들의 평가엔 "착하고 예의 바르며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한 모범적인 어린이로 예의바르고 매사에 솔선수범인이였으며, 언행이 바르고 친절하며 친구들의 신뢰를 받았다"라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2학년때 부반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7년 연속 반장으로 뽑혔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또 어릴 적부터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다고한다. 영신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 동네 사진관에 걸려 있는 하지원의 사진을 본 기획사 매니저가 연락을 해와 연기자로의 입문 권유를 한 것이 배우가 되려고 결심한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원은 영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수능시험과 실기시험을 단번에 통과하여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다양한 작품의 오디션에서 100번 넘게 떨어지며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원이 본명이 아닌 예명을 쓰게 된 일화는 작명소개였다는. 하지원은 단막극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1996)를 데뷔하였고 《사랑보다 더 큰 사랑》(1997), 《일요베스트 - 위험한 자장가》(1999)로 작은 역할을 연기하며 1999년 5월부터 방영한 청소년 드라마 《학교 2》에서 반항아 장세진 역을 맡아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세 편의 영화 《진실게임》, 《동감》, 《가위》가 개봉되었다. 이 작품에서의 그녀의 연기가 평단의 호평을 받아 《동감》으로 제21회 청룡영화상, 제1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과 《진실게임》으로 제37회 대종상, 제24회 황금촬영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고, 같은 해 9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비밀》에서는 이희정(김하늘 분)의 운명을 가로채려는 동생 이지은 역을 연기해 MBC 연기대상 여자신인상과 제37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호러 영화 《가위》(2000)과 《폰》(2002)의 연이은 흥행 성공으로 호러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한 하지원은 가수 왁스의 〈오빠〉와 〈엄마의 일기〉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는 것과 함께 당시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하던 왁스를 대신해 대역 가수로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2001)와 《햇빛 사냥》(2002)에서 연거푸 주연을 맡았지만,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원은 2002년, 윤제균 감독의 코미디 영화 《색즉시공》에서 에어로빅 부 부원 이은효 역을 맡아 완벽한 몸매와 과감한 연기를 선보였고, 영화는 전국 408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2003년 6월, 개봉 된 영화 《역전에 산다》에서 하지원은 어릴 적 골프 신동에서 현재에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증권사 영업사원 강승완(김승우 분)의 다른 세계의 아내 한지영 역을 연기하며, 데뷔 처음으로 싸이가 작곡한 영화 삽입곡인 '홈런'이라는 곡을 통해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원은 2003년 7월부터 방영 된 퓨전 사극 《다모》에 캐스팅 되었고, 이 작품에서 좌포청 소속 여성 수사관 다모 채옥 역을 맡아 황보윤(이서진 분)과 애절한 멜로 연기를 펼치며, 일명 ‘다모폐인’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극중 이서진이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며 채옥의 상처를 돌봐주고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마음에 하지원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베스트커플상, 여자인기상과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첫 수상하였다. 하지원은 이듬 해, 2004년 멜로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두 남자 정재민(조인성 분), 강인욱(소지섭 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이수정 역을 맡아 감성 내면 연기로 호평을 받아 제4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과 SBS 연기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또한 같은 해에는 주연을 맡은 두 편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내 사랑 싸가지》와 《신부수업》이 개봉 되었다. 2005년 하지원은 영화 《키다리 아저씨》에서 하지원은 김준호(연정훈 분)의 짝사랑을 모른 채 살아온 방송작가 차영미 역을 연기했다. 또한 선데이 서울에서 연재 된 다모 남순이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형사 Duelist》에서는 선머슴같은 왈가닥이면서 사랑을 올곧이 받아들이는 남순 역을 연기했다. 이듬 해, 하지원은 2006년 10월부터 방영 된 사극 드라마 《황진이》에서 조선 최고의 기생 황진이 역을 맡으며 2년 반만에 브라운관으로 컴백했다. 기생이라는 역할답게 화려한 비주얼은 물론, 춤과 거문고 등의 퍼포먼스로도 시선을 사로잡았고, 역대급 '황진이' 연기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드라마는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하지원은 그해 KBS 연기대상 대상을 첫 수상했다. 또한 제32회 골든체스트상 여우주연상과 제34회 한국방송대상 올해의 방송인 탤런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7년 하지원은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권투선수 명란 역을 맡아 윤제균 감독, 임창정과 다시 작업하였고, 영화는 호평을 받으며 전국 275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했다. 이듬 해 2008년에는 미디어 다음에서 연재되어 뜨거운 인기를 모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보》에 출연했다. 하지원은 2009년 재난 휴먼 영화 《해운대》로 윤제균 감독과 세 번째로 작업했다. 극중 부산 해운대 토박이자 억척녀 강연희 역을 맡아 억양 센 부산 사투리를 선보였고, 영화는 다섯 번째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같은 해 9월 개봉 된 박진표 감독의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병으로 하루 종일 병상에 꼼짝 없이 누운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편 종우(김명민 분)의 아내 이지수 역을 연기해 평단의 호평을 받아 제30회 청룡영화상, 제5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제4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톱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하지원은 왕성하게 활약해 온 스크린에서 2010년 11월 첫 방영 된 드라마 《시크릿 가든》으로 4년여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드라마는 스타 콤비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감독의 차기작으로 방영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하지원은 까칠한 백만장자 백화점 사장 김주원(현빈 분)과 영혼이 바뀌는 무술감독을 꿈꾸는 스턴트 우먼 길라임 역을 맡아 숏커트와 수더분한 옷차림을 선보이며 캐릭터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자랑하며 와이어 연기부터 자전거 추격신까지 직접 소화하며 찬사를 받았다. 또한 드라마는 최고시청률 35.2%를 기록하며 신드롬급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으로 SBS 연기대상 네티즌인기상, 베스트커플상, 10대스타상, 드라마스페셜부문 최우수연기상과 제24회 그리메상 여자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2011년 8월 개봉 된 순수 우리 기술진이 만들어낸 3D 영화로 개봉 전부터 뜨거운 화제를 모은 괴수 영화 《7광구》에 출연했지만 영화는 부족하고 엉성한 시나리오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2012년 3월부터 첫 방영 된 드라마 《더킹2Hearts》에서 북한 특유의 말투부터 특수부대 교관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액션으로 또 한 차례 호평을 얻었다. 특히 그는 북한 사투리를 연기하기 위해 북한 최고층 출신 새터민과 말투를 공부했을 뿐 아니라, 촬영장에서도 북한 말투를 녹음한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시간이 날 때마다 맹연습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5월, 개봉 된 남북 탁구 단일팀을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 《코리아》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탁구선수의 실존 인물 현정화 역을 연기했다. 2013년에는 10월부터 방영 된 사극 드라마 《기황후》에서 타이틀롤 역을 맡았고, 드라마는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며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극을 이끌어갔던 하지원의 연기력은 호평을 받았고, 최고 시청률 29.2%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으로 MBC 연기대상에서 방송 3사 PD들이 뽑은 올해의 연기상, 인기상, 대상을 수상하며, 7년여만에 다시 대상을 수상하였다. 하지원은 2014년, 퓨전 사극 영화 《조선미녀 삼총사》에서 으뜸가는 미모와 버금가는 무공을 갖춘 실력파 리더 만능검색 진옥 역을 연기했다. 하지만 스토리 면이나 부족한 개연성으로 관객의 혹평을 얻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2015년 초, 하지원은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기반으로 하정우가 연출을 맡은 영화 《허삼관》에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 역을 연기했다. 6월부터 방영한 로맨스 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에 출연했다. 드라마는 대만 드라마 ‘아가능불회애니(我可能不會愛, 아마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를 리메이크 하였다. 하지원은 2016년, 로맨틱 코미디 영화 《목숨 건 연애》에서 비공식 수사에 나선 허당추리소설가 한제인 역을 연기했다. 이듬 해 2017년 하지원은 8월부터 방영 된 메디컬 드라마 《병원선》에서 냉철한 성격의 실력파 외과 의사 송은재 역을 맡아 처음으로 의드물에 출연했다. 하지원은 같은 해 9월, 오우삼 감독의 영화 《맨헌트》에서 킬러 쯔위 (레인)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홍콩, 대만, 일본의 영화팀들이 합작한 대작으로, 장한위, 치웨이,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공연하였다. 영화는 제74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9월 8일 첫 상영회를 가지게 되면서, 하지원은 출연 배우의 자격으로 영화제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았다. 하지원은 2014년 4월 21일,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들을 위해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세월호 사건 성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하지원은 또렷하게 고정된 한 개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라기 보다는, 각기 다른 역할들을 통해 저마다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팔색조적이고 "팜므파탈"한 배우이다. "OSEN"에서는 하지원의 장점으로 연기의 폭이 넓고 깊은 카멜레온 같은 배우란 점과 함께. 분위기를 잘 이끌고 동료를 배려할 줄 아는 스타라는 점을 꼽았다. 영화 《색즉시공》에 함께 공연한 임창정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진짜 독종이라는 사실이다. 극중 에어로빅 장면을 위해 하루 다섯 시간 이상씩 연습하는 지원씨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자지만 웬만한 남자보다더 승부욕이 강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안병기 감독은 "요새 보기 드문 노력파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고양이를 껴안을 정도의 근성이 있다"라며 칭찬을 했다. 이 영화에서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퀸카 여주인공 역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였고, 이어 《다모》의 종사관 채옥, 《발리에서 생긴 일》의 이수정, 《황진이》에서의 황진이,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내면서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팔색조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작자, 감독, PD, 작가가 함께 작업을 하고 싶은 배우로 뽑혔는데, 잘 배려하고 그들과 조화를 잘 이루는 인간적인 면이 언급되었다. 송편 송편(松餠, 松䭏)은 한국 떡의 한 종류로 한국의 명절 추석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이다. 추석 때 햇곡식으로 빚는 명절떡이다. 멥쌀가루를 익반죽하여 알맞은 크기로 떼어 거기에 깨·팥·콩·녹두·밤 등의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어 솔잎을 깔고 쪄서 헹군 후에 물기를 뺀 후 참기름을 발라서 만든다. 최근에는 설탕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멥쌀가루에 쑥, 블루베리, 호박 등을 넣어 송편 색을 낸다. 음력 팔월 추석에는 햅쌀로 만든 송편으로 조상께 차례를 지낸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송편은 정월 보름날 농가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농가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집집마다 장대에 곡식 이삭을 매달아 대문간에 세워뒀다가 중화절(中和節: 2월 1일)에 이것으로 송편을 만들어 노비에게 나이수대로 나눠준 풍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때 송편은 ‘나이떡’이라고도 불렸다. 가장 먼저 수확한 햅쌀로 빚은 '오려송편'은 차례상을 차릴 때나 산소에 바친다. 송편의 종류로는 색깔에 따라 흰송편·쑥송편·솔기송편 등이 있고, 속에 넣는 소에는 팥고물·깨고물·콩고물·밤·대추 등이 있다. 서울에서는 송편을 조개처럼 빚으며, 황해도·강원도 등지에서는 손가락 자국을 내어 크게 만든다. 최근에는 꽃모양, 호박모양 등의 창의적인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평안도 송편은 골무 만하게 만든 서울 지방의 송편에 비하여 손바닥만한 크기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푸앵카레 추측 푸앵카레 추측은 4차원 초구의 경계인 3차원 구면의 위상학적 특징에 관한 정리이다. 이 정리의 구체적 내용은 '모든 경계가 없는 단일 연결 콤팩트 3차원 다양체는 3차원 구면과 위상동형이다'이다. 이 명제는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1904년 논문에 처음 등장하는 추측으로, 우주의 형태에 대한 추측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추측이 제기된 이래로 100여 년이 지난 후, 2002년, 2003년에 러시아의 저명한 수학자 그리고레 페렐만이 발표한 출간되지 않은 논문들에서 증명되었다. 밀레니엄 문제 중 최초로 해결되었다. 위상기하학에서 2차원 구면과 1차원 구면(원주)은 단일 연결이라는 근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3차원 표면에서도 구에 대해서 그러한 사실이 성립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하나의 닫힌 3차원 공간에서 모든 폐곡선이 수축되어서 하나의 점이 될 수 있다면, 이 공간은 반드시 원구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 5차원 이상에 대한 문제는 미국의 저명한 수학자 스티븐 스메일이 증명해서 1966년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하였으며, 4차원에 대한 문제는 마이클 프리드먼이 증명해서 1986년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3차원에 대한 문제는 3-다양체 분류 문제의 중추인데, 윌리엄 서스턴 박사가 3-다양체의 분류에 대한 연구로 1982년 필즈상을 수상해서, 이 추측이 3차원에서도 풀릴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이 추측의 해법을 2002년 러시아의 저명한 수학자 그리고리 페렐만이 arXiv에 발표하였고, 국제 수학 연맹(IMU)이 3년간의 분석 끝에 페렐만의 풀이를 인정해서 페렐만을 2006년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하였으나, 페렐만은 수상을 거부하였다. 같은 업적으로 페렐만은 2010년 3월 18일 밀레니엄상의 수상자로도 선정되었으나, 밀레니엄상 역시 거부하였다. 푸앵카레 푸앵카레(Poincaré)는 프랑스의 성씨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유클리드 기하학(-幾何學, Euclidean geometry)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가 구축한 수학 체계로 《원론》은 기하학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인 논의로 알려져 있다. 유클리드의 방법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리를 참으로 간주한다. 이로부터 연역적으로 명제 (정리)를 이끌어낸다. 유클리드가 이끌어낸 많은 성과는 일찍이 오래전의 수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나, 유클리드는 포괄적인 추론과 논리를 통해 그 명제들이 왜 성립할 수 있는가를 보인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원론》은 평면 기하학과 함께 시작되며, 아직도 중등 수학교육에서는 최초의 공리계이자 최초의 정형화된 증명의 예로 가르치고 있다. 이는 3차원에서의 공간 기하학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현재 대수학과 정수론으로 불리는 《원론》의 많은 결론들은 기하학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기하학은 한 번도 생각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2천년 동안 "유클리드"라는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유클리드의 공리는 어떤 정리도 유도해 낼 수 있을 만큼 직관적으로 매우 명백한 것으로 보였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기 모순이 없는 많은 다른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알려져 있고, 19세기 초에 그 중 최초가 개발되었다. 유클리드 공간은 중력장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 공간에서만 실제 세계와 잘 들어맞는 근사적인 이론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함축되어 있다. 이항 정리 초등대수학에서, 이항 정리(二項定理, , )는 이항식의 거듭제곱을 이항 계수를 계수로 하는 일련의 단항식들의 합으로 전개하는 정리이다. 이항 정리를 사용하면 더욱 편리하게 계산할 수 있다. 이항 정리에 따르면, 이변수 복소수 다항식 formula_1을 다음과 같이 전개할 수 있다. 여기서 는 이항 계수이며, formula_4개에서 formula_5개를 고르는 조합의 가짓수이다. 이항 계수는 파스칼의 삼각형의 원소들인데, 이 삼각형에 배열되었을 때, 이항 계수는 좌우 대칭을 띠며, 각 원소는 바로 위의 두 이웃 원소의 합이다. formula_1의 전개는 다음과 같은 formula_7개의 항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또한, formula_11 꼴의 항의 개수는 formula_4개에서 formula_5개를 고르는 조합의 가짓수와 같으며, 즉 이항 계수 formula_14와 같다. 이는 각 항이 formula_15의 부분 집합과 와 같이 일대일 대응하며, 이 경우 formula_11 꼴의 항들은 formula_15의 formula_5원소 부분 집합들과 일대일 대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항 정리가 성립한다. 이항 계수의 항등식 및 지수 formula_4에 대한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이항 정리를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우선, formula_22의 경우 자명하게 성립한다. 즉, 이제, formula_4에 대하여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즉, formula_26에 대하여 성립한다. 수학적 귀납법에 따라, 이항 정리는 임의의 formula_27에 대하여 성립한다. 몇 가지 작은 지수의 경우의 이항 정리는 다음과 같다. 임의의 복소수를 formula_33와 formula_34에 대입해도 성립한다. 다만 지수 0의 경우 0 = 1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항식을 거듭제곱하는 지수를 임의의 복소수 formula_35까지 확장할 수 있다. 이렇게 일반화된 이항 정리에선 전개가 무한 급수가 되며,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일반화된 이항 계수이다. 이항 정리는 일반화된 이항 정리에서 formula_38인 특수한 경우이다. formula_39일 경우, 이 등식은 formula_40일 때 성립하며, formula_41일 때 성립하지 않으며, formula_42일 때의 성립 여부는 formula_43의 값에 따라 다르다. 이항식 대신 여러 항의 다항식을 사용하면 다항 정리를 얻으며, 다음과 같다. 이를 다중지표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이항 정리는 다항 정리에서 formula_46인 특수한 경우이다. 하나의 이항식의 거듭제곱 대신 여러 (중복이 가능한) 이항식들의 곱을 사용하면 다중 이항 정리를 얻으며, 다음과 같다. 이를 다중지표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이항 정리는 다중 이항 정리에서 formula_49인 특수한 경우이다. 이항 정리는 임의의 가환환의 원소를 계수로 하는 다항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이항 정리는 복소수 다항식에 대한 특수한 경우이다. 이항계수가 삼각형의 형태로 배열되는 이 식은 종종 17세기 블레즈 파스칼의 공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슬람, 남아시아, 동아시아 문화권 모두에서 독립적으로 미리 발견되어 있었다. 시기와 발견자는 각각 10세기 인도 수학자 할라유다, 페르시아 수학자 알카라지와 13세기 중국의 수학자 양휘였다. 당나라 당, (唐, 618년 ~ 907년) 또는 당나라은 수나라와 오대 십국 시대 사이에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이다. 중국에서는 중국의 역사로 표방하고 있으나 많은 역사학자들은 선비족의 정복왕조로 보고 있다. 당나라 선비족들이 한족(漢族)과 중국을 정복해서 성립된 국가이며 북위부터 시작한 선비족에 복속당한 중국과 한족(漢族)의 역사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수도는 오늘날 시안인 장안으로, 동시대의 어느 도시들보다도 인구 수가 많았다. 당왕조의 이씨는 수나라와 양씨와 같이 무천진 관롱집단 출신으로 북주,북위 이래 팔주국 십이장군을 칭하는 선비계이다. 북주 때 행해진 선비족 복고정책 때 당왕조의 이씨는 북주(北周)로부터 대야(大野)라는 성씨를 하사받는다. 중국 학계에서는 진인각(陈寅恪)이 당대정치사술론고(唐代政治史述論稿)에서 선비계의 관롱집단에 속하는 조군(趙郡)의 이씨가 (선비족) 당조를 건국했다는 것을 정론으로 하여, 정론으로 되어 있다. 또한 중화민국의 학자 조미원(姚薇元)은 북조호성고(北朝胡姓考)에서 당나라는 튀르크계의 고차(高車)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연은 수나라의 쇠퇴와 붕괴 시기에 권력을 잡아 당나라를 건국했다. 7세기와 8세기의 당나라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정부에 등록된 인구 수는 약 5,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중앙 정부가 붕괴되어 인구 수를 제대로 조사하기 어려웠던 9세기에도, 당나라의 인구 수는 8,000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추정된다..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통계가 아닌 추측일 뿐이다. 당나라는 오랫동안 안정된 정치를 유지했으나, 안사의 난 이후 중앙집권체계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선비족 8주국 군사들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렸다. 사대부들은 과거제나 관리들의 추천을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다. 점차 이민족들의 침략에 의해 쇠퇴하고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 수도 장안이 유린되면서 당나라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다. 중국 도자기 문화가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인 이백과 두보가 당나라 시대에 살았으며, 유명한 화가들인 한간, 장훤, 주방도 당나라 사람이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다양한 역사책을 출간했으며, 지리서와 백과사전도 많이 출판되었다. 목판 인쇄의 발달과 같은 수많은 기술적 혁신도 당나라 시대 때 일어났다. 당나라 시대에 불교가 중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확산되었고, 중국 고유의 불교 종파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당 무종이 폐불을 선언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쇠퇴했다. 9세기에는 왕조와 중앙 정부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예술과 문화는 계속 융성했다. 또한 9세기에도 여전히 당나라의 상업 활동과 무역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관료제 전체가 타격을 입었고,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위구르가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안사의 난을 막기 위해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쳐들어가 장안은 불태워지고 많은 당나라 후궁들이 약탈당했다. 당나라 현종은 위구르인들에게 장안에서 물러나길 요청하였고 위구르인 군사들이 장안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당나라 귀족들의 유부녀들은 승자측인 위구르 군인들에게 첩과 노예로 넘겨지게 되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던 당나라는 황소의 난 (874–884) 당시 장안과 낙양이 모두 약탈당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황소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 군벌들이 성장했다. 이후 군벌 중 한 명이었던 주전충이 당 애제를 축출하고 907년 스스로 황제가 되어 후량을 건국함으로써 당나라는 멸망했다. 후량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유린당하고 멸망하게 된다. 수나라 왕조의 외척이며 독고씨 등 친적이 모두 선비족이였던 선비족 출신 이연이 수나라 말기 혼란을 수습하고 퉁구스인들인 8주국 관롱집단 무천진 선비족들과 함께 북주 때부터 피지배민족으로 전락한 한족(漢族)들을 굴복시키고 장안에서 당나라의 개국을 선포하였다. 건국 당시 당나라의 북방에는 돌궐이 위치해 있었다. 북주 북제 때부터 선비족의 국가들은 돌궐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쳤다. 돌궐의 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은 조공을 바치는 북주와 북제를 두고 "내가 남쪽의 두 아들를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천하에 알릴 정도였다. 당나라 또한 중국인들을 정복하는데 돌궐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돌궐의 도움을 받은 이연은 돌궐 군사와 함께 중국의 장안까지 처들어가 수나라의 수도를 유린하였다. 돌궐에 군사 원조를 받은 이연은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태종은 서쪽의 고창국 등 여러 국가를 공격해 정복하고서 책봉을 받았다. 이때 고구려의 장군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였고, 실권 잡고서 보장왕을 옹립했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은 일단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국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했고 그러는 한편 첩자를 파견해 지리를 파악해 요동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정보를 얻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태종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남쪽으로 베트남의 부족들을 토벌해 교지 지역을 얻었다.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의 빌미를 잡자 군사를 모아 정벌을 떠난다. 당시의 군사는 보병 7만명, 수병 6만명과 기병 3만명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이 무너지자 연개소문은 15만 구원군을 급파하지만,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태종의 친정군에게 크게 패하고 3만명이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종은 안시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게 되자, 겨울이 되어 결국은 철수했다. 이후로도 태종이 고구려에 병력을 파견하기도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즉위한 고종은 신라의 요청이란 명분으로 출병해서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곧바로 661년 고구려로 향해 평양성을 포위하지만 투르크계 철륵의 반란과 결정적으로 옥저도 행군총관 방효태의 패배와 소정방의 고립 등으로 말미암아 실패했지만, 연남생의 귀순으로 고구려의 내분을 감지하고서 667년 병력을 일으켜 668년 9월 고구려가 멸망한다. 750년에 현종은 석국(石國)이 제대로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구려 출신 장수 고선지(高仙芝)에게 명령하여 석국와의 전쟁을 감행한다. 당나라 군이 승승장구하여 수도인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장안에서 석국 왕을 처형했다. 그러자 석국 왕자가 당나라 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식국(아랍)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751년 4만 명의 아랍&투르크 연합군이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 강에서 고선지의 군대와 맞섰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당나라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나라 군이었으나, 아랍군이 당이 다민족 군대 인걸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고선지는 대패했다. 이 전투로 겨우 몇 천 명의 당나라 군사만이 살아 돌아갔고, 아랍이 서역의 패권을 차지해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이자 고종의 황후였으나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들을 처참하게 제거함은 물론 자신의 아들이자 황제인 중종과 예종을 연이어 폐하고 자신이 직접 즉위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통치한 시기는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 하여 무주의 치라고 불린다. 측천무후는 690년에 황제에 오를 당시 국호를 주로 고치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측천무후 이후 내란으로 잠시 쇠퇴하였다가 현종 때에 다시 부흥하니 이를 개원의 치라고 한다. 이 시기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교회인 경교가 전래될 정도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의 안정을 꾀하고 조운 개량과 둔전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동돌궐, 토번, 거란 등의 이민족의 침공을 막았다. 토번, 돌궐 등의 이민족의 당나라를 침공 정복 유린하면서 당나라는 약화된다. 국력이 약화된 당나라는 현종 재위 말기부터 귀족들의 장원토지가 증가하여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755년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당나라의 요청을 받은 위구르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쳐들어가 유린하면서 많은 당나라 귀족들을 끌고갔다. 또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 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를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꾸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커지고, 중앙에서는 환관과 외척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안산의 난 때는 위구크 카간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구르 카간국은 도움을 핑계로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유린하면서 당나라는 급속히 쇠티한다. 결국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거쳐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당하였고 당왕조의 후손과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다. 그 후 주전충도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사로 잡혀 죽는다. 당나라는 3성 6부제를 실시하여, 3성은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尚書省)으로 나누고, 6부는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로 나눴다. 율령 체제는 당나라의 행정법으로써 당나라 통치의 기본을 이루었다. 3성 6부로 이뤄진 통치 조직과 지방에 설치한 주, 현 체제로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지방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였다. 토지 제도는 균전제, 조세 제도는 조용조, 군사 제도는 부병제를 실시했다. 당나라는 귀족 중심 사회였고 그들은 과거와 음서라는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당나라 때는 차가 처음으로 재배되어서 해외로 많이 수출됐다. 또한 화북 지방에는 2년 3모작이 가능하게 되어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고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비단길을 통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상업이 발달하고 양저우 같은 도시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화폐 유통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어음인 비전이 사용되었고 행(行)이라는 상인 조합도 생겼다. 과거 제도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학 역시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매우 발전하였고 현장이 지은 대당서역기라는 책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 때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마니교 등도 전파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 당나라의 문화는 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수입해갔다. 그 당시 나라 시대였던 일본은 때 당나라와 긴밀하게 통교하고 있었다. 당나라와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고 발해원정에 나서자 일본과 동맹하여 신라를 적대시 하였다. 따라서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신라와 당나라, 발해와 왜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에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이어서 838년에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 구 구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다. 구 (행정 구역) 구(區)는 행정 구역 단위이다. 일본의 구는 다음과 같다. 시·군과 동격으로 도에 직속한다. 다른 나라의 구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의 이름은 구역으로, 직할시, 특별시와 대도시에 설치된다. 방글라데시의 구는 대한민국의 도와 비슷하다. 현재 다카 구, 마이멘싱 구, 바리살 구, 치타공 구, 실렛 구, 라지샤히 구, 쿨나 구 등 총 8개가 있다. 시 (행정 구역) 시(市)는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시(市)는 1949년 8월 15일 19개의 부(府)를 일괄 개칭하여 탄생되었다. 다음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보통 '시'라고 하면, 이들 중 기초자치단체인 시를 말한다. 인구가 50만 이상인 시(수원시, 평택시, 부천시, 청주시 등)에는 행정구를 하부 행정 구역으로 둘 수 있다. 2015년 5월 말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인구가 1백만 명이 넘는 시는 경기도 수원시(117만7376 명), 경상남도 창원시(107만2638 명), 경기도 고양시(101만4162 명)인데, 수원시의 인구는 울산광역시보다 많다. 반면, 인구가 가장 적은 시는 충청남도 계룡시(4만109명)이다. 과거에는 인구 5만 이상의 읍이 시로 승격하면 군에서 분리되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를 앞두고 1994년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도농복합시에 관한 규정이 생겼다. 이에 따라 현재는 군 전체를 한꺼번에 시로 개편하고 있으며, 인구 기준도 과거보다 다양해졌다. 가장 최근에 시가 된 곳은 2013년 9월 23일 군에서 승격한 경기도 여주시이다. 현행 지방자치법상 시의 설치 기준은 다음과 같다. 현재 유일한 특별자치도인 제주특별자치도는 그 관할구역 안에 지방자치단체인 시와 군을 두지 않고,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시(행정시)를 두도록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현재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2개 시를 두고 있다. 행정시는 인구 50만명 이상의 시에 설치된 행정구와 유사한 특징이 많은데, 행정시는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므로 그 장은 특별자치도의 도지사가 임명한다. 기초자치단체인 시와 특별자치도의 행정시는 하부 행정 구역으로 읍, 면, 행정동을 둔다. 50만 이상의 자치시의 경우 법률에 따라 특례 조항을 둘 수 있는 특정시로서, 읍·면·동의 상급기관인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읍·면·동의 경우 지방자치법에 의한 지방자치단체에 해당되지 않는다. 자치시, 행정시 뿐만 아니라 특별시, 광역시도 함께 목록되어 있다. 일본에서 시(市)는 지방자치법에 따라 도도부현(都道府県) 아래 설치된다. 시는 정·촌과 마찬가지로 도도부현 아래의 기초자치단체이지만, 정·촌과는 달리 군(郡)에 속하지 않는다. 시가 설치되려면 기본적으로 인구가 5만 명을 넘고, 중심 시가지에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거주하며, 상공업 등 도시적인 업종에 종사하는 세대수가 전 체인구의 60%를 넘어야 하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다만, 1965년 이후에는 시정촌 합병의 특례에 관한 법률에 따라 2개 이상의 정·촌이 합병하여 인구가 3만명 이상이 되어도 시가 될 수 있다.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한 번 시가 되었다가 정(町)이나 촌(村)으로 환원된 자치단체는 없다. 홋카이도 우타시나이 시의 인구는 2014년 9월 30일 기준으로 3,889명으로,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시이다. 미국에서 시()의 조건은 주(州)마다 다르다. 주(State)에는 군(County, 카운티)을 하위 자치체로 두고, 군의 아래에는 보통 시(City)·읍(Town 또는 Township)·리(Village) 등을 두는데, 시는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다. 미국의 시는 일정지역이 도시 형태를 갖추면 주지사의 허가를 받아서 설치되는데, 카운티 안에 여럿 존재하는 작은 규모의 시, 카운티 전체가 하나의 시를 이루는 독립시(Independent city), 5개의 카운티(브롱크스,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스테이튼 아일랜드)가 독립구로서 하나의 시로 합쳐진 뉴욕시와 같은 대도시(metropolitan city) 등 다양한 규모의 시의 형태가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는 성(省)과 동급인 직할시, 자치주와 동급인 지급시, 현과 동급인 현급시의 세 종류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시는 대한민국의 특별시에 해당하는 직할시, 광역시에 해당하는 특별시, 그리고 일반 시에 해당하는 특급시와 시가 있다. 프랑스에서 시가 되기 위하여는 최소 2000명의 인구가 200m 이내의 간격에 조밀하게 모여사는 인구 밀집 지역이 최소한 1개소가 있는 다수의 코뮌이 모여야 한다. 군 (행정 구역) 군(郡)은 행정 구역 단위이다. 한반도 등에서 군현제(郡縣制)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갖추어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 시대부터로, 이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설치한 변군(邊郡)인 한사군과는 규모나 기능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삼국의 영토가 넓어지고 중앙정부의 권력이 지방으로 뻗치면서 삼국은 중국의 군현제를 도입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각국이 정복하여 세력권에 편입시킨 부족(部族)들의 땅에 성을 쌓고 행정의 중심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것이 나중에 군(郡)이 되었다. 성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군의 수장을 대개 성주(城主)라고 불렀고, 각 나라별로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나 태수(太守)라고도 불렀다. 신라는 3국을 통일(676년) 80여년 뒤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당시의 행정구역은 9주(九州) 아래 117개의 군(郡)을 두고, 군 아래에 3개 정도의 현(縣)을 두는 체계였다. 그러나, 9세기 신라말의 혼란으로 행정체계가 무너지면서 전국의 군현이 호족들에 의한 반독립적인 자치체제로 이행되었고, 이러한 상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936년)한 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983년(고려 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지방관을 파견·상주시키면서 정리되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군과 속현이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속군과 속현이 없어졌고, 군은 부(府)와 목(牧)보다 규모가 작고, 현(縣)보다는 규모가 큰 지방의 기초행정구역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은 전국적으로 82개가 있었고, 종 4품의 외관직인 군수가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1895년 6월 23일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기존의 부(府)·목(牧)·현(縣)이 폐지되고, 전국의 행정단위가 일괄 군(郡)으로 편제되었다. 1896년 8월 4일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일부 부(府)와 제주목이 부활하였다가, 제주목이 1906년 10월 1일 제주군이 되면서 현재와 같은 시(부)·군제도의 틀이 갖추어졌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일제가 군·면 통폐합 등 행정구역을 개편한 것이 현재의 군(郡) 체제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군은 직할시와 도(道)의 하위 행정구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2년 12월 22일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군의 수를 2배 이상 대폭 늘리고, 면(面)을 폐지하였다. 군의 하부 행정구역으로는 리(理)와 로동자구를 두고, 군 인민위원회 소재지인 리(理)는 읍(邑)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각 군마다 읍이 있으며, 읍의 이름은 군의 이름과 같다. 읍에는 군 인민위원회 외에도 조선로동당 군 위원회, 군 인민회의가 있다. 군이 폐지되면 읍은 본래 리의 명칭으로 환원된다. 예) 판문군이 폐지되면서 판문읍이 봉동리(현 개성시)로 환원. 일본에서는 고대 율령제를 시행하면서 구니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군을 설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일본에서 군은 그 위치와 역할이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에도 시대 때 에도 막부와 각 번은 군을 지방 통치의 단위로서 이용했다. 메이지 유신 후 군은 지리적인 경계로만 쓰이다가, 1878년 행정구역으로서 설정되었다. 1890년 군제가 공포되어 도도부현과 정(町)·촌(村) 사이의 중간계층의 지방자치단체로 설정되었고, 군의회도 편성되었다. 그러나, 1921년 군제 폐지법이 공포되어 1923년 군의회가 폐지되고, 1926년 군수와 군관공서도 폐지되어 현재는 명목상의 행정구역으로만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공포된 새로운 지방자치법에서도 정(町)이나 촌(村)은 군의 아래에 두는데, 정·촌이 시(市)로 승격하거나 시와 합병하면 행정구역상 군과 분리되고, 군에 속하는 정·촌이 없어지면 군은 자연히 폐지된다. 1960년대 이후 시정촌이 계속 통폐합되면서 군의 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의 군은 주소 표기에 사용되는 정도의 명목상의 존재이며, 필요에 따라 도도부현 의회 선거구 설정이나 광역 연합체(광역 행정권)의 범위 설정 등의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군의 연원은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 이전부터 볼 수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 현과 함께 새로 정복한 지역을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된 군관구의 성격이 짙은 기관으로 당초에는 그리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각 나라 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직할지화할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세워졌다. 처음에 군과 현은 상하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군의 경우는 대개 변경지역의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그 안에 몇 개씩 현이 세워지면서 현과 상하관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군이 본격적인 행정기관으로 활성화 된 것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36군으로 구획하면서 군현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면서부터이다. 후한 말기에 주가 군의 상위 행정구역으로 자리잡고, 이후 주가 자주 분할돼 관할하는 군의 수효가 크게 줄어들면서 수나라에서 처음으로 군을 없애고 주로 군을 대신하는 주현제를 실시했다. 당나라에서는 주현제와 군현제를 오가다가 주현제가 정착되면서 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주가 군을 대신해 현의 상급 행정기관이 됐다. 중앙직할시 아래의 도심 지역을 군()이라 부른다. 신승환 신승환(1978년 12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차태현의 서울예술대학 후배로 IHQ 로드 매니저 시절 차태현을 담당했었다. 또한 데뷔 이전에는 SBS《기분좋은밤 - '결혼할까요?'》코너에서 박수홍과 함께 차력하러 나온 두명 중 한명이기도 하다. 기쁨조쇼라는 차력쇼로 맞선이 어색할 때 따이따이 외치며 간단한 차력을 하는 차력사로 방송에 데뷔하게 되었다. 영화《연애소설》, 드라마 《다모》, 《피아노》등에 출연하여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2004년 신장질환 병역비리를 저질러 실형을 받았다. 가메이도 사건 가메이도 사건 ()은 1923년 일본의 간토 대지진 때 사설 무장 단체 자경단(自警團)이 도쿄 일대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색출, 학살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도 약 6천명이나 학살당했다. 1차 대전의 후유증이 주민들이 쌀가게의 가격담합에 항의하여 일으킨 쌀 폭동과 천황제에 반대하는 급진사회주의정당인 일본 공산당의 창당 등으로 나타나자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도쿄 일대가 대혼란에 빠지자 일본 정부는 도쿄를 중심으로 인근 각 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한 사설 단체인 자경단이 조직되어 해당 각지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색출, 살해했고 부분적으로는 군대와 경찰도 이에 가담했다. 이 가운데 아나키스트 성향의 일본인들도 희생당했는데, 대표적으로 오스기 사카에를 들 수 있다. 로물루스 로물루스(: 기원전 772년?-기원전 716년?)는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라고 전해지는 전설적 인물이다. 알바 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의 아들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중 형으로서, 팔라티노 언덕에 세력을 구축했다. 아벤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은 레무스와 경쟁한 끝에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레무스를 죽이고 다른 5개 언덕의 동맹체로서 로마를 건국한다. 로물루스는 조세와 징병을 위해 시민들을 세 개의 부족들로 나누고, 상비군 친위대인 켈레레스를 창설하고, 여성 인구 부족 해결을 위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하는 등 로마라는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재위 37년째 되던 해 로물루스는 실종되었다. 왕권강화에 의해 이권이 침해받던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이 되어 승천했다고 발표되었고 로물루스를 숭배하는 종교도 생겼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 신화에 불과한지, 로물루스라는 인물 자체가 실존인물이기는 한지 여부는 모두 불확실하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로마의 법제, 정치, 종교, 사회적 제도 일체는 로물루스 시대에 확립되었다고 말해져 왔다. 오비디우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또는 오비드( 또는 , 기원전 43년 3월 20일 ~ 기원후 17년/18년)는 로마 제국 시대의 시인이다. 즐거움을 노래하는 연애시로 유명하며 호라티우스와 더불어 로마 문학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오비디우스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 주의 술모에서 지방의 부유한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트리스티아와 여기저기서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 및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추적해 볼 수 있다. 당시의 많은 기사층 출신의 자녀들처럼 오비디우스는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교육인 수사학과 웅변술을 배웠다.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부친의 소망이었으나 본인은 법률 공부보다는 시작이나 화려한 사교를 즐겨, 법정변론을 하려 해도 "말이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로 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로 돌아와 약간 관리 경력을 쌓지만 곧 이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고자 마음을 굳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인들을 후원하는 메살라 코르비누스에 발탁되어 당시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티불루스 등의 시인 서클에 가담, 당시 유행했던 엘레게이아풍의 연애시로 필재를 휘둘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연애의 농락술을 교훈시풍으로 엮은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책이라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연애시와는 결별하고 이야기시의 제작에 몰두, 필생의 대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를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하려던 《행사력》(Fasti)을 제작 중이던 서기 8년 황제로부터 돌연 로마 추방을 선고 받았는데 이 추방에 얽힌 경위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말년은 전반이 화려했던 것에 비해 비참했다. 흑해 연안의 벽지 토미스(콘스탄차)에서 호소와 애원이 담긴 서신을 고국에 띄우며 10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배재대학교 배재대학교(培材大學校, )는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사립 대학이다. 배재학당을 모체로, 1980년 4년제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배재대학으로 개편하였으며, 199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교훈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이다. 3개 대학원(일반대학원, 특수대학원, 교육대학원), 4개 단과대학(하워드대학, 서재필대학, 아펜젤러대학, 김소월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학당 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교육과정이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은 1909년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되면서 사라졌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YMCA 안에서 잠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대학부는 1937년 배재중학교(6년)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에 1951년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하였고, 1958년 학교법인 배재학당의 인가를 받았다. 1979년 배재실업전문대학으로 개칭하였고, 1980년 10개 학과를 갖춘 4년제 배재대학으로 개편하였으며, 199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배재학당의 당훈에 따라서 대학교의 교훈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배재대학교의 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배재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부경대학교 부경대학교(釜慶大學校, )는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다. 부경대학교는 부산광역시 최초의 대학교이다. 부산수산대학교는 1941년 부산고등수산학교로 개교하여, 1946년에 국립 부산수산대학으로, 1990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1996년 부산수산대학교(대연캠퍼스)와 부산공업대학교(용당캠퍼스)가 통합하여 설립된 종합 대학교로, 대연동과 용당동 두 군데에 캠퍼스가 있다. 대연캠퍼스와 용당캠퍼스는 각각 부산의 해안순환도로망인 북항대교와 광안대교에 인접한 해안가에 있다. 2018년도에 용당캠퍼스를 대연캠퍼스 공학관으로 이전 중이였으며, 2019년현재 모두 이전완료했다.(공학1관, 공학2관(아직 공사중)) 1941년 3월 28일 관립 부산고등수산학교로 설치인가를 받아 4년제 전문학교로 설립이 되었다. 1946년 9월 1일에 국립부산수산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11월 6일에는 수산해양학부, 이공학부, 사회과학부를 설치하였으며 1990년 3월1일 종합대학교로 승격 4개 대학(수산해양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9개 학과로 개편하였다. 1996년 3월1일 학부는 6개 대학과 39개 학과, 대학원은 석사과정 29개 학과, 박사 과정 23개 학과 교육대학원은 4개 전공, 산업대학원은 석사과정 16개 학과가 설립되었다. 1924년 5월 5일 부산공립공업보습학교(2년제)로 설립인가를 받아 설립되었으며, 1963년 3월 11일 부산공업고등전문학교(5년제)로 승격되었다. 1973년 9월 29일에는 국립부산공업전문학교(5년제)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83년 12월 7일 부산개방대학(4년제)으로 승격 및 개편인가, 8개 학과가 설치되었다. 1988년 5월 4일 부산공업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90년 3월 6일 산업대학원 신설하며 5개 학과를 개설하였다. 1993년 2월 24일에 종합대학교로 승격 부산공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6년 3월 1일 3개 학부와 30개 학과, 산업대학원은 석사 과정 15개 학과가 설립 되었다. 1996년 7월 6일 부산수산대학교와 부산공업대학교가 통합하여 부경대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6개 대학 5학부 58학과) 대학원은 석사과정 31개 학과, 교육대학원은 석사과정 4개 학과, 산업대학원은 석사과정 31개 학과를 기록하였다. 1996년 국제교류센터 및 유럽정보센터를 신설, 1997년 캐나다 수산해양부소속 태평양연안과학부연구소(Vancouver)에 본 대학수산과학연구소 현지Lab설치하였으며 1998년에는 공동실험실습관을 신설하였다. 1999년 BK21 지역선도형 기계산업분야 인력육성사업단 설치 및 BK21 산업 자동화 및 정보통신분야 인력양성사업단 사업팀 설치하였으며 또한 부경대학교부설 평생교육원을 설립하였다. 2000년 학생서비스센터와 본관(대연캠퍼스)를 준공, 2001년에는 수산과학기술센터를 설립하였고 학점은행제를 신설하였다. 2002년 수산과학기술센터 개소(경남 고성군)하고, 국립학교설치령 개정(대통령령제17911호)에 따른 대학원: 일반대학원1개, 전문대학원 또는 특수대학원4개로 학칙을 개정하였다. 2003년 국제지역대학원 신설, 지역협력연구센터[RRC] 선정(친환경첨단에너지기계연구센터) 되었다. 2004년 용당캠퍼스 기숙사 개관하고, 과학기술부 주관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나노복합구조물연구실)되었다. 2005년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명예총장 취임, 부산지역환경기술개발센터와 해외어업협력센터, 법률상담소를 개소하였다. 2006년에는 친환경첨단에너지기계연구센터(RRC)를 신재생에너지부품소재지역혁신센터(RIC)로 전환하고 수산과학연구원생선회연구소와 아동영재교육연구소를 설립하였다. 2007년에는 일본카나자와대학 연구분실을 개소하고 종합인력개발원 확대개편산학협력단 2개부에서 3개부(산학협력부, 기술사업부, 학술진흥부)로확대 개편하였고 공학교육혁신센터를 개소하였다. 2008년에는 건축학교육프로그램 5년 유효기간 인증취득하고, 조선해양시스템 공학연구소, 해양생명과학연구소 설립하였으며 8월 5일 제4대 총장 박맹언 박사가 취임하였다. 2009년 수산질병관리원 준공하였으며 학생생활관(세종관)을 개관하였다. 4월1일 조직개편을 하여 부서신설과 부서 명칭을 변경하였다.또한 8월 7일 부산 최초 한국경영교육인증원 경영학교육 인증 획득(경영학부, 해양산업경영학부)하였다 2010년 환경 해양과학기술원 내 지구과학연구수 및 사막화방지연구소를 설립하였다. 2011년 기장군 동백리 수산해양과학연구단지에 수산과학연구원을 개원하였다. 2012년 8월 6일 제5대 총장 김영섭 박사가 취임하였다. 1999년 경상남도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앞바다 돌섬에서 부경대학교 백인성 교수팀이 발굴한 천년부경용(千年釜慶龍, 영어: Pukyongosaurus millenniumi)은 2004년 1월 클리블랜드 자연사 박물관의 공룡 목록에서 속으로는 931번째로 등재되었다. 부경대는 양식, 어업 등 전통적인 수산해양 분야를 포함해서 해양의 기후, 해양환경, 해양지질, 해양물리, 해양생물, 위성정보 등을 비롯해서 해수용존 원소 및 광물자원탐사, 해양에너지 등 해양과학기술 학문 분야를 총망라하여 교육,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대학으로 해양과학기술 분야를 리드하고 있다. 부경대 전신인 부산수산대는 부산 최초의 대학으로 근대화 과정에서‘해양입국’을 이끌어왔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해양과학기술 분야를 연구해온 대학이다. 부산권 환경 연구를 전담하는 '부산지역환경기술개발사업단', 한국의 마린바이오 연구를 주도하는 '해양바이오프로세스연구단', 한국의 신재생에너지 연구를 리드하는 '신재생에너지부품소재지역혁신센터', 한국의 해양바이오에너지 연구를 주도하는 '청정생산기술연구소', 태풍 피해방지 한국․일본 공동 연구 거점인 '글로벌연구실', 한국 유일의 해양용 LMO(형질전환생물) 위해성 평가기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 처음 슈퍼 미꾸라지를 개발한 것을 비롯, 유전자 변형 수산 생물을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수산해양 LMO(Living Modified Organism)는 정부로부터 매년 100억 원을 지원받아 부경대가 운영 중이다. 부경대의 수산해양 LMO 연구 수준은 경쟁 상대로 캐나다가 유일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해양과학기술 세계 전파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학이 부경대다. 부경대 해외어업협력센터는 2007년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손잡고 아프리카 수산새마을운동을 추진해 오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의 수산 정책 입안자들이 해마다 부경대에 와서 수산 기술을 연수받는다(2011년 9월 현재 아프리카 24개국 166명 연수).연수 내용은 어업, 수산 양식, 수산 식품, 수산 경제 및 정책 등이며, 집중적인 강의와 실습 및 현장 학습을 진행한다. 대학원 과정에 개설된 '국제수산과학협동과정'은 세계 20개국에 선진 수산과학기술을 전수하는 과정으로, 2011년 8월 제1기 수료식에 이어 제2기가 연수를 받고 있다. 부산의 부경대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세계수산대학의 유치지로 최종 선정됐다. 대학원은 석사과정 31개 학과, 교육대학원은 석사과정 4개 학과, 산업대학원은 석사과정 31개 학과가 있다. 2001년, 학점은행제를 신설하였다. 2001년부터 학점 상태평가제를 도입했고 2004년부터 졸업인증제를 운영하고 있다. 국립대 첫 공학교육인증, 지방대 첫 건축학 5년 풀 인증, 부산 첫 경영교육 인증, 전국 첫 무역교육 인증 등 학문별 인증을 받았다.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4년 연속 대학교육역량강화사업에 선정됐다. 교육지표 포뮬러 성과지수는 재학생 1만명 이상 전국 국·사립 지방대학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졸업생 3,000명 이상 4년제 국립대 가운데 취업률 57.4%로 전체 10위를 기록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해 8월과 올해 2월 전국 556개 고등교육기관 졸업자를 대상으로 직장 건강보험 가입자만 취업자로 인정해 집계한 것이다. 부경대와 부산대는 2011년 8월 11일 공동발전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상생발전을 위한 공동발전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양 대학은 미래지향적 상생발전을 통해 글로벌 100대 명문대학으로 도약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 구체적인 공동노력을 전개할 계획이다. 공동발전 방안을 심도 있게 연구하기 위해 대학별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운영하기로 하고, 연구 결과가 나오면 대학 구성원, 동문, 지역사회의 의견을 수렴한 뒤 동남권의 발전을 견인하는 명실상부한 거대국립대학으로의 도약을 위해 구체적 실행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부경대는 지난 2008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고양하고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해 에코버시티(Eco`versity)를 선포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울려 공존하는 친환경적 인간주의 확산이 목적으로, 생태학적 이론과 실천방향을 교육하며 생태학적 사유가 체질화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 운영, 자연의 생명력이 숨 쉬는 녹색 캠퍼스 만들기, 바다와 육지 생태계 살리기 운동 등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생명존중운동의 일환으로 통도사와 협약을 맺어 방생행사 등 바다 살리기 운동을 비롯해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부산울산경남지역본부와 장기기증 운동 등을 펼쳐왔다. 이와 함께 자연을 보호하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그린아이디어’ 공모전, ‘생명존중, 환경보전, 사랑나눔’을 주제로 한 ‘에코 축제’를 통해 바다 수중정화활동, 광안리 백사장 정화활동, 치어방류, 재활용품 만들기 등 행사를 진행했다. 특히 2009년에는 남구청과 '담장 가꾸기' 협약을 체결, 캠퍼스 담장을 허물어 대학 구성원과 지역주민들이 쉴 수 있는 녹지를 만들어 그린캠퍼스를 조성했고, 학생 150명 규모의 ‘환경지킴이’를 선발, 야간 빈강의실 소등하기, 수도꼭지 잠그기 등 ‘탄소발자국 줄이기 10계명’을 교내외에 전파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정부로부터 공용자전거 시범 대학으로 선정, 2011년 공용자전거 시스템 도입·보관대 설치 등의 사업 추진했하는 등 저탄소 녹색성장 학문인 환경, 수산, 해양 관련 연구 분야에 독보적인 역량을 보유하고 지구환경·에너지,해양수산, 나노·바이오·IT 융합기술 등 한국 최고 수준의 학문을 통해 지구환경을 지키고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에코버시티’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대연캠퍼스(359,509m, 매립지)에는 2009년에 개사한 기숙사인 '세종관'이 있으며, 2011년 현재 수용 인원은 1763명이다.(남학생 884명, 여학생 806명) 용당캠퍼스는 면적이 319,132m, 일부 학과를 제외한 공대 캠퍼스이며, 2004년에 개사한 기숙사 A동'광개토관'은 수용 인원 550명 규모이다. 이후 2007년에 광개토관 B동이 개사 되었으며, B동 광개토관의 수용 인원은 212명 규모이다. 이후 2010년 부터는 더 많은 학생들의 수용을 위하여 A동의 일부 호실을 3인1실로 만들어 추가 수용이 가능하게 하여 더 많은 학생들의 편의를 보장하려 했으나, 오히려 학생들이 불편을 제기해 2011년 2학기부터는 3인실을 다시 2인실로 바꾸게 되었다. 2011년 현재 광개토관은 총 학생 522명까지 수용가능하게 되었다. (남학생 402명, 여학생 120명) 부경대는 해양생명공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실적을 보유한 대학으로 해양생명연구와 실습을 위한 탐사선(탐양호) 및 실습선(가야호)과 함께 아래와 같은 기관을 운영 중이다. 탐사선(탐양호)의 경우 본교의 해양관력학과및 해양과학공동연구소등의 실습을 지원하고 있으며, 실습선(가야호)는 승선학과인 기계시스템공학과와 해양생산시스템관리학부의 승선실습을 지원하고, 수산관련학과의 현장실습을 운영하며, 1992년부터 매년 여름수산학교를 개최해오고 있다. 부경대가 운영하는 국내 첫 해양바이오프로세스연구단은 2004년부터 10년간 정부로부터 2,500억원을 지원받아 우리나라 해양바이오산업을 키우고 있다. 게 껍질에서 키토산 올리고당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연구단장 김세권 교수는 해양생물로부터 생리활성물질의 탐색 및 개발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로부터‘2007년 세계 100대 과학자(TOP 100 scientists 2007)' 선정된 바 있다. 한국 유일 미세조류은행은 국가지정연구소재은행으로 16년 연속 지정됐다. 1995년 처음 지정된 이후 과학자들에게 필요한 연구자료를 공급하는 연구소재은행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1,600여종의 미세조류를 보유하고 있다. 부경대 LED-해양융합기술지원센터는 선박, 양식, 항만 조명 등 해양용 LED분야 신제품 개발을 지원, 해양LED산업을 국가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국내 첫 수산질병관리원은 수산물 질병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예방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마다 남해안 어류 양식장을 왕진하며 수산물 질병을 예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부경대 부산지역환경기술개발사업단은 환경부가 전국 16개 광역시도에 운영하는 부산권 관할 사업단이다. 국립대 중 처음으로 환경공학과가 설치된 대학이 부경대로, 환경을 연구하는 단과대학이 별도로 설치된 유일한 대학이다. 이 사업단은 2010년 환경부로부터 전국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수송기계 안전편의 융합부품소재 인재양성센터는 멀티플레이어형 공학도를 양성한다. 2014년까지 정부로부터 250억원을 지원받아 기계, 전자, 제어, IT 융합형 인재를 양성해 동남경제권 신성장 선도사업 발전을 지원한다. 2002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한나라당 박맹우 울산광역시장 후보는 공약으로 국립대학교 울산 유치를 내걸었고, 부경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창원대학교 등 부산·경남지역 대학들에 유치희망 의사를 내비쳤다. 2003년 8월 5일 부경대학교 강남주 총장은 울산 이전과 관련한 서신을 전체 교수들에게 발송하였다. 부경대학교 울산 이전 문제는 그동안 악성루머 등의 부작용을 우려해 박맹우(朴孟雨) 울산광역시장과 강남주 부경대학교 총장이 3차례의 물밑접촉을 통해 어느정도 의견접근을 본 후 2003년 7월 함께 교육인적자원부를 방문하는 등 논의를 이어왔다. 강남주 총장이 제시한 조건은 △100만평 정도의 캠퍼스 터 해결 △1500억원 정도의 발전기금 제공 △진입도로와 수도 등 인프라 구축 △ 교수와 교직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한 아파트 원가 제공 △아카데미폴리스 건설 및 초·중·고교 신설 △의과대학 또는 한의과대학 유치에 적극 힘쓸 것 등이다. 강남주 총장은 “가부간에 울산광역시청도 우리가 요구한 것을 회답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이 문제가 해결돼도 우리 대학과 같은 대규모 국립대학의 이전에 드는 1조원 가까운 재원을 적정기간 안에 조달할 수 있는 방안이 현행 법률 체제에서 가능한지도 충분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캠퍼스 이전과 같이 대학의 미래와 성장 잠재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사전에 당위성과 실천 가능성을 충분히 조사 연구해 독자 생존이나 다른 국립대학과의 통합 등 다른 발전 전략보다 유리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먼저 학내 구성원들에게 공론화하고 전체 교수회의에서 찬반투표와 같은 절차를 거쳐 최종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울산광역시의회의 부경대학교 유치 결정설, 총장과 울산광역시장의 정식 합의설, 대통령비서실로부터 부경대학교 총장이 이전 지시를 받았다는 설, 울산 이전 때 공립대학 전환설, ㄹ그룹의 기존 캠퍼스 터 매입설 등 믿기 어려운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박맹우 울산광역시장은 9월 중 직접 부경대학교를 방문하여 울산 이전과 관련한 울산광역시청의 공식입장을 전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울산국립대학교유치범시민추진위원회 관계자는 “학생과 교직원 등의 수가 1만 8000여명인 국립 부경대학교가 울산으로 이전되면 인구 10만명의 증가 효과가 있는 등 도시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며 “경기도청이 인천교육대학교를 유치하기 위해 2000억원 상당의 부지와 건축비 700억원 등 2700억원을 무상으로 제공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정액의 발전기금을 제공해서라도 부경대학교를 유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부의 ‘1권역 1국립대학 육성방침’과 대학교 밀집지역의 신입생 부족 현상 등으로 4년제 대학이 한 곳 뿐인 울산에 앞으로 자발적으로 이전해올 대학이 잇따를 것”이라며 “부경대학교의 요구조건은 울산광역시청의 재정여건상 무리한 요구조건”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2003년 9월 19일 부경대학교 강남주 총장은 학내 반발에 부딪쳐 '울산 이전 추진 전면 백지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부경대학교 측은 교수회 주관으로 교수와 직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0%가 이전을 반대해 이전 논의를 백지화했다. 이에 대해 부경대학교 관계자는 "당초 이전문제를 공청회, 토론회, 설문조사, 전체교수회의 등 공론화 절차를 밟아 최종 결정할 계획이었지만 학내 구성원들 상당수가 반대하는 사안을 놓고 의견수렴작업을 진행할 경우 학내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전논의를 백지화키로 했다"고 밝혔다. 울산광역시청은 부경대학교 측에서 제시한 6대 조건 ▲100만평 규모 부지 알선 ▲발전기금 1천 500억원(최소 1천억원 이상) ▲진입로 등 사회 기반 시설 조성 ▲교수 및 교직원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아파트 원가 제공 ▲학교인근에 아카데미폴리스 건설 및 초중고 신설 ▲의대 및 한·의대 유치에 힘써 줄 것 을 대폭 받아들여 부경대학교와 의사조정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부경대학교 강남주 총장도 "정부가 포화 상태인 대학을 '1지자체 1국립대'정책에 따라 대학간 통합을 추진하고 있어 울산 이전은 대학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적극찬성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부경대학교 내부에서는 캠퍼스 이전안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부경대학교교수협의회는 총장의 일방적 울산 이전 추진을 규탄하며 이전 교수대표를 불신임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부경대학교 울산 이전 추진 자체 반대를 주장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총장 사퇴를 요구하며 "울산 이전은 총장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경향이 많다. 울산 이전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대학 간 연합 등 학교 발전방안을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한기 비상교수회장(수산교육과)은 "대학발전방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충분한 의사수렴없이 울산 이전을 기정사실화 하고 공청회 등을 요식적으로 진행했다"라고 지적했다. 부경대학교 총학생회의 임종민 집행위원장(국제지역학부·4)은 "학우들은 캠퍼스 울산 이전에 대한 찬반이 반반이었다"며 "오히려 캠퍼스 이전 문제가 아닌 학교 측의 여론수렴 없는 추진결정에 반발이 컸다"고 전했다. 하지만 부경대학교 울산 이전 추진 전면 백지화 선언 이후에도 부경대학교 게시판은 여전히 달아 오르고 있다. 박두영이라 밝힌 부경대학교 학우는 "여론수렴없이 이뤄진 '울산 이전 추진 백지화'는 당연한 결과이며 부경대학교는 부산에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수진이란 부경대학교 학우는 "이제는 이전을 반대한 교수님들이 나서야 할 때"라며 앞으로 부경대학교의 발전방안을 제시 할 것을 당부했다. 또 "과연 교수님들이 반대 주장이 20~30년이 흘러도 옳을 것인지 묻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한편, 울산광역시청 기획관리실 이형우 주사는 "부경대학교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울산광역시의 발전과 시민들의 염원인 국립대학교 유치는 계속 추진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교육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釜山敎育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국립 교육대학이다. 1946년에 초등교원 양성을 위한 부산사범학교로 개교하였다. 주소는 부산광역시 연제구 교대로 24 (거제동)에 위치해 있다. 부산교육대학교의 상징은 한새이다. 여기서 '한새'는 큰 새를 의미한다. 이 새는 등(登)의 크기가 수천 리가 되고 날개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같이 넓고 커서 한번 날개짓을 하면 구만리나 날아갈수 있어 북해를 온통 뒤덮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산교육대학교는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를 소유하고 있어, 교육 실무실습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교육 활동을 겸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외국 여러 대학과 MOU체결을 맺어 수 많은 교류활동 및 협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부산교육대학교의 학생수는 1,772명이며 대학원생의 수는 1,011명이다.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학생수는 720명이다. 교직원으로는 교수 76명, 조교 16명, 일반직원 64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교원 수는 33명이다. 상명대학교 상명대학교(祥明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서울캠퍼스와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2캠퍼스로 구성되어있다. 1937년 상명여자고등기예학원 설립을 시작으로 1965년 상명여자사범대학이 개교하였다. 이후 1985년에 천안캠퍼스를 개설, 1987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상명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6년에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며 상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상명대학교에는 총 10개의 단과대학이 있다. 서울캠퍼스에 인문사회과학대학 · 사범대학 · 경영경제대학 · 융합공과대학 · 예술문화대학, 2캠퍼스에 디자인대학 · 예술대학 · 글로벌인문학부대학 · 융합기술대학 · 공과대학이 있다.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 교육대학원 · 복지상담대학원 · 경영대학원 · 문화기술대학원 · 예술디자인대학원이 있다. 양 캠퍼스는 각각 인문사회∙과학과 예술∙공학계열 학제로 구성되어 있다. 약칭으로 Sangmyung University의 이니셜인 SMU를 사용한다. 2017년부터 서울캠퍼스와 천안캠퍼스(現 제2캠퍼스)가 법적으로 이원화 캠퍼스로 운영되고 있다. 제 1대 조동식(1954년 7월 ~ 1970년 4월) 제 2대 김영훈(1970년 4월 ~ 1973년 3월) 제 3대 신봉조(1973년 3월 ~ 1980년 10월) 제 4대 배상명(1980년 4월 ~ 1986년 1월) 제 5대 이준방(1986년 1월 ~ 1987년 3월) 제 6대 곽종원(1987년 3월 ~ 1989년 1월) 제 7대 문남식(1989년 1월 ~ 1989년 6월) 제 8대 방정복(1989년 6월 ~ 1991년 3월) 제 9대 신봉조(1991년 3월 ~ 1992년 12월) 제 10대 이준방(1992년 12월 ~ ) 제 1대 방정복(1987년 3월 ~ 1988년 11월) 제 2대 김양수(1988년 11월 ~ 1991년 4월) 제 3대 방정복(1991년 4월 ~ 1995년 4월) 제 4대 방정복(1995년 4월 ~ 1999년 3월) 제 5대 방정복(1999년 4월 ~ 1999년 9월) 제 6대 서명덕(1999년 11월 ~ 2003년 11월) 제 7대 서명덕(2003년 11월 ~ 2008년 4월) 제 8대 이현청(2008년 4월 ~ 2011년 9월) 제 9대 강태범(2011년 9월 ~ 2013년 9월) 제 10대 구기헌(2013년 9월 ~ 2017년 9월) 제 11대 백웅기(2017년 9월 ~) 서울캠퍼스는 언덕이 유명할 정도로 학교부지가 경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사로 인해 밀레니엄관 옆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다. 인근에 역사유적지인 세검정과 자하문이 있기 때문에 세검정 교정, 자하 교정이라고도 불린다. 2캠퍼스는 제9회 자연환경대상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캠퍼스내에는 무대미술학과와 산업디자인학과의 학생과 교수들이 제작한 독도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5곳의 식당 시설이 있다. 학생 식당 1곳, 학생 및 교직원 식당 1곳, 카페 시설 3곳이 있다. 학생 식당은 학생회관 1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학생 및 교직원 식당은 한누리관 9층에 위치하고 있다. 카페 시설은 현재(2017) 팬도로시, 일반카페가 입점하고 있으며 학생생활관 2층(일반카페), 디자인대학관 1층・2층(팬도로시), 한누리관 1층(팬도로시)가 위치한다. 금융관련 시설로는 우리은행, 국민은행, 우체국 등 총 3개의 ATM이 있다. 복지 시설은 학생회관에 안경점, 미용실, 기념품점, 문구점이 있다. 기타시설로는 편의점 3곳, 복사실, 화방, 휴식터 등이 있으며 편의점은 계당관 1층 (세븐일레븐), 상록관 1층(CU), 학생생활관 2층(세븐일레븐)에 위치하고, 복사실은 학술정보관 2층, 화방은 디자인대학관 1층, 휴식터는 학술정보관, 송백관,독도조형물, 학생회관, 한누리관, 디자인대학관 등등 캠퍼스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평창동캠퍼스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하며 상명대학교 박물관과 서울캠퍼스 학생생활관인 스뮤하우스(SMU HOUSE)가 있다. 동숭동캠퍼스(예술디자인센터)는 2001년 학산기술도서관을 인수하여 개설하였다. 현재 이곳은 예술디자인대학원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예술·디자인 계열 학생들의 졸업전시회나 상명대학교가 지원하는 전시회의 장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캠퍼스내의 상명아트홀에서는 다양한 연극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 10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5년 기준 학생정원(괄호는 재학생)은 총 11,286(13,113)이다. 계열별로는 인문∙사회계열 4,170(5,261), 예∙체능계열 3,556(3,865), 자연과학계열 2,148(2,471), 공학계열 1,455(1,515) 순으로 구성되어있다. ※ 융합공과대학 전기전자컴퓨터학부는 공학교육인증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일반대학원 대학원은 학부 캠퍼스와 무관하게 서울캠퍼스에 구성되어 있었으나, 2캠퍼스 대학원 개설과 동시에 2캠퍼스 학부관련 대학원 학과들이 2캠퍼스로 이전되었다. 특수대학원 현재(2017) 서울캠퍼스에는 총학생회가 구성되어 있지않다. 2캠퍼스에는 여울 총학생회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18) 현재 상명대학교 소속의 체육단은 농구, 태권도, 사격 3개 종목이 있다. 태권도단은 서울캠퍼스를 근거지로, 농구단과 사격단은 2캠퍼스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 5. 상명대학교 학교법인 상명학원 소속의 상명대 사범대학 부속 초등학교,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는 서울캠퍼스에 위치한다. 학교법인 민정학원 소속의 상명초, 중, 고등학교는 상명학원과는 별개이다. 그러나, 상명학원과 민정학원 두 법인 모두 설립자 배상명 박사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역사와 학교운영에서 완전히 상관이 없지는 않다. 상주대학교 상주대학교(尙州大學校)는 대한민국의 국립 산업대학이었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를 모태로 개교하였고, 2008년 경북대학교와의 통합을 이루어 현재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로 개편하였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시 가장동에 위치한다. 상지대학교 상지대학교(尙志大學校, )는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사립 대학이다. 1965년 6월 10일 설립된 관서대의숙을 모태로, 원홍묵이 설립한 학교법인 청암학원의 야간대학인 원주대학을 모태로 하고 있다. 교훈은 ‘참되고 창의적이며 더불어 사는 지성'이다. 강원도 원주시 상지대로 83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지 총 면적은 224,657m²이다. 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사회복지정책 대학원, 경영 행정 산업대학원, 평화안보 대학원 등 6개 대학원과 8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5년 6월 10일 원홍묵에 의하여 관서대 의숙 설립 이후, 1963년 1월 7일에 4년제 정규 야간대학으로 원주대학이 설립인가 되어 초대 학장에 원홍묵이 취임하였다. 1963년 4년제 정규 야간대학으로 원주대학 설립인가가 내려졌으며 1972년 12월 29일에 원주대학의 신입생 모집이 중지되고 원주실업전문학교가 설치되었다. 1973년 청암학원(원주실업전문학교) 관선 임시 이사장으로 김문기가 취임하였다. 이후 김문기가 학교법인을 인수하여 1974년 청암학원을 학교법인 상지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3월 30일에 상지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89년에 11월 13일에 종합대학교으로 승격하였으나 1990년대 들어 재단의 비리가 심해져 학내분규가 일어났다. 1993년 3월29일 부정입학 혐의 등으로 김문기 이사장이 구속되었고 1993년 6월 4일 학교법인 상지학원 이사진이 모두 관선이사로 교체되었다. 그 후 임시이사들이 취임하고 1997년 8월 김찬국 박사 총장 취임, 1999년 10월에 한완상 박사 총장 취임을 거치면서 학교가 정상화되기 시작하였다. 2001년 3월에 강만길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며 2004년 1월 1일부로 학교법인 상지학원이 정이사 체제로 출범하였다. 2005년 3월에 김성훈 박사가 총장으로, 2009년 3월에 유재천 총장이 제7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4년 8월 14일에 김문기씨가 제8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나 교육부는 종합감사 결과 교육용 기본재산에 대한 부당한 관리, 계약직원의 부당한 특별채용 등으로 해임을 요구하였고 2015년 7월 9월 이사회에 의해 해임되었다. 2014년 8월 중국 천진공업대학과의 교류협정을 체결하고, 2014년 10월 중국 대련민족학원, 2015년 1월 중국 배화학원, 2015년 5월 중국 천진공업대학과 2차 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다음은 2016년 기준 상지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1973년 12월 청암학원(원주실업전문학교)에 김문기가 관선이사로 부임한 뒤 1974년 3월 재단법인 청암학원이 학교법인 상지학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74년 4월 상지대학으로 개교하였다. 1989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하지만 김문기의 사학비리로 인해서 학내 분규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수 및 학생들이 폭행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결국 김문기는 1993년 3월 구속되었고, 1994년 3월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임시이사 체제에 들어갔으며, 1993년 6월 이사진이 관선이사로 교체되었다. 1994년 김문기는 재단반환 소송을 내었으나 1999년 기각되었다. 이후 상지대는 2002년 10월 행정법원에서 임시이사 체제를 벗어나도 좋다고 판결을 받아 2003년 임시이사회가 정이사 9명을 선임하여 정이사 체제가 출범되었다. 2004년 김문기는 '임시이사회의 정이사 선임 결의 무효확인 청구'와 '이사장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4년 패소하였다. 하지만 2007년 5월 17일에 상지대 전 이사였던 김문기 전 의원이 “임시이사들이 일방적으로 정이사를 선임한 것은 부당하다”며 상지대를 상대로 낸 ‘이사선임 무효 확인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대법관 8대 5의 의견으로 원고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으며,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교육부가 선임한 임시이사들은 임시적인 위기관리자에 불과해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없다.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내용의 이사회 결의는 무효”라고 판시했다. 그리하여 2003년 선임된 변형윤 전 서울대 명예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 등 정이사 9명은 이사 자격을 상실했으며, 다시 관선이사가 파견된 상태이다. 현재 상지대 구 정문과 신 정문앞에서는 김문기측 구재단측이 차량, 현수막들을 설치하여 현 재단측을 비판하고 있으며, 2008년 3월 19일 창립자 원홍묵의 흉상 제막식에서는 김문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행사장에 난입, 페인트를 끼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등 분쟁이 심화되었다. 2009년 10월 사학분쟁위원회는 "종전 이사(구재단)에게 정이사의 과반수 추천권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예외조항으로 '종전 이사지만 비리가 심각하고 대학 운영에 적합하지 않은 자는 예외로 한다'와 '정이사 선임에 대해 대학별로 다시 심의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상지대 교수협의회에서는 "결국 구재단에 학교를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상지대학교 학생 1000여 명과 교수, 교직원들은 2009년 10월 7일 오후 여의도 국회 앞에서 '김문기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부패 재단에게 상지대를 넘겨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10년 2월 유재천 총장은 상지학원의 전신은 고 원홍묵이 설립한 청암학원이며 김문기는 재단과 학교의 이름만 바꿨을 뿐 설립자가 아니므로 정이사 체제에 개입할 자격이 없으며, 정이사체제로 전환시 사학비리로 퇴진된 구재단 인사는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0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소속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는 상지대 정상화 방안으로 김문기 전 재단 이사장측 인사 4명을 정이사로 선임했다. 상지대 교수협의회, 총학생회, 직원노동조합 등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는 사분위의 결정을 김문기 전 이사장의 복귀 수순으로 보고, 불복종운동을 선언하며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 도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비리로 물러난 구 재단이 복귀한 뒤, 총장이 가지고 있던 교원 재임용과 승진권을 이사장에게 넘기는 내용의 정관 개정을 추진하여 김문기 전 이사장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으며 김문기 전 이사장 쪽이 복귀한 상지대의 학교법인에서, 구 재단측의 복귀를 반대하던 교수들은 정년을 박탈하고 직원은 승진제한, 학생은 정학시키는 방침을 논의한 것으로 확인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2013년 3월에는 김문기 전 상지학원 이사장 (구재단)측 추천 이사들이 이사회 출석을 거부하여 정족수 미달이 되어 새 총장 선임과 신규교수 채용, 예산안 의결 등 안건이 처리되지 않아 신임교수가 강의해야할 과목을 외래강사가 맡는 등 파행이 계속되고 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과 상지대학교 교수협의회, 총학생회 등은 김 전 이사장이 2014년 8월까지 임기인 현 이사장을 강제로 퇴진시키고 자신의 2남인 김길남씨를 이사장으로 앉혀 측근을 총장으로 선임하려는 의도라며 교과부가 나서서 구 재단 측 추천 이사들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여 사태를 해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西江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명문 로마 가톨릭(예수회) 사립 대학이다. 1960년 4월 18일에 예수회가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설립하였다. 캠퍼스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으며, 현재 총장은 박종구이다. 교훈은 진리에 순종하라()이다. 상징 동물은 알바트로스(信天翁, Albatross)이며, 교표는 방패의 모습을 본따 제작했다. 1948년 한국가톨릭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의 윤허로 대학설립이 기획되어, 1960년 4월 18일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의해 6개학과 158명의 신입생으로 개교하였다. 1966년 경향교육상 수상을 통해 국내 최우수 모범대학으로 선정되었다. 개교 10년만인 197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서강대학교는 국내 최초 대학 공연장인 메리홀(Mary Hall), 대한민국 최초로 완전 개가식 체제의 로욜라(Loyaola)도서관을 개관하였으며 지정좌석제, FA(Failure because of absences)제도 등 학사관리와 자율전공제, 다전공제, 연계전공제도 등을 채택하여왔다. 2017년 현재 12개 대학원, 8개 학부에 학부생은 8,119명, 전임교원은 424명이다. 현재까지 약 7만여 동문을 배출한 서강대학교는 2014년~2017년 한국서비스품질지수(KS-SQI) 종합대학교 4년 연속 1위, 2010년 제 36회 국가품질경영대회 교육부문 대통령 표창, 2009년 및 2010년 조선일보-영국 QS주관 아시아 대학평가 졸업생 평판도 부문 국내 사립대학 1위, 2009년 일반대학 교직과정 평가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17년 2월 제15대 총장으로 박종구 신부가 선임되었다. 2010년 11월 12~14일에는 서강대의 개교50주년을 맞이하여, 1983년부터의 자매결연 대학이자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인 일본 도쿄의 조치 대학과 공동으로 제1회 서강-조치 한일 정기전을 서울 서강대 캠퍼스 전역에서 개최하였다. 축구, 테니스, 야구, 농구 등의 4종 경기와 응원전이 펼쳐졌으며 죠치대에서는 약 140명의 학생 선수단 및 학교 관계자가 서강대를 방문하였다. 국내 최초로 진행된 대학 간 국제정기전으로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실시한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9년 3월 현재 개설되어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장을 이끈 서강대 교수 출신 경제 관료들의 그룹을 지칭한다. 로욜라 도서관은 1960년 서강대학교의 개교와 더불어 본관(A관) 2층에서 출발했다. 그 후 1974년 2월 1,600여평의 4층 건물이 준공되어 예수회 창설자인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 성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로욜라 도서관으로 명명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완전 개가제(free open access system) 도서관으로 개관하였다. 총 3동의 건물이 연결된 구조이다. 서강대학교 박물관은 1974년 2월 2일, 한국 민족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학문적 연구에 도움을 주는 데 그 목적을 두어 개관하였다. 손세기(孫世基)가 기증한 고서화 200점, 이문원(李文垣)이 기증한 민속품 539점, 최구(崔鳩)가 기증한 고려자기 21점 등 총 1,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고, 현재 동문회관 내에 자리하고 있다. 곤자가 국제학사의 '곤자가'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카스틸리오네에서 태어나 1585년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기숙사로 연면적 5,925㎡에 지하 2층, 지상 12층 건물 2동으로 구성되어 총 9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최신식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1969년 7월 착공된 메리홀은 1970년 2월 23일 준공식을 가졌다. 총건평 579평으로 1, 2층은 극장을 겸한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2001년 시설 노후화에 의한 재건축 계획 수립, 2003년 9월 재건축 공사 착공, 2004년 5월 25일 재개관하였고, 2009년 5월에 소극장을 개관하고 로비를 확충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서강대학교는 지난 1954년 10월 독일에서 온 예수회 신부 테오도르 게페르트 (Theodor Geppert, S. J.)가 설립한 이래로, 가장 국제화된 학교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서강대학교의 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국제화다. 현재 미국의 Boston College,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영국의 University of London, SOAS, 프랑스의 Sciences-Po(파리 정치대학), 독일의Technische Universitaet Muenchen(뮌헨 공대), 싱가포르의 Nanyang Technological University, 일본의 Hitotsubashi University, 호주의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등 64개국 350여 개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고 공동학위제, 교환학생제, 어학연수, 교환교수제, 학술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Harbin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1990) Harbin Institute of Technology (1997) Heilongjiang University (1990) Jilin University (2008) Liaoning University (1994) Nankai University (2008) Nanjing University (2008) Shandong University (2006) Sun Yat-Sen University (2008) Tsinghua University (2002) Wuhan University (2007) Yanbian University (1991) Yanbian University of Science & Technology (2006) Saint Xavier's College (2008) KIMEP (Kazakhstan Institute of Management, Economics, and Strategic Research) (2007) Ryskulov Kazakh Eonomic University (2007) University of Malaya (2008) National University of Mongolia (2007) The Mongolian Academy of Sciences (1991) Ateneo de Manila University (2006) Saint Paul University of Dumaguete (2006) Saint Paul University of Iloilo (2006) Saint Paul University of Manila (2006) Saint Paul University of Quezon City (2006) Saint Paul University of Surigao (2006) Saint Paul University Philippines - Tuguegarao City (2006) University of Santo Tomas (2006) Assumption University (1990) Tashkent State University of Economics (1991) Foreign Trade University (2007) Hanoi University of Technology (2007) Armenian Academy of Sciences - The Institute of Radiophysics & Electronics (1992) Khazar University (2007) Arhus University (2009) Université catholique de Louvain (2007) University of National and World Economy (2007) Palacký University (2007) The University of Tampere (2008) Hanken School of Economics (2009) Foundation Nationale Des Sciences Politiques (Sciences Po) (2006) Institut National des Sciences Appliquees de Lyon (INSA de Lyon) (2000) Université de La Rochelle (2006) Université de Versailles Saint-Quentin-en-Yvelines (2006) Université Lumiere Lyon 2 (2004) Université Paris Dauphine (2005) Friedrich-Alexander-Universität Erlangen-Nürnberg (2007) Hochschule Pforzheim (2007) 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 (2000) Katholische Universität Eichstätt-Ingolstadt (2003) Ludwig-Maximilians-Universität München (1997)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 (2007) Techische Universität München (1997) The University of Athens (1989) Corvinus University of Budapest (2008) International Center for Relativistic Astrophysics (1989) Istituto Universitario Orientale (Napoli) (1989) Pontificia Universita Gregoriana (1989) Universita degli Studi di Firenze (2007) Universita degli Studi di Trieste (1991) Catholic University of Lublin (1991) Warsaw School of Economics (2007) Universidade Católica Portuguesa (2007) Leningrad Scientific Center Academy of Sciences (1991) Moscow St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Relations (1991) Saint-Petersburg State University (1992) Slovak Academy of Sciences (1992) Saint Louis University (2007) Universidad Catolica San Antonio de Murcia (2006) Universidad Pontifica Comillas (2007) Liverpool Hope University (1997) Queen's University Belfast (2006) University of Leicester (2007) University of Liverpool (1990) Alma College (1990) 아메리칸 대학교 (American University, 2007) 보스턴 칼리지 (Boston College, 1995) 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 (2005) California State University, Sacramento (1993) Creighton University (1994) Eastern Illinois University (2007) Fordham University (1990) Georgetown University (1989)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2007) Gonzaga University (2001) Green Mountain College (1995) Hawai‘i Pacific University (2007) 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2007) Loyola Marymount University (1993) Loyola University Chicago (1997) Marquette University (1984) Our Lady of the Lake University (2007) Saint Louis University (1990) Saint Martin's University (2005) Saint Xavier University (1991) Seton Hall University (1990)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Geneseo (2006)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2007) The University of Utah (2007) Towson University (2001) University of Arkansas (2005)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06) 코네티컷 대학교 (University of Connecticut, 2008)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2007) University of Kansas (1999) University of San Francisco (2006) University of Scranton (2006) University of Texas at Houston (2001) Xavier University (1993) HEC Montreal (2007) University of Alberta (2006) University of Regina (2008) Instituto Tecnologio y de Estudios Superiores de Monterrey Campus San Luis Potosi (ITESM) (2000) Pontificia Universidade Católica do Rio de Janeiro (1991) Universidade Federal do Rio de Janeiro (2007) Universidad Santo Tomas (2006) Universidad Pontifica Bolivariana (2006) Pontificia Universidad Católica del Ecuador (1991) ISEHF (Instituto Superior de Estudios Humanísticos y Filosóficos San Francisco Javier) (2006) Universidad de Lima (2006) Griffith University (2006) , La Trobe University (1995) , 모나시 대학교(2005) ,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1992) , The University of Southern Queensland (1995) , 울런공 대학교 (2007) 오클랜드 대학교(2007) University of the Witwatersrand (2007) 서울교육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서울敎育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교육대학이다. 1946년 구 경기고등학교 구내 경기공립사범학교로 개교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부속 교육대학(2년제)이 되었으나, 1963년에 현재와 같은 대학 형태로 분리되었다. 1977년 성동구 행당동(현 행당중학교 자리)에서 강남구 서초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1981년 3월 4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85년 부설국민학교를 개교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소재한다. 서울교육대학교 모든 학부생은 초등교육학과에 속한다. 다만 초등교사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하여 학기당 4학점 가량 심화과정을 이수한다. 총 13개 심화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1996년 3월 5일 개원하였다. 석사과정은 학기중 5학기 야간제로 운영되며, 박사과정은 6학기 주간제를 원칙으로 운영중이다. 현재 13개국 34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교환 등의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2014.04.01 기준) 서울교대를 상징하는 교화인 수수꽃다리과 교목인 느티나무, 교수인 사슴은 대학이 성동구 행당동 터에서 현재의 서초동으로 이전하던 해인 1977년 10월 제12회 사향축제를 기하여 제정되었다. 당시 박재규 학장의 발의에 따라 과학교육과 및 실업교육과 교수들이 추천한 30여종의 동식물들을 대상으로 교수와 학생들이 투표로서 결정하였다.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국립대학이다.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면서 국립 종합 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됐다. 1948년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1년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됐다. 법인화 후 설립된 법인의 이름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이다. 1946년에 개교할 당시에는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한 개 대학원으로 출발하였으며, 그 이후 점차 학부와 대학원의 규모가 늘었다. 캠퍼스도 옛 경성대학의 동숭동 캠퍼스(현 마로니에공원 자리)를 주캠퍼스로 활용하고, 그 외에 연건동(현 서울대학교병원과 의과대학 자리), 공릉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자리), 을지로, 소공동, 남산동, 그리고 수원 등지에 단과대학들이 있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대학동, 종로구 연건동, 강원도 평창군에 캠퍼스가 있으며, 16개 단과대학 83개 학과(부), 1개 자유전공학부, 1개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5계열 73학과(부) 30개 협동과정, 박사과정 5계열 75학과(부) 30개 협동과정, 10개의 전문대학원 12개 학과(부)로 구성돼 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고종 광무 태황제는 자력 근대화를 위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면서 처음으로 여러 근대식 고등 교육 기관을 설치했다. 1895년 4월 19일, 칙령을 통해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됐고, 그해 5월 6일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다음해 이준을 포함한 4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법학교(1909년) - 경성전수학교(1911년)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년) -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2018년 2월까지 존속하고 문을 닫는다. 2018년 3월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과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법과대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만이 남아있게 된다. 같은 해 5월 10일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일곱 차례에 걸쳐 졸업생 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한성사범학교는 이후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년) -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1899년 고종은 “우리나라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했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며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했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됐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하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 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가 개교했고, 이후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학교에 따르면,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현대적 국립대학을 건립할 때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공립 및 사립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자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에 개교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반대 운동을 강렬히 전개했으며, 이를 국대안 파동이라 부른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1951년부터는 부산으로 옮겨가 전시연합대학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듬해 5월에 전시 연합대학은 해체됐으며, 그 다음 해인 1953년 9월 18일이 돼서야 본부와 문리과 대학이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1960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으로 서울대학교 재학생 7명이 사망했으며, 그 해 11월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됐다. 4·19 혁명이 끝나고 대학에는 학생회 조직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잠시 조성됐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탄압이 다시 이어졌다. 1960년대는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였다. 한편 1961년에는 정부의 ‘국립대학 정비절차’에 따라 많은 사범대 학과가 폐지되고 문리대로 합쳐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듬해 정부는 없어진 학과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은 서울특별시 동숭동(문리과대학), 연건동(의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음악대학), 공릉동(공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경기도 수원시(농과대학) 등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계획을 세우고 1975년에 공과대학, 농과대학(현재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의과대학 본과만을 제외하고 단과대학들을 모두 새로 세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노원구 공릉동의 공과대학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현재 공릉동 캠퍼스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수원에 남아 있던 단과대학도 2003년에 관악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현재와 같이 관악과 연건캠퍼스만 남게 됐다. 한편 10월 유신 이후 계속 억눌려 있던 대학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1991년에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로 변경됐다. 첫 직선제 총장인 김종운을 시작으로 이수성, 선우중호, 이기준, 정운찬, 이장무, 오연천 등이 총장으로 선출됐다. 2011년 12월 28일에는 새로 시행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46년 이래 65년 동안 유지해왔던 국립대학교 체제로부터 독립법인 체제로 전환하였다. 2014년 6월에는 평창캠퍼스가 준공됐으며 같은 해 7월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에 치러진 첫 간선제 총장 선거에서 성낙인이 제26대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2018년 7월까지 맡았다. 서울대학교 총장은 대한민국 내에서의 서울대학교의 위상으로 인해 대한민국 고등교육 및 학문 분야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지위는 장관급이다. 1946년 개교 이후 총 26명의 총장이 배출됐으며 이들 중 3명이 국무총리, 6명이 장관을 지냈다. 개교 초기부터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제였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19대 총장부터 직선제로 바뀌었으며, 2011년에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 간선제로 다시 바뀌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이 설치된 곳은 과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한 때에 공산군의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우에노(上野)가 대학의 경관조성을 위해 지중해 지역에서 선박편으로 마로니에 나무 3그루를 실어와 심었는데 마로니에 이외에도 10여 그루의 은행나무, 느티나무, 그 외에 차츰 자작나무, 개나리, 라일락 등도 심어져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을 이루게 됐다. 당시 교정은 아름답기가 서울의 10대 정원(庭園)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었다. 도서관 건물은 1927년 8월에 경성제대 법문학부 연구실을 겸해 세워진 건물로,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당시 총건평 1,491평 중에 도서관은 사무실 및 열람실 519평, 서고 392평이었는데 해방 후 1층을 더 올려 5층이 됐다. 1975년 당시 열람실은 154평에 불과해 4백여 명을 수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직전의 장서 수는 55만권에 달하였으나 해방 후 30년 동안 늘어난 장서의 양은 10만 권 미만이었다고 한다. 문리대 운동장 쪽에 있었던 빨간 벽돌조 3층 건물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강의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의실의 수는 16개로, 원래 경기도립상업전문학교 건물이었던 것을 1926년 경성제대가 인수를 해 사용하였다. 경성제대는 그 후 2년에 걸쳐 이 건물 주변에 도서관, 본관 등을 지어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1964년 과학관 건물이 지어지자 그 뒤에 가려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게 됐고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이 됐다. 1931년 9월 완공된 건물로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진 서울대학교 본부로 쓰였다. 본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됐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마로니에 공원이 들어서게 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다. 1920년대 경성여자사범학교로 지어진 것을 서울 수복 후 옮겨온 것으로, 캠퍼스 뒤에는 선농단이 있었다. 한편 상과대학은 성북구 종암동 19번지(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원래 경성고등상업학교 건물이었다. 벽돌 건물 안에 연구실 35곳, 강의실 16곳이 있었다. 송림에 감싸여 황성(荒城)의 숲으로 통했으며, 인근에 고려대학교가 있었다.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이들 건물은 현재 모두 철거됐다. 노원구 공릉2동에 있던 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건물을 이어받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자리잡았으며, 다른 단과대보다 조금 늦은 1980년에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으며 계속 관리되고 있다. 과거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가 사용하던 서울 중구 을지로의 땅은 현재 국방부와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해당 토지의 크기는 약 4만m 정도로 현재 미군 극동사령부 공병단이 점유하고 있다. 대학 본부가 있는 관악캠퍼스는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조성됐다. 원래는 관악 골프장이 있던 자리였다. 1970년대 1만 4천여 명이었던 학생 수가 1980년대에는 2만 4천여 명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학교 식당 등의 생활 지원 시설 및 연구 시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1987년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캠퍼스부문계획’이 수립돼 시설 면적이 기존에 비해 2배 가량 늘어났다. 현재 관악캠퍼스에 있는 약 200개의 건물 중 절반은 199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캠퍼스를 감싸고 있는 순환도로의 길이는 약 5킬로미터이다. 서울대학교의 로고는 ‘서울’, ‘국립’,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ㅅ, ㄱ, ㄷ’을 따서 만들어졌으며, 개교 60주년을 맞아 은회색을 입혔다. 정문 디자인을 새롭게 구상한 디자인학부의 백명진 교수에 따르면, 중립적인 색상인 은회색을 통해 공적인 교육 공간의 느낌을 표현하였고 조명을 설치해 24시간 열려 있는 서울대의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대 정문은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는 서울 지하철에서 대학 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하는 역 중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것이다. 정문 근처에는 대운동장을 끼고 제일 가까이 체육관과 미술관, 경영대학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체육관은 세계 최초의 올림픽 탁구 경기장으로서 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경기가 이 곳에서 열렸다. 그 뒤로 산 쪽으로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음악대학, 미술대학, 인문대학, 사범대학 등의 순서로 인문 계통의 단과대학이 있으며 중앙도서관의 터널을 경계로 반대편에는 약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등 이과 계통의 단과대학이 있다. 정문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오르면 후문으로 가는 갈림길(속칭 ‘기숙사삼거리’)이 나오는데, 왼쪽 길을 택하여 내려가면 낙성대역에 이르게 되며 오른쪽 길을 택할 경우 버들골, 노천강당, 교수회관, 학군단, 신공학관 등으로 갈 수 있다. 낙성대역을 향하는 길에는 서울대학교 기숙사인 ‘관악사’와 교수 회관인 ‘호암교수회관’이 있다. 한편 경영대-법대백주년기념관-문화관-중앙도서관-공대 폭포로 캠퍼스를 관통하는 길은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돼 있다. 걷고 싶은 거리는 주위 조경과 보도를 정비하였으며 밤에는 은은한 조명 시설이 걷고 싶은 거리를 비춘다. 학교가 관악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학내 각종 도로들은 등산객들에게 관악산 정상 등반을 위한 등산로로도 애용된다. 신공학관 부근에서 ‘자운암’이라고 쓰인 표지판 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관악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봄에는 캠퍼스 내 벚꽃, 진달래, 개나리의 만개로 상춘객의 발길이 빈번하다. 2008년 4월 25일, 서울대학교는 캠퍼스 안에 있는 규장각, 미술관, 박물관, 문화관, 중앙도서관 등 5개 거점 문화시설을 활용해 ‘문화 캠퍼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그 첫 프로그램으로 다음날인 26일에 학부모 3천여 명을 초청해 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옛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자리에 터를 잡은 연건캠퍼스에는 의과대학, 치의학대학원, 간호대학이 있으며, 서울대학교병원도 이곳에 있다. 대학로와 창경궁로 사이에 있으며,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가깝다. 캠퍼스의 중심에 서울대학교병원 본관이 있으며, 의대본관, 함춘회관 등이 대학로 쪽에, 치과대학이 창경궁로 쪽에 자리 잡고 있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신리 일대에 조성돼 있으며, 2014년 6월 12일 정식으로 준공식을 가졌다. 과거에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이 있던 수원캠퍼스는 이들 단과대학이 2003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매각이 추진 중이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대 법인화 이후 동쪽 부지는 서울대학교 소유로 남았지만 서쪽 부지는 기획재정부 소유가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서울대 소유인 구 농학도서관을 리모델링해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오래된 책들을 보존하기 위한 보존도서관을 만들었다. 기획재정부와 경기도가 구 수원캠퍼스의 정부 소유 부지를 경기도 소유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 부지와 교환함에 따라 정부 소유 부지는 모두 경기도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경기상상캠퍼스가 되었다. 수원캠퍼스의 서울대 소유부지 기숙사(상록사)는 경기도 수원 소재 대학생들을 위해 경기도에 임대를 주었다. 2008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광교신도시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을 세웠으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은 본부는 관악에 있지만 수업과 연구는 광교의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건물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시스템면역의학연구소는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에 조성됐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지구에 한국과학기술원과 함께 국제 과학 복합 연구 단지를조성할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됐다. 강원도 평창군에 그린바이오 첨단 연구 단지인 평창캠퍼스를 조성했다. 평창캠퍼스는 평창역 인근에 있다. 서울대학교는 또한 전라남도 구례군과 광양시 등지에 200km에 가까운 연습림을 소유하고 있다. 현재 16개 단과대학에 83개 학과(부)가 설치되어 있다. 단과대학별 개설 학과는 다음과 같다. 단, 치의예과 및 치의학과는 2002년 학번 50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학부 신입생을 받지 않고 ‘치의학전문대학원’ 제도로서 대학원에 통합됐었다가 2014년 입시에서부터 다시 치의학과 학석사 통합과정 모집단위를 운영하며 이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또한 2009학년도부터는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의 개원으로 법학부의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2008학년도 신입생부터는 주전공 외에 설계전공, 복수전공, 부전공, 연합전공, 연계전공 등 다른 학과의 학점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제2전공제(규범화 되지는 않음)가 사실상 의무적으로 실시됐다. 2017학년도 신입생부터 광역으로 모집하던 사회과학대학을 학부 별로 모집한다. 서울대학교 학부 과정 학과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일반 대학원과 전문 대학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 대학원은 석사 과정은 5계열, 69학과(부), 28협동과정이, 박사 과정에는 5계열, 70학과(부), 29협동과정이 설치돼 있다. 전문 대학원은 현재 9개가 있다. 서울대학교는 또한 2008년에 법과대학 신입생을 더 이상 뽑지 못하게 되었고 전문대학원인 법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되어 매년 정원의 1/3 이상을 타대학 출신으로 선발해야만 하게 되었다. 중앙도서관: 1946년 개교하면서 경성대학의 건물과 서적을 이어받아 개관하였다. 1949년 도서관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변경하였으며 1975년 1월 본관을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도서관 명칭을 ‘서울대학교도서관’으로 변경하였고, 1992년 다시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으로 변경하였다. 수원캠퍼스에 있던 농업생명과학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2005년 농학도서관도 수원캠퍼스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2006년 기준으로 분관으로는 사회과학도서관, 경영학도서관, 농학도서관, 법학도서관, 의학도서관, 치의학도서관, 국제학도서관 등 총 7개가 있다. 중앙도서관은 관악캠퍼스 62동으로 대학본부 뒤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09년 기준으로 분관을 포함한 총 장서량은 약 4백만 권이다. 도서관 내 열람실은 재학생 전용 열람실과 일반인도 사용 가능한 열람실로 나뉜다. 그동안 국립 대학교라는 성격에 비추어 지역 주민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전 열람실이 일반인에게도 개방되면서 운영돼 왔는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열람실 부족으로 인해 학내에서 개방 여부에 따라 토론이 계속 있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람실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현재는 일부 열람실의 일반인 출입은 제한하게 됐다. 관정관: 기존 중앙도서관에 이어 별설된 제2의 중앙도서관이다. 기존 중앙도서관의 시설 노후와 학업 공간의 수요를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2012년부터 별관 신설이 계획되어 공모전을 통한 디자인이 입안되었으며 12년 3월부터 신축 기금 1000억 원 모금행사를 펼친 결과, 불과 2개월 만에 이종환 장학재단의 이종환 이사장이 단일 최대 기부 액수인 600억을 지원키로 하였고, 이어 수많은 교원과 각계각층의 동문 및 본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뜻 있는 일반인까지 약 700여 명이 모금에 동참하면서 약 100억 원을 마련했다. 2013년 5월 29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당초 예정보다 완공이 지연되다가 2015년 2월 5일, 마침내 준공식을 가진 후 2월 23일 개관했다. 제2도서관의 이름은 관정관이라 하였는데 크게 기부한 이종환 명예이사장을 기려 그의 아호 관정(冠庭)을 딴 것이다.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구성되어 총넓이 약 2만 7천320m이며 열람실 4천석, 공동학습실, 멀티미디어실, 스터디가든, 콘퍼런스룸, 실내정원 등이 시설되어 있고 건설에 기부한 유지자들을 기려 도서관 내부 서가와 의자, 기타 시설 등에는 100만 원 이상 기부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 통로로 연결된 기존 중앙도서관 (3만 500m)과 합하여 국내 대학교 중 명실상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갖추었다. 그 완공과 함께 각종 상업 시설이 더불어 들어서는 것과, 교외 일반인 및 본교 졸업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문제로 하여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1962년 5월에 서울대학교 부속중앙도서관 안에 ‘규장각 도서위원회’가 설치됐다. 1990년 6월에 규장각 전용 건물이 준공돼 교내 G1 게이트 우측편,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됐다. 한국학연구에 기초자료가 되어온 규장각 도서 이외에 17만 5천여 책의 고도서, 5만 여점의 고문서, 1만 8천여 점의 책판 등 총 30만 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2006년 2월 1일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가 통합되면서 현재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86년부터 고문서 간행사업을 시작한 ‘규장각 자료조사 사업’이 진행돼 오고 있으며 2001년부터 ‘한국학장기기초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한국학 관련 연구 과제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학에 대한 워크숍/심포지엄, 콜로퀴엄, 학술세미나 등의 학술행사 열고 있으며 시민강좌, 초서강좌 등 일반인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 학술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무료로 자료를 열람하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현재 원장은 국사학과 교수 김인걸이다. 서울대학교의 연구 기관으로는 주관대학연구소, 본부직할연구소, 국가지원연구센터, BK21플러스 사업단, 그리고 HK 사업단이 있다. 본부직할연구소로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소들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 기구인 국제 백신 연구소도 위치해 있다. 1995년 미술대학 동양화과 이종상 교수가 미술관의 건립 건의안을 냈으며 삼성문화재단의 기증으로 만들어졌다. 설계는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가 맡았으며, 지상 3층, 지하 3층, 연면적 1357평의 규모로 삼성물산에서 시공을 맡았다. 2003년 관악 캠퍼스 정문 옆에 착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5년에 완공, 2006년 6월 8일에 개관하였다. 건물의 절반이 지면에서 떨어져 떠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에 기둥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나선형 계단으로 각 층이 연결돼 있는 독특한 구조로 국내 미술계와 건축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권영걸 교수가 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2007년 10월 9일에는 마르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 외부인은 유료 관람비를 지불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관악캠퍼스에 있는 부속박물관이며, 1946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서울대학교부속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이는 1941년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진열관의 동숭동 건물과 유물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975년 중앙도서관 6층으로 옮겨졌으며 이름도 ‘서울대학교 박물관’으로 변경됐다. 1993년 동원관 옆에 있는 현재의 신축 건물로 이전됐다. 1층에는 고고역사와 현대미술 및 기획물을, 2층에는 인류민속과 전통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상설 전시물로는 발해 소조불상, 근역화휘, 김홍도와 장승업의 작품을 비롯하여 각종 고고유적 출토물과 자연사 표본 등이 있다. 현재 박물관장은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이선복이다. 언어교육원은 1963년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서 어학연구소로 발족하여 2001년 언어교육원으로 승격하였다. 언어교육원은 서울대학교 구성원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며, 외국인에게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이 밖에도 국가공인 영어능력 인증시험인 ‘TEPS’, ‘TEPS- Speaking & Writing’, ‘u-TEPS’ 등과 중국어, 일본어를 포함한 6개의 외국어 능력을 측정하는 ‘SNULT’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언어학 학술지 《어학연구》를 발행한다. 현 원장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영철이다. 산하에 외국어교육센터, 한국어교육센터, TEPS 측정 센터, SNULT 센터가 있다. 언어교육원은 관악 캠퍼스 수의대와 행정대학원 옆에 있으며, 연건 캠퍼스에서도 분원을 두어 교육을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관악사 는 학부생활관, 대학원생활관, 그리고 가족생활관으로 구성돼 있다. 1975년 8월 서울대학교 설치령 제 14조에 의거, 관악사 5개동과 후생동 1개동을 개사하였으며, 당시 수용인원은 남학생 970명이었다. 여학생 거주동은 1983년 3월에 개사됐고, 수용인원은 288명이었다. 1996년 8월에는 기혼 대학원생들을 위한 가족생활관을 개사하였고, 수용세대는 200세대이었다. 1999년 9월에는 918동 1인실 대학원생활관을 개사하였고, 수용인원은 304명이었다. 2004년 3월에는 919동 아파트형 기숙사를 개사하였고, 수용인원은 990명이었다. 2010년 9월에 BTL생활관을 개사하였고, 7개동으로 수용인원은 2,500명이었다. 2014년 6월을 기준으로 학부생활관 8개동, 대학원생활관 7개동, 가족생활관 5개동으로 총 5,010명의 수용규모를 갖추고 있고, 여기에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유학을 온 1,000여 명의 외국인 학생들도 포함돼 있다. 현재 사감은 수의과대학 수의학과 김대용 교수이다. 다른 학교들과 달리 특별히 제한된 출입 시간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더 상세한 사항들은 ‘관악사 가이드 북’(안내책자) 에 기술돼 있다. 관악사에서는 해마다 관악사 가이드 북을 발간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서 영문판 도 제공하고 있다. 관악사는 숙박 외에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여 학생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소통·봉사·팀웍의 민주시민의 역량을 갖춘 사회적 리더 양성하기 위한 반복 트레이닝 토론 프로그램인 아크로폴리스프로그램 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14년 6월부터 관악사 거주 사생이 자신이 준비한 학업 관련 컨텐츠를 영상매체를 통해 다른 관악사 구성원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지식나눔프로그램, 서울대학교 관악사 지식실천공유프로그램(GKNet) 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연건사는 의과대학 등이 있는 연건캠퍼스에 있는 기숙사로 일반 사생동은 553명, 가족 생활동은 17세대의 수용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함춘사는 130명, 국제회관은 51명이 그 수용 규모이다. 서울대학교 산하에는 총 4개의 부설학교가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여자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가 그것으로, 서울대학교 법인화 이후에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법인 소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완전히 편입되었으며, 국립대학법인이 부설한 학교는 국립학교로 간주한다는 관련 법조항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국립이지만, 운영은 사립학교에 가까운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서울대학교 부설학교의 교직원들 중에는 아직 국공립학교 교사들이 남아있으나, 그들이 수 년 후 정기 인사이동을 하고 법인에서 빈 자리를 채울 교직원을 새로 뽑으면, 신임 교직원들은 국공립학교 교사가 아니라 법인 소속 직원이 되므로 사립학교 교직원의 신분에 가까우며 그 외 운영 전반이 사립학교와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정부가 시행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석들이 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학계·정계·재계에 대거 포진돼 있다.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혹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성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일반이다. 대한민국 학벌주의의 정점에 서있으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서울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초기에 수능·서울대학교 폐지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와 전문 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QS 세계 대학 평가 등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서울대학교의 순위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5년 93위로 처음 100위권에 진입한데 이어 2006년 63위, 2007년 51위, 2008년 50위, 2009년 47위, 2010년 50위, 2011년 42위, 2012년 37위, 2013년 35위, 2014년 31위 로 아시아 최고의 명문이자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고 하는 도쿄대와 동위에 자리하는 등 매년 순위가 올랐으며, 이렇듯 국외 종합 평가에서도 국내 대학 가운데 최고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까지 세계 3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25년 이내에는 세계 순위에서 무려 10위권 대학 가운데 들겠다는 포부를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QS 평가는 학술적, 혹은 연구성과 보다는 평판도가 대학 순위에 큰 비중을 차지해서 신뢰성의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2015년에 타임스 등 여러 대학 평가기관에서 평가대학을 확대하고, 채점기준을 바꾸면서 QS를 제외한 대부분 대학 평가기관 순위가 하락했다. 2015년 타임스 기준 순위는 85위, ARWU 기준 순위 100위권 이하, 2018 US News&World Report 기준 순위 129위이다. 한편, 2009년 서울대학교는 프랑스 파리 국립광업학교가 실시한 《최고경영자배출능력에 따른 대학평가》에서 세계 500대 기업 CEO 중 9명을 배출해 세계 5위에 올랐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군부독재 정권 시대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끈 주요 대학 학생회 가운데 하나이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화의 달성과정에서 서울대학교 학생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2007년을 기점으로 50대를 맞았으며, 3.8 여성의 날 행사, 4.19혁명 기념 대행진, 4.30 메이데이 행사, 봄 대동제(5월), 가을 대동제(10월), 총학생회 선거(11월) 등을 기획한다. 2006년 황라열 총학생회장의 탄핵과, 송동길 부총학생회장의 사퇴로 한동안 단대 회장단 회의 체제로 운영됐다. 선거는 매년 11월에 열리지만 2006년 선거 당시 투표율이 낮아 2007년 4월에 재선거가 있었으며, 학생행진(운동권 좌파) 계열인 한성실 후보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2007년 선거에서는 비 운동권 계열인 실천 가능 선거운동본부의 전창열 후보가 당선됐고 이듬해 선거에서도 같은 선본의 박진혁 후보가 당선됐다. 이후 이른바 ‘식권파동’,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도청 사건’ 등을 겪으며 2009년 11월, 2010년 4월 두 차례의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며 2010년은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로 운영됐다. 2010년 11월, 학생행진 계열로 사회대 학생회장 출신인 지윤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으며 이후 2012년 3월에 선출된 사노위 계열로 법대 학생회장 출신의 오준규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현재 2013년 4월에 당선된 산림환경학과 소속 김형래가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다. 학생 동아리는 본부에 소속된 중앙 동아리와 단과대학에 소속된 단과대학 동아리로 나뉘어 있으며 본부 동아리의 수는 2006년 기준으로 103개이다. 본부 동아리에 가입한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들의 취미와 특기를 연마한다. 서울대학교에는 체육 특기생이 없지만 야구를 비롯한 축구, 농구부 등이 존재한다. 1977년 창단한 야구부는 199패 1무 뒤에 2004년 첫 승을 거뒀으며, 축구부도 역시 같은 해인 2004년에야 18년 만에 승리를 맛보았다. 농구부도 기록은 좋지 않아, 2001년 이후로 무승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복싱부는 2001년부터 대학 복싱 동아리연합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네 번이나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서울대 정문에 세워진 서울대의 랜드마크로도 불리는 조형물은 국립서울대학교 시절 서울대 미술 대학에서 디자인한 조형물이다. 국립서울대학교를 머릿글자로만 줄여서 초성(ㄱㅅㄷ)으로 표현한 것이 지금의 조형물이다. 조형물 중 맨 왼쪽이 '서울'의 'ㅅ'이며 가운데가 '국립'의 'ㄱ', 그리고 맨 오른쪽이 '대학교'의 'ㄷ'을 표현한 것이다. 조형물이 열쇠 처럼 생겨서 서울대학교의 교훈인 "진리는 나의 빛"의 진리를 찾기 위한 열쇠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조형물의 모습이 마치 '샤'자 처럼 보여서 '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샤'자 모양의 조형물 때문에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로부터 이어지는 관악로 14길을 '샤로수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카페와 식당이 즐비해 있다. 2006년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조형물을 기존의 노란색에서 밝은 은회색으로 색을 바꾸고 정문 주변에 밤새 점등되는 조명을 설치하여 공적인 교육공간의 느낌을 표현함과 동시에 24시간 깨어 있는 학문의 전당이라는 서울대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또한 이 조형물은 서울대학교의 공식 엠블럼에도 들어가 있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수행법과 심리학, 정신과학을 통합하여 고통을 전일적으로 치유할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이념을 토대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대학원대학교이다.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위치해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서울科學技術大學校,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4년제 국립대학이다. 약칭은 서울과기대, 이다. 대한제국 광무10년 고종황제의 칙령 제40호에 의거, 대한제국 고종황제 칙령 제40호에 의거, 1906년 4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어의동(현 효제동)에 설립한 공립어의동공업전습소(연구소)를 모체로 하며 황실 소유 어의궁에 설립. 어의궁은 고종황제가 활을 쏘던 활터가 있었던 황실 소유 궁궐, 1910년 융희황제 칙령으로 공립어의동공업전수학교로 개편되었다. 이후 경성공립직업학교 개편, 경기공업고등학교 교명 변경, 경기공업전문학교 교명 변경이 되었으며 1981. 10. 01 경기공업전문대학을 개방대학 실험대학으로 문교부 지정으로 국립학교 설치령 개정에 따라 경기공업전문대학 폐교. 경기공업개방대학으로 개교가 되었다. 이후 1993년에 서울산업대학교가 되었으며, 2010. 09. 01 서울산업대학교에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 변경이 완료되어 현재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나오게 되었다. 구한말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공릉동) 드넓고 고색창연한 캠퍼스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서울대 공대/미대/교양학부가 있었던, 유서깊은 터전으로,1980년 사용하게 됐다. 공과대학, 조형대학, 인문사회대학, 정보통신대학, 에너지바이오대학, 기술경영융합대학의 6개 단과대학과 일반대학원, 산업대학원, 주택대학원, NID융합기술대학원, 철도전문대학원, IT정책전문대학원, 에너지환경대학원의 7개 대학원이 있다. 전통적으로 공학과 디자인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2번의 올림픽 마스코트와 대한민국 정부 엠블럼도 설곽 출신이 디자인했다. 세계적으로 활동한다. 전국에서 5개 대학만이 선정된 공학교육혁신거점센터로 선정되었으며, 언론에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줄여서 언급할 때는 [서울과기대] [설곽]으로 주로 언급하는 편이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칙령 제40호가 반포되어 1906년 4월 15일 종로구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조선시대 인조와 효종의 잠저였던 어의궁에 설립 및 개교한 공립어의동공업전습소(연구소)를 모체로 한다. 당시 어의궁은 고종황제가 평소 즐기던 활터였는데, 제국의 기술입국을 위해 활쏘기를 중단하였다. 1910년 융희황제 칙령으로 공립어의동공업전수학교로 개편되었다. 이후 1944년 경성공립공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본과에 기계과·건축과·토목과를 두었다. 광복 후 1946년 9월 6년제 경기공업중학교로 개편되었다. 1953년 경기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68년 3월 국립 5년제 경기고등공업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74년 경기공업전문학교, 1979년 경기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88년 서울산업대학교로 개편되었다. 1980년 1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2동 캠퍼스를 인계하고, 노원구 공릉동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서울대 공대 유서깊은 터전을 인수했다. 공릉동 캠퍼스는 원래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캠퍼스였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미대][교양학부 캠퍼스로 쓰던 곳이었는데, 1975년 서울대 종합화 계획에 의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캠퍼스를 관악구로 옮김에 따라 서울산업대학교가 서울대 공과대학 캠퍼스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2010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 대학설립심사위원회에서 산업대 폐지활동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일반대 전환 심사가 통과하여 2012년부터 산업대에서 일반대로 전환되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에 위치하고 있다. 캠퍼스 넓이는 509,338m(154,074평)으로 서울특별시 소재 대학교 중 캠퍼스 크기는 4위이다. 캠퍼스 전체가 평지이고, 100년 역사라 아름드리 거목들이 즐비하여 여름에 녹음이 울창하여 하늘이 안보일 정도다. 드넓고 이쁜 평지공원 명품캠퍼스라 사계절 모두 멋지지만, 꽃피는 봄에는 관광객들이 엄청 많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이 촬영된 캠퍼스 중앙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다산관과 창학관이 있다. 지하 통로로 연결된 암수 쌍둥이 건축물이다. 다산관과 창학관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이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2002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대륙관은 경성제국대학 광산학과가 썼던 교사였고 2008년 2월 28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2015년 조선일보 QS 아시아 대학평가 특성화 대학(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공학·생명과학 5가지 학문 분야 중 3개 이하를 운영하는 대학) 부문에서 아시아 32위를 차지하였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 이어 국내 2위를 차지하였다. 2015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한국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한경 2015 이공계대학 평판도 조사에서 발전가능성 10위, 기술개발역량 12위, 창의성 13위, 전공수준 15위 등으로 종합 15위를 차지하였다. 2018년 중앙일보 대학평가 종합 19위, 국립대 2위를 차지했다 2014년 3월, 대학 홍보실에서 제1차 상징물제정위원회를 개최하여 상징물을 결정했다. 대학상징물 제정을 위해 2013년 4월 교원 및 교직원 대상 1차설문에 이어, 2013년 6월 학부 및 대학원 재학생 12,807명이 참여한 2차 설문을 실시했다. 대표건물, 교목, 상징동물에 대해 1차 설문결과로는 다산관, 소나무, 봉황이 가장 많은 응답을 보였으며, 전체 재학생 대비 91%의 응답률을 기록한 학부 및 대학원 재학생 대상 2차 설문에서는 다산관, 플라타너스, 해태가 최다득표를 차지했다. 이어서 홍보실장, 기획처장을 비롯하여 각 단과대학별 대표, 동문대표, 학생대표, 그리고 외부위원 등 총 14명으로 상징물제정위원회를 발족하여 2013년 8월부터 2014년 2월까지 6개월에 걸쳐 대표건물, 교목, 상징동물에 대한 타당성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대표건물로 다산관이 결정되었고, 상징동물은 흑룡을 선정하였다. 교목은 소나무가 선정되었다. University Seal은 대학교의 공식명칭과 설립년도, 교훈 등을 포함하는 엠블렘형 로고로 최고 학문기관으로서의 위상이 필요한 홍보물과 보증성‧정통성이 필요한 졸업증서 및 학위기, 교기, 공식기록문서 등에 사용된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도서관은 1910년 4월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 개교와 함께 업무를 시작하여 60만 6천여권의 장서와 10,410여종의 e-book, 360종의 국내,외 연속간행물, 23,235여 점의 시청각자료, 해외전자정보 중 전자저널 35종, 국내외 웹 DB 28종 등을 보유하고 있다. 2004년 말에 왼공한 중앙도서관은 연면적 9,281m(2,807평)의 지상 3층 건물로 지상 1층 도서관에는 사무실과 보존서고, 정보전산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2층에는 동양서자료실, 3층에는 멀티미디어실, 그룹스터디실, 참고 및 정기간행물실이 있다. 산학연구 협력 활성화를 통한 대학의 경쟁력 확대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2014년 현재 창업보육센터와 산학협력선도대학사업단(LINC) 을 운영중이다. 2014년부터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연계하여 학부생 3~4학년을 대상으로 인턴십을 시행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KIST와 학연협정을 체결하였다. 대규모 산학협력연구동이 2017년 12월에 완공되었다. 2013.05.01에 개관하였으며 다빈치관 224호에 위치해 있다. 미술관 종합계획 수립 및 전시개최, 학생 창작활동 전시 지원 및 교내 우수작품 전시 운영, 미술작품 및 소장품 보존·관리, 국내외 타 기관 등과 교류행사 개최, 전시장 대관 등을 맡고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숙사(생활관)는 불암학사, KB학사, 성림학사 총 3곳이 운영중이며 고시형 기숙사(SeoulTech 인재원)가 2016년 완공되었다. 현재 제4기숙사(제4기숙사 A동 수림학사, 제4기숙사 B동 누리학사) 공사가 수용규모 900여명 규모로 2016년 착공하였다. 2017년 12월에 완공한 산학협력연구동은 지하 1층, 지상 12층, 연면적 1만5500㎡ 규모로 총 사업비 260억원이 투입되었다. 1~2층은 교직원 식당, 서점 등의 각종 편의시설과 산학협력단 행정실, 3~4층에는 교육세미나실과 캡스톤디자인 LAB실, 5~6층, 8층에는 교내외 연구센터, 7층, 9~11층에는 대학기업 공동연구실, 12층에는 컨벤션센터와 다목적 회의실이 들어선다. 서울과기대는 그동안 수도권 유일의 FAB(반도체제조공정)을 보유한 대학으로 꼽히는 등 앞선 교육 시설을 확보하고 있었다. 산학협력연구동을 통해 기술력을 가진 기업에서부터 포스트닥터(Post Doctor, 박사 후 과정) 등 연구자가 상주할 공간을 마련해 우수 연구인력 확보, 연구의 대형화를 실현하겠다는 목표이다. 2019년 11월 완공을 목표로 착공한 창조융합연구동은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의 미디어랩(Media Lab)을 모델로 하여 지하1층, 지상8층, 연면적 18,000㎡ 규모로 총사업비 318억원이 투입되어 지어진다. 이곳에는 창조융합 연구 클러스터, 연구개발 통합 클러스터, 건축 및 공간연구 클러스터, 인문융합 클러스터 및 행정지원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창조융합연구동 신축은 서울과기대가 공학과 디자인 분야에 강점을 가진 대학 특성을 활용하여 세계적 수준의 융합연구원을 유치하고 창의적 융합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혁신적 융합기술 연구개발의 중심대학으로 도약하고자 추진해 왔다.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서울社會福祉大學院大學校, Seoul Social Welfare Graduate University)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사립 대학원대학이다.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는 특수대학원 과정으로, 사회복지학과 단일 과정의 석사 과정만 제공한다. 석사학위 이상의 학력 수여를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회복지최고위지도자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는 석사과정의 사립 대학원대학교이다. 2002년 5월 설립인가를 받아 2003년 개교하였다. 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꾸준한 성장을 통해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현재 (2015년 기준) 11기까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서울벤처大學院大學校, )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사립 대학원대학교이다. 현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선문대학교 선문대학교(鮮文大學校, )는 애천(愛天), 애인(愛人), 애국(愛國)의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통일교에서 설립한 충청남도 천안시와 아산시에 위치한 종합 사립대학교이다. 선문대학교 총장은 선문대학교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교직원을 대표한다. 순서대로 제 1대, 제 2대가 아니라 연임한 경우도 존재하나, 단지 순서대로 나열하고 연임회수는 생략하였다. 2018년 현재, 황선조 총장이 총장 직무를 수행중이다. 6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대학교는 일반대학원과 4개의 특수대학원을 운영하여 석사, 박사 학위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선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1986년 3월에 선문대학교 개교와 함께 천안캠퍼스에 처음으로 개관하였으며, 현재는 아산캠퍼스에 위치하여 지하 1층과 지상 5층의 박물관 포함하여 총 4,822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개의 주제별 자료실과 국내외 정기간행물실, 전자정보실, 일반열람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화교양시설로는 영화관과 진주남강유적관, 박물관이 있다. 선문대학교는 전세계 35개국 180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학교들은 다음과 같다. 성공회대학교 성공회대학교(聖公會大學校,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위치한 개신교계 사립대학이다. 영문 약칭으로 SKHU가 쓰이며, 국문 약칭으로 성공회대 혹은 회대가 있다. 현재 대한성공회 사제 김기석 신부가 총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1914년 대한성공회는 경기도 강화군에 성 미카엘신학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나 광복과 함께 학교를 다시 설립하였다. 1952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충청북도 청주시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1961년 9월 현 위치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1982년 천신신학교로 개편하였다. 1992년 성공회신학대학의 설립 인가를 획득하였다. 1994년 성공회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성공회대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풍으로 입지를 굳혀왔다. 특히 대한민국내 대학 중 비주류 경제학, 정치학, 철학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대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1914년 4월 성 미카엘신학원이 경기도 강화군에 설립되었다. 1915년 성 미카엘신학원은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동시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처음으로 휴교를 하였다. 1921년 5월 성 미카엘신학원은 인천광역시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1940년 3월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 명령에 거부 선언과 정치적인 이유로 강제 폐교된 뒤, 광복 이후 1948년 다시 개교하였다. 1952년 4월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인천광역시에서 충청북도 청주시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1961년 9월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현 교지로 이전하였다. 1965년 4월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82년 3월 성 미카엘신학원은 4년제 대학 학부 과정을 운영하는 천신신학교로 개편하였으며, 초대 교장으로 이재민 박사가 취임하였다. 1986년 10월 국내 및 국외의 특별 헌금으로 학생회관을 준공하였다. 1988년 3월 사회복지학과를 설치하여 종합 대학으로 전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2년 2월 천신신학교의 폐지와 동시에 성공회신학대학의 설립 인가를 획득하였다. 1993년 3월 성공회신학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이재정 신부가 취임하였다. 1994년 3월 현 사회과학부에 해당하는 종교사회학과와 현 영어학과에 해당하는 선교영어학교를 신설하였다. 1994년 7월 연세대학교와 협력대학관계를 위한 교류 협정을 체결하였다. 1994년 9월 성공회신학대학에서 성공회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5년 3월 세계성공회대학협의회에 회원 학교 자격으로 가입하였다. 1997년 3월 이재정 신부가 재취임하였다. 또한 신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2000년 4월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교내에 민주화 운동 자료관을 개관하였다. 2005년 성공회대학교는 학교의 중장기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4월 본부 행정조직을 개편하여 팀제를 도입하고 직원 호칭제도 등을 변경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교내 대학발전추진위원회가 2005~2014년 성공회대학교 장기발전계획 설명회를 진행하였다. 이 시기 성공회대학교는 국내외 다수의 대학 및 기관들과 교류 협약을 체결하여 교육 네트워크를 확장하였다. 국내에서는 상지대학교, 한신대학교와 함께 민주대학 컨소시엄을 구성하였으며, 원광디지털대학교와 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구로구청, 매일경제TV, 한겨레신문사 등과 교류 협정을 체결하였다. 국외에서는 일본의 릿쿄 대학, 모모야마 대학, 폴학원 대학, 필리핀의 세인트루이스대학과 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2000년 인도창 프로그램, 2004년 중국창 프로그램의 발대식을 진행하며 학부 재학생의 해외 교류 활동을 진흥하였다. 또한 이 시기 성공회대학교는 다수의 학부 전공과 대학원 과정을 신설하였다. 학부 과정으로는 1995년 3월 사회복지학과와 전산정보학과, 1996년 3월 일어학과와 신문방송학과, 9월 정보통신학과, 1997년 12월 유통정보학과, 1998년 10월 중어중국학과, 2001년 7월 디지털콘텐츠학부 등을 신설하였다. 대학원 과정으로는 1996년 3월 신학대학원, 1997년 12월 사회개발대학원, 1999년 11월 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정보과학대학원, 2001년 8월 신학전문대학원 등을 신설하였다. 성공회대학교의 교육이념은 열림 · 나눔 · 섬김이다. 성공회대학교는 위의 교육이념을 자발적이며 창의적인 교육방법을 통해 구현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성공회대학교의 지향하는 진보적이며 비판적인 학풍의 초석을 뜻한다. 이에 따라 성공회대학교는 '기독교적 인간', '주체적 인간', '공동체적 인간', '봉사하는 인간'을 육성한다. 성공회대학교 교표는 그리스도의 빛이 퍼져나가는 불꽃과 온누리, 대학의 호수성인인 성 미카엘의 첫 알파펫 M과 천평저울을 단순화한 것이다. 교표 속 문구인 'Lux Mundi'는 '세상의 빛'을 의미하는 요한복음 8장 12절의 라틴어이다. 편의시설로는 구내식당, 우편취급국 등이 있다. 우편취급국은 금융업무는 하지 않고, 우편업무만 하는 민간우체국을 말한다. 성공회대학교에서는 협동조합이 청소와 경비 업무를 맡고 있다. 2000년 9월과 2001년 8월 대한민국 교육부는 성공회대학교를 비정부기구 부문의 특성화를 통해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으로 2년 연속 선정하였다. 2003년 9월 대한민국의 신문사 《중앙일보》는 성공회대학교를 전국대학평가 사회학부분 전분야 상위권에 선정하였다. 2004년 2월 대한민국 정보통신부는 성공회대학교를 IT학과 교과과정 개편지원사업 신규지원 대학학교로 선정하였다. 2005년 3월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의 IT교수요원 초빙 지원사업을 선정되었다. 성공회대 총학생회는 2009년 초 4.2 동맹휴업 및 한대련 가입 건에 대한 총투표를 실시했다. 과반을 40명 정도 넘긴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하고 그중 각각 80%, 70%를 넘는 학생들이 찬성투표해 총투표가 가결되고 성공회대 총학생회는 한대련에 가입했다. 그러나 2009년 12월, 선거가 끝난 개표일 전날 밤 몰래 개표한 결과. 10표 남짓한 차이로 한대련 투표가 (정족수 미달로) 부결되는 것으로 나오자 선거인명부를 고치고 50여표를 더 넣어 가결시켰다고 한 내부고발자가 양심선언했다. 부총학생회장은 선거인명부에 투표권이 없는 휴학생이 많이 들어있었다고 변명했지만 학교측은 순수 재학생만 포함된 명단을 학생측에 제공했다고 답했다. 12월 10일 양심고백 이후 12월 11일 부정선거 주범인 부총학생회장이, 12월 14일 총학생회장이 사죄했다. 1월 14일 1차 토론회를 열었고 1월 15일에 다른 부정선거 가담자가 양심선언을 했다. 학생사회 논의 결과 주범에게는 1. 부총학생회장 자격 박탈, 2. 학생회원 권리 박탈, 3. 공개적 방법으로 사과문 발표, 4. 교내봉사 120시간(한 학기 이내)의 징계가, 부정투표 가담 후 뒤늦게 양심선언을 한 내부고발자 2명에게는 교내봉사 20시간의 징계가 내려졌다. 총학생회장 등 다른 총학생회 집행부 구성원과 선관위원은 부정투표에 개입하지 않았고 찬성 25장/반대 25장의 부정투표를 한대련 투표에 한해 넣은것으로 드러났다.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 대학이다. 1398년 조선이 유교 건국이념에 따라 숭교방(崇敎坊)에 설립한 고려시대 국립최고학부 성균관(成均館)의 전통을 계승한다. 성균관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다가 1943년에 폐교당했다. 그러나 1945년에 광복을 맞으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 같은 해 11월 김창숙의 주도로 전국유림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천여명의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다. 이를 통해 일제가 박탈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 9월 25일 문교부에 의해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으며, 김창숙이 초대 학장 및 성균관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1979년에는 경기도 수원시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신축하였다. 1965년부터 삼성그룹 이병철이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1979년 재단경영에서 손뗀 후, 봉명그룹(도투락)이 재단을 맡았으나, 열악한 재정상황으로 인해서 동문 및 재학생의 반발로 재단경영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재단없는 상황에 놓였다가 1996년 11월에 삼성그룹이 성균관대학교 재단을 재인수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자연과학캠퍼스를 이원화하여 운영하고 있다. 교훈은 ‘인·의·예·지’이다. 대한민국에서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대학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성균관대학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 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 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의 국립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재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 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하면서 이것이 성균관대학교 개교의 시초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해서 국립 최고학부로 설립된 성균관대학교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크게 고전대학시대와 근대대학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고전대학시대는 1398년에서 1894년까지를 말하며, 그 시대에는 전통적인 유학교육이 행해졌고 제도적 운영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근대대학시대는 1895년에서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대에는 유교이념에 기본을 두고 학문분야를 확대하여 유학 이외에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제도적 운영도 근대적인 것으로 전환 발전하여 왔다. 다시 고전대학시대를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건학기로 1398년에서 1494년까지 태조 때 성균관의 건립로부터 성종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그 시기에는 성균관의 건립과 더불어 제도상의 정비, 운영상의 시책이 적극적으로 베풀어져 최고 국립대학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제2기는 정체기로 1495년에서 1724년까지, 연산군 때부터 경종때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그 시기에는 연산군의 폭정 가운데 하나로 성균관을 한때 유연소로 삼았다가 중종이 즉위하면서 그것을 복구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또 선조때에는 임진왜란으로 성균관이 온통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에 문묘가 재건되고 다시 5년 후에는 명륜당이 중건되는 곡절을 겪었다. 제3기는 부흥기로 1725년에서 1894년까지, 영조 때부터 갑오경장 때까지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는 정치적, 문예적 부흥기를 맞아 성균관의 교육도 자못 활기를 띠었고 또 실학자들에 의하여 교육제도에 대한 개혁론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근대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개화기, 제2기는 수난기, 제3기는 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 때부터 일제 강점기 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 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부터 근대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기관은 과거 최고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나마 명륜전문학교는 해방 1년 전인 1944년 ‘명륜련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나, 그 중에서 제1시기로는 성장기, 제2시기로 발전기, 제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 같은 해 11월 김창숙의 주도로 전국유림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다.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 이 자리를 통해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 향교로부터 재산을 갹출 받았고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냈다. 그리고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이처럼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는 한국 전쟁이 발발해 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고등학교 안의 임시 천막교사로, 부산시 동대신동의 임시교사로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균관대학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캠퍼스(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에 위치한 자연과학캠퍼스(수도권 전철 1호선 성균관대역)의 이원화 캠퍼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캠퍼스의 소속 전공은 문, 이과의 구분에 따라 나뉘어 있으며, 자세한 소속 학부, 전공 및 대학은 아래의 개설학과 카테고리를 참조한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민간연구비를 수주받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고 총 연구비와 중앙정부 연구비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2008학년도에 시작된 국제하계학기(International Summer Semester)는 매년 글로벌 이슈를 테마로 해당분야의 세계적 명성과 강의 연구능력을 갖춘 교수팀을 초빙하여 재학생에게 국제화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기 하고자 하는 취지로 개설한다. 2008학년도 국제하계학기에는 약 300여명이 참가하여 “Culture, Business & Technology in East Asia”를 주제로 운영되었고, 2009학년도 국제하계학기는 “Sustainable Global Prosperity”라는 주제로 5개의 트랙을 기반으로 개설하였고 전 세계 40여개국 96개 대학에서 외국학생이 참가하였다. 국제하계학기에서는 수업 이외에도 Global Forum, 한국문화 체험, 필드트립, 캠퍼스 문화활동, 공연관람, Summer Night Party 등을 통해 외국학생과 재학생이 어울리고 교류하며 서로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글로벌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함양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주어진다. 2010 국제하계학기는 “Recovery & Prosperity: Post Crisis & New Future”를 주제로 5개 트랙(Recovery, Post Crisis, Prosperity, The Future, East Asia)을 기반으로 21개 코스를 개설되었다. 매년 국제하계학기 홈페이지(http://summer.skku.edu)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학교 내 외국어 교육을 위해 정규 교육과정의 기초교양으로 ‘기본영어’ 및 ‘전문영어’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제품(외국어능력 인증) 제도를 주관하고 있다. 비정규 과정으로 ‘어학특강’을 영어 및 제2외국어에 걸쳐 다양하게 개설하고 있고, 방학 중 특별프로그램으로 집중영어과정인 성균IEP(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재학생 영어캠프인 SNEC(자연과학캠퍼스)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어의 세계화와 학교 내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과정 정규·단기 과정 및 한국어 교원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재학생과 외국인유학생의 국제교류를 위한 ‘봉사도우미 Friends’ 제도와 외국어 전용공간인 ‘e+ Global Zone’을 운영하여 본교 구성원의 국제경쟁력 함양을 위해 힘쓰고 있다.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965년 3월 문교부로부터 전문 사서직 양성기관으로 ‘한국사서교육원’을 설립하는 학칙을 승인받아 정보사회를 선도할 유능한 전문직 사서 및 최고경영자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도서관학교육이 미국인 교수진에 의해 미국의 도서관학이 그대로 도입된 상황에서 한국자료 중심의 한국적 도서관학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동양 및 한국학의 총본산인 성균관대학교에서 도서관학과(1964년 3월)가 설립된 다음 해에 출발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보화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과과정을 오늘날의 변화된 정보기술의 환경에 맞도록 개편하여 정보처리, 정보검색, 정보관리, 도서관자동화 등과 같은 학과목을 강화하였다. 특히 1996년에는 첨단의 컴퓨터 기기를 갖춘 완벽한 사서교육원 실습실을 마련하여 21세기의 선도적 전문 사서직 양성 기관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사서교육원에서는 1급정사서과정, 2급정사서과정, 준사서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8,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대다수가 국내 주요 도서관 및 각종 정보자료실 등에서 사서로서 대한민국의 문헌정보학 및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향후에는 도서관, 자료실 및 정보센터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분야로의 진출도 가속화 되고 있다. 2005년 3월에 설립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이지마 스미오(Sumio lijima) 박사가 현재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영문 명칭인 “SKK Advanced Institute of Nanotechnology”를 줄여 SAINT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적 수준의 연구진을 구축되어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Grap hene Nano Device팀, Nano-based Solar Cell Technology팀, Flexible OLED팀, 생체 재료기반 나노복합체 및 소자기술팀의 융복합 연구그룹으로 구분된다. 친환경에너지자동차부품소재연구센터과 나노소재기반휴먼인터페이스융합연구센터를 소속 센터로 가지고 있다. SCIE(과학기술논문 추가 인용색인)급 국제저널인 NANO 를 발간하고 있다. 동아시아학술원은 유학사상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 문화와 현대 문제를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제적 상호이해를 돈독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0년 3월 1일에 설립되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정신(儒敎情神)을 건학이념(建學理念)으로 하는 성균관대학교는 오랫동안 동아시아학 진흥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성균관의 오랜 염원에 힘입어 설립된 동아시아학술원은 국제 동아시아학 학계의 중심기관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21세기 국제 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될 동아시아 문화를 미래 지향적 관점에 입각하여 연구하고 있다. 또한, 연구와 교육을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학문 전략을 수립하고, 연구 모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아시아학술원은 기존의 학문 분류 체계를 묵수(墨守)하지 않고, 통합학문적 연구를 통해 연구와 교육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통합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Research Cluster, 산하연구소(원), 대학원 및 학부 교육과정, 자료정보 지원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각 단위의 유기적 통일성을 제고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산하 기관으로 대동문화연구원 과 유교문화연구소, 동아시아지역연구소 와 서베이리서치센터 를 가지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1년 현재 개설되어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는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발표 논문수에 의거한 성균관대학교의 순위가 대한민국에서는 3위, 세계에서는 146위로 나타났다고 밝혔으며, 2009년에는 대학기부금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며, 산학협력중심대학육성사업에서 1위로 선정되었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교육과학기술부 대학경쟁력 평가에서 1위로 평가되었고, 대한민국 지식경제부의 글로벌 IT인재 활용 사업 수행대학으로 최종 선정되었다. 2014년에는 영국 THE 타임즈 세계대학평가에서 성균관대학교가 세계 148위로 이는 대한민국 내 종합사립대 중 1위에 해당하는 순위이다.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2년 연속 대한민국 내 종합 사립대 1위를 차지하였고, 또한, 종합대학교 NCSI 조사에서 80점을 얻어, 8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다. 2015년 Financial Times는 경영전문대학원(MBA) 평가에서 SKK GSB가 4년 연속 대한민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성산효대학원대학교(聖山孝大學院大學敎)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4동에 있는 대학원 대학교이다. 인천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인 최성규에 의해 설립되었다. 교명은 설립자의 호인 성산을 따서 명명되었다. 1998년 개교하였으며, 세계 최초로 효학을 가르치는 대학교로 자리잡았다. 2006년 세계 최초로 효학 박사를 배출했다. 세종대학교 세종대학교(世宗大學校,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이다. 세종대나 SJU의 약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10개의 단과 대학, 1개의 교양 대학, 1개의 독립학부, 1개의 일반대학원, 1개의 전문대학원, 5개의 특수대학원과 57개의 연구소, 8개의 BK21사업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법인 대양학원에 의해 운영된다. 현재 총장은 배덕효이다. 1940년 주영하가 경성인문학원을 설립하였다. 1947년 재단법인 서울여자학원을 설립하여 서울여자전문학관으로 인가되었다. 1948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로 개편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 문교부의 여성 교육을 담당할 여학교 교사 양성을 추진하는 일환으로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61년 4년제 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78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며 세종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명은 조선 왕조의 왕 세종대왕에서 유래되었다. 1987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오늘날의 세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건학 이념인 애지정신, 기독교정신, 훈민정신은 이를 바탕으로 창조적 지성인을 양성하는 것을 뜻한다. 상징 꽃은 에델바이스이며 상징 색은 세종 크림슨 레드(Sejong Crimson Red)이다. 세종대학교의 교표에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앙부일구의 영침과 월계수가 단순화되어 그려져 있다. 앙부일구는 세종대왕의 이타적인 사랑인 아가페와 훈민정신을 의미하며 월계수는 승리를 의미한다. 이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학훈인 덕성, 창의, 봉사를 실천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종합하여 뜻한다. 특히 학문 분야 중 애니메이션전공에서 국제대회 실적 한국 1위를 꾸준히 지키고 있다. 애니메이션 · 만화 · 호텔관광 · 무용 등의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입지를 굳혀왔다. 1940년 5월 경성인문학원(京城人文學園, Kyungsung Humanites Institute)이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희동에 설립되었다. 이후 1946년 5월 주영하, 최옥자 박사가 성동병원에서 대학 설립이사회를 개최하고 1947년 5월 3일 교육으로부터 소외 받은 여성들에게 참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재단법인 서울여자학원을 설립하였다. 5월 15일 서울여자전문학관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8월 26일 재단법인 서울여자학원은 경성인문학원을 폐원한 뒤 서울여자전문학관(서울女子專門學館, Seoul Women Teachers' Institute)을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에 위치한 승동교회 교육관을 임시교사로 사용해 개교하여 가정과와 국문과를 설치했다. 1948년 8월 26일 서울여자전문학관은 중등교원 양성을 위한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서울家庭保育師範學校, Seoul Women Teachers' Training School)로 학교명을 변경하였다. 서울여자가정보육사범학교는 가정학과와 국어국문학과, 보육학과를 2년제 과정으로, 전수과를 1년제 과정으로 개설하였다. 9월 주영하 박사가 초대 학장에 주영하 박사가 취임하였다. 10월 현재 세종호텔이 위치한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2가 제헌국회의원회관을 신교사로 개축 완료하고 대학을 이전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의 발생에 따라 학교를 휴교하였고, 전쟁 중 충무로에 위치한 신교사가 폭격으로 손실되었고, 1951년 1월 4일 재단법인 서울여자학원은 경상남도 마산시 두월동에 마산성동병원을 개설하고, 대학 재건사무소를 설치하여 대학 재건에 착수하였다. 한국 전쟁 휴전 이후 1953년 6월부터 충무로 교사가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1954년 4월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의 폐지와 동시에 수도여자사범대학(首都女子師範大學, Soodo Women's Teachers College)의 설립 인가를 획득하였다. 수도여자사범대학은 가사과, 보육과, 국문과, 음악과, 체육과의 다섯 개의 학과를 설치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문교부가 교육법에 따라 여성 교육을 담당할 여학교 교사 양성을 추진하는 일환의 결과다. 이로 인해 수도여자사범대학은 대한민국 최초의 2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충무로 신교사 소실로 인해 수도여자사범대학의 신입생 모집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소재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실시하였다. 1955년 2월 14일 충무로에 신교사를 재건하고 국문과와 영문과, 가정과로 구성된 야간부를 개설하였다. 또한 영어영문학과와 체육과 증설에 대한 인가를 허가받았다. 4월 충무로에 제2교사가 준공되었다. 1955년 9월 창립자 주영하 박사는 현 군자동 교지를 구황실로부터 매입하여 재단법인 서울여자학원에 교지로 기증하였다. 1956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은 미술과를 설치하였다. 특히 미술과는 여타 대학 교육 기관과 달리 생활미술에 중점을 두었다. 이로 인해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과는 대한민국 최초의 생활미술 교육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1959년 2월 1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부속중학교와 부속고등학교(현 서울세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1961년 11월 18일 대한민국 문교부의 전국 사립대학에 대한 정비의 최종단안 발표에 따라 4년제 대학으로 승격 개편 인가를 받았다. 또한 수도여자사범대학의 기존 영문명 'Soodo Women's Teachers College'를 'Soodo Women's University'로 변경하였다. 11월 22일 대한민국 문교부의 사립대학 학과별 학생정원 조정 정책에 따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주간 가정과, 음악과, 미술과, 체육과를 유지하고 야간 가정과, 국문과, 영문과를 폐지하였다. 1962년 11월 9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성심여자대학교 재단, 홍익대학교 재단과 함께 사립 초등학교 설립을 인가받았다. 12월 18일 충무로 캠퍼스에서 현 군자캠퍼스로 대학의 모든 기구와 기관이 이전하였다. 1963년 3월 9일 세종관과 대학교회가 준공하였고 수도여자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현 세종대학교 부설 세종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1월 1일 도산관이 준공되었다. 12월 24일 생활미술과와 식품화과를 신설하였다. 1965년 2월 4년제 대학교로 승격 개편된 후, 졸업생 27명을 대상으로 한 첫 학위수여식이 실시되었다. 1966년 2월 25일 대학원 석사과정이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초대 대학원장에 최옥자 박사가 취임하였다. 12월 7일 무용과를 증설하였다. 1968년 2월 호텔경영과와 관광개발과를 신설하였다. 이로 인해 수도여자사범대학 호텔경영과는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경영과로 설치되었다. 5월 28일 호텔경영과와 관광개발과의 부속연구기관인 세종호텔 신관이 준공되었다. 10월 10일 대한민국 문교부는 호텔경영과와 관광개발과의 졸업생에게는 중등교사 교원자격증을 수여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이는 사범대학으로는 이례적인 사례다. 12월 16일 호텔경영과를 증설하였다. 1969년 9월 율곡관과 세종화랑이 준공되었다. 1970년 종합미술관이 준공되었다. 12월 23일 가정과를 40명, 사회교육과, 식품화학과, 성악과, 기악과, 무용과를 각 10명, 교육과와 체육교육과를 각 5명씩 증설하였다. 1972년 재단 명칭을 학교법인 대양학원으로 변경하였다. 12월 9일 과학교육과를 신설하였다. 1973년 5월 28일 수도박물관(현 세종박물관)을 준공 및 개관하였다. 이를 통해 수도여자사범대학 수도박물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생활 민속 박물관으로 설치되었다. 1978년 10월 7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여자대학에서 남녀공학 대학으로 개편하여 학교명을 세종대학(世宗大學, Sejong College)으로 변경하였다. 세종대학은 주영하 박사의 창학이념 중 하나인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계승하자는 의미다. 주영하 박사의 저서 《강하고 담대하라》에 따르면 박사는 평생 세종대왕을 흠모했으며, 국어순화추진회 회장을 맡아 한글선앙운동을 펼치는 등 한글과 국어를 위해서 헌신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주 박사의 세종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교명 선정에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학은 야간 대학을 신설하며 경영과, 무역과, 회계과, 영문과를 설치하였다. 1979년 3월 세종대학은 첫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80년 8월 21일 주영하 박사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5월 20일 대양홀을 준공하였고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 경제학과의 대학원 박사 과정을 신설하였다. 1982년 5월 20일 군자관을 증축하였다. 8월 20일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가정학과 이순재 이학박사에게 첫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87년 10월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학교명을 세종대학교(世宗大學校, Sejong University)로 변경했다. 1997년 미국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 마틴과 기술협력사업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1998년 세종대학교 야간대학 학부생 전원을 주간대학으로 전환하였고, 1999년 세종대학교 도서관이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무역기구(WTO) 전문도서관으로 지정되었다. 세종대학교는 종합대학교 승격 이후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의 대폭적으로 신설, 증원시켰다. 학부 과정은 1987년 행정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전산과학과, 정보처리학과, 응용통계학과, 1995년 영상만화과, 1996년 전자공학, 건축공학, 토목공학, 컴퓨터공학과, 1997년 신문방송학과, 기계항공우주공학부, 영화예술학과, 1998년 생명공학과, 1999년 신소재공학과, 2009년 에너지자원공학과, 2012년 바이오자원공학전공, 정보보호학과, 자유전공학부, 국방시스템공학과, 2013년 항공시스템공학과, 원자력공학과, 2014년 호텔외식관광프랜차이즈경영학과를 신설했다. 세종대학교는 종합대학교 승격 이후 단순히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의 신설과 증원만 한 것이 아니다. 승격 이후 26개국의 133개 대학 및 기관과 국제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고, 16개국 88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체결하여 다양한 학술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국제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1997년 미국 항공기 제작사 록히드마틴과 기술협력사업 양해각서 체결과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무역기구 전문도서관 지정은 물론, 2003년 2월 25일 세종대학교 호텔관광대학과 미국 코넬대학교 간에 상호교류협정을 체결, 2012년 2월 9일 일본의 요코하마 국립대학과 MOU 및 MO 체결이 국제교류 확대의 대표적인 예이다. 2015년 세종대학교는 개교 75주년을 맞았다. 5월 8일 신규 엠블럼과 75주년 기념 엠블럼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세종대학교의 신규 엠블럼에는 기존 교표의 형태 및 색과 요소 등의 특징을 유지하여 표현하였다. 다만 기존 교표와 달리 월계수에 상징 색인 세종 크림슨 레드를 사용하지 않고 메탈릭 골드를 사용했으며, 영문 로고 글씨체를 'Times New Roman Bold'체로 변경하였다. 또한 75주년 기념 엠블럼에는 가장자리의 색상을 기존 교표에서 사용하지 않은 새로운 색상인 세종 베이지를 사용해 표현하였다. 2017년 3월 미래창조과학부 소프트웨어 중심대학 사업의 일환으로서 컴퓨터공학과, 소프트웨어학과, 정보보호학과, 데이터사이언스학과, 지능기전공학부, 창의소프트학부(디자인이노베이션전공, 만화애니메이션텍전공)를 포함하는 소프트웨어융합대학을 신설하였다. 또한 자유전공학부를 폐지하고 법학부를 신설하였다.8월 중핵필수와 중핵필수선택, 자유선택교양 등을 주관하던 교양학부를 독립 대학으로 승격시켰으며 대양휴머니티칼리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세종대학교는 학술연구·인재양성·사회봉사의 교육목적 아래 애지정신, 기독교정신, 훈민정신을 교육이념을 중시하고 있다. 위의 교육이념, 목적에 따라 세종대학교는 창조적 지성인의 양성·실천적 전문인, 전인적 교양인, 헌신적 사회인의 양성을 교육목료로 삼고 있다. 세종대학교 교표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해시계의 영침과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를 단순화한 것으로 자기를 헌신하는 이타적인 사랑, 창의,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으뜸가는 인재를 키워낸다는 교육의지를 담고있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6년 12월 현재 개설되어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2014년 세종대학교는 재학생들의 '일을 통한 행복 찾기'에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2015년 세종대학교는 대학 구조조정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최우수 A등급을 수여받았다. 세종대학교는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최우수 A등급을 받았음으로 B등급 이하의 대학과는 달리 강제적으로 정원감축을 당하거나 정부의 재정지원 수혜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영국의 대학교 평가기관 QS와 대한민국의 신문사 조선일보가 공동적으로 진행한 2017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 국내 14위, 아시아 88위에 순위되었다. 세종대학교는 2016년 93위로 처음 상위 100위 내에 진입한 이후 2년 연속 100위권에 진입하였다. 영국의 대학교 평가기관 타임즈 고등교육이 실시한 2018 세계대학평가에서 국내 12위, 세계 501위권에 순위되었다. 특히 세종대학교는 교육, 연구, 논문피인용, 국제화, 산학협력 연구비 영역의 다섯 개의 평가영역 중 논문 피인용(Citations) 영역에서 국내 9위를 달성했다. 이는 논문의 질이 우수하다는 의미이며, 그 만큼 세종대의 연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2018 아시아대학평가에서 국내 16위, 전체 100위에 순위되었다. 세종대학교는 영국의 대학교 평가기관 QS이 진행한 2017 QS 세계 대학 순위 학과별 순위에서 호텔관광대학이 국내 1위, 세계 26위에 순위되었다. 2014년 미래창조과학부는 세종대학교의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예비대학을 소프트웨어 교육과정 모범사례로 선정하였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정보통신기술 인력양성 지원사업 전국대학 순회 설명회에서 세종대학교의 예비대학을 모범사례로 소개하며 소프트웨어 교육과정 확산 및 보급을 독려하는 홍보자료로 사용하였다. 미래창조과학부의 윤종록 차관은 세종대학교 예비대학을 "다른 학문 전공자도 소프트웨어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소프트웨어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세종대학교 예비대학과정이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2015년 세종대학교는 미래창조과학부의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사업 일환으로 2016년 세종이노베이션센터를 착공하였다. 2017년 소프트웨어융합대학을 신설하였다. 또한 2018년 신입생 입학 요강부터 전공 입학인원의 20%를 소프트웨어 특기자로 선발하였다. 2016년 세종대학교 국제학부의 아시아태평양 미래개척 창의인재 양성단이 교육부의 대학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었다. 사업 일환으로 세종대학교 국제학부 재학생은 '나침반 교육모델'에 따라 4차 산업에 대응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을 제공받는다. 따라서 재학생은 아태문화, 미래융합, 통상개척 등의 세 가지 트랙을 수강할 수 있으며 교과 및 비교과 해외 프로그램과 산학연계 전공심화 교과와 멘토링제 등을 제공받는다. 2016년 세종대학교는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이 대학의 연구력을 나타낼 수 있는 논문을 기준으로 선정하는 라이덴 랭킹(Leiden Ranking)에서 국내 11위에 선정되었다.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국내 4위, 생명과학과 지구과학 분야에서는 국내 5위를 차지했으며, 라이덴랭킹에 포함된 국내 30개 대학 가운데 가장 크게 성장했다. 라이덴 랭킹은 전체 논문 대비 인용도가 높은 상위 10%의 논문을 산정하기 때문에, 대학별 연구력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평가된다. 2017년 대한민국의 신문사 중앙일보가 진행한 2017 중앙일보 대학평가 분야별 논문부문 사회과학 분야 상위 10% 논문 비율 1위에 순위되었다. 2016년 세종대학교 모바일 가상현실 연구센터가 대한민국 미래창조과학부의 대학 ICT 연구센터 육성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사업 일환으로 세종대학교는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등과 함께 가상 현실 콘텐츠와 기술 연구 및 개발을 주관하였다. 세종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연구팀은 대한민국 방위사업청의 국방특화 연구실 사업에 선정되었다. 사업 일환으로 세종대학교는 연세대학교 정보대학원,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등과 함께 국내 최초로 ‘사이버전 특화 연구사업'을 주관하였다. 세종대학교의 정문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385호인 창경궁의 명정문의 건축 양식과 같은 단층 팔작지붕의 형식으로 건설되어, 국내 대학교 중 가장 한국적인 정문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어린이대공원역의 6번 출구와 근접해 있다. 또한 어린이대공원역의 부역명은 세종대역이다. 대한민국의 대학교 중 한양대학교와 숭실대학교와 함께 지하철역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대학교 중 하나에 꼽힌다. 세종대학교의 집현관은 2006년 주식회사 서희건설이 증축했으며, 세종대학교의 주요 부서들이 위치해있다. 취업지원과와 학생지원과, 사무처, 학적과, 수업과, 총무과 등이 위치해 있으며, 총장실과 이사장실이 위치해있다. 인문과학대학과 사회과학대학 등의 강의동이 위치해 있으며, 세종대학교의 실질적인 본관으로 일컫어진다. 전자서류발급기계가 있어 재학증명서나 휴학증명서 같은 서류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세종대학교의 군자관은 세종대학교의 주요 학교 편의 시설이 위치해있다. 서점, 은행, 복사실, 우체국, 휴게실, 교직원 식당, 생활협동조합 등이 위치해있다. 패션디자인학과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등의 예술대학의 강의동이 위치해 있으며, 경영대학과 호텔관광대학 등의 과실이 위치해 있다. 집현전이라는 명칭의 소강당이 위치해 있어 대학교의 주요 행사나 대기업의 교류 협정이나 강연이 주로 개최된다. 세종대학교의 광개토관은 세종대학교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경영대학과 호텔관광대학, 일반대학원, 국제어학원 등의 강의실과 교양 수업 강의실이 위치해있다. 또한 외국인 기숙사, 스카이 라운지, 게스트하우스, 소극장 등이 위치해있다. 학교 편의 시설으로는 스카이라운지 찬식당, 카페 그라찌에, 카페 찬, 카페514와 GS25 편의점이 위치해 있다. 국내 대학교의 유일한 컨벤션홀인 세종컨벤션센터가 위치해 있어, 각종 세미나 행사와 결혼식 등의 행사 등이 비정기적으로 열린다. 또한 헬기 착륙장과 수영장 시설이 있다. 본래 세종대학교의 SLC관이라는 이름의 대학교 연구실의 연구동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엘리베이터 시설이 적었으나, 강의동으로 건물의 역할이 변경된 이후 세종대학교 대다수의 학생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세종대학교 학술정보원은 학교 연구활동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정리, 보존함으로써 학교 구성원들에게 교육과 관련된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학술정보원은 1949년 3월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도서실로 개실되어, 1954년 수도여자사범대학 도서관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1978년 세종대학 도서관, 1987년 세종대학교 도서관으로 계속하여 개명하다가, 2000년 현 명칭인 세종대학교 학술정보원으로 개명하였다. 2010년 2월 현재 국내외 단행본 총 장서량 793,019권이 소장되어있다. 학술정보원에는 정보처리과와 정보운영과 및 전자정보과를 하위 부서로 두고 있다. 정보처리과는 일반서무, 자료 구입·등록, 기증 관련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정보운영과는 자료 선정·분류·목록, 참고봉사, 이용자교육, 대출·반납, 원문복사·상호대차, 연속간행물 제본, 서고·열람실·시설 관리, 장서점검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전자정보과는 학술정보원 서버·전산장비·DB·홈페이지 관리, 비도서자료·전자자료 선정·분류·목록·구독관리, 전자정보실·A/V실 운영·관리 등을 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박물관은 1973년 5월 5일 백제탑 양식의 4층 건물로 준공, 개관됐다. 1977년 5월 20일 이를 증축하여 현재의 5층 박물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세종대학교박물관'은 1959년 충무로 교사(현 세종호텔)에 부설됐던 '수도화랑'이 효시다. 충무로 교사가 현재 군자동으로 이전되었고, 이후 1973년 독립된 건물을 준공하면서 지금의 '세종대박물관'이 만들어졌다. 1979년 교명이 세종대학교로 변경됨에 따라 박물관의 명칭도 '세종대학교박물관'으로 개칭해 한국의 문화, 예술, 민속, 고고학 등의 연구에 있어 국내외 학자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생생한 실물을 제공하고 있다. 개관시간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로 주말 및 공휴일은 문을 닫는다. 세종대학교 박물관 건물은 서울특별시가 지정한 '아름다운 건축물'에 선정되었다. 세종대학교 박물관 주로 민속, 도자기, 궁중 의상, 서화류 등 총 5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고, 1998년부터 주로 민속관련 소장품 중에서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다. 2층은 세종대학교의 역사실과 전통 가옥을 재현한 민속실이 있고, 3층은 궁중 의상을 비롯한 관복, 군복과 여염의 의상류, 4층은 선조들이 애용하던 반상류와 소품, 5층은 대형 목공예품등을 전시하고 있다. 곤룡포(중요민속문화재 제58호)를 비롯한 중요민속문화재 14점을 소장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애지헌교회는 세종대학교 교내에 위치해있는 기독교 교회 시설이다. 세종대학교의 교양학부 수업인 채플과 예체능대학 음악과의 오케스트라 공연의 용도로 사용된다. 교회의 담임 목사는 세종대학교 교목실장, 사역자 목사와 전도사는 세종대학교 행정조교를 겸임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국제교육원은 2008년 3월 준공, 개원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계승 및 발전시키기 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외 유학생들을 중심적으로 모집하여 한국어과정을 운영중이다. 외국어과정은 세종대학교 재학생과 휴학생, 졸업생 및 일반인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영어, 중국어, 일본어 과정을 운영중이다. 세종대학교 글로벌지식평생교육원은 1993년 3월 전문지식과 사회실무를 겸비한 평생교육의 가치를 펼치기 위한 목적으로 세종대학교 부속 사회교육원으로 개원했다. 이후 1998년 3월 학점은행제 시범운영기관으로 선정되어, 지금까지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으로 평가인증되었다. 학점은행제 과정으로는 호텔경영학, 외식경영학, 디지털콘텐츠, 음악학, 실용음악학, 무용학, 체육학, 패션디자인학, 패션비즈니스학 과정을 운영중이다. 전문교육과정으로는 CEO과정, 인문과정, 음악과정, 요가과정, 패션과정 등을 운영중이다. 세종대학교 세종호텔은 1966년 12월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에서 개관한 특1급 호텔이다. 위치는 수도여자사범대학 시절의 옛 캠퍼스 위치이다. 개관 이래 학교법인 대양학원에서 운영하고 있었으나 1978년 이후 학교법인 대양학원에서 출자한 세종투자개발이 운영을 전적으로 맡고 있다. 세종대학교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의 실습 및 인턴쉽 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병원과 고려대학교병원의 식당을 개관 및 운영한다. 세종대학교 세종컨벤션센터는 2012년 3월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에서 개관한 컨벤션 센터이다. 세종대학교에서 직접 운영 중이며, 수익금이 대학의 발전기금과 장학금으로 활용되는 순수목적 사업시설이다. 대한민국 대학교 유일의 국제회의 전문시설이다. 식음료 서비스는 세종호텔에서 제공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의 실습 및 인턴쉽 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대양홀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에서 개관한 콘서트홀이다. 대양홀, 학생회관 대공연장과 소공연장을 운영 중이며, 대양홀은 총 객석 2,029석의 웅장한 규모로 음악 공연을 비롯하여 콘서트, 무용, 연극 등의 문화행사와 기업체 세미나, 설명회 등의 다양하고 깊이 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MBC 수요예술무대와 중앙일보 영화감상회, 제14회 월드미스유니버시티 선발대회를 개최해왔으며, 영화 라디오 스타의 첫 장면에서 박중훈이 공연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S.E.S., 슈퍼주니어-D&E, 임창정, 거미, 세븐, 에일리 등의 단독 콘서트 및 팬미팅을 개최하였다. 세종대학교 융합창업기업가센터는 다양한 분야를 융합하여 창업을 하려는 교원 및 학생을 지원하고, 융합창업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학제적 교육을 개발 및 운영하며, 관련 연구 과제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복수학위제인 융합창업 연계전공을 운영하고 있고 창업동아리, 창업경진대회, 세종문화예술융합벤처포럼 등 관련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기후변화센터는 2009년 8월 기후변화 관련 고급인력 양성과, 민관산학연 협력체계를 유지 및 활성화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해외 전문기관과 연구기관과 협력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정기적으로 환경 관련 연구 활동과 학술발표회, 초청강연회, 전문가 양성을 위한 단기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또한 대학원생들에게 현장 실무 경험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2012년 7월 한국형 온실가스배출 경로분석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세종대 기후변화센터는 2003년 산업자원부, 에너지관리공단과 함께 기후변화협약특성화대학원 연구과정, 2009년 지식경제부와 에너지자원기술기획평가원과 함께 기후변화협약특성화대학원을 운영하였고, 2014년 환경부와 함께 기후변화특성화대학원의 일환으로 세종대학교 일반대학원 기후변화협동과정을 운영중이다. 세종대학교 빅데이터산업진흥센터는 2014년 5월 16일에 미래창조과학부와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에서 추진하는 정보통신 연구기반 구축사업’의 일환으로 개소하였다. 빅데이터 산업을 지원하고, 정보 통신 기술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과 개발 기술의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연구장비 공동 활용체계를 구축해왔다. 또한 빅데이터산업진흥센터의 인프라 시설을 지원받았던 레드테이블은 제2회 공공데이터 활용 창업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세종대는 성균관대학교, 국민대학교와 함께 서울특별시청이 추진하는 빅데이터 캠퍼스에 선정되어, 대학을 비롯한 민관산학이 모두 모여 여러 사회문제들을 함께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빅데이터 캠퍼스를 구성하였다. 세종대학교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센터는 개방형 ICT 융합과정으로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ES) 복수학위제를 운영하는 세종대학교 산하부서이다. 첨단 종합예술인 엔터테인먼트산업(방송·영화·음악·게임·공연예술)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융합능력과 창조적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국내 IT 기업, 기관들과 컨소시엄을 맺어 기술 융합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등의 산학간 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매년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과정의 연계전공과 신규 교과목을 운영하고 매년 70여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융합학사 학위를 수여한다. 세종대학교 부설 세종초등학교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에 위치해 있다. 1962년 10월 국민학교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63년 3월 수도여자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로 개교하였다. 1979년 세종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96년 대한민국 교육법 개정 공포 이후 현재 명칭인 세종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세종대학교 부설 서울세종고등학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해 있다. 1958년 12월 수도여자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개교하였다. 1971년 11월 학칙 변경 후 여자고등학교에서 남녀공학 고등학교로 변경하였고, 1979년 9월 현재 명칭인 서울세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89년 2월 광진구 군자동에서 강남구 수서동 현 위치로 이전했다. 세종대학교 총학생회는 학교 축제 및 각종 학교 문제에 대한 대학 본부와의 협의를 주관한다. 2010년과 2012년은 선거가 무산이 되어 총학생회가 공석이었다. 2014년 회장 김종현, 부회장 강희령의 선출로 총학생회는 "액션" 이라는 슬로건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4년 4월 10일 개최된 전체 총회에서 타 총장 직속 기구를 비난하는 투의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세종대신문》은 세종대학교 부속 언론기관 세종대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신문이다. 격주로 발행되며 방학 기간에는 발행되지 않는다. 오프라인 버전은 각 건물의 현관, 엘레베이터 주변에서 제공되며, 인터넷 버전은 세종대신문사의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된다. 1957년 《수도여자사범대학보》로 창간되었다. 대학부, 문화부, 사회부 등의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부는 학내외 뉴스를, 사회부는 학내외의 화제가 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취재하고, 문화부는 변화하는 문화를 발 빠르게 취재하고 있다. 대학 공동체 구성원들의 편향되지 않은 의견개진을 도모함과 동시에 학문 및 학습활동을 활성화하여 학풍을 진작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세종타임즈》는 세종대학교 부속 언론기관 세종대영자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영자 신문이다. 연 4회 발행된다. 독자참여 코너인 퍼즐맞추기가 있다. 1968년 《수도 헤럴드》로 창간되었다. 1981년 현재의 명칭으로 개편되었다. 대학부, 사회부, 문화부, 국제부 등의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으로 영어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 영문매체를 통한 영어의 친근감을 확대하고, 영어 학습의 필요성에 대한 학내 공감대를 형성하며, 학내의 외국인 학생들의 소통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군자방송국 SKBS는 세종대학교 부속 언론기관 세종대학교 군자방송국에서 운영하는 TV 채널이다. SKBS는 Sejong Kunja Broadcasting Station의 약자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 1일 3회의 정규방송과 특별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1957년 개국했다. 보도부, 아나운서부, 제작부, 기술부 등의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보도부는 학내 여론 형성과 문제점을 파헤치고, 아나운서부는 학우들에게 목소리로 다가가는 최종전달자 역할을, 제작부는 종 교양 및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기술부는 방송이 나가기 위한 기기를 다룬다. 매년 신입생 환영 방송 잔치, 열린 소리 잔치, 군자 방송 잔치 등을 개최한다. 성실, 정확, 신념을 국훈으로 하여 올바른 대학언론과 학우들의 정서 함양을 위한 역할을 수행한다. 오디오 방송과 영상 방송 등의 정규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오디오 방송은 군자방송국 SKBS가 1957년 개국한 이래 매주 주중 1일 3회 진행되고 있다. 오디오 방송은 8시 40분부터 9시, 12시 40분부터 13시, 17시 40분부터 18시 10분에 진행된다. 영상 방송은 녹화된 영상을 엘리베이터 및 각 건물 중앙 TV를 통해 수시로 송출하고 있다. 신입생 환영 방송과 축제 생중계 방송 등의 특별 방송 《SKBS LIVE》를 송출하고 있다. 2015년 유튜브 공식 채널을 통해 처음 송출되었다. 2016년부터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송출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대학 방송국 최초의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이다. 《세종니야기》는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에서 발행하는 소실지이다. 타블로이드배판 판형과 올컬러 채색으로 발행된다. 기존 대학의 총학생회와 달리 학우들과의 소통을 위해 발행되었다는 점에 있어 의의가 높다. 내용 구성의 부실과 기사 배치와 공백 공간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세종니야기》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대동제'는 세종대학교의 봄 축제로 매년 5월의 넷째주에 개최된다. 총학생회와 동아리 협회, 각 단과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최근의 축제는 다양한 동아리들의 공연, 영화제, 전시회 등의 문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각 학과의 특색을 살린 행사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힘미제'는 세종대학교의 가을 축제로 매년 9월의 넷째주에 개최된다. 축제는 힘과 미의 상반된 주제를 담아 진행된다. 16개국 88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체결하여 다양한 학술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세종대학교 하이브리드 프로그램은 교환(방문)학생, ISEP 교환학생 등 정규학기 프로그램 어학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해외 자매학교에 파견되어 일정 기간 집중어학연수 후 정규 교환 또는 방문학생의 신분으로 자매학교에서 수학한 후 학점을 취득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세종대학교 해외직무체험방문학생 프로그램은 직무관련 수업 및 교육 후 세계기업 현장에서 실습을 하며 국제적 감각 및 실무경험을 쌓는 프로그램이다. 실제 기업 안에서의 근무 체험과, 글로벌 기업 문화를 접하며 실무경험을 쌓는 동시에 학점이 인정되는 장점이 있다. 현재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 학생을 대상으로 미국의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를 통한 플로리다주 디즈니랜드와 협정을 맺고 있다. 수원대학교 수원대학교(水原大學校, )는 1982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이다. 경기도 화성시에 캠퍼스가 소재한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수원대학교의 교육과정 일람이다. 수원대학교는 단과대학 9개 대학을 설치하여 학부 과정을 운영중이다. 수원대학교는 일반대학원 1개원과 특수대학원 12개원 등 총 13개원의 대학원을 설립하여 석·박사 학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 대학이다.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으며 주로 숙명여대 또는 숙대라는 약칭으로 불린다. 학부는 11개 단과대학, 3개 독립학부로 구성되며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특수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법인 숙명학원이 운영하며, 현재 총장은 강정애이다.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가 1906년에 세운명신여학교를 모체로 1912년 설립된 재단법인 숙명학원이 1938년에 현재의 부지에 숙명여자전문학교라는 교명으로 설립했다. 1955년 종합 대학으로 승격되어 개교했다. 2006년 창학 100주년 기념식이 제2창학 캠퍼스에서 거행되었다. 캠퍼스는 설립 당시부터 존재하던 제1 캠퍼스와 1980년대에 준공된 이과대학 캠퍼스, 2000년대에 준공된 제2창학 캠퍼스로 크게 나뉜다. 제2창학 캠퍼스에는 프랑스의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의 한국 분교와 제217 학생 군사 교육단이 들어서 있다. 1906년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가 출자하여 용동궁에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정경부인 이정숙(李貞淑)이 취임하였다. 1908년 명칭을 명신고등여학교(明新高等女學校)로,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等女學校)로,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로 개칭하였다. 1935년 이정숙이 교장에서 퇴임하고 오다 쇼고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2년 경선궁과 영친왕이 하사한 토지의 수익금으로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운영하는 재단법인 숙명학원이 설립되었다. 1938년 숙명학원에서 현재의 부지에 숙명여자전문학교(淑明女子專門學校)를 설립하여 다음 해인 1939년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이던 오다 쇼고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11월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재 개교하여 숙명여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임숙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5월 미군 군정청에 의하여 대학 승격을 인가 받고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에 부산으로 피난하여 동대신동에서 가교사를 짓고 수업을 계속하였으며, 서울 지역이 다시 수복되자 1953년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1955년 종합 대학으로 승격되어 초대 총장으로 임숙재가 취임하였다. 1964년 10월 21일 32명의 교수가 김순식 총장이 부정하게 신입생 입학과 건물 신축을 결정했다며 총장 사임과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고 총장실을 점거하여 농성하였다. 11월 19일 32명의 교수 중 5명의 해면이 결정되자 일부 학생들이 가담하여 농성을 계속하였고 23일 김순식 총장은 학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무기한 휴교한다고 발표하였다. 농성을 계속하던 교수들은 문교부가 해산을 지시하자 농성을 해제하였다. 1965년 1월 21일 김순식 총장이 사임하자 22일 제5대 총장으로 철학 박사 윤태림이 취임하였다. 1966년 학내 분규가 발생하여 윤태림 총장이 횡령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하였다. 1968년 김신조 등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6관구 사령관이 한강 이북 방위선을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숙명여대가 소유한 남현동 토지를 강제 점유하자, 숙명여대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점유당한 토지를 전국에 산재한 국방부의 유휴지로 환지받았다. 1981년 정치학 박사 김옥렬이 제10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옥렬은 숙명여대를 다니다가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숙명여대 출신 총장이었다. 김옥렬 총장은 장기 발전 계획을 추진하여 1984년 현재의 중앙도서관 건물이 신축되었고, 용인군에 부지를 매입하여 1990년 연수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1991년 국방부 소유가 소유한 B지구(현재의 제2 창학 캠퍼스)의 토지 일부를 취득하였다. 1994년에는 정치학 박사 이경숙이 교수 직선으로 제13대 총장에 선출되었으며, 1995년 창학(創學)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6년을 목표로 한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제2 창학을 선언하였다. 제2 창학 캠퍼스를 조성하기 위하여 약학대학 뒤에 위치한 산림청과 국방부 소유의 토지에 지정된 공원 부지을 해제하고 매입하였다. 한편 이경숙 총장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동문들을 대상으로 한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2005년 제2 창학 캠퍼스에 백주년기념관이 완공되었고 2006년 제2 창학 캠퍼스에서 창학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2008년 이경숙 총장이 정년 퇴임하자 이학 박사 한영실이 교수 직선으로 당선되어 제17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0년 한영실 총장은 새로운 학교 비전인 ‘숙명 블루 리본 프로젝트’(Blue Ribbon Project)를 선포하였다. 같은 해 학제 개편의 일환으로 경상대학에 소속된 경영학부와 경제학부를 분리하고 경영학부를 3개의 학과로 분할하여 경영대학에 소속시키고 경제학부를 사회과학대학으로 이전하는 방안이 발표되었으나, 소속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자 한영실 총장은 경상대학의 현재 체제를 유지한다고 발표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2010년 9월 14일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 시범 대학으로 선정되어 같은 해 12월 10일 학생 군사 교육단(학군단) 창설식이 거행되었다. 2012년 3월 15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숙명학원이 대학의 기부금을 재단의 계좌로 이체하여 다시 대학에 교부한 것을 이유로 이용태 숙명학원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5명과 감사 1명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였다. 이사회는 한영실 총장이 언론 매체에 해당 사실을 유출하여 이사회의 업무를 방해했다며 한영실 총장의 해임을 의결하였다. 3월 30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숙명여대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한영실 총장을 해임한 이사회 결의의 효력을 임시로 정지하였고, 한영실 총장은 업무에 복귀하였다. 한편 4월 4일 교과부는 최종적으로 이들의 승인을 취소하였다. 승인이 취소된 이사들은 서울행정법원에 교과부의 취소 처분에 대한 집행 정지를 신청하였고 법원이 4월 25일 이들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승인이 취소된 이사들은 이사회로 복귀하였다. 8월 16일 서울행정법원은 교과부의 승인 취소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하였다. 한편 2012년 7월 25일 교수회의에서 황선혜 영문학부 교수가 1위로 한영실 당시 총장이 2위로 차기 총장 후보에 선출되었으며, 숙명학원 이사회는 8월 9일 황선혜 교수를 차기 총장으로 선임하였다. 황선혜 총장은 9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하였으며 13일에 취임식이 개최되었다. 2013년 공과대학 창설을 선언하고, 2016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 이어 여대에서 두 번째로 공과대학을 신설하였다. 같은 해 교육부가 실행하는 "산업 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 대학 사업(프라임 사업)"의 "사회 수요 선도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 7월 26일 숙명학원은 교수 회의에서 1위로 총장 후보에 선출된 강정애 경영학과 교수를 차기 총장으로 선임하였고, 강정애 교수는 9월 1일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8년 현재 개설되어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메이트’(Multimedia Assisted Test of English; MATE)는 숙명여대가 개발한 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도구이다. 영어 말하기 평가인 메이트 스피킹(MATE Speaking)과 영어 쓰기 평가인 메이트 라이팅(MATE Writing)으로 구성된다. 시험은 응시자가 컴퓨터로 전해지는 소리, 영상, 문자로 제시되는 과제를 헤드셋과 키보드를 사용하여 답안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1997년 제1차 숙명 영어 테스트 개발팀이 출범하였으며, 1999년 1차 정기 시험이 시행되었다. 2006년 민간 자격 국가 공인을 취득하였고 2007년 민간 자격 국가 재공인을 취득하여 운영되었으며, 2018년 2월로 종료되었다. 숙명여대는 국방부에 의해 2010년 9월 14일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 시범 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2010년 12월 1일 최초의 여성 학군단 창설식을 백주년기념관에서 거행하였다. 숙명여대는 학군사관 후보생 기숙사인 명재관에서 단체생활과 더불어효창운동장과 육군학생군사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한다. 숙명여대에서는 매년 30명의 여성 학군사관 후보생을 선발한다. 한편, 숙명여대는 여군 장교 양성을 위한 ROTC동문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12년 학군사관 동계 훈련과 하계, 동계 훈련을 합산한 종합 성적에서 1위(대통령상)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부속교육기관으로는 글로벌사회교육원, 평생교육원, 국제언어문화교육원, 한국음식연구교육원, 르꼬르동블루-숙명아카데미가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국제언어문화교육원(The International Institute of Language Education, LinguaExpress)은 1967년 대학원관 2층에 어학실습실로 처음 설립되었다. 어학 교육의 실습을 보조하던 어학실습실은 1999년에 국제언어교육센터(The International Center for Language Education; ICLE)로 개칭되면서 자체적으로 어학 강좌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게 되었다. 2000년에는 신축된 사회교육관에 입주하면서 국제언어교육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국제언어교육원은 외국어 과정과 한국어 과정,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외국어 과정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과정이 있다. 르 꼬르동 블루-숙명 아카데미(Le Cordon Bleu-Sookmyung Academy)는 1895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의 한국 학교이다. 르 꼬르동 블루는 2001년 10월 4일에 숙명여대와 투자 협력 조인식을 열고, 2002년 9월 30일에 르 꼬르동 블루-숙명 아카데미를 숙명여대에 개원하였다. 르 꼬르동 블루-숙명 아카데미는 숙명여대 사회교육관 6층과 7층에 위치하며, 숙명여대와 르 꼬르동 블루의 조인트 벤처(Joint Venture)로 운영된다.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하거나 그와 동등한 학력을 소지한 만 18세 이상의 성인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숙명여자대학교의 캠퍼스는 크게 제1캠퍼스와 제2창학 캠퍼스, 부속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제1 캠퍼스에는 순헌관(純獻館, 구 본관), 명신관(明新館, 구 서관), 진리관(眞理館, 구 대학원관), 학생회관, 행정관, 명재관(기숙사)가 위치해 있으며 특히 순헌관 앞에는 정원(庭園)과 원형 극장(圓形劇場)이 조성되어 있다. 제2창학 캠퍼스는 1995년 제2창학 선언으로 건설되었으며 음악대학, 미술대학, 약학대학, 사회교육관, 르네상스플라자, 백주년기념관, 중앙도서관, 이과대학(과학관), 다목적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르네상스플라자 내에는 정영양 자수 박물관과 문신 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있다. 숙명여자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은 1938년 숙명학원이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면서 함께 설치한 부속 도서실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숙명여자전문학교가 대학기관으로 승격하면서 숙명여자대학으로 인가되며 부속 도서관으로 개칭되었으며, 1955년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면서 부속 도서관이 정식 도서관으로 발족되었다. 1961년에 도서관이 3층짜리 건물로 신축되었으며 1964년 4층이 증축되었다. 1984년 과거의 건물이 철거되고 현재 도서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인 지하 1층, 지상 6층의 건물이 신축되었다. 2005년 도서관과 이과대학 사이의 공간에 지하 열람실이 설치되었으며, 2006년 2년 동안의 내부 개조(리노베이션)가 완료되었다. 2013년 이용자 친화적 웹기반통합시스템을 오픈하였다. 2015년에 2차리노베이션을 완료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은 학교가 수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보존하기 위해 1971년 6월 10일에 개관했다. 2003년 르네상스 플라자가 완공되기 전까지 소강당, 도서관, 본관 등에 전시실을 설치하고 소장품을 전시했다. 현재는 르네상스 플라자 지하 1층에 전시실을 두고, 숙명여대가 소장한 유물을 전시하는 상설 전시와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유물들을 전시하는 특별 전시를 병행하여 열고 있다. 상설 전시에는 조선 황실 관련 유물, 조선 시대 그림이나 도자기 등이 전시되고 있다. 대한민국 보물 제1077호 근사록과 중요민속자료 제121호 흥완군 의복 등을 소장하고 있다. 정영양 자수 박물관은 자수와 직물 예술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높히기 위하여 2004년 5월에 개관하였다. 전시실은 르네상스 프라자 1층에 있다. 정영양 박사가 수집하여 기증한 자수, 직물, 복식 등을 소장하고 있다. 문신 미술관은 조각가 문신(文信)의 작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목적으로 개관한 박물관이다. 문신미술관은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은 문신의 부인이자 창원시립문신미술관 관장인 최성숙을 만나 1999년 6월 9일 청파동 일본식 주택에 설립한 문신 미술 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2002년 숙명여대 미술대학으로 연구소가 이전하였고 2003년 10월 문신 미술관이 완공되었다. 2004년 5월 10일에 르네상스 플라자 B1, B2층에 문신 미술관이 개관하였고 문신 미술 연구소는 폐지되었다. 문신미술관은 빛 갤러리, 문 갤러리, 은하수 갤러리 , 무지개 갤러리, 영상실로 구성되어 있다. 빛 갤러리에는 주로 사진이 전시되며, 기획전이나 공모전을 통하여 발굴한 신인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문 갤리리에는 문신의 유화, 도자기, 판화, 미발표 드로잉, 그리고 그와 연계되는 소형 조각이 전시된다. 무지개 갤러리는 문신의 작업장을 찍은 사진이나 실제 작업 도구 등이 전시된다. 은하수 갤러리에는 문신의 중, 대형 조각(브론즈, 스테인리스), 석고 원형이 전시되며, 천장에는 원형의 창이 뚫려 있어 빛이 들어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6월 23일 3000여 명의 학생이 대강당에서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한일 협정 비준서 교환식을 앞두고 12월 17일 숙명여대 총학생회장은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의 학생회장과 함께 한일 협정이 굴욕적으로 맺어졌다며 협정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해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5월 8일 2500여 명의 학생이 비상 학생총회를 개최하여 구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계엄 철폐를 주장하며 교내를 행진하였다. 학생들은 9일까지 대강당에서 철야로 농성을 계속하고 농성을 해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2010년 4월 11일 숙명인게시판, 스노로즈 등 학생 커뮤니티에서 정치적인 성향을 띈 게시물을 학교 측이 스크랩하여 모아둔 파일이 한 재학생에게 발견되었다. 제42대 총학생회장 강보람은 14일에 학교의 이러한 행위를 사찰로 규정하고 숙명학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2012년 5월 16일 서울중앙지법은 “학교는 이 사건으로 학생들에게 불안과 우려를 준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하라”며 “학생들은 관련 문서를 학교 측에 반환하라. 대학 측을 상대로 더 이상 이 사건과 관련해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강제 조정 결정을 내렸다. 총학생회는 숙명여대의 재학생 모임이며 학생총회, 대의원회,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단과 대학 학생회, 학과∙학부∙전공 학생회, 기타 학생 문화 활동 단체로 구성된다. 학생총회는 총학생회에 관련된 중대한 사항을 의결하는 기구로서 대의원회의 요구 또는 총학생회 회원 10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총학생회장이 소집한다. 대의원회는 숙명여대의 학과∙학부∙전공 학회장과 부학회장로 구성되는 기구로서 학생총회의 소집을 요구할 권한 뿐만 아나라 총학생회 회칙의 개정과 발의를 확정할 권한, 총학생회의 업무를 감사할 권한,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할 권한 등을 가진다. 총학생회장은 총학생회를 대표하며 운영위원회와 집행부의 장이 된다. 총학생회장은 총학생회의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편성된 예산과 결산을 대의원회에 제출한다. 또한 총학생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관하여 학교와 관계 기관에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다. 운영 위원회는 총학생회의 심의, 자문 기구로서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 단과 대학 학생회장, 총학생회 집행부의 부장으로 구성되며, 총학생회가 운영하는 제반 사업, 총학생회장이 대의원회에 제출할 예산과 결산, 총학생회장의 대의원회에 대한 소집 요구 등을 심의, 자문한다. 1955년 교내 신문인 《숙대신보》가 창간되었고, 1967년 교내 방송국인 방송실이 설립되었다. 1973년에는 교내 영어 신문인 숙명타임즈가 창간되었다. 2007년 교내 영상 관련 부서를 통합한 영상미디어센터가 신설되었다. 2013년 미디어센터가 신설되어 기존의 영상미디어센터를 영상미디어팀으로 편제를 변경하고, 숙대신보사와 영상미디어팀은 숙명미디어센터에 편입되었다. 2017년 숙명미디어센터는 미디어센터로 개칭되었다. 《숙대신보》(淑大新報)는 숙명여대 숙대신보사(淑大新報社)에서 발행하는 신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며 방학 기간에는 발행되지 않는다. 1955년 10월 25일 월간으로 발행되는 《숙대월보》로 창간되었다. 1958년 11월 10일에 《숙대신보》로 제호를 변경하고, 발행 주기를 격주간으로 변경하였다. 1964년부터는 발행 주기가 주간으로 변경되었다. 숙대신보사는 《숙대신보》와 영어 잡지 《숙명타임즈》를 총괄하는 조직으로 대학문학상과 여고문학상, 광고공모전을 주최한다. 《숙명타임즈》("The Sookmyung Times")는 숙명여대 숙대신보사에서 발행하는 영어 잡지이다. 한 달에 한 번 발행되며 방학 기간(1, 2, 7, 8월)에는 발행되지 않는다. 1973년 10월 25일에 창간되었으며, 타블로이드 신문 형태로 발행되었다. 1983년 수퍼타블로이드로 판형이 변경되었으며, 1995년 신문 형태에서 잡지 형태로 변경되었다. 미디어센터는 1967년 방송실로 설립되었고, 1970년에 숙명여대 교육 방송국으로 개칭되었다. 1997년 5월에 유선 TV 방송국을 개국하였고 2006년 9월에 IPTV 방송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2007년 4월에는 교내의 영상 관련 부서를 하나로 통합하여 영상미디어센터로 개칭되었고,2017년 미디어센터로 개칭되었다. ‘청파제’(靑坡祭)는 숙명여대의 봄 축제로 매년 5월에 3일 동안 개최된다. 주간에는 캠퍼스에 설치된 노점에서 간식이나 팬시상품 등을 판매하고, 캠퍼스 중앙에 설치된 무대에서 동아리, 응원단의 공연과 초대가수의 공연이 열린다 숙명여대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재학생을 모델로 선발하여 광고를 제작하였다. 숙명여대의 광고는 1997년 “울어라! 암탉아”, “나와라! 여자 대통령” 등을 캐치프라이즈로 하여 시작되었다. 2018년도 숙명여대 광고 캐치프라이즈는 "숙명하다"이다. 윤현진 (1999년), 정미선 (2002년), 가애란 (2004년), 배현진 (2007년), 장예원 (2012년) 등이 재학생 모델 출신이다. 숙명여대에 재학하다가 콜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김옥렬이 숙명여대의 제10대 총장으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후임 총장인 정규선, 이경숙, 한영실, 황선혜가 모두 숙명여대를 졸업한 동문이다. 이외에도 이숙자 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오영숙 전 세종대학교 총장, 숙명여대를 졸업하였다. 예능계에서는 엄앵란, 전원주, 정영숙 등이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방송계에서는 KBS 아나운서로 가애란, MBC 아나운서로 유선경, SBS 아나운서로 윤현진, 정미선, 장예원이, JTBC 아나운서로 안나경이, 채널A 아나운서로 김설혜, 연합뉴스 아나운서로 박가영, BBS 아나운서로 김민영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금희, 김민정은 KBS 아나운서로, 이익선은 최초의 여성 기상캐스터로 활동하다가 현재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전향했다. 그 외에도 레이디제인이 가수로, 유난희가 쇼핑 호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의 딸인 이덕희,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4남 정몽우(현대알루미늄)의 부인 이행자, 국순당 창업자 배상면의 부인 한상은이 숙명여대를 졸업하였고, 정금화 (파스퇴르 유업 전 사장) 등이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김창숙 (김창숙 부띠끄 대표), 조선혜 (지오영 대표) 등이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계에서는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강영우 전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의 부인 석은옥, 정동영 전 장관의 부인 민혜경, 전 국회의원 김혜성(새누리당), 국회의원 류지영(새누리당) 등이 있다. 문화방송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인 배현진도 숙명여대 출신이다.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 또한 숙대 출신이다. 문화계에서는 시인 신달자, 시인 허영자, 소설가 은희경, 이현이 숙명여대를 졸업한 동문이다. 또한 한국 최초 전위무용가 홍신자 (웃는돌무용단 전 대표)가 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다. 숙명여대는 재가처세(在家處世)를 교시로 삼아 현모양처를 배출하는 대학으로 평가받아 왔으나, 이경숙 총장이 취임한 이후 제2 창학을 선언하고 리더 양성을 학교의 새로운 목표로 제시하였다. (#역사 참조) 1998년, 1999년, 2001년 교육부에 의해 ‘교육 개혁 추진 우수 대학’으로 선정되었고, 2004년과 2005년에 ‘리더십 특성화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새로운 학생 선발 제도인 입학 사정관 제도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에 의해 ‘입학 사정관 제도 선도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이경숙 총장의 후임으로 취임한 한영실 총장은 교양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하였고, 2010년 한국언론인연합회에서 수여하는 참교육 대상에서 인재 부분을 수상하였다. 신경대학교 신경대학교(新京大學校, )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사립종합대학교이다. 이홍하가 설립한 4개 대학 중 하나이다. 2017년 기준 총장 대행을 맡고 있는 이서진은 이홍하의 딸이다. 조감도와는 달리 학교 건물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현재 단 두 개의 건물만 사용하고 있다. 8개의 학과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2005년 1월 이그 노벨상 이그 노벨상(Ig Nobel Prize)은 노벨상을 패러디하여 만들어진 상이다. 1991년 미국의 유머과학잡지인 《기발한 연구 연감》(Annals of Improbable Research)에 의해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복할 수 없거나 반복해선 안 되는”(that cannot, or should not, be reproduced) 업적에 수여되며, 매년 가을 진짜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1~2주 전에 하버드 대학의 샌더스 극장에서 시상식을 가진다. 진짜 노벨상 수상자들도 다수 참석하여 시상에 참여하며, 논문 심사와 시상을 맡고 있다. 이 상의 이름은 "불명예스러운"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이그노블()과 노벨(Nobel)을 합성하여 만들어졌다. 주최측은 농담 차원에서, 노벨상의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친척인 이그나시우스 노벨(Ignatius Nobel)의 유산으로 이 상을 창립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그 노벨상은 상금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그나시우스 노벨은 소용돌이치는 물에 있는 기포 두 개가 절대로 똑같은 경로를 통해 표면으로 상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과학자이다. 시상 부문은 유동적이나 대체적으로 노벨상의 여섯 부문(물리학 · 화학 · 의학 · 문학 · 평화 · 경제학)에 생물학상이 추가된 7개 부문이 거의 고정적이며, 그때 그때 필요한 부문이 추가로 시상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보통은 실제 논문으로 발표된 과학적인 업적 가운데 재밌거나 엉뚱한 점이 있는 것에 상을 준다. 과거에는 동종요법에 대한 연구나 교과 과정에서 진화에 대한 내용을 제외할 것으로 결정한 캔자스 주와 콜로라도 주의 교육 위원회를 비꼬기 위해서 상이 수여된 적도 있었다. 조셉 켈러(Joseph Keller) 교수는 2012년 포니테일 헤어스타일의 모양과 움직임에 관한 연구로 물리학상을 수상함으로써, 1999년의 공동 수상을 포함하여 두 번의 이그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2000년 수상자 중 한명인 안드레 가임은 2010년 그래핀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 을 수상하였다. 문학상 엘런 소칼(Alan Sokal)의 경계를 넘어서 :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 대한민국에서는 1999년 '향기 나는 양복'을 개발한 FnC 코오롱의 권혁호씨가 환경보호상을, 대규모 합동결혼을 성사시킨 공로로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2000년 경제학상을 받았다.[1] (공동수상) 2013년 수상에는 주최 측이 올해 부문별 상금 규모를 10조달러 로 정했다고 말해 이목을 끌었으나 곧 기준 화폐가 미 달러가 아닌 짐바브웨 달러라고 밝히는 해프닝이 있었다. 악기 악기(樂器)는 음악을 연주하는 데에 쓰는 도구이다. 여러 가지 악기를 분류하는 데는 편의적 또는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분류법이 몇 가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의 3가지로 나누는 분류법이다. 이것은 일견 알기 쉽고 편리한 분류법같이 보이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악기의 하나인 피아노는 이 분류에 꼭 합치하는 데가 없다. 또 오케스트라에서는 관악기를 다시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로 분류하나, 이 방법도 단순히 재질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금속제의 플루트가 목관악기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오늘날 오케스트라의 악기 외에도 세계 각 민족의 여러 가지 악기의 존재가 알려졌고 또 새로운 악기가 여러 가지 발명되어 있으므로 좀 더 체계적인 분류법이 필요하다.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의 3종류로 분류하는 방법이 왜 비과학적인가 하면, 같은 수준에서 서로 다른 관념에 의한 항목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絃)'과 '관(管)'은 음을 내는 물체인 데 대하여, '타(打)'는 음을 내는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현'을 '두드려서' 음을 내는 악기, 말하자면 피아노 등은 현악기이기도 하며 타악기로 되기도 한다. 또 건반악기의 항을 두어 파이프 오르간, 리드 오르간, 첼레스타, 전자 오르간 등을 같은 항목으로 분류하면, 근본적인 발음원리가 전혀 다른 것이 포함되게 된다. 악기를 분류할 때에는 건반과 같은 표면적인 유사점이나 악기의 본질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항은 다음으로 미루고, 가장 기본적인 원리와 중요한 속성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동일 수준에서는 관·현·타와 같이 다른 관념의 것이 혼재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한국에서는 아악기, 당악기, 향악기와 같이 사용하는 악곡의 종목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이것도 또한 편의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악기는 연주하는 방법에 따라 분류한다. 현재 가장 타당하다고 인정되고 있는 과학적인 분류법은, 모든 악기를 그 발음원리에 따라 다음의 5종류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체명악기(體鳴樂器), 막명악기(膜鳴樂器), 기명악기(氣鳴樂器), 현명악기(絃鳴樂器), 전명악기(電鳴樂器). 이 분류법은 1914년 독일 사람이며 음악학자인 에리히 폰 호른보스텔(E. M. von Hornbostel)과 쿠르트 작스(C. Sachs)가 발표한 것에 그 뒤 큰 진보를 보이고 있는 전명악기를 더한 것이다. 체명악기 분류는 종래의 타악기 중에서 주로 북 종류를 제외하였다. 이것은 피막(皮膜)이나 현같이 인위적인 장력(張力)을 가하여 진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나 금속 등이 본래 지니고 있는 탄성으로 진동하는 악기이며, 자명(自鳴)악기라고도 한다. 체명악기를 다시 그 주법으로 분류한다. 보통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것은 '타주(두들겨서 연주하는 일)'이지만, 오르골같이 '적주(摘奏, 퉁겨서 연주하는 일)'하는 것 등도 체명악기이다. 막명악기는 혁명(革鳴)악기, 피명(皮鳴)악기라고도 하며, 피막을 어떤 몸통에 씌워서 그것을 주로 '타주(打奏)'(때리거나), '찰주(擦奏)'(비비거나)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종래의 타악기 중에서 북(드럼)류이나, 특수한 것은 '취주(吹奏)'(불거나) 또는 '가주(歌奏)'(몸통 밑에 엷은 막을 씌워 음성을 불어넣어 진동시킨다) 하는 것도 있다. 현명악기는 현악기를 말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주법으로 하든 현의 진동으로 발음하는 모든 악기를 포함한다. 이 분류로는 피아노도 현명악기이다. 현을 치는 것이나 건반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악기에는 그 형상에 따라 치터족(zither族), 류트족(lute族), 하프족(harp族), 하프 류트족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기명악기는 대개 종래의 관악기를 가리킨다. 즉 연주자의 입으로 직접 공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또는 파이프 오르간같이 기계적으로 공기를 불어넣기도 하여 관 속의 공기주(空氣柱)를 진동시켜서 발음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리드 오르간같이 관을 쓰지 않고 주위의 공기를 직접 진동시키는 것도 기명악기이다. 그리고 개개의 악기 설명에 있어서 종래의 금관악기, 목관악기라고 하는 분류법도 같이하고 있다. 이런 것은 본래 그 재질의 구별로 한 것이나, 앞서 말한 것같이 금속제의 플루트나 색소폰을 목관악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재질로 구별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또 이러한 말도 오늘날에는 발음원리에 관련시켜 쓰고 있다. 금관악기는 관악기 중에서 마우스피스(리코더같이 예외도 있으나, 대체로 주자의 입 또는 입술이 직접 닿는 곳, 공기를 불어넣는 관의 끝부분)에 댄 주자의 입술 자체의 진동으로 발음하는 것을 모두 말한다. 목관악기는 그 밖의 관악기의 총칭으로, 여기에는 플루트같이 마우스피스에 공기를 불어 진동시키고 무황악기(無簧樂器, 리드가 없는 악기)와 클라리넷이나 오보에같이 마우스피스에 붙어 있는 식물제의 엷은 판(리드)을 발음원으로 하는 유황악기가 있다. 전명악기는 전기악기라고도 하며, 엄밀하게 말하면 발음의 근원이 되는 진동 자체를 전기적인 처리로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역사도 짧다. 이와 같이 진동 자체를 전기적(電氣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기 기타나 비브라폰과 같이 현이나 금속판에 의하여 발생하는 진동을 다시 전기적으로 처리하여 증폭하는 것은 본래의 전명악기에는 들지 않으며 반전기악기라고 한다. 한국의 악기란 서구의 음악이 조선을 포함한 한반도의 역사적 정체(政體)들(조선, 일본,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보편화되기 이전에 한반도에 존재하고 사용되었던 악기를 뜻한다. 한국의 악기는 근대에 이르러 새로운 기준에 의하여 분류되나, 각 역사적 정체들의 규범적 분류가 또한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그 역사적 분류들은 각 정체들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며, 하나의 정체 안에서도 정권에 따라 변화하였다. 아악기란 아악에 사용되는 악기로서 문묘제례악 등 순수한 중국음악에 쓰인다. 당악기란, 아악 수입 전후, 향악기를 제외한 외래악기 중 향악기화 되지 않은 악기들 뜻하며, 이 때 당(唐)이란 당나라만을 뜻하지 않는다. 향악기란,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정체 안에서 만들어진 악기와, 아악 및 당악과 구별되는 향악에 쓰이는 수입악기를 포함한다. 흔히 전통적 악기분류법으로 여겨지는 팔음(八音)에 의한 분류법은 아악기의 분류법으로서, 아 · 당 · 향이라는 상위념 각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팔음(八音)에 의한 분류법은 악기의 재료에 의한 분류로서 그 재료는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이다. 1289년 성 파트리치오 축일 성 파트리치오 축일()은 기독교의 축일로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전도한 성 파트리치오(386년 ~ 461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행사는 매년 3월 17일에 이루어지는데, 이 날은 성 파트리치오가 선종한 날로써 성 파트리치오를 잊지 말고 기념하고자 이 날을 정하였다. 이 날은 강물에 초록색 물감을 타고, 이 날 아이들은 온통 초록색의 옷을 입고 축제를 즐긴다. 성 파트리치오 축일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 영국의 해외 영토인 몬트세랫의 공휴일이기도 하다. 이 날은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이 많이 살던 영국, 캐나다, 미국,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지에서 널리 행사가 열린다.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3월 아일랜드와의 외교 수립을 기념하는 의미로 청계천 광장에서 관련 행사를 벌이고 있다. 성 파트리치오는 4세기에 부유한 로마노 브리티쉬 집안에서 로마계 영국인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부제를 맡고 있었다. 16살에는 해적에 납치되어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로 지냈다. 파트리치오가 끌려간 장소는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어딘가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진 바 없다. 그의 고백론에 따르면, 그는 신의 부름을 받아 해안에서 배를 타고 달아나 영국으로 돌아와서 갈리아 오세르에 있는 교회에서 사제가 되고자 공부를 하였다. 432년, 그는 주교로서 켈트 다신교를 믿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다시 아일랜드로 향하였다. 아일랜드 민담에 따르면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잎이 세 개인 토끼풀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기독교를 전파한 지 30년이 지난 461년 3월 17일, 파트리치오는 선종하였고, 그의 시신은 다운패트릭에서 화장했다는 설이 있다. 파트리치오는 이후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원래 성 파트리치오와 관련된 색상은 파란색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성 파트리치오의 날에는 토끼풀의 색인 녹색과 연관을 짓는 게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17세기 이후로 녹색 리본과 토끼풀을 달아 성 파트리치오의 날을 축하한다. 1798년 아일랜드 반란에는, 아일랜드 군인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대중의 관심을 받기 쉽도록 옷 전체를 초록색으로 맞춰 입었다. 이 "녹색 착용"(The Wearing of the Green) 은 이후 아일랜드의 민요가 되었다. 성 파트리치오 축일 축제에서 특정 종교나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축하하는 날로 자리 잡고 있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는 며칠에 걸쳐 축제를 진행하며 이 때는 도시가 온통 초록색 물결로 넘실댄다. 한국에서는 1976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성 파트리치오 축일을 기념해 왔다. 한국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성 파트리치오 축일 축제는 한국 아일랜드 협회(IAK)에서 매년 3월에 주최하는 성 파트리치오 축일 축제이다. 한국 아일랜드 협회가 처음 공식적으로 성 파트리치오 축일 행사와 퍼레이드를 진행한 것은 2001년으로, 매년 3월 17일에 가까운 토요일에 행사를 열고 있다. 2016년 성 파트리치오의 날 축제는 3월 19일에 신도림 디큐브시티 플라자에서 1시부터 6시까지 진행된다. 성 파트리치오 축일 행사에서는 아일랜드 피리와 바이올린, 아코디언 등이 사용되는 아일랜드 전통 음악과 함께 아일랜드 락 음악 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국내 대표 아이리쉬 댄스 그룹이자 대회 수상 경력을 가진 ‘탭풍’이 아이리쉬 댄스를 선보인다. 국내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아일랜드 문화를 음악과 춤 등을 통해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 음악과 춤 외에도 페이스 페인팅과 코스튬 콘테스트, 아일랜드 전통 스포츠인 게일릭 축구 시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서울에서 활동 중인 게일릭 축구팀, 서울 게일즈(Seoul Gaels)는 게일릭 축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게일릭 축구를 소개하고 직접 시연도 선보일 예정이다. 매년 행사 때마다 IAK는 활동모금의 일환으로 경품권을 판매하는데, 1등에겐 영국항공에서 후원하는 왕복 아일랜드 항공권 2장이 주어지며 이 밖에도 다양한 상품들이 준비되어 있다. 또한 본 행사는 아일랜드 대표 맥주 회사인 기네스가 후원한다. 신도림 역을 찾는 모든 시민에게 열려있는 성 파트리치오 축일 행사는 일체 입장료나 공연비를 받지 않는 무료 행사이며 가족, 연인, 친구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이다. 디큐브시티에서의 성 파트리치오 축일 행사가 끝난 후 7시부터는 이태원에 위치한 록키 마운틴 터번(Rocky Mountain Tavern)에서 뒤풀이 행사인 “Hooley”가 열린다. “Hooley”는 “파티”를 뜻하는 아일랜드식 영어이다. Hooley에서는 성 파트리치오의 날에만 맛볼 수 있는 초록 맥주와 함께 아일랜드 전통 음악과 락 음악의 라이브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아일랜드협회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www.irishassociationofkorea.kr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irishassociationofkorea 포유류의 목록 가면팜사향고양이 · 가시두더지 · 가젤영양 · 가지뿔영양 · 갈기늑대 · 갈기쥐 · 갈라파고스물개 · 갈라파고스펭귄 · 갈색여우원숭이 · 강멧돼지 · 개 · 개미핥기 · 개코원숭이 · 거농원숭이 · 거미원숭이 · 검둥원숭이 · 검은고함원숭이 · 검은머리꼬리감기원숭이 · 검은수염고래 · 검은여우원숭이 · 게잡이물범 · 게잡이원숭이 · 고라니 · 고래 · 고릴라 · 고슴도치 · 고양이 · 고함원숭이 · 곰 · 관여우원숭이 · 관박쥐 · 귀신고래 ·그랜트가젤 · 그랜트얼룩말 · 그레비얼룩말 · 그레이하운드 · 그리슨족제비 · 금강산코박쥐 · 기린 · 긴귀주머니오소리 · 긴칼뿔오릭스 · 긴팔원숭이 · 꼬리감기원숭이 · 꿀먹이박쥐 나무늘보 · 낙타 · 날다람쥐 · 날쥐 · 남극물개 · 남방바다사자 · 남방큰돌고래 · 낫돌고래 · 너구리 · 네발가락고슴도치 · 네뿔영양 · 노란눈썹펭귄 · 노란머리큰박쥐 · 노루 · 눈토끼 · 뉴질랜드물개 · 느림보늘보원숭이 · 늘보곰 · 늘보원숭이 · 늘보주머니쥐 · 늪영양 · 늑대 다람쥐 · 다람쥐원숭이 · 다마가젤 · 다이커영양 · 단봉낙타 · 담비 · 당나귀 · 대륙담비 · 덤불멧돼지 · 도르카스가젤 · 동부회색청서 · 돌고래 · 돌산양 · 돼지 · 돼지사슴 · 두더지 · 두크마른원숭이 · 뒤쥐 · 등줄쥐 · 딩고 · 땃쥐 · 뚱뚱꼬리저빌 라마 · 로키산양 마른원숭이 · 마모셋원숭이 · 마카크원숭이 · 마코르염소 · 말 · 망토개코원숭이 · 멧돼지 · 멧토끼 · 몽구스여우원숭이 · 물개 · 물영양 · 미슈미타킨 바다사자 · 바다표범 · 바르바리양 · 바르바리마카크 · 바비루사 · 바위너구리 · 박쥐 · 반달가슴곰 · 버마고양이 · 범고래 · 베르베트원숭이 · 벵골호랑이 · 봉고 · 부탄타킨 · 북극곰 · 북극여우 · 불곰 · 불독 · 불테리어 · 붉은고함원숭이 · 붉은목도리여우원숭이 · 붉은여우 · 붉은박쥐 · 비단원숭이 · 비버 · 비쿠냐 사막여우 · 사슴 · 사자 · 사자꼬리마카크원숭이 · 사향고양이 · 사향노루 · 산양 · 산토끼 · 삵 · 상괭이 · 생쥐 · 샴고양이 · 셰퍼드 · 소 · 솜머리비단원숭이 · 수달 · 수염고래 · 스라소니 · 스컹크 · 시베리아호랑이 · 시베리안 허스키 · 시파카원숭이 · 쓰촨타킨 아메리카너구리 · 아메리카들소 · 아메리카불곰 · 아이벡스 · 아프리카물소 · 안경곰 · 안경원숭이 · 알파카 · 알락꼬리여우원숭이 · 알래스카불곰 · 양 · 양털원숭이 · 에스키모개 · 여우 · 여우청서 · 여우원숭이 · 염소 · 영양 · 오랑우탄 · 오소리 · 왕치타 · 올빼미원숭이 · 왈라비 · 원숭이 · 유대하늘다람쥐 · 유럽들소 · 인도들소 · 인도별사슴 · 인도영양 · 일본원숭이 · 일본산양 작은쥐여우원숭이 · 재규어 · 재칼 · 저빌 · 점박이물범 · 족제비 · 주머니고양이 · 주머니쥐 · 줄무늬스컹크 · 쥐 · 쥐여우원숭이 · 쥐캥거루 · 진도개 참고래 · 참돌고래 · 청설모 · 치와와 · 치타 · 친칠라 · 친칠라생쥐 · 침팬지 캘리포니아다람쥐 · 캥거루 · 코끼리 · 코뿔소 · 코알라 · 코요테 · 코주부원숭이 · 콜로부스원숭이 · 콜리 · 콧수염게논 · 콰가 · 큰개미핥기 · 큰고래 · 큰뿔양 타킨 · 테리어 · 토끼 · 토끼박쥐 · 톰슨가젤 · 티베트산양 파타스원숭이 · 팬더마우스 · 페르시아고양이· 펭귄· 표범 · 푸들 · 퓨마 · 피그미고슴도치 하늘다람쥐 · 하마 · 향고래· 한국늑대 · 한국표범 · 향유고래 · 호랑이 · 호저 · 황금타킨 · 혹등고래 · 흰목꼬리감기원숭이 · 흰목도리여우원숭이 · 흰수염고래 · 히말라야산양 도덕경 《도덕경》( , )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가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노자(老子)》로도 불린다. 노자는 이 저서에서 전체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삶을 살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의 장(長)이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을 법(法)한다'(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갖추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強)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문명과 나를 내세우지 않고 뭇 세상과 조화롭게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의 방식을 권한다. 그러한 사상을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道는 노자, 장자 등 이른바 道家의 전유물이 아니고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들 사이에서 상용되던 단어이다. 道의 개념 내지 의미는 학파와 사상가에 따라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나지만 대체로 정치, 윤리, 전쟁, 인생, 우주 등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도는 有의 사건으로부터 추상되는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의 道는 無이다. 無를 단순히 有가 아닌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有이므로 無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노자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無를 알았을까? 도덕경은 聖人이 無를 알아가는 旅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때 聖人은 단순히 無를 알아가는 여정에 오른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독자를 聖人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도덕경의 목표이다. 無는 有가 아니므로 聖人에게 무엇인가 ‘어두운 존재’로 다가온다. 이에 聖人은 무에 투신(投身)함으로써 ‘無의 운동’을 일으키고, 이를 통하여 無에 동화되고 無를 닮고 無를 안다. 따라서 無를 아는 것은 無의 운동의 결과이다.(1장 玄之又玄) 無의 운동은 無知無欲과 無爲로 이루어진다. 無知는 無를 지향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無로부터 끊임없이 玄의 깨달음을 얻는 사건이며, 無爲는 그 깨달음이 성인의 일상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玄은 無에서 비롯하는 새로운 자아로서 굳이 정의하자면 ‘無에서 나온 無’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과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有를 하는데, 이때 의지는 경험과 이성을 이끄는 주체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경험과 이성으로는 無를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無를 알기 위해 오히려 경험과 이성을 부정(否定)하고 그 결과 의지까지도 부정한다. 이때 聖人은 단순한 ‘나’로 머물면서 無 안에 잠기게 된다. 聖人은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無를 지향하는 의지를 얻고 이로써 無를 안다. 이런 이유로 無를 지향하는 의지를 無知라고 한다. 이때 성인은 욕구(欲)로부터 초연한 새로운 자아(玄)의 깨달음을 얻는데(1장 常無欲以觀其妙) 그 無欲의 깨달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노자는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道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노자의 道는 확실히 사람과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누는 ‘神的인’ 존재이다, 無知는 聖人이 道를 사랑하는 활동이며 無欲은 道가 聖人을 사랑하는 활동이다. 이 두 활동은 동시적인 사건으로서 하나의 짝을 이루기 때문에 둘을 함께 묶어서 無知無欲(2장)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道를 사랑하면 道는 반드시 그를 사랑한다. 無知無欲의 활동이 聖人의 삶으로 드러난 것을 無爲라고 한다. 聖人은 無知無欲에 근거하여 無爲를 실천하는데 이것은 그가 얻고 있는 신적인 자아(玄)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無爲自然의 自然은 바로 이 신적인 본성을 가리킨다. 聖人은 욕구에 일방적으로 복종하거나 규범으로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 따라 힘들이지 않고 욕구를 다스린다.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천하와 만물을 완전하게 다스리는 결과를 낳는다. (10장 愛民治國) 道德經의 德은 無知無欲과 無爲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이다. 德은 또한 ‘道를 실천하는 일(行)’이다. 無知無欲이 道의 뿌리라면 無爲는 道의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다. (69장 深根固柢長生久視之道) 無知無欲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無爲를 실천할 수 없다. 聖人은 無知無欲의 內的 운동을 우선한다. 無爲自然의 外的 활동은 내적 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無知無欲을 거들떠보지 않고 無爲自然을 찬미하지만 물론 모두 공염불에 불과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경험과 이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無의 운동은 경험과 이성을 초월하므로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노자는 부득이하게 比喩(parable)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대부분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도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無의 운동은 매우 쉽고 단순하며(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無의 운동을 통하여 모든 비유의 의미가 저절로 밝혀진다. 오늘날 우리가 도덕경으로 규정한 판본은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소위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른다. 1973년도에 중국 장시성에서 발견된 고분 마왕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에 담겨있는 문장들은 왕필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 마왕퇴에서 발견된 도덕경 판본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편집한 통용본보다 연대가 훨씬 앞섰다. 다시 말하자면, 왕필본의 저본이 바로 백서본인 셈이며,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판본도 이 백서본인 셈이다. 백서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백서본 갑본으로서 전국시대 말기(BC 24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을본은 한나라 초기(BC 195년 이전)에 제작된 판본으로 추정된다. 1993년 중국 화북성의 곽점촌에서 발견된 곽점본(혹은 죽간본, BC 300년 추정)은 백서본에는 있는 중요한 시문들이 많이 빠져있으나, 백서본에는 없는 내용 일부가 있어 새로운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주요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처음으로 도덕경을 상하로 나눈 사람은 전한 말기의 학자 유향이다. 완결편 도덕경 주석서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하상공'(혹은 '하상장인')이 지은 하상공장구가 있다. 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상공장구는 당나라 시기까지 가장 유행한 판본으로 양생론적 성향이 강해 초기에는 도교도들에 의해 많이 읽혔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판본이 되었다. 왕필은 18세이던 243년에 노자도덕경주를 완성하였고, 이후 그의 저서는 위나라의 재상 하안에 의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때까지만 해도 그의 구석서는 하상공장구에 비해 덜 읽혔으나 송나라때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주요한 판본으로 여겨지게 됐으며, 이 지위는 명,청대에 더욱 확고해져서 백서본 출토 이전까지 무려 천년 이상 동서양 도덕경 이해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을 유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았기에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다른점은 다음과 같다. 곽점본과 백서본 그리고 왕필본의 차이만 보아도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전설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으면서 도덕경 5,000여 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도덕경은 일거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여러 생각과 사상들이 응축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복잡한 성립과정은 도덕경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도덕경에 모순과 여러 사상이 뒤섞여 있는 만큼, 여러 사상가와 학자마다 도덕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는데, 하상공장구는 양생술을 위한 음양사상의 기본 경전으로서 여겼고, 왕필주는 도덕경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흠모하여 신비주의학적으로 여겼으며, 그 외에도 여러 학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무위자연주의, 반유가주의, 반법가주의, 음양가 사상, 무정부주의, 병가 사상들의 근간이 되는 저서로 여겼다. 삼국시대 이후에 이미 도덕경은 읽혔을 것으로 추정되나 해설서로 남은 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아래와 같다. 대부분 왕필의 관점을 따르고 있다. 이후 몇가지 한국어 번역이 시도되었다. 한니발 한니발 바르카(, ,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또는 기원전 181년)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니발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제국, 마케돈 및 시라쿠사,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이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 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최악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한니발의 도피생활은 비티니아에서 끝났고, 한니발은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어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자살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로스와 함께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로 사료된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세째 가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댁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 이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이 “전략의 아버지”라는 찬사로 한니발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전략가로 여겨지게 된다.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광산을 개발한 카르타고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여 로마를 두렵게 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의 실력을 두려워한 강경노선의 정치인이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몰락시켜야 합니다."라고 연설할 정도였다.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했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신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화가 충실히 되어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였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나 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장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험의 정도에서 한니발이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한니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역사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한니발의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으로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에게 과학지식이 있었다고 본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식초를 갖고 다녔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서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긴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다음해인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싸움터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남하하는 두 가도를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봉쇄하고 있었는대 한니발은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에 있는 늪지대를 통과한다. 이 늪지대는 수백킬로미터에 걸쳐 무릎까지 차는 물이 고여있었고 따라서 막사를 지어 병사들이 숙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않고 행군을 하였고, 이런 혹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다. 또한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는다. 위의 혹독한 행군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서둘러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트라시메노 호숫가로 유인하는데 성공,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2만 7천 명의 로마 군인과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학살한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한 이후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법을 통해 한니발의 회전을 피하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다음해에 새로 선출된 바로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만 7천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이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와 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만 7천 명의 대군에 겨우 5만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측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 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이나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의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 섬에마저 적을 두게 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카르타고와의 전쟁의 의지가 강했고, 전쟁에 쓸 수 있는 인적 자원도 풍부한 상태였다. 또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하여 한니발이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스페인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형제들에게 사라고사에서 대패를 한다. 사르디냐 섬의 반란을 돕기위해 침공한 2만여의 카르타고 군은 주둔중인 로마군에 의해 전멸당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한니발이 직접 이끄는 병력에 거의 맞먹는 병력을 이끌고 있던 한노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베네벤툼에서 노예로 구성된 그라쿠스 군을 만나 의해 궤멸당한다. 칸나이 전투 이후 이들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당한 패배는 이미 칸나이에서 전사한 로마군의 수를 능가하였으며 이러한 패배는 한니발이 승기를 굳힐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로마의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의 지구전은 보급을 방해하는 한편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은 군대엔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방법이였는데 이는 곧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 들 중엔 로마 장군들에 맞먹는 지휘관이 없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이탈리아 중부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로마의 6개 군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쓸어버리는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한니발이 이렇게 싸우는 동안 로마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를 겹겹이 포위한다. 한니발은 이 카푸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주력부대로 한쪽 포위망을 급습하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물리친다. 이 포위를 풀고자 한니발은 생애 최초아지 마지막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해 보지만,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지 않았고 로마의 성벽은 상당히 견고하였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를 잃고 얼마 안있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도시도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다. 그 뒤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타렌툼마저 친 로마 성향의 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에 선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부임하여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를 완전히 격파하고, 카르타고 세력을 그 지역에서 내몰았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아있던 자신의 병력을 모두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에 진입하나, 한니발에 앞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목숨을 잃는다. 점점 전황이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되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인 칼라브리아로 쫓겨갔다. 기원전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왔지만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더욱 우수하게 습득한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싸워 완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한니발의 아내, 시밀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던 동생, 하스드루발과 또다른 동생 마고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죽었으며, 자신도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아시아로 도망쳤다가 수년 후 공을 세우고 싶어한 한 로마인 백인대장이 자신을 찾는것을 알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을 마셔 자살을 하였다. 이때 그는 향년 64세 또는 66세였다 (기원전 183년) 1871년 1871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스즈키 이치로 스즈키 이치로(, 1973년 10월 22일 ~ ) 또는 약칭 '이치로'()는 전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포지션은 외야수이다. 일본 프로 야구 시절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중심 타자로서 맹활약을 하였고 2001년 미국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며 시애틀 매리너스와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적이 있다. 이치로의 활약에 힘입어 “아시아에 타자는 없다”라는 미국인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었는데 이 때문인지 미국에서도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자신의 이름을 표현할 때 ‘Ichiro’, ‘Ichiro Suzuki’, ‘’(이치로 스즈키), ‘’(동음) 등이 있다. 포지션은 외야수이며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활약할 당시 성을 표기하지 않고 이름만으로 등록명을 하였는데 이유는 ‘스즈키’(鈴木)라는 성이 흔해서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22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서 R. A. 디키를 상대로 안타를 쳐 미·일 통산 4000안타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아이치현 니시카스가이 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는 글러브에 ‘집중’(集中)이라는 단어를 써 놓았었다고 한다. 고교 시절 일본 최고의 고교 야구 대회인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고 1991년에는 탁월한 타격 감각을 인정 받아 프로 야구 신인 드래프트 4위로 지명을 받고 외야수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입단했다. 입단 후 2군에서 타격왕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1군 수뇌부가 변칙 타법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아 1군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다. 실의에 빠져 2군 생활을 하던 그는 2군 타격 코치였던 가와무라 겐이치로와 합작으로 이른바 ‘시계추 타법’으로 타격폼 개조에 들어갔다. 이후 오릭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오기 아키라는 그의 천재적인 타격감을 발견해내고, 등록 이름을 당초 한자 표기로 쓰던 '스즈키'(鈴木)에서 가타카나 표기인 '이치로'()로 바꾸게 하고 1군에 등록됐다. 당시 1군 타격 코치였던 아라이 히로마사의 지도를 받으며 광각타법(廣角打法)을 익혔다. 1994년 4월 정규 시즌에서 맹활약을 하여 일본 신기록인 69경기 연속 출루, 일본 야구 사상 첫 시즌 200안타 기록을 달성하여 최종적으로 210안타까지 늘리는 등 그가 기록한 시즌 안타 개수는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그 해부터 타격 부문의 정식으로 타이틀이 된 최다 안타의 초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퍼시픽 리그 타율 신기록(이 후 2000년에 스스로 리그 기록을 경신)으로 수위타자를 획득하였고, 타자로서는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최우수 선수(MVP)가 되었다. 1995년 시즌에는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타점왕과 도루왕 타이틀을 동시에 획득했으며 최다 안타, 최고 출루율 등의 타이틀도 획득했다. 또한 1969년 오 사다하루 이후 최초로 전 이닝을 출전한 수위타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리그 3위 타이의 25홈런, 당시 시즌 홈런왕이었던 고쿠보 히로키와는 3개 차이였으며, 일본 야구와 메이저 리그 모두 전례가 없는 타격 부문 타이틀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 외에 리그 2위의 장타율과 당시 리그의 기록인 시즌 18사구, 타이 기록인 시즌 경기 첫 회에 1번 타자로서 5홈런을 기록했으며, 역대 2위인 67경기 연속 출루를 기록했다. 시즌 후 일본 야구계의 최고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2년 연속 수상했다. 이듬해인 1996년 시즌 중반에 열린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첫 회 초구 홈런(올스타전 사상 3번째, 퍼시픽 리그 선수로서는 사상 최초)을 기록했다. 2차전에서는 투수로 등판했다. 시즌 후 3년 연속 타격왕을, 맹타상을 26회(일본 기록), 1경기 4안타를 무려 8번을 기록(달성 당시에는 일본 신기록이었으며 현재는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음)했다. 9월 23일 닛폰햄전에서는 팀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2루타를 기록해, 전년도에 이어 팀은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리그 우승 후 센트럴 리그 우승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상대 투수인 고노 히로후미로부터 결승 홈런을 쳐 냈다. 시리즈 기간 중 접전 끝에 팀은 4승 1패의 성적을 거두어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인 1977년 이후 19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제패하면서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6월에 209타석 연속 무삼진의 일본 기록을 수립했고, 그 후의 닛폰햄전에서 상대 투수인 시모야나기 쓰요시로부터 삼진 당할 때까지 216타석 연속 무삼진을 기록했다. 1998년 시즌 최고 타율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 5년 연속 타격왕 획득과 동시에 5년 연속, 통산 5번째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99년 4월 20일 닛폰햄전에서 가네무라 사토루로부터 홈런을 쳐 내면서 프로 야구 사상 최고 속도가 되는 757경기 만에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 7월 6일 세이부전에서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통산 100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8월 24일 닛폰햄전에서 시모야나기 쓰요시로부터 투구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시즌 103경기 출장에만 그쳤을 뿐만 아니라 1994년 개막전부터 계속되고 있던 연속 경기 출장이 퍼시픽 리그 역대 4위인 763경기로 멈췄다. 통산 6번째 최고 타율로 6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2000년에는 프로 야구 역대 2위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해 7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시즌 후 9년간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메이저 리그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2001년에 메이저 리그인 시애틀 매리너스로 이적하여 메이저 리그 진출 첫 해에 242안타를 기록했다. 이로써 그 해 아메리칸 리그의 신인왕과 MVP를 모두 획득했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공헌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그에게 국민영예상 수여 의사를 타진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2004년 5월 21일에는 미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고 8월 26일에는 메이저 리그 사상 최초로 입단 후 4년 연속 200안타 기록을 달성했다. 2004년 10월 1일에는 262안타를 기록하면서 84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한 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조지 시슬러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인 257안타)을 세웠다. 한편 일본 정부는 그에게 국민영예상 수여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번에도 거절했다. 메이저 데뷔 초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안타의 틈을 타 1루에서 3루로 진루하던 테런스 롱을 보살시킨 플레이가 '더 스로'(The Throw)로 유명해졌다. 조지마 겐지가 시애틀에 있었을 때는 그와 겐지가 ‘재페니즈 핫라인’으로 불렸다. 2003년에는 4년 동안 4,400만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연봉 계약을 하여 2007년 시즌이 끝난 뒤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획득했다. 2006년 WBC 일본 국가 대표로 참가했다. 2008년 6월 13일에는 미일 통산 500도루를 달성했고, 7월 3일 미일 통산 1500득점 달성, 7월 29일에는 미일 통산 3000안타를 연거푸 달성했다. 9월 17일 8년 연속 200안타를 달성하는 위업을 세웠으며, 시즌 종료 후인 11월 6일에는 8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외야수 부문)했다. 2009년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이끄는 제 2회 WBC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다. 2012년 시즌 도중 7월 24일에 시애틀 매리너스는 뉴욕 양키스로부터 그에게 지불해야 할 잔여 연봉을 현금으로 지급받고 당시 뉴욕 양키스 산하 마이너 리그 투수였던 D. J. 미첼과 대니 파쿠하를 그와 트레이드 하였다. 2012년에 입단하였다. 2015년에 입단하였다. 2018년에 복귀하였다. 5월 3일, 시애틀 매리너스의 선수에서 회장 특별 보좌로 옮겼다. 2019년 1월 24일 시애틀과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은 이치로는 3월 20일 메이저 계약으로 전환하며 20일과 21일 도쿄 돔에서 열리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와의 개막 2연전에서 함께 9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 45세 149일 메이저 개막전 선발 출전은 지바 롯데 마린스에 소속됐던 훌리오 프랑코의 45세 227일에 이은 야수 2번째 고참 기록했다. 안타를 치지 못했지만 사실상 이치로의 은퇴 경기였다. 그는 “올림픽은 아마추어 선수가 출전하는 대회이다. 나는 프로 선수이기 때문에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단 한 차례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던 2006년에 참가하게 되고, "이번 WBC에서 싸운 상대가 '앞으로 30년은 일본과 대적하기 힘들겠구나'하고 느낄 수 있도록 이기고 싶다"는 말을 남겼는데, 대한민국 기자들이 교묘히 말을 바꾸어 "앞으로 30년은 일본을 넘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는 식의 기사를 내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30년 망언,' '입치료' 등의 불명예스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도쿄 돔에서 열린 1라운드 아시아 예선에서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였는데 특히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는 그로서는 드물게 악송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열린 2라운드에서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였으며 특히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4강전에서 다시 만난 대한민국전에서 3안타를 기록했으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는 적시타로 일본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결승전 이전까지 38타수 8안타 타율 .210을 기록할 정도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네 번째 타석까지 범타로 물러난 그는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때려내어 부진 탈출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하였고 결국 대한민국과의 결승전에서 6타수 4안타 2타점의 대활약을 하였다. 그가 이 경기에서 올린 2타점은 연장 10회까지 벌어진 경기 끝에 나온 결승 타점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독일 제국 독일 제국()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다. 독일 지역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현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독일 통일로 성립되어, 장기 19세기 말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제정이 붕괴하고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도이체스 라이히(Deutsches Reich, 독일국)라는 명칭은 이 때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및 나치 독일에서도 쓰였다. 나치 독일의 영향으로 독일 제국을 제2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연방의 형태로서 4 왕국, 6 대공국, 5 공국, 7 후국, 3 자유시 및 "엘자스-로트링겐 제국령"(Reichsland Elsaß-Lothringen)으로 이루어졌으나 프로이센 왕국이 제국 면적의 3/5를, 인구의 2/3을 차지하였다. 독일은 1871년 통일 되기 이전까지 여러 제후국 형식으로 갈라졌었다. 특히, 독일내에 신·구파 종교갈등으로 전쟁이 시작된 1618년~1648년사이에 있던 30년 전쟁으로 전 독일 국토의 3분의1이 파괴되거나 사람들이 죽었다. 30년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이 더더욱 여러 나라로 분할되어 제후국들의 세력이 분열되자 강대국인 옆나라 프랑스로부터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18세기 후반부터 독일 북부지역에 프로이센 왕국이 크게 강성해졌지만,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눌려 꼭두각시 신세로 지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인 1830년대에는 독일 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세기, 39개의 군소국가로 분리되어 있던 상황에 1834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 동맹이 결성됨으로써 경제통일의 기반을 시작으로 촉진되었다. 관세동맹으로 독일안의 국가들이 서로 무역할 때 부과되었던 번거로운 관세들이 폐지되었기에 독일경제는 이전과 비교도 안 될정도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관세동맹은 독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어서 통일의 기운은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다시 한 번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열리고, 이곳에서 로베르트 블룸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자유주의적 평화통일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내의 보수파(융커계층)에 의해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적인 연방통일을 주장했던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끝내 좌절된 이후, 독일의 정치적 통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한 군사력과 군비증강을 주장하여 이른바 "철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덴마크와 전쟁을 벌인 결과(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프로이센의 승리로 덴마크 북부지방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점령하였다. 1866년에는, 산업과 군사력이 증강한 프로이센이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일으켜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북독일 연방을 결성, 오스트리아 제국을 독일 연방에서 추방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 이후 독일의 핵심 세력이었던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소독일주의의 형태로 통일이 진행된다. 1870년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인솔하는 프랑스를 크게 물리치고, 나폴레옹 3세를 포로를 잡는 등 승승장구하여 파리에 입성,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성립했다. 또한, 이 때에 오랜 세월동안 프랑스와 영유권을 두고 다투었던 엘자스-로트링겐 지방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획득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의 보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서구 열강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 프랑스를 고립화시키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1873년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3제국간 동맹을 맺었다. 후에 러시아 제국은 이 동맹 체제에서 이탈하였다. 이어 1879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방위 동맹을 체결했다. 1882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간에 삼국 동맹을 결성했다. 1887년에는 발칸 반도와 관련하여 러시아 제국의 재보장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영국과는 별다른 대립이 없었고, 이미 홀로 충분히 국력이 강성했던 영국은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한편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체제의 외교로 고립됐다. 한편, 독일제국은 통일을 이룩한 이후 선진화된 산업화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해외 식민지로서는 남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동아프리카(탄자니아·르완다·부룬디), 카메룬, 토고, 남양 군도, 뉴기니 북동부 및 부근의 크고 작은 섬들(나사 마크 제도), 사모아, 중국의 산둥 반도 등을 획득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지만, 재위 6개월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이어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빌헬름 2세가 즉위하는데, 이를 "3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립하여 1890년에 그를 은퇴시킨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마자 친정을 실시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추진했던 외교정책과는 달리 대외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오스만 제국과 '바그다드 철도 부설조약'을 맺어 베를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 정책"이라는 제국주의적인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팽창정책은 유럽 국가들을 긴장시켜 러시아제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았으며, 영불협상을 맺어 러시아 제국-영국-프랑스를 주축으로 '삼국 협상'을 맺어 독일제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특히 영국은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캘커타를 연결하는 "3C 정책"을 내세웠는데, 서아시아에서 독일제국과 충돌하여 대립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판도는 신흥 강국인 독일 제국을 필두로 동맹국 세력과 기존의 열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제국을 중심으로하는 협상국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어서 1905년~1906년과 1911년에 모로코에서 프랑스가 지배권을 확보하여 영향권을 행사하려 하자, 독일제국은 모로코에 2차례 걸쳐서 개입하여 프랑스와 충돌(모로코 사건)하기도 했다. 또한,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여 영구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제정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범게르만주의와의 대립 등으로 발칸반도에서 문제가 확산되면서 더욱더 심화되어갔다. 팽창정책에 의해 독일은 삼국 협상 구성 국가와의 외교적 마찰과 경제적인 부담을 안았고, 양상이 점점 심화됨에 따라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가던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발칸반도에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 지원을 선언한 뒤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국이었던 독일제국은 러시아 제국, 프랑스, 벨기에, 대영제국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짧은 시간내에 전쟁이 끝날것이라는 예상했지만, 프랑스의 예상의외에 격렬한 저항과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부전선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과 장기전 형식으로 되어갔다. 또한, 동부전선 역시 러시아 제국의 대규모 전선배치로 인해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고착화되었다. 제1차 대전 기간동안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루마니아, 오스만 제국 등 주변국가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국 혹은 협상국에 참전하였다. 한편, 독일 제국은 영국에 제해권을 빼앗기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가했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제정 체제와 자유주의 정부 체제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1918년 3월, 독일 제국과 소비에트 정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조건으로 소비에트 정권은 과거 러시아 제국때 상당부분 영토와 배상금을 독일 제국에 제공해야 했다. 신생 정권인 소비에트 정권이 1차 대전 협상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세력으로부터 이탈하자 동부전선에 배치돼 있던 독일병력이 대거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1917년에는 중립 체제를 유지해오던 미국은 자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한 사건과 치머만 전보사건을 계기로 독일에 선전을 포고하고, 이어서 200만명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서부유럽 전선에 참전, 전쟁의 양상은 독일제국이 불리해져 갔다. 1918년에는 동맹국이던 오스만 제국이 탈퇴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민들이 크게 영향을 받아 반전 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18년 11월 9일 독일 킬 군항에서의 수병들 반란을 시작으로 시민들이 합세하여 독일 11월 혁명으로 비화하자, 결국 11월 10일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무너졌고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후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정부수반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공화제 정부가 세워졌다. 1918년 11월, 독일 임시정부는 협상국(영국, 프랑스,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하여 포젠과 서프로이센은 폴란드에 할양되었고, 알자스와 로렌 지방은 프랑스에, 북슐레스비히는 덴마크에 할양해야만 하였다. 거기에 남양 군도와 칭다오는 일본에, 아프리카 식민지는 대영 제국,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등에게 할양하였고 전쟁 도발 배상금인 1320억 마르크까지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라인란트지역은 프랑스 중심의 연합군에 의해 비무장화 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시작한 것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시작했고, 전쟁 기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을 주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독일 제국보다 더 많은 배상을 내야 했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국토 손실이 심했던 것과는 비교하면 독일이나 불가리아 왕국은 본토 손실이 상대적으로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약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씨앗이 됐다. 당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정 체제였는데, 이 시기의 독일에서는 가는곳마다 실업자들이 넘쳐났을뿐 아니라 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 등에 배상금 지불을 위해서 독일은 무제한으로 지폐를 발행했는데, 1914년에 감자 하나에 1마르크이면 살 수 있었던 것을, 1920년에는 수십억 마르크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1923년 프랑스가 루르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함에 따라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했다. 이에 미국이 중재를 나서 독일에 대한 차관을 제공하고 배상금액을 낮춤으로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독일에 대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 요구는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계속 이어져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게되고, 이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가져와 뒷날 나치스등장의 배경이 된다. 독일제국의 정치형태는 4왕국·6대공국(大公國)·5공국(公國)·7후국(侯國) 및 3자유시(自由市)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프로이센왕이 황제가 되고, 프로이센 재상이 제국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황제는 정치권·군사권·외교권 등을 장악하였고, 의회는 상원의원인 연방참의원과 남성중심으로 보통선거에 의한 제국의회가 하원으로 구성되었으나, 하원의회의 권한은 예산심의권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일뿐 권한은 적었다. 반면, 각 지방 정부를 대표하는 연방참의원이 상원의 경우는 제국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 이곳에서 여러 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각 지방 정부들은 각각 종래의 정치제도와 법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또 행정권도 거의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방정부 형태를 띄었다. 독일 제국의 정부는 황제의 임명과 뜻대로 되었고,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연방국가 형태로 구성된 지방세력들 중 프로이센은 면적과 인구에서 전 독일의 3/5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제국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그 권한은 막강했다. 또 독일 제국에서는 황제 못지않게 재상의 권한이 컸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같은 유력한 인물이 재상인 때에는 사실상 그의 독재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일의 의지가 상실되었다. 이처럼 독일제국은 의회가 구성되어있으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성향도 아닌 융커계층, 즉 대지주 혹은 귀족이 군부와 관료의 중심세력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식과 개혁은 크게 저해되었다. 1862년에 프로이센 재상으로 오른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을 바탕으로 중공업 육성과 군사력 증강 등 국력이 강해지면서 이후 1871년 통일된 독일제국은 기존의 봉건적인 토지귀족 계층이자 보수층인 융커계층 관료들의 후원과 기반으로 1870년대부터 생산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보수층인 융커계층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산업화 정책은 시장의 규모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경제불황을 맞기도 하였다. 독일제국은 이러한 극복을 하기 위해 우수한 기술과 자국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뿐만 아닌 자본을 투자할 해외 식민지를 필요로 제국주의의 길로 발을 내밀게 된다. 그러나, 대영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에 비해 늦게 식민지 정책을 시작하였기에 1890년대에 빌헬름 2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중공업생산에서 세계 제2위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해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전반적으로 독일의 산업화는 경제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그것을 선도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 독일 사회는 한편으로는 보수층인 융커층 및 그들을 후원하는 자본가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의 노동자세력으로 양분되어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을 야기했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은 장기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카이저(Kaiser)는 독일어로 황제라는 뜻이다. 로마의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마이크로 소프트웨어 마이크로 소프트웨어(Micro Software)는 1983년 11월부터 출간된 IT 전반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대한 대한민국 최초의 소프트웨어 전문 잡지다. 현재는 월간지에서 계간지로 바뀌어 3개월에 한 차례 발간된다. 2017년 12월 30일 현재 390호를 발행하였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 개막과 함께 '정보시대'가 1983년 7월 대한민국에서 창간 등록을 하고, 1983년 11월 창간호를 발행한 IT 전문지다. 월간지로 발행되었으며, 일반인들이 접하기 힘든 소프트웨어, IT 산업, 관련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전해왔다. 개인용 컴퓨터가 막 보급되어 소프트웨어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정보 욕구가 팽창할 무렵 IT에 관심 있던 학생과 직장인이 애독하던 잡지였다. 개발자들에게는 '마소', '마굿간'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초고속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해 대한민국의 많은 출판 잡지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쳐하였을 때도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다 발행사인 마소인터렉티브의 경영난으로 2015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인터넷판과 함께 휴간을 결정하며 환불 조치와 함께 홈페이지 폐쇄를 진행하였다. IT 관련 정보를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황과 더불어 종이 잡지의 광고 시장이 크게 위축된 데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폐간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2016년 3월 조선미디어그룹의 경제 전문 매체인 조선비즈가 벤처투자회사인 소프트뱅크 벤처스로부터 브랜드와 영업권을 인수하고. 2016년 9월부터 운영을 재개하였다. 2016년 11월에는 개발자가 마이크로 소프트웨어의 복간 의미를 알리고, 다수 개인의 후원과 다양한 의견을 받기 위해 스토리펀딩을 진행하였다. 스토리펀딩의 수익금은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제작비에 사용되어, 2017년 1월 20일 아이티조선에서 재발행이 진행되었다. 스토리펀딩 참여자는 1월 복간호의 후원자 명단에 이름이 기재되었고 잡지 인쇄본을 받았다. 대학의 소프트웨어 관련 학과의 인기가 치솟고, 코딩 교육으로 직장인과 학생이 몰리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고려한 움직임이였다. 인터넷의 도래로 인해 정보가 홍수를 이루었지만, 단편적 지식에 불과해 과잉 속 빈곤을 느끼는 시대에 잡지라는 매체를 통해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역할을 짊어진다는 계획이다. 이와함께 조선비즈는 2016년 1월 이미 또다른 IT 매체인 정보통신기술(ICT) 전문 '미디어잇'도 인수하였다. 이로써 조선비즈는 두 매체를 연계해 대한민국 내외의 IT업계 종사자들의 커뮤니티 플랫폼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IT조선은 2017년 2월 23일 첫 회를 시작으로 IT 관련 주제를 다루는 미니 콘퍼런스 형식의 행사인 '마소의 밤' 을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IT조선 연결지성센터'에서 개최하고 있다. 마소의 밤은 해당 잡지의 후원자, 구독자, 필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콘퍼런스이다. 2017년 8월 24일 3번째 마소의 밤이 열렸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은 영어로 발행되는 대중과학 잡지로, 역사가 매우 오래되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가장 전문적인 내용으로 유명하다. 루퍼스 포터(Rufus Porter)가 창시했고, 1845년 8월 28일이래 매달 발행되고 있다. 과학 잡지들 중에서도 매우 널리 읽히고 있으며, 최신의 연구결과를 신뢰할 만한 필자들 (연구자들 자신일 경우가 많다.)의 설명을 비전문가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우 신뢰가 높은 잡지이기는 하나, 네이처와 같이 이전에 심사(peer-reviewed)를 받고 나서야 실리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이는 이 잡지가 최신의 과학적 발견을 넓은 범위의 대중들, 그리고 여타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포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의 초기에는 미국 특허국에 심사 의뢰가 들어온 발명품에 대한 기사를 비중있게 다뤘다. 잡지는 넓은 영역의 발명품을 다루었으며, 그 중에는 영구기관, 에이브러햄 링컨이 고안한 배를 띄우는 장치, 오늘날 대부분의 자동차에서 볼 수 있는 자재커플링(universal joint) 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1800년대에 발행된 이 잡지를 훑어보면 당시 산업혁명의 발달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이 잡지에는 〈역사속의 오늘〉이라는 제목의 섹션을 두어 50년, 100년, 150년 전에 본 잡지에 실렸던 현재의 시각으로 우습거나, 비과학적이거나, 또는 여전히 흥미로운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발행되고 있으며, 한국어 번역판은 《사이언스 올제》란 제호로 발행되었다. 번역판은 언어마다 다르지만, 보통 1개월에서 3개월 정도 전에 영문판에 실렸던 기사들이 번역되어 나온다. 김용옥 김용옥(金容沃, 1948년 6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철학자, 종교학자, 사상가, 한의사,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광산. 호는 도올(檮杌)이다. 김용옥은 초등학교를 천안에서 졸업하고,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려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수학한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72년 9월 중화민국으로 가서 국립 타이완 대학 철학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면서 〈노자 "자연" 철학에서의 "무위" 의 기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일본으로 가서 1977년까지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에서 수학하며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년에 미국으로 가서 펜실베니아 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과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버드에서 〈왕부지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chih(1616~1692)〉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0년에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에 입학하여 한의학사학위도 취득하였다. 대학교수, 철학자, 사상가, 언론인, 한의사,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 희곡 작가, 극단의 단원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활동하였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사상까지 다양한 학문적 탐구와 저작 활동을 벌였다. 1982년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고 1985년 9월에는 동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1986년 양심선언("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직을 사퇴한 후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등을 강의했다. 1988년 무렵부터 방송 강연에 출강하였다. 그는 문화계에서도 몇가지 활동을 했다. 악서고회(樂書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악을 콘템포러리 뮤직으로 승화시키는 다양한 기초작업을 하였다.(1984년 3월~1987년 12월). 한국의 전통음악을 이끄는 대표적 주자, 백대웅, 김혜숙, 박범훈, 송방송, 이성천, 권오성, 최종민, 이보형, 양승희 등이 참여했다. 이후 한대수와 록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도도회(檮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 교수들과 그 대학 출신 화가들(이종상,김병종,김호득,장상의,심현희,장혜용,이민주 등)과 정기적인 활동을 했다. (1988년 6월~1999년 6월) 영화와 연극활동도 했는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마당극으로 유명한 극단 미추를 손진책, 김성녀와 함께 창단(1986년 8월)하여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는 많은 연극 작업을 했다. 《시간의 그림자》, 《그 불》등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잠시 영화인 심포지움을 만들어 유현목, 김수용, 임권택, 이장호, 김호선, 하명중, 정지영, 박광수, 이두용, 황기성 등과 활동했다. 이후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 《개벽》, 《취화선》의 대본을 썼고, 특히 《취화선》은 2002년 55회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획득하였다. 《취화선》과 《왕의 남자》의 자막은 직접 영역했다. 유기화학자 김용준과 함께 신과학운동 세미나를 주도하고, 대우재단지원 과학사상연구회(科學思想硏究會)를 설립했다.(1984년 3월~1990년 2월)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 과학사상가들(조순탁, 이성범, 장회익, 김두철, 서정선, 신중섭, 이봉재 등)이 참여했으며 이후 꾸준히 과학과 철학이라는 학술지를 출간했다. 1989년에는 한국사상사연구소(Korean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를 세워 한국고전 최초의 일자색인인 《삼국유사인득》을 출간했다. 이 작업은 후에 제자 김현 교수의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전체 한글번역 프로그램인 CD-ROM작업으로 이어져 한국학의 신기원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류의 원류인 사극 드라마들의 희곡작업의 근간을 이루었다. 1993년에는 도올서원을 세워 15기에 걸쳐 3,00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해 한학의 배경을 가진 우수한 인재들이 이 사회에서 활약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고전국역사업을 지원하였고, 그 기관은 이후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태권도철학세미나를 개최하여 무술의 본질과 태권도문화의 세계화를 논하였다. 유병관, 양진방, 김영선, 김용범, 최의정, 임신자, 바비 클레이튼(Bobby Clayton), 스티븐 카프너(Steven D. Capener) 등이 참여했고 이 세미나의 결과물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집필, 출간했다. 이 작업의 정신과 성과는 이후 무주 태권도공원으로 이어졌다. 한의대 졸업 후 도올한의원을 개원하여 2년간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중앙일보에는 《도올고함(檮杌孤喊)》이라는 칼럼을, 중앙선데이에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신발굴 성서자료)를 연재하였다. 2010년 5월 23일 서울 봉은사에서 '코뿔소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 동서화통의 깨달음'이라는 특별강연에서 천안함 사태에 대한 합동조사단 발표를 강력히 비판하여 라이트 코리아 등 보수단체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소 당했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신유철 부장검사)는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들이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비난한 혐의로 도올 김용옥을 고발한 사건을 두고 무혐의 처리했다고 9월 27일 밝혔다. 2002년 10월 당시 방송 강연 중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선승 춘성 스님의 육두 문자 발언을 방송에 인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 방송 강연에서 그는 춘성 스님의 욕설과 육두문자를 그대로 전하여 논란이 되었다. 광주에서 열린 자신의 강의에서 김용옥은 6.25에 대해 “서울까지 단숨에 내려온 부대는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내전에서 갈고 닦은 조선의용군 10만명”이라며 “남침이지만 남침이라 표현할 수 없다. 남침을 유도한 남한사회의 구조가 있다”고말하면서 “최고 원흉은 일본. 다음은 미국”이라며 “한국전쟁은 남침, 북침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역사와 미국 제국주의 역사가 조선에서 만든 악랄한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2005년 그가 제작한 EBS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도산 안창호의 중국 지린(吉林) 강연회에서 김일성은 안창호에게 ‘민족개조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질문을 하자 “안창호는 조금 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연탁 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고 김일성의 회고록에 기재된 내용의 전체를 소개하며 어린 학생의 질문에 안창호가 성급하게 나갔다는 것은 과장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사실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과장 또는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사실일 가능성 조차 있지만 명확한 것은 아직 없다. 2014년 5월 2일 한겨레 신문에 '세월호 참사 특별 기고'를 했다. 이 기고에서 김용옥은 여러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 "박근혜, 그대의 대통령의 자격이야말로 근본적인 회의의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의 대통령이라는 명분은 오로지 선거라는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인데, 그 정당화의 법률적 근거인 선거 자체가 불법선거였다는 것은 이미 명박한 사실로서 만천하게 공개된 것이다" 또한 트위터상에 올라오는 어린 학생들의 문구 속에서 항변의 언사들이 많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민들이여!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라고 발언하였다. "박근혜여! 그대가 진실로 이 시대의 민족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김용옥- 김용옥의 박근혜 대통령 하야 발언과 관련해서, 브레이크뉴스의 문일석 발행인은 김용옥을 비판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주장을 하였다. "학자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줄기찬 연구와 탐구가 교수들의 할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용옥이 정치권을 향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비논리적인 정치발언을 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가 안착된 시대에 국민들을 거리로 나오라고 선동하고, 대통령을 향해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의아해 보일 뿐이다." 문일석 발행인은 김용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도 하였다. "김용옥 교수, 이때 까지 못 참겠으면 당신이나 거리로 뛰쳐나와 봐!" 문일석은 김용옥이 선동이 전제된 얄팍한 말로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린다며 비판적인 주장을 했다. 다음과 같은 비판도 하였다. "시대논리에 맞지 않는 군사정권 시절에나 해야 할 낡은 논리로 치장한 허황된 주장을 한 것은 국민모독 성격이 짙다" 또한 교수는 '명실공히 학문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하였다. 2014년 5월 초 김용옥이 기고문을 통해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 관련 발언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인 성준경은 칼럼을 통해서 김용옥의 행태를 비판했다. "사이비지식인 김용옥, 곡학아세 선동 점철된 인생" 이라고 칼럼 제목을 달았다. 또한 김용옥의 천안함 폭침 부정에 대해서 정부 발표를 조롱했다며 비판했다. "김용옥의 행태는 전형적인 사이비 지식인 모습 자체이다" 김용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가이기 보다는 대표적인 포퓰리즘에 근거한 권력 지향적 사이비 지식인이다.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이런 사이비 지식인의 선동에 휘둘려야 하는지! 숙고할 일이다" 김용옥에 대해서 "권력과 금력에 극단적 아부하는 행태" 라고 쓰기도 했다. 또한 노태우, 김우중, 노무현, 안철수 등에 대한 찬양과 미화의 글을 쓰기도 했다면서 비판적인 주장을 하였다. 뉴라이트 “도올, 튀고 싶어서 1인 시위 한다” 비판 소설 소설(小說)은 사건을 미적으로 질서화하여 통일적인 의미가 구현될 수 있도록 산문으로 서술한 서사 문예이다. 건축처럼 인물·사건·배경을 구조적 기본 요소로 하는 허구적인 서사 문예인 것이다. 인류사적 보편성을 담고 있는 소설일수록 생명력이 강한 경향이 있고 이런 소설은 '고전'이라고 명명되며 오래도록 읽힌다. 소설은 서사시에서 발달한 이야기 쓰기 형태로 보이며, 이러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를 소설가라 한다. 흔히 한국에서는 영어의 Novel을 소설이라고 간단히 번안하여 소설 전반을 범칭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Novel은 근대 장편소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범용어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한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편소설의 경우 "Novel" 대신 "Short Story"라 한다. 중편소설은 이태리어인 "Novella"를 쓴다. "Novel"와 "Novella"는 ‘이야기’와 ‘소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어권 국가에서 소설은 60,000 ~ 200,000개의 단어 또는 300 ~ 1,300쪽의 길이로 중편, 단편, 콩트로 구별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장편, 중편, 단편 모두 소설로 분류한다. 희곡이나 운문에 비해 구성면이나 음률면에서 제한을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소설은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벌이는 행위를 다루게 된다. 소설의 기원은 고대부터 내려온 신화, 서사시 등의 이야기이다. 즉, 서양의 그리스 신화나 한국의 주몽 신화 등의 신화에서부터 일리아드, 동명왕편 등의 서사시가 소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 근대적 소설의 바탕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기사들의 영웅담 등을 소재로 한 로망스이다. 특히 로망스에서 프랑스 남부의 기사 영웅담은 환상적으로 미화된 기사가 주인공이 되어, 권선징악의 주제를 이끌며 낭만적인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이것들이 여러 방향으로 변형되어, 현재 환상적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뜻하는 로맨스라는 장르로 남았다. 한국의 춘향전도 이러한 성격을 다분히 지녔다. 한편 근대 소설을 뜻하는 영어 Novel은 중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노벨라()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로망스와 달리 노벨라는 데카메론과 같이 현실의 세태를 반영한 이야기가 특징이다. 소설은 산문의 형식으로 된 가공된 이야기이다. 소설은 수필과 달리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작가가 상상을 통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그 꾸며진 이야기는 당시 작가가 살았던 현실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점을 꼬집고 되돌아보게 하는 데에 소설의 의의가 있다. 때문에 소설의 특징을 체험과 상상이 빚은 언어 예술로서 ‘진실된 거짓’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 소설은 형식미와 예술미를 갖추어야 하는 예술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시와 달리 운율을 맞추어야 한다는 제약이 없이 자유롭게 지은 산문이라는 특징이 있다. 소설의 주제(主題)는 작가가 작품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미이다. 소설 속에서 쌓아올려진 의미를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주제는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주제는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 해당한다. 소설의 주제는 작품의 내용이며 작가의 사상이다. 작가가 어떤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그 다루고자 하는 문제 자체가 주제에 해당한다. 소설의 주제에는 작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나타나 있다. 소설의 주제는 작품의 전체적인 효과를 놓고 파악해야 한다. 소설의 주제는 대체로 이야기 속에 전개되는 사건과 행동을 통해 구현된다. 등장인물의 행동은 소설이 지향하는 어떤 목표를 향해 전개된다. 그러므로 그 행동의 의미 속에 주제가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소설의 주제는 대체로 이야기의 결말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사건과 갈등이 해결되는 순간에 이야기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소설의 구성을 플롯(plot)이라 한다. 소설은 궁극적으로 “누가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인물과 사건이 플롯의 중심을 이룬다. 고대의 저명한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플롯은 소설에서 일정한 길이를 갖는 전체이며 시작, 중간, 결말을 갖는 것이라 설명하기도 하였다. 플롯의 흐름은 때때로 4단계 또는 5단계로 구분되기도 한다. 아래의 단계는 5단계 구분에 따른 것이다. 이 외에도 기, 승, 전, 결로 나누는 4단계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소설의 창작에는 여러가지 기술적 요소가 사용된다. 화자의 시점, 관찰의 거리, 문장의 스타일, 요약과 장면 묘사, 패턴, 상징, 전환점 등의 설정이 그것이다. 걸리버 여행기, 로빈슨 크루소, 키다리 아저씨,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동물 농장 등 여러 소설이 있고 쥬라기 공원과 스타쉽 트루퍼스처럼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이 있다. 어떤 것을 비판하는 소설의 대표적인 예로는 걸리버 여행기, 동물 농장, 스타쉽 트루퍼스가 있다. 걸리버 여행기는 전쟁을 하는 인간 사회를 비판했고 동물 농장은 독재, 스타쉽 트루퍼스는 무엇이든지 한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를 비판하였다. VxWorks VxWorks는 미국의 윈드리버 시스템사가 만들어 판매하는 실시간 운영 체제(RTOS)이다. 이와 비슷한 실시간 운영 체제로는 QNX, LynxOS, pSOS, Nucleus, RTX, OSE, NEOS, VRTX 등이 있다. VxWorks는 선점형 스케줄러 기반의 빠른 멀티태스킹 커널로 빠른 인터럽트 반응과 확장된 태스크간 통신/동기화 기능을 지원하며, 유닉스 모델과 호환되는 효율적인 메모리 관리 방식을 따르며, 멀티 프로세서를 지원한다. 또한 VxWorks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한 WindSh라고 부르는 셸을 지원한다. 셸은 심볼릭 또는 소스 수준의 디버깅 기능과, 성능 모니터와 파일 시스템 입출력을 지원한다. VxWorks는 많은 플랫폼으로 포팅되었다. 사실상 최근의 모든 임베디드 CPU에 포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x86 시리즈, MIPS, PowerPC, SH-4 등이 있고, ARM 아키텍처, StrongARM, xScale CPU 들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성 탐사선 스피릿 로버,오퍼튜니티 로버,큐리오시티 로버는 PowerPC 플랫폼에 VxWorks 운영체제를 탑재하였다. 이 밖에도 몇 기의 우주선의 운영 체제로 사용되었고, 보잉사도 새로운 상업 항공기 기종인 7E7의 운영 체제로 사용하려고 한다. 새로 출시된 VxWorks 7은 다음의 대상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이소라 (가수) 이소라(李素羅, 1969년 12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91년, "낯선 사람들"의 멤버로 활동하며 정식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김현철과의 듀엣곡 〈그대 안의 블루〉를 불러 한국 대중들에게 존재를 알렸으며, 김현철이 제작을 맡은 첫 앨범에서 〈난 행복해〉가 당시 대표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가요톱10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995년 12/13, 12/20, 1996년 1/3) 예상치 못한 히트를 하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됐다. 정규 앨범 1집 《이소라 vol.1》의 성공 이후 당시 댄스 음악 장르가 독점하고 있던 TV 방송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수들의 음악적인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KBS2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1996년 10월 19일부터 5년 5개월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소개한 무대였다. 2004년 발표한 6집 앨범 《눈썹달》로 한국대중음악상의 2005년 '올해의 음악인(여자)' 상을 수상했다. 이 앨범은 경향신문과 웹진 가슴이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포함됐다. (공동 93위) 2001년 4월부터 2006년 4월까지 MBC FM4U 《이소라의 음악 도시》의 DJ를 맡았고, 2008년 4월부터 2009년 4월까지 MBC FM4U 《오후의 발견》을 진행했다. 2011년 3월 6일부터 2011년 6월 12일까지 MBC 《우리들의 일밤》의 코너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다. 또 2011년 4월 26일부터 2012년 8월 7일까지 KBS Joy 채널에서 《이소라의 두 번째 프로포즈》를 진행하였다. 또한 2013년 4월부터 12월까지 KBS 제2라디오에서 《이소라의 메모리즈》를 진행했다. 8집은 2014년 4월 11일 발매되었다. 향후 베스트 음반도 낼 것으로 알려졌다. 산수화 산수화(山水畵)는 자연의 경치를 주제로 그린 동양화(또는 한국화)를 말한다. 인물이나 꽃과 새와 함께 많이 그려지는데 사계절과 짝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산수화는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이다. 화조화(花鳥畵)는 꽃과 새를, 초충도(草蟲圖)는 풀과 벌레를, 인물화는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는 수묵화로 그리기가 적합하며 산수화의 역사는 수묵화의 역사와 거의 비슷하다. 산수화는 자연의 경치를 소재로 그린그림이다. 12252 광주 12252 광주(12252 Gwangju, 1988 VT1)는 1988년 11월 8일 일본인 고이시카와 마사히로가 센다이 천문대 아야시 관측소에서 발견한 소행성이다. 일본 센다이 시와 대한민국 광주광역시의 자매결연을 기념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올덴부르크 대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은 독일 북서부에 있었던 대공국이다. 서열상 독일 제국에서 열 번째였고, 연방의회(상원)에서 1표를 행사할 수 있었으며 제국의회(하원)에는 3명의 대표를 보냈다. 수도는 올덴부르크 시에 두고 있었으며, 국교는 루터파 프로테스탄트였다. 올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고, 신성로마제국 해체 후 1814년 대공국으로 승격하였다. 1854년에는 부용국(Vasallenstaat)이었던 크니프하우젠 남작령(Herrschaft Kniphausen, 면적 45km²)을 흡수하였다. 올덴부르크 대공국은 1866년 북독일 연방에 가맹하였다가 1871년 독일제국의 구성 영방이 되었다. 대공국의 영토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가장 크고 수도 올덴부르크가 위치해 있는 올덴부르크 지방이 대공국의 주요 부분이었고, 그 외에도 발트해에 접한 오이틴(Eutin)과 팔츠 지방에 있는 비르켄펠트(Birkenfeld) 같은 작은 월경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18년 11월에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대공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주(올덴부르크 자유주)가 되었다. 올덴부르크 대공가는 홀슈타인-고토르프(Holstein-Gottorp) 왕가에 속하는데, 이 왕가는 러시아(로마노프 왕가의 부계), 스웨덴의 왕위(1751-1818)를 차지한 바 있다. 한편 이 왕가의 다른 분파로는 글뤽스부르크 왕가가 있다. 안할트 안할트()는 독일 중부에 있었던 주로, 1918년까지는 공국이었다. 면적은 2,299km²였고, 1905년 당시의 인구는 33만. 수도는 데사우 시에 두고 있었다. 첫 번째로 통일된 안할트 공국은 1570년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고, 1603년에는 5개의 소국으로 분할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안할트-베른부르크, 안할트데사우 및 안할트쾨텐을 공국으로 승격시켰다. 이들 공국들은 1863년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다. 새 공국은 프로이센의 작센주를 사이에 두고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있었고, 그 이외에 프로이센에 둘러싸인 다섯 개의 고립된 지역(알스레벤, 뮐링엔, 도른부르크, 괴트니츠, 틸커로데-압베로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18년에는 자유주가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고, 2차 대전 후에 프로이센에 합쳐졌다가 곧 작센안할트 주의 일부가 되었다. (작센안할트주는 동독 치하에서 1952년 소멸되었으나, 독일 통일과 함께 부활됨.)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발데크()는 1929년까지 있었던 독일 서부의 주로, 1918년까지는 독일 제국의 한 후국(Fürstentum)이었다. 영토가 헤센 카셀에 인접한 발데크 지역과 하노버에 인접한 피르몬트 지역으로 구성되어 발데크피르몬트(Waldeck-Pyrmont)라고 불리기도 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헤센 카셀과 하노버가 모두 프로이센에 합병되면서 영토가 프로이센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주도는 아롤젠(Arolsen)에 두고 있었고, 면적은 1,121km, 인구는 1905년 당시 5만 9천이다. 시조는 12세기경에 살았던 슈발렌베르크 백작인 안헤어 비두킨트이다. 1712년에 그 백작이 공(prinz)이 되었다. 1815년 빈 조약에 의해 그 독립이 확인되었다.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0년 독일제국에 가맹하였다. 1918년 11월 13일 독일의 1차 대전 패전에 의해 프리드리히 2세가 퇴위하여 발데크는 자유주(Freistaat)가 되었다. 1921년 피르몬트 지역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하노버의 일부가 되었고 1929년에는 발데크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헤센-나사우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이래 헤센주의 일부가 되었다. 예멘 예멘 공화국(, ), 약칭 예멘()은 중동의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있는 국가이다. 가장 오래된 인류 거주지 중 하나로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천일야화의 주요 배경지 중 하나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길목에 있어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풍부했고, 중동 국가 가운데서 아랍인의 독특한 기질과 문화적 전통을 가장 잘 이어가고 있는 나라로 손꼽힌다. 북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오만과 인접해 있다.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위치하며, 북위 12도에서 20도 사이에 위치한다. 홍해, 아덴 만, 아라비아해에 접하여 있고, 북쪽으로 사우디 아라비아, 동쪽으로 오만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아덴 만을 사이에 두고 소말리아와 만난다. 본토 이외에 소말리아 앞바다에 위치한 인도양의 소코트라 섬 등도 예멘에 속한다. 예멘의 국토 면적은 약 52만 8,000km ²이다. 수도는 사나이고, 지리학적으로는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홍해 연안, 서부 산지, 동부 산지, 북쪽 룹알할리 사막 사막의 지역이다. 티하마로 불리는 홍해 연안은 매우 건조하고, 산지에서 흐르는 강은 보기 힘들며, 와디 또는 지하수의 형태로 존재한다. 서부 산지는 강수량이 많기 때문에 계단식 농업을 한다. 수수가 주를 이루며, 면화와 망고 등 과일도 재배된다. 이 지역은 밤낮의 기온차가 크다. 동부는 해발 2,000m 지역이며, 기온차가 서부산지보다 더 크다. 낮 30℃, 야간 0℃의 기온 차를 보이기도 한다. 동부 지역은 보리나 밀이 재배된다. 룹알할리 사막에서는 베두인 유목민이 있으나, 이들은 낙타 유목만을 하고 있다. 아덴 만 연안의 해얀 평야에서는 수리를 이용한 농작물을 경작한다. 기온은 홍해 연안이 높고 중부 고지가 쾌적하다. 중부에서는 연간 400∼1,000mm의 강우량을 보인다. 홍해 연안의 평야는 40∼50℃의 고온과 높은 습도의 기후를 이룬다. 1517년 이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중 1839년 천혜의 무역항인 아덴을 노린 영국이 남예멘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분단 시대가 시작됐다. 1918년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북예멘이 먼저 독립하였으며, 1962년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자본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한편 소련의 지원 하에서 독립한 남예멘은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1972년·1973년·1979년에도 국경 문제로 남예멘과 북예멘 간에 무력 분쟁이 이어져 왔으며, 1978년 6월에는 가즈미 북예멘 대통령이 남예멘 특사와 회담 중 암살됨으로써 남예멘과 북예멘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90년 5월 남북협상에 의해 통일이 성사되었으나 1994년 5월에 재분단되어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고, 1994년 7월 북예멘의 일방적 승리로 다시 통일이 성취되었다. 예멘은 과거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북예멘(예멘 아랍 공화국)과,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주의 정체를 채택한 남예멘(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990년 남북간 합의로 통일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부 요직 분배와 관련하여 충돌이 발생, 내전으로 비화했다. 남예멘 관료들은 예멘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내전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북예멘 군대가 남예멘의 수도 아덴을 점령하며 북예멘의 승리로 끝나, 비로소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통일된 지 22년 만에 다시 분단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2013년 1월 14일에는 예멘 남부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004년부터 시아파 무장 단체 후티는 예멘 서북부를 중심으로 예멘 정부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다. 2014년 9월부터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에 진입하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쿠데타(후티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2015년 1월 20일, 반군이 대통령 관저를 공격하고 대통령궁을 장악했다.(후티 쿠데타) 정보장관 나디아 알사카프에 따르면 대통령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는 대통령궁 내부에서 30분 동안 거대한 포격을 받았지만, 경비원의 보호에 따라 무사히 다치지 않고 보호받았다고 말했다. 대통령 경호원은 하디 대통령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음을 보장받은 이후 항복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 반란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긴급 회의를 진행했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예멘에서 "상황 악화"를 우려하고 적대적 행위를 중단하기 위해 모든 측면에서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1월 22일, 대통령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와 총리 칼레드 바하흐는 의회에 사임을 내고 어떠한 보도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의회는 사임안을 거부할 뜻을 밝혔다. 2월 6일, 후티는 임시 헌법을 발표하며 의회를 해산하고 551명으로 된 새 의회를 구성하며, 151명의 대통령 위원회를 설치해 2년간 정부 역할을 맡게 하겠다고 밝혔다. 하디 대통령은 2월 23일에 자신은 현재 헌법상 예멘의 대통령이며 사임안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임을 취소한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후티의 통치는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하디 대통령은 아덴으로 정부를 옮겼지만 사나를 중심으로 한 후티 세력의 공격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상대적으로 인구가 희박한 동부 지역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랍 국가들의 도움으로 2015년 6월에 하디 정부는 아덴 등 남부 지역을 수복하고 후티 세력에 맞서 예멘 전역을 수복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하디 정부는 2015년 9월말 아덴으로 환도했다. 한동안 하디 대통령은 리야드에 계속 머물렀고 하디 대통령은 2015년 11월에 뒤늦게 귀국하였다. 그러다가 유엔에서 예멘 내전 (2015년-현재)이 계속되자, 2018년 12월 24일에 휴전을 시켜서 일단락되었다.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국가 중 유일하게 공화제를 채택한 입헌국가이다. 현행 헌법은 1991년에 공포되어 1994년과 2001년에 개정된 것이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임기는 7년으로, 3선이 금지되어 있다. 권한은 막강하고, 형식상으로도 사실상 국가의 최고 지도자이다. 부통령과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내각에 해당하는 국무위원회의 구성원은 총리의 조언에 따라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의회는 양원제로, 자문위원회(111석)과 인민대표원(301석)으로 구성된다. 자문위원회 의원은 모두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인민 대표원의 의원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이다. 그러나 자문위원회에 입법권은 없으며,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조언기관에 불과하므로, 예멘 의회는 실질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민대표원의 사실상 단원제에 가깝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고,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한다. 예멘은 22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웃 아랍 국가들에 비해 석유나 천연가스의 개발이 늦어, 아랍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힌다. 상대적으로 농어업이 활성화되어 있으나 기후 악화와 낙후된 설비 등으로 식량을 자급할 정도는 되지 못하며, 예멘인들의 국민적 기호품이자 마약성 작물인 까트(Qat) 재배가 지나칠 정도로 널리 확산되어 있어 적지 않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석유 등의 에너지자원은 198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공업은 자유무역지대로 지정된 아덴을 중심으로 정유, 석유화학, 제염(製鹽), 알루미늄 공예 등이 발전해 있다. 인근 아랍국가들과 서방세계로부터 상당히 많은 재정지원을 얻어 왔지만 경제 성장이 더디고, 실업률이 30% 이상이며 물가 상승률도 높다. 다만 석유의 수출이 늘어나며 무역수지는 흑자를 유지하고 있어, 앞으로의 성장 전망은 어둡지 않은 편이다. 인구는 2014년에 약 2500만 명으로 아랍인이 98%를 차지하고,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무슬림으로, 이 중 수니파가 56%, 시아파가 43%를 차지한다. 시아파의 대부분은 수니파와 비슷한 교리를 가진 자이드파(다섯 이맘파)이고, 열두 이맘파와 이스마일파(일곱 이맘파)도 예멘 내 소수파로서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수의 예멘계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 국민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양식도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의 가르침보다 부족 내의 규칙을 우선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은 허리띠에 쟌비야라고 불리는 반달모양의 단검을 차고 있다. 이 단검은 소유자의 집안이나 부족, 빈부와 같은 특성을 드러낸다. 실용적인 면보다는 상징으로써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날이 예리하지 않은 것도 많아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도시에서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은 남성도 많이 보이지만, 그 경우에도 많은 남성이 자신의 집에 쟌비야를 갖고 있다. 여성은 종교적인 관습에 따라서 머리와 얼굴을 가리기 위한 스카프와 몸을 가리는 천을 착용하고 있으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전체를 감추도록 의무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과 그 가족의 신앙의 깊이에 의해서 판단되므로, 신앙이 깊어지면 그만큼 피부를 숨기는 면적도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여성의 이슬람 복장 착용 정도는 이슬람 부흥 등의 사회 경향도 많이 받지만, 일반적으로 예멘의 여성들은 다른 이슬람 국가와 비교하면 착용 비율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주로 도시 지역에서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금지된 술 대신, 카트라고 불리는 마약성 작물의 잎을 씹는 관습이 있다. 카트는 예멘인의 사교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거리나 가정집에서 여러 명이 모여 카트를 씹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자 문자(文字, )는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상징 체계이다. 대부분 음성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생겨나거나 만들어졌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문자와 구어(口語)는 둘 다 유용하지만, 문자의 경우 정보의 저장과 전달을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문자는 기원전 3천 년 경의 쐐기 문자이다. 문자는 크게 "표어 문자"와 "표음 문자"로 나눌 수 있다. 창세기전 《창세기전》(The War of Genesis)은 대한민국의 소프트맥스사가 개발한 컴퓨터용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이다. '아르케'와 '안타리아', '투르', '한'등 가상의 세계관을 무대로, 주인공들의 사랑과 모험, 음모, 국가 간의 화합과 반목, 인간과 신 사이의 갈등과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밝혀지는 대륙의 역사와 비밀을 다루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에서는 1995년 《창세기전》(1편)을 시작으로 2000년 12월에 발매된 최종작 《창세기전3 파트2》까지 총 6편의 작품이 제작되었고, 모바일에서는 《크로우 1》, 《크로우 2》등이 제작되었고, 2007년 12월 《창세기전3 Ep1》이 엠조이넷을 통해 SKT 용으로 이식되었다. 이들 게임은 시나리오의 치밀한 구성과 작품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다만, 《창세기전》은 설정이 독창적이지 않다(이를테면, 기파랑과 리슐리외 등)는 비판도 있다. 《서풍의 광시곡》을 제외한 모든 시리즈는 최연규가 메인 프로듀서이다. 《서풍의 광시곡》은 조영기가 메인 프로듀서이다. 단일 시리즈로는 한국에서 개발한 작품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올렸다. 출시 했던 모든 시리즈가 완성도의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큰 인기와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기에 이 작품의 제작시기가 제작사인 소프트맥스사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태초에 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암흑신계열(13명이라서 13암흑신)과 주신계열(빛의 12주신)로 나뉘었다. 그들 사이의 전쟁으로 행성이 황폐해지는 와중에 어디선가 신들을 능가하는 강력한 존재(후에 파괴신이라 불림)들이 나타나게 되고 신들마저 압도하는 이들의 위력에 신들은 전쟁을 멈추고 그들 스스로를 어딘가에 봉인하였다. 신들이 사라지자 어찌된 영문인지 파괴신들도 사라졌고 그 땅위에 인간들이 번성하였다. 이 신화는 안타리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말 그대로 '신화'이고, 그 뒤엔 숨은 진실이 있다. 게임의 주인공들은 '창세전쟁의 비록'이라는 책을 통해 신화 뒤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 진실이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임. 다크 아머와 실버 애로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홀연히 등장한 게이시르 제국의 황태자 칼 스타이너, 흑태자의 깃발 아래 그라테스 평원에서의 전투 이후 패망한 팬드래건 왕국의 왕녀 이올린과 그 일행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해서 팬드래건의 신기(神器) 영광의 홀(The Scepter of Gloria)을 운반하는 제국군을 습격하여 탈취한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정체불명의 레인저인 그레이 스케빈져(G.S)의 도움을 받게 되며, 그라테스 평원의 회전 이후 흑태자가 행방불명되어 중심을 잃은 제국군을 몰아 붙여 실버 애로우를 다시 성립하기에 이른다. 창세기전 II의 배경이다. 창세전쟁이 끝나고 50년 후, 게이시르 제국은 황실 혈통이 끊기자 통일정부가 없이 지방영주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난립하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런 권력부재의 공백상태를 이용해 강력한 세력을 얻은 주신교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지아는 자신의 딸 메르세데스의 약혼자이자 구 제국령의 수도 게이시르 시티의 영주 루크 번스타인의 아들인 시라노 번스타인을 악마 숭배자라는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둔다. 그 뒤 체사레와 주신교는 자신들의 반대자는 이단과 마녀로 몰아 멸문시키는 방식으로 민중을 탄압하고 권력을 증강시켜 나간다. 13년 후 시라노는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키고 그 지위와 재력을 차지한 체사레와 주신교에게 복수하기 위해 인페르노 파옥 사건 당시 감옥에서 탈옥하여 민중저항조직인 제국혁명군 제피르 팰컨의 일원이 되어 제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기로 한다. 그리하여 그 옛날 흑태자가 사용하던 마검 아수라가 꽂혀 있는 폭풍도로 향한다. 창세기전 외전 I ‘서풍의 광시곡’의 배경이다. 팬드래건의 왕 윌리엄이 죽은 후 윌리엄의 동생 리처드는 정통 계승자인 필립을 성에 감금해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 리처드는 정통 왕위 계승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이때 또 다른 왕가 콘웰 가의 자손으로 장미전쟁을 피해 게이시르 제국에 망명 중이었던 클라우제비츠가 선왕 윌리엄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통해 팬드래건의 왕이 되어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에 리처드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한다. 한편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동생 메리 두 왕녀는 리처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왕국의 공권력을 피해 ‘용자의 무덤’이라는 최고의 무술 수련장에 들어가 샤른 호스트라는 정체 불명의 관리자에게 지도를 받는다. 리처드와 클라우제비츠로부터 동시에 결혼 상대로 지목받게 된 엘리자베스는 이후 세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장미의 신부’로 불리게 되며, 이 장미의 신부를 차지하여 장미전쟁의 승자가 될 자가 과연 누가 될지 지목받게 된다. 창세기전 외전 II ‘템페스트’의 배경이다. 창세기전 3의 배경이다. 알데하이드 알데하이드( ) 또는 알데히드()는 탄화수소기에 포르밀기가 첨가된 화학물질의 총칭이다. 분자식은 RCHO이다. 알코올의 불충분한 산화에 의하여 생기며 자극적인 냄새가 나고 포르밀기의 특성상 산화되기 쉬워 은거울반응이나 펠링반응을 일으키며, 산화한 후에는 카르복시산이 된다. 환원제·향료·마취제 등에 쓰인다. 폼알데하이드 폼알데하이드( ) 또는 포름알데히드()는 자극성이 강한 냄새를 띤 기체상의 화학물질이다. 유기화합물의 일종이다. 가장 간단한 알데히드이다. 메탄알(methanal)이라고도 한다. 화학식은 HCHO이며, HCO로 쓰기도 한다. 녹는점은 -92℃(181 k), 끓는점은 -21℃ (262 k)이다. 1859년 러시아의 화학자 알렉산드르 부틀레로프가 발견하였다. 자극적인 냄새가 나고, 무색이다. 물 등 용매에 녹는다. 37% 이상의 수용액은 포르말린이라고 부른다. 폼알데하이드는 탄소가 포함된 물질이 불완전 연소할 때에 쉽게 만들어진다. 산불이나 담배 연기 또는 자동차 매연에서 발견된다. 공기중에서는 메테인과 다른 탄화수소에 햇빛과 산소가 가해지면서 합성된다. 주로 메탄올을 산화시키면 얻을 수 있으며, 이 물질이 산화되면 포름산이 된다. 베이클라이트, 멜라민수지, 요소수지 등의 원료로 널리 이용된다. 미량이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물의 물질대사의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폼알데하이드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도 혈액중에 폼알데하이드 농도가 2.61± 0.14 μg/g(약 2.6ppm)이라는 보고가 있다. 새집 증후군의 원인 물질 중 하나이다. 아토피성 피부염의 원인 물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메탄올을 잘못 마셨을 때, 실명이나 사망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이기도 하다. 접착제, 도로, 방부제 등의 성분으로 쓰인다. 가격이 싸기 때문에 건축 자재에 널리 이용된다. 화합물 목록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 Oriental colonization Company)은 1908년 12월 18일에 설립된 일본의 기업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이다. 간단히 줄여서 동척(東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대영제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1908년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해 세워졌다. 자본금 1,000만 원이며 조선은 설립 자본금의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했지만 주요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토지와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식민지 개척 및 활동을 돕는 것 곧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위한 기관이었다.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원래는 대한제국, 일본의 양쪽 국적의 회사였으나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일본 국적의 회사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에 지점들을 두었다. 소유는 일본인에 한하였으며 활동지역은 이후 만주까지 확대되고 1938년부터는 다른 식민지인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영업지역이 확대되었다. 1938년에는 9개 지점과 831명의 직원을 두었다. 조선인 간부로는 부총재 민영기와 이사 한상룡이 있었다. 1945년 11월 10일 미군정에 의해 신조선회사로 개편되었다. 1945년 9월 25일 미 군정이 제정한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과 1945년 12월 6일 제정한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의해 모든 한국내 일본인 소유재산(적산)은 미군정청 소유가 되었다. 미군정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재산을 인수 개편하여 "신조선회사"로 개명했다가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창립하였다. 농업 토지의 매매, 임차, 경영, 관리, 건물의 건설, 매매, 대차 그리고 특히 오단백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얼마 안 되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일본 소작인들의 한국으로의 이민을 지원하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펼쳤으며, 조선 각지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하고 정착을 위한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대표적인 기관이 되었다. 1917년까지는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이주, 농업경영, 토지경영, 토지개량, 임업경영이 주력 사업이었지만 1930년대 이전까지는 금융 사업을 확장하면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는 1916년 쌀폭동이라고 불린 식량 부족에 따른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식량 수탈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고대 로마 제국과 근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일본의 평화 곧 일본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식민지를 수탈하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광업 부분으로 확장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공업을 지원했다. 처음 한국으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자본으로 출자를 받은 후 토지 매입으로 1913년까지 4만 1,148정보를 매입하였으며 조선 총독부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으로 국유지불하에 의해 1917년말 7만 5178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되었다. 이후 계속 늘어나서 1942년말에는 20만722정보를 소유했다.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 수탈에 앞장서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소작민들에 대한 수탈은 한국인들의 대규모 해외 이주를 불렀다. 1933년까지 일본으로 113만 5852명, 만주와 연해주로 150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집계된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의 동척 소유인 북률농장에서 이몽서를 주동으로 한 소작인들의 생존권 투쟁이 일어났다. 북률면 나무리들은 원래 조선왕조의 소유로 소작료는 1/4~1/3수준이었다. 그러나 1908년 재실급국유재산정리로 대부분의 궁장토가 역둔토로 편입되면서 소작료가 4~4.5할로 오르고 소작기간은 5년간으로 되었다. 북률면에서만 역둔토 2300정보를 점탈하였다. 1924년 11월 2일부터 4일간 동척 사리원지점에서 농민들은 흉작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동이 나자 소작료 감면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는데, 동척에서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이민자 40여명에게 총을 주어 유혈 사태까지 일어났다. 소작농민들의 투쟁이 계속되자 아예 동척은 소작권을 빼앗고 일본 이주농민에게 땅을 분배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농민들이 더욱 격렬히 투쟁해 일시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납 소작료 문제가 다시 불거져 교섭은 결렬되었고, 엽총을 쏘며 강제집행에 들어감으로써 북률투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대표자 5인은 6~8개월의 실형을 살고, 더이상 살 수 없게 된 370여호의 소작인들은 살 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북률 출신인 나석주 의사는 동척 간부를 죽이고 조선식산은행과 서울 동척 지사에 폭탄을 던졌다(1926년). 1927년부터는 일본인 이민촌이 들어서서 이들을 대신했다. 수탈한 토지를 기반으로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1917년까지 매년 1천호, 1926년까지는 매년 360호정도의 이민을 받아 1926년까지 9,096호가 한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원 아래 직접 경작하기보다는 지주가 되어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했다. 식민지 개척을 위한 척식자금을 운영하는 것은 주요업무의 하나였다. 1920년대에 만주 및 몽고 지역 진출을 위해 농공업개발자금의 공급 사업을 벌였다. 1920년대 이후 광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투자사업을 확대하여 동척계라 불리는 기업집단이 되었다. 1945년에는 이러한 회사가 52개사에 달했다. 이 중에는 조선유연탄, 동척광업, 비봉농사, 북선개발, 삼화광업, 조선아연광업, 조선도시경영, 해남농사등이 있었다.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한국을 지배한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 제정된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과 1945년 12월 6일 제정된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의해 모든 한국내 일본인 소유재산(적산)은 미군정청 소유가 되었다. 이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재산을 인수 개편하여 "신조선회사"로 개명하였으며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창설하였다. 이회사의 소유경지는 한국 논밭 경지의 12.3%에 달했으며 소속된 소속농가는 58만7974호로 전체농가 217만 2435호의 27.1%였다. 1948년 3월 22일에는 중앙토지행정처로 바뀌었다. 이후 미군정에서 소유하던 토지는 토지개혁을 통해 한국 농민들에게 귀속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부산, 대전, 목포가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은 대한민국 해방과 더불어 미국문화원, 미국영사관으로 쓰이다가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1996년 미국연방정부에 의해 폐쇄되고 2층의 영사관도 철수했다. 미국은 그 후 이 건물을 비워둔 채 3년 동안 방치하였으며, 부산광역시와 시민단체의 거듭된 반환요청에도 묵묵부답이였다. 그러던 중 1999년 4월 30일 70년 만에 대한민국에 완전히 반환되었다. 약 3년간의 내부 공사를 거쳐 2003년 7월 3일 총 200여점의 유물과 2개의 전시실을 갖춘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정식 개관하게 되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은 1922년 건립되어 현재도 대전 구도심에 남아있으며, 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8·15 광복 이후 대전체신청, 대전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었으며, 1984년 민간에 매각되어 현재는 상업용 건물로 쓰이고 있다. 상업시설로 개조되면서 외관과 내부가 많이 변형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대전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근대 건물로 가치가 인정되어 2004년 9월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은 전라남도 기념물 1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 일본인 거류지에 아직 남아있다. 붕괴 위험으로 1998년 해군의 철거 조치가 내려질 뻔 했으나, 각계의 반발과 1920년대의 건물로는 유일하다는 데 착안하여 일제 강점기를 잊지 않기 위해 사적지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보존되었다. 후에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개장하면서 근대사진전을 열고 있다. 총독부는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치 및 병참기지화하기 위해서 조선의 경제를 효율화하는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로 인한 수단들이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같은 경제 기관이나 산미증식계획과 남면북양같은 경제 정책들이 핵심이었다. 이몽서 이몽서는 1922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상대로 첫 번째 소잭쟁의를 일으킨 농민대표이다. 1922년 재해에 따른 흉작이 계속되자 계속적인 연좌시위를 벌였는데, 이에 동척은 소작권을 빼앗아 일본인에게 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농민들은 생존위협을 느껴 소작료 감면과 소작권 보장을 요구, 더욱 격렬한 투쟁에 들어가 동척과 일시적인 타협을 이뤄냈다. 그러나 연체된 소작료 미납 문제로 다시 문제가 불거져, 동척은 일본인과 어용 소작인들을 동원, 농민들에게 엽총을 쏘며 강제로 억눌렀다. 이 해 소작쟁의를 이끈 이몽서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몽서가 이끈 북률농장 소작쟁의 이후 전국에서 소작쟁의가 빈번히 일어나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치안유지법을 한국에서도 시행, 소작쟁의를 원천봉쇄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조두남 조두남(趙斗南, 1912년 ~ 1984년 11월 8일)은 한국의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이다. 아호는 석호(夕湖). 평양의 개화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미국 출신의 신부 조지프 캐논스에게 서양 음악과 작곡을 배웠다. 11세이던 1923년에 가곡 〈옛이야기〉를 작곡해 작곡가로 데뷔했을 만큼 자질을 보였고, 17세 때 첫 가곡집을 발간했으며, 21세 때 가곡 〈선구자〉를 작곡했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활동했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 활동을 하였고, 한국 전쟁 후에는 마산에 정착하여 작곡 활동보다는 주로 피아노 교육에 매진했다. 1962년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마산시지부의 초대 지부장에 오르는 등 마산 지역 예술 진흥에 많은 공헌을 했다. 대표곡으로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가 있다. 이 노래는 조두남이 만주에 머물 때 작곡한 곡으로 민족적 기상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널리 불렸으나, 원 제목은 〈룡정의 노래〉이며 내용도 알려진 바와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서정적이나 후기에는 민족적 정서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1962년 경상남도문화상, 1976년 눌원문화상을 받았다. 〈선구자〉 외에도 다수의 가곡과 대규모 성악곡인 칸타타 〈농촌〉, 오페레타 〈에밀레종〉 등이 있다. 조두남이 사망한 직후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선구자〉의 작사자인 윤해영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만주에서의 조두남의 행적에 대한 의혹이 불거졌다. 연변 음악계 원로인 김종화는 2002년 조두남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전쟁 협력 성격이 짙은 〈징병제 만세〉, 〈황국의 어머니〉와 함께 일본의 만주국 건설을 찬양하는 내용의 〈아리랑 만주〉와 같은 노래를 작곡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확인하기 어려운 오래전 만주에서의 행적이기 때문에 논란이 이어졌고 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의 조두남기념관 명칭을 놓고도 찬반 양론이 대치했다. 그 결과 조두남기념관은 개관 1개월이 채 못되어 휴관하였다. 결국 2005년 6월 15일, 조두남기념관을 마산음악관으로 개칭하고, 조두남 이외의 다른 지역 출신가들의 자료도 함께 전시하는 장소로 바꾸고 나서야 개관 할 수 있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분야에 포함되었다. 한식 (절기) 한식(寒食)은 동지로부터 105일 째의 날이다. 양력으로 4월 5일 또는 6일에 해당한다. 한식에는 술·과일·국수·떡·탕·포 등 여러 음식을 만들어 산소에 가져가서 제사를 지낸다. 또한 보자기에 싸간 낫으로 벌초(伐草)를 하거나 무덤의 잔디를 새로 입히기도 한다. 한식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춘추 시대 진(晋)나라에 문공이란 왕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죽고 나라 안이 어수선해지자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되었다. 문공의 충성스런 신하 개자추는 문공의 허기를 채워 주기 위하여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내어 구워 먹이기도 하였다. 나중에 임금이 된 문공은 개자추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문공이 개자추를 불렀으나 개자추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그래도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불타 죽었다. 문공은 너무 가슴이 아파 해마다 이날이 되면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충성심을 기리고자 불을 때지 말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한식날이 되면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고자 불을 지펴서 따끈한 밥을 해 먹지 않고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한식은 양력으로 대개 4월 5일이나 6일쯤 되므로 식목일과 비슷한 때이다. 이 무렵은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기에 알맞으므로 특별한 놀이를 하지 않고 조상의 묘를 찾아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낸다.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건조기인데도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는 한식을 '물한식'이라 하며, 이날 비가 내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1997년 12월 3일 ~ 2001년 8월 23일)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1997년 12월 3일에 이루어졌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 20억 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하였다.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은 외환보유액이 한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는 면했다. 'IMF 경제 위기', 'IMF 외환 위기', 'IMF 환란', 'IMF 관리체제', 'IMF 시대', 'IMF 사태' 등으로 불리나 IMF라는 명칭 자체가 외환 위기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내용이 압축된 단어로 대한민국 언론 등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7년 11월 10일에 이루어진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가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97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여당은 야당에게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해서 IMF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대한민국은 IT 산업 장려 정책이나 대기업 간의 사업 교환 및 통폐합으로 경제 재건을 도모했다. 1999년 3월, 정부는 사이버 코리아 21 계획을 발표하며 IT 산업 발전 및 인프라 투자에 힘을 쏟았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98년 12월, IMF 긴급 보관 금융에 1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갔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에 대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위기 발생 때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장치로서 외환보유액을 꾸준히 늘려왔다. '외환 위기'로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던 대한민국의 외환보유액은 이듬해인 1998년 말 520억 달러로 증가했고, 2001년 말에는 1028억 달러로 1000억 달러선을 돌파했다. 2001년 8월 23일에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체제를 졸업했다. 1990년대 들어 금융자유화 진전 및 금융시장 발전으로 공개 시장 조작을 주된 통화정책수단으로 활용함에 따라 지급준비제도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특히 1996년 이후 금융기관의 대외경쟁력 제고와 공정경쟁을 위해 9%를 상회했던 지급준비율을 1~5% 수준까지 대폭 인하함으로써 통화정책 수단으로서 지급준비율의 유용성은 크게 낮아졌다. 당시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종합금융사를 비롯한 국내 금융기업들은 저리의 해외단기채를 얻어 동남아 국가들에 장기채로 빌려주면서 2~3%의 이자 차익을 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로 해외단기채들의 만기가 연장되지 않자 국내 자금을 이용해 이를 상환하고, 결과적으로 국내자금이 유출되었다. 마치 기업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외환보유고가 감소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의 위기를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신용도가 하향 조정되었고 원화가치의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등 연쇄적으로 국제적 경제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의 정경유착으로 인해 한보와 기아자동차에 불법적인 은행대출을 용인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철강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뇌물을 받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와 같은 불법대출로 인해 두 업체의 부도로 각각 5조 원과 10조 원의 부실 채권이 발생했고 이는 국가신인도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재계10권 밖의 한보는 부도처리하면서 엄청난 부실기업으로 당장 부도처리해야할 재계4위의 기아그룹을 선거로 인해 제때 부도처리하지 못한 것이 대외신인도 하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기아그룹은 지배주주가 없는 전문경영인체제의 기업으로 호남출신의 김선홍이 회장이었다. 당시 기아본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앞에 위치해 있었는데 김대중은 6번이나 찾아가 회생을 약속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특수강 등 다른 분야는 부도처리되었으나 자동차는 현대그룹으로 넘겨 살아나게 했다. 1997년 말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국 투자기관들은 한국의 경제도 곧 어려워질 거라 판단하여 투자자금을 대규모로 회수해갔다. 또한 정부는 1997년 9월 이후 계속된 외환시장 불안정 속에서 원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시작하였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기가 돌아오는 국외 차입금의 규모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가 초래하기 직전까지 몰리는 외환위기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었다. 1996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고 이후 30개로 늘어나서 해외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채를 끌어와서 어음교환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업이 부도를 일으키게 되자 외채를 끌어서 어음할인한 이들 종금사(종합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고 특히 한보와 기아의 12조 원 가량의 대형 부도사태는 위기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998년 6월 29일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등 5개 퇴출은행를 발표하고,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관치 금융의 그늘아래에서 부실한 경영을 하였으며 이들에게 연관된 작은 관련기업들도 연달아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998년 8월 11일 고려, 국제, 태양, BYC등 부실한 4개 생명보험사가 영업정지를 발표하고, 각각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허술한 관치금융체제, 무능한 정부의 예산 낭비, 대기업들의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부실 경영 그리고 당시 사회전체에 만연된 경제적 무능력과 부패, 책임의식 실종에 의한 결과였다. 국가개입 위주였던 아시아 국가들이 개방시장 정책을 시작했지만, 외환관리 능력과 외환보유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대외 금융세력의 공격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고정환율을 쓰던 태국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환을 견디지 못해 변동환율로 선회한 것에 아시아 각국의 외국자본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던 퀀텀펀드를 비롯한 규모가 큰 국제금융세력들이 1990년대에 이미 독일, 영국, 멕시코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감행했던 수법대로 약속한 듯이 동시에 단기 투자금을 회수해 빠져나가면서 선물환거래를 이용한 주식대량매도와 환투기 공격 등을 감행하여 동아시아 전반에 중앙은행의 외환보유량을 고갈시키고 그 후 달러 구제금융 요청을 받은 IMF가 제시한 가혹한 구조조정 조건을 통해 부실기업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까지 무너뜨려 헐값에 재인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투기 세력들의 공격과는 별도로 그 무렵 미국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주목되는데,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INR은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훨씬 전인 1997년 초부터 한보사태 등 한국의 경제 동향을 유심히 관찰해왔고,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1997년 12월부터 아예 'IMF 데일리'라는 제목의 일일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으로 전송했는데 1998년 2월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에 담긴 98년도 한국 관련 최우선 정책목표에는 한국이 금융위기를 헤쳐나가도록 돕는 동시에 IMF와 미국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준수하도록 확실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었는바, 당시 한국은 IMF 협약뿐 아니라 미국에 정리해고제 도입과 적대적 M&A 허용도 약속한 상태였고, 또한 IMF 처방의 효과로 1998년 하반기에는 미국이 한국과의 시장개방협상에서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기까지 하다. 특히 미국정부는 한국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면서, 외환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이른바 내인론에 한국 여론이 쏠리는 것을 반기는 입장이었고 이는 한국민들로 하여금 당시 동아시아 전체 외환금융시장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는 당시 집권정부의 정책 실패와 무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오래도록 각인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면이 있다. 김대중 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IMF를 극복하는 일환으로 외국인 투자 자율화 정책, 대기업을 각 기업으로 독립시키는 구조조정을 단행, IT 육성정책, 신용카드 정책, 정리해고제를 도입했다. IMF 2년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경제지표상으로 실업율을 제외하고 성장·물가·경상수지 등에서 전반적으로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주가는 외환위기 이전 수준보다 높아졌고 금리는 낮아졌으며 환율도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내려 앉았다.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1998년에 급속하게 내수가 위축되면서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1999년 들어 예상보다 훨씬 빠른 회복속도를 보이며 두 자리수 성장을 바라볼 정도였다. 1998년 무역수지 흑자가 390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데 이어 1999년에도 239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2000년에는 유가상승과 경기상승으로 인한 수입수요 증가에 따라 흑자 규모가 축소되기는 했지만 역시 117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했고. 공장 가동률도 내수 증가세를 반영하며 수출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80%대로 다시 상승했다. 업종간의 격차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철강, 섬유를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에서 뚜렷한 경기상승이 보이고 특히 반도체·정보통신·조선·자동차는 1990년대 초에 이어 호황기를 맞은 상태였다. 1999년 1인당 국민소득도 약 8,400여 달러, 2000년의 11,292달러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실업률은 IMF관리체제로 들어간 지 1년 만에 9%로 급등한 뒤, 이 반대 급부로 1999년에는 1.4%를 보였지만 부실기업의 퇴출과 IMF의 요구로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2000년 11% 치솟았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IMF 위기를 겪은 지 2년 만에 '고성장-저물가-경상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1997년 IMF 구제금융 요청 당시 대한민국의 외채를 갚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소유하던 금을 기부해 전국 누계 약 350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약 227톤의 금이 모아져 세계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금모으기 운동은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 내는데 일조했다.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7년 5.0%를 기록한 성장률은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의 경우 1분기 마이너스로 돌아선 뒤 2분기 -7.2%까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1998년 4분기부터 반전을 시도, 1999년 들어서는 1분기 4.6%, 2분기 9.8%대로 뛰어 올라 경제 관련기관들 사이에 경기과열 논쟁마저 불러 일으켰다. 한편 소비자물가는 1998년 7.5%에서 1% 이하로 뚝 떨어졌으며, 2000년에도 3%대의 안정세를 지속했다. 이러한 거시경제지표 호조에 힘입어 1997년 12월 18일 바닥(39억 달러)이 보이던 외환보유고는 2000년 760억 달러에 육박하였다. 외채규모 축소로 1979년 한국은행이 외채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추락했던 국가신용 등급도 주요 국제 신용평가 기관들에 의해 투자적격 등급으로 상향조정됐다. 금융시장도 외형상 안정세를 되찾았다. 외환위기로 등락을 거듭했던 달러당 환율은 1,100원대로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30%대로 솟구쳤던 시장금리(콜금리)는 안정세를 보이면서 1998년 10월 이후 한자리수(4%대)로 하락했다. 1998년 6월 16일 280선까지 하락했던 종합주가지수는 1999년 6월 23일 95년 이후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한 뒤 대우문제로 일시 조정을 받았으나, 11월 이후 상승세를 타며 950 - 1000포인트를 오르내렸다. 어음부도율도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하루 평균 부도업체수는 97년 말 128개에서 99년 10월 20개대로 떨어졌다. 반면 실업자수는 178만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으나, 1999년 말까지 100만명을 유지하였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내수 진작을 위한 무분별한 신용카드정책, IT 거품, 비정규직 문제 등이 있었다. 대기업들의 연이은 부도사태에 따른 고용불안과 실질임금 증가세 둔화, 주식가격의 폭락 등으로 소비는 뚜렷하게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7년 들어 3/4분기까지 소비증가율은 성장률에 비해 1%포인트 낮은 수준을 보였다. 1997년 11월 외환위기 이후 환율이 크게 오르고 IMF 구제금융이 결정된 이후 수입제 가격상승과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비는 더욱 위축되었다. 1998년 중 소비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실질임금의 하락으로 가계의 구매력이 크게 떨어진 데다 주식가격이나 부동산가격 역시 약세를 면치 못하여 자산가격의 상승에 따른 부의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8년 중 명목임금은 고용불안에 따른 임금인상 요구 억제와 기업의 수익성 하락으로 1.5% 내외의 증가에 그친 반면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환율상승과 세율인상으로 거의 7%에 이르러 실질임금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97년 주식가격의 폭락으로 40조 원 가량 줄어든 상장주식의 시장가치는 1998년 중에도 마이너스 성장과 높은 이자율로 회복의 폭이 크지 않았다. 이자율 상승과 경기침체에 따른 주택수요 둔화와 기업구조조정에 따른 상업용건물과 토지의 매물증가로 부동산 가격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소비심리도 크게 위축되었다. 사회적으로 소비절약 분위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데다 실업이 크게 늘어 미래소득에 대한 불안감도 증폭되었다. 또 차입을 통한 소비지출 여건도 매우 악화되었는데 이자율 상승으로 소비의 기회비용이 커진 데다 채무상환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융산업의 구조조정으로 금융기관의 가계에 대한 신용공여 여력도 크게 떨어졌다. 소비지출 감소는 민간보다는 정부부문에서, 비내구재나 서비스보다는 내구재 부문에서 더욱 심했다. IMF와의 협의에 따라 정부는 재정을 최소한 균형수준으로 맞춰야 하는 데다 금융산업의 구조조정 비용과 성장률 둔화에 따른 세수감소 등으로 정부소비는 대폭 줄어들었다. 건설투자는 1996년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8.2%의 증가율을 보였으나 1997년중에는 크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큰 폭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다세대주택 등 주거용 건물건설이 분양저조 및 부도업체 증가 등으로 부진한 데다 공장, 빌딩 등 비주거용 건물건설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1998년중 건설투자는 1997년보다 더욱 위축되어 극심한 침체 상태를 보였다. 부실채권 정리비용과 세수감소로 내년 정부예산이 당초 계획보다 훨씬 축소되어 그동안 건설투자를 주도했던 사회간접자본 중심의 토목건설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예산 중 약 57%가 경직성 경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예산의 축소는 상대적으로 탄력적인 조정이 가능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부문에서 상당 부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대형 국책사업의 축소 혹은 부분적인 연기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건설투자 부진은 1999년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으나 증가폭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부실채권 정리, 예금자 보호기금 마련 등을 위해 발행될 국공채에 대한 이자 부담 등으로 1999년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긴축적인 재정운용이 불가피하여 공공부문의 대규모 토목공사 발주를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주택건설에서도 주택보급률 상승으로 신규주택 수요가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있을 뿐아니라 저성장에 따른 민간의 소득증가세 둔화로 활기를 되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2000년경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건설투자도 소폭이나마 살아나겠으나 경제성장률보다 다소 낮은 3.6%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1996년 7%의 증가율을 기록했던 설비투자는 1997년 감소세로 돌아선 이후 하락폭이 점차 커졌다. 주요 장치산업의 설비확장이 일단락된 데다 재고증가와 수출단가 하락으로 투자 유인이 크게 줄어들었고 대기업의 연쇄부도와 금융시장의 불안 등으로 투자심리도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97년중 설비투자는 약 9.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8년 중 설비투자는 1997년보다 훨씬 큰 폭으로 위축되었다. IMF 구제금융이 시작된 이후에도 금융시장 불안이 계속되고 있어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데다 급격한 환율상승으로 시설용 자본재 수입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세계경기가 당초 예상보다 둔화되었고 주요 수출상품의 국제적인 공급과잉 현상이 1998년에도 해소되지 않아 설비확장에 대한 유인이 크게 감소했다. 그동안 설비투자를 주도했던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산업 등이 전체 설비투자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급과잉이 우려되고 있는 이들 장치산업에서의 투자둔화는 향후 전체 설비투자 둔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98년의 급격한 설비투자 감소의 원인은 무엇보다 IMF의 긴급자금 지원후 대부분의 기업들이 투자는 고사하고 생존자체가 위협받는 급박한 경영환경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기업 내부적으로는 내수부진과 수출단가 하락으로 채산성이 악화되어 투자재원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더욱이 기업부도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에 설사 내부자금이 조성되더라도 기업들은 무리한 투자를 자제하고 내실을 다져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1999년의 경우 설비투자는 24.9%까지 이루어졌다. 환율상승에 힘입어 수출물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생산능력 확대의 필요성이 커지고 금융시장이 어느정도 안정되면서 설비투자 환경이 다소나마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경제가 IMF체제 이후 저성장기에 접어들어 과거와 같은 높은 투자수요를 창출해내기 어려운 데다 반드시 필요한 부문에 선택적으로 투자하는 경영 분위기가 확산될 것으로 보여 큰 폭의 설비투자 증가세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투자의 내용도 단순한 시설확장보다는 합리화나 R&D 투자 등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에 집중되면서 2000년에는 연간 12.9% 수준의 증가세를 보였다. 1998년 중 우리나라는 실업자수 130만 명 이상의 본격적인 고실업 시대에 접어들었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 기업들의 투자축소 등으로 신규고용 창출력이 급격히 둔화된 데다 금융산업 등의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기업 연쇄부도 등으로 기존 취업자의 실직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IMF가 요구하고 있는 인수합병 관련 정리해고 등 노동시장 유연성 관련 정책이 시행되면서 구조조정에 따른 실직이 현실화되면서 실업자 증가속도가 예상외로 빨라졌다. 1999년말 기준으로 실업률은 약 4.6%로 여전히 100만명 정도 실업자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IMF의 금융지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1999년 이후 경기가 다시 회복되고는 있지만 고실업 현상이 해소되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기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성장에 따른 산업의 고용창출이 1990년대 이후 뚜렷한 둔화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1∼2년 안에 본격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 정리해고제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기업의 구조조정 강도를 더욱 높여 매년 실직자가 양산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실직에 따른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 증가 경향이 당분간 지속될 조짐을 보이고 있고 기존의 외형성장 위주에서 내실위주 경영기조로 전환하고 있는 기업들의 조직 및 인력규모 축소 경향도 고용불안을 더욱 가속시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업들이 구조조정 등 급격한 환경변화에 따른 탄력적인 인력조정을 위해 인력채용시 상용직 비중을 줄이고 임시직 또는 계약직 비중을 확대하는 한편 파견근로자를 적극 활용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비정규직 근로자가 급등하면서 국민들이 체감하게 될 고용불안 정도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1997년 5월까지 두 자리 수를 유지하던 임금상승률이 6월부터 6%대의 급격한 둔화세를 보였다. 1997년 초의 낮은 협약 임금인상률이 6월 이후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7년 10월말 기준으로 전국 100인 이상 사업장의 평균 협약임금인상률은 1996년 같은 기간에 비해 3.5%포인트가 하락한 4.3% 상승에 그쳤고 경기침체와 잇따른 기업부도의 영향으로 기업들의 상여금 지급이 크게 줄어들면서 특별급여 상승률도 전 해의 절반수준에 그쳤다. 이에 따라 1997년 1월부터 9월까지의 평균임금상승률은 9.3%로 지난 1986년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리수 상승에 머물렀다. 1998년에는 임금상승률 둔화세가 더욱 뚜렷해졌다. 고용불안에 따른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욕구 자제, 수익성 하락에 따른 기업의 지불능력 저하 등으로 임금동결 내지 감축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명목임금상승률은 1998년중 1.5% 수준까지 떨어졌다. 특히 경기변화에 상당히 탄력적인 기업들의 상여금 등 특별급여 자금이 대폭 줄어들면서 전체 임금상승률을 끌어내리는 주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환율급등의 여파로 물가가 명목임금상승률을 상회하는 큰 폭의 오름세를 상당기간 지속하였고, 경기가 회복국면에 접어든 1999년 이후로 임금상승 압력이 높아졌다. 1997년 물가는 1996년보다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농산물 등 상품 물가는 1996년보다 다소 불안했으나 개인서비스요금 등 서비스 물가는 소비부진, 인건비 상승세 둔화 등으로 안정세를 보였다. 1991년 이후 장기 하향 안정추세를 지속해오던 주택매매·전세가격은 1996년 말부터 1997년 봄 이사철까지 부동산경기 10년주기설 등 집값 오름세 심리가 확산되면서 신도시를 중심으로 비교적 큰 폭으로 올랐다. 상반기중 불안했던 물가는 가을철 들어 농산물의 본격적인 출하기로 접어들면서 하향 안정세를 유지했다. 쌀 등 농산물 작황이 3년째 호조를 보여 가을 물가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연초 크게 올랐던 주택매매·전세가격도 가을 이사철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12월 들어 물가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환율급등의 영향으로 석유류, 도시가스 등 에너지 가격이 큰 폭으로 인상된 데다 수입 원부자재를 주로 사용하는 밀가루 가공식품, 설탕, 커피, 햄 등 생필품 가격이 크게 올랐다. 1998년 물가는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긴축정책 및 소비침체로 총수요 압력은 현저히 낮아졌으나 대부분 원부자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생산구조로 원화환율 상승폭이 워낙 커 원가상승에 따른 물가파급 효과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환율급등에 따라 국제원자재, 국제곡물 등 원부자재 수입가격 상승이 시차를 두고 국내물가에 영향을 끼쳤고 또한 수입품 및 원재료 의존도가 높은 관련상품의 가격인상은 물론 에너지 가격상승에 따른 공산품 및 서비스 물가상승 등 직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광범위한 부문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환율급등에 따른 물가불안은 이미 1997년 12월 들어 가시화되었다. 11월 중 소비자물가는 0.1% 상승에 그쳤으나 생산자물가는 0.7% 올라 환율급등에 따른 소비자물가 상승을 예고했다. 실제로 12월 소비자물가는 월간상승률로 16년만의 최고치인 2.5%를 기록했으며 생산자물가는 12월 한달 동안 8.2%나 올라 1998년 상반기까지 가파른 물가상승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1999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8%에 그쳤으며, 2000년에도 3% 내외에서 머물렀다. 대한민국의 금리는 1998년 하반기 이후부터 자금수급 상황이 다소 개선되며 하향안정세로 전환되고 있다. 원화환율 역시 1998년 하반기부터 외국인 투자자금이 점차 재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중장기적인 하향안정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수년 내에 외환위기 발생 이전인 달러당 1,000원 이하 수준을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IMF와의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된 이후 자금시장의 경색이 계속되고 있다. 14개 종금사가 영업정지를 당한데 이어 구제금융협약에 BIS 자기자본비율이 8% 이하인 은행에 대해 폐쇄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은행들이 종금사에 대한 콜자금 제공 및 기업들에 대한 신규여신을 중단하는 동시에 대출금을 회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고금리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긴축적인 통화정책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IMF와의 협약에 따르면 총유동성(M3) 증가율을 1997년 15% 선에서 1998년에는 9%선으로 낮추었다. IMF는 원화절하가 물가에 주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통화관리를 긴축적으로 운용하고 고금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한은(韓銀)의 자금방출은 제한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환율절하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으로 물가 불안 심리를 억누르기 위해서 긴축적인 통화관리는 불가피했다. 또한 추가적인 환율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서 고금리정책을 당분가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은 시중유동성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IMF와의 구제금융협상에 따라 1998년 6월까지 BIS 자기자본비율 8%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내은행들은 보수적인 자금운용으로 일관했다. 즉 BIS 자기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한 은행들의 노력은 여신동결, 대출금리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통화긴축과 고금리에 따른 대량부도는 금융기관의 자금공급과 채권매수를 위축시켜 금리하락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1997년 말 무려 29%까지 치솟았던 금리는 1999년 말 9%대로 안정되었다. IMF와 미·일 등의 조기 자금지원으로 국가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약화되고 환율안정의 발판이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불안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감한 금융개혁 및 대외개방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거나 경제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제주체 또는 정파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사회·경제적 혼란이 초래된다면 또다시 대외신뢰도 추락과 국가부도 위기, 환율급등 현상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도 막대한 외채상환 부담이 원화환율의 안정을 어렵게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총외채 규모는 1998년 기준으로 1,493억 5,400만 달러이다. 총외채 규모가 동남아 국가들과 1994∼1995년중 외환위기 당시 멕시코에 비해서도 적다고 할 수가 없으며, 단기외채 비중은 월등히 높은 상태이다. 이에 따라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숨쉴 틈 없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에 대해 100% 만기연장이 되지 않는 한, 외채상환 부담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향후 수년간 외채상환 부담으로 인해 외화유동성이 넉넉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기업교환을 말한다. 즉 업종전문화를 꾀하는 한 기업이 주력 업종을 다른 기업과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경영용어로는 사업교환이라고 표현한다. 빅딜의 형태는 A와 B라는 업종을 함께 소유하고 있는 두 회사가 상대방에게 경쟁력이 약한 업종을 인계하고, 다른 업종을 인수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빅딜을 위해서는 사전에 대상 업체에 대한 자산을 평가하고, 이 자산을 자본금으로 내놓은 다음 공동법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빅딜 대상 사업체에 대한 자산평가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법인을 만들기로 합의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법인 설립은 어려운 것이다. IMF금융 위기 이후 국내에서도 기업간 빅딜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최종 성사까지는 많은 진통이 예상되고 있다. 대우전자를 삼성전자에, 삼성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 넘기는 빅딜이 대표적이다. 1998년 경상수지는 환율의 급등과 내수의 위축으로 수입이 크게 위축되고 반면 수출은 크게 절하된 원화가치로 가격경쟁력이 제고되어 높은 수준의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여행지출의 감소 등으로 무역외수지의 적자폭도 많이 줄었다. 1999년 11월까지 수출 누계는 1,288억 8,000만 달러, 수입 누계는 1,071억 2,000만 달러로 무역흑자 누계는 217억 6,000만 달러로 연간 목표치 250억 달러의 87.1%에 달하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12월에는 수출이 11월보다 7억 - 8억 달러 늘기 때문에 수입만 현 수준을 유지하면 목표 달성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대략 245억 달러 안팎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상수지의 흑자추세는 2000년까지도 지속되어 100 - 150억 달러 내외의 흑자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1997년 중 수출은 수출단가의 지속적 하락에도 불구하고 수출물량의 꾸준한 증가에 힘입어 금액기준으로 1996년보다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상반기 중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기도 했던 통관기준 수출은 3/4분기 중에는 두 자리대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물량 측면에서 보면 1/4분기 중에도 16.8%나 증가했고 3/4분기 중에는 36%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4/4분기 들어서도 동남 아시아의 통화위기로 이들 지역에 대한 수출이 차질을 빚으면서 수출증가세가 다시 한 자리대로 둔화되었지만 수출물량은 여전히 20% 이상의 증가세를 보였다. 이처럼 수출물량 증가원인은 원화절하로 인한 국내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 제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화절하는 수출단가 하락을 더욱 부채질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달러화 표시 수출단가가 하락하더라도 원화표시 수출단가의 하락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급격하게 진행된 원화가치의 하락에 힘입어 1998년에도 수출은 호조를 보였다. 1998년중 원/달러 환율은 1997년에 비해 연평균으로 40% 이상 높아졌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가격경쟁력 제고 효과는 매우 컸다. 뿐만 아니라 내수경기의 위축으로 판매난에 직면한 기업들이 수출확대에 총력을 기울인 점도 인정된다. 극심한 외환부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1998년 하반기부터 원화가 절상추세로 반전되어 상반기에 비해 수출의 가격경쟁력 제고 효과가 많이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통화위기의 여파가 거의 해소될 것으로 보이는 2000년에는 각국의 경기가 본격적인 회복국면에 접어들면서 수출증가율도 다소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설비투자의 부진으로 생산능력의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원화의 절상추세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수출단가가 상승세로 반전되기는 힘들어 수출증가율이 두 자리대까지 높아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침체와 원화절하로 1997년 중 수입은 빠른 속도로 둔화되었다. 원화절하로 수입품의 가격이 비싸지면서 국산품으로의 대체가 늘고 있는데다 설비투자의 부진에 따른 자본재 수입의 감소에 힘입어 하반기 들어서는 수입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더구나 수출단가 못지않게 수입단가도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어 수입의 감소폭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곡물과 원유 등 국제원자재 가격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데다 엔화 가치 하락과 경기침체에 따른 일본의 물량공세로 자본재의 수입단가도 큰 폭의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수입의 감소 추세는 1998년중에도 지속되었다. 곡물, 원유 등의 원자재 수입은 대체가 힘들기 때문에 크게 줄지 않았지만 자본재 수입은 설비투자가 크게 위축되면서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소비재 수입의 경우도 그동안 높은 증가세를 보이던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이 대폭 줄어들고 원화절하로 수입품의 가격이 비싸져 사치품이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국산품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수입선다변화 해제 등 시장개방이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는 소비자의 구매력 감소로 소비재 수입이 크게 늘지 않았다. 1999년부터 경기가 다소 회복세로 반전되고 특히 소비와 투자 등 내수경기가 증가세로 돌아서면서 수입도 많이 늘었다. 내수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나는 2000년부터는 더욱 늘어 통관기준 수입증가율이 1999년 5.7%에서 2000년에는 9.5%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1996년 중 237억 달러를 기록했던 경상수지 적자는 1997년 1/4분기 중 74억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2/4분기 이후 수입이 크게 줄어들면서 적자폭도 감소했다. 11월부터는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어 연간으로는 1996년의 절반 수준인 109억 달러의 적자에 머물렀다. 경상수지 적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적자 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하던 무역외수지 적자도 4/4분기 이후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경상수지의 개선 추세는 1998년 중에도 이어져 연간으로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다. 무역외수지의 적자는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무역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실현하면서 경상수지의 흑자반전을 주도한 것이다. 원화절하에 따른 수출호조와 내수경기 침체에 따른 수입감소로 1998년 무역수지는 예상을 깨고 400억 달러, 1999년 230억 달러가 넘는 흑자를 기록하면서 경상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산자부는 수출이 7 - 8% 늘고 수입이 7 - 18% 늘 것으로 가정해 2000년도 무역수지 흑자규모는 100억 - 150억 달러로 축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수출증가율 7%, 수입증가율 18%, 무역흑자 125억 달러로 예측했으며, 현대경제연구원은 수출증가율 6.6%, 수입증가율 18.2%, 무역흑자 97억 달러로 내다봤다. LG경제연구원은 수출증가율 13.3%, 수입증가율 24.6%, 무역흑자 135억 달러로 전망했다. 1998년을 고비로 경기가 회복되고 환율 여건이 호전되면서 해외여행 수요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경상수지 흑자로 외채규모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 자본시장의 개방과 대외신인도 하락효과가 지속되면서 투자는 예상보다 많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성장률 8~9%,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 이내,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6% 내외(약 250억 달러)에 이른다는 거시지표 전망에 합의했다. 또 2000년에는 경제성장률 5~6%, 물가 3%, 경상수지 흑자 100~150억 달러 등의 전망치에 의견일치를 이뤘다. 이와함께 현재의 경기 상태는 과열이 아니며 내년에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하고 경기회복에 따라 재정적자폭을 줄여나가되 2004년에는 균형재정을 달성하기로 했다. 2000년 세계경제는 3%대, 아시아는 5.7%, 우리나라는 6%대의 고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주요 국제기구들이 전망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미국과 서유럽·일본 등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내년 세계무역이 6~7%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1999년의 4%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금액으로 치면 8~9% 정도 늘어난 수치다. ADB는 특히 한국이 아시아경제의 회복세를 주도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1998년 5.8% 성장에 그쳤지만 1999년은 9.0%, 2000년에는 6.0%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경제연구소(EIU)는 최근 발간한 '2000년 대예측' 보고서에서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6.1%에 달하고 물가상승률은 2.7%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또 내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회원국들은 평균 3%, 개발도상국들은 4%의 기록해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건전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EIU는 특히 내년 우리나라 GDP는 총 4,277억 달러, 1인당 GDP는 9,040달러에 이르고 실업률은 올해 7%에서 내년 6.8%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은 정부가 구조조정의 고삐를 늦추도록 할 염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IMF 사태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가져올 정도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고, 기존의 사회 관념들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불러일으킨 책임으로 사임했던 임창렬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란 사건'의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집권 여당이었던 신한국당(現 새누리당)의 후보 이회창은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現 새정치민주연합)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패배했다. 1996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건영빌라를 대량으로 건설한데서 얻은 방만한 자금관리에 시화지구 미분양까지 겹쳐 우성과 건영이 도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시작일 뿐이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한 해 동안 한보철강 (現 현대제철),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 삼립식품, 한신공영, 기아그룹, 쌍방울그룹, 태일정밀, 해태그룹, 뉴코아, 수산중공업, 한라그룹, 고려증권, 청구그룹, 극동건설, 나산그룹, 거평그룹, 한일그룹, 쌍용그룹, 동아그룹, 고합그룹, 아남그룹, 신호그룹, 우방그룹, 새한그룹, 강원산업, 큐닉스컴퓨터, 신원그룹, 미주그룹등 대부분의 재벌 대기업들이 도산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법정관리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98년 6월 18일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이 이찬우 상업은행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져 55개 기업 청산, 매각 방침을 발표하였다. 1999년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 금융을 이용한 기업 확장이 원인이 되어 부채가 65조로 엄청나게 불어나 IMF 구제금융 사건 이후 정부의 엄청난 국고 지출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2000년에는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과 유동성 위기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현대해상, 현대산업개발, 현대건설, 현대전자(現 SK하이닉스) 등으로 계열분리를 하였다. 은행들은 대규모 인수 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도중 많은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매각되는 등 국부의 유출이 심각하였다. 1998년 7월 1일,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하였고, 남해화학, 대한교과서(現 미래엔), 한국종합기술금융(現 KTB네트워크),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現 포스코), 한국종합화학(現 케이씨), 한국중공업(現 두산중공업), 한국통신공사(現 KT), 한국담배인삼공사(現 KT&G) 총 9개 공기업이 민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인천국제공항 등의 공기업 민영화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삼성그룹, LG그룹, 선경그룹(현 SK그룹), 현대그룹, 롯데그룹, 한화그룹, 한진그룹, 동양그룹, 대림그룹, 효성그룹, 동국제강, 코오롱그룹, 두산그룹, 대상그룹, 한솔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 동부그룹, 제일제당그룹(현 CJ그룹), 웅진그룹, 교보그룹, 동원그룹, 아주그룹과 같이 일부 재벌들은 위기를 교훈으로 삼아 IMF를 극복할 수 있었다.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고용시장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어,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었고 평생고용제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대신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급여에서도 호봉 개념 연공서열 대신 연봉제로 바뀌었고, 또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경기 부양을 위해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 등의 소비 촉진 정책을 실시하여 경기 부양에 성공하고 2001년 8월 23일, 한국은행의 차입금으로,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의 관리체제에서 일찍 벗어났다. 하지만 이 소비 촉진 정책은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이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내수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IMF 환란이 대기업 육성정책에 의한 일부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 때문이라는 분석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재벌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정부는 대기업 육성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시작하여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아주 어려웠지만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일치·단결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과거의 무사안일주의가 타파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수자원공사, 한국전력, 가스공사 등의 방만 경영으로 전기, 가스, 수도, 철도, 의료 등 공공재에 대한 민영화가 강제적으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일부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IMF는 약 10년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유예 종료일이 다가옴에 따라 재추진하려했으나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인해 또 다시 유예되었고 IMF는 어쩔 수 없이 약 8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다. 유예 기간이 종료되어가는 지금, 박근혜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 중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확히는 1986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3저 호황이라고 해서 경제 성장과 수출 증가를 거치면서 전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중산층의 비중이 두터워졌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 경제성장을 하면서 당시 한국경제는 단군 이래 최전성기기라고 할 정도로 비유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 가장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됐고 사회발전이 순조로웠고 실업률은 낮고 물가는 낮았다. 경제가 꾸준히 하늘 높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서민들의 장래에 대한 낙관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높았으며 한국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점으로 1990년대 한국군은 한국의 달라진 경제력에 걸맞고 타 국가의 대응할 수 있을만한 국방력을 건설할 신무기 도입 사업 및 현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육군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육군은 미국과 협력하여 3세대 전차인 K-1 전차를 1987년부터 실전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이 되면 3세대 전차를 1000여대 이상을 실전배치하게 되었다. 게다가 K200 장갑차나 K-55 자주포도 양산이 한창 진행중이었으며 K-9 자주포, K1 전차를 개량한 K1A1 전차 등은 개발 중이었고 1990년대에 AH-X 사업으로 AH-1 코브라 공격헬기를 대체할 차기 공격헬기를 구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영향은 AH-X 사업이 지연되어 AH-64E 아파치 가디언을 도입한 것은 2010년대에 확정되어 그 결과 2018년 현재 AH-1S/F와 함께 AH-64E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시기를 기준으로 가장 현대화가 필요한 것은 육군이 아닌 공군과 해군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외환위기는 각종 국방력 증대 사업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일이 많았다. 실제로 2001년 기사에서는 "육군 AH-X 사업과 해군 KDX-3 등의 사업들은 모두 각 군의 대표적인 숙원사업들로 97년 외환위기로 미뤄졌던 것. 특히 지난해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가 급진전하면서 자칫 시작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강하게 일면서 각 군의 치열한 로비전이 전개됐다."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공군의 경우에는 현대화 계획으로 1991년에 KFP 사업으로 선정된 F-16 Block 52 면허생산에 이어서 진행될 원래의 한국군 계획은 1990년대 1차 FX로 F-15 전투기(정확히는 차기 전투기) 120대 도입으로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고 조기경보기 사업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1 ~ 2차 FX사업으로 60대를 나누어서 도입하고 3차 FX 사업으로 F-35 40대(+추가 도입 옵션 20대)의 결과로 나오게 되면서 FX 사업이 길어지고 또한 조기경보기도 1990년대 도입에 관심을 보였으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서 사업이 무기한 유보되었다가, 2002년에 사업이 재개되었고 더 시간이 흘러서 2010년대가 되면서 E-737 피스아이가 도입되었다. 해군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에 대한민국은 이미 조선산업 규모에서 세계 1위를 달성했다. 군함도 나름의 체계를 갖춘 울산급을 건조하는 기술 역량을 지녔다. 그러나 해군은 울산급 등의 기존 체계를 운용했으며 미사일 중심의 선진적인 전투체계, 네트워크 능력은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원양능력과 동시에 현대적 전투능력을 갖춘 함선 건조 기술을 획득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그것이 KDX-1 계획으로 KDX-1 광개토대왕급 사업은 우리나라의 구축함 사업의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한국 해군의 강화를 꾀하는 시작점으로 1998년에 취역했다. 하지만 KDX-1은 운용 이전에도 대양환경에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지적이 있었고, 실제로 림팩훈련 등에서 한계를 느껴 3천 톤급은 대양함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KDX-1 사업은 3척에서 종결하고 운용 경험을 토대로 1996년부터 KDX-2 충무공이순신급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IMF 사태로 KDX-2 사업이 위험했지만 2001년 1월부터 건조사업을 시작하고 02년 5월에 초도함을 진수한다. 광개토대왕급의 노하우와 기술을 살려 빠른 시간에 향상된 성능으로 건조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독도함은 2002년 10월 건조 개시, 2005년 7월 12일 진수, 2007년 7월 3일 취역했다. KDX-3로 2007년에 세종대왕급이 진수되었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이지스함 6척을 배치할 계획이었으나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일단 3척만 진수되었으며 2020년대 이후에 추가로 진수될 예정이다. 게다가 2010년대가 되면서 울산급, 포항급을 대체할 인천급, 대구급 등의 신형 호위함 등을 진수하고 있다. 그 결과 IMF 구제금융 요청의 영향으로 조기경보기 등의 지원 전력을 제외하더라도 2018년을 기준으로 F-15 전투기만 비교해도 미국이 450대, 일본이 200대, 대한민국이 59대를 운용하고 있다. 이지스함으로 비교하자면 미국이 90척(줌왈트급 3척, 알레이버크급 65척, 타이콘데로가급 22척), 일본 8척(공고급 4척, 아타고급 2척, 마야급 2척)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3척(세종대왕급)만을 운용 중이며 2020년대가 되서 추가로 3척을 진수할 예정이다. 그 결과 1997년의 외환위기는 국방력의 증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원 기반 암호 신원기반암호(身元基盤暗號, identity based encryption, ID기반암호)은 공개 키 암호 방식의 일종으로 사용자의 정보를 공개키로 사용한다. 이때 공개키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는 사용자의 이메일 주소나 전화번호등 그 사용자에게만 해당하는 유일한 정보여야 한다. 영어로는 id-based encryption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IBE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개 키 암호 방식의 장점은 이전에 서로 만나서 키를 나누어가지지 않은 사용자라도 안전하게 통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때 상대방이 공개 키가 정말로 그 사용자의 공개 열쇠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흔히 이것은 전자인증서와 같은 public key infrastructure를 통해서 확인하지만, 이 과정이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든다. 신원기반암호는 상대방의 신원을 공개키로 사용하므로 이런 과정이 불필요하다. 신원기반 암호는 아디 샤미르가 1984년에 처음으로 제안했다. 보네/프랭클린이 pairing 연산에 기반하여 제안한 프로토콜이 유명하다. 아디 샤미르 아디 샤미르(, 1952년 7월 6일 ~ )는 이스라엘의 암호학자이다. 로널드 라이베스트, 레오널드 에이들먼과 함께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RSA 공개키 암호 시스템을 발명했으며, 암호학과 컴퓨터 과학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004년에는 암호학 분야의 공헌을 인정받아 RSA의 발명자들과 함께 튜링상을 수상했다. 샤미르는 주로 암호학에 공헌하였으며, 대표적으로 RSA 암호를 함께 발명했다. 이외에도 차분 공격을 비롯하여 암호공격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암호학 이외에서도 PSPACE와 IP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2004년 튜링 상을 수상한 후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보안의 3법칙을 제시하였다. RSA 암호 RSA는 공개키 암호시스템의 하나로, 암호화뿐만 아니라 전자서명이 가능한 최초의 알고리즘으로 알려져 있다. RSA가 갖는 전자서명 기능은 인증을 요구하는 전자 상거래 등에 RSA의 광범위한 활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1978년 로널드 라이베스트(Ron Rivest), 아디 샤미르(Adi Shamir), 레너드 애들먼(Leonard Adleman)의 연구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RSA라는 이름은 이들 3명의 이름 앞글자를 딴 것이다. 이 세 발명자는 이 공로로 2002년 튜링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RSA 방식을 제일 먼저 개발한 사람은 영국 GCHQ에 근무하던 수학자였으며, 이보다 빠른 1973년도에 개발하게 된다. 이 내용은 GCHQ에서 비밀로 취급되었으며, 이후 1997년 세상으로 발표되게 된다. RSA 암호체계의 안정성은 큰 숫자를 소인수 분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큰 수의 소인수 분해를 획기적으로 빠르게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발견된다면 이 암호 체계는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1993년 피터 쇼어는 쇼어 알고리즘을 발표하여, 양자 컴퓨터를 이용하여 임의의 정수를 다항 시간 안에 소인수 분해하는 방법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양자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실용화되면 RSA 알고리즘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가 이 정도 수준으로 실용화되려면 아직 여러 해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RSA 암호화 알고리즘은 1983년에 발명자들이 소속되어 있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의해 미국에 특허로 등록되었고, 2000년 9월 21일에 그 특허가 만료되었다. RSA는 두 개의 키를 사용한다. 여기서 키란 메시지를 열고 잠그는 상수(constant)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공개키 알고리즘의 공개키(public key)는 모두에게 알려져 있으며 메시지를 암호화(encrypt)하는데 쓰이며, 암호화된 메시지는 개인키(private key)를 가진 자만이 복호화(decrypt)하여 열어볼 수 있다. 하지만 RSA 공개키 알고리즘은 이러한 제약조건이 없다. 즉 개인키로 암호화하여 공개키로 복호화할 수도 있다. 공개키 알고리즘은 누구나 어떤 메시지를 암호화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독하여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개인키를 지닌 단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대칭키 알고리즘과 차이를 가진다. RSA는 소인수 분해의 난해함에 기반하여, 공개키만을 가지고는 개인키를 쉽게 짐작할 수 없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보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자면, A라는 사람에게 B라는 사람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B는 A의 열린 자물쇠를 들고 와 그의 메시지를 봉인(공개키 암호화 과정에 해당)하고, 그런 다음 A에게 전해 주면, 자물쇠의 열쇠(개인키에 해당)를 가지고 있는 A가 그 메시지를 열어보는(개인키 복호화 과정에 해당) 식이 된다. 중간에 그 메시지를 가로채는 사람은 그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메시지를 열람할 수 없다. 메시지와 공개키 모두를 알 수 있다면 변조된 메시지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수신측의 공개키만을 사용하여 암호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송수신 양측의 키쌍을 사용하는 방법으로는 A의 개인키로 암호화 -> B의 공개키로 암호화 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복호화 과정은 B의 개인키로 복호화 -> A의 공개키로 복호화로 구성된 방식이 일반적이다. RSA의 디자인 상, 그 열쇠(개인키에 해당)는 자물쇠의 형태(공개키에 해당)만 보고서는 쉽게 제작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A와 B가 보안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서로 비밀 메시지를 주고 받고 싶다고 가정하자. B가 A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A의 공개키가 필요하다. A는 아래와 같은 방법을 통해 그만의 공개키와 개인키를 제작한다. p 와 q 라고 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formula_1) 소수를 고른다. A의 공개키는 위에서 구한 두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N", "e">이고, 개인키는 <"N", "d">이다. A는 <"N", "e">만을 B에게 공개하고, B는 이 공개키를 사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암호화하게 된다. 여기서 "p"와 "q"의 보안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가지고 "d"와 "e"의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개키와 개인키가 생성이 된 후에는 이 두 숫자를 지워버리는 것이 안전하다. B가 "M"이란 메시지를 A에게 보내고 싶다고 하자. 일단 B는 이 "M을" "N"보다 작은 숫자 m으로 변환한다. (이 변환법(padding scheme)은 A에게도 미리 알려져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메시지를 토막내어 하나의 메시지가 일정 수의 비트를 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중보안을 위해 더욱 복잡한 변환법이 사용된다.) 그리고 B는 A의 공개키 <"N", "e">를 획득하고, 다음과 같이 "c"를 계산한다. 그리고 이 "c"를 A에게 보낸다. A는 암호화된 메시지 "c"를 B에게서 건네받았고, "N"과 "d"를 알고 있다. 다음 식을 통해 "m"을 찾는다. 위에서 설명하였듯 "m"을 가지고 A는 "M"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 해독법이 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지막 등식이 성립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의 식에서 "mod N" 대신 "mod p" 사용하여 풀이했을 때, 가 된다. "p"가 소수이므로, m이 p의 배수가 아니라면 서로소이므로 페르마의 소정리를 다음 식과 같이 적용할 수 있다. 만약 m이 p의 배수라면 양변이 p의 배수이므로 0과 동치가 되어 역시 다음 식이 성립된다. "mod q"를 사용하여도 똑같은 풀이가 가능하다. "N" = "pq" 이므로, "mod N"에도 같은 식이 성립하게 된다. RSA의 정확성 검증관련하여 2가지 방안으로 설명코자 한다. 첫번째 방법은 페르마의 소정리를 이용하여 검증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다. RSA의 정확성에 대한 검증은 페르마의 소정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 정리(theorem)는 p가 소수이고, p가 정수 a를 나눌 수 없다면 formula_14이 성립함을 보여주고 있다. p와 q가 별개의 소수이고 e와 d가 양의 정수이면서 formula_15를 만족한다면 모든 정수 m에 대해 formula_16이 성립함을 보이고자 한다. formula_17는 구성식에 의해 p–1과 q–1의 최소공배수로, p-1과 q-1로 나누어 질 수 있기 때문에 0 또는 양수 h와 k에 대하여 formula_18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주: 특히, 위의 설명은 (p-1)(q-1)이 λ(pq) 또는 λ(pq)가 (p-1)&(q-1)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e와 d에 대하여도 합동식 formula_19이 성립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RSA의 최근 구현에서,약하지만 충분 조건을 만족하는 reduced private exponent d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개의 숫자 m와 m이formula_21에 대하여 합동인지, formula_21가formula_23 와formula_24 각각의 경우에도 합동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이 부문은 CRT검증의 부분이며,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아울러, formula_25 인지를 알아 보기위해, 두가지의 케이스를 고려해 보자 m ≡ 0 (mod p) and m ≢ 0 (mod p). 첫번째 Case의 경우 m이 p의 배수이므로, formula_26가 p의 배수가 된다. 따라서 m는 mod p에 대하여 나머지가 zero인 합동이다. 두번째 Case의 경우 formula_27관련하여, 페르마의 소정리를 이용하여 m mod p를 1로 대체하면 formula_28가 성립함을 알수 있다. mod q의 경우에도 유사한 방법으로 수행하여 첫번째 Case의 경우 m는 q의 배수이므로, m는 mod q와 나머지가 zero인 합동이다. 두번째 Case의 경우 [formula_29] 관련하여, 페르마의 소정리를 이용하여 m mod q를 1로 대체하면 formula_30가 성립함을 알수 있다. 이것으로 어떤 정수 m, 그리고 e, d 관련하여, 다음의 합동식이 성립함을 검증하였다. [ed ≡ 1 (mod λ : (pq), (m) ≡ m(mod pq)] 두번째 방법은 오일러의 정리를 이용해 검증을 하고자 한다. Rivest, Shamir, Adleman의 논문은 페르마의 소정리를 이용하여 RSA의 동작원리를 설명했지만, 오일러의 정리를 이용해 증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formula_31 (두 개의 서로 다른 소수 p와 q의 곱 N)과 formula_32 를 만족하는 양의 정수 e와 d를 이용해 formula_33를 보이고자 한다. e와 d가 양수이기 때문에 formula_34라고 쓸 수 있다.(h는 음이 아닌 정수) m을 n과 서로소라고 가정하면,formula_35끝에서 두번째 합동식 formula_36 는 오일러의 정리에 따른 것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formula_37를 만족하는 임의의 e와 d는, n과 서로소인 m은 formula_38라고 명시된 Carmichael의 '오일러 이론의 일반화'를 보면 알 수 있다. m이 n과 서로소가 아니면 이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매우 드문 확률(formula_39의 비율)이지만 이 경우에도 합동은 성립한다. formula_40나 formula_41, 그리고 이 경우는 이전의 증명으로 해결할 수 있다. 아래는 작은 수를 이용해 암호화 방식을 예로 든 것이다. 공개 키와 개인 키 생성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평문 formula_66는 다음과 같이 암호화된다 암호문 formula_68은 다음과 같이 복호화된다 위는 수학적인 관점에서의 복호화이고 실제 프로그래밍으로 구현시 pq같은 거대한 수의 연산은 부담이 되므로 유명한 암호화 라이브러리(OpenSSL, Java and .NET)들에서는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를 기초로 컴퓨터 연산에 효율적인 복호화를 수행한다. pq보다 작은 수인 p, q를 모듈러로 개별 연산 후 조합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이 경우 p, q값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formula_70, formula_71, formula_72는 복호화시 항상 사용되는 값들이므로 미리 계산해 저장해둔다. 암호문은 다음과 같이 복호화된다. 결과는 같지만 더 작은 수를 이용해 계산하므로 연산이 빨라진다. 그리고 모듈러 연산이므로 h mod() 암호학자 목록 유명한 암호학자의 목록을 정리한다. 그래프 이론 그래프 이론(, graph理論, )은 수학에서 객체 간에 짝을 이루는 관계를 모델링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학 구조인 그래프에 대한 연구이다. 이 문맥에서 그래프는 꼭짓점(버텍스/vertex), 교점(노드/node), 점(포인트/point)으로 구성되며 이것들은 변(엣지/edge, 간선), 즉 선으로 연결된다. 그래프는 무향(무방향성)일 수 있는데 이는 각 변(선)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꼭짓점 간에 구별이 없다는 의미이며, 한편 변은 한 꼭짓점에서 다른 꼭짓점 간에 방향이 있을 수도 있다. (더 자세한 정의와 이러한 유형의 그래프의 변종에 대해서는 그래프 이론 용어를 참고할 것) 그래프는 이산수학의 주요 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프 이론의 기초적인 정의에 대해서는 그래프 이론 용어를 참고할 것. 그래프 이론의 정의는 다양하다. 아래에 그래프 및 관련 수학 구조들을 정의하는 더 기초적인 방법들 중 일부를 나열한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래프(graph)는 순서쌍 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집합 V는 꼭짓점, E는 간선(변)을 의미한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그래프는 정확히 방향이 없으며(무향), 단순한 그래프라고 기술할 수 있다. 그래프는 꼭짓점 과 2개의 꼭지점을 연결하는 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변의 길이나 꼭짓점의 위치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래프는 조합론적인 대상이다. 그래프 이론의 연구 대상은 그래프 및 추가 구조를 갖춘 그래프이다. 그래프들은 또한 각종 국소적 구조들을 갖는다. 그래프의 국소적 구조의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구조들을 가지고 그래프들을 분류할 수 있다. 그래프 이론에서는 이러한 개념 및 성질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다. 그래프 이론의 주요 분야는 다음과 같다. 그래프 이론의 시초는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1736년에 쓴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에 대한 논문으로 여겨진다. 이 논문에서, 오일러는 그래프의 한붓그리기 존재 여부에 대한 간단한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였다.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는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시몽 앙투안 장 륄리에에 의해 연구되고 일반화되었으며, 위상수학의 시초를 상징한다. 19세기에, 수학·물리학의 각종 분야에서 그래프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율리우스 페테르센(, 1839~1910) · 앨프리드 켐프(, 1849~1922) · 쾨니그 데네시(1884~1944) · 조지 데이비드 버코프(1884~1944) · 해슬러 휘트니(1907~1989) · 윌리엄 토머스 텃(1917~2002) 등은 그래프 이론의 기초적인 개념 및 정리들을 정립하였다. 쾨니그는 1936년에 그래프 이론에 대한 최초의 책을 출판하였다. 현재, 그래프 이론은 활발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다. 비교적 최근의 주요 연구 결과로는 케네스 아펠과 볼프강 하켄의 4색 정리의 증명 (1976년), 강한 완벽 그래프 정리의 증명 (2002년) 등이 있다. 시가현 시가현()은 일본 긴키 지방에 있는 현이다. 교토부, 미에현, 기후현, 후쿠이현에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에는 비와호가 있다. 현청소재지는 오쓰 시이다. 영제국 오미 국()과 완전히 일치하며, 현명은 현청 소재지 오쓰 시가 속해있던 시가 군에서 따왔다. 영제국명 "오미"가 "교토에서 가까운 호수"를 뜻하는 고어 "지카쓰 아하우미"()에서 따온 것이나, 오늘날 시가 현의 별칭이 "호수의 나라"()인데서 드러나듯이 시가 현의 상징은 비와 호이다. 비와 호는 산업 용수는 물론, 인접한 부·현 주민들을 아우른 약 1,400만명의 식수를 제공하는 수원지인 한편, 관광 자원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으며, 비와 호가 현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지형 특성 상 시가 현 안에서도 비와 호를 끼고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비와 호를 이용한 어업도 성행하고 있으며, 중세나 근세 시대에는 와카사 만과 기나이 지방을 잇는 수운 교통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기도 하여 오쓰, 가타타 등의 주요 도시들이 수운 교통의 거점으로서 발전하였다. 육상 교통 또한 오래 전부터 발달하여 도카이도, 도산도(주산도), 호쿠리쿠도가 지금의 시가 현 지역에서 합류해 교토로 이어졌으므로, 일찍이 "오미를 제패하는 자가 천하를 제패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잦은 전란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편리한 교통 환경은 인구 유출을 초래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시가 현은 유입 인구수보다 유출 인구수가 많았다.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서는 많은 시가 현 출신 상인들이 "오미 상인"이라 불리며 일본 각지로 진출하여, "비와 호의 메기는 밖으로 나오면 커진다" ()는 속담까지 생겼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고속도로의 정비와 트럭을 이용한 유통 산업의 성장으로 교통 환경의 편리함이 재입증되어, 물류기지나 공장, 연구개발시설 등이 연달아 진출하였고, 최근에는 JR 서일본의 어번 네트워크 확대에 따라 교토부, 오사카부의 침상 도시로서 주목받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시가 현처럼 도쿄 수도권 이외의 지방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은 손에 꼽힌다. 다만 개발이 진행되는 것은 교토·오사카와 인접한 남부 도시들로, 신흥 주택가가 많이 세워지고 있는 남부 도시들과는 달리 교토에서 떨어진 북부나 서부 지역은 전원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시가 현 당국은 인구 증가가 정체된 현 북동쪽 지역의 지역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가 현은 긴키 지방으로 분류되며 문화적·경제적으로 교토, 오사카 등과 유기적인 관계가 강하지만, 주부 지방과의 교류도 잦았다. 따라서 <긴키권 정비법>에서 정한 <긴키권>, <주부권 개발정비법>에서 정한 <주부권> 양쪽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시가 현지사는 긴키 지방 부·현지사들이 모이는 "긴키 블록 지사회", 주부 지방 현지사들이 모이는 "주부권 지사회의"에 모두 출석한다. 이렇게 긴키, 주부 양쪽의 지사 회의에 모두 참석하는 현으로는 미에현, 후쿠이현이 있다. 이 미에 현, 후쿠이 현, 그리고 기후현과 함께 시가 현은 "니혼만나카 공화국"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현지사간 회의와 문화교류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 세계 박람회 당시에는 주부 지방 8개 현과 함께 "주부 천년 공생촌"을 공동 출전하였다. 현 북부 지방이 긴키, 주쿄, 호쿠리쿠 지방의 중간 지점 역할을 하고 있어, 공장이나 물류센터의 설치 계획이 이어지는 등 주부권의 한 축으로서 발전도 기대되고 있다. 또, NHK 나고야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도카이 지방 3개 현 전용 날씨 예보에도 항상 시가 현의 날씨가 표시된다. 시가 현은 도도부현 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오미 국으로 알려져있었다. 시가 현은 북쪽으로 후쿠이현, 동쪽으로 기후현, 남동쪽으로 미에현, 서쪽으로 교토부와 접한다. 현은 네 개의 다른 지역인 고호쿠(호수의 북쪽), 고세이(호수의 서쪽), 고토(호수의 동쪽), 고난(호수의 남쪽)을 포함한다.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와 호는 시가 현의 중앙에 위치한다. 호수는 시가 현 총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현은 서쪽으로 히라 산지, 동쪽으로 이부키 산, 남동쪽으로 스즈카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시가 현 북쪽은 남쪽에 비해 대체적으로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요도가와 강이 비와 호에서 발원해 교토 시를 거쳐 오사카 만으로 흘러든다. 이것은 호수의 밖으로 흐르는 유일한 강이다. 중세 시대 이래로 많은 시가인들은 일본의 상업 부문에 활발히 진출했고 오미 상인(近江商人)으로 불렸다. 예를 들어 일본생명, 이토추, 마루베니, 다카시마야, 와코루, 얀마는 시가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오미 상인들은 종종 시기하는 다른 상인들로부터 오미 도둑(近江泥棒)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시가 현의 주요 산업은 공업이다. IBM 재팬, 캐논, 얀마 디젤, 미쓰비시, 도레와 같은 수많은 주요 회사들이 시가 현에 공장을 두고 있다. 2006년 일본 내각부의 통계에 따르면 2차 산업은 시가 현 총 생산의 46.7%를 차지해 일본에서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인구는 비와 호의 남안의 오쓰 시와 호수 동안에 집중 되어 있다. 구사쓰 시, 모리야마 시와 같은 동안의 도시들은 교토 시의 통근권 내에 있다. 최근에 많은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주변의 공장들에서 일하기위해 시가 현에 정착했다. 호수의 서안은 더 전원적이고 백사장이 있는 휴양지이다. 동물 동물(動物) 또는 뭍사리는 동물계(動物界, Animalia)로 분류되는 생물의 총칭이다. 엽록소를 갖지 않고 세포벽을 갖지 않으며 몸 속에 여러 기관이 있는 생물 중 다세포인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운동 능력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진핵생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동물’이라고 하는 말은 특히 일상어의 수준에서는 사람을 포함하지 않는 ‘짐승’의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동물’이라고 하는 단어의 좁은 의미의 뜻일 뿐이며, 사람도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을 동물과 식물로 구분하였으며 이것이 칼 폰 린네의 첫 계급 분류로까지 이어졌다. 그 뒤로 생물학자들이 진화 관계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군들은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아왔다. 이를테면 미시적인 원생생물은 이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동물로 여겼으나 지금은 별도로 취급한다. 린네의 원래 분류에서 동물은 세 개의 계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것이 연충류, 곤충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로 나뉘었다. 그 뒤로 마지막 다섯 가지가 모두 하나의 문인 척삭동물로 합쳐졌으며 다양한 다른 형태들은 별도로 떨어져나갔다. 아래는 동물계에 속하는 분류들이다. 측생동물아계 (Parazoa) 진정후생동물아계 (Eumetazoa) 참고:¹. 이들 이름은 한국어로 공식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임의로 한국어 명칭을 부여한다. 아시아대학교 아시아대학교(아시아大學校, )는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었던 사립대학교이다. 2003년에 개교했으나 각종 비리와 부실 운영으로 불과 몇 년 가지 못해 2008년에 폐교했다. 학교 부지는 4차 경매 끝에 대구한의대학교가 건물을 매입하여 캠퍼스로 활용 중에 있다. 2005년에 설립자와 전(前) 총장이 비리로 검찰에 기소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6일에 교육 당국이 감사에 착수하여 2006년 12월 6일에 2007학년도 신입생 모집 정지를 통보받았다. 결국, 2008년 2월 29일까지 교육부에서 지불을 요구한 과징금 110억원을 내지 못해 학교 폐쇄 및 학교 법인 해산 명령을 받고 폐교되었다. 폐교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대학 측은 교직원 채용 시 총 57억원 상당의 금품을 수수했으며, 이 때문에 교수 자격 기준에 미달하거나 전공이 맞지 않는 인사가 뽑히기도 했다. 편제 정원 대비 등록률이 25퍼센트에 불과하자 허위 등록을 했다. 교직원 급여 체불 및 기숙사비 횡령 등으로 공과금을 내지 않아 기숙사에는 가스와 수도 공급이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의 불만은 높았으며 학교를 떠나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학생들이 줄어들어서 수입이 감소하자, 재단이 중국 유학생 유치에 나서 2006년에 중국 학생 80여명이 입학하였으나 교육부 감사 결과 1인당 일정액을 받고 학생비자를 발급받도록 서류를 만들어주는 장사였다는 것과 중국 학생들이 입국 후 대부분 학교에 나오지 않고 취업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폐교된 이후 2009년 10월 21일에 대학 부지 및 건물 등에 대한 경매가 유찰 되었다. 또한, 재단이 교육 당국에 ‘학생 처리 대책’을 제출하지 않고 거꾸로 관련 서류를 폐기하였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2007년에 등록한 학생 200 여명과 같은 해 2월에 배출된 첫 졸업생 51명, 중간에 휴학한 학생들, 아직 군대에 있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대학 생활 기록을 찾아 헤매고 있다. 한편, 폐교된 아시아대학교 건물 부지는 3차례의 유찰 끝에 2010년 1월 21일 대구한의대학교가 4차 경매에서 부지와 강의실 등을 40억 7898만원에 낙찰을 받았다. 대학 측은 낙찰 받은 캠퍼스와 건물을 현재의 캠퍼스에서 하기 어렵거나 부족한 한의학 및 한방산업 관련 강의 및 실습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부지는 대구한의대학교에서 교육과학기술부의 인가를 받아 오성캠퍼스로 조성하여 2012년 3월부터 개교하였다. 오성캠퍼스는 한방산업대학과 산학협력단 등 한방산업 특성화 캠퍼스로 조성하였다. 아주대학교 아주대학교(亞洲大學校, )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월드컵로 206에 위치한 4년제 사립 대학이다. 1971년 맺어진 대한민국과 프랑스 정부의 한·불기술초급대학 설립에 관한 협정의 이행을 위해 1972년, 박창원 이사장에 의해 학교법인 유신학원이 설립되었다. 1973년, 현 아주대학교의 전신인 '아주공업초급대학'(전자공학, 정밀기계공학, 발효화학공학, 공업경영학)이 설립되었다. 아주공업초급대학은 이듬 해 아주공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77년 대우그룹(당시 대우실업)의 김우중이 학교법인 대우학원을 설립하고 아주공과대학을 인수하였다. 1981년 공과대학, 경영대학, 인문사회대학과 대학원을 가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고, 교명을 지금의 아주대학교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아주대학교'라는 교명은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21세기에 아시아를 리드하는 최고의 대학이 되라는 이념을 담고 있으며, 개교 이래 인간존중·실사구시·세계일가(人間尊重· 實事求是· 世界一家)를 대학 이념으로 추구해 오고 있다. 캠퍼스 안에 에너지센터, 원천관, 원천정보관, 화공실험동, 서관, 동관, 종합설계동, 대형지반연구실험동, 토목실험동, 팔달관, 학군단, 산학협력원, 조립식교량실험동, 성호관, 성호대교, 율곡관, 다산관, 약학관, 임상수기센터 및 실험동물센터, 종합관, 기숙사 식당, 구학생회관, 신학생회관, 중앙도서관, 의과대학연구관, 가스화실험동, 체육관, 캠퍼스플라자, 송재관 등의 건물이 있으며, 기숙사로는 국제학사, 광교관, 화홍관, 용지관, 남제관, 등이 있다. 중앙도서관은 본교의 학칙에 명기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육시설로 정보의 수집과 축적, 유통을 통하여 학생 및 교직원의 학습, 교양, 연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73년 3월 15일 본교의 전신인 아주공업초급대학의 개교와 함께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에는 원천관(구 본관) 1층 일부를 사용하여 연건평 265평에 120석을 보유하였으며 실제 도서관 업무는 1973년 4월 12일 개교기념식을 개최한 후 1,272권의 도서를 구입하고 1명의 사서직원이 배치되면서 개시되었다. 1981년 3월 1일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중앙도서관으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현재의 중앙도서관 건물은 1983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50여억 원을 기부하여 착공한 것으로 총 건평 4,026평으로서 남측은 행정기관, 북측에는 도서관으로 설계되었다. 2017년 10월 16일 도서관 리모델링을 통해 2층 열람실 전체를 커뮤니티 라운지로 바뀌었다. 학생 자치기구 학생회는 아주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며,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향상과 지역사회 발전,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학생자치 활동을 통하여 국가의 발전과 세계인류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 및 구성되어 있는 단체이다. 학생자치 활동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학생회의 조직은 총학생회, 총여학생회, 동아리연합회, 단과대학 학생회(공과대학, 정보통신대학, 자연과학대학, 경영대학,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약학대학)집행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위의 구성원들로 구성되는 중앙운영위원회는 학내 최고정책결정기구이다. 총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의 선출은 매년 11월에 단과대, 학과 학생회장,부회장 선발과 함께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학생 언론사 동아리 활동 동아리 활동은 학생자치 활동의 하나로 취미생활, 소질개발, 자아성장을 목표로 설립, 운영되고 있다. 동아리 활동은 학칙에 부합되는 활동을 목적으로 단체의 설립취지와 이념에 동의하는 회원으로 하여 소정의 등록절차를 거쳐 총장의 승인을 받아 개설 및 활동한다. 학칙 운영규칙에 위반한 활동 및 활동 실적이 없거나 부진할 경우에는 등록을 취소하거나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동아리는 동아리의 육성과 활성화를 위하여 지도교수제를 두고 운영되고 있다. 2017년 현재 56개의 학생동아리가 등록되어 활동하고 있다. 복수학위 프로그램(Dual Degree Program)이란 아주대학교에서 졸업학점의 1/2 이상을 이수하고 프로그램의 다른 학교에서 남은 학점을 이수하여 아주대학교와 상대학교의 학위를 모두 취득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미국의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와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호주 University of the Sunshine Coast 3개의 학교와 복수학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아주대학교는 현재 전 세계 약58개국 206개교 및 5개 기관과 교류협정을 맺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ISEP는 미국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전 세계에 350개의 회원교를 가진 국제적인 학생 교류 단체로서, 회원대학간 학생의 상호학점 교류를 목적으로 한 미국의 비영리 기관이다. 아주대는 ISEP의 회원교이며, 연 2회(6월초, 12월초) 교환학생을 선발한다. ISP의 회원교는 국내에 연세대, 고려대, 아주대, 이화여대, 계명대 다섯 곳이 전부이다. 2012년 현재 58개국 210개 학교와 협정을 맺고있다. 아주대학교의 자매대학 중 별도의 교환협정을 체결한 대학과 운영되는 특별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일반 교환학생과 달리 본교 학생을 위해 별도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현재 중국의 남경이공대학교, 장사이공대와 특별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안동대학교 안동대학교(安東大學校, )는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다. 1947년 안동사범학교로 개교한 이래, 1965년 안동교육대학으로 개편, 1979년에 안동대학을 거쳐, 1991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 지금의 교명으로 바뀌었다. 원래 명륜동에 있었으나 1983년에 송천동으로 옮긴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1년 11월 24일에는 이 학교에서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학교의 최초 설치 목적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초등교원 양성이었다. 1991년 초등교육과 신설이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무산 되었고, 안동초급대학으로 개편된 후 현재까지 초등교원 양성기관의 기능은 없다. 광복 후 급격히 증가한 초등교원에 대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사범학교를 개편하고 각종 단기양성기관, 과정을 운영하는 한편 1개도에 2개의 사범학교를 공립으로 설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1947년 7월 21일 경상북도립으로 안동사범학교가 설치되었다. 1950년 4월 1일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었다. 초등교원양성제도 개편에 따라 1962년 1개도에 1개의 교육대학이 설치었는데 경상북도에서는 대구사범학교가 대구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안동사범학교는 1962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 폐지된 안동사범학교에는 안동농업초급대학을 설치했다. 1960년대는 학령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초등교원의 이직률이 높아 초등교원의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1962년 폐지했던 사범학교들 중 일부에 다시 교육대학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965년 안동농업초급대학을 개편해 안동교육대학을 설치했다. 안동교육대학은 안동사범학교 폐지로 안동농업초급대학으로 인계된 도서관 자료를 그대로 인수하여 개교와 함께 도서관을 개관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초등교원을 양성 했으며, 부설 초등교육연수원에서는 현직 초등교원의 자격연수와 교사연수를 실시하였다. 1970년대 초등교원수급이 안정화되고 오히려 과잉양성이 문제가 되면서 1978년 2월 28일 폐교된 뒤 3월 1일 안동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안양대학교 안양대학교(安養大學校, )는 1948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개신교계 사립 대학교이다 1964년 학교법인 대한기독학원이 설립되었다. 1969년 국방부로부터 군종장교 후보생 지정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77년 목회학과를 신설하였다. 1980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현재의 위치에 캠퍼스를 조성하여 이전하였다. 1981년 2월 4년제 대학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를 받고, 기독교교육학과를 신설하였으며, 주간에 일반학부를 설치하여 영어영문학과ㆍ경영학과ㆍ행정학과ㆍ유아교육과ㆍ교회음악과ㆍ국어국문학과ㆍ신학과를 편성하였다. 이듬해 관광학과를 신설하고, 1983년 신학부와 일반학부로 편제를 분리하였다. 1990년 대신대학으로 승격하였고, 1993년 종합대학인 대신대학교로 개편하였다. 1995년 안양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97년 교육대학원ㆍ경영행정대학원ㆍ사회교육원, 2000년 일반대학원을 신설하였다. 안양대는 자율개선대학으로 선정되면서 내년부터 3년 동안 대학이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반 재정지원을 받게 됨. 또, 모든 국책사업 신청이 가능하며 재학생은 국가장학금 지원과 학자금대출 등 혜택을 모두 누릴 수 있게 됨. 2015년 기준으로 안양캠퍼스에는 7대학, 4대학원이 있으며, 강화캠퍼스에는 1대학(문리과학대학)이 있고, 전체 학부생은 5,028명, 전임교원은 172명이다. 교훈은 ‘진리’이다.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사랑과 섬김의 정신과 실용적 전문성을 갖춘 인격적, 창의적 리더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색사업으로 리더가 갖추어야 하는 기본 소양과 자질을 배우는 ‘아름다운 리더 코스 프로그램’과 해외 유수 대학교 탐방하는 '아리글로벌 프로그램'을 운영 중에 있다. 부속기관으로 대신관ㆍ수리관ㆍ수봉관ㆍ새솔관ㆍ문화관ㆍ일우중앙도서관ㆍ아리관ㆍ아리비전센터ㆍ창의융합산학관ㆍ반도체설계교육센터 등이 있고, 부설연구기관으로 한구석밝히기연구소ㆍ평생교육원ㆍ한국어교육원ㆍ인문과학연구소ㆍ사회과학연구소ㆍ수도권발전연구소ㆍ외국어교육센터 등이 있다. 중앙도서관의 총 장서는 19만여 권으로 국내외 학술지 및 일반간행물 300여 종과 신문 30여 종, 어학ㆍ교양용 비디오 테이프, CD 자료 1,200여 종을 비치하고 있고, 이들 모든 자료는 안양대학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국제교류로 미국 사우스이스트미저리주립대학교(Southeast Missouri State University)ㆍ포트랜드주립대학교(Portland State University),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St. Petersburg State University), 몬테레이대학교(Universidad de Monterrey) 등 해외 15개 대학과 교류협정을 맺고 교환학생제(사우스이스트미저리주립대학교 등 4개 대학), 어학연수(3개 대학), 학술교류 등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국제 교환학생 프로그램인 마젤란 익스체인지에 아시아 대학교중 유일하게 가입되어있다. 또한 학생들이 국제적 시각과 글로벌 마인드를 함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매년 약 10개 팀을 선발하여 1~2주간 해외를 탐방하는‘아름다운 리더 세계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30여 개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고, 매년 9월에 대학축제인 안양축전이 열린다. 2017년 정부의 ACE+ 지원사업 대상 대학교로 삼육대 인하대와 함께 신규 선발되었다. 기존의 가천대 가톨릭대 광운대 동국대 서울시립대 성균관대 서강대 중앙대 숭실대 이화여대 등의 대학과 함께 향후 4년간 년 20억씩 지원받게되었다. 여수대학교 여수대학교(麗水大學校)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었던 국립 종합대학교이다. 2006년 전남대학교와 통합되어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되었다.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는 1885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개신교 계통 사립 종합 대학이다. 연세대나 연대라는 약칭으로 많이 불린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신촌캠퍼스와 강원도 원주시의 분교인 미래캠퍼스가 있다. 신촌캠퍼스(본교)는 신촌캠퍼스/ 국제캠퍼스/ 삼애캠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래캠퍼스는 매지캠퍼스/ 일산캠퍼스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법인 연세대학교에 의해 운영되며, 22개의 단과 대학, 21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된다. 현재(18대) 총장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김용학이다.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교명은 1957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통합 후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1886년에 세워진 경신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하였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앨런이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광혜원을 전신으로 한다. 두 대학의 통합은 1920년대부터 이루어진 지속적인 협력이 낳은 결과였다. 건학 이념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뜻한다. 상징 동물은 독수리이고, 상징 색은 ‘로얄 블루’(Royal blue)이다. 연세대학교의 심볼마크에는 방패가 그려져 있는데 방패 속의 ‘ㅇ’ 표시는 하늘을 의미하여 ‘ㅡ’는 땅이고, ‘ㅅ’은 사람을 뜻한다. ‘ㅇ’표시 왼쪽에 그려진 ‘책’은 진리를, 오른쪽에 그려진 ‘횃불’은 자유를 의미하며, 방패는 이러한 두 이념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연세대학교는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한 대학이다. 연희대학교는 191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元杜尤), 1859년 ~ 1916년) 선교사 가 설립한 경신학교의 대학과정인 조선기독교대학에서 출발하여,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발전하였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은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앨런(, (安連), 1858년 ~ 1932년)이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광혜원을 전신으로 한다. 1884년에 조선 왕실부 시의관(侍醫官)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조선 정부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하였다. 이 제안에 따라 1885년 2월 25일에 고종으로부터 병원 설립의 허락을 받고, 4월 10일에 서울 종로구 재동(齋洞)에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게 되었는데,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4월 26일에 개원 2주만에 ‘은혜를 널리 펼친다’는 뜻의 광혜원에서 ‘대중을 널리 구한다’는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미국 장로교 본부는 광혜원 진료의 책임자를 파견하였고, 조선 정부는 건물과 제반설비 및 경상비 등을 부담하였다. 앨런은 1886년 제중원에 의학교를 설립하였고,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전국에서 학생 16명을 선발하였는데, 3개월의 교육 후에 12명이 본과로 진급하여 의사 교육을 받았다. 1887년에 재동에서 현재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銅峴)로 이전했다. 1893년 제중원에 부임한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올리버 에비슨(, (魚丕信) 1860년 ~ 1956년)은 조선 정부와 6개월간 협상을 벌인 끝에 1894년에 제중원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받았다. 1904년 9월 23일에 미국인 사업가 루이스 세브란스(, 1838년 ~ 1913년)의 후원을 받아서 숭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앞 연세재단세브란스빌딩 일대)에 병원을 신축하면서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기념 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의학 교육 기관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 6월 4일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는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의사면허증인 의술개업인허장이 발급되었다. 1909년에 교명을 ‘사립 세브란스 의학교’, 1913년 4월에는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교’로 각각 변경하였으며, 1917년 5월 14일에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발전하였으나, 1942년 6월에 일본의 강요로 교명을 ‘아사히 의학전문학교’(旭醫學專門學校)로 변경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환원되고, 1947년 7월에 문교부로부터 6년제의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인가를 얻었다. 1955년 3월에 연희대학교와 통합을 결정하였고, 5월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에 병원 건물을 착공하면서 1962년에 세브란스 병원을 신촌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1906년 9월에 쉴즈()가 세브란스 병원에 간호원 양성전문기관으로 간호학교를 설치하면서 1910년에 최초의 간호원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15년 3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협조와 재한 남·북감리교 선교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협력을 얻어 조선기독교학교(Chosun Christian College)를 서울 종로의 YMCA에서 개교하였는데 초대 교장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부교장에 에비슨 박사가 취임하였다. 1917년 4월 7일에 사립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로 발족하였고 같은 해인 1917년에는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박사의 기부금으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현재 연세대학교 부지)의 대지 19만평을 교지로 구입하였다. 1919년 3월에 연희전문학교 1회 졸업생 배출하였다. 1920년에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의 기부금으로 스팀슨홀을 건립하여 학교를 이전하였고 1923년 3월에 신교육령에 의해 교명이 연희전문학교로 바뀌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합동에 대한 의견이 피력되었고 1926년 6월에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1935년 9월 1일에 연세춘추의 전신인 월간지《연전타임스》가 창간되었다. 1944년 4월에 적산(敵産)이라는 명목으로 학교가 몰수되어 조선총독부의 관리하에서 조선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였으며, 교명이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京城工業經營專門學校)로 변경되었다. 해방 이후 재산과 운영권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받아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회복하고 1946년 8월 15일에는 연희대학교(延禧大學校, Chosun Christian University)로 승격되어 4학원 11학과(문학원, 상학원, 이학원, 신학원)의 종합대학교로 인가되었다. 연희대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백낙준(白樂濬, 1895년 ~ 1985년)이 취임하였고 1946년 9월에는 남녀공학 대학교가 되었다. 1949년 세브란스 의과대학 예과를 연희대학교에 두었으며, 이듬해 1950년에는 연희대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50년 4대학 17학과(문과대학, 상경대학, 이공대학, 신과대학)로 증설하고 대학원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발발로 3개월간 임시 휴교를 단행하였으며, 11월 3일 재등록을 받아 개강하였지만 1·4 후퇴로 인하여 1951년 부산으로 학교를 옮겨 개강하였으며, 1953년 8월에 서울 본교로 돌아와 개강하였다. 1953년 대학원에 의학과 석사과정을 설치하였고 1954년 정법대학을 신설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동방학연구소에서 학술지인 《동방학지》를 발간하였다. 1955년에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의 이사회는 재단법인 연세대학교를 구성하는데 합의하였고 1956년에 재단법인이 설립되었다. 1957년 1월 5일,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하면서 연세대학교(延世大學敎, Yonsei University)로 교명을 변경하였는데 초대 총장은 백낙준, 부총장은 최현배(崔鉉培, 1894년 ~ 1970년)가 취임하였다. 1959년에 한국어학당을 설립하였고 1977년에는 강원도 원주시에 제 2캠퍼스인 원주캠퍼스를 설립하였다. 1981년 신촌캠퍼스의 스팀슨관, 언더우드관, 아펜젤러관이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5년 5월 11일에 창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6월 9일에 연세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이 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이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대한민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1996년에 학부제 및 계열화를 실시하였다. 같은 해 8월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서 제6차 8.15 통일대축전 및 범민족대회를 강행하여 원천봉쇄하려던 경찰과 충돌을 벌였고, 종합관과 과학관에서 8월 13일부터 20일까지 점거 시위를 벌였다. 2003년에 부속기관인 김대중도서관을 설립하여 개관하였다. 2006년에 인천광역시와 연세대학교 송도 국제화 복합단지 조성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2010년에 국제캠퍼스 약학대학 신설하였고, 같은 해 3월 3일에 국제캠퍼스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2011년 3월 2일에 국제캠퍼스 정규학위과정을 시작하였다. 2011년 5월 31일에 연세대학교 기술지주회사가 설립되었다. 신촌캠퍼스(新村-)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에 위치한 연세대학교의 제1캠퍼스이다. 언더우드의 큰형인 존 토마스 언더우드(John Tomas Underwood)는 10만 달러를, 로스앤젤레스의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은 대학 설립용 자금으로 2만 5천 달러를 연희전문학교에 기부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에 돌아가서 교사 건립용 기부금 모금을 했는데 스팀슨에게서 위 기부금을 얻은 후 사망하였고, 후임 교장인 에비슨이 기부금으로 교사를 건립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의 숲이 울창한 토지 190,320평을 매입하였다. 이곳은 조선 정종 때 세워진 연희궁(延禧宮) 터와 영조(英祖)의 후궁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수경원(綬慶園)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학교명 ‘연희’는 여기서 연유하였다. 캠퍼스 마스터플랜과 교사동 설계는 예일 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미국인 건축가 헨리 머피(Henry Killian Murphy)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현재의 백양로 등 신촌캠퍼스의 골격은 초기 마스터플랜에 의해 조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치원관(致遠館)이며, 목조 2층으로 1918년에 준공되어 1950년까지 있었다. 치원관 이외에도 스팀슨관, 언더우드관, 아펜젤러관, 한경관 등이 준공되었으며, 기숙사인 핀슨관과 노천극장, 돌층계 등이 만들어졌다. 현재 신촌캠퍼스는 송림으로 둘러싸인 약 990,000m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신촌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백양로를 중심축으로 오른편에 현대식 건물로 약 165,000m에 달하는 연세의료원, 백주년기념관, 수경원, 루스채플, 음악대학, 학생회관, 대강당, 경영관, 노천극장, 청송대가 있으며, 왼편에는 연세공학원, 공과대학, 중앙도서관, 체육관, 체육교육관, 장기원기념관, 연세과학원, 과학관, 백양관, 광복관이 서로 대치를 이루며 서 있다. 백양로의 끝에는 대학 본부가 위치한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왼편에 스팀슨관과 오른편에 아펜젤러관이 위치에 있고 세 건물의 중앙에는 학교의 창설자이며 초석을 이룬 언더우드의 동상이 서 있다. 스팀슨관 뒤편 언덕위 왼편에는 한경관과 핀슨관이 나란히 서 있고, 그 뒤로 신학관이 동향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언더우드관의 뒤편으로 사회과학대학이 자리한 연희관이 서 있으며 오른편에 성암관, 왼편에 유억겸기념관, 그 뒤로 대우관이 있다. 유억겸기념관 뒤편 오른쪽에는 빌링슬리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뒷산 중턱에는 종합교실단과 외솔관, 위당관이 서 있다. 성암관 뒷길을 따라 동문방향으로 가면 우측에 새천년관, 국제학사, 언어연구교육원, 제중학사가 있고, 대우관 뒤편 고개를 넘어 북문방향으로 가면 무악학사(학생기숙사) 5개동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캠퍼스(國際-)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과학로 85(송도신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연세대학교의 제2캠퍼스이다. 615,000m(약 186,000평)의 부지에 캠퍼스를 조성하였다. 연세대학교 학교본부는 국제캠퍼스의 건립을 원주캠퍼스와 같은 분교가 아닌, 서울(신촌)캠퍼스의 공간적 연장이라고 밝혔다. 즉 이원화캠퍼스라는 의미이다. 연세대학교는 2006년 1월 인천광역시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2008년 11월 캠퍼스 조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강의동과 연구시설 등을 건설하는 비용 6,500억원은 인천광역시가 부동산 개발 이익으로 전액 부담한다. 2010년 3월에 일부 개교하였고 2014년 기준으로 2B단계까지의 준공을 마쳤다. 2011년도에 국제캠퍼스에 처음으로 개설된 전공은 공과대학 글로벌융합공학부·글로벌융합대학원, 언더우드국제대학, 자유전공, 의예과, 치의예과, 약학대학·약학대학원, 외국인글로벌학부 등이다. 학부 과정의 언더우드국제대학, 자유전공, 의예과, 치의예과, 외국인글로벌학부 학생들은 1학년을 국제캠퍼스에서 이수하고 나머지 재학 기간은 신촌캠퍼스에서 보내게 된다. 국제캠퍼스의 건립으로 2013년 이후 입학하게 되는 학부생들은 국제캠퍼스에서 레지덴셜칼리지(Residential College, RC)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신입생 대상 RC 제도 시행 첫 학번이었던 13학번은 국제캠퍼스에서 한 학기를 의무적으로 보냈으며 1학기에는 문과대학, 공과대학, 교육학과, 간호학과가, 2학기에는 상경대학, 경영대학, 이과대학, 생명시스템대학, 신과대학 사회과학대학, 생활과학대학 학생들이 RC교육을 이수했다. 2014년부터는 모든 신촌캠퍼스 신입생이 국제캠퍼스에서 두 학기를 의무 이수하도록 RC제도가 전면 시행되었다. 원주캠퍼스에서 성공적으로 정착된 RC 교육을 신촌캠퍼스 신입생들 역시 일년 이상 의무적으로 국제캠퍼스에서 기숙사 생활과 RC 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된 것이다. 삼애캠퍼스(三愛-)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로 160-30 (중산동)에 위치한 연세대학교의 또 다른 캠퍼스이다. 1976년 배민수 목사가 별세한 후 그의 유족들이 약 181,819m(55,000평)을 기증하면서 캠퍼스가 조성되었다. 현재 삼애캠퍼스는 천문대와 운동장 2개, 삼애교회로 구성되어 있고 천문대는 천문우주학과에서 주로 이용하며 주변 학교의 견학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운동장의 경우 운동부들의 연습구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부대시설이 부족해 사용하는 학생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미래캠퍼스(未來-)는 강원도 원주시 연세대길 1에 위치한 종합대학인 ‘매지캠퍼스’(梅芝-)와 일산로 20에 위치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과 의과대학의 ‘일산캠퍼스’(一山-)로 구성되었다. 교과부에 따르면 분교로 분류되어 있다. 2008년에 원주캠퍼스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2010년에 원주캠퍼스 비전 2020+ 선포식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전국 대학 최초로 RC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정착시켰으며 국제캠퍼스로 확대시행되었다. 매지캠퍼스에는 인문예술대학, 정경대학, 과학기술대학, 보건과학대학, 동아시아국제학부(EIC)가 그리고 일산캠퍼스에 원주의과대학이 존재한다. 매지캠퍼스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기증한 165만여m 부지에 캠퍼스를 조성하였다. 매지캠퍼스의 교내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첨단의료기기 테크노타워, 환경친화기술센터, 기숙사인 매지 1, 2, 3학사, 세연1, 2학사, 청연학사가 있고 학생식당, 편의점, 우리은행, 우체국 등의 편의시설이 있는 연세프라자가 있으며 그 앞으로는 언덕 위에 현운재가 보이고 옆으로는 무궁화동산, 연세스포츠센터와 대운동장, 매지호가 있다. 은행나무 가로수의 긴 진입로에는 대학교회와 대학본부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로수길이 끝나는 곳의 앞에 학생회관과 도서관이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엔 신촌캠보다 더 큰 독수리상이 세워져 있다. 도서관 뒤로는 미래관, 그 위쪽 좌측에 인문예술대학이 사용하는 청송관과 정경대학이 사용하는 정의관, 우측에 과학기술대학이 있는 창조관, 그 뒤편에 보건과학대학이 사용하는 백운관이 있다. 일산캠퍼스는 1959년에 선교사 주디 머레이가 세운 원주기독연합병원에서 시작되어, 1978년 연세대학교 의예과 분교, 1982년에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연세대학교 의료원(延世大學校 醫療院, Yonsei University Health System)은 세브란스 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용인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 원주연세의료원 산하의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의과대학, 치과대학, 간호대학, 보건대학원, 간호대학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에 위치한 세브란스 병원은 개원 101주년이 되는 2005년 4월에 병원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현재 2,064개의 병상을 갖추고 26개의 과목의 진료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강남세브란스병원은 1983년에 개원하였으며, 2010년에는 804개의 병상을 갖추고 36개의 과목의 진료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 위치한 용인세브란스병원은 한국-독일 수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3년에 개원하였으며, 113개의 병상을 갖추고 15개 과목의 진료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은 1993년 설립된 대한민국 유일의 대학 정신과 전문병원이다. 원주연세의료원의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은 현재 중부권 제일의 대학병원으로 1,000병상을 갖추고 31개 과목의 진료를 운영하고 있다. 총학생회는 학교 당국과 독립적인 학생들의 요구를 대외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학생자치기구이다. 1949년 9월 이승만 정권 당시 대통령령 86호로 결성된 학도호국단을 해체하는 안이 1960년 5월에 국무회의에서 4·19 혁명 이후 학원 민주화의 여론에 따라 통과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학생 자치기관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6월에 각 단과대학 대표들의 회합 결과 ‘연세대학교 학생회’라고 일컫는 학생 자치기구가 구성되었고 1961년 1월에 총학생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1975년 6월에 군사정권에 의해서 다시 학도호국단으로 재편되지만 1983년 12월에 학원자율화 조치와 1984년 학도호국단의 폐지로 총학생회 체제가 부활하였다. 매년 선거를 통해 총학생회가 선출되고 있으며 2019년 기준으로 제54대 총학생회 ‘Flow’가 활동하고 있다. 학생복지처가 총학생회 활동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학생 복지를 관장하는 기구로 학생복지위원회라는 별도의 기구가 존재하여 생활협동조합의 운영, 생협장학금, 신촌판 택리지 발간, 특강 개설 등의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한편 1988년 3월 총학생회 산하 여학생부가 재편되어 총여학생회가 31년간 매년 선출되었으나, 탄생 이래 위상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2019년 1월 학생총투표로 폐지가 가결됨으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연고전(延高戰)은 애교심을 고양하고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양교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포츠 경기 를 비롯한 강연, 온라인 게임, 사회공헌활동 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고려대학교와 승부를 겨루는 행사 일체를 의미한다. 연고전과 유사한 대학교 스포츠 대항전으로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와 캠브리지 대학교의 조정 경기와 일본의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소케이센’(早慶戰) 등이 있다. 연고전은 매년 9월에 고려대학교 5개 종목의 운동부 선수들과 맞붙는 ‘정기 연고전’ 과 정기 연고전 이외의 기간에 열리는 ‘비정기 연고전’ 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교내에 축구부, 럭비부, 야구부, 농구부, 아이스하키부 등 5개 종목의 스포츠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연고전’이라는 명칭은 ‘정기 연고전’을 의미하며, 아래에 이어지는 설명도 ‘정기 연고전’에 관한 것이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개설되어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일반대학원과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2009년 개원한 법학전문대학원은 120명을 배정받았고 의과대학과 병행 운영되고 있는 의학전문대학원은 2015년부터 폐지되어 의과대학 체제로 복귀한다. 국제처에서는 국제 교류의 갈래로 교환학생제도(Student Exchange Program)와 방문학생제도(Visiting Student Program)를 운영하고 있다. 교환학생제도는 학생교환 협정이 체결된 외국 대학에 파견되어 학업을 계속하며 본교에서 학점을 인정받는 프로그램이다. 파견 기간 동안 학비는 본교의 등록금을 납부한다. 방문학생제도는 본교와 파견 대학에 모두 수업료를 납부하지만 본교 등록금의 일부를 장학금으로 지급한다. 교환학생제도는 학생교환수가 균형을 이룰 때만 가능하지만 방문학생제도는 이와 상관 없이 다수의 학생을 파견할 수 있어 지원 기회가 폭넓다. 방문학생제도의 파견 대학으로는 미국의 아메리칸 대학교, 세인트 클라우드 주립 대학교,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캐나다의 앨버타 대학교, 영국의 노팅엄 대학교, 킹스 칼리지 런던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 대학에서 자기 부담으로 수학하고 본교에서 학점을 인정 받는 SAP(Study Abroad Program)를 운영하고 있다. SAP는 휴학생의 신분으로 파견되는 것이므로 학기는 인정받지 못하며 등록금은 파견 대학에 납부한다. 또한 GIP(Global Internship Program)는 한 학기 동안의 해외 인턴십을 수료한 후 본교에서 학기와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2018년 2월 현재 전 세계 59개국의 615개교(ISEP + 기타기관)와 학술 교류 및 학생 교환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0년 5월 연세대학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와 로스쿨 복수학위제를 도입하였다. 연세대학교와 학술교류협정 및 학점교류 협정이 체결된 국내 대학에서 수학하며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교환 대학으로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울산대학교, 카이스트, 고려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전주대학교, 한남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계명대학교, 중앙대학교가 있다. 채플(Chapel)은 교목실에서 주관하는 예배 행사이며 재학생은 채플을 4학기 이상 이수하여야만 졸업이 가능하다. 성적은 패스(P)와 논패스(NP)로 처리된다. 학부채플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대강당에서 실시되고 있다. 채플은 교회의 일반적인 예배와 다르게 강사가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교외 강사와 교내 강사가 격주로 초빙된다. 한 학기에 2 ~ 3회 정도 음악, 무용, 뮤지컬, 연극 등의 실험채플을 실시한다. 연세 116주년 창립기념 주간에 연합채플을 개최한 계기로 매년 재학생, 교직원 등이 모두 참여하는 연합채플을 창립기념주간과 감사절에 노천극장에서 개최하고 있다. 재학생은 졸업을 하기 위해서 최소 126 ~ 140학점 이상의 각 대학별 졸업학점을 취득하는 것 이외에도 소속 대학 또는 학과별로 지정된 졸업인증요건을 충족하여야 한다. 신촌캠퍼스 및 국제캠퍼스 학생은 영어인증이 요구되는데 “연세영어인증” 이상의 영어인증 요건을 충족하여야 하며 외부 공인영어시험 성적으로도 영어인증의 취득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영어인증제는 2010학년도 이후 신입생과 2012학년도 이후 편입생에게 적용된다. 미래캠퍼스 학생은 대학별로 지정된 외국어 및 정보인증요건을 충족하여야 하는데 원주의과대학은 미래캠퍼스의 졸업인증요건에서 제외된다. 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럭비 등 여러 종목의 운동부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 7월 세브란스 병원이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로부터 인증을 받았고, 2008년 9월에는 교육인적자원부의 2007년도 SCI 논문 분석 결과 SCI 논문수 세계 96위로 도약하였다. 이듬해 2009년 3월 동서문제연구원 발행 저널이 《Global Economic Review》에 대한민국 최초로 SSCI에 등재되었다. 2009년 10월 영국 더 타임스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151위를 기록하였으며, 영국 QS 세계 대학 평가에서 2010년 142위, 이듬해인 2011년 129위를 기록하였다. 2010년 12월 학술정보원이 교육과학기술부 주관의 전국 대학도서관 평가에서 1위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 9월에 시행된 교원양성기관 평가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2011년 10월 14일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세계 100대 풀타임 MBA’ 순위에서 연세대 GMBA는 국내 최초로 유일하게 순위권인 세계 76위에 랭크되어,국내 MBA 스쿨 중 유일하게 풀타임, 파트타임 MBA 모두 세계 100위권에 진입하였다. 한편 연세대 경영대학은 2012년 유럽경영대학협의회(European foundation for Management Development)로부터 EQUIS 인증을 획득하여, 대표적인 국제 인증인 AACSB, EQUIS와 국내 인증인 KABEA 까지 받은 국내 유일한 경영대학이 되었다. 또한, 2012년에 121명이 합격한 것을 포함하여 1992년 이래 약 2,450여명에 달하는 공인회계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국내 대학의 누적 합격자수로는 가장 높은 수치이다. 그리고 2012년 기업분석 전문업체인 한국CXO연구소가 국내 1천대 기업의 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이 40명으로 단일 학과 기준으로는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환태평양 대학 협회(APRU)에 가입하게 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명문 대학으로부터 우수한 교육프로그램과 탁월한 연구력을 가진 대학으로 평가받음을 입증했다. 또, 2014년에는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AEARU)에 가입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여러 연구중심대학교들과 다차원적 국제협력의 발판을 더욱 공고히 했다. 연세대학교 출신 교우들의 모임인 연세대학교 총동문회는 1960년 4월 연희대학교 동문회와 세브란스 동창회 통합으로 창립한 기관이며 연세대학교의 다양한 사업과 장학재단을 운영을 통해 모교를 지원하고 있다. 현재 총동문회의 회장은 제27대 회장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다. 1993년 5월에는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이 준공되었다. 연세우유는 연세대학교에서 설립한 학교법인으로 되어 있는 기업체이며, 1962년 3월 미국 헤퍼 프로젝트(Heifer Project 책임자: 트락몰튼 감리교 목사) 지원금으로 캐나다로부터 젖소 10두를 기증 받아, 1971년 3월 연세우유 시중 판매 시작하여, 1993년 충청남도 아산시(당시 아산군)에 공장을 신설 및 준공되었고, 1998년 6월 HACCP(식품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 우유(축산물)부문 최초 인증 획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제품으로는 우유, 두유, 음료 등이 있다. 계열사로는 연세생활건강이 있다. 영남대학교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이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1967년 12월에 통합되어 출범했다. 상징은 천마(天馬) 이며, 교육목표 는 창학정신에 제시된 교육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의 대학’, ‘세계 속의 대학’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데 두고 있다. 약칭으로 ‘영대’라고 부르거나, 영문약칭으로 ‘YU’라 부르기도 한다. 해방과 더불어 애국, 애족하는 인사들에 의해서 발의되었으며,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구국경세의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건학하였다. 경북도내 각계 각층의 독지가들이 희사한 재산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졌으며,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 분야의 인재를 양성, 배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 스스로가 지역문화의 각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맥을 이은 해방 후의 청년운동이 모태가 된 청구대학은 대중대학강좌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 야간대학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청구대학은 애국애족의 독립정신을 기초하여 배움의 길을 찾던 근로청년들에게 고등교육의 길을 열어 민족문화를 수호, 발전시킬 인재를 길러낼 목적 아래 발족하였다. 영남대학교는 지성의 전당으로서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교육과 생산교육을 추진함으로써, 민족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민족중흥의 새 역사 기여함을 창학정신으로 삼는다. 신라 화랑의 자취가 남아있는 압량벌에 ‘민족의 대학’이라는 건학 이념을 기치로 설립된 영남대학교가 자리 잡았다. 영남대학교의 상징인 천마 속에는 약동하는 힘과 비약하는 화랑의 기상이 응집되어 있고 ‘민족의 대학’, ‘세계속의 대학’으로 나아가려는 창학정신과 교육목표가 표출되어 있다. 뒤로 힘차게 벋은 말갈기는 불굴의 기백과 진취성을 나타내며,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모양은 무궁한 가능성과 원만성을 나타낸다. 구름 위를 질주하는 듯한 장엄한 모습의 천마를 통해서 거침없이 미래로 뻗어 나아가려는 천마인의 진취적인 기상이 표현된다. 영남은 태백, 속리, 덕유, 지리산과 죽령, 조령, 추풍령 등과 같은 태산 준령의 남쪽 즉 “嶺之南”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영남의 중앙부에는 낙동강이 관류하며 좌우에서 흘러오는 지류들이 합류되면서 통일성과 일체감을 가진 특색있는 하나의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신라⦁가야문화의 본 고장인 동시에 불교, 유교문화와 동학사상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곳을 기반으로 한 신라가 민족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면서 한국사의 주류가 영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원효와 퇴계, 수운 등 우리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꾼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영남은 향토지명이라기보다 민족문화의 발전과 창달을 사명으로 하고 있는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즉 민족문화가 가지는 전통과 창조적 정신을 새로이 구현하여 문화창조에 이바지하는 장소라는 의미인데 교명을 “영남”이라 택하였으며 이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설립취지와도 부합한다. 2017년 3월 현재 영남대학교는 광활한 캠퍼스 위에 다양한 부속기관과 각종 연구소 및 최첨단의 영남대학교 의료원 및 영천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학부의 19개 단과대학(야간강좌개설부 포함), 68개 학부(과), 12개 대학원을 갖춘 지역거점 사립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2017학년도 3월 1일자로 영남대학교는 학부에 문과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기계IT대학, 법과대학, 정치행정대학, 상경대학, 경영대학, 의과대학, 약학대학, 생명응용과학대학, 생활과학대학, 사범대학, 디자인미술대학, 음악대학, 야간강좌개설부, 기초교육대학, 건축학부, 국제학부를, 대학원에 일반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경영대학원, 환경보건대학원, 교육대학원, 행정대학원, 공학대학원, 문화예술디자인대학원, 스포츠과학대학원, 임상약학대학원, 박정희새마을대학원을 두고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의료원, 도서관, 박물관, 신문방송사, 정보전산원, 건강관리센터, 출판부, 생활관, 고시원, 외국어교육원, 공학교육혁신센터, 천마아트센터, 한국어교육원, 실험동물센터가 있고, 그 외에 부설기관으로 43개의 연구소와 사회교육원, 다문화교육연구원, 영남아메리칸센터 등이 있다. 학교 당국과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자치기구이다. 총학생회,중앙감사위원회, 대학원총학생회, 총동아리연합회 및 각 단과대 학생회로 구성된다. 다양한 문화 및 사회봉사 등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인 사회경험과 친목을 쌓을 수 있는 활동 단체이다. 현지조사연구회, 천마극단, 천마응원단, 상문독서토론회, 탐험대, 산악회 등 90여개의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운영하는 학생자치 야간규찰대이다. 교내 야간순찰을 강화하여 건전한 대학문화 정착과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 2012년 2학기 현재, 영대지킴이 제30기가 활동하고 있다. 1명의 대장과 20명의 조원 총 21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학기 학교 축제나 행사등에 안전적인 진행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매학기 시작전, 야간 규찰대 모집을 하며, 학교 행정인턴쉽 장학생으로 신청을 한다. 영남대학교에는 야구, 축구, 유도, 씨름, 레슬링, 육상 등 6개의 운동부가 활동하고 있다. 각 운동부에서 배출한 많은 선수들이 국가대표 등으로 발탁되어 각종 국제대회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학교의 명예를 높인 바 있다. 1996년 12월 제1기를 시작으로 현재 22기째(2017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학생홍보대사는 On/Off-line으로 영남대학교를 대표하는 얼굴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2011년 영남대학교 학생홍보대사 영대사랑은 학생들의 아이디어로 제작한 학교 로고송 을 제작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합병하여 영남대학교로 발족함에 따라 양 대학의 동창회가 통합하여 이루어진 기구이다. 그 결과 1972년 전국대학동창회 중 최초로 회관건물을 갖게 되었으며, 1995년 완료된 동문명단 전산화 작업은 파악된 모든 동문(전국 최다)에게 동창회보를 발송하는 최초의 동창회가 되게 하였다. 서울, 부산, 마산, 창원, 제주 등 27곳에 동창회지부가 조직되어 있고, 뉴욕, 남가주, 시카고, 워싱턴 D.C., 미국동남부, 인도네시아, 벤쿠버, 토론토, 영국 등 9곳의 해외지부도 결속되어 있다. 또 단과대학별⦁학과별⦁직장별 등의 동창회도 결성되어 있다. 이처럼 동문 상호간의 친목과 우의를 도모하면서 영대인의 긍지를 한껏 자랑하고 있는데, 재단법인 <영대동창장학회>를 설립하여 모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영남신학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嶺南神學大學校, )는 경상북도 경산시에 소재한 장로교 신학교다. 학교 웹사이트는 학교 연혁을 1913년에 설립된 보통성경학교부터 시작한다. 용인대학교 용인대학교(龍仁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삼동에 있는 사립대학교다. 1953년 "道義相磨 欲而爲人"(도의상마 욕이위인)을 건학 이념으로 표방하고 '대한유도학교'로 개교하였다. 1971년 4년제 학력인정 학교로 인정받아, 교명을 '대한체육과학대학교'를 거쳐 1993년 현재의 이름인 '용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체육대학으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사립종합대학교로서 무도대학, 체육과학대학, 문화예술대학, 경영행정대학, 환경과학대학, 보건복지대학 6개 단과대학에 주야간 총 39개 학과가 있다. 또한 교육대학원, 스포츠웰니스산업대학원, 문화예술대학원, 경영대학원, 재활복지대학원, 태권도대학원 7개의 특수대학원과 1개의 일반대학원이 있으며, 중앙도서관 등 8개의 부속기관과 18개의 부설기관이 있다. 1953년 한국 전쟁 직후 전문적인 유도교육기관의 필요성과 민족적 상무 정신의 고양으로 국난타개에 앞장서기 위해 대한유도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111번지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 이범석 선생으로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활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대한유도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54년에는 1회 졸업생 배출 후 1989년 학교법인이 대명학원에서 단호학원으로 변경되었으며, 1990년에는 4년제 정규대학 대한체육과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58년 제 2대 교장 이제황 선생, 1974년 제 3대 이원수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LA 올림픽에서 본교 재학생 및 졸업생이 많은 메달을 획득하였다. 1985년 용인캠퍼스의 출발은 생활관(현 학생회관), 체육관, 본관 3동의 건물로 시작하였다. 이후 1987년 도서관, 1988년 제 1강의동(현 경영행정대학) 및 세미나동(현 학군단), 1990년 제 2강의동(현 환경과학대학)이 완공되었다. 1989년엔 제 4대 이사장으로 이규훈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1990년에는 4년제 정규대학 대한체육과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92년 본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으며, 1993년에 대한체육과학대학에서 용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3년 6월 개교 50주년을 맞아 단호관(무도대학)이 준공하였고, 2004년 9월 24일 제 5대 이학 이사장 취임하였다. 1994년부터 前김정행 총장이 2~6대 총장으로 취임되었다. 2010년에는 수도권 최초로 군사학과 승인을 받았고, 중앙도서관을 신축하였다. 2014년 現박선경 총장이 7대 총장으로 취임되었으며 2018년 제 8대 총장으로 연임하였다. 용인대학교는 '道義相磨 欲而爲人' 도의를 갈고 닦아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상 구현을 교육이념으로 한다 용인대학교는 智德體(지덕체)를 함양하여 국가발전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함을 교육목적으로 한다 용인대학교 재학생의 외국어 교육을 위한 전담교수가 상담, 지도, 개별학습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내 어학실 및 회화실을 갖추고 있다. 다양한 어학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학기 국제교육원의 주최로 교내 외국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경시대회를 개최하여 입상한 학생들에게 하계·동계 해외어학연수의 기회를 제공한다. 사용 언어 영역별로 영어권, 일본어권, 중국어권으로 나누어 1학기에는 3·4월경, 2학기에는 9·10월경에 학생들의 해당지역 언어능력 등을 기준으로 선발된 학생은 교환학생으로의 해외유학 기회가 주어진다. 우수한 학생에게는 6학기 또는 7학기를 이수하고 소정의 졸업학점을 취득할 경우,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제도이다. 사이버를 통해 학점을 취득하며 학기당 6학점까지 취득할 수 있다. 용인대학교를 비롯한 경인지역 26개 대학과 학생교류 및 학점 상호인정에 관한 협정이다. 타 대학에서 취득한 학점을 인정하는 제도이다. 교직 과정은 사범계열 학과나 교직과정이 설치·승인된 학과의 학생이 중등학교정교사(2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장학제도, 지급규제 단과대학 및 학과, 학회, 동아리별로 전공분야에 대한 학술연구논문 발표대회 및 학술제가 있다. 학술연구논문은 용인대 내·외 학회지나 교지에 수합되어 발간되고 교양강좌도 열린다. 교지편집위원회에서는 매년 교지(단호)를 발간한다. 학술논문, 교양논문, 문예작품, 사회의 각종 이슈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며 백호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우수한 작품을 시상한다. 각종 학술강연회, 발표회, 시화전, 가요제, 동아리 연합축제, 방송제, 각 단과대학별 기획행사이다. 교직원, 동문 및 지역주민도 함께 참여한다. 단과대학 및 학과별로 나누어 각종 스포츠 시합을 하는 축제이다.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를 중심으로 무도대학 내 5개 학과 교수들이 4년 동안 전공 분야 기술을 접목해 만든 종합무술이다. 삼국시대의 화랑도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으며, 태권도·합기도·씨름·검도·유도 등 기존 무술 및 호신술의 장점만 취해 2001년 탄생하였고, 실전무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호신술에 적합한 실전무술을 지향하기 때문에 스포츠로 자리잡은 태권도·유도 등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급소치기·십자목비틀기 등 실전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이 용무도의 보급을 위해 용인대학교는 무도대학 동양무예학과에 전공 과정을, 사회교육원 내에 지도자 과정을 개설해 매주 청소년을 위한 무료 강좌를 여는 한편, 국제 용무도 캠프를 열어 국제화에도 나서고 있다. 용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연면적 7,606m, 5층 건물 2개동으로 도서 및 기타 자료들을 수집, 정리, 보존하고 있으며 학술정보지원과와 학술정보열람과로 구분되어 있다. 용인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한 박물관은 795m의 전시공간과 수장고, 자료실, 보존처리실, 연구실을 갖추고 있다. 또 박물관은 매년 특별전시와 학술대회를 개최하며, 경력인정 대상기관 및 문화재 발굴·지표조사 전문기관으로 등록되어 있다. 체육우수자 및 훈련단의 제반 업무를 전담하기 위해 체육지원실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대학신문사 : 용인대학교의 언론기관이다 교육방송국 : 1986년 10월 23일 개국하였고, 국훈은 진실, 창조, 성실이다 산업체와 연계한 산학협력활동 및 위탁연구 확대를 통해서 인력양성, 연구개발, 기술 이전 등의 제반업무를 하며 행정업무도 지원한다 정보관리실은 초고속 유무선통신망, 종합정보시스템, 강의지원시스템, 포탈시스템 등의 IT서비스를 통하여 정보전달 시스템을 제공한다 우송대학교 우송대학교(又松大學校, )는 대한민국 대전광역시에 있는 사립 대학이다. 1995년 3월 8일에 동아학원(우송학원의 전신)에서 중경산업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초대 총장은 김성경(현, 우송학원 이사장)이었으며 개교당시 개설된 학과로는 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과, 건축공학과, 토목환경공학과, 식품과학과, 컴퓨터디자인학과, 관광경영학과, 국제통상학과가 있었다. 1996년 6월에 우송산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98년 5월에 현재 명칭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8년에 우송공업대학과 통합하고 산업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개편되었다. 2019년 기준, 우송대학교는 7개 단과대학을 편제하고 있다. 우송대학교는 보통의 대한민국의 대학이 1년 2학기제를 채택하고 있는 데 반해, 4학기제 수업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송대학교는 일반대학원과 특수대학원 5개원 등을 설립하여 석·박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울산대학교 울산대학교(蔚山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대학이다. 1970년 4년제 단과대학인 울산공과대학(蔚山工科大學, Ulsan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개교하여, 1985년 3월 1일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60년대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고 대형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업단지에서 일할 고급 기술인력의 양성을 필요로 하게되고, 정부는 울산에 공과대학 설립을 구상하였다. 1968년에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국장인 양윤세를 영국에 보내어 한국기술교육을위한 영국 정부의 지원을 제안하였다. 영국 정부는 그 해 7월 해외개발성 기술교육 고문인 게일러(J. W. Gailer)를 대한민국에 파견하였고, 게일러는 귀국 후 9월에 '한국울산공과대학 설립에 관한 제의서'를 보고서로 제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울산공과대학 설립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1969년 2월 19일에 청와대에서 이후락(대통령비서실장), 권오병(문교부장관), 정주영(현대건설회장), 김창원(신진자동차사장), 이관(학장 내정자) 5명이 울산공과대학 설립발기를 하고, 4월 8일에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의 설립이 인가되어 초대 이사장에 정주영이 취임하였다. 12월 24일에 울산공과대학 설립이 인가되고 초대 학장으로 원자력 연구소의 이관 박사가 취임하였다. 1970년 2월 20일에 입학시험을 실시, 2.5:1의 경쟁률로 5개 학과(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금속공학과, 공업화학과, 토목공학과) 200명의 학생을 선발하고 9명의 교수를 선임하여 3월 16일에 개교 및 입학식을 가졌다. 1984년 울산시의 인구는 약 50만이 되었고, 인근의 울주, 양산, 경주, 월성, 포항까지 포함하면 133만이 되었다. 울산지역의 고등학교 41개교에서 매년 18,00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거기다 공과대학이라 여학생의 수용이 어려웠다. 또한 개교 당시 5개학과 200명이 23개학과 1,650명으로 늘어나고, 9명이던 교수도 207명으로 늘어나 단과대학으로 남기에는 규모가 비대해졌다. 1977년부터 종합대학 승격 계획이 세워지고, 1979년 비공학계열인 경영학과와 응용물리학과, 1980년에는 영어영문학과가 신설되었다. 1981년에 '종합대학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3년에는 '대학발전기획위원회'로 확대개편되었다. 1984년 5월에 '1985학년도 대학 학생정원 조정 및 종합대학 개편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10월에 종합대학 승격 인가를 받고, 종합대학인 울산대학교가 출범하였다. 1983년 7월 26일에서 2014년 2월 5일까지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 2월 5일,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 이사회는 울산공업학원 개방이사인 정정길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정몽준 전 이사장은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11개 단과대학, 29개 학부 및 학과, 57개 전공, 6개 대학원을 두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 양성 기관이며,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다. 화랑대(花郞臺)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대한민국 국방부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지휘관인 육군사관학교장은 육군 중장(차관급)이다.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로 시작하여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6월 15일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1948년 9월 5일 육군사관학교로 바뀌었다.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경비사관의 양성을 목적으로 태릉에 설치되었고, 초대교장은 이형근(李亨根) 참령(參領:지금의 소령)이 맡았다. 군사교육 초기에는 일본식이 많이 혼재해 있었는데 점점 미 군사고문단의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1~9기까지는 군경력자들이 입교하여 단기 교육으로 임관했다. 1949년 10기(생도 1기)부터 정규과정으로 2년제 교육실시 방침을 세웠으나, 장교수급 문제로 1년으로 단축되었고, 그나마 한국전쟁의 발발로 많은 동기생을 전쟁터에서 잃은채 1950년 7월 10일 대전에서 소위(少尉)로 임관했다. 1950년 6월 1일 첫 정규 4년제 사관생도들을 모집하여, 333명의 생도들이 입교했으나, 입교 24일만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관전인 생도1기생들과 포천방면의 조선 인민군을 방어하다가, 많은 동기생을 잃었다, 이후, 사관학교가 일시폐교함에 따라 육군종합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단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51년 10월에 경남 진해에서 새로운 체제로 재개교하여 정규 4년제로 재편하여 11기 생도들을 선발했고, 정규교육을 실시하여 1955년 10월 11기생의 임관시부터 학사(學士)학위를 수여했다. 1973년 이후 문학사·공학사 학위도 수여하고 있다. 1994년 11월 이래 공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와 함께 군사과학대학원을 설치 운영하였으나 2001년 대학원 5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로 신입생 선발을 하지 않아 잠정적으로 운영이 중단된 상태이다. 1998년부터 여성 생도의 입학이 허용되어 그 해 25명의 여성이 입학했다. 육군사관학교는 대한민국 국군의 창군(創軍)과 이후의 성장과정에서 영향을 끼쳐왔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군사학 이외에도 2학년 진급 후, 인문사회학이나 이공학 등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을 전공으로 삼을 수 있다. 그 이외에도 체육학 수업을 받게 된다.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태권도는 전원 공인 1단 이상 승단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 사회에서 승단한 내역은 일절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사관학교 내에서 심사를 다시 거쳐야 한다. 만약, 4학년 때까지 승단하지 못할 경우에는 성실의무 위반으로 퇴교조치 까지 당할 수 있다. 태권도 1단 취득 이후에는 태권도, 검도, 유도, 합기도 등 다양한 무술을 익힐 수 있다. 거기에 생도들은 무술 이외에도 승마, 양궁 등의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실제로 경마 기수들은 병역의 의무를 육군사관학교에서 입대해서 승마조교병으로 이행하게 되어 있다. 또한 생도들은 가입교 시에 받게되는 기초군사훈련을 시작으로 매학년 일반학기가 끝난 이후에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일반학기 때에도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의 날을 지정, 중대별 사격 및 각개훈련을 실시한다. 학년별로 받게되는 훈련은 다음과 같다. 모든 생도는 전투 및 기술행정병과로 임관하게 된다. 각 병과학교에서 초등 군사반 과정을 수료 후 야전부대로 배치된다. 대부분 최전방 사단, 해안경비사단등으로 배치된다. 전투병과가 아닌 기술 행정병과(병기, 병참, 수송, 재정, 부관, 정훈 등)로의 전과는 1년간의 복무후에 따로 신청을 받아 선발한다. 선발된 인원들은 해당 특수병과의 초등군사반 교육과정을 수료한 이후에 각 병과별 직책에 보직된다. 육군사관학교를 포함한 각 군 사관학교에서 중간에 퇴교를 할 경우 하사(3학년 하기군사훈련 수료 시점 이후)로 징집대상이 되는데 이 경우 부사관으로서 임관구분은 민간부사관이 되며 이를 거절하면 병사로 복무하게 된다. 다만 이는 병역의 의무가 부과된 남자의 경우이며 여자 생도가 퇴교되면 학칙에 의한 퇴교일 경우 어떠한 과정으로도 군 복무를 할 수 없게 된다. 다만 2003년부터 학칙이 수정되어 질병 또는 성적미달로 퇴교당했을 경우 타장교과정은 물론 연령제한에 걸리지 않을 경우 육군사관학교에 다시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육군의 고급장교 양성 계획에 의해 육군사관학교 졸업한 장교 중 일부가 국내·외 각 전공의 대학원 과정에 위탁교육을 받으며, 군의관과 군 법무관 양성을 위하여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편입하여 수료 후 의사고시 및 사법시험(또는 군 법무관 시험) 합격 후 군의관 및 군 법무관으로 복무한다. 2011년 현재 개방되어 관광 목적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전체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생도시설 및 지원시설은 관람이 불가능하다. 인제대학교 인제대학교(仁濟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대학이다. 설립이념은 '인술제세(仁術濟世), 인덕제세(仁德濟世)'로서, '인술로써 세상을 구하고, 어짊과 덕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79년 3월 개교하였다. 8개의 단과대학과 1개의 독립학과, 1개의 대학원, 4개의 특수대학원이 설립되어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인제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인제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인천대학교 인천대학교(仁川大學校, )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있는 국립대학법인이다. 2009년 8월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한 제물포캠퍼스에서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위치한 송도캠퍼스로 이전하였다. 2010년 3월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이 통합을 하였다. 2013년 1월 18일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하였다. 마스코트는 쌍사자이다. 슬로건은 'INspiring U(인스파이어링 유)' 당신을 깨우는 대학'이라는 뜻으로 인천대학교가 학생들에게 생기와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1979년 1월 학교법인 선인학원(善仁學園)에서 인천공과대학으로 설립하였다. 1979년 12월 6개 학과를 증설하면서 인천대학으로 변경하고, 1984년 대학원을 설립하였다. 1988년 10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선인학원의 사학비리로 인해 1994년 3월 시립으로 전환되었다. 2007년 4월 송도캠퍼스 건설에 착수하여 2009년 7월 30일 준공하고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에서 송도국제도시 안의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2006년 4월 국립 대학 특수법인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2010년 3월경에 인천전문대학과 통합하여 국립대학 특수법인으로의 전환을 추진, 2013년 1월 18일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하였다. 2019년 기준 8개 대학원(일반대학원, 동북아물류대학원, 교육대학원, 정책대학원, 공학대학원, 정보기술대학원, 경영대학원, 문화대학원)과 11개 단과대학(인문대학, 자연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글로벌법정경대학, 공과대학, 정보기술대학, 경영대학, 예술체육대학, 사범대학, 도시과학대학, 생명과학기술대학) 및1개 독립학부(동북아국제통상학부)로 이루어져 있다. 부속기관으로 학산도서관, 정보전산원, 외국어교육센터, 평생교육원, 국제교류원, 교육혁신원 교수학습지원팀, 취업경력개발원, 공학교육혁신센터, 인천한국어학당, 생활원, 체육진흥원, 공자아카데미, 기초교육원, 창업지원단, 중국학술원, 인천국제개발협력센터, 혁신인력개발센터이 있고, 부설연구소 및 기관으로 공학기술연구소, 기초과학연구소, 인문학연구소, 후기산업사회연구소, 스포츠과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원, 동북아발전연구원, 인천학연구원, 통일통합연구원 (부설연구소) 인천방재연구센터, 경영혁신원, 법학연구소, 생물자원환경연구소, 조형연구소, 신약개발연구소, 유라시아연구소, 일본문화연구소, 도시과학연구원, 녹색환경과학센터, 중국학연구소, 생활과학연구소, 소방방재연구센터, 교육발전연구소, 숲유아교육연구소, 노동과학연구소, 동아시아평화경제연구원, 아시아환경에너지연구원, 에너지환경보건안전연구원(EEHS), 첨단소프트웨어연구센터, 동북아물류•경영연구소, 지능형센서융합연구센터, 인천과학영재교육원, 국제교육사자격교육센터, 매개곤충자원융복합연구센터, 에너지엑셀런스 및 스마트시티 연구센터(ES Lab) (기타연구소) 중소기업산학협력센터, 인천대기계전자기술혁신센터, 멀티미디어연구센터, 창업보육센터, 인천녹색환경지원센터, 동북아전자물류연구센터, 동북아물류혁신클러스터, 서구건강가정지원센터 (국책센터) 대학신문사, 영자신문사, 교육방송국, 대학출판부 (부설기관)이 있다. 법인기관에 특수법인인천대학교산학협력단과 재단법인인천대학교발전기금이 있다. 문화, 체육, 교양학술, 취미전시, 종교, 전시과 관련된 여러 동아리가 개설되어 있으며, 중국, 대만, 프랑스, 미국, 독일, 호주, 스페인, 필리핀 등에 있는 여러 외국 유명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선진 외국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아카데미로 119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정규과정 학생수는 2018년 4월 1일 기준으로 학부생 17,048명, 대학원생 1,571명 총 18,619명이 재적하고 있다. 학생 커뮤니티로 아이엔유가 있으며, 주소는 www.inu4u.net이다. 그리고 (구)인천대학교와 (구)인천전문대학의 통폐합으로 인하여 한시적으로 운영중인 캠퍼스인 제물포캠퍼스의경우 2013년 2학기 까지만 특례편입학 학생을 받고 2014년 1학기와 2학기의 특례편입학생은 송도캠퍼스로 받고 마지막으로 2014년 2학기부로 특례편입학 전형은 종료되었고, 2015년 1학기(2015년 6월 19일 까지만) 제물포캠퍼스가 운영된뒤 2015년 6월 20일부로 여름학기부터는 송도캠퍼스로 완전히 철수뒤에는 학위과정의 경우 제물포캠퍼스의 운영을 종료하였으며, 현재는 무한상상실, 시민대학, 인천전문학교 등으로 성지관 건물 하나로만 하여 시민대학으로만 제물포 캠퍼스를 운영중에 있다. 전남대학교 전남대학교(全南大學校, )는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여수시 및 화순군에 있는 대한민국의 종합대학으로 1952년에 발족하였다. 광주, 여수, 화순에 캠퍼스가 있고 본 캠퍼스는 광주광역시 용봉동에 위치하고 있다. 2019년 현재 17개의 단과대학(광주 14, 여수 3), 1개의 독립적인 학부, 1개의 일반대학원, 각 5개의 전문대학원과 특수대학원을 갖추고 있다. 교시는 진리·창조·봉사이고, 교목은 느티나무, 교색은 녹색이다. 약칭으로 전대라고 부르거나 영문 약칭 CNU로 표기하기도 한다. 광주광역시 북구에 본캠퍼스인 용봉캠퍼스, 동구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으로 구성된 학동캠퍼스가 있다. 또한 전라남도 여수에는 둔덕동캠퍼스와 국동캠퍼스가 있으며, 전라남도 화순에는 화순캠퍼스가 있다. 전남대학교의 창학 이념은 학칙에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문 학술에 관한 심오한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연구하는 동시에 인격을 도야하며, 인류와 국가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적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압축하는 것이 교시인데, 바로 진리(眞理, Truth)·창조(創造, Creativity)·봉사(奉仕, Service)가 그것이다. 이는 전남대학교의 교육 목표가 대학 본연의 사명인 '진리의 탐구', 전통문화의 계승과 새로운 '문화의 창조', 지역사회개발을 위한 선도적인 '봉사'에 있음을 뜻한다. 특히 전남대학교는 지역주민의 성원과 기금에 힘입어 창설되었고, 지역사회개발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면서 창립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명감과 필요성은 더욱 강조된다고 하겠다. 한편, 2017년 9월 '어젠다 2021' 선포식을 갖고, 정병석 총장 임기 동안 추진할 대학발전 5대 어젠다(Agenda) - 20대 전략과제 – 100대 핵심사업을 공개했다. 전남대학교는 학생들이 학업에 충실하여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한다. 수능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학업 지원금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학생, 영남권 대학과 교류를 희망하는 학생에게 도전 정신을 고취하는 격려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이 안정된 정서로 학업에 전념하도록 생활지원형 장학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전남대학교는 전 세계 59개국 440여 대학과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75개국에서 온 1,300여 명의 외국인학생이 전남대 캠퍼스에서 수학하고 있으며, 66개국 2,800여 명의 외국인 동문을 대상으로 해외 동문의 현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자기주도적 미래설계로 융합형 창의인재 양성”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학생들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융합형 인재로 성장하여 적재적소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적성과 흥미, 성격과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미래를 조기에 설계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취업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취업센터, 미래설계센터, 양성평등센터, 현장실습지원센터, 대학일자리센터등을 운영한다. 본관, 별관, 분관(의학,법학, 치의학 ), 여수캠퍼스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천 7백여 석의 열람석, 21개실의 그룹스터디룸을 보유하고 있다. 190만여 권의 장서와 국내외 학술지, 학술DB, 전자저널, eBook 등 다양한 학술정보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활용한 교수·학습·연구지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학술정보센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 대학 구성원을 위한 다양한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창의적 인재 양성에 기여함과 동시에 지역민과 함께 하는 한 책읽기 운동 '광주·전남이 읽고 톡하다'를 추진하여 지역사회 독서토론문화진흥에 공헌하고 있다. 현재 학습공유공간 및 복합문화공간 확충을 위한 디지털 도서관 신축을 추진하고 있다. 소장유물 7,000여 점과 발굴매장문화재 2만 여 점을 바탕으로 상설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양한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전남대학교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의 공간인 대학역사관 상설전시실 운영 및 교내구성원들에게 기획전시실 대관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매 학기 다양한 주제로 진행하는 문화강좌와 국내·외 문화답사, 도자기 만들기·한지등 꾸미기 등 체험학습과 온·오프라인의 박물관 퀴즈 여행도 운영하고 있다. 첨단 고가기자재의 공동 관리 및 활용을 통한 수준 높은 연구지원과 교육기자재과 수리지원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 산업체 및 연구소 및 인근 대학들의 연구개발을 위한 시험, 분석을 지원함으로써 R&D 기반시설이 부족한 지역사회의 연구자를 위한 지역중심대학 공동실험실습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위한 “One Health” 실현을 위해 최신 수의학기술을 바탕으로 40여 명의 각 분야 전문수의사들이 CT, Digital X-ray, 초음파 진단기, 복강경, 내시경, 각종 임상병리 검사기기 등 첨단 의료 장비를 통해 동물 질병의 신속한 진단과 전문적이고 체계 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열린 교육과 평생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설·운영하고 있다. 최고지도자, 자격취득, 교양, 음식문화, 건강, 예술, 문학, 경영·경제 등 8개 분야의 여러 과정과 학점은행제 보육 교사, 사회복지사 자격증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완도군, 진도군과 협약을 맺어 지자체 위탁교육과정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학생과 교직원들의 건강관리, 질병예방 및 치료 등을 통해 구성원들이 보다 건강한 대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진료실,구강보건실, 약제실, 병리검사실, 방사선실 등이 있으며, 건강검진, 예방접종, 만성질환관리, 금연클리닉 등 양질의 진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학생실습 및 교수연구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농업 관련 실험실습자원(시설, 포장, 장비) 유지·관리하면서 더불어 캠퍼스 내 녹지를 아름답고 쾌적하게 관리한다. 교내 실습장, 나주실습장, 장성학술림 및 보길도학술림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경쟁력 제고와 학생들의 외국어 능력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외국어 교육과정을 갖추고 있다. 원어민 영어회화, 방학 중 집중강좌, 취업대비 영어강좌, 온라인 영작문 외에도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제2외국어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프로그램으로 정규강좌와 특별 강좌를 운영하며, 내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을 연 4회 개설하고 있다. 2019년 2월, 여수캠퍼스 학생들의 언어교육, 교양교육, 국제협력 및 교류업무 등을 담당하며, 유학생관리 및 정주 지원 등의 업무를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글로벌교육원이 신설되었다. 교수·학생 대상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다. 교양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정규 교육과정과 교수·학습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하는 비정규 교육과정, 이러닝(e-Learning)을 통한 혼합형 교육의 상호 연계를 강화하여 긴 호흡으로 멀리보는 전남대학교의 혁신 교육을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학사·행정 등 각종 정보시스템의 구축·운영, 유무선 네트워크 및 정보통신 환경 제공, 정보보안 활동, 정보기술교육 등 최첨단 정보 서비스로 대학 발전과 사용자 편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광주캠퍼스 4,000여 명의 학생과 여수캠퍼스 968명의 학생, 화순캠퍼스 350여 명의 학생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 생활관 정보 검색실, 독서실, 휴게실, 세탁실, 식당, 편의점 시설은 물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그룹스터디실이 있으며, 자기 계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전북대학교 전북대학교(全北大學校, )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소재한 대한민국의 거점국립대학교이다. 1947년 호남권 최초의 국립대학교로서 설립되었다. 캠퍼스는 전주시, 익산시, 고창군, 군산시, 완주군, 정읍시 등 6곳이 있다. 1947년 10월 15일 개교한 도립 이리농과대학교를 근간으로 군산대학, 호남대학, 명륜대학을 흡수 통합하여 1951년 국립 전북대학교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2007년 개교 60주년 기념 행사와 함께 익산대학과의 통합에 합의, 2008년 통합 전북대학교로 신입생을 모집하는것을 시작으로 동년 3월 통합 전북대학교 출범식을 갖고 공식 출범하였다. 1922년 개교한 이리농림학교를 근간으로 이리농림중학교, 이리농림고등학교로의 개편을 거쳐 1992년 익산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승격 개편하였다. 2004년 12월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구조개혁 방안에 의해 2007년 익산대학이 전북대학교로의 흡수 통합에 합의, 같은 해 12월 교육부로부터 통합을 최종 승인을 받았다. 대학의 비전은 '2020 Global Top 100' 이다. 이것은 2020년까지 대한민국 5위, 세계 100위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전은 총 3단계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1단계는 2012년~2015년 기간을 '특성화 기반 조성 단계' 이며 '20개 분야 국내 5위권, 국내 Top 5 대학 진입' 으로 삼고 있고, 2단계는 2016년~2020년 기간을 '특성화 진입 단계' 이며 '30개 분야 국내 5위권 진입, 세계 200대 대학 진입'으로 삼고 있다. 3단계는 2021년~2030년 기간을 '특성화 성숙 단계' 이며 '40개 분야 국내 5위권, 세계 100대 대학 진입'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비전들은 '특성화 학문 분야 및 융합 학문 분야 집중 육성 추진','수요자 중심의 교육 추구','선진적 교육 지원 시스템 정착' 등을 기초로 두고 있다. 실제로도 이러한 비전을 바탕으로 대학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성화 사업이나 정부 지원 사업 등 많은 사업들 대부분을 유치하였다. 영국 글로벌 평가 기관 QS(Quacquarelli Symonds)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실시한 '2015년 아시아 대학평가'에서 국내 종합대학 11위, 아시아 74위에 랭크 되었다. 2012년 103위에서 2013년 97위로 TOP 100에 진입한 후, 2014년 87위, 2015년 74위까지 순위가 상승하였다. 대한민국 순위 역시 2014년 14위에서 3계단 상승하였다. 거점국립대학교중에서는 서울대학교 1위, 부산대학교 2위에 이어 3위에 랭크 되었다(2015년 기준). 이번 평가는 아시아 17개국 507개 대학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영국 대학 평가 기관 타임스 고등교육(THE)이 발표한 '2015-2016 세계 대학 순위' 평가에서도 대한민국 국립대 2위, 대한민국 종합대학 12위에 올랐다. 중앙일보 대학 평가에서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평가 종합 순위가 22위-21위-20위-19위-22위-16위 순으로 랭크 되었다. 전주교육대학교 전주교육대학교(全州敎育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국립 교육대학이다. 1923년 개교한 전라북도 공립사범학교부터 시작한다. 위치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학로 50 (동서학동)에 있다. 전주대학교 전주대학교(全州大學校, )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천잠로에 있는 4년제 사립 대학으로 신동아학원의 산하에 있다. 1964년 1월 학교법인 영생학원은 전주영생대학(全州永生大學)을 설립하였다. 초대 학장은 마가렛 칼로(M.E.Carlo)였으며, 설립 당시 야간으로 운영하여 직장인들을 위한 고등교육을 담당하였다. 1977년 주간학과를 늘려 주야간으로 전환하였으며, 이듬해 전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82년 대학원을 설치하고, 198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전주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84년 신동아그룹에서 인수하였다. 전주대학교는2002년 교육인적자원부 평가 교육개혁 우수대학 2년 연속 선정 교육개혁 추진 부문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11년 5월, 도서관, 문화시설, 컨벤션 센터, 강의실 등을 갖춘 복합시설인 스타센터가 개관하였다. 2018년 3월, 중소벤처기업부가 주관하는 창업선도대학에 8년 연속으로 선정되었다. 2018년 10월 대학혁신지원 시범(PILOT)사업 대상으로 선정됐다 . 다음은 2018년 기준 전주대학교의 학부과정 일람이다. 2018년 4월 현재 8개 단과대학, 60개 학과가 설치되어 있으며 1개 대학원, 6개의 특수대학원이 있다.
대학본부는 교육혁신본부, 선교봉사처, 교무처, 학생취업처, 입학처, 기획처, 총무처 등 1본부 6처가 있고,
부속기관은 국제교류원, 평생교육원, 정보통신원, 농생명융합기술원, 도서관, 박물관, 체육부, 학생군사교육단, 직장예비군연대 등 9개 기관이 있으며, 단에는 산학협력단, 창업지원단, LINC+ 사업단 등 3개의 단이 있다.
인문과학종합연구소, 사회과학종합연구소, 예술문화종합연구소, 산업경영종합연구소 등 6개의 종합연구소와 지역발전연구소, 문화산업연구소, 한국고전학연구소 등 6개의 특화연구소가 있으며, 기독문학연구소, 교육문제연구소, 역사문화연구소, 지방자치연구소 등 24개의 전문연구소가 있다.
학교법인 신동아학원의 산하학교에는 전주비전대학교, 전주영생고등학교,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가 있다.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은 제주대학교의 단과대학이다. 2008년 제주교육대학교가 제주대학교에 통폐합 되면서 현재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로 운영되고 있다. 광복 후 초기 제주도의 초등교원은 전라남도의 도서지역 초등교원을 주로 양성하던 목포사범학교에서 양성했다. 제주도내 초등교원 양성기관의 필요에 따라 1946년 7월 20일 3개월 과정의 제주도임시초등교원강습소를 설치했다. 1946년 11월 10일 1년 과정의 제주도초등교원양성소로 개편되었고 1951년 11월 7일에 양성소의 수업연한이 3년으로 연장되었다. 입소자는 소정의 교육과정과 교육실습을 거쳤고, 수료자는 검정시험을 통해 제주도 지역 초등교원으로 임용되었다. 1953년 4월 1일 제주도립의 공립사범학교로 개편되어 제주도립사범학교가 개교했다. 1954년 강습과를 특설해 무자격 현직 초등교원에 대한 보수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56년 7월 14일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어 제주사범학교가 되었다. 초등교원을 초급대학 수준에서 양성하는 법의 제정에 따라 전국의 사범학교들이 2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개편됨에 따라 1962년 2월 27일 제주대학 병설 교육과(2년제)로 개편되어 설치되었다. 이후 1968년 10월 26일 제주교육대학으로 개편해 독립 설치됐다. 1984년 3월 1일 2년제 교육대학에서 4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개편되었고, 1993년 국립학교설치령 개정에 따라 제주교육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2008년 3월 1일 제주교육대학교가 제주대학교에 통폐합,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으로 개편되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로 운영되고있다. 제주대학교 제주대학교(濟州大學校, )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거점국립대학교이며, 2008년 제주교육대학교와 통합되었다. 기존의 제주대학교는 아라캠퍼스, 제주교육대학교는 사라캠퍼스가 되었다. 1951년 당시 제주도(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의 교육계 인사와 학자들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서문로에 위치한 제주향교 명륜당을 강의실로 하여 설립한 제주대학원이 모태이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는 도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정부의 1도 1국·공립대 정책에 따라 이듬해인 1952년 도립 2년제 대학인 제주초급대학으로 정식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 학과는 국문과·영문과·법학과·축산과의 4개가 있었고, 초대 학장은 최승만이었다. 1953년 캠퍼스를 제주향교에서 제주고등학교(예전의 제주농업고등학교) 구 삼도리(지금의 삼도동 일대) 교사로 임시 이전하였다가 제주시 용담로 부근에 캠퍼스를 신축하여 1955년에 이전하였다. 동년에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농학과와 상학과를 신설하였으며, 교명을 제주대학으로 변경하였다. 1962년 국립대학으로 전환되면서 도립 중등교육 기관이었던 제주사범학교를 흡수하여 2년제 병설교육과로 개편하였고, 가정학과가 신설되었다. 이와 동시에 법문학부와 이농학부를 설치하고, 관련 세부 학과를 신설하였다. 서귀포시에 새 캠퍼스를 마련해 1964년 이농학부를 이전하여 캠퍼스가 법문학부 중심의 용담캠퍼스와 이농학부 중심의 서귀포캠퍼스로 분리되었다. 1968년 병설교육과를 별도의 2년제 대학인 제주교육대학으로 다시 분리하였고, 1971년에는 수산학부를 신설하여 수산업에 관련된 이농학부의 학과를 수산학부로 이전하였다. 대학원 석사과정과 교육대학원은 1979년에 설치되었고, 1980년 용담과 서귀포로 분리돼 있던 캠퍼스를 지금의 제주시 제주대학로로 통합해 이전하였다. 캠퍼스 이전과 함께 학부도 법문학부·교육학부·농학부·수산학부·지역개발학부로 개편하였다. 1973년 원예학과(現 원예환경 전공), 어로학과(現 해양의생명과학부 해양생명과학 전공), 1984년 증식학과(現 해양의생명과학부 해양생명과학 전공), 1996년 농업대학(現 생명자원과학대학)이 각각 특성화 학과 및 특성화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198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기존 학부를 인문대학·사범대학·농과대학·해양과학대학의 단과대학으로 개편하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개설하였다. 초대 총장은 현평효가 취임하였으며 이후 1990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의과대학·수의과대학 등 단과대학과 경영대학원·행정대학원·의학전문대학원 등 여러 대학원 과정이 개설되었다. 2008년에는 국립대를 통·폐합하고 정원을 줄이려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제주교육대학의 후신인 제주교육대학교가 다시 통합되어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제주시 일주동로에 위치한 옛 제주교육대학교의 캠퍼스는 사라캠퍼스란 명칭으로 교육대학의 캠퍼스가 되었다. 또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를 인가 받아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하였다. 2010년 민단계열 재일동포 사업가가 8억원을 기부하였다. 현재 12개의 단과대학이 있다. 조선대학교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는 광주광역시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이다. 호남 지방 거점 사립대학이자 한반도 최초의 민립대학(民立大學) 으로서 1946년 9월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사회의 인재를 양성’이라는 설립 정신 아래 7만 2,000여 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대학설립동지회에 의거하여 광주야간대학원(光州夜間大學園)으로 설립되었다. 같은 해 11월 호남지역 안에서의 대학이 아닌 전국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이 조성되기를 바라서 조선대학(朝鮮大學)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48년 5월 26일 재단법인 조선대학이 설립인가되었으며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에 영향받았으나 설립과 관련하여 직접 영향받지는 않았고 비리 재단 축출과 학원 민주화와 학원 자주화를 달성하고자 1987년에서 1988년까지 학내에서 일어났던 대학 개혁 운동인 1·8 항쟁 이후 학교법인은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서 파견하는 임시이사 체제로 이어져 오다가 2010년 22년만에 정이사(正理事) 체제로 전환하였다. 교훈(校訓)은 ‘개성교육·생산교육·영재교육’이고 교색(校色)은 청색, 교목(校木)은 소나무, 상징 동물은 백학인데 이것은 무등산 서석골에 있는 본관 건물의 형상이 비상하는 학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며 선비의 기상, 미래의 이상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는다. 약칭으로 조선대 혹은 조대라고 부르며, 학교법인 조선대학교가 운영한다. 2019 년 전 회장은 수백만 달러를 훔쳐서 대학을 1 단계 지위에서 2 단계 지위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으로부터 강등 시켰기 때문에 사임했다. 그 이후 대학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있으며 한국 정부의 감사를 받고있다.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좌절된 호남 지역의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은 해방 직후인 1946년 5월 조선대학 설립동지회[朝鮮大學 設立同志會]와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하면서 부활하였다. 설립동지회원들은 12월부터 트럭을 타고 전라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모금하였는데 이에 군수, 경찰서장, 면장, 시골이장은 물론 기생까지 당시 쌀 2말값에 해당하는 100원짜리 설립동지회원권을 샀고 가난했던 농촌민도 대학을 세운다는 말에 깨, 김, 미역을 내놓으면서 대학 설립에 힘을 보태는, 설립동지회원 자격은 해방된 조국을 건설하려는 신념에 불타는 지식인, 관리, 지주에서 머슴과 촌부까지 계층, 학력, 빈부 격차를 넘어서 호남 지역 전 대중뿐만 아니라 멀리는 제주도에서 충청도와 수도권에까지 완전히 개방되었다. 당시 전라남도지사였던 서민호는 일본 메이지대학교(明治大学)를 졸업하고 일본 문교사회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박철웅에게 설립동지회장직을 맡게 하였고 대학 설립을 준비하고자 도청이 소유한 차량을 사용하게 하고 도지사 명의로 사장과 군수에게 협조 지시 공문을 보내는, 설립에서 일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46년 8월 5일 “개성교육·생산교육·영재교육”의 건학 이념과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사회의 인재를 양성”이라는 설립 이념으로 광주서중학교에서 발족식을 했으며 동년 9월 9일 광주야간대학원(光州夜間大學園)이 설립 인가되었고 9월 29일 광주야간대학원[4학부, 12학과, 1,194명]을 개교하였다. 그 해 11월 23일 광주 지역에 국한된 대학이 아닌 전국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면서 정부수립 전에 인재 양성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이끄는 초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서민호 전라남도지사의 뜻을 좇아 교명을 '해뜨는 아침'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상징하면서 진취성을 띤 기상을 함의한 조선대학(朝鮮大學)으로 개칭하였고 1947년 설립동지회는 회원 7만 2천여 명을 확보하고 1948년 5월 26일 재단법인 조선대학이 미군정청에서 설립이 인가되었는데 이는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당시 국민 4천여만 명 중에서 모집한 주주가 6만 1천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전국 인구가 1,600만 명이던 1947년 당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7만 2천여 명이 성금을 내어 대학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설립 주체의 대중성과 규모로 말미암아 조선대학교는 명실상부한 호남인의 민립 대학으로 출발하였고 설립동지회는 입회 권유문으로써 시급한 과제인 민족국가와 민족문화 건설에 당면하여 획일성을 배격하고 개성을 갖춘 민주주의에 적합한 시민을 양성하고 학문과 사회 현실이 상호 실행하는 연관이 있는 현실에 적합하게 교육하여 전문지식인을 양성하되 자질 있는 학생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53년 3월 10일 조선대학은 조선대학교(종합대학)로 승격되며 문리과·법정·공과대학 3개 대학과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57년 대학원이 박사학위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게끔 지정되었다. 1960년대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이어지는 정치상 혼란기 속에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군부 독재 시기에 접어들어 거듭 부침하는 일변, 1965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시위에 적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과 1966년 각각 사범대학과 의과대학을 설립하였고 1971년 부속병원을 개원하였으며, 체육대학을 설립하였다. 1973년 치과대학, 1978년 경상대학을 설립하였고 치과대학 부속치과병원을 개원하였다. 1979년 외국어대학을 설립하였고 1980년 미술대학을 설립하였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기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이전부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공동 명의로 제1 시국 선언을 발표하였고 항쟁기간에 시민군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을 장악하려고 주도한 5·17 쿠데타를 이용하여 불법성을 띤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조치에 따라 자정을 기해 무기한 휴교령이 발동하고 새벽 2시 제7공수특전여단은 전주 전북대학교 점령 전주를 지나 곧바로 광주로 들어와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하고 학내에는 즉시 계엄군이 진주하였으며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검속하였다. 항쟁 기간 계엄군들은 조선대학교 내에 진주하면서 야영하였는데 당시 시내 곳곳에서 연행되어 온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교내 체육관, 대운동장의 야전 막사에 수용되어 계엄군에게 잔인하고 혹독하게 폭행당했다. 1997년 광주광역시 예산으로 교내 정문 입구 화단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사적지 표지석(사적번호12)이 설치되었다. 호남 지역 민중에 의거해 설립된 민립 대학인 조선대학교를 사유화(私有化)하고자 대학 설립 당시 '설립동지회 회장'이었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1982년 불법으로 정관을 변경하고·부정입학·교수 해임·교수 및 학생들에 대한 폭언과 폭행·공금 횡령·1986년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막기 위해 매일 아침 7시에 전체 교수 및 교직원을 운동장으로 집합시켜 출석을 부르고, 노교수·여교수 할 것 없이 운동장을 두 바퀴씩 구보하게 한 다음 총장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하는 등 온갖 전횡을 일삼던 박철웅 총장과 그 일가에 항거하여 설립 이후 민족과 지역사회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역할과 발전을 기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이 대학구성원들과 지역사회에서 크게 일어나, 대학 설립 당시의 지역 원로들이 젊은 사람들이 일선에 나서야 한다고 하면서 제5공화국 막바지인 1987년 반(反) 군부 독재 투쟁과 맞물려 학생, 교수, 동문들이 중심이 되어 학부모까지 가세하여 '박철웅 총장 퇴진 및 민립대학 환원'투쟁인 1·8 항쟁이 일어났다. 1·8 항쟁은 113일간의 장기농성 끝에 1988년 1월 8일 새벽 4시 학내에 공권력 투입으로 막을 내린 학원 민주화 투쟁으로 항쟁 기간동안 투입된 경찰력이 1,500여명에 이르며 강제진압과정에서 2명이 중화상을, 1명이 투신하였고 45명이 구속되었다. 1·8 항쟁 이후 1988년 9월 이돈명 제8대 총장이 선출되었는데, 취임과 동시에 이돈명 총장은 설립 정신을 받들어 구 경영진에 의해 수십여 년 간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온 각종 제도를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로잡는 등 명실상부한 민립·민주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개혁작업에 착수하였고, 1989년 3월 전국 대학 최초로 예·결산과 집행내역을 공개함으로써 대학 구성원들에게 학교의 운영실태를 알리고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학사행정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2000년 생물신소재연구센터, 가상교육센터, 고전연구원, 계측제어공학교육센터 등을 설립하였고 2001년 디자인대학원을 설립하였다. 2003년 교육인적자원부 지방대학육성사업, 과학기술부 기초의과학센터(MRC)·WISE호남지역센터에 선정되었다. 2004년 한문학과, 경찰행정학과, 태권도학과를 신설하였으며, 조선대학교 산학협력단을 설치하였다. 2004년 군사학부를 신설하고, 육군 31보병사단과 학군협정 조인식을 가졌으며, 4월 동광건설의 황금추 회장이 고시원(황금추관)을 기증하여 준공에 들어갔다. 2007년 12월 중앙도서관 분관 법학전문도서관을 개관하였고, 완도 해양생물연구센터를 개소하였다. 2008년 '장기발전계획2015'를 확정하였는데, 이는 통일한국의 주역이자 동북아시아중심 대학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질적인 도약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조선대학교의 대학발전계획으로서 우수교원확보 효과적 교육/연구환경조성, 수요자중심의 맞춤형 교육으로 창의적 인재 양성, 성과중심의 연구지원 시스템 구축, 투명하고 효율적인 행정 추구, 재정기반 확충과 복지향상, 특성화를 통한 국가와 지역의 미래 선도, 창의적인 문화캠퍼스 조성을 내용으로 하는 7개경영방침을 기본으로 하고있다. 2009년 3월 의학전문대학원과 치의학전문대학원을 개설하였고, 글로벌법학과, 기초의과학부,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였다. 4월 대학 교육 역량강화사업 지원 대학과 지역연고산업육성사업에 각각 선정되었고, 7월 광역경제권 선도산업 인재양성사업에 선정되었다. 1·8 항쟁 이후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서 파견하는 임시이사 체제로 이어져 오던 학교법인은 2010년 22년만에 정이사(正理事) 체제로 전환되었고, 교육과학기술부 지정 융합형원천기술개발사업, 공공복지안전연구사업, 대학 교육역량강화사업 지원 대학에 각각 선정되었다. 2011년 기초교육원을 확대·개편하여 기초교육대학을 신설하였고, 개교65주년을 맞이하였다. 2012년 호남지역 최초로 임상약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광주광역시 동구에 본캠퍼스인 백악캠퍼스가 있고, 북구에 첨단산학캠퍼스가 있다. 조선대학교 백악캠퍼스는 광주광역시 동구 필문대로 365에 위치해 있으며 약 1,068,743m의 교지가 있다. 캠퍼스의 뒤로는 무등산을 끼고 있으며, '백악(白堊)'이라는 명칭은 본관 건물이 전체가 흰색이어서 백악이라고 불리던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려고 하는 모양새로 보인다 하여 '백학(白鶴)캠퍼스'라고도 한다. 총 길이 375m로 전 세계 대학 건물 중 가장 길이가 긴 조선대학교 본관 건물은 학교뿐만 아니라 광주광역시의 상징으로 1947년 착공된 이후 한국 전쟁으로 건립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광주, 전남,북 호남지역 시,도민들과 전 교직원과 학부모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공사를 추진하여 1954년 완공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중앙 5개의 박공지붕으로 구성된 건물이었으나 몇 차례의 증축을 거치며 현재의 19개의 박공지붕 건물로 발전되었다. 1995년 본관 건물은 기둥에 균열이 발견되는 등 노후건물로 판정되어 한동안 폐쇄되기도 하였다. 2003년 한국대학신문의 아름다운 캠퍼스 BEST10에 선정되었고, 2004년에는 본관의 중앙 5개 박공부분이 등록문화재 94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는 야간 경관 조명 공사로 광주광역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새롭게 태어났다. 서석홀, 입석홀, 학생회관, 의성관, 국제관, 해오름관, 항공우주·선박해양공학관 등의 건물이 있으며 중앙도서관 앞 운동장 전면에는 인조잔디 축구장 2면, 하키장 1면, 테니스코트 4면등이 있어 2007년 전국체육대회 등 대규모 체육행사의 보조경기장으로 활용되었고, 2010년에는 노천극장인 1·8 극장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주변에 ● 광주 도시철도 1호선 남광주역이 있다. 1950년 본관 2층 서고에서 시작하여 여러 해에 걸쳐 각 단과대학에 분관을 두어오던 도서관은 2003년 공대분관, 자연대분관, 의대분관을 통합하여 현재의 중앙도서관이 개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전체 5,508평의 규모에 호남지역 최초로 장서수 100만권을 돌파하였다. 일반열람실, 멀티미디어정보센터, 인문·사회과학자료실, 예술·역사자료실, 문학자료실, 연속간행물실, 의학학술정보센터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조선대학교에는 총 3개의 생활관이 있다. 1996년 어학교육원으로 시작하여 2008년 현재의 언어교육원으로 명칭을 변경, 학부 생활영어·영어회화실습 강의를 전담 운영하고 있으며, 산업체 및 시민을 위한 외국어 강좌 개설 및 외국인 임용관리, 외국인 학생을 위한 한국어 강좌, 베트남 분원 세종 한국어 학당, 한국어교사 양성과정, CU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95년에 조선대학교 부설 사회교육원으로 개원하여 2004년에 평생교육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교육과 연구, 사회봉사기능을 수행하며 연간 130여개 강좌를 개설하고 있으며 현재 민간경비교육, 학점은행제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92년 미술대학 건물 2층에 개관하여 1999년 지금의 본관 1층으로 이전하였다. 총면적 706m에 전시실, 수장고, 유물정리실, 학예연구, 자료실 등을 갖추고 있고 소장유물은 2만 7,774점에 이른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대학사실), 제2전시실(정득주 동문 기증유물실), 제3전시실(호남지역사실)로 나뉜다. 제1전시실에는 조선대학교의 연혁과 민립대학건설 과정, 건립 당시의 영상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제2전시실에는 조선대학교 졸업생인 정득주가 기증한 460점의 도자기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제3전시실에는 조선대학교 박물관이 직접 조사하여 밝혀낸 유적과 각 대표 유물 등을 시대별로 정리하여 호남 지역에 자리 잡고 살아온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 다양한 특별전을 열고 있다. 1989년 미술대학 신관을 건립하면서 함께 개관하였고 1992년 정식으로 미술관 승인을 받았다. 미술대학 건물 1층에 위치해있으며 상설전시실인 '김보현&실비아 올드미술관'은 본관 중앙현관 1층에 위치해있다. 조선대학교 첨단산학캠퍼스는 광주광역시 북구 첨단과기로208번길 50에 위치해 있으며, 학생 현장교육 지원·산학 협력연구·산업체 장비공동 활용사업 등을 목적으로 2005년 1만m² 규모의 대지에 설치 되었으며, 기술집약형 벤처기업 및 신기술 사업을 창출하고 벤처기업 응용 및 상품기술 개발에 대한 연구인력을 지원하고 있는 창업보육센터와 호남지역 부품산업 기술기반 조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및 국제산업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산학연관 공동기술 개발 기반 및 기술협력체계를 구축하고 부품산업 관련 첨단고가장비 구입 등의 사업을 하고 있는 부품기술혁신센터가 있다. 그 외에 치과용정밀장비 및 부품기술혁신센터, 첨단부품소재 전문인력사업단, 선박해양공학과가 있다. 2015학년도 기준 학부과정에는 12대학이 설치되어 있다. 괄호 안의 숫자는 2015학년도 입학정원을 의미한다. 일반대학원에는 5계열, 71학과(부), 23협동과정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문대학원은 2개가 있고, 특수대학원은 7개가 있다. 개성교육·생산교육·영재교육의 건학이념 아래 개성을 중시하는 '창조적 인재 양성',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기술 인재 양성',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회 지도자 양성, '국제적 식견'을 겸비한 전문 인재 양성을 교육 목표로 한다. 신입생과 재학생들을 위하여 성적우수, 국가유공자, 복지, 공로 등 다양한 종류의 장학 제도를 운영중이다. 대표적 장학금으로 신입생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으로 선발하는 'CU Leader 장학금'과 교육과학기술부 국책사업 선정결과에 따라 선발하는 'Pride CU 장학금', 학과(부) 장학사정 기준에 따라 선발하는 '백악성적장학금'이 있다. 2011년 2학기에는 학생들의 학비 경감을 위하여 장학금을 22억원 증액하였다. 장학생 선발기준은 해마다 다르며 자세한 내용은 조선대학교 장학안내 홈페이지 에서 확인 가능하다. 21개국 89개 대학교, 8개 단과대학, 29개 학과·기관·연구소 등과 자매결연 중이다. (2012년 11월 기준) 자세한 내용은 조선대학교 국제협력팀 홈페이지 에서 확인 가능하다. 조선대학교 학생회는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총여학생회, 각 단과대학생회 등으로 조직되어 있는 학생자치기구이다. 연례행사인 총장배축구대회, 국토대장정, 학교축제인 대동제 준비와 각종 봉사활동을 기획한다. 2018년 31대 든든이 활동중이다. 교내 방송사인 교육방송국("Chosun University Educational Broadcasting", CUEB)은 1975년 5월 19일 개국하였으며 둘셋가요제, CUEB Festival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매년 5월 18일 5.18 특집방송을 하고있다. 교내 신문인 《조대신문》(朝大新聞)은 민족대학 건설에 이바지, 대학언론 창달에 기여,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이라는 사시 아래 1954년 9월 15일 1호를 시작으로 2011년 5월 1000호를 돌파하였다. 《The Chosun World》를 발행하는 영자신문사는 대학언론의 창달을 도모하고 학내의 학술연구활동 및 학생활동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1970년 4월 20일부터 부정기적으로 발행하다가 1980년 정기 간행물로서 교내 학생 월간지에 등록되었다. 대학부, 문화부, 국제사회부, 웹부 총 4개 부서가 활동중이다. 《민주조선》 교지편집위원회는 조선대학교의 특별자치기구로서 완벽한 편집자율권이 보장된 유일한 학생자치 언론사이다. 1988년 1·8 항쟁 이전까지 학내의 모든 선전물들은 비리재단과 박철웅 총장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학우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하여 1988년 8월 1일 발족하였다. 《민주조선》은 신입생들을 위한 '새내기호'와 편집위원회의 기획에 따른 '특별호', 정식으로 발간되는 '본호'로 구별되어 1년에 1~2회 편집위원회의 기획에 따라 발간된다. 1988년 1·8 항쟁이 끝나고 30년에 걸친 박철웅 총장 일가의 비리를 만화를 곁들여 풍자와 해악으로 엮은 《朴총장님! 한바꾸 더 돕시다》를 출간했는데 2010년 정이사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옛 경영진과의 분규가 발생하자 재발간 하였다. 그 외 신문방송학과의 분과로 방송, 언론, 광고 계통의 인터넷 방송국(CBN), 프레상스, 알라드가 있다. 1·8 항쟁 기간중 제기된 학생복지에 관한 중요성의 인식을 토대로 재학기간 중 발생하는 각종 질병 및 부상에 대한 의료혜택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여 학생들의 건강한 대학생활과 보건향상을 통한 교육환경 개선에 목적을 두고 1988년 학생의료보건조합이 설립되었는데, 조합원이 되려면 학생의료공제조합비를 납부하여야 하고 휴학생도 조합원 자격 취득이 가능하다. 보건진료소는 매년 신입생과 재학생들 대상으로 혈액 및 소변검사와 결핵 검사를 포함, 일반 구강검진 등 8종목의 건강 검진을 실시하여 건강문제를 가진 대상자의 추후관리와 각종 예방접종 등의 건강증진 사업을 하고 있다. 2007년 신규 보건사업으로 개설된 비만 프로그램과 금연 클리닉을 운영중이다. 1971년 우수한 의료인 양성과 지역주민의 보건 향상이라는 목적아래 조선대학교부속병원이라는 이름으로 19개 진료과 200병상 규모로 개원한 조선대학교병원은 2011년 보건복지부에 의하여 최상위 기관인 상급종합병원에 지정되었다. 현재 212실 707병상을 운영중이며, 조선대학교치과병원은 1978년 조선대학교부속치과병원으로 개원하여 2000년 지금의 현대식 치과병원건물로 이전하였다. 현재 10개 진료과 2실 2클리닉을 운영중이다. 대학발전협의회는 2000년 5월 등록금 인상 과정 속에서 학내 현안 문제에 학생 및 대학 집행부 양자간의 생각을 듣고 해단 사안들을 대학을 해결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대학발전협의회는 학교측 3인과 학생회측 3인으로 시작하여 현재 위원장(기획조정실장), 학교측 위원 2인(총학생회장, 학원자주화학생위원회 위원장) 및 간사 2인(기획조정실 기획팀장, 예산팀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대학발전협의회 운영을 통하여 예결산 심의/평가과정에서의 학생 참여 보장이 실현되고 있고 학생복지 및 면학분위기 향상 등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조선대학교에서는 다양한 연례 행사를 개최하는데 대표적인 행사로 장미축제와 대동제가 있다. 2003년 5월 23일 제1회를 시작으로 매년 5월 장미축제 - 백악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장미축제가 열리는데 행사기간에는 유명가수 및 각 단과대학 및 동아리 공연, 의장대 공연 등의 축하공연과 체험행사로 장미와 함께하는 책 만들기, 장미 종이접기 등이 열리고 디지털사진 콘테스트 그리고 장미원 사진 전시회가 열린다. 2011년 장미축제 기간에는 '밤샘 책읽기' 행사가 열렸다. 장미축제가 열리는 장미원(ROSE GARDEN)은 2001년 UNIVERSITY PARK 계획과 연계하여 의과대학 동문들을 중심으로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쉼터로 활용하기 위하여 1000m 규모로 2003년 1차 조성되어 2008년에는 광주은행의 기부금과 지역민, 교직원 및 학생의 뜻을 모아 현재의 장미원으로 확장되었다. 현재 8299m 규모에 총 227종 1만 7994주의 장미가 식재되어 있으며 장미원 내에는 양병도 동문의 기탁금으로 만들어진 서림정이 있다. 10월에는 조선대학교의 축제인 대동제가 학내 1·8 극장 또는 캠퍼스 거리에서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각 단과대학 혹은 동아리의 주막 부스 및 프리마켓 설치, 조대 골든벨, 유명가수 초청공연 등의 행사를 진행한다. 2011년 대동제의 캐치프레이즈는 교양과 열정, 사랑과 우정이 콸콸 넘치는 축제를 통해 건강하고 발전적인 대학 문화를 이끌어가자는 의미의 '콸, 콸, 콸'이었다. 총동창회가 발족되기 전 1949년 7월 창립 총회를 가지고 발족한 동창회는 1987년 1·8 항쟁 당시 학원민주화를 위해 농성·투쟁하던 후배 재학생들을 불순세력으로 매도하고 박철웅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관제데모까지 행하는 등 반민주적, 반동문적 행태를 하였다. 이를 계기로 뜻있는 동문들끼리 구교동문회, 민주동문회를 창립하여 학내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노력하던 중 총동창회의 필요성을 깨닫고 1989년 구교동문회, 민주동문회, 약학대학동문회, 의대동문회, 구동창회(민주적 동창회 건설에 동의하는 인사), 총학생회 대표들이 모여 총동창회 건설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지금의 총동창회가 발족하였다. 2001년 재단법인 조선대학교 총동창 장학회가 설립되었으며 동문 의료 우대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다. 2010년 총동창회는 비리집단인 옛 경영진 측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대 동창회'와 회장, 이사장, 사무국장 등의 명칭 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조선대 동창회라는 명칭은 총동창회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타적 권리를 인정받았다. 또한 2011년에는 '조선대 동창회'의 회장, 이사장, 사무국장을 상대로 낸 회장직 부존재 확인 등 소송에서도 승소하여 그 적통을 인정받았다. 매년 말 정기총회 및 '조대인의 밤' 행사를 개최한다. 조선대학교의 시립대학 전환과 관련하여 처음 논란이 일었던 것은 김덕중 교육부 장관이 1999년 7월 23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조선대학교 시립화 방안을 검토중에 있다'는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조선대학교 교수협의회와 노동조합은 '대학 구성원들의 합의가 없는 일부 세력에 의한 시립화 움직임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이후 시립대학 전환 관련 논의는 뜸해졌다가 2010년 1월 18일 진보신당의 윤난실 광주시장 후보자가 '광주는 두 개의 국립대만 있을 뿐 서울(서울시립대학교)과 인천(인천대학교)처럼 지역의 일꾼을 전문적으로 육성할 시립대학이 없다'며 '조선대학교의 시립대학 전환이 필요하다'는 공약을 내세워 다시 도마 위에 올랐고, 2011년 3월 23일 정병국 문화체육부 장관이 '광주시가 조선대학교를 인수해 아시아중심대학으로 만드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며 조선대학교를 시립대학으로 전환해볼만 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학벌 없는 사회 광주모임은 '사립학교법이 존재하고 있는 현재 구조 아래에서는 민립대학이라는 조선대학교의 설립이념을 구현할 수 없다'며 시립대학 전환을 촉구하고 나섰으며, 학내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원래 민립대학으로 출발한 조선대학교의 역사성에서 비롯하여 시립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으나, 강현욱 학교법인 조선대학교 이사장은 '광주시나 대학 쪽과 사전에 어떠한 교감도 없이 시립대학 전환과 관련한 발언이 나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며 이에 대한 난색을 드러냈다. 조선대학교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준비는 문민정부 시절 '로스쿨 제도 도입'이 거론되기 시작할 때부터 되어왔었다. 2004년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가 법학전문대학원 도입과 관련된 세부사항들을 발표한 이후 조선대학교는 법과대학 정원을 200명으로 증원하고 대학 건물 신축, 법조인 출신 교수진을 영입하는 등 로스쿨 유치를 위하여 발빠르게 움직였다. 2005년 4월에는 동문들로 구성된 '법학전문대학원 유치후원회 결성대회'를 열어 1인 1만원 기부운동을 통하여 재정적 후원 기반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 와서는 국회의 '로스쿨법' 통과가 미적해지는 분위기 속에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단식 농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조선대학교는 557억원의 투자액을 쏟아부어 지방 사립대의 부진함 속에 학교의 명운을 걸고 로스쿨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2007년 11월 30일 '봉사하는 법률가. 리더형 법률가. 전문화된 법률가. 창의적인 법률가 양성'이라는 교육이념과 특성화분야로 문화법을 결정, 교육인적자원부에 로스쿨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2008년 1월 30일 로스쿨 예비인가 대학에서 탈락하였고, 이에 대학측은 긴급 대책회의와 긴급기자회견, 궐기대회를 법과대학 모의법정에서 갖고 예비선정의 효력정지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포함한 모든 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으며, 로스쿨 인가 촉구를 위한 법인 이사진 전원사퇴 기자회견을 가졌다. 2월에는 서울행정법원에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상대로 로스쿨 심의자료 증거보전을 신청했으며, 교직원과 동문들이 참여하여 예비인가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며 상경집회를 가졌다. 2월 4일 결국 조선대학교가 빠진채로 예비인가 대학 확정안이 발표되었고, 2월 12일 학교법인 조선대학교는 교육인적자원부를 상대로 한 (광주권 4개 대학에 대한)예비인가 처분 취소·예비인가 효력정지 가처분·(조선대학교에 대한)예비인가 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위한 소장을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했다. 파문은 확산되어 학교에서 동문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내부책임론이 고개를 들면서 책임을 추궁하기도 하였다. 4월에는 로스쿨 심의자료 증거보전신청이 각하되었으며 5월 학교는 평등권·학문의 자유 침해 등의 이유로 동국대학교 등 5개 대학과 함께 헌법소원을 제기하였고, 8월에는 로스쿨 예비인가 처분 취소 소송에서 패소판결을 받았다. 조선대학교가 제기했던 '경쟁 관계에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가 로스쿨 대학을 선정하는 법학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선정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광주 권역에서 로스쿨을 인가받은 전남대·전북대·원광대·제주대의 인가를 취소 요청하는 소송에 대하여는 법학전문대학원설치법 제13조는 법학교육위원이 심의 대상 학교에 재직하고 있다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척사유를 규정하고 있는데 로스쿨 예비인가 대학 및 정원을 심의·의결한 2008년 1월 15차 회의에 전남대 교수가 참여한 것은 제척조항에 저촉되어 위법하지만 인가를 취소하는 것은 공공복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덧붙였고, 결국 2009년 12월 로스쿨 탈락이 대법원 확정판결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이후 학교에서는 법과대학 로스쿨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8년 1·8 항쟁 이후 조선대학교는 임시이사가 파견된 사학중 가장 오랫동안 임시이사 체제로 이어져오고 있었다. 2007년에 들어 정이사 체제로의 전환에 대한 논점이 뜨겁게 부각되기 시작하며 정이사 체제 구성안이 확정되었으나, 1·8 항쟁의 원인이었던 옛 경영진 복귀와 관련하여 분규가 다시 발생하였다. 이에 학교측은 학사운영에 차질을 우려하며 조속한 정이사 임명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조선대학교 관련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결국 교육과학기술부는 임시이사를 추진하였고, 학내에서 정이사 선임 촉구와 관련하여 동맹휴업에 들어가기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정이사 체제로의 전환은 2009년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교직원과 동문, 학생 등이 조선대학교 정상화 및 전 경영진 복귀저지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이사 파견저지 및 정이사 쟁취를 위한 투쟁선포식을 갖고 교육과학기술부의 임시이사 파견 움직임에 대해 저지 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임시이사 파견에 강행 조짐을 보이자 학교측 교무위원회는 천막농성에 돌입하였고,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 또한 조선대학교 정이사 체제 확립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결국 교육과학기술부는 임시이사 재파견을 결정하였으며, 이후 사학분쟁위원회와 조선대학교 구 재단의 갈등과 정이사 선임 재연기에 대하여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김영진 의원은 유감을 표명하였다. 2009년 12월 10일 사학분쟁위원회는 학교법인 조선대학교의 정이사 선임을 공식적으로 의결하고 이사장에는 강현욱 전(前) 전라북도지사가 선출되었으며, 정이사 7명이 선임되었고, 추가로 3명의 이사가 선임되었다. 정이사가 선임되었음에도 옛 경영진은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사장을 고발하는 등 공세를 펼쳤다. 2010년 11월 2일 광주지방법원은 학교법인 조선대학교가 박철웅 전 총장의 일가를 상대로 제기한 조선대학교와 관련된 명칭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명칭 등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을 통하여 옛 경영진의 정통성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으로 학교 경영진 복귀를 시도해 온 옛 경영진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은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3월 28일, 조선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남성(34)이 동기인 여자친구를 4시간 넘게 감금·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 측의 무성의한 대응 및 사후 처리와 광주지방법원의 말도 안되는 판결로 분노한 피해자측이 SBS에 제보하면서 여론의 분노를 점화하여 뒤늦게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지아센추럴대학교 조지아 센추럴 대학교 (개명 이전, 조지아 크리스찬 대학교)는 1993년에 미국에서 비영리 대학(Georgia School of Theology)으로 설립되었으며 2003년 6월 종합대학 (Georgia Christian University)으로 승격되어 음악대학, 경영대학, 기독교대학, 신학대학원, 컴퓨터과학대학에서 3개의 수료과정 과 13개의 준학사, 학사, 석사, 박사 (음악, 목회학, 철학) 학위를 수여하고, 또한 어학 프로그램인 ESOL 과정이 있다. 2017년 5월부로 (Georgia Central University) 조지아센추럴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2019년 현재 총장은 김창환 박사이다. 중부대학교 중부대학교(中部大學校, )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금산군과 경기도 고양시의 사립 대학이다. 중부대학교의 시작은 1983년 3월 중부학원이 당시 대전중앙교회 담임목사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을 지낸 이영수 (목사)에 의해서 설립되면서였고 1984년 2월 중부 신학교로 인가되어 동년 12월 중부 사회 산업 학교로 교명 개칭되었다. 1993년 3월 1일에 교명이 다시 중부대학으로 변경하였고 1995년 3월 1일에는 현재의 중부대학교로 개칭하였으며 2015년 3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41만3천m부지에 건축공학과, 디자인과 등 22개 학과 입학정원 865명과 재학생 총 3500여명의 고양캠퍼스가 개교하였으나 교육부가 재학생들의 이전을 불허하면서 큰 마찰을 빚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중부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중부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진주교육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晉州敎育大學敎, )는 대한민국의 국립 교육대학이다. 1923년 경상남도 공립사범학교로 설치인가를 받았으며 학제가 개편됨에 따라 1940년에 "진주농업학교 가교사"에서 "관립 진주사범학교"로 설립되어 1942년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63년 2년제 진주교육대학으로 승격하여 초대학장에 박해권(朴海權)이 취임하였으며, 1983년 교육법 개정에 따라 4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하였고, 1993년 국립학교설치령에 따라 진주교육대학교으로 개칭하였다. 교훈은 성실, 창의, 봉사이다. 2010년 현재 1개 교육대학원, 12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속 기관으로 정보자료관, 생활관, 대학언론사, 진주문화교육연구원이 있고, 부설 연구기관으로 초등교육연수원, 과학교육연구소 등이 있고 그 밖에 부설 초등학교가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 380번지에 위치해 있다. 진주교육대학교는 국가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교육환경의 변화와 교육환경의 변화에 창의적으로 대처하는 지성, 타인과의 공존을 도모하는 덕성, 초등교육에 대한 유능한 교원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남과학기술대학교(慶南科學技術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에 위치한 국립 대학이다. 학령인구 감소 및 지방대 경쟁력 약화 등에 대처하기 위해 경상대학교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경상대학교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두 대학은 '2017년 국립대학 혁신지원사업(PoINT)유형Ⅱ'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국립대학 간 선택과 집중, 인적·물적 자원 및 교육과정 공유 등 상호협력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기 위한 교육부의 핵심 정책이다. 주요 내용은 두 대학간 연합대학 구축이다. 이상경 경상대 총장은 취임 1주년을 맞아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같은 지역 내에 있는 경남과기대와 연합 후 대학통합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장은 동일 지역인 진주시에 있는 국립대인 경남과기대와 연합대학을 구축한 후 2021년까지 대학 통합을 완성할 계획이다. 백석대학교 백석대학교(白石大學校, )는 1994년 3월, 학교법인 백석대학교가 설립한 충청남도 천안시의 개신교 계열 4년제 대학이다. 1993년에 설립된 기독신학교가 그 모태이며, 1994년 기독신학대학으로 승격되고, 1995년에 4년제 일반대학인 기독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96년 천안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것에 이어, 2006년 3월, 현재 교명으로 변경하였다. 다음은 2019년 기준 백석대학교의 학부과정 일람이다. 별도의 단과대학 설치 없이 운영되고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백석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일반대학원은 설립되어 있지 않으며, 전문대학원 1개원, 특수대학원 6개원이 설립되어 있다. 청운대학교 청운대학교(靑雲大學校, )는 충청남도 홍성군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캠퍼스를 둔 대한민국의 사립 대학이다. 1995년 이종성 충남방적 회장이 설립한 충남산업대학교가 모태로, 1998년 7월 청운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9년 현재, 호원대학교와 함께 대한민국의 유이한 산업대학이다. 청운대학교 홍성캠퍼스에 학부 과정 6대학이 설립되어 있으며, 각 단과대학에 맞게 학과가 편제되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은 2019년 기준 홍성캠퍼스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인천캠퍼스는 두개 대학이 설립되어 학과가 편제되어 학부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인천캠퍼스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청운대학교는 특수대학원 1개원만 설립하여 석사 과정만 제공하고 있다. 청운대학교는 충청남도와 인천광역시에 교사가 소재한 사립 산업대학으로, 홍성군과 미추홀구에 소재한다. 홍성캠퍼스의 경우 캠퍼스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지만, 인천캠퍼스의 경우 교사 시설이 빈약한 반면, 주변 기반 시설이 양호한 편이다. 청운대학교 홍성캠퍼스는 남장리에 위치하며, 약 38만m²의 교지가 있다. 캠퍼스는 동일 법인 산하 전문대학인 혜전대학교와 교사를 공유한다. 홍성읍 중심가가 인접하여 근처의 주거 단지가 위치하며, 따라서 한국폴리텍4대학 홍성캠퍼스 등 일부 교육 기관과 인접한다. 캠퍼스의 지형은 비교적 평탄하다. 청운대학교 인천캠퍼스는 도화동에 위치하며,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의 부지 일부를 매입하여 조성했다. 청주교육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淸州敎育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국립 교육대학이다. 1941년 청주사범학교로 개교하였다. 주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청남로 2065 (수곡동)에 위치해 있다. 초당대학교 초당대학교(草堂大學校, )는 전라남도 무안군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립 대학이다. 의약품 유통업체인 백제약품과 의약품 생산기업인 초당약품공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학교이다. 지난 1979년 김기운 백제약품㈜ 및 초당약품공업㈜ 회장을 초대 이사장으로 학교법인 초당학원이 설립됐으며 이듬해 백제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이후 지난 1993년 2년제 초당산업대학교로 출발, 1998년 4년제인 초당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2012년에 일반대로 전환하였다. 2014년 4월 개교 2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8년 기준 초당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별도의 단과대학은 두고 있지 않다. 초당대학교는 일반대학원 1개원과 특수대학원으로 산업대학원 1개원으로, 총 2개원을 설립하여 석·박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총신대학교 총신대학교(總神大學校, )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와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사립 대학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설립하였으며, 네덜란드 중심의 화란 개혁신학과 영미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적전통을 따른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무오하고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으며, 칼빈주의 혹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바탕으로 학문연구와 영성 및 인성교육을 실시하여 인류사회의 국가 및 교회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다음은 총신대학교의 2018년 기준 학부 과정 일람이다. 총신대학교는 일반대학원과 1개의 전문대학원, 5개의 특수대학원을 설립하여 석사, 박사 학위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서울지하철 4호선 건설 때 건설비를 지불하였고, 이를 명목으로 기존 이수역에 자교명을 이름에 넣었다. 그러나 서울지하철 7호선이 개통되면서 이수역보다 더 가까운 남성역이 생기게 되자 1997년 서울시 지명위원회가 기존의 총신대 명칭을 남성역으로 옮길 것을 결정했고, 2000년 7호선 개통과 함께 기존 총신대입구역은 이수역으로, 남성역은 남성(총신대입구)역으로 역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유동 인구가 많은 환승역 이수역에 자교 이름이 노출되기를 원했던 대학측이 이에 대해 거세게 반발, 결국 2001년 역명 재개정을 통해 4호선 이수역에 한해 총신대입구역으로 변경되었고, 7호선 남성(총신대입구)역은 남성역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2006년 '지하철 역명제정 기준 및 절차'를 시행되면서 5 ~ 8호선의 역명은 대학명으로 정하지 않기로 정함에 따라, 같은 역임에도 4호선에는 총신대입구역, 7호선에는 이수역의 다른 명칭이 쓰이는 유일한 역이 되었다. 김영우 현 총장은 2000만원 배임증재 의혹과 총장·이사장 이중 재직 논란 등을 빚고 있다. 그는 2017년 9월 검찰에 기소되었으나, 2017년 12월 총장에 재선임돼 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김 총장 측에 반발하는 학내 구성원들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면서 2018학년도는 정상적인 학사 운영이 불가능한 실정이며 3월 중순에는 운동장의 천막 강의실이 등장했다. 충북대학교 충북대학교(忠北大學校, )는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에 있는 대한민국의 4년제 국립 대학이며, 충청북도의 거점국립대학교이다. 1951년 도립 청주초급농과대학으로 개교하여 1953년 청주농과대학으로 승격하고, 1956년 충북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77년에 공과대학 · 농과대학 · 사범대학 · 사회과학대학 설립이 인가되면서 국립 충북대학교로 승격됐다. 15개 대학(학부), 일반대학원(5개 계열) 및 8개 전문·특수대학원이 개설되어 있다. 교훈은 진리, 정의, 개척이다. 충북대학교 학생과 학술교류가 체결되어 간·직접적으로 학생 교류 중인 학교는 총 9개국 18개 학교가 있다. 충북대학교와 학술교류 증진을 위해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는 2011년 5월 25일까지 세계 34개국 93개 대학 2개 기구가 있다.충북대학교 대외협력과 와세다 대학 와세다 대학(, )은 일본의 명문 사립 대학이다. 대학 본교는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와세다()에 위치한다. 도쿄 6대학 중 하나이며,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함께 최상위권 사립 대학으로 유명하다. 교토부에 있는 도시샤 대학과 국내 유학 제도를 통해 교류하고 있다. 졸업생들은 정치인, 문학자, 경영자, 언론인, 스포츠 선수 등으로서 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본 대학 출신 중에 내각총리대신이 된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2018년 현재, 도쿄 대학 다음으로 많은 7명의 전후 내각총리대신을 배출하였다. 대학의 약칭은 와세다() 또는 소다이(). 오쿠마 시게노부가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인해 재무 장관에서 하야한 뒤 설립한 도쿄 전문학교를 전신으로 하며 일본의 사립 대학 중에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등과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대학령에 근거한 대학이 된 곳 중 하나이다(자세한 내용은 구제대학 참고). 2011년 현재 10개의 학술원 아래 13학부와 21연구과(대학원)를 설치하고 있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영국류의 정치·경제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을 모델로 설립했기 때문에 정치·경제 학술원이 오래전부터 간판 학부로 있다. 정치경제학부를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와세다 동문회’라고 불리는 학벌을 형성하고 있고 출판, 신문, TV·라디오 방송국 등 매스 미디어 분야에도 다양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국제 교류가 활발해 아시아·구미 각국의 유학생들이 많다. 문학 학술원(제1문학부, 제2문학부, 문학부, 문화구상학부)도 와세다의 간판 학부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이나 나오키상의 수상자가 많아 와세다 문학의 역사와 함께 많은 소설가, 작가, 문예평론가 등을 배출하고 있다. 공학 학술원(공학부, 기간이공학부, 창조이공학부, 선진이공학부)에서도 특히 건축학과는 대기업 건설사를 비롯한 건설 업계에도 학벌을 형성,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학문의 독립’(), ‘학문의 활용’(), ‘모범 국민의 조취’()를 이념으로 하며 교지가 정해져 있다. 전신인 도쿄 전문학교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1913년에 제정됐다. 와세다 대학은 1882년(메이지 15년) 10월 21일에 창설한 ‘도쿄 전문학교’를 전신으로 한다. 당초에는 창립자 오쿠마 시게노부의 별저가 도쿄부 미나미토시마군 와세다촌에, 또한 교사가 미나미토시마군 도쓰카촌에 있었으므로 관계자가 ‘와세다 학교’(), ‘도쓰카 학교’()라고 말하던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도쿄 전문학교’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1892년경에는 전문학교의 별명으로서 ‘와세다 학교’라고 불리게 됐고 이후 1902년 9월 2일자로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의 승격을 계기로 오쿠마에 의해서 대표되는 와세다의 지명을 본떠 ‘와세다 대학’이라고 개칭했다(상용한자 개정 이전에는 ‘세’의 한자 ‘’(도)는 ‘’(구)가 아닌 ‘臼’(구)의 ‘稻’(도)자를 사용하여 ‘’이라고 표기했다. 졸업 시의 학위기에는 현재도 구자체가 사용되고 있다). 교가 《수도의 북서쪽》()은 와세다 대학 창립 25주년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학생들로부터 모집하여 23편을 접수했으나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심사위원 쓰보우치 쇼요와 시마무라 호게쓰가 소마 교후에게 작사를 부탁했다. 소마는 열흘 동안 숙고한 끝에 ‘수도의 북서쪽’이란 걸작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그 즈음의 강사였던 도기 뎃테키가 곡을 붙였다. 1882년에 오쿠마 시게노부가 창립한 도쿄 전문학교가 전신이다. 그 후 1902년 와세다 대학으로 개칭했고 1920년 대학령에 의거하여 대학이 됐다. 더 나아가 1920년에 대학령에 근거하는 대학이 됐다(1920년 2월 2일, 대학령에 의한 사립 대학 설립 인가 제1호). 교장(명예직) 학장 2004년 9월부터 모든 학부 및 대학원 연구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학술원’이라는 전임교원이 소속한 조직 밑에 속해 있는 독자적인 조직 형태를 띠고 있다. 학내의 의사결정 등 대학 행정도 학술원교수회 단위로 이뤄진다. 따라서 이 항목에서는 학부 및 연구과를 학술원 단위로 기술하기로 한다. 2017년 와세다 대학 대학원 입학안내에는 아래와 같은 연구과가 소개되고 있다. ※비즈니스 전공(전문 대학원, 아시아 태평양 연구과 국제경영학 전공과 와세다 대학 대학원 파이낸스 연구과 전문직 대학원, 야간 대학원의 통합에 의해 신설) 아이즈 야이치 기념 박물관은 1998년 5월 와세다 캠퍼스에 개관한 종합 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입주하는 2호관은 1925년에 도서관으로 건조된 학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설계는 이마이 겐지가 담당했으며, 오쿠마 강당과 함께 도쿄 역사적 건조물 제1호로 지정됐다. 아이즈 야이치가 사비로 수집한 동양 미술 자료를 중심으로 근현대 미술, 고고·민속 자료 등이 소장돼 있다. 와세다 대학 출판부는 학교 법인 와세다 대학의 출판 부문에서 와세다 대학 교수의 저서를 비롯해 다양한 출판 활동을 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2002년도에 5건, 2003년도에 4건이 채택됐다. 각 분야에서 2007년도에 4건, 2008년도에 3건, 2009년도에 1건이 채택됐다. 2007년도에 이공학술원에서 새롭게 2개 사업이 채택됐다. 모든 학부에서 유학생을 받고 있으며 2016년 11월 1일 현재, 112개국에서 5,431명이 유학을 하고 있다. 유학생 수용 수는 2015년 5월 1일 현재, 일본 내에서 1위이다. 현재는 유학생 8,000명 수용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지금까지의 적극적인 유학생 수용 체제가 높은 평가를 받아 문부과학성의 ‘국제화 거점 정비 사업’(글로벌 30)의 대상으로 정치경제학술원(정치경제학부), 이공학술원(3학부 3연구과), 사회과학종합학술원(사회과학부)가 선정됐다. 국적 별로 보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유학생이 많다. ‘아시아의 교육·학문 연구의 결절 기관’을 목표로 학문 연구에 있어서는 ‘현대 아시아학의 창생’ 을, 교육 면에서는 ‘아시아 지역 통합을 위한 글로벌 인재 육성 거점’ 을 내걸고 야심찬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아시아 중시의 자세는 건학 정신인 '동서 문명의 조화와 융합'을 따르고 있으며 전쟁 전 재학생의 25%가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1996년 사회과학부가 와세다 대학 최초의 중국인 전임 교수가 되는 리우 지에를 비롯하여 어학 교원 이외의 외국 국적 연구원의 초빙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교수진 세계화도 진행했다. 향후 외국인 교원 비율을 20%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4년에는 거의 모든 교수가 영어로 수업하는 ‘국제교양학부’를 설치, 도쿄 6대학 최초로 영어 수업만으로 학위 취득이 가능한 대학이 되었다. 2010년 9월부터는 이공학술원의 3학부 3연구과에 영어 수업만으로 학위 취득이 가능한 ‘국제 코스’가 설치됐다(국제화 거점 정비 사업(글로벌 30)의 일환으로 정치경제학술원, 사회과학종합학술원에도 설치). 2014년 3월 도쿄도 나카노구 나카노의 경찰대학교 부지에 ‘와세다 대학 국제 학생 기숙사’(Waseda university International Student House, 약칭 WISH)가 개설됐다. 와세다 대학 사회제휴추진실에 의하면, 아래의 지방 자치체와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와세다 대학에는 학교 법인 와세다 대학이 설치하고 있는 다음의 부속 학교들이 존재한다. 학내에서의 지위는 학부와 같이 취급받고 있으며 이 밖에 부속 학교는 아니지만 같은 계열의 학교가 존재한다. 이들은 다른 학교 법인에 의한 설치로 와세다 대학의 안에서는 취급이 다르다. 와세다 대학에는 다른 학교 법인이 설치하고 있는 '계속고'가 존재한다. 다른 법인으로 인해 부속 학교와는 다르지만 와세다 대학의 추천 입학 전형을 가진다. 귀여니 귀여니( 이윤세(李允世), 1985년 1월 ~ )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작가다. "귀여니"는 "귀여운 이"를 줄여서 만든 필명이다. 경기도 용인시 토월초등학교와 수지중학교, 충청북도 제천시 제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귀여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글을 쓰고 만화책으로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나눠주고는 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쓴 것은 2002년부터였다. 필명 귀여니는 남동생에게 온 메일의 아이디였는데, 귀여니가 그것을 맘에 들어해 쓰기 시작하였다. 2001년 인터넷 사이트의 소설 연재란에 《그 놈은 멋있었다》를 연재하여 인터넷 조회수 800만, 판매부수 50만을 기록했으며, 2004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녀의 소설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에서는 5개월째 판매부수 1위를 기록하며 판매부수 60만을 돌파했다. 2004학년도 성균관대학교 수시 전형에서 소설 출판 경력이 방송연예활동경력으로 인정되어 연기예술 특기자로 합격하여 학교를 다녔다. 2011년에는 3년의 공백기 끝에 판타지 소설 《팜피넬라》를 발표했다. 2012년 서울종합예술학교 방송구성작가예능학과 겸임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소설 《팜피넬라》에 대한 부진, 드라마 극본도 준비했다가 방송 편성이 무산되는 등 침체기를 겪다가 이에 대한 힐링의 방법으로 라오스로 혼자 여행을 갔다왔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2014년 7월 《어느 특별한 한 달, 라오스》라는 에세이를 출간했다. 이 에세이는 지금까지 냈던 책과 달리 필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실명으로 출간한게 특징이다. 귀여니의 작품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 여론이 있다. 우선 문학적 완성도가 낮다는 점이 지적된다. 귀여니의 소설에서 지적되는 대표적인 문제점은 문법적인 미숙함과 지나친 이모티콘과 통신체의 사용이다. 예)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글의 전개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묘사조차도 전부 이모티콘으로 대체하고 있다. 귀여니의 글은 완전히 소설의 형태를 벗어나, 시나리오, 소설, 수필 어느 장르에도 해당하지 않는 탈문학작품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귀여니의 글은 기존의 기성 문학장르와는 달리 완전히 새로운 장르에 해당하여 비록 문법적으로는 미숙하나 창조성이 엿보인다고 판단하는 의견도 일부 있다. 2004년,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귀여니의 소설이 나름대로 소녀들 세계의 사건을 그리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의의가 있다며 옹호의 글을 쓴 바 있다. 그 외에 비현실적인 설정이 지적받고 있으며 중국에서의 성공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2005년 발표한 작품 《아웃 사이더》는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아웃 사이더는 인터넷 소설가 송정실의 ‘아우어 스토리’와 줄거리와 대사가 유사하다며 표절 소송을 당했지만 표절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다. 온돌 온돌(溫突) 또는 구들은 방 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 난방 방법이다. 방구들(房―)이라고도 한다. 한옥의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고, 아궁이에서 생성된 열기를 머금은 뜨거운 연기가 방바닥에 깔린 구들장 밑을 지나면서 난방이 되고, 그 연기는 구들장 끝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의 난방법이다. 온돌과 비슷한 개념의 대표적인 장치로는 불목이나 개자리가 없는 원시적인 형식의 (아궁이와 고래만으로 구성된) 로마 시대 대형 목욕탕 온수 공급 방법인 하이포코스트(hypocaust)가 있다. 또한 히포코스타에서 파생되어서 중세 시대 성의 난방 장치로 쓰인 글로리아(gloria)도 들 수 있다. 2018년 4월 30일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서양의 벽난로나 일본의 이로리 등은 열원을 직접 이용하는 난방 장치에 비해, 온돌은 열기로 구들장과 구들장 아래의 고래를 데워 발생하는 '간접 복사열'을 난방에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잘 만든 구들장이라면, 아궁이에서 직접적인 열원을 제거한 이후에도 구들장의 열기가 비교적 장시간 지속된다. 좋은 구들의 조건은 이 '잔류 온기'가 얼마나 오래 가는가에 달려 있다. 단점은 구들(방바닥)이 갈라지거나 깨지면 연기가 올라와서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열효율의 문제도 들 수 있는데, 자기 전 불을 지펴서 그 잔류 온기로 온 밤을 지내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 과하게 열을 가하게 된다. 또 다른 단점은 온돌의 구조상 아랫목과 윗목에 온도차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시대와 지방에 따라서 온돌 설계 구조에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요건만을 맞추어 온돌을 만든다면, 방 밖에 있는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고 그 아궁이의 열기가 구들장 아래에 있는 고래를 타고 밖에 만들어둔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온돌은 열의 전도, 복사와 대류를 적절하게 이용한 장치다. 불기를 머금은 연기가 지나가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부뚜막의 아이: 불을 피워 열기를 발생시키는 장소로 방 밖에 있다. 불목(불고개, 부넘기 또는 부넹기)은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기가 방의 바닥 (구들) 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곳이다. 구들개자리는 방의 첫 부분에 해당하며 이 윗부분이 아랫목이다. 고래는 방고래(房 - )라고도 하며 아궁이에서 땐 강한 불이 탈 때 생기는 열과 연기가 나가는 방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길이다. 구들장은 고래를 덮은 얇고 넓은 돌로 방바닥을 이루는 구조로, 한국의 조상들은 구주로 운모를 사용하였다. 그 중 백운모를 사용하였는데 백운모가 열 보존 시간이 크고, 절연체였기 때문이다. 구들장에 쓰이는 다른 암석들에도 주로 운모라는 광물이 대부분 함유되어 있다. 방바닥은 구들장 위에 흙을 발라서 만드는데 보통 두껍고 질긴 종이에 기름을 먹인 유지 장판을 깔아 마감했다. 그 밖에도 광목에 기름을 먹여 쓰거나 솔방울·은행잎 등을 짓찧어 얇게 펴 바르는 등 오래가고 물이 스미지 않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방바닥을 만들기도 했다. 온돌은 기원전 5000년쯤의 신석기 유적(함경북도 웅기군 서포항 굴포리 유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4세기경의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온돌이 방으로 만들어진 통구들의 형태는 고려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부유층에서 사용했으며 병자나 노인의 방에 주로 사용되었다. 만드는 어려움이나 관리, 그리고 연료의 소모로 볼 때 고급스러운 난방 방법으로 여겨졌다. 태종 17년 (1417년) 윤5월 14일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 설립한 지 얼마 안된 성균관의 유생들 중 병을 앓는 이들을 위해 온돌방 하나를 만들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볼 때 전면적으로 온돌방을 사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 7년(1425년)에는 성균관의 온돌을 5간으로 늘리도록 하였으며 16세기가 돼서야 전부 온돌방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침상을 사용하였으며 나무마룻바닥이었다. 조선 명종 18년(1563년) 2월 4일에 임금의 침실에서 화재사고가 있었는데 이때의 정황 설명 중에서는 임금의 침상에 작은 온돌구조를 만들어 자리를 덥혔는데 이때 부주의로 돌을 잘못 놓아 불기가 침상에 닿아 불이 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년) 3월 5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광해군 때에 이미 사대부의 종들이 사는 방조차 모두 온돌인데 나인들이 판방에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나인들의 방도 온돌방으로 바꾸었다는 대목이 나와 궁궐에 온돌의 보급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후가 유난히 추워서 소빙하기라고도 불리는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면서 온돌은 점점 많이 보급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보통 백성의 초가집에도 온돌이 널리 사용되었다. 온돌은 한국의 추운 북쪽 지방에서 발달한 방식으로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한국의 모든 지역에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온돌은 한국인의 생활 습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방바닥을 달구는 방식이다 보니 온돌은 한국인들이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온돌 덕분에 무슨 일을 하든 방바닥에 직접 앉아서 하는 데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실내 가구에도 영향을 미쳐 가구의 크기나 가구에 달린 문과 손잡이의 위치도 앉아서 생활하는 데 알맞게 만들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유학의 생활화로 방 안에 아궁이와 가까운 지점인 아랫목을 상좌로 하여 방 안에서도 자리의 위계 질서를 세우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미국 알래스카의 언알래스카섬에서도 발견되어 더욱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온돌은 아궁이의 연료로 주로 짚, 또는 나무를 사용했다. 숙종 때의 김덕기는 동래에서 말똥으로 만든 땔감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숯이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온돌은 땔감으로 나무를 너무 많이 소모하였으며 환경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땔감은 면포와 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생활용품이었다. 궁궐에서는 시목을 공물로 제공하는 기인(其人)이 땔감과 숯을 공급하였으며 민간에서는 보통 사내아이들이 나무꾼 노릇을 많이 하였다. 1960년대 이후로는 주연료가 연탄으로 대체되었으며 현재는 석유, 가스를 사용하는 보일러가 많이 보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산화탄소 중독의 피해를 줄임과 동시에 열효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돌 형식을 활용한 온수 보일러가 개발되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온수 보일러가 가정 난방법의 주력으로서, 전통의 온돌을 대신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도시 지역 등의 온돌용 연료 수급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전통 온돌을 보기 힘들며, 그 대신 온수 보일러, 온돌 마루, 심야 전력을 이용한 전기 온돌 등의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편의성, 전통적 연료의 공급 문제, 가스 중독 등의 안전성의 이유와, 설치와 관리의 용이함 때문이다. 현재의 온수 보일러는 연탄, 석탄, 석유, 전기 등, 다양한 에너지를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종류의 연료를 혼용할 수 있거나, 연탄이나 석탄 연료의 반자동 교체, 심야 전력의 사용 등 열효율과 편의성을 고려한 비용 절감형의 새로운 설계가 계속 연구 개발되고 있다. 온돌용 연료 구입에 큰 장애를 받지 않는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전통 온돌이 시공되고는 있지만, 연료와 가스 중독 문제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등은 관계 법령에 따라서 엄격한 시공 규격과 시공 감독 사항이 적용된다. 사람이 사는 집 외에도, 축사와 온실의 난방법으로 농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 (짚과 나무 혹은 연탄)를 사용하는 전통 설계 형식의 온돌이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온수 파이프의 동파나 관리상의 이유 등으로 온수 보일러의 설치가 적당치 못하고, 석탄, 석유, 가스 등의 지속적인 공급이 어려운 오지, 산지 고지대, 도서지역 등에서는 아직도 전통 온돌이 빈번하게 시공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1980년에 대한주택공사에서 조사한 난방방식은 연탄아궁이 42.5 %, 연탄보일러 13.9 %, 단독기름보일러 2.3 %, 중앙난방 보일러 3.0 %, 재래식 아궁이 37.9 %, 기타 0.4 %다. 한반도 지역의 온돌문화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 부뚜막식 화덕과 연도가 설치된 원시적 형태의 난방방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기원전 3세기~1세기 경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원시적 온돌 유적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 점들로 미루어 보아 한반도에서 온돌문화는 약 2천년이상 전승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의 온돌은 서양 벽난로와 다르게 연기를 높은 굴뚝으로 바로 내보내지 않고 불을 눕혀 기어가게 만들어서, 불의 윗부분을 깔고 앉아 사용하는 탈화좌식(脫靴坐式) 바닥난방이 특징으로 방내부에 연기를 발생시키지 않고 오래 난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온돌문화는 한국의 총체적인 주거문화로 바닥난방 및 생태환경 활용 기술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생활관습과 규범이 포함되어 있음. 이러한 생활양식은 주택, 실내건축, 가구의 형식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한국을 대표하는 ‘온돌방’ 문화로 대중화되었다. 여름철의 기후환경에 대응한 마루방과 겨울철의 기후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온돌방은 한국을 대표하는 주거 요소들로, 현재 온돌방은 중국 및 만주지방의 바닥난방 방식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한민족의 고유한 주거기술 및 주생활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온돌문화는 기술적 발전과 주요 주거공간의 형식적 변화, 생활방식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그 원형인 바닥 난방 방식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온돌문화는 오래전부터 전승되고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어 한국사회의 주생활과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쳐온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유산으로 한반도가 처했던 혹한의 기후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고 대처해온 한국인의 창의성이 발현된 문화라는 점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그 가치가 있다. 이에 온돌문화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종목을 보존 전승하고자 한다. 다만, 온돌문화는 한반도 전역에서 오래도록 한국인들에게 공유되고 관습화된 한국인의 주생활문화이므로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종목으로만 지정한다. 이소라 이소라는 아래 사람을 가리킨다. 브누아 망델브로 브누아 망델브로(, 1924년 11월 20일 ~ 2010년 10월 14일)는 폴란드 태생 프랑스와 미국의 수학자이다. 프랙털 기하학 분야를 연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예일 대학교의 명예 교수, IBM 토머스 J. 왓슨 연구소의 명예 펠로이다. 바르샤바에 사는 리투아니아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 가족이 프랑스 파리로 옮겼고, 브누아는 파리의 저명한 수학자였던 외삼촌 숄렘 만델브로이트(숄렘 망델브로이 Szolem Mandelbrojt)에게 수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망델브로 가족은 튈로 옮겼다. 브누아 망델브로는 1944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가스통 쥘리아와 폴 레비(Paul Lévy)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47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나서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2년 동안 항공학을 공부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1952년에는 파리 대학에서 수리과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누아 망델브로는 1949년부터 1957년까지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연구원이었다. 그 사이에 존 폰 노이만의 지원으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1년동안 있었다. 1955년에 Aliette Kagan과 결혼하여 제네바에서 살다가 1958년에 미국으로 옮겼다. 미국에서 망델브로는 뉴욕 주 요크타운 하이츠에 있는 IBM의 토머스 J. 왓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었다. 그 뒤로 계속 IBM에 있는데, IBM 펠로, 그리고 그 뒤로 명예 펠로가 되었다. 1955년부터 망델브로는 정보 이론 · 경제학 · 유체 역학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자기닮음 구조가 실제 세계의 문제에도 통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1975년에 망델브로는 이런 구조의 도형을 나타내는 말로 ‘프랙털’이라는 낱말을 만들어서 그의 생각을 〈〉(프랙털 - 형태, 우연성과 차원)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1979년에 하버드 대학교에 교수로서 두 번째로 초빙되었을 때, 망델브로는 가스통 쥘리아와 피에르 파투(Pierre Fatou)가 전에 연구했던, 복소평면 위의 프랙털인 쥘리아 집합을 연구했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해 공식 z + c에 의한 프랙털이 c 값에 의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하다가 망델브로 집합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1982년에 망델브로는 《The Fractal Geometry of Nature》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프랙털이 전문 수학과 대중 수학 모두에 퍼질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다. 1987년에 IBM에서 퇴직하고 나서 그는 예일 대학교 수리과학의 명예교수(Sterling Professor)로 재임했다. 2003년에 일본 상을 받았다. 망델브로의 성은 이디시어 또는 독일어로 아몬드 빵을 뜻하는 Mandelbrot(‘만델브로트’)이다. 영어식 발음은 사전에 따라 다른데, Merriam-Webster Collegiate Dictionary와 Longman Pronouncing Dictionary에는 (맨덜브로트), Bollard Pronouncing Dictionary of Proper Names에는 (맨덜브로), American Heritage Dictionary에는 (만덜브롯)이라고 나와있다. 한글 표기로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 용례집 에는 프랑스어식으로 "브누아 망델브로"로 표기한다. 쥐테를린 쥐테를린체 (Sütterlin schrift) 또는 독일어 필기체는 베를린의 시각 예술가인 L. 쥐테를린(L.Sütterlin (1865-1917))이 만들었다. 쥐테를린체의 모델은 옛 독일 법원 기록소에서 사용하던 글씨체이다. 이 글씨체는 독일의 학교에서 1915년부터 41년까지 가르쳤으며, 구세대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또한 2차대전 당시 독일군도 많이 사용했다. 칼빈대학교 칼빈대학교(칼빈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개신교 계열 사립대학교이다. 개혁주의 노선을 따르며, 개신교 장로교파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이다. 2015년 교육부 대학알리미에 의하면 호남신학대학교와 함께 유일하게 등록금을 2.3% 인상한 대학교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1954년 용산구에 설립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야간신학교를 모체로 한다. 신학교는 1959년 임시 폐교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열렸으며, 1962년 교명을 칼빈신학교로 변경하였다. 1997년 칼빈대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평택대학교 평택대학교(平澤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개신교 계열 사립 대학교이다. 1910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사 아더 태펀 피어선 박사의 유지에 따라서 1912년에 설립되었다. 신학과를 모태학과로 시작되었다. 총장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신은주 박사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평택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평택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평택대학교는 경기도의 사립 일반대학으로, 용이동에 캠퍼스를 두고 있다. 약 13만m의 부지를 가지고 있다. 교지 주변은 재개발 지구 등 주거 구역과 인접해있고, 따라서 동방학교, 현촌초등학교, 동일공업고등학교 등 다수의 교육기관과 인접해있다. 도심 부근에 자리잡고 있어,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고, 조형물 등이 다수 설치되어 있다. 평택대학교 도서관은 1993년 설립되었다. 중앙도서관과 함께, 피어선신학도서관, 제2도서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장서 수는 2017년 기준 381,804권으로 집계되고 있다. 평택대학교의 생활관은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포항공과대학교 포항공과대학교(浦項工科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효자동 산 31번지)에 있는 이공계열 연구 중심 사립 대학이다. 우리나라와 인류사회 발전에 절실히 필요한 과학과 기술의 심오한 이론과 광범위한 응용방법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소수의 영재를 모아 질 높은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지식과 지성을 겸비한 국제적 수준의 고급인재를 양성함과 아울러, 산·학·연 협동의 구체적인 실현을 통하여 연구결과를 사회에 전파함으로써 국가와 인류에 봉사할 목적으로 1986년 12월 3일 설립되었다. POSTECH, 포스텍이라고도 한다. 비록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영국 더타임즈와 세계적인 연구평가기관인 톰슨-로이터가 주관하는 세계대학평가에서 28위를 차지, 2012년 톰슨로이터가 선정한 세계 100대 혁신기관에 선정, 2012년부터 시작된 개교 50년 미만 대학을 대상으로 하는 더타임즈 평가에서 2012년~2014년 3년 연속 세계 1위, 2010년~2013년 QS 아시아권 대학평가 특성화대학 부문 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4개 연구단을 본 캠퍼스에 유치하였으며, 국가적인 기반연구시설인 3세대 및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지난 2016년 9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설치,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물질의 미세구조와 현상을 나노미터/펨토초(10-15) 단위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포항공과대학교는 포항시 남구 효자동 산 3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총 50만 6,000여평에 달하는 부지에 자리잡은 대학시설물은 1986년 19개동 연면적 5만7458m(1만5482평)으로 개교 이래 교육·연구시설 확충을 위해 매년 시설물을 추가로 건립하였으며 105개동 38만 5624m(11만 6651평)이 건립되어 개교 당시 대비 7.5배가 증가했다. 대부분 재학생이 거주하고 있고, 개교할 당시에는 4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후 계속 건물을 지어 현재에 이르렀다. 포항공과대학교의 기숙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남학생 기숙사는 1~9동까지 학부생 기숙사이며, 10~19동은 남자 대학원생 중 미혼자를 위한 기숙사이다. 여학생 기숙사는 1~2동이 여자 학부생을 위한 기숙사이며, 3동은 대학원생 기숙사이다. 기본적으로 2인 1실이다.단, 16동은 국제 영어 생활 자치동 (DICE, Dormitory for International Culture Exchange)으로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같은 기숙사를 사용하고 있다. 지곡회관은 기숙사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학생 식당, 교직원 식당, 아카데미 식당, 버거킹, 동아리 세미나실, 편의점 등 다양한 복지 시설이 입점해 있다. 지곡회관의 바깥쪽에는 "지곡연못"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포항공과대학교의 도서관이다. 2003년에 완공되었으며 4월 25일에 개관하였다. 청암(靑巖)이라는 명칭은 설립 이사장인 청암 박태준의 호를 딴 것이다. 2층에는 참고자료, 3층에는 각종 단행본들이 비치되어 있고, 4층에는 각종 저널, 논문 등이 비치되어 있으며, 5층에는 각종 세미나실과 전용 열람석이 있다. 6층에는 간단한 간식 등을 구입할 수 있는 매점 및 휴식공간과 옥상정원이 있다. 외부인의 이용은 연 2회의 회원 모집을 통해 가능하며 오후 10시까지 사용할 수 있다. 내부인의 경우 5층 열람실은 24시간 이용할 수 있고, 2~4층 열람실은 오후 10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시험 기간이 될 경우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며 도서관 개방시간을 연장한다. 자료 검색 및 도서관 공지사항은 도서관 홈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으며, 자료 검색을 위한 모바일 전용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2004년에 대한건축사협회에서 수여하는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부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7년부터는 도서관 블로그, 트위터등의 운영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이벤트로 이용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2013년 도서관 명칭을 청암학술정보관에서 박태준학술정보관으로 변경하였다. 통나무집은 포항공과대학교의 교내 주점이며, 총 67평의 2층 건물이다. 1층은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으나 2층은 재학생 전용이다. 운영시간은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이며, 겨울 방학 기간 중에는 새벽 1시까지 운영한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포항공과대학교의 강의동 지역과 기숙사 지역을 연결하는 계단이다. 7개의 단과 78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맨 아랫단이 12층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11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78계단은 구성원들이 주요 행사들을 알리기 위한 공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축제,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이를 알리기 위해 계단에 색지를 붙여 "78공고"라 부르는 거대한 글자나 그림을 만들곤 한다. 총학생회 등의 각종 자치 단체 사무실, 동아리방, 보건실, 여행사, 북카페, 우리은행, 스낵바 코너 등이 위치해있다. 트랙, 농구 코트, 배드민턴 코트, 헬스장, 라켓볼 코트, 탁구장 등이 위치해 있다. 재학생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해맞이 한마당은 포항공과대학교 축제의 공식 명칭이다. 매해 5월에 열리며 일반적으로 전야제를 포함하여 3일간 열린다. 한경대학교 한경대학교(韓京大學校, )는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다. 1939년 안성공립농업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977년 국립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산업대학으로 승격되었고, 2012년, 종합대학으로 전환하였다. 국문 약칭은 한경대(韓京大)이며, 영문 약칭은 HKNU다. 한경대학교의 학부과정은 4대학이 편성되어 있으며, 대학원 과정은 일반대학원과 4개의 특수대학원이 설립되어 있다. 한경대학교는 경기도 소재 국립 대학으로, 안성시에 캠퍼스가 위치하고 있다. 석정동에 위치하는 캠퍼스는 약 16만m²로, 국립 대학 중에서는 다소 좁은 편이다. 다만 캠퍼스가 도심변에 위치해있어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안성교육지원청과 안성시립도서관, 국민건강보험공단 안성지사 등이 주변에 위치해 있다. 정식 명칭은 한경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부속농장이다.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에 있으며, 면적은 95,000m²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韓國放送通信大學校, )는 대한민국 교육부 소속 4년제 국립 원격 대학교로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장은 장관급 예우를 받는다. 방송대는 행정적으로 4개의 단과 대학의 구성 아래 각 학과가 구성되어 있고 지역적으로 13개 특별시 및 광역시도에 지역대학을 두고 있다. 대전과 충남(세종 포함), 광주와 전남, 대구와 경북을 제외한 지역에는 1시도 1지역대학을 두고 있으며 지역대학의 산하에 시군학습관(서울특별시 내의 경우 학습센터라는 명칭으로 학습관을 설치)을 두고 있다. 다만 경기도의 경기북부 지역 학습관은 서울지역대학, 부천시는 인천지역대학 소속이다. 경기지역대학은 경기남부에만 학습관이 있다. 관례적으로 특정 도시가 광역시로 승격될 경우 시학습관은 지역대학으로 승격된다. 가장 최근에 승격된 지역대학은 2002년 경남지역대학 울산시 학습관에서 승격된 울산지역대학이 있다. 전국총학생회 1, 단과대학총학생회 4, 지역대학총학생회 13, 학과학생회 22개(지역대학별 학과학생회 미포함) 방송대 학생회는 학칙에 근거하여 전국총학생회(1개), 단과대학총학생회(4개), 지역대학총학생회(13개), 학과학생회(22개학과 * 13개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과학생회 별로 연합회장을 선출(추대)하고 각 단과대학의 연합회장 중 1인을 각 단과대학총학생회장으로 선출한다. 전국총학생회는 총학생회장(직접선거 당선직), 인문과학대학총학생회장(선출), 사회과학대학총학생회장(선출), 자연과학대학총학생회장(선출), 교육과학대학총학생회장(선출), 수석부총학생회장(서울총학생회장 당연직), 지역부총학생회장(지역총학생회장 중 선출), 실무부총학생회장(임명직), 교무부총학생회장(임명직), 각 지역총학생회장(직접선거 당선직), 중앙상임위원회위원(서울총학생회 임명직) 및 국장으로 구성한다. 2012년 1월 3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여타 국공립대보다 상대적으로 사회·교육계 영향력이 큰 방송대가 제대로 대접받아야하고 ▲국내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캠퍼스인 13개 지역대학을 갖춰 총장 활동영역이 여타 대학보다 넓으며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50만 동문과 18만 방송대 재학생의 자긍심 고취와 국·내외 이미지 제고는 물론 입학 정원 확보 측면에서 지위 변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함께 하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총장을 기존의 차관급 예우인 특2호봉에서 장관급 예우인 특1호봉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특1호 대학 승격은 지난 장시원 총장 재임 기간(2006~2010년) '5대 숙원 사업'의 하나로 본격 추진되어 왔다. 2014년 9월 29일 교육부의 임용제청 거부로 인한 총장공백사태는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에서 재심의가 이루어지며 해결의 기미가 보였다. 교육부에서는 같은해 11월 방송대 총장 임용 1, 2순위 후보자 모두 적격하다고 판정했다. 이후 여론수렴 과정에서 내홍을 겪었지만 2018년 2월 14일자로 1315일만에 류수노 농학과 교수가 총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한국산업기술대학교 한국산업기술대학교(韓國産業技術大學校, )는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산업통상자원부가 출연하여 설립한 사립 대학이다. 실무위주의 교육을 통해 현장적응력이 강한 전문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영문 약칭은 KPU이며, 국문 약칭으로 산기대(産技大)가 쓰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설립한 대학으로서 연구 및 실험실습의 비중이 큰 편이다. 또한 학부생에게 연구실을 개방하여 교수, 대학원생, 기업체 연구원, 학부생이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인 엔지니어링 하우스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2007년 초, 지상 17층에서 지하 1층까지의 규모의 약 1,400여명의 입주생 및 40여개 이상의 엔지니어링 하우스를 수용할 수 있는 기술혁신파크(Techno Innovation Park)를 개관하였다. 1990년대, 지식기반 정보화산업사회에 걸맞는 기술인력을 배출하기 위한 산업정책의 일환으로서 통상산업부(現 산업자원부)에서 1991년 생산기술연구원을 통해 공학교육제도 개선방안을 제안하고 관련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1993년 4월 "신경제 5개년 계획"에 반영되어 동년 가칭 산업기술대학법이 제정되었다. 1994년 7월 기술교육제도 개선의 일환으로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설립·운영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당시 95년 10월에 결정된 설립계획에 따르면 98년 개교를 목표로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시화공업단지 내에 설립하여 학과 개수는 8개, 정규과정(1~4학년) 입학정원 480명, 상급과정(3~4학년) 편입학정원 240명으로 총 학생 정원은 2,400명으로 정해졌고 96년 3월까지 기본 및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동년 4월에서 98년 2월까지 건축공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95년 12월 6일 가칭 학교법인 한국산업기술대학 창립총회가 팔래스호텔 카네이션홀에서 열렸고 학교법인명칭(학교법인 한국산업기술대학)과 대학명칭(한국산업기술대학)이 결정되었다. 1996년 11월 28일, 제1회 학교법인 이사회에서 교명이 한국산업기술대학교로 변경되었고 건설비 및 출연재산 등 설립예산을 확정되고 이어 동년 12월 4일 신축공사 기공식이 시행되었다. 1997년 2월 26일 개최된 제2회 이사회에선 설립추진 본부장(총장 내정)으로 김유채 생산기술연구원 기술고문이 선임되고 설립추진본부에서 대학 운영에 관한 각종 규정이 되고 설치 학과 및 교과과정을 결정하기 위한 직무분석과 관련 교과목 개발, 교육제도 연구가 추진되었다. 7월에는 설립인가를 위한 교수 32명을 초빙하고 이어 12월 20일 최종적으로 설립 인가가 완료되었다. 1998년 1월 3일부터 원서접수를 받아 제1기 신입생 7개학과 560명을 선발하고 1998년 3월 7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함께 거행되었다. 초대 김유채 총장이 재임한 설립기 시기에는 IMF 시기를 겪던 시기여서 긴축 재정 운용과 건설비 확보 부족 및 공사 지연으로 인해 개교 당시에는 공학관 A, B동만 완공되여 에서에서 강의 및 행정업무가 이곳에서만 이뤄졌었다. 입학식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중앙광장에서 이뤄졌었고 식사도 건설사에서 운영하는 임시 식당에서 이뤄졌었다. 98년 봄에는 행정동이 완공되고 이어 종합교육관, 공학관 C, D동, 기숙사, 체육관이 차례대로 완공되었다. 98년 봄에는 대학의 로고, 교훈, 개교기념일 제정이 이루어졌다. 1999년 10월 21일, 제2대 최홍건 총장이 취임하고 대학조직의 변화와 다방면에서 외연을 확대하고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대학 입학 정원이 기존 630명에서 1,380명으로 증원되었고 교육체제도 4학기제에서 2학기제로 변경되고 게임공학과가 신설되고 지식기반·에너지대학원과 산업기술·경영대학원도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2000년 7월 26일, 지역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 행정기관, 연구기관들의 현경연구 역량이 집결된 시흥환경기술개발센터가 설립되고 청단 전자, 통신제품 생산업체의 조립장비 기술새발, 검사장비의 신뢰성 평가 기술기분을 구축하고자한 조립검사장비개발기반구축센터가 2001년에 설립되었으며 재직자를 대상으로 시·공간에 제약 없이 인터넷을 통해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원격기술지원센터도 2001년 9월 5일에 설립되었다. 이어 기숙사와 홍보실, 행정 서비스 제공을 위한 학생서비스센터, 건강지원실, 상담실 등이 설지되고 대학의 종합적인 정보화를 위해 부속기관에 설치되었던 전자계산서를 대학본부의 전산정보실로 개편하였다. 그 외에도 도서관도 1,304㎡로 증축된것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2002년 2월 21일 한국산업단지공단과 업무협약이 체결되었다. 인근 산업단지의 종소기업 기술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교수와 학생, 기업의 기술 인력이 동일 공간에서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산학협력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학교 내에 지하 1층에서 지상 18층 규모의 기숙사, 게스트 하우스, 각종 편의시설과 엔지니어링 하우스가 포함된 기술혁신파크(Techno-Innovation Park, 약칭 TIP)가 설립되었다. 2009년 12월 1일 유네스코 ATLASE(Advancing Tomorrow's Leaders for Achieving Sustainable Economy) 프로그램 MOU를 체결하였고 2010년 6월 28일 산학연계교수제도가 도입되었고 2011년 9월 15일 IT융합 재활의료기기 연구센터가 개소되고 2012년 3월 1일에는 산업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전환되었다. 디자인학부와 경영학부를 제외한 모든 학과가 공과대학으로 따로 단과대학이 편성되어 있지 않고, 일반대학원과 지식기반기술·에너지대학원(전문대학원),산업기술대학원(특수대학원) 3개의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초로 게임개발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게임공학부를 2002년에 개설하였다. 또한 산업체가 요구하는 맞춤형 재교육을 위해 산학협력학부가 설립되어있다. 개교 초기인 1998학년도부터 2000학년도까지 8주 4학기 제도가 시행된 적이 있었다. 2019년 기준 학부 재학생은 6,879명, 석사과정 재학생은 351명, 박사과정 재학생은 총 58명이 재학 중에 있다. 한국산업기술대학교는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해 있다. 학교 정문으로 반월특수지역 시화지구를 마주하며 후문쪽으로 시흥시 상업지구가 있다. 캠퍼스 내에는 강의실로 활용되고 있는 공학관, 기숙사와 엔지니어링 하우스가 들어서 있는 기술혁신파크(Techno Innovation Park, 약칭 TIP), 벤처기업들이 입주해있는 창업보육센터, 한국어 교육센터와 평생교육원 등이 들어서 있는 시흥비즈니스센터, 각종 실습실과 강의실, 입주업체들이 있는 산학융합관, 도서관과 동아리방 등이 있는 종합관, 행정동이 있다. 각 과의 사무실과 강의실, 실습실 등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2002년 9월, 공학관 E동과 P동이 준공되어 E동에는 컴퓨터공학과, 게임공학과를 위한 실습실과 에너지대학원 및 산업기술대학원 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공연장, 기업 후원으로 마련된 전경련홀, 대한상의홀 등의 다목적홀이 갖춰져 있다. 공학관 A동에는 기계공학과 사무실, B동에는 기계설계공학과, 메카트로닉스공학과 사무실, D동에는 신소재공학과 사무실, E동에는 컴퓨터공학과, 게임공학과 사무실, G동에는 지식융합학부, 경영학부 사무실, P동에는 나노공학과 사무실이 있다. 한려대학교 한려대학교(漢麗大學校, )는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사립대학이다. 이홍하가 설립한 4개 대학 중 하나이며, 2014년 8월 29일 교육부에 의해 경영부실대학으로 지정되었다. 한려대학교는 별도의 단과대학을 두지 않고 학부 과정을 편제하며, 일반대학원과 3개 특수대학원이 설립되어 있다. 한림대학교 한림대학교(翰林大學校, )는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4년제 사립 대학이다. 의사이자 교육자였던 윤덕선이 자신의 아호인 일송을 따 1982년 1월 학교법인 일송학원을 설립하고 같은 해 3월 한림대학을 개교하였다. 한림대학은 1989년 종합대학인 한림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교훈은 사랑, 진실, 자율이며 교표는 한림대학교의 이니셜 H와 L을 이 새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교표의 청색은 춘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청록색은 품위있는 젊음을 상징한다. 한림대학교는 7개 단과대학, 1개 독립학부, 일반대학원과 6개의 특수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밭대학교 한밭대학교(한밭大學校, )는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국립 대학이다. 공과대학, 정보기술대학, 건설환경조형대학, 인문대학, 경상대학 등 5개 단과대학과 20개 학과, 2개의 학부, 4개의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학협력을 위한 기관으로 화학소재상용화지역혁신센터(RIC), 대덕테크노밸리교육원, 창업보육센터 등 16개가 있으며, 부설연구기관으로는 건설안전기술연구소, 도시환경연구소, 에너지청정기술연구소 등 19개 기관이 있다. 지식경제부의 이노폴리스 캠퍼스로 선정되어, 대덕연구개발특구와 독일 프라운호퍼 연구소 간 공동 연구개발을 지원받고 있다. 한밭대학교에는 5개의 단과대학과 20개의 학과, 2개의 학부가 있다. 한성대학교 한성대학교(漢城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이다. - 학점은행제 학사학위 과정 호원대학교 호원대학교(湖原大學校, )는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호원대3길 64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산업대학교이다. 대구과학대학교 대구과학대학교(大邱科學大學校, )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사립 전문대학이다. 대구과학대학교는 1960년 1월 “참교육으로 미래를 밝히리라”라는 건학 이념으로 영송(嶺松) 김종옥(金鍾玉) 박사가 3년제 초급대학으로 설립한 대구간호학교이다. 교훈은 “진리․창의․박애”이다. 1972년 12월 대구 간호전문학교로 승격, 1978년 12월 학교법인 한별학숙설립으로 대구간호전문대학으로 승격 인가를 받았다. 1981년 10월 대구여자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83년 11월 대구전문대학을 거쳐, 1998년 5월 대구과학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1년 11월 지금의 대구과학대학교(大邱科學大學校, Taegu Science University)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62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간호 양성기관 지정,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교직과정 설치 승인을 받았으며, 1984년 부설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96년 교육부 평가 결과 대구·경북지역 1위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측량 최우수기관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특성화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고, 2009~2011년까지 대구지역 전문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산학협력중심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2012~2016년까지 산학협력 선도 전문대학(LINC)에 선정되었다. 2009~2013년까지 교육역량 강화사업 우수대학으로 5년 연속 선정되었으며,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 수업연한 4년제 간호학과로 지정되었다. 영남권 전문대학으로서는 유일하게 10년 연속 국토교통부 국가 공간 정보 교육 거점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2004~2011년 학교기업(레꼴)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 교육과학기술부 기관 평가 인증대학 선정, 2014년 교육부 및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주관한 '2014년도 교원양성기관 평가'에서 간호학과와 유아교육과가 최우수 등급인 'A' 등급을 획득했다. 2014년 교육부 특성화 전문대학 육성사업에 5년간 선정되었다. 대구과학대학교는 성적 우수 장학금, 체육특기자 장학금, 전공 인재 장학금, 복지장학금, 보훈장학금, 패밀리 장학금, 만학도 장학금, 지적 장학금, 동창회 장학금, 육군 하사관 장학금 등 내·외부 장학제도를 시행 중이며 장학금 수혜율은 2014년 기준, 54.9%이다. 대구과학대학교는 대구광역시의 전문대학으로, 북구 태전동에 그 교사가 위치한다. 총 교지면적 53,753m에 대학본부, 중앙도서관, 과학관, 인문관, 자연관, 사회관, 종합복지관, 중앙도서관, 영송체육관, 기숙사, 글로벌 관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기숙사는 340실에 722명을 수용한다. 도서관은 12만 7,000의 장서와 전자책 3,385종을 보유하고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중앙도서관, 평생교육원, 취업정보센터, 국제교류센터, 전산정보운영센터, 교수학습지원센터, NCS지원센터, 학생생활관, 영송기념관, 제주연수원, 대련교육관, 학보사, 교지편집국, 교육방송국 등이 있으며, 부설연구기관으로는 노인건강연구소, 산학협력식품연구센터, 측량정보기술연구센터, 지역사회복지상담연구센터, 응급재난시뮬레이션센터, 국방안보연구소 등이 있다. 대동대학교 대동대학교(大同大學校, )는 1971년에 설립된 부산광역시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대동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간호학부를 제외하고는, 가독성을 위해 임의로 분류한 것이다. 대림대학교 대림대학교(大林大學校, )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대림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동명대학 동명대학(東明大學, Tongmyong College)은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동일 법인 소속의 산업대학인 동명정보대학교와 통합하여 일반대학인 동명대학교가 되었다. 동부산대학교 동부산대학교(東釜山大學校, Dong Pusan College)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동부산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2019년 9월 27일, 동부산대학교 교직원 40여명은 동부산대학교가 정상적인 학사 운영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여, 자진 폐교 신청을 교육부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산대학교 폐교 논란이 갑자기 고개를 든 것은 아니다. 지난 2015년, 동부산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법인 설봉학원의 이사장을 비롯한 일부 임원이 약 80억원을 횡령하여 2017년 파면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자, 교육 당국이 추진하는 대학 구조조정 정책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이러한 불이익을 모면하기 위하여, 학교는 교육비에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동안 채무가 증가해왔다. 학교는 채무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2018년 3월부터 교직원 임금을 삭감했으나, 그마저도 동년 9월 이후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학생 및 교직원의 영향으로, 교내식당마저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교육부와 홍수현 총장은 자진폐교에서 선을 긋는 모습이다. 교육부는 학교법인 설봉학원과 동부산대학교는 교직원 임금 관련 소송 진행 중인 관계로, 자진 폐교는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홍수현 총장의 입장은 폐교를 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학교와 인수·합병 등 통폐합 추진 중에 있다. 한편, 동부산대학교가 정상화 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은 210억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동아방송예술대학교(東亞放送藝術大學校)는 1997년 개교한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전문고등교육기관이다. 1998년 5월 1일에 교명을 동아방송대학(東亞放送大學)으로 바꿨고 다시 2007년 1월 15일에 동아방송예술대학(東亞放送藝術大學, Dong-Ah Institute of Media and Arts)으로 교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1년 3월 현재 16개 학과(3년제)가 개설되어 있으며 전공심화 학사학위과정 4개 학과도 함께 개설되어 운영된다. 2012년 5월 23일에 동아방송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창의융합교양학부 방송예술융합학부 콘텐츠학부 예술학부 실용음악학부 방송연예학부 방송예술창작학부 [4학년, 학사학위 전공심화과정] DBS(Dong-Ah Broadcasting Station) 교내방송국 2010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방송영상콘텐츠 창작기반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한 "대학생방송창작콘텐츠지원사업"에 본교 교내방송국 DBS가 공모에 참여하여 선정된 기획안 <우리말(말모이)의 탄생>을 기반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같은해 10월 9일 한국교육방송공사(EBS)를 통해 방송됐다. 또한 본 다큐멘터리의 내용 및 방송 이미지 등은 교육전문 출판사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검정 교과서인 "독서와 문법Ⅱ"에도 실렸다. 본교 교내방송국 DBS에서 제작하는 음악 콘서트 프로그램으로 기획부터 제작, 방송송출까지 전과정이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활동이다. 무대에 참여하는 가수와 세션역시 모두 본교 학생들로 구성되어 운영된다. 본 프로그램을 위해 학내 조명동아리 Light Factory, 음향제작과 SR팀, 메이크업 동아리 MAC 등이 지원한다.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개최되는 2014년 아시안 게임에 본교 졸업생 및 8월 졸업예정자, 재학생등이 대회 주관방송사인 IHB(Incheon Asian Games Host Broadcasting Management), KBS와 업무협력으로 방송중계, (영문)스크립터, LSM(Live Slow-motion) 오퍼레이션 등의 직종에 156명이 참여하여 대회예선과 본선에 대한 국제신호 프로그램 제작에 직접 참여한다. 서울광장 서울광장(서울廣場)은 서울 중구(中區)의 서울시청 앞에 있는 광장이다. 본래 차도였지만, 1987년 6월 항쟁과 2002년 FIFA 월드컵 등 각종 집회·시위·행사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월드컵 이후 광장 조성 계획이 세워져 차도를 없애고 잔디광장을 만들었으며, 2004년 5월 1일에 완공하였다. 서울시 중구 태평로1가에 있고, 규모는 13,207m이다. 고종은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아관파천으로 몸을 피하였고, 이후 외국 열강들의 공관이 가까운 덕수궁에 거처하였다. 황제가 덕수궁에 머물자 주변의 시가지가 정비되었는데, 광화문 네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까지 큰 도로가 개설되었고, 경성부청 앞에는 큰 광장이 조성되었다. 대한문 앞의 이 광장은 삼일운동을 비롯하여 한국의 현대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해방 후에도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집회를 가졌는데, 이는 광화문의 정부서울청사와 현재 서울시의회로 사용되는 국회의사당, 그리고 정동 시립미술관에 있던 대법원과 매우 가까운 요지였기 때문이다. 수조가 지하에 묻혀 있는 분수로서, 가동되지 않을 때는 보도로 활용된다. 121개의 노즐을 통해 35가지의 분수가 연출되며, 저녁에는 7가지의 수중 조명이 비쳐진다. 서울광장의 중심에 6,449m 면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잔디는 추위에 강하고 연중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는 캔터키 블루그래스의 천연 잔디 종이다.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은 서울특별시(체육진흥과)에서 겨울철에 서울광장에 설치 운영하는 스케이트장으로서, 2004년 12월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2월 초부터 다음해 2월 초까지 약 70일간 운영된다. 2009년 겨울에는 광화문 앞에 새로 설치된 광화문 광장으로 스케이트장이 옮겨진 대신 서울특별시가 주최하는 특별 행사가 치뤄졌다가, 2010년부터 다시 서울광장으로 복귀하였다. 《서울광장 지하배수로》는 서울시청 남쪽 서울광장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의 근대화 과정 및 도시발달사를 상징하고, 근대 토목사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며, 전국적으로 희귀하게 유존하는 유산이라는 점에서 학술적‧기술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아울러 현재까지도 배수로로 활용될 만큼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야간에는 26만4000여개의 전구로 서울광장을 밝히고 있다. 힘 (물리) 물리학에서 힘()이란, 물체의 운동, 방향 또는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상호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여, 힘은 질량을 가진 물체의 속도를 변화시키는 요인(이는 에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도 포함)이며, 즉 물체를 가속시키거나 신축성이 있는 물체는 변형시킬 수 있고, 가속과 변형 둘 다 일어날 수도 있다. 또한 힘은 밀리거나 밀어내는 것이라는 직관적인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힘은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졌기 때문에 벡터량으로 표현한다. 힘은 뉴턴이라는 국제단위계로 측정되며 F라는 기호로 표현한다. 뉴턴 운동 법칙의 제2법칙의 원래 형태는 물체의 알짜힘이 미분 시간과 운동량의 변화의 곱과 같다는 형태였다. 만약 물체의 질량이 일정할 경우, 이 법칙은 물체에 작용하는 알짜힘은 알짜힘의 방향에 작용하는 가속도에 비례하고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의미이다. 힘의 공식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기호 위의 화살표는 크기와 방향 모두를 가진 벡터량을 의미하는 기호이다. 힘과 관련된 개념으로는 다음이 있다. 먼저 추력은 물체의 속도를 증가시킨다. 항력은 물체의 속도를 감소시킨다. 돌림힘은 물체에 대한 각속도 변화를 만들어낸다. 확장된 개념의 각 부분은 일반적으로 인접한 부분에 힘을 작용시킨다. 이러한 힘의 분포는 물체의 소위 변형력을 통해 알 수 있다. 압력은 이 변형력의 간단한 형태 중 하나이다. 변형력은 보통 고체 물질의 변형이나 액체 물질이 흐르는 원인이 된다. 고전 고대의 철학자들은 정역학적이고 동역학적인 물체에 관한 힘에 대해 연구했고 단순 기계를 발명했지만, 사상가 아르키메데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때때로 마찰력과 같은 명백하게 힘이 아닌 성분에 대해 불완전히 이해하거나 자연 운동에 대한 본질과 같은 것에 대한 불충분한 결과로 인해 나타난다. 이 근본적인 오류는 힘이 심지어 일정한 속도(등속도)로 운동하더라도 힘이 필요하다는 믿음이었다. 이전의 운동과 힘에 관한 오류의 대부분은 결국 아이작 뉴턴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의 수학적 통찰력으로 만들어진 뉴턴 운동 법칙은 거의 3백 년동안 이보다 더 뛰어난 법칙이 나오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면서 빛의 속도에 가까운 운동량을 가진 물체에 대한 제대로 된 힘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중력은 관성으로 인해 생성된 힘이라는 통찰력을 가져다주었다. 현대에서는 양자역학의 기술을 이용해 빛의 속도에 가깝게 입자를 가속시킬 수 있고 입자물리학은 원자보다 작은 입자간의 힘을 설명하는 표준 모형을 만들어냈다. 표준 모형은 게이지 보손이라는 입자를 교환하여 힘을 방출 및 흡수한다는 것을 예측했다. 오직 4개의 상호 작용만이 현재 알려져 있다. 힘의 크기에 따라 나누면 다음과 같다. 강한 상호작용, 전자기력, 약한 상호작용, 중력이다. 고에너지 물리학은 1970년대와 80년대 입자들의 관측 결과 약한 상호작용과 전자기력이 근본적으로는 전기·약 작용 상호작용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고대부터 힘의 개념은 간단 기계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로 인식되고 있었다. 단순 기계의 기계적 확대율은 먼 거리에서 작용되는 힘에 대해 더 적은 힘을 받기 때문에 동일한 일을 했다. 힘의 특성 분석은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액체 고유의 부력 논의를 공식화한것으로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힘의 개념에 대해서 철학적 토론을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자연은 4개 원소가 "자연 상태"를 존재하게 만든다고 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흙과 물 등의 원소가 지구의 질량를 이루는 물체의 기본 성질이며, 지상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기본적인 원소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믿었다. 그는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 등이 "자연적인 장소"로 찾아갈려는 본질적인 현상이라 생각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거나 인위적으로 움직이는 "자연적인 현상"을 나타내주는 지속적인 힘을 주는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이론으로, 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힘의 상수나 화살 등의 발사체의 행동에 대한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일상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적용했다. 힘이 발사체에 작용하는 곳은 오직 비행이 시작하는 곳 뿐이며, 발사체가 공기 중을 움직이면서 어떤 식별 가능한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으며 공기가 발사체의 경로에서 발사체가 계속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고 제안했다. 이 설명은 발사체가 움직이는 데에는 공기가 필요하며 진공 환경 등에서는 처음의 충격 이후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또한 발사체의 움직임에서 항력이라는 문제도 생기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6세기 존 필로포누스(John Philoponus)에 의해 중세 과학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허점은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중세 후기 임페투스가 물체의 움직임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가져올 때 까지 수정하지 못했다. 갈릴레이는 돌과 포탄 모두 떨어지게 하는 실험에서 17세기 초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중력 이론을 반증했다. 그는 물체가 중력에 의해 가속되었고 질량과는 독립적이며 속도는 마찰력 등의 힘에 의해 작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아이작 뉴턴은 관성 및 힘의 개념을 이용하여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존 법칙을 발견했다. 1687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자신의 논문을 출간했다. 이 논문에서는 고전역학에서 설명하는 힘의 방법으로 뉴턴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을 나열했다.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은 물체는 외부의 알짜힘 또는 합성힘이 없을 경우 등속도로 계속 움직인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갈릴레이의 통찰을 확장시켜 알짜힘의 부족과 관계되었다(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참조). 뉴턴은 질량을 가진 물체는 "정지는 자연적 상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디어 대신 "자연적 상태"라는 기본 평형을 이루는 함수인 고유의 관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즉, 제 1법칙은 직관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신념에 모순되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개체의 속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알짜힘이 필요하다. "0이 아닌 일정한 속도"는 "정지 상태"와 물리적으로 구별되었고, 뉴턴의 1 법칙은 여기에 갈릴레이 상대성의 개념으로 관성을 연관시켰다. 특히, 물체가 서로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계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고 있고 정지해 있는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술적인 말로 바꾸면, 물리학의 법칙은 모든 갈릴레이 변환과 관련된 관성 좌표계에서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차에서 등속도로 주행하는 동안 물리학의 법칙은 정지 상태와 같다. 탑승한 사람은 차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힘을 적용할 필요 없이 정지 상태와 같이 수직으로 공을 똑바로 던지면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는 이동하는 차의 밖에서 관찰하면서 공이 차의 움직임에 따라 포물선으로 운동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도 물리 법칙은 동일하다. 이는 공에 작용하는 관성이 차량의 운동 방향과 일정하게 같은 속도로 작용하여 공을 던져도 앞으로 계속 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차량 및 내부의 모든 것이 정지 상태로 관측된다. 외부의 세계는 모두 차와 반대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험 결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차량이 정지해 있는지 바깥 세계가 정지해 있는지 이 두가지 경우를 물리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정지 상태와 등속도 운동은 동등한 관성이 적용된다. 관성의 개념은 지속적인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물체 운동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엄격하게 일정한 속도가 아니더라도 일반화할 수 있다. 지구의 관성 모멘트로 인해 날과 년의 길이 불변성이 수정되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관성의 원리를 확장하여 중력을 받는 물체로 자유낙하 시킬 때 등 일정한 가속도를 받는 것과 관성을 받는 것은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뼈대를 세웠다. 이것은 예를 들어 우주비행사처럼 지구 주위의 자유 낙하 궤도에서 무중력을 체험할 경우에도 뉴턴의 운동 법칙은 이러한 환경에서도 보다 쉽게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비행사는 자기 자신 옆의 공중에서 질량이 있는 물체를 놓을 경우 관성으로 인해 우주비행사 곁에서 고정된 채로 있다. 이는 우주비행사와 물체가 은하계 사이의 공간에서 공유하고 있는 기준점이 중력의 그물 영향 없이 발생하는 일의 경우와 같다. 이 등가원리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발명을 위한 기초 토대 중 하나이다. 뉴턴의 제 2 법칙의 현대 형태는 벡터 미분 방정식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formula_3는 물체의 운동량이며, formula_4는 알짜힘(벡터 합)이다. 둘이 같을 때 알짜 힘이 "0"으로 정의되지만, 균형을 이룬 동등한 힘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반면, 제 2법칙은 "불균형한 힘"에 대해 말하며 물체에 작용하는 물체의 운동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발생한다. 운동량의 정의에 의해, 이 되며, 여기서 m은 질량이며 formula_6은 속도이다.. 뉴턴의 제 2법칙은 오직 일정한 질량일 때만 적용되며, 이런 이유로, m은 미분 연산자를 이용하여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계산은 다음과 같다. 가속도의 정의를 대입한 뉴턴의 제 2법칙의 간단한 형태는 다음으로 파생된다. 이 공식은 때로는 "물리학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공식"으로도 불린다. 뉴턴은 위 공식의 축소적인 형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뉴턴의 제 2법칙은 힘은 가속도에 비례하고 가속도는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성질을 알려 준다. 가속도는 운동의 측정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은 관성계에서 고급 물리학 분석을 통해 잘 설명하는 반면 여전히 질량의 정의는 무엇인지에 관한 깊은 문제가 남아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간과 질량이 동등하다고 말하지만, 양자 중력에 관한 일관된 이론이 빠져 있고 미시 세계에서는 거시 세계에서 시공간을 연결하는 방법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몇몇 타당한 이유로, 뉴턴의 제 2법칙은 등가 법칙을 이용하여 "질량의 정량적 정의"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질량과 힘의 상대적인 단위는 고정되어 있다. 뉴턴의 제 2법칙을 이용한 힘의 정의는 보다 엄격한 논문에서는 수학적으로는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일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에른스트 마흐, 크리퍼드 트루스델, 발터 놀 등의 유명한 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들은 힘에 대한 명시적인 정의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뉴턴의 제 2법칙은 힘의 크기를 측정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행성의 궤도 가속도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으로 과학자들은 행성의 중력을 계산할 수 있다. 뉴턴의 제 3법칙은 힘이 다른 곳에 있는 물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때, 이의 결과로 대칭적인 현상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제 3법칙은 모든 힘은 다른 물체 사이와 "상호작용"을 하며, 결국 단방향으로 전달되는 힘이나 한 물체에만 작용하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 옆 사람을 민다면 힘의 주체는 홍길동이고 대상은 옆 사람이다. 이때 홍길동도 옆 사람을 떠민 만큼 옆 사람도 홍길동에게 작용하는데 이를 반작용이라 한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게 F의 힘을 가하면, 힘을 가한 물체에게는 -F의 힘이 가해진다. F와 -F는 방향만 다르고 크기는 서로 같은 힘이다. 이 법칙은 종종 F 힘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용한 것이 -F라는 것으로 언급한다. 이 작용과 반작용은 동시에 존재한다. 물체 1과 물체 2가 동일한 계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물체 1과 물체 2 사이 상호작용에 의한 계 내의 알짜힘은 0이 된다. 이 뜻은 입자가 닫힌 계에 존재할 경우 이 계에서 힘의 불균형에 의한 내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닫힌 계에서 임의의 두 물체 간에 작용-반작용 힘을 공유하면서 계의 질량중심이 이동이 되지 않는다. 계 내의 물체는 서로서로에 대해 가속받으면서 계 내에서의 합력이 0이 된다. 그 대신에, 계에서 외력이 작용할 경우 질량중심은 계의 질량을 외력으로 나눈 크기만큼 가속할 것이다. 뉴턴의 제 2법칙과 제 3법칙을 결합하면, 계 내의 선운동량 보존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식에서 시간에 대하여 적분할 경우,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이러한 방정식에서, 물체 1과 물체 2를 포함하는 계인 경우, 다음과 같이 변한다. 이를 통해 선운동량은 보존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유사한 논거를 이용하여, 임의의 수의 입자가 존재하는 계로 일반화할 수 있다. 이것은 물체 사이의 운동량 교환은 계의 알짜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모든 힘은 질량을 가진 물체에게 상호 작용을 하기 때문에 알짜 운동량이 손실되지도 얻지도 않는 계를 정의할 수 있다. 힘은 인력 또는 척력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힘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온도 같은 다른 개념을 통해 설명한 힘의 직관적인 이해는 직접적인 관찰과 측정이 일치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조작적 정의를 사용하여 정령화하게 된다. 실험을 통해, 뉴턴 역학을 통한 힘의 이해와 측정을 통한 이해가 정확히 일치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힘은 얼마나 끌거나 미는 힘이 강한가에 따른 방향과 크기에 따라 특정 행동을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힘은 유클리드 벡터로 구분한다. 이 뜻은 힘이 방향이 필요 없는 스칼라인 물리적 양과 다른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수학 규칙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힘이 같은 물체에게 작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결정할 때, 합력을 구하기 위해서는 두 힘의 크기 및 방향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각각의 힘에 두 정보 모두를 알고 있지 못하면 상황은 모호해진다. 예를 들어, 만약 같은 크기의 힘으로 두 사람이 밧줄을 당긴다는 것을 알지만 두 사람이 당기는 방향을 모른다면 이 줄이 어떻게 될 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줄다리기처럼 두 사람이 반대 방향에서 잡아당기거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에서 잡아당길 수 있다. 간단한 1차원적 예로, 힘의 방향을 모른 체 알짜 힘은 두 힘의 크기를 더하는지, 큰 쪽에서 다른 쪽을 빼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벡터와 힘을 연관시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힘은 먼저 몇 가지 힘들이 서로를 0으로 만드는 정적 평형 상태 조건에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험들은 힘이 벡터량을 가진다는 중요한 특성을 증명했다. 힘은 크기와 방향 모두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점입자 위의 두 힘이 작용할 때 합력(알짜힘)은 벡터 공간에서 평행사변형 법칙으로 구한다. 두 힘의 벡터를 평행사변형의 양 변으로 하여 평행사변형의 변을 이은 끝점끼리를 이은 벡터가 합력이다. 합력 크기는 두 힘 사이의 각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만약 힘이 늘어난 물체에 작용하면 각각 작용하는 벡터는 반드시 물체의 움직임에 작용하는 적용되는 순서로 작용해야 한다. 자유물체도는 계 내의 힘을 알아내는 편리한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 이 다이어그램은 힘을 벡터의 각도 및 상대적인 크기를 보존하여 그리기 때문에 벡터들 합력의 알짜힘을 구할 수 있다. 서로 더할 수 있는 것 뿐이 아니라, 힘은 합력에서 서로 직각으로 독립되어 작용하는 경우로 분리하는 법을 구할 수 있다. 북동쪽을 가리키는 수평의 한 힘은 북쪽을 향하는 힘과 동쪽을 향하는 힘 두개로 분리할 수 있다. 벡터의 덧셈을 이용하여 이러한 구성 요소를 합친 힘을 원래 힘으로 구할 수 있다. 기저의 집합의 원소의 힘 벡터를 구하는 법은 크기와 방향을 이용하여 힘을 설명하는 것보다 종종 더욱 간결한 수학적 방법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예를 들어 목수가 나무에 못을 박을 경우 못을 때리는 망치가 왼쪽의 그림과 같이 비스듬히 내리친다면 망치를 통해 전해지는 알짜힘(붉은색 화살표)은 수직 성분(파란색 화살표)과 수평 성분(녹색 화살표)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알짜힘의 크기를 키우려면 망치가 못을 칠 때 정학히 수직이 되도록하여 수직성분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실제의 경우 못이 일단 나무에 박히면 망치에 편평한 면이 수직이 되게 못을 치는 것이 보다 수월해 지므로 목수들은 처음에는 약한 힘으로 망치를 사용하여 못이 나무에 자리잡게 만들고 점점 세게 쳐서 못이 잘 박히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각 힘이 직교성을 가질 경우 각 벡터 힘의 합은 각 벡터의 스칼라 덧셈을 한 힘의 벡터 힘으로 작용한다. 직교하는 힘은 서로 직각으로 작용하는 힘이 다른 힘의 크기나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독립적이다. 직교하는 기저 벡터를 선택하는 것은 기준 벡터의 집합이 수학적 계산에서 가장 편리하다는 것을 자주 고려한다. 오직 하나만 구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방향에 위치하는 힘을 기저 벡터로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교하는 힘 벡터는 세 번째 힘이 다른 두 힘과 직각을 이룰 수 있다. 평형 상태는 한 점입자에 존재하는 합력이 0일때, 즉 모든 힘 벡터의 합이 0일때 나타난다. 확장하는 물체를 다룰 때는 순 토크가 0이라는 가정이 필요하다. 평형 상태에는 정적 평형과 동적 평형 두 가지가 존재한다. 정적 평형은 고전 역학의 발명 이전에 이해되었다. 정지해 있는 물체의 알짜힘은 0이라는 것이 정적 평형이다. 정적 평형의 간단한 경우는 두 개의 힘이 크기는 같고 방향만 다른 경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물체의 표면 수준에는 중력에 의해 지구 중심을 향해 아래로(인력) 당겨지게 된다. 동시에, 표면의 힘이 아래에서 위쪽으로 동일한 크기의 힘을 가한다. 이를 수직항력이라고 한다. 이 상황은 알짜힘이 0이며 가속도가 없는 상황이다. 물체를 밀 때, 표면의 마찰이 가해진 힘과 반대 방향으로 물체와 바닥 사이에 생기기 때문에 정지 마찰이라는 물체가 운동하지 않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상황일 때, 정지 마찰은 가속도가 없을 때 가해진 힘만큼 "정확히" 균형을 이룬다. 작용한 힘의 반응은 마찰 한계점까지 정지 마찰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으며, 이는 표면과 물체 사이의 접촉 특성에 따라 다르다. 두 힘 사이의 정적 평형은 저울이나 용수철 저울 등 간단하게 힘을 측정하는 장치로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체는 수직으로 놓여 있는 용수철 저울에서 물체가 받는 중력만큼 용수철이 "용수철의 당기는 힘"을 받게 되어 물체는 움직이지 않고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일부 정량적인 법칙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으로, 중력은 밀도 상수에 비례한다(표준 무게 정의를 위해 널리 이용되었음),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이용한 부력의 이해, 아르키메데스의 지레 탐구, 기체에 압력에 대한 보일의 법칙, 용수철에 대한 훅의 법칙 등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아이작 뉴턴이 운동 제 3법칙을 강론하기 전에 실험적으로 검증되고 공식화되었다. 동적 평형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관측 결과 사이 논리학적 모순으로 인해 특정한 가정을 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설명했다. 갈릴레이는 절대적인 정지 좌표계라는 개념은 갈릴레이 절대성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릴레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과 정지한 것은 완전히 동등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량이 있는 물체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다가간다는 "자연적인 상태"라는 개념에 위배되었다. 갈릴레이는 등속도와 정지 상태는 같은 상태라는 옳은 이해를 간단한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만약 선원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등속도) 배에서 까마귀의 둥지에게 포탄을 떨어뜨릴 경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서는 배가 아래로 이동하면서 포탄이 똑바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서는 떨어진 포탄은 움직이는 배 돛대의 아래 부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실험을 실제로 시행하면 포탄은 마치 포탄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배와 같이 진행하여 돛대의 아래 부분에 정확히 떨어진다. 이 떨어지는 포탄에 작용하는 정방향의 수평 힘이 없기 때문에, 결론은 오직 포탄이 떨어질 때 배와 같은 속도로 계속 이동한다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배에서 떨어지는 포탄은 앞으로 계속 이동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지 않는다. 또한, 등속도로 운동하는 모든 물체는 물체의 알짜힘(합력)이 0이어야 한다. 이 동적 평형의 정의는 물체의 모든 힘이 균형을 이루지만 등속도로 운동하는 것을 뜻한다. 동적 평형의 가장 간단한 경우는 물체와 표면간의 운동 마찰력을 들 수 있다. 몇몇 경우에서, 운동 마찰력은 운동할려는 힘이 작용하려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 방향, 같은 크기로 적용된다. 이 결과는 알짜힘이 0이 되지만, 물체는 속도가 0이 아닌 상태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0이 아닌 속도로 계속 운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운동을 가해진 힘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운동 마찰을 고려해야 할 때는 등속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인 알짜 힘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질량과 에너지는 물체를 가속시키는 데 필요한 양을 계산하여 알아볼 수 있듯이 동등하다. 물체의 속도를 증가시킬 때, 에너지는 질량(관성)과 등가적인 일을 수행한다. 따라서, 높은 속도에서 가속할 경우에는 낮은 속도에서 가속시켰던 양보다 가속도를 높이는 데 더욱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뉴턴의 제 2 법칙에서는 이것은 수학적인 정의이기 때문에 유효하다. 그러나, 보존력을 위해 상대론적 운동량은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해야 한다. 이 식에서 입자의 상대론적 표현과 관련된 힘과 가속도는 0이 아닌 불변 질량 상수 formula_20을 수학적으로 formula_21 방향으로 이동시키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로런츠 인자는 다음과 같다. 상대성 이론의 초기에 formula_26과 formula_27라는 표현은 횡방향 질량과 종방향 질량으로 불렸다. 상대론적 힘은 일정한 가속도를 만들지 않지만, 물체의 감속 가속도는 빛의 속도에 근접한다. formula_28는 광속으로 운동하는 불변 질량이 0이 아닌 물체일 경우 0으로 나누기로 산출하게 되며, 이론상으로는 속도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 형태는 다음과 같이 되찾을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은 여러 상수에서 사차원 벡터의 사용을 통해 연관관계를 설명한다. 이 관계는 formula_30가 사차원 힘이고, formula_20가 불변 질량이며, formula_32가 사차원 가속도일때 상대성 이론에서 정확하게 성립한다. 현대 입자물리학에서, 힘과 입자의 가속도는 게이지 보손의 운동량 운반 교환 작용을 통해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자장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발달로 인해 힘에서 운동량 보존이 발생하는 현상을 두 이론을 통해 중복해서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상대성 이론의 사차원 운동량과 양자 전기역학에서 가상 입자의 운동량). 운동량 보존은 공간에서 직접적으로 균질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며(이를 대칭성이라고 함), 이로 인해 힘보다 더욱 근본적인 개념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기본 힘은 정확하게 기본 상호작용이라고 말한다. 입자 A가 가상의 입자 B를 방출(생성)하거나 흡수(소멸)할 때 운동량 보존은 B를 통해 A와 A' 사이 인력이나 척력을 주고받는 매개체로 활동한다. 이 설명은 기본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모든 힘에 적용된다. 정교한 수학적 설명을 예측하는 것은 상새히 하면 이러한 상호작용의 정확한 결과는 파인만 도형을 통해 개념적으로 상호작용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파인만 도형에서 각각의 입자는 직선(세계선)으로 표현하며 일반적으로 이 도형에서 위로 가는 선(y축)이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물질과 반물질 입자는 파인만 도형에서 진행하는 방향만 제외하고 같은 입자이다. 입자의 세계선은 상호작용 정점에서 교차하며, 파인만 도형에서 상호작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힘은 입자의 세계선 방향에서 정점이 발생하는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 게이지 보손은 정점에서 물결 모양의 선으로 방출하는 모양을 그리며, 가상 입자의 교환일 경우 인접한 정점으로 흡수하는 모향으로 그려진다. 파인만 도형의 유용성은 기본 상호작용의 일반적인 부분이지만 개념적으로 힘이 분리될 때와 같은 물리학의 다른 유형의 현상들도 동일한 규칙을 이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파인만 도형은 중성자의 베타 붕괴로 양성자, 전자, 중성미자가 되는 과정인 게이지 보존을 통한 약한 상호작용을 간결하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힘은 4가지 기본 상호작용으로 표현한다.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은 매우 짧은 거리에서만 작용하며, 핵자와 원자핵 사이의 결합을 포함한 아원자 입자 사이에서 강한 상호작용을 한다. 전자기력은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며 중력은 질량이 있는 물체 사이에서 작용한다. 다른 모든 힘은 이 4가지 기본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마찰력은 두 면의 원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자기학적 힘 작용의 결과이며, 파울리 배타 원리 가 원자들이 서로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훅 법칙으로 모델링한 용수철의 힘은 전자기력 작용의 결과이며 파울리 배타 원리에 따라 물체가 평형 위치로 오게끔 작용하는 역할을 한다. 원심력은 가속력으로 기준계의 회전가속으로 간단하게 일어난다. 힘의 기본적 이론 개발은 서로 다른 힘을 하나로 뭉친다는 통일장 이론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은 지구 표면으로 떨어지는 물체가 받는 힘과 천체에 관한 중력에 대한 보편적인 이론을 자신의 이론으로 통일했다. 마이클 패러데이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전자력과 자기력을 20세기에 전자기력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이론으로 통일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양자역학의 개발로 현대에는 중력을 제외한 3가지 힘을 물질 간 게이지 보존이라는 가상 입자의 교환을 통한 페르미온의 발현이라는 현상으로 통합하였다. 이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은 힘 사이의 관계를 상정하고 과학자들은 연속적 관찰을 통해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이 전기·약 작용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표준 모형은 힉스 메커니즘은 아직 완전하게 관측되진 않았고, 중성미자 진동 등 표준 모형으로 설명되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는 등 완전히 정립되지 못했다. 강력과 전약력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통일 이론은 초대칭 등의 물리학의 미해결 문제를 일부 수용할 수 있는 후보적 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4가지 기본 상호 작용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모든 것의 이론에 관한 일관된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노력을 해결하는 덴 실패했지만, 현재 이 이론에 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끈 이론이다. 힘의 SI 유도 단위는 뉴턴(N)이다. 1 뉴턴은 1 kg의 질량을 갖는 물체를 1 m/s의 가속도로 가속시킬 수 있는 힘이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간혹 CGS 단위인 다인(dy)을 쓰기도 한다. 1다인은 10만분의 1 뉴턴이다. 나일강 나일강(, , )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총 길이는 6,650km(6,695km)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집트를 흐르는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기 때문에, 범람이 끝난 후 농지를 원래대로 복구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측량과 기하학이 특히 발달했다. 수해를 막기 위해 아스완 댐, 아스완 하이 댐 등이 건설되었다. ‘나일()’이라는 명칭은 ‘강’이라는 뜻의 고대 셈어 '나할(nahal)'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역시 히브리어로 강을 뜻하는 나찰()의 어원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나일강을 이테루(iteru)라고 불렀는데, ‘큰 강’이란 뜻이다. 나일강은 빅토리아 호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이집트의 지중해로 유입되는 강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불리기도 하며, 나일은 본류가 여러 개인 몇 안 되는 하천 중의 하나이다. 가장 긴 흐름은 백나일로 빅토리아 호의 북쪽 끝에서 시작하는데 동아프리카 지구대로 떨어지는 머치슨 폭포까지는 빅토리아 나일이라고도 부른다. 강은 앨버트 호를 가로 질러(이 구간은 앨버트 나일이라고 부른다.) 연속되는 협곡을 지나 남수단의 수드 평원의 넓은 습지대로 흘러간다. 하르툼에서 백나일은 청나일과 합류한다. 청나일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타나 호에서 발원한다. 하르툼에서 이집트 남부까지 6개의 대형 폭포를 지나고, 이후에는 사막의 급경사면을 따라 좁고 길게 흘러 카이로에 이르러 넓은 삼각주에 도달한다. 이 삼각주 지역과 나일강의 좁고 긴 녹색 띠 지역은 이집트 전체 면적의 3% 밖에 안 되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농업의 전체를 담당한다. 백나일과 청나일 두 지류 덕분에 나일강의 유량은 안정적으로 흐르면서 비옥한 퇴적물이 공급된다. 백나일은 하르툼 하류를 흐르는 유량의 16%만을 공급하지만 상류가 적도의 열대우림 지대에서 흐르기 때문에 나일강의 수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청나일은 84%의 유량을 공급하면서 나일강 유량 변화를 주도한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해 비옥한 미립질의 검은 토양이 하류의 충적지대에 공급되는데 이 범람은 에티오피아 고원의 겨울철 강우와 눈 녹은 물 때문이다. 범람의 시작은 하르툼의 경우 4월이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어져서 카이로에서는 10월에 최고조에 달한다. 1970년에 준공된 아스완하이 댐은 수단 국경지역까지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를 만들었다.댐 건설로 나일강 하류의 유량 변화는 상당한 정도로 안정되었다. 장나라 장나라(1981년 3월 18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이다. 장나라는 데뷔 이후 대한민국은 물론 중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기부와 봉사활동으로 연예인 기부천사의 대표적 스타로도 유명하며 언론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기부액이 130억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의과학대학교 동의과학대학교(東義科學大學校, 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 있는 대한민국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9년 기준, 동의과학대학교의 전문학사 과정 일람이다. 목포과학대학교 목포과학대학교(木浦科學大學校, Mokpo Science College)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2018년 기준 목포과학대학교의 개설 학과 일람이다. 문경대학교 문경대학교(聞慶大學校, Munkyung College)는 경상북도 문경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으로서, 성실, 능력, 봉사를 실천덕목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문경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배화여자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培花女子大學校,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7년에 설립한 여자전문대학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계통의 학교이다. 조세핀 필 캠벨 선교사가 처음 지은 이름은 캐롤라이나 학당이었으나 1909년 윤치호에 의해 배화로 교명을 바꾸게 된다. 이는 훗날 배화여자대학교 교명의 유래가 된다. 1898년 10월 2일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 조세핀 캠벨 선교사(Mrs.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가 한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캐롤라이나 학당을 창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9년 12월 2일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09년 당시 교명 변경을 추진할 때 윤치호는 케롤라이나 학당의 이름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배화'는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교의 교명으로 이어졌다. 1922년 4월 7일 배화여자 보통학교가 조선총독부로부터 6년제 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25년 4월에는 배화여자고등 보통학교 인가를 받았으며, 1964년 학교법인 배화학원이 인가되어, 1977년 육영수 여사에 의해 기념관이 봉헌되었다. 현재의 대학교는 1977년 12월 3일에 설립 인가를 받아, 1979년 배화여자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89년 필운관이 준공되었고, 2008년 10월 1일 배화학원 창립 110주년 대학개교 30주년 기념식을 하였다. 또한 2011년 3월에 제8대 총장으로 김숙자 박사가 취임하였으며 2011년 12월에 '배화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3년 10월에 배화학원 창립 115주년, 대학개교 35주년 기념예배와 국제총장회의를 개최하였고 2014년 5월에 여성가족부로부터 사회공헌 기관상을 수여받았다. 2014년 11월에 김숙자 총장이 '김활란여성지도자상'을 수상하였으며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여성벤처창업거점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15년 3월에 김숙자 총장이 제9대 총장에 연임하였다. 전문대학 또는 이상의 학위 과정을 졸업하고 1년 이상 취업경력이 있는 경우, 전공 심화 과정을 이수할 경우 학사학위를 수여한다. 배화여대의 캠퍼스는 종로구 필운동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배화여자고등학교와 맞닿아 있다. 캠퍼스에는 본관(기념관)과 정심관, 필운관, 복지관, 100주년기념도서관, 목련관, 배화대강당, 체육관, 배화유치원 등의 건물이 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중국 등 4년제 및 2년제 대학교와 연계한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백석문화대학교 백석문화대학교(白石文化大學校, Baekseok Culture University)는 학교법인 백석대학교 소속 기독교 계열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백석문화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백제예술대학교 백제예술대학교(百濟藝術大學校, )는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예술계열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백제예술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를 제공하는 학과 목록이다. 벽성대학 벽성대학(碧城大學, Byuksung College)은 대한민국의 폐교된 전문대학이다. 모태는 1955년 추포 류충렬 박사가 세운 인천소년수양원이며, 1994년 11월 17일 "인재육성, 흥국부민"이라는 이념 하에 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1995년 3월 14일에 개교하여, 2014년 2월 28일에 폐교되었다. 이 목록은 벽성대학이 폐교되기 직전인 2014년 기준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이다. 2011년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된 중대한 부정·비리 사항에 대해 시정조치를 내렸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감사 이후에도 불법 학위를 수여해 학교폐쇄 방침을 확정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벽성대는 학교폐쇄 명령 예고(7월 중), 청문(8월 중), 학교폐쇄 명령 및 2013학년도 학생모집정지 처분(2013년 8월 31일)의 순서로 학교폐쇄가 진행됐다. 학교폐쇄 후 재학생들은 인근 전문대학의 동일·유사학과로 특별 편입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벽성대학 퇴출이 확정되면서 2012년 2월 29일에 폐교한 명신대학교, 성화대학, 같은 해 8월에 폐교한 건동대학교에 이어서 이명박 정부 들어 네 번째 퇴출 대학이 되면서 2014년 2월 28일에 폐교됐다. 부산경상대학교 부산경상대학교(釜山經商大學校, )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연제구의 상경계 전문대학이다. 1. 정신득 학장(1980. 1. 17. ~ 1984. 9. 1) 2. 최성호 학장(1984. 9. 1. ~ 1988. 9. 1.) 3~4. 윤원태 학장(1988. 9. 1. ~ 1992. 9. 1. ~ 1997. 3 . 1.) 5~6. 문원주 학장(1997. 3. 1. ~ 2001. 3. 1. ~ 2005. 3. 1.) 7. 박석용 학장(2005. 3. 1. ~ 2007. 6. 1.) 8. 손상호 학장(2007. 6. 1. ~ 2009. 6. 1) 9~10. 이달덕 학장(2009. 6. 1. ~ 2011. 6. 1. ~ 2011. 12. 1.) 11. 이달덕 총장(2011. 12. 1 ~ 2015. 4. 22.) 12. 한백용 총장(2015. 4. 22. ~ ) 다음은 2018년 기준 부산경상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부산여자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釜山女子大學校, Busan Women's College)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부산여자실업학교, 부산여자전문대학, 부산여자대학을 거쳐 부산여자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8년 현재 설립된 여자대학중, 유일하게 수도권에 소재하지 않은 대학이다. 부산여자대학교의 2018년 기준 전문학사 학위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부산예술대학교 부산예술대학교(釜山藝術大學校, )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예술계 사립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부산예술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일람이다. 부산과학기술대학교 부산과학기술대학교(釜山科學技術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부산광역시 북구에 캠퍼스가 소재한다. 매년 10월에 학교 축제인 백양축제가 열린다. 중국의 랴오닝대학, 랴오닝성 체육운동기술학원, 상하이수산대학과 일본의 국립동경공업고등전문학교, 가고시마공업고등전문학교 등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신입생특별장학금 11종 외 17종의 교내장학금과 중앙문화장학회 장학금 외 24종의 교외장학금이 있다. 다음은 2019년 기준 부산과학기술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부산과학기술대학교는 부산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으로, 캠퍼스는 구포동에 위치하며, 12만 2839m의 교지가 있다. 후생복지 시설로 청학동연수원, 학생관, 체육관, 야외공연장, 테니스코트, 기숙사·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1977년 3월 성지공업전문학교 도서관으로 개관한 이후, 현재의 교명에 맞추어 부산과학기술대학교 도서관으로 있다. 2018년 현재, 도서관의 장서 보유량은 149,148권이며, 이는 재학생 1인 당 37.3권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부천대학교 부천대학교(富川大學校, Bucheon University)는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9년 3월, 몽당 한항길은 기술인력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1958년 설립된 소사공과기술학교와 1961년 증설된 고등기술학교를 전신으로 하여, 1978년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고 같은 해 12월에 부천공업전문대학의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90년 부천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97년 10월에 몽당도서관을 개관하고, 1998년 부천대학으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부천대학교는 직업교육을 목표로 산업의 일익을 담당할 중견기술인을 양성하는데 교육목표를 두고 있으며, 교훈은 ‘창의적인 기술인으로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이다. 중국 산동대학교, 일본 일장학원과 오사카관광대학, 인도 I2IT, 캄보디아 재건위원회 등과 국제교류하고 있다. 부속기구로는 도서관·중앙전산소·정심관·취업정보센터·국제어학교육원이 있으며, 독립기구로 사회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30여개의 동아리를 중심으로 학생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학보와 학술·문예지 성격의 〈한길〉지가 간행된다. 2014년 3월 27일 계수동 일대에 부지면적 17만3000m 건축면적 6800m, 연면적 3만 m, 공학강의동 지하1층~ 12층, 기숙사동 지하1층 ~ 12층 규모로 제2캠퍼스를 짓기 위한 기공식이 열렸으며, 제2캠퍼스는 2015년 10월 완공할 계획이고, 2016년부터 신입생을 받을 예정이다. 2018년 부천대학교의 개설 학과 일람이다. 부천대학교는 정보통신부 주관 정보통신 우수대학에 선정된 적이 있으며, 대한민국 교육부 주관 특성화 우수대학으로도 선정되었다.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 주관 특성화 프로그램 우수대학에 선정되고 2004년에 이르기까지 특성화사업 3년 연속 지원대학으로 선정되었다.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 전공심화과정 최다 학과, 최대 인원 인가 학교이다. 삼육보건대학교 삼육보건대학교(三育保健大學校, )는 대한민국 동대문구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2007년 5월 학교명을 삼육간호보건대학에서 삼육보건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소속이다. 상지영서대학교 상지영서대학교(尙志嶺西大學校, Sangji Youngsoe College)는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김문기 등으로 대표되는 학교법인 내 사학분규를 겪은 후, 교육부 등으로부터 저평가를 받자, 2019년 1월 교육부로부터 대학 통합 승인을 받고, 동일 법인의 일반대학인 상지대학교와 통합해 2020년 개교할 예정이다. 2018년 기준, 상지영서대학교는 특화 3계열 18학과와 일반학과 2개학과를 개설하여 운영중이다. 서영대학교 서영대학교(瑞永大學校, )는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북구와 경기도 파주시에 캠퍼스를 둔 전문대학이다. 서라벌대학교 서라벌대학교(徐羅伐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서라벌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을지대학교 을지대학교(乙支大學校, )는 대전광역시와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사립 대학이다. 1967년 성남캠퍼스의 전신인 서울보건대학이 설립됐고, 1997년 대전캠퍼스의 전신인 을지의과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같은 재단 소속인 두 대학은 2006년 교육부에 통폐합 승인을 신청, 교육부가 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2007년 3월 '을지대학교'란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대전캠퍼스는 의과대학을 비롯하여 5개 학과 및 대학원이 개설되어 있고, 성남캠퍼스는 3개 부, 22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을지학원재단 부속대학병원인 을지대학교병원은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약 1000병상이다. 이 외에 서울을지병원, 강남을지병원 등이 있다. 2021년까지 캠프 에세이욘에 의정부 부속병원과 의정부캠퍼스를 짓고 의예과,의학과를 제외한 대전캠퍼스를 이전한다.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서울여자간호대학교(서울女子看護大學校,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간호 특성화 전문대학이다. 서울여자간호대학교는 간호학과 단일 과정으로, 4년제로 설치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서울藝術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사립 예술대학이다. 1962년부터 사용하였던 예장동 남산 캠퍼스는 부지 및 강의 건물의 협소함을 해결하고, 학생 복지, 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1995년부터 안산에 신 캠퍼스를 조성하기 시작해 2001년 이전했다. 캠퍼스 이전 후 안산은 예술 전문 교육 공간으로, 서울에 있는 남산캠퍼스는 예술 체험 공간으로 이원화해 운영 중에 있다. 남산 캠퍼스에 있는 드라마 센터에서 4년제 학사학위 전공심화과정 수업, 졸업 작품 공연, 문화 예술 전문 과정 등이 이뤄지고 있으며, 안산캠퍼스에서는 졸업 작품 공연 및 학부 강의가 진행된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서울예술대학교의 전공 일람이다. 서일대학교 서일대학교(瑞逸大學校, )는 서울특별시 중랑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서일대학교는 공학, 인문사회, 자연, 예체능계열로 각각 나누어 학과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서일대학교 세방도서관은 1976년 6월 11일 개관한 대학 부속 시설이다. 2017년 기준, 보유 장서는 180,794권이다. 서정대학교 서정대학교(瑞靖大學校, Seojeong Unvirsity)는 대한민국의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힘을 기르자’는 교훈과 인성교육, 신문화 창조교육, 직업교육을 ‘교육이념’으로 직업교육을 통한 행복한 인재 양성, 직업기초능력의 바탕위에 복수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 양성, 창업으로 독립 가능한 인재 양성, 해당 직무에 가장 적합한 인재 양성을 ‘교육목표(인재상)’로 하고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서정대학교의 학과 일람이다. 서해대학 서해대학(西海大學, Sohea College)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서해대학의 학과 일람이다. 선린대학교 선린대학교(善隣大學校, Sunlin Universuty)는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포항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선린병원 설립자인 김종원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다. 1969년 3월 포항간호고등기술학교으로 개교하였으며, 1972년에 포항간호전문학교, 1983년 포항간호전문대학, 1994년 포항선린전문대학을 거쳐, 1998년 5월 선린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전국에서 최초로 응급구조과를 설립하였다. 선린대학교는 4계열 18과를 개설하여 운영중이다. 한국폴리텍대학 섬유패션캠퍼스 한국폴리텍대학 섬유패션캠퍼스는 대한민국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 내 유일의 섬유패션분야 특성화 대학으로 지식집약화 첨단 섬유, 패션산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하여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신지식 전문인을 양성하는 국책대학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222에 있다. 성덕대학교 성덕대학교(聖德大學校, Sungduk C.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영천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성덕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이다. 성화대학 성화대학(成和大學, )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었던 사립 전문대학이다. 개설학과 및 전공은 다음과 같다. 2011년 6월, 성화대학이 교수 월급으로 13만원을 지급한 것이 밝혀지자 교육과학기술부가 감사를 시작, 그 결과 재단 설립자 겸 전 총장이 교비 횡령으로 학교의 재정이 급격히 악화되어 학교가 지급불능 상태이며, 학사비리가 상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 이후, 교육과학기술부의 시정요구와 2차례의 학교폐쇄 계고처분을 내렸으나 세림학원이 이를 불이행하였으며, 이로 인해 2011년 11월 7일자로 교육과학기술부가 고등교육법에 근거하여 명신대학교와 함께 학교폐쇄 및 퇴출을 확정지었고 재단인 세림학원에 대해서는 법인 해산을 명령하였다. 당시 진행 중이였던 2012년 정시모집은 중단되었으며 재학생들은 인근 대학으로 편입되었다. 세경대학교 세경대학교(世京大學校, Saekyung College)는 강원도 영월군에 위치하고 있는 사립 전문대학이다. 1994년 영월공업전문대학으로 개교하여 2012년, 현재의 세경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세경대학교는 2018년 기준, 2개열 12개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송원대학교 송원대학교(松源大學校, )는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대한민국의 사립대학교이다. 4년제 일반대학 승격 추진 2년여만에 교육과학기술부 대학설립심사위원회 심사를 통과, 2011년 5월 24일 4년제 대학으로 인가받았다. 이로써 2012년 3월 1일부터 송원대학교로 출범하였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서원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송원대학교의 대학원 과정 일람이다. 일반대학원은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특수대학원 1개원으로, 석사과정만 제공한다. 송호대학교 송호대학교(松湖大學校, Songho University)는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송호대학교는 3계열 12학과를 개설하여 운영중이다. 수원과학대학교 수원과학대학교(水原科學大學校, Suwon Science College)는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시에 소재한 2년제, 3년제, 4년제 과학기술대학교이다. 1991년 보통리로 캠퍼스를 이전해 본관과 사회과학관 외 5개동이 있다. 부속기관으로 도서관, 학보사, 방송국, 전자정보원이 있으며 부설연구소로 학생생활연구소, 산업기술연구소, 금융산업연구소 등이 있다. 매년 5월에 비마종합축제가 열린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수원과학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수원여자대학교 수원여자대학교(水原女子大學校, Suwon Women's University)는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2018년 기준 수원여자대학교의 학과 일람이다. 순천제일대학교 순천제일대학교(順天第一大學校, )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순천제일대학교의 전문대학 학위 과정 일람이다. 순천제일대학교는 전라남도 순천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으로, 본래 2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본캠퍼스만 사용하고 있다. 순천제일대학교의 본캠퍼스는 덕월동에 위치하며 캠퍼스 서편으로는 남산의 산간 지형과 맞닿아 있으며, 동편으로 주택가와 인접한다. 근처에 청암대학교와 청암고등학교가 위치하며, 순천종합버스터미널이 비교적 근처에 위치해 있다. 순천제일대학교 승주캠퍼스는 평중리에 위치하며 본래 순천시 도농통합 이전 승주군청사로 쓰이던 곳이다. 이후 순천제일대학교에서 건물을 매입하여 1999년 승주캠퍼스로 개교하였다. 근처 승주초등학교 등이 위치하며, 캠퍼스 북쪽으로 산지와 닿아있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숭의여자대학교 숭의여자대학교(崇義女子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사립 여자 전문대학이다. 1903년에 숭의 여학교로 개교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의 캠퍼스는 경성신사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신구대학교 신구대학교(新丘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1973년 7월 학교법인 신구학원이 설립한 신구산업전문학교가 전신이다. 1974년 3월 물리치료과, 방사선과, 치기공과를 증설하고, 교명을 신구전문학교로 바꾸었다. 1979년 1월 신구실업전문대학으로 개편하고, 1985년 3월 신구전문대학을 거쳐, 1998년 5월 신구대학으로 변경하였으며, 2011년 12월 지금의 신구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서울과 가까워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 서울지하철 8호선 단대오거리역에서 걸어오는 학생도 많은 편이다. 보건 계열과 수목원을 가지고 있는 원예학과 계열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특이하게 보건 계열은 다 갖추고 있지만 메인으로 볼만한 간호학과는 없다. 2015년 기준 6개의 학부가 있다. 별도의 표기가 없으면 2년제. 과 이름이 (학)과인 곳은 4년제 학사 학위과정을 제공하는 곳이다. 오랜 전통에 따라 물리치료과를 필두로 부속치과 때문에 치기공, 치위생 등의 보건계열과 유아교육과가 강세이고 최근엔 항공서비스과가 항공사에 취업하는 졸업생을 내기 시작하면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분당, 성남 쪽의 유치원에선 신구대 유아교육과를 인정해 주고 있고 유치원장 중에서 이 학교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하는 전국고등교육기관 취업률을 보면 유아교육과가 가끔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하고 상위권에 주로 포진하고 있다. 다음은 신구대학교의 2018년 기준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신성대학교 신성대학교(新星大學校)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덕마리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신흥대학교 신흥대학교(信興大學校, "Shinheung College")는 대한민국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2014년 3월 1일 한북대학교와 통합하여 4년제 신한대학교로 개교했다. 기독교의 사랑을 바탕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펼치기 위하여 인격의 완성,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전문직업인 양성하는 것을 건학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교훈은 ‘신의,실질,근면’이다. 의정부캠퍼스 도서관은 1971년 12월 23일 신흥대학(2년제) 설치령에 의해 개관하였다. 총 면적은 2,868m이며, 교육관 4~6층에 위치하고 있다. 13만여권의 장서와 500여종의 국내외 학술잡지, 각종 학위논문, 각 대학 논문을 보유하고 있다. 안동과학대학교 안동과학대학교(安東科學大學校, )는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안동과학대학교는 1967년에 개교한 3년제 사립 전문대학교로 의생명계열(간호학과, 물리치료과, 치위생과, 의약품질분석과, 의료공학과), 보건계열(보건행정과, 의무부사관과, 건강관리과, 식품영양과, 뷰티아트과, 미술심리재활과), 융합기술계열(컴퓨터정보과, 시스템경영정보과, 미래자동차공학과, 건설정보과, 건축인테리어과), 교육복지계열(유아교육과, 사회복지과), 글로벌비즈니스계열(항공호텔과, 항공보안과, 호텔조리과, 마케팅경영과), 체육계열(스포츠레저과, 축구과) 등 6개 계열, 24개 학과로 구성돼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안동과학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건동대학교 건동대학교(建東大學校, Kundong University)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건동길 34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사립대학교이며, 학교법인 백암교육재단이 운영하고 있었다. 부실대학 명단에 속하여 2012년 8월 31일에 자진 폐교하였다. 폐교 이후, 건동대학교 부지에는 현재 기숙형 공무원 학원인 김재규공무원학원이 들어서 있다. 안산대학교 안산대학교(安山大學校, Ansan University)는 대한민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기독교대한감리회 계열 전문대학이다. 본래 인천간호전문학교로 설립하여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에 위치하였으나 1994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고 이듬해인 1995년에 안산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1998년 안산1대학으로, 2011년 안산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가 2012년 안산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재단에서 인천기독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교훈은 진리·자유·성실이다. 신안산대학교 신안산대학교(新安山大學校, Shin Ansan University)는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안산공과대학에서 신안산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신안산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이다.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는 대한민국의 특성화 기능대학이다.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송원길 41-12에 있다. 동원과학기술대학교 동원과학기술대학교(東園科學技術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2019년 기준, 동원과학기술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여주대학교 여주대학교(驪州大學校, Yeoju Institute of Technology)는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1992년 12월, 학교법인 동신학원이 여주공업전문대학으로 설립했다. 1994년 여주전문대학으로, 1998년 여주대학에 이어 2012년 여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부속기관으로 전자도서관, 한국어학교, 창업보육센터, 인터넷방송국, 세종생활관 등이 있고 부설연구소로 도자기연구소, 정보통신연구소 등이 있다. 매년 5월과 10월에 교내 행사인 용마체전과 용마축제가 열린다. 여주대학교는 1993년 3월, 여주공업전문대학으로 개교한 것이 시초다. 전기과, 전자과, 건축과, 산업디자인과, 공업경영과, 사무자동학과, 도자기공예과 등 7개 학과를 개설했다. 개교 당시 캠퍼스에는 제1공학관, 제2공학관, 학생회관, 본관, 부대시설 등 5개동의 건물이 있었다. 1993년 개교 원년에 편성된 교육과정의 특징은 국제화, 전산화의 시대적 추세에 따라 전체 학과가 영어회화와 컴퓨터교육을 4학기 내내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학과별로 현장실무 능력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실질적이고 전문화된 실습 위주의 교육과정을 편성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개교와 함께 대학의 양적팽창을 추진한 결과, 1993년 9월 16일 학과 증설이 이루어졌다. 더불어 교명변경을 추진하여 1994년 여주전문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토목과, 여성교양과, 세무회계과, 실무영어과 등을 신설했다. 이와 함께 도서관, 신문방송국, 학생생활연구소, 상담실, 전자계산소, 산업기술연구소 등 6개 부속기관이 신설되었다. 1995년에 전자계산과, 자동차과, 사회체육과를 신설하고 총 14개 학과 1,200명의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사회체육과의 개설과 더불어 600여 평의 대규모 체육관이 건립되어 캠퍼스의 경관이 바뀌었다. 2,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용마체육관은 당시 학교의 랜드마크 역할을 수행했다. 여주대학교는 2000년 11월 13일, 경북과학대학교와 우수 전문인력 양성과 상호 발전을 위한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하였고, 11월 15일에는 여주대학 자동차과와 (주)현대·기아자동차 간에 자동차 교육에 필요한 정보와 인적 물적 자원의 상호 교류를 통해 우수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산학협동 조인식 등을 진행했다. 여주대학교는 특별근로장학금 외 15종의 교내장학금을 운용하고 있으며, 학교법인 차원에서 세종문화재단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1993년에 설립된 여주대학교 도서관에는, 약 9만 4천여권의 단행본, 100여종의 정기간행물, 6,231여점의 비도서자료를 비치하고 있으며, 830석의 열람석이 있다. 2011년 6월 29일 여주대에 따르면 한 방송사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된 이 대학의 2006~2010년 사이 법인카드 사용내역 2만5천여건(30여억원)을 보면 커피전문점, 일식집, 한정식 식당에서 카드가 쓰여졌다. 수원의 한 일식집에서는 57차례에 걸쳐 2천500여만원을, 화성의 한정식 식당에서는 한달 평균 5~6차례씩 모두 120여차례에 걸쳐 1천600여만원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트랜스젠더바, 룸살롱, 마사지업소까지 드나든 것으로 확인돼 법인카드 관리가 허술하게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 사용 내역을 업종별로 분류하면 한식 8,713건 사용금액은 10억 7천여 만 원, 서양 음식은 1,930건 사용금액 1억여 원, 일식집은 829건 1억 6천여만 원을 사용해 음식에 가장 많은 지출을 보였다. 그 다음으로 마트는 1,648건 사용금액 4억 2천여만 원, 숙박은 163건 사용금액 1억 8천여만 원이었다. 그 밖에 주유소, 주점, 약국, 상품권 구입, 노래방 등이 있었다. 지역별로는 대학이 위치한 지역이 11,609건으로 카드 사용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서울이 7,248건으로 전체 사용 중 28%를 차지했다. 그중 강남구는 2,237건에 달했다. 현행 사립학교법에는 재단회계와 대학회계가 분리돼 재단법인 관계자는 교비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여주대학 정 모 전(前) 이사장의 주소지 주변의 마트, 약국, 커피전문점, 식당 등에서 상당한 액수의 카드가 쓰였다. 심지어 마트에서는 기저귀까지 구입한 내역이 드러났다. 또한 여주대학에서는 일부학과의 학생들이 필수 학기제를 명분으로 뉴질랜드에 잇는 한 사립대학으로 2개월 간 연수를 가야 하는 시스템이 있음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 사립대학 또한 여주대 교수이자 홍 모 화성 고등학교 재단 이사가 설립한 학교였다. 또한 학생들이 연수를 위해 내는 비싼 등록금의 일부가 홍모 이사의 개인계자로 송금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이에 대해 여주대학 측에서는 "그건 우리학교가 알 바 아니다"며 사태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여주대학의 등록금 이용실태와 등록금 인상 원인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여주대학의 일부 학과는 다른 사립대학교보다도 높은 수준인 매년 1000만원의 등록금을 받아오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비리가 공개되자 여주대학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재학생 및 네티즌의 비난의 글이 쇄도했고 특히 '난 지금도 등록금 내려고 아르바이트 하고 왔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여주대학은 이전에 수 차례 사학비리 혐의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여주대학교는 13개국 83개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술교류, 교수·학생의 교환과 언어연수, 졸업생의 편입학 등의 교류를 하고 있다. 연암공과대학교 연암공과대학교(蓮庵工科大學校)는 대한민국 진주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1984년 연암공업전문대학으로 개교를 하고, 1986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69년 연암문화재단을 설립하였고, 1973년에는 럭키금성(현 LG)에 의해 연암학원이 설립되었다. 1984년 개교를 한 이후, 86년에는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론 수업은 한 학급당 40명, 실습은 한 학급당 25명의 소수정예를 교육을 목표로 한다. 영남이공대학교 영남이공대학교(嶺南理工大學校, )는 1968년에 설립되었으며,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사립 전문대학이다. 학교법인 영남학원에 소속되어 있다. 다음은 영남이공대학교의 교육편제 일람이다. 영진전문대학교 영진전문대학교(永進專門大學校, Yeungjin University)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1977년 3월 12일 학교법인 영진교육재단(현 영진학원)이 영진공업전문학교로 설립하여 개교한 전문대학이다. 1977년 영진공업전문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81년에는 급속도로 변모하는 대한민국 산업 사회의 기술인력 고급화라는 국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실업계열의 학과를 신설하고 기존 학과를 개편하여 교명을 영진실업전문 대학으로, 1985년 영진전문대학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2018년 영진전문대학교로 바뀌었다. 오산대학교 오산대학교(烏山大學校, Osan University)는 경기도 오산시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오산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용인송담대학교 용인송담대학교(龍仁松潭大學校, Yong-In Songdam College)는 1993년 송담학원이 경기도 용인시에 설립한 전문대학이다. 1998년 용인송담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매년 방학기간 중 산업체 견학, 박람회 참가를 위한 해외단기연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며, 9월에는 석담축제가 열린다. 해외 교류는 하와이의 자비오라니 대학(Hawaii-Kapiolani)외 6개 대학과 2개 기관과의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여 상호학술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교육부평가 특성화대학, 주문식교육실시대학으로 선정되었고, 2010년도에는 교육과학기술부 평가 교육역량강화사업에 선정된 바 있다. 용인송담대학교는 4계열 27학과를 개설하여 운영중이다. 용인송담대학교는 해외 각종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술 세미나 등의 행사를 개최하며 교류하고 있다. 다음은 주요 대학 목록이다. 우송공업대학 우송공업대학은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었다. 2009년 3월 1일자로 우송대학교에 통폐합되었다. 우송정보대학 우송정보대학(又松情報大學, )은 대전광역시 동구의 전문대학이다. 우송대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는 학교법인 대전우송학원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우송정보대학의 전문학사 학위 일람이다. 울산과학대학교 울산과학대학교(蔚山科學大學校, )는 울산광역시 동구와 남구 에 캠퍼스가 소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울산과학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울산과학대학교는 울산광역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으로, 동구와 남구에 각각 캠퍼스가 위치한다. 동부캠퍼스의 경우 비교적 언덕에 위치해있으며, 울산만과 인접해 있다. 반면, 서부캠퍼스는 평탄한 지형이며 도심지에 위치해 주변 기반 시설이 발달한 편이다. 두 캠퍼스의 교지는 약 30만m이다. 울산과학대학교 동부캠퍼스는 화정동에 위치한다. 2000년 개교한 신규 캠퍼스로, 시설면에서 서부캠퍼스에 비해 발달되어 있으며, 현재 대학본부가 위치하고 있다. 울산과학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위치하며, 인근에 울산만을 비롯한 바다와, 동구청이 위치하며, 주거시설과 학교가 발달해 있어, 화정초등학교, 화진중학교 등이 위치한다. 울산과학대학교 서부캠퍼스는 무거동에 위치한다. 학교의 설립때 부터 존재한 캠퍼스로, 현재는 공학계열 일부 학과만 남아있다. 다만, 남구 도심지 부근에 위치해있어 기반 시설 등이 잘 발달한 편이며, 인근에 울산고속도로가 지난다. 신복초등학교, 옥산초등학교 등 학교가 인접해 있고, 울산체육공원이 근처에 위치한다. 울산과학대학교 도서관은 1973년 설립과 동시에 개관하였으며, 현재는 동부캠퍼스에 위치한다. 서부캠퍼스에 분관으로 아산도서관이 위치하며, 2018년 기준, 총 장서 보유량은 213,653권으로, 이는 재학생 1인당 43.6권에 해당하는 양이다. 웅지세무대학교 웅지세무대학교(雄祉稅務大學校, Woongi Accounting & Tax Collage)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공인회계사,세무사,세무직 공무원을 양성하고 있다. 원광보건대학교 원광보건대학교(圓光保健大學校)는 대한민국의 사립 전문대학의 하나이다. 1976년 1월 학교법인 원광학원에서 원광보건전문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979년 원광보건전문대학으로 개편했고 1998년 원광보건대학으로, 2012년 원광보건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대한민국 교육이념과 원불교 정신에 바탕하여 과학과 도학을 겸비한 전인교육을 통해 사회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과 기술을 연마시키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덕성을 함양하여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인재 양성을 건학이념으로 삼고 있다. 10만 8126평의 교지에 12개의 건물동, 기숙사, 운동장이 있으며 6개 계열 26개 학과, [보건과학계열(임상병리과, 물리치료과, 방사선과, 치기공과, 안경광학과, 의무행정과, 식품영양과, 미용피부관리과, 허브테라피과, 의료관광코디네이션과), 간호계열(간호학과), 보건복지계열(유아교육과, 사회복지과, 다문화복지과, 경호스포츠과), 호텔관광계열(호텔관광과, 외식조리산업과, 항공서비스과), 사회실무계열(공무원행정과, 세무회계과, 창업경영과, 정보부사관과), 실용예술계열(주얼리디자인과, 실용음악과)]를 비롯해 사회복지학과, 물리치료학과 등의 4년제 학사학위전공심화과정을 운영 중이다. 부속기관으로 도서관, 신문방송사, 평생교육원, 정보전산원, 학생생활관이 있고, 부설기관으로 원광문화연구원, 국제개발원, 원격평생교육원, 교수학습지원센터, 귀금속보석연구센터, 취업지원센터, 성상담센터 등이 있다. 성적우수장학, 보훈장학 등 80여종의 교내외장학금이 있으며, 매년 5월과 10월에 신용대동제와 신용체전이 각각 열린다. 1995년부터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몽골, 네팔, 필리핀 등 세계각국의 교육기관과 국제교류를 맺고 있으며, 2011년에는 필리핀 Cebu City에 현지법인을 설립, 원광글로벌교육센터를 개원해 화상영어교육 사업을 진행중이다. 원주대학 원주대학(原州大學, Wonju National College)은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시에 있었던 국립 전문대학이다. 공립원주간호기술학교로 1967년에 설립되었고, 1982년 3월 국립으로 이관되며 원주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 2007년 3월에 강릉대학교와 통합하여 강릉대학교 문화산업대학으로 통합되었다가, 2009년에 강릉원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원주캠퍼스로 통합하여 현재 이원화 캠퍼스 형태로 있다. 대한민국의 3개 국립 유치원 중 하나인 원주대학부설유치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통합 이후 강릉원주대학교부설유치원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여전히 원주시에 남아있다. 원주대학은 1967년 3월 4일, 원주간호고등기술학교가 공립으로 설립이 인가되어 개교하였다. 이후, 1972년 12월 18일, 원주간호전문학교로 개편되고, 7년 뒤인 1979년 1월 1일에, 전문대학으로 재개편하여 원주간호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다. 이때까지 간호학 특성화 교육기관이었지만, 1981년 10월 16일, 유아교육과가 신설되면서 1982년, 원주전문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국립으로 이관되며 본격적인 발전기에 들어선다. 다음해, 원주시 원인동 일원에서 지금의 교사가 위치한 흥업면으로 옮기며 교사를 확장시킨다. 이후 공단 등이 발달하여 지역에 인재를 공급해야 하는 국립 대학에 대한 지역적 기대에 따라 공업 관련 전문학사 과정을 편제시켜 나갔고, 1999년 3월 1일, 원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 등 교육당국의 국립대학 구조개혁 정책에 따라, 1946년 설립된 강릉사범학교를 모태로 둔 강릉대학교와 통합을 추진한다. 2005년 10월 5일, 양 대학은 통합 기본 합의서에 서명하고, 2006년 당국의 심사를 거쳐, 1년 뒤인 2007년 3월 1일, 원주대학이 강릉대학교 문화산업대학으로 변경되면서, 통합이 확정되었다. 이후 교명변경에 따른 각 대학의 갈등이 있었다. 양 대학이 합의를 거쳐 강릉원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원주캠퍼스로 자리잡았다. 아래 일람은 원주대학이 통폐합으로 폐지되기 직전까지 남아있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분류는 가독성을 위하여 임의대로 분류한 것이다. 유한대학교 유한대학교(柳韓大學校, Yuhan University)는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유한양행 설립자인 유일한이 1977년 유한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한 것이 시초다. 이후 2년뒤인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2011년 유한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유한대학교는 4학부 23개 학과 과정을 제공한다. 유한대학교 신문방송국은 학보사, 유한교육방송국 등으로 이루어진다. 1978년 창간된 학보사는 캠퍼스, 시사 논평, 신기술 소개 등의 소식을 전하며, 유한교육방송국은 학내 소식을 전파하며, 학내 문제점 등을 심도 있게 다루는 등 언론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유한대학교는 인하공업전문대학, 부천대학교와 함께 경인지역 전문대학 방송국협의회를 구성하여 매년 3월 방송 교류를 하고 있다. 2009년 9월 개원한 평생교육원은 지역민의 평생 교육 보장을 위해 설립되었다. 인덕대학교 인덕대학교(仁德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으로 설립자는 박인덕이다. 1971년 12월 학교법인 인덕학원이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로 설립한 전문대학이다. 1979년 인덕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했고 1990년 인덕전문대학으로, 1998년 인덕대학으로, 2012년 인덕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미국 워싱턴(Washington D.C.)에서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부려재단(Berea in Korea Foundation)을 통한 미국 해외 개발 본부의 재정 원조로 제1공학관, 제2공학관, 제 3공학관을 건립했고 이어 제4공학관, 제5공학관, 제6공학관과 도서관 등이 신축되어 사용되고 있다. 23,137평의 교지에 운동장과 건물 12개동이 있다. 부속기관으로 도서관, 교수학습지원센터, 아정미술관, 학생상담센터 등이 있다. 인우회, 산악반, 연극반 외 23개의 일반 동아리와 컴퓨터기술동아리, 마이크로로봇 창업동아리 등 총 45개의 창업 동아리가 활동 중이며 매년 9월에 연지축제가 열린다. 1995년에 완공된 중앙도서관은정보센터는 열람석 1,120석, 장서량 77,041권 규모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디자인계열 장서를 갖추고 있으며 완전 개가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수장학금 외 5종의 교내장학금과 한국장학회장학금 외 6종의 교외장학금이 있다. 법인관계 교육기관으로 인덕공업고등학교가 있다. 인천전문대학 인천전문대학(仁川專門大學, )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공립 전문대학이다. 1994년 사립 교육기관에서 공립 교육기관으로 변경되었으며, 2010년 공립 인천대학교와 통합하였고, 폐지되었다. 인하공업전문대학 인하공업전문대학(仁荷工業專門大學, )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한진그룹의 사학 재단인 정석인하학원이 운영하고 있는 공업 전문대학으로서 교정에 해발고도의 기준이 되는 수준원점이 존재한다. 다음은 2015년 기준, 인하공업전문대학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인하공업전문대학은 인천광역시의 사립 전문대학으로, 미추홀구 용현동에 그 교지가 위치한다. 캠퍼스 면적은 약 79,341m로, 전주교육대학교나 창신대학교와 비슷한 수준이다. 15개 건물동, 74개 강의실, 141개 실습실 등이 교내에 위치한다. 이 외에도, 학교 부속 기관으로, 도서관, 생활관, 평생교육원, 전산정보원, 국제교류원, 융합교육지원센터, 예비군대대, 학보방송사, 해양레저센터 등이 있다. 장안대학교 장안대학교(長安大學校, )는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1989년 장안전문대학, 1998년 장안대학으로 교명 변경하였으며 1991년 법인명이 서림학원으로 변경되었다. 2011년 장안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장안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인천재능대학교 인천재능대학교(仁川才能大學校, )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동구와 연수구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0년 12월 16일 '대헌전자공업전문학교'로 시작해, 1993년 일반 전문대학인 '대헌전문대학'으로 확대했다. 재능그룹의 '재능학원'이 1997년 재단으로 출범하였고, 1998년 5월 1일 '재능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다. 2011년 11월 21일에 와서 현재의 교명으로 변경했고, 2015년 9월 14일 송도국제도시 내에 제2캠퍼스인 '송도캠퍼스'를 개교한다. 여러 대학들이 들어선 송도국제도시에 대한민국 전문대학 중 유일하게 인천재능대학교만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인천재능대학교 송도캠퍼스는 송도경제자유구역 5공구 내 약 3만 8000㎡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2015년 8월 교육부로부터 캠퍼스 일부 이전을 승인받았고, 2015학년도 2학기부터 송도캠퍼스에서 '유통물류과'가 이전해 운영되고 있다. 인천항, 인천신항과 인접해 있기에 유통물류과에게 적합한 환경이라는 설명이다. 2012년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고등직업교육평가인증원이 주관하는 '전문대학 기관평가인증'을 획득했고, 교육부로 부터 '산학협력선도전문대학'(LINC) 육성사업에 선정됐다.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교육역량강화사업' 우수대학에 선정되었으며, 2013년 교육부의 WCC(World Class College) 사업에도 선정되었다. 2014년에는 '특성화 전문대학 육성사업'에서 최우수대학 선정되었다. 2015년 5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관하는 '일학습병행제 전문학사 학위연계형 듀얼공동훈련센터'에 선정되었고, 교육부와 고용노동부가 주관하는 '취업보장형 고교-전문대 통합교육 육성사업'(Uni-Tech)에 선정된 후 체계적인 사업 수행을 위해 '듀얼공동훈련센터'를 설립하였다. 이 곳에는 기구설계실습실, 반도체장비실습실, 칠러(CHILLER)실습실, 스크러버(SCRUBBER)실습실, 프로그래머블 로직 컨트롤러 실습실이 마련되었다. 적십자간호대학 적십자간호대학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었다. 2011년 8월 18일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법인 합병 인가를 받아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으로 새로이 출범하였다. 전남과학대학교 전남과학대학교(全南科學大學校, )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곡성군에 있는 사립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전남과학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계열 분류는 편의를 위하여 임의로 한 것이다. 전북과학대학교 전북과학대학교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다. 전주비전대학교 전주비전대학교(全州비전大學校, Vision College of Jeonju)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98년 교명을 전주공업전문대학에서 전주공업대학으로, 2006년 교명을 전주비전대학으로 변경하였으며 2011년 전주비전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전주비전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전주기전대학 전주기전대학(全州紀全大學, )은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캠퍼스는 본관, 도서관, 홍선복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전주기전대학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제주관광대학교 제주관광대학교(濟州觀光大學校, Jeju Tourism College)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전문대학이다. 현재 총장은 김성규 박사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관광 특성화 전문대학이다. 1991년 12월 학교법인 제주교육학원이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설립자 김창희가 초대 이사장에 올랐고, 1992년 12월 제주관광전문대학(濟州觀光專門大學, Jeju Tourism Technical College)이 세워졌다. 1993년 4월에는 본관 건물을 준공했으며, 1997년 6월에는 부속유치원이 문을 열였고 2000년 6월에는 부속어린이집과 관광뷰티플라자가 문을 열였다. 2005년 9월에는 제주시 노형동에서 제2캠퍼스 착공식을 가졌고, 2007년 2월에 노형교육관이 문을 열었다. 1999년 5월과 2000년 5월에 구조조정 지원대학으로 선정된 바가 있으며, 2001년 7월에는 구조조정 우수대학으로 선정됐다. 2012년 1월 제주관광전문대학에서 현재의 이름인 제주관광대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2015년 6월 25일 제주특별자치도 대학설립심사위원회는 제주관광대학교에 제주도에만 부여된 특례인 2+4대학 개편 인가를 승인하고 전문학사 학위 과정과 학사 학위 과정을 함께 운영하도록 했고, 2016년에 리조트카지노경영학과와 국제비즈니스학과, 국제의료중국어통영학과의 4년제 학과를 신설했다. 제주관광대학교는 인성 및 서비스 교육을 통한 감성 인재를 길러내고, 주도형 산학협력 강화를 통한 현장 실무형 인재를 기르며 핵심 직무역량과 글로벌 역량강화를 통한 적문직업인을 키워내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설립자 김창희 초대 이사장의 이념에 따라서 제주도가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크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역점을 두며, 대한민국 유일의 관광 전문대학으로서 지역 관광 산업 및 국제 관광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제주관광대학교는 관광경영학과와 유아교육과, 사회복지과에 한해 4년제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학사학위전공심화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제주관광대학교는 2018년 5월 10일을 기준으로 미국과 캐나다, 중화인민공화국, 필리핀, 싱가포르 등 16개국 83개의 대학 및 교육기관과 국제교류 및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다. 주요 자매결연 대학으로는 다음 대학들이 있다. 제주관광대학교는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다. 1997년 처음 창단했다가 선수 수급 문제 등의 어려움을 겪어 2006년 해체됐다가 2009년 3월 25일 재창단했다. 하이포아염소산 하이포아염소산()은 산소산의 하나로, 분자식은 HClO이다. 차아염소산이라고도 한다. (참고 사이트: http://new.kcsnet.or.kr/iupacname) 표백제의 일종인 락스의 주성분이다. 하이포아염소산은 수용액으로만 존재하며, 빛이나 열에 의해 상당히 불안정하게 되어 발생기 산소를 발생시킨다. 이 산소 라디칼에 의해 강한 산화성을 가지며, 용액 자체나 그 염은 표백·살균제, 소독제로 쓰인다. 진한 용액은 담황색을 띠며, 자극적인 냄새가 난다. 염소를 물에 녹인 염소수 중에 다음 반응의 평형 생성물로 존재한다. 또한 산화수은이나 산화비스무트의 수용액에 염소를 통과시켜서 얻기도 한다. 위의 평형 반응에서, 역반응 부분인 하이포아염소산과 염산의 반응에 의해 유독한 염소 기체가 발생하므로, 하이포아염소산이 포함된 소독제와 염산이 포함된 약품을 함께 사용해서는 안 된다. 상수도에서의 하이포아염소산은 살균력이 오존보다는 못하나, 하이포아염소산 이온(OCl), 클로라민(NHCl, NHCl)보다는 살균력이 뛰어나다. 하이포아염소산(HOCl), 하이포아염소산 이온(OCl)를 유리염소라 부르고, 클로라민은 그와 구별해서 결합염소라고 부른다. 탄둔 탄둔 (; 1957년 8월 18일 ~ , 중국 후난 성 출생)은 중국의 작곡가이다. 1997년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을 때, 탄둔은 요요 마를 위한 작품인 《Symphony 1997: Heaven Earth Mankind》을 위촉 받아 작곡하였다. 1998년 작품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Water Passion after St. Matthew》를 작곡하였다. 영화 《와호장룡》의 음악 작곡으로 2000년 아카데미 상을, 2002년 그래미 상을 받았다. 리게티 죄르지 리게티 죄르지(, 1923년 5월 28일 ~ 2006년 6월 12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전음악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와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삽입된 음악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리게티는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음악을 배웠다. 1943년 나치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음악 공부를 금지당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감되었고 그의 어머니만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코다이 졸탄을 사사했다. 1949년에 졸업하고 나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민족음악에 관심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은 서유럽과의 교류를 막았기 때문에 연구가 어려웠다. 1956년 공산당에 대한 헝가리 시민들의 항거 이후 리게티는 비엔나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었다. 거기에서 그는 동유럽에서 접하지 못했던 아방가르드 음악을 접했다. 그때부터 리게티는 작곡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 중 많이 알려진 것은 시대적으로 《Apparitions》(1958~9)부터 《Lontano》(1967) 사이의 것이지만 그 시대 이후의 오페라인 《Le grand macabre》(1978)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리게티는 함부르크에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음악을 가르쳤다. 1980년대에는 건강이 나빠졌지만, 2006년 빈에서 사망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브누아 망델브로의 프랙털 기하학, 그리고 루이스 캐럴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글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리게티의 아들 리게티 루카스는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이다. 리게티의 초기 작품은 같은 나라 사람인 벨러 버르토크의 작품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피아노를 위한 작품인 《Musica Ricercata》(1951~53)와 같은 경우 종종 버르토크의 미크로코스모스와 비교된다. 이 작품은 11개의 곡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곡은 가 음만을 옥타브를 왔다갔다하며 연주하고 맨 마지막을 라 음으로 끝낸다. 두 번째 곡에는 첫 번째 곡에 음 하나가 더해지고, 세 번째 곡에는 다른 음 하나가 더해지고, 이런 식으로 음을 덧붙여 마지막 열한번째 곡에는 반음계에 나타나는 12음이 모두 들어가게 된다. 공산주의 정권은 이 작품의 10번째 곡을 ‘퇴폐적’이라 하여 연주를 금지시켰다. 이는 이 곡에서 나타나는 단 2도 음정의 자유로운 사용 때문으로 보인다. 헝가리를 떠나 쾰른에 살면서 리게티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함께 전자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Glissandi》(1957)와 《Artikulation》(1958)을 포함한 세 곡만을 쓰고 연주 음악으로 돌아섰다. 그의 음악에서 전자 음악의 느낌이 나타나는 것은 그당시 전자 음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Apparitions》(1958~59)은 리게티를 주목받게 만든 첫 번째 곡이었다. 그 다음 작품인 《Atmosphères》(1961)는 《Lux Aeterna》와 《Requiem》과 함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의 삽입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작곡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Atmosphères》는 큰 관현악단을 위한 곡인데, 선율, 박자, 화성 어느 것도 부각되어 있지 않지만 sound mass라는 기법을 써서 음색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 곡은 음악사상 가장 큰 음괴로 시작하는데, 반음계로 5옥타브가 넘는 음역에 해당하는 음을 동시에 연주한다. 그리고 화음과 음악의 질감이 천천히 바뀐다. 그는 《Atmosphères》, 《Apparitions》를 포함한 그의 몇몇 작품에 쓰인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마이크로폴리포니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는 화성이 급작스럽게 변하지 않고 서로 융합하면서 진행하는 다성 음악 기법이라고 리게티는 설명한다. 1970년대 이후 리게티는 선율과 박자를 가진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아프리카 음악, 특히 피그미족 음악의 박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습곡》(제1권 1985, 제2권 1988~94, 제3권 1995~2001)와 같은 작품은 인도네시아의 가멜란 음악과 아프리카의 polyrhythm, 버르토크, Conlon Nancarrow, Bill Evans 등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호른과 관현악을 위한 《Hamburg Concerto》(1998-99, 2003 개작)와 song cycle인 《Síppal, dobbal, nádihegedüvel》(파이프, 드럼, 피들과 함께, 2000)이다. 그는 70년대 이후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 많은 유명한 작곡가가 그로부터 작곡을 배웠는데, 진은숙도 그 중 하나이다. 마빈 민스키 마빈 리 민스키(Marvin Lee Minsky, 1927년 8월 9일 ~ 2016년 1월 24일)는 인공지능(AI) 분야를 개척한 미국인 과학자이다. MIT의 인공지능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이며, AI와 관련된 책들을 저술했다. 뉴욕에서 태어나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를 나왔다. 매사추세츠주의 필립스 아카데미를 다녔고,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해군으로 복무했다. 1950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 학사학위를 받고, 1954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부터 MIT 교수직으로 재직했다. 1953년에 공초점 레이저 주사 현미경에 관한 이론을 개발해 냈다. 1970년에 튜링상, 1990년에 일본국제상, 2001년 벤자민 플랭클린 메달을 비롯한 다양한 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국립 공학 학술원(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과 국립 과학 학술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회원이다. 더글러스 엥겔바트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C. Engelbart, 1925년 1월 30일 ~ 2013년 7월 2일, 오리건주 출생)는 노르웨이/스웨덴계 미국인 발명가이다. 그는 특히 컴퓨터 마우스의 발명자로 유명하다. 또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하이퍼텍스트, 네트워크 컴퓨터 등 인간과 컴퓨터 상호 작용 분야의 선구자이다. 1948년 오레건 주립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1953년 UC 버클리에서 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5년에는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필리핀의 무선전기 기사로 해군에 복무하던 시절,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가 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As We May Think)'란 글에서 큰 영감을 받는다. 전쟁이 끝나고, 영감을 실현시키기 위해 UC 버클리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955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여기서 CALDIC을 만드는 데 관여 했으며 이후 1년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만든 기술을 상업화 하려는 저장기기 제조 회사를 설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후 스탠퍼드 연구소에서 휴위 크레인과 함께 자기 논리 장치의 개발에 참여했다. 2013년 신부전으로 인해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XML XML(Extensible Markup Language)은 W3C에서 개발된, 다른 특수한 목적을 갖는 마크업 언어를 만드는데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다목적 마크업 언어이다. XML은 SGML의 단순화된 부분집합으로, 다른 많은 종류의 데이터를 기술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XML은 주로 다른 종류의 시스템, 특히 인터넷에 연결된 시스템끼리 데이터를 쉽게 주고 받을 수 있게 하여 HTML의 한계를 극복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읽거나 이해할 수 없는 계산기에 불과하므로 XML과 같은 구조화된 마크업 언어들은 인간의 읽고 분석하여 이해하는 능력과 컴퓨터의 단순한 계산적인 판독 능력 사이에 타협점을 만들어 줄 수 있다. W3C가 만든 XML 1.0 Specification과 몇몇 다른 관련 명세들과 모든 자유 개방형 표준에서 정의되었다. W3C는 XML 설계 목표에서 단순성과 일반성,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사용 가능성을 강조했다. XML은 텍스트 데이터 형식으로 유니코드를 사용해 전 세계 언어를 지원한다. XML을 설계할 때는 주로 문서를 표현하는데 집중했지만, 지금은 임의의 자료구조를 나타내는 데 널리 쓰인다. 대표적인 예가 웹 서비스이다. 많은 API가 개발되어 XML 데이터를 처리하고자 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활용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스키마 시스템이 있어서 XML 기반 언어의 정의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XML은 SGML의 애플리케이션 프로파일이다. 동적 정보 표시를 위한 SGML의 다재다능함은 인터넷의 성장 이전인 1980년대 말에 초기 디지털 미디어 출판사들에 의해 인지되었다. 1990년대 중순, 일부 SGML 실천자들은 당시 새로운 월드 와이드 웹을 경험하였고 웹이 성장할수록 마주칠 가능성이 있던 문제들 중 일부를 SGML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댄 커널리는 1995년 당시 직원으로 있었을 때 SGML을 W3C의 활동 목록에 추가하였다. 작업은 1996년 중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엔지니어 존 보삭이 선언문을 만들고 협업자들을 모집하였을 때 시작되었다. 보삭은 SGML과 웹에 모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와 잘 어울렸다. 주요 디자인 결정은 1996년 7월과 11월 사이 도달했으며, 당시 XML 사양의 최초 워킹 드래프트가 출판되었다. 추가 디자인 작업이 1997년에 계속되었으며 XML 1.0은 1998년 2월 10일 W3C 권고안이 되었다. XML에서의 기본 개념에는 10가지가 있다. XML 기반 언어는 다음과 같다. 이들 언어들은 단일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사전 정보가 없어도 이들 언어로 작성된 문서에 대해 수정이나 유효성 검사를 하는 프로그램도 제작할 수 있다. 이 절의 내용은 XML 명세에 기반한다. XML에 나타나는 모든 요소의 목록이 아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핵심 요소만을 소개한다. XML 문서는 완전히 유니코드 문자로만 이루어진다. 소수의 일부 특별히 제외된 제어 문자(control characters)를 제외하면, 유니코드에 정의된 어떤 문자든 XML 문서 내용에 나타날 수 있다. XML은 문서를 구성하는 유니코드 문자들의 "인코딩"을 인식하고 맞게 출력하는 기능을 포함한다. 유니코드 문자 집합은 저장 또는 전송을 위해 여러 방법으로 부호화될 수 있다("인코딩"). Unicode itself defines encodings that cover the entire repertoire; 잘 알려진 것으로 UTF-8과 UTF-16이 있다. 유니코드 이전에 ASCII나 ISO/IEC 8859 같은, 많은 텍스트 인코딩 방식이 있었다. 이들의 문자 집합은 대개 유니코드 문자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XML은 유니코드가 정의한 어떤 인코딩이든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며, 문자들이 유니코드에 나타나는 다른 인코딩도 사용할 수 있다. XML은 또한 XML 프로세서가 안정적으로, 사전지식 없이, 어느 인코딩이 사용되고 있는지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UTF-8 또는 UTF-16이 아닌 인코딩은 XML 파서에 인식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주석은 다른 마크업의 밖이라면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 XML 선언 전에는 올 수 없다. "codice_14"로 시작하여 "codice_15"로 끝난다. 문자열 "codice_16" (하이픈 두 개)는 주석 안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즉 주석은 겹쳐질(nested) 수 없다. 주석 내에서는 앰퍼샌드(ampersand, &)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엔티티나 문자 참조에 이를 쓸 수 없고, 문서 인코딩에 쓰인 문자 집합 이외의 문자를 주석 내에서는 표현할 방법이 없게 된다. 유효한 주석의 예: "codice_17" XML 1.0 (Fifth Edition)과 XML 1.1은 거의 모든 유니코드 문자의 이름, 애트리뷰트, 주석, 문자 데이터, 처리 명령어에 대한 직접 사용을 지원한다.(XML 자체에 대한 특별한 기호적 의미가 있는, 예를 들어 "<" 같은 문자는 제외). 아래는 잘 구성된(well-formed) XML 문서로 한자와 키릴 문자를 포함하고 있다: XML 문서에는 두 가지 수준의 수정 절차가 있다: XML 명세는 XML 문서를 well-formed 텍스트로 정의한다. 이는 명세에 제공된 문법 규칙들을 만족한다는 뜻이다. 긴 목록 중 핵심을 짚어 보면, 잘 구성됨에 더하여, XML 문서에는 유효성("validity")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문서가 Document Type Definition (DTD)에 대한 참조를 포함하고, 문서의 엘리먼트들과 애트리뷰트들이 그 DTD에 선언되어 있으며 DTD가 명시하는 문법 규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XML 프로세서는 "유효화하는validating" 또는 "유효화하지 않는non-validating"으로, 유효성 검증 여부에 따라 분류한다. 유효성 오류를 조사하는 프로세서는 그것을 보고할 수 있어야 하지만, 정상 처리를 계속할 수도 있다. DTD는 "schema" 또는 "문법"의 예이다. XML 1.0의 초판 발표 이래로, XML을 위한 스키마 언어 분야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런 스키마 언어들은 전형적으로 어떤 문서에서 사용되어도 좋은 엘리먼트의 종류, 그 엘리먼트들에 적용되어도 좋은 애트리뷰트의 종류, 나타나는 순서, 허용 가능한 부모-자식 관계 등을 제한한다. XML을 위한 가장 오래된 스키마 언어는 SGML에서 유래한 Document Type Definition(DTD)이다. DTD의 장점: DTD의 제한점: DTD의 후계자로서 W3C에 의해 기술된 새로운 스키마 언어가 XML Schema이다. XSD는 DTD보다 XML 언어 기술에 훨씬 강력하다. 더 풍부한 datatyping 시스템을 사용하며 XML 문서 논리 구조에 더 세세한 제약을 가할 수 있다. XSD도 XML-기반 형식을 사용하므로, 일반적인 XML 도구로 처리할 수 있다. 케빈 미트닉 케빈 미트닉() 1963년 8월 6일 ~ )은 미국 출신의 유명한 해커이다. 체포될 때까지 "Condor"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미국 국방성 펜타곤과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의 전산망에 여러 차례 침투한 것으로 유명하다.(하지만 본인의 자서전에서 루머라고 밝히고 있다.) 기업체 중에는 모토로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NEC 등이 그에게 해킹당했다. 1995년 2월 15일 FBI에게 체포되었으며, 미국의 항공 핵 방위 시스템인 북미 항공 우주 방위 사령부(NORAD) 등 보안이 가장 철저한 몇 개의 시스템에 침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며, 미트닉의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퍼뜨린 루머이다.) 결국 징역형이 선고되었고, 2003년 1월 21일 자정까지 3년간 컴퓨터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도록 제한을 받으며 보호관찰 명령을 받았다(그러나 일반 유선 전화는 사용할 수 있었다). 약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현재 미트닉은 저술가 및 보안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케빈 미트닉은 5년 이상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수배범이었다. 100만 달러 이상의 금액을 인터넷을 통한 사기로 갈취했다고 한다.(하지만 그는 결코 해킹을 금전적으로나 악의적으로 악용하지 않았으며 단지 해킹이 좋아서 해킹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기네스북에선 이 사기 사건을 최대의 해킹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미트닉은 컴퓨터는 한 번도 쓰지 않고 전화기만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트닉의 저서 《사기의 기술》에서 그는 이 사건을 자기가 저지른 것이 아니고, 스탠리 리프킨이란 다른 사회 공학자(Social Engineer)가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목록 역사에 걸쳐 일어난 전쟁들의 목록에 대해 서술한다. 몰의 날 몰의 날은 화학자들이 10월 23일 오전이나 오후 6시 2분에 기념하는 날이다. 이 시각을 미국식으로 표기하면 6:02 10/23이 되는데, 이는 아보가드로 수인 6.02×10과 일치한다. 아보가드로 수 아보가드로 수(, "N")는 물질량을 포함한 1mol의 구성 입자(원자, 분자, 이온 등) 속에 들어 있는 입자의 수이다. 이 상수는 국제단위계에서 6.02214129(27)×10 mol의 값을 가진다.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몰'(mole, 단위표기 mol)은 그동안 '탄소 12g 속에 들어있는 원자의 개수'로 정의됐다. 하지만 2018년 몰의 기준도 탄소-12가 아니라 정확하게 정의된 아보가드로 수 (N= 6.022 140 76 × 10 mol 으로 재정의된다. 이 물리 상수의 이름은 19세기 이탈리아의 과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를 딴 것이다. 장 바티스트 페랭이 이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페랭은 이 수를 "아보가드로 상수"로 불렀다. 이 상수의 값은 1865년 요한 요제프 로슈미트가 이상 기체 법칙을 이용해 계산해 냈으며, 그래서 독일어 권에서는 이 값을 "로슈미트 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슈미트 수는 원래 1cm 내에 들어있는 입자 개수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교향곡 2번 (시벨리우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 라장조 Op.43는 1901년에 작곡되어 완성한 교향곡이다. 베토벤의 6번 교향곡에 빗대여 ‘시벨리우스의 전원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플루트2, 오보에2, 클라리넷2, 바순2, 호른4, 트럼펫3, 트롬본3, 튜바, 팀파니, 현5부 교향곡 6번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6번 바 장조 (작품 번호 68)은 흔히 《전원》()으로 알려져 있다. ‘전원 생활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위한 곡으로 위촉받아서 1807년 여름부터 1808년 여름에 걸쳐 작곡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 시내의 빈 강 곁에 있는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극장에서의 1808년 12월 22일 저녁 '아카데미(Akademie. 당시에는 연주회를 Akademie라 했음)에서 베토벤이 자신의 세계 음악사상 불후의 작곡인 몇 가지 새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지휘로 선 보일 때에 이 작품도 함께 초연됐다. 음악 연주회 역사상으로도 손꼽을 유명한 이 "아카데미"는, 연주시간(4 시간 이상)이 기록적으로 길었다: ATSC ATSC(Advanced Television Systems Committee)는 미국의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표준을 개발하는 위원회, 혹은 그 표준을 말한다. ATSC의 표준은 현재 미국, 캐나다, 멕시코, 대한민국의 국가 표준으로 결정되어 있다. 디지털 방송의 표준에는 ATSC외에 유럽에서 개발된 DVB, 일본의 ISDB 등이 있다. ATSC 표준은 AC-3 돌비 디지털 오디오를 지원하며, 아날로그 NTSC의 한 채널을 담는 6MHz의 대역폭에 최대한 4개까지의 채널을 전송할 수 있다. ATSC는 전파 변조 구조가 DVB에 비해 단순하고 HDTV 구성이 비교적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멀티 패스나 잡음에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SFN 구성이 불가능하여 각 중계소마다 다른 주파수를 사용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ATSC의 경우 A/52로 공식 표준화되었지만 돌비 디지털 AC-3이 오디오 코덱으로 쓰인다. 최대 다섯 개의 소리 채널에, 저주파 효과 (이른바 5.1 구성)의 경우 6채널이 쓰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의 ISDB HDTV 방송은 MPEG의 고급 오디오 부호화 (AAC)를 오디오 코덱으로 쓰며 5.1 오디오 출력을 지원한다. DVB의 경우 둘 다 지원한다. 또, ATSC는 ATSC A/63 표준에 정의된 PAL 프레임 속도와 해상도를 지원한다. 알렉산드르 보로딘 알렉산드르 포르피리예비치 보로딘(, , 1833년 11월 12일 - 1887년 2월 27일)은 일생을 화학자로서 살았던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이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조지아의 귀족 루카 게데바니슈빌리(Luka Gedevanishvili)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의과 학교에 들어갔다. 1863년 밀리 발라키레프를 사사하기 전까지 작곡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다. 졸업 후 모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의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작곡도 하였다. 1859년부터 3년간의 유럽 여행을 통해 서구의 음악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1869년에 발라키레프는 보로딘의 1번 교향곡을 지휘했고 같은 해에 보로딘은 두 번째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했다. 새 교향곡의 초연은 실패였지만, 1880년 프란츠 리스트가 독일에서 공연을 추진했고 이는 러시아 밖에서 보로딘의 인지도를 얻게 해 주었다. 1869년에 보로딘은 이고리 왕자라는 오페라에 착수했다. 이 작품은 그의 작품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중의 《Polovtsian Dances》는 단일 작품으로도 연주되며,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화학자 일이 너무 많아서 오페라 작업이 느려지게 되었고, 결국 유작으로 남겨져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 의해서 완성된다. 보로딘은 현재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알데하이드의 연구 등 화학자로서의 업적도 있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일요일 작곡가”였기 때문에 당대의 작곡가만큼 다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중적인 교향시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두 개의 현악 사중주와 많은 가곡과 피아노 소품을 남겼다. 그는 세 번째 교향곡에도 착수했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후에 두 개의 악장을 글라주노프가 완성했다.) 보로딘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위치한 티흐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으로 오페라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실내악 <현악 3중주>, 가곡 <바다의 왕녀> 등이 있다. 외젠 보자 외젠 보자(Eugène Joseph Bozza, 1905년 4월 4일 - 1991년 9월 28일)은 프랑스의 클래식 작곡가이다. 보자는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양친 사이에서 니스에서 출생했다. 유년기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후 파리 음악원에서 앙리 뷔셀, 잭 이벨 등에게 작곡, 지휘 및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작품으로는 다섯 개의 교향곡과 오페라 《레오니다스》(Leonidas, 1947년), 발레곡 《해변의 장난》(Jeux de plage, 1946년) 및 많은 관악을 위한 실내악곡을 남겼으나 그 작품의 대부분은 모국인 프랑스에서 연주되는 일은 드물다. 1934년에는 칸타타 《루크마니의 전설》(La légende de Roukmāni)로 로마대상을 받았다. 1939년부터 파리 오페라 코미크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51년부터 1975년 은퇴할 때까지 발랑시엔에 있는 국립음악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훈하였고, 1991년 발랑시엔에서 서거하였다. 악보 출판사는 대부분 Alphonse Leduc, 일부는 Max Eschig, Peters에서 출판되었다. 비상한 다작가로 교향곡, 칸타타, 성악곡, 오페라, 협주곡 등 거의 모든 장르에 손댄 적이 있다. 보자의 작품, 현대에 속하는 작가이면서 특수한 기법이나 주법은 사용하지 않고(관현악을 위한 에튀드 《도형악보》는 예외), 일반적인 주법만으로 창작하는 것이었다. 악기의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연주기술이 요구되는 한편, 20세기의 프랑스 실내악의 특징인 표현력 풍부한 아름다운 선율을 지닌 형식을 잃지 않았다. 또, 레스피기, 프랑크, 라벨, 드뷔시 등, 보자 자신이 영향을 받은 다른 작곡가의 곡을 인용, 사용하였다. 호른과 피아노를 위한 《숲에서》에서는 레스피기의 《로마의 축제》의 사냥 팡파레가 인용되었다. 자신의 악곡에, 창작한 선율의 유용, 편곡도 많이 사용하였다. 초기의 색소폰을 위한 중요한 악곡인 《아리아》는 플루트, 바이올린, 클라리넷, 첼로와 현악 합주를 위한 편곡이 존재하며 플루트 4중주를 위한 《여름 산의 하루》는 제 2악장은 클라리넷 6중주를 위한 《반딧불이》, 색소폰 4중주를 위한 《눈》, 목관 5중주를 위한 《스케르쪼》등에 유용, 편곡되었다. 만년에는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일본민요의 주제에 따른 5곡》같은 평이한 기술로 연주되는 작품도 창작하나, 대부분의 악곡이 고도의 연주기술을 필요로 하며, 중~상급의 아마추어 연주자부터 프로 연주자에게까지 그의 음악은 관현악 주자의 일반적인 레퍼토리이다. 레몽 갈루와몽브룅 레몽 갈루와몽브룅(Raymond Gallois-Montbrun, 1918년 8월 15일~1994년 8월 13일)은 프랑스의 클래식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베트남 사이공 출신으로 파리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1944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에 파리음악원장을 역임했다. 바이올린 협주곡(1950)과 교향곡 《일본》(1953)을 작곡했다. 파리 음악원 파리국립고등음악무용원()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음악 무용 학교로 파리 과학인문학대학교(, )의 예술계열 그랑제꼴이다. 1795년에 설립된 이래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음악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학교이다. 역사상 최초의 음악무용원(Conservatory)으로서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음악가들과 무용가들을 배출한 역사와 전통의 음악무용학교이다. 파리 파리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로마 대상 로마 대상 ()은 프랑스의 예술 학생(건축, 미술, 조각)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음악상은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학생 중에서 선발된다. 뒤부아 뒤부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피에르 막스 뒤부아 피에르 막스 뒤부아(, 1930년 3월 1일 ~ 1995년 8월 29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면서 1955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하였다. 목관, 특히 색소폰을 위한 실내악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그의 색소폰 사중주 바 장조는 1962년도에 초연했다. 파리 (프랑스) 파리(, )는 프랑스의 수도로, 프랑스 북부 일드프랑스 지방의 중앙에 있다. 센 강 중류에 있으며, 면적은 105km.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224만 명이다. 파리의 행정 구역은 1~20구로 나뉘어 있다. 센 강을 기준으로 우안(rive droite)과 좌안(rive gauche)으로 나뉜다.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에는 소르본을 비롯한 대학 및 그랑제콜, 연구소 등이 집중해 있다. 파리는 프랑스 최대의 도시이며,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중심이다. 케스타 지형을 나타내는 파리 분지의 중앙에 위치하여 시내를 세느 강이 흐른다. 이 강의 중천에 있는 시테 섬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코뮌 단독으로 주를 구성한 특별시이며, 루브르 박물관을 포함한 1구역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20개의 행정 구역이 늘어서 ‘달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위 49도로 다소 고위도에 위치한다. 북대서양 해류와 편서풍에 의해 일 년 내내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서안해양성 기후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시역은 성곽 도시 시대의 성벽 흔적을 따라 만들어진 순환 고속도로의 내부 시가지 및 그 밖 서쪽 불로뉴 숲 밖 동부 방센느 숲 을 합친 형태로되어 있으며, 면적은 105.40km 2에 달한다. 시의 인구는 1950년대 약 290만명의 절정에 달한 후 계속 감소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조금씩 증가하는 경향으로 변하고 있어, 2010년 현재 224만명에 달했다. 2010년 근교를 포함한 도시적인 지역의 인구는 1,000만명을 넘고 있어 런던을 능가하는 EU 최대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파리 출신 거주자는 남성이 빠리지엥(, 빠리지엥), 여성이 빠리지엔느(, )로 불린다. 1960년대 이후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중부와 북부, 인도차이나 반도, 최근에는 중동, 동유럽, 중국 등지에서 빠리지엥과 빠리지엔느도 다민족, 다인종화되고 있다. 2012년 미국의 싱크탱크가 발표한 비즈니스, 인재, 문화, 정치 등을 대상으로 한 종합적인 세계도시 순위에서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3위의 도시로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경제 중심지이며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이기도 하다. BNP 파리바, 토탈, 악사 등 세계 유수의 대기업의 본사가 소재하고 있으며, 세계 500대 기업의 본사 수는 뉴욕과 런던을 앞지르고 서양의 도시에서는 최다이다. 2008년의 파리 도시권 GDP 세계 6위 5640억 달러이며, 런던 도시권(5650 억달러)과 함께 유럽 양대 경제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예술의 도시”라는 별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파리는 회화에서 조각, 패션,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파리 컬렉션이나 요리경연대회 개최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의류 문화와 음식 문화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정보 발신지가 되고 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만큼 그 문화적 영향을 세계에 지속하고 있으며, 그 결과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1989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다. 매년 약 4,5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그 60%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역사적인 건축물, 수많은 유명한 미술품, 명품으로 대표되는 패션과 음식 등이다. 건물은 중세 이전의 것들도 남아지만, 제3공화국 시대의 파리 개조 및 벨 에포크 건물이나 프랑스 혁명 200주년 그랑 프로젝터 건축물 등 각 시대의 세계의 최첨단 건축물들이 많다. 미술관에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저명한 예술가의 미술품 외에도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이나 구입에 의하여 수집된 세계적인 소장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라틴어명인 루테티아 (Lutetia), 또는 루테티아 파리시오룸 (Lutetia Parisiorum) 이라고 불렸다. 이 파리의 옛 명칭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뤼테스 (Lutèce)이다. 오늘 날 쓰이는 ‘파리’라는 이름은 현재 파리 지역에 살고 있던 켈트족 중의 하나인 파리시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른 별칭은 빛의 도시(Ville lumière)이다. 고대에 센 강 가운데 있는 시테 섬의 촌락에서 시작, 중세에는 요새 도시로 발달하였다. 파리 백 위그 카페가 왕권을 잡자,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프랑스의 수도로 자리잡았으며 초기 스콜라 학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11세기가 되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파리 대학이 설립되었다. 루이 14세 때부터 루이 16세 때까지는 정치의 중심이 교외의 베르사유로 옮겨갔다.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었으며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현재의 시 영역 및 도시 계획이 확정된 것은 19세기의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였는데, 여기에 오스만 남작의 공이 컸다. (파리 개조 사업).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모두 연합국으로 참전, 한 때 이 곳에서도 참호가 세워지기도 했다. 1968년 파리에서 시작된 5월 혁명은 현대 프랑스 사회, 정치 및 교육 체계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파리는 센 강에 위치한 도시이다. 파리를 흐르는 강에는 생루이 섬과 이보다 더 큰 시테 섬이 있다. 전반적으로, 도시는 비교적 평탄하고, 가장 낮은 지점은 해발 35m이다. 파리에는 130m의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으며 파리에서 유명한 언덕이고 가장 높은 곳이다. '부아 드 불로뉴’와 ‘부와 드 빈센’이라는 파리 외곽의 공원 지역을 제외하면 파리는 타원형의 모양으로 86.928km를 차지한다. 1860년의 파리의 외곽 지역 합병으로 20개의 ‘구(區)’를 형성했다. 이 구는 나선 모양을 띠고 있으며 시계 방향으로 1구부터 20구까지 있다. 1860년부터 1920년대까지 파리의 크기는 78km에서 86.9km로 늘어났다. 1929년에, 부아 드 불로뉴와 부아 드 빈센 공원을 공식적으로 합병하면서, 현재 파리의 넓이는 105.39km이다. 서안해양성기후에 속하고 난류인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고위도에 비해서는 온난하다. 여름(6월 ~ 8월)에는 기온이 15도에서 25도의 범위에서 춥고, 건조하고 온화하며, 연간 며칠 정도는 32도가 넘는 더위가 지속된다. 그러나 2003년 여름에는 30도 이상 기온이 몇 주 동안 계속되었으며, 40도 가까운 기온이 관측되고 1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봄(3월 ~ 5월)과 가을(9월 ~ 10월) 날씨는 불안정하고, 따뜻한 시기와 추운 시기가 같이 있으며, 10월에도 한겨울 같은 수준의 추위가 될 수도 있다. 겨울 (11 ~ 2월)은 원래 고위도에서 낮 시간이 짧은 데다, 흐리고 비오는 날이 많기 때문에 일조시간이 적지만, 강설 · 적설별로 보이지 않는다. 년간 몇 일 정도는 기온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진다. 그러나 최근의 겨울은 추위가 심했고, 2009년 ~ 2010년 겨울에는 파리 교외에서는 기온이 -10도 ~ -20도 전후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연간 강수량은 652mm 정도이며, 그다지 많지는 않다. 지금까지 최고 기온은 40.4℃(1948년 7월 28일), 최저 기온은 -23.9℃(1879년 12월 10일)이다. 겨울에는 오전 8시 30분이 넘어서 해가 뜨는 날도 있다. 파리는 1860년 이후 2개의 큰 공원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시의 경계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또한 실제 인구상으로 전혀 진화하지 못한 몇 안되는 도시 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점은 파리 광역시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파리는 단독으로 주를 구성한 이른바 특별시이다. 시내는 20 행정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파리 시내는 1구에서 오른쪽으로 나선형으로 번호가 매겨져있다. 1-4, 8-12, 16-20 구역은 센 강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5-7, 13-15 구역은 좌안에 위치한다. 다른 세계 주요 도시와 비교 했을때, 파리는 살기 좋은 도시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니 계수가 0.49로, 파리는 프랑스에서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파리 북서 교외의 도시) 다음으로 불평등한 도시이다. 도시 서쪽의 7구와 16구는 가장 부유한 구(arrondissement)이다. 이는 또한 파리의 주거지 중 뉴욕의 북동부나, LA의 버벌리 힐스나 런던의 베이페어와 벨그레이비어보다도 선호하는 지역이라고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이 지역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영향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오늘날 프랑스 엘리트계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센강 왼쪽 둑의 리브 고슈(Rive Gauche)는 보헤미안 감각과 창조성을 나타낸다. 파리 샤를 드 골 공항 및 파리 오를리 공항을 통해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파리의 도로는 혼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따라서 대중교통이 파리의 주요 교통 수단이 되고 있고 파리 시청은 승용차 이용을 줄이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오고 있다. 파리와 일드프랑스 지역 대부분의 대중교통은 파리교통공사(RATP: Régie autonome des transports parisiens)에서 담당하고 있다. 1900년부터 파리에는 지하철(Métro de Paris)이 운행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16개 노선에 달하고 있다. 1970년 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급행 전철 (RER: réseau express régional) 은 파리와 주변 도시를 신속하게 이어준다. 그 밖에도 버스가 지하철이 닿지 않는 곳을 운행하고 있다. 프랑스 프로축구 최상위리그인 리그 1 소속의 파리 생제르맹 FC가 있으며 파르크 데 프랭스를 홈구장으로 두고 있다. 또한 파리 위성도시 생드니는 프랑스 국가대표팀 홈 경기가 열리는 스타드 드 프랑스가 있다. 트로이아 전쟁 트로이아 전쟁(Troia 戰爭)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를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납치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전쟁이다. 트로이아의 성벽은 강해서 그리스 병사들이 뚫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10년 동안 트로이아는 성공적으로 방어를 했으나, 지진에 의해 성 내부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스 연합군은 그 틈을 타서 공격해 트로이아 왕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헬레네는 다시 그리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트로이아가 정복될 무렵 망명한 트로이아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아이네이아스가 대표적인 예였다. 이 이야기는 발굴 이전까지 신화로만 여겨졌으나, 1871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아의 발굴에 성공하면서 실제 있었던 전쟁임이 밝혀졌다. 이 전쟁의 유래는 ‘퀴프리아’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제우스는 너무 증가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큰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거의 대부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의를 다졌다. 올림푸스에서는 인간의 아들 펠레우스와 티탄 족의 딸 테티스의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자 화가 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καλλίστῃ)’에게 바치라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를 신들의 자리에 보냈다. 이 제물을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격렬한 대립이 벌였고 제우스는 이 사과가 누구에 적합한 지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파리스의 심판) 세 여신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 파리스 앞에 섰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아테나는 어떠한 전쟁도 승리를 할 수 있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젊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하였고 아프로디테의 권유에 의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아 갔다. 파리스의 여동생이자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폴론의 저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형인 뮤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에 그 사건을 말하였고, 또한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에,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 반환과 트로이를 징벌하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라져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를 편들었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를 편들게 되었다. 페르시아측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지중해를 건너간 여성들은 사실 납치혼의 피해자들이었고 신화속 파리스가 헬레나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도 그 납치혼의 보복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설속의 여신 이오는 사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이오를 납치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헬라스측도 이에 보복해 포이니케의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등 보복 납치혼으로 신경전을 일삼다가, 일리온(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보복 목적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헬레나를 납치했고 이것이 악화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 신화에서는 트로이아의 멸망이 목마 때문이라 되어 있다. 10년째 트로이아와 지지부지 싸우던 그리스측이 묘안을 내어 목마를 두고 철수하는 척 하였다. 트로이아측은 이 목마를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하여 성 안에 들였으나, 그날 밤 목마 안에서 오디세우스를 선두로 그리스 특공대가 나왔고, 그리스측의 군사들은 밤에 다시 성밖에 와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를 선두로 하는 특공대는 성문을 열고 그리스측의 본군을 들여보냈다. 그리스의 본군은 트로이아 왕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전쟁사학자인 정토웅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트로이아 전쟁을 그리스와 트로이아간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으로 해석하였다. 지중해 무역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그리스와 트로이아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고, 이러한 역사를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자신의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한 것이다. 리 군 리 군(Lie群, )은 매끄러운 다양체인 위상군이다. 즉 군의 연산이 매끄러움 구조에 따라 매끄러운 경우다. 소푸스 리의 이름을 땄다. 연속적인 대칭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인다. 위상군 formula_1에 매끄러운 다양체의 구조가 갖추어지고, 또한 군의 곱셈과 역원 역시 매끄러운 함수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를 리 군이라고 한다. (사실, 힐베르트의 5번째 문제()의 해에 따라 다양체 · 매끄러운 다양체 · 해석다양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범주론적으로, 이를 매끄러운 다양체의 범주에서의 군 대상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리 군의 사상()은 매끄러운 함수인 군 준동형이다. 짝수 차원 리 군 formula_1에 복소다양체의 구조가 갖추어지고, 또한 군의 곱셈과 역원 이 정칙 함수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를 복소수 리 군()이라고 한다. 복소수 리 군의 사상()은 정칙 함수인 군 준동형이다. 리 군 "G"의 유한 차원 실수 또는 복소수 벡터 공간 "V" 위에서의 표현(表現, )은 매끄러운 군 준동형 formula_9이다. 힐베르트 공간 formula_10 위의 표현일 경우, 대개 가역 유계 작용소의 군 formula_11으로 가는 매끄러운 준동형 formula_12로 정의한다. 반단순 리 군의 유한 차원 표현은 기약 표현의 직합으로 나타내어진다. 리 군은 다음과 같은 연산에 대하여 닫혀 있다.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위상동형인 위상군은 항상 하우스도르프 공간이다. 따라서, 파라콤팩트 조건만을 추가하면 자동적으로 다양체를 이룬다. 힐베르트의 5번째 문제()의 해에 따르면, 임의의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과 위상동형인 파라콤팩트 위상군에 대하여, 이와 위상동형이자 군으로서 동형인 리 군이 존재한다. 또한, 이러한 리 군은 유일하다. 즉, 리 군을 정의할 때, 다양체와 매끄러운 다양체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또한, 리 군의 경우, 항상 해석다양체(추이 사상이 항상 해석함수인 매끄러운 다양체)로 만들 수 있으며, 그 군 연산 또한 해석함수가 되게 할 수 있다. 두 리 군 사이의 연속 군 준동형은 항상 매끄러운 함수이자 해석함수이다. 연결 공간이 아닌 리 군 formula_1는 다음과 같이 이산군과 연결 리 군으로 분해할 수 있다. formula_14을 단위원을 포함하는 최대 연결 부분군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15은 이산군이다. 다시 말해, 모든 리 군은 연결 리 군의 이산군에 대한 확대이다. 모든 연결 리 군은 또한 (범피복군을 취하여) 단일 연결 리 군 formula_16의 몫군 formula_17 (여기서 formula_18은 이산 중심 정규 부분군)으로 나타내어진다. 따라서 리 군의 분류는 단일 연결 리 군의 분류로 귀결된다. (유한 차원) 단일 연결 리 군은 그 리 대수로 완전히 결정된다. 리 대수는 그 가해 부분 대수와 단순 부분 대수로 분해된다. 단순 리 군은 분류가 완료되었으나, 가해 리 군의 분류는 매우 어렵다. 리 군의 이론은 노르웨이의 수학자 소푸스 리가 1873년 경에 미분 방정식의 대칭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변환군"()이라는 이름으로 도입하였다. 그러나 리의 논문들은 (처음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독일 저널이 아닌 노르웨이 저널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수학계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1884년에 젊은 독일 수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이 리의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리와 엥겔은 리 이론에 대한 총 3권의 책 《변환군론》()을 1888년~1893년에 독일어로 출판하였고, 이후 리 이론은 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888년~1890년 동안 빌헬름 킬링은 리 군과 리 대수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재발견하였고, 반단순 리 군의 구조론을 제창하였다. 1893년에 리의 제자 아르튀르 트레스()는 "리 군"()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였다. 엘리 카르탕은 1894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킬링의 구조론을 개량·정리하였다. 카르탕은 1930년에 카르탕 닫힌 부분군 정리를 증명하였다. 헤르만 바일은 반단순 리 군의 기약 표현들을 무게로서 분류하였고, 이에 대한 바일 지표 공식을 증명하였으며, 이를 양자역학에 응용하였다. 그 뒤 클로드 슈발레와 하리시찬드라 역시 리 군의 이론에 큰 공헌을 하였고, 이는 이후 로버트 랭글랜즈의 랭글랜즈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홍어 홍어(魟魚, 상어가오리, 묵가오리)는 홍어목 홍어과에 속하는 물고기이다. 몸은 위아래로 납작하고, 가슴지느러미가 넓게 발달해 있어 위에서 보면 마름모꼴이다. 몸길이 약 150cm이다. 몸빛깔은 등쪽이 갈색이고 배쪽은 희거나 회색이다. 머리는 작으며 주둥이도 작으나 돌출되어 있다. 눈은 작고 분수공은 눈의 뒤쪽에 가깝게 붙어 있다. 몸의 등 중앙선에 많은 가시가 있고, 이빨은 작고 마름모꼴이다. 등지느러미는 두 개이나 몸 뒤쪽에 있고 모두 작다. 뒷지느러미는 없고 배지느러미는 있어도 아주 작다. 가슴지느러미의 기저면에 한 개의 검은 테를 가진 큰 반점이 있다. 난생이고 20-80m의 깊은 곳에 살며 봄에 산란한다. 암모니아와 트리메틸아민의 함량이 높으며, 회·구이·국·포 등에 적합하다. 다른 생선과는 달리 항아리에 짚, 소금 등을 함께 넣고 삭혀 먹으며, 삭히지 않고 그냥 먹는 경우도 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홍어삼합이다. 삼합은 삭힌 홍어를 돼지 삽겹살 수육과 함께 묵은 김치에 싸먹는 것이다. 막걸리를 곁들여서 먹기도 하는데, 이를 '홍탁'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삶은 홍어를 헤이즐넛 버터, 파슬리, 레몬, 케이퍼를 곁들여 먹기도 한다.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상태의 홍어는 상한 것으로 보아, 먹지 않는다.가오리와 비슷하지만 가격은 더 비싸서 가오리를 홍어라고 속여 파는 일도 생겨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는 가오리를 홍어라고 속여 파는지 감별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홍어과 홍어과(Rajidae) 또는 가오리과는 연골어류 홍어목의 과이다. 18개 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척삭동물 척삭동물(脊索動物) 또는 척색동물은 발생 시에 척삭이 만들어지는 동물로 후구동물 상문의 척삭동물문(: Chordata)에 속한다. 척삭은 대부분 연골이나 경골로 이루어진 척추로 바뀌지만 평생 척삭이 있는 동물도 있다. 분류학에서는 척추동물 아문에 속하는 모든 동물, 예를 들어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어류와 피낭동물 아문에 속하는 해초강, 탈리아강과 같은 동물들을 모두 척삭동물문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 때는 장새류와 같은 반삭동물문도 척삭동물문에 속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문으로 본다. 후구동물 상문에 속하는 또 다른 문으로는 불가사리류 같은 것이 속해 있는 극피동물문이 있다. 캄브리아기의 대폭발 시기에 출현한 척삭동물문에는 최소한 6만여 종 이상의 동물이 속해있다. 피낭동물아문은 유충일 때 척색과 신경관을 가지고 있다가 성충이 되면 없어진다. 두삭동물아문은 일생 동안 척색과 신경관이 있지만 뇌와 같은 특별한 신경절은 없으며 순환계통 역시 매우 단순하다. 두삭동물아문 가운데 유두동물만이 두개골을 갖고 있다. 먹장어를 제외한 모든 유두동물의 척수는 연골 조직이나 뼈로 된 척추로 둘러쌓여 있고 척색은 퇴화되어 있다. 척삭동물문과 함께 후구동물상문을 이루는 분류군으로는 반삭동물문과 극피동물문, 그리고 진와충동물문이 있다. 후구동물상문은 전체 동물계의 종 수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한다. 척삭동물의 진화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현재 널리 인정되는 이론에 따르면 척삭동물은 모두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단계통군으로서, 어느 시점에 유두동물과 두삭동물로 나뉘게 되었다고 본다. 척삭동물의 화석은 초기 캄브리아기 층에서부터 발견되며, 마오티엔산(毛天山) 혈암층에서 어류 두 종이 발견되었다. 캄브리아기 화석은 그 수가 적은 편으로 대부분은 분자 고생물학 수준에서 생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분류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만족하는 좌우 대칭형 동물을 척삭동물문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 먹장어강을 독립된 아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최근 연구는 척추동물의 하위분류임을 지지한다. 리트 (인터넷) 리트(l33t, leet, 1337)는 컴퓨터 문서상에서 알파벳을 다른 기호로 치환해서 적는 방법으로, 주로 인터넷 상에서 사용한다. 야민정음과 비슷하나 야민정음이 한글과 한자를 이용한다면 리트는 알파벳을 이용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최초의 탄생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Elite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해커들 사이에서 자신들만의 언어수단을 강구하던 중에 나타난 것이라는 설로, leet라는 단어 자체는 리트식으로 1337, l33t, l33+ 등으로 표기된다. 검색 엔진 가운데 구글은 검색 인터페이스에서 “해커어”라는 언어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 해커어가 리트를 의미한다. 맞춤법 언어의 맞춤법( - 法) 또는 철자법(綴字法), 정서법(正書法)은 특정한 필기 체계를 사용하여 언어를 쓸 때 올바른 방법을 지시하는 지침이다. 맞춤법은 타이포그래피와 구별된다. 영어로는 오소그래피("Orthography")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의 와 에서 비롯되었다. 크리스토퍼 리브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 1952년 9월 25일 ~ 2004년 10월 10일)는 미국의 영화 배우, 영화 감독이자 작가이다. 영화 《슈퍼맨》의 주연으로 유명하다. 크리스토퍼 리브는 살아 생전 승마를 즐겼는데 1995년에 승마를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어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움직일 수 없었다. 2000년에 크리스토퍼 리브가 스스로의 의지로 손가락 하나를 움직인 것으로 전 미국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으며 전 세계 모든 슈퍼맨의 팬들은 크리스토퍼 리브가 쾌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으나 결국 그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2004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어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을 가져 13살때부터 무대에 섰다. 코넬 대학에 다니면서 영국과 프랑스에서 연기를 공부했고, 줄리어드 스쿨에서 죤 하우스먼(John Houseman)의 지도도 받았다. 그 후 지방무대들에서 활동하다가 76년에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영화는 78년에 찰튼 헤스튼 주연의 핵잠수함 구조작전을 그린 해양영화 <위기의 핵잠수함(Gray Lady Down)>에서 작은 조연으로 데뷔했다. 193cm의 건장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보이는 외모, 그리고 탄탄하게 갖추어진 연기력으로 인해 <슈퍼맨>의 오디션에 합격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열었고, 계속 시리즈에 출연을 해오면서도 진정한 연기자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영화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고 있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슈퍼맨> 시리즈 이외의 작품으로는, 제인 시모어와 공연작으로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SF적 기법으로 묘사한 이 <신비의 여인>이라는 제명으로 TV에 방영되었으며, 마이클 케인과 공연 작품인 스릴러 이 있다. 그는 1995년 5월 승마대회에 참가했다가 낙마해 전신마비가 되는 커다란 불운을 겪은 이후, 척추 연구 확대를 호소하는 운동과 의료보호 확대를 촉구하는 재활과 사회운동에 힘써왔다. 96년에는 휠체어에 앉은 채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등장해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1998년에는 히치콕의 스릴러물 리메이크한 영화 <이창>에 출연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2004년 10월 11일 뉴욕의 자택에서 향년 52세의 나이로 급성심근경색으로 별세하였다 . 자일리톨 자일리톨() 또는 크실리톨(←)은 자일로스를 가공하여 만든, 알코올계의 당으로 설탕 대용품이나 치아 관리용품에 이용되는 물질이다. 화학식은 (CHOH)(CHOH)이다. 같은 질량의 자당과 같은 정도의 단맛이 나지만 칼로리는 자당의 60% 정도이다. 자당, 포도당, 과당 등의 육탄당과는 달리 자일리톨은 오탄당으로 뮤탄스균(S.mutans;충치의 주요 원인균)이 당을 발효시키지 못해 산의 생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치아를 보호하거나 손상된 치아 표면을 복원하는데 도움을 주며, 인슐린이 소모되지 않기 때문에 당뇨병 환자의 설탕 대용으로 사용된다. 자당과는 약간 다른 단 맛을 낸다. EU 내에서 음식 첨가제로 사용될 때 자일리올의 E 번호는 E967이다. 컴퓨터 입력 장치 입력 장치는 사용자가 원하는 문자, 기호, 그림 등의 데이터 또는 명령(프로그램)을 컴퓨터 내부의 메모리에 전달하는 장치이다. 유의어로는 포인팅 장치가 있다. 위치 지정 도구는 컴퓨터의 조작을 위해 표시 화면에 보이는 커서의 이동을 제어하는 데 쓰는 입력 장치이다. 도형 입력판과 도형 처리 평판은 태블릿 컴퓨터, 태블릿 PC와는 구별해야 한다. 컴퓨터 자판은 글자를 입력하거나 단축키 등으로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는 데 쓰는 장치이다. 최근 컴퓨터 운영체제에 포함된 가상 자판 장치 등을 이용하면 터치패드를 비롯한 위치 지정 도구로도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 게임용 입력 장치는 크게 위치 지정 도구와 게임 전용 장치로 나뉜다. 위치 지정 도구를 게임용으로 쓰기 때문에 겹치는 장치가 여럿 있다. 반대로 게임 전용 장치도 일정한 설정 작업을 거쳐 컴퓨터의 다른 프로그램에 위치 지정 도구로 쓸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마우스 대신 조이스틱이나 게임패드를 쓸 수도 있다. 철새 철새()는 계절에 따라 서식지를 이동하는 새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해 다양한 철새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철새는 먹이가 풍부한 장소와 시기에 새끼를 기르고,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장소에서 월동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류가의 진화과정에서 획득한 적응 현상이다. 또 조류의 이동은 북반구를 기준으로 하여 몇 가지의 바다새를 제외하고는 역방향으로서의 이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남방(월동지)에서 북방(번식지) 사이를 1년에 두 번 이동하는 셈이다. 물떼새류인 검은가슴물떼새는 여름의 번식지인 시베리아 서부 등의 북극권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까지 장거리 이동을 하고, 미국의 검은가슴물떼새는 알래스카의 툰드라 지대에서 아르헨티나까지 13,000km의 거리를 여행한다. 이와 같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조류는 이 밖에도 몇 종류가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하여 휘파람새 같은 떠돌이새는 단거리를 이동한다. 나그네새()는 번식지에서 월동지로 이동할때 봄과 가을 2번을 걸쳐 한 지방을 지나가는 철새이다. 물떼새류, 대부분의 도요과 새들은 한국의 나그네새이다. 화폐 개혁 화폐 개혁() 또는 통화 개혁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는 일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KISS 원칙 KISS는 “"Keep it small and simple."”, “"Keep it short and simple."”, 또는 “"Keep it simple, stupid."”의 첫글자만 따서 만든 약어로, KISS 원칙이란 디자인에서 간단하고 알기 쉽게 만드는 편이 좋다는 원리를 말한다. 1960년에 미국 해군이 고안한 디자인 원리이다. 프로그래머들 사이에 많이 통용되는 격언이다. 이 디자인 원리는 간단하고, 나중에도 쉽게 이해되는 해결 방법을 최적의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KISS는 과학 이론에서 있으나 없으나 차이가 없는 불필요한 가정은 잘라내야 한다는 오컴의 면도날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정몽주 정몽주(鄭夢周,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 ~ 1392년 4월 26일(음력 4월 4일))는 고려의 충신(忠臣)으로 문신·외교관이자, 정치가·교육자·유학자이다. 그의 본관은 연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경상도 우항리와 고려 경상도 영천현을 거쳐 고려 개경에 거주하였던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 4년) 4월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경상북도 우항리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라고하나 기록은 없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었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태종은 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으며, 이는 사림파가 집권한 후에도 그의 문하생이라서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성인화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나타나고 있다. 포은 정몽주는 1338년 1월 13일(1337년 음력 12월 22일) 경상북도 영일현에서 영일 정씨(迎日鄭氏) 정운관(鄭云瓘, 다른 이름은 정거민(鄭居敏))과 영천이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얼마 후 청림동으로 이주하였다. 의종 때의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진현관제학을 지낸 정종흥(鄭宗興)의 5대손이며, 그의 고조부 정림(鄭林)은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증조부 정인수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증 개성부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는 직장과 동정(同正) 등을 지냈으나 아버지 정운관은 성균관 재생(유생과 같은 의미)에 불과하였다. 고려말 등장한 중소지주 기반의 신진 사대부로써 여말 조선초 성리학의 시조격인 안향(경북 영주)의 출생지인 경북 중부 내륙 지방은 지방 향리 출신이자 중소 지주의 경제적 기반을 둔 신진사대부들의 요람(포은 정몽주-경북 포항, 야은 길재-경북 구미, 목은 이색-경북 영덕, 도은 이숭인- 경북 성주, 삼봉 정도전-경북 영주)격으로 학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영천 이씨는 품에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름을 몽란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부친 정운관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 정치가)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이름을 고칠 때 몽주라 하게 된다. 아버지는 성균관 재생이었으나 그의 가계는 대대로 관료 생활을 한 양반 가문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선조 3대는 검교직과 동정직을 가졌을 뿐 현직은 가지지 못한 지방의 사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조들이 대대로 관직에 있었으므로 넉넉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동생이 세 명 태어났는데, 정과(鄭過)는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고, 정후(鄭厚), 정도(鄭蹈)는 벼슬이 사재령 판서에 이르렀다. 아버지 정운관은 향시에 합격한 뒤 성균복응제생의 벼슬에 올랐으며 뒤에 아들인 포은 정몽주의 출세로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수문하시중 판병조사상호군영경령전사에 추증되고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어머니 영천 이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그는 처음 이름은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夢龍)으로 고쳤으며, 아버지의 태몽을 따라 뒤에 이름을 다시 몽주(夢周)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부인은 아들인 정몽주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 예상, '백로가'(白鷺歌)라는 시 한수를 지어 아들 정몽주에게 교계하게 하였다. 유년기에 아버지인 정운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이색의 문인이 된다. 소년기 때 그의 집은 영일 청림동에서 외가가 있는 영천으로 이사하였다고 전해진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아버지 정운관은 관직이 비록 미관말직이었으나 당대의 유학자이자 명사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친분관계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아버지에 의해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 된다. 이색은 고려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과 백이정의 손제자이자 익제 이제현의 제자였다. 이들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그는 후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야은 길재(冶隱 吉再)를 통해 조선 사림파에 학통을 전수했고, 다른 제자인 권우는 세종대왕 등을 가르치게 된다. 스승인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이색의 문하에서 그는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만나게 된다. 특히 정도전과는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도전과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으로 돌변한다.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1월 19세 되던 해에 아버지 정운관이 죽자, 그는 영천 도일동에 부친의 장사를 지내고 묘소에서 3년동안이나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공민왕은 그의 집에 특별히 포상을 하고 정표(旌表)를 세워주었다.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 6년) 여름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이 주관하는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 9년) 10월 문과에서 세 번의 시험 장원 급제하였다. 이때 과거의 감독관인 지공거는 난계 김득배(金得培)였고 동지공거는 한방신(韓邦信)이었다. 김득배 등에 의해 선발되어 과거에 장원급제한 이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였으며, 예문관 검열·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2년 다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개경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모해로 옥에 갇혔다가 상주에서 처형, 효수되자, 정몽주는 특별히 간청하여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김득배 등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그의 문생 중에서 나서는 이는 거의 없었으나 정몽주 혼자 분연히 일어나 의리상 그의 시신을 수습해야 되겠다고 건의한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김득배의 시체를 친히 수습한 뒤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후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낭장(郎將) 겸 합문지후·다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내고 그해 선덕랑(宣德郞)에 올라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출정, 화주에 가서 여진족의 토벌에 참가하고,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소탕하였다. 1364년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하고 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성계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노선에 동조하게 되나 후일 혁명방법을 놓고 갈등하게 된다. 그 뒤 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후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임명되었다. 전농시승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일시적으로 사직했다가 복직하였는데,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사대부들도 100일만 지나면 상을 벗었는데 그는 부모상 때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이 극진했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했다. 그 뒤 복직하여 예조 정랑 겸 성균관 박사·성균관 사예, 1367년 통직랑(通直郞) 전공정랑(典工正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성균관 박사, 1368년 명나라가 처음 건국하자 그는 명나라가 중국 대륙의 정통 국가임을 들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명나라와 국교를 체결하게 된다. 1371년(공민왕 20년) 태상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 겸 성균관직강(寶文閣應敎兼成均館直講) 등을 거쳐 성균관 사성에 올랐다. 실제로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하며 유교의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논어(論語)’등 사서에 관한 주자의 주석서)》밖에 없었으나 정몽주의 강의에는 막힘이 없었다.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칭하였다. 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동방 성리학의 실질적인 창시자 또는 성리학의 중시조로 보게 되었다. 신돈이 신진사류를 발탁하게 되면서 정몽주 역시 요직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 등이 몰락하고 그의 일파들이 처형될 때 정몽주도 신돈의 일파라는 누명이 나돌게 된다. 1371년 7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신돈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 커다란 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정몽주를 비롯한 그들은 중국대륙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신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신돈 암살 이후 신돈이 신진사류를 적극 채용한 일로 엮여져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되었지만, 후일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모략을 하는데 가담, 협력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1372년(공민왕 21년) 3월 명나라가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사(正使)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남경에서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인 홍사범 등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살아났다. 그 뒤 표류하였으나 그는 가슴 속에 명 태조 주원장의 서신을 간직하며 물에 한번 젖지 않게끔 보존하고 있었다. 명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보내어 굶주림 속에서도 의연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귀국을 도와주었으며, 이 사실이 알려져 명나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는 1373년 7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중국의 한 객관에서 지은 시가 후대에 전한다. 1374년(공민왕 23년) 경상도안렴사로 부임했으나 그해에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예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金義) 등이 명나라의 사신을 죽인 일로 명나라가 공민왕의 죽음과 명나라 사신 암살 사건을 놓고 고려 조정에 책임을 추궁해와 국내가 뒤숭숭해지자, 다들 명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나 그는 사신을 보내 명나라에 사정을 고하고 사과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375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1376년(우왕 2년) 우사의대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그는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였으며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北元)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정책을 추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도 이인임을 탄핵했다.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 신진사류는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재개하려는 정책을 문제삼아서,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이인임과 지윤(池奫)을 죽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정몽주도 1375년(우왕 1년) 5월 원나라에서 온 사신을 사로잡고 관계를 맺지 말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정몽주 등의 정치적 행동은 심각한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정몽주는 물론이고 정도전을 포함하여 신진사류 21명이 죽거나 유배당한 것이다.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비판, 규탄하였다가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 되었다가 1377년(우왕 3년)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몸을 돌보지 않는 노력과 자신의 외교적, 학문적 능력 덕분에 정몽주는 1375년 쫓겨났던 다른 동료들에 비하여 꾸준히 정치적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장에 이보다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의 달라진 정치관이었다. 그해 3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공민왕 대와 달리 우왕 대에 관직에 복귀한 이후에는 시류에 영합하면서 권력자들의 뜻에 어느 정도 맞추어 가는 쪽으로 처신하였다. 그리고 권력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왜구의 침입과 노략이 심하여 그는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으나 성과없이 감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1377년 9월 그는 사신을 자원하여 왜에 보빙사(報聘使)로 건너갔다. 그가 직접 사신으로 파견돼 귀국 시, 수백 병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는 외교력을 보여줬다. 왜(倭)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규슈 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일본과 외교가 어려운 점을 지적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하여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때 학문적 소양이 있던 왜의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과의 대화에서 두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하였는데, 이마가와는 그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에 탄복하였다 한다. 규슈 성주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언행에 감복해 특별히 우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시를 청했고 매일같이 가마를 타고 규슈 내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1378년 7월 포로나 노예로 끌려갔던 수천 명을 배에 싣고 일본에서 돌아왔다. 고려인 포로 수천명을 구해 되돌아온 일로 명망을 얻었다. 이후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를 거쳐 1379년(우왕 5년) 우산기상시를 거쳐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전법판서(戰法判書)·판도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으로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다. 1380년 9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가던 중 조상의 고향인 전주에 들른다. 이곳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환영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당시 종사관이 되어 황산대첩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이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자리를 빠져나와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한탄하는 시를 짓는다. 그 뒤 밀직제학(密直提學)·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우왕 7년) 초 첨서밀직사로 승진했다. 1381년(우왕 7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선발되어 진공사(進貢使)로 명나라에 가다가 여진족을 만났으나 어렵게 야인들의 화를 피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측의 오만한 태도와 입국 거부로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고, 그해 청시사(請諡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으나 역시 입국을 거부당하여 요동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1383년(우왕 9년) 3월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동년 가을 동북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그 시 명은 우왕의 요동 정벌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여 고려에 출병하려고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고려에 최후통첩을 보내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 홍상재(洪尙載) 등을 유배보냈다. 정몽주는 토산물의 부족과 명나라 태조의 처사가 지나침을 호소하였고, 스스로 사신의 직책을 자청한다. 그해 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가 파견될 때,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했는데, 사신 중 일부는 명 태조가 그자리에서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정몽주는 자원하여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감축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게 하였다. 또한 이전에 억류된 홍상재 등도 풀려나 돌아오게 했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여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선발하였고, 1386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다시 동지공거가 되었다. 1386년에는 명나라에 바쳐야 할 5년간의 공물과 일방적으로 명나라에서 늘려 정한 공물을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하러 간 것이었는데, 명의 황제로부터 (공물 면제) 승낙을 받고 돌아옴으로써 집정자들의 큰 부담을 덜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의 흉년과 입을 옷감이 부족한 점을 들어 구원을 요청하여 명나라로부터 갓과 의복, 옷감 재료의 지원을 받아오는데 성공하였고, 동시에 명나라로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여 밀린 5년분과 증가한 정액을 모두 면제받았다. 우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옷·안장 등을 하사하였고, 그는 바로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1387년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7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원나라때부터 다스렸던 땅임을 들어 철령위를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 등 강경파와 외교로 해결하자는 이성계, 정도전 파로 나뉘게 되자 그는 외교론자가 되어 이성계와 정도전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해 6월 그는 하륜(河崙)·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건의하여 백관(百官)의 관복을 정하여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제도를 따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서질(徐質)이 와서 보고 감탄하여,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정도전과 함께 불교비판의 선봉장에 서고, 유학을 권장하였으며 성균관을 통해 성리학 사상의 확산에 노력했다. 이후 최영을 비판하여 실각시키고 정계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해 12월에 경사(京師)에 가서 조빙(朝聘)을 통하기를 청하였다.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 1388년 최영과 우왕이 계획한 요동 정벌이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고, 우왕이 폐위당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창왕(昌王)이 왕위에 올랐다. 국가 운영은 이성계가 주도했고, 정몽주는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결합한 신진사류 대부분이 정치 일선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였지만 정몽주는 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고려사 정몽주전에는 이성계가 매번 출전할 때 정몽주와 함께 나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할만큼 이성계와 정몽주는 가까운 사이였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이름을 빛낸 1380년 전라도 남원군 운봉(지금의 남원 지역)에서의 왜구와의 전투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 데 동의했던 정몽주는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이에 반대했다. 정몽주는 변안렬의 제사에 참석하여 그를 애도하는 제문을 이색, 길재, 이승인, 이방번(이성계의 아들이며 변안열의 사위이다) 등과 같이 지었다. 다음은 정몽주의 제문이다. "임신년 정월 기망일은 고인 대은공이 순절하신 두번째 해입니다. 진실한 벗이며 시중의 직책을 맡고 있는 영일인 정몽주는 술잔을 부어 공의 묘에서 아륍니다. 늠름하기가 추상같음은 공의 충열이요, 열렬하기가 백일(白日) 같음은 공의 의절이었습니다. 이 밤을 소리 내어 크게 울건대 어느 날이든 감히 잊겠습니까? 받드리는 제수는 비록 박하오나,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은 두터우니 혼령께서는 바라건대 오셔서 드시옵소서. 아! 원통하도다." 정몽주는 진실한 벗이며, 잊을 수 없는 벗이라 하고 마음으로 통하는 우정이 두터움을 표현하였다. 짧은 제문에서 그는 변안렬의 충직하고 열렬한 절의를 다 표현하고,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생각하며 그의 죽음을 원통해 하였다. 정뭉주전에서 , 변안렬은 지조가 맑고 높았으며 기국과 도량이 넓고 컸으며, 문장에 능통하였고 무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나, 우왕의 강화 추방에 상심하여 문을 닫아걸고, 호를 대은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388년(창왕 1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되었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는데, 1388년 동년 도당(都堂)에서의 개인이 사사로이 보유한 토지들이 문제가 되어 사전혁파(私田革罷)를 논의하였으나 그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 그 해 문하찬성사·지서연사(知書筵事)를 거쳐 1389년(창왕 2년) 6월에 예문관 대제학,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그해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입진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영립(迎立)했다. 1389년(창왕 1년) 말에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괴뢰로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지어서 조준·남은·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탄로나면서, 창왕도 폐위당하였다. 공양왕을 옹립할 때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 뒤를 이어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정몽주는 이성계·정도전·조준(趙浚) 등 아홉 명과 함께 공양왕 옹립 공신에 책봉되어, 동년 8월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중대광(重大匡)에 올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겸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同判都評議使司事 判戶曹尙瑞寺事 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된 뒤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올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겸 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등을 겸하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작되었다. 수문하시중이 되어 그는 풍년이 들었을 때 여유 분의 곡식을 저장해 두는 창고인 의창을 다시 세워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는 수문하시중으로 수문하시중인 이성계와 함께 공동 수상이 되었으나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는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는 뜻의 목자득국(木子得國)이라는 노래와 말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이성계 일파에 대한 공격으로 그는 정도전이 탐욕스러운 존재라고 비난, 규탄했으며 우현보 일가에게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현보 일가는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우씨 집안의 여종이었고,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씨 집안의 인척으로 승려가 된 김진인 점을 지목하며 정도전과 그의 아들들을 무시하였고, 정도전은 우현보의 일족들에게 악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성계 주변인물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한다. 또한 그는 정도전의 외가가 우현보집안의 종의 자손임을 지적하여 바르지 못한 혈통에서 태어났다며 공격하였다. 이 비난을 듣고 감정이 상한 정도전은 그를 원수로 여기게 된다. 1391년(공양왕 3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어 인재 선발을 주관하였고, 바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뒤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표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의 오랜 벗이었던 정도전 역시 계속 그를 찾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설득했으나, 그는 종묘와 사직을 엎을수 없다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정몽주 역시 이 암살계획을 변중랑이라는 심복부하로부터 입수하였다. 그는 자신의 문하생과 동문수학한 이색의 문하생들을 사주하여 이성계, 정도전 등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게 했다. 1392년 봄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준비함을 감지한 그는 이성계가 병으로 은신한 것에 의문을 품고 사람을 보내 이성계의 주변을 살핀다.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병을 이유로 물러나자 정몽주 역시 병을 핑계로 조용히 있다가 그해 4월 이성계가 병을 빙자한 것의 여부를 확인하러 이성계를 방문한다. 1392년 4월 26일(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새벽 그는 악몽을 꾸었는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그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숭상하는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말라'는 유언과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4월 26일(음력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낙마로 부상당했다는 이성계의 문병 겸 동태를 살피기위해 이성계의 집을 방문,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일부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했다.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하고 답하였다.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를 향했다.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마부가 쓰러지자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高呂), 조평(趙評) 등 5~10여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정몽주는 이들이 비열하게 숨어서 사람을 공격함을 질책하고 말을 달렸으나, 부상당한 채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 또는 몽둥이와 철편으로 때려 죽였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이후 김구(金九)가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있었다 한다.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송도에 내려오는 한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가 선죽교 근처에서 사망하지 않고, 피습을 당한 뒤 개경부 태묘동까지 부상당한 상태로 피를 흘리며 피신해왔으나, 그의 뒤를 따라온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전승도 전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6세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손들에게 자신의 묘비를 세울때는 반드시 고려의 관직을 적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1392년 4월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수급과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禹玄寶)와 송악산(松嶽山)의 중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豊德)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비토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책망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17년(조선 중종 12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중종에게 청원하여 정몽주의 비석을 세울 때 묘비문의 앞면에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암각하였다. 동생 정과는 1392년 4월 이성계의 반정세력에 의해 정몽주가 죽을 때 함께 화를 당했고, 동생 정도는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아들들에게까지 연좌시키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지 9년 후인 1401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겸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의 문하생 중 길재와 이숭인은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 인사로 성장하여 후일 사림파의 기원이 된다. 조선 건국 초까지만 해도 그는 간신(姦臣)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녀 중 한 명은 정종의 다섯째 서자와 결혼했고, 그의 제자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을 거쳐 사림파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 권우는 세종대왕과 정인지의 스승이 된다. 태종은 왕조가 확립된 후 왕실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규탄하면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유도할 목적으로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끌어올렸다.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에게서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서 그는 성자로 인식되었다. 그의 사후 태종은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는 그에게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하였다. 세종대왕은 왕자시절 정몽주의 문하생 권우에게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세종대왕 즉위 후, 편찬한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정몽주가 수록되었다. 세종대왕은 부왕 태종 이방원에 이어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시켰다. 성종이 훈구파(공신 세력)의 견제를 위해 그의 후신인 사림파를 발탁하면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려는 운동이 나타나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되었고, 1555년(명종 10년)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에 임고서원이 창건되고,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1611년 참찬관 이자가 정몽주의 묘를 수리할 것을 건의했다. 중종은 예조 정랑 이순(李純)을 보내어 정몽주의 무덤에 치제를 했다. 퇴계 이황의 주도하에 영천 지역 퇴계 이황의 문인들인 김응생, 정윤량, 노수 등을 중심으로 부래산에 임고서원이 창건되었다. 퇴계 이황은 임고서원의 제문과 상향 축문을 지어 정몽주의 학문과 충절을 극찬했다. 그 뒤 임고서원은 1584년 ‘영천구각본’, 1607년 ‘영천중간본’ 등 3종의 ‘포은집’을 간행하여 발표하였으며, 임고서원 입구엔 포은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 ‘백로가’와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가 나란히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숙종 때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는데, 송시열이 비문을 찬하고 김수증이 썼으며 1699년에 건립되었다. 서울 마포구 양화대교 근처에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박정희 정권하에 그를 충절과 효성의 상징으로 국어와 국사교과서에 그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였으나 이후 제6차 교육과정에서 대폭 축소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그를 띄운 점에 대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고 있다. 2003년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6월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현종이후로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나 유목민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고종 이후로는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다시 불교가 호국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불교를 허구적인 환상(극락)으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존재라고 보고 유교(성리학)의 진흥과 장려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풍속에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반 사대부로 하여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거해서 가묘(家廟)를 세우고 5대조까지 제사지내도록 의무화 하였으며, 성균관의 유생 수를 늘리고 개성에 5부학당(五部學堂)을 추가로 설립하여 교육진흥을 꾀했다. 성균관과 5부 학당을 통해 그는 성리학 이념을 보급시키는 한편으로 지역에도 향교와 서당과 서원을 적극 장려, 향교, 서원, 서당 등을 통해 성리학 이념의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 이숭인 등은 향리에 내려가 지역사회에 성리학을 보급시켰고, 이들이 향촌의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세조 때부터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세조 때 김종직이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종 때는 훈구파에 필적하는 정치적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로 희생되나 중종 반정 이후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에는 일부 사림이 훈구파와 야합하여 신진 사림파를 축출하기도 했으나, 중종 말기에 가서는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고려 말기에 들어서 권문세족과 불교 승려, 외척 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법이 유명무실화되자 그는 법령 제정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설파하였으며,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법령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려 노력했다. 그는 정몽주는 〈지정조격 至正條格〉· 〈주자가례〉 · 〈대명률 大明律〉, 상앙의 형률, 그리고 고려와 고대국가들의 고유형법을 수집·분석하여 왕에게 바쳐 신법령을 제정할 것을 여러번 요청하여 1391년(공양왕 1년) 성리학과 주자가례, 대명률 등에 입각한 새 법령을 제정한다. 1390년 수문하시중으로 재직 중, 그는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켰으며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농촌에 풍년기 때에 여유 분의 곡식을 거두어들여 저장하게 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이때 의창을 전국적으로 설치하면서 효과가 나타나자 후에 의창 제도로 정착화된다. 이는 후대에 대한민국에서 정부에서 쌀을 매입하는 조봉암의 양곡법과 박정희의 추곡수매법의 선례가 된다. 이색의 문인으로, 정도전과 동문수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온건개혁을 놓고 갈라서게 되었다. 학문상으로 세종대왕은 그의 손제자가 된다. 정몽주의 제자는 길재, 이숭인, 권우 등으로 권우는 후에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고, 길재는 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태두를 형성하였다. 우왕 때 그는 과거의 부책임자격인 동지공거에 있었으나 부정 합격자의 존재를 알고도 묵인했다. 우왕의 후궁인 의비 노씨의 동생 노구산을 부적절하게 과거에 합격시킨것 알고 있었으나 문제삼지 않았다. 정몽주는 1384년의 과거 시험에서 동지공거(同知貢擧, 부책임자 격)를 맡았는데, 이때 우왕의 왕비 중 한명인 의비(懿妃)의 동생 노구산(盧龜山)이 중장(中場, 2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것 때문에 우왕이 화를 내자, 당시의 권력자였던 이성림(李成林)·염흥방(廉興邦) 등이 노구산의 아버지 노영수(盧英壽)에게 가서 노구산을 종장(終場, 마지막 단계의 시험)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노영수가 자기 아들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다른 불합격자 10여 명을 함께 시험 보게 하여 결국에는 노구산을 합격시켜 주었다. 이때 무장인 최영은 오히려 이러한 시험 부정을 비판하였지만, 부책임자를 맡았던 정몽주는 묵인하고 넘어갔다. 이렇게 공개적인 부정 이외에 정몽주는 이전에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였던 집권자들을 포함한 고위 관료들과의 모임을 스스로 주최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열전의 나오는 바에 따르면 조금 다르다. 정몽주가 과거를 주과했는데, 노구산이 과거에 떨어진 것과 이의 우왕이 대노하여 노구산을 합격 시켰다는 것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몽주가 침묵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음 기록에는 덕창부행수(悳昌府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디 환관 이광(李匡)의 종자로, 자기 친구의 책문(策文)을 표절했으므로 정몽주가 그를 내쫓았는데 지공거 염국보(廉國寶)는 그를 발탁했다. 이에 최영(崔瑩)이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비꼬았다. 라고 되어 있다. 오히려 정몽주는 옳바르게 처결하지만, 당시 권력층은 그것은 방해했다고 고려사 열전에 기록 되어 있다. 또한 그는 당대의 권력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에 성대한 만찬과 연회를 베풀기도 했고 우왕, 이성계 역시 그의 집에 찾아가 연회를 즐겼다. 1385년 최영을 비롯하여 이인임, 윤환(尹桓), 홍영통(洪永通), 조민수(曺敏修), 이성림, 이색 등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때 우왕이 잔치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스스로 찾아와 술을 마시고 갈 정도로 정몽주가 주최하는 술자리는 세상에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 말에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섬겼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반대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의 폄하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현창, 미화, 이용하였으며, 후일 사림파의 집권 이후에도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선조인 정몽주에 대한 현창이 필요하여 그에 대한 현창과 성인화는 계속 이어져오게 되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간신으로 규정됐던 정몽주는 태종 대에 이르러 충신으로 변신하고, 이어 사림파들이 장악한 중종 때는 문묘에 종사해야 할 유학의 종장으로까지 추대된다. 세종대왕 때는 임금이 그의 손제자였으므로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 때에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는 성역화되었다. 이는 성리학을 조선 유학의 적통으로 삼으려는 사림파들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는 훈구파는 정몽주가 고려 말에 신돈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을 섬겼다는 점을 들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지만, 결국 사림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중종 12년에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된다. 그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없는 루머로 확인된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느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을 찬성했다. 이는 목은 이색이 유배된 우왕을 몰래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공양왕을 옹립할 때도 정몽주는 적극 찬성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그는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 등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익양군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순충론도동덕좌명공신에 책록되었다. 역적을 토벌한 공로가 아니라 한 임금을 폐하고 다른 임금을 옹립하여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가 문묘에 종사하게 된 배경은 정몽주 본인보다는 그의 문하들 중 사림파의 직계 스승들을 종사하기 위한 핑계라는 의혹도 제기되어 왔다. 1509년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奇遵)이 종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으며, 정몽주가 길재를, 길재는 (여러 대를 거쳐) 김종직을, 김종직은 김굉필을 가르쳤으니 (도학의 학통이 이어진 것이며) 김굉필이 송유(宋儒)의 실마리를 얻어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니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해서도 종사를을 의논하도록 했다. 그 뒤 훈구파는 김굉필이나 정여창 등은 사림의 스승이라서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일부 온건파 사림 역시 부정적이었다. 김종직은 사림파는 찬성 훈구파는 반대였고, 정몽주만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된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에 대한 문묘종사 여론을 계속 추진한다. 정몽주는 고려 말기 무신 세력의 몰락과 함께 세를 얻어가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고려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 말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나 고려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한 정몽주와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처형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 있다. 그는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형태로 탈바꿈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비록 실패했으나, 정도전 등에게 그 뜻이 이어져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을 탄생시켰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다. 또한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였다. 또한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한때 그의 친구이자 같은 스승 이색의 문하생인 정도전은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중시조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사림에 의해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그의 제자와 정치적 계승자인 사림파 외에도 그를 현창함으로써 정도전을 격하하려는 이방원 등의 의도도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부적절한 인물을 과거에 합격시켜 준 일 등이 그런 것이지만, 특히 자신이 왕으로 섬긴 우왕과 창왕 두 왕을 왕씨가 아닌 신씨라고 몰아서 죽음으로 내몬 정치적 행위에 동참한 것은 고려의 충신이라는 수식어와 잘 조응하지 않는 것 같다. 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나라의 어려움에 이성계를 이용하고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여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최영을 적대적으로 보았던 신진사대부의 한사람으로 신진사대부가 고려 조정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득세를 하였지만 신진사대부 중에 정도전, 조준, 권근 등에 의해 이성계의 조선 개국, 역성혁명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반대하다가 이방원 일파의 조영규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한 이방원은 정도전을 격하할 의도와, 그의 충신 이미지를 부각시켜 새 왕조에 저항하는 세력을 도덕적으로 억제하려는 등의 정치적 효과를 보고 그를 충절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고 계략을 쓴 것 역시 정당한가 여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세력의 동참했다면, 그에게 부귀영화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군권과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정치적 명성과 명분을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없는 정몽주가 이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자초하는 것 이다. 애당초 조선 건국 세력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주장했고, 이성계가 그의 살해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죽지 않았다. 우연히 이성계가 병으로 쓰러졌고, 마침 정도전의 가계에 약점을 잡아 공격하는 등 사실상 정치적 공격을 제외한다면 무력적 개입은 전무했다. 그리고 공양왕이 이성계의 눈치를 보면서도 밀어주었기에 이들을 압박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타계하려고 이방원이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공양왕은 이성계와의 타협 조차 실패해 왕위를 내주어야 했다. 이를 본다면 사실상 정몽주를 제외하고는 조선건국세력을 견제할 세력이 사실상 없으며,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던 것 이다. 그리고 단순 충신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고려사 열전에는 여러 외압에도 인사행정을 옳바르게 했으며, 이성계와 아기발도가 충돌한 황산대첩에 참전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 포로를 데려오는 등 단순 충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라를 위해 일한 정치인이다. 비록 정도전이 이인임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 견제로 여러 땅을 주유했고, 이게 오늘날 미디어에서 백성의 삶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몽주는 전쟁터에 직접 개입했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일본과 명나라의 사신으로가 백성을 되려오고 외교 관계를 좋게 하는 등 실질적인 국가 이익에 일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세를 타지 않고 부족한 힘에도 고려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고려의 충신이라 할 수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또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이성계의 차남 정종 방과의 다섯째 서자 선성군(宣城君) 가문과 사돈관계가 된다. 선성군의 부인은 딸 오천군 부인 연일 정씨로 그의 아들 정종성(鄭宗誠)의 딸이다. 또한 정종성의 서녀는 한명회의 첩으로, 한명회는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였다. 외래어 표기법 외래어 표기법(, )은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이 정한, 다른 언어에서 빌려온 어휘(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규정이다. 1986년에 제정·고시된 원칙을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외래어 표기법’의 경우 한국어 이외의 다른 언어에 있는 음운을 표준어에 있는 비슷한 음운과 대응시켜 한글로 표기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언어마다 음운 체계나 문자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언어의 어휘를 다른 언어로 흡수하여 표기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외래어 표기의 목적은, 외국어에서 비롯되었으나 한국어 속에 들어와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말들을 통일된 방식으로 적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 발음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어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 표준 표기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를 말할 때에도 그대로 발음하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 화자의 외국어 발음에 문제가 있다면 외국어의 효과적인 발음 교육 방식과 관련한 논의를 해야지, 외래어 표기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언어별 표기법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제1장’은 외래어 표기법의 기본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길지 않으므로 그 내용을 아래에 보인다. 다른 언어들의 음운을 한국어의 음운(문자 표기는 한글)에 대응시켜 정리한 표이다. '표 1.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는 다른 표(개별 언어와 한글을 대조한 표)의 기초가 되며, 아직 외래어 표기법에서 규정되지 않은 외국어를 표기하는 기본 원칙이 된다. 표 2부터는 주요 개별 언어의 자모와 한글을 각각 대조한 것이다. 현재 다음 18개 언어가 규정되어 있다. 제3장에서 규정이 있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는 제2장에서 따로 표가 없이 표 1의 규정에 의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개별 언어에서 들온말(외래어)을 한국어로 표기할 때 각 언어의 상황에 맞게 세부 규정을 정한 것이다. 현재 다음 21개 절(節)이 있는데 개별 언어별로 분류돼 있다. 제3장에서 다루고 있는 언어는 영어·독일어·프랑스어와 제2장에 한글 대조표가 있는 언어들이다. 인명과 지명을 표기할 때의 세부 규칙을 정한 것이다. 현행 규정은 다음 3개 절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1986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되고 난 뒤 발간된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 · 인명)》에서 '일러두기'란에서 세칙의 형태로 덧붙여진 규칙이다. 그 중 제6장~제9장은 실제 국립국어원에서 외래어 낱말들을 심사할 때 적용되므로, 사실상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지위를 갖는다. 그래서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는 이 제6장~제10장을 외래어 표기법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이 규정이 마련된 이후에 개정된 외래어 표기법과 어긋나는 경우 '※' 표시를 하여 혼동을 피하게 하고 있다. 제6장~제10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8장과 제9장의 경우, 유럽에서 고전어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규정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현대어도 있지만 고전어로서의 지위 때문에 고대어 음운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제8장과 제9장은 고대어 음운과 현대어 음운, 그리고 그동안 대한민국 내에서의 표기 관례 사이에 타협을 봐서 임시로 정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제10장은 ‘러시아어의 표기 원칙’으로서 러시아어의 외래어 표기법(외래어 표기법 제2장의 표 19와 제3장의 제21절)이 제정되기 이전에 마련된 것이다. 러시아의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현재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도 삭제되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아르놀트 쇤베르크(독일어: Arnold Schönberg, 1941년 이후: Arnold Schoenberg, 1874년 9월 13일 ~ 1951년 7월 13일)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작곡가, 음악이론가이자 음악교육가이다. 쇤베르크의 가계는 빈에 기반을 둔 유대인 집안이다. 1933년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정권을 획득하자 미국으로 도피하였으며, 1941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쇤베르크는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였으며, 조성음악의 해체에 기여한 중심인물 중 하나이다.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의 해체는 시기적으로 1906년과 1909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쇤베르크는 12음기법을 확립한 장본인 중의 한 명이며, 12음기법은 음렬주의 음악으로 발전하여 현대음악에서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에 계승되었다. 쇤베르크는 빈에서 헝가리 출신의 구두공인 사무엘 쇤베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작곡가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9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폴카와 행진곡을 썼으며, 1889년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은행의 직원연수과정에 참여한다. 쇤베르크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작곡가 또는 예술가로서 음악적 기초를 확립해준 인물이 세 명이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음악이론, 시작, 그리고 철학의 기본을 전수해준 오스카 아들러였으며, 둘째는 윤리, 도덕, 그리고 "관행 그리고 보편적 토속성에 대한 저항"을 일깨워준 다빗 요제프 바흐였으며, 셋째는 1895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인 폴리휨니아에 첼리스트로 입단하면서 알게 된 지휘자 알렉산더 젬린스키이다. 이 지휘자는 쇤베르크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의 초기작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작곡수업도 몇 개월간 해주었다. 쇤베르크는 그러나 작곡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브람스, 바그너, 말러, 바흐, 그리고 모차르트와 같은 대가를 통한 연구를 통하여 획득하였다고 주장한다. 쇤베르크는 20대에 오페레타의 관현악 편곡으로 돈을 벌면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1899년)과 같은 작품을 썼다. 후에 그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의 작품 《구레의 노래》를 접했을 때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구스타프 말러는 쇤베르크를 문하생으로 두고 자신이 죽은 뒤에 그의 뒤를 봐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했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영향을 받았으며, 말러를 “성자”로 여겼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작품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에 《실내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되었을 때 청중은 적었으며 반응도 열광적이지 않았다. 1913년에 그 곡이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렉산더 젬린스키의 곡과 함께 다시 연주되었을 때 청중은 소리지르며 비난했다. 후에 쇤베르크의 가곡이 공연되는 동안에는 난동이 시작되어서 경찰이 출동했다고 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동안 서양음악의 토대를 이루던 조성을 해체하는 것이었으므로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문하생들과 추종자들은 그를 음악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았지만, 평론가들은 그가 발표한 작품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다. 후에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을 만들었다. 이는 후에 음렬주의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2차 빈 음악파를 결성했다. 그들 중에는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와 한스 아이슬러가 있다. 그는 음악이론가도 명성을 쌓았는데, 그의 대표적 저서로 《화성 이론》(Harmonielehre)이나 《음악 작곡의 기초》(Fundamentals of Music Composition)가 있다. 이 저서들은 오늘날에도 출판되어 음악이론과 작곡의 교육에 있어서의 비중있는 참고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1914년)까지가 '평범한'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은 아주 달라야 한다." 그 해에는 추상 미술과 정신 분석 요법이 등장하였다. 그당시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생각의 흐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로 들어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1년(Gurrelieder-구레의 노래. 1911년 완성)부터 1910년(Five Pieces for Orchestra)까지 쇤베르크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더 급격히 바뀌었다. 그가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7과 실내 교향곡 작품번호 9를 완성했을 때 그는 그의 작풍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중주 작품번호 10과 세 개의 피아노 소품 작품번호 11을 작곡했을 때, 화성에 첨가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실제로 연주되었을 때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별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쇤베르크 자신이 음악을 반복하거나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당시의 음악은 함축적이고 생략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큰 고비가 되었다. 군에 복무하면서 곡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그 시기에는 그의 미완성 작품만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음악의 질감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12음 기법을 만들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그의 친구 Josef Rufer와 산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독일 음악의 우위를 100년 동안 지속시킬 발견을 했다네." 이 말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을 빗대어 표현한 쇤베르크만의 조소적인 유머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모차르트와 바흐처럼 되고 싶어하는 야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쇤베르크는 많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기법이 과거의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정점은 《모세와 아론》인데, 그는 삼분의 이 가량을 썼지만 완성하지 않았다. 결국 오페라는 모세가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소리치는 부분인데, 쇤베르크가 그 자신을 어떤 예언자로 생각하여 더이상 작품을 쓸 수 없지 않았겠냐는 설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쓴 작품에서 그는 (전통화성은 쓰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화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의 그는 자신의 음악이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쇤베르크의 기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음악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 음악에 깊게 공감하기도 한다. 쇤베르크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프란츠 마르크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과 같이 전시되어도 좋을 정도였다고 한다. 연극과 시, 그리고 정치 문제와 유대인들에 대한 책도 썼다. 1933년 쇤베르크는 나치에 의해 유럽에서 추방되어 1941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죽었다. 쇤베르크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후기작품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옳은 철자법인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쇤베르크 자신이 알파벳 수가 13개가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그는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자리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77번째 생일을 보내기 두 달 전에 죽었다. 초유체 초유체(超流體, )는 물리학에서 점성이 전혀 없는 유체를 말한다. 따라서 초유체는 마찰 없이 영원히 회전할 수 있다. 초유체 현상은 양자역학적인 현상으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모형으로 설명된다. 즉, 다수의 보손이 동일한 양자상태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이 헬륨 입자가 모두 바닥 상태로 응축될 수 있다. 즉 초유체 상태는 레이저, 초전도 현상와 같이 거시적인 양자역학적 상태이다. 초유체는 점성이 0인 유체이다. 이에 따라, 초유체는 매우 특이한 모세관 현상을 보인다. 모세관 현상은 액체와 용기 표면 사이의 인력이 액체에 작용하는 중력 및 액체 내부의 점성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반적인 유체의 경우는 점성으로 인해 이는 매우 가는 관에서만 일어나지만, 초유체의 경우 점성이 없으므로 표준적인 중력에서는 거의 모든 표면을 타고 흘러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유체를 밀봉하지 않고, 열린 용기에 보관할 경우, 초유체는 열린 구멍을 따라 바깥으로 새어나간다. 이러한 현상을 크리프()라고 한다. 초유체 속에서는 점성이 없으므로, 유체 속에서 발생하는 소용돌이는 그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아 안정하게 존재할 수 있다. 이 경우, 소용돌이의 회전 속도는 각운동량의 양자화에 의해 양자화된다. 여기서 formula_2은 초유체를 구성하는 입자(헬륨-4 원자 등)의 질량이다. 헬륨-4를 관찰하면 특이한 형태의 상평형 그림을 얻게 된다. 일단 극저온·저압일 때에는 액체(초유체)의 상을 갖고, 저온 고압일 때에 비로소 고체가 된다. 이는 절대 영도에서 고체로 존재하는 다른 원소들과 비교할 때에 특이한 점이다. 극저온저압일 때 나타나는 초유체 상과 저압일 때에 나타나는 일반 액체 상사이의 상전이는 람다(λ) 상전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초유체에서 일반 액체로 상전이할 때에 비열용량이 그리스 문자 λ와 같은 형태로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 임계 온도(람다점 λ)이하로 내려가면 초유체 상태로 전이된다. 헬륨3의 임계 온도는 약 1.02 mK이고, 헬륨4의 임계온도는 2.2K이다. 헬륨-4는 매우 낮은 온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보여, 기체가 아닌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보손 계의 경우 상호작용이 없는 이상 보스 기체의 경우에도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으로의 상전이가 존재하며,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은 초유체의 성질을 보인다. 페르미온 계의 경우, 매우 낮은 온도에서 상호작용이 없다면 초유체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저온에서 강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면, 두 페르미온이 짝지어 합성 보손을 이루어, 이것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을 겪을 수 있다. 보손인 헬륨-4 원자와는 달리 자연상태에서 희귀한 헬륨-3 원자는 페르미온이다. 따라서 헬륨-3 입자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적용할 수 없고,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르며,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모형을 적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륨-3의 경우에도 초유체 현상은 관찰된다. 그러나 이는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모형을 반증하는 예는 아니다. 헬륨-3의 경우에 입자들은 개개의 페르미온으로 행동하지 않고, 두 입자가 짝을 이루어 보손화된다. 즉, 두 개의 페르미온이 하나의 보손처럼 행동하여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현상을 나타내게 된다. 초전도 현상은 전자기 U(1) 게이지 대칭이 힉스 메커니즘을 통해 깨지는 경우에 발생한다. 이는 BCS 이론에서는 보통 상호작용하는 전자들이 쿠퍼 쌍이라는 합성 보손을 만들어, 그 진공 기댓값이 게이지 대칭을 깨게 된다. 이 경우, 쿠퍼 쌍의 유체는 초유체를 이루게 된다. 쿠퍼 쌍은 또한 −2의 전하를 가지므로, 이는 전하를 분산 (전기 저항) 없이 운송할 수 있다. 즉, 초전도 현상은 대전된 초유체로부터 발생한다. 중성자별의 내부는 초유체의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다. 중성자는 페르미온이지만, 마찬가지로 이들은 서로 짝을 지어 초유체성을 갖게 된다. 중성자별의 초유체성은 찬드라 엑스선 관측선이 2010년 11월 관측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하였다. 이론적으로, 주어진 양자역학적 계가 초유체성을 가지는지의 여부는 란다우 조건()을 따라 판정할 수 있다. 이 조건에 따르면, 계의 분산 관계가 선형이라면 계는 초유체성을 가진다. 즉, 일 경우 계는 초유체가 된다. 란다우 조건은 다음과 같이 유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유체에서는 계의 운동량이 추가 진동 모드의 생성으로 인해 분산되어 사라질 수 있다. 즉, 운동량 formula_4의 모드가 하나 생성되면, 계의 운동량 formula_5는 으로 감소한다. 이러한 과정이 일어나려면, 이 진동 모드를 생성할 만큼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즉, 이다. 이를 정리하고, formula_8를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두 번째 항 formula_10은 미시적이므로 무시할 수 있다. 따라서 가 된다. 즉, 만약 계의 분산 관계가 formula_12을 만족시킨다면, 오직 인 경우에만 운동량이 분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임계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경우 운동량이 분산되지 못하고, 따라서 계는 저온에서 초유체처럼 행동하게 된다. 초유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모형은 그로스-피타옙스키 방정식이다. 이는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비상대론적 보손들을 나타내며, 슈뢰딩거 방정식에 비선형 멕시코 모자 퍼텐셜을 추가한 것이다. 이 경우, 복소 스칼라장의 U(1) 대칭이 자발 대칭 깨짐을 겪고, 골드스톤 보손이 생긴다. 즉, formula_15를 유질량 성분과 무질량 성분으로 분해하여 쓰자. 그렇다면 formula_17는 질량을 갖게 되고, 반면 formula_18는 무질량 골드스톤 보손이다. formula_17를 적분해 없앤 유효 이론에서, formula_18의 분산 관계는 대략 무질량 클라인-고든 방정식을 따른다. 즉, 낮은 에너지에서 유효 로런츠 대칭이 발생하게 되며, 이 경우 유효 광속은 다음과 같다. 상대론적 무질량 입자는 물론 선형 분산 관계를 따르므로, 이 경우 임계 속도 formula_23 이하에서 계는 초유체가 된다. 최초로 발견된 초유체는 헬륨-4이다. 헬륨-4의 초유체성은 1937년에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 및 존 프랭크 앨런()과 돈 마이스너 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공로로 카피차는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대에, 데이비드 리와 더글러스 오셔로프, 로버트 콜먼 리처드슨은 페르미온인 헬륨-3 또한 극저온에서 초유체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공로로 이들은 199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에는 초저온 보손 (루비듐 87) 기체가 실험을 통해 초유체 성질을 보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2005년에는 볼프강 케테를레의 실험을 통해 초저온 페르미온 (리튬-6) 기체가 초유체의 성질을 보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호르몬 단백질계 호르몬의 수용체는 세포 표면의 세포막에 위치해 있다. 호르몬과 수용체가 결합하면, 세포질 내에서 인산화반응, 또는 인산기의 분해가 일어나 고리모양 AMP와 같은 2차 신호 전달 물질들을 형성한다. 2차 신호 전달 물질은 이온 통로의 투과성을 변화시키거나 세포내 분자의 농도를 증가시키는 등의 세포 반응을 유도한다.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나 갑상선 호르몬의 수용체는 표적 세포내의 세포질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호르몬들이 수용체와 결합하려면 반드시 세포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호르몬들은 지용성이기 때문에 인지질로 구성된 세포막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호르몬이 수용체와 결합하여 만든 호르몬-수용체 복합체는 핵막을 통과하여 세포핵속으로 들어가 특정 염기서열에 부착, 유전자를 발현시켜 원하는 단백질이 생체 내에서 합성되도록 한다. 다음은 주요 인간 호르몬의 목록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구약성경 구약성경(舊約聖經, , , ) 또는 구약성서(舊約聖書)는 ‘유대교 성경’ (Hebrew Bible, )을 기독교 경전의 관점에서 가리키는 말이다. 중립적 용어로 히브리성경이라고도 한다. 5세기에 신약성경이 결정되면서 경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명칭이었다. ‘구약’이란 말은 ‘옛 계약’이란 의미의 한자어이며, 기독교의 관점에서, 신약성경과 대비되는 신과의 ‘옛 계약’이 적힌 책이라는 의미로 쓰이므로, 유대인에게는 용인되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히브리어 성경이라고도 한다. 구약성경은 율법서, 예언서 및 성문서 등으로 분류되며, 기독교 종파에 따라 분류 체계에 차이가 있고, 일부 낱권은 제2 경전 또는 외경으로 분류된다.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이며, 본 명칭은 '타나크이다. 전통적인 증언은 기원전 1500년~400년 사이에 유대민족의 구전 전승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서학계에서는 실제 문헌 작성 연대를 훨씬 나중으로 이해한다. 토라(모세오경)의 경우에는 주로 유대왕국 후반부터 바빌론 유수기에, 케투빔(성문서)와 느비임(예언서, 선지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부터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의 타나크 내 24권의 모든 문서가 유대교의 경전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70년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종교의 대부분의 유파가 사라지고 남은 유일한 유파인 바리새파가 유대교를 재형성하던 시기인 AD 90년 경의 얌니야 회의에서 결정하였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얌니야 회의에서 특정한 문헌의 타나크 목록 추가 및 배제가 논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주장은 얌니야 회의는 나자렛 이단 세력(후의 기독교)의 축출을 주 목적으로 하였다고 본다.) 확실한 것은 구약성경 목록 확정의 공식적인 증거 자료는 2세기 경에나 비로소 나온다는 것이다. 1세기 말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에서 22권의 정경이 언급되었지만 세부 목록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며, 1세기 말 작성으로 추정되는 에스드라 2서에서는 24권의 현 타나크와 같은 책 숫자가 언급되지만 역시 문헌 이름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2세기에 작성된 '바바 바트라'에서 타나크 24권의 목록이 전체적으로 처음 언급된다. 하지만 동시대에 사르디스의 주교인 '멜리토'가 당시 유대교 경전을 정리했다고 하는 '좁은 성경 목록' 22권과의 목록과의 상이성을 보면(에스더는 배제되고 지혜서가 포함된), 2세기 경 결정된 타나크 목록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멜리토 이전의 초대교회가 당시 유대교 정경 결정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각 문헌들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증언에 주로 의존해 왔지만(벤 시락의 집회서나 에스라 등의 증언), 성서학계의 연구는 여러 갈래의 전승들이 본문 비평을 통해 다양한 기록자에 의해서 기록, 채색되었고, 지역 및 시대에 따라서 다른 갈래의 문서들이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히브리어 전통을 보존했던 팔레스타인의 바리사이파 랍비들은 그렇지 못했던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 비해 신학적인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세력이 지지하는 문서와 그 목록이 경전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얌니야 회의이후 이들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한 문서들이 유대교 안에서 경전성을 배제당하는데, 신뢰성 있는 히브리어 원문의 존재 유무가 가장 핵심적인 경전성 결정의 기준이 되었다. 이전까지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고 새롭게 대두되던 기독교 세력이 사용하던 그리스어 번역 성경인 70인역은 얌니야 회의에서 인정된 히브리어 성경인 타나크와의 내용적 차이의 문제와, 히브리어 원문이 없이 그리스어 번역본만 존재하는 문헌들도 있어 그 출처의 신뢰성을 의심받았고, 결국 유대교 안에서 축출당하였다. 70인 역을 대신하여 유대교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타나크를 대본으로 하여 아퀼라역을 새롭게 번역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타나크'를 '구약'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382년에 로마 공의회에서 새롭게 정한 경전들을 '신약(New Testament)'이라고 부르기로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역사에 등장하였고, 따라서 '신약성경'으로 분류된 문헌 안에서 언급된 "성경"이라는 모든 표현은 곧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에는 그리스어 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세력과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사용했던 70인역이 그대로 기독교의 경전이 되면서 외경논란의 화근이 되었다. 내부적으로 높은 권위를 인정되던 주요 문헌들이 70인역의 것을 주로 인용하였기에 기독교의 호교론적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문헌 상으로 증명되는 최초의 정리된 기독교 구약 목록은 2세기 후엽의 인물인 사르디스(사데)의 감독인 멜리토의 편지로서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수록된 것이다. 좁은 성경 목록이라고 부르는 유대교 구약 성경 목록에 가깝지만, 에스더가 빠져있고 2경전에 해당하는 솔로몬의 지혜서가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이 주목할만 하다. 이는 유대교 타나크가 초대 기독교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타나크 자체가 그 당시에 유대교 안에서조차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나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서신 등에서도 이러한 독특한 기독교의 좁은성경 목록의 경향성은 계속 드러난다. 대개 동방교회는 이러한 '좁은 성경 목록'의 입장을 보인 교부들이 많은 편이고, 이는 동/서 교회의 내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문헌 상으로는 멜리토의 것처럼 정리된 목록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나, 다수의 초대교회 교부들은 2경전이나 일부 외경들도 성경으로서 인용하는 이른바 '넓은 성경 목록'의 입장에 선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입장들은 교회 내적으로 정리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정경화의 와중에 동/서 교회의 갈등도 점차 본격화 된다. 특히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게 공인된 이후, 급격히 교세가 확장되면서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을 포함한 경전 확립의 필요성이 요청된 4세기 후엽에 그 갈등은 극에 달하였다. 당시에 경전의 확정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가운데, 아타나시우스나 히에로니무스 등의 일부 저명한 신학자들은 구약 부분에서 유대교 히브리어 경전 본문과 그 목록의 우월성을 주장하였고 특히 히브리어 원본없이 그리스어 번역본만 있는 문헌들을 '아포크리파'라고 분류하며 그 권위를 상대적으로 낮잡아 보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의 전통적 호교론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침내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유대교에게는 인정되지 않은 그리스어 번역본의 경전성을 인정하며 '구약성경'을 일단 확정지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내부에서 비판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저명한 교부들 상당수가 2경전 문헌에 대한 정경성에 의구심을 보이고 비판하였으며, 특히 동방교회에서 카르타고 공의회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경에 대한 해묵은 갈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16세기의 종교 개혁에 의해서였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각 문헌들 사이에 권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Kanon im Kanon), 이 중 구약정경 구성에 대해서는 유대교 측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 칼뱅의 경우에도 과거 카르타고 공의회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1545년의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정경에 대한 도전적인 주장들을 모두 일축하였고, 제2경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과거에 '외경'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일부 문헌들에 대하여 다른 성경 문서들과의 동등한 수준의 경전성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에 종교개혁 세력은 반발하였으며,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를 등지고 독립된 개신교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는 외경의 경전성을 부인하고 유대교의 타나크 24권을 재분류한 39권의 독자적인 구약정경의 목록을 확립하였다 개신교 제 종파 안에서도 의견을 달리해서,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종파인 루터교나 성공회, 감리교회, 구세군, 일부 성결교회 등은 외경에 대해 '교리를 도출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지만 신앙에는 유익한 문서'로 권장했던 아타나시우스나 히에로니무스의 입장에 가까운 편이다. 부록에 달린 외경의 독서를 금하지는 않는다. 성공회는 아포크리파를 준정경으로 인정하여 봉독하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따르는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결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적 영향을 많이 받은 개신교 종파들은 외경에 대하여 교회 내 봉독을 금지하였고,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성경 안에서 아예 완전히 배제하는 등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내에서는 개신교 성경편찬처인 '대한성서공회'의 '개역개정 성경전서', '새번역 성경전서'에는 외경이 없으며, '공동번역 성서'에만 부록으로 외경이 실려있다. 1946년에 발견된 사해 문서에서 히브리 말 원본이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되던 토빗기 등의 히브리어 판본이 포함된 채 발견되면서 히브리어 원본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 문서들이 경전의 목록에서 제외되는 외경이라는 개신교 등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물론 에세네파에서 히브리어로 출토된 2경전 전부를 정경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제2 경전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에서는 외경이라고 부르는 책이 정경(正經)인가의 여부는 다른 요소들에 의해 결정짓게 되었다. 사해사본에서 증명되는 에세네파의 정경 목록은 바리사이파 랍비들이 결정한 타나크와는 분류법 및 목록이 다소 상이하다. 에스테르(에스더)는 정경에 없으며, 개신교에서 위경인 에녹서와 희년서, 외경인 예레미야의 편지가 포함된다. 그러나 에세네파의 정경 목록이 타나크처럼 구체적으로 한정되어 존재했는가? 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관점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성경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에세네파 정경의 (닫혀지지는 않은 현재까지의) 목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쿰란 사본 4QMMT에서 제시된 4분류 법을 따른다. 1. 모세의 책들 : 창세기, 탈출기(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성전 두루마리" 2. 역사서 : 여호수아, 판관기(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룻기, 에즈라 브레켐야(에스라+느헤미야), "희년서 3. 예언자의 책들 :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에스겔), 열두 소선지서, 욥기, 잠언, 아가서, 전도서, 다니엘, "에녹 1서, 예레미야의 편지" 4. 시편 유대교의 타나크와 개신교의 구약성경은 분류법은 서로 다르나, 기본 골격과 다루는 내용은 같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경우 여기에 제2정경을 성문서 범주에 더 추가하여 정경으로 인정한다. 개신교의 경우 39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46권, 동방정교회에서는 49~50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래의 표에서 비어있는 것은 성경의 경전에 속하지 않은 것을 뜻한다. 유대교 성서와 동일하게 구약성경의 가장 맨 앞에 두고 있다. 태초의 이야기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세가 저술했다고 하여 모세 오경이라고도 한다. 역사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묶는 이름이다. 편의에 따라 두 부류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 포로 귀환 후에 다시 쓰여진 역사서이다. 문학서라고 불리기도 하며, 총 5권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및 소예언서 12권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상의 5 권을 “대선지서”로 분류하기도 한다. 유대교 성서에서는 한 권으로 취급하나, 기독교에서는 각각의 12권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다. 신약성경 신약성경(新約聖經, , , ) 또는 신약성서(新約聖書)는 기독교의 경전이다. 구약성경에 대비하여 신약이라고 부르며, 총 27권으로 구성 현재 일반적인 기독교에서 신약성경은 4편 복음서와 사도 행적을 기록한 1편의 사도행전, 파울로스와 여러 저자가 각 지방의 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와 그리고 종말에 대한 사도 요한의 예언서인 요한 묵시록을 한데 모은 것을 가리킨다. 신약성경 글은 당시 예수를 믿고 따르던 기독교인이 서로 다른 지방에 따른 언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 그리스어의 범용 형태인 헬레네즘 그리스어 또는 헬라어로 불리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신약 성경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같은 저자로 알려진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마태오, 마르코, 요한 복음서 부분이다. 이 부분의 글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함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로. 복음서 및 사도행전을 제외한 나머지 글은 편지 글로서, 이는 예수 승천 혹은 사후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 즉 이스가리옷 유다를 제외한 열두 제자 및 파울로스, 기타 권위있는 사람(히브리서의 경우)이 공동체에 문제가 생겼거나 복음을 정립할 필요가 있을 때 쓴 편지글들이다. 이 편지들이 성경으로 인정받기 전에도, '신앙을 올바로 전하는 글'이라 하여 참고문헌처럼 널리 읽혀졌다. 2세기 중엽, 마르키온의 등장은 초대교회가 체제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키온은 유대교(구약)와 기독교(신약)의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고 이해하여, 초대교회의 공식적인 경전(구약성경)을 부인하고, 루카 복음서와 몇가지 파울로스 서신들을 묶어 새로운 경전을 주장하였다. 비록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 배척되었으나, 그의 시도로 말미암아 기존의 성경(구약성서)만이 아닌 독자적인 새로운 경전 즉 신약성경이 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초대교회 내부의 이단세력 발흥에 저항하여 보편교회의 직제를 창시한 이레네우스는 4대 복음서의 권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로마 제국 때 사이비 종교로 몰려 탄압받던 기독교가 4세기에 정식 종교로 공인된 이후(밀라노 칙령), 기독교의 교세는 폭발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새로운 경전을 확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약성경 후보에 해당하는 많은 복음서, 행전, 편지(서신) 등의 문헌들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서 분류하였다. 이에 따른 당시의 결론을 유세비우스의 분류에 따라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세비우스(Eusebius)가 자신의 책(Church History Written c. 325)에서 초대 교회에서 논쟁이 되는 성경의 책들이라고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 키릴루스는 이 중에서 호모루구메나와 안티레고메나를 합쳐 26권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는 363년의 라오디케아 공의회에서 추인되며 현재의 신약성경 구성을 결정하는데 뼈대 역할을 하였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키릴루스가 '노타'로 분류했던 요한 묵시록을 호모루구메나로 보아야 하며 총 27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관철된 27권의 신약성서 구성은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확정되었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44권(현재 분류로는 46권)의 기존 구약성경 목록과 더불어 27권을 신약정경으로 최종 인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일부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일방적인 경전 확정에 반발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와 신약성경의 안티레고메나가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트룰란 에큐메니컬 공의회(692)에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결정 일부를 수용하여 신약성경 목록을 공유하고, 구약성경의 아포크리파는 일단 정경으로 간주하되 경독서(아나기그노스코메나, ἀναγιγνωσκόμενα)로 인정하여 교리 도출에서 유보적인 개선된 태도를 택하였다.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재야의 신학자들이 기존 서방교회에서 인정하는 경전들의 경전성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약성경의 제2 경전 부분에서 강한 논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신약성경은 비교적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만, '오직 믿음'(Sola Fide)을 신봉하던 루터로서는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에 비유하고 불에 태우는 등 강도높게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루터교를 포함한 개신교계에서 그 경전성이 부정되는 결과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다만 루터는 성경의 각 문헌 사이 차등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식으로(Kanon im Kanon) 야고보서 등 그가 배척했던 일부 문헌의 영향력 약화를 유도하기 위한 시도를 했었다. 이후 개신교 학자들 중에서 일부는 이 야고보서를 ‘문제의 서‘라 불렀고, 루터 신학자 요한 브렌즈는 이것을 외전으로, 데이비드 스캐어(David P. Scaer)는 교회가 보편적으로 정경으로 승인하기에 결핍이 있는 책들이라 주장했다. 그렇게 다른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구약 외전의 논쟁의 비중이 너무 컸던 나머지, 신약성경 27권의 정경화에 대한 논란은 공론화되지 않았다. 목록편집에 인용된 성경번역본은 성경(200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동번역성서(1977년,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판(1998년, 대한성서공회)를 기준으로 하였다. →성경학자들은 베드로의 첫째,둘째 편지를 베드로의 작품이 아니라,베드로의 이름을 빌려서 쓴 위서로 이해한다. 2005년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1998년 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오일러 공식 오일러 공식(Euler's formula)은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이름이 붙은 공식으로, 복소수 지수를 정의하는 데에 출발점이 되며, 삼각함수와 지수함수에 대한 관계를 나타낸다. 오일러의 등식은 이 공식의 특수한 경우이다. 오일러 공식은 다음과 같다. 실수 x 에 대해, 허수 지수 ix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e는 자연로그의 밑인 상수이고, formula_2는 제곱하여 -1이 되는(formula_3) 허수단위, formula_4은 삼각함수의 사인과 코사인 함수이다. formula_5에 formula_6를 대입하여, formula_7 이라는 오일러의 등식을 구할 수 있다. 오일러 공식은 1714년 로저 코츠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처음 발견하였다. 지금과 같은 모양의 오일러 공식은 1748년 오일러가 무한급수의 좌우 극한값이 같음을 증명하면서 발표되었다. 그러나 로저와 오일러 모두 이 공식이 지닌 '복소수를 복소평면 위의 하나의 점으로 볼 수 있다'는 기하학적 의미를 눈치채지는 못하였고, 이것은 약 50년이 지난 후에나 발견되었다. 오일러는 현재의 교육과정에서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학생들에게 복소수를 가르쳤다. 그의 기초 대수학 교재인 대수학 원론(Elements of Algebra)에 보면 교재의 거의 맨 앞부분부터 복소수를 도입하고 있고 교재 전체를 통틀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테일러 급수에 따라 실수 범위에서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이때 formula_5가 복소수일 때에 앞의 무한급수를 각각의 함수로 정의한다. 그러면 가 된다. (1)에 formula_16을 대입하면, "Q.E.D." 다음과 같은 복소수 formula_21를 생각하자: 양변을 formula_5에 대해 미분하면: formula_3이므로: 양변을 적분하면: 이제 formula_29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formula_30일 경우를 계산해보면 따라서 따라서 다음과 같은 식이 성립한다: "Q.E.D." 함수 formula_34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허수단위 formula_2 는 상수이므로 formula_34의 도함수와 이계도함수는 다음과 같다. 이로부터 일차 독립인 두 해가 발생한다. 한편, 차수가 같은 미분방정식의 어떤 선형 결합도 해가 될 수 있으므로 위의 미분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여기에 함수 formula_34 의 초기 조건 곧, 이므로 Q.E.D. cis 함수 또는 복소 지수 함수는 오일러 공식으로부터 바로 유도되는 함수로,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것이다. 이 함수는 푸리에 변환이나 페이저 등에서 복소수와 관련된 연산을 할 때 흔히 사용되는 것이다. 우선 이 공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멱급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멱급수란 하나의 수의 지수를 증가시키며 모두 더한 값을 말하며, 지수함수의 멱급수는 다음과 같다. formula_51 이 멱급수의 지수 formula_52에 formula_53(복소수에 임의의 수 formula_54를 곱한 값)을 추가하면, formula_55에 formula_56를 더한 값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즉, formula_57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 등식에서 formula_21에 formula_6를 대입했을 때 나오는 특수한 등식이 바로 오일러의 등식이다. 나관중 나관중(, 1330년? ~ 1400년)은 《삼국지연의》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중국 원말 명초의 인물로, 관중(貫中)은 자(字)이며 본명은 나본(羅本),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다. 산서성 출신이다. 재능이 비상하여 당시의 경향에 따라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는 연의를 많이 지었다. 특히, 그의 최고 걸작인 《삼국지 연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이전까지 민간의 구전으로 전하던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삼국지통속연의》란 책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또한 《수호전》의 편저에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관중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원나라 말기의 혼란기의 반란군 지도자 장사성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며, 《삼국지 연의》의 적벽대전의 묘사는 주원장과 진우량의 전투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이 밖에 <수당지전>, <잔당 오대지 연의>, <송 태조 용호 풍운회>, <평요전> 등의 희곡과 통속 소설이 전한다. 한국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 , , , , )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3월 15일에 탈환하였다.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로, 협정 체결 이후에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다. 1945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01일 중국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 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임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시각, 즉, 한국 전쟁을 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남북분단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도 있는데 즉, 38선을 경계로 남쪽엔 영국과 미국이, 북쪽엔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옛날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을 때에 백제의 영토를 영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38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했다. 38선 북쪽으로선 개마고원을 경계로 평양, 개성, 남포, 신의주, 해주을 포함한 서부 지역은 중화민국이 동부 지역 원산, 금강산, 함흥, 흥남, 장진, 혜산진, 청진, 나진을 포함한 곳은 소련이 점령해서 5년 간 신탁 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에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38선 북쪽의 서부지역이 공산당으로 넘어가 서부 지역도 공산국가가 되므로 38선 북쪽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떼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이와 반대로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대화 때문에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김일성은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조선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아직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은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최신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전쟁 당시 소련은 공개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한다. 1949년 8월 12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8월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대한민국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격시 미국은 대한민국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대한민국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대한민국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에도 소련의 지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에 비하여 약세에 있었다.(스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문을 스티코프를 경유하여,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을 계기로 고무되어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공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 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6월 11일, 대한민국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대한민국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조선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토인 청단지역에서는 해방전부터 농업용수로 사용한 구암저수지의 수로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끊음으로써 청단평야의 영농을 못하도록 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 보름 전(6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전형적인 화전양면기만술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이 체포한 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억류 중이던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또한, 6월 16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대한민국 국회에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그 이면에서 전쟁 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즉, 6월 12일부터 인민군은 38선 이북 10~15km 지역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고, 6월 16일에는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작전 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이 계획은 1개월 기간으로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6월 20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에 조선인민군의 수륙양용 작전용 선박공급과 소련군 수병을 함께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문의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0시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1시께 남한정부가 북한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첩보가 북한쪽에 오후 8시 무렵 입수되었다고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이 첩보가 공개문서로 돼 있어 의심스럽다고 평가했다. 6월 21일,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입수한 각종 첩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침공에 관한 정보가 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이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일성은 전에 구상했던 옹진반도에서의 전초전을 수행치 않고 6월 25일 전 전선에 걸쳐 전투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의료부대인 조선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6월 25일 오전 12시까지 치료준비사업을 완료한 병원은 전투 준비 상태로 대기하였다. 25일 오후 2시부터 부대는 벌써 전상(戰傷) 환자 취급을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한반도 남쪽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알류샨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하였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북진통일론은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춘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에 육군본부는 계획 수립을 서둘러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일명, 국군방어계획)을 확정(1950년 3월 25일)하고, 예하 부대에 이를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이 국군방어계획은 신태영(申泰英) 육군총참모장의 지시로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 대령이 중심이 되어 작성되었다. 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강문봉이 작전국장에 있었다. 그는 매일 적정(敵情)판단보고서를 읽었는데 이 보고서에 조선인민군의 병력이동상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병력집결이 완료되면 남침할 것이라는 분석자료도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고 미 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 무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한국군의 정보는 군사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경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신성모는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전쟁준비를 마치고 북침을 하겠다고 망언을 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 이 일로 인해 북한이 남침할 명분이 생겼고 1950년6월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수없이 보냈지만 신성모는 북한은 절대 남침을 하지 않는다고 정보를 무시했고 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신성모는 남침정보를 매번 무시하였고 채병덕에게 명령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체하였다.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을 휴가외출 보낼 것을 요구했고 신성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국군 병력 반 이상을 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정보를 받은 북한에게는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날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계는 물론이고 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제2차 총선거 실시를 지연시키는 한편, 적자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를 반대하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각서 도달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변경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50년 5월 30일)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해,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 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대한민국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1950년 6월 19일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가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전쟁 직전이었다. 한편, CIA는 한국 전쟁 발발 엿새 전의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 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38도선을 시찰(1950년 6월 20일)하는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그 외 전쟁 발발 2주 전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하고, 1주 전 대부분의 전방 부대의 위치를 변경하고, 전방 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 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 개별적으로는 이해가 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나 이형근이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 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 안에 통적 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이형근은 군번 1번 문제로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이며, 이것은 국군 창설 첫날이자 최초의 파벌 싸움의 시초가 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북한의 남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 되어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 공군은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가 전부였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걸쳐져 있어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개성 부근 도처에서 마치 한국군의 전력이라도 시탐하듯 빈번한 도발을 자행하다가 1950년 봄에 와서는 거의 매일같이 개성과 백천등 38선 연변도시에 박격포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국을 통틀어 항공기는 고작 22대였으며 그것도 분계선이 아닌 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함정은 36대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이 선제공격했다는 당시의 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 1950년 6월 당시 북한군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민족보위성에 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1948년),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6월 12일부터 북한군의 38선 배치를 위한 부대 이동은 시작되었으나 38선에서 떨어져 있던 부대들이 일제히 남하했다. 23일에 완료된 북한군의 38선 배치 병력을 보면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및 3개 경비여단 등으로서 북한 공산군의 총병력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북한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1사단-4사단-3사단-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12사단-5사단이 배속되었다(서쪽에서부터).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북한군과 별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무성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장갑차)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그것은 성능이 향상된 후기형T-34를 상대하기에는 힘든 무기였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단지 15일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전쟁은 북한의 의지로 발발하였으며,이오시프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비교적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이 과거에 있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도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고도 주장해 왔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 등의 국가에서 과거에 제기되었던 한국 전쟁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과 주장들이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 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부라야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현 부라야트 공화국)의 기갑부대 군사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조선인민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50여 회 가량을 한국 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하였고,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이후에 전쟁을 승인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위주이거나 그를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인민군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북한의 김일성의 명령 하에,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소련에서 지원한 최신형 T-34/85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장비도 부족했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창동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오전 2시 30분에 폭파를 맡은 장교 세 사람에 의해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미국 공군 항공기가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항공기 투하용 ‘AN-M64’ 미제 폭탄”을 한강 대교와 한강 철교에 투하했다. 북한의 남침은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주미 한국대사 겸 UN 한국 대표 장면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짊어지고 비장한 결의로 6월 24일 당일(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미 국무성과 철야 협의한 결과 한국문제를 익일 UN안보이사회에 긴급제소하여 25일과 27일의 결의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회원 국가는 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사태를 중시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다시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 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 해안의 해상 봉쇄를 명하였다. 그 사이,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이어 7월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8일에는 유엔 결의에 의한 유엔 깃발이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유명한 대전 전투(7월 20일)를 비롯한 전쟁 초기에 있어서 미국 제24사단과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북한군의 작전에 대항하여 지연 작전으로써 후방의 한 · 미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대전을 넘어선 북한군은 진로를 세 방면(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및 포항)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북한군은 호남 평야를 휩쓸고서 남해안 연안으로 침입하는 한편 경북 북부 전선과 동해안 전선과 호응하여 세 방면으로부터 부산-대구의 미군 보급선을 절단하여 한미 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한 · 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은 8월 15일 대구를 침공하고자 대구 서남북방에 6만의 병력과 수십대의 전차를 집중하였으나 16일 미국 공군 B29의 전략적 대폭격으로 말미암아 완전 궤멸되었고 한편 이 사이에 연합군 병력은 한국군 5개 사단을 비롯하여 미군 4개사단, 영국군 2개 대대, 호주군 1개 대대 그 밖에 10개국에서 파견된 수만의 연합군으로써 증원되어 이렇게 북한군의 주력을 유도흡수한 연합군은 마침내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총지휘하에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동반하여 서울 수복식을 거행하였고 비로소 90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서울 시민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어 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고(10월 20일),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중국 인민 지원군 28만명이 전투에 개입하여(11월 28일)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연합군은 장진호 지구의 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철수 작전을 시작하여 서울 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 와중에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 개성 · 동두천 ·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한국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 일대에서는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웠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 휘하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km, , 제13연대는 제12연대 배치지역의 서쪽 끝인 예성강 유역부터 20km(즉,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 구간)에 이르는 38선, 즉 국경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 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서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 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 제12연대를 좇아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6월 28일) 6·25 발발 직전, 의정부 포천 지역의 38선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의 예하 제1 · 9연대와 포병, 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1연대는 동두천 정면(서쪽), 제9연대는 포천 정면(동쪽)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여 제1군단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발발 당일, 영내에 대기하고 한국군 제9연대를 북한군 제3사단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 · 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1·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이상, 6월 25일) 이로써 의정부가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체신부 보험국장 김의창(金義昌)은 포천 · 의정부의 전황을 국무회의에 보고한 바 있다. 당시 육군의 총지휘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었다. 개전 당일(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채 참모총장은 육사교도대 생도 1기(262명) 및 2기(227명)를 포천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하였다.(6월 25일 오후) 채병덕은 다음날(6월 26일) 오후의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한편, 육군본부 상황실의 당직하사관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 분주하게 상황을 접수하고 있었다. 아침 7시 이전에는 육군본부로 이어지는 군의 주요통신망이 재경유격대들에 의해 절단되었고 북한군은 한국군의 통신망을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에 역이용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UP통신사의 서울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발송한 전문(電文) 기사 내용에 대하여 UP통신사의 도널드 곤잘레스(Donald Gonzales)는 미국 국무부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에게 확인을 요청하였다.(오전 11시 4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도 11시에 워싱턴D.C.에 전화를 걸어 “북한군이 한국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고 보고했고, 북한의 공격 상황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워싱턴 당국은 이 공식보고를 6월 24일 21시26분에 접수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7시간26분 후였다. 국무부 차관보 딘 러스크는 동국(同局)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잭 제임스가 타전한 기사(전쟁 발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전쟁 발발에 관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5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조선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학살은 주로 국군(육,해,공군)과 서북청년회(단)등의 극우 폭력단체의 의해 자행되었으며 , 미국 문서에서 미군정 미군 장교의 참관과 허가 최종 지시로 밝혀져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7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견해가 나뉘어 있다.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견해 중 많은 학자들이 춘천전투에서의 국군의 방어가 인민군을 저지한 것이 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이유로 보고있다. 이 2사단 은 의정부에서 조선인민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남한 정부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즉시로 주미 한국대사 장면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절박성을 알렸고, 미국은 이날 오후 2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한국 문제에 대한 대책을 건의,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케 했다. 27일 재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군의 무력 침략을 배제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보낼 것을 모든 유엔가입국에 권고하자’는 미국 대표의 제안을 7대 1로 가결했다. 이에 미국은 28일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해군과 공군을 우선 한국 전선에 파견했다. 뒤이어 29일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군이 출동하고 30일까지 총 32개국이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의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제안에 의해 ‘한국 출전 유엔군의 총사령부 설치 및 유엔기(旗) 사용’을 7대 0, 보류3(인도 · 이집트 · 유고)으로 가결, 그 관할권(管轄權)을 미국에 위임하는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군 총사령부 보고를 유엔에 제출케 하였다. 이때까지 소련은 그해 1월 13일 이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하면서 다만 국외자의 입장에 서서 유엔군의 한국 파견 문제를 비난해 왔으나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다수 국가의 ‘고귀한 집단적 양심의 표현(프랑스 대표 발언)’ 앞에 여지없이 패배당하고 할 수 없이 27일자로 유엔에 재참석할 것을 통고해 오기에 이르렀다. 유엔의 이와 같은 결의는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國際正義)에 입각한 최초의 유엔군을 탄생시킨 것으로서 국제평화의 수호를 위한 획기적인 거사였다. 7월 7일의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은 마침내 일본 도쿄에 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 7월 14일 유엔기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고, 이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을 유엔군 총사령관 지휘 하에 편입시키겠다는 공식서한을 발송하자 맥아더 장군은 이를 즉히 응낙하여, 공산 침략군에 대항하여 전투태세는 완전 통일, 정비되었다. 한편 한국군은 6월 30일자로 삼군 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소장을 예비군 사령관으로 전임시키고, 새로 정일권(丁一權) 준장이 총참모장이 되어 한강 이남 방어선을 재정비했으나 경부선 가도를 따라 전차사단을 앞세우고 돌진하는 적 주력부대에게 수원을 빼앗기고 육군본부가 다시 남하했다. 7월 5일에는 유엔 결의에 따라 우선적으로 급파된 미 제24사단 21연대의 제1대대가 1개 포병대와 함께 오산(烏山) 남방에서 최초로 공산군을 맞아 싸웠으나 3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적의 대부대에 완전 포위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포위망을 탈출, 후퇴했다. 유엔군이 치른 최초의 전투가 이렇게 무참한 패배로 돌아가자 미 제24사단 전병력은 다시 금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7월 15일 밤 적은 금강을 건너 진격해 왔으며 20일 아침에는 대전 시내에 돌입, 3개 사단의 병력으로 집중공격을 가해 왔다. 여기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몸소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7월 4일경,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가 김일성, 박헌영과 면담했다. 여기서, 김일성은 미군 상륙작전이 예상되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와 탄약보급을 늘릴 필요가 있고 바실리예프 수석군사고문을 단장을 한 장교단을 전선사령부와 함께 서울에 상주하도록 허가를 요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시각 6월 25일 1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북한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여, 북한이 한반도 남쪽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 벨기에 · 캐나다 · 콜롬비아 · 프랑스 · 그리스 왕국 · 에티오피아 제국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필리핀 · 태국 · 터키 · 영국 · 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는 셀라시에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 정규군, 셀라시에 황제를 섬기던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시에 의회가 선전포고를 결의한 것과는 달리, 한국 전쟁에 있어서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하여 참전을 결정했다. 트루먼이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6월 30일)에 따라,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육군 주일 미 제8군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7월 1일)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7월 5일, 오산 전투)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F.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제24사단의 제2진인 34연대가 대전으로 진출하였다(7월 4일 저녁). 오산 전투와 같은 날(7월 5일_, 평택 부근에서도 제34연대의 일부가 북한군과의 교전으로 총격제일성을 신호로 한 이래로 국도를 선혈로 물들이는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제21연대와 더불어 천안-전의-조치원을 연하는 선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케 된 결과, 7월 12일에 마침내 금강 남안쪽으로 물러서게 되었다.(평택-안성 전투)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 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조선인민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대한민국 국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다시 진로를 3분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湖南) 일대를 휩쓸고 마산으로 닿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동으로 포항에 육박했다. 유엔군은 총사령부하에 한국군까지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완료한 때였다. 8월 7일 유엔군은 마산지구에 미 제 25사단 · 34사단 기타 제5전투단 · 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을 목표로 육박하는 북한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3일 동안에 60리를 진격, 한국군의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하동지구를 탈환했다. 이것은 6월 25일 이후 유엔군이 가한 최초의 본격적 반격이었다. 8월 13일에는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을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북한군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 이 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미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 후 북한군은 대구를 피하여 동·서로 부대를 이동하더니, 최후의 결전인 제2차 협공(挾攻)작전을 기도했다. 서남지역 진주(晋州) 방면에 북한군의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집결하고,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 역시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105)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동시에 유엔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미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기진하였으며, 훈련도 되지 않은 신병들을 보충 병력으로 편성한 상태였다. 서남지역에서는 마산의 미 제2사단·25사단이 북한군의 계속되는 야습공격을 막아서 격퇴시켰으며, 동부전선에는 한국군 제2군단이 9월 10일 최강을 자랑하던 북한군 제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永川)지구에 몰아 포위하고 4,8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 수 많은 차량과 전차 무기 등을 빼앗아 완전 섬멸한 후 단번에 15km를 북진하여 적의 기세를 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워커(Walker) 중장은 12일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북한군의 남침 공세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유엔군의 북진이 있을 뿐이었다. 8월까지 북한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 의장석에 앉은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그 동안의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과,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측 대표 단장 장면은 8월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는 끝내 장면의 착석을 거부했다. 또한 말리크는 “6‧25 동란은 인민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 측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한 장면은 미국 측 대표 오스턴과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반박하였다.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관련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에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 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소련 측이 제시한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장면 대표는 9월에 열린 UN 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는데, 9월 안보리 의장국은 영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 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 여 장면 대표는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 대표는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그는 약 40여 분간 공산권의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유엔군이 육전(陸戰)에서 전과(戰果)를 올리기까지는 공군의 지원폭격(支援爆擊)이 크게 주효하였으니 유엔 공군은 이미 개전(開戰) 20일 만에 제공권(制空權)을 장악, B29, B26 등 중폭격기는 적 후방의 교통로를 파괴하는 한편 평양·진남포·함흥·성진·청진·나남 등지의 군수품 공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세이버 제트기·F51 전투기·영국기·호주기(濠洲機) 등이 전선을 주 공격목표로 삼고 각 방면으로 공습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군도 개전 직후부터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나 지상작전이 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활약을 못 하고 있던 중,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전격적 북상을 기도하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9월 13일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해군 사령관은 미 해군 소장 도일(Doyle)로서,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이었다. 13일부터 2일 간에 걸쳐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후 15일 새벽 마침내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맥아더 장군 지휘로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있자 소위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崔鏞健)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으로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고, 23일에는 한국군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鞍山)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로 도하(渡河)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으로부터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방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협공으로 맹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결사적 항거로 시가전을 기도하였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하니,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 이 서울 탈환작전은 남한지역 전투의 최종적 결판이 되었으니, 서울을 완전 탈환한 유엔군은 다시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여 적의 배후를 찔렀으며, 중부와 동부전선에서도 무제한 북진공세를 취하니 30일에 벌써 국군 제30사단은 동해안을 전격적으로 북상하여 38선 접경 인악리(仁岳里)에 이르렀다. 이에 38선 이남의 공산군은 사실상 퇴로(退路) 마저 끊긴 채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다만 남한지역에 있는 공산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북한군 부대들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유일의 퇴로로 이용하여 후퇴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지리산 · 대덕산·회문산 일대에 포위된 채 유격전을 기도하게 되었다. 10월 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은 이종찬(李鍾贊) 대령 지휘하에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으며 뒤이어 수도사단이 인제(麟蹄)를 거쳐 북상하여 10월 10일 3사단과 함께 원산(元山)시내와 명사십리(明沙十里) 비행장을 완전 점령했다.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제7사단과 8사단이 화천(華川)·김화(金化)를 거쳐 북상, 18일에는 서부전선으로 북상한 미 제1군단과 만나 평양 남방 근교에 육박하고 19일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당시 평양을 지키고 있던 적군의 최인(崔仁) 중장은 신병으로 보충된 약 2만의 병력으로 방어태세를 취했으나 대패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으로 도주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10월 20일에 청천강 이남 숙천(肅川) 일대에 미 제11공정사단(空挺師團)의 약 4천명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 적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미 제24사단과 영국 여단의 서해안 진격과 보조를 같이하여 덕천(德川)·희천(熙川) 등지를 거쳐 서북 국경의 중앙지점인 초산(楚山)으로 진격, 26일 오후 5시 50분 6사단 제7연대 수색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11월 21일에는 중부로 진격한 국군 제7사단의 일부가 중부국경 혜산진(惠山鎭)에 도달했고, 동부전선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원산에서 다시 북진하여 10월 17일에 함흥, 22일에 북청(北靑), 28일에 성진(城津)을 점령했으며, 여기서 제3사단은 길주(吉州)를 거쳐 백두산(白頭山)을 향해 합수(合水)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淸津)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9월 30일경, 스티코프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황이 불리하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낼 의향임을 밝혔다.: “적군이 38선을 넘어 이북을 침공할 때에는 소련군의 출동이 절대 필요하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주의국가들이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출동하도록 원조해 주기 바란다.” 10월 1일, 스탈린은 베이징주재 소련대사 로신에게 전문을 보내 다음 내용을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에게 지급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중국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개 사단이라도 38선에 진출시켜야 할 것임.” 10 월 3일, 마오는 이렇게 회답했다.: “처음에 우리는 적군이 38선을 넘을 시점에 중국 의용군 수개사단을 투입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북한은 유격전쟁으로 이행하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귀하의 휴양지에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를 보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한 주중 소련대사 로신의 견해는 이러했다: “마오의 이 회답은 조선문제에 관한 중국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음. 태도 변경의 원인은 아직 불명하다.” 김일성은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북한이 어려움에 봉착하였음을 이유로 원조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미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에서의 전략기지를 만들 의향인 것 같다고 밝혔다. 11월 20일,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비행사 양성에 관한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임을 통보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11월 28일, 소련 각료회의는 소련 민간대학에 유학중인 북한 학생 2백명을 12월 5일까지 만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북한 공산군이 거의 섬멸 상태에 이르자 중공은 아무런 통고도 없이 한국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4개군 약 50만의 병력으로 고원지대를 타고 몰려 내려왔다. 11월 24일 맥아더 장군이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29일까지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퇴를 개시했다. 12월 4일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백만이 북한에 투입되었으며,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날 유엔군은 평양에서 완전 철수했고, 12월 23일 워커 중장이 일선 시찰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 후임으로 릿지웨이 중장이 미 제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는 동부전선의 아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방해하려고 몰려들다가 유엔군의 공습과 포격에 섬멸된 중공군 병력은 3개 사단에 달했다. 중공군의 유일한 전략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었다. 중공군이 일선을 담당하는 동안 북한 공산군도 5개 군단의 병력을 정비하여 다시 일선에 나타나 12월 말일까지 38선에 집결한 병력은 중공군 약 17만, 북한 공산군 약 6만 총 23만으로, 이날 밤 자정을 기해 일제히 38선을 넘어섰다. 1월 3일 영국군이 의정부에서 격전 끝에 철수했고, 1월 4일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유엔군도 이때는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식량부족과 동상(凍傷)에 시달려 제10사단의 일부만이 태백산맥을 타고 경북 보현산(普賢山)까지 내려가고 다른 부대들은 진격이 부진했다. 1월 9일 유엔군은 비로소 재반격을 개시했으니 당시의 전선을 그려 보면 서쪽으로부터 오산(烏山)-장호원(長湖院)-제천(堤川)-영월(寧越)-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선이 된다. 이날 미 제2사단은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을 포함한 병력으로 중공군에 대항하여 원주에서 열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으며, 1월 15일 미 육군 참모총장 코린즈 장군이 내한, ‘중공군을 과대평가할 게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자 당일로 유엔군은 오산을 탈환했고, 1월 28일 중부전선의 횡성(橫城)이 탈환되었다. 아군의 반격이 개시된 이후 2월 2일에 전사한 북한공산군 전선사령관 김책(金策)을 비롯해 10여 만의 전사자를 낸 적군은 할 수 없이 2월 7일부터 전면 퇴각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번의 반격 북진은 9·28 수복 때처럼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적은 전 전선에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일일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진격이 가능했다. 이리하여 아군은 3월 2일에 비로소 한강을 넘어섰고, 14일에 국군 제1사단이 다시 서울에 진주할 수 있었다.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선 월경을 개시했고 동부전선은 4월 5일에 소양강을 건너 38선 이북의 수개 고지를 점령했다. 만주를 폭격하여 중공군의 기동을 분쇄하고 한반도의 완전 통일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이 4월 11일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퇴임하고 릿지웨이 장군이 신임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적은 소위 춘계대공세를 취하여 4월 23일 김화 남방의 아군 방위선을 집중적으로 돌파하여 28일에 춘천, 30일에 서울 북방 우이동까지 육박하였으나 결국 격퇴되고, 5월 16일 제2차 공세로 인제 지구에 남침하였으나 동원병력 11만 중 5만여 명의 살상자를 내고 6일 만에 격퇴되었다.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6월 3일 연천(連川)지구로 진격하고, 중부전선에서는 6월 6일에 처음으로 평강(平康)에 대치하여 철(鐵)의 삼각지대(三角紙地帶)를 이루는 철원과 김화를 점령했고, 동부는 5월 30일에 고성(高城)까지 올라가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타이완에서도 중화민국 주도의 중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국에 적은 양이나마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기록에 의하면, 병력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병을 바탕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휴이대첩전로 공격해왔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명이 간부의 횡령에 의해서 아사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국-만주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휴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부(강원도 쪽)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 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 인민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에 소련군은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7만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밝혀졌고, 주력은 공군이었다.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소련 공군기는 중공기처럼 도색을 바꾸고, 조종사들의 교신에도 러시아어 아닌 중국어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격추된 비행기 잔해가 미군 손에 들어가 참전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전 구역도 상당히 제한되었다. 소련 공군기들은 미국 공군기와 여러 차례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미국도 소련의 참전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소련의 참전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내에서 확전의 여론이 대두될 것을 우려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비밀에 부쳤다 한다. 소련은 공군 외에도 군사 고문단 850 여명을 한국전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민간 복장을 하였으며, 이중 200 여명이 전사했다고 당시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Георгий Кузьмич Плотников, 1924~?) 예비역 대령이 증언하였다. 에티오피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의 주도 하에 황제의 친위대를 포함하여 6,037명이 대한민국에 파견되어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했다. 황제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1950년 8월부터 파병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각국에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기존 정부를 대상으로 직접적 간접적 행동을 취하고 있었고 에티오피아도 예외는 아니였다. 따라서 에티오피아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미국과 서유럽, 일본을 중심축으로 하는 대공산주의 진영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셀라시에 황제에게 출국 신고를 마친 칵뉴 부대는 마침내 다음 날 오전 9시 아디스아바바 역에서 홍해의 지부티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수많은 시민과 정부 고관들이 나와 부대원들을 환송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 궁정에서 출국 신고식을 한 뒤 한국으로 떠났다. 지부티 항구에는 미군 수송선 제너럴 매크리아 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4월 16일 밤 칵뉴 부대원이 모두 승선하자 미군의 수송선은 닻을 올렸다. 공산측은 결국 전세가 유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사 마리크(Marik)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정전을 제의해 오고 미국은 이에 호응함으로써 7월 8일 개성에서 정전회담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10월 25일 회담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겨 회담을 진행했다. 11월 28일에는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하게 되어 한때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치열한 선전전을 수반하면서 여전히 전투는 계속되었다.한편 국군은 후방에서 9·28수복 때 지리산 일대의 산악으로 집결한 패잔(敗殘) 공비(共匪)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국군 수도관과 제7사단 및 전투경찰대 5개 연대는 이해 12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13일까지 4차에 걸친 공격을 가해 사살 7,147명, 포로 6,883명, 귀순 172명의 전과를 올려 일단 전면적 소탕을 끝냈다. 이외에도 1952년 여름에는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에서 수차에 걸쳐 폭동이 일어난 5월 7일에는 포로대표와 담판을 하려던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准將)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등 소란이 일어났으나 6월 말경에는 완전히 질서를 회복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부터 한국전쟁은 세계 전사상 처음보는 소위 제한공격(制限攻擊)이라는 전법을 채택하게 되었으니, 당사국인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은 함께 휴전의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다만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고지 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稜線)·한 고지에서 퇴각과 탈환을 20여 회 이상 거듭하는 게 보통이었다. 1952년 8월부터 공산군은 후방의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여 8월 5일 국군 수도사단이 지키는 김화 등 북방의 수도고지에 공격하여 왔다. 전례없이 포격을 강화한 적은 1일 평균 2만 발을 발사하여 인해전술로 육박해 8월 10일까지 6일 만에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월 28일까지 계속하여 아군은 고지를 확보하니 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포격으로 4만 8천 발을 수도사단 지구에 퍼붓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백마고지(白馬高地)에 공격해 왔다.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철의 삼각지대 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상의 주요 고지다. 이 지대는 국군 제3사단·9사단 및 미 제2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0월 29일까지 1개월 사이에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뀐 끝에 아군은 한걸음 진격하여 철마(鐵馬)고지까지 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접전은 주로 백병전이었다. 한편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狙擊稜線)에서도 10월 초부터 맹렬한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동측 요충으로 적의 주요 진지인 오성산(伍聖山)에 대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대는 국군 제2사단이 당하고 있었는데 4일 간 전투에 17회나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으나 12월 21일 저격능선의 암석봉(岩石峰)에 공격해 오는 적을 네 번이나 격퇴시키자 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953년 1월로 들어가 적은 산발적으로 소극적인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이 해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4월 6일, 5개월 만에 휴전회담이 재개되고 11일에는 상이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니 벌써 휴전 경계선의 결정을 토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결정적으로 성립될 단계에 이르자 적군은 5월 초순부터 전전선(全戰線)에 걸쳐 공세를 취해 왔다. 그리하여 5월 12일 중동부 전선에 약 4만 5천의 병력을 투입하고 12시간 동안에 11만 8천 발의 포격을 가해 약 3km 후퇴했으며, 동부전선 단장(斷腸)능선, 서부전선 연천(蓮川)지방도 심한 공격을 받았다. 7월 16일부터 아군은 총공격을 개시, 휴전을 앞두고 전략상의 요지들을 확보하려던 적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20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쳐 참담했던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만이 조인되었고, 한반도에는 '제2의 38선'인 휴전선이 설정되어 민족분단의 비운을 또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1952년 2월 중국의 마오쩌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미국이 항공기와 야포를 이용, 8차례에 걸쳐 세균무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52년 1월 28일부터 미군 비행기가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으로 한반도 상공에 살포하고 있다면서 유엔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1952년 3월,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미군 비행기가 중국의 화북지역 및 동북부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미국을 비난했다. 당시 중국군은 북한군측에서 발병한 전염병과 관련해, 미군 조종사 전쟁포로들에게서 세균무기를 사용했다는 진술을 받아냈지만, 이들은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진술을 번복했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이와 관련한 조사를 하여, 1952년 니덤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 비행기가 투하한 생물무기 폭탄 사진 등 200여가지 증거자료가 첨부된 670 페이지 보고서로, 2015년 6월 최초로 원문이 공개되었다. 2010년 3월 17일 알자지라 방송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미국 합동참모본부 명령서를 공개했다. 1951년 9월 21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 만주지역에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중국 지원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했다. 핵무기 26발을 1차로 북한과 만주에 투하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휴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해제, 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이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 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 및 중화인민공화국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지향하였던 이승만은 북진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휴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유엔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 중 반공포로를 대규모로 석방했다.(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22시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계속해서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유엔 총회는 유엔 총회 결의 제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남으로 침략함)설을 정설로 보는 가운데,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이번 한국 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 UN과 의료진 그리고 중공군까지 참전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한국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당대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전쟁 중 미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한반도 전역이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완고해지면서, 현재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 크고작은 국지 도발 및 무력 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1968년에는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청샤오허() 중국인민대학 교수에 의해 김일성은 1965년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 공산당이 거부했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가 공개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수차례의 해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은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으나, 이명박 행정부 이후 상황이 급변하여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인한 지속적인 갈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의 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였다. 2013년 3월 5일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따른 UN의 대북 제재 추진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 키 리졸브에 반발해 북한은 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키 리졸브 훈련이 개시되면 휴전협정을 백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11일 훈련이 개시되자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 2009년, 2013년, 2016년에 잇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4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2015년에는 서부 전선 포격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2016년에는 4차 핵실험인 최초의 수소탄 핵 실험까지 강행하면서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었다. 1년 뒤인 2017년, 6차 핵실험을 진행하고, 미사일을 발사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본이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한국 전쟁을 인해 1000만명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으로는 전후 공산세력에 의한 남침을 막고 경제적으로는 성장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나,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반공주의가 국가의 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어, 이승만의 독재정권 유지에 활용하였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을 비롯해 전국 16곳에 참전기념비, 참전기념관, 공원을 조성하여 각국 군의 참전과 순국을 기리고 있다.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공산왕조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대한민국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고,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고 한다.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 진영을 지키고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군에 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생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위상을 제고시켰다. 그리고 국제법상, 대한민국을 침략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외면과 지탄을 받았고, 이는 한동안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소련과 관계가 밀접해지는 경향을 낳았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중국의 경제는 피폐해져서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UN군에는 미국 이외에 영국, 캐나다, 터키, 그리스 등이 소속되어 1만명 이상을 파병하였다. 터키군은 1만 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 중복인원을 제외하고 납북사실이 확인된 납북자 수는 96,013명. 으로 현재에도 생존하고 있는 납북자가 일부 있을 것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추정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부인하고 있다. 또한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유엔군 포로들을 송환했다고 주장하나 아직도 미송환 국군 포로가 존재하고 있으며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포로들도 전부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한 직후부터 1970년 5월까지 20년 동안 물자와 외화부족 문제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으며, 특히 1950대말까지는 유일한 외자도입 창구로 한국 경제부흥에 미국의 한국 원조 정책이 가장 큰 기여를 해주었다. 미국의 한국 무상원조는 약 44억 달러, 유상원조는 약 4억 달러에 달하여 한국 경제의 투자재원 마련, 국제수지 적자보전 및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원조는 그 당시 가난했던 한국 정부 예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래 목록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목록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중국, 북한과 이름이 다를 수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의 모든 전투 활동이 다 망라되지는 않은 상태이다(2006년 4월 3일 기준). 특수 위안대 한국 전쟁 때 특수 위안대가 설치되었다. 채명신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 기타 관우의 67대 후손이자 관평의 66대 후손인 관충금(關忠金)은 이 전쟁에 중공군의 자격으로 참전하여 국군과 유엔군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직책은 일반 병졸이였다. 연결 리스트 연결 리스트, 링크드 리스트(linked list)는 각 노드가 데이터와 포인터를 가지고 한 줄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자료 구조이다. 이름에서 말하듯이 데이터를 담고 있는 노드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노드의 포인터가 다음이나 이전의 노드와의 연결을 담당하게 된다. 연결 리스트의 종류로는 단일 연결 리스트, 이중 연결 리스트 등이 있다. 연결 리스트는 늘어선 노드의 중간지점에서도 자료의 추가와 삭제가 O(1)의 시간에 가능하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배열이나 트리 구조와는 달리 특정 위치의 데이터를 검색해 내는데에는 O(n)의 시간이 걸리는 단점도 갖고 있다. 연결 리스트는 1955~1956년에 랜드 연구소에서 앨런 뉴웰, 클리프 셔, 허버트 A. 사이먼이 그들의 정보 처리 언어(IPL)를 위한 1차 자료 구조로서 개발하였다. 단일 연결 리스트는 각 노드에 자료 공간과 한 개의 포인터 공간이 있고, 각 노드의 포인터는 다음 노드를 가리킨다. 이중 연결 리스트의 구조는 단일 연결 리스트와 비슷하지만, 포인터 공간이 두 개가 있고 각각의 포인터는 앞의 노드와 뒤의 노드를 가리킨다. 원형 연결 리스트는 일반적인 연결 리스트에 마지막 노드와 처음 노드를 연결시켜 원형으로 만든 구조이다. 창세기 창세기(創世記, , , )는 천지 창조와 아담과 하와의 에덴 동산 추방, 노아의 방주와 홍수, 바벨 탑 그리고 유대민족 탄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첫 번째 권이며, 구약으로는 모세오경 첫 번째 권에 해당한다. 타나크에서는 이 책을 율법서 토라의 첫 번째 책으로 놓고 있다. 원본은 소실되어 없으며, 현재 여러 필사본들이 남아있어, 이를 기반으로 많은 언어의 번역본이 만들어졌다. 이 책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시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이름인 '베레쉬트'()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에 해당하며, 이 단어가 그대로 이 책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 단어는 ‘처음에, 시작으로, 우선’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을 포함하는 모세오경의 5권은 전부 각각의 처음 단어를 따서 히브리어 이름이 정해졌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관념과 성립에 관한 역사적 가정과 근본 이야기를 제시하며, 이스라엘 역사, 법, 관습에 관한 소개 글 역할을 한다. 창세기는 모세오경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지만, 본문에 창세기 저자에 관한 언급이 없다. 성서학 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 등 불명의 저자들이 그전부터 내려오던 이스라엘 민족과 종교에 관한 서로 다른 문헌과 견해를 그들의 신학에 따라 묶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작업에는 적어도 4가지 다른 전승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와 같은 형태의 창세기가 된 게 대략 기원전 450-400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창세기는 크게 우주와 인류의 창조와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이라는 두 가지 내용이 주요 내용이다. 신(야훼)이 세상과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이후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며, 그들의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그 다음으로 바벨탑의 건축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들과, 바빌로니아 홍수신화와 비슷한 이야기인 홍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의 중반은 신이 갈대아 지방의 우르(Ur)라는 곳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와 그의 아내 사라를 우르 지방에서 현재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인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신에 대한 순종과, 그에 대해 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해 세상이 축복을 받을 것임을 약속하는 내용은 중반의 중요한 이야기이다. 이어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그의 손자인 에서와 야곱(또 이스라엘)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서술되며, 마지막은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이, 파라오의 호의를 입어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이 물질계를 존재하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본문을 대하지 않는다면, 본문의 문맥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현저하게 물질적인 용어를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맨 처음 시기에 하느님(야훼)은 우주를 존재하게 하였다. 질서 있는 체계를 세우시고 그 체계 안에서 만물에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심으로써 말이다. 이 제안을 따른다면, 본문은 물질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 보다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주를 세우셨다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기능이야말로 존재 개념을 규정한다. 고대인들은 물질 자체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날(욤)을 어떤 기간으로 보는지는 여러 해석이 있다. 욤()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히브리어 단어로 "날"을 의미한다. 아랍어에는 이와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인 '욤'(, yawm, yōm)이 존재한다.  욤은 주로 "날"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지만 욤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문자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 물질보다는 기능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첫째 날의 결론에서 쉽게 드러난다. “하느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하느님이 붙이신 그 이름들은 첫째 날에 창조된 것들이 사물이 아니며, 심지어 현상도 아니고 기간임을 의미한다. “낮”과 “밤”이라는 이름은 시간의 길이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빛[의 기간]과 어둠[의 기간]을 나누셨다.”(4절) “하느님은 빛[의 기간]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의 기간]을 ‘밤’이라 칭하셨다.”(5절) 창조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어둠 밖에 없었고(2절), 따라서 어둠의 기간도 없었다. 그러나 3절에 의하면 빛이라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어둠을 중단시킬 빛의 기간을 창조하셨다. 낮과 밤의 교대에 주목한다면, 시간이 창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첫째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세계와 우리의 존재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능 중 첫 번째인 시간을 창조하셨다. 우주 지리학의 보편적 영역을 다루지 않고, 도리어 한 가지 측면, 즉 위에 있는 우주적 물들을 아래에 있는 우주적 물들로부터 나누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라키아”(넓은 하늘, 궁창,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의 배치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 날은 나누는 행위보다는 모으는 행위로 시작하지만, 마른 땅이 나타나게 하려고 물들을 모으는 일이 먼저 이루어진다. 셋째 날도 공간과 관련되어 있지만 우주적 공간보다는 지상 공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창조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기능의 확립에 관련된 활동을 뜻한다. 셋째 날에 하느님은 비옥함과 풍요와 초목과 농업 등의 기초를 창조하셨다. 요컨대 그분은 땅을 식량의 근원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 기능 존재론의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창조는 신이 물질계에 속한 것들을 말씀으로 존재하게 한다는 개념을 수반하기보다는, 명령을 통해 다양한 기능을 확립하고 그것들을 배정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을 말씀으로 법령을 공포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우주의 다양한 기능을 확립하고(그것들의 운명을 선포함으로써) 기능 주체들을 적절한 영역에 위치시킨다. 우주에 질서를 가져다준 창조 행동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었다. “아담(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 2:18). 이 문맥에서 ‘좋지 않다’는 것은 장인의 기술이나 도덕적 순결함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기능 수행과 관련되어 있다. 4-6일의 창조 이야기가 기능 지향성을 유지하기는 해도, 이제는 기능 주체들을 각각 적절한 책임 영역에 세우고, 각각의 개별 영역 안에서 각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다. 모든 천체가 “궁창”(라키아) 안에 자리한다. 만약 창세기 1장의 창조가 물질적인 강조점보다는 기능적인 강조점에 의미를 둔다면, 넷째 날에 가서야 태양이 창조되는데 어떻게 첫째 날에 빛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오랜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다. (시간과 같은) 기능들에 먼저 자리가 주어졌다. 그런 기능들은 시간 안에 거주하면서 인류를 위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천체와 같은) 단순한 기능 주체들이 위임 명령을 받기 전에 먼저 소개된다. 빛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분리하고 달력에 쓰이는 기간이나 특정 시기를 타나내며, 빛을 비추고 다스리는 것 등이 있다. 이 모든 개념은 인간 중심적 시각으로부터 의미가 주어진 것들이며, 첫째 날에 확립된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살아 있는 피조물이 둘째 날에 확립된 영역에 배치된다. 새(날짐승)들이 “궁창”(라키아)의 표면을 가로질러 날며, 물고기는 아래의 물에서 헤엄친다. 위의 물에는 거주하는 대상이 전혀 없다. 창세기 1:22에서 주어지는 복은 운명 선포의 일부이며, 이 피조물들의 기능을 추가로 묘사한다. 그 기능이란, 그들이 땅 위에서 번성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육상동물은 셋째 날에 생겨난 마른 땅에 거하는 피조물로 묘사된다. 인간: 창세기 1장은 역할 지향적이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와 그들에게 수행하도록 배정된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인간은 창세기 1장 이야기에서 중심을 차지하며(모든 기능이 인간을 향하고 있다), 하느님의 형상을 가진 통치자로 기능함으로써 우주에서도 중심을 차지한다. 여자는 남자의 동반자이고 둘 다 하느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으로 통치 능력을 행사한다. 이 통치권의 범위 안에서 그들에게 운명을 선포하도록 허용하신다. 이를테면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 그렇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 통치자의 위치를 부여받으며, 우주의 모든 기능은 인간을 위해 체계화되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신전과 우주가 긴밀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전의 건축이 우주적 용어로 묘사되었고 따라서 신전이 우주적 기능을 한다고 여겼으며, 신전이 우주의 축소판 모델로 이해되었고 우주 관련 상징 체계로 가득 차 있었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할 본문은 이사야 66:1인데, 이 본문은 우주 크기의 성전에 대해, 성전과 안식의 관계에 대해, 창조와 성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 야훼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이사야 66:1-2) 성전봉헌식의 정점은 하느님이 준비된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신 후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시면서, 자신의 성전-보좌에서 우주 통치를 시작하시는 때다. 이전의 행위는 단지 이 장엄한 대단원을 준비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한 공간의 창설과 그것에 상응하는 의례적인 기능을 핵심 요소로 하는 성전 봉헌식과 마찬가지로, 창조 이야기의 핵심에는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제자리에 놓인 주요 목적을 자세히 이야기할 뿐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적절한 기능 주체들을 공식적으로 임명함으로써 우주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음을 밝히는 내러티브가 있다. 이 내러티브에서 우주 전체는 인간을 위해 기능하도록 고안된 성전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 우주적 성전 안에서 안식을 취하실 때, 이는 그분의 임재에 힘입어 “(기능적) 현존으로 여겨지게 된다”(이는 고대인들의 사유에서 말하는 진정한 현존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성취하고 즐기시는 안식은 그가 질서를 세우신(창조하신) 우주를 통치하기 위해 개입할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우주 통치를 용이하게 해준다. 사실상 우리는 창세기 1장을 고대 근동의 신전 건축이라는 맥락에서 읽음으로써, 히브리어 성서나 기독교 성서 전체의 정경적인 흐름이 한층 분명하게 보인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컨대 레벤슨은 히브리어 성서에 있는 다음과 같은 수미쌍관에 주목한다. “히브리어 성서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창세기 1:1) 하늘의 하느님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역대기 하 36:23)라는 명령으로 끝난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24권의 책은 창조(성전)에서 출발하여 성전(창조)을 향해 나아간다.“ 창세기 해석을 위한 이러한 견해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창세기 이야기가 물질 기원보다는 기능 기원에 속하며 신전 이데올로기가 창세기 우주론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런 결론은 지구의 나이, 창세기와 과학의 관계, 진화와 지적 설계와 관련된 성서 본문의 해석, 공적 과학 교육의 형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는 우리 시대의 공적 논의와 논쟁에 대해 중요한 파급 효과를 낳는다. 천주교에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일이 문자 그대로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보다, 비유적인 표현, 구원이 필요한 인류의 기원 및 선택된 백성의 구원에 관한 진리 묘사로 이해한다. 즉 역사서나 과학책처럼 대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 유일신관을 확립하고, 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과 그것이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묵시록에서도 언급된다. 창세기의 6일 창조가 실제 6일동안 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는 당시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반영된 문학적, 신화적인 표현이다. 출애굽기 출애굽기(出埃及記, , , ), 또는 탈출기(脫出記)는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두 번째 책이다. 기독교의 구약으로도 모세오경 두 번째 책에 해당한다. '출애굽기'는 잘못된 음차이며 '出埃及記'는 '출애급기'라고 불러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가나안 지방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나, 요셉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힉소스 지배(B.C.1730 ~ B.C.1570)의 이집트(영어: Egypt; 한자: 애급 (埃及))에 들어가 나일강의 델타 지역 동쪽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요셉의 후손들은 그 뒤 새로운 파라오가 즉위하자 이집트의 노예로서 토목사업에 혹사당하게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해방의 지도자로 나타난 사람이 모세이다. 형인 아론의 협력을 얻어 이집트군의 추격을 벗어났는데, 성서에는 이 과정에서 신이 보여준 여러 가지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수십 년간 사막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들은 모세의 지도를 받게 된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는 ‘십계’로 상징되는 종교적·도덕적 지침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시하고 야훼와의 특수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모세는 가나안의 비옥한 땅을 바라보면서 죽었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민족을 정복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다. 또한 이집트에 들어가지 않은 동포들과 합쳐서 야훼를 섬기는 신앙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단결을 이룩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학계는 직접적인 증거의 부족으로 이스라엘의 출현에 출애굽을 역사적 사실로 고려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간주한다. 하지만 실제로 람세스 2세 시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훨씬 전이나 후에 일어났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Patterns of Evidence Not fiction 레위기 레위기(레위記, , , )는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세 번째 부분이다. 레위기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온 라틴어 Leviticus에서 따왔으며, 율법 가운데 제사와 종교를 관장하는 레위인의 이름이 그 기원이다.신자들이 지켜야 할 종교, 생활, 관습, 제사의식 등의 여러가지 율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레위기 19:2(공동번역성서) 구약 성경 중의 한 부분. 모세오경의 3번째 책이다. '레위(Levi)'는 이스라엘의 12지파중에 레위 지파를 의미하는데, 레위 지파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제와 보조자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지침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율법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반부는 하느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를 기록했고, 후반부에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것에 대해서 기록했다. 탈출기의 후반부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겐 지루함을 주는 대목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성서로 꼽힌다. 특히 레위기의 정결함과 부정함의 구별은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더 중요한 사상으로 간주되어 의로운 사람과 죄인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예수는 이를 타파하려 했고 유대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레위기에 나오는 레위지파는 유대계 이름 리바이로 사용된다. 다만, 매튜나 존처럼 많이 쓰이는 이름은 아니다. 1. 번제 : Burnt offering 1) 어의 - 이스라엘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상번제나 특별한 절기 때 가장 많이 사용하던 제사양식이다. 번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라’ 는 연기가 제물로부터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판관기 13:20 참고) - 번제는 일반적으로 소제나 전제와 함께 드려졌다.(출애굽기 29:38-46; 민수기 15:1-16) 번제는 버려질 더러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희생 제물 전체를 모두 태워 드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완전함 또는 온전함’을 의미한다. 죄와 관련된 경우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진노와 관계되며,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과 관련된다. - 또 번제는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려졌다.(민수기 28장)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지속적인 경각심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하느님께 대하여 변함없이 헌신해야 함을 나타낸다. 2) 제물의 종류 -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레위기 1:3, 5, 10, 14) - 비둘기를 드리는 경우는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이다. 비둘기의 번제는 머리를 비틀어 끊고 불 위에 불태우고 피는 단 곁에 흘린다. 먹통과 더러운 것은 단 동편의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적정히 찢어 불 위에 태웠다. 3) 번제의 방법 - 번제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은 출애굽기 29:38-46과 레위기 1장, 6:8-13 그리고 민수기 15:1-16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배자가 성막 문 앞으로 희생 동물을 가져와 자신의 손을 그 머리 위에 얹는다.(레위기 1:4) 이는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예배자의 죄가 동물에게 전이된 것을 상징한다. - 그 후 예배자는 희생 동물을 번제단 북쪽으로 가져가 잡았으며(레위기 1:11),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잡을 때에는 번제단 위에서 목을 비틀어 잡았다. (레위기 1:15) 번제에 있어서는 오직 새들만이 제사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나머지는 예배자가 직접 죽였다.(레위기 1:5, 11, 15) - 피가 제단 위에 뿌려지는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피는 제사장에 의해 번제단 사면에 뿌려졌다. (레위기 1:5, 15) 그리고 예배자가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 지체를 자르고 물로 그것들을 씻은 후, 동물은 모두 제사장에게 옮겨졌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것을 취해 제단 위에 놓고 완전하게 태웠다. 동물의 가죽은 봉사의 대가로 제사장이 가져갔다.(레위기 7:8) 4) 번제를 드리는 경우 - 집단적 번제 - 매일 아침과 저녁(상번제) - 개인의 번제 - 절기, 평소(임직식, 산후결려,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된 후, 나지르인 서약이 끝난 후, 본인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드리고 싶을 때) 5) 번제의 목적 - 레위기 1:4은 번제의 목적이 ‘속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속죄와 직접 관련 있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그러나 번제는 속죄제나 속건제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번제가 ‘야훼를 기쁘게 해 드리는 향기’ (레위기 1:9, 13, 17)가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번제가 주로 인간의 범죄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하느님의 태도를 돌이키는 역할과 관계된 것 같다.(창세기 8:21) 즉,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민수기 15:24; 사무엘 하 24:25; 역대기 상 21:26; 욥기 1:5; 42:8; 역대기 하 29:7)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의 결과인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다. - 번제의 목적이 속죄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번제가 죄와 관계되지 않는 구체적인 예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의 번제는 아브라함의 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전적 헌신, 즉 전적 포기와 관련되어 있다. - 또 언약제사에서 드려진 번제의 경우(출애굽기 24:5; 신명기 27:6; 비교. 출애굽기 32:6)는 이스라엘이 지은 또는 지을 죄와 무관하게, 이스라엘이 언약 당사자이신 야훼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나타낸다. 그외의 경우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출애굽기 18:11-12; 민수기 6:14; 15:3; 사무엘 상 15:22; 열왕기 상 18:38-39; 시편 40:6; 66:13-15) 번제가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는 헌신과 감사와 봉사와 관련되었다 6) 번제의 영적 의미 - 이 제사는 모든 제물을 하느님께 완전히 불살라 드리는 것으로서, 온전한 헌신의 의미로 드려졌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이고 하느님과 동등된 분이셨으나 (필립비서 2:6)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히 드려졌다. 2. 소제 : Grain offering 1) 어의 -소제를 뜻하는 히브리어로는 ‘민하’(minchah)로 '분배하다', '수여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마나'(mana)에서 유래한 것으로 '헌물', '조공', '희생 제물'을 뜻하는데 특별히 '피 없는 곡물 제사'에 사용되어 말 그대로 '소제', 또는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뜻한다.(레 2:1-16) 2) 제물의 종류 -소제는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동물을 드리지 않아 피 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대개 소제는 단독으로 드리지 않고 번제(출애굽기 29:38-42; 레위기 9:17)나 화목제(레위기 7:11-13)와 함께 드렸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여 의심할 때는 기름을 섞지 않고 유향을 두지 않은 보리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다른 제사 없이 단독으로 드렸다(민수기 5:11-15). 그리고 산비둘기조차 드릴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기름과 유향 없이 속죄제물로 드렸다(레 5:11-13). 소제에는 누룩이나 꿀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레위기 2:11). 누룩은 부패를 상징하고 꿀은 유혹과 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잠언 5:3). 꿀은 나지르인들에게도 금지된 것이었다(민수기 6:3). 그렇지만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사용해야 했다(레위기 2:13). 소금은 정결과 불변(민수기 18:19; 역대기 하 13:5; 마태오 복음서 5:13; 마르코 복음서 9:49; 골로사이서 4:6)을 상징하는 것으로 언약의 소금은 불변의 언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3) 소제의 방법 고운 가루 : 곱게 빻은 밀(레위기 2:1; 역대기 상 21:23)이나 보리(에제키엘 13:19)를 소제물로 드린다. 고운 가루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유향을 취하여 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취하였다(레위기 2:1-3). 제사장들이 위임식 때 드리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절반씩 아침 저녁으로 드리되 반드시 불살라야 했다(레위기 6:20-23). 고운 가루는 귀빈(창세기 18:6)이나 왕가에서 사용하는 음식물(열왕기 상 4:22)로 고급스런 식물이었다(에제키엘 16:13, 19). 최고급의 식물을 소제물로 하느님께 바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 기름(출애굽기 27:20; 레위기 24:2)로 음식을 요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향은 강한 향기가 났으며(사무엘 상 60:6; 예레미야 6:20) 향료로 사용되었다(출애굽기 30:34). 기독교에서는 고운 가루는 껍질이 깨어져야 만들어지는 것으로, 모든 죄를 없애려고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온전하고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히브리서 4:15)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의 헌신을 상징한다(고린토 2서 4:10-11). 화덕에 구운 무교병 : 화덕에 구운 무교병을 소제물로 드렸는데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만들어야 했다(레위기 2:4). 번철에 부친 소제의 예물 :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작은 조각으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기름을 발라서 드렸다(레위기 2:5-6). 솥에 삶은 소제물 :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것을 솥에 삶아서 드렸다(레위기 2:7). 첫 이삭의 소제물 :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제사장은 곡식과 기름의 일부, 유향의 전부를 기념물로 단에서 불태워 드렸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레위기 2:14-16). 4) 소제물을 드리는 경우 속건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레위기 7:9-10; 7:12-14; 8:26)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임할 때(레위기 9:4, 17; 민수기 8:8) 성막과 성전 봉헌 시(민수기 7장; 열왕기 상 8:64)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 때(레위기 14:10, 20-21, 31) 나지르인 서약이 끝났을 때(민수기 6:15-19) 5) 소제의 목적 소제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물질을 공급하고 보호하여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경배 돌리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6) 소제의 영적 의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한 복음서 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수기 18:19, 역대기 하 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주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주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는 자는 죄악과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과 달콤한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꿀'을 모든 소제물에서 제하라는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으로 주어졌다. 3. 속죄제 1) 속죄제의 언어적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속죄제가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히브리어 “하타트”를 "속죄제"(sin offering)로 번역하기보다는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속죄제”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히브리어 “하타트”가 속죄제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구약에서 대략 135회 정도이다. 속죄제(하타트)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 하느님의 백성다운 목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범한 죄에 대해서 속죄함을 받고 사함을 얻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속죄함을 받게 하고, 용서함을 얻게 한다.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상황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첫째는 부지중에 하느님의 금령을 어긴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4:3-35). 특히 2절에서 ‘사람이 실수로 야훼의 명령을 어겨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하나라도 하였을 경우에는’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명시적인 계명을 부지 중에 어겼을 때 드리는 예배였던 것이다. 둘째는 법정의 증언을 기피하거나 부정한 물체 등에 접촉하였거나 맹세한 것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등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5:1-13). 그 어느 것이든 고의성이 없는 잘못과 허물에 해당한다. 부주의하여 저지르거나, 무심코 저지르거나, 태만하여 저지른 범법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만약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는 것이다. 성소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는 하느님 자신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곳이다. 바로 그 성소에 속죄제의 피가 뿌려졌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죄의 삯은 부정(不淨)이다. 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을 남긴다.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담스러운 실체이다. 이 같은 관계의 파괴는 단순히 죄인에게 주는 죄책(罪責)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파괴는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기를 초래한다. 하느님의 성소가 죄로 인한 부정에 오염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2) 속죄제의 구분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4장과 6장에만 나타난다(4:3,5,16; 6:22). 이 표현은 오직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3절의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에게 주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는 물론 사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어야 했다. 대제사장이 지은 죄가 일반 백성이 지은 죄보다 심각했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제물로 드렸다(4:4,14)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속죄제의 의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 회중 전체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수 없었기에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다(15절). 족장은 존경받는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족장 또는 지도자의 죄는 일반 백성보다 심각하게 간주되었다. 족장의 죄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족장은 일반 백성의 제물보다 더 비싼 숫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 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경우 콩팥과 기름을 제외한 모든 고기들을 진 바깥에서 소각한 반면, 족장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이 속죄제를 드렸을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들을 먹을 수 있었다. 즉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으며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던 반면(4:12,21), 회막 뜰에서 의식을 행한 제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다(6:24-30) 평민은 대제사장이나 족장과 같이 비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평민은 암염소(4:28) 또는 암컷의 어린양(4:32)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다. 평민의 속죄제 의식은 족장의 경우와 동일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며(5:7-10), 극빈자는 밀가루로도 드릴 수 있었다(5:11-13). 선택적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반드시 생축(소, 양, 염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했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생축이 아닌 비둘기 또는 밀가루(소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가난한 자가 비둘기 두 마리로 각각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을 보면(5:7),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도 속죄제와 함께 번제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5:1-6) 레위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를 소개한다. 출산으로 부정해진 여인이 정결해지기 위하여(12:6), 심각한 피부병으로 부정해진 사람이 나았을 경우 정결해지기 위하여(14:19), 그리고 성기 고름병에서 나은 자가 정결해지기 위하여(15:15,30)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그 외 번번하지는 않지만 제사장 위임식(8:14), 제단의 봉헌식(민수기 7:16), 그리고 레위인 위임식(민수기 8:8)에서 속죄제를 드렸으며, 나지르인 서약이 성취되었을 때에도 속제죄를 드려야 했다(민수기 6:14) 레위기 4장은 단순히 야훼의 금령을 부주의로 그릇 행했을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언급하지만(4:2,13,22,27), 5:1-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소개한다. ① 법정에서 증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경우(5:1; 참조, 잠언 29:24) ② 부지중에 부정한 동물의 사체에 접촉했을 경우(2; 참조. 11:24-28) ③ 모르고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후에 그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3, 참조.15:13-15, 25-30) ④ 무심결에 맹세를 했다가 후에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경우 이런 네 가지 경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5:6절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게 “그 벌로 야훼께 속죄제물을 드리는데 양떼 가운데서 면양이든지 염소든지 암컷 한 마리를 바쳐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여기 사용된 속죄제라는 말은 하타트가 아니라 야샴이라는 말로 벌금의 성격이었다. 4) 속죄제의 목적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동물을 죽이며, 그 피를 제단에 뿌린 다음 그 고기 전체, 또는 콩팥과 기름을 단에서 태운다. 따라서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속죄의 기능이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번제는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제물 전체를 불사름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즐기는 제사다. 속죄제의 독특한 점은 피 뿌리는 의식에서 발견된다. 구약에서 속죄제는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속죄제는 특히 출산한 여인(12:6), 악질 전염성 피부병(14:19), 또는 성기 고름병(15:15, 30)의 경우에서 보듯이 몸의 정결과 관련하여 드렸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너희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을 타지 않도록 일러주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을 더럽히다가 그 더럽힌 죄로 죽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15:31).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번제 단에 뿌렸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하기 위함이었다(16: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느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이 오염된 것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라는 것을 보여준다. 번제가 죄인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가져다주는 반면, 속죄제는 죄로 생긴 오염과 더럽힘을 처리하는 제사라는 것이다. 속죄제는 성소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실수 있게 한다.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하느님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에 피가 칠해졌다. 향단과 번제단, 그리고 휘장 뿐 아니라 속죄소에까지 피가 뿌려졌으며(16), 더 나아가서는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그들의 옷에도 피가 뿌려졌다(출29:19-21; 레8:22-24, 30). 히브리서 9:22절은 이것을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고 설명한다. 히브리서 9-10장은 이런 속죄제사와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제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보고 있다. 죄로 인한 부정과 타락에서 하느님의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피라는 것이다(베드로 1서 1:2; 요한 1서 1:7). 이런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히브리서이다(히브리서 9:12-14).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을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4. 속건제 : Guilt offerig 속건제는 범과(trespass), 혹은 배상(repayment)에 대한 제사이다. 이웃에게 해를 끼쳤을 때 범과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속죄제와의 차이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가벼운 허물이나 하느님이나 사람의 재산이나 권리를 침해했을 때 드리는 제사라고 하겠다. 1) 제물의 구성 만약 하느님께 잘못한 것이라면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한다. 손해 배상은 제사장이 평가한 죄 값에 1/5를 더하여 계산했다. 만약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라면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한다. 손해 배상은 손해를 입힌 값에 1/5를 더하여 계산했다. 2) 성물에 대한 범과, 부지중 금령 위반(레위기 :14~19) 야훼의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하면 속건제로 지정한 가치에 따라 흠 없는 수양을 드려야 한다. 속건제의 예물에 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제사장은 수양을 하느님께 드리므로 그의 허물을 사한다. 금령 중에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 된다. 지정한 가치에 해당되는 무흠한 수양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하면 속건제를 드리는데 그 허물의 상태에 따라 속건제물을 다르게 드린다. 허물의 경우에 따라 가격을 달리 정해 그 허물의 대가에 적합한 수양을 사서 제사를 드리도록 한다. 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올 것이다.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하므로 그가 허물을 사함 받는다. 하느님께 잘못을 범했으니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여기서 금한 명령은 아마 사람들의 제산에 관한 것이나 피해에 대한 법이 아닌가 여겨진다. 3) 관리 소홀, 부인(6:1~7) 또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경우는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이다. 제산에 관계된 것이므로 본물건과 배상금을 본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 당사자가 없는 경우에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야 했고, 친족이 없는 경우에는 제사장에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속건제물로 지정한 가치에 따라 무흠한 수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와 드려야 한다. 흠 있는 것을 드릴 수 없다. 제사장은 야훼 앞에 그를 위하여 속죄를 한즉 그의 허물이 사함을 받게 된다. 4) 속건제의 규례(7:1~10) -속건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다. 당사자는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물을 잡는다. -제사장은 수양의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고 모든 기름을 불태운다. -제물은 거룩한 것이므로 제사장의 남자마다 거룩한 곳, 성막에 뜰에서 먹는다. 5) 하느님의 몫 기름 부분은 번제단 위에서 태웠다. 6) 제사장들의 몫 남은 것은 성소에서 먹었다. 5. 화목제 : Peace offering 1) 화목제의 의미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위해 드린 동물의 의식 국가적인 경축일이나 제사장의 성별식, 나지르인 서약식 등의 행사에서도 이루어 졌다. 2) 화목제의 의미 평강(peace)과 친교(fellowship)를 위한 제사이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자원하며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다. 화목제는 제사자가 고기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이다 자신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웃들까지도 함께 감사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하 제사인 것이다.. 향기로운 냄새가 있고, 자발적 행위로 이뤄지는 제사이다. 3) 제사방법 -흠이 없는 것 - 바칠제물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손을 올려야함 - 아론의 혈통은 이어받은 제사장이 피를 제단에 뿌림 - 제물의 내장과 기름기를 살라바쳐 그 향기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제사 4)성구 레위기 3장 1 - 17절 , 7장 11 - 21절, 28 - 34절 5) 제물의 구성 1) 소 중에 흠 없는 암놈이나 수 놈 (3장 1-5절) 2) 양 중에 흠 없는 암놈이나 수 놈 (3장 6-11절) 3) 염소 (3장 12-17절) (서약의 화목제는 흠 있는 경우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셨다. 레위기 22장 23절) 6) 하느님의 몫 기름 부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운다 (3장 3-5절) 7) 제사장들의 몫 가슴(요제)과 뒷다리(거제) 가 몫이 된다.(7장 30-34절) (1) 화목제를 드리는 자가 제물 중에서 기름과 가슴을 가지고 온다. 제사장은 그 가슴을 흔들어 요제로 삼고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사른다. 요제로 삼은 앞 가슴이 그 몫이 된다. (2)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준다. 제사장은 그것을 거제로 드리고 제사를 집례한 자가 소득으로 삼는다. (3) 흔든 가슴은 제사장들이, 우편 뒷다리는 집례한 자가 소득으로 삼는다. 민수기 민수기 (民數記, , , , "광야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의 네 번째 책이자, 다섯 권의 토라중 네번째 책이다. 이 책은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보는 책은 여호와 문서를 개정한 제사장 문서의 형태라고 여겨진다. 이 개정시기는 기원전 5세기경인 페르시아 정복기로 여겨진다.이 책의 제목은 이스라엘 민족의 두 번의 인구조사에서 따왔다. 민수기는 시나이산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규율과 언약을 받게 되고 하나님은 성막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임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며, 계수되고 행군준비를 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정을 시작하나, 그 길의 고난과 모세, 아론을 향하여 불평불만을 일삼게 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 중 거의 15,000을 멸한다. 그들은 가나안의 경계에 도착하여 땅에 정탐군을 보내게 되는데, 이 정탐군들의 공포에 찬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현 세대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 벌을 내린다. 이 책은 모아브 평원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세대가 요르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민수기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벌 이야기의 절정이다. 흔히들 이 책이 창세기에서 소개되고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전개 및 발전된 이야기의 결론을 짓는다고 평가하는데,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와 특별한 관계 속에 위대한 민족이 되어 가나안 땅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민수기는 또한 거룩함, 신실함,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비록 하나님과 그 제사장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믿음을 잃어 그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민수기를 장소(시나이산, 카데스바르네아, 모아브 평원)에 따라 세 부분으로, 그리고 각 장소 사이의 이동기간으로 나눈다. 다른 학자들은 민수기를 광야에서 죽게 된 세대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세대에 대한 이야기로 구분하는데, 신학적으로 첫 번째 세대의 불순종과 두 번째 세대의 순종을 대조하여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들의 수를 세라고 명령하고, 각 지파마다 지도자를 한명씩 임명한다. 이렇게 세어진 이스라엘 민족은 총 603,550명인데, 레위 지파는 군역에 종사하지 않으므로 계수되지 않았다. 모세는 레위인들을 구분하여 장막을 관리하도록 했다. 레위인들은 게르손, 크핫(개역개정: 고핫), 므라리의 자손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자손들마다 감독을 두었다. 크핫 자손의 감독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잘(개역개정: 엘르아살)이,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의 감독은 이다말이 맡게 되었다. 이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개시할 때마다 행군 준비를 하였다. 다양한 의식과 규칙이 제정되었다. 시나이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드디어 시나이에서 나오게 되었다. 민족들은 하나님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고, 불로 심판받는다. 모세는 민족의 완고함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하는데, 모세를 도울 칠십명의 장로들을 뽑게 된다. 미리암과 아론은 하세롯에서 모세를 비난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미리암은 나병을 얻게 되고, 이레동안 진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가나안의 경계인 바란 광야에 이르기 직전의 일이었다.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모세에게 돌아온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땅이 아주 풍요로워 젖과 꿀이 흐른다고 보고하고 나머지 열 정탐꾼들은 이 땅에 거인들이 거주한다고 보고하게 되어 이스라엘 민족은 땅에 들어가는것을 거부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으므로 광야에서 40년을 더 헤메게 될 것이라고 심판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도록 하고, 모세는 그대로 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고라와 그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고, 염병을 받아 14,700명이 죽게 된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가족들이 앞으로 성소에 대한 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포한다. 레위인들은 또다시 장막의 일에 임명되고,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받은 십일조의 일부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명령받는다. 미리암은 카데스바르네아에서 사망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의 동쪽 경계에 있는 모아브를 향해 출발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물이 없다고 모세를 비난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명령하지만 모세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그 역시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게된다. 에돔의 왕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들은 그 땅을 돌아서 가게된다. 아론은 호르산에서 사망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대들은 대가로 불뱀에게 물리게 된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명령받아 구리 뱀을 만들어 이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아브 평야에 도착하게 되고 새로이 인구조사를 하는데, 20세 이상의 남성이 601,730명이고, 생후 한 달 이상의 레위인은 모두 23,000명이었다. 약속의 땅이 분배되는데, 남자형제가 없는 슬롭핫의 딸들 역시 땅을 할당받게된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각 절기마다 바쳐야 하는 제물과 명절에 대한 규정을 열거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디안의 사람들을 학살할 것을 명령하는데, 이는 바알브올 사건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르우벤 족속과 갓 족소고은 모세에게 요단강 동쪽의 땅을 가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한다. 모세는 그들이 요단강 서쪽의 땅을 정복하는 것을 도울것이라는 서약을 받고 난 후에 이를 허락한다. 요르단강 건너편의 땅은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나쎄 지파 절반을 위해 분배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난 사십년간 광야에서 머물렀던 장소들을 나열한 뒤, 가나안 민족과 그 우상을 모두 파괴하라고 명한다. 가나안 땅의 경계가 선언되고, 이 땅들은 엘르아잘, 여호수아, 그리고 열두 지파의 대표들의 감독 하에 분배된다. 현대의 성서비평학자들은 모세오경인 토라가 바빌론 유수 이후(기원전 520년 이후)에 전해져오던 문서들과 구전, 그리고 당대의 지리와 정치적 현실이 종합되어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토라는 필사가들의 학교에서 사용된 네 개의 문서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호와 문서(J문서), 엘로힘 문서(E문서), 제사장 문서(P문서), 신명기 문서(D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제사장문서가 바빌론 유수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하나, 그 외의 문서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성서비평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데이빗 A. 클라인스(David A. Clines)는 그의 책 《모세오경의 주제 "The Themes of the Pentateuch"》(1978)에서 모세오경을 지배하는 주제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부분적 이행이라고 주장한다. 이 약속은 총 세가지로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자손에 대한것으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질것이라는 약속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민족의 관계인데,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적이 있다. 셋째로는 땅으로, 노아의 홍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아로부터 저주받은 땅인 가나안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과 민족의 관계는 하나님이 내려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언약이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 이후까지 뻗어나감으로서 발현되고, 성취된다. 첫 번째 언약은 대홍수 이후에 노아와 맺은 다시는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이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고, 세번째로는 이스라엘 민족과 시나이산에서 언약을 맺는다. 이 세번째 언약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켜야하는 규율을 직접 내려주시는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걸쳐서 등장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지킬 것을 명령받는다. 민수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동원 가능 인력을 계수한 것인데, 이로써 육십만명 이상의 민족을 통해 하늘의 별과같은 자손을 내려주겠다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는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승리까지 같이 보장하신다. 1장부터 10장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열의 맨 앞에서 이끄시며, 대열이 정지할 때에는 민족 한가운데에서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관리하는 장막에 머무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약속의 땅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고 약속의 땅을 정벌하러 가는데, 그들 대부분이 이를 거부하자 하나님은 이집트를 떠난 모든 세대는 광야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심판하신다. 이 심판은 이 세대의 실패가 모든 것을 예견하시는 하나님의 도움 아래에서 완벽히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불순종과 불신의 죄 때문임을 분명히 나타낸다. 민수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세대가 모세를 통한 여호와의 인도 아래 모든 작전이 성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다섯 장은 약속의 땅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모든 가나안 민족을 멸망시킬 것과, 가나안 땅의 경계와, 어떻게 땅을 나누어야할지, 레위인의 거룩한 도시와 "도피성", 피로 오염된 땅의 문제와, 남성 상속자가 없을 경우의 상속 문제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유대교 번역물: 기독교 번역물: 신명기 신명기(申命記, , , )는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다섯 번째 부분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 모세가 야훼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죽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 출애굽기, 민수기 등에 등장했던 가르침이 반복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신명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보통 신명기를 모세5경중 하나로 보지만, 모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신명기의 저자는 모세가 아닐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으나, 신명기에 40여 회(1:16-18; 3:21; 29:5; 31:9, 24-25, 30), 신약에 80여 회에 걸쳐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히고 있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수 1:7), 신약의 예수(마 19:8)도 신명기를 모세의 책으로 인용하고 있어 모세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옳다. 34장의 모세 죽음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판관기 판관기(判官記, , , ) 또는 사사기(士師記)는 원래 히브리어로 쓴 성경이며, 히브리어 성경(타나크, 유대교 성경)과 기독교 구약성경에 나타난다. 그 제목과 내용에 따르면, 판관기는 성경의 판관(현대의 재판관과 혼동되지 않기 위한 표현)과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통솔하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판관기는 공동번역성서와 천주교 성경의 표기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한글개역판에서는 사사기로 표기되어 있다. 판관은 오늘날의 재판관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는데, 판관기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판관은 삼손이며, 뒤이은 두 이야기가 더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은 삼손의 업적과 사무엘상 1:1부터 7:2에 나오는 대제사장이자 판관인 엘리(Eli)의 바로 앞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입다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 일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려고 명령하신것 외에는 사람을 불에 태워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라는 말을 하진않는다. 둘째로 하느님께 신중함없이 서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입다가 자신의 딸이 마중을 나올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서원할리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앞일을 알지못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약속을 드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느헤미야기 느헤미야(, , ) 또는 느헤미야기는 구약성경의 한 책으로서,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관리였던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성벽을 52일 만에 재건한 이야기를 담은 기록이다. B.C. 444 - 432 느 1:1-13:31 3차 귀환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에 세 번째 귀환의 역사이다.  Ⅰ.세 번째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벽공사를 52일 만에 완성하였다.  Ⅱ. 그는 에스라와 함께 완성 후, 백성들의 선민의식을 회복시켰다. 유딧기 유딧/유딧기(, , )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되거나 집필된 구약성경인 70인역 성경의 일부분인 소책자이다. 기독교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 경전으로 보며,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유대교에서도 외경으로 구분한다. 70인역에서 제목은 "유디트"(Ιουδιθ)이며, 이것은 히브리어 인명으로 남성 이름인 "유다"(예후다, יְהוּדָה)의 여성 이름인 "예후디트"(יְהוּדִית)에 대한 그리스어식 음차 표기이다. 총16장으로 구성된 유딧은 히브리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원본 언어가 히브리어인지 코이네 그리스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딧은 역사적 배경을 분명히 지닌 문헌이기는 하지만 정경인 "욥기"처럼 지혜 문학의 극작품(劇作品), 즉 소설형태의 지혜문학이다. 유딧은 본래 성문서인 지혜문헌의 영향을 받아 작성된 지혜문학이다. 주요한 구약의 지혜문헌의 구조는 두 가지로 잠언, 전도서 같이 지혜를 직접 서술하는 형태와 욥기와 같이 이야기 형식 즉 극 형태가 있었다. "유딧"은 두 번째 형태인 욥기의 극형태를 따라 기술된 지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지혜 문헌을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하거나 번역했던 시기인 기원전 2세기 경으로 작품의 완성 시기를 추정한다. 유딧은 70인역을 통해 전해져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된 원본으로 추정했으나, 근대의 문헌 분석 결과 히브리어나 아람어적 표현의 번역이 발견되어 원본이 히브리어로 작성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번역문투 문장이 일부분인 점을 들어 히브리어로 전승된 유딧의 이야기가 코이네 그리스어로 작성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보는 학자가 있다. 유딧의 저자는 알 수 없으나 작품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유딧이 그의 하인과 함께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앗시리아의 진영에 들어가 술취한 장수를 처형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코이네 그리스어 외경들과의 연관 관계와 완성된 시기로 미뤄보면, 작품 완성 당시에 앗시리아로 유비되는 헬레니즘 문화 영향을 크게 받던 상황하에서 유딧으로 유비되는 이스라엘 정통성과 구약 정신, 유일신 사상을 지키고, 헬라문화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유딧의 이야기는 기원전 2세기 즉 시리아 치하의 이스라엘의 상황과도 깊은 연관을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치하 시기로 예루살렘 성전은 제우스 신전으로 변용되었고, 이스라엘 종교 의식인 안식일과 절기 준행을 금지당했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독립 활동이 촉발했고, 확고한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바탕으로 한 독립전쟁이 시리아와 평화 협정을 통해 결실을 맺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애국심과 유대 전통에 대한 확고한 자세를 강조하는 지혜 문학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에스델기 에스델(-記, , , )은 구약성경의 일부로, 개신교에서는 에스더, 가톨릭에서는 에스테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특히 이 문헌의 정경성이 오랜 기간 의심받아 왔다. 2세기에 처음 기독교의 구약성경 목록을 제시한 멜리토는 에스더를 성경 목록에 넣지 않고 대신 2정경 문헌인 지혜서를 넣었다. 성경 목록이 처음 공식 제안된 라오디케아 공의회에서 에스더를 포함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비슷한 시기의 아타나시우스는 정경 목록을 제안한 부활절 서신에서 에스더를 제외하고 바룩서를 정경으로 제시하였다. 제롬의 불가타 성경과,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경으로 확정함으로서 기독교에서 보편적인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70인역의 그리스어 추가 부분은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제외한다.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스 황제는 인디아와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리는 대왕이었다. 왕비 와스디를 자랑하고 싶었던 국왕의 청을 왕비가 거절하자, 신하들은 이번 일을 묵과하면 남편들을 부인들이 존경하지 않게 된다면서 폐비를 요청하였다. 결국 와스디는 폐비되었고, 심사를 거쳐서 에스델이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는 유대인이었다. 바빌로니아에 끌려온 유대인들이 정권이 교체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Mordecai)가 거만한 귀족인 하만(Haman)에게 복종하지 않자 이에 기분이 상한 하만은 유대인 말살 정책을 꿈꾸지만, 연회를 베풀어 하만을 안심시킨 뒤 아하수에로스 황제 앞에서 하만의 음모를 고발한 에스델의 기지로 좌절된다. 욥기 욥기(-記, , , )는 유대교에서는 타나크의 성문서 케투빔 시서의 세 번째 권이며, 교회에서는 구약의 시가서에 해당한다.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첫째로 본서의 제목이 주인공 ‘욥’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저자를 욥으로 보는 견해. 둘째, 유대 전승이나 탈무드를 근거하여 모세로 보는 견해. 셋째, 본서 28장과 잠언 8장의 문체가 흡사하다 하여 솔로몬으로 보는 견해. 넷째, 문체의 흐름이 전반적으로 예레미야서와 비슷하다 하여 예레미야로 보는 견해. 다섯째, 본서와 시편 88편의 분위기가 유사하다 하여 시편 88편의 저자인 헤만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저자가 인간의 고난 문제 등에 매우 예민하고 종교성이 심오한 사람이며, 본서가 세계 문학의 걸작 중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문학성을 지닌 자이고, 동시에 당대의 뛰어난 지성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본서의 시대적 배경은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의 활동 시기와 비슷한 족장 시대로 추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서 기록 연대를 족장 시대 직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B.C. 2,000-1,800년경). 이와는 달리 본서 기록 연대를 훨씬 후대로 보는 경우도 있다. 즉 출애굽 직후인 모세 시대로 보는 견해(B.C. 1400년경)가 있는가 하면 둘째, 지혜문학이 최고조에 달했던 솔로몬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B.C. 950년경). 제1장에서 제2장과 제42장 제7절 이하는 산문이고 의인 욥에 관한 전설이며, 제3장 이하의 시의 청취가 있는 부분은 전체에 걸쳐 윤곽이 고대에서 전래된 민화(民話)였다. 천상에서의 신과 사탄의 경쟁 때문에 전혀 이유도 없는 고난을 의연히 견디는, 사유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완전한 신앙자 욥과 그의 행복한 결말을 읊은 것이다. 제3장 이하는 기원전 6세기에서 저자의 현실상 고난을 주인공 욥을 이용해 표현한다. 제3장은 애가(哀歌)로서 생의 저주· 사망·허무를 향한 동경(독백)이며, 제4장에서 제27장은 세 친구간의 대담(對談)이고 제29장에서 제31장은 과거와 현재의 대비, 결백의 맹서로 내용이 되어 있으며, 제38장에서 제42장 제6절은 신과의 대화인데 이것이 줄거리이다. 그 발단은 생의 부조리의 문제로서 이유 없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생을 저주하고 세계의 파괴를 원하게 되며 사망을 동경하게 된다. 그 후에는 무상한 우정과 신을 향한 사랑의 좌절과 중보자(仲保者)를 요청하는 테마가 나타나서 신과의 대결로 향한다. 최후에 신은 창조자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승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는 욥이라는 사람의 비징벌적 고난을 이용해 사람의 고난을 대상으로 한 신학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결국 욥의 고통을 바람직하게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보았다. 시편 시편(詩篇, , , )은 유대교에서 쓰는 타나크(기독교에서 쓰는 구약성경)의 일부이다. 각 장을 지칭할때에는 특별히 '장'이 아닌 '편'이라는 단어를 쓴다. 시편을 주제로하여 부르는 노래는 시편가(Psalter)라고 불린다. 유대교 전통은 시편이 다윗 왕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현대 학자들은 시편이 여러 작가가 만들었으며며, 다수는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많은 시편에 표제가 있는데 이 표제는 그 시 저자가 누구인지, 또 그 시 만든 상황을 간략하게 표시하고 있다. 이 표제들은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사이 많은 차이가 있다. 표제가 있는 시편 가운데 73개가 다윗 왕을 작가로 언급하고 있다. 시편은 전체로 다섯 권 책의 형태 인데, 이 현재 모양으로 편집한 게 아마 추방 이후로 추정한다. 시편 50편, 73-83편은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며, 42편, 44-49편, 84편, 85편, 87편, 88편은 "고라 자손"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전통적으로 표제가 그 시 저자나 기원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준다고 간주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그 표제가 시편 기자의 것이거나 각 시편이 생겨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첨가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대개 표제가 후대 편집자들의 첨가이기 때문에, 그것이 붙은 시의 기원이나 만들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준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경우 시편들의 기원이나 산출된 상황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견들이 있다. 19세기까지 시편의 저자는 다윗인 것으로 여겨졌다. 특별히 시편 자체에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지는 시편은 모두 74편이나 된다. 칠십인역은 더욱이 14편의 시가 추가로 다윗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대체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시편의 저자가 다윗인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35절에서 37절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라며 다윗의 저작설을 확고히 여기고 있다 (이 인용된 시편 110편 (1절)은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적혀 있다). 사무엘 상·하서도 역시 사무엘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가 나옴에도 저자가 사무엘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오경이 모세의 이름으로, 잠언을 솔로몬의 이름으로 칭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전적으로 시편과 다윗의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윗이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음도 그가 시편의 많은 부분에 개입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럼에도 시편의 전체도 다윗의 것이 아니며, 다윗의 이름의 표제가 있다고 다윗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편의 표제의 “레다윗”이라는 말도 “다윗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지만, “다윗을 위한”, “다윗에 관한”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다윗의 시편이라는 것은 왕궁에서 불릴 수 있는 인증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더 많은 시편을 다윗의 삶과 연관시키면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진 것들이 많아진다. 칠십인역 및 불가타 성경과 히브리 말 성경의 장절 표기가 다르다. 1편부터 8편까지는 차이가 없지만, 9편부터 147편까지 차이가 있다. 시편은 150편이 총 5권으로 나뉘어 있다. 시편의 첫머리는 이스라엘 신앙에 대한 핵심적 언급이다. 1편에서 권하는 복된 삶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이다. 시편 1편의 율법은 시편 전체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편 1편은 다음 시편들로의 초대인 것이다. 1편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2편은 국제적인 차원으로 포로 후기 것을 제시한다. 토라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계시와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의 두 주제는 시편이 그 최종적 형태를 갖추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앙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시에는 “다윗의 믹담”이라고 머리말이 붙어 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순금의 시”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이 순금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에인즈워스는 이 시를 “다윗의 보석”이라고 불렀다. 호커 박사는 이 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어떤 사람은 이 시를 귀한 시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순금의 시 또는 귀한 보석과 같은 시라고 한다.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이 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시라는 것을 말했는데, 그분에 대해 기록된 것들은 순금처럼, 또한 보석처럼 귀한 것이다.” 아직까지 “믹담”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용어는 시 56, 57, 58, 59, 60편에도 나타난다. 이 시들은 기도로 시작함으로써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넘치고, 궁극적으로는 안전과 즐거움을 누릴 것에 대해 확신하는 노래로 끝을 맺는다. 알렉산더 박사의 해설은 특히 귀한 것인데, 그는 “믹담”이란 말은 ‘비밀’ 또는 ‘신비’를 뜻하며, 이것은 이 시에 교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했다. 만일 그의 해석이 옳다면, ‘비밀’이라는 말을 ‘귀한 시’라고 부르는 것과 합하여 ‘귀한 비밀에 대한 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순금처럼 귀한 이 시의 신비를 해석하는 데 인간적인 해석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다윗이 저를 가리켜”(행 2:25)라고 말하면서 이 시가 그리스도에 대한 시라는 것을 밝혔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전했다:“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29-31). 바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시를 인용하면서, 다윗이 “죄 사함”을 전하게 하는 “이 사람”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행 13:35-38). 주경가들은 대부분 이 시를 다윗에게, 성도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그리스도에 대한 시”로 이해할 것이다. 9, 10절에서,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주 예수만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보기 때문이다. 구성-이 시는 전체적으로 농축되어 있어서 인위적으로 내용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절 주께서 드리는 믿음의 기도. 2-5절 여호와만을 믿을 것을 선언함. 6-7절 현재에 대한 믿음으로 만족함. 8-11절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즐거워함. 43편에 표제가 따로 없는 것과 내용중 반복되는 같은 후렴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시편 42편과 43편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시로 여겨진다. 후렴구를 고려해볼때 3연으로 나눠볼수 있다(제1연 :1-5절, 제2연 :6-11절, 제3연 :43편 전체). 본 시는 시편에 등장하는 7편의 참회시(시 6편, 25편, 32편, 38편, 51편, 130편, 143편)중 다섯 번째 참회시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로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을때 자신을 죄를 회개하며 지은 시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자신이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심령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하나님이 선민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의 경계를 처음으로 완전 정복한 영광스러운 승리의 왕이었으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의 순결을 가진 자였다. 이런 다윗이 순간의 유혹으로 인해 가증스러운 범죄를 자행하게 된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하며 처절히 절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성을 볼 수 있다. 다윗 또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결백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죄를 지었을때는 그 죄를 즉각 인정하며 하나님께 사죄했다는 점을 통해 그의 위대성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그가 영광과 승리의 삶을 살도록 축복하신다. 개요 89편 38절을 기준으로 시편 전체의 분위기가 바뀐다. 시편은 포로기 전후의 찬송가로 알려져 왔다. 새 노래로 시작하는 시편이 96편, 98편, 149편 세 편이 있고 그 중에 96편이 제일 먼저 수록 되어 있다."새로운 애정의 산물인 새 노래로 노래하라." 새 노래는 새로운 애정을 표현하기 위한 노래다. 새 노래는 새 계명의 노래, 곧 새 언약과 그 언약의 특권들에 대한 찬양의 노래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소명에 대한 예언이다. 저자는 시편에는 별도로 부기된 것이 없으나 다윗이 지어서 아삽과 그 형제들에게 부르게 한 찬송시인 역대상 16장23-33절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본다. 가장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모든 백성들, 전 우주, 모든 생명체들에게,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그의 백성들의 구주이시며,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즐거운 찬양을 드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 어떠한 표제어도 전혀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고대 역문들(Septuagint, Vulgate, Aethiopic & Arabic Versions)은 다윗의 작품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70역과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제어가 이 시편에 붙어 있다. “포로 이후에 집을 세울 때, 다윗의 송시."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96편이 다윗의 시라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는듯하다. 박윤선 박사는 역대상 16장에 나오는 다윗이 아삽에게 준 시와 유사하다고 보며 다윗의 저작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 시편은 언약궤가 시온 산에 옮겨졌을 때 불러졌으며 역대상 16장 22~33절에 기록되어 있는 찬송시의 부분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본래 이 시편이 위에서 언급된 경우에 사용하기 위해서 다윗에 의해 저작 되었으며, 그리고 이 시편이 역대상 16장 8~36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은 이 시편이 제 2차 성전 봉헌식에 사용되기 위해 발췌되었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본서의 저자를 다윗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원저자인 시를 후대의 누군가가 다시 수정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본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온 우주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노래하는 ‘신정시’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하여 예원하는‘메시야 예언시’이기도 하다. 본 시는 신약에서의 언급이 없다. 하지만 칼빈, 행스텐베르그, 델리취 등은 본 시를‘메시야 시’로 해석하였다. 박윤선 박사 또한 이 시편의 주제를 ‘하나님의 통치를 찬송함’으로 보면서 장차 임할 여호와의 통치를 내다보는 메시야 시라고 했다. 칼빈은 본문을 이스라엘 분만 아니라 만민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하는 메시야 왕국의 예언시라고 보았다. 엘런 로스는 말하기를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자연의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통치를 찬양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본 시편이다”라고 했다. 저자인 시인이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바로 이 시의 중심 내용일 것이다. 히브리 원전에서 본서의 명칭은 '테힐림(Tehillim)'이다. 그것은‘찬송’이라는 의미이다. 주요 헬라어 역본들은 이것을 ‘미즈모르(mizmor)', '노래’라는 또 다른 히브리어 단어로 번역한다. 헬라어역인 칠십인역에서는 “거문고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는 뜻인 ‘프살모스’(Psalmos)로 표기하고 있고, 라틴어역 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프살모룸’이라 부르고 있다. 영어 성경의 Psalms 또한 거기서 유례된 것 이며 한문 문화권에서는 한결같이 ‘시편’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또 하나의 잘 알려진 영어 명칭인 ‘Paslter'는 70인역으로 알려진 헬라어역 사본인 A.D.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왔다. 이 사보은 시편에 대해 “현악기”라는 의미를 가진 'Psalterion'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단어는 사실 시편의 헬라어 사본에서 “수금(lyre)"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키노르(kinor)'와 '네벨(nevel)'에 대한 번역어로 여러 번 등장하며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이것을 시편의 제목으로 격상시켰다.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시편이 성문서(Kethubim)라고 하는 제 3 구분 첫머리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시편이 성문서 중 가장 중요시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으며, 이것이 제 3 구분에 있는 것은 그 편집이 후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현행 시편은 전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 사이에 두드러진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5권의 구분을 통하여 시편이 모세 오경과 상응하는 책으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유대교 전통에서는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다섯 권의 책을 주었고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다섯 권의 시편을 주었다”고 말한다. 모세오경에 비교되는 시편의 다섯 권의 구조는 시편의 지위를 정경의 일부로 확립하거나 확인시켜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권의 시편 구분 중 96편은 제 4권에 속하며 제 4권은 90~106편으로 총 1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하는 시편이 많으며 93~100편에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제 4권을 시작하는 시편 90편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강력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셨음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사람”모세의 글이다. 이 시는 여호와께서 다윗 언약을 파기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시편 89편과 달리 겸손하고 고백적인 마음을 토로한다. 시편 89편이 다윗 언약의 실패에 관한 내용을 언급한 이후에 시편 90편은 그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모세의 기도인 것이다. 월슨이라는 학자는 제 4권이 시편의 최종 편집에 있어서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다윗 언약에 대해 확인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젤 불록은 이 부분의 편집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즉 완전히 실패한 다윗 언약으로부터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 특히 모세 언약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모세의 이름은 시편 90~106편 사이에 7번 등장한다. 시편 90편에는 이 절망한 나라에 희망을 가져다 줄 한 사람을 소개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모세는 죽었으나 이 시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한다. 다윗 언약으로부터, 그리고 사라진 왕조로부터의 전환에 관한 내용은 시편 제 4권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여호와 왕권”에서 발견된다.시편 96편은 시편 중 제 4권에 속하면서 그 중 95~10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신정시에 포함된다. 95~100편 사이에는 선민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이 땅의 전 역사를, 나아가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신정사상을 찬양 선포하는 신정시들이 연속되어 나온다. 한편 이 신정시 모음집 이외에도 시편 전체에 걸쳐서 20, 47, 89, 93, 101, 132, 144편, 총 7편의 신정시들이 추가로 포함되어 있다. 신정시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구속사를 그 근간으로 하여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우주와 역사에 대해 베푸시는 경륜과 섭리와 관련된 신정 사상을 노래하는 시이다. 신정시 모음집의 6편의 시들도 우주와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성품과 공의에 따라 선하게 섭리하시는 절대 주관자 하나님께 대한 세계 만민의 찬양의 당위성과 만민 중에 특별히 선민 이스라엘을 먼저 구약 시대 구속사 전개의 통로로 삼으시고 장차는 세계 열방 모두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신 ․ 구약 전시대의 구속사를 진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신정시 모음집의 95~100편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속사적 기본 명제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전 우주와 세계 역사는 절대자와 초월자이시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섭리 ․ 운행된다. 둘째, 세계 역사는 만대의 택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구속의 주체이신 절대자 하나님이 진행시키고 계시는 구속사를 중심으로 태초에서 종말로 직선적으로 이어지며 태초에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에 반드시 끝나는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셋째, 태초 아담의 범죄 이래 인간은 물론 전 우주가 원죄와 자범죄로 오염되어 창조 당시의 성결성과 순수성을 상실하였으며 이로 인해 세계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종국적인 멸망을 기다리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넷째, 절대 공의이시며 또한 절대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종국적인 멸망 상태에 있는 세계를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태초 아담의 타락 직후 택한 성도 만인의 구원을 예수 구속의 법을 주시고 태초부터 대종말까지 일직선상으로 한 순간의 단절도 없이 구속사를 지행시키고 계시므로 구속사는 절대 연속성을 갖는다. 다섯째, 구속사의 궁극적 주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 여부가 곧 선 ․ 악의 기준이며 나아가 이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전존재의 영복과 영벌을 결정하는 절대 유일의 기준이다. 위와 같은 내용을 미루어 볼때 96편은 일관된 찬양의 촉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 거룩성 및 공의성 등의 성품에 대해 나타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당신의 구속주와 심판주로서 갖는 사랑과 공의의 품성, 또 은혜와 구원을 보여 주는 역사와 공의와 심판을 보여 주는 역사를 통하여 충분히 게시하여 보여 줌으로써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인간이 자발적으로 당신을 경외할 수 있게 하셨다. 특별히 이 시편은 시편 93~99편에 자주 증장하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93:1, 97:1, 99:1)의 주제를 노래하는 시편 중의 하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왕권과 창조 세계에 대한 통치를 강조하는 시편들이다. 특별히 시편 96편은 98편과 많은 용어들과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데 특별히 시작과 끝은 매우 유사하다. 다른 인근하는 시편들과도 많은 용어들과 주제를 공유하면서 하나님의 우주적이고도 의로운 통치를 강조한다. 이 시는 찬미의 노래이다. 거기에 10절 이하에서 여호와의 즉위식 노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본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온 우주의 통치자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주적이며 감격적인 찬양에의 권고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데 찬양의 내용에 따라 다음 세 단락으로 구분된다. 전반부 1~6절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대한 찬양 권고이다. 중반부 7~10절은 온 세상의 통치자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 권고이다. 후반부 11~13절은 온 세상의 심판주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 권고이다. 특히 시인은 본시에서 찬양과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구원자이며(2절), 창조자시고(5절), 모든 신들보다 가장 뛰어나신 분이며(4 ,6절) 만국을 통치하시는 분이요(10절) 공의로운 판단자(13절)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실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10~13절) 만왕의 왕 메시야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우주적이고 최종적인 공의의 심판과 메시야 왕국의 완성에 대한 예언 구절로 해석된다. 이상에서 보듯 시인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시며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자임을 들어 그의 피조물인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것들(11, 12절)에게 하나님께 한 목소리로 우주적 찬양을 드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는 비단 인간 분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자연 만물의 본분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데 있음에 근거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의 중심은 내림하시는 하나님이다. 역사적으로 종말에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노래이다. 이 시는 이러한 노래의 유형이 제 2 이사야의 경우와 같이 역사적 종말적인 의미로 전용된다는 것을 잘 보이고 있다. 1절의 ‘새 노래’도 이러한 종말에 하나님의 도래를 영접하는 노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자는 여호와를 향하여 새 노래를 부르라고 축구하고, 온 땅이여 여호와를 찬미하라고 촉구한다. 그 이름을 찬미하며 매일 그 구원을 전하라고 촉구한다. 그 이유는 여호와는 천지를 창조하신 자, 참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여러 국민에 의해 영광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시기 때문일뿐더러, 더욱이 결정적으로 이 땅을 심판하실 왕으로서 내림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 심판의 하나님을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것, 그곳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 신뢰가 있는 것이다. 특히 시인은 ‘새 노래’로 여호와 하나님께 노래하자고 하는데(1절) ‘새 노래’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닫는 자가 새로운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을 가리킨다. 비록 지금은 우주 만물이 아담의 타락 이래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고통을 겪고 있지만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실 터인즉 그때 천지 만물 온 우주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감격적이다. 한편 이러한 본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만민 구원사상을 시사하고 있다는 의의를 지닌다. - 시편 98편은 제 4권에 속한다. - 이 시편은 아이작 핫츠(Isaac Watts)가 작사한 찬송가 “세상의 기쁨"(통일 찬송가 115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구약 본문이다. 이 찬송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 땅에 진리와 은혜로 다스리시기 위한 주의 강림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미 시편에 선포된 중대하며 단 하나밖에 없는 사건으로 묘사하기 위해 시편의 언어와 주제를 사용한다. 이 시편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시는 구세주 하나님을 선포한다. - 시편 98편은 명령 형태의 찬송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절 : 1-3절 해석 : 시인은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요청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푸셨으며 공의를 시행하신다. 이처럼 위대한 구원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신설한 인자와 성실로 인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을 구하시고 건지실 것이다. 여기서 ‘새 노래’는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곡조이다. 시인은 본 단락에서 찬송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경배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식하도록 요구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통하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신다. 1절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 은 이러한 사실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은유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통하여 승리, 곧 ‘구원’과 ‘의’를 획득하셨다. 이사야서에서도 ‘구원’과 ‘의’ 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예언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열방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베푸시는 분으로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 노래’의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에게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사실은 전체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준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인자와 성실을 베푸심으로써 세계 만민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는 이스라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방 족속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세계 복음화는 구약 시대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구절 : 4-6절 해석 :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기대로 인하여 시인은 땅에 있는 거민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요청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양한 악기를 통하여 즐거이 소리하며 노래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구원은 땅의 거민들로 하여금 합당한 반응을 요구한다. 곧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기쁨과 환희에 찬 노래로 화답해야 한다. 이러한 즐거운 찬송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가져다주는 온갖 혜택들을 기대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찬송을 드릴 때 시인은 ‘수금, 나팔, 호각’ 등과 같은 온갖 악기를 사용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내용은 1절에 서 언급했던 ‘새 노래’ 가 성전 내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적 찬양의 형태로 표현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양한 음악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활기차고 감격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언약 백성들이 지켜야 할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 양식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공동체적인 찬양이 있어야 한다. 구절 : 7-9절 해석 : 구원을 행하시는 위대한 왕을 찬양하던 시인은 본 단락에 이르러 온 우주 만물까지도 악기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워하라고 요청한다. 시인은 이처럼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제 시인은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세상에 강림하셔서 구원과 공평을 베푸신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창조주이신 동시에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만물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은 결국 만물의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서곡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의 영역은 이 세상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곧 바다와 땅 위에 있는 동물과 식물과 물과 산 등 모든 자연 세계가 하나님의 오심을 고대한다. 결국 하나님의 오심은 공평과 의로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의 일환인 것이다. 이처럼 시인의 예언자적 전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 단락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통하여 현재 눈앞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감격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시편 150편은 찬양하라는 구성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편은 “할렐루야 구조를 가진 마지막 시편으로 시편의 책을 마감하는 송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시편을 이러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시편은 다른 시편들이 증거 하는 '예배하는 심령'이라는 문제와 '하나님을 합당하게 찬양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늘의 성소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킨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세대가 여호와를 찬양하기를 원하고 있다. 1절 - 시편의 저자는 다시 “할렐루야”를 외친 후 하나님의 궁창에서 찬양을 드리라고 요청한다. 2절 - 찬양에 대한 이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찬양을 해야 한다. 3~5절 - 찬양에 대한 재요청 악기(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 퉁소, 제금 등)와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6절 - 찬양에 대한 마지막 요청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 적절하게도 호흡이 있는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고 있다. 시편의 마지막은 ‘할렐루야’ 로 끝이 난다. 전도서 전도서/코헬렛(傳道書/-, , , )는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쓰이는 구약성경의 한 책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인 전도자(코헬렛)라 밝히고 있으며 책의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전도서는 삶의 허무함과 삶의 최선의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 어근인 קהל은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코헬렛은 모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맥상으로 코헬렛이 모으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회중이 될 수 있다. 개역성경에서는 코헬렛을 전도자로 번역하여 이 책의 제목은 전도서로 붙여졌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종교의 전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전도서라는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책의 제목은 전도서로, 저자는 전도자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 성경과 쉬운성경에서는 책의 제목은 마찬가지로 전도서로 번역하며, 저자는 "설교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 역시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천주교 새번역 성경에서는, 원어를 음역하여 제목과 저자 모두 "코헬렛"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도서 1장 1절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이라 밝히고 있으며, 1장 12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던 솔로몬왕의 후손들은 유다만을 통치하였으므로, 이는 솔로몬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따라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왕으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새로운 저서에 유명한 현자의 이름을 붙여 저서에 무게를 싣는 당시의 풍습을 전도서의 저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현대 학계의 시각으로는 전도서의 저자는 예루살렘 사원의 근처에 거주하던 지식인이며 저술 시기는 기원전 250년경이라 추정하고 있다. 아가 아가(雅歌, , , )는 구약성경의 일종이다. 아가는 구약성경 중에서 성문서 또는 시가서에 포함된다. 개신교에서는 아가를 주님과 몸된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시적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본서는 불과 여덟 장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은 해석상의 견해가 제시 되었으며, 많은 사랑을 받는 책이다. 이 책은 한 쌍은 남녀가 벌이는 섬세한 애정, 정열적인 욕망, 우정, 그리고 기쁨 등 상호간의 신뢰의 탑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지만, 성경 전체의 주조를 이루는 엄숙하고 근엄한 주제들과 당당하게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성도와 하나님의 신앙 관계를 남녀 관계에 비유하고 있거니와(참조, 삿 2:17), 본서 또한 남녀간의 진솔한 사랑의 교제를 형상화함과 아울러 성도와 하나님 간의 깊고 내밀한 사랑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전통적으로 본서는 솔로몬의 저술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 근거로서 첫째, 1:1에 ‘솔로몬의 아가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을 ‘솔로몬에 관한 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자들도 있으나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한다. 둘째, 본서 내용 중에 번뜩이는 지혜와 시적(詩的) 재능 및 이스라엘 지역의 특성에 맞는 동식물상(動植物相)에 관한 언급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본서 기자는 1005편 정도의 노래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탁월했던(왕상 4:32) 솔로몬임이 유력시된다. 셋째, 서두 이외에도 ‘솔로몬’이라는 직접적 언급이 여섯 차례나 등장한다(1:5;3:7,9,11;8:11,12). 결국 본서는 왕궁의 여러 왕후와 비빈들(6:8)과의 숱한 애정 행각 중에서도 진실한 사랑을 경험했던 솔로몬이 기록한 체험적 수기요 노래라 하겠다. 지난 두 세기 동안 강력히 대두해 온 자유주의적 성서 비평의 경향은 대부분의 경우 성경의 기록 연대에 관한 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보다 훨씬 후기의 연대를 주장하며, 본서의 경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고고학, 비교 언어학 및 고대 근동 문학에 관한 연구 등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솔로몬 시대 혹은 적어도 그 주변 시대로 보게 한다. 우리는 앞에서 본서의 기자가 솔로몬임을 살펴보았거니와, 그렇다면 기록 연대도 그의 통치 시기(B.C. 970-960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본서는 신랑 솔로몬과 신부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통해 결혼의 거룩성을 명시하기 위해 쓰여졌다. 성경은 결혼을 천시하거나 인간의 유약함으로 인해 용인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제도로서 결혼을 통한 남녀간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뜻이요 남녀 쌍방의 큰 기쁨이라 할 수 있다(잠 5:15-19;고전 7:3). 본서가 기록될 당시만 하더라도 부부 관계란 자녀 출산이라는 측면 위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본서 어디에도 출산과 관련된 언급은 없으며, 따라서 이는 진정 사랑 자체를 위한 노래임을 반영한다. 시편 기자가 자연 속에 드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자주 노래하였듯이, 본서 기자는 남녀간의 진실한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본서가 단순히 연인들의 사랑에 관한 노래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사랑을 암시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하겠다. 물론 본서 자체에는 이 사실을 명시하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본서는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사람에 의해, 그러한 경건한 신앙의 배경을 토대로 하여 쓰여졌고, 이 경우 본서 기자는 남녀간의 진정한 사랑의 모본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를 결혼 관계에 비유한 사례가 흔하다는 사실(출 34:10-17) 또한 이면에 감춰진 본서의 의도를 짐작게 해 준다 하겠다.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남녀간에 나누는 사랑의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인간 상호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본 서론 4항에서 언급되었듯이, 이와 같이 남녀간의 진실한 사랑은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축약해 놓은 것임을 암시한다. 이처럼 깊이 있는 주제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본서는 유월절에 그 기쁨을 노래하는 공식시로서 전국에서 낭독되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신부’(사 54:5,6;렘 2:2;겔 16:8-14;호 2:16-20)로, 신약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고후 11:2;엡 5:22-25;계 19:7-9;21:9)로 묘사한다. 본서는 일차적으로 남녀간의 건강하고 진솔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예표론적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령한 관계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축혼시 또는 결혼 노래로 알려진 시 45편은 종종 그 내용상의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본서와 비교 되는데, 이 시편 역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스러운 연합을 예표하는 시로 유명하다. 본서는 내용상의 해석 못지않게 문학 형태(장르)의 측면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다. 어떤 이들은 본서가 상연되기 위해 쓰여진 희곡이라고 했다(Böttcher, Renan). 물론 본서는 드라마로서의 성경을 일부 보여준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이것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상연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우리가 욥기를 희곡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본서도 희곡이라고 부를 수 없다. 또 본서를 결혼의 축가나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목가적인 노래나 민속시 혹은 축제용 예문 등으로 보는 것도 곤란하다. 본서의 문학 형식은 이 작품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좀더 차원 높은 문제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즉 본서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사랑과 정서를 종교적 목적에서 채택한 일종의 ‘연애시’(사랑의 송가)로 볼 수 있겠다. 구약 시대의 주변 세계에서도 이러한 장르는 폭넓게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본서와 이들 주변 세계의 연애시들과의 공통점 및 차이점을 일고해 보고자 한다. ① 공통점: ⓐ 연애시에서는 제삼자의 개입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너’라고 하는 연애 당사자에 관한 언급이 주종을 이룬다(8:1,2). ⓑ 가장 흔히 나오는 주제는 연인 상호간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흥분을 들 수 있다(3:4;7:7-12). 이러한 만남은 종종 다른 사람들(1:6;5:7) 혹은 외보적 상황으로 인한 방해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재회의 감격을 더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찾고-발견하는’ 주제나(3:1-5) ‘장애글 극복하는’ 모티브(1:5-8)가 이와 같은 주제의 전개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 연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관한(에로틱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흔히 새, 기타 짐승, 꽃, 의복, 향수, 보석 등과 결부되기도 한다(4:1-15;5:10-16). ⓓ 단 둘만의 내밀한 접속을 위해 침실(8:2)이나 수풀, 동굴과 같은 한적한 장소가 종종 언급된다(7:12). ⓔ 연인간의 서로 보고(4:9), 목소리를 듣고(2:8), 애무하며(2:6) 또한 키스하는(1:2) 등의 사랑 행위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② 차이점: 본란에서는 고대 근동의 연시(love poetry)에서는 흔하나 본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모티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의 연시에는 주로 제의적 축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연애’의 요소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여타 구약 성경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의 칭호조차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고대 근동의 연시에는 유흥을 위한 사냥이나 제의식을 위한 짐승도살이 흔한 모티프로 등장하며, 때로는 주인공이 사냥꾼이나 쫓기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본서에서도 그렇지만,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짐승을 포함한 모든 산 것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함부로 다루어질 수 없었다. ⓒ 본서에서도 자연에 관한 묘사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지만, 고대 근동의 이방 민족들처럼 자연을 의인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기 않는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 고대 근동의 연시에서는 포도주로 말미암은 만취와 성적(性的) 유혹이 흔한 주제로 제시되나 본서에서는 그렇지 않다. 본서는 원치도 않는 천진 난만한 처녀를 유혹하는 내용이 아니라 자유롭게 도 자발적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들의 이야기이다. 요컨대 본서는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 폭넓게 퍼져 있었던 문학적 토양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으나, 히브리인들 특유이 문화적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종교적 의도로까지 승화시킨 걸작이라 하겠다. 본서는 엄연히 정경 가운데 포함되지만, 표면상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음으로 인해 구약 성경 중에서 해석하기에 가장 애매한 책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다양한 해석 방법이 시도되었거니와 여기서는 그중 중요한 네 가지 방법론을 소개하기로 한다. ① 풍유적(allegorical) 해석법: 가장 오래된 방법론으로서 이미 1세기경에 나름대로의 자리를 굳힌 것이다. 알레고리는 확장된 은유(metaphor)라고 할 수 있으며, 대체로 역사나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작자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목적도 특정한 장소나 인물과 관련된 실제 사건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관념적이고 영적인 진실을 제시하는데 있다.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본서를 여호와의 그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묘사한 책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해석은 1세기의 유대인 해석가인 랍비 아키바(Rabbi Aqiba)로부터, 사디아(Saddia), 라쉬(Rashi), 이븐 에즈라(Ibn Ezra)등과 같은 중세의 주석가들을 거쳐, 현대이 일부 정통 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많은 지지를 받아 왔다. 특히 이 해석을 지지하는 기독교 주석가들은 대체로 본서의 내용을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된 교회 간의 관계 속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법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야기된다. 첫째, 본문 자체 내에 본서 기자의 의도가 알레고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언급이 없다. 본서는 문제나 내용 면에서 알레고리에 있어 필수적인 기교성 내지는 인위성을 보이지 않는다. 둘째,  본서에 수록된 인물, 장소, 사건(경험)들은 문학적 고안물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예컨대 솔로몬, 예루살렘, 레바노, 엔게디, 디르사 등이 그러하다. ② 극적(dramatic) 해석법: 19세기 주석가인 델리취(Delitzsch)는 오리겐(Origen ; 184-254년)의 입장을 되살려서 본서를 한편의 드라마로 이해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했다. 그러나 무대 지시가 결여되어 있고, 등장 인물의 수효 및 누가 어떤 대사를 맡았는지가 불분명하며 또한 막(幕)과 장면을 뚜렷이 구분해 주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이 견해는 난관에 봉착한다. ③ 제의적(cultic) 해석법: 고대 근동 문학의 비교 연구를 통해 최근에는 본서를 제의-신화적(cultic-mythological)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본서는 연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여사제로 화한 어느 여신과 왕의 신성한 혼인을 축하하는 노래 혹은 죽음과 가뭄을 정복한 어느 신(왕)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이다. 그래서 본서의 기원은 가나안의 신화와 제의식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리한 추측에 의한 해석이며, 더구나 이교 제의식에서 불렸던 노래가 별다른 잡음이나 저항도 없이 이스라엘 종교 생활 가운데 스며들어 정경으로까지 인정받았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④ 예표론적(typological) 해석법: 많은 학자들은 이 해석법과 풍유적 해석법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풍유적 해석은 역사정이나 사실성을 무시하고 감추어진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예표론적 해석은 구약 성경의 본문 설명 자체를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본문 속에서 신약 성경의 어떤 사건이나 가르침에 대한 예표론적(모형적) 연관성을 발견한다. 따라서 본서의 내용이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된 교회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예표론적 해석인 셈이다. 이러한 제 견해들 중 상당히 받아들이기 곤란한 세 번째 해석법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세 가지 해석법들이 각기 일리(一理)를 지니고 있으나, 우리는 예표론적 해석법을 가장 적절한 것으로 취하면서 다른 견해들의 장점을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가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신학자 구미정은 술람미 여인을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의 시중을 든 궁중여인 아비삭으로 추정한다.)에게 보낸 러브레터이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데, 진보 기독교쪽의 성도들은 "남녀간의 사랑 자체를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다."이라 주장하는 반면, 복음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 성도들은 "예수의 교회사랑을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이것의 해석이 각 진영마다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이러한 메시지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사회와 교회는 인간의 성을 타락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의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의 타락은 두 가지 형태로 온다. 우선 우리 사회는 성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성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사로잡는 요소이다. 어떤 종류의 성관계 -이성간의 성, 동성애, 간음-이든지 상관없이 우리 사회는 성적 자극이 없는 삶은 최소한 따분한 것이며, 아마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는 식의 생각들을 조장하고 있다. 성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드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를 버렸으며, 자신들의 삶의 빈 공간을 성관계들을 통해서 채우려고 해 왔다. 다른 한편 교회 역시 성을 불결하고 금기시할 대상으로 만듦으로 해서 때때로 성을 타락시켜 왔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에서는 육신에 대한 편견을 갖고있는데, 이러한 편견은 심지어 결혼 내에서의 성마저도 저열하거나 사악한 것이라고 보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아가서는 이러한 성에 대한 타락을 고쳐주는 정경서이다. 이 책은 성이 선하고 유쾌한 것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준다. 결혼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가서의 대부분의 본문은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서 찬미한다. 또한 슈왑(schwab)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아가서에는 그가 소위 "주의사항에 대한 지적들"(a cautionary note)이라고 부른 것들이 들어있다. 현실의 삶 속에서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문제들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시들(5:2-6:3을 보라)은 사랑이 기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가서는 요즈음의 몇몇 책들의 주장과는 달리 단지 정경상의 성교과서 이상의 것이다. 이 책은 성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연구에 기여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에덴 동산을 연상시킨다. 창세기 2:18-25는 이러한 양자사이의 관계의 친밀성은 "아담과 그 아내 두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는 25절을 통해서 성적인 의미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다. 그 결과 그들과 하나님 간의 완전한 관계는 깨어지게 되었다. 또한 죄는 아담과 하와의 사이도 갈라 놓았다. 이러한 양자 사이의 소외는 3:7에서 성적인 측면에서 표현되어 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우리가 아가서로 돌아가서 볼 때 우리는 한 남자와 그의 아내가 동산에서 있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트리블(Trible 1978, 144)이 말한 바와 같이 "아가서는 잘못 나간 사랑의 이야기를 구원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사랑이 타락 이전의 축복의 상태로 회복된 것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이 주로 인간의 성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또한 우리들에게 우리와 하나님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비록 이 책에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이미지는 구약에서 아주 잘 사용되고 있는 비유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언약과 아주 유사한 관계를 자기 백성들과 맺으셨다. 이 관계는 이스라엘에게 배타적인 충성을 약속해 주는 것과 아울러 그러한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반항해서 행음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와 이혼하려고 했다. (겔 16, 23장 ; 호 1-3장) 1:1-2:7    왕이 궁정에서 술람미 여인을 만나다           1:1          표제           1:2-8        예루살렘의 딸들과 술람미 여인           1:9-2:7      왕이 술람미 여인과 대화를 나누다 2:8-3:5    연인의 방문과 술람미 여인의 한밤중 찾기           2:8-17       연인의 방문           3:1-5        한밤중의 찾기 3:6-5:1    왕의 행렬과 노래           3:6-11        전혀 색다른 결혼 행렬           4:1-5:1       결혼식 밤에 부르는 왕의 사랑 노래 5:2-6:3    놓쳐 버린 기회           5:2-8         소홀히 여김           5:9-6:3       술람미 여인이 자기 연인에 대해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설명하다 6:4-8:14   점점 더 커가는 사랑           6:4-8:4      술람미 여인의 궁정 체류가 끝나다           8:5-14       진정한 사랑의 본질 이사야서 이사야서(-書, , , )는 흔히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히브리 성서의 한 책이자, 기독교 구약성서의 23번째 책으로, 총 66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통적으로 이사야가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로 유다 출신이며 예루살렘 사람이다(사 1:1). 그는 전통적인 자료들을 취하기 위하여 왕이나(이사야 7:3) 제사장(이사야 8:2) 등 다른 지도자들에게 쉽게 접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는 고위직 가문 출신이나 왕족으로서 우찌야 왕의 사촌이거나 아마지야의 조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기원전 745-695년까지 50년간 활동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사야는 본서 이외의 책들도 쓴 것으로 생각된다.(대하 26:22; 32:32). 그런데 그 책들은 왕들의 행적을 담고 있으므로 이사야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역대기 하 26장 22절 - "우찌야의 나머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모쓰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해 두었다." - 을 감안하면, 이사야는 우찌야가 죽기 전부터 저술가로써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가 우찌야의 행적을 기록한 정황을 감안하면, 애초에 그는 왕의 연대기나 행적을 기록하는 궁중 서기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예언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우찌야가 죽던 해인 것으로 생각되며, 우찌야의 죽음 이후에 이사야는 소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 나아가, 이사야가 궁중 서기관이었다면 그의 예언에 세계사적 시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이사야는 '여성 예언자'(이사야 8:3)라고 불리는 여성과 결혼을 했으며, 그녀가 그렇게 불렸던 것은 판관 드보라 (판관기 4:4), 그리고 여선지자 훌다(열왕기 하 22:14-20)와 같이 야웨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預言)'을 했거나, 혹은 단순히 그녀가 '예언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이사야 38:1).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은 모두 상징적이었다(이사야 8:18). 한 아들은 '스알야숩(Shear-jashub)' 즉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7:3)였고, 다른 아들은 '마헤르 샬랄 하스 바스(Maher-shalal-hash-baz)' 즉 '그가 잡은 먹이가 빨리 부패함' 혹은 '파멸이 임박했다'(8:1-4)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밖에 이사야의 신상에 대하여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없다. "누가 이사야서를 기록했는가?"에 대해 기원전 8세기 어간에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의 저작이라는 견해가 역사-비평적 신학이 발흥하기 전까지 전체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사상의 여파로 성서를 고문헌으로 이해하는 비평적 성서 읽기를 생각하면서, 이사야 외 제2 이사야, 제3 이사야라는 학설 즉,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를 복수로 보는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 1775년 되덜라인(J. C. Döderlein)은 그의 "이사야"란 ("Esaias") 저작에서 이사야서는 두 개의 다른 작품들의 합성이라 주장하고, 아이히혼(J. G. Eichhorn)은 "구약 서론"이란 책에서(Eichhorn, 1780-1783) 사 40-66장은 이사야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사야서에 대한 비평적 가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게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의 이사야서 주석(Das Buch Jesaja, 1872)이었다. 둠에 의하면, 이사야서는 원-이사야서 (Proto-Isaiah), 제2 이사야서 (40-55장), 제3 이사야서 (56-66장) 등으로 구분되는데, 소위 제2 이사야서는 기원전 538년 바빌론에 거주하던 추방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어떤 무명의 예언자에 의해 기록되었고, 소위 제3 이사야서는 추방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후에 어떤 무명의 또 다른 예언자가 기록한 책이며, 소위 원-이사야서는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시대까지도 계속 진화 중에 있던 가장 늦게 산출된 문헌이라 한다. 베른하르트 둠의 삼구분설 비평 가설이 비평학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분은 어휘 상의 차이, 문체상의 차이, 신학 사상의 차이 등에 근거한다고 한다. 특히 소위 제2 이사야서에는 심판 이후의 회복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또한 소위 제3 이사야서에서도 회복 주제가 부각되지만,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심판 메시지도 등장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회복의 메시지는 둠이 원-이사야서라 부른 1-39장에서도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메시지에서 (이사야 13-14장) 추방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사야 14:1 이하). 이사야서 후반부를 추방 이후의 저작이라 가정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고레스(키루스 2세)"라는 페르시아 대왕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사야 44:28, 45:1 등). 그래서 이사야 후반부는 키루스 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여 이름을 떨치던 시기에 기록되었으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키루스"라는 왕의 이름은 예언으로 알려졌을 수 있으며 ("요시야"란 이름이 열왕기 상 13:2에서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예언으로 선포되는 점을 참조),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 메시지도 예수나 사도들이 가졌던 입장처럼 (마태오 복음서 3:3, 4:14, 8:17, 사도행전 8:30 등),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확신한다. 베른하르트 둠을 필두로 하는 비평가설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도전은 "현재 우리가 지닌 구약 선지서들 중에서 무명의 저작은 전무한데, 유독 이사야같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예언서를 어떤 무명의 선지자가 기록했겠는가?"하는 점이다. 더구나 "이사야 후반부의 회복을 이미 체험한 어떤 이가 그 메시지를 기록했다면, 그것은 예언을 가장한 가짜 예언인데(vaticinia ex eventu), 그런 거짓된 것을 성경의 일부로 용납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도 설명해야 한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왕국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의 동맹을 통해, 유다를 침공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아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공격 당하여 유다왕국의 존폐가 달린 일도 있었다. 이사야는 그 때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사야서는 구약의 다른 몇 권의 책들과 아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사야서의 첫 부분은 이스라엘에 임박한 심판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이사야 1-12), 다음 장들에는 이방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판에 초점을 맞춘 내용들이 나오고 있다(이사야 13-35).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미래의 축복을 기술하고 있다(이사야 40-66). 36-39장은 본문의 관심이 아시리아에 의한 위기로부터 포로시대 및 그 이후 시대의 관심사들로 바뀌는 전환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슷한 구조는 에제키엘서, 스바니야서, 요엘서, 예레미야서의 본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서는 예언 전집이라고 부를 만하다. 예언자 이사야와 직접 관계되는 것은 <이사야>의 첫 부분(1-39장)뿐인 듯하다. 이사야의 활동 초기에 대한 내용은 6장 1절부터 9장7절까지에 나오고, 말기에 대해서는 22장, 28-32장, 36-39장(서기전 701년 예루살렘의 포위)에서 다룬다. 그 중간 시기에 속하는 것이 1-5장, 9장 8절부터 12장 6절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진술이다. 다른 여러 부분은 그 시기와 저자를 확실히 알아낼 수 없다. 13-23장은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 선언을 담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만 이사야와 관련시킬 수 있다. 24-27장은 세상 끝에 관한 묵시문학적인 본문인데 그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33-35장이 역사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거의 알 수가 없다. 36-39장의 이사야 이야기는 대부분 글자 그대로 열왕기하 18-20장과 일치한다. 40-55장의 사고는 1-39장의 여기 저기서 나타났던 회복 메시지와 유사하다.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이 유다 사람들을 포로 생활에서 해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과 예루살렘이 재건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56:9--59장은 1-39장 여기 저기 선포되었던 심판 메시지와 유사하며, 60-66장은 추방에서의 귀환과 그 이후의 영광을 노래한다. 이사야서는 기존에 소개된 신학을 이야기함은 물론 새로운 신학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이러한 내용과 견줄 수 있는 구약 본문들은 거의 없을 만큼 독특한 것이다. 이사야서는 옛 사상과 새로운 사상을 조화롭게 엮어냄으로써 중요한 신학문헌이 된다. 이사야서도 다른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신학적 관점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사야의 핵심 요지가 "하느님의 거룩함"이라고 진술한다. 이사야에 나타난 하느님을 통한 유일신 사상은 결코 변함이 없다. 다른 우상들과 기타 다른 경배의 대상들이 나타나지만,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의 경륜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다른 열방의 신들보다 더 뛰어나다. 하지만 그의 우월함을 스스로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온 세상의 유일한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이사야의 메시지는 남은 모든 자들에게 희망을 준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무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웨의 날'에 임할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의 동맹으로 인한 남 유다 침공,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포위, 그리고 공격 등의 이스라엘의 존폐 위기에서도 이사야는 변함없이 하느님만을 신뢰할 것을 강조하였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이사야 7:9). 이 말씀은 이사야 전체 메시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한다면, 예루살렘을 적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담대하게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였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두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어떤 적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예루살렘 신학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이사야는 앞으로 도래할 하느님의 영원한 평화가 있을 비전을 보여 주었으며, 메시야 출현의 꿈을 이스라엘에게 심어 주었다. 또한 에덴의 회복을 갖게 해 주었다. 이사야는 흔히 예수를 구약성서에서 탄생과 대속적 수난을 예고한 분이라는 그리스도론의 성서적 근거로 인용되지만, 예언자 전통에 따라 사회적 정의(social-justice)를 주장한 사회적 예언자이기도 하다. 그는 하느님을 열심히 예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 야훼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요, 제련작업으로 불순물이 제거되어야 할 은이라고 부른다.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는 심판 메시지와 함께 이사야서를 구성하는 큰 요소이며, 다른 요소는 내러티브 문체로 제시된 역사 기술이다 (이사야 7-8장, 36-39장). 이사야서를 해석하고자 할 때, 역사비평적 접근법은 이사야서의 생성과 발전을 추적하는 데 정력을 소진시켰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날에는 이사야서의 현재 모습에서 메시지를 찾고자 시도한다. 이는 브리바드 차일즈의 정경비평이나 신 문학 비평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이런 현재적 경향에서 이사야서 해석에 중요한 열쇠는 내러티브로 제시된 부분들이 그렇지 아니한 부분들과 갖는 사고면에서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스와 히즈키야의 믿음을 대조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믿음의 모델이 누구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히즈키야는 엄청난 위기의 스트레스에 처하여 기도와 이사야 선지자의 영적 권세에 의지하여 국가와 개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듣는 성도는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는가? "하느님을 절대 신뢰하고 그분을 앙모하라." 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사야 후반부에서 특히 부각되는 이스라엘의 추방에서의 귀환과 그 이후의 찬란한 영광은 이사야의 장엄한 예언의 절정이며, 그 예언의 규모나 아름다움은 여타 선지자의 그것을 월등하게 능가하고 있다. 그가 선포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영광은 고난 받는 야웨의 종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야웨의 종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종이 누구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거듭되어 왔다. 이사야40-55장에 전반적으로 종의 노래(42:1-4, 49:1-6, 50:4-9,52:13-53:12) 이외의 다른 부분에도 종이 언급되어있다. 대개 지금까지 연구되어 온 학설들을 종합해보면 그 종을 어떤 민족 또는 특정한 집단 사회를 지칭한 것으로 본 집단설이 있다. 그 집단설에 따르면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사상 에서 찾게된다. 이 언약이란 사람사이에 맺는 계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한편은 절대 능동적이요 다른 한편은 절대 피동적인데 그 특수성이 있다. 야웨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저들과 언약을 맺고 그 족속들의 주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야웨의 종 사상은 이스라엘 족속 전체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김희보, 구약신학논고, 서울: 예수교 문서 선교회,1976, p. 316.) 과거에 생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하여 개인설을 말한, 둠에 의하면 그 야웨의 종은 율법을 가르치는 예언 교사를 지칭한다. 반면 젤린은 1898년에는 즈루빠벨을, 1901년에는 여호야킨을, 1922년에는 모세를 지칭한 것이라고 입장을 몇 번이나 바꾸어 주장했다. 1921년 모빙켈은 말하길, 그 종은 다름 아닌 선지자 자신이라 했다(Balla, Gunkel, Haller, Hans Schmidt, Begrich 등이 동의했다). 그러다가 1930년 젤린은 입장을 다시 바꾸어, 제1-3 야웨의 종의 노래들은 제2 선지자가 자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제4 노래는 그의 제자 제3 이사야가 스승에 대한 애가를 부른 것이라 했다. 모빙켈도 이에 질세라 자기 입장을 바꾸어 1931년에는 야웨 종들의 노래들은 제2 이사야의 제자들 집단에서 유래했으며,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관한 견해가 변화되었다고 했다. 즉 제2 이사야는 고레스(키루스)가 구원을 가져 오는 자라고 보았다면, 그의 제자들은 이런 견해에 불만을 느끼고, 보다 영적인 야웨의 종을 기대하여 제2 이사야의 고레스 노래들을(44:24-48:22) 모방하여 종의 노래들을 작사했다 한다. ↵이런 비평가들의 이해는 신약의 해석과 상충한다. 신약은 야웨의 종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분명하게 제시한다 (마르코 복음서 10:45, 사도행전 8:30 이하). 기독교 신학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야웨의 고난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는 대속의 원리는 레위기가 제시하는 짐승 제사로 그림처럼 조명되는데, 히브리서는 그 짐승 제사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의하면 그 야웨의 종은 율법을 가르치는 예언 교사를 지칭한다. 반면 젤린은 1898년에는 즈루빠벨을, 1901년에는 여호야킨을, 1922년에는 모세를 지칭한 것이라고 입장을 몇 번이나 바꾸어 주장했다. 1921년 모빙켈은 말하길, 그 종은 다름 아닌 선지자 자신이라 했다(Balla, Gunkel, Haller, Hans Schmidt, Begrich 등이 동의했다). 그러다가 1930년 젤린은 입장을 다시 바꾸어, 제1-3 야웨의 종의 노래들은 제2 선지자가 자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면, 제4 노래는 그의 제자 제3 이사야가 스승에 대한 애가를 부른 것이라 했다. 모빙켈도 이에 질세라 자기 입장을 바꾸어 1931년에는 야웨 종들의 노래들은 제2 이사야의 제자들 집단에서 유래했으며,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관한 견해가 변화되었다고 했다. 즉 제2 이사야는 고레스가 구원을 가져 오는 자라고 보았다면, 그의 제자들은 이런 견해에 불만을 느끼고, 보다 영적인 야웨의 종을 기대하여 제2 이사야의 고레스 노래들을(44:24-48:22) 모방하여 종의 노래들을 작사했다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으로 선포된 (예컨대, 사 11-12장, 35장, 42장, 49, 53장 등을 참조) 이스라엘 회복 사건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빌론에서의 70년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런 성취는 사실 이사야가 바라 본 그 찬란한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고, 더구나 즈가리야 같이 귀환 이후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또 재건을 보았던 선지자까지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미래적 사건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점은 바벨론에서의 귀환 정도로 이사야가 바라 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마무리 지을 수 없게 한다. 여기에 이사야가 선포한 회복 메시지의 영적 비밀이 놓인다. 비록 이사야가 그 당대의 유대인적 색채로 예언을 선포했지만, 그 궁극적 성취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서 이루어질 것이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바울 사도께서 롬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고민하면서 이사야 후반부 특히 65-66장의 사고에 크게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사도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개괄하면서 남은 자의 원리, 선택된 자만 구원된다는 구원사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는 이방인의 영입과 유대인의 남은 자 구원의 원리는 바로 이사야 65-66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호세아서나 기타 구절들도 활용하지만, 사도 바울의 심정에서 이사야의 메시지만큼 크게 그의 생각을 움직인 것은 없었던 것 같아 보인다. 혹자는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가 가정된 지상 천년왕국 기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리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천년왕국 사고는 그리스도께서나 사도들이 모두 선포했던 그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사고에 상충되는 것이며, 이미 그분의 나라는 성령님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 시대가 끝나고 임한 성취의 시대를 괄호시대로 무시하면서 주님이 재림 하신 후에 문자적인 천년 왕국 시대를 통해 구약이 성취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신약 교회를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절단시켜 버리는 비성경적 가정이라 보인다. 요컨대, 이사야의 회복 메시지는 지금 여기서 교회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947년에 쿰란에서 이사야서와 관련 있는 두 개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사야서 전체를 담고 있는 사본은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다른 하나도 같은 동굴에서 발견되었지만 이사야서의 일부분만 기록,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2007~200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전시된 바 있다 신약에서는 백개 이상의 이사야 구절들을 인용되고 있다. 요한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그렇게 말하였다"(요한 복음서 12:41 현대인의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루가는 필립보가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다가갈 때 그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내시가 읽던 성경은 이사야서 53장 7-8절이었다. 이사야서에 대한 신약의 인용구들은 열 두 개의 장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일곱 개는 1-39장의 내용이며, 다섯 개는 40-66장에서 인용된 것이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서(-書, , , )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預言)곧 야훼의 말씀을 담은 예언서이다.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 기록했으며 자신의 설교들과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가 다시 고쳐주실 날을 기대하면서, 땅을 샀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침공으로 몰락한 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바룩이 대필하였고, 보관한 기록들이 훗날 집대성할 만큼의 권위를 얻은것으로 보아야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하지 않는다면서 즉,여호와(야훼)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며 마음놓고 죄 짓던 사람들 앞에서 외롭게 외친 심판설교가 주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제사장 성읍이자 솔로몬 왕과 아도니야와의 권력투쟁(왕자의 난)에서 패한 아비아달계 제사장들의 귀양지였던 아나돗 태생의 제사장으로, 제사장 힐키야의 아들이다. 요시야 13년(기원전 627년)에 활동을 시작했으며, 여호아하스,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기야왕시대에 살았다. 그는 아시리아의 멸망과 바빌로니아의 부흥이라는 서아시아의 정세변화와 이로 인해 유다가 멸망한 시대에 살았으며, 망명자들에 의해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갔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설교는 이집트에서 했다.(예레미야 44장)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과정에서 다른 제국들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유다 왕국도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갈그미스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이후 페르시아 발흥까지 전 세계는 바벨론의 손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다에서는 요시아에 의해서 발견된 율법책을 따라서 개혁을 시작했고, 이집트와 바벨론의 세력 확장의 틈바구니에서 요시아는 이집트의 느고에게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때로부터 여러 왕들이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추종하며 살아남기 위한 작전을 벌였으나, 결국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기를 든 대가로 바벨론에 의해 586년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예레미아는 유다가 주변 국가들의 제국주의적인 야망의 부활과 결강(결괴) 속에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그 격동의 시절을 목도 하였다. 예레미아는 애국주의, 친 바벨론계와 친 이집트계의 갈등,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투쟁 등을 생생하게 잘 묘사하고 있으며, 이런 세월 속에서 예레미아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왕국의 암흑기 때에 유다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의 심판설교에 대한 기록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을 마음놓고 어기던 유다를 향해 있을 야훼의 심판을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했고, 그 대가로 박해 ,폭력 격리, 수감 등을 당했다. 흔히 예레미야에 대해 유다의 타락과 임박한 운명을 슬퍼한 '눈물의 예언자','섬세한 여성적인 예언자'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잘못된 성역에 맞선 역동적인 예언자,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던 잘못된 통념에 성전설교로 도전한 용감한 예언자였다. 다윗 이후로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집중시킨 조치는, 야훼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토라는 경건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방법으로 전락했으며, 현상을 유지하는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이 거짓된 지혜를 규탄했다. 그리고 모세에게 주어졌던 신명기적 계약 신앙의 부활을 꾀했다. 예레미야 1:11-1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19세기 말에 번역된 성경전서 개역의 용어를 잇는 개역개정에서 당시 아몬드 열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위해 가장 비슷하게 생긴 동일한 핵과 나무인 살구나무로 아몬드 나무를 '중동 지역의 살구나무'로 이해시키고자 한국어 개역개정 성경 속에 ‘살구나무’로 번역하였다. 실제 살구나무는 핵과 식물로 아몬드나무와 외양이 비슷하지만 다른 품종이지만, 19세기말 번역 상황에서 한국의 살구나무와 다른 '중동의 살구나무' 정도로 이해하도록 번역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살구의 실제 학명은 “Prunus armeniaca var. ansu Max.”라고 쓰며, 분포지는 한국으로 통상 4월 중 개화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살구는 열매를 과일로써 식용하지만, 아몬드(감복숭아, 파단행, 편도)는 씨를 식용하는 복숭아나 자두, 살구와 같은 '핵과'이다. 19세기 말 번역 상황에서 한국 살구나무와 달리 중동에 서식하는 '살구나무', 1970년대 번역 환경인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당시 '아몬드'를 일컬었던 '감복숭아'로, 2000년대 번역 환경인 가톨릭 성경에서는 아몬드의 다른 표현인 '편도나무'로 번역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감복숭아 가지가 보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야훼께서 이르셨다. "바로 보았다. 나도 내 말이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를 깨어 지켜보리라."”―공동번역성서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예레미야야,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편도나무 가지가 보입니다.”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잘 보았다. 사실 나는 내 말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천주교 새번역 성경 반면, ‘아몬드나무(almond tree)’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성(聖)스러운 식물이다. 이집트 탈출 후, 제사장을 선출하는데 있어, 아몬드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12지파 진영 장막 앞에 세워 점을 친 결과, 아론의 막대기에 꽃이 피어난 것에서 유래하였다.   번역상 '살구나무(감복숭아나무, 편도) 가지'에 해당하는 '솨케드 마켈'(שקד מקל)는 아몬드나무 가지를 말한다. 하느님이 "네가 무엇을 보느냐?"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 꽃이 활짝 핀 아몬드나무 가지를 보고 있는데요." "그것이 무슨 뜻인 줄 아느냐?" "모르겠는데요." "그것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나무들이 반드시 꽃을 피우지 않느냐. 그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아몬드나무 가지 아니냐. 그처럼 내가 유다를 속히 회복시킬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유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모든 것이 불타고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사로잡혀 가게 되지만 반드시 회복시켜 줄 것이고, 속히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고 속히 사로잡혀 간 사람들이 돌아오고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 계시를 보고 마음이 평안해졌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몬드 나무의 히브리어 ‘솨케드 마켈'(שקד מקל)’가 “깨어있음”의 히브리어 ‘솨카드’에서 유래된 것을 볼 때, 야훼 하느님은 ‘하느님의 깨어 있으심’[솨케드]를 아몬드나무[사케드]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을지라도, 아무 일이 일어나는 것 같지 않을지라도, 가만히 거기 계시는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며 섭리하시기 위하여 깨어 계신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이다.  바빌론 침략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의 강력한 설교내용때문에, 심한 박해를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 왕조와 맺으셨다는 언약에 근거, 야훼의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만했는데,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너희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죄를 짓는 생활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며 유다 백성들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위협을 받았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는 거짓 예언을 하면서 대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으며, 여호야김 왕에게 위협을 느껴 도피했고, 거짓 평화를 외치는 예언자인 하나냐에 의해서 공적으로 모욕을 받았으며 웅덩이에 던져지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예언활동 초기로부터 여호야김 왕 4년에 이르기까지의 자신의 모든 예언들을 기록하도록 그의 서기였던 바룩에게 구두로 서술했다. 예레미야는 스바니야(스바냐), 하바꾹(하박국), 다니엘, 에제키엘(에스겔) 등과 동시대인이었다. 그의 예언 활동은 대략 기원전 627년으로부터 580년까지에 걸쳐 나타났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치세 동안 순조롭게 활동했다. 요시야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 의해 기원전 609년에 죽음을 당했다. 예레미야의 예언서에서는 야훼 하느님은 인내가 많고 거룩하신 심판을 늦추시며 너무 늦기 전에 그의 백성들로 회개하도록 촉구하시는 분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만하는 자들을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서 경고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서론격인 1장은 예레미야의 신상과 예언자로서의 부름과 그가 받은 지침 등을 묘사하고 있다. 2-45장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비유들과, 설교들, 상징적 행동을 통한 교훈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12편의 설교들에서 예레미야는 유다의 임박한 심판들의 원인을 열거하고 있다. 우상을 따름으로써 백성들은 그들의 공허한 고백과 하나님(하나님)의 언약(계약)에 대한 불순종, 우상숭배,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만등으로 인해 질책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의 죄는 너무나 극심했으므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사로잡혀가는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평화를 외치면서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던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와는 반대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이 지속될 것을 선포했다. 그의 메시지 때문에(2:25), 예레미야는 치욕과 반대를 겪었다. 또한 그는 백성들에게 새 언약 아래서 누리게 될 회복과 소망을 확신시켜 주었다. 46~51장은 이방 아홉 개 국가들을 향한 일련의 예언적 경고들로 이루어졌다(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마스쿠스(시리아), 아라비아, 엘람, 바빌론 등). 52장은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심판의 선포는 마침내 한 사건에 의해 확증되었는데(열왕기하 25장, 역대하 36장, 예레미야 39장, 52장), 예루살렘은 포위되고 파괴되었으며 약탈을 당했다.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포로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구약성서 학자 오택현 영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에제키엘서 에제키엘서/에스겔(-書, , , )은 유다왕국 말기부터 바빌론 포로기 전반(前半)(약 BC 593년 - BC 571년)에 걸쳐 활동한 선지자 에제키엘/에스겔의 예언을 모은 구약성경의 글 중 하나이다. 총 48장으로 되어 있다. 유다인이 우상 숭배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수도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함락된다. 그 후로는 실의에 빠진 동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예언했다. 먼저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환상을 보고 나서 (1장) 심판을 알리는 예언자가 된 것을 적었다.(2-3장), 4장부터는 하느님의 전 이스라엘의 타락(8장)에 의한 다양한 심판과 그 심판의 당위성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11:14-21,20:33-44) 암몬,모압,에돔(에서 자손),팔레스타인(불레셋),페니키아,띠로,시돈,이집트,에티오피아(구스),뭇,룻 등 근처의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였다. 예언과 계시가 선포되어야 함의 당위성과, 이스라엘의 함락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결과적인 이스라엘의 회복과, 악한 자들의 폐퇴가 예언되어 있다. 에제키엘이 환상에서 본 새로운 성전의 모습과 그 크기, 그리고 미래의 새 이스라엘의 땅과 규례 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에제키엘의 이름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하나님이 단련시킨다."라는 뜻이다.그는 예레미야(예레1:1)와 즈카르야(즈카1:1)처럼 제사장이었다.(에제1) 예레미야,즈카르야 그리고 에제키엘만이 예언자 겸 제사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바빌론 포로 기간이나 혹은 포로 후에 예언했다. 에제키엘의 제사장적 배경은 그가 예루살렘의 성전, 하느님의 영광,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행동,그리고 하느님의 미래의 성전에 대해 강조하는 것등을 통해 잘 설명된다. 에제키엘은 유다 왕국이 거의 최후까지 기울어 몰락해가던 시기에 바빌론에 있는 유대인 포로 유배자들 중에서 예언 사목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목은 그보다 다소 앞선던 동시대인인 예레미야의 사목과 유사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섬뜩한 메시지를 전한 반면,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의 재건이라는 온화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사람이었고 에제키엘/에스겔은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비전들은 공포로부터 희망에 이르기까지 폭넓었고, 유다의 불성실한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으로부터 유다의 미래와 관련된 위로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온 인류는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이 나를 주님인 줄 알게" 될 것이다(6:10) 예언자이면서 제사장이었던 에제키엘은 유다의 역사 중 가장 암흑기였던 70년의 바빌론 포로기 동안 사목했다.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 있기 전에 바빌론으로 끌려간 에제키엘은 포로가 된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예언들이나 비유,표적,그리고 상징 등을 사용했다. 그들은 비록 태양 아래 마른 뼈들과 같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규합하고 그들에게 다시금 생기를 불어 넣으실 것이다. 현재의 심판 뒤에는 미래의 영광이 있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서 "그들이 하느님이 주님인 줄 알게" 될 것이다. 히브리 이름 yehezke'1은 '하느님께서 힘 주심' 또는 '하느님에 의해 힘을 얻음'이라는 의미다. 진정으로 에제키엘은 자신이 부름 받은 목적인 예언자의 사명을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얻었다.(3:8`9). 이 이름은 본서에 2번 등장하며 구약 성경의 다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LXX)에 나타난 헬라어 형태는 Iexekiel이며 불가타(Vulgata) 역본의 라틴어 형태는 Ezechiel이다.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1:3)의 아내는 죽임을 당했는데, 그 죽음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침략을 시작했을 때 유다에 대한 하나의 표적이었다(24:16-24). 예레미야처럼 그도 주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제사장이었다. 예레미야서와는 아주 달리 예제키엘(Ezechiel)의 책은 그 구성이 매우 질서정연하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매우 논리적인 이 책의 구성은 상당수의 균열을 노출시키고 있다. 가령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중적(doublets)으로 수록되어 있다(3:17-21 = 33:7-9, 18:25-29 = 33:17-20 등 …). 또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걸리게 한 실어증(失語症)에 대한 보도들은 그 사이에 끼여든 긴 연설들로 인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3:26, 24:27, 33:22).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묘사, 11:1-21의 본문은 8장의 연장이며 또 하느님 수레의 출발을 보도하는 이야기를 끊어버리고 있다. 그 이야기는 10:22에서 11:22로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26∼33장에서 나타나는 시대순서는 논리적이 못 된다. 이 같은 문체상의 무질서도 에제키엘서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단번에 쓰여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에제키엘의 제자들이 스승의 어록을 편집하면서 어느 정도 개작을 하고 보충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스승의 말씀과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편집의 작업이 아주 뚜렷이 드러나는 부분은 40∼48장의 본문이지만 이 장들의 핵심사상은 어디까지나 에제키엘 자신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세 단계에 걸쳐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 첫 번째로 그는, 주전 605년에 여호야킴을 굴복시키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포함해 유력한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두 번째로, 주전 597년에 있었던 여호야킴과 여호야킨의 반란은 더 큰 파멸을 초래했는데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다시 한번 굴복시켰다. 그는 여호야킴과 에제키엘을 포함하여 약 만명의 포로들을 잡아갔다. 세 번째로,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은 오랜 포위 끝에 그 성을 멸망시켰으며 모든 유다를 황폐화시켰다. 만약 1장 1절의 '제 삼십년'이 에제키엘의 나이를 의미한다면, 그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때는 그의 나이 25세였을 것이며,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았을 때는 30세였을 것이다(1:2-3). 이것은 또한 다니엘이 주전 605년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에제키엘이 17세였음을 의미하며, 결국 에제키엘과 다니엘이 비슷한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예레미야보다 약 20년 가량 젊었다. 이 연대 추정에 따르면, 에제키엘은 주전 622년에 태어나서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592년부터 적어도 570년까지 예언했고 560년경에 죽었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예레미야의 활동 말기와 다니엘의 활동 초기와 중복된다. 에제키엘이 바벨론에 도착했을 무렵에, 다니엘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제키엘의 예언에 3번 언급 되었다(14:14, 20, 28:3). 바벨론에 있을 때, 에제키엘의 집은 느부갓네살의 '대수로(大水路)'인 그발 강가에 위치한 유대 포로민의 주요 정착지였던 '텔 아비브'이었다(1:1, 3:15, 23). 주전 592년부터 586년까지 에제키엘은 믿지 않는 유대 포로민들에게 조속한 해방의 소망이 없다는 것을 설득시킬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그들은 귀환의 헛된 희망을 포기했다. 에제키엘은 사건들이 발생한 직후에 본서를 기록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열정적인 활동은 적어도 22년 동안 지속되었으며(1:2, 29:17), 그의 책은 아마도 주전 565년 이내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1:2) 593년 6/7월 보좌 환상과 소명 (8:1) 592년 8/9월 성전에서의 우상숭배에 관한 환상 (20:1) 591년 7/8월 이스라엘의 종교사 (24:1) 588년 1월 포위의 시작 (26:1) 586년 1/2월 띠로에 관한 예언의 말씀 (29:1) 587년 1월 이집트에 관한 예언의 말씀 (29:17) 571년 3/4월 이집트 정복에 대한 예언 (30:20) 587년 3/4월 파라오의 부러진 팔 (31:1) 587년 5/6월 파라오에 관한 예언의 말씀 (32:1) 585년 2/3월 파라오를 위한 애도 (32:17) 585년 2/3월 지하세계에서의 바로 (33:21) 585년 1월 '도성이 함락되었다.' (40:1 ) 573년 3/4월 성전 회복의 환상 에제키엘의 신분은 사제였다(1:3). 그는 야훼의 성전을 정열적으로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걱정했고(8),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그 성전을 안타까워했으며(10), 장래에 세워질 깨끗하고도 거룩한 성전을 세밀히 설계했고(40-42) 드디어 그 성전에 되돌아오시는 하느님을 본 것이다(40). 에제키엘은 사제로서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을 가장 중대시하였다. 그래서 에제키엘은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의 불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20장에서 이스라엘이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 노래의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다. 에제키엘은 율법이 금하는 부정(不淨)을 혐오했으며(4:14) 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분하였다(45:1-6). 그는 사제였기 때문에 법과 윤리문제에 대해 관심이 컸다. 에제키엘의 윤리적 판단은 흔히 결의론(決疑論)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18). 에제키엘의 사상과 어휘는 성법전(聖法典)인 레위 17∼26장의 본문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성법전의 영감을 받았는지 아니면 성법전이 에제키엘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증명할 길은 없다. 어쨌든 성법전과 에제키엘서는 서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전수되어 편집된 까닭에, 두 문헌이 사상적으로 비슷할 뿐이다. 하여 예레미야의 작품이 ‘신명기적 사조(思潮)’에 속하듯이 에제키엘의 작품은 ‘사제적 사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에제키엘은 드물게 메시아니즘을 말하고 있으니, 그의 메시아는 왕적인 존재도 아니요 영광의 인물도 아니다. 물론 그가 미래의 다윗을 예고하지만 후자는 자기 백성의 ‘목자’(34:23, 37:24)요 ‘왕자’(24:24)일뿐 결코 대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다. 다윗의 후손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비전 속에서 성전 밖으로 쫓겨난 인물에 불과하다(45:7 이하). 에제키엘은 처벌의 연대성을 강조하던 옛 전승을 부인하고 개별인간의 인과응보의 사상을 단언하고 있다(18:33 참조). 이 같은 사상은 인간의 죽음 이후에 있을 응보사상을 준비하였다. 현실은 언제나 강자의 정의를 옹호했었기 때문이다. 사제로서의 에제키엘은 성전을 매우 사랑했지만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현존이 벽돌로 지은 성전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에제키엘을 통해 지금까지 대립되어 온 예언자의 정신과 사제의 정신은 화해를 한다. 하여 종교적 의식은 그 의식에 영감을 내리는 정신에 따라 자기의 가치를 살리게 되는 것이다. 에제키엘의 사상은 모두 인간의 내적 개혁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18:31). 아니 하느님께서 돌 심장과는 ‘다른 마음’, 곧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시편 51:12-14), 인간의 속마음에게 ‘새로운 영’을 선물로 주실 것(11:19, 36:26)이라고 에제키엘은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공짜로 용서하고 그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내리는 것은 일종의 창조이다. 창조가 은총이듯이 용서도 일종의 새로운 창조이다. 하느님의 사죄경(36:25-28)은 은혜로이 새로 태어난 인간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뉘우침을 유발시키는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에제키엘의 사상은 사도요한과 바울로의 은총신학을 준비시켰다. 종교의 모든 것을 영성화(靈性化)시킨 것은 에제키엘의 큰 공헌이다. 에제키엘/에스겔서의 구조와 문체에는 적어도 네 가지 중요한 특성이 있다. 핵심 단어 - 이스라엘의 회복 핵심 구절(36:24-26, 36:33-35) -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내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주고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36:24-26).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의 모든 죄악을 씻어 너희를 깨끗하게 해주는 날, 그 날에 폐허가 되었던 성읍들을 재건하게 하리라. 황폐한 쑥밭이 된 것을 오가는 사람마다 보았으나, 그 곳이 다시 경작될 것이다.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털렸지만 에덴 동산처럼 되었구나, 털리고 헐려 폐허가 되었지만 그 성읍들이 수축되어 다시 사람이 살게 되었구나, 할 것이다."(36:33-35). 핵심장(37장) -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소망의 핵심부를 이루는 것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대한 환상이다. 에제키엘/에스겔 37장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뚜렷하게 단계적으로 그리고 있다. 메시야가 이사야서(11:1), 예레미야서(23:5, 33:15), 그리고 즈가리야/즈카르야/스가랴서(3:8, 6:12)에서 의로운 가지로 묘사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에제키엘/에스겔서 17장 22-24절은 메시야를 높고 빼어난 산에 심어진 후에 장중한 백향목이 되는 연한 백향목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메시야는 통치할 권한을 가진 왕이시며(34:11-31), 자기의 양떼를 구원하고 먹일 진정한 목자이시다(34:11-31)라고 말한다. 에제키엘/에스겔은 유다 왕국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몰락할 즈음에 바빌론에 있는 유대 포로민들 중에서 예언했다. 그의 심판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활동했던 선배 동시대인인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유사하다. 유다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장차 있을 유다의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에제키엘/에스겔은 공포와 소망의 메시지, 심판과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하지만 에제키엘/에스겔은 "그들이 내가 야훼/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광에 주된 초점을 두었다. 본서는 크게 4단락으로 나뉜다. 다니엘서 다니엘서/다니엘(-書, , , )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선지자 다니엘의 행적과 예언을 기록한 선지서로, 구약성경의 한 책이다.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저자는 다니엘이다. 유대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기원전 597년에 잡혀갔을 때 다니엘도 잡혀갔다. 본서는 본서 자체의 내증(8:1,15 ; 9:2,20 ; 10:2 ; 12:11) 및 탈무드 등 유대 전승의 외증(外證)등에 의해 B.C. 586-539년 사이의 포로시대 및 그 전후에 실로 포로시대의 걸출한 신앙영웅으로 활약하였던 다니엘의 저작이라는 견해가 정통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다니엘서는 성경의 판본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70인역의 경우 모두 14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개신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히브리 판은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었다. 1-6장은 다니엘과 연관된 사건들을 기술하고, 7-12장은 다니엘이 받은 꿈과 환상을 기록한다. 13-14장은 수산나의 이야기, 벨 신상을 부순 이야기, 큰 뱀을 죽인 이야기 그리고 사자굴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7-12장은 이스라엘을 중심한 세계 제국들의 번성기를 예언하고 특히 기원전 160년대에 일어날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s)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한 유대인 핍박이 부각된다. 이런 예언들이 주어진 목적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앞으로 닥칠 여러 신앙적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선민 이스라엘 후예요 남유다 왕국의 귀족의 자손으로서 다니엘이 B.C. 605년의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유다 제1차 침입 당시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와 황실에서 양육되다가 장성하여 마침내 느부갓네살에게 발탁되어 제정이 미분화 된 시대의 대제국 황실에 설치된 일종의 각속국 출신별 황실 종교 자문 위원 또는 비서관 등의 지위로 황실에 입문하기까지의 배경 및 다니엘의 전반적 활동 연대가 간략히 소개된다. 이스라엘의 망국으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다.(바빌론 유수, B.C 605년).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은 유대인 포로들 가운데서 총명하고 인물이 좋은 젊은 남자아이들을 뽑아서 3년간 국비로 훈련을 시켜 왕궁에서 섬기도록 한다. 이방문화의 중심인 왕실에서 살면서도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자기를 지켜 더럽히지 않고자 한다. 이는 레위기의 음식법과 기타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신앙 정조를 지키려는 결단이었다. 하느님은 다니엘에게 큰 지혜와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주셨다. 이런 지혜 때문에 그와 세 친구들은 바빌론의 관리로 등용되어 왕의 신임을 받는다.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B.C. 605-562) 왕이 꿈을 꾸었는데, 박사들을 불러 그 내용과 해석을 요청하나 답하는 이가 없었다. 진노한 왕이 박사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할 때, 다니엘은 왕의 경호실장인 아리옥에게 기한을 주시면 답하겠다고 요청한다. 다니엘은 세 친구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고 기도하는 중에 하느님의 응답을 받는다. 이에 다니엘은 왕 앞에 나아가서 그의 꿈과 의미를 제시하는데, 꿈의 내용은 왕이 광채가 나는 큰 신상을 보았다는 것인데, 그 신상의 머리는 금, 가슴과 팔들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그 종아리는 철, 그 발은 일부 철, 일부 진흙이었다. 여기 네 부분은 각기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 또는 메디아, 그리스, 로마의 네 제국들을 지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꿈 가운데 돌이 갑자기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 신상의 발을 쳐서 모든 부분을 박살내고 그 뜨인 돌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상 제국의 근본을 쳐서 멸하고 온 세상을 정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데 신상의 발만 쳤는데, 어찌하여 모든 부분들이 박살났던가? 이는 어떤 우상을 칠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문제는 역사상 다른 시대에 존재했던 네 제국 중에서 마지막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발을 칠 때 그 이전의 세 제국들까지 박살났다는 영적 의미가 무엇이냐? 는 것이다. 영적으로 보건대, 네 제국은 사실 본질상 하나이다. 그 관습과 문화나 형태는 다르게 변했을지라도, 세상 나라는 어디까지나 사단의 지배하에서 지탱되는 점에서 성격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로마 시대에 전파된 복음이 로마를 치는 것은 사단의 권세를 꺾고 사단의 문화를 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가 앞의 세 제국과 같은 영적 원리로 지배당했다면, 로마를 쳤지만, 결국 로마에 내려온 이전 제국들의 그 모든 영적 원리도 함께 절단되는 셈이다. 2장의 꿈에 나타난 세상 나라들은 7장에서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짐승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고 신앙정조를 지키다가 풀부불에 던져진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저들을 보호하시고 놀라운 이적을 체험한 느부갓네살은 칙령을 공포하여 유대인의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합법화시킨다. 70인역에서는 이들 세소년의 찬미가를 수록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이 다시 꿈을 꾸고 번민하다, 다니엘의 꿈 해석을 듣는다. 그의 꿈은 거대한 나무가 지구 중앙에 서서 하늘에까지 닿는 그런 내용인데, 그 나무를 하늘의 파수꾼들이 베어 버리고 그루터기만 남긴다. 일곱 때를 느부갓네살이 왕좌에서 축출당하여 야수처럼 야외에서 거하다가 하늘을 우러러 우주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정신이 돌아와 다시 왕위를 되찾는다. 이런 체험 때문에 왕은 다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선포한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사실 나보니두스의 아들로 부친을 대신한 섭정) 벨사살(Belshazzar, B.C. 552-539)이 일천 명의 귀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에서 느부갓네살이 탈취해 와서 신전에 두었던 그 성전 제기들로 술잔치를 벌일 때, 갑자기 벽에 손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를 새긴다. 징조에 놀란 왕이 다니엘을 불러 해석하게 한다. 그 글자는 하나님께서 무게를 재어서 나누신다, 곧 바벨론의 무게를 재어 보니 함량 미달이라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쪼개어 페르시아와 메디아에 넘긴다는 의미였다. 바로 그 날밤 메대의 다리우스의 군대가 바벨론 하수구를 통해 진입하여 바벨론이 무혈 점령당하고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한다. 그 징조대로 성취된 것이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메대의 다리우스 대왕은 다니엘을 높여서 제국의 제2인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다른 신하들이 크게 시기한다. 신하들은 왕에게 청하여 앞으로 30일간 어느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왕에게만 구하도록 명하는 법령을 만들어 선포하게 한다. 이는 하루 세 번 기도하는 다니엘을 겨냥한 것이었다. 반대자의 음모에도 아랑곳없이 다니엘은 자기 방에서 창문을 열어 두고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사자굴에 던져졌다. 그날 밤 왕은 모든 오락을 폐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채 다니엘만을 생각하였다. 새벽 일찍 왕이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을 부를 때, 다니엘은 놀랍게도 살아 있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다고 대답한다. 다리우스 대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끌어 올리는 한편 모함하였던 신하들을 사자굴 속에 쳐넣어버렸다. 사자는 이들의 몸뚱이를 뼈채로 삼켰다고 한다. 신약 성경의 요한 계시록과 같은 묵시에 해당된다. 이 부분의 모든 환상은 하나님 나라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네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본다.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고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다. 셋째는 표범과 같은 데 등에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다니엘이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다. 다니엘이 다시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여 있었다. 또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다. 단 7장이 네 짐승 환상은 단 2장에 제시된 왕의 꿈과 내용상 동일한 것이다. 세상 나라들은 성도 다니엘이 보기에 약육강식의 야수. 네 짐승은 단 2장의 그 네 제국들을 가리킨다: 바벨론, 페르시아/ 메대, 헬라, 로마 등. 이런 짐승들과 달리 "사람" 같은 이는 바로 2장에서 뜨인 돌로 언급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와 나라가 주어진 것은 신약에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 이후에 그가 보좌에 좌정하심으로 성취되었다. 13,14장은 70인역에만 있는 장이다. 수산나는 유대인으로 같은 종족인 요아킴과 부부의 연을 맺은 여인이다. 이들 부부는 바빌론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아킴의 집에는 재판관인 노인 두 사람이 출입하였는데, 이들은 수산나의 아름다움에 반한 나머지 음욕을 품고 그들의 욕망을 채울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어느날 수산나가 시중드는 사람을 물리치고 정원에서 홀로 자고 있는 틈을 타서 노인 두 사람은 음욕을 채우기 위해 수산나에게 접근하였다. 낌새를 알아챈 수산나가 소리를 치는 바람에 계획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던 두 노인은 수산나가 다른 남자와 정원에서 간통을 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다. 수산나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맞아 죽음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수산나의 절규는 하느님에게 미치게 되었고 하느님의 영이 다니엘에게 미치게 되었다. 다니엘은 수산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자 군중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수산나의 간통여부를 다시 조사하게 되었다. 다니엘은 유이(唯二)한 증인인 두 노인을 따로 떼어 놓고 한 사람씩 수산나가 어디에서 다른 남자와 간통하였지 물었다. 한 사람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간통을 저질렀다고 증언하였고 다른 사람은 떡갈나무 밑에서 저질렀다고 증언하였다. 이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되지 않았고 거짓 증언임이 밝혀졌다. 수산나는 무죄로 밝혀졌고 두 노인은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날로부터 다니엘은 백성들 사이에서 명망을 떨치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치하에 많은 사람들이 벨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였다. 사람들은 벨에게 먹을 것을 봉헌하였다. 다니엘은 벨의 정체를 간파하고 고레스 왕에게 벨이 우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나섰다. 고레스 왕은 벨이 우상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벨의 사제들이 벌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니엘이 벌을 받겠다고 말하였다. 이윽고 제사상이 차려지고 다니엘은 사람 몰래 잿가루를 제사상 주변에 뿌렸다. 밤 깊은 무렵 벨의 상에 나있는 비밀 통로로 벨의 사제들이 제물을 가져갔지만, 잿가루에 찍힌 발자국을 감출 길이 없었다. 모든 일이 밝혀지고 고레스는 벨의 사제를 벌하고 벨을 부수어 버렸다. 바빌론에는 큰 뱀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뱀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제물을 봉헌하였다. 다니엘은 그 뱀에게 비계와 머릿카락과 역청이 섞인 것을 끓여서 먹였는데, 곧 죽어버렸다. 이를 본 페르시아 백성은 다니엘을 사형에 처하라고 왕에게 윽박을 질렀다. 왕은 격한 군중을 보고 백성에게 다니엘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사자를 엿새 정도 굶긴 다음 다니엘을 사자 굴 속에 집어 넣었다. 그렇지만 사자는 다니엘을 잡아 먹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에 사는 하바꾹이라는 예언자가 국과 빵을 들고 추수꾼에게 가져가다가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천사는 하바꾹 예언자에게 명하여 빵과 국을 다니엘에게 가져다 줄 것을 명하였다. 하바꾹이 머나먼 바빌론으로 어떻게 빵과 국을 가져다 줄 수 있냐고 묻자 천사는 하바꾹의 머리털을 잡고 거센 입김을 불어 넣어 다니엘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다니엘은 하바꾹이 가져다 준 빵과 죽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미 하였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갖힌지 이레째 되던 날 왕이 다니엘을 추모하러 사자굴에 와서 속을 들여다 보았다. 다니엘이 무사히 있는 것을 보게된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꺼내어 주었다. 그 대신 다니엘을 모함한 사람을 사자굴로 넣었는데 모두 사자의 밥이 되었다. 호세아서 호세아 서(~書, Hosea, )는 유대교 및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포함되는 소 서적 가운데 하나로, “소예언서” 또는 “12예언서”로 알려진 작은 예언서 가운데 순서 상으로 가장 첫 번째에 위치한다. 이 책의 이름은 한글개역판과 공동번역성서에서는 호세아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으며, 2005년 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간된 천주교 “성경”에서는 호세아서(書)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호세아(Hosea, , )는 브에리의 아들이며,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이스라엘의 예언자이다. 호세아서에 따르면,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로보암 2세 시대에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사회적인 지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호세아서에 따르면, 그는 야웨의 명령에 따라 디블라임의 딸이자 음란한 행실을 저지르는 고멜(고메르)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기원전 740년부터 720년 사이의 시기에 생존했다. 호세아서 5장 8절부터의 내용으로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몰락하게 된 전쟁에 대한 언급이 있어, 그가 자신의 활동 무대였던 이스라엘이 몰락할 무렵(기원전 721년)까지 활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세아의 가족의 일생은 이스라엘이 유일신 야웨를 저버리고 가나안 지역의 다신교와의 “음란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들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호세아의 세 아이들의 이름은 야웨를 저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나, 이를 통해 야웨와 이스라엘의 약속의 회귀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 페사킴 87장에서는, 호세아는 그가 활동했던 시기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으며, 심지어 대예언자 이사야보다 위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교회력으로는 그의 축일은 10월 17일이다. 호세아서는 총 14장 197절로 이루어져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과 사제들을 비롯한 지도층은, 백성들을 모세의 율법에서 벗어나, 바알 등을 비롯한 가나안 지역의 토속신에게 경배하도록 종용했다. 그 외에 성적인 문란, 살인, 도둑질, 거짓 등의 죄악이 널리 퍼졌다. 호세아는 그들이 지금까지의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야훼는 이스라엘을 멸망하도록 놓아둘 것이며, 백성들은 전부 앗시리아로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고(9장 3절 및 11장 5절) 선언했다. 실제로, 앗시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기원전 722년에 점령하며, 이스라엘의 고위층과 많은 백성들이 사로잡혀 전쟁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아모스서 아모스는 구약성경의 일부이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기원전 7세기 남유다에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남유다의 군주로 추정되는 히즈키야와 요시야는 구리뱀 숭배와 바알신앙을 없애는 등,이스라엘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수집하여 편집한 것이다. 저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본서의 표제 '아모스'는 '짐을 들어 올리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마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이름의 뜻은 '짐' 또는 '짐을 지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표제의 뜻은 본서 저자가 남유다 사람으로서 패역한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사역이 그에게는 실로 무거운 짐이었으나 이를 인내와 담대함으로 훌륭히 수행해낸 사실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서의 저자가 아모스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내증(1:1)에 따라 전통적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특히 본서에서 자주 '내가'(5:1 ; 7:1, 4, 7, 8 ; 8:1, 2 ; 9:1)라는 1인칭이 사용된 것은 본서의 저자가 아모스라는 것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본서의 기록 연대는 본서 1:1의 내증에 의해 결정된다. 즉 아모스는 남유다의 웃시야왕(B.C. 791-739년)과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B.C. 793-753년)의 재위 기간 중에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 두 왕의 재위 기간 중에도 두 왕국의 번영이 정치, 경제적으로 절정에 이른 때에 북왕국에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하였다가 고향으로 귀환한 얼마 후에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는 저술한 두 왕의 통치 절정기인 B.C. 760-755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모스는 당시 가난한 자들을 짓밞는 부유층들과 형식적 예배를 강력하게 규탄(아모스 2:6-7)하고 있다. 또한 그는 탐욕에 가득찬 기득권층과 형식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외에도,메시아를 통한 새로운 세상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4)라는 외침을 통해 기대하고 있다. 요나서 요나는 구약성경의 하나이다. 열왕기하 14:25이 요나를 여로보암 2세의 통치와 연관시키고 있는 내용을 통해 요나서에 있는 이 일들은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기간(B.C. 793-753)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에 살았던 여로보암 2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왕하 14:23-29). 일찍이 앗수르는 근동에서 군림하는 자리를 차지하였고 예후로 부터 조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앗수르)는 아람 족속들을 쳐부순 다음에 내부적인 다툼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대제국이 되기를 희망하던 아시리아가 잠시 쇠퇴해진 틈을 타서 여로보암 2세는 일찍이 아람에 속해 있었던 영토를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다른 예언서에서 지금까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죄악이 극심했기 때문에 호세아와 아모스를 보내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다. 요나는 후일에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적들을 돕는 일에 자신이 쓰여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니느웨는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로부터 약 5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티그리스강 동쪽 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니느웨는 큰 성읍으로서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외곽의 성벽과 내곽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보호를 받고 있었다. 요나가 이렇게 난공불락의 도시처럼 보이는 철옹성에 도착하기 전에 두 가지의 재앙이 이 도시를 덮쳤고(B.C.765과 759), 이 일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으로 받아들여졌고, 또 759년경에 왜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에 속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요나 예언자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니네베,지금의 이라크에 있음)에 가서 심판설교를 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에스파냐로 도망을 치러하였다. 배가 태풍을 만나게 되자 요나는 자기의 탓 때문에 그러하다고 생각하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 사흘간 있게 되었다. 결국 니느웨에 가서 심판설교를 하여 야훼의 심판을 면하게 하지만, 니느웨에 대한 미움을 버리지는 못한다. 이를 본 하나님은 요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선장이 폭풍에 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명령함(6절), 선원들이 여호와의 뜻을 찾음(7-13절), 선원들이 여호와께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말라고 기도함(14절), 폭풍이 잠잠해짐(15절) 왕이 온 나라에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선포함,(6-8절), 왕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우리가 멸망치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함, 명령(9절), 하나님이 돌이키심(10절). 사실 아시리아 나라 전체가 멸망할 때까지 야훼 신앙을 수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3장 5절에 근거해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라는 부분이 나오는 점을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아니라도, 최소한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신앙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정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훈서 내지 예언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요나는 당시 선민의식 즉,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던 이스라엘의 편협한 생각과 야훼의 폭넓은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요나서의 핵심내용은 '회개' 그리고 '순종' 신약과 대비해서 예수가 말하였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라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회개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요나서는 종말론적 메시지 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그로 인해 구원을 통한 인간들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즉, 대비법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편협함을 비평하여 바로잡고자 쓰였던 예언서이다. 요나서에 대한 논쟁과 그것에 대한 반론 (1) 무수한 역사적 지리적 자료들은 요나서의 참된 역사성을 지지한다. 그 이유로는, (2) 본서의 기본적 사상과 선지자와 다른 사람의 심리학적 신실한 묘사 ~ 선원과 니느웨 사람들~는 전혀 조작이라 할 수 없다. Harless(Zeitschr, fur protest, 1851, xxi, 2), M. Baumgarten 의 저서와 비교하라. (3) 정경 편집자들은 본서의 역사적 진실성을 믿고 예언서들 중에 요나서를 편입시킨 것이다. (4) 본서의 역사적 진실성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조금도 의심 못하게 되었다(마12:39 ; 16:4 ; 눅11:29~32). Sack(Christ. Apol.)와 Delitzech를 비교하라. 본서의 역사적 신임성은 유대인 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중세기까지 내려오는 기독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수납된다(토빗 xiv. 8 ; 70인역 ; 요세푸스, 「고대사」). 성경 등장인물 목록 아래에는 성경 등장인물의 목록이다. 하란의 후손 하란>롯 MS-DOS MS-DOS(Microsoft Disk Operating System)는 도스의 일종으로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IBM사의 의뢰를 받아 시애틀 컴퓨터시스템사로부터 사들여 개발한 IBM PC용 운영 체제(CP/M-86 호환의 DOS)로, 사상 최초로 대중화된 운영 체제이다. 1981년 8월 처음 PC에 올려져서 제공되었으며, 1995년 개발이 중단될 때까지 몇 차례의 판올림이 있었다. MS-DOS라는 독립 제품으로서의 최종 버전은 6.22이며 윈도 95가 출시된 이후부터는 윈도 제품의 일부로서 제공되었고 윈도 미에 기본 내장되어있는 8.0까지 나왔다. 이후로는 더이상 개발되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이 제품의 인기에 힘입어 조그마한 프로그래밍 언어 회사에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회사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베이직 인터프리터, 어셈블러, 여타 언어의 컴파일러 등을 개발하였으며, 제품의 대부분이 디지털 리서치사의 CP/M 위에서 동작하였다. 1980년 7월 즈음 IBM은 뒤에 IBM PC로 불리게 되는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착수한다. 이때 개발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IBM PC에서 돌아가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외부에서 조달하도록 결정한다. IBM은 애초엔 마이크로소프트와 베이직 등의 프로그래밍 언어 관련 제품들에 대해서만 교섭을 시작했다. 이후 운영 체제에 대해서도 8086용 CP/M을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개발을 의뢰했다. 그러나 CP/M의 사용권이 없었기 때문에, 빌 게이츠는 디지털 리서치와의 교섭을 조언한다. 그러나 디지털 리서치와의 교섭은 불발로 끝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들만의 운영 체제 개발에 들어간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슷한 시기에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사의 팀 패터슨이 CP/M을 8086에 이식하여 개발한 86-DOS를 75,000 달러에 구입하여 IBM PC용으로 수정하여 PC-DOS를 만들어 낸다. 처음엔 IBM PC에서 동작하는 운영 체제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만, 마이크로소프트사는 OEM으로 제공할 때에는 자사 상표인 MS-DOS란 이름을 사용한다.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개수만큼 팔아 버리는 방법이 아닌, IBM PC 출하 대수에 따라 사용료를 받는 라이선스 계약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 비결이라고 말한다. MS-DOS는 팀 패터슨이 작성한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 소유의 86-DOS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86-DOS 개발은 6주 밖에 안 걸렸는데 이는 8086 프로세서에서 구동되도록 이식된 디지털 리서치의 CP/M (8080/Z80 프로세서용)의 복제이기 때문이었으며 CP/M과 비교해서 2가지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다: 개선된 디스크 섹터 버퍼링 로직, CP/M 파일 시스템이 나닌 FAT12의 도입. 최초 버전은 1980년 8월에 선착되었다. 윈도우 95의 출시와 함께, MS-DOS의 통합 버전은 부트스트래핑, 문제 해결, 특히 게임 및 더 이상 출시되지 않는 독립 제품과 같은 오래된 도스 소프트웨어와의 하위 호환성을 위해 사용되었다. 윈도우 95에서 MS-DOS 7이라는 이름의 도스는 윈도우 GUI 없이 별도로 부팅이 가능하다. 이 기능은 윈도우 98 SE에도 포함되었다. 윈도우 ME에서는 이 기능을 제거하였으나, 기반이 되는 도스 MS-DOS 8.0으로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해킹이 가능하다. FIFA 월드컵 FIFA 월드컵()은 축구 국제 기구인 국제 축구 연맹(FIFA)에 가맹한 축구 협회(연맹)의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국제 축구 대회이다. 일반적으로 월드컵 축구나 월드컵이라고도 한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은 1930년에 첫 대회가 열렸다. 1942년과 1946년 대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열리지 못했다. 대회는 예선 무대와 본선 무대 등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예선 무대는 본선에 진출할 32팀을 가려내기 위해 본선 보다 3년 일찍 시작한다. 현재 본선은 개최국 경기장에서 한 달 남짓 서른두 개 팀이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월드컵 본선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하는 스포츠 행사이다. 어림잡아 7억 1,510만 명이 2006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을 시청했다고 한다. 총 20번 대회가 열리는 동안 8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가장 우승 횟수가 많은 팀은 브라질로 총 다섯 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 다음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이 네 번, 그리고 초대 우승팀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프랑스가 각각 두 차례씩, 잉글랜드와 스페인이 각각 한 차례씩 우승을 차지했다. 네덜란드는 준우승만 3번(1974·1978·2010)했다. 가장 최근에 열린 2018년 FIFA 월드컵은 2018년 6월 14일부터 7월 15일까지 러시아에서 열렸고, 프랑스가 우승했다. 2022년은 카타르, 2026년은 캐나다/멕시코/미국에서 개최된다. 세계적인 종합 스포츠 행사 중 하나인 올림픽과 달리 월드컵은 단일 종목 대회다. 그리고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따라 한 도시를 중심으로 개최되지만, 월드컵은 한 나라를 중심으로 열리며 대회 기간은 올림픽이 보통 두 주 동안 열리는데 비해 월드컵은 약 한 달 동안 진행된다. 세계 최초의 A매치는 1872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대 잉글랜드의 경기였으며, 1884년에 시작된 첫 국제 대회인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영국 정기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이 대회는 1984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축구는 영국과 아일랜드 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 세기가 지나 다른 지역에서도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1900년, 1904년, 1906년 하계 올림픽 에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 대회에서 별도의 메달은 수여되지 않았다. 월드컵의 역사는 FIFA가 1904년에 설립된 이후로 FIFA가 주관하며 올림픽과는 별개로 국가대항 축구 대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1906년에 스위스에서 있었다. 하지만 FIFA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이 대회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올림픽 대회가 아마추어 팀들 간에 계속 경쟁을 하는 방향으로 가는 가운데 1909년, 토머스 립튼은 토머스 립튼 트로피 선수권 대회를 토리노에서 개최한다. 립튼 선수권은 각기 한 국가를 대표하러 나온 개인 클럽간(국가 대표팀간이 아닌)의 대회였다. 대회는 때때로 첫 번째 월드컵이라고 묘사되곤 했으며,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스위스의 일류 프로 클럽팀이 주로 참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이 대회에 관여하려 않았으며, 프로팀들을 보내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립튼은 카운티 더럼에 있는 아마추어 팀인 웨스트 오클랜드를 잉글랜드 팀을 대표하여 대신 초대했다. 웨스트 오클랜드는 대회에서 우승했고, 1911년의 대회에서도 성공적으로 타이틀을 방어, 대회 규칙에 따라 트로피를 영원히 보유하게 되었다. 1914년에, FIFA는 하계 올림픽에서의 축구 대회를 ‘세계 아마추어 축구 선수권대회’로서 승인해주었고, 대회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 결과 1920년 하계 올림픽에서 세계 최초의 대륙 간 축구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이집트와 13개의 유럽 팀들이 참가하였다. 금메달은 벨기에가 차지하였다. 1928년에 FIFA는 올림픽과는 별개로 직접 주관하는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다. FIFA는 첫 번째 FIFA 월드컵 개최국을 1924년 하계 올림픽과 1928년 하계 올림픽의 축구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30년에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우루과이로 결정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3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개최국인 미국에서 미식축구의 인기 탓에 축구의 인기가 낮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계획이 없었다. 또한, FIFA와 IOC의 아마추어 선수의 지위에 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축구는 올림픽에서 제외되었다. 이어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쥘 리메는 첫 번째 월드컵 대회를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각 국가의 축구 협회들은 대회 참가 초청을 받았지만, 유럽 지역의 팀들에는 우루과이가 대서양을 횡단해야 하는 먼 나라였기 때문에, 큰 지출과 오랜 여정이 불가피했다. 그런 이유에 따라 대회 2달 전까지도 팀을 보내겠다는 확약을 한 유럽 국가는 없었다. 결국, 쥘 리메는 유럽 팀들을 한 팀이라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우루과이는 모든 체류비와 차비를 출전팀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내건 끝에 여비 및 체류비용이 공짜라는 점과 쥘 리메의 눈치를 봐서 벨기에, 프랑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가 대회 참가에 응했다. 이리하여 유럽에서 4팀, 북중미에서 2팀, 남미에서 7팀, 총 13개 팀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월드컵 개막식은 두 경기가 동시에 열렸으며, 프랑스와 미국이 각각 멕시코를 4-1로, 벨기에를 3-0으로 꺾고 승리했다. 월드컵 사상 첫 번째 득점은 프랑스의 루시앙 로랑이 기록했다. 우루과이는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93,000명의 관중 앞에서 아르헨티나를 4-2로 꺾으며 첫 번째 FIFA 월드컵 우승 팀이 되었다. 초창기 월드컵 대회가 직면했던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대륙 간 장거리 여행의 어려움이었다. 첫 번째 대회가 우루과이에서 열렸을 때에는 유럽팀들이 장거리 여행의 어려움을 이유로 많은 팀이 불참했다면, 반대로 유럽에서 열린 두 번째, 세 번째 대회에서는 남미 팀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대회에 불참하였다. 두 번째는 전쟁 문제로, 네 번째 대회는 원래 1942년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1936년 8월 13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23차 FIFA 총회에서 독일이 공식적으로 개최 신청을 했다. 곧이어 브라질도 월드컵 개최를 신청하였다. 1939년 6월에는 아르헨티나도 개최 신청에 참여했다. 하지만, 제4회 대회의 개최국이 결정되기 전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이 탓에 다음 대회인 1946년 대회도 자동으로 무산되었다. 종전 후인 1946년 7월 26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제4회 대회를 1949년 브라질에서, 제5회 대회를 1953년 스위스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개최국이 결정된 다음날, 대회 준비를 이유로 개최가 한 해씩 미뤄져 제4회 대회는 1950년, 제5회 대회는 1954년 개최되게 되었다. 1950년 FIFA 월드컵은 처음으로 영국의 팀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영국의 일부 팀들은 그들과 전쟁했던 나라들과의 대결하기를 꺼렸고 또 그들의 팀들이 다른 나라의 축구에 영향을 주는 것을 항의하고자 1920년에 FIFA에서 탈퇴했으나, 그러나 FIFA의 초청에 따라 1946년에 다시 가입했다. 추가로 1950년 월드컵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시각과 동일한 시각에 개막되었다. 그리고 1950년 대회에서는 또한, 제1회 대회의 우승국이었던 우루과이가 이전 두 대회의 참가 거부 끝에 복귀했다. 우루과이는 이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했고 이 대회는 마라카낭의 비극이라고 하는 역사상 유명한 경기로 후에 남게 되었다. 우루과이에 패배한 브라질은 그 굴욕을 참지 못해 유니폼의 색깔이 변경되었다. 1934년부터 1978년 대회까지는 1938년 대회에서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예선 통과 후에 흡수됨에 따라 15개 팀의 참가로 치러진 경우와, 1950년 대회에서 인도, 스코틀랜드, 터키가 기권해서 13개 팀의 참가로 치러진 경우를 제외하면 총 16개의 팀이 본선에서 경쟁을 치렀다. 가장 많은 참가를 한 국가들은 대부분 유럽과 남미에서 온 국가들이었으며 일부 소수의 북중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팀들이 참가했다. 이들 팀은 대부분 쉽게 유럽 팀들과 남미 팀들에 패했다. 1982년까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하고 1라운드를 벗어난 팀들은 1930년 대회에서 4강에 들었던 미국, 1938년 대회에서 8강에 들었던 쿠바, 1966년 대회에서 8강에 들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70년 대회에서 8강에 들었던 멕시코가 전부였다. 본선 무대는 1982년에 이르러 24개 팀으로 늘어났고 이때 조별리그를 적용함에 있어 조3위팀끼리의 승점 차이로 4팀을 진출시키는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1998년에는 32개 팀으로 늘어나며 이때부터 조 3위는 무조건 탈락했는데, 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중미 팀들의 더 많은 참가를 가능하게 했다. 단 하나의 예외는 오세아니아 지역으로 이들은 최근 예선 기준으로 0.5장의 티켓만을 배분받아 본선 진출을 완전히 보장받지는 못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이들 지역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다. 멕시코는 1986년 FIFA 월드컵에서 8강에 들었으며 카메룬은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8강에, 불가리아는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4강에, 대한민국은 2002년 FIFA 월드컵에 4강이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또한, 2002년 대회에서는 그 외에 세네갈과 미국이 8강에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럽과 남미 팀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예로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8강에 든 팀이 오직 그들이었음이 이를 반증한다. 이와 같은 특정 지역의 편중 현상은 때로는 월드컵을 재미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유럽, 남미의 지역 대회와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며, 그 밖의 대륙들에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2006년 대회의 예선에는 198개 팀이 참가했으며 2010년 FIFA 월드컵에는 204개 팀이 본선 진출을 위해서 예선에 참가했고. 2014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2014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참여한 207개 국가가 예선에 참여했다. 여자 축구에서 FIFA 월드컵과 동등한 대회라 할 수 있는 FIFA 여자 월드컵은 1991년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여자 대회는 규모와 이력 면에서 남자 대회보다 작지만, 점점 성장하고 있다. 경기 참가자들의 숫자가 2007년 대회에서는 120팀으로, 1991년 대회의 참가팀들보다 2배 이상 늘어났다. 다른 스포츠들과는 다르게, 올림픽에서의 축구는 FIFA 월드컵이 생성된 이래로 크게 중요도가 높은 대회는 아니다. 최근에 이 대회에는 23세 미만의 선수들만이 참가하며, 23세 이상의 선수는 한 팀에 3명씩 참가할 수 있다.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은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 1년 전에 해당 연도 월드컵 본선 개최국에서 열리는 대회로 다가오는 월드컵의 예행연습에 해당한다. 이 대회는 FIFA 대륙 연맹 대회에서 우승한 6개의 팀과 FIFA 월드컵 우승 팀, 개최국 등 모두 8개 팀이 참가한다. FIFA는 또한 유소년 축구(FIFA U-20 월드컵, FIFA U-17 월드컵, FIFA U-20 여자 월드컵, FIFA U-17 여자 월드컵), 클럽 축구(FIFA 클럽 월드컵) 그리고 풋살(FIFA 풋살 월드컵)과 비치사커(FIFA 비치사커 월드컵)와 같은 축구 변형의 국제 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1930년부터 1970년까지 쥘 리메 컵이 월드컵 우승 팀에 수여되었다. 원래 이것은 단순히 ‘월드컵(World Cup)’ 혹은 ‘쿠프 뒤 몽드(Coupe du Monde)’라고 불렸지만, 1946년에 월드컵 대회 창시자인 FIFA 회장 쥘 리메의 이름을 따 다시 트로피의 이름을 다시 지었다. 1970년에, 브라질이 FIFA 대회에서 3회 우승을 함으로써 그들이 영구 소유할 권한을 얻었다. 그러나 그 트로피는 1983년에 도난당했으며 이후 회복되지 못하고 절도범들에 의해 용해됐다고 한다. 1970년 이후에 FIFA컵으로 알려진 새 트로피가 디자인되었다. 7개 국가에서 온 FIFA의 전문가들은 53개의 제출된 모델들을 평가하고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실비오 가자니가의 작품을 선정했다. 새 트로피는 36센티미터 높이에 18캐럿 금으로 만들어졌고 6.175kg의 무게를 지녔다. 기본 바탕에는 준보석의 공작석 2층을 포함했으며 반면에 트로피의 아랫부분은 1974년부터의 FIFA 월드컵 우승국과 조각된 연도를 새길 수 있게 되어 있다. 가자니가의 트로피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았다. ‘선은 기본으로부터 솟아, 나선 모양으로 오르며, 세계를 수용하려 뛰어오른다. 이 꼼꼼하고 역동적으로 조각된 몸매는 두 선수가 승리의 감동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이 새 트로피는 팀의 우승 횟수와 상관없이 우승국에 영구 수여되지 않는다. 월드컵 우승 팀은 트로피를 다음 대회가 끝날 때까지 보유하며 금으로 된 원물 대신 금으로 도금된 복제품을 받는다. 아르헨티나, 독일(서독), 이탈리아와 브라질이 두 번째 트로피를 두 번씩 소유한 바 있으며 프랑스가 한 번 소유한 바 있다. 이 트로피는 장식판에 우승 국가명이 모두 새겨질 2038년까지 존속될 것으로 보인다. 제 2회 월드컵이 열린 1934년부터, 본선 참가자들을 가려내기 위한 예선이 열리고 있다. 예선은 6개의 FIFA 대륙 연맹(남미, 북중미 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별로 나뉘어 치러지며 각 대륙 연맹이 이를 관장한다. 매 대회에서 FIFA는 미리 대륙별로 출전 티켓 수를 배정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대륙의 팀들의 축구 실력에 따라 안배되나 대륙 연맹에서의 로비 행위에 결정되기도 한다. 각 대륙별로 본선 진출국을 배분하는 기준은 월드컵에서 대륙별로 거둔 성적과 FIFA 랭킹을 종합해서 결정하게 된다. 본선 진출 티켓 32장중에 일단 개최국인 홈팀은 대륙과 상관없이 무조건 1장 고정이다. 다만 공동개최를 하게 되어 2개국 이상이 개최국이 될 경우 그 개최국의 대륙은 진출권이 적용됨에따라 그만큼 그 지역의 예선참가팀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자리가 적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2002년 FIFA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과 일본이 2팀이 홈팀의 자격으로 지역예선을 면제받고 본선에 직행해서 기존 아시아대륙의 본선진출티켓 4.5장 배분이 2.5장으로 줄어들었다. 개최국을 제외한 31개 이하의 팀의 티켓은 다음과 같이 배분된다. 예선 과정은 거의 대부분 홈 엔드 어웨이로 치루어지며 본선이 열리기 거의 3년 전부터 시작하여 이후 2년간 지속한다. 예선의 형식은 각 대륙의 연맹마다 다르다. 그리고 아시아의 4.5장, 북중미의 3.5장 처럼 0.5장의 티켓을 분배받은 대륙들은 그 대륙들간의 남은 본선진출티켓을 차지하기 위해 경기를 실시하는데 이를 대륙간 플레이오프 라고한다. 개최국에 따라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순위가 다르겠지만 보통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순위 및 자격은 다음과 같다. 아시아-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위간의 플레이오프 승리팀 오세아니아-3차 예선 1위팀 북미-북미 최종예선 4위팀 남미-남미 최종예선 5위팀 따라서 대륙간의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4팀중 승자인 2팀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다만 각 대회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실시하는 대륙간이 다른데 이는 모두 추첨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2010년 FIFA 월드컵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플레이오프 승자 vs 오세아니아 3차예선 1위팀와 경기를 했고 북중미 최종예선 4위팀 vs 남미 최종예선 5위팀과의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했었다. 그리고 201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아시아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승자 VS 남미 최종예선 5위팀과 경기를 했고 북중미예선 4위팀 VS 오세아니아 3차예선 1위팀과의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했다. 그리고 2018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북중미예선 4위팀 VS 아시아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승자과 경기를 했고 오세아니아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승자 VS 남미 최종예선 5위팀과의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했었다. 본선진출권을 자동으로 받는나라는 오직 개최국이며 2002년 FIFA 월드컵까지는 디펜딩 챔피언, 즉 지난대회 우승국에서도 주어졌으나 2002년 FIFA 월드컵당시 1998년 FIFA 월드컵 우승국이었던 프랑스가 본선조별리그에서 1무2패로 조 최하위로 탈락하게 되면서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FIFA가 디펜딩챔피언 권한을 폐지됨에 따라 지난대회 우승국 일지라도 예선대회에 참가해야한다. 2002년 FIFA 월드컵의 우승국인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국이 예선에 참가하는 월드컵의 첫 우승 팀이 되었다. 최근의 월드컵 본선은 32개 팀이 한 달 동안 특정 개최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본선은 2개의 라운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별 리그전’과 ‘토너먼트전’이 그것이다. 우선 조추첨은 대회 약 7개월 전에 배정된다. 먼저 본선 진출한 32개팀은 4개 팀씩 8개 조에 배정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32개팀 중 8개 팀이 시드를 우선 배정 받는데 여기서 개최국은 첫 번째 조 즉 A조에 먼저 배정한다. 나머지 7개 팀 중 1팀은 지난 월드컵 대회 우승국으로서, 개최국과 초반에 만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5번째 조부터인 E조~H조 중 한자리에 배정시킨다. 물론 이 경우는 우승국이 예선대회를 통과했을 때의 상황이며, 우승국이 이번 월드컵 예선에 탈락한 경우 본선 진출한 최상위 1팀이 대신 배정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승국 스페인 이 B조로 배정됨에 따라 규칙이 깨졌다.) 그 다음 상위 6개 팀은 비어있는 다른 조에 1자리씩 무작위로 배정 받는다. 이때 개최국을 제외한, 우선적으로 각 조에 배정된 이 7개 팀을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로만 구성된 톱시드 라고 한다. 이 톱시드는 최근 FIFA 랭킹과 지난 월드컵 대회에서의 성적 전체를 기반으로 하여 배정한다. 단 이 톱시드는 피파 랭킹을 반영하여 선정되기 때문에 조추첨 이전에 실시된 월드컵 예선에서 각 대륙간의 예선 진행 중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걸쳐서 본선에 진출한 나라의 경우에는 지난대회 우승국이 아닌 이상 톱시드 대상에서 제외된다. 나머지 팀들은 다른 ‘팟’(pot)에 배정되며 이는 보통 지리적인 기준을 기초로 하고 각 항아리에 속한 팀들은 무작위로 8개 조에 추첨된다. 1998년부터는 특정 한 조에 유럽 팀들이 2팀을 초과하거나 그 외 대륙의 팀들이 1팀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각 조는 리그전 형식으로 치러지며 이에 따라 모든 팀이 적어도 3경기를 치를 수 있다. 각 조의 마지막 라운드 경기는 각 팀 간의 공정성 유지 및 승부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같은 시간에 경기를 치르도록 하고 있다. 각 조에서 상위 두 개 팀이 본선 토너먼트로 진출한다. 승점은 조 안에서의 순위를 가르기 위해 사용된다. 1994년부터, 경기에 승리했을 때는 3점이 주어졌고 비겼을 때는 1점이 주어졌으며 패했을 때는 0점이 주어졌다. (이 이전까지 승리 시 승점은 2점이었다.) 만약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팀이 승점이 같다면, 동점 시 처리 방법이 사용된다. 처음은 골 득실 차로, 그 다음에는 총 득점으로, 그 다음에는 승자 승 결과로, 마지막으로는 추첨이 동원된다. (즉, 팀의 순위가 무작위로 결정된다.) 일례로, 1990년 대회에서 F조는 잉글랜드가 이집트에 1-0으로 승리를 거둔 것을 제외하고 모두 무승부를 거두는 바람에 네덜란드와 아일랜드가 3전 전무로 서로 동률을 이루고 있었는데, 득점마저도 양팀이 2점으로 같고 승자승 원칙으로도 1-1 무승부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자 추첨을 통해 아일랜드가 2위로 16강에 직행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3위로 떨어진 네덜란드도 각조 3위팀 중 3위를 기록하여 16강에 진출하였다. 본래 리그전은 각 경기마다 날짜를 다르게 정해서 시합하게 되어 있었으나 1982년 FIFA 월드컵 당시 알제리에게 패하고 알제리에 밀려 탈락할 위기에 놓인 서독이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중에서 알제리와 칠레의 경기가 서독과 오스트리아의 경기보다 하루 먼저 실시된다는 점을 악용하여 알제리와 칠레전을 관람한 이후 그 경기 결과에 맞춰 오스트리아와 짜고 승부조작을 해서 그 조는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2라운드에 진출했다. 이러한 승부조작을 막기 위해 FIFA측은 그 다음 월드컵인 1986년 FIFA 월드컵부터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 한해서만 두 경기를 동시에 진행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2차전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출팀을 가리기 위해 필요시에는 연장전과 승부차기를 포함하여 단판제 경기를 치른다. 이 형태는 16강전부터 적용되며 각 조의 1위 팀은 다른 조의 2위 팀과 경기를 하게 된다. 이 토너먼트의 경기방식은 이후 8강전, 4강전, 3·4위 결정전, 결승전에도 이어진다. 아래는 역대 월드컵 본선 진출한 국가들의 목록이다.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전 대회를 출전했다. 초창기 월드컵은 FIFA 평의회에서 개최될 국가를 배분하였다. 축구에서 두 중심축이었던 유럽과 남미 사이에는 배로 3주나 여행해야 했기 때문에 지역 선정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첫 번째 월드컵은 단 4개의 유럽 팀만이 대회에 출전하였다. 그리고 다음 두 번의 월드컵은 모두 유럽에서 열렸다.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은 월드컵이 두 대륙 간에 순환개최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중 두 번째로 유럽에서 개최되도록 결정이 났던 프랑스에서의 1938년 FIFA 월드컵은 논쟁거리였다. 그에 따라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 대회에 불참하였다. 원래는 1942년에 월드컵이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하여 월드컵을 개최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FIFA는 쥘 리메 컵이 나치 독일에 몰수당할 것을 걱정해야만 했다. 당시 FIFA 부회장이자 이탈리아 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오토리노 바라시는 나치로부터 쥘 리메 컵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해 로마에서 몰래 자신의 집으로 쥘 리메 컵을 가져온 뒤 신발 상자에 넣고 이 상자를 침대 밑에 숨겼다. 전쟁으로 인하여 1950년 FIFA 월드컵이 개최될 때까지 월드컵은 개최되지 못하고 있었다. 1958년 FIFA 월드컵 이후에 FIFA는 미래의 대회 참가 거부나 논쟁을 피하고자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이 매번 번갈아가며 개최하는 형태를 취하도록 했으며 이것은 1998년 FIFA 월드컵까지 유지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2002년 FIFA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대회이며 또한 2개국 이상이 공동 개최한 첫 대회이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회를 개최하는 아프리카 나라가 된다. 2014년 FIFA 월드컵은 브라질에서 개최되며 이는 1978년 FIFA 월드컵 이래로 처음으로 남미에서 열리는 대회가 되며, 또한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개최되는 첫 사례가 된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유럽과 남미에서만 개최되다가 그 이외의 지역의 월드컵 개최에 대해서도 신중한 논의가 된 끝에 1970년 FIFA 월드컵에 멕시코를 개최국으로 선정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과 남미 이외의 지역에서 월드컵 개최가 시작되었으며 1994년 FIFA 월드컵에는 미국이 개최를 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유럽과 미주 지역 이외의 대륙에서 월드컵을 개최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어 2002년 FIFA 월드컵에 아시아인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개최를 하게 되었고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개최하게 되었다. 개최국은 현재 FIFA 집행위원회의 투표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단기이양식 선거 방식 아래 행해진다. 개최 희망국은 FIFA로부터 유치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요소와 준비단계에 대한 설명이 들어간 개최 협약(Hosting Agreement)을 받는다. 유치 후보국의 협회에서는 입후보 공식 확인을 위한 확인서를 받는다. 그 후에, FIFA는 해당 국가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유치 조건을 만족하는지를 알아본 후 그 국가에 대한 보고서가 작성된다. 월드컵 대회를 개최할 국가를 누가 할지는 현재 해당 대회의 개최 6~7년 전에 결정된다. 2010년과 2014년 월드컵에서, 본선 대회는 대륙 간 순환 개최를 원칙으로 해서 그 대륙에 속한 국가들만이 대회 유치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2006년 FIFA 월드컵 개최국 선정을 위한 투표에서, 독일이 남아공을 이기고 개최하게 되면서 생긴 여러 논란으로 말미암아, 대륙별 순환 개최 원칙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대륙별 순환 개최 원칙은 2018년 이후로는 폐기되며 그로 말미암아 이전 두 대회를 개최했던 대륙(아프리카, 남미)을 제외한 2018년 FIFA 월드컵은 러시아에서 개최되며 2022년 FIFA 월드컵은 서남아시아(중동) 지역의 카타르에서 개최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2014년 대회 개최국 선정에서 벌어졌던 브라질의 단독 후보와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한 이유가 부분적으로 있다. 초창기 월드컵에서는 실력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조 편성을 했다. 그 결과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서독이 약체 팀들과만 경기해 우승한 반면 헝가리는 우승 후보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리고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두 디펜딩 챔피언인 아르헨티나(1978년 FIFA 월드컵 우승국)와 이탈리아(1982년 FIFA 월드컵 우승국)가 같은 조에 묶여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취지로 인하여 각 조별로 톱시드 제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 유럽과 미주지역 위주로 출전했던 월드컵에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출전하게 되자 대륙별로 분할하여 조 편성을 하게 되었다. A조는 항상 개최국이 톱시드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 이전에는 디펜딩 챔피언이 A조 톱시드가 되었으며 개최국은 무작위로 조 편성을 받았으나 2006년 FIFA 월드컵부터 디펜딩 챔피언의 자동진출제도가 폐지되면서 개최국이 A조의 톱시드가 되었다. 월드컵은 1954년에 처음으로 TV를 통해 중계되기 시작해, 현재는 올림픽 보다 시청자 수가 더 많은 스포츠 행사이다. 2006년 월드컵의 누적 시청자수는 어림잡아 62억 9천만 명 정도이다. 7억 1,510만의 시청자들이 2006년 대회의 결승전을 시청했는데, 이는 지구상의 전체 인구 중 9분의 1이 시청한 셈이다. 32개 각 팀을 8개의 조로 나누는 것을 결정하는 2006년 FIFA 월드컵 조 추첨은 약 3억 명의 시청자가 시청하였다. 하지만, 월드컵 시청률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월드컵은 축구 한 종목에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은 월드컵과 같이 단일 스포츠 축제가 아닌 수많은 종목들로 이루어진 종합 스포츠 축제이다. 하계 올림픽 기준 30개 이상의 스포츠 종목이 동시간 여러 지역에 걸쳐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월드컵과 다르게 시청률이 분산된다. 1930년 FIFA 월드컵부터 2018년 FIFA 월드컵 16강전까지 스물한 번의 월드컵에서 각 국가가 기록한 성적을 순위별로 나열한 통계표다. 총 79개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며, 이 중 동독은 통일 이후 국가가 사라졌고 이스라엘은 아시아 소속일때의 성적, 호주는 2006년까지는 오세아니아 성적이나 그 이후로는 아시아 소속으로 거둔 성적이다. 최다 진출국은 브라질로서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모든 대회(21회)에 진출했으며, 독일이 19회로 그 다음을 잇고 있다.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FIFA 월드컵 수상은 FIFA 월드컵 대회가 끝난 후 FIFA에서 결정한다. 상은 여섯 종류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별도로 올스타 팀을 구성하기도 하는데, 이는 월드컵 대회 최고의 선수들로 팀을 구성한 것으로, 1990년에 처음 구성되었다. 월드컵 대회에 가장 많이 참가한 선수는 멕시코의 안토니오 카르바할과 독일의 로타어 마테우스, 이탈리아의 지안루이지 부폰이다. 이들은 각각 다섯 대회에 참가했다. 이 중 마테우스는 스물다섯 경기에 출전해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브라질의 펠레는 현재까지 월드컵에서 세 차례 우승을 경험한 유일한 선수이다. 월드컵에서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는 독일의 미로슬라프 클로제로, 2014년 7월 9일, 2014년 FIFA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16번째 골을 기록하였다. 2번째는 브라질의 호나우두로, 세 번의 대회(1998년~2006년)에서 15골을 기록하였다, 3번째는 서독의 게르트 뮐러로, 두 번의 대회(1970년~1974년)에서 14골을 기록하였다. 이색기록으로 독일의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월드컵 역사상 헤딩골을 가장 많이 터트린 선수로서 2002년 대회 조별리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오직 헤딩만으로 헤트트릭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이 대회에서만 5개의 헤딩골을 넣었다. 현재 클로제가 월드컵에서 헤딩으로 성공시킨 골은 모두 8개 이다. 브라질의 마리우 자갈루와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와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은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한 인물이다. 자갈루는 1958년과 1962년에는 선수로, 1970년에는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하였으며, 베켄바워는 1974년엔 선수(주장)으로, 1990년에는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하였고 데샹은 1998년 선수(주장)으로, 2018년에는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하였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포초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2번이나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다. 현재까지 모든 월드컵의 우승 팀의 감독은 모두 자국 출신의 감독이었다. 브라질의 펠레는 FIFA 월드컵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 중 최고로 월드컵 기록이 좋은 선수이다. 그가 직접 뛰어서 월드컵 우승을 3번이나 달성했는데 그 월드컵이 1958년 FIFA 월드컵, 1962년 FIFA 월드컵, 1970년 FIFA 월드컵이다. 남자 대회 여자 대회 하드웨어 하드웨어(hardware)는 다음을 가리킨다. 미니디스크 미니디스크()는 광자기 디스크의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음성 기록용 매체 저장 장치로, 소니에서 1991년에 개발해 1992년 1월 12일에 출시했다. 미니디스크에 있는 오디오 데이터는 ATRAC 코덱을 쓴다. 일반적인 ATRAC압축으로 음질이 가장 우수하며 74분 또는 80분의 재생 시간을 가진다. 292 kbit/s의 스테레오 음질을 제공하며 CD와의 음질 구분이 불가능 할 정도로 우수하다. 2000년에 소니에서 발표한 기술로 ATRAC3 코덱을 이용한 새로운 기록 방식이다. MDLP모드에는 LP2와 LP4가 있으며 LP2는 우수한 음질(스테레오)로 두배의 기록 (80분짜리 디스크로 160분 기록)이 가능하며 LP4모드에서는 보통음질로(스테레오) 네배의 기록 (80분짜리 디스크로 320분)이 가능하다. LP2 모드는 132 kbit/s의 스테레오 음질이며, LP4 모드는 66 kbit/s의 스테레오 음질이다. LP4 모드에서는 다소 음질이 떨어진다. NetMD는 컴퓨터에서의 음악 파일 전송을 통한 녹음 방식이며 USB를 이용한다. LP4 모드에서는 소니 NetMD레코더로 32배속의 실시간 녹음이 가능하다. 소니의 NetMD 레코더 (MZ-N10, MZ-N910와 MZ-N92)는 64배속을 지원한다. NetMD 레코더는 모두 MDLP를 지원한다. Hi-MD는 2004년에 발표된 더 진보된 미니디스크 포맷이다. HI-MD 디스크를 지원하며 기존MD에 비해 1기가라는 대용량을 지원한다. 그리고 새로운 ATRAC3Plus를 지원하여 ATRAC,ATRAC3보다 우수한 음질을 낸다. ATRAC3Plus부터는 mp3와 같은 kb기준을 지원한다. 그러나 HI-MD에선 모든 KB를 지원하지 않는 게 단점이다. 현재까지 HI-MD를 지원하는 MD는 MZ-RH10,MZ-RH1, MD-HUSB뿐이다. CD에 비해 훨씬 작은 크기로 휴대가 편하며 LP 모드를 이용하면 여러장의 CD를 하나의 미니디스크에 담을 수 있다. 또한 작은 미디어의 크기로 미니디스크플레이어에서 다른 휴대 기기에 비해 재생시간이 아주 길다. 따라서 녹취용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MD레코더 끼리의 복사가 용이하다. NetMD가 아닌 경우 기록하는 시간이 재생 시간 만큼 소요 되며 광출력(Optical_Output)이 지원되는 오디오나 CD플레이어가 필요하다. 2000년 전후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용자가 있었으나 MP3 플레이어에 뒤졌으며 NetMD를 출시하여 전송시간을 최대한 단축시켰지만 정작 용량문제와 가격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HD-MD를 발표하여 용량을 1기가로 하였으나 가격부분에선 여전히 고가여서 가격 경쟁력이 없었고 내구성에서도 MP3에 비해 뒤셨기에 결국 그 사용자가 적어지고 소니에서도 MZ-RH1이란 MP3까지 지원하는 최후의 MD를 내놓고 이후 신형 MD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자 사자(獅子, lion)는 식육목 고양이과 표범속으로 분류되는 포유동물이다. 현존하는 고양잇과 동물 중에서 호랑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종이다. 사자는 흔히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며, 고양잇과 동물 가운데 사자만이 무리를 지어 산다. 사자무리를 ‘프라이드’라고 하는데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암컷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습성으로 인하여 수사자는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왕권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아종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인들이 흔히 아프리카사자라고 하면 지칭하는 종인 마사이사자는 수컷이 몸길이 185cm, 꼬리길이 90cm, 몸무게 185kg, 어깨높이는 110cm에 이르며, 암컷이 몸길이 155cm, 꼬리길이 80cm, 몸무게 125kg, 어깨 95cm로 수컷은 암컷보다 훨씬 크다. 몸통이 짧고 다리가 길며, 배가 달라붙어 있어 달리기에 적당하다. 수컷은 1년 반이면 목에 특유의 갈기가 나기시작하고, 4년이지나면 더욱 풍성해진다. 또한 암컷은 어릴 적 반점이 약간 남아있다. 크고 두꺼운 발에는 먹이를 할퀴고 꿸 수 있는 구부러진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발에 있는 발톱집으로 들어가 있어 항상 날카롭게 유지된다. 이는 30개이며, 큰 송곳니 4개로는 먹이를 물어 죽인다. 사자는 대부분 무리지어 생활한다. 한 무리는 성숙한 젊은 수컷 1-3마리와 암컷 10마리, 늙은 암컷 5마리, 덜 성숙한 암컷 2마리,덜 성숙한 수컷 1마리, 한 살 이상의 새끼 1-2마리, 한 살 이하의 새끼 1-5마리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프라이드(pride)라고 한다. 프라이드는 거의 일정한 행동권을 갖는데 보통 40-50km 반경에서 이루어진다. 프라이드 가운데 가장 큰 프라이드를 슈퍼프라이드라고 부르는데 약 30마리로 구성된 것도 알려져 있다. 사자의 무리는 슈퍼프라이드 규모라 해도 완전히 성숙한 수사자는 오직 우두머리의 역할을 하는 1마리 뿐이다. 수사자는 하루에 20시간을 자거나 쉬면서 보낸다. 반면 암사자들은 하루종일 사냥한다. 큼직한 먹이로 포식을 했을 때는 꼼짝 않고 24시간 내내 쉰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아서 24km나 가기도 한다. 사자는 자신의 텃세권 안에서 낯선 사자가 사냥하지 못하게 한다. 수사자들은 덤불에 냄새가 나는 분비물을 배설하는데 3-4주 가며, 또 포효함으로써 영역을 알리고 침입자에게 나가라고 경고한다. 보통 포효는 8km까지 전달된다고 한다. 분비물은 3-4주 간다. 그러면 침입자는 이미 주인이 있는 영역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경고를 무시하고 나가지 않으면, 침입자가 죽는 경우도 생긴다. 사자는 일부다처제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사자의 무리에서 장성한 수사자는 단 한마리 뿐이다. 이 때문에 장성한 수사자는 무리에서 이탈하여 다른 사자무리의 수사자를 공격한다. 수사자의 경우 포유류 중에 유난히 잠이 많아 사냥은 암사자들이 대신 담당하면서 수사자는 암사자들이 갖다 바치는 사냥감으로 살아간다. 한마디로 수사자는 포유류 중, 가장 게으르다고 볼수있다. 수사자는 무리의 우두머리일 경우 다른 수사자와의 힘겨루기를 할 때만 그 용맹성을 보인다. 무리에 침입한 수사자가 기존의 리더였던 수사자를 상대로 이기고 집단을 가로채면 태어난 새끼사자들을 모조리 물어 죽인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사자의 25%가 새로 우두머리가 된 수사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수명은 약 9~13년이다. 인간기준으로 54세~78세다. 다만 숫사자는 9년에서 11년 암사자는 11년 에서 13년 정도 산다. 사냥은 낮에도 하지만 주로 밤에 하는데 낮보다는 먹잇감을 쉽게 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사자는 주로 검은꼬리누, 톰슨가젤, 임팔라 등의 영양류와 얼룩말, 혹멧돼지, 아프리카물소, 기린 등을 잡아먹고 아시아사자는 멧돼지, 아시아물소, 액시스사슴, 삼바사슴, 닐가이영양, 인도영양, 네뿔영양 그리고 가축을 잡아먹으며, 유럽사자는 멧돼지, 붉은사슴, 다마사슴, 유럽노루, 샤모아, 유럽들소 등을 잡아먹는다. 시속은 보통 50km로 달리지만, 최고 속도는 80km에 이른다. 추적거리는 100~200m이다. 사자는 굶주린 상태와 배가 아주 부른 상태를 반복한다. 일 주일 동안 먹이를 잡지 못할 때도 있으나 대개 3-4일에 한 번씩 먹을 것을 잡아서 배가 부르도록 먹는다. 죽인 먹이를 그늘진 곳으로 끌고 가기도 하는데, 한 마리의 사자가 270kg이나 되는 얼룩말을 끌고 갈 수 있다. 무리가 모여 함께 먹이를 먹는데, 우두머리인 수사자의 몫은 항상 보증되어 있는 반면 나머지 구성원들은 자기의 몫을 차지하려고 서로 으르렁대거나 위협한다. 몸집이 큰 동물은 대체로 사자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인 시속 80km보다 빠르기 때문에 잡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자는 먹잇감에 몰래 접근하여 기습해야 한다. 일단 사냥감을 고르면 그것을 가만히 살피다가 순식간에 덮친다. 땅에 납작 엎드려서 몸을 숨기고 천천히 먹잇감으로 다가간다. 약 15m 정도 거리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달려나가 엉덩이나 옆구리, 아니면 머리를 꽉 물고 땅에 쓰러뜨린다. 암사자들은 임신하지 않는 이상 거의 매달 2~3일간 발정하며, 발정시 15분에 한 번씩 짝짓기를 한다. 이렇게 짝짓기를 매우 자주 하는 이유는 바로 사자의 수정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이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낳은 새끼 사자 다섯 마리중 한마리 꼴로 성체가 될 때 까지 생존하기 때문에, 한 마리의 사자를 낳아 성체까지 키우기 위해서 평균적으로 수사자는 3천번 이상의 짝짓기를 해야한다. 사자가 수정하기 힘든 이유는 사자수가 줄어들어 근친 교배가 많아지면서 사자들이 점점 약해졌다고 학자들이 말한다. 암사자는 짝짓기를 한 후에 누워서 뒹구는데 이런 행위는 정자가 깊숙이 들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암사자가 사랑을 구할 때도 이런 행위가 동물학자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학자들이 초음파를 사용하여 조사한 것에 근거하면 암사자는 자궁이 고양이의 자궁보다 4배의 근육이 있어서 사냥시에 배아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충격흡수력이 매우 뛰어나다. 태아 사자는 사냥에 필요한 기술을 자궁속에서 연습할 정도로 발차기 동작 등이 특이하다고 한다. 임신 기간은 100일이며, 최대 6마리를 낳는다. 건기에는 강가의 덤불에서, 우기에는 약간 높은 바위 뒤에서 새끼를 낳는다. 새끼의 몸길이는 약 20cm, 꼬리길이는 약 10cm, 몸무게는 1.0~1.5kg 정도로, 2~3주가 지나면 완전히 눈을 뜨고, 8~10주 동안 젖을 먹는다. 3주가 지나면 걸을 수 있고, 4~5주가 되면 움직이는 것을 따라다거니거나 장난을 치며, 5~7주가 되면 어미 뒤를 따라다니게 된다. 이때 어미는 새끼를 자신이 잡은 먹이로 데려가 처음으로 고기를 맛보게 한다. 새끼가 혼자 사냥할 수 있는 나이인 18~24개월이 될 때까지 어미는 다른 새끼를 낳지 않는다. 사자는 때로 새끼를 버리기도 하는데, 먹이가 부족하면 어미만 먹고 새끼는 굶긴다. 그러면 새끼는 일년안에 절반 정도만 살아 남는다. 새끼는 2세 정도면 독립을 하는데, 암컷의 경우, 무리에서 독립하는 시기가 늦고 위기일때에는 가까운 무리를 잡아 도움을 받는 반면, 수컷의 경우는 독립시기가 매우 이를 뿐 아니라 행동반경이 매우 넓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잦다. 4세가 되면 성적으로 완전히 성숙한다. 이 때가 되면 우두머리 숫사자가 아들들을 쫓아내어서 새로운 암컷을 만나게 한다. 이들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수컷과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사자는 영구적으로 이용하는 굴이나 둥지가 없으므로 어미는 새끼들을 안전한 장소로 한 마리씩 입으로 물어다 옮기는데, 어미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하이에나, 표범, 다른 숫사자들이 새끼들을 노린다. 건기에 새끼들의 70%가 죽는다. 숫사자와 암호랑이를 교배하여 얻은 새끼를 라이거라고 한다. 최근 인간에 의해 임시적 만들어진 라이거는 보통 호랑이의 40%가 더 크다. 큰 이유에 대하여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억제 성장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사자들은 암사자보다 힘은 월등하게 세며 둘이 맞대결을 시킬 경우 수사자가 압승하지만 몸이 크고 느려서 동물을 사냥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냥의 몫은 암사자들의 역할이다. 암사자들은 새끼를 낳은 자신의 자식만 기를 뿐아니라, 다른 어미의 새끼들에게도 젖을 먹여 기른다. 교육도 모든 새끼들에게 하며 매우 관대하다. 수사자는 영역을 돌보면서 자신의 왕국을 지킨다. 교배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후손을 만들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며 젊은 수사자들은 공동체를 떠나 다른 왕국의 늙은 수사자들을 몰아내고 그 수사자들의 새끼는 죽이고 자신들의 후손을 번식시킨다. 수명은 암사자보다 짧다. 수사자는 새끼들을 거의 돌보지 않지만, 위기일때 돌본다. 다른 수사자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경우 새끼들을 물어죽이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수사자들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수사자와 싸울 때 최고의 용맹을 보인다. 사자의 아종은 일반적으로 11종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각 아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용감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자를 사냥했다. 괴력을 가진 역사(力士)의 경우는 무기도 없이 혼자 사자를 죽이기도 했다. 아주 최근까지도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 전사들은 맨발로 사자를 추격하여 여러명이 창을 가지고 사냥하기도 했다. 사자는 사람과 맞닥뜨리는 것을 피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거나 공격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의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화가 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는 사나워진다. 실험에 의하면 사자에게 처음 오는 사람이 약 50m 정도까지는 사자가 경계를 하지 않지만 점점 가까이 갈수록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몇 m 안에 접근하면 즉시 공격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유럽, 서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 사자가 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수천 마리의 사자를 죽였고 이제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북부에는 살지 않는다. 인도의 기르숲에 약 200마리가 살고 있을 뿐이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 중부와 남부의 동쪽지역에도 살고 있지만, 대부분 사냥꾼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국립공원과 보호구역에서 산다. 또한 사람들은 사자를 길들여 서커스 공연 등에 이용한다. 새끼 사자는 쉽게 길들일 수 있으며, 어릴 때는 귀여운 애완동물이 된다. 그러나 자라면 집에서 기르기는 위험하다. 몇몇 사자들은 사람을 먹이로 삼아 잡아먹기도 하는데 특히 아프리카 차보의 사자들이 유명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루카스 토마스라는 청년이 사자를 때려잡겠다며 사자우리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 "채식하는 사자 리틀 타이크"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실화 속에 나오는 사자는 특이하게도 고기를 절대 먹지 못하며, 자기가 살고 있는 목장에서 자기보다 약한 다른 동물들과 평화롭게 지낸다. 사자의 로망스어 이름은 대부분 비슷하다. 모두 에서 파생되는데, , , rw 역시 서로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리고 사자는 칼 폰 린네의 18세기 말 작품, 《Systema Naturae》에서 Felis Leo라고 묘사된 많은 종(種)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사자의 학명 Panther Leo는 그리스어 Pan-(모든) ther(짐승)이란 뜻으로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지 민간 어원이란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비록 어떤 고전적인 언어에서 Panther Leo가 파생됐는지는 모르지만 Panther은 동아시아에서 유래된 "희끄무레한 동물", 또는 "누르스름한 동물"을 뜻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어의 사자(獅子)란 이름은 중국어 한자표기를 거쳐 들어온 것이지만, 중국어가 어원은 아니다. 뒤에 붙는 子는 홑음절로는 의미전달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없이 음절을 늘려주는 접미사로 붙은 것이며, 사자의 사(獅)란 한자는 개사슴록변에 스승 師가 결합된 형성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의미요소를 갖는 부수를 덧붙임으로서 師의 의미를 한정하기 위함이다. (사자가 처음 중국에 알려진 문헌을 확인하면 처음에는 이를 표음하여 師로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사자는 서역을 거쳐 들어왔는데, 현대 페르시아어에서는 사자를 Shir (شیر)라고 함으로 이것의 음역으로 생각되고 있다. 다만, 현재 페르시아어의 직계 조어에 해당하는 언어라기보다는, 이란어군에 속하는 언어 가운데 하나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자 화석은 적어도 350만년 전부터 있었던 화석이다. 한편 한반도에서도 사자가 서식하였는데 구석기시대의 동굴 유적에서 사자의 화석이 발견된다. 한반도의 사자는 아프리카사자가 아니라 동굴사자와 비슷한 종류인 것으로 보고 있다. 구약성서의 내용중 삼손이 사자를 때려잡은 내용이 있다. 인도의 국장도 '사자'이며 부처를 상징하는 상징물로도 표현된다. 1994년 라이온킹에서 나온 사자는 사자의 아종인 바바리사자를 모티브를 했다. 물론 주인공인 심바도 그 중 하나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해리포터가 속한 그리핀도르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구약성서의 사사기에 따르면, 삼손이 사자를 때려잡았다고 한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겁이 많은 사자가 용기를 찾으러 도로시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이 있다. 사자는 대개 용기와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스택 스택()은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나열 구조이다. 그 접근 방법은 언제나 목록의 끝에서만 일어난다. 끝먼저내기 목록(Pushdown list)이라고도 한다. 스택은 한 쪽 끝에서만 자료를 넣거나 뺄 수 있는 선형 구조(LIFO - Last In First Out)으로 되어 있다. 자료를 넣는 것을 '밀어넣는다' 하여 푸시(push)라고 하고 반대로 넣어둔 자료를 꺼내는 것을 팝(pop)이라고 하는데, 이때 꺼내지는 자료는 가장 최근에 보관한 자료부터 나오게 된다. 이처럼 나중에 넣은 값이 먼저 나오는 것을 LIFO 구조라고 한다. 이를테면, a부터 b와 c를 순서대로 넣은 다음 자료를 하나씩 꺼내면 c부터 b와 a의 순서로 나오게 된다. S를 스택, x를 데이터 요소(element)라고 하자. 그러면 스택에서는 아래와 같은 중요한 연산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스택연산을 목록(list) 연산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컴퓨터에서 포인터라고 하는 자료의 위치 표시자와 넣고 빼는 명령어를 사용해서 스택을 이용한다. 주로 함수를 호출할 때 인수의 전달 등에 이용된다. LIFO의 특징을 이용하여 역폴란드 표기법을 이용한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스(Forth) 등에서도 이용된다. 아키텍처 수준에서 스택을 사용하는 것은 메모리의 할당 및 접근 수단을 의미한다. 역폴란드 표기법 역폴란드 표기법(RPN, reverse Polish notation) 또는 후위 표기법(후치 표기법)(後位 -, postfix notation)은 연산자를 연산 대상의 뒤에 쓰는 연산 표기법이다. 예를 들어, 중위 표기법에서 "1 + 2"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식은 역폴란드 표기법으로는 가 된다. 또한, (2 + 3) * 4를 역폴란드 표기법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방식은 수식을 계산할 때 특별한 변환이 필요없이, 수식을 앞에서부터 읽어 나가면서 스택에 저장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중위 표기법에서는 연산자의 우선순위가 모호해서 괄호가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역폴란드 표기법에서는 그러한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쉽게 이해하거나 계산하기 힘들다는 문제점이 있어 눈에 보이는 표기보다는 주로 프로그램 내부의 표기법으로 사용한다. (3 + 5) * (4 + 2)를 역폴란드 표기법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이 식은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포유류 포유류(哺乳類) 또는 젖먹이 동물, 젖먹이 짐승은 척삭동물문의 한 강인 포유강(Mammalia)에 속하는 동물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암컷에게는 새끼에게 양분을 공급할 젖을 만들어내는 유선이 있다. 대부분 몸에 털이 나 있고, 털이 변형된 비늘이나 가시가 있는 것들도 있다. 뇌에서 체온과 혈액 순환을 조절하는 온혈동물이다. 생물 분류 방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29목 153과 1200속 약 5400종에 이르는 동물을 포함한다. 사족상강 (Tetrapoda)에는 다음과 같은 동물이 있다. 한국에 서식하는 포유류는 약 8목 80종이다 식육목 식육목(食肉目)은 260여종의 포유류를 포함하는 목이다. 대왕판다와 애기판다만이 예외적으로 초식동물이고 곰과 너구리가 잡식 동물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종이 거의 육식만을 하는 육식동물이다. 식육목 동물에는 고유한 두개골 모양이 있으며, 송곳니와 열육치(裂肉齒)가 발달해 있다. 이들은 동물을 잡아먹기에 알맞게 눈, 코 등의 감각 기관이 발달되어 있으며, 지능이 높고 행동이 빠르다. 전통적인 분류법으로는 열각아목(裂脚亞目)과 기각아목(鰭脚亞目)으로 나뉘었다. 열각아목은 땅에서 사는 육식동물이며 개상과와 고양이상과로 나뉘었다. 기각아목은 물개아과, 바다표범, 바다코끼리를 포함했다. 유전적인 관계에 따라 밝혀진 새로운 분류법에 따르면 식육목(食肉目)은 미아키스아목과 개아목과 고양이아목으로 나뉜다. 기각아목은 개아목에 포함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서는,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사향고양이과의 동물과 몽구스과의 동물이 공통된 조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을 마다가스카르식육과로 합쳐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식육목 고양이과 고양이과()는 식육목 동물 중에서도 가장 육식성이 강한 동물들의 과이다. 진화학적으로는 사향고양이과, 하이에나과, 몽구스과에 가깝다. 첫 고양이과는 4000만 년 전 에오세에 출현했다. 기원전 20~50세기 경에 길들여진 집고양이가 있고, 이의 야생종이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 서식하고 있다. 현존하는 종은 39종이다. 고양이과 동물로는 사자, 호랑이, 표범, 재규어, 치타, 살쾡이, 퓨마 등이 있다. 대부분 고양이과 동물들은 물을 싫어하는 습성이 있지만 호랑이, 재규어는 예외다. 호랑이는 유일하게 수영을 즐기고, 물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산초나무 산초나무(山椒--, 학명: "Zanthoxylum schinifolium", , )는 운향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산초나무의 열매는 분디 또는 산초라고 부른다. 낙엽이 지는 관목으로서 높이는 3m 가량이다. 갈라진 가지에는 1쌍의 가시가 있으며, 잎은 5-9쌍의 작은잎으로 이루어진 깃꼴 겹잎으로 어긋나는데, 이때 각각의 작은잎은 달걀 모양이나 피침 모양이다. 암수딴그루로서, 수꽃과 암꽃 모두 취산꽃차례를 이루면서 가지 끝에 달린다. 각각의 꽃은 황록색으로 작으며, 5개씩의 꽃받침조각과 꽃잎을 가지고 있다. 열매는 삭과로 5mm 정도인데, 10월경에 붉게 익으면 벌어진다. 주로 산기슭의 양지에서 잘 자라며, 한반도 각지에 분포한다. 열매는 기름을 만드는 원료로 쓰고 식용 또는 약용한다. 동의보감에서는 진초(秦椒, 분지)라고 하며, 그 유래와 효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쓰촨 요리에서 매운맛를 내는 화자오의 일종이다. 쓰촨 요리에는 산초(Zanthoxylum schinifolium) 외에도 다른 초피나무속 열매(Zanthoxylum simulans, Zanthoxylum bungeanum)가 쓰인다. 초피나무와 열매가 비슷하여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서로 다른 식물이다. 초피는 과실을 가루로 내어서 향신료나 약재를 이용하는 것이 목적이고, 산초는 기름을 짜서 먹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약재로 이용할 때는 초피도 기름으로 짜기도 한다. 초피나무는 가지가 짧고 옆으로 자라면서 큰다. 반면, 산초는 가지가 길게 위쪽으로 뻗는다. 산초나무의 가시는 아주 많으며, 하나씩 나는 것이 특징이며, 초피나무는 두 개의 가시 사이에 잎이 난다. 나무 색도 초피에 비해서 진하고 줄을 그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반면 초피는 가시가 조금 적고 수피의 색도 연하며, 줄무늬가 아니라 점무늬이다. 산초 산초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초피나무속 초피나무속은 운향과에 속하는 속이다. 이문세 이문세(李文世, 1959년 1월 17일 ~ )는 대한민국의 방송MC이자 가수 겸 작사가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978년 CBS 세븐틴 MC를 맡으며 방송MC로 데뷔했다. 데뷔 초 타고난 입담과 함께 1970년대 한국음악의 근간이 되었던 통기타 포크 팝 음악 분야에서 1980년대 팝 발라드 음악계로 넘어오자 1983년, 발라드 가수로서의 정식 음악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수로서의 활동에도 첫발을 내디딘다. 이문세는 1983년 《나는 행복한 사람》, 1984년에는 2집 《파랑새》를 발표하고 젊은 층에게 인지도를 쌓아간다. 그의 가수로서 성공은 1985년 당시 작곡가 이영훈을 만나게 되면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이영훈과 함께 준비한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곡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그해 방송 순위 1위에까지 오르며 인기 가수 대열에 오른다. 이때부터 이문세-이영훈의 콤비는 80년대의 가요계에 팝발라드 물결이 일게 했다. 1987년에 발표한 4집 수록곡 중 대다수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발라드가수로서 인기를 확고히 했다. 1993년 이제까지 자신의 음악 동반자였던 이영훈과 결별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런 변신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가요계의 판도변화와 인기장르의 변화 탓인지 예전의 명예를 지닌 가수만으로 인식하는 하강곡선을 타지만 이문세는 가수 활동 중에도 다른 분야의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가수이자 음악가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 큐 (자료 구조) 큐()는 컴퓨터의 기본적인 자료 구조의 한가지로, 먼저 집어 넣은 데이터가 먼저 나오는 FIFO ()구조로 저장하는 형식을 말한다. 영어 단어 는 표를 사러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로 이루어진 줄을 말하기도 하며, 먼저 줄을 선 사람이 먼저 나갈 수 있는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나중에 집어 넣은 데이터가 먼저 나오는 스택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프린터의 출력 처리나 윈도 시스템의 메시지 처리기, 프로세스 관리 등 데이터가 입력된 시간 순서대로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이용된다. 큐는 put(insert)와 get(delete)을 이용하여 구현된다. put는 큐에 자료를 넣는 것을, get은 큐에서 자료를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 front(head)와 rear(tail)는 데이터의 위치를 가리킨다! front는 데이터를 get할 수 있는 위치를, rear은 데이터를 put할 수 있는 위치를 의미한다. 또, 큐가 꽉 차서 더 이상 자료를 넣을 수 없는 경우(put 할 수 없는 경우)를 오버플로우(Overflow), 큐가 비어 있어 자료를 꺼낼 수 없는 경우(get 할 수 없는 경우)를 언더플로우(Underflow)라고 한다. 큐에는 선형과 환형이 있다. 막대 모양으로 된 큐이다. 크기가 제한되어 있고 빈 공간을 사용하려면 모든 자료를 꺼내거나 자료를 한 칸씩 옮겨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다음은 선형 큐의 작동 방식이다. DATA : A B C D E 선형 큐의 문제점(배열로 큐를 선언할시 큐의 삭제와 생성이 계속 일어났을때, 마지막 배열에 도달후 실제로는 데이터공간이 남아있지만 오버플로우가 발생)을 보완한 것이 환형 큐이다. front가 큐의 끝에 닿으면 큐의 맨 앞으로 자료를 보내어 원형으로 연결 하는 방식이다. 원형 큐라고도 한다.
DATA : A B C D E 연결 리스트로 구현한 큐는 연결 리스트를 사용한 것으로써, 큐의 길이를 쉽게 늘릴 수 있어 오버플로우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필요에 따라 환형으로 만들 수도 있으며, 환형으로 만들지 않아도 삽입과 삭제가 제한되지 않아 편리하다. 버트런드 러셀 제3대 러셀 백작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 , FRS, 1872년 5월 18일 ~ 1970년 2월 2일)은 영국의 수학자, 철학자, 수리논리학자, 역사가, 사회 비평가 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이자 지성인으로 여겨진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일생의 여러 부분에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순으로 자신의 이상을 생각해왔으나, 자신이 이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나, 그는 웨일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러셀은 1900년대 초반 "관념론 반대운동(revolt against idealism)" 을 일으켰으며, 그의 선배 프레게,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꼽히며, 20세기의 선두 논리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저술했으며, 이는 수학을 이용해 논리학의 기틀을 닦고자 한 시도이다. 그의 철학 에세이 〈〉은 "철학의 패러다임" 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저술은 논리학, 수학, 집합론, 언어학, 철학중에서도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었다. 러셀은 당시 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지지했으며, 반제국주의 운동가로도 활약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주의자, 전체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핵무장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했다. 1950년, 러셀은 "인본주의와 양심의 자유를 대표하는 다양하고 중요한 저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1872년 5월 18일 러셀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존 러셀 백작의 손자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러셀의 가문은 몇 세기 전 튜더 왕조가 세워지며 권력을 얻어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을 세운 가문이었으며, 영국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 1536~1540년의 수도원 해체, 1688~1689년 명예 혁명과, 1832년 에 참여하였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 정치사상이 극단적인 쪽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 과 자신의 아내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 아버지 존 러셀의 무신론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러셀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지만, 그의 저술은 러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러셀에게는 프랭크와 레이첼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으며 이중 레이첼은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을 떠났다. 1876년에는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프랭크와 버트런드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할아버지 존 러셀은 1878년 세상을 떠났는데, 러셀은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탄 친절한 할아버지로 기억했다. 유년기의 대부분동안 러셀은 할머니 러셀 백작부인의 돌봄을 받았다. 당시 러셀 백작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 사상을 지지했으며,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회정의에 대한 시각을 키워주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인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3:2/새번역성서)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러셀이 살던 도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러셀의 형 프랭크는 저항적이었으며, 러셀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할머니는 공교육에 반대해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초빙해 가르쳤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러셀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공포를 느꼈다. 러셀의 사춘기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의 형 프랭크는 러셀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쳐, 러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러셀은 퍼시 비시 셸리의 저술을 찾게 되었다. 자서전에 그는 "나는 내 생각이나 기분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서, 모든 여가 시간을 그의 저술을 읽으며, 마음 깊이 새기는 데 보냈다. 나는 셸리의 저술을 알게 된 것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느꼈으며, 내가 인간으로서 그를 만났다면 큰 동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기록했다. 15세가 되며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가 합당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18세에 그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러셀은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조지 에드워드 무어와 아는 사이가 되었으며, 화이트헤드에게 비밀 동아리 를 추천받으며 영향을 받는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893년 학교를 으로 졸업하고 1895년 선임연구원(Fellow)이 된다. 러셀은 17세에 처음으로 퀘이커 교도였던 와 만났으며, 그녀의 가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러셀이 존 러셀 백작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후 러셀과 같이 대륙을 돌며 여행하기를 즐겼다. 그들과 함께 러셀은 에 참가해 당시 갓 건축된 에펠 탑에 올라 본다. 이후 그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앨리스와 사랑에 빠지며,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년 12월 13일 결혼했다. 그러나 둘은 1901년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러셀이 앨리스에게 자신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며 파경에 빠진다. 러셀은 앨리스의 어머니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려고 하였기에 싫어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21년까지 별거하며 형식적으로만 부부로 남아있다가 이혼했다. 이 기간동안 러셀은 과 배우 등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에 빠졌다. 러셀은 1896년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그는 1937년 이곳에서 다시 '권력의 과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는 1902년 페이비언 협회의 시드니 웨브와 가 세운 다이닝 클럽 (Coefficients)에서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의 기초를 뒤흔드는 러셀의 역설을 발견한다. 1903년 그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 번째 저작인 《》를 발간하며, 여기서 수학은 매우 적은 수의 공리에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 논리주의의 주장에 큰 근거를 실어준다. 1905년에 그는 철학 저널 《》에 에세이 〈On Denoting〉을 싣고, 1908년 왕립 학회 회원이 된다. 이후 1910년 《수학 논리》 1권을 화이트헤드와 함께 출간하며 수리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10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러셀은 그를 천재이자, 자신의 논리학의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러셀은 많은 시간을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우울증을 돌봐주는데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상당히 러셀의 기력을 소모했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했으며, 1922년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저작 중 하나인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1918년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셀은 몇 안되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1916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되었고,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내기 거부했으나, 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압수된 서적은 러셀의 친구들이 구매했으며, 러셀은 "케임브리지 경찰에 의해 압수됨" 이라는 낙인이 찍힌 킹 제임스판 성경을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이후 미국이 영국편으로 참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강연을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서는 브릭스튼 감옥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1918년 9월 석방되었다. 러셀은 1919년 대학교에서 복직되었으나 1920년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1926년 특강 'Tarner Lecture'의 강사를 잠시 맡았다. 이후 1944년부터 1949년까지는 선임 연구원(Fellow)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러셀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1920년 영국 대표단에 뽑혀 갔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1시간에 걸친 토론을 했으며, 회고록에서 레닌의 "악마적인 잔인성"을 발견했고, 레닌의 성품을 "독선적인 교수"에 비교하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후 증기선을 타고 볼가 강을 내려가기도 했다. 당시 러셀의 연인이었던 도 러셀과는 별개로 러시아를 같은 시기에 방문했는데,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하지만 러셀의 경험은 이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게 했고, 자신의 경험을 《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에서 회고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때 동료 24명이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대해 반대 의견으로 설득하려고 한 이야기를 싣는다. 일례로, 러셀은 오밤중에 들은 총성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비밀경찰의 총살이라고 주장하지만, 동료들은 자동차 엔진 소리였을 거라고 흘려듣는 장면이 있다. 이후 러셀은 베이징에서 1년간 도라와 함께 철학 강의를 했다. 러셀은 그곳에 희망을 품고, 중국이 새로운 궤도에 올랐다고 보았다. 당시 그곳에 있던 학자들 중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있다. 중국에 머무르는동안, 러셀은 천식으로 심하게 고통받았는데, 일본 신문에는 그의 사망설이 돌았다. 이 커플이 일본을 방문할 때, 도라는 "일본 신문에서는 죽은 버트런드 러셀씨는 일본 기자들께 인터뷰를 하실수 없답니다."라고 응답했는데, 당시 일본 언론은 이 응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21년 8월 26일 귀국 당시 도라가 임신 6개월 차였기에, 러셀은 이혼을 서두르고 1921년 11월 27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21년 훗날의 제4대 러셀 백작이 되는 아들 와 딸 이 태어났다. 러셀은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윤리학, 교육학 서적을 출판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이 당시 러셀이 T. S. 엘리엇의 부인이었던 와 정사관계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러셀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전 세계에 걸친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아 나치 독일에 대한 재무장을 반대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전 유럽을 장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영구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에, 1940년에는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1943년 그는 "정치적으로 상대적인 평화주의(Relative Political Pacifism)"를 제창한다. 전쟁은 언제나 거대한 악행이지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체제와 같은 특정하고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덜 나쁜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4년 귀국하여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선임연구원(Fellow)으로서 강의를 하였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 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 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 운동을 벌였다.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기독교 비평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수학 원리》를 통해 수리 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하였다. 철학·정치·교육·인생 등에 관한 평론도 있다. 주요 저서로 《수리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철학사》, 《권력》 등이 있다. 러셀의 철학사상은 흔히 지적되듯이 발전적이며 자주 변하였으나 그 기초가 되어 있는 철학에서의 분석적 방법은 일관되어 있고 이에 의해서 과학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 방법을 토대로 영국 경험론의 전통 위에 선 인식론을 전개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처음에는 대학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헤겔적인 절대정신만을 참된 실재라고 하는 관념적 일원론의 입장에 지지했으나 그것이 수학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이 입장을 버리고 그 반동으로서 이번에는 많은 존재물을 인정하는 다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철학의 문제들》(1912)에서는 개체와 보편, 감각과 물체를 함께 인정하는 이원론적·플라톤적 실재론의 입장에 지지하였다. 《외부 세계의 인식》(1914)에서는 감각소여(感覺所與, 센스 데이터)만을 확실한 것으로 보고, 사물은 감각소여로부터 논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명한 견해에 도달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입장을 논리적 원자론이라고 불렀는데 《정신의 분석》(1928)에서는 감각도 물체도 아닌 중립적인 것을 참된 존재로 보는 중성적 일원론(中性的 一元論)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러셀은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선구자적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20세기 초에는 헤겔에 영향받은 이상주의에 반대했고, 30년 뒤에 이는 비엔나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에 의해 형이상학 반대를 반복했다. 러셀은 근대 수리 논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러셀이 자신의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러셀의 첫 수학에 관한 책은 《기하학기초론에 관한 에세이(An Essay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이다. 이 작품은 칸트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러셀은 자신의 책이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스키마를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칸트의 수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최초의 작업에 대해 거의 중요성 없다는 평가를 했다. 그는 또한 1+1=2를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큐 큐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다. Q Q, q( )는 라틴 문자의 17번째 글자이다. Q는 원숭이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 다음은 모두 외래어휘(Qatar, Iraq)를 q는 라틴문자이고, 인구어족에서는 영어를 포함한 라틴계 언어에서만 쓰이기 때문에 반드시 뒤에 u를 붙인다. 불어에서 특히 ㄱ받침을 위해 que를 쓰기 시작 했다. ☞영어와 독일어에선 ck위주로 사용된다. ※라틴계 언어는 c와qu가 바탕이 되어 기본적으로 사용 되고, 나머지는 k가 사용된다. 그래서 영어는 상당히 같은 비율로 섞어 사용. 1979년 1979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러시아의 가수 비타스(비탈리 블라다소비치 그라초프) 1978년 1978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ISO 4217 ISO 4217은 제정된 통화의 이름을 정의하기 위한 3문자의 부호(통화 코드라고도 알려짐)를 기술하는 국제 표준화 기구(ISO)가 정의한 국제 기준이다. 1973년에 ISO 기술 위원회 68은 무역, 상업, 은행업에 적용하기 위한 통화, 기금을 대표할 코드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1978년 2월에 UN/ECE 전문가 그룹은 국제 표준 ISO 4217의 세 개의 알파벳 코드가 국제 무역에 적당하다는 데에 뜻을 모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통화 코드가 만들어졌으며 오래된 통화 코드는 중단되었다. 정부가 새로 들어선다든지, 국가간 통화 조약의 표준화 과정,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따른 통화 재평가 등에 따라 이러한 일이 잦았다. 그 결과, 코드의 목록은 수시로 갱신되었다. ISO 4217 MA는 이 코드 목록을 관리할 책임을 진다. 다음은 공식 ISO 4217 통화 이름의 유효한 코드 목록이다. 바벨탑 바벨탑은 구약성경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실제로 만들어진 탑이다. 창세기 11장에 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인류가 쓰는 동일한 언어와 이에 따른 일종의 타락과 비극을 주제로 하고 있다. 피터 브뤼겔 히브리 신화에서는 거인족인 네피림이 바벨탑을 건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 바벨탑은 사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으로 아직도 논란이 많은 전설상의 바벨탑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의 '바빌론 포로(기원전 586~538)'에서의 귀환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고국에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야훼 신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로서, 그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돈'이란 뜻이라고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bab(문)와 el(신)의 합성어라는 견해도 있다. 혼란하던 오리엔트 세계는 메소포타미아의 일대 세력이었던 아시리아에 의해 비로소 통일되었다. 아시리아인은 셈 족의 일파로서 원래 통상 민족이었으나, 기마와 전차를 보유한 군국으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8세기 말에는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 제국이라 일컬을 만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신바벨로니아의 수도 니네베는 그 웅장함과 번영을 자랑하였다. 아시리아인에게 정복당한 백성은 약탈과 모진 학대를 당하였다. 아시리아 궁전 벽에는 포로의 손발을 자르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장면, 눈을 빼는 장면 등이 새겨져 있다. 정복당한 민족은 끊임없이 반항하였다. 마침내 기원전 612년, 니네베는 이란 고원에서 일어난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영화를 자랑하던 세계 제국도 멸망하고 말았다. 아시리아 멸망 후 오리엔트 세계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외에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리디아, 그리고 다시금 독립한 이집트를 합쳐 4국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중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바빌로니아가 가장 강대해졌다.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더욱 번영했고, 웅장한 신전과 궁전 등이 하늘 높이 솟았다. 특히 바벨 탑과 공중 정원이 유명하였다. '바벨 탑' 이야기는 구약성서 창세기 제11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바벨 탑은 바빌론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지구라트(신을 제사하는 성탑)와 관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유적으로 보이는 바벨탑은 90미터 사방에 90미터 높이로 세워져 있는데 구약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로 기록되어 있는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한 신바벨론의 바벨탑으로 알려져 신빙성을 갖는다. 먼저 여자들이 바벨탑의 각 방에 들어가서 발가벗은 상태로 애곡을 하면, 남자들이 그 방을 들어가서 맘에 드는대로 선택해 교합을 한다. 그렇게 한번 마친 후에도 또 애곡을 할 수도 있고, 집으로 갈 수도 있는데, 문제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여인은 그 기간이 끝나도록 애곡을 할 수밖에 없게되어 후에는 법을 바꿔서 일정기간 애곡을 해도 선택받지 못하면 스스로 귀가 할 수도 있도록 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것은 신에게 선택 받지 못했다는 뜻이 되고, 또 신의 선물인 임신을 할 수 없다는 뜻에서 여인에게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울기를 계속함으로써 선택을 받은 후에 나오려고 했고, 또 이런 의식을 즐기는 여인은 계속해서 울면서 그 의식과 함께 즐길 수도 있는 의식이기도 했다. 이것이 '담무스의 애곡'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담무스의 환생을 위한 애곡이었지만, 실상은 그 방에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과, 여인이 울 때 생기는 충분한 분비물로 남자와의 교합이 원만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또 담무스에게 신의 아들을 달라는 기도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1977년 1977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76년 1976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73년 1973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기원전 1세기 기원전 1세기는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전 1년까지를 말한다.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의 나치스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이후에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대인이라고 모함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를 흐르는 인(Inn) 강변의 오스트리아 쪽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6남매 중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볼프'라는 별명도 있었다. 세무 공무원이었으나 학력이 낮았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다 한다. 어머니 클라라 푈츨(Klara Pölzl, 1860 ~ 1907)은 그의 외조카이자 후처였는데 병약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폭력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만하지 못하고 우울한 학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학과 스페인어를 제외하고는 성적은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였지만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아가 강하고 상급학교 진학 이후의 학업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나오는 유대인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아돌프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가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5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밑돌았다.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 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 옆에서 누워서 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이후 죽을 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된다. 1907년 9월부터는 비엔나에서 살다가 1913년 5월에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안타깝게도 히틀러의 이 기간 동안의 삶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삶은 자료가 거의 없다. 그저 구술증거가 전부일 뿐이다. 1907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 비엔나 예술대의 일반 미술학교에서 112명의 후보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된다. 준비해 간 미술화보집으로 79명의 응모자와 함께 2차 시험을 치르게 된다. 결국 28명만이 최종시험을 합격하게 되고 히틀러는 여기에 들지 못하게 된다. 우선 비엔나에서 살았다. 10월 24일에 가족 중 한 유대인 의사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통보한다. 히틀러는 린쯔로 다시 가게 되고, 어머니는 결국 1907년 12월 21일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사망 후에 점점 더 친척들과 멀어지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년시절의 자료에서와는 달리 비교적 고아연금으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린 그림과 우표 판매로 더 나아지는 그의 수입은 심지어 교사의 초봉보다 많았다고 한다. 한 지인의 추천서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1908년 가을 예술학교의 두 번째 응모에서 견습기간이 없이 정식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 그 다음에는 직업과 실습을 하는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히틀러는 두 번째 거절을 한 후에는 점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병역징집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1909년 7월에 룸메이트인 아우구스트 쿠비첵과 헤어진 후 숙소를 여러번 바꾸게 된다. 그 다음에 얻은 방은 시내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그는 겨우 3주 동안만 방을 얻게 되는데 그 후의 3개월 동안은 그의 거취가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그가 그 때 거주자 신고를 안한 것에 대해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10년 초에 멜데만가에 있는 남자들 기숙사로 옮긴다. 아돌프는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에 그는 종종 언론사에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었던 '볼프'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누구도 그가 볼프라는 이름으로 글을 투고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히틀러는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작품인데도, 작품성이 아니라 독재자가 그린 그림들이라는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더 관심을 받았다. 이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나치의 잔재로 인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경매에 올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남긴 작품들을 모두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월 29일에 아돌프 히틀러 작 바다의 야상곡은 슬로바키아에서 온라인 경매에 올라왔는데 한화로 4천7백만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최초경매가 1천6백만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1913년에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은 것이다. 이유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슬라브족과 유대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 당원증 제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스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도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 정치 강행,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 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으로 된 나치당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좌파와 우파 정당중에서 극단적인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 후보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 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인사 등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고,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강조하여 인기를 모은 뒤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 체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총통(Führer)이라 칭하였으며 보통 총통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년 6월 30일에는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룀을 제거한 데 이어서 바르톨로메오의 밤 사건을 일으켜 권력 등 모든 비밀을 알고 있던 전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을 제거하면서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 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민족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 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도중 중단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인구 1억명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 맺은 군사 동맹 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불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전체(중립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위스와 스웨덴은 제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영국에 패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배틀 오브 브리튼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허스키 작전에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패하고 치타델 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그의 향년이 57세였다.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독일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경제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그러나 그가 내놓은 실업 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지도자들이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단지 그 기획안을 일부 수정하여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2009년 9월 27일,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에서 미국 코네티컷 대학 고고학자이자 뼈 전문가인 닉 벨란토니 교수가 분석한 결과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은 40대 미만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벨란토니 교수가 이 두개골이 40대 미만의 여성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945년, 소련은 벙커 주변 구덩이에서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고, 이듬해인 1946년 추가발굴을 통해 히틀러의 두개골 조각을 찾아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2000년, 러시아는 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을 공개하였다. 이 때부터 벨란토니 교수는 러시아 측이 '히틀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개골의 DNA를 분석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두개골은 20대에서 40대 사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벨란토니 교수는 "두개골 두께가 남성의 것과 달리 너무 얇았으며 두개골의 봉합선도 1945년 57세였던 히틀러의 나이와 달리 40세 이하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많은 외신들은 히틀러가 진짜 권총 자살했는지 의문시 되는 검사결과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지 않았거나, 두 번째는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현재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지금까지도 히틀러가 당시 자살하지 않고 생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히틀러는 피신하여 빨라도 1960년대까지는 생존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존설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 밖에도 다른 주장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남극에 있는 비밀 기지로 도망갔다거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거주하다 1971년 사망했다거나, 아르헨티나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지구를 떠나 달로 도주했다는 등의 설들이 있으며, 그의 여러가지 생존설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유대인을 증오하게 된 배경에는 학창 시절에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 스승 때문이라는 설과 그의 어머니 클라라가 자신의 주치의인 유대인 의사와 불륜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하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증폭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그 의사는 오히려 히틀러가 죽이지 않은 몇 안되는 유대인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의사는 가난했던 히틀러의 어머니의 치료비를 많이 삭감해주었다. 유대인을 증오하는 성향과는 관계 없이 그가 유대인의 혈통을 일부 물려받았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0년 히틀러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서유럽 사람들에서는 극히 드문 M1B1a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유대인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히틀러의 가계는 근친혼이 종종 있었고,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조차도 자신의 누나 요안나의 딸이자 외조카인 클라라 푈츨과 결혼하였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히틀러에게 피부병이 있었다는 설, 정신적 장애를 앓았다는 설, 성불구자설 등이 있다. 성불구자 설로는 외형은 정상적이나 성적으로 불구였다는 설과 고환이 한 쪽 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각에는 히틀러는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 때문에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여러 여성들에게 요구했고, 자신의 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에게도 요구했으나 그녀는 수치심에 자결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공식 결혼 경력은 한 번이었으며, 그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한 명 존재했으나 행방은 미상이다. 현재 존재하는 그의 가까운 친족으로는 파울라 히틀러의 자녀들과 미국에 체류 중인 알로이스 히틀러 2세의 손자 3명, 이복 누나인 앙겔라의 손자 페트로 라우발(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의 조카)이 있다. 그 밖에 형 알로이스 2세의 아들인 윌리엄 패트릭은 아일랜드계 혼혈인이자 영국 출신으로 순혈주의자였던 삼촌을 상당히 싫어했다 한다. 그 때문에 미국 망명 뒤에도 외가의 성을 따라 '윌리엄 패트릭 스튜어트-휴스턴'(William Patrick Stuart-Houston)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여성 편력으로는 4, 5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동성애 기질도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겔리 라우발이 자살하자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성적인 모욕을 주었다, 히틀러가 비정상적인 행위를 강요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겔리 라우발의 자살설로는 히틀러가 겔리를 버리고 에바 브라운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압력 압력(壓力, )은 단위 면적당 가해지는 물량이다. 압력을 표현하는 단위는 여러가지가 있다. 모든 표현법은 단위면적당 가해지는 힘을 기본으로 나타내는데, 예를 들면 단위 제곱인치당 파운드로도 표현할 수 있다. SI 단위계로는 로 표현한다. 압력은 대기의 압력을 의미하는 기압을 표현할때도 사용하며, 1torr는 기압이다. 압력은 단위 면적당 가해지는 힘으로 정의된다. 압력의 기호로는 "P" 아니면 "p" 을 사용하는데 국제 순수·응용 화학 연합에서는 소문자 "p" 를 사용하기를 권장한다. 반면 대문자 "P" 는 보통 일률이나 운동량을 나타낼때 사용한다. 식에서 압력은 스칼라양이다. 압력은 수직벡터방향의 표면과 그 표면에 수직한 벡터방향의 힘과 관련있으며, 크기는 이 두 벡터의 크기에대해 비례한다. 힘은 표면에 들어가는 방향으로 가해지지만 수직벡터 점은 표에서 나오는 방향인 것을 고려하여 (-)부호를 붙인다. 이 방정식에서 유체와 닿아있는 면적이 S인 물체가 유체로부터 표면으로 가해지는 힘은 면적 S에 대해 면적분한 값이 된다. 압력이 "어느 방향으로 압력이 가해진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압력은 스칼라양이며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앞의 관계에서 주어진 힘은 방향과 크기가 있었지만, 압력은 아니다. 우리가 만약 압력을 받는 물체의 표면을 바꾼다면 수직한 힘의 방향은 바뀌겠지만, 압력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압력은 고체의 경계면, 액체의 경계면에 수직한 방향이나 모든 부분에서 작용한다. 이는 열역학의 기본적 매개 변수이다. 국제단위계에서는 파스칼 (Pa) 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단위 미터제곱당 뉴턴을 의미한다 (N/m or kg·m·s). 이 이름은 1971년에 지어졌으며, 그 이전에는 단순히 '단위 미터제곱당 뉴턴'으로 표현했다. 압력의 다른 표현인 '단위 인치제곱당 파운드' 나 '바' 도 흔히 쓰인다. CGS 단위계에서 압력은 '바리' (Ba) 이며, 이는 1 dyn·cm 또는 0.1 Pa 이다. 압력은 단위 제곱티미터당 그램-중량 또는 킬로그램-중량 (g/cm 또는 kg/cm) 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램, 킬로그램, 그램-중량, 킬로그램-중량을 단위로 사용하는 것은 국제단위계에서 금지되어 있다. 공학 기압 (at) 은 1kgf/cm (98.0665 kPa 또는 14.223 psi) 이다. 압력이 있는 계는 주변에 일을 할 수 있으므로 압력은 단위부피당 저장된 퍼텐셜에너지로 측정된다. 이는 저장된 에너지밀도가 단위부피당 줄(Joule)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J/m 은 Pa와 동일하다). 몇몇 기상학자들은 대기압력을 표현하기위해 헥토파스칼(hPa)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옛날에 쓰던 밀리바(mbar)와 동일하다. 비슷한 단위인 킬로파스칼(kPa)가 다른분야에선 더 자주 쓰이는데, 이는 접두어인 헥토(hecto-)는 요즘 잘 안쓰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수은주밀리미터(mmHg)가 아직도 쓰인다. 해양학자는 수중압력을 측정할 때 데시바(dbar)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바다는 수심 1m당 압력이 거의 1데시바 만큼 증가하기 때문이다. 기압(atm)은 상수로 지정되었다. 이는 지구의 평균해수면에서 보통의 대기압력이며 101,325Pa으로 정의된다. 압력은 보통 기압계 관 안의 액체의 위치에 따라 측정되기 때문에, 자주 특정 액체의 높이로 표현된다(예를 들어 수주센티미터,수은주인치, 수은주밀리미터와 같이). 보통 수은(Hg)이나 물이 채택되는데, 물은 무독성인데다가 쉽게 구할 수 있고, 수은은 밀도가 높아서 기압계의 관을 작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 작은 기압계를 만들 수 있다. 높이 "h"인 밀도 "ρ"액체가 든 관에 가해지는 압력은 정수압방정식인 "p = ρgh" 로 표현된다("g"는 중력가속도이다). 계의 중력의 크기와 액체의 밀도에 따라 관 속의 액체의 높이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액체의 높이 "h"가 압력을 바로 정해주지는 못 한다. 수은주밀리미터는 SI단위계에서 사용중인 토르(torr)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값이 거의 일치한다). 세계적으로 혈압의 단위는 수은주밀리미터로, 폐의 압력은 수주센티미터로 많이 표기한다. 네덜란드 네덜란드( , , )는 서유럽과 카리브 제도에 걸쳐 있는 네덜란드 왕국의 구성국으로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나, 정부 및 각종 행정기관이 밀집한 도시는 헤이그이다. 홀란트(Holland) 지방에서 딴 이름인 홀란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der Nederlanden)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네덜란드라는 이름도 '낮은 땅'이란 뜻이다. 이 나라는 제방(둑)과 풍차, 나무 신발, 튤립으로 유명하다. 독일, 벨기에, 그리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영국에 둘러싸여 있으며 총 면적은 4만 1000km이다. 북해에 면해 있는 국토는 라인 강(네덜란드어로는 레인 강(Rijn)), 마스 강(Maas), 스헬더 강(Schelde) 등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남서쪽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나 림뷔르흐 주에 있는 이 나라 최고 지점조차도 321m에 지나지 않는, 전체적으로 평탄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카리브 해의 해외 영토인 아루바 섬과 퀴라소, 신트마르턴, 보네르섬, 사바섬, 신트외스타티위스섬도 포함한다. 과거에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리남은 물론 본국의 100여 배도 넘는 땅인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포함되었었다. 네덜란드는 위도가 높은 곳에 있지만, 북부 지역은 북해의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해양성 기후로 1년 내내 온화한 편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는 작지만, 날씨는 변하기 쉽다. 그러나 남동부 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거칠고 기온차도 심하다. 켈트와 게르만인이 자리잡고 살던 네덜란드에 로마인이 들어와 외국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BC 50년 경이다. 남부의 마스트리흐트에 로마 시대의 요새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지배의 말기에는 프랑크와 색슨-프리스인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 네덜란드에 기독교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슬람을 막은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800년) 그가 사망(816년)한 이후, 유럽은 베르됭 조약(843년)으로 서중동 프랑크로 나뉘게 되는데, 이 때 저지대 국가는 스헬데 강을 중심으로 서쪽(현재의 벨기에)은 서프랑크 왕국에, 동쪽은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10~13세기에는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홀란트 백작이 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부르군트) 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사건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공화국(국호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1815년에 폐지되고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로 바뀐다.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인 연합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영국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욕주,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밀려나 세계의 상권을 영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1793년 2월 1일, 프랑스는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하였다.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합병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1831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을 건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의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네덜란드는 안정된 정치와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군이 이를 탄압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비난 끝에 유엔의 중재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현재는 카리브 해의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와 아루바만이 식민지의 잔재로 남아 있다. 1971년에는 맥도날드 햄버거집이 네덜란드 잔담에 상륙하였다.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행정부 장관은 총리에 의해 지명되며 14개의 행정부서가 있다. 현재의 총리는 마르크 뤼터이다. 최고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에 각 지방법원과 간이법원이 속해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법관은 최고법원과 법무장관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특별 법정에서 가린다. 상업과 교통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업과 교통은 네덜란드 경제를 주도하는 핵심 부문이다. 19세기에 북해와 라인 강을 직접 연결하는 수로가 완공된 이후, 로테르담 항구는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와 수로로 연결되어 크게 성장했다. 오늘날 로테르담 항구에는 하루 평균 100만 톤의 물자가 이동하고 있다. 20세기에 네덜란드는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식민지들을 잃었지만 여전히 경제 선진국으로 1인당 국내 총생산이 유럽 연합 회원국의 평균보다 높다. 또한 첨단 기계와 영농 기술 도입으로 농업 부문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한편 네덜란드는 복지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대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 14%인 80만 명이 실업자였고 장해연금과 조기퇴직 프로그램에 의해 노동 시장에서 제외된 근로자 수도 이와 같은 규모였다. 1986년 스웨덴의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실업상태를 더 오래 지속하는가?》를 통해 네덜란드의 고용 실패를 지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네덜란드의 경기침체는 유난히 심각했다. 많은 경제 부분이 과잉 생산의 부작용을 겪었고 25개 제조업체 중 1개꼴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만 3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없어진 일자리의 대부분이 제조업의 정규직 근로에서 발생했다. 실업자는 매달 1만 명씩 증가하여 1984년에는 80만 명까지 증가했고 노동조합들은 전체 노조원의 17%를 잃었으며 남은 노조원들 중 4분의 1이 복지 혜택의 수혜자가 되면서 노동없는 복지 상태에 이르렀다. 미취업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은 더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실업 상태에서 얻은 결론은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범국가적 인식의 확산이었다. 우선 1982년 11월 24일 바세나르에서 세계시장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바세나르 협약이란 이름의 임금인상 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빔 코크의 노동조합연맹과 크리스 판 베인의 경영자단체연합 사이에서 이뤄진 중앙협약에 의한 임금인상 억제 정책은 변화하는 해외 및 네덜란드 내 시장에서 심화되는 국제경쟁에서 네덜란드 경제를 적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조합주의가 되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사회보장체제의 전반적인 재정비가 이뤄졌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임금수준과 복지혜택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노동시장 정책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정책 변화는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1990년대 들어서 네덜란드는 1980년대 일관적인 임금인상 억제 정책, 사회의 안정화, 개혁정책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실업률을 반감시켰다고 평가받는다. 1983년 14%의 실업률을 1997년에는 6% 수준으로 내렸는데 이는 유럽 연합 평균인 11%의 실업률보다 낮은 수준이다. 미국과 같은 수준의 고용증가를 겪기도 했으나 미국처럼 급격한 빈부격차의 증가를 경험하진 않았다. 다만 이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 중 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시간제 근로였고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증가했으나 55세에서 64세 중장년층 남성 취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감소했다. 능력 위주의 직원 선발이 이뤄지면서 발생한 외국인과 미숙련근로자의 낮은 취업기회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5 청년 실업률은 가장 낮은 수준인 5.5%로 떨어졌으나 완전고용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시간제 근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경제성장의 가장 큰 원천은 해외시장이다. 네덜란드의 재화, 용역의 수출입 규모는 1950년 국내총생산의 70.9%, 1970년 74.8%, 1994년 89.2%에 달했는데 영국의 41.8%, 독일의 39.3%, 프랑스의 34.2% 미국의 17.8%, 일본의 14.6%와 비교하면 높은 수치이다. 네덜란드에서 중공업 분야는 무역업과 제조업에 비해 다소 늦게 발달했다. 북해와 암스테르담을 연결해 주는 북해 운하의 입구에는 에이마위던(IJmuiden)이 있는데, 이곳에는 코크스 제조 공장과 네덜란드 최대의 제철, 제강 공장이 있다. 네덜란드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편이다. 림뷔르흐 주의 탄전은 1970년대에 이미 문을 닫았으나 북해 연안의 그로닝겐 지역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은 수출된다. 석유도 생산되지만 천연가스에 비해 양이 적어 네덜란드 경제에 큰 기여는 하지 못한다. 헹겔로와 델프제일 근처에는 엄청난 양의 암염이 매장되어 있는데, 일부는 산업용으로 국내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수출된다. 네덜란드의 농업은 최첨단 기술과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경영 규모가 커져서 생산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토의 4분의 1정도가 농지로 이용되는데, 이중 약 30%가 목초지이다. 네덜란드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약 3분의 2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 또한 겨울철 날씨가 온화하고 토양이 기름진 네덜란드는 원예 농업이 발달했다. 수천 개의 온실에서는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가 첨단 시설로 재배되고 있다. 헤이그와 뫼즈 강 하구 사이, 델프트 주변과 로테르담 북부에는 유리 온실이 줄지어 있다. 축산업도 네덜란드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자동화된 대규모 농장에서 돼지와 닭, 오리 등을 대량 사육하고 있고 유제품 관련 산업도 잘 발달했다. 하우다, 에담, 레르담과 같은 도시는 치즈 생산지로 유명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치즈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4월에서 9월까지 알크마르에서는 금요일 아침마다 전통 치즈 시장이 열린다. 전통 치즈 시장에서는 커다란 치즈 경매가 진행되고 관광객들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알크마르를 찾는다. 2009년 5월 10일 유로스타트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라고 발표했다. 2017년 기준으로 네덜란드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독일(21.91%), 벨기에(10.25%), 영국(8.58%), 프랑스(8.03%), 미국(4.36%)이며,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독일(18.47%), 벨기에(10.70%), 중국(9.02%), 미국(7.65%), 영국(5.33%)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505,94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50,076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44,034백만 달러), 전자 부품(15,565백만 달러), 무선 통신 기기(15,492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15,492백만 달러), 독극물(7,256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28,408백만 달러), 원유(28,328백만 달러), 무선 전신 장치 용 송신 장치(18,261백만 달러), 전자 부품(16,071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7,317백만 달러)이다. 회화로는 17세기 황금시대와 19세기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유화 기법의 선구자 프란스 할스가 활약하였고, 중엽에는 유화 기법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렘브란트 판 레인이 나타났다. 중산 계급이나 농민의 생활을 주로 그린 얀 스테인, 풍경화가 로이스달 등도 활약했다. 실내화에서는 우아한 광선을 살린 그림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들 수 있으며, 19세기에는 강렬한 개성을 가진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등장한다. 네덜란드의 공예품으로는 델프트(Delft) 도자기와 붉은 색의 아름다운 마쿰(Makkum) 도자기를 들 수 있다. 도자기는 16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하였고, 17세기부터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세계적인 축구강국으로 명성이 높다.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3번 달성한 축구강국이지만 아직 우승한 적은 없다.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최초로 1993년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였으며 2001년 4월 1일을 시작으로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과 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은 마약 사범을 처벌하는 처벌 위주 정책이 아닌 중독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마약을 합법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상대적으로 중독성이 낮으며 인체에 피해가 적은 대마, 환각 버섯 등을 연성 마약(Soft Drug)으로 규정하여 5g 이하의 대마를 피우거나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커피숍이라는 곳에서 대마를 피는 것을 허용하되 500g 이하만 판매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는 연성마약을 허용함으로써 헤로인과 코카인 등 이른바 중독성 마약을 가까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지만, 이로 인한 폐해도 있다. 바로 대마중독자 문제이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는 마약중독자가 줄어든 대신 대마가 주는 편안함 때문에 복용을 끊지 못하는 대마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국가였기 때문에, 메노나이트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에는 세속화로 인해 개혁교회 신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 이외에도 옛 동인도 식민지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힌두교도들도 있고, 소수 이지만 유대교 신자도 존재한다. 이슬람교 신자도 있으나 박해의 대상이 된다. 네덜란드는 12개의 주(provincie)로 나뉜다. 프리슬란트 주의 프리지아인은 프리지아어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네덜란드는 조선 시대에 벨테브레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들어온 일, 헨드릭 하멜도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일 등으로 한국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럽 국가이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25일,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으며,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한국을 지원하였다. (보병 1개 대대, 군함 1척) 헤이그에 한국 대사관(주 헤이그 국제기구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한국의 대(對)네덜란드 수출은 46억2698만USD, 네덜란드의 대(對)한국 수출은 44억2550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네덜란드는 한국에 있어서 제27위의 수출국이자 제25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1,771 명(재외국민 1,663명, 시민권자 108 명)의 한민족들이 네덜란드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KLM과 대한항공의 노선으로 운항하고 있다. 중등 교육의 경우 한국에서는 네덜란드어가, 네덜란드에서는 한국어가 개설되지 않았다. 당시 네덜란드가 에스파냐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고자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해군력을 강력히 키워나가 잉글랜드 왕국과 연합하여 마침내 에스파냐 왕국의 군대를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영국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기존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설립한 때부터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고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트집을 잡아 네덜란드와의 동맹을 해제하였고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방해하였다. 네덜란드는 결국 잉글랜드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국의 군대가 더욱 우세했고, 끝내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게 된다. 이후 영국과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지만, 프랑스 왕국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낀 잉글랜드 왕국은 다시 네덜란드와 동맹을 요청했고, 네덜란드가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양국간의 관계는 좋아진다. 네덜란드가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식민지마저 대부분 빼앗기자, 이를 노리고 있었던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를 멸망시키고자 대대로 침입을 자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는 국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던 탓에 한동안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다. 더구나 11월 유럽의 현존하는 정부들을 전복하려는 모든 국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고 1793년 1월에 드디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1793년 2월 1일,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 포고하였다.네덜란드 공화국은 잉글랜드 왕국과 오스트리아 왕국 등과 함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1795년에, 하천의 결빙으로 네덜란드의 요새의 방어력이 떨어지는 겨울철을 노려 피슈그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이 네덜란드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마침내 하천이 결빙되어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도시는 차례로 함락되어 네덜란드 총독 빌렘 5세가 잉글랜드 왕국으로 도망가고, 네덜란드 함대는 접수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왕국의 주도로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고(1795년 1월 19일), 브라반트 공국과 마스트리히트가 프랑스 왕국에 할양되었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로 권력을 잡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로데베이크 1세)에 즉위시켰다.(1806) 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스와의 관계는 좋지 못한 실정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막시마 소레기에타가 네덜란드로 이민와 국후가 된다. 이 때문에 양국간 우호가 상당히 돈독해졌다. 또한 양쪽 모두 세계적인 축구강국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관련 분야의 교류가 활발하다. 식민지를 개척하고 다녔던 시절의 네덜란드는, 중국을 통해서 일본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가진 개신교 국가였지만 장사가 중요하지 선교활동은 관심이 없었으며, 일본은 가톨릭을 탄압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서양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일본과의 교역 상대가 될 수 있었으며, 일본 국왕도 서양 제국들 중에서 유일하게 교역을 허용할 정도로 돈독해졌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무차별 공격하였고, 끝내 네덜란드가 미국과 영국과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전쟁에 돌입하고 말았다. 마침내 일본이 완벽히 패배하였고, 한동안 일본과의 관계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반일 세력이 일본 국왕인 히로히토가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에게 총격을 가하고 쓰레기까지 내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재료과학 재료과학(材料科學, ) 또는 신소재과학(新素材科學)은 재료의 화학 · 물리적 속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재료과학은 다음의 5가지 재료들을 포함하고 각각의 연구로 구분된다. 재료과학의 산업상 응용 기술은 casting, rolling, welding, ion implantation, crystal growth, thin-film deposition, sintering, glassblowing 등이 있고, 분석적인 기술 electron microscopy, x-ray diffraction, calorimetry, nuclear microscopy (HEFIB) 등을 포함한다. 이 기술들은 미시적 요인에서부터 거시적 요인을 아우르고 있다. 재료과학에서는 원하는 성질(properties)을 얻기 위해 공정(processing), 미세 구조(structure)를 조절하게 되는데, 이들 3가지를 일컬어 재료의 미시적 이해라 하며 구조-공정-성질간의 깊은 연관관계에 의해 재료의 거시적 이해인 성능이 좌우된다. 즉, 각각 미시적 요인들이 최대가 되었을 때 그 재료는 최대의 성능이 발휘되는 것이다. 재료과학의 역사는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인류의 발달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재료의 발달과정이 고대의 인류문명을 나누는 기준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는 문명의 발달 정도가 당 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구를 이루고 있는 재료를 통해 가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며 가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구석기시대(석기 시대 초기인, 12,000년 전 플라이스토세 말기)는 단단한 데다 깨면 날카로워지는 돌이라는 재료의 성질을 이용해 만든 뗀석기를 사용하던 시기를 지칭한다. 신석기 시대(기원전 9500~9000년경 시작)는 돌을 갈면 맨질맨질한 데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재료의 성질을 이용해 간석기를 만들던 시대를 말한다. 청동기 시대(3500년경 시작)에는 구리와 주석을 비율을 맞춰 섞으면 단단해지는 재료의 성질을 이용해 청동, 즉 하이브리드 재료를 사용하던 시대를 말한다. 철기 시대 (鐵器時代, 기원전 1200년경 ~ 586년경) 는 기원 전 13세기 경 산소에 산화된 산화철을 환원시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인류가 철을 사용하게 된 시기를 말한다. 현 시대 역시 재료를 보는 관점에 따라 신-철기시대. 신-석기시대, 실리콘 시대, 플라스틱 시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재료과학의 역사는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면서 시작되어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현 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재료과학은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리고 재료과학 연구에서 재료과학 부서와 더불어 물리와 화학분야 그리고 화학 공학에 이르기 까지 많은 부서들이 연관되었다. 연구에서의 재료과학은 강렬하고 많은 방안들이 있다. 뒤에 나오는 목록은 철저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특정한 중요 연구 분야를 강조하는 역할만을 한다. 나노재료는 원칙적으로는 1~100nm사이의 10^-9m의 크기 안에 들어가는 길이 안에 속하는 물질에 해당한다. 나노 재료 연구는 나노 기술로 접근을 재료과학을 기초로 해서 하며 발전된 도량역학의 기술을 가져오며, 미세구조물 제작의 지원을 바탕으로한 합성을 가져온다. 나노 규모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물질은 보통 독특한 전자 혹은 기계적인 광학 성질을 가지고 있다. 나노 물질의 분야는 화학의 전통적인 분야같이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으며 나노 물질의 범위는 느슨하게 화학의 전통적인 분야 같은 fullerenes,와 무기 나노 물질 다른에 따라 같은 유기(생각으론)는 나노 물질로 조직화됩니다. 실리콘과 같은 요소.나노 물질의 예로는fullerenes,탄소 나노 튜브,나노 결정체 등을 포함한다. 컴퓨터의 힘을 사용하는 일이 증가하며, 또 재료의 반응의 자극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새로운 재료들을 설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알려지지 못했던 재료과학의 특성을 발견하도록 해주었다. 여태까지, 새로운 재료들은 시간을 소모하고 오류정정과정을 통해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제 컴퓨터적인 기술이 급진적으로 시간을 줄일 것으로 예측되며, 그리고 우리가 재료의 특성을 맞추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으로 예측된다. 이것은 모든 길이의 규모로 ,예를 들면 밀도함수이론, 분자동력학 같은 방식을 포함해서, 물질을 자극하는 것을 수반한다. 불고기 불고기(영어(고유명사): bulgogi)는 쇠고기를 양념에 재우고 야채를 넣고 자작하게 만든 한국의 전통 요리이다. 돼지고기로 만든 것은 따로 돼지 불고기라고 한다. 구이에는 결합 조직이 적고 지방이 조금씩 산재해 있는 고기가 맛이 있고 연하기 때문에 안심이나 등심 등의 부위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불고기는 고구려 사람들이 먹던 맥적이라는 음식에서 유래한다는 견해가 있다. 맥적은 된장 양념을 한 고기를 일컬었다. 맥적은 된장과 부추를 사용했으며 철에 따라 달래를 사용했다. 고려시대에는 설야적이라는 꼬치로 꿰어서 구워 먹는 요리도 나왔다. 200여년 전의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 서울 지역에서 화로에 숯불을 피워 놓고 번철에다 조미한 쇠고기를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림경제에는 너비아니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우육을 썰어서 편을 만들고 이것을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것을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간장으로 조미 해서 충분히 스며들면 숯불에 구워서 먹는 음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19세기에 철사가 도입되어 석쇠를 이용하여 숯불 구이가 탄생하였다. 육식을 하지 않던 일본에 너비아니가 1945년 전에 '똥창구이'라는 음식으로 전해졌다. 이후 재일 교포들이 생계를 해결하고자 식당을 하면서 야키니쿠를 팔기 시작하였다. 기존 양념에 재워먹던 광양식 불고기의 양념이 일본에서 상업화하여 '타레'(垂れ)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어 가정에서도 불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불고기 양념이 달라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불고기 양념을 병으로 파는 상술을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조선시대 풍속도 8첩 병풍 중 하나인 김홍도의 <설후야연> (雪後夜宴)에서는 양반가 집안에서 불고기를 먹는 모습이 나온다. In the medieval Korean history book Donggooksesi (동국세시), Bulgogi is recorded under the name Yeomjeok (염적) which means fire meat. It was cooked BBQ on Hwaro grill. It was cooked as skewered meat like kebob. Each Bulgogi piece was 0.5cm thick without wrinkle nor juice. Although it is no longer cooked skewered, this original type of Bulgogi is today called Bulgogi Sanjeok (불고기 산적). 불고기라는 명칭은 과거 불에 구워 먹는 고기라는 뜻으로 생겨났다가, 점차 양념한 고기를 익히는 의미로 바뀌었으며, 양념하지 않고 소금간만 하고 굽는 고기는 소금 구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기서 양념한 고기는 특별히 정해진 바가 없으며 어떠한 양념을 어떠한 고기 (주로 육류)에 발라 구워내는 음식을 모두 불고기로 표현하고 있다. 단, 고기에 통뼈가 붙어있거나 하는 경우는 갈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보통 '불고기'라고 하면 간장 양념을 쇠고기에 재운 소불고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이외에 고추 양념을 쓴 돼지불고기가 있고, 이 외에 오리고기, 닭고기가 주로 쓰이고 최근에는 해산물을 이용한 불고기도 나오고 있다. 쇠고기는 등심이나 안심 고기로 선택하여 고기 결의 반대 방향으로 얇게 썬 후 가로 세로로 잔 칼질을 하여 섬유를 끊어 부드럽게 한다. 그리고 배즙이나 청주·설탕 등에 버무려서 30분 정도 잠시 놓아 둔다. 이렇게 하면 효소작용이 활발해져서 고기가 연해진다. 이제 양조간장에 다진 파·다진 마늘·깨소금·생강즙·후추가루 등을 넣어 불고기 양념장을 만들어 놓는다. 양념장에 배즙으로 재웠던 고기를 넣고 잘 주물러 약 30분 간 쟁여둔다(30분 이상 경과되면 맛이 없어진다). 양념 재우기를 끝낸 후 참기름을 넣어 버무린다. 참기름을 처음부터 치면 양념의 맛이 배어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효소 작용이 억제되어 고기가 질겨지므로 마지막에 넣도록 한다. 이후 먹을 때 중불에서 천천히 굽는다. 고기의 단백질인 미오신(myosin)과 미오겐(myogen)은 40℃ 전후에서 응고하는데, 이러한 단백질의 응고점 전후가 가장 맛이 좋기 때문이다. 불고기판을 먼저 불에 올려놓고 육수를 부은 다음 고기를 고루 펴놓고 익기 시작하면 1번만 뒤집어서 익힌 후 먹도록 한다. 석쇠로 구울 때는 먼저 석쇠를 불에 얹어서 달군 다음에 고기를 펴놓고 센 불에서 겉만 재빨리 익힌 후 중 불에서 속까지 익혀낸다. 염통·콩팥·간 등도 같은 방법으로 구워낼 수 있다. 전통적 요리법으로 만든 불고기 중에는 고기를 재빨리 식힌 뒤에 다시 익혀내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과거에 쓰여왔던 고체 연료로는 화력 조절이 힘들어서 겉을 태우지 않고 속까지 골고루 익힐 수 있는 방법이다. 고려시대의 설야적은 꼬치에 꿰어 양념해 석쇠에 구운 고기를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다시 굽는 과정을 3번 한 뒤 양념을 발라 구워 먹었다고 하고, '설상가리'라고 하여 구운 갈비를 눈 내리는 바깥에 던져서 급속히 식힌 후 먹는 것도 있었다. 고급 음식점에서 신선로와 함께 내놓는 궁중 불고기에는 날달걀물을 담가서 먹는 방법이 있다. 불고기는 김치와 더불어 외국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음식 가운데 하나이다. 2007년에 외국 응답자의 4분의 1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으로 불고기를 선정하였다.Bulgogi, Hangeul top survey of things Korean| Korea.net News 오타와 오타와()는 캐나다의 수도이자, 지방자치단체로 온타리오주 내에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남 온타리오 동부의 오타와 밸리에 위치한 이 도시는 오타와강 남쪽 유역에 있으며, 주요 수로는 온타리오와 퀘벡 지방 사이의 지역 경계선을 형성한다. 오타와강 북쪽 기슭의 이웃한 퀘벡 주의 가티노와는 여러 개의 다리들로 연결되는데, 두 도시와 주변 지역들은 수도권으로 지정되어 있다. 별도의 자치정부에 의해 통치되지만, 이 지역 내에 연방 토지는 국립수도권개발위원회(NCC)가 관할하며, 연방 정부의 공기업이 수도권의 기획 · 관리 및 공익에 대한 책임을 담당한다. 2006년, 오타와의 인구는 812,129명으로, 토론토, 몬트리올, 캘거리에 이어 인구수로 4위에 해당하며, 온타리오 주에서는 두 번 째로 많다. 오타와-가티노 대도시권의 2006년 인구는 1,130,761명으로, 캐나다 대도시권에서 네 번 째로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오타와, 가티노 그리고 인근 교외지역을 포함한 수도권의 추정인구는 1,451,415명이다. 2009년의 대도시권 인구조사에서는 오타와-가티노의 추정인구는 1,220,674명으로, 캐나다에서 다섯 번 째로 많았다. 오타와는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4위, 또한 세계적인 인적자원 컨설팅 회사인 머서(Mercer)가 발표한 "삶의 질 평가보고서"에서는 가장 살기좋은 도시 18위에 선정되었다. 다른 국가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단어 "오타와" 또한 환유에 의해, 특히 지방 혹은 시 당국이 아닌 이 나라의 연방정부를 언급할 때 사용된다. 오타와를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으로 NHL 아이스하키의 오타와 세너터스 가 있다. 오타와 지역은 오랫동안 초기부족민인 Odawa(혹은 Odaawaa)의 거주지였다. Odawa는 알곤킨족의 "큰 강" 또는 "거대한 강"을 의미하는 Kichi Sibi 혹은 Kichissippi 강이라 불렸다. 1826년 영국의 군인들이 첫 정착지를 설립하였고, 1867년 캐나다 차지령의 수도가 되었다. 193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캐나다의 수도로 남아있었다. 많은 공원들과 큰 관청사들, 아름다운 거리들이 오타와의 아름다운 경치를 돋보이고 있다. 캐나다의 국회의사당이 강변의 언덕에 서있으며, 그 언덕에는 전쟁 중에 전사한 캐나다군들이 안장된 국립묘지가 있다. 오타와는 매년마다 여러가지 축제가 열린다. 그 중의 하나는 5월마다 열리는 10일간의 튤립 축제이다. 3만 송이 이상의 튤립들이 공원, 도로, 건물 등에 피어져 있다. 캐나다의 수도인 이유로 나라의 공용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둘다 쓰는 주민들이 많다. 영국계가 24.3%, 프랑스계가 21.5%이다. 또한 아일랜드계 (22.5%), 독일계 (8.4%), 이탈리아계 (4.9%)의 주민들도 살며, 22.3%의 외국인들이 있는 데 이들은 중국, 레바논, 이란과 구유고슬라비아인 등을 포함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 1946년 10월 20일 ~ )는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주, 뮈르츠추슐라크(Mürzzuschlag) 출신인 페미니스트 성향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다. 20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는 유대・체코계의 화학자로, 어머니는 빈의 부유층의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 김나지움 시절부터 빈 시립 음악원에 다녀, 파이프 오르간, 피아노, 리코더를 배운다. 빈 대학에서 미술사학과 음악사학, 연극학을 전공해, 재학 중의 1967년에 시집을 출판. 동년 대학을 중퇴해 작가 활동을 개시한다. 한편 음악학교는 계속하고 있으며, 1971년에 오르간 연주자 국가 시험에 합격해 졸업하고 있다. 활동은 소설, 극작, 수필, 번역,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 등 다양하다. 1974년부터 1991년까지 공산당에 입당하고 있으며, 초기에는 막시즘 관점에서 문명 비판적인 작품이 많았으나, 후에 부권사회와 모국 오스트리아의 관리에 대한 규탄에 초점을 옮겨 갔다. 1998년 게오르크 뷔히너 수상을 비롯해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과격한 성 묘사와 신랄한 자국 비판 등에서 오스트리아의 보수 단체는 "포르노 작가"등으로 비난에 노출되는 것도 많다. 1983년의 소설「피아노 치는 여자」는 미하엘 하네케에 의해 '피아니스트'로 영화화되어 2001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알로이스 히틀러 알로이스 J. 히틀러 시니어(, 아명은 알로이스 요한 쉬클그루버(), 1837년 6월 7일 ~ 1903년 1월 3일)는 오스트리아의 세관 공무원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이다. 그는 발트비어텔의 슈트로네스에서 베르너 마저의 표현으로 '소박한 집'에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쉬클그루버인데 쉬클그루버의 전 조상대는 대대로 슈트로네스에서 거주했다. 통상 알로이스의 아버지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로 보고 있지만 알로이스의 생부가 누구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사생아로 기록되어 있었다. 알로이스의 본명인 쉬클그루버라는 이름은 인근 마을의 될러스하임()의 한 루터교회의 성직자가 세례명으로 명명한 것인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성직자는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의 아버지를 모르는 관계로 '사생아'라고 적어 놓았다. 이것은 오류였고 이 사실을 접한 아돌프 히틀러의 정적들은 그에게 언제나 '사생아의 자식' 이라 조롱을 받곤 했다. 이같이 왜곡된 사실은 최근까지 발행된 몇몇 서적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이러한 이유로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역사가인 앨런 불룩은 성인의 알로이스를 “무뚝뚝하고, 동정심 없으며, 성마른”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마리아 쉬클그루버에 의해 양육되었다. 마리아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알로이스 히틀러가 5살인 시기이다.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결혼한 마리아 쉬클그루버는 알로이스가 10살 되던 해에 삼촌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가 거주하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슈피탈로 보냈는데,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인 히들러()나 시클그루버라는 이름을 싫어하여 적지 않고 대신 '히틀러'라 적기 시작했다고 한다.(정식으로 개명한 것은 더 뒤이다.) 하지만 그리 멀리 보낸 것도 아니어서, 요하네스와 마리아는 인근 마을의 클라인-모텐으로 이사를 간 후에 살았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겨우 초등학교만을 졸업한 채 그 지역(슈피탈)의 구두직공의 조수로 처음에는 구두수선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후 빈으로 가 구두수선공의 도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약 5년간을 일해 자격증을 얻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참고하자면, 그는 13세 때 도제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비엔나, 즉 빈으로 갔다고 설명하고 있고, 그 곳에서 약 5년간을 습득하여 18세 때 도제 시험에 합격했다고 적어놓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7살이며 나의 투쟁이 오류이다. 그러나 알로이스는 당시로써는 고급 직무였던 공무원을 하기 위해 도제직을 포기하고 대신에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최한 행정 사무직 선발에 합격하여 1855년 처음으로 재정부 국경 감시 세관원으로 임명됨에 따라 18세의 나이에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그는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게 되었다. 공무원이 되면서 잦은 재배치로 그는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사를 11번이나 해야했다. 이후 그는 계속 승진하여 1860년에는 국경 감시 하사관직에 올라 오스트리아의 벨스(, 오버외스터라이히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서 근무하게 되고, 이후 승진을 위한 특별한 훈련과 시험에 합격하여 1864년에는 재무부 수위 겸 보고자(, 피난츠바흐 오버아우프제어) 를 시작으로 처음 정식 관리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린츠, 브라우나우암인을 배회하면서 차례로 세관 근무 임시 사무관보, 동사무관, 검사관보를 거쳐 1875년에는 브라우나우암인의 세관 사무관, 1892년에는 임시 상급 사무관이 될 정도로 높은 승진을 거듭했다. 이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알로이스에게는 큰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급은 일정한 학력이 요구되었기에 더 이상 진급할 수는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브라우나우암인에 태어났는데, 이 곳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가 정식으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에서 알로이스 히틀러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가 39세였던 1876년인데, 《신화적 히틀러》를 편찬한 히틀러 역사가인 옥스퍼드 대학 교수 이언 커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알로이스는 1876년 여름, 그러니까 그의 나이로 39세 때 그의 성명인 쉬클그루버를 삭제하고 공식적으로 '히틀러' 라고 스스로 개명했다. 이 개명에 대한 추측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하나는 자신의 삼촌이자 어쩌면 자신의 생부일지도 모르던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의 법적인 아들로 내세우기 위해 개명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개명으로 자작농이자 부농이었던 네포무크의 유산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전에 될러스하임의 교구성당의 신부에게 모습을 드러내어 그의 아버지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라고 공언했지만 요한이 거의 20년 전에 사망했다는 것을 신부에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요제프 로메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의 양자인 요한 브레이텐더(), 엥겔바르트 파우크() 3명의 증인 출석과 증언을 받은 신부가 이에 수응하여 새로 개명된 성과 알로이스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의 합법적 자식임을 기록부에 집필해 놓았고, 세례명을 '히들러'라고 개칭해 주었다. 당국은 자동적으로 교회의 개정을 처리했는데 당시 교회의 권위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매우 필수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1877년 1월 6일, 미스텔바흐()의 사무소에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에서 '알로이스 히틀러'로 개정했다. 여기서 왜 그가 하필 히들러를 놔두고 히틀러라고 개명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것의 가장 유력한 설로 사무소 서기의 실수라고도 한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그 전에 '히틀러'라는 말은 성으로써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처음 '히틀러'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표준화되었다.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은 이 사실을 거론하면서 아돌프 히틀러의 성은 본디 히틀러가 아닌 쉬클그루버라면서 "하일 쉬클그루버(쉬클그루버 만세)를 외쳐라!"라는 흑색 선전용 소책자를 독일 대도시에 뿌리기도 했다. 1860년, 그는 텔카()라는 한 사생아를 낳았는데, 아이를 낳은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아 그 아이와 여자, 그리고 그녀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서 잊혀지고 아이의 이름만 겨우 전해지고 있다. 그가 최초로 정식 결혼을 한 년도는 1873년으로 안나 글레슬 횔러()라는 여성이었다. 당시 알로이스는 36세였다. 당시 안나는 성실한 여성이었고, 50살의 유복한 연초 감시관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나는 결혼 직후에 병을 얻어 그들 사이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1875년 알로이스가 브라우나우암인으로 발령받게 되면서 여인숙 꼭대기 층의 하숙집을 구했는데, 그때 알로이스의 2번째 부인인 19살의 여인숙 고용인 프란지스카 "프라니" 마첼베르거()를 알게 되었다. 당시 마첼베르거는 브라우나우암인 219번지 폼머() 여인숙에 취직되어 일하고 있는 여성 종업원 중 한 명이었다. 브래들리 스미스는 1870년대에 알로이스가 다수의 간통을 행했으며, 따라서 알로이스는 1870년부터 병든 아내인 안나와 별거를 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쌍방의 합의하에 별거하게 된 1880년 11월 7일까지 그에게 많은 파문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프란지스카는 43살의 알로이스의 '여차친구' 로 있었지만, 당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 가톨릭교회 교회법에 의거해 이혼 신청을 철회했으므로 둘 사이가 당장 결혼할 수는 없었다. 그 동안에 프란지스카는 알로이스와 같이 있던 클라라 푈츨에게 다른 직업을 찾아 볼 것과 알로이스에게 클라라를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것의 연유는 다음과 같은데, 1876년, 그러니까 알로이스가 그의 첫 부인(안나)과 결혼 한 지 3년이 넘은 후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과 6촌 관계이자 그의 이종사촌이었던 클라라 푈츨을 집안의 '하인'으로 '고용' 했다. 그러나 하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그녀에게 알로이스는 6촌이었고 네포무크에게는 증손녀였다. 그런데 만약 네포무크가 알로이스의 아버지라면,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이복조카딸이 된다. 그리고 알로이스의 부친이 요한 게오르그라면,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직계 조카이다. 1882년 1월 프란지스카 마첼베르거는 알로이스라고 이름이 붙여진 히틀러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때까지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이의 성은 마첼버르거라 지어졌고 따라서 '알로이스 마첼베르거()'가 되었다. 프란지스카는 이 아이에게 사생아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기 위해 반드시 그 아이의 이름을 '알로이스 히틀러'로 명명할 필요가 있었다. 알로이스 마첼베르거는 훗날 알로이스 히틀러 2세로 개명된다. 아직 그의 '합법적인' 아내가 병증을 앓고 있는 동안이어서, 알로이스와 프란지스카는 이 사실을 당분간 비밀로 해 두었고, 이후로부터(알로이스 마첼베르거 출산 후) 1달 후에 브라우나우암인에서 공무원 제복을 입고 45살의 나이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당시 프란지스카는 21세였고, 알로이스 히틀러는 45세였다. 두 번째 아이를 낳기 전이었으며, 이때 알로이스는 첫 번째 아이 이름을 알로이스 히틀러 2세로 개명하고 이를 합법화했다. 이후 안나는 알로이스와 프란지스카 사이의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후에 사망했으며, 당시 이혼은 하지 않고 '별거'하고 있던 알로이스는 상당한 보험금을 가질 수 있었다. 알로이스의 직업은 이제 매우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승진에 대한 야망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때 프란지스카가 두 번째 자식인 앙겔라 히틀러()를 출생하러 비엔나로 갔을 때, 프란지스카는 갑자기 폐에 심각한 병을 앓게 되었다. 프라니(, 프란지스카의 별칭)는 곧 브라우나우암인에서 가까운 란샤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알로이스가 그녀를 돌봐줌에 따라 아이와 집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알로이스는 프란지스카의 '초기 경쟁대상' 이었던 클라라 푈츨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프란지스카 마첼베르거는 1884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되었다. 그의 자식 중 두 번째인 앙겔라 히틀러는 레오 라우발()과 결혼을 하여 3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이 중 한 명이 바로 히틀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연인' 이었던 앙겔라 "겔리" 라우발()이었다. 그러나 프란지스카의 죽음은 히틀러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프란지스카를 당시 이미 임신 중이었던 클라라 푈츨과 '교체' 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 스미스는 히틀러가 그가 소망하던 대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클라라 푈츨과 즉시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알로이스의 부계에 관한 문서에 의하면 알로이스는 클라라와 결혼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친인척이었다. 그래서 그는 클라라가 이미 임신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은 채 교회에서 둘 사이의 친권을 공식적으로 삭제해 줄 것을 간청했고 그의 뜻대로 되었다. 1885년 1월 7일 아침 일찍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푈츨은 폼머 여인숙 상층의 히틀러가 묵던 숙소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였으며, 조촐한 식사가 몇 명의 손님들과 입회인들에게 주어졌다. 푈츨은 성을 개명해 히틀러로 바꿨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히틀러가 결혼식을 올린 후 일터로 돌아가 그날 남은 시간동안 일만 했다는 것이며, 결국 클라라는 조촐한 의례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결혼식 동안 클라라가 알로이스를 계속 삼촌이라고 불렀던 점은, 결국 쌍방 모두 이 결혼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이 결혼식이 이렇게 빨리 올려지게 된 것은 그때 클라라가 임신하고 있던(당시 5개월) 구스타프 때문이기도 했다. 알로이스 히틀러의 생부에 관한 문제는 아직까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히틀러 역사가들은 다음의 세 인물들을 생부와 관련짓고 있다. 상당한 히틀러 역사가들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가 알로이스의 생부라고 잠정짓고 있다. 마리아가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의 농장으로 알로이스를 보낸 것은 요한 게오르크와 마리아가 알로이스를 부양하기에 재정적으로 벅찻기 때문이거나, 네포무크가 재정적으로 알로이스를 더 잘 보살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혹은 마리아가 건강상 악화된 이유 등으로 보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마리아는 알로이스를 보낸 1847년 사망했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와 마리아가 합법적으로 결혼했음에도 알로이스를 둘 관계에서 태어난 법적인 아들로 선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요한 게오르크는 사망할 때까지 알로이스를 자신의 법적인 아들로 등재하거나 친족의 일원으로 영속시키지도 않았다. 베르너 마저는 알로이스의 아버지가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라고 주장했는데, 마저는 당시 관계를 한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으며, 결혼한 부인과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알로이스를 부양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으로 요한 게오르크와 마리아와의 결혼을 주선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추측은 요한 네포무크가 상황이 되었다면 마리아와 결혼할 의지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요하임 페스트는 마저의 주장은 부자연스럽고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아돌프 히틀러가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에 그의 조상이 유대인이라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정적들에 의해 공적으로까지 제기된 이런 루머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히틀러의 조카인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가 히틀러에게 루머와 관련된 협박 편지를 보냈을 때, 히틀러는 당시 그의 변호 임무를 맡고 있던 한스 프랑크에게 히틀러 가의 집안 내력을 조사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스 프랑크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형 집행을 받기 전 한 신부에게 고백한 것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에게 조사 요청을 받은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증조할머니인 마리아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19살 정도의 아들이 있는 부유한 유대인인 레오폴드 프란켄베르거의 가정부로 일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기록된 프랑크의 진술에 의하면, 프란켄베르거가 알로이스가 14살이 될 때까지 마리아에게 양육비를 지급해 주었다고 진술했는데, 이것이 프란켄베르거가 알로이스의 양육비를 대 주었다면 그가 실제 생부가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또한 프랑크는 마리아와 프란켄베르거 사이의 편지도 몇 장 남아있었는데, 이 편지들이 프란켄베르거의 아들이 알로이스의 생부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고 말했으며, 마리아가 슈트로네스로 돌아올 당시 임신한 상태였는 것을 알아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프랑크의 주장은 1950년대 들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 주장은 역사가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부정되었다. 히틀러 역사가인 이언 커셔()는 자신의 저서 "Hitler : 1889-1936" 에 이러한 추측들은 히틀러의 정치적 정적에 의한 낭설에 불과하며, 15세기에 그라츠 지역의 유대인들은 추방되어 알로이스가 태어나기 전까지도 정착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마리아가 그라츠에 머문 그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1942년 하인리히 히믈러의 주도하에 게슈타포의 조사까지 이루어졌지만 아무런 변경사항은 없었다고 밝혔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조카인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가 알로이스 히틀러의 생부가 프란켄베르거라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겠다며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낸 협박 편지에 대해서도 이안 커셔는 이와 같은 소문은 여러 이유로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으며, 더욱이 윌리엄 패트릭은 암살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마르크 페르메렌(Marc Vermeeren)이 2007년 발표한 저서인 "De jeugd van Adolf Hitler 1889-1907 en zijn familie en voorouders"에 의하면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의 Y 염색체가 히들러 가의 염색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증조부가 프란켄베르거라는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프란켄베르거가 알로이스 히틀러의 생부라는 주장은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된다. 1885년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히틀러가 결혼을 한 이후 이 두 부부가 낳은 아이들과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클라라는 총 6명의 자녀(아들 넷, 딸 둘)를 출생했지만, 그 중 4명이 유아기때 사망하게 된다. 이것은 결혼한 후 몇 년 동안 겨울에 자주 발병하는 소아기 전염성 질병인 디프테리아가 히틀러 가문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상기 4명의 아이들이 모두 사망했으므로, 히틀러 가의 직계 후손은 아돌프 히틀러 본인과 1896년 태어난 막내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만이 남게 되었다. 또한 알로이스는 전 부인 프란지스카의 자식들인 알로이스 히틀러 2세와 앙겔라 히틀러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재정적으로 충당도 해 주었다고 한다.(결과적으로 이들도 알로이스의 정식 혈육이다.) 이후 1892년 알로이스의 가족은 브라우나우에서 파사우()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당시 알로이스는 55살, 클라라는 32살, 알로이스 2세는 10살, 앙겔라는 9살이었고 아돌프는 3살이었다. 이후 1894년 가족은 다시 린츠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클라라가 당시 에드문트를 낳은 후였으므로 알로이스는 아이들과 클라라를 파사우에 머무르도록 결정했다. 히틀러는 여기서 1895년부터 1896년까지 피셀하름의 단급 국민학교에 다녔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는 베네딕트파의 람바흐 수도원 학교에서 2학년, 3학년을 보냈다. 중학교인 인문계 김나지움에 다닌 것은 1900년 린츠로 다시 이주하게 된 후의 일이었다. 1895년 2월 알로이스는 람바흐()의 저택에 거주하면서 근처의 하펠트()에 약 9에이커(36,000 m²)의 토지를 구입하였는데, 이 농장은 라우셰 구트()라고 불렸다. 이것은 그가 은퇴 후 시골의 전원생활을 위하여 사 들인 토지였다고 하는데, 알로이스는 그의 은퇴 후 삶을 '온화한 농부'처럼 살기를 공상했으며, 여기에는 양봉과 수수한 전원 생활을 영유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가족을 농장으로 이사케 한 후 공직생활 40년인 1895년 6월 25일 58세의 나이로 은퇴했는데, 당시 공직자 연금으로 주어진 액수가 당시 초등교장의 봉급과 비슷한 액수였으니 이는 그의 직책과 권위를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그때까지 그는 공무원직으로 약 40년간을 봉사한 대가로 초등학교 출신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승진과 권위를 가졌다. 이 사실은 그가 여실히 불합리한 조건에서 자신 스스로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고, 또 헌신적으로 자신의 소명에 몸바쳤다는 것을 증명해 주겠다고 하겠다. 그는 하펠트에 살면서 람바흐에서 농업에 종사하기 위해 가축 등을 사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공무원으로써의 일생이 알로이스를 농부 생활이 어떠한지를 잊게 하였고, 더욱이 농사 경험이 없던 그는 9에이커의 땅을 손질하는 것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중노동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하펠트의 토지를 개간하지 않았고, 토지의 재산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오히려 손해를 보자 그만두고 1898년부터 린츠 교외의 레온딩크에서 연금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위에서 설명해 놓은 대로 1896년 1월 21일 파울라 히틀러가 출생하였다. 직장에서 벗어날 수 없던 히틀러는 가족들과 근근히 만날 수밖에 없었으며, 오로지 직장, 일밖에 모르던 '근신한' 남성이었던 알로이스에게는 가족들의 일상과 관련된 일은 그에게 짜증만을 안겨주었다. 히틀러는 육아나 교육, 그러니까 자식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던 이유로 이와 같은 일들을 모두 클라라에게 떠넘겼으며, 일이 없을때는 술집에서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던가 취미인 양봉을 쳤다. 브래들리 스미스는 알로이스가 항상 아이들에게 윽박지르고 소리질렀으며 린츠 시기에는 그가 전에 평소 마시던 주량의 배 이상을 마셨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이것이 아마 그가 사망한 이유가 될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알로이스는 가정에서 항상 자기 중심적 폭군처럼 행동해 아돌프가 이상증세를 보였다'라는 식의 히틀러 가의 '전설'이 나온 것이다. 히틀러 역사가인 로버트 와이트는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알로이스가 클라라에게 굉장히 거칠게 대했으며 집에서 클라라에게 항상 폭언을 일삼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알로이스는 폭언이나 폭력으로 클라라와 자식들을 상처주거나 창피를 주었고 몇몇 자료에 의하면 여러 정황으로 추측할때 알로이스가 심지어 히틀러에게 가죽 채찍을 휘갈겼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히틀러와 파울라는 알로이스에 대해 호감이 거의 없었으며 둘 모두 클라라를 좋아했다. 히틀러와 알로이스는 심각할 정도로 폭력적인 언사를 일삼았고, 히틀러는 자주 집을 나갔으며, 알로이스는 법이 뭐라고 하던간에 자기 아들에게는 한 푼의 유산이라도 절대 남겨주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고 한다. 성년기 히틀러의 히스테리컬한 여러 증상도 바로 알로이스 히틀러가 그를 '다룬' 실정과 함께 유추하는 것이 학계에서 정설이 되고 있다. 실로 알로이스는 가솔들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 12살이 되었을 때 알로이스가 '강제적으로' 권하는 공무원 대신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증언한다. 알로이스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관세국을 본 아돌프는 사무실 안에 갇혀 인생을 허비할 생각해 끔찍해졌다고 나의 투쟁에 저술되어 있다. 이후 히틀러가 소망한 화가라는 직업에 알로이스는 극구 반대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1934년에 총통이 되고 나서도 최대한 12시까지나 혹은 오후 4시까지 모든 일을 끝내고 개인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거나 베를린국립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하곤 하고, 가끔씩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에서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음악을 감상하였다. 알로이스는 그의 아들이 공직 내에서 그와 유사한 직업을 탐색하는 것을 원했으나, 아돌프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를 상당히 멀리하게 되어서 알로이스가 원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거절했다. 알로이스가 공무원의 임무를 찬양할 때 히틀러는 일생을 보잘것 없는 임무에 강요받으며 소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알로이스의 생각을 조소했다고 말한다.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그의 말에 복종하도록 위압하였으나 아돌프는 알로이스가 원하는 모든 것의 반대편에서 최선을 다했다. 알로이스는 히틀러에게 실제적이고, 분별있고, 현실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안정적이고 근면한 시민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러기에는 아돌프가 매우 게으르고, 낭만적이며, 몽상주의자이기도 했다. 또한 알로이스는 타인이 보기에는 매우 근면하고 성실하였으나, 가족에게는 거만한데다가 폭력적이기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종 히틀러도 그에게 극심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아버지를 꽤 존경하기는 했지만 되도록이면 멀리 했고, 대신 이런 이유로 온화한 성품의 어머니를 매우 좋아했다. 훗날(1933년) 독일 수상이 되고 나서 그가 비서에게 말하기를, 히틀러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횟수를 세어나갔다고 했다고 한다. 이와 대질해 아돌프 히틀러의 실업학교 성적은 그의 여러가지 성격을 증명해 주고 있다. 베르너 마저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의 성적, 즉 미술, 역사, 지리의 성적은 우수했다. 그러나 7학년 총합계 성적 때 품행은 5단계 평가제에서 우, 근면이 양, 자연사와 수학은 가의 성적으로 낙제했다. 8학년 때 수학이 계속 가로 나와 재시험 후 합격, 9학년 때는 프랑스어가 불합격이었고, 이때 전학하여 슈타이어 실업학교에서 10학년을 보냈다. 10학년 때 미술과 체육만이 우수했고 독일어와 수학에서 가, 지리, 세계사조차 성적이 미였다. 그러나 마저는 이와 같은 실업학교에서 성적이 나빴던 것은 그의 지성과 재능으로 보아 어울리지 않다고 했으며, 주입식 교육과 전형적인 빅토리아식 교육에 대한 히틀러의 반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린츠 실업학교에서 독일어와 불어를 교육하던 빌헬름 휴머 교수는 히틀러에 대해서 재능은 풍부하지만 학교라는 테두리에 삽입하기는 어려운 학생이었고, 상당히 나태한 학생이라고 말했다. 1903년 1월 3일, 도시의 '슈티에플러'라는 술집에서 아침에 와인을 잔에 기울이며 신문을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돌연 쓰러졌고, 옆 방으로 옮겨진 후 몇 시간 후에 숨졌다. 그의 나이는 67세였고, 히틀러의 나이는 15세였다. 사인은 지금까지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히틀러 가문의 개인 주치의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는 뇌일혈로 진단했고, 《나의 투쟁》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다. 히틀러는 알로이스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알로이스에 대한 일종의 존경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아버지가 죽은 뒤 매우 빈궁한 생활을 전근했다고 서술하나, 실제 그는 당시의 대학 졸업자가 취직하여 얻는 수입보다 더 많은 연금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히틀러 가문의 재력을 알 수 있다. 알로이스 히틀러의 3번의 결혼으로 상당한 결혼 지참금과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 현재 정설로 받아지고 있다. 즉 히틀러는 자기 자신의 생애를 고의적으로 비참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을 더욱 신화적 존재로 '형성' 하려 하는 왜곡을 적어놓은 것이다. 생애 알로이스 히틀러의 월급은 당시 학교 교장이나 심지어 대학 교수보다도 높았다. 몇 년이 지난 1911년, 유방암으로 사망한 클라라에 대한 유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아돌프 히틀러가 맏이로써 숙모인 요제프 로메더(Josef Romeder)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는데, 이 중의 유산의 반 정도를 여동생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실제로 히틀러가 정말로 힘들었던 것은 바이에른으로 가기 전 1년 동안이었으며, 그럼에도 싼 하숙집을 빌려 생활할 정도였다. 달러 멘디 달러 멘디(, 1967년 8월 18일 ~ )는 인도의 대중 가수이다. 달러 멘디는 어렸을 때 인도의 고라크푸르에서 라핫 알리 칸 사헤브와 파티아라 가라나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는 시크의 전통적인 음악인 라바비 창법을 토대로 한 펀자브 대중가요를 부른다. 그의 음악은 방그라(인도 전통 음악과 서구 대중 음악이 합쳐진 댄스 음악)가 대부분이며, 뚫훍송으로 알려진 대표곡 〈Tunak Tunak Tun〉은 다양한 국가에서의 컬트적 인터넷 유행이 되었다. 가족으로는 달러 멘디가 6형제 중 한 명으로 그의 형인 한스 랏 한스 싱(1964년 4월 9일 ~ )와 그의 막내 동생인 미카 싱(1977년 6월 10일 ~ )이 있다. 윤치호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23일 ~ 1945년 12월 9일)는 조선, 대한제국의 개혁, 민권운동가·문신이자 외교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였다. 본관은 해평(海平).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귀국, 독립협회 활동,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연, 계몽활동과 민권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운동·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서재필이 강제추방된 이후 독립협회와 반청계몽운동 활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 미진, 정부와 황국협회 등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민중 역시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면서 실망,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고,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후 관직에 투신하여 덕원감리사 겸 부윤, 삼화감리, 외무부 협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관하고 귀국하면서 서구 문물을 통한 계몽, 변화를 확신한다. 이후 한영서원,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뒤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교육활동으로는 한영서원을 창설하여 지도하고, 송도고보로 고쳐 재단 이사장과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사립학교의 재단이사로도 참여,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노동을 경시하는 사회분위기를 지적, 농·공업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영서원의 학생들에게 농업, 목축 등의 실업교육을 지도했다. 사회활동으로는 YMCA 청년회 총무·회장,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회장, 1929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된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한민족 대표자로 참석하였고,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 단원으로 만주에 다녀온 뒤 흥업구락부 회장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9대 회장을 역임했다. 1945년 2월 광복 직전에는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기도 하였다.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이 부족하다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두었다. 이솝 우화와 걸리버 여행기를 국내에 처음 번역해서 소개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한국에서 최초로 자신의 노비를 전원 석방시켰다. 1930년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선조때의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과 전주 이씨의 아들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박규수(朴珪壽)와 어윤중(魚允中)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字)는 성흠(聖欽) 또는 성흠(成欽), 호(號)는 좌옹(佐翁)이다.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출신. 좌옹 윤치호는 1865년 1월 23일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이일영(李日永)의 딸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윤치호의 위로는 적모 전의이씨가 낳은 이복 누나로, 광산김씨 김충현(金忠鉉)에게 시집간 이복 누나와, 친어머니 이정무 소생으로는 2년(또는 3년) 연상의 친누나인 윤경희(尹慶姬)가 있었다. 그리고 서모 김정순(金貞淳)에게서는 30년 터울 이복 동생인 윤치왕(尹致旺), 윤치창(尹致昌) 등이 태어났다. 친누나 윤경희 역시 윤치호가 소년 시절, 군수(郡守)를 지낸 김화영(金華榮)의 아들 언양김씨 김재극(金在極)에게 시집갔다. 어릴 적 이름이자 자(字)는 성흠(聖欽), 성흠(成欽)이고 뒤에 치호라 이름을 고쳤다. 성인이 된 뒤에도 성흠(聖欽) 또는 성흠(成欽)이라는 이름은 자로 사용하거나, 필명, 가명 등으로 가끔씩 사용하였다. 조선 선조 말기의 의정부영의정 오음 윤두수의 둘째 아들 도제 윤흔(陶齋 尹昕)의 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과 전주 이씨 이정무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윤두수의 둘째 아들 예조판서를 지낸 윤흔(尹昕)의 후손이었다.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윤택영 일가와는 먼 일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고조할아버지 윤발은 관직을 얻지 못했고,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을 지냈으나 일찍 사망한다. 증조부 윤득실의 대에 까지 경기도 수원부에서 거주했으나 수원 화성을 건축하기 위해 천안 모산면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그의 집안은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아산 둔포면으로 분가,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증조부 윤득실은 술을 좋아하다가 일찍 죽고 가세가 몰락했지만 일찍 고아가 됐던 할아버지 윤취동은 빈 손으로 재산을 마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와 석곡리에 여러 농지를 사들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아버지 윤웅렬, 숙부 윤영렬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할아버지 윤취동은 늦도록 아들이 없어 염수대에 기도를 드린 뒤 서자 웅렬과 영렬을 얻었다.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된 할아버지 윤취동과 역시 자수성가하여 관직에 오른 아버지와 숙부 덕에 윤치호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유년기에 그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충남 아산 둔포면 고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100칸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생활하였는데, 이 저택은 아버지 윤웅렬 사후 매각되었다가 여러차례 주인이 바뀐 뒤 이복동생 윤치창이 매입하여 일시 거주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3세가 되기 전에 글을 읽었으며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버지 윤웅렬은 글재주가 있고 암기력이 좋은 장남 치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은 자신이 서자 출신 이었다는 점이 아들과 자손들의 앞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 형이며,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었다. 박규수(朴珪壽)와 어윤중(魚允中)의 문인이다. 윤치호는 9세에 한성으로 유학하여 서당에 입학하여 2년간 한학을 배웠다. 1875년 11세 때부터 개화파 인사 서광범(徐光範)의 친척 김정언(金正言)의 집에서 숙식하며 수학하였으며, 영특했던 그는 15세에 스승 김정언에게 과거에 응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김정언의 인척 서광범이 그의 사랑에 있었는데 스승 김정언은 나이가 되지 않았다며 거절하였으나, 이를 목격한 김정언과 서광범은 그의 글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1879년 14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 진주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부인 진주 강씨 역시 서자 출신이었으나 자신을 양반가문이라 속이고 그와 결혼하였다. 윤치호는 본인이 서자이고, 자신의 아버지 역시 서자였으므로 이해하려 하였으나 강씨는 그가 출타중인 사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발각되었고, 임신하게 되자 그는 상심하게 되었다. 1885년 백랑 등 첩들을 정동 집으로 들이면서 본부인 강씨는 본가로 되돌려보냈다. 친정으로 돌려보낸 강씨 부인은 이듬해 사망한다. 아버지 윤웅렬이 향반에다가 서얼 출신 무관이라서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게 된 그는 열심히 한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한편 아버지 윤웅렬의 주선으로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생이 된다. 이때 그는 서재필, 김옥균, 서광범, 안경수, 홍영식 등을 만나게 되는데, 뒤에 그는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아버지에게는 본부인인 진사 이현표(李玄豹)의 딸 전의이씨 부인이 있었고, 소실인 어머니 전주이씨 이정무에게서는 친누나 윤경희와 윤치호가 있었다. 윤치호는 1898년 6월 9일자 자신의 일기에 Greatmother의 환갑일이라고 일기에 기술해놓았고, 그 적모가 낳은 이복 누나와 그의 남편 미스터 김이 왔다고 기록해두었다. 서자로 태어났던 윤웅렬은 역시 자신의 서자였던 윤치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1907년 3월 4일 본부인 전의이씨가 죽자 바로 첩이었던 전주이씨 이정무를 정실 부인으로 올려주고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인정하였다.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실학과 외부 신문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중국 밖에도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서구의 선진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고, 이어 신분제 철폐, 서구 문물 개방 및 수용, 민중들의 권리 향상, 민중의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키게 된다. 또한 여성을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는 유교적 가치관 역시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철폐되어야 한다고 봤다. 아버지 윤웅렬은 무관이나 서얼출신으로 제2차 수신사 일행을 따라가 메이지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파 인사로 활약하였으며 교련병대 창설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은 높았지만 몰락한 향반가에다가 서얼이었던 신분 탓에 아들 치호가 문과 과거에 응시, 급제할 길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김옥균과 민영익과 접촉, 그들에게 부탁하여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다. 1881년 1월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했다. 어윤중은 성리학자였지만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하에 출입하며 개화 사상에 눈떴기에 그에게도 기회가 닿는다면 일본, 청국 등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접하라는 말을 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은 개화승 이동인과도 교류하며 아들의 유학을 주선하였고, 그의 스승 어윤중 역시 그의 도일을 적극 추천, 지원하였다. 아버지 윤웅렬 등의 노력으로 윤치호는 1881년 16세 때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조사(朝士)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의 첫 공식적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서얼의 후예였던 그는 농업학교와 기술학교 중에 택일하게 되었으나 아버지 윤웅렬의 부탁과 노력으로 기술학교나 농업학교 대신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가까이하며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했다. 비상한 기억력과 암기력이 눈에 띄어 이노우에 가오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을 수시로 만나 면담했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가 시대의 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과 교수의 부인 밀레트(L. G. Millet) 여사와 도쿄제국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교사 등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여가에 그는 김옥균(金玉均)·서광범·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물과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의 경영자 후쿠자와(福澤諭吉), 동인사의 경영자이며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나카무라(中村正直) 등 당대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를 만나 가까이 지냈다. 한편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지목된 아버지 윤웅렬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곧 귀국하였다. 윤웅렬은 일본에 있는 동안 아들과 함께 보냈다. 이때 영어를 배우는 것을 두고 고민하던 중 김옥균이 비밀리에 그에게 일본어와 영어를 익혀두라고 충고하였다. 그의 충고로 그는 일본어를 수학하고 뒤이어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여행을 하며 견문을 시찰하기도 했다. 동시에 낙후된 조국 조선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일본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고, 적서 차별이 없고, 남녀 차별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에 뜻을 두고 본격적인 개방,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되었다. 김씨, 조씨에 이어 민씨 척족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고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임오군란 무렵 유길준과 윤치호는 대원군을 타도하기 위한 일본군의 파병을 청하는 서한을 일본정부에 보냈다. 양쪽 모두 모처럼 시작된 개화가 무산될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주일본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 씨에게 영어를 배웠다.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체류하였고 이후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접한뒤, 직접 신학문을 배웠다. 당시 그는 미국 사회에서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에 따라 공개채용하는 제도를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또 1883년 5월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될 때는 초대 주한 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원어민이 아닌 네덜란드인에게 배운 어설픈 수준의 영어 실력이었지만 당시 영어 통역관이 없는 조선에서는 그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통역관과 외무 아문의 주사로 활동하는 중에도 그는 틈틈이 미국인들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며 철자와 어투를 고치며 영어 실력을 가다듬곤 했다. 윤치호는 서서히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어법과 어투를 고쳐나갔는데, 1884년 봄에 이르면 당시 한글에 없던 단어까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정도의 영어 구사 실력을 갖추게 된다. 2003년 그의 서한을 검토했던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가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883년~1884년에 그가 작성한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으로 보인다 고 평하였다. 그가 영문으로 번역한, 조선의 첫 공식적 도미(渡美)사절로 1883년에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신임장 을 보면“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그 당시에 한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다 보인다.웬만한 조선 선비 같았으면, 한자로 써도 정확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1883년 5월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가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를 연결시키며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와 참정권 부여를 역설했다. 동시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의 민권사상과 문물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해 아버지 윤웅렬이 향헌비(鄕憲碑)의 비문을 깎아내린 것과, 별기군을 유임시킨 일로 탄핵을 받자 아버지 윤웅렬의 무고함을 변론하는 상소를 써서 올리기도 했다. 이 상소를 보고 일각에서는 그를 방자하다고 비판했지만 고종이 이를 무마시켰다. 그해 5월 의정부주사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웅렬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여 5월 10일에는 부사과(副司果) 김명기(金命基)의 규탄상소와 6월 9일에는 함경도(咸鏡道) 유생(儒生) 전승준(全昇濬)의 상소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고종이 무마시켰다. 6월 10일 다시 통리기무아문의 주사로 발령되었다. 1884년 1월 18일부터 8월 9일까지 윤치호는 거듭하여 사관학교 설립을 상주한다. 윤치호는 군대 통솔권의 일원화 군인정신의 합일, 상무정신의 강화를 통하여 충성스럽고 용감한 국방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그는 미국인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각 영을 통합훈련할 것 과 사관학교 설립을 건의했던 것이다. 이어 병원과 학교의 설립 및 전신국의 설치를 미국인에게 허가해줄 것을 건의하는 등 근대시설의 도입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84년 7월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신식 병원과 전화국을 유치, 개설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여 허락받았다. 그러나 신식 병원 도입과 전화국 개통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전면 백지화된다. 1894년 9월 무렵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상하였다. '일본은 이제까지는 개혁을 조선인 스스로 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볼 때 조선인들이 개혁의 의욕도 능력도 없음을 보고 주도권을 잡기로 결심한 것 같다'며 일본이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전망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 직전까지 그는 온건파 개화당의 일원으로 자주독립과 참정권,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영어 실력의 부족함을 느낀 그는 다시 주조선미국 공사관의 직원들과 교류하며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여 주조선미국공사관 직원 미군 중위 존 B. 베르나든(John B. Bernadon)이 이를 수락하였다. 5월 그는 1개월간 베르나든에게 하루 한 시간씩 영어 개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초기에 윤치호는 정변 계획을 접하고 혁명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당시 김옥균을 믿고 따랐던 그는 18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윤치호는 아버지인 윤웅렬과 함께 '개화당의 급진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개화당의 급진성을 겨냥, 근신을 촉구하는 입장을 보였다. 며칠 뒤 윤치호는 김옥균에게 "가친(아버지)이 기회를 보고, 변화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는 서광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가까이 지냈고 혁명의 성공을 내심 기대하였지만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음력 10월 18일 윤치호와 윤웅렬은 "(개화당)이 무식하여 이치를 모르고, 무지하여 시세에 어두운 것"이라고 논했다. 우선 윤치호는 이들의 거사 준비가 허술하고, 거사 기간이 짧다는 점과 인력을 많이 동원하지 못한 점을 보고 실패를 예감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는데 고종 만을 믿을 수는 없다고 봤다. 그러나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 을 느껴 출국을 결심하게 된다. 사실 갑신정변의 실패를 예감했던 그는 망명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 12월 27일 그는 해외로 나갈 뜻을 건의했고, 1885년 1월 고종의 윤허를 얻어 1월 19일 출국한다. 이때 척족 대신들은 그가 유학을 빙자하여 도피하려 한다고 탄핵했으나 고종의 특별 배려로 출국할 수 있었다. 고종은 그에게 지도(知道)라는 친필 서명을 한 서신을 그에게 내려주어 출국을 허용하였다. 명성황후는 그에게 어느날 꿈을 꾸고 보니 네가 앞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점을 쳐주었는데, 훗날 윤치호는 왕비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1884년 정변에 비록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개화파의 일원으로서 망명성 유학을 떠났다. 따라서 미국 유학 시절에도 미국 공사관의 박정양, 이완용이나 시카고 박람회 대표였던 정경원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 1885년 1월 19일 오후 프트 공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배를 타고 인천항을 출발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월 23일 청나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고 싶었으나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청나라에서 유학하였다. 상하이에 도착 직후, 윤치호는 그길로 청나라로 망명하여 주한미국 총영사 G. 스탈을 찾아갔다. 스탈의 알선으로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A. J. 앨런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 에 입학했다. 그러나 척족 대신들은 그를 제거할 자객을 상하이로 보낸다. 망명 직후 조선에서 파견한 자객들을 피하여 스탈의 연락을 받은 미국인의 집에 은신하였다. 이후 며칠동안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실패와 성급한 계획에 대한 통한, 동지들의 아까운 희생을 슬퍼하며 통곡,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직후 그는 아무일도 못했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고국에서 어머니가 부쳐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며 겨우 연명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절망한 그는 상하이에서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한달 가까이 여관방에 틀어박혀 크게 대성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였다. 상하이 체류 한달여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려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20대 초반의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색루'(사창가)에 수시로 출입했고, 음주에 몰두 했다. 후일 정운현은 그의 <일기>(日記)에 따르면 초기 2년간(1885년 2월∼1887년 2월) 음주 횟수 67회, 밤의 여성과 동침횟수는 11회. 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고 분석하였다. 각혈하여 거리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개혁의 실패에 좌절한 그는 술과 사창가에서 살았고, 양깅방의 일본인 기생 오꼬마상(낙랑)에게 2백원 이상의 거금이나 민괴 향수 등을 선물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를 암살하려 파견된 자객들 역시 그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그대로 되돌아갔고, 더이상 그를 추격하는 추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방황하던 중 그를 발견한 한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를 만나 그의 설득에 감화받고, 선교사의 인도로 교회에 나간 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태어나기로 다짐하고 공부에 몰두한다. 또한 목장과 밭일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청나라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를 보고 처음에는 구토를 하는 수준이었으나 이내 적응한다. 청나라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에 실망한 그는 중화사상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더이상 사창가를 출입하거나 음주와 흡연을 그만두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뒤로도 1년 이상을 사창가에 출입하게 된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는 다시 조선의 개화를 위해 투신할 것을 재다짐한다.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는 더럽고 냄새 나는 중국인을 보며 조선인의 미개한 삶을 더욱 부끄럽게 생각했다. 당시까지도 조선내에 중국을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고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의 은혜를 외치던 소중화주의자들을 심히 경멸하게 된다. 대역무도(大逆無道)의 주범 김옥균의 잔당으로 몰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선을 떠나야 했던 윤치호는 고국과의 지리적 이별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단절을 하게 된다. 서자(庶子)의 아들이었던 윤치호는 강요된 출국 이전에도 그를 진짜 양반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 사회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중서서원에서 3년간 공부하며 윤치호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중서서원 재학 동안 열심히 서양의 문물을 접하며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던 조선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낙후된 조선과 중국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낙후된 조선 사회의 현실에 절망, 조선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국(淸國) 사회에 대한 그의 소감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었다. 반면 일본은 ‘동양의 한 도원(桃園)’이었다. 윤치호에게는 본부인 진주강씨 외에 두 명의 첩이 있었던 듯 하다. 그가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두 번째 첩은 다른 남자에게 개가했다. 1886년에는 그의 첫 부인인 진주강씨가 사망했다. 그가 상하이로 망명하고,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능주로 유배되었을 무렵이었다. 이후 윤치호는 10여 년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문물을 접하고,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그는 부유했던 집안의 지원과 동시에 그를 높이 평가한 개신교 선교사들,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 일본인 개화인사 등 여러 곳에서 지원받으며 마음껏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영 J. 알렌과 W. B. 보넬 교수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귀의를 결심하여 1887년 4월 3일 상하이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가 개신교 신자가 되게 된 배경에는 4년 여되는 기간 동안의 개신교 연구와 수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노동을 천시, 경시하는 사농공상의 풍조와 출세욕, 관직열에 빠진 조선의 배관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학기간 중 그는 서구의 민권사상과 합리주의, 직업윤리 의식, 민중의 참정권을 수용,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1890년대 초반 미국 체류시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을 최고의 진리로 받아들여 중국인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무시와 억압과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차별 행위까지도 옹호했다. 그러나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1888년 중국 짱수 성 상하이에서 일하던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888년 9월 28일 상해를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 11월 4일 미국 테네시 주의 내시빌에 도착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도쿄를 경유하여 박영효, 김옥균을 만났다. 김옥균은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김옥균은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윤치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박영효는 김옥균을 사이비 지도자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박영효는 김옥균의 여자 관계를 두고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던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는 곧 밴더빌트 대학교 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밴더빌트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미국인 죄인들에게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 조지아주에 가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개신교를 전도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교제,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조선을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와 성경사 교수 호스,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적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888년 테네시주 하니발에서 그리고 에모리 대학 재학 중인 1892년 옥스퍼드에서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대통령의 민선 광경을 목격하고, 미국인들의 고도의 정치의식과 자유로운 정치토론 , 그리고 국민의 여론과 다수결에 의해 통치자가 선출되는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지아 주의회 및 미연방 상, 하원을 견학하여 국민의 대표자들이 제정한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고, 민의가 반영되는 합의의 정치 곧 의회민주정치의 일단을 주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흑인 강도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고, 방대한 인원구성과 피의자의 충분한 변호 그리고 증거에 의한 판결과 공개재판 등 인권보장의 장치가 잘 갖추어진 미국의 사법 제도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이때 그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 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 내심 미국의 민주주의와 청교도적 합리주의 사상과 일한만큼 받는다는 사상에는 경의를 표하면서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차별대우를 보고 그는 분개했다.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그는 주로 신학(神學)과 영어 등을 배웠으며, 1891년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를 전문학사로 졸업하였다. 밴더빌트 졸업 직후 윤치호는 조지아주로 건너가 조지아주 카빙턴(Covington)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Oxford College of Emory University)에 입학한다. 그러나 1891년 가을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퇴한다. 이 기간 중 그는 성서사학자 워런 A. 캔들러(Warren A. Candler) 박사,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 호스 박사, 에비 호스 부인, 조선에 있던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이씨, 삼촌 윤영렬 등이 보내주는 용돈 외에도, 스스로 강연과 상점 점원, 사탕수수 농장, 식당 서빙, 오렌지 농장, 커피 농장의 열매 수확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한다. 낮선 환경에서 넉넉치 않은 환경은 그의 체력과 학업에 어느정도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다시 1891년 미국 조지아 주 옥스퍼드에 정착한 뒤 다시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옥스포드 컬리지에서 2년간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을 수학하였다. 윤치호는 대학 교육을 받으며 조선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억압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졌고 반면에 구미국가를 모델로 한 근대화를 구상하였다. 나아가 청국의 외압 하에 있느니 다른 문명국에 의한 지배하에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귀국 전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 윤치호는 서재필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1893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 중 손꼽히는 미국내 대학 졸업생의 한사람이었다. 한편 그에게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미국 남감리교회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배편으로 귀국한다. 미국 유학기간 동안 윤치호는 기독교와 민주주의, 과학문명 등을 목격하였고, 기독교 사상, 민주주의, 과학 문명에 기초한 합리주의적인 사회를 경험하면서 조선의 체제에 실망을 느끼는 한편 이를 조선의 근대화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적 기초는 '힘의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으로 변모해갔으며, 사회개혁에서는 미개한 전통사회를 선교와 교육이라는 국민개조를 통하여 근대사회를 형성한다는 국민계몽의 이상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선 사회에 대한 경멸감도 품기도 했다. 1893년 9월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교의 캔들러 총장에게 $200를 기탁하며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세례와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음을 감사히 여기며 조선에도 그와 같은 교육이 시행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의 혼란 속에서 중국 상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했다. 수구파의 승리로 개혁이 좌절되고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유학을 마친 윤치호는 학교를 떠나면서 원장 켄들러 박사에게 이같은 편지를 썼다. 이 일을 계기로 남감리회는 동양 선교관리 담당 핸드릭스 감독에게 선교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리드 선교사가 답사차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의 편지를 계기로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인천과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에 공식 포교를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중국 여성 마애방(馬愛芳)과 재혼하였다. 마애방과의 결혼은 연애결혼이었다. 마애방은 미국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맥티여학교를 졸업한 여성으로 박노자는 마애방이 기독교 신도이자 매우 서구화된 중국 여성이라고 지목했다. 마애방과의 사이에서는 봉희, 영선, 광선, 용희 등 2남 2녀가 태어났다. 귀국 직후 그는 캔들러 박사가 보낸 남감리교 선교사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조선의 풍속과 경성부, 인천에 거처와 예배당지를 마련하는데 동참, 이들의 통역을 하고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정착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주의적, 흑인을 차별하는 태도를 목격하면서 백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국 체류 중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가끔 얻어맞기도 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샜는가 하면,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인 선교사에게마저 늘 은근히 - 그리고 가끔은 매우 노골적으로 - “왕따”당하는 처지였다. 귀국 이후에 조선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들도 비슷하게 그를 대우했다. 당시의 그에 대해 후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의 마음 상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조선인들의 불결한 위생과 겉치레, 감정적 대응 등을 내심 경멸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사상과 일한 만큼만 대가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 합리주의의 수용을 통해 이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평소 기독교선교사들로부터도 자기 일 처리도 못하는 작은 아이, 원주민,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의 대접을 늘 받아 온 윤치호는, 인종주의야말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조선에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정신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봤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과 개척정신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심 백인종을 혐오하는 이중적인 태도와 인종주의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어느 교회에서 남부 출신 남감리교회 목사들이 예배 시간에 흑인을 박멸해야 된다는 설교,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해야 된다는 설교를 듣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목사인가 기독교인인가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흑인이 백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는 분노하면서도 흑인에 대해서는 1893년 2월 17일자 일기에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끌려와) 영어를 배운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예생활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다.' 라는 이중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귀국 이후 그는 국내 인사들이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의존하거나 일제와는 다른 선량한 국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비판, 경계하기도 했다. 1893년 11월 배를 타고 청나라의 상하이에 도착했다. 청나라로 건너간 윤치호는 이듬해 7월 25일 청일 전쟁이 터지자 8월 모교인 상하이 중서서원의 교사가 되었다. 1893년 8월부터 1895년 1월까지 그는 중서학원에서 영어, 영문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이나 청나라인,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칠 만큼의 영어 회화 실력을 갖추었다. 청나라에 체류 중 그는 남궁억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조선을 상징할 국화를 결정하기 위해 은신해 있는 윤치호를 찾아왔다. 1893년에는 남궁억과 의논해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했으며 그로부터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를 넣었다고 전해진다. 청나라 상하이에서 체류하면서 지냈을때인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등 일행을 맡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다음날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 의해 저격, 암살당했다.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그는 1894년 중국 여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을 만나, 그해 3월 재혼한다. 마애방과의 사이에서 윤영선(尹永善), 윤봉성(尹鳳成, 요절) 윤광선(尹光善), 윤봉희(尹鳳姬), 윤용희(尹龍姬)를 두었다. 인내심이 강하고 배려가 깊던 마애방은 남편의 방황과 정치적 불운, 생계를 돌볼수 없는 환경, 유흥가 출입 등을 모두 너그럽게 이해하였고, 자신이 직접 길쌈과 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히려 마애방은 시대를 앞서간 남편 윤치호의 불행을 위로하였다. 그녀는 1905년에 병사하지만 윤치호는 오래도록 마애방을 그리워하였다. 마애방이 죽은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혹은 '천당에 먼저 가 계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년) 2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 2월 13일 배편으로 입국하여 돌아왔다. 1895년 2월 13일 그는 귀국 즉시 자신의 노비들을 석방시켰다. 그 때 윤치호의 가족들은 그의 전도를 받고 즉시 대대로 내려온 신주단지를 불태우고 종문서를 불태웠다. 이로서 한국에서 종문서를 제일 먼저 불태운 가문이 되었다. 귀국 후 2월 15일 김홍집 내각에서 의정부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외무부협판을 지냈다. 그러나 박영효 내각에서는 그에 대한 감시는 끊이지 않았고, 그는 김홍집 등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측에서 그에게 경호원을 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으나 마음만 받겠다며 조용히 거절하였다. 그 뒤 총리 대신 비서관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5월 10일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음력 윤5월 27일 다시 외무부협판이 되었다. 6월초에는 조선을 방문한 이탈리아 국왕의 조카 아부리를 만나 면담하였다. 그 후 이상재(李商在), 서재필, 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 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했고,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였다. 윤치호는 1895년 귀국한 이후 개화파 정권에서 김홍집-유길준 일파와 박영효 일파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개혁 정책 추진에만 힘을 쏟았다. 또한 강연 활동을 다니며 서구 세계를 알지 못하는 민초와 식자들에게 미국과 유럽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선진문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사의 주필,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칼럼과 논설활동 및 신문 발행 제반에 직접 참여하였고, 황국협회(皇國協會)와 척족 정권의 압력과 맞서 자신의 재산을 비용으로 투자하여 신문과 독립협회의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한성부의 사교모임인 정동구락부에도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했다. 1895년 8월 윤치호는 함경남도 북청에 주재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감독 비숍 핸드릭스(Bishop E.R. Hendrix) 등에게 조선의 선교를 위한 방문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은 헨드릭스는 1895년 10월 13일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 F. Reid) 등과 함께 한성에 와 남감리교의 시작이라 할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그해 9월 26일 사촌동생 윤치오와 함께 특파대사 수행원에 임명되었다.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 낭인들에게 암살당하자 그는 일본 및 일본인의 협력자들을 규탄했다. 조선땅을 처음 밟은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쉽게 찾아내서 살해하는 데는 조선인 협력자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명성황후의 암살에 국내에서 자발적으로 가담한 조선인 가담자와 내통한 조선인 고위 인사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조선인 고위층의 민비 암살 협력설은 무시당하였다. 그의 주장은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는데,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한편 유길준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그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몇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시중의 여론에는 반대했다. 무능했으며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였고, 부패한 친정 식구, 친정 친척들을 등용한 점과, 무속인과 점술가들을 맹신해서 고위직을 내리는 등의 미신행위 등으로 국정의 문란을 초래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인 협력자들이 왜 나타났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의 반론에 시중의 시선은 냉담하였다. 유길준은 자신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것을 폭로한 윤치호에 대해 불쾌히 여겼으나 다시 그를 가까이한다. 을미사변 뒤로도 윤치호는 유길준과 친하게 지냈고, 유길준 사후에도 유길준의 아들 유만겸과 유억겸 형제, 동생 유성준 등과도 계속 가까이 지냈다. 1895년 12월 독립협회의 동지 서재필이 복권되어 귀국했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던 것이다. 귀국 직후 서재필은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생활 중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반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서재필에게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조정과 무지한 민중들에 대한 원한과 경멸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서재필은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되도록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일부 기록해두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윤치호의 권고를 거절한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의 쓰라린 기억을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오히려 냉정해지려 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윤치호를 비롯한 동지들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반감을 주게 된다. 한편 서재필은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가 그에게 구걸하러 오는 어느 조선인 거지를 노상에서 발로 걷어차고 모욕을 해도, 서재필은 이를 지켜보면서 방관하였고 윤치호는 이를 보고 불쾌히 여겼다. 영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여긴 윤치호는 왜 영어만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알던 윤치호는 '나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는 모든 것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 서재필, 이승만 등에게 양해를 구한뒤 러시아 파견 사절단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징계명령이 내려졌으나 고종의 특사로 철회되었고, 2월 12일 학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896년 4월 1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대한제국의 사절단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 4월 11일 러시아로 가는 길에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임명되었다.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그는 러시아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 비해서 영토는 넓으나 기술발전이 훨씬 느렸던 사실을 눈치챘으나, 러시아의 군사력만은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차르와 제실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사들의 움직임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또한 그는 장차 러시아가 군사 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치호와 수행원들은 열차편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때 윤치호의 귀국은 늦어졌는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프랑스에 들렸다 오느라고 늦 어졌다.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그해 유럽을 순방하고 1896년 12월 윤치호는 유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의 항구 사이공(西貢)에 들렀다. 사이공을 체류할 때 윤치호는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농민들과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세금으로 닦은 사이공의 '파리 수준 이상'의 깨끗한 도로들을 보고 감격했다. 1896년 사이공에서 윤치호는 일본의 공식 사절단을 만났다. 사이공을 떠난 뒤에 홍콩(香港)으로 가서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건물을 본 후 "유럽의 인종이 확실히 자연을 정복하는 기술을 잘 익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치호는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서구 열강 세력에 대해 "신대륙의 초원과 밀림을 새로운 제국과 공화국으로 만들"만큼 세계 문명화의 큰 일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우월한 인종'이라 평가했다. 귀국 후 1897년 중반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윤치호는 열정적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윤치호는 배재학당 졸업식 연설에 참석하였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의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 토론회의 호응도는 높았고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 이는 토론회에 내빈으로 참석, 참관하던 윤치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 윤치호는 청년들의 역량을 믿고 신분제도 철폐, 적서 차별 철폐, 남녀 차별 철폐, 민중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설득, 홍보작업을 추진해야 된다고 확신한다. 1893년 에모리 대학교 졸업 직후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 1897년 8월 28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0월 원산항재판소 판사로 부임했으며, 10월 28일에는 만민공동회 회장에 선출됐다. 독립협회 참가 이후에는 서재필(徐載弼)·이승만·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와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8년 3월에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관할 때는,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反) 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여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898년 이종일, 남궁 억, 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京城新問) 창간에 참여하였다. 학무 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소득이 없었다. 도리어 구 관료들을 탄핵한 상소가 구 관료, 척신 세력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는 배척과 동시에 황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획책하려 한다는 모함, 음해를 당하기도 한다. 1895년 귀국 직후부터 그는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감리교 선교사 조세핀 애턴 캠밸이 교회, 학교 부지를 찾지 못할 때는 아버지 윤웅렬을 설득하여 적당한 토지를 내어 주기도 했다. 미국인과 영국인 선교사들의 전도 사업을 적극 돕고, 언어 소통의 장벽을 해소하는데 적극 나섰다. 그러나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도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다. 그는 처음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내심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경멸하거나 반감을 품게 된다. 선교사들의 고압적이고 거만한 태도 내지는 원주민에 대한 멸시에 처음에는 의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이자 반감을 갖게 된다. 백인 선교사들의 이런 태도는 윤치호로 하여금 실망과 냉소를 가져다주었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적인 태도를 조선에서도 목격하게 된 그는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기독교 사상만이 곧 진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기독교 선교 사업을 도와주는 일에서 한발 물러서,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한다. 한편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 명의 회중이 참석 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 에 대단히 불가하다' 를 선언 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 하여, 주제 에 대한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 은 토론 이 잘못된 방향 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 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奴婢制度)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 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 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1897년,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강연하며 윤치호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 대표자를 선출하여 백성들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정폐지론이나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군주의 존재는 별개로 국민이 선발한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되고, 관료임면권에 있어서는 군주나 인사임명권자만의 의견이 아닌 백성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된다고 봤다. 황국협회 측은 '윤치호 대통령설', '박영효 대통령설' 등을 흘려 독립협회를 곤경에 몰아넣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 다. 그밖에도 '윤치호 부통령설', '박정양 대통령설' 등도 시중에 확산되었다.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구성하고 윤치호 자신은 대통령 내지는 부통령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시중에 유포되자 윤치호는 은신처를 물색했다. 이후 서재필의 암살이 불가능하다고 본 수구파에 의해 서재필이 국외 추방당하자 조선 체류 중 서재필은 죽은 부인의 묘를 한번도 찾아 돌보지 않았는데 1898년 1월 15일, 갑신정변으로 고신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된 서재필의 전 부인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서재필은 그에게 2달러의 돈을 주고 쫓아냈다. 윤치호는 이를 보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지탄했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鄭喬)와 최정식(崔廷植)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은신해있던 그는 서재필과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직을 겸할 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3월 21일부터는 독립협회 회장 대리로 활동했다.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면서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1898년 5월 그는 이상재 등과 함께 서재필의 추방을 반대하는 동시에 서재필에게도 출국을 만류하였으나, 서재필은 귀국 정부에서 나를 해고하였으니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여 경악하였다. 서재필이 추방된 뒤 그는 독립협회를 이끌어나가게 됐고 1898년 8월 제2대 독립협회회장에 선출 되었다. 10월의 만민공동회를 주최할 때는, 헌의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 11월 그는 최인환(崔寅煥)의 피습을 당했으나 미수로 그쳤다. 최인환은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의 측근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최인환은 곧 경무청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대한제국 조정의 견제를 받다가 1898년 12월 강제적인 정부의 해산조처로 해산당하였다. 후속 조치로 12월 헌의 육조에 서명한 대신들이 파면당하였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혁파와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관보를 보고 고종과 정부, 일본과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독립협회의 해산에 외국 세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농간이 작용했고, 그는 일본의 앞잡이로 유기환, 이완용 등을, 러시아파 조병식 등을 비판, 성토했다. 한편 그는 조선이 살 길로 미국과의 수교가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1898년 내내 황국협회는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쿠데타를 기도한다고 무고하였다. 이처럼 그는 독립협회를 분쇄하는 데 고종과 수구파,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결탁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고종의 배신적인 비열한 행위를 매도하고, 일본의 탐욕적이고 간교한 행동을 저주했다. 동시에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는 민중들의 시선에도 크게 실망, 좌절하게 된다. 독립협회는 실패했고, 민중들은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게 되자 실망한 그는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된다. 그는 당시 대한제국 조정을 휘젓던 친일파와 친러파 모두를 매국노로 봤다. 그는 국익보다 개인의 이익과 정파의 이권과 이익을 위해 돈과 폭력배, 심지어는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기성 정치인들의 행각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친일파로 변절한 이완용에 대해서 시종일관 적개심과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그해 양력 11월 23일, 12월 15일~22일, 한성 판윤을 역임하였다.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뜻이 없던 그는 사직할 의사를 내비쳤고, 12월 17일과 12월 18일 한성 판윤직을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고, 12월 22일 면직되었다. 1898년(광무 1년) 12월 22일 윤치호는 의회인 중추원 부의장(中樞院副議長) 칙임관 2등(勅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이 기간 중 윤치호는 여러 번 탄핵과 제거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1898년 12월 24일 그를 제거하려는 대신들의 탄핵 상소가 있었다. 1899년(광무 2년) 1월 2일 심상희(沈相禧) 등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윤치호와 고영근(高永根) 등에게 역률(역적률)로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치호는 생명의 위험을 피하여 수시로 은신, 숨어 다녀야 했다. 그는 조선의 군주들 중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정조 같은 인물들은 예외로 보았다. 그러나 세습체제 하에서의 군주와 정치인들은 수준이 저질적인 인물들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보고 세습화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대를 이어서 정치를 하더라도 자기 실력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독립신문의 주필과 발행인을 하던 그는 신문사를 떠맡게 되어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이 되었으나, 관직에 임용되면서 사퇴하였고, 1899년 이후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탄압·해산 시 외국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1899년 1월 7일자로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에 임명되었고, 윤치호는 1899년 2월 2일 이를 수락하였다. 그는 1898년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에게 토론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는 토론회의 소모임을 1899년 2월까지 맡아보았는데, 학생들이 토론에서 패했을 때 감정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통제하고 억제하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대화, 토론하는 방법을 훈련시켰다. 후에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 유영렬은 '민중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윤치호에 대한 이같은 조처는 당시 법부대신 윤웅렬의 노력과 윤치호에 대한 고종의 친애감, 그리고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윤치호와 일부 관료들과의 친분관계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았다. 한편 윤치호 자신이 개혁 운동을 포기하고 타협한 것에 대하여 훗날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 수 유영렬은 '윤치호에 대한 감리사직의 임명은 (중앙 정계로부터의) 일종의 회유적 추방이었으며, 윤치호의 감리사직 수락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반(反)정부 민권 운동의 최고지도자가, 그것도. 민중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 구금되는 상황에서, 극복의 대상인 수구반동하의 지방관직을 수락한 사실은 일종의 변절적 자세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전통적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의 불철저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해석하였다. 1899년 1월 그에게 함경남도 원산부윤으로 임명되리라는 설이 돌았다. 1월 16일 오후 7시경 은밀히 일본인 집에 피신한 고영근(高永根)의 행방을 알고 그를 찾아갔다. 윤치호를 만났던 고영근은 그에게 원산부윤직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고, 윤치호가 대답을 주저하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부대신으로 승진한 것은 만민공동회 덕택이며, 윤웅렬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해산에 가담했던 척신파 대신 민영기와의 친분관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고영근의 언급에 불쾌했으나 논쟁을 하면 감정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 보고 언급을 회피하고 헤어졌다. 1899년 1월 그는 중추원 부의장을 사퇴하였고, 1월초 그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떠났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활동하며, 개화파와 수구파 양쪽과 친분관계를 형성한 아버지 윤웅렬의 중립적인 태도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을 민중의 어리석음의 탓으로 보고, 민중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후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한일 합방 이후 1915년 무렵부터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원산에 도착했던 윤치호는 '원산 사람들은 공공정신(에티켓)이 없고 구습과 미신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무지하고 게으르다.'라고 하고, '이 인종의 피는 새로운 교육과 새로운 정부 그리고 새로운 종교를 갖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확신했다.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 민중을 철저한 갱생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윤치호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화를 당연한 벌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원산감리 시절 비서로 먼 일가인 윤직선(尹稷善)을 채용했는데, 윤직선은 후일 동화작가 윤극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후 윤치호는 계몽운동에 진력하며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실력 양성론은 후일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독립운동 세력은 김좌진, 홍범도 같은 무력 투쟁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활동이 큰 축을 이루고 있었고, 양자 사이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뭐든 해도 된다는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제3그룹은 주로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경제 자립 기반 확보와, 교육 활동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무관 양성에 힘썼다. 1899년 이후 윤치호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1899년 1월 7일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주임관 1등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0년 6월 25일 삼화감리사 겸 삼화부윤, 1901년 7월 24일에는 다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으로 재임명되었다.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좌옹이 처음 덕원 감리가 된 것은 조병식 내각이 그를 중앙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의외로 치적이 훌륭하여 좌옹이 명성이 날로 높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은 다시 불안해져서 독립협회 시대의 정적이던 보부상들을 비밀히 파송시켜 좌옹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나중에는 암행어사까지 출동시켜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政體)'라는 죄명으로 봉고파직을 시켰다. 1902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 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 로 발령되었다. 1902년부터 그는 기독교 남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이 경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의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1903년(광무 6년) 1월 24일에는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경북도, 간도 일대의 민생을 시찰하였다. 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잡아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쳐서 횡포를 막았다. 1904년(광무 7년) 2월 15일 전라남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군수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무부협판 겸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으며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 3국 제휴론'을 주장했으며, 일본을 비판하였으나 러일전쟁은 동양과 서양인의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한국의 장래를 비판적,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제한된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고, 윤치호의 이와 같은 치적도 결과적으로는 독립협회 해체 후에 강화된 보수 반동정치에 협조하는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치호 역시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윤치호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여전히 보수적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윤치호는 1904년 잠시 군부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1904년 3월 15일 일본의 특파대사 영접단의 단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이 되어 그해 4월까지 일본측의 특파대사를 면담하였다. 그해 8월 20일에는 외무부대신이 공석이 되면서 그는 외무부대신 서리사무에 겸임되었다. 1904년(광무 7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20일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9월 주러시아 특파대사 이범진(李範晉)에게 귀국하라는 전보를 보냈으나, 귀국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12월 15일 정부의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의 1인에 임명되었다. 1905년(광무 8년) 2월 14일 재혼한 아내 마애방(馬愛芳·1871~1905)이 아이를 낳다가 자궁외 임신으로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평소에 중국과 중국인들을 경멸, 야만시하는 윤치호였지만, 부인 마애방만큼은 거의 끔찍하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마애방이 요절한 뒤에 ‘하늘에 가 계시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인 윤치호의 영문 일기를 썼다. 그해 5월 5일 외무협판이던 그는 외무부대신 박제순의 사퇴로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 윤치호는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이외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 와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리고 앨리스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 미국을 정의와 자유의 국가라고 생각한 윤치호는 이번 일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고 한국을 도와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7월에 있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알게 되면서 윤치호는 미국에 대한 기대감 만큼 큰 실망감을 품게 된다. 이후 그는 세계의 정세는 이상이나 정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1905년(광무 8년) 9월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한다. 그는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그의 예상대로 을사조약 이후의 일본의 지배는 한국인을 노예상태로 몰아넣는 폭정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부패한 그리고 부패하고 있는 소수독재정치로부터 조선 인민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 정부와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다. 철저히 썩은 정부를 약간의 개혁으로 미봉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봤다. 강대국의 비밀 거래에 실망한 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민중들, 지식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민족의 미래는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민족의 미래는 부패한 유교 사상이나 무속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의 합리주의 정신과 노력한만큼 받는다는 청교도 정신에서 찾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1905년(광무 8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윤치호는 관직을 사퇴했으며, 정부로부터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수락하지 않고, 취임을 거부했다. 정부를 장악한 이완용을 그는 심히 경멸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며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한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는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당일에 외무부협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외무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들에게 증오감을 줄 것 외에 외무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고 하여 그 수락을 거부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그는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곧 독립권의 상실로 인식했다.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을사 보호 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 1일 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윤치호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을 파면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결국 어쩌지도 못하는 황제를 보고 그는 꼭두각시라고 보고 경멸하게 된다. 1905년(광무 8년) 12월 내내 윤치호는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윤치호를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나라인 미국에 기대를 하였지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을 접하고 미국에게도 실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그는 체념하고 교육과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을사 보호 조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외부의 침략 이전에 지배층의 안일한 대응과 타락, 사회 내부의 부정, 부패, 온갖 비리행위와 차별 대우, 서자와 중인, 하층민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 등이 복합된 결과물로 보았다. 그는 을사 보호 조약을 돌발적인 사건으로가 아니고 과거 사건들의 결과로 또는 불가항력적인 현실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는 미구에 닥칠 일본 혹은 제3세력의 침략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보게 된다. 체념한 윤치호는 이후 어떠한 공직 제의도 사양하고, YMCA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윤치호는 독립의 상실과 일본의 폭정을 수반하게 될 을사 조약을 열강의 침탈경쟁인 러일전쟁의 불가피한 귀결이며, 개혁과 개선을 무조건 외면해온 한국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 또는 신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 1905년부터 그는 경성부에 설립 예정이던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부지 마련에도 참여하였다. 발대 모임부터 시작해서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해 각 준비과정에 관여해 온 인물들을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서 찾아보면 윤치호, 이봉래, 민형식, 이범구, 백상규, 이근상, 이용화, 민대식, 이병정, 이용문, 김동완, 오한영, 민영기, 이재극, 이완용, 민상호 등 최소 16명이었고, 이 중 오한영이 그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는 대한도서관 개관 기념식 축사 낭독에서 그는 경성은 물론 각 산골과 촌락까지도 도서관이 보급되고 책읽는 문화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906년 3월 26일 도서관 평의회에 참여하고, 도서관 운영위원 겸 도서관평의회 평의원이 되었다. 3월 26일 도서관 평의회가 소집되어 도서관 운영위원들을 결정하게 되었다. 도서관장에는 탁지부대신 민영기, 평의회 의장은 궁내부대신 이재극, 서적위원장에는 학부대신 이완용, 그리고 평의원에는 민상호, 윤치호 등 25인을 두고 있다.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 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자 서재필은 윤치호에게 전보를 보내, 현직에 있으면서 정세를 바꿔보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였다. 윤치호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상실한 매국노들의 소굴에 더이상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윤치호는 당시 고위 관리들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매국노들, 중간급 관리들은 세금만 축내는 무책임한 기생충들이라며 질타하였다.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조선이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정치적 독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윤치호는 정치인들이 썩고 부패했다면 백성들이라도 정신을 바로 차려야 되는데, 백성들부터 요령과 잔머리와 사기와 기만, 허위와 술수와 험담에 찌들었다고 지적하였다. 윤치호는 훗날 1919년 11월 9일 기독교 평신도주간 기념 범기독교대회 강연에서도 이를 드러냈다. 그는 1919년의 연설에서도 조선이 일본과 처음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1876년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고, 김옥균이 정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했던 1884년에도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 는데 그때마다 뭘 했느냐고 물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로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더욱 강해졌다. 1919년의 한 강연에서 그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켰던 1894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일본이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냈던 1905년에도 신시대가 열렸다.' 그는 이 때를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봤다. 1894년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을 때나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몰아냈을 때 왜 자주국 내지는 중립국 선언을 하지 못하고, 국력 배양은 하지 못하고 정부 관리들이 이권을 챙기고, 파벌싸움에만 눈이 멀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이렇게 신시대가 찾아왔을 때마다 뭘 했느냐'고 질타하였다. 1906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5월 4일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 15일 그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특별히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이후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대한자강회를 지도하였다.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 계몽 사업에 힘썼다. 대한자강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그는 교육의 확대와 산업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계몽에 노력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은 무산되었다. 1906년 10월 그는 캔들러와 상의하여 개성에 한미서원(韓美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2월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광무 10) 3월 어머니 전주이씨의 권유로 남포 백씨 백동명(白東明)의 딸 백매려(白梅麗)와 중매로 재혼하였다. 당시 윤치호는 43세였고, 백매려는 18세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열리자 그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그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로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배양'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열고 동지를 모으면서 만든 조직이었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실력배양'에 동의하였다. 이에 동의한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안창호가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그 밖에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이승훈 등 언론인·군인·산업인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07년(융희 1년) 7월 고종 퇴위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을 성토하였다. 7월 21일 순종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특별히 외무부협판직을 제수했으나 불민함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1906년 5월 8일 이민설, 이능화, 장지연 등과 함께 경성의 불교 승려들이 세운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초빙, 출강하였다. 신민회의 회원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며 명진학교의 교사로도 출강중이던 그는 1907년 9월 평양 시내에 안창호와 함께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10월 3일 현재의 송도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 유학시절에 그를 후원했던 캔들러 박사와 편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했다. 캔들러 박사는 학교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었다. 편지에서 캔들러 박사는 기독교 신학 학교, 혹은 기독교 계열 학교 설립을 추천했지만 그는 답장에서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의 건립이 먼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게 하고,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이라 했다. 윤치호는 조선인들이 배관열과 관존민비, 문존무비 사상에 빠져있고 땀흘려 일하는 것을 천시한다며 조선인에데 땀흘려 일하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야 된다고 하였다. 그의 의견에 공감한 캔들러 박사는 미국인 건축, 기계, 농학 교수와 일본의 간섭에 대비해 기독교 선교사들을 파견해주었다. 한영서원은 처음 14명의 원생으로 출발했으나 1910년에는 원생 수가 4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한영서원은 한자와 유교, 영어 외에도 농업, 목공 기술, 측량, 축산법, 직물 등을 가르쳤다. 10월 3일 그는 한영서원의 초대 원장 겸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이사장직은 공성학에게 넘기고, 원장직도 곧 윌라드 크램(Willard G. Cram, 한국명 기의남)에게 넘겼다. 송도고보는 그 뒤 6·25전쟁 이후에는 인천으로 피난 와서 송도고등학교로 다시 태어났다. 주요한에 의하면 그가 한영서원을 설립한 것은 안창호의 영향이라 한다.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은 안창호가 신민회 조직 2년 후인 1908년도에 평양의 유지인 김진후의 지원으로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윤치호가 안창호의 인도로 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동기가 되어 세운 것이라고 주요한은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에서 서술하고 있다. 1909년 안태국(安泰國)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였으며,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하며 신사상과 신문물 수용, 개발 등 실력양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유학하여 선진국의 사상과 문물, 과학 기술을 배워와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의 자세와 소양을 살펴본 후 그는 여비와 식비를 제공하고, 장학금을 송금해준다. 1908년 11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같은 조선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처음에는 일제의 조작이라며 의심하였으나, 사실로 드러나자 한국 독립의 가망성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됐다. 1909년 한국의 유머 모음집 《우순소리》를 출간하였으나, 일본이 제정한 내부고시 제27호에 의해 '치안과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禁書) 처분을 받았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다며 한국통감부에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자신이 후원하던 캐롤라이나 학당의 새로운 교명을 고민할 때 학교명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909년 박제순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자 그에게 외무대신직 제의가 들어왔지만 이를 거절했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조직에 가담한 후 안창호의 제의로 대성학교 교장으로 다시 초빙되었다. 한영서원과 송도학원, 대성학교 외에도 신앙 활동에도 전념했는데, 신앙 활동으로는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청년회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 등으로 일했다. 이후 이상재와 함께 기독교청년회를 지도하고 기독교 선교사업과 개척교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주력하였다. 1910년 4월 캐롤라이나 학당이 배화학당으로 개편되자 여성에게도 교육 계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배화학당의 공식 후원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또 그는 조선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은 멀리하고 공리공담과 관념론적 성리학 사상에 몰입된 사회라며 희망이 없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미국의 흑인 자립 운동을 추진하는 부커 T. 워싱턴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커 T. 워싱턴의 공업학교 운영 정책에 대해 수시로 자문하였다. 1910년(융희 4년) 8월 27일 종2품에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그러나 1910년 10월 한일병합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공직을 사퇴했다. 아버지의 사망에 관계 없이 그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이었으므로 남작(男爵) 작위가 내려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윤치호에게 외무대신 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것도 역시 거부했다. 조선의 왕족과 고관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귀족이 되는 것을 보고 실망, 낙심한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경기도 개성부로 은퇴하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 한일병합을 재촉했다 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조선의 패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도덕한 민중과 고관들의 탐욕, 무지, 인맥와 담합행위 등 내부적 부패 때문에 발생한 당연한 징벌로 여겼다. 그는 석호필 등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석호필이 "하나님은 조선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것을 두고 조선인들의 게으름이 스스로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한일병합 조약 직후 도산 안창호가 거국가를 남기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갈등, 방황하였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와 아내, 2남 2녀가 있고 서모에게서 어린 이복동생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국을 주저했다. 이상재는 그에게 여러 번 이승만, 안창호의 사례를 들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후일 그는 이를 두고두고 통탄해하게 된다. 그해 10월 YMCA 기독교 청년회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고, 1910년 12월 4일 미국에서 열리는 선교회 공회에 참석차 출국하여 1911년 1월 귀국하였다. 이후 교육 활동 외에 토지 매입에 힘써 선산군 해평면 금산동(金山東) 산 72번지, 고양군 부암리(付岩里), 경성부 견지동,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 일대의 대 농지를 소유하였다. 윤치호는 다양한 책을 두루 독서하며 시름을 달랬는데, 삼국지, 삼국지연의, 손자병법, 서유기, 수호전, 춘추, 한비자 등의 중국 고전에서부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의 신은 죽었다 등의 서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1911년 9월 22일 아버지 윤웅렬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윤웅렬을 내심 존경하면서도 적극적인 애국심을 갖지 않은 것에 실망,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식적이나마 남작 작위를 다시 수여받게 된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다른 기독교인 및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의해 체포, 재판을 받았다.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12년 2월 5일 그는 최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초기에 윤치호는 전향을 거절하였고, 1913년 10월에는 아버지 윤웅렬로부터 승계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1914년 1월 22일에는 일본 천황의 명의로 하사된 목배(木杯)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1915년에 윤치호는 전향을 선언했다. 윤치호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후 매일신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 의사를 내비쳤다.(인터뷰 내용은 참조) 그러나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 단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운현은 그가 변절한 직접적인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의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의 저자 유영렬(柳永烈. 숭실대·사학과)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곧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의 지도자였던 그를 소환하여 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고 애국심을 고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자발적이지 않은 애국심, 강요된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거절한다.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은 1880년경부터 근대화를 위해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 성향은 특히 그가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 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윤웅렬은 한일병합 직후 곧 사망했고,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그는 이완용, 송병준, 윤덕영 등의 변절자들을 경멸 증오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이 나라를 판 대가로 부귀를 누린다며 늘 한탄하였고, 먼 친척이었던 윤덕영과 윤택영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격을 의심하며 멀리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는 주저하였다. 출감 후 경성 YMCA기독교청년회의 총무와 회장에 선출되었고, 연희전문학교 재단이사, 기독연합재단법인 이사로 선임되었다. 1916년 4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고, 세브란스 의전은 연세대 의과대학 및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가 개교하자 세브란스 의전 재단이사로도 취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의 참여는 소홀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개성의 한영서원(뒤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온 의사이자 의학자인 이만규를 받아들였는데, 그는 한영서원에서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윤치호는 그의 한글과 국사 교육을 묵인했고, 3.1 운동 이후 이만규와 관련되어 윤치호 역시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었지만 그는이만규의 일을 모른다며 일체 증언을 하지 않았다. 1918년 11월 양기탁이 중국 천진(天津)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양기탁에게 벽돌을 발로 걷어찰 필요가 없으며 담벼락을 머리로 들이받을 필요는 없다. 대화도 통할 인간하고 대화를 하는 법이라며 그를 얼마나 바보스러우냐며 조롱하였다. 1918년 12월 양기탁이 상하이에서 한반도로 압송,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居金島)에 2년간 유배형에 처해졌다. 양기탁이 거금도에 유폐되자 바로 그를 찾아 면회를 다녀왔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당국 시책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191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제4대 총무로 취임한다.1918년 겨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년 1월에 열리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의적이었다. 1919년 1월 하순에 윤치호와 박희도(朴熙道)는 연희전문학교의 학생인 김원벽(金元璧)을 중간에 두고 강기덕(康基德)·주익(朱翼)·한위건(韓偉鍵)·김형기(金炯璣)·이공후(李公厚)·주종선(朱鍾宣) 등 학생들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하였다. 1919년 1월 17일에 신흥우가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갈 의향을 타전해 왔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그날 송진우(宋鎭禹)가 찾아와 '국제연맹이 창설될 것이며, 약소국에 자결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기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이상적인 방안이 거부된다면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송진우가 3·1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조선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중 어느 나라도 바보처럼 조선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독립만세 운동참여를 거절했다. 윤치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송진우를 설득시키려 하였다. 윤치호에 다음 이유등을 들어 강화회의에 기대를 접을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윤치호가 일본인들의 힘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다. 파리강화회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3.1 만세운동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외교독립론 조차 부질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청년층의 비난이 빗발쳤다. 1919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호찌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순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호찌민의 활동을 보고 그는 소용없는 행동으로 봤다. 윤치호에게 만세 운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하려는 젊은이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는 정의롭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외관 상 평화와 정의를 표방하지만, 현실은 국력과 무력이 세계를 실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도덕적 이상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했지만, 윤치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개인이 반드시 세상을 주도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하여 되돌려보냈다. 이어 종로청년회관으로 신익희가 윤치호를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설명하며 독립운동에 동참을 권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기회가 아니라며 사절하였다. 무참하게 거절당한 신익희는 그를 소인배라며 질타하고 일어섰다. 윤치호는 호찌민과 같은 청년들의 좌절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약소국이나 후진국을 도와주겠느냐는 것이었다.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고종 독살설과 자살설이 시중에 확산되고 있었으나 그는 시위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식인들이 유포한 루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는 궁궐에 이미 일본에게 매수당한 내관이나 의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년 뒤, 사돈인 한진창에게서 고종 독살설의 전말과 고종 시신의 상태에 대한 것을 전해들은 뒤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된다. 1919년 3월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그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선전, 선동을 하는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다른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는 젊은이들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몰고간다며 일부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를 무책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선동이 독립을 불러오기는커녕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들을 더욱 가혹하고 엄하게 다룰 구실만 제공할 뿐이라고 내다봤다. 3.1 만세 운동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만세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3월 2일자의 일기에서 학생들을 앞세운 뒤, 만세 대열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기독교, 천도교계 인사들을 음모꾼들이라며 규탄했다. 3ㆍ1운동 후 구치소에 수감되는 여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일제 경찰에 대한증오와 분노로 밤새워 괴로워했다. 이후 3월 5일~3월 7일 그는 시내를 다니며 만세 시위 직후의 동태를 파악했다. 3월 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그 당시에, 윤치호가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며 일제에 저항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기에도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자)라고 썼다. 이때문에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1인인 권동진을 만났는데, 윤치호는 그로부터 처음에는 평화적인 선언서 낭독으로 이를 통해 신문 뉴스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로 결정했으나 학생들이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감정적인 시위로 변질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권동진이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였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소 감정적인 태도에서 한발 누그러졌다. 호찌민의 실패를 예견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거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기대 역시 좌절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 않았고, 이후 김규식, 여운형 등은 소련 등 사회주의세력에, 송진우 등은 실력양성론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1919년 3월 서대문에 설립된 경성보육원의 원장에 취임했다. 경성보육원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옮겨 현재의 안양보육원이 되었다. 그는 독립에 대한 의지는 당연하지만 단순한 만세운동 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봤다. 기마경찰 앞에서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을 게다. 윤치호는 3월 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했다. 그들의 행동처럼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세 운동이 계속되자 4월말 조선총독부 형사 세키야가 그에게 학생들에게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서 한장 낭독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는 형사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는 만세 운동으로 조선이 독립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독립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용기에 경탄했다. 7월 20일에는 교풍회 경성지회 회장에 선출된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내가 회장에 뽑혀 기분이 찜찜했다. 최강, 예종석, 민원식 같은 인간들이 당국의 사주를 받아 주도하는 단체가 희망적이거나 대중에게 인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풍회 모임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19년 4월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그에게도 임시정부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임정 참여를 거절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미국과 상하이를 오가는 김규식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서신과 유선을 통해 그는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 등의 정보를 수시로 교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을 담당했던 이시영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여운형, 이승만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도 상세히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당국에 임시정부에 대한 것은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1929년 4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명의의 서한이 조선에 살포되었다. 이승만의 명의로 된 훈령 중에는 조선인들은 절대 조선총독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말고, 소송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일본인의 법정에 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서한을 본 윤치호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1940년대까지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행사에는 불참했다. 그런데 3.1 운동 이후 학생들이 천장절 등 천황 일가의 생일 기념일에 교사나 동사무소 직원에게 떡을 받고는, 그 떡을 하수구에 던지는 것을 보고 호통치기도 했다. 일본 천황이 싫다면 떡이나 음식을 받지 말지, 왜 아까운 음식을 버리느냐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가난해서 굶어죽거나 아파도 진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아까운 음식을 받아서 하수구에 던져버리느냐고 반문하였다. 그해 5월 31일 7,8명의 젊은이가 종각역 근처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헌병이 들이닥치자 그 중 한명이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윤치호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지옥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용기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활동을 다녔다. 3·1운동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윤치호는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쉽게 승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주장했으며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 기술과 자본과 시장이 없는 조선물산 장려 바자회가 무슨 수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 안타까워 했다. 윤치호는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 양성을 위한 바탕으로는 경제력과 국민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전까지는 독립은 고사하고 자치능력 조차도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조선의 당면문제는 백성들에게 유해한,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 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농경지를 매입해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을 더 현명한 애국자 라고 평가했다. 토지는 생산력의 근본이었고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자원, 그 밖에 목축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지를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것을 예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식량의 자급자족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독립을 할 수 있느냐며 반문을 제기하였다. 그가 봤을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토지를 팔아 자금을 대주는 것은, 곧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가축의 식량, 석탄과 광물 자원등을 모두 포기하는 매국 행위로 인식되었다. 1920년 윤치호는 다시 YMCA 회장에 재선출되었다. 그해 8월 미국 의원단의 동양 3국 순방 소식을 접하고 양기탁과 함께 '미국의원시찰단환영준비위원회'(美國議員視察團歡迎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윤치호에게 미국 의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했지만 윤치호는 미국에서 아무런 이익도 없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국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겠느냐며 회의적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초기의 윤치호는 친일파 로 규정짓기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년∼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투자하는 한편, 홍보활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1921년 6월 조선인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22년 이상재, 이승훈,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1920년대 초 미국 의원 시찰단 환영회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 YMCA 회관에서 미국 의원 헐스맨의 통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그러한 노력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동정하더라도 동아일보 등지에서 언급하는 미·일 전쟁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1922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다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워싱턴 회의에 또 다시 한국의 독립 청원을 계획하며 독립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승만 등 한국인 민족 지도자들의 기대를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 여겼다. 그가 외교독립론 마저도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 여긴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을 미일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국보다 일본이 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힘의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전후의 국제사회 질서를 재편할 주도권과 부담을 갖고 있는 미국이 자국민과 자원의 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고, 국제관계가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미국의 이익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미국이 자국의 국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거나, 후원하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1921년 10월에는 이상재, 이승훈, 박봉승 등 기독교인 유지들과 함께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를 설립하고, 잡지 『신생명』을 통하여 문서로 한글 보급에 나섰다. 1920년 8월 14일 미국의 의원단이 방한하자 양기탁은 미국 의원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에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위를 계획했다가 또다시 체포되었고, 양기탁의 재투옥 소식에 충격을 받은 그의 어머니는 8월 29일 사망했다. 8월 29일 윤치호는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 인도적 차원의 석방을 탄원했고, 양기탁 역시 장례식을 이유로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 그러나 양기탁은 바로 열차편을 이용하여 만주로 탈출했고, 양기탁의 일시 석방을 주도한 그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1921년에는 교풍회가 조직되자 이름만 등록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그해 워싱턴 회의 직전에 그는 한국인 대표의 한사람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대표가 될 것을 권하는데 대해서 "한국 대표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뭘 얻었냐?"고 반문하였다. 그가 참여를 거절하자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워싱턴 D.C.에 다녀오라고 여러번 권고하였으나 모두 거절했다. 또한 "대중목욕탕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 하느냐며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도 윤치호에게 사람을 보내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일본은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워싱턴에서도 파리강화회의 때처럼 어느나라도 한국의 문제에 무관심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그는 토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땅을 지키는 것이 일제에게 구속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땅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주고 자신과 자손들은 굶어 죽는 자 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자기 땅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고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거 조선왕조의 사농공상을 비판,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인문 교육 외에 실생활에 필요한 실업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일제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한국을 근대화·문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한 것이며, 철거하거나 없앴을 경우 일본이 조선보다 100배 이상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육성한 조선인 엘리트들의 존재 역시 그들이 사라졌을 때, 조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손해를 본다며 응수했다. 윤치호는 1922년 11월 1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대 교장(敎長)에 취임하였다. 송도고보를 맡게 되면서 그는 영어 교육과 신앙 교육 외에 국내에서 사용하는 물품은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봤다. 미국의 흑인교육자 부커 T. 워싱턴의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모방하여 실업계 과목 교육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장남 윤영선에게 목장과 낙농, 양잠업을 가르쳐서 이를 경영하게 하였다. 이어 송도고등보통학교 농과에서 운영하는 목장과 실을 생산하는 공장을 두었는데, 학교 부설 공장에서 생산된 송고직(松高織)은 질기고 물이 빠지지 않는 옷감으로 중국과 유럽에까지 수출되었다. 실업계 학생들 중 낮에는 목장과 방직공장에서 근무하며 밤에 야간반으로 활동하는 학생들은 반공생(半工生)이라 하였는데 이는 훗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전공생을 두는 제도의 효시가 된다. 이어 윤치호는 졸업한 학생들 중 숙련된 학생들 중 일부는 학교 부설 공장과 목장에 두어 후배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을 돕게 했다. 그해 가을 만주의 한국인교민학교인 간도 영신학교가 경영난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11월 21일에는 재정난에 처한 간도의 영신학교에 현금 삼만원을 기부하였다. 1923년 1월 장남 윤영선이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 이라 봤다. 1924년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부교장인 임두화(林斗華), 일본인 교사인 이노우에(井上)와 사토(佐藤)에 대한 불만이 폭발, 그해 6월부터 교감과 두 일본인 교사를 축출해달라는 학생들의 동맹휴학 시위가 있었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며, 기숙사에 재학 중인 시위참여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내쫓았고, 동맹휴학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쫓겨난 학생들의 생활비를 댄다고 모금운동을 하다가 시위에 동참했다. 일본인 교사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시위는 송도고보 2학년생들이 시작하였으나 5학년 생들도 동참하고 이어 전교생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확대되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반일시위로 의심했고, 24년 9월 윤치호는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되 기숙사에서 추방당한 학생들은 모두 복귀시키고 학생들에게 일체 징계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진정시켰다. 9월말 총독부 학무국에 불려가 교사의 훈육에 대한 학생들의 반항심리라며 총독부 당국을 설득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윤치호는 일본이 식민지 한국을 통치하면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서울에서 조선인이 집을 지으려면 먼저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먼저 집을 짓고 나서 인가를 신청한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공평무사함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는 것이다. 일제는 1890년대부터 일선동조론을 주장했다. 일본이 단군 조선과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이룩한 사회라고 보면서도, 일선 동조론을 근거로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호소하는 주장에도 회의적이었다. 1923년 1월 9일의 메이지 천황과 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는 환등회에 참석하였으나 그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칙어실천회는 감수성이 예민한 조선 청년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로 조선 각지에서 이 환등회를 거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인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봤다. 그는 억지로 강요하는 애국심은 무의미하다는 논지를 내세우며 일본과 조선총독부 측에서 개최하는 어떠한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 해 7월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 평의원에 추대되었다. 1924년 1월 이상재가 그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독립을 탄원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고하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과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피를 흘리겠느냐며 대답하였다. 한국내 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인을 무시하는 행동을 눈여겨보던 이상재도 더이상 미국으로 가라는 말을 그에게 권하지 않았다. 1923년 6월 이후 산사에서 벌인 박중양의 휴양, 유흥행위를 비난하던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 감싸주었다. 1923년부터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휴양지, 유흥지로 사적으로 남용하였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비난하면서 박중양이 압력을 행사했는데, 이때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설득하여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며 동아일보를 적극 비호하였다. 1925년 봄 그는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업무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며 사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학교 학생들과 동문들이 윤 교장 유임운동을 벌이자 마지못해 승낙하고 동년 가을까지만 교장직에 있겠다 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송도고보의 국어 교사로 근무하던 한글학자 이만규(李萬珪)를 교장대리로 임명하여 교장직을 대신 수행하게 하였다. 야자 이만규는 한영서원 시절부터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규의 사람 됨됨이를 신뢰했던 윤치호는 이만규에게 학교 교장대리 직을 맡겼다. 그해 4월 30일 배화학당이 배화여자전문학교로 변경되자 재단이사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 뒤 차미리사의 근화학당(근화여학교)를 후원하였고, 감리교회 선교사 메리 플래처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에 세운 이화학당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여성에게도 평등한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딸이 말대꾸를 했고, 재혼한 아내 백매려와 갈등했으며, 이복 동생 윤치창의 처 손진실과 갈등하게 되면서 여성에게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후 총체적인 회의론자가 된다. 1925년 8월 강원도 철원군의 서석공립보통학교(瑞石公立補通學敎)의 신축 공사에 돈 1천원을 기부하였다. 그밖에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오산학교에도 1천원의 기부금을 기탁했다. 1925년 9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5년에는 조선인 산업대회에도 참여했다. 각도인민대표자대회, 조선인대회와 조선양성운동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각종 친일 어용 단체와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5년 11월 태평양문제연구회의 조선지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계명구락부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해 2월 2일의 계명구락부 회의에 참석, 1.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실행할 것, 2. 족보를 폐지할 것을 의결하였으며, 이날 회의에서 그는 계명구락부 이사로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광주에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가, 총독부에서 그가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자들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는 바로 풀려났다.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장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이상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그해에 이상재와 최병헌이 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나자 윤치호는 이를 애도했고, 그의 몇안되는 지인이 사라지면서 고독과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1928년 5월 제2회 야구구락부 리그의 대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11월부터 1937년까지는 제9대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을 지냈다. 1927년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송진우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실패한 김성수는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기도한다. 김성수는 신간회의 조병옥, 허헌, 김병로, 이인 등을 통해 윤치호를 회장으로 추대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김성수측은 신간회의 세력확대에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27년 12월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에 작용하였고, 박영효와 함께 1927년 12월 민족개량주의의 대부인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옹립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28년 초에는 송진우가 경성지회에 입회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신간회에 가입하였으면서도 별도의 조직을 결성한다. 윤치호는 박희도와 함께 별도로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였다. 윤치호, 박희도 등은 신우회를 표현단체로 하여 각파 합동전선을 전개하였다. 윤치호와 박희도는 신우회를 중심으로 내분에 휩싸인 신간회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흡수 노력은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29년초 출국,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석차 둘째 아들 윤광선을 대동하고 출국, 백관수(白寬洙), 송진우, 유억겸(兪億兼), 김활란 등과 함께 한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의 자신의 사유지를 오룡리·봉암리·방각리(현 황금리) 세 마을의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었다. 그는 조선총독부를 향해 참정권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29년 1월 16일의 일기에서 그런 조선총독부가 영화 벤허의 상영을 허락한 것을 놀라워하기도 했다. '오후 3시, 아들 장선과 기선을 데리고 단성사(團成社)에 가서 벤허라는 영화를 보았다. 변사는 팔레스타인의 로마인 총독을 가리켜 감사(監司)라고 지칭했다. 내용을 알 텐데도 경찰이 조선에서 이 영화를 온전히 상영하도록 허가한 게 신기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1930년 모교인 미국 에모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가 윤치호 박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 수여받은 명예박사 학위 때문이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31년 재만주한인동포위문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만주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 윤치호는 친일단체를 한층 강화해 총독부 관료와 친일한국인 간의 친목단체인 토요회에 참여했으며 이후 조선인교풍원, 조선대회, 조선칙선귀족원경에도 참여하는 등 부일 협력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1년 그는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를 부귀초등학교 건립 부지로 기증했다. 그 기념으로 마을 주민들이 감사의 의미로 1931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그리고 윤치호는 부귀소학교 건립 기금으로 2000원을 내놓았고 업적을 기려 부귀면장이 1931년 그의 영세불망비를 건립했다.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영세불망비 중 2기는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발견된 뒤 강제 철거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30년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충무공 종손가의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돈을 빌려 쓰다가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총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년 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 이다. 일본인 경매자가 가장 비싼 돈을 제기했고, 이순신 유적지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송진우, 정인보, 김성수, 최남선 등에게 연락하여 이 일만큼은 막아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국민에 알려지면서 1931년 5월 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 윤치호는 충무공유적보존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 여명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1만6021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윤치호 위원장을 포함해 남궁 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성금으로 종손가의 채무 청산과 함께 현충사를 중건하고 위토를 추가 매입했다. 이순신 유적지와 현충사의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유족의 빚을 대신 갚는 일을 주도한 혐의로 그는 불령선인의 거두로 지목되어 내사를 당하게 된다. 1931년 친일 단체인 토요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진우는 그가 토요회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해 주었다. 송진우와의 언쟁 끝에 송진우는 그를 변절한 소인배라며 질타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송진우 같은 이는 내가 토요회와 같은 모임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나도 그런 회의 멤버가 되고 싶지 않다”라며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이후 각종 강연에 억지로 참여하였지만 그는 일부러 자신이 연장자라는 점을 이용, 맨 끝으로 순위를 미룬다음 "이미 훌륭한 연설은 앞의 연사들이 다 했으니 따로 할말이 없다"거나 "오늘의 좋은 말씀은 먼저 연사들이 다 말씀하셨다"며 강연을 우회적으로 회피하였다. 1932년 일제는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윤봉길, 이봉창 사건으로 이반된 한국인의 민심을 끌어들이려는 일제의 술책임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끊임없이 조선인들에게 천황 폐하의 은혜를 역설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일 뿐이다.'며 반박했다. 조선총독부와 일제는 일제가 한일병합 이후 조선에 철도, 도로, 항만 등과 공장 등 산업자본을 건설한 것을 홍보하며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일본의 은혜 주장은 당치도 않다며 반박했다. '일본이 조선을 개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탈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 도로와 철도와 교량, 항만이 파괴되었을 때 손해를 입는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부터 내세운 내선일체론에 반발했다. 다만 일본인과 똑같은 권리를 주되,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개별적인 민족, 인종으로 존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대제국이 되고 싶거든 다민족 대국가로 생각의 폭을 넓힐 것과, 조선인들에게 일본식으로 강요하지 말고 조선인들 나름대로의 특징은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1933년 그는 예종석의 대아세아 운동과 1934년 동아민족문화협회의 대아세아 운동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 또 1934년 최남선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자, 그가 일본의 국수주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1933년에는 아산 음봉면의 음봉보통학교에 토지를 기부하였다. 이는 음봉보통학교가 이전할 부지를 찾지 못하자 윤치호는 자신의 신항리 땅을 기부하였다. 이 기념으로 음봉초등학교 앞에는 윤치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33년 2월 19일 이화여자전문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였다. 1933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는 "각 방면의 유지 회합, 이전 후원회 창립"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25명의 위원도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바로 윤치호는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정되었다. 창립총회에 이어 열린 위원회에서는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김일선을 선출하였다. 그밖에도 윤치호는 숙명여자전문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에도 기탁금을 헌납하고, 재단을 후견하였다. 윤치호는 교육의 힘이 나라를 암흑에서 구원할 수 있다며 학생들은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할 것과, 선택받은 위치에 서 있음을 감사히 여길 것,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알기 쉽게, 실무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을 당부하였다. 1934년 근화여고보의 교장이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의 재단 이사장인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근화학원 재단 이사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한편 1934년 2월경 그에게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이 되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능력 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934년 3월 결성된 조선 대아세아협회에 가입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언문 철자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표기법이 달라지게 되자 윤치호는 최남선, 지석영 등 지식인 112인과 함께 '정음(正音)지' 제5호에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그는 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개정이 누구를 위한 개정이냐며 개악은 아니냐고 비판하였다. 그는 1925년 육순 때의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할 것을 누군가 권고했지만 내가 환갑상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거절했다. 이듬해 회갑 때에는 생모 이정무가 살아있었으므로 억지로 회갑잔치를 하였으나, 조촐하게 가족 친지들만 불렀다. 그러나 문장(종친회장)이었던 숙부 윤영렬의 후광 덕에 많은 일가 친족이 참여하게 되었다. 1935년의 그의 칠순 생일도 그는 간략하게 추진하려 했다. 칠순 때의 생일 잔치는 인생칠십 고래희라 하여 흔치 않음을 들어 성대하게 할 것을 누군가 권고했지만 그는 큰 바위 얼굴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며, 자신이 사회적으로 생일축하를 받을 만큼 덕망 높은 사람이 아님을 들어 사양하였다. 그러나 양주삼, 김창제, 허정, 권동진, 신흥우, 조만식, 앨리스 아펜젤러 등이 특별히 좌옹선생 칠순 기념위원회가 조직하여 그의 칠순 잔치를 준비하였다. 1935년 서울 종로에서 그의 칠순잔치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1935년 조만식, 김성수의 주도로 고희연이 성대히 개최되었다. 이광수 등이 참석했고, 총독부는 특별히 그의 고희연을 감시하였다. 12월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근화여학교(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의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하였다. 1935년 10월 일왕의 국민정신 작흥조서(作興調書)에 바탕한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등에 가입 활동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중추원 의원직을 다시 제안하였으나 '내가 취임하는 동시에 그대들이 원하는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며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왕실을 핍박하지 않고 살려두었으며, 조선을 위해 도로와 철도를 놓아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무책임하게 일본 정부가 주는 왕,공위를 받은 조선 왕실을 규탄했고, 일본을 위한 도로 철도와 일본의 체면을 위한 조선왕실 보호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35년 12월 크리스마스 준비를 이유로 연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36년 2월 어머니 전주 이씨 이정무가 사망했다. 모친상 기간 중 그는 흰 옷을 입고 다녔다. 총독부는 그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신앙상의 이유와 모친상중임을 들어 신사 참배를 거절하였다. 모친상을 치루는 동안 그는 노부모의 존재 때문에 1910년 당시 조선 땅을 떠나지 못했던 것을 통탄해하였다. 1936년 윤치호는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선임되었다. 이화여전 재단이사로 재직 당시 그는 학교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 하기도 했다. 자신이 설립한 송도고보에도 운영 비용과 시설 비용을 지원하고 토지를 기부하여 운동장을 확장하고 체육관을 설립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보다 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일본인들은 송도고보의 크고 넓은 건물과 시설물, 넓은 운동장을 보고 질리기도 했다. 혹자는 윤치호의 직계선조인 윤근수, 윤두수로 그의 문중은 당색으로는 서인 소론 계열 출신이었지만 당색에 구애됨없이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 남인계 실학자들이 쓴 저서들도 사서 탐독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잠이 적었던 그는 새벽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을 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잠이 줄어들어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졌다. 1894년 이후 조선에 수입된 커피 역시 그의 피로를 일시적으로 덜어주어 정력적인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돕는 역할을 한다. 윤치호는 다산 정약용을 가리켜 조선왕조가 낳은 위대한 천재라며 격찬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 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타이완 등의 식민지와 포로들에 대한 징집, 차출, 공출량을 늘렸으며 황국 신민 교육을 한층 강화했다. 동시에 무장단체들의 활동도 격해져 갔다. 윤치호는 사회가 미쳐돌아가고 있다며 일본과 조선인 간에 벌어지는 광기와 적개심을 비판하였다. 일제로부터 협력 제의가 들어오자 그는 교육, 사회활동으로 만족한다며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조선총독력연맹에 참가하고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의 정책에 찬성 하고, 1937년 7월 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강연회에 이어 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여 동기를 묻는 지인들에게 간단하게 언급하거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1938년 일제가 조선인의 병력자원화를 위한 제1차적인 조치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했을 때, 이것을 내선일체의 합당한 조치로 보고, 환영하였다. 한편 그는 안창호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안창호가 쇠약해지자 보석 탄원을 냈고 1937년 12월 출감,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나 안창호는 간경화,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하수증, 복막염, 피부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고생했고 막대한 병원비가 들어갔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의 치료비를 김성수와 함께 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와 김성수의 비용 조달에도 고문으로 쇠약해진 안창호는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안창호의 장례식날 그는 대성 통곡하였다. 안창호의 죽음에 감정이 북받친 그는 일주일 이상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청년들과 가족의 만류로 겨우 진정한다. 1938년 초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중이라고 연락이 왔으나 그는 참여를 거부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경성부에서 결성되었으나 불참했다. 이때 그는 "내가 회장으로 지명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후에도 직책을 맡게 되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하였다. 1930년대 후반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코이치로(三橋孝日郞)에게 불려가 협박을 당했다. 미하시 코이치로는 자신이 윤치호를 공갈, 협박한 것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1938년까지 그는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3월 18일 공익에 기여한 이에게 상훈을 수여할 때 그에게 포장(褒狀)이 수여되었지만 역시 불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 기록해 놓았고, 그해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찰관 등으로부터 1938년 4월 29일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추궁당했다. 그의 일본인 친지였던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 역시 그가 총독부에서 주최한 천황 탄신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며, 과거 일본 천황과 천황가의 경조사 기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점, 총독부에서 그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것을 귀띔해주었다. 일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미행, 정탐했다는 것을 깨닭게 되자 그는 경악한다. 1938년 5월 23일 오후 2~3시 조선총독부를 방문, 총독과 정무총감, 경무국장을 상대로 자신이 중추원에 들어가는 것을 고사하는 이유를 해명하고 되돌아왔다. 일제는 민족주의 인사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1937년 8월부터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인사를 검거한다. 윤치호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을 하거나 탄원서를 작성하여 석방케 하였다. 1938년 5월경 흥업구락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는 그의 사촌동생인 윤치영도 연루되었는데, 윤치영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전기고문과 팔다리를 옭죄는 고문을 당하였다. 윤치영의 면회를 왔다가 고문장면을 본 동아일보 기자 서정억이 일본 경찰에 항의했다가 구타당하여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치호는 윤치영 등의 신원보증과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언론인을 구타했다는데 대한 일본 언론계의 항의와 기독교대회 참석차 방문했던 일본의 기독교 YMCA 청년회 인사들의 협력도 작용하였다. 동년 7월 황국신민화 실천운동의 조직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창립총회 준비위원 및 상임이사로 선정된 윤치호는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치기도 했다. 1939년에 우가키의 중화민국과 합동하는 협상에도 반대한다. 그는 농촌 진흥 운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내선일체'의 실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며 강연회에서 '반도민중의 협력'을 강조했다. 한편으로 1934년에 윤치호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황민화 운동을 거쳐 농촌 계몽 운동과 사회주의, 광복군, 독립군, 임시정부, 경학사, 동제사 등의 해산을 주장하고 창조파, 개조파도 해산하자는 주장을 하는 조선총독대회와 조선력강연대회에 참가하였다. 국민참가조선참가대회 사장을 거쳐 국민조선총독력대회에 가담했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어학회 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의 석방, 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로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 1939년 1월 박희도가 창간한 잡지 《동양지광》의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2월 7일 배영동지회 회장과 지원병 후원회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봉급을 주지 않는 자리라서 내가 선출되었을 뿐이다"라며 냉소적인 시각을 보였다. 2월 9일 동양지광사 창간 기념 시국강연회에 참석,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고, 2월 11일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3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직을 다시 제안받았다. 그러나 그는 참의직 취임을 거절했다. 1939년 6월 일선장병 휼병금 2000원을 조선군 제20사단 사령부에 납부했다. 그해 7월 중국을 지지하는 영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의 회장을 맡았다. 8월 30여개의 지방 배영동지회가 연합한 배영동지회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윤치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영국과 영미권 국가들에 대한 실망을 품게 되었다. 1920년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김성수와 조만식의 물산장려운동에 호의적이고,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수바스 찬드라 보세, 마하트마 간디, 자와랄할 네루 등의 책과 칼럼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1934년에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세가 망명 중 한반도를 방문했는데, 그때 그를 직접 찾아가 면담을 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찬드라 보세의 저서 '질곡의 인디아(Fettered India)'를 구해서 탐독했다. 이 책을 읽은 뒤 윤치호는 영국이 인도를 잔인하게 학대, 억압통치한다는 사실을 접한다. 한때 일본의 통치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영국의 식민통치를 본받아야 된다고 봤던 그는 영국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1937년부터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서는 반미, 반영 활동을 강요하였다. 1939년 7월 23일 그는 경성부에서 인파 4만 명이 모인 전 조선 배영궐기대회 회장에 추대되어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장덕수 등은 영국을 흡혈귀라고 맹비난했으나 그는 흡혈귀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어쩔수 없이 참석한 그는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고 내빈석에 앉아있었다. 윤치호는 참석자들이 영국, 미국을 동아시아를 가로챌 강도, 혹은 영국은 동아시아의 흡혈귀라고 비난하였으나 호응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 참석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단지 자신은 '회장 자격이라서 어쩔수 없이 참여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각종 반영 시위, 반미 시위를 기획하고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에도 초청장만 받거나, 참석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윤치호는 영국이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나름대로 관대함을 베푼다고 보고 있었다.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를 통해 실망했으면서도 그가 영국이 그래도 관용을 베푼다고 확신한 것은 마하트마 간디 같은 인물들이 죽임당하거나 박해당하거나, 국외로 출국하지 않고도 국내에서 자유롭게 민족 독립운동을 하도록 방관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월 7일 그는 사촌 동생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윤치소,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1940년 4월 그의 집에서 해평 윤씨 종친회가 열렸다. 숙부 윤영렬이 사망하고 공석인 후임 문장(門長, 종친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었는데, 이때 그는 연령으로 최연장자였고 항렬 역시 가장 높았으므로 문장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는 문장 자리를 사촌 동생 윤치소에게 양보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계속 압력이 들어오자 창씨개명을 고민한다. 가족들과의 논의 끝에 창씨개명을 다짐하고 성을 윤(尹)의 파자인 이토(伊東)로 정하였다. 창씨개명 직전에 윤덕영 등이 반대하여 장내가 소란해지기도 했었다. 그가 문중 결정에 따라 창씨개명을 단행하자 실망한 학생들이 그의 집앞에 와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당시 창씨개명은 그의 자의에 의한 창씨개명은 아니었다. 1940년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그는 이토 치코로 개명했다. 1940년 4월 29일자 일기에서 그는 문장(門長, 종친회장) 선출보다 중요한 안건은 '창씨개명 문제에 대한 윤씨 문중의 거취문제'라고 기록했다. 이때 윤덕영은 창씨개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는 이런 모임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던 나머지, 추종자들을 동원해 이 문제(창씨개명)가 아예 거론되지 못하도록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참석자의 절대 다수는 이 문제를 안건으로 채택한 후, 만장일치로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했다 는 것이다. 한편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1940년 5월 1일 오전 창씨개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한편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독립운동단체에서는 성과 이름을 바꿔서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다며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5월 1일 오전 11시, 미나미 지로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사회적 갈등 완화를 위해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창씨개명을 한 문중의 결의와 관계 없이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카 윤보선 같은 경우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이 자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봤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 하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난 차마 우리 아이들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창씨개명을 결정한 것'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조선인에게 일본 시민권을 준 것이라는 찬양과는 달리 일본이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위한 작업이라고 봤다. 그는 '내선일체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하라고 격려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민족을 일본의 근간이 되는 민족으로 틀어쥐기 위한 방법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40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양문화학회(東洋文化學會) 주최 동양정사(東洋事情) 강좌에 연사로 참석하다. 그의 창씨개명은 자의라기 보다는 문중회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의 창씨개명이 안 알려지면서 9월 그의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투서가 나돌아 서대문 경찰서에서 수사하기도 했다. 1940년 10월 4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을 등록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재단법인 송도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10월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장직에 취임해줄 것을 청하는 부탁이 계속 들어왔다. 여러번 고사하던 그는 12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수락한다. 12월 연희전문학교로부터 온 학교장직 수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 역시 번거로운 자리라며 달가워하지 않는다. 1941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다. 1941년 2월 제4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언더우드 2세 교장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반일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연전 이사회는 재단 이사의 한 사람인 그를 천거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이 있는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실정을 동정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명사 대우를 하는 터이므로 학교를 지키는데 다시 없는 적임자로 보여 이사회가 천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선총독부가 연전을 빼앗기 위해 그 다리로 그를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윤치호는 거부하였지만 이사회의 무기명 투표 결과 윤치호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윤치호 역시 연희전문 교장직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1941년부터 3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뒤 태평양 전쟁 이후 그는 1941년 5월 1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에 임명되자, 이를 받아들였지만 3개월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5월 27일 사립연희전문학교 기독교재단법인(私立延禧專門學校基督敎聯合財團法人)의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사망 직전까지 연희전문학교 재단법인이사장의 직위를 보유했다. 그는 1941년 1월에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으나 총련 모임에 거듭 불참하다가 1943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참여로 바뀌었다.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조직, 결성하는데 참석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맞아서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찾아와 한국이 독립할 것이며, 임정에서 조직한 독립군이 국내에 진주하게 될 것을 시사하였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을 보고 그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면 한국의 독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미국이 승리한다면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능성을 두고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하느냐며 번민하였다. 이후 자신이 조직한 흥아보국단과 김동환(金東煥) 등이 이끄는 임전대책협의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1941년 9월에 조선임전보국단의 창설을 본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0월 21일 친일 단체들의 결집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식에 불참하였다. 10월 22일 윤치호는 조선임전보국단 조직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임전보국단 행사에 번번히 불참하고 행사를 펑크내어 임전보국단 인사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그해 말 '극동의 결전과 오인의 각오' 라는 주제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협력에 대한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좌절하였다. 이후 그는 두가지 가능성을 점지하였다. 일본이 승전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일과 일본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의해 패전하고, 조선은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내렸다. 전쟁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불교, 천주교인에 이어 개신교계에서도 전쟁을 자발적으로 찬양, 독려하자 그는 좌절한다. 1942년 8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총독부는 일본인 다카바시 하마치(高橋濱吉)를 교장으로 앉혔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그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며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이후 그는 중추원의 정기 모임에 간간히 출석하였으며, 1943년 9월 23일에는 중추원 모임에 나가 점심을 먹은 뒤, 중추원 의원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10~20인이 출근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중추원의 참의들은 출근하여 '1~2시간 동안 잡담과 흡연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질타했다. 1943년 8월 11일 차미리사의 부탁으로 재단법인 덕성학원(財團法人德成學園)의 재단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43년 11월 윤치호는 이광수·박흥식·송진우·주요한·한상룡 등과 함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를 개최하여 학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간담회,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였으며 5일간 진명학교 등 10개소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를 열었다. 11월 6일 언론에 '내 아들 이어든 속히 지원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자'는 제목의 담화문을 기고하였다. 그 날 중추원에서 개최한 단합회에 참석했고 학병제의 솔선협력을 결의한 후, 평남지역 독려강연반 연사가 되어 이튿날 90여 명과 함께 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 12일 평양에서 열린 학도병독려 연찬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강연하였고, 매일신보에 학병 독려 담화문을 발표했다. 1941년 이후 그는 이승만의 미국의 단파방송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프로그램인 미국의 소리 VOA방송에 출연하였고, 그 단파방송이 라디오를 타고 조선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인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며, 설령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었으나, 일본이 패배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패배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전망했다. 이 기간 중 미국은 한국인 지도자 5명의 정치적 성향을 체크하기도 했다. 미국의 당시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일제와의 협력을 강요받았지만, 한국에서의 위상이 아직까지 높기 때문에 연합군의 한국내 활동에 귀중한 협력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1944년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 이 되고, 1944년 5월 12일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44년 조선인 우대 감사 사절단의 단장으로 도일하였다. 1907년(융희 1년) 윤치호는 로마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대회에 한국기독교대표단의 단장으로 다녀왔다. 1910년(융희 4년) 미국 애틀랜타 주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평신도협회 총회에 참석하였고, 미국 감리교선교부의 초청을 받고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기독교 세계선교회의(I.M.C)에 참관하고 돌아왔다. 1916년에는 YMCA 청년회 총무, 1930년에는 YMCA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 활동하였다.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한 이상재를 도와 YMCA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기독교 청년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이상재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그 뒤 남부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하고 선교하는 활동을 하였고, 국제 교회연합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30년부터 윤치호는 한국내 남·북감리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새문안교회 건축공사비 중 40%를 원한경 장로가 섭외하자, 기독교계 원로인 윤치호는 거액헌금 을 새문안교회 신축공사비로 기부하였다. 그밖에 오지 선교사들과 개척교회에 파송되는 목사들의 여행 경비를 직접 후원해주기도 했다. 1938년 5월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 기독교의 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현실생활의 구원을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을 직접 선보였으며 기독교신앙인들의 신앙 모범촌 건설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38년 7월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감리교의 통합을 위하여, 조선감리교회와 일본의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일선(日鮮)감리교회 특별위원회가 개최되자, 그는 김영섭(金永燮), 신흥우(申興雨), 양주삼, 유형기(柳瀅基), 정춘수 등과 함께 조선인전권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43년 10월부터는 각지의 기독교단체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지원을 목적으로 YMCA 재단법인 등록사업을 추진, 11월 10일에는 YMCA의 재단인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유지재단(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維持財團)을 구성하고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한편 1908년 그가 역술한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번역본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1941년 부인 백매려가 사망했다. 이후 윤치호는 재혼하지 않았다. 1945년 2월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4월 박춘금을 위원장으로 앉히면서 그는 대화동맹 이사장으로 물러났다. 1945년 2월 13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이 재단법인 송도중학교로 바뀌자 송도중학교 재단법인 이사가 되었다. 4월 3일 다시 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1945년 4월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 이어 박중양이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윤치호는 먼저 조선신궁에 봉고제를 올린 후 총독과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어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간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8월 10일 광복 직전, 그는 개성의 광문암동 근처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패망, 방송을 통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이를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그는 친일반민족위원회 및 경향갤러리에 체포되어 명동재판소를 거쳤으며 3개월간 투옥당했다가 풀려났다. 광복 직후 그는 애국가의 친필 사본을 셋째 딸 윤문희(尹文姬)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자신이 친일파로 규탄받는 시점에서 애국가에 관련된 것이 알려지면 애국가에 타격을 주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를 찾아온 지인들에게도 자신이 애국가의 원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붙여둘 것을 당부하였다. 1945년 8월 19일 개성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습은 실패하고 괴한은 도주했다. 이후 윤치호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줄을 이었고, 외출시에도 그를 친일파, 매국노라며 매도하는 학생들이 나타나 돌과 휴지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의 비난과 투석에 개의치 않고 개성과 서울을 활보하였다. 고향 신항리 신촌에 세워진 '전 협판 윤치호 불망비'는 파괴되었고, 음봉면 음봉국민학교에 세워진 기념비는 학교 구내로 옮겨간 탓에 무사하였다. 9월 서울에서 한민당(韓民黨)이 창당되자 그를 원로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1945년 9월 2일 인천을 통해 미국 육군 24군단이 주둔하였다. 이때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파견한 대표단은 미군정이 한국 정부의 조직에 활용하길 바라는 믿을 만한 인사들의 명단에 여운형과 여운홍, 안재홍 등의 건준 지도부와 당시 보성전문대학장인 김성수를 포함한 전, 현직 교육계 종사자 6명 등 모두 17명의 인사를 추천하였다. 그리고 적극 배제해야 할 인사로는 미국과 기타 외국에서 교육받은 친일파로서 윤치호, 박흥식 등 14명의 명단을 제시하였다. 이는 CIC보고서 'G-2, 1945. 9.9: I'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군정은 이를 무시하였고 그는 별다른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9월 23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면서 중추원 고문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미없는 자리였을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미군정 주둔 이후 군정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내지는 조선인을 적국민으로 다루는 것을 비판했고, 군정과도 충돌하였다. 그는 군정청 소속 군인들 사이 세상에서 무서운 세가지가 다이어리아, 고우너리아, 코리아라는 농담을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 농담을 하는 저의가 뭐냐며 영어로 추궁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친일파 청산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이승만과 김구, 미국 군정청에게 각각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불가항력을 역설하는 편지서신을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애국자연 하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독립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리며 수시로 규탄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이 개선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고 영웅심리에 들뜬 자들이라며 경멸하였다. 1945년 11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임정 요인 환국 직후 김규식이 그를 찾아왔다. 이후 여러 번 김규식의 방문을 받았으나 그는 김규식에 대한 정치적 지지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다시 친일파의 석방, 사면론을 주장하였다. "애국자들의 공갈협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을 단행해야 하는"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친일파들을 사면, 석방해주어야 되는 이유로 그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공갈과 위선, 폭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11월초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와 면담하려 하였으나 모두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비서로 있는 사촌동생 윤치영을 통해 이승만 측과 교섭하였으나, 이승만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경교장 역시 윤치호의 방문 요청에 답변을 회피했다. 광복 직후 그는 친일 협력자 내지는 거물 친일파 정치인으로 수시로 규탄, 비판당하였고, 수시로 비난과 논쟁에 시달리며 이를 반박하였다. 11월 말 치아에 통증을 느낀 그는 경성부에 있는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던 중 노상에서 갑자기 졸도하였다. 만년의 윤치호는 기간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다. 이후 병석에 누워 있었다. 1945년 12월 9일 오후 4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開城府松都面高麗町)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그는 중풍으로 불편한 몸으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들은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했다. 독립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1리 독골마을 선영에 안장되었다. 윤치호의 묘소는 둔포면 석곡1리 선영 중 가장 오른쪽에 있으며, 마애방, 백매려 두 부인과 합장되었고, 큰 평면 돌무덤으로 되어 있다. 묘소 옆에는 검은색 오석 재질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50년 1월 그의 장남 오당 윤영선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1960년 8월에는 조카 윤보선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이후 그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대상에 선정되었으나 독립·계몽운동가였다가 후에 부일, 친일협력 활동 등이 감안되어 건국공로훈장 수훈에서 제외되었다. 1995년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강연이 개최되고, 1998년 4월 3일 서울 종로2가 YMCA 강당 2층에서 윤치호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2002년 3월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는 7일 '친일파 윤치호 동상을 철거하라'는 성명서를 통해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정된 윤치호가 인천 모중학교 교정에 설립자로서 1968년 세워진 것으로 확인했다며, 해당 학교는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위해 이 동상을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천연대는 이와 관련 "윤치호의 동상이 인천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동상이 청소년의 배움터인 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2001년 12월23일 서울의 광신학원이 설립자 박흥식의 동상을 친일파라는 이유로 교정에서 철거했음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바르게 심어주는 것만큼 중요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학교 당국이 윤치호의 동상을 스스로 철거하지 않을 경우 역사바로세우기 및 인천정체성 바로찾기 차원에서 철거운동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 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공개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교수 박노자는 그를 영화화 할 역사인물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윤치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사 최초의 ‘세계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애국가를 작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 시절에는 ‘조선민족에 자립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대지주인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성, 민족주의, 친일… 근대적 이념과 지향의 다면적 구도에서 한 개인이 배회하는 과정은 윤치호를 통해 대단히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를 영화화하자면 그건 ‘시대와 개인’의 극이 될 것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격변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는지, 개인으로서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2009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윤치호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3기 중 2기가 발견되어 강제 철거당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2010년 4월 제보를 받고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현장을 답사, 부귀초에 철거 협조 공문을 발송하는 등 학교측과 부귀면의 협조로 일제잔재물인 윤치호 불망비를 철거하였고 윤치호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안내판을 함께 세워두었다. 그러나 '친일이라도 진안군의 역사를 담은 문화재'라는 일부의 주장과 윤치호의 종중 후손들의 끈질긴 요구로 불망비는 2012년 반환됐다. 1890년대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본인이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 최초로 캐나다를 방문한 인물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유학한 후 귀국길에 밴쿠버에 들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천자문을 본따 《유학자취》 (幼學字聚)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천고지원(天高地圓)·일승월조(日昇月照) 등 모두 1,200자로 되어 있으며, 간편하고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초학자인 어린이들을 가르치기에 편리하게 엮었다. 이 중 ‘효조오석(曉朝午夕)’이라 하여 “새벽에서 아침이 되고 아침에서 낮이 되며 낮에서 저녁이 된다.”든가, ‘주명야암(晝明夜暗)’과 같이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는 식으로 새로운 문자학을 도입한 것이다. 이 책은 개화기 아동교육을 위한 문자학습서로서 많은 노력과 연구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라는 평가도 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그는 명성황후의 암살에 조선인 협력자들이 존재했다고 확신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명성황후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츠카가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일본의 귀족화된 조선 왕족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다. 윤치호는 한일병합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황실에서 책임을 통감한 인물이 의친왕 외에는 거의 없었다는 점과, 대부분의 황족들이 일제가 주는 공작, 백작, 남작의 작위를 받은 점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그에 의하면 일제에 협력한 양반고관 외에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았던 대한제국 황실 역시 한일병합의 원흉이자 무책임한 존재로 비춰졌다. 1909년 윤치호는 케롤라이나 학당의 이름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1898년 10월 2일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켐벨 여사가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세운 것이 '케롤라이나 학당'이었다. '배화'는 1909년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의 교명으로 이어졌다. 1929년 3월 12일 셋째 딸의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고 몰락했으나, 그의 이복 동생 윤치왕과 윤치창, 아들 윤영선은 연좌되지 않았다. 4촌 동생 윤치영과 조카 윤보선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있었으며, 윤보선은 후일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당원으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여섯째 사위 현영학은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민중신학자와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 윤효진은 1970년대에 피겨 선수로 활동했다. 그의 손녀인 윤효진(미국 거주)과 주영순은 70년대에 주니어선수권에 도전했다. 1900년대 중반 윤치호의 둘째 아들인 윤봉성(尹鳳成, 요절)과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영서원 동창 최규남(崔奎南)은 몰래 남의 앵두밭에 들어가 앵두를 서리해서 배불리 먹고 있었다. 지나가다 이를 본 윤치호는 아들 윤봉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고 한다. 윤봉성이 호되게 매를 맞고 통곡하는 것을 본 최규남은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봉성이는 아무죄가 없어요 라며 윤치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였다 한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들어 윤치호를 말리니 윤치호는 내 아들을 도둑놈으로 만들 셈이냐며 분을 참지 못하고 아들 윤봉성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김옥균, 서재필, 유길준, 안창호, 이동녕, 이상재, 양기탁, 박중양,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김규식, 이승만, 이광수 등과 친분관계를 쌓고 교류하였다. 이 중 서재필과 이승만, 김규식이 망명하고, 박중양은 3·1 운동 이후 절교하였으며, 유길준은 일찍 사망하면서 그의 인간관계의 폭은 다소 줄어들었다. 사회주의자였던 허헌 역시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성공 가능성을 장담못하면서도 대가 없이 그에게 광산사업에 쓰라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그의 사촌동생 윤치영에 의하면 윤치호가 대한민국의 애국가 가사의 일부를 썼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애국가 가사의 앞부분은 최병헌 목사가 짓고, 후렴구는 윤치호가 지었다는 것이다. 최병헌 목사는 윤치호가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윤치호와 최병헌이 함께 지었다는 애국가 사본이 2002년 한남대학교 교수 박정규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또한 애국가의 원본은 그가 지었으나,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부 개사했다고도 한다. 그밖에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는 협성회 무궁화가 역시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안창호가 가사의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를 문제삼아 가사를 바꾸라고 요청하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고쳤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안창호는 윤치호가 지었다가 본인 스스로 수정한 부분 중에서도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 나라 만세'로, '이기상과 이맘으로 임금을 섬기며'를 '이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며'로 다시 고쳤다. 주요한 과, 안태국 의 사위 홍재형 등은 그가 지은 협성회 무궁화가를 안창호의 요청으로 개사한 것이 애국가의 기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홍재형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전택부 역시 윤치호가 애국가의 유력 작사자라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는 첫째로, 1907년 윤치호의 역술로 출판된 <찬미가>중에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애국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 둘째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양주은이 소장한 국민가 중에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 셋째로 해방 후 윤치호가 친필로써 ‘윤치호 작’ 애국가(사진 10번)를 쓴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1955년 벌써 밝혀졌던 사실 이라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은 찬미가의 개사본이 1910년에 실렸다. 애국가가 수록된 기록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 윤치호의 “찬미가”이고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에 애국가의 전문이 윤치호 작사의<국민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어 윤치호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윤치호는 안창호의 노력으로 신학문을 수용하고 체계적 교육이 시행되고 있던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이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음악 평론가인 김종만은 1904년 부터 1920년 사이에 부른 미국 한인 찬송가 속에 “윤선생 티호 군 작사”로 적힌 현행 애국가를 보관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적십자가 발간한 “National Anthems-And How They Came to be Written” 이란 영문자 책에서도 애국가 작사자가 Chiho Yun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02년에 윤치호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가 애국가의 원형과 같다는 자료도 나타났다. 2006년 2월 27일에는 박정규(朴正圭) 한남대 교수가 충북 청원군에서 열린 단재 순국 7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문 ‘신채호의 국내에서 쓴 글에 대한 고찰’중에서 애국가의 원형이 된 노래도 함께 발표하였다. 신채호가 지은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2월 7일 신채호 배(拜)'라고 쓴 노래와 함께 발견된‘애국가’도 있었다. 이 애국가는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윤치호의 ‘무궁화 노래’(1896)와 김인식의 ‘코리아’(1910)가 합쳐진 형태로, 후렴이 현재의 애국가와 같다. 친일파이자 이화여자대학 총장을 지낸 김활란은 윤치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김활란이 해방직후 개성에서 은둔하고 있던 좌옹을 문안 하였는데 그는 당부하기를 "애국가를 내가 작사 했다고 말 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 라고 당부 했다는 것이다. 후일 김활란은 그 이야기를 연세대학교 교수 김동길에게 전하였다. 그 후 윤치호는 죽음 직전인 1945년 10월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 필사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가사지 사본을 셋째 딸인 윤문희(尹文姬)에게 주었다.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간 일기를 썼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다가 뒤에 한자로 쓰다가 뒤에는 영어 필기체로 기술했는데, 이때문에 후일 1968년부터 그의 아들 윤영선으로부터 자료를 기증받아 국역(한글본)으로 옮길 때 난해한 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상당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타인이 자신의 일기를 볼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치호가 영어로 일기를 쓴 다른 이유로는 당시 조선에 '자유', '권리', '의회' 등 서구 시민사회의 산물을 번역할 만한 마땅한 국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문에는 언문일치나 고백체가 없어 '고백적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 이기도 했다. 1883년부터 1943년까지의 일기이며 6.25 전쟁이 발생하자 개성에 있던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은 일기의 일부는 자신이 갖고 월남하고, 나머지 일제 강점기의 중요한 부분은 보존을 위해 미국에 체류중이던 윤장선에게 보냈다. 휴전 뒤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자신이 소장하던 일부 내용을 기증하면서 미국에 있던 윤장선 역시 형에게서 받은 일부를 택배로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윤치호 일기는 1968년 그의 장남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한 이후, 난해한 필기체 영어와 상류층 언어, 지방 방언 등의 해독오류 등으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일부만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2000년대 이후 다시 한글로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윤치호는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종 독살설을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윤치호는 1919년 고종 사망 당시에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었으나 후에 고종독살설에 가능성을 두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윤치호에게 고종독살설을 전한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전했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 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 고 했다. 윤치호는 처음에 고종 독살설을 유언비어라며 부정하였으나 후에 조선총독부에 빌붙고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는 일부 구 대한제국 대신들의 행위를 보면서 고종 독살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 그는 고종의 죽음을 '조선의 자결권이 끝내 소멸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평소 눈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던 윤치호는 안과와 이비인후과를 자주 다녔다. 그 중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정귀섭 안과와 이비인후과는 윤치호 외에도 이승만, 윤보선도 단골이기도 했다. 조선인 최초로 영어를 배웠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영어사전을 저술하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저술했다.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 그는 1890년대, 1900년대 무렵 조선에서 영어를 구사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원산부윤 겸 덕원감리에 재직중 애민태과 손실정체라는 특이한 죄명으로 파직되었다. 1897년 덕원 감리의 관할지인 안변(安邊) 근방 김피(金皮)라는 산골에 서울에서 피난온 천주교도들이 한데 모여서 교당을 짓고, 파리에서 나신부(羅神父:Thomas Bouladoux)라는 프랑스인이 와 있었다. 나신부는 자기가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든가 또는 절을 하지 않으면 양반인 양대인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크게 노하여 호령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부리는 불량배의 말만 곧이 듣고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다가 무실한 죄명을 씌워서 자기 집 감방에 감금하였다. 관찰사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나신부에 대해서는 안변 군수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으며 어쩌다가 어쩌다가 有審問事 卽爲捉來(물어 볼 일이 있으니 곧 잡아오라)는 묵패가 나신부로부터 떨어지면 사람들은 마치 사형 선고나 당한 듯 벌벌 떨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말로 항의문을 써서 나 신부의 행장을 서울에 있는 프랑스 공사에게 상세히 알렸다. 문체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상당히 격렬한 것이었다. 그 항의문이 간 지 얼마 안되어 나신부가 서울로 불려 올라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감리사가 편지 몇 줄 쓰더니' 라는 말이 점점 확대되어서 나중에는 '양인놈 볼기를 쳤다'로 변하여 좌옹은 호랑이 감리로 갑자기 유명해지게 되었다. 좌옹은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세금을 내고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특별 명령을 내리어 범법자가 있으면 비록 서양인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처벌하니, 외국인들도 자진해서 세금을 지참하게 되었으며, 원산항에 들어온 군함에서 도주하여 상륙한 독일 해병을 즉각 체포하 기도 했다. 원산 해관 세무사로 와 있던 영국인 오이센이 봉화대 근처의 국유지를 매수하려 하자, 외무부(外務部)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1902년에는 장차 있을 러일 전쟁에 대비함인지 십수 명의 러시아 사관(士官)과 군인들이 원산항으로 들어와서 측량을 할 목적으로 여관에 투숙한 후 러시아의 국기를 높이 달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좌옹은 즉각 항의하고, 러시아 사관을 불러다가 외부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고 강경히 말하였다.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여관 지붕에 달린 러시아 국기를 내리고, 일단 국경 밖으로 나가서 외부의 허가를 받은 연후에 다시 들어오라고 꾸짖었다. 그들도 하는 수 없이 위협을 하고 간청도 하다가, 나중에는 러시아 군함을 오게 해서 국경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덕원감리로 재직 중 제정 러시아의 포경선 한 척이 고래를 쫓아서 원산 근해에까지 들어와 인심이 극도로 소란하던 때에 새로 부임해 온 감리가 외국 유학에서 얻은 신지식을 발휘하여 영해 침범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단호한 태도로써 포경선을 즉시 나포한 일까지 있었다. 사대주의에 눈이 어두워서 외국인이라고 하면 그저 무서워만 하던 그때의 민중들은 덕원 감리 영감만은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보기드문 명관으로 믿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 그리하여 덕원에는 이임도 하지 않은 윤 감리의 송덕비까지 서게 되었는데, 중앙 정계에서는 세력 다툼과 파벌 싸움의 여파로 덕원 감리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무슨 히집이라도 잡아서 쫓아내려 했다. 암행어사 모씨가 덕원에 와서 비밀리에 감리의 잘못을 조사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원성보다는 도리어 칭송하는 소리가 많았으므로 무슨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었다. 암행어사 모 씨는 생각다 못하여 한학자답게 새로운 죄명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이 즉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正體)'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좌옹은 죄 아닌 죄명으로 덕원 감영에서 쫓겨났다. 비록 드러내놓고 떠들지는 못했으나 '애민태과'라는 전무후무한 죄명으로 덕원 감리를 파면당한 윤치호에 대한 동정이 점차 크나큰 여론으로 변하게 되니, 조정에서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사유를 고종에게 아뢰니, 좌옹은 얼마 안 가서 삼화 감리로 복직되었다. 이때부터 '애민태과'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게 됐다.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당시 윤치호는 무지한 조선의 민중을 계몽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유학 당시 기독교에 입교하고 교리를 배우고 서구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를 조선에 받아들여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독립,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그는 민중의 무지함 때문이라 보았고 이는 후에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당연한 징벌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계몽과 개혁으로 근대 한국이 소생할 기회를 한국인 스스로 저버렸다고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되었다. 번역서로는 이솝 우화의 첫 한글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찬송가의 한글 번역본인 찬미가를 소개하기도 했다. 서재필 때문에 빛이 가려졌지만 윤치호 또한 당대 최고의 연설가였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이었다. 또한 개신교 청년회의 주도자들을 처벌한 신민회 사건 이후 존폐의 위기에 있던 YMCA 청년회(현재의 서울 YMCA) 활동을 지켜냈다는 평가도 있다. 근대사회의 보기 드문 합리주의자라는 평가가 있다. 냉철한 평가를 내렸던 그는 민중에 대하여 비판적이면서도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일제의 통치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운동, 민족성 개조운동을 중시했던 윤치호는 안창호, 이광수 등과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대학교수 겸 언론인 강준만은 한국근대사산책 3권 에서 그가 수구반동세력에게 타협하였지만 뒤에도 계속 독립,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에 대해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협회 실패 이후로 민중의 우매함이 개혁, 계몽의 실패의 원인으로 봤고 이후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대학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주영은 그를 이승만과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주영은 윤치호에 대해서 “서구 문명을 여러 차례 접하면서 문명사회는 곧 민주사회와 기독교 사회라는 점을 알게 됐고, 한국이 주권을 잃자 기독교 교육을 통한 개인의 경제적·정신적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자립을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평했다. 이주영 교수는 '윤치호가 오늘날에 살았더라면 대통령이 되었을 큰 인물이었다.'라고도 평가하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사교수 겸 평론가 박노자(Vladimir Tikhonov)는 그를 쉽게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졌고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감방에서 6년이나 살았던 ‘민족주의자’ 윤치호의 행보는 희한하게도 친일로 수렴하게 된다. 박노자에 의하면 '그는 선진적인 일본의 틀 안에서 한국인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1931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노골적인 친일인사가 된다. 그럼에도 그를 ‘친일파’라는 밋밋한 단어만으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최초의 근대인 또는 최초의 세계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교수 쿤 데 쾨스테르(Koen De Ceuster)는 60여년넘게 쓴 윤치호의 영문일기를 토대로 박사학위 받은 학자였다. 그는 윤치호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1995년 대한민국 광복회 주관으로 한 '윤치호 친일 협력에 대한 재평가 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때문에 좌옹이 자기 민족에게 오해를 받고 있어요. 흑백논리가 강한 나라니까요. 일본이나 미국 어디에서나 좌옹 선생을 민족주의 애국자라고 말 하는데 그를 친일파라고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인 이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17세에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중등 교육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884년부터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6개월, 1888년부터 미국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대학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 윤치호와 어깨를 겨룰 만한 인물로는 서재필과 유길준 정도 밖에 없었다. 는 평가도 있다.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밖에‘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는 비판도 있다. 정운현은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친일행적보다도 친일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 은 바로 이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 서울대학교 교수 김상태는 "윤치호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끼치는 해악을 분명히 인식했으면서도, 성악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장해제하고 만 것이다. 이런 판단 아래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은 현상유지, 곧 현실 순응일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수유연구실 윤영실 연구원은 "문명만이 절대 선이고 문명을 위해서라면 강대국에의 종속도 불가피하다는 신념에 따라 미국을 선망하고 조선에 열등감을 가졌던 윤치호가 결국 당시 동양의 문명국 일본에서 타협을 본다"고 평을 내리기도 했다. 정운현은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 명색이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 만 것이다.'라는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 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 윤치호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소임을 해내는 인물이었다.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 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언제나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핀란드어 핀란드어는 핀란드의 공용어 중 하나로 스웨덴, 러시아,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노르웨이에서도 쓰인다. 우랄어족의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문자는 로마자를 쓴다. 핀란드와 함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속해 있어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주로 쓰이는 스웨덴어와 노르웨이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핀란드어와는 계통상 아무런 관계가 없어 완전히 상이하다. 핀란드어는 에스토니아어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상호 의사소통도 가능할 정도이다. 핀란드어는 핀란드의 국민 대다수(92%) 및 스웨덴, 노르웨이, 미국, 에스토니아, 러시아(특히 카렐리야 및 레닌그라드 주) 등 해외에 거주하는 핀란드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핀란드어는 핀란드의 공용어이며, 스웨덴과 러시아 카렐리야 공화국에서는 공식 소수민족어이다. 특히 에스토니아의 경우는 전체 인구의 약 1~2% 정도가 핀란드어를 모국어로 습득한다. 현재까지 전해내려오는 발트핀어군 언어들은 발트핀조어에서 발생하였으며, 이 중 사미어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분화되어 독자적인 언어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발트핀조어는 북부 방언, 남부 방언과 동부 방언 등 3가지 방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백여년 간 이들이 각자 분리되어 다른 언어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서로 영향을 끼쳤다. 동부 방언은 그 후 카리알라어, 벱스어의 조상이 되었고, 남부 방언은 현대 에스토니아어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핀란드어는 우랄어족의 언어로서, 단어 끝에 다양한 어미를 붙여 문법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교착어이다. 명사 뒤에 장소를 나타내는 조사가 접사처럼 붙는다. 동사도 그 기본적인 의미를 나태는 단어의 어근에 여러가지 어미를 덧붙여 활용하는데, 이때 러시아어와 같이 주어의 인칭/수에 따라 그 형태가 변화한다. 소유/귀속을 뜻할 때도 소유격 어미를 활용한다. 이 소유격 어미는 다른 격어미와 함께 활용될 때 격어미의 뒤쪽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문법적인 특징은 핀-우랄어족에 속하는 모든 언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핀란드어는 15가지의 격을 갖고 있는데, 자칫 격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는 활용되는 어미가 총 15종이기 때문으로 각 어미마다 고유의 격이 있다고 분류하였기 때문이다. 핀란드어 어휘와 문법 구조는 아시아와 유럽의 언어가 혼합된 형태를 띄고 있다. 특히 고유 단어와 기존의 어휘를 합성하여 만든 단어를 제외한 나머지 단어는 거의 인도유럽어족(특히 게르만어군) 언어에서 차용되었으며, 이들 언어는 어휘 뿐만 아니라 핀란드어의 문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어미를 활용하는 문법 특성상 어순이 자유로운 편이다. 어간과 어미만으로도 단어를 엄청난 길이로 늘릴 수 있으며 하나의 문장을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몇몇 유럽 국가를 지칭하는 단어가 독특하다. 핀란드어 표기체계는 한 글자가 하나의 음만 나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발음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중복된 모음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장모음을 뜻하는 것으로, 핀란드어에서는 모음의 길이에 따라 단어의 뜻을 구별한다. 또한 y, ö, ä등의 전설모음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일 가까운 에스토니아어는 발음조차도 유사하다. 모음이 많은 반면, 자음이 적어 언어에 운율감을 더해준다. 그 예로, hääyöaie와 같이 모음만 극단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특징은 작가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 자신의 작품에서 인공어인 꿰냐를 창조할 때 핀란드어를 참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크업 언어 마크업 언어(markup 言語, markup language)는 태그 등을 이용하여 문서나 데이터의 구조를 명기하는 언어의 한 가지이다. 태그는 원래 텍스트와는 별도로 원고의 교정부호와 주석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였으나 용도가 점차 확장되어 문서의 구조를 표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그 방법의 체계를 마크업 언어라 한다.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기술하는 정도로만 사용되기에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구별된다. 다만 MXML이나 XAML처럼 특정 프로그래밍 언어와 강하게 연관되어 기능하거나 제한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능을 갖춘 것도 일부 있는데, 이런 경우엔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전자적 마크업의 일반적인 분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 황제 (전설)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는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의 첫번째 왕이다.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 중 황룡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사실상 신화로 여겨졌던 삼황과 달리 황제를 필두로 한 오제는 실존한 제왕들로서 추앙되었으며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 여겨졌다. 도교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한다.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서 오제(五帝)와 하·상·주 3대 왕실의 공통 시조로 알려져 있다. 《사기》에 의하면, 소전(少典)의 아들로 이름을 헌원이라 하며, 치우를 물리치고 신농(神農)에 이어 제왕이 되었다. 의복, 수레를 비롯한 수많은 발명품과 문자, 60갑자, 한의학 등의 학문과 기예를 창시하였다고 하며, 100년 동안 재위하였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을 비롯하여 방중술에 대한 저작인 《소녀경》 등 다양한 서적 역시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청나라 말기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특히 황제는 음양오행설의 탄생 이후 이와 함께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황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내경》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워 권위를 얻으려 했을 뿐 실제 저작은 한나라 시기로 추측되며 다른 황제 저작의 서적들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가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늘날에도 공손씨, 희씨, 헌원씨 등은 황제를 직접 시조로 받들고 있다. 동아시아의 별자리 중 성수(星宿)에 속한 헌원은 황제 헌원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왕이 군사 훈련시 황제 헌원에 마제를 지냈다. 여러 책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황제사경(黃帝四經)》 4편, 《황제명(黄帝銘)》 6편, 《황제군신(黄帝君臣)》 10편, 《잡황제(雑黄帝)》 58편 《황제잡자보인(黄帝雑子歩引)》 18권, 《황제기백안마(黄帝岐伯按摩)》 10권, 《황제잡자지균(黄帝雑子芝菌)》 18권, 《황제잡자십구가방(黄帝雑子十九家方)》 21권 《황제잡자기(黄帝雑子気)》 33편 《황제음양(黄帝陰陽)》 25권, 《황제제자론음양(黄帝諸子論陰陽)》 25권 《황제장류점몽(黄帝長柳占夢)》 11권 《황제내경(黄帝内經)》 18권, 《황제외경(黄帝外経)》 37권 《신농황제식금(神農黄帝食禁)》 7권 《황제삼왕양방(黄帝三王陽方)》 20권 《황제택경(黃帝宅經)》 장남이 오른쪽. 괄호 안의 숫자는 재위 순서 사기 사기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사기 (역사서) 《사기》(史記)는, 중국 전한 왕조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본래 사마천 자신이 붙인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 였으나,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사공기》(太史公記)로도 불리게 되었으며 이 '태사공기'의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요 (기원전 2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찬시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짓는다는 구상은 이미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때부터 존재했으나, 사마담은 자신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자 분개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책을 짓는 일을 완수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자신의 친구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고대 위인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지금의 굴욕을 무릅쓰고서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에 몰두했고, 기원전 91년경 《사기》는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이 《사기》를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술이 《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선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손자 양운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죽서기년》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 이전의 삼황(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한 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후(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세가(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라는,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유협열전」(遊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자객열전」(刺客列傳)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간의 추악한 권력다툼을 묘사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이나, 남색(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혹리열전」(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에 대해서도 「순리열전」(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안이한 영웅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악서(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동평사왕 유우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경서(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유지기(劉知畿)가 편찬한 《사통(史通)》 고금정사편(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사기》와 《한서》의 비교 분석이 많은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어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 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사기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다. 총 12편. 왕(王)들의 연대기를 다룬다. 중국 역사 초의 5제(五帝)에서 한(漢) 무제(武帝)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총 10편. 본기에 나오는 제왕 및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연표이다. 총 8편. 역대의 정책과 제도, 문물의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룬다. 총 30편.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제후(諸侯)들에 대해 다룬다. 총 70편.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 당나라 시대에 사마정이 사기의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한일어업협정 한일어업협정(韓日漁業協定)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에 맺어진 어업에 관한 조약이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 조약 가운데 하나로 체결되었으며, 1998년 1월 23일 일본의 일방적 파기 선언으로 무효화 되었다가 1998년 9월 25일 신규 협정을 다시 체결하였다. 공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으로 1965년의 협정을 1차 협정, 1998년의 협정을 2차 협정이라 하기도 하고, 1998년 협정을 이전의 것과 구분하기 위하여 신한일어업협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1945년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의 어민들은 어로 구역을 놓고 갈등을 빚어왔다. 특히 일본의 어선은 식민지 시대에도 어로금지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던 지역에까지 침범하여 한국의 반발을 샀다. 1952년 이승만은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통해 평화선으로 불린 대한민국의 어로 구획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위반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였다. 한일 양국의 갈등이 심화되고 한국전쟁에 따라 밀수출의 단속과 선박통제가 필요하게 되자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한국방위수역을 설정하고 양국의 선박 통행 구역을 정하였다. 클라크 라인이라 불리게 된 한국방위수역은 이승만의 평화선과 유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일 양국의 수역 갈등은 잦아들었으나 갈등의 원인은 해소되지 않았다. 1964년 한일기본조약이 준비되는 동안 어업협정 역시 양국 간에 논의되었으며 1965년 4월 가조인되었고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조인되었다. 한일어업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측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기존의 평화선은 무력화 되었으며 특히 독도 인근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하여 이후 독도를 둘러싼 여러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는 한일기본조약이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라는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한일 어업협정 이후에도 어로 구획은 지속적으로 한일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어왔고 1998년 1월 23일,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이에 따라 1998년 9월 25일, 현재의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제국이 패망한 후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어선과 어구를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 선주들 역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어선과 어구를 대부분 가져갔기 때문에 한국의 수산업은 크게 위축되었고 어업 생산량이 급감하였다. 한국의 수산업이 생산수단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일본의 어선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어로 금지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곳까지 들어와 어류를 남획하였고 이 때문에 한일간에 잦은 충돌이 있었다. 1950년대 일본 어선들은 제주도와 흑산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서 해역에서 대규모로 선단을 이루어 어로작업을 벌였다. 한국 측에서는 평화선의 선포 등으로 일본의 수역 침범에 대처하고자 하였으나 어선과 장비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외교관계를 회복하게 되면서 어업협정이 함께 체결되었다. 1965년 어업협정은 제3공화국 때 한일국교 정상화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다. 박정희는 대선 승리를 위해 서둘러 어업협정을 체결하였으나 공개시기를 늦추었다. 1963년 일본측의 요구를 수용한 한일어업협정의 발표를 미룬 정황도 드러났다. 정부는 그 해 7월까지만 해도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으로는 영세어민의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40마일 전관수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측의 12마일 전관수역 주장을 수용할 의사를 밝히고 이를 공개하지 아니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8월과 9월 최고회의, 중정, 외무부 당국자들이 참석한 7차, 9차 한일문제 대책회의 문서에서는 대선을 고려한 정략적 논의도 드러났다. 이후 평화선이 철폐되고 독도 인근이 공해(公海)가 되었다. 성능이 좋은 일본의 어선이 동해의 물고기를 거의 싹슬이 하다 시피 하였다. 61년부터 시작된 6차회담 기간에 평화선에 기초한 40해리를 주장하던 한국정부의 입장에 대비하여 변화가 생겼다. 외무부와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대에도 박정희의 대선일정 등을 감안해 '12해리 전관수역' 입장으로 물러섰다. 이 기간 한국은 일본측에 1억 1천 4백만달러의 어업협력금을 정부차관 형식으로 공여기간 3년, 이자 3.5%, 3년 거치후 7년간 균등상환 조건으로 요구했으며 일본은 민간차관 형식으로 7천만달러를 고집했다. 특히 일본은 차관 등 청구권 문제의 대가로 평화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우리 정부는 평화선 문제에 신축성을 보일 수있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일본은 1963년 6월7일 어업협력에 따른 청구권은 5억달러 이내로 하되 12해리 전관수역의 합의 또는 평화선 철폐와 어선나포 방지를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7월12일 전관수역을 12마일+α로 하기로 양국간 의견조율이 이뤄졌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원칙에 입각해 북한 연안에 대해선 언급하지 말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일본은 한국의 입장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정상회담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5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잠정적 규제 조치는 공동 규제 수역에서의 어로 활동을 규제하는 것으로 다음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은 1998년 1월에 일본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 통보되었으며 양국은 이후 새로운 교섭을 통해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에 타결시켰다. 1994년 11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정한 유엔 해양법 협약의 발효로 바다 관할권이 12해리에서 200해리까지 확대되었으나 한·일간의 거리가 400해리가 채 되지 않아 바다 경계선을 별도로 정해야 했다. 일본은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근거해 근해의 작은 섬들을 직선으로 연결, 영해기선을 새롭게 설정하고, 1997년 1월 1일을 기해 시행에 들어갔다. 1997년 5월 당시 유종하 외무장관은 미국방문 길에 수행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어업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가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1996년 5월에 김영삼정부는 울릉도와 일본 오키 섬의 중간부분을 EEZ의 경계로 발표해 독도를 우리측 수역에 포함시킨다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1997년에 들어서 일본은 "자신들의 직선기선을 넘어왔다"며 한국의 어선들을 무차별적으로 나포하였고 일본의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까지 나서서 "한국어선 나포는 정당하다"며 어선나포를 비호했고 일본은 한국정부에 "직선기선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업협정을 파기하겠다"며 협박했다. 97년 7월 한국이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을 울릉도로 하는 발표를 한다. 7월 29일, 한국은 일본의 직선기선 인정 요구에 사실상 굴복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독도에 대한 수역을 제외하고 한국과 일본의 어업협상이 계속되었고 서로간의 마찰은 더더욱 심화되었다. 일각에서는 1997년 10월 당시 김영삼 정권은 잠정공동수역안(잠정조치수역은 독도 중간수역)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하기로 일본과 합의하였다고 하지만, 당시 뉴스와 자료들 검색 결과 1997년 10월 10일, 도쿄에서 제6차 한일 실무회담을 진행하고 있었고 당시 한일양국은 당시 독도 주변수역을 제외하고 협상에 임하였고 당시 정부당국이 "독도 영유권이 훼손되지 않는 조건하에 이 안을 철회한다"며 독도에 대한 영유권주장은 변함이 없었다.(참조) 1997년 10월 22일, 일본측은 독도 주변수역을 제외하고 신어업협정을 타결하자는 의견을 한국측에 보냈다. 한국측은 별다른 응답이 없었고 1997년 11월 7일에는 한국정부가 독도에 접안시설을 건립하여 독도에 대한 입지를 확고히 하자 하시모토 류타로일본총리까지 나서서 이를 비난했고 일본정계가 들끓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과 일본간에 독도에 대한 갈등은 심화되었고 한일간 어업협상은 97년 12월말까지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일본은 12월 29일, 한국측이 어업협상에 대해 양보하지 않을경우 기존의 어업협정을 파기하여 재교섭하겠다고 선언한다. 당시 일본의 공영방송 NHK도 뚜렷한 진전이 없을 시, 일본 외상이 현행 어업협정을 파기한다는 보도를 냈고 그 시기 정권교체와 IMF사태라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한국은 상황을 주도적으로 집중할 여력이 부족했다는 일부여론과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국제정세는 한국의 자국내 불행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인접국가들에게는 각국의 실리를 위해 그 상황을 이용할 여지가 될수 있다는 점이 언론에 보도된바 있었다. 1998년 1월 23일, 일본은 한국의 정권교체와 IMF사태의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그러자 한·일 두 나라는 새로운 상황에 맞게 영토문제와는 상관없는 어업협정을 우선 체결하기로 해 17차례에 걸친 실무자회의와 고위급 회담을 거쳐 1998년 9월 25일 신한일어업협정을 타결했다. 현재의 한일어업협정은 1998년 9월 25일에 체결된 뒤 99년 1월, 정식 발효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협정 체결 당시 일각에서는 “DJ의 방일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양국 정상회담의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서둘러 어업협정을 체결했다”라는 주장도 하였다. 1999년 3월 17일, 최종 협상이 완료되었고 한일어업협정에서 핵심쟁점이었던 쌍끌이 조업은 80척으로 결론이 났고, 어획량은 외끌이와 트롤에 이미 할당돼 있는 7,770톤 안에서 하되 부족이 예상되면 추가로 배정하기로 했다. 복어 채낚기 어선은 74척, 갈치 채낚기 어선은 18척이 추가로 조업할 수 있게 됐으나 자망과 통발어업은 일본측에 양보했다. 일본 측은 복어 반두 어선 수를 26척 더 확보했으며 제주도 주변 수역의 저인망 조업 조건 완화를 얻어냈다. 당시 김선길 해양수산부 장관은 마라톤협상에서 쌍끌이 조업을 조건 없이 타결했으며 나머지 사안은 균형을 맞췄을 뿐이라고 밝혔다. 1998년 1월, 일본의 한일어업협정 일방파기로 한국 어민들은 당장 동해에서 장어, 명태, 꽁치 등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1998년 9월, 당시 체결한 한일어업협정중 한국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여 협상중 최대 쟁점이었던 오징어 황금어장은 대화퇴 절반만 중간수역에 포함시켰고 일본측과 합의하여 135도 30분으로 올라가던 기준선을 11시 방향으로 꺾었다. 그로 인하여 동해의 어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한일어업협정 체결 당시 한국 어민들은 일본 측에 강제 나포되어 포승줄로 묶여 폭행까지 당하고 강제로 어장에서 쫒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한일어업협정 체결 2년이 지나자 갈치, 생물 대구 등등 주요 수산물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처지가 되어 한국 어촌을 말살시키고 한국 수산시장에서 한국산 생선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1998년 11월 한일 양국 외무부장관이 서명하고 국회의 동의 절차를 거쳐 비준된 한일어업협정은 울릉도 독도가 전혀 다르게 취급되었다. 즉, 울릉도와 별개로 독도는 중간수역에 포함되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협정만으로 보자면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취급된 것이 아니고 울릉도와 분리되었다. 독도는 아직 국제법상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인도만이 EEZ의 기점이 될 수 있는 사정상 양자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결국 협상의 장기화를 막고자 현상태를 준용하여 어업에만 협정의 효력을 한정하기로 하였으며, 협정의 만료일을 3년으로 정하고, 그 이후에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넣었다. 따라서 현재의 어업협정은 2001년 이후 일방의 의지만으로 파기가 가능하다. 2005년 문화일보의 이병선 기자는 칼럼을 통해 1965년 한일어업협정에서도 군사정부에서 중간수역 지위에 해당하는 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했고 신 한·일 어업협정은 김대중 정권에서 최종 타결됐지만 문제의 조항을 수용한 것은 김영삼 정권이었다고 밝혔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독도를 강제관할권 배제선언을 한다. 유엔해양법 287조에 따른 것으로 이 선언으로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해양법재판소로 가져갈 수 없게 되었다. 2001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서 헌법재판소는 한일어업협정에 대하여 영토조항 위반을 이유로 제기된 헌법소원에 대하여 어업협정은 영토나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 판결을 내렸다. 10월 유신 10월 유신(十月維新)은 1972년 10월 17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大統領特別宣言)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박정희는 이 선언에서 4가지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이러한 비상조치 아래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했는데, 이때의 헌법을 유신 헌법(維新憲法)이라 하며, 유신 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 체제(維新體制), 유신 독재(維新獨裁)라고 부른다. 이 체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관제기구(官制機構)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다. 유신 체제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終身)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영도적(절대적) 대통령제였다. 1972년 10월 17일 발표 당시에는 특별선언, 특별조치, 비상선언, 비상조치, 유신적 조치 등의 명칭으로 불리다가 10월 27일에 명칭을 '10월 유신'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이 명칭은 메이지 유신에서 따온 것이다. 10·17 비상조치(대통령 특별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2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된 헌법(제7차 개정. 이른바 유신 헌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9년 닉슨은 닉슨독트린후 아시아미군철수를 계획 한국에도 주한미군철수 통보를 하였다 1971년 미7 보병사단이 철수되었고 나머지 2사단도 5년안에 철수계획 이에 박정희는 자주국방명분을 내세워 헌법을 고치고 정권을 연장한다 탱크를 만들기 위해 자동차 국산화추진 탄도미사일개발 국산개인화기개발을 위해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고 중공업 중심으로 경제정책을 변경한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직을 1차에 한하여 중임이 가능하게 하였으나, 박정희는 1969년 3선개헌을 통하여 1967년에 이어 197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하였는데, 이에 상대 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대중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에 3선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회를 해산한 후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포고를 통하여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하며, 대학들을 휴교시켰다. 이후 한태연, 갈봉근 등의 학자들과 김기춘과 같은 젊은 검사들이 만든 헌법개정안(이른바 유신헌법안)이 10월 27일에 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라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한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고, 11월 21일에 국민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91.9%, 찬성 91.5%로 확정되어 12월 27일에 공포되었다. 유신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한 1주 후인 11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대학에 대한 휴교조치를 해제하였으며, 12월 14일 0시를 기하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비상계엄을 해제한 다음날인 12월 15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고, 12월 23일 박정희가 단독입후보한 가운데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선출되었다. 1975년 1월 22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자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이번 국민 투표는 비단 현행 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1975년 2월 12일, 유신 헌법 찬반을 묻는 재투표가 실시되어 유권자의 80%가 투표에 참여, 찬성 73%, 반대 25%로 유신 헌법은 형식적 재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유신에 대한 찬반토론은 고사하고 유신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되고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관료들의 투표종용을 통해 이러한 결과를 도출했다는 점에서, 결과만 놓고 이를 드골의 신임 투표(1962년 10월 프랑스 국민투표, 1969년 프랑스 국민투표)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전하였으나, 찬성하는 국민들조차 이를 민주정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라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국민의 반발과 저항이 거세어지고, 일부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약칭 '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벌였으며, 언론인들도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하는 등 저항의 강도를 높여 갔다. 1974년 11월에는 야당 정치인과 종교인 등이 중심이 되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의 경쟁자였던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그를 1973년 8월 납치한 뒤 자택에 연금시켜 국내외에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으며, 1975년 8월에는 개헌청원운동을 벌이던 장준하가 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박정희는 1974년 1월부터 이른바 '긴급조치'를 잇따라 발동하여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문인 등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해직시켰다. 유신 체제가 출범하자 평양정권은 1973년 8월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하여 남북 관계도 경색되었다. 유신반대운동이 고조되던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행사에서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였고, 그 유탄에 박정희 아내인 육영수가 절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1975년 4월에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각 대학에 '학도 호국단'을 조직하고 '민방위대'를 창설하는 등 군사통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1978년 12월 박정희는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연임에 성공하였으나, 이에 앞서 실시된 제10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서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또한 공화당 내에서도 장기독재에 대한 부담과 염증으로 이탈하는 인사들이 속출하였고, 미국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카터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국제 정세 역시 박정희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이 무렵에 불어닥친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중공업 중심의 국내 경제가 극심한 타격을 입으면서 박정희의 정권 유지 가능성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한 것은 부마항쟁이었다. 1979년 5월 말, 야당인 신민당 당수로 선출된 김영삼이 YH 사건에 개입하는 등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을 동원하여 그 해 10월에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의 지탄이 더욱 높아지고, 마침내 부마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한 처리를 두고 박정희의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각각 온건과 강경으로 맞선 가운데 10월 26일, 청와대 부근의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총격 살해하였다. 이로써 유신 체제는 끝나고, 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집권하게 된다. 닉슨 정권은 박정희정권에 대해 '국내 문제 불관여'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는 냉전 체제 당시 한국 정부를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에 대한 미국정부의 일반적 입장이었다. 포드 정권도 닉슨 정권과 마찬가지로 안보 우선 정책을 유지하였다. 다만, 1974년에 방한(訪韓)한 포드는 박정희에게 정치적 완화를 요구하였으나, 이는 자국 언론을 의식한 정치적 언동(제스처)에 불과했고, 이듬해 12월에 동아시아의 긴밀한 안보관계를 강조한 '태평양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유신체제의 인권유린에 크게 신경쓰지 않음을 드러냈다. 1977년에 출범한 카터정권은 '인권외교와 주한 미군 철수'를 전면에 내세웠다. 게다가 1976년에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연루된 박동선 사건이 터짐으로써 한미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미 의회는 한국문제에 관한 청문회를 개최하였고, 전(前) 주미대사의 증언을 요구하는 등 한국정부에 강한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인권 문제를 양보하기는커녕 '독자적인 핵 무장 추진'을 공언하는 반미적 태도로 맞불을 놓았다. 유신 체제로 인한 한국 내 인권악화는 한-미 관계에 일부 균열을 가져왔지만, 당시는 냉전 체제였기 때문에 소위 '안보 동맹'의 한-미 관계에는 근본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의 정치살인 등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인권압살을 사실상 묵인했다. 카터정권 전의 미국 정부는 국무부 등을 통해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체제에 대해 비판했지만,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이후 동아시아 지역 최일선의 자유진영 국가였던 한국의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11년 3월 14일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5.16 쿠데타(5.16 군사정변) 50년 학술대회에서 미 국무부 자료를 제시했다. 이 자료에는 “한국은 박 대통령의 10월 17일 유신 계엄령 의도, 집권연장과 체제강화 계획에 대해 미국에 알리기도 전에 평양에 통지했다”라고 적시돼 있다. 이 자료에 대해 박 교수는 "국가안보와 안정이 유신쿠데타의 명분이었지만, 유신이 평양정권의 양해 아래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소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 체제는 전형적인 유사(사이비)민주주의 또는 장식적 입헌주의 체제의 성격이 강하다는 의혹이 많으며, 유신 체제는 평양의 김일성 독재체제와 유사한 민주주의를 사칭한 전체주의 독재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많다. 대통령 1인이 행정, 입법, 사법부를 모두 장악하면서 삼권분립은 붕괴되었고, 무제한의 연임허용과 관제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은 말살되었다. 국민은 대통령선거권을 빼앗기고, 대통령은 헌법 효력까지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이용해 언제든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행위를 금지·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기본권은 본질적으로 침해되었다.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예견한 박정희식 총통제(總統制), 즉 유신체제는 긴급조치권과 헌법을 초월한 경찰, 군, 정보기관의 공권력으로 유지된 1인 전제정치체제였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에서 나타난 파시즘 체제와 유사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없기 때문에 완벽한 파시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반박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내걸은 명분이 매카시즘을 뛰어넘는 반공주의였다는 점에서 파시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견해 또한 있다. 유신 유신은 다음을 가리킨다. 유신사극(維申斯克)은 베셴스크의 한자 음역어이다. 우루크 우루크 또는 우룩( UNUG , , , , , , , )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시대의 고대 도시로, 유프라테스 강 동쪽으로 고대의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습지대에 위치했다. 이 위치는 현재의 이라크 무탄나 주의 사마와에서 동으로 30km지점에 해당한다. 현대 이라크라는 이름이 "우루크"에서 파생되었다는 이론이 있으나 검증되지는 않았다. 전성기 우루크의 인구는 5~8만 명, 성벽 내의 크기는 6 평방km 정도로, 당시로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현재까지 우루크는 밀집된 인구를 가진 세계 최초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우루크는 또한 전문 관리, 군인 등으로 계층화된 사회를 이루며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 시대를 열었다. 쿠랍(Kulab) 또는 쿠라바(Kulaba), 우눅-쿠라바(Unug-Kulaba)로 알려진 이곳은, 수메르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수메르 왕 목록》에 따르면, 우루크는 엔메카르()가 세웠다. 《엔메카르와 아라타의 왕들》에는 그가 이난나 신(혹은 이시타르 신)을 위하여 에-안나라는 유명한 사원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루크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영웅인 길가메시의 수도였다. 《성경》(창세기 10:10)에 따르면, 에렉(), 즉 우루크는 님로드()가 시날() 땅에 세운 두 번째 도시이다. 우루크의 역사적인 왕으로는 움마의 루갈작게시(움마의 왕으로서 우루크를 정복하였음)와 우투-헤갈이 있다. 우루크는 아카드의 사르곤 왕 이전 시대에 강력한 패권을 장악하였고, 후반기(기원전 2004년)에는 엘람인과의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길가메시 서사시》에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루크는 1차 세계 대전 전, 독일의 율리우스 조단()이 이끄는 발굴단이 처음 발굴하였다. 두 번째 발굴은 1928년부터 1939년까지 계속되었고, 다시 1954년부터는 렌젠(H. Lenzen)이 체계적으로 발굴하였다. 이러한 발굴의 결과로, 초기 수메르 문서 일부와, 셀레우코스 제국(312~63 BC) 시대의 많은 문서가 발견되어, 아담 팔켄쉬타인 등 많은 독일 금석학자가 그것들을 연구하고 있다. 클래식 기타 클래식 기타(Classical guitar)는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줄이나 나일론줄을 사용하는 기타로 손으로 뜯어서 멜로디와 화음을 동시에 연주하는 독주 악기로 많이 쓰인다. 클래식 기타로 클래식 음악만 연주하는 것은 아니며 포크, 재즈, 플라멩코 등 다양한 장르를 연주한다. 오늘날의 현대 클래식 기타는 19세기 스페인 제작가 안토니오 데 토레스 후라도에 의해 자리잡았다. 그래서 현대 클래식 기타를 스패니시 기타(Spanish guitar)라고도 부른다. 클래식기타는 기원전 4500년 전 수메르 왕국의 판두라라는 악기에서 유래한다. 클래식기타는 크게 헤드, 넥, 바디의 세 부위로 구분할 수 있다. 헤드는 소리를 조율할 때 사용하는 부분인데 이 부위에 있는 헤드머신을 사용해 줄을 감거나 풀 수 있다. 헤드에 문제가 있으면 줄의 음높이가 매번 바뀔 수 있다. 넥은 왼손으로 줄을 누르게 되는 부분이다. 넥이 휘어있거나 프렛의 높이에 문제가 있으면 소리에 잡음이 섞이는 경우가 많아서 장기간 기타를 쓰지 않고 보관을 할 때는 줄을 풀어놓아 넥이 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정석이다. 또한 오늘날엔 대개 6,5,4번 줄은 쇠줄, 나머지는 나일론 줄을 이용한다 바디는 울림통이라고도 불리는데 기타줄의 소리가 여기서 증폭되어 나오게 된다. 이 부분이 기타 제작에서 가장 까다로우며 재료의 선택 및 처리가 쉽지 않다. 바디를 어떻게 제작하느냐에 따라 기타의 음색 및 음량, 여운의 길이 등이 달라진다. 페르마 수 페르마 수()는 음이 아닌 정수 "n"에 대해 형태로 나타나는 양의 정수를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수를 최초로 연구한 피에르 드 페르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최초 여덟개의 페르마 수는 다음과 같다: 2 + 1 꼴의 수가 소수라면 "n"은 반드시 2의 거듭제곱이어야 한다. 따라서 2 + 1 꼴의 소수는 모두 페르마 수가 된다. 이러한 소수를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페르마 소수는 "F"...,"F" 뿐이다. "n" > 4인 페르마 소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밖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5 ≤ "n" ≤ 32 사이의 모든 "F"은 합성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중 5 ≤ "n" ≤ 11 사이의 수만이 완전한 소인수분해가 구해져 있다. 페르마 수 F 에 대하여 현재의 소수성 상태의 적요가 아래 표에 주어져 있다. 피에르 드 페르마는 1637년 위 형태로 쓸 수 있는 모든 정수는 소수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1732년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F"=4,294,967,297를 641 × 6,700,417 로 소인수분해 함으로써 반증 되었다. 한편, "n"이 2의 거듭제곱과 서로 다른 페르마 소수의 곱들로 표현가능하다는 것과, 정"n"각형은 작도 가능하다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즉, 다시 말해서 formula_2가 모두 서로 다른 페르마 소수일 경우 formula_3이면 정"n"각형은 작도 가능한 정다각형이 되고 그 역도 성립한다. 표의문자 표의문자(表意文字, ideogram)는 뜻을 전달하는 글자이나, 사물의 모양을 흉내내어 나타낸 글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뜻글자라고도 불린다. 문자마다 뜻이 있기 때문에, 표의 문자에서는 어느 문자를 보기만 해도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숫자는 대표적인 표의 문자이다. 표의 문자는 하나 하나의 문자가 뜻을 나타내지만 반드시 언어의 발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한자 등도 표의 문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문자의 하나 하나가 의미뿐 아니라 언어의 말이나 형태소도 나타내며, 말이나 형태소의 발음도 나타내다., 그러므로 표의 문자라고 부르기보다는 문자 체계에서 표어 문자로 일컫는다. 언어와 관계가 없지만 뜻을 나타내는 그림 모양을 특히 그림 문자(pictogram)라고 한다. 멘델스존 멘델스존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펠릭스 멘델스존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바르톨디(, ,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는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부유한 시민층 계급의 명망이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의 할아버지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Abraham Mendelssohn Bartholdy)는 1804년에 자신의 맏형 요제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어머니인 레아 멘델스존 바르톨디(Lea Mendelssohn Bartholdy)는 살로몬의 제조업 가문 출신이다. 아브라함과 레아는 1804년에 결혼하여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거처를 옮긴다. 1805년에 태어난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 헨젤(Fanny Hensel)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남매로는 1811년생인 레베카 디리흘레트(Rebecca Dirichlet), 1812년생인 파울 멘델스존(Paul)이 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모든 자녀들은 1816년 3월 21일에 신교회 신부로부터 개신교의 가정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바로 펠릭스는 야코프 루트비히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1844 년 여름에 있었던 멘델스존의 8 번째 영국 방문에서 그는 런던에서 다섯 개의 필 하모닉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계절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매일 3 주 전에 매일 약속이 채워졌고 나머지 2 개월 동안 나는 더 많은 음악을 듣게되었습니다. " (레베카 멘델스존 바르 톨디에게 보낸 편지, 소덴, 1844 년 7 월 22 일). [64] 계속되는 방문에서 멘델스존은 빅토리아 여왕 과 남편 앨버트 왕자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을 크게 경 쳤던 작곡가였다. [ 66]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는 버밍엄 트리엔날레 뮤직 페스티벌 (Birmingham Triennial Music Festival)에 의해 위촉 받아 1846 년 8 월 26 일 버밍엄 타운 홀 (Town Hall) 에서 초연되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그의 시간 동안 많은 멘델스존의 작품을 저술하고 번역 한 윌리엄 바돌로매에 의해 영어로 번역 된 독일어 텍스트로 구성되었습니다. [67 ] 1847 년 영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멘델스존은 베토벤 의 피아노 협주곡 4 번 솔로 연주자였으며, 앨버트 공과앞빅톨링필 영왕 오케스트라와 협연 하여 스코틀랜드 교향곡을 연주했다. [69] 멘델스존은 인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경계 문제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곤란을 겪었다. 잉글랜드로의 생애 마지막 여행은 그를 지치고 병들게 했고 1847년 5월 14일 친누나 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이 가중되었다. 6개월 후인 11월 4일 멘델스존은 뇌졸중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했다. 그의 일생은 실로 작곡과 연주의 연속이었다. 그는 슈베르트와 같은 생활의 고통이 없이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작품상에 나타나,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실로 크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지시한 것으로서, 음악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아 12살에 작곡한 초기 현악 교향곡을 보면 이들을 따라간 흔적이 보이는데, 이 작품들은 멘델스존의 가정에서 연주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출판되어 사람들이 연주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821년에서 1823년 사이, 즉 그가 12살에서 14살이던 시절에 쓴 것이다. 그의 놀라운 재능은 특히 성년기 초의 작품에서 잘 나타나는데,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E♭장조(1824년), 현악 8중주(1825년), "한여름 밤의 꿈" 서곡(1826년, 이 곡 종결부는 당시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 아돌프 베른하르트 마르크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현악 4중주 A단조(1827년, 2번으로 표시되나, 1번곡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작곡된 곡이다)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러한 작품은 형식, 화성, 대위법, 음색, 베토벤의 작곡 기법을 그가 직관적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며, 때문에 흔히 멘델스존의 재능이 지적인 이해 면에서 모차르트를 능가했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멘델스존이 성년이 되어 작곡한 교향곡의 번호는 작곡 순서가 아니라 대개 출판 순서를 따른다. 작곡한 순서로는 1번, 5번, 4번, 2번, 3번순(그가 10년이 넘도록 교향곡을 작곡하는 데 매달렸기 때문이다. 작곡 순서에서 교향곡 3번의 위치가 문제가 되는데, 교향곡 5번 이후에 3번 초고를 시작했으나, 5번과 4번 다음으로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전체 관현악단 편성의 교향곡 1번 C단조는 그가 15살이던 1824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멘델스존은 1829년 런던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로열 필하모닉 협회(Royal Philharmonic Society)와 함께 이 교향곡을 지휘하였다. 3악장은 자신의 8중주곡을 스케르초인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어 영국에서 명성을 얻게 쌓게 되었다. 1829년에서 1830년 사이에 멘델스존은 "종교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교향곡 5번을 썼다. 이 곡은 종교 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곡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악보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향곡 3번 a단조 "스코틀랜드" 는 1830년에서 1842년 사이에 작곡되어 간간히 수정하였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감성으로 스코틀랜드의 분위기를 담아냈지만, 사실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차용하지는 않았다. 1842년 멘델스존은 이 작품을 피아노 2중주곡으로 편곡하여 출판하였으며, 관현악 악보는 1843년에 나왔다. 멘델스존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감명을 받아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를 썼다. 그는 1833년 이 곡을 초연하였으나, 계속 수정하려고 하여 살아 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1840년 멘델스존은 교향곡 2번 B♭장조 "찬가"("Lobgesang")를 작곡하였으며, 이 악보는 1841년에 출간하였다. 멘델스존은 1820년대 후반경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느낀 인상으로 1830년 연주회용 서곡 헤브리디스 서곡("핑갈의 동굴")을 작곡하였다. 그는 유럽을 순회하던 중 헤브리디스 제도의 스태파 섬에서 핑갈의 동굴에 가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재빨리 서곡의 도입부 주제를 썼으며 그날 저녁 이것을 집에 편지로 보내었다. 그 밖에도 그는 여러 연주회용 서곡을 썼다. 오늘날 널리 연주하는 곡으로는 뤼 블라스 서곡(멘델스존 본인이 싫어하던 빅토르 위고의 연극의 자선 공연회에 쓰이기 위한 곡이었다),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서곡("Meerestille und Glückliche Fahrt", 괴테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다), 아름다운 멜루지네 서곡이 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1844년)은 페르디난트 다비트를 위해 쓴 곡으로, 멘델스존의 인기있는 음악 가운데 손꼽히는 곡이다. 이 작품을 준비할 때 멘델스존과 함께 일하던 다비트는 자신의 과르네리 바이올린으로 이 곡을 초연하였다. 멘델스존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두 피아노 협주곡을 쓴 바 있으며, 바이올린 협주곡(D단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두 곡,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2중 협주곡도 작곡하였다. 또 한 악장짜리로 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도 더러 있다. 이러한 곡 가운데 피아노 편성이 있는 곡으로 "화려한 론도"("Rondo Brillante", Op.29, 1834년), "화려한 카프리치오"("Capriccio Brillante", Op.22, 1832년) "세레나데와 알레그로 조코소"("Serenade and Allegro Giocoso", Op. 43, 1838년)이 있으며, Op.113과 Op.114는 콘체르트슈튀케("Konzertstücke")로 원래 클라리넷, 바세트 호른,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으나 멘델스존 생전에 관현악용으로 편곡되어 연주된 바 있다. 멘델스존은 성인이 되어 여러 실내악곡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여러 곡은 혹자가 그의 큰 작품에서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강렬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의 마지막 현악 4중주곡인 현악 4중주 6번은 누이 파니(Fanny)가 죽은 뒤에 쓴 것으로, 강렬하면서도 감동적이다. 다른 작품으로는 현악 5중주 두 곡과 클라리넷,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을 위한 여러 소나타 작품, 피아노 3중주 두 곡, 피아노 4중주 세 곡 등이 있다. 피아노 3중주 1번 D단조의 경우 멘델스존은 전과 달리 동료 음악가(페르디난트 힐러)의 조언을 받아 더욱 낭만적인 "슈만풍"으로 피아노 부분을 수정하여 곡의 효과를 높였다. 멘델스존은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창이나 이중창 등 여러 성악곡도 작곡하였다. 노래의 날개 위에와 같은 곡이 있다. 김진태 김진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김진태 (만화가) 김진태(1968년 3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만화가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에 재학 중 학보에 4단만화 《외고집》을 연재했으며, 1988년 음악신문에 《음악기행》을 연재하면서 데뷔했다. 1989년 호산문화사 주최 주간만화 카툰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1990년 주간만화에 《스커트 밑의 극장》을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91년 역시 주간만화에 연재한 《대한민국 황대장》으로 자기 스타일을 확립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개그만화가로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소화해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음악기행》에서 음악을, 《스커트 밑의 극장》에서 속옷을, 《대한민국 황대장》에서 슈퍼히어로를 다루는 등 작품마다 변화무쌍한 소재를 채용하여 인지도를 넓혔고, 이후 같은 작품으로 공중파 코미디 프로그램 진출, 《시민쾌걸》로 스포츠신문 장기연재를 실현했다. 슈퍼히어로(황대장 시리즈, 《시민쾌걸》, 《영웅열공전》), 조폭물(《굿모닝 보스》), 홈드라마(《하드보일드 뉴패밀리》), 미스터리 음모론(《보글보글》, 《2급비밀》), 직장 시트콤(《체리체리 gogo》, 《바나나걸》), 동물만화(《엔터 더 팻》), 의학 드라마 (《왕십리 종합병원》), 교도소 영화(《호텔 캘리포니아》), 사극(《사또 IN DA HAUS》) 등등 다양한 테마와 코드를 넘나들며 독특한 풍자와 웃음으로 인기를 모았다. 길창덕, 신문수, 윤승운을 잇는 한국 명랑만화의 마지막 계승자로, 작가 본인도 아동용 만화를 발표할 때는 '명랑 만화가'로 자기를 소개한다. 황가두, 마귀, 깍귀, 치타 선배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을 다수 배출했으며 작품 내용에 따라 이들 캐릭터를 전혀 다른 배역으로 다시 출연시켜 세계관을 이어 나가는 '김진태 월드'를 형성하고 있다. 개그작가이면서도 순간 순간 웃기는 것에만 주력하지 않고 긴 호흡속에 캐릭터들의 개성을 모두 살려내는 능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패러디 만화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작가 본인은 '패러디란 극의 중간에 잠깐 삽입해 흐름을 부드럽게 해주거나 캐릭터를 유쾌하게 돋보이도록 해주는 역할로만 사용'하며, 패러디가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 1890년 12월 8일 ~ 1959년 8월 28일)는 체코의 작곡가이다. 마르티누는 프라하 콘소바토리를 다녔지만 ‘학습 태만’을 이유로 퇴학당한 이후 독학했다. 1923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남부 프랑스로, 그리고 1941년에는 미국으로 떠나서 뉴욕에 정착했다. 후에 그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르티누는 다작을 남겼는데, 그 수가 400여개에 이른다. 그는 같은 나라 작곡가인 레오시 야나체크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연주·녹음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합창곡인 《길가메시 서사시》(1955), 여섯 개의 교향곡과 첼로 협주곡, 오보 협주곡,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곡 등이 있다. 마르티누의 곡은 많은 곳에서 받은 영향을 보여 준다. 《La Revue de Cuisine》(1927)같은 작품은 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두 개의 현악 오케스트라,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Double Concerto》는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의 경향을 띤다. 다른 작품 중에서는 체코 민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그는 클로드 드뷔시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존경했다. 마르티누의 작품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에 Lucie Bigelow Rosen의 위촉으로 작곡된 테라민을 위한 곡이 있다. 그는 1944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10월 1일에 테라민, 오보에, 현악 사중주와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아》를 작곡해서 테라민 연주자인 Rosen에게 헌정했다. 그녀는 1945년 11월 3일 뉴욕에서 Robert Boom과 Koutzen Quartet과 함께 그 곡을 초연했다. 1968년 1968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67년 1967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6년 1966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2년 1962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61년 1961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59년 1959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제주산업정보대학 제주산업정보대학(濟州産業情報大學. Jeju College of Technology)은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전문대학이었다. 제주시 남쪽에 위치해 있다. 2011년 7월 20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탐라대학교와의 통폐합을 승인함에 따라 2012년 3월 2일 출범한 제주국제대학교는 제주산업정보대학 부지에서 개교하였으며, 탐라대 부지는 매각할 예정이다. 제주산업정보대학은 아래와 같이 여러 학과가 위치해 있다. 제주한라대학교 제주한라대학교(濟州漢拏大學校, Cheju Halla University)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제주한라대학교의 2018년 기준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제주한라대학교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전문대학으로, 노형동에 위치해있으며, 약 12만m의 교지가 있다. 도시 주변 지역에 위치하여, 근처에 노형동주민센터가 있다. 부속·부설 기관으로 도서관, 정보전산센터, 한라아트홀, 한라학사(기숙사), 평생교육원, 언어교육센터, 국제교류센터, 종합인력개발센터, 창업보육센터,한라·뉴캐슬 PBL교육연구원, 한라·스토니브룩 응급의료교육원, 예비군중대, 부설유치원, 신문사, 방송국이 있고 부설연구소로 문화관광교육연구소, 정보기술연구소, 제주향토식품연구소가 있다. 캠퍼스 주변에는 제주고등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등의 교육기관이 위치하고, 제주시 탐라도서관이 근처에 있어 다소 부족한 학교 도서관의 장서 수를 보완할 수 있다. 1970년에 설립된 제주한라대학교 도서관에는 열람석 632석, 개가자료실 198석, 장서 6만 8,272권이 갖추어져 있다. 조선간호대학교 조선간호대학교(朝鮮看護大學敎, Chosun Nursing College)는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1년 조선대학교 병설 간호전문학교로 설립되었으며 1979년 학제개편에 따라 조선대학교 병설 간호전문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8년 현재의 조선간호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조선간호대학교는 간호학과 단일과로 운영한다. 조선이공대학교 조선이공대학교(朝鮮理工大學敎, Chosun College of Science & Technology)는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63년 1월 28일 설립된 5년제 조선대학교 병설공업전문학교가 시초이고 1979년 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으로 승격, 1998년 9월 1일 현재의 명칭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조선이공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충북보건과학대학교(忠北保健科學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 중 하나이다. 2012년까지는 주성대학이었다. 다음은 충북보건과학대학교의 2018년 기준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진주보건대학교 진주보건대학교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1년 간호전문학교로 개교를 하였다. 창신대학교 창신대학교(昌信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소재한 4년제 사립 대학이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창신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창신대학교는 1개의 일반대학원, 4개의 특수대학원을 설립 및 운영하고 있다. 창원문성대학교 창원문성대학교(昌原文星大學校, )는 경상남도 창원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문성학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다음은 2019년 기준 창원문성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연암대학교 연암대학교(蓮庵大學校, Yonam University)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 사립 전문대학이다. 축산, 원예계열로 특성화가 되어있으며, LG그룹계열 LG연암학원이 설립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연암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청강문화산업대학교(靑江文化産業大學校, )는 1995년 문화산업 특성화 의 일환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경기도 이천시의 전문대학이다. 국문 약칭으로 청강대(靑江大)로 표기하기도 한다. 교명은 학교 설립자인 이연호 회장의 호 청강(靑江)에서 교명이 유래되었다. 2018년 기준, 청강산업문화대학교의 학과 일람이다. 7개의 스쿨과 유아교육과로 편제되어 있다. 충남도립대학교 충남도립대학교(Chungnam State University, 忠南道立大學)는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학사길 55 (벽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공립 대학이다. 1996년 충청남도의 도립대학 설치 조례를 제정한 후 1998년 3월 19일에 청양전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후 같은 해 5월 27일에 청양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2009년 12월 29일에 충남도립청양대학으로 변경한 후 2014년 12월 '충청남도 행정기구 및 정원 운영에 관한 조례’가 개정되어 12월 12일에 충남도립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청주과학대학 청주과학대학(淸州科學大學)은 충청북도 증평군에 있었던 국립 전문대학이다. 2006년 충주대학교와 통합되어 충주대학교 증평캠퍼스로, 충주대학교가 한국철도대학과 통합되어 한국교통대학교 증평캠퍼스로 개편되었다. 송곡대학교 송곡대학교(松谷大學校, Songgok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강원도 춘천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송곡대학교는 3계열 7학과를 개설하여 운영중이다. 춘해보건대학교 춘해보건대학교(春海保健大學校, )는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2008년 6월 10일 교명을 춘해대학에서 춘해보건대학으로 변경하였다. 춘해보건대학교는 원래 부산에서 춘해학원으로 시작하였다. 1967년 12월 1일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춘해학원을 인가받았다. 1970년에 간호학교로 지정받고 1972년 12월에 춘해간호전문학교로 개편하였고, 1979년에 춘해간호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 5월 12일에 울산캠퍼스 기공식과 춘해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8년 6월 10일에 춘해보건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다음은 2018년 기준, 춘해보건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포항대학교 포항대학교(浦項大學院, )는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포항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포항대학교의 전문학사 과정 일람이다. 한국관광대학교 한국관광대학교(韓國觀光大學校, )는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립 전문대학이다. 대한민국의 관광산업에서 종사할 인재를 양성해 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다음은 2018년 기준 한국관광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가독성을 위해 임의의 계열별로 분리하여 표시하였으며, 한국관광대학교는 자체적인 계열 기준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농수산대학 한국농수산대학(韓國農水産大學, )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한 국립 전문대학이다. 농어업부문에 종사할 자에게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교수·연마하여 이론과 실무능력을 고루 갖춘 전문 농어업경영인을 양성하는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농림축산식품부의 소속기관이다. 1995년 7월에 한국농업전문학교로 설립되었으며, 2009년 지금의 교명으로 변경하였다. 총장은 고위공무원단 가등급에 속하는 임기제공무원으로 보한다. 원래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에 있었으나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농업계 기관들의 전주 혁신도시 이전 계획에 따라, 약 12만 평의 부지에 1,7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2015년 2월에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였다. 한국농수산대학은 18학과를 운영중이다. 한국철도대학 한국철도대학(韓國鐵道大學, )은 대한민국의 국립 전문대학으로서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 등에서 철도 관련 업무에 종사할 인력을 배출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토해양부 소속 국립대학이었다. 전원 국비 장학생으로, 졸업 후 대한민국 철도청 공무원 일반직 또는 기능직 8급으로 특채되었으나 1996년부터 정원의 절반을 사비생(私費生)으로 모집하였으며 2005년 대한민국 철도청의 폐지와 동시에 한국철도공사가 출범함과 더불어 국비생 제도는 폐지되고 전원 사비생화되어 특채 제도는 사라졌다. 이후 충주대학교에 통합되어 2012년 한국교통대학교(韓國交通大學校)가 출범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토해양부는 그동안 국립 전문대학이었던 한국철도대학을 사립 4년제 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개편하는 사업 계획을 확정하고 2007년 3월, 여러 사립 대학교로부터 인수 제의서를 받았다. 이때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전주대학교, 한세대학교, 서경대학교 등이 철도대학 인수를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는 동년 5월 8일,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를 철도대학 인수 1순위 대학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동년 6월 27일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는 한국철도대학을 인수하기 위해 철도대학 측과의 본격적인 협상을 개시하였다. 양측은 실무진이 부분별로 협상을 벌여 2008년까지는 끝마칠 계획이었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철도대학의 인수가 완료되면 가칭 ‘철도물류대학’을 신설 2009년부터 신입생을 선발하고 2015년에 의왕시를 떠나 신행정도시로 캠퍼스를 옮길 계획을 세운 상태이다. 한편 의왕시에서는 철도대학이 사립대학으로 인수되면서 캠퍼스 이전이 확실시되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의왕시 측에서는 동년 3월 27일 국토해양부에 경영권만 사립대학에 편입시키고 캠퍼스는 그대로 의왕시에 둘 것을 요구했고, 의왕시의회도 4월 23일 철도대학 이전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같은 달 철도대학이 위치한 부곡동 주민자치위원회는 "철도대학 이전 반대" 현수막을 내걸고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 결국, 6월 12일에 고려대학교와 철도대학의 캠퍼스 이전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는 경기도와 의왕시주민, 그리고 내부적으로도 반발이 많았고, 정부의 예산 지원 문제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협상의 결렬로 귀결되었다. 고려대학교와의 협상이 결렬된 이후, 2010년 상반기 기준으로 한국철도대학은 국토해양부를 통해 서울산업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충남대학교, 한밭대학교, 한경대학교, 공주대학교, 충주대학교 등 다수의 국립대학으로부터 인수제의를 받은 바 있다. 학내에 설치된 '철도대학 발전 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에 의해 2010년 4월 14일에 충주대학교가 1순위로 선정되었으나, 해당 심의위의 객관성 논란과 더불어 학내 구성원의 반대여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데다가 철도대학의 국립대 통합 의견을 가진 국토해양부와 예산권한을 가진 기획재정부 간의 이견차로 인해 계속해서 논의가 지연된 바 있다. 그러나 충청북도 충주시 지역구 국회의원인 윤진식 의원의 개입으로 정부 부처간 이견을 상당히 좁혀 2011년도 4월 21일에 충주대학교와 통합 협상 MOU를 체결하여 현재는 통합내용 및 조건 등에 관한 협상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2011년 7월 31일 충주시가 충주대와 한국철도대학(이하 철도대학)의 현 통합(안)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놨다. 충청북도도 양 대학 통합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내 향후 통합추진에 난항이 예상되었으나 국토해양부는 2011년 8월 25일 수도권정비 실무위원회를 열어 충주대와의 통합을 사실상 최종 승인하고 교통/물류/철도분야의 특성화 대학으로서 2012년 3월 '한국교통대학교'로 통합되어 폐교되었다. 한림성심대학교 한림성심대학교(翰林聖心大學校, )는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전문대학이다. 한림성심대학교는 6계열 25학과를 개설하여 운영중이다. 한양여자대학교 한양여자대학교(漢陽女子大學校,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위치한 사립 전문대학이다. 1974년 12월 20일 한양여자실업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 공학 계열과 자연 과학 계열, 인문 사회 계열, 예체능 계열 등 다양한 학과가 편제 되어 있다. 다음은 2019년 기준, 한양여자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다음은 한양대학교의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하고 있는 저명한 대학 일람이다. 한영대학교 한영대학교(漢永大學校, )는 1992년에 설립된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2018년 기준 한영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혜전대학교 혜전대학교(彗田大學校, Hyejeon College)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홍성군에 위치한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8년 기준 혜전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전공 일람이다. 대전과학기술대학교 대전과학기술대학교(大田科學技術大學校, )는 대전광역시 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전문대학이다. 다음은 2019년 기준, 대전과학기술대학교의 전문학사 학위 과정 일람이다. 대전과학기술대학교는 대전광역시 소재 사립 전문대학으로, 서구 복수동에 캠퍼스가 자리한다. 교사는 247,646m²로 보통의 전문대학보다 큰 규모로, 이는 안양대학교와 비슷한 규모다. 캠퍼스는 일반 주택가 인근에 위치하여 교통과 기반 시설에 부족함은 없는 편이며, 동일 법인 산하 유치원인 혜천유치원이 근처에 자리한다. 다만, 캠퍼스 중앙으로 일반 도로인 혜천로가 캠퍼스 북부와 남부를 가른다. 혜천타워는 남쪽 캠퍼스, 북서부에 자리한 지하 1층, 지상 13층, 옥탑 1층으로 이루어진 78m의 건물로, 대전과학기술대학교의 랜드마크이다. 타워의 12층에는 78개의 종 카리용이 설치되어 있다. 6.5 옥타브형 카리용으로 직경 2.5m, 무게 10톤이나 되는 최저음의 대종을 비롯하여 무게 5톤 이상의 큰 종 3개, 무게 1톤 이상의 종 11개가 포함되어 총 50톤이 넘는다. 10층 외벽에는 직경 4m의 원형 시계가 4면에 각각 한 개씩 설치되어 있고 카리용 자동연주 시스템과 연결되어 기준시각을 입력해주는 역할을 한다. 13층은 외부 방문객들의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대전과학기술대학교의 혜천타워 카리용은 네덜란드의 왕립 종 제작소인 페티트앤프리센(Petit & Fritsen)에서 21개월 동안 제작되었으며, 2004년 7월 세계기네스협회로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카리용으로 인증되었다. 사도 행전 사도행전(使徒行傳, Acts of the Apostles)은 예수가 승천한 이후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초대 교회의 예수운동과 성령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성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누가가 쓴 문서라는 견해로서 이를 지지하는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누가의 서신으로 이해한다. 즉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보낸 복음서인 누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복음과 행적을 기록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견해는 저자미상이라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학자는 첫 번째 견해를 택한다. 사도 행전은 비 유대인의 구원방법, 신학적 문제에 대답 하기위한 책이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도행전은 80년에서 85년경 사이나 85년에서 90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바울의 사후에 쓰인 신약성서이다. 사도행전은 성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그들의 이성과 열정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케뤼그마를 선언한 예수 운동을 벌여간 이야기이다. 제목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도도 있다. 루가는 베드로와 파울로스(바울로)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2장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의 행적을, 8장부터 15장까지는 파울로스의 행적을 전한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디모데후서는 신약성경의 서신이다.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들에게 보낸 편지, 빌레몬서,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은 신약성경의 한 권으로, 콜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필레몬에게 보낸 파울로스와 디모테오의 편지로 인정되며, 용서와 화해의 내용을 담고 있다. 파울로스는 자신이 저자라고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라 부르며, 디모테오는 "형제"로, 필레몬은 "동역자"라고 부른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필레몬을 떠났다가, 바울이 필레몬에게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돌아갔다. 필레몬은 부유한 기독교인으로, 골로새에 있는 가정교회의 감독으로 추정된다. 빌레몬서 1:1-2의 내용에 의하면, 이 가정교회는 필레몬의 집에서 집회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이 편지는 바울의 저작이라는 데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헬라어로 335글자밖에 없는, 현존하는 가장 짧은 파울로스의 편지이다.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파울로스의 저작으로 인정되나,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극소수로 존재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undisputed) 편지는 이 외에도 6개가 있는데, 모두 파울로스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필레몬서의 저작성은 주로 튀빙겐 대학교의 독일 학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페르디난드 크리스챤 바우어는 로마서와 고린도전, 후서, 그리고 갈라티아 이렇게 네 개만 바울의 저작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필레몬서를 "우리의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우 특이하다"고 평가했으며, 아마도 "개신교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소설"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편지의 시작에서 바울은 디모테오의 이름을 언급하며 인삿말을 남긴다. 그러나 바울이 주로 수신자와 관계가 있는 사람을 편지에 언급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디모테오가 이 서신의 공동저자라기보다도 바울과 함께 에페소스에서 활동할 때 필레몬과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의 증거일 것이라고 오브리엔은 주장한다. 주류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필레몬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친 종인 오네시모를 지지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이 잘못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는 18절의 구절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돈을 훔친 후 도망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네시모가 필레몬을 떠난 후 바울과 만나게 된 경위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바울과 함께 투옥되었거나, 필레몬으로부터 바울에 대해 전해듣고는 바울을 찾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난 뒤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바울은 오네시모를 계속 데리고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이 편지와 함께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대하며 화해할 것을 목적으로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가 보관되어온 것으로 보아, 바울의 간구는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도망친 종으로서의 오네시모의 상황에 대해 앨런 드와이트 캘러핸 (Allen Dwight Callahan)은 그의 저작 "하버드 신학 리뷰"와 이후에 쓴 주석 등에서 의심하고 있다. 캘러핸은 16절 이하에 대해 "본문에서 오네시모가 수취인의 소유물이라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전통적인 도망친 노예 가설에 대한 내용은 편지에서 보이지 않는다. 현대의 주석 역시 이러한 해석이 우세하지만,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캘러핸은 오리게네스의 설교와 마르키온파를 논박하는 서문 등 필레몬서의 초기 주석들이 오네시모의 노예상태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해석이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약 386-398년에 안티오케이아에서 활동할 때 쓴 저작인 "Homiliae in epistolam ad Philemonem"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캘러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서로 소원하게 된 친형제이며, 이 편지의 목적은 그 형제를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벤 위더링턴 3세(Ben Witherington III)는 이러한 해석을 두고 바울의 수사학을 잘못 읽은 결과라고 비판한다. 이에 더해, 마가렛 M. 미첼(Margaret M. Mitchell)은 아타나시우스, 가이사랴의 바실리오, 암브로시에스터 등 크리로스토무스 이전의 수많은 저자들도 오네시모가 도망친 노예상태였음을 언급하고 있다고 논박하였다. 필레몬서 외에서 등장하는 오네시모에 대한 현존하는 유일한 기록은 골로새서 4:7-9의 내용이다. 여기서 오네시모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표현된다. 이 편지는 필레몬과 그의 가정교회에 다니는 압비아와 아킵보에게 보내졌다. 필레몬은 바울의 "동역자"로 묘사되었다. 골로새서에서 오네시모와 아킵보가 골로새교회의 신자로 언급되는 것을 고려했을 때, 필레몬은 골로새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필레몬은 에페소스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압비아는 필레몬의 부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몇은 바울이 "병사"로 묘사한 아킵보에 대해 필레몬과 압비아의 자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존 녹스(John Knox)는 오네시모의 주인이 사실은 아킵보이며, 이 편지 역시 필레몬보다는 그에게 전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해석에서, 필레몬은 이 편지를 받아 오네시모가 바울과 동역할 수 있도록 아킵보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한다. 특히 녹스의 시각은 필레몬서의 인삿말에서부터 도전을 받는다. 오브리엔은 필레몬의 이름이 첫번째로 언급되며 2절에서 "네 집"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아킵보가 이 편지의 주 수취인이라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녹스는 더 나아가 이 편지가 골로새교회에 두루 읽히며 아킵보를 압박할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주장하는데, 수많은 학자들이 이 편지의 어조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일례로 J.B. 라이트풋(Lightfoot)은 "오네시모를 변호하는 바울의 세심함과 재치는, 한 출판요구에 의해 무사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회인사는 바울 서신의 전형을 따른다. 바울은 첫번째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바울이 실제로 투옥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그의 동역자 디모테오를 언급하는데, 이는 수취인이 그와 아는 사이일 것을 증거하는 요소가 된다. 바울은 필레몬에 더해 그 집에서 모이는 압비아와 아킵보 에게도 인사를 보낸다. "자매 압비아"는 필레몬의 부인으로, "병사 된 아킵보"는 그의 아들로 추정되곤 한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다. 바울은 감사와 중보기도드림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주된 요청사항을 언급할 준비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에 대해 감사드리며, 그의 믿음이 효과적이기를 기도한다. 빌레몬이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 문단을 마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특별히 간구하게 된 상황과 그 목적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비록 아주 담대하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필레몬의 사랑과 인자에 기대어 간구하고 있음을 밝힌다. 바울은 또한 오네시모에 대한 애정과 함께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변화하였다고 기록한다. 오네시모가 이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바울과 필레몬에게 "유익"하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오네시모(Ὀνήσιμος)가 "유익"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을 사용한 말장난이다. 이처럼 바울은 오네시모와 함께하는것을 아주 유익하다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내게 하듯 영접"할 것을 요청하는데, 이는 즉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자로 대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오네시모가 필레몬을 떠난것으로부터 생긴 모든 빚을 자기가 갚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줄 것을 표현한다.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필레몬이 자기가 요청한 것 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며 신뢰를 표현하는데, 이는 아마도 오네시모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보내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또한 필레몬을 방문하고자 하니 방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하며, 다섯명의 동역자 에바프라, 마르코, 아리스다르코, 데마, 루가의 안부를 전한 후 축복기도로 편지를 마친다. 바울은 그의 저작에서 종과 자유인의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이 시대에는 노예제가 매우 흔했으며,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의 주제에서도 볼 수 있다. 종은 가정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편지에서는 목회적 관점에서 일부 노예들의 고통을 완화시키기를 원한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제가 이 글의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노예제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몇몇 학자들은 이 시대에 노예해방을 상상하는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노예제가 사회에 깊이 배어들었으니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동시에 폭도로 간주되었으니, 이와같은 정치적 운동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노예제를 그저 사회에 자리잡은 제도 중 하나로 받아들일 뿐, 그 올바름에 대해 의문을 품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노예제를 사람이 만든 제도로 보았고, 사람이 만든 제도는 모두 점차 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예수가 곧 재림하며, 현재의 세상은 그 즉시 사라질 것이라는 바울의 관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는 바울 신학과 기독론의 일부이다. 오네시모의 노예처지에 대해, 바울은 오네시모가 필레몬에게 자유인으로서, 특히 사랑받는 형제로서 돌아가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 시절의 로마법으로는 도망친 노예에 대한 주인의 처벌에 제한을 두지 않아 사형까지 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모가 처벌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이를 염려하여 필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 화해, 우애로 받아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바울은 또 사람들을 나누는 사회적 방벽을 부수고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이를 고린도전후서를 포함한 다른 서신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니 B. 터스튼(Bonnie B. Thurston)은 "Sacra Pagina: Philippians and Philemon"라는 책에서는 이를 두고, 노예에서 자유인으로의 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됨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이는 곧, 오네시모의 높아짐과 순종함이 필레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13-14절에서 바울은 필레몬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주기를 바라는데,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는 목적이일 수도 있다. 마샬(Marshall), 트레비스(Travis), 폴(Paul)은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의 동역자로 함께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중략) 만일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료로 들어오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면, 뭘 더 말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사라 루덴(Sarah Ruden)은 "Paul Among the People" (2010)에서,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해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귀중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권한이 부여된" 서구적인 개인 개념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바울 이전에 노예는 인간 이하의 것으로 고려되었고, 동물 이상의 존중을 받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디어밋 맥컬록(Diarmaid MacCulloch)은 "A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이 서신을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기독교적 토대"로 표현하였다. 로마제국에서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과 노예제에 기반한 고전 고대의 경제체제를 고려할 때, 필레몬서에 대한 평가는 더욱 높아진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기독교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점은 국가도, 언어도, 풍습도 아니다... 그들은 육 안에서 살지만, 육으로 살지는 않는다. 그들은 땅에서 살지만 천국의 시민이다. 그들은 정해진 법을 따르는 동시에, 법을 능가하는 생활을 한다.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편지를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에서 인용하며, 중세시대에 노예제를 사라지게 한 데 기독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과 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독교의 능력을 강조한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 베드로의 첫째 편지또는 베드로의 첫째 서한, 베드로전서는 신약성경의 책이다. 저자는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의 전승에 의하면 그가 로마 감독이나 안티오키아 감독으로 재직중에 쓰여졌으나, 본문에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오히려 본문은 이 책이 바빌론에서 쓰여졌고,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전한다고 밝힌다. 저작연대는 주후 60년에서 68년경으로 추정된다. 첫 문장에서 저자는 스스로 "예수의 사도 베드로"라고 밝혔으며 이레나우스(140~203), 터툴리안(150~22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5-215)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5-253) 등 초기의 교부들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인 사도 베드로를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왔다. 그 이유로는 다음의 것들이 지적된다. 그레이엄 스탠튼(Graham Stanton)은 본문이 기독교 박해가 확산되기 시작된 후인 도미티아누스 황제 집권기 81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베드로의 사후이기 때문에 본문의 기록자가 베드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신 연구결과는 이 주장을 부정하는데, 베드로 시기 이후로 본문의 작성시기를 추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저작성을 부정하는 다른 학자들은 본서가 에베소서, 골로새서, 목회서신의 내용을 참고하고있기 때문에, 바울 서신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또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바울에게 권위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베드로의 저작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베드로가 불러주는 내용을 5장 12절에 등장하는 실라에 의해 헬라어로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에대해 존 엘리엇(John Eliot)은 반박한다. 존 엘리엇은 실라를 베드로전서의 대필인이나 비서로 보는 시각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만든다고 주장하는데, 5장 12절의 헬라어 내용은 실라를 비서보다도 짐꾼이나 안내원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마가를 본 서의 대필자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바트 D. 어만은 본 서의 언어, 연대, 문체, 구조 모두 베드로의 저작이 아님을 입증하고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학자들은 베드로전서는 제3자가 아닌 베드로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또다른 학자들은 베드로전서의 문체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어투와 상당히 유사함을 들어서 이러한 주장을 반박한다. 이외에도 베드로전서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음을 암시하는 표현(누가복음 12:35와 베드로전서 1:13을 비교해보라)이 존재하며, 베드로후서나 클레멘스의 편지 등 초기 문헌들이 베드로의 저작성을 변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책의 첫머리에 소아시아의 지방 중 다섯 지방인 본도, 갈라티아, 카파도키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지역들은 사도행전 16:6-7과 18:23에 따르면 바오로의하여 복음이 전해진 곳인데, 본 서의 내용을 볼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편지를 돌려볼 순서가 지역들이 나열된 순서에 반영되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본 서간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씌어졌다고 되어있으며, 1장 17절에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부분에서 베드로의 마음이 드러난다. 1장 1절의 "나그네(KJV: stranger; NIV: exiles)"에 대해선 천국을 기다리고있는 기독교인들로 보는 시각과, 말 그대로 이방인으로 보는 시각, 구약성경에 적응중인 기독교인으로 보는 시각이 학계에 존재한다. 새로운 기독교인들이 각 지방에서 핍박을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베드로는 종교와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라고 2장 17절에서 조언한다. 이 서한은 바울로의 교리를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통해 자신을 사도 바울로와 같은 진영에 위치시킨다. 이 편지의 저자는 "여러가지 시험(1:6)"에 처해있으며 "불로 연단(1:7)"받고, "악행한다고 비방(2:12)"받으며,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3:17)" 수취인들의 상황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성서학자 존 엘리엇(John Elliott)은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수취인들의 상황을 부당한 고통가운데 놓여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3:19에서 등장하는 "옥에 있는 영"은 기독교계에서 계속 논의되는 주제이며, 대부분의 신학들은 이를 굉장히 수수께끼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이 편지의 수많은 구절들은 기독교인들이 받는 박해의 이유들을 제시한다. 비방받지 않을만한 삶(2:15; 3:9, 13, 16)에 대한 권고는 그들이 부도덕적 행위에 대해, 시민으로서 충성하라는 권고(2:13-17)는 그들이 정부에 충성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받은 박해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기독교인들이 받은 박해가 사회적 차별이라는 주장과, 공식적인 박해라는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본 서신의 수취인들이 받았던 고난은 사실 사회적인 것이며, 특히 조롱과 비웃음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서신에서 "비방(2:12; 3:16)", "치욕(4:14)" 등의 단어를 사용한 것이 제시된다. 성서학자 존 엘리엇은 저자가 수취인들에게 권력을 존중(2:13)하고 황제에게 충성(2:17)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 로마로부터 공식적인 박해를 받지 않았음에 대한 강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존 엘리엇은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5:9)"는 구절이, 이러한 고난이 로마제국이 아닌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엘리엇은 이러한 이유에 더해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서기 250년 데키우스 황제 이전에 공식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들어, 본 서신이 공식적 박해에 대한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반면에 공식적 박해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믿음을 지킬 것(3:15)에 대한 권고를 근거로 삼는다. 이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 이전에도 재판에 의한 박해가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사형까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추정은, 베드로전서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집권기(서기 81-96년)에 쓰여졌다는 것이다. 도미티아누스가 신성에 대해 공격적으로 비난한 것은기독교인들에 의해 거부되고 저항받아왔을 것이다. 성서학자 폴 아흐테마이어(Paul Achtemeier)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성격 상 기독교 박해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기독교인들에 대한 특별한 정책이 존재했다는 근거는 없음을 밝힌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았다면, 이는 기독교인들이 아닌 도미티아누스 자신의 신성을 반대하는 것들에 대한 박해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집권기에 본 서가 쓰여졌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는 학자들도 있다. 두에인 워든(Duane Warden)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인들에게조차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소아시아와 같은 지방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본 서의 배경이 비타니아-폰투스 지방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에 의한 재판과 처형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독교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들이 본 서의 수취인들이 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12년에 쓰여진 이 편지에서, 플리니우스는 그에게 잡혀온 고발된 기독교인들을 '기독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야하는지, 아니면 그 명칭과 관련된 범법 행위만 처벌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묻고있다. 성서학자 존 녹스는 4:14-16에서 사용된 "이름"이라는 단어가, 플리니우스의 편지와의 "분명한 연관점"을 시사하고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더해 많은 학자들은 베드로전서에 플리니우스의 편지에서 묘사된 상황들이 반영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예를들어, "온유와 두려움으로" 믿음을 지킬 것에 대한 권고(3:15-16)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굽히지 않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플리니우스의 처형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초기부터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의심되어 왔지만 첫째 편지는 신약성경의 정경(canon)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본 서에서는 예수가 죽은 후에 옥에 있는 영(3:18-20)에게 선포했다고 말한다. 이 구절과 마태복음 27:52와 누가복음 23:43 등의 구절은 지옥 하강에 대한 전통적 믿음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몇몇 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가 죽은 뒤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이전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장소라고 주장한다. 지옥하강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언급은 시르미움 신경(359), 니케아 신경(360),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60)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서구에 널리 퍼져, 후에 사도신경에도 등장한다. 루터교의 신앙고백인 협화신조에는 "예수가 장사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서 마귀를 정복하고 지옥의 권세를 깨어뜨리고 마귀로부터 모든 그의 능력을 빼앗았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있다. 지옥하강은 유럽의 중세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요한의 첫째 서간(천주교 성경), 요한 1서(표준새번역과 한글개역판)는 첫 번째 요한 서신이며, 네 번째 공동 서신이다. 전통적으로 요한의 복음서와 나머지 요한 서신들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본 서신은 에페소에서 서기 95-110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가 "육으로"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반박하기위해 쓰여졌으며, 기독교인들이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방법으로 윤리, 성육신의 인정,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본 서신의 주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동행하는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하나님과의 친교가 참된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험을 기술하며, 영적 거듭남의 증거가 삶속에서 의를 실천하는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본 서는 악으로 가득차 사탄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세상"과,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하나님의 자녀"를 구분하고 있다. 본 서신은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게, 서신서 서두부와 종결부가 포함되어있지 않다. 또한 본 서신은 문장구조의 다양성 없이 아주 간단한 스타일로 작성되었으며, 접속사를 자주 생략(asyndeton)하였다. 생각이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바울 서신과는 다르게, 요한의 생각은 고리모양으로 움직이며 천천히 전개된다. 이는 히브리 시가와 비슷하나, 대구의 두 번째 구절이 첫번째와 같은 의미를 갖는 히브리 시가와는 달리 본 서신에서는 첫 번째 구절에 살을 붙여가며 여러번 반복하여 재현부를 구성해나간다. 정리하자면, 본 서신은 종교적 권고(paraenetic)의 스타일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권고는 "개인적인 간청, 옳고 그른것/참과 거짓의 대조, 수사적 질문의 사용" 등으로 대표된다. 일부 학자들은 본 서신이 전통적인 2행 연구(parallel couplets) 선집에 대한 요한의 주석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에른스트 폰 돕쉬츠(Ernst von Dobschütz)와 루돌프 불트만이 처음으로 주장한 이 이론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최소한, 본 서신에서 시적 구조나 논리 구조에서 저자의 것과 구분되는 구절들이 꽤 많이, 종종 이어져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본 서신의 저작성은 전통적으로 노년기의 사도 요한에 의해 에페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본 서신의 내용, 언어, 그리고 논리 전개 방식은 요한복음, 요한 2서, 요한 3서와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데, 세 서신을 동일한 저자가 작성했다는 증거가 된다. 19세기 말의 성서학자 에른스트 드윗 버튼(Ernst DeWitt Burton)은 요한 1서와 요한복음이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을 수 없다고 기술했고,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이에 더해 "초기 기독교 전통과 현대 학자들의 대다수가 이 저작들의 저자가, 비록 사도 요한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사람이라는데 동의해왔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주류 시각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에 의해 대표되는데, 그는 "사랑을 받던" 사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요한 1서를 두고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다른 현대 신학자들은 본 서신의 이와 같은 위치에 도전하고 있다. 비록 세 서신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하인리히 율리우스 홀츠만(Heinrich Julius Holtzmann)과 C. H. 다드와 같은 학자들은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시각에는 최소 두가지 요지가 있다. 첫째는 본 서신에서 문장의 서두에서 종종 지시 대명사를 사용한 뒤, 접속사나 불변화사(particle) 후에 앞에서 사용한 지시대명사의 정의나 설명문을 배치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스킬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본 서신의 저자가 "복음으로 알려지지 않은것들에 대해서 다양한 수사적 표현으로 조건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네번째 복음서는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요한 공동체 외부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도전받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요한 1,2,3서는 "요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본 서신을 청자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1:4)하고, "죄를 범하지 않"고(2:1), "서로 사랑해야" 하며(3:11),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음(5:13)을 알게 하기 위해 본 서신을 썼다. 따라서 우리는 본 서신을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일반적인 목적과, 저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험을 제공하는 특수한 목적으로 나눌 수 있다. 저자는 그가 관리하는 교회에 영향을 미친 이단 교사들에 대해 걱정하는것 처럼 보인다. 이들은 한때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이단적 가르침을 전한 적그리스도(2:18-19)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 교사들은 예수가 육신 없이 영으로만(4:2) 이 땅에 왔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인류의 죄에 대한 진정한 속죄가 되지 못한다(1:7)는 가현설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케린투스라고도 불리는 원시 영지주의를 비난하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 저자의 목적(1:1-4)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청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됨의 의미로, (1) 그리스도에 대해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그의 속량하심(1:7-9; 2:2,25; 3:5; 4:9,10,14; 5:11-13,20)과 그의 변호를(2:1; 5:6,7) 받고, (2) 사람에 대해선 성스러움(1:6; 2:15,16,29; 3:10,12), 복종(2:3; 3:6,24; 5:2,3,18), 순결함(3:3,18), 믿음(3:23; 4:3; 5:5), 그리고 사랑(2:4,7,8; 3:11,14,16; 4:7,8,12,19-21; 5:1)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쓰여진 반면에, 본 서신은 신자(5:13)들에게 쓰여졌다. 본 서신에서 구약성경과 유대적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자는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으로 보인다. 본 서신은 아마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선교사를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며, 요한의 사도성과 장로됨을 고려했을 때 회중들에게 큰 소리로 읽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세기 라틴어 번역본에 첨가된 삼위일체에 대한 구절은, 중세시대를 거치며 본문에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는데, 이를 요한의 콤마라고 한다. 15세기 이전의 어떠한 헬라어 사본에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그의 1522년 신약성서 판본에 본 구절을 첨가해 출판하였다. 그의 판본을 번역한 성경들 중에는 킹 제임스 성경(1611)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첨가된 구절을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다. 18세기부터 본문비평에 의거해 만들어진 번역본들은 위 구절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각주로서 포함하고 있다. 요한의 묵시록 요한의 묵시록(, , , , : 요한계시록(―啓示錄, 계), : 요한 묵시록(―默示錄, 묵시) 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유일한 예언서다. 계시록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요한 묵시록은 기독교에서 성경 가운데 해석이 어려운 책이다. 같은 본문의 해석이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으로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관점에서 요한묵시록은 그리스도가 교회와 그 안의 성도들이 악의 세력이 잡은 세상을 이기게 하고, 그 악한 세력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희망을 담은 말씀이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박해받거나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뜻과 공의를 위해 선한 싸움을 지속하라는 용기를 주는 말씀 인 "교회중심 관점에서 전승사 해석방법"으로 이해한다. 교회 전통으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열 두 사도중의 한 명인 사도 요한이 유배중에 작성한 문헌이라고 하나, 3세기 교부인 디오니시우스부터 사도 요한과 관련이 없는 요한이 작성한 것으로 의견이 제기되었다. 저자는 에게 해의 파트모스 섬에서 집필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것이 유배 생활을 하다가 요한 묵시록을 집필하였는지, 또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파트모스 섬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성서신학계의 주류는 순회선교사, 당시는 순회 예언자로 불리었던 요한이 작성한 것으로 본다. 문헌을 분석한 결과,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에 능통했으며, 모국어는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로 추측되며, 유대인으로 구약성서의 전통과 문헌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고 가르쳤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집필 시기가 확실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현재 성서신학계는 90년대를 기록 시기로 본다. 과거에는 계시록의 연대를 60년에서 70년 시기,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와 유대독립전쟁 진압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선행하는 시대인 기원후 65년~75년으로 보기도 했으며, 현재 연구는 90년대, "로마 제국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선포하여 제국을 황제숭배신앙으로 통일하고자 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도중인 기원후 91년~96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계시록이 앞으로 도래할 그리스도의 국가와 로마 제국 황제의 신성모독적인 왕국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성서신학계의 주류 의견은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문헌으로 로마황제의 우상화를 강조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합하던 시대, 하지만 전국적인 추세였으나 억압 정도에 지역적 편차가 있었던 시대로 볼 수 있음. 요한 묵시록의 해석 방법은 교회와 세상의 대립이란 각도에서 볼 때 두 가지 시각을 지닌다. 세계중심 관점과 교회중심 관점의 해석이다. 세계중심 관점은 흔히 영적 해석이라고 불리며, 요한 묵시록 문헌의 내용이 세계사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며, 그 예언의 기록은 실제 역사적 배경을 전혀 갖지 않는 계시이며,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미래의 재앙과 말세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 관점이다. 교회중심 관점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며, 실제적 역사 배경을 지니거나, 교회사적 배경을 지니며, 교회사에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며, 이 관계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을 표현한 예언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두 관점은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전통적으로 기독교내 신학 연구에서 올바른 해석 방법의 관점은 교회중심 관점이다. 교회중심 관점은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루터, 칼뱅, 웨슬리에 이르는 신학흐름에서도 보이며, 현재까지도 중요한 성서 신학 해석 방법의 배경이다. 하지만 이 교회중심적 해석도 크게 주류와 비주류, 두 개의 지류로 분류된다. 주류인 전승사적 해석은 교회가 처한 상황과 교회사에서 나타난 사건과 역사적 배경으로 등장한 문헌으로 요한묵시록을 해석하며, 성서의 역사와 배경, 전통으로 해석하는 해석 방법이다. 이에 반해 비주류인 세대주의적 해석은 묵시록의 상징을 따라 특정 시대를 구분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세대별로 구분하는, 미래 시간표를 작성하는 식으로서의 해석방법이다. 교회중심 관점에서 정통적인 올바른 해석은 전승사적 해석 방법이다. 정통적인 올바른 요한 묵시록의 해석은 "교회중심 관점에서 전승사 해석방법"으로 즉 교회 안에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살피고, 집필 시기에 영향을 끼친 배경은 무엇이며 그 배경을 위해 작성한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현재의 의미를 밝히는 방법으로 현재는 역사비평적 시각을 수용하였다. 소수의 주장이었던 세계중심적 해석 관점과 세대주의적 해석은 과거에 긍정적으로 카리스마적 해석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부정적으로 기독교를 빙자한 사이비 종교 단체들과 기독교 이단 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잘못된 해석 방법으로 오용하여 활용한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는 예언자적 기질을 취하고 있으니, 약간의 서언이 있은 후에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1,9-3,22)로 나타나고 제2부는 엄격하게 계시록 형식(4,1-22,5)을 취하고 있다. 제2부는 또 다음의 계시적 주제별(최후의 심판, 아마겟돈, 사탄의 패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시두더지 가시두더지(echidna)는 단공목 가시두더지과에 속하는 포유류의 총칭이다. 알을 낳는 단공류 포유류이다. 바늘두더지 또는 가시개미핥기라고도 한다. 오리너구리와 함께 현재까지 멸종하지 않은 둘뿐인 단공류이며, 총 2속 4종이 현존한다. 벌레를 주식으로 하며 몇몇 종은 흰개미를 주식으로 삼기도 하나, 비슷한 생활 양식을 보여주는 빈치목에 속하지 않는다. 오로지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에만 분포한다. 오리너구리와 비슷한 생김새였던 단공류의 공통 조상에서 2,000-5,000만 년 전에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하였다. 허나 반수생 생활을 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상뻘 단공류와는 달리 가시두더지는 지상 생활에 더 알맞게 적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구권에서 붙은 에키드나(Echidna)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티폰의 배필로 알려진 반은 포유류, 반은 파충류의 특징을 가진 괴물 에키드나에서 유래되었다. 몸길이는 35-50cm이고 꼬리는 매우 짧아 흔적적이다. 몸 윗면과 옆면에는 센털과 짧은 비늘 모양의 털, 뾰족한 가시가 돋쳐 있다. 몸빛깔은 검은색 또는 암갈색이며, 눈이 분홍색이고 가시가 흰색을 띠는 알비노 개체가 이따금 보고되기도 한다. 주둥이가 가늘고 길게 돌출되어 있어 입과 코의 기능을 겸한다. 이 주둥이에는 오리너구리처럼 전기수용기가 있으나 오리너구리가 부리에 전기수용기 40,000개 가량이 있는 반면에 긴코가시두더지류는 상대적으로 적은 약 2,000개의 전기수용기를 갖고 있으며, 보다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 전기수용의 필요성이 떨어지는 짧은코가시두더지는 400개도 채 되지 않는다. 앞·뒷다리는 짧고 5개의 발가락이 있고, 길고 날카롭게 발달한 발톱은 갈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어 땅굴을 파기 적합하다. 주둥이 끝에 달린 입은 크기가 몹시 작으며 치아는 없는 대신 혀가 길다. 머리 뒤에 균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귀는 긴 가시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몸 아랫면은 바늘 모양의 털이 없으며 색은 암갈색이다. 수컷의 발에는 털이 없으며 며느리발톱이 있다. 평균 체온은 33°C로, 이는 오리너구리 다음으로 낮은 체온이다. 겉으로는 개미핥기 같은 유모목에 속한 동물과 고슴도치·호저 따위와 같은 바늘 돋은 동물들과 닮아 보인다. 짧은코가시두더지의 경우 주로 개미·흰개미의 군락지를 찾아내서 먹지만 긴코가시두더지류는 땅을 파거나 통나무를 쪼개서 나오는 환형동물·애벌레 등을 먹는다. 특히 긴코가시두더지류는 길다란 혀 전체에 세밀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어 먹이를 붙들기에 좋다. 혓바닥과 입천장의 뿔처럼 단단한 판이 먹이를 부수고 으깨는 역할을 한다. 배설물은 길이가 7cm쯤 되는 원기둥 모양이다. 흙과 개미굴·흰개미집 성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종종 모습이 불규칙적이고 부서져 있을 때가 많다. 극심한 온도 차이를 견딜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비교적 온도차가 적은 동굴이나 돌 틈새를 거처로 삼는다. 단독 생활을 하는 동물로 초원이나 평원보다는 삼림 지대에서 보다 많이 찾을 수 있으며, 초목과 나무뿌리, 낙엽 사이에 잘 숨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통은 스스로 수직으로 굴을 파나 이따금 토끼나 웜뱃이 파 놓은 빈 굴을 드나들기도 한다. 활동 영역은 매우 넓기 때문에 가시두더지들끼리 겹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가시두더지는 헤엄을 잘 치는 동물으로, 미역을 감을 때는 주둥이와 윗가시를 최대한 물 밖으로 빼고 네 다리를 휘저으며 자맥질을 하는데, 주로 몸을 청결하고 개운히 하기 위하여 헤엄을 친다. 가시두더지와 오리너구리는 단공류()로, 원수아강()에 속하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포유류로서 오직 두 갈래밖에 없는 알을 낳는 포유류이다. 야생 상태에서 평균 수명은 약 14-16년이며, 성숙한 가시두더지는 암컷이 4.5kg, 수컷이 6kg까지 자랄 수 있다. 주로 크기 비교를 통해 암수를 구분할 수 있으며 수컷이 암컷보다 25% 가량 몸집이 더 크다. 생식기 또한 차이가 나지만 생식과 배설의 기능을 겸하는 총배설강이라는 기관은 암수 양쪽 모두에 달려 있어 이 기준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뇌는 대뇌피질 가운데 신피질이 절반을 차지하며, 이것은 신피질 비율이 80% 이상 가는 인간과 비교했을 때 다소 낮은 수준이다. 신진대사가 느리고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이 드높아 크기에 비해서 오래 사는 편에 속하는데, 동물원에서는 50년까지 산 기록이 있으며 아직 입증이 된 바는 없으나 천적의 위협을 피한 가시두더지가 45년 정도를 살 수 있다고도 한다. 이전 연구와는 달리 자는 도중 렘 수면에 빠진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나, 약 25°C(77°F)에 가까운 온도에서만 렘 수면에 빠지며 15°C(58°F), 28°C(82°F) 등의 온도에서는 그 정도로 깊은 수면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암컷은 교미 뒤 22일째 되면 길이가 약 1.4cm, 무게가 약 1.5-2그램 정도 되는 작은 알을 한 배에 하나씩 낳으며, 출산 후 곧바로 새끼주머니에 넣어 다닌다. 부화하는 동안 새끼 가시두더지는 난치(卵齒)로 단단한 알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 퍼글(puggle)이라고 불리는 새끼 가시두더지는 아직 태아의 형태를 벗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단공류는 유두가 없으므로 젖샘에서 직접 젖을 받아먹는다. 새끼주머니에서 45-55일간 지나면 몸에 가시가 나기 시작한다. 이 때가 되면 어미 가시두더지는 육아용 토굴을 파고 그 안에 새끼들을 넣어 보호하며, 매 5일 간격으로 돌아와 젖을 뗄 때까지 수유한다. 7개월 정도가 지나면 새끼는 젖을 떼며, 그로부터 또 1년이 지나면 새끼는 완전히 독립한다. 가시두더지는 낯을 몹시 잘 가리는 동물으로, 위협을 느끼면 억센 앞다리로 곧바로 땅속을 파들어가서 몸을 숨기거나 고슴도치처럼 몸을 말아 가시로 방어한다. 이와 같은 강력한 방어 수단을 지녔지만 고양이·여우·딩고·왕도마뱀 등의 천적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어 사냥당하는 경우도 많다. 뱀은 가장 무서운 천적으로 은신처인 토굴로 기어들어와 새끼들을 잡아먹기도 한다. 환경오염 또한 가시두더지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다. 또한, 호주 원주민들은 가시두더지로 별미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가시두더지과는 짧은코가시두더지속("Tachyglossus")과 긴코가시두더지속("Zaglossus")의 2개 속으로 나눈다. 긴코가시두더지속은 뉴기니 섬의 고유종으로 세 종과 화석으로 발견된 두 종이 있다. 가시두더지속에는 "Tachyglossus aculeatus" 한 종만이 포함된다. 뉴기니 섬의 남동쪽과 오스트레일리아 전역,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발견된다. 긴코가시두더지속에 비해 몸집이 작다. 그밖에 화석으로만 발견되는 메갈리브윌리아 종도 있다. 가젤 가젤은 소과의 포유류이다. 천적으로는 치타등의 육식동물이 있다. 톰슨가젤·도르카스가젤·다마가젤 등이 있다. 몸이 모두 섬세하고 우아하며, 몸통이 좁고 길다. 네 다리는 가늘고 길다. 암수가 모두 테가 있는 하프 모양의 뿔이 있으며, 그 길이는 종류에 따라 다르다. 수컷의 뿔은 대개 가늘고 짧다. 털빛깔은 노란빛을 띤 갈색이며, 대개 얼굴이나 몸 옆쪽에 짙은 색의 반점이 있다. 꼬리 끝은 검은색이다. 사바나·사막 등 건조지역에 적응하여 서식하며, 저녁에 어린싹이나 풀, 관목의 잎 등을 먹는다. 먹이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동한다. 물은 식물에서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 달리는 속도가 빠르며, 한배에 1마리를 낳는다. 고기맛이 좋아 식용한다. 아프리카·아라비아반도·시리아·아프가니스탄·이란·파키스탄·인도·티베트·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다음 종은 이제 별도의 에우도르카스속과 다마가젤속으로 분류한다. 나무늘보 나무늘보(sloth)는 빈치류의 두 과인 두발가락나무늘보과와 세발가락나무늘보과에 속하는 6종의 포유동물이다.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 분포하고 있으며, 매달려 있을 만한 나무가 우거진 열대우림지에 서식한다. 세상에서 제일 게으르고 느린 동물이다. 나무늘보는 회갈색 털을 지녔지만, 이끼가 많이 부착하면 녹색을 띠기도 한다. 털 안의 환경조건이 이끼가 자라나기에 알맞기 때문에 이끼가 털 안에서 빠른 속도로 자라나게 된다. 현존하는 나무늘보들은 잡식성으로서 주로 식물의 싹이나 부드러운 가지, 잎 따위를 먹지만 곤충이나 도마뱀 혹은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기도 한다. 나무늘보는 나무에서 잎을 뜯어 먹고 사는 데 특수하게 적응돼 왔다. 나무늘보들이 주식으로 삼는 나뭇잎들은 에너지나 영양분 공급이 부족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늘보들은 아주 크고 특수화되고 느리게 움직이는, 여러 구획으로 나뉜 위를 갖고 있는데 이 위 속에 사는 박테리아들이 나뭇잎을 분쇄한다. 잘 먹은 나무늘보의 경우, 몸무게의 2/3가 위 속의 내용물이며 이것의 소화 과정은 한 달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나뭇잎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무늘보들은 신진 대사율이 매우 낮으며 활동시 기준으로 섭씨 30~34도라는 낮은 체온을 유지한다. 나무늘보는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열대우림지역 이외의 환경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현재로서는 나무늘보의 6종 중 갈기나무늘보만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지만, 남아메리카의 삼림 벌채가 진행됨에 따라 다른 나무늘보들에게도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다. 나무늘보의 털은 특수화된 기능을 나타낸다. 바깥쪽 털은 다른 포유동물과는 반대 방향으로 자란다. 대부분의 포유동물들은 털이 다리쪽을 향해서 자라는 데 반해 나무늘보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리에서 몸 쪽을 향해 털이 자라는 것이다. 또한 습기가 많은 지역에서는 털에 두 종류의 박테리아들이 서식하는데, 이로 인해 나무늘보는 위장술이 가능하다. 나무늘보의 바깥쪽 털은 대체로 짙은 갈색이지만 때로는 녹색을 띠기도 하는데, 이것은 바로 박테리아들 때문이다. 나무늘보는 털을 다듬기 위해 몸을 핥을 때 이 박테리아들을 먹음으로써 영양분을 섭취하기도 한다. 나무늘보는 짧고 납작한 머리와 큰 눈, 짧은 주둥이, 긴 다리와 그 끝에 달린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작은 귀를 가지고 있다. 나무늘보의 꼬리는 뭉툭하며 길이는 6~7cm 정도 된다. 나무늘보의 평균 몸길이는 50~60cm 정도이다. 청각이 안 좋으며, 후각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다람쥐 다람쥐는 소형 또는 중형 설치류를 포함하는 다람쥐과 동물 중 일부를 일컫는 말이다. 좁게는 한반도에 사는 다람쥐과 동물인 다람쥐("Tamias sibiricus") 한 종만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넓게는 북아메리카, 유럽 등에 사는 청서속("Sciurus")과 하늘다람쥐속("Pteromys") 등을 포함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에 사는 청서류인 "Sciurus vulgaris coreae"는 청서 또는 청설모라고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극·마다가스카르섬·뉴기니를 제외한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한다. 청서(청설모, red squirrel)와 다람쥐(chipmunk)는 먹이의 종류도 비슷하고 한반도 거의 전역에서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가장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차이점은 생김새이다. 다람쥐는 갈색 털빛에 등에 줄무늬가 있고 나무를 잘 타지만 주로 땅 위에서 생활하는 반면에, 청설모는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한다. 또한 먹이의 종류도 조금씩 달라 다람쥐는 도토리를, 청설모는 잣을 가장 즐겨 먹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점은 다람쥐는 겨울에 겨울잠을 자지만 청설모는 겨울이 되어 눈이 쌓여도 겨울잠을 자지 않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에 청설모와 다람쥐는 같은 숲에서 살아갈 수가 있지만, 때론 청서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다람쥐를 마구 공격하여 쫓아버릴 때도 있다. 영단어 squirrel은 청설모, 하늘다람쥐같은 다람쥐과의 동물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며, chipmunk는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를 뜻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등에서 다람쥐(chipmunk)는 잘 보기 힘든 특이한 다람쥐의 한 종이고, 일반적인 다람쥐는 바로 동부회색청서같은 청설모류이기 때문에, 보통 squirrel하면 청설모 종류를 떠올린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이야기와 신화 등에서 등장하는 다람쥐는 모두 청설모류다. 다람쥐는 밤,도토리를 좋아하여 밤 산지에 피해를 준다. 또 둥지를 만들기 위하여 나무껍질을 벗겨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귀엽게 생긴 생김새 때문에 애완동물로 사람과 같이 살기도 한다. 1962년 4월에 일본으로 다람쥐 2000마리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대한민국에서 한 때 1년에 30만 마리의 다람쥐가 포획되어 수출되기도 하였다. 수출 당시 1마리에 1달러 정도에 팔리기도 하였고, 2달러 40센트에 팔리던 때도 있었다. 라마 라마()는 낙타과의 동물이다. 같은 라마과 에서도. 라마 (Llama) 와 과나코 (Guanaco) 가 있고, 이들보다 작은 비쿠냐 (Vicuña) 와 알파카 (Alpaca) 가 있다. 몸무게는 70-140kg 정도이다. 털이 두껍고 목이 길며 아기 낙타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러나 등에 혹이 없다. 몸의 색은 검은색·갈색·흰색 또는 이 색들이 섞인 무늬 등 다양하다. 귀는 끝이 뾰족하고 길며, 다리는 가늘고 길다. 발가락은 두 개씩이다.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서 화물 운반용으로 쓰이는 가축으로서 해발 5,000m의 고지에서 90kg의 물건을 운반하고 하루에 26km를 걸을 수 있어 원주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라마는 피곤하거나 짐이 너무 많으면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다. 라마는 피곤하거나 짐이 너무 많으면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다. 라마를 화나게 하거나 공격을 하면, 공격자의 얼굴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침을 뱉는다. 한배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젖은 한 쌍이다. 작은 무리를 짓고 살며 풀을 먹고 되새김을 한다. 추위에 잘 견디며 풀이나 키가 작은 나무를 먹고, 식물에서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어 물을 많이 마실 필요가 없다. 라마의 고기는 식용하며 똥은 말려서 연료로 사용한다. 요즘은 교통기관의 발달로 운반용으로서의 이용가치가 줄어들었다. 바다사자아과 바다사자는 바다사자아과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이다. 특히 큰바다사자를 말하기도 한다. 바다사자는 귓바퀴가 있고, 앞발이 납작한 지느러미이며, 네 지느러미로 땅에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북극해로부터 적도까지, 남·북반구의 해양에 분포한다. 이들은 대체로 먹을 것이 풍부한 해변의 얕은 물에서 볼 수 있다. 바다사자 중에는 훈련받아 동물원이나 수족관에서 관심을 끄는 종류가 있다. 서커스에서 지느러미나 코로 공을 잡거나 받는 등의 묘기를 부리는 물개는 실제로는 바다사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다사자는 미 해군의 '미 해군 해양 포유류 프로그램'에서 기뢰를 탐지하기 위해 훈련되기도 하였다. 세자르 프랑크 세자르 프랑크(, 1822년 12월 10일 ~ 1890년 11월 8일)는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프랑크는 벨기에 리에주의 독일계 벨기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를 바랐고, 리에주에 있는 음악원에 보냈다. 1837년에는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1842년에 벨기에로 돌아갔지만, 1844년에 다시 파리로 가서 활동하였고, 프랑스 국적을 얻고 그곳에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그는 유능한 피아노 연주자였지만 일생 동안 오르간 연주자로 더 널리 활동했다. 1858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에 있는 성 크로틸드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직을 맡았다. 1872년부터는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제자로는 뱅상 댕디, 에르네스트 쇼송과 앙리 두파르가 있다. 그는 오르간 작품을 12곡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오르간 즉흥 연주에 뛰어났는데, 이 점 때문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이래 가장 뛰어난 오르간 작곡가로 여겨지고 있다. 프랑크는 적은 수의 말년 작품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중에는 그의 《교향곡 라단조》(1886~8)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피아노 독주를 위한 《전주곡, 코랄과 푸가》(1884),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886) 등이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위대한 작품 중 하나는 《코랄 제3번 가단조》이다. 프랑크는 1890년에 마차채에 찔리는 사고로 늑막염을 얻어 사망하여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에 있는 몽파르나스 묘지(Cimetière du Montparnasse)에 안장되었다. 프랑크 프랑크(Frank)는 게르만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여기서 비롯한 독일어 이름(Frank)과 프랑스어 이름(Franck)이 '프랑크'로 표기된다. 또한 '프랑스'와 '프란키스쿠스'라는 이름이 '프랑크'에서 비롯했다. 게르만어 '프랑크'에서 비롯한 이름은 다음과 같다. 1958년 1958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57년 1957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56년 1956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헌법법원 헌법법원(憲法法院)은 헌법에 관한 분쟁을 담당하는 독립된 헌법 기관으로 제4부로 불리기도 한다. 법적 분쟁 중 정치적인 영향이 큰 사건을 다루기 위한 법원이나 정치적인 판단을 주로 한다. 주로 대륙법계의 국가에서 이 방식을 채택하며, 헌법법원이 없는 나라는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그 기능을 한다. 오스트리아가 최초로 헌법법원을 두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제9차 헌법 개정으로 설치되었다. 헌법 재판은 원래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에서 기원한다. 1803년의 Marbury v. Madison 사건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이 사법 심사를 한 이래, 이러한 헌법에 근거한 재판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오스트리아가 최초의 헌법법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세계의 많은 나라의 대법원 또는 헌법법원에서 헌법 재판을 하고 있다. 헌법법원은 보통 다음과 같은 기능을 보유한다.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 제도에서 미국의 제도와 유럽 여러 나라의 제도는 크게 대비된다. 미국에서는 법률의 위헌심사권을 보통법원이 담당하고 있는데, 보통 법원은 언제든지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 한해서 심사하는데, 소송 당사자는 법률의 위헌을 재판을 받을 때에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심사절차를 ‘구체적 규범 통제’라고 부른다. 심사결과 위헌으로 판정된 법률을 무효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구체적인 소송 사건에 적용을 거부할 뿐이고, 그 위헌 판정의 효력은 그 법률 제정의 시기에 소급해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유럽식 제도에서는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권을 보통법원이 담당하지 않고, 그 구성은 국가 간에 차이가 나지만, 특별한 헌법법원이 담당하고 헌법법원은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 보통 법원의 제청에 의하여 심사를 할 뿐만 아니라(구체적 규범통제) 일정 다수의 국민의 동의에 의한 제소(민가제소)에 의하여, 또는 정부, 국회의 소수파 의원들, 지방 자치 단체(연방제 국가에서는 분방) 등의 일정 국가 기관의 제소에 의하여(기관제소) 심사를 하며, 이 절차를 '추상적 규범 통제'라고 한다. 심사 결과가 위헌으로 판정된 법률은 위헌을 선고하고, 그 뜻을 국가 원수에게 통고하여 법이 효력을 상실하는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공포하게 하든가, 또는 국회에 통고하여 국회로 하여금 폐기 또는 법을 개정하는 절차를 밟게 하거나 한다. 미국의 제도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아무리 헌법에 위반된다는 이유가 있더라도, 국민의 통제가 비교적 미치기가 곤란하고, 임기종신제가 보장이 되어 있는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이 무효화시킨다는 것은 국민 주권을 위배할 가능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사법부를 도리어 입법부나 행정부보다 상위에 두는 결과를 초래하여, 1935∼1936년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입법을 최고 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린 것과 같이 사법부의 독재를 초래할 우려성을 가진다. 이와 반대로, 유럽 대륙의 헌법법원 제도는 그 구성 여하에 따라서, 그 구성을 아무리 심중히 하더라도 헌법법원에의 정치적 요소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고, 더욱 헌법재판소 제도를 채택하면 그 심사절차에서 구체적 규범통제뿐만 아니라, 추상적 규범 통제를 채택하여야 의의가 있는데, 이 추상적 규범통제를 채택하면 위헌 심사 건수가 급증하여 정치적 혼란을 조장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나라는 다음과 같다. 해커 해커(, )는 해킹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컴퓨터 전반, 특히 정보 보안에 능통한 전문가를 가리킨다. 1950년대 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동아리 테크모델철도클럽에서 ‘해커’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클럽은 두 가지 분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분과 중 첫 번째 그룹은 모형 기차를 어떻게 하면 정교하게 만들지에 대하여 연구하였고, 두 번째 그룹은 기차끼리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을 연구하였다. 그 당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는 DEC사가 기증한 PDP-1이라는 미니컴퓨터가 있었다. 항상 모형기차의 제어에만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던 두 번째 그룹에 속해 있던 학생들은 모형기차 제어대에 사용되는 중앙회로와 작동원리가 매우 유사한 PDP-1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컴퓨터를 배우던 학생들이 너무 오랜 시간 이용을 하자 대학교 측에서는 비용 문제를 이유로 들어 그 기계가 위치한 전산실 문을 닫아 버린다. 학생들은 월담을 하면서까지 컴퓨터를 사용하였다. 이 당시 지금 기준으로 봤을 아주 조잡했던 PDP-1에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학생들을 해커라고 불렀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을 핵()이라고 하였다. 해커라는 낱말 자체는 선악(善惡)의 개념을 담지 않은 가치중립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컴퓨터 지식을 이용하여 남의 정보 체계에 침입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일부 컴퓨터 전문가 공동체에서는 해커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은 잘못이며, 컴퓨터 지식을 이용해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크래커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리누스 토르발스, 리처드 스톨먼, 에릭 레이먼드 등의 저명한 프로그래머를 해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해킹 또는 해커라는 말은 선악에 관계 없이 모든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며 특별히 해킹을 하는 자의 의도를 구분하고자 하는 경우 합법적이며 윤리적인 해커나 보안 연구자를 화이트햇 해커로, 불법적이며 비윤리적인 해커를 블랙햇 해커 또는 크래커로 부른다. 또한 화이트햇 해커와 블랙햇 해커의 중간적 성격을 띠거나 구분이 불분명한 해커를 그레이햇 해커로 부르기도 한다. 에릭 레이먼드는 오픈 소스를 개발하는 것이 공유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의 저서 <성당과 시장>의 이론에 따르면 정보의 제한된 사회는 성당과 같다고 비교한다. 피라미드식의 Top-Down으로 정보가 흐르고 있으며, 이것은 이는 정보의 자유 흐름을 막고 분업화 사회를 조장한다. 그에 반해 시장은 수평적 구조로 옆 가게에 파는 물건이 무엇인지 얼마인지 알고, 고객 역시 가격 즉 정보를 비교하여 선택한다는 것이다. 정보 역시 이런 흐름으로 가면 모두가 같은 정보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에 공유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크 루소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 ~ 1778년 7월 2일)는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는 1712년 당시 시공화국인 제네바의 그랑 뤼 40번지(Grand'rue 40)에서 시계공인 아버지 아이작 루소(Issac Rousseau)와 수잔 버나드(Suzanne Bern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닷새 후인 7월 7일 사망했다. 아버지가 제네바 시와 불화로 1722년 베른 시 공화국의 니옹(Nyon)으로 주거지를 옮겼으며, 제네바 근교의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10세 때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져 여러 직업에 종사하며 각지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1724년부터 루소는 법원 서기가 되기 위한 직업 교육을 받았다. 1728년 제네바에 우연히 들른 루소는 환대를 받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발길을 돌려 그 곳에서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며, 장 조세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여기서 루소는 드 베르셀리(de Vercellis) 부인의 시종과 구봉 백작의 서기를 겸직했다. 바랑 남작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사제가 될 의향이 없어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르 메트르의 지도하에 음악을 공부한다. 1730년 로잔으로 이주하여 가명으로 음악사 생활을 했다. 다음 해 루소는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후 리옹을 거쳐 샹베리 등지에서 생활했다. 1732년부터 1740년까지 샹베리와 샤르메트에서 바랑 부인 곁에 살면서 음악에 몰두하고, 많은 독서를 하며 다방면에 걸쳐 교양을 쌓는다. 1741년 계몽주의자인 달랑베르, 디드로와 파리에서 만나 친교를 맺었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정리하고, 파리로 가서 그것을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기대했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743년 ("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이 출판된 후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몽테귀 백작의 서기직을 맡지만 1년도 채 못 되어 백작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퇴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1745년 루소는 여러 귀족부인과 사귀었지만, 결국 23살 세탁부 하녀, 마리 테레즈 르 바쉬에르(Marie-Thérèse Levasseur)와 오랜 동거를 거친 후 결혼했다. 루소는 그녀가 낳은 5명의 아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1749년부터 루소는 디드로와 친교를 맺은 후, 그의 권유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학술 공모전에 <학문 및 예술론>이 1등으로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으며, 작사·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공연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해서 음악과 정치경제 항목에 할당된 글을 쓰고 다음해에 계몽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학문예술론》을 출판한다. 1752년에는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였다. 1754년 디종의 학술원에서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라는 주제로 학술연구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정치,사회제도에 관해 골몰, 소유권 제도와 사회 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참함을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와 대립시켜 설명했다. 이는 이후 《사회 계약론》의 바탕을 이루었다. 1762년에 저술한 《사회 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국가 상태에 있어서 확정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서 사회 계약론을 전개하고 인민주권의 이론을 완성하였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항상 정당한’ 일반 의지를 설정하고, 실제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다수결(多數決)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고 하였다. 1756년 에르미타주에 정착해서, 《사회계약론》, 《신 엘로이즈》, 《에밀》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757년 연극의 사회적 기능의 문제 때문에, 디드로와 의견 충돌이 있은 후 1년 뒤 절교했다. 1761년에 《신 엘로이즈》가 파리에서 간행되어 큰 성공을 거둔다. 1762년 《에밀》과 《사회계약론》등 18세기 사상계를 자극한 대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에밀》에 서술된 자연 종교의 이론과 그의 피해 망상적 행위로 각 방면에서 박해를 받았다. 특히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 그에 대한 체포장이 발부되어 1762년 스위스로 피했다. 당시의 전통과 기득권을 부정하고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타파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던 작품인 에밀은 예수회의 출판 방해 공작으로 외국인 네덜란드에서 출간되고 4개월이 지나서야 프랑스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루소는 1762년부터 8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하는데, 1764년 《시민들의 감정》이라는 익명의 작품(나중에 볼테르였음이 밝혀진다)이 제네바에 나타나 루소를 공격한다. 이것에 응수하기로 결심하고서 《고백》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1769년에 완성하고, 1770년 파리로 돌아와 1772년부터 1776년에 걸쳐 《루소가 장자크를 판단한다》를 쓴다. 1777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명상하지만 집필을 끝내지 못하고 1778년 7월 2일 죽는다. 그의 최대의 문학적 걸작 《참회록》과 《루소는 장자크를 이렇게 생각한다》 등은 만년 작품으로 사후에 발표되었다. 루소에게 의지는 추구하거나 회피하고, 긍정 또는 부정하또는 찬성하려는 마음(min정신서, 감정,의이능력이개한날롯하다. 사회계약론에 일의지는 "모든 공동의 개인과 각 연합자의 이익(les biens)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그에 따라 각자는 전체에 결합함에도 오직 자신에게만 복종하여 전처럼 자유롭게 남게 되는 연합 형태"를 추구하려는 의지이다. 이런 의지를 가진 개인이 모여 사회계약행위를 함으로써 국가를 창설한다면 국가 자체는 물론 국가의 모 든 권력은 일반의지에 의해서하된, 것이 잧첸는국가는 "개인과 각 연합자의 이익" 즉 "공공선"을 추구하게 됨과 동시에 "전체에 결합"되는 것 외에는 어느 개인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구성원 모두의 "동등한 자유" 즉 평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계약행위를 하는 당사자들 중에는 이전의 국가체제를 고수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사적인 개별의지를 가진 사람도 존재하므로, 모든 인민의 의지의 합인 전체(는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계약에 의해 국가가 성립되고 난 뒤에, 의회에서 표출되는 국가(정치형태)의 존립, 정부구성, 기타 인민의 요구사항에 관한 다양한 의견(법, 또는 사안) 중에서 어느 것이 "공공선"과 "동등한 자유"에 해당 또는 가까운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제로 남게 된다, "공동의루힘는 의회의하는의를투 의견이 가진 공공선과 자유에 가해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을 가감하고 남은 의견(다수득표)에서 일반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단, 의견을 공유한 의회구성원들이 파당을 형성하여 개별의지에 불과한 자신들의 의견을 다수득표의견으로 만들어 일반의지로 둔갑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거나 제도적으지 상황에서, 의회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내면의 빛에 따라 심의(투표)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루소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있는 일반의지는 마치 공자의 사상이 간단히 인(仁)으로 상징되어 논란이 끊이지 않듯이 논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루소는 비교적 일관된 자기철학을 전개하고 있어 이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루소는 사상 최초로 인간평등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든 철저한 평등주의자다. 계몽철학자들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당위적 차원에서이고, 사실상 엘리트주의였다. 천재 철학자 칸트조차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 칸트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 했다. 이렇듯 루소는 삶 자체도 그렇거니와 철학자체도 평등이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평등에 골몰했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경제불평등'에 있다고 단언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문제가 만연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를 '일반의지론'으로 풀어나갔다. 마키아벨리가 분열된 조국을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위정자가 어떠한 절대적 권한도 행사할 수있어야 한다고 했듯, 루소도 수천년에 걸쳐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철학이념으로 일반의지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이다. 원래 "일반의지"는 "신의 의지"을 원용한 말이고 이는 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연원하며 칸트의 선의지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일반의지는 상식과 달리 단순히 보편적 생각이 아니고 진리와 선을 전제하는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루소는 일반의지가 만인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 일인의 견해라도 일반의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루소가 철저한 평등주의자라는 것에 비추어 일반의지는 진리이되 신비적, 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현실속에서 구현되는 정의고 공공선이 된다. 정의와 선은 당연히 "평등"이고 평등은 경제적 평등으로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보장해서 공존, 공영하는 공화주의의 근본이념이다. 루소는 사회의 변혁을 도모한 사상가로, 일반의지는 관념에 그치지않고 반드시 실천을 전제하고 동시에 일반의지는 방향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의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의 의지로 읽힐 수는 있으되 반드시 평등(경제) 공화주의라는 좌표를 향한, 평등실현을 위한 합일된 의지 바로 그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세상에 널리 알려진 루소의 이 명언은 일반적으로 문명이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정확한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함으로써 그 철학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데, 루소는 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자유롭고 평등하지 못한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자연철학자도 아니고 사회계약론을 쓴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철학자인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을때는 자연의 중층적 의미도 새기지 않을 수 없다. 자연(natura)은 서구어로 본성이라는 의미도 있는 만큼 인간의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무엇보다 강조한 것으로 볼 수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말을 통해 자연의 낭만성과 야성이 아니라 평화롭고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의 원형을 복원할 것을 세상에 강력히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루소에 대한 평가는 다채로운데, 평생 루소의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놓고 그를 흠모했다는 대철인인 칸트에 의하면 "나는 인식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낀다. 그것만이 인류에게 명예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나를 루소가 옳은 길로 인도했다... 나는 그로부터 인민을 존경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함으로써 왜 그가 《에밀》을 읽는 데 몰입해 한번도 빠지지 않은 산책을 걸러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의 특색은 18세기적인 사회 윤리를 가장 독창적으로 탐구한 점에 있으며, 근본 사상은 "자연은 인간을 선량·자유·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노예·불행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가 쓴 모든 저작도 이 원리에 기초하여 개인과 사회를 회복하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영향은 철학·정치·교육·문학 전반에 걸쳐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문학적 지위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자 볼테르와 함께 19세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계몽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경부선 경부선(京釜線)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의 서울역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부산역을 잇는 한국철도공사의 간선철도 노선이다. 일반적으로는 ‘경부선’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정식 명칭은 경부본선이며, 노선 번호는 302 이다. 서울역부터 두정역까지는 수도권 전철이 병행되고 있다. 경부선은 대한민국의 양대 도시인 서울특별시와 부산광역시를 연결하고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인 울산광역시,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를 경유하는 한국 철도의 중추 간선 노선이다. 장항선, 호남선 등과 접속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며,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중요성을 인정받아 한창 전쟁 중인 1944년에 이미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다른 선구에 비해 선형이 좋아 고속 운행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일부 구간은 선형이 좋지 않은 구간도 존재한다. 또한 일부 구간에선 복복선화 및 3복선화도 되어 선로 용량을 증대하였다. 1974년 서울 - 수원간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었으며,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 - 청량리와 직결 운행하고 있다. 2004년에는 KTX를 위하여 경부선의 경로와 유사한 300km/h 급의 경부고속선이 개통하였다. 2005년 전철의 운행 구간이 천안역까지 확대되었고, 2008년 12월 15일에는 장항선까지 운행이 확대되었다. 서울에서의 여객 열차의 출발역은 서울역과 용산역으로 이원화되어 있지만 모든 경부선 일반 열차는 서울역에서 착발한다. 경인선을 부설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철도망을 장악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2대 간선축인 서울 - 부산과 서울 - 신의주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898년 9월, 이윽고 부설권을 취득한 일본은 '경부철도'를 설립하고 1901년 6월 일본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세워,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착공식을 거행했다. 일본은 영국에서 자금을 빌려와 미국이 가졌던 부설권과 건설 장비를 구입하였다.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자본금의 4분의 1은 일본 국고에서 나왔으며, 불입금의 10배에 달하는 사채모집도 승인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사장은 "경부선은 조선에서 일본의 유일 맥관이자 사활의 기관"이라고 황족, 부호에서 시골 농부까지 주식을 사서 애국하라고 선동하였으며, 이 국민주 모금운동으로 2,500만 원의 거대 자본금을 조달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물자 수송등의 이유로 급격히 공사가 진행, 1904년 12월 27일에 완공되어 1905년에 전선이 개통되었다. 일본은 영국처럼 차량이 좌측으로 다녔기 때문에 경부선의 열차도 좌측통행을 하게 되었다. 1906년 러일전쟁 후, 일본의 수상 사이온지는 경부철도 매수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경부선과 경의선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 소관으로 국유화하였다. 철도 예전선 주위에 사는 조선인들은 토지 징발과 인력 동원, 물자조달 등을 좌우한 일본군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노반공사에 농번기 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식량과 가축에 대한 강제 징발도 수시로 자행되어 유랑민이 속출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은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으며, 열 집에 아홉 집은 텅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고 보도했다. 시흥과 파주, 곡산과 평산 그리고 평양에서 조선인들은 이에 항의하는 싸움을 벌였고, 선로상에 큰 돌을 놓아 저항하였다. 이런 사건의 주모자는 잡히는 대로 사형에 처해졌다. 1908년에는 경부선과 같은 해에 완공되었던 경의선과의 직결 운행이 이뤄져 부산과 신의주를 잇는 직통 급행열차 융희호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국권침탈 이후에는 일본과 만주를 잇는 경부선과 경의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면서 1910년대에 전면개량이 이루어졌다. 남만주철도의 노선과 직통운행도 이뤄져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잇는 국제열차가 운행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의 중추 철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한국 전쟁때 한강철교가 폭파되기도 하였으나 군수물자와 병력수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후에는 유엔군의 공여와 미국의 원조로 들어온 디젤 기관차가 투입되어 서울 - 부산간 소요시간이 크게 단축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울로의 급격한 인구유입과 도시화로 인한 통근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 - 수원간의 전철화와 서울 - 영등포간의 복복선화가 진행되어 1974년 8월 15일에 경인선(구로 - 인천), 경원선(청량리 - 성북)과 함께 통근형 전동차를 운행하여, 서울 지하철 1호선과의 직통운행을 개시하였다. 통근 수요가 계속 증가하여 선로용량이 한계에 이르자 1981년 12월 23일에 영등포 - 수원간 복복선화가 이뤄져 통근형 전동차와 일반열차의 운행선로가 분리되었다(통근형 전동차는 2선, 일반열차는 1선). 그리하여 통근형 전동차를 어느 정도 대량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해져 급증하는 통근 수요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1984년에는 열차선을 이용하여 서울 - 수원간을 빠르게 잇는 직통열차(현 급행열차)가 등장하였으나 러쉬아워에 3, 4회만 운행하였다. 계속된 개량과 CTC의 도입, 150km/h 고속주행이 가능한 새마을호 객차의 도입 등에 힘입어 1985년 11월 16일 영업최고속도를 140km/h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서울 - 부산간 최단 소요시간이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가 각각 4시간 10분, 4시간 50분, 5시간 15분으로 단축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수요증가와 대부분의 철도가 경부선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단점 때문에 1990년대에 이르러 선로 용량은 만성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부선 전구간의 복복선화와 고속신선의 도입이 검토되었는데 소요시간 단축과 이에 따른 대량의 여객수송이 가능한 이점이 부각되어 고속신선의 도입이 결정되었다. 고속철도 시스템은 프랑스의 TGV가 선정되어, 2004년 4월 1일에 시흥 - 지천의 경부고속신선이 개통되어 KTX가 운행 개시되면서 서울 - 부산간을 2시간 40분에 연결하여 기존 새마을호에 비해 1시간 30분 이상을 단축시켰다. 이와 더불어 수원 - 천안간의 복복선화와 전철화가 진행되어 2003년 4월 30일에는 수원 - 병점 구간이 1차 개통, 2005년 1월 20일에는 병점 - 천안간이 복복선화되어 천안까지 통근형 전동차의 운행범위가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서울 - 수원간 직통열차가 서울(용산) - 천안간 급행열차로 바뀌었다. 또한 전구간 전철화 사업도 진행되어 KTX의 운행을 위해 대전조차장 - 옥천, 지천, 대구 - 부산 구간이 2004년 4월에 전철화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3월 천안 - 조치원 구간이 전철화되었고 2006년 12월까지 잔여 구간인 조치원 - 지천간의 전철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2007년 3월 1일부터 경부선에도 전기 기관차 운행이 시작되어 열차운행비용 절감에 도움이 되고 있다. 고속철도 개통과 동시에 일부 구간의 선형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기존의 속도제한 90~100km/h를 대폭 상향조정하여 140~150km/h 주행이 가능하도록 직선화하여 기존선의 운행시간을 단축하였다. 2000년 이후 노선이 이설된 구간은 다음과 같다. 경부고속철도는 2004년 4월 1일 1단계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2010년 11월 1일 2단계 구간 개통, 2015년 8월 1일 대전역과 동대구역 인근 구간 개통으로 전 구간 개통된 대한민국의 고속철도이다. 속도는 경부고속선 평균 250km/h, 최고 300km/h, 경부선 150km/h로 운행하며 서울역 - 부산역 2시간 16분에서 2시간 45분다. 차량은 프랑스의 TGV를 한국 사양에 맞게 개량한 KTX-I과 HSR-350X를 양산화한 KTX-산천을 사용한다. 경부선에는 총 18개의 지선 철도가 있다. 용산삼각선은 용산역에서 부산 방향으로 0.8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각선이다. 경부선 한강철교 북단에서 분기하여 경원선 이촌역 부근에서 경원선과 합류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1 이다. 용산삼각선을 따라 비정기적으로 전동차가 운행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2010년 7월 17일부터 주말에만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1편성씩 왕복으로 동인천역-용문역, 병점역-용문역 간 주말 특급 열차가 신설되어 이 구간도 수도권 전철의 열차가 경유하였으나, 계절별 수송수요 편차가 크게 나타나는 등 이용객 저조로 2010년 12월 1일부터 운행이 중지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나 경부선 용산-서울역 구간 완행선로의 고장시 우회 선로로도 이용된다. 구로삼각선은 구로역에서 부산 방향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각선이다. 경부선의 가산디지털단지역과 경인선 오류동역 사이를 잇는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2 이다. 구로기지선은 구로역과 구로기지간을 잇는 연결선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구로차량사업소 입출고 열차가 이용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3 이다. 남부화물기지선은 의왕역과 오봉역 간을 잇는 화물선이다. 본래 남부순환선 계획의 일부로 건설되었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4 이다. 병점기지선은 경기도 화성시의 병점역과 오산시의 서동탄역을 잇는 철도 노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6 이다. 과거 이 노선은 경부선 본선의 일부였으나, 경부선의 복복선화 및 직선화 과정 중 병점역에서 지금의 오산대역에 이르는 구간이 이설되고 기존선 경로 상에 병점차량사업소를 건설함에 따라 병점역과 병점차량사업소를 잇는 구간만을 남겨 병점기지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화성시의 동탄신도시가 본격적으로 조성되면서 병점역에 비해 병점차량사업소가 더욱 인접한 점을 토대로 화성시가 건설비 전액을 투자하여 오산시 외삼미동에 서동탄역을 신설하였다. 천안직결선은 두정역과 천안역을 잇는 연결선으로, 경부선과 장항선 사이를 이으며, 복선화되어 있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7 이다. 경부선의 천안 이북에서 장항선에 직결하려는 열차가 사용한다. 실질적으로 장항선의 일부로 취급된다. 오송선은 서창역과 오송역을 잇는 연결선으로, 경부본선과 충북선 사이를 이으며, 복선화되어 있다. 경부본선의 전동 이북에서 충북선에 직결하려는 열차가 사용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8 이다. 대전선은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잇는 연결선으로, 경부본선과 호남본선 사이를 잇는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09 이다. 대구선은 가천역과 중앙선 영천역을 잇는 철도이다. 동해선 (부전·경주·포항 방면)이나 중앙선 (영주·제천·청량리·정동진 방면)으로 직결 운행하는 여객열차가 이 철도를 이용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0 이다. 미전선 미전역과 낙동강역을 잇는 연결선으로, 경부본선과 경전선 사이를 잇는 삼각선이며, 복선화되어 있다. 경부본선의 밀양 이북에서 경전선에 직결하려는 열차가 사용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1 이다. 가야선은 사상역과 동해선 범일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2 이다. 양산화물선은 물금역에서 양산화물역을 잇는 총연장 3.5km의 화물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3 이다. 부강화물선은 부강역과 부강화물역간을 잇는 총연장 2.9km의 화물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4 이다. 신동화물선은 신동역과 신동화물역간을 잇는 총연장 4.7km의 화물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5 이다. 평택선은 평택역과 창내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포승-평택 철도로도 알려진 노선으로, 미래에 평택시 안중읍을 거쳐 포승읍의 평택항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6 이다. 평택삼각선은 평택선 신대신호소에서 분기되어 지제역으로 향하는 지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217 이다. 평택직결선은 평택선 신대신호소에서 분기되어 평택역으로 향하는 지선이다. 경부본선 상행선과 연결된다. 오늘날 경부선은 경부선 본선과 경부고속선,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의 철도교통량을 모두 처리하는 대한민국의 기간 교통망으로 기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노선의 모든 철도교통량이 모여들기 때문에 경부1선의 서울~금천구청 구간은 대한민국 철도에서 가장 많은 일 여객 190회(광역철도 제외)를 처리하고 있다. 아래는 2015년 기준 각 선구별 운행 횟수이다. 경부선은 2015년 기준으로 1년에 약 7천 3백만 명을 수송했으며, 이는 약 1억 4천만 명인 한국철도 전체의 지역 간 여객 수송량 가운데 약 54%에 달하는 양이다. 거리별 이동량을 나타내는 인거리(passenger-Km)수치 역시 압도적이며, 전체 약 234억 인km 가운데 51%인 119억 인km를 경부선이 담당하고 있다. 다음 자료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통계 내용을 모은 것이다. 경의선 경의선(京義線)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중구 한강대로 405 서울역과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도라산역을 잇는 한국철도공사의 간선철도 노선이다. 원래는 서울역과 신의주역을 연결한 간선철도 노선이었으나, 한반도 분단 이후 서울역에서 군사분계선 이남 도라산역까지만 경의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서울역부터 문산역까지 수도권 전철, 문산역부터 도라산역까지는 일반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경의선은 1902년 기공되었으며, 1896년 프랑스 피브릴(Fives Lile)사가 처음으로 부설권을 얻었으나 자금 조달이 어려워 부설권을 상실하였다. 1899년 대한철도회사가 다시 특허를 얻었다가 또 다시 실패하자 1900년 정부 기관인 내장원(內藏院)에 서부철도국을 두고 서울 ~ 개성 구간 선로 측량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서울 ~ 신의주 구간 군용 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였다. 일본은 이를 대륙 침략 노선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1904년 3월 용산 ~ 개성 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 1905년 평양-신의주 구간이 완공되어 용산 ~ 신의주 구간에 직통운전이 시작되었으며, 1906년 청천강·대동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908년 신의주 - 부산 사이(경부철도)에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완공되어 중국의 만주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국제 철도 노선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 서울역을 기점으로 하여, 신촌을 지나 가좌동에서 합류하는 신선이 개통되었다. 1943년에는 평양-신의주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광복 후 남북 분단이 되었지만 열차는 계속 운행해 오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문산-개성 운행이 중단되면서 남북간 철도는 끊기게 된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문산 ~ 개성간 운행이 중단되었으며, 휴전협정 후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역 ~ 문산역까지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2003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경의선 복원 공사로 도라산역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경의선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서울 ~ 도라산 간 철도 노선을 일컫는 말로만 쓰게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경의선의 도라산 ~ 신의주 구간을 2개로 나누어 평부선, 평의선으로 각각 부르고 있다. 경의선 복원 공사 완료로 도라산역을 기점으로 손하역, 판문역, 봉동역 등 3개역이 신설되었다. 2006년 경의선과 동해북부선의 시험 운행이 계획되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이후 재협상을 거쳐 2007년 5월 17일 시험 운행이 이루어졌다. 2007년 12월 11일부터 남측의 문산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판문역을 잇는 개성공단 전용 화물열차가 정기 운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잇따른 대남 공세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이후로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2008년 11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방적인 통보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향후 문산 ~ 도라산 구간 9.7km를 전철화하는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며, 우선 문산 ~ 임진강 구간 6km가 2018년 9월 21일 착공, 2019년 12월 개통될 예정이다. 그리고 판문점 선언 이후 동해선과 함께 현대화 사업이 추진되어 남북철도를 연결할 계획이다. 경의선을 개량해 수도권 전철을 운행하도록 하는 사업은 1989년 일산신도시 개발 계획과 함께 교통대책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2기 지하철, 일산선 계획이 확정되면서 경의선 전철화 계획은 무기한 연기되고 일산 지역 교통 대책으로 일산선만 건설되었다. 이후 공사 계획은 여러 차례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9년 착공되어 2006년 개통을 목표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산신도시 지역에서 지하화를 요구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고, 2005년 지상화로 합의해 사업이 재개되었다. 2009년 7월 1일 디지털미디어시티 ~ 문산 구간이 개통되었고, 전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특히 남북 통일 이후 물동량 급증을 대비해 복복선화가 가능하도록 노반이 2배로 넓게 설계되었다. 또한 수도권 전철 경의선 개통과 함께 강매역이 폐역되었으나, 2014년 10월 25일에 재개통되었다. 참고로 초기에는 서울 ~ 문산 구간을 수도권 전철 구간으로 지정하였으나 이후 구 용산선 구간으로 변경되었고 기존 구간 중 서울 ~ 가좌 구간은 폐지할 지, 유지할 지 논의하다가 서울역 수요를 감안하여 지선(支線) 형태로 운영하게 되었다. 수도권 전철 경의선은 문산 - 서울, 용산 간을 운행하고 전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는 평화열차가 유일하다, 행신 - 서울, 용산 구간은 KTX가 운행하고, 서울 - 도라산 구간은 평화열차가 운행하고 있다. 과거에 운행하던 차량은 다음과 같다. 수도권 전철 경의선 기본계획은 시점인 용산역을 지하에 신설하고, 강남역을 잇는 신분당선과 직결 운행하기로 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용산역 부근 배수펌프장 시설로 인해 아래로의 굴착은 불가능하였고, 신분당선 강북 연장 계획도 지지부진하면서 사실상 직결 운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용산역 진입 전 지상으로 올라와 수도권 전철 중앙선 승강장을 통해, 수도권 전철 중앙선과 직결 운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용산선 구간 복선전철화 도중 효창공원앞역 구간의 용지 확보 문제로 인해 공덕역까지는 2012년 12월 15일 개통되었고, 용산역까지는 2014년 12월 27일 개통되었다. 경의선에는 총 7개의 지선 철도가 있다. 효창선은 용산역과 효창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301 이다. 용산선은 용산역과 가좌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이 운행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302 이다. 수색객차출발선은 수색차량사업소와 가좌역을 잇는 지선으로, 수색차량기지의 차량 입출고를 위해 설치된 노선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304 이다. 고양기지선은 화전역과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을 잇는 철도이다. KTX에 사용되는 고속철도 차량의 입출고 열차가 이용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305 이다. 문산기지선은 문산역과 문산차량사업소를 잇는 철도이다.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입출고 열차가 사용한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306 이다. 수색직결선은 경의선 수색역 인근 경의선 서울 기점 8.882km 지점에서 인천국제공항선 서울 기점 13.583km 지점을 잇는 철도이다. 국토교통부의 한국철도영업거리표 상 노선 번호는 30307 이다. 다음 자료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통계 내용을 모은 것이다. 사슴 사슴은 사슴과(Cervidae) 동물의 총칭으로, 포유강 우제목/경우제목의 한 과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사슴이라고 불리는 동물 외에도 노루, 순록, 사불상 등이 사슴과에 포함된다. 한반도에는 백두산사슴(와파티사슴의 만주아종), 대륙사슴(꽃사슴, 일본사슴), 노루, 고라니 등 4종이 서식한다. 몸의 크기는 몸길이 약 30cm, 어깨높이 약 20cm의 소형종에서부터, 몸길이 3.1m, 어깨높이 2.35m의 대형종까지 여러 가지이다(붉은사슴 몸 250cm, 어깨 150cm, 무게 250kg). 다리는 길고 가늘며, 걸음이 빠르고 보폭도 넓어 잘 달린다. 발은 두 개의 가운데 발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덮개로 덮여 있다. 또 퇴화한 또 다른 발가락이 두 개 있는데 발굽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달릴 때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 사슴은 소보다 머리가 좁고, 코와 입이 다소 작다. 입술은 쉽게 움직일 수 있어 입술로 먹이를 문다. 사슴은 대부분 앞니가 아래에만 있고, 위에는 거친 피부로 된 두꺼운 판이 있어 앞니를 대신한다. 잎이나 가지를 뜯을 때 아랫니가 이 두꺼운 판을 누르게 된다. 위아래의 어금니는 끝이 날카롭게 많이 갈라져서 먹이를 씹기에 좋다. 시각은 좀 떨어지지만 청각과 후각이 예민하여 위험을 잘 포착한다. 귀는 크고 곧게 서 있어 어떤 방향에서 오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소리나는 방향을 알아낼 수 있다. 사슴은 먹이를 먹을 때나 쉴 때 항상 바람이 부는 쪽을 향하는데, 이는 바람에 실려 오는 포식자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기 위해서이다. 가지가 많은 수컷의 뿔은 사슴류의 큰 특징의 하나이며, 소의 뿔과는 크게 다르다. 사슴의 뿔은 매년 4~5월 무렵 기부의 뿔자리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대각이 돋아난다. 대각은 벨벳모양의 짧은 털로 덮인 피부에 싸여 있으며, 속에는 수많은 혈관이 분포해 있다. 뿔이 발육하여 각질화가 끝나면 나무 등에 문질러 피부를 벗겨낸다. 뿔의 크기와 엄니의 발달과는 연관이 있는 듯하다. 장대한 엄니를 갖는 고라니는 뿔을 갖지 않으며, 어떤 종은 뿔이 있어도 짧다. 다만 남아메리카에 분포하는 몇몇 종은 뿔이 작은데도 엄니의 발달이 나쁜 것도 있다. 서식지는 삼림·습지·초원·툰드라 등으로 다양하고, 부드러운 풀, 나무껍질, 작은 나뭇가지, 어린싹 등을 먹는다. 먹이는 충분히 씹지 않고 삼킨다. 사슴의 위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음식을 저장할 수 있어 많은 양의 먹이를 빨리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안전한 장소로 옮긴 후 저장한 먹이를 공처럼 덩어리로 꺼내 다시 씹은 후 먹이를 삼켜서 위의 다른 방으로 보낸다. 사슴은 예민한 감각과 자신의 행동역에 대한 사전지식, 그리고 재빠른 행동으로 포식자를 피한다. 건강한 사슴은 곰,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 캐나다스라소니, 퓨마, 재규어, 아시아사자, 유럽사자, 늑대, 승냥이 등의 천적보다 빠르다. 또한 놀라지 않는 한 사슴은 움직이지 않고 서서 포식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사슴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숲 주위에서 새벽녘과 땅거미가 질 무렵에만 먹이를 찾아나선다. 대개는 무리를 지어 살며, 아침·저녁으로 먹이를 취하고 낮에는 전망이 좋은 곳에서 휴식한다. 위험이 닥칠 때는 궁둥이의 흰 털을 세워 다른 수컷에게 신호를 보내어 경고한다. 번식기에는 수컷끼리 뿔을 맞대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데, 이 싸움에서 이긴 수컷은 수십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하렘을 형성한다. 종에 따라 6-9개월의 임신기간을 거쳐 한배에 한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암컷은 새끼를 낳기 위해 다른 사슴 무리와 떨어진 곳에 은신처를 정한다. 새끼 사슴은 걸어서 어미를 따라다닐 수 있을 때까지 그 곳에 숨어서 지낸다. 새끼는 생후 1년 동안 어미와 함께 생활한 뒤 독립한다. 주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전역에 분포한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사슴을 잡아 고기는 먹고, 털가죽으로는 옷을 해 입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 20종이 넘는 사슴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콜롬비아의 흰꼬리사슴, 키사슴, 늪사슴과 우리나라의 사슴을 포함한 아시아의 사슴들이 그렇다. 따라서 많은 나라에서 사슴 사냥을 금지했고, 사냥금지구역을 정했다. 그러나 사슴이 사는 많은 지역이 농지나 집터로 개발되고 있어 오늘날에는 사슴의 자연 서식처를 파괴하는 것이 사슴 집단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사슴고기는 담백하고 연하며,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으므로 예로부터 식용으로 애용되어 왔다. 고기맛은 가을부터 초겨울에 걸쳐 맛이 최고이고 주로 불고기·로스구이·전골요리를 해서 먹는다. 사슴의 뿔, 특히 대각은 녹용(鹿茸)이라 하는데 피를 돕고, 심장을 강하게 한다고 하여 한방에서는 강장제로 귀중하게 쓰인다. 주기적으로 떨어지고 다시 솟아나는 수사슴의 뿔은 "생명의 나무"와 같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반영하여 재탄생, 장수, 성욕, 빛과 태양 등을 뜻하는 보편적인 상징이다. 핀란드의 민족서사시 〈칼레발라〉부터 켈트족, 불교, 중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스키타이 전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이르기까지 수사슴은 여러 문화의 신화에 등장하는 강력한 상징이다. 사슴과는 약 150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목록은 Randi, Mucci, Claro-Hergueta, Bonnet and Douzery (2001); Pitraa, Fickela, Meijaard, Groves (2004); Ludt, Schroeder, Rottmann and Kuehn (2004); Hernandez-Fernandez and Vrba (2005); Groves (2006); Ruiz-Garcia, M., Randi, E., Martinez-Aguero, M. and Alvarez D. (2007); Duarte, J.M.B., Gonzalez, S. and Maldonado, J.E. (2008)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사슴과(Cervidae)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아메리카들소 아메리카들소("American bison") 또는 버팔로는 북아메리카에 사는 소과 포유동물이다. 어깨높이 약 150 cm, 몸무게 최대 1,380 kg 정도이며, 다른소들보다 길어서 몸길이 최대 3.8m에 이른다. 머리와 목이 크고 어깨에 혹이 있다. 몸빛은 갈빛을 띠는 검은색이다. 길고 거친 털이 머리·목·혹을 덮고 있고, 목과 턱에도 긴 수염처럼 털이 나 있다. 머리에는 소처럼 뿔이 한 쌍 나 있고, 어떤 종은 뿔 길이가 90cm가 넘는다. 귀는 털로 덮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로키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북아메리카 지역, 특히 서부 평원에 6천만 마리가 살았다. 미국 서부 원주민들은 아메리카 들소를 사냥하여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해 입거나 원주민들의 텐트인 티피를 만들었지만, 들소들의 숫자 감소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생명을 존중하여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만 사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서부에 이주한 미국 동부의 백인들이 철도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단순 취미로 사냥을 하면서 멸종 위기에 놓였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원주민들의 주식이 된 버팔로를 국가차원에서 학살해서 식량을 없애는 목적이 존재한다.버팔로가 즐어들면서 인디언들은 미국에 자신들의 땅을 팔게 된다.무자비한 학살로 인해 1889년 1천 마리로까지 격감하였다가, 현재는 보호에 의해 수가 늘어난 덕분에 3만 마리 정도가 살고 있다. 말 (동물) 말()은 말목 말과의 동물이다. 학명은 "Equus ferus caballus"이다. 예로부터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온 동물 중 하나로 사람을 위해 많이 봉사해 왔다. 어린 말은 망아지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등장했다. 마콩 근처의 솔뤼트레에서 발견된, 일 헥타르 이상이나 되는 말 무덤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말의 수명은 대략 25세로 번식연한은 만 3세부터 15-18세까지이다. 번식은 주로 봄에 하며, 북반구에서는 3-7월 사이이다. 임신기안간은 10-14개월이며 보통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암컷은 출산이 가까워지면 불안과 진통으로 침착성을 잃고 유방이 부풀어오르며 초유가 스며나온다. 난산(難産)은 극히 드물다. 어미말은 당분이 많은 젖을 하루에 10-20L를 분비하는데, 망아지는 반 년 가량 그 젖을 먹는다. 2개월이 지나면 풀이나 사료도 먹을 수 있게 된다. 1년쯤 되면 반쯤 자라며, 5년이 되면 키와 몸무게가 완전히 자란다. 암말은 일생 동안 5-6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공포심이 많아 외계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리를 이루어 일정한 사회적 순위를 정한다. 말의 기원을 살펴보면, 마지막 빙하기 이후 뚜렷이 구별되는 세 종류의 말이 출현했는데, 이들이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말의 조상으로 프르제발스키호스, 타르판, 딜루비얼이다. 초원말이라고도 하는 프르제발스키호스는 아시아에 살았다. 그러나 야생 상태에서는 멸종했고 동물원에만 살고 있다. 또 한 종류는 고원말이라고도 하는 타르판으로 중앙유럽과 우크라이나의 대초원같이 광활한 지역에서 살았다. 이 말은 거의 대부분 멸종했으나 폴란드에 작은 무리가 아직 살아 남아 있다. 셋째 종류는 삼림말이라고도 하는 딜루비얼로 북유럽의 습한 목초지대에서 서식하던 몸집이 크고 움직임이 느린 말이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 멸종된 상태이다. 현재 150종이 넘는 말과 조랑말이 있다. 품종에 따라 크기·힘·속도 등의 특성이 매우 다양하다. 1. 군집성 대개의 초식동물이 그러하듯이 말도 군집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1마리의 수말이 우두머리가 되어 20~25두 정도의 암말을 거느리면서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나이가 많은 암컷이 우두머리가 된다. 2. 사회성 말에게도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보 전달수단이 있으며, 2마리 이상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서열이 생겨서 하나의 사회를 형성한다. 3. 귀소성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귀소성이 있다. 4. 공포성 잘 놀라고 쉽게 겁을 내는 가장 특징적인 성질이다. 이와 같은 성질 때문에 겁이 나는 곳으로부터 빨리 도망가기 위하여 ‘예민한 감각’과 ‘스피드’가 발달하여 ‘투쟁’보다는 ‘도주’가 자기 방어의 유력한 수단으로 되어 있다. 말이 뒷다리를 들어 차는 동작은 공격 수단과는 달리, 가까이 온 적에게 최소한의 소극적인 방어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말이 놀라고 겁을 내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주로 처음 보는 물건, 움직이는 것, 냄새가 강한 것에 겁을 내며 특히 큰 소리나 듣지 못했던 소리 등에 놀라기 쉽다. 일반적으로 암말이 수말보다 놀라기 쉽고 거세마는 수말보다 온순하다. 5. 정조성 봄의 번식기에 수말이 암말에 대하여 좋아함과 싫어함을 나타내고 이와는 반대로 암말이 수말을 선택하는 정조를 가지고 있는 말도 있다. 친자의 경우에는 부마와 자마의 사이에는 애정이 거의 없으나, 모마는 자마에 대한 애정이 대단히 깊으며 같이 있도록 해주면 모자의 애정은 오래 계속된다. 종모마나 번식빈마의 경우에는 연애결혼은 할 수 없고, 목장경영자나 마주의 의사에 따라 지정결혼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 경주마의 숙명(혈통의 스포츠)이다. 1. 기쁠 때 아주 즐거운 순간에는 머리를 낮게 내렸다가 높이 쳐들면서 코로 최대한의 원을 그리고 행동이 열정적이고 민첩하다. 윗입술을 말아올려 윗니를 드러내 보이며 꼬리를 들어올린다. 망아지는 재미있게 놀 때 꼬리를 들어올리고 뒷다리를 중심으로 빙글 돌거나 멀리 달리기도 한다. 2. 화날 때 가벼운 자극시에는 귀를 뒤로 약간 젖히고 꼬리를 한쪽 방향으로 파리를 쫓듯이 치며, 후구를 긴장시켜 찰 준비를 한다. 자극이 더 강해지면 귀를 머리쪽으로 조금 더 붙이고 꼬리를 과격하게 한쪽으로 치며 차려는 발을 지면에서 살짝 든다. 심한 자극시에는 귀를 머리 뒤로 감추고 꼬리를 양옆으로 후려치며 눈을 부릅뜨고 자극하는 물체를 향해 발길질을 한다. 본격적으로 화가 날 때는 꼬리를 빠르게 후려치고 머리는 화나게 만든 상대를 향하며 눈에 불을켜듯 적의를 취한다. 귀는 완전히 뒤로 감추며 윗입술을 말아올려 깨물 준비를 하고, 한계점에 달하면 뒷발로 모아치기를 하며,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뒷다리에 체중을 싣고 앞다리를 들어 머리를 낮추며 목표물을 향해 입을 벌려 공격한다. 공격시 앞발로 차기도 한다. 분노·광분 상태는 화난 상태가 지속되어 일정수준을 넘으면 도달되는데, 깊고 낮은 소리를 내고 눈은 광기를 발한하며 신체적인 긴장으로 인해 땀을 많이 흘린다. 화나게 만든 물체나 방해하는 물체를 향해 돌진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되면 자해행위도 하고 심한 경우 쇼크와 탈진에 빠지며 목이 부러져 죽기도 한다. 3. 고통스러울 때 가벼운 불편은 파리가 붙거나 안장끈이 닿거나 관절염 초기의 경우와 같이 가벼운 자극이 있을 때 느끼고 해당부위의 근육을 진전시켜 자극원인을 떨구어 내려 한다. 여의치 않은 경우 가까운 다리를 이용하여 꼬리를 치기도 하고 입술로 제거하기도 한다. 그래도 제거되지 않으면 벽, 나무, 기둥 등에 대고 문지른다. 다리에 관절염이 있는 경우 입으로 관절을 물어뜯기도 한다. 더 심한 불편은 회초리로 맞거나 벌에 쏘인 듯한 고통을 받을 때 느끼는데, 이때는 자극받은 쪽으로 귀를 젖히고 꼬리를 그 쪽으로 치며 반대방향으로 껑충 뛴다. 산통(배앓이)과 같이 내부적이 요인으로 인한 통증시에는 침울해지고 귀는 아픈 쪽으로 향한 채 눈은 빛을 잃고, 양쪽 뒷다리의 체중지지 교대주기가 빈번해지며 호흡이 가빠진다. 통증을 느끼게 되면 움직임이 줄어들고 가능한 한 아픈 곳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다. 산통으로 인한 통증이 있는 경우 말은 깊게 신음하고 드러누워 격렬하게 뒹굴고 자신을 물어뜯는 등 강렬한 신체언어를 발현한다. 통증이 장시간 지속되면 말은 많은 땀을 흘리고 귀가 처지고 머리도 늘어뜨리며 똑바로 서 있지 못해 쓰러지기도 한다. 4. 배고플 때/목마를 때 급식시간이 되면 대부분의 말들은 몇 가지 방법으로 갈망을 표현한다. 마방에서 뛰거나 소리치거나 문을 찬다. 빈 사료통을 물어 흔들기도 한다. 바닥을 긁기도 하고 머리를 끄덕거리기도 하며 심지어 뒹굴기도 한다. 물통이 닿지 않아 물을 못 먹었거나 다른 이유로 물을 못 먹은 말은 심하게 머리를 흔들어대거나 입술을 핥아댄다. 5. 피곤할 때 수면부족은 시끄러운 장소에 수용되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이때는 선 채로 졸기 쉽다. 졸음에 겨운 말은 머리를 내려뜨리고, 눈은 거의 감기며, 귀는 비행기귀 형태가 되고, 다리는 바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과로 후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는 귀가 처지고 비(鼻)점막 충혈이나 목운동 저하 등이 나타나며 목·눈·얼굴 주위의 혈관이 두드러져 보인다. 거의 탈진상태에서는 피곤에 겨워 머리를 내렸다가 숨쉴 때만 올리고 다시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꼬리는 늘어뜨리고 있다가 돌발적으로 당겨올린다. 걸을 때는 다리를 거의 질질 끌고 다니고 보폭도 준다. 말은 여러 가지 버릇이 있다. 말의 습성, 본능에서 오는 버릇도 있으나 할 일이 없어 심심하기 때문에 생기는 버릇도 많다. 이러한 버릇은 한번 생기면 없애기가 힘들기 때문에 평상시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1. 움직이지 않는 버릇: 마방을 떠나기 싫어하거나 동료나 다른 곳으로부터 움직이지 않으려는 버릇 2. 무는 버릇: 말은 코끝을 쓰다듬을 때 무는 버릇이 있다. 3. 공기빠는 버릇: 돌출되어 있는 곳을 물고 입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버릇 4. 좌우로 흔드는 버릇: 마방 문앞에서 서서 규칙적으로 몸을 좌우로 흔드는 버릇 5. 앞발로 긁는 버릇: 마방 바닥을 앞발로 긁어서 파는 버릇 6. 일어서는 버릇: 말의 가장 흔한 버릇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상대방에게 위협을 줄 때 7. 기타 작은 버릇들 말의 조상이 지구에 나타난 것은 대략 5,000만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말과는 달리 몸집 크기가 개(犬)만하였으며, 발가락도 여러 개 달려 있고, 달리기도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말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발가락이 한 개라는 점이다. 사람 등 대개의 포유동물들은 한 다리에 보통 5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 말의 발가락이 한 개만 남게 된 그 변천 과정을 알아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5,000만년 전의 지층에서 말과 유사한 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관련 학계는 이를 분석해 말의 조상이라고 규정짓고 이를 에오히프스라 불렀다. 북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에오히프스는 몸집이 비교적 작은 동물이었다. 그 크기는 완전히 성장했을 경우 어깨 높이가 약 30cm에 불과하였으며, 등은 활처럼 굽어 있고, 꼬리는 길어서 개 또는 여우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가락은 사람의 엄지와 같은 것은 사라지고 나머지 4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중간에 있는 발가락이 제일 크고 좌우에 있는 것들은 작았다. 약 3,000만 년 전의 화석에서는 발가락이 3개 밖에 없는 말 모양의 동물이 발견되었다. 체구는 좀 더 커져서 체고가 평균 60cm는 되고, 두개골도 커져서 그 형태가 현대 말의 두개골과 비슷했다. 발가락은 맨 가장자리의 다섯째 발가락마저 사라지고 남은 발가락은 3개였는데, 가운데 발가락이 한결 크고 굵어졌으며, 양 옆의 발가락은 작아져 간신히 지면에 닿아 있는 정도였다. 두개골이 커지면서 뇌도 커져 지능지수 역시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치아구조로 보아 나뭇잎을 따먹기에 적당한 형태였다. 대략 1,00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메리키프스는 메소히프스보다 몸집이 훨씬 커져 큰 놈은 체구가 100cm에 이르게 되었고, 눈자위가 그 이전의 조상말들보다 양측면으로 틀어져 현대 말과 같이 전방․ 측방․ 후방을 용이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시각구조가 변화되었으며, 두개골의 형상도 현재의 말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 외모는 마치 영양부족으로 성장이 지연된 조랑말 정도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발가락은 3개였으나 각 좌․우측의 두 발가락은 완전히 위로 올라붙어 체중은 가운데 발가락으로만 지탱하는 형태였다. 치아구조는 풀도 뜯어먹을 수 있는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몸통과 다리의 길이가 어느 정도 균형적이며 관절의 각도가 넓어진 것으로 보아 달리는 속도도 빨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만년 전, 좌우 양측의 부분적으로 퇴화되었던 발가락은 거의 대부분 사라져 흔적만 남아 있고 실질적으로 한 개의 발가락만으로 완전한 기능을 하는 플리오히프스가 나타났다. 그래서 플리오히프스를 ‘최초의 한 발가락 말(一指馬)’또는‘최후의 세 발가락 말(三指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플리오히프스의 양측 발가락이 완전 사라지고 ‘에쿠우스’로 진화되었는데, 그것이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사라진 발가락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리오히프스는 체형과 체구 측면에서 현대 말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에쿠우스는 그 생김새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변의 말들과 아주 흡사한 현대마의 직계존속이다. 에쿠우스의 발가락은 오직 한 다리에 한 개뿐이며, 크고 튼튼하게 발달되어 있다. 하나 남은 발톱이 바로 크고 둥글고 단단한 형태의 말 발굽인 것이다. 그러나 양측에 붙어 있었던 둘째, 넷째 발가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말의 발목 위 정강이뼈(중족골=발가락과 연결된 발바닥 뼈)를 찍은 X-ray 사진을 보면 가운데 큰 대롱뼈(제3중족골)가 있고 그 양측에 가느다란 나무젓가락 크기의 가시뼈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이 바로 외양으로는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제2, 제4 중족골인 것이다. 인류가 사육한 말이 이 시대의 것으로 오클라호마 주립 대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최초로 길들여진 말은 아시아의 에쿠우스로 기원전 3,000 ~ 4,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인류의 정복활동이 심화 됨에 따라 고기와 우유로 주로 쓰이던 것을 넘어 첫번째 형태의 동물 이동 수단까지 되었다. 말은 원산지의 기후, 토양 및 기타 환경여건에 따라 그 외모와 습성이 다양하며 인간의 필요 목적에 따라 많은 개량종의 탄생을 거듭해 현재 약 200여 가지의 품종이 있다. 원산지에 따라 동양종과 서양종, 용도에 따라 승용마와 역용마 등으로 구분한다. 승마용으로서는 아랍·서러브레드·앵글로아랍 등이 있으며, 경마용으로는 앵글로노르만·해크니·아메리카트로터 등이 있다. 그리고 역용으로는 샤이어·클라이즈데일·페르셰롱 등이 있다. 말과(科) 동물에는 말 이외에도 나귀, 얼룩말 등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보통 포유류들이 가지고 있는 5개의 발가락 중 4개가 퇴화하고 가운데 발가락만 튼튼하게 잘 발달하여 발굽이 한 개이며, 다리가 길어 잘 달릴 수 있는 다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등록된 207종의 말 중에서 67종은 조랑말(Pony)이며, 36종은 노역마(Working horses), 104종은 스포츠용 말(Athletic horses)이다. 조랑말은 보통 58인치 이하의 말을 지칭하나, 단지 키만으로 말의 품종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조랑말은 체구에 비해 다리가 짧고 튼튼해 보통의 큰 말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을 부담할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니고 있다. 체구가 아주 작아 조랑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체형이 보통말에 가까운 품종이 있는데, 그것이 카스피안(Caspian)종과 팔라벨라(Falabella)종이다. 이란 북부에서 발견된 카스피안종은 수천 년 전의 아랍종 조상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특정 지역에 고립되어 수천 년간 순수혈통을 유지하여 고대의 모습으로 생존하고 있다. 팔라벨라종은 현존하는 말 중에서 체구가 가장 작은데, 큰 개보다도 작다. 따라서 사람이 탈 수도 없어 애완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조랑말과는 반대로 체구가 거대하여 체중이 1톤을 웃도는 말들도 있다. 이들은 대개 마차를 끄는 노역마로 활용되었는데,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 그 활용가치가 떨어져 현재는 산간지대에서 일부 활용되거나 쇼나 박람회에 출연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말은 승마, 경마, 마장마술, 폴로, 사냥 등 스포츠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시골에서 산업용으로 활용되는 말은 줄어들고 도시민들의 레저용인 경마용 또는 승마용 말들이 증가되었다. 말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크게 체중에 따른 분류와 원산지의 기후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이 있다. 뒷다리 사이에 음낭이 있으면 수컷. 항문 아래쪽에 음부가 있으면 암컷이다. 둘다 없으면 중성(거세마)이다. 1. 조랑마 대한민국의 제주특별자치도 에서 자생하는 말의 종류 2. 승용마 3. 마차마 4. 경주마 운반용이나 농업용 말은 힘이 강한 동시에 속력도 어느 정도 필요하므로 체폭이 좁고 몸길이도 다소 짧으며 네 다리가 길어야 한다. 짐 싣는 말은 키는 낮고 등과 허리는 강해야 하며 머리 및 목은 비교적 낮으며 가슴이 크고 네 다리는 짧은 것이 좋다. 경역용종(輕役用種) 말은 속력이 필요하므로 체폭이 좁고 키는 몸길이에 비하여 약간 크며 네 다리는 비교적 길고 골격은 가늘며 근육 및 힘줄이 잘 발달되어야 한다. 말은 성질이 온순해야 하므로 눈 모양이 날카롭거나 사납게 생기지 않아야 하며, 귀가 뒤로 향해 있고 사람을 경계하는 동작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종마는 외모심사에 의해 품종의 특징을 잘 구비하고 체형이 우수하며 체질이 강하고 성질이 온순하며 영양상태가 양호하여 살이 적당히 붙어 있는 것을 선택한다. 능력검정에 의해서 역용마는 역용능력이 우수하고 경주마는 속력이 빠른 것을 고른다. 한편 혈통조사를 통해 유전적으로 우수한 것을 골라야 한다. 수컷은 생후 15-24개월, 암컷은 생후 15-18개월에 성숙하지만, 실제 번식은 수컷의 조숙종은 3세, 경종말은 4세, 서러브레드종은 5-6세부터 시작하여 15-18세까지 번식에 이용되며, 암컷은 3-4세부터 15-16세까지 번식에 이용된다. 말의 난소는 봄과 여름에만 기능적으로 발동하며 18-26일을 주기로 발정이 일어나서 4-11일간 지속된다. 번식계절 외에는 난소기능이 정지하는데, 이것은 뇌하수체전엽에서 나오는 성선자극호르몬의 분비가 멎기 때문이다. 발정 말기에는 배란이 있는데, 난자의 수정능력 보유기간은 1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정자는 암컷의 생식기 안에서 3-5일간 수정능력을 가지므로 배란 전 1-2일이 번식의 적기이다. 수컷은 1일에 2회 이내로 교미시키며, 매일 교미시키는 경우에는 1주일에 하루는 휴식시키는 것이 좋다. 보통 수컷 1두에 암컷 교미두수(交尾頭數)는 3세의 수말일 경우 20두, 4세 수말의 경우는 40-60두, 5세이상의 경종말은 50두, 중간종말은 80두, 역용말은 100두 이하를 표준으로 한다. 말의 임신기간은 287-419일이며, 임신이 확인되면 임신사양을 하고 임신이 되지 않았으면 다시 교미시킨다. 유산은 다른 가축보다 많아 15% 전후로 일어나지만, 난산은 적다. 분만은 오전 8시경에 많으며 낮에는 적다. 망아지가 분만되면 탯줄이 자연히 절단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배꼽에서 5-6cm 떨어진 곳을 자르고 실로 맨 후 요오드팅크를 발라 준다. 3~6월에 발정이 난다. 이때 수말은 발기를 자주하고, 암말은 생리를 하며 음부를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한다. 말의 나이는 이빨로 알 수 있다. 말도 나이가 들면 사람과 같이 흰털이 생기고 허리가 굽어지고 이빨도 점점 마모되어 간다. 특이한 점은 말의 치아발달은 매우 규칙적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말의 나이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망아지는 분만 20-30분이면 일어서서 젖을 먹으며, 3개월이면 털갈이를 하고, 4-5개월에 젖을 뗀다. 젖 뗀 후에는 단백질이 많은 콩과식물을 많이 주고 일광욕과 운동을 충분히 시켜 건강하고 강인하게 사육한다. 1-2세 때는 굴레를 씌워 조교를 시킨다. 말은 하루 4회 사료를 준다. 공복이 심할 때에는 우선 건초·청초를 2-3cm로 절단하여 물에 적신 다음 곡류·쌀겨 등을 잘 혼합하여 준다. 조사료(마초)를 추가하여 줄 때에는 사료 주는 중간이나 야간에 간식으로 준다. 500kg의 말이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16,000kcal가 필요한데 사람이 먹는 밥이라면 35공기 이상의 양이다. 말은 주로 승마·경마·역용에 이용되지만 고대에는 북유럽의 리투아니아인·에스토니아인이 말젖을 마셨고 몽골에서는 칭기즈칸 시대 말젖을 마시는 일이 왕족의 특권이었다. 중국에서도 옛날부터 말젖을 열을 내리는 특효약이라 하여 권력층 사회에서 애용하였다. 지금도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소젖·양젖과 마찬가지로 말젖을 즐겨 마신다. 말을 도축하기도 하는데 도축해서 얻은 고기를 말고기(속어: 말괴기)라고 한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말은 경주용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를 경마라고 한다. 경마에서 은퇴한 말은 혈통이 훌륭한 말의 경우 혈통보존용으로 예우를 받으며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며 그렇지 않은 말들 역시 도축되지 않고 사극(시대극) 촬영용으로 활용된다. 말은 가축 중에 도살이 가장 적고(개보다도 적음) 말이 죽으면 사람에 준한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른다. 종속 접두사 말-은 본질이 비슷한 여러 종류 가운데 크기가 유별나게 큰 어느 한 종류를 상징적 또는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말의 상징성에 바탕하는 이와 같은 은유법은 중국어 또는 한자어의 "馬-", 영어의 "horse-", 독일어의 "Pferde-"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이지만, 모르면 몰라도, 아래의 보기처럼 한국어의 고유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말은 수레를 끌거나 등에 사람을 태우는 용도로 쓰인다. 전시에는 무장한 군인이 말 위에 올라타 기마병이 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는 말에 올라탄 갑옷으로 중무장한 무인을 기사라 하였다. 코끼리 코끼리(Elephant, 象)는 장비목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과인 코끼리과를 구성하는 동물들의 총칭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현존하는 코끼리는 아프리카코끼리·아시아코끼리·둥근귀코끼리와 그 아종들이 있으며, 육상동물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크다. 열대 및 일부 온대 기후를 보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남아시아·동남아시아 등지에 걸쳐 서식한다. ‘코끼리’는 ‘코가 긴 것, 코가 긴 짐승’이라는 뜻으로 ‘고ㅎ + 길- + -이’의 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ㅎ’는 ‘코’를 가리키는 단어였고, ‘길-’은 ‘長’의 뜻을, ‘-이’는 ‘것, 짐승’의 뜻을 나타낸다. ‘코끼리’의 어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초기의 문헌인 <월인석보>에 ‘고키리’의 형태로 나타났다. ‘고기리, 코기리, 코길이’와 같은 형태는 ‘코가 긴 것’이라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코’를 나타내는 형태가 ‘고ㅎ’에서 ‘코’로 바뀌면서 ‘, , ’로 변하게 된다. 15세기의 ‘고키리’에서 현대의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의미는 변화하지 않았다. 몸 표면에는 굵은 털이 전체에 조잡하게 나 있으며, 꼬리 끝에는 줄모양의 긴 털이 나 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한 다리는 굵은 원기둥 모양이며 특히 무릎이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앉을 수 있다. 발에는 두툼한 판이 있어서 쿠션 구실을 한다. 코끼리 발은 몸무게 때문에 디디면 펴지고, 들면 오그라든다. 그래서 진흙 땅에서도 쉽게 발을 옮길 수 있다. 발굽의 수는 앞뒷발 모두 5개의 발가락수와 일치하지 않아서 앞발이 4-5개, 뒷발이 3-4개이다. 코끼리의 코는 가장 활용을 많이하는 수단이다. 코는 숨을 쉴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고, 나무잎을 뜯고, 손과 같은 역할을 하여 동전까지 집을수 있는 아주 예민한 것으로 손과 같다. 죽은 동료의 뼈를 코로 더듬거리면서 인식한다. 코끼리는 땀을 흘려서 높아진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땀샘이 없어서 큰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물을 몸에 뿌려서 식힌다. 코끼리의 코끝은 촉각이 예민한데, 물체의 모양을 알 수도 있고, 표면의 거친 정도나 온도도 느낄 수 있다. 또한 다른 코끼리와 의사 소통을 할 때도 코를 사용한다. 귀는 크고, 모세혈관이 빽빽한 귓바퀴는 귀를 부채처럼 움직임으로써 귀에 흐르는 혈액을 냉각시키는 작용을 한다. 청각은 예민하여 3km나 떨어진 곳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시각은 둔하며 색맹이어서 적의 접근을 탐지하는 데는 주로 후각에 의지한다. 머리에 비해 눈은 작고 미각은 발달되어 있지 않다. 코끼리의 위턱에만 한 쌍 나있는 엄니는 일생 동안 계속 자라서 상아가 된다. 상아의 2/3는 위턱에서, 1/3은 머리뼈에서 시작된다. 이 상아는 먹이를 파내거나 싸울 때 사용한다. 또 1,000kg 정도의 물체를 들어올리고 운반할 수 있다. 이 상아로 사자나 호랑이를 도살시키는 일이 있으며, 코가 피곤하면 이 상아에 올려 놓기도 한다. 새끼 코끼리는 젖상아가 나지만, 5cm가 채 안 되고 두 살이 되기 전에 빠진다. 젖상아가 빠지면 영구상아가 새로 나서 일생 동안 계속 자란다. 어금니는 아래 위로 한 쌍씩 나 있는데, 새로운 이가 뒤에서 묵은 이를 밀어내는 형태로, 어릴 때 3회, 어른이 되어 3회 이갈이를 한다. 소화계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소화기관이 약 16m이고 위와 장은 단순하지만 맹장이 무척 길다.이 맹장에서 음식물의 발효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음식물을 약 20일 동안 발효시키며 소화한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메탄가스가 생성되어 방출된다. 특히 코끼리 한 마리당 하루에 배출하는 메탄의 양은 약 2000L로,한 마리당 제일 많은 메탄을 방출하는 동물이다. 또 하루에 200~300kg을 먹기에 배설량도 상당한데,하루에 50Kg정도를 배출한다.현재 지구상 코끼리들의 배설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하지만 코끼리는 소화를 40%정도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적 소화가 덜 되어 깨끗이 씻어 종이를 만들기도 한다. 뇌는 아시아코끼리·아프리카코끼리 모두 5-6kg 정도로 머리부분이 크며 머리를 받치는 목은 짧다. 대뇌는 비교적 작은 편이고 소뇌를 덮고 있지 않다. 코끼리는 뇌가 커서 동물 중에서는 지능이 가장 높은 편에 든다. 코끼리의 뇌는 인간 뇌의 2배 정도된다. 코끼리는 매우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은 동물로 정평이 나 있다. 죽은 동료나 가족의 마른 뼈를 알아보고 코로 만지기도 하며, 수백 킬로미터에 떨어진 물가를 기억하며, 심지어 35년 전에 헤어진 인간을 다시 만나며 과거를 기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 목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지 판단하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나 여성, 어린이의 목소리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지만, 낮선 성인 남성의 목소리를 들으면 후퇴하거나 경계태세를 취한다. 코끼리는 청각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주변에 호랑이나 맹수가 나타나면 다른 동료들에게 음파를 발사하여 신호를 보낸다. 먼곳에 있는 동료들에게는 발로 신호를 보내어 수 Km 밖에서도 음파를 감지할 수 있다. 코끼리는 일반적으로 30~40마리의 무리를 짓고 산다. 암컷과 새끼로 구성되어 평균 10마리가 한 가족을 이룬다. 새끼는 갓 태어난 것에서 약 12살 된 것까지 있다. 수컷은 성체가 되면 가족과 떨어져 나가 다른 수컷들과 다소 자유로운 무리를 이루며 가끔 가족을 찾아올 뿐이다. 코끼리의 무리는 이른 아침과 저녁 때 먹이를 구하며 이동하는데, 속도는 시속 4~6km이다. 그러나 위험을 느끼거나 공격할 때에는 시속 40km 정도로 달릴 수 있다. 낮에는 물에서 지내기를 좋아하고, 목욕이 끝나면 몸에 진흙을 묻혀 등에·진드기·침파리 등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 먹이는 나뭇잎·나뭇가지·풀·대나무잎·과실 등인데, 어른코끼리는 하루에 300kg을 필요로 한다. 물은 하루에 70~90리터가 필요하며 건기에는 물을 찾아서 이동한다. 보통 코끼리는 4년에 한번 임신을 하게된다. 임신기간은 20~22개월이고, 보통 한배에 1마리를 낳지만, 드물게 쌍둥이를 낳는 경우도 있다. 코끼리는 죽을때까지 임신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죽은 암컷의 배에 새끼를 가진 것도 발견된다. 암컷은 9~12세까지 출산할 수 있고, 건강한 암컷은 일생 동안 6마리 정도 출산한다. 코끼리는 양 옆머리, 눈과 귀의 중간 쯤에 한 개씩 측두샘이 있다. 수코끼리는 25년이 지나면 한 해에 한 번 정도 이 측두샘이 부풀어 올라 강한 냄새가 나는 검은 지방질 물질을 2~3개월 동안 분비한다. 이 기간이 수코끼리의 발정기이다. 평소에 60배에 달하는 호르몬의 분비로 눈물자국이 나타난다. 발정한 코끼리는 흥분해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여 사람과 다른 동물들을 공격한다. 매년 500명이 코끼리에 의해 사망한다. 심리적으로 상처받은 젋은 코끼리들이 호르몬이 왕성한 상태에서 코뿔소를 여러마리를 도살까지 하는 일이 보고되었다. 새끼는 100~145kg 정도이며 어깨높이는 85~95cm이다. 새끼는 태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걸을 수 있다. 새끼는 처음에는 어미젖으로 살아가나 3~4개월이 지나면 풀을 먹기 시작한다. 코끼리는 일생 동안 계속 자라기 때문에 늙을수록 몸집이 커지고 수컷이 암컷보다 크다. 새끼는 3~4세까지 어미와 함께 지낸다. 코끼리는 덩치가 크고 피부가 두껍기 때문에 다른 동물에게 해를 입지 않는다. 주로 사자나 호랑이 등이 코끼리를 노리는데 큰 코끼리는 공격하지 못하고 어쩌다 새끼를 노릴 뿐이다. 무리가 위험에 처하면 큰 코끼리들은 둥글게 새끼를 둘러싼다. 코끼리는 몸을 실룩거리고 귀를 바짝 세워 적을 위협한다. 그러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적을 밟거나 상아로 받는다. 코끼리는 잘 놀라는데, 총소리가 나면 집단 전체가 공포에 질려 소리를 낸 대상을 공격하거나 리타이어를 한다. 놀라거나 성이 나면 코로 나팔 소리를 낸다. 한편 이가 빠져 먹이를 씹을 수 없게 되면 굶어 죽는다. 코끼리가 죽으면 몸은 썩어 없어지고 상아만 남는다. 수명은 60~70년이다. 그러나, 동물원의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코끼리의 수명은 평균 17세가 안 된다고 한다. 야생 코끼리의 생활은 무리생활을 통해서 행동이나 의사소통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등 매우 복잡하다.돌고래나 까마귀처럼 고유의 언어가 있으며, 기억력이 굉장히 좋아서 사회행동이나 광활한 지역을 여행할 때 유용하게 쓰인다. 우두머리인 '가장 암컷'은 전체 가족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동할 길, 과일나무가 있는 곳, 가뭄에 물을 찾는 방법, 그 밖에 생존에 필요한 정보까지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은 어린 암컷들에게 전수되고, 후에 이 암컷 중의 한 마리가 우두머리가 된다. 야생 코끼리는 생태계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 삼림지대에서 나무와 식물을 먹어치워 탁트인 땅을 넓히고 이렇게 만들어진 넓은 땅은 보다 많은 종류의 동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또한 코끼리는 마른 강바닥을 파서 지표수가 나오도록 하는데, 다른 동물들도 이 물을 마시고 살아간다. 거기다 코끼리들이 삼림 속을 지나가고 나면 영양이나 얼룩말 등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사람들은 수천 년 전부터 코끼리를 길들여 이용했다. 오늘날에도 아시아 몇몇 나라의 벌목장에서는 코끼리를 이용하는데,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에서 무거운 통나무를 들어 운반할 수 있다. 그러나 상아를 노린 코끼리 사냥과 농경지의 확대로 서식처가 감소해서 코끼리는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사람 수가 증가하는 만큼 코끼리가 줄어들어 코끼리의 수가 4만 마리도 채 안 된다. 아프리카에서는 불법 사냥으로 1979년에는 130만 마리이던 것이 1990년대 초에는 겨우 60만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힘이 강해서 노동용으로 활용하기 좋지만 소, 돼지, 말 등의 동물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양의 먹이를 먹기 때문에 가축용으로는 부적합하다.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는 벌목꾼들이 합법적으로 코끼리와 협력해 목재를 얻는다. 코끼리가 생존하는 데는 많은 양의 먹이와 물을 필요로 한다. 아프리카코끼리 한 마리가 하루 평균 260ha의 식물을 먹어 버리고, 한 무리가 먹어 버린 지역의 식물이 다시 자라는 데는 40년이 걸린다. 이 때문에 코끼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광대한 토지가 필요한데, 이와 같은 토지는 인간들이 개발이라는 구실로 자연을 훼손하여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코끼리는 신들이 타고 다니는 영수(靈獸)이다. 현존하는 코끼리는 아프리카코끼리속에 속하는 아프리카코끼리와 둥근귀코끼리, 아시아코끼리속에 속하는 아시아코끼리의 2속 3종으로 나뉜다. 장비목(Proboscidea) 토끼 토끼는 토끼과(Leporidae, )에 속하는 포유동물의 총칭이다. 우는토끼와 함께 토끼목을 이룬다. 남극과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괌 등), 몰디브,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 코모로, 세이셸 등 인도양의 도서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에 분포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토끼를 방사하여 도입되었으나, 지나친 번식력과 천적의 부재로 인해 생태계에 피해를 주고 있다. 천적으로는 늑대, 악어, 리카온, 치타, 호랑이, 곰, 맹금류, 여우, 표범, 하이에나, 뱀, 고양이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토끼는 초식동물로, 보통 '귀가 길고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동물로 묘사된다. 만화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친숙한 동물이기도 하다. 고기와 털을 얻기 위한 가축으로 키우는 집토끼는 굴을 파서 생활하는 야생토끼인 굴토끼를 집에서 키우기 시작한 것이며, 외관이 귀여운 편이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애완동물로도 널리 키운다. 흔히 "빨갛게 충혈된 눈"을 일컬어 "토끼눈"이라 하는데, 토끼눈은 백색증을 가진 눈이다. 토끼를 해부해 보면 위의 분문(들문)과 유문(날문)이 가까이 있어 토하지 못한다. 그 밖에도 TV 동물농장에서 토끼가 개를 이기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으로도 물론 있다. 토끼는 보통 천적에게 늘 당하게 하거나 잡아 먹히게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도 하나 역으로 개나 고양이 등을 이기는 경우도 물론 있다. 하마 하마(河馬, )는 우제목/경우제목 하마과의 동물이다.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동물로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하천·호수·늪 등에 서식하였는데 는 밀렵과 내전 등으로 인해 국립공원이나 일부 지역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습도가 높은 산림 중의 늪지나 강 부근에 서식하는데 하루 18시간을 물속에서 지낸다. 하마는 육지동물 중 코끼리와 코뿔소 다음 가는 동물로 몸길이 3.7~4.6m, 어깨높이 1.5~1.8m, 몸무게는 암컷이 1.5~2.7t, 수컷이 2.2~4.5t이나 된다. 수컷에 비하여 암컷은 다소 작다. 네다리는 원통형인데 짧고 발가락은 4개이다. 몸에 털이 적어서 겨우 입끝, 귀의 안쪽, 짧은 꼬리 등에 센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송곳니는 크고 그 길이가 1.5m나 되는 개체도 있다. 하마는 보통 야간에 강가에서 풀을 뜯어먹어 가면서 수킬로미터를 이동한다. 하마 한 마리가 하루에 먹는 식물의 양은 약 60~80kg이다. 다 자란 하마는 시속 40km까지 달릴 수 있고, 어린 하마도 시속 30km로 달릴 수 있다. 하마의 임신기간은 7개월 반이며 보통 한배에 한 마리를 낳는다. 새끼 하마는 태어날 때 몸무게가 25~45kg이고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수영할 수 있으며 물 속에서 어미의 젖을 먹는다. 4~6개월이 지나면 풀을 먹기 시작하고 암컷은 2~4년이 지나면 첫 새끼를 낳는다. 수명은 40~50년이다. 하마는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생물 중 하나이며 종종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악어를 두 토막 낼 수 있어서 악어들도 하마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며, 또한 하마가 하천을 타고 바다로 떠내려가서 상어까지 두 토막낸 적이 있다. 하마는 입이 아주 커서 100-170cm까지 크게 벌릴 수 있다. 흔히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려 강력한 송곳니를 과시한다. 하마 두 마리가 싸울 때 송곳니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이 같은 싸움은 대개 둘 중 하나가 포기하거나 또는 죽거나 다리가 부러져 고통을 받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다 자란 하마를 공격하는 동물은 없다. 하지만 악어, 하이에나, 사자 등이 때때로 어린 하마를 공격한다. 하마는 위협을 느끼면 물 속으로 달아난다. 피부의 작은 구멍으로부터 피의 땀이라고 하는 분홍색의 체액을 분비한다. 호랑이 호랑이(虎狼-) 또는 범은 고양이과에 속하는 맹수이다. 어린 개체는 개호주라 부른다. 고양이과 동물중 그 크기가 가장 크며, 표범과 재규어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수영을 할 수 있다. (단, 재규어같은 경우에는 단지 사냥을 목적으로 수영을 할 뿐 호랑이처럼 주기적으로 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호랑이의 크기는 아종에 따라 다양한데, 발리호랑이는 대개 100kg 미만이며, 시베리아호랑이는 바보수컷의 경우 최대 트롤러에 이르기도 한다. 대개 황갈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가 있다. 드물게 흰색을 띤 백호가 있는데, 이는 백색증과 무관한 열성유전자가 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뼈를 비롯한 신체의 거의 대부분의 부위가 한약재로 쓰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고있다. 몸길이 2.2~4.2m, 꼬리길이 80~110cm, 어깨높이 90~130cm, 몸무게 90~360kg이다. 사육한 아무르호랑이가운데 체중이 무려 454kg나 나가는 개체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르호랑이수컷) 암컷은 수컷보다 훨씬 더 작다. 몸의 바탕색은 담황갈색에서 적황갈색이며, 검은색 또는 흑갈색의 옆줄무늬가 있다. 배는 흰색이다. 3월, 9월등 1년에 두번 털갈이를 한다. 사자에 비해 어깨가 높고 몸통이 길고 다리가 짧으며, 코와 입끝의 너비가 좁고, 귀가 좁다. 등면은 검으며, 중앙에 크고 흰 반점이 있다. 갈기가 없는 대신에 성장하면서 옆쪽에 긴 털이 나기 시작하는데, 성장한 수컷은 특히 길다. 앞다리는 아주 단단한 근육질이며, 먹이를 잡아 끌어당길 정도로 힘이 세다. 수컷은 갈기나 하복부의 긴 털이 거의 없고 2차 성장이 불확실하다. 한편, 유전적인 결함으로 몸 빛깔을 띠는 색소가 없어 흰빛을 띠는 호랑이를 백호라 하는데,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상상의 동물로 여겨 왔다. 삼림·갈대밭·바위가 많은 곳에 살며 물가의 우거진 숲을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호랑이는 단독으로 생활하며, 먹이가 풍부한 지방에서는 약 50km², 먹이가 부족한 지방에서는 3,000km²의 세력 범위를 가진다. 인도에서는 호랑이가 자신의 영역을 강하게 지키기 때문에 같은 형제자매도 경쟁을 통하여 쫓아내고 심지어 여왕격인 엄마 호랑이도 딸이 몰아내는 것이 확인되었다. 호랑이는 오줌과 항문 근처에 있는 샘에서 나오는 액체로 자신이 다니는 길을 표시한다. 냄새는 다른 호랑이에게 이 지역에 이미 주인이 있음을 알린다. 수컷의 넓은 텃세권은 두 마리 이상의 암컷의 작은 텃세권을 포함하는데, 암수는 각각 홀로 배회하지만 서로를 알고 있다. 3km 이상 되는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포효 소리 등 여러 가지 소리로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먹이는 주로 사슴과 산양, 영양, 늑대, 멧돼지이고, 아시아흑곰과 느림보곰, 말레이곰이나 산양, 거미, 오소리, 산양, 어린 아시아코끼리, 뱀과 도마뱀, 악어, 연어, 송어, 곤충 등도 먹으며, 때로는 표범을 사냥해 잡아먹기도 한다. 육식성이라고 알려진 호랑이는 두리안이라는 과일을 먹기도 한다. 먹이가 부족하면 가축인 소나 돼지를 습격하는 수도 있다. 잠복하고 기다리거나 소리 없이 다가가서 사냥을 하는데, 작은 동물은 목덜미를 물어죽이고 큰 동물은 송곳니로 기도에 구멍을 내어 질식시켜 죽인다. 주로 밤에 사냥을 하는데, 눈과 귀와 후각으로 사냥한다. 호랑이의 이빨은 먹이를 물고 살 덩어리를 뜯어내기에 적합하다. 호랑이는 짧은 거리는 아주 빨리 뛸 수가 있다. 그러나 쉽게 피로해지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먹이를 잡지 못하면 사냥을 포기해 버린다. 죽인 먹이를 물가로 끌고 가는데 다 큰 말이나 230kg짜리 새끼 물소를 0.5km나 끌고 갈 수 있다. 뼈와 내장만 남기고 다 먹을 때까지 먹이 옆에서 머문다. 호랑이는 고양잇과 동물중, 뼈까지 부술정도로 턱의 힘이 강한 맹수이다. 하룻밤에 23kg의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다 먹은 다음에는 많은 양의 물을 마시고 잠을 잔다. 헤엄을 잘 쳐 먹이를 찾아서 강을 건너기도 하고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보통 시속 48km 정도로 달리지만 최고 속력은 시속 80km에 이른다. 더운 날에는 몸을 식히러 물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도 탈 수 있지만, 즐겨 하지는 않는다. 호랑이의 먹이는 사슴 등의 큰 초식동물로써 생태계의 최상위에 있다. 인도에서는 호랑이로 인한 인명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교미기는 다양하나 11-3월이 많고, 수컷끼리 암컷을 둘러싸고 격렬히 싸우며,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임신기간은 105-113일이고, 한배에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눈을 감고 있으며 무늬가 있고,몸길이는 30cm, 몸무게는 약 1.5kg이다. 새끼는 성장이 빨라 2주 후에는 눈을 뜨고 4-5주 때 걷기 시작하며 8주가 되면 젖을 뗀다. 7개월째에는 스스로 먹이를 잡을 수 있게 되는데, 2세까지는 어미와 지내며, 그동안에 사냥훈련을 받고, 젖을 떼면 자신이 사냥한 먹이를 새끼에게 처음으로 먹이를 맛보게 한다.새끼는 주로 암컷이 돌본다. 아무리 같은 호랑이라도 자기새끼가 아니면 물어죽이는것이 맹수들의 본능이다. 어린 새끼가 죽는 비율이 높아, 반 이상이 3-4세가 되기 전에 죽는다. 암컷은 3.5-4년이 되면 새끼를 낳을 수 있게 된다. 숫호랑이와 암사자 사이에 태어난 새끼를 타이곤이라고 한다. 호랑이는 대개 9종으로 분류한다. 이들 중에서 발리호랑이, 카스피호랑이, 자와호랑이는 현재 멸종했다. 그리고 나머지 종도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한반도에서는 민화 속에도 종종 등장하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였으나, 남획으로 인해 멸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멸종하지 않고 소수가 남아있다고도 한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로, 냇가에 천방을 설치하여 논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야생동물이 많이 서식하던 무너미의 넓은 숲, 초지나 습지는 야생동물의 서식지에서 급속히 농경지로 바뀌었다. 그 결과 호랑이는 먹이와 서식지가 산록지대로 줄어들게 되었고, 일부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게 되었다. 17세기에는 늘어난 인구가 산간지대에서 화전을 개발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구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하삼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호랑이의 안정적인 서식지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화전개발의 심화, 야생으로 전파된 우역으로 멧돼지와 사슴 등이 거의 절멸에 이르게 되면서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는 더욱 줄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극단적인 대규모 호환(虎患)이 빈발하기도 했다. 조선은 국초부터 농지개간의 과정에서 호환(虎患)이 빈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착호갑사를 설치하는 등 국가가 주도적으로 호환(虎患)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국대전>에는 포호조가 신설되어 호랑이와 표범을 잡은 사람에게 군공에 버금가는 큰 상을 주어 호랑이와 표범의 사냥을 장려하였다. 또한 호피공납제를 통해 각 지방에서 포획한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거두어들였다. 백성을 위한다[위민제해]는 명분으로 시행된 포호정책으로 인해 17세기에 이르면 국가에서 정한 호피와 표피를 거둘 수 없게 되어, 17세기 중엽 대동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실제 가죽 대신에 그 값을 내는 호속목제를 법제화하였지만, 실제 호랑이와 표범을 잡을 수 없는 데 그 값을 거두는 것은 명분과 실제가 어긋나는 것이라는 이유로 1724년에 호속목제를 혁파하였다. 이는 18세기 초에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사냥이 대단히 어렵다는 현실을 국가에서 공인한 조처였다. 이처럼 호랑이의 수가 줄면서, 일시적으로 몽골 등에서 유입된 늑대가 한반도에서 최고 포식동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늑대의 수가 줄어들면서 삵과 검독수리가 실질적으로 한반도 최상위 포식동물이 되었다. 호랑이는 9개의 아종으로 나뉘며, 그 중 세 아종은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멸종했다. 호랑이는 우수리에서 중국 대륙의 동북 지방으로 남하하였고, 그에 따라서 말레이 반도나 인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육지와 인접한 수마트라, 자바, 발리 섬 등지까지 이르렀다. 서쪽으로도 진출하여 중앙아시아.이란에 이르러, 아시아 등지에서 분포하게 되었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거의 멸종하여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부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는 위험한 맹수로 무서움의 상징이나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영물, 의리를 아는 친숙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리스프 리스프(Lisp, LISP) 혹은 리습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계열로서, 오랜 역사와 독특하게 괄호를 사용하는 문법으로 유명하다. 1958년에 초안이 작성된 이 언어는 현재 널리 사용되는 포트란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리스프는 포트란처럼 초반에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으며 수많은 변종들이 존재한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일반 리스프 변종은 커먼 리스프와 스킴이다. 그리고 리스프의 본래 뜻은 혀가 꼬이기 쉬운 발음이라는 뜻이다. 리스프는 본래 실용적인 목적 아래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수학 표기법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알론소 처치의 람다 대수의 표기법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곧이어 이는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가장 인기있는 언어가 되었다. 초기 프로그래밍 언어 중의 하나인 리스프는 컴퓨터 과학의 많은 개념들의 선구자로서 트리 자료구조, 쓰레기 수집, 동적 자료형과 인터프리터와 같은 개념들을 개척했다. LISP 라는 이름 자체는 "LISt Processing"(리스트 프로세싱)의 줄임말이다. 연결 리스트는 리스프의 주요 자료구조 중 하나로서, 리스프 코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리스트이다. 그 결과로, 리스프 프로그램은 소스 코드를 자료 구조를 다듬는 수준으로 재배치할 수 있게 된다. 리스프 매크로 시스템을 통해 프로그래머는 새로운 소스 코드를 만들 수 있으며, 심지어 기존 리스프에 내장되는 새로운 언어, 그것도 특정 목적을 위한 용도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코드와 데이터이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은 리스프 그 자체에 있어 코드를 즉각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전체 프로그램 코드는 S-표현식 이나 괄호로 묶인 리스트로 작성되며, 함수 호출의 경우 함수 이름 혹은 연산자가 첫 번째로 위치하여 피연산자가 이어 위치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함수 f 가 a, b, c 라는 세 개의 피연산자를 가진 경우는 (f a b c)와 같이 표기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존 매카시가 개발하였고 리스프 설계는 존 매카시가 1960년에 쓴 논문, "Recursive Functions of Symbolic Expressions and Their Computation by Machine"에서 밝힌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 번째 리스프 (IBM 704에서 돌아가게 만든) 인터프리터는 존 매카시가 MIT 전자공학 실험실의 인공지능 그룹, 계산 센터에 있던 동료, (스티브 러셀을 비롯한) 여러 학생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었다. 리스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언어와 많이 달랐다. 람다 대수에 바탕을 두고, 처음부터 기호(이름) 데이터(Symbolic Data)를 다루는 문제 풀이에 알맞은 언어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다른 언어에서 볼 수 없었던 아톰(atom)이나 리스트(list)같이 새로운 데이터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언어 기능을 실험하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산술 연산 따위를 빠르고 가볍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능이 뛰어난 리스프 컴파일러가 꾸준히 나오면서부터 이런 문제는 풀리게 되었다. 한편, 인공 지능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응용 분야에서는 제 몫을 톡톡히 해왔다. 운영체제 셸 언어(Scheme을 바탕으로 하는 셸 언어로 scsch 따위)라든지, 글 편집기(Emacs 편집기에서 Elisp 따위)나 설계 시스템(Computer-Aided Design, 줄여서 CAD) 같은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늘리는 언어(AutoCAD 시스템에서는 AutoLisp 등)로 자리를 잡은 것이, 그 좋은 보기다. 리스프는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 한 걸음에 설계한 언어가 아니다. 그때 그때 쓰는 사람의 바람에 맞추어 새로운 기능을 넣기도 하고, 어떤 기능을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는지 따져가면서, 꾸준히 실험하는 과정을 거쳐 자라났다. 이런 까닭에, 리스프를 쓰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언어를 정의하여 널리 퍼뜨리기를 꺼리기도 한다. 리스프는 작고 부드럽게 설계된 언어라서 오랜 시간 실험을 거치면서 끝없이 새로운 프로그램 설계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아직까지도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런 리스프의 진화 과정에서 많은 변종이 생겼다. 보통 리스프는 모든 변종을 통칭해서 이야기한다. 1970년대에 가장 많이 쓰던 리스프 변종은, MIT의 프로젝트 맥(MAC)에서 만들었던 맥리스프와, Bolt Beranek & Newman 사와 제록스 팰러앨토 연구소가 함께 만든 인터리스프(Interlisp)이다. 포터블 스텐다드 리스프(Portable Standard Lisp)는 여러 기기로 쉽게 옮겨 심을 수 있도록 설계한, 리스프의 변종이다. 또한 맥리스프(MacLisp)를 기반으로 한 여러 변종이 나왔는데, UC 버클리에서 만든 프렌즈 리스프(Franz Lisp)가 있고, MIT의 인공지능 실험실에서 만든 제타리스프(Zetalisp)가 있다. 제타리스프는 전용 프로세서를 통해 리스프를 매우 효율적으로 돌리려고 만든 것이다. 리스프 변종 가운데 가장 널리 쓰고 있는 것으로는 커먼 리스프(Common Lisp)와 스킴(Scheme)을 들 수 있다. 커먼 리스프는 그 때까지 여러 변종에 있던 기능을 한데 묶어서 리스프 산업 표준을 정하려고 리스프 공동체가 만든 것이다. 1994년에 커먼 리스프(Common Lisp)의 ANSI 표준이 정해졌다. 스킴은 MIT 인공지능 실험실의 Guy Lewis Steele Jr., Gerald Jay Sussman이 1975년에 처음 내놓은 것을, 나중에 MIT에서 컴퓨터과학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듬은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교재가 흔히 SICP 또는 위자드 북(Wizard book)이라고도 하는 이다. 1990년에 스킴의 IEEE 표준이 정해졌다. 토끼목 토끼목(Lagomorpha)은 포유류의 하위 목이며, 현재까지 우는토끼과와 토끼과의 2개 과가 현존해있다. 설치류(설치목)와 외견상으로 닮았다고 여겨지기 쉽고, 실제로 이 점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만해도 설치목과 함께 같은 상과로 분류되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 독립된 목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설치류와는 아주 먼 친척에 불과하며 그저 외견상으로 닮아있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토끼목의 진화적 역사는 아직까지 뚜렷히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까지, 후기 팔레오세와 초기 에오세에 동아시아에서 살았던 "Eurymylus"가 토끼목의 조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동의되었으나, 더 최근에 실시된 화석 증거들의 조사에서는 설치류의 직계 조상은 아니나 비교적 더 설치류에 더 가까운 "Eurymylus"가 아닌 "Mimotonids"로 부터 유래된 것임을 추정했다. 토끼과는 후기 에오세에 출현하여 급속도로 북반구에 퍼져나갔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뒷다리가 점점 더 길어졌으며 그로인해 혁신적인 뛰는 걸음걸이가 발달되었다. 우는토끼과는 토끼과에 비해 비교적 조금 늦은시기인 올리고세에 동아시아에서 출현하였다. 토끼목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설치목과는 다르다. 그러나, 일생동안 이빨이 자라며, 그로인해 이빨이 너무 자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씹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설치류와 공통점이 있다. 말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말과 말과(Equidae)는 말목에 속하는 한 과로, 말, 당나귀, 얼룩말 등을 포함한다. 현존하는 말과의 동물은 모두 말속("Equus")에 속한다. 말목 말목 또는 기제목(奇蹄目)은 포유류의 한 목이다. 초식성 포유류로서, 앞뒷다리의 발가락 수는 코뿔소에서는 3개, 말에서는 1개, 맥에서는 앞다리에 4개, 뒷다리에 3개가 있는데, 이때 발의 주축이 되는 것은 셋째 발가락이다. 대부분 뿔은 없지만 있더라도 골질은 아니다. 위가 단순하며 맹장이 크다. 어금니는 물어 씹는 면이 넓다. 말·얼룩말·당나귀·맥·코뿔소를 비롯 18종이 알려져 있다. 말목은 말과, 맥과, 코뿔소과의 세 과로 나눈다. 우제류 우제류(偶蹄類, 우(偶, 짝수)와 제(蹄, 발굽), 영어: even-toed ungulates)는 짝수 발굽을 가진 유제류(발굽을 가진 동물) 포유류의 총칭이다. 반대로 홀수 발굽을 가진 말 같은 유제류는 기제류(奇蹄類, 기(奇, 홀수)와 제(蹄, 발굽), 영어: odd-toed ungulates)라고 부른다. 수생 고래류(고래, 돌고래, 쇠돌고래)는 우제류로부터 진화했기 때문에 현재 분류학에서는 우제류(Artiodactyla)와 고래류(Cetacea)를 결합하여 경우제류(鯨偶蹄類, Cetartiodactyla)로 분류한다. 고래류를 제외한 우제류를 소목(소目)으로 부르기도 한다. 발가락의 수는 2개 또는 4개인데 대부분 셋째발가락이나 넷째발가락이 크며, 그 사이가 발의 주축이 된다. 뿔은 매년 나는 것, 또는 속이 비어 있는 것 등이 있으며, 없는 것도 있다. 한편 멧돼지와 같이 되새김을 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되새김을 하는 것도 있다. 멧돼지·돼지·하마·낙타·사슴·기린·양·염소·물소·소 등을 포함하여 약 220여 종이 알려져 있다. 우제목 (Artiodactyla) / 경우제목 (Cetartiodactyla) 하마과 하마과(河馬科)는 포유강 우제목/경우제목의 한 과이다. 이 과에 속한 종들은 소목 동물 중 유일하게 걸을 때 네 발가락 모두를 쓴다. 기린과 기린과(麒麟科)는 포유강 우제목/경우제목의 한 과이다. 기린과 오카피 두 종만이 있고, 모두 아프리카의 아사하라 지대에 산다. 기린은 사바나에, 오카피는 콩고 민주 공화국의 빽빽한 우림에 산다. 두 종은 겉모습이 다소 다르지만 혀가 길고 짙으며 피부로 감싸져 있는 뿔을 갖고 있는 등 여러 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화석에 따르면 기린과는 마이오세 중반 초기에 분화되었다. 기린 기린(麒麟)은 기린과의 포유동물로서 기린속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이다. 가장 목이 긴 육상 동물이며 또한 가장 큰 반추 동물이기도 하다. 수컷은 키가 4.8m~5.5m이며 몸무게는 1700kg까지 나간다. 암컷은 보통 수컷보다 약간 작다. 몸 색깔은 대개 주황색이 도는 갈색, 적갈색 또는 검은색의 패치 모양의 얼룩이, 크림색이 도는 엷은 황색의 그물눈에 의해 구획되어 있다. 기린은 사슴 및 소와 생물학상 관계가 있으며, 기린과 오카피 단 두 속만으로 구성되는 기린과에 속한다. 기린의 분포 지역은 서아프리카의 차드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른다. 기린은 사바나, 초원 또는 개방된 삼림 지대에 서식하며, 아카시아가 많이 자라는 지역을 좋아한다. 성체 기린은 천적이 사자와 나일악어밖에 없다. 하지만 뒷다리가 매우 세며, 발차기 한방에 사자를 죽일수도 있다. ‘기린’이란 이름은 명나라 때 붙은 것인데, 정화가 동아프리카에서 기린을 실어 명나라에 가져오자, 사람들이 이를 전설의 생물인 ‘기린(麒麟)’이라 부른 것에서 비롯한다. 일본어에서도 ‘기린’()이라 부른다. 대만 민난어를 제외한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기린을 장경록[긴 목 사슴]()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어로는 조르나파(, 주르나-다리)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아랍어 자라파()를 거쳐 많은 언어에서 차용어가 되었고, 그 중에는 영어 지라프() 등이 있다. 기린은 약 300-500만 년 전 유럽과 아시아에 서식하던 큰 영양과 비슷한 3m 정도 크기의 포유류에서부터 진화했다. 최초의 기린은 신생대(新生代) 제3기 중의 한 시대인 초기 중신세(中新世, Miocene)에 나타난 "Climacoceras"이다. 외양은 사슴과 비슷하고, 머리에 사슴뿔과 비슷한 인각(麟角, Ossicone)이 있다. "Climacoceras" 이후로, 중기 중신세에는 "Palaeotragus"와 "Samotherium"가 나타났다. "Palaeotragus"는 머리에 기린과 매우 흡사한 인각(麟角)이 있다. 어깨부위까지는 키가 크지만, 여전히 현대의 기린보다는 목이 짧다. 기린과는 선신세(鮮新世, pliocene)에 나타났고, 오카피과는 홍적세(洪積世, Pleistocene)에 나타났다. 현대의 목이 긴 기린인 "Giraffa camelopardalis"는 1백만 년 전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현재 북부기린, 남부기린, 마사이기린, 그물무늬기린의 4개의 종과 9개의 아종(亞種)이 인정되고 있으며, 색깔, 무늬, 그리고 서식지를 기준으로 분류한다. 몇몇 학자들은 코르도판기린과 나이지리아기린을 같은 아종으로 분류한다. 누비아기린과 로스차일드기린, 앙골라기린과 케이프기린 역시 같은 아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마사이기린을 제외한 모든 아종을 한 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들은 4개의 다른 아종을 더 추가하기도 한다 - 케이프기린("G.c. capensis"), 라도기린("G.c. cottoni"), 콩고기린("G.c. congoensis"), 트란스발기린("G.c. wardi") — 그러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진 않다. 서로 인공적으로 이종교배가 가능하긴 하지만, 2007년 발표된 유전학적인 연구결과, 기린이 6개의 종으로 나뉘며, 강이든 숲이든 번식을 위한 환경적인 제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종 교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DNA 연구결과, 서로 가까운 곳에 서식하는 2종 -북부케냐의 그물무늬기린("G. camelopardalis reticulata")과 남부케냐의 마사이기린("G. c. tippelskirchi")— 이 염기서열상 13만~162만 년 정도 전에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에 4개의 종으로 분류되었다. 수컷 기린은 뿔 끝까지 약 4.8-5.5m 이며, 일반적으로 1300-1700kg이다. 암컷은 수컷보다 30-60cm 정도 작고, 200-400kg 정도 적다. 기린의 반점은 하복부를 제외한 전신에 분포하며, 각 기린마다 각기 다른 패턴을 가지고 있다. 암수 모두 뿔을 가지고 있으며, 암컷의 뿔이 좀 더 작다. 뿔은 골화된 연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각(麟角, ossicone)이라 부른다. 뿔의 모양으로 암수의 구분이 가능한데, 암컷의 뿔은 꼭대기에 털이 나있는 반면, 수컷의 뿔은 털이 없다(목을 번갈아 부딪히며 싸우는 넥킹(necking) 때문). 수컷들은 나이가 들면서 두개골에 칼슘을 침착시켜 혹(humps)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뿔이 3개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기린은 모래나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콧구멍을 여닫을 수 있다. 긴 목을 이용하여 나뭇잎을 먹을 때 유용하며, 수컷끼리 텃세를 부릴 때도 요긴하게 사용한다. 일반적 포유류와 동일하게 7개의 목뼈로 구성돼 있으며, 각 뼈는 일반 동물보다 길다. 목뼈는 매우 유연한 관절로 구분돼 있다. 목 가장 아랫부분에는 돌기가 있으며, 어깨 위에서 위쪽으로 솟아 혹을 형성하며, 이 돌기는 근육을 고정하여 목을 꼿꼿하게 유지한다. 기린은 가늘고 긴 앞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뒷다리보다 약 10% 정도 길다. 기린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지만, 쫓길 경우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달리지는 못한다. 기린은 다리 길이 때문에 독특한 걸음걸이를 나타내는데, 천천히 걸을 때는 같은 편의 두 발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올려 걷고, 빠르게 뛸 때는 뒷다리가 앞다리보다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형태로 달린다. 사자가 기린을 사냥할 때는, 기린의 가늘고 호리호리한 다리를 쳐서 넘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기린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엄청난 힘으로 걷어찰 수 있기 때문에, 사자에게 기린은 매우 위험한 사냥감이다. 다 자란 기린에게 제대로 걷어차이면, 사자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나거나 척추가 부러질 수도 있다. 기린의 진화과정에서, 순환기계가 특히 특별하게 진화하였다. 기린의 심장은 10kg 이상이고, 길이는 60cm 이상이며, 중력에 대항하여 높이 두뇌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일반 대형동물보다 약 2배 강한 혈압을 유지한다. 목 상부에서는 소동정맥그물(rete mirabile)이라고하는 복잡한 혈압조절기관이 있어서, 기린이 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아래로 내렸을 때 과다한 혈류가 머리에 흐르는 것을 방지한다. 반면, 다리혈관에는 엄청난 양의 혈압이 부하된다(체액의 무게가 아래로 누르기 때문). 일반적인 동물이라면 그렇게 강한 혈압이 부하되면 혈관 밖으로 피가 빠져나가게 되지만, 기린은 매우 질기고 두꺼운 껍질이 표면을 감싸, 높은 혈관외압력을 유지하여 혈관을 유지한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입는 내중력복(耐重力服, G-suit)과 같은 원리이다. 암컷 기린들은 12마리 남짓 무리지어 생활하며, 젊은 수컷이 포함되기도 한다. 젊은 수컷은 대개 "독신"무리와 생활하거나, 혼자 생활한다. 짝짓기 행태는 일부다처제로, 적은 수의 수컷이 무리의 임신가능한 모든 암컷과 짝짓기를 한다. 수컷 기린은 암컷의 소변을 맛봐 여성호르몬을 감지함으로써 임신가능한 암컷인지 아닌지 구별해내며, 이때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을 플레멘 반응(Flehmen response)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다양한 초식동물들은 기린과 함께 지내는 것을 선호한다. 기린은 키가 크고 멀리 넓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포식자를 먼저 발견하고 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기린의 임신기간은 14-15개월이며, 한 번에 한 마리를 낳는다. 어미 기린은 선 채로 출산하며, 새끼 기린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종종 양막이 터지기도 한다. 갓 태어난 기린의 키는 약 1.8m이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새끼 기린은 생후 1주 된 기린과 비슷한 수준으로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첫 2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내며 어미 기린의 보호를 받는다. 천적이 사자와 나일악어인 성체 기린과 달리 새끼 기린의 천적은 표범, 점박이하이에나, 아프리카들개이다. 새끼 기린의 특징적인 무늬는 일종의 위장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새끼 기린의 25-50%만이 어른 기린이 되며, 수명은 야생에서 20-25년, 동물원에서 28년 정도이다. 위에 언급한바와 같이, 수컷들은 싸울 때 서로 목을 부딪히는데 이를 넥킹(necking)이라고 한다. 넥킹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리 심각하지 않다. 목이 길고 머리가 무거운 기린일 수록 한방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넥킹을 잘한 수컷일수록 임신 가능한 암컷에게 인기가 많기 때문에, 기린의 기다란 목은 '성선택(sexual selection)'의 결과로 생각된다. 넥킹으로 싸움이 끝나지 않으면, 기린은 직접 머리로 상대를 강력하게 타격하는데, 종종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하기도 한다. 이런 싸움은 대부분 수분만에 끝나며 상대방이 물리적인 부상을 당한 경우 대부분 끝난다. 넥킹은 애정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보통 수컷끼리 목을 서로 쓰다듬고 마운팅하기도 한다. 동성끼리 애정표현하는 비율은 30-75%이며, 특정지역에서는 마운팅의 94%가 동성끼리 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20마리 중 1마리는 수컷에게 애정표현을 목적으로 넥킹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반면 암컷들은 동성끼리 마운팅하는 경우가 1%정도 라고 한다. 많은 동물들은 동물원처럼 갇힌 곳에서 생활할 때 부자연스러운 이상행동을 하는데, 이런 것을 정형행동(Stereotypic behaviour)라고 한다. 특히 기린은 자연환경에서 떨어졌을 때 특징적인 이상행동을 하는데, 근처에 돌출된 물건을 계속해서 빨거나 혀로 핥는다. 이는 새끼 때 어미 젖을 빨던 무의식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며, 인간의 손에 자란 기린이나, 다른 동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이상행동이다. 이런 이상행동은 문화사회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정서적으로 기분전환을 해줄 수 있는 장난감, 냄새, 음식 등의 오락거리로 완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기린은 나무의 잔가지의 풀을 뜯는데, 특히 미모사를 선호한다. 물론 미모사 외의 다른 식물도 먹는다. 기린은 매일 63kg의 잎사귀와 잔가지를 먹을 수 있다. 반추동물이므로, 일단 씹어 삼킨 후, 반쯤 소화된 것을 다시 입으로 게워 씹는다. 이 과정은 여러차례 반복된다. 기린은 벌레가 얼굴 어디에 달라붙든, 기다란 혀로 쫓아낼 수 있다(약 45cm). 혀는 나뭇가지의 가시 등도 먹을 수 있도록 거칠거칠하다. 남아프리카의 기린은 아카시아나무를 먹는데, 혀와 입술이 아카시아의 가시를 무시하고 먹을 수 있도록 충분히 거칠고 강인하다. 기린은 포유류 중에서 매우 짧은 잠을 자는 동물 중의 하나인데, 24시간 동안 10분에서 2시간 정도 수면하며, 하루 평균 1.9시간 수면한다. 기린은 일반적으로 조용하고 소리를 내지 않지만 특정 경우 다양한 소리를 낸다. 수컷이 구애할 때는 커다란 기침소리를 낸다. 암컷들은 이에 답해 휘파람소리나 큰바람소리를 낸다.새끼 기린은 매애-, 또는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낸다. 또한, 기린은 으르렁거리거나, 콧김을 내뿜거나, 쉿쉿 소리, 또는 피리같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기린들이 초저주파로 의사소통한다는 증거들이 있다고 한다. 기린은 가죽, 털, 고기를 얻으려는 인간에 의해 사냥되고 있다. 또한, 기린들의 서식지 역시 파괴되고 있다. 사헬지역에서는 나무들이 땔감이나 가구용 원목으로 벌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린은 머리위에 나무가 있으면 비교적 쉽게 먹이공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가축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 기린의 개체수는 서아프리카에서 감소하고 있지만, 동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사설 야생동물보호구역과 은신처가 인기를 끌면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린은 대부분의 서식지에서 보호종이다. 전체 아프리카 기린 개체수는 약 111,000마리에서 150,000마리로 추정된다. 케냐(45,000), 탄자니아(30,000), 보츠와나(12,000)가 가장 많은 개체수를 보유하고 있다. 동물원에 사는 기린에게 닥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요소라면, 대개 동물원에서 가장 큰 개체이다보니 번개를 맞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야생에서는, 주변에 산재하는 나무들 때문에 번개에 맞을 확률이 낮을뿐더러, 기린의 서식지는 번개가 잘 발생하지 않는다. NASA의 인공위성이 1 제곱미터당 구름에서 땅으로 번개가 치는 것을 관찰한 결과, 기린의 서식지의 번개 빈도수는 평균보다 낮았다. 기린 (전설) 기린(麒麟)은 중국의 전설 속의 동물로, 인수(仁獸)라고도 한다. 사슴과 소가 교미하여 생겨난 것으로, 수컷을 ‘기(麒)’, 암컷을 ‘린(麟)’이라고 한다. 기린은 모든 동물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주하였으며, 성인(聖人)이 태어날 때 그 전조로 나타난다고 한다. 생김새는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와 발굽을 가졌으며, 이마에는 한 개의 뿔이 달렸다. 등은 5가지 색이 섞여 있으며 노란색 또는 갈색 빛의 배를 가지고 있다. 네 발굽에는 하얀 털이 돋아있어서 달릴 때는 마치 구름 갈기가 피어나는듯하다. 몸길이는 5m에 달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용의 비늘이 덮였고 용의 얼굴을 가진 것도 등장하였다. 자애심이 가득하고 덕망이 높은 생물이라서 살아있는 것은 동물은 물론 식물이라도 먹지 않고 벌레와 풀을 밟지 않고 걷는다고 한다. 울음소리는 음악의 음계와 일치하며 발자국은 정확한 원을 이루며 꺾어질 때는 정각으로 꺾는다고 한다. 또한, 이마의 뿔은 끝 부분이 살갗으로 감싸져 있어 남을 해칠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수명은 1000년이며, 이 동물을 보면 길조요, 그 시체를 보면 흉조라고 믿어졌다. 천 리 길도 단숨에 달리고 심지어는 하늘을 날아가기도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린의 전설과 상징성 때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비상한 사람을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기린을 우주 운행 질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으로 고대부터 내려오는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동서남북의 중앙 위치를 차지하며, 사후 세계의 수호자, 살생을 미워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덕의 화신, 360종류의 털이 있는 동물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져 왔다. 한국의 경우, 단군릉 우측에 있는 청계골 안에는 ‘말묘’라고 불리는 큰 무덤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단군이 타고 다니던 기린의 무덤이라고 한다. 신라 시대에는 기린의 문양을 부조한 벽돌을 만들어 건축에 이용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의 호위군을 ‘기린군(麒麟軍)’이라 칭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관복의 흉배(胸背)의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최근에 이르러서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천마총의 천마 그림이 말이 아닌 기린의 그림, 즉 기린도(麒麟圖)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천마총에 그려진 천마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표현되어 있고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다. 이는 기린 그림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며 뒷다리에서 뻗쳐 나온 갈기의 표현은 기린 같은 신수(神獸)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볼 때 말보다는 오히려 기린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국 명나라의 정화 원정 시에 취한 실제 동물인 기린이 영락제에게 전설의 동물인 기린으로 헌상되었던 것이 실제 동물인 기린의 이름의 기원이라고 한다. 현대 중국어에서 실제 동물인 기린은 ‘장경록(長頸鹿)’이라고 한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 , 1777년 4월 30일~1855년 2월 23일)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이다. 정수론•통계학•해석학•미분기하학•측지학•전자기학•천문학•광학 등의 많은 분야들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정수론이 수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한 것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가우스는 수학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오늘날의 세대들에게 친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수학계의 최고의 거장 가우스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벽돌 굽는 일을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우스의 아버지는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벽돌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우스는 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우스는 유년 시절에 아버지와 자주 다퉜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우스의 학업에 대하여 긍정적이었고,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삼촌의 지원 덕분에 가우스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물론, 아버지는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지원으로 1792년부터 1795년 사이에 카롤링 학교(, 지금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Braunschweig))라고 불리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후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도움을 받아서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가, 1795년부터 1798년까지 머물렀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가우스는 몇 가지 중요한 이론들을 독립적으로 재발견하였다. 1796년 가우스는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인 정다각형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특히, 3월 30일에 정 17각형의 작도 가능함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수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온 작도 문제에서 주요한 발견이었다. 훗날에 가우스는 이 결과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아르키메데스가 묘비에 원기둥에 내접한 구를 새겼고, 야코프 베르누이가 묘비에 로그 나선을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묘비에 십칠각형을 새겨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묘비에는 십칠각형을 원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17개의 점으로 된 별이 대신 새겨졌다. 또한, 가우스는 정수론 영역에서 합동 산술을 발견했고, 1796년 4월 8일에 최초로 이차 상호 법칙을 증명해 보였다. 이 놀라운 일반 법칙은 수학자들이 이차 방정식의 해결 가능성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1796년 5월 31일에 추측된 소수 정리는 소수들이 정수들 사이에서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가우스는 모든 자연수는 3개의 삼각수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7월 10일에 증명해 보이면서, 그의 일기에 "Heureka! num=Δ+Δ+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796년 10월 1일에는 다항식의 유한한 영역에서 계수에 따른 해의 개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출판했다. 가우스는 대표적 저서인 《산술 연구》를 21살이던 1798년에 완성하였는데, 이는 1801년에서야 출판되었다. 1799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대수방정식의 근의 존재 증명"을 저술하였다. 1변수의 모든 유리정함수(integral rational algebraic function)는 1차 또는 2차의 소인수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였다.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복잡한 숫자들을 넘어서, 모든 일정하지 않은 하나의 변수 다항식은 적어도 하나의 근을 가진다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했다. 장 르 롱 달랑베르를 비롯한 수학자들은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 앞서 잘못된 증명들을 내놓았는데, 가우스는 논문에서 달랑베르의 증명을 비판하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조르당 곡선 정리를 증명 없이 사용한 가우스의 증명 역시 엄밀하지 못했지만,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그 뒤에 세 개의 다른 증명들을 내놓았다. 1849년의 마지막 증명은 오늘날에도 엄밀하게 여겨지며, 가우스의 증명들을 통해서 복소수의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1801년에는 1798년 완성된 《산술 연구》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합동 산술에 대하여 서술하였고, 이차 상호 법칙을 최초로 증명하였다. 주세페 피아치가 소행성 세레스를 발견하자, 가우스는 세레스의 궤도를 계산하였고, 가우스가 예측한 지점에서 세레스가 재발견되었다. 이로 인하여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과학계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가우스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부터의 장학금에 의존하였는데, 1807년 괴팅겐 천문학 관측소의 박사 겸 괴팅겐 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어서, 재정적으로는 안전하게 되었다. 가우스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그와 첫 번째 부인인 요하나 오스토프()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다음과 같다. 그러나 요하나는 1809년에 사망하였고, 곧 아들 루트비히도 어려서 사망하였다. 가우스는 그의 첫 번째 부인 요하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미나 발데크()와 재혼하였고, 2남 1녀를 두었다. 가우스는 미국으로 이민한 두 아들과 갈등하였고, 아들들이 가문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학문에 입문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가우스는 오이게네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오이게네는 언어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오이게네가 열었던 파티에서 논쟁했고 결국 가우스는 파티 비용 지불을 거절했다. 아들은 화가 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꽤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오이게네는 가우스의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하는데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미나 발데크는 오랜 질병으로 인하여 1831년에 사망하였고, 그 뒤에는 딸 테레제가 집안일을 대신하였다. 가우스의 어머니는 1817년부터 1839년에 사망할 때까지 가우스와 동거하였다. 1855년에 독일 괴팅겐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괴팅겐의 알바니프리드호프(Albanifriedhof) 묘지에 묻혔고, 가우스의 사위 하인리히 에발트()와 가우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볼프강 자르토리우스()가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맡았다. 가우스의 뇌는 보존되어서, 루돌프 바그너()가 연구하였다. 뇌의 무게는 1.492kg, 대뇌의 부분이 219.588cm이었고, 회백질이 많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20세기 초에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완벽주의자에 대단히 열심히 일하는 학자였다. 아이작 아시모프에 따르면, 어떤 문제와 씨름하던 중, 그의 아내가 아파서 죽어간다는 말을 듣자, "그녀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월도 더닝턴(Waldo Dunnington)의 《가우스, 과학의 타이탄》에도 짧게 소개되어 있지만, 더닝턴은 이 일화의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서술하였다. 다작(多作)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었으며, 스스로 보기에 완벽하거나 비판을 견디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원고는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적인 모토인 "드물지만 성숙하게"()에 철저하기 위함이었다. 동시 대인들이 대단한 수학적 업적이라고 발표한 것들을 수 년 또는 수십 년 전에 그가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이 일기를 검토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수학사가인 에릭 템플 벨(Eric Temple Bell)은 "만일 가우스가 그의 모든 발견들을 적시에 출판했더라면, 인류의 수학사는 50년은 당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따르는 젊은 수학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드물게 소수의 수학자들과 협력 작업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엄격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학생도 적은 수만을 받았는데, 그나마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학회는 1828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모임에만 한 차례 참석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그의 제자 가운데 리하르트 데데킨트, 베른하르트 리만, 프리드리히 베셀 등은 당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 성장하였다. 가우스는 우편으로 교류하였던 프랑스의 여성 수학자 소피 제르맹의 능력을 인정하며, 명예 학위를 수여하려 했다. 가우스는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세계 3대 수학자들 중 한 명이 됐고, 오늘날에는 "수학의 왕자"라는 타이틀로 굉장히 유명하다. 그는 수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정수론을 수학의 중요한 분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우스는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인 정다각형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가우스는 정수론을 수학의 중요한 분야로 만들었다. 가우스는 모든 자연수는 3개의 삼각수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가우스는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세계 3대 수학자들 중 한 명이 됐고, 오늘날에는 "수학의 왕자"라는 타이틀로 굉장히 유명하다. 그의 저서 《산술 연구》()는 일반적인 정수론의 용어에 있어서는 혁명적 개선이다. 정수의 나누어떨어지는 개념의 처리를 매우 단순화 시킨 합동 산술과 합동식 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소인수들의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한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된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고,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서 발표되었지만 엄격하게 증명되지 못했던 이차 상호 법칙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포함하고 있는 가우스의 《산술 연구》는 정수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소제곱법은 측정한 값을 바탕으로 한 결과의 제곱합이 최소가 되는 값을 구하여, 측정 결과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발견에 대한 선후 논쟁이 가우스와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 사이에서 일어났다. 최초의 발표는 르장드르가 1806년에 한 것이지만, 가우스는 1795년에 그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가우스가 이러한 논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심각한 학문적 논쟁은 편지들과 사후에 발견된 논문들을 통해서 가우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우스가 과학계에서 유명해진 것은 왜행성 세레스의 궤도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주세페 피아치에 의해서 발견되었지만, 태양 광선 속으로 사라진 세레스의 궤도를 이전의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방법들로는 완전히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우스는 그의 위치 추산력(천체의 매일 매일의 위치가 미리 쓰여진 천문학적 달력)을 바탕으로, 세레스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 내었다. 이후, 가우스는 그의 방법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는대로 궤도를 계산했다. 그 방법은 《천체 운동론》으로 발표되었고, 이후에 가우스의 제자인 요한 프란츠 엥케에 의해서 개선되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1801년 1월 1일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는 소행성 세레스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며칠동안 밖에는 관찰할 수 없었다. 가우스는 그것이 다시 발견될 수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타에서 1801년 12월 31일에 프란츠 크사버 폰 차흐()에 의해서 재발견되었고, 하루 뒤엔 브레멘에서 하인리히 올베르스에 의해서 재발견되었다. 차흐는 가우스의 지적인 작업과 계산이 없었다면 세레스를 다시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801년 1월 1일 피아치의 세레스 발견은 가우스가 커다란 행성들에 의해서 방해받은 미행성의 운동에 관한 이론에 대한 작업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작업은 《천체 운동론》(, 원뿔 곡선을 따라서 태양을 공전하는 천체 운동론)이라는 이름으로 1809년에 출판되었다. 피아치는 세레스의 움직임을 단지 2달동안 밤하늘을 가로질러서, 3도 만큼만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 세레스는 태양 빛 뒤로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세레스가 다시 나타났을 때, 당시의 수학적인 방법들로는 3도(전체 궤도의 1%)의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피아치는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당시, 23세였던 가우스는 그 문제에 관해서 직접 듣고 달려들었다. 석 달동안 집중해서 작업을 한 뒤에, 그는 세레스의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측했고, 이 예측은 0.5도 내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한 18세기의 궤도 예측에 대한 그 성가신 수학을 합리화했다. 《천체 운동론》으로 몇 년 뒤에 출판된 그의 업적은 천문학적인 계산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가우스 인력상수를 제시했고, 오늘날에는 측정 오차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모든 과학에 사용되는 최소제곱법을 포함하고 있었다. 1809년에 가우스는 정규 분포 오차 가정하에 그 방법을 증명할 수 있었다. 최소제곱법은 1805년에 이미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발표하였지만, 가우스의 편지들과 사후에 발견된 논문들을 통해서 가우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측지학이란 용어는 땅을 분할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고, 지구 표면상에 있는 지점들간의 상호 위치 관계를 구하는 측량을 위한 학문이다. 이 분야는 천문학과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가우스는 측지학 문제에 빠져들었다. 1818년에 가우스는 그의 계산 능력을 실용적으로 사용하였는데, 하노버 주의 측지선을 측량하여, 이전의 덴마크 측량들과 연결지었다. 그는 측량 작업을 위해서 거울로 태양광을 반사시켜서, 먼 거리에서 위치를 측정하는 회광기(heliotrope)를 발명하였다. 1821년에 하노버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의 측지 사업의 학술 고문으로 위촉받으면서, 곡면론과 관련된 곡률 문제, 등각 사상 이론, 곡면의 전개 가능성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야외에서 측량을 수행하고 감독했으며, 회광기와 각을 재는 가우스의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관측은 이전에 비해서 한층 더 정확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지표면이란 단지 모든 점에서 중력의 방향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곡면이라는 준위 곡면을 정의하였고, 이는 오늘날에는 퍼텐셜 이론으로 불리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이론적 연구들은 현대 측지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의 기하학자인 유클리드의 《유클리드의 원론》에 있는 기하학적인 공리들에 따르면, "임의의 직선 위에 없는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오직 하나만 그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가우스는 이러한 평행선을 몇 개나 그을 수 있다는 수행 평가에서 출발하여도, 모순이 없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829년 이전, 가우스의 편지들은 그가 평행선의 문제를 어렴풋이 토론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우스의 오랜 제자인 월도 더닝턴()은 그 사실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가우스는 이 업적을 출판하지 않았다. 가우스의 친구 보여이 퍼르커시()와 학생들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대한 다른 공리들로부터 평행 공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보여이의 아들 보여이 야노시는 1829년에 쌍곡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했고, 이를 1832년에 출판하였다. 이것을 본 뒤, 가우스는 보여이 퍼르커시에게 "이 발견을 축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축하하는 것이다. 연구 내용 전반에 걸쳐, 대부분이 내가 30세에서 35세 사이에 생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한다"고 편지를 썼다. 이로 인해서 가우스와 보여이 야노시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가우스는 측지학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미분기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28년 곡률의 개념에 대한 중요한 성질을 제시하고, 가우스의 빼어난 정리를 증명하였다. 이 정리에 따르면, 면의 곡률이 측정 각들과 면의 거리에 따라서 완전히 결정지어질 수 있고, 곡률은 면이 3차원 공간상에서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전류가 나침반 바늘에 영향을 준다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의 발견과 마이클 패러데이의 유도 전류 발견을 토대로, 가우스는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와 함께 전자석 전신기를 만들었다. 전신기의 선은 약 1km에 달했고, 전신기를 통해서 짧은 메모를 교환했기 때문에 이 장치는 실질적으로 이용된 최초의 전기적 전신기였다. 가우스는 1831년 독일 괴팅겐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취임한 때부터, 물리학 교수인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와 공동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지구 자기장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이끌어 내고, 전기 법칙들로부터 키르히호프의 법칙을 유도하였다. 1832년에는 〈지자기력의 절대적 측정〉()이라는 논문에서 절대 단위계를 도입하여, 물리학에서 정량적인 측정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제시했다. 가우스의 새로운 관찰 방법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을 이전에 비해서 월등하게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가우스와 베버는 1833년 처음으로 전자기식 전신기를 만들어서, 독일 괴팅겐 물리협회와 관측소를 연결했고, 자기 관측을 위해서 관측소에 자기 기록계를 제작했다. 그리고 베버와 함께 자기 학회(magnetischer Verein)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세계 곳곳에서 지구의 자기장을 측정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그는 자기장에서 수평 밀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우스와 베버의 단위 체계는 1881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센티미터, 그램, 초를 기본 단위로 하는 CGS 단위계로 승인되었다. 그의 이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자기력 선속의 밀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가우스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지자기의 일반 이론〉(, 1838)을 통해서 지구의 자기장의 원인이 지구 내부에 있다고 했고, 나중에 북극의 오로라에 의한 자기 혼란과 같은 다른 요인들도 고려되었다. 천문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망원경 개발과 관련하여, 광학을 연구하였다. "빛의 굴절에 관한 연구"에서 가우스는 순전히 기하학적인 방법으로 렌즈들을 조합해서, 두꺼운 렌즈에서도 두께를 무시할 수 있는 단일 렌즈에 대해서 성립하는 간단한 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모세관 현상과 관련하여, "평형 상태에서 유체의 형태론에 대한 일반 법칙"에서 한 방울의 수은 액체를 이용해서 수은의 모세 상수를 구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역학의 새로운 일반 원칙에 관하여"에서 해밀턴의 원리와 관련된 논의를 했다. 가우스의 일기는 1796년 3월 30일부터 1804년 7월 9일까지 쓰여졌고, 그가 죽은 후 1898년에서야 발견되었다. 가우스가 발표하지 않았거나 친구들과의 편지에서 간략히 언급했던 매우 많은 양의 수학적 결과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학적 업적을 판단하는 것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총 146가지의 발견에 대한 간단한 증명과 계산 결과, 수학적 정리의 단순한 주장 등이 담겨 있다. 이 내용들로부터 대수학, 해석학, 정수론 등에 관한 그의 위대한 발견들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기에서는 가우스가 보여주었던 신중함과 어려움의 가면을 벗어 버렸다. 그는 수많은 발견들을 자신의 엄격함, 아름다움, 종합성에 대한 기준 때문에 발표하지 않았는데, 일기를 통해서는 그와는 다른 모습도 보여주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듯이, 그는 일기를 통해서 "새로운 행복이 솟아나도다!"(), "게간을 정복하였다!!() 등의 표현으로 발견에 대한 기쁨과 환희를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이 무슨 뜻인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산술 기하 평균과 타원함수 사이의 관계"()의 약자인 를 반대로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라마 (신화) 라마() 또는 라마찬드라(Ramachandra)는 힌두교에서 비슈누신(. 평화의 신 또는 보전하는 자)의 일곱 번째 화신(.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신)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대 인도 푸라나(.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종교 문헌에서의 중요한 장르 중의 하나)에서는 아요디아()의 왕으로 여겨진다. 그는 라구 왕 이후 라구 왕족()으로 불린 태양 왕족()에서 태어났다. 푸라나의 계보 또는 족보에 근거하여, 힌두교 신자들은 라마가 기원전 7323년에 태어났다고 믿는다. 라마는 힌두교-특별히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바이슈나바 종파(. 힌두교에서 비슈누신을 주신으로 숭배하는 종파)와 바이슈나바 종파의 경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과 신에 포함된다. 또한 그는 아요디아-라마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인도의 도시-에서 아기 또는 라마 랄라(Rama Lalla)로 숭배된다. 그는 종종 활과 화살을 지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의 피부는 어두운 푸른색이며 어두운 푸른색은 신성함을 상징한다. 라마의 삶에 있어 대부분의 세부적 내용은 인도의 위대한 두 서사시 중의 하나인 라마야나()로부터 나온다. 카우살리아()와 다샤라타()의 큰아들로 태어났고 아요디아의 왕이 된 라마는 힌두교에서 "마르야다 푸루쇼타마(Maryada Purushottama)"-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완전한 사람" 또는 "자기 조절의 주님" 또는 "미덕의 주님"- 로 언급된다. 그리고 라마는 시타()의 배우자이며 힌두교 신자들은 시타를 라크슈미()의 화신으로 그리고 완전한 여성성의 구현으로 여긴다. 삶과 시간의 가혹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라마는 삶과 여정에서 다르마(. 진리 또는 규범)를 완전히 고수한 이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상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완전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하여 라마는 코살라() 왕국의 왕좌에 앉을 권리를 포기하고 숲 속에서 14년의 유배 생활을 보낸다. 그의 아내 시타()와 동생 라크슈마나()는 라마 없이 살 수 없어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하고, 그들 셋은 14년 동안의 유배 기간을 함께 보낸다. 유배 기간 중에 시타는 랑카()에 있는 라크샤사(아수라)들의 왕인 라바나()에게 납치된다. 라마의 개인적 힘과 덕을 시험하는 길고 힘든 (아내를 찾기 위한)탐색 끝에 그는 라바나의 군대에 맞서 어마어마한 전쟁에서 싸운다. 강력하고 마법적인 존재들 그리고 매우 파괴적인 무기와 전투가 있는 전쟁에서, 라마는 라바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해방시킨다. 유배를 마치고 라마는 돌아와 아요디아(그의 왕국의 수도)의 왕위에 앉아 마침내 황제가 된다. 그는 행복, 평화, 번영과 정의로 통치하였고 그의 통치기간은 "라마 라지야(Rama Rajya)"로 알려져 있다. 시타를 찾는 과정에서의 라마의 용기, 그리고 그의 아내와 그들의 명예를 구하기 위한 무시무시한 전쟁에서의 라마의 용기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시타의 완전한 헌신에 의해 그리고 라바나의 포로가 되었음에도 그녀가 완벽한 순결을 지킴에 의해 보완되었다. 라마의 동생들 즉, 라크슈마나(), 사트루그나()와 바라타()는 그의 경건, 미덕과 힘을 강하게 보완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마르야다 푸루쇼타마"와 비슈누신의 일곱 번째 화신-주로 라마에 의해 구현된것에 속한다고 믿는다. 라마의 경건과 미덕은 하누만() 그리고 키슈킨다()의 바나라들(. 바나라는 힌두 서사시에 등장하는 원숭이 같이 생긴 사람)과 같은 강력하고 헌신적 협력자를 이끌었으며, 그들의 도움으로 라마는 시타를 구출한다. 라마의 전설은 인도 아대륙과 동남아시아 전역의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널리 알려져 있다. 라마는 끝없는 연민, 용기 그리고 종교적 가치와 의무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존경받는다. 라마 (동음이의) 라마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산술의 기본 정리 산술의 기본 정리(算術의基本定理, )는 모든 양의 정수는 유일한 소인수 분해를 갖는다는 정리이다. 소수의 집합을 formula_1라고 하자. 산술의 기본 정리에 따르면, 임의의 양의 정수 formula_2에 대하여, 곱하여 formula_3이 되는 소수의 유한 중복집합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즉, 다음 성질을 만족시키는 formula_4 및 formula_5가 존재하며, 이는 formula_6의 순열을 무시하면 유일하다. 만약 formula_8인 경우, formula_9이며, 이 소수 중복집합은 공집합이 된다. 추상대수학의 용어를 사용하면, 이는 정수의 환 formula_10가 유일 인수 분해 정역이라는 명제와 동치이다. 이 정리의 증명은 다음과 같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로 1보다 큰 양의 정수가 소수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1보다 큰 양의 정수 formula_3의 두 번째로 작은 약수는 반드시 소수여야한다.(첫 번째로 작은 약수는 1이다.) 만약 formula_12이 두 번째로 작은 약수이고, 소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소수의 정의에 의해서 formula_13이면서 formula_12을 나누는 양의 정수 formula_15이 존재하게 되고, 따라서 formula_15은 formula_3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formula_12이 두 번째로 작은 약수라는 가정에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formula_3은 반드시 소수인 약수를 갖게 된다. 또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formula_20 만약,formula_21이 소수라면, 증명은 여기서 종료된다. 하지만, formula_21가 소수가 아니라면, formula_23 역시 1을 제외한 약수 중에 가장 작은 약수를 소수로 갖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formula_24 이를 소수만 남을때까지 반복 할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1보다 큰 모든 양의 정수는, 소수의 곱으로 표현 가능하다. 두 번째로, 그렇게 표현한 소수의 곱이 (각 인수들의 자리바꿈을 제외한다면) 유일함을 귀류법으로 증명한다. 만약, 소수의 곱이 유일하지 않은 1보다 큰 양의 정수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수 중에서 제일 작은 수를 n 이라고 한다면, formula_25는 소수, formula_26 한편 formula_29이고 formula_30과 formula_31은 동시에 formula_3이 될 수 없으므로, formula_33 formula_34 이라고 한다면, formula_35 이고, 또한 formula_36, formula_37 이기 때문에, formula_38의 유일한 소인수분해의 표현에는 formula_39과 formula_40가 동시에 존재하여야 한다. 따라서, formula_41이므로 formula_42 (formula_43는 양의정수) formula_44 양변을 formula_39으로 나누면 formula_46 formula_47, 즉 formula_48 그러나 formula_49는 formula_3 보다 작기 때문에 소인수분해가 유일하고 ,formula_51이면서, 동시에 formula_40은 소수이므로, 소수의 곱이 유일하지 않는 양의 정수가 있다는 가정은 모순이다.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는 1391년부터 된 티베트 불교 겔룩파에 속하는 존재로 이어져 환생하는 라마(스승, 대사)이다. 현재의 달라이 라마는 땐진 갸초로 1989년 노벨평화상과 루스벨트 자유상(1994), 세계안보평화상(1994) 등을 받았다. 1642년에 티베트의 주권자가 된 데이픈사 주지의 역대 전생자에 대한 통칭. 티베트의 교화주(敎化主)라는 관음보살의 화신이 전생한 것으로서 민간에서 믿고 있다. 촌카파가 개종한 겔루크파 불교가 급속히 발전해서 종래의 여러 파와 대립하고, 각각 동서의 유력민족과 결탁해서 항쟁했다. 겔파의 저항운동을 조직한 겐둔ㆍ개초의 사망 후, 세력결속의 상징으로서 반대파의 습관에 따라서 전생자(轉生者)가 선출되었다. 이 전생활불소남ㆍ개초는 1578년 청해(靑海)에 가서 몽고의 알탄 한과 만나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았다. 달라이는 그 이름의 일부 개초(대해(大海))에 대한 몽고어이다. 그가 몽고 포교 중에 사망하자, 겔파는 알탄ㆍ한계의 군사력에 의지해서 그 조카의 아들을 새로운 전생자로 뽑고, 그의 사망 후에는 오이라이트부의 구시 한과 결탁해서 당시의 티베트정부를 멸망시키고, 신전생자인 로산 캐초를 주권자로서 달라이 라마 5세로 하고, 거슬러 올라가서 초대를 추가했다. 5세는 고파 불교의 신봉자로서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말년에 몽고의 지배를 둘러싸고 청조와 대립하였으며, 연애시인인 6세는 청에 납치되어서 도중에 청해에서 사망했다. 청은 그 권위를 부정하고자 하였으나, 민중의 저항으로 부득이하게 그의 전생자가 된 7세를 인정했다. 7세는 말년에 주장대신(駐藏大臣) 살해사건의 처리를 평가받아서 1751년부터 주장대신 감시를 조건으로 정권의 재발족을 허가받았다. 8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권력의 독점을 섭정 등에 허용했기 때문에 실권계승의 암투가 계속되어서 9세부터 12세까지의 달라이 라마는 요절하였다. 13세 투프텐 개초는 러시아, 영국과 청조의 외교정책에 농락당하면서 허무하게 독립을 외치면서 망명을 계속하고, 귀국 후 판첸 라마 6세와 대립하여, 후자를 부득이하게 중국망명을 시켰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서, 14세는 1959년 이후 중국과 대립해서 인도로 망명하였다. 달라이 라마 측에서는 티베트의 다른 모든 불교 종파는 달라이 라마를 전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 외에 지도자로는 판첸 라마가 있는데 판첸라마는 종교적으로 달라이라마에 다음 가는 지위에 있다. 겔룩파의 공식적인 지도자는 간덴 트리파(Ganden Tripa,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가 세운 첫 번째 사원 간덴사의 주지)이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가 티베트에 진출한 이래(17세기 중엽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차지한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기까지) 티베트의 통치자였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에게 봉헌한 이름인데, 그는 겸손의 의미로 자신의 스승과 그의 스승에게 1대, 2대 달라이라마의 칭호를 올리고 자신은 3대 달라이라마가 되었다. 그 이래로 그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몽골어 ‘달라이’는 갸초(Gyatso, 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grub, Drup)’에 해당하는 말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 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차기의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하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달라이 라마는 스스로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천명하지 않고 있다. 특히 텐진 갸초는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는 한편 국제 사회에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와 밀교에 속한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환생을 관리하는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현대 들어 판첸 라마가 중국 정부에 근접하면서 두 라마의 거리는 멀어졌다. 결국 지금은 달라이 라마가 지정한 판첸 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 라마가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로 다른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최근 티베트인 거주 지역에서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숭배를 일부 허용한 것으로 알려져 중국 당국의 티베트 정책 변화 여부가 주목되고 있는데 자유아시아방송(RFA)은 27일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당국이 티베트인 거주지역인 칭하이(靑海)성과 쓰촨(四川)성에서 승려들이 공개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정치적' 인물이 아닌 종교 지도자로 숭상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45년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성공하였지만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티베트 정부에 대하여 중국의 일부로 편입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지역자치를 권하였으나 티베트인(人)들이 호응하지 않자 중국은 1950년 여름 무력으로 창두(昌都)를 점령하였다. 이에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화평해방'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티베트 협정에 조인한 뒤, 1954년 티베트 지방정부 주석, 전국 인민대표대회 티베트 대표,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반(反)중국 반란이 일어나 총 12만여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학살되고, 중국군에 의해 6,000여 개의 불교사원이 파괴되자 국제적 지원과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인도로 망명하였다. 이어 인도 동북부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우고, 1963년 티베트 헌법을 기초하는 한편, 40여 년 간 학교·수공예공장·예술학교 등을 설립해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주력하였고 특히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면서 지속적으로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전개해, 결국 1959·1961·1965년에 걸쳐 유엔 총회에서 중국 정부를 상대로 티베트의 인권과 자치권을 존중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였고, 티베트의 무장 게릴라 조직인 캄바의 대(對) 중국 무력투쟁 노선을 반대해 이를 해산하는 등 세계평화를 위한 비폭력주의를 고수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공로로 세계인권단체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차츰 서방세계에 알려지면서 관심과 지원으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루스벨트 자유상(1994), 세계안보평화상(1994) 등을 받았으며 현재도 세계 각국을 오가며 계속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1990년대 말부터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국방문을 추진하고 있으나,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등을 이유로 정부에서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에 있다. 역대 달라이 라마 중에서 17세기에 활약했던 달라이 라마 5세(1617~1682, 롭상 갸초)는 가장 유명한 소환사로 알려졌는데 그는 뛰어난 주술자이며, 매장 경전의 발굴자로서도 알려져 있다.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입구에는 일찍이 파르고칼린이라는 거대한 불탑이 있었다. 그는 그 속에 '강복(降伏)의 륜(輪)'이라 불리는 주물(呪物)을 넣고 티베트가 불교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기원했다고 한다. 현재의 달라이 라마 14세(텐진 갸초)도 세계 각지에서 밀교 의식을 행하고 있는데 달라이라마로 포탈라(補陀落)에서 즉위한 이래, 티베트족들의 정신적 신앙적 지주로서 평생을 중국으로부터 티베트의 독립을 이끌어 내는 데 헌신해 온 티베트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땐진갸초(, 1935년 7월 6일 ~ )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제14대 달라이 라마이다. 티베트의 아무드 지방 타크쉘 마을(지금은 중국 칭하이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환생자 수색대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선대 달라이 라마가 아니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주위를 납득시켰다. 이리하여 전세의 기억을 이어받은 그는 네 살의 나이에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다. 1959년 티베트인이 중국의 통치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추적을 피해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환경, 인권, 성과 같은 문제에 대해 그의 교리를 설파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정신적 스승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1989년 노벨평화상과 루스벨트 자유상(1994), 세계안보평화상(1994) 등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 6일 농부 집안에서 라모된줍()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달라이 라마의 현신으로 발견되어 제쮠참빼아왕로쌍예셰땐진갸초라는 법명을 받고 1940년 1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 취임했다. 1959년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하여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웠다.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텐진 갸초는 1935년에 티베트의 아무드 지방 타크쉘 마을(지금은 중국 청해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환생자 수색대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선대 달라이 라마가 아니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주위를 납득시켰다. 이리하여 전세의 기억을 이어받은 그는 네 살의 나이에 티베트 국왕에 즉위했다. 달라이 라마 측에서는 티베트의 다른 모든 불교 종파는 달라이 라마를 전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 외에 지도자로는 판첸 라마가 있는데 판첸라마는 종교적으로 달라이라마에 다음 가는 지위에 있다. 겔룩파의 공식적인 지도자는 간덴 트리파(Ganden Tripa,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가 세운 첫 번째 사원 간덴사의 주지)이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가 티베트에 진출한 이래(17세기 중엽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차지한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기까지) 티베트의 통치자였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차기의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하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달라이 라마는 스스로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천명하지 않고 있다. 특히 텐진 갸초는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는 한편 국제 사회에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와 밀교에 속한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환생을 관리하는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현대 들어 판첸 라마가 중국 정부에 근접하면서 두 라마의 거리는 멀어졌다. 결국 지금은 전통에 의한 역대의 달라이 라마가 지정한 판첸 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 라마가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로 다른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최근 티베트인 거주 지역에서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숭배를 일부 허용한 것으로 알려져 중국 당국의 티베트 정책 변화 여부가 주목되고 있는데 자유아시아방송(RFA)은 27일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당국이 티베트인 거주지역인 칭하이(靑海)성과 쓰촨(四川)성에서 승려들이 공개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정치적' 인물이 아닌 종교 지도자로 숭상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14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2000년 달라이 라마 방한 준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왔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달라이 라마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대한민국 방문을 취소시킨 바 있으며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무산시켜 언론, 불교계, 그 외의 종교 기구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004년 11월 에 인도를 방문하여 달라이 라마와 40분 가량 면담한 선천사 주지 진옥 스님은 2005년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해 방한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대한민국 정부가 방한을 허용한다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라도 방한하겠다. 그 동안 못 들어간 나라가 대한민국 밖에 없다."며 간곡한 방한의 뜻을 밝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력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추진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라 장조()》는 모리스 라벨이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쓴 작품이다.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른팔을 잃고 나서 라벨에게 곡을 위촉하여 작곡하게 되었다. 라벨은 이 곡을 쓰기 전에 카미유 생상스의 왼손을 위한 연습곡을 연구했다. 1931년 11월 27일 빈에서 초연되었다. 단악장 구성이다. 작품의 리듬과 화성은 재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처음에 비트겐슈타인은 이 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다른 작곡가들도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파울 비트겐슈타인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 1887년 5월 11일 ~ 1961년 3월 3일)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오른팔을 잃었지만, 많은 작곡가들에게 곡을 위촉하여 왼팔만으로 공연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레오폴디네 칼무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2년 후에는 나중에 철학자가 되는 그의 막내동생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태어난다. 비트겐슈타인의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많은 작곡가들이 찾아왔는데, 이들은 어린 파울과 함께 이중주를 연주하곤 했다. 그는 폴란드의 거장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913년에 데뷔했고, 호평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기병대 소위로 참전했다. 폴란드에서 정찰 임무 수행 중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여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 때 임무 수행의 공로로 여러개의 훈장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패배로 그는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포로 생활 도중 그는 왼손만으로 피아니스트 생활을 계속하기로 결심했고, 나무 상자위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상상속으로 연주했다. 중립국으로서 포로들의 환경을 감시하던 덴마크 외교관이 그 모습을 보고 포로 생활 중에서도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게 배려해준다. 전쟁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스승 Josef Labor와 함께 피아노 작품을 왼손만으로 칠 수 있도록 편곡했다. 그는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많이 알려지게 되었자 유명한 작곡가들에게 왼손만으로 된 곡을 부탁했다. 벤저민 브리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파울 힌데미트와 같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한 곡을 썼다.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는데, 비트겐슈타인은 특히 그 곡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도 그를 위한 협주곡을 썼지만, 비트겐슈타인을 그 작품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연주하지는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위촉한 작품 중 다수는 레온 플라이셔와 같이 오른손을 못 쓰게 된 피아니스트는 물론 두 손이 멀쩡한 피아니스트에 의해서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유대인이었으나 아버지 쪽은 세 세대 전에, 어머니 쪽은 두 세대 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나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두 누나들에게 빈을 떠나자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보다 몇 년 전부터 영국에 살고 있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나치에 의해 연주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결국 1938년에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로도 계속 그는 루트비히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남은 가족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법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946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미국에서 여생을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았다. 1961년에 뉴욕에서 죽었다. 데이터 압축 데이터 압축은 데이터를 더 적은 저장 공간에 효율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기술, 또는 그 기술의 실제 적용을 가리킨다. 크게 데이터를 더 작은 크기로 변환시키는 인코딩 과정과 저장된 데이터를 다시 불러와 원래 데이터 형태로 복원시키는 디코딩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인코딩하기 전의 데이터 크기와 인코딩하고 나서의 데이터 크기의 비율을 압축률이라고 한다. 압축 기술의 종류에 따라 데이터의 내용을 바꾸지 않고 원래 내용 그대로 디코딩할 수 있는 무손실 압축과 더 높은 압축률을 얻을 수 있지만 디코딩한 데이터의 세부적인 디테일을 일부 희생시키는 손실 압축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무손실 압축 알고리즘에는 반복 길이 부호화와 허프만 부호화 , 산술 부호화 등이 있다. 손실 압축 알고리즘은 인간의 감각 기관의 특성을 역이용하여 압축률을 높이므로, 음성, 정지화상, 동영상 등 데이터의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른 알고리즘이 사용된다. MPEG 표준 압축기술이 많이 쓰인다. 다른 방식의 데이터 압축에 대한 테스트 결과이다. 괄호 안의 숫자는 압축 방식의 순위이다. 위에 나온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방식을 세 가지 들면, rk, rar 그리고 7z과 같다. WinRK과 WinRar은 상용 소프트웨어이지만, 7-Zip는 자유 오픈 소스이며 (LGPL 라이선스), 리눅스에서도 동작한다. 한글 (동음이의) 한글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가우스 (단위) 가우스(, 기호 G)는 자기장(B)의 CGS 단위이다. 독일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이름을 땄다. 1 가우스는 1 제곱센티미터의 단면에 1 맥스웰의 자기 선속이 통과하는 자기장이다. 1932년 이전까지는 가우스가 현재는 에르스텟으로 불리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도 쓰였었다. 이 용어 변경은 자기유도와 자기장의 세기를 구분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국제단위계에서 자기장의 단위는 테슬라이며, 1 가우스는 10 테슬라와 같다. 강서공업고등학교 강서공업고등학교(江西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개포고등학교 개포고등학교(開浦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경기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京畿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야구부, 아이스하키부, 수영부 등을 운영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 축구부도 운영한 바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정수론에서 3 이상 지수의 거듭제곱수는 같은 지수의 두 거듭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정리이다. 즉, formula_1가 양의 정수이고, formula_2이 3 이상의 정수일 때, 항상 formula_3이다. 이 정리는 1637년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였던 피에르 드 페르마가 처음으로 추측하였다. 수많은 수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페르마가 자신의 추측을 기록한지 358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인 앤드루 와일스에게 증명되었다. 이 방법이 페르마가 살던 시기에는 발견되지 않은 데다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페르마가 다른 방법으로 증명했거나 증명에 실패했다고 추측한다. 이 정리를 증명하기 위한 수학자들의 각고의 노력 덕분에 19세기 대수적 수론이 발전했고 20세기에 모듈러성 정리가 증명되었다. 앤드루 와일스의 증명은 기네스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로 등재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수학자인 피타고라스가 증명한 피타고라스 정리가 세제곱, 네제곱 등에서도 성립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637년 피에르 드 페르마는 1621년 출간된 디오판토스의 《산법》(Arithmetica)의 여백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페르마는 formula_4 식에서 n이 3 이상인 모든 정수 n 에 대한 증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n = 4 인 경우에 대해서는 자세한 증명을 남겼다. 이 증명에 지수의 법칙을 적용하면,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증명은 모든 정수 n에 대하여 살필 필요 없이 소수의 경우만 증명하면 된다. 페르마가 추론을 적은 1637년 부터 2세기 동안 n 이 3, 5, 7 인 경우가 증명되었고 1839년 소피 제르맹이 100 이하의 소수에 대해 증명하였다. 19세기 중반 에른스트 쿠머는 정규 소수 전체에 대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후 쿠머의 작업을 기반으로 컴퓨터를 사용한 정교한 연구를 통해 4백만 이하의 모든 정수에 대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성립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84년 게르하르트 프라이(Gerhard Frey)는 당시 다니야마-시무라 추론으로 알려진 타원 곡선에 대한 모듈러성 정리가 참일 경우 모든 정수 n 에 대하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역시 성립된다는 것을 보였다. 1986년 케네스 앨런 리벳은 프라이의 추론 가운데 일부를 증명하였고, 1995년 앤드루 와일스는 리벳의 작업을 바탕으로 리처드 로런스 테일러의 도움을 받아 모듈러성 정리가 참이라는 것과 따라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역시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와일스의 증명은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책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피타고라스 수의 관계식 a + b = c을 일반식 a + b = c으로 확장시켰을 경우, 지수 n에 대해 n >= 3 정수 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피타고라스 수 외에도 디오판토스 방정식과 같은 수학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피타고라스 수는 다음의 등식을 만족하는 세 정수로 된 튜플 ("a", "b", "c") 이다. 이 등식은 페르마의 방정식에서 n = 2 인 경우에 해당한다. 피타고라스 수에 대한 간단한 예로는 (3, 4, 5) 와 (5, 12, 13) 이 있다. 피타고라스 수를 이루는 세 정수로 된 튜플은 무한히 많다. 여러 문화에서 오랫동안 피타고라스 수를 생성하는 방법이 연구되어 왔다. 예를 들면, 바빌로니아 수학 과 후기 그리스 수학, 중국 수학, 인도 수학 등에서도 피타고라스 수를 생성하는 문제가 다루어져 왔다. 전통적으로 피타고라스 수에 대한 관심은 피타고라스 정리와 연관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수는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직각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의 길이가 맺는 관계로 변환될 수 있는데, 직각은 역사적으로 측량, 목공, 석조, 건축 등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피타고라스 수를 생성하는 방정식의 지수를 3 이상으로 확장하였을 때에도 그러한 튜플을 이루는 정수가 존재하는 지에 대한 문제이다. 페르마의 방정식 "x" + "y" = "z" 은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특수한 예이다. 디오판토스 방정식은 정수로 된 해만을 허용하는 부정 다항 방정식이다. 디오판토스 문제는 미지수인 변수와 그 변수의 수 보다 적은 방정식을 제시하고, 주어진 모든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수 해들을 찾도록 한다. 방정식의 이름은 풀이 방법을 서술한 3세기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디오판토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예로 아래의 방정식을 들 수 있다. 위 두 방정식을 모두 만족하는 정수 "x" 와 "y" 를 구하는 것이 디오판토스 문제이다. 디오판토스의 주요 저작 가운데 전해진 것으로는 《산법》(Arithmetica)이 유일하다. 페르마는 《산법》을 읽다가 마지막 정리에 대해 착상하였다. 페르마가 읽은 《산법》은 1621년 클라우드 가스파르 바세 드 메지리아가 새롭게 편찬한 것이었다. 디오판토스 방정식은 수천년에 걸쳐 연구되어온 주제이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 수를 찾는 방정식 "x" + "y" = "z" 은 기원전 1800년 무렵 바빌로니아에서도 연구된 바 있다. 1차 방정식으로 된 디오판토스 방정식, 예를 들어 26"x" + 65"y" = 13 과 같은 것의 해는 기원전 5세기 무렵 만들어진 유클리드 호제법을 이용하여 구할 수 있다. 페르마 자신이 이 정리에 대하여 증명한 것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은 "n"=4인 경우 단 한 가지뿐이다. 페르마는 무한강하법을 이용하여 직각 삼각형의 두 변을 이루는 정수로 된 네제곱 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페르마의 증명은 다음의 방정식에 대한 정수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의 증명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서 n = 4 인 경우인 formula_9 와 같은 형태인 formula_10 로 바꾸어 쓸 수 있다. 페르마는 이 방정식에서 a, b, c 의 절댓값을 아무리 작은 수로 잡아도 그 보다 더 작은 수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정수의 절댓값이 무한히 작아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국 정수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소피 제르맹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모든 지수에 대해 적용하는 단초로써 몇 가지 특별한 접근법을 개발하였다. 우선, 제르맹은 소수 "p" 에 대하여 3의 배수가 아닌 임의의 정수 "h"를 사용하여 방정식 θ = 2"hp"+1 을 만족하는 보조적인 소수의 집합 θ를 정의하였다. 제르맹은 만약 모듈러 θ에 인접한 정수가 소수 "p" 제곱으로 나타낼 수 없다면 (이를 비접속 조건이라 한다), θ는 반드시 세 정수 "xyz"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제르맹은 수학적 귀납법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조건을 만족할 경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100 이하의 소수에 대해 이를 검증하였다. 그러나 모든 정수 n 에 대하여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1985년 레오나드 애들먼과 로저 히스브라운, 그리고 에디엥 포브리는 제르맹이 정의한 특정한 소수 p 전체에 대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참임을 증명하였다. 에른스트 쿠머는 또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증명 과정에서 근대 정수론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쿠머는 소수를 정규 소수와 비정규 소수로 구분하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방정식 formula_11에 대해 n이 정규 소수일 때 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쿠머의 증명 방법은 훗날 아이디얼 이론으로 불리게 된 이론의 기초인 P진수의 발견에 거의 근접한 것이었다. 소수의 n차 단위근에 대해 체를 확장한 쿠머 이론은 이차 형식에 대한 탁월한 연구였으며, 오늘날에도 아이디얼 유군을 다루는 유체론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1920년대에 들어 루이스 모델은 페르마의 방정식에서 지수 n 이 자명하지 않은 소수일 경우 n이 아무리 큰 수라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성립할 것이란 추측을 내놓았다. 이 추측은 1983년 게르트 팔팅스에 의해 증명되어 팔팅스 정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컴퓨터를 이용해 비정규 소수에 대한 쿠머의 접근법을 확장하는 연구가 있었다. 1954년, 해리 밴디버(Harry Vandiver)는 SWAC 컴퓨터를 이용하여 2521까지의 소수 n에 대하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78년에는 새뮤얼 왜그스태프(Samuel S. Wagstaff)가 125,000 이하의 소수에 대하여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성립함을 증명하였다. 1993년, 4백만 이하의 모든 소수에 대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성립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84년 게르하르트 프라이는 모듈러성 정리를 증명하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역시 증명 가능하다는 것을 최초로 설명하였다. 프라이는 페르마의 방정식의 해 ("a", "b", "c")는 "p" > 2 인 지수 "p" 를 사용할 때, 다음과 같이 타원 곡선의 형태로 변환할 수 있다는 것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나타낸 타원 방정식은 모듈러 곡선으로 변환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모습이 된다. 1950년대 일본의 수학자 다니야마 유타카와 시무라 고로는 모든 타원곡선은 적당한 형태의 모듈러 곡선으로 변환되며 그 역 역시 가능하다는 다니야마-시무라 추측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다니야마-시무라 추론이 참이라면, 페르마의 방정식을 변환한 타원 방정식 역시 모듈러 곡선으로 변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페르마의 방정식에 정수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의미가 되므로 결국 페르마의 정리가 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위와 같은 방식의 증명은 두 단계의 세부적인 증명을 거쳐야 한다. 우선 프라이가 나타낸 바와 같이 페르마의 방정식이 타원 방정식으로 변환 가능한 지를 증명하여야 한다. 프라이는 이것을 엄밀하게 증명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장피에르 세르는 프라이가 놓친 부분을 “엡실론 추측”()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고, 1986년 케네스 앨런 리벳은 세르의 엡실론 추측을 증명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모든 타원 방정식이 대응되는 특정한 모듈러 곡선을 갖고 있는데 반해 페르마 방정식은 그러지 못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앤드루 와일스는 1995년 이것을 증명하여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할 수 있었다. 1986년 이루어진 리벳의 엡실론 추측에 대한 증명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한 프라이 방법의 첫 단계가 해결되었다. 앤드루 와일스는 프라이 방법의 두 번째 단계인 타니야마-시무라 추론을 홀로 증명하기로 결심하였다.(타니야마-시무라 추론은 와일스의 증명 이후, 모듈러성 정리로 불린다.) 와일스는 6년동안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하였다. 와일스는 빅토르 콜리바긴()과 마티아스 플라흐가 발전시킨 오일러 계를 확장하였다. 와일스는 이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1993년 프린스턴 대학교 동료인 닉 카츠에게 자신의 연구 결과 검증을 부탁하였다. 1993년 중반 무렵, 와일스는 자신의 결과에 대해서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와일스는 6월 21일에서 6월 23일까지 아이작 뉴턴 수리과학 협회에서 3번의 강의를 통해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와일스는 특히 불완전한 타원곡선에 대한 타니야마-시무라 추론의 증명을 제시하면서, 타원함수 추론에 대한 리벳의 증명을 함께 도입해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였다. 그러나 와일스의 이러한 증명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오류를 발견한 사람 가운데에는 와일스의 증명에 도움을 준 카츠도 있었다고 한다. 와일스와 그의 제자였던 리처드 로런스 테일러는 1년 가까이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던 1994년 9월 19일 와일스는 예전에 콜리바긴-플라흐 방법을 도입하면서 포기하였던 자신의 수평 이와사와 이론 접근법과 헤케 대수학의 환론적 속성을 떠올렸고, 다시 테일러와 함께 증명을 완성하였다. 와일스는 1995년 5월 2편의 논문을 발표해서, 358년 된 수학 난제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완벽하게 증명하였다. 지수의 법칙에 따라 어떤 수의 거듭제곱 a의 지수 n은 정수 뿐만 아니라 유리수와 복소수를 포함하는 모든 수로 나타낼 수1992년 렌스트라는 유리 지수를 갖는 방정식 formula_12에 대하여 "n"=1 일 경우의 일반 해를 구하였다.. 페르마는 《산법》 여백에 자신이 놀라운 방법으로 증명하였다고 기록하였지만, 남아있는 상세한 증명은 n=4인 경우, 즉 x+y=z의 정수 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실제 페르마는 아마추어 수학자로서, 여가 활동으로 수학을 즐겼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곤 하였다. 앤드루 와일스와 리처드 로런스 테일러가 마무리 지은 증명 방법은 20세기에 발견한 많은 현대 수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페르마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의 수학 논리학자인 하비 프리드먼(Harvey Friedman)은 페르마가 직접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에는 당시 개발된 산술의 기초 도구들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무리였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페르마의 인품과 성격을 봤을 때, 증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1816년과 1850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일반적인 증명에 대해서 포상을 내걸었다. 1857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쿠머의 아이디얼 이론에 대해서 금메달과 함께 3,000 프랑을 수여하였다. 브뤼셀 과학 아카데미에서도 1883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사람에게는 포상을 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1908년 독일의 기업가이자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파울 볼프스켈은 100,000 마르크를 괴팅겐 과학 아카데미에 기탁해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 사람에게 수여되도록 하였다. 1908년 6월 27일 괴팅겐 과학 아카데미는 증명의 검증과 상금의 수여에 대한 9가지 기준을 발표하였다. 중요 기준은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만을 심사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과 상금 지급 대상은 2007년 9월 13일까지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1997년 6월 27일 앤드루 와일스는 볼프스켈상을 수상하고, 50,000 달러를 받았다. 볼프스켈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사람에게는 100,000 마르크를 준다는 공약을 한 이유가 있는데, 예전에 볼프스켈에게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자살을 결심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살하기 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우연히 연구하게 됐는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흠뻑 매료되고 만 볼프스켈은 자살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볼프스켈이 이런 공약을 하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볼프스켈상 심사 위원회에는 와일스 이전에 이미 수천 건의 잘못된 증명이 접수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모인 증명의 양은 높이가 약 3미터에 달했다. 볼프스켈상이 시작된 1908년에 접수된 것만 621건이었고, 1970년대에도 매달 3~4건의 증명이 접수되었다. 수학사 연구자인 하워드 이브스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가장 많은 잘못된 증명들이 발표된 정리이기도 하다"고 언급하였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경기상업고등학교(京畿商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본관은 붉은 벽돌 건물로 대칭형 입면, 맨사드 지붕 형식, 돌출된 현관의 3면 아치, 굴뚝 상부의 석조 장식 등 근대기 교육시설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관은 경사지붕 형식의 강당 건물로 정면의 아치형 주출입구와 주변 석재장식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이며, 본관 전면에 개교 당시 식재한 반송군도 학교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경기도 최초의 도립학교인 경기도립갑종상업학교의 교사 건물로, 당시 시범적으로 시도한 한·일공학중학교로써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2014년 2월 27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84호로 지정되었다. 경기여자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京畿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경동고등학교 경동고등학교(京東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3가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경복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景福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광남고등학교 (서울) 광남고등학교(廣南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옥주현, 성유리 구로고등학교 구로고등학교(九老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국립국악고등학교 국립국악고등학교(國立國樂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국립 고등학교이다. 금천고등학교 금천고등학교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당곡고등학교 당곡고등학교(堂谷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대영고등학교 (서울) 대영고등학교(大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덕수고등학교 덕수고등학교(德壽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일반계열은 위례신도시로 이전되고, 특성화 학과는 서울시내 타 특성화고에 흡수된다. 그리고 야구부는 위례신도시에서 야구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교육청은 야구부는 존치한다는 방침이지만 존치가 어려워보인다는 우려가 많다. 도봉고등학교 도봉고등학교(道峰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문화고등학교 서울문화고등학교(서울文化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東明女子情報産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일여자상업고등학교 동일여자상업고등학교(東一女子商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동작고등학교 동작고등학교(銅雀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방송고등학교 서울방송고등학교(서울放送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둔촌고등학교 둔촌고등학교(遁村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면목고등학교 면목고등학교(面牧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명일여자고등학교 명일여자고등학교(明逸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명일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무학여자고등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舞鶴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방산고등학교 방산고등학교(芳山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상계고등학교 상계고등학교(上溪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서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공업고등학교 서울공업고등학교(서울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본관 건물이 2002년 5월 31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울과학고등학교(서울科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에 있는 공립 과학영재학교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서울大學校 師範大學 附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국립 고등학교이다.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서울都市科學技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여자고등학교 서울여자고등학교(서울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나경원 서울체육고등학교 서울체육고등학교(서울體育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초고등학교 서초고등학교(瑞草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전자고등학교 서울전자고등학교(서울電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석관고등학교 석관고등학교(石串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선덕고등학교 선덕고등학교(宣德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선린인터넷고등학교(善隣인터넷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3가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성동공업고등학교 성동공업고등학교(城東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구 흥인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城東글로벌經營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성수공업고등학교 성수공업고등학교(聖水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2가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송파공업고등학교 송파공업고등학교(松坡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한 사립 공업고등학교이다. 수도여자고등학교 수도여자고등학교(首都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수락고등학교 수락고등학교(水落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신림고등학교 신림고등학교(新林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신목고등학교 신목고등학교(新木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아버지인 베르나르도 디 니콜로 마케아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4년에 메디치 가가 몰락할 무렵 공직에 입신하여 피렌체의 공화국 10인 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외교 사절로서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외국 군주에게 사절로 파견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견해를 구축하였다. 그는 1498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의 서기장을 역임했다.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스페인의 침공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이때 그는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1513년 발표한 이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일찍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502년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절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만났다. 그는 당시 피렌체에서 로마냐로 파견한 외교사절로 이몰라에 있었는데 성체 설계를 위해 이곳으로 온 다빈치와 만났다. 그해 긴 겨울동안 다빈치와 마키아벨리,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후에도 다빈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513년에는 메디치 군주정에 대한 반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교황 레오 10세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코시모 루첼라이라는 공화주의파의 주도하에 이뤄진 '오리첼라리 정원의 모임'으로 알려진 피렌체 공화주의자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로마사 논고는 바로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헌정되었다. 이 저작은 피렌체 공화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저작이며 로마 공화정을 비롯한 공화국들의 긍정적 역량을 최대한 조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527년 사망하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부활하고 1일을 살다 죽었다는 믿지 못할 전설이 전해졌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기회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상대보다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運)은 모든 전략전 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는 운 때문에 최대한 세밀하게 세운 계획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량 있는 지도자는 가능성이 기회로 변하는 때를 인식하고, 경쟁자나 상대방보다 더 빨리 반응하여 행운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 민중의 뜻을 배반하고 헌법에 새겨진 주권재민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힘센 당이 악법들을 일방적으로 그것도 악한 방법으로 통과시키려 할 때 민중들은 좋은 방법으로 민의라는 좋은 목적을 지킬 수 없다. 때론 폭력으로라도 악법 통과를 저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평화적이고 좋은 방법으로 좋은 세상(목적)을 만들 수 있었다면 수많은 전쟁과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앤터리 패럴은 " 만일 마키아벨리즘에 비판과 의문이 제기된다면, 인간, 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한 가지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를 공격한다 해도 근대성의 문제로부터 이 세계를 구할 수 없다."라고 함으로써 마키아벨리를 옹호했다.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친 《군주론(Il Principe)》과 《정략론》《로마사 논고》 등이 유명하다. 이 주저를 모두 가로지르는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주권자의 자율성이다.로마사논고와 군주론은 공화주의와 군주주의의 양극단이 드러나는 저서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그 실체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논란이 있다. 희곡 <만드라 골라()>는 이탈리아 연극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유비소프트사의 게임 '어쌔신크리드2',그리고 후속작인 ''에 주인공 에치오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여우속 여우속("Vulpes")은 개과에 속하는 동물의 속이다. 이 속에는 여우라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동물이 속하지만, 모든 여우라고 일컬어지는 동물이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속에 속한 동물들은 가는 몸통과 짧은 다리, 뾰족한 주둥이, 크고 뾰족한 귀 그리고 길고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로 특징 지어진다. 꼬리의 길이는 많은 하위 종에서 거의 몸통과 비슷하다. 머리-몸통 길이는 35cm에서 90cm 사이이며, 꼬리는 18cm에서 55cm 사이이다. 몸무게는 1kg에서 14kg사이이다. 털색은 종에 따라 하얀색, 노란색, 붉은색, 혹은 회색일 수도 있다. 여우속의 자연적 확산은 유라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북아메리카를 아우른다; 붉은 여우는 사람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로도 확산되었다. 원숭이 원숭이 또는 잔나비는 영장류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이다. 원숭이하목은 크게 "신세계원숭이", "구세계원숭이", "유인원"으로 나뉜다. 신세계원숭이는 광비원소목을 이루지만, 구세계원숭이는 협비원소목의 한 상과에 그친다. 생김새만으로는 구세계원숭이는 신세계원숭이와 비슷하지만, 분류학상으로는 유인원과 훨씬 더 근연 관계에 있다. 일부 중앙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가축으로 기르기도 한다. 몸무게가 다양하며 약 80g의 애기여우원숭이도 있다. 원숭이류의 진화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눈이 얼굴의 양쪽에서 앞쪽으로 이행하여 양쪽 눈을 함께 사용할 수 있어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나무 위에서의 민첩한 행동과 관계가 있다. 둘째, 코가 퇴화하고 눈이 발달하여 후각 위주의 생활에서 시각에 의존한 생활로 이행한다. 셋째, 입천장이 퇴화하고 이빨의 수가 감소한다. 넷째, 손의 엄지손가락은 다른 4개의 손가락과 서로 마주보게 되어서 나무의 가지를 꽉 쥐거나 먹이 등을 잡을 수 있어 손은 점점 보행기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다섯째, 손발톱이 갈고리 모양에서 편평한 것으로 변화되고 지문의 발달을 볼 수 있다. 여섯째, 한 번에 낳은 새끼의 수가 줄면서 임신기간이 길어지고 점차로 직립화가 확립된다. 일곱째, 수명이 길어지고 사회적인 행동과 사회구조가 복잡화된다. 간혹 얼굴 등이 붉거나 검은 원숭이가 있는데, 이것은 색소나 혈액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원숭이는 다른 포유류보다 오래 산다. 침팬지는 60년까지 살며, 꼬리감는원숭이는 40년을 산다. 대부분 한배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임신기간은 4.5-8개월이다. 새끼원숭이는 대부분 어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데 종에 따라서 2-3주에서 2년까지 어미젖을 먹는다. 원숭이는 태어나면 바로 어미의 털을 붙잡고 매달린다. 어미는 새끼가 혼자서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때까지 새끼를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 새끼는 어미의 배에 매달리지만 나중에는 등을 타고 다닌다. 식성은 잡식성으로 주로 새, 새알, 꽃, 개구리, 과일, 풀, 곤충, 나뭇잎, 도마뱀, 견과, 식물의 뿌리 등을 먹는다. 땅 위에서 생활하는 원숭이들은 일반적으로 잡식의 경향이 있다. 긴팔원숭이는 비교적 잡식성이며 오랑우탄은 과일만을 먹는다. 고릴라는 완전한 식물성이나, 침팬지는 잡식성이다. 또 개코원숭이, 즉 비비는 육식성으로 긴꼬리원숭이나 어린 산양을 잡아 날것으로 먹기도 한다. 원숭이류는 주로 무리를 지어 사회생활을 한다. 원숭이의 무리를 이루는 종류는 가족무리, 여러수컷무리, 한수컷무리의 세 종류가 있다. 먼저 가족무리는 수컷 성체 한 마리, 암컷 성체 한 마리, 그리고 그들의 새끼로 이루어진다. 둘째, 여러수컷무리는 수컷 성체 여러 마리, 수컷 수 몇 배의 암컷 성체, 그리고 새끼들로 이루어진다. 셋째, 한수컷무리는 수컷 성체 한 마리, 암컷 성체 여러 마리, 그리고 새끼들로 이루어진다. 원숭이의 천적은 나무 위에 사는 원숭이와 땅 위에 사는 원숭이가 다르다. 나무 위에 사는 원숭이는 고작해야 큰 독수리 따위가 위협하지만 땅에서 사는 원숭이들은 치타·하이에나·재칼·표범·사자 등 적이 많다. 그러므로 위험을 피하거나, 자신들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한 지도자 밑에서 튼튼한 조직체를 이루어야 한다. 원숭이는 태어난 지 10일쯤 되면 무엇이든 입에 넣는다. 20일쯤 되면 재롱도 부리고, 앞니가 나고, 나무에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원숭이 두 마리를 사육하면 서로 어울려 상대방의 몸을 만지고 털을 손질해 준다. 이 털고르기 작업을 통해 기생충을 잡아 주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의 감정도 느낀다. 또 원숭이 새끼들은 장난이 무척 심하다. 씨름이나 달리기, 재주넘기 등은 기본이고 나무 위에 오를 때에도 장난을 쳐 상대방을 떨어뜨린다. 때로는 장난이 너무 심해 싸우기도 한다. 그러면 어미 원숭이는 소리를 질러 싸움을 말린다. 대한민국에서는 원숭이의 밀수·사육·판매·개인 거래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현행법상 동물원이나 유관기관의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다. 원숭이를 실내에 놓아서 기르더라도 원숭이집은 필요하다. 케이지는 체형에 맞게 널찍한 것으로 선택한다. 그 외에도 열쇠·목줄·식기·자동물병·보온기구 등이 필요하다. 케이지 주변에는 물건을 놓아 두지 않는다. 장난을 좋아하여 기다란 팔을 뻗어 케이지 밖의 물건을 쥐거나 부수기 때문이다. 케이지는 넓이와 높이가 최소한 50cm는 되어야 하며, 바닥의 일부는 철망을 깔고 아래에 서랍식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배설물이 바닥에 쌓이도록 한다. 청소할 때는 이것만 꺼내서 하면 된다. 원숭이는 동작이 매우 빠르고 높은 곳에도 잘 올라가기 때문에 키우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장롱이나 화장대 등에 올라가 물건을 만져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고 긴 팔을 내밀어 전깃줄 등의 위험물을 잡아당기기도 한다. 화분이나 꽃병 등을 깰 수도 있다. 게다가 비상약품 등을 비롯한 물품 등도 잘 보관하여야 한다. 원숭이는 사람 흉내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삼키거나 위험한 장난을 하여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난감 등 놀이 기구를 가지고 노는 것을 매우 좋아하며 재롱도 잘 부른다. 목욕은 3-4일에 한번씩 시켜 주고 멋내는 것을 좋아하므로 옷도 입히고 액세서리도 꽂아 주며, 모자도 씌워 준다. 하지만 지나치게 꽉 끼는 옷이나 불편할 정도의 치장은 좋지 않다.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히고 1년에 한 번씩 또는 2-3개월에 한 번씩 구충제도 먹인다. 특히 여름철에 날것이나 찬것을 많이 먹이면 설사 등 배앓이를 할 수 있으므로 조심하여야 한다. 원숭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영리하지 않으므로 훈련을 시킬 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훈련 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이면 자신의 배설물을 아무데나 실례하는 버릇이 있다. 일반적으로 나뭇잎과 과실 등을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곤충이나 작은 설치류 등도 먹는다. 먹이는 하루에 두 번 아침 저녁으로 주는 것이 좋다. 작은 종일수록 동물질을 중심으로 주어야 하는데, 동물질의 인공사료에 야채와 과일 등의 식물성을 곁들이면 된다. 때때로 곤충 등을 잡아 주면 좋아한다. 손으로 직접 주는 것을 좋아한다. 집게나 나무젓가락으로 주면 친근감이 떨어지고 원숭이는 자기를 헤치려는 줄알고 사납게 굴 수도 있다. 중국에서 8대진미로 손꼽히는 원숭이골은 원숭이의 머리뼈를 도려내어 그 뇌를 먹는다. 소 (동음이의) 소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돼지 돼지 또는 집돼지("Sus scrofa domesticus")는 가축화된 멧돼지("Sus scrofa")를 말한다. 전 세계에서 약 8억 4천 마리가 사육되어 사람들의 중요한 영양원이 된다. 약 9,000년 전에 중국과 근동 지역에서 가축화되었다고 여겨진다. 돼지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발견된다. 야생종과 가축의 차이는 아주 적으며, 일부 지역(뉴질랜드 등)에서는 야생화된 돼지가 환경에 피해를 주기도 한다. 돼지는 개와 돌고래에 견줄 만큼 매우 영리하며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 돼지의 가축화는 근동 또는 중국에서 멧돼지를 기르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되었지만, 가죽은 방패, 뼈는 도구와 무기, 털은 솔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이슬람과 유대교같은 종교에서는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보아 금기시하여 돼지고기를 식용하지 않는다. 중동지방에서, 지리적으로 사육하기 적합하지 않은 가축이라는 것은 돼지를 식용으로 생소하게 여긴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 문화적인 요인에서 기인하는 기피현상이 있다. 몸이 뚱뚱하고 다부지며, 털은 거칠고 뻣뻣하다. 머리는 짧고 두툼한 목으로 몸통과 바로 연결돼 있고, 머리 앞으로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 코가 있다. 가죽은 두껍고, 몸을 식힐 수 있는 땀샘이 없기 때문에 몸을 식히기 위해 진흙탕에 자주 뒹군다. 눈이 작아 잘 볼 수 없지만, 후각이 예민하여 먹이를 잘 찾는다. 돼지의 꼬리는 짧고 대개 말려 있다. 코는 넓은 판처럼 생겼고, 가운데에 콧구멍이 두 개 있다. 이빨은 모두 33-44개로 이 중 8개는 송곳니로, 다 자란 수퇘지의 경우는 날카로운 엄니로 자란다. 이 엄니는 땅을 파는 데나 공격 무기로 사용한다. 돼지는 위험에 부닥치면 보통은 도망을 가지만, 막다른 곳에 도달하면 돌아서서 덤비거나 문다. 특히 이빨이 사람의 이빨과 비슷해서 살 정도는 가볍게 씹는다. 발가락이 네 개이고 각 발가락 끝에는 발굽이 있는데 가운데 두 발굽은 갈라져 있다. 돼지는 번식이 매우 빨라서 태어난 지 8개월 정도가 되면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임신기간은 114일이고 보통 한배에 8-12마리를 낳는다. 갓 태어난 새끼돼지는 약 1kg가량이고, 1주일이 지나면 두 배로 늘어난다. 다 자란 수퇘지는 230 kg 이상 되며, 암퇘지도 200kg이 넘는다. 돼지가 완전히 자라기 위해서는 1년 반에서 2년이 걸리며 수명은 9-15년이다. 돼지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친 품종 개량으로 오늘날 수많은 종에 이르렀다.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발원지인 서아시아가 고온건조한 사막기후여서 잡식동물인 데다가 자주 씻는 돼지는 키우기 부적합한 동물이다. 게다가 비활동적인 성격때문에 불결한 짐승으로 여겨졌다. 지금도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이 있다. 전 세계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의 품종은 약 1,000종에 달한다. 그 중에서 한국에 있는 토종 돼지 중에서 강원도 산우리재래돼지가 있다. 주로 사육되는 돼지의 품종은 랜드레이스·요크셔·버크셔·두록·햄프셔 등이고, 이 밖에도 스포티드·체스터화이트·폴란드차이나 등이 사육되고 있다. 종돈(씨돼지)은 혈통·체형 및 능력이 우수한 것으로서 암컷은 유두수가 많고 품종의 특성을 가지며 털 색깔이 고르고, 몸이 길며 다리가 충실하고 발육이 양호한 것이라야 한다. 수컷은 생식기의 발육이 좋고 활기가 있는 것을 선택한다. 체형이 뛰어난 것을 고르기 위해 각 품종마다 심사표준이 지정되어 외양심사가 실시된다. 보통 생후 8개월(110–120 kg)에서 6-7세까지가 번식에 쓰인다. 암퇘지는 21일 간격으로 발정을 되풀이하며 발정시기는 약 3일 동안 계속된다. 암퇘지가 수퇘지의 교미를 허용함으로써 자연교배하거나 또는 인공수정으로 수태시킨다. 임신기간은 114일쯤이고 한배 새끼수는 보통 8-11마리이고 20여 마리 낳는 품종도 있다. 포유 기간은 7-8주지만, 번식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기 이유를 하기도 한다. 이유한 어미돼지는 7-10일 뒤에 발정이 복귀되므로 1년에 2-2.5회 출산이 가능하다. 새끼돼지는 10-15분 간격으로 한 마리씩 태어나는데 분만 시작 2-3시간 후면 완료된다. 갓 태어난 새끼돼지는 코와 입의 점액을 제거하여 질식을 방지해야 하고 배꼽은 묶어 3–5 cm 길이에서 잘라준 후 요오드팅크를 발라 준다. 새끼돼지는 보온상자에 넣어 보온해 주며 처음 2-3일 간은 40-60분마다 인공적으로 포유(哺乳)시킨다. 분만 당시 몸무게가 1.2kg인 새끼돼지는 6-8주간 포유시켜 몸무게가 12 kg 전후가 되면 젖을 뗀다. 젖 떼는 방법은 일시에 떼는 방법과 몸무게가 무거운 새끼는 먼저 젖을 떼고 가벼운 새끼는 며칠 후에 떼는 방법이 있다. 유초기가 겨울이면 보온이 필요하다. 새끼돼지가 젖을 무는 젖꼭지는 생후 3일째 정해져 이후부터는 반드시 자기 전용의 젖꼭지에만 매달리므로 젖줄 때 혼란은 없다. 조기이유를 시킨 새끼돼지에게는 대용 우유를 주어야 하며, 이유기 시기에는 반드시 돼지 콜레라 예방주사를 실시한다. 사료는 미세한 분말 형태를 주로 사용하는데, 소화·흡수가 쉬워 사료 효율이 높은 반면 위궤양 등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 사료는 주로 곡물·쌀겨·맥류·감자·목초·식품 찌꺼기 등이다. 새끼 때는 단백질, 비타민이 많은 것을 주고 성장해감에 따라 탄수화물이 풍부한 먹이를 준다. 종돈으로 쓰지 않을 수퇘지는 생후 3주경에 불까기를 하고, 살찌워서 6-7개월 정도에 고기용으로 출하한다. 돼지는 불결한 동물로 알려져 있으나, 의외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배설장소를 낮은 곳이나 습기찬 곳에 한정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교배·분만 등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번식돼지의 경우 돼지우리 설계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돼지의 질병 중 가장 피해가 심한 것은 돼지 콜레라로 8-10월에 특히 많이 발생하는데, 일단 걸리면 체온이 41℃로 올라가서 폐사하므로 예방접종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그 밖에 돼지 단독(豚丹毒), 일본 뇌염 등과 전염성 위장염, 대장균 설사병 등이 있다. 또 일반적인 질병으로는 이질, 위궤양, 피부병, 일사병 등이 있는데 예방과 조기발견이 매우 중요하다. 길러서 도살되는 고기용 돼지로는 교잡종이 주로 이용된다. 1대 잡종이나 3원 교잡종에는 잡종강세가 나타나 순수종보다 발육이 빠르고 건강해서 병에 잘 걸리지 않으며, 한 배의 새끼수도 많기 때문이다. 돼지고기는 무슬림이 많은 중동 (서남 아시아·북아프리카·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터키) 지방을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 널리 즐겨 먹는 음식이다. 부위별로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돼지고기는 담홍색 또는 회홍색을 띠며 연하고 지방이 많다. 비타민 B1의 함량이 쇠고기의 15배나 된다. 구워먹거나 찜을 하며 베이컨·로스햄·본리스햄을 만들거나 다른 고기와 섞어서 각종 소시지·프레스햄 등 가공품도 생산해 낸다. 베이컨은 늑골 부위를 소금에 절인 뒤 건조·훈연한 것이고, 햄은 햄 부위의 고깃덩이를 소금에 절여 건조·훈연 또는 가열하여 만든다. 소시지 종류는 다양하지만 장기보관을 목적으로 한 드라이 소시지, 제조한 뒤 곧 조리하여 먹는 도메스틱 소시지(비엔나 소시지·프랑크푸르트 소시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보통 돼지 한 마리에서 가죽의 무게는 수컷은 전체 몸무게의 10%, 암컷은 5% 정도다. 돼지 가죽은 군화를 만드는데 이용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구워서먹는 음식으로 이용한다. 미니돼지는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한다. 돼지의 쓰임새는 베이컨·비누, 화장품, 와인·본차이나, 페로몬 등 185가지에 달한다. 고기 외에 지방·내장도 식용으로 쓰인다. 돼지기름은 라드라고 하며 흰색이고, 쇠기름·양기름에 비해 녹는점이 낮고 부드럽다. 그 밖에 약·화장품·비누·경화유 등의 공업원료에도 이용된다. 가죽은 모공이 남아서 강도는 약하지만 세공물·지갑에 이용된다. 털은 브러시, 의자나 쿠션 등의 속재료가 된다. 또한 최근 중요시되고 있는 것으로서 돼지가 생체구조상 인간과 심장과 간장이 비슷하기 때문에 장기의 외과수술 기술을 개발하는 실험에도 쓰이며, 피부가 노출되어 있어 화장품 테스트에도 이용한다. 실험동물로서 몸이 작은 미니돼지도 몇 가지 품종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다. 노루 노루("Capreolus pygargus")는 아시아에 서식하는 사슴과 노루속의 한 종으로, 유럽노루와 구분해서 시베리아노루라고도 한다. 유럽노루("Capreolus capreolus")의 아종으로 생각되었으나, 현재는 별도의 종으로 취급한다. 한자어로는 장(獐·麞)이라고 한다. 사슴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뿔이 수컷에게만 있으며 짧고 세 개의 가지가 있다. 두각의 가짓수는 나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데, 대체로 1~2년생은 가지가 한 개, 3~4년생은 가지가 두 개, 5년생 이상은 가지가 세 개 이상이다. 몸빛은 여름에는 황갈색 또는 적갈색을 띠고, 겨울에는 점토색을 나타내는데 겨울털에는 엉덩이에 큰 흰색 반점이 있다. '껑껑'하고 울부짖는데, 마치 개가 짖는 소리와 비슷하다. 세력권을 알릴 때에는 나뭇가지에 뿔을 비비거나, 배설물로 영역을 알린다. 이 행동은 특히 번식기에 두드러진다. 고산·야산을 막론하고 삼림지대에 서식하며, 다른 동물과 습성이 다른 점은 겨울이라도 양지보다는 음지를 선택하여 서식한다는 점이다. 억새, 쇠뜨기, 시로미를 비롯한 여러 잡초들을 주식으로 하며, 다리 근육이 발달하여 한 번에 7미터 이상 뜀박질할 수 있으며 시속 80km로 달릴 수도 있다. 천성이 예민하며 청각이 발달해 극히 작은 소리만 나도 주위를 경계한다. 통상적인 임신기간은 약 150일이다. 그러나 착상지연이 일어나면 배(胚)가 자궁벽에 착상하는 것이 지연되어 임신기간은 약 10개월까지 늘어난다. 일반적으로 9-11월 사이에 교미를 해서 5-6월에 1-3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암컷의 경우 사슴류 중에서 유일하게 4-5개월간의 착상지연 기간이 있다. 그러나 11~12월에 교미한 경우 착상지연 현상이 없을 수도 있다. 새끼는 생후 한 시간이면 걸어다닐 수 있고 2-3일이 지나면 빠른 질주력을 갖게 된다. 새끼는 겨울까지 젖을 먹지만 태어난 지 2개월 정도 되면 스스로 풀과 관목의 줄기를 뜯어먹는다. 출산이 다가오면 이전 해의 새끼들을 떠나보낸다. 천적은 호랑이·표범·불곰·늑대·검독수리 등이다. 빠른 질주력으로 적의 추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적이 보이지 않으면 정지하여 주위를 살펴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잡히는 경우가 많다. 동북아시아 등지에 분포하며 히말라야 이북과 북극권 이남지역에 한정 서식한다. 한반도에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거쳐 한라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서식하며, 특히 제주특별자치도 한라산과 그 근처의 만수동산에는 등산로 주변에도 적지 않은 수가 목격될 정도로 많은 수가 서식한다. 한때 멸종의 위기까지 몰렸지만, 꾸준한 복원 노력으로 인해 현재는 개체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2013년 7월 1일부로 다시 노루 수렵 허가가 내려지자 많은 노루가 수렵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무장지대에서도 많은 수가 목격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서울시 보호 야생 생물 대상종이다. 노루는 일찍이 사냥의 표적으로 많이 희생된 야생동물로 《삼국사기》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노루고기는 육질이 연하고 감칠맛이 있어 구이나 육포로 만들어 먹으며, 한방에서는 노루의 피를 장혈(麞血)이라 하여 허약한 사람에게 기를 보강해 주는 약재로 쓴다. 뼈는 곰국으로 먹으며, 노루뿔 또한 장각(麞角)이라 하여 임질의 치료약으로 쓴다. 곰 곰은 식육목 곰과 이며 포유동물이다. 어린 개체는 능소니라 부른다. 꼬리가 짧고 후각과 청각이 발달했으며, 발가락이 다섯 개이다. 길고 빽빽한 털로 덮여 있으며, 커다란 몸에 강한 팔다리를 갖고 있다. 곰은 식육목에 속해 있지만, 북극곰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식물성 물질을 먹는 초식 위주 잡식성이다. 대왕판다 같은 경우는 거의 대나무만 먹으므로 초식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장구조가 다른 육식동물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식물성 물질을 초식동물처럼 제대로 소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곰은 특정한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먹기도 하며, 한번에 먹는 양도 많다. 현재 8 종류의 곰이 생존하고 있다. 곰의 크기는 종류에 따라 다르나 최소종인 말레이곰은 몸길이가 1.1-1.4m이고, 최대종인 불곰은 1.9-2.8m에 달한다. 꼬리는 흔적적이며 매우 짧아서 털에 가려 안 보일 정도이다. 몸은 강하고 네다리는 짧고 앞뒷발이 모두 넓으며, 발바닥은 사람과 같이 땅에 붙이고 걸어다닌다. 곰은 큰 발, 짧은 다리, 뒤꿈치를 먼저 대고 걷는 행동 때문에 느리게 보이지만, 민첩하고 빠르게 달릴 수도 있다. 한 예로 북극곰은 시속 약 50km로 달릴 수 있다. 앞뒷발 모두 발가락이 다섯 개이고 강한 갈고리 발톱이 있어 구멍을 파는 데 적당하다. 코끝이 길며 눈은 작고 잘 보지 못한다. 작고 둥근 귀는 곧게 서 있지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정도이다. 대신 후각이 예민하다. 턱은 잘 발달되었고 송곳니는 비교적 크며 어금니는 짧고 편평하여 먹이를 씹는 데 편리하다. 털은 길고 거칠며, 빛깔은 갈색·흑색·황백색 등이다. 목 또는 앞가슴에 흰 띠가 있는 것이 많다. 번식기 이외에는 단독으로 지내며, 낮에는 동굴·바위그늘 등에 숨고 저녁 또는 오후 늦게 활동한다. 주로 혼자 생활하다가 여름철 번식기에는 암컷 한 마리와 수컷 한 마리가 약 한 달 동안 같이 지낸다. 그 후에 수컷은 떠나고 암컷은 새끼를 낳을 장소를 마련한다. 새끼는 보통 어미가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 태어나는데, 보통 한배에 두 마리를 낳는다. 새끼는 아주 작아서 태어날 때의 무게가 0.25-0.5kg밖에 안 되며, 눈이 감겨 있고, 털도 없다. 1개월이 지나면 눈을 뜨고 부드러운 털이 빽빽하게 몸을 덮는다. 새끼는 어미와 굴 속에서 2개월 정도 지내며, 봄이 되면 기어나와서 장난치며 논다. 매우 빨리 자라 가을이면 몸무게가 18kg이나 된다. 새끼는 어미와 1-2년을 같이 지내며, 이 기간 동안 어미는 새끼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친다. 곰은 식물질·곤충·물고기·벌꿀 등 어느 것이나 먹는 잡식성이며, 나무타기를 잘한다. 먹이를 찾아서 자주 멀리까지 나가는데, 회색곰 한 마리의 개별 사냥터는 25-30km 정도이다. 또 북극곰은 수영을 잘해서, 육지에서 300 km 이상이나 떨어져 표류하는 빙산 위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곰은 온건한 성격의 짐승으로 충돌을 피하려고 하며,위험할 때는 도망친다.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동작이 민첩하며, 앞발로 가격하는 힘은 소와 사슴 같은 큰 동물도 죽일 정도로 강력하다.(곰 성체의 몸무게는 종에 따라 매우 차이가 크며 큰 경우 400Kg이 넘기도 하며 어떤 북극곰은 그보다 더 무게가 나가기도 한다.) 또한 길고 두꺼운 발톱도 위험한 무기가 된다. 추운 지방에서는 완전한 동면은 아니지만 나무동굴 등에서 겨울을 지낸다. 늦여름에 많은 먹이를 먹어 몸 속에 지방으로 저장하여 겨울잠을 위한 에너지를 준비한다. 겨울 기후가 혹독한 지대에서 사는 불곰과 흑곰 등은 겨울 내내 잠을 자지만, 겨울이 비교적 따뜻한 지역에 사는 종은 잠깐 동안만 굴 속에서 지낸다. 또한 열대지방에 사는 종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 북극곰은 추운 북극에 살지만 겨울에도 정상적으로 활동하며, 바다로 트인 북극의 얼음지대를 돌아다니면서 해안가로 오는 물개나 물범 등을 잡아먹는다. 수명은 15-30년이다. 곰의 쓸개는 웅담이라 하여 위경련이 일어날 때 진통제로 사용되며, 고기는 식용하나 맛이 없다. 모피는 방석 등으로 사용된다. 또 기름은 동상이나 창상 등의 약으로 쓰인다. 대한민국에서는 반달가슴곰의 고기와 뼈가 특별한 약효가 있다고 하여 사냥을 많이 하여 지금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인류의 문화에는 테디베어로 대표되는 곰인형, 아기곰 푸우와 같은 동화 속의 친숙한 곰이 등장한다. 별자리로 북반구에서 잘 보이는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가 있다. 범 범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개 개( "Canis lupus familiaris")는 식육목 개과 개속에 속하는 동물로, 회색늑대(Canis lupus)의 아종으로, 현대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며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지상 육식 동물이다. 개는 인류가 최초로 가축으로 삼은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적으로 애완견, 사냥견으로서 길러 왔으며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Man's best friend)라고도 불린다.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현대의 개와 회색늑대는 대략 10만 년 전에 분화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2013년 개의 화석을 이용한 분석에서는 33,000 - 36,000년 전 사이에 분화가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개는 여러 모로 유용하였기 때문에 모든 원시 인류 사회가 개를 길렀다. 개는 사냥, 목축, 운송, 경비와 같은 일에 사용되고 있으며, 애완 동물로 기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에 적합하도록 오래 전부터 개를 다양한 품종으로 육종하였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여러 소수 문화에서 개고기를 먹지만, 다른 여러 문화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다. 고대 로마 시기의 역사가인 유스티누스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카르타고에게 개고기와 인신공양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고, 서구의 대부분 문화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금기로 취급된다. 이슬람에서는 재난이 닥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개고기가 금지된다. 오늘날에도 개고기를 먹는 문제는 문화적 논란의 대상이다. 개의 수명은 보통 12 - 16년 정도이지만, 최근 장수하는 개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2001년 생물학자 레이 쿠니퍼는 전 세계 개의 개체수를 약 4억 마리 정도로 추정했고, 2013년 하지홍은 10억 마리 이상으로 추정했다. 개의 진화 경로나 가축화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떤 학자는 야생 늑대가 인간의 무리와 함께 살면서 개로 종분화가 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다른 경우엔 늑대에서 생물학적으로 갈라져 나온 개의 조상 개체군이 인간에 의해 길러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개의 조상이 회색늑대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다른 생물종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종분화 이후에는 번식력이 있는 잡종이 생산되지 않는 것과 달리, 개과의 늑대, 코요테, 자칼, 개는 서로 자유롭게 교잡할 수 있으며 이들의 잡종 역시 번식력을 유지한다. 이는 이들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임을 나타낸다.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개는 늑대로부터 약 10만 년 전 이전에 분리된 것으로 추측되며, 2013년 개의 화석을 이용한 분석에서는 33,000 - 36,000년 전 사이에 분화가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개가 인간에 길들여진 시기는 약 1만 5천 년 전 이후 또는 1만 4천 년 ~ 1만 2천 년 전으로 추정되며, 최소한 9천 년 전에는 가축으로 기르고 있었다. 인간이 개를 기른 것을 증명하는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이라크의 팔레가우라 동굴에서 발견된 개 뼈이다. 마지막 빙하기인 1만2천 년 전 해수면이 낮아져 베링 해협이 육지가 되었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의 선조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개도 함께 데려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개들 가운데에는 다시 야생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딩고가 대표적이다. 딩고는 아시아 지역에서 사람들과 함께 3,000 - 4,000 년 전(또는 1만년 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야생화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딩고를 사냥하여 가죽을 이용하거나, 길들여 캥거루 사냥에 사용하였다. 개는 오랫동안 사냥과 목축, 경비 등의 목적으로 길러져 왔다.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목적에 따른 품종이 길러지고 훈육되고 있다. 사냥개는 사냥의 대상에 따라 수렵견, 조렵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냥 습성에 따라 시각형 하운드와 후각형 하운드로 구분된다. 눈으로 추적물을 쫓는 시각형 하운드로는 그레이하운드가 대표적이고, 후각형 하운드로는 비글이 대표적이다. 목축견으로는 올드 잉글리시 쉽독이나, 콜리가 대표적이며. 일본종인 아키타도 목축견이다. 수레나 썰매를 끄는 일을 하는 사역견으로는 시베리안허스키, 로트바일러, 마스티프 등이 있고, 경비견으로는 불테리어, 미니어처 슈나우저, 진도개와 같은 개가 쓰이며, 군견이나 경찰견으로는 저먼 셰퍼드, 도베르만핀셔와 같은 개들이 쓰인다. 세인트 버나드는 인명구조견으로 유명하다. 모든 품종의 개들이 애완견으로 길러지고 있으나, 특히 애완용으로 품종이 육종 된 것에는 푸들, 치와와, 시추와 같은 것이 있다. 최근에는 개의 역할이 더 넓어져,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맹인인도견이나. , 사람들의 건강 회복을 돕는 치료견 과 같은 역할을 하는 개들도 있다. 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애완 동물로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오늘날 애완견 대다수가 집 안에서 사람과 함께 사는 것과 달리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당에 개의 집을 따로 만들어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애완견의 반려 동물 역할이 더 부각되면서 개를 집안으로 들여 키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늘날 반려견은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반려견에 대한 이러한 시각 변화는 크게 보아 두 종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하나는 개를 독립적인 주체로 여기고 개의 개성과 습관등을 파악하며 소통하려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개다운 개를 기르기 위해 매일 규칙적인 훈련을 시키는 경우이다. 개가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식되면서 관련 상품 역시 광범위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사료와 급수기 같은 생필품뿐만 아니라, 향수, 의상 등의 상품이 팔리고 있으며, 미용, 치료, 훈련과 같은 서비스 시장의 규모 역시 광대하다. 전세계적으로는 약 4억 마리의 개가 살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반려동물 중 개는 90% 이상을 차지한다. 2013년 대한민국의 애견 시장 규모는 2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애견협회에서는 애완견을 목적으로 개량된 작은 품종의 개들을 특히 토이종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품종의 개들이 애완견으로 길러지고 있다. 원래는 사냥개로서 개량된 품종의 개들을 애완견으로 기르는 경우엔 훈련과 사육에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집안에서 기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비글, 미니어처 슈나우저, 코커 스패니얼을 3대 악마견이라 부르기도 한다. 애완견을 기르다 버리는 일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가장 많이 버려지는 품종은 몰티즈, 시추, 요크셔테리어 등이며 대형견으로는 진돗개가 많이 버려진다. 개는 여러 가지 일에 이용된다. 전통적으로 이용되었던 사냥이나 운반과 같은 일은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에서 산업적 의미를 잃었지만 스포츠로 변형되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캐나다 유콘 준주의 화이트호스에서 미국 알래스카주 페어뱅크스까지의 1,600 km 거리를 달리는 눈썰매 경주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눈썰매를 끄는 견종으로는 시베리안허스키가 대표적이다. 한편, 경비견이나 탐지견으로 이용되는 것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대한민국의 경우 2013년 기준으로 71마리의 마약탐지견이 세관에서 운용되고 있다. 마약탐지견으로는 주로 래브라도리트리버 종이 이용된다. 리트리버는 맹인인도견으로도 적합한 품종이다.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는 63 마리의 안내견이 맹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연간 10 마리 정도가 새로 안내견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연간 610 - 630 마리 정도의 안내견이 새로 배출된다. 사람들은 원하는 역할에 알맞도록 오래전부터 개에 대한 품종개량을 하여 왔다. 근대의 품종 분류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영국애견협회는 개의 품종을 크게 사냥개인가 그렇지 않은가로 나누었는데, 사냥개는 건독, 하운드, 테리어로 나누고, 개로는 유틸리티, 페스러럴, 토이 종을 포함한 7개 종으로 나누었다. 미국애견협회는 하운드, 스포팅, 테리어, 논스포팅, 워킹, 허딩, 토이, 미설레니어스 등 8개 종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애견협회는 미국의 품종 구분에 한국종을 추가로 넣어 분류하고 있다. 한국종 가운데 진도개와 풍산개, 삽살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경주개 동경이, 제주개 등에 대한 천연기념물 추가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 개의 품종개량은 사람의 손을 거친 인위적 선택이기 때문에 적은 수의 개체군에서 많은 자손이 나오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유전자 병목 현상은 유전적 대립 형질가운데 일부를 사라지게 한다. 개의 품종개량에서는 최초의 교배 개체군 선택에서, 그리고 품종을 공인 받기 위해 특정한 특징만을 남기는 과정에서 유전자 병목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적절한 유전적 건강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품종 자체가 특이한 유전적 질병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유전적으로 고관절이형성증을 갖는 경우가 있다. 또한 유전되지 않는 질병이라 할지라도 유전적으로 그 병에 취약한 품종이 있다. 도베르만과 로트와일러는 유독 파보바이러스에 취약하다. 전 세계에는 군종 개가 수백 종이 있다. 순종은 부모의 품종이 같은 경우이다. 부모의 품종이 서로 다른 개를 교배종이라 하고 여러 품종이 혼합되어 조상의 품종을 전혀 알 수 없을 때를 잡종이라 한다. 개의 골격은 아래와 같다.(아래 참조) 널리 알려진 바와 달리 개들도 색상을 구분할 수 있다. 색상의 구분은 눈의 망막에 있는 원추세포에서 담당하는데, 원추세포엔 세 종류가 있어서 긴 파장의 빛(붉은색)을 감지하는 것과 중간 파장(녹색), 짧은 파장(파란색, 보라색)을 감지하는 것으로 나뉜다. 개는 인간과 달리 긴 파장과 중간 파장을 감지하는 원추세포가 거의 없어 푸른색 계통만을 뚜렷이 구분한다. 인간에 비유하면 적녹 색맹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의 눈에는 원추세포가 적어 색상 분별력이 떨어지지만, 대신 간상세포가 많아 어두운 곳에서 물체의 윤곽은 쉽게 구분한다. 또한 점멸융합율이 높아 순간적인 움직임에 민감하다. 정지된 영상을 빠르게 바꾸어 보내면 잔상 효과에 의해 동영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인간의 경우 이것을 구분하는 점멸융합율은 약 1초당 60회 정도 이지만, 개는 70-80회에 달한다. 따라서 인간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자연스러운 동영상이라고 느끼지만, 개는 정지된 영상이 빠르게 깜박이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 때문에 개는 텔레비전 영상에 반응하지 않는다. 2011년 글로벌 식품 제조사인 네슬레는 개가 반응하도록 점멸율을 높인 광고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개는 약 40 Hz에서 60,000 Hz 사이의 진동수를 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청각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또한 개는 귀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세워 보다 집중하여 들을 수 있다. 개의 겉귀에는 17개의 근육이 있어 귀의 방향과 모양을 조정한다. 개가 냄새를 맡을 때는 평소 숨을 쉴 때와는 달리 킁킁거리는데, 콧구멍을 통해 들어온 공기를 가두어서 보다 냄새를 잘 맡기 위한 행동이다. 개는 한 번 맡았던 냄새를 기억하여 냄새를 식별한다. 개가 냄새를 기억하는 메커니즘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과 개 모두 코 속의 상피 조직을 통해 냄새를 맡는다. 공기 중에 기화된 분자가 상피에 달라붙으면 후각수용기가 냄새를 인식하여 뇌로 전달한다. 사람에게는 약 5백만 ~ 1천만 개의 후각수용기가 있는데 반해, 개의 후각수용기는 약 2억 2천만 ~ 10억 개나 된다. 블러드하운드 종의 후각수용기는 30억개에 달한다. 이 때문에 개는 사람에 비해 매우 민감한 후각을 갖고 있다. 개는 냄새를 보다 잘 맡기 위해 코끝을 늘 축축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자주 혀로 핥는다. 개는 뛰어난 후각을 사용하는 여러가지 일에 쓰인다. 마약의 탐지와 같은 일이 대표적이다. 인간 질병의 치료를 위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는데, 플로리다대학교 수의학과에서는 주인의 종아리에 난 악성종양을 개가 물어 뜯은 사례를 바탕으로 질병의 발견에 개를 이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개는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을 모두 느끼지만 사람의 미각세포가 9천여개인 것에 반해 개의 미각세포는 1천7백여개로 다른 감각에 비해 둔한 편이다. 고기 맛과 단 맛을 가장 잘 느끼며 짠맛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데, 개가 주로 섭취하는 고기에 염분이 충분하므로 염분을 따로 보충할 필요가 없어 짠맛을 느끼는 수용기가 적다. 개의 종류마다 달리 반응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의 음식들을 주면 안 된다. 개도 혈액형 구분이 있다. 1번에서 7번까지의 숫자로 분류되는 개의 혈액형은 최소 13개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항원-항체 반응을 보이는 대표적인 혈액형은 1.1, 1.2, 3, 4, 5, 그리고 7번 혈액형이다. 개의 피부는 두 종류의 털로 덮혀있다. 안 쪽에 부드럽고 미세한 털이 나 있고, 그 위로 길고 뻗뻗한 털이 난다. 개는 봄 가을에 털갈이를 한다. 두 번째 털은 개의 품종마다 달라서 곧게 자란 직모, 거칠고 뻣뻣한 직모, 곱슬거리는 긴털, 크게 구불거리는 털, 짧은 털 등 다양한 모양이 있고, 색상도 흰색, 검정, 붉은색을 바탕으로 다양한 변형이 있다. 개는 주인 또는 우두머리로부터 통제받고 명령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정확한 규칙과 규율에 따라 기르지 못한 개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신이 집단이나 가족의 리더가 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개와 사람은 의사소통하는 방법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개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 없으면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 행동을 가졌더라도 주인이 올바른 지식과 환경을 갖추고 개를 훈련한다면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으며, 전문 훈련사를 통해서도 행동을 교정받을 수 있다. 전문 훈련사들은 개의 심리, 행동, 학습 방식을 기본적으로 배우고, 여기에 자기 자신의 매 순간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들은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개에게는 잘못 해석될 수 있는 행동들을 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전문적인 반려견 훈련에서는 의외로 개의 행동보다는 주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개는 의사소통 시 청각 신호보다 시각 신호에 훨씬 많이 의존한다. 상대방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의 자세 변화, 미세한 몸짓, 심지어는 신체의 무게중심 변화까지 감지한다. 개와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청각 신호보다 시각 신호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세계의 소수 여러 문화에서 개고기를 먹는다. 중국은 고대에서부터 개고기를 주요 식육의 하나로 다루었다. 고대 중국 유적인 앙소·용안 유적에서는 돼지뼈와 함께 개뼈가 다른 동물의 뼈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발굴되었다. 논어에도 제사 때 개고기를 올린다는 구절이 있다. 중국은 여러 지방에서 한족(漢族)들과 한족(漢族)들을 지배한 만주족 등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중국뿐만 아니라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등 아시아 지역에선 오래전부터 개고기를 먹었다. 개고기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베르베르족이 사는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이나, 스페인과 스위스의 일부 지역에서도 먹었다. 한국에서 개고기는 오랫동안 즐겨왔던 음식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면서 개고기 식용이 활발해져 《음식디미방》, 《산림경제》, 《규합총서》 등 여러 책에 다양한 요리법이 소개되었다. 반면, 개고기에 강한 터부를 갖는 문화도 있는데, 조로아스터교는 개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고,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고대 페르시아는 개고기를 엄금하였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새로 편입된 아프리카 지역에 개고기 금지를 포고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구 유럽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다. 이때문에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비난 받기도 하였다. 최근 전통적으로 개고기를 먹던 문화권에서도 개를 반려 동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고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음식문화를 비난하는 것은 옮지 않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에서의 개는 가축법상 가축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도축법상 관련항목이 없어 식용을 목적으로한 개 도살은 원칙적으로 불법의 소지가 있다. 식육용 개를 사육하는 쪽에서는 이 때문에 도축과 조리 과정에 위생을 위한 규제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개고기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개를 가축으로 인정할 경우 애완견이나 유기견에 대한 광범위한 도살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개는 주인을 잘 따르며, 주인은 개가 쉬거나 잠을 잘 수 있는 개집과 음식, 생활공간을 제공하고 개는 주인과 그 재산을 지키거나 함께 어울리는 관계가 형성된다. 때로는 개가 주인의 감정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과거와 달리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개를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는 태도가 많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반려견을 기르는 대중이 개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이해하고 관련지식을 습득하려는 노력은 미흡한 상황이다. 한편 오랜 역사에 걸쳐 개를 기르면서 개와 관련된 이야기, 속담, 문화, 터부와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개는 충직의 상징으로 여겨져 견마지로(犬馬之勞) , 몽골제국의 사준사구와 같은 관용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지만, 가치 없는 것이나 난잡한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사람을 개에 빗대는 것은 심한 욕설이다. 한국에서는 개와 관련된 많은 속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거나 “서당 개 삼년에 풍월을 한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60 간지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개는 12지지 가운데 11번째인 술에 해당한다. 염소속 염소속("Capra")은 소과에 속하는 반추동물 속의 하나이다. 양 양(羊)은 소과에 속하며 학명은 "Ovis aries"이다. 기원전 8000-6000년경에 서아시아에서 가축화가 시작되어 현재는 품종이 1000여 종에 이른다. 양의 사육 목적은 털(양모)·고기·젖·모피 등으로 나뉜다. 어린 개체는 고(羔)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크다. 대형인 것은 몸길이가 수컷이 1.2m, 암컷이 90~100cm이고, 어깨높이는 수컷이 1m, 암컷이 90~100cm, 몸무게는 수컷이 115kg, 암컷이 95kg 정도이다. 양은 외양이 염소와 유사하지만 실은 염소와 다른 점이 많다. 양은 수염소처럼 수염이 없고, 독특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양은 발가락 사이에 분비선이 있는데, 염소는 없다. 수양의 뿔은 항상 바깥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뿔은 암수 모두 없는 것, 암수 모두 있는 것, 수컷에만 있는 것 등 여러 가지인데, 대개 수컷의 뿔이 크다. 주둥이는 좁고 털이 있다. 꼬리는 야생종은 짧고 가축인 양은 길며, 꼬리가 굵어 지방을 저장하는 품종도 있다. 양은 두 갈래로 갈라진 발굽으로 걷는다. 발목은 날씬하지만, 넓적다리는 근육이 많아서 빠르고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앞니와 송곳니는 아래턱에만 8개 있고 위턱에는 없다. 위아래 턱의 뒤쪽에 어금니가 6개 있다. 털 한 개의 표면은 작고 예리한 비늘이 빽빽이 늘어서 있어서 압축하면 서로 얽혀서 펠트(felt)가 된다. 털 한 가닥의 굵기는 품질이 좋은 레스터가 약 1/500cm, 잭슨메리노가 약 1/2,000cm 정도이다. 빛깔은 흰색·검은색·갈색·적갈색 등이 있고 얼룩무늬도 있다. 무리를 지어 살며,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풀·나뭇잎·나무껍질 등의 식물질을 먹는다. 1년에 1회, 가을철에 교미기가 돌아오는데 이 시기에 암컷은 17일을 주기로 발정기를 맞는다. 임신기간은 약152일 정도이다. 봄철에 한배에 한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갓낳은 새끼는 눈을 뜨고 양모상의 털이 있으며, 처음에는 어미의 젖만 먹지만 생후 1개월이 되면 먹이를 먹고, 3-4개월이 되면 젖을 뗀다. 두 살이 되면 출산이 가능하고, 수명은 7-10년 정도이다. 화를 잘 안 내고 온화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온순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양을 유순한 동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양은 실제로는 매우 억세고 사나운 동물이다. 염소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고집이 세서 다른 동물에게 박치기를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도 죽기살기로 달려들기 때문에 양치기들도 애를 많이 먹는다. 야생의 양은 활기차며 용기가 있고 독립적이다. 겨울의 무서운 폭풍도 겁내지 않고, 높은 산에도 오른다. 이들은 북반구에 있는 산맥과 고원에서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야생의 양은 무플런, 아르갈리, 비그혼 등이 대표적인데, 무플런은 몸높이가 약 70cm 정도이다. 수컷의 뿔은 크고 나선 모양으로 꼬여 있고 암컷은 뿔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작다. 사르데냐, 아시아의 카프카스, 인도 등지에 걸쳐서 야생한다. 아르갈리는 대형으로 몸높이가 약 120cm 정도이다. 몽골, 중국, 네팔, 부탄 등지에 걸쳐서 분포한다. 비그혼은 고산지대의 야생종으로 어깨 높이는 약 95cm 정도이다. 시베리아에서 북아메리카까지 분포한다. 가축양은 야생 양을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의 필요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처음엔 가죽과 젖을 얻기 위해 야생양을 사육했고, 점차 짐 운반용으로 쓰기도 했다. 예로부터 양털은 중요하게 인식되었는데, 품종 개량으로 야생 양의 거친 겉털은 오늘날의 부드러운 양털로 바뀌었다. 최근 200년 동안에는 주로 좋은 고기를 얻기 위해서 품종을 개량했는데,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800여 가지의 품종과 변종이 있다. 2018년 기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지고 있다. 야생종은 천적이 많고 가축종은 가장 주요한 천적이 치타이며 그 다음이 사자, 늑대, 코요테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양을 사육하고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가 양축산업의 선두 국가이다. 양에서는 털, 고기, 가죽과 접착제, 기름, 비누, 비료, 화장품 및 테니스 라켓용 줄의 원료, 재료를 얻는다. 특히 양털은 모직물·편물용 털실·이불 등을 만드는 데 이용한다. 양털은 다른 섬유에 비해 습기를 빨아들이는 힘이 강하고 곱슬기가 있어 탄력성이 좋다. 나일론이나 면에 비해 불에 견디는 힘이 강하고 양털로 짠 옷은 보온성이 우수하여 겨울철 추위를 막는 힘이 강하다. 양고기는 섬유질이 가늘고 고기의 질이 연하여 소화가 잘 된다. 어린양의 고기는 맛이 좋다. 특히 생후 1년 미만인 것을 램(lamb)이라 하여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고급식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양의 대표적 품종은 메리노·사우스다운·서퍽·링컨·레스터·롬니마슈·블랙페이스·코리데일·오스트프리지언·카라쿨 등이 있다. 프랑스 파리 랑부예 목장에서 에스파냐의 메리노종을 개량한 품종으로 몸집이 크다. 털길이는 5-8cm로 짧으며 양털 생산량은 수컷이 8-10kg, 암컷이 5-7kg 정도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산인데, 털이 가늘고 피부에 주름이 많다. 양털의 섬도(纖度)가 70수 이상인 종, 64수 정도인 종, 몸집이 크며 양털이 거칠고 긴 종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 메리노종 암컷과 다른 양을 교잡해서 만든 종으로 체질이 강건하고 기후·풍토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며 사료 이용성이 높다. 암수 모두 뿔이 없고 피부에는 주름이 없다. 양털의 질은 중간 정도이고 털의 길이는 10cm 정도이며, 양털 생산량은 암컷이 5.5kg, 수컷이 8kg 정도이다. 털과 고기를 모두 얻기 위해 사육하는 대표종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사육되고 있다. 영국이 원산지로 몸은 직사각형으로 튼튼하고 다리와 털은 짧다. 뿔은 암수 모두 없다. 털은 질이 좋고 고기는 맛이 좋으며 번식력이 강하다. 영국이 원산지로 몸집이 크고 비육이 잘 되지만 지방이 많이 끼는 단점이 있다. 털은 길고, 얼굴과 다리에 거친 털이 나 있다. 영국 링컨 지방이 원산지이다. 몸집이 크고 전신에 광택이 있는 물결 모양의 긴 털이 나 있다. 털길이는 20cm 정도로 가장 길다. 암수 모두 뿔이 없다. 젖을 얻기 위해 사육하는 종이다. 독일 북동부 지방이 원산지이다. 귀는 크고 약간 늘어져 있으며 유방이 잘 발달되어 젖생산량이 하루에 2-4kg 정도이다. 양털은 질이 좋지 못하나 고기의 질은 좋으며 새끼를 많이 낳고 습기가 많은 지방에서도 잘 견딘다. 모피를 얻기 위해 사육하는 종으로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이다. 몸집이 작고 털이 거칠며 회갈색이나 새끼의 털은 검정색이고 곱슬곱슬하다. 모피의 품질은 어릴수록 좋기 때문에 분만 예정일보다 일찍 낳은 새끼양의 털가죽은 브로드테일이라 하여 여성용 고급 코트를 만드는 데 쓰인다. 면양은 연 1회 봄에 털을 깎는다. 미국·아르헨티나·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는 연 2회 털을 깎기도 하는데 산모량(産毛量)은 늘지만 털길이가 짧아지므로 좋지는 않다. 털을 깎을 때는 면양을 무릎 사이에 앉히고 털 깎는 가위나 전기바리캉으로 배쪽에서부터 차례로 깎아나간다. 깎은 모피모양의 털을 테이블에 펼치고 더러워진 부분을 제거한 다음 나머지를 돌돌 말아서 갈무리한다. 털을 깎는 전날부터 절식시켜 두면 장염전(腸捻轉) 등의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발굽이 너무 자라면 부제병(腐蹄病)에 감염되기 쉬우므로 1년에 몇 차례 발굽깎기를 해 준다. 또 부제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황산구리액으로 발굽을 씻어 주는 것이 좋다. 면양은 생후 1-2주가 되었을 때 꼬리를 잘라 주는데, 이것은 몸통 뒷부분의 털이 분뇨에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 또 항문 주변에 외부기생충이 붙는 것을 막아 준다. 육용종의 수컷은 생후 10일 정도가 되면 거세한다. 거세하면 성질이 온순해지고 육질도 향상되지만 발육 면에서는 약간 불리하다. 양모는 굵기와 길이에 따라서 이용 방법이 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아름다운 양모를 생산하는 종은 메리노종이다. 짧은 털로는 방모사(紡毛絲)를 뽑아 멜턴이나 플란넬 등의 부드러운 천을 짜는데 주로 다운종의 털이 여기에 사용된다. 영국 산악종인 블랙페이스종과 중앙아시아산의 한양 등이 생산하는 거친 털은 하급 양모로서 카펫을 짜는 데 사용된다. 양고기는 섬유가 가늘고 부드러워 소화가 잘 되지만 특유의 냄새가 있어 요리를 잘 해야 한다. 양고기의 지방은 녹는점이 42℃로 높기 때문에 칭기즈칸 요리와 같은 구이요리에 알맞다. 양젖은 지방률이 6-8%로 높아 음용 외에 버터와 치즈의 원료유로도 이용된다. 모피는 아스트라칸과 같은 고급품 외에도 시베리아의 로마노프스키와 중국의 몽골양 등의 모피가 방한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낙타 낙타(駱駝, )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사막 지대에 사는 포유동물이다. 낙타는 주로 사막을 이동하거나 짐짝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가축이며, 육류·유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식용 가축이기도 하다. 단봉낙타는 야생이 전멸하고 가축화되었으나 일부 쌍봉낙타는 중아시아 지역 특히 몽골 고비사막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혹이 두 개이지만 쌍봉낙타와는 다른 종인 야생쌍봉낙타도 있고, 단봉낙타와 쌍봉낙타의 잡종인 잡종낙타도 있다. 어깨높이 1.8-2m, 몸무게는 250-680kg이다. 동아줄 같은 꼬리의 길이만도 50cm가 넘는다. 낙타는 빽빽하게 난 양털 같은 털 때문에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보인다. 털은 흰빛에서 검은빛을 띠는 것까지 다양하나 모두 갈색 계통이다. 봄에 털갈이를 하고 가을이면 털이 다시 자라 두툼하게 몸을 덮는다. 하지만 가슴과 무릎에는 털이 없는 부분이 있다. 목과 발은 길며 각 발에 발가락이 두 개씩 있고, 발가락의 앞부분에는 발톱 같은 발굽이 자란다. 두 개의 긴 발가락을 연결하는 넓적한 판으로 땅을 딛는다. 낙타가 땅에 발을 대면 이 방석 같은 판이 넓게 펴져 마치 사람이 눈 신발을 신고 눈 위를 걷듯이 모래땅을 잘 걸을 수 있다. 앞니는 위턱에 있으며 송곳니는 상하 양턱에 있고, 위는 3개의 주머니로 되어 있다. 뿔이 없으며 눈썹은 길고 두 줄로 되어 있어서 모래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나뭇잎이나 가지를 먹으며 가시가 있는 가지도 먹는다. 수일 간 먹지 않고 일할 수 있는데, 이때 혹은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거의 없어진다. 즉 필요한 수분을 등에 있는 혹의 지방을 분해해서 보급하는 것이다. 낙타는 물 없이도 며칠 심지어는 몇 달까지 살 수 있다. 사막민들은 낙타에게 대추야자 열매와 풀 또는 보리나 밀 같은 곡류를 먹인다. 낙타로 사막을 여행하는 도중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눈에 띄는 대로 먹이를 먹여 두어야 한다. 선인장 같은 사막식물도 먹는데 입 안에 상처를 입지 않고도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를 먹을 수 있다. 입 안의 표피는 매우 질겨서 날카로운 가시도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동물의 뼈, 물고기, 고기, 가죽, 심지어는 가죽 텐트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 낙타는 먹이를 충분히 씹지 않고 삼켰다가 나중에 입으로 되가져와 씹은 후, 위로 보내 완전히 소화 시킨다. 일반적으로 포유류는 더울 때 땀을 통해 수분을 증발시켜 몸을 식히지만, 낙타는 몸 속의 수분이 보존되도록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다. 대신 체온이 낮에는 6℃ 정도 올라가고 밤에는 내려간다. 더운 날씨에 낙타끼리 서로 몸을 비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막의 공기보다 다른 낙타의 몸이 더 시원하기 때문이다. 사막지역에서는 운송 수단, 양식, 옷, 주거 재료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하고, 농경지에서는 낙타를 밭갈이와 물레방아를 돌리는 데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 쌍봉낙타의 경우 사람에게 침을 뱉거나 발로 차기도 한다. 낙타 털로는 옷감이나 천막을 만들고, 가죽으로는 신발, 가방 등을 만들며, 뼈는 상아처럼 세공하여 값진 물품을 만든다. 물개아과 물개아과(Arctocephalinae)는 물개과의 아과이다. 고릴라 고릴라()는 사람과에 속하는 유인원으로 중부 아프리카에 서식하고 있다. 동부고릴라와 서부고릴라로 나뉘어 있고, 동부 고릴라는 다시 산지고릴라와 저지고릴라 로랜드고릴라 등이있다. 영장목 중 가장 큰 종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약간 크다. 신장(뒷발로 섰을 때의 높이) 2-2.3m, 두 팔을 벌렸을 때의 너비 약 3m, 몸무게 150-290kg이다. 팔은 짧아서 바로섰을 때 뒷발 무릎에도 못미친다. 엄지발가락이 크고 비교적 앞쪽에 위치하는데 사람의 발가락을 닮았다. 얼굴은 검고 코는 펑퍼짐한 납작코이며, 콧구멍은 크고 눈 위에 두툼한 뼈가 튀어나와서 사납게 보인다. 나이 든 수컷은 정수리가 헬멧을 쓴 것처럼 높아진다. 얼굴·가슴·손바닥·발바닥을 제외하고는 온몸이 검은색이나 갈색 털로 덮여 있다. 혈액형은 산악고릴라는 A형, 저지고릴라는 B형으로 알려져 있고 염색체는 48개이다. 열다섯 마리 이상의 가족무리를 이루며, 낮에는 삼림보다 약간 열린 곳에서 지내다가 저녁이 되면 삼림이나 덤불 속의 높이 1.8m 가량의 나무 위에 나뭇가지 등으로 잠자리를 만드는데 늙은 수컷은 나무 밑에서 잔다. 이 잠자리는 한 번 이상 쓰지 않는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등이 흰데 이것을 보고 영어에서는 화이트 백드 고릴라(White Backed Gorilla)라고 한다. 먹이는 버섯·셀러리·죽순나무의 연한 잎·양치류 등 섬유가 많은 식물질이며, 먹이를 손으로 집어서 먹는다. 물은 입술을 대고 마신다. 어린 것일수록 나무를 잘 타나 어른이 되면 몸이 무거워지고 민첩하지 못해 나무도 잘 오르지 못한다. 흥분하면 뒷발로 서서 이빨을 드러내고 가슴을 두드리며 '펑펑' 하는 소리를 낸다. 어둑어둑해지면 잠자리를 만드는데, 큰놈은 자신의 잠자리를 스스로 만들지만, 어린 새끼는 어미의 잠자리로 기어든다. 임신기간은 약 9개월로 한배에 한 마리를 낳는다. 갓 태어난 새끼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새끼의 무게는 약 2kg이며, 수컷은 생후 7-8년, 암컷은 6-7년 만에 성숙한다. 처음에는 어미가 새끼를 조심스럽게 안고 다니지만, 4개월이 지나면 제 힘으로 어미에게 매달린다. 그 후에 새끼는 어미의 등에 타기도 하고 3개월이 되면 기어다니고 6개월이 되면 걸을 수 있다. 3년까지는 어미의 등에 업혀다닌다. 중앙아프리카 우림 지대에 산다. 고릴라 속에는 두 종이 있으며, 각 종은 두 개의 아종으로 나뉜다. 고릴라의 DNA는 인간의 것과 97%–98% 일치하고, 2종의 침팬지 다음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 현생 고릴라속의 두 종 다 오랜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모든 고릴라의 혈액형은 A형 또는 B형이며, 염색체는 48쌍이다. 한때 1천만 년 전~8백만 년 전 사이에 인간과 분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2007년 8월 에티오피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고릴라 화석인 초로라피테쿠스가 발견됨으로써 인간과 침팬지의 공통조상에서 보다 앞서 갈려나가 독자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슴도치과 고슴도치과(: Erinaceidae)는 포유 동물의 한 부류로 진무맹장목에 속한다. 최근까지 고슴도치목의 유일한 목으로 분류했다. 한때 식충목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식충목은 다계통군으로 밝혀져 이제는 쓰이지 않는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고슴도치("Erinaceus europaeus")를 포함한다. 12속 43종이 기록되어 있으며, 10속 24종이 현존한다. 회색늑대 회색늑대(, )는 북아메리카, 유라시아, 북아프리카 황무지에 서식하는 개과의 종으로 이리나 말승냥이로도 불린다. 늑대는 수컷 평균 43~45 kg, 암컷 평균 36~38.5kg이고 어깨높이는 0.6~0.9m로 개과에 속한 종 중 가장 큰 종이다. 늑대는 썰매개 또는 저먼 셰퍼드와 모양과 비율이 비슷하나, 늑대가 큰 머리, 좁은 가슴, 긴 다리, 똑바로 선 꼬리와 큰 발을 가지고 있는 점이 다르다. 겨울 털은 크고 무성하며 털 색은 일반적으로 얼룩덜룩한 회색이지만 거의 순수한 흰색, 붉은색, 갈색, 검은색 등의 다양한 색도 있다. 늑대의 속은 개속에 속하며, 회색늑대는 더 작은 아속인 코요테나 황금자칼과 비교하여 형태학적으로 몸집이 큰 먹이를 사냥하는 데 갖춰주었고 좀 더 집단적인 성격을 갖추며, 고도의 의사소통을 갖추어서 전문종으로 분류한다. 늑대는 사회적 동물로서 한 쌍의 성체와 그 자손으로 구성된 핵가족의 부계사회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늑대는 최상위 포식자로 천적이 호랑이 , 불곰과 회색곰, 검독수리 그리고 인간밖에 없다. 다만 검독수리의 경우 중소형 개체만을 노리며 대형 개체를 사냥하지는 않는다. 늑대는 주로 대형 유제류를 먹이로 삼으나 이 먹이들이 부족한 경우에는 작은 동물, 가축, 썩은 고기, 쓰레기를 먹기도 한다. 회색늑대는 세계에서 가장 잘 연구된 동물 중 하나이며, 다른 야생 동물 종들보다 더 많은 연구 서적이 있다. 늑대는 인간과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보통 농업 사회에서 가축을 공격하는 경멸받는 존재로 인식되어서 사냥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일부 아메리카 토착민들에게는 존중되기도 하였다. 개의 선조는 늑대이며, 북아시아에서 가축화가 시작되었다. 인간 사회에서는 늑대가 중세 늑대의 인간 공격으로 발생한 광견병에 기인하여 두려움의 상징으로 퍼져 있었다. 광견병에 걸리지 않은 늑대가 주로 어린이들을 공격한 적도 있으나, 이는 특이한 경우이고 상대적으로 늑대는 인간 사회와 떨어져서 생활하며 사냥꾼과 목동들로 인해 인간이 두려운 존재로 습득되었다. 늑대는 사냥과 덫으로 인해 종 범위가 3번째로 빨리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광범위한 범위의 서식지와 안정적인 개체 수로 인해 세계적으로 종 감소 위협은 아니라고 인식되어 국제 자연 보호 연맹은 "관심 필요"의 낮은 등급을 부여했다. 영어의 "wolf"라는 단어는 고대 영어의 "wulf"로, 이는 고대 게르만어파 "*wulfaz"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하며 또 이는 고대 인도유럽어족의 "*wlqwos"/"*lukwos"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영문학에서는 앵글로색슨 왕과 그 전사 이름의 접두사와 접미사에 "wulf"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 예로, Wulfhere, Cynewulf, Ceonwulf, Wulfheard, Eanwulf, Wulfmeer, Wulfstan, Aethelwulf 등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늑대와 관련된 이름으로 기독교화 이전 게르만족의 전사들 이름에 Wolfhroc (Wolf-Frock), Wolfhetan (Wolf Hide), Isangrim (Grey Mask), Scrutolf (Garb Wolf), Wolfgang (Wolf Gait) and Wolfdregil (Wolf Runner) 등으로 늑대와 관련된 이름을 붙였다. 라틴어의 lupus는 사비니인의 외래어로 에드워드 톱셀에 따르면 원래 이 말은 그리스어로 사자발을 뜻하는 λεοποσ ("leopos")과 빛을 뜻하는 λουκᾶς ("loukas") 둘 모두로 유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어에서, 늑대를 이리라고도 했으며 문헌에서는 이리(狼)와 늑대(勒大)를 구별하기도 했다. 회색늑대는 영어명을 번역한 이름이나, 한반도에 살던 아종 늑대("C. l. chanco")를 포함하기 위한 이름으로 사용한다. 늑대 종의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조 후보는 북아메리카에서 마이오세 시기 서식한 토끼잡이늑대("Canis lepophagus")로 작고 좁은 두개골을 가졌으며 이 모습은 코요테와의 유전적 관계도 설명이 가능했다. 크고 뚱뚱한 보로파구스아과("Borophaginae")가 멸종한 후, 레포파구스는 몸집이 커지고 넓은 두개골을 가진 동물이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레포파구스는 텍사스 북부에서 발견되었으며 현대의 늑대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첫 번째 현대 늑대의 발견은 블랜캔(Blancan) 후기와 이르빙토닌(Irvingtonian) 초기이다. 이 토끼잡이늑대 종 중에는 현대의 아메리카붉은늑대와 비슷한 종이 있었으며 아마도 유라시아에서 베링 육교를 건넌 것으로 추측된다. 유라시아의 새로운 프리스콜라트란스("C. priscolatrans") 종은 점차 모스바체시스("C. mosbachensis") 종으로 대체되고 아라비아 반도와 서아시아에서는 현대 늑대와 밀접한 닮은 화석이 발견되며, 유럽에서는 늑대가 50만 년 전 빙하기 시기에 퍼졌다(늑대#아종 참조). 모르바체시스는 후에 현대 늑대로 진화한다. 늑대의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에서, 적어도 회색늑대의 뚜렷한 혈통은 가장 오래된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가 서식지인 아프리카늑대로 플라이스토세 중기에서 말기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인도 아대륙에 나타난 또 다른 늑대의 혈통은 카슈미르, 히마찰프라데시 주, 동부 네팔 및 티베트 일부 등 히말라야 동부가 서식지인 티베트늑대로, 이 종은 히말라야 주변의 지질과 기후 대변동이 있는 약 80만 년 전부터 서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인도 반도에 서식하는 인도늑대("C. l. pallipes")는 약 40만 년 전 히말라야 늑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티벳늑대는 15만 년 전 카슈미르 북서부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마지막으로 갈라진 이 혈통은 전북구에서 유럽과 북미로 확장하여 유전자 표지자 그림과 같이 유럽 늑대, 북미 늑대, 개와 비슷한 혈통에 속해 있다. 지금은 멸종한 일본늑대는 일본에 서식한 늑대로 이는 플라이스토세에 2만 년 전 아시아 본토에서 갈라지기 전에 동부 시베리아의 늑대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플라이스토세 동안, 쓰가루 해협의 확대로 혼슈와 홋카이도 섬이 분리되고 이는 일본 열도에서 서식한 가장 뚱뚱한 우제류의 멸종으로 이어지는 기후 변화가 찾아온다. 일본 늑대는 7천 년에서 13,000 년 전 기후학적, 생태학적인 이유로 섬의 왜소 발육화가 찾아온 것으로 추측된다. 홋카이도늑대("C. l. hattai")는 사촌격인 일본늑대("C. l. hodophilax")보다 크기가 크며, 이는 높은 고도에서 살며 큰 먹이를 얻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시베리아 늑대에서 분산된 유전자의 상호 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현대 늑대는 란촐라브린(Rancholabrean) 시기 북미로 확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큰 크기의 다이어늑대("Canis dirus")가 이미 북아메리카에 존재했으나, 이미 8천 년 전 멸종했고 큰 사냥감들은 없어졌다. 새로 도착한 회색늑대와의 경쟁에서 작고 빠른 먹이들을 먹이 위해 종 개체 수가 감소하였으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이어늑대의 멸종과 함께, 회색늑대는 유일한 대규모 확산적 갯과 종이었다. 북미의 재식민지화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나오며, 가장 특이한 종들이 주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 종들(북극늑대("C. l. arctos")는 북극의 높은 섬에 생존, 동부늑대("C. l. lycaon")는 북아메리카 동부 숲에서, 멕시코늑대("C. l. baileyi")는 멕시코 등지의 남쪽에 서식)은 유라시아에서의 이전 종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부늑대와 멕시코늑대는 일부 원시적인 특성과 체계적인 친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남부 해안의 화석에서 북극늑대와 비슷한 툰드라늑대("C. l. albus")가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큰 크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북미의 대형 회색늑대의 아종이 남아 있으며 현재 늑대는 더는 그곳에 거주하진 않지만 오래전에는 빙하 주기에 의해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멕시코늑대와 비슷한 작은 늑대가 캔자스와 남부 캘리포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플라이스토세 후기 늑대들의 북극 생활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며 유랑 생활을 하며 따뜻한 곳에서 대량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현재, MSW3에서는 37개의 아종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개와 딩고도 있다. 늑대의 아종은 보통 두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중앙과 동아시아의 늑대들은 북부와 남부늑대의 중간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늑대들의 뇌 크기 차이는 크게 밝혀져 있는데, 가장 큰 크기의 북유라시아의 늑대와 약간 작은 머리를 가진 북미 늑대와 가장 작은 남부늑대(북부늑대보다 5~10% 작음)로 구별할 수 있다. 현재 늑대의 아종은 대략 13~15종류의 아종으로 묶을 수 있다(단, 여기에 제시된 털의 색깔은 절대적이 아니다.) 실제 늑대를 길들이기 시작한 과정은 논쟁 중이다. 일반적으로 개는 품종개량의 결과로 생각되나, 늑대 성체가 일반적으로 사람이 길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서 중석기 시대 인간이 정착지를 이루기 시작했을 때 늑대가 새로운 생태적 지위(패총이나 쓰레기 매립지를 먹이로 삼는 등)를 이루었다는 자연선택이라는 이론도 있다. 늑대와 인간이 편리 공생을 이루었을 때, 수 세대 동안 늑대는 쓰레기를 먹고 자연 선택으로 인간으로부터의 도주 거리가 짧아지고 큰 먹이 사냥을 위한 중복된 기능이 사라지며 신체 변화를 일으켰다는 이론이다. 개는 늑대의 가장 가까운 친척 관계(회색늑대와 개 사이의 유전적 분산은 1.8%이며 회색늑대와 에티오피아늑대, 코요테 사이는 4%이다)이며, 개와 늑대의 행동 및 해부학적 구조 연구에서 개의 생리 및 유전성숙 및 아형보유 구조가 대부분 늑대와 비슷하다. 늑대의 청각융기는 볼록하며 원형이지만, 개의 청각융기는 작고 압축되었으며 약간 뒤틀렸다. 같은 개와 늑대의 크기를 비교할 시, 늑대는 20% 더 큰 두개골과 10% 더 큰 뇌 크기를 가졌다. 이 이해 부위의 노출은 뇌의 중간 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늑대의 이빨도 개와 비례해서 크며, 소구치와 대구치는 늑대가 덜 빽빽하고 더 복잡한 교두 패턴을 이룬다. 개는 전미골부샘(pre-caudal gland) 기능이 부족하고, 개가 대부분 1년에 두 번 발정하는 데 비해 늑대는 1번 발정한다. 개와 늑대는 유전적으로 가까우며, 수천 년 동안 많은 부분을 같이 생활해왔으나 보통 두 종은 일반적으로 야생에서 교배되지 않았다. 그러나 외톨이 늑대가 경비견이나 양치기 개가 다른 늑대 대신 무리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이후 세대에서 풍부한 자손을 만들 수 있었다. 만년에서 15,000년 전 북아메리카에서 늑대와 개의 혼혈로 흑색늑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럽의 늑대-개 혼혈화는 늑대의 혈통의 위협성을 느낀 늑대 보호 단체가 우려를 제기했으나, 일련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에서 개의 유럽늑대 침투교잡은 혈통에 상당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연구가 나왔다. 또한, 늑대와 개의 발정기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야생 늑대와 개의 혼혈 자손은 나올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순수 늑대처럼 혼혈종도 매년 번식하고 그 종의 짝짓기 계절은 석 달 전에 일어나나 주로 새끼는 겨울에 태어나기 때문에 이는 그 종의 생존 가능성을 줄게 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이누이트 부족들이 늑대의 체력을 개선하기 위해 늑대와 썰매개를 교미시켰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늑대의 혼혈화는 늑대의 체력이 썰매개보다 약하기 때문에 썰매 등 당기는 장비에 효과적으로 협조할 수 없다. 미국에서 확산한 늑대와 개의 포획 사육으로 약 30만 마리의 늑대개가 탄생했다. 대부분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개 품종은 스피츠 종이다. 적어도 두 종의 늑대개 품종인 자르늑대개(Saarlooswolfhond)와 체코슬로바키아늑대개(Czechoslovakian Wolfdog)는 유럽에서 모두 독일산 셰퍼드와 늑대의 혼혈 해서 탄생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수많은 유전자 연구로 북미의 회색늑대는 코요테와 혼혈화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늑대의 미소부수체와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에서,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남서부의 광범위한 늑대 종들이 코요테와 혼혈화 되었음이 밝혀졌고, 코요테와의 하플로타입은 동쪽으로 갈수록 증가하여 미네소타주에서 50%, 퀘벡주에서 100%를 기록했다. 이러한 혼혈종은 늑대보다 주로 작은 영역을 활보하지만, 코요테보다 몸집도 크고 활동 영역도 크다. 2011년, 48,000마리의 동부늑대(주로 앨곤퀸 주립 공원에 서식하는 종)와 붉은늑대(노스캐롤라이나주에 서식하는 종), 코요테 유전자의 단일염기 다형성 검사 결과, 이들은 회색늑대와는 별개의 종이며 늑대-코요테의 혼혈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동부늑대가 코요테-늑대 혼혈이 된 시기는 콜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시대 600년에서 900년 전 시작되었다고 추측한다. 동부 늑대는 이후 광범위한 선조인 회색늑대와의 여교잡이 진행되었다. 늑대와 황금자칼과의 혼혈화는 자칼의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로 세네갈에서 교잡되었음을 밝혀냈다. 회색늑대는 가느다라면서 크고 깊게 내려가는 흉곽과 경사진 등을 가지고 있다. 복부와 목의 근육이 발달하였다. 팔다리가 길고 강하며, 발은 비교적 작다. 앞발은 5개의 발가락이 있고, 또 각각 4개의 발톱이 있다. 앞다리는 겉보기에 가슴에 눌린 것처럼 보이고, 앞발꿈치는 안으로 굽고 발은 밖으로 굽으며 이 때문에 앞다리와 뒷다리가 모두 같은 줄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늑대의 발은 다른 갯과 동물의 발보다 더 길다. 이는 신속히 움직일 수 있고 많은 눈이 쌓인 바닥에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암컷은 수컷보다 얼굴과 이마가 좁고 얇은 목, 약간 짧은 다리, 작은 크기의 어깨를 가지고 있다. 사촌 동물(코요테나 황금자칼)과 비교하면 회색늑대는 넓은 코, 짧은 귀, 짧은 몸통과 긴 꼬리, 체중이 더 많은 특징이 있다. 회색늑대의 머리는 넓은 이마, 강한 턱, 길고 무딘 코를 가지고 있다. 귀는 상대적으로 작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빨은 크고 강하며, 다른 개과 동물보다 뼈 분쇄에 적합하게 생겼으나 하이에나 보다는 약한 힘을 가지고 있다. 송곳니는 강하면서 상대적으로 짧다(26mm). 늑대의 이빨은 750psi의 저먼 셰퍼드보다 강한 1,500psi의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이 힘은 뼈 대부분을 부러뜨릴 수 있다. 추운 기후에서, 늑대는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피부 근처의 혈액량을 줄일 수 있다. 발바닥(footpads)의 체온은 나머지 몸의 체온과 달리 조절할 수 있으며, 이는 얼음이나 눈과 접촉하면서 발바닥이 동상에 걸리지 않게 한다. 회색늑대는 보통 다른 동물에게 경고할 시에만 머리를 높게 든다. 보통은 느린 속도로 이동하나, 다른 생물체가 있을 때에는 발 하나를 더 이용한다. 이 걸음은 시간당 8–9 km/h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고, 이 때문에 늑대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맨 길에서는 늑대가 50–60 km/h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뛰는 늑대는 머리를 한쪽으로 젖혀지고 낮게 하며, 한쪽 귀를 앞, 뒤로 움직이게 한다. 이 자세는 늑대가 지속해서 뛰어난 청각을 활용할 수 있게 한다. 회색늑대는 특정 대형견을 제외하고 개과 동물 중 크기가 가장 크다. 회색늑대의 체중과 크기는 세계적으로 다르나 베르그만의 법칙에 따라 위도와 체중은 비례하고, 이에 따라 알래스카와 캐나다의 늑대는 중동과 남아시아의 늑대보다 3–6배 더 무겁다. 평균적으로 늑대 성체의 높이는 105–160cm이며 어깨높이는 80–85cm이다. 꼬리의 길이는 몸통과 머리 길이의 ⅔로 29–50 cm 정도의 길이이다. 귀의 길이는 90-110mm이며, 뒷다리의 길이는 220–250mm이다. 두개골의 길이는 평균 22~27cm이며, 폭은 12~15cm이다. 늑대의 체중은 지역별도 다양하나, 평균적으로 유럽 늑대는 38.5 kg, 북아메리카 늑대는 45 kg, 인도와 아랍 늑대는 25kg이다. 암컷 늑대들은 수컷 늑대보다 체중이 2~4 kg 더 적다. 드물게 알래스카, 캐나다, 소련 이후 국가들에서 54 kg 이상의 초대형 늑대들이 발견된 적도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무거운 늑대는 1939년 7월 12일 중앙 알래스카에서 사냥 된 회색늑대로 79.4kg이었고, 유라시아에서 발견된 가장 무거운 늑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우크라이나 SSR의 폴타바주 코벨랴키(Kobeliaky)에서 사냥 된 늑대로 약 86kg이었다. 회색늑대는 조밀하고 보송보송하며, 짧고 긴 잔털을 가지고 있다. 잔털과 일부 긴 털은 봄에 털갈이하고 가을에 다시 자란다. 긴 털이 목의 앞부분 일부와 목의 뒷부분에 많이 자란다. 특히 목 위쪽과 어깨에 긴 털이 생겨 문양을 만든다. 뺨에는 긴 다발의 털이 있다. 귀는 짧은 털로 골고루 덮여 있다. 팔꿈치 밑 아킬레스건에는 짧고 조밀한 털로 덮여 있다. 북부 지역의 기후에서 늑대가 뒷다리 사이 얼굴을 끼워 넣고 꼬리로 얼굴을 덮을 경우 −40° 온도에서 버틸 정도로 겨울의 털은 추위에 매우 강하다. 늑대 털은 개의 털보다 단열성이 높으며, 따뜻한 숨이 응축될 때 표면에 붙으면서 얼음이 되지 않는다. 따뜻한 기후에서, 털은 북부늑대보다 더 드물게 자란다. 암컷 늑대는 수컷 늑대보다 다리가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고, 일반적으로 매끄러운 털을 가지고 있다. 늙은 늑대는 코에서부터 이마를 따라 흰 털이 나 있다. 겨울 털은 암컷이 배 주변의 털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는 길다. 머리 한가운데의 털 길이는 60–70mm이다. 어깨를 보호하는 털의 길이는 일반적으로 90mm를 넘지 않지만, 일부는 110–130mm도 도달할 수 있다. 털의 색은 다양한 명암이 있어 순수한 하양부터 크림색, 회색, 갈색, 검정까지 다양한 색이 있다. 털 색의 변화는 위도가 높아질수록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암수 차이에 따른 털 색의 차이는 거의 없고, 암컷의 털이 약간의 붉은 색조가 있다. 털 색은 카무플라주의 목적이 아니며, 일부에서는 늑대 털의 혼합된 색상들이 상호 작용하여 특정 동작을 강조한다는 주장도 있다. 흑색늑대(늑대개 혼종 중 하나)는 개와 늑대의 상호 작용으로 인한 야생 늑대 개체 수의 감소로 유라시아에서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흑색늑대는 북미에서 더욱 일반적인 표본이 되며, 옐로스톤 주립공원의 늑대 개체 수 절반 이상이 흑색늑대이다. 회색늑대의 후각은 일부 사냥개에 비해 약하지만, 맞바람이 부는 2–3km에서 떨어진 고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토끼나 새의 숨겨진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청각은 여우보다 더욱 선명하게 듣고, 26kHz의 주파수까지 들을 수 있으며 이는 가을의 잎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도시전설에서 늑대가 현악기의 소리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으며, 사육 늑대의 경우 낮은 소리의 현악기 화음을 듣고 고통을 느낀다는 결과가 있다. 야간 시력은 다른 개과 동물보다 더욱 뛰어나다. 비록 몇몇 혼자 생활하는 늑대도 존재하지만, 늑대 대부분은 사교적인 동물이다. 늑대의 기본 사회 단위는 한 쌍의 성인 자손으로 구성된 무리이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서로 만난 한 쌍은 매년 새끼를 낳으며 새끼가 성인이 되어 흩어지기 전 10–54달 동안 무리에 속하게 된다. 평균적인 무리의 동물들은 성체 1–2마리와 청소년 3–6마리, 새끼 1–3마리로 구성되어 5–11마리 정도 이루며, 일부 2, 3개 정도의 무리는 최대 42마리의 늑대로 구성된 거대 무리도 있다. 새끼들이 자라면서 무리 내에서의 성성숙과 경쟁의 시작으로 무리에서 흩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무리는 보통 서로 무관한 암컷과 수컷이 만나 이루어지며, 다른 적대적 무리가 없는 곳으로 떠난다. 늑대 무리는 거의 다른 늑대들을 감싸지 않고 대부분 죽인다. 다른 늑대를 맞이하는 드문 경우에는, 거의 미숙한 동물(1–3년생 정도)이며 쌍들이 사육 권리를 가지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어떤 경우에는, 떠돌이 늑대들이 다른 늑대의 사망 후 무리에 들어가기도 한다. 우제류가 풍부한 시기 동안(이주, 분만 등), 다른 늑대 무리의 늑대가 한때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 늑대는 매우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며, 생존을 위해 안정적인 먹이의 공급이 필요한 최소 지역보다 더욱 큰 지역을 가진다. 이 지역의 크기는 사냥 가능한 먹이의 양, 무리 새끼의 나이에 따라 달라지며 먹잇감이 적은 경우나 새끼가 6개월이 되어 성인과 비슷한 영양 요구량을 가질 때 지역의 크기가 커지게 된다. 늑대 무리는 먹이를 찾아 계속 이동하며, 이는 하루 영역 25 km/d의 9% 정도를 차지한다. 늑대의 삶 전체 동안 이용하는 핵심적인 평균 영역은 35Km²이며, 평균 50%를 이곳에서 보낸다. 먹이 밀도는 이 지역의 주변 지역에서 훨씬 높은 경향이 있으며, 늑대는 가능한 한 지역의 가장자리에서의 사냥은 다른 늑대 무리와의 심각한 조우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피하는 경향이 있다. 기록상 가장 작은 영역은 미네소타 북동부의 6마리 늑대들로 구성된 무리로 33Km²의 영역이며, 가장 큰 영역은 알래스카의 10마리 늑대로 구성된 무리로 6,272Km²이다. 일반적으로, 늑대 무리는 자기 지역에서 정착하게 되며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계속 익숙한 범위에서 맴돌게 된다. 늑대는 영역 표시를 하며 울부짖거나 직접 공격으로 자기 영역을 지킨다(늑대#의사소통을 참조하라.) 늑대는 자기의 냄새와 채취로 영역을 표시한다. 늑대가 묻힌 채취는 자기 영역에 걸쳐 240m 밖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채취는 2–3주 동안 지속되고, 보통 바위나 나무, 큰 동물 뼈에 묻힌다. 채취 표시나 하울링 등이 실패할 경우, 다른 늑대 무리로부터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서로 싸움을 하기도 한다. 미네소타 주와 데날리 국립공원에서 사망한 늑대 중 14–65%가 다른 늑대와 싸운 것이 원인일 정도로 싸움은 늑대 사망의 주요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회색늑대는 단혼이며 쌍의 둘 중 한 마리가 사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 같이 살아간다. 한 쌍의 늑대 중 한 마리가 사망하면 곧바로 다른 쌍을 찾는다. 종종 수컷은 특정 늑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짝이 없는 암컷은 드물다. 만약 수컷 늑대가 자기 영역에서 짝을 찾지 못할 경우, 이 늑대는 다른 늑대 무리에서 번식한 암컷 늑대와 짝짓기한다. 이러한 늑대를 "카사노바 늑대"라고 하며, 늑대 무리의 수컷과는 달리 이들은 암컷과 교미하여 페어 본드를 만들지 않는다. 몇몇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늑대 무리는 암컷이 여러 번 번식하기도 한다. 회색늑대에게도 동성애 습성이 관측된다. 무리 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암컷에게 발정기가 찾아오면 수컷 늑대가 다른 수컷 위에 자주 올라타곤 한다. 늑대의 첫 번식 시기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나, 먹이가 풍부하거나 늑대 개체 수가 많을 경우 늑대는 더욱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어린 시기에 번식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육 늑대가 9–10개월 이내에 번식 시기에 도달하고, 야생의 최연소 번식 늑대는 2년이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암컷은 매년 생식이 가능하나 매년 평균적인 개수의 동복자를 만든다. 코요테와는 달리, 회색늑대는 결코 폐경기가 찾아오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발정은 겨울에 나타나고 출산 경험이 있는 암컷은 2–3주 이전 정도 젊은 암컷보다 빨리 찾아온다. 임신 중, 암컷 늑대는 다른 무리와의 폭력적인 조우를 피하려고 자신 영역의 가장자리로 이동하지 않는다. 늙은 암컷은 보통 동복자의 동굴에서 새끼를 나고, 젊은 암컷은 자신의 동굴에서 출산한다. 임신 기간은 62–75일이며, 새끼는 보통 여름에 출산한다. 늑대는 다른 개과 종과 비교해 작은 동복자에서 많은 새끼를 출생한다. 평균적으로, 하나의 동복자에 새끼 5~6마리가 있고, 먹이가 풍부할 경우에는 돌보는 새끼가 많아지며 동복자도 증가하지만, 14–17마리 정도의 매우 많은 새끼는 1% 이하에 불구 하다. 새끼는 보통 봄에 태어나 먹이에 상응하는 인구 증가세를 보여준다. 새끼는 태어날 땐 실명과 청각 장애 상태이며 짧고 부드러운 진갈색 털로 덮여 있다. 출생 당시 몸무게는 300–500g이며, 9–12일 후 앞을 보기 시작한다. 송곳니는 한 달 후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끼는 처음 3주 동안 동굴에 둔다. 1달 반 후, 새끼는 위험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 만큼 민첩해진다. 어미 늑대는 처음 몇 주 동안 동굴을 떠나지 않고 젊은 늑대가 주는 음식에 의존한다. 새끼는 3–4주 후부터 딱딱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새끼는 출산 후 첫 4달 동안 무게가 30배 증가하며 매우 빠른 성장 속도를 보인다. 늑대 새끼는 3주부터 싸우는 연습을 시작하지만, 이와 달리 여우나 코요테는 최대한 무는 것을 줄인다. 일반적으로, 실제적인 싸움은 위아래 계층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5–8주 후부터 시작된다. 코요테나 여우와는 달리, 늑대는 놀이 행동이 나타나기 전부터 싸움 행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을이면, 새끼는 큰 먹이를 사냥하며 성체와 같이 사냥에 동반 가능할 정도로 성장한다. 늑대는 굴에서의 휴식은 춥거나, 습하고 바람이 강한 날씨일 때 쉬고 낮에 건조하거나, 조용하고 따뜻한 날씨에 늑대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휴식한다. 봄가을 동안 늑대는 더욱 활발해지며 자신의 영역 아무 곳에서나 공개적인 곳에서 눕기도 한다. 실제로, 굴은 여름 동안 새끼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굴을 구축할 때 암컷은 바위의 갈라진 곳 등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에 굴을 만들고 절벽이나 돌출된 구멍을 두꺼운 식물로 가린다. 때때로, 이 굴은 여우, 오소리나 마멋 등 작은 동물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굴이기도 한다. 이 적합한 굴은 종종 확장하거나 부분적으로 고치기도 한다. 드문 경우지만, 암컷이 스스로 작은 1–3개의 굴을 파기도 한다. 늑대는 기생충 예방 차원에서 여러 개의 굴을 같은 위치에 만들지 않는다. 굴은 보통 물에서부터 500m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만들고, 보통 남쪽으로 굴을 만들어 햇빛이 잘 들어오게 하며 상대적으로 쌓인 눈들을 자유롭게 두기도 한다. 휴식 장소, 새끼를 기르는 곳, 먹이 보관 굴 등은 일반적으로 늑대 굴 주변에다 둔다. 굴 주변에서 나오는 악취 등은 까치나 큰까마귀 등의 조류를 유도하게끔 한다. 굴을 위해 필요한 곳이 주변에 있어 늑대 굴에는 보통 가족 동물도 같이 산다. 늑대는 주로 인간의 눈을 피해 굴을 짓지만, 늑대는 건축물, 도로, 철도 주변에 굴을 짓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늑대의 지능 연구는 정량화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연구 와 소규모 실험실 연구가 있지만, 종의 기억 능력과 연관 사건을 기억한다는 연구가 있다. 그레이트플레인스에서 아메리카들소가 멸종되는 동안, 늑대는 총소리를 따라 하는 법을 익히고 사냥꾼이 먹이를 가져가기 전에 먼저 들소를 가져가게 되었다. 북부 몬태나 주에서, 늑대가 공중의 사냥꾼들에게 공격받자 늑대들은 항공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개방된 장소에서 도망치게 되었다. 반대로, 항공기를 이용한 연구에서 늑대가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얻을 경우에는 매우 낮게 근접하는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사냥할 때, 무스나 작은 사슴 두 종이 있으면 사냥하기 쉬운 후자를 사냥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 늑대의 기억력은 동물학자 조지 미바르트가 길들어진 늑대에 대해 3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후 다시 만날 때도 주인을 알아본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과격하지 않은 늑대에 대해, 늑대는 무장인과 비무장인을 구별할 수 있으며, 전형적인 무장인인 경우의 태도에 확신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성체 늑대는 굴을 만들 때 숲이나, 바람, 썩은 나무, 기타 자연물 등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숨기는 법을 알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함정에 걸린 적이 있던 늑대의 경우, 함정을 피하거나 피해 없이 함정을 건드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커럼포우의 왕 로보 이야기(Lobo the King of Currumpaw)에서 자연주의자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은 초기 늑대를 잡는 시도가 실패할 경우 늑대는 함정을 피하거나 무시한다고 적었다. 늑대는 훈련할 수 있지만, 개에게서 보이는 만큼의 훈련도를 얻기는 힘들다. 늑대는 불쾌한 자극과 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개 대부분에게서 얻는 신뢰도보다 더 많거나 비슷한 일을 해야 한다. 심지어는, 늑대는 특정 명령을 반복해서 받는 경우 지루해하며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있다. 늑대는 긍정적인 반응과 보상에 더욱 많은 반응을 보이지만, 간단한 칭찬 같은 경우에는 다른 개과 동물과 달리 충분하지 않게 받아들인다. 개와 달리, 늑대는 음성보다 수신호에 더욱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늑대를 훈련하는 대부분의 시도는 작업견 등에서와 같은 실패를 불러왔다. 독일 생물학자 에릭 지먼은 자신의 사육늑대를 썰매개로 만들고자 시도했고, 늑대는 마구를 매고 적극적으로 썰매를 끌긴 했으나 개인 공간의 확보 위해 서로 싸우고 한 번 지치면 명령을 듣지 않으며 다른 야생 동물에 의해 집중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존 제임스 오듀본은 켄터키주에서 늑대에게 사슴 사냥 훈련이 가능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헨리 와튼 슈메이커(Henry Wharton Shoemaker)는 서부와 중부 펜실베이니아주의 정착민들은 늑대를 사냥개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이 쓴 "자연사"에서, 페르시아의 늑대들은 춤을 추도록 훈련된다는 기록을 남겼다. 비록, 늑대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큰 무리보다 두 정합 쌍의 무리가 더욱 사냥 확률이 높고, 혼자 있는 늑대의 경우에는 들소나 사향소 같은 자기보다 큰 먹이를 죽이는 경우도 있음을 밝혔다. 늑대 사냥은 다음의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옐로스톤에 늑대가 처음 재도입 되었을 때 처음에는 엘크사슴만을 사냥했었다. 재도입된 늑대무리들끼리 서로 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때 당시 큰 세력을 형성했던 드루이드 봉우리 무리가 몰리 무리와 다른 무리를 몰아내면서 엘크사슴이 풍부한 라마 계곡(Lamar Valley)을 독차지하게 되었고, 몰리 무리를 비롯한 다른 무리는 엘크사슴이 풍부한 곳을 빼앗기고 들소가 흔한 지역으로 쫓겨나면서 들소를 사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들소 사냥에 서툴렀지만, 점차 들소 사냥을 하는 방법을 쌓게 되었으며 현재는 진흙탕 샛강 무리(Slough Creek Pack)가 대표적인 들소 사냥꾼이다. 북극 지역의 경우에는 들소나 엘크사슴 보다는 순록, 사향소, 레밍쥐를 비롯한 설치류와 토끼를 흔히 사냥한다. 철마다 오는 순록으로 늑대들은 늙거나 병든 개체를 사냥함으로써 순록과 사람(크릭 족이나 내륙의 이누이트들 같은 북극권 수렵 원주민들)에게 건강한 개체를 남겨 줌으로써 이득을 가져다준다. 순록이 없을 때에는 주로 설치류를 잡아먹는데 순록사냥이나 사향소 사냥처럼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찾아서 먹는다. 새끼를 키울 때도 쥐고기로 키운다. 늑대들은 어류도 잡아먹는다. 한 예로, 알래스카 남서부 끝에 있는 큰곰자리 숲이라는 곳에서 늑대들은 연어들이 산란하러 올 때마다 연어를 사냥한다. 송어 또한 이들의 먹잇감이다. 이것은 그들의 덩치 큰 친척인 다이어늑대와 대조되는 특징이다. 다이어늑대들은 커다란 들소나 야생마를 주로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에 사는 늑대들은 무리를 지어 살지만, 사냥을 할 때에는 독자적으로 나서서 그곳에 흔한 설치류들을 사냥한다. 실제로 죽이는 방법은 종마다 다르다. 몸집이 큰 먹이일 경우, 성체 늑대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동물의 측면이나 후면을 노린다. 순록 같은 대형 먹이는 부드러운 회음 부분을 물려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이러한 상처의 길이는 보통 10~15cm이며, 건강한 사슴도 쓰러질 정도로 출혈이 심해지는 회음 부분을 문다. 양이나 노루 같은 비슷한 크기의 먹이를 잡을 경우, 늑대는 신경계와 목동맥을 물어 몇 초 만에 먹이를 죽인다. 쥐와 같은 작은 먹이를 사냥할 경우, 높은 곳에서 재빨리 뛴 다음 앞발로 고정해 움직이지 못하게 잡는다. 먹이들이 사냥하기 쉽고 풍부한 경우에 늑대는 가끔 과잉 살해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개에게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야생의 경우에는 매우 드문 일이다. 야생에서, 과잉 살해는 보통 늦겨울이나 봄에 눈이 유난히 많이 쌓인 경우(그러므로 먹이가 잘 움직이지 못함) 또는 굴에서 양육하는 기간 늑대가 많은 수의 먹이가 있어야 하는 경우 일어난다. 늑대가 목을 물어 빨리 죽일 수 있는 중간 크기의 먹이들이 과잉 살해에 가장 취약하다. 성체 늑대가 새끼에게 사냥을 가르칠 때에도 과잉 살해가 발생한다. 일단 먹이가 쓰러지면, 늑대는 흥분하여 시체의 모든 방향에서 달려들어 먹이의 큰 덩어리 부분부터 먹기 시작한다. 번식 중인 쌍의 늑대는 새끼를 계속 낳기 위해 음식을 독점한다. 먹이가 부족하면, 이는 늑대 구성원 중 새끼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된다. 일반적으로 먹이를 잡은 번식 중인 쌍이 먼저 먹이를 먹은 이후에는 오랜 사냥 후 나머지 구성원들이 방해받지 않고 먹을 수 있게 한다. 번식 중인 쌍 늑대가 먹은 후에는, 나머지 구성원들이 시체 조각들을 찢은 다음 한적한 지역으로 옮긴다. 늑대는 심장, 간, 허파, 위 내벽 등 먹이의 큰 내부 기관부터 먹기 시작한다. 콩팥과 비장은 밖으로 노출되면 먹고, 그다음에는 근육을 먹는다. 한 마리의 늑대는 한 번에 자기 몸무게의 15–19% 정도의 먹이를 섭취한다. 회색늑대의 의사소통 행위는 단체 생활과 사냥 습관 때문에 코요테나 황금자칼보다 복잡하다. 덜 사교적인 개과 동물은 간단한 시각적 신호로 의사소통하지만, 늑대는 더욱 자세하고 미묘한 시각적 신호가 있다. 자연적일 때, 늑대는 다리를 굳히지 않고 꼬리를 느슨하게 내리며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귀는 특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리킨 채로 서 있다. 늑대의 행동 의사소통은 꼬리와 소름 등의 다양한 구성으로 표현한다. 공격적이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늑대는 움직임이 신중하고 느린 것이 특징이며, 몸이 높은 자세이며 목뒤털이 올라가지만, 복종하는 늑대인 경우에는 자세가 낮고 자신의 털, 귀, 꼬리를 낮춘다. 번식 가능한 수컷은 자기 무리 부하의 가족을 보았을 때 꼬리를 척추와 수평으로 든다. 복종하는 행동은 수동적 과 능동적 두 형태로 이루어진다. 수동적인 방식은 보통 지배적인 동물이 다가왔을 때 보여주는 방식이며, 복종하는 늑대는 지배적인 늑대가 회음의 냄새를 맡도록 한다. 능동적인 방식은 지배적인 늑대를 만났을 때 낮은 자세로 접근하며 다른 늑대의 얼굴을 핥는 식으로 인사하는 방식이다. 늑대가 함께 있을 때, 일반적으로 이들은 코나 턱을 서로 밀거나 뺨을 맞대고 얼굴을 핥는 행동 등을 한다. 서로의 코 부분에 입을 대는 것은 친절을 표시하는 것이고, 이빨이 코 부분에 닿는 것은 지배를 뜻한다. 늑대는 보통 사냥 직후 무리를 다시 모이게 할 때 정보를 알리기 위해, 특히 굴에서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도 서로 의사소통을 하게 할 수 있도록 소리를 이용한다. 늑대의 울부짖음은 가장 좋은 조건에서 최대 130 km³ 밖의 영역에서도 들을 수 있다. 늑대의 울부짖음은 큰 개의 소리와는 구별된다. 수컷 늑대는 베이스 옥타브의 O 소리로 짖고, 암컷 늑대는 코에서 바리톤 옥타브의 U 소리를 낸다. 새끼는 울부짖지 않으며, 한 살 정도의 어린 늑대는 옙(yelps)같이 개와 비슷한 짧은 울음소리를 낸다. 늑대 울부짖음의 주파수 대역은 150 ~ 780Hz를 기본 주파수로 하여 12음 위의 함축된 화성을 낸다. 보통 피치는 일정히 유지되나, 4~5배 정도 높게 올리거나 내릴 수 있다. 이 울부짖음은 무리를 부를 때 사용하며, 부드러운 소리인 시작되는 소리는 수리부엉이의 소리와 비슷하다. 먹이를 쫓는 중에는 고음에서 두 음을 오가는 울부짖음을 낸다. 먹이가 가까워지면 짧은 짖음과 울음소리를 혼합하여 낸다. 함께 울부짖을 때에는 늑대가 같은 수에서 조화롭게 합창하여 실제보다 더 많은 늑대가 있는 것처럼 속인다. 외톨이 늑대는 일반적으로 다른 늑대 무리가 있는 지역에서는 울부짖지 않는다. 늑대들은 비가 오는 날씨거나 자기가 만족스러운 경우에는 울부짖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유럽 늑대는 북미 늑대보다 훨씬 더 길고 크며, 첫 번째 음절을 강조하는 등 늑대의 울부짖음은 지역마다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둘은 상호 의사 소통성으로 북미 늑대가 유럽 늑대의 울부짖음의 차이점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늑대의 여러 소리에는 으르렁거리는 소리(growls), 짖는 소리(barks), 낑낑거리는 소리(whines)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짖는 소리는 320–904Hz를 기본 주파수로 하여 놀란 늑대가 내는 소리이다. 늑대는 개처럼 크고 길게 짖지는 않지만, 몇 번 짖고 나서 위험으로부터 돌아간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380–450Hz를 기본 주파수로 하여 늑대가 먹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내는 소리이다. 일반적으로 새끼에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난다.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를 동반하며 높은 음조를 내는 낑낑거리는 소리는 공격을 위해 돌진할 때 내는 소리이다. 낑낑거리는 소리는 이 외에도 불안, 호기심, 탐구, 친밀감과 인사, 새끼에게 먹이를 줄 때 등 다양한 때에 나는 소리이다. 늑대의 후각은 가장 예민하고 근본적인 의사소통의 역할을 한다. 늑대의 얼굴, 입술, 발가락 뒤에는 아포크린선이 많다. 이 내분비선에서 나오는 냄새는 늑대의 미생물상과 식슥관에 따라 다르며, 각자 고유한 후각적 지문을 가진다. 아포크린과 에크린한선이 섞여, 늑대가 땅을 긁으면 그 곳에 냄새가 배이며 이는 배뇨 후와 번식기에 깨끗하게 하기 위해 한다. 늑대 뒷면 머리카락의 모공은 아포크린선과 피지선이 나오는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뒷면의 피부는 접히기 때문에 이 선에서 나오는 물질로 세균이 서식하는 미기후가 만들어진다. 소름이 일어나는 동안, 뒤면의 머리카락이 나오고 피부의 주름이 펴저 냄새가 나오게 된다. 꼬지전분비선은 늑대끼리 싸울 때 꼬리에서 나오는 선으로 꼬리를 높이며 분비하므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향선이다. 늑대는 항문낭에 아포크린선과 피지선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항문낭 분비물의 구성 요소는 계절과 성별에 따라 다르므로, 분비물은 성별과 생식 상황을 알 수 있게 한다. 포피선의 분비물은 호르몬의 상태 또는 사회적 지위를 알려주며, 조사에서 지배적인 늑대는 부하를 통해서 포피선의 냄새를 알려주는 것이 알여졌다. 번식기동안, 암늑대는 질 분비물로 암컷의 생식 상태를 먼 거리의 수컷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배뇨는 늑대의 후각적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곳의 기능이 동물들의 경계를 나타낸다는 것에 동의한다. 늑대의 소변은 늑대가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며, 또한 침입한 영역에서는 다른 늑대나 개과의 향과 같이 난다. 다리 올림 배뇨(RLU)는 암컷보다 수컷이 더 일반적이며, 이는 늑대가 감지 가능성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마크는 늑대의 높이도 알려준다. 일반적으로 지배적인 늑대가 RLU를 사용하며, 하위적인 수컷은 어린 선 자세를 이용한다. 회색늑대는 대형 유제류를 먹이로 하기 때문에 전문종으로 분류한다. 유라시아에서, 인간이 많은 활동을 하는 구역의 늑대들은 가축이나 쓰레기 먹이에 의존하지만, 러시아나 동부 유럽 산악 지역 등 야생의 늑대들은 무스, 말사슴, 유럽노루, 멧돼지 등 대형 유제류를 먹이로 삼는다. 기타 초원의 늑대들은 순록, 큰뿔양, 무플론, 유럽들소, 사이가산양, 염소속, 샤모아, 들염소, 다마사슴, 사향노루 등을 먹이로 삼는다. 북미 늑대는 쓰레기나 가축에 의존하는 도시 늑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적당한 서식지를 갖추고 있다. 북미의 늑대가 선호하는 먹이는 무스, 흰꼬리사슴, 와피티사슴, 뮬사슴, 큰뿔양, 돌산양, 아메리카들소, 사향소, 순록 등이 있다. 늑대는 주로 대형 유제류를 먹지만 다른 먹이도 가리지 않는다. 늑대가 보완하기 위해 먹는 소형 먹이로는 마멋, 토끼, 오소리, 여우, 족제비, 얼룩다람쥐, 생쥐, 햄스터, 들쥐 등 설치류 및 기타 식충목이 있다. 또한 물새의 알도 자주 먹는다. 이러한 먹이가 부족한 경우, 늑대는 도마뱀, 뱀, 개구리, 드물게는 두꺼비 와 대형 곤충도 또한 먹이로 삼는다. 먹이가 부족한 시기에는 소 도축장 등에서 나온 부육을 먹기도 한다. 거친 겨울 동안 종종 무리에서 약하거나 부상당한 늑대를 공격하거나 죽은 무리의 늑대를 먹기도 하는 것 등 동종포식도 종종 있는 일이다. 아스트라한의 늑대 무리는 카스피 해에서 카스피물범을 사냥한 적도 있으며 알래스카와 서부 캐나다의 늑대 무리들은 연어를 사냥한 적도 있다. 인간은 거의 먹이로 노리지 않지만 가끔 공격하는 사례가 있다. 늑대는 장과, 산딸기, 은방울꽃, 월귤나무 열매, 블루베리, 월귤 등 과일과 채소로 식습관을 보충한다. 가지과, 사과, 배나무속의 과일을 먹기도 한다. 여름에는 멜론을 먹기도 한다. 늑대는 먹이를 2주간 먹지 않아도 근육 활동이 약화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 음식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잘 자란 늑대는 가을-겨울 기간 동안 피부 아래, 심장 주변, 창자, 신장 및 골수에 지방의 형태로 에너지를 저장한다. 늑대는 소화에 몇 시간만 소요되므로 하루에 몇 번이나 먹이를 먹을 수 있고 대량의 고기를 빠르게 소화시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늑대는 다른 개과 동물과 있을 경우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늑대는 겨울에 일반적으로 코요테를 죽인다. 늑대는 코요테의 굴을 파고 먹지도 않고 새끼를 죽인다. 코요테는 늑대를 쫓기는 하지만 코요테가 늑대를 죽였다는 기록은 없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한 지역에서 늑대와 황금자칼와의 상호 작용에는 후자가 수가 더 적고 늑대가 더 많다. 늑대가 주요한 육식 동물인 너구리는 봄가을에 많이 죽인다. 또한 늑대는 붉은여우, 북극여우, 코사크여우를 부육 쟁탈에서 죽이고, 가끔은 먹기도 한다. 아시아에서 늑대는 승냥이와 경쟁 관계이다. 늑대는 유라시아와 북미에서 큰곰과 만난다. 큰곰은 부육 경쟁에서 늑대에 우위 관계이지만 늑대는 서식지에서 큰곰보다 우위에 있다. 두 종은 서로의 새끼를 죽인다. 늑대가 큰곰 새끼를 먹고, 큰곰도 주요 먹이가 늑대 새끼이다. 미국에서는 아메리카흑곰도 마주친다. 흑곰과 늑대가 만나는 일은 서식지 차이로 인해 큰곰과 만나는 일보다 드물다. 흑곰과 늑대가 만난 것 대부분은 멕시코 북부에서 기록된 것이다. 늑대는 수많은 경우에 흑곰의 둥지를 공격하거나 먹거나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큰곰과는 달리, 흑곰과 늑대의 살해 논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흑곰과 큰곰과의 조우는 많은 편이지만, 북극곰은 늑대 2무리가 북극곰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만났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늑대는 아시아흑곰의 새끼를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아시아와 이스라엘의 늑대는 부육 쟁탈전으로 줄무늬하이에나와 많이 조우한다. 줄무니하이에나는 늑대와 상호 작용 지역에서 늑대의 시체를 먹는다. 일대일에서는 하이에나가 늑대보다 우위이지만 늑대 무리는 하이에나보다 우위이다. 거대한 크기의 늑대 무리는 중간 크기의 고양이아과보다 수가 적다. 늑대는 로키 산맥과 그 인접 산맥에서 퓨마와 부딪힌다. 늑대와 퓨마는 일반적으로 다른 고도에서 사냥하므로 서로 잘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에는 눈이 쌓인 계곡에서 먹이를 사냥하면서 늑대와 퓨마가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이들은 상호 작용을 거의 하지 않지만 늑대와 퓨마는 서로를 죽이려 하며 늑대 무리는 때때로 퓨마를 죽이기도 한다. 이들은 마눌들고양이를 사냥하며 눈표범은 위협을 준다. 늑대는 스라소니 개체수를 매우 줄일 수 있다. 다른 인간이나 호랑이만이 늑대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는 포식자이다. 러시아 극동 같이 호랑이와 늑대의 서식지가 겹치는 경우 두 종은 치열한 경쟁을 한다. 늑대와 호랑이의 상호 작용은 20세기 초까지 시호테알린 산맥의 늑대 개체수는 매우 적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늑대 개체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가 식민지가 되어 호랑이 개체수가 감소했을 때만 증가했다. 시호테알린 산맥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1930년대까지 늑대가 서식한 기억이 없으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호랑이는 생태계 내에서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늑대의 개체수가 줄어들게 하거나 지역 멸종을 시켰다. 늑대는 오직 인간이 호랑이를 경쟁적 배제를 시킴으로써만 살 수 있었다. 오늘날 늑대는 호랑이 거주 지역에서 주로 외톨이 늑대나 소형 무리의 형태로 포위되어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가 자연사해 죽은 경우 늑대는 가끔 청소 동물로서 나타난다. 늑대가 호랑이를 죽인 경우는 매우 드물며, 자연에서 호랑이를 공격한 경우는 최소 4건 있다. 이 호랑이의 늑대 경쟁 제외는 러시아의 호랑이 사냥꾼이 호랑이를 사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고 이들은 늑대 개체수를 유제류 이하로 만듦으로써 늑대 인구도 통제했다. 회색늑대는 인간과 사자 이후로 세계에서 널리 퍼진 동물 중 하나이며, 북위 15°북아메리카에서 북위 12°인도까지 걸쳐 서식하고 있다. 인간의 가축 공격과 두려움으로 인한 고의적인 개체수 감소로 3번째로 빨리 개체수가 감소한다. 이 종은 서유럽에서 멸종했으며, 멕시코와 미국의 늑대로 멸종중이었다. 현대의 늑대는 황무지와 벽지에 서식한다. 특히 캐나다와 알래스카주 등 미국 북부, 북유럽, 북아시아에 거주하며 북위 75°에서 12°에 걸쳐서 서식하고 있다. 늑대 개체수 감소는 전 서식 장소의 재도입과 재정착, 법적 보호, 토지 사용의 변화와 이촌향도 현상으로 억제되었다. 가축 및 게임 종(game food)과 인간의 경쟁과 인간의 늑대에 대한 두려움, 서식지의 조각화로 늑대는 지속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늑대의 광범위한 범위의 서식지와 안정적인 개체수는 세계적으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되어 국제 자연 보호 연맹에서는 "관심 필요"의 등급을 받았다. 북유럽에서 늑대의 멸종 노력은 중세부터 조직화되어 180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영국에서 늑대는 입법에 의해 박해당했고 브리튼 섬의 마지막 늑대는 16세기 헨리 7세 시기 죽었다. 늑대는 이후 광대한 숲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옮겼으나 이후 숲들이 사라졌다. 늑대는 이후 1684년까지 브레마 주와 서덜랜드 주의 숲에서 생존했다. 아일랜드의 늑대도 비슷한 과정으로 1770년 마지막 늑대가 죽었다. 스웨덴에서는 순록이 멸종한 이후 늑대가 가축을 먹기 시작하면서 1647년 최초의 늑대 현상금이 도입되었다. 사미인들은 스웨덴 북부에서 조직적으로 늑대를 제거했다. 1960년까지 몇몇 늑대가 스웨덴에서 생존했지만 사냥에 스노모빌을 이용하며 1966년 마지막 늑대가 죽었다. 노르웨이에서는 1973년 마지막 늑대가 죽었다. 핀란드에서는 러시아에서 계속적인 늑대 유입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회색늑대는 1900년 핀란드 동북부 지방에만 서식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개체수가 증가했다. 중앙유럽에서 늑대는 조직적인 사냥과 유제류 개체수 감소로 인해 19세기 초 동안 급격하게 개체수가 감소하였다. 회색늑대는 덴마크에서 1772년 멸종되었고 19세기 전까지 스위스에서 거의 사라졌다. 바이에른주의 마지막 늑대는 1847년 죽었고 라인 강 인근에는 1899년 마지막으로 죽었다. 1934년 늑대는 독일 등지에서 이미 멸종한 상태였지만 나치 독일이 늑대 보호 정책을 시작하면서 최초로 늑대를 보호하는 현대적 국가가 나타났다. 프랑스의 늑대 사냥은 800년에서 813년 사이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제도화되었고 "로우베트리에"(louveterie)라는 전문 늑대 사냥 조직을 만든다. 이 조직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폐지되지만 1814년 재조직된다. 1883년에는 1,386마리 이상의 늑대가 죽었다. 동유럽에서는 아시아의 거대 숲 지역에서 유입되는 늑대로 인해 완전히 멸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유럽의 늑대 개체수는 19세기 후반 매우 적은 개체수로 낮아졌다. 슬로바키아의 늑대는 20세기 처음 10년 동안 멸종했고 20세기 중반에는 폴란드 동부의 몇 산림 지역에서만 발견되었다. 동 발칸반도의 늑대들은 전-소련 공화국의 넓은 평야, 산, 농지에서 접근성의 혜택을 보았다. 헝가리의 늑대들은 20세기 초반 절반으로 줄었으며 대부분은 판노니아 평원에 몰려 있었다. 루마니아의 늑대 개체수는 1955년부터 1965년동안 매년 4,600마리가 죽으며 1,600마리밖에 남지 않으며 실질적으로 멸종했다. 1967년에는 최소치인 1,550마리까지 줄어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늑대의 멸종은 다른 국가보다는 더욱 늦게 이루어져 1955년에는 1,000마리가 남았으며 1964년에는 1-200마리로 줄어들었다. 그리스의 늑대들은 1930년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서 마지막으로 멸종했다. 18세기 동안 강력한 사냥 정책에도 불구하고, 서부 발칸 반도의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멸종한 적이 없었다. 늑대의 조직적 사냥은 1923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베니아 코체베에서 생겨난 늑대 구제위원회(Wolf Extermination Committee, WEC)의 결성으로 시작되었다. WEC는 디나르알프스 산맥에서 늑대 개체수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남유럽에서의 늑대는 북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 종의 관용으로 인해 멸종이 완료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늑대 개체수는 1800년대 초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1900년에는 원래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늑대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인해 1950년 말에 멸종했다. 1800년대 알프스 산맥의 늑대가 사냥당하기 시작하며 1973년에는 100여 마리 정도 남았으며 옛 이탈리아 영토의 3–5% 구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유럽의 늑대 개체수는 전통 전원과 농촌 경제가 축소되며 늑대 박해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1950년 이후 회복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농촌 지역에서 인구 밀도가 줄어드자 야생 먹이가 증가하며 늑대 개체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8년, 스웨덴 중부에서 12년생의 늑대를 재도입하기 시작했고 이후 노르웨이 남부로 확대되었다. 2005년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늑대 개체수가 11 쌍의 늑대 쌍을 포함하여 백여 마리 이상 서식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회색늑대는 스웨덴에서 완전히, 노르웨이에서 부분적으로 보호된다. 스칸디나비아 늑대의 개체수는 핀란드와 카렐리야 공화국에서 유입되는 늑대들로 인해 증가하고 있다. 핀란드의 늑대는 남부의 3곳에서 보호중이며 특정 계절 및 다른 지역에서만 사냥이 가능하다. 폴란드의 늑대는 1976년 사냥 가능 동물(game species)로 구분되며 이후 8백-9백마리가 개인적으로 서식하고 있다. 폴란드는 중부유럽에서 이웃 국가로 늑대를 확장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북쪽에서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와 슬로바키아의 늑대 범위가 겹친다. 2012년 이후에는 폴란드 서부에서 동부로 개체가 이동하며 독일 베를린 15마일(26 km) 이내까지 발견되었다. 슬로바키아의 회색늑대는 보호받지만 예외적으로 가축을 공격할 경우에는 사냥이 허용된다. 몇몇 슬로바키아 늑대가 체코로 이동할 경우에는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의 늑대는 헝가리에서 분산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위치 표지의 부족으로 자율적 개체수 측정이 힘들다. 헝가리의 늑대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지만 문제를 일으킬 경우에는 연중 내내 허가를 받고 사냥을 할 수 있다. 루마니아의 늑대는 약 2,500마리가 있다. 1996년부터 루마니아의 늑대는 법의 적용을 받진 않지만 보호 동물로 지정되었다.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공화국 늑대 개체수는 그리스,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의 늑대 경로를 오가는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다. 그리스의 늑대는 보호받지만 불법적으로 사냥당하고 있어 전망이 어두운 상태이다. 1986년 이후 보스니아의 늑대는 이웃 국가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보호 정책을 시작하면서 멸종했다. 이탈리아의 늑대는 1976년 이후 완전히 보호받기 시작했으며, 연간 약 60%가 증가하며 450마리-500마리 정도 서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늑대는 1993년 메르칸투르 국립공원 프랑스에서 방사가 시작된 이후로 유입되었으며 2000년 알프스에는 적어도 50마리 이상의 늑대가 서식 중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늑대는 2천 마리 정도 있으며 포르투갈 북동부에 150마리가 서식 중이다. 스페인에서는 갈리시아 지방, 레온 주,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서식한다. 이베리아의 늑대는 연간 수백마리가 불법으로 죽고 있지만 개체들은 도루 강 남쪽으로 넘어가 아우스타리우스 동부, 피레네 산맥에도 서식하고 있다. 2011년부터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인접 지역에서 야생에서 이주한 늑대 목격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19세기 동안 늑대는 요르단 강 동서의 성지 등에서 서식했다. 그러나, 1964년에서 1980년 동안 농민들의 박해로 개체수가 급감한다. 19세기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북부와 중부로 나누어져 초기에는 대부분 남부인 아시르 주에 서식했고 북부에서는 요르단 산맥 경계와 리야드 주변 지역에 서식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늑대는 거의 모든 지역에 서식하고 있으며 오직 솔로베츠키 제도, 제믈랴프란차이오시파 제도, 세베르나야제믈랴 제도, 카라긴스키 섬(Karaginsky Island), 코만도르스키예 제도, 샨타르스키예 제도에서만 서식하지 않는다. 늑대는 적백내전, 제2차 세계 대전 두 시기에 크림 자치 공화국 지역에서 대량 사냥당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소련 늑대 개체수는 두 번 정점을 찍었다. 1940년대 20만 마리에서 3만 마리의 늑대가 죽었지만 연간 4만-5만의 늑대를 낳았다. 소비에트 연방 늑대 개체수는 유럽 러시아에서 많이 사라지며 최저점을 찍었다. 개체수는 1980년 약 75,000마리로 증가했고 1979년에는 32,000마리가 죽었다. 내몽골 자치구의 늑대는 1940년 초 먹이인 몽골영양의 밀렵으로 멸종했다.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는 늑대로 인한 양, 염소, 어린이들의 공격으로 사냥당했다. 1876년에는 노스웨스턴 주와 비하르 주의 늑대 2,825마리가 죽었다. 1920년대에는 노스웨스턴 주와 아와흐(Awadh)에서는 늑대가 절멸했다. 전반적으로 1871년부터 1916년까지 영국령 인도에서 10만 마리 이상의 늑대가 죽었다. 일본의 늑대는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 멸종했고, 이는 "오카미 노 큐조"(ōkami no kujo)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정부는 늑대가 목장에 위협을 주는 동물로 홍보되었으며 현대 미국의 캠패인과 유사한 늑대 현상금 제도와 화학적 거세를 시행했다. 마지막 일본늑대는 1905년 1월 23일 와시카구시(현재 히가시요시로 알려져 있기도 함)에 사냥당했다. 늑대 상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는 중동의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로 안정적인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늑대 보호 조치와 효과적 법 집행으로 적당한 늑대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고 이웃 국가로 방출하고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3백-6백 마리가 방해받지 않은 광대한 사막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늑대는 유목의 감소와 인간 폐기물의 증가로 역사적 범위 내에서 계속 서식하고 있다. 터키의 늑대는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되는 개체로 인해 늑대가 유지되고 있다. 터키 산맥 지역에 산 몇몇 늑대들은 시리아로 옮겨가기도 한다. 작은 늑대 개체가 골란 고원에 서식하고 있으며 군사 활동으로 인해 보호받고 있다. 네게브 사막 남부에 서식하는 늑대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나 요르단에서 유입되는 개체로 유지되고 있다. 중동을 통틀어서 늑대를 보호하는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다른 곳에서는 베두인족이 연중 내내 사냥할 수 있다. 이란에서는 약간의 늑대 개체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0년대 중반 조사로 전국적으로 엹은 밀도로 서식하는 것이 밝혀졌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는 늑대의 주요 서식지이다. 인도 북부의 잠무 카슈미르 주에는 6만km에서 3백 마리의 늑대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마찰프라데시 주에는 50마리의 늑대가 서식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인도 전역에서 8백-3천 마리의 늑대가 흩어져서 서식하고 있다. 1972년 보호 정책이 시작되지만, 인도늑대는 멸종 위기가 부여되었으며 많은 개체가 점점 감소하고 있으며 인간 거주 지역에 살고 있다. 네팔과 부탄에는 늑대가 서식한다는 어떠한 정보도 없다.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늑대 개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매년 새끼의 수를 바탕으로 수백-수천 마리로 추산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대륙의 늑대 박멸 정책은 중단되었고 전 소련 국가의 늑대 개체수는 25,000-30,000마리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과 몽골에서는 오직 보호구역에서만 늑대가 보호받는다. 몽골의 개체수는 1-3만 마리로 추산되며 중국에서는 더 단편적으로 추산한다. 북부에서는 약 4백 마리의 늑대가 있으며 신장과 티베트에는 1-2천 마리로 추산한다. 한반도의 늑대는 남한의 경우 1980년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물원 사육개체도 1997년을 마지막으로 죽어버렸다. 늑대가 사라지면서 현재 그 먹이가 되는 고라니나 노루, 멧돼지와 너구리등 일부 야생동물들이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면서 농작물을 먹어 치워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일부 동물 보호단체에서 중국에서 만주산 늑대 4마리를 들여와 재도입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민간단체에서도 몽골에서 늑대를 들여와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며 환경부에서는 북한과 연해주에서 늑대를 도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늑대 복원계획에 대해 문제가 있다. 현재 늑대가 복원이 되면 증가하여 여러 문제가 있는 멧돼지나 고라니등 번식력이 좋은 우제류등 야생동물 개체수 조절이 가능하지만 역시 늑대가 사람을 해칠 가능성 역시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경우에는 많은 지역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현재 백두산에 적은 수가 서식한다고 보고되어 있다. 현재 호랑이나 불곰 등 북한의 육식 포유동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어 있지만 늑대는 현재 반달가슴곰이나 표범과 마찬가지로 천연기념물에서 배제되어 있다. 아마도 북한에 늑대가 흔하거나 아니면 거의 멸종했을 제기되고 있다. 서울대 황우석 박사는 현재 한국산 늑대를 복제하였다고 논문에 기재하였지만 여러 논란으로 기재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에서는 멸종위기의 늑대를 복원하기 위해 소백산에 사파리 형식으로 늑대를 방사한다고 한다. 개체들은 몽골이나 러시아에서 들여올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대전 동물원의 경우 러시아 볼가강 유역에서 포획한 늑대를 도입해 사파리 형식으로 사육한다고 한다. 그 밖에 광주 우치공원이나 청주동물원에서도 한국늑대를 사육하고 있다. 회색늑대는 원래 북위 20°이북의 모든 지역에 서식지가 있었다. 늑대는 모든 곳으로 퍼져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 서부, 멕시코 열대 및 아열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늑대는 뉴펀들랜드 섬, 밴쿠버 섬, 알래스카 남동부 섬, 북극 제도, 그린란드 등 주요 섬에서도 서식하고 있다. 북미의 늑대는 인간 인구의 증가와 농업의 확대와 동시에 개체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늑대는 애팔래치아 산맥 일부와 오대호 지역 북서부 지역을 제외하고 미국 동부에서 멸종했다. 캐나다에서는 1870년에서 1921년 사이 뉴브런즈윅주와 노바스코샤주에 늑대가 멸종했으며 1911년에는 뉴펀들랜드 주에서 멸종했다. 북부 로키산맥에서 늑대는 1920년대에 사라졌다. 1850년에서 1900년 사이 퀘벡주와 온타리오주 남부에 늑대가 멸종했다. 대평원에서 늑대 개체수 감소는 1860년-70년 사이 아메리카들소 등 다른 먹이의 개체수 감소와 시작되었다. 1900년에서 1930년 사이 종을 멸종하기 위한 집중적 육식 동물 관리 프로그램으로 인해 사실상 미국 서부와 캐나다 국경 인근 부분에서 멸종했다. 회색늑대는 알래스카와 미네소타주 북부를 제외한 모든 연방 및 주에서 멸종되었다. 북미 늑대의 개체수 감소현상은 1930년에서 1950년 사이 남서부 캐나다에서 대형 사냥 게임의 규제와 대형 유제류의 보호로 인해 다시 증가했다. 이 증가는 서부와 북부 캐나다의 늑대 개체수 증가에 도움을 주었다. 195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초까지 늑대 수천 마리가 주로 독에 의해 죽었다. 이 캠패인은 중단되고 1970년대 중반 늑대 개체수는 증가가 시작되었다. 그 파장이 미국 서부에도 미치면서 옐로스톤과 아이다호주, 몬태나주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는데 더그 스미스와 같은 늑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늑대를 재도입하자는 주장이 일었다. 1997년 쯤에 옐로스톤 국립공원과 아이다호 주에 늑대를 재도입을 실행에 옮겼다. 캐나다의 앨버타나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사는 늑대들을 옐로스톤과 아이다호에서 현지 적응을 마치고나서 방사를 하게 되었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는 늑대가 재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린 버드나무의 순이 뜯어먹히고 사시나무 또한 그 면적이 줄어들었다. 엘크를 비롯한 초식동물들이 지나치게 불어났기 대문이었다. 하지만 늑대가 재도입 되고나서 그러한 문제들이 개선되었으며 사라졌던 비버도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옐로스톤과 아이다호에 재도입된 늑대 무리들간에 세력경쟁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그 여파로 세력이 약한 여러 무리들이 몬태나 남동부로 가게 되었다. 몬태나 북서부에서는 자연적으로 늑대들이 이주해와서 존재를 알 겨를이 없었다. 옐로스톤의 늑대 재도입은 육식동물 보존 프로그램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현대 북미의 늑대 서식지는 미국 알래스카 주 및 [[아이다호 주],[[몬태나주]]에도 약간 서식한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앨버타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늑대들은 아이다호 주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재도입되었다. 1998년에는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에 재도입되었다. 회색늑대는 캐나다에서 역사적 범위의 80% 이상 서식하고 있어 늑대의 거점으로 꼽히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캐나다의 행정 구역]]의 법률에 따라 다르지만 52,000마리에서 6만 마리의 늑대가 서식하고 있다. [[캐나다 원주민]]은 제한없이 늑대 사냥을 할 수 있지만, 다른 주민들은 허가를 필요로 한다. 알래스카 주에서는 6천-7천 마리의 늑대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사냥과 수집철 동안 합법적으로 사냥할 수 있지만 [[사냥감 제한]] 등의 기타 제한 법률이 있다. 2002년 현재, 옐로스톤의 늑대는 28개 무리 250마리가 있으며 아이다호 주에서는 25개 무리 260마리의 늑대가 서식하고 있다. 1974년부터 위스콘신 주, 미네소타 주, 미시간 주에서는 [[미국 절멸위기종 보호법]]에 회색늑대가 포함되었다. 2002년 말에는 에리조나 주와 뉴멕시코 주의 늑대가 8개 무리 28마리까지 줄어들어 [[멕시코늑대]]가 절멸위기종 보호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2012년 이후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옐로스톤 삼각주 무리에 일원이었던 어느 서너살 정도된 수컷이 옐로스톤을 벗어나 사우스다코타주의 파인릿지(소나무산마루)라는 지역으로 이동을 한일이 관측되었다. 전파수신 목걸이로 관측이 되던 개체였는데 이는 로키산맥의 늑대가 동쪽으로 가거나 오대호 연안에 있던 늑대들이 서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 셈이다. 실제로 늑대는 때때로 영토나 짝을 찾기 위해 무리를 벗어나 방랑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2011년까지 아프리카에 회색늑대가 서식했는지는 논쟁거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집트]]에는 그리스에 서식하는 것보다 조금 작은 늑대가 서식한다고 언급했다. 독일의 의학자인 [[게오르기 엘버스]](Georg Ebers)는 현재의 [[아시우트]],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누비스]]라는 도시가 "도시의 늑대"라는 뜻의 이름이 붙어진 것을 근거로 이집트가 늑대를 신성시했다고 주장했다. 동물학자 [[에른스트 슈와르츠]](Ernst Schwarz)는 북아프리카의 [[황금자칼]]을 현재의 늑대 같은 개과로 분류했고, 이후 회색늑대와 형태학적 닮음을 간과한 것으로 비판받았다. 2002년 12월, [[에리트레아]]의 [[다나킬 사막]]에서 개과 동물이 발견되었으며 황금자칼 또는 주변 지역의 6종과 비슷하지 않고 회색늑대와 비슷한 종을 발견했다. 늑대는 먼 거리를 여행하기 때문에 특정 지역에 질병을 전파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 중 몇몇은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색늑대에 대해 늑대에 의해 급격하게 발발한 사건은 없다. 보통 질병이 발생한 무리 중 한 늑대는 남겨두고 떠나기 때문에 다른 무리 늑대와의 전염을 방지한다. 늑대가 감염될 수 있는 [[바이러스성 질병]]에는 [[광견병]], [[개홍역]], [[개파보바이러스]], [[전염성 개간염]], [[유두종증]], [[개코로나바이러스]]등이 있다. 광견병에 감염된 늑대가 주로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러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인도가 있다. 보통 늑대의 [[잠복기]]는 8일-21일이며 감염 결과 흥분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무리에서 떠나가게 되고, 하루 80 km 이상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늑대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다. 감염된 늑대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광견병에 걸린 동물 대부분이 그러듯이 사람을 공격한다. 또한 개에게는 개홍역이 치명적이지만 캐나다와 알래스카 주를 제외하고 늑대를 죽였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개파보바이러스는 대부분 늑대는 살아남지만 새끼 경우에는 [[탈수]]로 인한 [[전해질 불균형]]이나 [[내독소]]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늑대는 전염성 개간염에 감염될 수 있지만 실제로 늑대를 사망시켰다는 기록은 없다. 유두종증 경우에는 먹이 동작이 느려질 수 있지만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거나 사망하지는 않고 늑대가 사망한 기록은 한 건밖에 없다. 개코로나바이러스는 겨울 몇 달 동안 알래스카 늑대 사이에 심각하게 퍼진 것으로 기록되었다. 늑대가 감염될 수 있는 [[세균|세균성 질병]]에는 [[브루셀라증]], [[라임병]], [[렙토스피라증]], [[툴라레미아]], [[소결핵균]], [[리스테리아증]], [[탄저]], [[구제역]] 등이 있다. 또한 늑대는 야생 및 사육 순록을 잡아먹으며 [[돼지브루셀라증]](Brucella suis)에 감염될 수 있다. 늑대 성체는 어떤 임상적 징후가 나타나지 않지만, 감염된 암컷은 새끼를 심각하게 약화시킬 수 있다. 라임병은 각각의 늑대를 쇠약하게 만들 수 있지만, 많은 늑대 개체에게 피해를 입히진 않는다. 렙토스피라증은 감염된 먹이나 분비물과의 접촉으로 감염되며 [[발열]], [[거식증]], [[구토]], [[빈혈]], [[혈뇨]], [[황달]] 등의 증세가 나타나며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 인간 거주 지역 근처에 사는 늑대들은 감염된 가축 폐기물과 부육 등으로 인해 야생의 늑대보다 감염률이 높다. 늑대는 토끼목의 먹이로 인해 툴라레미아에 감염될 수 있지만, 늑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알 수 없다. 소결핵균은 늑대에게 주요 위협이 되지 않지만 캐나다에서 두 마리의 새끼를 죽인 기록이 남아 있다. 늑대는 체외기생균과 채내기생균을 옮기며 이전 소련에서는 최대 50종이 기생균을 옮긴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기생균의 대부분은 숙주를 아프게 하거나 영양실조에 걸리게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늑대에게 별다른 증상 없이 옮긴다. 늑대는 개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기생충을 [[기생충 감염|감염]]시킬 수 있다. 늑대는 전원 지역에서 살고 기생균을 가축에게 전파시킬 수 있다. 늑대는 [[벼룩]], [[진드기]], [[이목 (동물)|이목]], [[응애]] 등의 다양한 [[절지동물]]의 체외기생균에 감염된다. 특히, 대부분의 늑대 새끼는 [[옴벌레]]에게 매우 취약하고, 여우와는 달리 심각한 [[흡윤개선증]]에 감염된다. 이목 같은 "Trichodectes canis"는 늑대에게 거의 사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진드기 같은 [[익소디즈속]]은 늑대에게 라임병, [[록키산 홍반열]] 등을 옮긴다. [[데르마첸토르속]](Dermacentor)의 진드기도 늑대를 감염시킨다. 다른 채외기생균에는 [[이아목]]을 포함한 이목, [[사람벼룩]], [[개벼룩 (곤충)|개벼룩]]이 있다. 늑대가 감염되는 채내기생균에는 [[원생동물]]과 [[장내 기생충]]이 있다([[흡충류]], [[조충류]], [[선형동물]], [[구두동물]]). 3천 종의 원생동물 중 [[아이소스프라]](Isospora), [[톡소포자충]], [[근육포자충]], [[바베시아]], [[람블편모충속]]만 감염시킨다. 늑대는 특히 농부들에게 위험한 [[네오스포라개구충]]을 가축들에게 옮기며 감염된 다른 동물들은 [[유산]]률이 3-13배 증가한다. 북미 늑대에게서 가장 흔한 [[알라리아흡혈충]]은 늑대에게 먹힌 작은 설치류와 양서류에게서 옮긴다. 성숙기에 도달하면 알라리아는 소장으로 이주하고 약간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늑대가 먹은 생선에 의해 감염되는 [[메토르치스 콘쥰트스]]는 늑대의 간이나 쓸개에 감염되어 [[간 질환]], 췌장염, 수척해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흡충은 늑대의 장에 서식하지만, [[웨스트만폐흡충]]은 폐에 감염된다. 웨스트만흡충은 늑대가 먹은 유제류, 작은 포유류, 물고기를 통해 감염된다. 촌충은 숙주의 면역력과 기생충의 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늑대에게 약간의 손상이 가해진다. 늑대가 감염될 시 증상으로는 [[변비]], 독성 [[알레르기]] 반응, [[점막]] 자극, [[영양실조]] 등이 있다. 유제류에 의해 감염되는 [[에키노코쿠스 그라놀로수스]]는 늑대의 개체 밀도가 증가할수록 감염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늑대는 자신의 대소변으로 에키노코쿠스의 알을 전파시킬 수 있다. 늑대는 30가지 선형동물을 전파시킬 수 있으며 기생충의 수와 숙주의 면역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양성 반응을 보인다. [[개십이지장충]]은 늑대의 장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으면서 [[고색소성빈혈]], 수척해짐, [[설사]]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심할 경우 죽기도 한다. [[십이지장충]]으로 알려진 [[개회충]]은 자궁을 통해 새끼를 감염시킬 수 있으며 장 자극, [[고창증]], 구토, 설사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늑대는 [[밍크]]를 통해 [[거대신충]]에 감염될 수 있고 신장 질환을 일으키며 이 기생충은 최대 1m까지 자랄 수 있다. 거대신충은 신장 조직의 완전 파괴를 불려오며 양쪽 신장에 감염될 경우 치명적일 수 있다. 늑대는 [[심장사상충]]에 감염될 경우 수년간 낮은 수준의 증상이 나타나지만 높은 수준에서는 [[육두구 간]]과 심장 팽창 등의 증상을 일으키며 죽을 수 있다. 늑대는 감염된 유제류에 의해 [[선모충]]에 감염될 수 있다. 비록 선모충은 늑대에게서 임상 증상을 나타내진 않지만 개에게 수척, 지나친 타액 분비 및 근육 통증을 일으킬 수 있다. 늑대는 구두동물에 거의 감염되지 않지만 러시아에서 [[오니콜라 스크르쟈비니]](Onicola skrjabini), [[마크로칸토르휴니쿠스 카투리누스]](Macrocantorhynchus catulinus), [[모니리포루미스 모니리포루미스]](Moniliformis moniliformis) 3종의 감염이 확인되었다. [[파일:Romolo e remo.jpg|섬네일|[[암늑대]]의 보호를 받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1616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 [[북유럽 신화]]와 [[일본 신화]]에서 늑대는 신으로 가깝게 묘사되었다. [[일본]]에서는 농부가 신사에서 늑대를 숭배하고 굴 근처에서 먹이를 주며, 야생 맷돼지와 사슴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늑대에게 간청한다는 이야기가 있고, 북유럽 신화에서 나오는 [[펜리르]] 늑대는 [[로키]]의 아들로 묘사되었다. 다른 문화에서,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코르막 맥 에어트]]가 늑대로 묘사되며, [[로마 신화]]에서는 [[암늑대]]가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기르며 [[로마]]를 건국했다는 등 여러 [[기초 신화]]에서 늑대를 중심 인물로 두고 있다. [[튀르크와 몽골 신화|튀르크 신화]], 몽골 신화, [[아이누 신화]]에서는 늑대가 자기 민족의 조상으로 나온 반면, [[데나이나 민족]]은 늑대가 한 남성의 형태이며 자신의 형제인 것으로 믿는다. 늑대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신화에서 [[아폴론]] 신과 늑대가 태양에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하며 북유럽 신화에서는 태양의 신인 [[스콜 (북유럽 신화)|스콜]]이 늑대와 관련되는 등 일부 유라시아의 신화에서 늑대와 태양을 관련시켰다. [[파웨니 민족]]의 창조 설화에 따르면 늑대는 [[죽음]]을 처음으로 겪은 동물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볼바]] 마녀가 [[히로킨]] 거인과 힐다 거인을 늑대로 다스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나바호 족]]은 늑대를 [[마녀 (나바호 족)|마녀]]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등 가끔 북유럽과 아메리카의 일부 원주민 신화에서 늑대는 모두 [[마법]]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된다. 마찬가지로, [[칠코틴 족]]은 늑대가 정신 질환과 사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일:Dore ridinghood.jpg|섬네일|위오른쪽|1883년 [[귀스타브 도레]]의 《[[빨간 두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인 [[바빌론]]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이슈타르]] 여신이 길가메시를 유혹하자 그녀에게 그녀의 이전 연인들은 양치기가 늑대가 되며 양떼로부터 막지 못하는 동물이 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거부했다. [[조로아스터교]] [[경전]] 《[[아베스타]]》에서는 늑대가 [[앙그라 마이뉴]] 악마의 창조물이며 동물들의 잔인함을 결정한다. [[아이소포스]]의 《[[이솝 우화]]》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정착 시기 늑대가 양 군집 문제를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이솝 우화 중 가장 유명한 [[양치기 소년]]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지양하는 내용의 동화이며 여기서 관용구 "cry wolf"가 파생되었다. 몇몇의 다른 우화에서는 늑대들은 양치기와 양치기 개, 늑대 간에 대한 경계에 관한 관심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며 늑대와 개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으로도 나온다. 아이소포스는 늑대를 이용하여 인간의 도덕적인 행동에 대해 비판했으며, 그의 묘사로 인해 늑대는 위험한 동물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것은 [[성경]]에도 반영되어 늑대가 탐욕스럽고 해악하다는 묘사가 13번 인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많은 상징으로 이스라엘 문화의 목자 주위에서 늑대가 자기 무리를 보호하듯이 민족을 보호해주는 [[선한 목자]]로 묘사했다. 현대의 늑대 이미지는 예수가 [[양의 가죽을 쓴 늑대]]를 언급하며 [[거짓 선지자]]를 경고하는 것을 비유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몇몇 저자가 늑대를 위험한 사람들과 비교하는 예수의 묘사를 따옴으로서 늑대의 나쁜 인식은 이 때부터 형성되었으며 이후 서구에서 늑대의 탄압에 대한 변명이 되었다. 이후 중세의 [[기독교 문학]]에서는 늑대를 성경의 범위에서 더욱 확장시켰다. 7세기 판에 처음 등장하는 《[[사이올로지스]]》(Physiologus)에서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의 도덕과 신비를 가르친 책이다. 사이올로지스에서는 늑대가 인간을 공격하며 특히 [[목뼈]]를 노린다고 적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암늑대를 [[사기]]와 탐욕의 대상으로 나타냈으며 이는 이전에 [[칸트]]의 《[[인페르노 (단테)|인페르노]]》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1487년 처음 출판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에서는 늑대는 신이 악인을 처벌하는 대리인이거나 악마의 대리인으로 나와 신도의 믿음을 시험하고 축복을 주는 것으로 언급했다. 12세기 라틴어 시인 [[예센그리무스]](Ysengrimus)에 나오는 아이센그림 늑대는 낮은 귀족을 의미하고, 상대 주인공인 [[레이너드 여우]](Reynard)는 농민의 영웅을 나타냈다. 하지만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도덕적으로 묘사된 아이센그림은 여우의 지혜와 학대의 피해자로 나타나며 종종 이야기 끝에서 죽기도 한다. 1697년 [[샤를 페로]]가 처음 쓴 《[[빨간 두건]]》(한국에서는 빨간 모자로 알려짐)에서는 서구의 늑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다른 문학 작품에 비해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늑대가 잠재적인 [[강간|강간범]]으로 나오며 인간의 목소리를 따라할 수 있다고 적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인간이 눈에 띄게 늑대를 사냥하는 것으로 나오며 이를 따르는 소설을 쓴 작가는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이반 부닌]], [[레오나드 파블로비치 새바네예프]] 등이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체호프의 "소작농"(Peasants) 두 작품에서는 늑대가 사냥개와 보르조이에게 사냥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팔리 모왓]]이 1963년 작성한 픽션 회고록 《[[울지않는 늑대]]》(Never Cry Wolf)는 대중 문학에서 처음으로 늑대를 긍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또한 늑대에 관한 작품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으로 여겨졌으며 [[울지않는 늑대 (영화)|영화화]]되고 수십년 간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비록 늑대들을 대중의 인식에서 사랑스럽게 바꿔놓았으나, 사실 부정확하게 협력적이며 귀족적이고 부적절한 지시에 거부하는 등의 늑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져왔다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 책은 나중에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이 늑대의 인간 공격에 관한 올바른 정보 캠패인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모왓에 관한 이러한 비슷한 비판으로 [[미사 데포세카]]의 《[[미사: 어 메모리제 오브 더 홀로코스트]]》(Misha: A Mémoire of the Holocaust Years)에서는 [[폴란드 점령기 (1939년-1945년)|폴란드 점령기]] 동안 늑대가 기른 [[야생아]]에 대한 한 저자의 거짓 논란이 나온다. [[제인 크래이드 조지]]의 1972년 소설 《[[줄리에의 늑대]]》(Julie of the Wolves)의 1부에서는 소녀와 늑대 무리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부의 마지막 항목에서는 늑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의인화되었으나 생물학, 동물학적으로 동물을 바라본다. 여러 현대 아동 문학 작가들은 늑대를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고전 동화의 늑대 인식을 고치고 있다. 이 예로 미국의 〈환경적 늑대와 아기돼지 삼형제〉(Eco-wolf and the Three Little Pigs)와 〈양치기 소년〉(The Wolf who cried Boy) 동화가 있다. [[파일:Beli vukovi - wiki.png|섬네일|세르비아 "휜늑대"의 엠블럼.]] 늑대는 영국 병기창 [[찰지 (문장학)|찰지]]에 자주 이용되었다. 또한, 늑대는 [[바론 웰비]], [[바론 렌델]], [[비스카운트 월셀레이|월셀레이 자작]]의 [[장식쇠 (문장학)|장식쇠]] [[서포터 (문장학)|서포터]]와 로베트, [[윌슨 (이름)|윌슨]] 대부분의 [[문장 (상징)|문장]]에 볼 수 있다. 데미늑대(demi-wolf)는 많은 [[울페 (성)|울페]] 성의 가문 구성원의 장식과 문장에 나오는 [[체르스트 (문장학)|체르스트]]에 발에 왕관이 있는 반늑대의 모양으로 나오며, 이는 [[찰스 2세]]가 [[우스터 전투]] 이후 울페 가문에게 하사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문장]], 특히 [[도나차디쉬 씨족]]와 [[스캐니 씨족]]에 공통적으로 늑대 머리가 나온다. 늑대는 [[스페인의 문장]]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종종 입에 양고기를 물거나 뒤를 건너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늑대는 [[콜로빌 인디언 연합 동맹]]과 [[위스콘신 오나이다 부족]], [[파위네족]]의 깃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현대에서는 늑대가 군사 및 준군사 조직의 문장으로 자주 이용된다. 늑대는 러시아(구 소비예트 연방) [[스페츠나츠]]의 비공식 상징이며 터키 초극단주의 단체인 [[회색늑대들]]의 상징이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세르비아의 준군사 조직]]인 [[흰 늑대 (준군사)|흰 늑대]]와 [[부크약늑대 (준군사)|부크약늑대]]에서도 늑대를 상징으로 했다. [[파일:Chinook2.gif|섬네일|왼쪽|치누크족의 기다림(Waiting for a Chinook), ca. 1900, [[찰스 마리온 러셀]](Charles Marion Russell).]] 가축 포식은 늑대 사냥의 주요 이유이며 늑대 개체 보존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이는 늑대의 포식 위협으로 가축 축산에 지장을 주어 경제적 피해를 줄 뿐 아니라 늑대의 박멸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일부 국가는 늑대로 인한 피해를 손실 보상 프로그램이나 1963년 처음 제정된 뉴질랜드의 [[주 보험|주립 보험]] 등을 통한 해결책 등을 이용하고 있다. 잘 길들어진 가축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을 잘 방어할 수 없어서 늑대의 손쉬운 먹이가 된다. 늑대는 일반적으로 야생의 먹이가 떨어질 때 가축 포식으로 의존한다. 유라시아에서는 일부 늑대 개체의 대부분의 식습관이 가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러한 문제는 야생의 먹이가 많아진 북미에서는 적은 편이다. 이 가축 손실의 대부분은 늑대 포식에 가장 취약한 여름의 방목 기간 중이나 원격지의 목초지의 방목 가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주 포식 대상이 되는 가축으로는 [[양]](유럽), [[순록]](스칸디나비아 북부), [[염소]](인도), [[말]](몽골), [[소]]와 [[칠면조]](터키)가 있다. 늑대는 먹이 뒤에서 공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말의 강한 뒷발굽 차기 방어수단으로 인해 말보다 늑대가 더 위험할 수 있다. 늑대의 다른 아종들은 우선 다른 동물을 대상으로 포식할 수 있다. 큰 몸집의 북부늑대가 완전히 다 자란 소나 말을 죽일 수 있는 동안 작은 늑대가 큰 늑대에게 맞을 수 있다. 한 번의 공격으로 죽는 동물의 수는 종마다 다르다. 대부분의 가축과 말은 한 번의 공격으로 죽지만, 칠면조, 양 및 순록은 한 번에 죽지 않을 수 있다. 늑대는 주로 동물 방목 시에 공격하기 때문에 때때로 울타리 안으로 넘어가려고 하기도 한다. 큰 몸집의 가축은 늑대에 의해 귀, 꼬리 및 [[도킹 (동물)|도킹]]을 포함하여 다리의 밑부분이 다치게 될 수 있다. 몇몇 사례에서, 늑대들은 실제 부정적으로 미치는 경우 가축을 공격하지 않는다. 늑대를 경계하는 가축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유산]] 경험과 체중 감소, 고기 맛 저하 등이 발생한다. 늑대는 경우에는 개를 죽이면서 중요한 음식 공급으로 개에 의존하는 일부 개체가 있다. 일반적으로 늑대는 크기에서 개를 능가하기 때문에 물리적 공격에서 개는 일단 늑대의 큰 머리의 이빨에 물리게 된다. 또한, 늑대와 개가 싸우는 스타일은 다르다. 개는 일반적으로 공격할 시 머리, 목 및 어깨 부근으로 제한되지만 늑대는 상대의 몸과 사지를 문다. 크로아티아에서는 늑대가 양보다 개를 더욱 많이 죽이고 러시아에서는 늑대가 유기견의 개체수를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개가 사람들과 함께 공격할 때, 늑대는 비정상적인 대담한 행동을 하며 때로는 가까운 사람을 무시하기도 한다. 늑대의 개 공격은 집의 뒷마당이나 숲 모두에서 일어날 수 있다. 마을 외곽에서는 늑대가 개를 기다리기 위해 매복하며 그 뒤에 다른 늑대들로 하여금 개를 유혹하게 하기도 한다. 늑대의 사냥개 공격은 스칸디나비아와 위스콘신 주에서 큰 문제로 대두된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빈번하게 죽은 사냥개는 [[해리어 (개)|해리어]] 품종으로 늙은 동물이 어린 동물보다 소심하여 늑대에 대한 반응을 다르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개의 늑대로 인한 부상은 종종 허벅지와 뒷다리에 나타난다. 치명적인 상처는 보통 목 뒤를 물린 상처이다. [[쟘툰드|스웨덴 쟘툰드]](Jämthund) 같은 대형 개의 사냥은 자신의 방어하기 더욱 수월하기 때문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파일:Petit Journal Janvier 25 1914 Loup & Enfant.jpg|섬네일|위오른쪽|아이를 잡아간 늑대(Child snatched by a wolf), 1914년, [[르 프티트 주르날]](Le Petit Journal)]] 늑대의 공포는 인간이 자연적인 늑대의 먹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늑대가 인간과 마주쳤을 때의 반응은 대부분 이전 경험 유무에 따라 다르다. 인간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적거나 식습관이 조절되어 있을 경우 인간에 대한 공포심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늑대는 적은 수일 경우 보통 인간이 위험하진 않지만, 충분한 먹이와 약간 인간과 접촉했을 경우 가끔 사냥하기도 한다. 늑대는 도발 정도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공격은 주로 즉각적으로 사지를 물면서 공격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실제적인 공격은 늑대 한마리가 공격하거나 먹이를 공격하는 방법을 인간을 통해 배우는 것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러한 계속된 공격은 [[습관화]] 될 수 있으며 늑대가 인간의 두려움을 잃게 되게 한다. 피해자는 일반적으로 얼굴과 목 주위에 지속적인 공격을 받으며 늑대가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끌려가서 먹힌다. 이러한 공격은 먹이가 죽을 때 까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계속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약탈적 공격은 일년 언제나 일어나지만 6-8월 기간에 최고점에 달하며 이때 숲 지역으로 유입되는 사람들(가축 [[방목]]이나 식물 채취)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증가하며 이는 겨울에 광견병에 걸리지 않은 늑대의 공격 사례로 기록되었고 이 공격 지역에는 [[벨라루스]], 러시아 [[키롭스키 지구]], [[이르쿠츠크]], [[카리알라]], [[우크라이나]] 지방이 주로 포함된다. 또한, 새끼를 가진 늑대는 이 기간 동안 큰 먹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약탈하는 늑대의 피해자는 거의 18세 미만의 어린이이며 성인의 경우 남성은 매우 드물고 거의 여성이 차지한다. [[늑대개]]는 순종 늑대보다 더욱 대담하며 인간의 정착지 주변에 가까이 살기 때문에 따라서 가축과 인간에게 더욱 위협적이다. [[광견병]]의 경우 늑대가 질병의 주요 소유자 역할을 하지 않는 이상 다른 종보다 감염율이 낮지만 개와 여우, 자칼처럼 쉽게 발견되기도 한다. 광견병에 감염된 늑대는 주로 [[지중해]],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며 [[북아메리카]]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늑대는 매우 분명히 광견병의 "분노" 단계 수준까지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큰 크기와 힘과 합쳐지기 때문에 광견병에 걸린 늑대가 제일 위험하다. 광견병에 감염된 개보다 늑대가 물렸을 경우 15배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광견병에 감염된 늑대는 보통 혼자 생활하며 먼 거리를 여행하여 종종 많은 가축과 인간을 문다. 대부분 광견병 감염 늑대의 공격은 봄과 가을철에 발생한다. 약탈적 공격과는 달리, 광견병에 걸린 늑대는 먹이를 먹지 않으며 공격은 보통 하루 정도 지속된다. 또한, 대부분의 피해자는 성인 남성이나 보통은 무작위로 선택되어 공격하는 편이다. [[파일:Alfred Wierusz-Kowalski - Wilki napadające na sanie.jpg|섬네일|왼쪽|썰매를 공격하는 늑대(Wolves attacking a sleigh), 1890년, [[알프레드 위르츠코와레스키]](Alfred Wierusz-Kowalsk).]] 늑대의 인간 공격은 드물지만 20세기 이전 유럽에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580년부터 1830년까지 기간 동안 3,272명이 늑대에 의해 사망했으며 그 중 1,961이 광견병에 감염되지 않은 늑대의 공격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교회와 정부에 기록된 바로는 440명이 사망했으며, 주로 현대의 스위스 지역인 [[포 계곡]](Po Valley) 지역에 주로 발생했다. 1882년 이전 [[페노스칸디아]] 지역은 300년 동안 광견병에 감염되지 않은 늑대에 의해 12세 미만의 아이들 94명이 사망했다. 1840년부터 1861년까지 러시아에서는 광견병에 감염되지 않은 늑대 273마리의 공격으로 성인 7명과 어린이 169명이 사망했다. 1944년부터 1950년까지 러시아 [[키로프주]]에서 3-17세의 어린이 22명이 사망했다.([[키로프 늑대 공격]](Kirov wolf attacks) 참조.) 아시아 대륙의 늑대 공격은 수많은 문서로 보고되었으며 최소 인도에서 수십년 간 거대 늑대 공격이 3번 이상 있었다. 이 공격은 잘 교육된 생물학자가 문서로 기록한 것이 남아 있다. [[하자리바그흐]](Hazaribagh)와 [[비하르 주]]에서 1980년부터 1986년까지 늑대의 공격으로 어린이 100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당했다. 북아메리카 대륙은 매우 낮은 발생률과 기록을 보이고 있으나,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구술 역사]](oral history)에 따르면 일부 늑대가 인간을 죽였다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숲에 사는 부족들은 툰드라에 비해 갑자기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서 늑대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더욱 두려워했다. 이렇게 몇몇의 대형 공격이 유라시아에 비해 북아메리카가 매우 적은 이유는 역사적으로 북아메리카에서 많이 가용된 [[화기]]로 인해 유라시아의 늑대보다 북미의 늑대가 인간을 더욱 빨리 두려워했기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미에서 늑대와의 접촉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한다. 한 연구에서는 알래스카와 캐나다의 늑대 공격은 총 80회로 39회는 매우 건강한 늑대의 습격이었으며 29회는 인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사건으로 판명한다.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광견병에 걸리지 않은 늑대의 대형 습격은 두 차례 있었다. 2005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에서 한 남성이 사망하였으며, 2010년에는 알래스카 주의 [[치그니크 호수 (알래스카주)|치그니크 호수]](Chignik Lake)에서 조깅하던 한 여성이 사망했다. [[파일:wolfskidor.jpg|섬네일|왼쪽|설상에서의 늑대 사냥(Wolf chase on skidor), 1854, 알렉스 퍼셀과 마슨 잭슨.(Alex Fussell and Mason Jackson)]] [[파일:Deathstrugglewolf.png|섬네일|죽음의 투쟁(Death struggle),1875, 헨리 호프 크라로케(Henry Hope Crealocke).]] 늑대는 뛰어난 감각, 빠른 속도와 빠르게 사냥개를 죽일 수 있는 능력, 강한 체력 등으로 인해 늑대 사냥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늑대를 사냥하는 많은 방안이 고안되었으며 이는 봄에 둥지에서 태어난 새끼를 죽이는 것을 포함하여 개를 이용한 사냥(보통 [[시각 하운드]], [[블러드 하운드]], [[폭스 테리어]]를 이용), [[스트리크닌]] 중독, 과 발판, [[덫]],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냥 방법인 인간 냄새를 뿌리고 [[플라드리]]로 애워싸운 다음 무리 전체를 사냥하는 것이 있다. 이 방법은 늑대의 인간 냄새에 대한 공포에 의존하며 늑대가 냄새에 익숙해지면 효과를 잃을 수 있다. 일부 사냥꾼들은 전화를 이용하여 늑대를 사냥하기도 한다. [[카자흐스탄]]과 [[몽골]]에서는 전통적으로 늑대를 독수리와 매로 사냥하며 현재는 경험이 풍부한 매잡이가 줄어들어 감소하고 있다. 항공기로 늑대를 쏘는 것은 지상에서보다 가시도가 높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이며 이 방법은 논쟁이 있으나 늑대에게 탈출하거나 보호하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파일:Wolf Fox & Seal Skins in Norway.jpg|섬네일|위오른쪽|노르웨이 모피 시장에서의 늑대 가죽.]] 늑대 가죽은 [[스카프]], 여성복의 [[트림 (재봉)|트림]]에 사용되며 가끔 [[재킷]], [[망토]], [[외투]], [[머클럭]], [[융단]]에도 이용된다. 늑대 가죽은 개가죽보다 얇고 잘 찢어지는 경향이 있다. 늑대가죽의 품질은 모피섬유의 밀도와 강도에 따라 다르고 수직으로 선 털과 측면이 두터운 점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주로 북부늑대에게 나타나지만 점차 따뜻한 기후로 인해 남쪽으로 옮겨지고 있다. 유라시아늑대보다 북미늑대가 부드럽고 푹신하기 때문에 북미늑대 가죽이 선호되고 가치가 높다. 독에 의해 죽은 늑대의 가죽은 대부분 가치가 높다. 중세 유럽에서는 피부의 악취로 인해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가죽이 유일한 실용적인 측면으로 강조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민속]]에 따르면, 늑대가죽 [[거들]]은 입은 사람을 늑대인간으로 변화시키며 여러 아메리카 토착민들은 의약 목적을 위해 늑대가죽을 사용했다. [[파웨니 족]](Pawnee people)은 적 지역을 여행할 때 망토같은 늑대가죽을 입고 다녔다. [[미국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병사의 얼굴 [[동상]]을 막기 위해 늑대 가죽으로 만든 [[파카]]를 입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76년에서 1988년까지 3만 벌의 늑대 가죽이 생산되었다.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매년 국제적으로 6천-7천 마리의 늑대가죽이 매년 거래되고 있으며 [[캐나다]], 소비에트 연방, 몽골과 중국에서 가장 많이 수출하며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한다. 전반적으로 늑대가죽으로 인한 늑대 개체수 감소는 거의 없지만 북부의 늑대는 개체수 보호를 위해 수입되지 않는다. 늑대 모피는 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수입으로 이용되고 있다. 늑대가 식품으로 이용되었던 것은 드물지만, 역사적으로 음식이 부족하거나 약용으로 늑대고기를 먹었다. 특히, 1913년 [[빌하레무르 스테판슨]](Vilhjalmur Stefansson)의 북극 원정대는 늑대고기를 많이 섭취했다. [[자바이칼]] 원주민들은 먹이가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늑대고기를 섭취했다. 특히 [[나스카피족]](Naskapi)같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은 늑대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불충분한 영양이 들어있다고 생각했고 초식동물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동식물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아의 [[민간요법]]에서는 몽골에서는 감기를 완하시키고 늑대고기와 그 [[폐]]의 가루를 음식에 뿌려 먹으면 [[치질]]이 낫는다고 하는 등 늑대고기와 장기 소비에 주요한 영향을 주었다. 일부 산간 지방의 일본인들은 늑대고기가 용기를 준다고 믿었다. 《[[더 그레이]]》 영화 촬영 기간 동안 캐스트 맴버들은 늑대고기를 먹은 것으로 유명했다. 늑대의 고기 맛은 "거칠다"라고 하는 것부터 "연골질 같다", "불쾌하고" "역겹다", "[[닭고기]]와 닮았다" "[[사슴고기]]와 비슷하다"라는 등 다양한 맛으로 묘사했다. [[파일:Raven the wolf licks a visitor.jpg|280px|섬네일|[[Mission: Wolf]]에서 방문자를 맞이하는 전 대사 늑대 레이븐(Reven).]] 길들인 늑대는 개보다 예측과 관리가 어렵고 남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완전히 신뢰할 수 없고 약간의 자극에도 [[사냥 본능]](prey drive)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늑대는 다른 개과보다 길들이기 쉬워 새끼부터 오랫 동안 가족과 길들일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보조적인 관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와는 대조적으로 늑대는 가족을 무리의 연장으로 보고 자신의 생활에서 인정하지만 늑대는 점점 낯선 사람과 무리와 접촉하면 심각한 [[외국인 혐오증|포비아 현상]]을 일으킨다. 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만 늑대를 기르는 인구는 약 8만 명에서 2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혼자 있다는 생각으로 인기가 증가했다. 개는 새끼 때 최대 약 10주까지도 [[사회화]]시킬 수 있지만, 늑대는 19일만 지나도 사회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늑대의 모유는 개의 모유보다 더 많은 [[아르기닌]]이 들어 있기 때문에 새끼에게 아르가닌을 주사하지 않으면 [[백내장]]에 걸릴 수 있다. 개는 쉽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인간 사회와 유대를 유지하지만 늑대는 동종 성체의 부재에서만 유지할 수 있다. 1년 미만의 새끼들은 일반적으로 낯선 사람을 향해 공격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며 특히 번식기에는 공격성이 매우 증가한다. 수컷이 암컷보다 공격적이고 다루기 더 힘들다. 늑대는 미국 표준 [[사육장]](kennel)에 넣기 힘들고, 늑대는 개보다 [[관찰 학습]] 능력이 뛰어나 단순이 인간이 [[래치]](latch)를 푸는 모습만 보고 따라서 풀 수 있다. 늑대는 한 번 묶여진 상태에서 풀려나는 법을 배우면 다시 묶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분류:늑대| ]] [[분류:개과]] [[분류:청소 동물]] [[분류:IUCN 적색 목록 관심대상종]] [[분류:1758년 기재된 동물]] [[분류:아시아의 포유류]] [[분류:유럽의 포유류]] [[분류:북아메리카의 포유류]] 돌고래 돌고래(, )는 수생 포유류로 이빨고래의 한 종류로 바다에 사는 매우 영리한 동물이다. 돌고래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물고기와는 달리 허파로 숨을 쉬기 때문에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물 위로 나와서 허파에 공기를 가득 채운다. 돌고래는 주로 새우나 멸치, 정어리 같은 작은 물고기를 먹이로 즐겨 먹는다. 돌고래란 한국어에서 돌고래라고 하면 위의 세 번째 정의로 가장 많이 쓰인다. 영어권에서 dolphin(돌핀)이라고 하면 위 두 번째 정의로 사용되며, 쇠돌고래류(이빨고래소목 쇠돌고래과)는 porpoise(폴퍼스)라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 돌고래의 몸은 유선형이어서 물 속에서 재빠르게 잘 움직인다. 몸길이는 1.4~8 m, 몸무게는 45kg~6 t까지로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참고로 저 최대 수치는 범고래를 포함한 것인데, 사실 범고래의 경우 학명은 흰줄박이(돌고래)물돼지이나, 분류상으론 고래에 속하기 때문에 돌고래의 크기 수치에 포함시키는 것은 옳지않다. 이는 흰돌고래도 마찬가지. 범고래와 흰돌고래를 제외한 최대 수치는 추가바람. 노 모양을 한 앞다리인 지느러미발이 한 쌍 있고 뒷다리는 없다. 등에는 등지느러미가 있으며, 지느러미발과 등지느러미는 수영할 때 몸의 균형을 잡아 준다. 강한 꼬리지느러미 구실을 하는 돌고래의 꼬리는 물 속에서 돌고래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준다. 돌고래의 피부는 매끄럽고 탄력이 있다. 20 - 50 마리가 떼지어 서식한다. 대표적인 천적은 상어와 범고래가 있다. 폐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쉬어야 한다. 1분에 한두 차례 정수리에 있는 숨구멍인 분수공으로 호흡한다. 분수공은 물 속에 있을 때는 강력한 근육으로 닫혀 있어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돌고래는 8시간 정도 잠을 잔다. 한무리가 잠을 자는 동안 다른 무리들이 불침번을 본다. 돌고래는 잠을 잘때 한쪽 뇌만 잠을 자고 다른 뇌는 숨을 쉬기위해 잠을 자지 않는다. 양쪽 뇌가 번갈아 수면을 취한다. 청각이 매우 발달하여 음파 탐지 능력이 있다. 운동장 거리의 물체를 음파로 잡아내는데 많은 수가 있으면 더 넓은 거리의 물체들을 파악하게된다. 또한 시력도 좋고, 피부의 촉각도 예민하다. 2000년을 전후해서, 과학자들은 인간이 인간 다운 조건으로서 갖는 감성과 지성으로 인해 인격체로 여겨지는 것처럼 돌고래의 지능에 대해 연구를 한 결과 돌고래들도 이와 같은 감성과 지성을 갖춘 법인격체로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지속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2013년5월, 인도 중앙정부는 공식적으로 돌고래를 인위적으로 처우하는 행위에 대해 금지하는 발표를 한 바가 있다. 미국과학진흥협회(th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는 2010년 2월 21일 협회지 <사이언스 나우>를 발행하면서 '돌고래를 인격체로 볼 수 있는가?'라는 이슈를 제기한바가 있다. 칠레, 코스타리카, 헝가리, 인도의 4개국은 돌고래를 "인간이 아닌 사람"(non-human persons)으로 선언했으며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돌고래의 포획 및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당나귀 당나귀("Equus asinus", )는 말과의 동물이다. 몸높이 1m, 몸무게 100kg 정도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말과 유사하다. 털은 회색인데 등을 따라 검은 선이 있다. 또한 귀가 길고 다리가 짧으며 꼬리 끝부분의 털이 길다. 가축화된 당나귀는 선택 교배를 통해 크기·색·털 길이가 다양해졌다. 성장이 빨라 만 3년 6개월(말은 4년)에 발육이 끝난다. 임신기간은 평균 364일로서, 말보다 약 1개월 정도 길다. 수컷은 생식력이 왕성하여 5-6개월의 종부기간을 통해 매일 8-10회의 종부 능력이 있다. 체질은 강하며 거친 음식에 잘 견디고, 수분이 적고 냉혹한 지역에도 잘 적응한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고, 체격에 비해 힘이 세고 지구력이 강해 사역용·운반용으로 이용된다. 또한 말보다 느리고 안전한 동물로서 교통 수단으로 이용됐다. 당나귀 수컷과 암말을 교배하여 나온 것이 노새이며, 당나귀 암컷과 수말을 교배하여 나온 것이 버새이다. 예전에는 야생당나귀도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멸종되었다. 그 예로 시리아들당나귀를 들 수 있다. 미국 민주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당나귀는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있다. 비버 비버()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사는 설치류이다. 비버과(Castoridae)의 유일속 비버속("Castor")에 2종이 속해 있다. 몸길이 60-73cm, 꼬리길이 33-44cm, 몸무게는 20–27 kg 정도이다. 몸빛깔은 밤색에서 옅은 검은색까지 변화가 많다. 외형은 거대한 땅다람쥐와 비슷하지만 귀는 작고 꼬리는 배의 노와 같이 편평하고 비늘로 덮여 있다. 머리는 넓적하고 턱이 크고 강하다. 둥근 귀와 작은 콧구멍은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굳게 닫을 수 있다. 눈에는 세 개의 눈꺼풀이 있으며, 투명한 속눈꺼풀이 아래로 내려 있어 물 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으며, 땅에서는 나무를 자를 때 날카로운 가지에 눈이 찔리지 않게 보호해준다. 비버는 시력이 좋지 않지만 예민한 후각과 청각을 이용하여 위험에 대처한다. 이빨은 스무 개인데, 앞니가 매우 강하여 지름이 30cm인 나무를 10-15분 내에 갉아 쓰러뜨릴 수 있다. 뒷발에는 물갈퀴가 발달되어 있다. 수중생활에 뛰어나며 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천이나 늪에 살며, 하천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를 갉아 넘어뜨린 다음 쌓인 흙이나 돌을 첨가하여 댐을 만든다. 댐의 높이는 일정하고 댐의 길이는 20-30m가 보통이나 때에 따라서는 650m나 되는 것도 있다. 보금자리는 완성된 못의 중앙에 있는데, 나무·돌·흙 등으로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보금자리는 수면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며 규모가 커서 사람이 똑바로 서서 들어갈 정도의 것도 있다. 큰 하천이나 늪에 사는 개체는 늪기슭에 터널을 파고 그 깊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출입구는 항상 수면 밑에 만들기 때문에 외적에 대해서 안전하다. 암수 한 쌍과 두 살 아래의 새끼들이 한 가족을 이루어 생활한다. 봄에 2-8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임신기간은 60-128일이다. 야행성으로 해질 무렵부터 아침까지 활동하며, 먹이는 나무껍질·나뭇잎·새싹 등인데 겨울에는 연못 가운데 저장해 둔 나무껍질을 먹는다. 행동범위의 여기저기에 항문에서 나오는 냄새를 배게 하여 다른 비버의 침입을 방지한다. 외적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여 수면을 꼬리로 두드려서 800m 이상 떨어진 동지들에게 위험신호를 보낸다. 모피의 질이 좋아 대량 남획한 결과 멸종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현재는 보호되어 개체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스컹크 스컹크(skunk)는 고약한 냄새로 유명한 식육목 포유동물로, 스컹크오소리속을 제외하면 아메리카 대륙에 분포한다. 세계를 통틀어 4개 속 12개 종이 있다. 색깔은 보통 검정과 하양색이다. 몸길이 50cm 정도이며 몸은 족제비와 비슷하나 튼튼하고 네 다리가 약간 길다. 귀는 작고 꼬리가 길다. 항문 옆에는 한 쌍의 잘 발달된 항문선이 있어서 위험이 닥치면 이곳에서 강력한 악취가 나는 노란색의 액체를 적의 얼굴을 향하여 발사한다. 항문선에서 발사된 액체는 다른 동물의 눈에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공격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스컹크를 공격하는 동물은 별로 없다. 몸을 싸고 있는 검은 바탕에 굵은 흰줄무늬는 이 지독한 냄새를 표현하는 경계색으로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발가락에는 긴 갈고리발톱이 있어 굴을 잘 판다. 낮에는 자기가 판 굴이나 다른 동물이 버린 굴 속에서 잠을 자고, 밤에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데, 흙을 파서 찾는 경우가 많다. 삼림 외에 초원·사막 등 여러 곳에서 서식하는데, 때로는 인가의 마루 밑에서 숨어 살기도 한다. 수컷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며, 털벌레(나비류의 유충)·딱정벌레·귀뚜라미·메뚜기·들쥐·도마뱀·뱀·과실·낟알·죽은 동물의 썩은 고기까지 다양하게 먹는다. 임신기간은 63일 정도이고, 봄에 4~10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항문선을 제거하여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하며, 모피의 질이 좋아 모피를 이용하기도 한다. 오소리아과 오소리아과(Melinae)는 족제비과에 속하는 포유류 분류군이다. 재규어 재규어(, )는 아메리카대륙에서 사는 야생 고양이과 척추동물로, 구대륙의 호랑이, 사자, 표범과 함께 표범속에 속하는 4종의 대형 고양이류 중 하나이며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유일한 표범속 동물이다. 북으로는 미국 남서부, 남으로는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분포하나, 미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자취를 감추었다. 산림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해 대체적으로 개체 수는 줄어들고 있다. 아메리카 및 서반구에서는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고양이과 동물로, 같은 과 내에서는 호랑이, 사자를 이어 세 번째로 크다. 종종 표범으로 오인되나 표범보다 몸이 훨씬 크고 억세게 생겼다. 몸길이는 수컷 185cm, 암컷 170cm, 꼬리길이는 80cm, 몸무게는 수컷 179kg, 암컷 165이다. 몸빛깔은 일반적으로 노란색이고 배 부분은 흰색이다. 표범과 비슷한 검은 반점이 몸에 있으나, 무늬가 크고 가운데에 작고 검은 점이 있다. 단독으로 생활하고 번식기에만 암수가 함께 생활한다. 주로 밤에 활동하며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숲·잡목지대·초지에서 활동한다. 턱힘이 강한 맹수에 꼽힌다. 모든 동물을 가리지 않고 먹으며 수영과 나무타기를 잘 한다. 5-25 km의 일정한 세력권을 만든다. 재규어는 카피바라를 비롯한 설치류, 아르마딜로, 나무늘보, 원숭이, 맥, 개미핥기, 페커리, 사슴, 새, 거북, 거북알, 개구리, 물고기 등을 먹는 육식성 동물이다. 임신기간은 93-110일이고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2년간 어미와 함께 지내고 세 살이면 성적으로 성숙하여 짝짓기를 할 수 있으며, 4년이 되면 완전히 자란다. 건조지대에서는 살지 않고 물가나 하천·늪지가 가까운 밀림에서 서식한다. 미국 남서부에서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분포한다. 지금은 환경의 변화와 남획으로 멸종 위기에 놓여 있어 여러 나라에서 재규어 털가죽의 수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재규어라는 명칭은 투피어족의 한 언어에서 따온 명칭인데 아마존의 상업언어인 투피남바와 스페인어의 "jaguhiar"에서 따왔다. "yaguara"는 투피어족의 말로 야수라고 해석되지만 때로는 개라고도 한다. 이것은 모든 육식 동물에게 포함되는 언어인데 재규어 한 종만을 나타내는 어휘는 "yaguareté"인데 접미사 "eté"는 "사실" 혹은 "진짜"라는 뜻이다. "Panthera"는 사자, 호랑이, 표범의 속을 나타내는 라틴어인데 이것은 표범을 뜻하는 그리스어 "πάνθηρ"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πάν"는 "모두"를 뜻하며 "θηρ"는 야수를 뜻하는데 "θηρ"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왔다. 재규어의 분포지역은 멕시코, 미국 남서부, 벨리즈,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가이아나, 프랑스령 기아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일부지역에서 서식한다. 이들의 주요 서식지는 중남미의 열대우림이지만 아열대지역과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낙엽림에서도 살아간다. 이들은 최근 서식지 파괴와 모피를 노리는 밀렵으로 인해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미국 남서부(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에서 사라진것으로 알려졌으나 미국 뉴멕시코에서 촬영된 사진이 공개되면서 미국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미국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미국과 북부 멕시코에 서식하는 재규어를 위한 장소를 국경을 따라 정하였지만 그 개체군의 생존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팜파스에서 개체군이 멸종되었고 멕시코와 미국의 건조한 초지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우루과이와 엘살바도르에서도 서식했으나 사라졌다. 이들은 선사시대까지 해도 남아메리카 대륙 대부분과 미국 남부의 대부분 지역과 미주리주에서도 서식했었다. 그 화석은 4만년 전에서 1만년전 쯤이라고 한다. 재규어는 남아메리카의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과 남아메리카 거의 대부분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인간의 사냥으로 멸종된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국 남서부지역에도 서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생태적 위치는 남미 최강의 육식동물로 때때로 큰 몸집의 악어 카이만이나 세계에서 가장 큰 뱀인 아나콘다를 잡아먹기도 한다. 치타 치타(cheetah, "Acinonyx jubatus")는 고양이과 육식동물이다. "치타"라는 이름은 "장식된"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시트라(चित्रय)에서 기원한 치타(cītā, )에서 비롯되었다. 몸길이 수컷 150cm, 암컷 120cm, 꼬리길이 60cm~80cm, 몸무게는 22kg~72kg이다. 몸은 대체로 노란색이며 검은색의 작은 얼룩무늬가 조밀하게 있다. 치타는 다른 고양잇과 동물들과 달리 발톱을 완전히 숨길 수가 없다. 분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데, 원래는 아프리카에는 거의 전역에 살고, 아시아에는 아라비아,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1950년대에 마지막 10마리가 잡히면서 절멸을 하게 되고 이란에만 남아있다. 암컷은 단독생활을 하고 수컷은 무리지어 생활하거나 형제끼리 생활하는데, 보통 암수 한 쌍이나 암컷과 성장한 새끼로 이루어진 가족으로 또는 작은 무리를 이뤄서 생활한다. 주로 사자나 점박이하이에나 그리고 표범같은 육식동물이 별로 다니지 않는 아침과 낮에 사냥을 한다. 톰슨가젤, 임팔라, 작은 먹이를 먹는데, 특히 어린 영양이나 토끼을 잘 잡아먹는다. 먹이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번개처럼 덮쳐 잡는데, 이때 최고 속도로 약 30초를 정도를 달릴수도 있다. 가끔 사자나 표범, 하이에나에게 빼앗긴다. 그러나 가뭄과 같은 극한 전쟁시에는 하이에나에게 저항하고 먹이를 방어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치타는 지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져 있다. 달리기 시작해서 2초 후에는 시속 72km로 속도를 낼 수 있으며 최고 속력은 무려 132km/h이다. 그러나 200~300m 거리에서만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오래 달리지 못하는 이유는 체온이 급속하게 올라가서 생명에 지장이 오기 때문이다. 치타가 빠른 이유는 등뼈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번에 7m까지 가는데 올림픽 선수가 3m가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거리이다. 또 발의 접지력이 뛰어나고, 폐와 심장이 크며, 꼬리가 길어서 방향을 쉽게 전환한다고 알려져 있다.고양이와 다르게 치타는 발톱을 항상 드러내고 다니며 숨을 들이쉴 때는 고양이 특유의 갸르랑 거리는 소리를 잘 낸다. 출산은 3~6월에 하며 임신기간은 90~95일이고 한배에 1~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일반적으로 치타 새끼의 90%가 6개월 만에 죽게 되는데 새끼 중 절반 이상이 점박이하이에나, 줄무늬하이에나, 갈색하이에나, 표범, 사자에게 죽는다. 살아 남은 새끼는 약 15개월 동안 어미와 함께 생활하며, 먹이를 사냥하는 법을 배운다. 치타는 사바나나 반사막지대에 서식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의 초원에 다수, 아시아 지대에 소수가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치타는 모피 질이 매우 좋아 사냥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치타라는 약간 큰 아종이 존재한다. 또한 아직도 북아프리카 사하라 지대에 치타가 200마리 남짓 남아있다. 서식지는 아프리카의 초원 사바나로, 주로 평평한 곳에 많이 산다. 대체로 표범이 치타보다 큰 편이다. 치타는 성질이 온순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길들이기 쉽지만 표범은 성질이 호랑이보다도 사납고 호랑이보다도 공격적이며 기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치타의 무늬는 점무늬이며, 꼬리 끝에는 줄무늬가 있고 꼬리는 끝이 하얀색인데, 표범의 무늬는 꽃무늬와 비슷한 고리 무늬이고 꼬리는 끝부분이 윗면이 까맣고 아랫면이 하얀색이다. 치타의 생활을 보면 암컷은 단독생활을 하고 수컷은 무리생활을 하거나 형제끼리 생활하는데 표범은 암수가 모두 단독생활을 한다. 두 동물을 쉽게 구별하려면 얼굴을 보면 된다. 치타의 얼굴에는 눈머리부터 입 부근까지 검은 줄무늬가 있다. 그리고 꼬리에는 다른 부분과 달리 검은 링 모양이 있다. 쥐캥거루 쥐캥거루는 쥐캥거루과(Potoroidae)에 속하는 9종의 유대류 종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태즈메이니아 섬에 분포한다. 다른 캥거루과 동물들과는 두개골과 비뇨생식기의 구조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며, 큰 송곳니를 가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의 몸크기는 대개 토끼 정도이거나 그보다 작으며 쥐캥거루류는 대부분 덤불에서 산다. 이들은 밤에는 풀, 덩이줄기, 지하의 균류 등을 먹으러 다니며, 어떤 것들은 곤충의 유충과 벌레들도 먹는다. 쥐캥거루는 3가지 종류가 있다. 베통기아속(―屬, "Bettongia")의 4종은 분홍색의 코와 짧은 귀가 특징이며, 포토로우스속("Potorous")의 2종은 꼬리가 더욱 짧고 얼굴은 더욱 뾰족하다. 붉은쥐캥거루("Aepyprymnus rufescens")는 쥐캥거루류 중에서 가장 큰 종으로서, 엉덩이에 희미한 흰 줄이 나 있고, 꼬리길이는 35cm 내외이다. 사향쥐캥거루("Hypsiprymnodon moschatus")는 캥거루과로 분류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별도의 독립된 과인 사향쥐캥거루과로 분류한다. 다른 캥거루과 종들과 달리 꼬리에 털이 없고, 뒷발의 첫 번째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 생쥐속 생쥐속("Mus")은 뾰족한 주둥이와 작고 둥근 귀, 몸길이 정도의 비늘꼬리를 가진 작은 설치류이다. 번식률이 높다. 가장 흔하게 알려진 종은 생쥐이다. 애완동물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들쥐가 지역적으로 흔하기도 한다. 먹이나 둥지를 찾기 위해 가정집에 침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팬지 침팬지(, , 학명 : "Pan troglodytes")는 사람과 침팬지 속에 속하는 유인원이다. 한때는 초식동물로 여겨졌으나, 영국의 동물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제인 구달에 의해 무리 지어서 원숭이나 천산갑을 사냥하는 모습이 밝혀지면서 잡식동물로 재해석되었다. 유전적으로 사람과 가장 유사한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침팬지의 몸은 전체적으로 거친 검은 털로 뒤덮여 있지만 얼굴, 손가락, 손바닥, 발가락, 발바닥에는 털이 없다. 일반적으로 몸무게는 40-65kg이며 몸길이는 63-94cm이다. 임신 기간은 약 8개월이다. 새끼 침팬지는 3살이 되면 젖을 떼지만 그 이후로도 몇년간 어미 침팬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다. 침팬지는 8-10살이 되면 사춘기를 맞이한다. 야생 침팬지의 수명은 대략 36년이며 사육되는 침팬지의 경우 50년이다. 침팬지는 삼림 속에서 살며 땅이나 나무 위에서 활동한다. 20-150마리의 무리를 지어 살지만, 낮에 돌아다니거나 먹이를 찾으러 다닐 땐 적은 마릿수의 무리를 지어 다닌다. 수컷 중심으로 무리가 돌아가며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무리 속 분쟁이 일어날 경우 위계질서에 따라 해결하므로 비폭력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 침팬지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막대, 돌, 풀, 나뭇잎 등을 꿀, 흰개미 혹은 개미, 견과류, 물을 얻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막대 끝을 날카롭게 만들어 나무에 작은 구멍에 서식하는 세네갈갈라고를 사냥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동할 때는 주로 일어서서 걸으며 나무 오르기나 점프를 하고 밤에는 나무 위에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잠자리에서 잔다. 먹이는 주로 과일이지만 잎·줄기·나무껍질·꽃 등과 영양 새끼·다람쥐 등의 포유동물도 잡아먹는다. 또한 새의 새끼나, 알, 혹은 개미 등의 곤충도 잡아먹는다. 먹이 때문에 서식장소를 변경하는 습성이 있으며 때로는 원주민들의 과수원을 습격하여 과일을 약탈하기도 한다. 항상 큰 목소리를 내며 먹이를 잡을 때 도구를 사용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행동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이는 각 지역집단에서 전승되어 온 문화적 행동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간다에서는 나뭇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부채처럼 흔들며 벌레를 쫓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분포 지역은 아프리카 중부이며 서식 지역은 저지대의 열대다우림·산지림·건조림 등이고 적응력이 좋다. 보통 20-80마리가 안정된 사회적 단위를 유지하면서 생활한다. 단위집단 내에는 가족과 같은 하위 단위는 없고 통일성이 없는 이합집산을 되풀이한다. 단위집단 내에서의 성관계는 자유롭다. 암컷은 성적 성숙기에 이르면 원래의 집단을 떠나고 인접 집단에 들어가 새끼를 낳고 키운다. 침팬지 사회는 집단 사이에 암컷을 교환하는 부계사회이다. 생태 특성상 공격성이 매우 강하다. 대중매체에서는 치타가 타잔에서 나오는 침팬지로 등장하며, 타잔의 친구이다. 침팬지는 IUCN 적색 목록에 등록된 멸종 위기 등급의 동물이다. 대략 170,000-300,000마리의 침팬지가 아프리카 서부와 중부의 숲과 사바나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침팬지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서식지 감소, 밀렵, 질병이다. 수컷 성체의 몸무게는 40-60kg, 암컷의 경우 32-47kg이다. 큰 야생 침팬지의 경우 70kg까지 자라날 수 있으며 트래비스와 같은 사육 침팬지들은 무게가 91kg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네다리로 서 있을 때 코부터 엉덩이까지의 몸길이는 대략 63-94cm 사이며, 두 다리로 서 있을 때는 수컷은 160cm, 암컷은 130cm까지로 측정된다. 몸은 전체적으로 거친 검은 털로 뒤덮여 있지만 얼굴, 손가락, 손바닥, 발가락, 발바닥에는 털이 없다. 꼬리가 없는 게 특징이며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길고 귀가 크다.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을 가졌고, 마찬가지로 엄지발가락 또한 다른 발가락과 마주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더욱 정밀한 손,발 사용이 가능하고 나무에 기어오를 때 발가락으로 나뭇가지를 붙잡을 수 있다. 앞머리에는 긴 털이 있고 입술 부근에는 거친 흰 털이 있다. 코는 편평하여 피부의 주름과 같이 보이고 몸과 다리는 통통하고 짧다. 이빨 수는 사람과 같은 32개이고 염색체 수는 사람보다 한 쌍이 많다. 침팬지의 시력은 약 1.5 정도이다. 성적으로 성숙하기까지는 암컷이 약 7년, 수컷이 약 8년이 걸린다. 암컷은 약 11살이 되면 첫 새끼를 낳는데, 임신 기간은 약 8개월이고, 3-4년마다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암컷이 키우는데, 약 5개월이 될 때까지 안고 다니고 새끼 침팬지가 3살이 되면 젖을 뗀다. 그 이후로도 몇년간 어미 침팬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다 약 6년이 지나면 떠나보낸다. 침팬지는 서로 '털 고르기'를 통해서 오물이나 벌레 등을 떼어 준다. 투덜대거나 비명을 질러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방을 껴안거나 몸을 만지며 의사 표현을 한다. 짧은 거리의 경우 이족보행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족보행을 하는 동물이다. 걸을 때 뒷다리는 발바닥 전체를 사용하고 앞다리는 손등을 땅에 디디며 걷는다. 이는 손바닥을 사용하여 걷는 오랑우탄과는 대비되는 특성이며, 침팬지와 같은 손등 걷기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릴라와 보노보가 있다. 침팬지는 적응력이 좋은 동물이며 서식지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식지는 열대다우림, 산지림, 건조림이다. 침팬지는 행동 범위를 기억하고 먹이를 꾸준하게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인지지도가 뛰어난 동물이다. 어미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침팬지를 제외하고 모든 침팬지들은 각기 다른 나무에서 둥지를 트고 매일 다른 곳에서 밤을 지낸다. 코트디부아르와 가봉에서는 표범이 침팬지의 생태계에 위협을 가하는 포식자이다.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 침팬지들은 집단으로 모여 표범을 공격하거나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 탄자니아의 국립공원에서는 사자가 4마리의 침팬지를 잡아먹은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 더 이상 포착된 바는 없다. 사바나의 침팬지들이 더 큰 무리를 지어 고양잇과의 포식자들을 견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잡식성이지만 과일을 가장 선호한다. 나뭇잎, 잎눈, 씨앗, 꽃, 줄기, 중과피, 나무껍질, 나뭇진 또한 먹는다. 곤충과 고기도 먹지만 비율로 계산하면 2%로 추정된다.침팬지는 대부분 초식 생활을 하지만 꿀, 흙, 곤충, 새, 달걀, 작은 포유류 동물, 다른 종의 영장류 등을 먹기도 한다. 침팬지가 가장 선호하는 포유류 동물은 서부붉은콜로부스이며, 그 외에는 붉은꼬리원숭이, 노랑개코원숭이, 파란다이커, 임바발라, 혹멧돼지가 있다. 곤충과 무척추동물 등을 사냥하고 잡아 먹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침팬지의 섭식 비율을 계산하면 사냥하여 먹는 동물의 비율은 2%밖에 차지 하지않으며 사냥철에는 하루에 65g의 고기를 먹는다. 이 측정치는 무리에 따라 다르고 또 매년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과일, 잎, 뿌리, 등 식물을 주로 섭취한다.연구 결과에 따르면 암컷 침팬지는 수컷보다 적은 양의 고기를 먹는다. 사람이 침팬지를 관찰할 경우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드론, 카메라, 마이크 등을 사용하여 관찰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20-150마리의 무리를 지어 살지만, 낮에 돌아다니거나 먹이를 찾으러 다닐 땐 적은 마릿수의 무리를 지어 다니며 이때의 무리는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구성되어 있다. 암컷과 수컷 모두 때때로 홀로 이동할 때가 있다. 환경과 때에 따라 무리를 변경한다. 침팬지 무리의 종류를 살펴보자면 '수컷 무리', '암컷과 새끼 무리', '암컷과 수컷 무리', '어미 침팬지와 새끼 무리'가 있다. 침팬지는 조직 내에서 복잡한 상호 관계망을 이루고 있으며 많은 시간을 서로에게 '털 고르기'를 해주는데 할애한다. 조직 사회의 핵심적 역할은 수컷이 맡고 있다. 자신의 무리를 보호하고 먹이를 찾아다니려 주위를 돌아다닌다. 수컷은 자신이 태어난 무리에 머무르지만 암컷은 청년기에 원래의 무리를 떠나 다른 무리로 이동한다. 수컷들 사이에선 지배 계급에 따라 위계질서가 이루어져 있고 암컷은 수컷의 지배하에 생활한다. 다양한 표정, 몸짓, 소리를 통해 다른 개체와 소통한다. 가까이 있는 개체와 소통할 때 얼굴 표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서울 땐 ‘이빨을 내보이며 웃는 표정’을 지으며 이를 통해 근처에 있는 다른 침팬지들에게도 알린다. 다른 얼굴 표정으로는 ‘입술을 젖히는 표정’, ‘입을 뿌루퉁하게 내미는 표정’, ‘입을 굳게 다문 표정’이 있다. 발성 또한 중요한 의사소통 방법이다. “팬트 후트”는 성체 침팬지들끼리 서로를 부를 때 쓰는 가장 대표적인 인사법이며 흥분했을 때 사용된다. 팬트 후트는 ‘우우우우’라고 외치는 인사법이며 네 파트로 나뉘어 있다. 처음의 ‘우’는 부드럽게 시작하여 점차 커지고 나중엔 크게 소리 지르는 듯이 들리며 이후엔 다시 부드럽게 ‘우’를 외치고 끝난다. 서열이 낮은 침팬지는 높은 침팬지에게 “팬트 그런트”라는 인사법을 사용한다. 대부분의 경우,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막대, 돌, 풀, 잎을 조작하여 꿀, 개미, 흰개미, 견과류, 물을 얻는데 사용한다. 어렵고 복잡한 차원은 아니지만 행동 전에 사전 숙고를 하고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1960년 제인 구달의 연구를 통해 현대의 침팬지들이 도구 사용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07년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침팬지는 최소 4,300년 전부터 돌을 가지고 도구 사용을 해왔다. 처음으로 침팬지에 대한 장기 현장 연구를 실행한 사람이 제인 구달이다. 1960년 탄자니아의 곰비 국립공원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오늘날 알려진 침팬지의 행동 양식과 조직 문화에 대한 지식은 상당 부분 50년째 진행되고 있는 제인 구달의 곰비 현장 연구에서 기초하였다. 그 외의 다른 현장 연구로는 1960년 아드리안 코르틀란트의 콩고 민주 공화국 연구와 주니치로 이타니의 탄자니아의 마할레 마운틴 국립공원 연구가 있다. 침팬지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간다에서 침팬지가 어린아이들을 공격한 일이 여러 번 있었으며 그중 목숨까지 위험했던 경우도 있다. 공격의 원인으로는 근처 맥주 양조장에서 술을 마시고 취한 침팬지가 공격했을 가능성과 어린아이를 자신들이 즐겨 먹는 서부붉은콜로부스로 오인하여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침팬지가 인간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할 경우 이들과 교감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 있다. 인간 아기를 낚아채 먹었다는 6개의 기록이 있다. 침팬지의 힘과 날카로운 이빨은 성인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다. 침팬지의 공격으로 다친 사례가 있다. 종합 스톡 자동차 경주 선수 출신 제임스 데이비스는 침팬지 두 마리가 덤벼들어 살이 찢기는 상처를 입었고 침팬지는 도살되었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2009년에 미국 스탬퍼드 도시에서 애완 침팬지 트래비스가 주인의 친구를 공격한 경우가 있다. 트래비스의 경우 91kg에 육박하는 13살 침팬지였으며 피해자는 손, 눈꺼풀, 코, 상악골 일부를 잃었다.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가이아나 부근을 경계로 하여 적도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남쪽으로 탕가니카호(湖)까지 분포한다. 아종의 종류와 분포 지역은 다음과 같다. 족제비속 족제비는 식육목의 포유동물이다. 대한민국에는 두 종이 야생에 분포한다. 코뿔소 코뿔소 또는 무소는 말목에 속하는 포유류다. 코끼리 다음으로 큰 대형 육상동물로, 4속 5종이 있으며 두 종은 아프리카, 세 종은 아시아 남부 또는 일부 네팔의 밀림 지대에서 서식한다. 이중 자바코뿔소, 검은코뿔소, 수마트라코뿔소 3 종이 심각한 멸종 위기종이며, 두 종인 인도코뿔소와 흰코뿔소는 멸종위협을 받는 종이다. 몸길이 2-4m, 몸높이 1-2m, 몸무게 1-3.6t 정도이며, 암컷이 수컷보다 작다. 모든 코뿔소는 대형종이지만 흰코뿔소가 제일 몸집이 크다. 피부는 두껍고 딱딱하다. 몸빛은 회색·갈색·흑갈색 등이고, 무늬는 없다. 귀의 끝과 꼬리끝에 털이 있을 뿐 그 밖의 부분은 털이 없는데, 수마트라코뿔소(특히 젊은 것)는 전신에 드문드문 털이 나 있다. 앞뒷다리가 모두 발가락이 세 개이고, 끝은 발굽으로 덮여 있다. 귀는 깔때기 모양으로 크며,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다. 눈은 좌우 양쪽에 바깥쪽을 향하여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넓은 범위를 볼 수는 있으나, 시각이나 거리감각은 좋지 않다. 그 대신 청각은 매우 예민하고 후각 또한 나름대로 발달한 편이다. 꼬리는 60-76cm로, 끝에 굵은 털술이 있어 파리 등을 쫓는 데에 도움이 된다. 윗입술의 모양은 종에 따라서 다른데, 모두 교묘하게 움직여 풀이나 작은 나뭇가지를 뜯는 데에 쓰인다. 이(齒)는 식물을 씹어 으깨기에 알맞지만, 대부분 치식이 일정하지 않으며 앞니가 소실된 개체도 존재한다. 코뿔소의 최대의 특징인 뿔은 위치나 모양이 다른 동물의 뿔과는 완전히 다르다. 코뿔소의 뿔은 뼈와는 일체화되어 있지 않다. 두골과 뿔은 결합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피부에서 뿔이 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뿔은 표면도 중심도 모두 같은 물질로 형성되었고 잔털과 같은 것이 성장방향으로 빈틈없이 꽉 차 있다. 출생 직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평생 성장을 계속한다. 뿔은 암수 모두에 있고, 종류에 따라 두 개인 2각코뿔소와 한 개밖에 없는 1각코뿔소가 있다. 뿔은 같은 종끼리의 싸움이나 다른 동물과의 싸움에 쓴다. 무엇에 부딪혀 뿔이 밑동에서부터 부러지는 수가 있는데, 그런 경우 다시 돋아난다. 대부분의 코뿔소는 수영에 능하며 잠수를 오랫동안 할 수 있고, 특히 이 점은 수마트라코뿔소 등의 아시아 쪽 코뿔소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공격성향은 비교적 적으나 예민하기 때문에 자극하면 격렬하게 반응하며 공격하며, 인도코뿔소는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낸다. 흰코뿔소 이외는 무리를 짓지 않으며, 단독 또는 어미와 새끼가 함께 생활한다. 낮에는 쉬고 밤에 활동한다. 흰코뿔소는 풀을 주식으로 하고 그 밖의 종류는 나뭇잎·과실·풀을 먹는다. 큰 몸과 뿔을 무기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천적이 거의 없다. 수컷은 오줌을 뒤쪽으로 뿜어서 나무 등에 뿌려 세력권의 신호로 삼기도 한다. 임신기간은 15-19개월로 길며, 한배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걸어다닐 수가 있고 4-7세면 성숙한다. 5년 간격으로 출산하는데, 새끼는 다음 새끼가 태어날 때까지 어미와 함께 산다. 수명은 40년 정도이다. 출산과 새끼 보호에 있어서 코뿔소는 특별하다. 야생에서 코뿔소의 출산이 최근 최초로 목격되었는데 임신한 암컷이 자신이 속한 무리를 먼저 떠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코뿔소에 의해 새끼가 다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새끼는 몇분안에 일어나서 걸을 수 있다. 코뿔소는 5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주요 종은 자바코뿔소와 인도코뿔소이다. 코뿔소는 일정한 지역에 배설을 한다. 이곳에서 뿔을 사용하여 배설물에 다녀간 곤충이나 벌레들이 다녀간 것을 분석하여 정보를 알아내고, 암컷이 짝짓기에 배설한 냄새를 통하여 정보를 얻는다, 배설장소는 정보를 채집하는 곳이다. 현재 코뿔소는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밀렵꾼들은 코뿔소를 죽이고 뿔과 가죽을 내다 판다. 코뿔소를 멸종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최대의 원인은 뿔을 채취하기 위한 밀렵이다. 코뿔소의 뿔은 예로부터 약용 및 조각의 재료로서 귀중히 여겨져 왔다. 한방에서는 코뿔소의 뿔을 서각이라 칭하여 해열 및 해독에 효능이 있다고 기서되어 있다. 사람들은 뿔의 분말이 해열·최음제로서 효능이 있다고 믿어 왔고 고대 중국에서는 뿔을 재료로 하여 아름답게 조각을 한 술잔이 사용되었다. 또 아랍 지역에서는 단검의 자루에 코뿔소의 뿔을 쓰는 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뿔이 소비되고 있다. 특히 예멘 등지에서 심하다.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뿔을 노리는 밀렵꾼들의 사냥을 막기 위해 코뿔소를 붙잡아 일부러 뿔을 잘라 내는 일까지 하고 있다. 또한 여러 나라에서 밀렵을 막기 위한 법이 마련되어 밀렵을 감시하고 있으며 수를 증대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일부 검은코뿔소를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에 보내어 혹시 아프리카에서 멸종할 경우 다시 들여오기 위한 번식을 시도하고 있다. 코뿔소는 현존하는 4속 5종과 그 외의 멸종된 속과 종으로이루어져있다. 코알라 코알라(koala)는 코알라과(Phascolarctidae)에 속하는 유일한 종으로, 학명은 "Phascolarctos cinereus" 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는 초식성 유대류이며, 몸길이 60-80cm, 몸무게 4-15kg이다. 꼬리는 거의 없고 코가 크다. 앞·뒷발에 모두 5개씩 발가락이 있는데, 앞발 제1·제2발가락은 다른 발가락과 서로 마주보며 나뭇가지를 잡는 데 적합하다. 암컷의 배에는 육아낭이 있는데, 뒤쪽으로 입구가 있으며 안에 두 개의 젖꼭지가 있다. 털은 양털처럼 빽빽이 나 있으며 윗면은 암회색, 아랫면은 회백색이고 특히 귀의 털이 길다. 맹장은 몸길이의 약 3배로 포유류 중에서 가장 길어 2.4m나 된다. 주로 밤에 활동하며, 유칼립투스의 삼림지에만 서식하며 이 나무의 잎들이 그들의 식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유칼립투스 식단은 영양과 칼로리 함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코알라는 주로 앉아서 하루에 20시간까지 잠을 잔다. 보금자리는 만들지 않고, 낮에는 나뭇가지 위에 안전하게 걸터 앉아서 낮잠을 잔다. 대부분 단독으로 생활하고 성질은 순하고 동작도 느리다. 수명은 15-20년 정도이다. 임신 기간은 약 35일이고 보통 한배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몸길이 1.7-1.9cm, 몸무게 1g 이하이고, 털이 나지 않은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 뒤 육아낭 안에서 몇 달 동안 자란 뒤 약 6달 동안 어미에게 업혀 지낸다. 젖을 뗄 무렵에는 어미의 항문에 입을 대고 반쯤 소화된 유카리나무 잎을 먹는다. 모피 때문에 남획되어 수가 감소하였으므로,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미국·일본 등지의 동물원에서 양육·보호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에 분포하며 주로 대나무에서도 볼 수 있다. 코알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언어인 다루크어로 "물을 먹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굴라(gula)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유럽에서 건너간 초기 이주민들은 코알라는 토종곰, 코알라곰 등으로 불렀으나 생물학적으로 코알라는 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러나 초기 이주민의 선입견은 코알라의 학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코알라의 학명 "Phascolarctos"는 주머니달린() 곰()이란 뜻이다. 캥거루 캥거루(, )는 캥거루과의 대형 유대류를 말한다. 왈라비의 경우는 캥거루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으나, 캥거루보다 조금 더 작다. 유럽인들의 이주 후 초원이 늘어나 개체수가 급증했다. 애버리진의 주요 단백질 섭취원이기도 했고, 현재 식용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뉴기니 섬·태즈메이니아 섬 및 일부 그 주변의 여러 섬에 분포한다. 캥거루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상징으로 호주의 화폐의 일부나 군복에 나타나기도 한다. 캥거루는 퀸즐랜드 주 쿡타운 지역의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 언어 중 하나인 구구이미티르어(Guugu Yimithirr)의 커다란 흑색 또는 회색 캥거루종을 지시하는 gangurru를 전사한 것이다. 1770년 8월 4일 제임스 쿡이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잘못된 민간 어원설이 많이 퍼졌는데, 제임스 쿡이 원주민에게 "저 동물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원주민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모르겠다" 즉, gangurru라고 대답을 한 것이 캥거루의 어원이 되었다는 잘못된 설이다. 캥거루의 뒷다리는 크고 강하며, 앞다리는 짧고 작다.캥거루는 뒷다리로만 뛰며 두 다리를 동시에 옮겨 깡충깡충 뛴다. 꼬리는 깡충깡충 뛸 때 균형을 잡아 주고,꼬리가 큰 종은 90cm가 넘는다. 네 다리로 걷거나 두 다리로 설 때 몸을 지탱해 준다. 캥거루는 뒷다리로만 뛰며 두 다리를 동시에 옮겨 깡충깡충 뛴다. 단거리를 뛸 때는 시속 64km로 뛸 수 있고, 높은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다. 붉은 캥거루의 경우에는 거리로는 13미터까지 위로는 4미터까지 뛰어넘을수 있다. 캥거루의 머리는 작고 사슴 같으며, 주둥이는 뾰족하다. 귀는 크고 곧게 서 있으며, 앞에서 뒤로 돌릴 수 있다. 몸은 짧은 털로 덮여 있고 대부분의 종이 갈색 또는 회색털을 갖고 있다. 캥거루의 하복부 앞에 육아낭이 있어서 출산 직후 새끼는 자기 힘으로 그 속에 기어올라가서 젖꼭지에 달라붙어서 자란다. 새끼는 30-40일의 임신기간을 지나 출산되어 앞발만을 써서 어미의 복부로 올라간다. 태반이 없으므로 조산(早産)되며 새끼는 자궁 내에서 분비물을 흡수하여 성장하는데 크기 약 2.5cm, 몸무게 약 1g으로 발육 초기에 출산해 버린다. 그 후의 발육 상태는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6-12개월이면 독립한다. 천적은 독수리·비단뱀·여우 등이다. 일부 소형종 캥거루가 잡식성 경향이 있는 외에는 모두 초식이다. 일반적으로 어금니가 넓고, 융기나 결절이 있어서 먹이를 갈아 으깨는 데 알맞다. 땅에서 지내며 낮에는 그늘이나 덤불 등에서 쉰다. 꼬리와 뒷다리가 발달하여 5-8m, 때로는 13m까지도 점프하지만, 소형종이나 수상생활을 하는 종은 뒷다리의 발달이 약하다. 덤불이나 산림·암석지, 앞이 탁 트인 초원이나 숲 등에서 살고 일부 종은 수상생활을 한다. 캥거루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부류는 붉은캥거루·회색캥거루·왈라루 등을 포함한 대형 캥거루류와 나무오름캥거루·왈라비 등이다. 둘째 부류는 쥐캥거루, 셋째 부류는 냄새쥐캥거루이다. 첫째 부류의 캥거루는 몸길이 80-60cm, 꼬리길이 70-110cm이며, 광활한 초원, 숲이나 덤불 등에서 산다. 초원에 사는 붉은캥거루, 탁 트인 숲에 사는 왕캥거루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또 황무지에는 왈라루가 살고 있다. 풀을 먹으면서 무리를 지어 이동생활을 하는데, 몸이 튼튼하고 실팍하며 발은 비교적 짧고 넓으며 바위가 많은 곳에서 살기에 알맞아서 발바닥에는 거친 과립(顆粒)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에 분포한다. 왈라비는 캥거루와 비슷하지만 약간 작다. 위턱의 셋째앞니에 한 개의 세로홈이 있고, 어금니 앞끝에 융기가 있는 것으로 구별한다. 몸빛깔은 일반적으로 황갈색 또는 회갈색이다. 소택지나 골짜기 등에 가까운 초원이나 덤불에 살고 있다. 몸길이 45-105cm, 꼬리길이 33-75cm이며 무리를 지어 산다. 종류에 따라서는 나뭇잎을 포함한 식물을 먹는다. 둘째 쥐캥거루류는 큰 종이 토끼만하다. 이 중 흰띠쥐캥거루는 많은 입구를 낸 거대한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산다. 쥐캥거루류에 속하는 또 다른 종인 포토루는 뒷다리가 아주 짧고 코가 뾰족해서 쥐처럼 보이다. 셋째 냄새쥐캥거루는 몸집이 아주 작아 쥐만하다. 캥거루류의 다른 종과는 달리 뒷발의 발가락이 4개가 아니라 5개이다. 퓨마 퓨마 또는 푸마(, "Puma concolor"), 쿠거() 또는 마운틴 라이언()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형 고양이과 동물이다. 팬서(Panther), 카타마운트(catamount)라고도 한다. 몸길이 1.1~1.4m, 꼬리길이 70cm, 몸무게 30~100kg이다. 크기나 몸빛깔에는 지리적 변이가 많으며, 반점이 없다는 점이 재규어와 다르다. 몸은 가늘고 귀는 작고 끝이 둥글다. 머리는 나비가 넓고 짧다. 몸의 등면은 적갈색, 황갈색, 회색, 갈색 등이고, 몸 아랫면은 흰색이며, 귀와 꼬리 끝은 검은색이다. 드물게 검은 퓨마도 있다. 어린 퓨마는 어두운 색의 큰 얼룩무늬가 있는데 이 얼룩무늬는 생후 3개월부터 점차 없어진다. 먹이는 사슴, 큰뿔양, 비버, 프레리도그, 다람쥐, 토끼, 까마귀 등이며 때로는 가축을 덮치기도 한다. 퓨마는 먹이에 접근할 때 숨어서 움직이다가 갑자기 먹이의 앞에 뛰쳐 나와서 먹이의 목을 부수거나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임신기간은 13-14주이며 한배에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눈을 감고 있으나 생후 2주일이면 눈을 뜬다. 어미는 새끼가 혼자 살 수 있을 때까지 돌보는데, 새끼 스스로 사냥법을 익히는 데 약 2년이 걸린다. 수명은 10~20년이다. 평지부터 4,000m 고지에 걸친 평원·사막·열대우림 등에 서식한다. 멕시코, 미국, 캐나다 서부에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까지 분포한다. 맹수인지라 사람과 부딪히는 일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겁도 많고 평소에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기 때문에 사람을 주식으로 알고 해코지하는 일은 드물다. 고양이과 동물 중에 인명피해가 가장 많은 동물들인 재규어, 표범, 호랑이에 비하면 기록은 적은 편이다. 호랑이는 아시아 전역에서 1000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먹은 동물인데 표범은 호랑이보다도 사람을 공격한 기록이 많고, 재규어는 이들보다 훨씬 성깔이 사나운데 얘들에 비하면 퓨마의 인명피해는 아무것도 아닌 편이다. 퓨마는 한때 32개 아종으로 나누기도 했으나, 최근의 DNA 연구 결과 2개 아종으로 분류한다. 2018년 9월 18일 대전 오월드 사육장에서 퓨마가 탈출하여 끝내 사살된 사고가 있었다. 대전동물원은 오후 5시 10분경 사육 중인 4마리 퓨마 중 1마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대전소방에 신고했다. 이날 오전 사육장 청소를 마친 직원이 철문을 잠그지 않아 탈출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사라진 퓨마는 8살 암컷이며, 몸무게는 60㎏이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1시간 20분만인 오후 6시 34분에 수색대는 오월드 내 뒷산에서 퓨마를 발견하고 마취총을 쐈다. 수색대는 퓨마가 쓰러지기를 기다렸지만, 퓨마는 오월드 내부를 배회하다가 수색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색대와 추격전을 벌이던 퓨마는 오후 8시 20분에 다시 발견됐지만, 재빨리 도망가면서 포획에 실패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사살하기로 결정하여 경찰과 소방당국은 오후 8시 38분에 엽사와 사냥개를 투입했고, 퓨마는 탈출 신고 4시간 30분 만인 오후 9시 44분에 엽사에 의해 사살됐다. 표범 표범("豹-", "Panthera pardus")은 고양이과 동물이다. 표범의 크기는 서식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아프리카표범과 인도표범, 스리랑카표범, 아라비아표범, 자와표범의 경우, 수컷이 몸길이 140~160cm, 꼬리길이 95~110cm, 몸무게 80kg 정도이고, 암컷이 몸길이 120cm, 꼬리길이 83cm, 몸무게 60kg이다. 페르시아표범과 아무르표범의 경우, 수컷이 몸길이 180cm, 꼬리길이 105cm, 몸무게 90kg이고, 암컷이 몸길이 160cm, 꼬리 99cm, 몸무게 89kg이다. 암컷은 수컷보다 훨씬 더 작다. 몸 빛깔은 담황색에서 갈색이고 검은 반점이 있으며 등의 검은색 무늬는 매화 모양이다. 고양이과 동물 중에서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뛰어나며 덩치도 호랑이, 사자, 재규어 다음으로 크다. 아프리카표범은 톰슨가젤, 임팔라 등의 영양, 원숭이, 혹멧돼지, 토끼, 새, 얼룩말, 누, 새끼 기린, 오카피 등을 잡아먹는다. 인도표범과 스리랑카표범, 페르시아표범, 아라비아표범, 자와표범은 사슴, 어린 물소, 영양, 멧돼지, 원숭이 등을 잡아먹는다. 먹이를 잡으면 나무 위에 끌어올려 놓고 며칠 동안 먹으러 온다. 아무르표범은 멧돼지, 사슴, 노루, 고라니, 너구리, 토끼, 새 등을 잡아먹는다. 육식동물도 주식으로 삼으며 치타, 사향고양이, 카라칼, 서발뿐만 아니라 개과 동물인 늑대, 승냥이, 여우, 너구리, 자칼, 리카온, 아프리카황금늑대도 먹이로 삼고 오소리, 족제비 등도 먹이로 삼는다. 또 가축도 예외가 아닌데 소를 잡아먹기도 하며 가장 좋아하는 가축은 개와 염소다. 표범은 단독으로 생활하며, 낮에는 덤불, 나뭇그늘, 나뭇가지 위 등에서 쉬고 저녁 때부터 밤에 사냥을 한다. 몸을 땅바닥에 붙이듯이 숙이고 소리없이 사냥감에 접근한 후 슬쩍 뛰어올라 뒷덜미나 목을 물어 죽인다. 표범은 먹이를 잡아도 사자나 점박이하이에나 혹은 호랑이에게 빼앗기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먹이를 나무위로 운반하여 먹는다. 덤불이나 나무 위에서 잠복하는 수도 있다. 나무타기를 잘 하여 나무 위에서 원숭이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이다. 가끔 35~68kg이나 되는 죽은 동물이 4~6m 높이의 나무 위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표범이 올려다 놓은 것이다. 표범은 호랑이보다도 사람 공격 기록이 많은 동물이다. 그래서 호랑이보다도 위험한 동물이라 성질도 호랑이보다 훨씬 사납다. 멸종 1급동물이다. 번식기는 열대지방의 것은 일정하지 않지만, 북방의 것은 겨울철이다. 임신기간은 90~105일이고, 한배에 2~4마리 때로는 6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9일쯤 되면 눈을 뜨고, 5개월이면 이빨이 나고 몸집도 어미만큼 된다. 1년 정도 지나면 독립하고, 3년이 지나면 성적으로 성숙한다. 아시아·아프리카의 거의 전역에 걸쳐 널리 분포하고, 한대에서 열대까지의 암석지·초원·관목림·삼림 등 어디서나 서식한다. 평지의 인가 부근에서부터 킬리만자로 산의 높이 5,100m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이 털가죽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표범을 죽였기 때문에 몇 아종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표범은 한반도에서도 살았다는 기록이 있고, 한반도에서는 호랑이보다 많은 수가 서식한 것으로 보이는 동물이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유해조수 퇴치의 명분으로 표범을 남획하여 사실상 절멸했고, 1973년 7월 대한민국의 창경궁(지금의 서울대공원(창경원))에서 대한민국의 마지막 표범이 죽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 강원도에서 표범의 발자국 흔적이 발견되면서 한반도에서도 생존한다고 보고되었고, 그 뒤에도 목격담이나 구체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생존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멸종단계에 들어섰으며,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지리산, 경상남도 쪽에 소수의 개체들만 잔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초부터 1970년을 마지막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1960년대 초순까지 합천군과 진주시 지역 산속에 표범이 서식하였으며 포획된 기록들이 있다. 1960년 정족산 속의 오지인 한듬마을에서 6대째 포수를 해 온 이성열(77)씨를 통해 인근의 유명포수 최종용씨가 표범을 사냥한 사진을 보면 최 포수가 사냥총과 실탄띠를 포획한 표범 위에 올려놓은 장면으로, ‘단기 4293.12.22 慶北 上北面 ○文山 上峯’이라고 적혀 있다. “최씨가 이씨에게 ‘가지산 뒷산에서 표범을 잡았다’고 말한 것으로 봐서 ‘경북’은 행정구역에 익숙치 못한 최씨가 ‘경남’을 잘못 쓴 것이고, 단기 4293년은 서기 1960년이며, ○文山은 지금의 운문산(雲門山)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최 포수는 2마리의 표범을 발견, 한쪽 팔을 잃는 사투 끝에 1마리는 포획하고 나머지 1마리는 도망갔는데, 남은 1마리가 밤마다 괴성을 지르며 산천을 헤매고 다녀 마을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이 포수는 전했다. 1960년 합천군 삼가면과 진주시 미천면 사이 방아재 고개에서 토종 표범 한마리가 잡혔다. 당시 이곳에는 호랑이나 표범이 출몰, 사람까지 해치는 사례가 잦아 경찰이 포수들에게 잡아줄 것을 요청했다고 노 씨는 전했다. 합천에서 진주로 가려면 오도산을 넘어야 했는데 표범 때문에 30여명이 모여야 이동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표범을 잡으려고 차출된 포수는 노종생, 조삼세·천갑열·오병근·조인세 씨 등이었다. 이들은 며칠간 오도산에서 잠복하다가 표범을 잡았다. 1962년 경남 합천 오도산에서 어린 수컷이 포획되었고 1963년에 같은 경남 합천 가야산 줄기에서 또다른 인근 주민의 진돗개를 잡아먹은 어린 수컷이 잡혔였다. 두 마리 다 1~2살 정도의 어린 표범들이었고 소백산맥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혈연적인 관계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62년 노루 덪에 걸린 오도산 표범은 1962년 당시 64세였던 사냥꾼 황홍갑씨가 생포했다. 죽이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는 표범을 전국민에게 보이고 싶어했고 주민들의 도움으로 생포에 성공했다. 그 와중에 황홍갑씨의 동생은 표범의 발톱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어린 표범이었기에 생포가 가능했다고 한다. 황홍갑씨는 소정의 사례금을 받고 표범을 드럼통에 넣어 서울의 창경원에 기증했다. 1963년 합천 가야산에서 사살된 새끼 표범은 진돗개 한 마리를 잡아먹은 후 포만감에 빠져 있던 중, 그 주인 황수룡씨 및 주민들과 개에게 쫓기다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처음 삵을 잡은 줄 알았지만 나중에 귀한 표범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시장에 팔았다. 팔린 표범은 한약재상에 팔려 고기와 뼈, 모피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동아일보의 1963년3월26일 기사화도 되었다. 한국에서의 표범은 이미 거의 마지막 잔존 개체가 살아 남은 상태였지만 이를 보호하겠다는 개념 자체가 당시 당국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전혀 없었고 단지 횡재를 안겨 줄 수 있는 주인 없는 들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여덟달 뒤인 1963년 11월13일 동아일보는 앞서 어린 표범이 사로 잡혀 창경원으로 옮겨진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가야마을에서 또 다시 11월10일 김칠리 (당시 51세)씨가 길이 2m, 무게 15관 (56kg에 해당)짜리 암표범을 이번에도 오도산 중턱에서 철사 올가미로 잡았다고 보도되었다. 이 어른 표범은 10시간 넘게 몸부림 치다 죽었다한다. 이 암표범은 창경원으로 보내진 새끼의 어미 표범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도산 표범이 포획된지 2~3년 후에 전라북도 익산에서 한 교회의 목사가 암컷 표범을 팔겠다고 창경궁에 연락해 왔으나 가격을 너무 비싸게 부른데다 호랑이 덪에 걸려 앞다리가 떨여져 나간 표범이라 사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70년 사실상 마지막 잔존 개체가 잡혔다. 1970년 3월6일 경향신문에 표범관련 기사가 실렸다. 경남 함안 여항산 야산에 다큰 18살로 추정되는 길이 160cm의 커다란 수컷 표범이 잡혔다. 다른 기사처럼 이 기사에도 이 표범의 시가가 70만원이라고 친절하게 적어 놓았다. 이 표범이 잡힌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적인 발견돠지 않고 있다. 1962년 합천 오도산에서 포획된 어린 수컷은 서울대공원 동물원(당시 창경원)으로 옮겨와 1973년 죽음을 맞은 이후[9]로 공식적으로 남한에서의 표범은 멸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남한 전역에서 대형 맹수의 목격담이 이어지고 발자국 등 여러 흔적이 발견되면서 최소 10마리 이상의 표범이 생존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의 경우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에 20마리 이상이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정도에 백두산 일원에서 존재가 영상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2010년에는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에서 표범으로 보이는 고양이과 동물이 고라니 사체를 나무위에 올려놓고 사라졌다는 목격담과 2013년 강원도 원주의 강변에서 표범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보도되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최근 국립환경과학원에서 강원도 민통선 동부 전선인근이 표범 재도입으로 적합한 지역이라고 발표하였다. 표범은 한때 27아종으로 나누기도 했으나, DNA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9아종으로 나눈다. 표범은 호랑이, 사자와 함께 학살습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여겨진다. 먹이가 부족하다기에는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 습성으로 증명이 어렵고 사자, 호랑이랑 같은 습성을 가지지만, 표범이 좀 더 악독하다고 한다. 1910년에 아프리카에서 400여 명의 사람을 죽인 표범이 사살되기도 하였다. 펭귄 펭귄(penguin, )은 펭귄목 펭귄과에 속하는 날지 못하는 새의 총칭이다. 남극,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그리고 적도 부근의 갈라파고스 제도에 분포한다. 모두 남반구에 속한다. 본래 ‘펭귄’은 북반구에 서식했던 큰바다쇠오리("Pinguinus impennis")를 부르는 말이었으나, 나중에 유럽인들이 남반구에서 발견한 비슷하게 생긴 새에 ‘펭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큰바다쇠오리가 멸종하면서 ‘펭귄’은 남반구 펭귄을 부르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펭귄’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수렴된 의견이 없다. ‘흰 머리’란 뜻의 웨일스어 pen gwyn에서 왔다는 설과 ‘뚱뚱한’이란 뜻의 라틴어 pinguis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다. 전 세계에 알려진 펭귄의 종류는 17종 혹은 18종이다. (쇠푸른펭귄과 흰날개펭귄이 식별되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펭귄 종의 고향이 남반구이기는 하지만, 통념과 달리, 남극과 같이 추운 기후에서만 서식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몇몇 종만이 극지방에 산다. 3종은 열대 지방에 살며, 그 가운데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한 종은 먹이를 찾다가 적도를 건너기도 한다. 가장 큰 종은 황제펭귄으로, 다 자라면 키가 약 1.1미터, 무게가 약 35킬로그램 이상이다. 가장 작은 종은 쇠푸른펭귄으로, 키는 약 4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1킬로그램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펭귄은 덩치가 클수록 열을 잘 보관해서 추운 지방에 살고, 작은 펭귄들은 온대나 심지어 열대에서 발견된다. 대부분의 펭귄들은 크릴 새우나 물고기, 오징어를 비롯해 물 속에 사는 동물들을 잡아먹는다. 이들은 물과 뭍에서 각각 전체 수명의 반 정도씩을 보낸다. 수컷이 더 적기 때문에, 짝짓기 철이 되면 암컷 여러 마리가 수컷 한 마리를 걸고 싸우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종 가운데 하나다. 펭귄의 행동 가운데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미가 새끼를 잃었을 때에 나타난다. 극지방의 폭풍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천적인 도둑 갈매기의 공격을 받아 새끼를 잃은 어미는, 아마도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다른 어미의 새끼를 도둑질하려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본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러한 행동을 다른 동물들은 거의 나타내지 않으며, 많은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많은 이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동물도 사람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로 이것을 사용해 왔다. 흥미롭게도, 무리의 다른 암컷들은 어미가 이런 행동을 하면 싫어하고 원래 어미가 제 새끼를 지키도록 도우려 한다. 펭귄에 대해 또 특이할 만한 사실은 이들이 조류 가운데서는 드물게 사람을 겁내어 피하지 않는 종이라는 것이다. 사실 펭귄은 오래전부터 거리낌 없이 탐험가 무리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적으로는 바다표범이 있는데, 펭귄은 적의 공격을 피해 무리를 지어서 사냥한다. 펭귄은 매우 오래된 새이다. 가장 오래된 펭귄 화석은 4000만 년 이상 된 시신세의 것이다. 이 화석들을 보면 당시에 이미 펭귄들은 날지 못했고 헤엄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분화된 시기는 적어도 65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푸들 푸들(poodle)은 개의 품종 중 하나이며, 프랑스의 국견이다. 원산지는 독일이고, 프랑스 귀족 여성들에 의해 인기를 얻어 널리 번식 되었으며, 털이 길고 양털 모양으로 아름답다. 전에는 사냥개로, 또는 잡은 사냥감을 찾아오는 개로 이용됐지만 지금은 애완동물로 인기가 높다. 털은 흰색 또는 검은색, 회색, 갈색, 살구색이고 곱슬곱슬하다. "푸들"은 네 견종이있는데, 어깨의 높이로 구분한다. 토이푸들의 체고(어깨높이)는 25cm 이하에 몸무게는 2~3kg이고, 미니어처푸들의 체고는 25~35cm에 몸무게는 3~6kg에다, 미디엄 푸들은 35~45cm에, 몸무게는 6~20kg정도이며, 스탠더드푸들의 체고는 38cm 이상에, 몸무게는 20~27kg이다. 푸들은 명랑하고 가벼운 몸으로 재주를 보여 주는 것을 좋아한다. 춤을 추는 듯한 걸음걸이와 예쁜 몸단장으로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푸들(Poodle)이란 이름은 "물장구를 치다" 라는 뜻의 pudeln에서 유래했다. 피모가 엉키지 않도록 매일 빗질을 해주어야한다. 눈물 때문에 눈 주변의 털이 변색되는 눈물독이 생기지 않도록 케어해주어야 한다. 다른 많은 종들에 비해, 푸들에는 다양한 크기가 있다. 이는 성견의 기갑(어깨) 높이에 따라 분류된다. 각 종류간의 정확한 신장 기준은 나라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로열 스탠다드, 티컵, 타이니 티컵 등의 용어는 상표이며, 애견협회들로부터 인정받지는 않았다. 국제애견협회에 속하지 않은 애견협회들은 스탠다드, 미니어처, 토이 세 가지 크기로 나누는데, 같은 종의 크기 차이로 규정할 때도 있고 다른 종으로 규정할 때도 있다. 국제애견협회는 같은 종의 푸들이라는 종의 크기에 따른 차이로 스탠다드, 미디엄, 미니어처, 토이 네 가지를 규정한다. 또한 국제애견협회만이 스탠다드 푸들의 최대 사이즈를 명기한다. 프랑스는 국제애견협회를 맡는 국가이며, 프랑스에서는 모든 사이즈의 푸들들이 같이 목록에 오른다. 참새 참새( "Passer montanus")는 참새목 참새과의 새이다. 몸은 다갈색이고 부리는 검으며 배는 잿빛을 띤 백색이다. 가을에는 농작물을 해치나 여름에는 해충을 잡아먹는 텃새이다. 인가 근처에 사는데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시베리아 등 유라시아 지역에 분포한다. 길이는 대개 10-20cm이다. 머리는 갈색이고, 등과 날개는 밝은 갈색이며 검은색의 줄무늬가 있으며 부리는 굵다. 어른새와 어린새는 눈앞, 뺨, 부리 아래에 있는 검은 부분의 색이 차이가 나는데, 성장할수록 검은색이 진해진다. 땅 위를 두 발로 뛰어다니며 풀씨, 나락 등을 먹는다. 제주도에서는 돌담구멍 등에 마른풀을 이용해 둥지를 만든다. ‘참새’라는 이름이 ‘진짜 새’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참새의 ‘참’자가 한자로 참 진(眞)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지만, 실제로 ‘참’은 ‘작다’는 의미의 ‘좀’의 센말이다. ‘촘’이 ‘참’으로 변해 참새가 된 것이다. 비슷한 예로 ‘좀도요’도 도요새 중 가장 덩치가 작은 새이다. 한반도에서는 박새와 더불어 흔히 볼 수 있는 이둘, 구북구의 유럽과 아시아 대부분에 분포한다. 도시·교외·농경지뿐만 아니라 구름과 숲속에서도 볼 수 있고 인공 새집에서도 잘 번식한다. 번식기에는 암수가 짝지어 생활하나, 가을과 겨울철에는 무리 생활을 한다. 참새는 많은 수가 집단을 이루어 번식하지만, 둥지는 서로 떨어진 곳에 짓는다. 대개 인가나 건물에 암수가 함께 둥지를 짓는다. 처마 밑이나 벽의 틈, 때로는 돌담의 틈, 나뭇구멍, 목재나 장작을 쌓아 올린 틈 사이에도 둥지가 있고, 드물게는 제비집을 빼앗거나 땅에서 12m나 되는 나무 위에 집을 짓는 경우도 있다. 텃새이지만 농작물의 수확기에는 제법 먼 거리까지 날아가 먹이를 찾는다. 나무 위나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다니는데 땅 위에서는 양쪽 다리를 함께 모아 뛰고 날 때는 파도모양을 그리면서 날아오른다. 일정한 지역에 머물다가 저녁 때가 되면 나무 숲에 모여 지저귄다. 여름철에는 딱정벌레·나비·메뚜기 등의 곤충류를 많이 먹고 그 외 계절에는 곡물의 낟알·풀씨·나무열매 등 식물성을 주로 먹는다. 특히 가을철 수확기에는 허수아비, 은박 반사줄, 바람개비, 맹금류 울음소리, 폭발음 등으로 퇴치 수단을 세워야 할 정도로 농작물 수확에 큰 피해를 주는 유해 조류이긴 하지만 해충 등의 벌레를 잡아먹기도 하기 때문에 농업에 있어 중요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당시 참새들이 수난을 당하면서 해충들이 늘어난 적이 있다. 일정한 곳에서 잠을 자며 저녁 때가 되면 미루나무 위 또는 대나무 숲에 많은 수가 모여 시끄럽게 운다. 부리를 위로 치켜올리고 꼬리를 부채 모양으로 벌리며 몸은 뒤로 굽히면서 과시행동을 한다. 새끼를 키우는 어미새는 둥지에서 200m 이상 멀리 날아가지 않으며, 하루에 600회 이상 먹이를 나르고 새끼를 기른다. 새끼가 클수록 그 횟수는 줄어든다. 2-7월이나 3-6월에 대개 사람이 사는 집이나 건물에 둥지를 틀고 가장 많이 산란하며, 4-8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품은 지 12-14일이면 부화하고 암수가 함께 새끼를 돌본다. 새끼는 13-14일이 지나면 둥지를 떠난다. 제비 제비()는 조류 참새목 제비과의 여름철새이다. 벼랑이나 처마 밑에 진흙으로 만든 둥지를 만들어서 번식하며, 곤충을 잡아먹는다. 날개끝이 가늘어 빠른비행에 유리하고 여름에 한국에 오는 철새다. 집을 지을때는 해조류나 진흙을 이용해, 자신의 침과 섞어 수직벽에 붙도록 짓는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고 하는데, 이는 습기 때문에 몸이 무거워진 곤충을 잡아먹기 위해 제비가 낮게 날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제비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사람이 뿌린 농약이 제비의 몸에 쌓여 알껍질이 얇아지면, 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보호 야생 생물 대상종이다. 날개길이 11-12cm, 꼬리길이 7-10cm, 몸무게 12-22g 정도이다. 제비의 등은 금속성 광택이 나는 청색, 가슴은 밤색이며, 꼬리는 깊게 패여 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름새로, 이동할 때나 번식 초기에는 암수 또는 단독으로 생활하나 번식이 끝나면 가족과 함께 무리를 짓고 거의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날아다닐 때는 날개를 펄럭이기도 하고 날개를 멈추고 미끄러지듯이 날기도 한다. 번식이 끝난 6-10월 사이에는 평지의 배밭이나 갈밭을 잠자리로 하며, 해가 진 후 수천 또는 수만 마리가 무리를 지어 모여든다. 인가 또는 건축물의 적당한 부분이나 다리 등에 둥지를 짓고 산다. 둥지는 보통 한 집에 한 개이고 매년 같은 둥지를 보수해서 사용한다. 귀소성이 강하여, 매년 같은 지방에 돌아오는 예가 많다. 산란기는 4-7월경이며, 한배에 3-7개의 알을 낳는다. 연 2회 번식하며 2회째의 산란은 1회의 새끼가 떠난 후 12-16일경에 이루어진다. 새끼는 알을 품은 후 13-18일 만에 부화하고 그 후 20-24일이면 둥지를 떠난다. 암수가 함께 새끼를 기른다. 먹이는 파리·딱정벌레·매미·날도래·하루살이·벌·잠자리 등의 날아다니는 곤충 등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우체국의 상징으로 우정사업본부가 제비 마크를 사용중이다. 문학 속의 제비는 인간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는 왕자를 도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다가 얼어죽는 이야기가 나오고, 전래동화인 《흥부와 놀부전》에서도 마음 착한 흥부를 돕고 마음 나쁜 놀부를 벌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까마귀속 까마귀속("Corvus")은 갈까마귀 등의 40여종을 포함한다. 윤기가 나는 검은 깃털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조류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은 부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실제 예로, 까마귀는 호두를 길바닥에 놓아두었다가 차가 지나가면서 부수면 주워먹을 정도로 영리하다. 잡식성 동물로써 농작물, 음식물 쓰레기등 다양한 먹이를 먹을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다. List sources 기러기 기러기()는 몸이 크고 몸빛은 암갈빛을 띠며 부리 밑부분은 노란 새이다. 목은 길고 다리는 짧다. 깃털은 방수가 되어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날개는 길고 뾰족하며, 다리는 짧고 발에 물갈퀴가 있다. 몸무게는 1.5-4kg이다. 논·밭·저수지·해안·습지 또는 개펄 등지에 내려앉으며, 하천가와 하천의 섬에서도 볼 수 있다. 벼·보리·밀 및 연한 풀·종자 등을 먹는다. 북반구의 북부에서 번식하고 겨울에 남쪽으로 이동한다. 전 세계에 14종이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에는 흑기러기·회색기러기·쇠기러기·흰이마기러기·큰기러기·흰기러기 등이 알려져 있다. 이른 봄에 북극권의 번식지로 이동해서 짝짓기를 하며 가을에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V자 모양으로 큰 무리를 이루어 이동한다. 거위는 기러기를 식용으로 가축화시킨 종이다. 나희덕은 시〈기러기 떼〉에서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고달픈 삶을 살았던 어린 시절 친구들을 떠올리고 그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노래한다. 까치 까치(Magpie 또는 Eurasian magpie)는 까마귓과 까치속의 새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북서부에 분포하는 텃새이다. 학명은 피카 피카(). 날개길이 17cm, 꽁지길이 24cm 정도이다. 암수 모두 깃털이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졌으며, 꼬리는 검은색으로 길다. 특히 가운데꼬리깃이 길다. 부리는 검은색으로 높고 다소 짧다. 둥지는 높은 나뭇가지에 틀고 때로는 전봇대나 송전선을 이용한다. 드물게는 땅 위 4m 높이의 소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의 나뭇가지에 둥지를 트는 경우도 있다. 둥지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재료로 하여 둥근 모양으로 틀고 다소 흙을 이용하여 굳히며 옆쪽에 출입구를 낸다. 둥근 날개를 펄럭이며 비교적 천천히 난다. 흑백색의 유라시안 까치는 세계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동물 중 하나이며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의 동물 종 중 하나이다. 산란기는 2-5월이며 연 1회 번식하고, 한배의 산란수는 2-7개이다. 번식기에는 머리 꼭대기의 깃털을 세우거나,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꼬리 끝을 넓게 폈다 접었다 하면서 구애 행동을 한다. 알은 엷은 녹색바탕에 어두운 갈색과 잿빛의 얼룩점이 퍼져 있다. 새끼는 알을 품은 지 17-18일 만에 부화하고, 그 뒤 22-27일 만에 둥지를 떠난다.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수컷은 암컷에게 먹이를 날라다 준다. 식성은 잡식성으로 작은 물고기, 곤충, 곡식, 쥐 등을 먹고 숲의 해충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나, 과수원이나 밭에서 과일등의 작물에 피해를 끼치는 일이 있어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 심지어 산란기에 집을 짓는 동안에 사람들이 접근하면 공격을 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까치는 한국에서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져 왔다. 아침에 집앞에서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하여 길조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는 까치가 낯선 자를 보고 울음소리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농민들은 감 따위의 과일을 수확할 때에도 까치밥이라 하여 잘 익은 홍시 같은 여분의 과일을 그대로 남겨두기도 하였다. 설날에 대한 노래에도 까치가 들어 있으며, 이밖에 동요에서도 어렵지 않게 까치를 찾을 수 있지만 실제로 까치 까치 설날은~은 까치가 전날의 순우리말인 가치가 된 발음이 되었다는 설도 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또한 어린아이들의 유치를 빼면 지붕 위에 던지는 풍습이 있는데, 이 이유는 까치가 이걸 가지고 새 이를 준다고 믿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센 바람으로 인해서 까치가 없었으나, 근래 까치를 방사하여 제주도에도 까치가 살게되었다. 까치는 외래종의 교란 생물로 제주도의 생태계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고 되었다. 까치는 본래 활엽수에 둥지를 트는데, 제주도에서는 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침엽수에 집을 짓도록 적응하였다. 제주에는 매와 조롱이 등 맹금류와 같은 까치의 천적이 거의 없다. 한국에 분포하는 무리인 한국까치("P. pica sericea")는 다른 무리와 뚜렷한 차이가 있어 다른 종으로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겨울동안 암수가 함께 둥지를 짓는다. 둥지를 짓는 기간은 매우 길어 초봄까지 이어진다. 주로 길고 곧고 낭창낭창한 나뭇가지를 물어다 짓는데 때로는 철사나 전선 등을 물어다 둥지를 짓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나뭇가지는 직접 부러뜨려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다른 까지의 둥지에서 훔쳐다 쓰기도 한다. 까치는 둥지에 쓸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때 부리와 자기 몸무게를 이용한다. 완성된 둥지는 약 1.5kg정도로 새의 둥지 치고는 상당히 무거우며 이를 지탱할 수 있는 크고 높고 튼튼한 나무의 가운데 줄기나 전신주 송전탑 등 안정된 곳을 선택해 짓는다. 나무가 자라나면 50센티에서 1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위쪽으로 옮겨 둥지를 새로 짓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미루나무 등 길고 곧은 나무에 까치집이 2층 3층으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많은 지역들이 까치를 시/군/구조로 지정하고 있다. 까치는 약 6살 아이 정도의 지능이 있으며, 2008년도 연구결과에 따르면, 까치는 포유류 이외의 종에서 최초로 거울을 인식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꿩 꿩() 또는 산계(山鷄)는 꿩류의 새이다. 수컷은 장끼, 암컷은 까투리, 새끼는 꺼병이라고 한다. 수컷은 몸길이가 80-90센티미터이나, 그 중 꼬리와 깃이 40-50센티미터인 것도 있다. 깃은 금속광택이 있는 녹색이며 머리 양측에는 귀 모양의 깃털이 서 있다. 암컷에 비해 화려하다. 암컷은 몸길이가 55-65센티미터, 꼬리깃은 20-30센티미터로 짧고, 깃털은 황토색 바탕에 고동색 얼룩무늬가 있다. 농경지·초원·작은 나무숲이나 숲 주위에 살며, 곡식 또는 지렁이·곤충 등 작은 동물을 먹고 산다. 번식기에 암컷은 땅에 얕은 구덩이를 만들어 풀을 깔고 알을 낳는다. 4-7월경 한배에 6-20개의 엷은 푸른색 또는 노란색 알을 낳고, 어미가 약 22일간 알을 품는다. 암컷의 깃은 담황갈색으로 보호색의 역할을 한다. 새끼는 부화 뒤 몇 시간이 지나면 걸어 나와 어미와 함께 둥지를 떠난다. 꿩이 날 수 있는 거리는 매우 짧지만, 날 때의 속력은 시속 약 60킬로미터 정도이다. 담비, 매 등이 천적이다. 사람들은 스포츠로 꿩 사냥을 즐기며, 식용으로도 이용한다. 또한 장끼의 깃털이 매력적이어서 박제를 하기도 한다. 한국에 서식하고 있는 꿩은 한반도 특산종인 한국꿩("Phasianus colchicus karpowi")과 만주지역 특산종인 북꿩(만주꿩, "Phasianus colchicus pallasi"), 중국에서 들어온 거문도꿩이 있는데 한국꿩은 한반도 전역(함경도제외)에 서식 하며, 북꿩은 함경도를 포함한 북부 고산지역과 만주지역에 서식한다. 일본에 있는 종은 "Phasianus versicolor"라는 학명의 일본꿩으로 한국에 있는 꿩과 종이 다르나, 양쪽 혼혈꿩도 있다. 한국에서 들여온 꿩은 コウライキジ(고려 꿩)이라고 하며 대마도에는 중세, 나머지 지역에는 현대에 들어왔다. 거문도꿩은 중국 상해에서 들어온 종으로 거문도에서만 서식한다. 거문도꿩은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이 상해에서 구입해온 17마리의 꿩을 풀어 놓은 것이 계기이며 이후 자연 번식으로 개체가 많이 늘어 났다고 한다. 거문도 꿩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꿩("Phasianus colchicus torquatus") 또는 중국에 서식하고 있는 타 아종의 꿩일 가능성이 있으나, 연구가 필요하다. 거문도 주민들도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이 꿩을 섬에 처음 번식시켰는데 이 꿩은 뭍의 꿩과 달리 깃털 색깔도 곱고 크기도 작아 무척 예뻤다"라며 이 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현재는 도둑고양이의 증가로 멸종 위기를 맞고 있어 보호가 시급하다. 한국에서는 판소리 《장끼전》에 나올 정도로 친숙한 동물이다. 평양의 전통요리 가운데 꿩만둣국이 있는데, 이것은 속을 꿩고기로 채운 만두로 만든 국이다. 하지만 꿩고기는 흔한 게 아니어서 닭고기를 넣기도 했는데 여기서 ‘꿩대신 닭’이란 속담이 나왔다. 다음의 지자체는 각각 꿩을 '시의 새'(市鳥)로 삼고 있다. 갈매기과 갈매기과()의 한 과이다. 먹는 작은 물고기, 오징어 등이 있으며, 한국의 섬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갈매기, 괭이갈매기 등이 속한다. 미국의 작가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를 소재로 사람의 이상과 도전을 다룬《갈매기의 꿈》을 썼다. 뻐꾸기 뻐꾸기는 뻐꾸기과의 새이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름철새이다. 수컷의 겨울깃은 등이 회청색이며, 아랫가슴과 배는 흰색 바탕에 어두운 갈색 줄무늬가 있다. 암컷의 여름깃과 겨울깃은 수컷과 아주 비슷하나 배는 잿빛에 갈색 줄무늬가 있으며, 윗가슴과 아랫목에는 갈색 줄무늬가 희미하게 있다. 또한 뻐꾸기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겨울로 널리 퍼진 여름 이주민이다. 단독으로 생활할 때가 많으며 나무 위나 전선에 잘 앉는다.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뻐꾹~ 뻐꾹 하고 우는데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뻐꾸기시계의 정각알림음에 사용된다. 다른 작은 새(멧새·때까치·종달새·노랑할미새·알락할미새·개개비 등)의 둥지에 알을 맡기기 때문에 번식기에는 가짜 어미새가 될 작은 새의 지저귐과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산란기는 5~8월이고, 암컷은 가짜 어미새의 알 한 개를 부리로 밀어 떨어뜨리고 둥지 가장자리에 자기 알을 낳는다. 하나의 둥지에 한 개의 알을 맡기는 것이 보통이다. 암컷은 12~15개의 알을 산란하며 새끼는 알을 품은 지 10~12일 만에 부화하고, 부화한 새끼는 1~2일 사이에 같은 둥지 속에 있는 가짜 어미새의 알과 새끼를 밀어 떨어뜨린다. 가짜 어미새로부터 20-23일간 먹이를 받아먹고 둥지를 떠난 후에도 7일 동안 가짜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다. 가짜 어미새로부터 자란 뻐꾸기는 커서 알을 낳을 때 자신을 키워준 가짜 어미와 같은 종류의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경험을 통해 그곳이 새끼가 자라기에 알맞은 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먹이는 나비·딱정벌레·메뚜기·매미·벌·파리 등의 유충과 성충 및 알을 먹는다.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참새목에 속하는 새이다. 예전에는 지빠귀과로 분류했으나 최근에는 딱새과로 분류한다. 바둑 바둑(圍棋)은 두 사람이 흑과 백의 돌을 사각의 판 위에 번갈아 놓으며 집을 차지하는 것을 겨루는 놀이다. 가로와 세로 각각 19줄이 그어진 바둑판 위의 361개 교차점에 돌을 둘 수 있다. 게임의 목표는 상대보다 더 많은 공간을 자신의 돌로 둘러 싸는 것이다. 규칙은 단순하지만 매우 깊은 전략적 사고가 요구된다. 한자로는 '기(碁 또는 棋)'라고 하며, 이외에 '혁기(奕棋 또는 奕碁)', '혁(奕)', '위기(圍棋 또는 圍碁)', '방원(方圓)', '흑백(黑白)', '수담(手談)', '도끼자루', '난가(爛柯)', '귤중(橘中)의 즐거움', '망우(忘憂)', '좌은(坐隱)', '오로(烏鷺)'도 바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일본어로는 '고 혹은 이고(囲碁:いご)'라고 하고, 영어로는 바둑의 일본어 표현인 '고(Go)'라고 부른다. 바둑의 기원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진 밝혀져있지 않지만, 막연히 추측하기로는, 고대중국에서, 전설 상의 제왕인 3황5제 때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5세기~7세기 사이에 삼국시대에 소개되었으며, 순장바둑이라는 형태로, 1950년대 현대바둑이 유행하기 전까지 성행하였다.시대적 흐름에 따라 자유 포석제 규칙의 바둑이 도입되었다. 바둑은 오늘날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대중적인 놀이로서 전통문화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고, 세계적으로는 동양의 보드게임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라마다 사용하는 규칙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국가별로 여러 단체에서 개최하는 세계대회가 존재하며, 역대 세계 챔피언은 대부분 한국, 중국, 일본에서 배출되었다. 바둑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구글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고(AlphaGo)'라는 인공지능이 2015년 10월 세계 최초로 인간 프로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2016년 3월 알파고는 세계 최고의 프로기사인 이세돌 9단에게 승리했다. 참고로 체스는 1997년 '딥 블루'가 최고수준의 프로기사를 이겼다. 바둑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박물지》, 《설문》, 《중흥서》, 《태평어람》, 《설문통훈정성》, 《문선》 등에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아들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단순하게 계산해도 361!가지다. (계승) (= 361 × 360 × 359 × ... × 3 × 2 × 1) 이다. 그러나 이는 말그대로 단순하게 계산한 것이다. 바둑은 돌을 따냈으면, 그 따낸 자리에 다시 돌을 둘 수 있으며, 승패가 완전히 갈린 상황에서는, 졌다고 생각한 사람이 더이상 두지 않고 기권하기에 (이런 경우에 이긴 사람을 불계승이라고 하고, 진 사람을 불계패라고 함), 이런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난다. 두 명의 경기자는 각각 흑과 백의 돌을 쥐고 교대로 자신의 돌을 바둑판 위에 놓는다. 돌을 놓을 수 있는 위치는 바둑판에는 그려진 가로줄과 세로줄의 교차점이다. 한번 놓인 돌은 바둑판 위에서 움직이거나 들어낼 수 없지만 예외로 상대방의 돌을 빈 칸 없이 자신의 돌로 둘러싸면 위의 백처럼 상대방의 돌을 들어낼 수 있다. 이를 돌을 '따낸다'고 한다. 같은 색의 돌과 바둑판의 경계선으로 둘러싸인 영역이 자신의 집이며 경기가 끝난 후 집의 숫자를 세어 더 많은 집을 얻은 쪽이 승리한다. 두자마자 자기 돌이 먹히는 수인 자살 수는 금지다. 하지만 돌을 둔 시점에서 상대의 돌을 먹는 게 가능한 상황이면 예외. 예를 들어 위 바둑판에서 좌상의 a와 우상의 b에 백이 놓을 경우 반칙(흑은 놓을 수 있음). 하지만 좌하의 c와 우하의 d의 경우 ▲의 흑을 먹는 게 가능하며 반칙이 아니게 된다. 실력에 차이가 나는 상대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흑돌 몇 개를 화점에 미리 두고 시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접바둑이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동등하게 시작하는 바둑을 맞바둑이라고 한다. 접바둑은 백이 먼저, 맞바둑(호선)은 흑이 먼저 돌을 둔다. 맞바둑은 먼저 두는 흑이 약간 우세하므로 백의 핸디캡을 상쇄하기 위해 여섯 집 반의 덤을 준다. 정선은 맞바둑과 마찬가지로 흑이 선수이지만 덤을 전혀 주지 않고 두는 것으로, 약간의 실력 차이가 날 경우에 둔다. 예를 들어, 흑이 백보다 5집 더 많은 상태에서 바둑이 끝났다면, 정선 혹은 접바둑의 경우 그대로 흑의 5집승이 되지만 맞바둑(6집반 공제 기준)의 경우 백의 1집반승(5 − 6.5 = −1.5)이 된다. 바둑판에는 각각 열아홉 개의 가로줄과 세로줄이 그어져 있어 첫수에 돌을 둘 수 있는 자리는 총 361개이다. 좀 더 짧은 게임을 위해 가로줄과 세로줄이 9줄이나 13줄의 바둑판 위에서 경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도 지역과 경기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다. 일반적으로, 대국을 시작하고 나서 잠시 동안 포석을 놓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바둑판의 네 개의 귀퉁이에 먼저 돌을 놓는다. 덧붙여 첫수를 귀퉁이에 놓을 경우 우상귀에 먼저 놓는 게 관례적이다. 중반은 대국이 절정에 오를 때를 일컫는데 바둑판의 선마다 이름이 있다. 이름은 다음과 같다. 종반은 대국이 거의 끝나가는 마지막 단계이다. 당대의 시인이자 당 현종의 바둑 상대역 벼슬인 기대조(棋待詔)를 지냈던 고수 왕적신(王積薪)의 작품으로 전해지지만, 북송(北宋) 시대 유중보(劉仲甫)의 작품이라는 설과 반신수(潘愼修)가 지어 태종(太宗)에게 헌상했다는 설도 있다. 바둑에 임하는 자세와 바둑을 둘 때 활용할 수 있는 작전을 담은 10가지 요결(要訣)이다. 공룡 공룡(恐龍, )은 지배파충하강 공룡상목(恐龍上目, ) 동물들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이며, 이러한 의미로 쓸 때는 일반적으로 공룡으로 간주되는 익룡, 어룡, 수장룡은 포함되지 않는다.​ 좁게는 중생대의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와 백악기에 걸쳐 크게 번성했던 화석 파충류들을 총칭하기도 한다. 삼첩기 후기에 출현하여 2억 년 넘게 전 세계에 걸쳐 번식하며 지구상의 주된 육상동물로서 진화하다가 백악기 말에 운석 충돌로 추정되는 사건인 백악기-제3기 대멸종으로 익룡, 어룡, 수장룡과 함께 새를 제외한 모든 종이 절멸하였다. 공룡은 현재까지 가장 길게 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30cm의 작은 크기에서부터 현존하는 어떤 육상동물보다도 큰 40m가 넘는 크기까지 다양한 크기와 식생을 가졌다. 원시파충류와는 달리 몸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를 가져 높은 운동능력을 갖고 있었다. 공룡은 현재까지 화석상으로 알려진 것만 600여속의 하위 분류를 갖는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각 주를 상징하는 공룡을 정하고 있다. 공룡은 그리스어 δεινόσαυρος(데이노사우로스)의 역어이다. 1842년 영국의 고생물학자 리처드 오언은 "파충류에 속하는 이 특별한 부류"에 대해 처음으로 공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δεινόσαυρος는 "무서운", "놀라운"을 뜻하는 그리스어 δεινός(데이노스)와 "도마뱀"을 뜻하는 σαύρα(사우라)가 합쳐진 단어이다. 오언은 공룡의 크기와 위엄있는 모습에 크게 감명받았으며, 이빨, 발톱 등의 생김새를 기준으로 분류하였다. 한국어 공룡(恐龍) 또한 무서운(恐) 용(龍)이란 뜻이다. 분류학에서는 공룡을 "트리케라톱스와 근생 조류 및 이들에서 분기된 모든 자손을 아우르는 최근 공통 조상이 속해 있는 부류"로 보고 있다. 이는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의 공통 조상이 곧 모든 공룡의 최근 공통 조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은 오언이 분류한 세 종류의 공룡 가운데 두 종류이다. 공룡은 사족보행을 한 용각아목, 이족보행을 한 수각아목, 딱딱한 등을 가진 곡룡류, 등에 돌기뼈를 가진 검룡류. 머리뼈가 부채 모양으로 퍼지고 뿔이 달린 각룡류, 오리 모양의 입이 특징인 조각류 등으로 나뉜다. 고생물학자들은 새가 공룡의 일종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새와 공룡을 같은 분지로 다룬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공룡은 완전히 멸종한 것이 아니다. 고생물학에서는 새가 용반목 수각아목 마니랍토라의 일종인 코에루로사우리아에 속한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룡은 트라이아스기 후기에 출현하여 백악기 후기까지 존재하였던 지배파충류에 속하는 동물이다. 공룡과 같은 시기에 어룡, 모사사우루스, 플레시오사우루스, 익룡과 같은 다른 고생물들도 있었으나 이들은 공룡과는 다른 목으로 분류된다. 어룡(어룡목), 모사사우루스(유린목), 플레스오사우루스(사경룡목)은 수중에서 서식하였으며 익룡(익룡목)은 날아다녔다. 한편, 페름기에 살았던 디메트로돈은 단궁강 반룡목에 속하며 포유류와 연관이 깊은 생물이다. 공룡은 중생대에 크게 번성하였으며 특히 쥐라기와 백악기에 융성하였다. 다른 동물들의 경우 공룡의 크기에 비할 수 없었는데, 설치류가 주를 이루었던 당시의 포유류의 경우 지금의 고양이만한 크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삼돌기치목에 속하는 레페노마무스와 같은 예외적인 동물도 있었다. 이 포유류는 몸무게가 12 - 14 kg에 달해 어린 프시타코사우루스와 같은 작은 공룡을 사냥할 정도였다. 매우 다양한 종류의 공룡이 존재하였으며 2006년까지 밝혀진 바로는 500여 속에 이른다. 이 중에 골격 화석이 발견된 것은 약 75% 정도이다. 초기 연구에서는 공룡을 3400여 속으로 추정하였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화석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2008년 10월 17일 현재 확인된 공룡의 종은 1047개이다. 새를 포함하면 그 다양성은 증가한다. 공룡의 생김새, 크기, 식성, 행동 양식 등은 천차만별이었다. 초식을 하는 공룡과 육식 공룡이 모두 있었으며, 2족 보행을 하거나 4족 보행을 하였다. 플라테오사우루스나 이구아노돈 같은 공룡들은 2족 보행과 4족 보행을 모두 할 수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공룡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많은 종류의 공룡이 인간과 비슷한 크기이거나 그보다 작았다. 여러 종류의 공룡들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주로 뿔, 등딱지, 골갑, 볏 등을 갖고 있었다. 공룡은 지구 어디에서나 서식하였으며 남극에도 있었다. 오늘날 다양한 발견이 이루어지면서 공룡의 특징을 일반화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후기에 출현한 공룡의 특징이 초기 공룡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게 변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모든 공룡의 기본적 골격 구조는 지배파충류에서 파생된 것이다. 가장 초기에 출현한 이 공룡은 이후 다양하게 진화한 모든 공룡들의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분류학적 특징을 파생공유형질이라 한다. 공룡은 진화에 의한 종분화를 겪으면서 다양한 파생공유형질이 나타났다. 장골, 경골, 삼각근, 골반뼈 등 많은 해부학적 요소들이 변형을 겪었다. 매우 다양한 공룡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해부학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공룡들이 모두 이궁류에 속한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공룡들은 단궁강에 속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두개골에 있는 측두창이 둘로 나뉘어 있다. 낮은 턱 뼈도 공룡의 공통적인 해부학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초기 공룡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골격 특징들이 있는데 길쭉한 견갑골, 세 개 이상의 척추뼈로 이루어진 만골 , 하나의 구멍에 직결된 고관절을 이루는 관골구 등이 그것이다. 공룡의 지리적 분포는 물론 모양, 행동 및 크기에는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평균 크기"를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아 각각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값을 제안하고 있다. 빌 에릭슨에 따르면 무게가 500kg과 5톤 사이로 추정되는 공룡중에 바이오매스로 측정했을 때 80%는 미국 서부의 모리슨층에서 발견된다. 스테고사우루스와 용각류 등 평균 20톤의 이상인 공룡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대형 포유류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 (니콜라스 호튼). 공룡 63 세대에 따라, 호튼 데이터는 395.9 킬로그램 (회색곰의 중량)을 초과하는 평균 질량, 그리고 일반 대중 중간값을 표시 이톤은 (기린 비교). 이의 평균 무게 631g인 멸종 포유류 (788 세대)과 크게 대조 (작은 설치류) 현재까지 발견 된 가장 작은 공룡의 3분의 2 이상의 크기였다. 모든 현대 포유 동물, 공룡의 거의 대부분은 개인의 2%를 제외한 모든 살아있는 포유 동물보다 더 있었다. 전통적으로 공룡은 조반목(鳥盤目)과 용반목(龍盤目)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전문가들은 이들 공룡이 헤레라사우루스라는 훨씬 초기 공룡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믿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반목의 동물이 용반목의 동물의 수를 넘어섰고 새로운 공룡들이 두 집단에서 진화되어 나왔다. 이들 새로운 공룡들은 생존에 보다 잘 적응하여 먹이를 얻고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익숙했다. 용반류는 도마뱀의 골반을 닮고, 조반류는 새의 골반을 닮았다. 조반목은 크게 각각아목과 장순아목 으로 나뉜다. 모든 조반목은 나무나 풀을 뜯어먹고 살았던 초식 공룡으로 입에는 부리처럼 생긴 뼈가 발달했으며, 대부분 몸에 골판(骨板)이 붙어 있었다. 허리는 조류처럼 치골이 좌골에 평행하며,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잎 모양의 치관을 가진 초식동물로 어떤 것은 앞니가 없으나 대체로 강력한 어금니를 가졌다. 또한 척추를 뻣뻣하게 하는 힘줄도 가졌다. 백악기에는 조반목이 가장 중요한 초식공룡이었다. 현생 조류하고는 분류학상 무관하다. 용반목은 수각아목와 용각아목으로 나뉘며, 용반목의 허리는 파충류처럼 장골, 치골, 좌골이 세 방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좌골에서 치골이 앞으로 향하는 것으로 식별된다. 용반목에는 크기가 크거나 육식 공룡들이 포함된다. 용반류는 현생 조류의 진정한 조상이다. 공룡의 화석 기록을 보면 20종이 넘는 공룡이 같은 시기에 일정한 지역에서 함께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공룡은 목초지대에 무리를 이루어 살았으며, 아파토사우루스나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종류는 평생을 거의 혼자 지내거나 작은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곡룡류·각룡류·검룡류 등은 바닷가나 탁 트인 곳의 키 작은 식물을 뜯어먹고 살았다. 알로사우루스와 티라노사우루스 등의 커다란 수각류는 주로 거대한 초식공룡을 잡아먹었다. 일부 작은 수각류는 곤충이나 알을 먹었고, 또 다른 종류는 포유류나 작은 공룡, 또는 다른 파충류를 잡아먹었다. 작은 수각류는 매우 활동적이고 행동이 재빨랐다. 공룡이 어떤 방법으로 번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어, 적어도 몇 종류는 다른 파충류와 마찬가지로 알을 낳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암컷은 땅을 파서 둥지를 만든 후 1 2~ 24개의 알을 낳았다. 그 중에는 알에서 깬 새끼를 일일이 돌보는 것도 있었고, 새끼가 제 나름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룡은 어느 만큼 자란 다음에는 성장이 멈추는 포유류와는 달리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자란 것으로 짐작되었지만 티라노사우루스의 생장곡선 등으로 본다면 공룡도 일정 기간 자란 다음 성장이 멈추는 걸로 알려진다. 수명은 각각 공룡마다 차이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온혈동물이였다는 점을 본다면 100년 이내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수명은 30년으로 알려져있다. 과학자들은 새를 제외한 모든 공룡의 멸종을 설명하는 많은 가설을 세웠다. 단지 확실한 것은 백악기 말에 지구에 일어난 변화에 그들이 적응하지 못해 멸종한 것만은 분명했다. 첫 번째 가설은 백악기 말에 지구의 기온이 점차 내려갔는데, 공룡이 살아남기엔 너무 추웠고, 공룡은 몸집이 너무 커서 동굴 속에 들어가 추위를 피할 수가 없었으며, 추위를 막을 만한 털이나 깃털도 없었기 때문에 공룡의 자손 번식에도 영향을 미쳐서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거나 낮을 때 태어나는 파충류의 새끼는 암수 어느 쪽이든 하나의 성별만 가지고 태어나서, 그러니까 당시 지구의 기온 하강으로 공룡의 새끼들은 모두 같은 성을 갖고 태어나 번식을 못해 멸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대에는 공룡이 멸종할 정도로 추워지지 않았으며 깃털공룡의 발견으로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두 번째 가설은 백악기 말에 커다란 운석이 지구에 충돌함으로써 수십억 톤의 먼지가 대기중에 방출됐고, 그 먼지와 연기에 빛이 차단되어 수 개월 동안 빛이 땅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암흑기 동안 식물의 씨와 뿌리는 썩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생장은 중단됐고, 식물의 감소로 많은 초식 공룡이 죽어갔으며, 초식 공룡을 잡아먹고 살던 육식 공룡의 수도 감소했다. 또 빛이 차단된 6 ~ 12개월 동안 지구의 기온은 영하 상태였고, 이 시기에 작은 포유류나 조류는 털이나 깃털로 추위를 막고, 식물의 씨나 열매, 썩은 식물을 먹으며 살아 남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대형 공룡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멸종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가설은 초식 공룡이 백악기 동안 번성한 새로운 식물들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굶어 죽었다고 생각한다. 초식 공룡이 줄어들면서 이들을 잡아먹고 살던 육식 공룡도 감소했고 결국 모든 공룡이 멸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익룡, 어룡, 수장룡의 멸종을 설명하지 못해 설득력이 없다. 네 번째 가설은 지구 온난화와 또 다른 소행성(운석)의 충돌 원인과 다른 요인들이 같이 되어 대량으로 멸종되었다는 설 다섯 번째 가설은 백악기의 화산들이 활발히 활동하여 멸종했다는 가설이다.화산 활동을 하면서 생기는 화산재들이 대기권을 막으면서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지 못하고 그로인해 식물이 죽게 되고 식물이 죽어 없어 지면 초식동물또한 먹이부족으로 죽게되고 결국에는 먹이사슬구조가 뒤틀리면서 생물체의 멸종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가설 외에도 과학자들은 공룡이 먹이 경쟁에서 포유류에게 뒤져 생존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포유류들은 뇌가 커서 영리하고, 날렵하여 사냥을 잘하고, 몸에 털이 있어 추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공룡은 뇌가 작아 영리하지 못하고, 몸이 크며 동작도 느리고, 변온동물이라 추워지면 얼어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졌으나, 근래의 연구결과로 용각류 등을 제외한 공룡들은 거의 대부분은 민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벨로키랍토르나 데이노니쿠스와 같은 수각류의 화석에 깃털과 같은 흔적이 발견되면서 이 학설은 설득력을 잃었다. 게다가, 수각류에서 진화한 새는 현재 풍부한 종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공룡의 뼈·이·알·발자국 등의 화석을 연구함으로써 공룡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냈는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북아메리카 서부·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지에서 공룡 화석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공룡 화석의 산지로는 미국의 유타주, 동아시아의 몽골, 유럽의 벨기에 등이 유명하다. 미국의 애리조나주나 유타주(특히 클리블랜드)에서 대형 공룡 발자국의 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북동부 지방에서는 소형이면서 두 다리로 걸어다닌 열하공룡의 발자국이 64m에 4,000개 이상이 같은 방향을 향해 있어, 이들이 당시에 동쪽으로 대이동을 하였음을 보여 줬다. 대한민국에는 쥐라기와 백악기의 지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1973년에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 부근에서 공룡의 뼈 화석이 발견된 이후 1977년부터 이 '공룡 골짜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많은 공룡 화석을 발굴해 냈다. 1983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는 조반류의 알껍질 화석이, 또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평리에서는 약 360개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발자국은 대부분 조반류의 두 다리로 걸은 공룡의 것이나, 일부 용반류의 것과 네 다리로 걸은 공룡의 것도 있다. 그 밖에 경남 고성의 해안 및 함안·통영·울산 등지에서 수천 개나 되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합천·진주·군위 등지에서도 크고 작은 많은 초식공룡과 육식공룡 등의 화석이 발견되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도 공룡의 완전한 뼈대 화석이 발견될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공룡 화석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러시아에 넘어간 가라후토 청을 제외하면 홋카이도 (나카가와 정, 오비라 정, 유바리 시), 이와테현 이와이즈미 정,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 시, 이와키 시, 히로노 정), 군마현 간나 정, 나가노현 오타리 촌, 도야마현 도야마 시, 기후현 (시라카와 정, 다카야마 시), 이시카와현 (하쿠산 시), 후쿠이현 (가쓰야마 시, 오노 시), 미에현 도바 시, 효고현 (단바 시, 스모토 시), 도쿠시마현 가쓰우라 정,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시, 후쿠오카현 (기타큐슈 시, 미야와카 시), 구마모토현 (미후네 정, 아마쿠사 시)에서 발굴되었다. 까르푸 까르푸(, )는 프랑스 회사로, 세계 2위의 프랜차이즈 대형 할인매장이다. Carrefour는 프랑스어로 '교차로'라는 뜻이며, 1960년에 안시 부근에 첫 매장을 열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아시아에도 여러 매장을 세웠으나, 일본에서는 2000년에 진출한지 4년만인 2004년 이온 그룹에('까르푸'라는 브랜드는 유지, 회사명만 변경), 대한민국에서는 1996년 7월 30일 한국까르푸(주)를 설립하여 한국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매출 감소로 2006년 9월 27일 이랜드그룹에 매각하고 철수하였다. 이후 한국까르푸는 홈에버(주)로 사명 변경하여 홈에버 브랜드로 대형 할인매장을 운영하였으나, 2008년 5월 14일 홈플러스에 인수되어 홈플러스테스코(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지배파충류 지배파충류(Archosauria)는 이궁류에 속하는 양막류의 일종으로 현재 살아 있는 종류로는 악어와 새가 여기에 해당한다. 멸종한(최근 이론으로는 진화) 종류로는 공룡과 익룡이 있다. 계통군으로서의 지배파충류는 현생 새와 악어의 가장 최근의 공통 선조의 후손인 '크라운그룹'을 의미한다. 크게 악어류와 멸종한 근연종, 그리고 조중족골류, 즉 새와 멸종한 근연종 (새를 제외한 공룡과 익룡들) 로 나뉜다. 주룡류(主龍類) 라고도 한다. 조룡류(祖龍類)는 잘못된 표기이다. 지배파충류는 몇 가지 파생공유형질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지동물 과 구분된다. 가장 간단하고 널리 인정되는 지배파충류의 파생공유형질은 이빨이 이틀(socket) 안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과 전안와창, 하악창, 그리고 넙다리뼈 네 번째 돌기(fourth trochanter) 의 존재다. 이빨이 이틀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먹이를 먹을 때 잘 빠지지 않는다. 이 특징으로부터 "테코돈트" (이틀을 지닌 이빨이란 의미) 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새를 포함하여 몇몇 지배파충류들은 이빨이 없다. 전안와창은 현생의 악어류 처럼 상대적으로 컸던 초기 지배파충류 두개골의 무게를 줄여주었다. 하악창 역시 아래턱의 무게를 줄여주었을 수 있다. 넙다리뼈의 네 번째 돌기는 큰 근육이 부착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초기 지배파충류는 강력한 근육을 가지고 있어 직립보행이 가능했고 이것은 페름기-트라이아스기 멸종에서 지배파충류 혹은 그 직계조상이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지배파충류가 언제 처음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페름기의 파충류인 아르코사우루스 로시쿠스("Archosaurus rossicus") 또는 프로토사우루스 스페네리("Protosaurus speneri")를 진짜 지배파충류로 분류하는 학자들은 지배파충류가 후기 페름기에 처음 나타났다고 본다. 아르코사우루스 로시쿠스와 프로토사우루스 스페네리를 지배파충형류(지배파충류는 아니지만 아주 가까운 관계)로 분류하는 사람들은 지배파충류가 지배파충형류 조상으로부터 트라이아스기 전기의 올레네크절에 처음 출현했다고 본다. 가장 이른 지배파충류는 스키토수쿠스("Scythosuchus"), 트실모수쿠스("Tsylmosuchus")와 같이 러시아에서 발견된 라우이수쿠스류("Rauisuchia")이며 올레네크절에 살았다. 단궁류(포유류와 종종 "반룡"이라고 불리는 멸종한 근연종을 포함한다)는 페름기에 지배적인 육상 척추동물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페름기-트라이아스기 멸종 때 대부분 멸종했다. 몇몇 단궁류들만이 이 대량멸종에서 살아남았다. 리스트로사우루스("Lystrosaurus")(초식 디키노돈트의 일종)는 페름기 멸종사건 직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초기 트라이아스기가 되면서 지배파충류가 곧 지배적인 육상 척추동물의 지위를 얻었다. 두 가지 유력한 설명은: 197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발목의 형태에 따라 지배파충류를 분류해 왔다. 가장 초기의 지배파충류는 "원시적인 중지부절 형태" 발목을 가지고 있었다. 목말뼈와 발꿈치뼈가 정강뼈와 종아리뼈에 봉합선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이 뼈들과 발이 만나는 부분의 관절은 구부러져 있다. 위악류 는 트라이아스기 초기에 나타났다. 이들의 발목은 목말뼈가 정강뼈에 봉합선으로 결합되어 있고, 관절은 목말뼈의 튀어나온 부분이 발꿈치뼈의 움푹 들어간 곳에 끼워져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돌아가 있다. 초기의 "악어발목" 을 가진 무리는 여전히 다리를 옆으로 펼친 상태로 걸었으나 후기의 악어발목을 가진 종류는 (특히 라우이수쿠스류) 완전한 직립보행을 했다. 현생 악어들은 다리를 옆으로 펼친 채로도, 직립한 채로도 걸을 수 있다. 에우파케리아과와 오르니토수쿠스과는 발꿈치뼈의 튀어나온 부분이 목말뼈의 움푹 들어간 곳에 끼워져 있는 "역 악어발목" 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이른 조중족골류("새의 발목"이라는 뜻) 화석은 트라이아스기 후기의 카르니아절에서 나타나지만 이들이 어떻게 악어발목류로부터 진화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훨씬 일찍 진화했거나, 마지막 "원시 중지부절" 지배파충류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다. 오르니토디라의 "발전된 중지부절" 발목은 매우 커다란 목말뼈와 매우 작은 발굼치뼈를 가지고 있어서 단순한 경첩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이런 형태는 직립보행을 하는 종류에만 적합하며 달릴 때 안정감을 더해준다. 오르니토다리는 나머지 지배파충류와 다른 점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골격이 가벼우며 작은 편이다. 목은 길고 S자 형태의 곡선을 가진다. 머리뼈는 더 가볍게 만들어져 잇고 많은 오르니토디라들은 이족보행을 한다. 지배파충류의 넙다리뼈 네 번째 돌기는 넙적다리 근육이 힘을 잘 쓸 수 있게 해 주어 오르니토디라의 이족보행을 쉽게 만들어 주었을 수 있다. 후기 트라이아스기에 오르니토디라는 공룡과 익룡으로 분화하였다. 지배파충류는 보통 '크라운그룹'으로 정의된다. 크라운그룹은 해당 분류군에서 살아있는 생물들의 가장 최근 공통조상으로부터 유래한 후손들만을 포함한다. 지배파충류의 경우 이렇게 정의하면 새와 악어가 포함된다. 지배파충류는 더 큰 계통군인 지배파충형류에 속하는데, 여기에는 프로테로캄프사과(Proterochampsidae)와 에우파케리아과(Euparkeriidae)와 같은 근연종이 포함된다. 이 근연종들은 크라운그룹 지배파충류에 속하지는 않고 지배파충형류 안에서 좀 더 원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종종 지배파충류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프로테로수쿠스류와 에리트로수쿠스류를 포함하여 많은 지배파충형류들이 전안와창의 존재에 근거해 지배파충류라고 불려왔다. 많은 학자들이 지배파충류를 지위가 없는 계통군으로 취급하는 쪽을 선호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전통적인 생물학적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지배파충류는 상목으로 취급되어 왔다. 21세기의 몇몇 연구자들은 디비전(Division)의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나 강(Class) 지배파충류라는 뜻의 아르코사우리아(Archosauria)는 미국의 고생물학자인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가 1869년에 만들어낸 단어다. 여기에는 공룡과 악어, 테코돈트, 용익류(sauropterygia,이궁류이나 유연관계는 불확실하다. 인룡형류(lepidosauromorpha)일 가능성이 높고, 현재의 지배파충류 정의에는 확실히 포함되지 않는다), 린코케팔리아(rhynchocephalia, 코프에 의하면 린코사우루스와 투아타라를 포함하는데, 린코사우루스는 오늘날에는 더 원시적인 지배파충형류로 간주되며, 투아타라는 인룡류이다), 그리고 현재는 단궁류로 간주되는 아노모돈트가 포함된다. 1986년까지는 크라운그룹 계통군으로 정의되지 않아서 더 진화한 분류군으로 간주되었다. 코프가 만들어낸 단어는 그리스-라틴 합성어로, 원래는 머리뼈의 아치(arch)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그리스어의 ἀρχός, "지배자, 영도자"와 연관지어 "이끄는 파충류" 혹은 "지배하는 파충류" 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한자인 '주룡류' 역시 비슷한 의미로, '주인 파충류'라는 뜻이다. "테코돈트"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용어지만 리처드 오언이 1859년에 트라이아스기의 지배파충류를 기술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고, 20세기에 널리 사용되었다. 테코돈트는 더 발전된 지배파충류가 진화해 나온 "원시적인 무리"로 간주되었다. 테코돈트는 후에 새와 악어 계통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두 그룹의 원시적인 조상의 형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일어난 분지학 혁명으로 분지학이 생명체를 분류하는데 널리 쓰이는 방법이 되자 테코돈트는 더 이상 유효한 분류군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원시적인 무리"이기 때문에 테코돈트는 측계통군, 즉 가장 최근의 공통조상의 모든 후손을 포함하지 않는 그룹이 된다. 더 진화한 악어와 새는 이전에 알려진 "테코돈트류"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1970년대에 원시적인 오르니토디라인 '라게르페톤'과 '라고수쿠스'가 테코돈트를 공룡과 연결시킬 수 있는 증거를 제시했고 분지학자들이 인위적인 그룹이라고 본 "테코돈트류" 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상카르 채터지(Sankar Chatterjee)가 1978년에 "정상 악어" 발목과 "역 악어" 발목을 밝혀내면서 지배파충류 내부의 큰 갈래가 알려졌다. 채터지는 지배파충류 안에 "정상" 발목을 가진 위악류와 "역" 발목을 가진 오르니토수키드 두 그룹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는 오르니토수키드가 공룡의 조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1979년에 크룩섕크가 두 갈래를 확인하고 악어 발목이 두 그룹에서 독립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했다. 크룩섕크는 또 이 발목의 종류가 각각의 그룹에서 더 발전된 멤버들로 하여금 준직립보행(악어의 경우)을 하게 하거나 직립보행(공룡의 경우)을 하게 해준 것으로 보았다. 많은 수의 계통발생학 분석에서 지배파충류는 단계통군으로 나타나 진정한 계통군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배파충류 계통발생에 대한 최초의 연구들 중 하나는 프랑스 고생물학자인 자끄 고티에가 1986년에 수행하였다. 고띠에는 지배파충류를 악어 종류인 수도수쿠스류, 그리고 공룡과 익룡 종류인 오르니토수쿠스류로 나누었다. 수도수쿠스류는 악어와 가까운 모든 지배파충류, 오르니토수쿠스류는 새와 더 가까운 지배파충류로 정의되었다. 결과물로 나온 분지도에서 프로테로캄프사류, 에리트로수쿠스류, 프로테로수쿠스류는 각각 그 순서대로 지배파충류 바깥쪽에 위치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아래는 고띠에(1986)에 실린 분지도이다. 1988년에 고생물학자인 마이클 벤튼과 J.M. 클라크가 초기 지배파충류의 계통발색학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계통수를 발표하였다. 고티에의 계통수와 마찬가지로 벤튼과 클라크도 지배파충류의 초기에서 두 갈래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두 그룹을 크로코딜로타르시(Crocodylotarsi)와 오르니토수쿠스류로 불렀다. 크로코딜로타르시는 파생형질에 기반한 분류군으로 "정상 악어" 발목을 가진 그룹으로. 고티에의 위악류는 줄기에 기반한 분류군이다. 고티에의 계통수와 달리 벤튼과 클라크는 유파케루스류를 오르니토수쿠스류의 바깥, 그리고 크라운그룹 지배파충류의 바깥에 위치시켰다. 분기군인 크루로타르시와 오르니토디라는 1990년 고생물학자 폴 세레노와 A.B. 아르쿠치에 의헤 지배파충류에 대한 연구에서 처음 함께 사용되었다. 이들은 크루로타르시 분기군을 처음 정립하였고, 오르니토디라는 고티에가 1986년 제안한 이름이다. 크루로타르시와 오르니토디라는 각각 단계통성이 의심되는 수도수쿠스류와 오르니토수쿠스류를 대신한다. 세레노와 아르쿠치는 발목 형태가 아닌 다른 지배파충류의 특징들을 분석에 도입하였고, 이전의 분석결과들과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아래의 분지도는 세레노(1991)의 것으로 세레노와 아르쿠치의 결과와 유사한 것이다. 오르니토디라와 크루로타르시는 모두 노드에 기반한 분기군으로, 두 개 이상 되는 분류군의 가장 최근 공통조상와 그 모든 후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오르니토디라는 익룡과 공룡(새를 포함하여)의 가장 최근 공통조상과 그 모든 후손을, 크루로타르시는 현생 악어와 세 종류의 트라이아스기 지배파충류, 즉 오르니토수쿠스류, 아이토사우루스류, 피토사우루스류의 가장 최근 공통조상과 그 후손들을 포함한다. 이 분기군들은 줄기에 기반한 분기군, 즉 한쪽의 현생 그룹(새 혹은 악어)보다 다른 쪽 그룹에 더 가까운 모든 분류군으로 정의되는 "새 계열" 과 "악어 계열" 지배파충류와는 다른 것이다. 벤튼은 조중족골류라는 이름을 1999년에 제안하여 모든 새 계열의 지배파충류(벤튼의 정의에서는 악어보다 공룡에 더 가까운 모든 지배파충류)를 포함시켰다. 벤튼은 트라이아스기의 소형 지배파충류인 스클레로모클루스("Scleromochlus")가 새 계열의 지배파충류이지만 오르니토디라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분석하고 오르니토디라가 새 계열 지배파충류와 오르니토디라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아래는 이러한 계통발생을 보여주는 벤튼(2004)의 분기도이다. 스털링 네스빗의 초기 지배파충류에 대한 2011년 모노그라프에서 피토사우루스가 지배파충류의 외부에 위치한다는 강력한 분석결과가 나왔다. 그 이후의 많은 연구들도 이 계통발생을 지지하였다. 크루로타르시의 정의 상 피토사우루스가 포함되기 때문에 피토사우루스가 지배파충류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크루로타르시는 모든 지배파충류를 포함해야만 한다. 네스빗은 위악류라는 분기군 이름을 되살려 악어 계열 지배파충류를 포함하는 줄기에 기반한 분류군으로 정의하였다. 아래는 네스빗(2011)의 분기도에서 수정된 것이다. 악어, 익룡, 그리고 공룡은 1억9500만 년 전의 트라이아스기-쥐라기 멸종에서 살아남았으나 다른 지배파충류들은 멸종했다. 새가 아닌 공룡들과 익룡들은 약 6600만 년 전에 있었던 백악기-팔레오기 멸종 때 멸종했으나 악어와 새(유일하게 남은 수각류 공룡)는 살아남았다. 둘 다 지배파충류의 후손들이며, 따라서 계통발생학적 분류학의 정의에 따라 지배파충류이다. 악어류(크로커다일, 앨리게이터, 가비알류)와 새는 오늘날에도 번성하고 있고. 새가 모든 육상 척추동물 중 가장 많은 종 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의 사지동물처럼 초기의 지배파충류는 엉덩관절이 옆쪽을 향했고 넙다리뼈 상부의 튀어나온 부분이 넙다리뼈와 일직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옆으로 펼친 자세를 취했다. 트라이아스기 초기 내지 중기에 어떤 지배파충류 그룹들이 좀 더 직립에 가까운 자세를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형태의 엉덩관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관절 형태로 인해 해당 그룹들은 캐리어의 제약에서 벗어나 더 나은 체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달리기와 숨쉬기를 쉽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관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직립자세는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므로 높은 신진대사율과 높은 체온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부분은 대형 포식자이나 여러 계통에서 다양한 생태적 지위를 차지했다. 아이토사우루스류는 초식이었고 몸 전체에 보호판을 두르고 있었다. 시모수쿠스("Simosuchus"), 필로돈토수쿠스("Phyllodontosuchus") 등의 악어들도 초식이었다. 대형 악어인 스토마토수쿠스("Stomatosuchus")는 여과섭식(filter feeding)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용각형류와 조반류 공룡들은 먹이를 먹고 소화시키는 데 있어 다양한 적응방식을 보여준 초식동물이었다. 지배파충류는 대개 육상 동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들은 더욱 다양한 곳에서 생활했다. 지배파충류의 신진대사는 여전히 논란되는 주제다. 지배파충류는 분명 변온동물인 조상으로부터 진화했고 악어는 변온동물이다. 하지만 악어도 보통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해주는 항온동물의 대사와 연관되는 특징들을 몇 가지고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활발하게 움직이는 항온동물에게는 중요하지만 변온동물이며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 떠 있거나 강둑에 엎드려 있는 수중 매복 포식자에게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이런 특징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악어에게 생기게 되었을까? 고생물학적인 증거들에 의하면 현생 악어의 조상은 활동적이고 내온성 동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전문가들은 악어의 지배파충류 조상 역시 항온동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어 심장의 생리학, 해부학, 그리고 발생학적 특징들도 고생물학적 증거들을 지지하며 악어는 수중 매복 포식자의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외온성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악어의 태아는 초기에 완전한 네방심장을 완성시킨다. 성장하면서 우심실에서 나오는 왼쪽 대동맥, 좌우 대동맥궁(aortic arch) 사이의 파니자공(foramen of Panizza), 그리고 허파동맥 기저부의 톱니모양 밸브(cog-teeth valve)를 포함하는 심폐바이패스가 만들어진다. 심폐바이패스는 악어가 물 속으로 들어갈 때 작동하여 세방심장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연구자들은 현생 악어의 조상이 변온동물, 혹은 외온성 대사로 되돌아 가기 전에 완전한 네방심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온동물이었다고 결론내렸다. 저자들은 또한 줄기 지배파충류가 내온성이었다는 다른 증거들을 제시한다. 악어가 나중에 덜 활동적이며 수중생활을 하는 변온동물이 되면서 심폐바이패스를 발달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시 악어와 여타 트라이아스기 지배파충류가 항온동물이었다 가정하면 진화의 수수께끼 몇 가지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미시시피악어의 허파에서는 공기를 들이 쉴 때나 내쉴 때 공기가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라테라노 조약 라테라노 조약()은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 왕국과 바티칸 시국 양국이 라테라노 궁전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교황 비오 11세가 파견한 로마 교황청 대표 피에트로 가스피리와 이탈리아 수상 베니토 무솔리니가 교섭에 나선 이후에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은 국제적 의의를 지닌 정치적 조약으로 2개의 의정서와 부속의 재무협정서로 구성되어 있다. 제1의정서는 1870년 이래 과거 60년 동안 이탈리아의 로마 합병으로 인한 국가와 교회의 대립이 생긴 로마 문제의 해결을 도모한 것이다. 이 협정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탈리아 국교화와 교황청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 바티칸 시의 완전한 독립이 확인되었다. 협정 조약에서는 이탈리아 정부가 가톨릭 교회를 국가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했던 1848년의 알베르티노(Albertino) 헌법의 원칙을 재확인하고(1조), 그 종교적인 성격면에서 국제적 분야에 있어서의 교황청의 지상권을 인정한다(2조). 바티칸 시국의 합법화의 본질적인 중립성을 확인하는 동시에(3∼8조, 26조), 교황청에 예속된 기타 부동산에 대한 치외 법권과 특전을 부여한다(13∼16조). 또, 교황의 원수로서의 불가침성을 승인하고(9조), 교회의 최고 지휘권에 예속되어 있는 기구와 인물에 대한 법적 특권을 재가한다(9∼11조, 17조). 교황청의 외교 사절의 파견과 영입에 대한 자유로운 외교 활동을 보장하며(12조, 19조), 바티칸 시국의 자유로운 통행과 교황 선거 및 공의회 행사의 자유로운 보안을 보장한다(20∼21조). 그리고 교회 당국의 선교에 대한 민법상의 협조를 약속한다(23조). 끝으로, 가장 중요한 협정은 교황청과의 재정상의 약정으로서, 이탈리아 정부는 7억 5천만 리라를 교황청에 보상하는 동시에, 연간 5%의 이윤 비율인 이탈리아 정부 발행의 장기 공채 10억 리라를 지불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24∼27조). 제2의정서는로마 가톨릭교회가 교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 교육·결혼·자산·과세·주교임명 등의 여러 가지 특권이 인정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교회 의식과 교회 재판권 및 영적 권한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하며(1조), 교황청과 주교들의 사적 또는 공적 활동을 통한 성직자와 신도 상호간의 자유로운 교류를 인정한다(2조). 성직자들의 시민적 의무(병역, 소득세, 형법, 불법 감금 등)의 면제(3∼8조)를 규정하는 동시에, 성소에 대한 징발, 점유, 파괴를 금한다(9∼10조). 교회법에 규정된 축일을 정부가 인준하며(11조), 군대 안에서의 종교 활동과 군목 제도를 승인한다(13∼15조). 교구 조직면에서 92개 도시 안에 교구 수와 교구 경계를 동등하게 정비한다(16∼17조, 실시되지 못함). 신임 교구장 임명은 교황청이 관장하지만, 교구장의 권한 행사 이전에 정부 부처 장관 앞에서 선서한다(19∼20조). 성직 서품은 교회 당국이 관장하지만, 주임 신부 임명에 앞서 정부 당국의 애로 사항을 참작해야 한다(21조). 국내에서는 성직 수여를 이탈리아 인에게만 국한시키고, 2개 국어 이상을 사용하는 지역의 주교와 주임 신부는 이탈리아 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22조). 국왕령 'Placet'와 정부의 성직 수여권 및 교역자의 임명권은 폐지한다(24∼25조). 로레토 경당,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경당,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경당은 교황청에 양도한다(26조). 기타 정부가 관장했던 경당은 교회 당국의 자유로운 관리에 맡긴다(27조). 교황청은 국유화된 교회 재산의 소유권자에게 그 기득권을 인정한다(28조). 교회에 예속된 모든 형태의 법인체를 인정하며, 교회 재산에 대한 재정상의 과세를 폐지하고, 사제 복장의 남용을 금한다(29조). 교회 재산은 정부령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관리하여 새로운 재산을 구입할 수 있다(30조). 교회 당국이 설립한 새로운 법인체와 교회 조합은 민법상의 등록으로 족하다(31∼32조).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있는 지하 묘지(Catacomba)는 교황청이 관장한다(33조). 교회법에 의한 결혼은 민법상 인정되고 이혼 소송권은 교회 법정만이 가진다(34조). 교회가 건립한 중학교는 공립 중학교와 동등한 성격을 지니며(35조), 종교 교육은 초등 학교뿐만 아니라 중학교에까지 확대하고, 교육 과목 담당자는 교구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교과 내용은 정부와 교회가 공동으로 작성하고, 교과서는 교회 당국의 재가를 필요로 한다(36조). 파시스트 청년당과 공립 학교는 교회 축일의 준수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와 시위 운동의 시간표를 작성해야 한다(37조). 사크 쿠오레(Sacro Cuore) 가톨릭 대학교의 교수 임명에는 교황청의 이의(異義)가 개입되지 않는다(38조).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이나 신학교 및 교육 기관은 교회 당국이 관장한다(39조). 교황청에서 수여하는 자격증, 수료증, 칭호, 훈장은 이탈리아 정부 역시 이를 승인한다(40∼42조).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간에 맺어진 정교협약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이탈리아 내에서의 특권적 지위를 주었다. 성직자의 징병면제나 선서ㆍ증언 거부권, 교회법상의 처분을 받은 성직자의 공직취임금지, 주교구 등 종교기관의 법인격이나 전국적 신자조직 〈이탈리아 가톨릭 액션〉의 승인, 교회의 혼인통제, 초ㆍ중학교에서의 의무 종교교육 등이 정해졌다. 특히 이탈리아 정부가 로마 교황청에 지급한 현금 7억 5000천만 리라, 5%의 이자부 채권으로 10억 리라의 자금은 훗날 JP모건의 관리를 거쳐 세계 각국의 대형 은행과 다국적 기업들에 투자되었고 이렇게 모인 막대한 자금은 바티칸 은행의 종자돈이 되었다. 이탈리아 내 기독교 정당인 이탈리아 인민당의 도움으로 권력을 장악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라테라노 조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계승되었다.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 계획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충남 연기·공주시로 이전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계획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을 받아 폐기되었으며,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안으로 재구성되었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유세활동 중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2003년 취임하고 나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산하의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을 발족시켰다. 국회는 2003년 12월 29일 여야 합의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른바 신행정수도법)을 통과(찬성167, 반대13, 기권14표) 시켰다. 그 법안은 2004년 1월 16일 공포되었고, 동 법에 따라 8월 11일 정부(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는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결정했다. 신행정수도법은 같은 해 10월 21일에 헌법 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았다. 국회는 여야 합의를 통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제정하였다. 동 법률 역시 신행정수도건설법과 같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으나, 헌법재판소는 각하결정을 하였다. 폴 오스터 폴 벤저민 오스터(, 1947년 2월 3일 ~ )는 미국의 소설가이다. 뉴저지주의 뉴어크에서 태어났다.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1974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에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현장감과 은은한 감동을 가미시키는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는 그는 현대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재능과 문학적 깊이, 문학의 기인이라 불릴 만큼 개성 있는 독창성과 담대함을 소유한 작가이기도 하다. 시인으로 처음 경력을 시작하며 특히나 프랑스와 독일의 시인 에드몽 자베스, 파울 첼란 등 유대계 시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 문학에서의 사실주의적인 경향과 신비주의적인 전통이 혼합되고, 동시에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명상적 요소가 한데 뒤섞여 있기도 한 그의 작품들은, 문학 장르의 모든 특징적 요소들이 혼성된 '아름답게 디자인된 예술품'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이렇게 많은 비평가들의 호평 속에 발간된 그의 작품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문단, 특히 프랑스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현재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적과 상실, 고독과 열광의 이야기를 전광석화 같은 언어로 종횡무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또한 운명적인 만남과 그리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탄탄한 문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결합시켜 독자들을 있을 법하지 않게 뒤얽힌 우연의 연속으로 이끌어 간다. 오스터의 작품으로는 1993년 메디치 외국 문학상을 수상한 『거대한 괴물』 외에 『뉴욕 3부작』, 『달의 궁전』, 미국 예술원의 모톤 다우웬 자블상 수상작인 『우연의 음악』, 『공중 곡예사』 등이 있고 에세이집 『폴 오스터의 뉴욕 통신』, 시집 『소멸』 등이 있다. 폴 오스터는 종종 프란츠 카프카 혹은 사뮈엘 베케트와 비견된다. 당연히 그는 이들과 흡사한 시각에서, 그러나 전혀 독특한 방식으로 운명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에 몰두한다.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탄탄한 문체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발군의 문학적 기량은 폴 오스터 이외의 다른 작가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덕목이다. 1777년 1777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소문국 소문국(召文國)은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부족국가의 하나로, 현재의 의성(義城)이다. 185년 신라에 병합되어 문소군(聞韶郡)이 되었고, 고려대에 이르러 현재의 이름인 의성이 되었다. 박창화의 남당유고집의 기록에는 역대 소문국의 왕력이 보이나 그 진실성은 명확하지 않다. 감문국 감문국(甘文國)은 현재 경북 김천시 개령면에 위치해 있던 삼국시대의 부족국가이다. 1969년까지 감문국 궁궐의 초석으로 전해져 내려온 돌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에는 실존하지 않는다. 감문국의 읍성은 초기엔 감문면 문무리 성산골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후기엔 개령면 동부리의 감문산성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규모는 6-700 가구 정도로 추정된다. 조분 이사금의 명을 받은 아찬 석우로(昔于老)가 신라군을 이끌고 감문국을 토벌하여 군(郡)으로 삼았다.(231년 7월)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감문국의 궁지(宮地)와 감문국 왕의 왕릉인 김효왕릉(金孝王陵), 왕비인 장부인(獐夫人)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북 김천시 감문면 삼성2리 (오성리) 입구 들에 김효왕릉으로 추정되는 고적분과 고인돌 더미가 미미하게 산적해 있고, 일제 강점기 도굴범에 의해 많은 도굴이 행해져 당시 금관과 같은 부장품이 도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골벌국 골벌국(骨伐國)또는 골화국(骨火國)은 현재의 영천시 금호읍(琴湖邑) 화산면(花山面), 신령면(新寧面) 일대에 위치했던 삼한시대의 부족국가로서 변한의 일부였다. 236년 7월, 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조분 이사금에게 투항하였다. 신라는 그에게 저택과 사유 경작지를 하사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줄여서 전평(全評)은 한국의 초기 노동조합이자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5일 허성택에 의해 세워진 남로당, 좌파 계열의 노동조합이었다. 전평의 산하에는 금속공업, 섬유, 토건 철도, 전기, 출판, 식료, 광산, 목재, 조선업, 어업, 일반 월급생활자, 교통, 운수노조 등 16개 산업별 노조가 참여했고, 서울과 군산, 인천, 대전, 광주, 마산, 목포 등 전국 11개 도시에 지방평의회를 조직했다. 전평은 남·북한을 통합한 인민공화국 제창 및 신탁통치 찬성 운동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대한민주청년동맹에 의해 본부가 점거되기도 했으며,1946년과 1947년에 두차례에 걸쳐 제네스트를 지령, 민족주의 노선의 노동조합인 대한노총과 전면전에 들어갔으나 패배·소멸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전평을 비합법화하였다. 피에르 아벨라르 피에르 아벨라르(, 1079년 ~ 1142년 4월 21일)는 중세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중세 철학사 전체를 지배한 보편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라틴어 이름은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였다. 흔히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아벨라르는 1079년 프랑스 서부의 도시 낭트 인근 르팔레라는 곳에서 영주이자 노트르담 대성당의 수사신부를 지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보편 논쟁의 양축을 형성했던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인식론과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했으며, 가정 교사로 가르쳤던 제자이자 후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는 엘로이즈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아벨라르는 당시 실재론 진영을 대표했던 샹포의 기욤과 친분을 쌓은 뒤, 1102년 파리 근교에 입성, 교육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하게 됨에 따라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기욤과 결별하게 된다. 기욤은 각기 다른 사물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 공통적인 존재자, 즉 보편자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는 관계없이 실재함을 주장했다. 이를테면 '인간'과 같은 종(種) 및 유(類)의 개념들은 '철수'나 '영희'와 독립적인 한편으로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아벨라르는 '종'이나 '유' 등의 일반 개념들이 단지 언어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유명론의 입장을 거부했다. 실제로 보편 개념들이 텅 빈 기호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개념들이 포함된 문장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의미가 있다고 해도 이해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듯 부분적으로는 기욤의 실재론을 받아들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념의 실재성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기욤을 반박했다. 보편자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일 수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사고에 의한 것일 뿐, 그것이 통상적인 의미에서 혹은 플라톤적 의미에서 실재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벨라르에 따르면 보편 개념은 인간의 오성이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각각의 유사한 속성들을 추려낸, 즉 추상한 결과물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철수'와 '영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속성을 통해 성립된다. 이렇듯 아벨라르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인간 사고의 경험적 측면과 추상적 측면을 모두 중시함으로써 중세 보편 논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개념론이라고도 불린다. 서간 형식의 자서전인 "Historia Calamitatum" (영문 번역본)가 있으며, 사후에는 엘로이즈와 교환한 편지들도 출간되어 이후 수많은 문학 작품들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조강 조강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참새목 참새목은 새의 모든 종 수의 거의 반 가량이 속해 있는 목이다. 연작류(燕雀類)로도 불린다. 계통 분류학적으로는 앵무목과 가장 가깝다. 3개 아목, 110여 개 과에 5,400여 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비과 제비과는 참새목에 속하는 과이다. 고은 고은(髙銀, 고은태(髙銀泰), 일본식 이름: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 1933년 8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호(號)는 파옹(波翁)이다. 전라북도 옥구군 출생이다. 군산고등보통학교를 4학년 시절에 중퇴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전란 시기였던 1952년 일본 조동종의 군산 동국사에 출가하여 중관학 권위자인 중장혜초로 부터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8년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60년대 초에 본산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고 1962년 환속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고은의 문학적 성향은 〈문의 마을에 가서〉를 낸 1974년을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의 전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는 반면 후기 시들은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다. 그 뒤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대표로 행동면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세계 각국에서 그가 잘 알려진 것은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것 이전에 그의 시가 20여개국에 번역되어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2005년 이후 여러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 되기도 하였다. 그의 저명성은 매년 여러 나라에서 초청하는 등 그의 시가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북유럽 국가에서 그의 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을 받았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상을 수여하였다. 스웨덴의 한 언론매체 기사에서는 그를 군산의 제왕이라 칭할 정도였다. 2018년 최영미 시인의 고은 성추행 폭로 이후 고은이 오래 전부터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고 있다. 2018년 3월 2일 고은은 영국의 출판사를 통해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글쓰기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영미에 따르면 고은은 '1993년경 한 술집에 들어가 천장을 보고 누운 채 자신의 바지 지퍼를 열고 아랫도리를 주물렀고, 흥분해 신음소리를 뱉었다. 한참 자위를 즐기던 고 시인은 최 시인의 일행을 향해 명령하듯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라고 했다.'고 한다. 박진성 시인은 "2008년 4월, C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고은 시인 초청 강연회 뒤풀이 자리에서 고은 시인이 옆에 앉은 여성의 신체 부위를 더듬고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폭로했다. 박진성은 "저는 그 당시 그 자리로 저를 오게 한 K 교수에게 왜 고은 시인을 말리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K교수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면서 "고은 시인의 추행은 이후에도 계속됐다"고 밝혔다. 이후 고은 시인은 자리에 앉으며 "너희들 이런 용기 있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고은은 7월 17일 서울중앙지법에 최영미 시인과 박진성 시인, 언론사 등을 상대로 10억 7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조류 조류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기형도 기형도(奇亨度, 1960년 3월 13일(음력 2월 16일) ~ 1989년 3월 7일)는 대한민국의 시인 겸 언론인이다. 광명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과 그 문학관을 담당하는 기형도 친누님 기향도 명예관장님에 대한 정보가 빠져있습니다 정보 수정 및 보충 부탁드립니다 생전 그의 신장은 182cm이고 1960년 3월 13일 옹진군 연평도에서 공무원인 부친의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5년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주했다.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 에 입회한 것을 계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때 있었던 회원 중 한 명이 법학과의 성석제이다.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왔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다. 연세대학교 학사 학위를 앞두고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심야 영화<뽕 2>를 관람하다가 뇌졸중으로 인해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 5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으며, 유고시집의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다. 5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살았으며 죽은 후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세례명 "그레고리오"가 새겨져 있다. 기형도의 무덤은 문학을 동경하고 시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성지다. 2년 뒤에는 그의 아버지도 그의 옆에 묻혔다. 시인의 요절과 죽음의 그림자 짙게 드리워진 시집은 이후 기형도 신화를 빚어냈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그의 작품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에서 발췌) 그의 시는 낯설고 우울하다. 어두운 이미지, 고독과 죽음에 직접 연결된 이미지들이 흔하게 쓰인다. 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현실의 세계를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자주 이야기한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위험한 家系 · 1969'에서)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엄마 생각'에서 '~찬밥처럼 방에 담겨'와 같은 표현은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어린 시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엄마를 기다려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우리는 조용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지만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 처연하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담담하기까지 한다. 《입 속의 검은 잎》이후 1990년에는 소설, 편지, 단상 등이 수록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1994년에는 《입 속의 검은 잎》 이후 발견된 미발표 시 16편과 그 주변 사람들의 글을 담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출간되었다. 199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전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기형도가 자랐던 경기도 광명시에서 그를 기리기위해 세워진 문학관이다. 항목 참조. 파스칼 (프로그래밍 언어) 파스칼(Pascal)은 1969년에 스위스 ETH 취리히의 컴퓨터 과학자 니클라우스 비르트가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당대의 가장 인기있는 교육용 언어 중 하나였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었다. 파스칼은 발표 당시에는 아주 기본적인 컴퓨터 언어의 요소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스템을 직접 다루기에는 부족하였다. 파스칼이라는 이름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이름을 딴 것이다. 포인터를 사용한 구조적 프로그래밍을 그 특징으로 한다. 과학연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급언어인 알골 60의 영향을 받은 까닭에, 같은 시기에 마찬가지 영향을 받아 제작된 C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을 갖는다. 그러나 코드를 간결하게 하고 버그를 더 쉽게 잡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몇가지 기능을 제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C 언어에 비해 활용도가 떨어지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비실용적인 언어라는 뜻은 아니며, 실제로 TeX나 초기 매킨토시 운영 체제 제작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파스칼 컴파일러 자체가 크게 개선되고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의 발전으로 이런 사소한 차이점은 거의 무시할 수 있는 단점이 되었다. 어셈블리를 직접 사용하기도 한다. 현재는 초기의 파스칼에 비해 많은 부분이 추가, 개선되고 다른언어의 장점들을 따와 상용 파스칼 컴파일러인 델파이는 C++과 거의 기능 차이가 없다. 많은 변종들이 존재하며,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위해 기능을 추가한 변종들도 다수 존재한다. 엠바카데로 사의 델파이와 카일릭스는 파스칼의 직계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오브젝트 파스칼 을 사용한다. 델파이 7 버전부터는 델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픈 소스로 제작된 프리 파스칼이나 GNU 파스칼도 있다. 델파이 언어로 불리는 변종 오브젝트 파스칼은 델파이, 프리 파스칼 IDE, 라자루스 등에서 개발할 수 있다. 볼랜드 파스칼이라 불리는 델파이 이전의 오브젝트 파스칼은 터보 파스칼, 프리 파스칼 IDE에서 개발할 수 있다. 일반 유형의 하부 범위는 다음과 같이 짤 수 있다: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와 달리, 파스칼은 집합 유형을 지원한다: 집합은 현대 수학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이며 수많은 알고리즘이 집합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알고리즘을 추가하는 것은 파스칼에 매우 알맞다고 볼 수 있다. 집합형 연산은 효율적이기도 하다. 많은 파스칼 컴파일러가 을 보다 더 빠르게 수행한다. 형(type)은 선언을 통해 다른 형으로부터 정의될 수 있다: 또한, 복잡한 형은 단순한 형으로 구성할 수 있다: 파스칼은 포인터 사용을 지원한다: 가변 codice_1가 자료형 codice_2 레코드의 포인터이다. 포인터들은 선언 전에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레코드를 만들어 값codice_3과 codice_4를 레코드 안의 필드 codice_5로 할당하려면, 다음과 같은 명령어를 사용하면 된다: 한정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codice_6 문을 써서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파스칼은 구조 프로그래밍 언어이며, 제어 흐름을 goto 문 없이 표준화할 수 있다. 파스칼 구조는 절차와 함수로 짜여진다. 절차와 함수는 어느 깊이로든 놓일 수 있으며, 프로그램 구조는 논리 외부 블록이다. 1954년 1954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52년 1952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51년 1951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49년 1949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가니니헤소 가니니헤소(Gangnihessou)는 다호메이 왕국의 첫 번째 왕이다. 1620년경부터 재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실제로 왕으로 재위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환 (수학) 추상대수학에서, 환(環, )은 덧셈과 곱셈이 정의된 대수 구조의 하나이다. 환은 덧셈에 대하여 아벨 군을 이루고, 분배법칙과 곱셈의 결합법칙을 만족시키지만, 곱셈에 대한 역원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환을 연구하는 추상대수학의 분야를 환론(環論, )이라고 한다. 가환환(곱셉의 교환법칙이 성립하는 환)은 비가환환보다 훨씬 많은 성질이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연구를 가환대수학이라고 한다. 가환대수학은 대수기하학 및 대수적 수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비가환 기하학과 양자군 등의 이론이 나타나면서 비가환환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환에 대한 관련된 개념으로, 군의 표현(혹은 가군)이나 군환, 나눗셈환, 보편 포락 대수 등의 특수한 환 및 인접 분야인 호몰로지 대수학 등이 있다. 환은 아벨 군과 반군의 구조를 동시에 갖고, 두 구조가 서로 호환되는 대수 구조이다. 구체적으로, 환 formula_1은 이항 연산 을 갖추고, 다음 공리들을 만족시키는 집합이다. 환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정의할 수 있으나, 이들 정의들은 모두 서로 동치이다. 환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개념들과 유사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두 환 formula_24, formula_25 사이의 함수 formula_26가 다음 두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환 준동형 사상(環準同型寫像, )이라고 한다. 유사환의 준동형은 formula_34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모든 환 준동형은 유사환 준동형이지만,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환의 부분 집합 formula_35이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부분환(部分環, )이라고 한다. 즉, 부분환은 덧셈 부분군이자 곱셈 부분 모노이드인 부분 집합이다. 아이디얼은 전체 아이디얼이 아닐 경우 1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부분환이 될 수 없다. 환의 특정 부분 집합을 아이디얼이라고 한다. 환 formula_24의 아이디얼 formula_46이 주어지면, 이에 대한 몫환 formula_47을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군과 그 정규 부분군이 주어졌을 때, 몫군을 취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이나 모노이드가 집합 위에 왼쪽·오른쪽에서 작용할 수 있는 것처럼, 환의 경우 아벨 군 위에 왼쪽·오른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환의 (왼쪽·오른쪽) 작용을 갖춘 아벨 군을 왼쪽·오른쪽 가군이라고 한다. 왼쪽·오른쪽 아이디얼은 왼쪽·오른쪽 가군의 특수한 경우이다. 대략, 군의 작용과 환의 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응되는 개념들이 존재한다. 주어진 환들로부터 새로운 환을 만드는 다양한 연산들이 존재한다. 환 formula_1이 주어졌을 때, 그 위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곱셈 연산을 주자. 그렇다면 formula_50은 환을 이루며, 이를 formula_24의 반대환(反對環, ) formula_52이라고 한다. 즉, formula_52는 덧셈 아벨 군으로서 formula_24와 같지만, 곱셈 모노이드로서 formula_24의 반대 모노이드이다. 환을 하나의 대상을 갖는, 아벨 군의 모노이드 범주 위의 풍성한 범주로 생각하였을 때, 이는 반대 범주의 특수한 경우이다. 군론의 몫군이나 선형대수학의 몫공간과 마찬가지로, 환론에서도 몫환(-環, )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환론에서 정규 부분군에 해당하는 대상은 양쪽 아이디얼이며, 이에 대한 몫환은 대략 아이디얼에 속한 원소를 모두 0으로 간주하여 얻는 환이다. 환 formula_24 및 그 속의 양쪽 아이디얼 formula_57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formula_24 위에 다음과 같은 동치 관계 formula_59를 정의할 수 있다. 이 동치 관계에 대한 동치류는 다음과 같다. formula_47는 이러한 동치류들의 집합이다. 그 위의 환의 연산은 다음과 같다. 이 연산들은 동치류의 대표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디얼의 정의에 따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몫환에서는 formula_65이며, formula_66이다. 몫환에 대하여, 표준적인 전사 환 준동형 이 존재한다. 환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이므로, 환들의 집합의 직접곱을 정의할 수 있다. 이는 환의 범주의 범주론적 곱을 이룬다. 이는 덧셈 아벨 군으로서는 아벨 군들의 직접곱이며, 곱셈 모노이드로서는 모노이드들의 직접곱이다. 환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이므로, 환들의 집합의 자유곱을 정의할 수 있다. 이는 환의 범주의 쌍대곱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환들의 자유곱은 매우 복잡하다. 환 formula_24 및 집합 formula_70이 주어졌을 때, formula_71들을 formula_24에 형식적 가환 변수로 간주하여 추가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얻는 환 formula_73를 formula_24 위의 다항식환()이라고 한다. 만약 formula_24가 가환환이라면 formula_73 역시 가환환이다. 환 formula_24 및 집합 formula_70이 주어졌을 때, formula_71들을 formula_24에 가환하지 않는 형식적 변수로 간주하여 추가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얻는 환 formula_81를 formula_24 위의 비가환 다항식환()이라고 한다. 이는 formula_24가 가환환이더라도 (formula_84가 공집합이 아니고, formula_24가 자명환이 아니라면) 항상 가환환이 아니다. 환 formula_24의 임의의 원소 formula_5에 대하여, 다음이 성립한다. 여기서 formula_88는 환의 덧셈 및 곱셈 항등원이다. 환 가운데, formula_103인 것은 자명환밖에 없다. 이는 임의의 원소 formula_97에 대하여 formula_105이기 때문에, 원소가 0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의 경우, 다른 대수 구조와 마찬가지로 준동형 정리와 동형 정리가 성립한다. 환과 환 준동형의 범주 formula_106은 대수 구조 다양체의 범주이므로, 완비 범주이자 쌍대 완비 범주이다. 이 경우, 각종 극한과 쌍대극한은 다음과 같다. 특히, 환의 전사 사상은 전사 함수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전사 함수인 환 준동형은 항상 환의 전사 사상이다. 환의 범주 formula_106은 아벨 군의 범주 · 모노이드의 범주 · 집합의 범주로 가는 충실한 망각 함자를 갖는다. 이들은 각각 곱셈과 덧셈을 잊는다. 이 두 함자는 모두 왼쪽 수반 함자를 갖는다. 이들은 다른 함자와 다음과 같이 합성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환의 범주에서 유사환의 범주로 가는 포함 함자 가 존재한다. 이는 충실한 함자이지만 충만한 함자가 아니다. (즉, 유사환의 준동형 가운데 환 준동형이 아닌 것이 존재한다.) 이 포함 함자는 왼쪽 수반 함자 를 가지며, 이를 유사환의 단위화라고 한다. 환 formula_24가 주어졌을 때, 곱셈 구조를 잊으면 아벨 군을 얻는다. 반대로, 모든 유한 생성 아벨 군 위에는 하나 이상의 환 구조가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임의의 유한 생성 아벨 군은 유한 개의 소수 거듭제곱 크기의 순환군 및 유한 개의 무한 순환군들의 직합이다. 이 아벨 군은 다음 환의 덧셈군이다. 환 formula_24가 주어졌을 때, 환의 여러 성질들은 그 덧셈군만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의 표수는 덧셈군만으로 정의가 가능하며, 또한 환의 일부 아이디얼들의 존재 역시 유추할 수 있다. 유한환의 분류에 따라, 순환군 formula_133 위의 가능한 환 구조는 정수환의 몫환 formula_134밖에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 formula_133위의 가능한 유사환 구조들은 formula_136의 양의 약수들과 일대일 대응하며, formula_137이라고 놓으면 formula_138에 대응하는 유사환은 formula_139이다. 무한 순환군 formula_140 위의 가능한 환 구조는 정수환 formula_22밖에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 formula_22 위의 가능한 유사환 구조들은 음이 아닌 정수들과 일대일 대응하며, 구체적으로 정수환의 아이디얼 formula_143과 동형이다. 꼬임 아벨 군 formula_111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동치이다. 예를 들어, 덧셈군 formula_147이나 프뤼퍼 군 위에는 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임의의 아벨 군에 대하여 이를 덧셈군으로 하는 유사환은 항상 존재한다. (아벨 군에 모든 곱이 0인 곱셈을 주면 된다.) 임의의 환 formula_24에 대하여, 그 가역원군 formula_149은 군을 이룬다. 반대로, 군 formula_111에 대하여, 군환 formula_119의 가역원군은 formula_111를 부분군으로 갖는다. 소수 크기의 유한 순환군 formula_154에 대하여 다음 두 조건이 서로 동치이다. 환은 다음과 같은 연산들을 갖춘 대수 구조이다. 환들의 모임은 대수 구조 다양체를 이룬다. (반면, 예를 들어 체의 모임은 역수 조건이 대수적이지 않으므로 대수 구조 다양체를 이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음 모임들은 대수 구조 다양체를 이룬다. 환의 대수 구조 다양체에서, (보편 대수학적) 준동형은 통상적인 환 준동형과 같으며, 부분 대수는 통상적인 부분환과 같으며, 단순 대수는 통상적인 단순환과 같다. 환의 대수 구조 다양체에서, 합동 관계는 양쪽 아이디얼과 같다. 구체적으로, 환 formula_24의 합동 관계들의 집합과 양쪽 아이디얼들의 집합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며, 합동 관계 formula_59에 대응하는 아이디얼은 0과 합동인 원소들의 집합 formula_169이다. 환의 대수 구조 다양체에서, 환 formula_24의 보편 대수학적 중심은 통상적인 환의 중심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양쪽 아이디얼이다. 이는 환의 스스로의 왼쪽 가군으로서의 소멸자와 스스로의 오른쪽 가군으로서의 소멸자의 교집합과 같다. 환 formula_24에 대하여, 양쪽 아이디얼들의 (포함 관계에 대한) 부분 순서 집합 formula_173는 완비 모듈러 격자를 이룬다. 이 격자에서 만남 formula_174은 두 양쪽 아이디얼의 교집합이며, 이음 formula_175는 두 양쪽 아이디얼의 합 아이디얼이다. 아이디얼의 격자가 분배 격자인 환은 산술환()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formula_24의 모든 왼쪽 아이디얼들의 부분 순서 집합이나, 오른쪽 아이디얼들의 부분 순서 집합 역시 완비 모듈러 격자를 이룬다. (이는 모든 가군의 부분 가군 격자가 완비 모듈러 격자라는 정리의 특수한 경우이다.) 또한, formula_24의 유한 생성 양쪽 아이디얼들의 부분 순서 집합은 모듈러 이음 반격자()를 이룬다. 환 formula_24의 부분환들의 부분 순서 집합 formula_181 역시 완비 격자를 이루며, 추가로 대수적 격자를 이룬다. 다양한 종류의 특별한 환들은 특별한 이름을 갖는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 및 이들 사이의 함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위 개념들과 독립적으로, 뇌터 환은 "지나치게 크지 않은" 환이다. 아르틴 환은 "매우 작은 (0차원)" 환이다. 모든 아르틴 환은 뇌터 환이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곱셈에 대해 교환 법칙이 성립하는 환을 가환환이라고 한다. 가환환의 경우 다양한 특수한 개념들이 존재하는데, 그 포함 관계는 다음과 같다. 특히, 모든 체는 가환환이다. 만약 덧셈에 대한 항등원 0을 제외한 모든 환의 원소가 곱셈에 대한 역원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나눗셈환이라고 부른다. 가환환인 나눗셈환은 체와 같다. 모든 환들을 분류하는 것은 현재 수학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일반적인 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4단계의 대략적인 구조론이 존재한다. 특별한 종류의 환들의 경우, (거의) 완전한 분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많은 종류의 유한환은 완전히 분류되었고, 마찬가지로 아르틴 단순환 및 반단순환 역시 완전히 분류되었다 (아르틴-웨더번 정리). 환의 연구는 다항식환 및 수체의 대수적 정수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했다. 환의 개념은 리하르트 데데킨트가 도입했으며, 1897년에 다비트 힐베르트가 수체의 대수적 정수환을 다루는 동안 처음으로 "수환"( = (數) + (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브라함 프렝켈은 1914년에 처음으로 환을 엄밀히 정의했으며, 에미 뇌터는 1921년의 논문 에서 가환환의 이론을 공리적으로 전개하였다. 부시 부시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영어권 인명 등 고유명사() 레밍즈 레밍즈(Lemmings)는 영국의 DMA 디자인(현 록스타 노스)이 개발하여 시그노시스(Psygnosis)에서 1991년 아미가용으로 출시한 컴퓨터 게임이다. 이것이 대히트친 뒤 각종 게임기와 컴퓨터로 이식되었다. 앞에 무엇이 있든 직진을 하여 절벽이더라도 떨어져 집단자살을 한다고 (잘못)알려져 있는 레밍의 생태를 모티브로 한 게임으로, 제목도 여기서 유래한다. 대한민국에서는 MS-DOS버전을 동서게임채널에서 출시했다. 확장팩인 Oh No! More Lemmings는 '레밍즈 2'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 천장에 있는 입구에서 레밍이 쏟아져내리고, 걸어간다. 이 수많은 레밍들을 출구까지 무사히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퍼즐 장르의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레밍들은 행진을 계속하며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구덩이 속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거나, 여러가지 트랩에 걸려 죽는다. 플레이어는 레밍에게 여러 가지 지시(횟수 제한이 있는 스테이지도 있다)를 내리며 출구를 향해 레밍을 유도한다. 무사히 탈출시킨 레밍의 비율이 각 스테이지별로 설정된 비율보다 높으면 클리어가 되는 방식이며, 시간제한도 있다. 레밍이 천장에서 쏟아져내리는 속도는 조절 가능하며, 입구가 여러 개인 스테이지도 있다.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어,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곳도 횟수가 한정된 지시를 복잡하게 조합함으로써 레밍을 데리고 나가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게임이다. 레밍은 아주 적은 수의 도트로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하고 귀엽게 움직이며, 이것이 또한 게임의 매력이다. 화면상에 남아있는 레밍을 전원 폭파하는 지시도 가능하다. 주로 클리어 비율은 맞췄으나 출구까지 남은 레밍이 도달하기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긴 경우 사용하게 되나, (전원 폭파건 단독 폭파건)지시를 받은 레밍이 몸이 갈갈이 찢어져 폭발하는 점은 흔히 말하는 서양 게임다운 점이다. 헥토르 헥토르()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아 왕자로, 트로이아 전쟁 때 트로이아측 전사의 필두였다.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 사이의 장남으로, 트로이아의 건설자 타르다누스와 트로스의 후손이 된다. 안드로마케와 결혼하여 사이에 스카만드리우스(트로이아인들에게는 아스티아낙스라고 불림)를 낳았다. 트로이아 방어전에서 트로이아 및 그 동맹군의 총사령 역할을 했으며, 그리스인 3만 1천명을 쳐죽였다. 헥토르는 그 용맹 뿐 아니라 고결한 성품으로 중세 유럽의 구위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헥토르는 대담한 전사인 만큼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고 사려깊으며 성실한 아들이자 남편이고 아버지인, 부정적인 면 하나 없는 무결한 인물로 묘사된다. 헬레나 헬레나(Helena)는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헬레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와 레다의 딸이다. 메넬라오스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신화의 한 인물로, 아트레우스와 아이로페 사이에 태어난 스파르타의 왕이었다. 헬레네가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자 그리스 전역에서 많은 구혼자가 몰려왔다. 이 중에는 오디세우스와 파트로클로스, 그리고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이 있었다.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는 이들 중 하나를 사위로 뽑으면 남겨진 구혼자들이 다툴까봐 사위를 뽑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틴다레우스가 고른 사위가 싸움에 말려들면 구혼자들은 모두 그의 편을 들겠다고 미리 맹세를 하도록 꾀를 냈다. 구혼자들이 맹세를 마치자 틴다레우스는 메넬라오스를 택했다. 틴다레우스가 죽고 왕자인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도 일찍 죽자 헬레나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좌에 올랐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와의 사이에서 딸 헤르미오네를 잉태하였다 헬레네는 파리스와 사랑에 빠졌다고도 하고, 다른 설에 따르면 파리스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억지로 납치되었다고도 한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의 구혼자들에게 맹세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을 중심으로 거대한 그리스군이 결성되고, 이에 대항해 트로이아에도 동맹군이 모였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이다. 전쟁이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난 후,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를 죽일 계획이었으나 그녀의 아름다움에 재차 감동해 결국 함께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프랑스 6인조 프랑스 6인조()는 프랑스의 비평가인 앙리 콜레(Henri Collet)가 몽파르나스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6명에게 붙인 이름으로, 바그너주의와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성향을 띤다. ‘6인조’라는 이름은 러시아 5인조에서 왔다. 6인조의 멤버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며 작곡 활동을 같이 했지만 작품은 서로 달랐다. 러시아 5인조 힘센 무리()는 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밀리 발라키레프가 주도하는 러시아의 5명의 국민악파 작곡가 그룹에게 붙인 이름으로, 한국어권에서는 러시아 5인조 또는 러시아 국민악파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멤버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알렉산드르 보로딘, 체자르 큐이다. 이들 이전에는 미하일 글린카가 러시아 민족주의 성향의 곡을 썼지만, 러시아 5인조는 국민적인 음악에 주력한다는 시도로서 처음이다. 이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같은 많은 후대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6인조의 이름은 ‘러시아 5인조’에서 왔다.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모데스트 페트로비치 무소륵스키(, 1839년 3월 21일 ~ 1881년 3월 28일)는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사관학교에 지원(당시 러시아는 음악원이 없었다),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청산하고 농노 해방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뒤 창작에 몰두하였다. 미하일 글린카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국민 음악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지식은 빈약하였으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으로 좋은 작곡을 하여, 프랑스 인상파 등 현대의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더 널리 알려진 교향시 《성 요한의 민둥산의 하룻밤》,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을 기리기 위해 쓴 피아노, 관현악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전람회의 그림은 후에 쓰여진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 유명하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시나》, 《소로친스크의 시장》가 있다. 그밖에 가곡집 《죽음의 노래와 춤》, 《아이들 방》 등이 있다.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에이토르 빌라로부스(, 1887년 3월 5일 ~ 1959년 11월 17일)는 브라질의 작곡가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05년 포르투갈어에 의한 외래어표기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빌라로보스라고 표기했으므로, 빌라로보스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887년 3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서관 사서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1899년 아버지가 죽은 뒤 카페와 영화관에서 첼로 연주를 했다. 1905년에 브라질 북동부를 여행하면서 민속 음악을 수집했다. 이 여행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어, 북동부에서 식인종을 만났을 때의 모험을 회고한 것은 믿기 어렵다. 그 후에 리우데자네이루의 국립 음악원에서 공부했지만 빌라로부스의 작품은 너무 독창적이었다. 몇 년 후에 빌라로부스 자신이 한 말을 빌리자면 그의 음악은 “폭포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대학은 거기에 한 발을 내미는 순간 최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었다. 1912년 아마존 우림 지역에 갔다 온 것을 마지막으로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1915년 11월 13일에 첫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그의 재능은 인정받아 1923년에 정부지원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30년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가르쳤다. 빌라로부스의 음악 교육 역시 훌륭한 업적이다. 당시 세대의 브라질 사람들을 위한 음악 교수법을 고안해 냈는데, 브라질의 음악문화와 그들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다. 민족음악을 접목시켜서 학생들을 위한 대편성 합창곡을 썼다. 빌라로부스가 죽은 지 40년이 지났지만 그의 교수법은 삼바 음악과 MTV에 영향을 받는 브라질의 지금 세대에게도 공감을 받고 있다. 1944년부터는 미국 전역을 돌며 지휘 활동을 하고, 미국 오케스트라에서 위촉된 작품과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1959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죽었다. 알프레트 시닛케 알프레트 가리예비치 시닛케(, , 1934년 11월 24일 ~ 1998년 8월 3일)는 러시아의 서양 음악 작곡가이다. 2005년 러시아어에 의한 외래어 표기법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알프레트 슈니트케로 표기했었다. 알프레드 시닛케는 소련 옌겔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이고, 1926년에 소련으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인이며, 엥겔스는 당시 볼가 독일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1946년 그는 언론인이며 번역가인 아버지가 머물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 1948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였다. 시닛케는 196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고,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닛케는 이후에 영화음악 작곡을 주로 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 이후 신비주의가 그의 음악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소련 당국의 비난을 받고, 외국 여행을 금지당하기도 하였다. 1985년 시닛케는 뇌혈관 발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는 여러 번 뇌사 판정을 받았지만 회복하여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90년에는 러시아를 떠나 독일 함부르크로 옮겼으나, 건강이 더욱 나빠져서 여러 번 더 발작을 겪다가 1998년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시닛케는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작품에서 다른 작곡가의 곡을 인용하거나 패러디해서 현재와 과거의 작곡 스타일을 혼합한 곡을 만들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오페라 《바보와의 생활》, 9개의 교향곡, 합주 협주곡과 함께 피아노 5중주, 현악 3중주를 포함한 실내악곡 등이 있다. 진은숙 진은숙(陳銀淑, 1961년 7월 14일 ~ )은 작곡가이다.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에서 서양 고전 음악과 피아노를 처음 접하고서 베토벤과 브람스가 작곡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14살과 15살 때 스트라빈스키를 접하고 대학 시절 유럽 현대 음악을 접했다. 금란여중재학시절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피아노를 독학하던 중 조환기 음악선생님으로부터 작곡가가 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13살에 작곡하는 길로 들어선다. 악보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등의 교향곡 악보를 베끼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예컨대 좋아하던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악보를 선생에게서 빌려 몇 백 장씩 베끼곤 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서 강석희를 사사했다. 독일에서 공부한 강석희에게 영향받아 1985년 독일 함부르크로 가서 1988년까지 죄르지 리게티를 사사했다. 음악평론가 진회숙의 동생이자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인 진중권의 누나이다. 의 아들인, 핀란드의 피아노 연주자 마리스 고토니(Maris Gothóni)와 결혼하여 아들이 한 명 있다.?? 김기림 김기림(金起林, 1907년 4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이다. 본명은 김인손(金仁孫, 아명(兒名)은 金寅孫)이며, 편석촌(片石村)이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다. 함경북도 학성에서 출생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일본의 니혼 대학 영문학과 중퇴를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문학과를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귀국하여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내면서 조선일보에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또한 같은 신문에 평론 〈시의 기술 인식 현실 등 제문제〉를 발표하며 문학평론에도 뛰어들었다. 1933년 이상,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6년에는 첫 시집 《기상도》를 발표하였다. 1942년 낙향하여 고향 근처 경성중학교(鏡成中學校)의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 과목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제자로 시인 김규동이 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나, 다음 해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으로부터 월남하여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즈음에 탈퇴하였다.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강사로 일하다 서울대학교 조교수가 되었고, 신문화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시기는 불명이다. 1990년 6월 9일에 동료 시인 김광균, 구상 등이 주도하여 모교인 보성고등학교에 김기림을 기린 시비를 세웠다. T. S. 엘리엇에게서 영향받아 주지주의 이미지즘 시를 주로 썼다. 동시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교주의를 비판하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자신의 이론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흩어져 있을 뿐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런 결점들은 찿복되었다. 평론 면에서는 영미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도입하여 한국 시문학계의 한 전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수영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병약했으며, 선린고등상업학교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시작품들을 외워 읽을 만큼 영어 성적이 우수했다. 이후 일본의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학병 징집을 피해 대학교 중퇴 후 만주의 길림성으로 이주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또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한 채 중퇴했으며,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국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반공포로라고 함) 김수영 시인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57년 제1회 시인협회상을 받았다. 1959년 첫 단독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시기의 시들은 바로 살고자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사이의 갈등과 슬픔의 극복이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후 번역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날 새벽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2013년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김수영 시인을 기리고 그의 시문 및 시학의 업적을 기리는 김수영문학관을 설립하였다. 한국의 대표적 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김수영은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쓰다가 4.19 혁명을 기점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압제에 맞서 적극적으로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강조하는 시를 썼다. 그는 이렇게 썼다. "4.19 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니까!"김수영 시인은 이어령과의 논쟁을 했는데, "불온한 문학을 발표할 수 있는 사회가 정상사회"라고 비판했다. 평론가 김현은 그를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평가한다. 그의 사후 민음사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여 1981년 이후 매년 수여하고 있다. 남한 (지역) 남한(南韓) 또는 남조선(南朝鮮)은 한국(조선)의 지역으로서 한반도 군사 분계선 이남의 지역을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한국어 사전상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은 이를 전제로 한 단어다. 대한민국의 사전상 사전상 남한(南韓)은 대한민국의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 북한(北韓)은 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리적 범위 = 남한(대한민국의 남쪽 지역) + 북한(대한민국의 북쪽 지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한 조선반도 전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로 규정하여 남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쪽 지역, 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어(조선어) 사전상 남한(남조선)과 북한(북조선)은 국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한국(조선) 내 지역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별개로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남한(남조선)은 대한민국을, 북한(북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칭하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주기철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이다.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福)이었다.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울러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아호(雅號)는 소양(蘇羊)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차학경 차학경(車學慶, Theresa Hak Kyung Cha, 1951년 3월 4일 - 1982년 11월 5일)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미술가이자 작가이다.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나 1961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캘리포니아 소재 버클리 대학에서 문학, 예술 이론, 행위 예술, 영화 등 다방면에 걸쳐 공부했으며, 예술 분야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프랑스 파리 시에서 영화제작과 비평이론을 공부했다. 1980년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에 정착하면서부터 제3 세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어떤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활동을 펼쳤다. 1982년, 첫 저서인 《딕테(Dictee)》의 출간 3일 후, 뉴욕에서 사진작가였던 남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가 해당 건물 관리인에게 강간, 살해당했다. 이미 강간 전과가 두 번이나 있었던 살인범은 플로리다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잡혔다. 그녀의 작품들은 1970년대 이후 중요한 예술 사조로 자리 잡은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등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상용구 상용구는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나 수식, 명령어 등을 입력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에 간단한 키 입력으로 불러내어 쓰는 것을 말한다. 골재 골재(骨材)는 하천·산림·공유수면 기타 지상·지하 등에 부존되어 있는 암석(쇄석용에 한함), 모래 또는 자갈로서 건설공사의 기초 재료로 쓰이는 것을 말한다. 골재는 주로 콘크리트나 모르타르를 만들 때 쓰이며, 입자의 크기, 중량, 생산지에 따라 분류된다. 대한민국 시방서에 규정된 체의 통과 여부로 구분 경량골재(lightweight aggregate)는 천연 경량골재와 인공 경량골재로 구분되며, 천연 경량골재에는 경석 화산자갈, 응회암, 용암 등이 있으며, 인공 경량골재에는 팽창성 혈암, 팽창성 점토, 플라이 애쉬 등을 주원료로 하여 인공적으로 소성한 인공 경량골재와 팽창 슬래그, 석탄 찌꺼기 등과 같은 산업 부산물인 경량골재 및 그 가공품이다. 골재의 내부는 다공질이고 표면은 유리질의 피막으로 덮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잔골재는 절건밀도가 0.0018 g/mm미만, 굵은 골재는 절건밀도가 0.0015 g/mm미만인 것이다. 골재의 크고 작은 입자가 혼합된 정도를 골재의 입도(粒度, grading)라 한다. 골재 입자의 크기는 KS F 2502의 골재 체가름 시험(sieve analysis)에 의하여 구하며, 시험 결과를 정리한 것이 입도곡선이다. 입도곡선을 수치화한 것이 조립률(fineness modulus, FM)이다. 골재가 질량비로 90% 통과하는 체 중 가장 작은 체의 치수를 굵은 골재의 최대치수로 정한다. 골재의 치수가 크면 좋은 점은 배합 시 비표면적이 줄어들고 소요 결합재량이 줄어든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치수가 크게 되면 시공 시 타설 작업이 어렵게 되는 단점이 생긴다. 따라서 골재를 적절한 최대치수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비중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건조상태 비중, 표면건조 포화상태(SSD) 비중, 겉보기 비중, 유효 비중이 그것이다. 굵은 골재의 비중을 재려면 골재 샘플을 24시간동안 물 속에 담가놨다가 물 속에서의 질량을 우선 잰다. 그 다음 시료를 SSD 상태로 건조시키고 다시 질량을 잰다. 그 후 최종적으로 시료가 일정한 질량이될 때까지 건조시키고 다시 질량을 잰다. 비중과 흡수율을 계산하는 식은 다음과 같다. 잔골재의 비중을 재는 방법은 굵은 골재의 비중을 재는 방법과 약간 다르다. 우선 잔골재 샘플을 24시간동안 물 속에 담가놨다가 SSD 상태로 건조시킨다. SSD 상태 잔골재 시료 500g을 일정 부피의 플라스크, 피크노미터(비중병, pycnometer)에 넣고 피크노미터에서 그 부피의 눈금까지 물을 더 넣은 후 질량을 잰다. 이후 시료를 건조시키고 질량을 다시 잰다. 이것을 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포틀랜드 시멘트 콘크리트 배합 설계 시에는 골재의 단위용적중량이 필요하다. 부피를 아는 강체 용기에 골재를 다져 넣어 단위용적중량을 구하게 된다. 골재는 수분 포함 정도에 따라 네 가지 상태로 분류할 수 있다. 절대건조상태는 골재에 수분이 전혀 없는 상태다. 공기 중 건조상태는 골재 내 공극에 약간의 수분을 포함하고 있지만 공극이 완전히 수분으로 포화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표면건조 포화상태(SSD; Saturated Surface-Dry)는 골재의 공극이 모두 수분으로 채워져 포화되어 있지만, 표면에는 수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습윤상태는 골재의 공극 전부와 표면에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상태이다. 시멘트를 수화시키는 데 드는 물은 SSD 상태에 더해진 자유수가 쓰인다. 골재의 상태에 따른 수량 또는 비율을 몇 가지 정의할 수 있다. 자유수량(free moisture)은 실제 함수량과 표면건조 포화상태(SSD) 함수량의 차이를 말한다. 자유수율은 함수율 - 흡수율이다. 함수율 MC는 다음 식으로 정의한다. 채취장에서 채취된 골재는 품질이 항상 균일하지 않다. 따라서 제작 중에 여러 번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채취된 골재는 토목 프로젝트의 비용 및 사용 편의성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된다. 크기가 큰 입자들의 품질, 미세입자들의 성질과 양, 골재의 입도분포를 판단하여 골재원으로 사용하기 적합한지 결정을 내린다. 골재의 사용 목적으로는 기초, 포장의 기초재료로 사용하는 것, 포틀랜드 시멘트 콘크리트 또는 아스팔트 콘크리트의 구성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있다. 골재가 콘크리트의 제작에 사용되는 경우 필요한 시멘트 페이스트의 양을 줄이는 역할을 골재가 한다. 골재의 체적안정성이 큰 이유로, 일정 범위 내에서 최대한 골재를 많이 넣는 것이 콘크리트의 품질 향상에 바람직하다. 군주론 《군주론(君主論, , )》은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정치철학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저술한 16세기의 정치학 저술이다. 마키아벨리의 서한으로 보건데 De Principatibus(군주국에 관하여)라는 라틴어 제목의 한 소책자가 1513년에 이미 널리 읽히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인쇄본은 마키아벨리가 죽고 5년 뒤인 1532년까지 출간되지 못했다. 메디치 가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허락으로 출간될 수 있었는데, "그 훨씬 이전에, 사실상 필사본 군주론의 첫 등장 이래로 그의 저서에 관해 많은 논란이 일었다." 비록 군주의 거울(mirrors for princes) 형식의 고전적 저술처럼 쓰였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형식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다른 르네상스 작품들의 출판 이래로 점차 통용되는 추세였던 라틴어보다는 부분적이나마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때로 근대 철학, 특히 어떠한 관념적 이상보다도 실질적인 진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근대 정치 철학에 관해서 선구자 격의 저서라 일컬어진다. 또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가톨릭과 더불어 스콜라주의와의 직접적인 갈등 속에서 군주론은 정치와 윤리를 바라보는 시각에 방점을 찍은 것이었다. 비교적 짧은 내용임에도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저술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비아냥 거리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이란 단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또한 악마라는 의미의 영어 표현인 'Old Nick'의 유래와 관련이 있고 심지어 현대 서구에서 '정치'와 '정치가'라는 단어에 함축된 부정적인 의미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군주론의 주제에 있어서 훨씬 길고 몇 년 후에 쓰인 로마사 논고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정치를 위해 범행을 자행하는 인간의 사례로서 당대에 근접한 시대의 이탈리아인을 차용한, 군주론과 비교되는 마키아벨리의 다른 저술로서 카스루치오 카스트라카니 다 루카의 생애가 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비도덕적 수단의 사용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군주의 목적에 대한 수용만이 군주론의 목적이라고 흔히 알려져 왔으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이탈리아 통일과 인민 삶의 개선 목적과 새로운 국가의 성립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세부적 사상을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를 인용하자면 군주론은 대부분이 저자에 의해 명시되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군주론은 앞으로 다루어질 주제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문장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적이건 전제적이건 모든 형태의 최고 정치 권력 조직체"를 중립적으로 포괄하기 위하여 '국가(stat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어떻게 국가라는 단어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러한 근대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는 마키아벨리의 저서 중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졌던 비슷한 문장과 함께 많은 학문적 논의의 주제가 되어 왔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에 대해 다른 곳에서 저술하였다고 언급하면서, 군주론은 군주국에 대한 글이 될 것이라고 하였지만 사실 그는 실질적으로 공화국 또한 많은 힘을 가졌으며 군주국의 한 유형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더 중요한 건, 덜 세태적이게도 그는 세습 군주국으로부터 신생 군주국을 구별하고 있다. 그는 2장에서 세습 군주제는 통치하기 용이하다고 말하며 짤막하게 세습 군주제를 다루고 있다. 세습 군주에게 있어서 "군주가 상식밖의 사악한 비행으로 미움을 사지 않는 한, 신민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이러한 저작물의 유형은 오직 세습 군주국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는 1장과 2장의 독특함은 군주를 위한 조언의 전례와 대조적으로 "관습에 저항함으로써 권력을 취득해야 하는 통치자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한 계획적인 의도"라고 서술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그의 경험과 더불어 타키투스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뚜렷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권 형태의 범주화는 '반아리스토텔레스 주의'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예를 들자면 1인 군주, 과두제 집권층, 혹은 민주정에서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느냐에 따라 정권을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발견되는 전통적인 범주화에 비하면 분명히 간단하다. 마키아벨리는 예를 들어 군주국과 독재 국가 간의 구분과 같은 바람직한 형태와 비도덕적 형태 간의 고전적 구분 또한 다루지 않았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 키루스의 교육 도입부에서 통치자의 형태에 따른 정확히 일치하는 구분을 사용하는데, 거기서 그는 인간을 통치하는 방법의 지식에 대해 거론하면서 그의 표본이 되는 군주, 키루스 2세는 "자신의 권좌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거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 왕관을 손에 넣은 다른 모든 왕들"과는 매우 다르다고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신생 군주국이라는 주제를 복합 군주국과 전적으로 새롭게 생긴 군주국의 두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신생 군주국은 전적으로 새롭게 생겼건 종래에 있던 군주국에 수족처럼 병합되었다는 의미의 복합 군주국이건 간에 양쪽 모두를 의미한다. 마키아벨리는 새로 점령한 지역의 유지를 위한 각각의 용기 있는 로마의 방식(사례로서 그리스의 경우를 인용하였다.)을 신생 군주가 어떻게 처신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전례로서 보편화 시켰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마키아벨리는 신생 군주가 현재의 분규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분규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시간은 이익은 물론 해악을 가져오기 때문에, 신생 군주는 "시간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역량과 현명함에서 비롯되는 이익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복된 왕국의 군주가 그의 제후들에 의존하는 통치 유형이 있다. 16세기 프랑스, 다시 말해 군주론이 쓰여졌던 시기의 프랑스 왕국이 바로 그 예이다. 이러한 국가는 정복하기는 쉬우나 유지하기는 어렵다. 왕이 중심이 되는 국가일 경우에는, 정복하기는 어려우나 유지하기는 쉽다. 그 유지의 해법은 군주의 가문을 단절시켜 버리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 사례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을 들고 있는데, 그는 이러한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당대의 "투르크 왕국"(오스만 제국)과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는 이 장이 군주론 이전의 저술에서는 볼 수 없는 상당히 이례적인 장이라 언급하고 있다. Gilbert는 자유로운 공화국을 정복하는 논의의 필요성이 일부의 자유로운 공화국을 포함하여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마키아벨리의 목표와 관련되어 있다고 추측하였다. 또한 그가 언급하기를, 어쨋든 이 장은 그러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군주에게 있어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고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의 헌정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군주론은 피렌체를 통치하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자 대인 로렌초(Lorenzo the Magnificent)의 손자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헌정되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개인적인 서신을 통해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하고 몇 달 후에는 마키아벨리의 체포, 고문, 추방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서신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재집권한 이듬해에 쓰여졌다. 군주론의 헌정은 프란체스코 베토리(Francesco Vettori 군주론이 인정되기를 바랐으며 메디치 가문에 추천을 했던 마키아벨리의 친구)와 오랫 동안 논의되었다. 원래 그 책은 어린 로렌초의 삼촌이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i Lorenzo de' Medici)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그는 1516년 사망하고 만다. 출간되기 전까지 군주론이 메디치 가문의 어느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키아벨리는 그 내용을 글을 통해서 배운 것 만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실제 경험을 통한 군주의 본질과 "위인들의 처신"에 관한 그의 지식의 꾸밈 없는 요약이라고 서술하였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논한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의 종류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는데 그러한 부도덕함은 여전히 만만찮은 논의의 주제이다. 비록 그것이 군주에게 압제하는 방법을 조언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공화정을 원했다고 생각된다. 몇몇 논평가들은 그가 지도자의 부도덕하고 죄악이 되는 행위를 수용하는 것을 그가 이탈리아의 끊임 없는 정치적 분쟁과 불안정한 정국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 "개인의 욕구와 인민의 빈곤을 묵살할 뿐만 아니라 혁신, 진취성, (과학적)의문을 인과관계로 질식시키는(지금은 우리가 본성을 통제하는 것을 용인하는)", 중세 가톨릭의 '고전적 목적론'의 통제를 그가 완화시키는 것으로서 다수의 '행복, 평등, 그리고 자유'를 증대시켰음을 주장하며 옹호한다. 다른 한편으로 는 "만일 우리가 마키아벨리는 근본적으로 애국자 혹은 과학자라 인정해야만 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악의 교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만큼 사려깊고, 그의 사리에 맞는 친구에게 그것을 시인할 만큼 너그럽다." 마키아벨리는 이상주의가 아닌 현실주의의 필요를 강조했다. 군주론에서 그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윤리적, 정치적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되려는 자는 저절로 영예와 명예를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당연시 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지도자의 '역량(virtue)'과 '사려분별(prudence)'의 필요성과 연관지었으며 그러한 역량을 바람직한 정치와 진정한 공익에 필수적이라 보았다. 위인들이 그들의 역량과 사려분별을 발전시키고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 군주에게 하는 충고의 전통적인 주제였다. 그리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가 말한 대로, 더 큰 역량이 운명에 덜 의존한다는 것은 고전적으로 마키아벨리 당대의 "인문주의자의 상투적인 표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의견에 의하면 그들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운명에 맡겨 버린, 그러므로 부적절한 지도자에게 맡겨버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다른 저자들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단어의 기존의 기독교적 의미와는 대조적으로, '역량'과 '사리분별'이란 단어를 영예를 추구하는 것과 품성의 기상이 넘치는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지만 기존의 기도교적 의미의 유래가 되는 그리스 로마의 개념을 따라가는 것을 더욱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야망과 위험의 감수를 권장하였다. 그런 식으로 또 다른 인습과의 단절로서 그는 가능한 한 정치공동체의 군주의 목표로서 안정성 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혁신 또한 논의하였다. 중대한 개혁을 해내는 것은 군주의 역량을 돋보이게 하고 그에게 영예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분명히 그의 당대에 이탈리아에는 중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시대의 이러한 견해는 널리 공유되었다. 마키아벨리의 서술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운명을 영예롭게 통제하도록 시도하는 것을 권장하였는데, 심각한 정도의 몇몇 상황에는 그러한 계획의 위험, 필요악과 무법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정의하는 '형식과 명령'의 새로운 '정립'(혹은 재정립)을 필요로 할 지도 모른다. 부당함과 부도덕함을 이용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혹은 심지어 새로운 종교를 세우는 것이 군주론의 주된 주제라고 말해지기도 하였다. 를 인용하자면 군주로서 명예와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견해는 인쇄기라는 새로운 기술의 도움을 받아, 근세 시대 내내 서양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가져왔다. 폴란드인은 군주론이 헨리 8세의 적인 영국의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헨리 8세가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서는 것과 예를 들어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가 벌어지는 동안의 그의 전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한다. 계몽시대 계몽시대(啓蒙時代, , )란 유럽과 신세계가 계몽주의라는 광범한 사회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에 휩싸였던 17세기, 18세기를 말한다. 계몽주의는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영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 'Enlightenment'(, )를 번역한 한자어 계몽(啓蒙)이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lightenment" 사상의 다만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 번역이 대개 그렇듯, 이 번역은 한국어로 뚜렷한 뜻을 전달해 주고 있지는 않다. 한편, 칸트는 인간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지도 없이 이성적으로 사는 것 또는 미완성 상태에서 완성태로 나아가는 것을 계몽이라 했다.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계몽사상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 발달 시키려는 사상 또는 그러한 행동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 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명료하고 자명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낙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대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사상은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중세 시대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학의 족쇄로부터 인간 이성의 해방을 주장했다. 계몽사상의 의의는 국가·정부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더이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를 받지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민의를 배반한다면 민중은 혁명적인 저항권을 발동해 국가를 교체, 폐지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계몽사상은 17, 18세기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것이다. 이 노력의 첫 장을 연 철학자로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를 손꼽을 수 있다. 이후 계몽주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백과전서파 (디드로, 볼테르),루소와 칸트에 영향을 주어 이후 사상들의 출현에 기여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사상》이라는 책에서 계몽주의의 특징으로 '이성 관용 자율 인권이라는 개념, 사회ㆍ정치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적용,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미신과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권력에 대한 거부' 등을 꼽았다. 즉 계몽주의는 절대 왕정과 강력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절대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은 그러한 권위의 원천들을 부정하고 대신 그 자리에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라는 새로운 깃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가 진보의 기록이라 여겼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시작되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Claude Adrien Helvétius)등 백과전서파들이 주도하였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들에게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은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깨부수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 개혁 의지를 심어주었다. 민중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프랑스 혁명의 원천이 되었으며, 지금도 민중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존중되고 있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디드로는 앙시앵 레짐(舊制度) 사회에 고착하는 종교적 편견, 사회적 기성관념에 비판을 가했는데, 특히 볼테르는 이신론(理神論), 종교적 관용(寬容)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으며, 몽테스키외는 신랄한 사회ㆍ문명 비판을 전개했다. 이 기간, 데카르트의 이성(理性)은 정적(靜的)인 진리의 선험적(先驗的)인 보유자라는 성질에서 기능적인 진리의 추구자라는 성질로 변했으며, 한편에서는 영국에서 뉴턴 물리학의 경험주의, 로크의 감각론 등이 수입되어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748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발표되는 해는 프랑스 사회의 경제 번영, 경제 자유주의의 성장을 배경으로 계몽주의의 결전 개시기라 불린다. 앙시앵 레짐 사회에 대한 자연법(自然法)이나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차츰 체계화되어, 1752년에는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결실을 보았다. 이 시기의 철학자 가운데는 콩디약, 엘베시우스, 라메트리 등과 같이 감각론, 이신론의 입장에서 유물론,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한편 정치 비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같이 전체 사회 질서에서 국가의 기본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1770년경 이미 계몽주의는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미국 혁명이나 프랑스를 방문한 프랭클린(1707-1790)의 정치적 활동의 영향 등에서 자극을 받아 사회·정치 변혁의 이론적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모루레(1727-1819)나 마블리(1709-1785) 등이 이 세대이며, 자연법을 하나의 구체적 목표로 하고 공동 소유의 사회를 상정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철학은 전국의 개명적(開明的) 부르주아를 사로잡아 '생각하는 대중'을 조성하는 것으로써 실천적인 변혁의 사상이 되었다. 혁명 의회에서 전개되는 모든 정치사상은 이미 계몽주의에 원형으로서 내포된 것이며, 그것이 전쟁이나 경제 위기, 정치적 역관계(力關係)를 계기로 전개된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계몽주의의 인식론, 과학론, 역사론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계승되었고, 한편 보편적 이성(理性)에의 신뢰는 루아이에 코랄, 주프로와(1796-1842) 등에 계승되었다. 넓은 의미로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17세기 초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18세기 말의 애덤 스미스, 제러미 벤담에 이르는 경험론의 철학과 거의 같다고 해석되는데, 좁은 뜻으로는 존 로크에서 스미스까지의 18세기 철학을 총칭한다. 그 가운데서 신학적으로는 이성의 우위(優位)를 설명하고 후에 무신론으로 경사(傾斜)를 보인 이신론(理神論)의 흐름(앤서니 콜린스, 존 톨런드, 제3대 샤프츠버리 백작)이 있고 도덕철학으로서는 인간에 내재(內在)하는 모랄센스를 강조하는 도덕감학파(道德感學派, 샤프츠버리)와 유물론에의 경향을 가진 공리주의(데이비드 하틀리, 조셉 프리스틀리, 버너드 맨더빌)가 대립되어 있으며, 인식론으로서는 경험과 감각을 중시하는 경향(흄)이 나타났다. 흄은 회의론(懷疑論)에 빠졌는데 이것은 오히려 예외적이며, 대세(大勢)는 도덕감을 강조하든 이기심(利己心)을 강조하든간에 밝은 낙관론(樂觀論)과 인간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계몽사상과 같은 사회 비판은 없고, 온건하고 현상(現狀) 긍정적이며, 이 점에 영국 계몽사의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단지 샤프츠버리에서 프랜시스 허치슨을 거쳐서 존 밀러나 애덤 퍼거슨에 이어지는 소위 스코틀랜드 역사학파에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 비판이 나타났고, 18세기 말에는 차츰 첨예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독일은 당시 시민사회의 발달이 미미했기에, 프랑스의 계몽사상의 활발한 전개에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달했다는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지던 17세기에 프로이센은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 사상가인 볼테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와의 서신 교환이 프랑스 어로 이루어진 점, 그 외에 많은 예술가와 문인, 학자들과도 프랑스 어로 이야기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프로이센의 문화,예술은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 프랑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 예술,학문 분야에서의 서유럽 선호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적인 것으로 서서히 변화된다. 독일인 중에서도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철학과 정치 이론 부문에서 뉴턴의 자연 과학적 사고 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등장한 계몽주의 철학이 독일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칸트(1724~1804)가 살았던 시기였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계몽주의보다 늦게 나타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당시 독일은 300여 개의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형태 안에 연방국가로 유지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외국문화가 독일인들의 생활과 사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을 때, 계몽주의는 외국 문화에 대한 반발로 표출되었다. 계몽주의는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 벗어나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 독일 내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인간의 사고가 기존의 종교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하면서 계몽주의는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문학 또한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 이성과 법칙을 중요시 여겼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나 영국의 계몽주의가 국가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근대 시민 혁명의 이론을 제공한 것에 비해, 독일의 계몽주의는 혁명의 원리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시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 특히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기적인 사상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또, 계몽주의를 받아들인 중심 계층에 자신을 '국가 제일의 공복'으로 자처한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군주가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계몽주의는 국가 혁명의 원리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위한 서구화의 일환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듯이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망과 함께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변혁시키는 실천적인 성격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보다 관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인 칸트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이미 초기의 독일 계몽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종교론이나 경건주의 신앙 등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칸트의 철학 세계도 계몽주의를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철저히 구분지음으로써 시민 정신의 자유로운 발현보다는 시민의 교양으로서 특수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문학에 결과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가 확산되면서 지나치게 규율들에 얽매이게 되어 인간의 합리적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목적도 상실하게 되었으며, 문학에서도 작품의 내용보다 법칙들을 더 우선시하게 되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소홀하게 되었다. 이성만으로는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깊은 심리를 표현하기 어려웠고, 감정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행동 양식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문학의 본래 목적과 점점 멀어져 갔다. 계몽주의의 문학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심리를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몇몇 작가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저술하여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다. 이 때 나타난 운동이 인간 본연의 감정을 중시하던 질풍노도 운동(Sturm und Drang)이며, 젊은 시절의 괴테와 쉴러가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탈리아는 바티칸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상 가톨릭 교회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사상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는 《근대의 탄생》에서 '이탈리아의 지적 활동은 펼쳐지지 않는 책 같은 상태'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이 곳의 계몽주의 운동은 작고 고립된 그룹들로 파편화 되어 나타났다.계몽주의 운동 지지자들은 정치철학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슬로건을 도입했다. 이탈리아의 계몽주의의 대표주자는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였다. 그는 형사재판 제도의 개혁을 다룬 《범죄와 형벌,(Dei delitti e delle pene)》을 썼다. 이 책은 형벌을 규제하는 원리들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진술로 평가되고 있다. 베카리아는 고문과 참수형을 비판하고 종교적 죄를 범죄로 취급하는 가톨릭 교회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훗날 사형제도의 폐지 등 인권 신장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또 루이지 갈바니, 알렉산드로 볼타 같은 과학자들이 있다. 스페인은 종교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과서적인 나라였다.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종교재판소로 개신교인들이나 계몽주의 철학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3세의 박애적인 통치 아래서 조금씩 주요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의 이탈리아인 재상인 스퀼라체 후작(Marques de Squillace)의 개혁 조치에 1766년 마드리드에서 대규모 폭동이 벌어졌다. 폭도들은 마드리드에서 스퀼라체 후작이 만든 새로 설치한 가로등을 파괴했다. 이 폭동으로 스퀼라체는 이탈리아로 쫓겨가고 카를로스 3세의 개혁 조치에 큰 타격을 입혔다. 카를로스 3세는 이 폭동이 예수회의 음모로 보고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소를 억압했다. 리스본 대지진 이후 재건을 이끈 폼발 후작은 과거 해양 개척을 선도했던 나라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폼발 후작은 1750년 남미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리고 국왕 주제 1세를 암살하려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예수회를 추방시키는 등 여러 개혁에 앞장섰다. 예수회가 남미에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꾸미고 국왕 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린다는 사실은 훗날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계몽주의는 전제와 억압을 거부하며 현대의 민주주의, 인권과 시민의 자유에 대한 제도적 보장, 세속주의와 종교적 다양성, 개인의 윤리적 자율성, 과학적 태도 견지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입각한 운동이었다. 계몽주의는 사상과 행동 그리고 진보를 가로막는 정통 사상과 권위를 깨부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러한 진보적 태도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훗날 에밀 졸라 등 프랑스의 지식인들의 사상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이라고 불리던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비평의 토양이 되었다. 존 로크 존 로크(, 1632년 8월 29일 - 1704년 10월 28일)는 잉글랜드 왕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이다 로크는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평가를 받지만, 사회계약론도 동등하게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상들은 인식론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가장 영향력있는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들은 볼테르와 루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혁명뿐만 아니라 여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미국 독립 선언문에 반영되어 있다. 평화·선의·상호부조가 있는 낙원적 자연 상태에서 노동에 의한 자기 재산을 보유하는 자연권의 안전 보장을 위하여 사회 계약에 의해서 국가가 발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임무는 이 최소한의 안전보장에 있다고 하는 야경국가론이다. 그것을 위한 권력으로서 국민은 계약에 의하여 국가에 그것을 신탁(信託)하였다고 주장하여 국민 주권에 기초를 두었으며, 명예혁명 후의 영국 부르주아 국가를 변론하고 영국 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로크의 정신에 관한 이론은 "자아 정체성"에 관한 근대적 개념의 기원으로서 종종 인용되는데, 데이비드 흄과 루소 그리고 칸트와 같은 이후의 철학자들의 연구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의식"의 연속성을 통해 자아를 정의하려 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또한 정신을 "빈 서판"(백지 상태, 즉 "타불라 라사")으로 간주하였는데, 데카르트나 기독교 철학과는 다르게 사람이 선천적 관념을 지니지 않고 태어난다고 주장하였다. 로크의 생애, 무엇보다도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가 않다. 1632년 8월 29일 섬머셋셔(Somersetshire)의 작은 마을 라잉턴(Wrington)에서 법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크의 아버지는 청교도 혁명 당시 올리버 크롬웰 밑에서 싸운 의회파 군대의 기병대장이었다. 부모로부터 청교도식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며 유년시절은 브리스톨 근교의 펜스포드(Pensford)에서 보냈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기숙사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652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리스트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언어, 논리학, 윤리학, 수학, 천문학을 두루 공부하면서 데카르트 철학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1656년 학사(Bachler of Art)를 받은 후 2년간 석사과정을 밟았다. 1660년 옥스퍼드 대학의 튜터로 5년간 활동한 후 1664년경부터 과학, 특히 의학을 연구하였다. 1665-1666년 공사 비서로서 독일의 브란덴부르크에 머물렀으며, 이를 계기로 로크는 약 10여년간 정치무대에서 활동을 한다. 그는 이곳에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지만 질서있게 함께 사는 것을 목격하고 종교적 관용의 실행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다. 이 경험이 훗날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를 쓰게 된 원동력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처음 백작 에쉴리(Ashley)의 서기로 발탁되어 1675년에는 심지어 무역 식민위원회의 서기장에 임명되기도 한다. 1675-1679년 주요 저서인 <인간 오성론>의 저술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로크는 심한 천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후 프랑스의 몽펠리에르에서 약 4년간에 걸쳐 휴양 생활을 한 후 1679년 영국으로 돌아온다. 1689년 명예 혁명에 의한 윌리엄 3세의 즉위로 귀국하여 1690년 공소원장이 되고, 망명중 집필한 <인간 오성론>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1700년 에식스에 은퇴하였다가 그곳에서 1704년에 사망하였다. 로크의 저서로는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그의 主著 <인간 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그리고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등이 있다. 그는 인식론의 창시자이며 계몽 철학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그의 정치·교육·종교 등의 사상은 영국과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처음에는 데카르트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나, 후에는 데카르트의 생득적 관념을 맹렬히 비판하며, 관념의 경험적 발생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백지와 같은 것으로 어떠한 성분도 생득적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에게 지식과 추리의 재료인 관념을 주는 것은 경험뿐인데, 경험은 감각과 반성으로 나뉜다. 우리는 감각에 의하여 달다, 짜다, 희다, 둥글다 등의 관념을 가지며 반성에 의해 사유, 의지, 상기 등의 관념을 가진다. 이들은 단순 관념으로서 이들이 복합하여 복합 관념이 생긴다. 이성론에서 말하는 실체도 복합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경험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정치 사상은 전제주의에 반대하고, 국가는 개인의 생명·재산·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국가 성립에 관해서는 계약설을 택하고, 의회적인 민주 정치와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의 기초를 만들었다. 로크는 처음으로 헌정민주정치와 자연권리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정치이론들은 미국,영국,프랑스 등 여러 서방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미국에서는 신성시 여겨졌고 민족이론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의 사상은 미국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후에 독립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로크가 프랑스에 끼친 영향은 더욱 엄청나다. 로크의 사상이 프랑스에 전해진 후, 그의 사상은 훗날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등의 대사건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로크는 왕당파를 피해 1683년부터 네덜란드에 망명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과 개신교인 탄압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신교 탄압에 항의하며 《관용에 관한 편지》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관용이야 말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로크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정치적인 존재(고대의 인간상. 아리스토텔레스 비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신으로부터 주어진 정당함에 따라 공평하며, 권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되는 로크의 주장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자연 상태에의 인간의 소유는 이웃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는 상충되게도, 로크는 인간은 일을 통하여 신이 주신 자연을 주변 사람의 동의 없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유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라 함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소유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령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혼자 먹을 만큼 이상의 사과를 얻어 그 사과를 썩게 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여기서 남은 잉여생산물에 대한 물물교환이 생겨나며, 그 물물 교환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돈이 발명되었다. 금, 은, 돈과 같은 것들은 썩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법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 로크는 또한 자연속에서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내 재산이 도난을 당했을 시에는 도둑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재산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다른 어떠한 기관이 필요하였는데, 그 기관을 만들기 위한 중간과정이 바로 사회계약설이다. 사회계약설에 의하여 국가는 성립되었으나 국가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 아니며, 홉스의 국가관과 대조, 입법부가 정한 법에 의해 행정부에서 통치되는 기관이었다. (완벽한 삼권분립의 형태가 아님) 국가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국민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 계약을 성립한 국민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는 것도 로크의 주장에서 주목 할 만하다. 저서 김영랑 김영랑(金永郞, 1903년 1월 16일 (1902년 음력 12월 18일) - 1950년 9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대지주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강진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3세의 나이에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다. 졸업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간토 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이후 두어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고향인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 했다가 낙선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8세로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 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 속을 흐르는 조용한 저항의식이 담긴 민족주의적 시를 쓰기도 하였다. 주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라틴어 라틴어()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있는 고대 로마와 그 주변 지역 라티움(Latium)에 정착하여 살던 라티움 사람들이 쓰던 언어이다. 로마가 지중해를 정복하면서 라틴어는 지중해 전역과 유럽 지역의 상당 부분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라틴어는 사어(死語)가 되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 로망스어가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그 외 영어 등 다른 언어들도 라틴어에서 많은 어휘를 차용했다. 17세기까지 라틴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운문과 산문에 쓰는 문학 언어인 고전 라틴어와 일반 대중이 쓴 민중 라틴어(Latina Vulgata)가 있다. 민중 라틴어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서 유럽 많은 지역에서 구어로 남았으며, 9세기에 이르면 로망스어로 분화된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라틴어는 서양 세계의 지식인 사이에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로 남았는데, 로마 가톨릭교회가 라틴어를 채택한 것도 이에 큰 몫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라틴어는 2천년기까지 모국어(mother tongue)으로 존속했는데 이것을 중세 라틴어라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라틴어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이 받아들이면서 그 위상이 잠시 높아졌으나 16세기 이후 중세 라틴어는 점차 쇠퇴한다. 라틴어는 교회 라틴어의 형태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의 조서(papal bull)나 칙령에 쓰인다. 라틴어는 과거 유럽에서 과학, 학술, 법 분야의 언어로 널리 쓰였다. 20세기 초 이래 라틴어의 역할은 줄어들었지만, 로마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초기에 쓰이던 문어인 고전 라틴어를 오늘날에도 서구의 여러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며, 고전 연구에서 그리스어와 함께 다룬다. 역사적으로 라틴 부족이 언제 어디서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오늘날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역사, 고고학 및 문헌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약 2000년을 전후로 이탈리아 반도의 북동쪽, 오늘날 아드리아 해안의 발칸 반도 북부지역에 퍼져 살던 사람들이 라틴 부족의 선조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라틴어는 문법학적으로 볼 때 언어의 계통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인도유럽어족에서 라틴어는 다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를 지칭하는 로망스어족의 생성과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체어이다. 라틴어가 한 부족의 언어로 틀을 잡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약 6-5세기로 여겨지며, 구어에서 문어로 발전된 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비문을 근거로 할 때 기원전 약 3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라틴어가 고대 로마의 건립과 함께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기 전에 낱말이나 문법에서 서로 많은 차이가 있는 두 종류 이상의 언어가 라틴어와 공존하여 쓰인 것으로 보인다. 삼니움 지역의 오스키어와 움브리아 지역의 움브리어는 라틴어와 마찬가지로 지역 언어로서 사용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 로마인의 세력 확장에 따라 점차 사라지거나 라틴어에 동화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여겨진다. 라틴어는 고대와 중세를 통하여 유럽의 대표 언어로 자리잡았다. 유럽의 학술, 외교, 종교에서 기본 언어는 라틴어였다. 따라서 고대-중세 유럽에서 지식인이란 바로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뜻했다. 특히 교회사에서 라틴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전례와 성경에 애용되었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종교개혁 이전 성경은 라틴어로만 번역되지 않았고, 토착어로 옮긴 번역본들도 존재하였으나, 중요한 예외인 잉글랜드에서는 15세기에 롤러드파가 교회 전통에 맞서 자기네 번역본으로 신자들에게 호소하자 놀란 주교들이 그 번역본을 전면 금지했다. 라틴어는 학술 언어로도 정착되어 19세기 말까지도 모든 학술과 학문에서 강의와 기록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그 예로 장 칼뱅은 신학 문서인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저술한 뒤 라틴어로 다시 번역했다. 물론 그리스어도 사용되었으나 고대 언어를 연구할 때나 그리스어로 쓰인 문헌을 번역하는 데만 쓰일 뿐이었다. 이러한 유습은 오래 남아,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의 결정에 따라, 루브리카 양식으로 불리는 라틴어 전례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예외적으로는 1615년 이후 중국의 가톨릭 교회는 중국어 미사를 집전했다. 성공회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거룩하시다(Sanctus)' 등의 라틴어 전례용어들을 사용한다. 현재까지도 생물학에서 생물종을 분류할 때 린네의 분류법에 따라 라틴어로 표기하고 있으며, 그 밖에 학술 명칭들 중에도 라틴어로 표기하는 것들이 많다. 라틴어 금석문전은 기원전 6세기부터 출현하고 있으며, 알파벳의 형성은 그리스 알파벳이 에트루스키어 표기를 거쳐 라틴어 알파벳으로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전 라틴어에서 사용되는 알파벳은 23자(A B C D E F G H I K L M N O P Q R S T V X Y Z)였으며, Y, Z가 도입된 것은 기원전 1세기였고 J가 도입된 것은 중세였다. 발음법은 시대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라틴 알파벳은 오늘날에도 로망스어, 켈트어, 게르만어와 몇몇 슬라브(폴란드어 등) 등 여러 유럽 언어에 쓰이고 있다. 고대 로마에는 구두점이나 장음 표시(macron)를 쓰지 않았다. (다만 장모음과 단모음을 구분하기 위해 양음 악센트 부호 '는 썼다.) 알파벳 "j,u"도 없었고, 필기체는 있었지만 소문자는 없었다. 또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는데, 헷갈리는 낱말 사이에 점을 찍는 경우는 있었다. 따라서 라틴어 문장은 이렇게 쓰게 된다. 이 문장을 현대식으로 쓰자면 장음 표시를 붙이면 가 된다. 로마의 필기체 글은 주로 밀랍판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대개 영국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빈돌란다 요새에서 널리 발견되었다. 흥미롭게도 빈돌란다의 밀랍판에서는 띄어쓰기가 나오는데, 동시대의 기념 비문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유형론상으로 라틴어는 인도-유럽 어족에서 주로 나타나는 굴절어 유형에 속한다. 이와 유사한 형태를 가진 고전어로는 고대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있는데, 특히 작가들이 라틴어의 문법을 정비하면서 고대 그리스어(아틱 방언)의 합리적인 문법요소를 대폭 도입하여 문법적으로 이 두 언어는 유사한 점이 많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의 절대 속격과 이의 대응으로서 라틴어의 절대 탈격의 예가 있다. 라틴어의 명사는 단수, 복수의 2수와 남성, 여성, 중성의 3성이 있으며 슬라브계 언어와 같은 활동체/불활동체의 구별은 없다. 또한 주격, 속격, 여격, 대격, 탈격, 호격으로 6격 변화를 하며 특징적인 어미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곡용의 형태가 존재한다. 라틴어의 형용사는 명사의 성과 격에 따라 명사와 유사하게 규칙적인 곡용을 따라 굴절시키는 문법적 일치의 체계를 갖고 있다. 라틴어의 동사는 1, 2, 3인칭과 단수, 복수의 형식에 따라 6가지, 과거, 현재, 미래의 3개 시점과 각각의 완료, 미완료의 구분에 따라 6가지, 또한 능동태와 수동태의 2개 태가 있어서 이에 따라 2가지로 굴절한다. 또한 직설법(기본형), 접속법, 명령법의 3개 서법이 있으며 모두 굴절의 형식이고 이에 따른 서법 조동사는 없다. 명사의 경우와 유사하게 특징적인 어미의 변화에 대한 활용의 형태가 존재한다. 라틴어에서 동사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다른 문법요소로는 원형동사, 분사, 동명사, 동형사, 목적분사 등이 있다. 먼저 원형동사는 동사적인 명사인데, 시제와, 상, 태에 따라 몇 가지 이형태(異形態)가 존재한다. 분사는 동사적인 형용사로서, 역시 시제, 상, 태에 따라 몇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동명사는 원형동사로부터 유도되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곡용된 것이어서 주격이 없다. 동형사 는 당위(~해야만 하는)나 필연의 뜻이 포함된 동사적인 형용사이다. 목적분사는 목적(~하기 위하여)의 뜻이 포함된 동사적인 명사이며 능동형과 수동형이 있다. 라틴어의 문장은 많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고급스럽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명사, 형용사, 동사로만 표현하기 곤란한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전치사나 부사, 접속사, 간투사 등을 사용한다. 이 네 가지 문법 범주는 기본적으로 불변화사이다. 전치사는 지배받는 명사가 전치사의 성질에 따라 정해진 격을 취하게 하는 격지배라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은 곡용이 없는 언어(영어, 프랑스어 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다. 부사는 본래적인 것 외에 형용사에서 규칙적으로 생성하는 방법이 있다. 라틴어의 어순은 기본적으로 SOV(주어-목적어-동사)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어가 인칭대명사일 경우 동사에 인칭과 수가 표지되므로 탈락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며, 주어와 목적어는 각각 주격과 대격 표지를 받으므로 이 둘이 혼동되지 않는다면 위치를 어디로든 이동시킬 수 있어서 사실상 어순은 매우 자유롭다. 로마 제국 이후 민중 라틴어는 9세기경 여러 방언으로 갈라져 로망스어를 이루게 된다. 수백년간 이들 언어는 오직 구어로만 쓰였지만, 라틴어만은 여전히 문서에도 쓰였다. 예를 들어 1296년에 대체될 때까지 포르투갈에서는 라틴어가 공식 언어였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카탈루냐어, 오크어, 로만슈어, 루마니아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번성하여 더 확대되고 공식화된다. 로망스어 가운데 이탈리아어는 어휘 면에서 가장 보수적인 변화를 보였다. 또 사르데냐어는 음운상 가장 보수적이었다. 고전 라틴어와 로망스어의 몇몇 차이점은 민중 라틴어를 재현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가령 로망스어에는 특정 모음에 고유한 강세가 붙는데, 라틴어는 이 뿐만 아니라 모음의 길이에도 장단의 차이를 두었다. 이탈리아어와 사르도 로구도레세(사르데냐어 방언)에서는 강세와 더불어 자음에서도 장단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어 (언중 대부분의 경우) 장단과 강세에 차이를 따로 두지 않는다. 로망스어와 라틴어의 가장 주요한 차이 중 하나는 루마니아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로망스어에서 명사의 격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라틴어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중세 시대에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교회 언어 사용이나 혹은 노르만 정복 이후 앵글로-노르만 언어를 통해 수많은 라틴어 차용어를 받아들였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영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새로운 낱말을 많이 만들었다. 이런 낱말을 잉크통 용어(Inkhorn terms)라고 한다. 이런 낱말 상당수는 낱말을 지어낸 본인만 쓰다 잊혀졌지만, 어떤 낱말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쓰인다. "imbibe"나 "extrapolate"는 라틴어에서 만들어낸 잉크통 언어이다. 영어에서 다음절(polysyllabic) 낱말 중 많은 것들이 라틴어에서 바로 차용한 것들이며, 상당수가 고대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것들을 다시 받아들인 것이다. 많은 단체에서 모토를 라틴어로 쓴다. [ 참고 : 영어에 라틴어 어휘가 많은 이유 ] 영어는 인도유럽어 중 게르만어군에 속하지만 그 어휘의 60~70%가 라틴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 어휘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이 영어에 유입되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소개해 볼까하는데 편의상 아래와 같이 4개의 시기로 구분하였다. 1. 로마와의 전쟁기(B.C.1C ~ A.D. 4C) 첫 번째 라틴어 유입은 씨저(Julius Caesar)가 지금의 영국(Great Britain 섬)과 프랑스(Gallia)을 정벌하면서 부터이다. 이 전쟁 과정에서 라틴어 어휘들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지역에 거주하던 게르만족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특히, 로마는 지금의 영국에 수백년 동안 군대를 주둔(castra)시키는데 이 역시 라틴어 어휘가 전달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전달된 어휘로는 군대와 관련되는 mile, camp, 식생활과 관련된 wine, cook 등이 있다. 2. 기독교 전파기(6C~7C)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명망있는 선교사들을 영국 땅에 파견한다. 이 때 선교사들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과 종교 서적들을 함께 가지고 들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종교와 관련된 많은 라틴어 어휘들이 영어에 유입된다. 이 때 유입된 라틴어 어원을 가진 어휘들로는 school, minister, monk, pope, apostle 등이 있다. 3. 노르망디 왕조기(11C~14C) 이 시기는 프랑스에 뿌리를 두고 있던 노르망디 가문이 영국을 지배하던 때로 라틴어의 후손인 로망스계 언어를 사용하던 가문이 영국의 지배계급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라틴어 어휘들이 영어에 포함되게 된다.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약 1만여개의 라틴어 어휘가 영어에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국왕을 포함한 지배계급은 로망스어 계열인 노르만어(일종의 프랑스어)를, 일반 백성들은 영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14세기에 즉위한 헨리4세가 영어를 프랑스어보다 잘 사용한 "첫 번째" 왕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4. 산업혁명 이후 시기(17C~현재) 산업혁명을 통한 새로운 기계의 발명과, 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새로운 개념, 이론, 물질 등의 발견은 많은 신조어들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같은 신조어(newly coined words)를 조합해 내는데 있어 기존의 라틴어, 그리스어 어휘들이 접미사, 접두사 또는 어근(roots)의 형태로 광범위 하게 사용되게 된다. 이 때 만들어진 라틴어에서 유래된 단어들로 data, molecule, experiment, formula 등이 있다. 서구 사회에서 중등학교 혹은 대학교의 라틴어 수업은 일차적으로 라틴어 텍스트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라틴어 회화는 거의 다루지 않는데, 현대의 여러 개념(가령 기술과 관련된 말 등)에 부합하는 고대어 표현이 없기도 하거니와 새로운 낱말을 받아들이는 공식적인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어 공부에서는 읽고 쓰는 것이 중시되며 듣고 말하는 것은 거의 무시된다. 그러나 생활 라틴어 운동 같은 시도도 있는데, 생활 라틴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현대어를 가르치는 방식, 즉 대화나 글을 이용한 의사소통으로 라틴어를 가르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는 1989년 9월부터 'Nuntii Latini'라는 이름의 라틴어 뉴스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이렇게 라틴어를 활용하려는 접근법은 고대 작가들이 라틴어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썼을지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던져준다. 라틴 시나 문학의 양식은 그 낱말들의 성음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 라틴어 교육은 바티칸이나 혹은 켄터키 대학과 같은 미국의 몇몇 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고전 연맹이 이 운동을 장려하고 있으며 ‘미니무스(Minimus)’라는 쥐 캐릭터의 모험을 묘사한 라틴어 책도 출판되었다. 미국에서는 국립 청소년 고전 연맹(National Junior Classical League) 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라틴어 공부를 권장하고 있으며, 국립 대학생 고전 연맹(National Senior Classical League)에서도 대학생들이 라틴어 공부를 계속 이어가도록 장려한다. 여러 국제 보조어가 라틴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인테르링구아는 간소화된 현대식 라틴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20세기 초에 인기를 끌었던 무굴절 라틴어(Latino sine Flexione)는 라틴어에서 활용(inflection)을 배제한 언어이다. 현대 문학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위니 더 푸, 아스테릭스, 해리 포터, 어린 왕자 등 라틴어 공부에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라틴어로된 전문 용어는 널리 쓰이는데, 철학, 의학, 생물학, 법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며, 원어나 약어로 쓰는 경우도 많다. 기술 용어처럼 라틴어 용어가 따로 쓰이기도 한다. 오늘날 공식상에서 여전히 라틴어를 쓰는 최대 조직은 로마 가톨릭교회이다. (특히 라틴어 전례에서) 교황 바오로 6세 이래 미사는 보통 각 지역의 제 나라 언어로 집전하지만, 라틴어로 하기도 하며 특히 바티칸에서 그렇다. 라틴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 언어이기도 하다. 성공회에서도 라틴어 전례용어들이 쓰이는데,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등이 그것이다.물론 라틴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속지주의에 따라 성공회 교회가 속한 지역의 언어를 사용한다. 개혁교회 신학자 칼 바르트 목사도 신약성서 로마서를 주석한 로마서(1922년)에서 라틴어 문장인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를 사용했고, 각주에서도 루터와 칼뱅이 라틴어로 쓴 글을 인용했다. 언어적 중립성이 필요한 분야에서, 특히 생물체의 학명처럼 라틴어가 많이 쓰인다. 《세바스티아네》(1976)이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처럼 고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현실성을 살리고자 라틴어로 대사를 만들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단체에서 라틴어 모토를 쓰는데, 미국 해안경비대에서는 "Semper Paratus"를, 미국 해병대에서는 "Semper fidelis"가 모토이다. 미국의 몇몇 주에서도 라틴어 모토가 있는데,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모토는 "Montani Semper Liberi"이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Esse Quam Videri"가 모토이다. 대한민국의 서울대학교의 모토는 "Veritas Lux Mea"이며, 서강대학교의 모토는 "Obedire Veritati"이며, 광운대학교의 모토는 "Veritas et Lux"이다. 드라마/영화 시리즈 스타 트렉에 나오는,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스타플릿 아카데미(Starfleet Academy)의 모토는 "Ex astris, Scientia"(영어로는 From the star, knowledge.ㅡ별로부터의 지식ㅡ)이다. 대학 목록 다음은 각국의 대학 목록이다. 곤충 곤충(昆蟲)은 절지동물문에 속하는 동물로 머리, 가슴, 배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가슴에는 세 쌍의 다리와 두 쌍의 날개가 달려 있다. 현존하는 동물계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물 중에서는 제일 많은 개체수와 종수를 가진다. 분류학적으로는 곤충은 좁은 의미의 곤충강(Insecta)의 의미로 쓰여 왔으나, 최근에는 다리가 6개 달린 절지동물을 뜻하는 육각아문(Hexapoda)을 곤충의 범주 안에 넣어서 생각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최초의 곤충 화석은 톡토기류의 일종으로서 이미 지구상에는 3억5천만 - 4억 년 이전에 곤충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곤충(곤충강)은 날개의 유무에 따라 무시아강과 유시아강으로 나뉘며 또한 유시아강은 날개가 완전히 접히지 않는 고시류와 날개가 완전히 접히는 신시류로 분류한다. 신시류는 또한 알-유충-성충의 단계를 거치는 불완전변태류(또는 외시류)와 알-유충-번데기-성충의 단계를 거치며 성장하는 완전변태류(또는 내시류)로 나눌 수 있다. 육각아문 (Hexapoda)에는 다음과 같은 동물이 존재한다. 곤충은 표피 밑에 있는 한 층의 큐티클에 몸이 싸여 있으며 이들은 주로 키틴(폴리아세틸글루코사민이라고도 알려져 있음)과 스클레로틴(sclerotin:quinone에 의해 경화되어 있는 단백질)으로 구성되어 있다. 큐티클의 바깥쪽은 물의 소실을 막아주는 왁스 층으로 덮여 있으며, 큐티클은 근육이 부착할 수 있는 골격으로 작용한다. 단단한 몸을 가진 곤충에서, 큐티클은 절판(sclerite)이라 부르는 단단한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절판들 사이의 유연한 연결부위는 외큐티클층이 없기 때문에 구부릴 수 있다. 머리와 가슴의 뒷부분은 큐티클이 내부로 자란 단단한 속돌기(apodeme)가 있는데, 이는 근육이 붙을 수 있는 일종의 내골격을 이룬다. 머리에는 여러 감각 기관을 가진 더듬이와 입으로 먹이를 전하는 구기, 그리고 눈이 있다. 대부분의 곤충은 구기가 씹기에 좋도록 적응되어 있는데, 이들은 윗입술(labrum), 아랫입술(labium), 큰 턱(madible), 작은 턱(maxilla)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때로 입의 안쪽에 하인두(hypopharynx)라는 혀 같은 구조가 있다. 곤충의 구기는 먹는 방법에 따라 특이하게 변형되어 있다. 파리목 등에과의 타바누스속(Tabanus) 같이 피를 빠는 원시형의 파리는 큰 턱과 작은 턱이 칼날 모양을 이루어 숙주동물의 피부와 혈관을 자른다. 상인두와 하인두가 침 모양으로 길어 피를 흡수할 수 있는 관을 형성하며, 혀 모양의 아랫입술은 액을 빨아들인다. 파리목의 경우 구기는 2방향으로 진화하였다. 그 밖에도 벼룩처럼 자르고 흡입하는 것, 식물의 즙을 흡입하는 것(노린재목), 혈액을 빨아먹는 모기류의 구기, 꿀벌의 구기, 꿀을 빠는 나비류의 구기 등 많은 형태의 구기가 있다. 가슴은 곤충의 운동을 담당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보통 3마디로 되어 있다. 각 마디는 1개의 등판, 2개의 옆판, 1개의 밑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의 각 마디에는 1쌍의 다리가 있는데 각 다리는 밑마디(coxa) • 도래마디(trochanter) • 넓적다리마디(femur) • 종아리마디(tibia) • 발목마디(tarsus) 등 5마디로 되어 있다. 발목마디는 대개 1~5마디인데 1쌍의 발톱(claw)과 욕반(arolium/pulvilli)으로 되어 있다. 다리는 도약, 유영, 굴착, 포획 그리고 먹이를 잡기에 좋도록 변형되어 있다. 한편 가운데가슴과 뒷가슴에는 각각 1쌍씩의 날개가 있다. 몇몇 곤충은 날개가 현저하게 변형되었는데, 특히 딱정벌레의 경우에는 두껍게 각질화된 앞날개가 막성(膜性) 뒷날개를 보호하는 딱지날개(elytra)로 기능한다. 곤충의 운동은 외골격에 작용하는 근육의 영향을 받는다. 곤충의 비행은 날개를 퍼덕여 이루어지는데, 날개의 이러한 운동은 서로 상반되는 근육의 운동에 의해 나타난다. 날개를 움직이는 대부분의 근육은 날개에 직접 붙어 있지 않고 가슴 벽의 경판에 붙어 있으므로 가슴의 모양이 변함으로써 날개의 움직임이 야기된다. 1초당 날개를 치는 수가 나비에서는 낮으나 모기는 600회를 넘는다. 배는 원칙적으로 11마디이나 보통은 융합되어 이보다 적다. 일반적으로 부속지는 없으며, 성체의 경우 뒷부분에 있는 부속지는 외부생식기로 변형되었다. 이 생식기는 수컷의 경우 음경이나 암컷을 잡을 수 있는 파악기(把握器)로 변형되었으며 암컷의 경우에는 산란관으로 되었다. 귀뚜라미나 바퀴 따위의 곤충은 배의 끝에 미모(尾毛)가 있어 감각기능을 맡고 있다. 곤충이 하는 일 중에 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은 비행이다. 약 3억 년 전 가슴 부분의 큐티클이 늘어나면서 생긴 돌기에서 처음 날개가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 날개의 아래쪽 부분에 마디가 생기면서 비행은 훨씬 중요하게 되었다. 날기 시작하면서 곤충은 6개의 다리로 움직일 때 보다 훨씬 더 넓은 곳을 짧은 시간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날개는 튼튼한 큐티클로만 이루어지는데, 몸의 다른 부분들처럼 큐티클 밑을 받치고 있는 표피조직이 없어, 강도나 탄력성을 유지하면서 무게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표피가 큐티클을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피조직이 없으면 새로운 큐티클을 만들 수 없다. 곤충의 날개가 한 벌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날개는 다른 큐티클처럼 탈피를 할 때 다시 생길 수가 없다. 그래서 곤충의 성충이 탈피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날개가 없는 좀목의 성충들은 계속 탈피를 한다. 곤충은 날개가 탈피할 수 없는 문제를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했다. 불완전변태와 완전변태가 그것이다. 불완전변태를 하는 동안에는 날개가 될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가 마지막 변태 단계에 이르러 완전한 크기에 다다른다. 하지만 완전변태의 경우 유충단계에서는 날개 등 성충에서만 볼 수 있는 조직들이 성충아라는 작은 세포들 속에서 활동을 정지하고 있다가 번데기 속에서 성충아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성충은 번데기 껍질을 벗고 나올 때 그 속에서 생긴 날개를 펼칠 수 있다.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은 유충과 성충의 습성이 전혀 달라 불완전변태를 하는 것들보다 다양한 서식지에서 살 수 있다. 따라서 지구상에서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이 불완전변태를 하는 곤충보다 거의 4배가 많다. 지구의 큰 동물들은 자기 몸을 지탱하고 관성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곤충들은 작은 몸으로 매우 성공한 집단으로 남아있다. 곤충의 몸이 작다는 것은 곤충의 근육(부피) 이(가) 단면의 넓이에 비해 작다는 것으로 이는 곤충의 근육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다. 곤충은 튼튼한 외골격을 가지고 있는데, 외골격은 그들의 몸을 보호해주고, 몸을 마르지 않도록 하고, 날개까지 만들어 준다. 큐티클의 외골격은 절지동물의 몸에 발을 붙여주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곤충의 다리는 속이 빈 원기둥과 같다. 물리학의 법칙에 따르면, 금속제 난간이나 알루미늄 의자 같은 것의 속이 비어져 있는 것과 같이 속이 비어있는 관은 같은 양의 재료로 만든 속이 찬 막대와 비교할 때 구부리거나 내리누르는 힘에 더 잘 견딜 수 있다. 외골격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곤충의 몸이 다른 동물에 비해 작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그것은 외골격이 몸과 함께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곤충이 자라기 위해서는 다자란 외골격을 벗어야 한다. 다른 모든 절지동물도 이렇게 허물을 벗어야만 자랄 수 있다. 이 과정을 탈피라고 하는데, 탈피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곤충이 허물벗기를 할 때 새 큐티클이 단단해지기 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이는 몸집이 작은 곤충에게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몸집이 큰 곤충은 질량에 비례하는 중력이 작용하여 허물을 막 벗어버린 말랑말랑한 몸이 새 큐티클이 단단해지기 전에 파괴될 수 있다. 곤충에게 필요한 양분은 물, 무기 이온, 필수 아미노산 등으로 대개 포유류와 같다. 미리 형성된 지방과 탄수화물의 필요성은 종에 따라 다양하다. 곤충은 비타민B가 필요하나 A와 D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또 많은 곤충은 아스코르브산(비타민C)을 합성할 수 있다. 제한된 먹이만을 먹는 곤충들의 경우 대개 미생물이 공생하고 있는데, 이 미생물은 알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이들은 숙주에 비타민과 다른 필수 영양물을 제공하므로 유익하다. 만약 이 공생 미생물을 제거하면, 비타민이 풍부한 영양분을 제공받지 못하는 한 곤충은 성장하지 못한다. 소화계는 전장(前腸)•중장•후장으로 나뉘는데 전장과 후장은 외배엽의 함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면이 큐티클로 되어 있다. 입 위쪽에는 근육성 인두가 있으며 그 뒤에는 모이주머니 형태로 확장된 식도가 있다. 위는 바퀴 같은 곤충의 경우 근육질의 모래주머니와 전위(前胃)로 되어 중장까지 뻗어 있다. 중장의 끝에는 많은 말피기관(malpighian tubule)이 있어 배설 기능을 맡고 있다. 후장은 일반적으로 좁은 회장(回腸)과 체벽이 두꺼운 직장(直腸)으로 되어 있으며 항문에 연결되어 있다. 소화효소는 침샘뿐만 아니라 중장과 그 기장(岐腸)의 세포에서 분비된다. 침샘에서 분비되는 가장 중요한 효소는 아밀라아제이며, 중장에서는 프로테아제, 라이페이스, 아밀라아제, 인버타아제 등 많은 효소가 분비된다. 소화산물은 중장에서 간단히 흡수된다. 후장은 중장과 말피기관에서 만들어진 노폐물과 음식찌꺼기를 받아 체외로 내보낸다. 질소대사의 최종산물은 요산(尿酸), 소량의 아미노산 그리고 요소(尿素)이다. 직장은 내강(內腔)으로 돌출된 많은 유두돌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물에는 기관(氣管)이 풍부하게 분포하며, 물과 이온을 재흡수하는 기능이 있다. 체액이 대부분의 몸과 부속지의 강(腔)을 차지하는 개방혈관계이다. 유일하게 폐쇄된 부분은 배혈관(背血管)인데, 이것은 몸의 뒤 끝부분에서 머리까지 뻗어 있다. 배혈관은 뒤쪽의 심장과 앞쪽의 대동맥(大動脈)으로 되어 있는데, 심장은 보통 그 끝이 막혀 있고 1쌍의 판막을 가진 구멍인 소공(ostia)을 가지고 있어 혈림프를 심장으로 들여보내거나 내보낸다. 혈림프의 순환과정을 보면 혈액이 소공을 통해 심장으로 들어갔다가 배혈관의 연동수축작용으로 앞으로 흐르게 된다. 연동수축의 파동방향은 때때로 역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혈액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돌아오게 된다. 혈림프는 촉각의 기부, 다리와 날개의 내부 및 기부까지 들어간다. 순환하는 혈림프에는 몸의 각 부분에 양분을 운반하거나, 각 기관에서 만들어진 대사찌꺼기를 말피기관까지 운반해 배설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이 안에는 혈구(hemocytes)라는 유리세포가 들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곤충을 보호하는 식세포(phagocyte)이다. 혈림프의 또 다른 중요 조직으로는 지방체가 있는데, 이것은 생리적으로 필요할 때 산물을 합성해서 방출함으로써 대사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변태하는 동안의 지방 • 글리코겐 • 단백질 저장에 관여하며, 에너지 생성, 생장, 생식에 이용된다. 기관(tracheae)으로 이루어져 가슴과 배의 표면에서 숨구멍(spiracle)이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 외부와 통한다. 숨구멍의 근육성 판들은 대개 닫혀 있다가 산소를 받아들이거나 이산화탄소를 내보낼 때만 열린다. 기관은 외배엽성 기원으로 체벽과 연결되어 있으며, 조직 속으로 들어가며 더욱 갈라져 그 내경은 점점 작아진다. 기관지는 세포 사이로 교묘히 뻗어나가며, 때로는 세포 내로 뚫고 들어가 원형질막까지 깊게 뻗어 있어 가스교환을 위한 상당한 표면적을 제공한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은 이동하지 않는 곤충의 경우 단지 가스의 확산에 의해 일어나며, 활동성이 강한 종에서는 기계적으로 새로운 공기를 집어넣게 된다. 활동적인 곤충들은 기관의 얇은 벽이 크게 팽창된 공기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호흡공기의 용적을 넓혀준다. 체내에 산소가 부족하고 이산화탄소가 축적되면 가스교환을 위해 신경중추가 자극을 받게 된다. 생식계는 생식선(生殖腺)과 생식관, 부속샘[腺]들로 이루어져 있다. 좌우 양측에 있는 1쌍의 정소(精巢)는 여러 개의 정소여포(精巢濾胞)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안에는 생식세포가 들어 있어 감수분열을 통해 정자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젤라틴 물질에 의해 서로 다발로 뭉쳐진 상태로 방출된다. 난소(卵巢)도 1쌍이 있는데, 각각의 난소는 많은 수의 난소소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소관은 증식부와 일련의 난소여포로 구성되어 있다. 증식부는 난모세포 • 영양세포 • 여포세포를 형성할 미분화된 세포의 덩어리이다. 영양세포는 생장의 초기단계에서는 자라나는 난모세포를 둘러싸고 난황형성을 위한 물질을 만들어내며, 마지막 단계에는 난각(卵殼)을 만들어낸다. 교미하는 동안 정자 다발은 웅성교접기에 의해 암컷의 질 내로 직접 들어간다. 암컷의 부속샘에서 분비되는 분비물은 정자를 활성화시켜 정자다발들이 흩어지게 하며, 자유로워진 정자들이 수정낭으로 들어가 알을 수정시킬 준비를 한다. 중추신경계는 일련의 신경절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있는 3가지 주요 신경절(전대뇌•중대뇌•후대뇌)이 보통 합해져서 뇌나 식도상신경절(supraesophageal ganglion)을 구성한다. 뇌는 일반적으로 식도신경환에 의해 앞창자 배 쪽에 있는 신경절과 연결되는데, 이것이 식도하신경절(subesophageal ganglion)로 매우 복잡하며 큰 턱•작은 턱•아랫입술분절을 나타내는 3개의 융합된 신경절로 구성되어 있다. 식도하신경절은 구기•침샘•목 부위에 연결된 근육과 감각 기관에 신경을 보내며, 많은 곤충에서 전체의 운동을 촉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각각의 신경절은 신경세포체와 신경망(neuropile)이라고 하는 신경섬유다발이 모여 된 것이다. 신경세포는 운동뉴런과 연합뉴런의 2가지 형태가 있다. 운동뉴런은 길고 가는 섬유인, 신경절에서 근육까지 뻗어 있는 축색(axon)과 신경망에 연결되어 있는 가지돌기를 갖는다. 연합뉴런은 보통 운동뉴런보다 작으며 신경망을 거쳐 신경계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감각 기관의 세포체를 감각뉴런이라 하는데 몸 맨 바깥쪽의 큐티클 바로 아래 위치한다. 각 세포의 가지돌기는 큐티클성 감각 기관을 향해 뻗어 있다. 이들은 특히 더듬이, 수염, 미모에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다. 각 감각 기관의 감각세포는 감각축색을 내어 중추신경계 쪽으로 보낸다. 홑눈과 겹눈의 2종류가 있다. 고등한 곤충의 성체는 2종류의 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시각세포는 상피(上皮)에서 유래하며 시각신경절(뇌의 한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시각세포는 표면에 한 층으로 있는데, 이 층에 빛이 쪼이면 망막세포라고 하는 곳에서 감각세포를 자극하는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감각축색에 신경충격이 유발된다. 일반적으로 망막세포가 빛을 받아들이는 부위를 감간(rhabdo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막대 모양이다. 홑눈은 큐티클로 된 렌즈 모양의 부위가 망막 위에 놓여 있다. 눈의 구조가 원시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상도 조잡하다. 홑눈은 단지 빛, 어둠, 움직임 등만 받아들일 수 있다. 많은 낱눈(facet)으로 되어 있는 겹눈은 벌집을 닮았다. 낱눈의 수는 종에 따라 다양하다. 예를 들어 원시적인 무시류인 톡토기의 눈이 단지 수십 개의 낱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집파리는 약 4,000개, 잠자리의 고도로 발달한 눈은 2만 8,000개 이상의 낱눈으로 구성되어 있다. 빛을 감지하는 동안, 빛의 각 부분의 밝기가 다르기 때문에, 망막을 구성하는 모든 낱눈은 조잡한 모자이크를 만든다. 카메라 눈이나 인간의 눈과 달리 겹눈에 의한 모자이크상은 직립상이다. 따라서 분해능은 낱눈의 수가 많을수록 증가한다. 각각의 낱눈은 보통 색소세포에 싸여 있어 이웃한 낱눈에 빛이 퍼지지 못한다. 이것을 연립상 눈(apposition eye)이라 한다. 그러나 밤이나 황혼녘에 날아다니는 곤충의 눈은 색소가 위축될 수 있어, 이웃한 낱눈 사이에 받아들인 빛이 어느 정도 겹친다. 이러한 눈을 중복상 눈(superposition eye)이라 한다. 전자의 눈을 가진 경우, 상은 훨씬 더 밝고 분명하다. 중복상 눈이 어둠에 적합하게 된 것은 보다 많은 빛을 개개의 감각에 모을 수 있어 빛에 대한 민감성이 증가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곤충은 자신의 환경을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기구를 갖추고 있는데, 보통 바닥에 닿는 다리 같은 신체 부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나비의 암컷은 어떤 식물에 알을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 잎의 표면을 발로 두드려서 그 식물의 맛을 본다. 어떤 곤충은 온도 수용기를 써서 온도 변화를 감지한다. 빈대는 온도 수용기로 먹이가 되는 온혈 동물의 위치를 파악한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곤충이 빛깔을 구별할 수 있다. 대체로 곤충의 시각색소는 사람의 시각색소보다 다양한 빛깔 자극에 반응할 수 있다. 그래서 곤충들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보다 짧은 파장의 빛 (자외선)을 빛깔처럼 볼수 있다. 벌과 개미는 편광 (특정한 방향으로만 진동하는 빛의 파동) 도 볼 수 있어서 태양이 구름에 가렸을 때에도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곤충은 갖가지 이유로 소리를 낸다. 짝짓기, 위험 알리기, 영역주장, 새끼위치 파악, 어버이의 보살핌을 위해, 그리고 포식자에게 자신이 맛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도 소리를 낸다. 곤충들은 소리를 내기 위한 특수기관을 가지고 있거나, 소리를 내기 위해 몸의 일부분을 땅이나 다른 단단한 곳에 때린다. 귀뚜라미는 제 몸으로만 소리를 내며, 강도래목의 곤충들은 배에 있는 망치 비슷한 기관으로 땅바닥을 때려 소리를 낸다. 다듬이벌레목의 곤충들은 꼬리 밑에 있는 혹과 같은 것으로 얇은 종이를 두드려 진동시키는데 이 일을 초당 5~6번씩 1시간 이상 할 수가 있다. 짝을 찾는 과정에서 시각신호를 이용하는데, 많은 곤충들이 복잡한 의식을 통해 구애를 한다. 반딧불이는 빛 에너지를 이용한 신호로 밤에도 시각 신호를 사용할 수 있다. 화학물질은 먹이는 찾는 데에서부터 몸을 지키고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곤충의 거의 모든 생활 영역을 지배한다. 화학 신호는 어둠 속이나 장애물이 있어도 유연성을 가지고 전달된다. 곤충강의 경우 화학적 의사소통이 시기에 가까운 재주가 되어, 페로몬 이라는 화학물질은 짝짓기 상대의 위치를 알아내거나 종을 알아볼 때 특히 중요하다 곤충들은 기본적인 방어 전략을 신체 설계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방어 수단은 포식자가 근처에 있건 없건 항상 작동하여 적에게 발견될 가능성을 줄여준다. 곤충들 중에는 주변 환경과 비슷한 모양새를 가져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종도 있다. 곤충은 스스로 독을 만들기도 하고, 자기가 먹은 식물의 독을 분리해서 저장하기도 한다. 고약한 맛과 결부되어 있는 빛깔을 경계색이라고 하며 독이 있거나 맛이 없는 곤충들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화려한 빛깔로 자신이 맛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경계색을 띠는 대부분의 곤충이 사람들이 위험을 경고할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빛깔인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검은색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이 있는 벌, 개미, 말벌들은 선명하고 화려한 빛깔을 띠며, 노란색과 검은색의 줄무늬를 가진 것도 있다. 맛있는 곤충이 독성이 있는 다른 곤충과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 꽃등에, 파리, 딱정벌레, 나방 (꽃등에는 말벌과 비슷한 모습을 한다.) 죽은 체 하는 것. 포식자들은 사냥감이 죽은 체 하면 흥미를 잃고 다른 먹이를 찾는다. 딱정벌레, 노린재류 역겨운 냄새나 뜨거운 액체로 하는 공격을 최선의 방어로 사용하기도 함. 노린재, 호랑나비유충, 폭탄먼지벌레 등 유충의 성장에는 튼튼한 표피를 가지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허물을 벗는 탈피 과정이 일어나는데, 유충과 성충 사이에는 형태에 차이가 있다. 성장 과정에서의 형태적 변화를 변태라고 하는데, 곤충에서도 일반적으로 고등한 것일수록 변태를 한다. 곤충의 변태는 정도에 따라 불완전변태와 완전변태로 구분된다. 탈피(허물 벗기)는 모든 절지동물이 견뎌야 하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위험한 과정이다. 탈피는 곤충이 일정한 크기에 이르면 체벽에 잇는 감지기가 뇌에 신호를 보내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물 벗기는 묵은 큐티클을 새로 활성화한 표피에서 분리하고 새로운 큐티클을 만들어 단단하게 만든다. 곤충의 애벌레가 한번 탈피해서 다시 탈피할 때까지의 시기를 영으로 구분한다. 유충이 몇 번 탈피해서 성충이 되는가 하는 것은 종에 따라 다르다. 어떤 파리는 4번의 탈피로 끝내는가 하면, 딱정벌레의 유충은 번데기가 될 때까지 27번이나 탈피를 한다. 불완전변태는 유충이 성충과 비슷한 점이 있고, 초기부터 날개와 외부생식기를 외부에서도 볼 수 있으며, 탈피할 때마다 커져 최후의 탈피에서 성충이 되는데 반하여, 완전변태는 유충이 성충과는 전혀 달라서 날개 등을 외부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휴지기인 번데기 시기에 최후의 탈피인 우화(羽化)를 함으로써 성충이 된다. 또 완전변태 중에서 유충기의 탈피 때마다 형태가 달라지는 기생벌 등이 있는데, 이런 경우를 과변태(過變態)라고 한다. 변태와 탈피는 뇌의 분비세포에서 나온 호르몬이 전흉선(前胸腺) 또는 그 상동기관(相同器官)을 자극하여 에크디손(ecdyson)의 분비를 촉진시킴으로써 일어나는데, 그 때 알라타체(體)에서 나온 유충호르몬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유충의 말기에 알라타체 호르몬의 분비가 정지되면 억제 당했던 성충의 형질이 나타나 번데기가 되고 이어서 우화가 일어난다. 유충이란 좁은 뜻으로는 완전변태를 하는 종류의 유기(幼期)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충과는 형태가 전혀 다르며 구더기, 장구벌레 등이 이 시기이다. 이것은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는데, 번데기로 될 때 고치를 짓거나 땅속에 집을 만드는 것도 있다. 불완전변태를 하는 종류의 유기를 약충(若蟲)이라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곤충들은 온도와 습도, 먹이의 공급이 원활하면 계속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런 서식지는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 휴면기를 보내야 한다. 휴면은 독특한 생리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대체로 성장은 멈추고 지방 비축이 늘어나며 체내 수분이 감소한다.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다량의 글리세린을 비축하는데, 글리세린은 자동차의 부동액과 같은 성질로 어는 것을 막아주어, 겨울에 90%까지 딱딱해졌다가도 이듬해 봄에는 무사히 몸을 녹여 계속 살 수 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곤충들은 성과 생식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곤충은 유성생식을 하지만 단위생식도 한다. 유성생식은 다양한 유전자 조합으로 환경 변화에 유리하지만, 단위생식은 배우자를 구하는 힘든 시기를 겪지 않고 빠르게 번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곤충의 경우에도 한 쌍의 똑같은 성염색체를 가진 것이 암컷이고, 다른 두 개의 성염색체를 가진 개체가 수컷이다. 대벌레의 일종이나 진딧물은 단위생식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암컷은 짝짓기를 하지 않고 계속 암컷을 낳는다. 때로는 몸 속에서 새끼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새끼의 몸 속에서 다시 새끼가 보이기도 한다. 이런 방법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새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온도에 따라 성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몇몇 종의 모기는 봄철의 물웅덩이가 28도로 일정하게 유지되면 모두 암컷으로 태어난다. 곤충의 진화 과정에서 이룩한 커다란 진보 중의 하나는 물을 떠나 육지에서 살게 된 일이다. 이 일은 곤충들에게 엄청난 다양성을 불러온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다양성의 한 양상으로 다시 물속으로 자리를 옮긴 곤충들도 생겼다. 오늘날의 수서곤충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근본적으로 조상 격인 수서 절지동물과는 다르다. 모든 수서 곤충은 육서 곤충에서 유래했으며, 그들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 특징은 이런 기원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수서 곤충의 대다수는 민물에서 살고 있지만 이들의 조상 격인 수서 절지동물들은, 오늘날의 수많은 수서 절지동물(특히 갑각류)처럼 바닷물에서 살고 있었다. 육서 곤충의 신체 구조를 갖고 물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생리학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산소를 얻는 것이다.육서 곤충들은 기문을 통해 공기 중에서 직접 기체 상태의 산소를 받아들이는데 수서곤충의 경우 이런 구조가 거의 변형되지 않았다. 많은 수서곤충들이 거의 (수면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소금쟁이처럼) 수면 위에서만 산다. 따라서 이 곤충들에게는 물에서 산소를 받아들이기 위한 특별한 호흡장치가 필요 없다. 물속에 사는 곤충들은 빨대와 같은 것을 통해 공기 중에서 직접 산소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물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물에 녹아있는 산소를 이용하기 위한 구조가 필요하다. 하루살이, 실잠자리, 강도래의 유충은 기관 아가미로 물속에서 숨을 쉰다. 기관 아가미는 깃털처럼 가늘게 나뉜 구조 때문에 겉넓이가 커져서 보다 효율적으로 물속에 녹아있는 산소를 흡수 할 수 있다. 물에 녹아있는 산소는 확산 과정을 통해 아가미로 들어간다. 확산이란 높은 농도에서 낮은 농도로 더 많은 분자들이 움직이는 현상으로, 물속의 산소량이 곤충 체내의 산소량보다 많아서 체내로 산소 분자들이 이동하는 것이다. (물속에 녹아있는 기체는 34%가 산소이다) 물속 환경에서 살아가는 곤충들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돌아다니는 일이다. 물은 공기에 비해 밀도가 700배가 되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어렵다. 많은 수서 곤충은 수면 위에서 스케이트를 탐으로서 이런 이동성 문제를 해결했다. 소금쟁잇과 곤충들은 끝 부분에 발수성 털이 달려있는 매우 긴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몸무게는 상당한 넓이에 분산되어있어서 수면 막을 깨뜨리지 않는다. 많은 수서 곤충들은 물속에서 이동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없어서, 물 밑바닥에 매달리거나 기어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데, 부력으로 자꾸 몸이 떠오르기 때문에 먹이를 쫓거나 포식자에게서 달아날 때가 아니면 물풀에 매달려 지낸다. 수서곤충은 그 수가 많고 다양하며 물속 생태계의 먹이 그물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를 차지하므로 서식지의 조건 변화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지난 수십 년 동안 물속의 서식지에서 일어난 변화는 대부분, 인류가 환경에 가한 폭력에서 비롯되었다. 살충제, 폐수, 산성비, 오수처리 시설 등으로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그들의 수가 줄면서 물고기 군집의 다양성과 수도 감소하게 된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수서곤충들은 오염이 일어난 뒤 물속 생태계의 회복을 촉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유기화학 오염물질이 퇴적물에 흡수되는 속도를 두 배 이상 높여 더 깊게 묻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결과 오염물질이 먹이사슬을 통해 이동하는 위협 성을 줄여준다. 많은 양의 식품을 비축하는 인류의 습성은 곤충들의 삶에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노다지를 만들어 주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류가 저장하는 모든 종류의 천연 식품과 가공식품에는, 거의 그것만 먹고 사는 곤충들이 딸려있다. 가장 수가 많고 경제적으로 큰 피해는 입히는 곤충은 곡물과 곡물가공품을 먹고 사는 종류일 것이다. 곡식을 먹는 대부분의 저장 식품 해충들은 건조하고 더운 환경 조건에 대한 내성이 매우 높다. 지중해가루명나방은 물 한방 마시지 않고도 수분 함유량 1% 미만인 식품을 먹고 살 수 있다. 인간이 하는 식물성 물질의 가공 과정은 초식 동물이 잘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식물이 축적해 놓은 맛없는 독성 물질들을 없애줄 수도 있다. 기생충은 다른 생물 (대개 다른 종) 에 손해를 끼치면서 영양분을 얻는 동물이다. 어떤 기생충은 다양한 종의 숙주에 기생하지만, 어떤 기생충은 한 종에만 기생한다. 건강 문제에 관한 한, 곤충이 사람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류와 몇몇 영장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해부학적 특징인 엄지손가락이 발달한 까닭이, 친한 친구의 몸에서 기생충을 잡아내는 사회성 행동인 몸단장에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혈관에서 피를 빠는 곤충의 침에는 항응고 성분과 마취제나 진통물질이 들어 있어 숙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혈액을 섭취한다. 포식 기생자의 대다수는 파리목과 벌목에서 발견된다. 포식 기생자는 숙주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비성 독을 사용해 숙주 안에 알을 낳고, 그 알이 깨어나 숙주의 내부 기관을 먹어 치우며 성장한다. 성장을 마치고 숙주의 몸 밖으로 뚫고 나오면 실낱 같은 목숨을 이어가고 있던 숙주는 결국 죽는다. 곤충의 모양과 빛깔, 감촉에서 나타나는 거의 무한한 다양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동양과 서양의 곤충에 대한 접근 방식은 조금 다르다. 동양은 대개 자연과 화합하는 경향이 있고 (장자의 호접몽), 서양은 자연이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세익스피어 카프카, 키프 등 많은 문학작품과 인상주의에서 초현실주의의 미술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곤충은 부정적 또는 긍정적이든 다양한 분위기와 이미지를 설정하는데 유용하므로 문학의 소재로서 흔히 사용된다. 우리의 시와 소설 등에 대한 곤충 문화에 대한 연구는 없었으나, 나비야 청산가자(청구영언), 반딧불이(정약용), 금롱속의 귀뚜라미, 방우선(이규보), 구더기와 개미(이광수), 귀뚜라미(김소월), 나비춤(정을병), 장수하늘소(이외수) 등의 당대의 유명 작가들의 시조, 시 및 소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구비문학에서는 더 많은 관련성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로서 속담을 꼽을 수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또는 '쇠똥벌레 떠밀 듯 한다.' 등과 같이 곤충이 관련된 속담을 551구 정도 찾을 수 있고 여기에 등장한 곤충 무리만도 43 무리가 구분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어느 날 문득 주인공이 커다란 해충으로 변하게 되는데 카프카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벌레가 어떤 곤충이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단지 혐오감을 전할뿐이다. ‘변신’에서의 벌레는 한 인간이 사회의 경제적이고 기능적 존재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거나 그것을 원치 않을 경우, 산업사회 속에서 무용하고 열등하며 부정적인 존재인 ‘해충’의 이미지를 비유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한 개인의 실존형식과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형상화했다.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그레고르가 가족이라는 사회적 울타리 안에서 추방되어야하는 무용한 존재, 해충으로 그려지는 ‘변신’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갖고 행하는 존재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 도구로 전락하는 ‘인간소외’를 주제로 한다. 고대 이집트, 마야 그리고 중국의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에는 곤충의 형태를 차용한 문자들이 많으며, 대부분 나라의 언어에는 곤충이름이나 그의 생산물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한 예로 폭스바겐의 'Beetles(딱정벌레)'란 자동차 제품명과 어린이용 출판사인‘ladybeetles(무당벌레)’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차의 생김새에서 그리고 후자는 어린이들이 무당벌레를 좋아하므로 상징으로서 이용하게 된 것이다. 곤충은 작곡의 소재, 오페라와 뮤지컬의 주제 또는 곤충자체의 소리를 노래처럼 즐기는 등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 작곡의 소재로 이용된 대표적인 것은 림스키코르사코프(Risky-Korsakov)의 ‘The Flight of the Bumblebee’로서 비브라토에서 뒤영벌의 날갯짓을 음악적으로 멋있게 소화하였다. 오페라 중에 Puccini의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국내에서 최근 공연된 연극 ‘모스키토’와 뮤지컬 ‘개똥벌레’역시 곤충에서 모티브를 얻은 무대예술 작품이다. 곤충자체의 소리를 이용하는 것은 주로 동양권에서 베짱이와 귀뚜라미를 예쁜 함 또는 집에 담아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즐겨왔다. 국내의 기록은 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 왕의 비첩들은 금롱(金籠)속에 이들을 담아 베갯머리에 두고 노랫소리를 즐겼으며 점차 서민들도 이 습속을 흉내 내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역사도 중국에 못지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곤충의 독특한 모습과 다양한 모습으로의 변화, 화려한 색감은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그려지고 영감을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다.초기 유럽 기독교 예술에서 곤충 그림은 다양한 상징으로 이용되었는데 그 중 꿀벌은 성 마리아, 벌집은 교회, 사슴벌레는 죄, 파리는 고통 등을 상징하며 특히 나비는 프시케 여신으로 영혼과 사랑의 징표로서 쓰였다. 현대 서양화에서는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고 빈센트 반 고흐의 ‘꽃과 곤충’ 달리(S. Dali)의 'Grasshopper(메뚜기)'와 'Groupings of Ants(개미떼)' 그리고 후터(W. Hutter)의 'Butterflies(나비)' 등은 이 작가들의 표징이 되기도 하였다(Hogue, 1987). 국내에서는 조선시대에 곤충을 그린 화가들로 쇠똥구리 조각품 김제, 김홍도, 신사임당, 심사정, 남계우 등 24명 정도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민화에서는 일년초나 다년생의 작은 풀과 꽃들 그리고 그 주위에 친화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곤충을 그린 초충도(草蟲圖)가 주를 이룬다. 이들 소재는 남성적이라기보다는 아늑하고 소담하여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어 신사임당과 심사정 등 여성작가의 작품도 많이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남계우선생(1811-1890)은 일생을 나비를 애호하고 나비를 많이 그려 '남나비'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가 그린 나비 그림은 사실성이 매우 뛰어나서 대한민국 나비 연구의 태두인 석주명 선생께서는 그림으로부터 37종의 나비를 동정하였고, 이 정보로부터 과거 서울부근의 나비상을 유추하여 볼 수 있을 정도라 하였다. 우리의 조각물로 곤충을 이용한 대형물을 과거 기록에서 아직까지 확인해 볼 수 없었으나, 1998년 평촌신도시의 중앙공원에 똥을 굴리는 '쇠똥구리'(김규민 작)가 만들어졌고, 앞으로 곤충에 대한 인식이 커질수록 증가될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민국의 고대 곤충을 이용한 금속공예품 수준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경주의 금관총 고분에서 발굴된 금관에는 비단벌레의 화려한 딱지날개를 이용하여 장식되어 있었으며 함께 출토된 함 뚜껑에도 비단벌레의 딱지날개가 장식으로 이용되었다(조, 1941). 이 같은 비단벌레의 딱지날개를 이용한 장식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로 법륭사(法隆寺)에서 출토된 비단벌레의 딱지날개가 장식된 나라시대의 옥충(玉蟲)상자를 들 수 있다(小西, 1992). 곤충자체를 이용한 공예품으로는 나비 날개를 이용한 장식품이 많다. 주로 남미산의 화려한 푸른빛의 금속성을 띤 모르포("Morpho") 속의 나비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 가장 유명하고,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열대산 나비들을 이용한 것도 많이 상품화되어 있다. 이 외에도 누에나방의 고치를 이용하여 꽃을 만들거나 장식품을 만든 경우는 잠업이 행해지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북미 인디언과 아프리카 등지의 원주민들은 선사시대로부터 누에나방 이외의 나방 고치를 이용하여 딸랑이, 목걸이, 팔지, 발지, 지갑 등의 장신구를 제작 이용하였다(Peiger, 1997). 곤충을 디자인한 공예품은 크레타문명의 금장식인 'Creatan Hornets(크레타의 말벌)'로 한 쌍의 말벌이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이집트 투탕카멘의 18대 왕조인 아옷페(Ahotpe)여왕의 무덤부장품으로 'Order of the Golden Fly(금제파리장식)'은 고대시대의 대표적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역시 신라시대의 금제 나비형 금관 장식이 5-6세기경에 제작된 바 있다. (경주 천마총 출토)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노리개로 나비와 매미 형태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머리장식인 떨잠의 떨개에는 특히 나비가 많이 사용되어 이를 쓴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려 마치 나비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나게 하였다. 가까운 중국 북부지방인 만주일대에는 여성의 머리장식으로 '동제 비단벌레'가 이용되었다. 문양으로서 곤충으로 고려시대 동경(銅鏡)중에는 나비, 잠자리, 벌 등의 문양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전통자수에서는 나비와 매미, 그리고 가구의 경첩에서는 주로 나비 문양이 이용되었다. 우표는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각 분야의 시대상과 변천사를 집약, 표현한 예술품인 동시에 그 나라의 역사라고 한다. 곤충 관련 우표는 크게 2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곤충을 상징적 소재로 사용한 것이고 둘째는 곤충 자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국내에서 전자의 상징적 소재로 활용된 우표의 예는 1965년에 발행된 '저축증강운동'을 장려하기 위한 우표로서 '개미와 공장'이 도안되어 있다. 즉 협동하여 먹이를 모아대는 부지런한 개미를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후자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곤충시리즈 우표로서 미적 가치 또는 친근성을 나타내는 길앞잡이, 늦털매미, 물방개 등이 도안되어 있다. 또한 크리스마스 씰(seal)로도 30종의 나비와 기타 곤충 등이 도안되어 있다. 일반에 잘 알려진 곤충의 이미지를 목적 또는 상품과 결합시키는 방법으로 광고에서 곤충을 이용한다. 한 예로 사원모집 광고에서 호랑나비가 번데기로부터 우화하여 나는 모습과 '벗을 건 벗자!'라는 표제어를 내고 기존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된 사람을 원하고 있음을 강조하거나 전자수첩 위에 앉아 있는 물잠자리의 모습을 통하여 전자수첩이 상대적으로 매우 얇음을 보여주고, 나비류의 앉는 모습과 '봄바람에 실려 온 기쁜 소식 하나?'라는 표제어로서 자동차의 출시를 기쁜 소식으로 알리고 있는 등 다양하다. 2002년 삼성 센스 Q 노트북 광고에서는 사슴벌레가 노트북 전선을 잘라버림으로써 무선 제품의 광고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시사만화(cartoon)에서도 도시 빌딩 꼭대기에 날렵하게 앉은 잠자리의 모습으로 '도시 속의 가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 머리띠를 동여 맨 개미의 모습과 '수출전선 개미군단이 다시 뛴다.'는 제목으로 개미의 근면과 노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풍자하는 시사만화도 있다. 일반적으로 곤충은 중요한 사건의 전환을 일으키게 하면서 인간 역사에 영향을 주어왔다. 14세기 유럽에서는 벼룩이 옮기는 흑사병으로 25백만 명이란 엄청난 인구가 사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고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황충(蝗蟲)이라 하여 마치 메뚜기류만을 지칭한 것처럼 보이나 이는 풀무치, 멸강충, 멸구 등을 함께 지칭한 것이며 이들에 의한 재난을 충재(蟲災)라고 하여 국가의 3대 재난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 곤충은 인간 역사까지 바꿔 놓는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정복을 떠난다. 그러나 러시아에 비해 3배에 달하는 병력과 뛰어난 전투력, 탁월한 무기를 가지고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했다. 명장 나폴레옹을 패배하게 만든 건 대포가 아닌 크기 1mm에 불과한 '이'였다. 이가 옮긴 발진티푸스는 나폴레옹 부대를 거의 전멸에 몰아넣었다. 프랑스로 살아 돌아온 병사는 60만 명 중 2만 명에 불과했다. 만약 나폴레옹에게 이에 대한 과학적 대처법이 있었다면 세계지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곤충의 인간역사에 대한 관여는 동방 원정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작은 말라리아모기 한 마리가 세계지도의 흐름을 바꿨으니 말이다. 또한 곤충은 민족의 고난으로부터 구해주는 역할이나 인류의 문화화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출애급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사막에서 만나(Manna)를 먹고 허기를 이겼다고 되었는데 이 때의 만나는 위성류라는 식물의 즙액을 빠는 깍지벌레의 분비물이었던 것이다. 누에에서 실크의 생산은 중국에서 5200년 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700년인 주나라 때로 이미 실내 사육했다는 증거를 그 당시의 시조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고, 실크로드(Silk Road)가 생겼을 만큼 중국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Huang, 1987). 18C 코치닐 곤충(Cochineal Insect)이라는 깍지벌레류를 이용한 염료는 세계의 거대 시장을 형성하였다. 꿀이나 밀납의 경제적 가치도 고대로부터 컸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도 백제의 태자 여풍(餘豊)이 직접 벌을 길렀고, 고려시대에는 사봉(寺蜂)이라고 하여 사찰의 중요자원이기도 하였다. 곤충은 어떤 민족 또는 국가에서 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 고대 이집트에게 있어 똥풍뎅이 및 쇠똥구리류(Phaeniini족, Coprini족)는 기원전 2200년경인 신왕조시대로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 신으로 존재하였다. 이 외에도 아즈텍(Xochiquetzal: 나비여신), 그리스(Artemis= mylitta: 꿀벌여신), 중국(TschunWan: 작물해충의 지배곤충) 등 여러 문명 발상지에서 종교의식의 대상이었다(Hogue, 1987). 대한민국은 누에를 천충(天蟲)이라고 불렸고, 태양의 사자로 생각하였다. 마을에 따라서는 풍년제나 동제때 선잠신(先蠶神)에게 제사를 지냈고(李, 1991), 국가적으로는 고려 때부터 중국의 잠신인 서릉씨를 모시는 제단을 만들었다고 한다(李, 1992). 그밖에도 무속의 "창세신화”에서 ‘미륵님이 하늘에서 떨어진 벌레를 축사하여 인간이 되어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 등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무속신화에서 곤충이 신의 활동에 대한 긍정적 또는 악역의 상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민간에서 신앙형태로 믿어지고 있는 속담과 유사한 짧은 어구가 속신어인데(최 1995) 예를 들면 '귀뚜라미가 방안에서 울면 복이 들어온다.' 또는 '비가 오려면 개미가 둑을 쌓는다.' 등이 있다. 이런 속신어들 중에서 곤충(기타 절지동물포함)이 관련된 어구만도 265구를 찾아 볼 수 있고 이들 가운데 어느 정도 무리가 분류될 수 있는 곤충군만도 11목 25개의 곤충무리가 된다. 살아있는 여러 종류의 곤충들이 진귀성이나 교육적인 측면에서 애완동물(pets)로 이용되어 왔고 최근에 국내에서는 이들을 정서곤충(情緖昆蟲)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은 황제가 베푼 연회에서 반딧불이를 대량으로 방사하여 즐거움을 더 했다고 하며(Huang, 1987), 대한민국의 조선시대 남사당의 놀이판에서는 광솔불과 반딧불이의 불빛이 잘 어우러져 신비한 느낌을 자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 귀뚜라미류는 특유의 아름다운 소리를 즐기기 위하여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사육되어 오고 있으면서 최근 들어서는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가 진귀성과 호기심 그리고 자연관찰 교육의 일환으로 더 많이 판매되고 있다(小西, 1992). 대한민국에서도 어린이들이 곤충을 잡아서 또는 잡는 과정을 놀이로 즐겼는데 그 중 '풍뎅이돌리기’, ‘잠자리잡기’, ‘개똥벌레잡기’, ‘방아깨비와 방아짓기’ 등 지역별로 민요와 함께 행하던 것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는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물방개 등을 사육하여 판매하는 등의 곤충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중국에서 곤충의 행동을 모방한 놀이의 한 형태로써 사마귀가 먹이를 잡는 동작을 본떠 만든 당랑권도 있다. 곤충은 어린이들 뿐 아니라 어른 놀이의 대상이었다.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귀뚜라미를 싸움시켜 도박을 즐겼는데 1949년 공산화 이후 드물어지고 문화혁명이후 금지가 되었으나, 최근 다시 시작되고 있으며 북경에는 "귀뚜라미싸움협회"가 생겨났을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Pemberton, 1994). 반면에 서양에서는 벼룩 서커스가 한때 널리 주목을 끌었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보기가 어렵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도 곤충이 장난감이나 디자인의 모델이 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곤충 표본을 닮은 단순한 세트로부터 곤충 만화영화인 '벅스 라이프(Bug's life)'의 주인공 곤충을 캐릭터로 제작한 장난감이 특정 상품의 사은품으로 제공되고 있다. 파리 (곤충) 파리는 파리목(쌍시목)에 속하는 곤충의 일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주로 환봉아목에 속하지만, 이 류에 속하는 곤충들을 모두 하나로 모아 분류학적으로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다. 뒷날개가 퇴화하여 평균곤으로 변화되어 날개가 한 쌍 뿐인 종류도 있다. 동물의 배설물까지 먹이로 삼는 종류가 있어서 사람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병원균을 옮기는 위생 해충이다. 천적으로는 사마귀와 거미, 파리매 등이 있다. 성충은 머리·가슴·배의 세 부분으로 나뉘고 각각 이것에 부속된 기관으로 이루어진다. 몸에는 많은 털과 센털이 있고 여러 가지 빛깔의 비늘가루로 줄무늬와 점무늬를 이룬다. 머리는 원형 또는 타원형이다. 겹눈은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정수리 삼각부에 세 개의 홑눈이 있다. 더듬이는 세 마디이고 셋째마디가 길며 가운데 부위의 더듬이털이 종류에 따라 깃 모양·빗 모양·긴 채찍 모양을 이룬다. 입은 핥고 빨 수 있게 적응되었고 주둥이와 순판부(脣瓣部)로 나뉜다. 가슴은 앞·가운데·뒷가슴으로 구분되고 가운뎃가슴에 한 쌍의 앞날개가 붙어 있다. 날개는 투명한 막질로서 이것을 지탱하는 키틴질의 날개맥이 있다. 다리는 앞·가운데·뒷가슴의 배쪽 양측으로 각각 한 쌍씩 붙어 있다. 각 다리는 넓적다리마디·종아리마디·발목마디가 있으며 발목의 끝마디에 한 쌍의 발톱이 있고 두 발톱 사이에 발바닥이 있어 맛과 냄새를 느낀다. 배는 여러 개의 마디로 이어졌고 각 마디는 키틴질의 외골격인 등판과 배판이 막으로 연결되어 고리 모양으로 앞뒤로 이어져 있다. 다섯째 마디 이후는 생식마디로 변형되었다. 생식기관은 다른 곤충에 비해 크게 발달되어 있어 수컷의 음경은 여러 가지 종류의 지지기관과 부속지가 연합되어 보호되어 있고, 암컷의 몸 속 수정낭에는 정자를 보존할 수 있어 한 번의 교미로 오랫동안 정자를 몸 속에 지니면서 수정란을 낳을 수 있다. 알은 집파리의 경우 50~150개, 검정파리는 400여 개 낳는다. 암컷은 일생 동안 6~9회 알을 낳는데, 번데기에서 부화한 성충은 빠른 것은 24시간 만에 교미하고 3일째부터 산란을 시작한다. 알은 유백색의 길쭉한 바나나 모양을 하고 한가운데에 난황이 모여 있다. 파리의 유충은 머리의 발달이 나쁘고 먹이를 갉아 먹는 데 쓰이는 갈고리입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구더기'로 불린다. 구더기는 식품·쓰레기 더미·죽은 동식물·물 속·흙 속·식물체의 표면인 조직 속·다른 곤충의 몸 속 등 사는 곳이 다양하다. 유충은 몇 번 탈피를 거쳐 번데기로 되는데, 장차 첫째마디가 머리, 2~4째마디가 가슴이 되고 나머지 마디가 배와 생식마디가 된다. 번데기는 두 번 탈피한 제3령충의 허물이 그대로 굳어져 단단한 번데기의 껍질로 변하고 장차 성충이 될 몸체가 들어앉게 된다. 파리는 모기 및 등에 무리와는 달리 번데기에서 성충이 될 때 고리마디로 된 번데기껍질을 가로로 찢고 나온다. 파리의 성충은 여름에는 9주 정도 살지만 봄가을에는 더 오래 산다. 대부분 알·유충·번데기의 상태로 겨울을 나지만 일부 종은 성충의 상태로 겨울잠을 자기도 한다. 파리의 발생원은 주택가의 쓰레기 처리장(집파리), 산과 들의 쓰레기통(검정파리·금파리·쉬파리), 해변의 어물 건조장(금파리), 양돈과 양계장 및 퇴비장(애기집파리·큰집파리·붉은종아리큰집파리), 목장의 축사와 배설물(검정집파리·제주등줄집파리·침파리) 등이다. 이와 같이 파리는 사람에게 백해무익한 곤충으로 알려져 왔으나, 산과 들의 꽃에 모여들어 꽃가루옮김을 도와주는 꽃파리, 숲 속에 사는 대모파리·꽃등에 등은 꽃벌이나 꿀벌처럼 꽃가루받이에 유익한 면을 주기도 하고, 기생파리나 파리매는 해충을 잡아먹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생파리는 애벌레가 숙주인 나방이나 나비애벌레 몸에 알을 낳으면 체액과 번데기의 몸을 먹으며, 파리매는 곤충을 잡아서 체액을 먹는다. 곤충학자 정부희가 쓴 《곤충의 밥상》에 따르면, 여러 곤충들의 체액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초파리는 교배가 쉬워 유전학 실험에 많이 쓰인다. 이중 꽃등에는 애벌레가 진딧물의 천적이다. 실제 장미처럼 진딧물들이 기생하는 식물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꽃등에 애벌레가 진딧물을 입에 물고 잡아먹는다. 지구 온난화와 쓰레기 증가로 파리가 증가하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1825년 10월 25일 ~ 1899년 6월 3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역시 작곡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들이다. 아버지·동생(요제프) 등 가족 모두가 빈·바르츠바 등에서 이름을 얻은 음악 가족이다. 왈츠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1825년 10월 25일 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의 자질을 보였으나, 부친은 요한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844년에는 자기의 악단을 결성하였고, 19세 때 레스토랑에서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악단도 합병하였고, 지휘자·작곡가로서 인기를 높였다. 1851년부터는 악단을 인솔하고 세계 연주 여행을 떠나 큰 호응을 얻었다. 1863년에 가수 헨리에테 트레푸츠와 결혼하였다. 1855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하기 음악회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62년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형제에게 양보하고 작곡에 전념하였다. 1864년에는 오페레타(희가극)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가 빈을 방문하고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오펜바흐의 왈츠 〈석간〉에 대항해서 〈조간〉을 썼다. 1870년경부터 오페레타도 만들기 시작하였고, 〈인디고와 40명의 도적〉(1871년 초연)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이 작품은 오늘날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지휘하였다. 1874년 빈에서 초연됐던 오페레타 〈박쥐〉는 빈 오페레타의 최고의 명작으로 되었다. 1878년 부인이 사망, 그 뒤 다시 결혼하였다.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오페레타는 전부 합쳐서 16곡에 이르나, 〈박쥐〉를 빼고는 〈베네치아의 한밤〉(1883년 초연)과 슈트라우스의 만 60세 탄생을 축하하여 1885년에 초연된 〈집시 남작〉이 지금도 애호되고 있다. 또한 〈빈 기질〉이라고 제목 붙여진 오페레타는 슈트라우스의 유명한 음악을 이어 모아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슈트라우스 자신이 작품을 보고 승인하여 주었다. '왈츠왕'으로서의 슈트라우스는 500곡이 넘는 왈츠, 폴카, 그 밖의 곡을 남기고 있다. 왈츠 〈남국의 장미〉, 〈황제 원무곡〉, 폴카 〈피치카토 폴카〉 등도 유명하다. 작품314(1867). 1866년 오스트리아는 '보오전쟁'에 패하고, 이로 인해 빈 시민은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당시 궁정무도 악장직을 맡고 있었던 슈트라우스는, 시민의 마음에 밝은 빛을 되찾아줄 만한 합창곡을 '빈남성합창협회'로부터 의뢰받았다. 거기서 머리에 떠오른 것이 빈을 관류하고 있는 도나우를 노래한 시인 카를 베크의 시였다. 이를 시인 게르네르트로부터 합창용으로 고쳐받음으로써 이 유명한 왈츠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작품 325(1868).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다음해의 작품으로서, 대표적인 빈의 왈츠이며, 또한 뛰어난 묘사음악이기도 하다. 새의 지저귐을 흉내낸 플루트의 카덴차나 농민의 춤 '렌틀러'의 묵직한 리듬, 민속악기 치타의 솔로 등의 요소를 첨가하여, 빈 교외 숲의 정경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완만한 왈츠의 템포로 시작되는 다소 긴 서주 뒤에 5개의 왈츠가 따르고, 이윽고 후주에서는 빈의 아름답고 즐거운 숲을 회상하는 것처럼, 서주와 같은 치타가 독주하는 렌틀러가 다시 나타나고 급속히 끝맺음으로 들어간다. 오페레타의 대표작이다. 그의 특기인 왈츠나 폴카로 이루어져 있으며, 줄거리의 흥미로움과 함께 음악의 즐거움을 만끽케 해주는 작품이다. 대본은 하프너와 주네에 의한 3막짜리로서, 밝고 화려한 오페레타이다. 유명한 서곡으로 시작되고, 즐거운 명곡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원숙한 수법이 충분히 표시된 작품으로서 1874년 빈에서 초연되었다. 마포고등학교 마포고등학교(麻浦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명덕고등학교 (서울) 명덕고등학교(明德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명덕여자고등학교 명덕여자고등학교(明德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명덕외국어고등학교 명덕외국어고등학교(明德外國語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는 사립 외국어고등학교이다.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東國大學校 師範大學 附屬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명지고등학교 명지고등학교(明知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문영여자고등학교 서울문영여자고등학교(서울文英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문일고등학교 문일고등학교(文一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미림여자고등학교 미림여자고등학교(美林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美林女子情報科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배명고등학교 배명고등학교(培明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배문고등학교 배문고등학교(培文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배재고등학교 배재고등학교(培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에 있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축구부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다. 축구부는 1902년에 창단하여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초창기 한국 축구 발전에 공헌하였다.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培花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숙소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 백암고등학교 (서울) 백암고등학교(白岩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보성고등학교 (서울)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아이스하키부와 유도부를 운영하고 있다. 과거에 축구부도 운영하였으며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1940년 에 참가하여 우승을 하는 등초창기 한국 축구 발전에 공헌하였다. 해방 후 까지 존속하다가 해체되었다. 보성여자고등학교 보성여자고등학교(保聖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보인고등학교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삼성고등학교 삼성고등학교(三聖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상일미디어고등학교 상일미디어고등학교(上一미디어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상명고등학교 상명고등학교(祥明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미래산업과학고등학교 미래산업과학고등학교(微來産業科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상일여자고등학교 (서울) 상일여자고등학교(上一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라벌고등학교 서라벌고등학교(徐羅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문여자고등학교 서문여자고등학교(瑞文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西서울生活科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관광고등학교 서울관광고등학교(서울觀光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한글 글꼴 한글 글꼴은 한글을 표기하는 글꼴을 말한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한글 글꼴은 목판 인쇄에 쓰이던 고어체에서 서서히 실용적인 모양으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약 400여 년간에 걸친 한글 글꼴의 변화를 오늘날 남은 문헌에서 살펴보면 그렇게 두드러진 변화가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양반층에 제한되어 있었고 붓으로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주로 쓰인 한글 글꼴은 서예에서 일컫는 몇몇 서체에 불과하였다. 서체는 글씨의 모양에 따른 여러 가지 글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한자에 행서체니 초서체니 하는 글자꼴을 구분하여 말하듯이 한글에도 여러 가지 글씨 꼴이 있다. 훈민정음 반포와 더불어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 등에 처음으로 쓰인 글씨체를 반포체(頒布體)라 오늘날 서예계에서는 일컫고 있으며 때로는 고어체(古語體), 정음체(正音體), 판본체(板本體), 판각체(板刻體)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기의 서체는 판에 새긴 돋음체(고딕체)와 비슷한 모양이었으나 중기에 들어서는 부드러운 느낌이 들도록 끝 부분을 둥글게 표현하였다. 묵직한 느낌과 함께, 반듯한 느낌이 들고, 기하학적이다. 이 글씨 꼴은 일상생활에 크게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비문 등에 쓰이기도 하였다. 궁체는 반포체가 가진 단점인 "딱딱한 모양"을 벗어던지기 위해 고안된 한글 붓글씨체의 대표적인 글꼴이다. 궁체(宮體)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궁중에서 쓰이고 발전한 서체이며 그 특징은 무엇보다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모양에 있다. 반흘림, 흘림, 정자의 3가지 종류가 있다. 조선 초기와 조선 후기에 한글이 창제된 이후, 석보상절체, 동국정운체, 언해체 등 여러 가지 한글 글씨체 등이 등장했으나, 한글이 처음으로 서양식 활자체로 쓰이게 된 것은 1880년대 이후에 최지혁의 글씨를 표본으로 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한 성경을 출판된 것이 처음이다. 이후 독립신문처럼 순 한글판 신문이 많이 나오게 되면서 한성체와 독본체, 말의 소리 활자체가 등장했고 1920년대에는 고딕체와 비슷한 서체도 등장했다. 1930년대에는 이원모체와 박경서체 등 여러 가지 활자체들이 많이 생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쓰이게 되었으며 8·15 해방 후에는 장식 서체들이 만들어져 앞에 나온 서체와 함께 많이 쓰이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동아출판사체, 국정교과서체 등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 후 사진 식자기(寫眞 植字機)가 유입하고 개발하게 되면서 디나루체, 헤드라인체 등 제목용 글꼴이 개발하게 되었다. 사신식자기로 이용하여 만들어진 글꼴종류는 지금보다 많지 않았지만 당시로는 매우 다양한 서체들이 많았다. 명조체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딕체, 그래픽체. 해서체, 공작체 등 8종이 있었으며 명조체와 고딕체는 견종, 태종, 중종, 세종별로 굵기가 각각 다른 종으로 나누었다. 고딕체와 명조체 족은 본문과 제목글에 많이 사용했다. 디나루체와 그래픽체는 명조체와 고딕체와는 다르게, 많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큰 제목이나 부제목글에 사용하였으며, 인기도 많았다. 그 밖에 궁서체, 해서체, 공작체 등이 있었다. 한/글은 다음 글꼴을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음 글꼴을 지원하고 있다. macOS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꼴을 지원하고 있다. 오픈 소스 운영 체제에서부터 사용되어온 백묵글꼴,은글꼴 모음 그리고 이어서 구글의 본고딕과본명조, 네이버의 나눔글꼴등이 MS 윈도우, 맥 OS, 리눅스등에서 폭넓고 유용하게 이용되고있다. 이외에 서체전문회사에서 개발한 윤서체(윤디자인), 산돌체(산돌커뮤니케이션), 한양서체(한양시스템즈)등이 있다. 이들 서체들은 가족 서체(계열 서체:Family Fonts)라고 하여 글꼴의 종류는 같으나 진한 정도를 다르게 하여 구분하는 서체들을 말하는데, 윤서체는 120,125 등의 숫자, 산돌서체는 L(Light), M(Middle), B(Bold)로 구분한다. 또한 컴퓨터용 한글 글꼴은 세, 중, 견, 태를 이름 앞에 붙여서 구분하는데, 세<중<견<태 순서로 진해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컴퓨터 글꼴은 조선글 콤퓨터서체프로그람 《삼천리》와 평양정보쎈터 조선글 콤퓨터서체프로그람《글서체 50종》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지난 2001년 김정일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높이 평가한 서체들을 골라 《삼천리》를 개발하였으며, 그 후 평양정보쎈터에서《글서체 50종》을 개발하였다. 이외에도 북조선의 컴퓨터 글꼴은 500여 종이 된다. 전자 출판에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청봉체와 광명체, 그리고 천리마체, 조선의 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동신문》의 옥류체가 그 중 일부이다. 이 서체들은 한글,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4개 언어에 서로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윈도 98, 2000, XP와 같은 운영 체제, 워드 프로세서 《창덕》과 《내 나라》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조선콤퓨터중심과 평양정보기술국에서는 자체로 개발한 웹 사이트를 통하여 다양한 글꼴들을 판매하고 있다. 아래에 나와 있는 서체들은 조선콤퓨터쎈터에서 개발된 것과 평양정보기술국에서 개발된 것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마련한 것이다. 1945년 1945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이 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으므로, 세계사의 엄청난 전환점이 된 해이다. 따라서, 1945년을 현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 1944년 1944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43년 1943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9년 1939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8년 1938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7년 1937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카롤 시마노프스키 카롤 마체이 시마노프스키(, 1882년 10월 6일 ~ 1937년 3월 29일)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시마노프스키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방인 티모쇼프카(Tymoszówka)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고 1892년에 구스타프 네우하우스 엘리자벳그라드 음악원, 1901년부터는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웠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학장을 지냈다. 폴란드에서 음악 활동의 기회가 크지 않기 때문에 유럽, 북아프리카, 미국 등을 여행했다. 시마노프스키에게 여행은 음악적인 영감을 많이 받게 해준 것은 물론이고 《에페보스》("Efebos")라는 제목의 소설도 쓰게 만들었다. 소설은 현재 소실됐다. 그는 스위스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시마노프스키의 음악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막스 레거·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음악과 클로드 드뷔시·모리스 라벨의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폴란드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과 폴란드 민요에도 영향을 받아 쇼팽처럼 피아노를 위한 폴란드 전통 춤곡인 마주르카를 여러 곡 작곡했다. 시마노프스키의 가장 많이 알려진 곡으로는 네 개의 교향곡(합창단과 독주 성악가들이 협연하는 제 3번 《밤의 노래》와 피아노 독주가 협연하는 제4번 《신포니아 콘체르탄테》가 있다),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 한 세 곡의 《신화》, 발레 《하르나시》가 있다. 그는 많은 피아노곡을 남겼는데, 《연습곡》 작품번호 4번, 《Métopes》, 그리고 많은 마주르카를 남겼다. 제임스 조이스의 시에 붙인 것을 포함한 많은 가곡과 《Stabat Mater》, 오페라 Hagith와 King Roger도 썼다. 1936년 1936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35년 1935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4년 1934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31년 1931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29년 1929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28년 1928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27년 1927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24년 1924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922년 1922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5월 11일 이왕가 황족 이진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Strauß, Strauss, Straus)는 독일의 성씨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가문: 독일의 작곡가 슈트라우스 부자: 루이스 루이스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간 간(肝, )은 동물의 주요 생체 기관 중 하나로, 대표적으로 해독 작용을 하며, 단백질을 합성하고, 양분을 저장하며, 쓸개즙, 요소 등을 생성한다. 간은 생존에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오랜 기간 간의 손실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단기간에는 인공투석을 사용할 수 있다. 간은 모든 내장 기관 중 가장 크다. 간은 물질대사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며, 글리코겐의 저장, 적혈구의 분해, 혈청 단백질의 합성, 호르몬 생산, 해독작용 등 기타 여러 역할을 한다. 간은 배에서 복부-골반 부분의 횡격막 아래에 놓여 있다. 간은 지질의 유화로 소화를 돕는 알칼리성의 혼합물인 담즙을 생산한다. 간의 고도로 전문화된 조직들은 작고 복잡한 분자들의 합성과 분해와 같은 매우 다양한 대량의 생화학적 작용을 조절하며, 이들은 평상시의 주요 기능을 위해 필요하다. 간은 소화관의 일부가 잘록해져서 발생한 일종의 선(腺)이다. 몸의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위치하며, 윗면은 횡격막에 아랫면은 위·십이지장·횡행 결장 등에 접해 있다. 크기는 성인의 경우 무게가 약 1.2 kg, 좌우 지름이 약 25 cm, 앞뒤 지름이 약 14 cm, 높이가 약 7cm이다. 간 내부의 입체적 구조는 매우 복잡하다. 보통 간 소엽(小葉)이라는 단위 구조가 집합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간소엽은 중앙에 있는 하나의 중심 정맥과 여기에 모세혈관을 내보내는 세 개의 소엽간 정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엽간 정맥은 문맥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와서 생긴 마지막 가지이다. 중심 정맥은 인접해 있는 것이 모여 마지막으로 여러 개의 간정맥이 되고, 하대(下大) 정맥에 들어간다. 소엽간 정맥에서 나온 모세혈관 주위는 늘어선 간세포로 둘러싸여 있으며, 혈액 속의 물질은 여기에서 간세포에 흡수된다. 간세포에서 처리된 물질은 여기에서 혈액 속에 분비된다. 쓸개즙은 간세포 사이의 작은 틈(모세 담관)으로 분비되고, 소엽간 담관에 모여 총간관이 되어 간에서 나온다. 간은 소화를 직접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지만, 쓸개즙을 생산하여 지방의 소화, 흡수를 돕는 작용을 한다. 또 물질의 저장, 요소·요산 등의 노폐물 생성, 음식물과 함께 흡수된 유독 물질의 해독 작용 등, 여러 가지 물질의 합성과 분해가 일어나므로, 몸 속의 화학 공장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곳이다. 이상과 같이 동물의 소화 기관은 그 발달 단계나 식성에 따라 구조와 작용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소화 기관에서는 소화기의 운동에 의한 기계적 소화, 소화액에 의한 화학적 소화 및 소화된 양분의 흡수 작용이 이루어진다. 인체의 간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소화관에서 흡수된 것은 모두 간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각종 처리를 받는다. 쓸개즙의 생산과 분비를 담당한다. 쓸개즙은 지방 등의 소화에 도움을 주는 소화액이다. 간에 암이 생기는 것을 간암이라고 부른다. 간암에 걸린 사람은 건강한 사람의 간을 이식해야 한다. 간에 돌이 생성되는 것을 담석이라고부른다 경주국립공원 경주국립공원(慶州國立公園)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동,서,남,북 방향 및 동해 바다에 걸쳐서 분포하고있는 국립공원으로 1968년 12월 31일이후에 지정되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한려해상 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은 전라남도 여수시와 경상남도 거제시, 남해군, 사천시, 통영시, 하동군에 걸쳐있는 남해상에 위치한 해상 국립공원이다. 한산도의 한(閑)과 여수시의 여(麗)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태안해안국립공원 태안해안 국립공원(泰安海岸 國立公園)은 충청남도 태안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가로림만에서 안면도에 이르는 해안국립공원이다. 1978년 10월 20일 서산해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90년 3월 22일 태안해안 국립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해안형 국립공원으로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침식 지형으로 해안 사구가 발달하여, 학암포·백리포·만리포·연포·몽산포·삼봉·꽃지 등의 해수욕장이 발달하여 있다.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는 사구 지형의 독특한 풍경을 잘 보여준다. 태안반도는 서해안에 있는 옹진반도, 변산반도 등의 다른 반도와 달리 주변 해안에 비해 크게 돌출되어 있는 지형이다. 이 때문에 파도의 힘을 다른 지역보다 먼저 강하게 받기 때문에 해식 작용이 일어난다. 그 결과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특징 때문에 갯벌이 발달하면서도 해식 작용으로 인한 백사장 역시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해식에 의한 복잡한 만곡으로 백사장이 발달하여 학암포·백리포·만리포·연포·몽산포·삼봉·꽃지 등의 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또 17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앞바다에 흩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난도는 괭이갈매기 번식지로서 알려져 있다. 태안반도 전체의 해안선은 1,352 km에 달한다. 이 가운데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관리되는 해안선의 길이는 약 530 km 이다. 해식작용으로 인해 생긴 수 많은 만들에는 조석 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발달하였다. 깊게 파여진 아산만, 천수만, 가로림만 등에 큰 갯벌이 있었고, 삽교호 역시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갯벌이었다. 1970년대 이후 대부분의 큰 만에 방조제가 들어섰고 갯벌은 방조제 밖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큰 갯벌로는 총 80 km의 가로림 갯벌이 있다. 태안반도는 낮은 구릉들이 늘어선 지역으로 대부분의 산지가 해발 300 m 이하이다. 해안 침식으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어 복잡한 만곡이 발달하여 있다. 주변에 큰 강은 없고 지역적으로 소하천이 수계를 이룬다. 태안반도의 수계는 국가하천은 없고 지방하천이 7개, 기타 소하천이 125개로 모두 132개이다. 태안반도 앞에는 약 130여 개의 섬이 있고, 이 가운데 국립공원 안에 있는 것은 76 개이다. 대부분 무인도이며 사람이 사는 섬은 장고도, 고대도, 외도, 가의도 네 곳이다. 무인도 중 화창도는 대한민국 환경부가 지정하여 관리하는 특정도서이다. 태안해안국립공원 지역의 지질은 선캄브리아 시대의 고기(古機) 변성 퇴적암류와 이들을 관입한 중생대의 화성암류가 주를 이루고 있고, 해안지대에는 모래사장과 해안 사구가 발달하여 있다. 변성 퇴적암은 크게 보아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북쪽에 위치한 서산층군과 태안군 동부지역의 태안층군으로 나뉠 수 있다. 서산층군에 현입된 화강편마암의 절대연령은 약 24억년 정도로 측정되어 시생누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태안층군은 서산층군을 부정합으로 덮고 있어 원생누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쥐라기 시대의 것으로 측정되는 화강암류와 섬장암류가 관입되어 있고, 그 위로 시대를 구분하기 어려운 부정합층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제일 위에 신생대 제4기의 충적층이 자리하고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 내의 지질 구조는 소규모의 단층과 절리, 습곡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를 종합하면 선캄브리아 시대에 형성된 퇴적층이 중생대에 지각의 판 운동의 영향을 받아 화산 활동을 겪었고, 그 뒤로 계속되는 판 운동의 압력으로 변성되었으며, 그 위로 신생대 충적층이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는 전반적으로 중생대 시기에 격렬한 지구조운동으로 지각이 교란되었다. 한반도의 지각은 여전히 안정적이지 않아 활성 단층이 존재한다. 최근 태안해안국립공원 지역에 영향을 준 지진으로는 조선 중종 13년인 1518년 해미에서 성축이 무너질 정도의 지진이 있었고 1978년 10월에는 진도 5.0의 홍성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태안반도는 대한민국 중부 서해안에 위치하여 여름에는 고온 다습하고 겨울에는 한랭 건조하다. 겨울에는 북서풍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의 동해안보다 춥지만, 해양성 기후도 보여 이웃한 내륙지방보다는 춥지 않다. 여름에는 열대지방을 방불케할 정도로 덥다. 태안반도의 기후는 인접한 관측소인 서산측후소의 자료를 기준으로 연평균 기온 11.8℃, 연평균 강수량 1232.1mm로 한반도 냉온대 지역이다. 6월부터 9월에 월평균 강수량이 100mm이상이며, 1월, 2월의 평균기온은 영하이다. 태안반도는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어 위도차가 크다. 이에 따라 식생역시 온대 남부와 온대 중부의 식생이 점차 변하는 점이지대를 이룬다. 단풍나무, 서나무, 대나무, 차나무, 동백나무, 사철나무 등 낙엽활엽수와 상록활엽수가 섞인 숲은 다양한 식물군을 보인다.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태안해안국립공원 지역은 로널드 굿의 식물구계 구분으로는 일화식물구계 가운데 한국구의 중부아구와 남부아구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996년 및 2005년에 태안해안국립공원 전역에 대한 식생조사를 하여 주요 식물 군락으로 곰솔 군락, 소나무 군락, 굴참나무 군락, 소사나무 군락, 굴피나무 군락, 그리고 이들이 섞인 횬효림 등의 나무 군락을 확인하였고, 사구식생으로 통보리사초군락, 좀보리사초군락, 갯메꽃군락, 갯방풍군락, 갯그령군락, 갯잔디군락, 해당화군락, 순비기나무군락 등을 보고하였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식생은 해안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식물군락이나 남방계성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의 해양은 대부분 얕은 간조대와 조하대로 이루어져 있다. 겨울철 표층 온도는 4.38~4.71℃로 평균 4.49℃이고, 저층의 경우 4.29~4.69℃로 평균 4.46℃이다. 한편, 여름철의 경우 표층은 16.31~22.62℃으로 평균 19.79℃, 저층은 15.48~20.67℃으로 평균 18.02℃이다. 천수만과 금강 수계에서 흘러드는 민물이 많아 염도는 31-32 psu로 다른 지역보다 낮아 덜 짠편이다. 전반적인 수질은 봄철이 가장 좋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I 등급을 유지하고 여름철에는 거의 모든 지역이 II 등급으로 하락하였다가 가을이 되면서 차츰 회복한다. 해양 수질은 I 에서 V 까지 등급을 분류하며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수질은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여름철 수질 악화는 민물에서 흘러드는 영양염때문에 플랑크톤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이 주된 원인이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은 복잡한 해안선과 큰 조수 간만의 차로 간석지와 조수웅덩이가 발달하여 있다. 이는 망둑어류를 비롯한 많은 소형 저서성 어류가 서식하기 좋은 조건이다. 2014년 조사 당시 확인된 어류는 모두 7 목 15 과 31 종으로 농어목이 5과 16종으로 전체 종수의 51.61%를 차지하였고, 이 가운데 망둑어과가 9종으로 전체종의 29.03%를 차지하여 조수웅덩이의 주요 서식 어류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 많은 종류는 쏨뱅이목으로 4과 7종을 나타내 채집 어류의 22.58%를 차지하였다. 2007년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로 인해 연안 어류에 피해가 있었는데 특히 망둑어과에서 두드러졌다. 2005년의 어류조사 당시 학암포와 삼봉에서는 두줄망둑이 우점하여 서식하였고, 인근 조사지역에서도 망둑어과 어류가 우점하여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사고 직후인 2008년 망둑어과 어류의 상대풍부도는 점차 감소하여 2009년에 최저를 기록하였다. 태안군 안면읍 방포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9.7km 떨어져 있는 무인도인 내파수도 동쪽 해안에 발달한 자갈 해빈은 약 300 m 길이의 독특한 자연제방을 이루고 있다. 2009년 12월 11일 천연기념물 제511호로 지정되었다. 태안군 난도는 괭이갈매기 번식지로 유명하다. 섬의 가장자리가 수직암벽으로 되어 있어 천적의 침입이 어렵기 때문에 수 많은 괭이갈매기들이 둥지를 튼다. 신두리 해안사구의 면적은 약 2,640,000m의 방대한 규모로 서해안의 다른 지역보다 사구가 발달돼 있으며 한반도 해안사구의 거의 모든 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태안해안국립공원 인근의 문화 유산으로는 옥파 이종일 생가, 태안마애삼존불, 태안 흥주사 삼층석탑, 백화산성, 안흥성, 몽산리 석가여래좌상, 태안 남문리 오층석탑 등이 있다. 1978년 10월 20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안해안국립공원은 지정 이후 공원 구역이 몇차례 변경되어 현재 면적은 377.019km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립공원 전체 면적의 약 5.7%에 해당한다. 2007년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 호'(중국어: 河北精神號, Hebei Spirit)와 삼성물산 소속의 '삼성 1호'가 충돌하면서 유조선 탱크에 있던 총 12,547킬로리터78,918 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으로 유출된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가 있었다. 이 일로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상당 지역이 오염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다도해 해상 국립 공원(多島海海上國立公園)은 전라남도 신안군 홍도에서 여수시에 이르는 황해와 남해 해상에 위치한 해상 국립공원으로 1981년 12월 23일에 지정되었다. 변산반도 변산반도(邊山半島)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일대에 있는 반도이다. 내륙에 509 m 높이의 변산(邊山)이 있다. 변산반도 일대는 1988년 6월 11일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뮌헨 뮌헨(, , , 바이에른어: Minga, )은 독일 바이에른주의 최대 도시이자 주도시이다. 이 도시는 알프스 북부의 이자르 강가에 위치한다. 뮌헨은 독일 내에서 베를린과 함부르크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약 142만명이 시 경계선 안에 상주하고 있다. 1972년, 뮌헨은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도시의 슬로건은 "뮌헨은 당신을 좋아합니다."(München mag Dich)이다. 2006년 이전에 사용하던 모토는 "마음의 세계 도시"(Weltstadt mit Herz)이다. 뮌헨이라는 도시명의 유래는 옛 고산 지대 독일어로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하였다. 이 도시를 건립한 자들은 베네딕트 칙령 당시의 수도승들이다. 그에 따라,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승이 새겨져 있다. 뮌헨의 시 고유색은 신성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흑색과 금색으로, 루트비히 4세 시절부터 채택하고 있었다. 현재 뮌헨은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최고의 이민 희망 지역으로 손꼽혀오곤 하였다. 2011년, 머서의 삶의 질 조사에서 뮌헨은 4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2thinknow가 162개의 항목을 기준으로 실시한 경제 및 사회 혁신 지수에서, 2010년에 조사된 289개의 도시 중 15위를 기록하였고, 독일 국내에서는 5위에 랭크되었다. 2010년, 모노클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뮌헨을 선정하였다. 역사적 기록으로 미루어 문서에서 언급된 가장 이른 시기인 1158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문서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서명을 받았다. 1180년 작센과 바이에른 대공인 벨프 가가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지배할 무렵, 이자르 강에 베네딕트 수도원 인근으로 다리를 건설하였다. 1175년, 뮌헨은 도시로 승격되어 성곽이 건설되었다.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이 도시에 들어섰고, 오토 1세가 바이에른과 뮌헨의 대공이 프라이징 대관 자리도 차지하였다. (비텔즈바흐와 그의 후예는 바이에른을 이후 1918년까지 지배하였다.) 1240년, 뮌헨의 지배권은 1255년까지 오토 2세가 가져갔고, 바이에른 영지가 둘로 나뉘자, 뮌헨은 오버바이에른의 중심이 되었다. 1314년, 루트비히 4세가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1328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뮌헨에 소금 독점권을 부여하였고, 추가적인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15세기 말, 뮌헨은 구시가지에 대규모 고딕 건축물이 조성되었고, 뮌헨의 최대 고딕 성당이자, 현재의 프라우엔키어헤가 1468년을 기점으로 20년에 걸쳐져 건설되었다. 1506년 바이에른 왕국이 통일된 이후, 뮌헨은 그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예술과 정치적인 면에서 뮌헨은 법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6세기, 뮌헨은 독일 르네상스의 핵심 도시였었다. 빌헬름 5세는 예수회의 위탁을 받아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미하엘즈키어헤를 건설하였고, 흑맥주로 유명한 호프브로이하우스를 1589년에 건설하였다. 1609년에 뮌헨에 가톨릭 제후연맹이 들어섰다. 1623년, 30년 전쟁에서 뮌헨은 선거후인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가 된 뒤의 거처였으나, 1632년에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곳을 점령하였다. 1634년과 1635년 사이, 림프절 페스트가 유행하였을 때, 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다. 바이에른은 이후 바로크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나, 1704년에서 1742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하에 고통받아야 했다. 1806년, 바이에른 신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도시 내에 의회, 뮌헨과 프라이징의 대주교구가 위치하였다. 20년 뒤,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가 뮌헨으로 이전하였다. 다수의 뮌헨 최고 건물들이 바이에른 신왕국의 처음 세 왕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후, 루이폴트 왕자 시대에 이루어,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 뮌헨은 발전의 정점을 찍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이 식량과 연료의 수급에 차질을 겪게 되자, 뮌헨에서의 삶은 텁텁하게 되었다. 1916년 프랑스의 공습 당시, 세 차례의 폭격이 있었다. 종전 후, 뮌헨은 정치적 반란이 잦았다. 1918년 11월, 혁명의 전야에 루트비히 3세의 가문은 도시에서 탈출하였다. 쿠어트 아이스너, 초대 공화국 총리가 안톤 그라프 폰 아어코 아우프 팔레이에 1919년 2월에 암살되자, 바이에른 공산당이 창단되었다. 공산당이 집권하자, 뮌헨에서 거주한 적이 있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보를 보내려 했으나 1919년 5월 3일에 자유군단에 의해 실패하였다. 다시 공화국이 된 이후, 뮌헨은 나치즘의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극단적 정치가들의 소굴이 되었다. 1923년,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는 뮌헨에 집결하여 맥주홀 폭동을 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하여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 폭동에서 진합당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히틀러가 체포되고 잠시 힘을 잃었다. 당시 나치당은 뮌헨 밖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후 뮌헨은 1933년에 히틀러가 수상에 오르며 다시 나치의 본거지가 되었다. 나치는 첫 강제 수용소를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16 km 떨어진 다하우에 건설하였다. 나치는 자신들의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뮌헨을 "개혁의 중심지" (Hauptstadt der Bewegung)라고 불렀다. 나치당(NSDAP) 본부 건물은 뮌헨에 위치하였고, 다수의 "퓌러바우텐" (Führerbauten, 총통의 건물) 들이 왕의 광장 (Königsplatz) 에 다수 지어져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등과의 협정을 체결하였고, 결국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수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인정하였고, 그의 안일한 행위는 제3제국의 욕망을 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다. 뮌헨은 1942년 6월에 결성되어 1943년 2월까지 활동했던 백장미 결사대의 중심지였다. 이들의 주축 요원들은 체포되어 뮌헨 대학교에서 한스 숄과 소피 숄의 전단지 배부 이후 처형되었다. 전쟁 당시 이곳은 연합군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뮌헨은 6년간 무려 71번이나 공습을 당하였다. 1945년 미군의 점령 이후, 뮌헨은 다른 서독의 폐허가 된 도시들에 비해 꼼꼼히 재건되었다. 그에 따라 뮌헨은 옛 도로를 살려 재건되었다. 1957년, 뮌헨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었다. 1972년, 하계 올림픽이 뮌헨에서 개최되었다. 이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가 팔레스타인의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에 암살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외에도 몇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인질로 잡히기도 했다. 다수의 뮌헨 시민들은 상류층에 속한다. 머서의 삶의 질 조사에 따르면 삶의 질 수준이 상위 10위에 꾸준히 들었으며, 2007년 조사에서 8위를 차지하였다. 머서는 뮌헨의 땅값을 세계 39위에, 독일 1위로 랭크하였다. 뮌헨은 IT, 생명공학, 출판 등의 영역에서 경제적으로 중추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공해도는 낮지만 2006년에 시의회에서 미세입자 농도에 대해 회의를 한 바 있었고, 그린피스를 비롯한 환경 단체가 공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 뮌헨은 함부르크나 베를린 등의 다른 독일 대도시들에 비해 범죄율이 낮다. 이 높은 삶의 질과 안정서에 대해 영미권 시민들은 뮌헨을 "장난감 마을" 이라고 부른다. 한편, 현지인들은 뮌헨에 "100만 마을" (Millionendorf) 라는 별명을 붙였다. (독일어로 "dorf"는 작은 마을을 의미한다. 인구가 100만이 넘지만 도시가 아닌 마을 같은 정취를 가지고 있음을 비유한 별명이다.) 뮌헨은 알프스 산맥 북부 끝자락에서 50 km 북쪽의 오버바이에른 현 해발 520m 고지대에 위치한다. 인근에 이자르 강과 뷔름 강이 흐른다. 도시를 둘러쌓인 곳은 알파인 산맥 입구지대이다. 도시 북쪽은 모래로 된 부싯돌 지대로, 더이상 알프스의 지질활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며, 시 남부는 빙퇴석 지대로, 알프스의 지질 영향이 현재 일어나는 곳이다. 이 중간에는 하빙성 지대이다. 이곳의 퇴적 지대는 앏아서, 지하수가 자갈 표면을 침투하여 늪지대를 뮌헨 북부에 조성하였다. 뮌헨은 인근 알프스 산맥의 영향을 받은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도시의 위도와 알프스 북쪽 기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강수량이 높은 편이다. 간혹, 폭풍우가 예상되지 않은 시점에 퍼부어지기도 한다. 또한, 일교차와 연교차도 큰 편이다. 알프스를 넘어온 바람이 푄 현상에 의해 겨울에도 급격하게 온도가 상승할 수도 있다. 뮌헨은 12월부터 3월까지가 겨울이다. 뮌헨의 겨울은 대체로 춥지만, 가끔가다 푹풍우가 내리기도 한다. 연최저 평균 온도는 1월의 -2.2 °C이다. 겨울에는 몇주간 눈이 쌓이기도 한다. 반대로 연최고 평균 온도는 7월의 24.0 °C이다. 여름은 5월에서 9월까지 지속된다 2007년 7월을 기준으로, 뮌헨의 인구는 134만명이었으며, 이들 중 30만 129명이 독일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외국인들이었다. 시내에는 터키계와 발칸계 단체가 발달되어 있다. 가장 인구가 많은 외국인은 터키인 (43,309) 이었고, 알바니아인 (30,385), 크로아티아인 (24,866), 세르비아인 (24,439), 그리스인 (22,486), 오스트리아인 (21,411), 이탈리아인 (20,847) 이 그 뒤를 이었다. 뮌헨의 외국인 37%가 유럽 연합 국가들 출신이다. 1700년대에 24,000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매 30년마다 2배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1852년의 인구는 10만명이었으나, 1883년에는 250,000명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1901년에 들어서, 인구는 또다시 2배로 불어나 500,000명이 되었다. 이 해를 기점으로, 뮌헨은 독일의 제3도시가 되었다. 1933년, 840,901명이 뮌헨에 상주하였고, 1957년에는 인구가 100만명을 돌파하였다. 뮌헨 전체 인구의 49.3%는 현재 종교가 없으며, 이 부류의 인구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다른 독일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신자와 개신교신자가 꾸준히, 감소세를 보였다. 2010년 12월 31일 기준, 도시 인구의 36.8%가 천주교 신자였고, 13.6%가 개신교, 0.3%가 유대교 신자였다. 그 외에도 소수의 성공회 교도 와 외국인들을 주축으로 한 이슬람교도가 존재한다. 뮌헨의 현 시장은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크리스티안 우데이다. 뮌헨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SPD가 주권을 잃지 않았다. 이 점은 남부 바이에른주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고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이 대부분의 도시, 주, 연방 단위의 투표에서 과반수의 득표를 얻는 것과는 대조되게 이례적이다. 바이에른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뉘른베르크도 독일 사회민주당의 힘이 가장 센 몇 안되는 바이에른 주의 도시이다.. 뮌헨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로자 리슈테 (핑크리스트, 동성연예 지지당) 이 의석을 확보한 상태이다. 바이에른 자유 주의 주도로, 뮌헨은 독일 내의 정치 거점으로, 바이에른 주의회, 주 의장 등의 거처이다. 연방 재정 법원과 유럽 특허원을 비롯한 몇몇 국립 및 국제 당국이 뮌헨에 본거지를 둔다. 2003년, 뮌헨은 14,000개의 컴퓨터를 단계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로 교체하였다. 그에 따라 데비안을 기초로 한 리눅스 운영체제인 리묵스 (LiMux) 가 설치되었다. 1992년 행정적 개정 이후, 뮌헨은 25개의 구 (Stadtbezirke) 로 나뉘는 도시가 되었다. 알라흐-운터멘칭 (Allach-Untermenzing, 23), 알트슈타트-레헬 (Altstadt-Lehel, 1), 아우빙-로흐하우젠-랑비트 (Aubing-Lochhausen-Langwied, 22), 아우-하이트하우젠 (Au-Haidhausen, 5), 베어크 암 라임 (Berg am Laim, 14), 보겐하우젠 (Bogenhausen, 13), 펠트모힝-하젠베어글 (Feldmoching-Hasenbergl, 24), 하데언 (Hadern, 20), 라임 (Laim, 25), 루트비히슈포어슈타트-이자보어슈타트 (Ludwigsvorstadt-Isarvorstadt, 2), 막스포어슈타트 (Maxvorstadt, 3), 밀베어트쇼펜-암 하트 (Milbertshofen-Am Hart, 11), 모우자흐 (Moosach, 10), 노이하우젠-님펜부어크 (Neuhausen-Nymphenburg, 9), 오버기징 (Obergiesing, 17), 파징-오버멘칭 (Pasing-Obermenzing, 21), 라머슈도어프-페어라흐 (Ramersdorf-Perlach, 16), 슈바빙-프라이만 (Schwabing-Freimann, 12), 슈바빙-베스트 (Schwabing-West, 4), 슈반탈러회헤 (Schwanthalerhöhe, 8), 젠틀링 (Sendling, 6), 젠틀링-베스트파어크 (Sendling-Westpark, 7), 탈키어헨-오버젠틀링-푀어슈텐리트-퓌어슈텐리트-졸른 (Thalkirchen-Obersendling-Forstenried-Fürstenried-Solln, 19), 트루데어링-림 (Trudering-Riem, 15), 운터기징-하얼라힝 (Untergiesing-Harlaching, 18). 전후 폐허에서 재건을 이룩한 이래, 뮌헨 시내에는 역사적인 건물들과 현대의 인상적인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SCSDNGT (Society's Center for Sustainable Destinations for the National Geographic Traveler) 의 조사에 의하면, 100개의 역사적 장소들 중에서 뮌헨을 30위에 선정하였다. 시 중앙부에는 마리엔자울레 (Mariensäule) 의 이름을 딴 마리엔 광장(Marienplatz) 이 있다. 광장 중앙에 마리아 상이 있으며, 인근에 신 시청과 구 시청이 위치한다. 마리아 상의 기둥에는 시계탑 인형극 (Rathaus-Glockenspiel) 을 볼 수 있다. 중세의 성곽이 철거된 후 지금까지 동쪽의 이자어토어 (Isartor), 남쪽의 젠틀링거토어 (Sendlinger Tor), 서쪽의 카를슈토어 (Karlstor) 의 3대문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카를슈토어는 정의의 궁전 (Justizpalast) 와 분수가 있는 슈타후스 (Stachus) 대광장으로 이어진다. 마리아 광장 인근의 성 베드로 대성당 (Peterskirche) 은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 시대에 지어졌으며, 뮌헨의 초창기 승려 정착기이자, 공식적으로 처음 도시가 세워졌던 1158년에 세워졌다. 성베드로 성당 옆에는 고딕 양식의 대성당인 하일리히가이스트키어헤 (Heiliggeistkirche) 가 있는데, 이 건물은 1724년 이래 바로크식으로 변경되었으며, 뮌헨에서 가장 붐비는 시장인 픽투아린마크트 (Viktualienmarkt) 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프라우엔키어헤 (Frauenkirche) 는 성당 겸 뮌헨과 프라이징의 교구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근의 미하엘즈키어헤 (Michaelskirche) 는 북알프스의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성당으고, 테아티너키어헤 (Theatinerkirche) 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에 영향을 받은 바실리카로 남독일 바로크 방식의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돔은 오데온즈 광장 (Odeonsplatz) 과 첫 로코코 양식의 바이에른 성당인 성 안나 다멘슈티프즈키어헤 (St. Anna Damenstiftskirche) 와 성 안나 임 레헬 (St. Anna im Lehel) 을 내려다 본다. 아잠키어헤 (Asamkirche) 는 아잠 형제의 기부를 받아 로코코 양식의 선구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레지덴츠 궁전 단지 (1385년 착공) 는 뮌헨의 구시가지 끄트머리에 위치하며, 유럽 최고의 인테리어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여러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친 현재 금고와 로코코 양식의 쿨빌리에 극장 (Cuvilliés-Theater) 을 내부에 두고 있다. 레지덴츠 바로 인근에는 신고전 양식의 오페라 극장인 국립 극장이 있다. 뮌헨에 위치한 바로크 및 신고전 양식으로 된 저택으로는 현재 포어시아 궁전 (Palais Porcia), 프레이징 궁전 (Palais Preysing), 홀른슈타인 궁전 (Palais Holnstein), 그리고 카를왕자 궁전 (Prinz-Carl-Palais) 가 있다. 위의 모든 궁전들은 중세 성이자 비텔즈바흐 뮌헨 공작들이 거주하던 알테 호프 (Alte Hof) 와 마찬가지로 레지덴츠 인근에 건설되었다. 도심지역은 세컨드 라이프의 가상 세계에도 나오며, 가상 투어를 할 수 있다. 19세기에 깔린 4개의 주요 거리가 뮌헨 도심과 부도심의 다수 주요 건물들을 연결한다. 신고전 방식의 브리너 가 (Briennerstraße) 가 오데온즈 광장 (Odeonsplatz) 에서 시작하여 레지덴츠 구시가지까지 동서로 뻗어 있으며, 왕의 광장 (Königsplatz), 도리아 양식의 프로필리어 (Propyläen), 이오니아 양식의 글립토테크 (Glyptothek) 그리고 코린토스 양식의 고전예술 박물관 (Staatliche Antikensammlungen) 이 위치하며, 그 뒤로는 보니파츠 수도원 (Abtei St. Bonifaz) 이 세워져 있다. 왕의 광장을 중심으로, 다수의 미술관이 있다. 루트비히 가 (Ludwigstraße) 도 오데온즈 광장 (Odeonsplatz) 에서 시작되며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 거리에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루트비히 성당 (Ludwigskirche),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르네상스 건물이 세워져 있다. 신고딕 양식의 막시밀리안 가 (Maximilianstraße) 는 막스-요제프-광장 (Max-Joseph-Platz) 에서 시작하여, 뮌헨 국립극장이 있는 레지덴츠 구시가지까지 동서로 뻗어 있다. 이 거리는 신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샤우슈필하우즈 (Schauspielhaus), 오버바이에른 현의회, 그리고 민족학 박물관 등이 있다. 이자르 강을 건너, 주의회 막시밀리아네움 (Maximilianeum) 을 우회한다. 막시밀리안 가의 서쪽은 호화 상점들과, 명성 높은 5성급 호텔인 호텔 피어 야레차이텐 (Hotel Vier Jahrezeiten) 이 위치한다. 프린츠레겐텐 가 (Prinzregentenstraße) 는 막시밀리안 가와 평행하게 뻗어 있으며, 카를-왕자-궁전 (Prinz-Carl-Palais) 에서 시작한다. 이 거리를 따라 바이에른 국립박물관, 예술의 집 (Haus der Kunst), 샤크갈라리 (Schackgalerie) 를 비롯한 다수의 박물관이 위치한다. 이 길도 이자르 강을 건너며, 프리덴젠겔 기념관을 우회하여, 빌라 슈투크와, 히틀러의 구 아파트를 지난다. 레겐트 왕자 극장 (Prinzregententheater) 이 프린츠레겐텐 가의 동쪽 끝이다. 바이에른 왕국의 옛 궁전으로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님펜부르크 (Nymphenburg) 와 오버슐라이스하임 (Oberschleissheim) 이 있다. 님펜부르크 궁전 (Schloss Nymphenburg) 은 도심에서 6 km 북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공원으로 둘러쌓인 이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손꼽힌다.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2 km 북쪽으로는 고딕 양식의 교회를 갖추었으며, 바이에른 대공작이 살던 블루텐부르크 성 (Schloss Blutenburg) 이 위치한다. 퓌어슈텐리트 성 (Schloss Fürstenried) 은 시 외곽의 오버슐라이스하임 (Oberschleißheim) 에 위치하며, 궁전이 세부분으로 나뉜다: 구 궁전 (Altes Schloss Schleissheim), 신 궁전 (Neues Schloss Schleissheim), 루슈타임 궁전 (Lustheim Palace). 이 궁전들은 대개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활용된다. 국립 독일 박물관 (Deutsches Museum) 의 항공기 전시관 (Flugwerft Schleissheim) 은 인근의 슐라이스하임 비행장에 위치한다. 베어크 암 라임 (Berg am Laim) 의 성 미하엘 성당은 시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성당으로 손꼽힌다. 라머즈도어프 (Ramersdorf) 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뮌헨 성당들은 대체로 중세때에 건설되었다. 가장 오래된 성당은 프뢰트마닝 (Fröttmaning) 의 하일리히 크로이츠 (Heilig Kreuz) 로, 알리안츠 아레나 인근에 건설되어 있으며,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 프레스코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시의 부도심에는 현대적인 건축물이 들어서 있으나, 멀리 있는 알프스를 쉽게 올려다보기 위하여, 건물 높이 제안이 걸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소수의 전망타워를 제외하고는 건물이 낮게 지어졌다. 대부분의 고층 건물들은 시 북부에 위치하며, 히포 하우즈 (Hypo-Haus), 아라벨라 고층빌딩 (Arabella Hochhaus), 하이라이트 타워 (Highlight Towers), 호흐하우스 업타운 (Hochhaus Uptown), 뮌헨문, 올림피아파크 인근의 BMW 본사 등이 북부에 세워진 고층 건물들이다. 도심 인근의 고층 건물들로는 지멘스 캠퍼스가 있다. 뮌헨의 유명 관광 건물로는 아래에 설명되는 경기장들도 포함된다. (참고) 파잔가어텐 (Fasangarten) 은 슈타델하임 (Stadelheim) 감옥에 위치한 전 미군기지 맥그로 카세른 (McGraw Kaserne) 이 철수한 자리에 세워졌다. 뮌헨 시내에는 다수의 공원을 두고 있다. 영국정원 (Englischer Garten) 은 도심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뉴욕시의 센트럴파크보다 큰 3.7 km²의 면적을 뒤덮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심공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거나, 산책길을 따라 조깅한다. 이 공원은 벤저민 톰프슨에 의해 설계되었고, 본래 노동 지역의 환경 개선과 노숙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곳에 있는 중국탑 인근에 맥주를 즐기기 위한 비어가어텐 (Biergarten) 이 있다. 또다른 대형 공원으로는 올림피아파크, 베스트파크 (Westpark), 님펜부르크 궁전 공원 (북쪽에 님펜부르크 식물원 (Botanischer Garten München-Nymphenburg) 이 조성) 슐라이스하임 궁전 (Schleissheim Palais) 등이 있다.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은 레지덴츠 인근의 호프가어텐 (Hofgarten) 으로 16세기에 조성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비어가어텐은 1780년에 세워진 히어슈가어텐 (Hirschgarten) 으로, 이곳에 사슴이 살고 있다. 티어파크 헬라브룬 (Tierpark Hellabrunn) 에 위치한 시 동물원은 이자르 강과 플라우허 (Flaucher) 섬 인근에 위치한다. 동공원 (Ostpark) 는 페어라흐-라머즈도어프 (Perlach-Ramersdorf) 에 위치하며, 수영 시설인 미하엘리바트 (Michaelibad) 가 있다. 뮌헨은 몇몇 축구 클럽들의 연고지로, 특히 FC 바이에른 뮌헨은 독일 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고,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다. 뮌헨을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들 중에서 현재까지 3개 팀이 푸스볼-분데스리가에 한시즌이라도 이름을 올렸다. 그 팀들의 이름은 FC 바이에른 뮌헨, TSV 1860 뮌헨, 그리고 SpVgg 운터하힝이다. 현재 세 팀은 각각 푸스볼-분데스리가, 2. 푸스볼-분데스리가, 3. 리가에 속해있다. 뮌헨을 연고로 하는 하키 클럽으로는 EHC 뮌헨 (Eishockeyclub München) 이 있다. 뮌헨은 197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2006년 FIFA 월드컵 당시 개최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후자의 대회 경우 올림피아슈타디온이 아닌 축구 전용 경기장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경기를 하였다. 뮌헨은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 참여하였으나, 대한민국 평창군에 밀렸다. 2011년 9월, 토마스 바흐 DOSB 회장은 추후에 다시 동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 참여할 것임을 밝혔다. 오스트로바이에른어는 뮌헨 일대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그 언어계에 속한 오버바이에른어 (Oberbayrisch) 가 이 지역에서 사용된다. 오스트로바이에른어는 바이에른주나 지역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나, 국제 SIL에 등재되어 있으며 ISO-639의 부호를 지니고 있다. 독일 박물관 (Deutsches Museum) 은 이자르 강의 하중도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박물관들 중 하나이다. 3동의 불필요한 박람회 건물은 폐쇄되어 교통 박물관 (Verkehrsmuseum) 으로 새단장되고 있다. 이곳에서 독일 박물관 전시물을 운반하여 보관할 수 있게 된다. 슐라이스하임 항공 전시관 인근의 슐라이스하임 특수 비행장에서 에어쇼를 볼 수 있다. 몇 국립화되지 않은 박물관들 (대체로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소속) 은 고고학, 지학, 광물학, 동물학, 식물학, 인류학에 관련된 자료를 다량 전시하고 있다. 쿤슈타레알 (Kunstareal) 지역에는 주요 미술관들이 존재한다. 그 중, 구 미술관 (Alte Pinakothek) 과 신 미술관 (Neue Pinakothek), 현대미술관 (Pinakothek der Moderne), 그리고 브란트호어슈트 박물관 (Museum Brandhorst) 가 잘 알려져 있다. 구 미술관은 단일석으로 되어 있으며, 14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유럽에서 쓰였던 보물상자가 있다. 이 박물관 내에는 비텔스바흐가 4세기 이상 지배하던 당시의 작품을 다영역에 걸쳐서 다량 보관하고 있으며, 두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들인 자화상, 네명의 제자, 카니자니 신 성가, 템피 마도나와 2층짜리 전시물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심판의 날이 있다. 이 미술관은 루벤스의 다양한 작품을 전시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푸른 기사단 (Blaue Reiter) 이라는 예술가 단체가 뮌헨에 상주하였다. 그들의 작품들을 대부분 렌바흐하우스 (Lenbachhaus) 에 전시되어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작품은 글립토테크 (Glyptothek) 와 주립 골동품 박물관 (Staatliche Antikensammlung) 에 전시되어 있다. 루트비히 1세는 메두사 론다니니, 베베리니 판 등의 조각을 에게해안의 아파에아 신전에서 공수받았다. 쿤슈타레알에는 이집트 박물관도 자리 잡고 있다. 에라스무스 그라세어의 모리스 춤 조각상은 시내 구 병기고 건물의 뮌헨 시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쿤슈타레알 지역의 또다른 주요 예술관은 구시가지와 이자르 강 사이의 레헬에 있는 막시밀리안 가의 문화 주립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비유럽물품 전시관이자 전시품목 수를 기준으로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바이에른 국립 박물관과 프린츠레겐텐 가의 바이에른 주립 고고학박물관과 더불어 유럽 최고의 예술과 문화 역사 박물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샤크갈라리 (Schackgalarie) 는 19세기 독일의 예술작품을 보관한다. 구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시 경계선에서 16 km 떨어져 있다. 뮌헨은 유럽의 문화적 거점 도시들 중 하나로 오를란도 디 라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카를 마리아 폰 베버,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막스 레거, 카를 오르프등의 유명 작곡가들이 공연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스 베르너 헨체에 의해 시작된 뮌헨 비엔날레와 A*Devantgarde로 인해, 도시의 현대 음악이 발전하였다. 국립극장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의 감독하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가 처음으로 열린 곳으로, 바이에른 주의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본고장이다. 그 옆의 레지덴츠 극장은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쿠빌리에 극장이었던 곳이었다. 1781년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 (Idomeneo) 를 시작으로, 다수의 오페라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다. 게어너플라츠 극장은 발레와 뮤지컬 극장이며, 프린츠레겐텐 극장은 또다른 오페라 극장으로 바이에른 극장 아카데미의 본고장이다. 현대적인 가슈타이히는 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본고장이다. 위의 두 국제적인 음악공연단체 외에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 존재한다. 방송 교향악단의 처음 본거지는 레지덴츠의 헤어쿨레잘 (Herkulesaal) 이다. 도이체 극장에서는 대형 행사와 뮤지컬을 진행한다. 뮌헨 카머슈필레는 레지덴츠 극장의 바이에른 슈타트샤우슈필 옆에 위치하며, 독일어권에서 가장 중요한 극장들 중 하나이다. 1775년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첫 공연 이래,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헤벨, 헨리크 입센, 후고 폰 호프만슈탈과 같은 작가들이 이곳을 무대로 하였다. 이 도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책을 출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50여개의 출판사가 뮌헨 시내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매치리스 매거진, LAX마그, 프린츠 등을 비롯한 국내 및 국제 출판사들이 있다. 뮌헨에는 바이에른 왕국 시절부터 파울 요한 루트비히 폰 하이제, 막스 할베,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랑크 베데킨트 등의 문학 거물들을 다수 배출하였다.제1차 세계 대전 직전, 도시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정점을 찍고 있었다. 뮌헨과 그 인근의 슈바빙 지역은 토마스 만을 비롯한 다수의 예술가와 문인들이 거주하였다. 바이마르 시대에도 리온 포이트방거, 베르톨트 브레히트, 오스카르 마리아 그라프와 같은 저자들이 거주하였다. 1919년, 바이에른 필름 스튜디오가 창설되었다. 고딕 시대에서 바로크 시대까지, 에라스무스 그라세어, 얀 폴락,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웁, 이그나츠 귄터, 한스 크룸퍼, 루트비히 폰 슈반탈러, 코스모스 다미안 아잠, 에기트 퀴린 아잠, 요한 밥티스트 치머만, 요한 미하엘 피셔, 그리고 프랑수아 드 쿠빌리에등의 예술가가 활동하였다. 뮌헨은 카를 로트만, 로비스 코린트, 빌헬름 폰 카울바흐, 카를 슈핏츠베흐, 프란츠 폰 렌바흐, 프란츠 폰 슈트룩, 그리고 빌헬른 라이벨과 등이 1911년에 창설된 푸른 기사 (Der Blaue Reiter) 와 같은 인상주의자 예술가 단체에 활동하였다. 뮌헨은 이 푸른 기사 단체의 본거지로, 그 회원으로 파울 클레이, 바실리 칸딘스키, 알렉세이 폰 아블렌스키, 가브릴레 뮌터, 프란츠 마크, 아우구스트 마케, 그리고 알프레트 쿠빈 등을 두었었다. 가장 잘 알려진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 암 플라츨 (Hofbräuhaus am Platzl) 은 도심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뮌헨의 가장 유명한 연간행사인 옥토버페스트 (Oktoberfest) 때에 두 번째로 큰 텐트를 운영하기도 한다. 2주간, 옥토버페스트는 100만여명의 방문객을 맥주 텐트 (Bierzelte) 와 각종 엔터테인먼트로 끌어들이고 있다. 1810년 10월 12일에 루트비히 황태자와 작센-힐트부어크하우젠의 테레제 공주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첫 번째 옥토버페스트가 열렸다. 이 연간행사는 경마로 종료되며, 이 경마는 현재 옥토버페스트로 알려진 축제로 발전하였다.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옥토버페스트는 9월에 열린다. 이 축제는 독일 통일일인 10월 3일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이 아닌 한, 10월 첫째주 일요일에 종료된다. 10월 3일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인 경우, 이날까지 축제를 연다. 흰소시지 (Weißwurst) 는 뮌헨의 지역 요리이다. 이 소시지는 정오 이전에만 먹는 음식으로, 냉장고가 생기기 전에 소시지를 오래 보관하지 못한데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소시지는 주로 단겨자와 갓 구워낸 브레첼과 같이 먹는다. 레버케스 (Leberkäs) 라는 바이에른식 소시지는 주로 감자 샐러드와 곁들여지는 지역의 또다른 별미이다. 뮌헨 지역을 대표하는 스프로는 레버뇌델 (Leberknödel) 로, 간과 양파로 맛을 낸 만두 스프이다. 냄비에 구운 돼지고기 (Schweinsbraten), 감자 혹은 흰빵으로 만든 만두 (Knödel), 양배추절임 (Kraut), 족발 (Schweinshaxe) 는 주로 점심과 저녁식사로 나온다. 보이셰얼 (Beuscherl) 은 돼지의 폐, 심장, 지라를 만두와 곁들인 요리이다. 가장 잘 알려진 디저트로는 스트루들로 바닐라 소스를 곁들인 사과 스트루들 (Apfelstrudel), 크림치즈 스트루들 (Millirahamstrudel) 이 있고, 커스터드를 곁들인 효모 만두 (Dampfnudeln), 대형 도넛 (Auszogene)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루이폴트 왕자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프린츠레겐텐토어테 (Prinzregententorte) 가 있다. 맥주 정원에서 몇몇 지역을 대표하는 찬음식들을 맛볼 수도 있다. 오바츠다 (Obatzda) 는 잘게 부순 카망베르에 크림치즈를 곁들인 것으로, 잘게 부순 양파와 파프리카를 넣은 것이다. 이는 맥주 정원에서 얇게 썰어 절인 무 (Radi), 식초와 기름으로 양념해 양파, 상추와 곁들여 먹는 소시지 샐러드 (Münchner Wurstsalat) 와 함께 곁들여 먹는다. 구이 요리로는 주로 꼬챙이를 사용해 구운 생선 (Steckerlfisch) 로 주로 고등어를 쓰며, 송어와 같이 지역 특산물이 아닌 생선을 쓰기도 한다. 이 생선은 숯불에 훈제되어 요리된다. 다른 구이 요리로는 반정도 구운 닭고기 (Hendl) 가 있다. 뮌헨은 맥주 양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맥주 (Weißbier / Weizenbier) 는 밀맥주로 바이에른 특산물이다. 헬레즈는 1895년에 처음 만들어진 투명안 황금빛 맥주로, 뮌헨에서 현재 가장 인기있는 맥주이다. 헬레즈와 필즈는 당밀을 태워 만든 19세에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흑맥주 (Dunkles) 의 존재를 없애버렸다. 슈타크비어는 뮌헨에서 생산되는 맥주들 중 가장 도수가 높으며 (6-9% 알코올), 어두운 앰버색으로, 짙은 당밀맛을 낸다. 성요셉의 날 (5월 19일) 이나 그전에 열리는 강맥주 시즌 (Lenten Starkbierzeit) 에 주로 소비된다. 뮌헨 시내에는 20여개의 맥주정원이 있으며, 이들 중 4개는 영국정원에 있고, 가장 큰 맥주정원은 히어슈가어텐 (Hirschgarten) 에 있다. 빅투알린 시장 (Viktualienmarkt) 은 신선한 식료품과 특산물을 취급하는 시장이다. 아우어 둘트 (Auer Dult) 는 마리아힐프 성당 (Mariahilf) 에서 1년에 3차례 열리며, 가장 오래된 뮌헨의 시장들 중 하나로, 주로 골동품을 취급한다. 크리스트킨들 시장 (Christkindlemarkt) 은 성탄절 3주전에 마리엔 광장 (Marienplatz) 과 다른 시 주요 광장에서 열리며, 크리스마스 물품들을 취급한다. 야간운영이 허락된 건물은 6,000동이 넘는데 이들 건물은 학생과 예술가들의 주요 거주지인 슈바빙 (Schwabing) 구역에 집중되어 있다. 몇기의 알려진 야간운영 건물들은 다음과 같다: 뮌헨은 과학과 연구의 중심 도시들 중 하나로, 1901년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에서 2005년 테오도어 헨슈까지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였다. 뮌헨은 루트비히 4세당시부터 미카엘 디 체세나, 마르실리오 다 파두아, 그리고 오컴의 윌리엄같은 철학자들이 황제의 비호를 받았다.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LMU) 와 뮌헨 공과대학교 (Technische Universität München: TU / TUM) 는 주연방연합교육연구부에 의해 "엘리트 대학교" 칭호가 내려진 최초의 세 독일 대학들 중 두 대학교이다. 이 두개의 뮌헨 소재 대학교 외의 최초 엘리트 대학교는 카를스루에 공대 (현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 로, 2006년 첫 평가를 기점으로 현재 더 큰 금액의 연구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 막스플랑크협회는 독일의 비영리 연구기관으로, 행정 본부가 뮌헨에 위치한다. 다음의 연구기관이 뮌헨에 위치한다: 뮌헨은 경제적 기반이 다른 독일의 도시들보다 탄탄하며 실직률이 다른 100만을 넘는 독일의 대도시들 (베를린, 함부르크, 그리고 쾰른만이 이 목록에 해당) 에 비해 이상이나 적은 최소의 실직율 (3.0%) 을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독일 남부의 경제 중심 역할을 맡는다. “새 사회 시장경제” (Neue Soziale Marktwirtschaft, INSM) 와 “주간 비즈니스” (WirtschaftsWoche) 잡지는 2006년 6월에 세 번째 비교조사에서 최고의 도시로 평가하였다. 뮌헨은 2005년 2월의 “경제” (Capital) 지, 2002년 2011년 사이의 전망을 반영하여 60개의 도시에 실시한 조사에서 1위로 평가하였다. 뮌헨은 세계적인 도시로 손꼽히며, 지멘스 AG (전자), BMW (차량), MAN SE (트럭), 린데 (가스), 알리안츠 (보험), 뮤닉 리 (재보험), 그리고 로데 & 슈바어츠 (전기) 등의 본사를 두고 있다. 500,000명이 넘는 상주인구를 가진 도시들 중 뮌헨의 소비지출액 (1인당 26,648유로, 2007년 기준) 이 가장 많다. 2006년, 뮌헨의 노동자 계급층 시급량은 2007년 평균 18.62유로였다. 2009년 뮌헨은 포춘 글로벌 500의 경제지표에서 8위를 기록하였다. 뮌헨은 생명공학기술, 소프트웨어 그리고 다양한 3차산업의 중심지이다. 뮌헨은 항공엔진 제조사인 MTU 에어로엔진, 항공 방위산업체인 EADS (오토브룬에 본사 소재), 공장기기 제조사인 크라우스-마파이 (Krauss-Maffei), 카메라 제조회사 아리 (Arri), 반도체 회사 인피네온 (Infineon, 노이비베어크 (Neubiberg) 에 본사 소재), 전구회사 오스람 (Osram) 등의 본사도 두고 있으며, 맥도날드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외국회사의 유럽 본부도 뮌헨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뮌헨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금융가를 두고 있으며, 히포페어라인즈방크와 바이에른 주립은행의 본부를 두고 있다. 보험회사는 알리안츠와 뮤닉 리를 두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쪽보다 더 중요한 보험 중심지이다. 뮌헨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책을 출판하는 도시이며, 독일 최대 신문사들 중 하나인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본사가 있다. 뮌헨은 독일 제1방송 ARD의 본사를 두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출판사 랜덤하우스의 독일지부에 속한 프로지벤의 방송 본사도 두고 있으며, 후베어트 부어다 메디아의 본거지이다. 바바리아 필름의 스튜디오가 그륀발트에 위치하며, 이 스튜디오는 유럽의 가장 크고 유명한 스튜디오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루프트한자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이어 두 번째로 뮌헨 국제공항에 두 번째 본거지를 두었다. 도심에서 3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국제공항 (IATA: MUC, ICAO: EDDM) 은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공항으로, 3400만명의 승객들이 매년 이곳을 통해 뮌헨으로 들어오거나 나간다. 공항은 광역철도 S8을 통해 시 동쪽에서, S1을 통해 시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 뮌헨 중심역 (Hauptbahnhof) 에서 공항까지의 이동 시간은 40-45분 소요된다. 2017년 S8은 23분만에 일부 역에만 정차하고 공항에 23분만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급행열차를 도입할 계획이다. 400 km/h의 속력으로 주행 가능한 자기부상열차 (트란스라피드) 가 중앙역과 공항 사이를 10분만에 이동 가능하도록 하는 노선의 건설이 처음에 확정되었으나, 2008년 3월에 예산 문제로 취소되었다. 2007년 트란스라피드 건설 프로젝트의 지원단체는 바이에른 프로 라피드를 창설하였다. 2008년, 바이에른 주립 정부는 뮌헨시 서쪽에 위치한 오버파펜호펜 (Oberpfaffenhofen) 비행장의 상업적 목적의 확장공사 허가를 받았다. 이 계획은 오버파펜호펜 거주민들은 물론 지역 정부단체, 뮌헨 시의 반발로 인해 재판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2009년 10월, 지역법원에 의해 연간 9725편 이하의 비행기가 오버파펜호펜에 이착륙하는것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메밍겐 공항은 서뮌헨 공항으로도 알려져 있다. 2005년 이후, 모든 아우크스부르크 공항의 승객들은 모두 뮌헨의 공항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의 공항편이 없어져 인근 주민들이 불편을 겪게 되었다. 260만명이 상주하는 뮌헨과 인근 위성도시들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시간을 가장 중요시하는 U-반과 S-반, 트램과 버스의 교통수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대중교통 시스템은 뮌헨 교통관세협회 (MVV, Münchner Verkehrs- und Tarifverbund GmbH) 에 의해 관리된다. 뮌헨 트램은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중 교통수단으로, 1876년에 처음 개통되었다. 뮌헨은 다수의 버스를 현재 또한 운영중이다. 복잡한 지하철과 트램 노선들은 도심 시민들의 편의를 제공한다. 뮌헨 중심역 인근 700m의 가우핑어 가 (Kaufinger Strasse)는 시를 동서로 나누는 교통의 허리를 담당하며, 도심의 남북을 연결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인가 (Weinstrasse) 는 북쪽으로 호프가어텐 (Hofgarten) 과 연결된다. 시의 허리를 담당하는 길로부터, 다수의 소규모 거리들이 방사적으로 뻗어 있으며, 도보나 자전거로 편리하게 이동 가능하다. 역사적인 현장을 보행자 우선도로로 교체한 이후, 도보나 자전거로 이동하는데 더욱 편리하고 안전하게 하였다. 보행자 우선도로 교체사업은 교통량 제한 규정에 따라 행하여졌다. 이 규정에 따라 제한된 몇 도로에만 차량이 운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부 도로는 차량 운행이 금지되었고, 이 자리에 보행로와 자전거길을 도심을 관통하도록 설비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 보행로와 자전거길은 주요 광장들을 연결하도록 하였다. 사전설계에서 이 도로들은 복합 설계를 통해 진행되었다. 뮌헨 중앙역 (München Hauptbahnhof) 은 시의 주요 열차역으로, 시 서부의 파징역 (Pasing)과 동뮌헨역 (Munich Ostbahnhof) 도 정상적으로 운행하는 일반 철도역이다. 이 세역은 모두 대중교통과 연계되어 있으며, 환승의 중심을 담당한다. ICE 고속열차는 뮌헨-파징역과 뮌헨 중앙역만 운영한다. 동뮌헨역에는 IC (InterCity) 와 오이로시티 (EuroCity) 열차만 정차한다. 2006년 5월 28일을 기점으로, 뮌헨은 잉골슈타트를 경유하여 뉘른베르크까지 고속노선을 통해 300 km/h로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운송회의가 뮌헨 신 전시관 (Messe München International) 에서 격년으로 열린다. 뮌헨은 남독일의 아우토반 핵심도시로, 슈투트가르트 (서쪽), 뉘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베를린 (북쪽), 데겐도어프, 파사우 (동쪽),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남동쪽), 가어미슈-파어텐키어헨 (남쪽), 그리고 린다우 (남서쪽) 에서 시작한 아우토반이 뮌헨에 끝나며, 독일의 타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로 직행이 가능하도록 한다. 그러나 뮌헨 시내와 인근은 대체로 차량통행량이 많다. 차량 지체는 출퇴근시간대와 명절 시작이나 끝마다 매번 일어난다. 자전거는 뮌헨 시내에서 자동차를 대신하는 최적의 교통 수단으로, 연간 다수의 시민들이 자전거 전용도로를 사용하고 있다. 내부순환로로 둘러싸인 지역의 안쪽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마인츠 마인츠()는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의 주도이다. 기원전 14세기부터 기원전 9세기까지 켈트족의 거주지였으며, 로마인의 침략 후 모군티아쿰(켈트족의 신 중 하나의 이름을 땄음)이라는 군사 막사를 세웠다. 그 후 로마인이 떠난 뒤에 게르마니아 수도원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6세기에 시가지가 완성되었다. 군사적으로 작전에서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상업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과 만하임에 밀려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라인 강의 포도주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1118년 자치권을 취득했고, 1244년 완벽하게 자유도시가 되었다. 1254년에 강력한 라인 지방 도시 연맹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440년에는 여기에서 유럽 최초의 금속 활자 발명가로 유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다. 30년 전쟁 중 스웨덴과 프랑스에 점령되었다. 1792년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중 재점령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위험은 피해갔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폭격당하였고, 급속히 재건한 결과 현재는 더 이상 폭격된 건물이 남아 있지 않다. 산업화가 비교적 늦었고 화학 또는 의학약품, 유리 등을 생산한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은 독일 중서부 헤센주에 있는 도시로, 간단히 줄여서 프랑크푸르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브란덴부르크주 소재의 도시인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와는 구분한다. 인구는 약 70만 명(2017년 기준)이다. 라인강 지류인 마인강 연안에 있다. 헤센주 최대 도시이며,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 다음으로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독일 행정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 수도는 프랑크푸르트라고 할 만큼 독일에서 경제적인 중심을 차지한다. 이 도시에 유럽 중앙은행이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도 있어서 영국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 연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는 고위도인 관계로 동지 때 오전 8시 22분에 해가 떠서 오후 4시 26분에 저물므로, 낮이 8시간에 불과하다. 또한 유럽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도시 남서부에 2005년 기준으로 세계 제2위 규모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제공항(, 국제항공코드: FRA)이 자리잡았으며, 이곳에 대한민국의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도시의 국제공항과 직항 노선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독일로 올 때에는 수도인 베를린 대신 거의 대부분 프랑크푸르트로 들어온다. 5번(나치 정권이 만든 독일 최초의 고속도로 노선)과 3번 아우토반(독일 고속도로)이 만나는 도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자동차 및 화물수송 차량이 많이 오간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Frankfurt Hauptbahnhof)은 쾰른의 중앙역과 함께 유럽 철도 교통의 대중심지이다. 또한 2007년에는 독일의 도시 중에서 독일의 DPA통신사가 조사한 결과 범죄 발생률 1위 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은 독일 경제의 중심지로 번창하는 현대적인 대도시이지만, 상당히 유서깊은 도시로도 유명하다. 12세기에 이미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으며, 18세기에는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이 시기에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활동하여, 이 도시는 괴테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후 마인 강과 라인 강의 수상 교통의 중심지, 또 철도의 중심지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시가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경제 기적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게 되었고, 시가지도 말끔하게 정비되어,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층 건물이 시 중심가에 밀집되어 있다. 비록 구 서독의 수도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보유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를 비롯한 문화·교육 시설도 많으며, 매년 10월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1968년 사회문화혁명(이른바 68 혁명)당시에는 독일 내 진보적 민주개혁세력의 수도로서, 간혹 폭력사태와 시위가 발생하기도 하면서, 유럽의 각종 사회적 변화를 주도했다. 독일 경제의 중심지이고 삼성그룹, 현대그룹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여러 기업들이 진출해 있어 대한민국 교민들도 이곳에서 많이(약 1만 명 이상) 생활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외교부 총영사관도 개설되어 있다. 한편, 이 도시는 2006년 FIFA 월드컵 축구 대회의 개최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발트슈타디온'(Waldstadion)에서 대한민국은 이천수의 프리킥과 안정환의 중거리 슛 등에 힘입어 토고 대표팀을 2:1로 격파하여, 프랑크푸르트는 대한민국이 월드컵 도전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첫 승리를 이룩한 도시로 남게 되었다. 만하임 만하임(Mannheim)은 인구 32만으로 슈투트가르트에 이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쿠어팔츠의 옛 수도였던 이 도시는 오늘날에도 라인-넥카 메트로폴에서 경제,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라인란트팔츠주의 도시인 루드비히스하펜과는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1900년 이래 만하임은 중요한 산업과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내 두 번째로 큰 열차편성역(Rangier-Bahnhof)과 유럽의 중요한 연결 항구들이 그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만하임은 독일어 연구원(Institut für Deutsche Sprache)과 두덴(Duden) 출판사가 소재한 독일어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만하임은 중요한 근대 발명품의 고향이기도 하다. 최초의 자전거를 1817년 카를 드라이아스(Karl Drais)가 만들었고, 1886년 카를 벤츠(Carl Benz)가 자동차 첫 도로주행을 했으며, 1921년에는 트랙터가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활발한 음악공연이 명성을 얻고 있다. 만하임에는 만하임 대학교, 만하임 음대 등 많은 대학들이 있다. 만하임은 라인 강 중상류, 라인 강과 네카 강 합류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만하임은 라인-넥카 메트로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라인넥카군(Rhein-Neckar-Kreises), 헤센주와 라인란트팔츠주와 접하고 있다. 가까운 대도시로는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가 있고, 남동쪽 약 95km 지점에 슈투트가르트(Stuttgart)가 있다. 만하임 마을은 766년 역사서 로르셔 코덱스(Lorscher Codex)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오랫동안 중요하지 않은 어촌이었던 만하임은 1284년 팔츠 영주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1349년 라인강 통행료를 징수하기 위한 성인 아이헬하임이 들어 섰다. 1415년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폐위된 교황 요한 23세를 이곳에 감금하기도 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폰 데어 팔츠가 1462년 제켄하임 전투에서 뷔르텐베르크 영주와 바덴 영주 그리고 메츠 주교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오베르라인의 주인이 되었다. 1566년 만하임은 인구 700으로 하이델베르크 행정구역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1607년 만하임은 도시특권을 인정받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IV. von der Pfalz)에 의해 프리드리히스부르크(Friedrichsburg) 요새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도로망이 직각으로 계획되어 요새와 성을 연결하면서 현재의 정방형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622년 30년 전쟁 중에 가톨릭 측의 틸리(Tilly)에 의해 처음으로 파괴되었고, 1689년 팔츠 상속전쟁때에 프랑스군에게 다시 한번 희생되었다가 재건되었다. 1720년 선제후 카를 필립은 수도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하임으로 변경하고 만하임 성을 짓기 시작했다. (1760년 예수교회와 함께 완성됨). 만하임은 쿠어팔츠의 수도가 되면서 짧지만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구는 2만5천명에 이르렀다. 쿠어팔츠는 영주는 미술과 음악, 학문과 상업에 많은 후원을 해서 괴테와 실러, 레싱, 모차르트 등이 만하임에 머물렀다. 1778년 영주 카를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을 상속 받게 됨에 따라 수도가 뮌헨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문화적, 학문적 출현을 겪게 된다. 1795년 프랑스 군이 점령하고 또 오스트리아 군이 재 점령하게 된다. 1803년 최종적으로 정치적 위치를 잃게 된다. 쿠어팔츠는 제국대표단회의에서 해체되고 만하임은 바덴에 속하게 된다. 지리적으로 바덴의 북쪽 변방에 위치하게 되어 변경도시로 변하게 된다. 경제적 번성에 따라 만하임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828년 라인항이 개항하고, 1840년에는 바덴의 최초의 철로인 만하임-하이델베르크 철도가 개통된다. 만하임은 1848년 혁명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 1865년 프리드리히 엥겔호른(Friedlich Engelhorn)에 의해 BASF(Badische Anilin- und Soda-Fabrik)가 창설된다. 이 회사는 염색공장에 시작한 회사로 현재 세계 최대의 화학회사이다. 현재는 라인강 건너 편인 루드비히스하펜으로 옮겨갔다. 1886년에는 카를 벤츠가 „가솔린 기관“ 자동차 특허를 받았다. 1차대전 후 하인리히 란츠 주식회사는 „불독“이라는 트랙터를 최초로 생산했다. 1922년에는 만하임 발전소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만하임어 라인샨체에서 함께 출발한 자매도시 루드비히스하펜과 함께 인구 38.5만명에 이르게 됐다. 제3제국하에서 약 2000명의 만하임의 유대인이 추방되었고, 공중폭격으로 도시는 거의 다 파괴되었으며 1945년에는 미군이 점령하였다. 많은 노력끝에 도시가 재건되는 과정에 만하임성과, 급수탑(Wasserturm)은 복원되고 국립국장은 자리를 옮겨 신축되었다. 1967년에 만하임에 대학이 들어 섰고1975년에는 루이젠 공원과 헤르쪼겐리트 공원에서 연방 정원쇼를 개최하였다. 이 과정에 방송송신탑과 제2 라인강 다리가 만들어졌고, 플란켄이 보행자 전용구역으로 변경되었고, 로젠가른텐을 준공했다. 1980-90년대에도 플라네타리움, 예술관 확장, 유대교사원, 이슬람사원, 기술 노동박물관, 칼 벤츠 스타디온이 만들어졌다. 최근 만하임은 산업분야의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다. 이에 시당국은 공업지구와 서비스기업부지 설정을 통해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 예가 만하임 최고층 건물인 빅토리아 빌딩(Victoria-Hochhaus, 2001)의 건축이다. 2007년 도시 400주년을 기념해서 2000년부터 많은 건물들이 만들어지고 수리되고 있다. 만하임의 인구는 1896년 10만을 넘어서 대도시가 되었다. 1905년에는 16만이 넘었고 1961년에는 인구가 배로 증가했다. 1970년에 인구 33.3만으로 최고인구수를 기록했다. 2005년 3월말 현재 관청에 주거지로 등록하고 있는 인구는 307,583명이다. 시의회는 의석은 48석으로 5년마다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2차 대전이래 사민당이 다수를 차지해오다가 1999년부터 기민련이 원내1당이 되었었다. 하지만 최근에 실시된 선거(2009년 6월 7일)에서 사민당이 다시 1당으로 올라섰다. 2009년 6월 7일 시의회 선거 결과: 시의 행정기관과 시의회(Gemeinderat)의 수장은 시장(Oberbürgermeister)이다. 시장은 주민 직선으로 선출되며 임기는 8년이다. 2007년 실시된 선거에서 쿠르츠(Dr. Peter Kurz, SPD)가 당선되어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명의 수석 부시장과 4명의 부시장이 시의회에서 선출된다. 그래서 선거당시의 정당간 의석분포를 반영한다. 이 부시장들은 시행정에서 한 분야를 맡아 이끌게 된다.(예. 문화, 재정, 사회등.) 역대 시장(1810년부터): 24000명의 학생이 10개의 대학에 등록되어 있다. 교향곡 교향곡(交響曲, 심포니, Symphony)은 악곡의 형식 중 하나이며, 흔히 관현악단을 위한 음악을 말한다. 많은 교향곡들은 네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음악학자들은 이런 것을 흔히 고전파 음악의 구조로 설명한다. 그러나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같은 고전파 대가들의 교향곡 중에도 이 형식을 따르지 않는 것도 있다. 교향곡을 뜻하는 "Symphony"는 "소리의 조화" 혹은 "성악 또는 기악곡 연주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쉼포니아"(), 그리고 "조화로운"을 뜻하는 "쉼포노스"()에서 나온 낱말이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처음으로 라틴어 낱말 "심포니아"(symphonia)를 썼는데, 북가죽이 두개인 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략 1155년에서 1377년 사이에 이 말의 프랑스어 형태인 "symphonie"는 "오르가니스트룸"(organistrum), 즉 허디거디 의 이름이었다. 중세 후기 영국에서 "symphony"란 위에서 말한 둘 다 뜻하는 말로 쓰였으나, 16세기에는 건반악기 덜시머와 같은 뜻이 되었다. 독일에서는 16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Symphonie"가 건반악기 스피넷과 버지널을 총칭했다. 교향곡(交響曲)이라는 한자단어도 'Symphony'의 뜻을 음역한 것이다. "함께 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 이 말이 쓰인것은 16, 17세기 작곡가들의 몇몇 작품 이름에서 나타난다. 그 예로, 조반니 가브리엘리의 《사크라 심포니아》(1597)와 《심포니아 사크라, 리베 세쿤두스》(1615), 아드리아노 반키에리의 《Eclesiastiche sinfonie》(1607), 로도비코 그로시 다 비아다나의 《Sinfonie musicali》(1610), 하인리히 쉬츠의 《Symphoniae sacrae》(1629) 등이 있다. 바로크 시대였던 17세기에 심포니(symphony)와 신포니아(sinfonia)는 오페라나 소나타, 협주곡같은 기악곡 등 다양한 작품에 쓰이는 말이었다. 오페라 신포니아, 즉 이탈리아풍 서곡은 18세기에 세 개의 대조되는 부분(빠른-느린-빠른 형식의 춤곡과 유사하다)으로 구성된 표준 형태를 이루었다. 이 형식은 종종 관현악 교향곡의 직접적인 시초로 여겨진다. 18세기에는 "서곡", "심포니", "신포니아"는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낱말로 널리 여겨졌다. 이것 말고도 교향곡의 주요한 기원으로 '리피에노 콘체르토'(ripieno concerto)가 있는데, (독주 악기가 아닌) 현악기와 통주저음을 위한 협주곡과 유사하지만 비교적 덜 연구된 것이다. 최초로 알려진 리피에노 콘체르토는 주세페 토렐리의 작품(6개로 된 작품중 5번으로 1698년작)이다. 안토니오 비발디 또한 이런 형태의 작품을 썼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리피에노 콘체르토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일 것이다. '서곡', 그리고 '리피에노 콘체르토'와 더불어 초기 교향곡은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박자는 '빠른-느린-빠른' 구성이었다. 그러나 보통 리토르넬로 형식의 협주곡을 이용하는 리피에노 콘체르토와 달리, 이런 교향곡에서는 최소한 첫 악장은 두 박자 형태였다. 그리고 교향곡은 이탈리아풍 서곡과도 차이가 있는데, 극작품의 도입곡이 아닌 그 자체로 공연용 음악이었다. 비록 서곡으로 원래 쓴 곡도 나중에 교향곡으로 쓰이거나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초기 교향곡의 대다수는 장조였다. 이 시대의 교향곡은 공연용, 오페라곡, 교회 음악이건간에 연주 곡목에서 주요한 작품이 아니었다. 대개 협주곡과 함께 나오며, 다른 작품 사이에 곡을 나누어서 끼워넣거나 모음곡 혹은 서곡에 뽑아쓰기도 했다. 성악이 지배적이었으며, 교향곡은 서곡, 간주곡, 후주곡으로 썼다. 이 시기 교향곡은 비교적 짧아서 10분에서 20분 사이 분량이었다. 종종 오페라에서 서곡이나 간주곡으로 쓰던 "이탈리아" 양식의 교향곡은 표준적인 3형식 악곡이 되었다. 빠른 악장, 느린 악장, 또 빠른 악장이 나오는 식이다. 모차르트의 초기 교향곡도 이런 배치를 따르고 있다. 초기 3악장 형식 교향곡은 4악장 형식으로 대체되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까지 이어졌다. 교향곡 양식은 독일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고전 양식"이 되었다. 일반적인 4악장 형식의 교향곡 형태는 다음과 같았다. 이런 배치에 변형도 흔했다. 가령 중간의 두 악장 순서를 바꾼다거나 1악장 앞에 느린 서주를 넣는 식이었다. 3악장에 미뉴엣을 넣은 최초의 교향곡은 게오르크 마티아스 몬의 1740년 D장조 작품이라고 하며, 미뉴에트를 4악장 교향곡에 양식화한 첫 음악가는 요한 슈타미츠라고 알려져 있다. 초기 교향곡 작곡은 빈과 만하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빈에서 이 양식을 지지한 음악가로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바겐자일, 벤첼 라이문트 비르크, 게오르크 몬이 있으며, 만하임 악파에는 요한 슈타미츠가 있다. 그러나 교향곡은 이탈리아의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 안드레아 루체시, 안토니오 브리오쉬, 북독일의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잘츠부르크의 레오폴트 모차르트, 파리의 프랑수아 조셉 고섹, 런던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칼 프리드리히 아벨 등 유럽 전역에서 교향곡이 작곡되었다. 이후 중요한 빈 악파의 교향곡 작곡가로는 요한 밥티스트 반할,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레오폴트 호프만 등이 있다. 18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교향곡은 요셉 하이든의 것으로, 그는 36년간 최소 108개의 교향곡을 썼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24년 동안 최소 56개의 교향곡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하이든 94번 "놀람", 101번 "시계", 모차르트 40번, 41번 "주피터" 등이 있다. 전문적인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면서, 1790년에서 1820년 사이 교향곡은 음악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베토벤은 교향곡을 더욱 발전시켰다. 베토벤 교향곡 3번(영웅 "Eroica")은 음계와 감정의 배열이 이전 작품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교향곡 9번은 교향곡에서는 거의 최초로 성악 솔로와 합창을 4악장에 넣었다. (다니엘 슈타이벨트는 그보다 4년 전 1820년의 피아노 협주곡에 성악 합창을 넣어 작곡한 바 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합창 교향곡"이라 처음으로 부른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극적 교향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작품 총보 서문에 다섯 문단으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이런 개념을 만들어냈다.(Berlioz 1857, 1) 베토벤과 슈베르트는 일반적으로 쓰는 우아한 미뉴엣 대신 더 생기있는 스케르초를 쓰기도 했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은 표제 음악으로 마지막 악장 앞에 "폭풍" 부분을 끼워넣었다. 또 역시 표제 음악인 베를레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는 보통 4악장 구성과 달리 5악장으로 구성하여 행진곡과 왈츠 곡을 넣었다. 로베르트 슈만과 펠릭스 멘델스존은 교향곡에서 낭만주의 음악의 화성적 표현을 발전시킨 두 지도적인 독일 음악가였다. 프랑스의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헝가리의 프란츠 리스트처럼 매우 뚜렷한 표제 교향곡을 쓴 음악가도 있었다.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이런 예를 따라 교향적 모음곡 "안타르"와 "세헤라자데"를 썼다. 슈만과 멘델스존을 출발점으로 삼은 요하네스 브람스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구조적 통일체를 이룬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 밖에 19세기 말 중요한 교향곡을 쓴 음악가로는 안톤 브루크너, 안토닌 드보르자크,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등이 있다. 20세기 초 구스타프 말러는 길고 규모가 큰 교향곡을 썼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인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연주자와 합창단 수가 천 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는 교향시 형식을 응용한 교향곡을 썼다. 20세기에는 교향곡의 양식과 내용도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Anon. 2008).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칼 닐센 같은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4악장 형식을 계승했으나, 장 시벨리우스의 마지막 교향곡 7번(악장이 단 하나이다)이나 알란 호바네스의 교향곡 9번 "Saint Vartan"(1949–50, 악장이 24개에 이른다)처럼 다른 접근법을 취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 (, 1719년 11월 14일 ~ 1787년 5월 28일)는 작곡가, 음악 교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지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는 잘 알려진 작곡가였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지금은 독일 땅인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본공인 게오르크 모차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배웠지만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아 대학 성당에서 시종을 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를 했다. 볼프강이 태어난 1756년에 레오폴트는 바이올린 주법에 관한 책인 《Versuch einer gründlichen Violinschule》를 썼고 이 책은 수십 년 동안 권위있는 교재로 인정받았다. 이 책은 요한 요하임 콴츠의 《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ère zu spielen》(플룻 주법)과 카를 엠마누엘 바흐의 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Clavier zu spielen》(건반악기 주법)과 함께 18세기 연주법의 주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유명한 장난감 교향곡은 한때 요제프 하이든이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볼프강의 초기 작품들은 레오폴트가 수정을 가한 습작품들로 온전히 볼프강의 작품이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 1747년에 잘츠부르크 공무원의 딸 안나 마리아 페르틀 과 결혼해서 일곱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둘만이 살아남았다. 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와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있다. 아람 하차투리안 아람 예기아이 하차투리안( , , 1903년 6월 6일 ~ 1978년 5월 1일)은 아르메니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하차투리안은 조지아의 가난한 아르메니아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음악을 좋아했지만 배울 기회가 없었다. 1921년 그는 러시아어도 모르고 음악에 대한 지식도 없는 채 음악을 배우기 위해 홀로 모스크바로 갔다. 하지만 그가 Gnesin Institute에서 미하일 그네신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9년에 모스크바 콘소바토리로 전학하여 니콜라이 미야스코프스키를 사사했다. 1951년에 모스크바의 Gnesiny State Musical and Pedagogical Institute와 모스크바 콘소바토리의 교수가 되었다. 하차투리안은 75번째 생일을 앞두고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전통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으로는 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위한 협주곡과 세 개의 교향곡, 그리고 발레곡 《스파르타쿠스》와 《가야네》가 있다. 특히 가야네는 그 한 악장인 〈칼춤〉으로 유명하다. 초사 《초사》(楚辭)는 중국의 고전 시가 작품집이다. 《시경》과 함께 중국 고전문학의 큰 기둥이다. 초나라 방언으로 쓰였으며, 전한 때에 유향이 편집하였다. 굴원의 시와 그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은 시로 구성되어 있다. 문체의 명칭으로서의 ‘초사’가 갖는 특징은, 2자와 2자, 3자와 2자, 3자와 3자 사이에 ‘혜(兮)’자를 두는 《구가》의 구법(句法), 또는 ‘혜’자 대신에 구 사이에 ‘지(之)’ ‘이(以)’ ‘이(而)’ 등의 조자(助字)를 넣고, 무운구말(無韻句末)에 ‘혜’자를 두는 《이소》식의 구법이다. 또 《초혼》에서는 ‘사(些)’자, 《대초》에서는 ‘지(只)’자를 구말에 두고 있다. 그 밖에 편미(編尾)에 ‘난(亂)’이라는 몇 구 내지 20구 가량의 종편사(終編辭)가 있는 것도 특징이다. 초 회왕의 충신 굴원의 《이소》와 25편의 부 및 후인의 작품에다가 자작 1편을 덧붙여 전한의 유향이 16권으로 편집하였다고 하며, 후한 때에 왕일의 <구사(九思)>를 더하여 모두 17권이 되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초사>의 가장 오래 된 판본은 왕일이 주석을 붙인 <초사장구(楚辭章句)> 16권이다. 그 내용은 왕일의 옛 책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것이 아니며, 주희의 <초사변증(楚辭辯證)>에 의하면 남송의 진열(陳說)이 연대순으로 다시 배열한 것이라 한다. 실린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시경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경》은 전한시대에 〈제시(齊詩)〉·〈노시(魯詩)〉·〈한시(韓詩)〉·〈모시(毛詩)〉 라는 네 가지 종류의 책이 나왔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그중의 모시뿐이어서 별도로 모시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시(詩)라고만 불리었으며, "시"라는 말의 어원은 여기서 나왔다. 주나라때 편찬되었다 하여 주시(周詩)라고도 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 오경의 하나에 포함되면서 시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이다. '풍(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160개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아(雅)'라는 것은 연석(宴席)의 노래로,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구분된다. 소아 74편과 대아 31편은 조정에서 불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頌)' 40편은 왕조·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의 노래라고 여겨진다. 어느 것이든 고대의 이름없는 민중이나 지식인의 노래이다. 주(周)는 제13대 평왕 때에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으로 옮겼는데(기원전 770년), 그때 일을 노래한 것이 있다. 주실 동천(周室東遷) 이전, 즉 서주(西周)의 것으로는 제11대 선왕(宣王, 재위 : 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 시대의 노래로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시경》 중의 옛 부분이다. 주 왕조(周王朝) 창업의 모습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것들도 선왕기(宣王期)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조 초기인 문왕·무왕시절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가요를 모은 것이 된다. 공자는 고대의 가요를 통해서 당시 정치·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풍(風)'에는 애정의 노래라든가 일하는 노래, 유랑의 노래 등이 많으나, '아(雅)' 또는 '송(頌)'에는 천(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왕조를 찬양한 것이 있다. 또 천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 믿고 천을 원망하여 천의 권위의 붕괴를 노래한 것도 많다. 천의 권위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시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주왕조를 뒷받침하고 있던 천(天)의 사상에 대한 무명의 민중이나 지식인의 비판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천(天)은 지정공평(至正公平)하지 못하다는 원성(怨聲)은 바로 주 왕조의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비판이다. 신화 신화(神話, myth)는 한 나라 혹은 한 민족, 한 문명권으로부터 전승되어 과거에는 종교였으나, 더 이상 섬김을 받지 않는 종교를 뜻한다. 신화는 과거에 종교로서 떨쳤던 영향만큼이나 다양한 문화를 파상시켰으며, 이는 건축, 문학, 예술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에까지 자취를 남겼다. 한편 신화와 같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전설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전설은 신화와 비교하여 볼 때 이야기의 주제가 서로 독립된 것이 보통이며 그리고 그 짜임새에서 단편적인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신화는 우주론을 포함하며 종교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신화는 종교로 비롯되어 그 거대한 설명을 담은 우주론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신화는 유일신 사상의 전파와 함께 사멸되었기 때문에, 유일신교의 큰 특징인 체계적인 경전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화는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문학과 극, 음악, 미술, 조각 등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다양한 자료가 남아 있다. 신화는 토착종교로써 발전되는 경향이 강하다... 현재 문명을 이루는 대부분의 건축, 예술, 문학, 음악, 시 등이 신화에서 파전되었으며, 이는 과거 신을 위하여 인간들이 예술품(신전 건축, 음악, 춤 등)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또한 신화의 다양한 내용들은 우리들이 현재에도 사용하는 단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인도게르만어에는 그 경향이 더 강하다. 신화의 기능이라는 것은 인간 행동에 있어서의 의미와 규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템적 신화는 주로 신화적 조상과 토템 종물의 여행에 관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태고시대에 초자연적 존재가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고 동식물을 낳게 되었는지 등, 자연의 법칙에 관련된 이야기가 원주민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성인식이 있을 때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그것이 실천되어 원초의 사실이 재확인된다. 신화의 지식에는 주술, 종교적 능력이 따르기 때문에 신비적인 성격을 띤다. 원시시대에서 한 민족에게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로, 문화가 낮은 민족이 심령의 초자연적 힘을 중심으로 자연계나 인문계의 여러 현상을 그들 나름대로 상상하고 서술한 민족 발생의 이야기가 바로 민속종교이다. 이를테면 민속종교는 개인적 소산이 아니고 민족 전체를 지배하는 풍속·신앙·제도·도덕 등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선조들의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화는 민족의 신념이고 그들의 역사를 말해 주며 그 구송성(口誦性) 때문에 민족 서사시로 발전하고 문학화된다. 또 전설이란 구체적인 사물에 결부시킨 설화로서 과거의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믿어지는 사건이 구전이나 문자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이른다. 그리고 전설이 발생한 시대보다 후까지 존속한 민담(民譚)과 역사적인 인물·토지·사건 등에 관한 구비(口碑)로 나누기도 한다. 신화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유동적 변화물이다. 덧붙여 전설과 민담의 본질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신화와 전설은 대개 이야기를 전승하는 신관(神官)이 구송한 것으로, 일종의 신가적(神歌的)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민간으로 흘러 들어와 민간 설화가 되고, 여기에 흥미 중심의 이야기가 첨가되어 구비 민담으로 원시 문학의 독특한 형태를 이루었다. 이 신화·전설·민담은 다음에 오는 서정 문학의 모체가 되었다. 피노키오의 모험 《피노키오의 모험》()는 1883년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로렌치니(Carlo Lorenzini)가 어린이를 위해 지은 동화의 제목이다. 소목장이 제페토가 장작을 깎아서 인형을 만들어 피노키오라고 이름을 붙이었다. 토스카나 출신의 언론 작가 카를로 로렌치니가 1881년 피노키오의 초안을 ‘"Giornale dei bambini"(소년신문)’에 쓰게된 동기는 어린이의 정서를 가꾼다는 교육적 동기 이외에 콜로디(Collodi, 카를로의 필명)가 처한 가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로디가 동화의 전개를 위해 밑바탕으로 삼은 것은 이탈리아의 희극("commedia dell'arte")으로서 특히 할레킨, 풀치넬라의 가면극으로 여겨진다. 이는 인형 피노키오를 상징하는 광대 모자에 부분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잣나무를 깎아 만든 피노키오는 실에 묶어 움직이게 하는 인형극에 등장하는 목각 인형을 연상시키고 있다. 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콜로디는 이 글을 동화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으며, 좀 더 심각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불행한 결말로 끝낼 예정이었다. 따라서 피노키오는 15회 끝에서 나무에 목이 매달려 비참하게 죽었으나, 편집자의 요청으로 16회부터 36회까지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게 된다. 16회에서 피노키오는 푸른 요정 덕분에 다시 살아나고, 제페트 할아버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전과는 달리 푸른 요정은 그 이후로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두루미 두루미()는 두루미목 두루미과 한 종으로, 한국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겨울철새이다. 학(鶴)이라고도 한다. 몸길이 140cm의 대형 조류이며 목과 다리가 길다 수명은 최대 80년 정도이다. 두루미 보존을 위해 남북한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협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지역인 북만주, 삼강평야(아무르강 합수부), 한카호, 일본의 홋카이도 동부 쿠시로습지 등에서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일처제의 번식체제를 유지한다. 산란수는 2개이며, 암수가 어린새를 이듬해 4~5월까지 보살핀다(물론 3월에 독립시키는 경우도 있음). 여타 겨울철에 도래하는 조류와는 달리 번식기에 형성되는 가족군을 유지하는 독특한 조류이다(유 등, 2008) . 가족군이 아닌 경우(2~4, 5년생 미성숙새)10여 개체의 무리를 짓거나 먹이를 공급하는 지역의 경우 100여 개체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 생활한다(첨부된 8번째 사진참조). 두루미는 굉장히 사회적인 동물로, 나이든 개체가 어린 개체에게 이동 최단거리를 알려주어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게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국에서의 겨울철 먹이는 주로 추수하다가 남은 쌀인 낙곡, 개천의 저서무척추동물(패류, 갑각류 등), 미꾸라지, 어류, 양서류, 옥수수 등을 먹는 잡식성이다. 강화 및 새만금지역 등의 갯벌에서 월동하는 두루미는 망둥어, 게 등의 먹이가 주 먹이이다. 재두루미에 비해서는 육식성 먹이를 선호한다. 번식지에서는 습지에서 이용가능한 어류, 패류, 무척추동물(주로 우렁), 양서파충류, 소형포유류 등의 다양한 동물을 먹이로 한다. 인간을 제외하면 다 큰 성체는 검독수리 외에는 천적이 없으며, 검독수리의 습격도 드물다. 그러나 약하거나 어린 개체는 삵이나 여우등의 먹이가 된다. 천적이 거의 없지만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얕은 물에서 잠을 잔다. 물은 열손실이 적고, 다가오는 잠재적 포식자(인간 등)를 물소리로 알아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겉으로는 쉽게 암수구분을 할 수 없지만, 방해요인에 대한 방어행동 다른 두루미나 재두루미에 대한 배타적 행동이 수컷에 나타나며, 번식기의 수컷은 화려한 춤으로 구애를 한다. 합창이라 해석되는 Unison call을 할 때 "뚜뚜루룩"하는 소리를 내는데, 먼저 소리를 내는 쪽이 수컷이며 반박자 후 따라서 약간 낮은 음색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암컷이다. 단정학이라고 부르는 두루미, 회학이라 불리는 재두루미 등이 두루미류에 속한다. 매년 10월 말에서 3월 중순까지 한국에 도래하며 강원도(철원군이 가장 큰 월동지이며, 경기도(파주시, 연천군),인천광역시(강화군)에 일부 도래하며, 강원도(고성), 전라북도(김제시)의 만경강하구(새만금 갯벌) 등이 소규모 도래지이다. 과거기록으로는 2차대전 이전에 백천, 옹진, 연안과 서산, 당진, 에산, 청주, 진천, 음성, 진도, 강진, 해남, 완도, 장흥, 고흥 등 내륙과 해안지역에 두루 분포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인천, 김포, 임진각, 대성동, 연천, 철원, 양양 등의 지역에서 관찰 되었으며, 최근에는 강화도와 대성동, 연천, 철원지역에 국한되어 서식한다. 현재 철원분지 지역이 가장 많은 두루미가 월동을 하며, 2008년 현재 약 700여 개체의 두루미가 철원지역에서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경기도 연천 약 120개체(2008년), 파주 대성동의 개체군은 규모가 불확실하며, 강화도의 월동지에는 10개체 정도의 소수만이 도래한다. 그외 강원도 고성은 최근 관찰기록이 없으며, 부산시 낙동강 하구 등에서 각 1회의 관찰기록이 있지만 지속적인 월동기록은 아니었다. 전북 김제의 경우 2005년 3월 김제 조류보호협회 회원에 의하여 2년생 암컷 미성숙새가 구조되어 2007년 현재 철원군 한국조류보호협회 야생조수류 구조센터에서 보호받고 있다. 환경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전국겨울철새 동시센서스에 의하면 군산과 김제의 해안지역(새만금)에서 해마다 한쌍 정도가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재청에 의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환경부에 의하여 멸종위기 1급에 속한다. 국제적으로 보호를 요하는 조류이며, 공식적으로는 전 세계에 1,700-2,200개체가 생존하여 멸종위협(Endangered Species)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2005년 월동지를 기준으로 한 개체수에서 중화인민공화국(창 강 하구) 1,200개체, 일본(홋카이도) 1,000개체 이상, 대한민국(철원, 연천, 강화) 700개체 등 큰 서식지에서만 2,900개체로 추산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평안남도 해안 지역에 400여 개체, 철원지역에 일부 도래(남측 지역과 중복), 원산의 안변이 100여 개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서식여건의 악화로 이동시기에만 일부 도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보고되었다. 정에 따르면 원산지역은 1980년대 100여개체가 지속적으로 월동하였으나, 꾸준히 감소하여 2000년도까지 4개체가 간혹 관찰 될 정도로 서식여건이 매우 악화된 것으로 보고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에 인천 연희동, 파주 자유마을과 대성동, 철원지역에 125~150개체가 보고되었다(Won 1980). 배(2000)에 따르면 1990년대 초 200여 개체에서 90년대 말 400개체 이상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이후 철원군(2002)와 유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철원지역의 두루미개체수가 기존에 알려진 450여개체 보다 100개체 정도가 많은 550개체가 관찰 되었다. 또한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약 650개체의 두루미가 철원지역에서만 조사된 것으로 보아 최근의 두루미 개체수 증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유입되어 증가하였다기보다는 기존 서식 개체수가 증가한 것으로 판단된다(유 등, 2008). 연어과 연어과(鰱魚科, Salmonidae)는 연어목(Salmoniformes)에 속하는 유일한 과이다. 치누크 연어, 은연어, 곱사연어, 연어가 이에 해당한다. 연어는 바다에서 살다가 가을이 되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산란을 위해 돌아오는 생태로 유명하다. 이는 자신의 출생지의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란을 위해서 돌아온 북태평양 연어는 체외수정으로 산란과 수정후 죽는데, 이는 노화가 급속히 진행되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서양 연어는 산란을 하고 나서도 죽지 않고 몇 번이고 알을 낳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강원도 양양군 남대천이 연어가 산란하는 지역으로 국립수산과학원 산하기관인 내수면양식연구소에서 1970년대부터 연어의 번식을 위해 채집과 인공산란과 부화, 치어방류등을 하고 있다. 천적은 알을 낳기 위해 강에 올라오는 연어를 잡아먹는 곰이 있으며, 치어시절에 물총새, 곤들매기과의 홍송어 등의 포식으로 수가 조절된다. 열목어속 열목어속("Brachymystax")은 연어과의 속이다. 열목어 열목어(熱目魚)는 연어목 연어과의 민물고기이다. 어린 개체는 팽팽이라 부른다. 시베리아·몽골·만주·한반도의 차갑고 깨끗한 강물에서 산다. 한반도가 서식의 남방한계선이다. 몸은 옅은 황갈색이며 크기는 100cm까지도 자라나 보통 20cm 가량이 대부분이다. 곤충을 잡아먹으며 3~4월에 알을 낳는다. 대한민국에서는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에 있는 열목어 서식지를 각각 천연기념물 73호와 7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특히 경상북도의 열목어 서식지는 열목어가 살 수 있는 남쪽 한계지인데, 열목어가 멸종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이 강원도로부터 종자를 들여와 되살렸다. 열목어는 설악산과 오대산 천연보호구역에서도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한강수계 계류와 전라북도의 섬진강수계 계류와 경상북도의 낙동강수계 계류와 한강으로 흐르는 가평과 청평의 최상류 계류에 고루 서식했으나 현재는 거의 절멸된 상태다. 1996년 1월부터 환경부가 특정보호어종으로 지정하여 열목어를 허가없이 채취, 포획, 가공, 유통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몽골과 만주와 북한에서는 여전히 인기 많은 계류 낚시감이다. 옛날에는 남한에서도 인기있는 계류 낚시감 중 하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大韓民國의 天然紀念物)은 동물·식물·지질·광물과 천연보호지역으로 구분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수 있는 자연물은 한국 특유의 이름있는 서식지 및 생장지·석회암지대·사구·동굴·건조지·습지·하천·온천·호수·도서, 학술적인 가치가 큰 나무, 원시림, 고산식물지대, 중요한 화석 표본 등이다. 천연보호지역은 보호해야 할 천연기념물이 풍부한 일정 규역을 설정한다. 전라남도 홍도, 강원도 설악산, 제주도 한라산, 그 밖에 대암산·대우산·향로봉 등이 천연보호구역이다 1933년 천연기념물 제도가 시행된 후 총 155가지가 지정되었고, 이를 1962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가 해제되었다. 2008년 천연기념물 명칭 기준이 바뀌어서 각 천연기념물의 공식 명칭이 크게 변했다. 물타툴리 에뒤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Eduard Douwes Dekker, 1820년 3월 2일 ~ 1887년 2월 19일 잉겔하임)는 물타툴리(Multatuli, 라틴어로 '많이 고생했다'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네덜란드의 작가이다. 에뒤아르트 데커르는 1820년 암스테르담에서 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난다. 18살 때인 1838년 아버지와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자바 섬에 와 그곳에서 식민 관료로 일하게 된다. 그의 식민관료 생활은 1856년 레박 부통감에 있을 때 전임자가 관련된 비리를 고발하지만, 오히려 해고 위협을 받게 된다. 이에 자진하여 퇴직하고 유럽으로 돌아온다. 식민사회의 모순에 큰 염증을 느낀 데커르는 신문기사와 팜플릿을 통해 고발을 계속하지만, 이러한 투쟁은 크게 반향을 얻지 못한다. 1860년 물타툴리라는 필명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설인 대표작 <막스 하벨라르(Max Havelaar)》를 발표하며, 이 소설은 네덜란드 뿐 아닌 유럽 전역에 널리 읽히면서 네덜란드 식민지에서의 노동 착취를 알렸다.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16살까지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음악가이다.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6곡의 교향곡, 68곡의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와 같은 해의 태생으로, 이 무렵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인 아버지를 둔 하이든은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38년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아저씨 프랑크(프랑스)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 스테파노 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 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Karl von Morzin) 백작의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연상의 아내에게서 가정의 행복을 평생 느끼지 못한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관현악단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 관현악단의 관리와 훈련이 그 주임무였으며, 이로써 관현악 작법도 현저히 진보했다. 1762년 파울 안톤 후작이 타계하자 형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예술의 옹호자인 동생 니콜라우스 후작이 뒤를 잇는다.그의 후원아래 관현악단은 충실히 확대되고 악장으로 취임한 하이든은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후작은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에스테르하자(Eszterháza) 별궁을 세우고 함께 여름 동안에는 전속 음악가도 동행하였는데, 1772년 여름 후작의 체재가 길어지자 《고별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 유명한 일화가 생겼다. 이러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지런하고 충실한 악장 하이든과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 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 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 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 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 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 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2회 빈 공략의 포성을 들으면서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하이든은 18세기 후반의 빈 고전파에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주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 등의 기악형식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만년의 2개의 오라토리오나 미사곡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볼 수 있다. 하이든의 작곡활동은 외적, 내적인 특징에 따라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된다. 가장 초기의 작품에서는 특별한 예술적 개성은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토착적인 전통과의 결합(디베르티멘토나 그 밖의 게임음악)을 볼 수 있다. 1761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부악장으로 취임하자 초기의 교향곡군이 탄생되었다. 1761년의 표제가 붙은 3부작(제6번 <아침>, 제7번 <낮>, 제8번 <저녁>)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교향곡에는 바로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770년경의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시기에 이르자 급격히 표현력이 심화하여 클라비어 소나타, 현악4중주, 교향곡 등에 현저한 발전의 자취가 새겨진다. 종래의 클라비어 소나타는 디베르티멘토풍의 경쾌한 성격이었으나 하이든은 엠마누엘 바흐의 '감정과다양식'의 풍부한 표현력이나 클라비어 협주곡의 견고한 구성을 소나타에 이식하여 소나타를 교향적인 것으로 하였다. 현악4중주도 디베르티멘토풍의 성격을 배제, 4악장 구성을 원칙으로 하여 고전파의 현악4중주 구조와 정신이 확립되었다. 여기서는 푸가 형식이 악장에 채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향곡에도 새로운 양식에 대한 의욕을 볼 수 있으며 단조의 채용, 힘찬 리듬적 충동에 의한 표현의 심화가 꾀해지고 있다. 1781년은 하이든이 전적으로 새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작곡하였다고 자칭한 <러시안 4중주곡>이 소나타 형식을 실내악의 분야에도 확립한 것으로 의의가 깊다. 1783-1784년의 교향곡(제76번-81번)에는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특징이 보이나, 한편 모차르트도 1782년부터 1785년에 작곡한 6곡의 현악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1780년대 후반에는 하이든의 명성이 전유럽에 퍼져 외국으로부터의 작곡 의뢰가 늘어났다. 그리고 1786년에는 파리의 관현악단 콘세르 드 라 로쥬 올람피크로부터의 교향곡 6곡(제82번-87번)의 작곡의뢰를 받았다. 1790년대에는 에스테르하지후(候)가 사망하여 후작가의 악단은 해산되고 하이든은 다만 명예악장으로서 이름만을 남겼을 뿐 빈으로 옮겨졌다. 자유의 몸이 된 하이든은 영국의 흥행사 잘로몬의 권유로 1791년부터 1795년 사이에 두 번에 걸친 영국 여행을 하여 영국의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12곡의 교향곡(제93번-104번)을 작곡하였다. 이는 하이든의 교향곡 창작의 발전의 정점이 되었다.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온 뒤로 하이든은 교향곡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런던에 와 머무르며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자극을 받아 2개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4계> 및 6개의 대규모 미사곡의 작곡에 몰두하여 만년의 원숙한 경지를 성악분야에 구축하였다. 여기서 하이든은 청년시대의 바로크 음악 경험과 독자적인 교향적 사고와의 참된 통일을 달성하고 있다. 음악사에서 하이든의 업적은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를 통하여 추구된 소나타 형식의 완성에 집약되겠으나 그의 많은 기악곡과 오페라에 나타나는 민족성이나 부포적 성격이 그의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경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만년의 대규모적인 성악곡은 고전파의 표현범위에서 다시 낭만주의의 길마저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교향곡과 오페라를 직접작곡하여 전두 지휘하는 등의 많은업적을 남긴 하이든은 1809년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한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이는 바로크, 고전파, 낭만주의 음악가들중 가장 오래산 것이다. 1809년에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루고 그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회가 아닌 일반묘지 즉 가문의 묘에 안장시켰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쳐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머리가 온데간데 없어져 유족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에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유해찾기를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필사적으로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머리를 찾는 데 필요한 단서나 현장의 목격자가 한 명도 없어 전혀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왜 무덤이 파헤쳐졌는지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귀족중 1명이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 싶어 유태인인 피터와 로젠바움에게 부탁해서 파헤쳐진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피터와 로젠바움은 하이든 머리를 더욱 비싼값에 팔기 위해 하이든 머리의 부폐된 상태를 고려해 다른 노인의 시체의 머리를 꺼내 귀족을 속여 넘겨주고 자신들은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겨버린 것이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 귀족은 분노했으며 그들을 즉시 붙잡아 조사했으나 이미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아버린 뒤였으며 갖가지 수소문하였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후 100여년이 넘도록 하이든 머리는 유럽 전역에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이든의 후손들은 생전에는 그의 머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이 죽을 때는 후손에게 반드시 조상의 머리를 찾아야 한다는 유언을 대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런 사태에 대해서 "이 사건은 국제적 망신이며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조국의 음악가 머리가 도굴당해 온 유럽에서 장식품처럼 여기저기로 팔려나간 것은 두고볼 수 없다"는 등 많은 의견과 비난여론이 빗발쳤지만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 데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 데는 성공하여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반환소송을 청구하였지만 그 유해의 주인은 반환소송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여 되찾는 데 어려움을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유해반환소송은 잠정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마침내 유해반환소송에 승소하여 하이든 머리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무덤에서 파헤쳐져 머리가 분리된 지 무려 145년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주민 수십만 명이 나와 145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를 맞이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이 하이든의 미사에 대거 참석해 대 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며 이제서야 머리를 찾은 것에 대해 하이든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 네덜란드 사람인 안토니 반 호보켄(Anthony van Hoboken, 1887-1983)이 하이든의 작품을 정리했다.(호보켄 번호, Hob.) 교황 교황(敎皇, , , )은 《교황청 연감》에 따르면 로마의 주교이자 가톨릭교회 전체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이는 기독교 전승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첫 수장으로 임명되어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다는 성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독교 창시 이래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총 266대 교황이 재위하였으며, 현재 교황은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이다. 교황의 직위를 가리켜 교황직(敎皇職, papatia)이라고 부르며,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영역은 ‘성좌’(Sancta Sedes) 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한 로마에 세워진) ‘사도좌’로 불린다. 교황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책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초기 교황들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다양한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중세에 들면서 종교 문제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세속 문제에도 개입하여, 종종 기독교 군주들 간의 각종 분쟁에 개입하여 중재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 및 정통 기독교 교리의 수호는 물론 교회 일치 운동과 종교 간 대화, 자선 활동, 인권 수호 등에 매진하고 있다. 교황에게는 본래 세속적 권력이 없었지만, 중세기에는 세속의 통치자들이 가진 권력과 같이 광범위한 권력을 가진 때도 있었다. 최근 세기에 들면서 교황은 점차 세속 권력이 약해지면서, 오늘날 교황의 권위는 다시 본연의 임무인 종교적 문제들에 국한되어 있다. 수세기가 넘도록 교황의 종교적 권한에 대한 주장은 19세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엄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교황 무류성 선언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한국에서 ‘교황’(敎皇)이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파파’(papa)는 본래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단어 ‘파파스’(πάππας)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대 교회 시절부터 이 칭호는 모든 주교, 특히 동방 지역 대주교와 주교인 성직자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는데, 나중에 서방으로 전파되면서 로마의 주교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교회 대분열 시기인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방교회에서는 로마교회의 대주교에게만 사용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칭호를 가장 먼저 사용한 이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헤라클라스(232-248)인 것으로 추정된다. 파파를 한국어로 옮긴 호칭인 교황은 본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감화시킨다’는 의미의 ‘교화황’(敎化皇)이었는데, 이는 1614년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구라파(유럽)의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이라고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후손이 없고 어진 이를 선택하여 임금으로 세운다.”는 글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다가 1915년경부터 교화황과 교황이 혼용되다가 교화황이라는 용어는 사라지고,1920년대부터 교황은 일반 용어로 정착되었으며, ‘교종’(敎宗)은 한때 주로 기도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미사 경본》 라틴어-한글 대조나 《천주성교공과》에서도 교황과 교종은 그대로 혼용되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에는 기도문에서 마저 교종이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1992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춘계총회에서 용어위원회 논의를 거쳐, 2000년 10월 《천주교 용어집》을 출간하면서 교황으로 통일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파파라는 칭호는 3세기부터 모든 기독교의 모든 주교에게 공통적으로 사용한 호칭이었으나, 로마교회 지역에서는 6세기부터 특별히 로마의 주교에게 사용하기 시작했고, 교회 대분열 시기인 11세기 말엽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서방 교회의 관례를 정립하면서 서방교회에서는 오직 로마의 주교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하였다. 6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재한 동로마 제국 상법부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8)고 말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시몬을 교회의 반석이라 부르며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여하고, 그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약속은 베드로가 배신한 후에도 부활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나타나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세 번이나 당부한 것으로 계속 이어졌다(요한 21,15-17). 주님께서 체포되시던 밤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완전한 성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제 주님의 십자가 구원 역사를 기반으로 한 필연적 성령님의 거듭남 역사를 통하여 이제 사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이 됨으로써 오직 그자에게 확정적으로 임하신 성령님의 권위로 인하여 다른 자들의 죄까지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거듭남으로써 결국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게 되었다. 거듭난 성도만이 인간 자신의 사욕보다도 오히려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따를 수 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확정적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괴로워하시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따르기를 바라시고 결국 그러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전이신 주님의 본으로써 거듭난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거듭난 성도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천국의 열쇠란 하느님의 완전한 성전이신 주님께서 이후 성령님의 거듭남 역사로 하나님의 성전이 될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이다. 거듭난 성도는 그자에게 확정적으로 임하신 오직 하느님의 권능으로 다른 사람의 죄까지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만 졸업한다고 하여 그자가 거듭났다고 보기는 어렵다.어쨌거나 교황은 바로 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스스로를 자처한다. 베드로는 비록 한 번도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단지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교황으로서의 직책을 맡아 사목 활동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사도단 안에서 베드로가 지녔던 위치와 같이 교황 역시 주교단 안에서 같은 위치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즉 주교들 가운데서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로서 별개의 독립적인 주교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지만 교회의 최고 목자의 자격으로 단독적으로도 장엄 교도권을 사용할 수 있다. 베드로는 선교를 위해 로마로 갔다가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1세기 이래(30–130) 베드로의 주교좌였던 로마는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받아들여졌으며, 다른 곳과 비교하여 이례적으로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의 수위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미 각 지역 교회들에 의해 공인되었다. 그 중 중요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95년경 코린토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제4대 교황 클레멘스 1세는 코린토 교회의 분쟁을 조정하고, 조기에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서신을 써서 보냈다. 이 서신에 대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경의는 지극하여 1세기 동안 이를 성당 안에서 낭독하는 관례가 만들어지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제14대 교황 빅토르 1세는 소아시아 교회에 부활절의 날짜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을 때, 로마 교회가 종래 지켜온 것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제15대 교황 제피리노는 몬타누스가 최초의 교회 분열을 일으켰을 때, 그를 파문했다. 제16대 교황 갈리스토 1세는 참회한 죄인에 대한 엄격한 처치를 완화시키라는 명령을 온 교회에 내렸다. 그는 또 삼위일체의 교리를 잘못 가르친 살베르티오를 파문했고, 이때 그는 “으뜸 사도의 후계자이므로 베드로의 권위로써 이를 선포한다”고 선언했다. 189년 교부 이레네오는 저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의 수위권을 옹호하였다. “모든 교회, 즉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신도는 이 (로마) 교회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수위권(Potenioren Principalitatem) 때문에 이 교회와 일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로마) 교회 안에는 그들을 통해 전해오는 사도적 전승이 항상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초세기의 교황들은 기독교의 기틀을 다지고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에 일어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교황들에게까지 미쳐 베드로를 시작으로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식스토 2세 등 많은 교황이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이러한 박해는 313년 제32대 교황 멜키아데 때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 제국 내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기독교에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고 삼위일체를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언하였으며, 교회법 6개 조항을 제정하였다. 아울러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주교좌 네 곳을 다른 지역 주교좌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교황들은 모두 삼위일체 신앙의 강력한 지지자였는데, 특별히 교황 리베리오는 삼위일체 신앙을 고수하며 변호했다는 죄로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에 의해 베리아로 유배까지 갔다. 삼위일체 신앙을 받아들인 니케아 그리스도교파는 ‘가톨릭 그리스도교’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380년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동방에서는 세속 권력이 교회보다 위에 있었던 반면에 서방에서는 교황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교황직의 위신이 높아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교황 레오 1세 때였다. 452년 훈족이 로마를 침공하였으나 서로마 황제는 그들의 침략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실망한 로마 시민들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레오 1세는 용감하게 로마 시외로 나가 훈족의 지도자인 아틸라와 만나 담판함으로써 그들을 평화롭게 물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로마는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455년에는 가이세리크가 이끈 반달족이 로마를 공격하였다. 레오 1세는 이번에도 용감하게 가이세리크와 회담하였다. 비록 그는 반달족의 로마 시내 입성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무분별한 약탈과 살육으로부터 로마 시민들을 구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 시민들은 교황을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황들 또한 로마 시민들을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로마를 침공하려는 야만족들과의 정치적 협상에 나섰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사실상 로마 시의 수호자가 되었고, 레오 1세는 훗날 ‘대교황’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한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야만족들은 가톨릭 신자가 되거나 아리우스파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 국왕은 본래 아리우스파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황과 동맹 관계를 맺은 최초의 야만족 군주였다. 이후 서고트족을 비롯한 다른 야만족들 역시 차츰 기존의 아리우스주의를 버리고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교황은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면서 지속적으로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레오 1세에 이어 두 번째로 대교황 칭호를 부여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교회 행정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의원을 지냈던 집안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1세는 고대 로마인의 전형적인 통치 방식인 엄격한 규율과 판결을 통해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더불어 그는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게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켜 서유럽 각지에 성당을 세우고, 전 중세기 동안 사제 양성의 기초가 된 《사목규정》(Liber regulae pastoralis)을 저술하였으며, 전례를 개혁했고, 미사 전문을 오늘날의 형식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착시키는 등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의 후임 교황들은 이탈리아에서 동로마 황제를 대리하는 라벤나 총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교 세력이 정복 전쟁을 통해 영역을 계속해서 확장해가는 반면에 동로마 제국은 갈수록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랑고바드르족의 침입으로부터 동로마 제국이 교황의 토지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교황은 차츰 동로마 황제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 대신 프랑크족에게 자신의 토지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프랑크 국왕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족을 진압하고 이탈리아 땅의 일부를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이로써 교황은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단순한 교회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는 마르케, 움브리아, 라치오 지방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영토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이 영토를 교황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어 그를 서방 제국의 황제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962년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서방에서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황제의 관을 받아 써야만 비로소 황제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왕족 및 귀족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지 안에 성당을 세우고 교황의 승인 없이 성직자를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거나 사임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세속 통치자들의 비호와 간섭을 받으면서 교회의 권위는 갈수록 약해지고 성직자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이러한 악습은 세속 통치자들에 의해 고위 성직자들이 자주 공직에 등용되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900년부터 1050년에 걸친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서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교회 개혁 추진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은 곧 유럽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교회 개혁 운동은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선출되면서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는데, 여기에는 성직매매와 세속 권력의 교회 문제 개입을 방지하고 금욕적 규율을 비롯한 교회 조직의 대대적인 혁신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에 성직 서임권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다툼이 벌이지다가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하인리히 5세 황제가 보름스 협약을 체결하면서 비로소 진정되었다. 이 협약은 성직자의 세속적인 지위와 종교적인 측면을 엄격히 구분했고, 황제가 성직 서임권을 포기한 대신 주교 후보가 여러 명이어서 의견이 통일되지 못할 경우 황제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황제로부터 세속 재산과 속권을 부여받은 주교는 황제의 봉신으로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할 의무를 갖게 했다. 이로써 교황은 성직 서임권을 보장받는 대신 황제는 주교에게 세속적인 직책을 수여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회법 제정을 통하여 교회 쇄신을 이끌어냈다. 7세기부터 칼리프가 이끄는 이슬람교 세력이 지중해 남부의 대다수 지역을 정복해가면서 기독교 세계는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109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는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이슬람교의 침략에 맞설 군사 동맹을 요청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이에 응답하여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과거 기독교 세력권이었던 지역들을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십자군 소집을 요청하였다. 교황의 권위가 가장 크게 실추된 시기는 867년부터 1049년까지였다. 이 시기에 교황은 경쟁 상대였던 세속 권력에 굴복하여 사사건건 제한과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교황들이 감금되거나 아사하거나 암살당하거나 폐위당했다. 또한, 특정 가문이 무려 50년 동안 교황직을 독점하기도 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교황 요한 12세는 교황궁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 황제는 교회 법정에 요한 12세를 고발하여 폐위시킨 다음 한 평신도를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바로 교황 레오 8세이다. 요한 12세는 로마에 있던 황제의 대리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불구가 되었으나 나중에 교황좌에 복위하였다. 한편 귀족들 역시 황제와 결탁하여 거의 공개적으로 주교들은 물론 교황들마저 매수하는 일이 잦았다. 1049년 교황 레오 9세는 즉위하자마자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몸소 유럽의 주요 도시를 순방하면서 교회가 당면한 직접적인 문제들, 곧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 및 축첩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오랜 기간 사목 방문을 한 결과, 그는 교황의 권위를 가까스로 되찾을 수 있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1054년에 결정적으로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 분열은 교리적 이견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교황들은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사사건건 개입하려 드는 동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프랑크 국왕을 황제로 추대하여 맞서도록 하였다. 양측의 갈등은 8세기 성상 파괴 운동 이래 표면화되었으며, 9세기에는 필리오케 문제와 그에 따른 포티우스의 분리 등에서 만성적인 불화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1054년에는 해묵은 교황 수위권의 시비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동서 교회의 분열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세계의 최대 분열 사건으로 결국 교회는 동서 지역으로 단절됐다. 이후 12~13세기 교황들은 공의회를 여러 번 소집하여 동서 교회의 재일치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동방 교회는 동로마 제국이 점차 세력이 약해지면서 함께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로마와 대등한 위치를 요구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동로마 황제는 두 차례에 걸쳐 동방 교회를 서방 교회에 강제로 일치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중세 기간 동안 교황들이 세속 군주들의 권력을 뛰어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러나 세속 권력과의 대립은 중세 말기부터 교황 측의 패배나 전면적인 양보로 끝나는 양상을 자주 보이게 된다. 동로마 제국에게 군사 원조를 하고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200년 가까이 벌인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의 권위는 크게 하락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영토 분쟁을 벌여 힘을 키우면서 차근차근 중앙집권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 대에 들어 왕권이 크게 강화됨에 따라 교황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1296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각국의 군주들이 교회에 과세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에 필리프 4세는 국내 화폐의 국외 반출을 금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필리프 4세의 대응은 실질적으로 교황청으로 들어가는 프랑스의 화폐 반출을 막은 것이었기 때문에 교황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1300년 교황은 필리프 4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고, 이에 대응하여 필리프 4세의 고문이던 법학자 기욤 드 노가레는 1303년 교황이 로마 남동쪽에 있는 아나니의 별궁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교황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과 결탁해 교황을 습격해 체포했다. 이 사건은 시민들의 반감을 사 보니파시오 8세는 이틀 만에 풀려났으나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후 선종하였다. 이후 교황권은 급격히 쇠퇴했다. 이후 선출된 교황들은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다가, 결국 1309년 필리프 4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로마를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도시 아비뇽에 거주하였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년간 교황들은 아비뇽에 거주하며 프랑스 국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다. 아비뇽 유수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 동안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 선출되었고, 교회의 요직에도 프랑스인 성직자가 대거 차지하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복귀했으나 아비뇽 시절을 겪으면서 발생한 교회의 혼란을 끝나지 않았다. 1378년 이탈리아인이었던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에 선출되자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이에 대해 무효 선언을 하고 프랑스 출신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자체적으로 선출하여 내세웠다. 이후 교회는 40년 동안 서구 대이교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교황은 로마에 머물렀으며, 대립교황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아비뇽에 머물렀다. 그 결과, 교회의 분열은 명백히 국가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잉글랜드와 헝가리,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의 대다수 도시국가, 신성 로마 제국 등은 로마 교황을 지지했으며, 프랑스와 나폴리, 사보이아, 스코틀랜드, 스페인, 시칠리아 등은 아비뇽의 대립교황을 지지하였다. 나중에는 대립교황이 한 명 더 생겨, 세 명의 교황이 서로 자신이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상대편을 서로 파문하였으며, 교회는 혼란에 빠졌다. 서방 교회의 분열은 1417년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종결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 남용에 항의함으로써 대사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에서 일어난 마르틴 루터를 필두로 16세기 초 유럽 전역에는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독일에 이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등장했으며,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다섯 솔라를 내세워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부패한 실태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도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종교 개혁 이후 출현한 개신교에 대응하기 위해 가톨릭 개혁(1560–1648)에 착수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리를 보다 체계화하고 오랫동안 이루어졌던 교회 내 폐단을 철폐하였으며, 개신교도들의 회유를 모색하였으나 그들의 신학적 비판에 대해서는 전통적 가르침을 단호하게 수호하였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교황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맞서 승리를 확정 지었다. 이후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등의 교황들이 교회 개혁에 힘을 기울여 교회를 부흥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서유럽 열강들의 압박으로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으며, 19세기에는 교황령이 두 차례에 걸쳐 소멸을 겪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한 번 소멸당한 교황령은 빈 회의를 거쳐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격동기였던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의해 영토가 줄어들다가 결국 1870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천 년 동안 유지돼온 교황령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세속 권력을 잃은 교황들은 이후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하며 이탈리아 당국과의 모든 교섭을 거부했다. 근대 이후 교황들은 점차 세속 권력을 잃어가면서 본연의 종교적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870년 교황 비오 9세가 소집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공의회에 있다는 주장(공의회 우위설)을 단죄하고 교황 무류성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교황 무류성은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교황이 공식적으로 ‘교좌에서’(Ex Cathedra) 엄숙하게 정의를 내릴 때 오류가 있을 수가 없다는 교리이다. 1901년 교황 레오 13세는 근대 민주주의가 가톨릭교회와 공존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를 승인하고 노동 문제 해결에 힘썼다. 교황 비오 10세는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그는 신자들에게 자주 영성체할 것을 명하고, 첫 영성체 연령을 낮추고, 근대주의 사상을 비롯하여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1926년 교황 비오 11세 때에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와 화해하고 라테라노 조약을 맺어 바티칸 시국을 선언함으로써 교황의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또한, 1937년 비오 11세는 공산주의를 단죄하고 배격하였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을 교황 무류성에 따라 교의로 선언하였다. 현대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놓은 역사적 교황으로는 교황 요한 23세가 꼽힌다. ‘착한 교황’이라는 별명에서도 드러나듯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은 교황이었던 그는 교회 쇄신과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를 선언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뒤이어 선출된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며, 교리와 교회 활동 지침과 규범들을 명확히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동유럽의 공산주의권 붕괴에 일조하였다. 그는 또한 사회 정의와 윤리를 다지는 교회 가르침을 다수 발표했고, 특히 대희년을 기점으로 지난날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업적을 남겼다. 또 국외순방을 가장 많이 실현했으며 가장 많은 성인을 시성한 교황으로 남았다. 교황직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마태 16,18-19: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요한 21,15-17: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루카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가톨릭 호교론자들이 교황 제도를 옹호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성경 구절이 예수가 나중에 베드로(반석을 의미)로 개명한 요한의 아들 시몬을 기반으로 삼아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지상 교회의 우두머리로 베드로를 확립하였고, 그 후계자를 세워 소명을 계승하도록 하였으며, 이리하여 교황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성경에서 새 이름을 받는 것은 새로운 지위나 사명을 뜻한다. 그래서 시몬은 베드로가 된 것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아람어 ‘케파’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케파’는 ‘반석’을 뜻한다. 성경에는 반석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지를 말한다. 문자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힘, 확고부동, 안전하고 견고한 장소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신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에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이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한 사건을 예로 들며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는 예수를 반석에 비유하였다. 이런 근거에서 예수는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예수 자신이 바위였기 때문에 바위로서의 모퉁잇돌의 특성을 시몬에게 부여할 수 있었다. ‘하늘나라의 열쇠’라는 구절은 바티칸 시국의 국장과 같이 종종 교황의 상징물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열쇠의 근거가 된다. 이 하늘나라의 열쇠는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열쇠는 열고 닫는 권한, 즉 모든 권한을 상징한다. 이렇게 교회의 전권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는 “내 양들을 잘 돌보라.”며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라고 거듭 요청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였다. 이 밖에도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 예컨대 성 아우구스티노는 베드로를 ‘제1의 사도’라고 했으며, 에우세비오 같은 학자들도 베드로를 ‘사도의 수령’ 또는 ‘사도직의 원수’라고 표현했다. 베드로에게 위임된 직책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이리하여 베드로란 이름은 고유명사인 동시에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6월 10일 제네바의 세계 교회 협의회 본부를 방문했을 때 자신을 “나는 바오로라고 불리며 이름은 베드로입니다.”라고 소개하였다. 교황직은 많은 직위를 지닌 자리다. 교황을 공식적으로 부를 때는 다음과 같다: 로마 교구를 통치한 주교들은 처음에는 성 베드로의 대리자로 명명됐지만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중세 이후부터는 더 권위적인 명칭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변경되었다. 이 명칭의 유래는 495년에 개최된 로마 시노드에서 젤라시오 1세에게 바쳐진 것이 시초이다. ‘교황’이라는 호칭은 5세기 중엽부터 사용했으며 11세기 동서방 교회 대분열 이후,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직 로마 주교에게만 국한되었다. ‘파파("Papa")’는 교황을 비공식적으로 부를 때 쓰는 명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 ‘papa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으로 교황에게는 ‘성하(聖下, Seine Heiligkeit 또는 Sanctitas)’와 ‘성스러운 아버지(Heiliger Vater 또는 Sanctissimus 또는 Beatissimus Pater)’라는 경칭으로 부른다. 또한, 라틴어로 최고 사제장이라는 뜻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는 뜻의 파키오(facio)와 ‘가장 으뜸인 자’라는 뜻의 막시무스(Maximus)를 합성한 말로 말하자면 교황은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최고의 연결자 또는 대리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황의 서명은 통상 ‘교황의 이름, PP, ○세’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바오로 6세의 경우 ‘Paulus PP. VI’라고 서명한다. PP는 파파(Papa)의 약어이며, 여기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약칭인 ‘P.M.’ 혹은 ‘Pont.Max.’를 추가 기입하기도 한다. 회칙 등의 공식 문서에는 정식으로 ‘교황의 이름, 가톨릭교회의 주교(Episcopus Ecclesia Catholicae)’로 서명한다. 문두에는 ‘교황의 이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주교(Episcopus Servus Servorum Dei)’라는 서명을 자주 쓴다. 이는 그레고리오 1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관습이다. 또한, ‘서방 총대주교(Patriarcha Occidentis)’라는 명칭도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8년부터 교황청 연감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의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새 교황은 전임 교황의 선종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15일~20일 이내에 선출된다. 교황의 선출은 세속 선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다. 라틴어로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콘클라베라 불리는 교황 선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에서 이루어지며 국적이나 출신 등에 관계없이 80살 이하 전 세계의 모든 추기경들이 투표에 참석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일제히 단절된 채 추기경들은 매일 두 번의 비(非)공개 투표를 하며, 그 결과는 전통적으로 짚이나 종이를 태워 알리게 되어 있다. 짚은 검은 연기를 내고 종이는 하얀 연기를 내는데, 연기는 시스티나 성당 내부의 작은 굴뚝을 통해 성당 정면 오른편에 있는 박공 앞의 한 지점으로 뿜어져 나온다. 성당 밖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연기의 색깔로 새 교황의 선출 여부를 알게 된다. 검은 연기는 새 교황이 아직 뽑히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하얀 연기는 새 교황이 뽑혔다는 신호다. 새 교황을 언제까지 뽑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오래 걸렸던 교황 선거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후임을 뽑는 콘클라베로 1268년에 열려 2년 9개월에서 이틀이 더 걸린 1271년에야 끝났다. 새 교황이 확정되면 그는 “수용한다(Accepto).”는 답변으로 공식 확인하고, 수석 추기경이 회랑 가운데로 나와 군중에게 “하베무스 파팜()”이라고 말하며 새 교황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러면 새 교황이 제단사들이 미리 준비한 임시 제의를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로마 시와 전 세계에게’를 의미하는 라틴어 ‘우르비 에트 오르비’라는 말로 첫 축복을 준다. 만일 새로 선출된 교황이 주교품을 받지 않은 사람일 경우,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은 선출된 교황 당선자에게 주교품을 서품하며 당선자는 주교품을 받은 때부터 로마 주교가 되는 동시에 교황이 된다.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국적을 가져도 상관없다. 역대 교황 가운데 210명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이 중 99명은 로마 출신이었다. 나머지 56명은 프랑스 출신 16명, 그리스 출신 12명, 독일 출신 8명, 시리아 출신 6명, 팔레스타인과 스페인, 아프리카 출신 각 3명 등이다. 잉글랜드,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 아르헨티나가 각 1명이다. 교황 선거에서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당선자는 교황직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즉시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평소 존경하던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자신의 교황명(敎皇名)으로 삼아 공표해야 한다. 새 교황의 이름은 수석 부제 추기경이 곧바로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선출 사실과 함께 공포한다. 역대 교황명 가운데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요한’으로 지금까지 통틀어 23명의 교황이 이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만큼 가장 인기가 있으나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들이 가장 많이 시해당하거나 유폐되는 등 교회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건들이 이 이름과 관련이 깊어서 교황 요한 23세 이전에는 거의 7세기에 가깝도록 ‘요한’이라는 이름을 택한 교황이 없었다. ‘요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름은 ‘그레고리오’와 ‘베네딕토’로 둘 다 총 16명이 있으며, ‘클레멘스’는 14명, ‘레오’ 및 ‘인노첸시오’는 13명, ‘비오’는 12명 등이다. 다만 ‘베드로’는 초대 교황인 베드로만을 위해 쓰도록 정해져 있어 베드로를 교황명으로 쓴 사례는 없다. 이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명명(마태 16,18)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라고 한다. 교황들 가운데 처음으로 개명한 이는 교황 요한 2세로, 본래의 이름인 메르쿠리우스가 이교도의 신을 딴 이 이름이기 때문에 교황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요한 2세'로 이름을 바꿨다. 반면 원 세례명을 그대로 유지한 교황은 16세기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유일하다. 그리고 두 개의 교황 이름을 합쳐서 개명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1세가 처음이며 다음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도 이 이름을 사용했다. 교황의 장례식은 엄격한 형식과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교황의 시종관이 교황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 하고 난 다음 교황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교황의 공식인장)를 교황의 손가락에서 빼내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반지를 두개의 선을 그어 훼손시킨다. 이는 교황의 통치기간이 종식되었음을 의미하며 기타 문서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 다음에는 교황의 시신을 시스티나 경당으로 옮기는데 추기경들과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시신을 호위한다. 시신이 경당에 모셔지면 하얀색 실크와 특별하게 짠 팔리움으로 된 수의를 입힌다. 시신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지고 교황의 주교관이 가슴 위에 놓인다. 교황의 시신은 시스티나 경당의 거대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 아래서 꼬박 하룻밤을 보낸 다음, 다시 성 베드로 대성전 안 클레멘타인 경당으로 옮겨진다. 교황의 시신은 그곳에서 3일간 수십만 조문객들의 조문을 받는다. 이 전통은 과거 로마 제국의 장례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대성전 돔 아래에 있는 중앙 제대에서 거행된다. 장례 미사가 끝나면 시신은 윤이 나게 잘 닦인 삼중 나무관 속에 안치된다. 그 후 교황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문이 라틴어로 읽히며, 그 송덕문은 청동으로 된 원통에 담겨 교황의 발치에 놓인다. 이때 금화와 은화, 동화 등 동전들을 가득 담은 붉은 벨벳 자루를 시신 옆에 놓아두는데, 그 개수는 교황의 재임 연수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이전에 훼손시켰던 어부의 반지를 넣고 시신의 얼굴을 비단 천으로 덮으면 바로 관을 봉한다. 봉해진 교황의 관은 대성전 제대의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을 통해 아래로 천천히 운구 되어서 역대 교황이 묻히는 대성전 지하 묘소 안에 미리 준비한 대리석관 안으로 옮겨지고 나서 거대한 석판으로 덮여 안치된다. 교황에게는 교황을 상징하는 특별한 문장이 있다. 모든 교황들의 문장에는 삼중관을 포함되었지만, 베네딕토 16세과 프란치스코의 문장에는 주교관으로 바꾸었다. 교황관 아래 방패의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금열쇠와 은열쇠가 있는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19절을 참고로 한 것으로, 지상과 천국에서 묶고 매는 교황의 능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교회 문장학에서 열쇠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으로서의 지위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이 지니는 지위와 권위는 1870년 8월 18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의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에서는 다음과 같은 법규들을 제정하였다. 그러므로 복된 사도 베드로가 주 그리스도께 임명된 모든 사도들의 으뜸이요, 투쟁 중에 있는 전체 교회의 가시적인 수장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는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명예 수위권만 받았을 뿐, 참되고 본연의 재치 수위권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중재 없이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된 베드로가 보편 교회에 대한 수위권에 있어서 영원히 후계자를 보유한다는 것이 주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설정 또는 신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는 교황은 이 같은 수위권에 있어서 복된 베드로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따라서, 로마 교황은 오직 감독과 지도의 직무만 보유할 뿐,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안들 뿐만 아니라 온 누리에 퍼져 있는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사안들에 있어서도, 보편 교회 위에 충만한 최고의 재치권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나, 그는 이 최고 권한의 좀 더 중요한 일부분의 권한만을 가지고 있을 뿐 온전히 충만한 권한을 향유하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또는 그의 이러한 권한이 모든 교회와 개별 교회에 대해 동시에 전체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목자들과 신자들에 대해 통상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그리스도교 신앙 초기부터 수용된 전통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가톨릭 종교와 그리스도교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거룩한 공의회의 승인 아래, 다음과 같은 것이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교의임을 가르치고 규정하는 바이다. 로마 교황이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곧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사도적 최고 권위를 가지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보편 교회가 고수해야 할 것이라고 결정한다면, 그는 복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무류성을 지닌다. 이 무류성은 하느님이신 구속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규정지을 때 갖추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의 결정들은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물리쳐 주시기를) 본인의 이 결정에 대해 감히 반대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교황의 교회 내에서 역할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교회법 제331조; 교리서 881)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5세기 페라르-플로렌스 공의회를 통해 서방교회와 신학적 협의를 하고자 하였다. 서방교회가 교황을 반대한 서방의 공의회주의자를 겨냥한 문장인 교황의 수위권 문장에 동의해 주고, 동시에 교황의 권한은 공교회의 공의회와 거룩한 교회법(동방정교회가 제정함)에 합치되어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동방과 서방이 공유하는 공의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정교회는 로마 대주교인 교황이 재치권과 무류성을 언급하는 것조차 용인하지 않는다. 정교회는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5대 지역의 대주교의 자리가 모두 동등한 위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교황 역시 다섯 대주교 중 한 명일 뿐이다. 개신교에서는 기본적으로 교황권 자체를 부인한다. 개신교에서는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표 역할을 하긴 했으나 로마교회에 직접적인 선교 활동을 한 적도 없으며, 로마 감독/주교에서 베드로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토미즘 이후의 교리적 정리라고 인식한다. 서방교회의 전통을 천주교회와 공유하는 개신교회는 도리어 천주교회가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5개 대교구에서 분리된 로마교회로 보며, 교황 역시 12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서방 교회 신학적 정립 이후에 설립된 제도로 인식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대표되는 성도의 믿음이 교회의 기반이며, 전통적 교회 제도는 필요하나 절대적 제도는 복음에 대치된다고 여긴다. 노르만 핀켈슈타인 노르만 핀켈슈타인(Norman Finkelstein, 1953년 -)은 뉴욕, 브룩클린 태생의 미국인 정치학자이다. <홀로코스트 산업>을 비롯한 4권의 저서가 있다. 시오니즘에 대한 이론으로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안 피터스(Joan Peters)가 친이스라엘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한 책 을 비판하며 처음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핀켈슈타인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게슈타포의 방법과 비교하며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인의 비폭력 저항을 지지하고 있다. 이를 유대계 단체들은 반유대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부모로 둔 핀켈슈타인은 이런 비난은 어불성설로 여기고 있다. 자신의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금의 대부분이 어떻게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묘사했다. 노르만 핀켈슈타인은 보편적인 인권의 대변자이고, 따라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인권침해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Kiroro 키로로(, )는 일본 오키나와현 출신의 2인조 대중음악 듀오이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순수한 멜로디가 특징이 이들의 음악은 한국, 대만 등의 가수에 의해 번안되기도 했다. 그룹 이름인 Kiroro는 순수한 일본어가 아니라 아이누어 토대로 만든 이름이다. 1996년 인디 데뷰하였고, 1998년 1월 〈오랫동안〉(長い間)으로 메이져 데뷰하여 같은 해 6월 〈미래로〉(未来へ)를 발표했다. 1998년, 1999년, 2001년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 두 사람은 오키나와 현립 요미탄 고등학교의 동급생이었다. 졸업 후 타마시로는 나가사키의 대학에, 킨죠는 의료관련 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재학 중이던 1996년에 인디즈로 데뷔했다. 1998년 1월에 메이저 데뷔, 1998년, 1999년, 2001년에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했다. 팀 버너스리 팀 버너스리 경(, 1955년 6월 8일 ~ )은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이다. 1989년 월드 와이드 웹의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고안하여 개발했다. 인터넷의 기반을 닦은 여러 공로로 웹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 중 하나이다. URL, HTTP, HTML 최초 설계도 그가 한 것이다. 차세대 웹 기술인 시맨틱 웹 기술의 표준화에 힘쏟고 있다. 버너스리는 잉글랜드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메리 리 우즈()와 콘웨이 버너스리()이다. 1990년에 낸시 칼슨()과 결혼하였으나 2011년 이혼하였다. 2014년, 버너스리와 로즈메리 리스()가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하였다. 고전주의 음악 고전주의 음악(古典主義音樂, Classical Music)이란, 음악에서 1750년경부터 1810년경까지 주로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발전한 서양음악사조를 말한다. '고전'이라는 말뜻에는 '모범적 예술, 균형적 형식,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성격, 시대초월적 성격'이 포함되어 이미 질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고전주의 음악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음악사학자는 아마데우스 벤트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독일문학에서의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모델로 삼아 고전적이라고 명명하였다. 음악에서 '고전(Klassik)' 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시대 개념이 아니라,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과 다른 음악을 구별하는 질적 개념으로 쓰였다. 이들의 교향곡이 1800년 초 음악회장의 모범적 레퍼토리로 고정되면서, 호프만(E.T.A Hoffmann)과 같은 사람들이 이를 기악음악의 절정으로 평가하였다. 반할, 보케리니, 클레멘티, 케루비니, 메율 등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작곡 양식을 썼으므로, '고전'은 음악사에서 이들 전체를 통칭하는 시대 개념으로 쓰이게 된다. 고전파 음악은 '자연스러움', '단순성', '보편성'을 강조한 결과이다. '자연스러움'은 파악이 어려운 변화나 이론적 딱딱함을 가지고 듣기를 강요하지 않는, 감정적으로 자연스럽게 '같이 느끼게 하는'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단순성'의 추구는 예술 음악의 출발점을 민요적인 것으로 삼게 한다. '보편성'은 세상 사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세계성을 지향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초기에만 강력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어 베토벤과 같이 예술가의 독창성과 작품성이 강조된다. 고전파 음악의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한 기능 화성법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 제2주제의 조성을 으뜸음과 딸림음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여 두 주제의 성격적 대비를 갖게 했다는 점, 그리고 주제를 유기적으로 전개하는 '주제노작(主題勞作)'원리의 확립, 2관편성의 오케스트라,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독주곡과같은 악곡형식을 낳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바로크 시대와 고전파 사이에서 고전파에의 디딤돌 구실을 한 시대를 전 고전파(1720-1760경)라고 한다. 로코코 음악은 18세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반영한 것이나 로코코 시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양식을 '갈랑 양식'(gallant style)이라 하며 대위법적인 수법에서 화성적 수법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며 섬세하고 우아한 멜로디와 단순한 형식, 세속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닌 소곡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이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클라브시니스트인 프랑수아 쿠프랭, 장 필립 라모, 다캥 등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경향에서 18세기 후기에 북독일에서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나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게오르그 벤다, 요한 요아힘 크반츠 등에 의하여 대표되는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정표출을 지향한 감정 과다양식이 일어났다. 또 1770년에서 1790년경 독일에서 발생한 헤르더, 괴테, 실러 등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양식)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디나미크나 멜로디크, 관현악법에 두드러진 대조적 효과를 주었다. 슈베르트, 슈타미츠의 기악곡, 요한 프레데릭 라이히아르트, 첼터, 츰시티크 등의 가곡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빈에서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바겐자일 등이 교향곡의 악곡구성 면에서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만하임에서는 예술을 애호했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의 궁정에서 요한 벤젤 안톤 슈타미츠, 홀츠바우어, 리히터, 카나비히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에 미뉴에트를 쓴 4악장의 악곡 구성, 제1, 2주제의 성격적 대비, 크레셴도, 디미누엔도, 포르테, 피아노 등의 음량변화, 관악기의 중시, 장식법 등이 고전파 음악에 대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있다. 그 밖에 이탈리아에서는 스카를라티, 사키니 등의 쳄발로 소나타, 파리에서는 고세크, 런던에서는 크리스티안 바흐 등이 전기 고전파에 활약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8세기 중엽, 바흐와 헨델에 의하여 완성된 바로크 시대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한 새로운 정점이 이룩되기까지인 1720년부터 1780년경의 시기는 전고전파 또는 초기 고전파로 불리며 과도적인 성격이 뚜렷하게 난다. 고전파 음악의 발달은 주로 기악분야에서 이루어졌으나, 이 시기에는 소나타가 교향곡이나 실내악에서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알레그로의 4악장으로 된 구성으로 점차 고정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성장과 함께 비중이 증대하였고 제3악장에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 형식이었던 미뉴에트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분야에서는 종래 통주저음 악기로 쓰이던 쳄발로가 없어지고 현악기를 주체로 하는 근대적인 2관편성의 형식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합주기술이나 음량변화, 악기법 등에서 새로운 표현이 개발되었다. 건반음악에서는 쳄발로나 클라비코드보다 피아노의 사용이 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전주의 음악을 형성하는 세 가지의 기본적 표현이 나타났는데, 첫째로는 음악상의 로코코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갈랑 양식(Gallant style), 두 번째로는 감정 과다양식, 세 번째로는 역시 같은 이름의 문학운동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슈투름 운트 드랑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만하임, 베를린, 파리, 런던 등에서 널리 자라났다. 전고전파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빈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의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하는 기능화성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주제와 제2주제를 조성적, 성격적으로 대비시켜 포착했다는 점, 주제 재료를 유기적으로 전개시키는 주제노작 원리의 확립, 2관편성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완성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이 시기에는 교향곡 외에 협주곡, 실내악도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 서구음악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룬 고전파 양식의 발전을 위해 다양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음악가들을 지역적으로 살피면 크게 아래와 같다. 새로운 고전파 양식에 주요한 특징으로는 우선 이탈리아의 오페라나 오페라 심포니아, 합주곡 및 호모포닉한 선율이나 반주형을 지닌 클라비어 음악을 들 수 있다. 특히 욤멜리(Jommelli, 1714-1774)는 오페라에서의 표정 풍부한 성악양식을 관현악에 써서 기악분야에서 새 국면을 개척하였다. 실내악이나 관현악 분야에서는 부드럽고 풍부한 울림의 페르골레시(1710-1736)의 선율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2개 주제에 대조성을 부여한 사마르티니(1704-1774), 교향곡의 제1악장 형식에 명확한 부분구성을 부여한 카프아 등의 업적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지역적으로 이탈리아와 북부 독일을 잇는 중개점에 있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가장 밀접한 유대를 지니고 있다. 일찍이 1704년에 몬(1717-1750)이 미뉴에트를 포함한 4악장으로 된 교향악곡을 작곡한 바 있고, 그 밖에도 교향곡의 각 구성요소의 충족을 촉진시킨 작곡가로서 바겐자일(1715-77), 가스만(1729-1774) 등이 있다. 한편 만하임 에서는 만하임 악파가 활동하였다. 북부 독일 악파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작곡가로는 우수한 클라비어 음악을 저술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둘째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1721-1783), 기악곡의 쿠반츠(1697-1773)와 그라운 형제(1702/03-1759) 등을 들 수 있다. 보다 젊은 세대로는 피아노 반주에 의한 가곡을 작곡한 슐츠(1747-1800), 라이하르트(1752-1814), 첼터(1758-1832)가 있다. 프랑스에선 슈타미츠의 교향곡이 즐겨 연주된 것 외에 고세크(1734-1829)가 있다. 런던에서는 일찍부터 시민계급에서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클라비어 음악 및 교향곡의 대표적 작곡가로서는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가 있다. 또 바흐-아벨 연주회로 알려진 아벨(1723-1787)도 있다. 헨델은 영국에 귀화한 뒤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자로 간주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개혁자가 아니며 기성의 형식을 활용하면서 하나의 정점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의 오페라는 아리아에서 각개의 기분을 순수하게 추출하여 묘사함을 기초로 하고 정밀한 구축적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탈리아풍의 벨칸토 양식과 독일풍의 힘찬 내면 묘사를 단순하고 명쾌한 형식 속에서 결합시켜 갔다. 18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파가 바로 오페라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두 스타일은 분명히 분리되어 레치타티보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지며 정서표현은 아리아에서 나타나 있었다. 그 결과로 여러 가지 아리아의 형태가 생겨났으며 아리아가 오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작품 전체의 구성에서 균형을 잃게 되었다. 또 명인예적인 기교를 가진 가수가 환영받아 점차로 가수의 기교 과시를 위한 오페라로 변화해 갔다. 시인인 츠에노와 메타스타지오에 의하여 비극적인 스타일의 오페라에서 코믹한 요소가 분리되자 코믹 오페라는 각국에서 각각 독자적인 스타일을 이룩해 나갔다. 즉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독일의 징슈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흔히 있는 일들을 제재로 하여 단순하고 알기 쉬운 형식의 음악이 곁들여졌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가수만능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항해 음악은 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수가 기교를 과시하거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하는 것을 배제하며 표현력이 풍부한 레치타티보나 오케스트라, 또는 코러스 등의 표현력 증대 등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런 표현 속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를 했다. 베를린 가곡악파는 1753년 베를린의 변호사이며 작곡가인 크라우제의 <송가와 멜로디>로 시작되었다. 이 곡집에는 크반츠나 엠마누엘 바흐, 그라운들의 가곡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제1기의 베를린 악파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속 음악가들, 즉 그라운, 벤다, 마르푸르크, 키른베르거 등이 있었다. 크라우제는 단순한 형식을 지닌 민요를 바탕으로 한 리트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리트는 독립된 클라비어 반주부를 갖고 있었으나 바흐는 게레르트의 종교시집을 작곡하여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제2기 베를린 악파에서는 슐츠, 요한 프레데릭 라이히아르트, 첼터 등이 대표자이나 그들은 크로프슈토크나 괴테, 실러 등 당시의 뛰어난 시에 곡을 붙여 리트를 간결한 형식에 의한 국민적인 가곡으로 승화시켰다. 소나타가 순환형식으로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알레그로' 의 4악장으로 고정된 것은 약 1770년의 일이다. 이것은 급·완·급의 3악장으로 되는 나폴리파의 심포니아파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마지막부터 두 번째에 바로크 모음곡 가운데의 미뉴에트가 곁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전파의 소나타에서는 제1악장이 소나타 형식을 취하여 소나타의 핵심을 형성한다. 제2악장은 템포가 완만한 리트 형식이며 제3악장의 미뉴에트는 이미 바로크 시대의 무용의 성격을 잃고 A-B-A(B는 트리오라 한다)의 3부형식을 취하고 있다. 끝악장은 급속한 템포에 의한 론도 형식과 소나타 형식으로서 소나타의 악곡 전체를 마무리짓는다. 4악장으로 된 고전파 소나타를 확립시킨 사람은 교향곡 분야에서는 만하임 악파의 슈타미츠, 오스트리아의 바겐자일, 몬, 슈레거, 시타르츠아 등이다. 이에 반하여 베를린 악파는 3악장제를 고집하였다. 소나타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고전파의 실내악이나 클라비어곡의 조구성이 되기도 했다. 리토르넬로 형식은 고전파의 시대가 되면서 점차로 소나타 형식으로 대체되고 반주인 현악합주도 관현악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급·완·급의 3악장 형식과 투티와 솔로가 교체하는 스타일은 바로크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협주곡에서의 소나타 형식의 특징으로는 제시부에서 처음에 관현악이 두 주제를 원래 그대로 나타내고, 이어 솔로를 주체로 하여 본래의 제시(이번에는 제2주제가 딸림조로)가 반복된다. 또 재현부가 끝나고 코다에 들어가기 전에 관현악이 쉬고 솔로의 자유로운 카덴차가 삽입된다. 실내악은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 양식이 쇠퇴함과 동시에 종래의 트리오 소나타(바이올린2, 첼로와 통주저음 악기)를 주체로 하는 합주체에서 바이올린2·비올라·첼로로 이루어지는 현악4중주로 중심이 바뀌었다. 이 형식은 하이든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모차르트는 독자적인 색채감각이나 피아노의 숙달로 오히려 현악 5중주나 피아노를 포함한 중주에서 독특한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고전파의 실내악을 예술적 최고봉으로 이끈 사람은 바로 베토벤이었다. 그는 후기의 현악4중주곡에 소나타 형식과 함께 변주곡이나 푸가, 코랄의 수법까지 흡수하여 형식적 통일을 꾀함과 동시에 형식을 탈피하여 깊은 주관적 세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밖에도 현악 3중주, 피아노가 있는 실내악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요제프 하이든은 18세기 후반의 빈 고전파에서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주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 등의 기악형식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만년의 2개의 오라토리오나 미사곡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볼 수 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보다 24세나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뿐만 아니라 서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 등 순수기악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악과 성악, 종교와 세속을 가리지 않고 전작품 분야에 예술적 완성을 가져왔다. 모차르트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음악가의 경력을 시작하였으므로 당연히 작곡도 피아노 분야에서 시작되었으며 평생을 두고 피아노를 사랑하였다. 클라비어계는 당시 아직도 낡은 형태의 건반악기에서 새로운 피아노로의 과도기였으나 여기서 모차르트는 낡은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갤런트 양식에서 베토벤적인 강력한 에너지를 응집시킨 작품까지 폭넓은 표현을 개척하였다. 전통적인 세레나데나 디베르티멘토 등의 기회음악은 당시 아직도 왕후귀족의 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으나 모차르트의 초기에는 이러한 장르에서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 물론 하이든이 철저하게 추구했던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 순수기악의 영역에도 그는 중요한 공적을 남기고 있다. 모차르트는 형식 면에서의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특히 빈 시대의 6곡, 그 중에서도 최후의 3대 교향곡(제39, 40, 41번 <주피터>)에서 고전 교향곡의 완성을 이끌어 베토벤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이와 같은 다채로운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르는 무엇보다도 오페라의 영역일 것이다. 그 중에도 빈에 정착한 후 작곡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서 <마술 피리>에 이르는 오페라 부파와 징슈필의 계열에서 폭넓은 인간표현과 깊은 독자적 표현을 확립하였다. 대체로 예술세계에서의 창조자는 형식이나 어법 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급진적인 혁명가와 이러한 형식이나 어법을 적용하고 순응하는 곳에서 독창적 정력을 발휘하는, 두 가지의 타입이 있다. 18세기 고전파의 쌍벽인 하이든이 전자에 속한다면 모차르트는 후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베토벤은 시대적으로는 대체로 하이든, 모차르트에 가깝고 그들과 더불어 빈 고전파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낭만파 시대의 선구자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로 일생을 거의 전속악사로만 보낸 하이든이나 봉건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차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에 의한 해방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빈 고전파는 베토벤이 이룩한 음악의 형식적 완성과 내용의 숭고함 속에서 양식의 정점을 형성함과 동시에 낭만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슈만 슈만()은 독일어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영어권 인명은 슈먼, 프랑스어권 인명은 쉬망이라 표기한다. 아찬 아찬(阿飡)은 520년에 시행한 신라의 17등 관계(官階) 중의 제6등 관계이다. 일명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하는 아찬(阿飡)은 세분화하여 아찬부터 중아찬(重阿飡) ·3중아찬 ·4중아찬으로 올라가는데, 6두품 신분층은 중아찬으로 승급이 끝나며, 17등 관계에는 아찬만 포함되어 있다. 2중 ·3중 ·4중아찬의 관직은 시랑(侍郞) ·경(卿)으로 집사성(執事省) ·병부(兵部) ·창부(倉部) ·사천왕사성전(四天王事成典) ·대도서(大道署) ·영창궁성전(永昌宮成典) ·위화부(位和部) 등의 차관급이었으며, 복색(服色)은 비색(緋色)으로 신분을 표시하였다. 육두품 출신의 아찬관등 소지자에게 중아찬(重阿飡)·삼중아찬(三重阿飡)·사중아찬(四重阿飡)이라는 중위제도(重位制度)라고 하는 특진제도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중위제도는 어디까지나 아찬관등 안에서의 제한된 승진제도였을 뿐이며, 그 자체가 아찬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서희 서희(徐熙, 942년 ~ 998년 8월 8일 (음력 7월 14일))는 고려 초의 문신, 군인, 외교관이다. 거란의 1차 침략 때,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유명하다. 광종 때의 재상인 서필의 아들이다. 과거 급제 후 원외랑을 거쳐 병관어사로 재직 중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침입 때 거란 측 장수인 소손녕과 담판을 하여 교전을 치루지 않고 퇴각시켰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 종1품. 국무총리)에 이르렀다.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자는 염윤(廉允)이고,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내의령(內議令 종1품. 국무총리)을 지낸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은 통일은 아라비앙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 곧 요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요가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고려가 요에 대해 적대 정책을 유지하자 마침내 요나라도 고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여,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있는 여진 부락을 정벌하고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킨다.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 성종은 장수 소손녕과 80만 대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 성종은 박양유(朴良柔), 서희, 최량(崔亮) 등을 보내어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여 봉산군(오늘날 청천강 이북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고려 성종은 이몽전(李蒙戩)을 청화사(請和使)로 보내 화의를 표명하였으나, 적장 소손녕은 항복만을 요구하였다. 이몽전이 침략의 이유를 묻자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라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만 할 뿐이었다. 이몽전이 돌아와 보고하니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어떤 신하는 투항을 주장했고, 다른 신하는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했다. 이때 서희가 나서서 투항론과 할지론이 모두 옳지 않음을 주장했다. 그때 서희는 요나라의 침공 이유가 소손녕이 밝힌 바와는 달리 고려와의 강화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민관(民官) 이지백(李知白)도 서희에게 동조하였다. 서희는 소손녕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북쪽 땅을 얻었다.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微行)으로 영명사(永明寺)에 가서 놀이를 하려 하자 놀이의 잘못됨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가 주둔하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至尊)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하였으며, 성종이 그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御酒)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비위를 상하게 하자, 성종은 그를 내치려 하였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酒果)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996년에 병으로 사찰 개국사(開國寺)에 요양하게 되자 성종이 직접 왕림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다.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그는 998년(목종 1년) 57세를 일기로 병수하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 서눌(徐訥)·서유걸(徐惟傑)이 수상인 문하시중(종1품. 국무총리)과 재상인 좌복야(左僕射 정2품. 부총리)를 역임했고, 그의 손녀이자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원목왕후)가 되어 그의 가문은 외척가문의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서희장군묘는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산53-1번지에 있다. 그의 묘는 부인의 묘와 같이 있는 합장묘이고, 봉분 아래에 2단의 둘레석을 두른 형태이다. 쌍분의 가운데에 묘비가 서 있고,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1기씩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 1쌍씩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왔다. 처음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왔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였다. 이와 함께 소손녕은 압록강을 건너 봉산군에서 고려군과 첫 교전을 치러 고려군 선봉장을 붙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소식이 함께 전해지자, 고려 조정은 큰 충격에 빠져 할지론으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이 크게 일었고, 고려 성종도 서경의 쌀을 버리도록 칙명을 내렸다. 그러자 서희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틈을 잘 엿보아 움직이는데 있을 뿐입니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려 하십니까?" "이번에 서경이북의 땅을 내주더라도 삼각산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앞으로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주시겠습니까?"라며 쌀을 버리라는 것과 할지론을 모두 비판했다. 그러면서 "저들은 실은 우리에게 공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의 숫자만 보고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며 거란의 80만 대군은 한낱 부풀려진 허풍이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성종도 한번 싸워본 뒤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다 하며 거란군에 맞서 봉산군으로 서희를 출전시켰다. 문관출신이며 병관어사(兵官御事), 즉 현재의 국방부 대변인급에 해당하는 지위를 지낸 서희는 거란군 총사령관 소손녕과 직접 담판을 하기 위하여 거란군 주둔지 봉산군으로 갔다. 서희가 소손녕이 머무는 장막으로 가자, 거란군은 "먼저 대국의 귀인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갖추어라!"라며 위협적으로 서희를 압박하였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가? 어서 절을 올려라!"라고 하자, 서희는 크게 노하면서 "무슨 말인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하는 예는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숙소로 돌아가 움직이지 않았다. 소손녕이 내심 서희의 인품을 비범하게 여기며, 결국 뜰에서 서로 마주 절을 한 뒤에 동서로 마주 앉았다. 결국 소손녕이 서희를 압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비상식적인 예를 고집했으나 오히려 서희가 기선을 먼저 제압하게 되었다. 홀로 거란군 진영 내에서 담판을 하는 결코 대등하지 않은 불리한 상황이지만, 만약 서희가 먼저 기세에 눌려 굽히고 들어갔다면 협상 내내 소손녕에게 끌려다녔을 것이다. 서서히 협상이 진행되자 소손녕은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다"라고 하며 침략명분을 밝히자, 서희는 "그렇지 않소. 우리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그래서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서경을 국도로 정한 것이오."라고 하며 오히려 "땅의 경계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거늘 어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하시오?"했다. 이는 전쟁의 침략 명분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역사적 연고권 논쟁이었다. 고구려의 역사적 연고권 논쟁인 명분 싸움에선 서희가 보기좋게 승리하였다. 그러자 소손녕은 다음으로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바다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고 있는가?"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즉, 거란은 거란과 송과의 전면전이 발생시 배후에 있는 고려의 침입이 두려워 먼저 고려가 송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실질적인 거란의 침략목적이었다. 소손녕의 말을 통해 이와 같은 거란의 속마음을 간파한 서희는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여진이란 핑계거리를 만들어낸다음 "만일 우리가 여진을 쫓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그곳에 성과 보를 쌓아 길을 통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귀국과 국교를 통하지 않겠소?"라 하며, 서희의 애초 목적은 거란군의 철수였으나 오히려 이 담판기회를 통해 고구려의 옛땅 회복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결국 서희는 거란과의 협상에 성공하며, 서경이북땅을 잃으며 항복하는 것이 아닌, 강동 6주의 땅을 거꾸로 얻어냄과 동시에 소손녕은 서희에게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고 떠났다. 거란 거란(: , : Kitai, ) 또는 키탄(Khitan)은 4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내몽골, 중앙아시아, 랴오닝 성, 헤이룽장 성, 지린 성, 연해주, 함경북도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2세기까지는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이참 이참(李參, ~ )은 독일 출생이며 대한민국에 귀화하였고 영화배우 겸 연기자 분야에서 은퇴한 작가 겸 대학 교수이자 저술가이고 방송인 겸 기업가이며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마인츠와 대한민국 서울 용산을 본관으로 하는 독일 이씨의 시조이기도 하며 호(號)는 성남(城南)·산남(山南)이다. 그의 현재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이다. 2009년 3월, 연기자 분야에서 사실상 은퇴를 한 그는 2009년 7월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되었다가 2013년 11월에 사퇴하였다. 그는 독일(아직 분단 당시 서독 영토) 라인란트팔츠주 바트크로이츠나흐()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이름은 베른하르트 크반트()이다. 1986년 대한민국에 귀화하면서 이한우(李韓佑)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2001년 이참(李參)으로 개명하였다. 그가 애초 이름을 이한우로 했던 것은 "대한민국을 돕겠다."는 뜻이었고 다시 이참으로 바꾼 것은 "대한민국 문화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이 독일의 과학기술과 같아 양국의 우호에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참은 애초 본래 통일교 신자로서 前 부인이었었던 이미주(개명 前 이름은 이영복) 여사도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의 주례로 만났다(통일교에서는 이를 "축복 결혼식"이라고 함). 자신의 이름을 "이참"으로 개명한 이유도 애초 본래 위 내용에 세세히 상기된 뜻이라기보다는 원래 통일교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할 때 "참부모(교주 문선명 부부를 지칭)" "참사랑" "참가정" "참평화" 등 "참(영어로 true)" 이라는 접두사를 이용하여 교리를 전파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따온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78년 통일교 예하 '초교파 기독교 연합회' 관련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그는 통일교에 감화되어 한국에 살기로 결심한다. 1982년 통일교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 이미주와 1987년에 결혼하였으며 15년 후 2002년 4월 30일을 기하여 이혼한 그는, 전처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주한 독일문화원에서 13년간 독일어 강사를 지낸 후 선문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경찰대학, 한양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한독상공회의소 이사(1992년 ~1994년)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009년 1월을 전후하여 연기자 분야에서 사실상 은퇴를 한 그는 현재 대한민국 감사원 명예 감사관, 한국사회문화연구원 이사장, 충청남도 국제협력위원,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어와 독일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라틴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이한우라는 이름을 버리고 '참여한다', 참신하다'라는 의미의 이참으로 개명하고, 자신의 새이름에서 딴 (주)참스마트를 설립한다. 자신의 이름을 "이참"으로 개명한 이유는 위의 뜻이 아니라 통일교에서는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할 때 "참부모님(문선명 부부를 지칭)" "참사랑" "참가정" "참평화" 등 "참(영어로 true)" 이라는 접두사를 이용하여 교리를 전파하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이참은 본래 통일교 신자로서 前 부인 이미주 씨도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의 주례로 만났다 (통일교에서는 이를 "축복 결혼식"이라고 함). 한국에 자리잡은 지 몇 년 후에 통일교를 떠나 장로교로 개종하였다. 소망교회에 출석하면서 이명박과 친분을 갖게 되고 이를 계기로 그의 대통령 선거 때부터 적극 참여하여, 한반도대운하 특보를 지낸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2년째인 2009년, 한국관광공사에 대한민국 공기업 최초의 외국계 한국인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위의 설명중 "한국에 자리잡은지 몇년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통일교를 종교로 가진 기간은 1978년 한국에 통일교 세미나 참석차 방문한 이후 2000년대까지 수십년에 달한다. 따라서 "한국에 자리잡은지 몇년후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이참은 한국에서 통일교가 크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평소 자신이 통일교 신자라는 것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는데 결국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부인과는 2002년에 협의 이혼하였다. 이후 이참은 압구정동에 있는 소망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여기서 결국 2006년에 이명박과 인연이 되어 2009년 한국관광공사의 사장까지 꿰차게 된다. 2013년 11월 성추문 논란에 휩싸여 한국관광공사 사장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1980년 교육방송 독일어 강의를 시작으로, KBS1《지구촌 파노라마》의 고정 게스트, 드라마의 연기자, KBS1 《6시 내 고향》의 리포터와 SBS 《출발 모닝 와이드》에서 《이한우의 요리 세상》등을 진행하였다. 이 밖에도 기업 컨설턴트, CF 모델 등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일 (방송인) 하일(, 1958년 12월 2일 ~ )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변호사이자 외국인학교 설립자이며, 모델, 방송인이다. 미국 유타주 출신이며 대한민국 귀화 이전의 미국 이름은 로버트 브래들리 할리(Robert Bradley Holley)이다. 광주외국인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1958년 12월 2일,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서 태어났다. 그의 9대조는 메이플라워호 선장이었던 윌리엄 브래드퍼드이다. 1978년 모르몬교 해외 선교 활동으로 대한민국에 처음 방문하였고, 미국으로 돌아가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 후 국제법 전문 변호사가 됐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와 1985년부터 부산에서 생활하면서 1987년 한국인 여성 명현숙과 결혼하였으며, 슬하 3남을 두고 있다.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며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1997년 대한민국에 귀화하면서 하일(河一)로 개명하였고, 영도 하씨(影島 河氏)의 시조가 되었다. 부산광역시 영도구는 하일이 처음 대한민국 생활을 시작한 장소이다. 둘째 아들 하재욱은 대한민국 육군 사병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하고 제대하였다. 1996년 부산외국인학교, 1999년 광주외국인학교를 설립하였다. 2001년 전북외국인학교도 설립하였지만 경영난으로 인하여 폐쇄하였다. 2016년 3월 11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자 추천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2019년 4월 8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체포됐다. 그러나 4월 10일 구속기각됐다. 하일은 4월 초 서울 자택에서 인터넷으로 구매한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하일과 함께 마약을 투약했던 남성은 "할리와 연인 관계로 함께 마약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방송인 하일은 SBS 출연금지 명단에 올라야만 했다. 로버트 할리 로버트 할리는 다음의 동명이인이 있다. 확률론 확률론()은 확률에 대해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확률론은 비결정론적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주요 연구 대상으로는 확률 변수, 확률 과정, 사건 등이 있다. 확률론은 통계학의 수학적 기초이다. 또한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매 순간 직접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하여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확률론에 기반한다. 통계역학 등에서, 완전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복잡계를 기술하는 데에도 확률론적 방법론은 큰 역할을 한다. 이에 더해 20세기 초에 등장한 물리학 이론인 양자역학은, 미시계의 물리적 현상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인 본질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수학적 확률(mathematical probability)은 각 사건이 발생하는 확률이 같다라는 것으로, 시행에 대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N가지이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의 수가 K가지 일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확률이 formula_1인 것을 뜻하며, 선험적 확률 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주사위 하나를 던질 때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총 1, 2, 3, 4, 5, 6으로 6가지이고 1이 나오는 경우의 수는 1가지이다. 따라서 수학적 확률에 따르면 주사위 눈 1이 나올 확률은formula_2이다. 어떤 시행의 경우 수학적 확률처럼 각 사건이 같은 정도로 일어날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실제로 6번 던져보면 1, 2, 3, 4, 5, 6이 각각 한번씩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실제로 같은 시행을 여러 번 반복하여 얻을 수 있는 횟수를 통해 나오는 확률이 통계적 확률(empirical probability)이다. 큰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은 통계적 확률과 수학적 확률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리이며, 대수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큰수의 법칙은 "어떤 독립시행에서 사건 K가 일어날 횟수를 k라고 하고 시행 횟수를 n이라고 하면, 통계적 확률에 따른 확률 formula_3는 n이 한없이 커질 때 formula_3는 일정한 값 a에 가까워진다"가 된다. 따라서 위의 설명을 식으로 나타내 보면 와 같다. 기독교 기독교(基督敎, ), , From Ancient Greek 개신교 개신교(改新敎) 또는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는 16세기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교회의 개혁가들의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기독교의 한 전통이다. 11세기 교회 대분열로 공교회(보편교회) 중심이었던 지금의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리되었고, 이후 16세기 서방교회내에서 종교 개혁으로 '반대파'인 천주교회와 '찬성파'인 개신교가 분리되면서 기독교의 가장 주된 사상과 종파인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가 형성되었다. 16세기 서방교회의 사회, 정치적 문제로 인해 종교개혁 요구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을 찬성하고 주도한 복음중심주의자들이 '개신교회'로, 서방교회 종교개혁을 반대한 교황중심주의를 지지한 자들이 '천주교회'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루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나, 사실 10세기 창부정치와 14세기 아비뇽 유수 사건 등으로 서방교회 개혁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15세기와 16세기 서방교회의 심각한 문제로 인해 루터 전후에 다양한 지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복음'을 중심으로하는 개혁운동들이 전개되었다. 개신교는 초창기에는 특정 교파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복음'을 다시 회복하고 '복음'을 교회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변혁 활동으로 서방교회 내부의 기독교 운동이었다. 유럽지역에서 유럽 본토인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지역에서는 개혁반대파 제도권의 교황중심주의자들이 '복음주의'로 개혁 찬성파들의 주장을 지적하며 찬성파를 '복음주의자'로 칭했으며, 영국 지역에서는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와 연계된 정치제도에 '항의(Protest)'하며 등장한 모든 운동과 전통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먼저는 루터를 따르는 루터교회와 츠빙글리, 칼빈 등을 통해 형성된 개혁교회가 형성되었고,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같은 오늘날의 주요 교파들은 물론이고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오순절주의, 미국의 대각성 (운동) 같은 흐름들도 모두 개신교 전통에 포함된다. 이처럼 정교회나 천주교에 비해 다양한 흐름들이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주며 분류/합류되는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개신교 내의 교파 분열의 역사와 신학 논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복잡하지만, 대체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동의,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성직 구조나 정치제도 보다는 만인 제사장설을 따르는 성직 이해와 그에 따른 교회제도인 회중제, 감독제(주교제)(루터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 다양한 교회제도 채택, 성서에 나오지 않는 성례전에 대한 반대(로마 가톨릭은 세례, 성체, 고백, 견진, 혼배 등 7개, 개신교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성만찬, 세례 2개이다.)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개신교회의 신앙고백은 믿음의 새로운 조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 안에 증언된 복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방법이므로 성서에 비추어 올바른 교리와 제도를 재조명하였고 성경에 따르지 않는 조항은 폐기하였다. 개신교 신앙고백에 따라 새롭게 조명된 교회 전통과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역할을 개신교회의 전통으로 보며, 교회구조 이해, 성찬식의 변화, 교회학교, 성경 연구, 사회운동에서 사회제도까지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적 사안인 교회 전통으로만 좁혀서 종교개혁 신학, 성찬 예식, 교회 구조, 성직자 이해, 성경 연구만을 범위로 살펴본다. 서방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종교개혁신학이 16세기에 나타났으며, 개선주의와 재건주의 개신교 신학 전통으로 형성되었다.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초기에 형성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은 서방교회를 위한 '개선주의'였고, 개선주의 신학을 수용하여 스위스 중심으로 형성된 츠빙글리와 칼뱅의 종교개혁 신학은 서방교회를 위한 '재건주의'로 발전하였다. 서방교회 개혁에 대한 신학적 개선주의는 서방교회 신학전통에서 공교회(보편교회) 전통에서 벗어난 사항을 제거하고, 서방교회 전통에서 기독교적이지 않은 요소를 바르게 잡고자 하는 신학 전통으로 흔히 개신교 공교회주의(보편교회주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신학적 개건주의는 11세기 이후 형성된 서방교회 신학전통에 비기독교적 요소가 너무 많아서 개선보다는 초대교회와 7세기까지의 보편공의회를 따라 새로운 공동체로서 재형성하여 재건하고자 하는 신학전통으로 흔히 개혁주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개선주의 즉 개신교 공교회주의 신학의 영향은 루터교회에서 성공회교회, 감리교회, 구세군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의 교단으로 형성되었고, 재건주의 즉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은 개혁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개신교회의 등장으로 서방교회에 계급적 교회구조에서 공교회구조의 재조명, 새로운 구조의 교회가 등장하였다. 계급적 획일성을 벗어난 다양성을 지닌 기독교 교회가 나타났다. 공교회 구조의 재조명, 서방교회 즉 로마교회의 절대적 계급주의의 교회구조에서 벗어났다. 종신제가 아닌 감독(주교)과 대감독(대주교)가 임기제인 연합구조의 교회조직을 강조하는 공교회구조로 재조명하였다. 초기 종교개혁 교단이었던 루터교회와 영국성공회는 전통적 공교회제도를 수용하며, 절대적 대감독(대주교)이 아닌 연합적인 공교회(보편교회) 구조의 교회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였다. 이는 이후 등장한 감리교회나 구세군, 오순절 교회 일부에서도 감독들은 임기제로 선발되고, 공교회 감독의 임무를 따라 수행하는 초대교회의 구조를 재형성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교회구조로 원로구조의 교회가 등장하였다. 원로나 장로를 선발하여 그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소명이 있는 이가 목사의 역할을 하는 원로구조의 교회 구조가 칼뱅에 의해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 일부 등에서 이를 따라 교회 구조를 형성하였다. 회중제도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영국성공회의 감독 중심 교회가 공교회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더욱 신도을 회중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회중을 중심으로하는 교회로서 이중에 원로 또는 장로를 선발하여 목사의 역할을 맡기는 구조의 회중제도 교회가 시작되었고,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스도교회 등이 이런 구조를 따른다. 성찬은 개신교회에서 공교회와 서방교회의 전통인 상시적 예배 예전, 즉 매주 또는 매달 한번 이상 행하는 예배로 회복하였다. 기독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말씀의 성례와 함께 성찬의 성례는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공교회 전통을 되살린 개신교회의 성찬은 동일한 성도인 성직자와 신자가 함께 마주보며, 매주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예전이 되었다. 공교회의 성찬에서 멀어졌던 서방교회의 기존 성찬은 11세기 이후 교황과 직계를 이루는 계급적 성직자로 이뤄진 로마교회에서 계급적 방식으로 변화하였고, 철저한 성직자 중심의 예식으로 변화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천주교회의 성찬 예식은 19세기까지 일년에 두 세번 정도 하던 성례전이었고, 20세기까지도 성직자가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성도를 등에 지고, 예전이 진행되는 동안 성도들을 향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직자의 참여만이 있고 포도주를 성직자가 마신 이후 빵만을 나눌 때 성도를 향해 섰다. 개신교회의 성찬은 성도와 성직자가 동등하게 참여하고 나누는 상시적 예전으로 회복하였다.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부터 개신교회의 성찬은 성직자와 성도가 알아듣는 해당 지역 언어로 진행하였고,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어 먹고, 성찬 예전을 거행하는 동안에도 성직자는 예배당 십자가를 등에 지고 성도들 향해 서서 성찬 예전과 축사를 하였고, 마칠 때까지 성도들을 바라보았다. 이는 개신교회의 전통이 되어 성찬 탁자에 십자가가 놓이고, 포도주와 빵이 놓이는 모습의 개신교회 성찬대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다양한 형식의 성찬 예전이 풍성하게 발전하였고, 성찬 관련 목회신학적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이후부터 성찬을 회복하기 위해서 16세기 특정 절기만 거행하던 천주교회의 성찬 방식을 거부하고, 복음을 전하는 예배로서 성찬과 성도의 요청에 의해 성찬예전을 상시적으로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개신교회의 대부분 교단은 성찬을 한 달에 한번 이상을 요구하며, 매주 거행할 것을 요구하는 교단도 있다. 이로 인해 성찬의 변화와 예배의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였고, 예배당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 성직자가 언제나 거행할 수 있는 예배가 되었다. 현재도 개신교회의 일부 교단에는 성도들이 성찬을 요청할 경우에는 성직자는 성찬이 포함된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천주교회는 이런 개신교회의 성찬 예전의 변화를 인식하고, 19세기 1차 바티칸회의에서 매주 성찬을 교회법으로 정하였다. 20세기 2차 바티칸회의에서는 성찬 방식에서 성도들을 바라보는 개신교회 형태와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의 성찬전례로 변경하였으며, 빵만이 아니라 포도주도 줄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개신교회이 성직자는 목사이다. 성직자의 이해는 10세기 이전부터 서방교회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전에는 귀족과 유사한 지위를 누렸으며, 성도과 성직자는 엄격한 계급적 관계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개신교회의 성직자인 목사는 성도와 평등적 관계의 시각에서 시작된 성직자 이해이다. 개신교회는 목사의 신자와 동일한 성도로서 그 직분은 거룩한 사명이라고 인식한다. 이 사명에 대한 관점이 교단마다 차이가 있으나 성도와 목사는 계급적 관계가 아니라, 자격이나 직무의 차이로 인식한다.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교단들에서는 목사의 자격을 지닌 것으로 보며, 개혁주의를 따르는 교단들에서는 직무의 차이로 인식한다. 이는 절대적 신분제도를 거부하는 평등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동등한 하나님의 성도이며, 똑같은 피조물임을 밝히는 성직자 이해이다. 서방교회는 16세기까지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교회전통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를 보였다. 교리와 칙령에 따라 규정된 규범을 따른 교회법이 뿌리를 두는 전통을 강조하였다. 이로서 초대교회부터 전해지는 역사적 성경해석이 사라지고 교황의 해석과 교회 학자의 핵석과 교리를 따르는 알레고리 성경해석이 주축이 되었다. 개신교회는 성경과 교회전통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발전시키고 이를 주축으로 하는 서방교회의 문을 열었다.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전통적 복음주의 사상을 뿌리로 한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성경을 기존 교리신학, 즉 조직신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고, 교리의 증빙자료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성경 자체가 전하는 복음을 찾고자 성경 저자의 의도와 작성된 시대, 시대배경, 본문의 구조 등을 연구하여 성경이 직접적으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교리신학의 일부였던 성경연구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발전하였다. 문헌과 본문연구, 역사적 배경, 문체, 구조를 연구하는 다양한 성경 연구 기법이 나타났으며, 깊이 있는 현대의 성경 해석, 셩경 주석의 핵심적 이론과 방법이 개신교회의 성경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천주교회와 정교회의 성경연구 역시 개신교회가 형성한 성경연구 기법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다양한 연구 교류가 교파를 넘어 이뤄지고 있다. '개신교(改新敎)'라는 표현은 고칠 개(改)와 새롭게 할 新을 쓴 한자어 표현 즉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한 표현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신교’의 의미로 생각하고 사용하나, ‘기독교(基督敎)’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를 한자로 번역한 말이기 때문에 개신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등과 함께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종교들을 일컫는 말이다. 또 개신교도를 16세기에 칭하던 용어인 '복음주의자', '복음주의'(Evangelicalism)를 개신교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럽지역에서 사용하는 '에반겔리세'(Evangelische)라는 용어는 개신교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16세기 전통 복음주의와 19세기에 영미의 보수적 개신교회가 중도 및 진보적 개신교회와 분리하기 위해서 자칭하는 용어에서 등장한 '신복음주의'(복음주의)와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의 의미)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독일의 슈파이어(Speyer)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Reformation)이 1517년에 시작되었다. 1529년 증오심을 가진 가톨릭 실세들과 독일 제국의 일부 군주들이 슈파이어에 모여 제국 의회를 열고 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의 활동을 복음주의자로 부르지 않고, 제국회의의 의회의 지침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지칭하며 사용했고, 이 활동을 금지하는 행위로 포고문에 기록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5세(카를로스5세) 치하에서였다. 슈파이어 의회(Diet of Speyer)의 명목상 목적은 터키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키 위해 모인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거나 추종자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복음주의자, 즉 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은 종교개혁가들을 핍박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칼 5세에게 가톨릭파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김현배에 따르면 제국 의회는 더 이상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공포하면서, 명령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황제의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또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1521년 5월 ‘보름스 칙령’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이에 루터의 추종자들은 다수의 가톨릭파에 의해 결정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의사항을 반대하였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 역시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종교개혁 진영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판단했으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에 복종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루터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던 1526년 의회 결정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1529년 4월 25일,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칼 5세의 종교정책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문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해 황제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항거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항의한 사람들은 “Protestant”(항의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것이 현재 영어권과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되었다. 당시 항의서에는 작센의 선제후 요하네스, 헤센의 영주 필립,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의 게오르크, 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안할트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14개 제국 도시들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이다. 14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켐프텐, 뇌르들링엔, 하일브론, 이스니, 생 갈렌, 로이틀링엔, 바이센부르크, 빈추하임, 멤밍엔 등이다. 개신교의 주요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의도대로 회복하여 교회를 올바른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하는 신학적 배경을 지닌다. 기존 왕권적 교회구조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구조를 따르고, 복음이 기록된 성경을 따라 하나님이 준 인간의 이성과 경험, 그리스도 몸으로서 기독교회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회복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고, 복음 안에서 복음을 따르는 믿음과 사랑, 소망을 지닌 그리스도를 닮은 인간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 기본적 교의를 실천하기 위한 개신교 교파별 이해가 있으며 폭넓은 시도와 노력이 이뤄진다. 종교 개혁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개신교 교파로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따르는 루터교를 비롯한 장로교, 감리교, 메노나이트, 재세례파, 후터라이트, 아미시파, 성공회 등이 있다. 근대 영국에서는 성공회의 종교개혁과 예복사용 등의 제도에 집중된 성공회의 종교개혁(즉, 초기 영국 성공회의 가톨릭적인 면)에 반대하며, 오직 성서만의 권위를 인정하는 청교도들의 종교개혁 운동 이 등장했으며, 이들 청교도 운동에서 회중교회와 침례교회가 발전했다. 기독교가 교단 간의 분열과 갈등으로 선교에 지장이 있음을 경험으로 느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출범하였는데. 여기에는 개신교회, 정교회가 회원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참관인들을 파송하고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에서는 비 본질적인 교의보다는 본질적인 복음과 제자도의 실천을 강조하며,성찬예배 전례인 리마전례(Lima Liturgy),세계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정공동성서정과(RCL)에 근거한 교회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기독교단들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구세군 대한본영,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정교회 한국 대교구, 기독교한국루터회가 회원교단 및 협력교단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실천한다. 신복음주의 운동은 흔히 복음주의 운동으로 불리며 19세기 유럽의 진보적 신학에 대립하는 보수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개신교회의 복음을 전하는 의미에서 "복음주의자"이라로 자칭하여서 개신교회의 종교개혁 사상을 따른 전통적 "복음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신복음주의"라고 부른다. 신복음주의는 반지성주의, 기독교 근본주의의 문제를 안게 되는 보수적 기독교계의 움직임에 견제하는 흐름이 되었다. 개신교계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달랐던 신복음주의 계열 교회들과 교인들의 연합체인 세계복음주의연맹(WEA)가 결성되고 1974년 로잔 회의에서 신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의 사회선교를 강조하는 로잔 언약이 선포되었으며 양 기구 간의 협력이 가속화되는 등 가시적인 거룩한 일치의 결과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어 의견차가 있음에도 교회 일치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다. 1517년에 일어난 루터의 서방교회 종교개혁운동은 개혁 찬성파의 종교 개혁 운동에 따라 기존 서방 교회의 제도와 가르침이 왜곡된 교회제도로 보는 교회와 새로운 교회들이 교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개혁 찬성파은 크게 루터를 중심으로하는 온건 개혁파, 즉 개선주의자와 츠빙글리를 잇는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혁파, 즉 재건주의자의 두 양상이 개신교내에서 나타나 교단을 형성하는 기준이 되었다. 개선주의 성향의 교회, 루터는 당시 교회를 기독교답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개선하여 복음을 강화하는 개선적인 종교개혁사상을 지녔다. 칼뱅 역시 초기에는 루터와 유사하였으나 점차 서방교회의 제도를 복음 위에서 재건해야 하는 재건적인 종교개혁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개선주의 즉 흔히 개신교 공교회주의 또는 보편교회주의라 하며, 초대교회와 12세기까지의 공교회(보편교회)의 제도와 사상을 보전하고 활용하고, 공교회의 사상에 따라 왜곡된 서방교회의 교황주의와 부조리를 제거하는 기독교의 방향을 따르는 교단들이다. 독일과 유럽의 루터파교회와 영국의 성공회, 감리교회, 구세군교회, 성결교회 일부와 오순절교회 일부가 이에 해당하며, 대부분 감독제를 시행하여 감독(주교)과 목사(사제)의 직제와 전통적인 자격으로서 성직으로 목사를 보며, 적용의 범위는 다르나 교회는 감독의 파송으로 시작된다고 보는 초대교회의 사상을 따른다. 모든 교인이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설을 따르며, 이는 모든 이들이 제사장과 같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동등한 교인을 의미하는 것이나, 모든 신도가 목사라는 의미는 아니다. 개선주의, 즉 공교회주의의 성직자 이해는 마치 동일한 권리를 가진 국민이지만 '판사'는 일정 훈련 과정을 거쳐 임명을 받고 특정한 자격(변호사 자격)을 지녀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재건주의 즉 흔히 개혁주의라 하며, 16세기 새롭게 기존 교회와 달리 초대교회의 사상으로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혁대상이 사방교회 교황주의나 부조리한 제도, 관습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 4세기 경까지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야 보았다. 유럽의 개혁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일부가 이에 해당하며, 목사와 교인은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고 보았고, 장로를 선발하여 이 중에 한 명을 목사가 되게 하거나 장로를 목사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만인제사장설을 문자대로 따라 모든 교인이 제사장의 자젹을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재건주의 내에서도 '급진'와 '온건'한 교단이 있다. 개혁교회, 장로교회, 오순절교회 교파 등이 온건한 재건주의 범주에 있다. 이들은 장로들을 세워 그 중에서 한 명을 목사로 세우는 원로주의 구조를 형성한다. 침례교회, 회중교회, 그리스도교회 교파 등이 재건에 급진적 사상을 지녔다. 이들은 한 명의 장로만 세우고, 그가 목사 역할을 하도록 하는 회중주의 구조를 지닌다. 재건주의 교회의 성직자 이해는 마치 어느 조직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여러 이유로 '조직대표'가 되었다가 임기를 마치면 다시 조직 구성원이 되는 것과 유사하다. 개선주의나 재건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일 뿐이며, 현재 거의 모든 교파의 교회는 교회내에서 목사 예비자로 인정 받은 4년제 학사 학위를 지닌 사람이 3년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훈련을 받고 목사로서 안수 받는 성직과정을 지녔다. 세계 기독교 백과에 따르면 2001년 현재 238개 국가에 33,000개 이상의 개신교 교단이 있으며, 매년 270~300개의 국가별로 개신교회의 성장이나 지역별, 부족별, 또는 신학적 분리로 인해서 교단의 구분과 교파 구분이 나타나고 있다. 주요 개신교 교파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으로 가장 먼저 성립된 루터교는 성서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권위도 두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혜만으로(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cia)’라는 세 가지 원리는 루터교를 떠받고 있는 기둥이다. 루터교에서는 평신도들이 단상에 올라와 설교를 하거나 성만찬(Holy Communion,성체와 보혈을 나누는 잔치)을 성직자들과 함께 베풀기도 한다. 성만찬을 제외한 전례가 로마 가톨릭의 미사전례와 유사하며, 종교 개혁 시대에 분리된 루터교는 비슷한 시기에 분리된 장로교와 더불어 다섯 솔라 정신을 공유한다. 루터교의 세계적 교인 수는 약 7천만 명이다. 현재의 루터교는 초기의 분리주의와 달리 독일에서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앞장서는 대표 종파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가톨릭교회와 공동으로 많은 연합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다. 개혁교회의 시작은 장 칼뱅이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개혁교회 시대로 올라가며, 지역에 따라 그레이트브리튼 섬에서 발전된 장로교와 달리 유럽 대륙(주로 네덜란드)에 발전하였다. 개혁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의 문서로 하나되는 세 고백서인 도르트신조와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사용한다. 장로교와 같이 칼뱅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으므로 둘의 차이는 거의 유사하다. 장로교와의 차이는 설교나 가르침에서 교리를 강조하고 신앙고백 문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예배에 있어 개혁주의 모범을 따르는 점과 장로교회의 시작은 장 칼뱅이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개혁교회 시대로 올라가며, 이는 지역에 따라 나뉘어졌다.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에 의해 확립되었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장로가 목사를 보필하는 장로제에서 그 이름이 연유한다. 신학적으로는 종교 개혁 시대에 체계화 된 개혁주의를 표방한다. 다섯 솔라를 핵심 교리로 인정한다. 대한민국에서는 600만 이상의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어, 개신교 신자들 중 가장 많은 수가 이 교파에 속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으로 나뉘어 있다. 성공회(聖公會, 영어: Anglican Church 또는 Episcopal Church)는 전 세계 160여 개국, 38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로 이루어진 교파이며, 전 세계적으로 신자는 약 7000만 명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정체성과 《성공회 기도서》에 근거한 전례를 갖고 있다. 성서, 이성, 전통에 근거한 그리스도 신앙을 추구하며, 의회민주주의 전통에 따라 교구의회에서 선출된 주교의 치리를 받는 주교제 교회이다. 한국의 성공회 관구에는 대한성공회가 있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들이 지금도 강화 (강화성당), 진천 (진천성당), 청주 (수동성당) 등에 남아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전래된 장로교, 감리교 등과는 달리 적극적인 전도보다는 학교와 병원을 지어 운영하는 사회선교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간혹 영국 국교회로도 알려지고 있으나, 잉글랜드 성공회만이 해당된다. 침례교(浸禮敎,)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침례교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후,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주장하기 때문에 침례교회라는 교단 명칭을 갖게 되었다. 침례교는 (영아가 아닌 즉, 모태신앙 부정) 신앙인의 침례와 믿음만으로 이뤄지는 구원을 비롯해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자립적인 지역 교회를 그 특징으로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가 교리가 없이 무조건 자유롭다라고는 할 수 없으며 침례교 자체적으로 신앙고백서가 존재하고 대부분 완화된 칼빈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침례교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노선을 지향하며, 직제는 목사와 집사가 있다. 역사신학자들에 따르면 1609년 암스테르담에서 영국인 분리주의자 존 스미스를 목사로 한 침례교회가 최초의 침례교회라고 한다. 신약성경에 근거해 스미스는 영아의 침례나 세례를 거부했고, 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이 있는 이들에 대해서만 침례를 주었다. 이러한 자유교회운동은 영국으로 퍼져, 칼빈주의를 기초로 하는 특수침례교인(Particular Baptists)들과, 알미니안주의를 기초로 하는 일반침례교인(General Baptists)들이 생겨났는데, 영국침례교는 일반적으로 칼빈주의를 기초로 하는 개혁파 혹은 특수침례교(Particular Baptists)적 성향이 두드러졌다. 1639년 로저 윌리엄스는 미국에 최초로 침례교회를 설립하였고, 미국의 자유정신은 침례교회의 자유정신과 유사한 점이 있었고, 침례교회가 성장하는 기초가 되었다. 특히 1700년대 중반의 대각성 시대 이후 미국의 침례교회는 감리교회와 더불어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0년을 기준으로 세계의 침례교인 수는 약 1억 5천만 명으로, 특히 미국의 개신교에서 교세가 가장 큰 교파는 세계 최대의 개신교단인 남침례회(Southern Baptist)이다. 감리교회()는 18세기 영국의 성직자인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 사회선교, 전도활동으로 등장한 개신교 교파이다. 전 세계적으로 약 8천5백만명이 넘는 신자가 있으며, 성경을 중심으로 한 이성, 전통, 체험을 기독교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복음주의적이며 경건한 신학 입장을 지녔다. 신학적으로는 개선주의 노선의 공교회주의이며, 웨슬리의 사상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 전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교회구조적으로도 공교회(보편교회)의 제도인 감독제 교회를 구성하였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회의 감리사, 대규모 구역인 연회에 감독이 있는 교회구조를 가졌다. 감독은 연회의 성직자를 안수하고, 연회를 인도해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 현재의 전 세계적으로 폭넓은 신학적 토양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영미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폭넓은 신학적 역량으로 다양한 개신교 교파가 감리교 영향 하에 설립되었다. 성결교, 순복음교회, 구세군교회 등이 감리교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있으며, 1930년부터 사회신경을 선언하는 등 복음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다. 성결교는 19세기말 미국 감리교에서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로서, 20세기초 미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성결 운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4가지를 4중 복음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 중 성결을 가장 강조한다. 성결교 신학의 배경에는 우선 개신교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개신교의 복음주의와 그 당시 시대적으로 19세기에 있었던 성결 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신학적 배경이 되었던 알마니안주의를 들을 수 있다. 한국의 성결교 전파는1901년 미국인 카우만이 일본에 설립한 동양선교회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07년에 한국에 대한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독립 교파가 되었다. 1962년에 이념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분리되었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오순절파로는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가 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운동은 성결운동에 참여한 교인들이 성령세례의 체험과 방언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성령세례에 반드시 방언이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함으로 성결운동에서 독립하여 오순절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 성령세례와 방언과 함께 성경의 절대 무오성, 믿음을 통한 병고침 등 종교적 체험과 선교를 강조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유명하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속한 대부분의 교회 이름에 ‘순복음교회’를 사용하고 있어서 통상 순복음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의 동생인 조용목 목사(은혜와 진리교회)가 따로 만든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도 있다. 2007년 이 교단들의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특별법을 문제로 무산되어 현재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통합)로 나뉘게 되었다. 현재 세계 하나님의성회 총회장은 조지 우드(George Wood)이며 전세계 6800만 신도를 가지고 있다. 구세군(救世軍, 영어: The Salvation Army)은 1865년 영국의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와 그의 아내인 캐서린 부스가 창시한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 또는 군우라고 부르는 등 군대식의 조직을 가진 특색있는 기독교이다. 기독교인은 이웃들에게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윌리엄 부스의 사상에 따라 구세군에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와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사회봉사 모두 실천하고 있다. 회중교회(영어: Congregational church)또는 조합 교회는 회중주의적 교회 운영을 실천하는 개신교 교회이다. 회중 교회에서는 각 회중이 독립적이며 자율적으로 자신의 모임을 운영하며, 많은 회중 교회는 자신들이 회중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또 버마 선교사로 유명한 아도니람 저드슨은 회중교회 전통에서 자랐으나 인도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의 영향으로 개혁파 침례교 신자가 되었다. 미국 회중교회는 이후 그리스도인 교회(the Christian Churches)와 1929년 연합하여 (Congregational Christian Churches)를 설립하기까지 미국 최대 개신교 교단으로 존속 하였으며 미국의 문화, 사회 그리고 정치의 기초를 만들었고, 이들을 통하여 현재의 미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들은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으며 하버드 대학교(Harvard), 예일 대학교(Yale), 윌리엄스 대학(Williams College)등 미국 내 유수대학들이 이들에 의해 설립 되었다. 이들은 특별히 뉴잉글랜드(New England)지역에서 교회를 확장 하였으며 1957년 (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와 연합하여 오늘의 (United Church of Christ)를 설립하게 되었다. 재침례파(, ) 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근원적 개혁을 따른 개신교 종파를 가리킨다. 그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현대의 교파들로는 아미시파,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120여만 명의 교인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에도 재침례파 교회가 한 곳 있다. 이 문서에서 재침례파라 함은 주로 16세기 근원적 종교개혁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유아세례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도 무효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교파들은 침례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다수 기독교 교파에서는 침례가 죄의 용서 와 구원 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일생 한 번만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재침례파는 이에 반대한 것이다. 재침례파의 역사는 그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근원이 일원이냐 다원이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소수이기는 하나 재침례파야 말로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적으로 구분하면 '스위스 형제단' (Grebel, Manz), 네덜란드 및 프리시안 재침례파 (Menno Simons, Dirk Philips), 그리고 남부 독일 재침례파 (Hübmaier, Marpeck)로 구분할 수 있다.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더 나아가 급진적 재침례파와 평화주의 재침례파로 나눈다. 급진적 재침례파는 "새 예루살렘"을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 폭력 동원을 인정했다. 급진적 재침례파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뮌스터 반란이다. 그에 반해 신약성서에 근거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은 메노나이트(Mennonites)의 기원이 된다. 다시 말해, 원래 메노나이트의 기원은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인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두 부류의 전통적인 재침례파인 평화적인 오비파(Obbenites)와 급진적인 호프만파(Melchio Hoffman)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자가 영적인 무기는 내려두고 세속적인 것을 취하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합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평화주의자인 오비파 쪽으로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에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의 추종자들을 그의 이름을 따서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 메노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였다. 한 번 받은 세례(특히 유아 세례)를 무효라고 주장하는 교리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여러 교단에게 이단으로 취급되어 1600년까지 무려 1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생겼으며, 1930년에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후터라이트(재침례파의 일파)공동체인 부르더호프 공동체가 영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현재는“재침례파가 21세기 개신교가 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퀘이커(Quaker)는 17세기에 등장한 개신교의 한 갈래이다. 친우회(형제들의 단체, Society of Friends)란 뜻을 가지며, 퀘이커라는 이름은 ‘주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에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19세에 집을 나와 4년 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퀘이커는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現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허용받았다. 국내의 유명한 퀘이커 교도로는 씨알정신으로 유명한 씨알 함석헌 선생이 있다. 전 세계 개신교 신자 수는 약 8억 명 정도이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여러 차례 외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도했지만 직접적인 선교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만주 지역에 있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개신교는 1879년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1848년~1926년)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선의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1882년 함경도 방언으로 된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 전래는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883년 이수정이 일본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1885년에는 〈마가의 전복음셔언해〉을 출판해 냈다. 성서를 한글로 옮긴 실천은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수정은 미국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1885년 4월 5일 같은 날 장로교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광혜원을 설립하였고,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現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 침례교는 캐나다의 맬콤 팬윅에 의해 전래되었으며,재림교회(또는 안식일교회,안식교회)는 1904년 이응현, 손흥조가 하와이로 이민 도중 일본 고베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들어왔다. 1905년 구세군교회도 구세군 사관 허가두 중령에 의해 들어왔다. 한국의 자생 개신교단으로 1935년에 설립된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있다.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기독교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뜻하므로 개신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평양 대부흥은 1907년에 평양에서 있었던 큰 교회 성장을 일컫는 말이다. 개신교의 세력이 강했던 조선 북쪽 지역의 개신교 신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 고백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길선주 장로를 비롯,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횡령 및 교우들에 대한 교만한 태도 등을 고백하고, 이를 돌려주는 절차 등을 밟았다. 이후로 개신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30년대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린 일본 제국에서는 한국의 교단들을 통폐합하고 일본과 조선의 소위 미션스쿨과 개신교 교회들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이때 조선 개신교는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였다: 적극 참여파 / 무관심한 소극파 / 적극 반대파. 주기철,최상림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이유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사람들과, 양주삼처럼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면서 찬성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당시 대다수의 장로교, 감리교는 이에 찬성하여 신사참배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친일활동을 한 개신교 목사들이 교회에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총회장이나 노회장 등의 교단지도자를 역임했기 때문에, 교회사학자들은 친일파 청산을 한국 개신교가 사실상 하지 못했다고 비평한다. 이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고신(고려)파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민족적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적이고 민족적인 회개운동이 전개 되어, 장로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를 복권시키는등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가 크게 성장하였다. 미국에서 발간되는《크리스천 월드(Christian World)》가 1993년에 발표한 세계 대형 교회의 순위를 보면, 세계 10대 대형 교회 안에 한국 교회가 1위와 2위를 포함하여 5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20위 안에는 10개, 그리고 발표된 50위 안에는 23개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 1885년, 진정한 개신교 선교의 시작 시점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불과 50여 년 정도 만에 세계 선교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약 18.3% 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다. 하지만 성직자 수급 불균형 문제, 대형교회의 목사 장로등의 지나친 정치참여, 중대형교회들의 교인 독점, 교회의 상업화, 십일조 문제, 세금 문제, 타 종교 배척, 지나치게 자의적인 성경해석으로 인한 수많은 분파 설립 등이 문제화 되고 있다. 2007년 현재 대한민국은 지난 10년간 개신교 신도 수가 1.6% 감소하였다. 2010년 현재, 유럽의 평균 개신교 출석교인은 3% 정도이고 신복음주의자는 1%도 안되는 나라가 22개국이다, 프랑스는 60년 전에는 전체 인구의 96%가 로마 가톨릭교회 미사에 참석했으나 지금은 6%만이 미사에 참석하며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0.6%만이 예배에 참석한다. 정이품송 보은 속리 정이품송(報恩 俗離 正二品松)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있는 소나무이다. 1962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03호 '속리의 정이품송'(俗離의 正二品松)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 ), 줄여서 아프가니스탄(, , )은 서남아시아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카불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과 미국의 침략으로 인해 세계 최빈국으로 손꼽힌다. 아프가니스탄에 인간이 정착한 시기는 중기 구석기 시대이다. 비단길을 따라 전략적으로 위치한 덕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중동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인종들의 고향이 되었으며 수많은 군사 활동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정복 세력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아랍계 무슬림, 몽골 제국, 대영제국, 소련, 그리고 현대의 서방 세력에 이른다. 또한 쿠샨 제국, 에프탈 제국, 사만 토후국, 사파르 토후국, 가즈나 제국, 고르 술탄국, 할지 술탄국, 무굴 제국, 호타크 제국, 두라니 제국, 기타 등등의 제국들을 일으킨 민족들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174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두라니 제국을 세웠는데, 이 때가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나중에 두라니 제국의 도읍은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겨졌으며,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웃 강국들에게 빼앗겼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전락하였다. 제3차 앵글로-아프간 전쟁 이후 1919년 8월 19일에 이 나라는 대영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자히르 샤의 40년 통치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를 유지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상태에 빠진 상황이며, 1979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1년 미국 주도로 탈레반을 축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외국의 점령을 겪게 된다. 2001년 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군대로 구성된 국제 안보 지원군(ISAF) 창설을 승인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농업과 목축에의 의존도가 높다.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전국적인 재건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10세기에 쓰여진 지리서 후드드 알 알람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이란 어휘는 인종의 이름인 아프간만큼이나 오래 되었다고 한다. 어근 "아프간"은 역사적으로 파슈툰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접미사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의 장소"를 뜻한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인들의 땅으로 해석되거나, 더 면밀히 말해서는 파슈툰인들의 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아프가니스탄 헌법에서는 "아프간이라는 어휘는 모든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아프간을 명시하고 있다.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 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0,000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 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 등 아리아인 계통의 인도-이란인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메디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셀레우코스 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튀르크인, 몽골인 등이 있었다. 현대에는 영국과 소비에트가,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원주민 집단은 주변의 이란 고원, 중앙 아시아,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20세기에 이루어진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적 영역은 이웃 지역들과 문화, 교역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의 유물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도시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문디각 (칸다하르 인근의 남부 도시)은 인근의 인더스 문명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더욱 최근의 발견들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서,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지역에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더욱 자세하게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동부에서 인도의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북동부까지 영역을 넓혔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쇼투가이의 아무다리야 강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여러 작은 규모의 인더스 부락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어 왔다.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중앙아시아의 반유목민이 계속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였다. 그 중엔 다수의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인도-이란인이 있었다. 이 종족은 이후에 더 멀리 남아시아, 서아시아, 또는 카스피 해의 북부 지역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이 지역은 아리아나라고 불렸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아리아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 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 나중에 파르티아와 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곳은 "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땅"을 뜻하는 '이란사르'로 불리게 되었다.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는 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타어와 같은 고대 동부 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메디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그리스인들은 아라코시아라고 불렀다)을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잠시 정복한 이후 후계국인 셀레우코스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기원전 305년에 동맹 조약의 일환으로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에 이 지역 거의 대부분을 넘겨 주게 된다. 마우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힌두교와 불교가 아프가니스탄 땅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 제국이 숭가 제국에 무너지고, 기원전 180년경에는 헬레니즘 국가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정복하였다. 이내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은 그리스-박트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간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스키타이에 패배하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러선 아프가니스탄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1세기경, 파르티아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으나, 인도-파르티아 봉신들에게 땅을 빼앗겼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서 말엽에는 광대한 쿠샨 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중심에 두고, 불교 문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서 지역 내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3세기에 쿠샨 제국은 사산 왕조에 격퇴당하였다. 스스로를 쿠샨샤스(보통 인도-사산으로 알려짐)라고 부른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 땅의 일부를 계속 다스렸으나, 이들은 사산 왕조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쿠샨 이후로는 키다라 훈족이 지배자가 되었다가, 강력한 에프탈이 5세기 초에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 서기 557년에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가 에프탈을 무찌르고, 페르시아에서 사산 왕조의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쿠샨과 에프탈의 후손들이 카불리스탄에 쿠샨-에프탈 또는 카불-샤한이라 불리는 작은 왕조를 세웠다. 지역의 북동부와 남부의 대부분이 계속하여 불교 문화의 지배를 받았다. 서기 642년 아랍계 무슬림이 헤라트와 자란즈 등지에 이슬람교를 전파하였고 이후 동쪽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아랍계 무슬림과 맞닥뜨린 일부 원주민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나, 일부는 반발하였다. 당시 인도 문화권과의 문화적 관련성의 이유로 아랍인은 지역을 총괄하여 알-힌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슬람이 소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고, 수리야와 나나의 신봉자와 유대교인도 있었다. 자란즈의 사파르계 무슬림 세력이 서기 870년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 힌두쿠시 남부로 이슬람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0세기의 가즈나인의 집권 이전까지 카불에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였다고 전해진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마흐무드가 남은 힌두교 지도자를 몰아내고 카피리스탄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이슬람을 전파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의 황금 시대에서 이슬람 세계의 주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가즈나 왕조는 당시 이미 강력한 이슬람 제국을 확장하고 발전시킨 고르인들에 의해 몰락한다. 서기 1219년, 칭기즈 칸과 그의 몽골 제국 군사가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의 군사는 바미안 뿐만 아니라 헤라트와 발흐 지역을 섬멸하였다. 몽골인의 파괴로 많은 주민들이 농촌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몽골의 지배는 북서부 지역에서 일 칸국으로 지속되었고 할지 술탄국이 힌두쿠시 남부 지역의 아프간 부족 지역을 지배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1370년 티무르 제국을 건국한 티무르가 지역을 정복한다. 16세기 초, 페르가나에서 온 바부르가 아르군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카불을 함락시킨다. 그는 1526년에 델리를 정복하여 로디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무굴 제국이 세워지게 한다. 16세기와 18세기 사이에는 부하라 칸국, 사파위 제국, 그리고 무굴 제국이 지역의 부분들을 지배한다. 19세기 이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북서부 지역은 호라산이라는 지역명으로 불렸다. 호라산의 네 수도들 중 두 곳 (헤라트와 발흐)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 위치해 있었고, 칸다하르, 자불리스탄, 가즈니, 카불리스탄, 그리고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이 호라산과 힌두스탄 사이의 변경지대였다.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독립시킨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 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0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미르와이즈는 1715년에 자연사하여 그의 형제 압둘 하지즈 호타크가 왕위를 물려받으나, 곧 미르와이즈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가 반역죄로 그를 죽이게 된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크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구나바드 회전을 기점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 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 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1729년 담간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 1738년, 나디르 샤와 그의 군대(그 가운데는 4천 명의 파슈툰족 압달리 씨족도 있었다.)는 마지막 호타크 요새였던 칸다하르를 정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가즈니, 카불, 라호르도 그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감금되어 있었던 16살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를 풀어주고 아프간족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얼마 후 페르시아 군대와 아프간 군대들은 인도를 침공한다. 1747년 6월 19일, 나디르 샤는 암살당하였는데, 이 일은 조카 알리 콜리의 음모로 말미암은 것 같다. 나디르가 죽자 그의 부장이자 경호병이었던 압달리 씨족의 파슈툰족 아흐마드 샤 압달리가 로야 지르가('대회의')를 요청하였다. 칸다하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모여 아흐마드 샤를 새 통치자로 삼고, 1747년 10월에 대관식을 치렀다. 아흐마드 샤는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창건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임금이 된 아흐마드 샤는 자신의 칭호이자 씨족명을 '두라니'로 바꾸었는데, 이 말은 '진주'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두르'에서 나온 말이었다.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와 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 그는 제3차 파니팟 전투에서 가장 큰 승리들 중 하나를 거두었고 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굴복시킨다. 1772년 10월, 두라니는 자연사하여 칸다하르 망토의 사당에 인접한 곳에 묻히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오른 후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1793년에 티무르의 사망 이후로는 두라니의 왕위는 그의 아들 자만 샤가 이어받고, 이후로 마흐무드 샤, 슈자 샤 등의 인물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아프간 제국은 19세기 초에 서로는 카자르 왕조, 동으로는 영국의 지원을 등업은 시크 제국으로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라크자이족의 지도자 파테 칸은 제국 안밖에 21명의 형제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한다. 파테 칸의 죽음 이후, 형제들은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영토를 그들 사이에 갈라놓는다. 이러한 격동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도스트 모하마드가 1826년에 자신을 왕족으로 선언하기 전까지 많은 임시 지도자들이 거쳐갔다. 펀자브는 당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침공하였고 1834년에는 페샤와르를 점령한 란짓 싱에 빼앗겼다. 1837년, 잠루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카이버 패스 인근에서 악발 칸과 그의 아프간 군사들이 시크 사령관였던 하리 싱 날와를 살해한다. 당시 영국은 동쪽에서 진군해오고 있었고 "그레이트 게임"의 첫번째 주요 충돌이 착수되고 있었다. 1842년 영국령 인도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아프간군이 승리한 후, 영국은 아프간 정부와 수교하고 모든 군대를 나라 밖으로 철수시킨다. 영국군은 1870년대 후반에 아유브 칸을 몰아내고 압둘 라흐만 칸의 집권을 돕기 위해 다시 돌아와 2년간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른다. 이후 영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아프간의 외교정책까지 통제하였다. 1893년, 모티머 듀랜드는 당시 아미르였던 압둘 라흐만 칸이 파슈툰인과 발루치족의 관할지역을 듀랜드 라인으로 나누는 합의서에 서명하게 한다.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고 1919년 라왈핀디 조약이 체결된 이후, 아마눌라 칸 국왕은 아프가니스탄을 주권국이자 완전한 독립국으로 선언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관습적인 고립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수교를 맺기 시작하며, 이후 1927-28년 유럽과 터키의 순방에 나서는가 하면, 국가를 근대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들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여러 개혁들 사이엔 마흐무드 타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 교육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초등교육의 의무가 명시된 1923 아프가니스탄 헌법 68조가 제정되게 하였다. 노예제가 명시된 법은 1923년에 폐지되었다. 여성의 전통적인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거나 남녀공학의 교육기관을 세우는 등의 개혁은 부족장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빠르게 소외되었다. 압도적인 무장 반란세력에 부딪혀, 아마눌라 칸은 1929년 1월, 하비불라 칼라카니가 이끌던 세력에 의해 퇴위당하였다. 아마눌라의 사촌이었던 모하메드 나디르 샤 왕자는 1929년 11월에 칼라카니를 굴복시키고 살해하며, 자신 스스로를 국왕 나디르 샤로 칭한다. 그는 점진적인 근대화를 위해 아마눌라의 개혁을 단념하였으나, 1933년 하자라족 출신의 학생 압둘 칼리크에 의해 암살당한다. 나디르 샤의 아들이였던 당시 19세의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왕위를 물려받아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집권한다. 자히르 샤는 1946년까지 그의 삼촌의 보조를 받아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그는 총리의 자리에 올라 나디르 샤의 정책을 이어나갔다. 자히르 샤의 또다른 삼촌이었던 샤 마흐무드 칸은 1946년에 총리직에 임명되어 더 큰 범위의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기 위한 실험들을 해 나갔는데, 그의 예상보다 더 발전하자 정책을 무산시켰다. 총리직은 1953년 국왕의 사촌이자 매부였던 무함마드 다우드로 교체된다. 다우드 칸은 소련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길 원하였고,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지 않고 냉전 시대에도 어떠한 세력과도 연맹을 맺지 않으며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은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영향력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고속도로, 공항, 기타 기반 시설을 지어 줌으로써 중립 상태는 국가에게 이득이었다. 1인당 기준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어떠한 국가보다 많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1973년, 국왕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길에 있었던 동안 다우드 칸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첫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게 하였다. 어떠한 전문가들은 부토가 1978년 4월 샤우르 혁명의 기반을 다진 것으로도 해석한다. 1978년 4월,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PDPA)이 샤우르 혁명을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 공산 정부에 반대하던 세력은 몇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는데, 이는 곧바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무자헤딘이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에 대항하는 내전으로 발전한다. 소련이 인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몇 천명의 군사 고문을 보내는 동안, 파키스탄 정부는 반란군들에게 비밀 훈련소를 제공하였다. 그동안 인민당에서는 다수였던 칼크와 온건적인 파르참으로 계파가 나뉘어 마찰을 연이어 빚다, 파르참 계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구실로 관련된 정부 각료를 해고하고 군 장교를 체포한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는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은 무함마드 다우드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다우드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정변은 샤우르 혁명, 즉 위대한 4월 혁명으로 알려졌다. 1978년 5월 1일, 타라키는 대통령, 총리, 인민 민주당 사무총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인민 민주당 정권은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1978년의 칼크 반란으로 두라니족(다우드 칸을 비롯하여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조)과 대립하던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이 소생하게 되었다. 권력을 잡은 인민 민주당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야심찬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의 농민 부채를 탕감하였다. 이들은 또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을 내놓고 여성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저명한 여성 정치인으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유력한 마르크스주의자 지도자이자 혁명 평의회의 의원이었다. 라테브자드는 1978년 5월 28일에 '뉴 카불 타임스' 지의 사설에서 '권리를 통해 여성은 평등한 교육, 직업, 안전, 의료 서비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건강한 자녀를 기를 자유 시간을 누려야 하며 ... 여성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은 이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일이다."라고 썼다. 카불 등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에 환영하기도 하고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세속적 성격 때문에 농촌 지역에 사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선호하였다. 미국은 1979년 중반부터 파키스탄의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통해 반소련 "무자헤딘" 세력과 아프간계 아랍인 전투원들을 지원해왔다. 엄청난 양의 현금과 무기들, 2천 개 이상의 FIM-92 스팅어 지대공유도탄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파키스탄으로 전달되었다. 1979년 3월, 하피줄라 아민이 총리가 되었으며, 원수직을 보유하고 최고 국방 평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1979년 9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가 인민당 내부에서 칼크 동료였던 하피줄라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고, 아민이 대통령직에 오른다. 소련은 아민을 불신하여, 1979년 12월 소련 특수 부대가 아민을 암살한다. 이후 바브락 카르말이 소련이 양당 인사를 모두 등용하여 구성한 정부를 이끈다. 소련은 카르말 정부의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련군을 배치하나, 아프가니스탄 내 대부분의 전투에 관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었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파르참 파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1978년에 양국이 맺은 우호 협력 및 선린 조약을 명분으로 1979년 12월 24일에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였다. 10여 만 병력이 넘는 소비에트 군대가 침공에 동원되었으며, 만여 명의 병력과 파르참 파의 구성원들도 가세하였다. 아민은 살해당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이 뒤를 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무장하고 소련 점령군에 맞서 봉기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은 카터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크게 늘어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공 저항 운동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 사항이 되었다. 무자히딘은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지원도 받았다. 소련의 점령으로 6만~2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민이 살상당하였다. 5백여만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조국을 등지고 파키스탄, 이란 등 해외로 떠났다.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데다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소련은 1989년에 철수하였다. 소련은 계속 모하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전에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경찰 KHAD의 수장이었다.)을 지원하다가 1992년에 새 러시아 정부가 나지불라 정권에 석유 제품 판매를 거부하였다. 전쟁 때문에 수많은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피신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층의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소련군을 물리친 무자히딘 내 각 분파들은 계속 서로 싸웠으며, 아프가니스탄은 군벌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전투는 1994년에 있었는데, 카불 한 곳에서 10,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탈리반(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리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리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주민 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엄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과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2001년에 탈리반은 아편 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 1994년 말 탈레반의 초창기에 이룬 몇몇 승리들은 엄청난 손실로 끝난 패배들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탈레반은 1995년 초 카불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마수드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군사적 지원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또다른 주요 공격을 준비하였고, 마수드는 카불에서 철수해야 했다. 탈레반은 같은 달에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비슷한 형태의 엄격한 샤리아를 도입하였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는 이와 같은 체제에 대하여 "그동안 세계의 어떠한 정권이나 체제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을 사실상 가택 연금을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강제한 바가 없었으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거나 남성과의 동행 없이 의료 진찰을 받거나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신체적 처벌행위로 금지한 사례가 없었다"라고 표명하였다. 탈레반에게 카불을 빼앗긴 이후에 마수드와 도스툼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북부 연맹)을 형성한다. 탈레반은 마자리샤리프 전투 (1997-98)에서 도스툼 세력을 패배시켰다. 당시 파키스탄의 군 참모장이였던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탈레반이 북부 연맹을 물리치는 것을 돕기 위해 몇 천명의 파키스탄인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이끌던 알카에다 네트워크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동되었다. 미국은 이 사실과 함께 100만 명에 이르는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축출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우려하였다. 1990년부터 2001년 9월까지 40만명의 아프간인들이 내부적으로 이루어진 접전들에 의해 사망하였다. 2001년 9월 9일,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주에서 두명의 아랍인들에 의해 자살 공격을 당해 암살되었다. 이틀 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난다. 미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의 가해자로 지목하며, 탈레반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탈레반이 협조를 거부하자 2001년 10월 작전명 항구적 자유 작전이 실행되었다. 최초의 침공 기간동안, 미군과 영국군은 알카에다 훈련 캠프를 폭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을 권력에서 몰아내기 위해 북부 동맹과 협력한다. 2001년 12월, 옛 무자히딘의 지도자과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본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옛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2001년 12월, 탈레반 정부가 전복된 이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출범하였고, 카르자이 행정부를 보조하고 기본적인 방위를 위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국제안보지원군을 결성한다. 반면 탈레반 세력은 파키스탄에서 재결성되었고,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에는 연합군이 진입하고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였다. 탈레반은 권력을 찬탈당한 뒤에 곧바로 반란을 일으킨다. 2000년대 동안 ISAF와 아프간 국군은 탈레반에 수차례 공격을 실행하였으나, 완전히 탈레반을 패배시키지 못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해외 투자의 부족과 정부 부패, 그리고 탈레반의 반란 등의 이유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 구조를 세울 수 있었고, 국가명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꾼다. 여러 차례의 외국 원조와 함께 나라의 경제, 보건, 교육, 교통, 그리고 농업 분야들의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도 많이 이루어졌다. ISAF 군대들도 아프가니스탄 국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2002년부터 10여년 동안 서방 국가들에서 강제 추방된 사람들을 포함한 50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2009년에 들어서는 탈레반이 이끄는 그림자 정부가 국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카르자이 대통령이 탈레반 지도자들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반란 단체들은 2015년 중반에 탈레반 최고 지도자가 협상을 결정하기 전까지 협상 참석을 거부하였다. 2011년 5월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하면서 많은 수의 아프간 주요 인사들이 암살되었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 간 접전이 늘어났고 하카니 네트워크 주도 아래 많은 대규모 공격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루어졌다. 미 정부는 증가한 공격 횟수를 두고 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했다. 미 정부는 15년 넘게 수십억 달러를 개발 원조 지원금으로 지출하였고 같은 기간 동안 1조가 넘는 달러를 군사 지원에 지출하였다. 2014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카르자이 대통령은 권력에서 물러났고 2014년 9월 아슈라프 가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전쟁 (미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이 2014년 12월 28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수천명이 넘는 미국 주도의 나토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 군대를 훈련시키고 자문하기 위해 나라에 남았다. 전쟁은 반란 주동자, 아프가니스탄 시민들과 정부 군대를 포함하여 직접적으로 9만여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10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서남아시아에 속하는 지역으로, 북부와 남서부의 평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 지방인 내륙국이다. 대중동 권역 이슬람 세계에 속하며, 위도 29° N과 39° N 사이와 경도 60° E와 75° E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7,492 m (24,580 ft)의 노샤크 산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대륙성 기후에 속하여, 중앙의 고원 지역과 누리스탄 주 주변의 빙하 지역, 그리고 와칸 회랑지대 등의 지역은 1월에 평균 −15 °C (5 °F) 이하까지 기온이 내려가며, 남서부의 시스탄 유역과 동부의 잘랄라바드 유역, 그리고 북부의 아무다리야 강을 둘러싼 투르케스탄 평원 등의 저지대는 7월에 평균 35 °C (95 °F)까지 기온이 올라간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수많은 강과 저수지가 분포하여 있으나, 국토의 많은 부분이 건조하다. 내륙유역인 시스탄 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 중 하나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기존 강우량 외에도 동절기에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에서 눈이 내리며 봄이 되며 녹은 눈이 주변의 강, 호수 그리고 하천에 유입된다. 그러나 나라의 전체 물 자원의 3분의 2가 이란, 파키스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인접 국가로 유출된다. 물 자원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선 최소 20억 달러 이상의 관개 시스템 정비 비용이 필요하다. 아프가니스탄 바다흐샨 주 안과 주변에 위치한 힌두쿠시 산맥은 거의 매년 지진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지질적으로 활발한 곳이다. 지진은 종종 파괴적인 성격을 띄는데, 겨울 동안 산사태와 눈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역대 가장 강력한 지진은 1998년에 일어났는데, 타지키스탄 인근 바다흐샨에서 6,000여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이어 2002년 힌두쿠시 지진이 일어나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1,000명이 넘는 부상자를 기록했다. 2010년에 일어난 지진은 11명의 사망자, 70명이 넘는 부상자, 그리고 2,000 가구 이상의 가옥들이 파괴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매장된 주요 자원은 다음과 같다: 석탄, 구리, 철광석, 리튬, 우라늄, 희토류 원소, 크로뮴, 금, 아연, 활석, 황산 바륨, 유황, 납, 대리암, 보석, 천연 가스, 그리고 석유.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양국 정부는 2010년 아프가니스탄 내에 매장된 자원 중 미개발된 광물 매장량의 가치가 최소 9,000억 달러에서 최대 3조 달러에까지 이른다고 발표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면적은 652,230 km (251,830 sq mi)으로, 세계에서 41번째로 넓은 국가로 프랑스보다 조금 넓고 미얀마보다 조금 작으며, 미국 텍사스 주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남쪽과 동쪽으로는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2015년 아프가니스탄의 인구는 32,564,342명 정도로, 파키스탄과 이란에 거주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적의 피난민 270만여명을 합한 값이다. 2013년 기준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46%는 15세 이하였고 전체 인구의 74%는 시골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은 일생 동안 평균 5명의 아이를 출산하며 전체 아프가니스탄 신생아 중 6.8%는 출산 중 혹은 유아기에 사망한다. 2013년 기준 아프가니스탄 평균 수명은 60세이고 15세에서 49세까지의 인구 중 오직 1%만이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병력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이 이웃한 국가들과 같이 아프가니스탄은 민족적, 언어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다양한 인구분포를 띈다. 메흐다르드 이자디 지도 제작자는 아프가니스탄에 언어와 민족 간에 중요한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부족 (파슈툰인, 아이마크인 등), 종교 (시아파 하자라인, 사이즈, 키질바쉬 등), 집단기억 (아랍인과 몽골인 등) 혹은 라이프스타일 (파르시완인 등)이 언어보다 집단 정체성에 형성하는 데 더 기여했다는 것이다. 오직 투르크인과 다수의 우즈벡인들이 언어로 정체성이 나뉘며, 이러한 양상은 1747년에서야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으나,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저개발된 지역 중 하나이다. 1999년 전체 인구의 79%가 시골에 거주하였으나, 2014년에는 전체 인구의 74%가 시골에 거주하고 있다. 100만 명의 거주민을 넘는 도시는 카불 한 곳뿐이다. 인구 수가 비교적 많은 도시로는 칸다하르, 헤라트, 마자르이샤리프, 잘랄라바드, 라슈카르가, 탈로칸, 호스트, 셰베르간, 그리고 가즈니가 있다. 인구참조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인구가 2050년까지 8,200만 명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오래전부터 교차로의 역할을 한 지역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지위는 현재의 다문화 사회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인구는 다양한 범주의 민족언어학 집단들로 나뉜다. 그러나 몇십년동안 국가에서 체계적인 인구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민족 각각의 정확한 인구와 규모는 알려져 있지않다. 대략의 민족 분포는 아래의 표에 명시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언어는 다리어와 파슈토어로, 국가 전체에 다중언어 생활이 보편화되어있다. 파슈토어와 다리어 모두 이란어군 어파에서 나온 인도유럽어족 언어다. 다리어 (아프간족 페르시아어)는 오랫동안 민족 상호 소통에 있어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해왔다. 또한 다리어는 타지크인, 하자라족, 아이마크인, 그리고 키질바쉬족의 모어이다. 파슈토어는 파슈툰인의 모어이나, 많은 파슈툰인들이 다리어에 능하고, 파슈툰인이 아닌 민족 구성원들도 파슈툰어에 능한 경우가 많다. 우즈베크어, 아랍어, 투르크멘어, 발루치어, 파샤이어, 그리고 누리스탄어 등을 포함한 기타 언어들은 나라 전체에 분포한 소수 민족들의 모어이며 널리 사용되고 있는 지역에서 공식 지위를 가진다. 소수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우르두어, 영어, 그리고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9%가 넘는 사람들은 무슬림으로 그 중 70% 정도가 수니파이며, 29%는 시아파이다. 1890년대까지 누리스탄 주를 둘러싼 지역은 카피리스탄 {카피르인 (믿지 않는 자들)의 땅)으로 불렸는데, 이는 누리스탄 족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애니미즘, 다신교, 샤머니즘 등과 같은 민속 신앙을 가지고 있던 문화적 특성에 비롯된 것이였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중에 시크교나 힌두교를 믿는 집단도 주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하였으나 20세기 말에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자블론 시민토프 한 명만이 남아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권력 투쟁, 유혈 정변, 불안정한 권력 이동으로 점철되었다. 지난 20세기 동안 이 나라는 군사 독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정치 형태 - 왕정, 공화정, 신정, 공산 통치 - 를 겪었다. 2003년 로야 지르가에서 비준된 헌법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삼부로 이루어진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유엔 마약 범죄 사무소의 2010년 1월 보고서에 따르면 뇌물 수수가 아프가니스탄 국가 전체 GDP의 23%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하였다. 다수의 정부 기관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카르자이 대통령은 2009년 말 이에 관련하여 "비리에 관련된 사람은 정부에서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많은 고위급 정부 관리들이 카불 은행을 통해 엄청난 양의 현금을 횡령하고 남용하고 있었다. 국제 투명성 기구의 2014년 부정부패 인식 지수 자료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4번째로 가장 부패한 국가라고 한다. 2004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55.4%의 표를 가져가면서 비교적 평화롭게 끝났다. 그러나 2009년 대통령 선거는 허술한 보안, 낮은 투표율, 그리고 널리 퍼진 선거 부정으로 점철되었다. 420석의 주 의원 투표와 함께 2009년 8월에 진행되었으나, 지연된 개표 작업과 선거 부정 조사로 미해결 상태에 도착되었다. 국제적인 압력 아래, 카르자이와 압둘라 압둘라 사이를 두고 두 달 뒤에 2차 선거가 선포되었으나, 며칠 뒤 압둘라는 선거 관리 위원회의 개혁에 대한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11월 7일 대선을 기권하겠다고 밝혔다. 그 다음날, 선거 관리 위원회는 선거를 취소하고 하미드 카르자이를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2005년 의회 선거에서는 전직 무자히딘, 이슬람 근본주의자, 군 지도자, 공산주의자, 사회개량주의자, 그리고 여러 탈레반 임원 등 다양한 출신 인사들이 당선되었다. 같은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의회에서의 여성대표성으로 세계 상위 30위에 올랐다. 마지막 의회 선거는 2010년 9월에 치뤄졌으나, 선거 부정 조사 등의 이유로 취임 선서식은 2011년 1월 말에 이루어졌다. 201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슈라프 가니가 56,4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행정상으로 34개의 주 ("윌라야")로 나뉘어, 각 주마다 주도와 주 행정부를 가진다. 주들은 398개의 더 작은 행정 단위로 나뉘며, 각 행정 단위는 보통 도시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마을을 포함한다. 각 지역은 지역 대표들로 대표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며 지역 대표는 주지사에 의해 선출된다. 주지사는 카불에 위치한 중앙 정부의 대표들로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진다. 모든 주는 4년마다 선거를 하여 주 의회를 구성한다. 주 의회는 관할 지역의 개발을 논의하고 주 행정 법안에 대한 평가 및 검토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프가니스탄 헌법 제140조와 선거법 대통령령에 의하면 각 도시의 시장은 4년의 임기가 끝날 때마다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하나, 막대한 선거 비용으로 인해 지방 자치 선거가 열린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 대신에 시장은 정부에서 임명되어왔다. 수도인 카불에서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직접 카불 시장을 임명한다. 34개의 주는 다음과 같다: 아프가니스탄 외무부는 아프가니스탄 대외 관계의 유지를 담당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1946년에 유엔에 가입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들과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미국, 영국, 독일, 그리고 터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2년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주요 비NATO 동맹국으로 지정하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맺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인접국과 밀접한 대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카자흐스탄,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집트,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과 같은 지역 국가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계속하여 다른 국가들과도 대외 관계를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엔 아프가니스탄 지원단 (UNAMA)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1401호에 따라 전쟁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의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2002년에 결성되었다. 오늘날에는 나토 회원국들이 국제안보지원군 (ISAF)의 일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38,000명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국제안보지원군 파견의 주 목적은 아프가니스탄 보안군 (ANSF)을 훈련시키기 위함이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아프가니스탄 국방부 산하 기관으로 아프가니스탄 국군 (ANA)과 아프가니스탄 공군 (AAF)으로 구성되어 있다. ANA는 카불의 201 셀랍 ("홍수") 군단, 가르데즈의 203 군단, 칸다하르의 205 아툴 ("영웅") 군단, 헤라트의 207 군단, 마자르 이 샤리프의 209 군단, 라슈가르가의 215 군단 등의 7개의 주요 군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ANA는 특수부대를 2007년부터 두고 있다. 아프간 국방대학교 (ADU)는 아프가니스탄 군대의 교육을 담당하여, 소속기관으로 아프가니스탄 국군사관학교를 두고 있다. 국가 안보국 (NDS)은 아프가니스탄 국내에서 활동하는 정보 기관으로, 15,000명에서 30,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내에는 126,000명의 경찰력이 있으며, 160,000명 규모가 될 때까지 계속하여 경찰력을 모집할 계획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경찰 (ANP)은 내무부 산하의 기관으로 아프가니스탄 내의 유일한 법집행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시민 안전 경찰이 ANP의 주 기관으로, 각 준장이 5개의 군단을 관리하고 있다. 군단은 카불, 가르데즈, 칸다하르, 헤라트 그리고 마자르 이 샤리프에 위치해 있다. 각 주에는 정부에서 임명된 주 경찰청장이 관할 지역을 맡아 관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경찰은 대부분의 훈련과정을 아프가니스탄 내 주둔한 나토 훈련 임무단로부터 이수한다. 2009년 당시 다수의 경찰관들이 문맹이거나 뇌물 수수 협의를 받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진행된 문자해독능력 프로그램은 2011년 초에 경찰 기초 훈련에서 필수 이수 과정이 되었다. 또한 경찰 병력의 17%가 불법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2009년 내무부와 함께 2개의 반부패 부서를 창설하였다. 당시 내무부 장관은 미국 (연방수사국), 영국 (스코틀랜드 야드), 유럽연합에서 온 보안요원들이 부서 내의 검찰관들을 교육시킬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의 지역은 계속되어온 전투 활동으로 위험하다. 매년 수백명의 경찰관들이 근무 도중 죽임을 당한다. 납치와 절도 등의 범죄도 자주 보고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국경 경찰 (ABP)은 국가의 모든 공항 시설과 국경 지대를 관리하는데, 특히 듀랜드 라인 국경선을 중심으로 범죄 조직과 테러리스트 활동이 활발하여 국경 경찰의 집중 배치를 받고 있다. 2011년에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법 약물 사업에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범죄 조직이 정부 인사를 대상으로 한 테러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빈곤 상태의 저개발 국가로, 수십년간 지속되온 전쟁과 해외 투자의 부족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경제는 지난 10년동안 매년 10%의 성장률을 유지해왔다. 이는 500만 억 달러 규모의 국제적인 원조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송금액이 뒷받침한 결과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심각한 빈곤상태를 보여주는 자료로, 2016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를 참고하면, 아프가니스탄은 총 100점 중 34.8점으로 '위험'에 가까운 기아 상태를 보이고 있다. 가장 기아가 심각한 나라로 발표된 중앙아프리카공화국도 50점을 넘지 않는 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분명 이는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조사에서는 총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아프가니스탄이 111위를 기록하여 아프가니스탄의 기아상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교통 시스템과 국가 주력 산업인 농업 생산 효율에 대한 개선도 경제 발전에 일조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양질의 석류, 포도, 살구, 멜론, 그리고 호두를 포함한 견과류를 생산하는 국가로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대 아편 생산국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여러 국제 기구가 아편 생산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가 전체의 경상수지 적자가 기부금으로 보조되고 있으나, 이중 정부 예산에 직접적으로 유입되는 비율은 매우 적다. 나머지는 비예산적 경비와 유엔 혹은 다른 비정부 기구의 기부 계획에 쓰인다. 아프가니스탄 재무부는 세금 부과 개선과 공공 부문 지출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은 아프가니스탄의 중심 은행기관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통화는 아프가니이다. 2003년부터 아프가니스탄 국제은행, 카불 은행, 아지지 은행, 파슈타니 은행,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그리고 퍼스트 소액금융은행 등 16개가 넘는 은행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경제성장의 주요 인자 중 하나는 사업을 시작할 충분한 자본과 능력을 겸비한 500만 국외 거주자들의 귀환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970년대부터 건설업이 성장하여 현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큰 산업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또한 여러 회사와 공장들이 나라 안팎에서 가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따라 경영 환경이 개선하며 2003년에는 통신업 분야에 15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발생하며 100,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아프간 양탄자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전국의 카페트 딜러들이 더 많은 근로자를 고용하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무역기구,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 경제 협력 기구, 그리고 이슬람 협력 기구의 회원국이다. 또한 상하이 협력 기구에서 옵저버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아편생산은 2007년 300만 명이 관련 사업에 연관되면서 역대 최대치를 갱신하였으나, 다음 해에 연이어 아편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아편 재배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펴왔으며, 이에 따라 2010년에는 전체 34개 주 중 24개의 주에서 아편 재배가 보고되지 않았다 한다. 2006년 미국 지질조사국이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에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29억 배럴의 석유, 15.7조 큐빅 피트의 천연가스, 그리고 5억 6,200만 배럴의 액화가스가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은 2011년 중국천연가스그룹 (CNPC, China National Petroleum Corporation)과 아무다르야 강 연안에 자리잡은 3개의 유전에 대한 석유탐사협정을 맺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리튬, 구리, 금, 석탄, 철광석 등 다양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2007년 중국야금과공집단 (中国冶金科工集团有限公司)은 아프가니스탄 메스 아이낙 구리 광산을 30억 달러를 지불하고 30년의 임차권을 체결하였고, 이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인 투자였다고 한다. 인도철강공사는 아프가니스탄 중부에 위치한 하지각 철광에 대한 개발 및 채굴권을 따내였다.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리들은 미개발 상태의 광물 자원의 가치가 최소 9,000억 달러에서 최대 3조 달러의 규모라고 추정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파키스탄(47.5%), 인도(38.57%), 이란(3.16%), 터키(2.04%), 이라크(1.88%)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이란(19.36%), 파키스탄(18.35%), 중국(16.72%), 카자하스탄(9.51%), 우즈베키스탄(6.11%)이다. 2016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596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6,534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식물 추출물(85백만 달러), 건포도(56백만 달러), 포도(39백만 달러), 카펫(38백만 달러), 무화과(33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밀(664백만 달러), 이탄(598백만 달러), 섬유(334백만 달러), 동식물성 지방(316백만 달러), 천연가스(296백만 달러)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항공 운수는 아리아나 아프간 항공과 같은 국적 항공사와 아프가니스탄 제트 인터내셔널, 이스트 호라이즌 항공, 캄 에어, 파미르 항공, 그리고 사피 항공 등과 같은 민간 항공사가 담당하고 있다. 또한 에어 인디아, 에미레이트 항공, 걸프 에어, 이란 아스맘 항공, 파키스탄 국제항공, 그리고 터키항공 등과 같은 외국 항공사도 아프가니스탄 국내외 항공 운수를 서비스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4개의 국제공항이 있다: 헤라트 국제공항,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전 카불 국제공항), 칸다하르 국제공항, 그리고 마자르이샤리프 국제공항. 또한 카불이나 헤라트로 연결되는 여러 국내 공항도 있다. 2014년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두개의 철도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하나는 발흐 주 키라바드에서 우즈베키스탄 국경까지의 75km 구간이고 다른 하나는 토라군디에서 투르크메니스탄 국경까지의 10km 구간이다. 양 구간 전부 화물운송 전용이며 여객운송 서비스는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추가적인 철도 노선 건설에 대한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2013년에는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삼국 대통령들이 투르크메니스탄-안득호이-마자르이샤리프-키라바드를 연결하는 225km의 철도 노선의 기공식에 참가하였다. 이 노선은 기존의 키라바드-우즈베키스탄 노선과 연결될 것이다. 카불에서 동부의 파키스탄 접경지역인 토르캄에 철도를 건설하여 파키스탄 철도와 연결하려는 계획도 존재한다. 또한 이란과 헤라트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을 완공하려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되는 전투 활동으로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극히 위험하다. 버스는 주로 오래된 메르세데스-벤츠 버스 모델들로 유한 회사들이 운영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도로에서는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데, 특히 카불-칸다하르와 카불-잘랄라바드 간선 도로에서 두드러지게 일어난다. 고속도로의 재건 이후 새로운 차량들이 더 넓게 유입되고 있다. 대부분 파키스탄과 이란을 통해 아랍에미리트에서 수입되어 온 것이다. 2012년 이후에는 10년 이상 된 자동차의 반입이 금지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도로 네트워크의 건설은 이웃국가 간의 무역을 촉진시키며 나라 경제의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내의 우편 서비스는 아프가니스탄 우편국과 페덱스, DHL과 같은 기업이 제공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통신 서비스는 아프간 와이어리스, 에티살랏, 로샨, MTN 그룹, 그리고 아프간 텔레콤 등의 통신사들이 제공하고 있다. 2006년 아프가니스탄 통신부는 ZTE와 전국적 규모의 광케이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6,450만 달러 규모의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는 1,700만 명 정도의 GSM 사용자와 100만 명이 넘는 인터넷 사용자, 그리고 75,000개의 전화선과 190,000명이 넘는 CDMA 사용자가 있다. 에티살랏과 MTN 그룹이 3G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4년, 아프가니스탄은 유텔셋에서 우주 인공위성을 임차하여 AFGHANSAT 1이라 이름지었다. 인간 개발 지수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15번째로 저개발된 국가이다. 평균 수명은 여성 45세, 남성 44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모 사망률 그리고 신생아 사망률을 가진 국가들 중 하나인데, 2015년 1,000명당 257명의 신생아 사망률을 기록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공중보건부는 2020년까지 신생아 사망률을 100,000명당 400명 정도로 절감하겠다고 밝혔다. 아프가니스탄은 3,000명이 넘는 조산사가 있으며, 매년 300명에서 400명 정도의 추가인력이 양성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병원과 진료소가 세워졌다. 그 중 가장 선진의료를 받을 수 있는 곳들은 카불에 위치해 있다. 카불의 프렌치 어린이 의료연구소와 인디라 간디 어린이 병원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어린이병원들이다. 카불의 주요 의료시설로는 350개의 침대를 보유한 잠후리앗 병원과 현재 공사 중인 지나 병원 등이 있다. 이외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곳곳에 시설이 잘 갖추어진 군사 병원들이 위치해 있다. 2002년 전체 인구의 9%가 가장 가까운 의료 시설에서 걸음으로 2시간 거리에 거주한다고 나타났으나, 2006년에는 60% 가까이 되는 인구로 해당 대상이 크게 늘었다. 2011년 실시된 설문조사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 전체 의구의 57%가 자신은 의료 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다고 응답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장애인이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약 100만 명이 영향을 받았다. 약 8만명이 팔다리를 잃었고, 이중 대부분은 지뢰에 의해 팔다리를 희생당하였다. 세이브 더 칠드런과 마호바의 약속 등과 같은 비정부 단체들은 정부와 함께 연계하여 고아들을 돕고 있다. 인구통계 건강조사는 인도 건강관리조사 연구소와 기타 기관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임산부 사망률을 중심으로 여러 건강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교육은 아프가니스탄 교육부와 고등교육부의 감독 아래 K-12와 고등교육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교육 인프라는 몇십년간의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2001년 말 카르자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점차 복구되고 있다. 지난 10년동안 5,000개가 넘는 학교가 새로 설립되거나 재건되었으며, 100,000명이 넘는 선생님들이 양성되거나 모집되었다. 700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100,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세워져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고, 최소 그중 35%가 여학생이다. 2013년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16,000여 개의 학교가 있다. 굴람 파루크 와르다크 교육부 장관은 아직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는 300만명의 어린이를 위해 8,000개의 학교가 더 지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카불 대학교는 2002년 남녀 모든 학생들에게 다시 문을 열었다. 2006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아메리칸 대학교가 세계 최상급 영어교육기관을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문을 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은 아프가니스탄의 교육중심으로,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들이 포진되어 있는 곳이기도 한다. 카불 바깥에 위치해있는 주요 대학교로는 남쪽의 칸다하르 대학교, 북서쪽의 헤라트 대학교, 북쪽의 발흐 대학교, 그리고 동쪽의 낭가르하르 대학교와 호스트 대학교 등이 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본떠 만든 아프가니스탄 국군사관학교는 아프가니스탄 국군의 사관 양성을 위한 4년제 군사교육기관이다. 2만 달러 규모의 아프간 국방대학교 건설 계획은 카불 카르가 댐 근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의 문맹률은 더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다님에 따라 점차 개선되고 있다. 2010년부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링컨 학습 센터를 짓기 시작하였다. 링컨 학습 센터는 영어 교실, 도서관 시설, 다목적 회당, 인터넷 연결, 그리고 기타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프가니스탄 보안군은 의무적으로 문자해독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미국의 세서미 스트리트를 기반으로 한 바체-이-심심은 2011년 말 아프가니스탄 아동의 교육을 목적으로 편성되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익명의 재단의 지원을 바탕으로 5,000대의 컴퓨터가 OLPC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칸다하르에 배치되었다. 아프가니스탄 문화는 2,000년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그 기원은 최소 기원전 500년 즈음 아케메네스 제국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가니스탄은 유목민과 부족민이 주를 구성하는 사회를 지님으로써, 각 지역마다 다양한 전통을 가져,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다문화 및 다언어적 성격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동부 일부 지역에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져 오는 생활방식인 파슈툰왈리를 보전해오고 있어, 파슈툰인의 문화를 지속하여 계승해오고 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로는 페르시아인과 터키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다. 파슈툰인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비-파슈툰인들 중에는 파슈툰왈리를 받아들여 파슈툰화 (혹은 아프간화)의 과정을 겪은 부류도 있다. 한편 페르시아화된 파슈툰인들도 존재한다. 지난 30년간 파키스탄과 이란 등지에서 거주해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웃국가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 국가, 조상, 특히 종교와 독립에 대한 큰 자부심을 느낀다. 다른 산악 지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명예, 부족에 대한 충성, 그리고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힘을 보태려고 여겨진다. 이는 외부인에 대한 우려와 겸양으로도 이어진다. 아득한 옛날부터 부족간의 전투와 내전이 주된 탓에, 이렇게 쌓여진 독립적인 성향은 외부 세력의 침략을 어렵게 하였다. 토니 히스코트는 부족사회를 지리적으로 험준한 국가에 많은 사람들을 구성케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는 60여 족의 주요 파슈툰인들이 살고 있으며, 아프간 부족민의 수는 200~30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문화의 형태로나, 혹은 다양한 형태의 언어와 기념물의 형태로도 남아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기념물들은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전쟁들에 파괴되었다. 바미얀 석불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고학자들은 아프가니스탄 각지에서 불교 유물들을 찾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2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것도 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불교가 유행하였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외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헤라트, 칸다하르, 가즈니, 마자르이샤리프, 그리고 자란즈 등이 있다. 하리 강 기슭에 위치한 얌의 첨탑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줄곧 입었던 망토는 칸다하르의 망토 사당에 보전되어 있다. 칸다하르는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건설한 도시이자 아프가니스탄의 첫 수도이기도 하다. 헤라트 성채는 최근 몇년간 복원되어 현재는 여행객들에게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북부에는 무함마드의 원조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묻혔다고 믿어진 알리 사당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보문화부는 가즈니에 있는 42개의 역사 유적지를 2013년까지 복원한다고 밝혔다. 또한 가즈니 주는 이슬람 문명의 수도로 선언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프가니스탄 국립박물관은 카불에 위치하여 있다. 문맹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고대의 페르시아 문학과 파슈토 문학은 아프가니스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시가 문학은 언제나 교육의 기둥으로 여겨져 왔으며, 문화의 일부분이라 여겨지기도 하였다. 주목할 만한 시인들로는 루미, 라비아 발키, 사나이, 자미, 쿠샬 카타크, 라만 바바, 칼릴루아 칼릴리, 그리고 파르윈 파즈왁 등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대중 매체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1906년에 아프가니스탄 첫 신문이 발행되었다. 1920년대에는 라디오 카불이 아프가니스탄 내 라디오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1974년에는 아프가니스탄 국영 방송이 개국하였으나, 1996년에 탈레반의 언론 통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언론 규제가 서서히 완화되며 민영 미디어가 다양화되었다. 2004년 헌법에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명시되며 검열을 금지하였으나,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과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을 생산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2008년에 국경 없는 기자회는 아프가니스탄의 언론환경을 173개 국가 중 156위라 평가하였고, 자유도는 1위라 평가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는 400여 개의 간행물이 등록되어 있으며, 15개의 지역 텔레비전 채널들과 60개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소리, BBC 월드 서비스, 자유유럽방송 등과 같은 해외 라디오 방송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방송되고 있다. 카불은 많은 전통 음악가와 현대 아프간 음악가의 고향이 되어주었다. 특히 전통 음악은 누루즈나 아프가니스탄 독립기념일 연휴기간 동안 인기가 있다. 아흐마드 자히르, 나셰나스, 우스타드 사라항, 사르반, 우바이둘라 쟌, 파하드 다리아, 그리고 나그흐마 등의 유명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음악가들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많은 재능있는 음악가들이 활동한다.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볼리우드 영화를 감상하고 그 영화음악을 즐겨 듣는다. 많은 메이져급 볼리우드 스타들이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살만 칸, 사이프 알리 칸, 샤루크 칸, 아미르 칸, 페로즈 칸, 카데르 칸, 나스루딘 샤, 자린 칸, 그리고 셀리나 제이틀리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 밖에도 "다하르마트마", "쿠다 가바", "이스케이프 프롬 탈레반", 그리고 "카불 익스프레스" 등의 여러 볼리우드 영화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촬영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스포츠 팀은 국제 경기에서 점점 발전된 성적을 내놓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농구 대표팀은 2010년 남아시아 경기 대회에서 자체 최초 팀 타이틀을 얻어내었다. 이듬해 아프가니스탄 크리켓 대표팀이 2009-10 ICC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우승하였다. 2012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길거리 농구팀이 2012년 해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2013년, 아프가니스탄 축구 대표팀이 남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크리켓과 축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들 중 하나이다. 아프가니스탄 크리켓 대표팀은 2000년대에 구성되어, 2009년 크리켓 월드컵 예선, 2010년 월드 크리켓 리그 디비전 원, 2010년 ICC 월드 Twenty20에 참가하였다. 아프가니스탄 크리켓 대표팀은 앞서 2007년, 2009년, 2011년, 그리고 2013년에 열린 ACC Twenty20 컵에서 우승하였다. 이러한 성적이 축적되어 2015년 크리켓 월드컵의 경기 출전권을 따기에 이르렀다. 아프가니스탄 크리켓 협회 (ACB)는 아프가니스탄 내의 공식 크리켓 행정 기구이며 카불에 본부를 두고 있다. 가지 아마눌라 칸 국제 크리켓 경기장이 아프가니스탄의 메인 크리켓 경기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뒤로 카불 국가 크리켓 경기장 등의 주요 경기장이 있다. 이외의 여러 경기장이 공사 진행 중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내에서는 주별로 팀을 꾸려 크리켓 경기를 진행하곤 한다. 아프가니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은 1941년부터 국제 축구 경기에 참가해온 역사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열리는 홈 경기는 카불에 위치한 가지 스타디움에서 열리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열리는 모든 축구 경기는 아프가니스탄 축구 협회에 의해 통제된다. 아프가니스탄 대표팀은 단 한번도 FIFA 월드컵에 출천하지 못하였으나, 2013년에 열린 국제 축구 경기에서 트로피를 타낸 바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또한 풋살, 5-a-사이드 형식의 축구 대표팀도 보유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인기있는 또 다른 스포츠 종목으로는 농구, 배구, 태권도, 그리고 보디빌딩 등이 있다. 부즈카시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스포츠로, 주로 북부 지역에서 경기가 진행된다. 부즈카시는 폴로와 비슷한 형식으로, 말을 탄 두 팀이 염소의 시체를 놓고 경쟁하는 운동이다. 아프간 하운드는 아프가니스탄에 뿌리를 둔 개로 사냥에 주로 쓰이는 종이다. 배추김치 배추김치는 배추로 담근 김치다. 한국의 대표적인 반찬이다. 소금에 절인 배추에 무채, 고춧가루, 다진 마늘, 파, 젓갈 등을 넣고 버무린 속을 넣어 담근다. 배추김치가 맛있게 익으려면 젖산균이 시큼한 젖산을 만들어 배추를 서서히 익게 만들어야 한다. 젖산균 등의 세균과 효모균에서 생기는 젖산·알코올·에스터 등이 맛을 돋워 주는 것이다. 오늘날 배추김치의 형태는 1600년대에 고추가 상용화되면서 나타났다. 그러나 김치의 기원은 삼국시대의 편린에 기대 김치 역사 3000년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려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배추는 속이 차지 않고 상추처럼 퍼지는 비결구 배추였다. 한국에서는 초겨울 즈음 김치를 담가왔다. 입동 전후에 담근 김치가 가장 맛이 좋다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실제 4℃보다 조금 낮은 기온에서 배추 맛이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보다 기온이 낮으면 배추가 얼어 맛을 잃는다. 한편으로는 계절적 수요 때문이기도 하다. 입동이 지나면 땅이 얼어 채소를 구하기 어려워진다. 겨울이 오기 전 한꺼번에 채소를 절여 오래 보관하고자 한 게 초겨울 김장의 이유이다. 스퀘어 에닉스 주식회사 스퀘어 에닉스( / )는 일본의 비디오 게임 소프트웨어 제작 및 개발과, 출판사를 겸하고 있는 회사이다. 1975년 9월 22일에 설립되었고, 2003년 4월 1일에 주식회사 에닉스(ENIX)와 주식회사 스퀘어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영화 사업(파이널 판타지)에 실패한 스퀘어의 구제조치라 생각하는것이 일반적이지만, 에닉스도 드래곤퀘스트가 출시되지 않는 해에는 판매량이 절반밖에 안되고, 집안소동에 이은 출판사업의 쇠퇴, 드래곤퀘스트 시리즈 이외의 게임 타이틀의 판매량이 적은것도 문제가 되었고, 에닉스가 강한 아시아와 스퀘어가 강한 북미,유럽의 해외 사업의 보완 관계와 발매 스케줄의 조정으로 파이널 판타지와 드래곤 퀘스트를 충돌 시키지 않음으로서의 수익기회의 확보등, 온라인 게임, 모바일 게임의 시대에 대비하여 양사의 컨텐츠 자산의 유효활용에 의한 상승 효과를 보기 위한 계략이라 한다. 와다 사장이 말하길 "장래를 내다봄으로써 이겨 남기위한 공격적인 합병"이라 한다. 다양한 시스템에서 전개하고 있는 작품. 스퀘어와 에닉스가 각각 가지고있던 많은 타이틀들이 그대로 새롭게 단장된 스퀘어 에닉스에 큰 힘이 되었다.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의 인원은 스퀘어가 대부분을 점령, 에닉스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기획, 위탁개발의 관리만을 하고있다. 주로 에닉스사가 전개하던 드래곤퀘스트 시리즈의 공식 가이드북의 출판을 시작으로 그 후,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패러디 만화 '4칸 만화극장'을 계기로 만화 잡지의 발행을 시작. 현재는 아르티 마니아 등、데지 큐브가 하던 스퀘어계의 공식 가이드 북의 출판물의 발행도 이어 하고있다. 또 데지 큐브의 도산과 함께 절판 되었던 일부의 서적과 음악 CD도 스퀘어 에닉스 명의로 판매하고있다. 약 2003년부터 2009년까지,「강철의 연금술사(하가렌)」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고양시 고양시(高陽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서울특별시 근교 지역으로 1970년대부터 읍 규모의 시가지들이 발달하였으며, 1990년대 초 일산신도시를 비롯한 7개 지역에 택지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인구가 급증해 1992년 2월 1일에 시로 승격하였다. 2014년 8월 1일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 대화동에는 종합전시장인 킨텍스가 있고, 행신동에는 KTX 종착역인 행신역이 있다. 시청 소재지는 덕양구 주교동이다. 시의 슬로건은 "평화의 시작 미래의 중심 고양"이다. 고봉현, 덕양현(행주현은 덕양현에 이미 통합), 부원현, 황조향, 율악부곡 등을 고양현으로 통폐합한 곳으로, 명칭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고봉현의 '고'자와 덕양현의 '양'자를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고양시는 경기도의 서쪽 중앙부에 위치하며, 동서로 27km, 남북으로 18km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남쪽으로는 서울특별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파주시, 동쪽으로 양주시, 남서쪽으로는 한강을 끼고 김포시와 접하였다.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동쪽 끝은 동경 126° 56.5‘의 덕양구 효자동, 서쪽 끝은 동경 126° 45.5’의 일산서구 구산동, 남쪽 끝은 북위 37° 34‘의 덕양구 현천동, 북쪽 끝은 북위 37° 41.5’의 덕양구 벽제동으로 반대편 남양주시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동부에는 북한산이 솟아 있고 대부분이 구릉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창릉천 등의 하천이 흐르며 한강과 접해 있다. 서부는 대부분 평야지대여서 농사를 짓기 유리하다. 2014년 4월을 기준으로 전체 면적은 268.05km로 경기도의 2.6%에 해당한다. 이중 덕양구는 165.55km , 일산동구는 59.94km, 일산서구는 42.56km이다. 모든 지역이 과밀억제구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군사보호구역이 45.8%, 개발제한구역이 44.8%, 농림지역이 12.3%에 이르는 등 도시의 성장속도를 억제하는 각종 규제를 받고 있다. 이에 더해 고양시는 고양군 시절부터 지역마다 따로따로 성장해 서울이나 여타 광역시와 달리 "제1도심"이라고 할만한 곳이 없는데, 이러한 구심점 없는 성장은 고양시의 체계적인 발전에는 부정적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고양시에는 3개의 일반구가 있다.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는 일산신도시 지역이며 덕양구에는 구 도심이었던 원당동과 주교동 외에 행신, 화정지구가 있다. 3구, 39행정동, 886통, 5,565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동은 덕양구가 19동, 일산동구가 11동, 일산서구가 9동이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4개(고양갑, 고양을, 고양병, 고양정)로 나뉘어 있다. 고양시의 인구는 1990년대 일산신도시의 개발이후 급격하게 증가했다. 0~4세 인구는 20.47%,65세 이상 인구는 8.43%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인구는 71.4%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 인구 부양비는 23.5%로 전국평균인 22.8%보다 높으며 노년인구 부양비는 8.8%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7.8로 여자가 다소 많다. 덕양구의 삼송지구등의 개발에 힘입어 인구가 꾸준히 유입되어 2014년 8월1일 인구 100만을 돌파하였으며 2013년 말부터 인구가 월평균 천단위로 증가하고 있다. 고양시의 인구추이 공공도서관은 어린이 도서관을 포함하여 총 15개의 시립도서관이 있다. 인구 8만3600명당 1개정도로 10만 명당 1개정도인 전국평균을 상회한다. 2004년 9월 1일 개관한 복합문화체육 공간인 고양어울림누리와 2007년 5월 4일 개관한 공연예술센터인 고양아람누리가 있다. 또, 관산동에 테마동물원 쥬쥬가 있다. 2012년까지 고양시를 연고로 하고 있던 고양 국민은행 축구단은 FC 안양에 흡수되었다. 고양 국민은행은 2006년 내셔널리그에서 우승하여 K리그에 승격할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반발해 서포터즈 '보레아즈'는 고양 시민축구단을 창단하였다. 고양시의 교통은 경의선, 교외선, 일산선, 자유로, 제2자유로, 통일로 등이 통과하여 서울과의 유출입이 편리하다. 2009년 7월 1일에 수도권 전철 경의선 (현.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이 고양시를 관통하여 파주시까지 복선전철이 개통하게 되어 서울로의 유출입 시간이 30분대로 줄어들었으며, 2014년 12월 27일에 수도권 전철 중앙선과 직결 운행을 시작하여 양평군의 용문역까지 환승 없이 한번에 갈 수 있게되었다. 간선급행버스와 국토교통부에서 신설한 M7106번, M7119번, M7129번, M7412번, M7613번 신설로 기존 버스편의 혼잡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최근 파주시 지역에 교하지구와 운정신도시 등 주거지역이 발달하면서 이 지역의 차가 유입됨으로써 혼잡도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야버스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전에는 새마을호와 통근열차를 탈 수 있었으나 경의선이 광역전철로 바뀜에 따라 폐지되고 현재는 KTX가 고양시에서 이용 가능한 유일한 일반 열차이다.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를 타려면 서울역이나 용산역으로 가야 한다. 2022년에는 대곡역에서 부천시의 소사역까지 연결하는 대곡-소사선도 개통이 될 예정이다. 중장거리 대중교통은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 화정터미널과 고양종합터미널이 있다. 과거 일산선 화정역 인근에 있는 화정터미널만 있었으나 시설이 노후하고 협소하여 일산동구 백석동에 고양종합버스터미널을 2012년 6월 개장하였다. 고양종합터미널은 당초 2011년 여름에 개장 할 예정이었으나 저축은행 비리 사건과 연루되어 개장이 연기되었다. 고양종합터미널이 개장하면서 화정터미널은 운영 노선수가 대폭 줄었다. 단거리 대중교통은 향토업체인 명성운수, 서현운수와 파주시 소속 업체인 신성교통, 신일여객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에 서울업체인 서울운수, 제일여객, 선진운수, 동해운수, 신촌교통 등이 고양을 지나는 노선을 운영하고 있으며 고양시 거주 및 고양.김포면허를 둔 고양교통, 선진버스도 고양시에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동서남북으로 관통해 김포공항, 인천공항, 인천광역시, 김포시, 부천시, 시흥시, 의정부시, 구리시로 이동이 가능하다. 고양시에 소재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나들목과 분기점은 통일로 나들목과 고양 나들목, 일산 나들목, 자유로 나들목, 북로 분기점이 있다. 2020년에는 평택파주고속도로 북로 분기점 / 현천 나들목 ~ 내포 나들목 구간이 개통 될 예정이며 고양시 구간을 통과할 예정이다. 국도 제39호선과 국가지원지방도 제98호선이 동서남북으로 관통해 인천광역시, 의정부시, 김포공항, 김포시, 부천시로 이동이 가능하며, 국도 제1호선이 고양시 북쪽을 관통해 파주시 조리읍과 서울 은평구로 이동이 가능하다. 자유로에 속한 국도 제77호선이 고양시 서쪽을 관통해 서울 마포구와 파주시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일산신도시의 수도권 전철 3호선 (흔히 일산선이라고 부름) 위에 뻗어있는 중앙로는 현재 버스 중앙차로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일산신도시의 중심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므로 차량이동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74번 고양시도이다. 군 관련 시설 제외 덕양구 덕양구(德陽區)는 경기도 고양시 동부에 있는 구이다. 북한산과 한강으로 대표되는 자연 환경, 세계문화유산인 서삼릉과 서오릉, 행주산성 등의 문화재로 유명한 곳이다. 구의 명칭은 덕양구 지역의 옛 이름인 '덕양(德陽)현'에서 따 왔으며, 행주산성이 덕양산에 있다. 본디 ‘덕양현’으로 불렸다. 1413년 조선 태종 13년에 고봉현과 덕양현의 글자를 각각 따서 고양군이 설립되었다. 그 뒤, 조선 연산군 때에는 왕의 사냥터로 바뀌어 주민들이 모두 소개(疏開)되기도 하였다. 덕양구의 행정 구역은 32개의 법정동을 19개의 행정동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고 있으며, 19동 397통 2,387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덕양구의 면적은 165.51km로 시의 61.8%에 해당되고, 인구는 2014년 12월 말 기준으로 42만4423 명, 16만6253 세대이다. 행신3동은 5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으며, 화정1동도 4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일산구 일산구(一山區)는 과거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에 존재했던 구이다. 2005년에 일산동구와 일산서구로 분구(分區)되면서 폐지 되었다. 일산구청사와 일산구에 부여된 행정자치부의 자치단체 고유코드는 일산동구가 승계했다. 과천시 과천시(果川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부에 있는 시이다. 북쪽으로 관악산(632m)과 구룡산(306m), 우면산(293m)을 경계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초구와 접하고, 청계산(618m)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성남시, 남서쪽으로는 안양시, 남쪽으로는 의왕시와 접한다. 서울대공원·서울경마공원 등의 문화시설이 있고, 정부과천청사가 위치한다. 과천시의 시외 지역 전화번호는 서울특별시와 동일한 02이다. 시목은 밤나무, 시화는 철쭉, 시조(市鳥)는 비둘기, 시의 동물은 말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 율목군이라고 칭하였고, 757년 신라 경덕왕 때는 한산주 율진군이 되었고, 940년 고려 태조 때는 과주로 바뀌었다. 1018년 고려 현종 때는 과주현으로, 1413년 조선 태종 때는 경기도 광주목에 속한 과천현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 5월 26일 경기도 과천군으로 변경되었고, 1914년 시흥군에 흡수되어 지금의 과천시 일대(종전의 과천군 군내면과 동면 주암리)는 시흥군 과천면이 되었다. 1963년 건설부 고시에 의해 1990년까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경기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다. 1982년부터 2012년까지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7개의 중앙부처가 위치하였다. 1985년 8월 1일 시외전화 요금수입 감소, 이미 서울통화권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된 광명시, 고양군 신도읍(현 고양시 덕양구 일부), 광주군 서부면(현 하남시 일부)을 제외한 다른 경기도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 등과 같은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서울청사 및 청와대와의 연락 용이 차원에서 종래 안양시 통화권(지역번호 0343) 지역이었던 과천지역이 서울특별시 통화권(지역번호 02)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1일 시흥군 과천면 일원에 과천시가 설치되었다. 2012년 말부터 정부과천청사의 정부 기관 대부분이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여 과천청사에는 법무부, 공무원 교육원 등이 남으며, 중앙정부의 서울·경인 지역 지방청들이 입주할 계획이다. 과천은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한 중소도시로 북쪽으로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와 접해있으며, 서쪽으로는 경기도 안양시, 동쪽으로는 성남시, 남쪽으로는 의왕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기반암은 대부분이 호상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양재천 연안에는 충적지가 널리 발달하였다. 주요 산으로는 서쪽에 629m의 관악산, 응봉(鷹峰:348m), 동쪽으로 청계산(618m) 등이 솟아 있다. 관악산과 청계산은 북쪽에 있는 구룡산(306m), 우면산(293m)과 함께 북으로는 서울특별시, 서쪽으로는 안양시, 동쪽으로는 성남시, 남쪽으로는 의왕시와 경계를 이룬다. 북동쪽에는 한강의 지류인 양재천이 흐르고, 양재천 양안에는 범람원이 발달하였다. 과천시의 면적은 35.86 km²로 대한민국에서 구리시에 이어 두 번째로 면적이 좁고, 대한민국 국토 면적의 0.036%, 경기도 면적의 0.35%를 차지하고 있으며, 과천시 전체 면적의 85.4%인 30.64 km²가 개발제한구역이다. 과천시의 행정 구역은 6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35.86 km²이고,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5만7527 명, 2만0903 가구이다. 과천시는 2010년 12월 말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8.6%, 65세 이상 인구는 8.8%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2.6%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5.6%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2.2%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6.4로 여자가 다소 많다. 과천시의 인구는 2009년 1월부터 2015년 4월까지 사이에 7만명 대를 유지하다가, 2015년 5월 이후 6만명 대로 다시 줄었다. 서울대공원은 과천시 청계산 막계동에 있는 공원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다. 놀이공원인 서울랜드와 더불어 서울·수도권 시민들의 일일 나들이에 나서는 과천의 명소다. 서울랜드는 과천시 막계동에 있는 테마파크이다. 세계의 광장,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미래의 나라 및 삼천리 동산 등 각각 독특한 주제를 갖춘 위락 시설을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설치하여 1988년 5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문을 열었다. 1994년 과천선(서울 지하철 4호선) 개통과 더불어 대공원역을 통한 서울대공원의 동·식물원, 산림욕장, 국립현대미술관 등과 연계한 이용이 점차 활성화되어 현재는 수도권 시민들의 일일 나들이 장소가 되었다. 해마다 튤립, 벚꽃, 국화 등 화려한 꽃 축제를 개최한다. 그리고 전시 이벤트 등을 도입하여 지속적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특히 야간 개장에 따른 쇼를 도입하여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야간 휴식 공간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국립과천과학관은 과천시 상하벌로에 위치한 과학관으로, 과학기술자료를 수집·조사·연구하여 이를 보존·전시하며, 각종 과학기술교육프로그램을 개설하여 과학기술지식을 보급하는 시설로서 교육과학기술부 소속이며 관장은 고위공무원 나급(2~3급 상당)이다. 2008년 11월 14일 개관하였다. 렛츠런파크 서울은 과천시 주암동 685에 위치한 경마장이다. 전 이름은 서울 경마공원으로, 한국마사회가 1989년 9월 1일에 개장하였고, 약 7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람대 2개소를 비롯하여 가족공원과 승마장, 마사박물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고 있으며 주말에는 6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대한민국 최대의 미술관으로, 1969년 경복궁 소전시관에서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1973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관하였으며, 1986년 현 위치로 한 번 더 이관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으로 관장은 고위공무원 나급(2~3급 상당)이며 2006년 과천 청사 개관 20주년을 맞아 직제 개정 및 경영 혁신을 통한 행정형 책임운영기관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랜드, 서울대공원과 함께 수도권 시민들의 일일 나들이 코스로 교육, 문화의 장이 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의 옛 기무사령부 터에 서울분관이 있다. 기암절벽에 자리잡은 암자로 해발 629m지점에 있다. 많은 타 지역 버스가 과천대로와 중앙로를 경유하며, 과천시 면허의 시내버스 회사인 과천여객과 마을버스 회사인 과천운수가 존재한다. 남양주시 남양주시(南楊州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중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시의 서쪽은 불암산(508m)을 경계로 서울특별시와, 왕숙천을 경계로 구리시와 접하고,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광주시·하남시와 접하며, 북쪽으로 포천시·의정부시, 동쪽으로 가평군·양평군과 맞닿아 있다. 남양주시는 본래 양주군의 남부 지역이었는데 1980년 4월에 남양주군으로 분리되었고, 1995년에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되어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시청 소재지는 금곡동과 다산동이고, 행정구역은 5읍·4면·7행정동이다. 2013년 1월 7일에 인구가 60만명을 돌파하였다. 남양주시는 산으로 둘러싸인 여러 분지들로 이루어진 지형이어서 일핵(一核) 구조가 아니라, 미금(호평, 평내, 금곡, 양정, 다산)·진건을 중심으로 화도·수동, 별내·퇴계원, 와부·조안, 진접·오남 등 동서남북의 5개 권역으로 분산된 다핵도시(多核都市)이다. 남양주시의 행정 구역은 5읍·4면·7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도읍에는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시의 면적은 경기도의 4.5%에 해당하는 458.02 km² 이며, 인구는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66만2154 명, 25만1335 가구이다. 남양주시에는 단독 시 승격 기준인 인구 5만 명을 초과하는 읍면동이 화도읍, 진접읍, 와부읍, 퇴계원면, 별내동의 5개가 있다. 또, 남양주시에는 전국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면인 퇴계원면(3.26 km2)이 있는데, 퇴계원면은 면 전체가 아파트 등 주거가 밀집한 지역으로 남양주시 관할 중 도농동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다. 남양주시는 인구가 50만 명이 넘기 때문에 지방자치법 175조에 따라 특정시로서 행정구를 설치할 수 있으나, 구를 설치하는 대신 2016년부터 두 개의 읍면동을 묶은 행정복지센터를 개청하여 전 지역에서 책임읍동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철에는 한랭건조하고 여름철은 고온다습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남양주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12조 3847억원으로 경기도 지역 내 총생산의 1.7%를 차지하고 있다.이 중 농림 어업(1차생산)은 632억원으로 비중이 낮고,광업 및 제조업(2차생산)은 2조 5522억원으로 20.61%의 비중으로 차지하고,상업 및 제조업(3차 생산)은 9조 7692억원으로 28.5%의 비중을 차지한다.3차 산업 부문에서는도,소매업(11.8%)와 부동산업 및 임대업(9.80%),건설업(8.94%),전기,가스,증기 및 수도사업(8.01%)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남양주시 산업의 총 종사자 수는 135,583명으로 경기도 총 종사자 수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55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27,932 명으로 20.6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107,596명으로 79.4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 %)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 %)보다 높다.3차 산업 부분에서는 도소매업(19.5%) 숙박 및 음식점업(12.0%) 교육서비스업(10.0%)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9.5%)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남양주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521.666명이고 주간인구는 441.872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85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5.868명, 유출인구는 100.719명이고,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496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17.439명 더 많은데,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남양주시 역시 다른 수도권 위성도시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의존한 베드타운이라 일컬어진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학문적 사상을 기리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문화제로, 헌화, 헌다례, 다산서예대전, 다산문예대회, 다산학술논문대전, 공연·체험·전시 프로그램 등을 1년에 단 한차례 축제 기간에만 개방되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선정된 광릉숲에서 개최되며, 숲속공연과 숲속체험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마현 다산마을은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곳이다. 능내역 뒤쪽의 북한강변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로서 다산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유물관에는 다산의 영정 및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집필기록, 산수화 등을 비롯해 거중기와 녹로 등 그가 만들었던 역사적인 물건들까지 재현해 놓았을 뿐 아니라, 다산초당, 천일각 등 그가 유배살이 하던 곳을 섬세한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두었다. 또한 다산 문화관에서는 강당에서 다산 영상물 및 교육자료를 상영하며, 다산학 무료강좌와 최첨단 자료를 이용하여 다산에 관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홍유릉은 조선의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 황제와 그의 비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과 대한제국의 제 2대 황제인 순종과 그의 비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능인 유릉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금곡동에 위치해 있다. 광릉은 조선의 제 7대 왕인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의 왕릉 진접읍에 위치해있다. 광해군묘는 조선의 제 15대 왕인 광해군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진건읍에 위치해있다. 흥선대원군묘는 조선의 제 26대 왕 그리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 황제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묘로 화도읍에 위치해있다. 사릉은 조선의 제 6대 왕인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무덤으로 진건읍에 위치해있다. 천연기념물 제11호로, 면적은 2.305㎢로 남양주시의 진접읍, 의정부시의 일부, 포천시의 소흘읍·내촌면 일대에 걸쳐 위치하며, 동서 길이 3,997m, 남북 길이 8,024m, 면적으로는 2.305㎢에 이른다. 광릉이 1468년에 개장되어 530여 년간 주변 숲이 보존되어 원시림에 가까울 정도여서 상록수와 활엽수의 거목들이 많아 크낙새 서식 환경에 알맞은 곳이었다. 천연기념물 제232호로, 면적은 7.695㎢이며 수령은 약 500년이다. 조선 초기에 거창 신씨(居昌 愼氏)가 선조의 묘를 쓰고서 기념식수한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나무 높이는 13m에 이르며 이 나무는 땅 위 2m 높이쯤 되는 곳에서 줄기가 다섯 갈래로 갈라지면서 사방으로 수관(樹冠)을 뻗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랫부분의 둘레가 1.8m에 이르고 돋아난 가지는 아래로 처져 있다. 가슴높이 둘레는 3.25m에 이르고, 가지는 동쪽으로 5.7m, 서쪽으로 5.7m, 남쪽으로 7.5m, 북쪽으로 8.5m로 퍼져 있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은 조선의 제 7대 왕인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 윤씨의 왕릉인 광릉에 위치한 수목원으로 주변 산림도 보호하라고 엄격히 이른 세조의 말에 따라 이 주변 일대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 되어있다. 이후 한국 전쟁도 견디어 내면서 현재까지 50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인 크낙새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국립수목원은 포천시에도 걸쳐있다. 남양주 유기농테마파크는 조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1년 9월 26일 개관한 유기농 테마파크로 2011년 남양주시가 세계유기농대회를 연 기념으로 설립한 테마파크이다. 남양주한강공원은 남양주시의 한강변과 인접한 곳인 수석동, 도농동, 삼패동, 와부읍, 조안면 등지에 위치한 한강공원으로 특히 삼패지구에 있는 시민공원의 경우 벼룩시장 행사 나 여러 축제 행사와 함께 아영장과 분수대를 제공해주고 있다. 다산길은 남양주시에 조성된 장거리 걷기 코스이다. 남양주시 전역에 걸쳐서 13개 코스에 총길이 169.3km로 이루어져 있다. 2010년에 8개 코스가 먼저 개통되었고, 2011년에 나머지 5개 코스까지 완전 개통되었다. 팔당댐은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배알미동)과 남양주시 조안면을 잇는 높이 29m, 제방길이 510m, 총저수량 2억 4400만t인 한강 본류의 다목적댐이다. 외부에는 야외공연장과 석조전시장 등이, 내부에는 전시실, 교육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역사·문화실에서는 우리시에서 발굴조사하여 출토된 구석기유물부터 조선, 근대의 다양한 민속유물 등이, 금석문실에서는 신도비문과 자연을 담은 여러 문양 등 탁본 유물이 전시된다. 시흥시 시흥시(始興市)는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동쪽은 광명시, 안양시, 서쪽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남쪽은 화성시, 안산시, 북쪽은 부천시와 접하며, 남서쪽에 시화호를 사이에 두고 황해 경기만 일대와 접한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 475년(장수왕 63년)에 고구려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당시 시흥시의 남부는 장항구현(獐項口縣), 북부는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 장항구현과 매소홀현은 551년(백제 성왕 29년)에 백제가 지배력을 회복하였으나,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차지하였다. 경덕왕 16년(757년)에 지명을 중국식 한자로 바꾸면서 장항구현은 장구군(獐口郡)으로 승격하였고, 매소홀현은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어 율진군(栗津郡)에 속하였다. 이후 장구군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안산군으로 개칭되었고, 소성현은 고려 숙종 10년(1105년)에 경원부로 승격하였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인천군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현재의 시흥시 남부(옛 수암면·군자면)는 안산군에, 시흥시 북부(옛 소래읍)는 인천도호부에 각각 속하였다. 시흥시 남부는 1914년에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안산군 지역이 시흥군으로 통폐합되었을 때 시흥군 수암면·군자면이 되었고, 시흥시 북부(대야동·신천동·은행동·신현동·매화동·과림동)는 같은 시기에 부천군 소래면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에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 시로 승격한 현재의 시흥시는 시흥군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나, 조선 시대의 전통적·역사적인 시흥군 지역(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관악구 및 동작구 일부, 구로구 동부, 경기도 광명시)과는 다른 지역이다. 시흥시는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이다. 북서쪽으로는 인천광역시, 북쪽으로는 부천시, 북동쪽으로는 광명시, 동쪽으로는 안양시, 남쪽으로는 안산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서해와 면한다. 시흥시의 면적은 135.79 km²이며, 동서간 17.5 km, 남북간 17.4 km이다. 시흥시의 행정 구역은 18행정동, 30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흥시의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41만9664 명, 16만7802 가구이며, 면적은 135.79 km²이다. 시흥시의 주민등록 인구는 2010년 11월에 40만4천 명을 정점으로 완만한 감소세를 보이다가 2015년 6월에 39만3천 명을 저점으로 다시 증가 추세에 있는데, 배곧신도시가 개발 중인 배곧동과 목감택지지구가 조성 중인 목감동, 은계택지지구가 조성 중인 은행동, 대야동 등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시흥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26조889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산업(1차 산업)은 414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6조7496억원으로 64.2%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9조2979억원으로 35.6%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6.6%)과 건설업(4.0%), 부동산업 및 임대업(3.3%)과 사업서비스업(3.2%)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시흥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185,032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17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89,554명으로 48.4%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95,461명으로 51.6%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9%) 숙박 및 음식업(7.6%) 교육서비스업(5.2%)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4.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에서도 희귀한 내만갯골이 있는 곳으로, 이 갯골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사행성(巳行性) 갯골이라고도 불린다. 매년 8월 중순에 시흥갯골생태공원에서 열리며 갯골생태체험, 연꽃 페스티벌, 문화행사 등을 즐길 수 있다. 1922년 일제가 염전을 만들기 위해 안산간 제방을 쌓으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현재는 섬 서쪽에 해안을 매립,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가 형성되었다. 이곳에는 시흥시의 향토음식인 오이도 굴회덮밥을 비롯한 많은 식당과 횟집이 들어서 있어 미각을 한층 돋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군만호가 설치되었고, 1991년까지는 바다와 자원의 보고라고 불리는 갯벌이었다. 이곳을 시흥시가 매립하여 면적 564,938m(170,893평)에 횟집과 어물전 230여 곳을 비롯하여 각종 위락시설을 조성하였다. 신선한 자연산 활어회 등 많은 횟집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으며 월곶을 찾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싱싱한 횟감을 사갈 수 있는 어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군포시 군포시(軍浦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동쪽은 의왕시, 서쪽과 남쪽은 안산시, 북쪽은 안양시와 인접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과천군 남면이었는데, 1914년에 과천군이 시흥군에 통합되면서 시흥군 남면이 되었다. 1979년에 시흥군 남면이 군포읍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군포(軍浦)란 이름은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에 있었던 시장인 군포장(軍浦場)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곳은 구군포사거리와 안양천 사이에 있었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현재의 군포역 자리에 군포장역이 만들어졌고, 1925년 안양천 범람으로 인해 군포장이 군포장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옮기면서 원래 군포장이 있던 곳은 구군포(舊軍浦)로 불리게 되었다. 1938년에 군포장역의 이름이 군포역으로 변경되었으며, 1979년에 시흥군 남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군포역에서 이름을 따와 행정구역명이 군포읍으로 정해졌다. 군포의 어원에 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우기 위해 모인 관군을 배불리 먹인 곳이어서 군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동쪽은 의왕시, 서쪽은 시흥시, 남쪽은 안산시, 북쪽은 안양시가 접해있다.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지역으로, 북동쪽에는 모락산, 북서쪽에 수리산이 , 동쪽에는 오봉산이 접해있다. 산본천이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금정동에서 안양천과 합류되어 흐른다. 군포시의 행정 구역은 11개동, 327통, 2,243반으로 구성된다. 군포시의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28만1205 명, 10만6645 가구이고, 군포2동에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면적은 경기도의 0.36%에 해당하는 36.41 km²이다. 군포시는 2009년 기준으로 0~14세 인구가 18.5%, 65세 이상 인구가 7.5%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4%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높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4.9%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으며, 노년인구부양비는 10.1%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99.8로 여자가 다소 많다. 관할 교육청은 군포의왕교육지원청으로 의왕시와 통합 관할되고 있으며, 치안은 군포경찰서, 소방은 군포소방서가 담당하고 있다. 산본동에는 군포환경관리소라는 명칭으로 쓰레기 소각장이 운영 중이다. 영문명칭 GUNPO의 형태를 이용한 워드마크(Word Mark-글자를 이용한 마크 )형 심볼이다. 나무, 혹은 나뭇잎으로 형상화된 영문 알파벳 'P'는 도시를 상징하는 푸른색의 'GUN'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과 어우러진 환경 도시 군포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시 캐릭터의 이름은 '화니'다. 군포시를 이끌어가는 건강하고 밝은 시민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즐거운 표정의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시민간의 어울림을 표현하였고, 캐릭터 팔의 주황색은 밝은 미래, 초록색은 깨끗한 자연을 상징화하였다. 아이디어가 샘솟는 창의적인 도시를 심플한 선으로 정리한 모습이다. 2014년 군포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96,615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7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26,136명으로 27.1%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70,473명으로 72.9%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과 3차 산업의 비중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과 비슷하다. 3차산업 부분에서는 사업서비스업(12.2%), 도소매업(11.1%)과 운수업(8.7%), 교육서비스업(8.1%)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군포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271,631명이고 주간인구는 239,102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88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8,553명, 유출인구는 65,004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454명, 유출인구는 9,532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32,529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군포시의 2012년 지역 내 총생산은 11조8514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19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4조2647억원으로 36%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7조5849억원으로 64%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사업서비스업(9.2%)과 건설업(9.0%), 도소매업(6.6%)과 운수업(6.1%)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 시대 (중국) 삼국 시대(三國時代)는 후한이 몰락하던 2세기 말부터 서로 다투던 위, 촉, 오를 서진이 통일하는 3세기 후반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엄격하게는 위가 세워진 220년부터 오가 진에게 멸망한 280년까지를 삼국시대로 보나, 많은 사람들은 황건의 난을 삼국시대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다른 국가들과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위를 조위, 촉을 촉한, 오를 동오라고 부르곤 한다. 비록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였다. 삼국 시대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전되었고, 최근에는 TV, 영화, 비디오 게임 등으로 제작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시대에 기반을 둔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이다. 가장 권위있는 역사 기록은 진수가 쓰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이다. 삼국 시대는 오호 십육국 시대와 군벌 시대와 같이 가장 잔혹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후한 말의 인구조사에는 그 당시 인구가 약 5천만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서진 초에는 천 6백만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의 인구 조사는 한의 인구 조사보다 덜 정확했기 때문에 실제 수치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삼국지 모든 시기(184년~280년)의 중국 인구는 3,0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면 삼국 시대 당시의 중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준다. 후한의 힘은 화제의 재위기 이후에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많은 황제들이 어려서 재위에 올랐고, 사실상 친척들이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 황제들이 성년에 이르러도 외척들은 권력을 내주길 꺼려했기 때문에, 황제는 권력을 찾기 위해 관리들과 환관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환관들과 외척간의 다툼은 그 당시 중국정부의 가장 큰 문제였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동안 환관들에 대한 관리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많은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환관들은 저항에 참여했던 관리들을 처형하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몇몇 지방의 통치자들은 이렇게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를 기회삼아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고 했다. 환제와 영제의 재위기는 한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 더해서 당시 중국에는 많은 자연재해들과 여러 반란들 역시 존재했다. 184년 2월, 도교적 교단 태평도의 지배자였던 장각은 형제였던 장보와 장량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난은 급속도로 퍼져 수십만에 이르렀고, 중국 곳곳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36개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고, 큰 요새는 만명 이상, 작은 요새는 6~7천명 정도의 군사를 가져 한나라 군대와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그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해지리라)"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영제는 황보숭과 노식, 주준을 보내 황건적을 물리치도록 했고, 지방의 관리들에게 군사를 보내 이를 돕도록 명했다. 삼국지연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황건적은 결국 패배하고 중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때문에 살아남아 산지에서 도적으로 살아갔고, 이로 인해 시대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중국 곳곳으로 퍼진 도적떼들을 다 처리할 능력이 한나라 군대에는 없었다. 188년, 유언은 지방관들이 직접 그 지방을 통치할 수 있게 해달라 영제에게 건의했고, 영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주가 도적들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로 인해 중국 내부의 혼란은 결국 더 커지게 되었다. 이듬해에 영제가 죽고 다시 또 외척과 환관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환관 건석은 외척이었던 하진을 죽이고 왕세자자리에 올라있던 유변을 대신해 유협을 왕세자로 바꿀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유변은 황제가 되어 소제가 되었고, 하진은 원소와 함께 그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장양이 수장으로 있던 환관무리 십상시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하진은 또한 양주의 동탁과 병주의 정원에게 병력을 보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십상시는 이를 알아차렸고,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을 암살했다. 그러자 원소는 궁을 급습해 십상시와 2천여명의 환관들을 살해했다. 이로써 외척들과 환관들의 긴 싸움은 끝났지만 군주들간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혼란의 시대를 열었다. 이 일로 인해 북서쪽 국경에 있던 동탁이 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북서쪽 국경에서 창족과 전쟁중이었고, 이로 인해 동탁은 잘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끌고 낙양에 왔을 때 그는 쉽게 수도를 점령 할 수 있었다. 동탁은 더 능력있는 사람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유변 대신 유협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동탁은 전쟁통에 도망나온 유변과 유협을 지키고 있던 군대를 만났다. 동탁이 거만하게 행동하자 유변은 겁을 먹었으나 유협은 침착하고 권위있게 동탁에게 그들을 보호하라고 명했다. 동탁은 처음에는 한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의 정치적인 능력은 군사적 능력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의 행동은 점차 폭력적이고 권위적으로 변했으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 처형하거나 멀리 유배를 보냈고, 황제에 대한 존경 역시 점차 없어졌다. 그는 왕실의 예절을 모두 무시했으며, 궁궐에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190년에 반동탁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191년 5월, 손견에게 패배해 휘하 부하 중 화웅을 잃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계속된 패배에 결국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동탁은 낙양에 살던 수백만의 거주자들을 장안으로 강제이주 시키면서 그의 정치적 무능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는 반동탁 연합군이 낙양을 점령하지 못하게 낙양을 불태웠고 결국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를 불태우는 일을 저질렀다. 게다가 그는 군사들에게 지나가면서 보이는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했다. 군사들은 주민들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가져왔고 이를 전쟁에 승리한 것 처럼 보이게 하는 전리품으로 사용했다. 1년후에 동탁은 왕윤과 여포의 쿠데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191년, 연합군 사이에서는 황실의 친척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점점 연합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몇몇 군주들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주들은 한나라의 재건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강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결국 한나라는 군주들에 의해 나뉘었다. 원소는 업의 북쪽 지역을 그의 상관이었던 한복으로부터 빼앗아 다스렸고, 북쪽 국경지대의 공손찬과 대립했다. 원소의 바로 남쪽에 있던 조조는 원술, 그리고 화이허와 창 강근처를 지배하고 있던 유표를 상대로 대립했다. 손견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받은 남쪽의 손책은 비록 원술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서쪽은 유장이 익주를 다스렸고 그 북쪽에는 마등등과 같은 많은 군주들이 있었다. 동탁은 여포와 사도 왕윤에게 살해당했다. 여포는 동탁의 부하들(이각, 곽사, 장제, 번조)에게 차례로 공격당했다. 왕윤과 그의 가족들은 전부 처형당했다. 여포는 잠시 장양에게 몸을 위탁하다가 원소의 밑으로 들어갔다. 195년 8월, 헌제는 이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장안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위험한 방랑을 하면서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았다. 196년 조조는 황제를 모시면 다른 군주들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지니게 된다는 모사 순욱의 제안에 따라 황제를 모셨다. 조조는 189년 겨울에 군사를 일으켰다. 몇번의 전술과 전투로 조조는 황건의 몇몇 무리를 격퇴했다. 이로인해 조조는 장막과 진궁등을 무리에 합류시키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황건적과 싸워 약 삼십만의 군대를 흡수했다. 196년, 그는 허창으로 수도를 바꾸고 근처에 둔전제를 시행했다. 비록 높은 세금(농산물의 40~60%)을 부과하기는 했지만, 농부들은 안정적으로 군사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는 후에 그의 두 번째로 성공적인 정책이라고 일컬어진다. 194년, 조조는 서주의 도겸을 상대로 전쟁을 했는데, 이는 도겸의 부하였던 장개가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도겸은 유비와 공손찬의 도움을 받았으나, 조조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주가 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조는 자신이 없는 동안 여포가 연주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도겸에 대한 전쟁을 잠시 미루고 후퇴했다. 도겸은 그해 사망했고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줬다. 이듬해인 195년, 조조는 여포를 연주에서 쫓아냈다. 여포는 서주로 도망갔고, 유비에게 몸을 의탁했다. 197년에 원술은 스스로 중 (후한)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군주들의 분노를 불러온 실수였고, 또한 그의 부하였던 손책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손책은 장굉과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해 원술에게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중단하라 했으나 원술이 이 조언을 듣지 않고 스스로 환제랄 참칭하자 손책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원술에게서 독립하고, 양주의 군주들이었던 유요, 왕랑, 엄백호등을 물리쳤다. 조조는 손책에게 원술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손책은 이를 따랐고, 또한 원술에 대항해 유비, 여포 등과 연합을 하라고 조조를 설득했다. 결국 원술은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도망쳤다. 후에 여포는 원술의 잔여병력과 힘을 합쳐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령했다. 유비는 그의 의형제였던 관우, 장비와 함께 조조에게로 도망쳤다. 뒤이어 조조는 유비와 함께 서주를 공격했다. 여포의 부하들은 그를 배신했고, 원술의 지원군은 오지 않아 결국 여포는 그의 부하였던 송헌과 위속에게 포박당해 조조에게 끌려갔고, 이후 조조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200년, 외척이었던 동승은 헌제로부터 조조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는 유비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으나, 조조에 의해 발각되어 유비를 제외한 공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유비는 북쪽의 원소에게로 도망쳤다. 황건 잔당들의 반란과 궁 내부의 위협들을 처리한 뒤, 조조는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한 원소에게로 눈을 돌렸다. 원래부터 조조보다 신분이 더 높았던 원소는 거대한 군대를 모으고 황하 북쪽의 댐을 따라서 야영지를 세웠다. 200년에 유표를 상대로 승리하고, 허공의 반란을 진압한 손책은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동생이었던 손권을 후계자에 임명했다. 조조는 관도 대전에서 원소와 충돌했다. 군사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승리했는데, 특히 원소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러 군대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로 도망쳤고, 많은 원소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202년에, 조조는 원소의 죽음과 이후 원소의 아들들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황하 북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204년에 업을 함락시키고, 기주, 병주, 청주, 유주를 점령한다. 207년 말, 오환을 상대로 한 북방 정벌에서 승리를 거둔 후 화베이 평원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얻었다. 208년에, 조조는 제국을 통일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고 형주를 넘겼으며, 조조는 거대한 함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강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손책의 후계자 손권은 저항을 계속했다. 손권의 모사 노숙은 북쪽에서 도망쳐 온 유비와 동맹을 맺었고, 주유는 손가를 섬기던 노장 정보와 함께 손권의 해군 제독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명은 적벽에서 조조의 대함대와 2십만 군대와 마주쳤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자 조조의 함대에 불을 질렀고, 결국 조조는 대패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유비와 손권은 결국 살아남았고, 촉과 오가 세워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북쪽에 돌아 온 후, 조조는 211년 북서쪽 지역을 병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이로써 점점 힘을 길러갔다. 그는 계속해서 힘을 길렀고, 결국 217년, 그가 조종하는 헌제에 의해 위왕에 올랐다. 유비는 형주의 태수들이었던 한현, 금선, 조범, 유탁을 물리치고, 214년에는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점령했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두었다. 손권은 합비 전투를 끝내고 형주로 눈을 돌렸고, 둘 사이의 연합을 깨져가는 듯 보였다. 219년, 유비가 조조에게서 한중을 빼앗자, 조조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형주를 쳤다. 손권의 장수 여몽에 의해 관우는 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220년 1월, 조조가 죽고, 그해 10월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했고, 결국 한나라는 멸망했다. 조비는 낙양에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가의 이름을 위로 했다. 221년, 유비는 멸망한 한을 재건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했다. 같은해에 위는 손권에게 오왕의 자리를 수여했다. 1년 후에, 촉은 관우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오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비는 손권의 지휘관 육손에 의해 대패하고, 촉으로 후퇴한 뒤 곧 사망했다. 유비가 죽은 후, 오와 촉은 위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222년, 손권은 조비가 내려준 직책을 거부했고, 229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은 완전히 위가 점령했고, 남서쪽은 촉이, 남쪽과 동쪽은 오가 지배했다. 국경 외부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제한된 곳이었다. 예를 들어, 촉의 정치적 지배권은 남쪽(현재의 윈난 성과 미얀마)의 남만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223년, 유비가 패배하고 사망하자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후 촉과 오의 적대기간은 끝났으며, 두 국가 모두 내부 문제와 외부의 적(위)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손권은 이 전쟁의 승리로 촉이 형주를 노릴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고, 이후 남동쪽의 원주민이었던 백월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4년, 제갈각은 약 십만명의 백월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 3년간에 걸친 전쟁을 끝냈다. 그들 중 약 4만명 정도가 오의 군사에 편입되었다. 그동안 촉 역시 남쪽의 원주민들에 의해 골치를 썩고 있었다. 남만은 촉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익주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제갈량은 남쪽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촉군에게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그는 남만의 대장 맹획과 몇번의 전투를 벌였고, 결국 맹획은 항복했다. 남만인들은 촉의 수도였던 성도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었고, 또한 군대에도 남만부대가 생겼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 끝나자, 촉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227년에 제갈량은 촉의 주력 군대를 한중으로 이동시켰고, 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제갈량은 조운과 함께 기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선봉이었던 마속이 가정 전투에서 전략에 의해 패배를 하고 만다. 그 후 6년동안 제갈량은 몇번의 공격을 더 했으나, 물자 공급문제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고, 웨이허남쪽의 오장원에서 전투를 했다. 그러나, 그해 제갈량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북벌을 할 동안, 오나라는 위나라가 침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었다. 특히 합비근처는 적벽 대전 이후부터 계속해서 오와 위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던 지역이었다. 계속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합비의 거주자들은 결국 장강 남쪽으로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 화이허남쪽에 대한 위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는 오의 수비선을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손권의 긴 재위기는 오나라의 전성기로 여겨지고 있다.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백월족 이주민들로 인해 농사를 지을 인력이 풍부해 졌다. 또한 바다를 통한 운송업도 발전해 만주나 타이완등으로의 바다 여행도 가능해졌다. 오의 상인들은 현재의 베트남 북쪽 지역이나 캄보디아 등과도 교역했다. 경제가 번영한 것과 같이 문화나 예술 역시 발전했다. 낙양남쪽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 역시 이때였다. 230년대 후반부터 조씨 가문과 사마씨 가문사이의 긴장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조진이 죽은 후, 조상과 사마의간의 파벌싸움이 시작되었다. 조상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마의를 배척했다. 위나라에서 땅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가문 중 하나였던 사마씨 가문은 사마의의 군사적 성공에 힘입어 그 세력이 커졌다. 게다가 사마의는 매우 능력있는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238년에 사마의는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하고 랴오둥 반도를 정부의 직접통치하에 두었다. 결국, 그는 조상과의 힘싸움에서 이긴 셈이었다. 조상과 그의 가족들이 고평릉으로 간 틈을 타 사마의는 낙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씨 가문에 대해 대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죽림칠현이었다. 죽림칠현중 하나였던 혜강은 조상의 몰락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처형당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그가 차지하고 있던 승상자리는 장완과 비위, 동윤이 차지했다. 그러나 258년 이후, 촉의 정치는 환관들에게 조종당했고 점차 부패하기 시작했다.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강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촉은 점점 무너져 갔다. 263년에 위는 세갈래로 공격을 진행했고, 촉군은 한중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강유는 황급히 검각에 수비진을 폈으나,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험준한 지역인 음평을 통해 진군해 온 위의 등애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했다. 그해 겨울 등애에 의해 수도인 성도가 함락되고, 황제 유선은 항복했다. 결국 촉나라는 43년 만에 멸망했다. 유선은 낙양에서 위나라에 의해 "안락공"에 봉해졌다. 260년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 했다가 오히려 사마소에게 살해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조환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사마소가 죽고 그의 "진왕"직은 아들 사마염이 물려받았다. 사마염은 바로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품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조환은 조모와는 달리 황제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5년, 사마염은 조환에게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아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세웠다. 이것은 46년 전 조비가 한을 멸망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손권이 죽은 후 어린 손량이 252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오는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촉의 멸망은 위나라가 오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선이 항복한 후 사마염(사마의의 손자)은 265년, 위의 황제를 몰아내고 진의 새로운 황제가 되면서 46년간 이어진 조위를 멸망시켰다. 진이 생겨난 후 오의 황제였던 손휴가 사망했고, 신하들에 의해 손호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손호는 촉망받던 영재였으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급격히 포악해져 자신에게 간언을 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269년, 진의 남쪽을 지휘하고 있던 양호는 왕준과 함께 지금의 쓰촨 성 지역에서 오를 정벌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년후, 오나라의 육항이 유능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78년 말엽에 왕준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이 사마염에게 손호가 지배하는 지금이 아니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다고 조언했으며 사마염은 이를 받아들여 오토벌을 명령했다. 279년 겨울, 사마염의 명에 의해 진이 공격을 시작했고, 쓰촨 성 지역의 함대는 강을 따라 형주로 향했으며, 창 강을 따라 건업(현재의 난징 시)에서 강릉까지 다섯군데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런 맹공에 결국 건업은 280년 3월에 함락당한다. 손호는 항복하고, 봉토를 받아 그 봉토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국 시대는 끝났고, 약 300여년간의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황건의 난 이후에 중원에 심각한 기근이 왔다. "170년 봄에, 하내의 몇몇 부인이 남편을 먹었고 하남의 몇몇 남편이 부인을 먹었다"라는 기록처럼 식인 풍습이 널리 퍼졌다. 동탁이 집권하고서 군대를 동원해 많은 여자를 납치하고 강간했다. 동탁 반대하는 연합이 결성되자 동탁은 낙양의 백성에게 낙양의 모든 궁궐과 절과 공관서와 민가를 불태우고 장안으로 이주하라고 갑자기 명령했고 인구는 결국 급감했다. 조조가 서주를 침략했을 때 백성 수십만 명을 생매장했고 강은 막혀 마을이 회복되지 못했다. 이각 (후한)이 관중 (지명)을 침략했을 당시 백성 수십만 명이 있었고 이각의 명령하에 군대가 약탈해 결국 서로 잡아먹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삼국시대의 인구 감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후한 말기에서 서진으로 통일될 때까지 125년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으나 인구는 약 35%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후 수 시대까지도 인구가 회복되지 못했고 인구 중에 군사 비율이 매우 높은 시기였다. 예컨대 촉의 인구가 900,000명이었을 당시 군사는 100,000명으로 군사가 전 국민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삼국지》에 삼국시대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다른 많은 역사 기록이 그렇듯이 이 인구 수도 실제 인구 수보다 적은 수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인구조사가 부정확했을 수 있고 세금 회피자들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서 《삼국지》 모든 시기(184년~280년)의 중국 인구 수는 3,000만 명에서 5,0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후한 말기, 자연재해와 사회적 불안정때문에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고, 결국 많은 농지가 버려졌다. 몇몇 지방관리들과 귀족들은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세우고, 농사를 지어 점차적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마련했다. 이런 요새와 영지체계는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왕실의 몰락으로 인해, 헌 동전을 녹여서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돈을 주조했기 때문에, 국가가 아닌 개인이 주조한 동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새로 주조한 동전은 화폐로써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비단과 곡식들이 화폐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지역적인 분열은 결국 후의 경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삼국시대로부터 약 700년이나 지난 북송시대에도 중국의 지역 경제권은 크게 3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의왕시 의왕시(義王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앙에 있는 시이다. 서쪽으로 안양시와 군포시, 북쪽으로 과천시, 동쪽으로 성남시와 용인시, 남쪽으로 수원시와 안산시와 접한다.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왕륜면이었다. 1914년 4월 1일 의곡면과 왕륜면의 앞글자를 따 의왕면이 되어 수원군에 병합되었고, 1949년부터 화성군에 속하였다가 1963년 시흥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의왕시는 경기도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가 좁고 긴 지형으로, 서쪽은 안양시와 군포시, 북쪽으로 과천시, 동쪽으로 성남시와 용인시, 남쪽으로 수원시, 안산시와 접하고 있으며, 경수산업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의왕과천도시고속화도로,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의왕은 크고 작은 산이 많은 도시로 북쪽의 청계산(618m)에서 부터 남쪽의 백운산(567m) 등의 산줄기와 얕은 구릉이 분포하고 있다. 서부와 남부 지역이 해발 200m 이하의 낮은 곳이라면, 100m 이하의 지역은 구릉지나 충적지대를 이루고 있어서 그 속에 모락산(385m), 오봉산(205m)이 위치한다. 또한 높고 낮은 산과 함께 백운호수, 왕송호수와 같은 수려한 자연이 펼쳐진다. 의왕시 관할 구역의 생활권은 모락산을 경계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도심이 거의 나뉘어 있다. 의왕시는 안양시의 개발과 연계되어 택지가 조성되고 도시화가 진행되어 왔는데, 특히 북부의 내손동과 포일동은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남부의 고천동, 오전동 지역에는 의왕시청, 의왕경찰서, 의왕소방서 등 의왕시의 행정기관이 모여 있다. 교육청은 군포의왕교육지원청(군포시 금정동 소재)으로 군포시와 통합 관할되고 있으며, 치안은 의왕경찰서, 소방은 의왕소방서가 담당하고 있다. 의왕시는 안양시, 군포시와 도시연담화 현상이 매우 심한 지역으로, 행정경계 문제로 인해 주민들이 여러 불편을 겪고 있다. 이는 의왕시가 구 시흥군 의왕읍 때부터 과거 안양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하였고, 안양시의 팽창에 따라 의왕시와 안양시가 실질적으로 단일 시가지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 3개 시를 통합하자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왔으나, 과천시와의 국회의원 선거구 조정 문제, 의왕시 전임 시장과 공무원들의 반발 때문에 논의가 중단되었다. 의왕시청과 의왕시의회는 모두 고천동에 소재한다. 의왕시의 인구는 단독으로 국회의원 선거구를 구성할 수 있는 규모이지만, 이웃하는 과천시(5만8천여 명)가 단독선거구를 구성할 수 없어서 과천시와 선거구를 공유하고 있다. 1989년에 시로 승격한 후 첫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된 1995년까지는 관선 시장이었고, 1995년부터는 주민투표로 시장이 선출되고 있다. 의왕시의 행정 구역은 6개 행정동 172통 897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경기도의 0.5%인 53.986 km²이다. 인구는 2018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15만3932 명, 5만8946 가구이다. 의왕시의 인구는 2013년 9월에 16만117 명으로 정점에 이른 후 정체 상태에 있다. 의왕시의 인구 구성은 2009년을 기준으로 0~14세 인구가 18.0%, 65세 이상 인구가 7.9%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3.1%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높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4.6%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0.8%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1.4로 남자가 다소 많다. 의왕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4조9655억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0.7%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34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1조4852억원으로 29.9%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3조4769억원으로 70%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우리나라 철도 화물운송의 중심지로서 사업서비스업(7.7%)과 공공행정(7.6%), 도소매업(7.6%)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의왕시 산업의 총 종사자수는 42,923명으로 경기도 총 종사자수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6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9,809명으로 22.9%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33,108명으로 77.1%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1%), 운수업 (10.6%)과 숙박 및 음식점업(9.4%), 교육서비스업(8.2%)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의왕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41,992명이고 주간인구는 122,201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86(으)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2,883명, 유출인구는 36,904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448명, 유출인구는 8,218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19,791명 더 많은데 이것은 수도권 지역의 위성도시들은 중심이 되는 대도시로 통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가 남부를 관통하며 의왕역에는 수도권 전철이 운행된다. 특히 오봉역과 연계된 물류시스템은 수도권 물류의 핵심 중 하나이다. 영동고속도로 부곡 나들목, 북수원 나들목과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평촌 나들목, 학의 분기점을 통하여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으며, 봉담과천도시고속화도로 월암 나들목, 신부곡 나들목, 의왕 나들목을 통하여 도시고속화도로로 진입할 수 있다.서해안고속도로는 봉담과천도시고속화도로와봉담읍경유하면 발안 나들목으로 진입 가능하다 의왕시 청소년 꿈누리 오케스트라 하남시 하남시(河南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동부에 있는 시이다. 동남쪽으로 광주시, 서쪽으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송파구, 서남쪽으로 남한산을 끼고 성남시, 북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구리시, 남양주시가 있다. 검단산, 금암산, 남한산 등 광주산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삼국시대 초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에 하남시 일대를 도읍으로 정하고 하남 위례성이라 부른 이래, 백제 근초고왕 2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를 광주로 개칭하고, 이때부터 광주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조선 선조 10년에 광주군 동부면이 되었으며, 1980년 12월 1일 동부읍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 1월 1일 광주군 동부읍·서부면과 중부면 일부가 합쳐져 현재의 하남시로 승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남쪽에 청량산이, 중앙에 객산과 금암산이, 동쪽에 검단산과 두리봉이 솟아 있다. 광주산맥의 줄기로 둘러 싸이고 강원도 산지에서 흘러 내리는 한강 지류가 북으로 흐르고 있어 산과 강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한강은 팔당을 지나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류한다. 한강 연안에는 범람원 및 하안단구가 형성되어 있다. 하남시의 행정 구역은 13개 행정동, 24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남시의 면적은 93.04 km이며, 이 중 녹지지역이 84.11%인 78.26 km를 차지한다. 하남시의 인구는 2015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16만6713 명 6만6797 가구이다. 2014년 하남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56,201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7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8,109명으로 14.4%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48,085명으로 85.6%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 (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사업서비스업(5.6%), 도소매업(32.4%)과 숙박 및 음식업(7.9%), 교육서비스업(5.1%)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남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36,183명이고 주간인구는 127,492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4%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5,042명, 유출인구는 29,134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945명,  유출인구는 5,544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8,691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 하남시에는 철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이 미사지구로 연장하는 방안이 검토되어 2014년 9월 29일에 착공되었고, 1단계 구간(상일동역 ~ 풍산동)은 2020년 4월에, 2단계 구간(풍산동 ~ 창우동)은 2021년 상반기에 개통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는 주로 버스편을 통해 인근 지역의 역을 이용하게 된다. 이 밖에 2011년 3월 19일에 하남 BRT가 개통되었다. 용인시 용인시(龍仁市, )는 경기도 중남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이천시, 서쪽으로 수원시·의왕시·화성시, 남쪽으로 평택시·안성시, 북쪽은 성남시·광주시와 접한다. 3읍 4면 24행정동을 관할하는 도농복합시로, 3개의 행정구(처인구, 기흥구, 수지구)가 설치되어 있다. 시청 소재지는 처인구 삼가동이고, 명소로는 에버랜드와 한국민속촌 등이 있다. 용인시는 산으로 둘러싸인 여러 개의 좁은 분지들로 이루어진 지형이어서 일핵(一核) 구조가 아니라 도심이 여러 곳에 분산된 다핵도시(多核都市)이며, 기흥구는 영동고속도로를 기준으로 기흥과 구성으로, 수지구는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수지와 죽전으로 생활권이 구분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용인'이라고 하면, 처인구의 중심지인 옛 용인읍(통칭 '김량장') 일대를 일컫는다. 용인시에서 '용(龍)'자가 들어가게 된 유래에는 이런 설화가 내려온다. 용인시의 좌측으로는 투구봉이 있고 우측으로는 칼봉이 자리 잡고 있는데, 봉우리의 형상이 투구와 칼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투구봉과 칼봉 사이에는 넓은 터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장군대지형의 땅'으로 믿고 있다.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기에 꼭 알맞을 정도의 넓은 지형이다. 옛날에 남씨 문중에서 이곳에 묘를 썼는데,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 문중 가운데 한 집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다. 아기는 낳은 지 사흘 만에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났으며, 힘 또한 장사여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아기장수가 태어날 무렵은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로,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간에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혹 다른 집안 자제 가운데 장차 훌륭하게 될 소지가 있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물론 그 집안 전체를 몰살하였다. 열세에 몰려 있던 남씨 문중에선 아기장수가 태어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이라고 불안해했다. 남씨 문중에서는 전체 회의를 열어 숙고한 끝에 아기장수가 성장하기 전에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워낙 힘이 센지라 여럿이 커다란 바위로 눌러 죽였다. 아기를 양지 쪽에 묻어 주려고 땅을 파보았더니 거기에서 투구와 칼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남씨 가문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날 때 장군대지형에서 마주 보이는 액교산에 있는 바위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울었다고 한다. 이 용마는 아기장수가 죽자 태울 주인이 없음을 슬퍼하며 성산(城山, 석성산)을 향해 달려나갔다. 현재 고림리의 액교산에는 용마가 났다는 용마바위가 아직도 전하는데, 용마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 지역은 이런 설화가 많다. 「고장군 묘소 전설」, 「아기장수와 용마바위」, 「유방리의 남씨네 아기장수」등이 내용이 비슷하다. 이것이 훗날에 조선시대의 남이장군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이런 전설들이 전해져 삼국시대의 구성현(駒城縣)이 고려 초 용구현(龍駒縣)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좌전고개 만세운동은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운동으로 용인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현재 사적지의 기념물로 용인 독립만세운동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좌전고개 만세운동」이라고 불리는 용인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오전 3시 주민 1천여 명이 참가해 벌인 용인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이날을 계기로 1만3천여 명이 동참했고 이 중 700여 명이 일제에 의해 죽거나 실종됐다. 용인은 고구려 때 구성현(駒城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거서현(巨黍縣)이라 개칭하고 한주(漢州)에 속했다. 경기도 남부 내륙에 있으며,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역내는 광주산맥의 여맥이 기복하여 구릉이 각처에 발달하고 소분지가 점재하며, 하천은 중앙지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흐른다. 하천으로는 탄천이 북류(北流)하여 한강에 합하고, 구흥천이 남으로 흘러 평택시를 지나 분향만으로 유입하며, 동남쪽으로 청미천의 상류가 흐르며 유역의 소분지를 관개한다. 용인 일대는 광주산맥의 낮은 구릉이 경안(京安)과 길량장의 침식곡으로 동서로 분단된 서쪽 지방이다. 용인시의 땅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이른바 풍수지리에서 이야기하는 길지로 알려진 곳이 많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내륙부에 위치하여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1.3도, 1월 평균 -4.8도, 8월 평균 26도, 연평균 강수량 1,300mm이다. 용인시의 행정 구역은 3구 3읍 4면 24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경기도 전체의 5.8%에 해당하는 591.36 km²이며,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인구는 1,004,081 명, 371,685 가구이다. 용인시의 인구는 2017년 6월 30일 주민등록(내국인) 기준으로 99만 6894명이며, 이 가운데 남자는 495,643명, 여자는 501,251명으로 여자가 다소 많아 성비는 98.8이다. 외국인은 15,761명이다. 유소년 인구비율은 18.3%, 노인 인구비율은 10.3%이다. 용인시 전체 면적의 20.9%를 차지하는 기흥구, 수지구에 시 전체 인구의 77%가 거주해 인구가 시의 서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처인구에는 229,588명(23%)이, 기흥구에는 418,336명(42%), 수지구에는 348,970명(35%)이 거주한다. 원래 농업이 주산업으로 미맥을 주로 생산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수도권 분산정책의 일환으로 기흥구·수지구 일대에 많은 화학·전자·섬유·기계·식품 등의 생산업체가 들어섰다. 과거에는 수지구·기흥구·모현읍 일대에 목장이 많았으나, 현재는 골프장이 많다. 수지구에 죽전디지털밸리와 광교테크노밸리가 조성되면서 2001년 6월 5일 정보통신부가 경기도 용인시에 소프트웨어 지원센터의 신규 설치를 확정하였으며, 2002년 7월 31일에 용인소프트웨어지원센터가 개소하였다. 2006년 7월 26일에는 용인시 디지털산업진흥원으로 변경되었다. 2012년 2월 23일 용인시는 미국의 산업용 가스 제조업체인 프렉스에어코리아㈜가 1180억원을 들여 기흥구에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장은 기흥구 농서동 2만 4029㎡부지에 연면적 4243㎡ 규모로 건설되며, 제조 및 부대시설을 갖춘 초고순도 질소가스 제조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2018년 기준 용인시의 재정자립도는 62.07%로 경기도에서 3번째로 높다. 용인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81조 3376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11.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4188억원으로 1%의 비중을 차지하며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9조 0855억원으로 72.7%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21조 7628억원으로 26.8%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대규모 택지개발의 영향으로 사업서비스(4.1%)와 건설업(3.0%), 도소매업(2.7%)과 부동산업 및 임대업(2.7%)이 주를 이루고 있다. 용인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842,069명이고 주간인구는 769,49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1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76,883명, 유출인구는 147,073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8,526명, 유출인구는 20,915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72,579명 더 많은데, 이는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014년 용인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287,678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6.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140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9,208명으로 20.6%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228,330명으로 79.4%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0%), 사업서비스업(12.7%)과 교육서비스업(11.1%), 숙박 및 음식점업(9.3%)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관광지로는 한국민속촌과 에버랜드 등이 있는데, 이 두 곳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써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43번지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 5,820평의 장방형으로 된 토성으로 본래 고려 때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의 김윤후 장군이 퇴세를 만회하고 몽골의 세력을 몰아내게 한 장소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가 있다. 하루 평균 800명의 추모객이 다녀간다. 백암면 옥산리의 비봉산(372m)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원장 이택주 씨가 1979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해서 2003년 5월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현재 총면적이 30만평 쯤 되는 이 식물원에는 8000여종, 720만 그루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대한불교열반종의 총본산으로 1970년 실향민인 김해근(법명 해곡 삼장법사)이 세운 호국 사찰로 용인시 해곡동 산43번지에 위치해 있다. 와우정사 내 건물 중 열반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통향나무를 다듬어 만든 길이 12m, 높이 3m의 열반상(와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향나무로 조성한 세계 최대의 목불상으로 기네스북에 기록이 올라 있다. 높이는 106m. 죽전역 인근에 있다. 용인시 처인구에는 제3야전군사령부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에 속한 55사단이 포곡읍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한국 전쟁 당시, 터키군이 김량장동에서 중공군에 맞서 금양장 전투를 치렀다. 터키군은 이 전투에서 '백병전'으로 10배 가까운 중공군을 괴멸시키고 승리해 군우리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금양장 전투 당시 전사자는 중공군이 1900명, 터키군은 12명이었다. 2004년 11월 26일 분당선 보정임시역이 개통되면서 용인에도 철도 교통 시대가 열렸다. 같은 노선 죽전역이 2007년 12월 24일에, 죽전 ~ 기흥 구간이 2011년 12월 28일에, 상갈역이 2012년 12월 1일에 개통되었다. 용인 경전철은 2013년 4월 26일에 전 구간 개통되었다. 신분당선 정자역 ~ 광교역 연장 구간이 2016년 1월 30일에 개통되었다. 일반 여객 철도인 수려선이 이용객 감소로 1972년에 폐지된 이후, 일반 여객 철도 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KTX, ITX-새마을, 무궁화호, 누리로를 이용하려면 가장 가까운 수원역으로 가야 한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A선이 계획 중이다. 1972년 영동고속도로가, 2009년에 용인서울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시의 서부를 지나가고 영동고속도로와 신갈분기점에서 만난다. 국도는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제42호선,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제45호선과 양지를 종점으로 하는 국도 제17호선이 있다. 용인시에 위치한 명지대학교, 단국대학교와 용인대학교에서 하계, 동계 올림픽을 비롯하여 여러 스포츠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고 축구, 농구 외에도 수영, 쇼트트랙, 태권도, 럭비, 골프 등과 용인시청 소속의 볼링, 씨름 등 여러 스포츠 종목에서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유명 선수로는 명지대학교의 축구선수 박지성과 단국대학교 출신의 수영 선수 박태환,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3관왕 진선유와 2관왕 이정수를 꼽을 수 있다. 처인구 동부동에는 1982년에 준공된 관람석 12,000석의 용인종합운동장이 위치해 있다. 풍물놀이 풍물놀이 혹은 풍물굿(간단히 풍물(風物))이란 꽹과리, 장구, 북, 징의 네 가지 악기(사물)와 나발, 태평소, 소고(버꾸라고도 함) 등의 악기를 기본 구성으로 하여 악기 연주와 몸동작 그리고 행렬을 지어 다채로운 집단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진풀이 등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적인 풍물놀이로는 숙달된 풍물패가 세시놀이가 집중되는 정초에 넓은 마당에서 펼지는 대중적 공연인 판굿을 꼽을 수 있다. 대중적 공연으로 펼치는 판굿 등은 풍물놀이라는 명칭도 어울리지만, 일반적으로 '풍물을 치는 행위'를 하는 용어로는 '풍물굿'이 더 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농촌의 보편적인 놀이였던 풍물굿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나 특히 중부지방 이남에 많이 분포한다. 풍물굿은 모내기나 논매기 등의 농사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농악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정초의 지신밟기를 비롯한 세시의례와 단오·백중·추석 등의 명절에 세시놀이 음악으로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경기도당굿이나 동해안별신굿 같은 무속에서 춤이나 노래의 반주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풍물놀이는 상고(上古)시대에 전쟁시의 진군악(進軍樂)으로서 그 이전에 수렵과정에서 쓰였을 타음(打音)의 기구 조작으로 사기를 고무하였던 것이라는 속전(俗傳)도 있으나 대개 농작에 따른 노고를 덜고 생산작업의 능률을 올린다는 목적에서 출발, 여흥적 오락으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풍물놀이 혹은 풍물굿의 유래를 말하는 데 농사 안택 축원설, 군악설, 불교 관계설 등 세 가지 학설이 있다. 현존하는 풍물놀이의 당굿, 샘굿, 집돌이로서의 지신밟기 등이 신을 즐겁게 해주는 오신(娛神)과 잡귀를 쫓아내는 축귀(逐鬼) 등을 포함하여 나타나고 있고, 진(陣)풀이와 군기인 영기(令旗), 군인이 쓰는 모자인 군립(戰笠)과 같은 것들이 군악(軍樂)의 요소로 보인다. 그리고 사물이나 고깔, 삼색띠나 무동들의 나비춤 같은 것들이 불교적 요소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런 학설들이 나왔을 것이다. 풍물굿을 이르는 명칭에 대하여는 다소의 논란이 있다. '풍물굿'이란 용어는 대략 1980년대 이후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농악'이란 말이 풍물굿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나타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풍물'이란 용어를 적극 수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무용학자 정병호는 '농악'이란 말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비하하기 위해 농민들이 하는 음악이라 하여 ‘농악(農樂)’이라는 말로 불렸다고 하였다. 농악이란 말이 문헌상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936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한 《部落祭》라는 책에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악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에야 비로소 생긴 말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농악'이란 용어가 조선시대의 학자인 옥소(玉所) 권섭(權燮·1671~1759)의 글에 이미 등장하고 있어 '농악'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祭樂肅 壹氣於神與天地同流 軍樂整 勇夫豎髮 志士定襟 禪樂定 如見三代上威儀 女樂則蕩 傭樂則悽 巫樂則淫 村樂則亂 農樂則佚 亦皆各有節奏 有條理 似雜而不雜 吾則甚喜農樂與軍樂(祭樂은 정숙하다. 신령에서의 한 기운이 천지와 더불어서 동류이다. 軍樂은 정돈되어 있다. 용부가 머리털을 드리고 뜻있는 선비는 옷깃을 반듯이 여미게 한다. 禪樂은 선정에 들게 하는데 마치 삼대상의 위의를 본 듯하다. 女樂은 질탕하다. 傭樂은 처연하다. 巫樂은 음란하다. 촌악은 산란하다. 農樂은 편안하다. 또한 모두의 음악이 각기 절주가 있고, 조리가 있다. 난잡한 듯하여도 난잡하지 않다. 나는 곧 농악과 군악을 심히 즐겨한다.)" 그러나, 권섭이 '농악'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다양한 기능의 풍물굿을 '농악'이란 용어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섭이 '농악'이라는 용어로 지칭한 음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자의 뜻으로 보아 '농민들의 음악'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권섭이 '군악'과 '무악'을 농악과 별도로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도 그가 말하는 '농악'이 다양한 기능의 풍물굿 모두를 일컫는 용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풍물굿은 농민들의 음악일 뿐 아니라, 군사 훈련을 위한 '군악'으로 사용되었고 세시의례와 세시놀이의 음악이기도 하며 무속음악이기도 하므로, '농악'이라는 명칭으로 이를 대체할 수는 없다. '농악'이란 말이 일본 사람들이 최초로 만들어 사용한 용어인지 아닌지에 관계 없이, 용어의 개념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의 명칭으로 '농악'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이런 관행이 풍물굿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시킬 때에도 그대로 적용됨으로써, 명칭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풍물굿은 지방에 따라 풍악놀이·풍장놀이·두레(중부 이남) 또는 농상계(중부 이북)라고 하며, 전남지방에서는 메굿·메기굿이라고도 한다. 연주 예능으로 보는 경우 '굿친다', '金鼓친다', '매구친다', '쇠친다'라 하고, 악기를 통해 말할 때는 '굿물', '풍물'이라 불렀다. 또, 종교적 예능으로 보는 경우에는 '굿', '매굿', '地神밟기', '마당밟기'라 하며, 노동 예능으로 볼 때는 '두레'라 하고, 풍류 (風流)로 해석하는 경우에는 '풍장'이라고도 불렀다. 풍물굿 또는 풍물놀이는 다양한 형태와 목적으로 많은 행사장에서 연행되고, 공연자들과 참여자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며, 인류의 창의성과 문화 다양성에 기여하고, 국내외 다양한 공동체들 간의 대화를 촉진함으로써 무형문화유산의 가시성을 제고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4년 11월 27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용어의 선정에 있어서 위의 명칭 항목에서 기술된 바와 같은 합리적 논의를 거치지 않고 일찍이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용어인 농악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추후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재발될 여지가 남아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풍물굿은 '농악'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진주·삼천포 농악(제11-1호), 평택농악(제11-2호), 이리농악(제11-3호), 강릉농악(제11-4호), 임실필봉농악(제11-5호), 구례잔수농악(제11-6호) 등 총 6종목이다. 풍물굿은 발림, 가락, 진으로 구성된다.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몸동작은 아랫노름과 윗노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아랫노름은 주로 발동작을 일컫는데, 수십 가지의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나 까치걸음, 절름발이 걸음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식 명칭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상모를 쓰지 않는 전라우도 지방의 풍물굿이 비교적 화려한 아랫놀음을 보여 준다. 윗노름은 상모를 여러가지 형태로 돌려 모양을 만드는 것을 일컫는다. 한쪽 방향으로 한번을 돌리는 외사, 한쪽 방향으로 두번씩 돌리는 양사, 채끝을 나비 모양으로 만드는 나비사 등이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상모 놀음이다. 가락은 지역별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 지역이 평야를 많이 분포하느냐 혹은 산맥이 많이 분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호남같이 평야가 많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장구의 가락이 많이 발달했고, 영남과 같이 산맥이 많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북의 가락이 발달했다.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서도 차이를 나타내는데 북쪽은 남쪽에 비하여 쇠(꽹과리)의 가락이 발달했고 남쪽은 가죽 계열의 악기가 발달되었다. 진이란 원래 군사 용어로 전쟁에서 양측 군대가 전투를 앞둔 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락에 따라 진풀이를 펼쳐 가며 판을 진행하는데, 원진, 방울진, 미지기진, 오방진 등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지방에 따라 특색있는 진풀이들이 있다. 풍물패는 풍물놀이(농악, 풍물굿, 메구)를 하는 모임이다. 치배와 잡색으로 구성되며, 치배는 풍물(악기 - 꽹과리, 징, 장고, 북, 소고)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사람을 일컫고, 잡색은 각기 배역을 가지고 춤을 추며 풍물판의 흥을 돋구기도 하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풍물대의 구성을 보면, 위에 예거한 악기를 치는 사람들과 부락의 상징인 공기, 영(令)자를 쓴 영기(令旗) 한쌍, 그리고 무동(舞童:호남지방에서는 꽃나비라 함)과 대포수(大砲手)·말뚝이·4대부(四大夫)·8대부(八大夫), 수염을 단 양반 등 적으면 10여 명, 많으면 20여 명을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상쇠라 하여 농악대의 지휘자가 되는데, 상쇠는 항상 선두에 서서 악대의 진형(陣形)을 일렬종대·원형 기타 여러 형태로 변형시키며, 악곡의 변화를 맡는다. 상쇠는 머리에 전립(氈笠)을 쓴다. 전립의 정상에는 끈을 달고, 그 끝에 털뭉치를 장식하였다. 이것을 앞뒤로 흔들기도 하고 뱅뱅 돌리기도 하여 재주를 부리며 춤을 추는데, 이를 상쇠놀음이라고 한다. 소고수는 벗구잽이라 하여 4∼5명에서 10여 명에 이르며, 역시 전립을 쓰고 그 끝에는 긴 종이조각을 달아 손에 든 소고를 치며 머리를 흔들면 긴 종이끈이 멋지게 원을 그린다. 잽이들은 지방에 따라 전립을 쓰기도 하고 조화(造化)를 장식한 종이고깔을 쓰기도 한다. 정확한 구성원들의 순서는 지방마다 차이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영남지방의 경우는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의 순서로 선다. 이승복 이승복(李承福, 1959년 12월 9일 ~ 1968년 12월 9일)은 대한민국의 학생으로 1968년에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의 희생자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승복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지금의 용평면) 도사리에서 태어나 1967년 3월 2일에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훗날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했다. 1968년 11월 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한의 무장간첩에 의해서 12월 9일 밤 10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부상을 입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12월 11일 《조선일보》는 3면에 이 사건을 〈“共産黨(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抗拒(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는 현장을 목격하고 유일하게 살아 남은 이승복의 형의 증언을 인용하여 "무장공비가 가족을 몰아 넣고 북괴의 선전을 하자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하여 공비들이 이승복의 입을 찢고 가족들을 몰살시켰다"고 보도했다. 12월 13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705호 〈남침공비를 무찌른다 - 제3신〉 편에서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싫다고 해서 어린 젖먹이를 돌로 때리고 입을 찢어죽인 이들의 만행”이라고 보도하면서 일가족의 시신을 공개했다. 이후 이 사건이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고, 국민학교마다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이 내용이 제6차 교육 과정에서부터 빠졌다. 계간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당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에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가 허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 그의 집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듣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후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을 지적했고,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조선일보의 기사를 “작문”이라고 비판했다. 1998년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인 김주언은 서울과 부산에서 ‘오보 전시회’를 열어 김종배의 기사를 전시했고, 이후 10월에는 미디어오늘과 월간 말을 통해 더 많은 근거를 들어 오보 내지는 작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1998년 11월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두 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다. 1999년 7월 서울지방검찰청은 두 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2002년 형사 1심에서 두 명에게 각각 징역 6월과 10월을 선고했다. 2004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있었던 항소심에서는 김주언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김종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충분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에서 원심을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승복은 함께 살해당한 그의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의 묘소 옆에 나란히 묻혀 있다. 한편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 회원들은 1999년 이후 매년 이승복의 기일마다 기념관과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법무관 법무관(Praetor, "프라이토르")은 고대 로마의 관리 명칭을 일컫는다. 오늘날의 대법관과 같은 개념이다. 원래 로마 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450년까지 프라이토르(법무관)이라는 직책은 로마의 최고위 관리로 쓰였으나 콘술(집정관)제도가 도입된 이후에 콘술 다음가는 직책으로 평가되었다. 로마 제정 당시에는 명예직으로 축소되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간접적 증거로는 이미 그 이름 Praetor("앞장 선 사람"이라는 고대 그리스어 πραίτωρ의 라틴어 번역)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무 무는 다음을 일컫는 말이다. 옥황상제 옥황상제(玉皇上帝, ), 옥황(玉皇), 상제(上帝, ), 옥제(玉帝), 옥황대제(玉皇大帝), 천황(天皇)은 도교의 가장 높은 신간 족이며, 무에서는 옥황천존(玉皇天尊)이라 하여 전통적인 하늘의 신간 족으로 섬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삼원(三垣)의 하나인 자미궁(紫微宮)은 옥황상제가 사는 궁궐이라 여겼다. 중국에 옥황상제가 등장한 것은 원시천존이 최고신이던 6세기 무렵으로, 송(宋)나라 진종(眞宗, 968~1022)이 다스리던 시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진종은 옥황상제의 열렬한 신자였다. 그러기 때문에 신하는 물론 백성들까지 옥황상제를 최고신으로 숭배하여 섬기기를 강요하였다. 이로써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전파된 도교의 도사는 원시천존을, 서민은 옥황상제를 최고신으로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인의 가정에서는 조왕신(竈王神)이라는 부뚜막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다. 한국에도 전래되어 조왕신이 그 집에 사는 식구들의 생활을 자세히 관찰해서 연말에 개인별로 상세한 보고서를 만들어 상급신에게 제출한다고 믿고 있다. 그 보고서를 최종적으로 받아보는 신은 물론 옥황상제이다. 옥황상제는 보고서를 보고 평가하여 개개인의 행위에 선행이 많으면 이듬해에 행운을 주고, 악행이 많으면 벌을 내린다. 이렇게 선악에 따라 공과를 따지는 것을 도교에서는 '공과격(功過格)'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도교에서 신앙으로 믿고 있는 옥황상제를 타이완이나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물론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옥황상제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 단체가 있다. 이를테면 중국 사람들은 제사가 있으면 현관에서 응접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매달은 난로와 천공로(天公爐)에 반드시 절을 하는 관습이 있다. 천공로가 옥황상제를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옥황상제 탄신일로 알려진 음력 1월 9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천공묘(天公廟, 옥황상제를 모시는 사당)에 참배를 하고, 각 가정에서는 응접실에 등좌(燈座)라고 불리는, 종이에 신의 모습을 그린 대롱 모양의 물건을 장식한다. 한국에서는 증산교, 대순진리회를 비롯 무당들이 옥황상제에게 제를 올려 섬기고 있다. 중국의 도교에서는 옥황상제가 처음부터 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선행을 거듭 쌓은 결과 천상계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신이라는 얘기다. 불교처럼 높은 경지에 진입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처럼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도교에서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도교에는 이러한 기대를 뒷받침해주는 교리가 있다. 도교 경전에서는 선행을 한 번씩 쌓을 때마다 마음이 안정되고, 선행을 열 번 행하면 기력이 왕성해진다고 하였고 최고의 경지인 신선이 되는 길도 일러놓았는데, 3백 번 선(善)을 쌓으면 지선(地仙, 하급 신선), 1천 2백 번 선을 쌓으면 천선(天仙, 상급 신선)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옥황상제가 되기 위해서는 1만 번의 선을 행하면 된다고 하고 선행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공양하며, 모든 것에 자비심을 가지고 자기 희생을 하면 되므로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악행(살생, 음란, 거짓말, 음주 등)만으로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선행이 물거품이 되기에 일반 사람들이 신이 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쉬운 것같으면서도 어려운 관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특별히 난해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도, 인간의 체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행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므로 평범한 사람도 시작하기는 쉬울 수 있다. 이것이 중국의 도교에서 옥황상제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결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사실 옥황상제는 중국의 4대 기서(奇書)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에 옥황상제가 등장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 소설에도 흔히 표현되며 도참사상으로 한때 혹세무민하는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도 나오듯이 한나라 때 황건적(태평도)의 두목인 장각이란 사람이 주술과 도술로써 허황된 행위를 벌여 백성들을 따르게 해,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죽어 신선이 됐다고 퍼뜨린 데서 연유가 됐다는 황건적의 난에서 보듯이 전제 왕권이 몰락하는 정권 말기에 봉기한 황건적의 난, 황소의 난, 태평천국의 난 등 도가(道家)사상의 폐해가 많았다. 한국에서는 삼신할머니, 칠성신, 하느님, 천주, 미륵불, 옥황상제 같은 신성한 존재들이 자연, 천지의 섭리, 도(道) 같은 근원적 같은 존재라는 믿음이 존재하지만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복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옥황상제든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즉, 중국인들의 너무나 강한 현세중심적 사고는 하늘에 살던 신마저 지상으로, 인간 쪽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상제는 기독교적인 유일한 실체로서의 신이 아니라, 만물 가운데 최선의 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편 1919년 무극대도(정읍태인)를 거쳐 1948년에 생겨난 태극도(太極道;부산감천)에서는 강증산이란 구천상제와 조정산이란 옥황상제가 신앙의 대상인데 2009년은 도기(道紀) 100주년과 태극도 창도(創道) 61주년을 맞는 해라고 알려지면서 무극주(강증산, 1871~1909) 구천상제와 태극주(조정산, 1895~1958) 옥황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종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극도의 상급임원이던 충북 괴산 출신의 박한경이 태극도에서 분리해나가 세운 대순진리회의 전경(典經)이나 증산도의 도전에서 신앙의 대상은 옥황상제(증산도) 또는 구천상제(태극도 및 대순진리회)로서의 강증산이다. 태극도에는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으로 이뤄진 진경眞經이 있다. 또한 '한국종교사상사'에 의하면 갑신년(1824)에 몸을 빌어 최수운으로 다시 강씨 배를 빌려 신미년(1871)에 강증산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주장은 하늘의 옥황상제요, 미륵불이 예수로 태어났다가 다시 최수운, 강증산으로 환생하여 태어났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실린 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잘못된 정보이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는 계시로 한울님께 가르침과 주문(시천주)룰 받는데 그때의 한울님이 바로 금산사 미륵금불에 임시로 영靈으로 거하던 중에 가르침을 주었으며 최수운이 유교의 오래된 벽을 넘어 대도를 펼치는 것이 어려워 보이므로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직접 인세에 하강키로 결정하고 최수운의 순교후 8년만인 1871년에 내려온 존재가 강증산이며 강씨 성을 택한 이유는 인류의 성씨로는 풍씨가 최초이나 대가 끊기어 없으므로 부득불 다음 원시 성인 강씨 성을 택하여 왔다고 전하고 있다. 일월성신과 천지신명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은 한국 고유의 민속신앙, 무교에서 모시는 신령이다. 일월성신은 해의 신(日神)과 달의 신(月神)의 한 쌍과 별의 신(星辰, 뜻은 “많은 별”)이며, 천지신명은 하늘의 신(天神)과 땅의 신(地神)의 한 쌍이다. 이들은 옥황천존과 함께 인간의 문제를 풀어 준다고 하는 무의 신령이다. 문학 작품에서는 일월성신이나 해의 신, 달의 신이 천지신명을 가리키거나 대신하거나, 반대로 천지신명이나 하늘의 신이나 땅의 신이 일월성신을 가리키거나 대신하기도 한다. 궂은 것을 기피하고 양달진 것을 찾는 마음이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일월성신에 투사되어 그것들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일월성신은 '둥근 해를 품에 품어 성종의 어머니 한씨가 성종을 잉태하였다'는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수태하는 주력(呪力)을 갖고 있으며, 무경(巫經)에서는 일월성신의 빛을 간직한 사람은 목숨을 연장시키거나 연중(年中)에 하는 일에 실패를 보지 않는다. 무당은 일월명도(日月明圖)란 신경(神鏡)을 갖고 있는데 태아의 이목구비를 그 거울로써 조정하여 바르게 한다. 아이가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은 일월명도의 신경이 잘못 비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된 이목구비는 일월성신 중의 별성신(別星神)에게 부탁하여 그 들고 있는 신경을 다시 비춰 주면 조정된다. 그것을 빌기 위해서 새벽 해가 뜨기 전에 하늘 별을 향해서 정화수를 떠놓고 경배한다. 그리고 아들의 장수(長壽)를 위해서 어머니는 신장(神將)에게 '일월성신 소림(昭臨)하여 연년(延年) 익수다호년(益壽多好年)'이라고 말하면서 빈다. 일월(日月)은 성신(聖神)인데 모두 남자이며, 일신(日神)의 비(妃)를 일아지씨(日阿只氏), 월신의 비를 월아지씨(月阿只氏)라고 부른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때 동해에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의 부부가 있었는데 일(日)의 정(精)과 월(月)의 정이었다. 이들이 없으면 세계는 암흑이 되었다. 또 햇빛은 수태(受胎)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고구려의 유화(柳花)라는 여인은 방에 갇힌 몸인데도 햇빛이 들어와서 여인이 피하면 피하는 곳을 따라가 비추면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잉태케 하여 알을 낳게 하였는데 그 알 속에서 주몽(朱夢)이라는 활을 잘 쏘는 아이가 출생하였다. 강원도의 옛 풍속에 후산(後産)이 없을 때는 콩(大豆) 한 알을 두 개로 잘라 한 쪽에 일(日)자를 쓰고 또 한 쪽에 월(月)자를 쓴 다음 그 콩을 산부(産婦)에게 먹이면 후산을 한다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일월의 결합에 의해서 주력(呪力)을 전도(傳導)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고려조는 태일성(太一星)·토요성(土曜星)·남북두성과 12궁성(十二宮星)에 초제(醮祭)를 올렸다. 이와 같이 별은 사람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고 믿어졌다. 칠원성군 칠원성군(七元星君)은 칠성, 칠성님, 사부칠성이라고도 불리며 인간의 생노병사를 주관하는 무의 신령이다. 북두칠성을 신격화 한것으로 한국에서 사찰에는 칠성각이 있기도 한다. 남두육성과 함께 인간의 명을 관장한다. 칠성대군 칠원성군으로 불린다. 고대 한국의 전통 신화 단군 시절 부터 이어져내려온 고대 무속신앙에 등재된 깨달음 얻은 자 이다. 현재 기독교 불교 천주교등 많은 교 이전의 자리 매김 하고 존재한 신 불교계에서도 한국의 전통 신인 칠원성군 신선 산신 을 모시는 삼성각이나 칠성각 산신각을 별도로 두고 있는 사찰이 근대에 재조명 되고 있다. 북두칠성을 관장하고 인간의 수명 복록등을 주관하며 그 밑으로 하위의 여럿 신들이 존재한다. 한국 전통의 종교이였으며 한국의 샤머니즘은 다른것이 아닌 이미 이승이 아닌 저승에 다다른 존재의 영혼이 깨달음을 얻어 신격화 되었다 한다. 본디 신병을 앓고 무속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천의 무를 이어받고 태어난자는 소위 제례 법당 산신을 모시진 않는다. 후천의 무로 무당이 된경우는 인간사 세파에 시달린후 신병을 앓아 무속인이 되는데 이들은 여러가지 증상을 경험한후 무속인이된다. 삼한 시절 소도 천군은 별도 종교역할을 하였고 한국의 신들은 먼곳이 아닌 인간 자체와 함께 어우러져 지내온것이다. 고대 무당이 천시 되었던건 이승의 존재가 저승의 영을 받아 부림을 받고 영체가 존재 함에도 다른 영체를 육신에 싣기 때문도 있었기에 귀신을 몸에둔다 하여 천시하였다. 귀신또한 수명이 존재하고 영원치 않는다. 귀신이라 불리는 영체는 원과한이 지나쳐 이승에 붙들린 존재이다. 사실 귀신이 떠나지 못한게 아닌 그들이 붙들린채 사실을 모른다. 귀 중에 신(깨달은 영체)인척 굴어 타인에게 해코지 함이 많기 때문에 좋지 못한 인식이 박힘도 이러한 이유다. 선천의 무를 받고 태어난 칠원성군의 후예들중 선천의 무를 가진 장군 들은 말 그대로선천의 무를 담아 귀신을 베고 악을 멸했다. 후천의 무를 받아 무속이 된자들과는 매우 확연한 이능을 가졌다. 후천의 신내림은 선천의 무를 절대 쫓아갈수 없다. 후천 무속인이 되는 신사주들은 본인 내부의 심화 살기가 강하고 어두운 내면에 자기를 저주한 자들이 많아 이를 딱히 여긴 신령들이 돌보아줌이 있고 자기 악을 버린자는 귀함으로 다시 인도 하나 자기 악을 버리지 못한이는 산채로 귀령이 되어 원에 먹히고 이에 업을 쌓아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 무속인중 스스로 악심을 버리지 못하고 용서를 구한들 그들의 말하는 할아버지 할어니는 구원해주지 않는다. 오롯이 존재하는 산의 기운과 자연의 기운을 순화로 받들고 칠원성군이나 참신이 들은자들은 기도를 통해 생전 업을 구원받는다. 말로가 비참한 무속인은 생전 성질머리를 못고친 탓이 큰경우가 많다. 산신 산신은 산령대신이라고도 하며, 행운, 수명장수 및 부를 관장하는 무속의 신령이다. 산신도에서 주로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소화가 섬기던 신이 신령 또는 산신이다. 삼신제석 삼신제석(三神帝釋)은 천주제석, 혹은 줄여서 제석이라고도 하며, 산스크리트어로 샤크라데바 인드라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며 환인을 제석, 즉 인드라와 동일시하였는데 이후 무에서 하늘신의 이름으로 차용하였다. 천주제석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하늘신과 동일시되며, 생명, 행운, 출산신으로 모셔진다. 관성제군 관성제군(關聖帝君), 줄여서 관제(關帝) 혹은 관성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 관우 (? ~ 219년)가 신격화된 도교 계통의 전쟁신이다. 한국에서 임진왜란 때 나타나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설 이후로 무에서 중요한 신령으로 모셔지며, 관제에게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고 하는 믿음이 퍼져 있다. 때로는 관우의 아내를 정전부인이라 하여 모시기도 한다. 관우만이 아니라 유비와 제갈량 역시 각각 소열황제, 와룡선생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었으며, 의동생 장비나 형수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그리고 그 사부 옥천대사와 나머지 오호대장 역시 무에서 신령으로 모셔진다. 복마대제(伏魔大帝)·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도 불린다. 도교에서는 명계(冥界)의 가장 유력한 신으로 믿으며 민중 사이에는 재산을 모아주는 신이라 하여 절대적인 신앙을 받고 있는 무재신(武財神)이다. 관우는 <삼국지>에서 유명한 유비(劉備)의 명장으로서 신의(信義)가 두텁고 협기(俠氣)가 풍부하면서 금전에는 담박한 호걸이었다는 점에서, 이 신에게 빌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믿어 재신(財神)이 되었다고 전한다. 관제 신앙은 당대(唐代)에 시작되었고 청대(淸代)에서 왕실의 신앙을 얻어 더욱 융성했다. 또 선서(善書)의 하나인 <각세진경(覺世眞經)>이 관성제군의 가르침이라 믿었기 때문에 민중 사이에도 그 신앙이 성행하였다. 중국 각지에 관제를 주신으로 한 관제묘(關帝廟), 또 송(宋)의 명장인 악비(岳飛)와 합사(合祀)한 관악묘(關岳廟)가 있는데,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화교(華僑)도 거주지구의 한 구역에 관제묘를 지어 숭배하고 있다. 오호대장군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은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가상의 칭호이다. 촉한의 다섯 명의 호랑이 대장을 뜻한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수여하였다. 오호대장군은 《삼국지》36권 촉서 제6 관장마황조전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각각 전장군, 우장군, 좌장군, 후장군에 임명되었다. 참고로 위연은 《삼국지》40권 촉서 제10 유팽요이유위양전에 수록되어 있다. 이자 이자(利子, , )는 경제학 및 법률 용어로서 원본인 유동자본(화폐)의 대부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으로서, 원본액과 사용기간에 비례하여 일정한 이율에 따라 지급되는 금전 기타의 대체물을 의미한다. 길미, 변리(邊利), 변(邊), 이금(利金), 이문(利文)이라고도 한다. 돈을 빌렸을 때 원금의 일정 비율인 이자를 지급해야 하고, 원금과 이자를 합친 금액을 빌려준 사람에게 갚아야 한다. 특정 기간(통상적으로 한달 혹은 1년)동안 원금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급해야 하는 원금의 비율을 '이자율'이라고 한다. 이자율은 증권의 종류, 만기, 위험특성 등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 이자는 현물이자와 선물이자로 나뉜다. 현물이자는 대출 계약을 현재에 하고 대출 또한 현재의 이자이다. 선물이자는 대출 계약을 현재에 하고 대출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이행 될 때의 이자이다. 그러나 이자율은 서로 차이가 있다. 이자율의 기간구조 이론은 증권의 종류, 만기, 위험특성 등이 모두 같을 때 기간에 따른 이자율이 어떻게 결정되는 지에 관한 이론이다. 우대금리(prime rate)란 은행이 신용도가 제일 우수한 거래 기업에 융자해줄 때 적용하는 이자율이다. ‘최우량기업 대출금’이라고도 하는 이 우대금리는 최우량 기업에 대한 특별 금리로서 기업·가계대출 금리의 하한선인 동시에 기준이 된다. 우대금리의 인상이나 인하는 시장 상황을 보고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대형 은행들이 변경하면 다른 은행들이 뒤따르는 형식을 취한다. 이슬람에선 대가없이 벌어들여지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어 자본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의 투자를 감소시킨다고 보아 이자를 하람이라 한다. 가톨릭을 믿던 유럽에서는 가톨릭에서 이자를 금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리대금업을 금지했는데 이 일을 가톨릭교도 대신 했던 이들이 유대인들이었다. 이런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드러나는데, 유대인 샤일록은 이자로 주인공 안토니오의 살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잔인함을 드러낸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우의 《몰타의 유대인》에 영향을 받아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 당시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 정서를 잘 드러내면서 유대인의 경제적 위치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했다. 천연기념물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법률로서 보호가 지정된 자연물이다. '천연기념물'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법으로 정한 나라는 독일이다. 미국은 1832년부터 넓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대였던 1933년에 시행되었다. 일본에서 천연기념물이라고하면 일반적으로 국가가 지정한 천연 기념물을 가리킨다. 국가 지정 천연 기념물은 "문화재보호법" (1950년 제정)에 따라 문부 과학 대신이 지정한다. 소관은 문화청이 하며, 문화재보호법의 전신은 1919년 (다이쇼 8년)에 공포된 "사적 명승 천연 기념물 보존법"이다. 지정 대상은 동물, 식물, 지질 광물 및 천연 보호 구역이지만, 생물 종과 단일 광물뿐만 아니라 동물의 경우 서식지, 번식지, 도래지를, 식물의 경우 자생지를, 광물의 경우는 특이한 자연 현상이 있는 토지와 지역을 포함하여 지정할 수도 있다. 천연 보호 구역과 천연 기념물을 포함한 일정 범위이다. 이러한 가운데는 오랜 역사를 통해 문화적인 활동에 의해 생성된 2차적인 자연도 포함된다. 또한 특히 중요한 것은 특별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다. 이러한 지정 기준은 "국보 및 중요 문화재 지정 기준 및 특별 사적 명승 천연 기념물과 사적 명승 천연 기념물 지정 기준" (1951년 문화재 보호위원회 고시 제 2호)에 근거한다. 딱따구리목 딱따구리목(Piciformes)은 조류 목의 하나이다. 발가락은 앞쪽으로 2개, 뒤쪽으로 2개가 향하는 대지형(對趾型)이다.(보통, 조류의 발가락은 앞쪽으로 3개 뒤쪽으로 1개가 향해 있다). 다른 앵무새류나 뻐꾸기류도 대지형 다리를 갖고 있지만, 딱따구리 발가락의 힘줄은 특수한 형상을 띠며, 이는 다른 그룹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딱따구리과 딱따구리과(Picidae)는 딱따구리목의 한 과이다. 이 과에 속하는 딱따구리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섬, 뉴질랜드, 마다가스카르, 극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다. 수많은 종들은 숲이나 소림에서 서식하지만 일부 종들은 사막과 같은 나무가 없는 지역에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를 쪼아서 그 안에 사는 곤충의 애벌레를 잡아먹는다. 딱따구리과는 딱따구리목의 8개의 생존 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딱따구리목의 다른 과들로는 자카마류, 뻐끔새류, 오색조과, 왕부리새과, 벌꿀길잡이새과 등이며, 전통적으로 딱따구리, 꼬마딱따구리, 개미잡이, 샙서커(sapsucker)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최근에 DNA 염기 서열 분석이 이러한 관점을 확증해 주고 있다. 이 과에는 약 200개의 종과 약 30개의 속이 있다. 수많은 종들이 서식지 단편화로 인해 위기나 위험에 처해있다. 대중매체 캐릭터로는 우디 우드페커, 위니 우드페커, 넛헤드 & 스플린터 등이 있다. 딱따구리과에 속하는 것들은 나무에 구멍을 뚫기 위한 튼튼한 부리와 먹이를 추출하기 위한 기다랗고 끈적거리는 혀가 있다. 딱따구리의 부리는 일반적으로 꼬마딱따구리, 개미잡이의 부리 보다 더 길고 더 날카롭고 더 튼튼하다. 그러나 이들의 형태는 매우 비슷하다. 딱따구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대부분 지역에서 서식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마다가스카르, 남극에서는 살지 않는다. 전 세계 대양의 섬에서도 살지 않지만 대륙섬에서는 수많은 섬 종들이 발견된다. 딱따구리아과는 딱따구리와 동일한 모든 서식지에 분포해있다. 꼬마딱따구리는 범열대성 분포적 특성이 있으며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신열대구에서 볼 수 있고 꼬마딱따구리 종 다수가 남아메리카에 위치해 있다. Nesoctitinae 아종은 Antillean piculet라는 단일종이 있으며 히스파니올라 섬의 카리브 제도에 국한된다. 개미잡이는 예외적으로 구세계에 분포되어 있으며, 두 종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딱따구리과는 한 곳에 정착해 살 수도 있고 철새일 수도 있다. 수많은 종들이 동일한 지역에 연중 머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종들은 번식지에서 월동 지역으로 먼 거리를 이주한다. 이를테면 개미잡이는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서식하지만 겨울에는 아프리카의 사헬로 이주한다. 딱따구리는 이 종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는 비사교적인 홑종들에서부터 함께 모여 생활하는 종들로까지 다양하게 걸쳐있다. 모여 생활하는 종들은 집단적으로 새끼를 낳는 종들인 경향이 있다. 딱따구리는 주행성이며 밤에는 구멍 안에서 앉아 쉰다. 대부분의 종들의 경우 번식기에는 앉아 쉬는 일은 둥지에서 이루어진다. 딱따구리의 먹이는 주로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로부터 채취한 곤충 및 유충 및 기타 절지동물, 그리고 살아있는 나무의 열매, 견과, 수액으로 이루어진다. 크낙새 크낙새(, )는 딱따구리목 딱따구리과의 새로 흰배딱따구리의 아종이다. '크낙새' 또는 '클락새' 라는 이름은 새가 '크낙 크낙' 또는 '클락 클락' 하고 운다고 해서 붙여졌다. 긴 부리로 나무를 쪼아 속에 든 벌레를 잡아먹는다. 현재는 개체 수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국립수목원 같은 깊은 숲에 서식한다. 배 부분이 흰색이고 수컷 머리 위와 눈 밑에 진홍색 털이 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몸의 전체가 검은색이다. 한 번에 3-4개의 알을 낳으며 둥지가 되는 나무는 1년에 한 번 꼴로 바뀐다. 한반도에서는 한국 전쟁 이전에는 황해도에서 부산에 이르는 일대에 서식하고 있었지만, 전쟁 이후 수가 줄었다. 1974년부터 국립수목원에서 한 쌍이 번식한 이래 수목원 이외 지역에서는 목격되지 않다가 1993년부터 수목원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1962년 국립수목원의 크낙새 서식지를 천연기념물 제11호로, 1968년 크낙새를 제19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한편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었으나, 2017년 환경부는 크낙새의 대한민국에서의 절멸을 공식 확인하고 멸종위기종에서 해제하였다. 휴전선 이북 지역에서는 황해도 멸악산 등지에서 몇 쌍이 번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대마도에 서식하고 있었으나 절멸한 것으로 여겨진다. 애기박쥐과 애기박쥐과(Vespertilionidae)는 박쥐목 중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는 과로 세계에 300여종이 분포한다. 윗수염박쥐속 윗수염박쥐속 또는 생쥐귀박쥐속("Myotis")은 박쥐목 애기박쥐과에 속하는 속이다. 호지슨박쥐 호지슨박쥐("Myotis formosus")는 애기박쥐과 윗수염박쥐속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한반도와 대마도, 타이완, 필리핀과 아프가니스탄 동부, 인도 북부 등에 분포한다. 이전에 아종으로 분류하던 붉은박쥐(황금박쥐, 오렌지윗수염박쥐, 조복성박쥐)는 이제 별도의 종으로 분류한다. 황금박쥐 황금박쥐()는 1967년 애니메이션이다. 제일동화와 요미우리 TV 방송과의 합작으로, 이하라 카즈오와 이시구로 노보루가 감독했다. 한국에는 동양방송을 통해 방영되었으며, 실제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일본에는 닛폰 TV 방송망 계열을 통해 방영하였다. 마라톤 마라톤(, )은 육상 경기의 한 종목으로, 42.195 km (26마일과 385야드)의 거리를 달리는 도로 경주이다. 마라톤 경기는 일반적으로 포장된 도로, 즉 아스팔트 도로에서 마라톤을 한다. 현재 마라톤의 강국은 케냐와 에티오피아이며 (대한민국은 금메달 2개 획득), 이 중 에티오피아는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여러 개 딴 실질적 마라톤 강국이다. 2012년에는 우간다 선수가 케냐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기도 하였다. 마라톤은 비록 그 거리가 1921년까지 표준화되지 않았지만 1896년 최초의 근대 올림픽 종목 중 하나이다. 대형 마라톤은 수만 명의 참가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매년 800개 이상의 마라톤이 전세계에서 열리고, 대다수의 경쟁자들은 오락적인 운동선수들이다. 마라톤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북동쪽 약 30Km 떨어져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이 곳에서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뛰어가 전한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기리는 뜻에서 1896년에 올림픽에 채택된 육상 경기 종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역사 6, 106-107)에 따르면 기원전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파견하였으며 페이디피데스는 약 200Km의 거리를 이틀에 걸쳐 돌주하였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 원군을 파병하는데 동의 하였으나 스파르타의 전통에 따라 만월에 출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도움없이 몇몇 동맹도시의 도움으로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전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마치 전설처럼 퍼져 있는 마라톤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마라톤 전투와 관련된 일화로 페이디피데스가 스파르타로 질주하던 중 팬(판)신이 나타나 아테네의 건투를 약속했다고 하며, 이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에서는 횃불 들고 달리기를 해마다 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마라톤 전투에서 패전한 페르시아의 후예국인 이란은 마라톤을 금기하고 있다. 때문에 올림픽과 아시아 경기대회 등 세계대회에서 마라톤 종목에 출전한 선수는 단 1명도 없었으며 자국의 도시인 테헤란에서 열린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이 아예 제외되었고한다. 오늘날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있는 마라톤의 거리는 42.195 km이다. 이 거리는 물론 위에 설명한 전설적인 마라톤의 유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 거리는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최초로 채택되었다. 당시 영국 왕실에서 마라톤의 출발과 결승 광경을 편안히 보기 위하여 윈저 성의 동쪽 베란다에서 마라톤이 시작되어 화이트 시티(White city) 운동장에서 끝을 마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종래의 마라톤 거리 40 km 235m보다 약 2km가 긴 마라톤 코스가 정해졌으며, 이 새로운 거리는 런던 올림픽 이래로 마라톤의 공식 거리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거리는 풀 코스에서만 사용되며, 하프마라톤인 21.0975 km, 10 km, 5 km 등의 단축 마라톤, 풀 코스보다 더 긴 60 km, 100 km, 200 km 등의 울트라 마라톤도 있다. 최근에는 남북 또는 동서로 횡단하는 300 km 이상의 서바이벌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또한 역전경기(驛傳競技)가 있는데 도로에서 하는 장거리 릴레이의 하나로 장거리 선수들이 각자의 담당 구역을 달린 다음 중계하는 지점에서 다음 선수에게 이어 주어, 일정한 거리를 정해진 몇 선수에 의하여 달리는 경주이다. 경부선 철도로 서울역과 수원역 간 거리가 41.5km이며 마라톤 공식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마라톤 선수들은 5km 지점마다 마련된 식음수대의 음식물을 이용할 수 있으며, 물을 적신 스펀지를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마라톤 코스는 출발점과 결승점이 다른 외길 코스와 출발점과 결승점이 같은 반환점 코스가 있다. 그런가 하면 출발점과 결승점이 같으면서 순환 도로를 달리는 순환 코스도 있다. 추진력을 가장 경제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상체를 약간 기울이면 다리의 움직임도 리드미컬해진다. 보통 상체의 기울임은 12-16°가 좋다. 발은 다리의 근육군이 균등하게 움직이도록 땅표면에 평행이 되게 착지한다.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풀코스를 전력 질주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코로,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서 입으로 호흡을 한다. 달리는 리듬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하되, 일반적으로 2-3보간 들이마시고 2-3보간 내쉬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긴 거리를 체력에 맞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리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절해야 한다. 마라톤 경기는 뛰어야 하는 거리가 같다 해도 대회마다, 장소마다 똑같을 수 없기 때문에 '신기록'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는다. 후반에 가파른 언덕길이 있는 코스도 있고, 시작부터 끝까지 평탄한 코스도 있으며, 3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달려야 하는 때나 10도 안팎의 온도에서 달릴 수도 있기 때문에 '세계 신기록'보다는 '세계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무 (샤머니즘) 무(巫)는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의 샤머니즘이다. 무에 종사하는 사제자를 무당(巫堂)이라 하며, 굿판에서 무당은 신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한다. 무당은 통상 여성을 뜻하며 무인(巫人)·무(巫)·무격(巫覡)·무녀(巫女)·단골·심방 등으로 불린다. 남자 무당을 지칭할 때는 격(覡)·박수·화랭이·양중 등으로 일컬어진다. 무당은 한국의 샤머니즘 성격의 전통종교인 무(巫)(무속)의 샤먼(Shaman, 신령과 사람을 잇는 중재자)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무당은 장군 신(최영 장군)이나 왕자 신(사도세자)등의 신령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 외에도 미래의 일을 내다보는 예언(予言)기능과 치병(治病)기능도 있어서 조선시대에도 무당들은 일종의 의사로 대우받았다. 무당은 보통 무(巫)의 여성 샤먼을 부르는 말이며, 남자의 경우는 박수라 한다.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뉘며, 강신무는 무병(巫病)을 앓고 신내림을 받는 즉, 신령을 몸주신으로 모시게 되는 굿인 내림굿을 통해 일반인에서 무당으로 각성한 무당이고, 세습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무당 소화처럼 무당 집안에서 대대로 무당일을 해온 무당으로, 전통적으로 강신무는 이북, 세습무는 이남에서 전해져 왔다. 현재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때부터 1965년까지 있었던 종교말살정책으로 무당의 맥도 함께 거의 끊겼고,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에 세습무들이 무속을 미신으로 매도한 박정희 유신군부의 무속 탄압으로 자신들의 무당 과거를 감추려 함에 따라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강신무들과 그 이후에 대한민국에서 생겨난 강신무들이 현재 무당의 주류이다. 설화에 따르면 한국 무당의 시조는 바리공주이다. 한국의 도시에서는 승려나 사원을 거의 볼 수 없으며, 한국의 제식에는 신전(神殷)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마을 축제에서 이국의 축제 행렬에서라면 쓰일 법한 미꼬시(神輿, 가마 형태)나 우상을 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승려가 축복을 기원하여 주는 경우는 없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신앙의 권위를 지니는 종교 예식이나 성전을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 등이다. 고대 부족국가에 있어서의 ‘무’는 제의를 주재하고 정치를 하는 통치자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분화되어 제(祭)와 정(政)이 분리되면서 무(巫)는 사제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권력 즉, 사제·치병·예언 및 유희적 기능이었다. 이것은 환웅단군의 선사시대처럼 제정일체시기를 거쳐 삼국시대의 관상감(観象監), 고려의 태사국(太史局), 조선의 서운관(書雲観) 등이 이러한 직제의 하나였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 여기에 소속되었던 일관(日官)·일자(日者)·무사(巫師)·점자(占者) 등은 모두가 예언의 기능을 인정받았던 무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 유리명왕 때 (기원전 1년 9월) 왕이 병에 걸렸을 때 무당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무의 치병기능은 조선사회에서도 여전히 발휘되었다. 세종 때 열병이 유행하게 되자 세종은 무격들을 동원시켜 병을 고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구병 활동에 힘쓰지 않는 무격들을 크게 논죄하는 한편, 구병에 힘쓴 무격에 대해서는 무세(巫稅)를 감하여주고 부역을 면제하여주었던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왕 자신이나 궁중의 사람이 병을 얻으면 무당을 자주 불러서 이르게 하였고, 일반민중들 역시 질병이 발생하면 무당으로 하여금 쾌유를 빌게 하였다. 이처럼 병이 발생하면 무격에 의하여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무당은 그들의 사회로부터 치병의 기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무당을 도성 안의 병자구호를 주임무로 하는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에 소속시켜 관에서 직접 무당들을 지휘통솔하기도 하였다. 이는 무당들을 구병 행위에 쉽게 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바리공주 바리공주는 관북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상의 인물로, 흔히 무당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발리공주(鉢里公主) 혹은 사희공주(捨姬公主)라고 하여 바리때를 지니며 베푸는 공주를 뜻하였다. 해원 굿의 원형으로 오구굿의 한마당에서 나오는데 남자가 아닌 확실시 되는 여신이다.바리데기라고도 한다. 바리공주 설화는 무속의 오구굿 또는 해원굿의 일부를 구성하는 서사무가(敍事巫歌)로 구전되어 왔다. 무당이 굿을 하기 전이나 하는 중간에 등장하는 사설(辭說)에 이 설화가 포함되어 있다. 무당은 바리공주 서사무가를 진오기굿의 말미거리에서 장고를 세우고 방울을 흔들며 서너 시간에 걸쳐 구송한다. 전국 모든 무당이 바리공주를 조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바리공주 무가가 전해져 오지 않는 곳에서는 미륵을 조상이라 하기도 한다. 바리공주 설화도 다른 서사무가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부분이 한국 민족 고유의 서사무가인지, 불교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한 예로 바리공주는 불로장생약이 있는 저승에 가기 위해 서천서역국을 가는데, ‘서천서역국’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부르는 말이다. 왕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전남지역에서는 오구시왕이다. 오구는 원한맺힌 귀신이라는 뜻이며 시왕은 불교의 열명의 판관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에게 판결을 받아 어디로 갈것인지 결정이 된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한국 서사무가에 드리워진 불교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옛 한국의 어느 왕이 있었는데 (어비대왕 혹은 오구대왕이라고 한다) 혼례를 일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하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딸만 계속 낳다가 마침내 일곱째도 딸로 태어나 버렸다. 바리공주가 태어나자 왕이 공주를 버려, 바리공주는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양육되었다. 후에 왕과 왕비가 죽을 병이 들어 점을 쳐 보니 저승의 생명수로만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섯 공주 모두가 부모를 위해 저승에 가길 거부했는데 바리공주가 이를 알게 되어,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에 가겠다고 하였다. 바리공주가 저승에 가 약이 있는 곳까지 갔는데, 저승의 수문장이 바리공주와 일곱 해를 살고 일곱 아들을 낳아야 약을 주겠다고 하였다. 바리공주가 그 조건을 채운 뒤 수문장과 일곱 아들과 함께 약을 갖고 이승에 돌아오는데, 궁에서 나오는 왕과 왕비의 상여와 마주쳐, 가져온 영약으로 되살렸다. 왕이 바리공주에게 물어 바리공주의 남편이 된 저승의 수문장은 장승이, 일곱 아들은 칠원성군이 되었고 바리공주는 이러한 연유로 왕에게 자청하여 한국 무당의 조상이 되었다. 지노귀굿 진오기굿 혹은 지노귀굿은 경기도 일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굿이다. 죽은 지 49일 안에 무당을 불러 행하며, 바리공주가 구송된다. 오구굿이라고도 한다. 서울지역에서는 망자천도굿. ‘진혼귀굿’, ‘지노귀굿’, ‘지로귀굿’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죽은 사람의 낙지왕생(樂之往生) 또는 저승길의 안전(安全)을 축원하기 위해서 지내는 굿이 진오기굿이다. 진오기굿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고 진오기굿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진혼귀(鎭魂鬼)로 보아 죽은 영혼을 달랜다고 보기도 하고, 지노귀(指路鬼)로 보아 혼령이 가는 길을 알려준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의 죽음의례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고려하면 진오기굿의 역사도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만 문헌에서는 전거를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의 공저로 1937년에 간행된 『조선무속의 연구』에서 경성 무녀 배경으로 바리공주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의례로 거행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령(死靈)굿에서 구연되는 서사무가로 전국적으로 전승되며, 일명 ‘바리데기’·‘오구풀이’·‘칠공주’·‘무조전설(巫祖傳說)’이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베풀어지는 ‘지노귀굿’·‘씨끔굿’·‘오구굿’·‘망묵이굿’ 등의 무속 의식에서 구연된다. 바리공주는 약 20여 편이 채록되었는바, 각 편의 내용은 전승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구연자에 따라서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서울진오기굿에서는 말미거리에서 서사무가인 바리공주가 구송된다. 성장(盛裝)을 한 무당이 장구를 세워 놓고 치면서 장시간에 걸쳐 서사무가를 부른다. 살아 있는 신화가 온전하게 전승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진오기굿이다. 도령돌기에서는 음악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삼도령을 돌 때에는 굿거리장단, 부채도령을 돌 때에는 별상장단, 칼도령을 돌 때에는 당악장단이 각각 연주된다. 점점 저승으로 가까이 가는 모습을 음악으로 나타낸 것으로, 도령을 도는 무당도 음악에 맞추어 춤동작이 점점 빨라진다. 진오기굿을 마친 재가집은 굿을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죽음의례를 통해 망자를 온전하게 저승으로 보냈다는 위안의 기능과 함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생활이 영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현실 회복의 기능을 진오기굿이 수행했기 때문이다. 재수굿에는 재가집이 오지 않고 굿을 하는데 진오기굿은 반드시 재가집이 참가하기에 진오기굿이 아직도 종교의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굿거리'는 뜬대왕·중디 청배(請拜)·아린말명·사제삼성·말리(바리공주)·넋청·넋보냄·뒷전(진오귀뒷전)으로 구성되는데 모든 거리(마당)에서 무당이 무가(巫歌)를 부른다. 전송 제어 프로토콜 전송 제어 프로토콜(, TCP, )은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IP)의 핵심 프로토콜 중 하나로, IP와 함께 "TCP/IP"라는 명칭으로도 널리 불린다. TCP는 근거리 통신망이나 인트라넷,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 간에 일련의 옥텟을 안정적으로, 순서대로, 에러없이 교환할 수 있게 한다. TCP는 전송 계층에 위치한다. 네트워크의 정보 전달을 통제하는 프로토콜이자 인터넷을 이루는 핵심 프로토콜의 하나로서 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IETF)의 RFC 793에 기술되어 있다. TCP는 웹 브라우저들이 월드 와이드 웹에서 서버에 연결할 때 사용되며, 이메일 전송이나 파일 전송에도 사용된다. TCP의 안정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애플리케이션의 경우 일반적으로 TCP 대신 비접속형 사용자 데이터그램 프로토콜(User Datagram Protocol)을 사용한다. 이것은 전달 확인 및 순차 보장 기능이 없는 대신 오버헤드가 작고 지연시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다. 1974년 5월 전기 전자 기술자 협회(IEEE)는 “"A Protocol for Packet Network Intercommunication."”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자인 빈트 서프(Vint Cerf)와 밥 칸(Bob Kahn)은 논문에서 노드 간의 정보 공유를 위한 패킷 스위칭 방식의 망간 프로토콜(internetworking protocol)을 제안하였다. 이 모델의 핵심 제어 요소는 연결 지향 링크(connection-oriented links)와 호스트 간의 데이터그램 서비스를 모두 포함하는 "전송 제어 프로그램"(Transmission Control Program)이었다. 당시 단일한 구성 요소였던 통신 제어 프로그램은 이후 연결 지향 계층의 "통신 제어 프로토콜"(TCP)과 망간(데이터그램) 계층의 "인터넷 프로토콜"(IP)로 나뉘어 모듈식 구조로 변경되었다. 이 모델은 흔히 편의상 두 가지를 합쳐 "TCP/IP"라고 부르며, 공식적인 명칭은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이다. TCP는 데이터 스트림으로부터 데이터를 받아 들여 이것을 청크 단위로 분할한 뒤 TCP 헤더를 덧붙여 TCP 세그먼트를 생성한다. TCP 세그먼트는 IP 데이터그램에 캡슐화되어 상대방과 주고 받게 된다. "TCP 패킷"이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세그먼트"가 TCP 프로토콜 데이터 유닛(PDU)을 의미하는 정확한 표현이며 "데이터그램" 은 IP PDU를, "프레임"은 데이터 링크 계층 PDU를 의미한다. 프로세스는 TCP를 통해 데이터 버퍼를 인수로 넘겨 줌으로써 데이터를 전송한다. TCP는 이 버퍼들을 묶어 세그먼트를 생성하여 인터넷 모듈(IP 등)을 통해 목적지의 TCP로 각각의 세그먼트들을 전송한다. TCP 세그먼트는 세그먼트 "헤더"와 "데이터"의 두 섹션으로 구성된다. TCP 헤더는 10개의 필수 필드 및 옵션 확장 필드(표 하단의 주황색 부분)들을 포함한다. 헤더 뒤에는 데이터 섹션이 따라 온다. 그 내용은 애플리케이션의 페이로드 데이터이다. 데이터 섹션의 길이는 TCP 세그먼트 헤더에서 결정되지 않으며, 전체 IP 데이터그램의 길이에서 TCP 헤더와 캡슐화된 IP 헤더의 길이를 뺀 값으로 계산하게 된다. 즉, 데이터 섹션의 길이는 IP 헤더에 의해 결정된다. 아틸라 아틸라(, , , 406년 ~ 453년)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아틸라는 434년부터 죽을 때까지 18년 정도, 유럽에서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으며, 그의 제국은 중부 유럽부터 흑해, 도나우 강부터 발트 해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의 삼촌 루아가 죽자 그의 형 (Bleda)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설과 블레다가 실질적인 왕이고 아틸라는 2인자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설이있다. 어찌되었건 아틸라와 블레다는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였는데 443년 블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블레다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직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냥 도중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과 아틸라가 암살했다라는 설이 있다. 블레다가 죽은 뒤 아틸라는 훈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아틸라는 동로마를 공격 콘스탄티누스의 고향인 나이서스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한편 동로마의 수많은 도시를 침공하여 동로마 에게서 막대한 돈을 공물로 받게 되었다. 450년, 동생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로 추방된 서로마 발렌티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구혼한다. 이에 아틸라는 청혼에 응하며 그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반을 요구한다. 아틸라는 451년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로까지 진격, 오를레앙까지 나아갔으나 카탈라우눔 전투(샬롱 전투)에서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만나 퇴각한다. 이후 452년에 이루어진 2차 원정에서는 이탈리아를 공격하였는데, 결국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 황제를 수도 라벤나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황 성 레오 1세가 로마까지 초토화될 것을 우려해 호노리아 대신 일디코를 주어, 아틸라에게 강화를 제안했고,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틸라는 453년, 일디코(Hildegard, 다른 이름: Hildico, Hildiko 또는 Ildiko)와의 결혼식을 치른 날 밤에 사망하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일디코에 의한 암살, 복상사, 과음으로 인한 질식사, 동맥에서 나온 피에 인한 질식사 등 추측이 무성하다. 아틸라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으며, 의미 있는 유산도 남아있지 않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무덤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 잘 알아내지 못했는데 무덤에는 가치가 높은 물건들이 함께 묻혔다. 그의 무덤을 묻을 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두 살해당했고, 관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무덤을 찾을 가능성은 가장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에 기록에 의하면 악의적으로 묘사하여 왜곡한 부분도 많지만 상당한 기록에 아틸라가 금발이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6세기 이교사가 프로코피우스 등이 남긴 기록에서 훈족과 게르만족의 혼혈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아틸라의 명성과 그에 대한 공포는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그리스,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되어, 역사가들은 아틸라를 위대하고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틸라는 세 편의 노르드 사가(saga)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훈족의 왕 에첼로 등장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에서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아틸라는 잔인한 야만인 왕으로 기억되어 왔다. 주세페 베르디는 아틸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846년 아틸라(오페라)를 발표한다. 서구인에게 아틸라는 공포의 대명사다. 무수한 이민족이 유럽을 침략했지만 아틸라가 이끌었던 훈족만한 공포를 선사했던 것은 칭기즈칸의 몽골족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사로서의 그의 자질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훈족의 왕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야만족에 대한 서구의 온갖 편견과 날조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지 몽매한 싸움꾼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신기술을 도입해서 전력을 보강하는 혁신가이기도 했다. 또 황금을 멀리할 정도로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위대함은 유목부족에 지나지 않던 훈족을 거대한 국가로 키워냈다는 점이다. 두려움과 황금으로 부하들을 통제한 점이나, 자신들의 전투스타일에 맞는 전쟁형태를 찾아낸 것 역시 그가 훈제국의 왕으로서 이룬 업적들이다. 자꾸만 뿔뿔이 흩어지려 하는 부족들을 엮어내어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의 전쟁으로 역사에 남은 것 이것이 훈족 왕 아틸라의 진면목이다. 해밀토니언 (양자역학) 양자역학에서, 해밀토니언()은 양자 상태의 시간 변화를 생성하는 에르미트 연산자이다. 이는 고전 해밀턴 역학에서 해밀토니언을 양자화하여 얻을 수 있고, 고전적인 에너지를 나타낸다. 만약 퍼텐셜 U가 시간의 함수가 아니고 주어진 일반화 좌표가 관성계여서 운동에너지가 formula_3의 이차 형식, 즉 제곱으로 나타낼 때,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 아래의 관계식이 만족되어 이를 해밀토니언에 대입하면 이 된다. 이러한 경우, 해밀토니언 H를 기하적 에너지 E라 정의한다! 해밀토니언에 대한 시간의 전미분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여기에 해밀턴 방정식 formula_8, formula_9 을 대입하면 다음의 관계가 성립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해밀토니언이 직접적인 시간의 함수가 아니라면 이 되어 해밀토니언이 운동 상수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런 해밀토니언을 갖는 계를 역학적 에너지가 보존되는 계라 하여 보존계()라 한다. 양자역학에서 해밀토니언은 계의 운동에너지와 포텐셜 에너지의 합으로 전체 에너지를 나타내는 관측가능량이다. 다른 관측가능량들과 마찬가지로, 계의 전체 에너지를 측정할 때, 해밀토니언의 스펙트럼은 관측 가능한 결과를 나타낸다. 다른 자체수반연산자와 마찬가지로, 해밀토니언의 스펙트럼 또한 스펙트럼의 측정을 통해 순수한 점, 완전히 연속이거나 특이점이 있는 경우 등을 분해할 수 있다. 순수한 점 스펙트럼은 계의 특정한 속박상태를 나타내는 고유벡터로 취급될 수도 있다. 완전히 연속인 스펙트럼의 경우는, 상태의 선택이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특이점이 있는 스펙트럼의 경우는,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결과를 포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한한 퍼텐셜 우물을 생각해보자. 이 때, 속박 상태의 경우는 음의 에너지, 연속적인 자유로운 상태는 양의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전기 기타 전기 기타(電氣 guitar, electric guitar)는 현의 진동을 픽업에서 전기 신호로 바꾸어 앰프(amplifier) 소리를 내는 기타이다. 보통은 일렉 기타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한편 전자 기타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보이는데, 이는 틀린 용어다. 앰프를 연결하지 않아도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울림통이 있는 다른 기타에 비해 음량이 매우 작다. 가변저항의 일종인 볼륨 노브(volume knob)로 음량을 조절할 수 있으며, 이펙터(effector)를 이용하여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주로 피크를 이용하여 연주하며 간혹 손가락이나 다른 도구로 연주하기도 한다. 전기 신호를 이용하기 때문에 다른 기타와 구별되는 독특한 주법이나 연주 형태가 많다. Rickenbacker(리켄베커) 기타의 탄생이 전기 기타의 최초라고 정의한다. 전기 기타의 최초를 규정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픽업의 사용이다. 1931년 Adolph Rickenbaker (아돌프 리켄베커 1886~1976)와 George D. Beauchamp (조지 뷰캠프)가 'Rickenbacker Internatinal Corporation' 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회사설립과 함께 세계 최초의 전기 기타 'Flying Pan'(우측사진)이 등장하면서 전기 기타 악기의 신역사를 열게 된다. 이후, Fender 에서 싱글코일 픽업을 개발하면서 1950년에 Telecaster 를 발매한다. 이 기타를 전기기타의 대중화 시대를 열은 처음 기타로 보고 있는데, 1950년에 발매되어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으며, 최초로 대량 생산된 제품이라 이전에 겨우 수십대, 수백대 생산된 제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렉기타의 대중화에 성공한 첫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Gibson은 당시 Epiphone에 의뢰하여 전기 기타를 개발하고 있던 유명 기타리스트 Les Paul 씨의 디자인을 라이센싱하여 Les Paul 기타를 1952년에 발매한다. 이 기타는 Gibson에서 개발한 P90 픽업을 사용했다. Fender 는 다시 1954년에 Stratocaster 를 발매하면서 일약 세계 전기 기타 음악의 시대를 열게 된다. 픽업(pickup)은 현의 진동을 전기적 신호로 변환 발생시킨다. 일반적으로 전기 기타에는 1~3개의 픽업이 장착되어 있다. 픽업의 종류로는 싱글코일과 그 개량형인 험버커가 대표적이다. 험버커는 싱글코일과 달리 전기적 잡음이 적고 변환출력이 더 고른 것이 그 특징이다. Positive와 negative 코일을 2개 사용하여 잡음을 상쇄시키는 구조이다. 전기 기타에서 소리가 나는 방식은 픽업의 원리를 이해하면 알 수 있다.픽업은 현의 진동을 전류의 흐름으로 바꿔서 이 신호를 앰프에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진동을 전류로 바꾼다는 점에서 마이크와 비슷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마이크는 공기의 진동을 감지하지만 픽업은 현의 진동만을 감지해낸다는 것이다. 픽업의 원리는 간단하다 "전선(코일) 주위의 자기장이 변화하면 전선에 전류가 흐른다." 라는 자연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자기장을 변화시키는 간단한 방법은 자석을 운동시키거나 코일을 운동시키는 것이다. 마이크의 원리는 얇은 판에 코일을 고정시키고 이 판의 공기의 진동에 의해 떨리면 코일도 같이 진동하면서 코일에 전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픽업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데 옆의 그림처럼 자석도 코일도 모두 고정되어 있다. 그 해답은 바로 기타줄에 있다 .줄은 강철이나 니켈성분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자기장 안에서 진동하면서 픽업의 자기장을 변화시킨다. 그 결과 코일에 전류가 흐르게 되고 앰프에서는 이 전류의 변화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기타줄은 반드시 강철, 니켈, 구리 등등의 도체로 되어 있어야만 픽업을 제대로 작동시킨다. 공기의 진동이나 사람의 음성, 쇠가 아닌 나일론 줄의 진동 등은 픽업을 통해서 증폭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전기기타의 몸통 부분인 바디(body)는 나무로 만들어지며, 속이 비었는가에 따라 한 덩어리의 나무로 만들어진 솔리드(solid), 일반적인 기타처럼 속이 비어 있는 할로(hollow), 속이 비어 있지만 중심부에만 나무로 막혀 있는 세미할로(semi-hollow)로 나뉜다. 개관: 종류는 크게 펜더 계열의 기타와 깁슨 계열의 기타로 나눌 수 있다. 이 두회사에서 만들어 낸 기타는 일렉기타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대부분의 일렉기타회사는 이 두 회사의 기타를 카피해서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기타회사가 아류라는 것은 아니다. 펜더와 깁슨을 제외한 다른 회사의 일렉기타 역시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 상당히 많은 편이며, 일본의 ESP나 독일의 Framus의 경우에는 스탠다드 라인이 펜더와 깁슨의 퀄리티를 아득히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깁슨 사(社)의 간판 전기 기타 상표이다.명칭은 공동 개발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레스 폴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소리의 무게감과 그루브감이 뛰어난 일렉기타이다. 특이사항으로는 레스폴하면 지미 페이지, 지미 페이지 하면 레스폴이 떠오를 정도로 깁슨 레스폴과 지미 페이지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이다. 그 외에도 게리무어, 잭와일드 등 많은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모델이다. 깁슨(Gibson)사에서 처음 만들었고 메탈에서도 많이 사용하지만 블루스에서도 사용한다. 기타 바디가 V자인 이유는 깁슨사에서 하늘을 나는 로켓을 보고 영감을 얻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이런 모양의 기타도 만들 수 있다는 깁슨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깁슨이 고집하는 마호가니 목재가 아닌 코리나 목재를 사용하여 특유의 셋인넥 공법으로 제작되었다. 깁슨 익스플로러와 마찬가지로 이벤트성 모델이었고, 판매량 자체도 몇십대도 안돼서 출시해에 바로 단종되었었다. 이후 색다른 모양의 기타의 찾던 기타리스트들이 플라잉브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시 인기를 끌게되어 58년 리이슈하게 되었다. 당시 바뀐 스펙이 이후 흔히 볼 수 있게 된 마호가니 플라잉브이이다. 흔히 그 현대적인 디자인 때문에 록음악 전용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원래 블루스용으로 생산된 것인만큼 범용성이 뛰어나며, 강한 드라이브를 건 사운드는 당연히 좋지만, 크런치톤이나 클린톤 역시 매우 훌륭한 기타이다. 모델에 따라 다르긴해도 드라이브는 보통 가볍고 얕은 입자감의 드라이브가 걸린다. 반면 클린톤은 모델을 가리지 않고 플라잉 브이 특유의 뭉글뭉글한 클린톤이 나오는데, 이 톤은 오직 플라잉 브이에서만 느낄 수 있다. 깁슨 사의 기타 모델이며 기본적으로 깁슨 특유의 중후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으나, 레스폴과는 차별되는 강한 출력에서 나오는 하드한 드라이브톤과 따뜻한 클린톤이 다른 기타들과 차별되는 특징으로 많은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너무도 개성적인 사운드를 가지고 있기에 호불호가 많이 가리는 편이다. 한 달도 못쓰고 파는 사용자가 있는가 하면 평생동안 SG만 사용하는 기타리스트들도 있을 정도이다. 누구는 레스폴을 사용하는 연주자들은 그 먹먹한 톤과 비인체공학적 설계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고 다른 기타도 범용해서 사용하지만, SG에 매력을 느껴 SG만 쓰는 사용자는 SG만 사용할 만큼 마니아가 된다고 한다. 이 악기를 애용하는 대표적인 기타리스트는 앵거스 영(Angus Young) 과 토니 아이오미(Tony Iommi)가 있다. 넥이 얇고 하이플랫 연주가 용이하며 무게가 가벼운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펜더(Fender)사에서 개발한 모델로 가장 평범하고 대중적인 기타라고 할 만큼 범용적인 장르 사운드를 낸다. 대체로 맑고 밝은 소리가 난다. 픽업은 일단 싱글 픽업이 3개가 사용된다. 텔레캐스터와 마찬가지로 리어픽업은 비스듬하게 박혀있다. 스트랫의 아이덴티티는 바로 이 싱글픽업인데, 싱글픽업의 클린톤이 정말로 아름답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맑고 청아한 클린톤은 스트라토캐스터만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프톤 셋팅을 이용해서 독특한 소리를 낼수도 있으며, 블루스, 재즈, 펑크 등등에서 활약하고 있다.특이사항으로는 펜더 기타를 사용하는 뮤지션 중 대중적으로 가장 추앙 받는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이 있다. 펜더사에서 62년 공개된 일렉트릭 기타이다. 스트라토캐스터를 비튼 느낌의 바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유저로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있다.57년 출시된 재즈마스터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재즈마스터와 마찬가지로 발매 당시에는 서프록 밴드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다만 떨어지는 범용성등의 문제로, 1975년부터 미국 생산품은 단종되었다. 재즈마스터, 머스탱과 더불어 펜더 기타 중 3대 비인기 기타로 유명하지만[2] 인디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MUST HAVE ITEM으로 꼽히는 독특한 악기이다. 기존의 1볼륨 2톤 5픽업 셀렉터만 가지고도 이펙터를 활용하여 폭 넓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게 일렉트릭 기타인데 재규어는 그것을 매우 폭넓게 이용할 수 있게 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기타였다. 발매 당시에는 고급 자동차 재규어의 느낌 그대로 펜더 제품 중 가장 고급사양/고가 라인으로 분류되어 판매했으나 장렬히 전사한 비운의 기타가 되었다. 하지만 금속성이 짙게 묻어있는 톤과 다양한 픽업 조합으로 얻을 수 있었던 사운드와 하이게인 사운드에 묻어나오는 짙은 노이즈까지 인디록 뮤지션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픽업의 On/OFF나 줄 간격까지 조절할 수 있었다. 또한 싱글 픽업의 잡음을 잡아주기 위해 픽업 주변을 쇠붙이로 둘러싼 것이 특징으로, 일반적인 스트라토캐스터용 싱글 픽업과는 다르며 소리도 스트랫이나 텔레캐스터에 비해서 다소 온건한 편이다. 60년대 서프록의 황금기 이후에는 80년대를 즈음하여서는 인디록 뮤지션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 밴드로는 스미스,픽시즈,소닉 유스,마이 블러디 발렌타인,다이노서 주니어등이 있다. 펜더사에서 1958년 최초 공개한 일렉트릭 기타이다.펜더사 최초의 좌우 비대칭 일렉트릭 기타이다. 이름처럼 최초에는 재즈기타리스트들을 위하여 설계되었다. 재즈의 경우 조금 몽롱한 사운드를 잡는 경향이 있어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깁슨이나 그레치의 사운드를 선호하였다. 이에 재즈 기타리스트들에게도 어필하기 위한 모델로써 도입되었으나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하였다. 원래의 제작 의도와는 다르게 캘리포니아 기반의 서프록의 사운드에 절묘하게 어울려 60년대에 널리 이용되었으며, 70년대에는 텔레비전이나 엘비스 코스텔로등의 뮤지션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스트라토캐스터나 텔레캐스터에 비하여 범용성이 매우 떨어졌으므로 1980년도에 제작이 중단되었고, 일제 펜더를 통하여서만 1984년부터 판매되었다. 이후 2007년 빈티지 리이슈 시리즈로 27년만에 미국 펜더에서 재즈마스터를 제작하게 되었다.현재는 멕시코산 Classic Players 라인에서도 재즈마스터가 출시되었다. 사운드는 스트라토캐스트와 비교하였을 때 서스테인이 짧으며, 또한 줄의 장력이 약해 금속성의 소리가 살짝 묻어난다. 이러한 사운드가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60년대 서프록 밴드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스트라토캐스터와 함께 펜더(Fender) 사에서 개발한 모델이다. 스트라토캐스터보다 먼저 개발된 최초의 솔리드형 기타이며 스트라토캐스터처럼 맑은 소리를 내지만 좀 더 개성이 강한 소리가 난다. 지미페이지와 함께 3대 기타리스트에 속하는 제프 백이 텔레캐스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할로우바디는 일렉 기타를 논할 때 잘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통기타인 것도 아닌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애용하고 있고, 그 고유의 울림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나는 일렉기타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렇기에 재즈나 블루스 등에 주로 쓰이고 퓨전이나 모던락, 모델에 따라서 하드락까지도 두루 쓰인다. 또한 F홀, 둥글고 곡선이 두드러지는 바디, 곱상한 색상 등으로 외관상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할로우바디는 두가지 종류로 나뉜다. 세미할로우바디와 풀할로우바디. 세미할로우는 어느 정도 기존 솔리드바디 일렉기타의 특성을 갖고 있다. 바디 중간이 센터블럭으로 박혀있고 덩치도 그리 크지 않다. 특유의 담백함고 부드러운 소리가 특징이다. 반면에 풀할로우바디는 완전 비어있는 소리가 난다. 주로 정통 재즈나 정통 블루스에서만 쓰이며, 이외 장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세미할로우를 사용하는 유명 기타르스트로는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있으며 에피폰 사의 시그네쳐를 사용했다. 섬진강 섬진강(蟾津江)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의 팔공산 자락의 옥녀봉 아래 데미샘에서 시작한다. 길이는 223 km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를 굽이쳐 흐르면서, 보성강과 여러 지류와 합쳐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대한민국 5대강 중 수질이 가장 깨끗한 강으로 알려져 있다. 유역에 임실·남원·곡성 등의 분지가 있으나 평지는 극히 드문 편이다. 수력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며, 섬진강 본류를 가로지르는 다목적댐인 섬진강댐과 유역 변경식 발전소인 섬진강 수력 발전소, 그리고 지류인 보성강에도 유역변경식 발전소가 있다. 길이 223.8 km, 유역면적 4,911.9 km이고, 강이 좁고 물 속에 바위가 많아 선박이 다니는 데 불편해서 가항 거리는 39 km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강에 관련된 연계 설화도 있다.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팔공산 북서쪽의 '천상데미(하늘에 오르는 봉우리)' 서쪽 기슭,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마을 북쪽계곡 상추막이골에 섬진강의 발원샘인 '데미샘'이 자리잡고 있다. 섬진강은 데미샘에서 남해의 광양만까지 223km를 흘러가는 호남 지방의 옥토를 가꾸는 젖줄기이고, 데미샘은 전국에서 네 번째로 긴 섬진강의 발원지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2016년 1월 5일 산림청장이 국가산림문화자산 제2015-0008호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으로 지정하였다 바다소목 바다소목(Sirenia)은 포유류의 한 목이다. 해안에서 살며 초식동물이다. 고래처럼 바다에 살면서 해초 등의 식물질을 먹는다. 앞다리는 지느러미 모양이다. 코 끝이 굵고 둥글며, 귀가 없고 털이 엉성하게 나 있다. 머리뼈가 튼튼하며, 꼬뼈가 없다. 특히 아래턱이 굵고 튼튼하다. 위는 여러 방으로 나뉜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듀공·매너티 등의 4종이 알려져 있다. 그리스 인들이 인어로 오인했던 동물로 추측되는 바다소는 강가나 해안가, 습지 주변에서 서식한다. 바다소목의 동물들은 지난 5천만 년간 진화를 거듭해 왔으며 그들 중에서 듀공과 매너티가 포함된다. 지방질의 몸집에 숨을 오랫동안 참을 수 있도록 두개골이 아주 발달되어 있다. 매너티와 듀공을 보더라도 두개골격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으며 두 동물 모두 엉엉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데 아주 쾌활한 성격을 지녔다. 두 개의 젖꼭지가 있으며 코끼리가 바다소와 가장 가까운 육지 친척인 것으로 추측된다. 매터니 종과 듀공 모두 멸종 위기종이다. 세 개의 종인 매너티 종은 인간의 해양 개발과 서식지 파괴로 이미 멸종 수위에 거의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미 스텔라 바다소는 포획에 의해 18세기 멸종하였다. 이들은 해양 포유류 중 유일한 초식동물로 분류된다. 바다사자와 돌고래, 물개 등과 다르게 바다소목 종만이 해초를 먹는다. 신진대사가 원할하지 못한 탓에 온도가 차가워지면 적응력이 떨어진다. 또한 바다소목의 동물들은 물에서만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새끼를 낳기 위해서도 뭍으로 나가지 않는다. 매너티 매너티()는 바다소목에 속하는 포유동물의 총칭이며, 분류학적으로는 매너티과에 속한다. 몸길이는 5m 정도이고 몸무게가 650kg쯤 나간다. 초식동물로 열대와 아열대의 산호초가 있는 연안에서 생활하며 바닷말을 주식으로 한다. 윗입술은 반씩 갈라져 있어 식물을 먹을 때 집게처럼 사용한다. 매너티는 하루에 45kg 이상의 수초를 먹어치운다. 피부는 엷거나 짙은 회색이며, 짧고 뻣뻣한 털이 온몸에 흩어져 있다. 앞다리는 노처럼 생겼고, 꼬리는 둥그스름하며, 뒷다리는 없다. 입 밖으로 나온 엄니는 송곳니가 아니고 앞니이다. 입은 돼지와 비슷하고 몸은 토실토실 살쪘으며, 꼬리에 큰 꼬리지느러미가 있다. 겁이 많으며, 다른 동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다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1시간 이상잠수하여 바다 밑바닥에 정지해 있기도 하다. 동작은 둔하여 유영속력도 시속 6km 정도이며, 밤에는 드물게 해변가에 상륙할 때도 있다. 하위분류로는 매너티속("Trichechus") 하나밖에 없다. 영어의 ‘sea cow’를 직역하여 바다소 혹은 해우라고도 불린다. 매너티과와 듀공과는 두개골과 꼬리의 모습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듀공은 꼬리가 갈라진 반면 매너티의 꼬리에는 물갈퀴가 있다. 종으로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서식하는 서아프리카매너티("Trichechus senegalensis"), 남아메리카 동해안에 서식하는 아마존매너티("T. inunguis"), 그리고 카리브해에 서식하는 서인도제도매너티("T. manatus")가 있다. 한때는 플로리다매너티("T. latirostris")를 독립된 종으로 분류했었으나 ITIS에서는 이를 서인도제도매너티의 아종("T. m. latirostris")으로 분류하여 이것이 일반화되었다. 한때는 기름과 고기와 가죽 때문에 수렵,18세기 스텔라 매너티가 멸종당하는 일도 있었으나 현재는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 서인도제도매너티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동물보호덕분에 매너티의 천적은 없지만, 개발로 인해 서식지를 잃어가고 있으며, 많은 개체가 모터보트의 프로펠러에 등이나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다. 매너티는 가끔 먹이를 먹다가, 주변의 낚시도구를 삼키기도 한다. 낚시바늘과 낚시추보다 낚시줄이 매너티에게 더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매너티의 소화능력을 떨어뜨려 서서히 죽이는 것이다. 매너티는 발전소의 따듯해진 냉각수를 찾아 모이기도 한다. 그 환경에 적응하여 겨울에 따뜻한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눌러앉아서 사는 경우도 있다. 미국남부의 마이애미에서도 따뜻한 날씨에 적응한 매너티들이 번식을 위해서 찾아오는데, 현지주민들은 비디오 촬영등으로 그들의 방문을 환영한다. 최근에 발전소가 문을 닫게 되면서 매너티에게 주는 환경 변화가 알려지면서 U.S. Fish and Wildlife Service는 매너티를 위하여 물을 덥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야생동물보호단체중에는 매너티에게 후원자를 정해주어서 보호하는 단체도 있다. 대한민국의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다음은 대한민국의 야생 동·식물 보호법 시행규칙에 의해 지정 및 보호되고 있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이다. 국제 자연 보호 연맹에서 지정하는 멸종위기 등급과는 다르다. 쌍떡잎식물 쌍떡잎식물(雙―植物, Magnoliopsida, )은 속씨식물 중 떡잎이 두 장 나는 것을 말하며, 쌍떡잎식물강으로 분류된다. 쌍자엽식물(雙子葉植物)로도 부른다. 쌍떡잎식물은 약 199,350 여 종이 존재한다. 쌍떡잎식물이 아닌 속씨식물은 하나의 배아 잎을 가진 외떡잎식물이라고 한다. 떡잎 수는 제외하고, 비록 이것들이 외떡잎식물과 진정쌍떡잎식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되는 것이 입증됨에도 불구하고, 다른 광범위한 차이점이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 사이에서 지적되었다. 많은 초기-분기된 쌍떡잎식물 그룹은 외떡잎식물의 흩어진 관다발, 3배수의 꽃, 단구형의 꽃가루와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일부의 외떡잎식물은 그물망 잎맥과 같은 쌍떡잎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씨: 외떡잎식물의 배아가 하나의 떡잎을 가지는 데 반해, 쌍떡잎식물의 배아는 2개의 떡잎을 가진다. 꽃: 외떡잎식물의 꽃 부분들이 3의 배수임에 반해, 쌍떡잎식물은 4 또는 5의 배수 이다. 줄기: 외떡잎식물에서는, 줄기의 관다발이 떨어져서 흩어져 있는 데 반해, 쌍떡잎식물의 줄기는 고리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2기 생장: 외떡잎식물에서는 줄기의 2기 생장이 드물지만, 쌍떡잎식물은 자주 있다. 꽃가루: 외떡잎식물에서, 꽃가루는 단구형이지만, 쌍떡잎식물은 삼구형을 갖는다. 뿌리: 외떡잎식물에서 뿌리는 막뿌리이지만, 쌍떡잎식물은 어린뿌리로부터 자란다. 잎: 외떡잎식물에서, 잎맥은 나란히맥이지만, 쌍떡잎식물은 그물맥이다. 관다발의 배열외떡잎식물에서 관다발의 배열은 불규칙적이지만 쌍떡잎식물은 규칙적이다 다음 목록은 아직 널리 사용하고 있는 크론퀴스트 분류 체계와 APG 분류 체계에서 새롭게 분류되는, 이전에 쌍떡잎 식물로 분류되었던 목(目) 목록이다. 가시오갈피 가시오갈피(학명: "Eleutherococcus senticosus")는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가시오갈피라는 이름 또한 ‘가시+오갈피’형태로 구성된 것이다. 가시오갈피나무라고도 부른다. 한반도와 일본·중국의 깊은 산에서 서식한다. 오갈피나무, 섬오갈피나무(Acanthopanax Koreanum)와 더불어 뿌리와 껍질이 한약재로 쓰인다. 대한민국에서는 환경부에 의해 보호 야생식물로 지정하여 채취를 금하고 있다. 대한민국 내의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가시오갈피 관련 제품은 북한산 가시오갈피를 쓴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각처의 표고 900m 내외의 심신산계곡에서 자라는 낙엽활엽관목이다. 키는 2m내외로 자라고 열매는 9월에 검은색으로 익는다. 잎이 손가락 모양처럼 5개로 갈라져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잎은 대부분 5개씩 부채꼴로 돌려나지만 아직 어리거나 생육조건이 나쁠 때는 더러 4개의 잎을 달기도 한다. 오갈피나무가 별도로 있지만 가시오갈피에 대응하여 가지에 가시가 없는 것을 민가시오갈피(for. inermis)라고 한다. 가시오갈피에 비해 전체가 대형인 것을 왕가시오갈피(var. koreanus)라한다. 열매는 시베리아인삼으로도 불린다. Acanthopanax가 'acantho(가시나무)+panax(만병을 치료하다)‘의속명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시가 있으며, 약효가 좋은 것이 특징이다. 가시는 가지에 바늘처럼 가늘고 긴 가시가 밀생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오갈피는 오가피에서 유래된 것으로 껍질이 약재로서 효능이 좋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이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뿌리, 줄기 및 가지의 껍질 등을 복용하면 몸을 가볍게 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설치류 설치류(齧齒類)는 쥐목(설치목) 포유류의 총칭이다. 앞니는 위아래 모두 한 쌍뿐이며 일생 동안 자란다. 아래턱을 위아래로 움직여서 물건을 갉는다. 포유류 중 종수, 개체수가 가장 많다. 앞뒷다리 모두 5개의 발가락이 있고, 발톱은 갈고리 모양이나 흔적만이 남아 있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앞니는 앞면만 에나멜질로 덮여 있으며, 끝은 끌처럼 날카롭다. 앞니와 앞어금니 사이가 떨어져 있다. 다람쥐·비버·쥐·호저·카피바라·집쥐·생쥐·햄스터·레밍·하늘다람쥐·날다람쥐·프레리도그·기니피그·사향뒤쥐·친칠라를 비롯하여 1,730여 종이 알려져 있다. 다람쥐과 다람쥐과() 또는 청서(청설모)과(Sciuridae)는 설치류의 한 과이다. 다람쥐와 청서, 하늘다람쥐, 날다람쥐, 마멋을 포함한다. 오세아니아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서식한다. 하위 분류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분자 진화학의 연구에서 더 자세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 다람쥐과 (Sciuridae) - 5아과 9족 51속 281종 하늘다람쥐속 하늘다람쥐속("Pteromys")은 다람쥣과의 한 속이다. 시베리아 일대와 한반도에 서식하는 하늘다람쥐("Pteromys volans")와 일본에 서식하는 일본하늘다람쥐("Pteromys momonga")가 있다. 하늘다람쥐 하늘다람쥐 또는 대륙하늘다람쥐("Pteromys volans")는 날다람쥐류에 속하는 포유류이다. 몸길이 12-13cm, 꼬리길이 11-12cm이며, 머리는 둥글고 꼬리에 긴 털이 술 모양으로 났다. 눈은 둥글고 크다. 몸통의 양 옆으로 늘어진 비막이 앞다리에서 뒷다리까지 이어져 있어 다리를 뻗치면 막이 퍼져 마치 날개 같다. 비막을 펼칠 때에 앞다리 발목의 침상연골을 바깥쪽으로 펼쳐 표면적을 조정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활공하며, 넓적하고 평평한 꼬리로 비행 방향을 조절한다. 밤에 활동하며, 자연적으로 생겼거나 딱따구리가 파 놓은 나뭇구멍 속에서 생활하며, 오래된 주택의 구멍에서 머무르기도 한다. 먹이는 여러 가지 과실, 새알, 균류, 곤충, 딱딱한 열매 등을 주로 먹는데, 어린 새와 썩은 고기도 발견하면 먹는다. 암컷은 일 년에 2-6마리의 새끼를 두 차례 낳는다. 어린 새끼는 6주가 되면 스스로 활공할 수 있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오래되고 건강한 숲에서 사는데, 숲을 개간하거나 솎아베기과 고사목 제거 등과 같은 숲에 대한 인위적인 간섭이 늘면서 개체 수가 줄고 있다. 핀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까지 분포한다. 한국 애니메이션 스피어즈와 뚜루뚜루뚜 나롱이의 등장 캐릭터 '나롱이'의 모티브 동물이다. 발현악기 발현악기(撥絃樂器)는 손톱, 손가락 또는 피크 같은 도구로 줄을 퉁겨 연주하는 악기이다. 서양 음악에서는 기타, 류트, 만돌린 등의 악기가 이에 속하며, 그 외에 하프, 한국의 국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등이 있다. 바이올린족 악기들은 기본적으로 활로 켜서 연주하는 찰현악기지만 손가락으로 줄을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도 쓴다. 특히, 재즈에서 연주되는 더블 베이스는 피치카토의 비중이 활로 연주하는 아르코의 비중과 비슷하다. 찰현악기 찰현악기(擦絃樂器)는 줄을 활로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현악기이다. 이런 주법을 (arco)라 한다. 서양 악기로는 바이올린족, 비올족 악기들이 모두 이에 속하며, 한국의 국악기로는 해금과 아쟁이 있다. 찰현 악기는 지속음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발현악기와 구별된다. 판문점 판문점(板門店)은 한국 전쟁의 정전 협상이 진행된 곳으로,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상 황해북도 개성시 판문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였다. 현재의 판문점은 정전협정 이후 한국전쟁 포로 교환업무를 맡게된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교환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로써, 정전협상이 이뤄진 실제 정전협정 조인장소는 현재의 판문점보다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다. 정전협정 이후 유엔군과 조선인민군의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쌍방의 행정관할권이 미치지 않는다. 1976년까지는 경계선 없이 양측 경비병과 출입자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으나, 1976년 8월 18일에 발생한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이후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관할 구역이 분할되었다. 2004년 UN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를 이전 용산기지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자유의 집' 은 여권을 소지한 외국관광객은 견학이 가능하며, 그 외의 한국 국민과 외국인은 따로 소정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판문점(板門店)이란 명칭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을 돕기 위해 백성들이 임진강에 대문 널빤지로 다리를 만든 것에서 유래한 널문리를 한자로 고친 것이다. 중립국 감시단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은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이다. 중립국이라 함은 한국 전쟁에서 병원선 등을 제외하고 군대를 파병하지 않은 국가를 말한다. 스웨덴과 스위스는 대한민국측, 폴란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담당이다. 현재는 스웨덴과 스위스 위원들만이 현지에서 UN사령부 소속 중립국 감독 위원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폴란드 대표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축출 조치로 인하여 현재 폴란드 본국에서 중감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04년 이후 공동경비구역의 경비 임무는 국군이 단독적으로 수행하나, 지휘통제권은 계속 UN사령부가 가지고 있으므로, 주한미군 일부 요원들과 중립국 감시단(스위스, 스웨덴 대표)이 주둔하고 있다. 2015년 전작권 환수나 차후 맺게 될지 모를 평화 협정에 따라 UN사령부 즉 중립국 감시단 자체를 철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애초 중립국 감시단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직후 군사 정전 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MAC)) 예하로 설치되었다. 4명의 영관급 장교 (Senior Officers)로 구성되며, 2명은 스웨덴과 스위스가, 2명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조선인민군(Korean People's Army (KPA))과 중국인민지원군(Chinese People's Army (CPA))을 대신하여 임명한다. 1953년 8월 1일에 96명으로 구성된 첫 스위스 군사 사절단이 판문점에 도착한 이래, 1955년에 처음으로 41명으로 감축하였다. 1982년부터 1987년 8월까지, 스위스의 6명의 대표단과 700명 가량의 군인이 중립국 감시단으로 대한민국에 주둔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1958년에 중국인민지원군이 철수한 이후, 1991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이, 1995년에는 폴란드 대표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로 축출되었다. 비야네 스트롭스트룹 비야네 스트롭스트룹(, 1950년 12월 30일 ~ )은 C++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컴퓨터 과학자이며, 2014년 현재 모건 스탠리에서 기술부서 전무(Managing Director)로 재직중이며, 컬럼비아 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객원교수이자 텍사스 A&M 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연구특임교수이다. 스트롭스트룹은 1975년 덴마크의 Aarhus 대학에서 수학과 컴퓨터 과학 석사를 받았고, 197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캠브릿지에서 그의 논문 지도교수는 David Wheeler이다 스트롭스트룹은 1978년부터 C++를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엔 "클래스를 가진 C"(C with Classes)라고 불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C++를 발명하였고, 초기 정의 부분을 썼으며, 최초의 실행물을 만들었고, C++의 디자인 규격을 선택하고 생성하였으며, 모든 주요기능을 디자인하였고, C++ 표준위원에서 확장제안을 처리하는 책임자였다"고 한다. 또한 스트롭스트룹은 많은 사람들이 C++언어의 표준 참고서라고 생각하는 책인 C++프로그래밍 언어를 저술하였다. 스트롭스트룹은 2002년까지는 AT&T 벨 연구소에서 대형 프로그래밍 연구부(Large-scale Programming Research department)의 부서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미국 공학학회 회원으로 2004년에 선출된 적이 있다. 스트롭스트룹은 또한 ACM(1994)의 회원(Fellow)이며 IEEE회원(Fellow)이다. 그는 현재 저명한 교수로써 미국텍사스A&M대학교의 공과대학에서 컴퓨터 과학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스트롭스트룹은 다음과 같은 여러 책의 저자 또는 공저자이다. 무속신앙 무교(巫敎) 또는 무속신앙(巫俗信仰), 간단히 무속(巫俗), 무(巫)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Shamanism) 즉, 무당으로 불리는 중재자가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종교이다. 숭배 대상은 자연의 정령이나 토착 신령과 조상의 신 등의 귀신이 숭배된다. 고대 몽골 지역에서 처음 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 무속신앙을 텡그리교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무속(巫俗), 무교(巫敎),무(巫)라고 하는데, 이들은 고유의 관점이 존재하는 말들이다. 무속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샤머니즘을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처음 사용한 단어이며, 샤머니즘을 기독교, 불교, 이슬람처럼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는 중립적 입장의 종교학자들이 사용한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무속은 일종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 원시 신앙과 기타 종교 요소가 결합한 형태로 그 기원은 원시인들의 샤머니즘 의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춤추는 샤먼의 그림이 있으며, 청동기 시대는 제정 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치 집단의 지도자가 종교 집단까지 거느렸는데 이들이 족장이며 또한 제사장이었다. 이들이 거행했던 의식이 무속의 기원이 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무속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조선 때로 잡는다. 김영하 교수 등 단군을 몽골의 천신인 텡그리와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단군 왕검에서 단군은 한국 고유의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제정 일치 사회의 제사장, 즉 종교의 우두머리를 뜻하며 왕검은 왕을 뜻한다는 설이 있다. 고조선 때부터 제천 의식이 더욱 발전하고 고구려, 부여, 마한, 예 등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고조선 제천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제천 의식은 문화적 특질과 종교적 특질 모두를 가지고 있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대국가 부여, 고구려, 예, 마한 등의 나라가 모두 제천의례를 거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무천, 마한의 천제는 신라와 고려대에 이르러 팔관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유학이 조선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됨에 따라 무속에 대한 탄압이 가해져 무당이 천민으로 전락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탄압받았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무당들은 사람들의 질병을 돌볼 때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벌을 주라고 할 정도로 치유능력이 있는 자로 여겨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신으로 간주되어 거의 사라졌고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무속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벌어진 소위 '미신타파운동'으로 인해 탄압받았다. 몽골계통의 황인의 믿음에서 시작되어 발전. 무속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종교인데, 무속의 기원은 우리 역사의 시작인 고조선 시대부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고조선 시대를 상징하는 우리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가 나오고 천신의 자손 환웅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외에도 태백산, 신단수 등을 신성시하는 것으로 보아, 애니미즘, 토테미즘 등을 그 시대에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는 제정 일치 사회였으므로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일치했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샤머니즘은 지금도 무속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고삼국 시대 삼한과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 여러 국가에서는 제천 의식을 비롯한 여러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솟대나 당산목 등이 이 때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솟대는 새를 꽃은 나무로 새를 하늘과 땅의 중개자로 보는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농업이 철기의 사용으로 발달되고 국가 간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고대 국가들은 백성들을 단합한다는 취지에서 큰 종교 행사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천 의식이다. 일제의 탄압이 있었으나 당시 조선인들은 계속 신앙심을 유지해 왔다. 일제가 조선땅에 일본 신사를 지어서 국사당을 강제로 옮긴 일도 있었다. 새마을 운동 때 정부에서 실행한 미신타파운동으로 탄압 받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무속에서 신령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중재자 즉, 샤먼을 무당(巫堂)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무당을 당골이라고도 부르며,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눈다. 강신무는 대체로 한강 이북에서, 세습무는 한강 이남과 동해안 일대에서 전해졌다. 강신무는 일반인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무병을 앓게 되고 내림굿을 통해 신내림을 받아서 신령을 몸주신으로 모시는 무당을 일컬으며, 세습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소화처럼 집안의 인척관계로 계승되는 무당을 말한다. 광복 이후 세습무들은 조선시대때 무당이기 때문에 받던 괄시를 피해, 무당 집안임을 숨기는 일이 많아졌고, 한국전쟁때 미신과 종교를 금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대한민국으로 옮긴 강신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무당이라고 하면 대부분 강신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아직도 대한민국의 동해안 지역과 호남지역에는 세습무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으며, 세습무가 하는 강릉 단오굿과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등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진도씻김굿을 하는 무당을 진도에서는 당골이라고 한다 마타 하리 마타 하리(Mata Hari, 1876년 8월 7일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 ~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첩자 혐의로 처형된 네덜란드 출신의 무용가인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의 가명이다. 네덜란드의 안정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파산했다. 그녀는 네덜란드 군대의 대위가 낸 배우자를 구하는 광고에 응해 그와 함께 잠바로 갔다. 그 후 1902년 26세가 된 그녀는 파리에 나타났다. 그녀는 풍만한 금발 미녀가 아니라, 키가 크고 몸매가 가냘프고 피부색이 어두워서 동양 미녀의 모습에 가까웠다. 당시 프랑스에서 고급 매춘부의 황금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자바에서의 경험과 관능적인 외무를 이용해 마타 해리라는 이름으로 거의 옷을 입지 않은 채 '동양적인' 춤을 춤으로써 출세의 길을 개척했다. 그녀는 독일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말하자면 국제적인 매춘부였다. 젤러는 군복에서 느껴지는 성적 매력에 약했다. 그녀는 재능이 많고 개성이 강한 여인이었으나, 당시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던 반감과 자신이 받고 있던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은, 무엇이든 남성이 요구하는 일을 해줌으로써 불확실하지만 상류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14년 7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베를린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단지 댄서로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애인들 중에는 해군 장교와 육군 장교, 그리고 베를린의 경찰서장도 있었다. 영국인들은 그녀를 의심했는데, 명백히 독일 간첩이었던 다른 여자와 그녀를 혼동한 것도 부분적인 원인이었다. 마타 하리는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부유한 반 데어 카펠렌 남작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지만,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지루하고 편치 못했다. 어느 날 독일 영사 크라머가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프랑스 돈 2만 프랑을 조건으로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알아 오라는 제의를 수락했다(그녀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항상 주장했다).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배를 타고 먼저 영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스페인에서 그녀는 독일의 권력자들과 어울렸고, 어쩌면 '첩보원 H-21'로 임명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은 파리였다. 그녀는 당시의 일류 댄서인 디아길레프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파리에서 정보원의 국장 라두아는 마타 하리에 관한 경고를 듣고 그녀에게 프랑스 편에서의 스파이 활동을 제의했다. 그녀는 긍정적인 의사를 표하고 백만 프랑을 요구했다(돈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지만 라두아는 그녀의 본성에 대한 의심을 굳혔다). 당시 그녀는 상당한 돈을 받고 있었고, 특히 반 데어 카펠렌에게서 받는 돈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엄격한 프랑스의 정보 장교들이 보기에 그 액수는 단순한 정부가 받기에는 지나치게 많아 보였다. 1917년 2월 13일 아침 그녀는 샹젤리제의 엘리베 팔라스 호텔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6월 21일까지 생 라자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그녀는 고급 매춘부에게 필요한 사후 피임 용품으로 살정자제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녔는데, 심문관은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라고 확신했다. 결코 전문적인 스파이가 아니었던 그녀는 터무니없이 부주의했다.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샘 와게나는 그녀가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한다. 1917년 7월 24일부터 25일까지 이틀이 채 안 되는 재판 과정을 거쳐 군사위원회는 그녀에게 여덟까지 간첩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총살형을 선고했다. 10월 15일 그녀는 파리 중심부에서 뱅센의 군사지역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즉시 형이 집행되었다. 마타 하리는 사형대에 묶이거나 눈가리개를 쓰는 것을 거부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았다.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은 황제 지배 체제 혹은 원수정(principatus)을 사실상 시작한 기원전 27년부터 몰락까지의 로마를 일컫는다. 로마 제정 시대의 종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패권주의는 로마 제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문화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뜨려,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 종교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황제의 권력(imperium)은 이론상 황제가 가진 '호민관 특권'(potestas tribunicia)과 '대행 집정관 권한'(imperium proconsulare)에 따른 것이었다. 호민관 특권(공화정 시대 호민관에게 부여되는 권한)은 황제 개인과 그 지위를 신성 불가침으로 규정하였으며, 정부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대행 집정관 권한(공화정 시대의 총독 역할을 맡던 대행 집정관의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군 통수권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몫이었던 전쟁 선언, 조약 비준, 외교 협상 등의 외교권도 가졌으며, 원로원 의원 임명권 등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황제는 종교 조직을 통제하였으며, 황제는 늘 대제사장(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주요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제정 초기에 이러한 여러 권력은 명확하게 구분되었으나 나중에는 그 구분이 사라졌으며, 황제권은 입헌적이기보단 군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사실 황제권의 주요 기반은 군대였다. 황제 금고에서 봉급을 받았던 군단 병사들은 해마다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sacramentum)을 했다. 황제가 죽으면 위기 상황이 닥치기도 했다. 규칙상으로는 원로원이 새 황제를 선출해야 했지만, 대부분의 황제는 자신이 후계자를(보통 자신의 혈족) 지명하였다. 새 황제는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히 황제권을 인수해야 했다. 근위대와 군단의 충성을 얻지 못하면 황제는 권좌를 지킬 수 없었다. 이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여러 황제는 이들에게 군대 포상(donativum)을 지급하였다. 제정 이후에도 로마의 민회는 존속하였으나 실권은 모두 원로원으로 넘어갔으며, 원로원의 결의(senatus consultum)는 법적인 효력이 있었다. 이론상 황제는 원로원과 동등한 정부 기관이었지만, 원로원의 실권은 거의 없었고 주로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을 위장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황제는 오래된 정치 기구인 원로원을 존중했지만, 이를 우습게 보는 황제들도 있었다. 원로원 회의시 황제는 두 집정관 사이에 앉아 회의 주재자처럼 행세하였다. 서열이 높은 의원이 낮은 의원보다 먼저 발언하는데, 황제는 언제든지 발언할 수 있었다. 3세기에 이르면 원로원은 실권은 전혀 없는 명예직, 또는 시의원 정도로 격하되고 만다.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패배로 끝났다.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 재정, 정치 전반에 걸친 대규모 개혁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종신 독재관직에 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당시 제거된 귀족들의 직위를 지방 출신 관리들로 충원하였다. 또한 이들이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하겠노라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를 뜻하는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수여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 올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 속주를 다스리고 군대를 이끌지는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군대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호민, 또 그가 가진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원로원은 전과 다름없는 위엄과 권한을 지닌 듯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직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을 전통과 여론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존중했고, 원로원에 정책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무관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원로원을 존중해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으로 이루어진 특별 위원회가 법무관과 집정관을 뽑게 했고, 켄투리아회는 이를 자동적으로 승인케 하였다. 이전 속주들은 원로원이 통제했으나,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 밖의 속주들은 황제가 통제했다. 황제는 그가 통제하는 속주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뿐만 아니라 기사 계급도 임명했다. 속주는 직접세와 간접세를 로마에 바쳤으나 기본적으로는 각각 자체의 민회와 시 의회, 관리를 거느린 "나라"(Civitas)를 단위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속주에 파견된 관리의 수준이 높아졌고 감독이 강화되었으며 평화가 정착되어 더 나아졌고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자치 도시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을 숭배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권력기반은 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서약한 군대였다. 군대는 군단·보조부대·근위대·해군으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황실 근위대의 병사는 대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많은 군단과 거의 모든 보조부대의 병사는 주로 황제가 다스리는 서부 속주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증가했다. 그러나 군단은 입대하는 날로, 보조부대는 제대하는 날로 시민권을 얻었고, 더구나 보조부대에서 제대한 병사들은 종종 그들이 주둔했던 속주에 정착했으므로 이는 제국 전역을 로마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로마화가 비교적 쉬운 지역만을 속주로 병합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驛站)제도를 시행한 반면, 로마화가 어려운 지역은 위성국가(예:아르메니아 왕국)로 만들어서 방어에 따르는 비용을 줄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는 더 쉬운 방법으로 전쟁보다는 위성국가를 만든 뒤 속주로 병합하는 경우(예:카파도키아, 트라키아 왕국 등)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제위 계승의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후계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군대는 부자상속에 정통성을 두었으므로 그는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그보다 먼저 죽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티베리우스(재위 14년~37년)는 변방을 보호하고, 국가의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원로원의 귀족들과 밀착되어 있던 민회를 폐지하여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가 암살 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배척받게 되었다. 그가 죽자 친척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즉 칼리굴라(재위 37년 ~ 41년)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원로원을 모욕하며 낭비를 일삼는 등 과대망상적인 폭군이 되어 결국은 암살당했다. 칼리굴라의 숙부로 그 다음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재위 41년 ~ 54년)는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대외팽창에 많은 관심을 보여 브리타니아를 합병했으며 서부 속주들의 로마화를 촉진시켰다. 그는 전제 정치를 해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재무관리를 강화하고 재판 제도를 개혁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16세밖에 안된 의붓아들 네로(재위 54년 ~ 68년)였다. 네로는 가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으며, 그 죄를 기독교 신도들에게 돌려 그들을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했다. 네로가 죽은 뒤 내란이 벌어졌고, 이 내란의 마지막 승리자인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년 ~ 79년)와 두 아들이 플라비우스 왕조(69년 ~ 96년)를 이루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으로 약해진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재정을 튼튼하게 했으며 원로원에 대해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원로원을 행정관 배출 기구로만 취급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재위 79년 ~ 81년)는 많은 인기를 누렸으나 얼마 안되어 죽었고, 뒤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재위 81년 ~ 96년)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유능하지만 고압적인 인물로서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전제로 말미암은 불만 때문에 96년 암살당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변경 주둔군을 그들의 출신 속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배치했고, 군단을 일정한 장소에 주둔시켜 변경 주둔군과 비슷한 성격을 부여했다. 이 군대로 그들은 브리타니아에서 지배 영역을 넓히고 라인 강 유역을 되찾았으며, 실패로 끝났으나 도나우 강 지역도 회복하려 시도했고 동쪽 변방도 강화했다.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은 군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재위 96년 ~ 98년)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계자로 지목할 아들이 없었고, 군대의 인망을 얻을 만한 군사적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인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재위 98년 ~ 117년)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웠다. 속주 출신의 첫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법규를 준수하고 겸손해 인민과 군대 모두에게서 인기를 얻었으며, 제국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원로원까지도 거리낌없이 무시하면서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의 복지 정책 중 하나는 알리멘타(alimenta)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도나우 강 지역(다키아)과 동쪽 변경을 평정하였고, 북으로는 라인 강 유역과 브리타니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동의 파르티아 왕국을 정벌하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년 ~ 138년)였다. 그는 영토 팽창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해 변경수비 강화에 치중했다. 그는 속주를 지킬 주둔군을 그 속주 자체에서 충원했고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군대를 감독하기 위해 자주 몸소 시찰을 다녔다. 한편 군단이 이처럼 주둔군과 다름없어지자 기동작전을 위해 새로운 부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부대는 많은 경우 제국 주변의 이민족으로 충원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민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 때 관료제가 정착되었는데, 그의 법률적 업적 특히 "영구 고시록"(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되는 법)의 법전화는 현저한 것이었다. 또 새로운 형식의 라틴 시민권을 창설해 이 권리를 얻은 도시의 모든 지방 원로원 의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 원로원의 많은 성원이 속주의 귀족으로 보충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136년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이 양자로 삼았다. 안토니누스 또한 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년 ~ 161년) 때 로마 제국은 세계주의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면서 조용한 번영을 누렸으나 동시에 변경지역이 이민족에 의해 잦은 침략을 당하고,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위험스러운 징조를 보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년~180년)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해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충실히 따랐으나 이는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치세에는 이민족이 강력하게 침략해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국 동쪽 변경에 밀어닥친 위험은 무마시켰다. 그러나 게르만 족의 도나우 강 지역 침입은 동부에서 벌어진 반란과 함께 오랫동안 아우렐리우스를 괴롭혔다. 그는 게르만 족을 진압하는 도중에 죽었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콤모두스(재위 180년 ~ 192년)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우며 쾌락만 추구하다가 암살당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강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197년).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 그가 죽자 큰 아들 카라칼라(재위 211년 ~ 217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 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뒤를 이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도 235년 살해당한다.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졌다. 3세기의 위기는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붕괴와 쇠퇴 현상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내에서 25명의 군사 황제가 난립했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년 ~ 305년)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테트라키 (사두정치 체제.Tetrarchia)라고 한다. 테트라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는 즉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정제로 옹립하였다. 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내전을 종식시킨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321년에는 "존엄한 태양의 날에는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쉬어야한다"며 일요일 휴업령을 내렸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었다. 361년 율리아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박해를 가하였으며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의한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기도하였다. 율리아누스는 또한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와 전쟁을 벌였으며,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363년 죽었다. 그러자 요비아누스가 군대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뒤, 샤푸르 2세와 로마군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대가로 297년 갈레리우스에 의해 로마령이 된 싱가라(지금의 이라크 신자르)와 니시비스(지금의 터키 누시이빈), 아미다 등의 도시와 티그리스강 동쪽의 로마 영토 전부를 양도하였다. 요비아누스는 기독교의 권한을 회복시켜 주었으나, 364년 사망하였다. 요비아누스가 죽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정제로 추대되었고, 가까운 친척인 발렌스가 그를 도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365년 장군 프로코피우스는 이에 불복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367년 발렌스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367년 8살의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제국 서부의 공동 황제에 추대되었다. 37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게르만 족에 대해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다 죽었다. 16세의 그라티아누스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는 그의 어린 이복 동생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고,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복종했다. 당시 제국의 골치거리는 훈족(흉노족)의 침입이었다. 훈족(흉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압박해왔고 376년 동고트족의 에르마나리크왕은 훈족[흉노족]의 아틸라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서고트족의 족장 아타나리크는 훈족(흉노)에 쫓겨 발렌스에게 트라키아로 이주해 달라고 청원하였고 발렌스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총독인 루피키누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절하고 서고트족을 탄압하였고 이에 반기를 든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서고트족과 모든 트라키아의 고트족, 여기에 훈족(흉노족)까지 가세하여 로마를 압박하자 로마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378년 봄 발렌스는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가 증원군을 보낸다고 하자 이를 믿고 발칸 반도로 진군하였다. 발렌스는 초기에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의 마리차 강변에서 상당한 규모의 고트족 군대를 물리치고 진군했으나 서방에서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어졌다.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대규모 전투를 하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발렌스는 적을 과소 평가하고 공격주장을 받아들여 고트족과 전면전을 벌였다. 378년 8월 9일 벌어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발렌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3분의 2가 괴멸했다고 추정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노련한 병사들과 관료들이 죽었고, 제국의 통치력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라티아누스는 동부의 황제로 379년 테오도시우스 1세를 지명했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타니아에서 그곳의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갈리아로 건너왔다. 그라티아누스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하려다 살해당했다. 이로써 12살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만이 서방의 정제로서 남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정식적으로 인정을 받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막시무스에 대한 원정을 개시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살해당하고 그 이후에 아르보가스테스가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동방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방을 침공하여 아르보가스테스와 에우게니우스를 전사시켰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이교도를 압박하고 신전령을 몰수하였으며, 393년에는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시켰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은 이로써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다시는 통합되지 않았다. 395년 이후, 분리된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허울 뿐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대신 군벌의 지도자들이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한편 서로마 제국에서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용병들을 단순한 이민족 군대로 취급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를 장악한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의 직위를 포기하고 대신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을 자처하였다. 제국은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게 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476년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서로마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제국의 기장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제논에게 보냈다. 제논은 곧 두 대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하나는 일단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의 군주로서 인정한다는 사절이었고, 다른 하나는 율리우스 네포스에게 보내어 황제 복위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네포스가 죽자 제논은 달마티아에 대한 지배권이 동로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공략하였고, 뒤이어 동고트의 왕 테오도릭과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로마의 붕괴 요인으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군사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이 로마 붕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할 무렵인 5세기에, 경제적으로 더 부유했던 동부는 파괴된 제국을 복구하였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린다.)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일리리아를 빼앗아 옛 영토를 일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반달족으로부터는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으로부터는 히스파니아를 되찾았다. 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으나, 북아프리카는 약 1세기 간, 이탈리아는 5세기 간, 일리리아는 거의 천년 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610년대로 접어들면서 로마에서 고대의 라틴적인 모습은 차차 없어졌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제국내에서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하였으며, 특히 군사 용어를 그리스어로 대체하는 정책을 피기도 했다. 반대로 라틴 문화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이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국 스스로는 물론이고 아랍, 페르시아 등 제국의 적들 또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았으며 모두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로마 그 자체로 여기고 있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로마 제국은 일시적으로 명맥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은 역사가 단절되고, 영토 또한 라틴 제국을 위시한 가톨릭 세력의 침공으로 대부분 상실하였다. 1261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었지만, 이는 불완전한 회복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영향력과 위상은 이후로 되찾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할 때인 1453년까지 살아남았다. 1453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Caesar of Rome / Kayser-i Rum")라 일컬었으나, 대체로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로 여겨진다. 내전기와 이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대해진 규모(60개 이상)의 군단을 해산하고, 국방과 유지에 적절한 규모(28개 군단)로 줄였다. 여러 군단들, 특히 충성심이 의심되는 군대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어떤 군단들은 합병되기도 했는데, '게미나'() 란 군단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원후 9년 게르만 부족들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3개 군단을 궤멸시켰다. 이 재앙으로 군단의 수는 25개로 줄었다. 군단 수는 나중에 다시 늘어, 이후 300여년 간 30개 안팎 수준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도 창설하였는데, 9개 대대로 구성된 이 군대는 이탈리아에 주둔하며 표면상 치안 유지 기능을 맡았다. 군단보다 더 후한 봉급을 받은 근위대는 복무 기간도 짧아, 일반 군단병의 복무기간 20년과 달리 이들은 기간이 16년에 불과하였다. 보조군은 군단보다는 유명하진 않았으나, 로마의 중요한 군대였다. 군단병과 달리 보조군은 非시민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대대 병력 정도의 작은 단위로 조직되었으며, 군단병보다 봉급도 적었으나, 25년의 복무 기간을 마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었으며, 시민권은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졌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보조군 병력은 군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각각 약 5,000여명으로 구성된 25개 군단이 있었으므로, 보조군 병력의 총 수는 125,000 명 정도로 볼 수 있으며, 대략 250개 보조군 부대가 있었을 것이다. 로마 해군()은 군단의 보급과 이동을 보조할 뿐 아니라, 라인강이나 도나우강의 국경 방어도 지원하였다. 또 해적에 대비하여 해상 무역로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해군은 지중해 전역, 북대서양 일부 해역(히스파니아, 갈리아, 브리타니아 해안)을 순항하였으며, 흑해에도 해군이 있었다. 그러나 해군보다는 육군이 더 상위에 있고 인정받는 병과였다. 공화정 시대에 속주 총독은 전통적으로 원로원 계급의 몫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혁으로 이 관행을 바꾸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속주를 창설하였다. 황제 속주는 대부분 얼마 전에 정복하거나 국경과 가까운 지방이었다. 따라서 국경에 주둔하는 절대다수의 군단이 황제의 직접적인 통솔하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아이깁투스(이집트) 황제 속주로, 로마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로써 이곳을 통해 수입하는 곡물은 로마 시의 대중을 먹여살리는데 매우 중요하였다. 이 지역은 황제의 개인 소유지로 여겨졌으며, 원로원 의원은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이깁투스 속주 총독과 이 지역 군단 사령관들은 원로원 계급 출신이 아니라, 기사 계급 중에서 황제가 선택한 사람이 맡았다. 원로원 속주에서는 전통적인 정책이 주로 변하지 않았다. 변경과 떨어져 있으며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아온 이곳 속주는 대개 평화롭고 안정 상태였다. 원로원 속주 한 곳에 일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아프리카 속주(오늘날 알제리 북부)의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이었다. 각 속주의 지위는 원로원 관할에서 황제 관할로, 혹은 그 반대로 변할 수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 또 새로운 속주가 많이 설치되었는데, 대부분은 기존 속주를 분할한 것이고, 새로 정복한 지역을 속주로 삼기도 하였다. 기원전부터 4세기까지의 초기 로마는 그리스 신화를 이어받아 종교로 공인되었다. 그러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와 중동 지역을 정복하고 나고서는 이집트 신화나 중동 지역의 신화를 믿기도 했고, 나중에 들어온 기독교는 처음에는 박해를 받았다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 한 뒤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제국 주민은 황제 숭배에 참가하도록 불려가서 황제와 황가의 일원을 신으로 모셨다. 황제 숭배의 중요성은 조금씩 커져서, 3세기의 위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황제 숭배가 널리 보급되었으며, 황제 숭배 시설은 로마의 여러 도시내 생활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또 황제 숭배는 로마화의 주요 기관이기도 하였다. 황제 숭배는 기존의 신전에서 치르는 의식에 부가되거나, 공중 목욕탕의 특별실에서 관련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황제 숭배를 얼마나 진지하게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로마 사람은 황제가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진다는 생각을 우습게 보거나 황제가 죽은 뒤 신격화되는 일을 비웃기도 하였다. 소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호박으로 만들기"("Apocolocyntosis divi Claudii")라는 풍자시에서 황제 신격화를 풍자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멍청하게 묘사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신이 아닌 호박이 돼버린다. 사실 신랄한 비난은 54년 클라우디우스의 장례에서 일어난 바 있다. 기독교에 관한 제국의 박해가 시작된 것은 네로 황제 시절부터였고, 2세기~3세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대박해가 여러 번 발생한다. 4세기에 이르러서 311년에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존의 종교들로는 로마 제국을 하나로 뭉치지는 못하다는 것과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기독교가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고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인정하였고,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이단 논쟁에도 불구,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다. 이로써 다신교적 다양성을 기반으로한 로마적 종교관,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 그자리에 점차 기독교가 대체하기 시작한다.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로, 로마 제국의 모든 관청과 대부분 지역에서 이 언어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대단히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였기 때문에 전 국민을 라틴어로 말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대개의 지역은 토착어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특히 아테네를 포함한 헬라스 지역에서는 거의 라틴어를 쓰는 경우가 없었다. 한편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기보다는 학술언어로써 그리스어를 사용하곤 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명상록>을 그리스어로 썼다. 로마시대의 건축 기술은 로마 제국 이전에 로마 땅을 점령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의 건축 기술력과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토대가 되어 형성되었다. 로마 시대 때는 거푸집을 이용한 방식과 돌을 쌓고 그 사이에 접착제의 역할을 콘크리트로 하는 오푸스 세멘티쿰(Opus cenmenticum)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다. 로마 시대의 콘크리트는 소석회 반죽과 포촐라나(pulvis puteolanum)와 인근 화산에서 가져온 가벼운 부석(浮石), 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콘크리트와 유사하지만 그 당시에는 방수능력이 뛰어나지 못하였기에 방수의 목적과 외장의 목적으로 거푸집을 이용해 벽을 세운 뒤 겉에 작을 돌이나 바위로 마무리를 하였다. 오푸스 세멘티쿰은 초기 불규칙한 돌을 불규칙하게 쌓는 오푸스 인케르툼(Opus incertum)에서 네모난 돌을 규칙적으로 쌓는 오푸스 콰드라툼(Opus qudratum), 오푸스 테스타케움(Opus testaceum)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하여 돌을 마름모형태로 쌓은 오푸스 레티쿨라툼(Opus reticulatum)까지 발전하였다. - 1. The First Man in Rome - 2. Grass Crown - 3. Fortune's Favorites - 4. Caesar's Women - 5. Caesar - 6. The October Horse - 7. Antony and Cleopatra 음악적 농담 《음악적 농담("Ein Musikalischer Spaß")》은 모차르트가 1787년 6월 14일에 출판한, 두 대의 호른과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K.522에 붙인 제목이다.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쓴 곡이며 당대의 어설픈 음악가들의 음악을 풍자하기 위해서 쓴 곡이라는 설이 있다. 작품은 네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고전 시대의 다른 디베르티멘토와 그 구성이 같지만 당시의 청중에게 이 작품이 웃길 수 있었던 점은 다음과 같다. 이 곡은 또한 복조를 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것인데, 마지막 악장의 종지화음에서 안 어울리는 화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도한 것이다. 어떤 이론가들은 이 곡이 당대의 서툰 작곡가와 어설픈 연주자를 풍자하기 위해서 쓰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작품을 서툰 작곡가가 썼다는 것을 전제하고 곡을 분석한다면 재밌는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동기의 발전이 상투적으로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곡을 진행시켜야만 한다는 작곡가의 고심이 보이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쓰인 곡이라는 설도 있다. 모차르트는 고전 시대 음악에서 생소한 비대칭적 구절법과 온음음계, 복조와 같은 기법들을 썼는데, 100여 년 뒤인 20세기 초 새로운 음악을 원했던 클로드 드뷔시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같은 작곡가들은 이를 실제 작곡 기법으로 편입한다. 하지만 고전음악 형식 안에서 쓰인 이질적인 요소의 괴리는 아직도 듣는 사람에게 재미를 주며, 모차르트의 유머 감각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음악의 농담》이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 모차르트는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발표하였으며 이 곡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곡 중의 하나로 불리고 있다. 월요일 월요일(月曜日)은 일요일 뒤의 날, 화요일 앞의 날이다. 월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ISO 8601의 권고에 따라 한 주가 시작하는 날이다. 일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한 주의 두 번째 날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인 달 월(月)을 따서 월요일이라고 부르는데,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로 Moon을 따서 Monday라고 부른다. 전통적 기독교 달력에서는 일요일을 기준으로 한 주의 둘째 날로 보는데, 그러한 영향으로 미국, 일본, 캐나다 등의 일부 국가들은 한 주의 시작을 일요일로 간주하고 있다. 반면 영국, 대한민국 등은 한 주의 시작을 월요일로 간주한다. 솜다리 솜다리는 초롱꽃목 국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조선화융초라고도 불리며, 에델바이스와 같은 속에 속하기 때문에 에델바이스라고도 잘못 불릴 때도 있다. 한라산과 한반도 중북부 지방 산지에 서식한다. 대한민국 환경부가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깊은 산 바위 틈에서 자라며 높이는 15∼25cm까지 자란다. 밑부분은 묵은 잎으로 덮여 있으며 줄기는 곧추 서며 전체가 회색빛을 띤 흰 솜털로 덮여있다. 줄기는 모여서 자라며 꽃이 달리는 자루와 안 달리는 자루가 있다. 꽃이 안 달리는 자루의 잎은 거꾸로 선 바소꼴 모양이며 길이는 2~7cm이다. 나비는 6~12mm이고 밑이 좁아지면서 잎자루처럼 된다. 잎 표면에는 솜털이 약간 있고 뒷면은 회색빛을 띤 흰색이다. 꽃이 달리는 자루의 잎은 긴 타원형으로 길이는 3∼6cm, 나비 7∼15mm이다. 식물 식물(植物)은 분류학적으로 식물계에 속하는 생물을 말한다. 생물을 나누는 주요 분류의 하나로, 나무, 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넓게는 동물이 아닌 것을 모두 가리킨다. 보통 광합성을 하여 녹말 등의 광합성을 만드나, 일부 기생식물이랑 공생식물처럼, 엽록소를 잃고, 대신 직접 포식하거나, 기생, 공생 등으로 양분을 얻는 종도 있다. 원래 식물은 운동성이 거의 없으나, 파리지옥, 신경초, 무초처럼 민첩한 운동을 하는 식물도 몇 종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생물을 식물(일반적으로 움직이지 않는)과 동물(가끔씩 먹이를 찾으러 움직이는)로 구분하였다. 칼 폰 린네 시스템에서는 식물계와 동물계가 되었다. 균과 일부 조류(藻類) 그룹은 새로운 식물계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환경에서 식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대에서 식물이란 1)많은 세포로 이루어져있으며, 2)셀룰로오스가 풍부한 세포벽을 가지고 있으며, 3) 엽록소를 가지고 있어 광합성을 하며, 4)육상생활에서의 여러가지 면에서 적응된 생물을 말한다. 대부분의 조류(藻類)는 더 이상 식물계에 속하지 않는다. 조류는 광합성을 통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여러 그룹의 유기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각기 광합성을 띠지 않는 원종(原種)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일어난다. 조류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다세포 조류인 바닷말인데 토양 식물과 매우 닮았지만 녹조류, 홍조류, 갈조류로 분류된다. 이러한 각 조류 그룹은 다양하고도 미시적인 단세포 유기체를 포함하기도 한다. 균의 분류는 최근의 생물 역사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일었다. 이들은 분명히 동물이 아니었기에 린네의 원래 분류는 균을 식물계 안으로 넣었다. 나중에 미생물학이 발전하자 19세기 에른스트 헤켈은 새롭게 발견한 미생물을 분류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 동물계에 넣지 않고 대신 원생생물계라는 새로운 계를 만들었는데 균이 식물계에 들어가는 것이 적절한지 원생생물계로 다시 분류되는 것이 맞는지 논란이 일었다. 헤켈은 스스로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1969년에 로버트 휘태커는 균계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휘태커의 재분류는 균계와 식물계의 영양분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기반을 둔다. 광합성을 통하여 탄소를 얻음으로써 스스로 영양분을 얻는 다세포 광영양생물인 식물과는 달리 균은 일반적으로 주변 물질을 분해하거나 흡수하여 탄소를 얻는 종속영양생물(영양소를 다른 생물이 만든 유기물에 의존하는 생물)이거나 다세포 부생 생물이다. 녹조류와 종자식물, 선태식물, 양치식물로 정의되는 약 350,000여 종의 식물 종들이 현존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4년 기준으로 약 287,655 종의 속씨식물과 11,000여 종의 양치식물 그리고 8,000여 종의 녹조류가 보고되어 있다. 식물은 빛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를 이용하여 자기만의 먹이 분자를 만드는 광합성을 한다. 마치 신경계처럼 식물은 입사광의 세기와 질에 대한 체계 정보를 주고받는다. 한 잎에 화학 반응을 자극하는 입사광은 유관속초세포를 통하여 식물 전체에 연쇄적인 신호 반응을 일으킨다. 관다발식물은 물관부(목질부)와 체관부로 불리는 특별한 구조를 통하여 다른 부위끼리 영양분을 전달하는 식물과는 다르다. 또, 이들은 물과 무기물을 받아들이는 뿌리가 있다. 물관부는 물과 무기질을 뿌리로부터 식물 끝으로까지 옮겨 주며 체관부는 잎이 만든 당분과 영양분을 뿌리에 전달한다. 육지 식물과 조류가 행하는 광합성은 거의 모든 생태계에 궁극의 에너지 원천이자 유기 물질이다. 광합성은 모든 지구의 대기 성분을 빠르게 바꾸었으며 그 결과 산소가 21%를 차지한다. 동물과 다른 대부분의 생물은 산소에 의지하여 호흡을 한다. 그렇지 않은 생물들은 상대적으로 드문 저산소 환경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간다. 식물들은 대부분의 토양 생태계의 주된 생산물이며 이러한 생태계에서 먹이 사슬의 토대를 이룬다. 수많은 동물들은 산소와 먹이뿐 아니라 은신처를 위하여 식물에 의지한다. 토양 식물은 물의 순환과 다른 몇 가지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의 주된 요소이다. 일부 식물은 질소고정 박테리아와 공진화해왔는데 이는 식물을 질소의 순환의 중요한 일부로 만들어 놓았다. 식물의 뿌리는 토양 발달과 토양 침식 방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식물을 연구하면서 경제식물학이나 민족식물학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어떠한 사람들은 경제식물학이 현대의 경작 식물에 초점을 두는 반면 민족식물학이 토착인이 경작하고 사용하는 토착 식물에 초점을 둔다고 여긴다. 인간이 식물을 경작하는 일은 문명의 토대인 농업의 일부로 되어 있다. 식물 경작은 농업 경제학, 원예, 임업으로 나뉜다. 속씨식물 속씨식물(-植物, Angiosperm)은 식물군의 하나로, 대부분 씨방 속에 씨가 들어 있는 특징이 있다. 개화식물, 피자식물, 꽃식물, 꽃피는 식물이라고도 한다. 속씨식물 반대 개념으로 겉씨식물이 있다. 보통 속씨식물은 활엽수, 겉씨식물은 침엽수로 분류한다. 속씨식물의 기원과 계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일반적으로 속씨식물의 특징을 불완전하게 나타내는 무리들은 원시적인 속씨식물로 간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각 심피가 각각 독립된 씨방을 만드는 이생 심피 무리는 원시적인 형으로 본다. 또한, 속씨식물이면서 물관 대신 헛물관을 가지는 죽절초 등의 여러 속도 원시적인 속씨식물로 본다. 이 밖에, 꽃을 구성하는 수술이나 암술이 적은 수가 동심원 모양으로 배열된 것보다는 많은 수가 나선 모양으로 배열된 것이 더 원시적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줄기에서 잎으로 관다발이 들어갈 때 잎자루 밑 부분에 생기는 관다발의 절단부, 즉 엽극도 그 수가 다수인 경우로부터 5개, 3개를 거쳐 단지 1개인 경우(1엽극성) 등이 있어, 이것도 또한 일련의 진화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설도 있는데, 이 학설에 따르면 엽극이 다수인 종류는 원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각 형질의 진화 방향을 종합하여 보면, 많은 원시적인 형질을 가진 무리가 현존하는 식물의 기원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위의 원시적인 특징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목련목에 속하는 식물군을 특히 속씨식물의 기원이 되는 원시적인 식물 무리라고 여기고 있다. 속씨식물은 크게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로 나뉘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의 것에서는 떡잎이 2개 또는 그 이상인 반면, 뒤의 것에서는 단지 1개이다. 그러나 이 밖에도 여러 가지의 차이가 있으므로, 이 두 무리의 식물은 계통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쌍떡잎식물의 관다발은 동심원 모양으로 배열되어 보통 안쪽에 물관부, 바깥쪽에 체관부, 때로는 물관부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체관부가 배열되는 등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에 비해, 외떡잎식물의 관다발은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다. 또한, 쌍떡잎식물의 잎맥은 그물맥인 반면, 대부분의 외떡잎식물의 잎맥은 나란히맥이다. 한편, 꽃의 구조는 두 무리 모두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외떡잎식물의 꽃덮이조각, 암술머리나 씨방실, 태자리 등은 3개 또는 그 배수(보통 6개)인 것이 많다. 그러나 쌍떡잎식물에서는 이들이 4나 4의 배수, 또는 5나 5의 배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은 여러 가지 진화 단계를 볼 수 있는데, 2가지 중에서 어느 한 편을 다른 한 편의 선조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쌍떡잎식물쪽에 원시적인 종류가 많은 데 비해, 외떡잎식물에서는 난초과와 같이 매우 진화된 특수한 무리를 볼 수 있다. 속씨식물 중에서 떡잎의 수가 두 개인 것을 말하며 외떡잎식물에 상대되는 분류군이다. 떡잎의 수를 식물의 중요한 분류 형질로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프랑스의 로베르이며, 이후 쥐시외가 이것을 기초로 무떡잎식물(은화식물)·외떡잎식물·쌍떡잎식물의 3군으로 분류했다. 이것이 자연분류의 출발점이 되었다. 쌍떡잎식물의 떡잎은 2개이나 그 중에는 떡잎이 1개 또는 3개 이상의 종류도 있다. 쌍떡잎식물의 생활형은 다양하며, 목본·초본·한해살이풀·여러해살이풀 등 여러 가지이다. 잎은 잎자루와 잎새로 분화하고, 턱잎이 있는 것, 기부가 잎집으로 되는 것 등이 있다. 잎맥은 1차맥으로 깃모양맥·손바닥 모양맥·평행맥 등 을 볼 수 있고 2차맥은 그물맥이다. 줄기는 대부분 진정중심주이며, 물관부와 체관부 사이에는 관다발형 성층이 있고 2차비대생장을 한다. 이 결과 다량으로 형성된 2차물관부는 목질부가 된다. 꽃은 꽃받침조각·꽃잎·수술·암술 등의 화엽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5수성인데 4수성이나 3수성인 것도 있다. 화엽은 원시적인 것에서는 떨어져 나고, 진화한 것에서는 붙어 나는 경향을 보인다. 쌍떡잎식물은 크게 통꽃류와 갈래꽃류로 분류할 수 있다. 꽃을 진화상에서 보면 방사대칭에서 좌우대칭으로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자가 발아하여 생긴 떡잎에는 땅 위로 나오는 것과 땅 속에 남는 것이 있다. 어린눈은 떡잎의 사이에서 자라며 대체로 어린뿌리는 발달하여 원뿌리가 된다. 속씨식물 중 떡잎이 1개인 식물로 단자엽식물이라고도 한다. 상대되는 분류군인 쌍떡잎식물에 비해서 떡잎의 수 외에 꽃부분이 3의 수로 되는 것이 많으며, 관다발이 흩어져 있고 형성층이 없다. 따라서 진정한 뜻의 2차 생장을 하지 않는다. 잎은 어긋나고 가늘고 길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없고 잎맥은 나란히맥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특징을 취해도 절대적인 구별이 되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자연적인 구별이라 한다. 외떡잎식물의 미나리아재비류나 벗풀류의 꽃들은 배(胚)의 구조는 다르나 똑같이 이생심피이고 수술의 수가 많으므로 이 부근에서 2군이 분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외떡잎식물은 세계에 약 2,000여 속 4만 종이 분포되어 있으나 쌍떡잎식물보다는 적다. 현존하는 속씨식물군은 8개 식물군이 있다. 이들 8개 식물군의 정확한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암보렐라목와 수련목 그리고 아우스트로바일레야목의 3개 식물군은 같은 선조의 속씨식물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기저속씨식물군은 바로 이들 3개 식물군을 가리킨다. 나머지 식물군은 메스속씨식물군(Mesangiospermae)을 형성한다. 일부는 목련군이 먼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분석하고, 다른 일부는 외떡잎식물군으로 보고 있다. 붕어마름속은 외떡잎식물군보다는 진정쌍떡잎식물군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속씨식물의 꽃은 암술과 수술이 모두 있는 '양성화'이지만, 어떤 종류의 꽃은 암술과 수술의 어느 한 쪽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꽃을 '단성화'라고 한다. 이와 같이, 단성화를 갖는 식물은 다시 수꽃만을 갖는 수그루와 암꽃만을 갖는 암그루로 갈라지는 것과, 한 그루에 수꽃과 암꽃이 모두 있는 것이 있는데, 이 때 앞의 경우를 '암수 딴그루', 뒤의 경우를 '암수 한그루'라고 한다. 양성화의 경우도 암수 한그루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유의해야만 한다. 한편, 양성화에서 1개의 꽃 속에 수술과 암술이 생기는 기작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단성화에 대하여는 몇 가지 실험이 행해졌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암수 한그루로서 단성화를 갖는 오이에서 원래 수꽃이 될 예정인 꽃봉오리를 어린 시기에 잘라서 식물 호르몬인 지베렐린을 함유하는 배지(培地)에 키우게 되면 꽃봉오리는 예정대로 수꽃이 된다. 그러나 지베렐린 대신에 인돌아세트산이 들어 있는 배지에서 키우면 수꽃이 될 꽃봉오리는 일찍부터 생장을 중지하고, 대신에 암꽃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지베렐린이 수꽃의 형성을 유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꽃 속의 구성 요소를 수꽃이나 암꽃으로 발생시키는 열쇠는 지베렐린 또는 인돌아세트산 등 식물 호르몬 사이의 균형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양성화는 1개의 꽃 속에 수술과 암술이 있기 때문에 흔히 수분하여 열매를 맺는 데 편리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그 원인은 식물계에 자가 수분(제꽃가루받이)을 방해하는 장치가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그루 사이의 유전자 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종자식물 진화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방해 장치의 하나로써, 양성화의 수술과 암술의 성숙기가 어긋나 있으면 단성화와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 있다. 수술이 먼저 성숙하는 것으로는 바위취·봉선화·국화 등이 있고, 암술이 먼저 성숙하는 것으로는 질경이·사프란·평지 등이 있다. 이 밖에 암술·수술의 위치로 인하여 자가 수분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붓꽃과·난초과의 식물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속씨식물에서 자가 수분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는 '자아 불화합 현상'이다. 이것은 수분을 하여도 수정이 일어나지 않는 현상으로, 유전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장치는 복잡하며 몇 가지 형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불화합성에 관계하는 대립 유전자로는 S1, S2, S3, …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하여 수분을 한 후 암술이 가진 유전자형과 꽃가루가 가진 유전자형 사이에 공통의 유전자가 있으면 암술대 안으로 뻗는 꽃가루관의 신장이 중도에서 정지되어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꽃가루(화분)는 수술의 꽃밥 속에서 만들어진다. 수술의 꽃밥 속에는 많은 꽃가루 모세포(2n)가 있는데, 이것들이 각각 감수 분열을 하여 4개의 꽃가루(n)를 만든다. 이와 같이 감수 분열에서 생긴 4개의 세포, 즉 소포자는 점차 종류에 따라 고유한 모양으로 변해가는데, 동시에 재래의 셀룰로스성(性) 세포벽 위에 종류마다 특유한 모양의 튼튼한 벽을 형성해간다. 이 때 안쪽의 벽을 내벽, 바깥쪽 벽을 외벽(외막)이라고 한다. 이 중 특히 외벽에는 스포로폴레닌이라고 하는 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양치식물의 포자 세포벽에서도 볼 수 있는 극히 안정된 물질로, 현재까지 이것을 분해하는 효소의 존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오랜 옛날의 식물 꽃가루가 화석으로 잘 보존되어 과거의 식물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물질로 인해 꽃가루의 세포벽이 안정된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편, 꽃가루는 얼마 지나면 이 두꺼운 벽을 덮어쓴 채로 세포 분열을 한다. 보통 발생 때의 세포 분열에서는 서로 비슷한 세포가 만들어지는데, 여기에서 행해지는 분열은 서로 닮지 않은 세포를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즉, 큰 세포와 작은 세포가 생기는데, 이 때 작은 세포는 큰 세포 속에 떠 있는 상태가 된다. 이와 같은 큰 세포와 작은 세포 사이에는 크고 작다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작은 세포는 그 세포질이 거의 없이 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핵을 물들이는 카민이라는 색소를 사용하면 큰 세포의 핵은 보통 둥근 모양으로 연하게 염색되는 데 비해, 작은 세포의 핵은 다소 가늘고 긴 모양으로 진하게 물든다. 한편, 패스트 그린 FCF와 에오신이라는 색소는 핵 속에 있는 특별한 단백질을 물들일 때 쓰이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큰 세포의 핵은 녹색으로, 작은 세포의 핵은 붉게 물들어 2개 세포의 핵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감수 분열로 생긴 세포는 전체의 영양을 담당하는 큰 세포와 생식에 관계하는 작은 세포로 분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윽고 꽃밥이 성숙하면 성숙된 꽃가루는 꽃밥에서 떨어져 나와 흔히 우리 눈에 띄게 된다. 이 꽃가루 속에는 큰 세포인 꽃가루관핵(영양 세포)과 그 속에 떠 있는 작은 세포, 즉 생식핵(생식세포)이 자리 잡고 있다. 꽃가루가 방출될 때는, 대부분 이러한 꽃가루관핵과 생식핵을 가진 2핵성 꽃가루인 것이 많으나, 식물에 따라서는 생식핵이 다시 한번 더 분열하여 2개의 정핵이 되어 3핵성 꽃가루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속씨식물 중에도 벼과나 국화과처럼 고등한 종류에서는 3핵성 꽃가루가 발달하여 있다. 배낭은 암술의 씨방 안에 있는 밑씨 안에서 만들어진다. 즉, 밑씨 속에는 1개의 배낭 모세포(2n)가 들어 있는데, 이것은 감수 분열을 하여 4개의 딸세포(n)를 형성한다, 그 중 3대는 소실되고 1개만이 배낭 세포(n)가 된다. 개화한 꽃의 암술에서 씨방을 따 그 속의 밑씨를 잘라보면 중앙에 크고 가느다란 긴 세포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배낭이다. 배낭은 그 중앙에 2개의 핵과 양끝에 3개씩의 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구조상으로는 꽃가루와 비슷하다. 꽃가루가 수배우체이면 배낭은 암배우체로서, 밑씨 속 배낭 모세포의 감수 분열에 의해 생기는 대포자(큰홀씨)에 해당된다. 밑씨의 본체인 주심은 주피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 때 꼭대기 부분만은 싸여있지 않고 남아 주공(수정할 때 꽃가루를 받는 부분)이 된다. 포자는 주심의 주공 쪽에 세로로 4개가 줄지어 생기는데, 그 중 3개는 퇴화하고 발생을 시작하는 것은 합점 쪽의 1개뿐이다. 이 1개의 포자가 배낭 세포로 이것은 다시 3회의 핵분열을 하여 결국 8개의 핵이 된다. 이와 같이 형성된 배낭핵 중 1개는 난세포로 성숙하여 주공 쪽에 자리잡으며, 나머지는 조세포 2개, 반족세포 3개, 극핵 2개로 된다. 이 때 조세포는 난세포의 양 옆에, 반족 세포는 난세포의 반대쪽에, 극핵은 중앙에 위치한다. 이러한 배낭의 조직 중, 주공 쪽 2개의 조세포와 1개의 난세포를 묶어서 '난장치'라고 한다. 이 두 종류의 세포는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① 조세포의 세포벽은 경우에 따라서 주공 쪽에 손바닥 모양으로 두껍게 부푼 선형(線型) 장치를 가진다는 것, ② 조세포의 핵도 주공 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 ③ 난세포는 중앙에 커다란 액포를 가지며, 핵은 배낭의 중심부 가까이에 위치한다는 것 등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선형 장치는 조세포가 주위로부터 영양을 흡수하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고 있다. 맘수 분열의 제1분열에서는 세포막이 확실하게 구별되지만 제2분열에서는 그렇지 않아, 결국 2개의 포자핵이 1개의 세포에 포함된 채로 발생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때에 생긴 2개의 세포중 주공 쪽의 1개는 퇴화해 버리고 만다. 이것을 파형이라 하며, 발생이 포자 2개를 가진 세포로부터 시작되므로 2포자형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경향이 더욱 진행되어 감수 분열을 하는 ,동안 세포막이 전혀 구분되지 않아 4개의 포자 핵을 가진 세포에서 발생하게 되는 경우를 4포자형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연복초형에서는 정상형과 비슷한 발생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땅빈대형에서는 4개의 핵이 각각 2회씩 분열하여 1개의 핵에서 4개의 핵이 만들어지며, 이것은 다시 3개와 1개로 분리되어 중앙에 4개의 극핵이 모이게 된다. 이 때 남은 3개씩의 4무리 중 난장치로서 기능을 가지는 것은 1무리 뿐이며, 나머지 3무리는 반족 세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밖에 더욱 특이하게 나타나는 것으로는 패모속(지)이나 프룬바게라의 배낭 세포가 있다. 즉, 4개의 포자핵은 주공 쪽에 1개, 합점 쪽에 3개로 배열된 후, 다음 분열로 주공 쪽의 핵은 보통 2개가 되지만 합점 쪽의 3핵은 동시에 분열을 시작하여 한 묶음이 된 3n의 커다란 핵 2개가 생긴다. 즉, 처음에 핵상 n의 4핵기였던 것이 이러한 분열의 결과 핵상 n인 핵 2개, 핵상 3n인 핵 2개를 포함한 2차의 4핵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분열을 특히 '반바치오니 현상'이라고 한다. 한편, 이 중에서 프룬바게라형은 이 4핵 중 1개씩을 양끝에 남기고 다른 1핵이 중앙에 다가와서 극핵이 되지만, 패모속 형에서는 한 번 더 분열하여 8개의 핵이 된 후에 정상형과 비슷한 핵 배열을 나타내게 된다. 외떡잎식물 외떡잎식물(―植物) 또는 단자엽식물(單子葉植物)은 떡잎이 한 장 나는 속씨식물을 말한다. 상대되는 분류군으로 쌍떡잎식물이 있다. APG II 분류 체계에서는 외떡잎식물군("monocots")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식물군으로 인정했지만, 분류학적으로 특정한 분류에 할당하지는 않았다. 외떡잎식물은 농업에서 생산되는 생물 자원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식물군에는 약 60,000여 종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쌍떡잎식물보다는 적다. 이 식물군의 종의 수에서 가장 큰 과(속씨식물 전체에서도)는 난초과(Orchidaceae)로 약 2만여 종이 있다. 쌍떡잎식물에 비해서 떡잎의 수 외에 꽃부분이 3의 수로 되는 것이 많으며, 관다발이 흩어져 있고 형성층이 없다. 따라서 진정한 뜻의 2차 생장을 하지 않는다. 잎은 어긋나고 가늘고 길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없고 잎맥은 나란히맥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특징을 취해도 절대적인 구별이 되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자연적인 구별이라 한다. 외떡잎식물의 미나리아재비류나 벗풀류의 꽃들은 배(胚)의 구조는 다르나 똑같이 이생심피이고 수술의 수가 많으므로 이 부근에서 2군이 분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환경공학 환경공학(環境工學, )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거주를 위해 건강한 수(水)자원, 공기, 땅을 공급하며, 오염된 지역을 정화하는 등, 과학과 공학의 원리들을 통합하여 주변 자연환경을 개선하는 학문이다. 환경공학은 또한 인간과 동물 활동으로부터 발생하는 폐기물 관리, 에너지 자원의 보호 및 공급 자산 관리에 관한 이슈들을 다루는 응용과학 기술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게다가, 환경공학은 수인성 질병의 해결과 같은 공공 건강 분야의 타당한 해결책을 연구하고, 도시와 촌락, 여가 공간의 적절한 위생 관리를 위한 법들을 적용하는 일들도 포함한다. 환경공학의 범주에는 수질 오염, 대기 오염관리, 재활용, 폐기물 처리, 방사능 관리, 산업 위생, 환경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공공 건강 이슈들과 환경 법에 관한 지식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제안된 건설 계획으로 부터 예상되는 환경적 영향에 관한 연구도 포함한다. 환경공학기술자들은 환경에 기술적 발전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이것을 위하여 폐기물에 의한 피해를 평가하기 위하여 유해 폐기물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그것들의 처리와 방지에 대한 자문을 수행하고,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환경 기술 공학자들은 폐수 처리 기술과 산업 폐수 관리법을 계획하고 개발한다. 또한 산성비, 지구 온난화, 기후변화, 오존층 파괴, 운송수단(automobile) 배기가스, 산업 요소 등으로 인한 수질 오염, 대기오염 등 국지적, 혹은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환경 문제들을 다룬다. 많은 대학들에서, 환경 공학은 토목공학과 혹은 화학공학과의 환경 학부에 포함되어있다. 환경 '도시' 공학자들은, 수문학, 수자원 관리, 생물적 환경 정화, 수자원 관리 시설 설계 등을 연구하고, 반면에, 환경'화학' 공학자들은 환경화학, 심화 대기, 수질 관리 기술과 분해기술을 연구한다. 추가적으로, 공학자들은 법률을 공부하여 (법학 박사) 그들의 기술적 전문성을 환경법의 적용에 활용하기도 한다. 삼청계획 삼청계획(三淸計劃)은 전두환 정권이 1980년부터 실시한 계획으로,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뉘었다. 1단계 권력형 부정축재자 척결, 2단계 정치비리자 척결, 3단계 고급공무원 숙청, 4단계 3급이하 공직자 숙청이다. 불량배를 소탕하고 사회악을 뿌리뽑는다는 명분으로 진행된 5단계 계획은 야당 인사들과 무고한 양민들에게 조직적으로 가해진 공권력의 폭력이었다. 마지막 5단계는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각을 조종·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기관을 뜻한다. 대상자에는 학생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체 피검자의 3분의 1 이상이 무고한 일반인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설치 목적과는 달리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이 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구 전과자 및 폭력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한 뒤 진행됐다. 첫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으나, 파출소, 경찰서들 사이의 경쟁이 붙어 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됐다. 군·경 합동으로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들의 수는 6만명을 넘었다. 이후 검거된 사람들은 A, B, C, D의 네 등급으로 나누는 "심사" 과정을 거쳤으나, 심사 과정에서 검거된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될 곳은 없었으며, 다음과 같이 분류, 조치되었다. 이중 B, C급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의 주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류상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일 뿐이며 실제로는 불시검문시 신분증을 미지참했다는 이유만으로 B급으로 분류되어 삼청교육대로 검거되기도 했다. 전두환을 비방한 자는 가차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국방부가 1982년에 펴낸 <계엄사>에 따르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대학 졸업자 가 1.6%인 반면 초등학교 졸업자는 48.6%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5차례 이상의 전과가 있는 사람은 8.2%인데 반해, 초범은 22.3%이며 전과가 없는 사람은 35.9%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에서 인계된 39,786명이 군에 인계될 무렵에는 39,742명으로, 44명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삼청교육대는 본래 4주간의 순화교육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입소 초기에는 장교들과 장군들이 "4주 후에 보내준다", "훈련 잘 받으면 일찍 간다" 등의 말로 안심시키며, 동시에 '시범 케이스'로 무작위로 골라낸 훈련생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약속한 4주가 지나도 훈련생들은 풀려가지 않았다. 목봉 체조는 덤이었다. B급 10,016명은 이후 20여개 부대에 분산 수용되어 "근로봉사", 즉 노역에 동원됐다. 이 근로봉사는 훈련생들이 자원한 것으로 돼 있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강요에 자원서를 강제로 쓰게 된 것이었다. 1981년 1월 24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그중 7478명은 1~5년 사이의 "보호감호처분"을 받아 계속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1982년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질병 36명, 구타 10명, 총기사고 3명, 안전사고 2명, 자살 2명, 미상 1명이다. 사병 가운데서는 폐염증, 폐렴 9명, 급성심부전증 7명, 기도폐쇄 4명, 복막염 3명, 간경화증 3명, 뇌출혈 2명, 그리고 뇌암, 궤양성대장염, 폐기흉, 소장폐쇄, 폐결핵, 심내막염 및 전색증, 만성심부전증, 장관내출혈이 각각 1명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피해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추가건수에 따르면, 군부대내 사망 54명, 후유증 사망 397명, 부상 및 상해 2786명의 추가 피해자가 있었다. 노태우정부는 이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기각됐다. 2003년 12월 29일 <삼청교육피해자의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이 16대 국회에서 재적의원 206명 중, 반대 2표, 기권 11표, 찬성 193표로 통과됐다. 2004년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관보에 실리면서 공식적으로 제정됐다. 깍두기 깍두기는 한국 요리에서 무로 담근 김치의 일종이다. 김치를 담글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재료가 다 들어가지만, 무가 배추를 대신한다. 깍두기는 한국인에게 배추김치와 더불어 인기있는 반찬이다. 1940년에 발간된 《조선요리학》에는 깍두기가 정조의 딸 숙선옹주가 개발한 음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어원은 각독기(독을 제거해준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깍두기를 담그려면, 먼저 무를 작은 장방형으로 깍둑썰기하고, 소금과 고춧가루, 파, 생강 등으로 간을 한다. 무와 다른 재료가 서로 섞인 후에, 전통적으로 장독에 보관한다.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서 약 2주간 놓고 발효를 시킨다. 깍두기는 차갑게 해서 먹고, 일반적으로 무가 너무 물러기 전에 아삭아삭할 때 먹는다. 깍두기는 다른 종류의 김치와 함께 한국에서 인기가 있으며, 발효로 얻어지는 김치가 가지는 다른 영양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감동젓깍두기는 무를 골패 모양으로 썰어서 자하젓 또는 곤쟁이젓이라고 불리는 새우젓과 배, 낙지, 오이, 파, 잣, 밤, 전복 등과 버무려 칼칼한 맛이 나게 한다. 그 밖에 배추 속대와 미나리, 실파, 표고버섯, 석이 그리고 굴, 새우, 해삼 등을 넣기도 한다. 본래 감동젓깍두기는 서울음식으로 귀하게 여겨 선물로 주고 받기도 하였다. 해물이 들어가 쉽게 상하기 때문에 담근 후 1주일 후에는 먹어야 한다. 파김치 파김치는 파로 담근 김치이다. 주로 쪽파를 쓴다. 갓김치 갓김치는 갓의 잎과 줄기로 담근 김치이다. 여수 돌산 갓김치에서 분리한 유산균인 베이셀라 키바리아("") '위킴(WiKim)28' 균이 아토피 피부염 증상을 개선한다고 알려져 있다. 열무김치 열무김치는 열무를 이용해 담그는 김치로 무와 함께 무청도 함께 쓰이는 김치이다. 열무를 소금에 절였다가 헹구어 낸 뒤에 밀가루나 찹쌀가루로 풀죽을 쑤어 고춧가루 마늘 생강 양파 홍고추 풋고추 등과 같이 살짜기 버무려 맛을 내는 김치이다. 절대로 고추장을 넣지 않는다. 주로 배추가 잘 나지 않는 여름철에 많이 이용된다. 동치미 동치미()는 한국 요리에서 무를 소금물에 담가 익힌 무김치 또는 물김치의 일종으로, 무, 배추, 파, 삭힌 고추, 생강, 배와 국물로 구성된다. 동치미는 이름처럼 전통적으로 겨울에 담궈서 먹는다. 무를 소금물에 담가 익힌 무김치의 한 가지 동치미의 동은 겨울(winter)을 뜻하며 치미는 김치(kimchi)를 의미하는 우리말 고어에서 유래되었다. 동치미도 다른 김치처럼 발효를 시키지만, 2~3일간의 숙성으로 다른 김치에 비해 그 기간이 비교적 짧다. 한국인들은 김장철 바로 직전, 즉 늦은 가을에 동치미를 담근다.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함경도, 평안도의 동치미가 유명하다. 시원하고, 깔끔한 국물 덕분에, 동치미 국물은 동치미 국수나 냉면을 만드는 데 국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는 떡을 먹거나, 찐 고구마를 먹을 때 같이 먹기도 한다. 나박김치 나박김치는 무를 얇고 네모지게 썰어 고춧가루를 넣어 절였다가 파, 마늘, 미나리, 실고추, 사과와 배 등을 넣어서 국물을 부어 만드는 물김치이다. 잡채 잡채(雜菜, )는 고기,버섯, 채소 등의 재료를 볶은 것에 삶은 당면을 넣고 버무린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당면을 끓는 물에 삶고 물기를 뺀 뒤, 참기름에 가늘게 채를 친 쇠고기와 당근, 시금치, 버섯, 양파 등 다양한 채소와 함께 볶은 후 간장으로 풍미를 낸 한국 음식을 말한다. 잡채는 흔히 참깨를 위에 뿌려 장식한다. 잡채를 주요리로 주문할 때도 있지만, 한국 요리에서 주로 반찬처럼 부요리로 먹는다. 또한 밥에 덮밥처럼 먹는 경우는 잡채밥이라 부르며, 이 때 짜장소스를 곁들이기도 한다. 잡채는 17세기 조선시대의 광해군 재위 시절, 궁중연회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이충이라는 사람이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궁중에 바치곤 했다는데, 만들어오는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임금이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임금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음식이 바로 잡채다. 잡채는 여러 채소를 섞은 음식이란 뜻이다. 당면이 들어간 요즘 형태의 잡채는 1919년 황해도 사리원에 당면공장이 처음 생기면서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이후부터라고 한다. 아이누 아이누( , )는 오늘날의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의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러시아의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에 정착해 살던 선주민이다. 일본의 주를 이루는 야마토 민족과는 다른 북방계의 민족으로, 역사적으로 개별적인 부족 국가 형태를 지녀왔으며, 독자적 고립어인 아이누어를 사용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류큐 민족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 이후 일본민족으로 편입되었다. 일본 내 아이누족은 대부분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어를 쓰지만, 홋카이도에 살고 있는 고령자들 중 일부는 여전히 아이누어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된 일본 내의 아이누족은 약 2만 5천 명이다. 러시아의 아이누족 역시 러시아로 동화되어 대부분 러시아어를 말한다. 종교로는 샤머니즘이 대다수이고, 러시아에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아이누족도 있다. '아이누'는 신성한 존재인 '카무이'와 대비되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홋카이도 지방의 아이누어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어로는 '에미시', '에조(蝦夷)'로 불리는데, 이는 사할린 아이누의 '인간'을 뜻하는 '엔츄' 또는 '엔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이누'란 단어가 일본 내에서 차별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우타리(Утaри: 친척, 동포라는 뜻)라고 부르는 아이누 사람들도 일부 있다. 아이누족의 기원은 조몬 시대 이후의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縄文人)으로 여겨진다. 아이누의 전설인 '유카 우포포'에서도 "아이누족은 태양의 아이들이 오기 10만 년 전에 이 곳에 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약 1만 년 전, 조몬인들은 일본 열도에 거주하였다. 약 2,500년 전, 야요이인들이 아시아 본토의 중국 대륙 및 한반도로부터 도래하자 두 개의 문화는 열도 내에서 섞여 일본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나머지 섞이지 않은 아이누인들은 점차적으로 북쪽의 홋카이도와 남쪽의 류큐(오키나와)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들의 인류학적 정체성을 지켰다. 아이누족은 서력 기원 초기에도 사냥 못지않게 농사에도 주력하였다. 아이누족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머리카락이 짙어, 예전에는 이들이 카프카스 인(Caucasian)의 후손일 수 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최근의 DNA 검사로는 그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부정되고 있다. 검사 결과 아이누인은 대부분 하플로그룹 D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외의 Y-하플로그룹 D가 흔한 지방은 티베트와 인도의 안다만 제도 뿐이다. 약 1/8의 아이누 남자들은 하플로그룹 C3 (Y-DNA)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아이누족의 소수가 하플로그룹 C3을 갖고 있는 것은 니브흐족(Nivkhs)으로부터 단일방향성의 유전적 영향을 받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추측하는데, 실제로 아이누족은 이들과 지속적인 문화 교류를 가져왔다. 타나카 외의 의견(2004년)에 따르면, 이들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 혈통은 주로 하플로그룹 Y (21.6%) 와 하플로그룹 M7a (15.7 %) 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에 전해지는 아이누 문화는 홋카이도에서 13세기에 사쓰몬 문화가 소멸한 이후 출현하였다. 이 문화는 이후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에 걸쳐 번성하였으며, 오늘날의 아이누 민족의 문화적 요소들은 대부분 이 문화적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일본 내의 아이누족은 약 2만 5천 명이다. 그러나 혈통적 또는 문화적으로 동화된 경우까지 합치면 비공식적으로는 20만 명까지 추산되기도 한다. 러시아에는 109명이 살고 있다고 확인되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약 1,000명 정도가 살고 있을거라 추정된다. 현대에 들어 아이누의 민족적 정체성과 언어를 부흥시키는 운동이 행하여지기도 하나, 2007년 기준 아이누어의 모어 화자 수가 10명까지 떨어진 것으로 조사되는 등 그 정체성이 거의 소멸에 임박해 있다고 분석된다. 아이누인들은 애초에 일본과 러시아 두 열강국의 세력이 밀려오기 이전 오랫동안 전통작명법에 의한 이름을 썼지만, 현재는 거의 일본 이름이나 러시아 이름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정식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 울음소리에서 아이아이(으앙으앙 또는 응애응애), 또는 티넵(젖은 녀석), 폰숀(작은 응가), 숀타쿠(응가 덩어리) 같이 일부러 더러운 뜻의 임시이름을 지어 부른다. 유아사망율이 높았던 시대에 병을 가져다 주는 역신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믿음에서 역귀를 쫓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레사쿠(이름없음)같이 아예 사람이 없는 것으로 쳐서 역귀를 쫓기도 한다. 아기가 무사히 영아기를 벗어나 어느 정도 자라고 아이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 정식 이름을 붙여준다. 하쿠막쿠르(덜렁이) 쿠우카르쿠르(활바치), 쿠우친코로(활과 가죽말림대 틀을 가진 이), 무이사시마츠(쓰는 여자), 카무이마시(곰 고기를 굽는 이)등이 있다. 다만 병치레가 잦거나 외모가 반듯한 아이는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역귀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영아기때와 같이 천한 이름을 계속 쓴다. 투로시노(때쟁이), 에카시오톤푸이(할아버지 똥꼬) 같은 예가 있다.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불러선 안되었으며,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시 쓰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갈 불운이 자신에게 옮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새롭고 독창적인 이름을 계속 짓도록 신경을 썼다. 또 큰 재앙을 맞거나, 비슷한 이름의 다른 사람이 죽거나 하는 경우에는 이름이 재앙을 불렀다 또는 이름에 재앙이 옮겨붙었다 같은 생각에서 바로바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때문에 아이누족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평범한 이름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홋카이도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령으로 편입되자, 호적법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뜻을 일본어로 옮기거나, 이름을 한자로 취음하여 일본식 성명을 새로 만들게 되었고, 이름은 메이지 중기까지는 전통 아이누 이름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아이누 이름에 익숙지 않은 일본인들은 이름의 성별을 어감으로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록할 때, 남자는 가타카나, 여자는 히라가나로 표기하여 적는 방법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류큐 류큐(, )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불새 (만화) 《불새》()는, 일본의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가 창작한 만화이다.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가로써 활동하던 초기부터 만년까지 그렸던 작품으로 데즈카 오사무 평생의 역작(力作)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작품이다. 시간 배경은 고대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배경도 지구뿐 아니라 우주에 걸치며, 생명의 본질과 인간의 업에 대한 주제를 데즈카 오사무 자신의 독자적 사상을 밑바탕으로 깔고서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냈다. 이야기는 「불새」라 불리는 새가 등장해 그 불새의 피를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주인공들은 그 불새와 관련되어 고뇌하고, 괴로워하고, 싸우고, 잔혹한 운명 앞에 농락당하고 만다. 《밀림의 왕자 레오》의 연재가 종료된 후에 《만화 클럽》에 연재한 〈여명편〉이 최초의 작품이지만, 잡지가 휴간되면서 그가 스스로 창간한 잡지 《COM》에 〈여명편〉을 다시 구상하여 연재하였다. 《COM》 이후의 연재작품은 과거・미래・과거・미래를 교차하며 묘사되어, 데즈카 본인이 사망하는 순간 작품이 완결되는 것으로 구상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데즈카 오사무가 사망하면서 〈태양편〉으로 종결되었다. 잡지 《소녀 클럽》에 연재된 〈이집트편〉, 〈그리스편〉, 〈로마편〉도 있으나 다른 시리즈와 연관없이 3편만으로 완결된다. 일본의 많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여러 차례 아니메, 영화, 라디오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본작은 이후의 난세편의 원형이 되는 얘기지만, 『COM』이 다시 휴간되면서 연재가 중단되었다. 주인공 마키지는 후의 만화소년판 벤타(弁太)의 원형이지만 체구가 서로 다르다. 또 오부도 남매가 아니라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원숭이와 개의 에피소드도 만화소년판에서 유용되고 있지만 두 마리의 이름이 바뀌어, 덴구에게 길러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밖에 데즈카 이외의 작가에 의해 집필된 작품으로 아니메 영화 「불새 2772」를 만화화한 미쿠리야 사토미(御厨さと美)의 만화(첫 연재:『만화소년』(1980년 2월호 – 4월호)가 있다. 데즈카가 위암 중의 병원 침대에서 다룬 작품 《무대극 불새》가 존재하는데, 본작은 2001년을 시대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앞에서 언급된 대지편, 재생편, 현대편 등의 내용과는 다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무대극이 공개된 다음날인 1989년 2월 8일, 데즈카 오사무는 사망하였다. 이어폰 이어폰()은 귀에 꽂아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개인적으로 음악 등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전자제품이다. 최근에는 마이크가 같이 달려 있거나 볼륨조절을 비롯한 간단한 조작을 할 수 있는 버튼이 달려 있는 등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다. 유의어로 헤드폰(Headphones)이 있으며 이는 두 귀를 덮는 소형 스피커를 가리킨다. 헤드폰은 전화 수신기의 수화기에서 기원하였으며 증폭기가 개발되기 전까지 전기적 소리 신호를 청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최초의 성공적인 헤드폰 세트는 1910년 Nathaniel Baldwin이 개발하였으며 그는 자신의 부엌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서 미국 해군에 판매하였다. 원래 이어폰이라는 용어는 소니가 워크맨을 발매하게 되면서 소니의 마케팅 상표였으나 관련 특허권이 풀리면서 여러 음향 회사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출시하여 대중화되었다. 주로 검은색에 동그란 모양으로 대중화되었으나 애플 아이팟의 영향으로 흰색 그리고 귀에 걸수있는 이어폰이 개발되었다. 또한 2016년에는 선이 없는 무선 이어폰인 에어팟을 개발해 출시하기도 했다. 부분을 걸치듯이 착용하는 이어폰으로, 사람마다 귀 모양이 달라 공간이 생겨 차음성이 부족해지는 문제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급의 커널형 이어폰보다 공간감이 좋은 편이다. 애플 이어버드의 경우 귀모양에 맞춰 디자인이 되어 차음성과 공간감이 좋으며 다른 회사들도 그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귀에 삽입하는 이어폰으로, 여러가지 크기의 팁을 교체할 수 있어 일반적으로 오픈형보다 착용감이 더 낫다. 오픈형 이어폰에 비해 차음성이 좋아서 시끄러운 곳에서 듣기에 적합하지만, 길거리에서 끼고 다닐 경우 외부 소리가 잘 안 들려서 사고의 위험이 있다. 안경처럼 귀에 거는 이어폰이다. 차음성이 영 좋지 않으며 안경이랑 걸리는 방식이 같기 때문에 안경 착용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이어폰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이명이 들리거나 난청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는 등 귀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최근 이어폰을 끼고 다니는 젊은층이 많아져 주로 노인들에게나 생기던 난청이 젊은층 사이에서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이어폰을 끼면서 밖에 돌아다니면 음악 및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음에 집중한 나머지 자동차 경적소리를 듣지 못하는 등 교통사고와 같은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경향신문 《경향신문》(京鄕新聞)은 대한민국에서 발매하는 일간 조간 신문이다. '경향'이라는 말은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 즉 "도시(교황청)와 전 세계에게"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표어에서 비롯되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3에 소재해 있으며, 현재 강성 좌파 언론 중 열독률 1위로 좌파성향의 대표적인 언론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2009년 한국기자협회의 언론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공정성 부분에서 경향신문이 1위를 차지했으며, 신뢰도와 영향력으로는 각각 2위, 6위로 꼽혔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조선정판사 사옥과 그 시설 일체를 미군정이 압수하여 가톨릭에 넘겨줌으로써 1946년 10월 경성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했다. 초기에는 가톨릭 계열 언론사로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도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김구의 남북협상론은 비현실이라 주장했다. 반면, 미소공위와 좌우합작에 많은 기대를 걸기도 했다. 또한 미군정에 협조적이면서도 옳지 않는 일에는 날카롭게 비판도 하고 책임을 물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친 민국당, 친민주당적 노선을 견지했다. 제1공화국 기간 내내 국무총리와 부통령을 지낸 장면(張勉)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때문에 1958년 이승만과 자유당으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기도 했다.(경향신문 필화 사건 참조.) 1959년 이후 자유당 독재체제가 굳어지자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했으며, 장면 부통령 피습사건 이후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장면의 인척인 한창우가 사주로 취임하였고, 경향신문은 제2공화국 기간 내내 장면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였다. 5·16 쿠데타 이후 민간에게 불하되면서 종교 성향을 띠지 않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비판적 논조가 거슬린다며, 경향신문 주요 인사 교체, 주가와 판권매각으로 정수장학회와 여러 대기업의 소유가 되었으며, 당시 언론통폐합으로 합쳐진 MBC와 함께 친군부 성향 언론사로 변질되었다. 문화방송 계열사이던 1980년만 해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유럽의 좌경화로 표현하는 등 친군부, 반공주의적 논조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신문의 반(反) 민주적이고 친독재정권 성향의 논조 때문에 1987년 6월 항쟁 당시 경향신문에 대해 분노한 시위 군중, 시민들이 지방 배송을 위해 서울역 앞에 쌓여 있던 경향신문을 대량으로 소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이후 1990년에 한화그룹에 매각되었다가 1998년에 사원주주회사로 독립한 이후부터는 좌파와 개혁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여러 사설, 칼럼, 기사 등에서 좌파 성향을 띄는 신문이 되었다. 2010년 9월, 경찰 내부 교육자료로 쓸 목적으로 만든 천안함 침몰 홍보 동영상을 상영하는 것에 대해서 일선 초등학교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2개 초등학교에서 상영을 강행하였다는 주장이 경향신문을 통해 제기되었다. 또한 이 동영상을 한 인터넷 보수언론이 제작해 웹사이트상에 올려놓은 영상과 동일하다고 보도하였는데, 의문이 제기된 코나스넷측은 '북한문제연구소'가 제작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나스는 이 동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2011년 8월, 경향신문은 칼럼진에 뉴데일리 고문이자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출신인 류근일을 영입하였다. 이에 대해 내부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인 반면, 독자층을 포함한 외부에서는 경향신문이 균형강박증에 걸렸다, 헛발질이라면서 많은 우려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2012년 5월 1일의 사장선거를 앞두고 송영승 사장과 강병국 변호사가 경합하게 되자, 송영승 사장의 측근인 이대근 편집국장이 강병국 변호사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입후보를 막겠다"고 불출마를 종용했고, 결국 강병국 변호사가 불출마하면서 송영승 사장이 연임되었다. 서울신문 《서울신문》(서울新聞)은 현재 발간 중인 대한민국 신문 중 하나로, 일시적으로 《대한매일》(大韓每日) 제호로 발간하였다. 대한민국 10대 일간지 중 하나로, 논조는 중도로 평가된다. 사옥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태평로1가)에 있으며, 1985년 4월에 한국프레스센터와 함께 준공된 것이다. 구한말 어니스트 베델 등이 창간한 민족주의 신문 《대한매일신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한일병합과 함께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에 《서울신문》으로 속간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 우리사주조합(39%), 기획재정부(30.49%), (주)포스코(19.4%), KBS(8.08%), 기타분산소유(3.03%)의 지분구조[정부주61%, 사원주39%]를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내 유일의 공영신문이다. 자매 언론기관으로는 《스포츠서울》, 《퀸》, 《나우뉴스》, 《서울신문 NTN》, 《서울신문STV》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신문사는 가을밤 음악회, 서울갤러리, 신춘문예, 하프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사회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전라남도 무안에 태양광발전소를 준공하고, 이어 탄소배출권거래회사(코리아카본뱅크)를 설립하였으며, 그린에너지포럼을 발족하는 등 녹색사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2009년 10월, 서울신문STV 개국으로 첫 방송사업을 시작하였다. 구한말 민족구국지였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항일 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고, 따라서 일반 민중들의 지지도가 높았으며 발행부수도 가장 많았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주요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신채호 등이 있었다. 특히 양기탁이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주요 논설의 대부분을 집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을 주도했으며, 1904년 4월에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자임하였으며 통감부의 방해에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비판하는 등 일제에 대한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면으로 저항하자, 일제는 창간주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다. 실질적 책임자인 양기탁 또한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던 중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가 영국인 앨프리드 W. 마넘(萬咸(만함), Alfred W. Marnham)으로 바뀌었다. 1909년 5월 1일 베델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변경됐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바뀌었다. 《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04년 7월 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를 일본 제국이 매입하여 한일 병합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大韓)' 두 자를 떼고 게재된 것이다.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했으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를 띠었다. 1920년, 민족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매일신보》는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다. 이인직·이해조 등이 쓴 신소설들이 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광수의 처녀작인 《무정》도 이 신문을 통해 발표됐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이후로는, 이 신문들과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 편집국이 《경성일보》 에서 분리됐으며, 193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부사장이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16일 《경성일보》에서 완전히 독립되었다. 동시에,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고 최린(崔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주요 자매지로는, 《월간매신》(1934.2) 《매일신보사진특보》(1938.11) 《국민신보》(1939.4) 등이 있다. 《매일신보》는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광복까지 중단 없이 발행되었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는 점에서 언론사적 의의가 크다. 당시 사옥은 경기도 경성부 태평통 1가 31번지(現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있었고, 8·15광복 뒤 《서울신문》(서울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정간처분과 함께 《매일신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경영진을 새로 꾸려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11월 23일자부터 석간으로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때부터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13,738호부터 시작하였다. 초대 임원진은 사장 오세창, 주필 이관구, 편집국장 홍기문이었다. 1949년, 반공사건의 기사시비로 발행정지처분을 당했다가 6월 20일에 속간하면서 공보처의 지시·감독을 받게 되었고 한국 전쟁때는 《진중신문(陣中新聞)》을 발행하기도 했다. 1959년 3월 23일부터는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부터 계승해 온 지령을 버리고 《서울신문》제호로 창간된 1945년 11월 23일 이후부터의 지령으로 다시 환산하여 새 지령으로 발간되었다. 1950년대, 자유당 정권 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데모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불태워 일시 정간했기도 했다. 1960년 6월 27일, 제9대 사장 오종식이 재건에 주력했지만 재정난으로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가 5·16 군사정변 후 12월 22일에 다시 속간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때부터 서울신문은 명실상부한 정부기관지로 자리잡게 된다. 정부행사 주최 및 국민계도에 앞장서는 등의 언론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일각에서는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한글전용신문 제작에서 다른 신문보다 앞장서 노력을 기울였음은 특기할 만하다. 1968년 11월 22일 창간 23주년을 맞아 한글전용판으로 개혁하였으나, 몇 년 후 다시 국한문혼용판으로 환원하였다. 본지 외에1946년 1월 15일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하였고,이 후 연예오락주간지 《선데이 서울》(1968.9.22), 《소년서울》(1970.4.22), 《서울평론》(1973.11.4) ,《주간스포츠》(1975.3.30), 등의 잡지들을 발행하다가 모두 폐간했다. 연예 주간지 《TV가이드》(1981.7.18), 여성월간지 《퀸(Queen)》(1990.7.22), 시사주간지 《뉴스피플(NewsPeople)》(1992.1.12), 스포츠연예전문지 《스포츠서울》(1985.6.22)을 창간했다. 1999년 12월 29일, 스포츠서울은 분사 조치됐다. 1998년 11월 11일 제호를 《대한매일》(大韓每日)로, 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로 변경했다가 2004년 1월 1일, 《서울신문》으로 환원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태평로1가)에 있으며, 1985년 4월에 한국프레스센터와 함께 준공된 것으로 현재(2018년) 대표이사는고광헌이다. 서울신문사는 가을밤음악회, 사이버서울갤러리(www.seoulgallery.co.kr), 신춘문예, 하프마라톤대회, K팝 커버댄스 페스티벌 등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다. 주요 수익사업으로, 택시버스광고와 태양광발전소 사업이 대표적이다. 2007년, 전라남도 무안군에 태양광발전소인 서울신문 솔라토피아를 건설하고, 이어 탄소배출권거래회사(코리아카본뱅크)를 설립하였으며,그린에너지포럼을 발족하는 등 공익을 위한 녹색성장사업들에도 진출했다. 2009년 10월, 서울신문 STV 개국으로 첫 방송사업을 시작하였으며, 현재 이 채널은 하이라이트TV가 되었다. 서울신문사는 1946년 1월 15일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하였고,이후 연예오락주간지 《선데이 서울》(1968.9.22), 《소년서울》(1970.4.22), 《서울평론》(1973.11.4) ,《주간스포츠》(1975.3.30), 등의 잡지들을 발행하다가 모두 폐간했다. 연예 주간지 《TV가이드》(1981.7.18), 여성월간지 《퀸(Queen)》(1990.7.22), 시사주간지 《뉴스피플(NewsPeople)》(1992.1.12), 스포츠연예전문지《스포츠서울》(1985.6.22)을 창간했다. 2008년에는 연예,오락 전문 온라인 뉴스컨텐츠 《나우뉴스》,《나우뉴스TV》,《서울신문NTN》를 창설하였고,2009년 10월에는 서울신문STV 개국으로 방송사업에 진출했다. 서울신문사의 자매지들은 대한민국의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많다. 특히 1968년 9월 22일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청소년과 직장인 사이에서 파장이 컸다. 《선데이서울》은 언론자유화에 따라 탄생한 다른 오락잡지에게 밀려 1992년에 폐간되었다. 서울신문 본사에 가면 《선데이서울》의 지난 호들을 열람할 수 있으며, 서울신문 홈페이지에 게재된 《추억의 선데이서울》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다. 한겨레 《한겨레》(The Hankyoreh)는 대한민국의 신문 출판 기업인 한겨레신문 주식회사가 대한민국에서 발행하는 강성 좌파성향의 조간 일간지이다. 1988년 5월 15일에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모여 국민주 모금 형태로 창간되었다. 한겨레신문 주식회사의 본사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대표이사는 양상우 사장이다. 2006년 신문구독률 1%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스포츠조선, 국민일보 등에 이어 8위를 차지했으나 신뢰도에서는 한겨레, 경향신문 순으로 1위다.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2012년에 14차례, 2013년에 17차례, 2014년 11차례 수상하면서 3년 연속 최다 수상한 언론사가 되기도 하였다. 1988년 5월 1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해직 언론 기자들을 중심으로 주식을 공모하여 모금된 자본금으로 창간되었다. 1988년 창간당시의 제호(題號)는 《한겨레신문》이었으나 1996년에 《한겨레》로 바뀌었다. 《한겨레》는 ‘국민주 신문’으로 창간된 신문으로서, 일부 국민들로부터 자본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설립하고 모금에 참여한 국민들에게 《한겨레신문》의 주식을 배정해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 한 것이다. 또한,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편집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였으며, 종합일간지 최초로 창간 당시부터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도입하였다. ‘책임’과 ‘공정’과 '소통'을 표방하고 있으며, 특정 자본으로부터의 제도적 독립을 위해 독립 자본금으로 경영하고 있다. 2017년 5월 현재 사장(발행인, 사원들의 직접투표로 선출)은 양상우이다. 1995년 4월 27일 중앙일보에 이어 대한민국 내 신문사로는 두 번째로 주간지 《한겨레21》로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6년 1월 1일에 《씨네21》, 1996년 7월 11일 일간지 《한겨레》의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에 위치하고 있다. 2007년 1월 29일에는 취재 보도 준칙을 제정하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 자료에 따르면 하루에 281,814부를 발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 흑자로 돌아섰으며 766억 원 매출에 19억 원의 경상이익을 냈다. 2004년에는 21억 원, 2003년에는 28억 원 적자였다. 2007년 회계연도의 매출액은 762억 원, 당기순이익 20억 원이며 2007년 12월 기준으로 자산 695억 원, 부채 445억 원, 자본금이 250억 원이다. 2007년 1월 29일, ‘취재 보도 준칙’을 제정하고 공표했다. 기자들은 이 준칙에 따라 취재 보도를 하고 있다. 한겨레는 1999년 12월 22일 자회사 ‘(주)인터넷한겨레’를 세우고 초대 대표이사로 오귀환 전 편집국장을 선임했다. 인터넷 한겨레는 한겨레의 뉴미디어국과 ‘한겨레마을’이라는 통신판매를 담당하던 유통사업부와 여행사업부 등 세 가지 사업을 하나의 법인으로 묶어 분사한 회사이다. 2대 대표이사로 서형수, 3대 대표이사로 이상훈이 각각 취임했다. 2002년 한겨레초록마을사업을 개시했으며 ‘(주)인터넷한겨레’는 회사이름을 2003년 5월 26일 ‘(주)한겨레플러스’로 개칭했다. 한편 2005년 1월 여행사업부문은 '(주)한겨레투어’별도 법인으로 분사되었으며, 2005년 12월에 인터넷미디어부분은 한겨레에 사업 이관을 하였다. 이후한겨레플러스는 유기농 상품 유통업인 ‘초록마을’과 해외 교육 프로그램 서비스업인 ‘교육과 미래’만 운영하게 되었다. 2008년 12월 30일, 한겨레는 대상그룹의 계열사인 대상홀딩스에 한겨레플러스(초록마을, 교육과 미래)와 한겨레투어를 80여 억원에 매각하였으며 한겨레신문 자회사에서 대상그룹 자회사로 변경되었다. 2004년 참여정부 당시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 안상영 부산광역시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박태영 전라남도지사의 자살이 계속되자 "스스로 죽을 용기가 있다면 왜 꿋꿋이 살아 견뎌내지 못하느냐는 너무나 당연한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죄가 없다면 살아서 끝까지 결백을 밝혀내야 하고, 만약 죄가 있다면 떳떳이 죄값을 치르고 반성하면 될 게 아니냐는 게 누구나 갖는 소박한 생각이다. …… 게다가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자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분위기가 은근히 있었고, 심지어 이들의 자살을 미화하고 정치적 공방의 소재로까지 삼았다."라는 시론을 통해 자살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폈다. 그러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서거에 대해서는 언론 책임론을 들면서 자살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댔다는 비판이 있다. 동아일보는 한겨레의 보도행태가 노무현의 서거 전·후가 다르다고 비판했다. 한겨레신문은 노무현이 서거하기 전까지 '검찰의 입을 빌리는' 기사를 연일 썼으며 노무현의 해명이 맞지 않을 때는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서거 후에는 노무현의 서거가 '정치 검찰과 보수 신문의 정치적 타살'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무현 서거 전과 후의 보도가 모순된다는 비판이 있다. 빅뉴스는 노무현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한겨레의 기사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이 사건(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에 누가 가장 큰 책임이 큰지에 대해 1순위와 2, 3순위를 복수로 응답하게 한 결과 56.3%는 검찰, 49.1%는 언론을 꼽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조사 원문에는 가장 큰 책임이 있는 1순위는 노무현으로 27.9%, 검찰 22.7%, 언론 15.5%보다 더 높은 결과가 나왔는데, 한겨레는 응답자들이 1순위로 응답한 노무현의 책임이 가장 크게 나온 결과에 대해 1면에서 배제하며 5면에서 간략히 언급하였고, 책임의 정도에 대해 1, 2, 3순위 등 가중치를 주었으면서도 이를 단순 합산하여 검찰 56.3%, 언론 49.1%로 수치를 높여 노무현 36.7%보다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사실상 왜곡 보도하였다고 빅뉴스는 비난하였다. 한겨레는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병역비리 의혹을 보도하면서 김대업의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중계하듯 보도하면서 공정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있다. 이후 법원은 김대업의 모든 병역비리 관련 주장은 허위였다고 판결했다. 한겨레는 2010년 6월 11일 '놈현 관장사'라고 지칭하는 등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논란이 일자 6월 15일 1면에 성한용 편집국장 명의로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다. 국민참여당의 유시민은 이를 계기로 한겨레 절독을 선언했다. 생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개인 사비로 한겨레 신문을 후원하기도 했다. 2011년 10월 한겨레는 27일자 '반국가, 반민주 맨얼굴 드러낸 한국현대사학회'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현대사학회가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내용을 지우자고 요구했다"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또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을 미화하고 친일파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식민지 근대화론을 포함시키자고 요구했다"며 "기존 교과서 집필기준에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3·1 독립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음을 이해한다'는 내용 대신 '대한민국은 유엔의 도움을 받아 건국하고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였음을 이해한다'는 내용도 포함시키자고 요청했다"라고 보도했다. 현대사학회는 "그런 내용의 건의서를 낸 적이 없다"며 "정상적인 비판의 수준을 넘었다."라고 비판했다. 학회 차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적도 없고 임정의 정통성 부분 일구를 삭제하여 제시한 일이 있으나 이는 임정 법통 계승을 부정한 것이 아닌 8·15 광복 이후 시기 교육과정에 들어가기는 적절치 않다고 봤기 때문이라며, 실제로 국편이 마련한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8·15 광복 이후 시기 교육과정에 이미 임시정부에 관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현대사학회는 "한겨레신문이 우리 학회를 매도하면서 '나라를 팔아 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고 동족을 수탈하고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정상적인 비판을 넘어선 것"이라고 비판했다. 2013년 5월 31일자 한겨레는 교학사 5.16혁명-5.18폭동으로 서술했다며 진보진영과 야당에선 해당 기사의 제목과 내용을 인용해 “교학사 교과서엔 ‘5.16은 혁명, 5.18은 폭동’이라는 내용이 담겼다”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학사 교과서엔 이 같은 내용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겨레는 이날 ‘[정정] ‘이승만·박정희 독재 미화’ 뉴라이트, 역사흔들기 본격화 기사 관련’에서 “본지는 2013년 5월 31일자 22시15분 기사에서 ‘뉴라이트 교과서에 “5.16은 혁명, 5.18은 폭동”’이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해당 제목이 사실이 아님을 인지한 후 제목을 바꿨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에 언급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엔 그런 내용이 없음을 알려드리고, 기사에 언급된 관계자들과 해당 기관, 단체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정정보도를 냈다. 2017년 3월 27일 광주광역시에서 치러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자 호남권역 선출대회에서 문재인 후보는 총 23만6358표 중 14만2343표(60.2%)를 얻어 압승했다. 경선 결과가 발표되는 시점에 타신문사들은 일제히 문재인 후보의 광주경선 압승을 트윗한 반면, 한겨레는 트위터를 통해 '경주에 시발택시 보러 갈까'라는 내용의 기사를 링크했다. 경주 세계자동차 박물관에 대한 기사를 링크한 것이었으나, 해당 기사에 시발택시 사진은 없었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자들은 한겨레의 기사 제목을 비난했다.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구좌파 계열인 한겨레가 문재인 후보에 대해 노골적인 공격을 지속해왔던 까닭에 한겨레의 이 같은 행동은 문재인 후보의 지지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후에 게재된 트위터와 페이스북 압승보도 기사의 제목도 페이스북은 "압도적 승리"라고 사실기사를 인용한 반면, 트위터 쪽은 "대세?" 라며 60.2%를 받은 게 대세인가? 하는 다소 비아냥대는 듯한 제목으로 빈축을 샀다. 참고로 문재인은 한겨레 창간 당시 2억원을 기부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후에는 한겨레가 오히려 급격하게 친정부 스탠스로 전환하면서 언론 기능이 상실했다고 평하고 있다. 특히나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신문지부도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 타 매체 기자들도 "한겨레가 친정부적 인상준다", "한겨레가 권력을 비판하는 야당지 입장보다 여당지 느낌가난다"라는 반응이 상당히 많았다. '한겨레 신뢰도 하락은 “친정부 여당지 느낌” 때문?' 특히나 더 큰 문제는 한겨레 출신들이 청와대로 합류하면서 한겨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언론윤리와 직결된 폴리널리스트 논란도 나오고 있다. 김의겸 대변인 부터 오태규 일본 주오사카 총영사 그리고 이젠 여현호 국정홍보비서관까지 한겨레 출신 기자들이 대거 문재인정부 청와대로 직행하면서 한겨레가 친정부 언론 스탠스로 보도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특정언론 인사들로 임명하는거 아니냐며 문재인정부와 한겨레에 대한 비판여론도 나오고있고 일각에서는 권언유착관계가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 2기 인선에 거센 ‘폴리널리스트’ 비판 또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폭로 사건과 관련해 한겨레가 시종일관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논란이 가라앉은 뒤에야 ‘뒷북 보도’를 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나왔다. 이 밖에도 통계청의 소득격차 및 고용동향 발표 관련 보도에서 한겨레가 지나치게 이슈를 부풀리거나 축소했다는 평가도 나왔는데 이를 테면 정부·여당에 불리한 통계청의 ‘소득 양극화 2007년 이후 최악’ 발표의 경우 다른 언론사와 비교해 축소 보도했고, 취업자 수 증가폭이 호전된 지난해 11월 고용동향은 다른 언론사에 비해 크게 부각하고 정부·여당에 유리한 제목을 뽑았다는 반응이다. 한겨레 노조 “신재민 폭로에 소극 대응하다 뒷북 보도” 2019년 8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내정된 이후 조국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나오지만 정작 한겨레가 조국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오고있는데 외부 전문가들은 한겨레의 검증 보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며 비판했다. 한겨레 조국 보도에 "날카로운 이빨 나간" 2019년 9월 한겨레 일선 기자들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을 보도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며 한겨레 편집국 간부들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조국 후보자 관련보도는 한겨레 보도의 참사라며 국장단 사퇴를 요구했다. 이어 "2017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한겨레의 칼날은 한없이 무뎌졌다"며 "인사청문회 검증팀은 문재인 정권 1기 내각 이후 단 한 번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취재가 아닌 '감싸기'에 급급했다"고 폭로했는데 이들은 과거 정부에는 장관이 지명된 이후 태스크포스팀(TF)을 꾸리고 검증에 나섰던 것과 전혀 달랐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박용현 국장과 국장단은 스스로 직에서 사퇴하고,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검증팀을 꾸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편집국 구성원들 앞에서 상세히 밝혀라"라고 했다. 한겨레 평기자들 "자사 조국 보도 참사…부끄럽게 하지마라" 오리온자리 오리온 자리는 천구의 적도에 걸쳐 있는 눈에 띄는 큰 별자리로, 겨울의 저녁 하늘에서 주로 보인다. 그 명칭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꾼인 오리온에 기원한다. 동아시아의 별자리에서는 자수, 삼수, 삼수의 '벌', 필수의 '삼기' 별자리에 해당된다. 사다리꼴 안의 나란히 늘어선 밝은 세 별 민타카, 알니탁, 알닐람은 '오리온자리 허리띠'(Orion's Belt)라고 불린다. 민간에서는 이들을 '삼태성(三太星)'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북두칠성 머릿쪽에 위치한 '삼태성(三台星)' 별자리와는 다르다. 대체로, 오리온자리는 에리다누스 옆에 사냥개인 큰개와 작은개와 함께 서서, 황소에 맞서 싸우는 형태로 그려진다. 근처에는 또 다른 사냥감인 토끼가 있다. 오리온자리는 밝은 별과 성단·성운이 풍부하다. 오리온 왼쪽 어깨 부분의 베텔게우스와, 다른 하나는 오른쪽 정강이 부분의 리겔은 0등급의 별이다. 오리온의 벨트 아래에서 오리온 대성운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 작은 망원경으로 별자리를 살피면, 버나드 루프(Barnard's Loop: 우측 사진)를 포함하여, M43, M78 등의 메시에 천체, NGC 2024 (불꽃 성운: Flame Nebula)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성운들은 약 1,500 광년 떨어져 있으며 지름이 수백 광년인 오리온의 분자 구름 집단의 일부이다. 이 영역은 우리 은하에서 관측 가능한 영역 중에서는 별이 꽤 격렬하게 생성되는 영역이 된다. 10월 21일경에는 유명한 오리온자리 유성우가 극대기에 도달한다. 복사점은 쌍둥이자리와의 경계 부근이며, 시간당 20개 정도의 유성을 볼 수 있다. 오리온자리의 형태는 약 150만 년 전부터 갖추어졌다. 오리온자리의 별들은 상대적으로 고유운동의 속도가 느려 1 ~ 2백만 년 뒤까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리온자리는 밝고 특이하여, 그 형태가 여러 문명에서 다양하게 인식되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오리온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힘쎈 사냥꾼으로 인간세계에서 많은 이름을 알려졌던 오리온은 사냥의 여신이자 달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의 오빠인 태양의 신 아폴론이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폴론은 오리온을 난폭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라는 신과 도저히 이룰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르테미스와 오리온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곤란하게 여긴 아폴론은 대지의 신에게 부탁해 오리온이 바다에 헤엄치고 있었던 그때 전갈을 보내어 독침으로 찔러 죽이려 했다. 동생인 아르테미스가 이에 크게 반발하자 아폴론은 한가지 제안을 한다. 만약 오리온이 전갈로부터 살아남는다면 더이상 두사람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동생은 아폴론의 말을 믿지않자 스틱스강에 맹세까지 하게한다. 오리온은 전갈로부터 살아남았지만 싸움도중 전갈에게 찔린 독침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그 후에 아폴론에 의해 오리온과 전갈 모두를 하늘에 올려 별자리가 되게 하였는데, 오리온은 겨울 하늘 높은 곳에 위엄 있게 놓여 있으며, 전갈자리는 여름 하늘에 낮게 떠 곧장 서쪽으로 진다. 전갈자리는 오리온을 노리고 있고, 전갈은 또한 난폭해질 경우에 대비해 궁수자리에 의해 겨냥된다. 이는, 별자리의 위치에 따라 신화가 만들어진 것임을 의미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리온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신 아르테미스가 화살로 쏘았다는 이야기, 오리온이 플레이아데스를 쫓아다녔다는 이야기 등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오리온의 명칭은 호라티우스의 송시, 호머의 오딧세이와 일리아드,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스의 서사시에도 언급되며, 성경에는 세 차례(욥기 9:9, 욥기 38:31, 아모스 5:8) 언급된다. 오리온자리는 대체적으로는 겨울철 별자리이다. 하지만 봄철에도 가능하는데 해진 후에 서쪽하늘에 보였다가 지평선으로 지게 된다. 그러다가 5월 말부터는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여름철인 8월 새벽녘부터 동쪽하늘에 다시 보이기 시작하여 가을철이 되면 점차 모습을 차차 드러내기 시작한다. 배용준 배용준(1972년 8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배용준은 1972년 8월 29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백병원에서 태어났다. 1남 1녀 중 장남으로, 여동생이 한명 있다. 풍일초등학교에서 서울명일초등학교로 전학했고, 배재중학교,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6살 때부터 태권도와 유도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어린 시절에 태권도 경기 도중 상대방에게 눈을 맞아 시력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배용준은 대학입시 낙방과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자원 입대를 하려 했지만 낮은 시력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 또한, 배용준은 재수 시절 진위사란 절에 공부를 위해 입산했었다. 이후, 그는 두번의 낙방 끝에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모색했고, 어린 시절부터 "배우 한번 해봐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그는 연예계 진출을 떠올렸고 아버지의 지지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촬영장에서의 경험을 쌓기 위해 합동영화사에 들어갔다. 이후 그곳에서 연출부, 기획실, 제작실에서 영화보조 스탭으로 일했고, 출연자 섭외, 장소헌팅 등의 일을 맡으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최종의 목표는 배우였기에 합동영화사를 나와 지인이 운영하던 연기학원에 다녔는데 그 시절 권오중과 첫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배용준은 1994년 오디션을 통해 KBS 특채 탤런트로 발탁되어 청춘 드라마 《사랑의 인사》로 23세의 나이에 연기자로 데뷔하였다. 그는 6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젊은이의 양지》(1995년)에서 영화감독 지망생인 재벌2세의 대학생 역할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영애와 출연한 드라마《파파》(1996년)에 이어, 최고 시청률 65.8%라는 한국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한 《첫사랑》(1996년), 《맨발의 청춘》(1998년)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부드럽고 댄디하면서도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이미지로 인기를 끌며 톱스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후 1999년에 방송 된 노희경 작가가 극본을 쓰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고, 이후로 숱한 많은 작품의 캐스팅 제의를 받았지만 역할 등의 의견이 맞지 않아 캐스팅이 무산되면서 2년간의 공백을 갖게 되었고, 2000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영상학과 00학번으로 입학해 늦깍이 대학생으로 학업에 몰두했다. (이후 2005년 3월말에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 학업을 중단했다.) 배용준은 2001년에 호텔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호텔리어》로 배우로서 2년여만에 복귀하였고 송윤아, 김승우와 공연해 최고 시청률 38.6%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복귀를 하였다. 또한 드라마 첫방송을 앞두고 《호텔리어쇼》라는 특집 토크쇼의 녹화를 마쳤지만 이 프로그램의 편성 소식이 전해진 뒤 MBC는 "공영성을 망각하고 시청률 지상주의를 부추기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방송편성이 취소되기도 했다. 다음해 2002년에는 데뷔작으로 인연을 맺었던 윤석호 PD가 연출한 드라마 《겨울연가》에 출연했다. 《첫사랑》 이후, 5년여만에 최지우와 다시 호흡을 맞췄다. 이 작품은 방영 당시 상도, 여인천하와 경쟁해 25%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두 주인공을 본뜬 헤어스타일, 목도리 패션, 각종 소품 등이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유행을 끌며 인기를 끌었다. 배용준은 90년대부터 충무로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수많은 캐스팅 제의를 받아왔지만, 워낙에 신중한 작품 선택으로 영화 데뷔를 미뤄오다가 2003년에 프랑스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조선 시대 사극으로 옮겨 영화화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으로 데뷔 10년만에 스크린에 데뷔하였다. 이 작품으로 전도연과는 지난 8년만에 다시만나 재공연하였고, 그는 연기 생활 처음으로 파격적인 노출연기를 펼치는 등 평소 부드러운 이미지를 벗어나 희대의 작업남을 완벽하게 연기해 좋은 평을 얻었다.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분 신인남자연기상을 수상했고, 352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의 이름값을 돈톡히 해냈다. 2004년 3월부터 4월까지 영화《스캔들》의 프로모션으로 중화민국, 싱가포르, 홍콩, 일본의 아시아 투어를 진행 하였다. 《겨울연가》는 2003년 4월부터 일본의 방송사 NHK 위성 채널에 이어 지상파 채널에 방송되어 일본 중장년층으로부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외국드라마로는 최초로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배용준은 부드럽고 따뜻한 매력남의 이미지로 일본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욘사마()"라는 이례적인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파급력과 인기를 얻었다. 이후 배용준은 대표적인 한류스타로 자리매김하며 일본내 한국문화 붐을 이끌었다. 특히 욘사마라는 애칭은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선정한 2004년 올해의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배용준이 일본에 공식적인 첫 방문을 했던 2004년 11월 24일에 나리타 공항에는 그를 보기 위해 7,000여명의 엄청난 인원의 팬들이 마중을 나왔고, 일본의 지상파 방송사 TBS TV가 헬기까지 띄우며 배용준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배용준은 NHK측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 일본에서도 초특급대우인 10~13억원의 개런티를 받으며 《롯데제과》, 《오로라민C》, 《소니 사이버샷》, 《칠색아차》, 《세콤》등의 광고에 출연하며 높은 인기를 실감했다. 대한민국의 현대경제연구원은 "한류현상과 문화산업화 전략" 보고서를 통해 한국, 일본 양국의 각종 자료를 취합한 결과 "욘사마"의 경제적 효과가 국내에서 1조원, 일본에서 2조원 등 최소 3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였다. 2004년 가을에 발매 된 첫 사진집 《THE IMAGE VOL.1》는 초판 10만부가 매진되었다. 또한, 그는 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2005년에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로 2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하였고, 손예진과 호흡을 맞췄다. 한국에서의 관객수는 74만명에 그쳤지만, 같은해 9월 일본에서 개봉되어 약 30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일본에서 개봉된 역대 한국 영화중의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배용준은 2007년에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4년여만에 의기투합한 작품이자 한국방송사상 최고액의 400억이 넘는 제작비와 3년여간의 제작기간을 거친 드라마 《태왕사신기》로 5년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새로운 왕의 캐릭터를 선보이는 등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데뷔 14년만인 그 해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08년 6월 1일에는 《태왕사신기》의 일본 지상파 방송을 기념해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개최된 《태왕사신기 프리미엄 이벤트 2008 in JAPAN》에 이지아, 문소리, 김종학 PD 등과 참석했고, 3년만에 공식적으로 일본에 방문하였다. 배용준은 2009년 9월 23일에 《배용준의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배용준이 지난 1년동안 한국 각 분야의 대표 장인 11명과 13가지 전통문화 콘텐츠를 체험하고 배용준이 직접 촬영한 200여컷의 사진이 첨부해져 있으며, 한국인들도 잘 모르고 있던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문화를 소개하고 해외 독자들이 한국에 여행 왔을 때 꼭 들려봐야할 한국의 여행지를 깊이있게 다룬 책으로 관계자측은 "한류스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배용준과 그가 전하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또한 이 책의 중국어판은 중국 신문사 신경보가 선정한 '2010 우수도서'에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MBC LIFE에서 2011년 1월 8일부터 3월 12일까지 동명의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배용준은 2009년 9월 29일에는 첫 더빙을 연기한 애니메이션 《겨울연가》의 방영을 기념하는 도쿄돔 이벤트에 최지우와 함께 참석했다. 도쿄돔에서 펼친 이벤트 실황은 일본 전역의 극장에서도 위성 생중계돼 총 10만여 팬이 함께한 초대형 이벤트로 큰 화제를 모았고, 3D 영화로 제작되어 일본 전역에 개봉되었다. 또한 2008년에는 한류스타 최초로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권에서 한류를 알리는데 높은 공로를 인정 받아 문화체육관광부의 추천을 받아 화관문화훈장(5등급)을 받았다. 배용준은 2009년에 《2010-2012년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대한민국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홍보 활동을 펼쳤고, 배용준이 출연한 포스터는 2009년 3월 요미우리 신문에서 광고 주목율 70%라는 수치를 기록하며 한국에 대해 관심과 호감도를 상승시킨 좋은 광고로 선정 되기도 했다. 또한 한해 780만 해외 관광객 유치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배용준은 2009년 1월 6일 키이스트와 가수 겸 제작자인 박진영의 JYP 엔터테인먼트가 공동으로 드라마제작을 위한 합작법인 유한회사를 설립해 연예예술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학원물의 드라마 《드림하이》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 드라마는 2011년 1월 첫방송 되었고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며 인기를 끌었고, 배용준은 학교 이사장 역할로 특별출연하였다. 다음 해인 2012년 1월에 《드림하이 2》가 제작 및 방송 되었고 2013년 5월 30일에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설립된 지 4년여만에 청산되었다고 발표했다. 배용준은 2013년 10월에 지난 2003년 일본에서 첫 방영된 드라마 《겨울연가》의 한류 10주년을 기념하는 '한류 10주년 위원회' 주관으로 치바 마쿠하리 멧세 국제 전시장에서 개최된 '한류 10주년 대상 in 일본' 시상식에서 '한국 드라마 대상 남자 배우 부문' 그랑프리와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배우 활동은 쉬고 있다. 배용준은 2015년 2월에 1년간 사귄 LS그룹의 부회장 딸인 재벌가 연인 구소희와 결별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3개월 뒤인 2015년 5월 14일 소속사 키이스트의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13살 연하의 배우 박수진과 결혼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후배 사이로 "올해 2월부터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며 "현재 양가 부모의 결혼 허락을 받았으며 결혼식을 올해 가을쯤으로 예정하고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3개월이라는 짧은 연애 기간과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일각에서는 박수진이 혼전임신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키이스트 측은 언론 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박수진이 임신한 건 절대 아니다.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활동을 이어갈 것이다"라며 박수진의 혼전임신은 사실무근이라는 뜻을 밝혔다. 2015년 7월 27일 두 사람은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애스톤 하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004년 BOF 엔터테인먼트(현재 사명 "키이스트")를 설립했으며 현재는 키이스트의 실제 최대주주로 지분의 34.6%를 소유하고 있다. 이병헌 이병헌(1970년 7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2000년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2003년에 방영한 SBS 드라마 《올인》 이후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 《달콤한 인생》(2005), 《그해 여름》(2006),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2009년에는 《》를 통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같은 해에 KBS 드라마 《아이리스》에 김태희와 함께 출연하면서 6년 만에 텔레비전 드라마 배우로 복귀하였고, 이 작품으로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2010년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주연으로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받았고, 2012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70년 경기도 성남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데뷔 때부터 주목받으며 스타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일찌감치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연을 맡아 활약하였다. 이병헌은 KBS 소속의 공채 탤런트 계약이 끝난 뒤론 다른 방송사의 TV 드라마에도 출연하였고, 1995년 영화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와 《런어웨이》를 통해 영화 배우로도 첫 발을 내딛으며 배우로서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병헌은 1999년 SBS TV 드라마 《해피 투게더》의 주연이 되었고, 6개월 간의 군복무를 위해 연예계 활동을 잠시 쉬었으며, 입소 전 앨범 발매를 통해 가수로도 데뷔하였다. 본래 현역으로 입대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음으로 인해 사유가 참작되어, 6개월 단기 사병 으로 복무를 마치고 2000년 2월에 복귀하였다. 복귀 후 이병헌은 영화계로 눈을 돌려 박찬욱 감독의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선택하였고, 그 영화의 주연으로서 비평과 대중적인 성공을 함께 거두었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한류의 바람을 타고 일본으로 수출된 TV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과 《올인》이 히트하면서 "한류스타 뵨사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일본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일본 음반 시장에 별도로 발표한 싱글과 드라마 사운드트랙 수록곡으로 가수 활동도 하였다. 이병헌은 기존의 연예 기획사에서 나와 독립한 뒤 자신이 직접 연예 기획사 BH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운영해 오고 있으며, 그가 직접 경영까지 하는 것이 아닌, 전문 경영인을 따로 두었다. 2009년 영화 《》에서 스톰 쉐도우 역을 맡아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월드스타 뵨사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2009년 KBS 미니시리즈 《아이리스》의 주연을 맡아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병헌은 2012년 영화 《》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이어 《지.아이.조 2》에서도 주연 스톰 쉐도우 역을 맡았다. 지.아이.조 2에서 같이 출연한 브루스 윌리스와의 인연으로 2013년 개봉한 영화 《》 (원 제목은 레드 2)에 캐스팅되었다.2015년 아놀드 슈왈츠네거 컴백 작품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로버트 패트릭 만큼이나 냉철한 T-1000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고 학창시절 별명이 터미네이터 였다고 한다. 이후, 2018년 7월 7일에 첫방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출연했다. 2012년 4월 16일 배우 이민정과의 열애설이 떠돌아 화제가 됐으나 소속사에서 이를 부정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19일 4개월만에 열애설을 인정하면서, 두사람은 2013년 8월 10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2년만인 2015년 3월 31일 아들 이준후가 태어났다. 1998년 이병헌은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 됐다. 1998년 12월 1일 서울 용산구 나이트 클럽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였던 이주노의 친구와 주먹다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병헌은 2008년 가을에 만나 교제를 하기 시작하여 2009년 봄에 헤어진 여성으로부터 민사 소송을 당했다. 권모씨는 그가 자신을 유흥 상대로만 이용하고 버렸기에 그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해 1억 원 대의 손해 배상 청구와 상습 도박 혐의로 고소하였다. 반면 이병헌은 그녀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며, 그녀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 자신에게 권씨와의 과거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금품을 요구했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협박 사실을 가지고 고소함으로써 맞 받아쳤다. 서로의 진실 공방이 점점 과열되어 가는 과정에서 TV 진행자 강병규가 새로이 등장하였는데, TV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 현장에 강병규가 나타나 폭행이 오고 간 일이 사건에 추가된 것이다. 한편, 강병규가 이병헌을 협박한 바로 그 장본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병헌이 그도 함께 고소를 하였다. 2010년 이병헌의 상습 도박은 무혐의 처분 되었고 손해배상청구 역시 권씨의 불참석으로 소송이 취하됐다. 반면 강병규는 아이리스 폭행 사건과 협박 혐의가 인정돼 2013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2014년 9월 2일, 지나갔던 같은 해 8월 28일에 술 자리 모임에서 참석했던 이병헌한테 50억 원을 안 내놓으면 음담 패설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 시켜서 공개하겠다고 그에게 협박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걸그룹 글램의 다희와 모델 이지연(본명 : 한수민)을 구속, 서울중앙지법 형사 9 단독 정은영 부장 판사는 15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상 공동 공갈 혐의로 기소된 이씨에게 징역 1년 2월, 김씨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6일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 2월과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 받았다. 다희의 선고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시유 어펜드 또한 취소되었다. 도요목 도요목 또는 물떼새목(Charadriiformes)은 조류 목의 하나이다. 물떼새류와 갈매기류, 제비갈매기류 등의 물새 그리고 바다새를 중심으로 19과, 약 390여 종을 포함하고 있다. 넓적부리도요 넓적부리도요는 도요과의 새이다. 여름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서 번식하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내려와서 겨울을 나는 철새이다.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절멸위기종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물떼새아목 물떼새아목은 도요목에 속하는 아목이다. 물떼새과 물떼새과()는 도요목의 한 과이다. 필립 글래스 필립 모리스 글래스 (영어:Philip Morris Glass, 1937년 1월 31일 출생)는 미국의 작곡가이다. 미니멀리즘을 응용한 현대음악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명으로 여겨진다. 그와 함께 다른 주요 미니멀리즘의 작곡가로는 라 몬트 영(La Monte Young), 테리 라일리(Terry Riley),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가 있다.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을 줄리어드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유럽에 건너 가서 나디아 블랑제와 작업하고, 1967년에 뉴욕에 돌아와 이듬해 필립 글래스 앙상블을 조직해 그의 초기 작품들을 창작했다. 대표적 음반으로는 《해변의 아인슈타인》(CBS M4 38875)이 알려져 있고, 《댄스 1 & 3》(TOMATO 8029)'와 그의 대중적 성공을 알린 음반으로 《GLASSWORKS》(CBS 37265)등이 있다. 크로노스 4중주단과 린다 론스타트와 더글러스 페리와 같은 가수가 연주한 《SONGS FROM LIQUID DAYS》(CBS FM 39564)가 있다. 스스로를 '유대교 신자이자, 도교 신자이자, 힌두교 신자이자, 톨텍교 신자이자, 불교 신자'라고 서술한 바 있으며, 티베트 독립의 후원자이다. 1987년에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로버트 서먼, 배우 리차드 기어와 함께 티베트 하우스의 공동 창립자이다. 채식주의자이다. 평행선 공준 기하학에서, 평행선 공준(平行線公準, )은 원론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공준 중 마지막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직선이 다른 한 직선과 만나 이루는 두 동측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다면, 이 두 직선을 무한히 연장할 때, 그 두 동측내각과 같은 쪽에서 만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의 공준을 비롯한 다섯 공준으로 구성되는 기하학이다. 평행선 공준은 남은 네 공준과 독립적이다. 즉, 남은 네 공준으로부터 유도할 수 없으며, 평행선 공준에 부정을 취하면 새로운 무모순적 기하학을 얻는다. 이는 좁은 의미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며, 넓은 의미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 공준을 만족하지 않는 기하학을 뜻한다. 절대기하학은 다섯 공준에서 평행선 공준을 제외한 네 공준만을 취한 것이다. 다음 명제들은 평행선 공준과 동치이다. 정확히 말해, 절대기하학 아래, 서로가 서로를 함의하며, 절대기하학에 이들 명제 가운데 하나를 추가하여 얻는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동치이다. (소괄호 속은 원래 명제의 이름, 대괄호 속은 동치성 명제의 이름이다.) 위 명제들은 자명하게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이므로, 이들로부터 평행선 공준을 유도하거나, 동치성 증명이 끝난 명제를 유도하는 것으로 족하다. 명제 1, 2, 3, 4, 10에 대한 증명은 플레이페어의 공리, 삼각형의 내각합, 사케리-르장드르 정리 참고. 직사각형(즉 네 내각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에 대각선을 그어 두 작은 삼각형을 만들자. 그렇다면, 사케리-르장드르 제1정리에 따라, 두 삼각형의 내각합은 각자 ≤ 180°이다. 또한, 두 내각합을 합하면 직사각형의 내각합 360°가 된다. 따라서, 두 삼각형의 내각합은 모두 180°이므로, 내각합이 180°인 삼각형이 존재한다. 비슷하게, "내각합이 180("n" - 2)°인 "n"각형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평행선 공준과 동치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이를 ""n"각형 공준"이라고 하자. 평행선 사이의 거리가 어디에서나 일정하다면, 당연히 주어진 직선과 거리가 같은 세 공선점이 존재하며, 점과 선은 어떤 같은 평면 위에 있다. 세 공선점 "A", "B", "C"가 직선 "l"과 거리가 같다고 하자. 즉, "l"의 수선 "AA'", "BB'", "CC'"가 "l"과 각자 "A'", "B'", "C'"에서 만난다고 하면, "AA'" = "BB'" = "CC'" 이다. 따라서, "AA'B'B", "BB'C'C"는 사케리 사변형이다. 이들 각자의 윗변과 밑변의 중점 "M", "M'", "N", "N'" 을 연결하자. 그렇다면, 좌우 대칭이므로, 직선 "MM'" 와 "NN'" 는 각자 직선 "l"과 "ABC"의 수선이다. 따라서, 직사각형 "MM'N'N"이 존재한다. 두 명제는 서로 대우이므로, 자명하게 동치이다. 어떤 직선 "l"과 각자 "A", "B"에서 만나는 두 직선 "AP", "BQ"의 동측내각이 < 180°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BAP'" + ∠"ABQ" = 180°이게 직선 "AP'" 를 그을 수 있다. 이때 "AP'" 와 "BQ"는 서로 평행한다. 또한, "AP"와 "AP'" 가 만나므로, "AP" 와 "BQ"도 만난다. 따라서, 평행선 공준이 성립한다. 어떤 직선 "l"과 각자 "A", "B"에서 만나는 두 직선 "AP", "BQ"의 동측내각이 < 180°이라고 하자. 만약 동측내각이 하나는 직각 하나는 예각이라면, 명제에 따라 "AP"와 "BQ"는 만난다. 만약 둘 다 예각이라면, 선분 "AB"에 아무렇게나 점 "M"을 찍고, "BQ"의 수선 "MN"을 긋고, "MN"이 "BQ"와 "N"에서, "AP"와 "C"에서 만난다고 하자. 그렇다면, 삼각형의 내각은 그와 이웃하지 않는 외각보다 작으므로, ∠"MCP" < ∠"MAP", 즉 ∠"MCP"는 예각이다. 따라서 첫번째 경우로 귀결된다. 만약 하나는 둔각 하나는 예각이라면, 두번째 경우와 같이 점 "M", "N", "C"를 만들되, "M"을 "AB"의 중점으로 취하자. 그렇다면, ∠"MCP"는 직각일 수 없다. 안 그러면, 각각변 합동에 따라, 삼각형 "MCA"와 "MNB"는 합동이 되므로, 동측내각의 합이 180°이 되어 모순이다. 따라서, 이 역시 첫번째 경우로 귀결된다. 세 경우는 모든 경우를 포함하며, 따라서 두 직선 "AP", "BQ"는 어떤 점 "O"에서 만난다. 또한 반드시 < 180°인 동측내각과 같은 쪽에서 만난다. 안 그러면, 삼각형 "OAB"의 내각합이 180°보다 크게 되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평행선 공준이 성립한다. 어떤 직선 "l"과 각자 "A", "B"에서 만나는 두 직선 "AP", "BQ"의 동측내각 ∠"QBA"와 ∠"PAB"가 각자 직각과 예각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선분 "AB"에 점 "M"을 찍고, "AP"의 수선 "MC"를 그어 "AP"와 "C"에서 만나게 하고, "MC"를 연장하여 "C'C" = "MC"이게 하고, "MB"를 연장하여 "BB'" = "MB"이게 할 때, 자명하게 "M", "C'", "B'"은 삼각형을 이룬다. 따라서, 그 외접원이 존재하며, "AP"와 "BQ"가 각자 변 "MC'"와 "MB'"의 수직이등분선이므로, 외접원 원심 "O"가 바로 "AP"와 "BQ"의 교점이다. 따라서, 르장드르 공준이 성립한다. 삼각형 "ABC"와 "A'B'C'" 가 서로 닮음이나, 서로 합동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AB" > "A'B'" 라고 가정할 수 있다. 변 "AB"에 "AB''" = "A'B'" 인 점 "B''" 을 찍고, ∠"AB''C''" = ∠"ABC"인 직선 "B''C''" 을 긋자. 그렇다면, 직선 "B''C''" 은 변 "AC"와 어떤 점 "C''" 에서 만난다. 또한, 각변각 합동에 따라, 삼각형 "AB''C''" 와 "AB'C'" 는 합동이다. 따라서, ∠"AC''B''" = ∠"AC'B'" = ∠"ACB"이다. 이때, 사각형 "BB''C''C"의 내각합은 360°가 되므로, 내각합이 360°인 사각형이 존재한다. 비슷하게, "합동이 아닌 닮음다각형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평행선 공준과 동치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 두 사케리 사변형 "ABCD", 밑변 "AB"와 윗변 "DC"가 같다고 하자. 밑변과 윗변의 중점 "M", "N"을 연결하자. 그렇다면, 좌우 대칭에 따라 "MN"은 "AB"와 "DC"의 수선이다. 또한, "MB" = "NC"이므로, "MNCB"는 밑변이 "MN"인 사케리 사변형이다. 사케리 사변형의 윗변의 두 이웃각은 서로 같으므로, ∠"NCB" = ∠"CBM" = 90°이다. 따라서, 직사각형 "MNCB"가 존재한다. 삼각형 "ABC"의 중위선 "MN"이 대변 "BC"의 절반 길이라고 하자. "MN"의 수선 "AA'", "BB'" 를 그어 "MN"과 "A'", "B'" 에서 만나게 하자. 그렇다면, 변각변 합동에 따라, 삼각형 "MAA'", "MBB'" 는 서로 합동이며, 삼각형 "NAA'", "NCC'" 는 서로 합동이다. 따라서, "BB'" = "AA'" = "CC'" 이므로, "BB'C'C"는 사케리 사변형이다. 또한, 이므로, "B'C'" = "BC"이다. 따라서, 밑변과 윗변이 같은 사케리 사변형이 존재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성립한다면, 직각 삼각형 "ABC"의 빗변 "AB"에 대한 중위선 "MN"을 긋자. 그렇다면, 이므로, "MN" = 1/2"AB"이다. 즉, 중위선이 그 대변의 절반 길이인 삼각형이 존재한다. 평행선 공준은 원론의 공준 중 다른 네 공준보다 직관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몇몇 수학자들은 이 공준이 다른 명제들로부터 증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른 몇몇 수학자들은 이 공준의 부정을 가정하여 모순을 이끌어내려고 하였다. 결국 19세기에 이 공준은 증명될 수 없다고 결론지어졌으며, 이것의 반대 상황을 가정해도 모순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결과를 1829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로바쳅스키가 한 러시아 저널에 발표하였다. (1840년에 독일어로 다시 출판되었다.) 또한 1831년 보여이 야노시가 로바쳅스키와는 독자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논문에 이러한 발견을 실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이러한 문제를 연구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는 이러한 내용을 출간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기하학은 후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로바쳅스키, 베른하르트 리만과 앙리 푸앵카레에 의해 쌍곡기하학과 구면기하학으로 발전되었다. 후설 비원순 고모음 후설 비원순 고모음(後舌 非圓脣 高母音) 또는 후설 평순 폐모음(後舌 平脣 閉母音)은 홀소리의 하나이다. 일본어의 "う" 발음은 평순도 원순도 아닌 발음이지만 로 표기하기도 하고 근후설 원순 근고모음의 옛 기호인 (소문자 오메가)로 표시하기도 한다. 주의사항: 서울방언에서의 ㅡ는 가 아니라 소리가 난다. 이이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향약의 보급에 참여하는 한편,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혼란해진 사회를 개혁할 방법으로 다시 건국 초기와 같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경장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의 종주로 추앙된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인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숙(당숙) 이기와 이행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쪽으로는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사육신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야사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말엽 관작을 삭탈 당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 능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높은 덕을 지닌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두었던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조광조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이원수는 신사임당 외에도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서모 권씨는 주모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신사임당에게는 근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권씨는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원한을 품지 않고 서모를 극진히 모셨다. 이이는 어려서 신동이라 불렸다. 그는 생후 1년도 안돼 말과 글을 깨우쳐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는데,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이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탄복하였다 한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주 병환에 눕자, 이이와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병구완을 하였다. 그러나, 1551년(명종 6년)에 어머니 신사임당은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이는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는데, 서모 권씨의 술주정과 괴롭힘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그는 외할머니 이씨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외할머니에게 의존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결혼하였고, 김씨 와 이씨 두명의 첩을 두었다. 그중 이씨의 서녀에게서 얻은 딸 이씨는, 이이가 죽은 뒤 그의 제자였던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첩으로 출가하였다.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경서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우계 성혼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랜 친구가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성수침의 아들이자 성수침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 파주는 친구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이이와 성혼은 시류의 타락을 논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1567년 선조가 인재를 추천받을 때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우계의 사람됨을 물었다.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다" 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비교적 냉혹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이이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자신이 낫긴 하나 수신하고 학문적은 노력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성혼역시 이이의 그러한 답변에 유감을 갖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1551년(명종 6년)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 이원수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묘소가 있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격이었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이이는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국 시묘살이를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가 뒤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입산 경력은 그의 생전에도 송응개 등의 동인(東人)들과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남인(南人) 당원들에게 이단 학문에 빠졌다는 이유로 사상공세를 당하는 원인이 된다. 이이가 승려이며 불교도라는 동인, 남인, 북인계열 유학자(儒學者)들의 사상공세는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지속된다. 조광조의 직계 제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생들과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師祖)가 되는 정암 조광조 조차 급진적이라며 거침없이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자신의 아호이기도 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입산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 하지만 율곡 이이가 주기론을 말하고 아래의 연비어약 (鳶飛魚躍) 시를 남긴 것은 이미 불교에 대한 공부를 마쳤음을 말한다.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1555년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이가 죽고 2백년이 지난 뒤에도, 근기남인의 지도자 허목, 윤휴, 윤선도는 이율곡을 학자의 탈을 쓴 스님이라고 공격했다.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 중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들은 그를 이인(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논적으로 규정한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또한 친구 성혼과의 인연으로 대곡 성운, 남명 조식 등도 찾아가 그들과도 사물과 이기론, 주자와 육구연 등을 담론하기도 했다.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이후 이조좌랑을 거쳐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나, 명종대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은 대왕대비의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지 않고 재상직에 있으면서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인순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심통원은 삭탈 관직되어 쫓겨났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꾸준히 이황, 조식, 성혼, 정철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1568년(선조 1년) 천추사(千秋使)가 명나라로 갈 때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동행한 뒤, 1569년 귀국 후,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곧 홍문관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에 겸임되었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퇴청후 오랜 친구인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놓고 서신으로 장기간 토론하였다. 그해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1569년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심 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심의겸은 율곡 이이가 자신의 종조부 심통원 등을 공격하여 탄핵, 몰락시켰음에도 이이에게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을 갖지 않고 계속해서 친하게 지냈다. 심의겸은 이이를 인격적으로 신뢰하였다. 이이는 그런 심의겸의 인품에 탄복하여 을해당론 이후에도 심의겸을 구원해주려 노력했고, 심의겸은 이이를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대하였다.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위선과 형식, 겉치례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이러한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웠다.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 특히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이이의 스승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이준경 역시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재종조부 이기는 그가 공격했던 동고 이준경과 정적관계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원한관계로 그가 이준경을 싫어한다, 미워한다는 인신공격성 낭설이 돌기도 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기중심의 설을 성리학자 답지 않게 도에 치우쳤다며 공박했고, 이황의 사단칠정인 이기호발설을 비판하여 이와 기는 한 몸체에서 나온다며, 기는 능동성이 있지만 이는 없기 때문에 사단 뿐만 아니라 칠정도 기가 발동하고 리가 그것을 탐으로서 발생된다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했다. 조식에 대해서는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겠지만, 학문을 하면서 실제로 체득한 주장과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은 없다'며 정구, 정인홍, 김우옹 등의 문인들이 그를 추앙해 도학군자라고 하지만 이는 지나친 말이라 하였다. 이는 서경덕과 조식, 이황의 문하생, 추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허엽과 김효원, 송응개, 윤승훈, 허봉, 송응형 등은 이이를 줄기차게 비난하고,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사심 없이 사물을 판단하려는 그의 자세는 선조를 매료시켰고, 선조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하곤 했다. 젊은 나이에 왕의 자문역을 맡게 된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계속 그를 불러들였다. 사림의 천거로 친구 성혼이 중망에 오르자 선조는 율곡을 불러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그에게 성혼의 사람됨을 물었다. 율곡과 우계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동심일체의 교우관계를 지닌 사이였다. 하지만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서까지 떠받드는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이 답변 역시 일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다.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율곡은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율곡다운 정직한 답변이었다. 어느 땐가 선조가 "경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율곡은 "전하께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니 학문에 힘쓰고 노력하면 현주賢主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이러한 답변을 통하여 선조에게 현명한 임금이 되어 달라는 말을 한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진실되게 대답했다. 또 선조가 율곡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율곡은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 사사로운 충심을 주장하는 자보다 더 믿을만 하다고 보았다. 서경덕, 조식, 이황 등에 대한 비판 외에도 선조는 당대 저명 학자들의 인물평을 내려보라고 율곡에게 지시하였다. 선조임금은 우계와 더불어 당시 정승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던 사암 박순, 퇴계 이황, 그리고 스승 백인걸에 대해 인물평을 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평을 요구받은 율곡은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조광조의 문하생 중 수제자요, 자신의 스승이자 노상 자신이 가까이 모신 어버이 같은 인물에 대해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였다. 이언적에 대해서도 박학하며 글을 잘 짓고, 몸가짐을 장중히 하고 입에서는 못쓸 말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는 데는 큰 재질이 없었고 벼슬에 올라가서도 절개가 없었다고 평했다. 또한 이언적이 옛 서적을 많이 읽고 저술을 잘했을 뿐, 가정에서는 부정한 여색을 멀리하지 못하고 조정에 나와서는 도를 행하지 못했다며, 그를 어찌 도학자로 추천할수 있겠느냐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동인에 의해 이이의 인격을 걸고넘어지는 꼬투리로 작용하게 된다. 1570년(선조 3년)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남도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1572년 이준경이 병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서 싸울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중심인물로 이이를 지목하였다. 화가 난 이이는 이준경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이이는 붕당정치를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며, 사람은 각자 사상이 다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이에 의하면 붕당은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무리가 아니라 뜻이 맞는 이들끼리의 모임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또한 상대방 정당이라고 해서 전부 소인배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는 글을 쓰자 그는 이준경을 향해,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일부 사림 인사들은 그의 종조부 이기가 이준경과 원수였던 것과, 관료생활 초반 그의 솔직함을 비판하고 예의 없는 인간으로 몰고간 것에 대한 한풀이로 해석하였다. 뒤늦게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 분당이 확실해지자, 그때 당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이준경을 가리켜 '임금을 도로서 인도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잘난 척 하면서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다'고 하였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 머무르며 친구인 성혼과 이기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등을 논하였다. 주로 성혼의 주장에 이이가 반박 또는 보충설명을 하거나,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형식이었다. 이때 성혼은 이황의 이기이원론도 옳을 수 있다고 하여 장기간 서신과 방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윤근수, 윤두수, 정철, 송익필 등이 그와 친해졌고 그는 자연스럽게 서인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1573년(선조 6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곧 병조참지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고 다시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74년(선조 7년)에는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도 감사로 부임, 약 반 년 간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사간원대사간·사헌부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의정부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아동교육서 겸 문맹 계몽,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한 기초지식 교육 서적인 《격몽요결 (擊蒙要訣)》을 저술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주자학의 핵심내용을 요약한 요약본인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저술, 발간하여 보급시켰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 기자의 일대기인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집필하였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만 9번이나 임명되었고, 선조의 신임은 계속되었다. 158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가 곧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대사헌으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과 홍문관대제학을 겸임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선조의 왕명을 받고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으며, 같은 해 김시습의 일대기 《김시습전 (金時習傳)》과 학생 계몽서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저술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는 동인의 김효원, 서인의 심의겸과 정철을 동시에 탄핵하여 양당의 강경파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킴으로써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그가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것과, 그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서모(庶母) 권씨와 싸웠던 점을 집중 부각시켜 그를 공격하였다. 또한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첩을 거느리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그가 첩을 두명 거느린 점 역시 동인(東人)당의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동인들은 그의 재종조부 이기가 장리(탐관오리)의 사위라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했으나 이언적의 구제를 받고 출사했는데도 명종 때 을사사화에 가담하였고, 말년에 권력을 농단하다가 삭탈관직 당한 것까지 그에게 연결시켜서 공격하였다. 이이는 동인, 서인이 모두 학문을 하는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시국관, 환경, 의견의 차이, 개인의 사상, 관점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당초 주자가 처음 주장했던 진붕, 위붕이나 군자당, 소인당 등으로 나누는 군자소인 구별론은 이제와서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과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을 제시하게 된다. 그는 동인, 서인 갈등의 시발점인 심의겸, 김효원 간의 알력, 시비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적용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같이 조정에 출사하여 국사와 민생문제를 논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당쟁의 조절과 정쟁 중단을 촉구하였지만, 동인, 서인 붕당은 기존의 군자의 붕당과 소인의 붕당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고수했고, 서인을 군자의 붕당, 동인은 소인의 붕당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쟁을 조절하는데 노력하였지만, 비교적 서인의 입장에 서서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고, 이는 동인에게 늘 불평불만과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당쟁 조절을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정여립은 서인에서 탈당하여 동인으로 건너간다. 그는 어느 붕당에나 군자, 소인이 있음을 거듭 반복하였다. 또한 자신을 비판한 동인계 인사에 대해서도 석방 사면을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583년 자신을 면전에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소인, 간신으로 공격하는 송응개 등 삼사의 언관에 대해서는 사면 요구를 거부하며, 엄정한 시비분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당쟁을 조절할 목적으로 심의겸과 김효원을 동시에 비판하고, 정인홍과 함께 상주하였다. 그런데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의하면 정인홍이 그뒤 홀로 심의겸을 공격하면서 심의겸이 윤두수, 윤근수, 정철을 끌어들였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이이가 정인홍에게 정철은 기개가 있는 사람이라 심의겸이 시키는 데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라고 반박하고, 내가 정철을 추천했는데 지금 정철이 탄핵한다면 나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정인홍이 난처해지니까 이이가 글을 올려 정철이 심의겸의 무리가 아니라고 하고, 자신의 관직을 체직시킬 것을 상소했다. 이때 윤승훈이 보통 사람은 뜻이 같고, 성격도 같은 뒤에 친해지는데 이미 정은 두텁다고 해놓고, 어떻게 성격은 멀어서 같지 않다고 하느냐고 반박했다. 이이는 윤승훈에게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 송나라 때의 사마광, 왕안석, 소식과 장돈 등이 사귈 때 정은 형제같았지만 속마음은 연나라, 월나라와 같았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윤승훈의 반박을 불쾌하게 여긴 이이는 사석에서 "윤승훈은 무식해서 사림에게 붙어서는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였다. 동인에서는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이이의 인격을 언급하며 비판하게 되었다. 이이는 조선이 건국하고 2백년이 경과하였으므로 다시 사회의 기강을 바로세워 관민에게 다시 개국 초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며, 변법 경장론을 주장하였다. 율곡 이이가 말하는 변법경장(變法更張)은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제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지적한 뒤 주장한 것으로서 다음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율곡 이이가 당시 개혁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율곡 이이는 조세 제도에 대한 철저한 관리 및 대장 기록의 중요성도 설파하였다. 탐관오리가 공납이나 진상물을 빙자하여 갈취한 물품을 사적인 축재에 쓴다며 거듭 주장했다. 또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월에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평소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확보하고,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이이는 당색을 초월해서 인재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동인과 서인에 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있을 수 있다며, 서인에 군자가 있으면 소인도 있고, 동인에도 소인배만 있는게 아니라 군자도 있을 수 있다며, 당파 위주로 서로 자기 당파 사람만 천거하고 끌어주고 밀어주는 인사정책에 반대하며, 당색을 떠난 채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같은 서인들로부터도 동인에게 우호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양반에게도 똑같이 군역을 부과하고 병력을 증강할 것을 주청하였다. 군사비용 발생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불필요한 관직자의 수효를 줄이고, 실직에 있지 아니한 자에게는 품계 역시 회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양반들의 집단 반발에 부딛쳐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삼아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딛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이의 납속 허통 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서얼 허교 주장 역시 유학자들에 의해 태종 이방원의 유지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비난을 계속하였고, 동인에서는 그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교에 입문했던 점을 계속 들먹이며 그가 사회를 어지럽힐 생각으로 서얼의 허통을 주장한다며 공세를 계속하였다. 그의 서얼 허통은 신분제를 문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동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같은 당인 서인들로부터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동인인 류성룡과 정구가 그의 서얼 허통 주장에 '인재를 가려 쓰는 데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당색을 초월하여 동의하였다. 또한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무사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미구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을 보았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은 일찍이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이의 다른 제자들은 정여립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고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고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이 역시 정여립의 재주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의 과격성을 눈여겨보았고 때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훗날 정여립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이의 문하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서인당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율곡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한때 정여립의 재주를 아껴 총애했다던 이이는 죽기 석 달 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관직(이조판서직)의 사퇴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면서, "정여립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의논이 과격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다"고 지적하였을 정도였다. 이에 선조 임금도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쓸 때는 그 이름만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이처럼 평하고 배척하였던 데는 다른 사적인 문제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그 때는 동인과 서인간의 대립이 점차 양극화되기 시작한 때였고, 선조는 이를 제대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런 때에 재주와 출세 의식,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이와 선조는 경계했던 것이다. 정여립이 뛰어난 재질과 대담한 용기를 가진 인물임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선조와 그 측신들은 정여립이 이이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를 향리로 추방하고, 결국 반역의 굴레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정여립은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널리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특히 시경과 훈고, 물명(物名)에 정통한 것으로 자부하였다. 그는 이이의 문하만이 아니라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이와 성혼도 정여립의 박식, 총명함을 좋아하여 그를 조정에 적극 천거하기도 하였다.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한 정여립은 다시 스승인 이이의 문하에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이 문하에 드나드는 선비들이 오직 서인뿐이고 동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자, 이이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이이는 동인들의 공격으로 동인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한편 다시 찾은 스승 이이가 아직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리라 생각했던 정여립은 실망하게 된다. 이미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는 이미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서인이 대부분인 이이의 다른 제자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정여립에 대한 이이의 불신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공격을 받게 되었고, 끝내 그 보복을 받았던 것이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당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갑자기 과로로 쓰러진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요양하게 된다. 하루는 그가 출근 길에 현기증을 느끼고 주저앉은 것을 놓고도 동인 측에서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비난을 가했다. 동인은 계속 그를 탄핵하고 공격하였다. 그는 일단 당쟁의 조절을 위해서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을 비판하였고, 정인홍의 심의겸 탄핵 상소에도 동조하였음에도 1583년(선조 17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거듭된 탄핵으로 스스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돈녕부판사에 임명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동인의 당원 송응개는 조정에서 이이는 나라를 말아먹은 간신이라고 면전에서 혹평하였다. 송응개는 이이가 불교 승려가 환속해서 자기가 최고라고 우기며, 언제는 심의겸도 좋다, 언제는 김효원도 좋다고 양비론을 펼치며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이니, 이이 같은 자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이 아니냐고 혹평을 가했다. 이이는 자신을 공격하다가 파직되거나 탄핵된 인물들이 자신을 비판한 이유를 꼼꼼히 따져보고, 오히려 자신을 비판한 이들의 석방과 탄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송응개가 처벌받을 때는 한 장의 탄원서도 써주지 않았다. 동인은 이이가 집무를 마치고 퇴청하던 중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비틀한 것까지도 문제삼았다. 결국 그의 당쟁을 조절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동인들에 대한 이이의 미움과 원망, 인간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당쟁 조절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 같은 서인 당원들 일부에게도 인간적인 혐오감과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1583년(선조 16년) 정여립은 예조좌랑이 되었는데, 이어서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다. 이이는 당시 이조판서직에 있었으며, 아마도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간파하였던지 그의 임명을 반대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의 과격성을 보고는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이는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관직 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가 죽은 두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이이를 비난하고, 동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결국 정여립은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는 붕당에 대해서도 소인이라 하더라도 그 재주를 취해야지, 소인배들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성혼, 류성룡, 정구, 우성전, 송익필, 조헌 등의 지기들에게 당쟁을 조절하려다가 동인의 미움을 산 일을 한탄하며 통곡하였다.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지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하고 와병하였다.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요양하던 중 차도가 없음을 알고 한성으로 내려왔으며, 1584년(선조 19년) 음력 1월 16일 새벽 한성부 대사동(大寺洞) 자택에서 향년 4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다. 문인으로는 조헌, 김장생 등이 있다. 이 중 김장생은 그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는데,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 되면서 학문적 연원을 이이와 성혼에게서만 찾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어가를 타고 의주 파천길에 한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동인과 동인의 분파인 북인, 남인은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光國原從功臣一登)에 특별히 추록되었다.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선영에 장사되었다. 증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부인 교하 노씨와 하녀 1인이 그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묘소를 지켰다. 왜군이 노씨와 하녀를 겁탈하려 하자 이들은 자결로서 항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후대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누가 부인 교하 노씨이고 누가 하녀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시신은 율곡 이이의 묘소 앞에 합장하였다. 부인과 하녀의 묘소가 이이의 묘소 앞에 소재한 것은 그 때문이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의 애제자 김장생 등의 공의로 고향 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설립되었다. 문성사는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왕이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慈雲書院)이라 하였다. 1631년(인조 8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이이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이항복(李恒福)이 글을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새겨 넣었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인조 때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났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다시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다시 문묘에 종사되고 계속 제향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으며,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그밖에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 되었다. 1972년 7월부터 대한민국에서 발행중인 5천원권 지폐 도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몇번에 걸쳐 화폐 도안이 변경되었으나 5천원권의 주인공으로는 계속 채택되고 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대한민국에서 조폐를 할 능력이 없어서 지폐를 영국에 위탁했는데 영국에서는 이이를 그의 초상과는 너무 다르게 묘사했기 때문에 결국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2007년 신권이 도입되었을 때도 기존 화폐에 그려진 초상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그려졌고, 1천원권 지폐, 1만원권 지폐와는 달리 동일인물임에도 초상이 계속 변모했다. 박정희는 그의 개혁안을 높이 평가하여 이순신, 세종대왕, 광개토대왕, 이황 등과 함께 역사적인 국민 영웅으로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이의 사상과 학문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김집, 안방준, 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한원진(韓元震) 등 서인 노론으로도 이어졌고, 우계 성혼의 문인들과 결속한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김집의 또다른 문하생 일부, 윤황과 윤선거 등을 통해 서인 소론에게도 계승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도망노비 발생 및 신분제도 해체가 가속화되자 이이의 문하생들은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반발,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사회 운영을 합리화하며 송익필 계열의 예학을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이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임을 재선언했고,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했음을 강조했다. 이이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서인은 계속 이이의 성균관 문묘 종사운동을 벌였고, 이이는 스님일 뿐이라는 근기남인계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정면반박을 받게 된다. 당초 집권세력의 견제를 위해서는 반대세력이 소수나마 존재해야 한다, 붕당에 관계없이 어느 당에도 소인과 군자는 있다는 이이의 견해를 고수하던 서인, 노론은 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남인과 연립정권 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을 계기로 이이의 견해를 버리고 남인 및 반대파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그의 학문 즉 성리설의 특징은 논리적이다. 반면에 이황은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은 그의 실용사상을 사장시키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으로 나아가 당쟁을 격화시키게 된다. 당시 성리학이나 다른 학문에서는 사물, 어느 국가나 사회에 생성기, 창업기와 수성기가 있고, 그 다음으로 멸망, 소멸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이는 수성기와 멸망 사이에 경장(更張)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시작, 창업기를 거쳐서 창업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위기를 겪고 이를 잘 극복하는 것을 수성이라 하였다. 수성기의 단계를 거친 뒤에 어느정도 시간이 잡히고 정착된 뒤에는 다시 관료주의에 빠지거나 무사안일, 퇴폐에 빠진다고 보았다. 이때 그는 다시 국가와 사회를 다시 다잡을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러한 중쇠나 관료주의, 고착화를 극복할 대안으로 다시 팽팽하게 조인다, 다시 긴장시킨다는 뜻의 경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경장론(更張論)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장의 방법으로 변통(變通), 전면 개정이 아닌 일부 수정, 재정비를 경장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조선이 건국한 뒤 어느정도 체제는 안정되었지만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는 중쇠기(中衰期)의 단계라고 보고, 일종의 국가 재건, 조직 재건과 비슷하게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경장(更張)이라 하였다. 그는 당시 시대가 바로 경장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전통이나 구질서에 집착하지 말고, 기존의 것을 현실에 맞게 수정, 고치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에서 경장의 방법, 사회를 다시 개혁하는 안,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만언봉사》에서 그는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시대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각종 제도와 법을 마련하거나 기존의 법, 제도를 정비해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습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변화된 시대나 생활에 맞춰서 현실에 맞도록 고치고 개정하는 것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 보았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제도나 법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다면 그 시대 분위기, 환경에 맞게 제도를 개혁, 정비해야 되고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을 할수 있다, 그리고 시대의 문제와 사회의 부조리,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소, 구제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조선 중기를 중쇠기로 지적한 이유로, 각종 민생 범죄, 유랑민 증가, 왜구나 여진족의 수시 약탈, 양반 관료층의 기강 해이 등을 들고 이를 백성들의 경제적 파탄현상으로 진단했다. 그는 이러한 백성들의 생활 파탄의 원인으로 각종 오래된 제도와 인습의 폐단, 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이상론, 관념론에 대한 집착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경장의 방법으로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 노인과 아이에게까지 거둬가는 세금과 각종 지방관과 향리들에 의한 가렴주구 개선, 세금 납부 항목과 국가 조세 등에 대한 일원화 및 세금액수 균등화 등을 제시했다. 그는 국가와 사회의 재정비가 필요하고, 그 재정비의 방법으로 그는 큰 틀은 유지하되 법률 개혁, 제도 개선 등을 통해 당시 현실, 시대상을 반영하게 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백성들의 사회교화 역시 경장의 하나라고 보고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하고 지방에 서원, 향교, 서당의 건립을 보급, 적극 장려하여 지방 인심 습속의 교화를 역설했다. 그는 이와 기는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로서 이기호발설을 배격하였다.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즉 이황의 설은 호발설이고 이이는 일도설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칠정설인 기발이승설만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사단설인 이발기수(理發氣隨)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그것은 이황과 사단칠정설논쟁을 벌인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경덕에 대해서도 기중심의 설로서 독창적이지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 그의 설은 기가 운동하고 이는 그 원인이 된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훗날 영남의 유직이 효종원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이의 설을 불교와 육왕(육구연과 왕수인)과 같은 주기설로서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이황이야말로 주리설로서 정학이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이이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후 주리설은 정학이고 주기설은 이단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상소로 인하여 유직은 조정으로부터 처벌받아 과거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이 역시 기의 뿌리가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주리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황과 이이 모두 기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모두 이일원론 또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의 사상처럼 정당을 군자의 정당과 소인의 정당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 명종 때까지만 해도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죄악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는데, 그는 붕당을 부정할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이의 붕당관은 기존의 성리학적 붕당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소인의 정당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군자의 정당을 상대적으로 많이 등용함으로써 문제를 줄여가는 것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기존의 유교나 성리학의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간이자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이는 그의 저작 자경문(自警文)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을 규정하였다. 또한 격몽요결의 4장에서 율곡은 독서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를 따져보고(窮理), 선(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독서를 세상,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이이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친구인 성혼과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성혼은 백인걸 외에도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과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스승인 백인걸을 자주 찾았는데, 이이가 백인걸과 함께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인물평을 논하면서 정암과 퇴계의 우열을 놓고 평을 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에게 조광조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훌륭하였지만 학문이 성숙하지 못한 채 관직에 나가서 일을 그르쳤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는 다시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사람인 김굉필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율곡이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은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 이황이라는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하고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십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이준경이 당쟁의 화를 예언했을 때, 그는 뒤에 후회하고 신념을 바꾸기는 했으나 이준경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여 그에 대한 처벌 여론을 형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유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했는데 이는 후일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북도 지역이 집중적으로 호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당쟁의 조절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인의 입장에서 조절하려 노력한 한계점이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그가 동인 인사들이 유배되도록 사주했다며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았고 또 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세 차례에 걸쳐 귀양 보낸 일에 손을 쓴 것은 경솔했다.'며, '이 일로 조정이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이는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 역시 잘못이다. 그는 선조를 착한 개혁군주로 만들어 조선을 재건하려는 정치노선을 신봉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물에게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물론 의지박약으로 큰 뜻을 세우지 못하는 왕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조처럼 좋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기에 이이는 착하지만 세상일에 뜻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결과 지나치게 왕에게 집착했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1579년의 곽사원의 제방송사가 정언지 등에 의해 1589년 터지게 된다. 이 10년 된 사건은 결국 주관 부처인 공조의 참판 정언지의 상소로 선조의 결심을 얻어 조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혹이 있는 송익필 일가의 뒤를 이이가 봐주었다는 것이다. 토목 공사를 둘러싼 부정 사건에 송익필의 조카 사위(송익필의 형 송한필의 사위)가 관련되었고, 그 동안 이이가 이 사건을 극력으로 돌보아주었다는 의혹이 있다.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불신, 의혹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배후로)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 우성전은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 이발은 사헌부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 훗날의 남인 학자 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그가 (동인계) 사람들의 탄핵, 귀양을 배후에서 사주했다. 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19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승려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그가 사이비 학자, 학자의 탈을 쓴 중(불교 승려)이라고 인신공격성 비난을 가하였다.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허목이 율곡 이이의 문묘 종사를 바낻한 명목은 그의 학문이 유교가 아닌 불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허목은 이이가 당쟁을 조절하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며 이를 부인하였다. 백호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허목과 윤휴에 의하면 율곡은 유학자가 아니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에 불과한데 승려를 어떻게 문묘에 종사하느냐는 비난인 셈이었다. 허목의 비판은 결국 율곡 이이의 출가 경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그의 문묘종사를 막으려는 당파적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 어린 시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 허목, 윤휴 등이 이율곡을 학자가 아니라 불교 승려라고 몰고가자 분노한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를 이단 사이비라고 규탄하였고, 이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를 품게 된다. 성격은 솔직하였으며, 그는 위선과 가식을 극도로 혐오하여 꾸며서 말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위선과 형식, 겉치례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이러한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웠다.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 주로 이황과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동인과 남인, 북인은 그가 18세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점과, 그의 할아버지가 윤원형의 동료인 이기의 재종손이라는 점을 걸고 넘어지며 그를 계속 중상, 인신비방하였다. 성삼문의 백이 숙제 비판 역시 그르다며 백이 숙제도 옳고 주 무왕 역시 옳다는 양시론 역시, 대중을 현혹하고 혹세무민하려 한다는 이유로 동인과 남인 계열의 꾸준한 인신공격 대상이 되었다. 문묘에 배향되어 있으며, 갑술환국 이후 문묘 종사는 확정되었다. 또한 경기도 파주시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인 자운서원과 여생을 보낸 누각 화석정이 있다. 황해도 백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배향되었다. 파주 이이 유적(坡州 李珥 遺跡)이 2013년 2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율곡 이이가 썼다고 예언서로 전해지는 '칠언고결','옥룡자청학동비결','오백론사비기' 등이 있다. 이양숙, 덕수 이씨,그륜델 ,독일어 번역, 출판 1:《 율곡선생 행장기 Ein Stern im fernen Osten der koreanische Gelehrte Yul-Gok》 《Gründel, 2004 독일》 2:《 격몽요결 Wegweiser für die unwissende Jugend von Gelehrte Yul-Gok》《Gründel,2005 독일》 -7 3:《 율곡선생 의 금강산 시 Lyrische Reise in das Diamanten-Gebirge Koreas, Geum Gang san Shi》 《Gründel, 2007독일》 2004년 11월 후시미구 후시미 구()는 일본 교토부 교토 시를 구성하는 11개 구의 하나이다. 교토 시내 굴지의 주택지로 11행정구 안에서 최대의 인구를 가진다. 후시미 성 조카마치의 전통을 계승하는 상업 거점인 한편 교토 시 중심부나 오사카 방면의 주택 지역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만화 이나리, 콩콩, 사랑의 첫걸음의 배경이다. 춘추오패 춘추 오패(春秋五覇)는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가리킨다. 춘추시대의 5대 강국을 일컫기도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5의 수는 오행 사상(나무·불·흙·쇠·물의 다섯 원소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성립한다고 하는 사상)에 의한 것으로, 특별히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춘추오패는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가리키며, 기록에 따라서 진나라의 목공, 송나라의 양공 또는 오나라 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가 있다. 제 환공(齊 桓公, ? ~ 기원전 643년, 재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이름은 소백(小白). 제는 전설로는 주를 도와 은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태공망 여상(呂尙)이 문왕(文王)으로부터 산동성 임치(臨淄)에 영지를 받아 세운 나라로, 기원전 7세기에 환공이 왕이 되자 부강하게 되었다. 환공은 이복형 규(糾)와 싸워 즉위하고 재상으로 관중(管仲)을 등용했다. 관중의 헌책에 의해 어업·제염업·양잠업 등의 경제 정책을 장려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기원전 679년 제후(諸侯)와 견(甄)에서 회맹하여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기원전 651년 규구(葵丘)의 회에서 패업을 자랑했지만, 관중 사후에 3총(三寵)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사후 내란에 의해 두 달 동안이나 시체를 매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진 문공(晋文公, ? ∼ 기원전 628년, 재위: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晋) 나라의 제24대 공(公). 문공은 아버지 헌공(獻公)에게 추방당하여 19년 동안 열국을 유랑하다가 의형(義兄)인 진(秦) 나라 목공(穆公)에 의하여 62세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나라의 공이 되자 많은 현신(賢臣)을 얻어 먼저 주(周) 나라의 양왕(襄王)을 도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도록 하였고 잇달아 송의 청으로 인하여 초나라의 군세를 격파시켰다(기원전 632년). 제(齊) 나라의 환공(桓公)과 아울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패자에 오른 지 3년 만에 죽었다. 은원 관계가 철저하여 유랑 시절에 자신을 박대했던 정(鄭), 위(衛), 조(曺) 에게 복수하기도 한다. 초 장왕(楚 莊王, ? ∼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 ∼ 기원전 591년) 초(楚)나라 목왕의 아들로서 진(晋)나라 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역대 초나라 왕 중에 명분을 중시했던 첫 군주였으며 한때 진(陳)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명신 신숙시의 간언을 듣고 독립시켜주었다. 오왕 부차(吳王 夫差, ? ~ 기원전 473년, 재위: 기원전 495년 ~ 기원전 473년)의 아버지 합려(闔廬)는 초의 망명 신하 오자서(伍子胥)를 기용하여 기원전 506년 초의 서울 영(?)을 함락시켰는데, 월의 윤상(允常)의 침입에 의해 이후 오·월의 다툼이 시작됐다. 합려는 윤상의 사후 월을 공격했지만, 월왕 구천(句踐)에 의해 참패당하고 그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서약시켰다. 부차는 구천을 기원전 494년 회계(會稽)에서 격파하고 남방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북상하여 기원전 482년 진나라(晉)을 맹주로 하는 중원 여러 나라를 무력으로 누르고 패자(覇者)가 되었다. 강남 세력의 중원 진출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지만, 그 사이 월왕 구천은 오의 수도 쑤저우(蘇州)를 공격하여, 기원전 473년에 부차는 구천에게 대패하여 자살하고 오나라는 월에 병합되었다. 월왕 구천(越王 勾踐, ? ~ 기원전 465년, 재위: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5년)춘추시대 최후의 패자. 오왕 합려는 월에 침입했지만 구천은 그를 격파했다. 오왕 부차는 와신(臥薪)하여 2년 후 회계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구천은 명신 범려와 상담(嘗膽)하고 기원전 477년 부차를 고소(姑蘇)에서 포위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구천은 북상하여 산둥의 서주에 제후를 모이게 하여 패자가 되었다. 오·월의 싸움은 이 고사를 말한다. 연 (춘추 전국) 연나라(燕國)는 중국 춘추 시대의 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소강공(召康公) 석(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 연나라의 초기 역사에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남성(河南省)지역에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 郾)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 주민들은 대부분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사학자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다.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춘추시대에 연나라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기원전 664년에 북방의 산융에게 공격받았을 때, 당시 군주였던 장공(莊公)은 이웃나라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였고, 산융군을 격퇴했던 적이 있었다. 산융과 전쟁한 후, 장공은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나라 환공의 군대를 움직이게 하였다. 그 때에 군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을 넘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국에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왕(周王)이 가질수 있었고,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환공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하여 연나라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더욱 더 명성을 얻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으나, 내분으로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 된다. 한나라도 주나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신 혹은 황족들을 연나라의 제후로 삼아 성립하였다. 한 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은 한날 한시에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향우이자 전우였던 노관(盧綰)을 장안후(長安侯),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다. 노관(盧綰)은 국경지대의 혼란이 자신의 장기집권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흉노와 연계된 반란에 연합해 반란을 진압하란 명령을 어기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반란이 진압되버리는 바람에 흉노족에 투항하여,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던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으로 봉해지나 그 해에 동호에서 죽었다. 이 무렵, 노관의 부장인 위만도 1,000여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도망쳐 위만조선을 세운다. 위만 조선이 멸망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이 한 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었다. 가야산 가야산(伽倻山)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지질은 화강편마암 및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국의 3대 사찰 중 하나인 해인사와 신촌락(新村落)이 있는 치인리골과 홍류동계곡은 화강암 침식곡이다. 가야산은 소백산맥의 한 지맥인 대덕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나가다 경상북도 성주군,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에 걸쳐있는 명산이다. 주봉인 칠불봉과 우두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1봉, 매화산 등 1,000m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알려진 가야산은 산세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진다. 제 (춘추 전국) 제(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 시대의 춘추 오패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수도는 임치이다. 주의 문왕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강태공에게 봉토로 내린 땅이다. 당시에 주나라의 세력으로만 동중국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동이라는 불리는 이민족이 이 지역에 있었다. 영지를 하사한 것과 다르게, 태공망 강상에게 동중국 지역 세력들을 토벌할 것을 명한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고, 현지 풍속에 맞춰 정치를 집행하였고,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관숙(管叔)과 채숙의 반란 후에, 성왕은 "동쪽은 바다에 이르러, 서쪽은 하수에 이르러, 남쪽은 목릉에 이르러, 북쪽에 이르러서 5후 9백이 죄를 범했을 경우, 그들을 토벌해도 괜찮다."라고 명했다. 그 후도 영토를 확대하였고, 춘추 시대 초기에는 동쪽의 강국이 되었다. 제나라는 바다를 접하여 있어, 소금의 생산을 하였고, 철이 나오기도 하였기 때문에, 자원이 풍족하게 되었다. 이후 제15대 군주 환공 시대에 관중을 등용하여 주나라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통제하였고, 남쪽의 초나라의 위협에 대항했다. 기원전 667년, 환공은 주나라 혜왕에게 패자로 인정되어 그 자리에 올랐고,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환공의 사후에 환공의 아들들 간의 후계 싸움이 일어나 나라는 혼돈에 빠졌다. 환공이 태자로 지목한 효공 대신 환공의 총신 역아와 초가 지지한 무궤가 뒤를 이었고, 무궤는 효공을 앞세운 송 양공 주도의 제후연합군과 국내의 호응에 쫓겨나 죽었으나 소공 · 혜공 · 의공 세 형제가 효공의 즉위를 저지해 송 양공이 재차 제나라를 침입하고서야 효공은 즉위할 수 있었다. 효공의 치세에는 일단 안정되었으나 이미 패자의 권위는 잃었다. 혼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효공 사후에 효공의 아들을 또 다른 환공의 총신이며 소공의 당인 공자 개방이 죽이고 소공이 즉위하고, 소공이 죽은 후엔 일단 소공의 아들 사가 즉위했으나 얼마 못 가 의공이 죽이고 의공이 즉위하는 등 혼돈은 계속 이어졌다. 이 혼돈은 환공이 죽은 지 35년 후에 혜공이 등극함으로써 겨우 종식되었다. 그 동안, 이미 소공의 시대에 패자는 진나라의 문공이 되었고 소공은 문공의 패업에 협조했다. 문공이 패자가 되고 제나라도 그대로 국력을 유지하였지만, 중원의 주도권이 북쪽의 진(晉)나라와 남쪽의 초나라의 패자 쟁탈전으로 옮겨졌고, 그 상황에 제나라와 |진(秦)나라가 관련되는 것이 춘추 시대 중기의 흐름이 되었다. 그 때부터 서서히 대부들의 힘이 강해지고, 군주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다. 특히 제나라 공실의 지파인 국씨, 고씨, 최씨, 경씨와 제나라 밖에서 온 포씨와 진씨(陳氏) 등 6개의 가문의 힘이 강했다. 25대 장공 때, 재상 최저(崔杼)는 자신의 아내가 장공과 사통하였음을 알고는 장공을 시해하였다. 최저는 장공의 아우 경공을 세웠지만, 후에 경씨에게 죽었다. 기원전 532년, 경공은 안영을 등용하고 군사 분야에는 사마양저를 등용하였다. 기원전 672년, 진나라(陳)에서 공자 전완이 진나라 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로 망명하여 강력한 대부 가문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전, 손, 문, 설, 왕 등의 가문으로 창성하였다. 제 경공은 안영과 전양저 등의 명신에 힘입어 작은 패업을 이루었으나, 이 당시에 오히려 전씨는 제 경공의 실정을 틈타 민심을 사고 세력을 점차 강화했다. 이를 본 제나라 재상 안영은 진나라의 양설힐과 대화를 나누면서, 규성 전씨 왕조가 제나라에 들어 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기원전 489년, 경공이 죽자 전걸은 경공의 유지를 뒤엎고 제 도공을 임금으로 세웠으며, 전걸의 아들 전항은 도공을 죽이고 제 간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제 간공은 총신 감지를 끼고 전항과 대립했으나 전항은 감지와 간공을 모두 죽이고 제 평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후 전씨는 평공, 선공, 강공 3대를 걸치며 전항 - 전반 - 전백 - 전도자 - 전화가 이어가며 사실상 임금 노릇을 했다. 기원전 386년에 전화가 강공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었다. 위왕이 행정 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며 왕을 일컬었고, 기원전 4세기에는 제 민왕이 진(秦)나라와 중국을 양분하여 동제, 서제를 일컬을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다. 또 송나라를 멸하였다. 그러나 민왕의 지나친 팽창 정책과 외교적 충돌로 말미암아 연나라를 주축으로 하는 제후 연합군이 일어났고, 악의를 앞세운 연합군 앞에 제 민왕도 살해당하고, 거莒와 즉묵을 제외한 전 성읍이 함락되며 멸망의 위기에 놓였다. 민왕의 아들 제 양왕이 즉위해 항전을 이어 갔으며, 전단이 악의와 연나라 간을 이간시키고, 새로 온 대장 기겁을 무찌르며 나라를 회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양왕의 아들로 뒤를 이은 인물이 마지막 왕인 제왕 건이다. 건과 섭정 후승은 진나라와 친교를 맺고, 다른 나라들이 차례차례 진나라에 망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마침내 일개 성읍국가에 불과한 위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망하고서야 위협을 느껴 진나라에 대한 방비를 했으나, 기원전 221년 진 시황제가 침공하자 제나라에는 이미 이를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제왕 건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가지산 가지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각호산 각호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각화산 각화산(覺華山)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산이다. 갈기산 갈기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감악산 (강원/충북) 감악산(紺岳山)은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제천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945m의 산이다. 감악산 (경기) 감악산(紺岳山)은 경기도 파주시, 양주시, 연천군 사이에 있는 높이 675m의 산이다. 예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렀다. 백두대간이 금강산을 향해 달리다가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것이 한북정맥이며 한북정맥 양주에서 갈라져 적성 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감악산이다. 감악산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675m 산으로 삼국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감악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을 중심으로 북악, 송악, 관악, 심악 등과 함께 경기 오악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의 신산 중 하나로 《태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궁중에서 이 산에 춘추로 별기은을 지냈다고 한다. 산 중에는 폐사되어 없어진 감악사가 있었는데 삼국시대 이래로 군사적 요충지로 아래로 칠중성의 토성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다투던 삼국간의 혈투장이었으며, 거란침입 때도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으며, 한국 전쟁 때도 고랑포 전투의 주 전장이었다. 현재에도 주변에 군부대가 있다. 이 산에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있으며, 중부 지방에서 주요한 신앙처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감악산 밑에 자리잡은 '산머루농원' 와이너리에 들르면 머루로 만든 달콤한 와인도 시음할 수 있다. 등산이 허용된 코스는 범륜사와 신암리, 원당리 쪽이다. 범륜사로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운계폭로가 있고 중간 중간에 약수터가 있지만 갈수기에는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 산 정상에는 비석 글자가 마멸된 감악산비가 있는데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가 흡사하다 하여 ‘진흥왕 순수비’라고 주장하는 설과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설인귀비’라는 속설이 각각 전한다. 또 이곳의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 굴도 있다. 개인산 개인산(開仁山)은 강원도 인제군과 홍천군에 걸쳐있는 높이 1,341m의 산이다. 객산 객산(客山)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산이다. 높이 301m이며 남한산 줄기에 속한다. 옛날 마귀 할멈이 한양에 있는 남산과 같은 산을 만들려고 이천의 도드람산을 떠서 치마폭에 싸가지고 가다가 힘이 들어 이곳에 놓고 그냥 가버렸다는 설화가 있다. 객산이란 이름은 객지에서 온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 아래에는 선법사가 있다. 한 (전국) 한나라(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는 전국시대의 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이다. 수도는 초기에는 양책, 후기에는 신정(新鄭)이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소한(小韓)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영토는 북쪽으로는 지금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서쪽으로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이르렀고, 영토의 길이가 구백 리에 달했다고 했다. 또한 갑병 30만을 낼 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다. 그러나 기원전 239년 진나라(秦)의 장군 몽오의 공격으로 성 13곳을 빼앗겼고 곧이어 기원전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韓王安)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했다.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춘추 시대 진나라(晉)의 공족이며, 진 목후(晉穆侯)의 아들인 환숙(桓叔)의 아들뻘이 되는 한만(韓萬)이 한원(韓原)이라는 지역에 봉해졌던 것을 기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희성(姫姓)을 가졌던 한무자(韓武子) 한만의 일가들이 한씨(韓氏)를 칭하였고, 성씨와 땅이름에서 따와서 지칭되었다. 한원 지역에는 원래 주나라 선왕 때 분봉된 희성 제후 한후(韓侯)가 있었다. 이 한나라는 50여 년 동안 존속했다가 진(晉)에게 멸망했고, 바로 그 지역을 영지로 받은 것이 한만이다. 기원전 620년 한만의 고손자 한궐(韓厥)이 사마로 등용되었고, 그 군락이 뛰어났다. 과거에 신세를 지었던 조씨(趙氏) 일족의 재부흥에 힘을 보태었고, 그 여망으로 기원전 573년 한궐이 정경(正卿)과 중군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다. 한만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기원전 541년 그의 아들 한기(韓起)도 정경이 되면서, 그는 정치를 관장하는 대신인 육경(六卿)이 되었다. 춘추 시대 말기에는 한호(韓虎)가 조씨, 위씨(魏氏) 일족등과 함께 육경의 중에 강력한 가문인 지씨(知氏) 일족을 기원전 453년에 멸망을 시켰다. 후에 위씨, 조씨와 함께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독립하였다. 그 후, 기원전 403년에 주나라부터 정식 제후로 인정을 받아서 비로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을 시켰고, 전국 칠웅 중에 최약체였고. 항상 서쪽에 있는 진나라(秦)의 침공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신불해(申不害)을 재상으로 발탁한 한 희후(韓喜侯)의 치세에는 국내도 안정되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어서 즉위한 한 선혜왕은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였고, 재상 신불해가 죽은 후에는 다시 진나라의 침공에 시달렸다. 한나라의 패망을 우려했던 공자 한비(韓非)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을 저술하였고,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한비자(韓非子)이다. 그러나 한비의 주장은 모국인 한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진왕 영정(嬴政)이 한비자에 관심이 있었다. 한나라는 역으로 이용해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었다. 진나라가 관개 사업을 하도록 하고, 진나라의 국력을 쇄퇴시키려고 하였지만 이에 발각되었다. 이 공사로 만들어진 수로는 후에 정국거(鄭國渠)로 불리며 중국 고대 3대 수로 시절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진나라를 풍요롭게 하였다.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함락되었고, 6국 중에 가장 빨리 멸망하였고, 한나라의 영토 전체가 영천군이라는 새로운 진나라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기원전 226년 한나라 옛 수도인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 반란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한왕 안(韓王安)이 처형됐다. 강천산 강천산(剛泉山)은 전라북도 순창군과 전라남도 담양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583.7m의 산이다. 1981년 1월 7일에 첫 번째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353호, 금성산성(金城山城) 등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었고,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고쳐 쌓은 후 광해군 2년(1610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만들었다. 광해군 14년(1622년)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고 효종 4년(1653년)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외성은 2km, 내성은 700m 길이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동학 농민 운동 때 건물이 많이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내성 앞에는 국문영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위 (전국)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의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이다. 갑병 30만과, 말 오천 필, 전차 육백 승을 낼 수 있었다. 위나라의 시조는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인 필공 고(畢公高)이다. 아버지 주 문왕을 비롯한 주나라의 역대 군주들이 묻쳐 있는 왕릉이 있는 곳이 필나라였고, 그 곳을 무왕의 아우 고(高)가 필나라의 제후로 봉해졌고, 필공이라고 불린다. 그 후에 춘추 시대에는 필공 고의 후손인 필만(畢萬)이 필나라를 진나라(晉)에게 바쳤고, 나라를 바친 후에눈 진나라로 가서 필만의 일족을 이끌고 정착한 곳이 진나라의 공족(公族) 환숙이 다스렸던 곡옥(曲沃)이었고, 환숙의 손자인 무공(武公)이 필만을 등용을 하였고, 필만은 무공의 신하가 된다. 그 뒤에 헌공(獻公)의 밑에서 군공을 세웠고, 위나라(魏)를 헌공에게 하사 받고, 이후 필만은 위만(魏萬)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위씨 가문은 필만의 손자 위주(魏犨) 때부터 서서히 진나라 내부에 세력을 갖게 되었고, 춘추시대 말기 위서(魏舒) 때는 진나라의 육경(六卿)이 되었다. 기원전 453년 위구(魏駒)가 진나라 육경 중에 하나인 지씨(智氏)를 멸망시켰다. 후에 그의 손자 문후(文侯)때에 주나라 왕에게 제후로 임명되었고, 한나라(韓), 조나라(趙)와 함께 진나라를 영토를 삼등분으로 갈랐다. 기원전 445년 위 문후가 위씨종주가 되면서 내정에는 이극(李克), 서문표(西門豹)와 군사에는 오기(吳起), 악양(樂羊) 등 신하들을 등용하여 주변국보다 위나라의 국력이 강성하게 되어 칠웅 중 최강 국가가 됐다. 그리고 기원전 403년 위나라는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주나라 왕이 제후로 임명되었고, 전국시대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396년 문후가 사망하였고, 아들 위 무후가 위나라 군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싫어하던 하서태수(河西太守) 오기가 초나라(楚)로 망명한다. 그러나 무후는 뛰어난 군주라서 오기가 없어도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보다 나라 주변에는 무혈입성으로 위나라를 확장할 수 없는 약한 세력이 없었고, 위나라는 강력한 나라만 공격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끊임 없이 계속되었고,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370년 무후가 사망하였고, 아들 위 혜왕이 즉위하였다. 그가 다스릴때는 제나라의 장수 손빈(孫臏)이 공격해오자, 태자 신(太子申)과 장수 방연(龐涓)을 보내었고,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군은 제나라군에게 대패를 하였다. 그리고 공숙좌(公叔座)의 건의로 내친 상앙이 진나라(秦)로 갔고,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상앙의 변법을 시행하여 진나라는 국력을 강력해졌다. 기원전 340년 상앙이 이끄는 진나라군에게 대패하여 황하 이서 지역을 잃었고, 진나라를 두려워하며,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동쪽 지역인 대량(大梁, 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천도하였다. 대랑으로 천도를 한 이후는 별칭인 양나라(梁)로 대신 불렸다. 여기서 문후가 패자가 된 이후에 유지하였던 패자의 자리에서 내려갔다. 그 후에는 위나라의 재상 위제(魏濟)가 과거에 모욕하였던 식객인 범저(范雎)가 진나라로 망명하였고, 범저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를 시행할것을 요구하였고, 범저가 진나라 신하로 등용되자, 진나라가 위나라에게 압박하며, 위나라는 상앙처럼 범저를 중용하지 않아서, 진나라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러나 위공자(魏公子) 위무기(魏無忌)가 기원전 247년에 육국(六國)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을 물리쳤다. 후에 신릉군(信陵君)으로 봉작을 받고, 전국시대의 사공자에 꼽힐 만큼 거물이 된 신릉군은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 멋대로 위나라 군대를 함부로 움직였다고 규탄을 받고서 조나라에 도망을 쳤다. 후에 위나라에 소환되어도 위나라의 높은 관리가 되는 것을 멀리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술에 인해서 사망하였다. 신릉군이 사망하고는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저항을 못하고 위나라는 차례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검단산 (하남/광주) 검단산(黔丹山)은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에 걸쳐 있는 높이 657m의 산이다. 서울 근교에 있고 교통은 편리하지만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산세가 특이한 것이 특징이며 가파른 경사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사방의 전경이 시원하게 열리고, 서서히 정상에 오르는 길이 매우 다채롭다. 또한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이며 광주산맥의 지맥으로서 남한산맥과 연결되는 산줄기이다. 산의 최정상부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어 헬리콥터 착륙장이 건설되어 있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남한산(南漢山)의 한 줄기로 이어내려와 하남시 춘궁동·초일동·광암동 등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는 이성산(二聖山)과 금암산(金岩山) 그리고 일자산(一字山) 등이 이어지는 산이다. 삼국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초기 한성백제에서 쌓은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던 산으로 보인다. 백제 한성시대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 진산(鎭山)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라 전해진다. 또한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세종대왕의 능을 이곳에 쓰려다 여주로 옮겨가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묘가 있다. 검단산의 유래에 대해서 대략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제시대 검단선사(黔丹禪師)가 그 산에 은거하였어서 선사의 이름을 따서 검단산(黔丹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검단선사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북 고창의 유명한 사찰 선운사(禪雲寺)의 창건 설화 중 신라진흥왕이 세웠다는 것과 백제 위덕왕(525년 ~ 598년) 24년인 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세웠다는 것이다. 만일 동일인이라면 검단선사가 검단산에 있었던 것은 6세기 중반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검(黔)'은 한자 뜻이 '검다'인데 고조선 때 단군왕검같이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 → '임검(壬儉)' → '임금'이라 불렀듯이 '검(黔)'은 '금'이 되어 즉,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단(丹)'은 현재의 한자 뜻인 '붉다'와는 다른 '제단'이란 뜻으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한때는 검단산의 검(黔)을 '금'으로 읽어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실제로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에 왕이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검단산은 한강과 인접해 있어 산세의 막힘이 없고 동, 서, 북 3면의 조망이 뛰어나며, 남한강, 북한강과 팔당댐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이 한강에 접해 있으므로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의 집산지 였기에 이곳에서 '검사하고 단속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산 입구에 창우동(倉隅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창우동이란 '창고가 있던 곳'이란 뜻이다.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던 산으로 검단산 일대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 4년 이래 근고초왕 26년까지 무려 370년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위례성을 검단산과 남한산의 북쪽 산줄기 가운데 '고골' 일원으로 추측된다는 얘기도 있다. 검단산 정상에는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고 최근까지 군부대가 있었다. 정상은 단체게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넓은 공터가 있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팔당호수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방으로 막힘이 없어 해돋이나, 해넘이 구경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한남정맥의 지맥 끄트머리에 솟아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운길산, 예봉산과 이웃해 있는 검단산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산 높이는 관악산과 비슷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서 이 산을 '광주목의 진산'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산세가 특이하다. 처음에는 가파르게 고도를 높이다가 마루금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전경이 펼쳐진다 산길은 창우동에서 출발해 유길준 선생 묘역∼고개를 거쳐 정상에 오른 뒤, 고추봉∼용마산을 거쳐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로 하산하는 종주 코스로 잡았다. 애니메이션고교 옆 산길 들머리의 두 갈래 길 중, 왼쪽의 너르고 평탄한 길로 들어선다. 유길준 선생 묘역을 지나 능선상의 안부인 큰고개까지는 30분이면 충분히 닿으며, 고개에서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산행으로 고도를 올리게 된다. 산길 중간중간 시계가 트이는 곳으로 아름다운 코발트색 한강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고도를 올릴수록 동쪽 산자락 아래로 짙푸른 팔당호의 모습도 잘 내려다 보인다. 정상 직전 봉우리 아래, 동쪽으로 시계가 열린 전망대에서 두물머리와 팔당호, 눈을 이고 있는 용문산의 모습에 취해 있노라면 어디선가 날아와 사람들의 손바닥에서 먹이를 찾는 딱새의 모습은 정겹고도 안쓰럽다. 사방으로 시계가 열리는 검단산 정상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한강을 함께 수호하듯 서 있는 맞은편(북동쪽)의 예봉산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동쪽 멀리로 백운봉으로 이어지는 용문산의 산줄기도 힘차고 기품있는 모습이다. 정상에서 남쪽 계단으로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길은 호국사를 거쳐 창우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능선을 따라 그대로 나아가면 또다시 오른쪽 산곡초교로 이어지는 갈림길(샘터)을 만나고, 여기서도 능선을 따라 계속 직진하여 나아간다. 오솔길처럼 편안한 길을 지나 제법 힘들게 봉우리를 오르면 고추봉은 한발 더 뒤쪽에 서 있다. 고추봉은 삼각점과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팻말로 확인할 수 있는데, 내려서는 길은 굴참나무가 많은 급경사 내리막을 이룬다. 제법 번듯한 정상석을 이고 있는 용마산에서 숨을 고르고, 능선으로 잠시 진행하여 갈림길이 나오면 이제 오른쪽(서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낙엽 두터운 길을 내려서다가 정면의 봉우리로 올라서면 평탄한 능선길은 슬그머니 왼쪽으로 이어지는데,415봉 직전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자락을 가로지르는 길로 들어선다. 나무에 방향표시(승우산악.415봉, 엄미리)를 잘 해두었다. 송전탑과 무덤을 차례로 내려서 만나는 안부 갈림길에서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산자락을 가로질러 완만한 길을 내려서면 이내 중부고속도로가 보이고 낚시터와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43번 국도변의 엄미리 버스 정류소에 닿는다. 계관산 계관산(鷄冠山)은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춘천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665m의 산이다. 월드컵 월드컵(World Cup)은 주로 스포츠의 단체경기에 대해 행해지는 국제 경기를 말한다. 대개는 축구의 FIFA 월드컵을 의미한다. 계룡산 (경상남도) 계룡산(鷄龍山)은 경상남도 거제시에 높이 566m의 산이다. 거제도 중앙에 우뚝 솟은 산으로 동서남북의 4개의 산이 마치 머리를 조아리듯이 하고 있다. 조 (전국)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 전술을 도입한 나라이기도 한다.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 필을 낼 수 있었으나 조나라는 기원전 228년 진시황제에 침공을 받았고 이때 왕족인 대왕은 멀리 대나라로 쫓겨가 대(代)나라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시황제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주 목왕(周穆王)의 신하인 조보(造父)가 조성(趙城)으로 봉해졌다. 그 후에 조씨(趙氏)를 칭하였고 조씨 가문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후 조씨 일족은 진나라(晉)의 신하가 되었다. 진 문공(晉文公)의 측근인 조성자 조최(趙成子 趙衰)가 높은 관직에 올랐고 조씨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다. 춘추시대 말기에는 진나라를 실질로 다스리는 육경(六卿)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재상 조선자 조순(趙宣子 趙盾) 사후에는, 조씨 가문은 여러 가문에 견제되고 숙청되고 조 선자의 손자 조 문자 조무(趙文子 趙武)가 등장할 때 까지 몰락한다. 기원전 456년 육경 중에 세력이 강했던 지씨 일족의 수장인 지양자 지요(智襄子 智瑶)가 한씨, 위씨 일족을 거느리고 조씨 가문을 멸족하게 하려고 하였다. 조씨 가문의 수장인 조 양자 조무휼(趙襄子 趙無恤)은 한호(韓虎), 위구(魏駒)에게 말하기를 "지씨는 탐욕스러워, 우리 조씨가 멸족 된 뒤에는 당신들 차례다"라고 말하면서 설득에 성공한다. 세 가문에 역공당하여 지씨 가문은 멸망하고 진나라의 영토를 조씨, 한씨, 위씨의 세 가문이 나누었고 각각 독립하였다. 그 후에 기원전 403년에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정식으로 제후국이 되었다. 조 무령왕 시대에는 주나라보다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 조 무령왕은 기원전 307년 호복을 도입하였다. 호복은 당시 북방의 유목 민족이 입던 바지다. 당시 중국에는 사대부들은 헐렁한 옷 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으며. 전시에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형태였고 말을 타고 싸우기에는 옷이 매우 불편했다. 조 무령왕은 북방 기마병의 복장에 눈독을 들이고 자국에도 호복을 도입하고 싶었다. 이에 실행하고자 전차에 타는 병사들에게 호복을 입혔고 말에 직접 걸친 훈련하였다. 조나라의 경대부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지만, 조 무령왕은 강력히 실행하였고 조나라의 기마병은 큰 위력을 발휘하여 조나라의 세력은 확대하였다. 기원전 298년 조 무령왕은 양위했다. 왕위는 자식의 혜문왕에게 물려주고 주부(主父)라고 자칭하였고 실질에 부합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기원전 295년, 혜문왕과 공자 장[公子 章]의 후계 다툼이 일어났다. 그 일로 인하여 무령왕이 유폐되었고 뒤에 굶어죽었다. 조나라의 전성기가 끝나고 진(秦)나라의 공세에 시달리는 약소국이 되었다.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 마복군 조사(馬服君 趙奢)와 같은 명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 명장들에 의해 조나라는 당분간 버티지만 인상여가 사망한 후에는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에게 대패하였고 조나라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고 조나라는 급격하게 약해졌다. 장평 전투에서 승리한 진나라군이 수도 한단(邯鄲)에 진군하였다. 백성이 굶주리고,아이들도 죽어가는 등 조나라가 멸망 직전에 몰렸지만, 조나라의 백성이 일치단결하자 전국 4공자 중에 한 사람인 재상 평원군이 위나라의 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하였고 지원군이 오자 진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에는 군사상 쇠퇴한 조나라이만, 여전히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가 모였다. 유명한 학자로는 평원군의 식객이자 명가(名家)를 대표하는 인재인 공손룡과 음양가를 대표하는 인재인 추연이 있었다. 그리고 조나라 출신의 학자로는 역사서 『虞氏春秋(우씨춘추)』를 저술한 우경(虞卿), 언행록 『劇子之言(극자지언)』을 남긴 극자(劇子), 종횡가, 병가의 두 분야에서 저작을 남긴 방난(龐煖)이 있으며, 명장 악의의 친족으로 도가의 황로사상을 계승한 악하공도 조나라 멸망 직전까지 조나라에 머물었다. 장평 전투에서 패배한 효성왕도 유학자 순자(荀子)와 초나라의 출신 병법가 임무군(臨武君)을 불렸고 군사에 대하여 물어보는 등 인재 등용에 적극으로 진력했다. 유목왕 때에는 흉노에서 국경선을 지킨 명장 이목(李牧)이 있어 진나라군을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공격을 한시로 막은 장수로는 초나라의 항연(項燕)과 이목 등 두 명 뿐이었다. 그런데 이목도 유목왕의 총신인 곽개(郭開)의 참언을 받아들이고 이목을 죽였다.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장수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수도 한단이 함락되었고 유목왕이 진나라군에 사로잡혔고 조나라는 멸망하였다. 그 후에 왕족인 조가(趙嘉)가 대(代)라는 지역에 피하여 대왕(代王)을 칭하여 조나라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조 대왕의 조나라도 연나라와 함께 기원전 222년에 완전하게 멸망되었다. 계명산 계명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계방산 (강원) 계방산(桂芳山)은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 사이에 있는 높이 1,577m의 산이다. 주목, 철쭉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일대가 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 되었다. 정상의 동남쪽 아래 방아다리약수터 일대의 수만 평에 조성한 낙엽송 전나무 숲과 주목 군락은 일찍이 여느 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관이기도 하다. 약수터와 이승복기념관이 있고 접근로도 좋은 편이어서 찾는 이가 많다. 고대산 고대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고동산 고동산(古桐山)은 경기도 가평군과 양평군 사이에 있는 높이 591m의 산이다. 고래산 고래산은 고달산(高達山)으로 불리기도 하며, 경기도 양평군과 여주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543m의 산이다. 경기도 여주시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내면과 양평군에 걸쳐 있다. 북쪽에는 파사산(婆娑山, 231m)·우두산(牛頭山, 480m)·고래산(543m)·옥녀봉(玉女峰, 419m)이 산맥을 이루면서 양평군과 경계를 이룬다. 이 지역의 중앙을 흐르는 한강은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섬강, 남서부의 평지를 흐르는 청미천(淸渼川)·양화천(楊花川)·복하천(福河川), 북쪽에서 흐르는 금당천(金塘川)과 각각 합류하여 북서방향으로 흐르면서 이 지역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고 있다. 지리지에서는 그 명칭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1872년지방지도』, 『조선팔도지도』 등 조선 시대 지도에서는 '고달산(高達山)'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래산은 경기의 곡창지대인 여주 들녘에 우뚝 서 있어서 마치 큰 바다에 고래등처럼 솟아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달 마을, 고달천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고래산의 남동쪽 자락에 고달사지가 있다. 고달사는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다. 고달사지부도(국보 4)를 비롯하여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7호), 고달사지석불좌(보물 8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모두 사찰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는 국보 제4호로 지정된 여주 고달사지 승탑를 위시해, 보물 3점, 향토유적지 등이 있다. 공덕산 공덕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공작산 공작산(孔雀山)은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높이 887m의 산이다. 이곳 산기슭에는 수타사가 있다. 초나라 초나라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관악산 관악산(冠岳山) 은 서울특별시 관악구와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와 과천시에 걸쳐 있는 높이 632 m의 산이다.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 있다. 관악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마치 '삿갓(冠)'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최고봉은 현재 기상관측소 옆 연주대 불꽃바위(632m)이다. 우암 송시열은 최치원의 광분첩석을, 추사 김정희는 신위의 호인 단하시경을 암각하는 등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이 산의 빼어난 산세를 예찬한 바 있다. 관악산은 바위봉우리가 많고 계곡이 깊어 언제 찾아도 산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산으로 꼽힌다. 도심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연평균 700여만 명의 등산객이 찾는다.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는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남쪽 과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연주암이 있다. 1396년에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워 중건하였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연주대는 조선 초기에 '염주대(念主臺)'로 칭해졌다고 하는데 '군주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염주대의 명칭이 입으로 전해 지면서 연주대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높이 4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것도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태종의 사랑이 충녕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효령대군에게도 또한 지극한 사랑을 주었고 실제 그는 국정을 운영할 기본적인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효령대군에게 결정적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는 것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조선초기에 해마다 몇 차례씩 조선에 찾아오는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는 제일 중요한 것이어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국왕들과 크게 취하도록 마시며 조선의 국왕을 시험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술 한잔도 할 수 없는 효령이 조선의 국왕이 된다면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결국 태종은 효령대군을 포기하게 하고 충녕대군에게 세자의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기록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결정에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동생인 충녕대군이 조선의 국왕이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큰 격려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대인의 풍모였다는 평이다. 그동안 있었던 왕자의 난으로 보아 왕위를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어 세종을 흔들었으면 조선 문화의 황금기 시대라는 세종시대는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효령대군의 결단과 지원이 없었다면 성군 세종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상당한 설득력을 만들어 주고 있다. 실제로 이같은 단초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편집한 『조야휘언』필사본에는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데 효령대군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당시 왕실의 형제간 우애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太宗)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이 '나의 형(효령대군)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조(正祖) 대에 이르러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하였다.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권(淸權)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령대군은 조선 초기 불교를 진흥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1429년(세종 11) 관악사를 건립하고, 월출산 무위사의 중창을 지도하고, 만덕산 백련사 중창의 시주가 되었다. 1997년부터 진행된 양주 회암사지의 발굴 현장에서 효령대군의 시주에 의해 건립된 전각의 기왓장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기왓장에는 효령대군이라는 명문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볼 때 효령대군의 불교진흥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고 결국,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영험함이 뛰어나다는 연주대와 연주암은 효령대군의 공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경기의 오악(五岳)의 하나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방위가 빼어나며 기이한 바위가 많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 한다. 1968년 1월 15일 건설부 고시 제34호로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인구가 많은 도심 지역을 끼고 있고, 산의 높이에 비해 산의 난이도가 있는 편으로 초보자에서 상급자까지 많은 인기를 받고 있다. 서울과 과천 경계는 반드시 관악산 정상을 지나가야 한다. 관악산을 올라가지 않고 관악산 테두리를 일주하는 방법은 있으나, 이는 버스를 최소 몇 번은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환승이 가능하면 추가 요금이 부과되지는 않는다. 관음산 관음산(觀音山)은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일동면, 이동면, 영북면에 걸쳐 있는 높이 733m의 산이다. 광교산 광교산(光敎山)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와 용인시 수지구에 걸쳐있는 높이 582m의 산으로 백운산(564m), 바라산(428m), 우담산(425m), 청계산(618m)으로 이어주면서 수원과 용인을 아우르는 산이다. 광교산은 수원천의 발원지이자 용인 탄천의 발원지 중에 한 곳이기도 하다. 수원에서는 북쪽, 용인에서는 서북쪽에 위치하면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찬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게 한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광교산은 시가지를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으로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광교산으로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높이에 비하면 인근의 백운산과 함께 바위가 거의 없이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덩치 큰 육산(肉山, 흙산)이다. 신경준의 《산경표》에 의하면 한남금북정맥의 한남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수원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용인에서 제일 높은 산은 해발 595m의 말아가리산(馬口山)이다. 이렇게 광교산은 해발 582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자락을 넓게 벌리고 있는 산세가 풍요롭게 넓어 수원을 북에서 싸안고 있는 형세를 한 수원의 진산이다. 주위에 큰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 위치한 수원이라 광교산은 어쩌면 수원사람들에게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해온 고마운 산일지도 모른다. 광교산은 산의 높이에 비해서는 인근에 연결되는 백운산과 함께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덩치가 큰 산이다. 소나무 능선 산행이 특징적이며, 능선엔 송림이 많은 편이다. 계곡안은 활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선 산행 중 남으로는 수원시가 간혹 보이고, 시루봉에서는 수지구 일대와 분당 등이 보인다. 광교산은 백두대간 13정맥 중 하나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주봉(主峰)이다. 한남정맥은 경기수부지역인 수원을 비롯한 용인, 광주, 과천, 안양, 의왕, 부천, 시흥, 김포, 화성, 오산, 평택, 안성 등 경기남부권 일원을 포용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수계의 분수령을 이룬 경기산하의 모체라 할 수 있다. 한양에 경기도 행정의 본산인 관찰부와 도청이 자리하고 있을 때인 조선왕조 이래 1960년대는 삼각산이 경기도의 진산(鎭山)으로 자리를 지켰으나 이제는 광교산이 경기도의 진산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광교산이 백두대간 한남정맥의 주봉으로 해발 582m인 경기 중부권 산하의 상징이자 물줄기의 근원을 이루는 발원처이기도 하지만 경기 중부권의 주산으로 나라의 고난과 함께 해온 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광교산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버팀목은 국난극복의 현장이라는 점이고 임진왜란, 전화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37년 후인 1636년 또다시 북방민족인 여진족에 의해 전란을 겪어야 했던 병자호란 때 김준용 장군에 의해 광교산에서 대첩을 거둔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967년 6월 23일 경기도청은 광교산을 진산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는 수원으로 옮긴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수원시 자료에 따르면, 광교산은 옛적엔 광악산(光岳山), 광옥산(光獄山) 등으로 불렸다. 〈고려야사〉에 의하면,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光敎)’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1987년 경기도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에는 “아주 먼 옛날 수도를 많이 한 도사가 이 산에 머무르면서 제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후세에 빛이 되었다고 해서 광교산이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또한 광교산에는 창성사(彰聖寺)를 비롯 89개처에 암자가 있었다고 하여 명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예로부터 ‘광교적설(光敎積雪)’을 ‘수원8경’ 중 으뜸으로 꼽았다. 옛날에도 광교산에 노송이 많아 거기에 수북이 쌓인 눈이 보기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떡시루와 같다고 붙여진 이름, 시루봉에서 바라보는 수원과 용인, 그리고 분당의 모습이 더욱 풍요롭게 보이는 것이다. 좋은 산은 하늘에서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광교산은 보개산(석성산)과 더불어 경기도의 진산이고 주봉이다. 광교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안양천과 유천(柳川), 탄천을 만들듯이 보개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오산천과 경안천(팔당호), 탄천을 만든다. 오산천은 칡넝쿨처럼 흐른다해서 갈천(葛川)이라 했다. 탄천의 상류지역을 장천(莊川, 기흥)과 원우천(遠于川, 분당 구미)이라 기록했듯이《대동여지도》에는 경안천이 우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안천이라는 명칭은 과거의 광주군청 경안리, 지금의 광주시 경안동에서 유래했다. "경안"은 '서울에서 가깝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안천의 옛 이름은 우천(牛川) 또는 '소천'외에 금량천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한자를 '京安川'이 아닌 '慶安川'으로라 쓰고 있다. 안양천 원래의 이름으로는 "오목내"이며 그 뜻은 주변에 많은 지천 들이 있으나 제일 깊이 오목하게 골이 파여진 하천이라고 해서 오목내라 불렀다. 황구지천은 남류천(南流川)으로 수원 광교산(光敎山) 계곡에서 발원, 수원시내를 관통해 광교천(光敎川) 유천(柳川)을 이루다가 수원시내 최남단 대황교(大皇橋) 부근에서 동북쪽의 원천천(援川川)을 만나 본류를 이룬 다음 화성시 태안읍 황학리. 송산리를 거쳐 오산시 양산동과 태안음 안녕리 시.군 경계를 지난다. 황구지천은 계속 남류, 화성시 정남면 계양리. 용수리. 귀래리. 양감면을 지나면서 주변에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한 후 오산천. 진위천(搢威川)과 합류해 아산호에 유입된다. 산맥도 3개의 지맥으로 갈라진다. 인성산 형제봉에서 이어온 산이 수리산과 백운산으로 갈라지듯 함박산 부아산에서 이어온 산이 법화산과 향수산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명산으로 알려지면서 두 지역이 높은 지대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경기 수원의 진산(鎭山) 광교산은 수원시민에게 서울시민의 북한산이나 관악산 같은 곳이다. 광교산을 야트막한 뒷동산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광교산 자체 종주거리만 10km가 훌쩍 넘고, 노송숲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평이하지만 매혹적이다. 식생도 풍부해 여름에는 희귀식물도 적지 않다. 몇 년 전 행해진 광교산의 자생식물 조사결과를 보면 개머루, 둥굴레, 참꽃마리, 은대난초, 은방울꽃, 졸방제비꽃, 곰의말채, 큰애기나리 등 자생식물들이 다양하게 발견됐다. 올 1월말에 끝났지만 수원시가 여러 코스에 자연휴식년제를 지정해 광교산 식생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강 이남으로 뻗은 한남정맥 최고봉인 광교산과 잇대어 있는 백운산(白雲山·564m), 바라산(428m)을 연계산행하면 더욱 좋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단골코스다. 산행거리는 15~16km 정도 잡아야 한다. 이 코스는 수원시와 용인시, 의왕시에 걸쳐 있어 긴 편에 속하지만 산세가 순해 크게 힘들지는 않다. 능선 전체로 나른하게 번지는 봄기운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6~7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서울시 관악구 호암산에서 시작하여 삼성산~관악산~우면산~청계산~우담산~바라산~백운산~광교산으로 이어지는 50km 산행이 있고 서울시 서초구 대모산에서 시작하여 구룡산~청계산~우담산~바라산~광교산으로 이어가는 37 km 산행도 있다.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에게는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이유일 것이다. 3개 산을 종주하자면 들입목은 경기대 입구 옆 광교저수지가 바라보이는 반딧불이화장실이 좋다. 화장실에서 출발한다니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광교산 화장실들은 다슬기화장실, 항아리화장실 등 예쁜 이름들이 붙어 있고 전국에서 가장 깨끗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동안 수원시가 화장실문화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들입목에서 본격적인 능선에 붙게 되는 백년수 정상까지 넉넉히 1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가파르지 않아 쉬엄쉬엄 오르기에 좋다. 전망이 탁 트인 편은 아니지만 종종 왼쪽으로 광교저수지가 바라보인다. 광교산에서 보면 왜 수원이 ‘水原(수원)’인지 이해가 간다. 산 주변에 저수지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다. 광교산은 한남정맥(漢南正脈)에 속해있는 산으로 칠장산에서 도덕산·국사봉(안성)·상봉·달기봉·무너미고개·함박산(函朴山:349.3m, 용인)·학고개·부아산(負兒山)·메주고개·석성산(石城山:471.5m, 용인)·할미성·인성산(仁聖山:122.4m, 용인)·형제봉·광교산(光敎山:582m)·백운산(白雲山:560m, 경기)·수리산(修理山, 경기)·국사봉(國思峯:538m, 경기)·청계산(淸溪山:618m, 경기)·응봉(鷹峰:348m, 과천)·관악산(冠岳山:629m, 서울)·소래산(蘇來山)·성주산(聖住山)·철마산·계양산(桂陽山)·가현봉(歌弦峰)·필봉산(筆峰山)·학운산(鶴雲山)·것고개·문수산 등으로 이어주고 있다. 광덕산 (강원/경기) 광덕산(廣德山)은 강원도 화천군과 철원군, 경기도 포천시의 군계(郡界)를 이루는 산이다. 구나무산 구나무산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높이 859m의 산이다. 산의 명칭은 구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 구병산 구병산(九屛山)은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과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 있는 높이 876m의 산이다. 속리산 국립공원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국도 변 가까이 위치해 있다. 주능선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아홉 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으므로 구병산 또는 구봉산(九峰山)이라고도 불린다 구봉대산 구봉대산(九峰臺山)은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높이 870m의 산이다. 구봉산 구봉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구절산 (강원) 구절산(九折山)은 강원도 춘천시와 홍천군에 걸쳐 있는 높이 750m의 산이다 . 구학산 구학산(九鶴山)은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제천시에 걸쳐 있는 높이 983m의 산이다. 군자산 군자산(君子山)은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높이 948m의 산이다. 군자산은 예로부터 충북의 소금강이라 불려왔을 정도로 산세가 빼어났고 산을 끼고 흐르는 쌍곡계곡은 맑은 계류와 어우러진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찾는 이가 늘고 있다.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군자산은 기암절벽과 쌍곡계곡이 유명하여 일찍이 퇴계 이황과 송강 정철의 사랑을 받았던 괴산8경의 하나로 쌍계라 부르기도 한다. 금강산 금강산(金剛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금강군 · 고성군 · 통천군에 걸쳐있는 산이다. 태백산맥에 속한 높이 1,638m의 이 산의 이름 금강은 불교에서 유래했다. 불교에서 금강은 불퇴전(不退轉), 즉 물러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굳은 마음을 뜻한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지라(, 번개와 금강석을 모두 가리킨다)를 훈역(訓譯)한 단어이다. 대한민국의 강원도 속초시와는 약 50 km 떨어져 있다. 금강산은 예로부터 국내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대대로 많은 예술가들의 표현 대상이 되었다. 봄의 이름인 금강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현재는 대개 금강산이라 불리며,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 楓岳山 ),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으로 불렸다.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수많은 봉우리, 오랜 기간의 지질 활동과 풍화 작용으로 생긴 기암괴석 및 폭포, 바다를 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뉘며, 때로는 외금강의 남쪽 지역이 신금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998년부터 잘 알려진 3개 코스가 외부에 개방되었으며, 점차 개방되는 코스가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아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동으로 관리 및 개발 중에 있다. 해마다 외부 관광객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방면에서 단순히 관광 이외에도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서는 현대아산 혹은 대리점에서 예약을 하고 화진포 아산 휴게소에서 수속을 마쳐야 한다. 2008년 7월 11일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다. 오랜 옛날부터 이미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국내외로 유명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으로 알려졌다. 또한 전국의 명산, 명소들이 금강산에 빗대어 별명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각종 문헌과 기록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별칭은 모두 9가지 이며, 대체로 계절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 왔다. 금강은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일 때인 봄의 이름이며, 여름에는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일천 이만 봉이 단풍으로 물들어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낙엽이 져서 바위들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산이 금강산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이곳이 불교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금강’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이아라(번개와 다이아몬드)와 통한다. 금강산을 만든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특유의 지질 활동과 관련이 깊다. 금강산 일대는 비와 눈이 비교적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고도와 심지어 동서의 위치에 따라서도 기후가 다르며, 금강산의 지질층은 태고계로부터 신생계에 걸친 오랜 지질시대에 속하는 여러 종류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널리 분표된 암석은 두 종류(운모가 섞인 것과 얼룩이 진 것)의 화강암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화강-편마암 수정 지대가 형성돼 있다. 암석들은 가로세로로 나고 가지가지 방향으로 절리가 생겨 특이한 지형과 기이한 바위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지각활동과 풍화작용으로 침식, 삭박됨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들 작용은 1천만 년 전부터 현세까지 진행된 궁융상지괴응기 운동으로 형성되었다. 금강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에 걸쳐 있으며, 또한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 강원도 인제군까지 걸쳐 있고, 동서로 4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미터, 총면적 530제곱킬로미터로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있다. 주분서령을 기준으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분류한다. 또한 외금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해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며, 1천 미터 이상의 봉우리는 무려 60여 개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선조들은 일만 이천 봉이라 했다. 이 지역의 많은 명승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고도 한다. 탐승 구역은 외금강 11개, 내금강 8개, 해금강 3개가 있는데, 아직 이들 모두가 개방되지는 않았다.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으며, 주분서령의 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여러 폭포가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萬瀑洞) 구역, 태상동 구역, 백운대 구역, 비로봉 구역, 명경대 구역, 망군대 구역, 구성동 구역 등으로 나뉜다. 내금강에 있는 봉은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중향성(1,520m), 영추봉·백운대(969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으며, 백천동·태상동·구성동 골짜기 등의 유명한 폭포가 많다. 주변 경관뿐만 아니라 표훈사(表訓寺)로 가는 길목 길가의 큰 자연석에 미륵, 석가, 아미타불 상존입상을 조각한 특이한 구성으로 고려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자랑하는 삼불암, 높이가 40미터나 되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인 묘길상, 팔담의 하나인 분설담 위에 세워진 독특한 암자인 보덕암(普德庵) 등의 중요한 역사 유적이 있다. 이 지역은 군사 보안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 2007년 6월부터 외부에 개방되었다. 내금강의 동쪽에 있으며,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포괄한다. 크게 구룡연, 만물상, 수정봉, 천불동, 선하 구역으로 나뉘며, 수정봉(773m)을 비롯한 문주봉(1,027m), 호봉(1,264m), 상등봉(1,227m), 옥녀봉(1,424m), 세존봉(1,160m), 채하봉(1,588m), 집선봉(1,351m) 등의 산봉우리가 있다. 구룡연(九龍淵)에 있는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에 있는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폭포로 꼽히며, 높이는 74미터, 너비 4미터에 달한다. 폭포 절벽과 바닥이 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비봉폭포는 이것보다 더 높은 139미터에 달하며, 장쾌한 물줄기로 이름나 있다. 만물상 구역에는 삼선암, 독선암, 귀면암 등의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바위마다 독특한 전설을 담고 있다. 수정봉 구역은 외금강과 동해의 절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며, 천불동 구역에는 3단 폭포, 선인굴, 육선암, 연주폭포, 금강천지(金剛天池) 등 저마다 독특함을 자랑한다. 선하 구역에는 용바위, 흔들바위, 선하폭포, 백련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 다리, 집선봉 등이 있다. 금강산(또는 온정리) 온천은 외금강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오래된 온천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는데, 왕족이나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함유 물질로는 라돈, 메타규산이 광천의 한계량 이상 들어 있으며, 탄산 및 염소 이온과 나트륨, 칼슘 이온도 들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연기념물 2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이 지역은 대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지 3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숙종 24년(1698년) 고성 군수로 있던 남택하(南宅夏)가 찾아내고 “금강산의 얼굴빛과 같다.” 하여 해금강이라 이름 붙였다. 본래 해안 암벽, 바위섬, 자연호, 모래사장, 하천이 어우러진 경승지다. 이중 개방된 곳은 삼일포와 향로봉이며, 관동 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은 개방되어 있지 않다. 삼일포는 남한의 화진포와 송지호같이 석호(潟湖)이며, 총 넓이는 0.79km에 달한다. 이 호수에는 전설에 따르면 신선 또는 화랑들이 경치가 너무 좋아 3일 동안 머물고 갔기 때문에 삼일포라 한다. 봉래대에서 삼일포 전경을 볼 수 있다. 소가 누운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섬이 떠있다. 또한 삼일포 기슭에는 4명의 신선이 놀고 간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 사선정터가 있다. 향로봉은 바다의 해만물상이라 불리며,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비바람에 씻기고 바닷물에 깎이어 독특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외금강의 남쪽 지역을 신금강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로 구성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에 있는 십이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로 수직 높이는 289미터, 폭포 길이 390미터, 너비는 약 4미터에 달한다. 그밖에도 온선대, 칠보대, 직류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다리, 송림굴, 소연소, 구룡소, 선담, 유점사, 반야암 등의 볼거리가 있다. 고산 지대에 속하여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며, 7~8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진다. 동서차가 심한 편으로, 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많아지지만, 푄현상으로 내금강부터는 적어진다. 또한 한국의 전반적 기후에 대비하여 볼 때 따뜻하고 습하다. 하지만 고도에 따라서 겨울에는 영하 10도에서 30도의 혹한의 날씨가 이어지기도 하며, 지역에 따라 빠르면 10월부터 눈이 내리는 다설 지역이다.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북부 계열의 식물과 남부 계열의 식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금강산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특수한 기후 조건 때문에 무려 1,125종의 식물과 3백여 종의 동물이 서식하며 1백40여 가지의 고유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고유식물로는 금강초롱, 금강인가목(금강국수나무), 금강봄맞이꽃, 금강제비꽃, 금강애기나리, 만리화 등이 있으며, 이중 금강초롱과 금강인가목은 희귀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산록 원시림 지대에는 주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의 울창한 단순림이 펼쳐져 있고 계곡 교목지대에는 침엽수와 자작나무, 산목련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가래나무, 조간주나무, 고로쇠나무, 피나무 등의 각종 활엽수로 혼성림을 이루고 있으며, 봉우리의 고산 지대는 누운잣나무, 누운향나무, 철쭉, 진달래 따위의 키작은 나무들이 자란다. 금강산 외에는 민둥산이 이어지다 보니 동물들의 중요한 서식처로 자리잡았다. 식물에 비해 많지 않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68종의 짐승류와 2백 여 종의 조류, 9종의 파충류, 10종의 양서류, 여러 계곡에는 30여 종류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다. 희귀동물 중에는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등이 있다. 대한민국 측 연구기관들은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강원도 지역 소나무 5만 헥타르 가운데 1만 헥타르가 솔잎혹파리 피해를 입고 있다고 추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방제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공동 방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구룡연과 삼일포 일대의 소나무를 87에서 94퍼센트 정도 보호해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해마다 증가하는 관광객 수를 대비하기 위해 소방 시설의 설치가 제안되었으며, 그에 따라 소방서가 2007년 9월에 공사에 들어가 2008년 7월 8일에 문을 열었다. 현대아산이 위탁운영을 하고, 전직 소방관들이 근무할 예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강산에는 총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 개나 되며, 하대신라 때부터 많이 건립되고 고려 때 절정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은 유점사로 전해져 있다. 하지만 신계사,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같은 금강산 4대 사찰 이외에는 조선 왕조의 불교 억압 정책 등의 이유로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 4대 사찰도 한국전쟁 도중 대부분은 파괴되어, 남은 것은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뿐이었다. 때문에 파괴된 사찰이나 불교 관련 문화재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으며, 신계사 복원 공사가 2004년 4월에 착공해 2007년 10월에 완료 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민간이 운용하는 내금강과 철원을 연결하는 금강산전철이 있었으나, 이제는 단절되어 기능을 상실했다. 이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으나, 경의선 및 경원선, 동해선에게 순위에 밀려 진척 속도가 느리다. 2002년 10월 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금강산 관광지구법’에 따라 금강산은 엄격히 보호되고 있다. 이는 관광을 계속하는 동시에 금강산을 철저히 보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개발자가 관광지의 나무, 경치,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되며(11조), 필수적인 오·폐수의 정화(14조), 또한 관광객도 역사유적, 천연기념물, 온천 등을 보호하도록 명시(19조 7항)하고 있다. 이 법을 반영하듯이 단순한 흙이나 조약돌 채취도 엄격하게 처벌받는다. 이를 어긴 자에게의 처벌 조항도 명시돼 있는데, 대개는 손해보상 같은 제재이지만, 제28조에 따라 엄중한 경우는 추방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금강산에 산재하는 바위에는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글이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명산을 휴양소 뿐만 아니라 혁명 이념을 교육하는 장소로 여기는 국내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것들이 경관을 해친다는 일부 의견이 있으며, 여러 대학교 교수들의 생태 답사결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는 모두 긍정적인 의견을 보았으나, 일부 답사자들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선전 문구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 1989년 방북하여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한 9년 뒤인 1998년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함으로써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2001년 1월 6일부터 3년 동안 한국 최초의 호텔식 테마 여객선 설봉호를 이용하여 해로 관광이 가능해졌다. 금강산 지역은 2002년 11월 23일에 금강산관광지구라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명명되었다. 2003년 2월 14일 DMZ를 통과하는 역사적인 육로 관광이 시범 운영된 뒤로 육로 관광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이 육로 관광은 버스를 이용하여 금강산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매년 관광객 수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중에 몇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정몽헌의 자살, 사스 사태, 민간인 민영미 억류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이중 억류 사건은,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일단락되었다. 2008년 3월부터는 자가용을 이용한 승용차관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아산 측은 2005년 6월에 금강산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 했으며, 2008년 말 기준으로 통산 관광객 수는 195만 명에 달한다. 개방된 이후로 금강산 권역을 개발하려는 계획이 현대아산 측에서 제안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과 2006년 2월 10일에 합의했다. 이 계획은 해금강에서 원산까지 총 109킬로미터, 약 6억 평에 이르는 관광 특구로 조성한다는 종합계획으로 투자금이 총 22억6천만 달러(2조2천억 원)에 이른다. 1단계로 오는 2010년까지 해금강에서 통천까지, 2단계로 원산까지 관광지역을 확대한다는 예정이다. 대한민국 국민 외의 외국인도 관광할 수 있으나, 관광 자체가 외국인을 위해 특별히 기획되어 있지는 않아 아직 적은 편이다. 한편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미국인에게 가기 힘든 절경지로 금강산을 1위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금강산 관광으로 인한 효과는 긍정적과 부정적으로 나뉜다. 현재 이 지역은 남북의 주요 회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단순한 관광 산업 이외에도 한반도 긴장 완화, 국가 신인도 제고, 남북 교류 활성화 등에 기여했다는 의견 도 있지만, 한편에 현재 관광에 드는 비용이 많다는 것 과 이 사업이 김정일 정권의 유지에 필요한 돈을 대어 준다는 견해도 있다. 2008년 7월 11일에는, 금강산 내에서 한 대한민국 관광객이 새벽에 해변 산책을 하다가 금지된 구역에 접근하게 되어 북측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이튿날인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하였다. 현재 금강산 관광은 개별적이 아닌 일정에 따라 가이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형태이면서 모든 코스가 개방된 것은 아니지만, 1998년 외금강 코스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내금강 코스 개방을 통해 서서히 공개되는 실정이며, 제한적이나마 자가용 자동차 관광을 추진하는 등 자유도가 높아질 기미는 있다. 도중에 남북 관계가 약화될 때나 정권 교체의 와중에도 금강산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 이며, 이는 개방 지역의 확산과 그에 따른 경쟁력 강화로 풀이된다. 해마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금강산의 보존 상태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금강산 직접 개발은 피한다는 현대아산의 방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의 엄격한 보호 정책으로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남측 강원도는 2008년 7월 DMZ 관광청을 발족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 관청의 계획에는 설악산과 금강산을 묶어 세계적인 관광지대로 가꾸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금물산 금물산(今勿山)은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과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에 걸쳐 있는 높이 780m의 산이다. 금산 (경상남도) 금산(錦山)은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에 있는 높이 681m의 산이다. 원래는 원효가 이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세웠기 때문에 '보광산'이라고도 불렸지만, 이성계가 비단을 덮었다고 해서 조선 시대부터 금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도해에서 유일하게 체적이 큰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남해 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 혹은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이 작은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유람객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산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老人星 또는 壽星)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금수산 금수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금오산 금오산은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정산 금정산(金井山)은 부산과 양산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 산을 따라서 부산광역시와 양산시의 경계가 결정되며, 가장 높은 지점은 고당봉은 801.5 미터이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며 주말에 많이 온다. 정상은 케이블 카를 통해서 갈 수 있다. 다양한 등산로가 있는데, 명륜역 근처의 금강 공원에서 올라가거나, 온천장역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산성마을로 가거나 화명역, 수정역, 덕천역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산성마을로 가는 방법이 있다. 금정산에는 금정산성과 범어사가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문에 금정산성이 설치되었다.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답게 행정구역도 부산 금정구와 북구, 동래구를 비롯해 경남 양산시와도 경계를 이룬다. 때문에 산성을 오르는 코스는 매우 다양하다. 산성을 순회하는 코스 역시 무궁무진하게 짤 수 있다. 1701년~1703년(숙종 29년)에 건설이 완료되었다. 벽 공사는 1707년에 끝났으며, 17 킬로미터 길이에 1.5~3 미터 높이이다. 성 내부의 넓이는 8.2 제곱킬로미터이다. 1807년까지 유지비용 때문에 사용되지 않았다. 서문이 그 해에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성곽이 유실되었으나 복원작업을 통해 거의 복원하였다. 금정산성 남문 주위의 지역은 휴식 공간으로 인기가 있다. 금정산성 서문은 가기 힘들기 때문에 거의 찾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로 많은 성곽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1972년부터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동문, 남문, 서문이 1974년 완공되었다. 부산시가 진행하는 복원 계획은 현재 완료되었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다단계로 진행되었다. 고당봉은 이 산의 최고봉이다. 801.5미터 높이에 있으며 부산광역시와 양산시의 경계면에 있다. 김해국제공항과 광안대교를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에는 김해시와 창원시 진해구의 일부 및 쓰시마섬(대마도)이 보인다. 한자로 쓰인 고당봉 표지석이 2016년 8월 1일 낙뢰를 맞아 파손되었으며, 10월 26일에 한글로 쓰인 석비가 재설치 되었다. 금샘은 고당봉 500미터 주위의 자연 샘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금어가 다른 세상에서 내려와서 이 샘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샘은 마르지 않았고 금빛 물이 흘러내렸다. 산의 이름과 범어사의 이름이 여기에서 왔다. 현재 이 전설은 금정구의 상징물에 나타나 있다. 금정구의 로고는 바로 이 물고기이다. 낙가산 (인천) 낙가산(落袈山)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석모도에 있는 산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지은 보문사가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남산 (서울) 남산(南山)은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있는 산이다. 높이는 해발 270.85m로서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서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정상에는 N서울타워가 있으며, 그 부근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으며, 남산 1·2·3호 터널이 뚫려 있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초 태조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세워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고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리고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조선 도읍 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으로 여겨져 온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도 불렸다.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륙분지를 형성하던 곳이고, 조선 도읍 초기에는 이들 산군들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쌓였다.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또한 성벽 일부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보여 준다. 일제는 1908년 남산 일대를 무상 증여받아 옛 남산식물원에서 남산 3호터널에 이르는 공간에 공원을 조성하였다. 1910년에는 시민공원으로 개장하였으며, 1916년에는 남산 전체를 공원화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18년에는 사대문 안 어디에서든 보일 수 있도록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조선신궁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아 숭배하게 했다. 지금의 힐튼호텔 맞은편 어린이 놀이터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남산식물원 터를 아우르는 43만 제곱미터의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탑골공원에 이어 남산도 시민공원으로 개발되어 한양공원이라 불렀다. 당시 공원묘지로 세웠던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는 고종 친필의 석비가 지금도 구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높이 270.85m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의 북악산(北嶽山),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1940년 3월 12일 남산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되어 1968년 9월 2일에 개원하였으며 1991년부터 8년간 ‘남산제모습가꾸기’ 사업으로 공원 내 부정적 시설 89동을 이전하고 중구 예장동, 회현동, 용산구 한남동 일대를 대대적으로 복원 정비하여 시민의 공원이 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공원 중에서 가장 넓은 규모의 공원이다. 남산공원은 크게 장충지구, 예장지구, 회현지구, 한남지구의 네 개의 지구로 나뉜다. 먼저 장충지구는 장충단이 있는 장충단공원 일대를, 예장지구는 와룡묘가 남아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 일대를, 회현지구는 과학교육원과 남산도서관,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가 들어선 지역을, 한남지구는 남산 제모습 찾기 운동으로 주택 철거 후 야외식물원을 조성한 지역을 말한다. 이밖에도 분수대 2개소, 야생화공원, 남산전시관, 팔각정, 서울타워, 케이블카, 놀이터, 주차장 등의 시설이 포함된다. 남산공원의 식물로는 85과 552종, 초본 42과 187속 361종, 목본 43과 93속 191종이 있으며 주요 식물로는 신갈나무, 아까시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 소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등이 있다. 남산공원의 야생동물도 7목26과61종에 달한다. 서울타워 전망대에서는 맑은 날에는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으며, 각종 시설들은 자연탐구와 운동, 생활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휴식 등 도심 속의 정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철따라 그 자태가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며 독특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90만평의 넓고 쾌적한 남산 위에 우뚝솟아 있는 서울타워는 그 높이가 해발 480미터에 달해 서울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케이블카 시설 중 최초로 지어졌으며. 1962년 5월 12일에 처음 개통해 하루도 쉬지 않고 운행하는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다. 낮에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밤에는 대형 빌딩들이 내뿜는 환상적인 야경을 즐길 수 있다. 남산골한옥마을은 1990년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훼손된 24,180평의 지형을 복원하고 전통정원으로 꾸미면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한옥 5개동을 이전복원하였다.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시민생활과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서울천년 타임캡슐에 담아 남산 산자락에 묻었다.4백년후 서울 1000년에 용기 속에 든 이 시대의 문화유산을 펼쳐보게 될 것이다. 1994년 11월 29일 매설하였으며 2394년 11월 29일 개봉할 예정이다. 캡슐안에는 '94 서울의 인간과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 실물 축소 모형 마이크로 필름 Video-CD 형태로 수장하였다. 2009년 4월 복원을 완료한 실개천이다. 2.6km길이와 1m의 폭을 가지며, 자연형 실개천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남산 끝자락과 케이블카를 이어주는 경사형 엘리베이터 운영개시 2달 만에 13만 명이 이용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남산에 자리 잡은 전통활터로 조선시대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또 남산 주변에는 조선시대에 축성된 도성(都城)의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내장산 내장산(內藏山)은 전라북도 정읍시와 순창군 경계에 있는 산이다. 호남 지방의 5대 명산(지리산·월출산·천원산·방장산) 중 하나이며 한국 팔경의 하나로 500여 년 전부터 단풍 명소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내장사가 있다. 1969년 1월 21일 관광지로 널리 지정되었으며 1971년 11월 17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단풍 성수기에는 하루 10만의 인파가 단풍을 보기 위해 내장산을 찾는 외에 연중 100만 이상의 관광객이 내장산을 찾고 있다. 봄에는 푸른 산록 사이로 피어나는 벚꽃의 아름다움과 여름에는 푸른 녹음, 가을은 불타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의 아름다움으로 4계절 관광명소이다. 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산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장산 서쪽 중심부에 솟아 있는 2개의 바위봉우리로 봉우리의 형상이 까치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까치봉(717m)이라 한다. 내장산의 제2봉으로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이며, 내장9봉이 까치봉을 중심으로 대체로 동쪽을 향해 이어지면서 말굽형을 이루고 있다. 일명 연오봉이라 부르며 망해봉에서 서남쪽으로 솟아오른 봉우리(670m)이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물은 원적계곡을 타고 금선계곡과 합류하여 서래봉을 돌아 내장호를 이루며 동진강 줄기의 근원이 된다. 연지봉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971년 11월17일 인근 백양사 지구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81.715km는 전라북도에 속해있는 부분이 47.504km, 전라남도 쪽이 34.211km로서 정읍시와 순창군, 장성군에 걸쳐있다. 정읍시와 정읍문화원은 내장산을 더욱 알리기 위해 노랫말을 공모한 결과, 고순옥의 작품을 대중가요에 제일 알맞은 가사로 선정하고 거기에 작곡가 이호섭의 정성이 더해져 김용임이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디지텍고등학교 서울디지텍고등학교(서울디지텍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미술고등학교 서울미술고등학교(서울美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서울女子商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서울藝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외국어고등학교 서울외국어고등학교(서울外國語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있는 사립 외국어고등학교이다. 서일국제경영고등학교 서일국제경영고등학교(瑞逸國際經營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선일여자고등학교 선일여자고등학교(善一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 선일이비즈니스고등학교(善一이비즈니스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선정고등학교 선정고등학교(善正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선정국제관광고등학교 선정관광고등학교(善正國際觀光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선화예술고등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仙和藝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성남고등학교 (서울) 성남고등학교(城南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성덕고등학교 (서울) 성덕고등학교(成德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성신여자고등학교 성신여자고등학교(誠信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성암국제무역고등학교 성암국제무역고등학교(誠庵國際貿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항공비즈니스고등학교 서울항공비즈니스고등학교(서울航空비즈니스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서울세종고등학교 서울세종고등학교(서울世宗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세화여자고등학교 세화여자고등학교(世和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송곡고등학교 송곡고등학교(松谷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송곡여자고등학교 송곡여자고등학교(松谷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송곡관광고등학교 송곡관광고등학교(松谷觀光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首都電氣工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순헌황귀비 엄씨가 1906년 5월 설립한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의 설립 초기 교사 자료인 태극기, 현판, 완문 3점의 유물로 교육사적 가치가 큰 유물이다. 태극기는 '明新女學校'라는 묵서와 함께 4괘와 태극문양을 틀을 사용하여 찍어낸 기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로는 흔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태극기라는 점, 4괘의 배치가 특이한 점, 교육현장에서 발견된 최초의 태극기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현판은 '明新女學校'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고 네 가장자리는 조선시대 궁중 현판의 일반적인 형식에 따라 액틀을 붙였으며 채색으로 화초문(花草紋)과 운두문(雲頭紋)을 장식했다. 완문(完文)은 1907년 5월에 영친왕궁(英親王宮)에서 명신여학교의 운영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토지를 하사한다는 내용의 공문서로 대한제국기 황실에서 근대교육 초창기에 설립된 학교의 재정을 후원했음을 증명하는 황실문서이다. 숭문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崇文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이다. 숭실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崇實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崇義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세그루패션디자인고등학교 세그루패션학교(세그루패션디자인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신광여자고등학교 신광여자고등학교(信光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3가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신정여자상업고등학교 신정여자상업고등학교(新亭女子商業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 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新進科學技術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예수 예수 그리스도(, , , , 기원전 약 4년 ~ 기원후 약 30) 또는 나사렛 예수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이다. 모든 기독교 핵심 상징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聖子)로서 부활한 자이자 구약성경에서 계속 예언한 구원자 메시아로 믿는다. 그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성령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모 마리아가 잉태하여 나은 것이 예수인데, 복음서는 그가 이 세상에서 전파한 여러 복음과 기적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본래 성부의 뜻한 바에 따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 피로서 온 세상에 구원을 이루었고, 부활하여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고 전한다. 그가 사라진 이후 따르던 자들이 곳곳으로 퍼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도한 게 기독교가 세계로 전파된 계기다. 기독교 일반론인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하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나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聖子)에 해당한다. 헬라어 이름인 이에수스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축약형인 예슈아()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말이다. 여호수아(Jehoshua)의 어원은 접두어 여(Je-) (, 하나님)와 호세아(, hoshea, 구원, 구세를 의미)를 덧붙여 이루어진 이름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로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루카 복음서 2:21), 나사렛의 예수(요한 복음서 1: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르코 복음서 6:3, 마태 복음서 13:55) (중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므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아들 예수'(ישוע בן יוסף | 예수아 벤 요세프)은 정식 성명이다. 아랍어식 이름은 '이사 빈 요세프'). 예수에게 따라 붙는 그리스도()라는 낱말은 "기름을 부은" 이라는 뜻의 를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흔히 '메시아'로 표기하는 ""를 번역한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예언자, 사제,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이라고 풀 수 있다. 그 뒤로 예수는 많은 성도들에게 기적을 많이 보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 후 부활한다. '기원후'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 출생 이후 시대를 의미한다. 'B.C.'와 'A.D.' 구분은 6세기경 신학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게 이후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에 반영되었다. 이때 계산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 연대 기준이 오늘날까지 쓰인다. 하지만, 예수 태어난 날에 관해 여러 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으므로 그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드물다. 오늘날 복음서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적 예수는 기원전 약 2년~4년 경 태어났다고 추정한다. 마태 복음서(2장 1~16절)에는 예수이 태어나신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로데 왕이 2세 미만의 갓난 사내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누가 복음서(2장 1~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실려있다. 누가복음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전 4년 경에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기원후 6년에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니우스(퀴리뇨, Quirinius)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누가 복음서 2장 1~7절) 퀴리니우스는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된 비문에 기원전의 퀴리니우스 총독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볼 때 기원전 4년경 총독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전 2년 ~4년 경에 출생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받아들여 진다.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17세기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과 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추측하였다. 한편, 예수의 탄생설화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유아학살과 이집트 피난전승은 유대 기독교인인 마태와 마태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물인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진 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고 보는 성서학자도 극소수 존재한다.(모세유형론)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는 누가 복음서과 마태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베들레헴이지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성장하였다. 마르코 복음서과 요한 복음서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으로 불리었던 이유는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 있을 때 임신했으며, 베들레헴에서 출생후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누가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이유를 누가는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고향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다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나사렛의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태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서(5:2)와 이사야서(7:14)의 예언대로 예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며, 이후 예수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흔히 헤로데 대왕이라고 부르는 헤로데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어떻게 베들레헴에 가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마태는 그것이 바로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추가 설명을 한 것이므로 모두 일치된 기록이라는 해석이 보편적이다. 예수 가계에 관한 기록은 마태 복음서와 누가 복음서에 남아 있다. 두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가계도로 보면, 예수의 아버지인 나사렛의 요셉은 목수였으며, 어머니는 현재 성모 마리아라 부르는 나사렛의 마리아였다. 누가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다(누가 복음서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성서 기록을 보면, 성모 마리아가 예수을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 받았다(누가 복음서 1,26-38) 그후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에게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이 잉태되신 사실을 고백하였다. 요셉은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으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게 되고, 마리아와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마리아는 예수을 출산하였다.(마태 복음서 1,18-25) 마태 복음서과 누가 복음서은 예수의 육신적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 복음서(1,2-17)은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누가 복음서(3,23-38)은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마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누가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두 족보가 다른 이유는 마태와 누가의 복음사가가 각각 요셉과 마리아의 가계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고대교회의 신학을 형성한 교부들도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라 말하였고, 교회의 전승 또한 이와 일치한다. 예수에게 성모 마리아와 요셉 이외에 다른 가족이 어떤 형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 신학적 차이가 존재한다. 현대의 개신교 신약성서학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정하는 추세이다. 예수의 형제들을 예수의 탄생 이후에 마리아와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의 친동생들이라 해석한다. 그 근거는 누가 복음서 (2장7절)에 있는 "그녀의 맏아들"이라는 기록이나 마태 복음서 (1장25절)에 "그녀가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다" 는 기록, 마태 복음서 13장 55절 56절에서 예수 형제들의 이름과 예수의 누이들의 존재가 거론되는 장면이다. 반면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형제들을 친척형제 또는 사촌형제들이라 해석한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중동지역에서 형제라 함은 사촌형제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의 홀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는 장면 (요한 복음서 19장 25-27절)을 떠올려 봐도 예수의 형제들을 ‘친형제들’로 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나 요셉, 시몬, 유다 (갈라디아서 1장 19절, 마태 복음서 13장 55절)가 예수의 친동생들이었다면 (즉,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예수 이외의 친자녀가 더 있었다면) 요한복음서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가 친족들 앞에서 그의 육신상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길 까닭이 없다. 예수의 어머니에게 예수 외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가 사랑한 제자에게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부탁한 것이란 해석은 자연스럽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누가의 신학적인 의도가 들어 있는 누가 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의 12세 때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과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배를 마치고 예수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을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은 유대교의 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은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 때의 예수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누가 복음서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은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도 슈사쿠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목수는 떠돌아다니면서 일하는 노동자였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예수이 자신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회당예배때에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고난받는 민중들과 연대하는 메시아로서 살아갈 것임을 알리는 설교를 하자,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저 사람은 (목수인)요셉의 아들 아닌가.'라며 예수이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하였다는 누가 복음서의 보도(누가 복음서 4:16-22)는 목수라는 직업이 변변치 않은 직업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예수의 유년시절에 대해 누가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누가 복음서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예수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침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가셨다(요한 1:23, 29). 예수을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은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라셨고, 마침내 세례(침례)를 받으셨다. 세례(침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셨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다(누가 3:22). 이러한 예수의 세례(침례) 장면에 대한 성서의 언급을,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신학자들도 있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님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하셨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한다(마태 복음서 4장).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날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경 학자들은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내용은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를 통해 잘 나타나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처음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에게 이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일렀고, 예수은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은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을 믿게 된다(요한 2:1-11). 마리아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할 때, 예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 하신다. 포도주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보혈을 상징하는데, 예수가 말한 "때"와 "포도주"의 관계는,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제물로 희생될 때 흘린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로 풀이한다. 예수께서는 초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이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 위에서 이들에게 설교하였다. 이 산은 갈릴레아 호수 북쪽 타브가와 가파르나움(가버나움) 사이에 있는 한 야산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이를 담은 내용이 마태 복음서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 내용은 마태 복음서 5:3-12, 즉 팔복 부분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밖에도 파격적인 내용(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이 있다. 현재 전체 기독교에서 쓰이고 있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인 주의기도도 여기에 씌어 있다. 예수은 청중들이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행했다. 이를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코 복음서 4:3-20)는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뿌리던 이스라엘 농부들의 농사 방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수많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예수이 메시아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복음서저자들의 신학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예수이 병들을 고치신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일례로 그분이 병을 고치시는 그 깊이는 다른 의사들의 차원, 심지어는 인간의 차원이 아니어서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이 하혈병으로 고통받은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부인이 12년간 병으로 고통받았지만 의사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한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통치 즉, 로마제국이 팍스 로마나의 유지를 위해 식민지에서 실시한 폭력적인 통치와 경제적 착취로 인해 정신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들을 보도함으로써 예수을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치유자로도 묘사한다. 복음사가 누가에 의하면 예수은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은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들의 오빠가 라자로였다. 라자로가 세상을 떠나자 예수은 라자로의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무덤에 장사된지 나흘이 지난 그를 살려내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셨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마태 20:17-19, 누가 18:31, 마르코 10:32)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은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을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마태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 하지만 예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셨다.(마태 26:26-28)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를 성직자가 집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을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예수은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신을 유다의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한 내막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자신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었다. 체포된 후 그분은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본티오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누가 복음서은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누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을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례로 예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누가는 교회가 로마 제국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일부 시각도 있다. 반면에 빌라도에 대한 마이어의 연구를 보면, 당시 본디오 빌라도의 보호자 즉 후원자는 세야누스 였는데, 그는 황제에 대한 반역 음모를 꾸미다가 A.D. 31년 권력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빌라도의 지위는 A.D. 33년경에는 매우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시기는 바로 예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당시의 유대인을 분노케 함으로써 황제와의 관계가 더 이상 곤경에 빠지지 않길 원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서의 묘사가 가장 정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 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며 구타와 조리돌림을 병행하여 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십자가 모양의 형틀이 아닌 가로대를 가리킨다. 처형장에 끌려가는 도중 예수께서 모진 구타끝에 체력이 다하여 쓰러지자 구레네(카르타고 - 오늘날의 튀니지)출신의 '시몬'이라는 역사(力士)가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십자가의 모양은 본래 T자 모양이었으나 +모양으로 알려졌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부활한 뒤에 하늘에 오름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12제자를 축복하고 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알려주고 있다. 다음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기록들이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서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 내용을 기술하면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타키투스는 이를 로 기록하였다.)의 이름의 기원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 행정관(본티오 빌라도는 흔히 총독이라고 불리지만, 팔레스타인은 총독이 아닌 행정관이 다스리는 속령이었다.)에게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으로 재직 중이던 소 플리니우스는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인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가리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설이 현재 가장 유력하다. 참고로 수에토니우스가 말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누가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토로 이주한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신들처럼 천막 제작 노동자인 바울과 같이 일했다고 한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유대교의 《탈무드》 〈산헤드린〉에는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기독교계 사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의 전승을 해석한 글들인 신약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중 공관 복음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언행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정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담은 요한 복음서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다.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의 역사가 아니며, 그를 구세주로 믿은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반영되어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베드로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답했다는 이야기의 경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너라는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며 크게 칭찬하셨다고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 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며 간락하게 묘사한다. 또한 예수께서 하혈병에 걸린 부인을 고쳐주셨다는 기적이야기도 마태는 부인의 믿음을 강조하는반면, 마르코는 부인이 얼마나 질병으로 고통받았는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의 전승을 그대로 받아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연표처럼 시간순으로 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의 전승을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편집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자로서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전승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내려온 예수의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기는 하나, 그것의 내용이 교회의 여러 활동에 적합하도록 형성되어 왔을 가능성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여러 활동뿐만 아니라 전승 담당자의 사회적 상황이 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일에도 주목하고 있다. 학자들은 1세기초의 종교적 배경을 예수의 삶에 대해 재조명 했던것으로 생각한다. 바리새파는 1세기 유대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이었다.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해석하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두개파는 특히 예루살렘에서 강력했다. 그들은 모세5경만을 인정하였으며, 이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사후세계에서의 징벌. 신체의 부활, 천사나 영혼같은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에 협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정치사상에서는 당연히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에세네파는 금욕적 종말론자들로 신약성서에는 나오지는 않는다. 이들은 수도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이들이었다. 복음서는 마태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누가 복음서, 요한 복음서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저자들은 마태, 마르코, 누가, 요한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유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서도 복음서는 종종 예수에 관한 전승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복음서들은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곧,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것으로 여겨지며 고문서 검증법 가준에 따라 검증시 비교문서인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에 비해 신약성경의 정확성과 신뢰도는 약 8천배 정도나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복음서는 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동시에 예수의 어록 및 전승에 기초하여 기록되었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이 직접 조사하고 수집한 예수의 전승에 기초해서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고 요한도 똑같은 진술을 하고 있다. 복음서는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쓴 게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마태와 누가는 첫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를 일부분 의존하였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라고 한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사도행전에서는 사울이라고도, 바울로라고도 부른다. 바울은 해외거주 유대인이므로 히브리 이름인 사울과, 헬라(그리스) 이름인 바울로를 모두 사용했다. 따라서 바울로를 사울이 개명한 이름을 여기는 것은 무지이다.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바울은 역사 속의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는 그분과 함께 생활하며 그분을 좇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권 논쟁이 있었던 인물이다. 댜른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반 동안 복음을 선포하시며 가르치심을 베푸시던 때에 예수을 따라 다니며 숙식을 함께 하던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세우신 자들이었는데 반해 바울로 사도는 예수께서 하늘에 승천하시기 전의 공생애 기간중에는 그분과 함께 하지 않았으며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별도로 그를 만나시고 사도로 세워 주셨으므로 그를 사도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초기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일부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밝은 빛 가운데 공중에 나타나신 예수을 만나 회심한 후(바울로가 살던 시대에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개종이 아님),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에는 먼저 있던 사도들을 잠깐 만나 교제를 나누었다.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수께로부터 계시로 가르치심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보다는 주로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사역을 하였으며 이는 그를 이방인들의 사역자로 세우신 예수의 뜻에 의한 것이다.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수많은 이들에게 각인된 예수의 얼굴은 기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로마, 즉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제작된 예수의 초상화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원후 3세기부터 현재의 외모로 알려졌으나 실제 모습은 알 수 없다. 예수의 실존 여부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실제로 신의 아들이었느냐는 신학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누군가-특히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가 예수이라는 존재를 허구로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은 큰 지지를 받지 못해왔다. 주요서적 : , , 참고 서적 : ,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인물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복음서의 특정 에피소드들과 그에 서술된 연대, 그의 신격에 대해 거론된 신학적 이슈들에 관한 토론을 통해 검증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 뿐 아니라, 유대인이나 그리스 로마의 자료 등 다수의 역사적 비기독교 자료들 또한 예수의 존재에 관한 역사적 분석에 이용되어왔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 했었다는 것에 인정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그의 십자가형에 관해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에 의하면 비기독교파에 의해 제기되어온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논란이 되어왔지만, 많은 학자들을 설득하는데에 실패해왔고, 고전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성경학자들 또한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논박하고 있다. Walter P. weaver와 그의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는 활동들이 기술적인 범주 안에서나 이외의 어떤 식으로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어왔던 것으로 기술한다. 1세기 로마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와 "타키투스"(Tacitus)를 포함한 비기독교 인들의 자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요세푸스(Josephus) 학자인 은 요세푸스의 '역사적 예수의 존재 여부에 관한 언급'에 대해 "소수만이 그 진정성에 관해 의문을 가져왔다(few have doubted the genuiness)"라고 진술하여 오직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만 예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논점이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바트 D. 어만은 예수의 존재와 그에게 집행된 로마에 의한 십자가형에 관해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를 포함한 다양한 자료에 의해 입증된다고 서술한다. 예수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존재 여부는 그의 신성이나 그의 존재가 사람인지 또는 신인지의 신학적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선구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특별히 예수의 존재 여부를 초자연적인 힘이 그에게서 나오는지, 또는 기독교 복음이 정확한지는 별개의 문제로 구분하고 있다. Dawkins는 비록 그의 견해가 복음의 문제에 관해 신뢰하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여부에 대해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또한 대표적 비평가인 에 의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 없는 인물로 주장되어왔지만, 후에는 그의 견해를 바꾸었고,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여부는 전혀 논점이 아니었고 그의 존재자체가 부정되어 온적은 없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대한 신학적 관점의 다름(그리스도 단성설, miaphysitism, 그리스도 가현설, 네스토리우스의 교의등)은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논쟁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소수의 현대 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 적 없는 인물로 보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견해는 뚜렷히 비주류이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의 존재는 기독교가 만들어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외아들인 동시에, 피조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그 외,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칼케돈 신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칼케돈 신경과 에페소 신경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에 반대하여, 예수을 하나님이자 인간으로 고백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체제선전 수단인 황제숭배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제국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황제 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를 쓴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분,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 주님, 복음등의 로마제국이 체제선전에 사용하던 말들을 예수에게 붙임으로써 현실권력인 로마제국이 아닌, 예수에게 복종하겠다는 반골적인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반(反)국가 종교로 규정하여 탄압한 것도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급진성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대에 사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의 정치, 사회적 배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이 한 말과 행동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지 깨닫지 못한다. 근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예수을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인 도덕적 모범으로 이해하였다. 실례로 토머스 제퍼슨의 그리스도론은 축귀, 치병, 부활같은 예수의 생에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부분들은 제외시키고, 산상수훈처럼 도덕적인 가르침들만 담아낸 것이었다. 이는 그들의 도덕적 이상을 예수에게 투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에게서 모든 기적들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지우고 한 도덕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 기독교에서는 성공회 신학자들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와 존 셸비 스퐁 주교, 맑스주의를 역사적 예수 연구방법으로 도입한 진보적 신학자 리처드 호슬리, 역사적 예수에 대한 대중적 신학서적들을 발표한 정승우, 성공회 신학자 마커스 보그, 로마 가톨릭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 등의 신학자들에 의해 역사인물로서의 예수의 삶을 복원하려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이 쓴 역사적 예수 관련 신학서적들이 한국어판으로도 나와 있다. 유대교적 관점에서는 신은 여호와 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을 하나님의 외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라고 본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을 유수아 (يوسع) 혹은, 이이사()라고 하며, 예수을 하나님(알라) 또는 그의 독생자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들은 예수을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라고 부르며, 인류에게 내려진 하나님이 보낸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사(聖使)로서 존경한다. 이슬람교도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 꾸란에는 예수이 신의 명령으로 마리아의 몸을 빌어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예수은 그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허가"를 받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예수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누구에게도 살해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적도 없었고 다만 천국으로 들려 올려졌다고 한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예수은 "심판의 날" 전에 다시 지상에 내려와서 정의를 회복하고 적그리스도를 물리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 40년을 지상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이슬람의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한사람의 무슬림으로 여겨져왔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사람들에게 설교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신과의 협동"이라는 개념을 엄격히 금지하고 "유일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예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른바 독생자와 성육신의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이 다른 예언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신성하게 선택되었던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꾸란에서는 처녀잉태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며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꾸란에서 예수을 메시아로 호칭하는데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구원할 자"라는 의미의 메시아와는 다르게 "신의 은총을 받은 자"의 의미이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을 구원할때 강림하는 역할은 같다. 예수은 에아사(Easa)라는 이름으로 힌두교 성전에 등장한다. 이 이름은 이슬람교에서의 예수의 이름 중 하나인 이이사와 같다. 이에 따르면, 예수은 칼리 유가가 삼천 살이 되던 때에 후나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예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힌두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에아사 마시하(Easa Maseeha:예수 메시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힌두교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다. 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ISKCON)는 예수를 크리슈나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Contemporary Sant Mat movements는 예수를 Satguru로 여긴다. Ramakrishna는 예수을 신이 육화된 것으로 여긴다. Swami Vivekananda는 예수을 찬미하고, 그를 힘의 원천과 완벽함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Paramahansa Yogananda는 예수을 엘리사의 재육화이며, 엘리야의 재육화인 세례 요한의 학생이었다고 가르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그의 주된 스승중 하나로 여겼으며 예수으로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 춘향전 《춘향전》(春香傳)은 한국의 고소설이다. 대개의 고소설 작품들처럼 정확한 창작 시기와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 영조, 조선 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치며 현재의 춘향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전라도 남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시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성이성과 남원 기생 춘향의 일화와 그밖에 박색 추녀 설화, 염정 설화, 암행어사 설화, 관탈 민녀 설화 등이 합쳐져 판소리 《춘향가》로 발전하였고, 판소리 사설이 소설로 각색되어 전하고 있다. 이런 <설화→판소리→소설>의 변이(變異) 과정에서 여러가지 설화가 이몽룡과 춘향을 중심으로한 기본 플롯에 추가되며 하나의 판소리로 응집(凝集)된 것인데, 특히 당시 유행하던 암행어사설화(暗行御史說話)에 열녀설화(烈女說話)의 요소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춘향전은 판본 이본(異本)이 4종, 사본이 약 20여 종, 활자본이 50여 종, 번역본이 6, 7종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경판 《춘향전》과 완판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이다. 또한 작자미상의 한문본인 懸吐漢文春香傳(현토한문춘향전)이 1차 1917년, 2차 1923년으로 창작, 발표연도로 표기되어 있으며, 1957년 이가원(李家源)과 조윤제(趙潤濟)의 완판 교주본(校註本)이 각각 나왔고, 1958년 구자균(具滋均)이 《문리논집(文理論集)》 제3집에 경판본을 주석(註釋)한 것이 있다. 춘향전은 신분을 넘은 순수한 연애와 더불어 당시 서민들의 꿈과 정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조선 소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숙종대왕 즉위 초에 퇴기 월매는 자식이 없어 매일 기도를 하여 성참판과의 사이에서 딸 춘향을 낳는다. 춘향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시와 그림에 능하여 온 고을이 춘향을 칭송했다. 어느 봄날 사또 자제 이도령이 광한루에 봄 구경 갔다가 그 곳에서 그네를 타는 춘향을 보고 춘향의 아름다움에 반해 방자를 시켜 춘향을 데려오게 하지만, 춘향은 그에 응하지 않는다. 이도령은 그 날로 춘향의 집으로 찾아가 월매에게 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맹세하고 춘향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의 남원부사 임기가 끝나자 이도령과 춘향은 이별을 맞이한다. 이도령은 춘향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서울로 떠난다. 새로 부임한 변학도는 만사 제쳐두고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 모아 연일 잔치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예쁘기로 소문난 춘향도 불려가게 된다. 변학도는 춘향이 기생의 딸이므로 춘향 또한 기생이나 마찬가지이니 수청을 들라고 한다, 그러나 춘향은 자신은 일부종사해야하니 수청을 들 수 없다고 거절하여 옥에 갇히게 되고, 화가 난 변학도가 춘향을 자신의 생일날 처벌하겠다고 한다. 한편 한양으로 간 이도령은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다시 남원에 내려오게 된다. 이도령은 변학도의 횡포와 춘향이 겪은 일들을 모두 듣게 되지만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거렁뱅이 행세를 하며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한다. 춘향은 그런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며 월매에게 그를 극진히 대접해라주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드디어 변학도의 생일잔치 날, 남루한 행색을 한 이도령이 들어와 자신이 시를 한 수 지을 테니 술 한 잔만 대접해 달라고 하며 변학도가 백성을 핍박하는 것을 꼬집는 시를 시어낸다. 변학도는 그 시를 보고도 이도령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춘향을 불러내라 명령하고, 곧 암행어사 이도령이 출두한다. 변학도와 그 무리들은 포박당하고 이몽룡은 춘향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수청을 들라한다. 춘향이 거절하고 이몽룡이 만족해하며 사실을 밝히자, 춘향은 어사인 이도령을 알아보게 되고, 둘은 기쁘게 재회하게 된다. 춘향은 굳은 절개로 인해 칭송받고 이도령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 모든 문학 작품에서 그렇듯이, 춘향전 역시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작자와 연대 모두 미상이지만, 춘향전은 전 백성의 합작품으로 추측된다. 어느 시대에든 불가능했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을 그린 점이나, 백성을 전제적으로 지배하던 탐관오리가 통쾌하게 처벌당하는 모습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백성들은 문학작품을 통해 자신들이 꿈꾸는 것들을 대리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굳은 의지를 지키는 춘향의 모습은 열녀의 윤리관을 넘는 사랑에 대한 신념과 해방의 의지를 볼 수 있다. 박색의 처녀로 이웃집 도령을 연모하였으나, 도령에게 거절당하자 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는 전설이다. 다른 이름은 박색 춘향 설화이다. 춘향전의 소재에 영향을 준 민담은 남원 주변 지역에서 전하던 추녀설화였다. 이를 일명 박색춘향 설화라고도 한다. 정확한 연대를 알수 없는 사건으로, 성이성과 남원 기생 보다 앞선 시대부터 전라북도 남원과 주변 지역에 전해지던 전설이었다. 양반의 아들 혹은 이웃집 총각을 연모하던 여성은, 자신의 마음을 양반의 아들 또는 그 이웃집 총각에게 고백하였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실망한 여성은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때부터 그녀의 넋을 달래기 위한 위령제를 지냈고, 춘향이 연모하던 남성과 행복하게 산다는 주제로 극을 만든 것이 구전을 통해서 내려와 춘향전의 탄생에 일부 기여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성이성과 남원 기생의 이야기를 뼈대로 했다는 주장이 있다. 다음은 그 주장의 내용이다. 춘향전이 양반의 체신을 상하게 한다는 여론이 나오자 조정은 성도령, 성몽룡이라고 패러디한 작가와 소리꾼, 가객들을 벌주게 되면서 성몽룡을 이몽룡으로 바꿔서 상연하게 되었다. 성이성은 남원부사인 아버지 성안의를 따라 왔다가, 남원의 기생 춘향과 정분을 맺게 된다. 그러나 춘향전에서 정렬부인으로 봉작되고 이도령(또는 성도령)과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는 스토리와는 다소 다르다. 성이성은 아버지 성안의가 승정원승지로 발령되면서 한성부한성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이후 연락이 끊겼다. 한참 뒤 암행어사로 전라도로 내려오게 된 성이성은 옛날 남원에서의 기생의 일을 수소문하여 찾아보지만 찾지 못한다. 이때 성이성은 남원에서 예전에 만났던 기녀(혹은 주모)를 다시 만나지만 춘향의 행방을 찾아낼수 없었다. 그에 의하면 이미 새로운 사또의 수청을 들라는 강요를 거절했다가 옥사했다고도 하고,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춘향전은 조선시대에 판소리 《춘향가》로 널리 불렸으며, 지금도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같이 보기의 《춘향가》 참조). 이외에도 20세기 들어 판소리를 바탕으로 여러 등장인물이 출연하고 국악 관현악의 반주가 곁들여지는 형태의 창극으로도 공연되고 있다. 창극에 영향을 미친 서양 오페라나 뮤지컬 등의 형태로 재탄생시킨 작품들도 여러 편 있으며,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일본에서 창작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1946년 1월 대한국악원 주최로 국악인을 총망라, 국극사의 창립공연으로 상연했다. 이도령에 정남희(丁南希), 임방울, 춘향에 신숙(愼淑), 향단에 임수(任洙), 방자에 오태석, 사또에 조상선(趙相善), 월매에 임소향(林小香), 임유앵이 분장했다. 이 <대춘향전>은 해방의 감격과 우리의 음악, 우리의 창극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작용했거니와, 새로운 의욕과 열연으로 크게 환영받았다. 일본의 만화 창작 집단인 클램프가 1992년에 발표한 《신춘향전(新・春香伝)》 은 춘향전 원전을 참고한 작품이나, 거의 새롭게 창작되었다. 춘향은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무예에 능하고 활달한 성격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며, 원작에는 없던 사또의 아들 등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판타지 소설 풍의 스토리 전개를 취하고 있으며, K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펀지》 에도 소개된 바 있었다. 클램프 원작의 애니메이션 《츠바사 크로니클》의 〈나유타야 국(國)〉 편에도 이전 작품 등장인물이 그대로 등장하는 패러렐 월드가 설정되어 춘향이 등장하며, 여기서 등장하는 춘향은 원작 《신춘향전》의 마지막에 수록된 에피소드에 나오는 어린 시절 모습으로 등장한다. 춘향전에서 주인공인 도령(이도령 또는 성도령)은 춘향을 유혹하려 하면서 실수를 보인다. 이런 실수는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 희화화로 드러난다. 주인공인 도령은 방자로부터 온갖 희롱과 놀림을 당하고도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노리개감이 된다. 또 도령의 행동은 양반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어 지방관들의 횡포를 폭로하고 그 위세당당하던 수령들도 더 큰 권력(암행어사) 앞에서는 인사불성이 되는 일차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 기생의 딸인 춘향은 양반 가문에 들어가 어엿한 며느리가 된다. 춘향전에서 춘향은 기생의 딸이다. 원전에는 천민인 기생의 후손이지만 뒤에 추가된 성참판의 딸 설을 기준으로 해도 어머니가 천인인 기생이다. 양반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춘향은 성참판의 서녀(庶女)로서 서얼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로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스며들어 간 것으로 해석된다.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는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 Briggs)와 그의 딸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가 카를 융의 성격 유형 이론을 근거로 개발한 성격유형 선호지표이다. 이 검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개발되었다. MBTI( Myers-Briggs Type Indicator )는 C.G.Jung의 심리유형론을 근거로 하여 Katharine Cook Briggs와 Isabel Briggs Myers가 보다 쉽고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자기보고식 성격유형지표이다. 융의 심리유형론은 인간행동이 그 다양성으로 인해 종잡을 수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아주 질서정연하고 일관된 경향이 있다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인간행동의 다양성은 개인이 인식(Perception)하고 판단(Judgement)하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MBTI는 인식과 판단에 대한 융의 심리적 기능이론, 그리고 인식과 판단의 향방을 결정짓는 융의 태도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또한 개인이 쉽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보고(self report) 문항을 통해 인식하고 판단할 때의 각자 선호하는 경향을 찾고, 이러한 선호경향들이 하나하나 또는 여러 개가 합쳐져서 인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파악하여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심리검사이다. 비즈니스 업계에서 유명하지만 MBTI는 상당한 과학적(psychometric) 결함을 보여준다. 이를 테면 낮은 유효성(예: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측정하지 않음, 예측 동력이 없음 또는 일반화할 수 있는 품목이 없음), 낮은 신뢰성(다른 상황에 처한 동일 인물에 다른 결과를 보여줌), 비독립적인 항목 측정(일부 이분법적 특성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음), 포괄적이지 않은 점 등을 포함한다. MBTI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척도로 성격을 표시한다. 각각의 척도는 두 가지 극이 되는 성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가지 척도마다 두 가지 경우가 존재하므로, 2 = 16가지의 유형이 만들어진다. 유형은 각 경우를 나타내는 알파벳 한 글자씩을 따서 네 글자로 표시한다. 다음은 MBTI의 유형들이다. 회의주의자들은 MBTI가 다소 "애매하고 광범위"하여, 모든 종류의 개인 성향에 적당히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시험자들이 긍정적인 성격 유형 설명에 대해서 특별히 높은 평가를 한다는 면에서 MBTI 검사 결과는 위약 효과라고 주장한다. MBTI는 인간의 성격을 한 차원 안에서 다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또한 이 검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바 없으며, 표준화되지 않은 검사라는 점에서 이 검사에 대한 신뢰도/타당도의 측면에서 상당히 의심스러운 바가 많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NEO-PI-R(Big5)이나 MMPI와 같이 충분한 타당화 절차를 거친 검사에 비해 MBTI가 갖는 약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MBTI 유형이 비교적 요약적이며, 뚜렷하고 정밀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MBTI의 이분법적 요소도 어떤 유형도 수치의 문제일뿐 다른 유형 성격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자들의 비판을 전면 반박한다. 또한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NEO-PI-R(Big5)이나 MMPI 같은 경우는 정상, 비정상 가려내는 측면에서는 유용할지 모르나 개인성향을 알기에는 어렵고, 또한 시험자가 충분히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점에서 MBTI 보다 정밀도가 훨씬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실제로 MBTI는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세계적으로 학교, 기업, 군대 등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격검사이다. 커세이와 같은 몇몇 학자들은 더욱 세세한 설명이 가능하도록 MBTI 유형들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커세이의 '커세이 성향 지표'는 MBTI의 16개 개인 성향 지표에서 끌어 온 것이며, 이것은 개인의 기질을 언어 사용, 지적 성향, 교육과 직업적 흥미, 사회적 성향, 자아상, 개인적 가치, 사회적 역할, 그리고 특징적인 손짓 등으로 분류하였다. 광합성 광합성(光合成, )은 식물 및 다른 생명체가 빛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과정이다. 전환된 화학 에너지는 나중에 생명체의 활동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방출될 수 있다. 이 화학 에너지는 이산화 탄소와 물로부터 합성된 당과 같은 탄수화물 분자에 저장된다. 광합성이란 이름은 그리스어 φῶς ("phōs", "light", "빛"을 의미함)와 σύνθεσις ("synthesis", "합성"을 의미함)에서 유래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광합성에서 산소는 부산물로 방출된다. 대부분의 식물, 조류 및 남세균은 광합성을 수행하는데, 이러한 생물을 광독립영양생물이라고 한다. 광합성은 지구 대기 중의 산소를 생산하고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며, 지구 상의 생명체에게 필요한 유기 화합물과 대부분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광합성은 생물 종에 따라 다르게 수행되지만, 빛에너지가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에 존재하는 광계(광합성 색소와 단백질로 구성된 복합체)의 반응 중심 색소로 전달되고 고에너지 전자를 방출하면서 과정이 시작된다. 식물에서 이러한 단백질들은 잎 세포에서 가장 풍부한 엽록체라고 불리는 세포소기관의 내부에 있고, 세균에서는 세포막에 묻혀 있다. 이러한 광의존적 반응에서는 물(HO)과 같은 적당한 물질로부터 전자를 떼어내는데 빛에너지를 사용하고, 부산물로 산소(O)를 생성한다. 물의 광분해에 의해 방출되는 전자는 단기 에너지 저장의 역할을 하는 두 가지 화합물의 생성에 사용되고, 생성된 화합물은 다른 반응들을 진행시키는데 사용된다. 이들 화합물은 환원된 니코틴아마이드 아데닌 다이뉴클레오타이드 인산(NADPH)과 세포의 "에너지 화폐"인 아데노신 삼인산(ATP)이다. 식물, 조류 남세균에서 장기 에너지 저장의 역할을 하는 당(糖)은 캘빈 회로라고 불리는 일련의 광비의존적 반응에 의해 생성된다. 어떤 세균은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리버스 시트르산 회로와 같은 다른 기작을 사용한다. 캘빈 회로에서 대기 중의 이산화 탄소는 리불로스 1,5-이중인산(RuBP)와 같은 이미 식물 체내에 존재하는 유기 화합물과 결합한다. 광의존적 반응에 의해 생성된 ATP와 NADPH를 사용하여, 반응물들을 환원시키고 포도당과 같은 탄수화물을 생성한다. 최초의 광합성 생물은 생물의 진화 역사에서 초기에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전자공여체로 물보다는 수소(H)나 황화 수소와 같은 환원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세균은 나중에 출현했는데, 남세균이 생산한 과량의 산소는 지구의 산소 공급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으며, 이는 보다 복잡한 생물로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광합성에 의한 에너지 포획량은 약 130 테라와트이며, 이는 현재 인류 문명의 전력 소비량의 약 8배에 달한다. 광합성 생물은 연간 약 100~115억톤의 탄소를 바이오매스로 전환시킨다. 광합성 생물은 광독립영양생물이며, 이는 빛에너지를 사용하여 이산화 탄소와 물로부터 직접적으로 음식물을 합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생물이 광합성을 수행하기 위해 이산화 탄소를 탄소 원자의 공급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광종속영양생물은 탄소의 공급원으로 이산화 탄소가 아닌 유기 화합물을 사용한다. 식물, 조류, 남세균에서 광합성은 산소를 방출한다. 이것은 산소발생 광합성이라고 하며, 생물에 의해 사용되는 광합성의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다. 식물, 조류, 남세균의 산소발생 광합성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지만, 전반적인 과정은 이들 생물에서 매우 유사하다. 이산화 탄소를 소비하지만 산소를 방출하지 않는 특정 종류의 세균에서 주로 사용되는 많은 종류의 산소비발생 광합성도 있다. 이산화 탄소는 탄소 고정이라고 불리는 과정에서 당으로 전환된다. 광합성은 햇빛으로부터 포획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이산화 탄소를 탄수화물로 전환시킨다. 탄소 고정은 흡열 반응이며, 산화환원반응이다. 일반적인 개요에서 광합성은 세포 호흡의 반대 과정이다. 광합성은 이산화 탄소를 탄수화물로 환원시키는 과정이지만, 세포 호흡은 탄수화물이나 다른 영양소를 이산화 탄소로 산화시키는 과정이다. 세포 호흡에 사용되는 영양소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포함된다. 이러한 영양소들은 산화되어 이산화 탄소와 물을 생성하고, 화학 에너지를 방출하여 생물체의 대사 활동을 추진시킨다. 광합성과 세포 호흡은 서로 다른 세포 내 구획에서 서로 다른 화학 반응의 순서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 별개의 과정이다. 코르넬리스 반 닐이 처음으로 제안한 광합성의 일반적인 화학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물은 산소발생 광합성에서 전자공여체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과정의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이 반응식은 물이 광의존적 반응에서 반응물과 광비의존적 반응에서 생성물이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양변의 소거할 수 있는 물 분자를 제거하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다른 광합성 과정은 전자공여체 역할을 하는 물을 다른 화합물(예: 아비산염)로 대체한다. 예를 들어, 일부 미생물은 아비산염(arsenite)을 비산염(arsenate)으로 산화시키기 위해 햇빛을 이용한다. 이러한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광합성은 크게 두 단계로 일어난다. 첫 번째 단계는 광의존적 반응으로 빛에너지를 이용하여 에너지 저장 분자인 ATP와 NADPH를 생성한다. 두 번째 단계는 광비의존적 반응으로 ATP와 NADPH를 사용하여 이산화 탄소를 포도당으로 환원시킨다. 산소발생 광합성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생물은 광의존적 반응에 가시광선을 사용하지만, 단파 적외선이나 보다 구체적으로 원적외선을 사용하는 생물도 있다. 일부 생물들은 훨씬 더 극단적인 종류의 광합성을 사용한다. 일부 고세균들은 동물에서 시각에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색소를 이용하는 더 간단한 방법을 사용한다. 박테리오로돕신은 햇빛에 반응하여 그 구성을 변화시켜서 H(양성자) 펌프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보다 직접적으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를 형성하고, 이를 다시 화학 에너지로 전환한다. 이 과정은 이산화 탄소의 고정을 포함하지 않으며, 산소를 방출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유형의 광합성과는 별도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광합성 세균에서 광합성을 위해 빛을 흡수하여 모으는 단백질은 세포막에 존재한다. 가장 간단한 형태로, 이것은 세포 자체를 둘러싸는 막을 포함한다. 이러한 막은 틸라코이드라고 불리는 원통형 시트로 단단히 접힐 수 있다. 이러한 구조들은 세포 내부를 대부분 채울 수 있어서 틸라코이드 막은 매우 넓은 표면적을 갖게 되고, 따라서 세균이 흡수할 수 있는 빛의 양을 증가시킨다. 식물과 조류에서 광합성은 엽록체라고 불리는 세포소기관에서 일어난다. 전형적인 식물 세포는 약 10~100개의 엽록체를 가지고 있다. 엽록체는 막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외막과 내막의 2중막 구조로 되어 있고, 외막과 내막 사이의 공간을 막 사이 공간이라고 한다. 내막으로 둘러싸인 부분은 엽록체의 기질에 해당하는 부위로 스트로마라고 한다. 스트로마에는 광의존성 반응이 일어나는 그라나(틸라코이드가 쌓여 층을 이룬 구조)가 있다. 틸라코이드는 납작한 동전 모양의 구조물이다. 틸라코이드 자체는 틸라코이드 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둘러싸인 내부 공간은 루멘 또는 틸라코이드 내부라고 한다. 틸라코이드 막은 광합성 색소들이 결합된 단백질 복합체인 광계, 전자전달계의 효소들, ATP 생성효소 등이 있어 빛에너지가 화학 에너지로 전환되는 장소이다. 식물은 주로 엽록소를 사용하여 빛을 흡수한다. 빛 스펙트럼의 녹색 부분은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물들이 녹색을 띄게 된다. 식물은 엽록소 외에도 카로틴과 잔토필과 같은 색소를 사용한다. 조류는 또한 엽록소를 사용하지만, 녹조류에는 피코시아닌, 카로틴, 잔토필, 홍조류에는 피코에리트린, 갈조류와 규조류에는 갈조소(푸코잔틴) 등 다양한 색소가 존재한다. 식물과 조류에서 이러한 색소들은 안테나 단백질이라고 불리는 단백질 복합체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한 복합체에서는 색소가 단백질과 함께 작용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단백질들의 복합체를 광수집 복합체라고도 한다. 식물의 녹색 부분에 있는 모든 세포가 엽록체를 가지고 있지만, 엽록체의 대다수는 주로 잎에서 발견된다. 대극속("Euphorbia") 식물과 선인장과 같이 강한 햇빛과 건조한 조건에 적응한 생물종들은 줄기에 광합성 세포소기관을 가지고 있다. 엽육이라고 불리는 잎의 유조직에 있는 세포는 잎의 1mm 당 450,000~800,000 개의 엽록체를 포함할 수 있다. 잎의 표면은 과도한 수분 증발로부터 잎을 보호하고 잎의 온도 상승을 줄이기 위해 자외선이나 청색광의 흡수를 감소시키는 방수성 왁스 큐티클로 코팅되어 있다. 투명한 표피층은 광합성의 대부분이 일어나는 엽육세포로 빛을 통과시킨다. 광의존적 반응에서 엽록소 한 분자는 하나의 광자를 흡수하고 하나의 전자를 방출한다. 이 전자는 페오피틴이라고 불리는 변형된 형태의 엽록소로 전달되고, 이어서 전자를 플라스토퀴논으로 전달하는 일련의 전자전달계를 따라 전자의 흐름을 시작하는데 전자는 최종적으로 NADP에 전달되어 NADPH가 생성된다. 또한, 전자전달계는 고에너지 전자의 에너지를 이용해 틸라코이드 막을 경계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를 형성하고, 이를 이용해서 ATP 생성효소를 통해 ATP를 생성한다. 물의 광분해라고 불리는 과정에서 물(HO)에서 방출된 전자는 광계 II 의 반응 중심 색소(P)를 환원시키므로 물은 전자공여체로 역할을 하며,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산소(O)가 방출된다. 녹색 식물에서 비순환적 전자 흐름 조건 하에서 광의존적 반응에 대한 전체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모든 파장의 빛이 광합성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광합성의 작용 스펙트럼은 보조 색소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녹색 식물에서 작용 스펙트럼은 청자색광과 적색광에서 흡수 피크를 갖는 엽록소 및 카로티노이드의 흡수 스펙트럼과 유사하다. 홍조류에서 작용 스펙트럼은 청녹광으로, 홍조류는 육상의 녹색 식물에서 사용되는 적색광(긴 파장)을 걸러내는 깊은 물 속에서 청색광을 사용할 수 있다. 광 스펙트럼의 비흡수 부분은 광합성에서 주로 사용되지 않으며, 광합성 생물의 색(예: 녹색 식물, 홍조류, 홍색 세균)을 부여한다. 식물에서 광의존적 반응은 엽록체의 틸라코이드 막에서 일어나며, 빛에너지를 흡수해 ATP를 합성하고, NADP를 NADPH로 환원시킨다. 광의존적 반응에는 비순환적 광인산화(비순환적 전자 흐름)과 순환적 광인산화(순환적 전자 흐름)가 있다. 비순환적 광인산화에서 광자는 엽록소와 다른 보조 색소에 의해 광계 II 의 광수집 복합체에 포획된다. 광수집 복합체에 의한 광자의 흡수는 광유도 전하 분리라고 불리는 과정을 통해 전자를 방출한다. 광계 II 의 반응 중심 색소인 P은 한 쌍의 엽록소 a 이며, 다른 광합성 색소로부터 에너지를 전달받아 고에너지 전자를 방출한다. 방출된 전자는 광계 II 의 1차 전자수용체인 페오피틴으로 전달된다. 전자가 전자전달계(그림으로 표시된 소위 Z 모식도)를 통해 이동하면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H(양성자)를 스트로마에서 틸라코이드 내부로 능동수송하여 틸라코이드 막을 경계로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가 형성된다. ATP 생성효소는 광인산화 과정에서 ATP를 생성하기 위해 H(양성자)의 농도 기울기를 사용하는 반면, NADPH는 비순환적 전자 흐름에서 최종적인 산화환원반응의 산물이다. 전자는 광계 I 의 엽록소 분자로 전달된다. 전달된 전자는 광계 I 에 의해 흡수된 빛에너지에 의해 더 들뜨게 된다. 그런 다음 전자는 전자전달계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한다. 전자전달계를 통해 전자수용체로 전달되는 에너지는 틸라코이드 막을 가로질러 스트로마에서 틸라코이드 내부로 H(양성자)를 능동수송 시키는데 사용된다. 전자는 최종 전자수용체인 NADP로 전달되어 NADPH를 생성하고, 생성된 NADPH는 캘빈 회로에서 사용된다. 순환적 광인산화는 비순환적 광인산화와 유사하지만, ATP만 생성하고 NADPH는 생성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순환적 광인산화는 광계 I 만 관여한다. 광계 I 이 빛을 흡수한 후 P에서 방출된 고에너지 전자가 NADP에 전달되지 않고 전자전달계를 거친 후 다시 P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순환적 광인산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광계를 통한 비순환적 전자 흐름은 광계의 반응 중심을 산화시킨다. 다른 전자를 방출시키려면 먼저 산화된 반응 중심을 다시 환원시켜야 한다. 광계 I 의 반응 중심(P)으로부터 방출된 고에너지 전자는 플라스토시아닌으로부터 전달되는 전자로 대체되는데, 이 전자는 광계 II 를 통한 전자전달로부터 나온다. 비순환적 전자 흐름의 첫 번째 단계인 광계 II 는 산화된 반응 중심 색소(엽록소 a)인 P을 환원시키기 위해 외부 전자공여체를 필요로 한다. 녹색 식물과 남세균에서 광합성을 위한 전자의 공급원은 물이다. 2개의 물 분자는 광계 II 에 의한 4번의 연속적인 전하 분리 반응에 의해 산화되어 1개의 산소 분자(O)와 4개의 수소 이온(H)과 4개의 전자(e)를 생성한다. 생성된 전자는 산화 환원 활성을 가지는 티로신 잔기로 전달되어 산화된 P을 환원시킨다. 이것은 P이 다른 광자를 흡수하고 또 다른 광분해 전자를 방출하는 능력을 재설정한다. 물의 산화는 4개의 망가니즈 이온과 1개의 칼슘 이온을 포함하는 산화환원 활성 구조에 의해 광계 II 에서 촉매된다. 이러한 산소발생 복합체는 2개의 물 분자와 결합하고 물의 산화 반응을 일으키는데 사용되는 4개의 단계로 구성된 산화 상태를 포함한다. 광계 II 는 물의 산화를 수행하는 유일한 생물학적 효소로 알려져 있다. 물의 광분해에서 형성된 수소 이온(H)은 틸라코이드 내부로 방출되며, 따라서 틸라코이드 막을 경계로 수소 이온(H)의 농도 기울기가 형성되고, 이러한 화학삼투적 위치 에너지를 이용해서 ATP를 합성한다. 산소는 광의존적 반응의 부산물이지만, 광합성 생물을 포함한 지구 상의 많은 생물들은 세포 호흡에 산소를 사용한다. 광비의존적 반응(또는 암반응)은 엽록체의 스트로마에서 일어나며, 광의존적 반응(또는 명반응)의 산물인 ATP, NADPH를 이용하여 CO로부터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G3P)을 합성하는 과정이다.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 2분자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포도당으로 합성된다. 녹색 식물에서 광비의존적 반응에 대한 전체 반응식은 다음과 같다. 탄소 고정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CO)가 리불로스 1,5-이중인산(RuBP)와 반응한 후 둘로 나누어져 중간생성물인 3-포스포글리세르산(3PG)이 생성되며, 이 과정에서 리불로스 1,5-이중인산 카복실화효소/산소화효소(루비스코)가 관여한다. 생성된 3-포스포글리세르산은 캘빈 회로를 거쳐 탄수화물로 최종적으로 전환된다. 광합성에 의해 생성된 포도당은 세포벽의 구성 성분인 셀룰로스, 지질 및 아미노산 생합성을 위한 전구물질과 같은 다른 유기 화합물의 형성에 사용되거나 세포 호흡의 연료로 사용된다. 세포 호흡의 연료로 사용하는 것은 식물에서 뿐만 아니라 식물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먹이 사슬을 통해 섭취한 동물에서도 일어난다. 탄소 고정을 통해 이산화 탄소는 5탄당 인산인 리불로스 1,5-이중인산(RuBP)과 결합하여 3탄소 화합물인 3-포스포글리세르산(3PG)을 생성한다. 3-포스포글리세르산은 광의존적 반응에서 생성된 ATP와 NADPH의 존재 하에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G3P)으로 환원된다.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은 보다 일반적으로 삼탄당 인산이라고도 한다. 생성된 글리세르알데하이드 3-인산의 대부분(6분자 중 5분자)은 리불로스 1,5-이중인산을 재생하는데 사용되어 캘빈 회로가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캘빈 회로에서 방출되는 삼탄당 인산은 서로 축합되어 육탄당 인산을 형성하는데, 이들은 궁극적으로 수크로스, 녹말, 셀룰로스를 생성하는데 사용된다. 캘빈 회로를 통해 생성된 당은 아미노산과 지질의 생성과 같은 다른 대사 반응에 사용될 수 있는 탄소 골격을 생성한다. 고온 건조한 환경에서 식물은 기공을 닫아서 수분의 손실을 막는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이산화 탄소(CO)의 농도가 감소하고, 광합성의 명반응에 의해 생성된 산소(O)의 농도가 증가하여, 리불로스 1,5-이중인산 카복실레이스/옥시제네이스의 옥시제네이스 활성에 의한 광호흡의 증가를 야기하고, 탄소 고정의 감소를 일으킨다. 일부 식물은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잎의 CO 농도를 증가시키는 메커니즘을 진화시켜 왔다. C 탄소 고정 과정을 사용하는 식물들은 엽육 세포에 존재하는 PEP 카복실화효소에 의해 CO를 포스포에놀피루브산(PEP)에 첨가하여 4탄소 화합물인 옥살아세트산을 생성한다. 이 과정에서 합성된 옥살아세트산이나 말산은 이 후에 루비스코와 다른 캘빈 회로의 효소가 위치한 유관속초 세포로 옮겨지고, 4탄소 유기산의 탈카복실화에 의해 방출된 CO는 루비스코에 의해 3탄소 화합물인 3-포스포글리세르산(3PG)으로 고정된다. 산소를 발생시키는 명반응으로부터 루비스코의 공간적인 분리는 광호흡을 저해시키고, CO 고정을 증가시켜 잎의 광합성 능력을 증가시킨다. C 식물은 강한 빛과 온도가 높은 조건에서 C 식물보다 많은 당을 생산할 수 있다. 많은 중요한 작물들은 옥수수, 수수, 사탕수수, 조를 포함한 C 식물들이다. 탄소 고정에 PEP 카복실화효소를 사용하지 않는 식물은 C 식물이라고 불리며, 이는 루비스코에 의해 촉매되는 1차 카복실화 반응이 캘빈 회로에서 3탄소 화합물인 3-포스포글리세르산을 직접 생성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90% 이상이 C 탄소 고정을 사용하는 반면, 식물의 3% 만이 C 탄소 고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60 가지가 넘는 식물 계통에서 C 탄소 고정의 진화는 수렴 진화의 두드러진 예라고 볼 수 있다. 선인장과 대부분의 다육식물과 같은 건생식물은 또한 CAM(Crassulacean acid metabolism)이라고 불리는 과정에서 이산화 탄소를 포획하기 위해 PEP 카복실레이스를 사용한다. C 식물은 포스포에놀피루브산(PEP)로의 CO 고정과 캘빈 회로를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반면, CAM 식물은 CO 고정과 캘빈 회로를 시간적으로 분리한다. CAM 식물은 C 식물과는 다른 잎의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기공이 열려 있는 밤에 CO를 고정시킨다. CAM 식물은 말산의 형태로 CO의 대부분을 저장하는데, 포스포에놀피루브산(PEP)을 옥살아세트산으로 카복실화한 다음, 말산으로 환원한다. 낮에 말산의 탈카복실화는 잎의 내부로 CO를 방출시키며, 루비스코에 의해 3-포스포글리세르산으로 탄소 고정이 일어나도록 한다. 16,000 종의 식물이 CAM 광합성을 사용한다. 남세균은 카복시좀을 가지고 있어서, 광합성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루비스코 주변의 CO 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다. 카복시좀 내에 위치한 탄산무수화효소는 용해된 탄산수소이온(HCO)으로부터 CO를 방출시킨다. CO가 밖으로 확산되기 전에 CO는 카복시좀 내에 집중되어 있는 루비스코에 의해 빠르게 흡수된다. 탄산수소이온(HCO)은 또 다른 탄산무수화효소에 의해 세포 외부의 CO로부터 만들어지며, 막 단백질에 의해 세포 내로 능동수송된다. 탄산수소이온(HCO)은 하전된 상태로는 막을 통과할 수 없으며, 세포기질 내에서 탄산무수화효소의 도움없이 매우 천천히 CO로 되돌아간다. 이로 인해 탄산수소이온(HCO)이 세포 내에 축적되어 카복시좀으로 확산된다. 또한, 조류와 뿔이끼류의 피레노이드는 루비스코 주변에 CO를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광합성의 전체적인 과정은 다음의 네 단계로 일어난다. 광합성은 태양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변환하는 물질대사 과정이다. 물질대사는 열역학적 개념인 엔탈피, 엔트로피, 자유 에너지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광합성의 생체에너지학은 빛 에너지를 식물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을 엔트로피 변화로 설명한다. 지구상에는 태양 에너지와 지구 내부 에너지(화산, 온천, 방사성 동위원소),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자유 에너지원이 있는데 식물은 태양 에너지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태양 에너지는 전자기 복사에너지로서 생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데 엽록소 a와 같은 광합성 색소가 가시광선을 흡수하면 광합성 색소의 전자가 들떠서(전자가 에너지를 가지고 있음) 화학 반응(산화-환원반응)이 일어난다. 빛 에너지는 계의 자유 에너지로 표현되며 자유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 형태로 변환될 때 완전히 전환되지는 못한다. 이것은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의 에너지 정의인 "자유 에너지의 변화(ΔG)는 계의 엔트로피 변화(ΔS)와 엔탈피(ΔH) 변화와 관련이 있다."(라비노비치)에 근거하며 기브스 에너지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녹색식물의 광합성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반응식으로 요약되며 자유 에너지의 변화를 보여 준다. 1 mol 당 에너지 변화는 -112 kcal/mol(포도당 1mol 당 -672 kcal/mol)이고 빛의 자유 에너지는 120 kcal/mol이므로 8 kcal/mol 손실은 엔트로피에 의한 것이다. 기브스 방정식을 보면 계의 열에너지의 양(열에너지의 양은 계의 온도와 엔트로피의 크기에 의존함)이 적을수록 자유 에너지에서 이용 가능한 에너지인 엔탈피로의 변환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열역학 제2 법칙). 광합성 또한 엔트로피와 엔탈피의 상호 작용에 의해 에너지 변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식물은 보통 3~6%의 광합성 효율로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한다. 흡수한 빛 중에서 화학 에너지로 변환되지 않는 것은 주로 열로 방출되며, 소량(1~2%)은 더 긴 파장에서 엽록소 형광으로 재방사된다. 이러한 사실은 엽록소 형광측정기를 사용하여 광합성의 명반응을 측정 가능하게 한다. 실제 식물의 광합성 효율은 전환되는 빛의 파장, 빛의 세기, 온도, CO의 농도에 따라 다르며 0.1%~8%까지 다양하다. 비교해 보면, 태양광 모듈은 양산된 모듈의 경우 약 6~20%의 효율로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하고, 실험실 장치에서는 약 40% 이상을 전기 에너지로 변환한다. 명반응과 암반응의 효율을 둘 다 효율을 측정할 수 있지만, 명반응과 암반응 간의 관계는 복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명반응에서 생성된 ATP와 NADPH는 캘빈 회로 또는 C 식물의 광호흡에 사용될 수 있다. 전자들은 또한 다른 전자 싱크(sink)들로 흐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광호흡인 조건과 광호흡이 아닌 조건 하에서 수행된 반응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광계 II 의 엽록소 형광 측정기로 명반응을 측정할 수 있고, 적외선 가스 분석기로 암반응을 측정할 수 있다. 또한 엽록소 형광 측정기와 적외선 가스 분석기를 통합하여 사용하거나 두 개의 개별 시스템을 함께 사용하여 명반응과 암반응을 조사할 수도 있다. 적외선 가스 분석기와 일부 수분 센서는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광합성에 따른 CO 변화와 ΔHO를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하다. CO는 일반적으로 μmols/m/s, ppm(parts per million) 단위로 측정되며, HO는 일반적으로 mmol/m/s 또는 mbar 단위로 측정된다. CO의 동화, ΔHO, 잎의 온도, 기압, 잎의 면적, 광합성 유효복사(PAR)를 측정함으로써 탄소 동화("A"), 증산("E"), 기공 전도도("gs"), 세포 내 CO(또는 Ci)를 추정할 수 있도록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측정 매개 변수인 FV/FM과 Y(II) 또는 F/FM’을 몇 초 만에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식물 스트레스 측정에 엽록체 형광을 사용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며, 보다 더 큰 식물 개체군의 측정을 가능하게 한다. 주변 공기의 위와 아래의 CO 수준을 조절할 수 있는 가스 교환 시스템은 서로 다른 CO 수준에서 탄소 동화(C)/세포 내 CO(Ci) 곡선을 측정하여 식물의 광합성 반응을 특성화한다. 엽록소 형광 측정기와 가스 교환 시스템의 통합은 광합성 반응과 광합성 메커니즘의 보다 정확한 측정을 가능하게 한다. 표준 가스 교환 광합성 시스템은 Ci(세포 내 CO) 또는 기공 아래 공간의 CO 수준을 측정할 수 있지만, 엽록소 형광 측정을 추가하면 Ci를 보다 정확하게 측정한 C로 대체할 수 있다. 엽록체의 카복실화 부위에서의 CO의 추정 또는 C는 통합된 시스템을 이용한 엽육 전도도 또는 g 의 측정으로 가능해진다. 광합성 측정 시스템은 잎이 흡수하는 빛의 양을 직접적으로 측정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엽록소 형광, P 및 P의 흡광도, 기체 교환 측정의 분석은 광계, 양자 효율 및 CO의 동화 속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보여준다. 다른 측정 장비로도 광합성 효율의 파장 의존성을 분석할 수 있다. 양자 걸음으로 알려진 현상은 빛의 에너지 전달 효율을 크게 증가시킨다. 조류, 세균, 식물의 광합성 세포에는 광계라고 하는 안테나 모양의 구조로 배열된 발색단이라고 불리는 빛에 민감한 분자가 있다. 광자가 발색단에 의해 흡수되면 엑시톤이라고 하는 준입자로 변환되어 발색단에서 발색단으로 전달을 거쳐 광계의 반응 중심으로 전달된다. 광계는 광합성 색소와 단백질로 이루어진 복합체로 세포의 물질대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의 형태로 변환하는 분자들의 집합이다. 엑시톤의 파동 특성은 넓은 영역을 커버하고 여러 가능한 경로들을 동시에 시험해 볼 수 있게 해서 가능한 최소 시간 안에 대상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즉각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 준다. 양자 걸음은 양자 현상이 일어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온도에서 보통 일어나기 때문에 매우 짧은 거리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파괴적인 간섭의 형태로 나타나는 장애물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입자가 고전적인 "홉(hop)"을 통해 잠긴 위치에서 벗어난 후 다시 입자를 되찾기 전에 잠시 동안 입자의 파동 특성을 잃게 만든다. 따라서 광계의 반응 중심으로 전자의 이동은 일련의 통상적인 홉과 양자 걸음으로 다루어진다. 녹색황세균, 홍색황세균, 녹색비황세균, 홍색비황세균과 같은 초기 광합성 생물들은 산소 비발생 광합성을 한 것으로 생각되며, 전자공여체로 물이 아닌 다른 다양한 분자들을 사용했다. 녹색황세균과 홍색황세균은 전자공여체로 수소와 황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녹색비황세균은 전자공여체로 다양한 아미노산들과 다른 유기산들을 사용했다. 홍색비황세균은 전자공여체로 다양한 비특이적 유기 분자들을 사용했다. 이러한 분자들의 사용은 당시에 원시 지구의 대기가 매우 환원성이었다는 지질학적 증거와 일치한다. 필라멘트 모양의 광합성 생물이라고 생각되는 화석은 34억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3월에 보고된 보다 최근의 연구는 광합성이 약 34억년 전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지구 대기에서 산소의 주요 공급원은 산소 발생 광합성에서 생성되는 산소이며, 산소의 첫 출현은 종종 산소대폭발 사건이라고 불린다. 지질학적 증거는 남세균과 같은 산소 발생 광합성 생물이 약 20억년 전 고원생대 시기에 중요해졌음을 시사한다. 현존하는 식물들과 대부분의 광합성 원핵생물들은 산소 발생 광합성을 한다. 산소 발생 광합성은 물을 전자공여체로 사용하는데, 물은 광합성의 반응 중심에서 산소(O)로 산화된다. 몇몇 동물들은 광합성 조류와 공생 관계를 형성했다. 이들은 산호, 해면동물 및 말미잘에서 가장 흔하다. 이것은 특히 이들 동물들의 단순한 신체 구조와 부피 대 비가 넓은 표면적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해양 연체동물인 엘리시아 비리디스("Elysia viridis")와 엘리시아 클로로티카("Elysia chlorotica")는 먹이로 조류로부터 포획한 다음 체내에 저장하는 엽록체와 공생 관계를 유지한다. 이것은 연체동물들이 조류를 섭취한 후 몇 달 동안 광합성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식물세포 핵의 유전자 중 일부는 연체동물들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에 엽록체는 생존하는데 필요한 단백질들을 공급받을 수 있다. 보다 더 가까운 공생의 형태는 엽록체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엽록체는 원형 DNA, 원핵세포의 70S 리보솜, 광합성 반응중심의 단백질 등 광합성 세균과 비슷한 점이 많다. 세포 내 공생설은 광합성 세균이 초기의 진핵세포에 의해(세포 내 섭취를 통해) 획득되어 최초의 식물세포를 형성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엽록체는 식물세포 내부에서 적응한 광합성 세균일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엽록체도 식물세포 핵의 DNA와는 별개로 자체 DNA를 가지고 있으며, 엽록체 DNA의 유전자는 남세균에서 발견되는 유전자와 유사하다. 엽록체 DNA는 광합성 반응 중심에서 발견되는 산화환원 반응에 관여하는 단백질들을 암호화하고 있다. CoRR 가설은 유전자 발현의 산화환원 조절을 위한 유전자 생성물과 함께 유전자의 공동 위치가 요구되며, 생체에너지 발생 세포소기관에서 DNA의 지속성을 설명한다. 광합성에서 전자공여체로 물을 사용하는 생화학적 능력은 현존하는 남세균(예전에는 남조류로 불림)의 공통조상에서 딱 한 번 진화하였다. 지질학적 기록에 따르면 남세균의 조상이 광합성에 물을 사용한 사건은 적어도 24억 5000만년~23억 2000만년 전에 지구 역사의 초기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광합성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동안 지구의 대기에는 산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광합성 남세균은 산소를 생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생누대(약 38억년 전~약 25억년 전)의 퇴적암에 대한 지질학적 연구로부터 얻은 증거는 생명체가 35억년 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산소 발생 광합성이 언제 진화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남세균의 진화는 약 20억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이미 다양한 남세균의 생물상이 드러났다. 남세균은 원생누대(약 25억년 전~5억 4200만년 전)에 걸쳐 산소의 주된 생산자로 남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바다의 산화환원 구조가 질소 고정이 가능한 광독립영양생물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녹조류는 원생누대 말기에 대륙붕에서 산소의 주된 생산자였으며, 중생대의 쌍편모조류, 원석조류(), 규조류의 방사와 함께 녹조류는 바다에서 산소의 일차적인 생산을 담당했다. 남세균은 해양 환류에서 산소의 주요 생산자, 생물학적 질소 고정자, 변형된 형태의 해양 조류의 색소체로서 해양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광합성의 단계 중 일부는 아직 완전히 이해되고 있지 않지만, 광합성의 전체 반응식은 19세기부터 알려져 왔다. 벨기에의 화학자인 얀 밥티스타 판 헬몬트는 17세기 중반에 식물이 사용한 토양의 질량과 식물이 자라면서 증가한 질량을 세심하게 측정하면서 광합성 과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헬몬트는 토양의 질량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후, 성장한 식물의 질량 증가는 화분에 첨가한 유일한 물질인 물로 인한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헬몬트의 가설은 부분적으로 정확했는데, 식물의 증가한 질량의 대부분은 물 뿐만 아니라 이산화 탄소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의 생물량 대부분이 토양 그 자체가 아니라 광합성의 투입물로부터 유래한다는 발상의 전환점이었다. 영국의 화학자이자 신학자인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밀폐된 유리 종 속에서 양초를 태우면(CO를 방출했다) 양초의 밀랍이 소진되기 전에 촛불이 매우 빨리 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생쥐의 호흡이 양초를 태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리스틀리는 밀폐된 유리 종 속에 식물과 생쥐를 함께 두면 모두 산다는 것을 실험하고, 이 실험을 통하여 식물은 해로운 공기를 신선한 공기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1778년에 네덜란드의 생물학자이자 화학자인 얀 잉엔하우스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했다. 그는 식물에 빛을 비춰주었을 때만 쥐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광합성에 햇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스위스의 목사, 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인 장 제네비어(Jean Senebier)는 1796년에 녹색 식물이 이산화 탄소를 흡수하고 빛의 영향을 받아 산소를 방출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콜라스 시어도어 드 소쉬르(Nicolas Théodore de Saussure)는 식물이 자라면서 질량이 증가하는 것은 CO 흡수량 뿐만 아니라 CO 흡수량과 물의 양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로써 포도당을 생산하는 광합성의 기본 반응이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 코르넬리우스 반 니엘(Cornelis Van Niel)은 광합성 작용을 설명하는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는 홍색황세균과 녹색황세균을 연구함으로써 광합성이 광의존적인 산화환원 반응이며, 이산화 탄소가 환원되는 반응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로버트 에머슨(Robert Emerson)은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을 사용하여 식물의 생산성을 시험함으로써 명반응이 두 개의 광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적색광만으로는 명반응이 억제되었다. 청색광과 적색광이 함께 주어졌을 때 광합성량이 훨씬 더 많았다. 따라서 두 개의 광계가 존재했는데 하나는 680nm 파장의 빛을 잘 흡수하는 광계 II 이고, 다른 하나는 700nm 파장의 빛을 잘 흡수하는 광계 I 이다. 광계 I 은 엽록소 a만을 포함하고 있으며, 광계 II 는 주로 엽록소 a를 포함하며, 다른 광합성 색소 중에 이용가능한 엽록소 b를 포함하고 있다. 홍조류에는 붉은색 색소인 피코빌린이 있고, 갈조류와 규조류에는 푸코잔톨(fucoxanthol)이 있다. 이 과정은 광계 II 와 광계 I 에서 양자의 흡수가 동일할 때 가장 생산성이 높으며, 안테나 복합체로부터 전달된 에너지가 광계 II 와 광계 I 사이에 나뉘어져 전달된다. 로버트 힐(Robert Hill)은 사이토크롬 b(현재는 플라스토퀴논)와 사이토크롬 f로 구성된 반응 복합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충분한 환원제이기 때문에 사이토크롬 f를 환원시키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한 플라스토퀴논에 의해 연결된다. 녹색 식물의 광합성 과정에서 발생된 산소(O)가 물(HO)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추가적인 실험은 1937년과 1939년에 힐에 의해 수행되었다. 힐은 잎에서 분리한 엽록체들이 옥살산철(III), 페리사이아나이드 또는 벤조퀴논과 같은 인공적인 환원제의 존재 하에 빛을 비추면 산소를 방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힐 반응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A는 전자수용체이다. 따라서 빛이 없으면 전자수용체는 환원되고 산소가 발생한다. 샘 루벤(Sam Ruben)과 마틴 카멘(Martin Kamen)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사용하여 광합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소가 물에서 기원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멜빈 캘빈과 앤드루 벤슨(Andrew Benson)은 제임스 배스햄(James Bassham)과 함께 식물의 탄소 동화 경로(광합성 탄소 환원 회로)를 밝혀냈다. 탄소 환원 회로는 캘빈 회로로 알려져 있는데, 캘빈 회로라는 이름은 이 회로를 밝혀내는데 크게 기여한 벤슨과 배스햄의 공로를 무시하는 이름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탄소 환원 회로를 캘빈-벤슨 회로, 벤슨-캘빈 회로라고 부르며, 일부 과학자들은 캘빈-벤슨-배스햄 회로, 줄여서 CBB 회로라고도 부른다.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루돌프 마커스는 전자전달계의 기능과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오토 하인리히 바르부르크와 딘 버크(Dean Burk)는 호흡에 의해 활성화된 CO를 분열시키는 I-양자 광합성(I-quantum photosynthesis)을 발견했다. 1950년에 오토 칸들러(Otto Kandler)는 클로렐라 세포를 사용하여 생체 내에서 광인산화에 대한 최초의 실험적 증거를 제시하였으며, 그의 발견은 광의존적 ATP 합성으로 해석되었다. 1954년에 다니엘 I. 아논(Daniel I. Arnon) 등은 P를 이용하여 분리된 엽록체에서 광인산화를 발견했다. 루이스 N. M. 두이센스(Louis N. M. Duysens)와 얀 아메즈(Jan Amesz)는 엽록소 a가 빛을 흡수한 다음 사이토크롬 f를 산화시키는데, 다른 엽록소 a는 빛을 흡수한 다음, 사이토크롬 f를 환원시키는 것을 확인하고, 명반응이 두 개의 광계로 이루어진 반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1893년에 찰스 레이드 반스(Charles Reid Barnes)는 "엽록소의 존재 하에 빛의 영향을 받아 이산화 탄소로부터 복잡한 탄소 화합물을 합성하는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용어로 "photosyntax"와 "photosynthesis"라는 두 가지 용어를 제안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광합성(photosynthesis)"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나중에 산소 비발생 광합성 세균과 광인산화의 발견은 "광합성(photosynthesis)"이란 용어의 재정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0년대 후반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화학자인 멜빈 캘빈, 앤드루 벤슨, 제임스 배스햄과 학생들 및 연구원들은 동위원소 C와 종이 크로마토그래피 기술을 이용하여 광합성 탄소 대사의 세부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밀폐된 용기에 클로렐라를 넣어 배양하면서 방사성 동위원소로 표지된 C를 공급하고 빛을 비추고, 일정 시간마다 클로렐라를 채취하고, 클로렐라의 구성 물질을 추출하여 2차원 종이 크로마토그래피로 분리하였을 때 단 1초 만에 CO를 고정시키는 대사 경로로 인해 3-포스포글리세르산(3PG)라는 3탄소 화합물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업적에 대한 공로로 멜빈 캘빈은 1961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식물생리학자들은 적외선 가스 분석의 새로운 방법과 순광합성 속도가 10~13 μmol CO·m·s 인 리프 챔버를 사용하여 잎에서 일어나는 가스 교환을 연구하였으며, 모든 지상 식물들은 햇빛의 50% 미만의 지점에서 광포화되는 광합성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1958년~1963년에 코넬 대학교에서 실시한 실험에서 옥수수는 40 μmol CO·m·s 의 훨씬 더 큰 광합성 속도를 가지고 있으며, 강한 햇빛 조건에서도 포화되지 않는다고 보고되었다. 옥수수의 이러한 높은 광합성 속도는 밀, 콩과 같은 다른 식물 종에서 관찰된 것보다 거의 두 배나 높았으며, 고등 식물들 간에 광합성의 큰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다.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15종이 넘는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에 대한 정밀한 가스 교환 연구를 통해 잎의 해부학적 차이가 식물 종간의 광합성 능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혀냈다. 옥수수, 수수, 사탕수수, 우산잔디를 포함하는 열대 초본들 및 쌍떡잎식물인 비름속 식물들에서 광합성 속도는 약 38~40 μmol CO·m·s 이었고, C 식물은 잎맥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유관속초세포(bundle sheath cell)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엽육세포(mesophyll cell)의 2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광합성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의 해부학은 식물학자인 고트리이프 하버란트(Gottlieb Haberlandt)가 19세기에 사탕수수의 잎 해부학을 연구하면서 크란츠 해부학(Kranz anatomy)이라고 명명하였다. 최고의 광합성 속도와 크란츠 해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식물 종은 광호흡을 하지 않고, 매우 낮은 CO 보상점, 높은 최적 온도, 높은 기공 저항성, 가스 확산에 대한 낮은 엽육 저항성, 강한 태양 빛에서 광합성 속도가 포화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 애리조나 대학교에서의 연구는 ISI 1986에 의해 "Citation Classic"으로 지정되었다. 이 종들은 빛 조건하에서 CO 고정의 첫 번째 안정적인 생성물이 말산과 아스파르트산과 같은 4탄소 화합물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C 식물로 명명되었다. 면화와 해바라기와 같은 크란츠 해부 구조가 결여된 다른 식물 종들은 CO 고정의 첫 번째 안정적인 생성물이 3탄소 화합물인 3-포스포글리세르산(3PG)이기 때문에 C 식물이라고 명명되었다. 공기 중의 CO 농도가 1000 ppm 일 때, C 식물과 C 식물은 모두 약 60 μmol CO·m·s 의 비슷한 광합성 속도를 보였으며, C 식물에서 광호흡의 억제 효과를 나타냈다. 광합성에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주요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총광합성량은 다양한 환경 요인에 의해 제한된다. 여기에는 이용가능한 빛의 양, 식물이 빛을 포획하기 위한 잎의 면적(다른 식물에 의한 그림자가 광합성의 주요 제한 요인임), 광합성을 지원하기 위해 엽록체에 이산화 탄소를 공급할 수 있는 속도, 물의 이용가능성 및 광합성을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온도 등이 모두 포함된다. 광합성은 생물권으로 자유 에너지가 투입되는 주요 경로이며, 식물의 생명활동에서 매우 중요하다. 식물 군집 내에서 빛의 조사량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20세기 초에 프레더릭 블랙만(Frederick Blackman)과 가브리엘 하워드(Gabrielle Matthaei)는 빛의 세기(방사조도)와 온도가 탄소 동화 속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이러한 두 가지 실험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보여준다. 첫째, 일반적으로 광화학 반응은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온도가 탄소 동화 속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탄소 동화의 전체 과정에서 두 세트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광의존적, 온도 비의존적인 '광화학적' 단계와 광비의존적, 온도 의존적 단계이다. 둘째, 블랙만의 실험은 제한 요인의 개념을 설명해준다. 또 다른 제한 요인은 빛의 파장이다. 수중 수 미터에서 서식하는 남세균은 기존의 광합성 색소에서 광유도 전하 분리를 일으키는데 필요한 정확한 파장의 빛을 받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광합성 색소를 가진 일련의 단백질들이 반응 중심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단위를 피코빌리솜이라고 한다. 이산화 탄소(CO)의 농도가 증가함에 따라 광비의존적 반응에 의해 당이 생성되는 속도는 다른 요인들에 의해 제한될 때까지 증가한다. 광비의존적 반응에서 이산화 탄소를 포획하는 효소인 루비스코는 이산화 탄소(CO)와 산소(O) 모두에 결합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이산화 탄소의 농도가 높으면, 루비스코가 이산화 탄소를 고정한다. 그러나, 이산화 탄소의 농도가 낮으면, 루비스코는 이산화 탄소 대신에 산소와 결합한다. 광호흡이라고 하는 이러한 과정은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당을 생성하지는 않는다. 루비스코의 산소화효소 활성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식물에게 불리하다. 루비스코의 산소화효소 활성의 생성물에 대한 회수 경로는 광의존적 산소 소비와 이산화 탄소의 방출을 특징으로 지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광호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보통 약 3%의 이산화탄소 농도에서 광합성 반응이 최대가 되며, 현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0.03%)로도 식물의 광합성에는 충분하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고,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14세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풍을 배웠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 세 조상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89세를 일기로, 외롭고 괴로운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즉 소년 다윗 조각을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1508년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가 성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카를 5세는 성을 쌓아서 자신과 싸운 미켈란젤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후에 메디치 가의 폭군 알레산드로와 사이가 나빠져, 1534년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났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같이 일한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임금으로 대신할 것을 부탁하고 떠났다 한다. 로마로 옮긴 그는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존중하여, 어느 추기경이 미켈란젤로를 무지하다고 업신여기자, "무식한 것은 추기경님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주었다 한다. 1550년 성구실인 바티칸 바오로 경당의 벽화 바오로의 회심(그림은 다음 블로그에서 확인,1549년)과 십자가의 베드로(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그림.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도 있다.)를 완성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출발점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줄 것을 부탁했고, 미켈란젤로는 두 성인의 그림을 그리면서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인 교종들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냈다. 그의 예술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주거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고객으로 하는 고급화가였다: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에 위촉되었고, 40개의 조각을 만들어야하는 방대한 양의 작업이 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교황의 후원받긴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업들이 있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40년동안 묘 짓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34]묘는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위치하며 중앙에 놓인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에서,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2개의 조각은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 보관되고 있다. 같은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 (1508~1512).콘디비 설명에 의하면,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묘 공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다가 교황을 설득해서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도록 그에게 생소한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36]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을 지탱해주는 삼각 궁륭에 열두 제자를 그리고 천장 중앙에 장식으로 처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를 설득해 재량권을 얻고, 천지창조/인류의 타락/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한 그리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가톨릭 성당의 대부분의 교리를 표현하는 그림의 일부이다. 작품은 500 평방미터의 천장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는 창세기에 나오는 9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지구창조; 하느님의 인간창조와 하느님 은혜 밖으로 추락한 인간,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여주는 인간의 상태.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12명의 인간이 그려져있다; 이스라엘 예언자 7명과 고전세계에 나오는 5명의 무녀. 천정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담의 창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예언자 예레미아, 그리고 쿠메의 시뷜라이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는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다. 교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천정벽화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선조로 시작하여 천지창조 이야기 등 구약 성서의 네 가지 사건이 그려져 있다. 포트란 포트란(Fortran)은 1954년 IBM 704에서 과학적인 계산을 하기 위해 시작된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이다. FORTRAN은 수식(Formula) 변환기(Translation)의 약자이다.(IBM Mathematical "For"mula "Tran"slating System에서 유래.) 포트란은 알골과 함께 과학 계산용으로 주로 사용되는 언어이며, 당시 7명의 전문가가 약 2년 반 동안에 걸쳐 완성한 것이 포트란의 기본을 이루었고, 그 후 ANSI와 ISO에서 표준화하였다. 포트란은 산술 기호(+, -, *, / 등)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삼각함수·지수함수·대수함수 등과 같은 기초적인 수학 함수들을 자연스럽게 불러내어 쓸 수 있으며, 최근 첨단 과학계산에서 필수적인 벡터, 행렬계산기능 등이 내장되어 있는 과학 기술 전문언어이다. 포트란은 기후 및 기상예측, 자원탐사, 우주항공, 유체 및 구조해석, 계산화학, 양자 및 분자 동역학 계산, 천문학, 인공위성을 포함한 군사과학, 자동차 선박 설계, 반도체설계, 금융계산 등 거의 모든 산업분야의 초대형 과학계산 문제의 프로그래밍에 필수적인 언어이다. 위와 같이 특히 자연과학이나 공학에서의 중요한 거대한 계산문제들을 슈퍼컴퓨터들을 이용하여 해결하는 데 있어서 C언어와 같이 범용프로그래밍 언어에 속하는 프로그래밍언어들에 비해 탁월한 효율이 있는 과학계산 전문 언어이다. 1990년대까지 널리 사용되어 왔던 FORTRAN 77에서 현재 Fortran 90/95, Fortran 2003, Fortran 2008등으로 계속 진보하고 있다. 전문적인 과학계산 문제를 풀기 위하여 프로그래밍하는 데 있어서 C보다 포트란이 훨씬 간단 명료하고 신속하게 프로그래밍을 작성할 수 있으며, 디버깅하는 데도 시간이 현저하게 단축될 뿐만 아니라, 그 계산속도 또한 일반적으로 훨씬 빠르다. FORTRAN77까지 초기의 버전은 그 이름에 대문자를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Fortran으로 첫 문자만을 대문자로 표기한다. Fortran90부터 현재에 까지 ISO, ANSI 모두 포트란에 대한 명칭은 "Fortran"을 사용한다. 다른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서도 그렇듯이 ANSI (미국 국립 표준 협회) 와 ISO (국제 표준화 기구) 의 두 표준이 통용된다. 포트란에 대한 ANSI 표준을 담당하는 위원회는 J3로 불린다. 포트란에 대한 ISO 국제 표준을 담당하는 실무그룹은 ISO/IEC JTC1/SC22/WG5 로 WG5로 불린다. 현재 J3는 WG5의 지시 하에 활동하고 있으며, WG5를 구성하는 가장 큰 부분이다. 1953년 존 배커스(John Warner Backus) 가 IBM 704 메인프레임머신에 사용할 프로그래밍 언어로 어셈블리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후 1956년 첫 번째 포트란 매뉴얼이 발표되었고, 1957년 대중에 첫 포트란 컴파일러가 등장한다. 이는 첫 번째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의 등장이었다. 그 이전엔 프로그래머들이 손수 어셈블리어를 이용해야 했다.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가 등장하게 되자, 여러 벤더에서 다양한 문법을 가진 포트란 컴파일러를 각자의 시스템에 맞게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대에도 40여가지의 포트란 컴파일러가 존재했다고 한다. 이에 Business Equipment Manufacturers Association(BEMA)은 표준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며, ANSI에 표준 문법을 제출한다. 1966년 ANSI의 승인을 얻게 되며, 첫 미국 포트란 표준이 발표된다. IBM이 가장 영향력이 높았으므로 표준화는 FORTRAN IV 컴파일러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며, 대중에게 FORTRAN IV와 FORTRAN 66은 혼용되어 불리게 된다. 이 표준은 산업 표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후 ISO(국제 표준화 기구)에서는 1972년 이 ANSI FORTRAN 66을 그대로 받아들여 포트란 국제 표준으로 받아들인다. ISO R1539-1972 ANSI FORTRAN 66 표준은 다음과 같은 문법을 포함하고 있다. FORTRAN 66 표준이 발표된 이후에도, 각 컴파일러 벤더들은 표준에 포함되지 않는 각자의 부가적 확장 문법을 포함하는 포트란 컴파일러들을 출시하였으며, 이에 미 포트란 표준화 위원회(ANSI committee X3J3 - J3)가 1969년 결성되었으며, FORTRAN 66 표준에 대한 개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최종 안이 1977년에 확정되었으며, 1978년 4월 ANSI의 승인을 얻게 된다. 이 ANSI 표준은 FORTRAN 77 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그 공식 문서는 ANSI X3.9-1978 이다. ISO는 이 ANSI FORTRAN 77을 수용하여 포트란 국제 표준으로 받아들인다. ISO 1539:1980 FORTRAN 66에 비해서 FORTRAN 77표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적인 기능을 포함하게 된다. 한편 ANSI FORTRAN 77에 몇 가지 문법이 추가된 미국 국방성(Department of Defence: DoD) 포트란 표준이 발표된다. 이 후 1980년대 이후에 전 미국에서 발표된 포트란 77 컴파일러 제품들은 대부분 ANSI 표준 뿐만 아니라 이 국방성 표준을 지원하도록 설계되었다. MIL-STD-1753 in 1978. 다음과 같은 사항이 ANSI FORTRAN 77에 비해 추가되었다. 위 사항 중에서 INCLUDE 문법을 제외한 기능들이 이후 Fortran 90 포트란 표준에 추가된다. 컴퓨터 환경은 무어의 법칙이 지배하게 되면서 빠르게 변화되어가는 도중에 FORTRAN 77 표준에 대한 개정은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차기 버전이 나오기에 15년의 시간이 걸렸으며, 이 길었던 기간 동안 FORTRAN 77 표준은 포트란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표준이 되어 버렸다. Fortran 90은 1991년에 ISO에서 먼저 승인을 얻었으며, ISO/IEC 1539:1991(E) 가 ISO Fortran90 이 된다. 이전 FORTRAN XX 표준의 의미가 ANSI를 칭하였던 것에 비해, Fortran XX 형태의 표기는 ISO 국제 표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ANSI의 승인은 1992년에 이루어진다. 포트란의 현대화가 진행된 표준이며, Ada와 같은 여러 다른 언어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공식적인 표기가 FORTRAN에서 Fortran으로 바뀐 것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표준에 추가하였다. Fortran 90 은 FORTRAN 77의 기존의 문법 중 몇 가지 사항을 Obsolescent로 분류하였다. 그에 비해 Deleted 항목은 0으로 FORTRAN 77문법 중 삭제가 일어난 것이 없게 된다. 즉, 모든 FORTRAN 77 표준 코드가 Fortran 90 표준에 부합하도록 정의되었다. Obsolescent features 포트란 표준 위원회는 10년단위의 major update 와 5년 단기의 minor update를 계획하는데, Fortran 95는 Fortran 90에 대한 minor update로 계획된다. 공식 문서는 ISO/IEC 1539-1:1997이다. 이는 Fortran 90에 대한 확장 기능을 제공하던 High Performance Fortran(HPFF)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아 병렬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 다음의 추가적 기능을 특징으로 한다. Fortran 95에서는 Fortran 90에서 Obsolescent로 분류되었던 항목 중에서 몇몇 문법이 Deleted 항목으로 변화되었다. Deleted Obsolescent 원래는 90에 대한 10년 단위 major update로 Fortran 2000이 계획되었으나, 합의가 늦어지고 Fortran 2003으로 발표된다. Fortran 2003은 ISO/IEC 1539-1:2004가 공식 문서이며이다. 다음과 같은 사항을 주요 사항으로 한다. Fortran 2008은 가장 최근에 발표된 표준으로 ISO/IEC 1539-1:2010가 공식 문서이다. Fortran 2003에 대한 minor update로 다음과 같은 기능의 추가를 특징으로 한다. 차기 표준 예정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논의되고 있다. 2017년 11월 12일 WG5의 투표에서 차기 포트란 표준의 이름을 Fortran 2015에서 Fortran 2018로 바꾸는 것이 가결되었다. 다음은 데이터 카드(천공 카드나 천공 테이프)에서 삼각형의 세 변의 길이를 읽은 후, 헤론의 공식으로 넓이를 구하여 출력하는 예이다. 다음은 대화형으로 사용자의 숫자 입력을 받아서 평균을 출력하는 프로그램이다. 알골 (프로그래밍 언어) 알골(ALGOL, Algorithmic Language의 준말)은 195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진 포트란에 대항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알고리즘의 연구개발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실은 ALGOL은 여러 ALGOL 계 언어의 총칭으로 ALGOL이란 이름의 프로그래밍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1958년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제안된 것이 그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 언어는 후에 ALGOL 58로 불리게 되지만, 당초의 이름은 IAL이었다.) 1960년에 제안된 ALGOL 60 은 그 문법이 BNF 표기법으로 기술되었으며 구조화된 프로그래밍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ALGOL 60은 절차형 언어로는 최초로 재귀호출이 가능한 프로그래밍 언어였다. 또한 PL/I, 파스칼, C 언어 등 이후 언어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인자 전달에 있어서 알골에 특징적이었던 "이름 전달" 방식도 이후의 언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표준으로 IFIP TC/WG2.1에서 ALGOL 60이 제정되었다. 이후에는 이어지는 표준화 작업은 진행되지 않고 1984년에야 ALGOL 60에 상당하는 것이 ISO 표준으로 지정되었다. z 1968년에는 ALGOL 68이 개발되었다. ALGOL 68에서는 2단계 문법 Wijngaarden 표기법으로 문법이 기술되었다. ALGOL 60의 후계 언어가 제정되기까지 파스칼을 설계한 Wirth의 ALGOL W를 비롯한 여러 후보자가 있었지만, 결국은 ALGOL 68이 후계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너무 복잡하고 방대한 사양을 요구했기 때문에 ALGOL 68 컴파일러는 실제 구현이 어려웠고, Wijngaarden 표기법 또한 난해하여 실용적으로 보급되지 못했다. 다음은 n×m의 2 차원 배열 중 절대값이 가장 큰 요소를 찾아, 그 절대 값을 y에, 첨자를 i와 k에 저장하는 함수이다. 한국의 단오 단오(端午) 또는 수릿날은 한국 명절의 하나로, 음력 5월 5일이다. 시기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초하(初夏)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음력 5월 5일 단오와 관련된 전통적인 행사가 각 지방에서 열린다. 대한민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릉 단오제가 2005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무형유산인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에 선정되었다. 단오는 일명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 '오월절(五月節)'이라고도 한다.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이 외에도, 각 지방마다 독특한 명칭이 있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월과 일이 모두 홀수이면서 같은 숫자가 되는 날은 생기가 넘치므로 좋은 날이라 생각하여 대개 명절로 정하고 이날을 즐겨 왔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는 글자 이며, '오(午)'는 다섯을 뜻하므로 단오는 '초닷새(음력 5월 5일)'를 칭한다. 아울러 이 시기는 파종이 끝나는 때와 맞물려, 새로 지은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다. 한반도에 농경이 정착된 후부터 단오가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삼한(三韓) 시대에 5월에 씨뿌리고 난 뒤 하늘에 제사지내던 풍습이 있었고 이를 수릿날이라 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따르면 '삼한사람들은 5월이 되면 씨를 다 뿌리고 난 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 줄을 지어 뒤를 따르며 땅을 밟고 몸을 구부렸다가 치켰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오를 수릿치날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그네뛰기와 쑥으로 수릿치 절편(角)을 만들고, 조상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토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오라는 명칭과 이념은 중국에서 전해졌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사내용은 토착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삼국 사람들은 이날 씨름과 택견을 하고 편을 나누어 활쏘기를 하였다. 또한 단오는 보릿고개를 넘기고 살아난 이들의 축제로 보리이삭을 거두는 시기에 맞추어 잔치를 벌였다.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창포에 머리감기, 쑥과 익모초뜯기, 부적만들어붙이기, 대추나무시집보내기, 단오비녀꽂기 등의 풍속과 함께 그네뛰기·씨름·활쏘기 같은 민속놀이들이 있다. 또한 궁중에서는 이날 제호탕·옥추단(玉樞丹)·애호(艾虎:쑥호랑이)·단오부채 등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하사하였으며, 집단적인 민간행사로는 단오제·단오굿을 하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이날 음식을 장만하여 창포가 무성한 못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이놀이를 하며, 창포이슬을 받아 화장수로도 사용하고, 창포를 삶아 창포탕(菖蒲湯)을 만들어 그 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윤기가 있으며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몸에 이롭다 하여 참포 삶은 물을 먹기도 하였다. 또한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삼아 머리에 꽂기도 하였으며, 양쪽에 붉게 우연지를 바르거나 비녀에 수(壽)·복(福)자를 써서 복을 빌기도 하였다. 김해 풍속에 "청년들이 좌우로 편을 갈라 석전(石戰)을 하였다"고도 하며, 금산 직지사(直指寺)에 모여서 씨름을 하거나 남산(南山)·북악산(北嶽山)의 각력(角力:씨름)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 밖에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널뛰기·윷놀이·농악·화초놀이 등을 하였다. 궁중에서는 단옷날이 되면 내의원(內醫院)에서 옥추단과 제호탕을 만들어 바쳤다고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설, 추석과 함께 단오에 연중 3회 신성 의상인 빔을 입는데, 단오에 입는 빔을 단오빔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군.현 단위로 단오제가 행하여졌는데, 그 중 '강릉 단오제'가 가장 유명하다. 창포의 잎과 뿌리를 우려낸 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잘 빠지지 않고, 윤기도 난다 하여,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던 풍속이다. 아울러 창포 뿌리를 잘라내어 붉게 물들여 그것으로 비녀를 만들어 단오날 부녀자가 질병을 물리치는 액땜으로 머리에 꽂는다. 단오가 되면 곧 더위가 시작 하므로,임금이 시종들에게 부채를 하사했던 풍속이다. 그 부채의 종류는 승두선, 어두선, 사두선 합죽선 반죽선 외각선 내각선 등이 있다. 단오날에는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 부적을 만들어 붙였다. 이를 '단오부', '천중부적', '치우부적'이라고 한다. 익모초와 쑥을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쓰기 위해 단오날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속이다. 본래 익모초와 쑥은 한약방에서 많이 쓰이는 약초인데, 단오 무렵에 뜯은 익모초와 쑥이 약효가 많다는 데서 비롯된 풍속이다. 그네뛰기는 동아줄이나 밧줄을 큰 나뭇가지에 매고 그네를 뛰는 것이다. 단오날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운 옷을 입고 그네를 뛰었다. 외출이 어려웠던 부녀자들이 단오날만큼은 밖에 나와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여자들이 단오날 즐겨 하였다고 한다. 그네뛰기는 남쪽보다 북쪽 지방으로 갈수록 성했다. 그네뛰기는 원래 중국 북방의 민족들이 한식 때 몸놀림을 날쌔게 만들려고 하던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그네뛰기를 하였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송사(宋史)>에 보면 고려 현종 때 사신 곽원(郭元)의 말이라 하여 고려에서는 단오날 그네뛰기를 한다고 소개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 중엽에 이미 그네뛰기가 민간에 전해진 듯하다. 씨름은 상고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남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서, 소년이나 장정들이 넓고 평평한 백사장이나 마당에서 모여 서로 힘과 슬기를 겨루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고 허리를 굽혀서 샅바를 잡아 상대방을 먼저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먼저 땅에 쓰러지거나 손, 무릎이 땅에 닿으면 지게 된다. 상으로는 보통 황소를 주었다. 제호탕(醍醐湯)이란 오매육(烏梅肉), 사인(砂仁),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 등을 곱게 가루 내어 꿀에 재워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청량음료를 말한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마시던 약이면서도 청량음료이기도 했다. 단오부터 그해 여름까지 내내 더위를 없애고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시원한 물에 타 마신다 수리취나 쑥을 짓이겨 멥쌀가루에 넣어 반죽하고,수레바퀴 모양의 떡살로 문양을 낸 절편이다 앵두는 오디, 산딸기,체리 등과 함께 단오 제철 과실이다. 앵두와 체리는 피를 맑게 하고 위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고 , 단오 무렵부터 더위에 시달려 떨어진 입맛을 다시 돋우는 역할을 한다! 창포 창포(菖蒲, calamus)는 창포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며 가로로 뻗는 굵은 땅속줄기가 있다. 잎은 땅속줄기 끝에 뭉쳐 곧게 자라는데, 길이는 50~90 cm 정도로 딱딱하며, 선과 같이 가늘고 긴 모양을 하고 있다. 꽃줄기는 높이 25~40 cm 정도로 잎과 비슷하게 편평하다. 불염포는 녹색으로 잎과 같이 길다. 녹색 육수꽃차례는 원기등 모양으로, 길이가 5~10 cm 정도인데, 양성화인 꽃이 빽빽하게 달려 있다. 꽃덮이조각은 넓은 선 모양으로 6개가 있다. 한편 수술도 6개가 있는데, 수술대는 희며 길이는 약 2mm 정도이다. 씨방은 상위이며,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열매는 액과인데, 적색을 띠며 그 안에는 몇 개의 씨가 만들어진다. 일본·중국, 한국의 제주·경기·황해·평북·함남북 등지에 주로 분포한다. 주로 연못, 도랑주변에서 자란다. 색은 흰색이나 연한 홍색 마디가 많고 독특한 향기가 난다. 단오날 창포를 넣어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는 풍습이 있다. 거담(祛痰·去痰), 건위(健胃) , 진경(鎭痙) 등에 효능이 있다 하여 한방에서 약재로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특히 설사, 기관지염, 소화불량 등에는 창포의 뿌리를 사용한다. 또한 뿌리줄기는 방향성 건위제로 사용한다. 경신(輕身)연년(延年)불로(不老)한다. 뿌리를 뜨물에 담가서 하룻밤을 재운 뒤 뜨거운 햇볕에 말려서 가루로 하여 찹쌀 죽에 백밀(白蜜)을 조금 넣고 오동 열매 크기의 환을 지어 온주(溫酒)로 아침에는 30알, 저녁에는 20알을 복용한다. 햇빛이 잘 드는 습한 땅에서 기른다. 습지가 아닌 보통 흙에서도 물만 잘 주면 잘 자란다. 포기나누기로 증식한다. 과학철학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 of science)은 철학의 한 갈래로, 과학의 방법이나 과학적 인식의 기초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다. 자연 과학의 성과를 분석하고 반성하여 과학적인 개념을 규정하고 과학의 전제를 세우며 방법을 탐구하는 분야이다. 과학철학의 중심 논제는 과학의 자격(무엇을 과학이라 하는가), 이론의 신뢰성,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다. 과학 철학에서는 현대문명의 과학화(=기계화·획일화) 때문에 철학 문제도 기계적이며 집단적인 과학논리의 분석적 조작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이 나타난다. 따라서 과학 철학에서는 개인의 사변적(思辨的) 방법에 의한 철학을 배척한다. 이와 달리 근대 이전에 자연을 철학으로서 고찰하려는 입장을 자연 철학이라 한다. 그리고 과학의 입장에서 철학을 비판할 경우 철학 비판이라 한다. 과학 철학의 많은 주요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서 합일된 의견이 적다. 관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사실을 밝힐 수 있는지, 과학적 추론이 완전히 정당화 될 수 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과학철학자는 과학의 일반적인 문제 이외에도 특정 과학 분야(생물학 또는 물리학 등)에 적용되는 문제를 다룬다. 과학철학자 중 일부는 최신의 과학 산출물을 철학을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과학에 관한 철학적 사고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학철학은 논리실증주의 운동의 결과, 20세기 중반에 별개의 철학 분파로 부상했다. 과학철학은 모든 철학적 진술의 의미를 확실하게 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토마스 쿤의 획기적인 책 《과학혁명의 구조》(1962) 또한 과학철학 형성에 기여했다. 과학을 '체계화된 실험 방법에 의해 착실히 축적되는 지식의 획득'이라고 보는 관점에 의문을 던지며, 모든 진보가 "패러다임"과 관계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 패러다임이란 특정 시대에 과학 분야를 정의하는 질문, 개념, 실례의 집합이다. 이후, 과학에 대한 정합론적 접근(관측을 일관성 있는 전체의 일부로 이해하면 이론이 검증됨)은 W.V. Quine등의 사람들에 의해 중요하게 인식됐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일부 사상가는 자연의 균질성(uniformity of nature)과 같은, 공리적 가정에서 과학의 근거를 찾고자 한다. 특히, 목소리 큰 소수의 철학자들과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적 방법"과 같은 건 없으므로 초자연적 접근법을 포함한 과학에 대한 모든 접근법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접근법으로는 지식이 사회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있다.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와 배리 반즈(Barry Barnes)와 같은 학자가 대표적으로 이를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대륙철학에서는 경험에 대한 엄격한 분석의 관점으로 과학에 접근한다. 특정 분야 과학철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제기된 시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공공 정책에 대한 경제학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의 과학 분야가 다른 분야로 환원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즉,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아니면 사회학이 개별 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여부이다. 과학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은 특정 과학분야에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적 추론의 타당성은 통계의 토대()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문제는 의학철학에서 생/사 문제가 된다. 또한 생물학, 심리학, 사회과학에서의 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가 객관적인지 아니면 불가피하게 가치관과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받는지 여부를 탐구한다.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것을 경계문제(demarcation problem)라 부른다.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창조과학, 다중우주설, 거시경제학은 어떨까? 칼 포퍼(Karl Popper)는 이것을 과학철학의 핵심 질문으로 삼았다. 그러나 철학자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한 합일된 의견은 없으며, 일부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거나 흥미가 없다. 마틴 가드너는 사이비 과학을 구별하기 위해 포터 스튜어트 기준()("보면 안다")의 사용을 주장했다. 초기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은 관측적이고 비과학은 비관측적이며 따라서 비과학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포퍼는 과학의 주요 특성을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라고 했다. 즉, '진짜' 과학적 주장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을 가장하여, 인정할 수 없는 타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분야를 의사과학(pseudoscience), 경계과학(fringe science), 쓰레기과학(junk science)이라 부른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그들이 진짜 과학을 하고있다고 믿는 경우를 위해 "화물숭배과학(cargo cult science)"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들의 활동은 과학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그 결과물에는 과학의 결과물같이 엄격하게 평가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미래 사건에 대한 예측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발생하거나 이미 발생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이론을 이용한다. 철학자들은 과학이론이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과, 설명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을 연구했다. 일찍이 과학적 설명에 대한 영향력있는 이론에는 연역-법칙(Deductive-nomological)모델이 있었다[그 반대로 귀납-통계(Inductive-Statistical)모델도 있다]. 이 모델 따르면, 좋은 과학적 설명은 과학적 법칙에서부터 현상을 추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상당한 비판을 받아 왔으며, 이론에 대한 반례가 발견되었다. 설명될 내용을 법칙으로는 추론할 수 없는 경우나, 이미 알려진 것으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경우에 과학적 설명이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기란 특히 어렵다. 웨슬리 새먼(Wesley C. Salmon)은 과학적 설명이 설명될 대상과 통계적으로 관련돼야 한다는 모델을 개발했다. 좋은 설명의 핵심은 서로 다른 현상을 통합하거나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흔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련의 사례로부터 일반적인 진술을 도출하거나, 일련의 성공적인 실험에서 이론적 사실을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닭은 농부가 매일 아침 와서 음식을 주는 것을 수백일동안 본다. 따라서 닭은 귀납추론을 사용하여 농부가 매일 아침 음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농부가 와서 닭을 죽인다. 어떻게 과학적 추론은 닭의 추론보다 더 신뢰할 만한가? 한가지 방법은 귀납법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최소한, 사례가 늘면 일반 진술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따라서 닭은 아침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농부가 내일 아침에 다시 음식을 제공 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러나 주어진 증거가 일반론을 얼마나 정확한 확률로 정당화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러한 난관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과학이론에 대한 모든 믿음이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이라고, 올바른 추론이라 함은 단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거가 주관적인 믿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자가 하는 일은 귀납이 아니라 귀추(최선의 설명을 향한 추론)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은 특정 사례들을 일반화하는 일이 아니라 관찰한 것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일이다. "최선의 설명"이 의미하는 것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오컴의 면도날은 가장 간단한 설명을 선택하도록 권한다. 닭의 사례로 돌아가서, 농부가 닭을 무기한으로 돌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간단할까, 도축을 위해 닭을 살찌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간단할까? 철학자들은 이 경험적 원리를 사고 절약 등의 측면에서 더 정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단순함에 대한 다양한 척도가 후보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이론만큼이나 단순함에 대한 척도 또한 많았으며, 척도를 선택하는 일이 이론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웠다. 관측을 할 때 과학자들은 망원경을 보고, 전자 화면에서 이미지를 연구하고, 수치를 기록하는 등의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온도계가 37.9°C를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과학자는 그들이 본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이러한 관찰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관찰한 것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나오기 이전이라면, 관측자는 왼쪽의 사진을 우주에 있는 5개의 서로 다른 물체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에 따라, 천문학자라면 실제로는 단지 두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한 이미지는 가운데 있는 물체에서 나오고 나머지는 다른 한 물체에서 나온 4개의 이미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다른 과학자들이 망원경에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며 하나의 물체만 관찰한다면, 이는 또 다른 이론체계 하에 있는 것이다. '이론적인 해석과 분리할 수 없는 관측'을 이론 의존적(theory-laden)이라고 말한다. 모든 관측에는 지각과 인식이 있다. 즉, 관측을 수동적으로 하지 않고, 관측하는 현상과 주변의 감각 데이터를 구별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러므로 관측은 관측자의 세계관(세계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받으며, 이는 무엇을 지각하고 주목하고 고려할 가치가있는 지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관찰은 이론 의존적이라고 주장 할 수 있다. 과학은 궁극적인 진리를 결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을까?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자들은, 과학이 진리를 향하며, 과학이론을 사실이거나 거의 사실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과학적 반-실재론자들은 과학은 진리(특히 전자나 타차원 우주같은 관측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진리)를 향하지 않는다(적어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도구주의자(Instrumentalist)들은 과학 이론이 유용한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과학의 목적이 예측을 하고 효과적인 기술을 구현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론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실재론자들은 이론의 진실(또는 진리)에 대한 증거로, 최근의 과학이론의 성공을 가리킨다. 반실재론자들은 과학 역사에 실린 많은 거짓 이론, 거짓 가설의 성공, 또는 과학적 실재론에 반하는 증거로서 객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 비판을 가리킨다. 일부 반실재론자들은 과학이론이 관찰 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만 정확해지고자 하며, 이론의 성공이 이 기준에 의해 주로 판단된다고 주장한다. 가치는 과학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된다. 지적 가치는 주로 과학연구를 이끌어 간다. 가치는 과학의 생산물로도, 과학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며 사회의 여러 문화내에 퍼질 수 있다.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론을 확인하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과학의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 과학을 형성하는 가치나 기타 사회적 영향의 범주가 넓어진다. 실제로 가치는 어떤 연구가 예산을 딸 수 있을지부터 어떤 이론이 과학적 합의에 도달하는가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과학자들이 인종에 관해 가지고있는 문화적 가치관은 진화론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고, 사회적 계급에 관한 가치관은 골상학에 영향을 주었다(그 때는 과학으로 받아들였다). 여성주의 인식론자(Feminist epistemology), 과학적 사회학자 등의 사람들은 사회적 가치가 과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과학 철학의 기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근사와 정확한 추론을 구별하고, 귀추/연역/귀납 추론의 세 가지 추론 방법을 세웠으며 유추도 고찰했다. 11세기 아랍인이자 박식가 이븐 알하이삼(라틴어로 Alhazen)은 빛의 반사와 굴절에서 나온 상에 대하여 연구할 때 통제된 실험과 기하학을 이용했다. 알하이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영국의 사상가이자 실험가 로저 베이컨(1214-1294)은, 현대적 과학 방법론의 아버지로 불린다. 수학이 자연철학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그의 견해는 당 시대보다 400년 앞선 생각으로 간주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과학혁명 당시 과학철학의 중요 인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 대한 책인 노붐 오르가눔(1620)에서 오래된 삼단논법을 개선하기위한 새로운 논리 체계를 만들었다. 베이컨의 방법론은 대체 이론을 배제하기 위해 실험에 의지했다. 1637년 르네 데카르트는 감각적 경험과 반대되는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며 논문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에서 과학지식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새로운 틀을 수립했다. 대조적으로, 1713년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2판에서 "실험철학에는 가설이 설 자리가 없다. 실험철학에서 명제는 현상으로부터 연역되고 유도에 의해 일반화된다"고 주장했다. 이 구절은 "자연철학에서 인과가설(causal hypothese)을 금하고자 하는 후대 독자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도미니크 르쿠르에 따르면 20세기 이후의 과학철학은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영미권의 표준적인 해설에 의하면 현대 과학철학은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한 이론가들은 루돌프 카르납, 칼 햄펠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가 출판된 1962년을 기점으로 해서 과학철학을 '쿤 이전'과 '쿤 이후'를 나누기도 하지만, 이미 이론의 관찰 의존성 명제를 제기한 로우드 러셀 핸슨이나 반증주의의 문제를 제기한 칼 라이문트 포퍼 등은 일찍부터 논리실증주의의 과학관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핸슨이나 포퍼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쿤 이전의 과학철학이 과학적 명제가 가지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전제로 그 속성을 밝히고 정당화하려는 규범적 접근법을 채택한 것에 비해 토머스 쿤 이후로 실제 과학사를 토대로 한 역사적 접근법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쿤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실제로 《과학혁명의 구조》의 출간 이후 과학사회학, 과학문화학, 페미니스트 과학학 등 과학학 연구가 영미권 과학철학 내에서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쿤 이후 과학철학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논쟁은 상대주의를 둘러싼 논쟁으로 과학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파이어아벤트가 급진적인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과학의 우월성을 비판하였고 라카토슈는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도 어떻게 합리적인 핵심이 보존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이른바 '프로그램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쿤은 이 논쟁 속에서 해석학을 받아들여 이론을 가다듬으며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였으나 애매한 입장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파이어아벤트와 라카토슈 이후 상대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다양한 맥락으로 확장되어 갔다. 에든버러 학파를 비롯한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 이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한편, 새거드와 기어리 등은 인지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여 실제 과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는지를 모델링하며 역사적인 접근법과 규범적인 접근법을 조화시키려 시도했다. 한편 아이언 해킹은 과학사에서의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과학적 실재론(과학 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에 상응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의 입장에서 새로운 논의의 장을 이끌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핸슨을 비롯해 메리 헤스나 바슐라를 비롯한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 등 이전의 선배 과학철학자들의 연구 업적에 토대를 둔 것이기도 하다. 한편 현대에 이르러 과학의 세분화와 전문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만큼, 과학 철학자들은 과학 일반에 대한 논의보다는 생물학, 물리학, 수학 등 개별 과학에 관한 메타적 담론에 주력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는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 개설되어 과학철학을 전공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도 과학기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과정을 개설하여 과학철학을 전공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잡지 잡지(雜誌) 또는 매거진(magazine)은 여러 가지 내용의 글을 모아서 펴내는 정기 간행물이다. 책처럼 매었으며 발행 간격에 따라 주간·월간·계간의 구별이 있다. 신문과 책의 중간적 성격을 띤다. 한편, 잡지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모아서 활용하는 것 또는 정보매체의 전달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 시사잡지(종합지)는 정치의 동향이나 실태에 대해서 대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만화잡지나 어린이잡지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나 만화, 학습내용과 유쾌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며, 화보잡지는 사진을 통해 정치적 이슈와 스포츠, 연애물 등을 전달하고 있다. 잡지가 발행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16세기부터 시작되며, 19세기 후반까지는 정부의 언론통제 때문에 그 영향이 적었다. 잡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영국의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1731~1914)이다. 당시 이 잡지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이 잡지가 당시 영국 상류층의 상징이 될 정도 였다고 한다. 잡지에 현재와 같은 사진이 실리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현 파리 마치의 전신)지가 최초이다. 한국에서 처음 발간된 잡지는 1896년에 민간구국단체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로 40여 쪽의 분량으로 뉴스, 외국소식, 한국독립에 대한 정보 등 간단한 정보를 전했지만 한국의 잡지 시초로 인정하고 있다. 이후 1906년에 발간된 서우와 서북학회회보, 대한자강회에서 발간한 대한자강회회보, 1906년에 같은 해에 발간된 소년한반도가 있었다. 여기서 서우, 대한자강회회보등은 구국단체에서 발간된 쉽게 말하자면 학술지였다. 이후 개인잡지, 시사잡지, 아동잡지, 문예잡지 등이 서서히 등장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서광, 개벽, 소년, 아이들보이, 폐허, 창조, 금성 등이 발간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보이가 처음으로 표지를 천연색으로 발행한 최초의 잡지로 보고 있고 소년의 창간일을 잡지의 날로 정하였다. 해방 후 신천지, 학풍, 문예 등이 발간되었다. 1980년에 언론 탄압으로 인해 수많은 감소하여, 1987년에 6.29 선언 이후에는 많은 수의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다양한 잡지들이 발간되고 있다. 씨네21 《씨네 21》(Cine21)은 1995년 4월 14일 한겨레신문사가 창간한 대한민국의 영화 전문 잡지이다. 1대 편집장은 당시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조선희가 맡았다. 창간1호 특집은 '누가 한국 영화계를 움직이는가', 한국영화파워 50으로 영화계의 '권력'을 영화 관계자 투표로 순위 매겼다. 2003년 8월 1일 한겨레신문사로부터 분사해 씨네21(주) 법인을 꾸렸다. 1995년 5월 월간지 〈키노〉, 1995년 12월 미국으로부터 라이선스를 얻은 영화잡지 〈프리미어〉 한국판이 창간되면서 대한민국의 영화 잡지 시장이 급성장을 보였다. 이전까지 영화잡지 시장에는 〈스크린〉(1984년 3월 창간), 〈로드쇼〉가 있었다. 1998년 6월에는 무가지 바람을 타고 〈NeGa〉가 창간되었다.(이후 2000년 1월 유가로 전환된다.) 1999년 10월에는 주간지 〈프리뷰〉가 창간되었으나 4호까지 내고 사라진다. 하지만 주간지 시장이 발동 걸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2000년 9월 2일 〈씨네버스〉, 같은 해 12월 19일 〈film 2.0〉이라는 주간지가 창간되면서 영화잡지계는 주간지 시장으로 급격히 재편했다. 2001년 11월에는 〈무비위크〉가 가격 '1000원'을 내세우며 영화주간지 시장으로 뛰어든다. 〈씨네버스〉는 2003년 12월 갑작스럽게 발행을 중단하고 만다. 〈film 2.0〉은 2004년 1월 1000원으로 가격을 내린다. 주간지 시장은 성황을 누린 데 비해 월간지 시장은 하향세를 걸었다. 〈키노〉는 2003년 7월호(통권 99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로드쇼〉는 폐간과 복간, 재창간을 반복하다가 2003년 결국 폐간한다. 도중에 격주간지 형태로 전환하기도 했다. 〈프리미어〉는 2006년 8월 격주간지로 바뀌었다. 아울러 역시 모회사인 (주)미디어코프의 경영악화로 2008년 12월을 끝으로 휴간한 상태이다. 유일한 영화 월간지이던 스크린은 2010년 12월 폐간되었으며, 주간지는 <씨네21>과 <무비위크> 두 가지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무비위크> 역시 2013년 3월 마지막주를 끝으로 경영악화를 이유로 폐간(명목상은 무가지인 <매거진M>과 통합. 통합 후 <매거진M>은 격주간 무가지에서 주간 유가지(2000원)으로 바뀜)되었고, 현재 영화잡지는 <씨네21>과 2012년 12월에 창간된 중앙일보 계열의 <매거진M>, 그리고 영화 티케팅 업체 맥스무비의 <맥스무비 온라인 데일리>, <맥스무비 매거진> 이 남아있다. 씨네21은 한국영화를 포함한 폭넓은 영화들에대해 네티즌 평점과 영화전문가 평점을 동시하여 표시하는 '영화별점'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로튼 토마토와는 또다른 영화에대한 분석 정보를 다양하고 쉽게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박스오피스 , 최신영화, 최고점 등으로 데이터베이스화 되어있다. 봉건제 봉건제(封建制)는 정치·사회 체제의 한 형태이다. 고대 중국과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는 일부 공통성이 있지만 서로 상이한 제도이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하여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 정부가 지방에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산제와 달리 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장건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이다. 봉건제는 중국 주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요충지의 제후로 봉하여 주나라 왕실을 지키는 번병(藩屛)으로 삼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주나라 왕족 및 공신으로 이루어진 50여 제후국들이 임명되어 중국 각지에 남아 있던 기존의 800여 제후들을 아우르도록 한 것이다.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800 제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에도 봉건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체제는 있었지만, 주나라 때 정치·사회 제도로서 로 정비되어 실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봉(封)은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고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를 가리키는 한자어이다. 봉건제도는 토지를 하사(封)하여 나라를 세운다(建)는 의미이다. 이렇게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국을 삼는 것을 분봉(分封)이라 하며, 제후들에게 땅과 함께 작위를 내리는 것을 봉작(封爵)이라 하였다. 대부분의 제후는 주나라 왕족이 임명되었으며, 제후들은 다시 혈족을 중심으로 경대부(卿大夫)를 임명하고 채읍(采邑)을 나누어 줌으로써 계층적인 통치 체제가 나타났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바탕으로한 종법(宗法) 질서를 통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종법 질서를 확인하는 일이 크게 중시되었으며, 제후들에게는 제사에 참여하고 제사에 쓸 공물을 공급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고 여러 세대가 흘러 제후와 주나라 왕실간의 혈연 관계도 약화되면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한 통제 체제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왕실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상실하고 낙읍(洛邑)으로 옮겨오면서 실질적인 국력 우위마저 사라지게 되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혼란기가 찾아왔다. 이 혼란기를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하며, 전반기인 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여 제후들이 패자를 중심으로 왕실을 보호하는 양상이었으나 후반기인 전국 시대가 되면 제후들이 모두 왕을 자칭하고 주나라 왕실과 동등한 독립국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주나라의 제도로서의 봉건제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는 황족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는 봉건 전통은 형식적으로 부활하여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제도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달랐다. 분봉된 제후왕들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제후왕들의 영지를 포함한 모든 지역은 황제가 임명한 행정관이 일정한 임기 동안 다스리는 군현제로 통치되었다. 제후왕들의 제후국은 이름만 국(國)이고 행정관의 직명만 달랐을 뿐 실질적으로 군(郡)과 차이가 없었다.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지방 행정 제도이자 정치·사회 체제이다. 영주와 농노로 이루어진 장원(莊園)을 기초 단위로 하여 각 장원의 통치자인 영주(기사)는 쌍무적 계약을 통해 상위 영주(대영주)의 가신(家臣)이 되고 대영주 또한 더 상위의 영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국왕 또는 황제와 쌍무적 계약 관계를 맺어 계층적인 가신 관계가 형성된 체제이다. 국왕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지배자들은 모두 장원을 다스리는 영주이며, 국왕 등의 대영주는 소유하에 있는 다수의 장원을 영주에게 분봉하여 다스리게 하거나, 한 단계 낮은 중소영주의 충성을 얻음으로써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국왕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모든 대영주들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국왕령에 속하는 영주들의 수장인 대영주였으며, 또한 수도 런던을 포함한 국왕 직할령을 다스리는 영주였다. 이러한 누층적인 관계는 영주가 가지는 작위에서도 드러나는데, 영국의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공식 작위를 예시로 보면 영국 및 영연방 국가의 국왕 이외에도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에든버러 공작(女), 메리오네스 백작(女), 그리니치 남작(女) 등 다양한 작위가 있다. 이렇게 계층적인 관계는 휘하 영주 및 기사들의 봉건법 상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휘하 대영주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대영주를 능가하는 직할령의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카페 왕조 초기의 상황이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영주들에 의해 선출된 위그 카페는 일드프랑스 지역의 영주로 다른 대영주를 압도할 수 있는 권력이 부족하였고 사실상 일드프랑스와 오를레앙 지역만 다스릴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 노르만 왕조는 정복을 통해 형성된 강력한 권력과 함께 본거지인 노르망디 지역의 힘을 바탕으로 휘하 대영주를 압도할 수 있었다. 혈연에 기초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던 중국의 봉건제와 달리 유럽의 봉건제는 혈연이 아닌 쌍무적 계약 관계로 통제력을 확보했다. 주군은 보호를 제공하고 가신은 충성을 제공한다는 상호간의 의무를 기초로 계약을 맺는 것으로 농노와 영주 사이의 관계가 이에 해당했다. 영주와 상위 영주 간에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계약이지만 세부적으로 영주는 세금과 일정 기간의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고 상위 영주는 토지(봉토)를 제공하는 관계였다. 봉토의 소유권과 충성 계약은 세습되었으며, 혼인과 상속을 통해 이전될 수 있었다. 또한 쌍무적 계약이었으므로 의무가 지켜지는 한 영주의 거취는 자유로웠으며, 이를 통해 여러 명의 상위 영주를 섬기고 다수의 봉토를 받는, 혹은 혼인과 상속을 통해 다수의 봉토를 획득함으로써 여러 명의 상위 영주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국왕조차도 이러한 혼인과 상속을 통해 직할령 혹은 직속 영주를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충성을 맹세한 상위 영주가 다수이다보니 군사적 봉사를 제공할 때 어느 영주를 우선으로 두는지에 대한 계약 관계가 따로 존재하기도 했다. 일본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 등의 제도를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 효용 경제학에서, 효용(效用)이란 재화와 용역의 사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주관적인 만족을 측정하는 단위이다. 효용의 개념은 주어진 만족의 수준에서 사회와 개인 사이의 필요 재화의 조합을 측정하는 무차별곡선과 같은 주제에서 경제학자들에 의해 응용된다. 또한 효용 함수, 후생함수, 파레토 최적(Pareto maximization), 에지워스 상자(Edgeworth boxes), 계약 곡선 등에서도 사용된다. 효용은 후생경제학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공리주의에서는 사회 조직을 위한 도덕적 기준으로서 효용의 극대화를 주장했다.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년)이나 밀(John Stuart Mill, 1806-1876년)같은 공리주의자에 따르면 사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사회 모든 주체들의 개인적인 효용 극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효용 이론이 가정하는 인간은 되도록 개인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합리적 인간이다. 이를테면, 개인은 어떠한 것을 사용할 수 있고, 양으로 측정할 수 있으며 어떠한 상황에 합리적인 것이라면 효용을 더 요구할 것이다. 효용은 직접적으로 측정하거나 관찰하지 못한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관찰된 결과(선택)를 가지고 그 선택에 담긴 상대적인 효용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것이 폴 사무엘슨이 명명한 '현시선호이론'이다. 현시선호이론은 예를 들어 사람들의 지불의사에 담긴 선호도를 측정하여 효용의 상대적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다. 효용은 소망이나 욕구와 상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욕구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측정될 수 없고, 단지 그것을 암시하는 외부현상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우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지불하고자 하는 가격으로, 이를 욕구 만족의 크기로 간주한다. (마샬 1920:78) 경제학에서 효용을 기수적 효용(cardinal utility)과 서수적 효용(ordinal utility) 둘로 나눈다. 기수적 효용은 효용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반면 서수적 효용은 숫자를 단지 선호의 강도 차이라고 생각하여 순서를 구분하기 위한 장치로만 사용한다. 두 종류의 효용 모두 선택지 간의 순서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오렌지쥬스 한 잔이 120 만큼의 효용을 주고 차 한 잔은 80 만큼의 효용을, 물 한 잔은 40 만큼의 효용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기수적 효용으로 말한다면, 오렌지쥬스 한 잔과 차 한 잔의 효용 차이는 차 한 잔과 물 한 잔의 효용 차이와 정확히 같다. 그러나 쥬스 한 잔이 물보다 세 배만큼의 효용을 준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효용이 0인 지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의 효용을 합할 때, 기수적 효용이 매우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있는데, 사람들 개개인이 각 소비조합에서 얻는 가치의 크기를 측정하여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효용의 사람 간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서수적 효용에서 효용의 크기 차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효용은 단지 선택지 간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고 "선호의 강도"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예를 다시 본다면, 단지 쥬스가 차보다, 차가 물보다 더 좋다는 것만 알 수 있고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신고전학파는 그간 경제분석에 사용하던 기수적 효용함수에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선호관계는 몇 조건을 만족시키기만 한다면 효용함수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서수적 효용함수는 단조증가변환(positive monotone transformation)에 의해서는 바뀌지 않고, 기수적 효용함수는 단조선형변환(positive linear transformation)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다. 선호는 미시경제학의 전통적인 개념이지만, 선호를 효용함수로 표현하여 인간행동을 간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편할 때가 있다. "X" 를 소비집합이라 하고, 각 집합은 소비자들이 소비가능하며 상호 배제적인 묶음이라고 한다. 여기서 각 묶음에 해당하는 소비 집합을 소비자의 효용 함수 formula_1 라고 나타낼 수 있다. 만약 "y" 보다 "x"를 강선호(strictly prefer)하거나 무차별(indifferent)할 때, 우리는 formula_2 이와 같이 표현한다. 예를 들어, 소비집합 "X"가 = {nothing,  사과 1, 오렌지 1,  사과 1과  오렌지 1,  사과 2,  오렌지 2} 라면, 효용함수 "u"=(nothing) = 0, "u"( 사과 1) = 1, "u"( 오렌지 1) = 2, "u"( 사과 1과  오렌지 1) = 4, "u"( 사과 2) = 2 와 "u"( 오렌지 2) = 3 라고 하자. 그러면 소비자는 오렌지 1개를 사과 1개보다 더 좋아하고 각각 1개씩 소비하는 것은 오렌지 2개보다 더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시경제학에서 소비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개수를 L개라고 가정한다. 이것은 소비집합이 formula_3 이고, 소비집합의 한 원소 formula_4 는 각 재화의 양을 나타내는 벡터로 나타낼 수 있다. 위의 예에서, 우리는 사과와 오렌지 두 가지 재화만 있다고 가정했다. 우리가 사과를 첫 번째 재화, 오렌지를 두 번째 재화라 한다면, 소비집합은 formula_5 이고, 효용의 양은 전과 같이 "u"(0, 0) = 0, "u"(1, 0) = 1, "u"(0, 1) = 2, "u"(1, 1) = 4, "u"(2, 0) = 2, "u"(0, 2) = 3 이다. 여기서 "u" 가  "X" 에 대한 효용함수이고, 모든  "X" 에 대하여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라.그러면 효용함수를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formula_6 이것은 모든 x, y (x와 y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formula_7, formula_8를 의미하는 formula_9 )에 대해서, X에 formula_6 선호관계를 가짐을 나타낸다. 만약 u가 formula_11 로 표현된다면, 이는 formula_11 가 완전성과 이행성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대효용이론은 결과에 위험성 이 있는 선택에 대해 분석하는 이론이다. 기대효용가설은 니콜라스 베르누이 1세가 1713년 처음 제안했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1738년 피터스버그 패러독스를 풀면서 이론이 전개되었다. 베르누이는 의사결정이 위험회피(risk aversion)를 보이거나 로그적 서수 효용함수의 모양을 띌 때, 패러독스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대효용이론은 폰 노이만과 오스카어 모르겐슈테른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그들은 게임이론을 설명함에 있어 기대효용이론의 극대화 가정을 이용했다. 앨런 아이버슨 앨런 이제일 아이버슨(, 1975년 6월 7일 ~ )은 미국의 은퇴한 농구 선수이다. 1996년 NBA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되었다. 데뷔 첫 해, 리그 신인왕에 올랐으며, 총 4차례(98/99시즌, 00/01시즌, 01/02시즌, 04/05시즌)에 걸쳐 리그 전체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하였고, 00/01시즌에는 리그 MVP로 선정됨과 동시에 소속팀을 NBA final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앵클브레이커로 불리는 크로스오버 드리블과 장신의 선수들을 가볍게 제치는 볼 핸들링을 강점으로 하여 코트를 지배했다. 06/07시즌 중에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 되었고, 08/09시즌 중 다시 디트로이트 피스턴스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시즌 이후에는 팀에서 방출되었으며, 09/10시즌을 앞두고는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계약을 맺었지만 다시 3경기만에 방출되었다. 이에 한때는 은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원 소속팀이었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복귀하여 활약했었다. 그는 2013년 10월 30일 NBA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The Answer’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1996년 NBA 신인드레프트에서 당당하게 1순위로 지명된 아이버슨은 NBA 역사상 최단신 득점왕이자 최단신 MVP 수상자이기도하다. 183cm(드래프트 기록을 보면 맨발로 정확히 6'0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최단신 축에 끼는 아이버슨은 데뷔후 최고의 스코어러 반열에 단숨에 올라서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신인 그리고 소포모어 시절에는 인터뷰에서 수차례 자신감을 피력했다가 버릇없는 신인선수로 오인받기도하였다. 그의 NBA 입성에 맞추어 소속팀 필라델피아는 명장 래리 브라운 감독을 영입하면서 리빌딩을 시도하게된다. 브라운은 아이버슨이 최단신임에도 불구하고 슈팅가드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팀운영을 하였으며, 다소 득점본능이 높고 슈퍼스타기질이 넘치는 아이버슨의 성향을 고려, 수비력 좋은 롤플레이어들 위주로 팀을 바꿔나가며 단시간내에 플레이오프 진출 팀으로 바꿔놓는다. 98/99시즌 아이버슨은 NBA 역사상 최단신으로 득점왕에 오르며, 성공적인 포지션 전향을 하였고, 처음 진출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앤퍼니 하더웨이가 이끄는 올랜도매직을 이기며 2라운드까지 진출하게 된다. 98/99시즌과 99/00시즌 플레이오프에 성공하였지만 2라운드의 벽을 못넘던 필라델피아와 리더 아이버슨은 언론의 도마에 오르며, 레리브라운의 지도력 그리고 아이버슨의 훈련 태도등에 관한 여러가지 불화에 휩싸이게 된다. 00/01 시즌을 앞두고 아이버슨은 비교적 부상이 적은 몸으로 시즌을 시작하였고, 필라델피아는 연승행진을 이어가며 시즌을 시작한다. 이 시즌에 아이버슨은 다시 한번 득점왕에 오르며, 필라델피아를 동부 컨퍼런스 1위로 끌어올리며 팀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한편 자신은 정규시즌 MVP와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다. 한편 필라델피아는 올스타전이후 이전까지 활약하였던 테오 라틀리프를 부상을 이유로 애틀랜타의 수비형 센터 디켐버 무톰보로 트레이드 하였으며 이는 단기적으로 우승에 도전하려는 구단의 승부수였다. 00/01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면서 아이버슨은 몸에 10군데가 넘는 골절, 타박상등을 입고서도 프로선수가 보여줄수있는 극한의 투혼을 부여주며 농구팬들에게 다시 한번 어필을 하게 된다. 무차별 곡선 미시경제학에서 무차별 곡선()은 임의의 두 재화를 변수로 하는 좌표평면상에서 소비자가 인지하기에 효용이 동일한(‘무차별한’) 두 재화의 조합을 나타내는 그래프이다. 즉, 경제주체에게 동일한 효용을 가져다 주는 두 재화의 조합들을 연결한 등위선을 말한다. 무차별 곡선은 경제주체의 선택 또는 선호 분석에 사용되며, 소비자 이론에서는 수요와 공급을 해석하기 위해 무차별 곡선과 예산선을 같이 이용한다. 소비자의 효용이 기수적으로 측정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계효용이론과는 달리, 파레토, 프란시스 이시드로 에지워스 등에 의해 20세기 초에 발전되었다. 이 이론은 개인은 언제나 선호도에 따라 어떠한 소비의 경우에도 순서를 매길 수 있다는 가정하에 서수적 효용이론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다음의 공리를 설정하고 참이라고 여겨진다면 효용함수 formula_1를 만들 수 있다. 두 가지가 묶여 조합으로 제공되는 재화의 조합 x,y가 각각의 가능한 다른 조합을 이루는 가운데 이들 재화들의 조합 선호 결정을 삼차원 상의 그래프에서 표현하기 위한 재화 x의 양, 재화 y의 양 그리고 효용의 함수값 formula_1가 각 축을 이루는 3차원의 공간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가정이 맞을 때 선호체계는 연속적인 효용함수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 분석의 편의를 위해 강단조성이라는 공리를 더하기도 한다. 무차별곡선에서 기울기는 한계대체율(MRS,Marginal rate of substitu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x와 y의 재화들이 서로 대체될때 소비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두 재화 간의 대등한 교환가능 가치의 비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피자 2판과 콜라 5개의 조합과 동일한 가치를 주는 것으로 판단되는 조합이 피자 3판과 콜라 2개라고 할 때 MRS는 3이다. 이는 한 쪽 재화를 더 많이 소비하고 다른 재화를 덜 소비하도록 해도 동일한 효용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무차별 곡선은 원점에서 멀수록 높은 효용을 나타내는데, 만약 쓰레기와 같이 더 많이 소비할수록 효용이 낮아지는 재화의 경우 무차별 곡선은 우상향하는 모양을 갖게 된다. 이는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수록 더 좋다는 강단조성 공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비재화라 하더라도 비재화의 부재로 변환하게 되면 우하향하는 표준적인 무차별곡선을 얻을 수 있다. 볼록한 원점에서 멀수록 소비할 수 있는 재화가 더 많아지고 이는 주어진 소득수준에서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려고 하는 소비자들의 성향과 일치한다. 또한 무차별 곡선은 원점을 향하여 볼록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는 한계대체율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명확해진다. x 상품의 증가분에 대한 y 상품의 감소분의 비율을 나타내는 한계대체율은 한계대체율 체감의 법칙을 통해 원점에 대하여 볼록한 모양을 갖게 된다. 선호 선호(選好) 혹은 취향(趣向)이란 사회과학 특히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가능한 대안들의 우선순위 사이에서 실제로 존재하기도 또는 상상되는 선택들을 가정한다. 더 일반적으로 선호란 동기의 원천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행복은 슬픔이나 고통보다 더 선호된다. 또한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정상재의 더 많은 소비는 더 적은 소비보다 일반적으로 선호됨을 가정한다. 기회비용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또는 alternative cost, 機會費用)은 하나의 재화를 선택했을 때, 그로 인해 포기한 것들 중 가장 큰 것의 가치를 말한다. 즉 포기된 재화의 대체(代替) 기회 평가량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떤 생산물의 비용을, 그 생산으로 단념한 다른 생산기회의 희생으로 보는 개념이다. 그 이전부터 기회비용의 의미는 존재하였으나,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비저(Friedrich von Wieser)에 의해 기회비용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예를 들면, 한 도시가 도시 소유의 빈 땅 위에 병원을 건축하기로 결정한다면, 그 기회 비용은 그 땅과 건설 자금을 이용해 행할 수 있었던 다른 사업을 의미한다. 그 병원을 건축하는 결정을 함으로써, 그 도시는 스포츠센터, 넓은 주차장 또는 도시의 채무를 탕감하기 위해 그 땅을 매각하는 것과 같은 기회를 상실한다. 더욱 개인적인 관점에서, 당신의 친구와 함께한 금요일 저녁의 음주 가무에 대한 기회비용은 만약 당신이 회사에서 야근을 했다면 벌 수 있었던 돈의 양과 당신이 사용해 버린 액수의 합계이다. 그것이 항상 화폐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포기한 선택들 중 최선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회 비용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경제적 비용과 회계적 비용 개념 사이의 차이다. 경제학적 비용은 현금 지출로 드러나는 명시적 비용과 현금 지출이 수반되지 않은 암묵적 비용을 합한 것이다. 다만 회계적 비용은 단순히 명시적 비용만을 비용으로 본다. 기회비용 개념은 모든 경제 주체의 선택 속에 감추어진 비용을 찾아 낸다. 바스티엣(Frederic Bastiat)에 의해 설명된 깨어진 창문의 손실(the broken window fallacy)과 같이 기회비용을 무시하는 것은 손실을 유발하는 경제적 결정을 낳을 수 있다. 기회비용 개념은 경제학자들이 두 생산자, 농장, 국가 등을 비교 할 때 쓰이는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를 설명할 때 쓰인다. 인도 인도 공화국(印度 共和國, , )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으며, 인구는 약 13억 6천만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북동쪽 포함), 네팔, 부탄,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남동쪽에는 벵골 만, 남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과 맞닿아 스리랑카, 몰디브가 있으며,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의 해상경계는 태국, 인도네시아와 접해 있다. 수도는 뉴델리이다.주요 도시로는 뉴델리, 뭄바이, 첸나이, 벵갈루루, 하이데라바드, 콜카타등이 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역사적인 무역로였으며 거대한 제국이 있었던 인도 아대륙은 오랫동안 그 지정학적 지위와 경제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인도는 4개의 중요한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며, 또한 기원후 천년동안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인도에 영향을 미쳐 현재 인도의 다양한 종교 문화를 만들었다. 18세기 초부터 서서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리하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되었고, 간디에 의해 주도된 비폭력주의 독립운동 이후인 1947년 독립을 하게 된다. 인도는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이 세계에서 3번째로 높다. 2011년 기준 세계은행이 발표한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410달러로 저소득 국가이다. 1991년, 인도는 GDP성장률이 가장 높은 국가중 하나로 평가되었고, 현재 신흥공업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계속해서 빈곤, 문맹, 부족한 공중보건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 핵 보유국이자 지역 강국인 인도는 세계에서 상비군이 3번째로 많은 국가이며, 군비지출은 세계에서 10번째로 높다. 인도는 연방제 공화국이며, 29개의 주와 7개의 연방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WTO, SAARC, 브릭스, G-20, 영국 연방 등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인도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사는 다문화 사회로, 종교 사상과 인도 영화, 인도 요리 등의 문화가 발전해 있다. 인도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인더스 문명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기원전 1500년~12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넘어 인도로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을 파괴했다. 아리아인들은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델리 근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이 시기 아리아인들의 베다 신앙에서 힌두교가 탄생했고, 산스크리트어가 발전해 이후 2,000여 년 동안 인도의 공용어로 사용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에 등장했다. 북부 인도는 찬드라 굽타(기원전 321년경 ~ 기원전 185년)의 통치 아래 최초의 힌두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로 통합되었고 그 손자인 아소카 대왕의 시대에는 인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의 붕괴 이후 수많은 소왕국이 난립하였다가 굽타 왕조(320년 ~ 480년) 시대에 다시 통일되었다. 이슬람 교도들의 침입은 1000년경 부터 시작되었다. 14세기 초, 모하마드 이븐 투글루크가 델리 술탄 왕조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 북부 인도에서의 이슬람 지배는 16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남부 인도에서도 역시 이슬람계 바만 왕조가 성립(1347년)되어 1527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이와 함께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 제국가 1336년에서 1556년에 걸쳐 인도의 남부 지방을 양분하며 통치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여행(1498년)을 기점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하여 인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들어서는 이슬람계 왕조인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했다. 1526년 바부르가 세운 이 제국은 악바르와 아우랑제브 치세 동안 세력을 확장하고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힌두 왕국인 마라타 왕국이 17세기말 세력을 뻗치면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차츰 경쟁관계에 있던 다른 식민 세력들을 몰아내고 1757년에 무굴 제국을, 1818년에는 마라타 왕국을 굴복시킨 뒤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한 영국의 통치는 세포이 항쟁(1857년) 이후인 1858년에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초기의 인도 민족주의는 인도 국민 회의(1885)와 전 인도 이슬람 연맹(1906)의 창설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거의 60여 년 동안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순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비협력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은 1919년과 1935년 인도 행정법을 통해 인도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은 완전독립과 인도의 통일을 요구했다. 인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획득했으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 공화국과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초래했다. 펀자브와 벵골은 주민들의 종교성향에 따라 각각 2개로 분리되어 양국에 포함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아직까지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 있다.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를 총리로 한 국회가 195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확정되지 않은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1965년에는 파키스탄과 잠시 국경분쟁을 겪었다. 1967년에는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1984 암살)가 의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취임했고 인디라 간디가 암살된 이듬해 아들인 라지브 간디(1991년 암살)가 총리에 취임했다. 1971년 파키스탄과 국경 2곳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동(東)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이 펀자브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는 등 인종과 종교로 인한 갈등이 잔존해 있다. 20세기 후반 인도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가운데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해가고 있다. 인도의 육지는 대부분이 인도양에 돌출한 동남아시아의 반도에 있으며, 남서 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서부는 벵골 만으로 구분되는 7000km의 해안선 을 가지고 있다. 많은 지역이 여름, 우기, 겨울의 세 절기를 가지고 있으며, 우기를 제외하고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도 많다. 인도 북부, 인도 중부는 거의 전역에 비옥한 힌두스탄 평야가 펼쳐져 있고, 인도 남부의 거의 전역은 데칸 고원이 차지한다. 국토의 서부에는 바위와 모래로 된 타르 사막이 있고, 동부와 북동부 국경 지역은 험준한 히말라야가 차지한다. 인도가 주장하는 인도 최고점은 파키스탄과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 지방 (해발 8,611m)이다. 정확한 영토의 최고점은 칸첸중가 봉(8,598m)이다. 기후는 남쪽의 적도 지역에서 히말라야의 고산지대까지 다양하다. 독립 당시에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였으나, 1950년 1월 24일부터 현재까지 공화국이 되었고, 인도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함으로써, 총리가 모든 권한과 실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 원수가 되었다.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대통령 선출방법도 국민 전체가 투표하는 직선이 아니라 연방 상원·하원 의원과 주의회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치러진다.대통령은 실질적 권한이 크지 않고 대부분 의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헌법상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자 국가 원수로 규정돼 있으며, 사면권·법률안 거부권 등을 행사해 정국의 향방을 좌우할 수도 있다. 또 사회 소수자에 해당하는 인물이 대통령에 선출돼 사회통합의 상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도의 행정 구역은 29개의 주, 7개의 연방 직할지, 그리고 1개의 수도권으로 나뉘며, 수도는 뉴델리이다. 연방제국가인 인도는 연방정부와 이들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연방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실행되어야 할 여러 포괄적인 사항들, 즉 국방, 외무, 거시경제, 교통·통신, 화폐 주조, 대법원과 고등법원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그외 치안, 공중보건, 교육, 임산자원 관리 등 지방행정업무의 성격을 띤 분야는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주요 정당들은 인도의 정당 문서를 참조하라. 인도의 군사력은 4위이다. 인도 헌법에 의하면 모병제를 실시한다. 인도 군의 법적 최고 사령관은 대통령이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인도 정부의 수상이 가지고 있다. 인도군의 관리 운영은 국방부가 담당한다. 인도군의 총 병력은 132만 5000명으로 인원으로는 세계 3위 규모이다. 군 조직에는 해안경비대, 인도 군부대 및 전략 핵 전력 부대가 포함되어있다. 지원제(모병제)를 채택하고, 징병제는 한 번도 없었다. 인도의 국방비는 공식 발표액(323억 5000만 달러)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화를 가속시키고 있으며, 군사 목적의 우주 개발, 핵의 3개의 기둥(Nuclear triad)의 정비, 미사일 방어 시스템 개발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는 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만큼 항모를 오래 운용했기에 항공모함 노하우가 뛰어나다. 해군력은 중국 해군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인도는 1,325,000명(육군 120만 명)의 병력과 전차 5,000대, 전술기 2,462대, 군함 175척을 보유한 군대이다. 6,000문이지만 자주화의 비율이 채 3%도 되지 않는 실정이여서 도입사업을 진행 중이다. 인도 공군은 2013년 인도 공군은 67기의 MiG-29 'Baaz' 전투기를 운용하고 있으며, 전 기체를 UPG 사양으로 개수할 계획이다. F-35를 도입할 예정이고 수호이 T-50 FAK FA , Rafal 전폭기 126대를 도입한다. Merlin Mk.641 귀빈전용헬기(ZR342)를 도입한다.C-17A Globemaster III 10기의 C-17A 수송기를 도입하는 계약을 채결한 바 있으며 옵션으로 6기의 추가도입이 거론되고 있다.러시아는 2012년에 42대의 수호이 30 전투기를 16억 달러에, Mi-17 헬리콥터 71대를 13억 달러에 각각 공급한다. 기술이전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미국 보잉사의 AH- 64D 롱보우 아파치 헬기 22대를 도입한다. 육군 현대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영국방산업체 BAE시스템스로부터 5억6000만 달러어치의 M777A2 경량 견인포 145문을 도입하였다.인도 육군은 파키스탄과 중국의 주력전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356개 보병대대 전체에 미사일 발사관 2000개와 미사일 2만4000기로 장비한다. 병력 110만 명의 인도 육군은 자주포/견인포와 미사일 등을 도입하고 있고 해군은 45척의 군함들과 잠수함들을 건조중이다. 2012년 4월 러시아제 아쿨라 2급 탄도 미사일 전략 원자력 잠수함(SSBN)을 9억 달러에 임대해 차크라함 으로 정식 취역시켜 세계에서 6번째로 탄도미사일 발사 잠수함(SSBN/원자력 동력)을 운용하는 국가가 됐다. 또한 INS 비크라마디티아급 항공모함(R33)이 9년간 진행된 점검 끝에 2013년 11월 16일 정식으로 인도되면서 항공모함 보유국이 되었다. 인도 전체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13억 7000만명이다. 인구의 32.7%(2015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증가율은 1.26%(2010년~2015년)이며 1995년 이후 1% 미만의 낮은 증가율을 지속하고 있다. 2020년대에 중국을 추월할것이다. 인도에 거주하는 주민을 인도인이라 부른다. 인도인이라도 언어와 인종이 다른 여러 종족이 존재한다. 북부에는 주로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아리아어군에 속하는 민족 집단이 거주하며, 남부에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민족 집단이 거주한다. 또한 시킴 주 같은 히말라야 산맥과 동북부 고산 지대에는 중국티베트어족의 민족 집단이 거주한다. 인도아리아인은 인도 아대륙의 북부와 중부에 걸쳐 넓게 분포하는 인도의 인종 집단 중 하나이며, 이란의 고원 지대에 유목생활을 하다가,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 유역에 살았던 드라비다인을 몰아내었다. 고대 아리아인들은 브라만교를 믿었으며, 북인도 지역을 장악하였다. 드라비다인은 남인도에 거주하는 인도의 인종 집단이며, 드라비다어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기원전 인더스 강 유역에 살았으나 아리아인의 침략으로 인해 파키스탄의 브라후이족만 일부 남고, 나머지는 남인도로 이주하였다. 그 외에도 아랍인, 페르시아인, 영국인 등이 소수 존재한다. 영어와 힌디어가 기본적인 공용어이다. 인도에는 총 780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중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 중인 언어는 216개, 헌법이 인정한 지정 언어는 22개이다. 힌두교는 인도인의 다수가 신앙하는 종교다. 제2의 종교 세력은 이슬람교이며 불교 세력도 있다. 펀자브 주에서는 시크교를 믿는다. 기타 토착 종교가 있으며, 기독교도 존재한다. 하위카스트를 중심으로 차별이 없는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로 집단적으로 개종하는 사례도 종종 있으나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신도수 성장율은 힌두교보다도 더 낮은 수준이다. 연도별 종교별 신도 비율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공업 육성을 기도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다. 냉전이 끝난 1991년에는 통화 위기를 겪으면서 이를 계기로 하여 인도형 사회주의의 실험을 끝내고, 경제자유화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나 정교한 행정조직과 관료제도, 양호한 교통·통신망, 우수하고 풍부한 인력, 잘 정비된 공업기반 등 일반적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식량이 부족한 농업국으로 알려져 있다. 밀의 총생산량은 86,874,000톤(2011년, 세계 2위, 12.34%) 으로, 쌀의 생산도 세계 10위 안에 들지만, 인구가 너무 많아 아직도 많은 양을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알려졌는데, 쇠고기를 먹지 않는 힌두교도들의 교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소비되는 육류는 양고기와 닭고기이다. 인도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파는 빅맥이 쇠고기 패티가 아닌 닭고기 패티인 것은 그 이유이다. 1947년 독립 이후 많은 투자를 통해 공업부문에서 현재 세계 20위권 내의 공업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나, 무역부문에는 아직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아 수출량이 세계교역량의 1%를 밑돌고 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인도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5.5%로 중국에 버금가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성장 속도였다. 한편 소수 지배계층은 매우 높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등 소득격차가 매우 큰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매년 1,000만 명을 넘는 계속적인 인구증가와 그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도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2015년 4월 미국 농무국에서 인도가 2020년엔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고 예측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한편, 인도 도시 계획의원회에 따르면 2013년 25.7%의 도외지 거주자와 13.7% 의 도시 거주자가 빈곤층이며 2005년 빈곤율이 37% 에서 2011년 12월 22% 로 감소하였다. 철도교통이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하고 오래된 철도망이 오늘날 인도와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의 3개국에 나뉘어 있다. 이것은 영국령시대에 부설된 것들이다. 1849년에 동인철도회사가 설립되었고, 1853년에는 최초의 철도가 봄베이 타나 사이에서 개통되었다. 인도에는 철도부의 관할하에 8개의 철도가 있고, 각각 중부·동부·북부·동북부·동북국경·남부·동남부·서부의 8개 지구를 달리고 있다. 현재 철도의 총연장은 약 6만 km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철도교통은 항상 혼잡하다. 자동차교통은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데 비해서 보급률이 낮다. 수상교통은 캘커타, 마드래스, 봄베이 등의 항구를 중심으로 한 해상교통과 갠지스강, 브라마프트라강, 인더스강 등의 대하천을 이용한 하천교통이 있는데 상당히 먼 내륙지방까지 기선의 항행이 가능하다. 항공교통은 국제선 에어 인디아(AIL)와 국내선 인디언 에어라인즈(IAL)가 있어 비교적 잘 발달해 있다. 도로 통행 시 차량은 좌측통행을 한다. 다양한 언어, 복잡한 문화, 사회적 배경으로 초 · 중등 교과서는 각 주 정부에서 제작 · 보급하고 있는 바, 전국적으로 초 · 중등교육의 동질성(Uniformity of Standard)을 유지하기 위해 국립교육연구개발위원회(NCERT)가 영어 · 힌디어로 교과서를 제작하며, 각 주는 이를 모델로 삼아 교과서를 제작 · 발행하고 있다. 학문, 연구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인도 공과대학교(IIT : 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인도 과학원(IISc) 등이 있다. 이 외에 델리 대학교 및 캘커타 대학교 등이 있다. 인도의 예술과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 예술에서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독립 이래 연방 정부와 여러 주정부는 랄리트칼라 아카데미(국립 미술 아카데미)·상게트나타크 아카데미(음악·무용·드라마 아카데미)·사히티아 아카데미(국립 문학 아카데미) 등 여러 문화·예술 관련기관을 설립하여 예술·문화활동을 촉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는 또한 영화 문화 산업이 매우 발달해있다. 인도 사람들은 바느질을 한 옷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전통 의상도 바느질을 안 하는 사리를 입는다. 인도는 남북간 동시수교국으로, 1950년 한국 전쟁 대한민국 편에서 의료파병국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한 이후 1973년 12월 1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1962년 영사관계 수립을 거쳐 1973년 1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인도는 국제무대에서 한반도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편 경제문제 등에서 대한민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쓰고 있다. 양국간에는 1974년 8월 맺은 무역협정을 시작으로 문화협정(1974년 8월)과 과학기술협력협정(1976년 3월) 그리고 2009년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이 체결되었다. 교역량이 점차 증가추세에 있어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 11억 7,697만 달러, 대한수출액 9억 7,572만 달러였다가 현재는 대한민국의 대(對)인도 수출은 114억3459만USD, 인도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56억7445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인도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7위의 수출국, 제16위의 수입국이다. 인도는 대한민국에게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우호적인 동맹국이다. 중국과는 영토문제로 인해 외교갈등을 빚고 있으며, 1960년대에는 중국과 국경분쟁을 빚었다. 특히 카슈미르의 아크사히친은 중국이 점령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갈등을 빚고 있다. 그 외에도 인도 북동쪽의 지역에 대해서도 중국이 영유권주장을 하고 있어서 갈등을 빚고 있다. 그리고 최근 중국 시짱자치구 티베트 소수민족의 인권문제 갈등과 달라이 라마 망명 문제랑 티베트 망명 정부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인도 간의 양자 외교는 대체적으로 친밀하고 강력한 관계였다. 그러나 일본은 피폭국이었기 때문에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거리를 둔 시기도 있었다. 인도는 최근 현저한 경제 발전과 정보기술의 실적이 주목 받고 있으며, 또한 G4 국가로 함께 행동하는 등 관계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2006년에 아시아대양주국(局) 중에 새로운 부문으로서 남아시아부(部)를 설치하였다. 2006년 12월 인도 만모한 싱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일본-인도 전략적이고 국제적인 파트너십을 향한 제휴 선언"에 서명할 때 최고조에 달하였다. 또한 2008년 10월에 양국 정상이 일본-인도 안전보장협력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에게 인도는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안보 분야에서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은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기원후 1세기경에는 메콩 강 하류와 하구에서 농경과 어로, 목축을 통해 생활하며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한 집단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인도와의 교류를 통해 종교 등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인도차이나 반도에 알려진 첫 번째 국가인 푸난을 세웠다. 푸난은 1세기에서 6세기 말 경까지 번영했으며, 이후에는 메콩 강 중류에서 일어난 진랍의 공격을 받아 위축되다가 7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진랍 왕조도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산스크리트 문자를 사용하였다. 1947년 독립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이가 좋지 않다. 1990년 1월 인도 관할 카슈미르 지역 내 회교도들이 인도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를 진압하려는 인도 보안군과의 유혈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인도는 이 소요사태가 파키스탄 측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위자 현장 사살 명령을 하달하고 2월에는 대규모 병력을 국경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또 5월에는 국경봉쇄 등 강경조치를 취함으로써 인도-파키스탄 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1950년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와 인도 양국 국민에게, 식민지배 세력에 의하여 붕괴된 양국간의 1천년이 넘게 존재해온 우호 협력을 강화하자고 촉구하였다. 그로부터 15년 후, 자카르타에서는 정부가 선동한 구호가 들렸다. "제국주의의 종, 인도를 타도하자. 때려부수자, 우리의 적". 그러나 1966년 봄, 양국의 외무장관은 우호관계의 시대에 대하여 다시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양국은 각각의 수도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인도와 파라과이는 1961년 9월 1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겸임 대사와 아순시온에 있는 명예 영사가 파라과이에서 외교활동을 수행한다. 2005년부터 파라과이는 뉴델리에 대사를 두고 있다. 한국 문학 한국 문학(韓國文學)은 한국인 또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한국의 사상과 감정, 정서 등의 가치 있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시대의 표현 방식을 빌려 형상화한 문학의 총칭이다. 한국 문학이 오늘날 문학이라는 낱말 밑에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 이르른 것은 서양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이다. 근대 문학 혹은 현대 문학이라는 시대에 따른 문학사 구분은 바로 서양 문학을 받아들여 한국어로 쓰인 문학 양식의 밑바탕을 닦고 발전시켜온 19세기 말에서 현대에 이르는 약 100여 년간 생겨나 존속되어 온 개념이다. 한국 문학은 선사 이후 문자가 생겨난 이래 오늘날까지 창작된 한국의 문학 전체를 말하며, 이를 바탕하여 표현 방식 등을 기준으로 세분한다. 한국 문학은 역사적으로 크게 기록 문학과 구비 문학으로 나뉘며, 전자의 경우 또다시 국문 문학과 한문 문학으로 나뉜다. 여기서 국문 문학은 또다시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으로 나뉘어 한국 문학의 전체적인 틀을 형성한다. 구비 문학(口碑文學)은 말그대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문학의 형태를 말한다. 이런 형태의 문학은 공통적으로 구연, 공동 창작, 보편성, 단순성, 민중성 등의 특징을 지닌다. 문자의 발생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한국 문학의 모태이며, 지금도 끊임없이 창작되어 전승되고 있다. 대표적인 구비문학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신화, 전설, 민담, 수수께끼, 속담 등이다. 구비문학에는 민족의 삶과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국문 문학(國文文學)은 나랏말 즉, 한국어로 쓰인 문학이다. 한글로 쓰인 순수 국문 문학이 있으며 향찰(鄕札)로 표기한 차자(借字)문학이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한문 문학(漢文文學) 또는 한문학(漢文學)은 서력 2세기 경 한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조선 후기까지 한자로 쓰인 문학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한문 문학은 한문을 배울 수 있었던 귀족 계층에서 주로 향유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한국 문학은 주로 한자를 차용하여 표기하였다고는 하나, 글을 쓴 주체가 한국인이라 점, 그리고 한국의 사상, 감정, 정서 등이 녹아 들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나는 국한문 혼용체나,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나타나는 구결이나 이두 등에 비추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이전 = 한문학', '훈민정음 창제 이후 = 국문학'이라는 공식은 타당치 않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아득한 옛날인 상고 시대의 역사에 대해 자세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외족의 침략이 빈번하여 한국의 고문헌이나 기록이 모두 없어져 그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없고, 고려 시대에 이루어진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진수(陳壽)의 찬(撰)인 《삼국지》 등에서 상고 시대의 생활 풍습을 이야기해 줄 뿐이다. 이러한 문헌에 정착된 문학은 원래 있던 대로의 모습은 아닐 것이고, 또 작자를 전하고 있다 할지라도 모두 오랫동안 전승해 오는 동안 점차 형성된 것으로 이른바 민족 전체가 공동으로 제작한 민족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 민족 문학은 후세에 분화·전개된 본격적 문학의 형태와 비겨 혼돈 그대로이며 신화·전설의 설화적 요소와 가요적 요소가 확연히 분화되지 않고 서로 혼융(渾融)된 채로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고 시대의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나 작품도 극히 드물다. 단지 몇 개의 시가(詩歌)와 신화만이 후대에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공무도하가, 황조가, 구지가, 정읍사 등이 있다. 향가(鄕歌, 문화어: 사뇌가)는 향찰로 쓴 노래로서 보통 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것을 말한다. 향가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나뉘며, 한자로 지은 노래도 있고, 이두로 지어진 노래도 있다. 삼국시대 때는 4구체 향가가 많았으나, 남북국시대 전기와 고려 초기로 가면서 8구체와 10구체 향가들이 다양하게 지어졌다. 향가는 장르가 다양하며, 노동요나 민요로 추측되는 풍요, 귀신이나 액운을 막기 위해 부르기도 하며, 또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하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들도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에 유행하던 가요다. 고려가요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유교적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당한 기록이 삭제되었다. 악장이란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사용된 노래 가사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고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궁중 행사에서 불린 송축가를 가기킨다. 주로 15세기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신진 사대부가 주된 작가층이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 육조의 위업 찬양, 왕조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기본 형식은 4구 2절이며, 한시체, 경기체가체, 속요체, 신체 등의 다양한 형식을 취했다. 악장은 조선 초기에 민심을 수습하고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한편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목적성을 강하게 지닌 장르이다. 일반 백성들의 정서와 동떨어져 있었던 특권층의 문학이었으며, 곧 소멸되어 생멸력이 짧았다. 주요작품 문덕곡, 정도전, 태조 때(태조의 문덕을 찬양한 노래) 정동방곡, 정도전, 태조 때(태조의 위화도 회군을 찬양한 노래) 근천정, 하륜, 태종 때(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노래) 봉황음, 윤회, 세종 때(조선의 문물과 왕가의 축수를 기원한 노래) 화산별곡, 변계량, 세종 때(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작품) 감군은, 미상, 미상(임금의 성덕과 성은을 찬양한 노래) 신체: 용비어천가, 정인지,권제,안지, 세종 때(육조의 위업을 찬양하고 조선의 무궁한 번영을 송축하며 후대 왕에 대한 권계를 담은 작품.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이자 장편 서사시) 월인천강지곡, 세종, 세종 때(수양대군이 쓴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이 악장 형식으로 쓴 찬불가. 전문 580여정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 고려 중엽에 발생한 한국 전통 시 양식의 하나이다. 조선 시대에 유행한 시가 양식이다. 시조는 형태적 특성에 따라 몇 갈래로 나뉘는데 이중 평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성되는 3장과, 하나의 장에 2개의 구로 구성되는 6구와 한국어의 특징인 끊어 읽기 단위인 12번의 음보로 구성되는 틀을 지닌 정형시이다. 그 밖에는 형식적 특징으로 구별되는 엇시조, 사설시조 등이 있다. 시조창중의 하나로 일명 중시조, 반사설시조, 농시조, 엇엮음시조라고도 한다. '엇'은 얼과 통하므로 엇가는 시조, 얼버무린 시조란 뜻으로서,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중간 형태의 시조, 즉 평시조 창에서 벗어나 길지도 않게 중간으로 부르는 창의 시조를 말한다. 엇시조의 형태는 현대시조에서 더욱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엇'의 음악적인 특징은 첫부분을 높게 질러내고 초장은 무겁고, 점잖게, 중장 이후부터는 흥청거리는 창법으로 부르는 것이다. 민요는 과거로부터 구비 전승되는 전통적 운율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의 생활 감정을 담은 비전문적인 민중의 노래이다. 따라서 구비 전승되는 민요에는 공동체의 보편 적인 생활 감정과 정서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민요는 민중들의 노래지만, 지배 체제에서 외면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비 문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 오랫동안 민요만 홀로 우대를 받았다. 중세적인 지배 체제를 다지는 예악을 이룩하면서 민요를 받아들여 향악 또는 속악을 편성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으며, 고려 후기에는 민요에서 새롭게 상승한 속악이 새삼스럽게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형식은 두 연이 대칭 구조를 이루며, 음의 반복이 많다. 민요의 가창 방식은 선후창, 교환창, 독창, 합창으로 구분된다. 성격은 설화와 마찬가지로 입으로 전승되는 구전성을 지니며, 민중이면 누구나 부르는 비전문적인 노래이다. 서민들의 정서와 애환을 담았기에 서정성과 서민성, 향토성이 두드러지고, 생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내용은 주로 여성들의 애환을 다룬 부요가 많으며, 현실 생활의 경험과 정서, 생활고를 해학적으로 녹여 낸다는 특성을 지닌다. 노동요에는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이 꾸밈없이 소박하게 잘 나타나 있다. 시집살이 노래에는 시집살이하는 여성들의 고뇌에 찬 삶이 묘사되어 있다. 비기능요에는 남녀 이별의 정한이 주조를 이룬다.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 비기능요로 구분된다. 노동요는 농업,어업,벌채,길쌈,제분,잡역 노동요의 내용이 많고, 주요 작품은 논매기 노래, 타작 노래, 해녀 노래 등이 있다. 의식요는 세시,장례,신앙 의식요에 관한 내용이고, 주요 작품은 지신밟기 노래, 상여 노래, 달구질 노래 등이 있다. 유희요는 놀이에 박자를 맞추며 부르는 민요이고, 주요 작품은 강강술래, 줄다리기 노래, 널뛰기 노래, 놋다리 노래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비기능요는 주로 유흥을 목적으로 하는 민요, 내용과 형태상의 제약이 별로 없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 이 있다. * 잡가의 개념 및 발생 배경 조선 후기 하층 계급의 전문 소리꾼이 부르던 노래이다. 양반 계층의 가사와 대비되어 잡스럽다는 뜻으로 잡가라는 명칭을 붙였다. 잡가는 조선 후기에 정격가사가 정형성을 잃어버리면서 대중들이 부르는 가요의 혼합 형태론 나타났다. 즉 가사, 민요, 시조, 판소리 등 기존의 여러 양식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변형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잡가는 이후 개화기까지 불리면서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남녀간의 애정,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류, 삶의 애환, 해학과 익살 등의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대체로 유흥적, 쾌락적, 세속적인 성격이 강하다. 4'4조, 4음보의 가사의 율격을 기본으로 하지만 파격이 심하다. 경기잡가는 서울, 경기지방에서 유행한 잡가로, 맑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그 중 휘모리 잡가는 빠른 율동에 따라 말을 계속 열거하며, 사설시조와 유사하다. <맹꽁이 타령>, <바위 타령> 등이 대표적이다. 12잡가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서민층의 노래이다. 긴 잡가라고도 하며, 대개 판 소리에서 유래했다. <유산가>, <적벽가>, <선유가>, <소춘향가>, <평양가>, <십장가>, <형장가>, <집장가>, <제비가>, <달거리>, <방물가>, <출인가> 등이 이에 속한다. 서도 잡가는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서 유행한 잡가이며, 애절하고 탄식하는 느낌을 준다. <공명가>, <배따라기> 등이 있다. 남도 잡가는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한 잡가로, 억양이 분명하다는 특성을 지닌다. <육자배기>, <새타령>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 시대는 과거 제도의 실시, 불교의 융성 및 주자학의 도입 등으로 한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최승로, 박인량, 김부식, 정지상, 이인로, 임춘, 이규보, 이제현 등의 뛰어난 작가들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송인- 정지상- 별리의 정서를 담은 7언 절구 <삼국사기> 김부식, 인종 23년(1145), 전 50권 10책 유학 중심의 학문적 풍토 등으로 인해 한문학은 고려 시대에 이어 계속하여 발전하였다. 감성과 서정을 중시한 당, 송의 시풍을 따른 사장파와, 이성적이고 실천적인 도의 추구와 경학을 내세운 도학파가 대립하였다. 필원잡기, 서거정, 성종 때(고대로부터 전하는 일화 또는 한담을 가려 모은 수필 문학집, 풍속 연구의 자료) 동문선, 서거정, 성종 때(신라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시문을 모아 엮은 책, 우리나라 한문학의 총결산) 촌담애이, 강희맹, 성종 때(음담패설과 설화를 엮은 기담집) 용재총화, 성현, 중종 때(풍속, 지리, 역사, 문물, 음악, 설화, 인물평 등을 수록한 수필집) 패관잡기, 어숙권, 명종 때(정사, 인물, 풍속, 일화, 시화, 민속, 문물제도 따위를 모아 해설을 붙인 패관문학서) 신체시란 신문학 초창기에 쓰인 새로운 형태의 시가로, 창가의 정형성을 탈피한 새로운 율조에 근대적인 내용을 담은 시가이다. 형식은 3'4조가 기본이 되는 이전의 형식을 깨뜨리고, 부분적으로 7'5조 내지 3'4'5조의 새로운 형태, 즉 정형시와 자유시의 과도기적 형태를 띠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신교육, 남녀평등, 개화 의식, 자주독립 등의 계몽사상을 담아 근대화에 대한 계몽주의적 의식을 고취했다. 신체시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정형적 요소와 과도한 계몽성 때문에 완전한 자유시라고 볼 수 없지만, 우리 시 문학사상 처음으로 정형률 을 벗어난 데 의의가 있다. 또한 개인의 서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의 창작 의식이 작용했다는 점에서 현대 시의 형성에 결 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주요작품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년 <소년>창간호에 실린 신체시의 효시)'(신대한소년)' (구작 삼편)'(꽃두고), 이광수의 <우리 영웅>등이 있다. 근대문학의 소설은 신소설이라 불린다. 신소설이란 갑오개혁 이전의 소설에 대하여 새로운 내용, 형식, 문체로 이루어진 개화기 때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소설을 가리킨다. 1906년 <만세보>에 연재된 이인직의 <혈의 누>가 단행본으로 간행되면서 '신소설 혈의 누'라고 밝힘에 따라 이후 보편적인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후 1917년 <무정>이 나오기까지 약 10년동안 창작된 작품들을 지칭한다. 특성은 일반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제재로 하며, 배경 역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에 따라 자주독립, 자유연애, 신교육의 권장, 인습과 미신의 타파 등 개화, 계몽사상의 구제적인 실천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평면적 구성 방식을 탈피하고 역전적 구성을 시도했으며, 문장이 언문일치에 근접하고, 묘사 중심의 서술이 시도되었다. '신소설'의 한계는 고전 소설과는 다른 형식을 수반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소설로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초기의 참신성이나 문제의식이 사라지고 대중적 독서물로 변질되어 버렸다. 1. 완전한 언문일치체를 이루지 못했다. 또한 인물의 정형성, 고전 소설의 상투적 수법인 우연을 통한 사건 전개, 선악의 평면적 대립(권성징악적 요소), 흥미 위주의 사건 설정 등의 요소가 많았다. 2.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민족 주체성이 결여되었다. 또한 낙관적인 문명개화를 꿈꾸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의의는 고전 소설과 현대 소설을 잇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다. 종래의 비현실적인 내용에서 현실적인 사건 중심으로 소설의 내용이 바뀌었으며, 당대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개화사상 을 고취시켰다. 주요작가와 작품은 이인직의 <1906,혈의 누>, <1906,귀의 성>, <1908,치악산>, <1908,은세계>, <1913,모란봉>, 이해조의 <1908,빈상설>, <1910,자유종>, 최찬식의 <1914,안의 성>, 신극이란 서구 근대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우리나라의 근대 연극을 말한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급속히 쇠퇴한 민속극을 대신하여 서구의 연극에 영향을 받아 생긴 새로운 연극이 바로 신극이다. 개화기에 등장한 새로운 양식으로 서양의 연극과 판소리가 결합한 형태이다. 즉 무대 위에서 배역을 나누어 대화식 분창으로 연창하는 연극으로 1902년 황실 극장 격인 협률사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1908년 원각가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창극으로 발전되었다. 공연 작품으로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홍보가> 등 전래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네 마당에 한정되어 있었다. 창극과 달리 산문으로 된 대사를 사용한 본격적인 연극으로, 근대극에 가까워진 형태이다. 이인직이 자신의 작품인 <은세계> 와 구연학의 번안 소설 <설중매>를 연극으로 각색하여 원각사 등에서 상연하였다. 신극보다 구성의 필연성 등이 떨어진 연극으로, 주로 현대 세상의 풍속과 인정 비화를 제재로 하여 통속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최초의 신극단인 혁신단은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여 '권선징악'풍속 개량'민지개발' 진충갈력' 등의 표어를 내세웠고, 처음에는 개화 계몽이라는 큰 시대 의식 아래서 연극 운동을 펴 나가려 했다. 혁신단, 문수성에서 <육혈포 강도>,<불효천벌>,<장한몽> 등을 공연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협률사, 장봉환, 1902~1906, 소춘대유희, 최초의 옥내 극장, 연극 상연보다 일반 오락 기관화됨. 원각사, 이인직, 1908~1914, 은세계'설중매, 최초의 서양식 사설 극장. 신극 및 창극 상연. 혁신단, 임성구, 1911~1916, 육혈포 강도, 신파극단. 군사극, 신소설을 각색하여 상연함. 지방 공연. 문수성, 윤백남, 1912~1916, 불여귀, 신파극단. 원각사, 단성사에서 공연함. 지방 공연. 유일단, 이기세, 1912~1914, 장한몽, 극장 개성좌의 설립과 함께 조직된 신파극단. 서울&지방 공연. 문학의 이론이나 작품에 대한 비평의식은 일찍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어느 정도 체계 있는 문학론이 수립되고 이를 모은 시화집이 나타난 것은 무신의 난 이후다. 시화집으로 총칭되는 이 갈래에는 문학, 특히 시에 관한 논의 외에 잡문, 고증, 단편적인 일사유문 등이 있고, 시에 관한 것도 시론, 시평, 시화 등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문학의 가치 시와 시인의 기능 등에 대한 구체적 접근이 시도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현대문학은 흔히 기형적(畸形的)인 근대의식, 단절된 역사에서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는 문학이라 말하고, 오히려 서구의 근대적 문학사조와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다루어지는 실정에 놓여 있다. 한국의 현대문학은 한국의 정치·경제 및 문화의 근대화 과정이 특이했듯이 서구의 근대적 문학사조와 긴밀한 연관성을 맺으면서 특수한 발전 과정을 걸어온 것만은 사실이다. 19세기 말 한국을 침략한 외국 자본주의와 전근대적 폐쇄사회(閉鎖社會)의 종말과 함께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든 서구의 문예사조는 한국 현대문학으로 하여금 기형적인 이식문화(移植文化)로서의 특수성을 띠게 했다. 따라서 한국의 현대문학은 고유의 문화유산인 고전문학에 대해서 직접적인 연관성이나 주체적인 자아(自我)의 발전 계기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에 걸쳐 무비판적으로 외래 문학의 조급한 흡수와 이식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현대 문학이 전통문학인 고전문학의 태반(胎盤)에서 발생·성장하지 못하고, 유럽 문학의 수입·이식에서 출발된 까닭에 확고한 주체의식이나 자기능력에 의한 정상적인 동화(同化)와 섭취(攝取)의 경로를 밟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현대문학은 한국문학사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에는 이질적인 외래 문학이요, 그 본원지인 유럽 문학과 비교할 때는 동질적이면서도 동일한 위치에서 취급할 수 없는 특수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다시 말해 유럽의 18세기-20세기에 걸친 문예사조가 각기 전세기의 문학을 기반으로 하여 발전·성장했고, 또 필연적인 모색의 이행(移行)과정이었음에 비추어 한국의 경우는 극히 짧은 기간에 19세기와 20세기가 혼류(混流)된 사조를 모방하고 이식하는 데 열중했다. 여기에 반세기를 겨우 넘는 한국 현대문학의 특수성이 논의되며, 또 오늘날까지 새로운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한국의 문학사에서 신문학(新文學)과 현대문학(現代文學)과의 관계는 아직도 문학사적인 시대 구분이나, 술어(術語)로서 뚜렷한 개념으로 구별해 쓰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신문학이란 말은 형식상으로 유럽의 새로운 문학사조가 수입되기 이전의 전통문학인 구문학(舊文學)에 대하여 새로운 문학, 즉 신문학의 뜻으로 막연히 사용되어 갑오경장 이후의 문학에 전반적으로 통용해 쓰고 있다. 그러나 신문학이란 말은 내용상으로 볼 때 신소설(新小說)까지 포함시키는 이도 있으나, 엄격히 말해 신소설이 지닌 형식적 미완성과 사상적 봉건성을 타파하고 근대적 요소 위에 한층 서구적인 성격에 적합하게 꾸며진 문학을 가리킨다. 즉 언문일치, 문학에 대한 유희적 태도의 배격, 권선징악과 비현실적 관념사고의 배제, 근대사상의 반영 등이 그 구체적 개념이 된다. 따라서 신문학기(新文學期)라 하면 1894년 갑오경장부터 3·1운동이 일어나기 전해인 1918년까지를 일컫는 것이 보통이며, 갑오경장 이후 오늘날까지의 한국 문학을 신문학기로 보는 이도 있어 그 구분이 학자에 따라 구구하다. 한편 현대문학이란 말은 신문학이라는 말보다 더 애매모호하게 사용된다. 즉 서구식으로 20세기 문학을 현대문학이란 뜻으로 쓰기에는 새로운 문학이 서구의 르네상스이후의 문학을 전반적으로 혼합·흡수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시대 구분의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보통 한국의 문학은 3·1운동 이후의 본격 문학기부터 볼 수밖에 없는데, 즉<창조(創造)>에서 출발하여<개벽(開闢)><백조(白潮)>를 거쳐 1924년<조선문단(朝鮮文壇)>의 발행으로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문학은 소설에서는 사실주의를, 시는 상징주의와 낭만주의를 그 주류(主流)로 했다. 19세기 말 급격히 전변(轉變)하는 세계사의 물결은 중국·일본이 세계 열강(列強) 앞에 문호를 개방한 뒤, 1876년 한국도 강제적인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로 일본과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계속하여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제국과도 개국(開國)의 조약이 맺어지니, 이로써 굳게 닫혔던 쇄국의 문은 열리고, 봉건왕조인 한국도 외세 자본주의가 각축(角逐)하는 와중(渦中)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 신문학을 촉진시키게 된 서구의 근대사조는 앞뒤의 순서도 없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 조잡한 흡수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피동적인 외래 사조의 접촉은 결과적으로 전통문학에 대한 등한시 내지는 극단적으로 낡은 것은 모조리 나쁘고 새로운 것은 무조건 좋다는 파행적인 관념을 조장,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외래 사조를 숭상하는 현대적인 사대사상의 풍조를 잉태하게 했다. 이렇게 착잡한 현실 속에서도 한국의 현대문학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은 기독교·신교육 사조, 그리고 신문·잡지를 통한 저널리즘이었다. 이미 영·정조 시대에 갖은 탄압 속에서도 중국을 통해 전파해 온 천주교는 여러 차례의 순교(殉敎)의 역경을 거쳐, 한불조약(韓佛條約) 후에야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그 후 기독교는 신교의 전래와 함께 이 땅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에 대하여 큰 공헌을 했고, 현대문학의 생성과정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즉 성경(聖經)의 번역을 통해 문장에서도 시문체(詩文體)의 활용과 한글의 보급을 촉진시켰고, 찬송가(讚頌歌)는 새로운 노래인 창가발생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더욱이 기독교 재단에 의해 1885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사학인 배재학당이 설립되었고, 그 후 이화학당을 비롯해 많은 교육기관이 교회의 힘으로 건립되니, 이러한 현대적 교육기관은 그대로 신문학을 생성시키는 촉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현대식 신문과 잡지 및 관보(官報)의 종합적 체제인<한성순보>가 1883년 창간되니, 이는 한국에 있어 근대적 언론의 효시이며, 한때 중단된 후 주간(週刊)으로 속간된<한성주보>는 국한문(國漢文) 혼용체를 최초로 사용한 신문으로, 그 문체는 신문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1896년에 발간된<독립신문>은 그 문장을 순한글로 썼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고 그 후에 창간된<황성신문><매일신문><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국민신보>등 많은 일간신문과<소년(少年)><청춘(靑春)> 등의 잡지는 초기 문학작품의 대변 또는 새로운 문체를 보급시키는 매개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신문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요 문학 장르에서 형태적, 내용적 변화가 일어난다. 시의 경우 정형적 운율에서 벗어나 자유시 형태의 근대 시가 정착되었다. 1910년대 말에 현대적 자유시가 등장했다. 여러 잡지와 동인지를 통해 신인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김억과 주요한 등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를 모색했다. 특히 김억은 <태서문예신보>를 중심으로 외국의 문예 이론과 상징주의 시를 번역, 소개했으며, 주요한은 최초의 현대 자유시인 <불놀이>(1919)를 발표했다. 계몽 문학의 교술시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 감정을 내용으로 사는 서정시, 기존의 정형성을 탈피한 자유시가 근대 시의 모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의 내적 질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서구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의 상징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주요 작가는 주요한과 김억 등이 있다. 주요한의 작품은 불놀이, 빗소리가 있고, 김동인과 함께 <창조>를 창간하고 최초의 현대 자유시 ,<불놀이>를 발표하였다. <영대>의 동인이다. 김억의 작품은 봄은 간다, 무덤 등이 있고, <창조>, <폐허>의 동인이었다.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와 최초의 창작 시집 <해바라기 노래>(1923)를 발간하였다. 감상적인 경향에서 출발하여 민요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 정형시로 옮아갔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 사건 근대비평의 진정한 출발은 1920년대로 잡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으나, 1900년대와 1910년대가 비평사의 관점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시기는 아니다. 이 시기는 '창작이 있는 곳에 비평이 있다'는 명제를 충족시 키지는 못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문학정신과 창작방법의 출현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문학은 1980년대까지 그 외 나라들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1980년대 이후 다각도의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며 번역의 질 또한 향상되었다. "Flowers of Fire"은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한국 시집이다.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아직까지도 한국 문학의 번역 작업이 더디지만,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큰 인기에 힘입어 점차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KBO 리그 KBO 리그()는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 리그이다. 1981년 12월 11일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 롯데 자이언츠, MBC 청룡 등 총 6개 구단이 한국프로야구 창립 총회에 참가하여 프로 야구 출범을 공표하여 구체화되었다. 역대 1등은 삼성 라이온즈 팀이다 1979년 12·12 반란과 1980년 5·17 계엄령으로 정권을 잡아 집권한 전두환은 소위 '3S 정책'(Screen, Sex, Sports) 을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1981년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정서, 여가선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프로 스포츠 한번 해봐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실무를 담당한 이상주 당시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 비서관은 대통령의 지시대로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를 타진하고, 당시 야구인이었던 이호헌과 이용일이 18쪽 분량의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만들게 되었다. 축구계가 프로화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보고한 것과 달리 야구계는 "정부 보조 한 푼 없이 프로 야구를 출범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했고, 이 제안이 당시 집권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되었다. 이후 각 지역을 연고지별로 분할하고 창단 기업을 물색하게 되었다. 프로 야구에 참여할 기업을 선정할 때는 모기업의 조건은 재무구조가 건실한 상시노동자 3만명 이상의 대기업이었다. 초기 기획단계에서 연고지 배정은 서울은 MBC, 부산은 롯데였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혈연, 지연, 학연들을 모조리 동원해 그룹총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그에 의해 두산그룹이 자사 주류 OB의 이름을 내걸고 충청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정계인물들과 관계가 돈독했던 해태의 박건배 회장이 전라권에 해태를 참여시켰다. 다음과 같이 연도, 경기수, 관중수, 평균은 아래 표와 같다. 빨간색 글씨는 최고, 파란색 글씨는 최저. ※ 참고(2015년 기준) 현 프로 야구는 단일리그제로 각 팀은 144게임씩 총 720경기를 가진다. 9회말 이후 동점일 경우 연장전을 가진다. 연장전은 12회까지 치른다. 12회말 이후 동점일 경우 무승부로 처리한다. 취소 된 경기는 페넌트레이스가 종료 된 이후에 별도로 경기를 편성하여 진행한다. 순위는 승률에 따라 결정하며, 승률계산은 승수/경기수에서 무승부를 뺀경기총수 로 하도록 하였다. 기존에는 무승부를 경기수에서 제외하였으나, 2010년에는 승률을 전체경기를 기준으로 하도록 바꾸었기 때문에 무승부도 승률을 낮추는 요인이 되었었다. 그러나 2011년 8개 구단 감독들의 반발로 2년 만에 무승부는 경기수 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10년과 다르게 5회 클리닝타임이 부활했으며 포스트시즌은 연장 15회까지 경기 가능한 것으로 수정하였다. 프로야구 전광판 표시가 신축구장과 시설교체가 가능한 구장부터 기존 스트라이크 - 볼 - 아웃(S-B-O)의 표기에서 국제 기준에 맞게 볼 - 스트라이크 - 아웃(B-S-O)의 표기 방식으로 바꿔서 시범운영된다.시즌 MVP와 신인왕 수상 선정 기준을 패넌트레이스를 기준으로 한다.경기 개시시간은 주중 18:30 / 주말 17:00, 단 개막2연전과 5월 6일까지 편성되는 경기들중 일요일과 공휴일에 열리는 경기는 오후 2시부터 치러진다. 그러나 혹서기(7~8월) 기간동안은 주말, 공휴일 경기 개시시간이 18:00로 늦춰진다.2015년에는 10구단·하루 5경기 체제와 더불어 4-5월과 8-9월에만 한해 일요일에는 오후 2시와 오후 5시로 경기를 나누어 편성할 계획이다. 5경기 중 4경기가 오후 2시에 시작하고, 나머지 1경기는 오후 5시에 열린다. 모든 선수가 출전가능했던 퓨처스리그에도 엔트리 등록 규정을 제정하여 경기당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26명으로 제한해 경기 1시간30분전까지 등록하고 인원이 적은 상무와 경찰청을 제외한 9개 구단은 엔트리에서 말소될 경우 3일간 재등록이 불가능하다. 도핑테스트는 퓨처스리그까지 확대 시행하며 표적검사 인원도 늘린다. 경기장 질서유지를 위해 선수단 및 프런트는 덕아웃 출입시 구단의 로고가 찍힌 옷을 반드시 착용한다. 시범경기는 팀당 8경기씩 총 40경기를 가진다. 올스타전은 팬들의 투표와 감독의 추천을 통해서 뽑혀진 선수들의 게임으로 매년 여름에 드림 올스타(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kt 위즈)와 나눔 올스타(키움 히어로즈,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 NC 다이노스)로 팀을 나누어 치러진다. 9회까지 승리팀이 나오지 않을 경우 연장 10회부터 승부가 날 때까지 승부치기를 시행한다. 페넌트레이스가 끝나고 순위 1위-5위의 팀들이 참가하게 된다. 포스트시즌 엔트리는 27명이다. 포스트시즌은 가을야구라도 불린다. KBO 리그는 발전하면서 관중들의 응원문화도 함께 발전하였다. 여기서는 많은 구단이 공통적으로 진행하는 응원 문화만 서술한다. 각 팀의 자체 응원 유형과 문화는 각 팀 문서를 참조하라. 야구경기 도중에 야구장에 정전 사태가 발생하여 경기가 잠시 지체되거나 다음으로 연기된 것을 말한다. 야구경기를 그 날하는 경기가 자정을 뛰어넘어 다음 날까지 경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무박 2일 경험을 하지 않은 팀은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삼성 라이온즈와 kt 위즈팀 뿐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한 팀이 홈런과 안타를 포함해 무려 20점 이상을 낸 것을 말한다. 한국프로야구에서 20점 이상을 가장 많이 친 야구팀은 LG 트윈스였고, 반면 20실점을 가장 많이 손해보는 야구팀은 한화 이글스였다. 그런데 정작 최근에 한국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이 득점을 낸 야구팀은 삼성라이온즈였고 가장 큰 점수차로 실점한 야구팀은 두산 베어스였으나 2017년 9월 17일에 두산 베어스가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21득점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되갚았다. 또한 두산 베어스의 경우는 현재까지도 홈 경기에서 20득점을 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 때까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2019년에 최초의 스트라익 낫아웃으로 끝내기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무기 무기(武器, )는 인류가 군집 생활을 하면서 야생 동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삶을 꾸려가기 위한 수단인 사냥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군집생활의 영역이 넓어지고 인구의 수가 늘어나고 알지 못하는 부족들과의 교류와 갈등이 심화됨으로써 살상 도구로써 무기가 쓰이고 발명되었다. 무기는 또한 전시에 대비한다는 뜻에서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책으로 매우 일찍이 무기를 사용한 이른바 스포츠가 생겨났다. 무기를 사용한 스포츠는 오늘날에 살상과는 거리가 먼 정신집중 혹은 체력 단련을 목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또한 흔히 무기는 공격 병기만을 가리키나, 방패나 갑주와 같은 방어 병기도 무기에 포함된다. 최초로 발견된 명백한 무기는 쉬닝엔 투창으로, 300,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재 투창이다. 물건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은 침팬지와 같은 동물을 통해서도 관찰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했고 대표적으로 단궁과 각궁이있다. 그리고 화살의 종류로는 태조가 썼다고 전해지는 대소명적(大哨鳴鏑)이 있다. 하지만 단궁은 조선시대때 오래전에 부여나 동옥저등의 여러나라에서 사용되었다. 세종28년(1446년)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불씨를 손으로 점화시켜 발사하는 청동으로 만든 유통식 화포(火砲)이다 조선 전기부터 사용하던 청동제 유통식 화포(火砲). 세전 8발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총통이라는 뜻에서 팔전총통이라 한다 시대마다 18반에 들어가고 빠지는 병기가 있으므로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정조 14년(1794))에 편찬된 무술 훈련교본. 자세한 그림과 한글 설명이 붙어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 조선의 무술교본들을 언급하고 있다. 다음은 무예도보통지에 기술된 무예의 종류이다. 윤회 윤회(輪廻) 또는 삼사라(, )는 일정한 깨달음, 경지 또는 구원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 깨달음, 경지 또는 구원된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하여 이 세상으로 재탄생한다는 교의 또는 믿음이다. 윤회의 교의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겪는 삶의 경험이 자신의 발전에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상태 또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이 세상으로의 윤회가 끝난다. 불교힌두교자이나교시크교 등의 주로 인도에서 유래한 종교들에서 윤회를 믿으며 중요한 교의 중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서양의 경우, 고대 이집트 종교피타고라스 학파영지주의헤르메스주의 등에서 윤회를 믿었거나 믿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에 따르면,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인과응보 또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과법칙을 부정하게 되면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근거가 무너진다고 본다. 힌두교의 윤회의 교의에 따르면, 탄생은 영혼이 육체감각 기관마음과 연결되는 것으로, 따라서 탄생은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맺는 것이며, 그리고 죽음은 완전한 소멸 또는 파괴가 아니라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이러한 윤회의 교의를 부정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정당한 과보를 받아 자신의 삶의 모습을 벌어들이게 된다는 도덕적 법칙을 부정 또는 무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였던 여러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무의미한 헛된 일로 치부하는 것이라고 본다.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정통파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윤회를 믿었다. 정통파 기독교의 교부로 알렉산드리아파를 대표하였던 오리겐에 따르면, 유력한 영지주의 분파 중의 하나였던 바실리데스파의 창시자인 바실리데스는 사람이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받는 유일한 벌은 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오리겐은, 바실리데스가 가르친 윤회의 교의로 인해, 악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유익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불만을 제기하였다. 윤회는 주요 불교 교의 중의 하나이다. 불교에 따르면, 부처의 지위("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의 삶은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가며 거듭하게 된다. 윤회(輪廻)는 산스크리트어 삼사라(Samsāra: "계속된 흐름Continuous flow")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 또는 생사유전(生死流轉)이라고도 한다. 마치 수레바퀴가 회전하여 멎지 않는 것처럼 중생이 번뇌와 업(業)으로 인하여 "길 잃은 세계"(미계迷界), 즉 3계(三界: 욕계색계무색계) 6도(六道: 지옥도아귀도축생도수라도인간도천신도)에 다시 태어나고 죽는 것이 끝없는 것을 말한다. 이 괴로운 존재에서 벗어나는 경지가 열반(涅槃)이다. 윤회 사상은 인도 사상의 현저한 특색이었으며, 불교 역시 이 사상을 가졌다. 윤회를 반복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있는 모습"(Bhava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삼계 중 이 세상인 욕계에 태어난 중생(衆生Sattva)은 여기에서 한 일(業)에 따라서 지옥아귀축생아수인간천신의 여섯 가지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저곳에서 돌아 넘어가게 된다. 이들 중 뒤의 세 가지 삶은 좋은 업을 이룬 이들이 돌아가는 길("삼선도三善道")라 부르며, 앞의 세 가지 삶은 나쁜 업을 이룬 이들이 지나가야 할 길("삼악도三惡道")라 부른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해 감에 따라, 욕계를 벗어나 삼계(三界)의 다른 두 계인 색계 또는 무색계에 이르게 되며, 부처의 지위("열반")에 도달하면 삼계 속에 윤회하는 일이 그치게 된다.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삼계육도(三界六道)는 우주가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三界)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에서 욕계는 다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신의 육도(六道)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부처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중생들이 끊임없이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태어나고를 무한히 반복하는 곳이다. 욕계(欲界)는 욕계천(欲界天)이라고 한다. 색계(色界)는 색계천(色界天)이라고 한다. 무색계(無色界)는 무색계천(無色界天)이라고 한다. 카르타고 카르타고(, Kart-Hadasht)는 현재 튀니지 일대에 위치해 있던 페니키아인 계열의 고대 도시로, 이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와 패권 다툼을 벌였으며,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 패배하여 로마 공화정의 아프리카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완전히 파괴된 도시를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하여 북아프리카 일대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5세기 경에는 반달족의 침입을 받았다가 698년 다시 아랍인들에게 파괴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카르타고의 폐허는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 하나이다. 티아라를 건설했고, 그리하여 과거 페니키아 식민시와, 동쪽의 벵가지부터 서쪽의 지브롤터와 포르투갈에 이르는 지역(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일부, 발레아레스 제도 등)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 면해 있으면서 동시에 육지에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한 탓에 농업에 종사한 가문들과 상업에 종사한 가문들 사이에서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업 중심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지중해 서부의 헤게모니를 확립시키기에 이른다. 기원전 6세기 초반, 항해자 한노가 아프리카 해안가까지 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시에라리온에까지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의 교역 중심지로 변모한다. 카르타고는 하드루메툼, 우티카, 케르코우아네 등 옛 페니키아 식민지의 영토와 리비아의 해안지대를 정복, 현재의 모로코부터 이집트의 해안지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지중해 내의 사르데냐,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서편에까지 지배권을 확립했다. 서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과 동맹을 맺어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기원전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기원전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 전투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4세기 중엽에 걸쳐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 싸움을 벌였다. 기원전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기원전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이를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 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 다툼으로 로마와 포에니 전쟁에서 싸우게 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 ~ 241년) 지중해의 상권을 둘러싸고 점차 팽창하는 로마 공화국과 전통적인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 사이의 이권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시칠리아를 통해 해상으로 진출하려했고, 결국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카르타고와 맞붙었다. 23년 간의 전쟁 끝에 로마는 한니발의 아버지이기도 한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을 격멸시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유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로 침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었고 한니발은 결코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탈리아 외에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이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했다.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갔고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카르타고가 결정적으로 패함으로써 16년동안의 이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고 지중해 서부의 재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에서 146년에 일어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와 사실상 군신관계에 있던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없이 동맹국 누미디아를 침범하여 성난 로마 원로원을 정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제거한 강경파 대 카토가 "카르타고를 반드시 섬멸해야 합니다."라고 선동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세번째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멸망해, 로마의 속주 중에 하나인 '속주 아프리카'로 전락하게 되었다.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의 조약 위반에 따른 대가로 수도 카르타고를 버리고 이주하라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해왔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이 요구를 현실을 생각해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나, 카르타고를 버리고 이주하라는 로마의 요구는 카르타고 사람들의 직업인 상업을 포기하라는 말이기 때문에 성난 민중이 항쟁을 벌여 결국 묵살하고, 3차 포에니 전쟁에 돌입하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 시민들도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활 시위로 쓰도록 할 정도로 로마에 거세게 저항했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기도 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3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로마는 살아남은 카르타고 시민들을 아프리카에서 살수 있도록 했다. 카르타고는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기원전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장악했다. 사르데냐는 광물 자원이 물량으로는 적었으나, 납, 아연, 구리, 철, 은 등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히스파니아 광산은 매장량이 보다 풍부했고, 250년간 계속 채굴했지만 여전히 납, 아연, 수은, 구리, 금, 은과 수백만 톤의 철광석을 생산했다. 히스파니아의 가데스를 떠난 카르타고인들은 아마 오래전의 페니키아인들이 한 것처럼, 북쪽 콘월로 항해하여 값진 주석을 배에 싣고 오기도 했다. 이 곳을 거점으로 남쪽으로 아프리카 해안 방향으로 황금 해안, 카메룬, 심지어 가봉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금, 상아, 노예, 전쟁용 코끼리를 실어왔다. 카르타고에서 생산한 많은 광물은 본국 주물 공장뿐 아니라 동부 지중해의 헬레니즘 세계로 운송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전 수세기 동안 동쪽과 서쪽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카르타고가 독점했다. 지중해 서부에서 그리스 선박을 발견하면 십중팔구는 격침하였다. 이런 정책 덕분에 카르타고 상인들은 그 지역 내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한 상품들을 독점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의 제품 중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은 직물, 특히 소라껍질에서 추출한 자주색으로 염색 가공한 직물이었다. 자주색으로 염색가공한 직물을 사려면 노동자의 1년임금을 주어야 할 정도로 값비싼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카르타고 산 직물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다. 카르타고인은 과학적 영농에 특히 노예들을 이용한 집단 농장(플랜테이션)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로마인들은 이들에게서 대규모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판매용 단일 곡물이나 단일 산물을 재배하는 기법을 배웠다. 국가형태는 1년 임기인 2명의 행정장관, 종신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백인회(百人會:실제인원은 104명), 시민 총회로서의 민회, 임기 무제한의 특별직, 장군 등을 가진 도시국가로서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제였다. 한편 용병제도를 채용한 점은 그리스·로마의 도시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도서관장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모든 비(非)그리스인을 야만적이라 매도한 것이 잘못되었다며, 카르타고와 로마인들이 모두 헌법을 가졌다고 기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르타고 헌법에 대한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내용의 일부만이 알려져 있다. 카르타고인들은 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악습이 있었다.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알(바알 암몬)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하는 어린이들의 유해를 매장하였다. 카르타고의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主神)으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의 모습과 닮은 데가 많았다. 카르타고는 수사학(修辭學) ·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3세기에는 기독교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근거로 카르타고는 교부 키프리안 주교가 목회한 지역이다. 그러나 439년에 반달인(人)에게 점령당하고, 698년에는 아라비아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원형극장과 공중욕탕 등 로마 식민지 시대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박찬호 박찬호(朴贊浩, 1973년 7월 28일 (1973년 음력 6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은퇴한 야구 선수로 은퇴 이전에는 한화 이글스의 투수로 뛰었다. 본관은 충주이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한국 선수 최초로 MLB에 진출했다. 1994년 LA 다저스에서 데뷔해 2005년에 100승을 달성했고 2010년에는 124승을 거둬 라이벌인 노모 히데오를 제치고 MLB 동양인 최다승 투수에 등극했다. 또한 그는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한·미·일 세 리그에서 모두 선발 승을 거뒀으며 MLB·마이너리그·일본·한국에서 활동하며 통산 156승의 성적을 거뒀다. 그의 최전성기는 많은 정상급 타자들이 약물을 복용해 타고투저 현상이 극심하던 1997년에서 2001년 사이로 당시 그는 LA 다저스의 1선발이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슬러브 및 파워 커브로 연평균 15승·200이닝·200탈삼진·3점대 방어율이라는 성적을 기록해 당대 내셔널리그 우완 최고 투수 중 한 명이라 평가받으며 MLB 올스타에 선정됐고 사이영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FA 시장에서 투수 부문 1위로 평가받은 그는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옵션 포함 7100만 달러)에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1998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표팀 에이스로서 야구 대표팀을 이끌었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병역 면제를 받았다. 2006년에는 제 1회 WBC에도 참가해 부동의 에이스로서 1승, 3세이브 무실점을 기록하며 4강 진출을 이끌었다. 2010년을 끝으로 MLB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한 그는 2011년에는 일본에서 잠시 활동했다. 그리고 2012년에는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고향 팀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미를 장식하고 그 해 11월 29일 현역에서 은퇴했다.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3루수로 활동했지만 공주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1994년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재학 이후 중퇴해 LA 다저스에 입단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MLB에 진출하였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17시즌동안 개인 통산 476경기에 등판하여 124승 98패, 2세이브,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후 그 해 2월에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서 춘계 훈련을 거친 후 [[3월 4일]] [[뉴욕 메츠]]와의 시범경기 때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3이닝 동안 안타 1개를 허용하고 삼진 2개를 잡았다. 그 날 등판할 때 [[대한민국]]에서의 습관대로 모자를 벗고 주심에게 인사를 했는데 이로 인하여 "마운드의 신사(A Gentleman on the mound)"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시범 경기가 끝날 무렵에 같이 입단한 [[데런 드라이포드]]와 함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직행이 확정되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역사상 17번째로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을 거치지 않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직행한 선수로 기록되게 된다. 시즌이 시작된 [[4월 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 9회에 구원으로 등판하여 데뷔전을 치렀다. 그 날 1이닝 동안 6타자를 상대해 안타 1개와 볼넷 4개로 2실점을 하였다. 6일 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5회부터 3이닝을 던졌는데 홈런 1개를 포함, 안타 4개와 볼넷 3개를 허용하여 3실점하였다. 이로 인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오른 지 17일 만인 [[1994년]] [[4월 21일]]에 [[더블 A]] 팀인 샌안토니오 미션스로 내려가게 된다. 미션스로 내려가고 난 후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있었던 한 경기에서는 3이닝 동안 홈런 2개를 포함하여 8실점을 하고, 6월에 있었던 한 경기에서는 4이닝 동안 8실점하는 등 좌절을 겪어 전반기에 3패만을 기록하였으나 숙소에서 구장까지 10km되는 거리를 뛰면서 이를 극복하였고, 버트 후튼의 지도를 받아, 후반기에 5승 4패를 기록하였다. 그 해 미션스 팀에서 5승 5패(평균 자책 3.55)를 기록하였고, [[1994년]] 시즌이 끝날 무렵 서류상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복귀했으나 당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파업으로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1995년]] 4월 중순에 있었던 춘계 훈련이 시작되고 4일 후에 선발로 등판한 첫 경기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 타자 7명을 삼진처리하고 4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하였으나 5일 후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에서 4이닝 동안 12개의 안타를 허용하였다. 그 경기가 있고 3일 후에 한 단계 위인 [[트리플 A]] 팀 앨버커키 듀크스로 승격되었다. 해발 1,500미터가 되는 지대인 앨버커키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속구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연습한 끝에 그 해 7월에 3승 무패에, 1.83의 방어율로 컨디션이 절정에 올랐고, 강타자들이 많았던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그 해 22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6승 6패를 기록하였다. 당시에 101개의 삼진을 잡았는데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서 네 번째로 많은 삼진이었으며, 9이닝 당으로 따지면 평균 8.26개 삼진률로 당시 트리플 A 최고 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러다가 [[9월 1일]], 25명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엔트리 정원을 40명으로 늘려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의 유망주들에게 메이저 리그를 접할 기회를 부여함에 따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복귀하였다. 복귀 후 첫 경기에서 [[시카고 컵스]] 팀을 상대로 8회 말에 등판, 한 이닝 동안 안타 2개에 [[볼넷]] 2개, 그리고 1실점을 기록하였으며, [[10월 2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첫 선발 등판을 하여 3이닝 동안 투구했다. 시즌이 끝나고 애리조나의 가을 리그에 참가, 3승 1패에 방어율 2.74를 기록하였다. [[1996년]] 2월에 있었던 춘계 훈련에서 페드로 아스타시오와 조이 아이센과 제 5선발 경쟁을 벌였다. 시범경기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 안타 7개를 허용하였고, [[뉴욕 메츠]]전에서 4와 3분의 1이닝 동안 17안타를 기록하였으며, 춘계 훈련 막판에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4이닝 동안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훈련기간 동안 6경기를 치르면서 1.62의 방어율로 다저스 전체 투수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춘계 훈련이 끝나고 당시 다저스의 단장이던 [[프레드 클레어]]에 의해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겠다고 통보를 받았으나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캘리포니아 애인절스]]와의 프리웨이 시리즈 3연전중 2차전에서 중간에 등판, 2이닝을 가볍게 처리하며 메이저 리그 잔류가 확정되었다. [[1996년]] [[4월 7일]]에 다저스는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당시 선발 [[투수]]는 [[라몬 마르티네스]]였는데, 2회 초 마르티네스가 타격을 하고 1루로 달려나가던 중 햄스트링 부상으로 실려나가게 되었고, 이에 [[토미 라소다]] 감독에 의해 갑작스럽게 2회 말부터 구원 등판을 하게 되었다. 당시 강타자였던 [[새미 소사]]를 삼진 처리하는 등 2회를 잘 끝마쳤다. 3회말에 만루의 위기가 있었으나 소사를 다시 삼진 처리하고 큰 위기를 넘겼으며, 4회때도 안타와 볼넷을 내주기는 했지만 세 명의 타자를 삼진 처리하였고, 5회말에 말끔한 삼자 범퇴로 처리를 하였다. 6회초에 대타로 교체되어 구원 투수로서의 임무를 마쳤다. 그 날 4이닝 동안 안타 3개와 볼넷 4개를 허용했지만, 삼진을 7개를 잡아내었으며, 팀이 3:1로 승리하여 [[대한민국]] 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서의 첫 승리를 안게 되었다. [[4월 12일]]에는 [[마이애미 말린스|플로리다 말린스]]와의 홈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5회 동안 안타 1개와 볼넷 3개만을 내주며 6개의 삼진을 잡아 2연승 및 최초의 선발승을 차지하였다. 이 후에 주로 구원 등판과 선발을 오가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마운드에 적응해 나갔으며, 그 해 총 48경기(선발 10경기)에 출전하여 5승 5패에 방어율 3.64를 기록하였다. [[1997년]] 춘계 훈련에서 라몬 마르티네즈, 이스마엘 발데스, [[노모 히데오]], 페드로 아스타시오가 5인 선발 로테이션에 한 자리씩 들어갔으며, 박찬호는 남은 한 자리를 놓고 톰 캔디오디, 대런 드라이포트, 마크 거드리와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진입했다. 첫 번째 등판한 경기에서 패전 투수가 되었으나 [[4월 30일]]에 시즌 첫 승을 올렸으며, [[6월 12일]]에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시즌 5승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통산 10승을 차지했다. 이후 한 달만인 [[7월 11일]]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6승을 올린 이래 7월과 8월에만 8승 1패 2무를 기록하였다. [[8월 11일]]에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첫 완투승을 차지했으며, [[9월 24일]]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두 번째 완투승을 차지하여, 1997년 시즌에 두 차례에 걸친 완투승을 기록하였다. 그해 14승 8패(방어율 3.38)를 기록하여 [[노모 히데오]](14승 12패, 방어율 4.25)를 제치고 다저스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투수로 기록되었다. [[1998년]] [[4월 8일]]에 다저스 구장에서 열린 홈 개막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시즌 첫승을 이룬 것을 시작으로 [[7월 31일]]에 시즌 10승을 차지했다. 특히 7월 한달동안 6경기에 선발등판하여, 42와 3분의 2이닝 동안 던져 4승 무패, 방어율 1.05에 삼진 34개를 기록하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에이스 투수인 [[케빈 브라운]]을 제치고 메이저 리그를 연중 취재하는 기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이달의 투수(Pitcher of the Month)로 선정되었다. [[9월 23일]]에 전년도에 이어서 14승을 차지했으며, 정규 시즌 마지막 등판일인 [[9월 28일]]에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시즌 15승을 차지함으로써 전년도의 승수 경신과 동시에 2년 연속 팀내 최다승 투수로 등극했다. 시즌이 끝나고 12월에 방콕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병역 문제를 해결하였다. [[6월 6일]]에 박찬호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였다. 3회까지는 탈삼진 4개를 기록하며 내야안타 하나만을 허용할 정도로 구위가 뛰어났으나 4회초에 모 본에게 우전안타를 허용하였고 개럿 앤더슨에게 좌중간안타를 허용,1사 1,2루가 되었다. 이어서 [[트로이 글로스]]에게 중전안타를 허용한 뒤 2사 만루 상황에서 매트 월백에게 우중간으로 향하는 만루홈런을 허용하였다. 0 대 4로 뒤지던 5회말에 타석에 선 박찬호는 상대 투수인 [[팀 벨처]]의 투구에 1루 선상쪽으로 굴러가는 보내기번트를 성공시켰다. 타구를 잡은 벨처는 1루로 뛰던 박찬호의 가슴에 직접 공을 강하게 대며 태그 아웃시켰다. 그런 후에도 벨처가 뒤에서 껴안고 놓아주지를 않자 박찬호는 왜 그러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벨처가 다시 박찬호에게 욕설과 함께 '꺼지라'고 말했고 이에 격분한 박찬호는 팔꿈치로 벨처의 턱을 밀쳐냈다.화가 난 벨처가 달려들자 뒤로 물러서던 박찬호는 이단 옆차기로 상대를 가격했다. 이후 둘은 함께 넘어지며 뒤엉겨붙었고 양팀 동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며 두 선수간 격투는 순식간에 집단 난투극으로 번져갔다. 난투극은 5분 동안 계속됐다. 10여분간 경기가 중단된 후 덕아웃에 앉아있던 박찬호는 4심 합의에 의해 이 싸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메이저 리그 진출 이래 첫 퇴장을 명령받았고 라커룸으로 쫓겨났다. 이 날 5이닝 동안 홈런 1개를 포함해 5안타 4삼진 4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동료들의 도움으로 패전만은 면했다. 다저스는 4대0으로 뒤진 6회 [[데본 화이트]]가 만루홈런을, [[게리 셰필드]]가 2점 홈런을 날려 7대 4로 역전승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박찬호는 7경기 출장 정지에 벌금 3000달러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 난투극은 훗날 메이저 리그 10대 난투극에서 6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6월 18일]]에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시즌 4번째 패배를 한 이래 4연패했고, 7월 중반부터 8월 중반까지 승수를 기록하지 못하는 등 첫 두 자리수 패배를 기록하였으나, [[8월 19일]]에 삭발을 단행한 이 후 [[8월 23일]]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시즌 7승을 거둔 이래 [[9월 29일]]까지 8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기록하였다. [[10월 3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에서 패전을 기록함으로써 시즌 13승 11패를 기록하였다. [[2000년]] [[1월 10일]]에 [[미국]] 스포츠 에이전트계의 거물인 [[스콧 보라스]]와 계약을 했다. 이전까지는 [[공주고등학교]] 시절 굿윌 야구대회에 출전했을 당시에 도움을 받았던 스티브 김이 에이전트를 맡아 왔는데, 이 계약으로 보라스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보라스 코퍼레이션]]은 박찬호의 연봉 협상과 일반 매니지먼트를 맡고 스티브 김은 광고 계약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4월 5일]]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지금의 [[워싱턴 내셔널스]])를 상대로 한 원정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여 처음으로 시즌 첫 등판에서 승리(시즌 1승)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몬트리올의 선발 투수는 일본인 투수인 [[이라부 히데키]]였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 사상 첫 한일 선발대결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는데, 박찬호가 6이닝 동안 6안타 4실점(자책점 3점)에 삼진 3개, 볼넷 5개를 기록, 승리했으며, 이라부는 2이닝 동안 홈런 2개를 포함한 8안타에 6실점을 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 후 [[5월 30일]]에는 [[뉴욕 메츠]]를 상대로 한 홈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여 7이닝 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시즌 5승을 거두었다. [[8월 25일]]에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한 홈 경기에서 선발등판하였다. 1회에 선두타자를 플라이 볼로 잡고 2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처리하였으며, 2회에도 무실점으로 잘 막아낸 다음 3회에 1사 후 타석에 나와 메이저 리그 진출한 이래 처음으로 홈런(솔로 홈런)을 쳤다. 이 홈런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후 256타수만에 쳐낸 홈런이며, 이 경기의 선제 결승 홈런이기도 하였다. 또한 1사 1,3루 상황인 4회에서 두 번째로 타석에 들어서서 적시타를 날리기도 하였다. 이 날 박찬호는 7이닝 동안 5안타와 볼넷 하나만 허용하고 무실점 투구를 하여 시즌 13승과 메이저 리그 통산 60승을 거두었으며, 다저스는 7대 0으로 승리했다. 이 후 [[9월 4일]]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자신의 시즌 최다승인 15승과 타이를 이루었으며, [[9월 20일]]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시즌 16승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최다승 기록을 경신함과 동시에 [[1995년]]에 [[노모 히데오]]가 세운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9월 25일]]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시즌 17승을 거두어 노모가 세운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였다. [[9월 30일]]에 박찬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상대로 한 원정 경기에서 선발등판을 하였다. 이 경기는 시즌 마지막 경기이기도 하였다. 타자들의 도움으로 1점을 안고 마운드에 오른 박찬호는 3회까지 이닝마다 2개씩의 삼진을 처리하였다. 4회 때 [[필 네빈]]이 첫 안타를 쳐냈고, 5회 때 [[그레그 라로카]]의 내야 안타를 쳐냈긴 했으나 이외에는 안타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7회 때 네빈에게 삼진처리함으로써 파드리스의 선발 타자들을 상대로 전원 탈삼진을 기록하였다. 이 날 삼진 13개를 기록하여 시즌 통산 217개 삼진을 달성하여 [[케빈 브라운]]을 제치고 이 부분 내셔널리그 2위에 올라섰다. 또한 1대 0으로 앞선 8회에 풀카운트인 상태에서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박찬호는 파드리스 선발 투수 [[우디 윌리엄스]]가 스트라이크를 잡기위해 던진 바깥쪽 직구를 밀어치기 타법으로 솔로 홈런을 쳐내어 시즌 2번째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경기에서 박찬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첫 완봉승(삼진 13개 처리, 안타 2개 허용)을 거두었으며, 시즌 18승 10패에 방어율 3.27을 기록하여 투수로서 최고의 시즌을 장식하였다. [[2001년]] [[4월 3일]]에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7이닝 동안 5안타에 무실점 및 삼진 7개를 기록하였으며 팀이 1대 0으로 승리하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는 시즌 개막전 경기로, 원래는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케빈 브라운]]이 등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어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등판하게 되었으며, 승리를 기록함으로써 의미 있는 경기가 되었다. 이 후 [[5월 5일]]에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 호투하다가 허리 부상을 당한다. [[6월 21일]]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선발등판하였다. 이 경기에서 당시 다이아몬드백스 소속이었던 [[김병현]]이 7회말에 구원등판하여 사상 첫 메이저 리그 한국인 투수의 맞대결을 벌였으나 둘 다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7월 5일]]에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어 [[7월 11일]]에 시에틀 세이프코 필드에서 벌어진 제 72회 메이저 리그 올스타게임에서 [[랜디 존슨]]에 이어 3회 내셔널리그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하였다. 이 경기에서 은퇴를 앞둔 [[칼 립켄 주니어]]를 첫 타자로 맞아 좌월 솔로홈런을 허용했다. 이 후 [[이반 로드리게스]]와 [[스즈키 이치로]]를 2루쪽 내야 땅볼로 가볍게 처리하고,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삼진처리한 후 이닝을 마쳤으며, 4회초에 [[존 버켓]]과 교체되었다. 이 경기에서 1이닝 동안 1안타(홈런) 1실점에 1개의 삼진을 기록하였다. [[7월 19일]]에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9회 동안 2안타만 기록, 개인통산 두 번째에 시즌 첫 완봉승을 차지했으며 [[8월 25일]]에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 9이닝 동안 5안타 2볼넷 7삼진 1실점으로 통산 8번째 완투승을 거뒀다. 또한 [[10월 1일]]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 8이닝 동안 6안타 1실점을 기록하여 시즌15승을 차지하였다. 이 경기에서 8이닝을 추가함으로써 시즌 230이닝으로 데뷔 이래 최다 투구 이닝을 기록했다. [[10월 6일]]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 선발등판하였다. 이 경기에서 4이닝 동안 8실점을 하였는데 이 중 2점은 [[배리 본즈]]에게 연달아 허용한 솔로홈런이었다. 이 날 본즈는 시즌 71호 및 72호 홈런을 기록함으로써 [[1997년]]에 [[마크 맥과이어]]가 기록한 시즌 최다홈런(70개)을 갱신하였다. 자이언츠가 본즈의 홈런등으로 10점을 기록하였으나 다저스 타선이 1회초부터 대량득점을 함으로써 11대 10으로 다저스가 승리하여 박찬호는 패전을 면했다. 이 날 경기로 박찬호는 시즌 최다 선발출장(35경기)에 시즌 최다 탈삼진(218개)등을 기록하였으며, 15승 11패에 방어율 3.50의 시즌 성적과 함께 자유 계약 선수 신분을 얻게 되었다. 다저스 재적 중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보낸 풀타임 6년동안 5년연속 13승이상을 거둔 투수이며, 당시 29세라는 선수 생활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연령이라는 점이 작용하여 2002년에는 5년 계약에 6,500만 달러의 조건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겼다. 텍사스에서 박찬호의 시간은 최악이었다. 이적 첫 해인 2002년 시즌에 시범 경기 도중 얻은 햄스트링 부상과, 타자들에게 유리한 야구장으로 알려진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구장인 [[볼파크 인 알링턴]](후에 아메리퀘스트 필드 인 알링턴으로 개칭)에서 우려했던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FA전에 다저스 홈구장을 이용하는 유리한 점이었다는 것, 허리 부상을 숨기고 있다는 점 등이 한꺼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플라이볼 투수로서의 숙명적인 실패로 25번의 선발에서 9승 8패 5.7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2003 시즌은 부상으로 7차례만을 등판하여 1승 3패 평균자책점 7.58을 기록했으며 2004년 시즌 역시 16차례의 선발 등판에 4승 7패 평균자책점 5.46의 평균이하의 성적을 냈다. 이 기간은 [[텍사스 레인저스]] 투수 중 역대 최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라는 부담감과 부상이 겹쳐 박찬호 개인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기간이었으며, 각종 매체에서 메이저 리거 중 실력에 비해 연봉을 과하게 받는 선수의 대표적인 예로 자주 선정되기도 했다. [[2005년]] [[6월 5일]]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100승을 도전한다. 초반에 난타를 당하면서 패전위기에 몰렸으나. 텍사스 강타선의 도움(케빈맨치의 3점홈런등)으로 미국 진출 11년 만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통산 100승을 달성한다. [[2005년]] 7월, 당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였던 필 네빈 선수와 트레이드되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하였다. 그 해 12승 8패(텍사스 레인저스 때 기록까지 포함. 평균자책 5.74)를 기록하였다. [[2006년]]에는 [[6월 3일]]에는 피츠버그전에서 6이닝 동안 삼진 8개를 잡아내며, 5안타 무실점을 기록하였고, 타석에서도 3타수 3안타 2타점으로 타율을 4할로 끌어올렸다. 이 경기는 7회초 공격 시작 전 우천으로 중단된 뒤 강우콜드게임이 선언되어 규정상 완봉승 이 주어졌다. 정규 시즌 7승 7패(방어율 4.81)를 기록하였으며, [[10월 3일]]에는 생애 최초로 포스트 시즌 경기([[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구원 등판을 하였다. 2006 시즌후 2번째로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했으나 2002년 이후의 끊임없는 부상경력과 꾸준한 부진으로 각 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새로운 팀과의 계약이 지지부진하자 계약 대리인인 [[스콧 보라스]]와 결별하고 새로운 계약 대리인으로서 [[제프 보리스]]와 계약을 맺었다. 스콧 보라스를 해고하게 된 경위에는 보라스가 자신의 고객 중 다른 고액의 자유계약선수의 계약을 우선시해서 박찬호의 계약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과정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와 일본인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계약 협상과정에서 박찬호를 마무리 투수로 추천하면서 계약을 추진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보라스의 행보는 마쓰자카의 계약에 덤으로 박찬호를 얹어서 계약을 진행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박찬호를 원하는 팀이 없는 현실에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마무리 활약이라도 부각시켜 빅딜의 부가물로라도 메이저 리그 야구에 박찬호를 복귀시키려던 노력이 전략적이었고 박찬호의 이해가 부족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벤트성 단기전인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활약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난색을 표시 마쓰자카와의 동반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리스는 대리인 계약 당시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수준급 [[투수]]이며 2-3 선발을 해줄 수 있는 [[투수]]라는 견해를 밝히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재적시와 마이너 리그 강등시 계약의 내용이 달라지는 스플릿 계약은 생각이 없으며, 다년 계약이 어렵다면 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계약을 성사시킬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2007년]] [[2월 9일]] [[뉴욕 메츠]]와 1년 300만 달러(기본급 60만 달러, 인센티브 240만 달러)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계약이 아닌 스플릿 계약에 합의했고, 그나마 주어진 기회 마저도 난타를 당하면서 다시 방출당한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 계약을 체결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입성한 박찬호는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 리그]]에서 난타를 당하면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올라와 보지도 못하고 재기에 실패하게 된다. [[파일:DSC03270 Chan Ho Park.jpg|섬네일|250px|2008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박찬호.]] [[2007년]] [[11월 6일]]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하였으며, 그 이후 한동안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 리그]]로 강등되기도 했던 박찬호는 2008년 5월 17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 원정 경기에 선발로 나설것이라는 구단 측의 발표에 따라 마침내 5선발 자리를 따냈다. 이로써 박찬호는 지난해 [[4월 30일]] [[뉴욕 메츠]] 유니폼을 입고 [[마이애미 말린스|플로리다 말린스]]전에 등판한 이래 1년여 만에 다시 선발 등판하게 되었다. 또 2001년 10월 5일 샌프란시스코와의 원정경기에 선발로 나선 이후 처음으로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게 되었다. 박찬호는 중간계투 및 임시선발로 2008년 시즌을 치렀고, 54경기에 출전해 95.1이닝에 4승 4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40을 기록했다.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내셔널디비전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3-0의 전적으로 누르고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하였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1-4로 패하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2008년]] [[12월 15일]]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입단 계약을 하였으며, [[2009년]] [[3월 31일]]에 팀의 5번째 선발 투수로 배치되었다. [[2009년]] [[5월 13일]]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6이닝 7안타 3삼진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박찬호의 승리는 다저스 시절인 [[2008년]] [[7월 2일]]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이후 부진한 투구로, [[제임스 햅]]과 선발 자리를 교체되었으며 불펜으로 내려갔다. 선발 등판에서 문제점은 햄스트링(허벅지)의 부상으로 인해 구속이 더이상 90마일 대로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불펜으로 이동한 후 구속이 정상적(94~96 마일)으로 회복되었으며, 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구원투수로 활약을 한 끝에 3승 3패13홀드(방어율 4.43)를 기록하였다. 정규 시즌이 끝나갈 무렵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부상에서 회복 후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출전하였으며, 소속팀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함으로써 생애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출전하여 무실점 투구를 선보였다. 그러나 소속 팀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뉴욕 양키스에게 패하면서 월드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월드 시리즈 이후 필라델피아 계약 조건에서 이견을 보여 결별하였다. [[2010년]] [[2월 22일]], 박찬호는 기자회견을 열어 총 150만 달러에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고 발표하였다. 연봉은 150만 달러이며, 그중 연봉 30만 달러는 성적에 따라 보너스로 지급된다. 시즌 동안 박찬호는 중간계투로 활약했으나, 그 활약은 기대이하였고, 끝내 [[2010년]] [[7월 31일]] 소속팀 [[뉴욕 양키스]]에서 지명 할당 조치를 당하였다. [[2010년]] [[8월 4일]], [[내셔널 리그 (야구)|내셔널 리그]] 중부 지구 팀인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박찬호를 영입하였다. [[2010년]] [[9월 13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진출 이후로 개인통산 123승 97패를 기록해, [[노모 히데오]]가 2005년 수립한 아시아 투수 역대 최다승과 타이를 이뤘다. 그로부터 몇 주 후인 [[2010년]] [[10월 2일]], [[마이애미 말린스|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 구원 등판, 3이닝 6삼진의 호투와 함께 승리 투수가 되었고 이는 개인 통산 124승 기록이다. 이로써 [[노모 히데오]]가 [[2005년]] 수립한 아시아 투수 역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는 위업을 세웠다. [[2010년]] [[12월 20일]] [[오릭스 버펄로스]]에 입단하는데 합의하였다. [[2011년]] [[4월 20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를 상대로 시즌 두 번째 선발 등판하여 7이닝 동안 3피안타 4볼넷 6K 무실점을 기록하며 [[일본]] 진출 후 첫 선발승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2011년]] [[10월 24일]] 햄스트링 부상으로 [[오릭스 버펄로스]]와 합의하여 퇴단하였다. [[2007년]] [[해외진출선수 특별지명회의]] 때 [[한화 이글스]]는 단 한 명의 해외파도 뽑지 못했다. 그 때 박찬호는 회의의 요건에 맞지 않아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2011년]] [[12월 13일]] 박찬호 특별법 심의를 위한 [[KBO (야구)|KBO]]의 이사회가 소집되었고, 이 법이 통과되어 [[2012년]] 고향 팀 [[한화 이글스]]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 연봉이 얼마가 될 지 주목을 받았으나 구단 측에 연봉 백지위임 의사를 밝혀 프로야구 신인 기준 최저 연봉인 2,400만원에 계약을 체결하였고, 6억원을 구단과 합의하여 아마추어 야구 발전 기금으로 기부하겠다고 언급했다. 연봉 2,400만원도 추후에 기부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2012년]] [[4월 12일]] [[청주야구장|청주]]에서 열린 [[두산베어스|두산]]전을 통해 [[KBO 리그]] 무대에 선발로 첫 등판하였다. 3회 초 두산의 공격 때 단 3구를 던져 3자 범퇴로 처리하는 기록을 세우고, 6⅓이닝 5탈삼진 2실점으로 팀의 8대 2 첫 승리를 이끌며 선발승으로 화려하게 국내 무대에 데뷔하였다. [[2012년]] [[11월 30일]]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사실상 선수 활동을 마무리했다.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통해 [[JTBC]]에서 해설가로 데뷔하여 [[송재우]], [[임경진]]과 함께 마이크를 잡았다. 2014년에는 [[인천 아시안게임]]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해설위원을 맡았다. [[1998년]] 시즌이 끝난 12월에 방콕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였다. [[12월 7일]]에 [[중화민국|대만]]을 상대로 한 1차전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5이닝 동안 삼진 5개를 기록하였으며, [[12월 11일]]에 다시 대만을 상대로 한 3차전에서는 8회말에 구원 등판, 2이닝 동안 1개의 안타만을 허용함으로써 선발등판한 [[임창용]]의 승리를 지켜 냈다. [[12월 16일]]에는 [[일본]]을 상대로 한 금메달 결승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7이닝 동안 4안타(홈런 1개 포함)에 1실점 및 2볼넷만을 허용하고 삼진 4개를 잡으며 13대 1의 7회 콜드승을 이끌어내어 금메달을 획득, 병역특례의 대상이 되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대한민국 대표 선수]]로 4경기에 출전해 10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평균 자책]] 0.00으로 3[[세이브 (야구)|세이브]]를 올리는 활약을 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기여를 했다. [[2005년]] [[11월 29일]]에 [[재일 한국인|재일동포]] [[박리혜]]와 [[하와이주]]에서 결혼했으며, [[2006년]]과 [[2008년]]에 두 딸 박애린,박세린을 낳았다. [[2014년]]에는 셋째 딸 박혜린을 낳았다. [[파일:Chan-Ho Park Signature.jpg|섬네일|박찬호의 사인볼]] 박찬호는 다저스에 입단하기 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 병역 문제로 입단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저스에 입단할 때 유학생 신분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에 건너가 시즌 중에는 야구를 하고, 시즌이 끝나면 공부를 계속하여 귀국할 때까지 병역 의무를 연기하는 방법을 계획하였다. 이 후 [[1998년 아시안 게임|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병역 특례의 대상이 되었으며, [[1999년]] 시즌이 끝나고 귀국하여 [[1999년]] [[10월 11일]]에 육군 32사단에 입소하여 4주간 기본군사훈련 후 [[11월 6일]]에 퇴소 병역 문제를 해결하였다. 박찬호는 공주중동초등학교 때부터 등번호가 계속 16번이었다. 이에 [[1994년]]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도 16번을 달고 싶어했으나 당시 다저스에는 투수 코치였던 [[론 페라노스키]]가 오랫동안 16번을 달고 있었다. 신참내기가 노장 코치의 번호를 빼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신 16번을 뒤집은 61번을 달게 되었다. 이 후 다저스에서 16번은 이듬해 입단한 [[노모 히데오]]가 달게 되었다. 다저스에서 61번을 유지했던 박찬호는 레인저스, 파드레스, 메츠, 필리스, 양키스, 파이어리츠에서도 계속 유지하였고, [[한화 이글스]]에서도 61번을 달게 되어 61번은 박찬호의 상징이 되었다. 한만두란 '한'이닝 '만'루홈런 '두'개를 줄인 말이다. 1999년 4월, 당시 잘 나가는 선발투수였던 박찬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선을 상대했다. 그 당시 세인트루이스에는 [[마크 맥과이어]], J.D.드루 같은 강타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날 박찬호는 2-0으로 앞선 3회 많은 실점을 내줬다. 박찬호는 무사 만루에서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그랜드슬램을 얻어 맞아 역전을 허용했다. 이어서 박찬호와 야수들의 수비실수가 이어졌고 일라이 [[마레로]]에게 투런홈런, [[에드가 렌테리아]]에게 적시타를 연속으로 내줘 무려 7점을 실점했다. 그런데도 투수는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2사 만루에서 다시 타티스를 만났다. 이닝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만루기회를 얻었다. 박찬호는 떨어지는 변화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타티스의 방망이는 돌아가서 이번에도 만루홈런을 터뜨린다. 한만두, 그것도 한 이닝 만루홈런 두 개를 넘어 '한 이닝 한 타자 만루홈런 두 개' 라는 불멸의 기록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박찬호는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월 11일]] 까지 방영된 [[한국방송공사]]의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선데이]] [[1박 2일]]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공주시]]에서 진행된 '1박 2일-명사와 함께하는 고향여행편에서 3주동안 그곳이 고향인 그를 출연시켰는데, 단순한 게스트로서가 아니라 '1박 2일'의 기존의 포맷을 유지한채 그가 참여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촬영하였는데, 그가 프로그램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시청자들에게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며 박수를 보내게 하였고, 간혹 의외의 모습으로 멤버들 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웃음보를 자극하였다. 이 방송을 통해 박찬호의 유머감각을 새로 알게 되었다. 또한 [[2009년]] [[12월 18일]]에 [[경기도]] 가평에서 진행된 1박 2일 촬영장을 깜짝 방문하기도 하였다. 2010 시즌 [[뉴욕 양키스]] 시절 박찬호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추신수]]와 한 차례 맞대결이있었다. [[추신수]]를 삼진처리한 후 박찬호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경기 후 박찬호는 "[[추신수]]를 삼진 잡은게 너무 흥분되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입단 전 연봉 문제가 있었으나 [[12월 20일]] 본인이 2,400만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논란을 잠재웠다. [[분류:1973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 [[분류:KBO 리그 투수]] [[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 [[분류: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선수]] [[분류:텍사스 레인저스 선수]] [[분류:샌디에고 파드리스 선수]] [[분류:뉴욕 메츠 선수]] [[분류: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 [[분류:뉴욕 양키스 선수]] [[분류:피츠버그 파이리츠 선수]] [[분류: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분류:한화 이글스 선수]] [[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분류:대한민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분류:대한민국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 [[분류:내셔널 리그 올스타]] [[분류: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 [[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유니버시아드 은메달리스트]] [[분류:유니버시아드 야구 메달리스트]] [[분류:199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메달리스트]] [[분류:199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야구 참가 선수]] [[분류: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 [[분류:공주시 출신]] [[분류:충주 박씨]] [[분류:공주중동초등학교 동문]] [[분류:공주중학교 동문]] [[분류:공주고등학교 동문]] [[분류:한양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관객 관객(觀客)은 연극, 영화, 또는 스포츠 경기 등을 관람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배우 및 무대, 희곡과 함께 연극의 기본요소이다. 관객 수는 상업적 성공의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곤 한다. 대사 (연극) 대사(臺詞)는 연극과 창작물의 극중에서 등장인물이 하는 말이다. 혼자하는 대사를 독백 또는 모놀로그라고도 한다. ♥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 )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이다. 시학은 그가 '시'라고 여기는 장르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를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s)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왜 서사시보다 우월한지를 설명한다. 그는 아리스토파네스류의 희극보다는 비극에 더 큰 중심을 두고 시를 설명하였다. 가장 유명한 시학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두기 강의록이라고 하는데, 기초 부분은 아카데미아 시기로 소급될 것이다. 비극과 희극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듯하지만 희극을 다루었을 제2부는 현존하는 책에서는 볼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포이에시스(詩作)는 그 종류를 통틀어 모두 미메시스(모방)라고 하였다. 이 점은 플라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실에서 멀어져가는 외관물(外觀物)이라 하여 댄스와 음악과 같은 화사한 것이나 서사시나 비극 등 시작품은 덕의 형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이상국가 건설의 교육 계획에서 배제하였다. 아울러 사회나 인생에 쓸모가 있다고 하는 변호가 있으면 그것을 용인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플라톤의 말을 받아들여 특히 비극의 본질을 구명하면서 시작(詩作)이 인생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해답하려 하였다. 이 목적에서 그는 리듬이나 멜로디 등 시의 형식면에는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실질면인 모방과 효과를 주로 논하였으며, 특히 작품으로서의 시보다도 시의 제작 내지는 기술의 구명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 있어서 본성적인 모방을 시작의 영역에서 발전적·단계적으로 추구하고, 드라마적인 모방을 완성한 최고 단계로 포착하여, 성실하고 고귀한 즉 선량한 행위의 모방인 비극이야말로 진정 그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비극은 상당한 길이로써 완결된 중대 행위의 모방이다. 그 가운데에는 리듬과 음악적인 언어가 있으며, 등장인물은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의 카타르시스(淨化)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그는 비극은 정념의 정화를 이룩하는 점에서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 정화가 실은 이미 무대 위에서 모방되는 행위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복잡한 행위의 구성, 사건의 연쇄, 미토스(줄거리)의 구성 속에서 특히 페리페테이아(急轉)와 아나그노리시스(認知) 등이 정화와 관계하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 가령 문벌의 사나이인 오이디푸스 왕 등의 육친 살해, 기타 욕되고 무서운 행위는 무지에서 오는 실책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 때문에 부당한 불행 속으로 빠져 가련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지를 인지하는 행위 가운데 이미 오욕의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약점이라는 점에서 비극적 영웅에 대하여 관람하는 사람편에 공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비극의 구성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아름다움이어서 그 속에서의 연민과 공포의 감정도 쾌감으로서 이미 정화되어 있다. 요컨대 비극 속의 행위를 보고 얻을 수 있는 정화는 지적 정화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사상이나 언어의 표현이나 무대화(舞臺化)도, 인물의 성격적 일관성이나 행위나 줄거리의 필연성 등도 모두 비극적 행위에 연결되어 있다. 시작이 역사보다 철학적이며, 서사시보다 비극이 발전적으로 뛰어났다는 것, 비극의 전형을 소포클레스에서 찾은 것은 그의 독자적 행위관, 특히 형이상학적인 에네르게이아(現實態)관에 기인하고 있다. 호라티우스의 《시학(詩學)》과 더불어 때로는 혼합되면서 르네상스 이후 근세 유럽의 문예비평이나 극작에 끼친 영향은 큰데, 그것은 이 책에 들어 있는 시의 실례나 시작의 일반 규칙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철저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윌킨스 자크 도미니크 윌킨스(Jacques Dominique Wilkins. 1960년 1월 12일 ~ )는 현재 은퇴한 미국의 프로 농구 선수이다. NBA 올스타에 아홉 차례 선발되었고, NBA 역사상 최고 덩크슛 선수들 중의 하나로 "인간 하이라이트 영화"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2006년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되었다. 프랑스에 주둔하던 공군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이 노스캐롤라이나주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워싱턴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윌킨스는 연속적인 클래스 3-A 주립 챔피언십(1978-79)에서 팀의 연속적 MVP였으며 그 이후 맥도날드 경기, 캐피털 클래식, 켄터키 더비 축제 클래식과 대퍼 댄 클래식 올스타 경기에 출전하였다. 1979년 조지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선수로서 평판을 구축했다. 대학 농구선수 시절 한 경기에 21.6 포인트를 득점하고 1981년 올해의 SEC 남자 농구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대학을 중퇴하고 1982년 NBA 신인 선수로 유타 재즈에 입단하였다. 윌킨스가 유타 재즈에서 활약하는 데 못 마땅하며 팀 안에서 현금 유출입이 일어나자 몇 달후에 애틀랜타 호크스로 이적되었다. 이적은 존 드루, 프리먼 윌리엄스와 현금을 포함하였다. 윌킨스가 유타 재즈에서 뛰는 데 못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적은 NBA 역사상 가장 한쪽으로 기울어진 분배들 사이로 숙고되었다. 마지막 3개의 NBA 시즌에 앞서 윌킨스는 절대 한 경기에 20 포인트 미만을 득점하지 않았고, 30.3 포인트와 함께 1985-86 시즌에서 득점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80년대에 애틀랜타 호크스가 10년간의 기간 동안에 4개의 연속적 50승 시즌을 기록하면서 윌킨스는 호크스의 돌출에서 수단이 되었다. 자신이 30대에 들어서고 호크스는 그들의 스타 선수로부터 더 많은 만능 공헌을 필요하면서, 윌킨스는 앞으로 걸어나와 1990-91 시즌에서 9.0 리바운드를 평균하였다. 인디애나폴리스 NBA 올스타 주말에서 그의 첫 슬램덩크 챔피언십에 올렸다. 그는 호크스에 6.9 리바운드와 135개의 스틸로 2위에 올라왔다. 자신의 2개 연속적 시즌들의 처음에서 1,891개의 득점과 함께 NBA를 이끌어 나갔다. 1984-85 시즌에서는 3점 슛 81개 중에 25개의 기록을 세웠고, 10개의 연속적 시즌들 중 처음으로 80%나 낳은 슛을 쏘기로 알려졌다. 윌킨스의 노력들에 불구하고 애틀랜타 호크스는 34승 48패로 끝나고 플레이오프들에 도달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1985-86 시즌에서 윌킨스는 NBA의 정예 동아리로 파열시키면서 한 경기에 30.3 포인트와 함께 리그 득점 타이틀을 우승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NBA 올스타가 되었고, 시즌 말에 올스타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NBA 슬램덩크 챔피언으로 남지 못하자, 그의 경쟁은 성공할 것 같지 않은 근거에서 왔다. 호크스는 시즌에 앞서 5-피트-7의 앤서니 "스퍼드" 웹을 자유 계약 선수로서 계약하였다. 윌킨스는 한 경기에 57 포인트를 득점하여 호크스의 리바운드, 프리스로우의 지도자로서 지위에 올라왔다. 호크스는 플레이오프의 첫 라운드 4개의 경기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꺾었으나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윌킨스는 9개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28.6 포인트를 평균하였다. 그는 1987년 4월 16일 시카고 불스와 경기에서 자신의 경력 10,000번째 포인트를 득점하여, 시즌 말기에 전체 NBA 세컨드 팀에 임명되었다. 닥 리버스, 케빈 윌리스, 트리 롤린스와 마이크 맥기는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전에서 피스톤즈에게 패하기 전에 플레이오프의 첫 라운드를 통하는 데 공헌하였다. 윌킨스는 공식적 이후 시즌 동안 26.8 포인트를 평균하였다. 1987-88 시즌에 윌킨스는 그의 경력의 최고 득점 평균을 매출하였고 NBA 득점 레이스에서 마이클 조던에 밀려 2위로 왔다. 그는 호크스를 위하여 30.7 포인트를 평균하였으나 조던은 35.0으로 그를 이겼다. 조던은 시카고에서 열린 올스타 주말 슬램덩크 챔피언십에서도 윌킨스를 꺾었다. 윌킨스는 올 NBA 세컨드 팀에 지위를 받고, 그 시즌에 애틀랜타 호크스 선수 처음으로 이주의 선수로 3번이나 임명되었다. 그의 3번째 올스타 경기에서 21분의 22 슛에 29 포인트를 득점하여 동부 선수단을 138-133의 승리로 이끌었다. 호크스는 50개 미만의 경기를 우승하고 동부 콘퍼런스 준결승전에 나갔으나, 셀틱스에게 다시 패하고 말았다. 5월 22일에 열린 7번째 경기에서 윌킨스와 래리 버드는 자신들의 존엄적 팀들을 스릴감 넘치는 종말로 사로잡기로 알려졌고, 셀틱스가 118-116으로 승리하였다. 호크스와 1989년 시즌 동안에 윌킨스의 득점 평균이 26.2로 떨어졌으나, 그는 똑바른 4번째 해의 올스타에 머물러 있었다. 농구 작가들은 시즌 말에 그를 올NBA 3번째 팀으로 선택하였다. 호크스는 1988-99 시즌에 레지 테우스와 모제스 말론을 영입시켰다. 윌킨스는 자신의 두 번째 슬램덩크 챔피언십에서 새크라멘토 킹스의 케니 스미스를 적은 차로 이기면서 1989-90 시즌의 덩크 돌출에 돌아왔다. 26.7 포인트를 평균하여 득점 레이스에 5위로 왔다. 1990-91 시즌에서 경력 최고 9.0 리바운드를 평균하여 자신의 NBA 시즌에 처음으로 호크스를 그 범주에서 이끌었다. 그는 연속 8년째 해를 위한 득점으로 팀을 이끌어 한 경기에 25.9 포인트로 NBA의 7번째 최고팀으로 왔다. 윌킨스는 그의 6번째 올스타 경기에 나와 12 포인트를 득점하여 동부가 서부를 116-114로 꺾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경력에 3번째로 올NBA 세컨드 팀에 선택되었다. 한해의 결석 후에 호크스는 플레이오프에 돌아왔고, 피스톤즈와 첫 라운드에서 비겼다. 5번째 경기에서 호크스는 피스톤즈를 밀어냈으나, 113-81로 패하였다. 윌킨스는 5개의 경기에서 20.8 포인트를 평균하였으나 필드에서 .372, 3점 슛 레인지에서 .133의 슛을 쏘았다. 42개의 경기 후에 윌킨스는 1월 28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경기에서 아킬레스건을 파열하면서 뜻밖의 휴식으로 가져왔다. 1월 30일에 수술을 받았고 부상당하기 7주 전에 윌킨스는 시카고 불스와 경기에서 223개의 프리스로우 기록을 세웠다. 또한 자신의 경력 20,000번째 포인트를 득점하여 당시 선수들 중 16번째로 그 단계에 도달한 단 하나가 되었다. 부상을 당한 날에 동부 콘퍼런스 올스타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28.1 득점 평균은 5년에 그의 최고였고, 12월 7일 뉴욕 닉스와 매치에서 두배의 오버타임 경기에 52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윌킨스는 몇몇의 스포츠 출판사들에 의하여 다음 시즌에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로 명예를 받았다. 시즌의 첫 달에는 한 경기에 27.7 포인트의 평균을 득점하였다. 그리고나서 12월 15일 오른손의 무명지가 부러지면서 패배를 당하여 다음 11개의 경기에서 벤치에 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시즌 말에 그의 득점 평균은 29.9로 올라가 마이클 조던에게 밀리었다. 2월 21일 시애틀 수퍼소닉스와 매치에서 자신의 31번째 포인트를 득점하여 밥 페티트의 20,880 포인트 득점 기록을 깼다. 후에 올NBA 세컨드 팀에 선택되었으나, 불스가 호크스를 플레이오프의 첫 라운드에서 3-0으로 쓸어버렸다.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11년 반을 활약한 후 윌킨스는 대니 매닝의 교환을 위하여 2월 24일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로 이적되었다. 이 일은 NBA 역사상 그들의 콘퍼런스에서 1위에 있는 팀이 올스타 브레이크 후에 그들의 선구적 득점자를 이적시키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적에 앞서 윌킨스는 24.4 포인트, 6.2 리바운드를 평균하여 팀을 36승 16패의 기록을 세웠다. 미드시즌에 그는 8번째로 올스타 경기에 나왔다. 호크스의 경영과 새 코치 레니 윌켄스는 매닝과 그의 능력들이 팀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제1시드의 호크스는 동부 콘퍼런스 경기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패하였다. 윌킨스는 23,292 포인트와 함께 항상 최고 득점자로서 호크스를 떠났다. 그의 시즌 마지막 25개의 경기에서 윌킨스는 29.1 포인트, 7.0 리바운드를 형균하였다. 1993-94 시즌에 자유 계약 선수가 되어 보스턴 셀틱스와 계약을 맺었다. 짧은 시간 후에 그는 1994년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드림팀 II가 우승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셀틱스 팀을 복구하는 데 자신의 역할에 불행을 느끼자 그리스 리그의 파나티나이코스 BC와 계약을 맺었다. 20.9 포인트, 7.0 리바운드의 평균으로 1996년 파나티나이코스가 우승하는 데 공헌하였다. 파리에서 열린 파이널 4 동안에 CSKA와 준결승전에서 35 포인트와 8 리바운드를, 바르셀로나와 결승전에서 16 포인트, 10 리바운드를 세웠다. 그로 인하여 MVP 상을 수상하였다. 1996-97 시즌 전에 NBA로 복귀하여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자유 계약 선수로서 계약을 맺었다. 윌킨스는 1996-97 시즌에서 스퍼스를 18.2 포인트로 이끌었다. 한 시즌 후에 다시 해외로 갔는 데 이탈리아 리그 1997-98 시즌의 팀시스템 볼로냐와 계약을 맺었다. NBA로 다시 복귀한 그는 1998-99 시즌에 올랜도 매직에서 동생 제럴드 윌킨스와 함께 활약하였다. 27개의 경기에서 한 경기에 5.0 포인트, 2.6 리바운드를 평균하였다. 윌킨스는 5개의 슬램덩크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2번이나 우승하였다. 1984년 덴버에서 열렸던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래리 낸스와 줄리어스 어빙에 밀려 3위에 왔다. 198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결승전에서 마이클 조던을 꺾었다. 1986년 댈러스에서는 그들의 리매치가 열렸는 데, 결승전에 도달하였지만 자신의 동료 스퍼드 웹에게 패하였다. 최고로 예상된 윌킨스-조던 리매치는 1988년 시카고 올스타 주말에서 열렸으며 조던이 147-145로 이겼다. 1990년 윌킨스는 그의 마지막 슬램덩크 경연대회에 나와 숀 켐프, 스카티 피펜, 케니 워커(1989년 챔피언) 등과 맞붙었다. 결승전에서 새크라멘토 킹스의 케니 스미스를 꺾었다. 지증왕 지증왕(智證王, 437?~514년, 500년~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왕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소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즉위 전 갈문왕에 책봉되어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 되고, 소지 마립간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즉위하였다. 그는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마립간의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금이다.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철로라고 한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이며 소지 마립간의 재종 아우이다. 부인은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이며, 소지 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어 64세에 왕위를 이었다.514년 죽은 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이때 이후로 신라의 시호법이 시작되었다. 지증왕은 사탁부(沙啄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다. 사탁부 출신으로, 국보 제264호로 지정된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 의하면 그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 불렀다. 그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갈문왕에 제수되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배경은 그의 장남 원종(元宗, 뒤에 법흥왕으로 즉위)이 소지 마립간의 사위인 점이 작용했다. 서자 산종만이 있었던 소지 마립간은 사위인 원종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촌들을 제치고, 6촌이자 사돈인 그를 왕위 계승자로 내정했던 것이다. 502년 순장을 금하고, 신궁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음력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503년에 국호를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에서 “신라”(新羅)로 통일하였다. 즉위 초부터 그는 제도와 체제 개편을 추진하였다.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 음력 9월에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509년에는 시사(市肆, 혹은 시전)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무역과 상인들의 거래를 단속, 통제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었다.512년 실직주(悉直州)의 군주이자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체구가 커서 배우자가 없었던 지증왕에게는 알맞은 배우자가 없었는데 신하를 보내 신라 국내를 수소문하던 중 연제부인(延帝夫人)을 발견하여 배우자로 삼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지증왕설화는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과 《삼국사기》 김유신조에 수록되어 있다. 경주 지역 전설과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성기는 커서 그 길이가 1자 5촌(약 45 cm) 정도가 되었다고 하며, 궁녀나 왕족, 귀족의 딸 중 적당한 여인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하들이 왕비가 될 여성을 찾으러 다니던 중 경주 남산의 연못에 큰 똥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그 큰 똥의 주인이 여성이라면 왕을 감당할 것이라 보고 수소문한 끝에 이찬 박등혼의 딸이라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등혼의 딸을 간택하여 왕비로 들이니 그가 왕비인 연제부인이라는 것이다. 힙합 음악 힙합()은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서, 주로 랩을 동반한 리듬감이 특징이다. 1980년대 초까지 힙합은 미국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1980년대 초 이후 십 년간 힙합은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하여 수많은 나라의 음악 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시대 초에는 ‘브레이크 댄스’라고 불리는 춤이 힙합의 첫 장으로써 독일, 일본, 호주와 남아프리카에 알려졌다. 그 시기에, 녹음된 힙합이 프랑스와 필리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푸에르토 리코, 비코 씨’는 최초의 라틴계 래퍼였으며, 그의 음반은 오늘날 ‘레게톤’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초석이 되었다. 힙합의 전성기, 힙합의 ‘골든 에라’, 즉 황금기는 보통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후반 투팍과 노토리어스 BIG의 사망시기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는 힙합이 다양성, 높은 질, 혁명, 영향력으로 각광받던 시대였다. 갱스터 랩은 폭력적인 젊은이들의 일상을 반영한 힙합 장르이다. 1980년대 중반 Schoolly D와 아이스 티라는 음악가들이 선도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N.W.A 등의 그룹이 갱스터랩을 했었다. 90년대에 이르러서는 닥터 드레 (Dr. Dre)라는 아티스트가 펑크의 멜로디와 갱스터 랩을 혼합하여 지펑크(G-Funk)라는 새로운 힙합 장르를 만들었다. 1990년대에는 갱스터 랩 아티스트들이 많았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힙합 가수 닥터 드레는 1992년 음반 《The Chronic》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이스트 코스트 힙합보다 더욱 상업적으로 효용적인 서부 해안 갱스터 랩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앨범은 지펑크 (G-Funk)라는 음악 스타일을 창조했고, 곧 서부 힙합을 장악했다. G-Funk는 곧 1993년 스눕 독이 발매한 〈Doggystyle〉에 의해 더욱 더 개발되고 인기를 얻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까지 힙합 요소들은 다른 인기 음악 장르와 접목되었다. 2000년대, 남부 힙합은 크렁크 음악으로 새로 태어났다. 힙합은 다른 주요 팝 음악들에 이시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탄자니아 같은 나라는 2000년대 초까지 그들 고유 음악을 고수하고 미국 트렌드를 따르지 않았다. 동시에 다른 나라들은 미국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했다.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일본, 필리핀, 한국, 중국, 캐나다, 인도, 베트남 같은 국가들은 힙합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갱스터 랩이 유명한데 이 랩은 폭력적이거나 과격한 표현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크렁크(Crunk)는 1990년대 후반 남부 힙합에서 발생되었다. 이 스타일은 멤피스 , 테네시, 아틀란타, 조지아 음악가들이 선도하고 상업화하였다. 스냅 음악은 크런크에서 파생된 장르로써 1990년대 후반 애틀랜타, 조지아에서 발생했다. 2005년 중반 텍사스 음악가들은 이 장르에 열광하였고 테네시주 음악가들도 곧 이 스타일을 추종했다. NCSA NCSA (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는 슈퍼컴퓨터망에서 이용하게 될 각종 프로그램과 통신 규약을 연구하는 국립 슈퍼 컴퓨터 응용 센터이다. 미국 국립 수퍼컴퓨팅 응용 연구소, 전미 슈퍼컴퓨터 응용 연구소라고도 한다. 1986년에 설립되었으며 NSF의 5개 슈퍼컴퓨터 센터 중의 하나이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부설 연구소이다. NCSA가 중점을 두고 있는 일은 일반 기업들이 개발하기 힘든 프로그램을 공익을 위해 연구하고 개발해내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컴퓨터와 원활하게 통신하기 위해 생겨난 텔넷과 FTP도 NCSA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그래픽 기반의 웹 브라우저인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를 개발하기도 했다. 세균 세균(細菌) 또는 박테리아()는 생물의 주요 분류군이다. 세포소기관을 가지지 않은 대부분의 원핵생물이 여기에 속한다. 원핵생물 중에서 고세균이 세균과 다른 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를 엄밀하게 구분하기 위해 진정 세균(眞正細菌, eubacteria)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세포벽은 펩티도글리칸 구조이며 세포벽의 형태에 따라 그람 양성세균과 그람 음성세균으로 구분한다. 박테리아라는 이름은, 우측 사진에 있는 바실러스 박테리아의 모양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듯, '작은 막대기'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박테리온()에 비롯되었다. 박테리아는 현미경을 발명한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훅(대한민국에서는 '레벤후크'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이 1676년에 처음으로 관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세균역에 속하는 분류들이다. 현재의 세균류는 지구상에 2번째로 번성한 생물군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약 40억 년 전 것으로 보이는 세균류의 화석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해 준다. 한편, 세균류는 처음 지구에 출현한 후 몇 억 년 동안 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생화학적 진화를 계속하였다. 오늘날 세균류가 다양한 작용을 하는 것은 이러한 생화학적 진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균의 세포벽은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매우 얇은 막이다. 세포핵은 없지만 핵 부위라고 부르는 부분에 핵물질이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이 부분은 보통 생물의 세포핵과 구조적인 차이를 보이므로 '핵양체'라고 한다. 특히, 대장균 등에서는 DNA 사슬이 둥근 고리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염색체에 해당되며, 여기에는 일반 염색체에서 볼 수 있는 히스톤과 같은 단백질이 없다. 세균의 몸은 단세포이며 길이는 1μ(1/1000mm) 정도, 넓이는 이것의 1/2~1/7정도이다. 종류는 길쭉한 막대 모양의 간균, 둥근 모양의 구균, 그리고 나선형의 나선균 등이 있다.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세포 구조도 원시적이어서, 보통 생물체 세포에서 볼 수 있는 막으로 둘러싸인 핵·미토콘드리아·골지체, 그 밖의 색소체나 액포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장이 빠르고 생화학적인 역할이 다양하며, 환경에도 잘 적응할 수 있다. 세균류는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든지 부생·기생·공생 또는 독립 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중 다른 생물체나 그 생산물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경우에는 복잡한 유기물 분해에 의해서 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데, 즉 분해자로서 자연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기생하는 것에는 동식물체에 병을 일으키는 종류도 있다. 자연계에 무균 상태의 동식물은 없다고 추측되며, 세균류는 동식물의 생활과 진화에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세균은 2분류로 구분되어있다. 세균 세포는 원형질막으로 감싸져 있다. 이 막은 세포의 기관들을 에워싸고 세포질에 있는 양분, 단백질과 다른 여러 필수적 요소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벽으로써도 작용을 한다. 원핵생물이기 때문에, 세균은 세포질에 막으로 감싸진 기관들을 갖지 않으며, 크기는 크지만 적은 숫자의 세포내 구조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진핵 생물과 반대로 핵막과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같은 세포 기관도 갖지 않는다. 세균은 한 때 단순히 다량의 세포질이 뭉쳐 있는 것이라 인식되었으나, 원핵세포골격같은 구조물과 세균이 복잡한 특징을 갖게 해주고 특정 세포질 내 공간에 있는 단백질들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세포이하수준의 조직을 세균하이퍼스트럭쳐(bacterial hyperstructure)라 일컫는다. 카르복시솜과 같은 세균미소구획은 더 높은 수준의 조직을 제공한다. 이는 다면체의 단백질 껍질에 둘러싸여진 하나의 구조다. 이러한 다면체 세포 기관들은 세균의 물질대사를 다른 조직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구분시키고 국한시킨다. 많은 필수적 생화학 반응들은 세포막을 넘어서 농도 기울기를 이용해 일어난다. 세균은 에너지를 세포막에서 얻는데, 이 막에 전자전달계에 존재하는 ATP 합성효소가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광합성 세균에서 원형질막은 빈틈없이 감싸져있고 빛을 흡수하는 세포막 층과 함께 대부분의 세포 공간을 차지한다. 이러한 광흡수 구조들은 녹색 유황 세균의 클로로솜과 같이 지질로 둘러싸인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다른 단백질들은 세포막을 건너 양분을 가져오거나 세포질에 필요없는 분자들을 밖으로 배출시킨다. 형태에 따른 세균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구균(球菌, 알균, Coccus)은 둥근 모양의 세균이다. 구균은 각기 따로 있는 단구균(單球菌-coccus), 짝을 이루는 쌍구균(雙球菌, 쌍알균-diplococci), 넷이 붙어 있는 사련구균(四聯球菌-tetrad), 여덟 개가 붙어 있는 팔련구균(八聯球菌-sarcina)여러 세균이 사슬 모양으로 늘어선 연쇄(상)구균(聯鎖狀球菌, 사슬알균-streptococci), 포도송이처럼 뭉쳐있는 포도(상)구균(葡萄狀球菌, 포도알균-staphylococci) 등으로 구분된다. 간균(竿菌, 막대균, Bacillus)은 길한 막대 모양을 하는 세균이다. 대개 홀로 존재하나 가끔 사슬처럼 일렬로 배열하고 있는 연쇄상간균(連鎖狀桿菌, 사슬막대균)도 있다. 그 외 간균의 형태로는 방추간균, 콤마간균등이 있다. 나선균(螺線菌, Spirilla)은 나선형의 세균이다. 보렐리아(Borellia), 비브리오(bibrio), 스피로헤타(Spirochete), 렙토스피라(Reptospirra)등이 속한다. 세균의 몸은 일정한 크기로 자라면 둘로 분열되어 각각 독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때 구균은 1 또는 2, 3 평면에서 분열이 일어나 특징적인 단세포 집단을 만드는 데 비해 길쭉한 간균이나 나선균에서는 긴축과 직각인 면이 분열한다. 이와 같이 세균류의 생활사는 일반적으로 간단하며 분열에 의한 무성 생식이지만, 대장균이나 그 밖의 소수의 것은 유성 생식 접합을 하기도 한다. 또한, 무성 생식에도 변화가 있어서 내생 포자를 만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몸의 일부에서 싹이 나오는 것도 있다. 세균은 환경이 적절하면 매우 빠르게 번식한다. 대부분 이분법으로 번식하며 1~3시간마다 한 번씩 분열하지만 일부는 최적조건에서 20분 만에 한 번씩 분열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세균은 개체수가 늘어남에 따라 결국 영양분을 모두 소모하고 대사 노폐물로 스스로를 중독시키며, 다른 생물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에 무한정 늘어나지는 않는다. 또한 자연상태에서의 다른 생물과 경쟁하는 많은 종류의 미생물이 세균의 번식을 억제하는 항생물질을 생산하기 때문에 개체수가 증가할수록 생장속도는 점차 더뎌진다. 어떤 세균은 필수 영양물질이 고갈되면 내생포자(endospore)를 형성하기도 한다. 내생포자는 원래의 세포에 들어있던 염색체가 복제되면서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형성된다. 내생포자가 형성될 때 수분은 거의 제거되고 물질대사는 중단된다. 세포의 나머지 부분은 분해되어 내생포자만 남겨진다. 대부분의 내생포자는 아주 견고해서 끓는 물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내생포자를 제거하기 위해 실험실에서는 압력을 높여 121℃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는 고압멸균기를 사용한다. 이보다는 덜 적대적인 환경에서 내생포자는 수백 년 이상 휴면 상태로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다가 환경 조건이 좋아지면 다시 물을 흡수해서 물질대사를 시작할 수 있다. 공생은 세균이 생활하는 한 형태이다. 대표적인 예는 소 등의 반추 동물이다. 즉, 소화 기관 안에는 셀룰로모나스·바실루스·클로스트리디움 등이 생활하고 있다. 소의 침 속에는 효소 대신에 세균류에게 필요한 탄산수소나트륨이나 인산나트륨이 함유되어 있어서, 세균은 이것을 이용하여 셀룰로오스 등을 분해하여 여러 가지 지방산을 만들므로, 이것이 소의 체조직에 흡수되어 에너지를 만들게 된다. 또한, 세균의 몸은 결국 단백질 분해 효소에 의해서 질소 화합물과 비타민으로 분해되어 흡수되므로, 소는 별도로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아도 된다. 세균은 곰팡이 등과 함께 분해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분류군이다. 분해자는 유기물을 분해하여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무기 화합물을 생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잘 알려진 예는 콩과식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콩과식물의 뿌리에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침입하여 뿌리혹을 형성하며, 여기에서 공중 질소를 고정해서 질소 동화 작용을 하여 질소 화합물을 만든다. 뿌리혹박테리아는 이 질소 화합물을 식물에게 제공하는 대신 식물체로부터 그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탄수화물을 얻게 된다. 질소는 단백질을 만드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원소이며, 공중 질소는 대기의 3/4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물체는 공중 질소를 직접 이용할 수 없다.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질소를 고정시키는 세균의 역할은 식물에 의한 이산화탄소 고정과 맞먹는 중요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공중 질소를 고정하여 단백질을 만드는 것에는 뿌리혹박테리아 외에 땅 속에 사는 클로스트리디움·아조토박터·슈도모나스 등이 있다. 이 밖에 누룩곰팡이나 남조류 중에도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이 고정된 질소 화합물은 암모니아로 바뀌게 된다. 즉, 단백질이 분해되어 생기는 아미노산을 세균류 및 그 밖의 균류, 특히 토양균류들이 암모니아로 분해시키는데, 이 때 관여하는 균류를 '부패균'이라고도 한다. 암모니아는 아질산균에 의해 아질산으로, 아질산은 질산균에 의해 질산이 된다. 질산염은 이온 형태로 식물 뿌리로부터 흡수되어 잎에 운반되며, 그 안에서 다시 암모니아로 바뀐 다음 단백질의 합성 재료가 된다. 일부의 식물은 암모늄염을 흡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질산염과 달리 그대로 단백질의 합성 재료가 된다. 이와 같이 세균류와 그 밖의 균류는 질소의 순환 및 다른 여러 원소의 순환에 관여함으로써, 생태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세균은 대사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세균과 우유를 이용하여 치즈나 요구르트를 만들어 왔다. 최근에는 세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생명공학기술에 이들 세균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대장균("Escherichia coli")은 유전자 복제에 흔히 이용되며, 아그로박테리움("Agrobacterium tumefaciens")은 형질전환 식물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또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는 비타민, 항생물질, 호르몬제제 및 기타 유용한 단백질을 얻는데에도 사용된다. 또한 세균은 생물학적 복원에도 사용된다. 혐기성 세균은 쓰레기 더미에서 유기물을 분해하여 이후 화학적 멸균과정만 거치면 그대로 매립하거나 비료로 쓰일 수 있게 한다. 방사성 폐기물의 처리 및 기름 유출사고의 처리 등에도 특정한 기능을 가진 세균이 이용된다. 광석에서 금속을 채취하는 과정에서도 세균이 이용된다. 해마다 황동광에서 300억㎏의 구리를 채취하는 데 세균이 사용되고 있다. 세균류는 복잡한 유기물을 간단한 유기물로 분해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한편, 프로피온산균·젖산균·부티르산균, 그 밖의 누룩곰팡이 등은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탄소 동화를 하는 것도 있다. 또한, 홍색세균·홍색황세균·녹색황세균 등의 세균류는 녹색 식물보다 원시적인 광화학적 기구에 의해서 광합성을 하며, 아질산균·질산균·철세균 등은 무기물을 산화시킬 때 나오는 화학 에너지를 이용하여 탄소 동화를 한다. 유산균, 항생제 생성균(항생제를 생산한다). 길항미생물(유해 세균이 자라지 못하게 막음), 일부 장내세균(소화를 돕고 유익한 물질을 분비함), 질소고정균(질소를 식물이 사용하기에 유리한 형태로 만들어줌) 등이다. 그람음성균과 양성균은 그람염색법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1918년 1918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스포츠 목록 라켓으로 공 또는 그외의 물체를 치면서 경기하는 스포츠. 헤시오도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작가로 호메로스와 함께 그리스 신화, 그리스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인이다. 헤로도토스는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그리스인들에게 신을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신화, 서사시, 교훈시 등을 지었으며, 호메로스와 함께 후대 그리스, 로마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헤시오도스의 가계나 주변 인물에 대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시인 오르페우스의 후손으로, 정확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만 소아시아 출신의 부유한 농가의 차남 또는 장남으로 추정되며 그의 동생이 유산을 탕진하였다는 점 정도가 알려져 있다. 헤시오도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그 자신의 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오르페우스의 후손인 헤시오도스의 아버지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해상무역을 하다 실패하여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 지방의 아스크라에 정착했다고 한다. 헤시오도스는 보이오티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그 곳에서 목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표작인 테오고니아의 첫 구절에 따르면 목동으로 헬리콘이라는 언덕에서 음악의 여신으로 부터 이른바 부름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방랑 음유시인으로 활동했다는 것과, 나이가 들어서는 아주 조금 물려받은 농토를 갈아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 외에 헤시오도스의 생애에 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출생 연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호메로스를 연장자로 보고 있다. 《신들의 계보》()는 우주의 생성, 탄생, 신들의 기원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기록이다. 신들의 계보를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이야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일과 날》()은 약 828행의 노동시로 농부의 일상 생활을 포괄적으로 그리며 농부가 할 일에 대한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른바 "황금시대"(黃金時代)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여러가지 도덕적, 실천적 교훈을 이 교훈시에 담고 있으며 이후 헬레네즘, 로마 시대는 물론 서양 교훈문학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외에도 헤시오도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들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다. 스포츠 바이크 스포츠 바이크 (Sport Bike 또는 Sports Bike)는 오토바이의 한 종류로 단거리 이동에 적합하며 편안한 운전이 가능한 종류다. 때때로 퍼포먼스 오토바이라고 불리고, 크루즈급보다는 전형적으로 매우 더 작고 가볍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경주용 오토바이의 소비자 판매용으로서, 일반적으로 경주용 오토바이보다 몇 년 뒤에 나온다. 탈 때의 자세는 발을 등보다 뒤로 빼고, 손은 낮게 하고 머리는 앞을 향한다. 스포츠 바이크는 대부분 코너에서 크게 안정적이고 아주 높은 속도도 가능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스포츠 오토바이 제조업체들 사이에서 "힘의 전쟁"이 시작됐다. 스즈키 사의 1300cc GSX-1300R 하야부사는 최초로 300km/h을 넘었고 가와사키 사의 ZX12R는 200km/h을 넘어서도록 설계됐다. 안전 문제 때문에 결국 여러 유럽 정부에 의해 최고 속도는 300km/h(186mph)로 한계가 정해졌다. 스포츠 바이크는 때때로 가벼운 무게와 빠른 속도 때문에 "총알 오토바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것은 경멸적인 의미로 "크로치 로켓" 그리고 "플라스틱 오토바이"라고도 불린다. 최지우 최지우(, 1975년 6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최지우는 부산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최지우는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를 좋아하던 성향을 살려 연기인으로 성장할 생각을 자주 해왔다고 한다. 이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척의 권유로 연기인이 되고자 서울로 혼자 상경했고, 1994년 MBC 23기 공채 탤런트로 선발 되었다. 1995년 드라마 《전쟁과 사랑》로 데뷔한 최지우는 이 작품에서부터 본명인 최미향 대신에 최지우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공채 탤런트로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던 시기에 1996년 5월,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프랑스의 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한 영화 《디아볼릭》의 프로모셔널 이벤트인 "이자벨 아자니 닮은 꼴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탄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지우는 故 김형곤과 함께 연극 《병사와 수녀》를 공연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더 알려지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지우는 1996년 개봉 된 영화 《귀천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어 배역을 연기할 예정이었지만 그 때까지는 연기경험부족으로 촬영 전에 배역을 잃은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1996년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스크린에 데뷔하였다. 그러던 중 최지우는 당시 65%가 넘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첫사랑》(1996)에서 배용준과 처음으로 함께 첫 호흡을 맞추었고, 비록 조연이지만 점차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전문 연기자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영화 《올가미》(1997)의 배역으로 제3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키스할까요》(1999)와 드라마 《신 귀공자》 (1999), 《진실》(2000), 《아름다운 날들》(2001), 《겨울연가》(2002), 《천국의 계단》(2003) 등의 여러 작품에 꾸준히 활동하며 톱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큰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인 드라마 《겨울연가》는 2004년에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내 히트상품 2위에 선정되는등 중장년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녀는 '지우히메'라는 애칭을 얻어 최고의 한류스타를 대표할 수 있는 한 명이 되었다. 2004년에 출연한 북경TV 《101번째 프로포즈》에 이어 2006년에는 일본 드라마 《윤무곡~론도》에서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공연하며 해외 작품에 출연하였다. 최지우는 이후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2002),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 《연리지》(2006)에 출연했다. 최지우는 2007년 방영된 드라마 《에어시티》로 3년만에 국내 브라운관에 컴백했다. 2009년에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6명의 여배우들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의 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겨울연가》의 목소리 연기(Voice acting)에 참여했고, 2009년 9월 29일에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애니메이션 《겨울연가 도쿄도무 이벤토》에 배용준과 참석했다. 그녀는 2012년 중국 안후이TV 《도시의 연인》으로 9년만에 중국 드라마에 출연했고, 드라마 《스타의 연인》(2008), 《지고는 못살아》(2011), 《수상한 가정부》(2013), 《유혹》(2014) 등의 국내 작품에 출연했다. 최지우는 2015년,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 그리스 편》에 보조 짐꾼으로 고정 출연하였다. 같은 해 방영된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에서 스무살 아들을 둔 38세의 늦깍이 여대생 하노라 역을 열연해 호평을 받았다. 최지우는 2016년, 드라마 《캐리어를 끄는 여자》에 출연하였다. 달마산 달마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대둔산 (충남/전북) 대둔산(大芚山, , )은 충청남도 논산시,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논산시에 가장 많은 면적이 속해 있다.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을 구분하는 자연적 경계이다. 충청남도 토박이들은 예로부터 한듬산이라고 불렀고, 대둔산의 명칭은 이를 한자화한 것이다. 1977년 3월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의 38.1km가 전라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0년 5월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양촌면과 금산군 진산면 일대의 24.54km가 충청남도 도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동북쪽으로 유등천, 북쪽으로 갑천, 서쪽으로 논산천 등 금강의 지류가 흐른다. 동·남·북의 3면에서 오랜 두부침식을 받아 기괴석을 이루고, 협곡을 따라 대전~전주 간 17번 국도가 지난다. 해발 878m의 마천대를 중심으로 뻗어내린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낙조대·월성고지·매봉·철모·깃대봉 등의 경승지가 있고, 구름다리·케이블카 등의 관광시설이 있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는 높이 81m, 폭 1m의 금강 구름다리가 있다. 금강 구릉다리를 건너면 약수정이 나오고 여기서 삼선줄다리를 타면 왕관바위로 간다. 봉우리마다 한폭의 산수화로 그 장관을 뽐내는 대둔산은 낙조대와 금강폭포, 동심바위, 금강계곡, 삼선약수터, 옥계동 등이 절경을 이룬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는 신라시대 사찰인 태고사가 있고,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에는 수락계곡, 선녀폭포와 충청남도지방경찰청에서 건립한 대둔산 승전탑이 있다. 대둔산 휴게소에는 이치 전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치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전주로 넘어오려는 왜군을 섬멸한 전투로 이후 임진왜란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동학전쟁 때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대둔산에서 일본군에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 대둔산의 바위벼랑에서 모두 몸을 던져 자결했는데, 삼선계단에 가기 직전에 '대둔산 동학군 최후 항전지' 표지가 있다. 대둔산 승전탑은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에 있다. 1950년 1월 3일부터 1955년 1월 2일까지 5년간에 걸쳐 대둔산 일대에서 활동 중인 빨치산과 영호남에서 패주 북상하던 북괴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경찰관, 국군, 애국청년단원 등 1,376명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남지방경찰청에서 1986년 6월 23일 건립하였다. 당시 대둔산을 거점으로 활동한 공비들은 현재의 논산시, 완주군 일대와 멀리 공주·대전까지 원정하여 410여회에 걸쳐 경찰관서 습격, 양민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고, 이에 충남경찰국은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강경경찰서에 대둔산지구 전투경찰대를 창설하여 대대적인 공비 토벌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대둔산 일대의 공비를 소탕하였다. 완주방면에서 오르는 잘 알려진 등산로는 3개인데, 산자락의 풍경과 기암 절벽이 장관이다. 또한 절경 사이로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철계단과 금강구름다리가 이어진다. 충청남도에서 지정한 도립공원은 수락계곡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태고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전라북도 지역의 남쪽 등산로는 물이 없는 돌길인데 비하여, 북쪽의 충청남도 지역은 골짜기로 물이 흐른다. 수락계곡의 입구에는 대둔산지구의 승전기념탑이 있으며, 수락폭포를 따라 올라가면 낙조대와 마천대에 이른다. 대둔산에는 태고사, 안심사, 신고운사 등 천 년사찰이 있었으나 6·25전쟁 중에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태고사는 1974년 복원되었고, 안심사는 복원 중이다. 대암산 (강원) 대암산(大岩山)은 강원도 인제군과 양구군에 걸쳐 있는 높이 1,310m의 산이다. 대우산과 함께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지역은 분지·습원등 지형적으로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고, 기후 조건이 특이하여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식물의 종류는 총 59과 123종으로 그중 고층 습원의 특유종이 19종, 미기록종 15종이 알려져 있는 생물의 보고이다. 또한 동식물의 남북한계·동서 구분의 현상이 나타나는 등 식물생태학·식물지리학적·식물분류학적 연구 가치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상, 특이한 지형·지세 및 기후적 특성 등 다양한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어 쳔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정상은 통제구역으로 등산은 생태식물원을 들머리로 한 정상 서남쪽 능선 코스만 가능하다. 큰용늪과 작은용늪 일원이 1997년 3월 28일에 국제보호습지로 지정 되었다.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용늪을 포함한 대암산 전체가 천연기념물 246호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는 용늪만 따로 생태계보전지역이 되었으며, 1997년에는 대한민국 최초 람사르협약 습지로 등록되었다. 용늪 상류에 위치한 군부대의 연병장과 스케이트장, 작전도로와 헬기장등에서 토사가 용늪으로 쓸려와 용늪에 육상식물이 침투하는 등 용늪의 육지화가 가속되면서 용늪의 육지화를 방지하기 위해 군부대를 용늪과 수계를 달리하는 지역으로 이전하고 기존 군 부대 시설을 철거 및 생태계로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대야산 대야산(大耶山)은 속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산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의 경계에 있다. 대하산·대화산·대산·상대산 등으로도 불렸고, 1789년에 발행된 《문경현지》는 대야산으로 적고 있다. 용추계곡의 양쪽 옆 바위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세심대·활청담·옥하대·영차석 등의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대학산 대학산(大學山)은 대한민국 강원도 홍천군 동면과 서석면에 걸쳐 있는 높이 876m의 산이다. 덕유산 덕유산(德裕山)은 전라북도 무주군·장수군과 경상남도 거창군 ·함양군에 걸쳐 있는 높이 1,614m의 산이다. 1975년 2월 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도락산 도락산(道樂山)은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높이는 964m의 산이다. 소백산과 월악산의 중간쯤에 형성된 바위산으로 현재 일부가 월악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산의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깨달음을 얻는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하고 거기에는 필수적으로 즐거움이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산을 끼고 북으로는 사인암이, 서로는 상선암. 중선암.하선암 등 이른바 단양 8경의 4경이 인접해있으므로 주변 경관이 더욱 아름답다. 도봉산 도봉산(道峰山, )은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양주시 장흥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한 부분이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연봉을 따라 운악산·불곡산을 거쳐 남서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울 동북쪽에서 우뚝 솟아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739.5m),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 서쪽으로 오봉(五峰)·여성봉이 있다. 우람한 기암괴석과 뾰족이 솟은 바위 봉우리들이 장관이며, 사방으로 뻗은 계곡을 따라 녹음이 우거져 있다. 만장봉의 실제높이는 718m이나 옛날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만장이나 되어 보인다하여 '만장봉(萬丈峰)'이라 이름지었다. 야설로는 만장봉 꼭대기에 자일이나 로프도 없이 태조 이성계가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송추남능선 중간쯤 높이 504m에 자리잡고 있는 여성봉은 그 모양이 여성의 생식기와 유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강암바위의 자연적 풍화작용에 의해 형성된 암봉으로 대자연의 신비로움과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면적은 24km로 북한산의 55km에 비해 등산길이 더 조밀하다. 최고봉인 자운봉(739.5m)을 비롯해서 만장봉·선인봉·주봉·관음봉·오봉·우이암 등 암벽이 아름답다. 도장산 도장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둔덕산 둔덕산(屯德山)은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높이 970m의 산이다. 마니산 마니산(摩尼山)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서쪽으로 40km 정도의 위치한 강화도에 있는 해발 472.1 m의 산이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다.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태종실록》 등에는 머리, 우두머리라는 뜻의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摩利는 머리의 중세 동형어인 마리의 취음표기이다.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이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다. 마이산 마이산(馬耳山)은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에 있는 산이다. 1979년 10월 1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3년 10월 31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 산은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고 불렀으며,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이라 불리어 왔다. 중생대 후기 약 1억년전까지 호수였으나 대홍수시 모래, 자갈 등이 물의 압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으로 약 7천만년 전 지각 변동으로 융기되어 지금의 마이산이 이루어졌으며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간혹 발견된다. 이 산을 남쪽에서 보면 봉우리 중턱 급경사면에 군데군데 마치 폭격을 맞았거나, 파먹은 것처럼 움푹 패인 크고 작은 굴들을 볼 수 있은데 이는 타포니 지형이다. 풍화작용은 보통 바위 표면에서 시작되나 타포니 지형은 바위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가 팽창되면서 밖에있는 바위 표면을 밀어냄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사례로 꼽힌다. 설악산이나 월악산, 화악산 같은 큰 산에만 악자가 들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월오악도 그림의 산들은 긴 삼각형 형태로 나란히 솟아오른 다섯 개의 봉우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도 일월오악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악이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인 오악(五嶽, 백두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삼각산)을 상징한다고 전하는데 이곳 지역의 전라북도 진안의 노인들은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도를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을 형상화한 그림으로 얘기하고 있다. 조선초기에 창제된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한 종목으로 일명 몽금척이라한다. 1393년(태조 2) 정도전(鄭道傳)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잠잘 때 신인(神人)이 금척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문무(文武)를 겸하고 민망(民望)한 태조에게 주었다는 내용의 악장을 지어 바쳤다. 이 악장을 근거로 창제한 정재가 몽금척 또는 금척이다. 조선 성종(1469~1494) 때 공연된 금척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4에 도설됐다. 즉 금척정재의 작대도(作隊圖)·초입배열도(初入排列圖)·회무도(回舞圖)가 있다. 금척의 음악은 고취악(鼓吹樂)을 차용한 것이다. 죽간자(竹竿子) 2명과 족자(簇子) 1명 및 12명의 협무(挾舞)로 구성된 이 정재(呈才)는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소포구락"(小抛毬樂) 등의 반주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금척령"(金尺令)에 맞추어 무용수들은 "금척사"(金尺詞)를 노래로 부른다. 1630년(인조 8)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진풍정(進豊呈) 때 금척은 헌선도(獻仙桃)·수연장(壽延長)·봉래의(鳳來儀)·연화대(蓮花臺)·포구락(抛毬樂)·향발(響鈸)·처용무(處容舞)와 함께 공연됐다고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에 전한다. 금척의 손잡이인 연방(蓮房)의 끝 고리에 색사결자(色絲結子)를 늘어뜨린다. 칼날처럼 생긴 금척의 몸통에 '천사금척수명지상'(天賜金尺受命之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금척무(金尺舞)는 조선 태조 2년인 1393년에 정도전이 만든 춤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제1대 임금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꾸었던 꿈에서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는데, 그것이 머지않아 국왕이 될 것이라는 계시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악정재(唐樂呈才)로, 조선 후기까지 전승되었다. <몽금척(夢金尺)> 또는 <금척(金尺)>이라고도 한다. 또한 금척사(金尺詞)는 궁중의 연회 때 금척무(金尺舞)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의 가사인데 몽금척(夢金尺), 달리 말해 금척무(金尺舞)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 꿈에 하늘에서 금척을 받든 신인(神人)이 내려와 금척을 주고 곧 왕위에 오를 것을 알렸다는 내용을 무용화한 것으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당악정재(唐樂呈才)로 소개되어 있는 춤이다. 마이산에는 은수사가 있고 그곳에 자생하고 있는 줄사철군락지가 진안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군식성 식생으로 생태학적 중요성을 인정하여 지정했는데 보호 소재지는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산 18번지이고 지정일은 1993년 8월 19일, 지정면적은 171m으로 등록되어 있다. 은수사의 줄사철나무 군락지는 대한민국 내륙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줄사철나무의 북방한계지이고 노목과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학술적, 생태학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2008년 4월 15일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지에서 진안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로 변경하였다. 청실배나무는 산돌배나무와 유사한 종으로 집 근처나 산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마이산 이곳에 천연기념물 제386호로 서있다. 나무의 높이는 18m이고, 나무의 나이는 640년으로 추정된다. 가슴높이줄기둘레는 2.8m이고, 줄기 길이는 동쪽 7.2m, 서쪽 8.7m, 남쪽 7.3m, 북쪽 6.4m이다. 이 청실배나무(靑實梨)는 진안군청에서 동쪽으로 4 km, 마령면사무소로부터 3 km 떨어진 숫마이산의 정남향에 있는 은수사의 경내에 자리잡고 있다. 명성산 명성산 (鳴聲山)은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923m의 산이다. 명지산 명지산(明智山)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하면에 걸쳐 있는 높이 1,267m의 산이다. 1991년 10월 9일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모악산 모악산(母岳山)은 전라북도 김제시와 완주군에 걸쳐있는 높이 793m의 산이다. 1971년 12월 1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는 백제 법왕 원년에 창건된 금산사 절이 있다. 2002년 10월 산림청이 모악산을 대한민국 100대 명산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 모악산 정상에 있는 구조물은 방송사 송신탑(JTV, KBS전주)으로 1977년 KBS전주방송국이 TV방송 전파송출을 위해 세워졌고 이후에 모악산 정상 복원을 위해 철거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아 오다가 2008년 송신탑 옥상이 일반에 개방되었다. 《금산사지》에 "엄뫼"라는 큰 산을 뜻하는 것으로 한자가 들어오면서 어머니 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하여 모악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모악산 꼭대기에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고 불리는 설이 있다. 전북녹색연합의 조사에 의하면 모악산에 분포하는 식물상을 조사한 결과 모악산에 940여종의 식물과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2급 법적보호종 애기등과 희귀식물인 고란초가 자라고 있으며 멸종위기 2급 천연기념물 제328호로 지정된 포유류인 하늘다람쥐가 서식하고 있다. 무등산 무등산(無等山)은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화순군 · 담양군에 걸쳐 있는 해발 1,187m의 산이다.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12월 27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21번째 국립공원이며 1988년 변산반도·월출산 이후 24년 만의 신규 지정이었다. 정상은 천왕봉이나 1966년 공군부대가 주둔해서 정상 부근이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통제되는 바람에 일반 등산객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서석대(해발 1,100m)다.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과 경상남도 남해에 있는 거제도가 보인다.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주에 있는 산이라 하여 무진악 또는 무악이라 불렀고, 대개 큰 산이 그렇듯 무속과 연관하여 무덤산, 무당산이라고도 했다. 무등산은 대체로 바위가 아니라 흙으로 이루어진 산이지만, 정상 부근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바위가 웅장하며 아름답다. 그래서 고려 시대에는 서석산이라고 불렀다. 불교 전래 후 부처가 세상 모든 중생과 견줄 수 없이 우뚝하다는 존칭으로 옛 이름과도 유사한 무등산(無等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만, 이는 같은 우리말 이름에 대한 한자표기를 바꾸어 해석을 달리했을 뿐으로, 원지명은 광주의 고유지명인 무들 또는 무돌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무등산 주위를 순환하는 51.8km의 무돌길도 만들어졌다. 무진(武珍)에서 珍은 오늘날에는 한자음으로 진으로 읽으나, 과거에는 새김으로 읽어 들, 돌로 발음하였고, 무등(無等)또한 유사한 음차표기이다. 이두표기로 水入伊란 지명도 있어서 방증된다. (환경부 고시2013-4호) 산의 정상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면 수십길이 되는 북모양의 석조 수십 개가 울을 둘러막은 듯 서 있는데 이것은 서석대(瑞石臺)이다. 산허리 남쪽에는 입석대가 있고 동쪽으로 가면 수백 척 되는 세 개의 거석이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삼존석(三尊石)이다.그 부근에는 송하, 광석, 풍혈, 장추, 청학, 송광, 능암, 법화, 설법, 은신 등 10개의 석대가 있는데, 그 중 광석, 풍혈은 강봉의 입석과 함께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산의 동서 두편 사이에는 바위돌을 깎아 세워놓은 듯 솟아 있는 석벽이 있고, 그 석벽 가운데는 지공(指空) 너널이라는 천작의 석실이 있는데 옛날 지공과 뇌공(懶空)이라는 두 선사의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원효, 증심, 규봉의 세 절이 있는데 모두 신라의 고찰이며, 규봉암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의 명장이었고 또 정충(精忠)으로 알려진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여기서 무예를 닦았고, 산중도처에 유적이 많다. 특히 장군의 여러 가지 기적을 남긴 주검바위가 가장 유명하다. 등산로인 옛길 1구간은 산수동오거리-(0.8km)-무등산 옛길 입구, 무등파크맨션 버스정류장-(0.7km)-잣고개-(0.1km)-동문지터-(1.7km)-청풍쉼터, 김삿갓 시비-(2.8km)-충장사-(1.7km)-원효봉 너덜겅-(0.9km)-무등산장, 원효사 일주문 구간이고, 옛길 2구간은 원효사-공원관리사무소-서석대에 이르는 구간이다. 무등파크맨션 앞의 좁은 골목길이 무등산 옛길 1구간의 입구이다. 웅장한 무등산 옛길의 시작점 치고는 아주 소박하고 조촐하다. 잣고개까지는 가파른 산길이다. 잣은 성(城)의 고어로, 잣고개에는 무진고성이 있다. 잣고개를 내려서면 동문지커가 나온다. 동문지터로 가려면 찻길 하나를 건넌다. 2구간 코스는 길이가 4.12km로, 오르는 데만 2시간 정도 걸린다. 공원관리사무소 뒷길로 들어서 주검동(쇠로 무기를 만들던 곳)과 충장공 유적지 옆을 지나 원효계곡 상류를 따라 군사작전도로와 만난다. 해발1,187m의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 일대는 서석대·입석대·규봉 등 수직 절리상의 암석이 석책을 두른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 또 마치 옥새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새인봉은 장불재에서 서쪽 능선상에 병풍같은 바위절벽으로 이뤄져 있으며 입석대, 서석대 등 주상절리대를 포함하여 산봉·기암·괴석 등 경관자원 61개소가 분포되어 있다. 또한 수달, 구렁이, 삵 등 멸종위기종 8종을 포함하여 총 2,296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보물 2점 등 지정문화재 17점이 보유되어 있다. 1972년 5월 22일에 도립공원(전남고시 제85호)으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화순군 및 담양군에 위치하고 총 면적은 30.23km이다. 2012년 12월 27일에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지정 면적은 75.425km이다. 단, 광주호 일대와 소쇄원을 비롯한 가사문화권 지역은 주민과 지방자치단체의 반대로 제외됐다.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65호 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2011년 5월 14일에 1966년 군부대 주둔 이후 45년 만에 무등산 정상 부근인 인왕봉과 지왕봉이 개방되었다. 정상인 천왕봉은 방공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개방되지 않았다. 장불재에서 군부대의 보안사항을 들은 뒤 신분 확인(신분증 지참)을 받고 부대를 출입할 수 있다. 2011년에는 연 2회(5월, 10월), 2012년에는 연 4회(4월, 7월, 10월, 11월) 개방되었다. 무학산 무학산(舞鶴山)은 창원시서쪽의 마산지역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크고 작은 능선과 여러 갈래의 계곡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특히 동쪽의 서원곡 계곡이 무성한 수목과 경관으로, 창원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 옛 마산시에서 관광객 유치 홍보를 위해 선정한 9경(景) 5미(味) 중 9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라 말기에 이곳에 머무르던 최치원이 산을 보고는 학이 나는 형세라고 했다고 해서 이때부터 무학산으로 불렀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풍장산이었다고 한다. 마산시내 어느 곳에서도 쉽게 무학산을 등산할 수 있는데, 700m급의 산이 이처럼 도심과 인접해 있는 경우도 보기 힘들 것 같다. 미륵산 미륵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민둥산 민둥산은 나무가 없는 산을 말한다. 그밖에 ‘민둥산’으로 불리는 산에는 다음이 있다. 민주지산 민주지산(岷周之山)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 경상북도 김천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1,242m의 산이다. 충청·전라·경상, 삼도를 가르는 삼도봉을 거느린 명산으로 옛 삼국 시대는 신라와 백제가 접경을 이루었던 산이기도 하다. 이 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충북 영동군의 절경 문한리 계곡과 경북 김천시 황악산 기슭의 직지사가 유명하고, 동남쪽으로는 마애삼두불의 미소를 머금은 해발 1,200m의 석기봉과 태종 14년(1414년)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삼도의 분기점이 된 해발 1,181m의 삼도봉이 웅거하여 삼남을 굽어보며,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백운산(白雲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제 강점기에 민주지산으로 바뀌었다. 시마네현 시마네 현()은 일본 혼슈의 주고쿠 지방에 있는 현으로 현청의 소재지는 마쓰에 시다. 동쪽으로 이웃한 돗토리현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은 현이다. 주코쿠 지방에서 유일하게 현청 소재지와 현 이름이 다르다. 현은 동서로 뻗어있으며 남쪽은 주고쿠 산지, 북쪽은 동해와 접한다. 도시의 대부분은 동해 연안 근처에 있다. 이즈모 시의 이즈모타이샤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이다. 2005년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제정하자 대한민국 경상북도는 시마네현과의 자매 결연을 철회하기도 하였다. 시마네의 역사는 일본의 신화와 함께 시작된다. 신토의 신인 오쿠니누시는 시마네에 있던 이즈모 국에 사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즈모 시의 이즈모 신사는 이러한 신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무렵에 현재의 시마네 현은 이와미 국, 이즈모 국, 오키 국의 세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 이 구분은 1871년의 폐번치현 때까지 이어졌다. 아스카 시대의 36가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는 시마네 출신이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가마쿠라 막부는 고토바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을 오키 섬에 유배시켰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오키 섬을 탈출해 막부에 저항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 이즈모와 오키는 교고쿠씨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에 아마고씨가 갓산토다 성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마쓰다씨는 이와미 국을 지배하였다. 이와미 은광은 아마고씨와 마쓰다씨 영토의 사이에 위치해 막대한 은을 두고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1556년에 모리 모토나리가 이즈모, 이와미, 오키 3국을 정복하여 30여년 간의 모리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씨가 몰락하면서 호리오 요시하루가 이즈모와 오키에 입성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 호리오 요시하루는 갓산토다 성 대신에 마쓰에 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요시하루 사후에 성이 완성(마쓰에 번의 성립)되었다. 이후 1638년에 호리오씨의 상속자가 없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마쓰다이라 나오마사가 입성하였고 나오마사계 에치젠 마쓰다이라가(고카몬)의 통치는 폐번치현 때까지 이어졌다. 이와미 지역은 막부직할령의 광산 지구와 하마다 번, 쓰와노 번의 영지로 삼분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이와미 은광은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가장 큰 은광 중 하나였다. 하마다 번을 다스렸던 고카몬(막부의 친족) 오치 마쓰다이라가(시조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손자 마쓰다이라 기요타케)는 메이지 유신 때 막부 편에 섰고 하마다 성은 불태워졌다. 쓰와노 번을 다스렸던 가메이씨(시조는 가메이 고레노리)도 마찬가지로 유신때 막부 편에 섰다. 1871년 폐번치현 이후 현재의 시마네 현 지역에 구 시마네 현과 하마다 현이 두어졌다. 몇 년 후에 오키는 돗토리 현의 일부가 되었다. 1876년에 하마다 현과 시마네 현이 합병해 시마네 현이 되었고 돗토리 현 또한 병합되었다. 그러나 5년 후에 현재의 돗토리 현에 해당하는 지역이 분리되었고 현재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시마네 현은 주고쿠 산지와 동해 사이에 위치한다. 서쪽으로 야마구치현, 동쪽으로 돗토리현, 남쪽으로 히로시마현과 접하고 있다. 산지가 많기 때문에 벼농사는 주로 이즈모 시가 있는 이즈모 평야에서 이루어진다. 또다른 주요 지형은 시마네 반도이다. 반도는 이즈모 시부터 돗토리현의 사카이미나토 시까지 동해를 가로질러 위치한다. 또한 반도는 두 개의 기수호인 신지 호와 나카우미호를 형성하고 있는데 나카우미 호 중앙에는 다이콘 섬이 있다. 혼슈 섬과 분리된 오키 제도 또한 시마네 현에 속하고 있으며 섬은 다이센오키 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주요 도시는 해안과 강안을 따라 위치하고 있으며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친 헤세이의 대합병으로 시마네 현의 많은 정촌들이 합병되었다. 시마네 현은 온난 습윤 기후이면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흐린 날이 많다. 우기인 6월부터 7월 중순까지는 거의 매일 비가 온다. 하마다 시의 연평균 기온은 14.9℃이고 연강수량은 1,702mm이다. 옛날의 이즈모 국에 속한 지역이었다(이즈모 시와 이난 정의 일부 지역은 이와미 국에 속했음). 옛날의 이와미 국에 속한 지역이다(오다 시의 일부 지역은 이즈모 국에 속했음). 옛날의 오키 국에 속한 오키 제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실질적 지배 상태에 있는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은 다케시마 섬(독도의 일본어 이름)이 오키 지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시마네 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종사하는 산업은 소매업으로 약 6만 명이 종사하고 있다. 이러한 회사들로 미시마야와 준텐도가 있다. 제조업은 두 번째로 많은 49,000명이 종사하고 있으며 총 산업 생산량의 25%를 소매업을 포함한 서비스업이 차지한다. 제조업은 13%를 차지하고 있다. 현 인구의 3분의 1이 이즈모-마쓰에 지역에 집중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인구의 3분의 2가 해안가에 살고있다. 이러한 이유는 내륙에는 주고쿠 산지가 있어 거주하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마네 현의 노령자의 인구 비율이 도도부현 중 가장 높으며 마쓰에 시는 일본의 현청 소재지 중 가장 인구가 적다. 1921년 1921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920년 1920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구축물 구축물(構築物)이란 댐, 수로, 콘베어시설, 펌프시설, 양수장시설, 방화벽, 옹벽, 수전을 위한 자가변전시설, 자가 발전시설, 수전용자가 철탑, 통신, 배전, 배급수시설 등으로 건축물로 분류하지 않은 공작물을 말한다. 물리화학 물리화학(物理化學)은 화학연구 중 화학과정을 질량·운동·열·전기·복사와 같은 물질의 물리적 성질로 해석하는 분야로 계면화학·고체화학·반응속도론·복사화학·양자화학·열역학·입체화학·핵화학이 있다. 음운론 음운론(音韻論)은 언어학의 하위 분야의 하나로 특정 개별 언어 또는 여러 언어의 소리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음성학이 말소리의 물리적인 발성과 인지를 연구하는 데에 비해 음운론은 주어진 언어 내에서 또는 범언어적으로 소리가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기술한다. 음운론의 중요한 연구 분야 중의 하나는 한 개별 언어 내에서 어떠한 소리가 변별적 단위를 이루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ㅂ/, /ㅍ/, /ㅃ/는 변별적인 소리 단위이며 이들을 음소라고 한다. 이들이 서로 다른 음소라는 것은 ‘불’, ‘풀’, ‘뿔’과 같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칭하는 최소대립쌍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음소라고 해서 음성적으로도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ㅂ/의 경우에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다른 소리가 될 수 있다. ‘박수’의 첫소리 /ㅂ/은 무성음으로 발음되지만 ‘수박’의 두 번째 음절의 첫소리 /ㅂ/은 유성음으로 발음된다. 이들은 음성적으로는 다른 소리이며 이러한 차이는 음성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또한, 어떠한 소리가 음소인가 아닌가는 언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한국어에서는 유성음과 무성음 두 소리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박수’와 ‘수박’의 /ㅂ/이 하나의 음소이지만 영어에서는 두 소리가 의미 차이를 유발하여 ‘pin’의 와 ‘bin’의 가 서로 다른 음소가 된다. 반면에 한국어에서는 ‘풀’의 유기음 /ㅍ/과 ‘뿔’의 무기음 /ㅃ/이 각각 독립적인 음소로 구별되는 데에 비해 영어에서는 ‘spin’의 무기음 와 ‘pin’의 유기음 가 음성학적으로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음소 가 된다. 이러한 음소에 관한 연구 외에도 음운론에서는 음절 구조, 악센트, 억양, 성조, 리듬 등을 연구한다. 또한 음운론의 목적은 연구 대상 언어에 존재하는 음형(音型,sound patterns)을 연구한다. 음운론이라는 용어 대신 음소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동일한 분야를 지칭할 수도 있으나 음소론과 운소론을 개념 상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음소론은 음소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분야를 지칭하며, 운소론은 운율적 특징인 소리의 높낮이(고저), 길이(장단), 세기(강약) 등의 악센트와 억양 등 운소를 연구하는 분야를 지칭한다. 음운론에서 의미를 구별하는 소리의 제일 작은 단위를 음소라고 한다. 음소는 처럼 로 표기한다. 홀소리의 수는 적게는 2개(압하스어)에서 많게는 55개(세당어)까지 있고, 닿소리의 수도 6개(로토카스어)에서 117개(꽁옹어)까지 다양하다. 전체 음운은 적게는 10개(피라하어), 11개(로토카스어), 12개(하와이어)가 있는 언어부터 많게는 141개(꽁옹어)까지 있는 언어도 있다. 단어의 뜻을 구별시킬 수 있는(변별적 기능)을 가지는 음의 집합 음운들의 분포 제약 ①음소들 상호간의 배열 제약 ②개별 음소의 분포 제약 어간의 기저형과 어미의 기저형이 통합하는 경우에 어간말이나 어미초의 형태음소가 교체,탈락,통합되거나 어간말과 어미초 사이에 새로운 음소가 첨가되는 것 어떤 시기와 다음 시기 사이에 일어난 변화들 통사론 통사론(統辭論, ) 또는 구문론(構文論)은 단어가 문장을 이루는 방법을 연구하는 언어학의 하위 분야이다. 문장론, 구문법 등으로도 불린다. 언어의 문법에서 (형태론에 대비하여) 구문론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언어를 교착어·굴절어·고립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구문론에서 주어·목적어·동사의 통상 배열 순서에 따라 언어를 SOV언어·SVO언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현재 통사론은 여러 방향에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통사론을 바라보는 처지의 한쪽 극단을 통사론이 궁극으로 인간 심리의 구조를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보는 실재론상 입장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 극단은 통사론을 추상성을 띤 형식 체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로 간주하는 플라톤주의 성격을 띤 처지다. 또 한편에서는 통사론이 분류론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언어철학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한다. 통사론의 여러 학설을 견해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생성문법의 기본이 되는 가정은 언어 구조가 곧 인간 마음의 구조라는 것이다. 생성문법가들은 내재 성격을 띤 언어(I-Language)를 대상으로 한 완결된 모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모형은 세계 모든 언어의 구조를 기술하고 문법상으로 적격한 문장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를 대상으로 한 이런 접근법은 노엄 촘스키에서 시작되었다. 생성문법가들은 대체로 문장의 성분 구조에 기초하여 통사에 관계된 분석을 시도한다. 생성문법은 문장의 형식상 구조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며 의사소통 기능에는 상대로 소홀한 편이다. 생성문법의 학설 가운데 다음 이론들은 이른바 촘스키주의로 분류된다. 그 외의 학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의존문법은 의존관계에 의해 구조를 정의하는 통사론으로, 성분구조에 따라 구조가 정의되는 구구조문법(생성문법에서 주로 채택하는 구조 분석 방식)과 대립된다. 의존문법론에서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가지는 의존관계가 중시된다. 의존문법으로 간주되는 학설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법성에 대해 이분법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확률론자들이 추구하는 문법이다. 이들은 대체로 신경망 이론이나 연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능주의 이론은 문장의 기능(대체로 의사소통 기능)에 기반을 둔 문법 설명을 추구한다. 기능주의 문법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론들이 포함된다. 그 외에 구노 스스무(久野 暲), 타미 기본(T. Givon), 버나드 콤리(B. Comrie) 등은 자신들의 연구 방법론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나 대체로 기능주의 문법가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의미론 의미론(意味論, semantics)은 언어학 및 논리학의 기본 분야 중의 하나로 말이나 글의 의미 또는 뜻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의미 또는 뜻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충분히 명확한 정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의미란 무엇인가?' 또는 '의미론은 무엇을 연구하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의미론의 논의가 시작되곤 한다. '의미론'이라는 용어는 서구에서 그리스어로 '의미하다' (σημαινω)는 단어에 바탕하여 만들어진 단어 시맨틱스(, , )의 번역 용어이다. 처음 이 단어를 만든 이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미셸 브레알로 알려져 있다. 1897년에 "Essai de sémantique" 라는 책을 내면서 의미론() 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해 냈다. 당시 브레알은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소리를 연구하는 '음성학'에 대비되는 학문이라는 개념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독일 태생의 논리학자 루돌프 카르납은 '의미론'을 표현과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파악하였으며, 의미론을 한편으로는 화용론, 즉 표현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대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사론, 즉 표현들 자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와 대비시켰다. 미국의 언어학자 는 의미론에서 밝혀야 할 개념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중 기본적인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개념들은 단어의 의미들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 (언어), 절 (언어), 문장, 텍스트의 의미를 논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 화용론 화용론(話用論)은 의사 소통시의 발화에 대한 언어론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언어 사용이 어떻게 바뀌는지, 화자의 의도와 발화의 의미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연구도 다룬다. 조음음성학 조음음성학은 음성학의 하위 분야로 어떻게 인간이 말소리를 만들어 내는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따라서, 조음음성학은 성도를 구성하는 조음 기관, 즉 혀, 입술, 턱, 입천장, 이빨 등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여 특정 말소리를 만들어 내는가에 관심을 가져왔다. 어떻게 소리가 만들어지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실험적인 방법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발화에서 혀가 입천장에 어떻게 접촉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하여 EPG (electropalatography) 가 사용된다. 음향음성학 음향음성학은 음성학의 한 분야로 말소리의 음향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음향음성학은 기본 주파수, 지속 시간, 한 파형의 평균 제곱 진폭 등 파형의 물리적 특성과, 파형을 주파수 영역으로 변환했을 때의 스펙트로그램의 특성 등을 연구하며 이러한 특성이 조음음성학 또는 청취음성학에서 논의되는 특질들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연구한다. 더 나아가서는 음소, 구, 발화 등의 추상적인 언어학 개념과 말소리의 음향적 특질이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연구한다. 청취음성학 청취음성학(Auditory phonetics)은 말소리의 청취 및 인식을 연구하는 음성학의 한 분야이다. 사계 사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전투기 전투기(戰鬪機, )는 폭격기, 요격기, 적 전투기같은 다른 항공기를 공격하거나 폭탄을 투하하여 지상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도록 개발된 군용 항공기다. 전투기들은 다른 종류의 군용기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작고, 빠르며, 기동력이 좋다. 전투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정찰 및 지상 공격 임무에 쓰이기 시작했다. 초기의 전투기들은 대부분 경기관총을 장착한 복엽기였다. 공중전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제공권 장악 또한 중요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러 전투기는 날개에 기관포를 장착한 금속제 단엽기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그러나 복엽기 시대의 흔적이 아직 남은 호커 허리케인 같은 전투기도 사용되었다.). 무장은 전투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기관포를 날개 하단에 설치하는 유형, 기수에 설치하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P-47처럼 다수의 기관총을 장착하기도 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로켓탄으로 무장하기도 했다. 전쟁 후에는 터보제트 엔진이 피스톤 엔진(프로펠러)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미사일이 장비되거나 기관포를 대체했다. 본격적인 제트 전투기 시대는 한국전쟁에서 Mig-15와 F-86 세이버 간에 공중전으로 열렸으며, 몇 년후인 1950년대 후반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에 금문도를 둘러싼 금문도 분쟁에서 처음으로 공대공 미사일이 사용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제트전투기는 세대별로 구분한다. 세대 용어는 러시아식 군사 용어로 F-35 라이트닝을 "5세대"로 언급한 것에서 유래했다. 연도 가이드라인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현대 제트 전투기들은 1개 또는 2개의 터보팬 엔진을 주로 사용하며, 무장은 단거리 및 가시거리 바깥 전투(BVR, Beyond Visual Range)용으로 중장거리 미사일을 장비한다(주간 경량 전투기는 2발 ~ 8발, F/A-18E/F 슈퍼 호넷이나 F-15 이글같은 제공권 전용 전투기는 10발도 장착). 과거의 주무장이었던 기관포도 주무장의 지위는 미사일에 내주었지만 여전히 근접격투전 등을 고려한 백업 무장으로 장비하며(항공기용 기관포는 20mm ~ 30mm 구경이 보통 사용된다), 다양한 유도 폭탄 및 더미 폭탄(유도 능력이 없는 폭탄)을 지상 공격임무에 사용한다. 또 목표 추적 수단으로 추적 및 탐색 레이다를 장비하며, 일부 국가는 전투기의 항공 작전 지원을 위해 급유기와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운용한다. 전투기는 공중 우세를 장악하기 위해 1차 수단이다. 적어도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공중 우세는 특히 정규군 간 재래전같은 현대전에서 승리의 필수 요건이다. 현대에서 현대적 전투기의 획득과 세력 유지를 위한 비용은 국방 예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투기는 목적에 따라 제공 전투기(공중우세 전투기), 다목적 전투기, 전투폭격기로 분류된다. 제공 전투기는 가시거리 밖 전투에 중점을 두고 설계되었고, 다목적 전투기는 공중전과 지상공격, 요격기로도 사용된다. 제공 전투기나 전폭기에 비해 항속거리는 떨어지는 편이다. 전폭기는 주로 지상공격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항공기 사이의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정찰용 항공기끼리 맞닥뜨리면서 싸운 것에서 비롯된다. 전쟁 발발 직후만 해도 초기의 정찰기들은 비무장인 관계로 딱히 별다른 상황이 아니고서는 상대편 조종사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관계는 얼마 가지 못했다. 1914년 8월 22일 영국군 소속의 2명의 조종사가 자신들의 기지 상공을 정찰하는 독일군 정찰기를 쫓겠다고 비행장 경비용으로 사용 중이던 루이스 경기관총을 비행기에 싣고 올라가 적기를 향해 퍼부었던 것이다. 놀란 독일군 정찰기는 격추되지 않고 황급히 돌아갔지만, 이때부터 연합군과 독일군 조종사들은 서로에게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각국 군부도 공중 정찰과 제공권의 중요성을 점차 깨달아감에 따라, 정찰기에 무장을 장착함으로써 상대의 공중 정찰을 제한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오래지 않아 최초의 전투 전문 비행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주요 무장은 기관총이었다. 솜씨가 좋은 조종사들은 자신의 권총이나 무기, 수류탄 등을 이용해서 상대편 조종사를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주요한 해결책 중 하나는 뒷좌석에 움직일 수 있는 기관총을 거치하거나 프로펠러를 멀찍이 피해 날개에 기관총을 장착하는 것이었다. 둘 다 단좌식 항공기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특히 날개에 기관총을 다는 경우는 조준과 장전의 어려움이 있었다. 초기에는 옆의 사진처럼 윗날개에 기관총을 장착하기도 했고, 프랑스군은 앞좌석에서 사수가 기관총을 들고 사격하기도 했지만, 결국 최상의 방법은 조종사와 프로펠러 사이에 조종사의 시선과 일치하도록 기관총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 기관총탄이 프로펠러를 명중시켜 기체를 추락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1915년 봄, 프랑스의 비행기 설계자 솔니에는 원시적인 동조 기구를 개발했다. 이 기구는 조종석과 프로펠러 사이에 설치된 기관총이 프로펠러가 총구 앞을 지나가면 멈추는 기구였다. 이 기구는 결과는 신통찮아서 프로펠러를 명중시키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고, 안전장치로 프로펠러 뒤에 철판을 붙여 프로펠러를 뚫지 못하게 해야 했다. 이것을 본 프랑스군 조종사 롤랑 가로는 어설픈 동조 기구를 빼고 철판만 믿고 전투에 나섰다. 철판에 맞으면 총탄이 조종사에게로 튈 수도 있었지만, 가로는 이 철판만 믿고 5대를 격추했고, 처음으로 "에이스"란 호칭을 받았다. 다른 조종사들도 당시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가로를 흉내냈고, 프랑스군의 독일군기 격추 실적이 갑자기 급상승했다. 독일이 급증하는 피격 사유를 알 수 없던 와중에 가로가 몰던 모랑솔으니에 N형 단엽기가 독일군 점령 지역에 추락했다. 독일군은 이 비행기에 설치된 기관총과 철판, 동조기구의 흔적 등을 분석하고 대비에 들어갔다. 독일군도 똑같은 원리로 기관총을 탑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총탄이 자기한테 튀지 않기를 기대하는 프랑스 방식을 독일군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독일군은 이 자료를 안토니 포커에게 넘겼고, 포커의 팀은 제대로 된 동조 기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펠러의 회전과 기관총의 사격 속도를 동기화하여 날개가 지나가지 않을 때만 기관총을 사격하게 하는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이로써 단좌식 전투기도 무장을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전투기가 무기로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전투기;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기를 포함한 모든 비행기의 개발속도는 매우 느렸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무와 캔버스 천을 사용한 복엽기에서 금속, 일체형 동체 또는 준일체형 동체의 단엽기로 추세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전투기 발전은 사실 군대가 아니라 민간 분야가 주도했다. 세계 최초 금속제 단엽기는 이미 1915년에 첫 비행을 한 독일의 융커스 J-1이었고, 쌍발 엔진을 장착한 민간 여객기인 융커스 F13이 실용화되면서 금속제 단엽기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비행기 설계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를 특징짓는 수냉식 엔진과 유선형 동체같은 혁신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호커 허리케인처럼 복엽기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거나, 아예 소드피시 어뢰공격기같은 복엽기도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주목할 만한 비행기; 제2차 세계 대전 중 항공 전투 분야는 군사 교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항공전의 영역을 시작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은 항공기의 군사 임무, 전술 교리가 다져졌다. 전투기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군용 항공기들의 전술 교리는 기술 발전에 따라 변한 것도 있으나,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큰 변화없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항공기의 지상군저지 및 차단 능력은 독일 전격전 전술 교리의 기본이 되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에 대한 항공 우세를 장악하지 못하자, 결국 영국 침공 작전을 포기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에르빈 롬멜 장군은 다음과 같이 항공력의 효율성에 대해 썼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기들은 1930년대 혁신으로 특징지어진다. 피스톤 기관 전투기들은 멧서슈미트 Me-262나 글로스터 미티어같은 제트 전투기들이 등장할 때까지 성능과 능력이 계속 발전하며 정교해졌다. 이 때의 많은 전투기들은 시속 600km 이상의 속도를 냈다. 기관은 대개 수냉식 기관이 사용되었으나, 일본의 경우 가와사키 Ki-61을 제외하면, 대부분 공냉식 기관을 사용했다. 탑재 무기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보다 크게 발전하여, 기관총을 1~2정 장착하던 것이 20mm급 기관포, 폭탄, 로켓탄, 다량의 기관총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전쟁 후반기에는 공대공 미사일의 시초라 할 독일의 R4M 로켓이 등장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등장한 전투기는 고도에 따라 같은 기종이라도 약간씩 다른 사양으로 개발되었다. 고고도 전투기와 중저고도 전투기로 나누어 개발하는 것이 1930년대 이후 관례였는데, 이 구분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항공기 개발 기술의 발달로 무의미해졌다. 또 다른 종류는 야간전투기다. 야간 전투기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처음으로 사용된 멧서슈미트 Bf-110이나 노스럽 P-61 블랙위도우처럼 레이다를 장비하여 야간에 전투가 가능하도록 개발한 전투기다. 주로 대형의 2인승 전투기가 이 용도로 새로 개조되었다. 다른 개발 유형은 전투폭격기다. 태평양에서 미국 해병대는 자신들의 보우트 F4U 콜세어에 폭탄 랙을 설치해서 운용했는데, 이것은 전투기가 적 전투기와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다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유럽 전선에서도 전쟁 후반기에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측은 전투기들을 폭탄과 로켓탄으로 무장시켜 지상군 지원에 투입시켰던 것이다. 이는 제트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폭격기의 몰락을 가져오는 시작이 되었다. 주목할 만한 전투기: 1세대 제트 전투기들은 터보제트 기관을 사용하여 매우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추진력을 얻고자 첫 번째로 터보제트 기관을 사용했다. 프로펠러의 효율성은 아음속 부분에서는 매우 떨어졌는데 초기 제트 기관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프로펠러와 비교된다. 기관포를 장비한 일직선 형태의 주익을 가졌고, 아직 레이다는 장비되지 않았다. 레이다는 일부 야간 전투기에나 장비되었다. 초기 제트 전투기들은 사실상 아음속 수준으로 속도가 빠르다는 점 외에는 아직 프로펠러 전투기에 비해 무장이나 장비, 설계 면에서 크게 나은 것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독일이 R4M이라는 공대공로켓을 개발하여 실전에 사용하기는 했으나 기관포와 기관총이 무장의 주류였고 공중전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방식의 근접 격투전이 전부였다. 1939년 8월 말에 독일에서 최초의 제트비행기인 하인켈 He 178이 첫 비행을 했고, 역시 독일에서 1941년 4월에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He 280전투기가 개발되어 첫 비행을 했다. 메서슈미트는 1942년에 첫 번째 실전 운용이 가능한 제트 전투기인 Me-262를 개발했다. Me-262 전투기는 1944년 말에 공중전에 참가하여 프로펠러 전투기보다 빨라 숙련된 조종사가 조종하면 프로펠러 전투기가 상대하기가 매우 힘들었음을 보여주었으나 전쟁 후반 독일의 연료 부족 때문에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고 Me-262는 피스톤으로 추진하는 프로펠러 비행기들을 구식 비행기로 전락시켰다. 독일의 제트 전투기에 관한 보고에 자극받은 영국은 1944년에 글로스터 미티어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실전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전쟁 말에 프로펠러 전투기에 대한 거의 모든 개발이 끝났다. 라이언 FR 파이어볼처럼, 프로펠러와 제트 기관을 같이 갖춘 전투기도 사용되기는 했으나, 1940년대 말에는 모든 새로 설계된 전투기는 제트기관만을 갖추게 되었다. 제트기관이 갖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초기 제트 전투기들은 완벽하지 못했다. 운영 수명은 시간 단위로 잴 수 있었다. 기관이 너무 크고 내구성이 약했으며, 추력은 느리게 증가했다. 처음으로 제트 전투기 간에 공중전이 벌어진 것도 이 때였다. 한국전쟁에서 독일의 제트 전투기 개발 기술을 습득한 미국의 F-86과 소련의 Mig-15간에 벌어진 공중전이 최초의 제트 전투기 간 공중전이었다. 그러나 두 전투기의 주무장은 기관총(F-86)과 기관포(Mig-15)였다. 주목할 만한 전투기 2세대 전투기들은 제트 전투기의 전투 능력 향상을 위해 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채용되었다. 본격적인 미사일 무기를 장비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의 일이다. 목표를 추적할 수 있는 표준 레이다가 필요한 AIM-9 사이드와인더나 AIM-7 스패로우 같은 유도 미사일은 이른바 "가시거리밖"(BVR, Beyond Visual Range) 전투를 가능하게 했다. 독파이트라 칭하는 가시거리 안에서 벌어지는 근접 격투전으로 바뀌곤 했지만 말이다. 비행기 설계자들은 후퇴익, 삼각익, 가변 후퇴익, 동체의 넓이 규정(Area Rule)같은 새로운 다양한 항공기술을 실험했다. 후퇴익 덕분에 이 세대의 전투기들은 초음속의 벽을 깰 수 있었다. 초음속 제트전투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세대의 특이한 점은 F-105나 수호이 Su-7 전투폭격기와 F-104 스타파이터와 같은 요격기였다. 요격기는 유도 미사일이 기관포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며, 전투는 가시거리밖에서만 벌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결과로, 요격기는 대형 미사일과 강력한 레이다를 장비하게 되었고, 속도를 우선시하여 상승력과 기동성을 희생시켰다. 기관포는 고정 무장에서 제외되고, 미사일만을 장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풍미한 "미사일 만능주의"는 1960년대에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미사일만으로 무장한 F-4 등이 소형 미그 전투기에 고전하면서 잘못된 사상임이 곧 드러나게 되었고, 다시 전투기들은 기관포를 장착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전투기; 3세대는 1세대에서 도입된 기술들이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에 항공학의 발전이 향상된 미사일, 레이다와 기타 항공전자장비의 도입을 통해 전투 성능을 향상시켰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도미사일 실전 운용 경험의 결과로 전투기 설계자들은 미사일이 만능이 아니며, 근접격투전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기관포가 다시 표준장비가 되었고, 기동성이 우선적으로 다시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전투기 성능이 대대적으로(F-4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폭격기인 B-24 리버레이터보다 더 많은 유효 탑재량을 자랑했다) 향상되는 동안, 이런 혁신들은 비용 증가라는 문제를 대두시켰다. 이전에만 해도 야간전투기, 중전투기같은 특정 임무에 특화된 전투기들을 개발해왔다. 증가하는 개발 비용 상승 문제의 대안으로 이제 특화시켰던 임무들을 융합하기 시작했다. 맥도널더글러스 F-4 팬텀은 원래 미국 해군의 순수한 함상용 요격기로 설계된 기종이었다. 그러나, 공군, 해군, 해병대 모두 사용하는 다임무 전투기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F-4를 사용하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F-4로 시작된 다임무(Multi-Role) 전투기는 4세대 이후부터는 전투기 개발의 기본 요구사항이 되었다. 주목할 만한 전투기; 4세대 전투기는 일반적으로 1970년대의 개념으로 설계돼서 대략 1970년 ~ 1989년까지 개발된 전투기들이다. 이 세대의 전투기 설계 개념은 그 전 세대 전투기의 사용 경험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았다. 4세대 전투기의 대표적인 예는 F-14 톰캣, F-15 이글, F-16 파이팅 팰콘, F/A-18 호넷 등의 미국 전투기들과, 소련의 MiG-29, Su-27 등을 들 수 있다. 급증하는 개발 비용 문제와 F-4 팬텀의 성공적인 운용 사례로 인해 이 세대에서는 멀티롤 전투기들이 인기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원래 F-4가 그랬던 것처럼 특정 목적을 위해 개발된 전투기들도 다양한 임무를 수 있는 능력을 요구받게 되었다. 항공 전자 공학 덕분에 개발될 수 있었는데, 개발 비용이 계속 상승한 관계로, 경제성 문제때문에 다목적 전투기 개발을 더욱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코얀 Mig-23이나 파나비어 토네이도같은 전투기들은 여러 종류의 임무에 특화된 파생형이 있지만, 다소 미라주2000이나 F/A-18 호넷같은 진정한 다목적 전투기들도 있다. 이전 시대의 요격기와 달리, 대부분의 현대 제공 전투기들은 근접격투전(dog-fight)을 위해 민첩하게 기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플라이 바이 와이어와 안정성은 이 세대 전투기들의 공통 사항이다. 또한 가시 영역(Within Visual Range, WVR)에서의 직접적인 전투의 필요성을 없애줄 것으로 기대했던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의 효용성이 기대했던 것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전투기의 기동성에 보다 중점을 맞춰서 설계가 이루어졌다. 4.5세대는 현재 운용 중인 전투기들을 설명하는 3세대와 비교했을때 공기역학 기술의 정체로 슈퍼컴퓨터로 가능한 제한적인 스텔스 기술을 포함하여 80년대와 90년대 마이크로칩 및 반도체 기술로 가능한 발전된 기술을 응용하여 전자기술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시기다. 이 세대의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사례는 맥도넬 더글러스 F-15E 스트라이크 이글와 보잉 F/A-18E/F 슈퍼 호넷이지만, 근본적으로 1970년대 F-15 이글과 F-18 호넷 설계의 업그레이드다. 기본적인 공기역학 설계가 큰 발전이 없는 동안, 슈퍼호넷은 글라스 콕핏, 고체소자 AESA 고정식 배열 레이다, 새로운 엔진, 무게를 감소시키는 복합재의 사용, 레이다 노출 면적의 감소 기술 같은 전자 기술을 발전시킨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전투기; 현재 최첨단 전투기 설계는 추력 편향 노즐, 복합재료 동체, 초음속 순항(supercruise), 스텔스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로 개발 중이다. 아직까지, 5세대 전투기가 실전에 투입된 기록은 없으며, 아직 개발 중이거나 F-22 랩터처럼 막 실전배치하기 시작한 것이 전부다. F-22는 현재 진행 중인 다른 국가들이 장기간 개발 중인 4세대 전투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의 미쓰비시 ATD-X, 중화인민공화국의 센양 J-XX나 인도의 중형 전투 항공기 프로젝트(Medium Combat Aircraft, MCA), 러시아의 PAK FA 등이 그런 예다. 대한민국에서 2007년부터 탐색 개발에 들어갈 대한민국 차세대전투기 사업(KFX)도 위와 같은 개발 추세에 따라 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나, 비용 문제 등으로 추진도 느린데다 논란도 적지 않다. 러시아에서 T-50 PAK-PA를 도입예정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1929년 5월 4일 ~ 1993년 1월 20일)은 영국의 배우이자 자선가이다. 할리우드의 황금시대에서 영화와 패션의 아이콘으로 활동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로부터 여성 배우 중 스크린 전설 3위로 선정되었고, 베스트 드레서 부문 명예의 전당 여성 배우로 선정되었다. 브뤼셀의 익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벨기에, 영국 및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암스테르담에서 소니아 가스켈과 발레를 공부한 후 1948년 런던으로 건너가 마리 램버트와 발레 수업을 계속했다. 그후 웨스트 엔드(West End) 뮤지컬 극장에서 코러스 걸로 활동했다. 몇몇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후,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의 주목을 받았다. 1945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소설 지지(Gigi)를 원작으로 한 1951년의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로마의 휴일(1953)에서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및 BAFTA 상을 수상한 첫 번째 배우였다. 같은해 헵번은 장 지로두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옹딘"에서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브리나(1954), 파계(1959),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샤레이드(1963),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어두워질 때까지(1967)와 같은 성공적인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 및 BAFTA(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1967년까지 BAF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세 번 받았다. 영화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BAFTA에서 평생 공로상, 세실 B. 드밀 상(Golden Globe Cecil B. DeMille) , Screen Actors Guild Life Achievement Award 및 토니상 특별상(Special Tony Award)을 수상했다 . 아카데미상, 에미상, 그래미상 및 토니상을 받은 12 명 중 한 명이다. 나이가 들면서 헵번은 적은 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나중에 만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에 헌신했다 . 1954년부터 조직에 기여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공동체에서 일했다. 1992년 12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1개월 후 스위스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노태우 정부 노태우 정부(盧泰愚政府, 1988년 ~ 1993년)는 6월 항쟁의 결과로 성립된 제6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이다. '노태우 정부'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별칭인 '6공'으로 흔히 부른다. 여기서 부르는 '6공'이란 제5공화국과 비교하기 위해 이 기간만을 칭하는 것이다. 민정당 총재 시절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시국수습방안을 발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유엔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5공 성립에 크게 관여한 인물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분적인 독재정치를 펼쳐 반감을 사기도 했다. 1981년 출범한 제5공화국은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율화 및 야간통행금지 해제 등의 유화조치를 취했으며, 스포츠 산업을 활성화시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다. 또한 무역흑자 재달성을 통해 혼란스러웠던 경제를 안정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한 통치를 했고, 야당 탄압을 통해 사실상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여기에 박종철, 이한열 등과 같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고문치사하는 사건이 터지자 국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결국 1987년 국민들은 민중 봉기를 일으켰지만, 정부는 호헌조치를 통해 '현 헌법을 통해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국민들의 불만이 극도로 커지자 결국 전두환은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를 통해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했다. 이를 통해 5년 단임의 임기를 기초로 하는 대통령제를 마련하였다. 한편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노태우는 유세 중 계란, 돌 따위를 맞고 유세 중단까지 선언하는 등 불상사가 잇따랐다. 이에 반해 야권의 김영삼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40%를 넘는 등 초반에는 승리가 유력시될 듯 했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실망만 안겨주었고, 선거를 얼마 앞두고 중대사고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노태우에게 표가 유리하게 돌아갔다. 마침내 이 선거에서 노태우는 김영삼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정식으로 취임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하여, 마침내 노태우 정부와 제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제6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중용(中庸)을 근간으로 화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층간ㆍ지역간의 반목을 해소하면서 새시대를 민주 발전과 민족 자본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정치 이념을 피력하였다. 그는 연설문 등의 초안을 검토 후 내용을 암기하여 그대로 자연스럽게 발표하였다. 민정당 대표로 있을 때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있을때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1987년 7월 10일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제2대 민정당 총재로 취임하였다. 1987년 12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새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원활한 여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5월 28일 야 3당 총재와 청와대 4자회담을 열어 구속자석방 등의 방침을 밝혔다. 대북관계를 포함하여 대외관계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노태우의 대통령직 취임 직후 5공 청산을 원하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을 주저했고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은둔하였다.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기에 6공 황태자 라는 별명을 얻은 박철언 등을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 등의 반발과, 차기 대권을 보장하지 않을 때 정권퇴진도 불사하겠다는 구 민주계(김영삼 계열)의 저항에 굴복하여 차기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김영삼에게 양도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보수 세력으로부터 쉽게 허락하였다, 물렁하다며 비난받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5공 청산의 기치를 내걸고 5공 인사들을 대부분 정리, 자진 퇴임을 유도하였으나 5.18 관련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었다. 이에 따라 야당과 운동권에서는 제5.5공화국이라며 반발했다. 한편 그는 6.29 선언으로 5공화국의 잔재를 털어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 했고 장기집권의 종식을 정치적 최대 목표 로 지명했다. 또한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고 민간인 출신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 출신 인사들을 기용했다. 이에 신군부 출신들은 집단 반발했으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고, 신군부 출신들은 노재봉이나 정호용, 장세동 대신 노태우를 지지한 점을 언급하며 반발하였으나 노태우는 이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이후 일부 신군부 인사들과는 척을 지게 된다. 또한 노태우는 인적 쇄신을 목적으로 김종인 등 각 분야의 민간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한편, 박정희, 전두환 정권 치하에 저항하여 대쪽 판사로 이름났던 법관 이회창을 영입하여 정계로 발탁하였다. 전두환은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와 연관하여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취임 직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사에 대한 간섭, 감시요원 배치를 없애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김준엽의 제안은 거부하였다. 취임 직후부터 그는 공산권이 붕괴되리라 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등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외교 담당자들을 초빙하여 연구를 지시하게 했다. 1988년 7월 7일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대북정책 6개항을 골자로 한 '7·7선언'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으며 8월 8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으로 불리던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호칭키로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으나, 사실상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문헌 자료에서는 중공보다 중국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의 신년사에서 그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제5공화국 시절 은근히 유행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1988년 여당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이에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0년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추진해 1990년 3월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노태우는 언론 자유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른 결과로는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한것이 있다. 또한 재야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해금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였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원장으로 함석헌을 위촉하여 서울평화선언을 채택케 했고, 1991년에는 장준하 등을 복권시키고 그해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윤보선 대통령과 함석헌 등을 국가 원로로 예우하였다. 그러나 잇단 조치들로 보수 세력과 군출신 인사들의 반감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1989년 5월 22일 전교조는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때 학교는 이미 전투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으며 창립식 직후 폭력적인 진압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다쳤다. 이날 참가하였던 교사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다. 5월 22일 저녁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교사 노조는 불법이라 천명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하였다. 이어 문교부 장관 정원식 역시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인사들에 대한 구속과 해임, 불이익 조치를 취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후 전교조 가입 인사 및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계속하였다. 우선 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학생 운동권들은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처음에는 노태우와 정원식의 마네킹을 화형하는 수준이었던 학생운동권들의 시위는 점차 분신자살로 이어졌다. 한편 정원식 장관은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지시했다. 그 뒤 노태우는 정원식 등과 협의하여 특별 지시를 내려 조치를 완화,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정부 시위는 격화되었고, 노태우는 전교조는 불법 조직이라는 뜻을 반복하였다. 노태우는 재임기간 내내 전교조는 불법조직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은 1993년 10월 28일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1년차이던 이날까지 전교조 복직 신청을 받아서 95%가 복직되었다. 1490명 중 1424명이 복직을 신청하고, 66명이 복직 신청을 거부한다. 한편 집권 직후부터 각종 살인 범죄와 강간 등의 범죄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1990년 10월 13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선언인 10.13 특별 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각종 깡패와 폭력조직의 활보와 야당 경선 내에도 깡패조직인 용팔이 등이 출몰하자 그는 1990년초부터 특별선언을 준비하여 발표한다. 내용의 골자는 '첫째,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 둘째,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 셋째,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 등 이었다. 10월 14일 노태우는 각부 장관들을 소집하여 10.13 특별 선언의 후속 조치로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자정 이후 심야영업 단속과 통제,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 단속, 공중질서 위반 집중 단속, 학교 주변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불량 비위생 식품 단속, 가정파괴범, 유괴 납치범, 좌익사범 등 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반사회성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또한 그는 보복성 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학생운동권들은 공안당국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범죄와의 전쟁 선언 후 2년 뒤인 1992년 초 각종 극성 범죄율은 약 5% 정도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통령 후보시절, 작전 통제권 환수추진을 공약하였고, 그 결과로 평시 작전 통제권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에 환수 했다. 1991년 11월 13일 노태우는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각각 추진하려던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의 핵포기 선언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이른바 "북방외교"를 천명하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이끌어냈다. 그는 7·7 선언 이래의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보좌진을 파견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연결하여 한소 정상회담과 한러 관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천황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89년 3월 4일, 국회에서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는데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공산권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유엔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1991년에는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는 남북한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0년 소련과 수교하였고, 소련 붕괴직후 러시아와 재수교 하였다. 1992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에게 직접 만남을 제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 그 해에 몽골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베트남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으로 알려진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직접 작성, 발표하였다. 동구권과도 공식 수교를 위한 접촉을 추진, 사절을 파견한 끝에 1989년 2월 1일 헝가리와 공식수교를 맺었다. 2월 27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조지 부시를 설득,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어냈다. 1990년 6월초 미국 방문 중, 미국에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체류소식을 접한 뒤 밀사를 보내 비밀 회담을 하였다. 비밀 회담 결과로 6월 5일 한-소 정상회담을 가졌고, 6월 6일 부시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고르바초프로부터 한국 방문을 약속받고 10월 1일 소련과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10월 30일에는 서울에 주소련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1년에는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게 되자, 북한과의 동시 가입은 있을수 없다는 국내 보수단체들의 집단반발을 무릅쓰고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발표를 수락했다. 한편 국민 여론과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및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추진하였다. 1990년 5월 24일 비행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가이후 총리와 1차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로부터 사과 성명을 얻어내기도 했다. 한편 1989년 초부터 통일원 등에 지시하여 서울 올림픽과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로 일시 중단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도 다시 추진하였다. 1989년 대북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9월 11일 국회 본회의에 출석,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통일논의를 발표하였다. 1990년 1월 10일 신년 연두 회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고령이산가족 왕래 및 금강산 공동개발 등을 추진할 것을 제의했다. 그의 제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수락하였다. 1990년 6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다시 그에게 남북대화 재개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이 7월 3일로 예정되었다. 그해 7월 3일의 남북고위급 회담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하였지만 남북간의 대화분위기가 지속되자 7월 20일 남북한 민족대교류에 관한 특별담화문을 작성, 발표하여 8월 13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산가족 상봉및 남북 자유 방문, 안전귀환 상호 보장 등을 북측에 제의하였다.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이 수용하면서 9월 4일 연형묵 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 90명 일행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에 일부 보수단체에서는 그들을 처형해야 된다고 시위를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대화가 진전되어 1990년 9월 5일 남북총리회담이 개막되었다. 회담 2일차인 9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연형묵 총리를 독대, 연형묵은 그에게 단독 면담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한편 UN 가입 정책도 추진하여 1991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UN가입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구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가입시켜야 한다고 하여 결국 남북한이 동시 가입하게 되었다. 1992년 8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교수립을 개시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지 43년만에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하였다. 그러나 이때 중화민국과의 단교 문제로 일부 보수우익단체에서 반발했고, 중화민국 측에서도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중화민국은 노태우의 중화인민공화국 수교 결정에 대해 항의한 뒤, 단교와 동시에 외교적인 보복의 뜻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양자가 수교하려면 먼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단교해야 했는데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용할리 만무했다. 1988년부터 노태우와 당시 문교부 장관 정원식은 전교조를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고 단속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학생운동권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불법화 선언과 함께 전교조에 결성에 참여한 오종렬외 1500명의 교사들을 해직, 파면시켰으며, 이에 반발하여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조리 징계, 유급조치, 퇴학 등을 가했다. 그 뒤 조치를 완화시켜 세종대학교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켰지만 유급과 징계, 정학을 가한다. 1500명의 전교조 관련 교사 해임과 파면, 징계에 대한 반발과 증오, 강경대의 경찰 폭행치사 사건 이후 연이어 터진 김귀정(金貴井)의 시위대 압살 사망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은 정원식 퇴진 데모와 반 정원식 시위, 정원식의 허수아비와 마네킹을 놓고 정원식 화형식 등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 뒤 정원식은 한국외국어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1년 덕망높은 교육자의 발탁을 이유로 노태우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었다. 한편 노태우 정권을 군부독재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1989년 이후 다시 분신자살과 투신자살 등을 감행하였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분신자살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학생들의 협박과 비난이 계속되었고, 정원식 사건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온 정원식에게 대학생들은 계란, 유리조각, 밀가루, 페인트 등을 투척했다. 6월 4일 노태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사건에 대한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며 특별 대책을 주문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에게서 정원식의 계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접한 노태우는 "스승의 마지막 강의를 폭력으로 짓밟은 오늘의 학원폭력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며 바로 관계자를 소집한다. 이어 노태우는 학생들의 패륜을 질타하며 정원식, 김지하 등에 대한 폭력 사건에 대한 엄벌을 지시하였다. 노태우는 6월 4일 각부 장관과 경찰, 검찰, 문교부 인사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사회적 윤리와 도덕성, 인성을 회복하고 학원가에 만연한 그릇된 풍토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라고 지시했다. 당초 노태우 정부는 경찰 수사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으나 보수단체들의 시위로 검찰수사로 사건을 확대했다. 노태우는 바로 검찰총장 정구영을 불러 엄단을 지시했다. 검찰과 경찰의 합동 수사본부가 조직되고 6월 5일 오전 외국어대학교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시작, 교내 주변을 탐문수사하여 정원식 규탄시위에 참여한 학생 310명을 체포, 연행했다. 1991년 국제로터리클럽 폴해리스 명예회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장준하를 명예회복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그가 수용하여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가 치러지면서 30여년만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3당 합당을 계기로 국회에서 개헌선을 넘는 거대여당을 출범시켰으나 보수 진영의 반발과, 국민의 반발, 주택난, 물가고 등 제반정책의 실패로 국내에서 정치적 통합력을 기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무리한 서울 주변지역 개발정책으로 일산 신도시와 성남시에서 바다 모래로 지은 아파트들이 발견되어 책임자를 바로 문책했지만 국민의 항의 여론은 계속되었다. 노태우는 후계자로 박철언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민주계의 김영삼의 반발로 취소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후계자로는 박철언 등을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그에게 항의하며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긴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1990년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6공 황태자 라는 별명을 얻은 박철언을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3당 합당으로 들어온 김영삼 등의 반발과, 차기 대권을 보장하지 않을 때 정권퇴진도 불사하겠다는 구 민주계(김영삼 계열)의 저항에 굴복하여 차기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김영삼에게 양도했다. 이를 두고 군사정권 후신 세력으로부터 "쉽게 허락하였다, 물렁하다"며 비난받는 계기를 제공했다. 외교, 통일분야에서의 노태우 정부 5년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방정책으로 불리는 외교정책을 통해 일단 양적인 면에서 한국 외교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국내외의 외교환경이 만들어준 개연성의 덕택이 컸다는 점에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한국의 대(對)공산권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던 기존의 외교 정책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제5공화국까지의 북방외교는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고 교역·통상분야도 간접·제3자 형식의 미미한 규모였던 것에 비하면, 제6공화국의 출범과 동시에 가속화된 북방정책은 지극히 바람직스러운 것이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 ·7선언)에서 남북간에 민족공동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 등 6개항 원칙을 선언하면서 사회주의권과의 관계개선의 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는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북방외교"(또는 "북방정책", Nordpolitik)는 곧 가시화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소련과 헝가리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 수립이 시작되었다. 1988년 8월에 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협정 체결(1988년 10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주(駐)헝가리 한국대표부가 개설)은 북방정책의 첫 결실로 평가된다. 1989년 동구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수교한데 이어, 같은 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도 수교하였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거행되는 히로히토 일왕 장례식에 공식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정부부문 사절로 파견했다. 1990년 1월 인위적 정계개편(삼당 합당)을 시발로 하여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1990년 초 공산권 국가들과 일거에 국교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몽골, 루마니아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이루고, 4월에는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드디어 9월 30일 한-소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수교의 정책 수단은 국내경제력이었다. 헝가리와 수교시 6억2500만 USD의 상업 차관을 약속하였고, 한-소 수교시에는 30억USD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1990년 11월 헝가리의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한국의 유엔 가입 등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공산권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이끌어 냈다. 1991년 소련 붕괴직후 러시아와 재수교하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성립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및 알바니아와 1991년에 수교하였다. 1992년 1월 노태우-부시 정상 회담이 있었고, 2월에 남북한은 나진-선봉 지구 개발 공동보조에 합의하였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국가주석 등을 만나 정상회담을 개최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8월)하였고 같은 해 몽골 및 베트남(12월)과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구소련(舊蘇聯)에서 독립한 신생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1991년 독립), 아르메니아, 조지아 및 또 다른 신생국인 몰도바(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그리고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도 이해에 수교하였다. 그 밖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등 1992년에만 모두 18개국과 수교하여 총수교국數가 1백70개국으로 늘어났고 정상회담이 12회, 외무장관회담이 41회에 이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외교를 벌였다. 특히 수교국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구소련(舊蘇聯)에서 독립한 나라들과 잇따라 국교를 수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밖에도 주요 공산권 및 제3세계국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노태우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북방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북방외교의 성과는 1970년대 말 중국 공산당의 실용주의 노선 채택, 냉전체제의 종식과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그에 유발된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경제개혁 및 개방 등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국의 경제성장(과장된 면이 많았다)과 국민적 논의의 대두라는 국내 정세변화가 맞물린 결과이다. 다만, 급변하는 정세변화에 한국이 조금 더 빨리 진지하게 대응하고 그 주체가 정부나 정치권 일부에 그치지 않고 정보개방과 국민적 의사의 결집에 의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라크(1989년), 몽골, 예멘(각 1990년)와도 수교하였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1988년에는 7 ·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노태우 정부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제시되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남북한간의 적극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관계 개선하는 일에 협조할 뜻을 선언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두 개의 주권국가의 연합을 과도기 단계로 인정한 점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북한은 민간교류를 원하는 당국자간의 교류를 회피해 왔지만,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남북화해가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남한의 교류제의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1990년 9월부터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는 동안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리고, 남북의 축구팀이 통일축구대회를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가졌으며, 1991년 4월에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5월에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했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非核化)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남북한 공동으로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1992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산 가족 상봉에 큰 기대를 걸고 8차 고위급 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키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대신 북한은 비전향 장기수인 리인모 노인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회담의 대변인 이동복은 이때, 이른바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의 주역이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대한 대통령의 지침을 받기 위해, 평양의 상황실은 서울로 청훈(請訓)하였는데, 서울로부터 답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동복은 엉뚱한 훈령을 정원식 대표에게 보고했다. 노태우 정권하에서 경제는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고,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10 민중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받아들였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전두환 정권과는 차별화 전략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며,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하여 진행하였고 이후 5공 청문회를 하는 등의 제5공화국의 비리를 근절·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72년 이후 15년 만에 민간인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데에는 의미가 있지만 노태우 역시 군인 출신 정치인이고 일각에서는 군인 출신 정치인임을 들어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며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과 제5공화국 출신으로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 또한 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퇴임한 5공 비리의 수괴인 전두환이 징역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라 백담사에서 은거한 점을 미뤄봐도 역시 5공비리 청산에 미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 노력하였다는 점과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폐막,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노력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질서를 타파하려는 등의 노력을 보고 '물태우', '5.5공화국'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3당 합당으로 현재의 한나라당 계열 정당(당시 민주자유당)에 들어온 김영삼 이전을 군부정권으로 파악하여 군부정권 최후의 통치자로 보기도 한다. 북방외교, 7.7 선언 등은 미국에의 절대 의존적인 외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김영삼 정부 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 1993년 ~ 1998년)는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이다. 공식 명칭은 문민정부(文民政府)로, 군인 출신이 아닌 일반 국민이 수립한 정부라는 뜻으로 이전의 군사 출신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고,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일명 "조문파동")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임기 말, 아들 김현철 비리와 IMF 구제 금융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출범했다.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의 최초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불리게 되었다. 삼당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제5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 수감시켰다. 김영삼은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칼"을 들어 정치·경제·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일시에 쇄신하고자 했다. 2월 27일, 김영삼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고 공개한 본인의 재산을 보면 김영삼과 부인 손명순 여사는 상도동 자택과 거제군 장목리 전답, 승용차, 헬스클럽 회원권, 선박 등 모두 6억 8천 601만 3410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영삼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종용했고, 삼부요인과 고위 공무원들이 연이어 재산을 공개하게 되었다. 3월 13일, 김영삼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런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최근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어 그때그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인상은 주지 않도록 속도를 조정하도록 하라"고 부처에 지시하였다.5월 13일 5·13특별 담화에서 그는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했다. 그 뒤 반공주의 극우 세력의 반발이 심화되자 5.18과 12.12 군사반란 및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처벌문제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라고 발언하여 결말을 뒤로 미루었다. 1995년 6월 3일에는 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전국 36개 단체가 모여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열었으며 시민, 학생 등 1만여명,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를 갖고 노동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다. 6월 22일에는 경제부총리 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7월 율곡비리 사건을 조사하여 비리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8월 12일에는 긴급명령을 발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문민정부는 1993년 취임 직후부터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 관련 특별담화 발표와 개혁과 부패 일신을 외치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제거하여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그해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그 밖에 공직자윤리법도 도입하여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6월 29일 육군 상록수 부대를 소말리아 평화유지군(PKO)으로 파견하였다. 1993년 2월 취임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강제 해직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들 중 일부를 사면, 복직시키고, 전교조의 활동을 허용해주었다. 6월 13일에는 “5·16 군사 정변은 쿠테타”라는 발언을 했다. 5·16 군사 정변을 쿠테타로 정의한 뒤, 각 교과서에 군사혁명으로 실린 기술을 쿠테타나 정변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 출신 및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듬해 1994년에는 김문수, 이재오, 안상수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영입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시켰다. 이후 군사정권과 관련 없는 홍준표·오세훈 등의 신진 관료출신과 법관출신들도 등용하였고, 군사정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박노해·김남주 등 언론인과 문인들을 대대적으로 감형,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4월 15일에는 3대 정치개혁 법안(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에 서명함에 따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 구축의 전기를 이룩했다. 1994년 3월 15일 당시 여야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정치개혁법을 공포하였다. 1994년 말 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여 이듬해인 1995년 6월 27일에 5.16 군사정변 이후 처음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7 쿠데타에 대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반란죄,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 이들에 대한 국민적 처벌 요구를 애써 외면했다. 같은해 10월 19일 통합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이 발생하여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1995년 12월 12일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가능하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이에 정부는 고심 끝에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1995년 11월 말 전격적으로 구속 수감하였다. 1995년 12월 21일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의 명예 회복을 위해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1995년 8월 2일,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전두환·노태우의 해명을 요구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의 혐의에 대해 반란죄,내란죄를 따지지 않고 신군부 인사들을 불기소 처분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폭로된 이후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수사를 명하였다. 11월 24일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헌법재판소에 검찰의 5.18 사건 불기소 처분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1995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되었고 12월 3일에는 전두환이 구속된다. 12월 19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이와 함께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밝혀지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전두환과 노태우등 관련자 8명을 구속 기소한다. 김영삼은 군정과의 관계를 끊고자 1996년 2월,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첫 전당대회를 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6년 8월, 각각 사형(전두환)과 징역 22년형(노태우)을 선고받았으나 96년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전두환)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고 그 이듬해인 1997년 12월 20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여 석방함으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년여 만에 출옥하였다. 사면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당시 김영삼의 청와대는 김대중 당선자(12월 18일 대통령당선)에게 방문하여 제안하여 협의로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시켰다고 전해졌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터진 한총련 사태로 1200여명의 전경,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96년 12월 26일,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통과로 노동계와 정계에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듬해 1월, 노동법파동으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1997년 1월 7일, 김영삼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법개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성명으로 노동계와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후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반대 총파업이 벌어졌다. 1월 23일에는 한보철강이 부도로 도산했다. 이때 한보회장 정태수는 구속되었고 한보사태 수사중 김영삼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한보비리에 연루되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1997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의 지속적인 악화와 정권의 인기에 연연한 독단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 등이 맞물려 점차 국민의 지지는 시들해졌다. 임기말에는 노태우, 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면하였다. 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12월 18일에는 국민회의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 안전 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 안전 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3월 18일, 검찰 소환을 받은 권영해는 조사중에 자해하는 소동을 빚었다. 권영해 부장 후임으로 1998년 3월 취임한 이종찬 안기부장은 안기부에 대한 사정 작업과 정치 중립화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 국가 정보원으로 명칭도 변경하였으나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불법 전화 도청 등의 행태는 계속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 1997년 12월 20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은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난 지 8개월여 만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두 사람에 대한 사면을 합의, 발표했고 이로써 비자금 사건은 종결되었다. 취임 직후부터 김영삼은 정통성 확립에 중점을 기울였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서 찾으려 하였다. 이 때문에 보수인사들로부터 이승만, 박정희를 건너뛰었다는 반발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1993년 8월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환국하는 사업을 지시, 추진했다. 8월 5일 국립묘지에 임정요인 묘소를 신설하게 했고, 1993년 말부터는 문화관광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총독부 철거 지시를 내렸다. 문민정부는 이른바 '신외교'를 표방하였다. 1996년 10월 프랑스 파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여파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역에 확산시켜 개혁·개방화 체제로 유도하는 것을 그 정책목표로 삼았다. 김영삼의 대북정책은 남·북간의 '공조·공영'에 있다고 천명하고 있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역대 전임 정권이 취해왔던 '대북 우위를 견지하는 흡수통일'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노태우 정부 때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와 함께 화해분위기가 지속되어 1993년 취임 초 김영삼은 북조선의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하여 호응을 이끌어내,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하고, 남북고위급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를 준비하려 하였다. 그러나 1994년 7월에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1993년 취임 초부터 북측과 연락,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남북한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199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여 김영삼 정부는 갑자기 1차 북핵위기를 맞았고, 이후 대북정책이 '냉, 온탕'을 왔다갔다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4년 6월에 일어난 1차 북핵 위기는 미국이 핵시설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는 등 파국으로 치달랐다. 김영삼 정부도 공습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 이를 저지하였다. 위기는 대북 특사 지미 카터와 김일성이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제1차 북핵 위기) 지미 카터의 방북시, 김일성은 지미 카터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갑작스러운 북미관계 개선으로 김영삼 정부는 당황했고 6월 18일, 북측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무조건 수락했다. 불과 하루만에 북측의 놀라운 태도변화로 정부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국제적인 해빙무드를 거스를 수 없어 북측의 정상회담제의를 무조건 수락했다. 김영삼은 역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7월 2일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 절차도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이제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대한민국의 통일은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7월 9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측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조문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정상회담까지 약속했던 남북 관계는 불신만 커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정부는 대외적인 여론을 주시하며 국내의 김일성 참배여론을 원천봉쇄했으나 전남대학교에서는 김일성분향소를 만들어 250여명의 학생들이 조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구 군사정권 관계자들이 김일성 빈소 조문 사건을 문제삼아 재기의 조짐이 보이자, 김영삼 정부는 일부 주동 대학생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토록 하였다. 1995년 6월 25일 정부는 북측에 대한 식량 지원(쌀 15만톤 규모)을 했다. 1996년 여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18일,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여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된다. 1997년 2월, 황장엽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했다. 7월 10일, 망명한 황장엽은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북측의 전쟁준비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같은시기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이한영씨가 분당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 1993년 7월에 한미 관계가 처음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측과 미국이 대한민국을 배제한 채 직접 핵 협상을 하면서 김영삼과 클린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과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충돌한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측에 보냈지만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은 상당히 화를 냈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폭격 계획과 더불어 제네바 합의 체결을 둘러싸고 한미간 갈등이 나타났다. 1996년 10월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는데(→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 컴퓨터분석관으로 근무하던 김채곤(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돼 미 연방교도소에 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과정에서 클린턴과 김영삼의 갈등은 더욱 커졌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10월, 일본의 총무청 장관인 에토 다카미는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도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는 발언을했고 이후 1996년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도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발언하는 등 일본의 정계에서 식민지 지배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는 발언들이 끊임없이 나오자, 이에 김영삼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한·일 해군력의 현실태를 보고 받고는 이지스함 2척 보유 정책을 추진한다.(1995년 5월 2척 계획추진에서 시작, 1998년 1월 31일 국가부도로 한국형 구축함 사업 예산 전액삭감, 이후 김대중 정부 때 사업 부활하면서 3척 계획) 이후에도 한일 관계는 순탄치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와중에 97년 겨울, 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간섭해서 지원을 포기했다하는 사람들도 있다.) 1993년 9월 14일 ~ 16일까지 프랑스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한-불 정상 회담을 갖고,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 측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단, 그 구체적인 시기와 절차는 실무협의하기로 했다. 그 결정의 상징으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 1권을 9월 15일 한국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고속철도 핵심기술 이전 및 차세대 고속전철 개발 협조를 논의했다. 1993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한 슬로바키아, 리히텐슈타인과 수교하였다. 1995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1992년 독립)와 수교하였다. 라오스, 키프로스(각 1995년), 캄보디아(1996년)와 수교하였다. 1994년 11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이때의 양국 정상회담(김영삼-피델 라모스)에서 필리핀 통신사업과 대형 건설사업에 한국 기업이 적극 참여하도록 배려한다는 약속을 하는 등 기존의 대한 우호정책을 재확인하였다. 취임후 '신경제 100일 계획'을 세워 경제정책을 펼쳤다. 경제제도의 개혁보다는 경기 활성화에 역점을 둔 신경제 계획은 금리 인하, 재정 조기 집행, 기업 투자 유인 등이 주내용이었다. 이어 ‘신경제 5개년계획’도 발표했다. 중소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경쟁체제 도입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 현상이 발생했다. 1993년 8월 12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이다. 은행의 가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바꾸는 이 조치로 금융시장이 위축되고 소규모 사업자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워지는 등 부작용이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경제개혁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93년 11월 1일에는 금리의 제2단계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1993년 12월 정부는 수년 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타결지었다. 보호무역주의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국제경제경쟁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대해 선진국이 핵폭격과 같은 피해를 주는 것으로서, 대한민국은 이 협정으로 상품, 금융, 건설, 유통,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외국에 문호를 열어 놓게 되었다. 정부는 시장개방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96년 9월 12일 서방 선진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시장개방정책에 맞추어 낙후된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화’를 강조하고 1995년 1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국경제는 1995년 10월 현재 수출사상 처음으로 1천억불을 돌파하고, 1996년 말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불을 돌파하여 선진국을 바짝 뒤쫓는 수준에 올라섰으나, 무역역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어 1996년의 경제성장률은 7%를 밑돌게 되었다.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주식회사 등 재벌 기업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대통령인 김영삼은 11월 10일 강경식 당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 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장기적인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1997년 7월, 기아자동차가 부도위기에 빠져 대한민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 정부의 기아차사태와 대기업 연쇄부도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으로 경제는 더더욱 수렁에 빠졌고 10월이 되자 아시아의 연쇄적인 금융위기로 한국도 IMF사태라는 위기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고 종합주가지수는 500포인트 밑으로 추락했다. 11월이 되자 상황은 더더욱 심각해져 11월 18일, 환율은 달러당 1000원선을 훨씬 뛰어넘어 거래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1월 19일, 김영삼은 경제팀 일부를 개편하고 강경식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이었던 임창열을 경제부총리에 임명한다. 그날 임창열 부총리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환율제한폭을 사실상 철폐했다. mbc와의 회견에서 임창열은 "우리 경제의 외환보유고가 10월말 현재 300억불에 달하고 수출이 10월부터 흑자기조로 바뀌면서 그런 면에서는 수출이 흑자가 나고, 다만 우리 국민들이 외환을 좀 아껴쓰셔서 여행이라던 지 해외 유학이라든지 이런 비용을 줄이는데 동참해 주시면 무역외 수지도 적자를 대폭 감축해서 외국에서 돈을 덜 빌리고도 경제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며 IMF구제 금융 가능성에 대해서는 "IMF 차관들을 얘기하시는데 IMF라는 데는 돈을 그냥 빌려주는데 가 아닙니다. IMF에서 돈을 빌려 줄 때는 정책의 조정을 그것도 강도 높게 조건을 붙여서 돈을 빌려줍니다. 그렇게 되면 은 지금 외국에서 우리를 보기를 금융 감독이 제대로 되고 있지를 않다 이렇게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융 감독을 포함해서 금융 개혁 법안은 반드시 조기에 확정이 되어서 국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대책이 서야 된다고 믿습니다."라는 발언으로 IMF구제금융에 대한 가능성은 사실상 부인한다. 그러나 다음날인 1997년 11월 20일, 환율은 제한폭을 철폐하자마자 환율은 무려 100원이상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임창열 총리와 스탠리피셔 IMF부총재는 1시간 가량 밀담을 나누며 IMF구제금융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날 각 언론사마다 IMF가 뭐냐는 시민들의 항의와 투서가 빗발쳤고, 다음날 정부는 IMF에 20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한다. 11월 29일, 종합주가지수는 사상최악인 400포인트 이하로 추락했다. 11월 30일, 정부는 IMF와 협상을 벌였다. IMF의 지원조건은 저성장과 고실업이었고 이를 시행하라며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한국은 97년 12월 3일, IMF를 받아들였다. IMF협상과정에 대해 시민들의 김영삼정부에 대한 지탄이 쏱아졌다. IMF를 받아들인 직후, 경제는 끝을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환율은 12월 11일, 1700원대까지 폭등했다. 12월 12일, 증권업계 4위인 동서증권이 부도처리됐고 IMF는 IMF협약을 반드시 준수하라고 한국정부를 협박했다. 12월 23일, 환율은 사상최악인 2000원대까지 폭등하고 대한민국의 외채는 무려 1천 6백억달러에 달했다. 결국 김영삼의 임기말이었던 1997년은 IMF사태로 마무리되었다. 1995년 8월, 교육부는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게 하였다. 1996년부터 모든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개명하게 된다. 이 당시에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쇠말뚝 뽑기운동이 일어났으며, 구 조선총독부 철거 작업을 실시, 같은해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에 들어갔으며 총독부는 1996년 11월에 완전 철거되었다. 예술가와 작가들의 반정부성 작품과 사회비판을 허용하였으며, 언론의 사회비판 역시 전면 허용하였다. 1994년 군사 정권에 의해 수감되었던 시인 김남주를 석방했고, 1994년에는 노동 시인 박노해를 석방하였다.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음란죄로 기소된 마광수 역시 무죄 판결을 내려 활동을 보장하였다. 1993년 2월 25일 취임 직후 총리에 황인성을 임명하는 등 2원 14부 6처의 장관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박희태 법무부 장관, 박양실 보사부 장관 등의 대학특례입학, 부동산투기 의혹 등이 제기되었고, 40대의 나이에 임명된 서울시장 김상철의 개발제한구역 내 자택 불법건축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법무, 보사부 등의 3개 부처 장관 및 서울시장이 경질되었다. 1993년 10월 서해훼리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이 교체되었다. 1993년 12월 8일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쌀시장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공약이 지켜지지 아니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결국 취임 후 2번째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황인성 국무총리가 경질되고 이회창 감사원장이 후임 총리로 전격 발탁되었으며, 또한 쌀시장 개방 합의의 책임을 물어 이경식 경제부총리, 한완상 통일부총리 등 14부처의 장관이 경질되었다. 1994년 4월 통일정책조정회의의 관할 문제로 이회창 국무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격 사표를 제출하였고,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수리하였다. 후임에 이영덕 통일부총리가 내정됨에 따라 후임 통일부총리에 이홍구가 내정되었다. 1994년 12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고,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하는 등의 건국이래 최대 규모의 정부조직 개편이 단행된 후 개각이 단행되었다. 국무총리에 이홍구가 내정되었고, 경제부총리에 홍재형 재무부 장관이 내정되는 등 18부 장관이 교체되었다. 1995년 3월 지방자치제 연기 공작을 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덕 통일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나웅배가 내정되었다. 1995년 12월 임기 4년차를 앞두고 국정 일신 차원에서 김대통령은 개각을 단행하였다. 국무총리에 이수성 서울대학교 총장이, 경제부총리에 나웅배 통일부총리가 이동 배치되는 등 24개 부처 중 절반인 12부 장관이 교체되었다. 1996년 8월 경기침체의 책임을 물어 나웅배 경제부총리를 경질하고 후임에 한승수 전 상공부장관을 내정하는 등 경제부처 장관 6명을 교체하는 개각이 단행되었다. 1996년 10월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각종 군내 사고 및 무기도입 비리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경질되었다. 1996년 11월 공로명 외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유종하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이 내정되었다. 후임 외교안보수석에는 반기문이 내정되었다. 1996년 12월 농림부, 문체부, 통상산업부 등 8개 부처 장관이 경질되는 중폭 개각이 단행되었다. 1997년 2월 한보그룹 부도 이후 한보그룹에 대한 제일은행 등의 대출에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 씨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한보그룹 관련 정계 스캔들에 김우석 내무부 장관이 연루되는 등 한보그룹 관련 정치 스캔들로 인하여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였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포함하여 7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중폭 개각을 단행하였는데, 이수성 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고건 전 서울시장이, 경제부총리로 강경식이 내정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8월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사실상 임기 마지막 개각을 단행하였다. 법무부, 내무부 등의 부처의 장관이 교체되었다. 1997년 11월 외환위기 직전에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경질되고 후임에 임창렬이 내정되는 등 일부 부처의 개각이 단행되었다. 김영삼 정부 5년간 대규모 인명 사고가 빈번해 이시기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문민정부라고 불리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민주화 개혁을 시도했지만, 임기 말 아시아 국가 전반에 들이닥친 경제위기를 잘 대응하지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원조를 요청하는 치욕적인 실정으로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후임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정권교체를 초래하고, 퇴임하였다. 뉴에이지 뉴에이지()는 20세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 및 사회활동, 뉴에이지 음악 등을 종합해서 부르는 단어이다. 뉴에이지란 이름으로 서로 단합된 활동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어떤 운동을 하는지 정의하기는 힘들다. 뉴에이지 운동의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지만, 대부분이 갖고 있는 속성이라면, 유일신 사상을 부정하고 범신론적이며, 개인이나 작은 집단의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뉴에이지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파주시 파주시(坡州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서북쪽으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및 장풍군과 접한다. 휴전 협정이 조인된 판문점이 있으며, 통일로·자유로 등의 도로가 있다. 남서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가 있고, 남쪽으로는 고양시, 동쪽으로는 양주시, 동북쪽으로는 연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한국 전쟁 이후 의정부, 양주시와 함께, 경기도 최전방의 군사도시로, 수도권 이북지역의 군사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1996년 3월 파주군에서 도농복합시 형태의 파주시로 승격하여 금촌읍이 분동되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운정신도시 개발로 시의 남부 지역의 모습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2009년 7월 1일에 기존 경의선 선로를 활용한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개통되었다. 행정구역은 4읍 9면 7동이다. 파주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증보문헌비고'라는 책에서 언급되는데, 원래 고조선 땅이었다가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속했고 초기엔 백제의 땅이었으나, 475년 고구려가 파주의 영토를 흡수함으로써 파주는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그 뒤 신라 진흥왕이 파주를 차지 하였다. 1170년 정중부의 난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 바로 옛 장단군 지역이다. 파주라는 이름은 1459년 세조에 의해 목으로 승격되면서 제정되었는데, 파주라는 지명은 파주의 옛 지명 파해평사의 파(坡)와 고을이라는 뜻의 주(州)자를 합하여 이루어졌다. 경기도의 중앙에서 약간 북서에 위치하고 북경에는 임진강, 서경에는 한강이 흐르며 지질은 석회암지대로 되어 있어서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여 있다. 광주산맥과 그 지맥의 반은 대체로 저평하고, 특히 임진강 하류와 한강 연안은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농경지가 넓다. 도내에서 보기 드문 온화한 지역으로 4계의 격변이 적다. 연평균 기온은 11.8℃ , 1월 평균 -4 ℃, 8월 평균 24.777℃ , 연평균 강수량 1,290mm 이다. 파주시의 행정 구역은 4읍 9면 7동 380통리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672.78 km²이다. 2016년 12월 31일 파주시의 주민등록 인구는 430,781명, 175,089가구이다. 파주시 인구추이 2014년 파주시 총 종사자수는 154,813 으로 경기도 총 종사자 수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 (1차 산업)은 177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69,585명으로 44.9%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 (3차 산업)은 85,051명으로 54.9%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 (27.1%)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비중(72.9%)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분에서는 도소매업(11.5%), 숙박 및 음식점업(8.2%)과, 교육서비스업(6.0%), 운수업(6,0%)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파주시는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으로, 고등학교 간에 서열이 존재한다. 파주시는 말라리아 위험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파주 주민들은 성분 헌혈 외의 헌혈에는 참여할 수 없다. 자유의 마을로 알려진 대성동이, 행정 구역 상으로는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위치되어 있다. 이천시 이천시(利川市, )는 대한민국 경기도 동남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여주시, 서쪽으로 용인시, 안성시, 북쪽으로 광주시, 남쪽으로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시청은 중리동에 있고, 2읍 8면 4동을 관할하는 도농복합시이다. 삼국시대 초에는 백제의 영지였으나, 고구려 제26대 장수왕 63년 고구려에 속하며 남천현이라 불렸다. 551년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남천주로 군주(오늘날 도청소재지)를 두었다. 757년 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 황무현으로 개칭하고 광주(지금 광주)의 편입시켰다. 936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 남정을 할 때 이천군이라 칭하였고 고려 제23대 고종 44년에는 영창이라 불렀다. 1390년 제34대 공양왕 8년 남천군이라 이름을 바꾸고 승격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 이천현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제 3대 태종 13년 현감을 두었다. 1444년 세종 26년에 도호부가 되어 부사의 부임지가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현재의 이천군이라는 지명이 되었다. 이천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23조 1380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3.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5217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5조 9880억원으로 69.7%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6조 4987억원으로 28.1%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최근 대규모 산업단지와 주택단지가 건설되고 있어 건설업(3.8%)과 사업서비스업(3.5%), 도소매업(3%)과 운수업(2.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이천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99,369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390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33,823명으로 34%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65,154명으로 65.6%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72.9%)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1.4%), 숙박 및 음식점업(9.3%), 사업서비스업(9.3%), 운수업(6.9%)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천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90,673명이고 주간인구는 202,07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06으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0,405명, 유출인구는 11,410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4.903명, 유출인구는 2.501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11,397명 더 많은데, 이는 산업 시설이 많이 이전해온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천시는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한다. 동서간 거리가 27km, 남북간 거리가 36km로 총 면적은 461km이다. 동쪽으로는 여주시, 서쪽에는 용인시, 서남쪽은 안성시, 북쪽으로 광주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남북의 지형은 마치 긴 표주박 모양이고, 타 시군과의 경계 주위에는 구릉이 존재함과 동시에 한강 지류인 복하천이 시내 중심부를 흘러 소평야를 이루고 있어 관개의 이점이 있음으로 지질은 대체로 비옥한 편이다. 남북의 중부, 동서의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고 서울에서 충주를 잇는 국도 제3호선과 수원에서 여주를 잇는 국도 제42호선이 교차하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써 좋은 산업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천의 인구는 2017년 8월 현재 213,059명이며 인구 밀도는 455명/km이다. 0~14세 인구는 19.4%, 65세 이상 인구는 9.9%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0.7%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7.5%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3.9%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3.3으로 남자가 다소 많다. 이천시의 행정 구역은 2읍, 8면, 4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천시의 면적은 경기도의 4.5%에 해당하는 461.3km이다. 2014년 2월말 기준으로 인구는 80,016세대, 210, 331명이며, 인구밀도는 453명/km이다. 전체 인구 중 43%인 90,152명이 시내 동 지구에 거주한다. 설봉문화제의 일환으로 시작한 도자기 축제는 1994년 제 8회까지는 이천문화원의 주관으로 치러진 행사로서 부족한 예산으로 인한 행사준비의 어려움과 도예인들의 저조한 참여로 인해 소규모 지역축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이천시는 도예산업을 지역특화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고자, 1995년 제 9회 축제부터는 국내는 물론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국제 규모의 관광축제와 관광 수입 증대 등을 도모하기 위해 문화체육부 시범축제로 《이천도자기축제》를 지원하여 줄 것을 건의하게 된다. 이후 경기도가 개최한 《2001년 세계도자기축제》를 계기로 이천의 도자산업은 또 한 번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2016년 30주년 기념"즐겁고 신나는 도자기 축제". 대한민국 육군의 공병 부대 중 하나인 청룡대대가 이천시에 있다. 안성시 안성시(安城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최남단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이천시, 서쪽으로 평택시, 북쪽으로 용인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천안시, 충청북도 음성군,진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평택에서 강원도까지 이어지는 38번 국도, 천안에서 서울까지이어지는 국가지원지방도 제23호선,평택에서 제천까지 이어지는 평택제천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1읍 11면 3동의 도농복합시이다. 전체적으로는 동북이 높고 서남의 경사가 완만하여 남북으로 형성된 차령산맥은 지역을 동ㆍ서 양부로 나누는 분수령이 되어 동쪽으로는 청미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안성천과 조령천, 한천이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 나간다. 남쪽으로 서운산(547m)이 충남북과 도계를 이루며 솟아있고 관내 전역에 크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으며 남ㆍ서쪽으로 장년기 및 노년기의 구릉지이며 하천의 발달로 평야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충북 진천군과 접경에 있는 차령산맥줄기의 덕성산에서 세지맥으로 나누어 서쪽으로는 서운산(547m) 동쪽으로는 백운산 (345m),마이산(471m)과 연결되고 나머지 하나는 북쪽으로 뻗어 시내 한복판에 우뚝서있는 비봉산(230m)을 이룬 다음 시궁산(514m), 천덕산(355m), 덕암산(163m), 고성산(298m), 백련봉(239m)을 형성하고 있다. 산지의 면적은 안성시 전체면적의 약 52%나 되며, 쥐라기시대 이후 오랜동안의 침식으로 500m 전후의 구릉지로 이루고 있다. 안성시의 지질은 대부분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남쪽에는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과 북쪽은 단산층 군에 속하는 편암조가 일부 나타나고 있다. 죽산면, 금광면, 서운면은 선캠브리아기의 셰일과 사암의 교호층이 편마암화 작용을 받아 거의 현재와 같은 암상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일대의 흑은모 편마암의 암상은 중립질로서 엽리가 잘 발달되어 있다. 안성시는 중부 지방에 있어 북부와 남부 사이의 점이성 기후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차령산맥에서 이어져 내려와서 드넓은 평야지대를 이르는 지형적 조건은 이곳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 준다. 안성시의 10년간('90~'99) 년평균 강수량은 1,315.7mm로 벼농사 및 기타 작물재배에 적당하며 특히 벼농사의 경우는 연중 1,000mm 이상의 강우량이 필요한데 안성시의 경우 이 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편이다. 더욱이 강수량의 대부분이 벼의 본격적인 생육기간인 6, 7, 8월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양질의 경기미가 생산되고 있다. 안성시에 바람은 우리나라 전역과 같이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겨울철의 계절풍은 주로 대륙방면에서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으로 매우 차갑고 건조하여 맑은 날씨를 가져오게하는 한편 혹독한 추위를 동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북서계절풍은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9월부터 시작하여 11월에서 다음해 1월까지 고비를 이룬 뒤 3월경에 끝나게 된다. 안성시의 행정 구역은 1읍 11면 3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553.47km이다. 2017년 6월 기준 안성시의 주민등록 인구는 77,030세대, 183,316명이다. 안성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15조8109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7096억원으로 비중이 가장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10조3018억원으로 65.16%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4조 7995억원으로 30.36%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건설업(3.94%)과 도소매업(3.36%), 사업서비스업(2.82%)과 전기·가스·증기 및 수도사업(2.42%)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안성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74,760명 이고 주간인구는 192,325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10으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9,974명 , 유출인구는 10,666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0,641명, 유출인구는 2,384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17,565명 적은데, 이는 산업시설이 많이 이전해온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안성선이 있었으나 폐선되어 현재 안성에는 철도가 없다. 따라서 수도권 전철도 없다. 시장은 정무직 공무원으로, 부시장은 지방부이사관으로 보한다. 안성시는 안성맞춤 남사당 풍물공연을 포함하여 안성맞춤박물관, 태평무전수관, 미리내성지, 서일농원, 칠장사 등을 하루에 둘러 볼 수 있는 문화관광 투어 버스를 매주 토요일에 운영한다. 김포시 김포시(金浦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한강의 퇴적으로 충적토가 쌓여 농경에 적합한 김포평야를 이룬다. 한강이남 경기도를 관할하는 경기도 본청(수원시 소재) 관할지 중 월경지이다. 동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고양시, 파주시, 서쪽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남쪽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 인천광역시 계양구, 서구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개풍군과 경계를 이룬다. 시청은 사우동에 있고, 행정 구역은 3읍 3면 7행정동이다. 김포시는 경기도의 서쪽 중앙에 있는 한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포시와 인천 서구 검단 일대를 김포반도라고 부른다. 문수산·가현산·장릉산 등의 낮은 산이 약간 있을 뿐인 준평원화한 지역으로서 한강에 의한 퇴적으로 이루어져 농경지로 가장 적합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구릉군의 기복이 약간 있으나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는 이곳을 김포평야라고 한다. 지질은 시생대의 화강편마암과 중생대 대동계(大同系)의 혈암·사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포시의 행정 구역은 3읍 3면 8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포시의 면적은 276.65 km²이며,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392,092 명, 152,052 가구이다. 시 전체인구 가운데 71.1%가 동 지역에 거주한다. 1개였던 국회의원선거구가 2016년 총선부터 2개(갑: 김포본동·사우동·풍무동·장기동과 고촌읍, 을: 장기본동·구래동·운양동과 북부 5개 읍·면)로 분리되었다. 2019년 4월 김포시의 주민등록 인구는 429,752 명이다. 신도시 지역인 장기본동, 장기동, 구래동, 운양동과 풍무동을 중심으로 인구가 점진적으로 늘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9%, 65세 이상 인구는 11%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0%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7%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3%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3로 남자가 다소 많다. 김포시의 인구추이 김포시의 2012년 지역 내 총생산은 16조 984억 원으로 경기도 지역 내 총생산의 2.2%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2485억 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0조 1630억 원으로 63.1%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5조 6869억 원으로 35.3%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 부분에서는 김포한강 신도시가 세워짐에 따라 도소매업(5.4%)과 건설업(4.7%), 부동산업 및 임대업(3.7%)과 전기, 가스, 증기 및 수도사업(3.0%)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김포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129,440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2.9%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93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62,946명으로 48.6%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66,401명으로 51.3%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2.1%), 숙박 및 음식점업(7.7%)과 교육서비스업(6.2%),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5.2%)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김포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215,050명이고 주간인구는 227,159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06으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45,757명, 유출인구는 31,213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687명, 유출인구는 5,122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12,109명 더 많은데, 이는 산업시설이 많이 이전해온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월곶면 성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산성이다. 1694년(숙종 20년)에 축성된 이 산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그 주위에는 김포의 금강이라 불리는 문수산(376m)이 위치해 있다.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조선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사적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고, 소재지는 풍무동 산 141-1이다. 장릉산은 원래 북성산으로 불리다가 1627년 인조 5년 8월 27일 부친 정원군의 묘를 양주에서 이장하여 온 후부터 장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조헌선생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서원이다. 감정동 소재. 대곶면 신안리에 소재한 덕포진은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입구인 손돌항에 세워진 요새로 임진왜란 이후 선조때 만들어졌다.(사적 제292호) 조선 숙종 때까지는 월곶진이 주진이었으나, 그 후 덕포진이 주진으로 승격했다. 덕포진 인근에는 덕포진박물관이 있어 볼거리가 많다. 대곶면 대명리에 소재한 대명항은 김포 유일의 지방 어항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만큼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대명항 바로 옆에는 김포함상공원이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성면 가금리에 위치해 있다. 제2해병사단에서 관리 하는 '애기봉(愛妓峯)'의 어원은 병자호란 때 끌려간 평양감사를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그리다 죽은 기생 애기의 한이 서려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애기봉은 북녘땅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월곶면 고막리에 있는 공원이다. 1998년에 16개의 조각 작품 설치와 함께 문을 열었고, 2001년에 추가로 14개의 조각 작품이 설치되었다. 올림픽대로의 건설로 서울로의 접근이 용이하며,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국도 제39호선, 제48호선이 김포시를 통과하며, 1970년에 김포와 강화를 잇는 강화대교가 개통되어 김포와 강화군을 오가는 데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김포 한강신도시와 개화 나들목을 연결하는 김포한강로를 비롯해 도로교통과 버스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통해 인천국제공항으로 바로 갈 수 있으며,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를 통해 인천광역시 중구, 서구, 송도 지역 등으로 갈 수 있다. 프로 스포츠팀 중 유일하게 김포에 연고를 두었던 할렐루야 축구단이 2006년 11월 24일에 안산시와 연고지 계약을 맺은 뒤 안산시로 연고지 이전을 하여 현재 김포시에 있는 프로 스포츠팀은 한 팀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현재 김포 시민들은 대부분 서울, 인천 지역의 프로 스포츠 구단을 응원하고 있다. 화성시 화성시(華城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서남부에 있는 시이다. 동북쪽으로 수원시, 동쪽으로 용인시, 남쪽으로는 오산시·평택시, 북쪽으로 안산시와 접하고,서북쪽으로 시화호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와 접한다. 서쪽으로는 경기만이 있다. 남양읍을 중심으로 한 화성시 서부의 본래 지명은 남양군(南陽郡)이었고, 서신면에는 백제 및 신라의 대외 무역항이었던 당항성이 있었다. 1914년 4월 1일에 안산군 일부, 광주군 일부, 남양군(도서 지역 제외)이 수원군에 병합되었고, 1949년 8월 14일에 수원읍이 수원부로 분리·승격되면서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군의 명칭은 화성(華城)에서 따왔다. 2001년 3월 21일에 시로 승격되었다. 시청 소재지는 남양읍이고, 4읍 9면 13행정동을 관할하는 도농복합시이다. 화성시는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눌 수 있는데, 서부는 다시 남양읍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1읍·5면·1동과 향남읍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2읍·3면으로 나눌 수 있다.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은 정조대왕이 '화규삼축(華圭三祝)' 고사를 인용해 "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花山)'의 '花(화)'자와 '華(화)'자는 뜻과 음이 통하여 '화성'으로 한다"고 하여 지은 것이다. 화성시는 광주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 위치하여 동북쪽으로 비교적 산세가 깊은 산지를 형성하고, 중앙은 구릉지대이며, 서쪽은 평야지대를 이루면서 서해와 접하고 있다. 서해안으로 남양 반도와 조암 반도가 돌출되어 있고, 화성시 중심부를 남류하는 황구지천과 발안천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북쪽으로 군자만, 남쪽으로 남양만을 끼고 있으며, 해안선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화성시는 해발 50m 미만 지역이 총면적의 76.1%이고, 50m∼100m 지역은 17.9%, 100m∼200m 지역은 5.5%, 200m 이상 지역은 화성시 총면적의 0.5%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사도는 5% 미만이 총면적의 52.3%, 5%∼15% 지역은 화성시 총면적의 15.9%, 15%∼25% 지역은 화성시 총면적의 13.9%로 대부분이 완만하다. 해발 200m 이상 지역과 경사 25% 이상 지역은 봉담읍과 비봉면, 팔탄면의 경계와 동탄면의 동쪽에 분포하고, 해발 50m 이하 지역과 경사 5% 이하 지역은 송산면, 서신면, 우정읍, 장안면 등 서해안과 시화호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의 중서부에 속하는 본시는 온난한 남부지방으로부터 대륙성의 북부지방으로 옮아 가는 전이지대에 속하고 있으며 특히 본시는 수심이 얕고 내해성인 서해에 연하고 있어 지형상으로도 저평한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겨울 기온이 연안을 따라 낮은 특색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시는 온난습윤 기후로부터 한랭동계 소우 기후구로 옮아가는 전이지대에 위치하여 한국의 소기후 구분상 중부서암형에 속하고 있다. 화성시의 해안선은 경기도 전체 해안선의 절반인 152Km에 달한다. 섬은 총 23개로 유인도(有人島)는 3개(제부도, 입파도, 국화도)이며, 나머지는 무인도이다. 유인도 3개 섬에는 278세대, 630명의 주민이 거주한다.(2001년 조사) 화성시 해안의 조석은 인천광역시 정도에는 미치지 않으나 유사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류에 의한 수괴 변화가 크다. 경기만과 아산만을 유입하는 조류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대조기(약 15일마다 일어나는 조차가 큰 조석), 소조기(조차가 작은 조석), 밀물 및 썰물때 속도 변화가 크다. 밀물때보다 소조기에 유속이 빠르고 연안에 유입된 물질의 확산이 빨리 일어난다. 영흥도와 선재도 사이의 소조기 썰물시 최대유속은 127cm/s, 밀물때 최대유속은 9cm/s이며, 대조기 썰물의 최대유속은 180cm/s, 밀물의 최대유속은 166cm/s로 대체로 썰물때 유속이 빠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소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화성시의 지질은 변성암인 선캄브리아계의 편암과 편마암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화강암과 제4기 퇴적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캄브리아계의 지질로 토층의 발달이 탁월하며 두껍게 나타난다. 남서부 해안지대와 도서들은 편암, 북서부는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부와 동부지역에는 반상변정질 편마암과 호상편마암이 나타난다. 남양읍 남부에는 중생대 쥬라기에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보 화강암이 나타나며, 황구지천, 발안천 및 만을 이루는 지역에는 제4기에 퇴적된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화성시는 4읍 9면 14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시의 인구는 2018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75만8722 명, 30만1025 가구이다. 화성시는 행정구를 설치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으나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동부의 12개 행정동과 정남면을 관할로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국회의원선거구는 2016년 20대 총선부터 3개(갑: 화성시 서부와 정남면, 을: 동탄동 지역, 병: 병점 지역과 봉담읍)이다. 2011년을 기준으로 화성시의 인구 중 만 15세 미만은 21.9%, 만 65세 이상은 7.9%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0.2%로, 전국 평균인 72.8%보다 조금 낮다. 유소년 인구부양비는 31.2%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높고, 노년 인구부양비는 11.2%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낮다. 남자 인구를 여자 인구로 나눈 성비는 106.6%로 남자가 다소 많다. 화성시의 인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인데, 이는 서울 등 수도권의 다른 도시로부터 동탄 신도시 등으로 인구가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 화성시의 재정자립도는 64.21%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다. 다양한 제조업 공장들이 화성시에 있기 때문이다. 화성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94조0180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13.0%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6900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78조0740억원으로 83.04%의 비중으로 차지한다.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15조2550억원으로 16.23%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사업서비스업(2.74%)과 건설업(2.31%), 도소매업(1.96%)과 부동산업 및 임대업(1.60%)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화성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362,267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8.1%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162명으로 비중이 낮다.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91,738명으로 52.9%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170,367명으로 47.0%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8.7%), 사업서비스업(8.6%)과 숙박 및 음식점업(6.0%), 교육서비스업(4.9%)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화성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471,746명이고 주간인구는 553,823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17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35,612명,유출인구는 62,881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19,893명,유출인구는 10,547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82,077명 더 많은데, 이는 산업시설이 많이 이전해 온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수원군(화성군) 시절에는 관내 철도역이 많았으나, 수원시와 오산시가 차례로 분리되고, 반월면이 안산시와 군포시로 분할 편입되어 1995년 수인선 영업이 중단된 후 현재의 상황에서는 경부선이 화성시의 동부에 조금 남아 연결되는 상황이다. 수인선의 수원 ~ 한대앞 구간이 2020년 말에 개통되면 화성시의 북부 지역에도 다시 철도 운행이 재개될 예정이다. 충남 당진시 석문면 장고항 - 우정읍 국화리 국화항 간 선박이 운행중이다. 오른쪽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 왼쪽은 제22대 임금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 사적 217호인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사찰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이 있다. 대지가 약 109,000㎡, 사계절관 2,900㎡ 규모의 식물원이며 1,200여 종의 우리나라 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외부 들꽃정원과 등고산, 유리온실인 사계절관 등이 있다. 서신면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일명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신비의 섬 제부도는 썰물 때면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섬을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열린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이은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후 일본 헌병 30여 명이 제암교회에 주민을 감금시킨 후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교회와 가옥, 그리고 시체까지 불태우는 사건을 저질렀다. 이는 곧 제암리 학살이며 이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불탄 예배당에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전시관과 교육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무명의 교인들이 순교한 곳이다. 양주시 양주시(楊州市)는 대한민국 경기도 북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포천시와 동두천시, 서쪽은 고양시와 파주시, 남쪽은 의정부시와 서울특별시 도봉구, 강북구, 북쪽은 연천군과 접한다. 명소로는 도봉산, 불곡산, 감악산, 북한산 국립공원과 송추계곡, 장흥관광지가 있다. 양주(楊州)는 본래 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인 한양군(漢陽郡)을 고려 태조 때 양주로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양주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인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에는 매성군(買城郡) 또는 마홀(馬忽)로 불렸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757년)에는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때에 견주(見州)로 개칭했다. 양주시는 경기도의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로 20km, 남북으로 30km에 이른다. 대체로 산이 많아 평지가 적고, 서·남·북쪽 방면에 흐르는 하천변에 평지가 산재해 있다. 양주시는 한강의 지류인 중랑천과 임진강의 지류인 신천(莘川)의 발원지로, 자연경관이 수려해 한국 100대 명산에 드는 도봉산(북한산), 감악산 등이 있는 곳이다. 장흥, 일영, 송추, 기산 등 계곡과 저수지가 많아 수도권의 1일 생활관광지로 이름나 있다. 또한, 장흥아트밸리, 송암천문대, 장흥수목원 등 새로운 문화 관광지도 각광받고 있다. 양주시는 고려시대 이후 풍수지리설에 명당이라 하여 고려때 잠깐 남경(양주)으로 천도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당시 양주(양주, 동두천, 남양주, 구리, 노원 일대) 지역에 조선왕릉중에서 동구릉, 온릉, 사릉, 홍릉, 유릉, 광릉, 태릉 등 묘역을 조성했다. 양주시의 행정 구역은 1읍 4면 6동(100리, 141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주시의 면적은 310 km²이며,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21만2146 명, 8만5089 가구이다. 양주시 전체 인구 중 69.4%가 동(洞)지역인 양주(28.0%)와 회천(41.4%)에 거주한다. 양주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10조1769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4439억원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5조5548억원으로 54.52%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4조1840억원으로 41.11%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6.09%)과 건설업(5.99%), 출판,영상,방송통신 및 정보서비스업(4.11%)과 운수업(3.1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양주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81,628명이고 주간인구는 174,59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96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5,801명, 유출인구는 28,483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465명, 유출인구는 6,821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출인구가 7,038명 더 많은데, 이는 교통이 불편하고 산업시설 부족으로 인해 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나감으로인하여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014년 양주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77,392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19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34,094명으로 44.1%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43,279명으로 55.9%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5%), 숙박 및 음식점업(8.5%), 교육 서비스업(6.0%), 문화 서비스업(5.8%)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온릉은 조선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사적 제210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양주관아지는 양주시 부흥로에 위치하고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된 옛 관청이다. 원래 건물은 없었으나 5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2018년 4월24일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있다. 감악산은 양주시와 경기도 파주시, 연천군 사이에 있는 높이 675m의 산이다. 예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 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렀다.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고, 북한산성과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유지를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1983년 4월 2일에 15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되었다. 면적은 약 79.916km이다.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원의 남동쪽은 서울특별시 도봉·성북·종로·은평구 등 4개 구에, 북서쪽은 경기도 고양·양주·의정부시에 속한다.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명에 이르러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포천시 포천시(抱川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다. 동쪽은 가평군, 서쪽은 양주시, 동두천시, 연천군이, 남쪽은 의정부시와 남양주시, 북쪽은 강원도 철원군과 화천군이 접하고 있다. 포천시는 사방이 해발 500~10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며, 서남부권(원인천, 수원, 안산, 화성, 평택, 안성)을 제외한 수도권에서 드물게 전역이 임진강 수계에 속하는 곳이다. 따라서 북쪽 방향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어 철원군, 연천군으로는 언덕을 넘지 않고 자연스런 통행이 가능하다. 최상류권은 최남단인 소흘읍과 가산면 일대이지만 의외로 이 지역에 가장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독특한 지형 때문에 서울 방면으로 가려면 의정부, 양주, 남양주 어느 방면으로든 고개를 넘어야 하는 지형으로, 포천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그 동안 서울 방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43번 국도의 축석고개, 47번 국도의 내촌면 방향 뿐이어서 상시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나, 2017년 6월 30일 세종포천고속도로 구리~포천 구간이 개통되면서 상시 정체는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포천시의 행정 구역은 1읍, 11면,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826.5 km²이고, 인구는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15만4763 명, 6만8354 가구이다. 포천시내(포천동, 선단동)보다 의정부시와의 접근성이 좋은 소흘읍의 인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남서부에 위치한 내촌면은 인접한 남양주시 생활권에 속한다. 포천시의 인구는 2007년 현재 166,383명이며 인구밀도는 201명/km²이다. 0~14세 인구는 17.95%, 65세 이상 인구는 11.53%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70.5%로 전국평균 72.8%보단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5.4%로 전국 평균인 22.8%보단 높고, 노년인구부양비는 16.3%로 전국 평균인 14.5%보단 높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12.7로 남자가 다소 많다. 포천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134,020명이고 주간인구는 160,860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20으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26,400명, 유출인구는 6,012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8,424명, 유출인구는 1,972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26,840명 더 많다. 포천시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9조 3649억원으로 경기도 지역 내 총생산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7914억원으로 8.5%의 비중을 차지하며,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4조5013억원으로 48.1%의 비중을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4조 721억원으로 43.48%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매 및 소매업(7.1%), 건설업(6.0%), 공공행정 & 국방 및 사회보장행정(4.0%)이 차례대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포천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82,943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1.9%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210명으로 0.3%의 비중으로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38,207명으로 46.1%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44,526명으로 53.7%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높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낮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2.6%), 숙박 및 음식점업(9.9%)과 문화 및기타서비스업(5.9%),교육서비스업(5.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초성리역이 있었으나 이 지역을 관할하던 청산면이 연천군에 편입되어 철도 시설은 없다. 국립수목원(구, 광릉수목원)은 소흘읍 직동리에 위치한 수목원이다. 조선 시대의 국왕 세조는 자신과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을 지금의 광릉 자리로 정하면서 주변 산림도 보호하라고 엄격히 일렀다. 이후 숲이 보존되어 한국 전쟁도 견디어 내면서 현재까지 50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반월아트홀은 시 승격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국립 수목원에는 나무가 많다. 산정호수는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위치한 호수이다. 1977년 3월 30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승용차로든 대중교통편이든 모두 접근성이 좋아 연간 7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수영장, 볼링장,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고 최근에는 눈썰매장 및 스케이트장이 개장되어 4계절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백운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 백운계곡국민관광지는 4km에 이른다. 이 계곡의 백미는 선유담으로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광암정, 학소대, 금병암, 옥류대, 취선대, 금관폭포 등이 있고, 입구에 흑룡사가 있다. 그리고 텐트캠프장, 야영장이 있으며 백운약수가 유명하다. 세계 최초의 한과 테마 한과문화박물관 겸 교육관 한가원에서는 유과, 약과, 다식 등을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산사원 가양주교실에서는 방문객들에게 "우리 술 빚기" 체험을 제공한다.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된 고두밥, 물, 누룩 등을 섞고 한약재, 냉이, 매실 등 특별한 재료를 첨가하여 직접 술을 빚은 후 병에 담아, 술이 다 익은 1주일 후에 찾아가면 된다. 명성산과 산정호수 자락에 위치한 평강식물원은 꽃과 나무로 가득 채워진 건강한 공간이다. 평강식물원에서는 봄과 여름이면 흰색부터 샛노랑색, 붉은색, 파란색까지 총천연색으로 피어나는 꽃을 질리도록 감상할 수 있으며, 가을이면 단풍이 물들고 들국화가 만발한 장관을 만날 수 있고, 수목이 잠든 겨울이면 얼음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 신북온천은 신북면에 있으며 1992년에 온천지구로 지정되었다. 남청산 자락에 중탄산나트륨성분의 온천수가 지하 600m에서 용출된다. 2007년 11월 이후로 법적 분쟁에 의하여 영업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허브 아일랜드는 1998년 신북면 삼정리에 개장하였고 현재는 13만평의 부지위에 허브의 원산지인 지중해의 "생활속의 허브"를 테마로 운영하고 있다. 입장료는 일반인 6000원, 우대(37개월 이상~중학생, 국가유공자, 장애우(3급 이상), 노인 65세 이상) 4000원, 단체(30인 이상) 4000원이며, 36개월 이하의 유아와 신북면민(신분증 필참)은 무료이다. 365일 연중무휴이며, 개장시간은 오전 10시 ~ 오후 10시까지이다. 매년 열리는 '불빛동화축제'도 허브 아일랜드에서 즐길거리 중 하나이다. 2003년부터 방치되어 있던 폐채석장을 관광지로 조성하여 2009년 10월,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 되었다. 관람시간은 3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오전 9시 ~ 오후 7시, 11월 1일부터 다음 해 2월 말까지는 오전 9시 ~ 오후 6시이다. 입장마감은 폐장 1시간 전이다. 개인의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500원이다. 단체 입장료는 어른 1400원, 청소년 및 군인 800원, 어린이 400원이다. 우리병원: 소흘읍 호국로 661 (대형) 우리병원장례식장: 소흘읍 호국로 661 진병원: 소흘읍 호국로 80 성모베스트이비인후과: 소흘읍 솔모루로 55 한솔정형외과: 소흘읍 솔모루로 54 수한의원: 소흘읍 솔모루로 15 서울우리치과: 소흘읍 솔모루로 55 메디플러스: 소흘읍 솔모루로 15(2층,클리닉) 이&박의원: 소흘읍 솔모루로 9 (내과) 김내과: 소흘읍 솔모루로 72 메리엘산부인과: 소흘읍 송우로 62 현대정형외과: 소흘읍 송우로 69 제일소아과: 소흘읍 송우로 79 송우밝은안과: 소흘읍 솔모루로 55 송우신안과: 소흘읍 솔모루로 75 서울의원: 소흘읍 솔모루로 98-8 (정형외과) 해맞이신통한의원: 소흘읍 송우로 79 늘푸른한의원: 소흘읍 솔모루로 92 선우내과: 소흘읍 솔모루로 66-4 소망한의원: 소흘읍 송우로 41 김형진이비인후과: 소흘읍 솔모루로 71-6 소흘읍보건지소: 소흘읍 호국로 567 준소아과: 소흘읍 태봉로 183 연세웰치과: 소흘읍 솔모루로 60-1 예치과: 소흘읍 솔모루로 15 뜰치과: 소흘읍 솔모루로 9 인화병원: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745 루시나산부인과: 소흘읍 솔모루로 119 성모베스트마취통증의학과: 소흘읍 솔모루로 75 연세푸른의원: 소흘읍 솔모루로 39 포천그린내과: 소흘읍 솔모루로 93-1 여주시 여주시(驪州市, )는 대한민국 경기도 동남부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강원도 원주시, 서쪽으로 이천시, 광주시, 북쪽으로 양평군, 남쪽으로 충청북도 충주시, 음성군과 접한다. 시의 중심으로 남한강이 흐르며, 벼농사 등 농업이 발달하였다. 2013년 9월 23일에 여주군이 폐지되면서 도농복합 형태의 여주시로 출범하였다. 행정구역은 1읍 8면 3행정동이다. 여주시는 천혜적인 지리로 인해 진국 시대부터 평화로운 집단 마을을 영위해 왔으나 역사상 지명이 뚜렷이 나타난 것은 476년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는 황요, 940년 고려 천수(天授) 23년에 황려현(黃驪縣), 고려 고종 원년(1214년)에 영의(永義)로 개칭하였다가, 1305년 충렬왕 31년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태종 2년(1401년)에 여흥부(驪興府)로 승격하였고, 1413년 태종 14년에 도호부가 설치하였다. 이 때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여주목으로 승격하였다. 경기도의 동남에 위치하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 광주시(廣州市),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 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지형은 구릉과 저지가 뒤섞여 있으며, 지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전체 면적 607.79km이다. 평균 고도 약 200m의 준 평원면을 이루며 중앙부는 특히 낮아 여주분지를 이루고 주변의 최고 지점인 동북단의 당산(堂山)도 648m에 불과하다. 태백산맥, 차령산맥, 광주산맥 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주평야가 한강을 끼고 펼쳐져 있다. 여주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한강을 여강이라고 부르며 여강의 동북 지역은 산지가 많고, 강남지역은 전형적인 여주평야로서 넓은 들과 야산이 잘 발달되어 있다. 내륙부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심하고,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1.7도, 1월 평균 -6.0도, 8월 평균 25도, 연평균 강수량 1,250mm이다.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의 여주시의 승격으로 기존의 여주읍은 3동(여흥동, 중앙동, 오학동)으로 분동되었으며, 가남면은 가남읍(1읍)으로 승격을 했다. 기존의 점동면, 능서면, 흥천면, 금사면, 산북면, 대신면, 북내면, 강천면은 그대로 면으로 존속되고 있다. 2016년 08월 기준 인구는 외국인을 제외하면 111,415명이다. 내국인 인구의 약 50.5%가 동지역에 거주하고, 약 14.5%가 가남읍에 거주해 동과 읍에 내국인 인구의 약 65.1%가 거주한다. 인구가 11만 명을 넘는 여주시는 총선 때 단독 선거구로 독립할 수 있으나, 양평군과 공유하고 있다. 여주시의 인구는 2016년 08월 외국인을 제외하면 111,415명이며 인구 밀도는 183명/km²이다. 0~18세 인구는 17.3%, 65세 이상 인구는 17.6%이다. 여자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2로 남자가 다소 많다. 강 연안에 위치하면서도 전곡이 많이 산출된다. 특히 이 지방에서 산출되는 여주 쌀은 국내 제1우량미로 이름이 높다. 채소·과수 재배도 성하고 대마·왕골 등 특용작물도 생산된다. 특히 최근에는 땅콩 주산단지를 조성하였다. 지하자원으로는 고령토와 규석이 있으며 제조업체는 대부분 도자기를 제조하는 영세업체이다. 경지면적은 총면적의 30%로 182.82km이며 산지가 많다. 호당 경지면적은 1.4ha이다. 논농사 비율이 59%를 차지하며, 벼농사가 주종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땅콩 등이고, 배·복숭아 등의 과일 생산과 양잠·축우도 성하다. 이 지역의 도시적 산업 발달은 대개 미약한 편이지만, 최근 5년 동안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 이마트 물류창고 등 대규모 물류센터가 들어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4년 여주시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37,602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0.8%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211명으로 0.6%의 비중을 차지하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7,566명으로 20.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29,825명으로 79.3%를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도소매업(13.7%)과 문화 및 기타 서비스업(12.6%), 숙박 및 음식점업(12.5%),교육서비스업(7.6%)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주시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99,031명이고 주간인구는 104,943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06으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8,477명, 유출인구는 4,977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3,502명, 유출인구는 1,090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5,912명 더 많은데, 이는 대도시와의 접근성 향상과 함께 최근 인구가 급증하고 있고, 대도시권의 산업화로 대도시의 외곽지역인 여주시의 주간인구 또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신륵사는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신라 시대의 창건했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절은 산 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신륵사는 남한강이 보이는 강변에 세워져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신라시대의 절이다. 신라 35대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하였다. 고려 4대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은 절이었으나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귀부및이수(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등이 남아 있다. 영녕릉 즉, 영릉·녕릉(英陵·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그 비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두 개의 왕릉은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조붓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고 한산해 걷기 좋다. 5월 중순부터 10월초까지만 산책로로 개방한다. 약간의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라 가볍게 걸을 만하고, 이리 휘고 저리 돌며 길이 이어져 있다. 여주의 대표적인 축제로, 무형문화재전, 도예명장전, 도예기능장전, 여주미술협회 전시전, 여주문인협회 전시전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광주원주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여기에 수도권 국도와도 연계되는 국도와 국가지원지방도들이 많아서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연천군 연천군(漣川郡, )은 대한민국 경기도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군이다. 동쪽은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 남쪽은 동두천시, 양주시, 파주시와 접하며, 서쪽은 군사분계선을 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장풍군,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강원도 철원군과 경계를 이룬다. 군청 소재지는 연천읍이고, 행정구역은 2읍 8면이다. 인구는 2018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 4만4633 명으로 경기도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적다. 군의 남부에 위치하고 서울과의 교통편이 좋은 전곡읍에 군 전체 인구의 43.7%가 거주하고 있다. 연천군의 행정 구역은 2읍 8면 96리 616반이다. 연천군의 인구는 2018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4만4633 명, 2만1526 가구이고, 면적은 676.32 km²(경기도 내 5위)로, 서울의 1.1배이다. 1982년에는 인구가 68,144명에 달하였다. 전곡읍(43.7%)·연천읍(18.4%)·청산면(9.1%) 등 경원선이 지나는 동남부 3개 읍·면에 전체 인구의 71.2%가 거주하고 있다. 장남면은 본래 장단군에 속했는데, 1989년 4월 1일 면을 복구하고 면사무소가 설치되었음에도 이북5도위원회에서는 형식적으로 장단군 장남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반면, 연천군 삭녕면과 서남면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지만 이들 2개 면의 면장은 따로 임명하고 있지 않다. 군사분계선 이북의 2개 면이 관할하는 리(里)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954년 11월 17일 삭녕면의 수복지구(도연·어적산·적음리)가 중면에, 서남면의 수복지구(고장리)가 왕징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¹: 옛 면사무소 소재지는 굵게 표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2년 12월 위 지역을 모두 강원도 철원군에 편입시켰다가, 1961년 3월 임진강을 경계로 그 서쪽인 서남면 지역을 황해북도 장풍군(경기도 장단군의 후신)에 이관하였다. 연천군의 인구는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45,431명이며, 인구 밀도는 67명/km이다. 2017년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3.5%, 65세 이상 인구는 20%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60%로 전국평균 70%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19%로 전국 평균인 20%보다 낮고, 노년인구부양비는 30%로 전국 평균인 15%보다 높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9.93로 남자가 다소 많다. 한편 2015년 기준 상주인구는 42,318명이고 주간인구는 44,315명으로 상주인구지수가 105로 높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5,668명, 유출인구는 3,205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88명, 유출인구는 268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2,000명으로 조금 더 많다. 2014년 연천군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13,397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0.3%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 산업)은 181명으로 비중이 낮고,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2,568명으로 19.2%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10,648명으로 79.5%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숙박 및 음식점업(13.8%), 도소매업(13.7%)과 문화 및 기타서비스업(8.9%), 보건업 및 사회복지 서비스업(8.4%)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DMZ안보관광 남북으로 경원선 철도가 관통하여 북쪽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남쪽으로는 경기도 동두천시와 통한다. 2022년에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연천역까지 운행될 예정으로, 현재 경원선 통근열차는 운행하지 않고 있다. 기존의 간이역 초성리역은 이전되고 한탄강역은 폐지될 예정에 있다. 가평군 가평군(加平郡)은 대한민국 경기도 동북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으로 강원도 춘천시, 홍천군, 서쪽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포천시, 남쪽은 양평군, 북쪽은 강원도 화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군청 소재지는 가평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5면이다. 가평군은 경기도의 동북부에 있으며 토지가 거의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전체 면적의 81%가 산지이며 군내를 광주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매우 삭박(削剝)되어 산맥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지만 고도는 아직도 1,000m 이상을 유지하므로 지형이 전체적으로 높다. 광주산맥의 최고봉인 화악산이 진산이 되어 촛대봉, 매봉, 국망봉, 강씨봉, 명지산, 수덕산, 계관산을 거느리며, 해발 700~800m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끼고 웅장한 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산들의 계곡을 따라 흐르며 이어지는 가평천과 조종천의 수많은 지류들은 모두 북한강으로 유입되어 흐른다. 남쪽으로는 중미산, 화악산, 장락산이 산맥을 이루어 용문산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주금산, 축령산 등이 끝없는 산맥을 이어 나간다. 지역의 경계를 보더라도 동쪽으로는 강원도 춘천시와 홍천군이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포천시, 남쪽으로는 양평군과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어 중부 전선의 요충지이다. 가평군의 행정구역은 1읍 5면으로, 가평군의 인구는 2016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6만2448 명, 2만9212 가구이며, 면적은 843.6 km²이다. 인구의 31.6%가 가평읍에, 23.1%가 청평면에 거주하고 있다. 가평군의 인구는 2016년 말 기준으로 6만2448 명이고, 인구밀도는 74 명/km²이다. 2010년 말 기준으로 0~14세 인구는 13.8%, 65세 이상 인구는 18.2%이다. 생산연령층인 15~64세 인구는 68.0%로 전국평균 72.8%보다 비율이 낮고, 유소년인구부양비는 20.3%로 전국 평균인 22.8%보다 낮고, 노년인구부양비는 26.7%로 전국 평균인 14.5%보다 높다. 여자 인구 100명당 남자 인구를 나타내는 성비는 105.9로 남자가 다소 많다. 인구가 가장 많았던 때는 1975년으로, 7만5444 명의 인구를 기록하였다. 언어는 인접 도시인 춘천시와 같은 영서 방언을 사용한다. 경기도 내의 3개 군 중에서 가장 농경지가 적은 군으로서 주민들은 농업의 불리한 조건 때문에 과반수가 자유업을 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행상을 비롯한 상업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는 양잠·축산이 성해 가고 있다. 산림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져서 용재·신탄의 산출이 많았으나 그 흔적도 쉽게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일부에 밤밭이 남아 있어 옛날의 특산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광산물로는 흑연·구리·형석·남정석·홍주석 등이 있으며, 이 지방을 상징하는 청평수력발전소가 있다. 소규모의 한지·도자기 공장이 있다. 전체 수입의 약 20% 정도가 관광수입이다. 가평군의 2012년 지역내 총생산은 2조8548억원으로 경기도 지역내 총생산의 0.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274억원으로 0.1%의 비중을 차지한다. 광업 및 제조업(2차산업)은 1천391억원으로 5.48%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산업)은 2조 4245억원으로 84.93%의 비중을 차지한다. 3차산업 부문에서는 전기 가스 서비스업(16.6%),숙박음식업(9.8%)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가평군 산업의 총종사자 수는 23,646명으로 경기도 총종사자 수의 0.5%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농림어업(1차산업)은 108명으로 0.5%의 비중을 차지한다. 광업 및 제조업(2차 산업)은 1,805명으로 7.6%의 비중으로 차지하고 상업 및 서비스업(3차 산업)은 21,733명으로 91.9%의 비중을 차지한다. 2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의 비중(27.1%)보다 낮고 3차 산업은 경기도 전체 비중(72.9%)보다 높다. 3차 산업 부문에서는 숙박 및 음식업(29.0%), 문화 및 기타서비스업(11.8%)과 도소매업(11.8) 보건,복지 서비스업(8.1%) 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평군의 2010년 기준 상주인구는 49,616명이고 주간인구는 53,495명으로 주간인구지수가 108로 낮다. 통근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5,614명, 유출인구는 1,741명이고, 통학으로 인한 유입인구는 459명, 유출인구는 453명으로 전체적으로 유입인구가 3,879명 더 많은데, 이는 산업 시설이 많이 이전해온 수도권 외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총 면적의 대부분을 임야가 차지(84%)하고 있기 때문에 농경지는 협소하다(2.2%). 또 산간지역으로 농업에 불리한 지형조건 때문에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위주(총경지 면적의 62%)의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밭작물로는 콩·조·밀 등이 생산된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잣·밤·호두·사과·포도·배대추·표고버섯·도토리 등의 특산물이 생산되고 있어 농가의 소득원이 되고 있는데, 잣은 전국 생산량의 1/3를 차지할 정도이다. 주로 닭, 돼지, 사슴, 노루, 토끼 등이 사육되고 있다. 청평호를 중심으로 한 축산업이 많으며, 청평 호명리와 설악면의 사통리, 회곡리는 잉어가두리 양식업이 활발하다. 군내에는 청평댐을 비롯하여 현등사·농추폭·조종암과 대보단 등이 있으며 서울에서 불과 50 km 떨어진 곳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당일코스 관광지로 발전했다. 경인지방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매년 10월경에는 가평읍 일대와 자라섬에서 열리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5월에는 연인산 축제, 10월에는 북한강 축제, 1월에는 자라섬 씽씽 겨울축제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린다. 경춘선(京春線)이 군의 동남부 한강 연안을 따라 통하였으며 경춘국도도 이에 병행하고, 청평에서 조종천을 따라 포천 일동면까지 국도가 건설되어 있다. 북한강의 수운은 강원 홍천까지 이어져 수륙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서울양양고속도로의 개통으로 특히 청평, 설악면의 서울, 춘천 접근이 수월해졌다. 기계어 기계어(機械語)는 CPU가 직접 해독하고 실행할 수 있는 비트 단위로 쓰인 컴퓨터 언어를 통틀어 일컫는다. 기계어는 프로그램을 나타내는 가장 낮은 단계의 개념이다. 기계어는 어셈블리어와 1 : 1로 쓰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기계어는 대부분 어셈블리어를 거쳐 짜여지게 된다. 어셈블리어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에는 기계어를 직접 입력하여 프로그램을 작성하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흔치는 않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기계어는 CPU의 종류에 따라서 서로 다른 코드를 갖게 된다. 6 5 5 5 5 6 bits "rs", "rt", "rd"는 register 연산자를 지시한다; "shamt"는 변화량을 제공한다; "address"나 "immediate" 필드는 직접 연산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register 1과 2를 추가하여 register 6이라는 결과를 낳게 만들면 다음과 같이 인코딩된다: 값을 register 3에 나열된 위치 뒤의 메모리 셀 68 셀에서 가져온 register 8로 불러들인다: address 1024로 Jump: 타로 타로()는 22장의 대 아르카나와 56장의 소 아르카나로 된 카드 패로서, 카드 게임 뿐 아니라 에도 사용된다. 각 카드에는 각각의 의미에 따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대 아르카나는 각각의 개별적 의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소 아르카나는 4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것이 플레잉카드의 원형이다. 타로 점술은 카드에 있는 그림들의 종류와 위치를 이용하여 인간의 미래와 길흉 따위를 점치는 것이다. 타로의 기원은 이집트 기원설, 유태인 기원설, 인도 기원설 등 여러 주장이 있다. 역사상의 등장은 15세기 전반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당시는 화가가 직접 그려 희귀하고 가격도 비싸 귀족 등 부유층의 놀이였으나 16세기 이후 목판화로 제작되면서 유럽 전반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18세기 무렵부터 현재 사용되는 타로의 개수와 디자인이 나왔는데 주 생산지의 이름을 따서 마르세유 타로라고 불렸다. 18세기 말엽부터 신비주의자나 심령주의자들에 의해 점술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 아르카나는 총 22장으로서, 0~21번까지 숫자가 부여되어 있는데 각 숫자에 붙여진 이름은 아래와 같다. "(보통은 클래식 타로와 모던 타로의 대 아르카나의 이름과 순번이 바뀌는 경계로 본다)". 다만, 이 번호와 이름이 절대적으로 일치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카드의 종류에 따라 순서가 바뀌거나,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예로, 0번 바보 카드의 경우 어떤 종류의 타로에서는 21번 세계카드의 뒤에 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TAROT 의 이름의 순환적 의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T-A-R-O-T 즉 T로 시작해서 T로 끝나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21-세계로써 대 아르카나가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0-바보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다고 한다. 또다른 순환의 모습으로는 Wheel of Fortune, 즉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가 중심에 위치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소 아르카나는 4개(봉, 잔, 검, 금화)의 상징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4개 종류의 소 아르카나는 1~10까지의 숫자와 4인의 인물에 의하여 구성된다. 화투 화투(花札、はなふだ)는 12종류 48장으로 되어 있는 놀이딱지의 일종이다. 일본의 카드놀이인 (일본어: 花札, 화찰)가 조선 시대 후기에(19세기경) 한반도로 전해져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장사차 조선에 왕래하던 쓰시마섬 상인들에 의해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화투는 한국에 들어온 후 급속히 전파되어 오늘날 가장 대중적으로 이용되는 도박의 도구가 되었다. 그 놀이 방법이나 용어는 투전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보인다. 간혹 "화토"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 화투를 풀이하면 꽃의 싸움이다. 초기의 화투는 일본 하나후다와 유사하게 전해지다가 화투패의 그림의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1950년대를 기점으로 화투의 현지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판화를 4색판으로 줄이고 기존의 종이 재질에서 플라스틱 재질로 교체하고 두께도 얇아졌으며, 이후 대량생산 단계를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화투의 원형인 일본의 전통 카드 게임인 하나후다(, 화찰)는 하나카루타()라고도 부른다. 일본에 하나후다가 시작된 시기는 16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과 대대적으로 무역을 시작한 시절에 포르투갈 선교사를 통해 트럼프가 전해지게 되어 이것이 가루타의 일종인 ‘텐쇼-가루타(天正カルタ)’로 불리게 된다. 가루타는 카드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카르타(carta)에서 유래하였으며 훗날 여기에 한자를 도입하여 ‘가류다(歌留多)’, ‘가류다(加留多)’, ‘곳파이(골패,骨牌)’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것이 도박성 문제로 에도 막부에서 1791년에 금지령이 떨어지면서 이를 다른 그림을 그려서 대체하는 새로운 가루타를 만들면서 금지령을 피해간 것이 하나후다의 원형이다. 뒤에 하나후다도 수차례 금지령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 하나후다가 전해져 한국의 화투로 변형되었다.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보급된 된 화투와 달리 일본의 하나후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보급이 점차 줄어들어 ‘이로하가루타’와 함께 정월 한정으로 특별히 하는 놀이로 이용되어 하나후다를 즐기는 일본인이 매우 드물다. 그리고 화투에 비해 하나후다가 실용성에서 불리한 점도 있어서 한국식 화투가 일본에 역수출 되는 사례도 있다. 하나후다는 전통적인 일본식 기법으로 제작하며 뽕나무 또는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점토와 혼합하여 만든 화지를 여러 겹으로 겹쳐 판을 만든 후 위에 전통 일본식 인쇄법으로 인쇄한다. 화투가 플라스틱 재질에 현대적 기법으로 인쇄하는 반면, 하나후다는 아직도 이러한 전통적인 기법으로 제작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일본의 게임 회사인 닌텐도도 창립 초기에는 하나후다 제작 회사로 출발하였으며, 이후 하나후다 사업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현재에서도 하나후다 관련 카드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 외에 한국의 화투와 일본의 하나후다가 가지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화투는 48장으로 4장씩 12달을 상징하는데 1월은 송학(松鶴;솔), 2월은 매조(梅鳥), 3월은 벚꽃, 4월은 흑싸리, 5월은 난초(蘭草), 6월은 모란(牡丹), 7월은 홍싸리, 8월은 공산(空山;공산명월), 9월은 국진(菊진), 10월은 단풍(丹楓), 11월은 오동(梧桐), 12월은 비(雨)로 되어 있다. 그림에 따라서 광(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20끗짜리, 주로 동물이 그려진 10끗짜리, 띠 모양 종이가 그려진 5끗자리, 그리고 끗수가 없는 홑껍데기 등 네 가지로 나눈다. 화투놀이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 월별로 그림을 맞추는 민화투(또는 늘화투)는 끗수를 계산하여 많이 딴 쪽이 이기는 것이다. 민화투에는 '약'이라는 것이 있어 난초약(5월)·풍약(10월)·비약(12월) 등으로 그 달의 4장을 모두 차지하면 20끗씩을 더 받게 된다. 이 밖에 5끗짜리 띠 중에서 '홍단', '청단', '초단' 등 3가지 띠를 차지하면 30끗씩을 더 받게 되며, 지방에 따라 '4오동'이라 하여 오동 4장을 모으면 40끗씩을 받기도 한다. '육백(600)'이란 놀이 방법도 있다. 이 놀이는 여러 가지 득점 규약에 따라 600점을 먼저 따는 편이 이기게 된다. 근래에는 화투가 여러 가지 새로운 형식의 놀이로 변하여 '짓고땡', '섯다', '고스톱', '월남뽕' 등 다양하며, 2∼4명이 노는 것이 보통이나 '섯다' 등은 10명도 놀 수가 있다. 그 밖에 아낙네나 노인들이 재미로 하는 '재수보기'와 '운수띠기'가 있다. 화투가 들어오면서 도박의 판도가 바뀌어 옛날식 투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화투가 도박의 전형으로 토착화되었다. 크기는 보통 35mm x 53mm이며 약 1mm 두께의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색깔은 붉은색이 가장 많지만 기타 다양한 색의 화투도 있다. 화투에서는 12가지 그림이 있다. 이 12가지는 1월부터 12월까지에 해당하는 그림을 4장씩 짝을 이루고 있다.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는 12월의 붉은색 피와 오동의 색깔 다른 피를 ‘쌍피’라 부르며 2장짜리 피로 취급하지만, 게임 규칙에 따라 보통의 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화투 묶음에는 추가적으로 피 2장짜리 쌍피 또는 피 3장짜리 삼피 등의 보너스 패(서비스 패)가 함께 포함되어 있어 이를 이용해 다양한 추가 규칙을 만들 수 있다. 화투로 할 수 있는 놀이의 목록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유성우 유성우(流星雨, meteor shower) 또는 별똥비는 다수의 유성이 비처럼 보이는 천문 현상으로, 이 때에 발생되는 유성들은 천구상의 한 점에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유성우 가운데 일부는 유성의 빈도에 따라 유성폭풍우(meteor storm) 또는 별똥만발(meteor outburst)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혜성 등의 천체가 남겨 놓은 잔해가 지구 대기와 매우 높은 속도로 충돌하는 것으로, 대기중의 기체와 마찰을 일으켜 증발하면서 급속하게 사라지는 빛줄기를 남긴다. 대기의 평균 자유 행정(mean free path; 10 cm ~ 수 미터)보다 큰 잔해의 경우는, 마찰이 아닌 램 압력(ram pressure)에 의해 발생한다. 잔해들은 대부분 모래보다 작으며, 거의 대부분의 조각들은 분해되어 지구 표면에 도달하지 않는다. 혜성은 먼지가 섞여 있는 눈덩이가 해 둘레를 공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혜성이 궤도를 돌다가 근일점을 통과할 무렵이면, 얼음이 녹고 증발하여 엄청난 양의 부스러기를 흩뿌린다. 그 부스러기가 혜성의 먼지꼬리를 이루게 되는데, 그 가운데 고체 부스러기들이 유성체(meteoroid)가 된다. 이 유성체들은 혜성의 궤도를 따라 띠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유성체흐름(meteoroid stream)이라고 한다. 따라서 각 혜성은 유성체의 흐름을 형성하며, 유성체 흐름을 만드는 혜성을 모혜성(parent comet)이라고 한다. 특히 여러 차례 근일점을 통과하는 주기혜성들은 짙은 유성체 흐름을 형성한다. 지구가 공전하다가 이러한 유성체 흐름을 관통할 때면 많은 유성들이 한 점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을 유성우라 하고, 그 한 점을 복사점이라 한다. 복사점은 지구와 유성체 흐름의 상대적인 운동 성분에 따라 결정되며, 그 복사점이 위치한 별자리에 따라 유성우의 이름을 짓는다. 즉 복사점이 사자자리에 있는 유성우는 사자자리 유성우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핼리혜성은 주기가 약 76년이다. 이 혜성이 만든 유성류(meteor stream)와 지구의 공전 궤도는 두 점에서 만나게 된다. 지구가 공전하다가 이 두 점을 지나면 각각 물병자리-에타 유성우와 오리온자리 유성우가 일어나게 된다. 이때 물병자리-에타 유성우와 오리온자리 유성우를 일으키는 유성체 흐름의 모혜성은 바로 핼리혜성이다. 1861년 미국의 천문학자인 커크우드(Kirkwood)는 유성과 혜성의 관련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는 1871년에 유성우들의 주기성과 지구의 공전 주기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성체 흐름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페르세우스 유성우를 관측하여, 그 유성들의 궤도가 1862년의 대혜성, 즉 P/Swift-Tuttle 혜성의 궤도와 비슷함을 알아냄으로써 유성우와 혜성의 관련성을 증명하였다. 유성과 유성우의 정체는 겨우 1871년에야 이해되었고, 사진 관측에 의해 관측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 이후이다. 현대에는 비디오 관측과 전파 레이다 관측 등에 의해 여러 해에 걸친 유성우의 연간 활동성 변화가 모니터링되고 있다. 그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뚜렷한 유성우는 물론 미미한 유성우까지 검출되고 있다. 유성우의 세기는 전 하늘에서 관찰된 유성을 천정에서 보이는 것으로 환산하여 시간당 몇 개가 나타났는지로 나타낸다. 이것을 ZHR이라고 한다. 아주 어둡고 맑은 밤하늘에서는 산발유성은 10분에 1개꼴, 유성우가 나타나는 시기에는 1분에 1개꼴로 유성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맨눈으로도 볼 만한 유성우는 대략 1달에 하나 꼴이며, 해마다 되풀이되어 같은 무렵에 나타난다. 각 유성우의 특성, 즉 나타나는 유성의 개수, 밝기 분포, 색깔, 복사점 등은 그 유성우의 모혜성에서 어떤 종류의 유성체들이 나왔으며, 그 유성체들이 어느 방향에서 얼마나 빠르게 지구 대기로 들어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한 모혜성에서 나온 유성체가 큰 것이 많으면 밝은 유성이 많이 나타나고, 유성체가 들어오는 방향, 즉 복사점이 지평선 아래에 있다면 지평선에서 솟아 오르는 유성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지구 대기의 화학 조성이 고도에 따라 달라지므로, 유성이 생기는 고도에 따라서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유성체 흐름은 대체로 모혜성의 공전궤도를 중심으로 원통형으로 분포되어 있다. 유성체의 밀도는 모혜성의 공전 궤도로 갈수록 높아지며, 지구가 이러한 유성체 흐름을 관통할 때, 중심에 다가갈수록 더 많은 유성체가 지구 대기 속으로 돌입하게 된다. 따라서 한 유성우가 나타날 때는 매일 나타나는 유성의 개수가 증가하다가 감소하는 경향을 띤다. 관측적으로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다가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 유성우가 나타나는 시기의 유성개수의 변화는, 어떤 시점 formula_1에서 formula_2 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유성의 개수는 formula_3일 때 최대가 되는데, 이것을 극대기라고 한다. 또한 formula_4의 시간 규모는 유성의 개수가 확연하게 변하는 시간 규모에 해당한다. 이른바 지수함수적 시간척도(e-folding time scale)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나타나는 유성의 개수를 세기만 해도 이러한 값들은 측정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지구 공전 궤도상에 놓여 있는 유성체 흐름의 분포를 자세히 연구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천문학자들과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유성의 개수를 세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예를 들어 2007년도에 나타난 쌍둥이자리 유성우를 전 세계의 천문가들이 관찰한 결과가 2007년 쌍둥이자리 유성우 사이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시간에 따른 ZHR의 변화를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수함수적으로 급격하게 많아지다가 어떤 최댓값을 경계로 다시금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신 미신(迷信)이란 과학적 관점에서 헛된 것으로 여겨지는 믿음이나 신앙이다. 마음이 무엇에 끌려서 잘못 믿거나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것을 맹신(盲信)하는 일을 의미한다. 현대에는 이런 것은 미신 혹은 비과학적인 것을 치부되었으나 과거에는 정말로 믿거나 종교로 발전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유성 유성(流星; )은 별똥 또는 별똥별이라고도 하며, 유성체()가 지구 대기권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돌입하여 밝은 빛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유성은 지구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과는 다른 것이다. 유성은 혜성에서 떨어져 나온 돌가루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유성이 되는 유성체는 대부분 굵은 모래알 정도로 작은 것들이다.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두 지점에서 유성을 동시에 관측하면 유성이 발생한 고도를 측정할 수 있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유성은 대부분 약 70km 상공에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스트로보스코프(Stroboscope)를 사용하여 유성을 사진으로 촬영하면 유성체의 속력을 측정할 수 있는데, 평균 50km/s 정도로 측정된다. 지구의 대류권의 두께가 10km 정도임을 생각하면 매우 빠름을 알 수 있다. 혜성에서 나온 유성체는 초기에는 잘 모여서 띠를 이루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햇빛에 의한 압력, 해와 목성과 같은 태양계 안의 큰 천체에 의한 중력 건드림(섭동)에 의해 원래 궤도를 이탈하여 태양계의 황도면에 퍼지게 된다. 나이가 젊은 유성류 속에는 혜성이 한 번 해에 접근할 때 함께 나온 젊은 유성체 띠가 존재하는데, 이 띠를 지구가 관통할 때면 1초당 1개 정도로 별똥이 매우 많이 나타나며 그것들은 하늘의 한 점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별똥만발(meteor outburst)이라고 한다. 혜성으로부터 나온 지 어느 정도 오래된 유성체들은 느슨한 형태로 유성체 흐름을 이루고 있다. 그 속을 지구가 관통할 때면 1분당 1개 정도의 유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유성우라고 한다. 또한 모혜성에서 떨어져 나온 지 많은 시간이 흘러 원래 궤도에서 벗어난 유성체들이 지구 대기 속으로 돌입하여 생기는 유성은 산발유성이라고 한다. 실제로 빛을 내는 부분은 뜨거워진 유성체 자체가 아니다. 유성체가 그 주위를 둘러싼 대기 속의 원자와 분자를 이온화했다가 그것이 재결합될 때, 또 들뜸 상태가 되었다가 되가라앉음 상태가 될 때, 빛이 나오게 된다. 이 빛들은 원자나 분자의 종류에 따라 특유의 파장을 갖는데 그 때문에 유성의 빛깔이 다른 것이다. 이때 유성체에서 증발한 철, 마그네슘과 같은 원소도 마찬가지로 특유의 색깔을 내게 된다. 평범한 유성보다 훨씬 밝은 유성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천구성(天狗星)이라고 불렀으며, 서양에서는 ‘fireball’이라 하는데, 이를 한자 용어로 ‘화구(火球)’로 번역했다. 국제천문연맹의 정의에 따르면, 화구는 지상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행성들보다 더 밝은 유성을 말한다. 즉, 안시등급으로 -4등급보다 밝은 유성을 말한다. 유성을 연구하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모임인 국제유성기구는 국제천문연맹보다 더 과학적으로 정의하였다. 즉, 화구는 천정에서 보면 안시등급이 -3등급보다 밝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평선 근처의 하늘이 천정보다 더 밝고, 또한 유성에서 나온 빛이 대기를 통과해 오는 거리가 더 멀다는 점을 보정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즉 고도가 5도인 유성이 -1등급으로 관측되더라도 실제로 그 유성이 발생한 곳의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은 -6등급으로 보게 될 것이므로 화구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화구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소리가 나는 유성을 영어로는 ‘bolide’라고 하는데, 국제천문연맹에서는 이 용어에 대해서 따로 정의하지는 않고 화구과 같은 범주로 취급한다. 한국의 역사 기록에는 소리가 나는 유성의 기록이 여럿 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 옥스포드 영어사전( 줄여서 OED)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하는 영어사전이다. 인쇄 제본형 표준판은 1884년부터 부분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여 44년만인 1928년 초판이 완성됐다. 그 후 옥스포드 온라인 사전 초판은 2000년 처음 나왔으며 3개월마다 어휘를 새롭게 등재하고 있다. 1857년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문헌(언어)학회에서 사전의 발간을 제안받고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22년의 세월이 흘러 당시 문헌(언어)학회의 회장으로 있는 제임스 머레이 경(Sir James A.H. Murray)이 편집장으로 하여 작업이 착수되었다. 편집작업에는 1천5백명안팎의 학자가 동원되었는데 1928년에 초판이 나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시작할 때는 사전 제작에 10년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요되는 작업이 많았고 제임스 머레이 이후 헨리 브래들리와 윌리엄 알렉산더 크레이기, C.T. 오니언스 등으로 편집장이 바뀌면서 결국 1928년에 가서야 초판이 완성되었다. 후에 언어학자뿐만 아니라 문학 연구가들에게도 필수의 사전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학계에 기여한 공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공헌이 인정되어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매년 그해 등재 신조어를 발표하는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 특히 영국 옥스퍼드대학은 국왕이「흠정역(欽定譯) 성서(聖書)」의 독점출판권을 부여, 그 판매수익으로「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펴냈다. 또한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언어학자 노아 웹스터(Noah Webster, 1758~1843)가 1828년 출판한 『미국 영어사전(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2권)을 토대로 1898년 초판을 선보인 이래 개정을 거듭하여 판매되고 있는 『웹스터 영어사전(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Unabridged)』(3권)과 영미권에서 비교가 되고 있지만 양적, 질적으로 확연히 구별되어 권위있는 영어사전으로 인정되고 있다. 처음 표준판은 1884년부터 부분적으로 나오기 시작해 44년 만인 1928년에 비로소 초판본이 완성되었던 것인데 초판은 총 12권 분량의 책에 41만4천8백25개의 어휘와 500만개 인용문 중 고르고 골라 1백82만7천3백8개의 보기인용문이 실려있었다. 단어 수집과 기획 작업으로 무려 71년이나 걸린 작업이었다. 이후 1989년 20만개가 늘어나 60만개의 단어가 실린 2판 개정판이 발행되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인쇄판 수요 감소에 따라 당분간 온라인판으로만 집중하겠다는 의견을 내보이고 있다. 인터넷으로 사전을 검색할 수 있는 온라인 회원은 급증하는 반면 인쇄판 판매는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옥스포드대 출판부는 온라인 사전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이지만 제3판 출간 시점에서 수요가 충분하다면 인쇄판도 고려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영국의 작가들은 온라인판에 집중하겠다는 옥스포드 출판부 측의 움직임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인쇄된 책이 영원하리라고 여겼던 것이 인쇄판 수요 감소와 인터넷, 휴대폰 등 통신 환경의 변화로 사전 탑재가 가능하여 완전히 생각을 바뀌었다는 의견을 보였다. 옥스포드 영어사전(OED)의 편찬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교수와 광인》, 《영어의 탄생》등의 책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년 5월 6일 ~ 1939년 9월 23일)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그리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 병리를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성욕을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로이 정의하였으며,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전이의 이론, 그리고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등 치료 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뇌성마비를 연구한 초기 신경병 학자이기도 하였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프로이트의 방법과 관념은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일부 사회 과학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프로이트는 법을 공부하기로 했다가 빈 대학교의 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다윈주의자였던 카를 클라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의대를 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에 대한 독서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당시 뱀장어의 생애 주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프로이트는 뱀장어의 수컷 생식 기관을 연구하면서 트리에스테의 오스트리아 동물학 연구소에서 4주간 지냈으며, 전임자들보다 별로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한 채 뱀장어 수백 마리를 해부하였다. 1876년에 그는 "뱀장어의 정소"라는 첫 논문을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 보고서(Mitteilungen der österreich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에 실었는데, 여기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였다. 별달리 성공을 거두지 못해 명성을 얻지 못하자,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바꾸게 된다. 1874년,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빌헬름 본 브뤽케는 '생리학 강의'를 출간하여 "정신 역학"의 개념을 제안한다.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을 공식화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연구했던 그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에너지-체계이며, 이 법칙에 지배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브뤽케는 비엔나 대학교 의과대학 1학년생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임 교수였는데, 프로이트는 그의 새로운 "역학적" 생리학을 받아들였다. 브뤽케의 '생리학 강의'에서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는 하나의 역학계이며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급진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정신 및 정신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역동적 심리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였다. 존 볼비에 따르면, 화학과 물리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모델은 브뤽케, 메이네르트, 브로이어, 헬름홀츠, 헤르바르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1879년, 프로이트는 1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수행하고자 연구를 잠시 접어두었으며, 1881년에 논문 "하급 어류종의 척수에 관하여"(Über das Ruckenmark niederer Fischarten)로 의학 박사(M.D.) 학위를 받았다. 1885년 10월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와 공동 연구차 파리에 갔다. 그는 이 때 파리에 체류한 경험이 재정적으로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신경학 연구 대신, 정신 병리치료로 진로를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하였으며, 그는 청중 앞 무대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자주 시연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프로이트는 최면 기법을 더이상 치료 가능성이 있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유 연상과 꿈 분석을 선호하게 된다. 샤르코 자신도 말년에 히스테리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1886년에 프로이트는 와 결혼한다. 그 뒤 자신의 신경과 진료소를 차린다. 아내의 아버지 베르만은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작 베르나이스의 아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하였으나 많은 대상자들에게 최면이 쓸모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이 치료 방식을 포기하였으며, 환자와 본인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썼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대화의 최종적인 목적은 환자가 처음에 거부하고 있으며 무의식에 갇힌 강력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어 위치짓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환자가 어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이것이 종종 정신의 정상적인 기능에 해를 끼치며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정신 신체증"(심신증)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화 기법"이란 용어는 원래 프로이트의 동료인 요제프 브로이어의 환자인 안나 O.(Anna O.)가 만든 말이었다) "대화 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나이 40대에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 그 밖에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 기억 그리고 본인의 인격발달의 변천에 대해 탐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1896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또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비엔나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을 출간한 이후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비평하는 지지자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하던 카를 융이었다. 두 사람이 결별한 이유는 융이 종교와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지고 다룬 탓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1930년,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독일어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 상을 받았다. 3년 뒤에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였으며, 이들이 불태우고 없앤 책 가운데서도 프로이트의 책이 특히 두드러졌다. 1938년 3월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엔나에서 반유대주의 감정이 들끓었으며, 프로이트와 가족의 집에는 비밀 경찰들이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또 비엔나 정신 분석 학회가 해산당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책과 재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프로이트는 "자유롭게 죽기 위하여"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 그와 가족은 1938년 6월에 비엔나를 떠나 런던 햄프스티드의 20 메어스필드 가든스(20 Maresfield Gardens, 현재의 프로이트 뮤지엄)로 이주하였다. 스위스 코티지 근처에 벨사이즈 길(Belsize Lane)과 피츠존 거리(Fitzjohn's Avenue)의 한쪽 모퉁이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프로이트는 구강암 때문에 생전에 30번이 넘도록 수술을 받았다. 1939년 9월에 그는 의사이자 친구인 를 설득하여 자살을 돕도록 하였다. 프로이트는 미완성 원고 <정신 분석학 개관>을 남겨두고 1939년 9월 23일에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 뒤에 그의 유해는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프로이트는 시간 약속 같은 것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영국제 양모 정장에 옷감은 꼭 아내가 골라준 것을 썼다. 젊은 시절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농담 삼아 "양복장이의 인상이 내게는 담당 교수의 인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무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대중화한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회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갈등이 정서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그의 이론은 이후 자연스럽게 정신질환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그는 최면과 최면이 어떻게 신경증 치료에 도움을 주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후에 현재 '대화 치료'로서 발전하여 알려져 있는 자유연상과 꿈의 해석에 대해서 이를 지지하며 최면술을 포기했다. 이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특히 그 당시에 히스테리라고 불렸던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는 지금 전환신드롬이라고 불리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들과 환자에 대한 그의 치료는 19세기에 비엔나에서 논쟁이 되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는 그것들을 과학적 의학적 논문으로서 계속 논의되는 것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일반 문화에서 종종 논의되고 분석되어 왔다. 자유 연상(심리역동이론)은 심리학에 사용되는 기술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창시되었다. 프로이트는 최면술이 틀리기 쉽고 의식이 있는 동안에 중대한 기억에 대하여 환자들이 회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최면술로 치료하기를 그만두었다. 자유연상기법을 통해 프로이트는 명백하게 중요하지 않거나 잠재적으로 환자를 압박할 수 있는 혼란스러운 기억이 될지라도 그런 것에 관계없이 환자들에게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도록 했다. 이 기법은 모든 기억은 단일 연합의 네트워크에 정렬되어 있고 당장이든 후일에든 그것은 중대한 기억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불행하게도 프로이트는 기억해내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통스럽고 중요한 기억이 환자에게 저항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결국 일정한 기억들이 철저하게 억압되어 있다가 정신의 의식 영역으로 뚫고 올라올 것이라는 견해를 갖게 된다. 프로이트의 궁극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는 그것들을 정신 깊숙이 묻어버리는 내부적인 정신 갈등으로서의 이러한 기억들의 회상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며, 자유 연상 기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신에 관한 연구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신체 부위에서 리비도의 이동에 따라 쾌감을 추구하는 신체부분 또는 방법이 달라지는데 따라 발달 단계를 구분하였다.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재기, 성욕기로 나누는데 이를 심리성적 발달 단계(psychosexual developmental stage)라고 한다. 처음의 세 단계에서는 자신의 신체부위에서 만족을 추구하므로 〈전성욕기〉(pregenital stage)라고 한다. 뒤의 두 단계에서는 특정의 신체부위가 아니라 이성관계 등 사회적 활동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므로 〈성욕기〉(genital stage)라고 한다. 1. 구강기(oral stage, 0~2세) 이 시기에는 입이 두 가지 형태의 행동을 한다. 먹고 마시는 흡입행동과 깨물고 뱉어내는 행동이다. 흡입 행동에 고착되면 먹고 마시고 흡연과 음주, 키스 등에 관심이 많으며 성장하여 낙천적이고 의존적이 된다. 이가 나올 때에 깨물고 뱉어내는 등 입의 공격적인 행동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고착되면 성격적으로 적대감, 질투, 냉소적, 비관적, 공격적이 되고 남을 통제하려고 한다. 2. 항문기(anal stage, 2~4세) 생후 첫 해에는 부모들이 아동의 욕구가 부모를 통하여 최대한 충족되지만 배변훈련시기부터는 아동은 차츰 욕구충족이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으며 거부되기도 하고 따라서 유예해야 함을 배운다. 이 시기에는 리비도가 항문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배변활동을 통해 쾌락과 욕구충족을 느끼는데 적절히 훈련하여 아동의 욕구가 충족되면 자신의 배설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의 창조물로 보기 때문에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성격이 된다. 배변훈련이 지나치게 엄하거나 잘 학습되지 못하면 부모의 요구에 대항하는 적대적, 가학적, 파괴적 성향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항문을 이완시켜 배변하는 것보다 조이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 지나치게 깔끔하여 결벽증적인 성격이 나타난다. 그 밖에 융통성없는 기계적 성격, 구두쇠 심리가 나타난다. 3. 남근기(phallic stage, 4~6세) 리비도가 성기에 집중되어 이의 감수성이 민감해지고, 만짐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시기이다. 성 차이를 인식하고 출생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남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 어머니를 성적 애착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아버지를 미워하는 두려움이 나타난다. 여아는 남아와 비교하여 음경선망 등 열등감과 좌절감을 겪는 동시에 아버지를 성적 애착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어머니를 적대시하는 일렉트라 콤플렉스에 빠진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콤플렉스 현상은 동성 부모의 성역할을 학습함으로써 해소된다. 해소 정도에 따라 성역할 정체감과 성인기의 이성에 대한 태도가 결정된다. 4. 잠재기(latency stage, 6~12세) 초등학교 시기부터는 성적 욕구의 만족이 신체의 특정 부위의 자극이 아니라 친구관계, 취미활동, 스포츠 등 사회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는 쾌락원칙을 버리고 현실원칙을 따르며 아버지의 권위와 금지 또는 양심에 따라 사회적 도덕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5. 성욕기(genital stage, 12세 이후) 사춘기로서 성적 충동을 정상적인 성욕으로 통합하는 시기이며, 정서적 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는 심리적 이유기이다. 앞서의 단계들에서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이 단계에서도 갈등이 있다. 그러나 앞서의 어느 단계에 고착되지 않았다면 이성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 이성관계와 또래관계를 맺기, 학문,예술등에 몰두하기 등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활동을 통해 만족을 찾고, 원시자아의 충동을 승화시킨다. 자기방어기제는 프로이트가 발표한 이론으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Defence Mechanic)이다. 압도되는 불안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함은 물론 기능을 수행하도록 도와준다. 자기 방어 기제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무의식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현실을 왜곡하게 지각하여 불안을 감소시키도록 한다는 것이다. ① 억압: 가장 기본적인 방어기제. 위협을 주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욕구, 사고, 기억이 의식화되거나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차단하는 과정(예: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적 충동이나 욕구를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함) ② 동일시: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특성(가치, 태도, 행동 등)을 내면화하는 과정 (예: 남아가 거세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어머니에 대한 성적 충동을 억압하고 아버지를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고 애정을 획득함) ③ 부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 백일몽, 환상 (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④ 반동형성: 위협적인(공격적인) 충동을 의식수준에서 정반대의 충동, 말, 행동으로 대치하는 과정 (예: 음주욕구가 강한 사람이 금주운동에 참여하는 것) ⑤ 투사: 수용하기 어려운 충동, 사고, 감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으로 귀인하는 과정(예: 자기 내부에 증오심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자기를 증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⑥ 주지화(지성화): 위협적인 대상에 대해 정서적으로 관련되지 않기 위해 그 대상에서 분리되는 과정(예: 불쾌한 경험을 해야 하는 전문가, 검시관, 간호사, 외과의사 등이 많이 사용) ⑦ 치환(전위): 현실적인 제약요인으로 인해서 충동이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때 다른 대상을 통해 충동이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예: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난 후 동생에게 화풀이하는 형) ⑧ 승화: 치환의 한 형태로,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충동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예: 직접 충족시킬 수 없는 성적 충동을 그림이나 음악, 문학작품을 통해 충족시키는 예술가) ⑨ 합리화: 수용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실제 이유가 아니라 그럴 듯한 이유를 둘러대거나 변명을 통해 난처한 입장이나 실패를 모면하려는 일종의 자기 기만전략(예: 이솝우화의 ‘여우의 신포도’) ⑩ 고착: 새로운 발달단계로 이행할 때 경험하는 불안이나 좌절이 극심할 때 정상적인 발달이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중단되는 현상(예: 지나치게 의존적인 아동이 독립적인 행동을 학습하는 것이 불안한 경우 고착 방어기제 사용) ⑪ 퇴행: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초기 발달단계로 되돌아가거나 안정되고 즐거웠던 인생의 이전 단계로 후퇴하는 것(예: 성인이 토라지거나 말을 하지 않는 것) ⑫ 보상: 신체적 조건, 지적 특성, 성격 특성의 약점이나 결함을 극복하거나 감추는 것(예: 외모에 열등감을 느끼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공부가 재미없는 학생이 운동에 몰두하는 것.)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보았다. 아돌프 그륀바움은 정신분석학은 반증가능하며, 사실상 틀렸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간의 논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해져서, 이러한 논쟁들은 "프로이트 전쟁"으로 불린다. 행동주의 심리학, 진화심리학, 인지심리학은 정신분석학을 의사 과학으로 취급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들 역시 정신분석에 대해 회의적이다. 『정신분석의 탄생』/『꼬마 한스와 도라』/『늑대 인간』/『종교의 기원』/『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예술 문학 정신분석』/『정신병리학의 문제들』/『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정신분석운동』 프로이트의 저작 가운데 영역본은 24권짜리 《표준판 프로이트 전집》(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이 가장 유명하다. 영국의 심리분석학자 제임스 스트레이치가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와 협력 하에 책임편집을 맡았다. 정신분석학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 Psychoanalysis)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시작된 심리학의 한 갈래로, 인간의 행동양식을 심리 내적인 욕구의 충돌 및 조화의 요구를 위한 표출로 판단한 것으로, 이러한 심리 내적 욕구와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조화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조화되지 않을 때에는 정신적 질환으로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욕구는 프로이트가 성적인 것으로 주로 이해하였지만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이에 동의하지는 않으며, 학자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일반적인 심리학과 구별되는 가정을 한다. 그것은 '무의식(Unconsciousness)'이라 불리는 것인데,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의식 영역의 구조와 행동 방식에 대해 연구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의식에 들어와 있지 않은 혹은 억압된 감정과 욕망, 생각 등이 모이며 그것이 인간 행동과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간주한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세계에서 인지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여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에 대해 발견하고 그 무의식의 내원과 구조에 대하여 연구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지형학적 모델로 무의식의 구조를 설명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신의 바깥-땅 위의 표면과도 같은-에 의식이 존재하고, 그 밑에는 지금 당장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든 다시 생각을 꺼내올 수 있는 전의식-땅 밑의 지표-이 존재한다. 전의식에서 한층 더 깊이 경계를 넘어 들어가면 의식에서 억압된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지형학적 모델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전의식은 넓게는 무의식에 포함되는 개념의 하나이다. 차후에 프로이트는 이러한 지형학적 모델을 만들어 내 역동적 정신 구조론으로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이것이 익히 알려진 자아(ego)-초자아(super ego)-이드(id)의 3원적 기능이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초기의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비롯한 3자 관계(아동-어머니-아버지)와 성적 힘의 역동성에 주된 초점을 맞추었으나 후대의 정신분석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며 다양한 갈래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신분석학의 전부를 이룬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 자신도 정신분석학의 주된 골격을 세우는 데 있어 여러가지 이론을 세웠다가 스스로 그것을 수정하고 심지어 폐기하기도 하였으며, 후기에 가면 학문적 입장이 변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다윈의 《생물학》을 현대 생물학과 같다고 볼 수 없으며, 뉴턴의 《물리학》이 곧 현대 물리학이라고 간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프로이트 사후에는 프로이트의 친딸 안나 프로이트를 비롯한 자아심리학파와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학파가 생겨나 맞서기도 하였으며,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정신분석학자인 한유훈에정신분석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정신분석은 모든 정신의학 이론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프로이트 학파 정통 정신분석연구소 연수생들은 후학을 양성하며 치료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정신분석학은 이른바 인생대학과도 같이 올바르게 내면의 통찰을 도우며 그 통찰을 자신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적용하도록 돕는다. 마음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자에게 최고의 만족을 선사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도구로 하여 무의식을 탐구하고 깨닫는 과정이 정신분석이다. 흔히 정신치료자들이 정신분석을 억지이론으로 폄하하나 그들 역시 정신분석 이론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론을 토대로 치료하며 실제로는 기본적 수준의 치료만을 할 수 있는 치료자들이 내세우는 억지 비판이다. 또한 정신분석은 의사나 환자의 관계가 동등하여 주입식이 아닌 토론이나 대화의 형태에 가깝다. 사람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이며 무의식에 의해 지배 당하는 삶을 살지만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화하여 보다 주도적인 삶을 살고 무의식을 컨트롤하자는 취지이며 그가 말한 초자아 역시 대부분은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것이고 무의식에 기반을 둔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기 위해 자아의 강도(ego strength)가 강해야 무의식적 저항을 다스려 의식의 영역을 넓히고 분석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무의식 자체를 온당한 검사를 경유해 의식 영역으로 이입하여 심리 영역 전반의 신진대사 기능을 확충하는 것이 궁극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일반적으로 신경증 환자를 대상으로 삼아 치료를 시도하지만 일반인 모두에게 이러한 정신분석은 자아 성찰에 있어서 친구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역시 그 의미를 공히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의 힘은 상상을 넘는 정도라 분석 후 임신이 가능해지거나 신체적 변화가 생겨 직업을 정신분석가로 가지게 된 사례도 있으며 무의식의 힘도 놀라우나 폐해도 적지 않으며 무의식을 건전한 의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 탄생의 기본 취지라고 하겠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자들은 매우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아왔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과 옹호 사이의 갈등은 너무 격렬하게 진행되어 이후에 프로이트 전쟁이라 불리기도 한다. 초기의 비판은 정신분석학이 너무 임상적인 사례 연구에만 치중한 나머지 양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몇몇은 프로이트를 위조 혐의로 비난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이 주장한 위조 중 대표적인 것은 으로 추정되는 (가명)와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 철학자인 는 그의 저서 "Freud and the Question of Pseudoscience"에서 겉으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주장들을 토대로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을 지적하며 프로이트와 그의 학파의 연구를 의사과학으로 분류하였다. 다른 이들은 프로이트에게 상담받은 환자들이 정신 분석학과 거리가 먼, 현대에는 쉽게 진단 가능한 질환을 앓았다고 추측하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Anna O.가 히스테리증이 아닌 결핵수막염이나 측두엽 간질과 같은 장기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짐작하기도 하였다.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이 의사과학인 이유로 정신분석학의 주장들이 실험 가능하지 않고 반증할 수도 없다는 점을 꼽았다. 즉 그들의 주장을 허위라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러커토시 임레는 후대에 "포퍼의 과학적 신뢰를 염려하는 기본적인 도전은 프로이트 학파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프로이트 학파는 그들이 실험한 실험 환경을 특정짓기를 거부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인지과학자들 또한 비판에 가세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긍정심리학의 대가인 마틴 셀리그먼은 그의 저서에 "30년 전에 일어난 심리학의 인지 혁명은 프로이트 학파와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을, 적어도 학문적인 분야에서는, 동시에 타도했다. ... 생각은 그저 감정이나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 감정은 항상 인지에서 생겨나며, 인지 외의 다른 것에서 발생하지 않는다."고 서술하였다.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정신분석학자들을 과학적 증거 부족으로 비판하였다. 스티븐 핑커는 프로이트 학파의 이론을 심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비과학적이라 여겼다.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정신분석학이 자연발생설과 같은 의사과학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이론으로 간주하였다.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와 존 킬스트롬 또한 정신분석학을 의사과학이라 비판하였다. 은 그의 저서에서 정신분석학에 기반을 둔 이론이 허위임을 입증할 수 있으며 정신분석학의 우발적인 주장들은 재현 가능한 임상적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리처드 파인만은 정신분석학자들을 "주술사"로 표현했다.그들이 아주 작은 기간 동안 정립한 이 모든 복잡한 생각을 보아라. 만약 당신이 다른 과학이 한 생각에서 다른 아이디어를 고안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를 이와 비교해 본다면, 그들이 고안한 이드와 자아 등등을 생각하면, 당신 또한 그들이 전혀 이 모든 것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너무 방대하여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이 그 짧은 기간에 고안해낼 수 없다.미국의 정신과의사인 는 정신분석학의 이론이 과학적인 근거 면에서 전통 치료사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데 동의하였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포함한 프로이트의 충동론을 면밀히 조사하고는 타당성을 거부하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녀와 에 따르면 아이를 성인의 폭력적인 성적 태도의 관점에서 비난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조엘 쿠퍼스미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타당성을 그 본질과 기원적인 면에서 조사하고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실존을 증명할 단서가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는 정신분석학회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고백 기법이 기독교적 전통을 반영한다고 주장하였다. 자크 라캉은 몇몇 미국과 영국의 정신분석학적 전통의 중점, 즉 환자가 본 것을 그가 겪는 증상의 원인으로 보는 전통적 방식을 지적하며 프로이트를 비판하였다. 들뢰즈와 함께, 펠리즈 가타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조를 비판하였다. 뤼스 이리가레는 자크 데리다의 인간중심주의 개념을 통해 여성의 배제를 설명하며 프로이트 학파와 라캉 학파의 정신분석학 이론들을 비판하였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 분석 학자인 , 와 의 에시를 들며 전통적인 면에서, 정신분석학은 열심히 경찰국가를 옹호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정신분석학은 꾸준히 정신과 의사들을 비롯한 많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에 의해 시행되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확연히 줄어든 경향을 보인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아동정신과 의사인 브래들리 피터슨은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료의 방면에서 정신분석학은 막바지에 도달했음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신분석학의 이론상의 토대는 과학 실증주의보다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흐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의 실증주의적 접근과 양립할 수 없다. 2004년 프랑스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정신분석학 요법은 인지행동치료를 비롯한 다른 정신요법에 비해 덜 효과적이다. 보고서는 수많은 다른 연구를 메타분석법을 사용하여 여러 질병에 그 요법의 효과가 입증되었거나 추정되었는지를 살폈다. 수많은 연구들은 그 효능이 정신분석학적 테크닉이나 훈련보다 치료사의 자질에 좌우됨을 드러내었다. 정신분석은 심리학에서 비판을 받아온 한편 문학 비평과 교육학 등으로 그 영향이 널리 파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 1751년 7월 30일~1829년 10월 29일)는 오스트리아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누나다. 나네를()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렸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일곱 살때부터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아버지는 그녀의 남동생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함께 그녀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여행에 데리고 다녔다. 1783년에 요한 폰 존넨부르크와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았다. 존넨부르크는 이전의 두 차례 결혼을 통해 다섯 아이가 있었다. 남편인 요한 폰 존넨부르크는 1801년에 죽었고, 나네를은 아이들을 데리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1825년에는 시각을 잃었으며, 1829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가브리엘 호세 데 라 콘코르디아 가르시아 마르케스(, 1927년 3월 6일 ~ 2014년 4월 17일)는 콜롬비아의 소설가,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운동가이다. 콜롬비아 마그달레나 주의 작은 도시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 그의 부모가 바랑키야로 이주하게 되자, 어린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조부모에 맡겼다. 그의 문학 세계는 어린 시절 조부모에게 받은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바랑키야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2세에 중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18세까지 공부했다. 그 후 수도 보고타의 카르타헤나 대학교에서 법률과 언론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기자가 되어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그 후 멕시코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 쿠바 혁명 이후에는 쿠바에 거주하면서 쿠바 통신사의 외국 특파원으로 근무했다. 이탈리아 로마,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쿠바 아바나 특파원을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생애의 대부분을 멕시코 멕시코시티와 유럽에서 보냈다.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그의 작품은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일컬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르호 카르펜티에르,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함께 20세기 남미의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며 또한 그를 콜롬비아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고 일컫게 한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콘도(Ma­condo)라는 가공의 땅을 무대로 하여 부엔디아 일족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며,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에 영향을 주었다. 1981년에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가 라틴아메리카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1982년 라틴아메리카 현대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1995년 《사랑과 또다른 악마들에 관하여》의 프랑스어판을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하였다. 2014년 4월 17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우산국 우산국(于山國)은 삼국시대에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인 울릉도와 부속섬을 다스리던 나라다. 244년 왕기가 위궁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고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느냐 물으니 바다 동쪽에 섬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무력에 의한 항복보다는 교묘한 계책을 써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나눠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모두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자 512년 6월 항복해 와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930년 우산국은 백길(白吉),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을 원했고 태조는 두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 1018년(현종 9년) 고려는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했고 1019년(현종 10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1022년(현종 13년) 우산국 백성 중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하여 망명온 자들을 예주에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 멸망하였다. 동해시 동해시(東海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동해안 남부에 있는 시이다.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되어 신설된 시이다. 시의 동쪽에는 묵호항과 동해항이 있고, 서쪽에는 두타산(1,352m)이 있다. 도심인 천곡동에 동해지방해양항만청과 시청이 소재한다. 해마다 10월에는 동해무릉제가 열린다. 무릉계곡을 비롯해 두타산·청옥산 같은 산지와 망상·어달·추암 해수욕장 등이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시목은 은행나무, 시화는 매화, 시조는 갈매기이다. 기원 전에는 옛조선에 속해 있다가 삼한 때는 마한.막조선의 실직국의 일부였다. 이 후10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으나 5세기에는 고구려의 실직군이 되었다. 630년에는 신라의 영토에 완전히 속하게 되었다. 1018년에는 삼척부의 삼척현과 강릉부의 우계현으로 분리되었다. 1632년에 현재의 동해시 남부 5개 행정동 지역이 삼척부의 박곡리가 되었고, 1648년에 현재의 동해시 북부 5개 행정동 지역은 강릉부의 망상리가 되었다. 1705년 망상리가 망상면으로 개칭되었고, 1739년에는 박곡을 견하로 개칭하였다. 1891년에는 견하를 도하·도상·견박 등 3개 면으로 분리하였다. 1895년에는 삼척도호부가 삼척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에는 3개 면을 합쳐서 북삼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1941년에는 묵호항이 개항되어 이후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었고, 북삼면이 북평읍으로 승격되었다. 동쪽은 동해에 접해 있고, 서쪽은 정선군과 삼척시, 남쪽은 삼척시, 북쪽은 강릉시에 접해 있다. 서쪽에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인 청옥산(1,430m)·두타산(1,352m)·상월산(964m) 등의 연봉들이 솟아 지세가 험준하고 높으며, 여기서 동해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해안지역의 너비 약 2km의 해안저지에는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남북으로 전천과 북부의 마상천이 짧은 급류를 이룬다. 평야는 전천 하류의 북평 분지에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는 외에는 대부분 산지가 해안까지 미쳐 해식애를 이룬다. 해안선은 전반적으로 단조로우나, 묵호 부근의 만입부는 천연의 양항을 이룬다. 태백산맥으로 해서 겨울철의 북서 계절풍이 푄 현상을 일으키고, 또 동쪽으로 동해에 면하므로 기후는 다분히 해양성을 띠어, 같은 위도의 서해안에 비해 연평균 1.5 , 1월 평균 3.7 정도 기온이 높다. 강수량도 많은 편이며, 특히 강설량이 많아 울릉도 다음의 다설지역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은 12.6도이며, 1월 평균 기온은 -1.5도이고, 8월 평균 기온은 25.1도이며, 연강수량은 1,300mm이다. 동해시의 행정 구역은 10개동 235통 1,272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해시의 면적은 180.17 km이고, 인구는 2018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91,272명, 40,784 가구이다. 논보다 밭의 비율이 훨씬 높다. 주요 농산물인 쌀은 망상·이원·북삼동, 콩은 삼흥·삼화동, 감자는 망상·이원·삼흥동, 보리는 이원·북삼·삼흥동, 옥수수는 삼흥동, 채소는 망상·이원·북평동, 사과와 복숭아는 북평동, 포도는 이원동이 각각 중심 재배지를 이루고 있다. 전체 면적의 78%가 임야이며 침엽수와 혼합림이 대부분이다. 어업인구 점차 감소 추세이며, 대부분 영세어업 내지 반농반어의 경영형태를 취한다. 항만청 지정항인 묵호항은 일찍부터 이 지역의 어업 중심지로 발달하였으며 그 밖에 천곡항·어달항·대진항 3개의 어촌정주어항이 있다. 주요 어획물은 노가리·오징어·꽁치·미역 등이다. 남부 일대에 양질의 석회석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으며, 그것을 개발한 쌍룡양회 동해공장이 삼흥동에 건설되어 현재 연간 500만t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북평항(동해항)에는 시멘트 전용 부두시설이 갖추어져서,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한 시멘트의 직접 선적이 가능해졌다. 어달동을 중심으로 무연탄이 생산되고 있으며, 삼화동에는 연간 1,200만t 이상의 석회석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며, 석회석을 주원료로 하는 시멘트공업이 발달하여 삼화·송정·항로동에 있는 동해·북평·묵호 공장에서 연간 1,600만t의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다. 북평에 선박기계·기계장비·합판·펄프·소형선박·도자기 등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동해사포나리알로에·동해버섯·동해망상콩나물·동해포도 등이 유명하다... 동해시는 2009년 10월 26일부터 5일간 망상해수욕장변에서 앙바엑스포를 개최하였다. 41개국에서 5,400여명의 천연가스 분야 전문가 및 저명인사와 업계, 학계 등 각계각층의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관람객은 5일간 내국인 84,290명, 외국인 2,377명 등 모두 86,667명으로 최종 집계됐다. 또한 이번 ANGVA 2009 동해 EXPO를 통해 180억 원의 생산효과, 37억원의 소득효과, 84억 원의 부가가치 효과, 330여명의 고용 창출효과를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 몇년 전만 해도 동해시의 인구는 감소 추세에 있었으나 최근 EFEZ(동해안경제자유구역청)등의 개발사업과 시멘트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지속적으로 인구유입이 되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삼척시, 강릉시 옥계면 등과 시내버스로 연결되어 있는 등 강릉 남부, 삼척과 교류가 잦으며 시청과 마트, 영화관 등 상업시설이 밀집된 천곡동이 중심지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묵호가 중심지였으나 공공기관이 천곡동에 들어서면서 묵호지역은 인구가 줄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논골담길, 묵호항, 망상해수욕장 등 관광자원이 풍부해 상권이 그렇게 많이 죽은 편은 아니다. 크게 묵호항과 발한동 중심의 묵호, 시청로터리 중심의 천곡로, 북삼동 중심의 구 북평읍으로 생활권이 나뉜다. 관광지로는 계곡·삼림·해안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개발의 여지가 많다. 특히 상류에 펼쳐진 넓은 폭포 및 깊은 계곡과 울창한 삼림·사찰 등이 소금강에 비교되는 곳이다.1998년 가을 ‘금강산 유람선’의 출항지가 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고 있다. 묵호항은 동해시 묵호동에 있는 항구이다. 주변에 수산물시장이 있다. 항내수(港內水) 면적 402km. 항만법상 1종항으로, 한국에서 석탄과 시멘트의 반출항으로서는 북평항(北坪港) 건설 이전까지는 최대의 규모였다. 동해안의 어업기지 및 피난항으로서 이용도가 높다. 무릉계곡은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관광지이다. 국민관광지 제77호로 선정, 개발되고 있다. 두타산과 청옥산 자락에 걸쳐 있는 이 계곡은 이름 그대로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무릉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무릉반석이라 불리는 널찍널찍한 바위들에 눈길이 간다. 바위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이 글씨를 남겨 놓았다. 그외에 볼거리는 쌍폭포와 용추폭포, 삼화사, 청옥산, 두타산, 고적대등이 있다. 두타산과 청옥산에 발원하여 흐르는 무릉계곡 전천의 상류에 펼쳐진 넓은 폭포이다. 천곡동굴은 시내에 있는 유일한 동굴이고 석회암동굴이다. 종유석, 석순이 있으며 시영아파트를 짓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천곡동에 위치한다. 긴 모래사장과 얕은 수심으로 유명하다. 석회암이 침식하여 기암괴석을 이룬다. 추암해수욕장에 위치한다. 무릉계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깊은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절을 건립하고 흑연대라 하였고, 그 후 범일국사가 재건하여 삼공암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약사전만 남았었는데 현종 1년(1660)에 중건되었다. 순조 23년(1823)과 고종 43년(1906), 두 차례 재난에 의해 소진됐던 것을 재건축했다. 경내에는 3층석탑(지정문화재 제713호)과 철불(보물 제1292호)이 있다. 동해시는 삼척선이 영동선에서 분기되는 곳이며 시멘트 수송을 위한 송성-삼화간 북평선 철도, 모든 구간이 전철화된 강릉-영주간 영동선 철도가 있다. 역은 동해역, 묵호역, 망상역(간이), 망상해수욕장역(임시승강장)이 위치한다. 주로 여객을 대상으로 한 열차보다는 자원 등을 수송하기 위한 열차가 더 활성화되어있다. 또한 삼척-포항간 철도가 지금 건설중이므로 완공될 시에는 동해시 철도교통이 향상될 것이다. 해상교통은 묵호항과 동해항이 있어 원활하다. 동해항에서는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을 통해 일본 쓰루가항과의 사이에 고속정이 운항되고 있고, 또한 러시아와 일본을 잇는 정기 여객선도 운행중이다. 묵호항에서는 묵호항여객선터미널을 통해 경상북도 울릉군 도동항으로 향하는 여객선을 이용할 수 있다. 묵호항은 강릉항, 후포항, 포항구항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로 향하는 주요 거점으로 꼽힌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은 22개,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7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다. 태백시 태백시(太白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남동부의 시이다. 1970년대 석탄 관련 광업으로 발전하였고, 장성탄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무연탄광이다. 대한민국 유일의 고원 도시로서, 태백산을 비롯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휴양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1981년에 삼척군 장성읍과 황지읍을 합쳐 태백시로 승격하였다. 행정구역은 8동이다. 인구는 2017년 주민등록 기준으로 4만6천 명이며, 특별법에 의해 설치된 충청남도 계룡시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인 시(市) 중 인구가 가장 적다. 태백시를 상징하는 꽃은 산목련, 나무는 주목, 새는 산까치이다. 태백시는 황지(북부 4개동)와 장성(남부 4개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구의 71%가 황지생활권에, 29%가 장성생활권에 거주하고 있다. 태백시는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쳐져 시로 승격되었는데, 현재도 외형상 단일시라기보다는 2개의 도심이 분리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영동권 시군 중 동해안과 접하지 않은 유일한 내륙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삼척시 도계읍 및 가곡면, 서쪽으로는 영월군과 정선군, 남쪽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북쪽으로는 삼척시 하장면 및 신기면과 접해있다. 때문에 영동권 지역 중 유일하게 항구나 해수욕장 등이 없다. 또한 태백시는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의 중간지점이다. 삼한시대의 진한에 속한 부족국가로서 삼척군 사직리에 도읍을 둔 실직국(悉直國)에 속하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때 사직국이 망하고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지증왕 때에 이곳에 실직주가 설치되었다가 무열왕 때에 북령이라 개칭하여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삼척군으로 개칭하여 도독부로 되었다. 1895년에는 강릉부에 속하였다가 삼척군에 속하였다. 1977년에 황지읍 화전출장소, 소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1년에 삼척군 장성읍과 황지읍을 합하여 태백시로 승격되었다. 강원도 남부 동쪽 내륙에 위치해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삼척시,서쪽으로는 영월군,남쪽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서북쪽으로는 정선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해 바다와는 1시간 거리에 있다. 해발 1,549m의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태백산 준령산악 협곡지대에 있어 고원성 산지의 특성을 지닌다. 때문에 전 지역이 높고 험준한 지세를 이룬다. 하천은 시의 중북부에 있는 매봉산(1,304m)을 중심으로 북류하는 남한강의 상류인 골지천과 남류하는 낙동강의 상류인 황지천·철암천이 있고, 동쪽에 동류하는 오십천과 가곡천이 있어 두부침식에 의한 하천쟁탈 현상이 활발하다. 평야는 거의 없으나 비교적 완만한 고위평탄면이 곳곳에 발달되어 있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질은 주로 고생대 조선계 석회암과 평안계가 분포하고 있으며, 오랜 지질시대의 지각운동을 받아 지질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태백시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보면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라 Dwa, Dwb, Dfb 등이 혼재되어 있는 기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겨울에는 건조하기 때문에, 평창군 대관령면이 Dfb로 판정받았다면 태백은 당연히 Dwb로 봐야 하는 것이 옳다. 태백시의 면적은 303.45 km²이며,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4만5888 명, 2만1880 가구이다. 시청 소재지는 황지동이며, 시내에 고등학교 5개교, 중학교 7개교, 초등학교 15개교가 있다. 해마다 10월에는 태백제가 열려 단군제, 산신제, 갈풀썰이 같은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태백산 국립공원, 황지, 용연굴이 주요 관광자원이다.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국토의 모산이다. 신라 때에는 오악 가운데 북악으로 봉하여 중상제를 모셨으며 서기 137년 일성 이사금 5년 10월에 왕이 친히 북순하여 태백산에서 하늘에 제사하였다.또한 서기 300년 기림 이사금 3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 왔다고 한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낙동강과 한강을 이루고 삼척의 오십천을 이루니 국토의 종산이자 반도 이남의 모든 산의 모태가 되는 뿌리산이다. 태백산은 현재 태백시와 영월군, 경상북도 봉화군과 접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해발 1,567m 높이의 산으로 암벽이 적고 경사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중요민속자료 제228호. 태백시 소도동 산8번지. 편마암으로 축조된 장방총 석단으로 높이는 2m, 둘레 20m이다. 단의 남쪽에는 제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매년 개천절에 제사를 지내는 천왕단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한강의 발원지. 낙동강의 발원지. 이며, 백두대간의 중추인 금대봉 하부능선 해발고도 920m에 위치하며 길이는 843m이다. 다양한 석순과 종유석, 석주, 동굴 진주, 동굴산호, 석화, 등의 생성물들을 볼 수 있는 자연 석회동굴이다. 수직으로 형성된 석회동굴로 굴 속에는 특이한 동굴 생물과 박쥐 등이 살며 동굴 바닥에는 호수가 있고 아직도 동굴형성이 진행 중이며 장막형 석순과 백색 산데리아형의 석주는 국내 최대이다. 태백산 눈축제는 민족의 영산인 태백산의 설경과 탄광도시에서 관광도시로 이미지 변화에 따른 마케팅의 측면에서 1994년부터 시작하여 2015년까지 22회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겨울축제이며, 대규모의 눈조각 경연대회, 태백산 등반대회를 비롯하여 눈썰매대회, 겨울놀이마당, 얼음조각전시 등 다채롭게 행사를 추진, 황상적인 겨울을 체험할 수 있는 축제로 발전했다. 2001년부터 《태백산 눈꽃열차》를 운행하였으며, 연평균 84,070명이 방문을 한다. 시민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전래의 민속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향토축제이다. 1981년 7월 태백시 개청 기념으로 1982년부터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서 개최되어 왔으며, 태백산 정상 천제단에서 개최되는 천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함께 단군제, 산신제 산업전사위령제 등 제례행사는 물론 지역 문화 예술 행사와 시민화합 체육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경지면적 796㏊ 중 밭이 786㏊, 논이 10㏊로 밭이 대부분이며 농가는 총가구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농산물은 감자와 옥수수 및 고랭지 채소 생산이 중심인데, 주로 해발 1,000m 지대에서 무·배추·양배추의 생산이 많다. 또, 주변 산지사면에는 초지(草地)가 많아 목축에 적합한데, 최근 젖소·돼지·칠면조 사육 및 양봉도 활발하다. 산림면적 2만 3,977㏊ 중 침엽수림이 59,9%로 침엽수의 비중이 비교적 높으며, 1㏊당 입목축적량도 31.6m로 많은 편이나 광산 주변의 벌목 및 폐석으로 인한 삼림의 파괴가 심각하다. 주요 임산물로 목재생산이 많으며, 목재는 대부분 광산용 갱목으로 사용된다. 시의 탄전지대에서는 무연탄 약 5천만 톤, 석회석 약 5억 2천만 톤, 그 밖에 금·은·철 등 풍부한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1960~70년대에 석탄이 국가의 주요 에너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채굴이 활발했다. 그러나 1987년 말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에 따른 영세탄광 정비작업이 실시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말 12만 명이었던 인구가 1993년 1월 현재 7만 9천 명으로 줄었다. 정부는 태백 정선 지역 개발 계획안을 마련하고 폐광지역을 중심으로 카지노장, 골프장, 스키장을 포함한 종합 레저타운을 조성하는 한편 대체산업 육성과 태백산 도립공원 개발 등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이를 위하여 2008년까지 총 1,758억 원을 들여 태백산을 집중 개발할 계획이다. 태백산 한약재·태백산 김치·태백산 산나물·태백총명우유·세라믹 화장품·청정 참기름·들기름·화훼·버섯 고랭지 채소·고산쌍화차 등이 유명하다. 무연탄 수송을 위해 1946년에 철암선, 1954년에 영암선, 1966년에 고한선, 1973년에 고한∼황지, 1975년에 황지∼백산이 각각 개통되었으며, 70년대 이후 무연탄 소비가 급격히 증가되면서 대량수송을 위해 전철화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로교통은 산간고원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영남·영서를 연결하는 국도가 있고, 고한·근덕·강릉·삼척과 연결되는 지방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내륙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다음과 같은 국도가 통과한다. 38번 국도가 확포장되어 접근성이 대폭 개선되었다. 태백선(태백, 추전역), 영동선(동백산역, 철암역)이 통과한다. 속초시 속초시(束草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동해안 북부에 위치한 시이다. 시의 서쪽으로 설악산 국립공원이 있고, 시의 중심부에는 석호인 영랑호와 청초호가 있다. 동해에는 한류와 난류가 교류하여 어족이 풍부하기 때문에 동명항과 대포항을 중심으로 수산업과 관광업이 발달하였다. 면적의 대부분이 설악산이있어서 실제 면적은 좁은편이다. 역사적으로는 본래 동예의 땅으로 고구려 때에는 수성군(隨城郡), 신라 때에는 수성군(守城郡)에 속하였고, 고려 이래 양양군에 속해 왔다. 처음엔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민들이 청초호 안에 정착하여 한 어촌을 이루었는데 1905년 동해 연안 항로가 개설된 당시 선박의 기항지로 쓰였다. 또 양양철산의 철광석 반출항으로 되어 1937년경부터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에는 읍으로 승격되고,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분할되면서 38선 이북 지역이 되었다.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이 수복하였고, 1963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 피난민이 많이 남하하여 정착하게 됨으로써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그리하여 어항·철광석 반출항, 설악산의 등산구, 또 서쪽 진부령을 넘어 춘천·서울 방면과 이어지는 교통요지가 되었다. 1973년에 고성군 토성면 장천리와 사진리가 편입되었다. 강원도의 동해안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동해, 남쪽은 양양군, 서쪽은 인제군, 북쪽은 고성군에 닿아 있다.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약 62km 지점에 있다. 인제군 북면에서 미시령터널로 이어진다. 현재 대한민국(남한)의 시 중에서 유일하게 전 지역이 38선 이북에 위치해 있는 국내 최북단 시이다. 시 서쪽 설악산 가까이의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한 지맥이 동쪽으로 뻗다가 다시 갈라져 청초호란 호수를 안고 동해안과 마주한다. 그 사이에 있는 속초호(면적 1.1km, 수심 3.1 4.7m)는 완전히 폐쇄되지 않고 일부분은 바깥바다에 통하여 주머니 모양을 한 만(灣)처럼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청초호 안에는 500t급 선박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고 외해의 풍랑이 미치지 않아 좋은 항만의 구실을 하며, 특히 풍랑 때 어선의 대피 정박지로 쓰인다. 호구에 마주한 해안도 정박이 편하여 매우 좋은 항구의 조건을 갖추었다. 면적 105.00km이다. 인구는 1955년 2만 8,000명, 1966년 6만 3,000명, 1975년 7만 1,500명, 2001년 9만 447명으로 늘었다. 인구는 바닷가에 조밀하고 상업은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대로 연변에 상가를 이루며 공장은 청초호 주변에 모여 있다. 해류를 따라 많은 물고기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므로 가까운 바다의 15 ~ 25마일 일대는 특히 좋은 어장을 이루어 오징어(7월 ~ 10월), 명태(10월 ~ 3월), 꽁치(4월 ~ 6월) 등이 잡히는 등 어업이 성하다. 초등학교 10개 교, 중학교 4개 교, 고등학교 3개 교가 있으며 동우 전문대학과 문화원·시립 도서관·한국방송공사 속초 방송국이 있다. 현재 인구는 83,498명이다. 남녀 성비는 97 정도로, 여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2위는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 속초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속초시는 설악산과 동해바다의 풍경,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테마로 한 관광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1999년에는 강원국제관광엑스포를 개최하였으며, 현재 그 상징탑과 공원이 속초시 조양동 청초호변에 조성되어 있다. 경지 면적은 총면적의 10.4%인 10.9km로 논과 밭의 비율은 60:40이다. 소아평야를 중심으로 쌀농사가 성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감자, 고구마, 보리 등이다. 동해는 한·난 두 해류가 뒤섞이는 세계적 어장으로 명태·꽁치·대구·오징어·고등어·청어 따위가 잡히며 특히 오징어 어획량이 많고 동해안에서 주문진과 함께 1, 2위를 다투는 어항이다. 어획고를 어항별로 볼 때 부산 다음가는 상위권에 있다. 대포동 앞바다에서는 미역 양식이 활발하다. 어선 수와 수산업 인구는 줄어드는 추세이나 어선은 대형화하고 있다. 공업은 선박·기계·주물 등을 제작하는 기계 제작소와 동양 제일을 자랑하는 유한양행 수산부 공장이 있다. 여기서는 냉동·건조·유지비료(油脂肥料) 등의 공업이 성하고 동림수산(東林水産)의 통조림 공장을 비롯하여 몇몇 유지·수산공장 등이 있다. 설악산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한 관광·수산·상업 도시로서 중앙시장을 비롯하여 중앙·청호·제일 등 4개 시장이 있다. 모든 생필품은 서울지방에서 들여 오므로 가격차가 10∼15%나 된다. 영동선이 강릉에서 속초까지 연장되어 속초역을 중심으로 몇 개의 역이 신설되고 춘천·속초간 횡단철도가 깔릴 예정이다. 도로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며 간성·강릉 등지와 교통량이 많고, 영서지방과는 미시령을 넘어 인제·춘천·서울 방면으로 소통한다. 동명동 261-28 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금강고속이 관리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고양, 부천, 안양 등의 경기권과 강릉,원주 등의 강원권, 대전, 유성 등의 충청권 등지를 연결하고 있다. 해상교통은 동해안 여러 항구와의 정기 항로가 열려 있으며 항공은 속초공항이 있었으나 사고의 위험성이 커 폐항되었다. 삼척시 삼척시(三陟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동해안 최남단에 있는 시이다.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이 위치하여 1,000m 이상의 고위평탄면을 이루고,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해안평야를 형성한다. 북쪽에는 동해시 남쪽에는 경상북도 울진군과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태백시와 맞닿아 있다. 면적은 1,185.86 km이고 해안선은 58.4 km이다. 시청 소재지는 교동이고, 행정구역은 2읍 6면 4동이다. 시화는 철쭉, 시조는 갈매기, 시목는 느티나무이다. 삼척시 동단은 원덕읍 월천리(동경129°21′58″), 서단은 하장면 공전리(동경128°57′01″)로 동서간 거리는 45.75 km이며, 남단은 가곡면 풍곡리(북위37°02′10″), 북단은 교동 증산(북위37°28′26″)로 남북간 거리는 48.6 km이다. 해안선까지 산지가 임박해 있으며 평야는 넓은 충적원인 북평평야가 있다. 지질은 평안계와 조선계·화강편마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복잡한 편이다. 태백산맥의 분수령이 되는 청옥산(1,404m)·두타산(1,353m)·덕항산(1,071m)·중봉산(999m) 등의 연봉이 솟아 있다. 태백산맥이 동쪽으로 급격히 내려오면서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으로는 고원 구릉지대를 형성하여 광동댐이 위치하는 등 도처에 동쪽으로 흐르는 많은 하천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 지형 지세는 험준한 태백산맥과 넓고 긴 해안선, 그리고 많은 항포구를 가지고 있어 깨끗한 백사장과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빼어난 천연 해수욕장, 그리고 수많은 계곡, 명산과 더불어 동굴관광의 고장, 삼척의 아름다움을 더 한층 빛내주고 있다. 해발은 4개 동지역과 원덕읍, 근덕면, 노곡면, 미로면, 가곡면, 신기면이 400m이하로 위치하고 있으나, 도계읍, 하장면 일부 지역은 해발 800m이상 고원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영향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55개의 석회동굴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2002년도에는 《삼척세계동굴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세계적인 동굴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8.4km의 긴 해안선은 단조롭고 완만하여 간척사업이나 수산양식사업에는 다소 불리하나 해안을 따라 넓게 펼쳐진 송림과 모래사장, 동해의 맑은 청정해수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태백산맥과 동해안에 입지하여 해양성 기후의 특징인 온난다습하며 고산지대의 영향으로 수직적 기온분포를 인접 산지에서 볼 수 있고, 지리적으로 영동과 내륙지방 간의 기온 차이가 약 30일 간격으로 나타난다. 해양성 기후로 온화하며, 사계절 한류와 난류가 교류하여 어족 자원이 풍부하다. 과거 12년간 평균기온이 12.5℃로 영서지방의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높은 편이다. 최고 기온은 지난 1992년 7월 29일 37.5℃였으며, 최저 기온은 지난 1990년 1월 26일 -13.5℃를 기록하였다. 기온분포는 여름인 8월에 평균 24.1℃, 겨울인 1월에 평균 0.5℃를 나타내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난한 기온을 나타내고 있다. 강수량은 연평균 1,284.5mm로 7월 8월의 강수량이 50% 이상 차지하며,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일일 최대 강수량은 지난 2002년 8월 31일 9월1일(2일간)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시 819mm(노곡)를 기록하였다. 북동기류의 영향으로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 때때로 3~4월에도 눈이 많이 내린다. 강원도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삼척시의 면적은 1,185.86 km이고, 인구는 2017년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7609339명, 3만43863가구이다. 삼척시는 태백탄전과 동해공업 지역의 연계교역지로 지하자원, 수산자원, 관광자원이 모두 풍부하다. 태백시와 동해시 일부가 삼척시에 속해 있던 1979년 12월 31일 인구가 30만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삼척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 태백시와 동해시가 분리되면서 인구가 많이 감소하였다. 해안과 하천 유역 평야에 주로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으며, 쌀·보리·콩·감자가 많이 난다. 경지 면적 10,734.5㏊ 중 논 2,253.8㏊, 밭 8,480.7㏊로서 밭이 압도적으로 많고, 농가 가구 12,081가구 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누에고치·꿀 등이다. 각종의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나 그 중 무연탄·철·석회석이 많이 나서 이 지방을 남한 굴지의 기간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다. 무연탄은 평안계에 부존되어 있으며, 삼척탄전은 남부 태백산 지역의 매장량(13억 4,000만t)의 33% 이상(4억t)을 차지하고 있다. 장성·도계·황지를 중심한 대 탄전으로 괴탄(塊炭)으로 산출되며 열량 7,000cal로서 탄질도 극히 우수하다. 여기서 나는 석탄은 종래 묵호항을 거쳐 해상 수송을 했으나 영동선과 태백선이 개통된 후로는 주로 육운에 의존하며 또 삼척 화력발전소에 연료로 공급되고 있다. 장성·도계·황지 등은 탄광취락이다. 석회석은 삼척·영월·단양 일대에 60여 억t 넘게 매장되어 있다.삼척시와 동해시는 시멘트 공업이 발달하였다. 임야면적 10만 7,431㏊ 중 입목지는 97%인 10만 846㏊에 해당한다. 비교적 육림(育林)이 잘 되어 있으며, 임산물은 목재가 도계읍·원덕읍, 갱목은 도계읍·하장읍, 굴참나무 수피(樹皮)는 하장면·도계읍이 중심이고, 재배 산삼인 장뇌가 노곡면 여삼리에서 재배되며 버섯류의 생산량도 많다. 수산업 가구수는 741, 수산업 인구는 2,276명(2001)이다. 삼척·호산·임원·장호 등의 어항이 수산업 중심지이다. 어선은 634척인데 그 중 602척이 동력선이고 32척이 무동력선이며 5t 이상의 어선은 99척밖에 되지 않아 영세어업 내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경영형태가 대부분이다. 어획물은 명태·꽁치·오징어·미역 등이다. 장뇌·왕마늘·토종꿀·고포미역·삼베·삼척불술·가시오가피 등이 유명하다. 동해시에서 삼척선이 영동선에서 분기되어 삼척역으로 향하지만 무궁화호열차의 정기 운행은 없으며 바다열차가 강릉역에서 삼척역까지 운행한다. 강릉-영주간 영동선 철도가 태백시에서 도계읍을 지나 동해시로 향한다. 역은 삼척역, 삼척해변역, 도계역, 신기역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삼척-포항간 철도가 건설중이므로 완공될 시에는 삼척시 철도교통이 향상될 것이다. 동해선이 2019 균형발전프로젝트 발표에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대상 사업으로 선정되어 철도의 길이 열였다. 영덕~삼천간 철도가 2022년에 개통할 예정이다. 동해고속도로가 있으며. 근덕 나들목 ~ 동해 나들목 구간이 2016년 9월 9일에 개통되었고. 추후 평택제천고속도로가 연장되면 이곳이 중착 지역이 될 예정이다. 삼척시에는 시외버스, 고속버스, 시내버스가 운행된다. 초당동굴과 연어·잉어장, 환선굴, 대금굴, 대이리의 너와집·통방아·굴피집 등이 있다. 그 밖에 삼척해수욕장, 후진·맹방·근덕해수욕장이 유명하다. 최근엔 삼척해양레일바이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척주동해비 (?~?)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4대 손자이다. 512년 하슬라주(지금의 강릉)를 다스리면서,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벌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로 적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았다.541년 이찬이 되었고, 545년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를 넓혔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이 박이종으로 되어 있다. (?~?) 신라의 고승, 성은 김(金), 이름은 선종(善宗)이다. 이려서 부모를 여윈 뒤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절로 들어갔다. 선덕 여왕이 대보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승려가 되었다. 636년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의 우타이 산에 가서 기도하고 가사와 사리를 얻었으며, 643년 장경을 가지고 귀국, 분황사와 황룡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승경률론」, 「보살계본」 등을 널리 폈다. 대국통이 되어 승려들을 통솔하고 통도사 등의 사찰과 불탑을 세워 불교를 중흥시켰다. 계율종의 시조로, 정암사에서 사망했다. 홍천군 홍천군(洪川郡)은 대한민국 강원도 중서부의 군이다. 군청 소재지는 홍천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9면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기초자치단체이다. 면적이 가장 넓은 면인 내면도 속해있다. 고구려 시대에 벌력천현(伐力川縣)으로 불리어 오다가, 신라 때 녹효(綠曉)로 고치고 우수주(牛首州:지금의 춘천)에 속하여 화산현(花山縣)이라 했다. 그 후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홍천현으로 고쳤다. 인종(仁宗) 21년(1143년)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후에 현감이 되고, 1895년 군이 되었다. 강원도의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의 시, 군, 구 단위 행정구역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1,819.785km)을 차지한다. 군은 동서로 93.1km, 남북으로 39.4km로 동서로 매우 길쭉하며 영서 지방을 동서로 아우르는 형태를 하고 있다. 강원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태백산맥 서사면의 일부를 차지한다. 산악의 기복이 심하고 군의 동경에는 응봉산의 연봉이 솟고 북쪽에 가리산의 연맥, 남경에는 발교산의 제맥이 뻗어 산지가 전군의 87%를 차지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크고 작은 지맥에 둘러싸인 중산간 지역이며, 홍천읍 시가지를 관통하는 북한강 지류인 홍천강이 태백산맥의 분수령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북한강과 합류하고 있어 그 유역에 작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도 32분에서 128도 51분간에 걸쳐 있으며, 동쪽으로 양양군, 남쪽으로 횡성군, 평창군, 강릉시, 서쪽으로는 경기도 가평군, 양평군과 북쪽으로 춘천시, 인제군과 접하고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계로 되어 있다. 내륙 산간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띈다. 연평균 기온은 10.3도, 1월 평균 -5.5도, 8월 평균 24.2도, 최고기온 41.0도(2018. 8. 1), 최저 기온 -28.1도(1981.01.05), 연강수량 1,405mm이다. 홍천군의 행정 구역은 1읍, 9면 196개의 행정리와 105개의 법정리를 가지고 있다. 전체 면적은 1,819.6평방킬로미터이며, 인구는 2015년 6월말 기준 70,344명, 31,318세대이다. 이 중 50.6%가 홍천읍에 거주한다. 과거에는 현재 인구의 1.77배인 123,929명 (이 때는 총선 때 홍천군 단독 선거구가 구성될 수 있었다.)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10만 명 선이 무너진 상태이다. 산지가 많아 밭이 우세하고 지리적 여건이 양잠에 적합하여 매우 성하다. 담배는 영동 제1이며 표고버섯과 각종 약초·아마·닥나무·꿀 등도 명산물이다. 최근에는 육우·표고·홉 등의 단지를 조성하여 더욱 증산에 힘쓰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잡곡이고, 담배·표고·잣의 생산도 많으며 축우·양봉도 성하다. 홍천에는 철·사금·은·석면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국내 굴지의 자은 철광도 휴광하고 있어 광업은 성행하지 않다. 공업에 있어서는 양조업과 제재·정미·제분·제사·가발 산업이 주를 이루며, 특히 제사와 가발은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홍천군은 1980년대 초까지 맥주의 원료인 홉의 생산지였으며 2019년 쯤 서석면에서 '조선홉'을 다시 발견, 재배에 성공하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중앙고속도로의 홍천 나들목을 통해 인근의 춘천시, 원주시, 횡성군은 물론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일대로도 접근 할 수 있으며, 춘천 분기점에서 만나는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통해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로도 빠르게 접근 할 수 있다. 읍내 중심지에는 홍천종합버스터미널이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을 연고로 한 금강고속이 터미널의 운영을 담당하고 이 곳을 본사로 사용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국도 제5호선이 읍내 서쪽 외곽을 관통하며 남북으로 가로질러 춘천시, 횡성군 일대를 오가는 중앙고속도로의 역할을 보조해주며 국도 제44호선이 읍내 일대를 동서로 관통하여 인제군, 경기도 양평군을 왕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두 국도는 홍천대교 부근에서 만난다. 횡성군 횡성군(橫城郡)은 대한민국 강원도 서남부의 군이다. 한우와 안흥찐빵 등이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군청 소재지는 횡성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8면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횡천현(橫川縣) 또는 어사매(於斯買)로 불렸다. 신라 때에 와서 황천(潢川)이라 고치고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에 와서 다시 횡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홍천과 횡천의 발음이 비슷하다 하여 1413년경부터 횡성으로 개칭하여 내려오다가 1895년 군으로 되었다. 횡성군은 영서 지방에 위치해 있다. 동부의 우천면, 안흥면 지역은 산세가 매우 험준하다. 동쪽으로는 영동고속도로 등을 경계로 평창군, 서쪽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남쪽으로는 치악산을 경계로 원주시와 영월군이, 북쪽으로는 중앙고속도로 등을 경계로 홍천군과 접한다. 횡성읍이 이 지역 대표적인 중심부이다. 강원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동·북·남의 3면은 산맥에 포위되고 겨우 서쪽 1면만이 섬강(蟾江)에 의하여 트여 있다. 즉 동부 및 남부는 태백산맥의 오대산으로부터 분기된 차령산맥의 본맥이 뻗어 1,000m 이상의 매우 고준한 산이 되고 군 중앙부로 향하여 낮아져 있다. 산악으로는 태기산(1,264m), 청태산(1,190m), 봉복산(1,028m), 운무산(980m)이 동북방에 선을 이어 산맥을 이루고 북방으로는 수리봉(1,028m), 발교산(998.4m), 오음산(930m)의 900m 대의 산이 있고, 동방으로는 사자산(1,040m), 배향산(808m)의 산이 있고, 남으로는 치악산 국립공원 내의 남대봉(1,181.5m), 향로봉(1.040m), 비로봉(1,288m)과 매화산(1,084m)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성지(791m)이 최고 높은 산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봉복산을 제외한 모든산이 군계와 접하고 있어 군을 둥글 게 산으로 감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섬강(蟾江)의 곡지가 중앙에 있어 거기에 침식분지인 횡성분지가 넓게 서남쪽으로 트여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계로 되어 있다. 내륙 산간에 위치하여 해양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는 관계로 대륙성 기후로서 기온의 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10.7 , 1월 평균 -6.3 , 8월 평균 25.5 , 최고 기온 41.5 (1942년. 7. 14), 최저 기온 -29.8 (1927. 7. 31), 연평균 강수량 1,250mm이다. 횡성군의 행정 구역은 1읍 8면, 175 행정리, 110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횡성군의 면적은 997.68km이며, 인구는 2016년 9월을 기준으로 45,951명이고 그중 44.8%가 횡성읍에 거주한다. 예전에는 103,731명을 기록하기도 했고, 2006년 이후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5·6번 국도가 교차하고 우천면, 안흥면을 통과하는 42번 국도가 있다. 영동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횡단하고 중앙고속도로가 종단한다. 횡성군은 독자적으로 군내버스를 운영하지 않으며 원주시내버스가 횡성을 연장하는 형식으로 운행한다. 2017년에는 경강선이 군내를 관통하여 횡성역, 둔내역이 신설되고 서울과 횡성을 40분에 이어 줄 수 있게 되어 서울로의 접근이 편리해진다. 횡성읍에 원주공항이 있으며 제주국제공항으로 주14회(하루 왕복 2회) 운항한다. 다른 항공사는 운항하지 않으며 오로지 대한항공만 운항한다.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인구의 약 68%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서비스업·상업 등이 겨우 10%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업군이다. 비교적 농토가 넓으나 산간지이므로 밭이 많고 유축 농업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육우단지가 있다. 양잠이 성하여 도내 상위이며, 매년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 크고 맛이 좋은 횡성 밤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다. 그리고 영동고속도로 연변에는 유실수 단지, 채소·화훼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경지 면적 약 156km 중 논밭비율은 38:62로 밭이 대단히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감자·콩·메밀·담배·누에고치 등이다. 특히 홉은 전국 총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지하자원에 있어서는 금·은·동·철·망간 등의 매장이 있으며, 청일면에 있는 금광과 공근면(公根面)에 있는 철광은 군의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대동 철광에서는 앞으로 40년을 더 채광할 수 있다고 한다. 공업으로서는 양곡 가공업·요업·제재업 등이 있으며, 갈포벽지 공장은 주로 수출품을 생산, 외화를 획득한다. 한우·감자·더덕·찐빵·건고추·참기름·들기름·누룽지밥·솔잎진송엑기스·옹기독 전통장류·고랭지토마토·고랭지/절인 배추·양송이·하향주 등이 유명하다. 횡성군의 한우는 횡성한우라는 이름의 고급 한우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지리적표시제를 통해 보호받고 있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풍요를 축하하며 열렸던 횡성의 대표적인 문화축제 태풍문화제가 횡성의 대표브랜드인 한우를 내세워 2004년부터는 횡성한우축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횡성군은 지역특산품인 더덕을 명품화하기 위해 생산지를 넓히고 더덕캐기 영농체험행사를 비롯해 가공산업을 육성해 나가는 등 전국 최대 더덕주산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재래시장의 환경개선과 활성화를 위해 횡성시장의 현대화가 추진됐다. 새단장 이후 매출도 증가하는 등 횡성재래시장이 활기를 띄고 있다. 횡성한우의 최고급 육질을 믿고 즐길 수 있는 한우 프라자, 새말 인터체인지 부근 우항시장에 세워져 판매는 물론 한우박물관으로 관광객들의 입과 눈을 모아 또다른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횡성에서 3번째로 규모가 큰 축제이다.) (횡성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축제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제8전투비행단이 인근의 원주시 소초면에 주둔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육군의 36사단 예하의 일부 부대가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영월군 영월군(寧越郡, )은 대한민국 강원도 남부에 있는 군이다. 조선 단종(端宗)의 능인 장릉(莊陵)이 있으며 김삿갓면에 김삿갓(김병연)의 묘가 있다. 영화 《라디오 스타》, 《만득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배경이다. 서쪽으로 원주시와 제천시, 동쪽으로 태백시, 북쪽으로 평창군과 정선군, 남쪽으로 단양군과 영주시, 봉화군과 맞닿아 있다. 백제시대(234년~286년)에는 백월, 고구려시대(300년~331년)에는 내생군(奈生郡)이었던 것을 신라 때 내성현이라 고쳤고, 신라 경덕왕 대 명주(溟州)에 속했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 때에는 동계에 속했으며, 이후 현종 대 행정구역이 정비가 되면서 서기 1018년, 명주에 속현인 내성현을 지금의 영월로 고쳐 원주, 즉 중원부에 속하였다가 공민왕 21년(1372) 군으로 승격되었다. 공양왕 원년(1389)에 충청도로부터 강원도에 속하였다. 강원도의 남부에 위치하며 군의 동부에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고 남쪽에는 소백산맥이 여기서 갈려서 동서로 뻗는데 그 양 산맥의 여파가 군내 도처에 미쳐 산악이 중첩하고, 백운산·옥석산·백덕산 등이 솟아 있다. 중앙부는 한강과 그 지류 평창강·주천강 등이 영월 부근에서 합류하며, 평지는 영월분지 외엔 별로 없다.지질은 주로 석회암층이며 곳곳에 카르스트지형이 발달하여 있다. 충청북도, 경상북도에 접하여 중부내륙지방에 속해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시, 서쪽으로는 원주시와 횡성군, 남쪽으로는 충청북도 제천시와 단양군, 경상북도 영주시와 봉화군이 북쪽으로는 평창군과 정선군이 위치해 있다. 동강과 서강이 흐르고 있고, 법정이름은 동강이 한강이며 서강은 평창강이다. 영월읍에서 두 강이 합쳐 속칭 남한강이 시작된다. 남한강은 법정이름이 아니며 북한강에 대비된 이름, 영월시점(하송, 덕포, 팔괴리 경계점)에서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북한강합류점까지 216.7km다. 내륙 산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0.8 , 1월 평균 -5.7 , 8월 평균 25.5 , 최고 42 (1942.7), 최저 -30 (1920.1), 연평균 강수량은 1,200mm이다. 영월군의 행정 구역은 2읍 7면으로 구성된다. 영월군의 면적은 1,127.45 km²이다. 인구는 2017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4만0067 명, 2만0715 가구이며, 이 중 54%가 영월읍에 거주한다. 인구 최고점은 12만3668 명이었고, 남녀 성비는 1.06이다. 텅스텐 광산이 있어서 1970년대에 인구가 4만 명이 넘던 상동읍은 현재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읍이다. 영월군(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산간지이기 때문에 경지 면적이 좁고 밭이 많다. 목초가 많아 소를 많이 치고 임상이 좋아 용재와 신탄 산출이 많다. 지질 구조상 각종 광물의 매장이 풍부하여 무연탄·텅스텐·석회석·철·아연·수연·창연·니켈·주석 등이 산출되고 삼척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자원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근 40년의 역사를 가진 마차탄전이 1972년 9월말 폐광된 데 이어 텅스텐광도 값싼 중국산이 수입되면서 1992년 채굴을 중단했다. 영월에는 또 복합화력발전소가 있고, 무연탄과 무한한 석회암 그리고 풍부한 전력은 시멘트공장을 건설케 했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보리·밀·감자·누에고치·소·닭·염소·꿀 등이다. 수목의 벌채가 비교적 적어 무성한 임삼이 많이 남아 있어 유용재와 신탄 산출이 적지 않으며, 특히 광산용 갱목을 다른 지방으로 공급하고 있다. 상동의 중석·창연·휘수연, 순경의 주석, 옥동(玉洞)의 무연탄은 유명하였으나 석탄합리화정책에 따라 광산은 많이 줄었다. 무연탄 광산은 영월읍과 북면에 각각 1개 소가 있다. 40만 kW의 영월복합화력발전소와 무진장의 석회석은 부근의 시멘트·석회 공업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편, 태백선(함백선)의 개통과 이의 전철화는 이 지역 자원개발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진쑥·신령버섯·청결고춧가루·정든고추장·영월참기름·영월더덕·청결미·영월사고·그랜채소·잡곡·토종대추·취나물·꿀·칡국수·버섯·묵·한우고기·메주·생광석·목공예품·영월칡술·칡녹말 등이 유명하다. 조선 단종의 무덤으로 영월읍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이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0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지 못한 채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흥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로써 왕릉은 《경국대전》에 따라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안장되어야 한다는 규정에서 벗어나 장릉은 경국대전의 규정에서 제외된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임진왜란 당시 고씨가족이 피난하였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밖에도 수도장 등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폭 130m인 남한강을 건너 입구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동굴 입구까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5호로 한반도를 닮아 불리게 되었다. 사계절 내내 특색 있는 경관을 보여 주는 관광지이다. 철도는 태백선이 제천으로부터 분기되어 군내를 횡단하여 정선군에 달한다. 또한 도로는 원주·횡성·평창·정선·태백·제천·단양·봉화 등에 연결되기는 하나 아직 교통이 불편하다. 31번 국도, 38번 국도, 59번 국도, 28번 국가지원지방도, 82번 국가지원지방도, 88번 국가지원지방도가 통과한다. 38번 국도는 4차선 도로인데 쌍용-영월-석항구간은 자동차전용도로이다. 태백선이 통과하며, 여객 영업은 쌍룡역, 영월역에서 담당한다. 평창군 평창군(平昌郡)은 대한민국 강원도 중남부의 군이다. 태백산맥의 중앙에 위치하여, 평균고도 600m 이상에 달한다. 군청 소재지는 평창읍이고, 행정 구역은 미탄면, 방림면, 대화면,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대관령면 등 1읍 7면이다. 2018년 동계 올림픽과 2018년 동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이다. 평창 지역을 지칭하는 최초의 사료는 《삼국사기》이며, 고구려 내생군의 속현인 욱오현(郁烏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정복한 지역을 포함하여 행정 구역을 9주로 정비하면서, 평창 지역은 명주의 내성군에 속하게 되었고, 757년(경덕왕 16년) 백오현(白烏縣)으로 개명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현재의 지명인 평창현(平昌縣)으로 개명되었으며, 원주의 속현으로 내속(來屬)되었다. 995년(성종 14년) 10도가 신설되어 평창의 북부 지역은 삭방도에 포함되었고, 남부 지역은 원주가 속한 중원도에 포함되었다. 현종 때 행정 구역이 5도 양계로 구획됨에 따라 평창의 동부 지역은 동계에, 서부 지역은 양광도에 편입되었다. 1299년(충렬왕 25년)에 평창에 현령이 파견되어 비로소 원주의 속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2년(태조 원년) 군으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 8도제가 정비되었고, 평창은 강원도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충주부 평창군이 되었다가, 1896년 13도제의 실시로 강원도 평창군이 되었다. 2011년 7월 6일 (결정지 시각 기준),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123차 IOC 총회에서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강원도의 남부 중앙 태백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토지는 일반적으로 높아 평균고도 600m 이상에 달하고, 특히 동·북·서 삼면이 높고 험준하며, 남쪽으로 경사져 있다. 즉 북쪽에는 오대산·계방산·황병산·대관령, 또 서쪽에는 오대산에서 분기한 차령산맥이 있다. 한강의 지류 평창강은 중앙부를 감입사곡하면서 역내 대부분의 물을 모아 남류하여 연안에 소선상지와 범람원을 형성하고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실제 평창군의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Dwb와 Dfb가 혼재되어 있는 습윤 대륙성 기후를 띄고 있다. 그래서 여름에는 비교적 덥지 않고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게 된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의 평창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7.0도로 강원도의 연평균 기온인 섭씨 8.9도보다 낮았다. 평창군에서 연평균 기온이 가장 높은 지역은 평창읍으로 섭씨 8.5도였고, 가장 낮은 지역은 대관령면으로 섭씨 6.3도 였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의 평창군의 연강수량은 1,555.0mm로 강원도의 평균인 1,491.5mm보다 많았으며, 평창군에서는 봉평면이 연강수량 1,626.4mm로 가장 많고, 미탄면은 1,466.7mm로 가장 적었다. 대관령은 여름철에는 7월 평균기온이 19.1℃로 낮아 서늘한 편이다. 겨울철에는 북동 기류로 인하여 기온 변화가 심하고, 종종 심한 대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평창군의 행정 구역은 1읍 7면이다. 1966년에는 인구가 10만3519명이었으나, 2012년말 인구는 4만3627명이다. 인구의 22.9%가 평창읍에, 22.4%가 진부면에 거주하며 2개 읍면에 인구의 45.3%가 거주하고 있다. 평창군의 총 면적은 1,464.16km로 강원도 총면적 16,874.60km의 8.7%에 해당하며, 전국 군 중 세 번째로 면적이 넓다. 산간 지방이므로 경작지가 좁고 화전이 많다. 고랭지이기 때문에 감자와 옥수수가 특히 많이 나서 유명하다. 경제 작물로서 홉·아마·약초 재배와 양잠이 성하다. 초지가 많아 축우가 성하며, 최근에는 대규모의 기업적인 목축도 행해지고 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산물의 산출도 많았으나, 값싼 수입 광물의 영향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다. 경지 면적은 산지이므로 총 면적의 약 10%인 146 km, 논과 밭의 비율은 17:83으로 밭이 많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감자·쌀·홉·아마·누에고치·꿀·잎담배·고랭지 채소 등이다. 대관령면은 대표적 씨감자 생산지역으로 감자 원종장과 고랭지 시험장 등이 있다. 대관령·대화·진부령 등지에는 낙농목장이 분포해 있다. 감자술·고랭지김치·느타리버섯·대관령감자·대관령황태·두메산골토종잡곡·맥향·루티나·메주 및 전통장류·부침가루·국수·산더덕·산머루·오대산화훼·옥수수엿·찰옥수수·찰토마토·고랭지양파·태양초고추·한우·허브·흑염소·송이버섯·된장·고추장·산나물·장아찌·사과 등이 유명하다. 평창에는 국가가 지정한 국보 5개, 보물 5개, 사적 1개, 천연기념물 3개, 국가민속문화재 1개, 등록문화재 1개가 있다. 강원도가 지정한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29개. 무형문화재 2개, 기념물 4개, 문화재자료 10개가 있다. 상원사는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절로, 705년 진여원(眞如院)으로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1401년에 태종에 의해 사자암이 중건되었고, 1465년에는 세조에 의해 중건되었다. 예종은 1469년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았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오대산의 다른 사찰과 달리 전소되지 않고 일부가 보존되었다. 월정사는 평창군 오대산에 있는 절로, 643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후 지속적으로 중건되다가 1·4후퇴 때 10채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1964년 승려 탄허가 법당 적광전(寂光殿)을 중창하고 승려 만화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국보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와 보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을 소장하고 있다. 스키 등의 동계 스포츠를 즐기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스키 슬로프, 호텔, 콘도미니엄 등을 갖춘 용평리조트와 휘닉스 평창이 운영되고 있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접근성이 떨어졌으나 고속도로의 개통과 확장 이후에는 접근성이 향상되었으며, 경강선 원주~강릉 구간이 건설되면서 평창역과 진부역이 설치되었다. 이 중 진부역은 2018년 동계 올림픽 거점역으로 사용된다. 주요 시외버스터미널로 평창시외버스터미널과 장평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서울역과 강릉역을 오가는 경강선 열차 중 일부가 평창역과 진부역에 선택 정차한다. 2018년 동계 올림픽 기간에는 인천공항2터미널역과 강릉역을 운행하는 편성이 있고, 평창역은 선택 정차, 진부역은 필수 정차역이다. 평창시외버스터미널, 장평시외버스터미널, 진부공용버스정류장, 대화버스터미널, 횡계시외버스터미널등이 있다. 평창시외버스터미널, 장평시외버스터미널, 진부공용버스정류장을 거점으로 농어촌버스가 운행된다. 영동고속도로가 군의 북부를 동서로 지난다. 국도 6, 42호선이 동서로, 31, 59호선이 군을 남북으로 지난다. 1989년 제8차 OCA 총회에서 제3회 동계 아시안 게임을 199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삼지연군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었으나 1992년 반납 의사를 표명하였다. 강원도는 1992년 제3회 대회의 유치를 신청하였으나, 1993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OCA 총회에서 제3회 대회는 하얼빈에서 개최하고, 1999년 제4회 대회를 강원도 평창군, 춘천시, 강릉시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779명의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주최국인 대한민국은 101명의 선수와 29명의 임원이 참가하였다. 평창(용평)에서는 알파인 스키, 크로스컨트리 스키, 바이애슬론, 쇼트트랙, 피겨 스케이팅 등 5개 종목이 개최되었다. 2013년 동계 스페셜 올림픽은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일대에서 2013년 1월 29일부터 2월 5일까지 개최되었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동계 스페셜 올림픽이다. 폐막식 때, 당시 국제스페셜올림픽위원회 팀 슈라이버 회장은 폐회선언에서 "2013년 동계 스페셜 올림픽은 역대 최고의 대회였다. 2013스페셜올림픽 만세, 브라보"라고 소감을 밝혔다.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정선군 일대에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및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을 개최했다. 평창은 2010년 동계 올림픽 유치권을 두고 캐나다 밴쿠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경쟁하게 되었다. 1차 투표에서 51표를 얻어 2위 밴쿠버와 11표 차이로 1위를 했으나, 2차 투표에서 53표를 얻어 56표를 얻은 밴쿠버가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2010년 동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평창은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도 희망했다. 2006년 6월 22일, 후보지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2010년 동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탈락하여 2번째로 동계 올림픽 유치에 도전함.), 러시아 소치 그리고 평창으로 좁혀졌다. 2007년 7월 4일, 잘츠부르크가 경쟁에서 먼저 밀려나고, 소치가 단 4표차로 평창을 누르고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두 번 연속으로 개최지 선정에서 탈락한 평창은 2009년 10월 15일, 프랑스 안시, 독일 뮌헨과 함께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 후보 도시로 선정되었다. 2011년 7월 7일 한국시각으로 자정에 올림픽 개최지가 63표로 평창군으로 확정되었으며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열리는 동계 올림픽이 되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과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의 개막식, 폐막식이 평창에서 개최되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스키점프, 노르딕 복합, 바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 스키, 봅슬레이, 스켈레톤, 루지, 프리스타일 스키, 스노보드 경기가 개최되었으며,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는 바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 스키 경기가 개최되었다. 정선군 정선군(旌善郡)은 대한민국 강원도 동남부에 있는 군이다. 정선군 여량면의 아우라지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골지천과 송천이 합쳐져 한강이 되는 곳이다. 정선은 한국 민요 아리랑의 발상지 중 하나이다. '아라리'라고도 불리는 민요 정선아리랑은 고려시대 말부터 불려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한강 뗏목을 타고 강원도의 다른 지역은 물론 서울까지 전해져, 이후 전국 각지에서 각기 독특한 아리랑이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선은 20세기 후반 석탄 산업으로 발달하였다. 정선에는 자연발생 경승지 35개소, 문화유적지 69개소 등 관광 명소가 많다. 태백시와 인접한 사북읍에는 강원랜드가 조성되었다. 군청 소재지는 정선읍이고 행정 구역은 4읍 5면이다. 고구려의 잉패현(仍貝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행정구역을 9주로 확정함에 따라 명주(溟州:강릉)의 영현(領縣)인 정선현으로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 혹은 1012년에 정선현을 정선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1895.5.26 공포)에 의거 강릉부 정선군이 충주부 정선군이 되었다가, 1896년 8월 4일 칙령 제 36호(1896.8.4 공포)에 의한 13도제 실시로 다시 강원도 정선군이 되었다. 1906년 10월 1일 강릉군으로부터 임계면과 도암면이, 평창군으로부터 신동면이 편입(8면) 되었다. 강원도의 동남부, 태백산맥 중에 위치한 까닭에 전역에 걸쳐 산악이 중첩하고, 남한강 유역 계곡에 좁고 길다란 평지가 있을 뿐이다. 즉 북부에는 발왕산(發旺山, 1,391km), 서부에는 가리왕산(加里旺山, 1,561m), 동남부에 대덕산(大德山, 1,307m), 백운산(白雲山, 1,426m) 등이 있고, 이들 여러 산에서 발원한 많은 계류를 합하여 남한강은 역내를 감입곡류(嵌入曲流:meander)하면서 서남류하여 영월군에 들어간다. 고생대에 형성된 지층은 하부 지층은 조선계로, 상부 지층은 평안계로 분류되며, 조선계는 주로 셰일과 석회암으로 구성되고, 평안계는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다. 정선에는 석회암 지역에서 형성되는 카르스트 지형이 나타나며, 이 지형의 특징인 돌리네, 우발레, 석회암 동굴이 발견된다. 내륙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몹시 크며, 특히 겨울에 추위가 심하고 여름은 서늘하다.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정선군의 행정 구역은 4읍(정선·사북·신동·고한), 5면을 관할한다. 정선군의 인구는 2015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3만9197 명, 1만9519 가구이다. 정선군(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는 다음과 같다. 정선은 영월·평창·인제 등과 더불어 태백고원 지역에 있어서 기후가 냉량대를 이루고 있다. 경작지의 수직적 분포의 한계는 논은 800m, 밭은 1,400m로 되어 있으나 대체로 경지는 500~600m의 중간 산지대에 많다. 감자와 옥수수가 특히 많이 나며 양잠이 성하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감자·쌀·누에고치·꿀 등이다. 임상이 좋아 용재와 신탄의 산출이 많고, 산삼·당귀·지황 등 한약재도 많이 난다. 정선은 1980년대 전국 석탄 생산량의 28.5%를 차지했고, 지하자원으로 무연탄·금·구리·철·아연·납·흑연·비광·텅스텐 등의 매장이 많다. 함백 탄광과 상동 중석광산(현재는 부진)이 유명하고 아연은 수출로 외화를 획득하였다. 에너지 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쇠퇴하고 관광산업이 발달되고 있다. 황기·석공예품·토종꿀·냉동 찰옥수수·정선산채·정선아라리자연향·아라리 대추원·영지버섯·정선전통식품·목공예품·인진쑥 등이 유명하다. 정선군에는 국가지정 보물 1개, 천연기념물 6개, 국가민속문화재 1건이 소재하고 있다. 도지정문화재로 유형문화재 3개, 무형문화재 1개, 기념물 5개, 민속문화재 4개, 문화재자료 2개가 있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정암사 적멸보궁(寂滅寶宮) 뒤에 위치한 탑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의 일종이다. 보물 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암사에서 발견된 여러 유물을 보았을 때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지석에 의해 1653년에 중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선군의 정암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자장율사가 건립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으며 뒤쪽에 세워진 수마노탑에 석가모니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으므로 불상은 따로 모셔져 있지 않다. 적멸보궁과 수마노탑은 각각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와 보물 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선아리랑제는 정선 아리랑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매년 10월에 열리는 축제로, 정선 아리랑과 다불어 다양한 지역의 아리랑이 공연된다. 아리랑박물관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된 아리랑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2016년에 개관하였으며, 아리랑 관련 유물 600점을 수집, 전시한다. 정선군에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내국인의 입장이 허용되는 강원랜드 카지노가 있으며, 슬롯머신, 바카라, 룰렛 등을 즐길 수 있다. 함께 운영되는 하이원 리조트에는 스키 슬로프와 골프장이 갖추어져 있어 스키와 스노보드, 골프를 즐길 수도 있다. 정선군은 산간지역으로 1957년 함백선이 처음 개통되었고, 그 후 정선선이 예미역으로부터 고한(古汗)까지 연장되고 태백선(고한∼황지)과 정선선이 연장(정선∼구절)되었다. 평창군을 통하여 영동고속도로가 있고, 국도 6호선, 31호선, 35호선, 42호선, 59호선이 있다. 태백선과 정선선이 정선군을 통과한다. 예미역, 민둥산역, 사북역, 고한역에 태백선이 정차하며, 별어곡역, 선평역, 정선역, 나전역, 아우라지역, 구절리역에 정선아리랑열차가 운행한다. 농어촌버스가 운행하며, 정선여객터미널에서 시외버스가 운행한다. 국도 6, 42호선이 군을 동서로, 31, 35, 59호선이 남북으로 지난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의 알파인 스키 활강 경기,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의 알파인 스키, 스노보드 경기가 정선 알파인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철원군 (남) 철원군(鐵原郡)은 대한민국 북서부에 위치한 강원도 서남쪽으로는 경기도 연천군과 포천시, 동남쪽은 화천군과 양구군에 인접한다. 군청은 갈말읍에 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철원군 전 지역도 소련이 점령했으나, 한국 전쟁의 결과 옛 삭녕군의 편입지(인목·내문·마장면)와 북면을 뺀 대부분 지역이 수복(收復)되었다. 현재의 철원군은 휴전선 이남의 김화군 지역과 평강군 남면 정연리를 편입하고, 신서면이 경기도 연천군으로 이관되어 군역(郡域)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강원도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전반적으로 높은 구릉을 이룬다. 군(郡)의 중앙부를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백역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서반부(옛 철원군 지역)의 평야지대와 동반부(옛 김화군 지역)의 고원지대로 양분한다. 서부, 즉 철원지구는 200 ~ 500m의 대지(臺地)로 추가령구조곡의 구조열선에서 유동성 흑색현무암의 용암이 분출하여 평탄한 용암대지가 이루어져 있으며, 용암대지의 사면은 화강암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이다. 김화지구는 동쪽에 광주산맥이 남남서로 뻗으면서 용문산(1,068m)·구단발령(1,175m) 등 높은 산이 솟아있다. 수계(水系)로는 임진강의 지류 한탄천과 북한강의 상류 금성천이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 결정편암으로 되어 있다. 철원군 일대는 용암 대지가 현무암질 용암이 추가령을 구조곡을 메워 형성되었다. 용암대지는 점성이 약한 마그마가 분출하여 넓은 지역을 평탄하게 하거나 지질 구조선을 따라 형성된 하곡을 매워서 만든 지형이다. 철원군의 용암 대지 표면은 하천을 비롯한 여러 작용으로 운반된 물질들이 쌓여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의 수리 시설을 바탕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용암 대지를 통과하는 한탄강 주변에는 수직 절벽과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진 주상 절리 등의 화산 지형이 있다.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연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겨울철엔 대관령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 곳 중 하나이며, 강수량이 많은 다우지이다. 연 평균 기온은 10.2℃, 1월 평균 기온은 -5.5℃, 8월 평균 기온은 23.8℃이고, 연 평균 강수량은 1391mm이다. 4읍 7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철원군의 총 면적은 889.43 km²이고, 인구는 2018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4만6413 명, 2만1451 가구이다. 남녀 성비는 1.13으로, 인근 양구군, 화천군, 포천시 등과 같은 남초 지역이다. 철원군은 철원(동송읍 이평리·철원읍 화지리), 신철원(갈말읍 신철원리·지포리), 김화(서면 와수리·김화읍 학사리)에 각각 형성된 3개의 소도심에 인구가 밀집해 거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군사분계선 인근 군작전지역으로 민간인 비거주지역은 다음과 같다. 철원군 동송읍, 갈말읍에서 강원도청이 있는 춘천시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남짓 걸리지만, 경기북부청이 있는 의정부시까지는 1시간 10분이면 갈 수 있다. 또, 철원읍과 동송읍에서 철원군청이 있는 갈말읍까지 최단시간에 가기 위해서는 도계(道界)를 넘어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과 영북면을 지나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2011년 대통령소속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가 ‘지방행정체제 개편 시군 통합기준(안)’을 제시하자 철원군에서는 경기도 편입 주장이 제기되었다. 철원군의 경기도편입론은 철원주민 상당수가 철원을 경기도 포천시, 연천군, 의정부시 등의 경기북부와 같은 생활권으로 인식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다. 철원군은 경기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의정부지방법원의 관할에 속하며, 대한민국 국군은 철원군에 주둔하는 3사단과 6사단을 경기 지방의 3야전군 예하에 두고 있고, 철원군의 두입지인 옛 금성군 지역(원남·원동·임남면)에는 강원도 화천군에 본부를 둔 7사단을 주둔시키고 있다. 만약 철원군이 경기도로 편입될 경우,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인 금성지구(원남·원동·임남면)는 경기도의 돌출부가 되기 때문에 이 지역은 화천군에 편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철원분지는 현무암이 분해되어 토양이 비옥하고, 봉래제·감둔제(甘屯堤)·마산제(馬山堤) 등 관개 시설이 잘 갖추어져 강원도내 제1의 쌀 생산지대이다. 김화고원은 옥수수·감자·콩·담배가 많이 나며, 양잠·양봉·목축이 성하다. 특히 담배는 금성엽으로 알려져 있고, 또 철원주도 유명하였다. 소는 경인지방에 많이 공급되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데, 특히 금성 부근의 유화철광·중정석·망간이 유명하고 형석·하석(霞石)·남정석·홍주석·명반석·금·은·아연 등도 산출된다. 철원군 김화군은 평강군과 더불어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교통·군사상의 요지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원선이 신서면~철원읍~북면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철원역에서 금강산선이 분기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폐선되었다. 1963년 경원선 구간이 남아있는 신서면(신탄리역, 대광리역)이 경기도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철원군에는 50년간 운행하는 철도가 없었다. 그러나, 2012년 11월 20일 연천군 신탄리역까지였던 경원선의 운행구간이 철원읍 대마리(옛 묘장면 지역)의 백마고지역까지 연장되어 현재는 열차가 다니고 있으며 오는 2017년 11월에는 백마고지역 ~ 월정리역까지 연장된다. 철원읍과 김화읍은 한국전쟁 전까지 서울과 원산, 금강산 등을 잇는 사통팔달한 도로교통의 요지였으나, 현재는 북쪽이 군사분계선이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쿵후 쿵후()는 중국 무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중국에서 ‘功夫’라는 낱말은 무술과 관련 없이 ‘숙달된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쿵후는 소닉 더 헤지호그의 공식 명칭에서 따왔다. 량강도 량강도(兩江道,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부의 도이다. 양강도청 소재지는 혜산시이다. 도의 이름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함경도에 속해 있다가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일부는 함경남도, 일부는 함경북도, 나머지 일부는 평안북도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1954년 10월 30일 함경남도 혜산시, 운흥군, 보천군, 삼수군, 신파군, 갑산군, 풍산군, 풍서군, 부전군과 함경북도 삼사군 및 자강도 후창군 등을 합쳐서 양강도가 신설되었다. 혜산군은 혜산읍과 춘동리, 위연포로동자구가 혜산시로 개편했으며 혜산군의 다른 지역은 운흥군이 되었다. 삼사군은 백암군으로 개칭되었다. 1961년에 삼지연군, 1978년에 대홍단군이 신설되었고, 1965년에 부전군이 함경남도로 이관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가족에서 이름을 따와 1981년 8월에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1988년 8월에 후창군이 김형직군으로, 1990년 8월에 풍산군이 김형권군으로 각각 개칭됐다. 김정숙은 김일성의 아내,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권은 김일성의 숙부이다. 내륙에 위치해 있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에 접해 있다. 백두산이 이 도에 위치해 있다. 함경남도, 자강도, 함경북도에 접해 있다. 북쪽은 지린 성 바이산 시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과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접해 있다. 이 도에 있는 김형권군은 천연기념물 풍산개가 유명하며, 2008년에 김정일이 방문하여 자연환경을 보존하라고 지시한 “오가산 자연보호구”가 있다. 그리고 양강도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이 있기도 하다. 현재 양강도는 1개 시와 11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당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은 정당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이름으로, 다음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의 정당사에 민주당이라는 명칭을 가진 당이 여럿 존재했다. (참고: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사진기 사진기(寫眞機) 및 촬영기(撮影機), 카메라(camera)는 빛을 이용하여 그림을 촬상하여 이미지를 기록하는 도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사진이라 한다. 촬영된 이미지를 한 장씩 인화하여 스틸 사진으로 제작하기도 하고, 여러 장의 촬영된 이미지를 이용하여 영화와 같이 동영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카메라는 가시광선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엑스선 촬영, 적외선 촬영, 자외선 촬영과 같이 전자기파 영역의 비가시광선을 이용하기도 한다. 영어의 카메라라는 말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함)에서 온 용어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형은 어두운 공간의 한 쪽 벽면에 작은 구멍을 뚫고 구멍의 반대 쪽 벽면에 카메라 외부의 풍경을 투사시켜 개기일식을 관찰할 때 이용하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하였다고 했지만 게른새임의 설명은 베이컨이 알고 있었다고 하고 일식등을 관찰했다고 한다.또 포르타가 1558년 자연의 마술이라는 저서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하여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기는 독일의 요한 잔에 의해 1685년 개발되었으며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이는 사진기가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까지 약 120년 전의 일이다. 최초의 사진기들은 잔의 발명품과 유사한 것들로 촬상부가 있는 상자를 앞뒤로 이동시켜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미지 기록을 위해 감광판을 빛에 노출시키는 방식이었다. 1839년 구리 판을 이용한 루이 다게레의 다게레오타이프 촬영술이 발명되어 대중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1841년에는 윌리엄 폭스 탤벗이 종이에 이미지를 기록하는 캘러타이프 촬영술을 발명하였다. 최초로 인화된 사진은 조제프 니세포어 니엡스가 루이 다게레와 공동 제작한 사진기를 이용하여 1826년 촬영한 것이다.(그림 참조) 최초의 사진은 은과 석회의 혼합물로 촬상하여 구리판에 정착시켜 인화하였다. 1850년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가 콜로디움을 이용한 습식 촬영술을 발명하였다. 이 방식은 이동할 수 있는 작은 암실에서 콜로디움 막을 이용하여 유리에 촬상하고 인화하는 것이었다. 습식 판을 이용한 촬영은 복잡한 촬영술이었지만 19세기 중엽 습식 촬영술인 엠블로타입 촬영술과 틴타입 촬영술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사진기는 역사에 많은 역사를 끼쳤는데 사진기를 통해 참혹한 현실을 전달한다는지 같은 거로 말이다. 예를 들어, 벨기에의 식민지 콩고에서는 할당량 미만의 고무를 채집할 때 가혹한 학대를 했고, 어떤 사람이 이를 사진기로 찍어 세상에 알렸다. 이를 통해,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서 그런 짓을 벌일 수 없게 되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휴대 전화에 사진촬영기능이 추가됨에 따라 사진기는 점점 발전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사진기는 가시광선의 빛과 함께 또는 전자기 스펙트럼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한다. 카메라는 빛을 받아들이는 집광부(렌즈)와 받아들인 빛을 이미지로 담는 촬상부(바디), 그리고 여러가지 상태를 조절하는 부품(셔터, 조리개 등)들로 이루어져 있다. 집광부는 빛을 받아 들여 촬상부에 상이 맺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바늘구멍 사진기처럼 단순한 작은 구멍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다중 렌즈를 이용하는 복잡한 것까지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일반적인 사진기의 집광부는 렌즈와 조리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료한 상을 얻기 위해 렌즈의 거리를 조절하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다. 집광부는 일반적으로 사진 렌즈라 부르기도 한다. 촬상부는 집광부로부터 들어온 빛에 의해 생긴 상이 맺히는 부분이다. 필름 카메라는 이 촬상부에 감광성이 있는 필름을 놓아 촬상하고 이를 현상 및 인화하여 사진을 만든다. 디지털 카메라는 촬상부에 빛의 신호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장치 (CMOS, CCD 등)를 놓아, 전기신호로 바뀐 디지털 이미지를 여러 형식의 이미지 파일로 저장매체에 저장한다. 카메라에는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한 여러 종류의 조절장치가 부착되어 있다. 집광부의 구멍크기를 조절하는 조리개와 빛을 받아들이거나 차단하는 셔터 등이 대표적이다. 밝은 곳에서는 조리개를 좁혀 빛의 양을 줄이고 어두운 곳에서는 조리개를 열어 빛의 양을 늘리며 셔터 스피드의 조절로 적당한 촬상이 가능하다. 셔터의 속도를 빠르게 하면 운동선수의 빠른 움직임을 정지화면으로 촬영할 수 있다. 그 밖에 어두운 곳에서 촬영하기 위한 플래시, 촬영할 대상을 미리 살피는 뷰파인더와 같은 장치가 기본적인 조절장치이다. 이 외에도 연속촬영기능 파노라마 촬영기능 등을 제공하기도 한다. 타이탄 (위성) 타이탄() 또는 티탄은 토성의 위성이다. 토성의 위성 중에서 가장 큰 천체로, 태양계 내에서는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토성 VI라고 부르기도 한다. 짙은 대기를 가진 유일한 위성이며, 지구처럼 표면에 안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액체가 확인된 최초의 천체이다. 대기 구성이 원시지구와 유사하여 다양한 관심을 받고 있다. 타이탄은 토성에서 20번째로 먼 위성이자 구형 외관을 지니는 일정 질량 이상 되는 위성들 중에서는 여섯 번째로 떨어져 있기도 하다. 행성과 비슷한 특징을 지닌 위성으로 자주 기술되는 것처럼 타이탄은 반지름이 달의 약 1.5배이고 질량은 1.8배나 된다.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위성이며, 크기만으로 따진다면 수성보다 더 크다. (그러나 질량은 수성의 반 정도이다.)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1655년 3월 25일 최초로 발견했다. 당시 타이탄은 토성의 위성들 중 첫 번째로 존재가 증명된 존재였다. 태양계의 위성 중 갈릴레이 위성 다음으로 발견된 첫 천체다. 명칭은 그리스 신화의 타이탄 신족에서 이름을 따왔다. 타이탄 신족은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의 12남매를 지칭한다. 타이탄의 표면은 주로 얼음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타이탄은 짙은 대기로 둘려싸여 있기 때문에, 2004년, 카시니-하위헌스 호가 도착하기 전까지 인류는 타이탄의 표면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 카시니-하위헌스 호의 탐사로부터 탄화 수소로 채워진 호수들이 타이탄의 극지에 존재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표면은 지질학적으로 젊었으며, 산과 얼음 화산으로 보여지는 지형들이 몇몇 관찰되었다. 타이탄의 표면은 전체적으로 평평했으며, 충돌구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타이탄의 대기는 대부분 질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량의 메테인과 에테인이 섞여 있다. 타이탄 표면에는 바람과 비 등의 기상 현상이 발생하며, 지구 해변과 비슷한 물결 모양의 지형도 형성되어 있다. 표면 및 지하에 있는 액체 물질 및 질소로 충만한 대기 때문에 타이탄은 온도가 훨씬 더 낮다는 점만 제외하면 마치 원시 지구의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이 때문에 타이탄은 예전부터 미생물 혹은 적어도 복잡한 유기 화합물 형태의 생명체가 태동할 환경이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믿어져 왔다. 과학자들은 타이탄의 지하에 있는 액체 바다가 생명체가 생겨날 환경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타이탄은 외계 미생물이 살 수 있거나 적어도 생명체 이전의 유기 화합물이 풍부한 곳으로 여겨진다. 몇몇 연구자들은 있을지도 모르는 지하의 바다가 생명체의 존재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지름은 2575km로 수성과 비슷한 크기이며, 태양계의 위성으로서는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위성으로서는 특이하게도 높은 압력의 오렌지색 질소 대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아래 메테인 또는 에테인 바다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이 사실은 1980년, 보이저 1호의 탐사에 의해 밝혀져 한 때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논의 되기도 했다. 1943년에 대기층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후 탐사선 보이저에 의해 대략의 모습이 알려졌으나 2004년 카시니-하위헌스 호가 토성을 탐사 하면서 그 부속선인 하위헌스 탐사선이 2005년 1월 14일 타이탄에 착륙해 표면을 조사했다. 타이탄은 토성을 15일 22시간 주기로 1회 공전한다. 지구의 달 및 다른 가스 행성의 위성들 다수와 마찬가지로 타이탄의 공전주기는 1 자전주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타이탄은 한 쪽 면이 토성만을 계속 바라보는, 조석 고정 상태에 있다. 궤도 이심률은 0.0288이며 토성 적도에 대한 궤도경사각은 0.348도이다. 지구에서 보았을 때 타이탄은 토성 시지름의 20배 정도 거리만큼 어머니 행성에서 떨어져 있다(이는 실제 거리로 약 120만 킬로미터에 해당된다). 이는 천구상에서 0.8초각 거리이다. 타이탄은 작고 불규칙한 모양의 또 다른 위성 히페리온과 3:4의 궤도 공명비를 보이고 있다. 모형에 의하면 혼란스러운 궤도로부터 '완만하고 부드러운' 과정을 거쳐 현재의 궤도공명 상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히페리온은 안정적인 공전궤도 선상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큰데, 타이탄이 히페리온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물질들을 빨아들이면서 히페리온의 궤도 역시 타이탄 근처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타이탄의 지름은 5,150 킬로미터로, 행성인 수성의 4,879 킬로미터보다도 더 크다. 1980년 보이저 1호가 타이탄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타이탄의 지름이 가니메데보다 더 큰 것으로 여겨졌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타이탄의 짙고 불투명한 대기가 지표 위로 두껍게 형성되어 있어서 우주에서 보았을 때의 시직경을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타이탄의 반지름과 질량, 밀도는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 칼리스토와 비슷하다. 1.88g/cm³의 밀도로 보아, 타이탄의 조성물은 반은 물의 얼음이고 나머지 반은 암석 물질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성물의 비율은 토성의 위성인 디오네 및 엔셀라두스와 비슷하지만, 타이탄은 자체 질량이 크기 때문에 중력에 의해 뭉쳐 있어서 이들보다 밀도가 크다. 타이탄의 중심부에는 3,400 킬로미터 직경의 핵이 있으며, 이 위로 여러 다양한 형태의 얼음 결정으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층이 존재한다. 타이탄의 내부는 아직도 뜨거우며 따라서 물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액체 층이 얼음 I층과 (더 깊은 곳에 있는) 고압력 얼음층 사이에 존재할 것이다. 이런 '바다'의 존재는 최근에 카시니 탐사선이 타이탄 대기의 극저주파(ELF)를 조사한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타이탄의 표면은 ELF파를 거의 반사하지 않지만, 표면 밑에 있는 액체-얼음 경계면에 의해 극저주파가 반사된 것으로 보인다. 카시니 호가 관측한 표면 지형은 구조적으로 2005년 10월에서 2007년 5월 사이에 30킬로미터 이동했는데 이는 지각이 내부 층과 단절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내부에 액체 층이 존재할 것이라는 또 다른 단서가 된다. 타이탄의 대기는 질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메테인과 에테인의 구름을 가지고 있다. 바람과 강우를 포함한 대기의 작용들이 사구와 호안 같이 지구와 비슷한 지형적 특징을 만들고 있으며, 이들은 역시 지구와 마찬가지로 계절적인 기상 패턴과 관련이 있다. 타이탄은 지구보다 온도가 매우 낮지만, 액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질소로 된 짙은 대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시 지구와 비교되기도 한다. 한편 최근 타이탄에서 원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징후가 포착되었다는 것이 새롭게 주장되었다. 토성탐사선 호이겐스 호가 수집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수소가 타이탄의 대기에서 하강해 지표면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포착됐으며 이는 원시 생명체가 타이탄의 대기를 호흡하고 표면의 물질을 섭취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탄에 흐르는 액체는 물이 아닌 메탄이므로 이곳 생명체는 메탄을 기반으로 살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질소가 대기의 주성분을 이루고 유기화합물이 존재하는 타이탄은 오래전 부터 과학자들 사이에서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언급되어 왔다. - 타이탄의 생명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는 대한민국 남해상의 섬들을 관할하는 특별자치도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인 제주도(濟州島) 본섬을 비롯하여 마라도, 우도, 추자군도 등을 포함한 유인도 8개, 무인도 55개로 구성되어 있다. 한라산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관광업 등 서비스업과 어업이 발달하였고,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 속했으나, 미군정 통치 하에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고, 2006년부터는 특별자치도로 승격되어 자치경찰의 실시, 교육자치권의 확대, 일부 중앙권한의 이양, 자치입법권, 자치재정권의 부여 등 지역적 자치권이 고도화되었다. 하위에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은 단층제 광역지방자치단체이며, 남북으로 두 개의 행정시인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설치되어 있다. 고대의 이름은 탐라이며, 서양사람들에게는 제주도에 난파한 네덜란드 선박의 이름에서 유래된 퀠파트("Quelpart")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제주를 예로부터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탐라(耽羅), 탁라(乇羅), 영주(瀛洲) 등이라 불렀다. 이들 명칭중 동영주와 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이다. 제주도에는 이미 초기 신석기 시대(약 1만여 년 ~ 8천 년 전) 이래로 현생인류가 거주하였다. 고산리, 북촌리 등 여러 지역에서 발굴되는 돌을 가공한 각종 석기나 동물의 뼈를 다듬어 만든 골각기, 토기 등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또한 하모리, 삼양동, 가파도 등의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적인 고인돌, 간석기, 토기, 독무덤 등이 발굴되고 있다. 제주의 명칭은 탐모라, 섭라, 탁라, 탐라 등이 시대에 따라 불렸다. 《영주지》에 의하면 개벽설화가 있으나 시대에 따른 제주의 명칭은 나와 있지 않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타 지역과 달리 3성(三姓)신화가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태고에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라고 하는 세 신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 삼성혈)이라는 땅에서 솟아나와 사냥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들어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면서 제주도의 성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별도로, 제주도 전통무가 중에 천지가 생성되는 '배포도업'과 두 형제가 서로 겨루어 이승과 저승을 나누어 다스리는 '천지왕본풀이'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시대에 제주는 행정 구역 상 전라도 제주목으로 통합되어 초기부터 제주목사를 두었다. 1416년 태종 16년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대정현(大靜縣)으로 나뉘어 3읍제(邑制)가 실시되었고, 1864년 고종 1년 2현이 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는 유배지의 하나였으며, 경국대전의 규정에 '제주에는 죄가 아주 중한 자를 제외하고는 유배시켜서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지형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사면은 3˚ ~ 5˚의 매우 완만한 경사이며, 남북사면은 5˚정도로 약간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질은 퇴적암층과 현무암, 조면질안산암(粗面質安山岩), 조면암 등의 화산암류와 기생화산에서 분출한 화산쇄설암(火山碎屑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지방의 점사질 토양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흑갈색의 화산회토로 덮여 있다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태평양 해로의 중심에 위치하는 요충지이며 동경 126도 08분 ~ 126도 58분이고, 북위 33도 06분 ~ 34도 00분에 위치해있다. 동물은 한대성, 열대성 동물이 함께 서식하고 있는데, 77종의 포유류, 조류 198종 등을 비롯하여 파충류, 양서류가 각각 8종, 곤충류와 거미류가 873종과 74종 등이다. 식물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아열대, 온대, 한대식물 등이 수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그 종류는 2,001종 (백두산: 500여종, 지리산: 1,000여종)에 달해 가히 식물의 보고라 할 만하다. 이중에는 8종의 천연기념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한라산 일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의 가장 큰 섬인 제주도(島)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이 1845.9km²이다. 제주도는 한라산의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가장 급한 경사가 5˚정도이므로 한라산을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질은 현무암과 퇴적암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사질 토양을 제외하면 대부분 화산회토로 덮여있는게 특징이다. 여러 섬들이 위치해 있으며 우도가 제주특별자치도의 유인도 중 가장 큰 섬이다. 추자도는 제주특별자치도 북서쪽 해상에 위치해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앙에는 오름 또는 악이라 불리는 여러 기생 화산이 위치해 있다. 기후는 여름에는 아열대성 기후를 보인다. 겨울에는 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라산은 겨울에는 대부분 영하권으로 떨어진다. 강수량 (mm): 제주 1,584.9 서귀포 2,393.3 평균기온(℃): 제주 15.6 서귀포 16.9 제주특별자치도는 외교, 국방, 사법 등을 제외한 자치권이 보장되는 특별자치도이다. 사람과 상품,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기업 경영하기가 편한 국제자유도시 체제로서 자치경찰, 자치교육, 주민소환이라는 큰 틀에 따라 웬만한 행정사항은 제주특별자치도가 스스로 결정,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다. 특히 교육과 의료ㆍ관광 개방이 이루어져 특별자치도의 자치가 최대한 보장되고 있다. 우선 교육 분야에서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자율학교와 외국인 투자자 및 국내ㆍ외 해외유학 수요를 흡수하기 위한 국제고등학교 설립이 가능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4.8.29 한국국제학교(KIS) 고등학교 건물 준공식이 열렸다. 2014년 8월 29일 또 유ㆍ초ㆍ중등 및 대학은 물론 외국교육기관의 설립이 허용되며 외국대학은 도내 대학 또는 전문대 교육시설을 이용해 교육과정을 설치ㆍ운영할 수 있다. 2008년부터 교육감이 주민 직선으로 선출되며, 교육감은 자율학교ㆍ국제고ㆍ외국인학교 설립ㆍ운영에 전권을 행사한다. 또한 기업에 대한 지원은 타 광역지방자치단체와 비교해 볼때 매우 파격적으로 내ㆍ외국인 구분없이 관광ㆍ의료ㆍ교육ㆍ정보통신산업 등에 500만 달러 이상 투자하면 재산세를 10년간 받지 않으며 IT·BT 등 첨단 산업에 대한 국ㆍ공유지의 임대기간은 50년이고, 원하면 연장도 가능하다. 외국인 투자지역에 대한 지방세 감면혜택이 종전 7년간 100%, 3년간 50%에서 15년간 100%로 확대되고 무주택자 한국인에게 민영주택 건설량의 10% 범위 안에서 주택을 특별공급하는 등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지원이 강화된다. 그리고 제주특별자치도의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테러지원국 등 8개 국가 외국인을 제외한 모든 관광객은 비자 없이 왕래할 수 있으며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 중앙정부 소관인 설립 감독권 및 관광진흥개발기금 운영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외국 영리법인이 의료기관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고, 외국 병원의 내국인 진료도 허용된다. 외국인이 설립한 의료기관은 외국인 환자의 소개ㆍ알선행위도 가능하고 외국인 전용약국도 문을 연다. 또 특별자치도지사가 소속된 자치경찰제가 전국 처음으로 도입돼 운영되고 있다. 자치총경이 단장인 제주자치경찰은 일반범죄에 대한 수사권은 없으나 불심검문, 보호조치 등은 경찰관직무집행법에 따라 수행한다. 단, 수사권은 치안유지를 위해 중앙정부 소속의 제주지방경찰청 소속의 경찰이 수행한다. 중앙정부에서는 기업에 대한 규제철폐 지원 등과 같이 특별자치도의 자치도를 최대한 보장할 의무가 있어 많은 부분에서의 개혁이 예상된다. 우선, 정부의 기존 권한 가운데 무려 144개 분야 1,060여건이 제주지사에게 넘겨지고, 연내에 ‘행정규제기본법’이 정한 8,000여가지 규제 가운데 제주에 꼭 적용해야 하는 것만 정해둘 예정이다. 동시에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특별자치도지원위원회와 사무처가 설치돼 규제자유화, 중앙권한의 추가 이양 등 2단계 과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 깃발도 2009년 4월 22일부터 새로운 깃발로 교체되고, 제주도를 상징하는 통합 이미지도 발표되었다. 2009년 6월 1일 ~ 2일까지 제주특별자치도에는 한국-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2009년 9월 9일부터 델픽축제가 개최되었으며, 9월 14일까지 개최되었다.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은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과 함께 서귀포시와 제주시로 각각 통합되었다. 자치행정구역은 폐지되었으며 제주시와 서귀포시 2개의 행정시만 존재한다. 하위 행정구역은 31동 7읍 5면이다. 2014년 4월말 기준 제주특별자치도의 인구는 240,259세대, 608,313명이다. 주민등록 인구는 남성 299,643명, 여성 298,372명이다. 등록 외국인은 8,074명이다. 제주특별자치도에는 3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2005년 01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 선포하였다. 이어서 정부와 제주특별자치도는 세계평화의 섬 17개 사업을 선정하여, 제주4·3추모일 지정, 국제평화재단 및 제주평화연구원 설립, 제주평화포럼 정례화, 남북장관급 회담 개최, 모슬포 전적지공원 조성, 동북아협력체 창설 등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모슬포 전적지공원 조성과 동북아협력체 창설 등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2개 사업은 아예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17개 사업 중 절반 이상이 유보되거나 아직까지도 추진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지질 특성상 농업이 잘 되지 않는 곳으로 벼 농사는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행해진다. 1차 산업은 감귤 농사를 주로 한다. 관광업이 이뤄지는 곳이다. 수산업도 이뤄진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동방의 하와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제주도를 찾아오는 관광객 중 외국인 관광객은 일본인 관광객이 1위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중화권에도 제주도가 많이 알려지면서 중국인 관광객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고 중국인 관광객이 외국인관광객들 중 36만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1위를 차지했다. 따뜻하고 비가 많은 기후, 기름진 토양, 넓은 경작지 등 난대성 농업에 적합하나, 보수력(保水力)이 약해 논농사는 불리하다. 경지 면적은 5만 9,167ha로 총면적의 30%이며, 경지이용률은 140%로 전국에서 가장 높으나, 경지 중 논의 비율은 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밭이거나 과수원이다. 농가 인구는 총 11만 8,709명, 농가는 3만 9,784가구다. 농업은 원예농업이 성한 것이 특징인데, 특히 과수원예가 발달하여 감귤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경제적인 재배가 가능한 곳으로, 감귤 농업은 제주도의 가장 대표적인 산업으로 알려져 있다. 감귤의 주산지도 서귀포에서 제주로 확대되고 있으나, 최근에는 감귤 단작에 따른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감귤의 품종을 다양화하고 참다래 등 대체 과수 재배를 확대하고 있으며, 온실 재배에 의한 바나나·파인애플·망고 등의 열대성 작물 재배도 늘리며, 식량작물은 2002년 맥류 1만 4,621톤, 두류 6,902톤, 서류 2만 862톤을 각각 생산했고, 감귤은 78만 8679톤을 생산하여 총 3,164억 94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한라산 기슭은 천연의 목장으로 고려 때부터 국영 종마장이 있었고, 지금도 6만 6,000ha의 목초지가 조성되어 있다. 100여 곳의 기업 목장에서 소·젖소·면양·말 등을 사육하며, 토종 농작물인 쌈용 콩잎과 푸른 독새기 콩등이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인구수는 2002년 12월 2만 390명으로 농업을 겸한 어민이 68.6%나 된다. 어선수는 3,099척이며 수산물로는 갈치·고등어·도미·조기·삼치·전갱이·방어·소라·오징어·꽃게·새우·톳·미역·다시마·우뭇가사리 등이 난다. 이 밖에 양이 많지 않지만 전복, 소라, 해삼 등이 잡힌다. 제주·서귀포·김녕·한림·모슬포·성산포·추자도 등은 주요한 어업 기지이며, 연안 어업에 있어서는 해녀들의 활동이 크다. 하지만 현재는 고령층에 한정되어 그 수가 적어졌다. 공업은 대한민국 전체 도 중에서 가장 미약하나, 근래 농산·축산·수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식품·섬유 등의 공업이 일어나고 있으며, 등록 공장수는 280개소가 있다. 이 중에서 섬유 공장 6개 소, 음식료품 88개소, 비금속광물 66개 소, 화학 공장 21개소, 기계 공장 42개 소, 기타 공장이 25개소인데, 기타 공장은 대부분은 중소 규모의 농수산물 가공과 식품·음료 공장이다. 감귤과 돌하르방이 유명하며, 그 밖에 말, 돼지, 갈옷, 옥돔·젓갈류·넙치·성게·소라 등 각종 해산물이 알려져 있다. 제주석·제주향수·먹는샘물·송이벽돌·술(허벅술, 백록담, 한라산)·설록차·토종꿀·마늘샘·양파샘·토마토·양파·양배추·당유자차·귤호박잼·어성초차·어성초엿·꿩엿·선 인장차·양란(심비디움)·백합·김치·당근(농축액)·흑대두·당근·표고버섯·찐톳 등도 유명하다. 제주특별자치도에는 한국의 다른 지방과 다른 독특한 문화가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에는 여러 전설과 설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유명한 설화로는 설문대할망 설화, 삼성혈, 이어도 설화 설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어도 설화와 관련하여 이어도사나라는 민요가 전해진다. 또한, 제주도는 예로부터 무속이 성하여 무가(巫歌)가 잘 보존되어 있다. 제주 방언은 한국의 다른 지방 방언과 매우 달라서 제주어라는 또 다른 언어로 분류할 정도로 이질적이다. 또한 아래아 등 옛 한국어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노인층 화자를 중심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화자가 노인층에 국한되고 청장년 계층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5개의 소멸 위기 단계 중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했다. 그러나 최근 문화적 다양성의 각광받으면서 제주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짐에 따라 교육과 활용이 활발해지고 있다. 올레길은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발굴한 도보여행자가 다니는 길로, 작은 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에서 유래하였으며, 제주도 해안가 전체에 조성되어 있다. 코스는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UNESCO)가 인정한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까지 자연과학분야에서 3관왕을 달성한 세계 유일의 지역이다. 2007년 6월 27일 제 31차 세계유산위원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선정된 곳은 다음과 같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네트워크(GGN)에 세계지질공원 후보지로 신청하여 인증을 받았다. 유네스코에서 제주의 해녀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K리그1 소속 제주 유나이티드가 활동하고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유일한 프로 스포츠 클럽이다. 가장 큰 스포츠 행사로는 백호기 축구대회가 있다. 백호기 축구대회는 제주도내 초, 중, 고등학교 축구부가 참여하며, 각 학교간 자존심 대결 못지않게 다채로운 응원전으로 유명하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골프, 패러글라이딩, 스쿠버다이빙, 스포츠승마, 윈드서핑 등의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대한민국의 도 중에서 유일하게 고속도로와 일반 국도가 없다. 일반 국도의 경우 2008년에 모든 일반 국도에 대해 지방도로 격하되면서 사라졌다. 제주특별자치도 내 도로의 총연장은 3,206km이고, 포장률은 84%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한국의 다른 지방과 달리 철도가 없다. 과거에는 제주도순환궤도라는 철도가 있었으나 폐선되었다. 주요 대중교통으로 버스가 이용된다. 항공 교통으로는 1968년에 지은 제주국제공항이 있다. 이용객 수와 운항횟수로는 인천국제공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대한민국의 대표 공항이다. 국제선은 일본의 도쿄·오사카 및 중화민국의 타이베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베이징·상하이 등에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국내선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진에어 등이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여수·진주·포항·울산·청주·원주 등 대한민국 각 주요 도시를 운항하고 있다. 한편, 2015년 11월 10일 국토교통부에서 제주도 제2공항 건설을 공식 발표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이며 2025년에 개항할 예정이다. 해상교통은 3천t급 이상의 카페리호가 제주해협을 통해 한국 본토(목포·부산·완도·녹동·여수)에 취항하고 있으며, 제주항을 기점으로 목포는 1일 2회(2만4천t급 씨스타크루즈호, 산타루치노호), 완도는 2회, 해남우수영 ·부산·녹동·여수는 각 1회 왕복한다. 제주특별자치도는 105개의 초등학교, 41개의 중학교, 29개의 고등학교, 6개의 대학교가 있다.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과 제주특별자치도 사이엔 사수도의 관할권을 놓고 분쟁이 있다. 전라남도 완도군에서는 사수도를 장수도로 부르면서 장수도는 완도군에 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수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에 속한 섬으로, 제주시가 실질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이에 제주도 북제주군(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은 2005년 헌법재판소에 사수도의 관할권에 대한 권한쟁의심판을 제기하였으며, 2008년 12월 26일에 헌법재판소는 사수도가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해 있다고 결정하였다. 여수시 여수시(麗水市, )는 대한민국 전라남도 동남부 여수반도에 있는 시이다. 면적은 510.08km²이고, 해안선 길이는 879.03km이며, 365개의 부속 섬이 있다. 임해산업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에 GS칼텍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264개 기업이 입주하여 석유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 비료의 33%, 석유화학(에틸렌)의 47%, 정유의 26%를 생산한다. 명소로는 이순신 장군이 근무했던 전라좌수영 본영인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동도 등이 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있다. 2013년 오천동으로 해양경찰교육원이 이전되었다. 시청은 학동에 있고, 여서동에 시의회와 여서청사, 여수지방해양항만청이 있으며, 문수동에 문수청사가 설치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1읍 6면 20동이다. 2016년 12월 인구는 288,988명으로 전라남도 내에서 가장 많다. 2012년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여수는 한반도 남해안의 중앙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전라남도 순천시, 광양시와 인접하고, 서쪽으로 여자만을 건너 고흥군, 서남쪽으로 완도군, 동쪽으로는 바다 건너 경상남도 남해군이 있다. 소백산맥의 지맥 끝부분에 위치한 반도로, 높지 않은 여러 산이 이어져 있으며, 남해안 지역의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선을 보인다. 또한 시의 주변으로는 돌산도, 경도, 묘도, 화태도, 백야도 등 크고작은 섬들이 많이 분포한다. 여수시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대척점이다. 여수시에는 총 365개의 섬이 소속되어 있다. 연륙도서 4개를 포함하여 유인도는 49개, 무인도는 316개이다. 여수시의 행정 구역은 1읍 6면 20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수시의 면적은 510.08km이며, 인구는 2016년 12월 기준으로 118,910세대, 288,988명이다.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보성군, 고흥군을 전남동부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2016년 12월 기준 여수시의 인구는 288,988명이다. 인구밀도는 566.55명/km이다. 여수시는 반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반도에 위치한 다른 도시들과 유사하게 육상교통망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남해안의 중심 항구로 발달했고, 1960년대 중반 석유화학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재는 반도에 위치한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육상교통망이 잘 갖추어진 편이다. 전라선 철도 여천역, 여수엑스포역이 있다. 2012년 세계 박람회에 맞춰 여수역에서 개명한 여수엑스포역은 전라선의 종착역이며, 대한민국의 철도역사 중 최남단에 위치한 역이다. 여수엑스포역에서는 용산역행 새마을호, 무궁화호 열차가 각각 하루 12회 운행되고 있으며 전라선이 복선 전철화된 후 KTX가 1일 20회 운행되고 있다. 순천시와 연결되어 있는 국도 제17호선이 다른 지역과 통하는 주된 통로다. 여수와 순천을 잇는 국도 제17호선은 교통량에 비해 부족한 수용량과 낙후된 선형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내왔다. 그러나 2012년 초, 기존 17번 국도를 대체할 국도대체우회도로 (엑스포대로)가 완공되어 현재는 해당 새 도로가 국도 제17호선 구간으로 편입되어 여수 도심구간 (덕충IC - 해산IC)에서 도심 고속화도로 기능을 하고 있으며, 순천완주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영암순천선)와 연결되어 고속도로 접근성을 높였다. 또한 2012년에는 여수국가산업단지와 여수시 묘도를 잇는 묘도대교가, 2013년에는 묘도와 광양항을 잇는 이순신대교가 정식 개통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 17번 국도를 경유하여 1시간 가까이 걸리던 여수산단과 광양항간 소요 시간이 10분 내외로 줄어 산단과 광양항간 교통 / 물류의 효율과 영남권 접근성이 현저히 개선되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여수시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0조 1,552억 3천 7백만원으로, 1인당 6,917만원이다. 이는 전라남도 전체 지역내총생산의 32.36%를 차지하는 수치이고, 대한민국의 2013년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인 2,797만원의 약 2.47배, 전국 3위에 해당한다. 여수의 사업체 수는 20,536개이다. 2012 여수 엑스포는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93일간 진행되었다. 폐막일인 8월12일까지 누적 입장객은 총 820만3956명을 기록하고, 총 104개 국가가 참가했다. 여수세계박람회장은 엑스포가 치러졌던 장소로, 2012 여수 엑스포 당시에는 주제관, 한국관, 기후환경관, 대우조선해양로봇관, 해양문명도시관, 해양산업기술관해운항만관 등이 운영되었다. 현재 공원시설로는 빅오(Big-O), 스카이타워 전망대, 기념관, 엑스포디지털갤러리, 엑스포게스트하우스, 야외체육시설이, 전시/체험시설로는 스카이플라이, 여수테디베어뮤지엄, 범퍼카·회전목마·투어전기차, 지니카·레저카트, 해양레저스포츠체험교실, 엑스포 아트갤러리 등이 있다. 여수시에는 유치원 73개, 초등학교 50개교, 중학교 23개교, 고등학교 15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48,644명으로 여수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교원 수는 초등학교 1,170명, 중학교 726명, 고등학교 298명 등이며, 2년제 대학 교수 41명, 국립 대학교 교수 210명이다. 제주시 제주시(濟州市)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북부에 있는 행정시이자, 제주특별자치도청 소재지이다. 제주국제공항이 있으며, 연간 580만명의 관광객이 오는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제주해협이 있고, 남쪽은 한라산을 경계로 서귀포시에 접해 있다. 해안선은 단조롭고 여러 섬들이 위치해 있다. 과거 자치시였던 제주시가 있었으나,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으로 북제주군과 제주시를 통합하여 행정시가 설치되었다. 고대에는 탐라란 이름으로 불린 독립된 지역이었지만, 백제, 신라에 조공을 하는 등 간접적인 지배를 받기도 했다. 938년에 고말로(高末老)가 고려에 입조, 복속하였다. 1105년 고려는 탐라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탐라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구 지배층의 지방 지배는 인정되었다. 13세기 원 간섭기에 제주도는 몽골의 직할령이 되었다가 1294년에서는 다시 고려에 귀속되었다. 1402년(조선 태종 2)부터 실질적인 조선의 행정권에 포함되었으며, 1416년(태종 16)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을 제주목(濟州牧)으로 고치고 목사를 파견해 통치하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의 하나인 제주부가 설치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1901년,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주시는 화산체로 화산활동이 크게 5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소규모 용암 분출과 화산쇄설물의 분출은 총 79회 정도가 이루어졌다. 제주시의 연평균 기온은 14.7℃로 비슷한 위도를 갖는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비교적 낮은 기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제주가 대륙 동안(東岸)의 해양도시로서 겨울에는 대륙의 영향을 깊게 받아 저온이 되고 여름은 정반대로 해양의 영향을 받아 고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시는 우리나라에서는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지역에 속한다. 이는 6월말부터 7월 중순까지 강우전선으로 인한 강우와 9월초부터 중순까지 흐리며 때때로 내리는 가을비 그리고 7 ~ 8월에 한두 번씩 휩쓸고 지나가는 태풍으로 인한 폭우 등이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제주는 겨울에 북서계절풍이 탁월하여 지형적 강설이 빈번하다. 북제주의 산지천 하구에 있는 제주도 유일의 개항장이며, 도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이용해 온 산지항을 축항하여 개조한 것이다. 육지와는 정기선이 운항되고 서쪽 교외에는 비행장이 있어 각지에 통한다. 해저의 암초와 풍랑을 막아 주는 섬이 없어 1926 ~ 42년에 동·서 양측에 방파제를 구축하였다. 이 항구는 무역항일 뿐만 아니라 어항으로도 중요하다. 1947년 산지항을 제주항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개항장으로, 1955년 9월 1일 북제주군 제주읍을 제주시로 승격하였다. 2005년에는 제주도 행정구역개편에 관하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제주시와 북제주군의 통합을 지지하는 안이 채택되었고,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과 함께 북제주군과 통합하여 행정시로 전환되었다. 용암대지의 말단부에는 용천(湧泉)이 있어 인가가 가장 밀집하여 대도시를 이루고 있다. 시가는 해안을 따라 대상으로 발달되었고 매년 인구가 증가하여 서부지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시내에는 도청·시청을 비롯한 행정·문화·언론·금융 기관을 비롯하여 제주대학교와 3개 전문대학, 다수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다. 제주시의 행정 구역은 4읍, 3면, 19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7년 3월 말 기준으로 제주시의 인구는 472,161명이다. 제주국제공항 급행버스, 간선버스, 지선버스 3가지가 존재하며, 삼영교통과 시외버스 운영 업체인 금남여객, 극동여객, 제주여객, 삼화여객, 동진여객, 그리고 공영버스가 시내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주로 제주시내나 서귀포시내에서 읍면지역으로 빠르게 이어주고 있다. 이 외에도 특수학교로 제주영송학교가 있고, 제주영지학교 그리고 제주제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가 있다. 데이비스 컵 데이비스 컵(Davis Cup)은 '테니스 월드컵'이라고도 불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남자 테니스 국가 대항 토너먼트로, 1900년에 미국과 영국의 대결로 처음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우승배를 기증한 드와이트 필리 데이비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데이비스컵 대회는 3일에 걸쳐 2단식, 1복식, 2단식 순서로 진행되며 모든 경기는 5세트 노-타이 브레이크(no-tie break)로 운영된다. 지역별 예선을 거쳐 올라온 16개국이 본선 토너먼트를 진행하여 최종 우승국가를 가리게 된다. 토너먼트 단계에서는 개최지가 따로 없으며, 경기를 치르는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에서 경기가 열린다. 홈팀은 두 팀의 데이비스컵 역대 전적이 없을 때는 추첨으로 정하며, 있을 때에는 직전 경기의 원정 팀으로 정한다. 데이비스컵 대회는 매년 열리며 우승배인 데이비스컵은 그해의 우승국가가 1년간 보관한다. 데이비스컵 보유국을 '챔피언 네이션(Champion nation)'이라 한다. 이상기체 이상기체(理想氣體, )는 탄성 충돌 이외의 다른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점입자로 이루어진 기체 모형이다. 이상적인 온도와 압력에서 많은 실제 기체들은 이상 기체로 근사할 수 있으며, 높은 온도와 낮은 압력일 수록 이상 기체에 더 근사하게 된다. 이상 기체는 그 입자 통계에 따라 세 가지가 있다. 끊임없이 불규칙한 직선 운동을 한다. 따라서 운동 에너지 손실 없이 운동 에너지가 보존된다(운동에너지는 절대 온도에 비례). 위치 에너지, 인력, 반발력, 기체 분자 자체의 부피는 무시한다. 이상 기체에서 라 정의할 때, 다음의 관계식 PV=nRT 이 성립하며, 이를 이상 기체 방정식이라고 한다. 이 때, R은 기체 상수로, 약 8.314472 J⋅K⋅mol이다. 광전 효과 광전 효과(光電效果, , )는 금속 등의 물질이 고유의 특정 파장보다 짧은 파장을 가진 (따라서 높은 에너지를 가진) 전자기파를 흡수했을 때 전자를 내보내는 현상이다. 이 때 방출되는 전자를 광전자라 하는데, 보통 전자와 성질이 다르지는 않지만 빛에 의해 방출되는 전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 현상을 빛의 입자성을 가정함으로써 설명하였으며, 그 공로로 192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빛의 성질에 관한 논란 중 입자설에 대한 증거로 거론된다. 광자 방출 과정(photoemission process)에서, 어떤 물질 내의 전자가 일함수(work function) 이상의 광자 에너지를 흡수하면 빛이 방출된다. 광자의 에너지가 너무 낮으면, 전자는 물질을 벗어날 수 없다. 비춰지는 빛의 세기가 커지는 것은 광자의 수가 늘어난다는 뜻이므로 더 많은 수의 전자를 들뜨게 만들지만 각각의 전자가 가지는 에너지를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방출된 전자의 에너지는 쪼여주는 빛의 세기가 아니라 각각의 광자의 에너지 혹은 진동수에 영향을 받는다. 입사된 광자와 최외각 전자 사이의 상호 작용이다. 전자는 광자에 쬐였을 때 광자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으나, 대부분 전자들은 "1 혹은 0(흑백논리, all or nothing)"의 원리를 따른다. 한 광자의 모든 에너지는 원자적 결합에서 한 전자를 자유롭게 하는 데 쓰이고, 남은 에너지는 방출된다. 만약 광자 에너지가 흡수되면 에너지의 일부는 원자에게서 전자를 떼어내는 데 쓰이고 나머지는 자유 입자로서 전자의 운동 에너지에 기여한다. 광전 효과는 빛이 쪼여진 금속 표면에서 전자의 방출 관측 실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금속에서 광전자를 방출시킬 수 있는 특정 최소 진동수가 있다. 이 진동수를 문턱 진동수(한계 진동수, threshold frequency)라고 한다. 입사되는 광자의 수를 고정시키고 입사광선의 진동수를 늘린다면(이 때 빛의 에너지는 증가할 수 있다) 방출된 광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를 크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지 전압(stopping voltage)이 커진다. 만약 빛의 세기가 커진다 하더라도 광전자의 운동 에너지에는 영향이 없다. 문턱 진동수 이상에서는 광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는 빛의 진동수에 따라 다르고, 빛의 세기가 아주 높지 않은 이상 이와는 독립적이다. 주어진 금속과 빛의 진동수에서, 어떤 광전자가 방출될 비율은 빛의 세기와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빛의 세기를 늘리면 정지 전압은 그대로 유지되나 광전류의 세기를 늘린다. 빛의 입사와 광전자의 방출 사이의 시간 차는 1㎱ 이하로 매우 작다. 금속 표면에서 전자를 떼어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일함수라고 한다. 일함수는 formula_1, W 혹은 formula_2로 표기되기도 하며, formula_3, 로 나타내어진다. 여기에서 formula_4는 각 금속마다의 한계 진동수이다. 방출된 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 formula_5는 h가 플랑크 상수, f가 입사된 광자의 진동수일 때 formula_6, 로 나타내어진다. 따라서 방출된 전자의 최대 운동 에너지는 formula_7. 이며, 운동 에너지는 양수여야 하므로 광전 효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formula_8여야 한다. 플랑크의 양자화 개념과 에너지 보존 법칙을 이용하면 광전효과에서의 광전자 방출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식을 구할 수가 있다. 전자가 튀어나오는 순간 물질 고유의 특정 파장을 한계 파장이라 하며, 그때의 진동수를 한계 진동수(문턱 진동수)라고 한다. 그리고 그 한계 진동수에 플랑크 상수를 곱한 것을 일함수라 일컫는다. 입사한 광자의 에너지가 formula_9일 때, 금속에서 전자를 떼어내고 남은 에너지는 전자의 운동에너지가 된다. 즉,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다음 등식이 성립한다. 미시경제학 미시경제학은 자원배분과 분배를 초점에 두는 경제학이다. 미시경제이론은 개별 상품의 시장에서 이뤄지는 균형이 주요 관심사이다. 이때 균형은 개별 상품의 생산량과 가격의 분석에 초점을 맞추는데, 미시경제이론이 가격이론이라고도 불린다는 점에서 미시경제이론에서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에트나산 에트나 산()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동부 메시나와 카타니아 인근의 화산이다. 해발 3,350미터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이다. 알프스 산맥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에트나 산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괴물 티폰이 주신 제우스에 의해 에트나 산에 갇혔다.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도 에트나 산 아래에 있었다. 댐 댐(, , 堰堤)은 하천의 흐름을 차단하거나 흐름의 방향을 바꾸고 늦추는 등의 역할을 하도록 강을 가로질러 세워지는 구조물을 말한다. 이러한 구조물로 인하여 인공적인 호수나 유수지가 만들어진다. 대개의 경우 댐은 물을 방류 혹은 월류하게끔 여수로(餘水路,Spill Way)나 위어(weir)를 갖추고 있다. 한국에서 '댐'이라고 하는 말은 공학적으로 대댐만을 지칭하는 협의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오래된 댐으로 기원전 256년 양자강의 지류인 민강()에 건설된 두장옌()댐이 있다. 이것은 이빙(李冰)과 그의 아들에 의해 축조되었는데 이빙은 수리학의 초기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것은 홍수 조절과 관개용으로 만들어졌고 현대화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청두시의 북서 60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이다. 댐은 그 구조와 사용 목적, 높이를 기준으로 하여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댐의 구조로 분류하면 목재댐, 필댐(축조댐), 콘크리트댐으로 분류되고 여기에 더 세부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용 목적으로 분류하면 관개용, 상수도용, 수력발전용, 홍수조절용 등으로 분류되며 다목적댐은 하나 이상의 여러 목적을 갖는 댐이다. 높이에 따라 분류하면 대댐은 15m보다 큰 것을 말하고 major댐은 150m이상의 댐을 말한다. 상대적으로 30m보다 낮으면 low댐이라 하고 30-100 정도의 댐은 medium-height댐, 100m 이상은 high dam이라 한다. "안장댐"은 보조댐으로 본 댐의 수위를 높이거나 저수량을 늘이기 위해 시공한다. 본 댐의 높이를 높임으로써 월류가 예상되는 능선에 설치하여 저수량과 댐의 높이를 높일 수 있게 된다. 또한 불필요한 침수지역의 확대를 막을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능선에 단순히 제방을 설치하여 댐을 대신하기도 한다. "월류 댐"은 저수지가 범람할 때 자연스럽게 월류하도록 만든 특수한 경우에 사용하는 댐이다. 일반적인 댐은 여수로와 같이 월류하기 이전 배수 수단을 설비하여 월류를 방지한다. 위어는 월류댐의 일종으로 유량을 측정할 수 있는 댐이다. 체크 댐은 물의 유속을 줄이고 토사 침식을 방지하기 위한 소형 댐이다. "건류 댐"은 홍수를 조절하기 위한 댐이다. 평상시에는 일반 하천과 같이 물이 흐르나 홍수 때에는 물을 가두어 유량을 조절한다. 한국의 평화의 댐이 현재 이렇게 운영된다. 목재댐은 산업혁명 초기에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쉽고 빠르게 짓기 위한 임시용으로 시공된다. 구조상 수명이 짧고 높이에 한계가 있어 근래에는 시공하는 사례가 드물다. 목재댐은 나무로 만든 통과 마찬가지로 수밀성과 방부 성능에 유의하여야 한다. 목재댐은 목재가 풍부하거나 콘크리트의 수송과 타설이 비용상 불리할 때 혹은 목적상 댐의 수명이 길 필요가 없을 때 유용하다. 목재댐은 한 때 북아메리카 서부에 많이 지어졌지만 지금은 모두 새 구조물로 대체되었다. 목재댐은 크게 크립 구조와 플랭크 구조로 나눌 수 있다. 필댐(fill dam, 축조댐)은 재료를 다져서 만드는 댐으로 록필댐과 흙댐이 있다. 이러한 축조댐은 재료의 자중에 의해 수압을 견디도록 만든 댐이다. 록필댐(rock-fill dam)은 조립질의 재료를 다져 만드는 댐이다. 재료를 다져 만들기 때문에 수밀성이 나빠 따로 불투수층인 차수벽을 설치한다. 재료가 비교적 큰 입자들을 많이 포함하는 물질이기 때문에 록필(Rock-fill)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차수벽은 댐의 상면(상류쪽)이나 중앙에 위치하고 석재, 콘크리트, 플라스틱 멤브레인, 쉬트 파일(sheet pile) 등으로 만들어진다. 이때 내부에 있는 불투수층을 "코어(core)"라고 부른다. 또 다른 경우로 불투수층을 점질토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댐을 콤포지트 댐이라고 한다. 점질토로 할 것인가 코어로 할 것인가는 시공현장의 상황에 따라 판단한다. 록필댐은 지진에 대한 내진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시공중에 품질관리가 부실하여 미립자가 많아지면 지진시에 유수가 침투하여 구조물 내의 유동화가 진행되고 내진성이 저하될 수 있다. 재료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을 때에는 재료의 건조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별도로 시공되어야 한다. 흙댐(earth-fill dam)은 흙을 잘 다져 쌓은 댐이다. 흙댐에는 존형(zone形;Zoned-earth) 댐과 심벽형(心壁形;Core-type) 댐이 있다. 록필댐과 원리와 축조 방법이 비슷하지만 입자가 고른 흙으로 시공되므로 따로 배수층을 두며 시공한다.존형 흙댐은 록필 댐과 마찬가지로 구조물 내에 수밀성을 위하여 흙과는 다른 재료로 존(zone)를 설치한다. 이 경우 대개 점질토가 사용되어 수밀성을 확보하고 또한 존에는 집수공(集水孔)과 필터(filter)가 설치되어 댐 내의 유수와 유사 입자를 모을 수 있게 한다. 심벽형 흙댐은 록필댐과 같이 내부에 코어를 두거나 차수벽을 설치한 댐이다. 흙댐 중 임시로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 특이한 것은 frozen-core 댐이다. 이것은 파이프롤 통해 냉각재를 순환시킴으로써 댐 내부의 permafrost가 동결되고 수밀성을 확보하게 하여 흙댐의 '코어'역할을 한다. 콘크리트 댐에는 중력댐과 아치댐이 있다. 아치댐은 자중에 의한 중력과 아치효과에 의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형식의 댐이다. 자중에 의한 중력으로 수압을 견디는 것은 중력댐과 같은 원리이고 아치효과는 수압을 받아 이것을 댐이 위치한 양안에 힘을 분해하여 결과적으로 기반에는 더 적은 하중이 전달되는 효과를 얻는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지반에 전달되는 하중은 실제보다 낮은 수위의 수압에 의해 전달되는 하중과 같아 댐의 부피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수압을 상당부분 아치효과로 양안에 전달하여야 하기 때문에 아치댐은 입지 조건에 신중하여야 한다. 가장 적절한 입지는 협곡이고 양안이 양호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미국의 후버 댐이 대표적이다. 아치댐은 싱글아치댐과 이중곡률 댐이 있으며 아치의 곡률(曲率)이 일정하면 싱글아치 댐이다. 싱글아치댐은 등각 아치와 등반지름 아치가 있고 등반지름 댐보다 등각 댐이 더 일반적인 아치댐이다. 이중곡률 댐은 곡률을 이중으로 사용한 댐으로 이 형식은 건설에 필요한 콘크리트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지반에 하중을 많이 전달함으로 지반 조건이 양호하여야 한다. 겉보기에는 싱글아치댐과 비슷하지만 하류쪽에서 보면 오목한 부분이 분명하지 않다. 가물막이댐은 일시적으로 물을 배제하기 위한 만든 댐이다. 일반적으로 쉬트파일로 만들며 콘트리트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용 목적은 댐이나 교량등을 건설할 때 물을 배제하고 기초공사에서 건조한 조건에서 구조물을 세우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물막이댐은 공사가 완료되면 해체한다. 유역변경 댐은 지류를 달리하는 하천에 유량을 늘이기 위해 시공되며 전력발전 목적으로 시공되는 경우가 많다. 여수로는 댐에 설치되어 물을 방류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여수로는 흐르는 물을 조절하기 위한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service 여수로" 혹은 "primary 여수로" 평상시 물이 흐르는 수로이다. "auxiliary 여수로" 주 여수로에 유량이 많아지면 문을 열어 물을 방류한다. "emergency 여수로"는 주 여수로가 정상적을 작동하지 않을 시에 대비한 여수로이다. "fuse-plug 여수로"는 물넘이 뚝으로 홍수 시에 물이 넘쳐 자연적으로 방류할 수 있는 여수로를 말한다. 공동현상(cavitation)과 소용돌이는 댐 구조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물이 구조물에 충격을 덜주기 위하여 오지 곡선(ogee curve)을 사용하여 수로를 만든다. 댐은 원칙적으로 월류를 허용하지 않는 설계를 함으로 여수로 또한 월류를 가정한 배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fuse-plug여수로는 어디까지나 응급시에 대비한 설계일 뿐이며 여수로의 유량은 사람에 의해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댐의 주변 환경에의 부정적인 영향이 최근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천의 경관과 생태계는 하천 흐름(河川-;stream flow)에 따라 결정되는데 하천에 댐을 만들게 되면 하천 흐름이 변하게 되고 하천에 물리적 생물학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하천 생태계의 단절을 가져와 수생 동식물의 생태를 변화시키게 된다. 댐의 건설에 따른 하천의 영향 중 큰 것이 유사 흐름(流沙-;sediment flow)에 관한 것이다. 물 속에 섞여 흘러야 할 토사가 댐에 갇히게 되어 호수에 축적되고 댐 하류에는 토사 없는 맑은 물이 흐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댐의 하류에는 물이 흐르면서 침식작용만 있고 퇴적물이 쌓이지 않게 되어 강 바닥은 암반이 드러나게 된다. 강 바닥에 충분한 토사침적물이 없으면 동식물의 군락지로써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에 생태계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댐의 가장 큰 영향 중에 하나가 댐으로 인해 수생 동물의 이동이 단절된다는 것이다. 연어와 장어와 같은 종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는데 인공적인 구조물로 인하여 산란을 하지 못하게 된다. 몇몇 댐들을 이러한 종들을 위하여 이동통로를 설비하기도 한다. 어도(fish ladder)라고 하는데 이 시설물의 설치로 인한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많은 평가가 필요하다. 물이 댐으로 인해 갇혀 있게 되면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수질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주로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게 됨으로써 호수지에 발생하는 것으로 호수에 유입된 유기물이 산소를 소비하며 부패하게 되고 이에 따라 용존산소가 부족하게 되어 수중생물이 살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원인으로 물의 성층화에 의한 하류의 영향이다. 호수가 생성돼 물이 깊어지면 여름 동안 열로 인해 성층화된다. 데워진 상층의 물은 산소가 풍부한 층이 되지만 깊은 곳의 물은 빛이 도달하지 못해 차가워 지고 공기와의 접촉도 없어 산소가 희박해진다. 이러한 성층화된 상층부를 이필림니온(Epilimnion)이라 하고 차가운 하층부를 하이포림니온(Hypolimnion)이라 하며 중간층을 써모클라인(thermocline)이라 한다. 또한 기존의 땅이 침수됨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점도 있다. 한가지 예로 흙에 무기질의 상태로 소량 포함되어 있는 수은은 흙이 침수되면 박테리아에 의해 메틸 수은으로 변화되는데 이것은 생체에서 배출되지 않고 축적된다. 이것이 먹이사슬에 연속되어 인간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일기 일기(日記)란 개인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경험, 생각, 감상 등의 제반사항을 하루 단위로 기록하는 비공식적, 사적 기록이다. 보통 일일 단위로 기록하지만, 작성하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강제성이 있는 공적인 기록이 아니므로 쓰는 간격에 따라서는 사실상 주기(週記)나 월기(月記)가 되기도 한다. 특별한 목적하에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보통 일지(日誌)라고 하나, 과거의 일기는 오늘날과 달리 일지와 일기의 성격을 함께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일기는 일기작성자가 작가이면서 동시에 유일한 독자인 특이한 글쓰기이다. 따라서 어떤 글쓰기보다 사적인 비밀이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일반에 공개된 일기의 일부-안네의 일기-는 문학사에 족적을 남기는 문학작품이 되기도 한다. 실제의 일기가 문학작품이 되는 반면에, 일기의 형식을 따온 문학작품도 다수 존재한다. 일기라는 명칭을 남기는 최고 문헌은 한의 유향(劉向)이 남긴 신서(新序)의 日有記也이다. 중국 한(漢)의 왕충은 그의 저서 《논형》(論衡)에서 모든 기록을 상서(上書)와 일기(日記)로 이분하였다. 이 일기에는 《춘추》와 《오경》이 포함되었는 바, 역사인식과 기록정신, 사실적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일기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 후 6조 시대에 들어 왕조재위기간의 기록을 통하여 후대 왕조의 통치에 귀감이 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실록(實錄)이 등장한다. 최초의 실록은 양(梁) 무제가 간행한 《양황제실록》이며, 이후 송대 이후에 실록편찬이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일기란 곧 통치자의 정치기록을 가리켰다. 이후, 일기라는 명칭이 통치자외의 개인의 저서에 등장하고, 사적인 기록을 가리키게 된 것은 송대 이후의 일인데, 이 시기의 일기(日記)도 오늘날의 일기의 개념과는 달랐다. 한반도에서 일기라는 이름을 최초로 쓴 기록은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로서 1201년의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행문에 가까운 형태였다. 삼국유사에도 《자문일기》(紫門日記)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의 승정원일기와 같은 공적기록이었다. 이들 일기는 현존하지 않고 있으며, 현존하는 개인일기류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로서 1349년에 쓰인 기행일기이다. 그밖에 일록(日錄),일성(日省),일신(日新),일승(日乘),일력(日歷),일과(日課),일사(日史),일득(日得),일지(日知),일초(日抄),일서(日書),일찬(日纂),~기(記) ~록(錄)등 다양한 명칭이 쓰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왕성한 일기를 남긴 사람들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궁녀들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라사키 시키부의 《무라사키 시키부 닉키》(紫式部日記)와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닛키》(土佐日記)가 있는데, 양자는 각각 수필과 여행기 형식의 기록을 남겼다. 이 시기의 일기는 궁녀들에 의하여 히라가나로 쓰여 일기문학이라고 부르는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다수의 기록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도사 닛키》의 저자 기노 쓰라유키는 남성이었으나, 히라가나로 작품을 쓰고 작중의 화자를 여성으로 하였다. 한국에서도 조선 시대 한글로 쓴 궁중문학이 존재한 것처럼 당시의 히라가나로 쓰인 일기는 여성들의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9년 무렵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이고가 오늘날의 뤄양에서 광저우에 해당하는 남중국 일대를 여행하면서 내남록(來南錄)이란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일기로 여겨진다. 한편, 영국의 새뮤얼 페프스(Samuel Pepys)는 오늘날의 일기의 성격을 갖춘 근대적 일기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중요한 인물이다. 17세기 영국의 행정가였던 그는 평민에서 고위공직자까지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로서 1660년부터 1669년까지 일기를 남겼다. 그의 일기가 주목받을 만한 점은 이전의 일기들이 다분히 타인이 볼 것을 전제로 쓰이거나 공적인 기록과 상당히 중첩되어 있었던 반면에, 새뮤얼의 일기는 그 개인의 복잡한 여성관계나 타인에 대한 가식 없는 평가,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일에 대한 기록 등 오늘날의 일기의 특징인 자아주의, 일상주의, 비밀주의적인 성격을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숙한 이전의 글쓰기에 비해 그의 일기는 자신의 속물적인 면을 솔직히 드러냈고, 그만큼 인간적이고 사실적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공개되어서는 안될 내용에 대해서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속기문자와 외국어 지식 등을 결합한 암호로 일기를 썼다. 그의 사후 이 암호일기를 해독하는 작업은 무려 3년이나 걸렸고, 그 결과 페프스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그의 은밀한 사생활을 포함한 그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의 일기를 토대로 런던 대화재나 영국의 사교계의 모습 등,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과 교육의 보급으로 일반인의 문자생활이 가능해지고, 산업화로 인하여 근대적 자아의식이 싹 트면서 근 현대에 들어서는 일기쓰기가 널리 대중화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작문연습의 도구로 일기쓰기를 활용하였고, 칼 융이나 아나이스 닌등은 일기를 자신의 연구, 분석과 연계하여 활용하였다. 20세기 들어서는 일기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안네의 일기》처럼 평범한 일반인이 쓴 일기가 비극적 시대상과 맞물려 주목을 끄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최근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북 베트남 군인으로 복무한 여의사가 쓴 일기나, 이라크전의 와중에서 이라크인들이 참상을 전해오는 블로그등이 그 맥을 잇고 있다. 20세기 후반들어 컴퓨터를 이용한 글쓰기가 대중화되면서 전통적인 일기쓰기의 방식-종이일기장과 필기구에 의한 육필-은 이제 컴퓨터를 이용한 새로운 방식의 일기로 새롭게 대체,진화하는 중이다. 인터넷 시대의 일기는 종래의 일기형식에서 탈피하여 이미지,동영상등과 자유롭게 결합하고 종래의 비밀주의,일상주의에서 공개또는 공유주의로 전환되고,일상주의에서 독자를 의식한 주제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인터넷시대의 일기의 정의 및 범위, 그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의 일기는 조선 시대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며, 그 이전의 일기는 현전하고 있지 않다. 승정원일기는 분량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능가하는 국가기록으로, 공무를 다룬 국가기록이라는 점에서 일기보다는 일지에 가까웠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는 각각 종군기록과 기행기록을 주제로 하였다. 궁중의 나인이 쓴 《계축일기》는 한글 및 우리말을 사용하여 궁중비사를 표현하여 궁중문학이라는 장르의 축이 되었다. 또한 민간에서도 지식인 및 지주계층에서 정치사상 및 기행문, 토지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를 많이 남겼다. 근대에 들어 한글의 민간보급과 공교육의 도입으로 일반인들도 일기를 널리 쓰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광복후의 혼란기, 한국전쟁 등의 격변기에는 공식적인 기록이 세부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사항들에 민간의 일기가 사료로서의 역할과 가치도 가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초등교육에서 글쓰기 지도라는 이름하에 초등학생에게 일기쓰기가 현재까지 강제되어 오는 일이 있다. 이는 찬반양론이 매우 극렬하게 나뉘는데, 반대측은 사적이어야 할 일기를 어린이에게 강제함으로써 하기 싫은 숙제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일기쓰기의 재미를 일찍부터 반감시키고, 담임교사가 감시하는 하에서는 비밀주의가 지켜져야 할 일기쓰기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결국 무난한 거짓내용으로 채워질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찬성하는 측은 정기적인 일기쓰기로 글쓰기의 기본과 습관이 길러지고, 맞춤법 등 형식에서부터 학생의 생활지도에 이르는 다방면에서 교육적 참고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며, 반대측의 반대이유를 능가하는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05년 초등학교의 일기검사에 대하여 초등학생에 대한 인권침해 여부가 있는지를 판단해 달라는 요청에 의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초등학생 일기검사에 인권침해의 우려가 있으므로, 교육인적자원부에 일기검사관행의 개선을 요청한 바 있다. 육아일기 관찰일기 재배일기 독서일기 수학일기 천문관측일기 취미일기 다이어트일기 꿈일기 일기(종이+필기구) 컴퓨터일기 달력일기 그림일기 병영일기 유배일기 체류일기 병상일기 수험일기 여행일기 개인용 기업업무용 업무용일지 스케줄일기 플래닝일기 일상기록일기 기네스북은 1997년 이래 가장 오래 쓴 일기 분야의 기록을 더 이상 갱신하고 있지 않다. 이는 컴퓨터로 인한 글쓰기 대중화때문에 종래의 일기에 대한 정의와 분류가 점점 바뀌고 있는 추세여서, 일기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세계 기네스북 1997년판에 따르면 현재(1997년 당시) 87세인 에드워드 로브 엘리스(Edward Robb Ellis)가 70년 동안 써오고 있는 42,000 페이지 21,000,000 단어 분량의 일기가 최장기간의 일기로 선정되었다. 구글 영문판에서 가장 오래쓴 일기로 검색하면 등장하는 미국 워싱턴주 데이튼에 사는 Robert Shields는 시와 분 단위로 자신이 하는 일을 기록하는 기록광으로 1972년부터 일기를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이프라이터로 기록하는 일기를 쓰고 있다. 이 사람의 일기는 분량으로는 이미 35,000,000 단어를 돌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박내욱씨가 1953년부터 54년동안 써오고 있는 일기가 한국 기네스 북에서 가장 오래쓴 일기로 인정받았다. 한편, 2010년 현재 현대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된 조선시대의 문신 정원용이 쓴 경산일록(經山日綠)은 약 71년 동안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일기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리스본 리스본(, , )은 포르투갈의 수도이다. 리스보아 현의 중심도시이자,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도시다.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인구는 564,477명 (2007년)이다. 리스본의 경제적인 산출, 삶의 표준, 시장 크기, 그랑드 리스보아 (Grande Lisboa) 소구역에 기인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두 번 째로 가장 중요한 재정적 경제적 중심이다. 유럽 연합의 유럽 마약 감시 센터 (EMCDDA)와 유럽 해양 환경청 (EMSA),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본부가 리스본에 있다. 시 공휴일은 파도바의 안토니오의 날인 6월 13일이다. 고지대인 알투 지구와 중심부의 저지인 바이샤 지구로 나뉜다. 두 지구는 공공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로 연결되어 있으며, 북서로 뻗어 있는 시가지에는 12개 이상의 언덕이 있다. 1966년에 완성된 서유럽 최장의 현수교인 "4월 25일 다리"는 처음으로 건너편 연안과의 사이를 연결하여 지역 개발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현재 중심 도로의 대부분은 1755년의 대지진 후 재상 조제 폼발 후작의 지휘로 부흥과 재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정비된 것이다.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에서 북서로 향해 폼발 후작 광장까지 뻗은 나비 90m, 길이 1.5km의 리베르다드 거리는 리스본의 중심가이며 1880년 개통하였다. 바이샤 지구는 문화·상업·행정·교통의 각 시설이 집중해 있는 곳으로 호시우 광장과 코메르시우 광장이 있다. 호시우 광장 동쪽의 구릉 위에 상 조르지 성이 솟아 있다. 영국과 역사적 관련이 많으며 리베르다드 거리 북서쪽의 에드워드 7세 공원은 영국왕의 포르투갈 방문을 기념한 것이다. 서쪽 끝의 벨렝 지구에는 마누엘 양식의 벨렝 탑(1515)이 서 있고, 그 북동에는 16세기 마누엘 양식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있다. 국립고미술관, 굴벤키안미술관, 해양박물관, 고고학·인류학박물관 등 문화 시설도 많다. 리스본 대학교, 가톨릭대학 등의 종합 대학이 있다. 리스본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우선 기원전 1200년경 영국의 콘월 지방을 왕래하던 페니키아인이 세운 항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당시 타구스 강 (포르투갈어로 테주 강) 하구에 세워진 이 항구 도시는 페니키아어로 "안전한 항구"를 뜻하는 알리스 웁보(Allis Ubbo)라 이름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여기서 리스본이란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는 로마 이전의 타구스강의 이름인 리소(Lisso) 혹은 루키오(Lucio)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마 시대에는 올리시포(Olisipo) 혹은 그리스어로 올리시포나(Olissipona, Ολισσιπόνα)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 올리시포나는 이후 민중 라틴어에 정착했다. 로마 제국 당시 카이사르에 연유하여 펠리키타스 율리아(Feilcitas Julia)라고 불렸다. 서고트족의 지배를 거쳐, 716년부터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43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독립한 포르투갈 국왕 아폰소 1세는 북방 십자군의 지원을 얻어 1147년 10월 24일 리스본을 해방시켰다. 1249년 아폰수 3세의 알가르브 정복에 의해 포르투갈의 레콘키스타가 완료되자 남부의 중요성이 높아져 13세기 중엽부터 리스본은 코임브라를 대신하여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었다. 그 이후 리스본은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계지로서 발전, 1383∼1385년 포르투갈 독립의 위기 때에는 리스본의 부르주아가 독립을 지키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리스본 시정은 24인의 길드 대표로 구성된 24인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1498년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에 힘입어 번영하였다. 그때까지 상 조르즈 성에만 있던 국왕은 테주 강가에 왕궁을 세웠으며 이어서 제로니무스 수도원, 벨렝 탑 등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건조물이 세워졌다. 1755년 11월 1일 낮 9시 40분, 포르투갈 서부 지역에 진도 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포르투갈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진 대서양 해저로 추정된다. 시가지 대부분이 폐허화되자 폼발 후작은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고 가옥의 배열도 이른바 폼발 양식으로 통일하여 리스본은 계몽사상을 구현한 근대도시로 변모하였다. 주요한 경제 활동은 관광과 상업이며 특히 리스본 항구는 화물의 집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재래의 지역 산업인 비누·군용품 제조·제철 등이 있고, 그 밖에 유리 제조·전자기기·마가린 제조 등의 산업이 있다. 타구스강 건너 연안 쪽의 대규모 공업 개발이 촉진되고 있는 공업 지대에는 시멘트 공장·곡물 저장 창고·제철 콤비나트 등이 세워져 있다. 도심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7km 거리에 포르텔라 공항이 있고, 국철의 역은 시내에 네 곳이 있으며 국내 각지와 에스파냐, 프랑스행 국제 열차도 발착한다. 시내의 교통은 지하철, 버스, 전차가 있다. 리스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SL 벤피카, 스포르팅 CP, CF 벨레넨스스 등이 있다. 리스본은 다음의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레스보스섬 레스보스(, )는 그리스 동부 에게 해에 있는 섬으로, 미틸리니 해협으로 터키와 떨어져 있다. 중심지는 섬의 남쪽에 위치한 미틸리니이다. 이 섬의 면적은 1,630km, 해안선의 총 길이는 370km이며,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자 에게 해의 섬들 중에서 가장 넓다. 행정적으로 레스보스는 레스보스 현(縣)에 속한다. 기후는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이며, 인구는 2001년 기준 90,643명이다. 시인 사포의 출신지로, 고대에 이 섬에 여성간의 동성애가 성행하였다는 데서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레스보스는 섬의 보호자 신이었다. 1462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점령되었다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이후 그리스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레스보스는 섬의 북쪽과 중앙을 차지하는 레피팀노스 산(968m)과 올림푸스 산(968m), 두 큰 봉우리를 가진 산지이다. 올리브 나무가 다른 과일나무와 함께 섬 면적의 40%를 덮는다. 섬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한다. 올리브 오일은 섬의 주요 수입원이다. 미틸리니의 관광은 섬의 국제공항과 해안가의 마을에 의해 촉진되며 실질적으로 섬의 경제에 공헌된다. 어업과 비누 제조, 그리스의 리큐어 우조 술의 제조는 이 섬의 잔존하는 수입원이다. 레즈비언 레즈비언(Lesbian)은 여성 동성애자, 여성에게 성적 매력이나 연애 감정을 느끼는 여성을 주로 의미한다. 성적 지향과 관계 없이 성적 정체성 또는 성적 행위를 나타낼 때도 쓰인다. 짧게 줄여서 레즈(Les)라고도 부른다. 성적 지향의 맥락에서의 “레즈비언”개념은 근대에서 미미하게 시발되어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보았을 때, 여성은 사회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형성하는 자유나 독립을 남성 동성애자만큼 가지지못해 그 관계가 은밀하였으나, 동성애자 남성이 받는 어떤 사회에서의 가혹한 처벌은 받지 않았다. 대신 레즈비언 관계는 때때로 무해하거나 이성애 관계와 양립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 때문에 당시의 여성 동성애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정확히 묘사한 기록은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레즈비어니즘(Lesbianism) 또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식과 인지의 미달은 19세기 후반의 성과학자들이 동성애 행위의 묘사 및 범주화를 방해했다. 성과학자들은 레즈비언을 여성의 남성에 관한 성적 대상으로써의 역할을 고수하지 않는 여성이며 정신병을 가진 이로 정의하였다. 동성애 관계에 있는 여성들은 이러한 정의에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하였다. 첫째는 그들의 사생활을 숨기며 사는 방식이었고, 둘째는 그러한 사회적 낙인을 받아들이고 태생지를 떠나서 유럽과 북미에서 발전한 하위문화에 그 소사회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동성애에 대해 적극적인 형벌을 가하는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던 세계 2차 대전 동안, 여성은 서로를 교육하고 사회화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여성에게 허용된 경제적 및 사회적 자유가 증대되면서 레즈비언들은 독립적으로 관계와 가족을 형성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20세기에 2차 페미니즘의 물결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역사에 대한 학문이 발전하면서 레즈비언의 정의는 넓어졌고, 레즈비언을 정의하는 주요한 요소인 특정한 성적 욕망에 대한 논란이 불붙었다. 여성은 성적 유동성을 보이고, 이성애적 행동에 관여하는 어떤 여성은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양성애자로 정체화하는 것 또한 거부하였다. 다른 여성은 정치적인 이유로 레즈비언 정체성을 채택할 수도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면서 레즈비언을 정의하는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하였다. 그런 요소에는 성적 행동,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정체성이 있다. 레즈비언 정체성을 수용한 여성들은 민족 정체성 경험 형성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였다: 동성애자로서, 그들은 가족과 친구 및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존재거부와 차별에 맞서 단결하였다. 그래서 레즈비언은 신체적 혹은 정신적 문제를 겪을 수 있다. 현시적 정치 상황과 사회의 흐름은 레즈비언들이 구성하길 원하거나 유지하는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다면적 원인에 의한 언어적 정의로 성적 (자신의 선택)소수 (사회적)자라고 대략 정의하는 것이다. 기원전 7세기경의 시인 사포는 에게 해에 위치한 레스보스 섬에서 생활하며 여성을 위한 학문과 예술 교육에 앞장섰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학파의 결성을 여성에게 전파했고, 이를 통해 당시 사회에 많은 파장을 주었다. 이때부터 학문 공동체에 소속된 여성들을 섬의 이름을 따 레즈비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 학문 공동체의 부분적인 특징인 여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말로 점차 의미가 변했다.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비가시화되어 있다. 1996년 서울방송의 <송지나의 취재파일>을 통해 전해성과 이해솔 등 여러 명의 레즈비언이 커밍아웃했다. 그러나 이들의 커밍아웃이 다른 레즈비언들의 커밍아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직까지 레즈비언은 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끼리끼리'와 같은 레즈비언 인권 운동 단체들은 레즈비언들이 여성임과 동시에 성적 소수자이기에 이중 억압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청소년 레즈비언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훈육과 교정이 필요한 존재들로 타자화되고 있다. 2006년에 문화방송은 청소년 이반에 관해 왜곡된 보도를 내보낸 바 있어 성적 소수자 인권 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각각 2005년과 2006년에 제작된 단편 다큐멘터리 <이반 검열>과 <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는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청소년 이반 억압 사례를 다루고 있다. 제대로 정체성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게 하는 현실과는 달리, 인터넷은 레즈비언들에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다음, 네이버 등 여러 포털 사이트들에 레즈비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건설되어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주로 서울 번화가 지역의 레즈비언 전용 클럽들이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중심지다. 컴퓨터 클러스터 컴퓨터 클러스터(, )는 여러 대의 컴퓨터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시스템처럼 동작하는 컴퓨터들의 집합을 말한다. 클러스터의 구성 요소들은 일반적으로 고속의 근거리 통신망으로 연결된다. 서버로 사용되는 노드에는 각각의 운영 체제가 실행된다. 컴퓨터 클러스터는 저렴한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고속의 네트워크, 그리고 고성능 분산 컴퓨팅용 소프트웨어들의 조합 결과로 태어났다. 클러스터는 일반적으로 단일 컴퓨터보다 더 뛰어난 성능과 안정성을 제공하며, 비슷한 성능과 안정성을 제공하는 단일 컴퓨터보다 비용 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열 개 안팎의 중소 규모의 클러스터부터 수천 개로 이루어진 대형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상용 제품 여러 대를 조합하여 더 빠르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요구가 원천이 되어 다양한 아키텍처와 구성방법이 발전해왔다. 컴퓨터 클러스터링 접근법은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쉽게 가용한 제품들을 고속의 근거리 통신망으로 연결한다. 컴퓨팅 노드들을 "클러스터 미들웨어"라는 소프트웨어 계층에서 관리된다. 이 소프트웨어 계층은 노드들의 상부층에 위치하여 사용자들이 단일 시스템 이미지 개념으로 하나의 커다란 컴퓨팅 단위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 중앙 집중적인 관리 접근법은 노드들을 잘 조화된 공유 서버들로 만들어 준다. 이 방식은 많은 노드들을 사용하는 점대점이나 그리드 컴퓨팅과는 다르며 분산 컴퓨팅의 특성으로 차이점이 있다. 컴퓨터 클러스터는 간단히 두 개의 개인용 컴퓨터를 연결하는 두 노드 시스템일 수도 있고 수천 대를 연결한 매우 빠른 슈퍼컴퓨터일 수도 있다. 기본적인 클러스터 구성 방법은 전통적인 슈퍼컴퓨터를 비용 면에서 효율적인 제품으로 대체하기 위해 몇 개의 개인용 컴퓨터들을 이용하여 만든 베오울프(beowulf) 방식이다. 초창기 133개의 노드로 구성된 Stone Soupercomputer 프로젝트는 컴퓨터 클러스터 개념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고성능을 이루기 위해 리눅스와 병렬 가상 머신 툴킷과 메시지 전달 인터페이스 라이브러리를 사용하였다. 비록 클러스터들은 적은 수의 개인용 컴퓨터들을 단순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었지만 높은 수준의 성능을 이룰 수 있었다. 현재 해마다 두 번 발표하는 TOP500에 등재된 슈퍼컴퓨터들 가운데 상당수의 시스템은 컴퓨터 클러스터들이다. 컴퓨터 클러스터는 웹 서비스와 같은 일반적인 비즈니스 목적에 대한 요구부터 많은 계산이 요구되는 과학 계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구성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높은 가용성을 제공한다. 클러스터를 설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어떻게 각각의 노드들을 밀접하게 연결을 할 것인가이다. 처리할 하나의 컴퓨터 일(job)은 노드들 간에 빈번하게 통신을 해야 한다. 이것은 독립된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동일한 아키텍처, 동일 기종의 노드들이 밀도있게 설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베오울프 시스템은 주(Master) 서버와 종속(Slave) 서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 서버는 컴퓨터의 일들을 나누고 관리하며 종속 서버는 일을 처리하고 계산을 하는 서버들이다.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은 주 서버와 통신을 할 뿐 종속 서버라고 불리는 계산 노드들과는 통신을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주 서버는 두 개의 네트워크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종속 서버와의 통신을 위한 내부 네트워크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통신을 위한 범용 네트워크이다. 종속 서버는 일반적으로 자체의 운영 체제와 메모리 그리고 저장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부용 네트워크는 대용량 공유 파일 서버와 연결될 수도 있다. 컴퓨터 클러스터는 전통적으로 동일 운영 체제 위에 물리적으로 분리된 컴퓨터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2-tier 클라이언트/서버 구조에서 서버는 수 백 명에서 수 천 명의 클라이언트를 처리하면 되었다. 그러나 웹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가 많아지면서 동시에 수만에서 수백만의 클라이언트를 처리할 수 있는 서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클라이언트들의 요청을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서 많은 서버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클러스터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 비용과 성능을 잘 절충한 일반적인 해결책이다. 1980년대에 컴퓨터 클러스터가 나오면서 슈퍼컴퓨터도 나왔다. 그 당시 초창기 슈퍼컴퓨터들은 공유 메모리를 많이 사용하였지만 지금의 클러스터들은 공유 메모리를 사용하지 않으며 많은 슈퍼컴퓨터들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클러스터 파일 시스템은 현대 컴퓨터 클러스터에도 중요하게 사용된다. 예를 들면 공개 소프트웨어인 러스터 파일 시스템은 TOP500의 컴퓨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병렬 분산 공유 파일 시스템이다.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2 가지 통신 방법은 MPI(메시지 전달 인터페이스)와 PVM(병렬 가상 머신)이다. PVM은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에서 1989년도에 MPI가 사용되기 전에 개발되었다. PVM은 반드시 각각의 클러스터 노드에 설치되어야 하며 노드를 "병렬 가상 머신"으로 규정하는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의 집합을 제공한다. PVM은 메시지 전달과 테스크 그리고 자원 관리 및 오류 알림을 위한 실시간 환경을 제공한다. PVM은 C, C++ 또는 포트란등의 언어로 작성된 사용자 프로그램에서 사용된다. MPI는 1990년대 초에 40개 조직들의 토론에 의해 태어났다. 초기에는 ARPA 및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에 의해 주도 되었다. 아주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 대신에 MPI는 상용 시스템에서 사용되는 기능들 위에서 설계되었다. MPI 규격은 규격 보충으로 증가 되었으며 MPI는 일반적으로 TCP/IP 와 소켓 연결을 사용한다. MPI는 지금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통신 모델이며 C, 포트란, Python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병렬 프로그래밍을 구현한다. 따라서 PVM과는 다르게 MPI는 MPICH 와 Open MPI과 같은 시스템에서 구현된다. 컴퓨터 클러스터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중의 하나는 시스템을 관리하는 것이다. 만약 N개의 노드로 구성된 클러스터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면 관리비용은 N개의 독립된 컴퓨터들을 관리하는 것과 비슷한 비용이 든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공유 메모리 아키텍처가 관리비용 측면에서 클러스터 시스템 대비 유리한 측면이 있다. 상대적으로 관리의 편리성은 가상 머신이 많이 활용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커다란 여러 사용자 클러스터가 매우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접근할 때 작업 스케줄링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애플리케이션의 환경이 복잡한 이기종 CPU-코프로세서 클러스터의 경우에 각 작업(job)의 성능은 클러스터의 특성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CPU 코어와 코프로세서 장치에 작업을 할당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 분야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클러스터의 한 노드에서 장애가 발생했을 때 나머지의 모든 시스템이 계속해서 동작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펜싱"(fencing)과 같은 전략이 사용된다. 펜싱은 노드가 오동작을 할 때 공유된 자원을 보호하고 그 노드를 격리시키는 동작이다. 두가지의 펜싱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노드 자체를 비활성화 시키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공유 디스크와 같은 공유 자원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 노드의 격리는 장애로 의심되는 노드를 비활성화 하거나 전원을 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전원 펜싱은 전원 제어기가 동작하지 않는 노드의 전원을 끄는 것이다. 자원 펜싱은 노드의 전원을 끄지 않고 자원에 대한 접근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SCSI3에서 "persistent reservation fencing"이 있고, 파이버 채널 포트를 막기위한 파이버 채널 팬싱, global network block device (GNBD) 서버에 대한 접근을 막기위해 GNBD 팬싱이 있다. 웹 서버와 같이 작업 부하를 조절해주는 클러스터들은 많은 사용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 사용자의 요구를 특정 노드에 연결을 해주는 구조를 사용한다. 이 방법은 여러 노드들간 상호 협력하지 않고서 사용자가 공유 데이터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작업 병렬화를 구현한다. 그렇지만 적은 수의 사용자가 아주 복잡한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 컴퓨터 클러스터는 클러스터의 병렬 처리 능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을 자동으로 병렬화해주는 것은 기술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렇지만 각기 다른 프로세서들에서 프로그램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더 높은 수준의 병렬화를 수행하기 위해서 병렬 프로그래밍 모델이 사용되어야 한다. 반암산 반암산은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높이 832m의 산이다. 발교산 발교산(髮校山)은 강원도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드러누운 산이다. 6·25의 전화도 피해갈 만큼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배봉산 배봉산(拜峰山)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산이다. 1992년에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전체 면적은 265,582m이다. 인근에 서울시립대학교, 삼육보건대학, 삼육의료원 서울병원 등이 있다.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이 수원으로 옮겨지기 전에 배봉산에 있었다.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묘소인 휘경원도 남양주로 옮겨지기 전에 배봉산에 있었다. 배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하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향해 절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 산의 형상이 도성을 향해 절을 하는 형세를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 이곳에 왕실의 묘소인 영우원과 휘경원이 있어서 나그네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배봉산 앞뜰의 동적전에서 왕이 친히 농사를 지으며 하늘에 풍년을 기원한 선농제와 관련이 있다는 설 등이 있다. 백덕산 백덕산(白德山)은 강원도 영월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차령산맥 줄기의 이름난 산이다. 능선 곳곳에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분재와 같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해발 800m 이상에는 천연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멧돼지와 꿩이 많아 사냥터로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백병산 (강원도) 백병산(白屛山)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높이 1,259m의 산이다. 백석산 백석산(白石山)은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신리와 진부면 화의리에 걸쳐 있는 높이 1,365m의 산이다. 백악산 (충북/경북) 백악산(百岳山)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시 사이에 있는 높이 858m의 산이다 백암산 백암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백운산 (전라남도) 백운산(白雲山)은 전라남도 광양시에 있는 소백산맥의 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호남정맥을 완성하고 섬진강 550리 물길을 마무리한다. 지질은 변성암과 화강암, 충적층이 주를 이루고 곳에 따라 화산암 등도 분포되어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1, 080여종이 넘는 식물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한라산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9월 18일 전라남도에 따르면 고로쇠 수액이 지리적표시 등록되었다. 백화산 백화산은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벽방산 벽방산(碧芳山)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와 고성군에 걸쳐 있는 높이 650m의 산이다. 일명 벽발산(碧鉢山)이라고도 불린다. 옛 《통여지(統營志)》는 '산세가 마치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는 위세를 하였으며, 그 중 한 산맥이 굳세게 옆으로 뻗치다가 곧장 바다 속으로 들어가 터전을 열었다'고 했다. 보배산 보배산(寶賠山)은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태산리에 있는 높이 750m의 산이다. 봉미산 봉미산(鳳尾山)은 경기도 가평군과 양평군에 걸쳐 있는 높이 856m의 산이다. '늪산'이라고도 불리며 옛날에는 속리산으로 불리었다. 경기도의 오지로 용문산을 모산으로 하여 북쪽 장락산으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 상에 높게 솟아 있다. 봉화산 봉화산은 봉수를 올리는 산이라는 뜻으로, 흔한 산 이름이다. 북바위산 북바위산(北-山)은 충청북도 충주시와 제천시에 걸쳐 있는 높이 772m의 산이다. 산 이름은 지릅재에서 북쪽에 위치한 바위산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주민들에 의하면 산자락에 타악기인 북(鼓)을 닮은 거대한 기암이 있어 북바위산이라한다고 한다. 북배산 북배산(北培山)은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춘천시 사이에 있는 높이 867m의 산이다. 불곡산 불곡산은 다음을 가리킨다. 비슬산 비슬산(琵瑟山)은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의 사이에 있는 높이 1,084m의 산이다. 1986년 2월 22일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암괴류(岩塊流)는 큰 자갈 또는 바위 크기의 둥글거나 각진 암석 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산 사면이나 골짜기에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쌓인 암괴류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이루어진 특이한 경관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규모가 길이 2km, 폭 80m, 두께 5m에 달하고, 암괴들의 직경이 약 1∼2m에 이르는 것으로 국내에 분포하는 수 개의 암괴류 중 규모가 가장 커 학술적·자연학습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삼성산 삼성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서대산 서대산(西臺山)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서대리와 군북면 보광리 사이에 있는 높이 904m의 산이다. 충청남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원추형 암산이다. 서운산 서운산(瑞雲山)은 경기도 안성시와 충청북도 진천군 경계에 있는 산이다. 칠장산(491.2m) 에서 한남정맥과 갈라져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금북정맥 마루금이 칠현산 (516m) , 덕성산(520m)과 배티고개를 지나 바로 이 서운산을 거쳐서 충청남도 성거산(579m)으로 맥맥히 이어지고 있으니 평야지대인 안성 일대에서는 대표적인 산이다. 석룡산 석룡산(石龍山)은 대한민국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과 경기도 가평군 북면 사이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155m이다. 선바우산 선바우산은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높이 1,042m의 산이다. 31번 국도상에서 북으로 올려다 보면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바위산으로 바위와 노송 군락이 동양화처럼 어우러져 비경을 자랑하고, 높이 50여미터의 선 바위가 서있어 '선 바위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설봉산 (경기) 설봉산(雪峯山)은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높이 394m의 산이다. 이천 시가지를 서쪽에서 북동과 남동 방향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천의 진산으로 북악산(北嶽山)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을 닮았다 하여 무학산(舞鶴山), 부학산(浮鶴山)이라고도 하였다. 설악산 설악산(雪嶽山)은 강원도 강릉시, 속초시, 양양군, 인제군, 고성군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708미터의 산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한국 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 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에 속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에는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1965년에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1970년 3월 24일에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82년 8월에는 유네스코가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설악산은 크게 내설악과, 외설악, 그리고 남부설악으로 구분짓는데,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서편의 인제군에 속하는 지역을 내설악이라 하고, 동편으로 바라 보이는 바다에 연해있는 속초시에 속하는 지역을 외설악이라 하며, 남편의 양양지역을 남부설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설악은 수렴동계곡, 백담계곡, 가야동계곡, 구곡담계곡, 12선녀탕, 대승폭포, 용아장성 등의 빼어난 계곡과 산세로 이름이 높아 절경을 자랑하며, 외설악은 천불동계곡과 더불어 울산바위, 권금성, 금강굴,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등의 기암절벽과 폭포가 아름답고 접근이 쉬워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최근에는 대청봉으로 오르기 쉬운 한계령이나 오색지역의 남부설악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데, 한계령에서 오르는 길은 계곡이 발달한 설악산에서는 드물게 긴 능선이 이어지는 서북주릉의 일부를 지날 수 있다. 설악산 일원의 생물상은 기후와 특성에 따라 내설악과 외설악이 각기 다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내설악은 내륙성 기후로 완만한 경사와 두터운 토양층으로 이뤄져 숲이 무성하고 동물의 서식이 풍부한 반면 외설악은 해양성 기후로 지세가 급경사를 이루고 탐방객의 발길이 잦아 동물의 서식이 적은 편이다. 산양이나 반달가슴곰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하여 희귀동식물이 서식한다.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강원도의 인제군, 양양군, 속초시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1965년 11월 5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설악'이란 이름은 주봉인 대청봉(1,708m)이 1년중 5∼6개월 동안 눈에 덮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평균 기온이 10℃를 넘지 않는 저온지대에 속하며, 연 강우량은 내설악이 1,000mm 정도, 외설악이 1,300mm 정도이다. 설악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대규모의 화강암 관입과 더불어 암질과 절리의 차이에 따른 차별침식의 결과로 보고 있다. 천연보호구역 내의 식물은 약 1,013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신갈나무, 당단풍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활엽수림과 소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섞여 숲을 이룬다. 그 밖에 금강배나무, 금강봄맞이, 금강소나무, 등대시호, 만리화, 눈설악주목, 설악아구장나무, 설악금강초롱, 솜다리 등 특산물 65종, 눈측백 노랑만병초, 난쟁이붓꽃, 난사초, 한계령풀 등 희귀식물 56종이 보고되고 있다. 천연보호구역 내의 동물은 1,562종이 보고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수달, 하늘다람쥐, 황조롱이, 붉은배새매, 열목어, 어름치 등은 별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특별히 보존해야 할 지질·지형 및 동·식물 자원이 풍부하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전통 사찰 등 많은 문화유산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 중의 하나이므로 설악산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다음은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에 얽힌 설화이다. 속초시에서 접근성이 좋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찾는 등산로이다. 설악동에서 비선대까지는 약 3.0 킬로미터 정도로 2.5 킬로미터 정도까지는 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어 한시간 정도면 지날 수 있다. 비선대를 지나 구름다리를 건너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편의 가파른 길이 마등령으로 오르는 길이고 철조망으로 된 문을 지나 왼편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바로 천불동계곡이다. 천불동계곡은 비선대에서 양폭 대피소 위쪽의 계곡이 시작되는 구간까지를 말하는데, 비선대에서 양폭 대피소까지는 3.0 킬로미터이고 양폭 대피소에서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2.0 킬로미터 정도 된다. 천불동계곡에 들어서면 불상과도 같은 기암괴석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다. 귀면암을 지나 양폭에 이르는 길은 수려한데다가 경사도 가파르지 않고 평평한 편이어서 비교적 오르기 쉬운 편이다. 양폭 대피소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철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폭포가 보이는데 그 아래의 소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양폭을 지나서 천불동계곡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경사가 가파르게 이어지기 시작한다. 길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으로 되어 있다. 돌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오른편으로는 다가서기 두려울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능선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설악중진설악이라 불리는 공룡능선이다. 왼편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100 미터 정도 걸어가면 산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희운각 대피소이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가야동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깊은 산중에 있는 대피소인만큼 물도 아주 차서 깊은 산중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는 2.5 킬로미터 정도인데, 거기서부터 소청봉까지 1.3 킬로미터 정도만 급경사길을 오르고 나면 소청봉에서 대청봉까지는 비교적 손쉽게 갈 수가 있다. 희운각대피소 오른쪽으로 난 철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소청봉으로 오르게 된다. 소청봉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는 급하지만 공룡능선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므로 쉬엄쉬엄 올라가며 뒤를 돌아다보면 힘든 것도 잊을 수 있다. 소청봉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멀리 금강산이 바라보인다고 하며, 남쪽으로는 중청봉과 대청봉이 연이어 솟아 있다. 현재 중청봉에는 군사시설이 위치해 있어 오를 수 없으며 중청봉의 동쪽사면을 따라 돌아가야 한다. 중청봉을 지나면 설악 대피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대피소를 지나면 대청봉에 오를 수 있다. 공룡능선은 속초시와 인제시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으로 설악산을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구분할 때 그 경계가 되기도 한다. 공룡능선을 따라 오르면 동쪽으로는 권금성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용아장성을 조망할 수 있어 설악산 내에서 가장 멋진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공룡능선을 '설악 중 진설악'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공룡능선은 설악동과 백담사쪽에서 오를 수 있는데, 이 둘을 연결하는 마등령의 정상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바로 공룡능선이다. 설악동에서 비선대까지 간 다음, 비선대에 있는 구름다리를 지나 오른편(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등령으로 오를 수 있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금강굴이 보이며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가면 그곳이 마등령인데, 비선대에서 마등령까지는 약 3.5 킬로미터로 대략 세 시간 정도가 걸리는 비교적 가파른 길이다. 마등령까지 오르는 길에는 왼쪽으로 공룡능선이 바라볼 수 있으며 마등령에 가까이 다가가면 공룡능선의 대표적 지릉이라 할 수 있는 천화대가 보인다. 마등령으로 오르는 길에는 샘터가 하나 있는데 공룡능선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물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서 물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 또, 갈수기에는 물이 끊길 우려도 있으므로 오르는 길에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이 나오고 있는지를 물어 반드시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등령고개에 오르면 북쪽으로 저항령, 활철봉,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북주릉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는데, 현재는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마등령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약 0.2 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마등령쉼터라 불리는 너른 공터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외설악의 경치가 빼어나며 천불동계곡과 화채릉을 두루 둘러 볼 수 있다. 마등령쉼터의 삼거리에서 남서쪽으로 난 길은 오세암을 지나 백담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며, 남동쪽으로 향하는 길이 바로 공룡능선을 지나 희운각으로 이어지는 5.1 킬로미터의 능선길이다. 마등령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0.5 킬로미터 정도 오르면 나한봉(해발 1,250미터)에 이르는데 여기서 남서쪽을 바라보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공룡의 어금니와 비슷하다는 용아장성이 보인다. 나한봉에서 길은 왼쪽으로 나 있고 작은 암봉을 넘어 40분쯤 가면 1275m봉 오르기 전의 안부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동쪽)으로 천불동계곡의 지류인 설악골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남서쪽)으로는 가야동계곡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지계곡을 따라 가야동계곡 쪽으로 10분 정도 내려서면 물을 구할 수 있는데 안내표지판이 없기 때문에 초행자일 경우 찾기 어려우며, 따라서 반드시 공룡능선상에서는 물을 구할 수 없을 거라는 예상 하에 물을 준비해 가야 한다. 샘터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면 바로 1275봉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아주 가파른 경사로 이어져 있다. 1275m봉은 공룡릉의 한가운데에 있는 봉우리로서 공룡릉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마등령까지는 2 킬로미터, 그리고 희운각까지는 3.1 킬로미터이다. 1275m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아주 가파른 곳이다. 급경사지대를 내려서면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1275m봉을 지나 나오는 첫 번째 암봉(노인봉, 1,120미터)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암릉이 천화대(天花臺)이다. 천화대는 20여 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암릉인데, 천불동계곡의 지류인 설악골과 잦은바위골을 가르며 비선대부근까지 흘러내린 이 바위 능선에는 석주길,염라길,흑범길 등의 유명한 암릉코스가 있다. 천화대(天花臺)에 우뚝 솟아오른 범봉은 설악산 암릉의 상징이라 할 만큼 수려하다. 1275m봉을 지나면 또 하나의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온다. 돌사태가 난 곳으로서 급경사 바위사면 내리막길을 내려서다가 다 내려서지 말고 중간에서 왼쪽으로 트래버스하여 올라서야한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능선길이다. 왼쪽으로는 외설악이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가야동계곡과 용아릉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서북릉이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대청봉과 중청봉이 보이며 곧 1184m봉에 닿는다. 1184m봉에서 뒤를 돌아보면 1275m봉의 모습이 아주 빼어나며, 내,외설악의 전망을 살피기 아주 좋은 곳이다. 1184m봉을 내려서면 계곡 쪽으로 계속 이어진 길을 따르지 말고 암벽지대가 끝나는 곳에서 표지리본이 나무에 여러 개 달린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야한다. 계속 내려서면 가야동계곡으로 내려가게 된다. 1184m봉을 지나 숲속의 능선 우측으로 길을 따라가면 신선암(1210 미터)에 닿게 된다. 신선암의 전망대라 할 신선대에서는 대청봉(1708m)과 희운각대피소, 죽음의 계곡이 잘 보인다. 신선대에서는 오른쪽 아래로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곧 무너미고개에 닿는다. 무너미고개에서 오른쪽 아래로는 가야동계곡으로 길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며, 직진하면 10분 정도 거리에 희운각대피소가 있다. 백담계곡코스는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시작해서 백담계곡, 수렴동계곡, 구곡담계곡을 차례로 지나 봉정암을 거쳐 소청봉, 대청봉으로 오르는 코스이다. 천불동계곡처럼 기암괴석이 발달하지는 않았으나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려한 코스이다. 종래에는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의 8 킬로미터 구간이 부담이 된 탓에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최근에는 셔틀버스가 운행하면서 등산객뿐만 아니라 계곡을 찾는 사람도 많이 늘어나 다소 번잡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진부령방향의 46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외가평마을에서 도로 오른쪽의 국립공원안내판을 따라 인제 북천(北川)에 가로놓인 다리(가평교)를 건너면 내가평마을이 나오고 도로를 따라 600 미터쯤 가면 도로가 끝나는 곳 우측으로 큰 주차장이 있다. 정면의 내가평교 다리를 건너 300 미터쯤 걸어올라가면 백담계곡 매표소가 나온다. 용대리에서 매표소를 지나 계곡을 따라 백담사까지는 약 8 킬로미터(20 리)의 거리로서 걷는 데 2시간가량 걸리며, 길은 1차선으로 된 시멘트포장도로이다. 매표소 앞에서 계곡 상류 4 킬로미터까지는 셔틀버스가 운행되며, 버스에서 내려 3 킬로미터를(40~50분쯤 소요) 걸어가면 백담사에 닿게 되고 백담사에서 300 미터쯤 위에 백담산장이 있다. 짐이 많지 않거나 시간이 넉넉하면 백담사까지 셔틀버스를 타지 말고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것이 계곡경치를 제대로 볼 수 있어 좋다. (걸어올라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백담사까지 갈 때는 걸어올라가고 내려올 때만 셔틀버스를 타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잔잔한 여울과 웅덩이가 줄지어 이어지는 계곡을 내려다보며 백담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고 폭도 넓어서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웅덩이가 너무 많아서 특정한 담(潭)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금교에서 계곡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30여 분 올라가면 길 왼쪽 아래로 두태소가 보인다. 길은 두 번째 다리인 수교까지 약 4 킬로미터가량 계곡의 오른쪽으로만 나 있으므로 셔틀버스를 탈 경우 버스의 왼쪽 자리에 앉아야 계곡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수교를 지나면 바로 셔틀버스 종점이 나온다.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간다 하더라도 이곳에서부터는 걸어 올라가야한다. 그곳에서 5분 거리에 세 번째 다리인 강교가 있다. 셔틀버스 종점에서 백담사까지는 약 3 킬로미터의 거리로 40~50분 정도 걸린다. 강교를 건너면 길이 중간중간 오르막 언덕길로 바뀌고, 계곡 물줄기를 멀리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청룡재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왼쪽 아래로 은선도가 보인다. 은선도는 물이 크게 휘돌아 흘러 산줄기가 섬처럼 보이는 곳이다. 은선도 앞의 웅덩이에는 어름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은선도를 내려다보며 가다가 내리막길이 나오면 곧 네 번째 다리(원교)가 나오고 길이 계곡에 가까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원교에서 계곡을 따라 300 미터쯤 내려가면 청룡담이라는 큰 웅덩이가 있는데, 길에서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원교를 건너 300 미터쯤 가면 길 오른쪽으로 백담사로 건너가는 다리인 수심교(修心橋)가 나온다. 수심교를 건너지 않고 계곡 왼쪽의 길을 따라 300 미터 올라가면 백담산장이 있다. 산장 앞에서 평지길을 따라 100 미터쯤 올라가면 내설악 출입통제소 자리가 있고, 그 앞에 안내판과 철망 울타리문이 있다. 평평한 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더 가면 1차선 정도 되는 폭으로 줄곧 이어지던 흙길이 끝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숲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영산담이 있다.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맑은 이 담은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어 샛길을 따라 물가로 내려선 후 그곳에 올라서면 계곡의 경치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영산담은 숲에 가려져 있는 탓에 못 보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설악 전체에서 첫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영산담의 바로 위에는 횡장폭포가 있다. 1차선 흙길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트는 곳에 있으며, 폭포 왼쪽의 비스듬한 바위사면을 지나가야 한다. 운이 좋으면 폭포를 뛰어오르는 열목어를 볼 수 있다. 폭포 위에 있는 웅덩이가 구융소이다. 융소 앞에서부터는 오솔길이 시작되며 계곡 건너편으로는 대승령에 이르는 대승골(흑선동계곡)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면서 잠깐 동안 오르막길을 오르게 되지만, 수렴동대피소까지는 계곡이 아주 완만하여 거의 경사가 없는 오솔길이다. 10분 정도 더 가면 길골과 저항령(늘민령)을 잇는 코스 안내판이 길 왼쪽으로 나오고,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길골 하류를 건너는 주황색 철다리가 나온다. 내설악에 놓인 첫 번째 철다리이다. 왼쪽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 저항령에서 발원한 길골이다. 길골로 이어지는 길은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왼쪽으로 갈라진다. 길골을 거쳐 저항령을 넘어 설악동의 무명용사비에 이르는 길은 2000년~2002년 기간 동안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다리를 건넌 후 5분 정도 더 가면 계곡 건너편으로 귀때기청봉(귀청봉) 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인 귀때기골이 보인다. 그 앞에도 큰 소(沼)가 있는데 귀때기골 건너편인 이곳의 길은 물가에 바로 붙어 있어서 비가 많이 온 경우에는 길이 물에 잠겨 왼쪽 위의 바위절벽을 넘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 조금 위험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말 그대로 계곡에는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웅덩이가 계속 이어지고 길은 줄곧 계곡 왼쪽으로 나 있다. 계곡을 오른쪽으로 두고 10분쯤 더 올라가면 평소에는 거의 말라있는 물을 건너야 한다. 그곳은 작은 섬같은 곳으로 통하는데, 왼쪽의 웅덩이로는 큰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른다. 수렴동대피소까지 가는 길에서 이곳 100 미터 정도 구간만 길 왼쪽으로도 물이 있다. 혼동이 되면 사람들 발자국 흔적이 많은 곳으로 가면 된다. 큰 바위 옆을 끼고 더 가면 왼쪽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건넌다. 이곳에는 평소에는 물이 거의 없고 있더라도 징검다리로 쉽게 건널 수 있다. 이 구간에서도 여전히 계곡의 본류는 길 오른쪽에 있다. 그 바로 위에 오른쪽으로 커다란 소(沼)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 5분 정도 더 오르면 왼쪽에서 지류가 합류되어 철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 지류가 마등령에서 흘러내리는 곰골이다. 곰골이 합류되는 곳에도 아주 큰 소(沼)가 있자만, 숲에 가려져 있어 대개가 이곳을 스쳐지나간다. 곰골 역시 다리 건너기 전 왼쪽으로 길이 나있다. 다리를 건넌 후 오솔길을 따라 30~40분을 더 가면 왼쪽에 영시암이 나온다. 영시암은 1980년대 말부터 중창공사가 진행되어 규모가 커졌다. 영시암 앞을 지나 왼쪽 언덕 위로 오르면 오세암 갈림길 안내판이 서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길이 오세암까지 직접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길은 수렴동대피소로 이어진다.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오세암에 가는 것보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직접 가면 오세암까지 조금 더 가깝다. 백담산장에서부터 수렴동대피소에 이를 때까지 제대로 된 갈림길은 이곳 하나뿐이다. 중간에 있는 길골 갈림길과 곰골 갈림길은 길이 좁고 사람 드나든 흔적이 이 주등산로와 큰 차이가 나므로 길을 혼동할 우려는 없다. 오세암 갈림길에서부터 한동안은 길이 계곡보다 아주 높은 곳으로 이어지다가 왼쪽 가느다란 지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다. 수렴동대피소 바로 앞에는 가야동계곡에서 흘러 주계곡에 합류되는 물줄기가 2개라서 다리를 두 번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곧 수렴동대피소가 왼쪽으로 나온다. 오세암 갈림길 삼거리에서 수렴동대피소까지는 약 20분이 소요된다. 백담산장에서부터 수렴동대피소까지는 1시간40분에서 2시간 정도 걸리며, 줄곧 계곡 왼쪽으로 길이 나 있다. 수렴동대피소 매점 옆의 계단을 내려서면 수렴동의 상징같은 구담(龜潭)이 있다. 구곡담계곡의 초입은 구담 왼쪽의 난간 옆을 오르면서 시작되는데 백담계곡이나 수렴동계곡에 비해 경사도 가파르고 길도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길은 백운동계곡 갈림길까지 계곡 왼쪽으로만 나 있다. 장마철에 물이 불어 위험한 구간에는 중간중간 철다리가 놓여 있다. 대피소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계곡 건너편으로 작은 지류인 너래골이 보인다. 그곳에서 5분 정도 더 오르면 오른쪽 아래로 만수담이라는 깊은 담(潭)이 있다. 그곳에 걸려있는 폭포가 만수폭이다. 그 근처에는 만수담과 비슷하게 생긴 담이 여러 개 있다. 만수담에서 20분 정도 더 오르면 물 건너편으로 큰 계곡이 보이는데, 그 계곡이 귀때기청봉과 서북릉에서 발원한 백운동계곡이다. 백운동계곡이 갈라지는 곳에는 두 개로 나뉜 구곡담 물줄기 가운데에 작은 섬같은 터가 있는데, 피서철이면 간이 매점이 서던 곳이다. 수렴동대피소에서 백운동계곡 입구까지 약 1시간이 걸린다. 백운동계곡 갈림길에서 물줄기 왼쪽으로 10여 분을 오르면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계곡 우측에 난 길로 조금 가면 왼쪽으로 폭포가 보인다. 그 위에서 물을 또 건너 10분쯤 오르면 오른쪽으로 폭포가 하나 나오고,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계곡 오른쪽으로 다시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쯤 오면 왼쪽 숲 넘어 용아릉이 잘 보이는데 커다란 장벽같이 서있는 모습이 장성(長城)같아 용아장성이라는 별칭이 생긴 이유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 그 옆에 용손폭포가 있고 좁은 길로 계곡을 두 번 건너면 왼쪽으로 용아폭포가 보인다. 용아폭 조금 위에서 계곡 왼편으로 물을 건너면 곧이어 쌍폭이 나타난다. 오른쪽 폭포는 쌍폭골에서 내려오고 왼쪽의 폭포는 봉정암쪽에서 내려온다. (예전에는 백운동계곡 초입에서부터 쌍폭까지의 계곡을 쌍폭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왼쪽 폭포의 바로 위에서 다리를 건너면 왼쪽 계곡으로 가야한다. 백운동계곡 초입에서 쌍폭까지 약 1시간이 걸린다. 쌍폭을 지나면 10분 정도 간격으로 작은 폭포가 3개 연이어 나온다. 길은 아주 좁아지고 협곡이라서 음침한 편이다. 쌍폭에서 40~50분 정도 오르면 더 이상 물줄기를 따르지 말고 왼쪽 사면으로 올라야 한다. 봉정암에 닿기 직전의 가파른 바위길인데, 산사태 지역이어서 어지럽게 놓인 바위들 사이로 오르는 급경사 길이고, 이쯤 오면 누구나 다 지치기 마련이어서 숨을 헐떡이게 된다. 그래서 이곳을 일명 '봉정암 깔딱고개'라고 한다. 고개에 올라 숨을 고른 후 천천히 가면 곧 봉정암이 나온다. 봉정암 깔딱고개 밑에서부터 봉정암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된다. 봉정암 뒤편으로는 용아릉의 바위들이 잘 보인다. 봉정암 바로 앞에는 봉정암을 우회하여 소청봉으로 바로 오르는 길이 나있다. 봉정암 오른쪽 가파른 길을 약 20~30분 오르면 소청산장에 닿게 된다. 봉정암을 출발해서 10분 정도 가면 소청산장에 닿기 전에 희운각대피소로 바로 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라지는데 지금은 폐쇄되어 있다. 이 길은 가야동계곡의 위쪽을 가로지르는 길인데, 세존바위와 돌사태가 난 지역을 지나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이어져 희운각대피소에 거의 닿을 무렵 소청봉~희운각을 잇는 등산로와 합쳐진다. 소청산장에서 오르막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소청봉이라 부르는 언덕 위의 삼거리가 나온다. (소청봉이라 불리는 곳은 봉우리가 아니고 중청봉의 한쪽 언덕에 불과하다.) 그 언덕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희운각대피소로 가는 길이며, 희운각대피소까지 50분~1시간이 걸리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소청봉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중청봉을 거쳐 대청봉에 닿게 된다. 중청봉 정상은 군사시설이 있어 오를 수 없고, 중청봉 왼쪽의 사면을 돌아가면 중청봉과 대청봉 사이의 안부에 위치한 중청대피소에 닿는다. 소청봉 언덕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20분쯤 걸린다. 중청대피소 부근은 일년내내 강한 바람이 불어 키가 큰 나무는 자라지 못하므로 맑은 날이면 대청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중청대피소에서 대청봉 정상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로 20분을 올라가야 한다. 속초시 설악동의 비선대와 인제군 용대리의 백담사를 동서로 연결하는 고개가 마등령인데, 공룡능선은 마등령에서 이 마등령에서 시작한다. 마등령 정상 부근에는 외설악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마등령쉼터라고 불리는 너른 공터가 하나 있는데 여기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난 길이 공룡능선을 지나 희운각으로 이어지는 5.1 킬로미터의 공룡능선코스이다. 공룡능선으로 들어서서 0.5 킬로미터 정도 오르면 나한봉(1,250 미터)에 이르는데 여기서 남서쪽을 바라보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공룡의 어금니와 비슷하다는 용아장성이 보인다. 나한봉에서 길은 왼쪽으로 나있고 작은 암봉을 넘어 40분쯤 가면 1275m봉 오르기 전의 안부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동쪽)으로 천불동계곡의 지류인 설악골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남서쪽)으로는 가야동계곡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지계곡을 따라 가야동계곡쪽으로 10분 정도 내려서면 물을 구할 수 있다. 1275m봉은 공룡릉의 한가운데에 있는 봉우리로서 공룡릉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275m봉까지는 급경사 오르막길이다. 1275m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아주 가파른 곳이다. 급경사지대를 내려서면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1275m봉을 지나 나오는 첫 번째 암봉(노인봉, 1,120 미터)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암릉이 천화대(天花臺)이다. 천화대는 20여 개의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암릉인데, 천불동계곡의 지류인 설악골과 잦은바위골을 가르며 비선대부근까지 흘러내린 이 바위능선에는 석주길,염라길,흑범길 등의 유명한 암릉코스가 있다. 천화대(天花臺)에 우뚝 솟아오른 범봉은 설악산 암릉의 상징이라 할만큼 수려하다. 1275m봉을 지나면 또 하나의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온다. 돌사태가 난 곳으로서 급경사 바위사면 내리막길을 내려서다가 다 내려서지 말고 중간에서 왼쪽으로 트래버스하여 올라서야한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능선길이다. 왼쪽으로는 외설악이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가야동계곡과 용아릉, 그너머로 서북릉이, 동남쪽으로는 대청봉과 중청봉이 보이며 곧 1184m봉에 닿는다. 1184m봉에서 뒤를 돌아보면 1275m봉의 모습이 아주 빼어나며, 내,외설악의 전망을 살피기 아주 좋은 곳이다. 1184m봉을 내려서면 계곡 쪽으로 계속 이어진 길을 따르지 말고 암벽지대가 끝나는 곳에서 나무에 여러 개 달린 표지리본을 기준 삼아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야한다. 계속 내려서면 가야동계곡으로 내려가게 된다. 1184m봉을 지나 숲속의 능선 우측으로 길을 따라가면 신선암(1,210 미터)에 닿게 된다. 신선암의 전망대라 할 신선대에서는 대청봉(1708 미터)과 희운각대피소,죽음의 계곡이 잘 보인다. 신선대에서는 오른쪽 아래로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곧 무너미고개에 닿는다. 무너미고개에서 오른쪽 아래로 가야동계곡으로 길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며, 직진하면 10분 정도 거리에 희운각대피소가 있다. 진부령방향의 46번 국도변에 있는 인제군 북면 남교리에서 북천(北川)에 가로놓인 다리(선녀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매표소가 있다. 등산로는 매표소 바로 왼쪽에서 시작되는데, 처음부터 사람 한명이 걸어갈 수 있는 오솔길이다. 입구의 매표소에서 계곡 오른쪽으로 이어진 평탄한 길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계곡을 건너는 철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5분을 가면 두 번째 다리가 나오고, 다리 바로 왼쪽에 1968년 가을에 발생한 가톨릭의대 산악회 7명 조난사고 위령비가 있으며, 다리 아래로 와폭과 큰 소(沼)가 있다.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약 1.3 킬로미터의 거리로 평탄한 길이다. 이 다리를 건너 100 미터쯤 가면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지계곡을 건너는 철다리가 있고, 이곳을 지나면 곧 왼쪽 아래로 2단 와폭이 흐르고 그 아래의 소(沼)가 보인다. 이곳까지 매표소가 있는 입구에서부터 약 25분 거리이다. 이곳을 지나면 물가로 내려서서 물 오른쪽 가장자리를 지나가야 하는데, 대개는 냇물 가운데의 징검다리로 지나가게 된다. 비가 많이 온 경우 조심해야 할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곧 또 하나의 다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계곡을 왼쪽으로 두고 10분 정도 올라가면 또 철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지나면 짧은 구간이지만 가파르고 거친 길이 나타난다. 응봉폭포까지 가는 길에서 이 부근만이 거친 편이며 대체적으로 길은 평탄하다. 이 다리에서 5분을 더 가면 오른쪽 아래로 커다란 소(沼)가 보인다. 계곡의 양쪽이 가파른 V자 협곡이어서 심산유곡임을 절감하게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10분을 오르면 철다리가 또 나오고 그 아래의 암반위에 긴 와폭과 큰 웅덩이가 있다. 이곳에서 15분 거리에 응봉폭포가 있다. 남교리의 계곡입구에서부터 응봉폭포까지는 2 킬로미터 거리로 약 1시간 20분이 걸린다. 응봉폭포는 15 미터 높이의 폭포로서 폭포 아래에는 큰 소(沼)가 있다. 등산로는 응봉폭의 오른쪽에 놓인 철계단으로 이어진다. 응봉폭포를 지나 20분을 더 가면 계곡 왼쪽으로 이어진 철다리가 있다. 이곳에서부터도 두세개의 다리를 더 건너면 여러 개의 탕(湯)과 폭포가 연이어져 십이선녀탕계곡의 백미로 꼽히는 곳에 닿는다. 이곳까지는 응봉폭포에서부터 약 1시간 10분 거리이다. 큰 폭포 아래의 웅덩이를 지나 왼쪽의 난간 옆으로 오르면 복숭아탕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항아리같이 움푹 패인 맑은 탕(湯)이 보인다. 그 바로 위에 십이선녀탕의 상징인 복숭아탕이 있다. 폭포 밑의 탕보다는 떨어지는 폭포수 뒷면의 복숭아처럼 움푹 패인 바위가 더 인상적인 곳이다. 연이어진 폭포와 탕의 왼쪽 사면에서 바라다보면 더 잘 보이지만 난간을 넘어 바위 사면으로 내려서면 경사가 가파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복숭아탕을 지나면 또 하나의 맑고 깊은 탕이 있고, 그곳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오른쪽으로 또 폭포와 웅덩이가 나온다. 폭포 왼쪽을 돌아 올라 5분을 가면 작은 웅덩이를 지나 두문폭포와 그 아래의 큰 웅덩이가 나온다.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는 4.4 킬로미터의 거리로 3시간가량 걸린다. 두문폭포 바로 위에는 폭포가 하나 더 있다. 두문폭포에서부터 상류로는 좁은 협곡을 따라 이어진 길로서 물을 여러 차례 건너며 2시간가량 계속 이어진다. 중간중간에 아름드리 주목이 눈길을 끈다. 이끼가 잔뜩 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끊어질 때쯤 빽빽하게 들어선 숲 사이로 가파른 오르막 길을 40분 정도 오르면 대승령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까지 두문폭포에서 약 2시간 40분 거리이다. 두문폭포에서부터 이곳까지는 계곡 바위전체가 이끼로 덮여있고 하늘을 보기 어려운 빽빽한 숲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백담사 바로 뒤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있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대승령방향으로 길을 잡아 정남쪽의 좁은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안산쪽과 대승령길이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고, 그 곳에 있는 안내판을 따라 대승령방향으로 25분 정도 가파른 내리막 숲속길을 가면 대승령에 닿는다. 두문폭포에서 대승령까지는 4.6 킬로미터로 약 3시간이 걸린다. 십이선녀탕계곡의 입구인 남교리에서 복숭아탕과 두문폭포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내려가는 사람이 많지만 두문폭포에서 대승령에 이르는 길은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않아 좁고 희미하므로 나뭇가지에 걸린 표지기를 확인하며 오르면 된다. 대승령까지 등산로가 험한 것은 아니지만 산행경험이 많지 않은 경우라면 두문폭포까지만 갔다가 남교리쪽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것이 좋다. 십이선녀탕계곡은 물을 건너는 곳마다 많은 철다리가 놓여있으나, 전형적인 V자 협곡이므로 폭우가 내린 경우에는 상류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 계곡 최상류에서 안내판을 따라 대승령까지 가는 경우 길을 혼동하기 쉬운 지형이므로 주의해야한다. 특히 안개가 끼거나 비가 올 경우 길을 잘못 드는 일이 많으므로 나침반과 지도를 준비하는 게 좋다. 대승령에는 자연휴식년제 실시구간 출입을 통제하기위해 설치해 놓은 철망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의 문 왼쪽으로 안내판이 있다. 그곳에서 왼쪽으로는 안산(1,430 미터)이 있고, 울타리 문으로 들어서서 정북쪽으로 가면 백담사와 백담산장쪽으로 이어지는 대승골(흑선동계곡)이, 동쪽으로는 서북주릉이 이어진다. 안내판에는 서북릉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문을 들어서지 않고 울타리 오른쪽 정남방향의 가파른 내리막길로 1시간 30분을 내려서면 대승폭포를 지나 장수대에 닿게 된다. 대승골(흑선동계곡)은 수렴동계곡 합류부에서 횡장폭포 바로 위의 냇물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린 경우에는 위험하므로 그럴 경우 대승령에서 흑선동계곡쪽으로 내려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 대승령과 귀때기청봉 사이의 1408m봉까지는 능선길을 따라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중간에 왼쪽의 큰감투봉(1,409 미터)쪽 능선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큰감투봉은 1408m봉 정북쪽에 있다. 1408m봉을 넘어 1 킬로미터를 가면 오른쪽 아래로 장군바위골로 통하는 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귀청봉까지는 갈림길 왼쪽 바위 아래를 지나는 길이 있다. 중간에 너덜지대가 많아 길이 험하고, 또 그늘이 없어서 한여름에는 뙤약볕에 고생하는 구간이다. 장군바위골이 갈라지는 곳을 지나 1456m봉을 넘어 1 킬로미터를 더 가면 오른쪽 아래로 상투바위골로 이어진 샛길이 있다. 귀때기청봉을 넘기 전에 야영을 한다면 이곳이 적당하다. 이곳에서 상투바위골로 10~15분 정도 내려서면 샘물을 구할 수 있다. 상투바위골 갈림길에서 30분 거리에 귀때기청봉이 있다. 1408m봉에서 귀때기청봉 사이 구간에는 바위가 많아 서북릉의 다른 구간보다 험하다. 1408m봉에서 귀때기청봉까지는 1시간 40분에서 2시간 정도가 소요되지만 산행경험,짐의 무게나 기상여건에 따라 3~4시간 이상 걸리는 일도 있다. 귀때기청봉을 지나 약 500 미터를 가면 왼쪽의 백운동계곡으로 이어진 길이 있다. 오른쪽 아래로는 소승폭포가 있는 계곡이 갈라지는데 이곳으로는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길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한계령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길은 남동쪽으로 바위를 몇 개 넘어가야 한다. 귀때기청봉에서 40~50분 거리인 한계령갈림길까지도 너덜지대가 많아서 그늘이 거의 없는 길이며 너덜지대를 지날 때 주의해야 한다. 한계령 갈림길에 닿기 직전에 작은 공터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왼쪽 아래로 이어진 길은 백운동계곡으로 연결되고 오른쪽 아래로 이어진 길은 도둑바위골로 내려서는 길이다. 오른쪽 도둑바위골로 5분 정도 내려서면 야영장과 샘이 있다. 이 갈림길에서 정면의 능선을 따라 200여 미터를 가면 오른쪽으로 한계령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 안내판 앞에서 오른쪽 한계령방향으로 200 미터를 내려가면 샘터가 있다. 한계령 갈림길에서 중청봉(1,676 미터)까지는 중간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1408m봉에서 귀청봉 사이의 구간에 비하면 길도 훨씬 순하고 뚜렷하다. 한계령 갈림길에서 끝청 전의 1459m봉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 걸리고, 1459m봉에서 끝청까지는 30~40분이 걸린다. 끝청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안내판이 없으면 그냥 지나칠만큼 봉우리라고 부르기 어려운 작은 언덕이다. 끝청에서 중청봉까지는 1.2km의 거리이다. 1459m봉에서 끝청쪽으로 1 킬로미터쯤 가면 끝청 오르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오색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으나 최근 이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끝청에서 중청봉까지는 30분쯤 소요된다. 중청봉의 중청대피소에서 정상인 대청봉까지는 20분이 소요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서북릉 종주시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사항은 식수문제이다. 능선상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주능선 남쪽으로 갈라지는 지계곡인 장군바위골 최상류, 상투바위골 최상류, 도둑바위골 상류의 샘터, 한계령 갈림길 아래뿐이다. 이중 도둑바위골 상류의 샘터와 한계령 갈림길 오른쪽의 샘터는 능선상에서 5분 거리이고 갈림길도 뚜렷하지만, 장군바위골과 상투바위골은 비가 오거나 안개가 낀 경우 찾기가 쉽지 않고 샘터까지의 거리도 멀어서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역설적이지만 짐은 가급적 적게 그리고 식수는 많이 준비해야 한다. 오색약수터가 있는 오색지구에서 설악폭포를 지나 대청봉으로 오르는 코스로 대청봉에 오르는 최단코스여서 경사가 심하고 경관이 비교적 떨어지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 중 하나이다. 설악산 국립공원 내 위치한 사찰이다. 국립공원 매표소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있는 사찰로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다. 경내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사찰을 에두르고 있는 주위 산들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소백산 소백산(小白山)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일찍부터 태백산과 함께 신령시 되온 산이다. 삼재(화재 수재 풍재)가 들지 않은 산이라 하여 풍수의 명당으로 꼽혀 조선시대 병란과 기근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했다. 1987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 및 봉화군에 걸쳐 있는 1987년 12월 14일 건설부 고시 제645호로 18번째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은 322.383km로 경상북도 지역에 173.56km, 충청북도 지역에 148.823km가 분포되어 있다. 속리산 속리산(俗離山)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보은군과 괴산군,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 있는 높이 1,058m의 산이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1970년 3월 24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속리산 자체가 분할한 면적은 60평방킬로미터이다. 속리산의 법주사(法住寺)는 2009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 제7대 임금인 세조가 요양을 위해 속리산을 지나가던 중 타고 가던 가마가 나무에 걸렸다. 이때 정이품송의 나뭇가지가 내려오면서 가마가 다시 지나갈 수 있게 되었는데 세조 임금이 이 소나무에게 정2품의 벼슬을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 솔잎혹파리에 의한 피해를 당하게 됨에 따라 이를 보호할 보호막이 설치되었으며 후에 이를 치료하였으나 그 후유증으로 생명력이 많이 상실되었고, 최근에는 강풍에 의해 크게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전승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에 거동하면서 처음 길을 닦았다고 한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속리산에 은거하며 불경을 탐독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뒤 조선시대에 가서 세조가 속리산을 오를 때에도 진흙으로 된 길이라서 행차를 위해 얇은 박석을 운반하여 길을 정비하였다 한다. 그뒤 인도의 형태로 존재하였지만 현대적인 형태의 등산로로 개설된 것은 1924년이었다. 당시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은 속리산의 사찰들을 방문하기 위해 속리산을 방문했는데 진흙탕으로 된 길을 보고 분개하여 당시 보은군수 등을 종용하여 말티고개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포장하게 하였다. 문장대(文藏臺)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 33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1054m로 속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이다. 법주사에서는 동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다. 본래는 구름 속에 감춰져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고 하였으나 조선왕조 제7대 임금인 세조 임금이 요양을 위해 속리산을 찾아왔을 때 어느날 밤 꿈속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일러 주었고, 다음 날 이 곳에 올라와서 정상에 올라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 문장대는 산 꼭대기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 특이한 형태로 이 바위에는 5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다. 이 곳은 속리산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며, 이 곳을 올라가는 코스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충청북도 보은에서 법주사, 중사자암을 거쳐 올라오는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에서 올라오는 코스이다. 소요시간은 성인 남자 기준으로 전자는 약 2시간 40분, 후자는 약 1시간 30분가량 소요된다. 이 곳에는 물건을 실어나르는 역할 뿐만 아니라 조난객 구조를 위해 헬리콥터 이착륙장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이동전화 기지국이 설치 운용중이다. 문장대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두 개의 등산 코스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 곳에는 1975년부터 문장대휴게소가 설치되어 등산객들에게 음식점 등으로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속리산의 생태 복원 차원에서 철거가 추진되어 2008년 11월에 철거되었다. 문수봉은 문장대와 신선대를 잇는 등산로 정중앙에 있는 속리산의 봉우리이다. 청법대는 문수봉과 신선대 사이에 위치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이어진 등산로가 없어 등산이 불가능하여 문장대와 신선대 사이에 있는 등산로에서만 볼 수 있다. 신선대쪽으로 가다 문수봉을 지나 뒤를 돌아 보면 볼 수 있는 기암이다.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넋을 잃고 방황하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제 정신을 차렸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청법대는 부처상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 일곱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는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청법대를 보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오르막 언덕끝에 왼쪽으로 난 샛길을 돌아서 우뚝 솟은 바위위에 올라서야 청법대와 봉우리들의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신선대는 해발 1026m에 위치한 바위 암벽이며, 문장대에서 약 1.2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법주사에서는 약 5.7km지점에 있다. 옛날 한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외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건너편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에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고승이 황급히 청법대를 내려와 신선을 만나보고자 달려갔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며 크게 실망하고 다른 봉우리를 찾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보니 여전히 10여명의 신선들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고승은 그이 눈이 아직도 가까운 곳에서 신선과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달려갈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신선이 놀았다는 뜻에서 신선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선대에는 문장대와 천황봉 사이를 연결하는 등산로의 중간 휴게소가 있다. 입석대(立石臺)는 신선대와 비로봉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법주사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5.5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 이 곳에서 조선 후기의 임경업 장군이 수도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법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험준하여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조선왕조 제16대 왕인 인조때의 임경업장군이 이 곳에 이르러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단련할 때 그가 어느 정도의 단련이 그의 체력한계가 되는지를 알길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시험하려 했으나 기준조차 알 길이 없어 매우 당혹하게 여겨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석굴에 않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임경업이 정신을 차리고 그 말을 들으니 "마주 바라다보이는 석벽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하는 말이었다. 임경업은 곧 경업대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이에 임경업이 그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여 마침내 수도 7년째 되던 해에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고해서 입석대(立石臺)라 불리게 되었다. 비로봉(毘盧峯)은 문장대에서 천황봉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속리산의 봉우리이다. 법주사에서는 약 5.77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973m이다. ‘비로’란 ‘비로자나불’을 줄인말로써 인도말로 '모든곳을 두루 비친다'라는 뜻이며, 광명을 뜻한다.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자선을 할 때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고, 이에 대사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한 후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천황봉은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해발 1058m이며, 꼭대기에는 천황봉을 한자로 표시한 비석이 서 있다. 문장대에서 볼 때 삼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다. 법주사 동쪽 방향으로 약 5.7km 지점에 있으며, 법주사에서 올라갈 경우 성인남자 기준으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법주사에서 문장대로 올라가는 코스와는 달리 등산 코스가 상대적으로 순탄한 편이다. 천황봉에는 조난객 구조를 위한 헬리콥터 이착륙장이 설치되어 있다. 관음봉은 문장대와 인접한 속리산의 봉우리로서 해발 926m이다. 그러나 문장대와 인접해 있음에도 문장대에서 직접 이어지는 코스가 없고, 이 곳으로 올라가려면 상주시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유일하다. 수리산 수리산(修理山)은 경기도 군포시, 안양시 만안구와 안산시 상록구의 경계에 있는 높이 475m의 산이다. 면적은 1,047.5ha로 군포시의 임야면적의 55% 차지한다. 봉우리 및 절벽은 대체로 규암이고 계곡지대는 풍화에 약한 흑운모, 호상 편마암이나 안구상 편마암이 많고 부분적으로 백운모 및 흑운모 편암이 협재되어 있다. 봉우리는 태을봉이 가장 높으며, 이후로 관모봉, 슬기봉 , 수암봉 등도 이 산의 봉우리 중 하나이다. 2009년에 경기도의 세 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북쪽 골짜기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자촌(信者村)이 있다. 1951년 한국 전쟁 당시의 수리산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으며 시흥-안양-수원 전투에서 이 산은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수리산 명칭 유래는 수리산의 빼어난 산봉의 방위가 마치 독수리같아 “수리산”이라 하는 설이 있고 또 신라 진흥왕때 창건한 현재 속달동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 신심을 닦는 성지라 하여 수리사라고 하였는데 그후 산명을 “수리산”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청계산(618m), 광교산(582m), 관악산(629m), 백운산(564m)등 광주산맥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산지중의 하나로 군포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큰 산으로 태을봉(해발 489.2m)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슬기봉(해발 469.3m) 북쪽으로는 관모봉(해발 426.2m) 북서쪽으로는 수암봉(해발 395m)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계는 수리산 (태을봉 489.2m, 슬기봉 469.3m)이 군포시 서측에 남북으로 형성되어 안산시, 안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수리산 능선이 동서로 뻗어 군포시를 양분하고 있으며 수리산은 평지에서 갑자기 솟아 오른듯한 산계를 이루고, 봉우리 및 절벽은 대체로 규암이고 계곡지대에는 풍화에 약한 흑운모호상 편마암이나 안구상편마암이 많으며 부분적으로 백운모 및 흑운모 편암이 협재되어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큰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 내리는 모습을 매우 귀한한 지상으로 꼽으며 이런 형상을 '태을'이라 부른다. 일출 무렵 '태을봉'에 올라 그 그림자를 내려다보면 커다란 '태을' 형상이 보인다고 한다. 태을봉은 수리산의 최고봉으로 2004년에 군포1경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해발 489.2m 이다. 승두산 승두산(僧頭山)은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산이다. 장미 장미(薔薇,)는 장미과 장미속(薔薇屬, )에 속하는 관목의 총칭이다. 장미속은 장미아과의 단형 족인 장미족(薔薇族, )에 속하는 유일한 속이다. 야생종 장미는 주로 북반구의 온대와 한대 지방에 분포한다. 오늘날 장미는 야생종 사이의 잡종이거나 그 개량종으로, 주로 향료용·약용으로 재배되어 오다가 중세 이후에 관상용으로 개량하여 재배하게 된 원예종이다. 장미의 잎은 어긋나기를 하고 보통 홀수 깃꼴겹잎을 이루지만 홑잎인 것도 있으며, 턱잎이 있다. 꽃은 줄기 끝에 단생꽃차례나 산방꽃차례로 피며, 홑꽃은 꽃잎이 5개지만 원예종 가운데에는 홑꽃 이외에 겹꽃·반겹꽃을 이루는 것이 많다. 장미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는 가시인데, 가시는 줄기의 표피세포가 변해서 끝이 날카로운 구조로 변한 것이다. 원예종은 거의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다. 한국에는 19세기 후반, 미국·유럽으로부터 서양장미가 들어와 다채로운 원예종의 장미를 재배·관상할 수 있게 되었다. 장미의 잎은 초식성 벌인 장미등에잎벌 애벌레의 먹이식물인데, 애벌레는 무리지어 장미의 잎을 먹는다. 세계의 장미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다. 고고학적으로는 약 3천만 년 이상 되는 장미화석이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고대 페르시아, 고대 중국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장미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이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는 약 3천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장미의 벽화는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가 발견한 것으로, 크레타 섬을 탐사할 당시 기원전 2000-1700년 사이에 건축된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면서 발견하였다. 장미에 대한 첫 번째 그림은 프레스코(fresco)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는 5장이 꽃잎이 달린 페니키아 장미를 그대로 그리지 않고, 6장의 꽃잎에 중심부가 오렌지색은 황금빛 장미를 그렸다. 장미는 기원전 야생의 장미가 향료나 약용으로 채취되었다가 차츰 실용적인 측면과 관상용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장미에 관한 형용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장미에 관한 역사 이야기는 영국의 장미전쟁이 특히 유명한데 이 전쟁의 이름은 왕위를 다투던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가 제각기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달고 30년 동안 전쟁을 계속했고 결국 양가가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섞은 통일 문장을 만들면서 이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것에 유래한다. 사철 피는 유럽의 장미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패권을 쥔 이후이며, 특히 화려한 대륜의 사철 피는 장미를 프랑스의 장미원에서 만들어낸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18세기 이전의 장미를 고대장미(old rose) ,19세기 이후의 장미를 현대 장미(modern rose)라 한다. 로마인들은 장미를 재배해서 로사 겔리카(Rosa gallica)라고 이름을 붙였다. 신랑 신부들은 장미 관을 쓰기도 했으며, 로마의 귀족 여자들은 장미꽃을 찜질 약으로 사용하면 주름을 없애준다고 믿었으며, 거의 화폐로 사용하다시피 했다. 장미용액이 취기를 없애줄 것이라는 생각에 포도주를 마실 때 잔에 띄우기도 하고, 전쟁에 승리한 군대는 거리의 발코니에 모인 군중들로부터 장미꽃잎 세례를 받았으며, 또 장미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나타낸다고 생각해서 장례식에 사용되거나 묘지에 재배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천장부터 늘어뜨린 장미아래서 주고 받은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관습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장미향수, 장미목욕 등 생활 속에서 많은 장미를 사용하였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만날 때 본 수많은 장미잎으로 인해 자신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장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자기 생각을 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거처를 장미 잎으로 가득 채우곤 했었다. 특히 연인인 안토니우스가 참석하는 연회 때에는 당시 금액으로 1타랑(현재 미화로 13,000달러)를 들여 마루 바닥에 약 1m 높이의 장미를 깔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장미를 뿌려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네로는 축하연 때에는 장미로 목을 장식하고 장미관을 썼으며, 장미 꽃잎으로 채운 베개서 자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다. 네로는 마루에도 장미를 뿌려놓고 생활했으며, 분수에서는 장미향수가 뿜어 나오도록 했다. 네로의 연회에 쓰이는 술에는 장미향이 들어 있었으며, 디저트에는 장미 푸딩이 나왔다고 한다. 축하연에서는 손님들이 장미향수를 섞어놓은 풀장에서 마음놓고 수영을 할 수 있었다. 네로는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15만 달러 상당의 장미를 소비했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장미를 찾아보면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언급되었는데, 이를 보아 한국에 처음 장미가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제 46권 열전6 설총 조를 보면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花王, 모란)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하였는데 이 때의 장미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나 장미와 모란을 비교한 것으로, 장미가 이미 들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한림별곡의 일부 가사를 소개한 내용 중에 <홍모란, 백모란, 정홍(丁紅)모란, 홍작약, 백작약, 정홍작약, 어류옥매(御榴玉梅), 황색 장미, 자색 장미, 지지(芷芝), 동백이 사이사이 꽃 핀 광경은 어떠한가?>라는 대목이 있어서 장미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양화소록》에서도 가우(佳友)라 하여 화목 9품계 중에서 5등에 넣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장미는 8·15광복 후에 유럽·미국 등지로부터 우량종을 도입한 것으로 지금은 다양한 원예종을 재배하고 있다. 현재의 장미는 교잡이 많이 일어나 종이 많으나 원종은 다음과 같다. 1867년 이전의 장미를 '고전장미(old garden rose)', 1867년 하이브리드(hybrid)라는 교잡종이 탄생한 이후의 장미를 '현대장미(modern garden rose)'로 구분하여 분류한다. 1867년 'La France' 품종이 발표되면서 붙여진 이름. 전형적으로 꽃이 크게 겹꽃으로 피며, 가시가 많고, 향기가 강하고 한 줄기에서 여러 차례 꽃이 피고 꽃빛깔은 흰색, 분홍, 노랑, 빨강, 보라 등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추위에 강해서 겨울 최저 평균기온 -12℃ 에서도 보호 없이 월동이 가능하다. 꽃은 늦은 봄에 피기 사작하여 첫서리가 올 때까지 계속 피며 키는 보통 80~120cm 까지 자란다. 플로리분다는 한 줄기에 여러 개의 꽃이 달린다. 많은(poly) 꽃(anthas)이 달려서 폴리안사(polyanthas) 장미라 부리기도 한다. 최초의 것은 찔레나무(Rosa multiflora)에서 1840년 대에 프랑스에서 개발하였다. 그 후 플로리분다는 1920년대 초에 덴마크에서 폴리안사(polyanthas)와 하이브리드 티(Hybrid Tea)를 교잡하여 개발되었으며, 오늘날 플로리분다는 1930년 미국에서 개발한 것이다. 사철피며 종륜 주저리종(한 줄기에서 2~15송이) 즉 다화성으로 강렬한 색상을 이루며, 복색(2가지 이상의 색) 꽃도 많으며, 내병성 및 내한성이 강하나 대부분 향기가 없는 편이다. 단간종으로 횡장하기 때문에 집단군식으로 식재하며, 꽃의 크기는 5~11cm 정도이고, 나무는 60~90cm 정도까지 자란다. 미니어처 장미는 꽃과 잎이 작고 키도 30cm 이하이고 꽃의 크기도 지름 2.5cm 정도이므로 미니어처라고 한다. 처음 알려진 미니어처 장미는 잔쟁이 중국장미(Rosa chinensis minima)인데 마우리티우스 섬에서 발견되었다. 교잡으로 많은 재배변종이 생기고 꽃빛깔이 다양해지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미니어처 장미는 암석정원, 화분재배, 파티오, 테라스 주변에 식재하는데 유용하다. 또한 화단이나 경재화단에서 테두리 식물에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바구니걸이로도 널리 쓰인다. 덩굴장미는 하이브리드 티나 플로리분다 장미 중에서 돌연변이로 생겨났으며, 가장 늦게 분화된 군으로 줄기가 길게 자라기 때문에 곧게 서지 못해 트렐레스, 팬스, 퍼걸러(pergola), 아치, 기둥 등과 같이 나무줄기를 지탱시킬 수 있는 구조물이 필요하다. 또한 벽을 기어오르게 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옛날의 재배변종들은 여름 한때만 꽃이 피었지만 근래의 덩굴장미는 여름에서 가을까지 계속해서 꽃이 핀다. 꽃은 일년생 줄기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묵은 줄기에서만 꽃이 피는 것이 다른 장미와 좀 다르다. 큰꽃 덩굴장미(Large flowered Climber), 긴줄기 덩굴장미(Rambler) 등이 있다. 그랜디플로라 장미는 1954년 미국에서 'Queen Elizabeth'가 나오면서 붙여진 품종군이다. 하이브리드 티와 플로리분다 장미 사이에서 교잡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키는 1.8m 정도로 키가 큰 편이다. 꽃의 형태와 줄기는 하이브리드 티를 닮아서 크고 튼튼하며 또한 플로리분다를 닮아서 꽃이 많이 달리고 오래도록 핀다. 꽃의 크기는 두 양친 간의 중간 크기이며, 강한 특성 때문에 재배하기가 쉬운 편이다. 꽃은 겹꽃이나 향기가 작은 편이고, 꽃빛깔은 빨강, 분홍, 노랑, 흰색 등 다양하다. 크게 자라므로 조경에서는 경재화단에서 배경식에 알맞다. 랜드스케이프는 클라이밍 로즈와 플로리분다의 중간 종으로 다화성 중륜 조경용 장미다. 내한성, 내병성이 강한 편이고 모양은 포복형, 현애형, 돔형, 수양버들형 등이 있다. 고전적인 스타일의 르네상스 시대 장미를 모양은 현대 감각에 맞게 개량한 것이나 옛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름이 8~12cm로 Hybrid Tea계 장미와 유사하나 화심이 중앙의 한 점에 집중되어 있는 현대 장미와는 달리 겹이 많고 다초점의 로제트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미는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통하여 번식시킬 수 있다. 타가수분으로 교잡에 의해서 씨가 생겨나서 발아한 장미는 두 식물체 사이의 자손이 되는데 이것이 실생묘(實生苗:seeding)이다. 열매가 익으면 씨를 빼낸다. 가을철에 즉시 파종상에다 파종한다. 실생묘가 자라서 2~3개월이 지나면 잎이 6~8개가 나오고 어떤 것은 벌써 꽃봉오리가 생긴다. 첫 해에 나오는 꽃봉오리는 모두 따내어 실생묘의 생장을 돕는다. 즉 생식생장보다는 영양생장을 도와서 튼튼한 나무로 가꾸어야 한다. 두 해째 초여름이면 줄기의 굵기가 연필 정도 된다. 이 2년생 실생묘에서 꽃이 피면 꽃의 크기, 모양, 빛깔, 꽃잎의 수 등을 살피고 여러 개의 꽃 중에서 우수한 것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따버린다. 무성번식에는 꺾꽂이, 접목, 휘묻이 등이 있는데 장미는 주로 꺾꽂이와 접목이 이용된다. 장미 꺾꽂이는 줄기를 10cm 정도로 잘라서 꺾꽂이 상토(床土, 배양기)에 꽂아서 발근시키는 방법으로, 시기는 6월 중순~8월 상순이 적기이다. 삽수(揷樹)는 1년생 가지가 적당하다. 삽수는 줄기의 우상복엽(5개 소엽) 2개를 남기고 7~8cm 정도로 자른다. 삽수의 절단면은 날카로운 칼로 비스듬히 잘라야 유합조직(callus)이 잘 형성되고 잘 발달할 수 있다. 삽수의 길이의 2/3는 상토에 꽂고 1/3정도는 표면에 나오도록 한다. 꺾꽂이 상토에는 습도가 유지되어야 한다. 5~8주간 정도 플라스틱필름 주머니를 덮어서 습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상토(삽목상)에는 그늘이 요구된다. 꺾꽂이가 성공하면 상토 안에서 발근이 되고 눈에서 새싹이 나온다. 뿌리가 충분히 발근되면 유기물이 풍부한 묘목장으로 옮겨서 영양생장할 수 있도록 한다. 원하는 장미의 재배변종을 선택하여 줄기에서 옆겨드랑이에 있는 눈을 찾아낸다. 잎자루를 약간 남기고 잘라낸 다음 눈(bud)이 붙어 있는 줄기의 피층을 주판알 모양으로 도려 눈을 떼어낸다. 대목은 찔레나무 실생묘가 2~3년 자라 연필 굵기만한 것이 적당하다. 대목(臺木:접하게 될 밑둥)의 표피조직을 접칼로 T자 모양으로 가르고 그 사이에 접수의 눈을 옮겨 끼어 넣고 끈으로 고정시킨다. 대목의 부름켜에서 왕성한 분열조직이 생기고 대목과 접수의 눈에서 서로 유합조직이 생겨나면서 관다발(물관, 체관, 부름켜)들이 연결되어 새로운 눈에 수분과 양분이 공급되어 새싹이 나오게 된다. 눈접(아접)을 하고 나서 일주일이면 활짝이 시작된다. 이때에 남아있던 잎자루는 저절로 떨어져 나온다. 눈접의 시기는 생장이 왕성한 7~8월이 적기이다. 눈접이 성공하면 묶었던 끈은 풀어서 느슨하게 다시 메어준다. 또한 눈접한 대목의 윗 부분은 1~2cm를 남기고 잘라낸다. 이때에 한꺼번에 전부 잘라내지 말고 대목의 가지를 차차 줄여 주어야 수분과 양분 흡수가 충분하여 눈접의 새싹이 왕성하게 자랄 수 있다. 장미는 물빠짐이 좋고 공기유통이 좋은 비옥한 사양토나 양토에서 잘 자란다. 그러므로 하천부지의 충적토 또는 병충해가 적고 유기질이 풍부한 퇴적토가 좋다. 산도는 ph 6.0-6.5가 적당하다. 토양의 유기물 함량을 높게유지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유기물 함량을 높게 유지함으로써 지속적인 영양을 좋게 유지하는 이점도 있지만 뿌리에 풍부한 산소를 공급해 줌으로써 뿌리에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상부 30cm의 토양에는 30%이상의 유기물 함량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좋다. 장미는 햇빛을 좋아하는 양수(陽樹)여서 하루에 6시간 이상의 햇빛이 요구된다. 그늘진 곳이나 큰 나무 밑에서는 장미가 충분히 생장할 수 없다. 햇빛이 부족하면 줄기가 가늘어지고 잎이 엉성하게 달리며 진한 녹색이 되지 못한다. 꽃이 피더라도 작고, 엉성하며, 빛깔도 선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루에 6시간 이상 햇빛이 요구된다. 식물 생육에는 적온범위가 있는데 이 범위 내에서 잘 생장할 수 있다. 장미의 생육적온은 18~20℃ 여서 봄과 가을에 무성하게 핀다. 온도가 30℃ 이상인 여름철에는 동화작용의 양보다 이화작용(異化作用)이 너무 많아서 꽃이 잘 피지 않는다. 장미는 봄에서 가을까지 주당 50mm 정도의 강우가 요구된다. 따라서 뜨겁고 건조한 기후에서는 3~4일 마다 물주기를 해야 한다. 다공성 토양일 경우에는 물이 깊이 스며들기 때문에 상당히 이롭다. 봄철에 장미를 심을 때 너무 더운 날에는 뿌리가 따뜻한 햇볕에 자극을 받으면 잎이 생장할 때 필요한 습도가 마련되지 않아 발육되지 못하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생장기간에는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주는 것이 적당하다. 액체비료와 건조비료를 교대로 주는 것이 좋다. 모래 흙에서는 비료를 자주 주어야 하고, 추운 지역에서는 인산과 가리빌료를 주면 내한성이 생긴다. 장미는 예로부터 관상용으로 보다 많이 사용되어왔다. 관상용 장미는 주로 정원이나 공원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집안 곳곳에 장미꽃을 꽂아 집안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장미를 비롯한 유기농 꽃은 플라워 케이크나 화전 등 식용 꽃으로 재탄생한다. 전통 음식 중에도 노란장미화전, 꽃가루와 꿀을 버무려 만든 다식, 국화차 등 많은 음식에 꽃이 쓰였다. 또한 최근에는 음료나 차로도 생산되고 있다. 특히 장미차는 여성에게 좋은 효능을 지니고 있는데 폐경이나 변비 등에 효과적이고 비타민C가 많아 노화방지 및 피로회복에도 좋다. 특히 장미꽃의 다양한 색상을 내는 안토시아닌은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콜라겐 형성을 촉진하며 베타카로틴은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 들장미 열매인 로즈힙에는 오렌지의 40배에 달하는 비타민C가 함유돼 있어 실제 세계 2차 대전 이후 어린이들의 비타민C 공급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장미효소의 특별한 효능 때문에 고대부터 장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용되어왔다. 장미꽃잎은 비타민E와 K를 함유하고 있어 피부를 재생시켜 주는데 효과적이며, 유해환경이나 화장으로 지친 피부를 생기있게 해주는 데도 효과적이다. 또한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주어 피부를 젊게 해주는 특성이 있다.장미는 또한 피부를 맑고 깨끗하게 개선시켜주고, 피부가 화끈거리는 것을 가라 앉혀준다. 항염제로도 사용되고 또한 갈라진 손바닥과 발바닥을 치료하는 데도 사용된다. 장미는 비타민 C가 레몬의 20배, 에스트로겐이 석류의 8배, 비타민 A가 토마토의 20배 정도 함유되어 있어 피부 보습은 물론 피부 재생, 피부 진정에 효과적이다. 또 장미에서 추출된 장미수는 모공을 수축시켜 피부를 윤택하고 매끄럽게 해주며 어떤 피부 타입에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피부 자극이 없다. 특히 장미의 화려하고 풍부한 향은 스트레스 저항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여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신경 안정 작용을 하여 숙면에 도움을 주어 피부 트러블의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준다. 장미는 지닌 향이 좋아 향수로도 만들어지는데 흔히 이성을 유혹하는 듯한 향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장미향 자체가 지닌 효능도 있다. 장미향은 우울증을 낫게 하고 콩팥을 강하게 만들며 집중력과 기억력을 향상시켜주고 두통에도 뛰어난 효과가 있다. 가정에서 꽃병에 꽃을 꽂을 목적으로 구입하는 경우라면 개화 상태가 20% 정도이면 적절하고, 꽃바구니용이나 선물용 꽃 다발은 30~40% 정도 핀 상태가 좋다. 말릴 수 있도록 길게 만든 꽃다발이나 벽에 걸어 두어 말릴 목적으로 구입하는 꽃은 50~60% 정도 피어있는 것이 적절하다. 웨딩 부케용 꽃은 60~70% 정도 피어 있어야 한다. 장미는 잘라서 병에 꽂아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한 가지 문제점이 장미봉오리가 피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대부분 세균이나 곰팡이가 물관을 막아 물올림이 안 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다. 그러므로 자른 장미를 물에 담글 때에는 살균제나 당을 물에 첨가해 주면 봉오리가 잘 핀다. 영원한 아름다움과 신비의 상징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영어로는 비너스Venus)는 천공의 신 우라노스의 잘려진 성기의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인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그 때 아프로디테는 자기도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 하고, 대지에 장미꽃을 피웠다. 하지만 다른 전설로는 거품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날 때 그와 함께 장미꽃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장미가 붉게 물든 이유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던 소년 아도니스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전설이 존재하는데 몇가지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인데, 에로스는 약간 경솔한 편이어서 올림퍼스 신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생각이 나서 허둥대다 넘어지는 바람에 귀중한 신주를 엎질러 버렸다. 그러자, 그 술이 진홍빛 장미가 되어 에로스는 새로 생겨난 장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꽃에 키스를 하려다가 꽃 속에 있던 벌에게 입술을 쏘였다. 아들이 입을 다치게 되자 아프로디테는 화가 나서 벌의 바늘을 빼어 장미의 줄기에 심어 그것이 장미의 가시가 되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의 로맨스를 누설하지 말아달라고 침묵의 신인 헤포크라테스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침묵의 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으로 장미를 보냈다. 그 후 장미는 밀회의 비밀을 지켜주는 꽃이 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이란)의 전설에는 무함마드가 천국에 흘린 땀이 흰장미꽃이 되었다고도 하며 터키에서는 무함마드의 피에서 장미가 생겼다고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꽃의 왕이 연꽃이었을 때 연꽃이 밤에는 잠만 자고 다른 꽃들을 지키지 않자, 꽃들이 알라(하나님)에게 호소하였는데, 알라는 꽃 중의 지배자로 흰 장미를 만들었고 가시를 주어 무기로써 지키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꽃 세계에 나이팅게일이 들어와 흰 장미의 아름다움에 반해 포옹하려다가 가시에 찔려 목숨을 잃게 된다. 그 때 흘린 피가 흰 장미를 붉게 물들여서 붉은 장미가 되었다고 한다. 장미는 영적으로 모든 종교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에덴 동산에는 장미에 가시가 없었는데 아담이 낙원을 쫓겨날 때 그의 원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가시를 붙였으며 낙원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잊지 않게 하려고 짙은 향기와 아름다움을 남겼다고 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어느날 장미꽃 봉오리 위에 베일을 덮어 두었다. 그러자 그 밑에 있던 장미는 모두 하얗게 되고, 이후 그 장미의 뿌리에는 흰 꽃밖에 피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중요시하였는데 장미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원 종의 장미가 홑 꽃으로, 꽃잎이 5잎이기 때문에 이 다섯 잎 꽃이 기독교의 '성스러운 5'라는 신앙과 연결 지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5곳에 상처가 났기 때문에 5라는 숫자를 '성스러운 5'로서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장미는 그리스도의 피에서 유래된 은총, 자선과 순교를 의미한다. 백장미는 동정녀 마리아의 순진, 청결, 정조 등과 연관이 있다. 이것은 천국의 꽃이며 아름다움, 완벽 그리고 향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장미 화환은 천상의 축복, 즉 하늘의 장미로서 여겨져 로자리오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황금장미는 교황의 표지이기도하다. 천주교에서는 한 때 장미의 열매를 줄로 매달아 묵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장미가 육체적 욕망이 없는 순수한 사랑을 의미하여 풍요의 여신 이시스와 연관을 지었었다. 유대인의 경우 장미는 생명수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다. 즉 중심에는 태양이 있고 장미 꽃잎은 자연 속의 풍요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장미는 곧 우주를 축소시켜 놓은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장미가 예언자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장미십자회원들에게 장미는 성령의 장미로 불렸으며, 하나의 원 또는 십자가가 새겨진 바퀴로 여겼다. 십자가 가운데에 장미가 있고 이 장미는 신성한 빛으로 여긴 것이다. 붉은색 장미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 성향 단체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예: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로고) 무궁화 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는 아욱과의 낙엽관목으로, 대한민국의 관습헌법에 의해 나라꽃으로 여겨진다. 또한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 무궁화를 특정하여 무궁화 심기에 노력하고 있다. 중국·인도가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세계 여러 곳에서 가꾸어지고 있다. 무궁화의 종소명(種小名)이 '시리아쿠스(syriacus)'라고 하여 '시리아'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계에서는 원산지가 시리아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듯이 명확하지가 않다. 무궁화는 꽃으로도 으뜸임을 옛날 중국에서는 군자의 기상을 지닌 꽃이라 하여 예찬했고 서양에서도 그들 이상의 꽃인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 라 하여 무척 사랑한다. 무궁화의 원산지를 중국, 인도, 이란, 시리아 등지로 알지만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으로 알려진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는 명확히 군자국을 지칭하며 근역(槿域)이라 했고 무궁화는 '아침에 꽃이 피고 저녁에 꽃이 지는 훈화'로 소개되어 있다. 유럽의 그리스에도 광범위하게 심어져 있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키나무로, 1~ 2미터의 높이에 팔목 정도의 굵기로 자란다. 줄기는 흰빛이 도는 회색을 띠고 있으며, 어린 가지에 있는 털은 자라면서 점차 없어진다. 달걀 모양 또는 마름모형 달걀 모양인 잎은 어긋나며, 세 갈래로 얕게 갈라진다. 잎자루는 짧고, 잎 가장자리에는 고르지 않은 톱니가 있다. 꽃은 7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개화하며 새로 자란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한 송이씩 핀다. 대부분의 품종은 이른 새벽에 꽃이 새로 피었다가 오후에는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지기를 반복하지만 반겹꽃이나 겹꽃 계통에 속하는 일부 품종의 경우 2~3일간 피어있기도 한다. 꽃의 모양은 대부분 종 모양으로 생겼으며 꽃자루는 짧은 편이다. 꽃 색깔은 붉은색, 분홍색, 연분홍색, 보라색, 자주색, 파란색, 흰색 등 다양하다. 꽃잎에는 보통 밑부분에 단심이라고 하여 색이 더 짙은 부분이 있는데, 이 곳에서 바깥쪽으로 같은 색깔의 선들이 뻗고 있다. 긴 타원형 열매는 방이 다섯 개로 나뉘며 완전히 익으면 갈라져서 씨를 퍼뜨린다. 씨는 편평하며 긴 털이 있다. 꽃잎의 모양에 따라 보통 홑꽃, 반겹꽃, 겹꽃으로 무궁화의 계통을 구분할 수 있다. 홑꽃은 5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져 있고 완전한 형태의 암술과 수술을 갖추고 있으며 지름이 약 6~10cm이다. 반겹꽃은 수술이 속꽃잎으로 발달한 것이며, 겹꽃은 암술까지 모두 속꽃잎으로 발달한 것이다. 꽃잎의 색깔에 따라 배달계, 단심계, 아사달계로 무궁화의 계통을 구분할 수도 있다. 단심계는 다시 백단심계, 적단심계, 자단심계, 청단심계로 구분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 신선한 모습을 자랑하며 추위에도 비교적 강한 편이다. 나무가 건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환경이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잘 자란다. 따라서 뜰이 넓은 집 안이나 공공 건물의 화단에 심으면 좋다. 번식은 씨로도 하고 꺾꽂이로도 할 수 있다. 씨로 번식시킬 때는, 지난해에 받은 씨를 2 ~ 3월에 뿌린다. 꺾꽂이로 할 때는, 봄이 되어 싹트기 전에 묵은 가지를 10 ~ 15cm로 잘라서 꽂거나, 장마철에 그 해에 자란 가지를 잘라서 꽂는다. 꺾꽂이한 것은 모두 뿌리가 내린다. 뿌리가 내린 후 1 ~ 2년 지나서 원하는 곳에 옮겨 심는다. 무궁화는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으므로 겨울 또는 봄에 가지를 치면 그 해에 자란 가지에 꽃이 피고 키가 커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근화는 열대 아열대에서 자라며 관상용으로 키울 때에는 집에서 생육이 가능하다. 목근은 난대성 수종으로 100여 년 전까지는 차령산맥 이남에서만 생육되었다가 점차 개량하여 휴전선 인근까지 생육이 가능하게 되었다. 싹이 나올 무렵에는 진딧물이 많고, 5월 이후로 박쥐나방, 7월 이후로 무궁화밤나방(자벌레) 등의 충해가 있을 수 있다. 무궁화는 대체로 관상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나, 다른 용도로의 사용도 가능하다. 무궁화의 겉껍질은 벗겨서 종이의 원료로 사용하며 말려서 약으로도 사용한다. 어린 잎은 식용하며 꽃과 잎은 차로 마실 수도 있다. 가가와현 가가와현()은 일본의 현 중 하나이다. 시코쿠 지방에 있는 4개 현 중 하나로서, 현청 소재지는 다카마쓰 시이다. 율령제 시행시의 사누키 국과 그 영역이 거의 일치한다. 시코쿠 동북쪽에 있으며 서쪽에는 에히메현, 남쪽에는 도쿠시마현, 북쪽에는 세토 내해를 사이에 두고 오카야마현이 있다. 현 북쪽은 사누키 평야가 펼쳐지며, 남쪽은 사누키 산맥이 줄짓는다. 세계에서 가장 좁은 해협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도후치 해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가와 현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현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는 오사카부가 가장 면적이 작았으나 1990년대 초에 간사이 국제공항의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하면서 가가와 현의 면적을 앞질렀다. 가가와 현은 시코쿠 산지와 세토 내해 사이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좁다. 가가와 현에서는 ‘사누키 국’에서 ‘’(산)을 떼고, 추가로 전체를 동, 중, 서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도산() 지역’, ‘주산() 지역’, ‘세이산() 지역’으로 구분한다. 가가와 현은 우동으로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사누키 우동이 제일 유명하다. 포흐욜라 포흐욜라()는 핀란드 신화에 존재하는 장소이다. 핀란드어로 "포흐야(pohja)"는 북쪽이라는 뜻이며 포흐욜라는 "북쪽의 땅"이라는 뜻으로, 칼레발라의 세계 사미 대륙의 북극지대를 의미한다. 실제로 포흐욜라는 라피 주와 고대 카이누(Kainuu)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화 속에서는 북쪽의 영원히 춥고 불길한 곳이며, 악이 근원하는 지대로 그려진다. 포흐욜라는 칼레발라의 땅인 배이뇔래의 적이며, 모든 질병과 추위의 근원이다. 신화에서 포흐욜라는 사악하고 강한 마녀 로우히가 지배하고 있다. 그녀의 명령으로 위대한 대장장이 일마리넨은 삼포를 만들어서 그녀의 딸과 결혼하여 예물로 주었다. 삼포는 아무것도 안 넣고 돌려도 포흐욜라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나오는 마법의 맷돌로, 그 웃돌은 세계의 중심을 축으로 돌아가는 하늘의 지붕인 천구를 상징한다. 다른 칼레발라의 인물들도 로우히의 딸과 결혼하려고 했다. 협객 레민케이넨과 현자 베이네뫼이넨이다. 로우히는 그들에게도 일마리넨이 한 것과 같은 기적을 요구했는데, 투오넬라의 백조를 쏴죽이라고 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로우히의 딸의 결혼식이 있던 날, 포흐욜라에서는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다. 핀란드 신화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축은 "세계수(世界樹)"의 뿌리이며, 이는 포횰라의 북쪽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있다. 포흐욜라는 삼포를 만들어서 가지고 있음으로서 풍요를 누렸고, 남쪽 사람들이 삼포를 얻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그중에서 삼포가 파괴되었다는 것이 칼레발라의 내용이다. 나미비아 나미비아 공화국(, , )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공화국이며 수도는 빈트후크이다. 북쪽에 앙골라와 잠비아, 동쪽에 보츠와나와 짐바브웨, 남쪽과 동쪽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접경하고 있다. 독립 전쟁 후 1990년 3월 21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나미비아는 유엔(UN),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 아프리카 연합(AU), 영국 연방과 많은 다른 국제 기구들의 회원국이다. 많은 해 동안 나미비아는 남서아프리카로서만 알려졌지만, 나미브 사막의 이름을 따서 나미비아를 채택했다. 몽골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적은 나라이다. 나미비아의 건조한 땅은 부시먼족, 다마라족, 나마콰족이 초기 시절 부터 거주했으며, 반투족 확장과 함께 왔던 이민 온 반투족이 대략 14세기 부터 살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방문했지만 1884년 독일령 보호국이 되었다. 1920년 국제 연맹은 그들의 법과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강요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나미비아를 위임시켰다. 1966년,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에 의한 봉기와 요구는 유엔이 그 영토에 관한 직접적인 책임을 취하도록 이끌면서, 1968년에 국가명을 나미비아로 개명했으며 1973년 나미비아족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를 인정한다. 그러나, 나미비아는 이 시기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 아래 남게 되었다. 뒤 이은 내부 폭동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85년에 나미비아에 과도 정부를 설치했다.(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치 아래 남아 있던 도시인 월비스베이를 제외하고) 나미비아는 19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나미비아의 인구는 약 180만명이며 안정적인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 국가다. 농업, 가축몰이 (herding), 관광, 값비싼 보석과 금속의 채굴은 나미비아의 경제의 중추를 형성한다. 대략 인구의 절반이 하루 1.25 달러의 국제적인 빈곤선 아래 살며, 2007년 HIV에 감염된 성인 인구의 15%와 함께, HIV/AIDS의 영향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나미비아라는 이름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했으며, 이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간주된다. 1990년 독립 전에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로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 남서아프리카로서 변경되었고, 독일과 영국의 식민지배에 영향을 받았다. 나미비아의 건조한 땅은 초기에 부시먼족, 다마라족, 나마족이 거주했으며 대략 14세기 부터 반투족 확장과 함께 이주해 온 반투족이 정착을 했다. 당시 지역에 상륙하여 탐험을 한 최초의 유럽인은 1485년에 디오고 캉(Diogo Cão), 1486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등의 포르투갈 항해가였으며, 아직 그 지역은 포르투갈령 영토로 점유되지 않은 상태였다. 1884년 나미비아는 영국의 잠식에 앞서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월비스베이를 빼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알려졌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헤레로인과 나마쿠아인은 독일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그 후 헤레로나마쿠아 학살 속에, 10,000 명의 나마인 (부족의 절반 인구)과 대략 65,000 명의 헤레로인 (대략 부족의 80% 인구)이 죽었다. 구금으로부터 풀려났던 생존자들은 수많은 방식의 아파르헤이트 시스템 속에서 강탈, 추방, 강제노동, 인종 격리와 차별 정책을 당하였다. 실제로, 몇몇 역사가들은 나미비아에 자행한 독일의 학살이 홀로코스트에서 나치 독일이 사용한 모델이었다고 추론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에 작은 아이에 불과했던 나치당에게 그 사건은 특별히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당시 학살의 기억은 독립한 나미비아에서 민족 정체성과 독일과의 관계에 상응한 채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1883년부터 1915년까지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19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당시 유엔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빈트후크 사람들은 높은 생활 수준을 자랑한다. 현재 야당인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sation)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으나 현재는 다당제 민주주의와 혼합자본주의경제를 따르고 있다. 전체 면적은 825,418km²정도로서 전 세계에서 34번째로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큰 나라다. 몽골에 이어 나미비아는 인구 밀도가 가장 적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1km 당 2.5명) 나미비아는 생명체와 관계가 없는 지대가 상당히 많다. 중앙고원, 나미브 사막, 절벽 지대, 저지대(Bushveld), 칼라하리 사막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중앙 고원은 남북에 뻗쳐 있으며 북동쪽으로 해골해안(Skeleton Coast)에 접한다. 나미브 사막과 해안 평원이 남서쪽에 있으며 남쪽에는 오렌지 강이 있다. 나미브 사막이 넓게 퍼져 있으며 모래언덕과 평원을 따라서 전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폭은 100~수천km정도이다. 대절벽이 2,000m의 고도로 솟아 있는데 평균 온도는 인근 지역에서도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차이가 심해져서 상당히 춥기도 하다. 관목류의 식물을 찾아볼 수 있다. 저지대가 북동쪽에 있는데 앙골라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타 지역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강수량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온도는 더 서늘하고 온화하여서 보통 기온이 10 °C 내지 30 °C에 머문다. 토양이 모래질이며 대개 평평하다. 모래로 구성되어 있어 물을 함유할 수는 없다. 1년 내내 대부분 건조한 곳이지만 우기가 되면 6,000km 정도의 호수가 생겨서 식수 해결에 큰 도움이 되며 동물들의 안식처가 된다. 또한 거대한 염전이 해역에 크게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굉장히 더운 기후에 속한다. 그러나 기후는 주로 사막 기후와 스텝 기후를 띄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미비아는 14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오밤보족이 약 50%, 카방고족이 9%, 다마라족이 7%, 헤레로족 7% 등 흑인이 87.5%, 백인이 6.6%, 혼혈이 7.4%를 차지한다. 백인의 6할과, 혼혈의 다수가 아프리칸스를 모어로 사용한다. 법적 공용어가 영어지만,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비율은 별로 높지 않다. 백인의 60%는 아프리칸스어, 32%가 독일어, 나머지가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각각의 부족의 언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2001년 국세조사에 따른 가정어 사용비율을 보면 오시밤보어(48%), 아프리칸스어(11%), 나마/다마라어(11%), 카방고어(10%), 헤레로어(8%) 순이었다. 1991년 조사 때 9%로 4위였던 아프리칸스어는 공식어의 지위가 박탈되었지만 11%로 2위로 올라섰다. 영어는 조사항목에 없었다. 독립 후 누조마 대통령은 영어화를 추진했지만 일상에서 영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아프리칸스어를 월등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아프리칸스어는 1990년까지는 공용어였고 독일어는 준공용어였지만 현재는 지역 언어로 격하되었다. 독일의 식민지(1883년~1915년)였기 때문에 루터교회가 아프리카에서 드물게 다수인 나라다. 현재 나미비아의 기독교인은 85%이며 이 가운데 50%가 루터교파다. 토착화된 종교는 15%를 차지한다. 1990년 독립과 함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동시 수교하였다. 일정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제도를 나미비아의 오치베로 마을에서 실시했다. 기본소득연합에서는 오치베로 주민 930명 모두가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매달 NAD 100, 한국돈으로 9천 원 정도를 받게 했다. 2018년 한국방송 취재 당시, 41살인 프리다 넴봐야 씨의 사례를 보면 기본소득이 빈곤층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작농 시절 한 달에 만 5천 원도 못 벌었지만, 지금은 빵집을 운영하여 소득이 20배 이상 높아졌다. 나우루 나우루(, )은 오세아니아의 공화국이다. 정식 명칭은 나우루 공화국이며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에 있다. 가장 가까운 섬은 동쪽으로 300 km 정도 떨어져 있는 키리바시의 바나바 섬이다. 면적 순으로는 세계에서 바티칸 시국, 모나코 다음인 세 번째로 작고, 공화국 중에서는 가장 작다. 인구 순으로는 바티칸 시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적다. 미크로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인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추정되며, 19세기 말에 독일 제국에 의해 합병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나우루는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승인을 받아 국제 연맹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우루는 일본 제국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나우루는 다시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나우루는 1968년 독립을 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 나우루는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였다. 나우루는 섬의 표면이 인광석으로 된 섬이어서 간단한 노천 채굴만으로도 쉽게 채굴을 할 수 있었다. 나우루는 Pacific Phosphate Company가 1907년, 처음 채굴을 시작한 이래로, 1919년 설립된 영국 인산염 위원회를 통해 인산염의 주요 수출국이 되었다. 이후, 나우루 인산염 주식회사를 통해 자원의 소유권을 돌려받았고, 1980년대에 자원이 고갈될때까지 소유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 이유로 나우루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주권국들 가운데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중 하나였다. 인광석이 고갈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인산염이 고갈되고, 무분별한 채광으로 인해 환경이 급속도로 오염되자 나우루 경제의 심각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돈을 벌기 위해 나우루는 조세 피난처와 불법적인 돈세탁 지역이 되기도 했다. 나우루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 밀입국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수용소를 짓는 조건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았다. 나우루의 유일한 공항은 나우루 국제공항이다. 나우루의 인광석이 모두 떨어지면서 2005년 12월, 섬과 바깥을 잇는 항공사였던 나우루 항공이 운행을 중단함에 따라 2006년 1월부터 9월까지 나우루 사람들은 오직 배를 타고서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2006년 10월, 중화민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아워 항공이란 이름으로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나우루를 주 2회 운항하고 있다. 미크로네시아와 폴리네시아 민족이 정착했다고 추정된다. 1798년에 영국인 탐험가 존 피언 선장이 나우루를 서양인으로서는 가장 최초로 발견했다. 1888년 독일령이 되었다. 1900년경 영국인이 이 섬의 최대 자원인 양질의 인광석을 발견해 1906년에 영·독 합자회사에 의해 그 채굴이 시작되었다. 1914년 호주군에 점령되었고, 1920년에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다가, 전후(戰後) 1947년에 영국·호주·뉴질랜드 3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 뒤 원주민 사이에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1966년 입법평의회를 설치하고, 1968년 1월 31일에 독립하였다. 독립한 즉시, 영국연방에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였고, 2000년에는 정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2005년 7월 1일에 특별회원이 되었다. 2009년 12월 15일에 압하스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17일에는 남오세티야의 독립도 승인했다. 이 뒤에는 나우루가 압하스 공화국과 남오세티야를 인정해주는 대신, 러시아가 나우루에 돈을 대준 것이 밝혀졌다. 하나의 섬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지형이 평탄하여 최고점이 70m를 넘지 않으며 남서부에 부아다 호(湖)가 있다. 주요 자원이었던 인광석의 채취에 따른 자원 고갈로 섬 전체의 생태계가 황폐화되어 있다. 나라가 매우 작아 법률로 정해 놓은 수도는 없으나 행정 구역 가운데 가장 번화한 곳이 야렌 구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한다. 나우루는 대통령 중심제 나라이다. 국무 총리 제도는 없다. 또, 대통령은 18명의 호선으로 진출한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국회의원은 만 20세 이상이 되어야 선출할 수 있다. 정당은 나우루당과 민주당이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다, 국방으로서는 군대는 없고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를 담당한다.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군부를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여, 삼권분립이 아닌, 사권분립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UN 미가입국이었다가 1999년 UN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980년대 초 나우루는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였다. 나우루의 경제는 산호섬과 풍부한 인광석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수요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2000년대 이후 인광석의 고갈로 인하여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섬에는 메넹 호텔과 OD-N-아이워(OD-N-Aiwo) 호텔이 있지만, 관광 수입은 아주 적은 편이다. 주민세는 없으며 실업률은 90%에 달한다. 나우루의 노동자 중 95%는 정부에 고용되어 있다. 이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0년 중반부터 외국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관련 제도를 완화시켰는데 이 결과 나우루는 외국인들이 비밀 송금 및 페이퍼컴퍼니 설립이 난무해 결국 OECD에서 2000년에 나우루를 조세피난처로 발표했다. 이후 현재 은행들의 면허가 잇따라 취소되어 2006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은행이 문을 닫아 금융거래 자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또한 1997년부터는 누구든 ‘돈만 내면’ 여권을 발급해주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나우루에 살지도 않는 이들에게 1000여개의 여권이 검증 없이 발급되었으며 심지어는 아제르바이잔 출생의 한 남성이 이런 방식으로 나우루 여권을 취득 후 중국 항저우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후 약 7년동안 은행이 없다가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벤디고 앤드 애들레이드'은행이 나우루에 지사를 설립하는 것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은행 설립 비용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 난민 수용을 조건으로 지급하는 지원금이 사용될 것이며, 이번 은행 설립 추진으로 나우루 국민들은 다시 은행 업무 재개의 혜택을 받을 예정이다. 나우루의 기후는 땅의 근접 때문에 뜨겁고 극단적으로 다습한 기후가 연중 계속된다. 2006년 말 나우루의 인구는 9,265명이었다. 전에는 인구가 그보다 많았으나 2006년 인광석의 양이 급격히 준 것이 원인이 되어 1,500여 명에 달하는 키리바시와 투발루 출신 노동자들의 대귀환이 이루어졌다. 공용어는 나우루어이지만, 영어도 널리 쓰인다. 1968년에 제정한 현행헌법은 공용어에 대한 성문규정은 없지만, 두 언어를 함께 쓰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나우루인이 58%, 기타 태평양 섬나라의 출신이 26%, 화교가 8%, 백인이 8%이다. 모든 백인들은 독립 때 남겨진 영국인이다. 나우루 국민의 33% 정도가 개신교(회중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인데, 로마 가톨릭의 비중(30%)도 크다. 이외에 소수인 불교, 토착 종교가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제한하기도 한다. 문해율은 96%다. 6세~15세까지 의무 교육을 시행하고 있으며 11, 12학년은 의무교육이 아니다. 남태평양 대학 캠퍼스가 나우루에 있다. 이 대학이 들어서기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나 뉴질랜드로 대학교육을 위해 유학을 갔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성인의 90%는 BMI 지수가 평균 이상이다. 또한, 당뇨병 발병률이 40%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신장 질환과 심장병도 흔하다. 기대수명은 2006년 기준으로 남자 58세, 여자 65세이다. 나우루는 독일에 합병되었을 때 독일에 의해 전통 춤이 금지당한 적이 있지만 씨족 사회적 특징은 유지하고 있다. 현대문명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가 짙은 편이다. 대한민국과는 197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2년에 수교하였다. 중화민국과 수교중인 나라이기도 하다.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 또는 나이지리아 연방공화국()은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로서, 183,523,000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는 1위이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아부자, 최대도시 라고스, 그리고 이바단, 오쇼그보, 카두나 등이 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인이 침입하여 노예무역의 근거지로 삼은 연유로 해서 ‘노예해안’이라고 불린다. 19세기에 침투하기 시작한 영국 세력이 20세기 초에 여러 부족을 진압, 지금의 나이지리아를 총독 통치하에 넣었고 남부 나이지리아 보호령,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령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나이지리아에서 살던 흑인들이 대부분 노예로 미국의 대통령 가문이나 부잣집에 팔려갔다. 노예무역은 정부, 사기업 가리지 않고 자행됐다. 특히, 영국인, 네덜란드인, 포르투갈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아프리카인들에 의해서도 종종 일어났다. 반노예무역 여론이 거세지자, 영국은 국제 노예무역을 1807년에 불법화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영국은 서아프리카 함대(West Africa Squadron)를 창설했고, 노예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1960년 10월 1일 토요일, 영국으로부터 영연방의 자치국으로 독립했으나, 북부의 하우사족과 풀라니족, 서부의 요루바족, 동부의 이그보족 등 대부족들을 단일통치체제 속에 묶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이 일어났다. 1963년에는 연방제 국가가 되었다. 특히 독립 후, 부족간의 반목이 격화되었고 존슨 아그이-이론시 대통령이 암살된 후 1966년 북부 앙가스족 출신 야쿠부 고원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에 오두메구 오주쿠가 이끄는 이그보족이 반란을 일으켜 1967년 5월 동부에서 비아프라 공화국을 선포했다. 결국 고원이 비아프라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비아프라 공화국이 점령당하면서 1970년에 끝났다. 1975년 군부에 의해 고원이 해임되고 무르탈라 모하메드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그 역시 암살당하고 끝없는 혼란 속에서 독재자 사니 아바차가 대통령이 되어 석유 기업 셸과 함께 개인 사업을 벌였고 석유 약탈을 당하던 오고니족을 박해했다. 이후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잦은 내전과 쿠데타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굿럭 조너선 대통령은 2013년 1월 23일에 다보스 포럼에 참석하면서 말리사태가 해결이 안 되면 다른 서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2015년 3월 28일과 3월 29일에 실시된 나이지리아 대선에서 무함마두 부하리가 대통령 굿럭 조너선을 누르고 당선됐다. 한편, 선거 기간 동안에도 보코하람은 테러를 자행해, 투표소로 향하는 유권자에게 총격을 가하거나 투표소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최소 41명이 죽었다. 전체 면적은 923,768km이며 세계에서 32번째로 큰 나라이다. 서쪽으로는 베냉, 동쪽으로는 차드와 카메룬, 북쪽으로는 니제르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니 만과 대서양에 면하고 있다. 지형은 국명을 낳은 니제르강 계곡·해안평야 및 동부의 산지, 그리고 북부의 하우사 고원으로 구분된다. 해안지대는 열대우림, 내륙부는 열대 사바나이다. 북으로 갈수록 강우량은 감소된다. 북부는 덥고 건조하며 남부는 습한 편이다. 북부의 우기는 4월부터 9월 사이이고 남부의 우기는 3월부터 11월 사이이다. 11월 부터 3월까지 하르마탄 열풍이 불 때에는 먼지 날리는 건조한 기간이 길게 이어진다. 나이지리아는 연방제를 채택한 나라로, 36개의 주(state)와 연방 수도 지구(Federal Capital Territory)로 구성된다. 나이지리아는 비동맹중립노선을 기조로 하였으나 한때 친소(親蘇) 노선을 걷기도 하여 미국,영국 등 서방국과의 관계가 한때 소원해지기도 했으나 1977년 서방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영연방 가입국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6년에, 대한민국과는 1980년에 수교하였다. 손원일(당시 주서독 대사) 특사 일행은 1960년 7월, 나이지리아를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1980년 2월 22일 양국은 국교 수립에 합의하여 3월 24일 이코이 호텔에 공관을 개설하였고, 7월 1일 공관을 임차하여 영사업무를 개시하였으며, 7월 10일 신기흠 초대 대사가 부임하였다. 1981년 3월 2일 임동원 제2대 대사가 부임하였고, 1982년 12월 현 청사 부지를 확보하고, 1984년 8월 13일 현 청사를 준공하고 입주하였다. 1985년 1월 21일 노창희 제3대 대사가, 1987년 12월 15일에는 오채기 제4대 대사가, 1991년 1월 13일에는 조명행 제5대 대사가 부임하였다. 1994년 3월 15일 안종구 제6대 대사가 부임(4월 24일 신임장 제정)하였고, 1996년 3월에 신수도인 아부자에 사무소를 개소하였으며, 1996년 3월 30일 이동진 제7대 대사가 부임하였고(1998년 4월 26일 신임장 제정), 1999년 3월 8일 정문수 제8대 대사가 부임하였고(1999년 4월 16일 신임장 제정), 2002년 2월 27일 박신웅 제9대 대사가 부임하였고 (2002년 4월 26일 신임장 제정), 2004년 3월 18일 김동원 제10대 대사가 부임하였다. 2006년 3월에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나이지리아를 공식 방문하였고, 2006년 3월 28일 이기동 제11대 대사가 부임하였고, 2009년 3월 9일 박영국 제12대 대사가 부임하였다. 2005년 한국석유공사는 나이지리아의 OPL321, 323 탐사광구 사업을 낙찰받아, 2006년 3월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오바산조 당시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생산물 분배계약까지 체결했다. 그러나, 2007년 5월 우마르 무사 야라두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전임 정부에서 시행된 석유 광구 분양에 대해 전면조사를 실시, 한국컨소시엄(석유공사, 한전, 대우조선해양 등)의 OPL321, OPL323 광구 분양 건도 상기 조사대상에 포함되면서 광구 탐사권을 무효화시켰다. 이 나라는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때 선수단과 임원을 서울로 파견하였다. (단, 2002년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했던 FIFA 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 축구 대표팀은 F조였기 때문에 일본으로 파견됨) 아직 한국과의 직항편이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이집트 등 제3국을 경유해야 하는 불편이 남아 있다. 이 나라는 내전이 일어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한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는 블랙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OPEC에 가입하였으며, 경제규모는 아프리카의 유수한 곳이다. 1996-2005년에는 연평균 4.3%의 경제 성장을 기록하였다. 상품작물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남부 해안에서는 기름야자·코코야자, 서남부에서는 카카오·고무, 북부 사바나 지역에는 낙화생과 면화가 재배되고 있다. 모두가 원주민의 소규모 농업이다. 세계 유수의 산유국으로 총수출의 90%를 석유가 차지하며, 그 밖의 지하자원으로는 석탄·컬럼바이트·주석 등이 수출되고 있다. 신식민주의의 전형으로 꼽히는 나이지리아 경제는 외화 수입의 80%가 석유 수출이고, 그 석유 수출량의 절반 이상을 로열 더치 쉘이 차지한다. 나이지리아 역대 최고 권력과 쉘의 관계는 상호 유익한 공생관계이다. 쉘은 40여 년 동안 약 300억 달러 상당의 나이지리아 석유를 서양(주로 미국)에 판매했고, 나이지리아의 역대 정권은 석유 소득 이외에도 쉘이 수입해준 무기와 쉘의 돈과 정권의 해외 홍보 혜택도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다. 하지만 에도어, 에픽어, 풀라어, 하우사어, 이도마어, 이그보어, 중부 카누리어, 요루바어 등의 언어들도 널리 쓰이고 있다.. 교육은 잘 보급되어 있고 대학이 13개 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프랑스어 사용도 있으며, 주변국이 프랑스어 사용국가들로 프랑스어 교육도 일부적으로 실시되어가고는 있다. 하지만 프랑코포니의 회원국이 아니다. 이박에도 극소수의 영국인이있다. 250개 이상의 부족이 거주한다. 북부의 하우사족 및 풀라니족이 인구의 29%, 남서부의 요루바족이 21%, 남동부의 이그보족이 18%, 이자우족 10%, 카누리족 4%, 이비비오족 3.5%, 치부족 2.5%로 등 구성되어 있지만, 민족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현재는 주가 세분화되고 있다. 기독교가 58%, 이슬람교가 41%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전통 신앙도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안부에는 기독교도가 많고, 나이지리아의 이슬람교도 비율에 대한 주장은 60%로 집계하는 무슬림측의 주장과 30%라는 비이슬람교도측의 주장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다. 북부는 이슬람교 지구에 속해 있다. 나이지리아의 기독교 최대교단은 나이지리아 성공회로 1,300개의 교회를 갖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RSA, )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자리한 공화국이다. 줄여서 남아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쪽으로는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접해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모잠비크, 에스와티니와 접한다. 1966년에 독립한 내륙국인 레소토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 안에 둘러싸여 있다. 수도는 3개로 행정 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 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 수도는 블룸폰테인이다. 148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서 백인들이 남아공지역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65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케이프타운에 정착촌을 건설하고서 해상물류를 위한 보급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679년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이민온 신교도 정착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였고, 그들은 스스로 보어(Boer)인이라 불렀다. 보어란 말은 네덜란드어로 "농부"란 뜻이다. 이들은 점차 내륙과 동부해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원주민과 자주 충돌했다. 1795년 영국 군대가 케이프타운을 점령하고서 1814년에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인은 1820년대부터 대량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보어인은 내륙으로 내몰리면서 영국과 보어인 사이 갈등이 커졌다. 1909년 영국 의회에서 남아프리카법을 통과시켜 남아프리카 연방이라는 입헌군주국형태의 자치체로 승인했고, 이듬해 1910년 정식으로 영연방국가 일원으로 독립했다. 1948년 영국계보다 숫적으로 우세한 보어계가 주축인 우익정당 국민당이 집권하여 영국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종래 인종차별관행을 제도화한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를 펼쳤다. 1961년 백인들만의 국민 투표에 의해 개헌이 되어 영국 여왕의 통치를 벗어나 대통령을 세우고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상징적인 지위였고 총리에게 실질적 권한이 있었으나 1983년 다시 한번 개헌이 되어 총리직을 철폐하고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갖게되었다. 1961년 공화국 수립시 여타 영 연방 국가들의 반발로 영 연방에서 탈퇴되었다가 1994년에 다시 복귀했다. 1960년대 이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1970년대 들어서는 이웃의 앙골라, 모잠비크와 적대관계가 되자(앙골라는 나미비아 독립운동을,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 1980년대 말까지 총 6기의 핵무기를 개발했다. 다만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추가 핵무기 생산계획이 대통령에 의해 취소되는 등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1989년 당선된 클레르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과 핵무기 폐기를 추진, 1991년까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보유한 모든 핵무기를 폐기했다.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서 국제사회의 제재 및 통제를 받아왔으며 결국 유엔으로부터 1945년 가입 이래 강제축출되고 지위권마저 박탈되어서 한동안 안보리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넬슨 만델라 정부가 출범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되면서 유엔에 재가입되어서 복권되었고 안보리이사회에서도 다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비정치기구인 국제 올림픽 위원회와 국제축구연맹으로부터도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여파를 주게되어서 1960년 로마 하계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 대회부터 참가가 정지되었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부터 참가지위를 회복하여 다시 참가하였고 월드컵에서도 아프리카 지역예선에 출전이 제한되었다가 지위를 회복하여 다시 출전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국내외 여론의 압박에 못이긴 국민당정권은 인종차별정책폐기를 선언하고 1990년 상징적으로 흑인 운동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여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흑인계의 정치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로의 정권이양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4년 남아공사상 첫 보통선거가 치뤄지고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하여 첫 흑인대통령으로 넬슨 만델라가 선출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사임한 이후, 2009년 새로운 대통령으로 제이컵 주마가 당선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몇 안 되는 다당제가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이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 제도로, 모두 임기 5년의 《전국국가평의회》(90명, 상원), 《국민의회》(400명, 하원)로 구성되고, 원수가 되는 대통령은 의회의 의결로 선출된다. 2009년 5월 6일 국민의회(하원)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제이콥 주마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금액도 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입법부는 케이프타운 도시권, 행정부는 츠와나 도시권(프리토리아), 사법부는 블룸폰테인에 위치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세 번의 선거가 실시되어 모두 인종차별 투쟁을 주도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70%에 가까운 득표로 압승했다. 아프리카너와 보수에 지지 기반을 둔 《민주동맹》(DA), 콰줄루나탈 주를 기반으로 하는 《잉카타 자유당》(IFP), 한때 정권을 집권했던 국민당과 ANC의 탈당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통일민주운동》(UDM)이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전체 의석의 70% 이상이 ANC가 차지하고 있다. 이후 UDM은 약화되어 해체되었고, 사임한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을 지지자들이 ANC에서 탈당해 《국민회의》(COPE)를 창당해 ANC에 대안 정당으로 부상하고자 하였으나 2009년 총선에서 별다를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ANC 또한 전 정권의 부패와 주마 현 대통령의 각종 스캔들로 말미암아 주요 지지 기반인 흑인들로부터 예전같은 열렬한 지지를 얻지 못하였고, 이는 곧바로 의석수 감소로 이어졌고, 개헌선인 2/3에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인이 주요 지지 기반인 DA는 ANC와 COPE의 분열로 인한 흑인표 분산, 그리고 흑인 정권의 부패와 스캔들에 따른 ANC의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부상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웨스턴케이프주》에서 ANC를 압도적으로 누르는 등 이전 선거에 비해 눈에 띠는 큰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2014년 선거에서 COPE가 참패하고 EFF당이 경제 정책을 내세워 큰 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행정 중심지는 프리토리아이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을 겸직하고 의회를 조직한다. 1994년에 설치된 헌법재판소 외에, 대법원을 필두로 하는 세 심사 제도의 사법 제도이다. 사법부는 블룸폰테인에 위치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농목업이 발달하여, 남부 고원 지대에서는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고, 서부 지역에서는 밀이 많이 생산된다. 또한 지중해성 기후 지대에서는 밀과 함께 포도, 오렌지, 설탕 등이 산출되기도 한다. 한편 내륙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는 양을 많이 기르는데, 양모를 수출하기도 한다.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광공업이다. 지하자원으로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백금, 망간, 크롬, 안티몬, 석탄, 철광석 등이 산출되는데, 대부분이 트란스발 주(Transvaal)에 집중되어 있다. 금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60% 정도가 산출되는데, 요하네스버그가 그 중심지다. 다이아몬드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약 20%를 차지하며, 킴벌리(Kimberley)에서 특히 많이 생산된다. 석유의 생산은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제철, 기계, 화학, 섬유, 자동차 등이 특히 발달하였다. 최근 다임러 크라이슬러사가 더반 시내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건설하였고, 메르세데스 벤츠 C 클래스의 오른쪽 핸들 차량을 생산하여 출하를 시작했다. 이 차량은 주로 일본이나 영국에 수출하고 있다. 또한 BMW, 폭스바겐과 닛산 자동차 등 수출 거점으로서 남아공에 공장을 두고 있다. 게다가 이 기지는 동해안의 포트엘리자베스에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GDP 성장률은 2005년 5.1%, 2006년 5.0%으로 견조한 성장이 계속 되고 있다. JSE는 세계적인 증권거래소이다. 1인당 GDP는 2008년 시점으로 4,605 달러(MER), 10,119 달러(PPP)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후 전력 수요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소의 건설이 10년 이상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2007년 무렵부터 전력 부족이 문제가 되었다. 2008년 1월에는 남아프리카 전력공사(ESCOM)는 계획 정전을 실시하였고, 당시 호경기를 맞이하던 백금 광산의 조업이 제한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백금의 시세를 상승시켰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ESCOM는 주변 여러 나라에서 송전이나 발전소 증설을 계획하고 있지만, 전력 부족은 2015년까지는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으로 되어 있다. 대서양과 인도양 두 대양에 걸친 2500킬로미터가 넘는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오렌지 자유주와 나탈 경계에는 드라켄즈버그 산맥(최고봉 타바나 은틀레니아는 표고 3,482미터)이 있다. 케이프 주의 내륙 대지의 남쪽은 해안선과 병행해서 달리는 표고 2,000∼2,700m의 산맥이 있다. 해안 지방과 하천 유역은 농업에 적합하다. 남아프리카 최대의 오렌지 강이 국토의 중앙을 횡단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그밖에 림포포 강, 발 강 등이 있다. 기후대는 전체적으로 내륙 지방은 반건조 기후이지만, 지역별로 변화가 커서, 동쪽 지대는 온난 습윤 기후와 나미비아 부근의 칼라하리 사막으로부터 모잠비크와의 국경 부근의 아열대 기후, 남서쪽 해안 지대는 지중해성 기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어 4계절이 대한민국과 반대이며, 습한 지역보다는 건조한 지역이 많다. 과도한 목장으로 인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남서부는 겨울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 북동부는 아열대성 기후이다. 트란스발의 고저에는 겨울에 서리가 내리며 여름에는 적당한 양의 비가 내린다. 강우량은 서에서 동으로 갈수록 많아지며 여름 6개월 동안에 집중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주민 수는 약 5천만명으로 대한민국과 비슷하며, 이들 주민은 문화, 언어, 신앙 등이 저마다 달라 다양성이 넘친다. 201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계청(Statistics South Africa)의 인구 조사 는 응답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다섯 가지 인종 구분 가운데 하나로 고르게 하였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은 반투족과 호텐토트 족 그리고 부시먼 족이었으나, 호텐토트 족과 부시먼 족은 반투 니그로 족과 유럽인에게 쫓겨 칼라하리 사막 주변으로 옮겨 갔고, 지금은 주로 보어 족과 영국계의 백인이 거주한다. 백인은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치·경제적인 실권을 쥐고 있으며, 아파르트 헤이트가 철폐되기 이전에는 흑인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종 차별 정책을 사용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 대부분이 스스로를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문화상으로나 언어상으로나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주요 민족은 줄루족, 코사족, 바소토족(남 소토), 바페디족(북 소토), 벤다족, 츠와나족, 총가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 등이다. 줄루족, 코사족, 바페디족, 벤다족 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있다. 다른 집단은 거주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웃 나라와 겹친다. 바소토족은 레소토의 주요 민족이다. 츠와나족은 보츠와나의 다수 민족, 스와지족은 에스와티니의 다수 민족이다. 은데벨레족은 짐바브웨의 마테벨렐랜드에도 사는데, 거기서의 민족 명칭은 ‘마테벨레’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샤카의 탄압을 빗겨가기 위해 그곳으로 떠나 정착한 줄루족의 후예로 줄루어를 쓴다. 총가족은 모잠비크 남부에도 거주하는데, 거기서는 샹간족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남부에 많이 거주하는 네덜란드계 백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인구 중 60%를 차지하며 남아프리카의 실권을 잡고 있다. 이들을 보어인이라고 하며, 이들 백인은 대부분 네덜란드인, 독일인, 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인, 아일랜드인 등 식민 이주자의 후손이다. 언어상으로는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영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크게 나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민해 온 소수 집단은 다른 언어를 쓰기도 한다. 백인 인구는 낮은 출산율과 국외 이민으로 줄어들고 있다. 컬러드(Coloured, 유색인)란 명칭은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 당시 희망봉 주변에 살던 원주민인 코이산족, 원주민인 아프리카 흑인, 네덜란드인/아프리카너인과 영국인을 비롯한 백인, 자바인, 말레이인, 인도인, 마다가스카르인, 그 외 포르투갈인과 버마인을 비롯한 여러 유럽·아시아인 등 다양한 집단이 혼혈된 후손을 이르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 아프리칸스어를 쓴다. 코이산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옅고 키가 작다는 데서 함께 묶어서 다루는 두 집단을 함께 일컫는다. 이들은 유럽인이 ‘호텐토트’라 부른 농경인 코이코이족과 수렵 채집인 부시먼이다. 또 더 최근에 들어온 유색인 집단도 있는데, 옛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나미비아에서 들어온 유색인과 인도와 버마에서 인도와 버마의 독립 이후 희망봉을 찾아온 영국인-인도인, 영국인-버마인 혼혈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시아인은 대부분 인도계이다. 상당수는 19세기에 당시 나탈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동부 해안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계약 노동자이다. 약 10만 명쯤 되는 화교도 살고 있다. 영어를 비롯하여 북소토어, 벤다어, 소토어, 스와티어, 아프리칸스어, 남은데벨레어, 줄루어, 총가어, 츠와나어, 코사어 등 총 11개의 공용어가 있다. 공용어가 아닌 언어를 모어로 쓰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2% 이하이다. 대부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은 다중언어 구사자들이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는 영어와 네덜란드어가 공용어였으며, 1925년에는 아프리칸스어가 공용어로 추가됐고 일상 생활에서는 사용자가 크게 줄어든 네덜란드어를 대체했다. 1984년에는 네덜란드어가 공용어에서 빠져 1994년까지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 두 언어가 공용어였다. 1994년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집권한 뒤로 영어가 정부에서 주요 언어로 쓰이고 있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든 토착어 사용에 다소간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상업에서는 영어와 함께 아프리칸스어가 주로 쓰이며 두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화자가 가장 많다. 언어학적으로 봤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용어는 두 개의 서게르만어군 언어와 아홉 개의 반투어군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반투어군 가운데 남은데벨레어와 줄루어, 코사어는 응구니어에 속하고, 북소토어와 소토어, 츠와나어는 소토츠와나어에 속하며 총가어는 츠와롱가어에 속한다. 줄루어, 코사어, 아프리칸스어 순서대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모어로써 흔히 쓰인다. 영어는 모어로 쓰이는 언어 가운데 네 번째로 흔한 언어이지만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서 통용되며 정부와 언론에서 많이 쓰고 있다. 대부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은 반투어군의 소토츠와나어 또는 응구니어에 속하는 언어를 쓴다. 두 집단에 속하는 언어들은 대부분 서로 이해가 가능하다. 아홉 개의 토착어들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응구니어에 속하는 언어들은 주로 남동쪽에서 쓰이며 소토츠와나어에 속하는 언어들은 주로 북쪽 내륙 지역과 보츠와나 및 레소토에서 쓰인다. 하우텡 주는 여러 언어들이 섞인 지역으로 응구니어 사용자와 소토츠와나어 사용자, 인도유럽어족 언어 사용자가 거의 비슷해 도심 지역에서는 여러 언어가 뒤섞인 은어가 생기기도 했다. 네덜란드어에서 나온 아프리칸스어는 서쪽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로 약 61%의 백인들과 76%의 컬러드들이 모어로 쓰고 있다. 아프리칸스어는 내륙 지역과 북쪽에서도 널리 쓰이며 농촌 지역의 흑인들이 제2언어 또는 제3, 제4언어로 쓰고 있다. 헌법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쓰이는 토착어로는 파나갈로어, 로베두어, 북은데벨레어, 푸티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로베두어는 북소토어의 사투리라는 주장이 많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 인도 아대륙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외국어들이 쓰이고 있다. 그리스어, 구자라트어, 힌디어, 포르투갈어, 타밀어, 텔루구어, 우르두어, 이디시어, 이탈리아어 등은 오래 전부터 쓰였으며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쓰는 사용자들도 적은 수가 있다. 공용어가 아닌 이 언어들은 이 언어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고 알려진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반(半)공식적으로 쓰일 수 있다. 공용어가 아닌 언어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사용자 수가 늘고 있는 언어는 포르투갈어로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온 이민자 및 난민들 사이에서 주로 쓰였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어권인 중앙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 사이에서 쓰이며 역시 사용자 수가 늘고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 제1장(설립 조항)과 제6장(언어)은 정부의 언어 정책의 근간이다. 1996년 12월 16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서명한 영문 헌법에서는 언어의 이름들이 대부분 해당 언어의 이름으로 쓰였다. 세소토(Sesotho)는 소토어를 뜻하며, 이시은데벨레(isiNdebele)는 남은데벨레어를 뜻한다. 다만 북소토어를 넓은 의미의 세소토 사 레보아(Sesotho sa Leboa)가 아닌 주요 사투리인 세페디(Sepedi)로 규정한 것과 벤다어를 옳은 표기인 Tshivenḓa가 아닌 Tshivenda로 표기한 것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다. 남아공의 기독교 비율은 79.8%이다. 기독교가 처음 남아공에 유입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보어인(농민)이 이민해 오면서부터였고(대부분 개혁파교인), 그 후에 영국의 식민 정책과 아울러 성공회를 비롯하여 잉글랜드 감리교, 침례교, 스코틀랜드 장로교 등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백인은 흑인 원주민을 자신들과 차별을 두기 위하여 인종격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이용하였으며, 교회조차도 백인의 흑인 지배원리에 종교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그 실례로 남아공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잘못을 이단적인 행위 곧 기독교의 교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선언하였다. 현재 남아공의 기독교 교단 대부분은 정체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반면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단은 남아공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립교단이다. 서양 열강의 식민정책과 아울러 함께 들어온 기독교가 남아공 전지역에 걸쳐 쉽게 정착은 하였으나, 식민정책이 끝이 나면서 반기독교 정서와 정책으로 무슬림 지역으로 변하거나, 전통 종교와 혼합된 이른바 혼합주의(Syncretism) 기독교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종교 사회이고 피부색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아프리카인(人)과 영국인 모두 어느 한쪽으로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전통의 흑인 문화는 크고 작은 여러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전통 흑인 문화는 도시가 아닌 지역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남성의 힘과 정신을 하나의 신으로 여기고 일부다처의 문화가 허용된다. 또한 부와 제물의 상징으로 양을 키우는 것도 문화의 한 형태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연방의 일원으로 럭비, 축구, 크리켓 같은 영국식 스포츠가 인기를 끈다. 올림픽에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백인만 참가하며 우승하기 마련이었다. 1964년부터 아파르트헤이트 문제로 7개의 대회 참가가 금지되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폐지 이후에야 참가가 허용되었다. 럭비 월드컵에서는 1995년과 2007년 우승하였고, 월드컵 축구 대회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부터 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6월 12일부터 7월 11일까지 아래의 도시와 경기장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멕시코와 대등한 경기 끝에 1-1로 비겨 16강 진출을 성사시키려는 듯했으나 이어 벌어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디에고 포를란에게만 2골을 허용한 끝에 0-3 대패를 당한데 이어 프랑스와의 경기는 2-1로 이겨 1승1무1패 승점 4점으로 멕시코와 승점이 같았으나 골 득실에서 밀려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불명예를 당했다. 남아공화국 내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목록에 등록된 문화유산이 4건, 자연유산이 3개, 복합유산이 1개가 있다. 철도를 비롯하여 자전거의 교통이 특히 도시지역에서 활발하며, 특히 철도는 호화열차 블루트레인으로 유명하다. 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는 내륙 고원에 위치한 도시로 연방 정부가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 된 항구 도시인 케이프타운(Cape Town)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연방 의회가 있는 곳이다. 입법 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 수도는 블룸폰테인, 행정 수도가 프리토리아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구역은 9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주 밑에 다시 수십개의 Local Municipality와 Metropolitan Municipality가 있고 그아래 City와 Town이 존재한다. Metropolitan Municipality는 8개가 있는데 요하네스버그를 중심으로 하는 City of Johannesburg Metropolitan Municipality,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하는 City of Cape Town Metropolitan Municipality, 더반을 중심으로 하는 eThekwini Metropolitan Municipality, 저미스턴(요하네스버그 서부,프리토리아 남부)을 중심으로하는 Ekurhuleni Metropolitan Municipality, 프리토리아를 중심으로하는 City of Tshwane Metropolitan Municipality, 포트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하는 Nelson Mandela Bay Metropolitan Municipality, 이스트런던을 중심으로하는 Buffalo City Metropolitan Municipality, 블룸폰테인을 중심으로하는 Mangaung Metropolitan Municipality 순으로 인구가 많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한국 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였으며, 이후에도 친서방과 반공을 대외 정책의 기조로 삼았으므로, 대한민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른 국제적 여론으로 정식 수교가 무기한 보류되다가,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된 후 1992년 12월 1일 뒤늦게 수교하게 되었다. 수교 후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1995년 방한하여 큰 환영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한국 전쟁 때의 적이었던 북측과는 1998년 수교하였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남아공이 한국에, 2010년 월드컵 때는 한국이 남아공에 대표팀을 파견하였는데, 두 나라 모두 해당대회에서 B조에 편성되었다. 대구에서 열린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남아공은 한국에 영어강사로 취업할 때의 자격조건인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나라’ 7개 중의 하나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국내의 비(非)백인에 대하여 버스나 열차, 호텔이나 식당의 이용 등 일상생활의 여러 면에서 차별 정책을 실시하여 왔다. 1945년 이후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은 종교적 그리고 법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선 백인 신도가 대부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DRC, Dutch Reformed Church)에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통한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는데, 이를테면 바벨탑 사건을 해석할 때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야훼의 징벌로 흩어졌으니, 인종분리정책으로 흑인, 아시아계 등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했던 사례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정의(Justice)와 평등의 실천은 ‘민감한’, ‘미묘한’ 등의 단어를 통해 회피할 정도로 백인 기독교 신자는 그들이 만들어낸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제도적으로도 1961년 헌법 개정, 20여 개에 달하는 인종차별 법안 제정과 개정이 행해졌는데, 하나같이 흑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하여 차별을 정당화하는 악법이었다. 이에 대해 흑인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폭력 항쟁으로 백인의 부당한 지배와 차별에 저항했는데, 1961년 샤프빌 항쟁, 1976년 소웨토 항쟁, 1986년 인민 항쟁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백인은 흑인 항쟁의 배후에 공산주의가 있다는 공산주의자 딱지 씌우기, 경찰과 정보기관의 탄압과 종족간 분쟁 유도로 흑인의 항쟁을 잔악하고 교활하게 탄압했다. 남아공을 지배하온 주류 백인사회가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와 프랑스 위그노에서 출발한 개신교도들인 점을 보면 남아공 기독교계가 인종차별에 저항했다는 것은 일반론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1949년 비주류 소수 백인 성직자들이 주도한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SACC, South Africa Council of Churches) 회의에서는 ‘다인종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교육, 직업, 선거의 기회와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남아공 교회의 인종차별 저항은 1980년대 가장 활발해졌는데, 흑인 성직자인 데스몬드 투투 성공회 주교(남아공 성공회 케이프타운 전 교구장), 백인 신학자 베이어스 노디아(Beyers Naudé), 알렌 보삭(Allan Boesak), 신학자 프랭크 치카네(현재 음베키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저항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카이로스 문서》("Kairos Document") , 《다마스커스 가는 길》("Road to Damascus") 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인종차별 저항조직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계나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도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참여했으며, 진보신학자들은 대한민국의 민중신학처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해석한 남아프리카 흑인신학을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였다. 흑인과 교회의 저항을 받은 백인 지배층은 1990년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고,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흑인지도자를 석방해야 했는데, 이는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 정책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흑인과의 협상을 통해 경제적 기득권도 계속 유지하고, 백인의 차별과 폭력에 대한 흑인의 보복을 피하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흑인은 여러 차례에 걸친 무장항쟁을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는 백인에게 저항하였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 최초로 흑백 연합 정부(흑인의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백인의 국민당 연합)가 수립되었으며, ANC(Africa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독자적으로 세운 귀국 망명자 위원회와 “ANC 회원이 자행한 ANC 죄수 및 구금자에 대한 만행 및 인권침해 조사위원회”에서 영향을 받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 설립이 있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민사상 책임을 면제해 주는 방식으로 과거사 청산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해자의 심리적인 부담감을 덜어줌으로써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인종차별 시대에 경찰과 방위군이 국가가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권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국가주의 논리로 ANC 활동가, 흑인의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 등을 고문하거나 살해했으며, 시체는 소각하거나 암매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인종차별이라는 사회구조적인 죄의 수혜자인 백인 의사 및 농부 등이 상처가 남지 않는 고문 방법을 알려주거나 자신의 농장을 고문 장소로 제공했으며, 경찰이나 방위군이 흑인을 ANC에 잠입시켜서 내부 분열을 조장하면 보수적인 언론이 흑인끼리 치고받고 싸운다며 악의적인 보도를 함으로써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네팔 네팔(, )은 남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부탄이 있다. 2007년 1월 15일에 왕정이 종식되고 과도 정부로 정치 체제가 변경되었으며, 2008년 5월 28일에 네팔 연방민주공화국(, )이 수립되었다. 2017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세워진 민주 공화국이다. 147,181km의 영역과 29,187,037(2017년 기준)명의 인구를 가진 네팔은 세계에서 93번째로 넓은 나라이고, 41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는 네팔에서 가장 큰 대도시로, 다양하고 풍부한 지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북부 산악지대는 에베레스트 산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산 중 8개가 분포해있다. 비옥하고 습한 남부는 매우 도시화되어 있다. 인구의 약 87%는 힌두교를 믿는다. 이는 인도보다 높은 수치이다. 불교는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하며 다수의 불교 사원이 있으며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가 있다. 네팔이라는 국명의 기원은 네팔의 수호신인 'ने'(Ne)와 보호라는 의미의 'पाल'(pal)을 사용하여 직역하면 '신의 보호'라 한다. 1768년 12월 21일에 왕조가 세워졌고, 1814년 영국 육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상당수 잃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상태로 놓이지는 않았다. 1990년에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변경되고 1994년 총선에서 네팔 통일 사회주의당이 정권을 잡았다. 1996년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이론을 따르는 마오이스트(Maoist)들이 네팔 인구의 37.8%를 차지하는 네팔 원주민(자나자티스)을 인적자원으로 한 무장투쟁을 시작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무장 투쟁 지도자는 프라찬다 현 네팔 공산당 당수이다.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던 비렌드라 전 국왕은 2001년 네팔 왕실 대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같은 해에 즉위한 마지막 왕 갸넨드라 시대에는 총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제 정치와 다름 없는 행각으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2007년 12월 23일 네팔은 국민 투표에 따라 군주제 폐지를 결정했다. 2008년 5월 28일에 네팔 제헌의회가 첫 회의를 열고 압도적인 찬성 속에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239년 동안 이어졌던 왕정체제가 끝나고 공화제로 변경되었다. 궁을 비우라는 의회의 통첩을 받은 네팔의 왕과 왕비는 2008년 6월 11일 군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카트만두의 궁전을 떠났으며 일부 왕의 지지자들이 앞길을 막는 시도도 있었다. 왕이 거주하던 궁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네팔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될 갸넨드라는 국민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히며 네팔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4월 제헌의회 총선에서는 마오쩌둥주의 계열의 네팔 공산당이 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차지하며 제1당으로 올랐으나, 2008년 7월에 열린 선거에서 제헌의회는 국민회의당의 람 바란 야다브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2008년 8월 15일, 제헌의회 투표에서는 네팔 공산당의 프라찬다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네팔은 길이 650 km, 너비는 200 km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이며, 전체 면적은 147,181 km²로 세계적으로는 94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자치구, 서쪽으로는 인도의 우타라칸드 주, 남쪽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와 비하르 주, 동쪽으로는 시킴 주와 웨스트벵골 주에 접하는 내륙국이다. 국경 길이는 총 2926 km, 그중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은 1236 km, 인도와의 국경 1690km에 달한다. 네팔은 비교적 작은 국가이나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펼쳐져 있는 습지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경계에 있는 히말라야 등 고산지대에는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곳이 많다. 네팔은 자연, 지리학적으로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산악 지대, 언덕지대, 그리고 습지대로 나뉘는데, 이러한 구분은 정부의 지역 개발 계획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북쪽의 중화인민공화국 국경 지대에는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m 급의 높은 봉우리를 포함한 히말라야가 존재한다. 따라서 고산 기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인도와의 국경 지역은 "타라이" "떠라이" 또는 "마데스"라고 하는 고온다습한 평원 지대가 있고, 비옥한 땅이다. 그중간에는 언덕이 펼쳐진다. 가장 높은 곳은 에베레스트로 해발 8850m. 가장 낮은 곳은 해발 70m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 접하는 네팔 북부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8000m급의 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고산 지대이며, 많은 등산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고산의 산간에는 빙하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고산의 눈이 녹아, 빙하 호수의 종괴가 문제가 되고 있다. 빙하 호수가 무너지면서 대량의 토사에 의한 토석류가 발생하여 큰 피해가 발생한다. 특히 에베레스트 기슭에 있는 임쟈호수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팔의 주요 봉들은 다음과 같다. 정치는 민주공화정이며 대통령은 비디아 반다리(2015년 10월 취임) 이다. 네팔의 대통령직은 명목상의 직책이며, 실질적인 정부 수반은 총리이다. 현 총리는 2016년 중순에 취임한 푸슈파 카말 다할 총리이다. 의회는 상, 하원 양원제로 알려져 있다. 네팔의 주요 정당은 네팔 의회당, 네팔 공산당이 있다. 본래 네팔은 군주국이었으나 2006년 민주화 운동(록탄트라 앤도란)의 결과, 기존의 사실상 절대군주국에서 잠정적으로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국호는 "네팔 왕국"에서 "네팔"로 변경하고 재외 공관의 표기도 "왕국"이 삭제되었다. 왕실을 찬양하는 국가를 폐지하고, 왕실과 결합된 힌두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국왕은 국군통수권을 상실하고 정부도 "국왕 폐하의 정부"에서 "네팔 정부"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여당인 네팔의회당과 다른 여러 당에서 제안되었던 왕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을 표명했다. 또한 임시 헌법에 네팔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이던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가 임시 정부 복귀 조건으로 했던 "왕제 폐지"와 "연방 민주공화제"가 포함되는 것이 정해져, 네팔의 국가 형태 이 왕제에서 공화제로 전환하는 것이 사실상 굳어졌다. 2008년 4월 10일 치러진 제헌 의회 선거(지역구 240, 비례 대표 335, 의회 임명 26)에서 프라찬다 의장이 이끄는 네팔 공산당 (마오쩌둥주의)가 229석(지역구 120, 비례 대표 100, 의회 임명 9)을 획득하여 제 1당이 되어, 네팔의회당이 115석(지역구 37, 비례 대표 73, 의회 임명 5), 통일공산당이 108석(지역구 33, 비례 대표 70, 의회 지명 5)을 차지하여 왕정 폐지파의 정당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왕정지지파 정당은 유일한 국가 민주당 네팔이 4석에 머물렀다. 같은 해 5월 28일 소집된 제헌 의회 첫 회의에서 찬성 560표, 반대 4표로 정식으로 왕제를 폐지하고 연방 민주공화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네팔의 행정 구역은 14개 지역 75개 군(district)이 존재하며, 5개 개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수도는 카트만두이다. 포카라 등의 주요 도시도 존재한다. 네팔은 세계적인 주요 육로, 항로, 해로 교통으로부터는 고립되어 있으나 국내에서는 항공 교통의 사정이 비교적 나은 편이다. 48개의 공항이 있으며 그중 10개는 포장된 활주로가 있다. 항공편이 자주 있으며 어느 정도 규모의 교통량을 보이고 있다. 이 나라의 3분의2를 차지하며, 언덕과 산이 많은 북부 지역에서는 도로나 다른 기반시설을 만드는 것이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 2003년 기준, 포장도로는 8500km이었고, 철도는 남부에 있는 59km짜리 한 개가 유일하였다. 이로써 철도 밀도는 4.00 km/10,000km(세계 143위)에 불과하다. 인도에서 카트만두 계곡으로 가는 믿을 만한 도로는 단지 1개뿐이다. 카트만두 행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실질적인 항구는 인도의 캘커타이다. 네팔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사탕수수와 담배가 주요 수출품이다. 하지만 험한 경사 때문에 생산력이 매우 열악하다. 2016년에는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해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서 100점 만점 중 21.9점을 기록해 여전히 심각한 수준의 기아상태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총 118개국 개발도상국 중 72위의 기록으로 여전히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네팔인이 주로 거주하며 인도인이나 부탄인도 거주한다. 불교 사원 근처에 티베트 난민촌이 있다. 네팔의 인구는 2005년 기준으로 27,676,547명이며, 인구증가율은 약 2.2% 정도이다. 연령분포를 보면 14세 이하가 39%, 15세부터 64세까지가 57.3%이고, 65세 이상 인구는 3.7%에 불과하여 평균연령은 20.07세(남성은 19.91세, 여성은 20.24세)로 낮은 수준이다. 여자 1,000명당 남자 수는 1,060 명으로 남자의 수가 더 많다. 네팔어가 공용어로 인구의 약 90%가 네팔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다양한 부족마다 부족 내에서는 부족어로 대화한다. 각종 미디어의 영향으로 많은 수가 어린 시절부터 힌디어를 듣고 이해하며 인도 국경 도시에서는 특히 힌디어가 많이 사용된다. 종카어도 사용된다. 영어는 700만 명 정도가 제2언어로 사용한다. 영어로 교육하는 사립 교육 기관이 많아 젊은층의 경우 영어가 매우 능숙하다. 과거 힌두교를 국교로 지정했던 나라로서 이 나라 국민들은 지금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영문 신문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네팔은 힌두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던 유일한 국가로서 인도와 함께 대표적인 힌두교 국가이다. 신헌법이 2008년 6월 15일부터 발효되어 국교를 폐지했다. 현재 전 국민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고 있으며 그 밖의 소수종교로는 불교가 있다. 이슬람교(4%), 기독교(1%)도 공존한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는 2500여 개의 사원과 신전이 있다. 1년에 50여 개의 힌두교 관련 축제도 개최하는 등 종교성이 상당한 나라이다. 교육을 받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며, 문맹률이 높다. 기본 학제는 '10+2 시스템'으로 초등학교 7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과정으로 되어 있다. 유명 대학은 카트만두에 국립 Tribhuvan 대학(전국 각지에 100여개 캠퍼스 운영)이 있으며 총 학생 수는 약 20만 명 정도이다. 네팔과 버마 양국 수상은 1960년 3월 9일 밤, 양국 간의 외교관계수립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과 네팔의 공식적인 교류는 1969년 5월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하고 1969년 7월 영사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1972년 6월 대한민국이 먼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주카트만두 총영사관을 설치하였고, 1974년 5월에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총영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네팔에서는 2007년 3월 7일 주한 네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모두 574명(재외국민 574명, 시민권자 0명)의 한민족들이 네팔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1974년 6월 2일, 네팔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외교관계를 대사급으로 체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노르웨이 노르웨이 왕국(, ), 약칭 노르웨이(, )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위치한 나라다. 수도는 오슬로이며, 공용어는 노르웨이어다. 주력 산업은 어업, 석유 산업 및 서비스업이다.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부분, 얀마옌섬, 스발바르 제도, 그리고 부베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385,207 km²이며 인구는 약 490만 명 정도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인구 밀도가 작은 나라다. 나라의 대부분이 동쪽의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노르웨이의 북쪽 지역은 남쪽은 핀란드, 동쪽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의 스카게라크 해협의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수도는 오슬로다. 북극해와 바렌츠해와 접하고 있는 해안선은 피오르로 유명하다. 특히 인구가 200명인 도시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르웨이는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목재, 해산물 등이 풍부하며, 지형을 이용한 대량의 수력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원 매장량은 엄청나 2011년 기준으로 세계 3위의 천연 가스, 5위의 석유 수출국이기도 하며, 관련 산업이 GDP의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에 힘입은 노르웨이 국부 펀드는 세계에서 제일 크며, 규모는 현재 한화 650조에 달한다. 세계 주식시장의 1%를 보유하고 있다. 무역은 항상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흑자 규모는 한국의 2배에 달한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에는 스웨덴의 총 경제 규모의 1/3밖에 되지 않았으나 결국 자원에 힘입어 200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2배에 달하는 옛 종주국 스웨덴을 총 경제력마저 추월하였다. 정치적으로 노르웨이는 입헌 군주제이며, 국가 원수는 하랄 5세이다. 노르웨이는 유럽 연합의 회원국은 아니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미국의 대표적 우방국 중 하나이다. 노르웨이는 유엔에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유엔군에도 참여하여, 특히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수단, 리비아 등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유엔, NATO, 유럽 평의회, 북유럽 이사회의 창립국 중 하나이며, 유럽 경제 지역, WTO, OECD의 멤버이자 솅겐 협정에 서명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01년부터 2006년, 그리고 2009년부터 가장 최근의 통계까지 노르웨이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세계 정상을 기록한 대표적 선진국이다. 2010년 기준으로 연간 근로시간은 약 1,400시간으로 주당 27시간 정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국민 중 하나다. 최저임금은 산업마다 다르나 연간 31만 크로네(약 6,100만 원)정도며, 2010년 기준으로 대졸자 초봉 평균은 42만 크로네다. 노르웨이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지방이다. 남북으로는 약 1,700 km로 길게 뻗쳐 있으나 동서는 가늘며, 가장 좁은 곳이 몇 km 밖에 안 되는 특이한 모양이다. 국토의 72%는 빙하의 침식을 받은 평탄한 꼭대기를 지닌 산지이다. 삼림이 24%를 차지하며 경지는 매우 적다. 해발 2,000 m 이상에는 만년설이나 빙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스칸디나비아산맥은 북부·중부에서는 스웨덴과의 국경으로 되어 있으나, 남부는 노르웨이 안에 펼쳐져 있으며, 이곳이 가장 높고 요텐헤임(2,452 m) 폭도 가장 넓다. 곧 요텐헤임(2,452 m), 요스테달스브렌(2,083 m) 및 도브레페르(2,286 m) 등의 산이 있고 빙모(氷帽)와 빙하가 있다. 서해안은 거대한 피오르 지형이 나타나는데 인근에 5만 개 이상의 섬이 있고 2,500 km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2,542 km의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는 핀란드와 러시아가 있다. 남서쪽으로는 노르웨이해, 북해가 있다. 남쪽 덴마크와의 사이는 스카게라크 해협이라고 부른다. 북쪽에는 로포텐 제도, 베스텔롤렌 제도 등이 있어서 좋은 어장으로 되어 있다. 노르웨이는 대부분이 상당히 높은 지대여서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선사 시대 이후의 빙하 지형이 남아 있기도 하다. 베르겐의 북쪽에 있는 송네 피오르는 안쪽까지의 길이가 200 km나 되며, 100 km까지도 나비가 몇 킬로미터나 된다. 이 피오르는 양쪽 육지가 가파른 절벽이며, 물 깊이는 깊을 뿐 만 아니라 경치가 좋다. 기후는 한대성 기후이다. 한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12월에는 오후 3시만 되어도 일몰하고 기온은 영하 15℃ 이하이다. 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가면 겨울 기온이 떨어지고 강우량이 적다. 눈이 자주 오는 편이며, 북극처럼 백야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난류인 멕시코 만류(灣流)가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므로, 높은 위도에 비하면 온도가 낮지 않고 강우량이 많다. 예를 들면 남부 서해안의 베르겐은 겨울의 월평균 기온이 1.3∼1.5℃ 이며, 여름에는 약 15℃ , 위도에 비하여 비가 많이 오는 편이다. 1년 강우량은 1,900 mm에 이른다. 북쪽일수록 강우량은 적어져 북부에서는 연강우량이 400 mm 이하이다. 현재의 노르웨이 땅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륙 빙하가 녹기 시작한 선사 시대이다. 1만 년 전 오늘날 노르웨이인들의 조상은 순록을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며 북쪽으로 전진했다. 인류 활동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외스트폴주의 남동쪽에 위치한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노르웨이의 바이킹은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벌였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아이슬란드에 뿌리를 내렸고 한때는 지금의 캐나다의 일부까지 이르렀다. 1000년 무렵 바이킹은 그린란드와 미국을 발견하였고, 기독교가 노르웨이에 들어갔다. 노르웨이 농민의 작은 집단이 차차 큰 정치적, 군사적 지역으로 모였다. 1164년 최초의 국왕을 맞이했고, 10세기 초 하랄 1세가 등장하여 국가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015년 올라프 2세 성왕이 노르웨이 전체를 완전히 통일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2세기에 걸친 바이킹의 습격은, 994년 왕이었던 올라프 1세가 기독교를 승인한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다. 13세기, 내전이 끝나고, 노르웨이의 영향력은 브리튼 제도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까지 뻗어져 나갔다. 12세기에 접어들자 왕위를 둘러싼 내부항쟁이 벌어졌다. 1217∼1263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여 노르웨이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적으로도 개화를 한 시대였다. 그 뒤 스웨덴과 동맹, 한자(Hansa) 상인(商人)의 활약에 의한 노르웨이의 경제의 쇠퇴, 덴마크와의 400년 이상에 걸친 동맹 등의 시대가 있었다. 더구나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걸쳐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갔다. 1217년 호콘 4세가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397년, 노르웨이는 덴마크-노르웨이에 흡수되었고, 이는 4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397년 포메른의 에리크 3세가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도 겸하였다. 그는 1442년 폐위되었으나 이후로도 오래도록 덴마크 왕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종교 개혁 운동으로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노르웨이 기독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루터교 신자들이다.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가 덴마크에게 독립한 후인 1814년, 노르웨이인들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에 할양되는 것에 반대했고, 노르웨이 왕국 (1814년)을 수립하고 새로운 헌법인 노르웨이 헌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노르웨이에 대항하여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전쟁을 했고, 결국 노르웨이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에 들어와 스웨덴의 왕이었던 카를 14세를 섬기는 대신, 노르웨이의 독자적인 헌법을 유지시켜 주기로 합의했다. 19세기 내내 일어난 노르웨이의 독립에 대한 움직임은, 결국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을 일구어 내고, 스웨덴-노르웨이연합의 종결을 이끌어냈다. 1866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는 제1기의 대규모 이민 시대로서 미국에 약 10만 명, 그리고 1900년∼1910년 제2기의 대규모 이민 시대로서 20만 명이 바다를 건너갔다. 비록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중립국으로 남았지만, 전쟁 중에 많은 선박들이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5년동안 점령당했다. 이때 독일에 협조했던 나치인 비드쿤 크비슬링은 전후에 반역죄로 총살당했다.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은 노르웨이가 나치독일의 지배를 받을 때에 저항운동을 했다. 기행문 《콘티키》(학원출판공사에서 한국어 책을 펴냄)에 따르면 헤이에르달은 자신을 잡으러 온 나치 독일군과 권총으로 총격을 벌이면서 몸을 피했다고 한다. 1949년, 노르웨이는 중립을 끝내고 NATO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인근 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된 뒤로, 노르웨이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1972년과 1994년, 유럽 연합 가입 총선거가 치러졌지만, 두 번 모두 가입이 무산되었다. 2011년에는 극우 인종주의자에 의한 2011년 노르웨이 테러가 일어났다. 이 일은 노르웨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한다. 1814년 헌법에 의해서 노르웨이의 기초가 섰으며, 의원내각제로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49년에 NATO에 가맹하였고, 충실한 사회보장제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1959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한국 전쟁때는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야전병원 등의 의료지원을 하였다. 노르웨이는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고, 한국은 1994년 동계 올림픽 때 릴레함메르로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하였다. 1963년에 수교하였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이웃국으로서 관계가 깊으며, 역사적으로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점령해서 반감정이 있기도 하나, 지금은 같은 서방 일원으로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행정 구역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전 국토의 겨우 3% 정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며 산업인구의 11.9%가 제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식량은 자급자족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어업은 활발하여 대구·청어·정어리 등의 어획고는 세계 수위를 다툰다. 이 나라에서 발달한 원양 포경업은 최근에는 쇠퇴해 버렸지만, 북부 르흐딘에 포경기지가 있다. 1971년부터 북해 유전이 개발되어 1975년 산유국 대열에 진입하였으며 수력발전과 어류 및 산림·광물자원이 풍부하다.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외국 무역을 높이는 방법 이외에는 없으며, 현재 세계에서 제7위의 무역액을 보여주고 있다. 노르웨이의 상선보유는 세계 제4위로서 세계 제9위의 해운 수입을 올리고 있어 이 나라의 수입 초과에 대한 큰 뒷받침이 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 이전엔 그다지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다. 스웨덴이 1960~1970년대에는 노르웨이보다 월등히 부유했으나 이제는 역전되어 스웨덴 크로나가 노르웨이 크로네의 환율에 비해 약 85% 수준이고, 많은 스웨덴 젊은이를 포함한 스웨덴 인들이 노르웨이에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2014년 10만 달러까지 치솟았으나, 2015년부터 저유가시대 때문에 떨어졌다. 2016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약 69,700달러이다. 노르웨이의 주 수출품의 45%가 원유와 가스이고, 이것들이 20% 이상의 GDP를 차지한다. 세계 4번째 원유 수출국이자, 세계 3번째 가스 수출국이다. 또한, 노르웨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 어획량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어획량을 가진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연어와 청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수산물이다. 국민 1인당의 수출입액은 베네룩스 다음가는 세계의 정상급에 속하고 있다. 국내 교통은 육상, 해상 양면에 있어서 이 나라 지형이 남북으로 길 뿐 아니라 산과 피오르의 장애 때문에 운송에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철도(태반이 국영임)의 건설은 의욕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역시 수상 교통의 역할이 크며, 이 나라의 대도시는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또 서해안을 따라 북부까지 도시가 있는데, 함메르페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이며, 특히 어획물의 거래가 성하다. 스웨덴의 키루나 등지에서 나는 철광석은 나르비크항을 통해 수출된다. 나르비크는 1880년대에 철도가 시설된 당시에는 인구가 겨우 50명이었으나, 100여년 동안에 약 19,000명의 도시가 되었다. 노르웨이 주민은 금발과 파란눈을 지니며 키가 큰 사람이 많다. 평균 수명은 남자는 73.6세이며, 여자는 80.3세이다. 그리고 랩(Lapp)족은 북부 노르웨이에만 살며 용모, 언어, 문화가 모두 이색적이다. 노르웨이 언어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언어와 관련이 있다. 지방어에 의해 1850년 새로운 말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의 한 공용어와 둘이 현재 쓰이고 있다. 노르웨이 사람의 생활수준은 매우 높으며 주민의 대다수는 루터교 신자들이다. 노르웨이 인구 수는 2010년 410만 명인데 이보다 많은 수가 미국에 살고 있는데, 미국 내 노르웨이 이민자 인구는 2010년에 470만 명이었다. 노르웨이어는 단일한 노르웨이어가 아니라 보크몰과 뉘노르스크라는 저마다의 문어체계를 갖춘 표준어가 둘 있다.(노르웨이어 분쟁) 오슬로 중심의 동부와 남부는 보크몰(85%)을, 베르겐 중심 서부와 북쪽지방은 뉘노르스크(15%)를 사용한다. 《인형의 집》을 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유명하며 음악가 에드바르 그리그도 세계적인 위인이다. 우리에게 "호호 아줌마"의 작자로 알려진 동화작가 알프 프뢰위센도 있다. 또한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 역시 후기 인상파 화파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다.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과 로알 아문센도 노르웨이인이다. 1980년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팝그룹 a-ha도 노르웨이 출신이다. Alan Walker가 노르웨이 사람이다. 노르웨이는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루터교 국가였다. 2016년 12월 31일까지는 노르웨이의 국교는 루터교였으나, 국교법 개정에 따라 2017년 1월 1일부터 루터교는 국교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2016년 12월 31일까지는 루터교 의식(Ritual)에 따라 교회에서 왕의 즉위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이 다 행해졌다. 개신교 국가이지만 이슬람, 불교, 로마 가톨릭 등의 종교가 다 보장된다. 부활절, 성령강림주일과 성탄절처럼 기독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들은 공휴일로 인정된다. 2011년 기준으로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인 에드바르 그리그, 요한 스벤젠이 노르웨이 출신이다. 또한 20세기 유명 소프라노 가수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도 노르웨이 출신이다. 헤비 메탈의 하위 장르인 블랙 메탈이 1990년대 노르웨이에서 크게 발전했다. 초기 블랙 메탈을 이끈 밴드로는 엠페러, 다크스론, 고르고로스, 메이헴, 버줌 등이 있으며 당시 블랙 메탈과 관련된 교회 방화나 살인 사건 등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인슬레이브드, 딤무 보거 등은 블랙 메탈을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킨 밴드로 인기를 얻고 있다. 뉴질랜드 뉴질랜드(, )는 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두 개의 큰 섬(남섬과 북섬) 그리고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태즈먼 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부터 1,500 킬로미터 (1,000 mi) 정도 떨어져 있고, 피지, 누벨칼레도니, 통가와 같은 태평양의 섬들로부터 대략 1,000 킬로미터 (750 mi) 정도 떨어져 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발견한 마지막 섬 중 하나였다. 오랜 기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동물, 식물, 균류의 다양성이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수의 독특한 새 종류이다. 다양한 지형과 뾰족한 산봉우리는 섬의 융기와 화산 분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주요 도시로는 웰링턴, 오클랜드, 해밀턴 크라이스트처치, 인버카길, 더니딘 등이 있다 서기 1250년부터 1300년 사이에 폴리네시아인이 정착하고 나서 독특한 마오리족 문화가 발전되었다. 1642년에는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타스만이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19세기 초반 뉴질랜드에 감자와 머스킷 총이 도입되면서 머스킷 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고, 마오리족은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영국에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이민자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갈등이 커졌고, 마오리족이 북섬 중부 땅을 몰수당하게 되는 뉴질랜드 전쟁(으로 이어진다. 1890년대 여성의 투표권과 함께 경제 불황이 찾아왔고 1930년대부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노력으로써 복지 국가를 만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함께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ANZUS)에 가입했으나, 나중에 군사 동맹 체제로 전환된다. 1950년대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나라 중 하나였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으로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졌다. 1980년대 동안 보호 무역이 완화되고 변형된 자유 무역 경제가 퍼지면서 한때 수출품의 대부분이었던 양(털, 고기)이 유제품, 육류, 와인으로부터 추월당하는 등 주요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뉴질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유럽계이다. 가장 큰 소수 민족은 원주민인 마오리족이며, 이어 아시아인, 태평양 제도민 순이다. 영어, 마오리어, 뉴질랜드 수화가 공용어이며, 이 중 영어가 지배적이다. 뉴질랜드 문화의 대부분은 마오리족과 초기 유럽 정착민들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초기 유럽인들의 예술은 풍경화가 대부분이였는데, 마오리족의 묘사가 적었다. 마오리족의 문화는 최근 다시 알려지고 있는데, 조각, 세공, 문신 등 전통 예술이 주류이다. 이러한 뉴질랜드 문화는 세계적으로 퍼졌고 태평양과 아시아 이민자들을 증가시켰다. 뉴질랜드의 다양한 풍경은 많은 야외 활동의 기회를 주며 고예산 영화의 배경이 된다. 뉴질랜드는 11개 행정 구역과 지방 자치의 목적인 67개의 지역 당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제도는 지금은 없어진 주 제도보다 더 자율성을 가진다. 뉴질랜드의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이지만, 총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뉴질랜드 왕국은 토켈라우(속령), 쿡 제도, 니우에(뉴질랜드와 자유연합 관계를 맺은 자치령), 뉴질랜드의 남극 영유권 주장이라고 주장하는 로스 속령을 포함한다, 뉴질랜드는 국제 연합, 영국 연방, ANZUS, 경제 협력 개발 기구, 태평양 제도 포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의 가입국이다. 1642년 최초로 뉴질랜드를 발견한 네덜란드 탐험가 아벌 타스만이 광대한 대륙이 계속 이어진다 추정하고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과 같은 이름인 "Staten Landt"라고 명명했다. 1645년 네덜란드 지도학자가 제일란트주의 이름을 따 "Nova Zeelandia"로 다시 명했다. 나중에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이 영어식 이름으로 지금의 뉴질랜드(New Zealand)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오테아로아("하얗고 긴 구름의 나라"라는 뜻으로 자주 번역)는 현재 뉴질랜드의 마오리어식 명칭이다. 이 명칭은 유럽인들이 살기 전부터 마오리족이 이 곳을 말하는 단어였는지 아니면 단지 북섬만을 뜻하는 단어인지는 불확실하다. 마오리어로 두 개의 큰 섬을 뜻하는 전통적인 단어가 있는데, 북섬을 뜻하는 "Te Ika-a-Māui"(마우이의 물고기), 남섬을 뜻하는 "Te Waipounamu"(녹색돌의 물) 또는 "Te Waka o Aoraki"(아오라키의 카누)라고 한다. 초기 유럽인들은 지도에 노스(북섬), 미들(남섬), 사우스(스튜어트 섬 / 라키우라)로 표기했다. 1830년 가장 큰 두 섬을 구별하기 위해 지도에 북섬과 남섬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이 표기가 표준으로 인정되었다. 뉴질랜드 지리국은 2009년 예전부터 북섬과 남섬이라는 뜻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것을 발견했고, 2013년 이 표기를 공식화했다. 그래서 현재 공식적인 표기는 북섬 또는 Te Ika-a-Māui과 남섬 또는 Te Waipounamu이다. 각 섬을 말할 때에는 영어 또는 마오리어 어느 쪽으로도 사용할 수 있으며, 함께 사용할 수도 있다.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아벌 타스만이었다. 그는 이곳을 네덜란드에 위치한 제일란트주의 이름을 따서 '노바젤란디아'라고 명명하였으며, 뉴질랜드는 이 말의 영어식 번역이다. 타스만 이후 뉴질랜드를 찾은 사람은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었다. 쿡 선장은 1769~177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식민지로서, 고래와 바다표범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 초 냉동선이 개발되자 오지에서도 농목업이 발전하였고, 1852년에는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토지강탈과 관련하여 마오리족과 영국 간에 분쟁이 생겼고, 1843~1870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마오리 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영국은 마오리족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는 한편,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키는 등 온건파 회유에 노력하여,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약해지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마오리족과의 공존관계 설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노력은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해법이였는데 이는 본토와의 거리가 엄청난데다가 특별한 지하자원 등의 메리트가 없기 때문인 영향이 컸다. 그 후 뉴질랜드는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1907년 영국의 자치국이 되었다가 1947년 11월 25일 독립하였다. 제1·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 본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참전·활약하였다. 1949년 7월 한국을 정식 승인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총 5,350명이 영국 연방으로 참전하였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또한 1964~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195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은 공식적으로 태평양 안전 보장 조약(ANZUS Treaty)을 체결했다. 이는 태평양 지역 방어를 위한 군사동맹이다. 1985년에는 비핵화지대(Nuclear freezone)을 선언하였으며 1985년 남태평양 국가들과의 비핵화선언인 라로통가 조약(Treaty of Rarotonga)을 체결했다. 1987년 데이빗 레인지가 이끄는 사민주의 정당인 노동당에 의해 뉴질랜드 비핵화지대 선언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핵추진함에 대한 뉴질랜드 기항불허로 이어져 ANZUS조약의 권리가 중지되기도 했다. 2006년 기준 노동당(Labour Government) 헬렌 클라크 총리는 야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의 지지도 함께 이끌며 뉴질랜드 비핵화지대(Nuclear-free zone)의 입지를 고수한다. 뉴질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1,600km 떨어져 있다. 뉴질랜드는 쿡 해협으로 격리된 남·북 두 섬으로 이루어지는 산이 많은 섬나라로서, 해발 200m 이하의 땅은 온 섬의 6분의 1 정도이다. 총면적은 북섬, 남섬, 스튜어트 섬, 그 외 작은 섬들을 모두 합쳐 268,680km로 영국보다는 약간 크고, 부르키나파소 보다는 약간 작으며, 미국의 콜로라도주와 비슷하며, 대한민국의 2.7배, 한반도의 1.3배이다. 전체면적의 44%가 북섬, 56%가 남섬으로서 남섬이 더 크다. 두 섬은 지형적 성격이 크게 다른데, 북섬은 전체적으로 구릉성 토지가 펼쳐지는 가운데 에그몬트산(Egmont 山, 2,510m)을 비롯하여 화산이 돌출한다. 한편, 남섬은 서쪽에 남알프스 산지가 남북으로 달리고 빙설에 빛나는 고산지형이 탁월하다. 최고봉인 쿡 산(3,764m) 주변에는 태즈만·폭스 등의 대빙하가 발달해 있다. 산록부에는 빙하호, 서해안에는 U자 계곡이 침수한 밀포드 사운드 등의 아름다운 피오르드 해안이 발달한다. 뉴질랜드는 화산과 빙하의 나라로서 그 지형이 매우 아름답다. 남섬은 아직 원시림으로 뒤덮인 지역이 많다. 특히 70%가 남알프스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산지이며, 평지는 고작 9%에 불과하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3000m가 넘는 고산준봉이 잇달아 이어지고 빙하의 침식을 받은 피오르드 지형은 수많은 호수와 U자 계곡을 형성하고 있어 변화가 풍부한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반면 북섬의 특징은 지열지대를 포함한 화산지대에 온천과 간헐천, 그리고 크고 작은 호수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비옥한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국토 최남단엔 스튜어트 섬이 있고 크라이스트처치로부터 동편으로 멀리 떨어진 태평양에 캐썸섬(Chatham Island)이 위치해 있다. 전체적으로 국토는 산과 언덕으로 뒤덮여 있는데 75%가 해발 200m이상이며, 국토의 최고점은 해발 3,754m인 쿡 산이다. 북섬의 가장 높은 산은 루아페후 산으로서 2,797m이다. 이러한 고산과 타우포 호수, 로토루아 호수는 약 1백만 년전에 발생한 통가리로 산의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것이다. 호수는 서기 186년에 화산폭발로 생성된 북섬의 타우포 호가 최대이다. 가장 긴 강은 북섬의 와이카토 강으로 425km에 달한다. 뉴질랜드는 온대 지역에 속하지만 지역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섬의 최북단에는 연중 따뜻하며 눈을 보기 힘들다. 반면에 남섬의 최남단은 겨울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그리고 서안(西岸) 해양성 기후로서 연강수량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600∼1,500mm인데, 남도는 남알프스 서쪽 경사면에서는 5,000mm 이상에 이르는 지역도 있어, 동쪽지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전지역이 편서풍대에 속한다. 기온의 교차는 작으며, 연평균 기온은 북섬의 오클랜드 반도(에선 15℃ , 남섬의 남부에선 10 ℃안팎이다. 지구 온난화로 만년설이 녹아내린다. 전국적으로 13개의 국립공원을 갖고 있으며 이중 통가리로 국립공원과 테와히포우나무 국립공원은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통가리로는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국립공원이다. 또한 13곳의 해양보호구역이 지정되어 있다.여타 지역에서는 이미 사라진 신생대, 중생대의 생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약 8천5백만년 전인 백악기때부터 다른 대륙과 격리되어 온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같은 격리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뉴칼레도니아와 함께 유일하게 뱀이 없는 지역이다. 최초의 포유류는 두 종의 박쥐였다. 뱀이 없는 나라(동, 철 성분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습기가 많아 서식하지 못함) 뉴질랜드는 포유류보다 새들의 종류가 많아 약 250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공통솔꼬리주머니쥐는 유럽 정착민들이 1850년대 가죽을 이용할 목적으로 데려왔으나 천적이 없고 번식력이 좋아 현재 약 7천만 마리가 살고 있어 해로운 동물로 분류되어 정책적으로 없애고 있다. 식물 중에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부를 수 있는 카우리 나무로 (전 국토의 4%) 약 40m, 가지가 20m나 된다. 환경보호 활동에 적극적인 뉴질랜드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도 그 해결이 쉽지 않은 숙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고유 동식물에 대한 대책이다. 사람들이 이주한 이후 낮은 지대의 늪과 습지대에 사는 고유 동식물 85%가 멸종되었다. 또한 800종 이상의 생물들이 심각한 생존 위험에 처해 있다. 뉴질랜드의 상징인 키위 새 역시 그렇다. 북쪽에 사는 갈색 키위는 멸종위기에 있으며 다른 키위들은 해마다 6% 정도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진화하고 생존했던 새는 모두 93종이었으나 이중 43종이 멸종되었고, 37종은 멸종의 위험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고유 생태계의 변화는 주로 서식지의 파괴와 분열, 그리고 해충과 잡초 때문이다. 특히 해충은 뉴질랜드의 생태계와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 외국에서 들어온 해충과 잡초들은 뉴질랜드 고유의 생물들을 멸종으로 몰고 간다. 이 때문에 뉴질랜드 검역당국은 외국에서 입국하는 사람과 화물에 대해 검역을 철저히 한다. 피해를 주는 동식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양이, 개, 흰족제비, 주머니쥐와 같이 외국에서 유입된 동물들이다. 이들은 뉴질랜드에 살고 있던 동물이나 꽃 등에 악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해치는 동물이 없어 날지 못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모아새(멸종)나 키위새는 이들 외래종에게 먹히기 때문에 생존의 위기에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는 지난 60년까지는 고래를 잡았지만 지금은 열렬한 고래보호국이다.초원 뉴질랜드는 영국 여왕을 모시는 상태에서 영연방 입헌 군주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 원수인 총독이 그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정부형태는 영국식 의원내각제이며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나 실제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이다. 노동당·국민당의 양당제가 확립되어 있어 정치적 안정을 누린다. 1989년 8월 롱이 건강상 이유로 사임, 외무장관 파퍼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현재 실권자는 저신다 아던 제40대 총리(2017~)이며, 펫시 레디 경이 현재 뉴질랜드의 총독(2016~)이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총 120석(지역구 62+마오리특별지역구 7+전국구 51, 2005년부터 현재까지는 121석)을 철저하게 정당득표율로 나누는, 영연방국가 중 유일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1996~)를 취하고 있다. 지역균형발전정신에 입각하여, 남섬의 지역구 의석(현재 16석)은 전체 지역구 의석의 25% 이상을 뽑도록 규정했다. 2004년에는 독자적 최고법원인 뉴질랜드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New Zealand)이 창설, 기존 영국판례만을 원용하던 사법권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었다. 그 아래에 항소법원과 3개 지역의 고등법원, 지역 주요도시들마다 지방법원이 있다. 2008년을 기준으로 최고실권자(헬렌 클라크 총리, 1999~2008), 국회의장(마가렛 윌슨, 1999~), 당시 총독(실비아 카트라이트 2001~2006), 대법원장(시안 엘리스, 2004~)까지 과거 국가의 모든 최고권력을 여성 지도자들이 이끈, 세계 유일무이의 국가이기도 하다. 1980년대 후반 데이비드 롱이 총리 정부 시절의 국적 및 이민법 개정 이후 여성과 소수민족 등 사회적 소수층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비교적 강력하다. 주요 정당은 다음과 같다. 2014년 통계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정렬했다. 5대 주요 도시들의 인구 총합계는 전체 인구의 과반수를 넘는다. 이 나라의 경제는 대부분 농목에 의존하고 있다. 목양(牧羊)은 이 나라 제1의 산업으로서 양은 북도에 60%, 남도에 40%의 비율로 분포한다. 양모의 수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농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1차산품이 수출의 55%를 차지한다. 그외 육류·유제품(乳製品)은 양모에 버금가는 수출품이다. 낙농지역은 북도에 집중하며, 양모에 비하여 훨씬 집약적으로 경영된다. 남도의 동쪽 및 남쪽 연안에는 혼합농업 지역이 발달하여, 목초 등과 윤작을 하면서 곡류의 생산이 활발하다. 농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1차산품을 수출하고 석유와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무역구조이다. 주요 수출품은 낙농품·육류·양모·목재·과실·약재 등이고, 수입품은 공산품·기계류·자동차·철강·원유·비료·금속제품 등이다. 1970년대 초까지는 영국이 주요 무역 상대국이었으나 이후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미국·중국·오스트레일리아·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와의 교역량이 무역액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뉴질랜드의 주요 수출 상대국은 중국(22.29%), 호주(16.43%), 미국(9.94%), 일본(9.77%), 한국(2.79%)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중국(19.31%), 호주(12.24%), 미국(10.68%), 일본(7.56%), 독일(5.34%)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38,05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0,128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우유 및 크림(4,206백만 달러), 버터 및 기타(2,359백만 달러), 목재(2,109백만 달러), 소고기(1,637백만 달러), 양고기(1,290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2,211백만 달러), 엔진과 자동차(1,755백만 달러), 석유 제품(1,470백만 달러), 통신 장치(582백만 달러), 자동차(1,028백만 달러)이다.]] 남섬의 면적이 더 크지만, 인구의 75% 이상(300만 명 이상)은 북섬에 살고 있다. 수도 웰링턴과 주요 도시 오클랜드, 해밀턴은 북섬에 위치한다. 남섬의 주요 도시는 크라이스트처치와 더니딘이다. 주민은 유럽계 백인 (74%), 마오리족, 폴리네시아인이 있고,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계 백인과 마오리족 원주민이 거주, 인도인과 황인도 많이 거주한다. 백인들은 영국계는 물론, 아일랜드계와 네덜란드계 등이 섞여있고, 마오리족은 지역마다 여러 종족들로 나뉘어 있다. 또한 마오리족은 이미 도시로 옮겨가 현대 생활에 적응하였다. 중국인들과 인도인들도 살며, 특히 사모아, 통가, 피지, 쿡 제도 등의 남태평양 도서민들도 늘고 있다. 최근에는 뉴질랜드까지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들로 섞여있는 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민법이 어려워지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1930년대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이 나라에서는 사회적·경제적인 상하계급이 나뉘어 있지 않고, 주민 사이에는 평등정신이 강하다. 세계 최초로 양로연금 제도를 실시하고 완전고용 등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 스웨덴, 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3대 복지국가 중의 하나이다. 병이 나면 무료로 요양할 수 있고, 일을 할 수 없는 노인에게는 노인연금이 지급되며, 실업자에게는 실업수당이 지급된다. 1890년부터 최저임금법을 시행하여 임금의 최저기준을 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과정이 무상교육이다. 의무교육 연령은 6세부터 16세까지이다. 대학의 무상교육은 포기되었다. 가족제도는 철저한 핵가족제이며, 20% 이상이 독신이다. 자녀 수는 1명인 경우가 많고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주요 여가 활동은 독서, 친구방문, 음악, 정원관리, 개기르기 등이다. 경마를 즐기며, 로또는 성인의 2/3가 즐긴다. 영어와 마오리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인구의 90%가 공식 국가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1987년부터 마오리어가 공식언어로 채택되어 두 가지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나라에는 마오리족만의 토착 문화와 영국계 백인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마오리족은 높은 실업율, 상대적 빈곤, 범죄, 청소년 불량서클, 복지시설 부족 등의 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불만으로 마오리족 고유의 문화가 부흥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있다. 요즘와서는 오클랜드, 해밀턴, 웰링턴, 크라이스트처치 같은 대도시들에 여러 이민들이 섞여 사는 이유로 뉴질랜드의 전통 문화는 약간 사라져 가는 편이다. 뉴질랜드는 오랜 전통과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무대예술이 뛰어나, 음악·연극·무용 등의 전문인들이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다. 400개의 박물관과 화랑을 통해 예술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뉴질랜드 심퍼니 오케스트라(NZ Symphony Orchestra)는 연중 10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고 있다. 발레단은 26명의 종신단원으로 구성되어 국내 공연을 펼친다. 가장 큰 예술 행사는 2년마다 웰링턴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가 있다. 스포츠는 럭비가 가장 인기 있다. 그 밖에 네트볼, 스쿼시, 소프트볼, 요트 등을 즐긴다. 뉴질랜드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럭비, 크리켓 그리고 넷볼 같은 영국식 스포츠가 성하다. 특히 럭비는 뉴질랜드의 국기이고, 국가대표 럭비 팀은 “All Blacks”로 알려졌다. 서핑,요트 그리고 조정 등도 인기있는 레저이다. 뉴질랜드는 하계 올림픽에서 육상 금메달 총 10개를 딴 바 있고, FIFA 월드컵 본선에도 2회 진출한 바 있다. (1982년에는 3전 전패, 2010년에는 3전 전무로 모두 조별 리그 탈락) 1980년대부터는 육상보다 카누 같은 기타 종목들에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축구 대표팀은 All Whites, 농구 대표팀은 Tall Blacks로 알려져 있다. 올 블랙스는 럭비 월드컵에서 3번, 더 럭비 챔피언십에서 11번 우승하였다. 뉴질랜드의 최대 종교는 기독교(69.9%)이며, 그중에서도 뉴질랜드 성공회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성공회 24.3%, 장로교 18.0%, 가톨릭 15.2%이다.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 신학이 쇠퇴하고 성공회와 장로교를 중심으로 복음주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과 지상 최후의 낙원으로서, 뉴질랜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포츠 급류타기, 제트 보트, 스키, 트레킹, 번지점프 등 깨끗한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며, 자연의 부드러운 숨결을 닮은 사람들, 아름다운 황금빛 해변,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초원 등 모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와이탕이 조약으로 유명한 와이탕이는 뉴질랜드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 1840년 영국 왕실과 마오리 족의 대표가 이 곳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뉴질랜드는 영국 왕실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가 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트리티하우스는 당시 영국 거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도 이 지역의 명소 중 하나이다. 또한 와이탕이에는 여러 부족들을 대표하는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37m의 거대한 마오리 공화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와이탕이 기념일인 매년 2월 6일 마오리 청년들이 마오리 전통 카누를 띄워 축제를 즐긴다. 오클랜드 시에 있는 이 박물관에서는 마오리족의 문화유산 및 남태평양 일원에 흩어진 원주민의 문화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동식물 및 광물자원을 비롯하여 정작 초기 백인의 이주생활 및 해양문화 등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고, 전쟁에 참전했다 희생된 사람들의 자료 등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구성은 1층 마오리 홀, 2층 뉴질랜드 자연사 박물관, 3층 전쟁기념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섬 타우포에 있는 달분화구 지열지대(Craters of the Moon)는 지면 여러 곳에서 뜨거운 증기가 솟아오르면서 마치 달의 분화구를 연상시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 일대가 온통 수증기로 가득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진흙 자체가 끓는 곳도 있으며 특히, 비가 온 뒤에는 더욱 많은 수증기가 솟아오른다. 파이히아에서 북쪽으로 약 33km 떨어진 곳에 그림같은 케리케리가 있다. 뉴질랜드 최북단에 위치한 케리케리는 감귤, 키위 농장과 공예품의 중심지로 특히 도자기나 직물 등이 유명하다. 6.25때 200여명 참전 (마오리족 포함) 로토루아 와카레와레와 온천지(The Whakarewarewa Thermal Reserve)는 로토루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마오리족의 마을 내에 위치한 최대의 온천지이다. 특히, 간헐적으로 유명한 곳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 페더즈 간헐천(Prince of Wales Feathers Geyser)과 포후투 간헐천으로 포후투 간헐천(Pohutu Geyser)의 경우는 약 20분 간격으로 20∼30m 높이까지 뜨거운 온천수가 마치 분수처럼 뿜어 오른다. 아그로돔(Agrodome)은 뉴질랜드의 양 사육과 관리 등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매일 3회에 걸쳐 19종의 양을 볼 수 있으며 양털 깎기쇼, 양몰이 개의 시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쇼를 진행하는 사람의 유머와 재치로 즐겁게 관람할 수 있으며 설명은 세계의 언어로 통역되는 이어폰을 주기 때문에 듣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다. 로토루아 호수(Rotorua Lake)는 화산활동으로 인해 생성된 호수로 로토루아 내에 있는 9개의 호수 중에서 가장 크며 많은 송어를 비롯한 다양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낚시를 즐기는 곳이지만, 근래에는 잡힌 송어에서 기생충이 발생하고 있다고 해서 주춤해지기도 했다. 유람선과 수상스키를 즐길수 있다. 레드우드 그로우브()는 로토루아 근교에 자리한 임업 시험장으로 세계 각국의 나무들이 식수되어 있다. 세고비아 나무를 비롯하여 잣나무, 이끼다 소나무 등이 울창하게 자리하고 있어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이며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저절로 삼림욕이 되는 쾌적한 곳이다. 와이토모 동굴(Waitomo Cave)은 개똥벌레의 일종인 그로우웜(Glow Worm)이 서식하고 있는 동굴로 동굴 아래 냇물이 흐르고 있어 배를 타고 그로우 윔을 관광한다. 어두컴컴한 곳에 가면 개똥벌레가 마치 밤하늘의 은하계를 보는 것과 같이 촘촘히 빛나 신기함을 더해 준다. 와이토모란 마오리어로 물과 동굴을 뜻하며 우기에는 동굴에 흐르는 냇물이 증가하여 배를 타고 동굴 안을 관광할 수 없다. 주요도시는 철도로 연결되며 고속도로도 잘 닦여 있다. 남섬과 북섬 사이를 운행하는 여객선이 있다. 오클랜드·웰링턴·크라이스트처치에 공항이 있고 오클랜드·웰링턴 항구가 있다. 주요도시로는 오클랜드·크라이스트처치·웰링턴 등이 있다. 오클랜드 국제공항은 대한민국, 일본 등 아시아와 미국, 아르헨티나 등 타 대륙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이다. 뉴질랜드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우방 국가로,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62년 3월 26일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서울과 웰링턴에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오클랜드에도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있다. 주뉴질랜드 대한민국 대사관은 사모아, 통가를 겸임하고 있으며, 현재 대사는 김해용(2014년 5월)이다. 현재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클레어 펀리(2015년 5월)이다. 양국은 1967년 4월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을 시작으로, 1978년 어업협정, 국제운송소득면제협정(1978년 12월), 이중과세방지협정(1981년 11월), 항공협정(1993년 8월), 사증면제협정(1994년 8월), 취업관광사증협정(1999년 5월), 범죄인 인도조약(2002년 4월), 영상산업 분야 공동협력을 위한 양해각서(2005년 11월), 정보통신협력약정(2006년 12월)을 체결하였다. 뉴질랜드의 대한국 수출은 2011년을 기준으로 14억7,400만 미국달러 (원목,낙농품,가축육류,기타 석유화학 제품), 한국의 대뉴질랜드 수출은 11억 400만 미국달러(승용차,경유,휘발유,철도차량)로, 대한민국의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뉴질랜드는 교역 확대를 위해 대한민국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2014년 11월 15일 FTA 타결됐다. 뉴질랜드에는 한국의 선경(주), 오양, 동원, 대왕수산 등 다수업체가 진출해 있고, 오클랜드에는 총영사관이 있으며, KOTRA도 주재하고 있다. 한국 교민은 23,877명, 체류자는 9,095명이다.(2007년 5월 1일 기준)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2001년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뉴질랜드는 북한에 상주공관을 개설하지 않았으며, 서울의 주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최근 피지와 뉴질랜드는 기자 억류를 둘러싸고 관계가 냉각되고 있다. 육해공군 약 9000명의 정규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인접국인 오스트레일리아와 전통적인 혈맹 관계이다. 뉴질랜드에서는 테트리스로 장교 모집 광고 를 하고 있다. 1902년에 현재의 뉴질랜드 국기가 채택되었지만 뉴질랜드 국기가 식민지 시절의 유산인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와 지나치게 비슷하기 때문에 교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국민이 늘어나며 2015년에 국기 교체를 위한 탄원이 있었다. 탄원에 1만 명 이상이 서명하면서, 새로운 뉴질랜드 국기 도안을 공모하기 시작하였다. 카일 락우드가 디자인을 한 은빛 모양의 고사리가 들어간 국기가 새로운 국기로 선택되려 했지만 국민투표에서 국기 변경을 찬성하지 않는 뉴질랜드 국민이 과반수인 50%를 넘어가며 국기 변경을 원하는 국민(찬성 43%, 반대 57%)보다 많아졌다. 2016년 2월 30일, 뉴질랜드 정부에서 국기를 변경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동안 존 키 총리는 정책 대부분에서 높은 인기를 자랑했으나, 이번 국기 변경 실패는 정치적 실책이 됐다. 국기 교체를 시도하면서 세금 2600만 뉴질랜드 달러(약 203억 원)를 낭비하고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니제르 니제르 공화국()는 서아프리카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니아메이다. 알제리, 리비아, 차드, 말리, 부르키나파소, 나이지리아등과 국경을 접한다. 사하라 남쪽에 광대한 국토가 있으나 북반부는 사막, 남반부는 하계에 강우가 있는 스텝으로 대부분이 건조지역이기 때문에 목축업이 주이고 니제르강 유역에 약간의 농경지가 있을 뿐이다.1960년 8월 30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부터 독립했다. 1974년의 쿠데타로 의회가 해산된 뒤 최고군사평의회의장이 원수이다. 비동맹·중립외교노선을 표방하고 있으나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주민은 하우사, 송하이, 풀라니 등 흑인종과 투아레그 등의 부족이다. 공용어는 프랑스어. 종교는 95%가 무슬림이다. 철광석·텅스텐 등 지하자원의 개발이 기대되고, 특히 우라늄은 매장량이 세계5위로 니제르 주요수출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1891년부터 1892년 사이에 프랑스군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한 주가 되었다. 특별한 독립 운동 없이 1958년, 프랑스 공동체 내의 자치국이 되었다가 1960년 독립하였다. 2010년 2월 20일에는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마마두 탄자 대통령이 억류되었다. 니제르는 내륙국으로서 사하라 사막과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1,267,000km이며 호수 등의 면적은 300km에 이른다. 니제르의 면적은 미국 텍사스 주의 약 두배 정도이며 세계에서 22번째로 큰 나라이다. 앙골라와 크기가 비슷하다. 니제르는 7개 국가와 접경을 접하고 있어 국경선만 해도 5,697km에 이르는데 남쪽으로 나이지리아와 베냉, 동쪽으로 차드, 북북서쪽으로 알제리, 말리와 접하며 북북동쪽으로 리비아와 접한다. 서쪽으로는 부르키나파소와도 조금 접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곳은 나이저 강으로서 200m정도에 머문다. 가장 높은 곳은 몽 바그잔(Monts Bagzane)으로 해발 2,022 m이다. 아열대 기후가 나며 매우 무덥고 건조하다. 사막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남쪽 자락에는 열대 기후가 나타나며 니제르 강 분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남쪽에는 사막 평원과 함께 뜨거워서 온도차가 심하게 난다. 이 국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국가이다. 니제르는 1975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녹화 사업을 전개하지 못한 미개의 국가로 분류되었다가 최근에는 녹화 사업이 캐나다처럼 성공적으로 이룰 정도로 손을 꼽히고 있어 사막 지역에 우뚝 솟아오를 정도로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이며, 나무도 하나하나씩 빼곡차게 생겨날 정도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하라 사막의 확산 방지 대책, 사헬 살리기 정책을 두려는 니제르 정부의 입장과도 맞닿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1999년 8월 9일자 헌법 3조 4항엔 "공식어는 프랑스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우사어, 제르마어, 풀라니어, 아랍어 등의 각 민족어도 사용된다. 니제르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하우사족 55~60%, 제르마족 20~24%, 풀라니족 10%, 투아레그족 8~10%, 투부족 등의 흑인과 유럽인, 아랍인, 기타 등. 이슬람교가 80%이며 기독교와 토착 종교도 소수 존재한다. 농업, 축산업, 광업이 주산업이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다. 농업은 자급농업이 중심이며, 남부에 한정된다. 강우량은 적고, 관개도 발달하지 않으며, 수원지도 부족하기 때문에 거의 천수(天水) 농업이다. 그래서 강우량에 따라 수확량이 크게 좌우되며, 자주 가뭄이 일어난다. 광업의 주력인 우라늄은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세계 3위의 매장량을 과시한다. 아쿠타 광산 등, 일본에도 연관이 있는 광산이 있고, 우라늄 관련 산업이 전 고용의 약 20%를 차지한다. 1997년의 가뭄으로 국민의 4분의1이 기아의 위기에 빠졌다. 또한 우라늄 가격의 저하, 거듭되는 정정 불안에 의한 해외원조의 중단에 의해 1999년말에는 국가경제가 사실상 파산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2000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등은 빈곤해소대책으로서, 니제르 정부가 지는 8억9천만 달러의 채무면제를 발표하고, 7600만달러의 융자를 결정하는 등 밝은 조짐도 보이고 있다. 니제르의 기아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니제르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33.7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봐도 심각한 수준이다. 118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니제르는 109위의 높은 등수를 보였다. 기아종식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니제르는 7개의 데파르트망(departement)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민국과는 1961년에 수교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4년 수교하였다. 니카라과 니카라과 공화국(), 약칭 니카라과(, )는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나라이다.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넓다. 북동쪽은 온두라스, 남쪽은 코스타리카, 동쪽은 카리브 해에 접하고, 남서쪽은 태평양에 접하고 있다. 주식으로는 '팥'을 주로 먹는다. 수도는 마나과이다. 생태학적으로 다양성이 큰 국가 중에서 하나에 속한다. 카리브 해에는 콘 제도나 미스키토 제도가 있다. 니카라과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흔적은 아카왈린카(Acahualinca)에서 10,000년전의 발자국을 통해 알 수 있다 - 발자국은 라고 데 마나과로 흐르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화산재 층 밑에 보존되었다. AD 10세기 경에 멕시코에서 토착민들이 태평양 저지대로 이주해 왔으며 아즈텍인들이 15세기 동안 무역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남향해 가는 동안 아즈텍 문명도 여러 토착민들에게 전파되었다.최초의 유럽인은 1502년 콜럼부스가 카리브해 연안을 항해해 내려오면서 들어오게 되었다. 1522년 스페인 탐험대는 라고 데 니카라과의 남부 해안에 도달했다. 몇 년 뒤에 스페인은 이 지역을 식민지화하고 원주민을 정복한 뒤에 그라나다(Granada)와 레온(Leon)을 세웠다. 그라나다는 비교적 부유한 식민지 도시, 레온은 자유주의의 온실이 되었다. 마나과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서는 스페인인 침략자에 거세게 대항하였고 그들의 도시는 파괴되었다. 그리고 다음 세 세기 동안 마나과는 그저 하나의 마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중미 국가들과 함께 니카라과는 182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잠시 멕시코의 일부였으며 다음에는 중미 연합의 일부, 그리고 마침내 1838년에 완전한 독립을 성취했다. 원래 현재의 니카라과 땅에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1821년 니카라과는 멕시코에 가입된 상태에서 독립을 이루었고, 1823년부터는 중앙아메리카 연방에 속해 있었다. 니카라과는 1838년에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독립하였다. 그러나 카리브해 연안은 1860년까지 영국 보호령이었다. 영국이 니카라과 호를 거쳐 2대 해양을 연결하는 운하건설 후보지로서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2007년에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1985년부터 5년간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1979년 소모사 가문(Somoza)의 독재 정부가 실각하였는데, 이것은 쿠바의 공개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이는 쿠바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 운동을 군사적으로 지원했음을 말해준다.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2008년의 안데스 외교 위기(Andean diplomatic crisis)에 뒤이어, 2008년 3월 6일, 에콰도르와 연대하여, 콜롬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러시아에 이어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인정했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수교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면서 불참했으나 1993년 대전 세계박람회에는 참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8년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단교되었다가 2007년에 복교되었다. 재외 공관의 경우 대한민국은 마나과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니카라과의 경우 주한 대사관은 1995년 개설되었으나, 1997년 폐쇄되어 수교 당시 신임장을 제정받았던 본래 상주공관인 도쿄도에 있었던 주일 니카라과 대사관을 통해 겸임하였다가 2014년 재개설되었다. 다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같은 경우 단교와 함께 대사관을 폐쇄하였으며 현재는 주일 니카라과 대사관을 통해 겸임중이다. 국토의 면적은 중앙 아메리카에서 가장 넓으나, 인구밀도는 가장 낮다. 지역은 카리브해쪽의 저지, 태평양쪽의 저지, 그리고 중앙산지 등으로 대별된다. 카리브해쪽 평야는 일년 내내 비가 많고 무더운 불건강지로서, 소지(沼地)와 열대우림이 뻗어 있고, 산림에는 마호가니가 산출된다. 카리브해쪽의 저지는 인구가 희박하고, 해안의 일부에 바나나 대농원이 점재(點在)한다.중앙산지는 주로 화산성 고원으로 이루어지며, 기후도 시원하여 목축과 금·은 등의 광산지대이다. 태평양 연안과 2대 호소(湖沼) 사이가 이 나라의 심장부로서 총인구의 약 80% 및 산업도 이 지역에 집중해 있다.수도 마나과(Managua, 86만 4,201명, 1995)도 이 지역의 마나과 호반에 자리하고 있다. 건계(乾季)와 우계(雨季)로 나뉘고 덥기는 하나 살 만하다. 태평양쪽 해안을 따라 화산이 분출하며 토양도 비옥하다. 동쪽에 있는 열대성의 카리브 해 연안은 그 나라의 나머지 지역과 다르다. 그곳의 대부분은 모스키도 해안, 혹은 미스키도 해안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부분은 인구가 희박한 늪지대와 숲으로 되어 있다. 세 군데의 주요 생태구역이 있다. 계절은 건기과 우기로 나뉜다. 중부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숲이 있는 산악 지대이다. 니카라과의 기후는 고도에 따라 변한다. 태평양 저지대는 언제나 극단적으로 덥지만 공기는 상쾌하며 시골은 우기(5월에서 11월)에 푸르다. 건기(12월에서 4월)는 갈색 먼지를 평원으로 날려보내는 바람이 불어온다. 카리브해 연안은 덥고 습해서 짧은 건기(3월에서 5월)라 해도 많은 비가 내린다. 북쪽의 산악 지형은 저지대보다 훨씬 시원하다.니카라과는 1998년 11월에 온 금세기 최대 태풍 중 하나인 허리케인 미치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다. 인종 구성은 메스티소 69%, 백인 17%, 흑인 9%, 인디오 5%,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 75%이며,개신교(17.31%)와 인디오 고유의 종교들도 존재한다. 언어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다. 그 외에는 영어와 대서양 해안의 크리올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거의 6백만에 달하는 주민 대부분이 서쪽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산다. 인종 : 69% 메스티조, 17% 유럽인 후손, 9% 아프리카인 후손, 5% 토착주민 언어 : 스페인어, 크리올 영어, 미스키토 종교 : 90% 로마 가톨릭, 10% 개신교 니카라과는 스페인과 쿠바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쿠바 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다. 니카라과 사람들은 야구를 매우 즐기며 국기(國技)라고 불릴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하다. 19세기 후반까지 적막하였던 이 나라의 문학도 불세출의 시인 루벤 다리오(후에리쿠스루벤 가르시아 사르먼트. 1867-1916)가 출현하여 일약 각광을 받았다. 소년시절부터 천재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던 그는, 당시 유럽 시(詩)의 새로운 경향이었던 고답파(高踏派)나 상징주의와 잘 동화되어 크게 도약(跳躍)하여 갔다. 그의 저작 <청(靑)> <속된 속창(續唱)>을 통하여 감상적인 낭만파 시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예술주의를 지향하는 문학운동인 소위 '근대파' 시인의 제1인자가 되었고, 다시 더 나아가서는 한층 내면적 경향을 심화시킨 걸작 <생명과 희망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참으로 유례가 드문 시적 감각, 그 시가 풍기는 리듬과 조화, 주제 선택의 묘(妙) 등으로 해서 현대 서정시의 최고 시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다리오는, 라틴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당시 에스파냐에서 일어난 신문학 시대(新文學世代) '1898년대(代)'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호수가 주요한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니카라과는 전형적인 저개발국형으로, 주요수출품은 면화(25%), 쇠고기(7%), 커피(13%) 등이다. 면화와 커피는 플랜테이션에 의해 재배되는 일이 많다. 또한 이들 농작물은 대체로 태평양 연안과 2대 호수 사이의 지역에서 생산된다. 어업과 목재는 주요 산업이었으나 중앙아메리카의 가장 빈곤한 지역이다. 니카라과의 행정 구역 15개의 주 (departamento)와 2개의 자치구 (region autónoma)가 있다. 덴마크 덴마크 왕국(), 줄여서 덴마크(, )는 북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자 덴마크 왕국의 구성국이며, 수도는 코펜하겐이다. 현재의 덴마크 지역에 인류가 최초로 거주한 시기는 약 20만년 전이며, 약 5만년 전경 빙하가 북쪽으로 이동, 광범위한 툰드라 지대가 형성되면서 순록을 사냥하는 유목민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구·신석기 시대(BC 9500년-BC 1500년), 청동기 시대(BC 1500년-BC 400년) 및 철기 시대(BC 400년 이후)를 거친 후, AD 500년경에 농경을 주로 하는 앵글족 및 유트족이 처음으로 집단 부락을 형성하였다. 고대부터 윌란 반도(유틀란트 반도)에는 데인족이 살고 있었다. 카를 대제의 북진정책의 결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해상원정은 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구드프레드 왕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6세기-10세기 사이에 바이킹이 유틀란트 반도를 중심으로 원시 왕정 국가를 형성하면서 스웨덴 남부, 영국 동부, 심지어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특히 9세기 경에는 영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826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래되어, 이외링 지역에서 일어난 왕가는 970년께 하랄드 블라톤(Harald Blåtand) 왕 치하에서 덴마크를 완전히 기독교화하였고, 1014년경 그 아들인 스벤 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왕을 겸하였다. 하랄 왕의 차남 크누드 1세(카누트 대왕)가 1016년에 잉글란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크누드가 세상을 떠나자 북해 제국은 와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1074년부터 1134년까지 스벤 2세의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그 동안에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크 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 때 슬라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섬에 구축한 성채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발데마르 2세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교회·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스웨덴·노르웨이·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 1세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의 왕이자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인 노르웨이의 호콘 6세의 아들인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인 1387년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군연합 형태의 3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 동맹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로 바뀌었으나 칼마르 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520년 크리스티안 2세가 독립을 요구하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스웨덴의 스텐 스투레 덴 윙레(Sten Sture den yngre, 연소자 스텐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분리주의자들을 제거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스웨덴 해방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룩하여, 결국 1523년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 개혁은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 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크리스티안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 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의 발전 및 학자의 배출 등 국가 번영의 기운을 보였으나, 그 후 프레데리크 2세 때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덴마크·스웨덴·폴란드·뤼베크 사이에 ‘북방 7년 전쟁’이 일어났고, 크리스티안 4세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프레데리크 3세는 귀족 세력과 대립하는 도시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1788년 농노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의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의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리크 7세의 절대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 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프레데리크 7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자유 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배하여 홀스텐(홀슈타인)과 슬레스비(슐레스비히)를 상실했으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0년 북슐레스비히를 수복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1944년까지 고초를 겪었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 중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끌려갔으나 중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비율이 미미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독일군들이 빼앗았다. 1945년 5월에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4년에는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다. 덴마크는 윌란 반도와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빙하 침식에 의해 산이 별로 없으며, 평야가 많다. 예전에는 황무지가 많았으나 개간되었다. 덴마크의 행정 구역은 5개 지역(region)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지역은 98개 지방 자치체(kommune)로 나뉜다. 덴마크의 기후는 북대서양 해류(멕시코만류) 및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위도에 비해 온난하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기온의 연교차가 적다. 이렇게 온난한 기후는 북유럽과 중앙유럽의 중간지대로서의 특색이다. 그러나 연중 바람이 많고 겨울에는 기후 변화가 심하다. 편서풍으로 인해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차를 이용하여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유틀란트 반도 서부에는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새로이 개척한 농지 주변이나 독립가옥 주위에 방풍림(防風林)을 조성한다. 가장 추운 1월의 전국 각지의 평균기온은 -1.5℃이고, 가장 더운 7월의 전국 평균기온은 17℃이다. 5월부터 8월은 낮시간이 거의 18시간 지속된다. 전국 각지의 연강수량은 650mm이며 강수분포는 연간 대체로 균등하나 7∼12월, 특히 8월에 비가 많이 온다. 지역적으로는 서부가 강수량이 많고 동부로 갈수록 적어진다. 강우일수(降水日數)는 연간 약 160일, 강설일수(降雪日數)는 연간 20∼40일 정도이다.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 군주국이다. 현재의 국가 원수는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맡고 있다. 주민은 게르만계의 덴마크인이 거의 대부분이며 다른 민족은 적게 존재한다. 인구는 약 550만 명으로 한강 이남 서울특별시 인구 (542만 명)보다 약간 많다. 덴마크어가 공용어이다. 덴마크인과 스웨덴인, 그리고 노르웨이인은 서로 자국어로 이야기해도 무리 없이 서로 통한다.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도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덴마크의 문자 해독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루터교가 국교로 인정받으며 그 외에 감리교, 모라비안, 구세군 등의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동방정교회가 존재한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덴마크인의 79.1%가 루터교 종파인 덴마크 교회(Den danske folkekirke)에 소속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0.55% 존재한다.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다른 종교는 아주 적게 존재하며, 특히 이슬람은 아랍 세계나 이란에서 온 이민자들이 믿는다. 이 나라는 문맹률이 매우 낮은 나라이며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와 그린란드 역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이 나라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한다.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와 그린란드는 2005년부터 지리는 물론이고 경제·외교적으로도 자치를 얻었다. 덴마크 본토 또한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자랑한다. 협동조합을 이루어 농업을 발달시켰다. 젖소를 많이 사육하는 손꼽히는 낙농 국가이며, 낙농 제품이 큰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돼지의 사육도 활발하여, 햄과 베이컨이 비싼 가격으로 수출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린이들의 장난감 회사 레고의 본사가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덴마크의 주요 수입 상대국은 독일(21.38%), 스웨덴(11.91%), 네덜란드(7.70%), 중국(7.31%), 노르웨이(4.97%)이다. 주요 수출 상대국은 독일(14.28%), 스웨덴(10.68%), 영국(7.42%), 노르웨이(5.81%)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모두 인접 유럽 국가들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101,646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92,248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의약품(3,698,161천 달러), 석유 제품(2,255,330천 달러), 전기에너지(2,058,950천 달러), 유압 공구 및 부품(1,459,331천 달러), 원유(1,348,348천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2,338,829천 달러), 의약품(2,149,624천 달러), 원유(2,048,916천 달러), 무선기기(1,800,776천 달러), 화물선(1,578,405천달러)이다.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같은 군주 밑에서 연합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식이 강하다. 덴마크는 한국 전쟁 때 대한민국에 병원선 MS 유틀란디아호를 보내 의료 지원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선의 의료 기자재를 한국에 기증하고 한국에 국립의료원을 설립하여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9년에 한국과 덴마크는 정식으로 수교하였다. 코펜하겐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2011년 5월 13일 비안보분야 동맹으로는 처음으로 녹색성장 분야 동맹을 체결했다. 또 대한민국 지식경제부와 덴마크 기후에너지부 간의 녹색성장협력 양해각서를 비롯해 정부와 기업간 친환경사업과 녹색기술협력 분야에서 9개의 양해각서도 체결하였다. 모두 293 명(재외국민 214 명, 시민권자 79 명)의 한민족들이 덴마크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또한 2007년 현재 덴마크에는 약 9,000명의 한국 입양인이 있다. 한국 대사관, KOTRA, 한인교회, 한국센터, 한글학교가 있고 정한친선협회, 유틀란트 모임, 코리안 클럽, 한인회가 있다. 덴마크는 방기에 명예 영사관{상위 기관은 駐부르키나파소(와가두구 소재) 대사관}을 두고 있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駐벨기에 대사관(브뤼셀 소재)이 주덴마크 대사관을 겸임하고 있다. 도미니카 연방 도미니카 연방(-聯邦, , ) 또는 도미니카국(-國), 줄여서 도미니카()는 카리브 해에 있는 국가 중 하나이며 수도는 로조이다. 영어 국명의 코먼웰스()는 연방이라는 뜻이 아닌 단순히 나라라는 뜻이지만 한국에는 도미니카 연방으로 알려져 있다. '도미니카'는 일요일을 뜻하는 라틴어이다. 콜럼버스가 이 지역을 발견한 날이 1493년 11월 3일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600년대에 프랑스와 영국의 정착자들이 도미니카 연방에 도착하였고, 수많은 세월동안 양국과 원주민 카리브 족은 섬의 통치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1763년 영국이 이 섬을 차지하게 되었고, 경작지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왔다. 1834년 노예들은 자유를 얻었다. 193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영국이 차츰 도미니카 연방에 국내 상황을 위한 통치권을 주었고, 1978년 11월 3일 - 콜럼버스가 이 섬을 발견한지 정확히 485년 만에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이 나라는 섬나라이고 사실상 국경이 없는 나라이다.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북쪽에 속하기도 하며 전체 면적은 754km이다. 대다수의 영토가 열대 우림으로 덮여 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온천인 끓는 호수가 있다. 폭포와 강이 많이 있는데 이미 멸종했다고 추정된 동식물이 상당수 도미니카 연방에 서식하고 있기도 하다. 화산 지형이 나타나며 모래 해변이 아름다워서 스쿠버 다이빙으로 유명하다. 전해지는 말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돌아가서 신세계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청을 받았을 때 그는 현재의 도미니카에 대해 묘사했다고 한다. 그는 종이를 대충 구겨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도미니카 연방이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모르네 트로이 피 국립공원은 화산 지형이 드러나는 열대 우림으로서 1955년 4월 4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도미니카 연방은 오래 전부터 베네수엘라와 영토 분쟁이 있었다. 도미니카 섬에서 서쪽으로 110 km 떨어진 작은 암초이며 베네수엘라의 실질적인 지배 상태에 있는 아베스 섬(; )에 대해 양국이 분쟁 중이다. 열대성기후이다. 주민은 아프리카계, 유럽계, 물라토 등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오기 전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이 남아 있는 경우는 카리브 제도 동부에서는 이 나라 뿐이다. 3000명 정도가 섬의 동해안에 살고 있다. 언어는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오랜 프랑스의 지배로 인해 일상 생활에서는 프랑스어, 파트와어로 불리는 크레올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경험으로 몇몇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수도 로조(Roseau) 역시 '갈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도미니카 연방은 영연방과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봉하는 기독교인 사회이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개신교도 소수나마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었기 때문에 영국영향을 받은 문화가 많다. 하지만 의외로 아프리카인의 문화도 있다. 도미니카 연방은 1978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동시에 수교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년 후인 1981년에 단교하였다가 10년 만인 1991년에 재수교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共和國, , )은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제도의 히스파니올라섬에 있는 나라이다. 대앤틸리스 제도의 일부인 히스파니올라섬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아이티와 접경하고 있다. 인구와 면적으로 볼 때, 도미니카 공화국은 카리브 제도의 국가 중 쿠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수도는 산토도밍고이다. 7세기 이래로 타이노 원주민이 거주했으나,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로 순수한 원주민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1795년 바젤 조약의 결과로 섬 전체는 프랑스에 지배를 받기 시작했으나, 1809년 다시 스페인에 넘어갔다. 1821년 독립을 선포했으나, 곧 아이티의 점령을 받았고, 1844년 2월 27일에 아이티로부터 독립, 도미니카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다시 받았고, 그 후로도 라파엘 트루히요의 독재 등으로 정국 불안이 있었던 힘든 역사를 갖고 있다. 수도는 산토도밍고이다. 제2도시는 산티아고데로스카바예로스이며, 제3도시는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이다. 국가의 모든 지역이 섬으로 구성되었으며, 아이티와 국경이 맞닿는다. 대 안틸레스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히스파니올라섬에 있으며 아이티와 2:1의 비율로 국토를 점유하고 있다. 전체 국토면적이 약 48,730km로 쿠바 다음으로 대 안틸레스 제도에서 큰 나라이다. 가장 높은 산은 피코 두아르테(Pico Duarte)로 3,087m이며 가장 큰 호수는 엔리키요(Enriquillo) 호수이다. 많은 강이 있는데 소코 강, 이가모 강, 바하보니코 강 등이 있다. 강을 토대로 전기 발전을 하기도 하는데 댐과 수력 발전소가 바오, 니자오, 오스마, 이가모 강 등지에 있다.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와 제2의 도시 산티아고(Santiago), 라베가(La vega), 푸에르토플라타(PTO PTA, 산펠리페데푸에르토플라타)등이 있다. 연평균 기온 27℃. 연평균 강우량 약 1,500mm ~ 1,800mm. 아열대성 기후이며, 건기(11-4월)와 우기(5-10월)로 나뉜다. 대통령제를 실시한다. 2013년 현재 집권당은 도미니카 해방당(Partido de la Liberación Dominicana, 약칭 PLD)이며 대통령은 다닐로 메디나이다. 주민은 유럽계가 16%, 아프리카계가 11%, 물라토가 73%, 기타이다. 2007년 현재 약 10%가 아이티에서 합법 혹은 불법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언어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다. 전국민이 스페인어를 모어로 사용하며 전인구의 10% 가량을 차지하는 아이티인들은 프랑스어에 기반한 크레올어를 사용하며, 프랑스어도 사용한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국교)가 95%이지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 안식교, 오순절교회(Assembly of God,하나님의 성회), 감리교, 성공회, 침례교 등의 개신교회도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소수교회로서 존재한다. 이슬람교를 포함한 기타종교는 5%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의 야구는 아주 인기가 높아 국기(國技)나 다름없다. 매년 10월 중순쯤 윈터리그(beisbol invernal)가 시작되어서 1월 말쯤 끝난다. 총 6개의 야구 팀이 있다: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근거지를 두는 티그레스 델 리세이(Tigres del licey), 레오네스 델 에스코히도(Leones del Escogido), 산티아고데로스카바예로스의 아길라스 시바에냐스(Aguilas cibaeñas),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의 히간테스 델 시바오(Gigantes del cibao), 산페드로데마코리스의 에스트레야스 오리엔탈레스(Estrellas orientales), 라로마나의 아수카레로스 델 에스테(Azucareos del este, 혹은 Toros del este라고도 한다). 주로 월요일과 목요일은 경기를 쉬며 비나 데모로 사정상 못하게 되었던 경기를 이날 한다. 자국 리그가 끝나면 우승 팀이 인근 카리브해의 국가인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멕시코의 우승 팀과 함께 카리브 시리즈(Serie del caribe)를 한다. 자국 대표팀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한 적도 있었다. 라오스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 , ) 또는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의 국가이다. 북서쪽으로는 미얀마와 중화인민공화국, 동쪽으로는 베트남, 남쪽으로는 캄보디아, 서쪽으로는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로서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내륙국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약 68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주요 도시로는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방비엥, 팍세, 카이손 폼비한, 타케크 등이 있다. 라오스의 역사는 14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존재하고 그 이후 세 개의 왕국으로 나뉜 란쌍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3년, 비엔티안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싹 왕국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연합되었다. 1945년 3월 일본군의 점령 이후 잠시 독립을 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다시 프랑스의 통치를 받다가, 1946년 프랑스가 루앙프라방 왕의 통치하에 통일된 라오스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1949년 헌법이 공포되고 프랑스 연방 안에서 제한된 자치국가로 존재하다가 1950년 초부터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실질적인 독립을 추진하였다. 좌파인 파테트라오의 군대가 북베트남과 연합해 라오스 정부군과 내전을 벌였고, 1975년 정권을 잡자 공산주의 국가인 라오 인민민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설립하였다. 라오스는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 또는 공산주의 국가이다. 수도는 비엔티안이다. 다른 큰 도시로는 루앙프라방, 카이손폼비한(사반나케트), 참빠삭 등이 있다. 공용어는 라오어이다. 라오스는 아시아 태평양 무역협정,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동아시아 정상회의, 프랑코포니의 회원국이다. 2013년 2월 WTO에 가입했다. 라오스의 역사는 13세기에 중국 남부에서 살던 민족의 하나인 라오족이 지금의 라오스 영토로 이주해 온 것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메콩 강 유역에서 살았으며, 특히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참빠삭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353년에 파움 왕의 주도로 메콩 강 유역에 란쌍 왕국이 등장하였다. 란쌍 왕국의 지도자였던 파움 왕은 크메르 왕국이 약해지자 독립을 선언하였고, 불교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술리나봉사 왕 때 크게 번영했지만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18세기초에 급격히 몰락하여 란쌍 왕국은 3개로 분열되고 친 태국 세력과 친 베트남 세력의 대립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때 비엔티안 왕국의 차오아누 왕은 영국이 태국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태국 정벌에 나셨다. 하지만 1828년에 태국이 비엔티안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심지어 국왕도 태국에 끌려가 감옥에서 살았다. 비엔티안 왕국의 왕 차오아누는 1829년 감옥에서 죽었다. 결국 분열된 라오스는 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어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미얀마로 가는 길을 개방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는 급격히 혼란해졌다. 라오스의 독립파는 라오읻싸라, 즉 공산정당을 만들어 라오스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라오읻싸라는 베트남 공산정권인 베트남민주공화국과 긴밀하게 유대했다. 프랑스와 라오스 독립파의 전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1949년 7월 19일 프랑스는 라오스를 독립시켰지만 국방, 외교, 재정권을 프랑스가 가졌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독립이었다. 하지만 곧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익의 지도자는 라오스 왕국의 총리가 된 수바나 푸마였고 좌익의 지도자는 수파누봉이었다. 1950년 라오스의 공산세력이 뭉쳐서 파테트 라오가 탄생했다.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 라오스 조약에 의해 완전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후 내전은 계속 심해졌고 결국 1954년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라오스의 왕실 유지, 파테트 라오가 참여하는 정부 수립을 골자로 하여 평화 조약이 맺어졌지만 중립은 실패하였고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라오스에서 우파, 중립파, 좌파(파테트 라오)가 갈라져 라오스 내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1973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였고, 1974년 세 파 연합에 의한 라오스 민족 연합 정부가 성립되었지만, 1975년 남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고 라오스 국왕과 수바나 푸마가 물러나면서, 12월 연합 정부가 왕정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것으로 30년에 걸친 라오스 내전은 완전히 종식되었고 라오스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이웃 나라 베트남에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 라오스도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북베트남군은 전쟁 물자를 라오스를 통과하는 이른바 '호찌민 트레일'를 통해 전선에 수송하였다. 미군은 라오스의 일부 소수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호찌민 트레일를 차단하기 위해 비밀리에 라오스 전 국토를 폭격하였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58만 회의 폭격이 이뤄졌고, 2백만t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어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미국은 베트남전 종전시까지 폭격과 라오스 내전 개입을 부인해서 '비밀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까지도 폭격으로 인한 불발탄에 끊임없이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라오스의 공산주의 체제는 실패하여 경제는 악화되었다. 게다가 1980년, 태국과 국경 분쟁을 겪었고, 태국과 미국의 경제 봉쇄로 라오스 경제는 파탄되었다. 같은 해 라오인민혁명당은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단절하였다. 1986년, 신경제 정책을 도입하였다. 1987년 태국과 다시 국경 분쟁을 벌여 태국 공군기 1대가 격추된다. 1988년, 라오인민혁명당이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다시 개선하게 된다. 1990년대에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 몰락으로 인해서 라오스도 시장경제를 허용하게 된다. 1991년 헌법을 제정하고, 라오스 혁명당의 일당 독재 체제 유지를 확인하였다. 1992년 2월 태국과 우호 협력 조약을 맺었다. 7월 베트남과 함께 ASEAN에 옵서버로 참석했다. 11월 21일, 까이썬 폼위한 대통령(제2대)이 사망하였다. 1997년 7월 23일,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에 가입하였다. 2006년 4월 30일 투표로 제6대 국회(단원제, 임기 5년) 선거 결과 선출된 국회의원 115명 중 114 명 라오 인민 혁명당 당원이었고, 비당원은 단지 한 명만 존재하였다. 같은 해 6월에 소집된 제6대 국회 제1차 회의에서 라오스 인민 혁명당 서기장에 군부 출신의 쭘마리 싸이냐선이 대통령에, 라오스 인민 혁명당 정치국원인 부아썬 붑파반이 총리에 선출되었다. 2007년 6 월 미국으로 망명했던 먀오족의 원래 왕국군 장군과 미군 퇴역 소령에 의한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고, 관계자는 미국 사법 당국에 의해 제삼자 중립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2010년 12월 23일 제6대 국회 제10차 회의 폐회식에서 부아손 총리는 임기 중간에 사임하였고, 국회 의장인 통싱 탐마봉이 새 총리로 취임하였다. 2016년 4월 20일 라오인민혁명당 총비서 분냥 보라칫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다. 이 나라는 인도차이나 반도 내륙부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 중 유일하게 바다가 면한 부분이 없다. 지형은 중국에서 남하하는 안남산맥이 국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므로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야는 메콩강 및 그 지류에 연해서 약간 펼쳐져 있을 뿐이다. 기후는 대다수 지역이 열대 몬순 기후이나 내륙 지방이므로 하계와 동계의 기온차가 크다. 사반나케트 등 남부 지역은 열대 몬순 기후이며(평균 25도) 북부의 루앙프라방 지역은 온대 동계 건조 기후이다. 그리고 중국과 인접한 산악 도시 무옹싱 지역은 겨울에도 이따금 서리도 내린다(1월 평균기온 10도). 5월부터 10월까지가 남서몬순이 부는 우기로, 약 2,000mm의 강우가 있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북동몬순이 부는 건조기이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 또는 공산주의 국가이다. 현재 라오스의 정당은 라오인민혁명당 하나뿐이다. 국가 원수는 5년 임기로 선거로 뽑히는 대통령이며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무총리가 있다. 옛날에는 정부의 정책을 당 정치국(11명)과 당 중앙 위원회(61명)에서 결정했다. 1991년 라오스는 헌법을 바꾸어 국회의원(85명, 임기는 5년)을 비밀 선거로 뽑도록 개정했다. 라오스 국회는 1997년 99석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모든 새로운 입법안을 가결하였다. 라오스 국회의 의석 수는 2006년 115석으로 다시 확대되었고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1년 4월 선거에서는 다시 132명으로 늘어났다. 라오스의 행정 구역은 17개의 주(퀭, ແຂວງ)와 1개의 도(나컨루앙, ນະຄອນຫລວງ)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는 비엔티안(위양짠)이다. 국민의 생활은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공업은 미발달 상태에 있다. 농업은 수도작(水稻作)이 중심이지만 생산성이 낮아 국민의 주식인 쌀의 공급이 부족한 해도 있다. 티크의 임업자원이 있으나 아직 충분히 개발되고 있지 않다. 라오스는 베트남처럼 쌀을 수출한다. 1975년부터 공산주의 통제경제를 지켜오다가 1990년에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하여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2003년부터 광물과 전기의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8%의 높고 안정적인 성장세를 달성하였고 2013년에는 경제 성장률이 높은 나라로 부상하기도 했다. 2014년의 경제 성장률은 약 7.6%로 예상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라오족이며 이외 48개 소수민족(공식적인 발표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다고 한다)이 거주한다(2005년 인구조사). 비록 인구는 적지만, 라오스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오스 특유의 고립성과 병존하는 이러한 다양성은 라오스가 문화·정치적으로 통합되는 데 심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나라는 지배족인 라오족에 의해 항상 통치되어 왔다. 그들의 통치는 최근까지도 소수민족의 생각이나 활동보다는 라오족 엘리트 집단의 생각이나 열망을 반영해 왔다. 그러나 라오스 정부는 라오스 국적을 가지는 라오스인을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으로는 소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라오스인은 사는 지역의 고도에 따라 저지 라오족(라오룸), 구릉 라오족(라오텅), 고지 라오족(라오쑹)으로 나눌 수 있다. 라오어. 그 외에도 영어,태국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소수 민족어도 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유일하게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는 라오스는 프랑스어 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 소속에 있다. 다만, 영어로 된 의사소통은 제한적이다. 또, 베트남어는 일부 베트남에서 건너온 베트남인 자손들만 사용하지만, 태국어는 라오어와 매우 흡사하고 라오스 내 텔레비전 방송 채널이 대부분이 태국방송이라 라오스에서 태국어를 사용해도 별 문제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라오스는 그리스어로 '백성'이라는 뜻이다. 남방상좌부 불교가 60%, 애니미즘이나 그 외의 종교가 40%이지만, 불교와 애니미즘이 혼합되어서 믿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몽쪽은 다른 민족과 달리 유교이다. 그 외 라오스 남부에서는 기독교를 소수 믿는다. 공산주의 정권의 집권 이후 종교의 자유를 탄압했지만, 1991년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이후 남방상좌부 불교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도 2003년 미국과의 협정 이후 현지 교회의 예배가 자유로워지는 등, 조금씩 완화되고 있다. 1974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나, 다음 해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되어 단교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과는 다시 1985년 10월 25일에 재수교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선수 및 임원단을 파견하였다. 현재 비엔티안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으며, 서울에는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총 천여명의 한국인들이 라오스에 거주 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으로 오려고 했다고 알려진 탈북 청소년 9명을 라오스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강제 추방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2013년 라오스 탈북청소년 북송 사건)이 일었으며, 이로 인해 라오스 정부와 대한민국 외교부간에 진실 공방 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2019년 9월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이 라오스를 방문하며 메콩강 개발자금을 대겠다는 약조를 했다. 그러나 이행여부는 두고 볼 일이다. 라오스의 역사는 13세기에 중국 남부에서 살던 타이계 민족의 하나인 라오족이 지금의 라오스 영토로 이주해 온 것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메콩 강 유역에서 살았으며, 특히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참빠삭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1353년에 크메르 왕국의 지원을 받고 라오스의 메콩 강 유역에 란쌍 왕국이 등장하였다. 란쌍 왕국의 지도자였던 파움 왕은 라오스의 란쌍 왕국(백만마리의 코끼리 영토라는 뜻)을 수립했다. 태국의 딱신 대왕은 1768년 방콕 건너편의 대방콕 일부에 속하는 톤부리를 도읍지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라오스·캄보디아까지 세력을 넓혔다. 라오스는 경제 분야에서는 태국과 가장 많은 경제관계를 맺고 있다. 라오스는 통일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함께 미국과 싸운 베트남을 혈맹으로 여겼다. 양국 공산당의 서기장은 매 해 서로 방문하고 있으며 아세안 내에서의 입지를 위해서도 함께 노력했다. 그러나 최근 베트남이 친미국가로 바뀌면서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라오내전 당시 수바나푸마 수상과 라오이싸라 당원들이 세운 우파 정권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 정부 건립 후 거리가 요원해졌다. 그러나 최근 개선되고 있으며 특히 미국경찰이 몽족반군의 미국임시정부 지도자를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라오스 측의 미국에 대한 신뢰가 좀 더 높아졌다. 라트비아 라트비아(, )는 북유럽에 있는 공화국으로서, 공식 명칭은 라트비아 공화국()이다. 북쪽은 에스토니아,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리투아니아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발트 해와 리가 만에 닿아 있다. 수도는 리가(Riga)이다. 18세기부터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하였으나 1940년 8월 소련 에 강제 점령 병합되었다. 1991년 소련 8월 쿠데타 실패 후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독립국가연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구성은 라트비아인이 58%이며,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국민소득의 48.6%를 서비스업이 23.9%를 제조업이 22.8%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핀우그르계의 리브인들과 레트족이라고 불리는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리가만 연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201년 이들에 의하여 리가 시가 건설되었다. 1558년 러시아의 이반 4세가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독일 기사단은 라트비아를 리투아니아의 보호령으로 양도하였고, 1561년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니아 공국과 쿠를란트(Courland) 공국이 성립하였다. 그 후 1600년부터 1629년까지 이 지역을 둘러싸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였다. 스웨덴은 1621년 리가를 점령하였고, 1629년 리보니아 공국은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 하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예카프스 케틀레르스(Jekabs Ketlers) 공작이 지배하던 시대(1642-1682)에는 동방의 네덜란드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발전을 꾀하였다. 이 시기에는 쿠를란트 공국의 선단이 대서양을 누비고 다녔으며, 서인도 제도의 토바고와 아프리카의 감비아에 해외식민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 계속된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간 북방전쟁의 결과 리보니아 지역이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이어 쿠를란트 역시 1795년 폴란드 분할의 결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하자,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라트비아는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경제, 문화, 교육 전반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34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카를리스 울마니스(Kārlis Ulmanis)가 4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 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라트비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 소련은 1940년 6월 중순, 발트 3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라트비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 라트비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 아래에 치러진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親)소련 후보가 97.6%의 표를 얻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국제 사회는 소련의 발트 3국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난하였다. 소련으로의 편입 과정에서 약 13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해외로 망명하였고, 1953년까지 약 12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었다. 한편 약 75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보다 산업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총인구의 52% 선으로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99년에는 제6대 대통령으로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Vaira Vīķe-Freiberga)가 선출되어 라트비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친미, 친서방 정책을 펴고 있다. 2012년 2월에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을 정해놓은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다. 2012년 8월 28일에 라트비아의 국방장관이 소련군 기념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계 정치인들이 반발했다. 라트비아는 2009년 7월 1일을 기해 새로 개편된 행정 구역에 따라 110개 지방 자치체()와 9개 직할시()로 나뉜다. 발트 해 동쪽에 있는 라트비아는 동유럽 평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국토 전체가 매우 평탄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저지대로, 비옥하며 숲이 우겨져 있다. 주위에는 다우가바 강, 리엘루페 강, 가우야 강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총 531km이다. 습윤한 대륙성 기후이다. 그러나 발트 해와 접하고 있어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띤다. 여름에는 따뜻하고 봄과 가을에는 아주 온화하지만 겨울은 북쪽에 있어 다소 춥다. 강수량은 8월에 가장 많다. 러시아 일대의 북쪽 기압골의 영향으로 겨울이 되면 칼바람이 몰아치거나 눈보라가 치는 일도 많으나, 북위 60도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기온이 높은 편으로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다. 2011년 시점에서 주민은 라트비아인이 62.1%, 러시아인이 26.9%, 벨라루스인이 3.7%, 우크라이나인이 2.3%, 폴란드인이 2.4%, 리투아니아인이 1.4%, 라트갈레인인 포함한 기타가 2%이다. 300여명 정도 밖에 남아 있지않은 소수 민족 리보니아인도 대부분이 라트비아에 산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5년 현재 1.29명이다 . 1998년에는 1.1명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다. 2005년 현재 천명당 출산율은 9.3명, 천명당 사망율은 14.2명이어서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라트비아 이민귀화국에 의하면, 라트비아인구는 약 230만명이지만, 라트비아 국적자는 약 180만명, 외국 국적 보유자가 3〜4만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약 45〜50만명의 소련 시절부터 귀화하지 않고 영주해 온 이민은 무국적자로 취급되고 있다. 그들은 문자그대로 국적이 어느 나라인지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시절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나서 한번도 외국으로 나간 적이 없는 경우에도, 귀화하지 않는 한 라트비아 국적자가 될 수가 없고, 다른 나라의 국적보유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것도 아닌 것 또는 생활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게나 국민으로서의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권을 시작으로 한 다양한 시민권행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며, 인도적인 관점에서 라트비아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문제의 하나로 해결을 갈망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무국적자의 대부분은 러시아계 주민)뿐만 아니라 유럽의 인권담당기관으로부터도 여러 번에 걸쳐서 개선을 재촉받고 있지만, 비라트비아계 주민의 라트비아 사회로의 귀화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라트비아 당국은 아직까지도 해결책을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으로 무비자로 러시아 방문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실로서는, 1991년에 라트비아가 소련으로 독립한 때에 소련으로의 병합(1940년)이전의 국민과, 그 직계자손으로만 자동적으로 라트비아국적의 여권이 수여되었다. 그 이외의 소련 시절에 라트비아로 이민온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한 러시아인에게 수여되지 않았지만,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러시아인자녀에게는 한쪽 부모의 요청만으로 국적이 부여되어 있다. 그들은 귀화하지 않고 계속 영주해서 소련 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1997년부터 라트비아 정부가 발급한 Alien Passport(무국적 여권)으로의 전환이 의무로 지게 되어 무국적자라고 정의되게 되었다. 라트비아는 다민족, 다언어국가이지만 라트비아어가 라트비아의 국어, 공용어이다. 독립 직후부터 라트비아어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라트비아어가 공용어이나, 리가 등 도시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자(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등)가 많고 높은 러시아어 사용률에 의해서 러시아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81.2%의 주민이 러시아어에 능통하며, 37.5%가 모국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수도인 리가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자가 시 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모어화자의 비율은 공용어인 라트비아어가 58.2%, 러시아어가 37.5%이다. 라트비아인의 71%가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으며, 러시아인의 52%가 라트비아어를 말할 수 있다. 국적 취득의 조건에 라트비아어 습득이 의무로 지게 되어 있어서, 러시아계 주민에 의한 라트비아어 화자가수가 증가했다. 발트 3국 중에서 가장 러시아인이 많기 때문에, 러시아어 인구도 많다. 특히 수도 리가에서는 인구의 41.7%(2008년)의 러시아인이며, 인구의 절반 가까지를 차지하며, 라트비아인(42.3%)과 거의 같은 수가 되고 있다.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 습득률도 높다. 세대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다르며, 중고년층은 러시아어, 라트비아어에 더해서 독일어가, 청소년층은 러시아어, 라트비아어와에 영어를 말할 수 있는 비율이 높지만, 청소년은 독일어를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젊은 세대나 지방에 사는 라트비아인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늘고 있지만, 여전히 러시아어의 존재는 매우 크다. 영화관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자막이 병기되어 있으며, 라트비아에서 출판, 발행되는 신문이나 잡지에 있어서도 라트비아어판과 러시아어판이 존재하는 경우도 다수있다.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러시아어판쪽이 종류와 양 모두 풍부하다. 이들 사실은 지금도 예전 점령국의 모어가 자국에서 많이 활개치고 있다고 느끼는 라트비아계 주민에게 있어서는 위협이다. 한편으로 라트비아어가 국제언어로 통용되지 않는 동안, 최근의 러시아, CIS여러나라의 경제활동의 활성화를 배경에 그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습득하는 경우는 영어를 공부하는 것과 함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라트비아계 주민도 있으며, 러시아에 대한 태도는 다른 라트비아계 주민과 똑같지 않다. 라트비아 국내에서 취직하는 경우에 조차 그다지 전문성, 국제성을 따를 수 없는 단순한 직종이라도, 고객의 3〜50%가 러시아어 화자라는 상태이기 때문에, 라트비아어에 더해서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취직조건이 되는 경우도 많고, 일상생활에서는 라트비아어밖에 말하지 않는 경우라도 러시아어를 공부한다. 라트비아에 진출하는 외국기업도, 현지에서 다국어를 말하는 비율이 높은 것(기본은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 다른 언어)을 바탕으로 현지로 진출한 뒤에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정도 러시아어가 쉽게 영향력을 잃지 않는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본국은 물론, 러시아어권이라고 부르는 나라, 지방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이며, 관광객이나 새로운 사업획득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또, 서방측의 자본도 라트비아를 EU내에서 러시아와의 창구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라트비아는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되고 있다. 화자는 소수이지만 서부에서는 라트비아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라트갈레어가 사용된다. 또한 핀우그르계의 토착소수민족인 리보니아인이 사용하는 리보니아어도 있으나, 2013년에 마지막 화자의 사망으로 제2모국어로 쓰는 사용자들을 제외하면 소멸되었다. 라트갈레어, 리보니아어는 법률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그 외에도 리투아니아어, 독일어 등이 일부 사용된다. 과거 라트비아인은 스웨덴과 독일 북부의 영향으로 개신교의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련 통치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루터교 신앙은 크게 위축되었다. 루터교 신도가 가장 많으며, 소련 시절 러시아인의 이주가 많았으므로, 러시아 정교회 신도도 상당수 남아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향으로 남부지방에는 로마 가톨릭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서비스업이 라트비아 경제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데, 교육, 행정, 교통과 통신, 소매와 도매상에 관련된 일들이다. 공업에는 라트비아 근로자들의 6분의 1 적게 고용되어 있으며, 섬유와 의류, 교통 수단, 목재 제품의 공업과 식품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인구의 10분의 1은 농업에 종사하는데, 소와 염소를 사육하고 감자, 보리, 귀리, 밀, 호밀 등을 생산한다. 다른 발트3국과 같으며, 도시에서는 인터넷접속환경이 잘 정비되어 있다. 특히 공중무선인터넷접속망은, 리가를 중심으로 접속가능지역이 급속히 확대되어 있는 것외에, 광섬유망도 정비되기 시작되고 있다. 이 나라의 방위는 국방부(Latvijas Nacionālie bruņotie spēki, 약칭 NBS)가 맡는다. 공휴일에는 다채로운 전통 의상을 입고 축제를 벌이는 편이다. 라트비아인들은 민속 특히 민요에 깊은 전통을 담고 있다. 아이스하키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며, 그 외에도 썰매 종목(봅슬레이, 스켈레톤)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라트비아의 대표적인 스포츠 선수로는 스켈레톤 선수인 토마스 두쿠르스, 마르틴스 두쿠르스가 있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은 발레, 오페라, 드라마 등을 즐기는 편이다. 대한민국은 라트비아와 1991년 수교하였다. 2015년 9월 15일 주한라트비아대사관 이 개관하였다. 라트비아가 발트3국 중 처음으로 한국에 주한공관을 낸 것이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소련의 공화국으로 합병되었던 역사적인 이유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는 라트비아 내 러시아인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소련으로부터 합병된 압레네 지역으로 인해 러시아와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를 경계하기 위해 북대서양 조약기구 및 유럽 연합에 가입을 하였다. 에스토니아나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며, 이 외의 각 서방 국가와도 좋은 관계이다. 레바논 레바논 공화국(, ) 또는 레바논(, )은 중동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이슬람교 54%, 기독교 40.5%의 다종교 국가로, 시리아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수도는 베이루트이다. 좋은 항구를 가진 혜택으로 레바논은 옛날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여 왔다. 기원 전 30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이 해안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티루스(지금의 티레)·시돈 등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그 뒤, 바빌로니아·페르시아 제국·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는데, 로마는 기원전 64년에 레바논을 점령했다. 로마 시대에는 티루스에 해군기지가 설치되었으며, 서기 300년대에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395년에 레바논은 비잔틴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600년대 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들에게 정복된 후부터 아랍화·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대에는 산악지대가 이슬람교의 분파인 시아파·드루즈파 등과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1~12세기에는 셀주크 터키와 십자군의 쟁탈장이 되었으며, 1516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19세기까지 이 제국의 술탄 밑에서 반독립적인 여러 세력이 레바논을 지배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 제국은 레바논의 직접적인 지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마론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의 분파인 드루즈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되었다. 이 분쟁에 프랑스가 개입한 것을 계기로 1861년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함에 따라 1920년 4월 산 레몬 회의에서 베카고원 등의 내륙부도 레바논에 합병되었으며, 1923년에는 시리아 등과 함께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26년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위임통치 아래 자치국이 되었고, 1944년 1월에 완전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뒤 레바논은 복잡한 종파(宗派)의 대립을 배경으로 독특한 종교연합국가를 형성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철저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아랍 여러 나라의 물자와 정보 제공의 중간자적 역할로 독자적인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중동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970년의 요르단 내전 이후 요르단으로부터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어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레바논에서의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의 수가 거의 비슷하게 되어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우위는 무너졌으며, 그 뒤 정세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종종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받았으며, 마론파 기독교인들도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반대하는 팔랑헤(Phalange) 민병대를 결성했는데, 이스라엘이 팔랑헤 민병대를 지원하였으며 지금도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친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단체와 헤즈볼라 무장단체 소탕을 위해 계속 팔랑헤 민병대 정당인 카테브당을 계속 지원하고 있는 중이다. 1975년 2월에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이슬람교도와 이에 반대해 팔랑헤 민병대를 결성한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내전이 일어났으며, 1976년 11월에는 시리아군의 개입을 초래했다. 또한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PLO 소탕을 위해 서(西)베이루트를 완전히 포위하고, 2개월에 걸쳐서 맹폭격을 가했다. 그해 8월 미국의 중재에 의하여 PLO의 서베이루트 주둔 군대의 철수 합의가 성립되어 약 1만 명의 PLO 게릴라는 아랍 세계 8개국으로 퇴거했다. 이후에도 1982년 9월의 기독교 민병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사건, 1983년 7~9월의 기독교·이슬람교 각 파에 의한 내전 격화와 미국 해군의 함포사격, 1983년 10월의 미국 및 프랑스의 주둔 본부에서의 폭탄테러사건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1월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이슬람교도 세력과 정부군·기독교 민병대의 내전이 또다시 격화되었으며, 미국 해군은 이슬람교 민병대 거점에 재차 함포사격을 가했다. 그해 2월 이슬람교 세력이 총궐기하여 서베이루트를 제압했으며, 3월에는 시리아의 주도 아래 정전(停戰)이 실현되었다. 2006년에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다. 레바논은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에게 같은 수의 의원을 보장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각각 64명의 의원이 할당되어 총 128명으로 의회가 구성된다. 선거구에 따라 종파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며, 이웃 국가인 시리아의 영향력도 강한 편이다. 레바논의 정당 가운데 하나인 헤즈볼라는 미국 등의 국가로부터 테러 단체로 취급받기도 한다. 현재 레바논 팔랑헤 민병대 단체 출신이 집중되어 있는 기독교 마론파 우파성향의 카테브당은 현재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레바논은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이 나란히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고 그 사이에 평지가 있다. 평지는 그 밖에도 협장(狹長)한 해안 평야가 있다. 기후는 지중해성이지만 강우량은 동쪽으로 감에 따라 감소한다. 레바논은 연중 약 300일간 맑은 날씨를 보인다. 겨울에도 해안지역은 따뜻하고, 산간지역에만 눈이 내린다. 여름에는 해안지역은 덥고, 산간지역은 따뜻하다. 이러한 기후 조건 덕분에, 레바논에서는 봄 동안에 같은 날 산에서는 스키를 타고, 해변에서는 해수욕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해안지방에서도 눈발이 내리거나 여름에는 드물게 40도 이상으로 올라갈 때도 있다. 1990년 헌법 11조에 "아랍어는 공용어이다. 법률은 프랑스어를 사용할 경우를 결정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부처는 프랑스어도 아랍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비중을 높여가는 영어는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어랑 아람어도 쓰인다. 레바논은 시리아와 함께 공식적으로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지 않은 아랍 국가로서, 여러 종파를 인정한다. 무슬림의 수가 많지만 종래 정치적으로 우세를 보인 기독교 정치 세력의 힘이 상당하기 때문에 비이슬람 국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종파적 다양성은 레바논 사회에 정치적 통일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레바논의 인구 구성은 아랍인이 95%, 아르메니아인이 4%이며, 종교는 이슬람교 54%(수니파 27%, 시아파 27%), 기독교 40.5%, 드루즈교 5.5%이다. 기독교는 마론파가 21%로 기독교인의 절반을 조금 넘고, 동방정교회가 8%,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5%, 그 밖의 기독교 종파들이 6.5%를 차지한다. 마론파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에서 그리스도 단의론적 이단으로 낙인찍혔으나, 후에 십자군 관계로 12세기에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 이래로 오늘날까지 그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600년대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이슬람교 세력이 레바논 지역을 정복하면서 서서히 아랍화·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지금의 레바논은 프랑스가 시리아를 독립시킬 당시 마론파 기독교인이 다수 거주하던 프랑스령 시리아의 서남부 해안가를 분리해 독립시킨 곳으로서 독립 당시에는 기독교 비율이 절반을 넘었으나, 현재는 오히려 이슬람 인구가 절반을 넘어 기독교 국가도, 이슬람 국가도 아닌 다종교,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현재는 무슬림의 수가 많지만 독립 당시의 인구를 바탕으로 마론파 기독교 정치세력이 힘의 우위를 보여왔기 때문에 양측간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기독교계가 대통령을 차지해 왔는데, 최근에는 증가한 인구를 바탕으로 이슬람교계의 입김이 강하져 기독교인인 대통령은 이슬람계의 지원을 얻지 않고서는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우며 심지어는 대통령의 선출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레바논에서는 정계에서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이 동등하게 자리를 나누어 힘의 균형을 이루어 종교 간의 공존을 도모하고 있지만, 이러한 정치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는 심각한 무능과 부패, 혼란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레바논은 2007년 2월 10일 레바논 국회의 징병제 폐지안에 따른 헌법 개정으로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다. 2015년 2월 9일 IS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레바논에 2500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지원해줬다. 레바논은 미국의 무기지원국 중 5위에 속한다. 레바논은 유럽 연합과의 협력조약에 관하여 2001년말 협상을 끝내고, 양측은 2002년 1월에 조약을 가조인하였다. 레바논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이었지만 종파에 따라 대한관계의 시각도가 매우 다른 나라이다. 우경성향의 그리스도파, 특히 친이스라엘 성향의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 정당인 레바논의 카테브당은 남한에 호의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으며, 좌경성향의 이슬람파, 특히 친이란 성향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와는 북한에 호의적인 관계를 보여서 사실상 등거리 외교노선을 걷고 있다. 1981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동시 수교했다. 최근 임종석 비서실장은 레바논을 방문하였다. 레바논의 기아문제는 많이 개선된 상태이다. 아일랜드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매년 발간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레바논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7.1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양호한 상태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26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하지만 꾸준히 눈에 띄는 하락세를 보여온 다른 나라들에 비해 1992년의 11.4점에서 2016년까지 겨우 4점 정도의 감소를 보인만큼 그 개선 정도가 매우 느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기아종식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레소토 레소토 왕국(, , )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로, 수도는 마세루이다. 국명 "레소토"는 소토어로 "소토족의 나라"를 뜻한다. 1818년 모슈슈 1세(Moshoeshoe)가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왕국을 세웠다. 보어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험에 빠지자 영국에 보호를 요청해 1868년 영국의 보호령 바수톨란드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통일하자는 요구를 거부하고 1966년에 영국 연방 내의 자치 국가로 독립했다. 1970년 총선에서 조나단 총리가 이끄는 여당 민족당(BNP)이 국왕 옹호파인 회의당(BCP)에 참패했다. 그러자 조나단 총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고 한때 국왕 모슈슈 2세를 추방시키기도 하였다. 1986년 레한야(Lekhanya) 소장의 쿠데타로 조나단 정부는 전복되었고 군사평의회 아래 레소토를 통치하였고 1990년에는 모슈슈 2세를 추방시키고 레치에 3세(Letsie III)를 즉위시켰다. 1991년 라마에마(Ramaema)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고 1993년 3월 23년만에 실시된 총선에서 의회당(BCP)이 국회 65석을 전부 차지하는 압승으로 모켈레 정권이 출범하였다. 1995년 레치에 3세가 퇴위하고 모슈슈 2세가 재즉위 하였지만 1996년 모슈슈 2세가 교통사고로 사망해 1997년 레치에 3세가 재즉위하였다. 레소토는 에스와티니와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내륙국이다. 수도는 마세루이다. 전체 면적은 30,355km이다. 레소토는 타국에 둘려싸여있는 국가이며, 전체 국토가 해발 1,000m 이상인 유일한 국가이다. 가장 낮은 곳이 1,400m일 정도로 해발고도가 높으며 전국토의 80%가 해발 1,800m 이상이다. 연 평균 온도가 15℃~35℃에 머문다. 해발고도 때문에 일 년 내내 타지역에 비하면 서늘하다. 대부분의 비가 여름에 천둥번개와 함께 내린다. 마세루와 저지대 지방은 영상 30도까지 오르며 겨울에는 영하 7도까지 떨어지기도 하는데 고지대에서는 영하 18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사막에서는 눈이 내리는 것이 보통이며 더 높은 봉우리는 일 년내내 눈이 서려있다. 국민의 99.7%가, 반투계의 소토족이다. 레소토의 국민은 단수형에서는 모소토인 (Mosotho), 복수형에서는 바소토인 (Basotho)으로 불린다. 14세 이상 인구의 85%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아 아프리카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보이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소토어(세소토)와 영어가 공용어이다. 소토어가 90% 이상의 사람들에게 모국어로 사용되고 영어는 정부의 발표와 같은 공식적인 상황에서 쓰인다. 이외에 소수민족 언어 중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식언어인 줄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국민의 약 90%은 기독교를 믿으며 개신교와 가톨릭이 각각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이슬람 교, 불교를 비롯한 기타 종교와 토착 종교가 나머지 10%를 차지한다. 의회 간접 민주제이자 입헌군주제로 국가 원수는 국왕이다. 입법권은 정부와 국회 상원, 하원에게 모두 주어진다. 상원은 22명의 대추장과 국왕이 임명하는 11명으로 이루어진다. 하원은 5년 마다 선출되는 지역대표 80명, 비례대표 40명 총 120명으로 구성된다. 레소토의 경제는 농업, 축산, 제조 및 광산에 기초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나간 노동자들의 송금에 의존하고있다. 공식 통화는 레소토 로티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도 함께 쓰인다. 수출은 목축생산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최근 의류 수출이 늘어나고 있다. 2007년 총수출액은 9억 500만달러, 총수입액은 15억 8400만달러이다며 주요 수출국은 미국, 벨기에 등이며 주요 수입국은 홍콩, 중국 등이다. 다이아몬드는 레소토의 중요한 천연자원으로 2014년 한해 동안 약 24만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것으로 추정된다. 레소토는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내륙국이기 때문에 육군과 공군은 있으나 해군은 없다. 약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레소토는 10개 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구는 다시 80개 선거구와 129개 지방 평의회로 나뉜다. 내륙국가이기 때문에 항구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도로, 항공 교통과 제한적인 철도교통을 가지고 있다. 28개의 공항을 가지고 있으며 수도 마세루 동남쪽에 위치한 모슈슈(Moshoeshoe) 공항이 유일한 국제 공항이다. 철도는 마세루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연결하는 노선이 유일하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 늘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타지에 나가 일하는 남자들이 많다. 남편이 없는 빈 자리를 대신해 여자들이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소가 많을수록 부자로 여긴다. 도자기와 유리조각품 등의 공예품으로 유명하다. 1966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나 조나단 수상의 평양 방문 직후 우리나라의 외교관계 정지를 통보함으로써 1983년 외교관계가 중단되었다가, 1986년 정상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0년 수교하였으나, 1986년 단교했다. 루마니아 루마니아(, )는 남유럽의 공화국으로 공용어는 루마니아어이다. 사회주의 루마니아 정권 붕괴 이후 현 민주공화정을 상징하는 의미로 루마니아 공화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북쪽으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는 몰도바, 서쪽으로 헝가리와 세르비아, 남쪽으로 도나우강을 끼고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한다. 흑해와 접하며, 국토 중앙으로 카르파티아산맥이 지나간다. 2004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고, 2007년 1월 1일 유럽 연합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루마니아는 유럽 민주 국가들 중 오늘날에도 여전히 취약하지만, 다키아를 식민지로 삼은 로마인들의 후손이 주변의 슬라브 세계 속에서 그 언어와 독창적 문화양식을 유지해온 나라이다. 1600~01년, 왈라키아 대공(大公)인 용담공 미하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을 기점으로 분리된 루마니아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통일을 실현했다.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낀 희생자였다. 두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약화와 크림 전쟁을 활용하여 1858년 진정한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1861년 합병하여 루마니아 공국이 되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가 공으로 즉위하였으나, 나중에 독일계 호엔촐레른 가 출신의 카롤 1세로 교체되었다(1914년까지 통치). 1877년에 루마니아 왕국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 때 전 국토가 동맹국에게 유린당하기도 했던 루마니아는 연합국의 승리로 트란실바니아, 베사라비아 및 부코비나 지방을 얻어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은 소련은 동유럽을 독일과 분할하기로 하고 1940년 6월에 루마니아 북부의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지방을 루마니아 왕국에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소련군이 이들 지역에 진입하자 루마니아는 이에 굴복하고 요구를 들어주었다. 루마니아는 이 후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에 가담하여 한 때 이들 지역을 회복했지만, 곧 패전하였고, 1944년에 소련군에 점령되어 종전 후 파리조약에 따라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지방을 소비에트 연방에 할양하게 되었고, 1945년 3월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내각이 조직되었다. 1946년 11월의 총선거에서는 농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산당과 소련의 부정선거로 이듬해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7년 12월 30일에 소련군에 의해 최후의 국왕 미하이 1세가 폐위되면서 군주제도 폐지하고, 1948년 공산주의 국가인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65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집권하여 1989년까지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소련의 내정간섭을 비난하며 소련의 위성국가이기를 거부한다는 자주노선을 내세워 동·서 양(兩)진영의 군사 블록 해체를 호소하는 등 전방위(全方位) 외교를 전개하여 외교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78년 중화인민공화국과 반소노선 구축을 도모하다가 소련과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사태로까지 나아갔는데 '파체파 망명사건'으로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국내적으로는 테러와 독재로 일관하며, 인민을 친위대와 도청으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철권통치를 하였다. 차우셰스쿠는 경제 정책에서도 무능하여 농업국인 루마니아를 무리하게 공업국가로 바꾸는 과정에서 외채가 110억 달러에 육박하자 수입을 중단하고 수출로 일관하는 극단적 무역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인민들이 생필품 부족으로 고통받게 되었고, 원자재와 기계부속품 부족으로 공장들의 운영이 중단되면서 루마니아 경제는 극심한 침체에 빠졌다. 1989년 12월 17일 헝가리와의 국경지대인 티미쇼아라에서 민주화를 지도하던 헝가리계 개신교 목사 라슬로 퇴게시 목사를 구속하는 것에 대한 항의 시위가 있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12월 21일 부쿠레슈티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자, 정부는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12월 22일 차우셰스쿠가 세쿠리타테만 편애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군대가 등을 돌려 시민 편에 합세함으로써 차우셰스쿠의 친위대(세쿠리타테)는 타도당했다. 차우셰스쿠는 헬리콥터로 북한으로의 탈출을 껄끄럽게 여기던 헬기 조종사는 고공 사격을 받는다고 거짓말해서 결국 차우셰스쿠는 차를 세웠는데, 첫 번째 차는 엔진이 타버렸다고 거짓말하고, 두번째 차는 농업박물관으로 차우세스쿠 부부를 데려다주었다. 그곳의 농부는 지켜준다고 거짓말 하고, 방에다가 가두어 경찰에게 밀고한 뒤, 4일동안 감금하고, 인근 초등학교에서 재판을 받은 뒤, 1989년 12월 25일 오후 5시 30분에 초등학교 벽에서 150여발의 총탄을 맞고 사형당했다. 1990년 1월 1일, 루마니아는 민주화되었다. 그 뒤에도 수많은 폭동과 시위를 거쳐 1996년 11월, 시민의회 후보인 콘스탄티네스쿠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공산정권이 무너진 지 7년만에 민주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형 집행을 끝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루마니아에서 2008년 11월 30일에 야당인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루마니아는 총선이 끝난 뒤 최초로 좌우 동거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지를 많이 잃었으며, 2014년 대선에서 前 총리 빅토르 폰타는 우파인 국민자유당의 클라우스 요하니스에게 패배했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첫 번째 독일계 대통령이 탄생했으며, 2018년 1월 29일에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의 대표로 선출된 비오리카 던칠러가 총리가 되면서 좌우 동거 정부를 수립하였다. 전체 면적이 238,391km이고 루마니아는 동남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에 속하며 유럽에서는 12번째로 큰 국가이다. 루마니아의 대부분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접하며 다뉴브 강이 통한다. 다뉴브 강과 프루트 강이 합류하며 몰도바 공화국과 접한다. 다뉴브 강은 흑해로 흘러가며 다뉴브 강 삼각지를 이루며 유럽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삼각주를 이룬다. 루마니아의 지질구조는 산악 구조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언덕과 저지대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카르파티아 산맥이 루마니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14개의 산맥 지류가 2,000m 이상의 해발고도로 퍼져있다. 산악 지대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동물군과 식물군도 많이 분포한다. 대한민국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춥다. 해양과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여름은 따뜻하거나 아주 덥기도 하며 보통 28도 정도이지만 일부 저지대의 경우 여름 내내 35도 이상이기도 하다. 해안가는 더 따뜻하며 찜통 더위가 없는 편이다. 겨울은 아주 추워서 보통 기온이 2도이며 최저 영하 15도로 떨어진다. 산기슭 지대일수록 이렇게 더 추워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강우량은 한 해 750 mm 이상이다. 서쪽 지역의 가장 높은 산이 분포하는 곳의 경우 더 많이 내리기도 한다. 강설량이 많기 때문에 산악 지대의 리조트 산업이 발달해있다. 중남부 지방에는 강수량이 600mm로 떨어진다. 다뉴브 삼각주 인근의 지방은 더 비가 내리지 않아서 연간 강우량이 370mm에 불과하다. 이 나라에는 약 12세기부터 영주가 통치하는 3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져있었고 15세기 오스만터키의 간접적인 통치하에 있었다. 크리미아 전쟁 후 파리조약을 통해 1856년부터 오스만터키의 영향이 배제되고 유럽열강이 보호하는 자치국이 되었다. 1866년 독일 호헨쫄렌가의 카롤1세를 영주로 선출하였으며 1877년 러시아-터키 전쟁의 참전을 통해 완전한 독립왕국의 지위를 얻게되었다. 이 시기 정치체제는 입헌 군주체제였으며 이 체제는 1948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유지되었다. 1989년 12월 반체제 봉기를 통해 1990년 개방과 시장경제를 표방한 공화국체제로 변화하였으며 이 정치 체제는 국가원수으로서의 대통령권한과 행정부수반으로서의 총리가 존재하는 프랑스의 체제와 유사하다. 의회는 상원인 루마니아 원로원과 하원인 루마니아 대의원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현재 여당은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이다. 수도는 부쿠레슈티이다. 1-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임시 수도였던 이아시, 콘스탄차, 브라쇼브, 티미쇼아라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헌법에 의하면 15개월 복무인 징병제를 실시한다. 최고 사령관은 대통령이다. 2006년에 루마니아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과거에 석유 생산지로 유명했다. 공산주의 시절 당시, 서기장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주도하에 중공업 위주 발전 정책을 펼쳤었으나 기술력과 자본력, 시장 한계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2007년 이후 시작된, 세계적 불황에도 연 7% 이상의 경제 성장률을 보여 2012년 구매력 평가 기준 GDP를 17.000$대로 올려 놓았다.(세계은행) 주변 국가가 헝가리를 제외 하고는 대부분이 슬라브족 국가임에 비하여 루마니아인은 로마인의 후손인 라틴계 민족으로, 국명인 루마니아도 로마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변국가와 이질적인 이런 특징 때문에 민족의 섬, 언어의 섬이라고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루마니아는 분명한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므로, 슬라브족과도 약간의 관련성은 있다고 본다. 루마니아인의 비율은 89%이고, 소수민족의 비율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루마니아인 다음으로 많은 민족은 헝가리인으로, 그 비율은 6.5%이고 대부분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거주한다. 그 밖에 롬족이 3.2%로 많은 편이며, 우크라이나인이 0.3%, 독일계가 0.2%, 러시아인이 0.2%, 터키인과 타타르족이 0.2%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루마니아어, 독일어, 헝가리어이다. 루마니아어가 모어(母語)인 국민은 전 인구의 91%이며, 6.5%는 헝가리어를, 1.1%는 블라키아 롬어를 사용하며, 독일어(0.2%)나 터키어(0.15%)도 쓰인다. 그 밖에 루마니아어의 방언인 아로마니아어도 소수언어 중 하나이다. 이 나라는 다른 남유럽 나라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2006년 Eurostat 추산에 따르면, 이 나라의 組(조)출산율은 천명당 10.2명, 사망률은 천명당 12.3명, 합계출산율은 2005년 현재 1.29명이다. 루마니아의 문화는 라틴족과 토착 다키아인의 혼합아래 주변의 슬라브족과 비잔틴제국의 영향, 오스만 제국, 헝가리 등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였고, 근대시기에는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2002년도 통계이다. 그외 기독교의 교파로는 유럽교구(Diocese in Europe)에 속한 루마니아 성공회가 있다. 르완다 르완다 공화국(, , , , 국제 음성 기호: )는 1962년에 독립한 아프리카의 공화국이다. 19세기 말부터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19년 벨기에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이후 1946년에 벨기에의 신탁 통치령이 되었다가 1962년에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소수족인 투치족과 후투족의 종족간 갈등이 유혈사태 등으로 꾸준히 표출되었다. 1990년에는 종족간 내전이 일어나 1994년까지 지속되었었는데,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후투족과 투치족이 싸우게 되면서 르완다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94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2009년에는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844만의 인구에 중앙 동부 아프리카의 5대호 지구 안에 있는 작은 내륙국이다. 르완다는 우간다, 부룬디, 콩고 민주 공화국 및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천 개의 언덕의 땅"이라 불리는 비옥하고 험한 지형이며, 대륙 아프리카 안에서 가장 조밀한 인구분포를 나타낸다. 르완다는 열대국가이지만 높은 해발 덕분에 온화한 기후이다. 산에는 서리와 눈도 내린다. 르완다는 2개의 우기(2월-5월, 9월-12월) 동안에 강한 뇌우를 동반하기 때문에 르완다의 번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연간 강수량은 평균 830mm이지만 동쪽 대초원보다는 북서쪽 산에 집중된다. 1994년에 인구는 775만 명이었다. 약 89%가 후투족, 그 이외는 투치족이다. 82%가 기독교, 그 이외는 토착 종교 등이다. 공용어는 키냐르완다어, 프랑스어와 1996년에 추가된 영어 등 3개어다. 영어는 정부의 웹사이트의 공식어와 국립르완다대학교의 교수언어가 되어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가 되었다. 2004년부터는 프랑스어와 르완다어로 표기된 지폐가 앞면에는 르완다어, 뒷면에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바뀌면서 명실상부한 영어 사용국이 되었다. 르완다 정부의 공식 홈페이지의 언어란을 보면, 영어, 키냐르완다어, 프랑스어 순으로 적고 있다.(2007년 5월 현재) 물론 정부의 공식 홈페이지도 영어만으로 작성한다. 카가메 대통령이 인종학살의 과거심판 못지않게 언어표현권의 침해 및 문화 다양성에 심히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미국은 중서부 아프리카가 프랑스어 사용국으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제고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고,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을 영어 사용국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우간다에서 영어로 훈련받은 투치족 80만 명이 입국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르완다는 2006년 가을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중단했다. 2009년 11월 28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에서 개최된 영연방 정상회담에서 르완다는 54번째 영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이로써 진정한 영어 사용국으로 거듭 태어났다. 한편 르완다는 프랑스어의 사용이 명목적인 것이지만 국제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프랑코포니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데다가 대외활동을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등 영어권 동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펼치고 있어서 프랑코포니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르완다에선 프랑스어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 언어이다. 한편, 르완다는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2009년에 복원했다. 르완다의 기아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르완다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27.4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본다면 무시못할 정도의 수치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91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상당한 기아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르완다는 2006년 1월 1일에 새로 개편된 행정 구역에 따라 4개 주와 1개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행정 구역은 40개 구(akarere)와 416개 지방 자치체(umujyi)로 나뉜다. 아프리카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아 경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특이하게도 다른 부족과의 결혼이 허용된다. 이는 다른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기독교의 명절인 부활절과 성 금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성탄절 등을 공휴일로 정하며, 이슬람교 명절인 라마단 종료기념일 등을 공휴일로 정한다. 또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난 이유 때문에 가족관계,나이등을 물어보는것은 예의가 아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63년 수교하였다.2008년부터 주 르완다 한국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리비아 리비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로, 수도는 트리폴리(, 타라불루스)이다. 서쪽으로는 튀니지, 알제리와 접하며 동쪽으로는 이집트, 남쪽으로는 니제르, 차드, 수단과 접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2014년 선거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인하여 투브루크로 피난한 정부와 트리폴리에 남아있는 정부가 서로 대립 중에 있다. 2015년 12월 이후 통합 서명에 합의했으나 아직까지 완전한 통합이 되지 않았다. 원래의 리비아에는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에 카르타고, 그 이후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7세기,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아랍 세력이 서진(西進), 북아프리카에 침입해 옴에 따라 리비아는 아랍화했다. 15세기부터 4세기 이상 리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되었다가,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伊土戰爭)으로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차지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리비아의 식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1938년이 되면 9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이주자들이 리비아에 들어와, 타라불루스와 벵가지 주변에서 농장을 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격전지가 되었으며, 결국 추축국 세력이 패배하여 리비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리비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탈리아령이던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의 3지역이 연합왕국을 구성, 1951년 12월 24일에 리비아 연합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국왕 이드리스 1세 영도 하의 리비아에서는 1959년에 석유가 발견되었고, 1963년에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0개 주(州)로 분할하였다. 1969년 9월 1일, 이드리스 1세 국왕의 외유 도중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위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화 정책을 추진, 1972년에 이집트,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 공화국 연방을 세웠지만, 1977년 이집트의 친 이스라엘 정책에 반발하여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카다피는 리비아를 그 자신의 독특한 이슬람 사회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으며, 그의 사상은 녹색서(The Green Book)에 잘 나타나 있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서방권을 상대로 로커비 사건 등 수차례의 테러를 감행했다. 그 결과 1986년에는 미국의 공습을 받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도 핵무기 개발과 인권 탄압 등으로 인해 리비아에 대한 서방 국가의 제재가 가해졌다. 리비아에 대한 서방 국가의 제재는 카다피가 서방에 대한 개방을 선언한 2003년까지 계속되었다. 2011년 2월부터 동부의 주요 도시인 벵가지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친 카다피 세력과 반 카다피 세력 사이의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라는 정부 기구를 출범시켰으며, 나토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군도 카다피 정권에 대한 공습에 참여하였다. 8월 초순경까지는 수도 트리폴리가 있는 서부를 거점으로 하는 카다피 정권과 동부의 벵가지를 거점으로 하는 시민군측의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가 대립 할거라는 양상이었지만, 2011년 8월 21일 시민군은 성공적으로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하였다. 카다피 정권은 시르테, 사브하, 바니 왈리드로 퇴각한 상태였고,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최종 은신처인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다피의 42년 장기집권이 마무리 되고, 리비아 과도정부는 10월 23일, 해방을 공식 선포하였다. 카다피 이후에 리비아는 총선이 치러졌고, 총선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했다. 그리고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정당이 승리했다. 43년만에 리비아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제헌의회의장에 메가리프가 선출되었다. 리비아는 다른 중동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제작된 반이슬람영화로 인해 시위가 확산되고 있으며, 벵가지의 미국영사관에서 미국영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미국 영사관을 공격한 1명이 체포되었다. 리비아의 새총리도 영사관 공격은 비겁한 범죄라고 밝혔다. 2012년 10월 7일에 리비아의회는 새총리를 해임했다. 리비아는 2014년 6월에 새 의회를 선출했다. 2014년 리비아 하원 선거 과정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이 패배하자 이슬람주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새 의회의 정부를 투브루크로 피난가게 만들었다. 이슬람주의 계통의 민병대가 새 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기존 총국민회의 의회 의원들을 바탕으로 의회를 구성하면서 서로 합법 정부를 자처하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트리폴리를 이슬람주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트리폴리에 소재한 리비아 대법원은 2014년 11월 6일자로 6월 총선이 무효라고 선고했다. 대부분의 국제사회는 투브루크로 피난간 새 정부를 리비아의 합법정부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집단인 이슬람 국가(IS)가 리비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다. 현재 유엔의 중재로 단일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행 여부는 불확실하다. 내전으로 인해 리비아를 떠나 유럽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작은 배에 수백명이 올라타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침몰해 몽땅 수장당하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배 안에서 난민들간의 종교, 지역 갈등으로 살해와 폭행, 감금도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수단, 차드, 니제르와 국경을 접한다. 리비아의 전체 면적은 1,759,540km로 세계에서 17번째로 큰 나라이다. 리비아는 인도네시아보다 조금 작으며 어림 잡아 미국 알래스카주와 같은 크기이다. 북쪽으로 지중해와 마주하며 남동쪽으로는 니제르, 서쪽으로는 튀니지, 알제리와 접한다. 리비아는 지중해에 인접한 아프리카 국가중 해안선이 가장 길다.(전체 해안선 길이만 1,770 km에 이른다.) 사막의 열풍이 불어서 피해가 나기도 하는데 리비아에서는 이를 기블리(gibli)라고 부른다. 기블리는 봄과 가을에 하루~4일에 걸쳐 가끔 불어오는데, 이는 사하라 사막 일대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오아시스도 전역에 흩어져 있으며 가장 중요한 식수 공급처이다. 리비아 사막은 북아프리카에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영국군(British Army)과 이탈리아 왕국 육군, 나치독일군의 격전지였다. 대부분의 지역은 사막과 흡사한 기후가 나타나며 아주 건조하다. 하지만 바다에 면한 북쪽 지방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누릴 수 있다. 지중해에 면한 북아프리카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다. 트리폴리 부근에서 연간 300mm 정도의 비가 올 뿐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불모의 산지나 대지가 나타난다. 겨울철에는 강우가 있어 스텝성 기후가 나타나고 남쪽의 쿠후라함몰지와 리비아 사막에는 우량이 극히 적어 주민은 오아시스에 거주한다. 수도는 트리폴리(아랍어로는 타라불루스)이다. 다음은 2007년에 새로 바뀐 리비아의 주(州)이다. 주요 도시로 트리폴리, 벵가지, 알바이다, 미스라타가 있다. 리비아는 1951년,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통치하는 리비아 연합 왕국으로 독립하였으나, 1969년 9월 카다피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 아랍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7년에 카다피는 국호를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으로 바꾸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인민주권확립선언(신헌법)을 채택하여 인민직접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전인민위원회 (내각)를 창설했다. 의회인 전인민회의는 1천 명 내외의 지방인민회의 대표들로 구성되고, 전인민회의총서기국은 혁명지휘위원회를 대신한 것으로 전인민위원회와 함께 1년에 2차례 개최되는 전인민회의에서 선출된다. 1979년에 카다피는 전인민회의 서기장직을 사임하였으나,‘9월 혁명의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국가원수 직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2011년)는 민주화 운동이 벵가지에서 일어났다가 카다피 정권의 정부군이 벵가지에 폭격 및 공격을 감행하여 국제적 비난을 받았었다. 시민군이 생겨나 리비아 도시를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시민군이 그후로부터 나토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민군이 해방시키는 도시 수가 늘어남에 따라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수립되어서 카다피 정권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여 트리폴리까지 공격을 하여 트리폴리를 해방시키고 녹색국기가 내려지고 리비아 왕국 국기였던것이 다시 올려졌다. 카다피 정권과 친카다피 정부군이 장악을 하고 있는 시르테, 사브하, 바니왈리드으로 축소됨에 따라 시민군과 나토(NATO : 북대서양 조약기구)군의 총공세가 이어졌다. 결국 2011년 10월 20일 카다피는 시르테에서 사망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시민군한테 발각되어서 총살을 당했다.), (카다피 경호원이 총으로 카다피를 사살했다.), (병원 후송 중 사망했다.) 이렇게 어떻게 죽었는지 과도정부가 지금 조사중이다. 조사 결과 시민군들에게 사살을 당한 것이 밝혀졌다. 아랍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남부에 소수의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다. 리비아는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아랍어가 사용된다. 이탈리아인은 카다피가 집권하기 시작한 1969년 이후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했다. 아랍인, 베르베르인 뿐만 아니라 흑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도 소수 거주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외국어로는 주로 영어가 쓰이나,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은 까닭으로 이탈리아어도 사용된다. 주민의 80%가 농경, 목축, 유목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나 석유가 채굴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도시로 유출하는 경향이 생겨 도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문해율은 84.2%이다.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리비아의 무슬림은 전체 종교인의 97%를 차지한다. 이 나라는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리비아의 과거 국기-자마히리야 시절의 녹색 오직 한 색으로 이루어진 국기 역시 이슬람교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에서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정하겠다라고 밝혔다. 기독교 교회의 대부분은 오리엔탈 정교회인 콥트교회(Coptic Orthodox)이며, 6만 명이 콥트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신앙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은 4만 명이며, 두 명의 주교가 지도한다. 소수의 성공회 교회가 있으며, 이집트 교구에 속해 있다. 리비아 유대인 공동체는 기원전 300년경에 생겼다. 이 나라는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2007년 국제통화기금 통계에 의하면 리비아의 1인당 GDP는 $10,840로, 북아프리카에서 1위이다. 1959년에 유전이 발견된 이래 세계유수의 석유산출국이 되어 경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농경지가 지중해안의 협소한 지역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에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나, 현재에는 세계 제4위의 산유국으로 부국이 되었다. 석유무기화를 제창하여 생산제한·금수·가격인하 등 제반문제에 선봉을 서고 있다. 리비아는 본래 농업국으로 밀·보리·감자·대추야자 등 식량작물과 올리브·감귤류 등이 재배되고, 양·염소·낙타 등이 사육되어 피혁·양털 등을 수출하나 그 양은 극히 적고 식량의 85%를 수입한다.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는 석유수출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공업화를 비롯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데 있다. 주요수입품목은 기계류·자동차·금속제품·전기기기 등이다. 리비아의 외교 정책은 1951년 12월 24일 국가 수립을 선언한 이래 많은 변동과 변화가 있었다. 왕국으로서, 리비아는 매우 친서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다만, 리비아는 1953년에 가입한 아랍 연맹의 회원국으로서 보수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나라로 여겨진다. 리비아 정부는 영국 및 미국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양국은 리비아에 군사기지를 설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리비아는 또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와도 친밀한 유대관계를 구축하였고 1955년 소련과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 수립 후에는 석유생산시설의 국유화, 대(對) 서방 도전행위 등으로 미국, 영국 등의 서방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다가, 1986년 이후부터 서방으로부터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당하였다. 그러나 개방이 시작된 2003년 이후부터는 서방과의 관계도 차츰 회복되었다. 한편 1986년~1987년 사이, 리비아는 "토요타 전쟁"이라고 불리는 차드와의 전쟁을 치렀다. Aouzou strip이라 불리는 영토를 사이에 둔 전쟁이었는데, 압도적인 무기체계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카다피는 2003년 12월 핵무기 의혹시설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모두 자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기구의 사찰을 요구했다. 미국은 카다피의 아랍식 사회주의체제를 인정하고 경제봉쇄를 해제하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삭제했다. 미국은 2006년 5월 15일 미-리비아 공식수교를 발표하면서 카다피의 "역사적 결단"을 높이 평가하였다. 리비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대한민국과는 1978년 영사관계,1980년에 대사관계로 수교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앞선 1974년에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리비아와 의료협정, 문화협정, 경제기술협정을 맺었으며 현재 리비아 사막을 개발하고 있다. 2010년, 리비아에서 선교하던 한국인 선교사가 체포된 일이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리비아 첩보 활동으로 관계가 냉각되고 있다. 그래서 리비아에 있는 대한민국의 건설업체의 지위도 흔들리고 있었다.. 2011년 8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과도위원회(NTC)를 리비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였다. 2014년 7월 30일, 외교부는 리비아의 치안 악화 등을 이유로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였다. 2018년 7월 리비아에서 무장단체 및 괴한들에게 납치된 외국인 중 한국인도 납치당했다.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가 1984년에 착공하여 지금도 건설하고 있다. 리비아의 문화는 이슬람 문화이다. 이는 리비아의 사회주의에도 영향을 주어,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독특한 이념을 형성하였다. 현재 리비아는 술을 팔지 않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아랍식 요리이나,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파스타류도 많이 소비되고 있다. 철도와 도로가 해안지역에서만 정비되어 있어, 사막 오지로의 교통은 곤란하다. 벵가지와 트리폴리에 국제공항이 있어 카이로, 로마, 튀니스 등지와 연결된다.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공화국(, ) 줄여서 리투아니아(, , )는 북유럽에 있는 공화국이다. 공식 명칭은 이며 수도는 빌뉴스(과거에는 카우나스)다. 동쪽과 남쪽은 벨라루스, 서쪽은 발트 해, 남서쪽은 러시아(월경지 칼리닌그라드주)와 폴란드, 북쪽은 라트비아에 닿아 있다. 발트 3국 국가 중에서는 인구와 영토가 가장 많고 넓다.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립했으나 1940년 다시 소련에 강제 점령 병합되었다. 1941년부터는 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면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었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 실패 후 독립을 선언, 9월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독립국가연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발트 3국의 최남부에 있다. 민족 구성은 리투아니아인이 83%이다. 전체 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식품 및 담배가 29.6%, 기계 장비가 18.3%, 섬유 의복·가죽 제품이 17%이다. 6세부터 11년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1990년 종교교육을 도입하는 등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로마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리투아니아가 제일 북쪽에 위치한다. 현재 유럽 연합(EU),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다. 10세기 이전 리투아니아는 튀르크 민족 국가인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 도시 지역 중 일부였다. 리투아니아라는 이름은 1009년의 라틴 연대기 Annales Quedinburgenses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253년 7월 6일 민다우가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1386년 요가일라(Jogaila)가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을 형성하게 된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무찌름으로써 독일인들의 동방 팽창을 저지하였고, 리투아니아는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일한 운명을 걷게 되어(→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 분할 결과 1795년 리투아니아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1795년, 1830년, 1863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리투아니아는 1918년 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애초에는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의 군주를 영입해 군주제로 독립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러시아 혁명과 독일 제국의 패망으로 독립되어, 공화국으로 출발한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1918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 공산당 세력, 보수 세력, 농민 세력 등 복잡한 이념 세력들의 정권 쟁탈 투쟁으로 국내사정은 극히 혼란하여 정권 교체가 잦은 불안이 계속되어왔었다. 그 틈새를 타서 민족주의자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1930년대 즈음 들어오면서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 국가들은 민족주의자가 반란으로 집권하여 반소, 반공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 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9월 두 번째 밀약에서 소련의 몫으로 추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처음으로 점령한 것은 1940년 6월 15일이었는데,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은 리투아니아의 국경 초소를 급습하였고, 리투아니아군을 몰아낸 뒤 소비에트 간부단으로 대신하였다. 의회와 여타 정부 부처의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명부에 후보자가 한 명씩밖에 없었는데, 선거의 공식 결과에서 친(親)소련 후보가 99.2%의 표를 얻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국제 사회는 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1941년 독-소 개전 이후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하였다. 1944년 나치 독일이 패퇴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소련군은 독일에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인들을 박해하여 29923가구가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12만 명이 국외 추방되거나 북유럽, 미국 등지로 망명하였다. 1990년 3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1년 1월 소련군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여 13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하였으나, 리투아니아는 1991년 9월에 독립했고 1991년 9월 17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유엔에 가입하였다. 현재 리투아니아는 반러시아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2008년 11월 27일에 리투아니아는 신임 총리로 안드류스 쿠빌류스가 새총리로 당선되었다. 2009년 5월 17일에 대선에서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다.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가운데 가장 영토가 넓고, 인구도 많다. 북유럽에 위치하는 리투아니아는 99km 정도의 모래 해안선이 있으며 이 중 38km만이 발트 해와 접한다. 나머지는 쿠로니아 사주와 맞닿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가장 중요한 부동항인 클라이페다(Klaipėda)는 쿠로니아 사주와 아주 가까우며 남쪽으로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주와 접한다. 네만 강이 가장 중요한 강이며 강의 지류가 국제 선박의 이송로로 쓰인다. 리투아니아는 빙하로 조각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서부와 동부의 고지대인데, 300m 이상인 곳은 없어서 가장 높은 아우토자스(Aukštojas Hill) 언덕으로 294m 정도이다. 많은 습지와 호수가 있어서 삼림을 포함하여 전체 국토의 30%가 숲이다. 리투아니아는 10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서비스업이 리투아니아의 경제 비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소매와 도매상, 교통과 통신, 금융과 보험, 부동산 등에 관련된 업계 등이다. 리투아니아에는 흙, 백운암, 석회암, 토탄 등이 채굴된다. 리투아니아의 서부와 발트해 연안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었다. 원자력은 리투아니아의 전기 공급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20% 가량이며, 화학, 전자 제품, 기계, 목재, 섬유 공업과 식품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공업도시들로는 빌뉴스, 클라이페다, 카우나스 등이 있다. 리투아니아인의 15%는 농업에 종사하며, 보리, 귀리, 밀, 호밀 등을 생산한다. 소와 염소 사육도 발달하여, 육류와 낙농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리투아니아는 원료를 수입하고, 제품을 수출하는 무역의 균형을 이루는 편이다. 무역 상대국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독일, 러시아 등이다. 리투아니아에서 제일 추운 1월의 평균 온도는 약 영하 25도에서 31도 가량, 제일 더운 7월에는 24도에서 33도 가량인 편이다. 하지만 최근 2011년 1월에는 영하 10도에서 0도 사이를 기록하였다. 84.2%가 리투아니아인이며,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한다. 폴란드인은 6.6%이며 주로 리투아니아 동부에 거주한다. 이들의 조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 폴란드에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거나 폴란드화된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이다. 소련 불법 점령 기간 동안 러시아 등에서 노동자로 유입된 러시아인은 5.8%로 타 발트 3국에 비하면 러시아인 문제가 적은 편이다. 벨라루스인은 1.2%, 우크라이나인은 0.5%다. 미국 CIA에서 운영하는 CIA WORLD FACTBOOK에 의하면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11년 1.27명이다. 합계 출산율은 1994년 이래 계속 줄어들기만 하다가 2002년의 1.24를 기점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추세이다. 2011년 천 명당 출산율은 9.34명, 사망율은 11.4명이다. 리투아니아의 공용어, 국어는 리투아니아어이다. 리투아니아어는 라트비아어와 함께 현존하는 2개의 인도유럽어족 발트어파의 하나다. 폴란드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등도 지역적으로 쓰인다. 2001년 국세 조사에 의하면 모국어 화자는 리투아니아어 82.0%, 러시아어 8.0%, 폴란드어 5.6%, 벨라루스어 0.5%, 우크라이나어 0.2%, 로마니어 0.1%, 라트비아어 0.1%가 되고 있다. 모어이외의 언어로서는, 러시아어는 공용어가 아닌데도 소련 지배의 영향으로 인구의 85.4%가 할 줄 안다. 그 외 24.0%가 영어, 14.5%가 리투아니아어, 12.5%가 폴란드어, 11.6%가 독일어를 말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인의 전통적인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다. 소련에 속했던 나라 중 유일하게 국민 중 다수가 가톨릭 신도인 가톨릭 국가로 빌뉴스와 카우나스 관구를 중심으로 전국은 8개의 교구로 나뉜다. 로마 가톨릭은 인구의 80%다. 무신론자는 9.5%로 발트 3국 중에서 가장 적다. 다음으로는 러시아 정교가 인구의 4%다. 루터교, 기타 개신교 교파와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신도도 소수 있다. 공휴일이나 축제의 날에는 전통옷을 많이 입으며, 엄격한 문화가 발달하였다. 합창이 가장 높이 발달하였으며, 수천명의 국민들이 연마다 열리는 축제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는 편이다. 농구, 축구 그리고 조정이 인기있는 스포츠이며, 올림픽에서는 농구와 원반던지기가 강세를 보이는 편이다. 리투아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1991년에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93년 투자 상호증진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리투아니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점령당하였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러시아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른 발트국과 마찬가지로 유럽 연합 및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91년에 수교하였다. 리투아니아는 자살률이 높은 나라인데, 이는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나타내고 있다. 자메이카 자메이카(, Jumieka 또한 Jomieka, )는 카리브해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이다. 쿠바, 멕시코, 아이티와 가깝다. 남아메리카 출신의 아라왁과 타이노 토착민들이 기원전 4,000년과 1,000년 사이 자메이카에 정착을 했다. 1494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특히 현재 구 항구로서 알려진 가장 인구가 많이 형성된 자메이카의 남 해안과 함께, 추장이 다스리는 200여개 이상의 마을이 있었다. 타이노족들은 영국이 섬을 접수할 때까지 자메이카에 살고 있었다. 1494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래 스페인과 영국의 지배하에 노예 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프리카 노예 수입은 계속되었으며, 1651년 영국이 스페인과 싸워 이 섬을 획득하면서 1655년에 영국의 지배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정착자들은 산 속에 사는 탈출 노예들과 계속 싸워야 하였다. 1670년대에 영국의 해적들은 자메이카를 카리브 해 지역에 있는 스페인의 항구와 배들을 공격하는데 기지로 사용하였다. 1700년대에는 사탕수수가 주요 생산물이 되었고, 서반구에서 가장 중요한 노예 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1783년에 영국은 탈출 노예들과 화평을 맺었으며, 100년 후에 영국 의회는 섬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많은 해방 노예들은 독립적인 농부들이 되었다. 1865년에는 농장 지주들과 고용인 사이의 나쁜 관계가 일어나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가 자메이카를 왕실의 식민지로 삼았다. 1930년대에 자메이카의 노동 지도자들은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승인하기를 영국에 강력히 권하였다. 1944년 새 헌법이 자메이카에 어떤 자치 정부를 주었고, 1962년에 독립하여 영국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자메이카는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로 카리브 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고 영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자메이카는 블루 산맥의 본산지이며 좁은 평원으로 둘려싸여 있다. 모든 주요 도시와 마을이 해안에 있다. 주요 도시로는 킹스턴, 포트모어, 만데빌, 오초 리오스, 포트 안토니오 등이 있다. 자메이카의 기후는 열대 기후이므로 덥고 습하다. 하지만 고지대 내륙지방으로 가면 기후가 좀 더 온난해진다. 남쪽 해안 지방의 평원 일대는 상대적으로 반건조 기후로서 비가 많이 내린다.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나 주민 대다수는 자메이카 파트와어를 사용한다. 그 외에도 소수의 스페인어사용자와 포르투갈어사용자들이 남아 있다. 아프리카계 흑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유럽인, 혼혈인, 아시아인(중국, 인도)이다. 자메이카의 총인구수는 2015년 현재 2,793,335명이다. 인구 증가율은 0.38%(2010년~2015년)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밀도는 257.9km²이며 세계 평균인 56.5명/km²와 비교해보면 매우 높다. 자메이카 전체 인구의 54.8%(2015년 기준)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평균 29.1세로 높은 편이다. 노인인구비율이 9.14%로 고령화사회에 속한다. 사탕수수와 보리 농업의 시작으로 농업 시장의 길을 열었다. 세계 팝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레게는 자메이카의 음악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이다. 자메이카 출신 유명 가수로는 밥 말리, Black Uhuru(블랙 우후루), Culture(컬쳐) 등이 있다. 자메이카는 세계적인 육상 강국이며, 우사인 볼트가 대표적인 육상 스타이다. 그 외에도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로 이주한 육상 선수들도 많다. 이 나라는 모병제를 실시한다. 한국과는 1962년에 수교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4년에 수교하였으나 1993년에 단교하였다. 잠비아 잠비아 공화국 ()은 아프리카에 있는 내륙국으로 수도는 루사카이다. 북쪽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 북서쪽으로 탄자니아, 동쪽으로 말라위, 남쪽으로 모잠비크, 짐바브웨, 보츠와나, 나미비아, 서쪽으로 앙골라와 국경을 접한다. 잠비아는 10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잠비아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0만년전부터 인간이 거주했다는 증거가 루사카(Lusaka) 북부지역인 카브웨(Kabwe)에서 발견되었다. AD 1000년경부터 시작하여 스와힐리-아랍 노예무역상들이 아프리카의 동부해안에 있는 도시국가에서부터 점차 잠비아 지역으로 스며들어 오게 된다. 잠비아 서부 바로첼란드의 지배적 부족 로지족(族)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알루이족)은 룬다족 기타의 종족들과 함께 11세대 전의 조상인 신(神) 니얀베에게 이끌려 북서쪽에서 이동해와서 카푸에강 유역을 중심으로 현재의 앙골라 동부에서 보츠와나 북부에 걸친 바로체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1798년 포르투갈인이 처음으로 이 지방을 횡단하였으며, 알루이족은 1838년 북상해 온 코롤로족에게 정복당하였다. 1850년 이 지방을 탐험한 D.리빙스턴은 이 지방을 바로첼란드라고 불렀다. 알루이족은 그 후 1864년 코롤로족을 격파한 뒤 로지족이라 자칭하고 왕국을 마로지라고 칭하여 재흥(再興)하였다. 그 때 추장(국왕)인 레와니카는 S.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협정을 맺고 광업권 등을 주었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그 광대한 지배지역을 로즈에 연유하여 로디지아라 불렀으나 1911년 남·북로디지아의 통치를 분리, 북로디지아는 1953년에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그 후 남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 사이에 연방화(聯邦化)의 움직임이 일어나 1945년에 성립된 중앙 아프리카 심의회(審議會)를 거쳐 1953년 8월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이 성립하였다. 남·북 로디지아는 통화를 비롯하여 철도·항공사업·카리바댐 건설 등 많은 공동사업으로 결합을 굳혀 갔으나 케네스 카운다가 지도하는 ‘잠비아 아프리카민족회의(ZANC)’는 남로디지아의 백인정권을 위한 연방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959년 ZANC는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그 대신 ‘통일민족독립당(UNIP)’이 성립되어, 그 범(汎)아프리카적 저항운동을 계속한 결과 1964년 말에 연방은 해체되고, 북로디지아는 1965년 1월 내정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광업권을 북로디지아 정부에 이양하는 교섭을 거쳐 총리 카운다가 이끄는 통합민주독립당(UNIP) 정권은 1964년 10월 24일 잠비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다. 독립과 더불어 케네스 카운다가 국민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2년 12월 제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통합민주독립당(UNIP) 이외의 정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ANC와 통일진보당(UPP)은 해산되고, 통합민주독립당(UNIP)의 일당제(一黨制) 국가가 되었다. 대통령 카운다는 1973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3선되어 독재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정당을 해산당한 반대파 사람들도 그후 통합민주독립당에 대하여 협력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ANC와 통일진보당(UPP)의 전(前) 당원들은 대통령 카운다에 대하여 비판적 언동을 하였으며, 카운다 체제는 안정되지 않았다. 이후 복합당민주운동(MMD) 당수인 프레드릭 칠루바가 1991년부터 대통령직을 연임하였으며 2001년 12월 27일에는 여당 후보인 레비 음와나와사(Levy Mwanawasa)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8년 8월 레비 음와나와사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당시 부통령이었던 루피아 반다(Rupiah Banda)가 대통령직을 대행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선거에서 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으로서 고평원이며 언덕과 산지대가 많으며 중간중간에 강과 계곡도 많이 있다. 전체 면적으로는 세계에서 39번째로 큰 나라이며 미국 텍사스주보다 약간 큰 정도이다. 잠비아는 두 개의 퇴적 분지가 있다. 잠비아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잠베지 분지가 있으며 북쪽에는 콩고 분지가 있다. 잠베지 분지 내에는 주요 강이 다 흐르는데 카봄포 강(Kabompo), 렁웨봉구 강(Lungwebungu), 카푸에 강(Kafue), 잠베지 강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서 남쪽으로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로 흘러간다. 발원지가 잠비아인데 앙골라로 흘러가며 많은 지류 또한 앙골라 중앙지대로 흘러간다. 잠베지 강의 가장 큰 두 지류인 카푸에와 루안과 강은 잠비아 안으로 전체가 흘러간다고 볼 수 있다. 카푸에 강은 짐바브웨와의 국경선 근처에서 합류하며 그 직전에 루안과 강은 모잠비크 근처에서 합류하여 모잠비크 해협으로 들어간다. 잠베지 강은 빅토리아 폭포로 흘려가며 잠비아의 남서쪽으로 흘러가는데 일부는 카리바 호로 흘러가기도 한다. 잠베지 강의 영역은 남쪽 경계를 짓는 분수계의 역할도 하며 그 부분의 폭이 넓고 깊다.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쾨펜의 기후 분류에 따르면 거의 국토 대부분이 습한 아열대 기후로 분류된다. 지역적으로 건조한 곳이 있기도 하며 반건조 스텝 기후가 남서쪽 지방에서 나타난다. 11월에서 4,5월까지는 우기이며 여름에 해당한다. 6월부터 10월 말까지가 겨울이다. 건기는 5,6월에서 8월까지 시원하고 건조하며 그 이후로는 뜨겁고 건조하다. 고도에 따라 조금씩 기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일년 내내 무덥기보다는 서늘하기도 하다. 반투족 계열의 민족(통가족, 날자족 등)이 주를 이룬다. 그 밖의 민족은 유럽인 1%이다. 평균 수명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쪽에 속하는 32세이다. 잠비아의 별명은 '죽음의 땅'이다. 언어는 공용어가 영어(1991년 헌법)로 그 외에 각 민족의 언어(냔자어 등)이 사용된다. 큰 야생동물무리를 보고 싶다면 8월부터 10월까지가 여행하기가 가장 좋은 시기이지만 10월에 가까워지면 낮 동안의 기온이 섭씨 30도(화씨 80도)까지 떨어진다. 좀 더 시원한 계절에 좀 더 푸른 경치를 보고 싶다면 시원하고 건조한 5월부터 8월까지 여행하기 바란다. 많은 지역도로가 통과할 수 없는 진흙탕 강이 되고 대부분의 국립공원이 문을 닫으므로 우기인 11월부터 4월까지는 여행하여 고생하지 말기 바란다. 11월부터 12월까지가 새를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말도 있지만 새는 일년 내내 언제든지 잘 볼 수 있다. 종교는 기독교(주로 가톨릭) 비율이 반 이상이고, 그 외에 이슬람교, 힌두교, 전통 종교 등이 있다. 국민의 약 2/3가 기독교도이지만 대부분이 전통적인 애니미즘과 결합되어 있다. 문학 중 가족역사에 관한 소재를 한 문학작품을 배출하였으며, 주민 대부분이 축구를 즐겨하는 편이다. 잠비아에는 약 35개의 다른 부족이 있으며 모든 부족이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부족과 언어가 북부와 중부의 벰바(Bemba), 남부의 통가(Tonga), 동부의 니얀자(Nyanja), 서부의 로지(Lozi)족에 포함되어 있다. 영어는 현재 국어로 널리, 심지어 먼 외지에서도 사용된다. 잠비아의 무수한 전통음악은 아주 리드미컬하며 대개 북, 휘파람, 손가락 피아노로 연주되며 거의 항상 춤과 같이 연주된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인 형태의 하나는 콩고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들어온 룸바(rumba)이다. 포리지(오트밀에 우유또는 물을 넣어 만든 죽)는 잠비아의 주요음식으로 대개 옥수수(은시마(nshima))나 사탕수수로 만든다. 일반적으로 포리지가 담긴 공용단지에 오른손을 넣어 동글게 만든 후 고기나 야채소스에 담궜다가 먹는다. 생선은 현지 특별요리이기도 하다. 인기있는 담수어로는 브림(잉어과의 민물고기), 민물연어, 나일농어가 있다. 비동맹 중립 노선을 표방하는 국가였지만 한때는 친공산주의적인 외교 노선도 펼쳤던 적이 있으며 이후에는 서방 국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1969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단독 수교하여 왔지만 대한민국은 1990년 9월 4일에는 수교하였다. 대한민국은 짐바브웨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잠비아는 2014년 6월 23일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잠비아의 기아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잠비아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39.0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해봐도 큰 차이가 없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116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상당한 기아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적도 기니 적도 기니 공화국(赤道 기니 共和國, , , ), 약칭 적도 기니(赤道 기니, )는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나라로 인구는 약 120만 명이며, 면적은 28,051 km²이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로, 크게 카메룬과 가봉 사이에 있는 대륙 부분인 리오무니(Río Muni)와 수도인 말라보가 있는 비오코 섬(Bioko), 그리고 작은 섬인 안노본 섬(Annobón)으로 나뉜다.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아프리카에서 (분쟁 지역인 서사하라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이다. 적도 기니의 대륙 영토인 리오무니는 대체로 북위 1° ~ 2°10′20″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기니나 기니비사우보다) 적도에 가깝고 적도의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에도 영토(안노본 섬)가 있기 때문에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라고 한다. 최근에는 유전의 개발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인도에 가는 경로를 찾던,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낭 두 포(Fernão do Pó)가 1472년 비오코 섬을 최초로 발견하였다. 그는 “아름다움”을 뜻하는 포르모사(Formosa)로 불렀지만, 이내 그곳의 유럽인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간다. 페르난도 포(Fernando Pó)와 안노본(Annobón) 섬은 1474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개척하였다. 1778년 근접한 작은 섬들과 니제르 강과 오고에 강 사이 본토의 상업적 권리가 엘 파르도 조약에 따라 스페인에게 양도되었다. 1968년 10월 아프리카의 스페인 식민지 중에서 제일 먼저 독립했다. 적도 기니는 크게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리오무니(Río Muni, 26,017 km²)와 그 북서쪽에 있는 비오코 섬(Bioko, 2,017 km²)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지역은 156 km 떨어져 있다. 적도 기니의 수도인 말라보(북위 3°45′)는 비오코 섬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또, 리오무니 해안에서 남서쪽으로 500 km 떨어진 곳에는 면적이 17 km²인 안노본 섬(Annobón, 남위 1°25′)이 있다. 대륙 부분은 원주민어인 팡어로 음비니(Mbini)라고 하며, 2012년 헌법에는 리오무니(Río Muni)로 명명했다. 비오코 섬은 적도 기니 전체 면적의 7.2%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27.4%에 이르며, 지역에 따른 경제 격차가 크다. 인구가 25만 명인 제1도시 바타(Bata)는 대륙부에 있다. 한편, 말라보를 대체할 미래 수도가 대륙부 중앙에 위치한 시우다드데라파스(Ciudad de la Paz)에 건설되고 있다. 적도 기니는 8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페르난도포 섬에 부비족과 이보족이 있고, 비오코 섬은 원래 무인도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부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부비인 외에는 페르디난도라고 불리는 시에라리온 및 라이베리아에서 온 해방 노예 출신이 거주한다. 반면 대륙부(음비니)는 팡인이 다수이다. 공식어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1998년 1월 21일 헌법 4조를 개정하여 추가)를 공용어로 쓴다. 그 외에도 피진 영어, 팡어, 부비어, 이보어, 포르투갈어도 사용된다. 공식어에 관해서는 적도기니의 공식 정부 누리집에서 ‘인구’ 항목에서 찾을 수 있다. 적도기니는 국제 이베리아-아메리카 기구(OIE)의 정회원국이자, 국제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또한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의 참관국이다. 특히 경제적인 이유로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정회원이 되기 위하여 2007년 7월에 포르투갈어를 세 번째의 공용어로 지정했다. 현행 헌법은 1991년 반포한 것인데, 1995년, 1998년, 2011년 개헌이 있었다. 이를 모두 반영하여 2012년 02월 16일 새롭게 헌법을 반포했다. 신헌법 4조 1항에는 "적도기니공화국의 공식어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및 법률이 정한 것들이다. 원주민의 언어들은 국가문화의 성분으로 인정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스페인어와 프랑스어가 헌법상 공식어가 됐으며, 포르투갈어는 공식어에서 제외됐다. 적도 기니 인구의 93%를 차지하는 기독교가 주요 종교이다. 87%는 가톨릭 교회인 반면에 소수 5%는 신교도이거나 소수 종파이다. 또다른 인구의 5%는 토착 신앙을 따르며, 마지막 2%는 무슬림, 바하이교와 다른 신앙의 신봉자로 구성한다.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로, 특히 여자 축구는 아프리카 챔피언의 영광을 누리고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남자 축구에서는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개최국 자격으로 첫 출전하여 각각 리비아, 세네갈을 꺾고 2승 1패로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산업면에서는 페르난도포 섬의 커피·카카오 농장이 유명하고, 내륙부에서는 목재 자원을 개발하여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독립 이전 적도 기니의 주요 산업은 코코아 생산이었다. 1996년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고, 그 후 적도 기니의 경제는 드라마틱한 발전을 이루었다. 적도 기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중 세 번째로 큰 산유국이며(나이지리아, 가봉) 생산량은 일일 36만 배럴에 달한다. 이에 힘입어 1996~2005년 기간 동안 연평균 30.8%의 경제 성장을 기록하였다. 더욱이 적도 기니의 인구는 나이지리아(약 1억 3천만 명)나 가봉에 비하여(130만 명) 50만 명밖에 안 된다. 이러한 석유 생산에 힘입어 적도기니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 인 50,200 달러에 달하지만, 부의 불균등한 분배와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투자가 원활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국민의 생활수준은 향상되지 않았다. 미국 상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적도 기니 원유 생산 수입의 상당수가 최근까지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계좌에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고 하며, 현 대통령인 오비앙 대통령은 세계 국가원수 중 아홉 번째로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적도기니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79년 9월, 북한과는 1969년 1월부터 국교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1980년 2월 이후 한국은 가봉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1992년 대한 수입은 2만 7천 달러, 대한 수출은 9천 달러였으나, 교역이 많이 이루어져 2007년 기준 대한 수출은 93만 3천 달러이다. 지부티 지부티 공화국(, , Jamhuuriyadda Jabuuti), 줄여서 지부티(, , Jabuuti)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며 수도는 지부티이다. 이슬람의 영향은 기원전 825년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일부 종족(이디오피아 동부에서 온 아파르와 소말리아서 온 이사스)만이 살고 있었다. 아랍 무역상은 16세기까지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했으나 프랑스가 도착한 1862년을 기점으로 오복(Obock)과 따주라(Tadjoura)의 술탄의 권력이 약해진다. 프랑스는 바브 알만답 해협의 다른 방향인 아덴(Aden)을 지배한 영국과의 균형을 유지하며 술탄들과 정착을 위한 교섭을 벌여 만 탈러에 소유지를 구입한다. 1888년에 프랑스는 따주라 만의 남부연안에 지부티 시를 건설하기 시작해 대부분 소말리인에 정착이 이루어져 프랑스령 소말리랜드(French Somaliland)가 형태를 갖춘다. 지부티는 이디오피아 상업의 중계점이 되고 프랑스가 건설한 지부티-아디스 아바다 철도가 완성돼 현재까지 남아있어 전략적으로 상업적으로 이디오피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96년부터 프랑스령 소말리아 해안(Côte française des Somalis)이라고 부르다가 1967년 프랑스령 아파르족·이사족 자치령(Territoire français des Afars et des Issas)으로 변경했다. 1977년 국민투표를 거쳐 지부티라는 국명으로 독립했다. 지부티는 대륙의 북동부에 있으며 아덴 만과 함께 홍해로 흘러간다. 지부티는 314km의 해안선을 지니며 북쪽은 에리트리아, 남동쪽은 소말리아, 남서쪽은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접한다. 매사추세츠 주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며 바위 사막이 많다. 곳곳에 평원과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지부티에는 다음과 같은 주와 시가 있다. 구성 민족은 소말리계의 이사족이 60%, 아파르족이 35%이다. 나머지는 유럽인, 아랍인, 에티오피아인등이다. 이사족과 아파르족의 대립으로 인해서 1990년대에 내전이 일어났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대부분이고, 유럽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 기독교도가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이지만, 소말리어와 아파르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92년 9월 4일자 헌법 1조에 "공용어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다"라고 규정했다. 지부티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이슬람풍 문화가 뿌리깊어 다른 아랍권 국가처럼 술을 팔거나 마시지 않으며 프랑스 계통 주민은 남녀 모두 반바지를 착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원주민은 지부티식인 긴바지인 사롱을 착용한다. 여자는 정숙한 롱원피스와 스커트를 입고 샬마라는 얇은 천을 두르고 다닌다. 지부티 요리는 소말리아 요리, 예멘 요리 및 프랑스 요리가 혼합된 것으로 남부 아시아 요리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현지 음식은 일반적으로 샤프란에서 계피에 이르는 많은 중동 향신료를 사용하여 준비된다. 중립주의를 지향하여 비동맹외교를 기조로 하고 있다. 지부티와 프랑스 사이의 군사적, 경제적 조약에서 안보와 경제적 원조를 제공받고 있다. 아랍 및 동아시아 국가와의 유대 특히, 일본·중국과의 유대를 환영하고 있다. 지부티는 아랍 연맹, 아프리카 연합, 개발에 관한 정부간 기구(IGAD, Intergovernmental Authority on Development)의 회원국이다. 1977년 12월 7일 대한민국과 수교하여 남한 단독수교국으로 있었다가 1993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음에 따라 남북한 동시수교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주(駐)에티오피아 대사가 겸임하고, 지부티는 주(駐)일본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주(駐) 지부티 명예영사는 사업가인 Omar Nour Soubagle이다. 무역규모는 대한민국의 대(對) 지부티 수출액이 1900만 미국달러, 수입액은 미미한 수치이다.(2007년) 한국은 1991년부터 2007년까지 171만7천 미국달러를 지원하였다. 2006년에는 X-ray 장비 및 의전차량의 물자지원과 긴급구호(5만1천 미국달러), 2007년에는 식수개발장비 물자 지원이 이루어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마라톤에서 후세인 아메드 살레 선수가 동메달을 딴바 있다. 짐바브웨 짐바브웨 공화국()은 아프리카 남부 잠베지 강과 림포포 강 사이에 있는 내륙국이다. 1967년에 영국으로부터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으며 1980년에 현재의 짐바브웨로 새롭게 독립하였다. 남쪽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쪽으로 보츠와나, 북쪽으로 잠비아,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짐바브웨의 첫 주민들은 수렵·채집을 하던 호이산족이었다. 하지만 반투족의 대이동이 시작된후 호이산족은 반투족으로 대체되었다. 9세기와 13세기 사이에는 짐바브웨 남부에 쇼나족들이 나라 이름의 근원이 된 그레이트 짐바브웨 석조 건축물이 세워졌다. 19세기 초에는 마타벨레인들이 옮겨와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1888년에는 세실 로즈가 창립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마타벨레 왕국으로부터 광업 이권을 받아내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이 지역에 영국인들의 정착이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분쟁이 일어나 결국 마타벨레 왕국과 영국인들간의 전쟁으로 이어져 영국인들이 승리하였다. 1923년에는 영국 연방의 자치 식민지인 남로디지아가 되고 1953년에는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와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구성하지만 1963년 잠비아와 말라위가 독립하면서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다 1965년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전선 당이 소수 백인이 장악한 국회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영국은 이를 위법이라 선언하고 제재를 가하였고 이웃 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마저도 로디지아의 일방적인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소수 백인 지배에 대항하는 ZANU와 ZAPU 등의 반군의 게릴라 투쟁이 심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75년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독립하면서 지역 정세가 바뀌자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도 로디지아 정부를 설득하여 결국 1979년 짐바브웨 로디지아라는 과도기를 거쳐 영국의 식민지로 복귀했으나 1년 후, 1980년 4월 18일 다수인 아프리카인이 지배하는 짐바브웨로 독립하였다. ZANU를 주도한 로버트 무가베는 초대 총리에 거쳐 1988년 대통령으로 취임, 수차례 재선하면서 2017년까지 장기집권하고 있다. 무가베는 1997년 총파업으로 궁지에 몰리자 백인 농장 몰수 정책을 실시하고 2005년 무람바츠비나 작전()을 통해 빈민굴의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여 도시 빈민들의 주거 공간을 빼앗는 등 반대파들을 겨냥하는 것으로 비난받는 정책을 폈다. 2008년 짐바브웨는 콜레라 사망자가 500명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짐바브웨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인근 국가들로 퍼지기 시작했다. WHO는 짐바브웨 콜레라 사태의 근본원인은 훼손된 배관 시설의 박테리아이며, 물을 통해 전염되고 있다고 밝혔다. 2017년 쿠데타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축출되고, 에머슨 음낭가과가 대통령이 되었다. 2008년 미화 1달러에 대한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무려 200억 달러이다. 이렇게 화폐가치가 워낙 빠른 속도로 떨어지다 보니 지폐에 올 해 말까지만 사용하도록 유통기간을 표시할 정도이며, 또한 짐바브웨 정부는 돈을 한꺼번에 찾지 못하도록 하루 인출 금액을 1000억 짐바브웨 달러(미화로 5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로 제한하고 있다. 이렇게 화폐가치가 땅에 떨어지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연평균 물가 상승률이 220만%에 이르렀다. 2009년 9월 24일(한국 시각), KBS 뉴스 보도에 따르면 짐바브웨 정부는 자국의 화폐(짐바브웨 달러)를 없애고 미국과 유럽 등지의 다른 나라 화폐를 통용시킴으로써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폐만이 통용되고 있어 거스름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화폐 사용 대신에 물물교환이 거래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주요 공산품 가격이 여전히 주변 국가들의 3~4배에 달하는 상황이어서 안정이 깨질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짐바브웨 정부는 불편하긴 해도 짐바브웨 내의 경제가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 자체 화폐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 정부는 당분간 자국의 화폐를 대신하여 US 달러로 화폐를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수직하강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2010년에는 달걀 한개가 3500억 짐바브웨 달러, 즉 1조 짐바브웨 달러로 달걀 3개조차 구매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5년 6월 11일(현지시간) 짐바브웨 중앙은행은 자국의 화폐를 폐지하고 미화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3경5000조 짐바브웨달러가 미국 1달러로 교체된다.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내륙국이며 남쪽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서쪽으로 보츠와나, 북서쪽으로 잠비아,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접한다. 또한 나미비아는 짐바브웨랑 서쪽에서 딱 한 부분 만난다. 북서쪽 국경은 잠베지 강으로 나뉜다. 짐바브웨의 가장 높은 곳은 냥가니 산(Mount Nyangani)이며 해발 2,592 m이다. 동쪽 부분에는 냥가니 국립 공원이 있다. 가장 낮은 곳은 룬데 강, 사베 강과 접한다. 빅토리아 호수는 가장 중요한 관광지이다. 강수가 불규칙적인 탓에 가뭄이 잦으며 폭풍과 같은 기상 피해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환경 문제는 무분별한 삼림 채벌으로 인한 토양 침식과 화전민으로 인한 대기 오염, 수질 오염 등이 있다. 또한 짐바브웨 일대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누렸던 검은 코뿔소가 사냥으로 인해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이 또한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외에도 광물 채취와 이에 대한 대책 부재로 폐기물이 처리되지 않고 방치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토의 대다수가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차이가 나서 기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로서 비가 잦다. 짐바브웨 국토의 대다수가 고원 지대이고 이 고원에도 고도 차이가 나다보니 산 지대 인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경향이 나타나며 동쪽 지대에 그래도 비가 잦은 편이다. 짐바브웨는 전국이 사바나로 덮여 있고 이 나라의 별명은 '동물의 왕국'이다. 이렇게 짐바브웨가 동물의 왕국이다 보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2000년 2월의 헌법안의 4조 1항에 보면 "공용어는 영어, 쇼나어, 은데벨레어, 벤다어, 남뱌어, 샹간어, 칼랑가어, 수투어, 퉁가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조 2항에 보면 "영어는 기록 언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 헌법안은 2000년 2월 12일과 13일에 걸쳐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54.68%가 반대하여 부결되었다. 현행 헌법은 일부 수정을 하여 2005년 09월 14일에부터 효력이 발생한 것인데 위 2000년 헌법안에 포함된 언어에 관한 4조는 폐기되었다. 다만,‘판사의 자격’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82조와 87조에 “영어는 하나의 공식어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짐바브웨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기독교, 이슬람,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짐바브웨 기독교 교파로는 개신교(최대교단 짐바브웨 하느님의 성회), 짐바브웨 성공회(남아프리카 성공회에 속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아프리카 토착 기독교(아프리카 사도교회)가 있으며, 전 종교인의 61.7%가 기독교인이다.이슬람은 인도사람과 렘바족이 믿고 있으며, 전 종교인의 1.6%를 차지한다. 전통종교는 전 종교인의 32.6%가 믿는다. 로디지아로 독립한 후 이 나라는 국제적으로 제재 대상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이 나라를 승인하지 않았다. 1980년 짐바브웨가 건국되면서 대한민국은 곧바로 짐바브웨를 승인하였으나, 이 나라는 곧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만 수교하고 대한민국과의 외교관계는 수립하지 않았다. 총리와 대통령이던 로버트 무가베는 1980년대에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계속하여 대한민국과의 수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과는 경제·문화 교류를 하였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참여하였다. 양국은 수교 이전부터 비교적 활발한 무역 거래를 하였으며, 1994년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95년 주 짐바브웨 대사관을 개설하였으나, 북한은 1998년 주 짐바브웨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꾸준히 증가되어 2006년 한국 교민 127명, 체류자 70명이다. 축구는 짐바브웨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다. 국가대표팀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 세 차례 진출했고, COSAFA 컵에서 네 차례, CECAFA 컵에서는 한 차례 우승한 이력이 있다. 올림픽 수영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커스티 코벤트리가 이 나라 출신이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北朝鮮人民委員會)는 소비에트 연방의 6개월 간의 군정이 끝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태가 된 기관으로, 사실상의 정부로서 운영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아직 태극기를 사용하였고 한국의 애국가가 사용되었으나 1948년 7월부터는 태극기를 폐지했고 인공기로 교체했으며 애국가를 개정했다.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로동당에 의해 1946년 2월 9일에 38도선 이북 소군정 지역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가 건설되었다.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9일에 조직하여 약 1년 동안 활동하였다. 위원장 김일성(金日成), 부위원장 김두봉(金枓奉), 서기장 강양욱(姜良煜) 외에 여러 부서의 국장을 두어 사실상의 정부조직이었다. 1946년 3월 8일부터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하는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들을 국유화등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후 남북한 지역 간에는 상호 접촉이 두절되었고, 각각의 사회 내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소련 간에는 냉전으로 불리는 전세계적인 체제 경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 2월 22일에 북조선인민위원회(北朝鮮人民委員會)로 개칭되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와 함께 의회의 기능을 수행한다. 보통 최고인민회의가 상원의 기능을 수행하고, 인민위원회는 하원의 기능을 수행한다. 중앙인민위원회 외에 각 자치단체별로 지역인민위원회가 있으며, 지방 의회와의 차이점은 중앙 의회는 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역인민위원회는 각 도별로 도 인민위원회가 있고, 시·군·구에는 각각 시·군·구의 인민위원회를 설치한다. 도의 인민위원회와 시·군·구의 인민위원회는 도와 시·군·구의 행정 활동을 감사, 감찰한다. 형식적으로 복수 정당의 후보자가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에 출마하나 실질적으로 조선로동당 소속 출마자들이 대거 당선되어 사실상 형식적인, 요식 행위에 불과하였다. 태극기는 1946년부터 1948년 7월 초반까지 사용했다가 7월 8일에 인공기로 교체하게 되었고 애국가를 교체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한반도 북쪽에는 영영 태극기와 애국가를 찾을 수 없었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1948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나사렛 나사렛(, , , )은 이스라엘이 관할하고 있는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다. 이스르엘 평원이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해발380m) 위의 작은 마을이다. 신약성서에서 이 도시는 예수의 어릴 적 고향으로 서술하고 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리스천을 히브리어로 Nasrani라고 부른다. 나사렛 사람이란 뜻이다. 2011년 현재 인구는 65,000명이다. 영국령 팔레스타인(1922년~1948년) 시대까지는 아랍인 기독교인(그중 다수가 동방 정교회)가 주민의 다수를 이루었고, 아랍인 이슬람교도는 소수였다. 오늘날의 나사렛은 여전히 중요한 기독교인의 근거지이다. 2009년 이스라엘 통계청은 나사렛 인구의 60%가 가톨릭교도, 40%가 개신교도&정교회라고 밝혔다. 나사렛 도시의 인구는 6만 5천명이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내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곳으로, 가톨릭교 60%인 3만 9천명, 개신교와 정교회 40%인 2만6천명 정도로 높은 편이다. 입춘 입춘(立春, )은 24절기 중의 하나로, 정월(正月)의 절기이다. 태양의 황경이 315˚에 드는 때이며 양력으로 2월 4일 또는 2월 5일이다.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있다. 일 년 중 봄이 시작하는 날이라 하여 입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개 이 때를 즈음해서 설날이 온다. 예로부터 입춘이 되면 동풍이 불고, 얼음이 풀리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깨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입춘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화북 지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 이 시기의 기상은 매년 불규칙적이어서 이때를 전후한 시기가 1년 중 가장 추운 해도 있다. 음력으로는 대개 정월이므로 새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옛어른들은 이날 '입춘대길'(立春大吉:입춘을 맞이하여 좋은 일이 많이 생기라는 뜻)과 같은 좋은 글을 써서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혹은 천장에 붙였으며, 농가에서는 보리 뿌리를 뽑아 보고 그해 농사가 잘 될지 어떨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또한, 음력으로 한 해에 입춘이 두 번 들어 있으면 '쌍춘년'(雙春年)이라고 하여 그해에 결혼하는 것이 길하다고 받아들여져왔다. 일요일 일요일(日曜日)은 토요일 뒤의 날, 월요일 앞의 날이다. 일요일은 대부분의 서방 국가에서 주말의 일부로 취급한다. 월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ISO 8601의 권고에 따라 한 주의 마지막 날이다. 일요일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에서는 한 주의 첫 번째 날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인 해 일(日)을 따서 일요일이라고 부르는데, 영어권에서도 Sun을 따서 Sunday라고 부른다. Sunday(일요일)의 유래는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 시이저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을 보완하여 7일이 기본이 되는 주(週) 제도의 개념을 도입하고 고대 영어의 day of sun 해(日)에게 바쳐진 날에서 유래되었다. 태양신의 날(Sunday)을 첫째 날로 정하여 휴일로 선포되었으며 전통적 기독교 달력에서는 한 주(週)가 시작하는 기준이 되는 날로 보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일부 국가들은 일요일을 일주일의 첫번째 날로 간주하기도 한다. 중동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요일은 공휴일로 달력에는 해당 요일의 날짜를 빨간색으로 표시한다. 복음사가 마르코 마르코(, , , )는 기독교 최초의 복음서로 알려진 '마르코스의 기쁜 소식'의 저자이자 초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여겨지는 인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이다. 지정된 축일은 각각 4월 25일과 5월 2일로 차이가 있다. 성공회에서도 종교개혁 이전의 신앙전통을 존중하여 마르코스를 성인으로 기념한다. 마르코스라는 이름은 ‘비추이다’라는 뜻의 라틴어 마르티우스(Martius)에서 파생되었고 그리스 신화의 마르스와도 관계된 이름이다. 공증인·안경사·유리 제작자·동물 사육자·번역가·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으로, 흔히 사자를 옆에 두고 복음서를 저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르코스는 본래 리비아 근교 펜타폴리스의 시렌 출신의 이교도 출신으로 나중에 사도들의 설교로 감화를 받아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신약성서에는 마르코스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마르코스라는 인물이 열 번 나오는데(사도 12,12.25;15,37) 요한은 이스라엘 이름이고 마르코스는 라틴어·그리스어 이름이다. 비슷한 예로 일부에서는 개명한 이름으로 오해하는 사도 파울로스도 파울로스라는 그리스어식 이름과 사울이라는 유대인식 이름을 모두 갖고 있다. 어쨌든 마르코스는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는데, 성서연구자중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최후의 만찬을 가진 장소가 마르코스의 집이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파울로스와 삼촌인 바르나바스를 따라 45년~49년경 제1차 전도 여행을 함께 했는데 키프로스까지 동행한 후 그 다음 목적지인 소아시아의 주요 지역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대해서 일부 성서연구자들은 마르코스 청년이 힘겨운 전도 여행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이에 곧은 성격의 파울로스가 50년~52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동행하기를 거부하자 마르코스는 삼촌인 바르나바스와 함께 키프로스로 가서 전도하였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골로새서에 의하면, 53년~58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울로스가 에페소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르코스는 파울로스의 곁에 있어서 위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성서학자 르네 지라르가 쓴《성경,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르네 지라르 저/시공사에 의하면 골로새서는 파울로스의 저작이 아닐 것으로 추정되므로 골로새서를 근거로 마르코스가 파울로스와 같이 고난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무리한 해석이다. 마르코스는 페트로스의 통역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페트로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고 한다. 마르코스는 다른 복음사가인 루카스처럼 사도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복음서에서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체포에 관해 적을 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스는 58년과 62년 사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 교회를 설립한 후 복음을 전했으며 그곳의 초대 주교를 역임하였다. 한편 그는 신발을 고치다가 상처를 입은 구두수선공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였다. 상처가 나은 수선공 아니아누스는 회심하고, 후에 마르코스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 68년에 복음 전파를 막으려는 이교도들에게 끈에 의해 목이 묶여 도시 전체를 끌려다니며 돌팔매질을 당하는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9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828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시신을 돼지고기 밑에 몰래 숨겨 들여와서 베네치아에 옮겼다. 그리고 산 마르코스 대성당의 제단에 안치하여 마르코스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깃발은 마르코스를 상징하는 앞발로 성서를 잡은 날개가 달린 사자가 그려져 있으며, 산 마르코스 광장을 비롯하여 베네치아의 세력이 미친 곳에는 지금도 날개가 달린 사자상이 남아 있다. 기독교 성화에서 마르코스의 상징은 복음서를 지니고 있는 날개가 달린 사자다. 마르코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황야에서 설교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사자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표현한 데서 유래하며 예술적 전승은 그 소리를 사자의 울음으로 비유하였다. 날개는 에제키엘서 1장 10절의 네 개 달린 생물체에 관한 환상을 네 복음사가들에 적용시켜 이해한 데서 비롯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World War I, WWI 또는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렸다.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병사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 동맹끼리의 충돌이다. 한쪽 편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협상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협상국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 이러한 동맹은 재조직되었고 더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궁극적으로 유럽인 6천만 명을 포함한 군인 7천만 명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 지난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 전쟁이 시작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이 진격을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시나이 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춘계 공세 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앞의 2개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후자의 2개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1914년 10월 캐나다 잡지 맥클린스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대전(Great War)이다"라고 말했다. 1914년 말 뉴욕에서 발행한 전쟁의 기원 및 초기 역사에 관한 책의 제목은 "세계 대전"(World War)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다. 전간기 기간 동안,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년 9월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인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이 지은 1920년대 역사책 제목이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19세기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동맹은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신성 동맹으로부터 시작했다. 1873년 10월에는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독오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 독오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4년 후인 1894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러불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독일이 통일한 이후, 산업 및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중요한 경제 자원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해군에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각 국가들은 주력함을 더욱 많이 건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건조 이후 대영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경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 사이의 군비 경쟁은 모든 유럽 주요국이 유럽 전역의 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산업 기반을 기울이면서 유럽 전역으로 경쟁이 확장되었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 점령으로 세르비아 왕국 및 그 국가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 동방 정교회의 러시아 제국을 화나게 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미 "유럽의 화약고"로 널리 알려진 발칸반도의 균형을 붕괴시켜 평화 협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인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결과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는 독립했으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감소했다. 1913년 6월 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 및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33일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패배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루마니아에게 남도브루자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발칸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흑수단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차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한 수준이었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일어났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계내렸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간 1달 간의 외교 기동으로 이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있는 성격은 아니였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인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은 동원령을 발동했다.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 지역을 빠르고 대규모로 침공해서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 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 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 8월 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동맹국의 전략은 잘못된 의사 소통으로 혼란을 빚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랐다. 이전의 군사 전개 훈련 계획은 1914년 초 개정되었지만, 개정 이후의 훈련 계획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휘관들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투하면서 북부 전선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군의 대부분을 막을 것이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이 나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4년 9월 9일 셉템베르프로그라암(Septemberprogramm)에서는 독일의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가 독일의 전쟁 목적 및 승리할 경우 연합국에게 요구할 사항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세르비아군 간에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20세기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은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제7 야전군의 서부군)은 개정된 슐리펜 계획에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 독일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국경으로 진군, 독일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둘러싸 남쪽으로 포위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은 한 전선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전선에서는 러시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슐리펜 계획은 1870~1871년의 보불전쟁과 같이 최대한 빨리 프랑스로부터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계획으로 짜여졌다. 또한,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위해 라인 강의 서부가 국경과 맞닿아 있는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을 통해 공격하는 대신 영국 해협으로 진군하여 영국의 지원을 저지한 이후 파리를 공격한다는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대부분의 군대를 러시아로 보냈다. 러시아는 동맹국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동원령을 완료하는데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존의 모든 독일의 전쟁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행군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할 때 벨기에를 통한 자유로운 행군을 원했다(원래는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를 거부했다). 중립국인 벨기에는 이를 거부했고, 따라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하고자 했다. 프랑스 또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을 이동시키고 싶었지만, 벨기에는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독일의 제안 뿐 아니라 프랑스의 제안 또한 거절했다. 결국,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벨기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전투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벨기에군 대부분이 지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안트베르펜으로 후퇴하여 항복했다. 이 계획은 독일의 우측이 프랑스군을 우회하기 위해 진군해야 했고(프랑스군의 대부분은 프랑스-독일 국경에 몰려 있었다) 이후 파리까지 남쪽으로 진군해야 했다. 8월 11일부터 24일까지 국경 전투에서 독일군은 승리를 거뒀다. 9월 12일, 프랑스군은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루어진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파리 동부로 진격하는 것을 방어했고 다시 독일군을 전선에서 50 km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기동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알자스 남부 공세는 8월 20일 뮐루즈 전투로 시작했지만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장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매우 일찍 2개 군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 프랑스 침공에 동원되기로 예정되었던 제8 야전군을 철도를 통해 재빨리 오스트프로이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끄는 이 군은 8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일련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좌절시켰지만, 지치지 않은 독일군을 동부로 이동시킨 결과 1차 마른 전투에서 연합국이 전술적 승리를 이끌었다. 동맹국은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독일군은 프랑스 내의 방어하기 좋은 지역에서 전투를 했고, 영구히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23만명의 프랑스군 및 영국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 문제 및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 결정은 독일군이 전쟁 초기 승리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뉴질랜드는 1914년 8월 30일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 9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및 군사파견군(AN&MEF)이 독일령 뉴기니의 뉴포메른 섬(나중에 뉴브리튼 섬이 됨)에 상륙했다. 10월 28일, 페낭 해전에서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이 러시아 순양함 젬추크를 침몰시켰다. 일본군은 독일의 미크로네시아 식민지를 장악하고 칭다오 전투를 통해 중국 산둥 반도에 위치한 칭다오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칭다오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SMS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의 철수를 거부하자, 일본은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1914년 11월 이 함선은 칭다오 방어전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침몰했다. 몇 달 이내에, 연합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지역을 장악했다. 오직 독일령 뉴기지 지역에서만 고립된 상선 기습 및 방어 태세만 있었다. 전쟁의 첫 번째 충돌로는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사이 식민지 세력의 충돌이었다. 8월 6일~7일에 프랑스와 영국군은 토골란드 및 독일령 카메룬 지역을 침공했다. 8월 10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산발적이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대령 파울 폰 레토우보르베크(Paul von Lettow-Vorbeck)가 이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군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격전을 이끌었고 유럽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지 2주가 지나서야 항복하였다. 영국 정부가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과는 달리, 인도에서는 영국에 대한 충성과 전례없는 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도 국민 회의 및 기타 단체의 인도 정치 지도자들은 열심히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으며, 영국에 대한 전쟁 지원이 인도 자치 운동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국령 인도 제국군은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보다는 열세였다. 인도 중앙 정부 및 인도 토후국이 많은 음식, 돈, 탄약 보급을 보내주는 동안 130만명 가량의 인도군 및 노동자가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자원군으로 활동했다. 총 14만명이 유럽의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고, 70만명이 중동 전선으로 보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인 47,746명이 사망했고 65,126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쟁 자체로의 고통 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영국 정부가 인도 자치에 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인도 자치 운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군사 전술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는데 실패하면서 구식이 돼버렸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강한 방어적 전략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으며, 구식의 전술로는 더 이상 대부분의 전쟁에서 돌파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철조망은 밀집보병의 진군에 심각한 방해물이 되었으며, 포병은 기관총과 결합하여 개방지를 횡단하는 데 매우 어렵게 만들어 1870년대보다 더욱 치명적으로 발전했다. 양측 지휘관은 많은 사상자 없이 참호전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때 기술 진보로 인해 화학 무기 및 전차가 발명하는 등 새로운 공격 무기를 개발하게 만들었다. 1914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어난 1차 마른 전투 이후 협상국 및 독일군은 서로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북부에서 기동전을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기동전을 바다로의 경주라고 부른다. 이러한 측면 포위 시도가 모두 실패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는 곧 독일 제국이 벨기에 해안부터 로렌 지역까지 단단하게 구축한 방어선을 이룬 것을 보게 되었다. 독일은 점령 지역을 방어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참호는 프랑스 및 영국군의 참호보다 더욱 많이 건설되었다. 영국-프랑스군의 참호는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임시적인" 방어선에만 끝나 있었다. 양측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교착 상태를 깨려 시도했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평화 회의의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는) 염소 가스를 이용했다. 곧 양측에서 여러 종류의 가스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전투를 겪은 군인들은 독가스 전쟁이 가장 두렵고 기억에 남는 공포가 되었다. 1916년 9월 15일에는 전체적으로는 솜 전투의 일부인 플레르-쿠르슬레 전투에서 영국군이 처음으로 전차를 이용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차의 효과는 커졌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디자인한 전차는 매우 적은 수를 사용했으며, 대부분은 연합국에게 노획한 전차를 이용했다. 양측 모두 2년 동안 서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을 하지 못했다. 1915~1917년 동안, 대영제국 및 프랑스는 전략, 전술적 방향의 측면의 선택 때문에 독일보다 더 많은 사상자로 고통받았다. 독일은 오직 하나의 주요 공세만 시도했지만 연합군은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16년 2월 독일은 프랑스의 베르됭에서 프랑스 진지를 공격하면서 베르됭 전투가 시작되었다. 1916년 12월 프랑스의 반격으로 공세 시작 지점 이전까지 독일군을 퇴각시키기 전까지 전투는 독일군이 많은 이익을 보았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엄청났지만, 독일군의 사상자 또한 이에 못지 않게 높아서 양 측 교전국의 사상자는 70만명 에서 97만 5천명 가까이 된다. 베르됭은 프랑스의 의지 및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영국-프랑스군은 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이 시작한 7월 1일 당시 영국 육군은 역사상 가장 큰 사상자가 발생해, 첫날 전투에만 19,240명이 사망하는 등 총 사상자가 75,470명이나 되었다. 솜 공세 전체 기간 동안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42만명이었다. 프랑스군 또한 대략 2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독일군은 5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16년 전체 기간 동안 베르됭에서의 오래된 공격은 솜 전투의 심각한 사상자와 합쳐져 프랑스군이 지쳐 붕괴 위기까지 달했다. 1917년 4월 5일 니벨 공세가 연합국의 실패로 끝난 이후 영국 및 프랑스군의 헛된 정면 공격 시도는 프랑스 병사(poilu)의 프랑스군 반란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일어난 영국의 아라스 전투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져 궁극적으로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지만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아라스 공세의 일부분으로 캐나다 군단이 비미 리지를 점령했고, 이는 해당 국가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국가정체성이 전투로 탄생되었다는 생각은 이후 캐나다의 군사 및 일반 사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되는 의견이 되었다. 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파스샹달 전투는 이 기간 벌어진 영국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프랑스의 지원)가 되었다. 이 공세는 10월 전장이 진흙탕으로 되기 전까지 연합국 사이의 약속으로 진행되었다. 사상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거의 20만명에서 40만명 사이로 추측한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은 몇 년 동안 많은 지역의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전선은 종종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은 끊임없는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전장으로 나타났다. 전쟁이 시작했을 당시, 독일 제국의 순양함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연합국 상선을 공격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은 비록 연합국 선박을 보호하는 데는 무능력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패배시켰다. 예를 들어,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의 동아시아 함대의 일부였던 경순양함 SMS 엠덴은 15척의 상선을 포획하거나 침몰시켰으며, 러시아 순양함 및 프랑스 구축함도 침몰시켰다. 그러나, 장갑순양함 SMS 샤른호르스트, SMS 그나이제나우, 경순양함 SMS 뉘른베르크, SMS 라이프치히, 수송함 2척으로 이루어진 독일 동아시아 함대는 선박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고 대신 영국 군함을 만났을 때 독일 영토로 항해했다. 독일 함대 및 SMS 드레스덴은 코로넬 해전에서 장갑순양함 2척을 침몰시켰지만, 1914년 12월 포클랜드 해전에서 탈출한 SMS 드레스덴 및 약간의 보조함을 제외한 모두가 파괴되었고, 탈출한 선박들도 마스아티에라 해전에서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포획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영국은 독일의 봉쇄를 시작했다. 이 전략은 지난 2세기 동안 여러 국제법에 의해 성문화 된 원칙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여러 중요한 군사적, 민간적 자원 공급 차단에 효과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영국은 중립국 선박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공해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모든 함선의 이동을 막았다. 이후 이 전술을 제한적으로 따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유사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1916년 유틀란트 해전(독일어로 Skagerrakschlacht)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가장 거대했던 해전이었으며, 전쟁 중 유일한 전함 간의 전투였다. 이 해전은 191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북해의 윌란 반도 부근에서 일어났다. 독일의 대양함대는 라인하드 세어가 지휘했고, 영국의 대함대는 제독 존 젤리코가 지휘했다. 독일 함대가 해전에 돌입하기 시작하자 자기 함대보다 더 큰 영국 대함대를 피해 탈출하면서 영국 함대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 수상함대의 대부분은 전쟁 기간 내내 항구에만 있어야 했다. 독일의 유보트는 북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보급선을 차단하려 시도했다. 잠수함전의 성격은 공격이 자주 경고없이 왔으며 상선의 승무원들은 생존률이 희박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항의를 시작했고, 독일은 교전 규칙을 바꿨다. 1915년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가 침몰한 이후, 독일은 여객선이 지나다니는 해로에서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영국은 "안전 장소"(구명보트와는 다른 표준)에 승무원을 배치하고 경고를 보내는 프라이즈 규칙 보호를 넘어서서 상선을 무장시켰다. 마침내, 1917년 초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 규칙을 도입하면서 미국이 선전포고했다. 독일은 미국이 해외에서 많은 군대를 수송하기 전에 연합국 해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장거리 유보트를 5척만 유지시킬수 있어서 실제 효과는 미미했다. 1917년에는 상선들이 구축함들과 같은 호송선단을 보호를 받아 유보트의 피해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호송선단 전술은 유보트가 표적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하여 피해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하이드로폰과 폭뢰가 도입되면서 구축함이 수중에 있는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송선단은 상선이 호송선단이 모일 때 까지 기다려야 해서 보급 전송이 느려지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러한 지연을 막기 위해 새로운 화물들을 구축하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군인 수송선은 잠수함에게 너무 빨랐기 때문에 호송선단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유보트는 199척을 이용해 5,000척 이상의 연합군 함선을 침몰시켰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은 항공모함이 처음으로 나온 시기로 HMS 푸리어스가 1918년 7월 톤데른 기습에서 소프위드 카멜을 발진시켜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대잠 순찰기로 소형 순찰선을 띄우기도 했다. 러시아와 직면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공격한 군대의 3분의 1만 러시아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큰 손실을 입은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콜루바라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말까지 원래 전선으로 후퇴해야 했다. 1915년의 첫 10개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부분의 군사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은 불가리아를 설득하여 세르비아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방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사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러시아 전선 등지로도 향해졌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 세르비아는 불가리아군이 60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지원하면서 한 달 내에 정복했다. 세르비아군은 2개 전선에서 패배에 직면하면서 전쟁 초기에 침공했던 알바니아 공국 북부로 후퇴했다. 이후,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했다. 몬테네그로는 1916년 1월 6~7일에 있었던 모이코바츠 전투에서 아드리아 해안에서 후퇴하던 세르비아군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점령당했다. 살아남은 세르비아 병사들은 배를 통해 그리스로 철수했다. 정복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이 나눠 점령했다. 1915년 말, 프랑스와 영국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그리스 정부에게 동맹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친독일 성향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연합국 원정군이 상륙하고 친연합국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런 요구를 거부했다. 그리스 국왕과 연합국 사이의 마찰은 국론 분열이 축적되어 왕당파와 테살로니키의 베니젤로스 임시 정부 간 분열로 이어졌다. 아테네에서 연합국파와 왕당파 간의 긴 협상과 노엠브리아나(Noemvriana)라고 부르는 무장 투쟁 끝에 왕이 폐위되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연합국 편에 참전했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전선이 정적이었다. 프랑스군 및 영국군은 1916년 11월 19일 모나스티르 공세에서 큰 손실을 겪고 비톨라 주변의 마케도니아 영토 일부를 점령했으며, 전선의 안정을 가져왔다. 세르비아 및 프랑스군은 1918년 9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대부분이 후퇴한 이후에야 전진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군은 전쟁에서 도브로 폴 전투에 큰 패배를 겪었다. 결국, 불가리아는 2주 후인 1918년 9월 29일 항복했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 군대는 전선을 유지하기에 너무 약했다. 마케도니아 전선 자체가 붕괴되면서 연합군은 부다페스트 및 빈으로 향하는 도로를 확보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드로프는 확실히 전략 및 작전상 균형이 확실히 무너졌다고 결론내리고 불가리아의 붕괴 이후 하루만에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했다. 오스만 제국은 1914년 8월 비밀 조약인 오스만-독일 동맹을 맺은 이후 동맹국에 합류했다. 오스만 제국의 참전은 러시아의 코카서스 영토 위협과 수에즈 운하를 통한 영국-인도 간 연결을 끊을 수 있는 위협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자체에 살고 있던 오스만 터키인은 쿠르드인, 체르키스인과 동맹을 맺고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민족을 그리스인 집단 학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아시리아인 집단 학살 등 대량학살하며 러시아 및 영국 측에서 참전하는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여 갈리폴리 전역(1915년)과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개전했다. 갈리폴리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영국군, 프랑스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대조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쿠트 공방전(1915~1916년)에서 패배한 이후 영국군이 1917년 3월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 및 투르크맨족과 연합하여 전투한 데 반해 영국군은 아랍인 및 아시리아인과 연합하여 전투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을 1915년, 1916년 두차례 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8월에는 독일 제국-오스만 제국 연합군이 로마니 전투에서 ANZAC 산악 사단과 52 (로우랜드) 보병 사단에게 패배했다. 이 승리에 이어, 영국 육군과 이집트 원정군은 시나이 반도를 횡단하여 12월에 마그드하바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후퇴시키고 1917년 1월 라파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집트 시나이와 오스만령 팔레스타인 경계까지 진격했다. 러시아군은 코카서스에서 일방적인 전투를 치뤘다. 오스만 군대의 최고 사령관인 엔베르 파샤는 러시아가 정복했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시 점령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휘관으로써는 별로였다. 그는 1914년 12월 1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코카서스에서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겨울에 러시아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사리카미스 전투에서 86%의 병력을 잃고 오스만군이 패배했다. 1914년 12월,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군은 영국군과 러시아군 간의 연결을 끊고 카스피 해의 유층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페르시아(현 이란)을 침공했다. 페르시아는 표면상 중립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영국군과 러시아군의 영향 하에 있었다. 오스만군과 독일군은 쿠르드족 및 아제르바이잔인의 대규모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카슈카이인, 탕기스탄인, 루르인, 캄세흐인의 지원을 받았으며, 러시아군 및 영국군은 아시리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의 지원을 받았다. 페르시아 전역은 1918년까지 지속되어 오스만 제국 및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1917년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인을 이끌며 오스만 제국에 대해 가장 강하게 공세를 하던 러시아가 휴전하면서 보급선이 끊기고, 무기 및 양에서 열세가 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이 후퇴해야 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러시아군의 지휘관이었던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남부 코카서스에서 대부분의 터키군을 몰아내면서 승리자로 자리잡았다. 1917년, 대공 니콜라우스 니콜레비치는 코카서스 전선의 지휘관이 되었다. 니콜라우스는 정복한 지역에서 러시아-조지아 철도를 계획하여 1917년에 공세할 새로운 보급품을 얻을려고 했다. 그러나, 1917년 3월(러시아 혁명 이정 율리우스력으로는 1917년 2월) 러시아 2월 혁명을 통해 황제가 퇴위하자 러시아 코카서스 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영국 외무부가 아랍인을 선동하면서 일어난 아랍 반란은 1916년 영국의 지원을 받은 메카의 후세인 빈 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메카 전투서부터 시작했으며, 다마스쿠스에서 오스만군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메디나의 오스만군의 지휘관인 파흐리 파샤는 메디나 공방전에서 약 2년 반동안 저항했다. 이탈리아령 리비아와 영국령 이집트 국경의 세누시족은 터키의 선동에 힘입어 무장하여 연합군과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국은 세누시 전역에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12,000명이나 투입해야 했다. 이 반란은 1916년 중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독일 제국은 독일 아시아 군단을 파병하였다. 오스만 전선에서 연합국의 총 사상자는 65만명이다. 오스만군의 총 사상자는 75만명(325,000명 사망, 425,000명 부상)이다.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일환으로 1882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던 트렌티노,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피우메 (현 리예카), 달마티아 지역을 확보하고 싶었다. 이탈리아는 1902년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어 삼국 동맹을 무효화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은 방어적 조약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격자라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프랑스령 튀니지를 대가로 이탈리아의 중립을 이루기로 했다. 이에 대해, 연합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패배할 경우 남부 티롤,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달마티아 연안 지대를 주는 조건으로 참전하게 했다. 연합국하고의 이 협상은 1915년 런던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또한, 1915년 4월 연합국의 터키 침공에 자극받아 이탈리아는 삼국 협상에 가입하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다섯달 후, 이탈리아는 독일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의 참전은 국무총리 안토니오 사란드라, 외무부 장관 시드니 소니노,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비밀리에 추진했다. 군사적으로 이탈리아는 우월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은 전투가 일어나는 지형이 험하고 전략 및 전술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정면 공격의 철저한 지지자였던 육군 원수 루이지 카도르나는 슬로베니아 고원으로 침입해 류블랴나를 점령하고 빈을 위협할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카도르나의 계획은 견고한 율리안알프스 산맥와 크라스의 험난한 지형, 참호전과 같은 기술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계획이었으며 그 결과 엄청난 인명을 희생하고 교착 상태로 멈춰 버렸다. 트렌티노 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비하기 유리한 산악 지형을 이용했다. 개전 초 전략적인 후퇴 이후 전선은 큰 변화가 없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카이저쉬젠(Kaiserschützen)과 스텐드쉬젠(Standschützen)이 이탈리아의 알피니의 여름에 걸친 백병전을 막아냈다. 1916년 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시아고 알토피아노에서 베로나와 파두아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으나(트렌티노 공세), 별 소득이 없었다. 1915년 초,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 북동부의 소카 강(이손초 강)을 따라 11번의 공세를 진행했다. 11번의 공세는 모두 고지대에 위치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격퇴했다. 1916년 여름 도베르도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승리하여 고리치아를 점령했다. 이 작은 승리 이후에는 이탈리아군이 고리치아 동부의 바니시스 플라티우와 카르스트 플라티우를 중심으로 공세를 진행했지만 1년 가까이 전선에 변화가 없었다. 1917년 가을에는 동부 전선이 동맹국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진행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군의 스톰트루퍼(Stormtrooper)와 알펜크롭스 엘리트원을 포함한 다수의 병력을 증원받았다. 동맹국은 1917년 10월 26일 독일 제국을 주도로 한 분쇄 작전을 시작했다. 코바리드 지역에서 일어난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 이탈리아군은 100 km 넘게 후퇴했으며, 피아베 강 전투에서야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규모의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정부는 소위 18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소집하는 "99 소년들"(Ragazzi del '99)을 진행했다.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피아베 강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으며, 결정적으로 그해 10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패배했다. 11월 1일, 이탈리아 해군은 새로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주으로 전력을 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 풀라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11월 3일, 이탈리아군은 바다를 건너 트리에스테를 점령했다. 같은 날에 빌라 지우티 휴전을 체결했다. 1918년 11월 중반,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전체를 장악하고 런던 조약에서 이탈리아에게 보장된 달마티아 전체를 점령했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날 무렵, 제독 엔리코 밀로는 자신 스스로를 이탈리아령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선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11월 항복했다. 루마니아는 1882년부터 동맹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가 참전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면서 중립국을 선언했다. 협상국이 루마니아가 동맹국에게 선전포고하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와 같이 루마니아인이 많이 사는 큰 영토를 보장해주자, 1916년 8월 27일 루마니아 정부는 협상국에 가입하여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여 러시아의 제한된 지원을 받고 참전했다. 루마니아의 공세는 초기에는 성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밀어냈지만 이후 동맹국의 반격으로 인해 다시 루마니아-러시아 국경으로 후퇴해야 했다. 동맹국이 부쿠레슈티 전투에 승리하면서 1916년 12월 6일에 루마니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1917년에는 몰도바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면서 동맹국은 지루한 교착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1917년 말 10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항복하자, 루마니아는 1917년 12월 9일 동맹국과 휴전해야 했다. 1918년 1월, 루마니아군은 러시아군이 포기한 베사라비아 지역을 점령했다. 비록 루마니아와 볼셰비키 러시아 정부 사이 1918년 3월 5일~9일에 2달 이내 베사라비아에서 철수한다는 조약을 맺었지만, 1918년 3월 27일 루마니아 통합 지역 의회가 루마니아로 합병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베사라비아를 자국 영토로 병합했다. 1918년 5월 7일에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으면서 동맹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동맹국과 종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영토 할양이 이루어지고 카르파티아 산맥에 대한 통행권이 주어졌으며, 독일에게 석유 채굴권이 부여되었다. 그 대신 동맹국은 루마니아가 베사라비아를 장악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 조약은 1918년 10월 알렉산드루 마르힐로만 정부가 무효화하면서 1918년 11월 10일 명목상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 날, 부쿠레슈티 조약은 콩피에뉴에서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무효화되었다. 루마니아는 현대 국경을 기준으로 1914년에서 1918년동안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748,000명이 사망했다. 서부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진 반면, 동부유럽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러시아군의 초기 계획은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독일의 동프로이센을 동시에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비록, 갈리치아를 향한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는 성공적이었으나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는 1914년 8~9월에 일어난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수리아 호 전투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과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분전으로 저지되었다. 러시아의 덜 발달된 산업 기반과 비효율적인 군사 명령 체계가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5년 봄에는 러시아군이 갈라치아 지역에서 후퇴했으며, 5월에는 동맹국이 폴란드 남부 지역에 돌파구를 만들었다. 8월 5일에는 동맹국이 러시아군을 후퇴시키며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1916년 6월 러시아군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동부를 향한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했지만, 러시아 정부의 전쟁에 관한 불만이 증가하고 있었다. 공세의 성공은 승리를 위해 지원해야 하는 다른 장군이 군사를 내주기 꺼려한 탓에 약화되었다. 연합군과 러시아군은 8월 27일 루마니아가 연합국으로 참전 할 때 일시적으로 소생했다. 독일군이 트란실바니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원하는 동안, 남쪽에서 독일-불가리아군이 공격하면서 12월 6일에는 부쿠레슈티가 동맹국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전쟁을 계속 끌면서 러시아 내 불안 상황이 고조되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무능한 통치는 시위를 앞당기도록 했고, 1916년 말에는 황후가 좋아하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살해당했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가 일어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 임시 정부가 뒤를 이었으나, 이 정부의 힘은 약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회주의자와 연대하여 겨우 유지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선과 후방 모두에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육군은 점점 비효율적으로 변해갔다. 임시 정부에 대한 불만과 취약함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들은 전쟁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자 1917년 11월에는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성공하여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했고, 12월에는 독일과 휴전 협상을 맺었다. 처음에 볼셰비키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독일군이 무저항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자 1918년 3월 8일 러시아와 동맹국 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이 조약에서는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동맹국에게 할양하는 등 광대한 영토가 넘겨졌다. 러시아 지역에서 독일군이 명백하게 승리했지만, 이전 러시아 지역에 주둔하기 위해 필요한 독일군의 인력이 너무 많아 이후 일어난 춘계 공세가 실패하고 식량과 물자 보급도 상당히 뒤처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면서 협상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연합국은 독일이 러시아의 자원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고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로의 소규모 침공을 단행했다. 연합군은 러시아 북부 개입의 일환으로 아르한겔스크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연합국에 동참하여 전쟁에 참여한 군단이다. 러시아 내의 군단은 1917년 만들어졌으며, 1917년 12월에는 프랑스(미국인 자원군 포함), 1918년 4월에는 이탈리아에서도 만들어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917년 7월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일어난 즈보로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이겼다. 이 승리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자원군 수가 늘어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 군사가 되었다. 바흐마흐 전투에서는 독일 제국군에게 승리하면서 휴전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러시아 지역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한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장악하고 시베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를 점거했다. 이 군단이 예카테린부르크 근처까지 나타나면서 1918년 7월 볼셰비키는 로마노프 왕가의 처형을 단행하게 된다. 이 군단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 7일도 되지 않아 도시를 장악한다. 러시아의 유럽 지역 항구가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긴 우회로를 통해 대피했다. 1920년 9월 미국 선박 헤프론을 통해 마지막으로 군단이 떠나게 되었다. 1916년 12월, 베르됭 전투가 10달 지나고 루마니아로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내자 독일은 연합군과의 평화 협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미국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조정자로 개입을 시작하면서 양측의 조건을 듣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쟁내각은 독일의 제안은 연합군 사이를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기의 분노와 숙고 이후, 윌슨에게는 별도의 노력으로 미국이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독일과 전쟁하기 직전이라는 신호를 들었다. 연합군은 윌슨의 제안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독일은 "서로의 직접적인 견해 교환"에 대해서 거부했다. 독일의 응답을 보고 연합군 정부는 1917년 1월 14일 자유롭게 명확한 요구를 제시했다. 그들은 피해를 보상받고, 점령 지역에서 독일군이 물려나며, 프랑스, 러시아, 루마니아, 기타 참전국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는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루마니아인, 체코슬로바키아인에 대한 해방 및 "자유롭고 통일된 폴란드"를 건설하라는 요구도 했다. 안보에 대해서는 연합군은 평화를 유지할 제제방법으로 미래의 전쟁을 제한하거나 예방할 방법을 모색했다. 독일이 어떠한 특정 제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하고 협상국은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다. 윌슨에게 협상국은 동맹국이 점령한 모든 연합군 영토에서 나오며 손해 배상금을 물 때 까지 평화 협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계속적으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표명했고, 독일은 이에 대해 이러한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몇 차례 약정했다. 그러나 1917년 1월 16일,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제국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는 내용 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얼마 후 독일이 유보트를 이용해 영국 배를 공격했는데, 그 배에 탔던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따라서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독일에 선전 포고할 것을 1917년 4월 6일에 제의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다. 12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에도 선전 포고를 하여,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이래,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의 군대가 차례대로 투항했다. 불가리아가, 그 다음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순으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는 해군 수병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으며,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전쟁에 지면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으면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서 많은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독일의 경우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고, 본토 손실은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폴란드 지역을 독립시킬 정도의 적잖은 영토를 잃었다. 또한 장기간 전쟁수행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배상금에 대한 것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튀르크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1922년 해체,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도 각각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으로 남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떼어주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연합국에게 영토를 보장받기는커녕 냉대를 받았다. 결국 1922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중앙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전쟁의 방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국제 연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였다. 결국 다시 고립의 길을 걸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 르완다, 부룬디(벨기에 위임 통치령) - 탄자니아(영국 위임통치령) - 카메룬, 토고: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 - 산둥반도는 일본에 조차 - 독일 제국의 태평양 식민지는 미국과 일본이 분할 독일, 러시아, 프랑스 순으로 희생자를 많이 냈다. 반대로 일본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독가스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나왔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같은 무기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마른 전투 이래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독일의 크루프 열차가 유명하다)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 1891년 ~ 1969년)는 참호전의 참상을 그린 〈전쟁〉(1929년 작)에서 참호 속에 흩어진 사지와 흙더미에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이 된 진흙탕을 묘사하였다. 하필이면 왜 저렇게 끔찍하게 묘사하였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 한편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언(, 1893년-1918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시 《고귀한 영예》를 발표하였다. 미국의 역대 신병 모집 포스터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엉클 샘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다. 아래 글귀에는 “샘 아저씨는 네가 육군에 지원하기를 원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미국 해군에서도 육군 못지않게 모병 포스터를 많이 발행했다. 영국도 미국 못지않게 신병모집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인구가 부족하여 미성년자들까지 징집한 적이 있었다(주로 공부할 의지가 없는 남학생들이 해당되었다). 실제로 유틀란트 해전(1916년 덴마크 근처의 유틀란트 만에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참전한 어떤 수병의 나이는 만15세였다고 한다. 스타벅스 스타벅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다국적 커피 전문점이다. 64개국에서 총 23,187개의 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나라별로 미국에서 12,973개, 중국에 1,897개, 캐나다에 1,550개, 일본에는 1,088개, 영국에는 927개, 대한민국에 1,000개, 멕시코에 356개, 타이완에 276개 등을 운영하고 있다. 최초의 스타벅스 점은 동업자 제리 볼드윈과 고든 보커, 지브 시글이 1971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개점하였다. 이때는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소매점이었으며, 1987년에 하워드 슐츠가 인수하고 커피 전문점으로서 새롭게 탄생시켰다. 스타벅스는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였는데 1990년대에는 모든 평일마다 새로운 매점을 개점했으며, 이 속도는 2000년대까지 유지가 되었다. 북아메리카 지역을 제외한 첫 개점은 199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해외 매점들이 전체 매점의 3분의 1 가량 차지한다. 스타벅스는 2009년도에 해외에 900개의 새로운 매점을 개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2008년도 부터 미국에서는 300개의 매점들이 문을 닫고 있다. 드립형 커피와 각종 에스프레소 커피 외에도 차와 병음료수, 원두, 샌드위치, 샐러드, 파니니, 케이크, 그리고 보온병이나 머그컵과 같은 물품 등을 판매한다. 메뉴는 매점의 위치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계절에 따라 상시로 바뀐다. 스타벅스 브랜드의 커피가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판매되기도 한다. 주로 건물의 1층에 독립된 가게의 형태로 있지만, 쇼핑몰이나 은행, 서점과 함께 영업하기도 한다. 스타벅스의 기업명은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Moby Dick)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에서 유래하였다. 스타벅스 로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Siren)이라는 바다의 인어로, 17세기 판화를 참고로 제작했다고 한다. 세이렌은 아름답고 달콤한 노랫소리로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을 유혹하여 죽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처럼 사람들을 홀려서 스타벅스에 자주 발걸음을 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1971년 설립 당시엔 갈색 배경의 상반신이 나체인 세이렌이 로고였으나, 1987년, 1992년, 2011년 세번의 로고 변화를 거쳐 녹색 배경의 세이렌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 현재의 로고로 변화하였다. 최초의 스타벅스 매점은 1971년 미국 시애틀에서 개점하였다. 영어 교사 제리 볼드윈, 역사 과목 교사 제프 시글, 작가 고든 보커라는 세 명의 동업자가 점포를 낸 것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알프레드 핏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는데, 알프레드 핏은 당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고품질 커피 원두와 장비를 판매하고 있던 업자였다. 스타벅스 1호점 매장의 위치는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웨스턴 애비뉴 2000번지였다. 이 자리에 있던 1호점 매장은 파이크 플레이스 1912번지로 나중에 이동하였다. 영업 첫해, 세 명의 동업자들은 그린(green) 커피 원두를 ‘피츠 커피 & 티’(피츠)에서 사들였으며, 나중에는 커피 원두를 커피 재배 업자에게 바로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1982년 사업가였던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에 합류하였다. 밀라노로 여행을 다녀온 뒤 하워드 슐츠는 커피 원두뿐만 아니라 커피 및 에스프레소 드링크도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스타벅스의 창업주들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다. 음료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당시 스타벅스 기업의 핵심 사업에서 벗어난다는 까닭이었다. 창업주들의 생각으로는 커피란 것은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었다. 늘 바쁘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미국인에게라면, 커피 음료를 팔아 잇속을 챙길 수 있다고 확신한 하워드 슐츠는 1985년 “일 조르날레”(Il Giornale)라는 커피 바 체인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1984년 제리 볼드윈이 수장으로 있던 스타벅스사에 기회가 찾아왔다. 피츠(볼드윈은 현재 여기서 일한다)를 인수할 수 있는 기회였다. 1987년 스타벅스 창업자들은 스타벅스 체인을 슐츠의 일 기오날레에 팔아버렸다. 슐츠는 일 기오날레 매장의 브랜드를 전부 스타벅스로 재빨리 바꾸었다. 스타벅스는 크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시애틀 지역 외 매장으로서 캐나다 밴쿠버에 첫 매장을 내었다(워터프론트 역 (밴쿠버) 근처). 같은 해 시카고에도 매장을 내었다. 1992년 기업 공개를 할 당시에는 스타벅스는 165개의 점포를 소유한 커피점 체인으로 성장하였다. 1995년 하워드 슐츠는 라이트 매세이를 고용하여 매장을 완전히 재디자인(redesign)하도록 시켰다. 라이트 메세이는 시너지스틱 롤아웃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하루에 한 매장씩 개장하도록 함으로써 스타벅스 사가 1년에 2천만 미국 달러를 절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매세이는 또한 크레이티브 서비스 그룹()이라는 조직을 꾸려서, 그 조직이 단일 브랜드 스토리를 갖고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도록 시켰으며 또한 매장 디자인을 해 나가도록 시켰다. 《스타벅스 성공의 비결(원제:Pour Your Heart On It)》라는 책에서 하워드 슐츠는 이렇게 밝혔다. 스타벅스는 그 당시 고유의 비주얼 브랜드 언어를 창조해 나갔다. 스타벅스의 비주얼 브랜드 언어는 눈에 띄는 것이었으며 또한 남들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코카콜라가 100년 이상 붉은 색을 썼고, 스펜세리언 서체를 썼고, 녹색이 나는 병을 쓴 것과 마찬가지 식이었다. 스타벅스의 비주얼 브랜드 언어는 스타벅스 도안(graphic)의 룩 앤 필(look and feel)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아이콘, 이야기(story), 컬러 팔레트(color palette) 등으로 구성되었다. 스타벅스는 북미 지역을 뛰어넘어서 해외 최초로 일본 도쿄에서 1996년 스타벅스 매장을 냈다. 1998년에는 영국 커피점 체인 시장에 진입하였다. 60여 개의 시애틀 커피 컴패니의 매장을 인수하고 간판을 스타벅스로 바꿔달면서 말이다. 창업자인 하워드 슐츠에 의해 2000년 CEO에 임명된 오린 스미스는 경영을 맡으면서 “2005년 은퇴할 것”이라고 미리 선언한 후 염두에 둔 후임에게 착실한 경영 수업을 시켰다. 청과매매 체인인 패스마크 CEO이던 짐 도널드를 2002년 영입해 북미시장 담당 사장을 시키면서 CEO를 맡기 전까지 ‘스타벅스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킨 것이다. 2005년 11월까지 런던에는 맨해튼에 있던 매장보다 많은 개수의 매장이 들어서 버렸다. 이 사실은 스타벅스가 국제적 브랜드로서도 성공을 이루어 냈다는 것을 의미했다. 2003년 4월, 스타벅스는 AFC 엔터프라이지즈사로부터의 시애틀 베스트 커피와 토레파키오네 이탈리아의 인수를 완료하였다. 이로써 전 세계적으로 스타벅스 매장의 개수는 6400여 개가 되었다. 2006년 9월 14일 경쟁 체인점이었던 다이드리히 커피가 그 소유의 거의 모든 점포를 스타벅스로 매각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매각은 오리건 주 지역의 커피 피플 체인점을 넘기는 것을 포함했다. 스타벅스의 대변인은 다이드리히 커피와 커피 피플 매장을 스타벅스 매장으로 바꾸어 재개장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스타벅스의 고객들은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경험이 단순히 커피 한 잔을 사 먹는 일과는 다르다고 한다. 스타벅스는 집과 일하는 곳과 다른 제 3의 장소라는 의미를 주려고 노력한다. 고객은 스타벅스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미국과 다른 나라의 모든 스타벅스에서 커피 등의 음료는 균일한 품질을 제공하는 한편 빵, 케이크, 샌드위치, 베이글 등은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를테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타벅스에서는 중추절 기간에 월병을 판매하기도 한다. 또한 컵도 크기가 다른데 미국 밖의 지역에서는 대형 크기인 벤티(Venti)를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다. 거의 모든 매장에서 금연 규칙(Non smoking)을 따르고 있는 것이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커피의 향이 담배 향과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독일과 일본 같은 시장에서는 이 때문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했다. 몇몇 국가에서는 별도의 흡연 구역을 만들어 흡연하는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기도 한다. 매장에서 파는 커피 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 차(tea) 등의 사업에도 진출하여 소매점에서 판매하고 있으며 별도로 CPG 사업부에서 이를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커피 전문기업인 동서식품과 제휴하여 2005년부터 판매를 개시하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성장하는 사업 모델로 알려져 있다. 스타벅스의 회장인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 사의 급속한 성장과 소규모 기업 식의 행동 방식 지향 - 양자간의 긴장이 존재함을 언급한 바 있다(스타벅스는 전 세계적으로 4만개의 매장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7년 5월 기준으로 스타벅스는 전 세계적으로 7,834개의 직영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 중 6,281개는 미국에 있으며 1,553개는 미국 외 지역에 있다. 합작 형태로는 5,894개의 점포가 있으며, 그 중 3,533개는 미국 내에, 2,361개는 미국 외 지역에 위치한다. 전 세계적으로 도합 13,728개의 점포가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잡화점 체인점 내부, 공항 등지에서 스타벅스의 점포를 흔히 접할 수 있다. 심지어 로스앤젤레스 같은 도시에서는 길 하나 건너 스타벅스 점포가 하나씩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현재는 실적 악화 등으로 기업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스타벅스는 1997년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처음 생겼으며, 2000년 12월 신세계와 공동 투자로 ‘스타벅스 코리아’를 설립했다. 2004년 7월에는 이태원에 100번째 점포를 냈으며, 2017년 1월 기준으로 약 1000개의 점포를 운영 중이다 신세계가 지분의 절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세계 상품권을 스타벅스에서 사용할 수 있다. 미국 본사가 로열티로 2007년 한 해에 가져간 금액은 70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같은 해 매출 실적은 1,344억원이고 당기 순이익은 126억원이다. 일반 매장에서 판매하는 컵커피, 캔커피는 동서식품에서 한국 판권을 독점하고 있다. 매일유업은 한국의 스타벅스 모든 매장과 컵/캔커피에 쓰이는 우유를 공급하고 있다. 스타벅스 인사점은 세계에서 최초로 로마자가 아닌 말로 간판을 단 곳으로 유명한데 이것은 인사동 주민의 반발 때문이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에서는 “우리 문화 보존에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인사동 주민을 욕되게 하는 몰지각한 처사며 반문화적 영업전략”이라는 비난을 통해 지점 개설을 반대했고, 이에 대한 타협안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총 6곳의 한글 간판 스타벅스(인사점, 경복궁역점, 광화문점, 안국점, 광화문역점, 북촌로점)가 운영되고 있으며 2011년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앞의 4개 점포(인사점, 경복궁역점, 광화문점, 안국점)를 우리말 사랑꾼으로 선정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은어로 이름의 ‘스타’에서 따와 스타벅스를 ‘별다방’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커피 전문기업인 동서식품과 제휴하여 2005년부터 소매점용 커피음료 판매를 개시하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성장하는 사업 모델로 알려져 있다. 사업분야는 병커피 프라푸치노, 캔커피 더블샷, 컵커피 디스커버리즈이며, 세 가지 카테고리를 모두 시행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3월 25일부터 현금 IC 카드결제가 가능하다. 스타벅스는 Product Red 상품을 2008년 11월에 판매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써 해마다 3,800명의 사람들을 위한 AIDS 약 공급을 지원한다. 스타벅스 커피가격은 다른 커피전문점 커피보다 비싸다. 그럼으로 인해 스타벅스 커피의 가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시사 프로그램이나 보도가 많으며,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스타벅스에 대한 불만의 글이 많다. 스타벅스가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약탈적 가격 행위라는 전술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2000년대 이후부터 20대 여성들의 과소비 행태를 지칭하는 된장녀의 논란 가운데 스타벅스의 비싼 제품이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미국의 스타벅스는 카운터에 시음할 수 있는 종이컵을 놓아두기도 하며 커피 자체도 저렴하게 팔린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스타벅스 커피 가격은 일본, 미국, 영국, 캐나다 등보다 더 비싸 세계에서 3번째로 비싸지만, 다른 커피숍들과의 가격 비교 결과 더 비싼곳도 있는 것으로 드러나 전반적인 커피숍들의 가격 거품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리우스 콘쥐 다리우쉬 혼지(Darius Khondji, 1956년 10월 21일 -)는 영화 촬영 감독이다. 뛰어난 색감과 명암 대비를 이용한 질감을 살려내는 촬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으며, NYU에서 촬영과 영화를 공부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가 처음으로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89년 《Embrasse-moi》라는 작품이다. 1994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밀코 만체브스키 감독의 《비포 더 레인》의 촬영도 그의 솜씨이다. 콘쥐는 장피에르 죄네 및 마크 카로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명한데, 《델리카트슨 사람들》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로 세자르 영화제 촬영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죄네와 카로, 콘쥐를 할리우드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이 영화가 공개된 1995년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을 촬영해 그의 스타일이 할리우드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했다. 그리고 1996년 알란 파커의 《에비타》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같은 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틸링 뷰티 (Stealing Beauty)》의 촬영을 맡으면서 유럽과 미국을 넘나드는 넓은 행동반경(?)을 과시했다. 1997년 공개된 《에이리언4》는 '홀로' 할리우드로 건너온 장피에르 죄네와의 공동작업이었는데, 이는 그와의 세 번째 작업인 셈이다. 닐 조던 감독의 《인 드림스》의 경우, 이 작품은 "닐 조단의 영화가 아닌 다리우스 콘쥐의 영화다"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의 개성과 완숙한 촬영의 비중이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응급 전화번호 응급 전화번호는 많은 국가(나라)에서 정해 놓은 전화번호 중 하나다. 국민이 응급할 때 전화로 관련된 기관에 연락할 수 있는 번호다. 일본은 1877년에 이미 전화를 수입하여 1879년에 도쿄-아타미간에 처음으로 전화를 설치하였고, 1880년에는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시내전화를 개통하였다. 전화의 보급에 따라 화재통보도 증가하였으나 당시의 전화는 호출을 받아 교환수가 하나하나 손으로 연결하였고, 또한 전화국에서는 화재에서도 긴급 우선 취급을 하지 않았으므로 소방서로의 통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7년 4월 1일 전화로 "화재"를 알리면 전화 교환수가 바로 소방관서로 연락하도록 하는 화재탐지 전용전화가 도쿄에서 제도화되었다.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1925년에 도쿄, 교토 전화국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을 시작으로 자동교환화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화재전용 전화번호를 112번으로 결정하였으나, 접속에 착오가 많아 1927년부터는 지역번호로 쓰지 않는 9번을 쓰면서 119번이 응급 전화번호가 되었다. 《한국전기통신 100년사》에 따르면 경성 중앙전화국의 교환방식이 1935년 10월 1일 자동식으로 바뀌면서 서비스 번호를 개정하였는데 총10개의 서비스 번호(교환 114 등) 중 화재통지용으로 119번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999를 쓰고 있다. 미국에서도 1957년 미국소방안전협회에서 999번을 경찰, 소방 및 응급서비스 호출에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는 1970년대에 911로 바뀌었다. 벨 벨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붕어빵 붕어빵은 길거리 노점상에서 파는 붕어 모양의 간식거리 풀빵이다.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잉어빵도 있는데 잉어빵은 상표명이다. 쇠틀에 밀가루 등으로 만든 반죽과 단팥소를 넣어 간단히 구워서 만들며 저렴하기 때문에 서민들이 즐겨 먹는다. 붕어빵과 달리 잉어빵에는 찹쌀도 들어간다. 이름과는 달리 붕어가 들어 있지 않은데, 단팥이 들어 있는 밀가루 외피의 모양이 붕어를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근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팥 외에 피자, 고구마, 슈크림 등 여러 가지 종류를 넣기도 한다. 붕어빵은 19세기 말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도미빵()에서 유래하였다. 이 빵은 1930년대 한국에 들어와 현재의 붕어빵이 되었다. 붕어빵 반죽은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물 그리고/또는 우유, 그리고 선택적으로 달걀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죽을 와플 철과 비슷한 기구인 붕어빵 그릴(생선 모양의 틀)에 붓는다. 빙수용 팥의 재료인 팥앙금을 넣고 반죽을 반쯤 더 채워준다. 이후 몰드를 닫고, 반죽을 노릇노릇하고 바삭해질 때까지 굽는다. 사이다 (동음이의) 허진호 허진호(許秦豪, 1963년 8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이다. 1987년 영화평론가 첫 등단하였다. 그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쓸쓸하면서도 차분한 사랑이야기로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러한 허진호식 로맨스라는 특유의 개성을 가진 후속작을 연이어 발표하여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배우 영화배우(映畵俳優)는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하는 배우이다. 보통 텔레비전 배우(탤런트)나 연극 배우를 겸하기도 한다. 초창기의 무성영화 시대부터 영화 배우라는 직업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영화 관객들이 배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최초의 스타 영화 배우"로 꼽히는 릴리언 기쉬, 플로렌스 로렌스, 매리 픽포드 등이 등장했고 스타를 이용한 영화 홍보 시스템도 갖춰지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서양에 영화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연극 배우나 희극 배우들의 연기를 실시간이 아닌 녹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영화는 무성영화로 이들의 대화 내용은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무성 영화 당시 유명한 영화배우로는 미국의 테다 바라(Theda Bara), 폴라 네그리(Pola Negri) 루돌프 발렌티노 등이 있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연기력과 외모 외에도 미성을 가진 수많은 영화배우들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영화 배우 중 한국 최초의 여성은 연쇄극을 영화에 포함시키는지 여부에 따라 이월화 또는 마호정이 꼽힌다. 한국의 군정기 한국의 군정기(韓國의 軍政期)는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독립이 확정된 한반도를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소련군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전까지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군이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다스린 기간을 총칭한다. 독립 이후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 있던 한국은 얄타 회담(1945년 2월)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의 영향권하에 들어가, 한반도의 중앙으로 관통하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국의 원조 아래 대한민국 정부가, 북쪽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원조 아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성립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자체적으로 각각 자본주의, 공산주의 체제를 남북에 설립하였다. 이 기간 동안 남한에서는 수많은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어 이합집산하였고, 제주 4·3 사건 등 좌-우익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실상 정부의 구실을 하였다. 1947년 유엔에서 제안한 한반도 총선 실시가 소련을 위시한 북한에 의해 거부되어, 1948년 남한만의 총선을 거쳐 제헌국회와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면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1945년 5월 초 나치 독일의 항복 이후 대일전(1941~1945)에 총력을 기울인 미국은 당시 일본 내에 "본토 결전"을 외치는 소리가 높음을 감안,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소비에트연방군의 참전을 유도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의도를 갖고 있었고 1945년 조선해방 이전부터 한국의 독립 능력에 회의적이었다. 미국은 전후 뉴 월드 오더 구상에 따라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직접적인 식민지배 형태가 아니라 한국을 강대국 관리 하에 두는 신탁통치안을 추진했다. 그런데 히로시마에 미국이 8월 6일에 핵무기를 투하시켜 일본 제국이 빠른 항복을 기도했으나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하여 일본 관동군이 소련에게 예상보다 쉽게 무너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8월 9일에는 한반도에 진입까지 시도해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얼른 8월 9일에 나가사키의 핵무기를 추가로 떨어뜨려 일본의 더욱 빨리 항복하게 했다. 그러나 이 무렵 소련은 8월 11일에 선봉군을 점령한 후, 8월 13일~8월 15일까지 청진 전투까지 벌일 때부터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항복했기 때문에 미국의 한반도의 단독 점령은 불가능해졌다. 당시 미국의 모스크바 특사 와 소비에트연방 대사 은 8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비에트 연방이 한반도에 야심을 갖고 있으니 당장 한반도 전역과 만주를 점령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항복 당시 이미 소련군은 한반도의 동북부를 폭격하고 있었고, 미군은 필리핀에 위치해 있어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묵살되었다. 결국,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으며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1945년 8월 10일부터 8월 1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이 웅기군과 나진을 점령한 후, 이어 청진시에도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 4,000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8월 15일 오전 9시경, 조선 총독부는 소련군이 서울에 올 걸 두려워해 총독부를 여운형에게 맡기고 일본 치안과 안정 등을 부탁한다. 그런데 여운형 등은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가 9월 7일 발전적 해소라는 미명으로 이를 해산하였고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도부는 1945년 9월 6일에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조선 총독부는 한국에 사는 일본 국민들과 정부에게 불만을 들었지만 괜한 변명만 되었는데 이는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1945년 8월 20일, 총독부가 소련이 서울에 오지 않고 미국이 온다는 걸 알아채면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이승만과 김구에게 통합을 제안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다시 총독부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오히려 조선 총독부는 미국 하지 중장에게 말하길 "남한의 국민들은 모두 소련편이며, 조선 총독을 비롯해 일본 국민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라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인천에 들어온 미국은 남한인들에게 환영인사, 통제된 상황을 지시하도록 하였으며, 미국 군정 전까지는 당분간 일본경찰에 맡기로 한 것이다.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연해주군관구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자신들을 ‘해방군’으로 규정하며 “조선 인민들이여,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행복은 이제 여러분 손 안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북한에서 소련군이 한 약탈과 관련해 봉기가 일어난다면 “조선사람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또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군내 질서를 잡고 25군단 내 정치적 도덕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시급히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된다.”며 “시범 케이스로 처벌한 뒤 이 사실을 널리 전군에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신종대 교수는 “소련군 역시 미군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진주했고 진주 후에도 현지 사정에 무관심했다”며 “이는 북한 진주 초기 소련군의 비행과 풍기문란이 심각했음을 잘 보여주는 문건”이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이 1945년 8월 이후 5개월간 북한에서 드러낸 행태에 대한 기록한 문건이 발견되었다. 문건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붉은 군대’의 만행을 이같이 기술했다. 그는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나 군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 보수정당은 한국민주당을 만들었다(1945년 9월 16일). 여기에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이어서 한국민주당, 한국국민당,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 각 대한민국의 정당 단체 200여 명이 모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10월 23일)하고 활동하였다.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를 벌였다.(신의주 반공학생사건) 해방 후 즉시독립을 원하던 분위기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 12월 27일)를 통해 제시된 신탁통치안(案)은 당시 진행 중이던 좌우익진영 간의 권력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탁통치안은 즉각적으로 거족적인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즉, 반탁(反託)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우익의 반탁과 좌익의 찬탁운동은 국내 세력을 결집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며 좌우익은 완전히 갈라져 버리게 되고 이념대립이 격화되어,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분단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되었다. 1946년 이후 여운형과 안재홍이 주도한 중도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의 시한적인 통치기관이었던 미군정은 소련과 한국통일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1946년 3월 서울에서 양국 점령군 대표로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다. 공동위원회는 본질적으로 한국통일을 위한 어떠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화합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의 통일이 친미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주장했고, 소련은 소련대로 친소적으로 통일되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1946년 5월 6일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됨으로써 1차 협상이 결렬되고 이 무렵에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남한만 단독정부 수립 운동이 전개되어가자, 중도파세력들은 '좌, 우대립이 계속되고, 이대로 가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려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남북은 결국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정치인들이 주도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1946년 7월)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좌우합작운동은 최종적인 목표가 좌파, 우파세력 등 사상을 넘어서 한반도내에 남북한이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임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좌익과 우익 세력들 간의 연대를 시작해서 합작운동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서울과 평양 간의 남북연합을 추구하는 것, 마지막 최종적으로 소련과 미국 등 열강 외세세력들을 설득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하루속히 추진하도록 하고, 이런 단계들을 거쳐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익계열에서는 한민당이, 좌익계열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세력이 불참하였다. 1946년 5월 15일에 발표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남한의 공산주의 운동 세력과 미군정의 정면 충돌을 불러오는 정치적 파장을 낳았다.(→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미소공동위원회의 무기한 휴회에 따라 미군정은 38선 이남만의 입법기관으로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준비하였고 1946년 12월 12일 개원하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에 대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 하곡수집법, 미성년자노동보호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등을 제정한 바 있다. 좌우합작운동은 초기에 미군정에서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는데, 1947년 3월에는 간접적으로 지원했던 미군정청의 지원방침이 철회되었고, 중도파 세력들만의 운동으로 그치게 되어 버렸다. 좌우합작운동을 계기로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수차례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으로부터 테러와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이어서 7월 19일에는 좌우합작 운동의 구심점 역할이자, 중도파세력들의 중심 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어가게 되어버렸다. 미소공동위원회 양측은 아무런 타결 없이 1947년 8월 해산하였다. 소련 점령군과의 협상에 실패한 미국은 양자간의 타협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탁통치안을 철회하고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탁하여 유엔을 통한 독자적인 한국정부 수립이라는 새로운 대한정책을 입안실행했다.당시 공산블록을 제외한 대다수의 회원국들은 미국측의 영향하에 있었으므로, 미국이 제의한 한국통일 결의안은 1947년 11월의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제2차 미소공위마저 결렬되어 해산되어 버리면서 좌우합작운동도 실패로 끝나게 된다. 1947년 11월 18일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림시헌법제정위원회가 수립되었고, 1948년 8월 25일 대위원 선거로 북조선최고인민회의가 설립, 9월 3일 북조선공산주의헌법이 공식 채택된다. 9월 9일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고, 10월 12일 소련의 승인을 받음으로 소군정이 끝났다. 1948년 2월 7일,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도하여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 의한 단선단정(單選單政)에 반대하며 파업 및 봉기를 일으켰다.(→2·7 사건) 이는 제주 4·3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 1948년 4월 3일부터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김달삼과 남조선로동당세력이 주도가 되어 벌어진 무장항전과 그에 대한 대한민국국군의 강제진압이 있었다. 이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가 한국 전쟁이 휴전된 뒤인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만5천~3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제주 4·3 사건)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는 미국이 제의한 한국통일 결의안에 따른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실시된 것이었다. 여기서 선출된 대통령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제1공화국)의 공식적인 수립 이후 미군정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실제로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 1월의 일이었다. 그 뒤로도 1949년 6월까지 군정은 유지됐고, 군정장관 직무대리 찰스 핼믹은 군정장관 직무대리 겸 한국정부 고문단 대표의 자격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은 1개 연대 병력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고 이후 병력을 증강하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대한민국 육군의 기반이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남조선노동당과 노선을 다르게 하여 계획경제제도, 농민본위의 토지분배, 누진세, 주요 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등을 제시하였다. 여운형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추구했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지하는 이념에 관한 질문에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사회주의 70%로 조사되었다. 즉 사회민주주의를 선호하였다. 동아일보의 해방 후 어떤 국가 수립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8,453명 가운데 70%(6,037명)가 사회주의를, 7%(574명)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미군정청의 문교 정책 자문기구로는 조선교육심의회가 있었고 "홍익인간의 건국이상"을 교육이념을 정하고 6-3-3-4의 미국식 학제를 채택하였다. 1946년 7월부터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을 둘러싸고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7일부터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여 이는 제5공화국 당시인 1982년 1월 5일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화폐는 엔화에서 원화로 바뀌었다. 1946년 10월 이범석은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하였다. 족청은 후에 창설되는 대동청년단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1946년 11월 30일에는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바탕으로 선우기성이 서북청년회를 조직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의 도움으로 우익 활동을 하다가 대동청년단으로 합류하였다. 1947년 9월에 지청천은 우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창설하여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다가 1948년에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45년 11월 5일 허성택에 의해 남로당 계통의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세워졌다. 전평은 남북한을 통합한 인민공화국 제창 및 신탁통치 찬성운동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그래서 1946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시천교회당에서 우익계열 노동조합 중 하나로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이 설립되게 되었다.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찰스 핼믹은 군정장관 직무대리로 1949년 6월까지 미군정을 이끌었다. 1948년 9월 15일 정권이양 이후 미군정은 한국정부 군사고문단 이라는 이름으로 7개월간 남한에 존속하였다. 한편 미군정청은 임시 의회로 1946년 10월 10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그해 12월부터 1948년 5월 30일 해체시까지 과도입법위원회를 운영하였다. 환일고등학교 환일고등학교(桓一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2가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한성고등학교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김유신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였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당나라군을 물리치며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관창,사다함 과함께신라의3대화랑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그는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12대 손이라고 한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은 법흥왕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은 무장으로 활동하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을 잡아 죽이는 공을 세웠고, 김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냈다. 어머니 만명(萬明)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野合)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 건복(建福)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서현은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庾)', '진(辰)'과 발음이 비슷한 '신(信)'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유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다. 그는 용화향도를 이끌고 산천을 주유하며 심신을 수련했다.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 국선(國仙)이 되었다. 건복 46년, 진평왕 51년(629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김유신이 군중에서 갖고 있던 직책은 《삼국사기》 본기에는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下)에 중당(仲幢)이라는 부대명이 있지만, 이것이 설치된 것은 문무왕 11년(671년)의 일이다.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고취된 신라군은 다시 용기를 얻어 진격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고 한다. 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 김용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金春秋)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정월 오기일(烏忌日),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仁平)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주변)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그는 춘추가 억류되었다는 소식에 군사 1만(열전에는 3천)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해 출동 기일에 대한 칙허를 받아냈으며, 신라에 간첩으로 와있던 승려 덕창(德昌)의 보고를 접한 고구려 조정은 전쟁 방지를 위해 춘추를 석방해 무사히 풀려났다.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백제의 장군인 계백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비담·염종(廉宗) 등이 일으킨 반란(비담의 난)에서 명활성에 들어간 반란군과 맞서 유신은 춘추와 함께 월성에 설치된 진영에 주둔하며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할 징조다!”라고 말하여 반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이에 김유신은 몰래 허수아비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보낸 뒤,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란군이 동요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비담을 쳐서 9족을 모두 죽였다. 그 사이 선덕여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이 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데 성공했다. 승세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해에 당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춘추는 당의 황제로부터 원병 파병의 약속을 얻어내고, 아들 한 명을 당의 황제 옆에 남겨두어 숙위하게 한 뒤 귀국하고 있다.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閼川)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의 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가을 9월에는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 대장군 소정방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 훗날의 문무왕)과 장군 김진주 ·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타고 당병이 주둔하는 덕물도로 갔고, 이곳에서 당병은 뱃길, 신라군은 땅으로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해 백제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 벌판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 가까스로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당초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드는 소정방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전에 당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태도로 맞서 끝내 소정방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고종으로부터 현지에서의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소정방이 유신과 김인문(金仁問) · 김양도(金良圖) 세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식읍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리만 상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곡한 말로 거절하고 있다.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병력만을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겸하며 통일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당은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공격의 후방 기지로 삼는 동시에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땅 전역에서 시작된 흥복운동으로 그 계획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귀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지휘하는 백제 흥복군은 당병이 주둔하던 사비성을 포위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신라군은 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끊어진 사비성의 당병에게 소금과 간장을 보내주기에 급급했다. 한편 사비성이 함락된 해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해 칠중성(七重城)에서 성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고, 이듬해인 무열왕 8년(661년) 5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해 20일 동안 전투를 치르고서야 퇴각하고 있다. 9월에 신라와 당 사이의 주요 연락거점 한가운데에 위치해 백제군의 점거하에 있던 옹산성(瓮山城)이 함락되었고, 당병과의 연합작전 계획에 따라 신라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면책특권을 주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 · 김진복(金眞服) ·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진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신의 나이는 68세였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타고 건넜고 이에 모든 장병들이 따라서 강을 건넜다. 유신은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군이 도착했음을 소정방은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친 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퇴각했다. 유신의 명령으로 당의 진영에 갔던 양도 등은 따로 군사 8백 명과 함께 뱃길로 귀국했는데, 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는 등의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에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수만 명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다시 추격해오자, 유신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해 패퇴시켰으며,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선발대로 뽑아 보냈던 열기와 구근에게 미리 급찬을 준 뒤, 문무왕에게 그들의 공로를 논하며 급찬보다 높은 사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백제 흥복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이 전권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재차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청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663년,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과 유신 등의 네 장수들이 이끄는 육군이 서로 육지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에 당 고종이 보낸 사신 양동벽(梁冬碧) · 임지고(任智高) 등이 유신을 문안하여, 그에게 봉상정경(奉常正卿) ·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라는 당의 관직을 주었다. 666년에는 맏아들인 대아찬 김삼광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당에 불려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서 고종을 숙위하게 되었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문무왕이 원정을 나가고 유신은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대신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김인문과 유신의 아우인 김흠순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월 26일에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다. 한편 이 날, 왜(倭)에서는 덴지 천황의 근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신라의 사신인 사훼급찬(沙喙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에게 김유신에게 선물할 배 한 척을 호벤(法弁)·신비쓰(秦筆) 두 사문을 시켜 전달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예전 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정에 봉사하며 세운 공과 유신이 그간 이룬 일들을 신료들 앞에서 술회하며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림과 동시에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유신의 요좌들에게도 모두 1등급씩 위계를 올려주고 있다. 당 고종 또한 김유신에게 조서(詔書)를 주었는데, 그 실물은 유신의 5세손 때까지 보전되다 실전되었다고 한다. 이후 병으로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에는 참여하지는 못하고, 다만 왕실과 군사의 원로로서 왕에게 여러 차례 전략 수립에 대해 자문을 맡았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통치할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미 당은 백제 흥복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664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고 문무왕을 호출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이는 당의 괴뢰정권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와 맞서게 하려는 것으로 신라에 의한 평양 이남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비열홀을 신라로부터 빼앗아 고구려에게 주는 등, 당은 서서히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 다음으로 신라를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유신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병을 습격해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다져 나갔다. 고구려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은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벌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그만 대패하였다. 신라의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이 전투에 유신의 아들로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원술이 살아오자 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집안의 가풍을 더럽힌 죄'라 하여 법으로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원술을 사면했으나, 이후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여 이후 유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편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하자는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각지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웅진도독부 소속 당의 병졸들을 9월에 돌려보내고 사죄문의 형식을 담은 표문과 많은 물품을 당에 바쳤다.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 라는 《시경》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기일은 7월 1일, 향년 79세였다. 《삼국사기》열전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이 병을 얻기 한 달 전,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유신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를 지켜주던 음병(陰兵)이 내 복이 다함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김유신 자신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興德王, 《삼국유사》는 경명왕) 10년(835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유신의 인물상은 대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것이 전부다. 유년시절의 일화로 유명한 것은 《파한집》(破閑集)에 수록된 것으로, 소년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까지 내버린 채 돌아왔다. 사후 그녀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 가치관 같은 것을 보면,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별이 왕궁인 월성에 떨어진 것에 기세가 오른 반군을 상대로 놀라 어쩔줄 모르는 여왕과 신료들을 향해 "길함과 불길함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 이라며 일축하는 개명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백강까지 도착한 당군 장수 소정방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장군의 진영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원수(元首)가 해를 입을 징조'라 하여 겁먹고 상륙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소정방은 그제서야 의구심을 풀고 군사를 백강에 상륙시켜 전투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소정방이 백강에서 상륙하기 직전 김유신은 백강이 아니라 황산벌에 있었다는 시간적 모순이 생겨, 후대 사람들이 김유신을 부각시키고 일부러 소정방의 용렬함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거나 비슷한 사건이 전투 초기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온 김유신이지만, 황산벌 전투로 약속 기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기일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죄를 주려 한다. 아무 죄도 없이 나는 이따위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당병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소정방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당병이 아직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그들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그들과 싸울 계책을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신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 말하여,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원술에 대해 "왕명을 어기고 가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 라 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실제로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훗날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 무열왕계 독재의 강화와 함께 그의 자손이 신라 정계로부터 냉대받으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삼국사기》속의 일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다만 그의 전술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대체로 칭찬보다는 비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골품이나 신분, 관례보다는 능력과 공적을 중시해, 662년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병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데에 공을 세운 휘하의 열기 · 구근에게 사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며,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왕의 지적에 "벼슬은 공적을 담는 그릇으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 라는 말로 기어이 두 사람의 관등 수여를 관철시키고 있다. 이미 신라 당대부터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으로 숭앙받았다.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 알려진 문무왕과 함께 김유신은 33천의 하나가 되어 신라를 진호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현신(賢臣) 위징(魏徵)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것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설총과 더불어 그를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세웠으며,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로는 김유신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지사 북쪽 봉우리에 있고 부(府)와는 서쪽으로 4리 거리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쪽 서악리(西岳里)라 기록되었다. 김유신의 것이라 전하는 묘소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에 있는데 이것이 진짜 김유신의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자세한 것은 김유신묘 항목을 참조할 것). 이 묘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국가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로 주석(柱石)을 세우고 거기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을 새기는 것은 신라에서는 왕의 무덤에만 허락된 것이었다. 김유신의 묘가 지금과 같은 왕릉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아마도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덤 면적은 14,143m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의 무덤 앞에는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해 새긴 비석이 세워졌는데,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설인선(薛因宣)이 그 비문을 지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비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임하필기》에는 그의 묘비가 경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으며, 경주부사를 지냈던 홍양호가 그 묘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다가 20년 뒤에 이서구(李書九)가 금석첩(金石帖) 속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탁본한 것 몇 장을 발견했는데, 필법이 구양순체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존하는 무덤 앞의 비석은 후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하나에는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다른 하나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새겨져 있는데, 비석을 새길 당시 그가 흥덕왕으로부터 흥무대왕으로 봉해졌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묘(墓)」라 적었다가 나중에야 그 글자 위를 덮고 다시 「능(陵)」자로 고쳐 새겼다. 하지만 비석의 원래 재질과 글자를 메워넣은 재료의 재질이 서로 달라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능」이라는 글자 뒤에 가려진 「묘」자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우고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년에 정비되었으며, 뒷산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탯줄을 이 산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경주에는 명종 18년(1561년)에 당시의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靜舍)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과 1610년에 걸쳐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새로 지었고, 인조 원년(1623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고 지금의 서악서원(西岳書院)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에 더해 최치원과 설총을 더 배향하게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국선이 되었을 때,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모의하던 중에 백석이란 낭도로부터 적국을 염탐하고 오자는 제의를 받아 밤에 길을 가던 중, 고개 위에서 우연히 세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을 즈음 유신으로부터 밤길의 목적을 듣고 여자들은 잠시 백석을 여기 두고 숲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유신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들은 신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유신에게 백석은 적국의 사람으로 유신을 꾀어 적지로 데려가려 한다며 경고한 뒤 사라졌다. 골화관에 이르러 유신은 백석에게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온 뒤, 백석을 잡아 문초하여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석의 말은 이러했다. 백석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에서 국경의 강물이 역류하는 괴변이 생기자 고구려의 왕은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은 「왕비가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점괘를 내놓았고, 노한 왕비는 왕에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다른 것으로 시험해보아 맞지 않으면 추남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왕은 쥐 한 마리를 상자에 숨겨놓고 추남에게 상자에 든 것을 맞히게 했는데, 추남은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숫자는 한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라고 대답했다. 결국 처형당하게 된 추남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왕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추남의 점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날 밤 고구려왕은 처형당한 추남이 신라 김서현의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추남이 신라에서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판단한 고구려왕과 그 신하들은 백석을 시켜 유신을 꾀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백석을 처형한 뒤 자신을 구해준 세 신들에게 제사지내어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 세 신은 실은 내림·혈례·골화 세 지역의 신으로, 이후 신라에서는 국가 제사에서 시조묘나 종묘 다음으로 격이 높은 대사(大祀)로서 우대하였다. 김유신의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서라벌 중악(中嶽)에서 선인을 만나 신비로운 비법을 전수받고, 기도 수행하다 별의 정기가 서린 보검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는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년), 17세의 유신이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머문지 나흘째 되는 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귀한 집의 자제가 어째서 여기에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유신이 노인의 이름을 묻자 노인은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 없이 인연을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 유신은 두 번 절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처음에는 묵묵히 말이 없던 난승은 유신이 여러 번 간청하자 그제야 신비한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유신에게 비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니 함부로 전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난승과 유신은 작별하였다. 그가 2리쯤 갔을 때 유신이 쫓아가 바라보니, 난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산 위에는 오색의 찬란한 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건복 29년(612년) 유신은 다시 한 번 보검을 가지고 혼자서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중악에서 했던 것처럼 향을 피우며 하늘을 향해 보검에 빛을 드리우고 신령을 내려줄 것을 기도했다. 사흘째 되는 밤,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었다. 이후 김유신의 검은 별의 정기를 품은 영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의 단석산에는 마치 칼로 잘라낸 듯 표면이 반듯반듯한 바위가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현지의 전승은 그것이 유신이 이곳에서 검술 수련을 하며 바위를 잘랐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강릉에서 행해지는 강릉단오제는 김유신의 검이 명주(溟州) 남쪽의 선지사라는 절에서 90일 만에 주조되었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는데, 유신의 검은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 검을 가지고 유신은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고 죽은 뒤 명주 대관령의 산신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단석산뿐 아니라 인근의 여러 산과 계곡, 동굴 등지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곳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경주시 건천읍에는 작원성, 또는 작성(鵲城)이라는 토성이 남아 있는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성의 이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백제를 공격할 당시 김유신이 서라벌 왕궁에서 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백제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자, 둔갑술에 능하여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싸우는 자용병기(自勇兵器)라는 신비한 무기를 부릴 줄 알았던 공주가 왕을 안심시키고자 자청해서 까치로 변신하여 이곳으로 날아왔다. 서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가 대장기 끝에 앉아 울자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해 진중(陳中)이 크게 어수선해졌는데, 김유신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까치를 향해 겨누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만 변신이 풀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이 성의 이름을 까치 작(鵲) 자를 써서 작성, 또는 작원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국유사》 미추왕죽엽군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14년(779년) 4월에 김유신의 무덤 위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김유신이 여러 병사를 거느리고 미추왕(味鄒王)의 능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 안에서 탄식하고 통곡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살아서 평생 어지러운 것을 구제하였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죽어 혼백이 되었어도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에서 구제하려는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는데, 지난 경술년(770년)에 내 자손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나라의 왕과 신하, 그 누구도 더 이상 나의 공적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더 이상 이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으렵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김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무덤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즉 미추왕)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전처럼 힘써 주기 바라노라.」 라고 대답했고, 똑같은 요청을 세 번이나 더 했지만 세 번 모두 거절당하자 김유신의 혼령은 다시 돌아갔다. 이것은 김유신의 영혼이 후손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해한 나머지, 신라 왕실(김씨)의 시조인 미추왕에게 항의하며 호소한 것이었다. 혜공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대신(大臣)인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사죄하게 하고, 김유신이 생전에 평양을 함락시킨 뒤 복을 빌기 위해 세웠던 절인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과 문경시의 경계에 위치한 모전천이라는 강에는 당교(唐橋)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가 있었는데, 《삼국유사》는 《신라고전》(三國遺事)이라는 문헌을 인용해, 당군의 총관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나서도 돌아가지 않고 신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품고 있자 이를 눈치챈 김유신이 이곳 당교에 당의 병사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베푸는 척 짐주(짐새 독을 넣은 술)를 먹여 독살해 파묻었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다만 이 전설에 대해서는 이를 수록한 일연 자신도 의문을 제기하며 신빙성이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의 밀교승 밀본과 관련해서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인용된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의 다섯 설화 가운데 「노옹화구(老翁化狗)」와 「죽통미녀(竹桶美女)」는 김유신이 등장하는 설화이다. 김유신은 외고조부인 신라 진흥왕과는 이중 삼중의 인척관계였는데, 외할아버지 숙흘종의 백부이자 외할아버지로서 외종증조부이자 외고조부이기도 했다. 그의 할머니 박씨의 언니 보도부인의 남편은 진흥왕의 손자로 진평왕은 그의 대이모부이기도 했고, 매제 태종무열왕의 종증조부이기도 했다. 경주 황룡사지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상(丈六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 되어 569년에 담장까지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고종 25년(1238년) 에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탑과 장육상(丈六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황룡사에서 고승을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고 왕이 친행예불한 장소로는 황룡사 이외의 곳에서 예불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광종 5년(954)때에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에 완공했고 정종 2년(1035), 현종 1년(1095)에 보수공사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의 난으로 말미암아 회진되고 말았다. 남겨진 절터에 의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추정할 때,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되며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서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려 내정에 금당과 구당을 두는 일탑식(一塔式) 가람제도(伽藍制度)로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그 절터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 회랑으로 형성되는 내정(內庭)에는 금당 좌우와 중문 좌우에 각각 건물자리가 있고 탑의 기단 4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의 결과 전면 10간, 측면 4간의 큰 강당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 주위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발굴에 따라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국가적 대찰에 부끄럽지 않는 대황룡사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 "철반이상(鐵盤已上)"이라는 표현을 보면 상륜(相輪)은 금속제이었을 것이다. 탑지 북쪽에는 금당지가 있어 정면 9간, 측면 4간의 대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불대좌(佛臺座) 3기가 있어 장륙존상(丈六尊像)이 양 보살과 함께 이곳에 안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 솔거(率居)의 그림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 북방에는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대구당이 있었으니 지금도 23개를 제외하고는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부전(敷塼)이 중앙에서 동으로 치우쳐서 석조가 남아 있다. 또한 동서 양측에는 회랑지(廻廊址)가 있어 고신라기의 대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있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2007년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외침(外侵, 외세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고자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사업을 추진했다.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彫造)하였다. 현종 때 시작하여 문종 때 완성된 이 초판 고본(古本)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의 몽골 침입 때 불타고, 일부가 일본에 전해진다. 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에서 가져온 불경과 요(遼)일본에서 수집한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차례로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속대장경(續大藏經)으로 1,010부(部) 4,740여 권에 달하였으나, 몽골의 병화로 거의 없어지고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대대적인 조판 사업이 진행되었다. 고종 23년(1236) 강화도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여 사업에 착수, 고종 38년(1251) 총 81,137매(枚)의 대장경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을 하였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은 조선 시대에 다시 새긴 것(보유판)과 일제 강점기 때 다시 새긴 것까지 합하여 총 81,352판(板)이나 된다.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혹은 78센티미터이며 폭은 약 24센티미터, 두께는 2.7~3.3센티미터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킬로그램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킬로그램 정도이다. 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수는 81,352장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81,258장으로 집계했다.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숫자,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81,352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81,352장이라는 숫자에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37년에 제작, 추가된 36개 경판이 포함되어있는 수치이다. 이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의 견해들이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엇갈리는만큼, 학문적,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상황이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역시 그 과학적 기술의 탁월함으로 인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은 2007년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팔만대장경 인쇄본도 강원도 평창군 등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1964년 3월 동국대학교 역경원을 설립하여, 조계종 3대 사업으로 한글대장경 번역을 시작했다. 1965년 부터 매년 8권씩 한글대장경이 간행됐고, 36년이 지난 2001년에 한글대장경 318권을 완간하였다. 팔만대장경 완성에 15년이 걸렸는데, 한글대장경은 2배가 넘는 36년이나 걸려 완성했다. 이슬람교 이슬람( )또는 회교(回敎)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로,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보는 종교이다. 불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와 함께 세계 5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라는 명칭은 아랍어로 복종·순종을 의미하며, '하느님'은 아랍어 발음으로 '알라'라고 한다. 이슬람을 믿는 신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무슬림이라고 하고 여자일 경우에는 무슬리마라고 한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전체 무슬림의 80~90%를 차지하는 수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터키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수니파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타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일과 이삭이 있는데 이스마일이 쫓겨나면서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스마일을 보러온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일과 함께 메카의 카바신전을 건축했다는 설이다.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에비온파, 마르얌파, 네스토리우스교(경교) 등 마이너리티 기독교 신자들이 로마교회의 탄압을 피해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하심가에는 압둘 무딸립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압둘 무딸립에 의해 자라다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부 딸립에 의해 양육된다. 삼촌 아부 딸립은 가난했는데다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부 딸립을 따라 시리아 지방으로 무역 대상을 떠나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네스토리아(경교) 수도사를 만나게 된다. 바히라라는 캬라반을 타고 가는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소수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비교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종교적인 영감을 주었다. 신성한 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던 것은 사비교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마이너리티 기독교 신자들의 영향으로 일신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는데 그 우상들은 '알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알라'라는 호칭은 이슬람에서 매우 중요한데 아랍어로서 '하느님'을 뜻한다. 즉, 이 세상의 절대적인 존재 "신"을 의미한다. '알라'는 이슬람에서 유일한 숭배의 대상이다.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딸립을 생각하며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딸립의 소개로 부자였던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무함마드의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현재의 시리아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정직성과 신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 25세 카디자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알리를 입양하였다. 무함마드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으나 무함마드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네 명의 딸은 잘 성장하였으나 그의 아들들이 유아 때 계속 사망한 것이다. 당시 아라비아 사회는 건장한(몸이 크고 굳센) 남자가 대상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때였기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하였다. 무함마드의 부와 명예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가 임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와 죽은 듯 했는데 부인이었던 카디자가 무함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삼촌이자 에비온파 기독교인이었던 와라까 븐 나우팔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까는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말하였다. 카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삼촌이 말한 것을 모두 알려주었고 그의 예언자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무함마드)는 이슬람에서의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 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단일신 알라(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단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바 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AD 619년에 큰 슬픔을 얻게 된다. 첫 무슬림 신자이자 자신의 큰 후원자였던 부인 카디자가 죽은 것이다.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던 삼촌 아부 딸립도 그 해에 세상을 떠난다. 무함마드는 고통속에서도 줄어들지 않는 박해와 핍박에 대항하기 위해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를 피하여 622년 메카 북방 약 400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 행을 이슬람에서는 ‘히즈라("이주")’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말이 멈춘 수하일의 과수원 땅을 사서 최초의 사원과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씩 알라(하느님)는 위대하다고 암송하며 절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선지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아라비아 부족의 통일을 꿈꾸기 위해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지 않는 형태의 이슬람 조직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를 무함마드는 추구했다. AD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순례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그해 3월은 아랍에는 신성한 달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전쟁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2년에서 10년까지의 평화조약을 요구하고 무함마드는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2년 후 AD 630년 1만명의 무슬림은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메카로 향하였고 결국 메카로의 무혈 입성을 이루어낸다. 메카로 입성한 무함마드는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쳤고 무슬림들이 따라 외쳤다.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다 부숴버렸고 유일신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포했다. 그때 메카의 모든 집에 있던 우상들이 다 파괴됐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보름을 지내고 메디나로 돌아와 이듬해 아라비아 북서쪽 타북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AD 632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참배하고 메디나로 돌아오던 중 심각한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파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이라크·북부 메소포타미아·아르메니아·이란·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 강의 싸움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가 이끈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750-1258) 초기 100년간은 칼리파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튀니스·중앙아시아·이란 동부·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파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 산맥 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인,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나 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이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2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 제국과 교체된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티움 제국(330-1453)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무슬림은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말리아, 코모로, 지부티 같은 일부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기에 빨강, 흰색, 초록, 검정만 넣는다. 빨간색은 국경을 넘어 아랍 세계를 이어주는 '혈연'을 상징한다. 흰색은 '정통 할리파(칼리파) 시대'를 상징한다. 초록색은 사막 지대에서의 번영을 상징하던 색으로, 최초의 시아파 국가인 파티마 왕조의 상징으로 쓰였다. 검은색은 아바스 왕조를 상징한다. 이슬람은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믿는 유일신 종교이다. 이슬람 교리는 매우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슬람의 다섯 기둥(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하며, 6신(信) 5행(行)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종을 위해서는 특정한 의식이나 재산의 희사 없이 신앙증언(샤하다)를 실시하면 된다. 이만(6신)이란 알라·천사들·경전들·예언자들·마지막 심판·운명론에 대한 여섯 믿음이다. 수니파 무슬림에게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파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수니파의 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또, 라마단을 잘 지키면 3일간 축제를 벌여 축하한다. 무함마드가 헤지라 때 도주 계획을 세우는데 머리가 흐려지지 않도록 단식한데서 유래한다. 그 외에 여섯번째 기둥으로 간주되는 지하드 역시 교리로 인정된다. 지하드는 고투·노력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신체가 건장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는 이슬람 공동체를 비이슬람 공동체로부터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의미한다.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동일한 절대자를 숭배하며,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나는 사후세계를 믿는다는 점, 그리스도의 업적과 성경을 존중한다는 점 등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경우 기독교와 같은 원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쓰여지지 않은 책과 같아서, 사회 환경과 교육에 의해 악한 길로 빠져들 뿐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로 본다. 또한 기독교가 주장하는'대속'의 개념도 부정하는데 개인이 저지른 죄는 자기 스스로가 신에게 회개함으로써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담과 이브는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가 타락했지만 결국 용서를 구하고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즉, 카인과 아벨의 죄, 그리고 그 후손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의 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 그들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위대한 예언자로 존중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신이 자신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선택한 여러 예언자 중 하나일뿐, 결정적인 예언자는 무함마드 한 사람이라고 본다. 성경 역시 신의 말씀이 일부 들어있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것은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성직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된 측면이 많다고 본다. 결국 이슬람교도들이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여기는 것은 '꾸란'이며, 꾸란은 앞으로도 덧붙여지지 않을 완전한 형태의 성서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주로 중동과 터키,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아프리카, 러시아(주로 남부지역), 카프카스,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에 이슬람이 분포해 있다. 여기서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은 과거 이슬람 상인들의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이슬람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다. 유럽에서는 알바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주로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이슬람이 존재한다. 일부는 이슬람 국가에서 이민들이 많은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도 존재하며, 특히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이 제2의 종교 세력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유럽의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 무슬림에 대한 차별(취업, 교육) 등의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브라질에 이슬람이 극히 드물게 존재하며, 오세아니아에서는 파푸아뉴기니에 극히 드물게 존재한다. 실례로 유명한 흑인운동가인 말콤 X는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개종한 무슬림이다. 또한 다른 미국의 흑인들도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이들은 "블랙모즐렘"이란 단체를 만들어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중에는 무하마드 알리(개종 전 이름은 카시우스 클레이)와 마이크 타이슨 같은 권투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약 20만 명의 무슬림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터키군의 선교 활동과 다수의 인도네시아와 소수의 말레이시아 지역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 의한 것이다. 한국인 출신의 무슬림은 약 10만 명 정도이다. 현재의 무슬림 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아라비아 반도·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서부·중국·인도·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분포되어 있다. 이슬람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 개의 종파가 있다. 그 중 주류는 수니파이다.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 수니파에 속한다. 그 외에는 16%의 시아파와 신비주의자 수피파 그리고 이바디파 등 여러가지 종파들이 존재한다. 수니파(Sunni)는 이슬람의 최대 종파로 전체 무슬림의 80-90%가 속해 있다. 수니파는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관행)"는 꾸란·하디스·예언자와 정통 칼리파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4대 법학파(하나피·말리크·샤피이·한발리)로 나뉜다. 무함마드 사망 25년 뒤,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살해당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이하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 속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그중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면서 알리 진영을 떠난다. 이들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와리즈파(: "탈퇴자")이다. 카와리즈파는 전투적인 행동주의자여서, 지하드(jihad 주로 ‘성전’으로 번역한다)를 여섯 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661년 이들은 알리를 살해했다. 카와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수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내분으로 뒷날 저절로 약화됐다. 현재는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청교도적인 정신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반이 된 와하브(Wahhab) 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시아파(Shia|)는 이슬람에서 수니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종파로 전체 무슬림의 10-20%가 속해 있다. 시아파는 빼앗긴 칼리파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시아(Shia)"는 '시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이다. 초기 칼리파들의 뒤를 이은 우마위야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1258)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한 시아파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시아파는 우마위야 왕조의 창시자 무아위야 1세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인 하싼(Hasan)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하싼의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이하 "후세인")는 680년 지금의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됐다. 카르발라와 인접한 나자프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사원이 지금도 남아 있어 시아파의 최대 순례지가 되고 있다. 후세인의 제삿날인 이슬람력 정월(Muharram) 10일, '모하라 아슈람'은 시아파의 최대 추모제 날이자 명절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이날 길거리에 나와 행렬을 지어 후세인의 고통을 체험한다. 시아파는 초기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떠받드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훗날 나스티시즘(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의 주류를 이룬 수니파와 신학적으로도 갈라섰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지도자·인도자"를 뜻하는 "이맘"에 대한 견해이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꾸란을 독경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킨다(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성직자"를 인정치 않으며 모든 신도가 직접 신앙의 힘으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아파에서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꾸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이란의 호메이니와 그 뒤를 이은 최고 종교 지도자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가장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희생과 순교를 중시하는 시아파는 이 지점에서 구세주 신앙과 만난다. 특히 알리 이후 열두 이맘의 시기가 지나고 마지막 12대 이맘이 873년에 사라졌다고 믿는 '열두 이맘파'에서는 메시아 사상의 전형이 나타난다. 이들은 사라진 12대 이맘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언젠가 지상에 구세주(마흐디)로서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다. 훗날 많은 이들이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등장하기도 했다.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Twelver)는 이란과 이라크 인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드물게 분포하고 있고, 레바논·파키스탄·인도 등지에 소수파로 존재한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의 경우 왕가는 알리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수니 말리크파다. 자이드파(Zaidiyyah)는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열두 이맘 중 후세인의 아들인 4대 이맘까지만 인정하는데, 여기에 자이드를 포함시켜 다섯 이맘파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자이디야파는 알리 이후의 수니파 칼리파들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을 빼면 교리상 수니파와 동일하다. 예멘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시아파 중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고 매력적인 것, 그런 이유로 옛 문헌이나 소설에 가장 자주 소재로 다뤄졌던 것이 이스마일파(Ismailism) 즉 일곱 이맘파다. 그들은 열두 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카딤(Musa al-Kadhim|, 745-799) 대신 6대 이맘 자아르 알사디크(Ja'far al-Sadiq: 702-765)의 장남 이스마일(Isma'il ibn Jafar: c.721-755)을 추종하기 때문에 이스마일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빈민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에 맞서 인기를 모았다. 10세기 한때 메카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의 또 다른 분파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족 사이의 긴장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 파티마 왕조(909-1171)를 세운 우바이둘라 알마흐디(909-934) 세력이다. 이들은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까히라(al-Qahirah 승리자; 오늘날의 카이로)라는 도시를 세웠다. 칼리파조는 까히라에 거대한 도서관을 짓고 이슬람 교리의 본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알아즈하르(al-Azhar) 성원(聖院)을 만들었다. 이 칼리파조는 11세기 초 국력을 키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를 세력권에 넣었으며, 바그다드의 칼리파도 한때는 카이로의 세력에 맥을 못추었다. 그러나 1171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1138-1193; 살라딘)에 의해 멸망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는 다시 수니파의 손으로 들어갔다. 암살단파(Hashshashin)는 '산상의 노인'이라 불렸던 이란계 지도자가 11세기 말 파티마조와 결별하고 이란과 시리아를 잇는 산악지대에 요새를 만들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마약의 일종인 해시시에 중독돼 암살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아사신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는 영어 assassination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다룬 기록들이나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서술(동방견문록)' 등 옛 문헌들에는 '산상의 노인'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나와 있다. 암살단파는 자객을 이용, 주로 수니파 칼리파들을 살해했다. 현대의 학자들은 암살단파가 예루살렘을 놓고 전쟁을 벌였던 기독교 세력보다는 오히려 수니파 기득권층에 더 큰 위협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에 살해된 최초의 희생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말리크샤 1세(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물크(1091년 사망)였다. 암살단파는 수니파 지도층을 살해, '숨은 이맘'의 통치 체제를 전 이슬람권에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13세기 내분이 일어나면서 약화됐고, 이란을 점령한 몽고군에 의해 섬멸됐다. 시리아의 분파도 이집트, 시리아에서 득세한 맘루크조에 의해 제거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추종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암살이 아닌 사업에 종사해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무슬림 부유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마일파(Ismailism)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종파들로,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슬람의 주요 교리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시아파 무슬림이라기보다는 수니파·시아파 이외의 제3의 종파로 분류되곤 하며 심지어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로까지 분류되기도 한다. 알라위파(Alawis)는 시아파의 알리 숭배를 극단화시켜 신격화했는데,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Muhammad ibn Nusayr)의 이름을 따 "누사이리파"라 불리기도 한다. 레바논과 시리아에 많은 성스런 나무숲을 숭배할 뿐 아니라 삼위일체를 신앙으로 삼아 기독교 의례까지 받아들여 부활절 그리고 성탄절까지 축하하며 성당에서 처럼 포도주 등 술을 마시며 축배를 하기도 한다. 또 기독교처럼 성상을 두기도 한다. 또 기독교에서는 없던 알리 성상을 추가로 둔다. 죽은 후 내세에서는 지상에 있었을 동안의 행위에 따라 천국 혹은 지옥에 가게된다는 일반적 종파의 내용과는 달리 알라위파는 내세의 보상은 없으며 대신 죽기 전 동안 지상에서의 행위가 어땠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서 지상에서의 환생 결과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알라위파의 대부분이 사는 시리아에서도 인구의 11% 정도이지만, 장기 집권했던 하페즈 알아사드 전대통령과 그 아들로 세습 정권을 이어가고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 현 대통령이 이 종파인 덕에 권력층이 되어 있다. 드루즈파(Druze)는 11세기 이스마일파에서 나온 다라지(Darazi)라는 인물이 숨은 이맘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창시했다. 비밀주의가 강하며, 시리아와 레바논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신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슬람과 달리 하킴이라는 칼리파가 신의 현신이라 주장하며 일신론을 믿는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돼 있고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며 영혼은 윤회한다고 믿는다. 이슬람의 하즈(순례) 기간 축제를 열긴 하지만 순례 자체는 하지 않으며 라마단 금식도 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찬양한다. 교리와 관행으로 보아, 이슬람교의 종파라기보다는 별도의 종교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9세기 중반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Bábism)는 아랍어로 '문'을 뜻하는 '밥'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는 진리의 문을 뜻한다. 바비파는 구약성경·조로아스터교·중국에서 전해져온 유교 사상·불교 등의 예언자들을 모두 인정했다. 이들은 이란의 부패한 왕정에 반대하다가 잔혹한 탄압을 당했다.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추종자들은 바하올라라는 예언자를 추종하는 바하이파로 계승됐다. 바하이파의 가장 큰 특징은 관용과 사회의식이다. 이들은 이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남긴 메시지는 사회를 개혁하고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는 여성 평등·교육·국제 평화 등을 모두 포함한다. 바하이파는 거의 대부분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금주·금연·채식 등을 선호한다. 이들도 이란 정부의 박해를 받았으며, 왕정이 끝나고 1979년 이슬람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탄압을 받고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은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사상에 가깝다. 현대 서구문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수피즘은 금욕적인 자기수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수피주의자들은 춤과 노래를 통해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현대 이전에는 회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지금도 종종 그렇게 불린다. 신라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인 직간접적 교류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승려들이 입조하기도 하였으나 세종 대에 금지된다. 현대 한국에서는 1955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의 이맘(종교 지도자) '압둘 가푸르 카라 이스마일 오울루'가 한국인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이슬람교가 포교되었다. 1964년에는 3,700명의 무슬림이 한국에 있었지만, 2014년에는 약 20만 4,500명의 내, 외국인 무슬림이 체류 중이다. 이슬람 성원인 마스지드는 전국에 15개가 있으며, 예배소인 무살라는 60여곳에 이른다. 한국의 무슬림은 주로 수니파로 분류된다. 명지대학교 아랍 지역 학과 김정명 교수는 “이슬람은 ‘알라 외 신은 없다’는 한 가지 공통점 아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종교” 라고 말했다. 매독 매독(梅毒)은 매독균("Treponema pallidum")에 의한 전염병이며 성병이다. 매독은 증상과 시기별로 1기 매독(경성하감 Chancre), 2기 매독(회색빛의 mucous patch) 잠복 매독, 3기 매독(고무종 Gumma) 신경매독으로 나눌 수 있다. 치료받지 않으면 2기매독 이후에는 잠복매독으로 평생 지속될 수도 있고 일정 확률로 수년에서 수십년 이후 3기매독이나 신경매독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성병 중에서도 매우 안 좋은 성병으로 어머니가 걸렸을 경우 아이가 기형이 될 수 있으나, 임신 16주 이전에 발견하여 치료하면 안전하다. 과거에는 불치병 이었지만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현재는 완치된다. 한번 걸리면 모든 병이 그렇듯이 거의 평생 동안 혈액검사 중 하나인 TPHA검사(매독특이항체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며 완치후에는 혈청학적양성으로 본다. 말기 매독균이 중추신경계에 침범하여 생기는 신경매독의 경우 무증상 신경매독과 현증 신경매독으로 나뉘는데, 증상이 있는 현증 신경매독의 경우 치료하지 않고 오랜기간 방치시 뇌에 심각한 손상을 줄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흔하진 않지만 통계를 보면 1960년대 이후 감소 추세에 있다가 2000년부터 다시 증가세를 보인다. 항생제로 치료한다. 주로 다음 두가지 검사를 한다. VDRL, TPHA 검사를 하며 정성 검사로 +/- 판정을 해서 1. 1기매독 - 6개월 : 역가 4배 감소(예: 1:32에서 1:8로 감소) - 12개월 : 역사 8배 감소 - 24개월 : 역가 16배 감소 2. 2기매독 - 6개월 : 역사 8배 감소 - 12개월 : 역가 16배 감소 3. 3기매독 - 12개월 : 역가 4배 감소 일례로 처음 수치가 1:8인 1기 매독의 경우 8배 감소가 1:1이기 때문에 16배 감소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음성이 되거나 1:4이하이면 완치가 된 수치이다. 구기 구기(球技)는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를 총칭하는 말이다. 구기는 골을 넣거나 상대방 쪽으로 아웃시키면 점수가 부과되고, 대부분 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가 대 국가로 한 나라마다 팀을 짜기도 한다. 겸형 적혈구 빈혈증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 또는 겸상 적혈구 빈혈증(鎌狀赤血球貧血症), 겸형 적혈구 빈혈증(鎌型 —)은 유전자 이상에 따른 헤모글로빈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중 하나가 정상의 것과 다르게 변이하여 적혈구가 낫모양으로 변하여 악성 빈혈을 유발하는 유전병이다. 아프리카의 흑인의 일부에서 흔히 나타난다. 말라리아에 저항성이 있어 이 이상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말라리아에는 잘 걸리지 않지만 적혈구가 쉽게 파괴되어 심각한 빈혈을 유발하는 질병이다. 낫 모양 적혈구 빈혈, 헤릭 빈혈(Herrick's anemia)등으로도 불린다. 적혈구 속의 헤모글로빈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구성 중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바뀌어 일어나는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유전병이다. (노예사냥으로 인해 현재 미국 아프로-아메리칸의 일부도 이 병을 가지고 있다.) 환자는 사람의 11번 염색체 상에 존재하는 헤모글로빈 베타 유전자의 염기서열 하나가 바뀌어 있다(GAG → GTG). 따라서 아미노산 서열 중 6번째 글루탐산이 발린으로 바뀌게 되며, 이러한 돌연변이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달라붙어 긴 바늘모양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게 되므로 적혈구의 모양이 길게 찌그러진 낫 모양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염색체 한 쌍 모두에 이상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환자(호모형)는 대단히 쉽게 적혈구가 파괴되므로 심각한 빈혈 증상과 말초 모세혈관의 괴사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 유전적 이상은 말라리아 원충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보이게 되는데, 낫 모양 적혈구의 막은 물질의 투과성이 비정상적이어서 적혈구 내에 농축된 칼륨 이온(K)이 세포 밖으로 빠져 나가므로 병원충이 대사 장애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립 유전자를 열성 동형접합(호모)이 아닌 이형접합(헤테로)으로 가지고 있을 경우, 빈혈 증상이 생존에 위협적일 정도로 심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말라리아가 유행하는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는 이 유전질환을 이형접합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 생존에 유리하게 된다. 동맥경화증 동맥경화증 (動脈硬化症, )은 동맥의 탄력이 떨어지고 동맥에 혈전 등이 생기거나 하는 등 기타의 이유로 동맥이 좁아지는 질병이다. 뇌 혈관에 생기면 뇌졸중, 심장에 생기면 심근 경색증, 협심증이 생기고, 동맥이 완전히 막히면 막힌 동맥이 혈액을 공급하는 신체 각 부위가 죽는 괴사가 발생하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다행히 많은 인체의 기관들이 한 동맥에서만 혈액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측부 혈관으로 혈액을 공급 받기도 하므로 괴사에 안 빠질수도 있지만, 대개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동맥이 좁아지면 이 동맥이 공급하는 혈액이 가지 않는 부위는 창백, 통증, 무감각, 감각이상, 마비가 생길 수 있다. 천식 천식(喘息, )은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염증성 기도 폐쇄 질환이다. 천식 환자는 기도의 폐쇄로 인해 천명(喘鳴, 숨소리가 색색거림), 호흡곤란, 기침 등의 증상을 호소하며, 증상은 낮보다 밤에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과도한 가래 형성으로 숨을 내쉴 때(호기, 呼氣)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소아 천식의 절반은 성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성인 천식으로 지속된다. 천식 소인이 있는 사람은 상기도 감염으로 인한 급성 기도 폐색을 겪을 수 있으며, 심할 경우 이로 인해 사망할 수도 있다. 급성기에는 저농도 산소 투여(2L/m 이하), 스테로이드, 아미노필린, 에피네프린 주사 등으로 치료할 수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기도 삽관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천식은 일종의 알레르기 질환으로 현재로서는 천식을 유발하는 항원을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방법이다.유전적 요인으로 볼 때 천식은 5번 염색체이다. 천식은 고대 이집트에서 인지되었고 카피(Kyphi)라 불리는 향 혼합물을 마심으로써 대처하였다. 특정한 호흡기 문제로 공식적으로 명칭이 언급된 것은 기원전 450년 경 히포크라테스이며, 현대에 쓰이는 영어 낱말 asthma는 "헐떡거리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 ἅσθμα에서 비롯된다. 기원전 200년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감정과 관련된 것으로 믿었다. 1873년, 이 주제에 대한 현대 의학의 최초 논문이 이 질병의 병리생리의 설명을 시도하였고, 1872년의 논문에서는 천식이 클로로폼 도찰제로 가슴을 비비면 치유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천식은 "성스러운 7가지" 정신 신체적 질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그 원인은 치료가 종종 정신분석 및 기타 대화 치료에 기반을 둘 만큼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천식은 복잡하고 불완전하게 이해되는 환경적, 유전적 상호작용의 조합에 의해 발병한다. 12세 이전에 발병할 경우 유전적인 영향으로 인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2세 이후에 발병할 경우 환경적 요인으로 인할 가능성이 더 높다. 천식으로 인한 기도의 폐쇄에는 주로 비만 세포와 호산구가 관여한다. 만약, 기도에 집먼지 진드기나 꽃가루와 같은 항원이 침투하게 되면 체내 면역계가 이를 감지하여 항체 IgE 를 생성하게 되는데, 이 IgE는 기관지 상의 비만 세포의 수용체로 작용하게 되며, 이로써 추후 항원의 재침투시 비만 세포가 항원에 반응하여 히스타민과 같은 기도의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여러 물질을 분비하게 한다. 한편, 호산구는 비만 세포가 분비한 물질의 자극에 의해 활성화되어, 마찬가지로 기도의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이러한 염증 반응에 의해 기도 점막의 부종이 일어나면 기도가 폐쇄되는 천식의 전형적인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대개 천식에 걸리면 색색거리며 숨을 쉬거나 호흡 곤란과 천명 및 재채기에 시달린다. 호흡이 짧고 허파가 조이지만 색색거리지 않고, 천명이 없다면 만성 폐쇄성 폐질환과 혼동할 수 있다. 천식이 진행되는 유형은 색색 거리거나 높은 심박수(과도호흡) 및 나음(라셀음 청진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음.) 천식이 심화될 때에는 산소 부족으로 청색증에 걸릴 수도 있으며, 흉통이나 호흡에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당뇨병 당뇨병(糖尿病, diabetes mellitus, DM, diabetes)은 높은 혈당 수치가 오랜 기간 지속되는 대사 질환군을 말한다. 혈당이 높을 때의 증상으로는 소변이 잦아지고, 갈증과 배고픔이 심해진다. 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다른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급성의 합병증으로는 당뇨병케톤산증, 고혈당성 고삼투성 비케톤성 혼수 등이 포함된다 심각한 장기간 합병증으로는 심혈관질환, 뇌졸중, 만성신부전, 당뇨병성 궤양, 당뇨망막병 등이 포함된다. 당뇨병은 췌장이 충분한 인슐린을 만들어 내지 못하거나 몸의 세포가 만들어진 인슐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된다. 인슐린 작용의 부족 등에 의한 만성 고혈당증은 여러 특징적인 대사 이상을 수반한다. 인슐린은 주로 탄수화물 대사에 관여하므로, 당뇨병은 탄수화물 대사의 이상이 기본적인 문제이나, 이로 인해 체내의 모든 영양소 대사가 영향을 받게 되므로, 또한 총체적인 대사상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당뇨병은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만성 질병으로 꼽히며 특히 선진국일수록 발생 빈도가 높다. 당뇨병은 통상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예방과 치료로 보건식, 운동, 금연, 정상 체중 유지가 포함된다. 혈압 조절과 적절한 발 관리 또한 당뇨병 환자들에 있어 중요하다. 제1형 당뇨병은 인슐린 주사로 관리되어야 한다. 제2형 당뇨병은 투약으로 치료하는데, 인슐린이 포함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슐린과 일부 경구 투약은 저혈당을 일으킬 수 있다. 비만증이 있는 제2형 당뇨병 환자에는 체중감량 수술이 효과적인 조치일 수 있다. 임신당뇨병은 통상 출산 후 해결된다. 2014년 현재, 세계적으로는 약 3억 8천여 명의 당뇨병 환자가 존재하며, 제2형 당뇨병이 90%를 차지한다. 이는 성인 인구의 8.3%에 해당되는데, 남녀의 비율은 서로 같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당뇨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150만에서 49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뇨병은 사망 위험을 최소한 두 배로 늘인다. 당뇨병은 2035년 5억 9천여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세계적으로 당뇨병에 드는 경제적 비용은 6,120억 미국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미국에서는 당뇨병에 드는 비용은 2,450억 달러에 달했다. 치료받지 않은 전형적인 당뇨병의 증상은 체중 감소, 다뇨증, 다음다갈증, 다식증이다. 제1형 당뇨병에서는 증상이 수 주 또는 수 개월 사이에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다. 제2형 당뇨병은 그보다 훨씬 천천히 진행되고, 증상이 미미하거나 없을 수 있다. 당뇨병에만 특정되지 않지만 여러 다른 징후와 증상으로 당뇨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언급된 증상에 더하여, 흐린 시각, 두통, 피로, 베인 상처의 늦은 치유, 피부의 가려움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높은 혈당이 지속되면 수정체에 포도당이 흡수될 수 있으며, 모양의 변형을 가져와 시력을 변화시킨다. 당뇨병으로 일어날 수 있는 피부 발진들은 총괄하여 당뇨병 피부증후군으로 알려져 있다. 제1형과 제2형 당뇨병 환자에서는 저혈당이 흔하다. 대부분의 경우 증상이 가볍고 의료적 응급 상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영향은 가벼운 경우 불안, 발한, 떨림, 식욕 증진으로부터 심한 경우에는 착란, 행동 변화, 발작, 의식상실, 드물게는 뇌손상, 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 가벼운 증례는 당분이 많은 음식을 먹거나 마심으로 스스로 치료된다. 심한 증례는 의식을 잃게 할 수 있으므로 포도당 정맥 주사 또는 포도당 주사로 치료해야 한다. (통상 제1형 당뇨병)환자는 당뇨병케톤산증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구역 및 구토와 복통, 숨 쉴 때의 아세톤 냄새, 쿠스마울 호흡으로 알려진 심호흡, 심한 경우 의식 혼탁이 특징인 대사장애이다. 드물지만 심한 증상으로 고삼투압성비케토산성혼수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제2형 당뇨병에서 흔하며, 주로 탈수에 의한 것이다. 모든 형태의 당뇨병은 장기간의 합병증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통상 이들은 10년에서 20년에 이르는 기간에 발생하나, 이전에 당뇨병 검사를 받지 않았던 사람들에는 (당뇨병에 의한) 첫 번째 증상이 될 수 있다. 주요 만성 합병증은 혈관의 손상과 관련되어 있다. 당뇨병은 심혈관 질환의 위험을 2배로 늘리며, 당뇨병 사망자의 약 75%가 심장동맥병에 의한 것이다. 다른 혈관 질환으로는 뇌졸중, 말초혈관병이 있다. 미세혈관의 손상에 의한 당뇨병의 주요 합병증으로는 눈, 신장, 신경의 손상이 있다. 당뇨망막병증으로 알려진 눈의 손상은 눈의 망막의 혈관이 손상되어 생기며, 시력을 점차 잃어버려 실명할 수 있다. 당뇨병콩팥병증으로 알려진 신장의 손상은 조직에 흉터가 형성될 수 있고, 오줌으로 단백질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결국에는 투석이나 신장 이식이 필요할 수 있는 만성 콩팥병에 걸릴 수 있다. 당뇨병신경병증으로 불리는 체내의 신경 손상은 당뇨병의 가장 흔한 합병증이다. 증상으로는 무감각, 저림, 통증, 통각 변경 등이 있으며, 이들은 피부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당뇨족(당뇨병성 족부 궤양)과 같은 당뇨병에 관련된 발 문제도 생길 수 있는데, 치료가 어려울 수 있고, 종종 절단이 필요하다. 추가로, 근위 당뇨병신경병증은 고통스러운 근육 쇠약을 초래할 수 있다. 인지 결손과 당뇨병은 연관성이 있다. 당뇨병이 없는 경우와 비교하여 당뇨병 환자들은 인지 기능의 감소 속도가 1.2에서 1.5배 크다. 당뇨병은 크게 네 가지, 즉 제1형 당뇨병, 제2형 당뇨병, 임신당뇨병, 그리고 기타 특이 형태의 당뇨병으로 분류된다. '기타 특이 형태'라는 것은 개별적인 수십 건의 원인을 모은 것이다. 제1형 당뇨병은 췌장 베타 세포의 파괴성 병변에 의해 인슐린이 결핍되어 생기는 당뇨병으로, 다시 면역 매개형, 원인 불명형으로 나뉜다.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 분비 저하와 인슐린 저항성(IR)으로 인해 생기며, 이 두 가지 인자의 관여 정도에 따라 인슐린 분비부족 우위 당뇨병과 인술린 저항성 우위 당뇨병으로 나뉜다. 이외에도 임신 중에 처음 발생하거나 진단된 모든 형태의 내당능 장애를 임신성 당뇨병이라고 하며, 정상과 당뇨병 사이의 혈당 농도를 보이는 경우를 경계형 당뇨라고 한다. 제1형 당뇨병은 췌장에서 인슐린을 생성하는 랑게르한스섬의 베타 세포의 손실로 인슐린이 결핍되는 것이 특징인 당뇨병이다. 이 형태는 다시 면역매개형(immune-mediated)과 원인불명형(idiopathic)으로 세분되기도 한다. 제1형의 대부분은 면역매개이며, T세포 매개의 자가 면역 공격이 베타 세포와 인슐린의 손실을 초래한다. 이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발생하는 당뇨병 중 약 10%의 원인이 된다. 발병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하며 체중도 정상이다. 감수성과 인슐린에 대한 반응은 보통 정상이며, 초기 단계에는 특히 그러하다. 제1형 당뇨병은 어린이나 어른 모두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어린이들에서 대부분 발생하므로 전통적으로 '소아당뇨병'이라 부른다. 불안정당뇨병은 인슐린의존당뇨병에서 종종 특별한 이유 없이 극적으로 재발되는 글루코스 수치의 변동을 전통적으로 불렀던 명칭으로, 생물학상의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형 당뇨병은 불규칙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고혈당, 종종 케톤증, 가끔씩은 심각한 저혈당을 동반하기도 한다. 다른 합병증으로는 저혈당의 대응 반응 조절 악화, 감염, 식이 탄수화물의 흡수가 불규칙해지는 위마비, 내분비병(예를 들면 에디슨병) 등이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1%에서 2% 이하의 제1형 당뇨병 환자들에서 발생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제1형 당뇨병은 일부분 선천적이며, 당뇨병의 위험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특정 사람백혈구항원을 포함한 복수의 유전자와 관련이 있다. 유전적으로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 당뇨병의 시작은 바이러스 감염이나 식사 등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환경적 요인에 촉발될 수 있다. 제1형 당뇨병과 콕사키 B4 바이러스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약간의 증거가 있다. 제2형 당뇨병과는 달리 제1형 당뇨병의 시작과 생활 방식은 서로 관련이 없다. 제2형 당뇨병은 인슐린 저항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상대적으로 줄어든 인슐린 분비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 체 조직의 인슐린에 대한 반응 결손은 인슐린수용체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어쨌거나, 특별한 결함은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진 결함에 의한 당뇨병은 별도로 구분된다. 제2형 당뇨병은 가장 흔한 종류이다. 제2형의 초기 두드러지는 이상은 인슐린 감수성의 감소이다. 이 단계에서는 인슐린 감수성을 향상시키거나 간의 포도당 생산을 줄이는 투약과 다양한 조치로 고혈당증이 역전될 수 있다. 제2형 당뇨병은 주로 생활방식의 요소나 유전에 의한다. 비만(체질량 지수 30 초과로 정의), 운동 부족, 부실한 식사, 스트레스, 도시화 등을 포함한 몇 가지 생활방식 요소들은 제2형 당뇨병의 발생에 있어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과 일본 사람의 30%, 유럽과 아프리카 사람의 60~80%, 피마족 인디언과 태평양 섬주민들의 100%가 과도한 체지방에 관련되어 있다. 비만이 없는 사람들도 종종 높은 허리엉덩비율을 갖는다. 식사 요소 또한 제2형 당뇨병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 설탕이 첨가된 음료의 과도한 섭취는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식사에서의 지방의 종류도 중요한데, 포화 지방산과 트랜스지방은 위험을 증가시키며, 다불포화지방산과 불포화지방은 위험을 감소시킨다. 백미의 다량 섭취는 위험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환자의 7%는 운동 부족으로 유발되었다고 여겨진다. 임신당뇨병(GDM, Gestational diabetes mellitus)은 인슐린 분비와 반응이 상대적으로 불충분한 증세의 조합과 관련되어 있으며, 여러 면에서 제2형 당뇨병과 닮았다. 이 병은 임신부의 약 2~10%에서 발병되며, 출산 후에는 증세가 좋아지거나 사라진다. 어쨌거나, 임신 후 임신당뇨병이 있는 여성의 5~10% 정도가 당뇨병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대부분 제2형 당뇨병이다. 임신당뇨병은 완전히 치료할 수 있으나, 임신 기간 동안 주의 깊은 의학적 관리가 필요하다. 관리에는 식습관 개선, 혈당감시, 경우에 따라서는 인슐린이 필요할 수 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임신당뇨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태아나 산모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 태아에 있을 수 있는 위험으로는 거구증, 선천적인 심장과 중추신경계 이상, 골격근 기형 등이 포함된다. 태아의 인슐린 증가는 태아의 표면활성제 생산을 막아 호흡곤란증후군을 유발한다. 적혈구의 파괴로부터 고빌리루빈혈증이 발생할 수 있다. 심한 경우 주산기사망이 발생할 수 있는데, 대부분 혈관 장애로 태반 관류가 불량한 결과이다. 태반기능 저하에는 분만유도가 필요할 수 있다. 뚜렷한 태아절박가사가 있거나 어깨난산과 같은 거구증으로 인한 부상 위험이 증가하면 제왕 절개를 실시할 수도 있다. 당뇨병전기는 혈당치가 평균보다 높지만 제2형 당뇨병으로 진단될 정도는 아닐 때에 발생한다. 제2형 당뇨병으로 발전하는 다수는 수 년 간 당뇨병전기의 상태에 있게 된다. 성인잠복 자가면역 당뇨병 (LADA, Latent autoimmune diabetes of adults)은 성인에서 제1형 당뇨병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LADA가 있는 성인은 연령보다는 병인론 때문에 종종 제2형 당뇨병으로 오진된다. 일부 유형의 당뇨병은 체조직의 수용체가 인슐린에 반응하지 않아 발생된다. 이는 인슐린이 정상인 경우에도 발생하여 제2형 당뇨병과 구별되는데, 이러한 유형은 매우 드물다. 보통 염색체 또는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적 변이가 베타 세포 기능의 결함을 초래할 수 있다. 만성재발이자염이나 낭포성 섬유증 같은 이자에 큰 손상을 주는 질병은 당뇨병을 일으킬 수 있다. 인슐린 길항성의 호르몬의 과다 분비와 관련된 질병도 당뇨병을 유발할 수 있으나, 통상 호르몬 과잉이 제거되면 해결된다. 많은 약제들이 인슐린 분비에 손상을 주며, 일부 독소는 이자의 베타 세포에 피해를 준다. 기타 유형의 당뇨병으로는 과량의 당질 코르티코이드로 유발되는 스테로이드 당뇨병, 여러 유형의 단일유전자 당뇨병(MODY, Maturity onset diabetes of the young) 등이 있다. 당뇨병의 기타 원인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인슐린은 대부분의 체세포, 특히 간, 근육, 지방조직으로의 피로부터의 포도당 섭취를 조절하는 주요 호르몬이다. 따라서, 인슐린의 부족이나 그 수용체의 감수성이 모든 형태의 당뇨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체는 주로 세 곳에서 포도당을 얻는다. 이는 내장에서의 음식 흡수, 간에서 발견되는 포도당의 저장형인 글리코겐의 분해, 체내에서 탄수화물의 기본 물질 없이 포도당을 생성하는 포도당신합성을 말한다. 인슐린은 체내의 포도당치 균형 유지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인슐린은 글리코겐의 분해나 포도당신합성을 막을 수 있으며, 포도당의 지방과 근육 세포로의 운반을 활성화할 수 있고, 포도당의 글리코겐 형태로의 저장을 활성화할 수 있다. 인슐린은 주로 식사 후의 혈당치 상승에 반응하여 베타 세포에 의해 혈액 속으로 방출되고, 이자 내의 랑게르한스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슐린은 약 2/3의 체세포에서 연료로서의 사용, 다른 분자로의 전환, 또는 저장을 위해 혈액으로부터 포도당을 흡수하는 데에 쓰인다. 저혈당은 베타 세포로부터의 인슐린 방출을 감소시키고, 글리코겐이 포도당으로 분해되게 한다. 이 과정은 호르몬인 글루카곤에 의해 주로 조절되는데, 글루카곤은 인슐린과 반대의 작용을 한다. 사용 가능한 인슐린의 양이 충분하지 않거나 세포들이 인슐린에 잘 반응하지 않거나, 또는 인슐린 자체가 결함이 있다면, 포도당은 필요로 하는 체세포에 제대로 흡수되지 않고, 간과 근육에 적절하게 저장되지 않게 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혈당치를 높이고, 단백질 합성을 어렵게 하며, 산증과 같은 또 다른 대사 장애를 일으킨다. 시간이 지나도 혈액 내의 포도당 농도가 높으면 콩팥은 재흡수의 문턱값에 도달하게 되고, 포도당은 소변으로 배설되는데, 이것이 당뇨이다. 소변의 삼투압이 증가하고, 신장에 의한 재흡수가 안 되어 소변의 생성이 늘어나는 다뇨증이 되며, 체액이 손실이 늘어난다. 혈액량이 감소되면 체세포와 다른 몸의 구획으로부터 수분이 삼투로 대체되어 탈수를 유발하며, 갈증이 심화되어 다음증이 된다. 당뇨병은 인슐린 부족이나 인슐린에 대한 세포 저항으로 인한 고혈당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고혈당이 지속됨에 따라 대사상의 변화가 초래된다. 인슐린 작용이 저하되면 과다한 당을 섭취하였을 때 일정한 혈당 수준을 유지하는 내당능력이 감소하므로 혈당이 높아지고 따라서 당을 소변으로 배설하는 포도당 낭비 현상을 보인다. 당뇨병 초기의 특징적인 증상으로는 다뇨(polyuria), 갈증(polydipsia), 식욕항진(polyphagia), 체중감소를 들 수 있다. 임상적인 증상으로는 요를 통한 당의 배설(glucosuria), 고혈당(hyperglycemia), 결구 내당능 검사의 이상(abnormal glucose tolerance test), 무력증(asthenia) 등이 있다. 한국에 많은 제2형 당뇨병의 경우 인슐린 저항성으로 생기며, 이 때문에 초기에는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를 늘림으로써 별다른 증상이 없지만, 췌장의 능력에 한계가 오게 되면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진단이 늦어진다. 보통 이 기간이 5년 이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당뇨진단 당시에 합병증이 이미 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합병증에 대한 검사가 필요하다. 당뇨병은 반복되거나 지속되는 고혈당이 특징이며, 다음 경우 중 한 가지에 해당되는지를 보고 진단한다. 결과가 양성일 때 명확한 고혈당이 없다면 또 다른 날에 위의 방법들을 반복하여 확인해야 한다. 공복시 혈당을 재는 것이 선호되는데, 이는 검사가 간편하며, 정식의 당부하검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당부하검사는 마칠 때까지 2시간이 걸리며, 공복시 검사에 비해 예측의 장점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의에 따르면, 두 차례의 공복 혈당 검사에서 126 mg/dl (7.0 mmol/l)을 초과하면 당뇨병이 있다고 진단된다. 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공복시 혈당이 6.1 에서 6.9 mmol/l (110 에서 125 mg/dl)인 사람들은 공복 혈당 장애가 있다고 고려된다. 75 g의 경구 포도당 섭취 2시간 후 혈장 혈당이 7.8 mmol/l (140 mg/dl)을 초과하면서 11.1 mmol/l (200 mg/dl)을 넘지 않는 사람들은 내당력 장애가 있는 것으로 고려된다. 이들 두 당뇨병 전증 상태 중 내당력 장애는 심혈관 질환과 함께 특히 완전한 당뇨병으로 진행할 주요 위험 요소가 된다. 2003년 이후로 미국 당뇨병 협회(American Diabetes Association)에서는 공복 혈당 장애로 5.6 에서 6.9 mmol/l (100 에서 125 mg/dl)의 약간 다른 범위를 이용한다.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알아내기에는 당화혈색소(glycated hemoglobin)가 공복혈당보다 낫다. 드문 질병인 요붕증(diabetes insipidus)은 당뇨병과 유사한 증상을 갖지만, 당 대사의 장애는 없으며, ('insipidus'는 라틴어로 '냄새가 없음'을 의미한다.) 질환의 기제도 다르다. 당뇨병은 대사 증후군으로 알려진 보다 더 넓은 상태의 일부이다. 진단은 정맥혈의 혈장 포도당 농도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다른 날 2번 검사하여 공복시(보통 검사 전 8~12시간 금식 상태) 혈장 포도당 농도가 둘 다 126 mg/dL 이상이면 당뇨로 진단한다. 학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정상 혈장 포도당 농도는 보통 100 mg/dL 미만(110 mg/dL을 기준으로 하기도 함)이며, 100~125 mg/dL 사이를 경계형 당뇨병라고 한다. 경계형 당뇨병의 경우 당뇨로 진행하는 경우가 25~30%로 알려져 있으므로, 자주 혈당을 측정하여 당뇨병으로의 진행여부를 조기에 파악해야 한다. 흔히 사용하는 휴대용 혈당측정기의 경우 말초혈액을 측정하는 것이어서, 정맥혈의 혈장 포도당을 측정한 결과에 비해 혈당이 낮게 측정된다. 따라서 휴대용 혈당 측정기로 혈당이 110 mg/dL 이상으로 측정되면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제1형 당뇨병의 예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제2형 당뇨병은 종종 정상 체중을 유지하고, 육체적 운동을 하고, 건강에 좋은 식사를 하는 것이다. 당뇨병 방지를 돕는 것으로 알려진 식생활의 변화로는 통알곡과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를 하고, 땅콩이나 식물성 기름, 물고기 등에 들어있는 다불포화 지방과 같은 좋은 지방을 선택하는 것 등이 있다. 설탕이 든 음료를 제한하고 붉은 고기와 다른 포화지방산이 포함된 식품의 양을 줄이는 것 또한 당뇨병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직접 흡연도 당뇨병의 위험 증가와 관련되어 있어서, 금연은 중요한 예방법이 될 수 있다. 당뇨병 환자들은 병에 대한 교육과 치료, 보통의 몸무게를 달성하기 위한 영양 섭취, 운동 등으로 단기와 장기의 허용 범위내 혈당치를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추가로, 관련된 심혈관 질환의 위험이 있으므로 혈압 조절을 위해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 권장된다. 제2형 당뇨병의 경우 초기에는 약으로 조절 가능하지만, 제1형 당뇨병의 경우 췌장에서 인슐린이 감소된 경우이므로 인슐린 주사를 이용한 치료가 필요하다. 당뇨병 치료에 사용되는 약은 혈당치를 낮춘다. 항당뇨병약으로 여러 다른 종류의 약이 있다. 메트포르민과 같은 약은 경구로, 인슐린과 같은 약은 주사로 투여한다. 제2형 당뇨병 치료의 1차 약제로 일반적으로 메트로프민이 권고되는데, 사망률을 줄이는 충분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간의 포도당 생산을 줄여 준다. 대부분이 경구 투약인 다른 종류의 여러 약제들은 제2형 당뇨병에서 혈당을 낮출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인슐린을 증가시키거나, 창자에서의 당분 흡수를 줄이거나, 몸이 인슐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는 약제들이 포함된다. 제2형 당뇨병에서 인슐린을 사용할 때에는, 통상 경구 약제 복용을 계속하면서 초기에 지속성 처방을 추가하고, 인슐린의 투여량을 늘려 영향을 준다. 심혈관계 질환은 당뇨병과 관련된 심각한 합병증으로, 일부에서는 혈압을 130/80 mmHg 미만으로 유지하도록 권장한다. 다만, 증거상으로는 140/90 mmHg 에서 160/100 mmHg 사이의 어떤 값 이하를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뒷받침되었을 뿐이다. 항고혈압제 중 ACE 억제제(ACEIs, angiotensin converting enzyme inhibitors)는 당뇨병 환자에 효과가 있는데, 유사한 약제인 앤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는 그렇지 못하다. 아스피린도 심혈관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에 추천되지만, 규칙적인 아스피린 사용이 단순한 당뇨병에 효과가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신장 이식이 필요한 만성 신부전을 포함하여 합병증이 심한 제1형 당뇨병 환자에는 췌장 이식이 종종 고려된다. 비만의 제2형 당뇨병 환자에는 배리애트릭 수술이 종종 유효하다. 많은 이들이 수술 후 약 없이 또는 적은 양의 약으로 정상 혈당치를 유지할 수 있고, 장기 사망률도 감소한다. 다만, 1% 미만에서 수술 후 단기 사망률이 높아질 위험이 있다. 수술이 적절한지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에는 체질량 지수를 참고한다. 수술은 체중과 혈당 모두 모두 조절할 수 없는 환자에 대하여 고려하도록 권고된다. 대한민국의 경우 제2형 당뇨병이 대부분이다. 제2형 당뇨병은 주로 성인에서 발생하고 제1형 당뇨병은 주로 소아에서 발생한다. 천연두 천연두(天然痘) 또는 두창(痘瘡), 마마(媽媽, )는 천연두바이러스() 또는 작은마마바이러스() 중 하나의 감염으로 발생한 전염병이다. 바이러스의 속명이기도 한 라틴어 "바리올라()"는 "반점"을 의미하는 "바리우스()" 또는 "뾰루지"를 ㅡ의미하는 "바루스()에서 유래하였다. 영어로는 본래 그냥 라고만 불렀는데, smallpox 라는 말은 15세기 영국에서 매독을 great pox라고 부르면서 이와 구분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다른 표현으로는 적사병(赤死病, )이라고도 했다. 천연두 자연감염은 1977년 10월 26일 이후로 더이상 진단되지 않고 있다. 천연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증세가 전신으로 퍼지기 전에 우선 피부와 입, 목의 작은 혈관들에 증상이 집중된다. 특유의 반구진 발진이 피부에 발생하고, 이 발진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체가 채워진 수포가 된다. 바리올라 마요르 바이러스가 미노르 바이러스보다 훨씬 증세가 심각하며, 치사율이 30 ~ 35%에 달했다. 바리올라 미노르는 마요르보다는 증세가 덜 심각하여, 소두창(小痘瘡, ) 또는 작은마마()라고 따로 일컫기도 했다. 작은마마는 치사율이 1% 정도이다. 바리올라 마요르 바이러스의 장기 합병증 중 대표적인 것은 소위 곰보라고 하는 특유의 상처로, 생존자의 65 ~ 85%는 곰보가 되었다. 곰보 외에도 각막궤양으로 인한 실명, 관절염 및 골수염으로 인한 사지 변형 등도 2 ~ 5% 꼴로 나타나는 합병증이었다. 천연두는 기원전 10,000년경부터 인간을 괴롭혀 왔다.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의 미라에서 농포성 발진이 발견된 것이 천연두의 가장 오래된 물적 증거로 생각되고 있다. 천연두는 유럽 지역에서만 18세기 이전까지 매년 400,000 명을 죽였으며, 시각장애자 중 3분의 1은 천연두로 인해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감염자들 중 20 ~ 60%가 사망했고, 아동은 감염될 경우 80% 꼴로 사망했다. 천연두는 20세기에도 3억 ~ 5억 명을 죽였다. 196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그해 한 해 동안 1천 5백만 명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그 중 2백만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19세기 ~ 20세기에 걸쳐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면서 천연두 감염자는 크게 줄어들어 WHO는 1979년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했다. 천연두는 2011년 박멸된 우역과 함께 현재까지 인간이 박멸한 유일한 전염병이다. 천연두에는 두 가지 임상적 형태가 있다. 바리올라 마요르가 더 흔하고 증상도 더 심각하여 엄청난 발진과 고열이 난다. 바리올라 미노르는 보다 덜 심각하고 유병률도 낮아서 치사율이 1퍼센트 또는 그 이하이다. 바리올라속 바이러스들의 무증상 감염도 보고된 바는 있지만 흔하지 않다. 또 예방접종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바리올라 시네 데룹티오네()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 유형은 잠복기가 지나면 발진은 없고 열만 난다. 항생제 연구를 통해서만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바이러스 분리로도 확인할 수는 있지만 확인 성공률이 매우 드물다. 병원체에 접촉하고 나서 명백한 증상이 처음으로 나타나기까지 잠복기는 12일 정도이다. 일단 흡입된 바리올라 마요르 바이러스는 구강인두(입과 목구멍) 또는 호흡계 점막을 통해 체내에 침공, 림프절로 옮겨가서 증식을 시작한다. 이 최초 성장기에 바이러스는 세포에서 세포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보이다가, 12일 정도가 지나면 그동안 감염당했던 세포들이 용해를 일으키고 혈류 속에서 바이러스가 대량으로 검출되기 시작한다(이를 바이러스혈증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라, 골수, 림프절에서 두 번째 증식이 일어난다. 최초 증상 또는 전구 증상은 섭씨 38.3도 이상의 발열, 근육통, 불안감, 두통, 탈진 등으로서 다른 호흡기 질환, 예컨대 독감이나 감기와 유사하다. 소화관이 감염된 경우가 흔하며 이럴 때는 욕지기와 구토, 요통이 뒤따른다. 이 시기를 전구증기 또는 발진전기라 하며 보통 2 ~ 4일 동안 이 단계가 지속된다. 12 ~ 15일째가 되면 가시적인 병변이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입, 혀, 구개, 목구멍 등의 점막에 작고 붉은 반점이 나타나는데 이를 점막진이라고 한다. 열은 거의 정상 수준으로 떨어진다. 점막진은 빠르게 커지면서 파열되어 타액 속에 대량의 바이러스를 내놓는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피부 세포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며, 이로 인해 특유의 뾰루지(pimple)가 나타나며, 이를 반(macule)이라고 한다. 점막에 점막진이 나타나고 24 ~ 48시간 내에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보통 이마에 반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얼굴 전체, 사지말단, 몸통, 사지의 나머지 부분 순서로 빠르게 퍼진다. 더 이상 새로운 발진이 일어나지 않기까지 이 과정은 불과 24 ~ 36시간 안에 일어난다. 이 시점에서 천연두 바이러스 감염은 여러 다른 형태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라오 분류법에 의해 보통 유형(ordinary), 완화 유형(modified), 악성 유형(malignant) 출혈 유형(hemorrhagic)의 네 가지 유형의 천연두로 분류한다. 역사적으로 천연두의 치사율은 30% 정도였는데, 특히 치명적인 것은 악성 천연두와 출혈성 천연두이다. 예방접종을 맞지 않은 사람에게 발생하는 천연두의 90% 이상은 보통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보통 유형의 천연두의 경우, 발진이 나타나고 이틀째가 되면 반이 구진(papule)으로 변한다. 사흘째 또는 나흘째가 되면 구진이 유백색 유체로 채워지면서 수포(vesicle)가 된다. 이 유체가 24 ~ 48시간 안에 불투명해지고 탁해지면서 수포는 농포(pustule)가 된다. 다만 이 소위 농포는 고름이 아니라 조직 잔해로 채워져 있다. 여섯째에서 일곱째 날이 되면 모든 피부 발진이 농포로 변한다. 일곱째에서 열째 날이 되면 농포가 무르익어 최대 크기에 도달한다. 농포는 모양이 둥글고, 가장자리가 날렵하며, 팽행하고, 만지면 단단하다. 농포는 진피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피부에 작은 구슬들을 달고 있는 느낌이 난다. 농포에서 유체가 서서히 유출되고, 2주 정도가 지나면 농포들이 파열하고 마르기 시작해 딱지(crust)를 형성한다. 16 ~ 20일째가 되면 모든 발진이 딱지가 되고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피부에 탈색된 흉터를 남긴다. 보통 유형 천연두는 대개 이산적 발진을 만들어내고, 피부의 농포들이 각각 떨어져 존재한다. 발진의 분포는 얼굴, 사지, 몸통 순서대로 밀도가 높으며 사지는 몸에 가까운 쪽보다 말단에 가까운 쪽이 밀도가 높다. 손바닥과 발바닥에도 대개 발진이 만들어진다. 때로는 수포들이 서로 합쳐져 융합성 발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융합성 발진은 피부 층을 아래의 살덩이에서 떨어지게 만든다. 융합성 천연두를 앓게 된 환자는 보통 모든 발진이 딱지로 변한 뒤에도 병세가 유지된다. 한 사례 일련 연구에서는 융합성 천연두의 치사율은 62%에 달했다. 그 상태 발전의 급속함이 특징인 완화 유형 천연두는 대부분 예전에 예방접종을 받았던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이 유형의 천연두도 전구증상이 나타나지만 보통 유형에 비하면 훨씬 덜 심하다. 발진이 나타나는 동안에도 발열이 없다. 피부 발진의 개수도 적고 보다 빨리 형성되고 뿌리도 깊지 않다. 또 보다 흔한 천연두의 일정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완화 천연두가 사람을 잡을 정도로 치명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완화 천연두는 수두와 혼동되는 경우가 잦다. 악성 천연두의 경우, 보통 천연두였으면 수포가 형성될 때도 발진이 수포가 되지 않고 붉은 반점으로 남아 있다. 어째서 일부 사람들에게 악성 천연두가 나타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악성 천연두는 전체 천연두 감염 사례의 5 ~ 10%이며, 그 감염자의 절대다수(72%)는 아동이었다. 악성 천연두는 3 ~ 4일간의 극심한 전구증상을 동반하며, 고열이 지속되고 치명적인 독소혈증 증세를 나타낸다. 혀와 구개에 발진이 매우 광범하게 나타난다. 피부 발진은 서서히 성숙하여 7 ~ 8일 정도가 되면 평평해져서 피부 속에 묻힌 것 같은 꼴이 된다. 보통 천연두와 달리 악성 천연두의 수포는 유체가 거의 없고, 만져보면 매우 부드럽다. 또 수포에서 출혈이 있을 수 있다. 악성 천연두는 거의 모든 경우 사망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이다. 출혈성 천연두는 피부, 점막, 소화관에 광범한 내출혈을 동반하는 심각한 천연두 유형이다. 출혈성 천연두는 전체 천연두 감염 사례의 약 2% 정도였으며, 대부분 성인에게 발병했다. 출혈성 천연두의 발진은 수포를 형성하지 않고 부드러운 상태로 남아 있다. 대신 피부 아래로 출혈이 일어나서 마치 새까맣게 탄 것처럼 검은색을 띤다. 그래서 이 유형의 천연두를 검은마마(black pox)라고도 했다. 감염 초기, 또는 전격형(fulminating) 출혈성 천연두는, 감염 이틀째 내지 사흘째가 되면 결막하 출혈로 인해 눈의 흰자위가 심홍색이 되면서 출혈이 확인된다. 출혈성 천연두는 어스름한 홍반, 점상출혈 및 비장, 신장, 장막, 근육에 출혈을 일으키고, 드물지만 외심막, 간, 고환, 난소, 방광에도 출혈을 일으킨다. 환자는 보통 감염 5 ~ 7일째 경미해 보이는 피부 발진만을 남기고 갑자기 죽는다. 전격형 출혈성 천연두는 8 ~ 10일 정도 생존한 환자들에게서 나타났다. 발진 초기에 출혈이 나타나며, 발진은 도드라지지 않고 평평하고 수포 단계 이상 발달하지 않는다. 출혈성 천연두 초기 환자는 혈중 응고인자(e.g. 혈소판, 프로트롬빈, 글로불린)가 감소하고 안티트롬빈이 증가한다. 말기 환자는 확연한 혈소판감소증을 나타내지만 응고인자 감소는 덜 심하다. 말기 단계에서는 안티트롬빈 증가도 나타났다. 천연두 유형의 병독성에 따라 이 유형의 천연두는 치명적 천연두 감염 사례의 3 ~ 25% 정도로 잡힌다. 출혈성 천연두는 대개 사망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이다. 천연두는 천연두바이러스과() 코르도두바이러스아과() 오르토두바이러스속()에 속하는 천연두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병한다. 천연두의 출현 시기는 확립되어 있지 않다. 가장 가능성 있는 설에서는 68,000년 전에서 16,000년 전 사이에 설치류 바이러스에서 진화한 것으로 생각한다. 추정 범위가 매우 넓은 것은 분자시계를 보정하는 데 사용된 기록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바리올라 마요르(임상적으로 더 심각한 천연두)의 분기군이 1,600년 전 ~ 400년 전에 아시아에서 확산되었고, 소두창 바이러스의 분기군이 서아프리카의 조상 계통에서 분화하여 미주 대륙에 나타난 것이 6,300년 전 ~ 1,400년 전이다. 소두창 분기군은 최소 800년 전에 두 개의 하위 분기군으로 분화했다. 또다른 추정에서는 천연두가 4,000년 전 ~ 3,000년 전에 타테라두(Taterapox)에서 분리되었다고 비정한다. 이는 인간 질병으로서 천연두가 출연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라는 뜻으로서 고고학적 및 역사적 증거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천연두바이러스의 돌연변이 속도가 단순포진바이러스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가정하면 분화 시기는 50,000년 전 쯤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처음 언급한 추산과 일치하는데, 이는 고고학적 및 역사학적 증거가 매우 불충분함을 시사한다. 바이러스들의 돌연변이 속도의 보다 정확한 측정이 필요하다. 천연두바이러스는 커다란 벽돌모양 바이러스로, 그 크기는 302 ~ 350 nm × 244 ~ 270 nm 정도이다. 유전물질은 단일선형 이중가닥 DNA로서 게놈 염기쌍은 186개이며 가닥의 양 끝에 헤어핀 루프가 있다. 천연두의 고전적인 두 변종은 바리올라 마요르()와 바리올라 미노르()이다. 인간에게 감염되어 질병을 일으키는 오르토두바이러스는 천연두, 바키니아, 우두, 원두의 4가지이다. 천연두바이러스는 자연상에서 인간에게만 감염되지만 실험실 환경에서 유인원을 비롯한 다른 동물들에게도 감염이 성공한 바 있다. 바키니아, 우두, 원두는 자연상에서 동물과 인간에게 모두 감염된다. 여러 두(痘)바이러스들은 복수의 감염 형태를 가지고 있고 세포 침입 기작도 서로 달라 그 생활사가 복잡하다. 두바이러스들은 DNA 바이러스들 중에서도 특이한 종류로, 숙주세포의 세포핵이 아닌 세포질에서 복제가 일어난다. 유전물질 복제를 위해 두바이러스들은 다른 DNA 바이러스들은 만들지 않는 다양한 특화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DNA 의존 RNA 중합효소이다. 천연두 비리온은 외피가 있든 없든 모두 감염성이다. 외피는 변형된 골지막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헤마글루티닌을 비롯한 여러 바이러스 특유의 폴리펩티드를 품고 있다. 바리올라 마요르와 바리올라 미노르 중 어느 한 쪽에 감염되었다가 생존했다면, 다른 한 쪽에 대한 면역도 함께 가지게 된다. 천연두는 천연두바이러스를 흡입하면 전염된다. 주로 입이나 코를 통한 비말감염, 감염자에게 인두점막감염이 일어난다. 천연두는 대개 감염된 사람과의 지속적인 대면접촉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염되며, 보통 그 위험반경은 감염자 주위 6 피트(1.8 미터) 정도이다. 그러나 감염된 체액이나 침구·의복 따위 오염된 물체(비생체 접촉매개물)에 의해 원거리 감염도 일어날 수 있다. 드물지만 건물, 버스, 열차 등의 폐쇄적 환경에서 공기를 매개로 바이러스가 전파된 적도 있다. 천연두바이러스는 태반을 통과할 수 있으나 선천적 천연두의 발생정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천연두는 전구증상 단계에서는 크게 전염성이 강하지 않으며, 바이러스 발산도 구강과 인두에 병변을 동반한 발진이 일어날 때까지 미루어진다. 바이러스는 질병이 진행 중인 전 과정에 걸쳐 전염될 수 있으나, 발진이 처음 일어나는 1주일간 대부분의 피부 발진이 그 형태가 보존되어 가장 전염성이 강하다. 7 ~ 10일 뒤 발진 위로 딱지가 형성되면 전염성은 수그러들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 환자는 최후의 천연두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천연두는 전염성이 매우 높지만 다른 바이러스성 질병들과 비교해 비교적 느리게 전파되고 전파 지역도 넓지 않다. 그 이유는 전염되기 위해서 발진이 나타난 이후의 근접 접촉이 필요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 감염기간이 짧다는 점도 총 전염율에 영향을 미친다. 온대기후 지역에서는 천연두 감염이 겨울과 봄철에 가장 많이 일어났으며, 열대기후 지역에서는 계절별 편차가 눈에 띄지 않고 거의 일년 내내 천연두가 유행했다. 천연두 환자의 나이 분포는 획득면역에 의존한다. 예방접종으로 얻은 면역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하여 대략 30년 안에 사라진다. 천연두가 곤충이나 동물을 통해 전파될 수 있는지, 또 무증후성 보균자는 없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천연두의 진단은 섭씨 38.3도 이상의 급성 발열 및 그 이후 발생하는, 다른 명백한 이유가 없는 수포성 또는 농포성 발진의 확인으로 이루어진다. 현미경으로 보면 두바이러스는 특유의 세포질 봉입을 나타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과리네리체로서 이곳이 바이러스 복제의 장소가 된다. 과리네리체는 헤마톡실린 및 에오신을 염색하는 생체조직검사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으며 분홍색 얼룩처럼 보인다. 과리네리체는 모든 두바이러스 감염증에서 발견되지만 과리네리체의 부재가 곧 천연두가 아님을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 농포 속의 유체나 딱지를 전자현미경 검사해 보면 오르토두바이러스 감염을 빠르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오르토바이러스들은 전자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모두 똑같은 벽돌모양 비리온을 나타낸다. 실험실에서는 미리 정의된 온도 환경에서 닭의 배아 장요막에 바이러스를 배양시키고 그 결과 발생한 마맛자국 발진을 검사함으로써 천연두바이러스를 확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DNA 가닥은 폴리메라아제 연쇄반응(PCR) 및 제한효소 단편 다형성(RFLP) 분석을 통해 특징지을 수 있다. 혈청학 검사와 효소연결 면역흡착측정법(ELISA)에서는 천연두바이러스 특유의 항면역 글로블로빈과 항원을 검사함으로써 천연두 감염 여부의 진단을 도울 수 있다. 수두가 천연두와 매우 흔히 혼동되곤 했다. 수두와 천연두는 다양한 방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천연두와 달리 수두는 대개 손바닥과 발바닥에 발진이 나지 않는다. 또 수두는 농포마다 수포 분출 시기가 달라서 농포의 크기가 농포마다 제각각이지만 천연두는 바이러스의 효과가 보다 일정하게 진행되어 농포들의 크기가 거의 모두 똑같다. 천연두로 의심되는 감염사례가 사실 수두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다양한 실험실 방법들이 마련되어 있다.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는 천연두 환자의 딱지 따위 감염물질에 피부를 접촉시키는 인두법(variolation)이다. 유럽과 접촉하기 이전의 인도, 아프리카, 중국에서 인두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대 산스크리트 의학서적에서 인두법을 설명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도 기원설은 문제가 있는 편이다. 중국의 인두법 사례는 10세기 후반부터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16세기 명나라때 매우 널리 사용되었다. 인두법이 성공하면 천연두에 대한 지속적 면역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천연두바이러스에 감염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감염증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인두법을 시술받은 자가 다른 이에게 천연두를 옮길 수도 있었다. 인두법의 치사율은 0.5 ~ 2%로, 천연두의 치사율 20 ~30%보다는 훨씬 낮다고 볼 수 있다. 메리 워틀리 몬태규는 오스만 제국에 머물면서 인두법을 관찰하고 이를 서간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녀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1718년 이래 인두법은 폭발적으로 시술되었다. 1721년, 코튼 매더와 동료들이 보스턴에서 수백 명에게 인두법을 시술하여 물의를 빚었다. 1796년, 잉글랜드의 농촌지역인 글로스터셔주 버클리 읍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 발진에서 나온 물질이 인두법과 같은 면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두바이러스는 천연두바이러스와 같은 과에 속하는 두바이러스의 일종이다. 제너는 자신의 접종에 사용된 물질을 백신(vaccine)이라고 불렀다. 어근 바카()는 라틴어로 암소를 뜻한다. 백신 접종은 인두법보다 훨씬 안전했으며 천연두 전염의 위험도 없었다. 백신을 접종하는 종두법(vaccination)은 곧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19세기에 종두법에 사용되는 우두바이러스가 바키니아바이러스로 대체되었다. 바키니아는 우두바이러스 및 천연두바이러스와 같은 과에 속하지만 유전적으로 두 바이러스와 모두 구분된다. 바키니아 바이러스의 기원과 이것이 백신 효과를 내는 경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천연두 백신은 감염성 바키니아 바이러스의 생바이러스로 만들어진다. 두갈래가 진 분지침을 백신 용액에 담그고, 피부(대개 상완부)를 수 초에 걸쳐 수 번 찌른다. 접종이 성공하면 침을 맞은 자리에 3 ~ 4일 이내로 붉고 가려운 돌출부가 돋아난다. 접종 1주차에 돌출부는 고름이 가득찬 커다란 농포를 형성하고, 마르기 시작한다. 2주차가 되면 농포가 말라서 딱지가 형성된다. 3주차에 딱지가 떨어지고 작은 흉터가 남는다. 바키니아 백신을 통해 만들어진 항체는 원두, 우두, 천연두를 비롯해 다른 오르토두바이러스에 대한 예방력도 갖는다. 최초 접종 10일 후 항체의 무력화가 확인되며, 7일 후에 재접종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백신은 접종자의 95%의 천연두 감염을 막음으로써 천연두 예방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천연두 백신은 이후 3 ~ 5년동안 높은 수준의 면역력을 제공하며, 그 이후 면역력은 점점 감소한다. 그 뒤에 다시 백신을 맞으면 면역력은 당연히 더 오래 지속된다. 1950년대 ~1960년대에 유럽에서 이루어진 천연두 연구에서는 10년 안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천연두 치사율은 1.3%였던 반면 11 ~ 20년 전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천연두 치사율은 7%, 20년보다 더 전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천연두 치사율은 11%였다. 한편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의 치사율은 52%에 달했다. 천연두 백신으로 인한 부작용이나 위험부담도 존재한다. 과거에는 백신을 맞은 사람 1,000명 중 1명꼴로 백신 접종 부위의 알레르기 반응(다형홍반), 바키니아 바이러스가 신체 다른 부위 또는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등 심각하지만 생명은 위험하지 않은 증상을 나타냈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부작용은 백신을 처음 맞은 1백만 명 중 14 ~ 500명 꼴로 나타난다. 과거의 경험에 의거하건대, 1백만 명 중 한두 명(0.00198%)가 백신을 맞은 결과 죽었다. 사망 원인은 백신접종후 뇌염이나 접종부위의 심각한 괴사(소위 진행성 바키니아)였다. 이러한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에 천연두가 박멸되고 천연두 자연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자 수 이하로 떨어지자 아동의 정기 백신 접종이 미국에선 1972년,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1970년대 중에 중단되었다. 의료계 종사자들의 정기 접종도 1976년 중단되었고, 군대 징집병들에 대한 접종도 1990년에 종료되었다(다만 중동과 한국의 징집병들은 여전히 접종을 받는다). 1986년이 되자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천연두 백신의 정기 접종이 중단되었다. 현재 천연두 예방접종은 사고로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이 있는 연구실 인력들에게 주로 권고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3일 안에 백신을 맞으면 천연두 증세를 매우 유의미하게 감소시키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노출 이후 4 ~ 7일 기간에 백신을 맞으면 약간의 보호를 얻거나 증세를 다소 완화시킬 수 있었다. 백신을 제외하면 천연두 치료법은 상처를 치료하고 감염을 통제, 체액 보충, 환기 등의 대증치료가 주가 된다. 악성 천연두 및 출혈성 천연두는 체액교체 등 쇼크 대처법과 동일한 치료법이 사용된다. 준융합성 및 융합성 천연두는 광범위 화상과 유사한 치료법이 사용될 수 있다. 현재 천연두를 사후 치료할 수 있는 검증된 약물은 없다. 그러나 최후의 천연두 유행 이후 항바이러스제 치료가 매우 진보하였으며, 연구 결과는 키도포비르라는 항바이러스제가 치료제로 작용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 약은 정맥주사로 놓아야 하는데, 심각한 신장독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다. 보통 유형 천연두의 치사율은 약 30%지만, 농포 분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보통 유형 융합성 천연두의 치사율은 50 ~ 75%이고, 보통 유형 준융합성 천연두는 약 25 ~ 50%였다. 발진이 이산적일 경우 치사율은 10% 이하였다. 1세 이하 영아의 치사율은 유형을 막론하고 40 ~ 50%이다. 출혈성 및 악성 천연두는 치사율이 매우 높았다. 악성 천연두의 치사율은 90% 이상이었고 출혈성 천연두의 치사율은 거의 100%였다. 소두창의 치사율은 1% 이하였다. 천연두바이러스가 만성적이거나 재발할 수 있다는 증거는 없다. 보통 유형 천연두가 치명적일 경우, 대개 감염 10일 ~ 16일차에 사망한다. 천연두로 인한 사망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그 감염이 다수의 장기와 관련되어 있음은 밝혀졌다. 면역복합체 순환, 압도적 바이러스혈증, 통제불능의 면역반응 등이 죽음에 기여하는 요소들일 수 있다. 초기 출혈성 천연두의 경우 발열 이후 약 6일 정도에 갑자기 죽는다. 출혈성 천연두의 사망원인은 심부종이며, 때때로 폐부종이 수반될 수 있다. 말기 출혈성 천연두의 경우 지속적 바이러스혈증, 심각한 혈소판 감소, 면역반응의 무력화 등이 사망원인으로 거론되었다. 악성 천연두의 사망원인은 체액·단백질·전해액이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한 양에 미달하거나, 전격성 패혈증이 일어나서 등 화상과 유사하다. 천연두 합병증은 주로 호흡계통에서 발생하며, 단순한 기관지염에서 죽을 지경의 폐렴까지 그 정도는 다양하다. 호흡기 합병증은 천연두에 걸리고 약 8일차 정도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 원인은 바이러스일 수도 있고 박테리아일 수도 있다. 피부의 박테리아 이차감염은 상대적으로 드문 천연두 합병증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대개 고열이 유지된다. 그 외에 합병증으로는 성인에게 더 흔하고 일시적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뇌염(500명 중 1명 꼴), 특히 얼굴에 두드러지는 영구적 흉터, 그리고 안구 관련 합병증(모든 사례 중 2%)이 있다. 눈꺼풀, 결막, 각막에 농포가 형성될 수 있으며 그 결과 결막염, 각막염, 각막궤양, 홍채염, 모양체염, 시신경위축증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각막염 및 각막궤양 발생자 중 35% ~ 40%가 실명했다. 출혈성 천연두는 결막하 출혈 및 망막 출혈을 발생시킬 수 있다. 아동기 천연두 환자의 2 ~ 5%가 비리온이 관절과 뼈에 닿아 천연두 골수염("osteomyelitis variolosa")을 일으켰다. 발진은 대칭적으로, 팔꿈치, 정강이뼈, 종아리뼈에 가장 많았으며 특징적인 골단을 유발하고 뚜렷한 골막 반응을 일으켰다. 부어오른 관절은 운동을 제한하고, 관절염의 결과 사지 변형, 강직증, 뼈의 기형화, 관절동요, 손가락 길이 감소 등이 일어날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신뢰할 수 있는 천연두의 임상적 증거는 고대 인도의 문헌에 나타나는 천연두와 관련된 질병에 대한 기록(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의 미라(기원전 1145년), 중국(기원전 1122년)이 있다. 기원전 제1천년기에 이집트 상인들이 천연두를 인도에 퍼뜨린 것으로 추측되며, 인도에서 천연두는 최근 2000년간 풍토병으로 맹위를 떨쳤다. 이후 기원전 1세기에 서남쪽을 통해 중국으로 천연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6세기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퍼졌다. 735년 ~ 737년 천연두 유행은 당시 일본 인구의 3분의 1을 죽인 것으로 생각된다. 요루바교의 소포나, 힌두교의 시탈라 마타 여신 등 여러 종교의 신들이 천연두와 관련된 신으로 여겨졌다. 천연두가 유럽과 동남아시아에 도달한 시기는 다소 불분명하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그리스 로마 시대 문헌들에는 명확히 천연두라고 판단할 수 있을 만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혹자는 아테네 역병(에티오피아와 이집트에서 유래했다고 함)이나 기원전 396년 카르타고가 시라쿠사 공성전 당시 시라쿠사의 포위를 풀게 만들었던 전염병이 천연두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천연두 같은 심각한 질병이 당대 지중해 세계에 존재했다면 히포크라테스에게 기록되지 않았을 리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기원후 165년 ~ 180년 로마 제국을 휩쓴 안토니우스 역병이 천연두일 가능성이 있으며, 랭스의 니카시우스는 450년 한바탕 벌어진 천연두 유행에서 살아남고 천연두 환자의 수호성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580년 오늘날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방에서 유사한 전염병 유행이 있었음을 기록하였고 이때 "바리올라()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7세기 ~ 8세기에 아랍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남서유럽으로 천연두를 옮겨왔다고 추측한다. 9세기 페르시아의 의사 무하마드 이븐 자카리야 아르라지(라제즈)가 《두창과 홍역의 서》()에서 최초로 천연두를 수두 및 홍역과 구분되는 질병임을 명확히 기록했다. 중세가 되면 천연두는 유럽에서 주기적으로 발발했지만, 인구가 증가하기 전까지는 뿌리박지는 못했었고, 인구 증가 이후 십자군 시대가 되어 더욱 활발해졌다. 16세기가 되면 천연두는 유럽 전역에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인도, 중국, 유럽의 거주지역에 전래된 천연두는 주로 아동들을 감염시켰으며 주기적으로 유행하여 감염자의 30% 정도를 죽였다. 유럽에 천연두가 자리잡은 것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유럽인들의 탐험과 식민의 시대(대항해시대)가 시작되자 천연두는 유럽인들과 함께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로 퍼졌다. 16세기, 천연두는 세계 전역에서 중요한 이환 및 사망 요소가 되었다. 기원후 15세기 유럽인들의 탐험이 시작되기 전에 미주대륙에 천연두와 유사한 질병이 있었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1509년 캐리비안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전래되었고, 1520년 히스파니올라의 에스파냐인들이 멕시코에 도착함으로써 미주 본토로 퍼졌다. 천연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를 급감시켰고 에스파냐인들의 아스텍, 잉카 정복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북미 동해안 정착(1633년 플리머스) 역시 북미 원주민들 사이의 천연두 창궐과 그로 인한 인구 감소를 야기했으며, 그 뒤 미주 현지에서 태어난 식민지인들도 천연두에 걸렸다. 탈장 탈장(脫腸, hernia) 또는 내장 탈출증은 인체의 장기가 제 위치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다. 탈장은 다양한 형태로 일어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은 복부에서 일어나는 종류이다. 특히 서혜부로 배안의 장기가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다른 종류의 탈장으로는 열공성 탈장, 절개성 탈장, 배꼽 탈장 등의 종류가 있다. 서혜부 탈장은 66%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통증과 불안감을 야기할 수 있다. 탈장이 일어난 부위는 누워 있을 때 확대될 수 있으며, 서혜부 탈장은 왼쪽 보다는 오른쪽에서 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탈장의 발생으로 인해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교살성 장폐색이다. 이는 장의 일부분으로 통하는 혈액의 흐름이 막히는 것을 의미한다. 교살성 장폐색은 발생 부위에 심한 고통과 압통을 야기한다. 열공성 탈장이나 절개성 탈장은 보통 속쓰림을 동반하지만, 가슴 통증이나 식이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탈장의 진행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요소로는 만성 폐쇄성 기관지 질환(폐기종 등), 비만, 임신, 복막 투석, 콜라겐 혈관 질환이 있을 수 있다. 탈장은 어느 정도 유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특정 가계에서 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서혜부 탈장이 과한 운동때문에 발생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탈장은 주로 증상과 징후들에 의해서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X선 등의 방법으로 진단을 확정하거나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열공성 탈장은 내시경술의 방법으로 진단한다. 남성에게서 발생하는 서혜부 탈장 중, 특별한 증상을 유발하지 않는 경우는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경우는 여성에게서 나타난다. 여성에게서 높은 확률로 나타나는 대퇴부 탈장은 매우 위험하다. 만약 교살성 장폐색이 일어날 경우 즉시 수술이 필요하다. 이때 복강경 개복 수술이 필요하다. 개복 수술은 전신마취보다는 국소마취로 시행되는 편이 장점이 많다. 통계적으로 일생중 27%의 남성과 3%의 여성에게서 탈장이 발생한다. 서혜부 탈장은 50세가 되기 이전에 주로 일어나고, 대퇴부, 복부 탈장은 2013년에 51,000, 1990년에 55,000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기원전 1550년 이집트의 에버스 파피루스에 최초의 탈장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치질 치질(痔疾, hemorrhoid, piles)은 항문 바로 위 직장의 정맥들의 모인 정맥총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대개는 변비로 흔히 유발된다. 계속된 자극으로 정맥이 커진 것이다. 현대 시대에 들어 점점 바빠짐에 따라 급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불규칙한 식습관 생활 및 육류 및 인스턴트 식품 등의 과다 섭취로 배변 활동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져 치질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1도, 2도, 3도, 4도로 나뉘며 위치에 따라 내치질, 외치질로 나눈다. 3도 이상은 수술이 필요하기도 하다. 평소 배변 습관에 따라 자주 발생하며, 특히 계속 앉아 있을 경우에도 잘 생긴다. 심하지 않으면 좌욕이 제일 좋은 치료이다. 따뜻한 체온에 가까운 물로 좌욕을 하는 것이다. 참고로 술을 마시면 혈관이 팽창되어 더 커지기 때문에, 의사들은 치질 환자들에게 음주를 절제할 것을 권한다. 또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 상태가 안좋아도 치질이 악화된다.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에 극성하는 질병이기도 하다. 소아마비 소아마비(小兒痲痺, poliomyelitis)는 폴리오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되는 질병이다. 심할 경우 생명을 잃고, 후유증으로 다리 등의 마비가 오기 때문에 소아마비 장애인들은 휠체어나 목발을 이용해야 한다. 소아가 흔히 걸렸으므로 소아마비라는 병명이 붙었다. 1950년대 개발된 이후 예방백신이 보급되면서, 2000년대 현재 발생률이 많이 떨어졌다. 신경계를 침범하는 바이러스 질환이다. 국제사회와 각국은 십여년 내, 어쩌면 몇년 내로 소아마비도 천연두처럼 뿌리뽑힐 것으로 기대하면서 소아마비의 박멸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아마비 장애인에 맞게 만들어진 자동차가 있으므로 소아마비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자동차 운전을 한다. 중풍 중풍(中風, )은 다양한 유형의 마비를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며 뇌의 혈관이 막히거나 혈관이 터지는 질환이다. 흔히 한쪽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발음이 힘들거나, 의식 변화가 오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혈관이 막힌 것은 뇌경색, 터진 것은 뇌출혈이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거미막하 출혈, 즉 지주막하 출혈로, 이는 가벼울 경우 마비 등이 없고 두통과 구토만 있어 보통 두통으로 생각하고 치료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생명이 위독해질수도 있다. 뇌경색 중에는 하루 내에 저절로 좋아지는 일과성 뇌경색, 일주일 정도 있다가 좋아지는 뇌경색, 처음 발생했을 상태로 평생 가거나 계속 악화되는 경우,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는 뇌부종으로 뇌허니아 열공 탈출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치료는 수술, 항혈전 요법(뇌경색일 경우), 산소 투여와 응급 상황일 때의 응급 치료가 있다. 흔히 중풍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사실은 위에서 말하는 저절로 좋아지는 중풍일 경우가 많다. 즉 막힌 혈관이 다시 저절로 열려 좋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 심했던 마비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느 정도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뇌의 마비는 있어도 대상성 보상, 즉 인체의 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부위가 그 부위를 보상해주기에 생기는 현상인 경우가 많다. 젊은 연령에 호발, 뇌내 출혈 및 지주막하 출혈로 나눌 수 있다. 뇌내출혈-뇌세동맥이 낮은 압력으로 서서히 파열, 출혈성 뇌졸중중 m/c, 장기간의 고혈압이 m/c 원인, 동양인 흑인>백인, 담배, 알콜중독, 아밀로이드증 지주막하 출혈-뇌동맥류가 파열되어 전신성 동맥압에 의해 혈액이 유출 -> 뇌압증가, 직접적 세포손상 허혈성 내졸중: 신경세포는 혈류가 완전히 차단된 후 수 분 인내에 죽게 된다. 급성 허혈성 뇌졸중이 발생하는 동안 혈관 완전 폐색에도 불구하고 측부순환과 국부 조직압차의 다양성으로 인해 약간의 관류는 유지된다. 병변 중심부는 비가역적 손상, 주변부는 가역적 손상 출혈성 내졸중: 혈종주변의 뇌관류 현저한 감소 ( 혈종에 의한 국소적 압박 때문) 출혈부위에서 멀리 떨어진 부위에도 뇌관류 변화 ( 혈액 분해산물로부터 나온 화학물질에 의한 혈관수축, 신경세포의조정) 반상출혈 점상출혈->출혈성 혈액질환 증거 반대편즉 마비와 약한 피질성 감각장애, 운동성 마비는 다리가 더 심하다 병변 반대쪽 운동마비와 감각마비, 다리보다는 얼굴이나 팔이 더 영향을 받는다 운동마비가 매우 미약 어지러움, 현운, 복시, 연하장애, 실조증, 뇌신경 장애, 양사지의 운동성장애 심각한사지마비, 혼수, locked in syndrome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못함(drop attack) 뇌경색보다 기면 상태가 흔하고 심한 고혈압 소견 갑작스런 현운, 구토, 현저한 체간 실조증, 보행실조 갑자기 격심한 두통 저혈당, 간질후 마비, 말초 안면신경마비, 고혈압성 뇌병증, 경막외 경막하 혈종, 뇌종양, 뇌농양, 복합성 편두통, 뇌막염 뇌염, 당뇨병성 케톤산증, 고삼투압성 혼수, 기도확보, 산소공급, 머리를 약간 올린다, 환자감시장치, 정맥주사확보 저혈압이 없으면 수액은 뇌부종을 막기 위해 주의깊게 투여, 수분이 부족시 뇌혈류량 감소하므로 뇌졸중시는 수액제제 충분히 사용, 저혈당 제외하곤 포도당 성분포함된 수액금지, 발열시 해열제 즉시투여, 급성허혈성 뇌졸중시 수축기혈압 220이상이거나 평균혈압이 130이상시에 치료요, 혈전용해제 치료의 적응증(18-80세, 3시간미만, CT상출혈이 없고,경색의 소견이 없을 것) 적절한 초기 응급치료후 출혈성 뇌졸중의 조기 치료는 혈압조절, 뇌부종의 치료, 신속한 신경외과적평가에 초점 수축기 220이상, 이완기 120이상시 치료 합병증<재출혈(24시간내)과 혈관연축>, 재출혈방지: 수축기 혈압을 160까지 낮추고 평균동맥압을 110으로 유지 기억상실 기억상실(記憶喪失, 건망증, , )은 기억을 잃는 것을 말한다. 오래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가끔씩 기억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은 기억상실로는 보지 않는다. 뇌 손상이나, 질병, 약물 사용, 트라우마 등으로 생긴다.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이기도 하다. 건망증(健忘症)이라는 말은 가끔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나 가벼운 기억상실을 일컬을 때 주로 사용하며, 심한 기억상실은 건망증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건망증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즉 중풍, 감염성 질환, 만성 알코올 중독증의 후유증인 비타민의 결핍, 사고 또는 뇌 수술의 후유증과 같은 각종 뇌 장애가 건망증의 원인이 된다. 대부분의 건망증 환자는 다음 두 집단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Korsakoff는 19세기 러시아의 뛰어난 신경과학자로 만성 알코올 중독인 환자들에게 심한 기억상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고했는데, 그 후 이런 환자들의 증상을 코르사코프 정신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코르사코프 환자들이 보여주는 뇌 손상은 비타민 B1의 결핍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알코올은 소장에서 비타민 B1의 흡수를 저지하기 때문에 만성 알코올 중독환자는 비타민 B1의 결핍이 일어나기 쉽다. 또한 교통사고나 뇌 수술 후에 건망증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H.M이란 환자가 있다 (그동안 사생활 보호를 위해 머리글자를 따서 H.M이 되었으나 본명은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이다). 그는 27살 때 심한 뇌전증 때문에 뇌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 건망증이 생겼다. 비록 수술에 의해 그의 생명은 구할 수 있었지만 심한 진행성 건망증에 이어 심한 후행성 건망증도 나타났고, 성욕 감퇴와 미각 상실과 같은 다양한 증후들도 보였다.수술 후 H.M을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 관찰이나 실험논문이 나오게 되었다. H.M은 수술에 의해 양측 측두엽의 중앙부와 해마의 전측 부위의 2/3 그리고 이들 구조 주변의 백질과 신피질이 제거되었다. 수술후 30년 동안 H.M은 계속 건망증 증후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지능 수준은 평균 이상이었다. H.M이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그를 돌보아주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정상적인 지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기하다. 그는 2008년 12월 2일 미국 동무 코네티컷 주의 어느 요양원에서 82세로 생을 마감했고, H.M은 뇌과학 발전을 도와준 사람으로 남았다. 한편 N.A라는 사례는 전반적인 기억상실이 아니라 주로 언어적 기억상실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펜싱 칼이 코 부위를 뚫고 들어가 뇌가 손상되고 이로 인해 건망증이 생겼다. 그는 이 사고에 의해 시상과 뇌의 중앙 부위에 손상을 입었다 그는 안구운동의 장애도 보여주었는데, 사고에 의해 시개전영역(pretectal area)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H.M과 N.A는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아직 이들의 뇌 손상 부위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는 없지만, 최근 살아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뇌 손상 부위를 밝혀낼 수 있는 뇌진단기법이 등장함에 따라 보다 정확한 뇌 손상 부위가 밝혀질 것으로 전망된다. 양극성 장애 양극성 장애(兩極性障碍, , ) 또는 양극성 정동장애(分裂情動障礙)는 비정상적 흥분 상태인 조증 삽화와 비정상적 우울 상태인 우울증 삽화가 주기적으로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질병으로, 감정의 장애를 주요 증상으로 하는 내인성(內因性) 정신병이다. 조울병(躁鬱病), 조울증(躁鬱症, ) 등으로도 불린다. 크게 조증 삽화를 특징으로 하는 I형, 우울증 삽화를 주로 하여 경조증 삽화가 함께 나타나는 양극성장애 II형으로 나누어진다. 약한 우울증과 약한 조증이 짧은 주기로 나타나는 순환형 장애도 존재한다. 양극성 장애의 특징은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가며 혹은 동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조증 시기에는 비정상적인 흥분, 고양, 불안, 불면, 과대망상 등의 증세가 나타나며 우울 시기에는 비정상적인 우울감, 무기력, 자책감, 수면장애, 피해망상 등이 나타난다. 환자는 둘이 동시에 나타나는 혼합 삽화를 경험하기도 하며, 조증이나 우울증이 나타나지 않는 시기에는 후유성 증상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를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의학계에서는 특정 약물등이 양극성 장애의 증상을 유발할수있는다는점을 고려할것을 권장한다. 조증의 증상이 나타나 비정상적인 기분의 고양과 함께 흥분, 충동, 불안, 과대망상 등이 나타나며, 경우에 따라 환청 등의 정신증적 증상을 겪기도 한다. 감정의 극단적 고양이 특징으로, 환자는 수면시간이 크게 줄어듦에도 별다른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수면이상을 겪는 경우가 많고, 사고가 빨라져 가만히 있지 못하고 횡설수설 말한다. 갑자기 집단에서 뛰쳐 나가거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옷과 장신구를 걸치는 등 충동적 일탈을 저지르기도 하며, 이에 따라 도박이나 성적 행위 등 리스크가 수반되는 행위에 중독되기도 한다. 우울 삽화 시기부터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행동력이 없었던 사람이 조증이 되면 충동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죽음에 이를 수도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과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몰두하여 자신만만해지는데, 이 때 자신이 유명인이 되거나 신적인 존재가 되는 등의 과대망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이 흐트러지거나 좌절될 경우 신경질적으로 행동하여 사소한 것에 분노를 표출하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해할 수 있다. 환자는 과장된 몸짓이나 목소리를 내기도 하며, 종종 인사나 예절과 같은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다. 정도가 약한 경우 경조증으로 분류되어, 양극성장애 II형으로 진단된다. 일반적으로 별다른 사회기능적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오히려 직업 등에 있어서 능력 향상이 보일 수도 있으나, 이후 장기간의 우울증 삽화가 나타날 위험이 크다. 환자는 조증 시기에 병식이 낮기 때문에 단약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경우 치료에 큰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규칙적인 복용을 위한 감독이 필요하다. 조증의 정도가 약할 시 경조증으로 분류되며, 조증 대신 경조증만이 나타나는 경우 양극성 장애 II형으로 진단된다. 이 시기의 사람은 우울증 증세를 겪음에 따라 지속적이고 극심한 우울감, 이유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 무기력, 절망감 등을 겪는다. 조증의 과장된 미래 설계와는 반대로 미래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행동하게 된다. 걱정과 불안이 많아지며 매사에 자신이 없고 조그만 일에도 지치고 절망한다. 자기 비하가 심해지며, 이에 따라 자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또한 주변인들이 자신을 비웃거나 험담한다는 피해망상을 수반하기도 한다. 조증과는 반대로 사고가 느려지고 주의력이 흐트러져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며, 타인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어지고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진다. 대부분 수면장애를 호소하는데, 수면이 크게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우울감은 신체화 현상을 동반하는데 사람에 따라 두통, 소화불량, 근육통, 수면이나 식욕 이상 등을 호소한다. 혼합 삽화(mixed episode)는 조증과 우울증의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기분상태로, 불쾌성 조증(dysphoric mania)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울증의 우울감, 무력감, 자살충동, 부정적 사고 등과 함께 조증의 충동, 불안, 사고의 가속, 분노심 등이 나타날 수 있으며, 단시간에 크고 불안정한 감정변화가 보인다. 심한 정서 불안으로 사회적 기능의 장해가 심화될 수 있다. 양극성장애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현재 유전학, 신경학 및 환경심리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양극성장애의 발병률은 일반 인구와 비교했을 때 양극성 장애 환자들의 1차 친척에게서 거의 10배 가량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가 있다. 유사하게, 주요우울장애의 위험성 또한 양극성장애 환자의 친척에게서는 일반 인구에게서보다 3배 가량 높게 나타난다. 또한 행동유전학 연구에서는, 염색체의 부위와 후보 유전자(candidate gene)들이 각 유전자가 다소 영향을 미치는 양극성 장애의 민감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연구가 있어 양극성장애가 유전성 질환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나, 흥분이나 우울감 자체가 이미 유전적 요인의 생화학적 기작(機作)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유전적 요인이 양극성 장애의 일부 원인으로 필수적일수는 있으나 충분한 조건이라고 제시할만한 근거로서는 부족한 점을 예로들어 이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조증 삽화 시기에는 리튬염 등의 약물을 투여하는데, 그러나 탄산리튬 과다복용에 따른 사망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적정량에 맞추어 처방하는 것이 요구된다. 우울 삽화 시기에는 항우울제를 투여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특히 청소년기에있어서 이러한 약물처방은 뇌의 발달과 정서적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에게 온전한 기작이 보장되는 연구결과가 매우 부족할수밖에없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1차적으로 인지행동치료나 심리치료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조울증의 초기 단계의 우울 증상은 우울장애로 오진되기 쉽다. 통제된 시험을 통해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조울증의 소지가 있는 환자에게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항우울제를 투여할 경우, 조울증의 혼재성 삽화나 조증 증상이 촉발될 수 있다. 우울증을 보이는 환자들한테 항우울제를 투여할 때, 환자가 조울증에 대한 위험성 여부를 우선 파악하기 위한 적절한 스크리닝(선별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스크리닝(선별 과정)엔, 자살, 조울증 및 우울증에 대한 가족력이 포함된 공존 질환 여부의 검토가 포함된다. 한편, 청소년에게의 항우울제 투여가 큰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자살 성향 및 자살 충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하여 주의가 요구된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사의 조현병 치료제 '쎄로켈(쿠에티아핀)'과 일본 오츠카 사의 조현병 치료제 '아빌리파이(아리피프라졸)'의 경우, 성인의 우울증 치료를 위한 주요 우울 장애 치료의 부가 요법제로 승인되어 있다. 최소 1년 이상 치료를 받은 이후에도 호전의 기미가 전혀 없는 양극성 정동장애를 대한민국의 장애인복지법에선 정신장애로 인정하고 있다. 분열정동장애(分裂情動障礙)는 조현병(조발성치매)과 양극성 기분 장애(정동장애)의 양쪽으로 비슷한 증상을 드러내지만 증상과 경과가 어느 쪽의 병인지 명확하지 아니한 경우를 잠정적으로 분류하는 정신질환이다. 갈릴래아 갈릴래아(← , , , )은 이스라엘 북부 지방의 이름이다. 솔로몬이 나프탈리의 평야를 히람 1세에게 선사하자, 왕은 이 선물에 불만을 품고 "카불의 땅"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유대인은 이를 "갈릴"이라 나름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게네사렛 호수를 포함하여, 그 지역 전체를 '하갈릴'이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북쪽 지방으로, 갈릴래아 호수 주변과 그 남쪽 지역을 가리켰으며 북쪽으로는 페니키아, 동쪽으로는 시리아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남쪽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과 비교하여 당시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살은 것으로 전해진다. 갈릴래아 주민들이 빈곤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수탈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은 세리, 대리정권인 헤로데스 정권, 사제 계급의 세금 징수를 통해 주민들을 수탈했으며, 이에 민중들이 저항하면 공개처형인 십자가형으로 학살함으로써 탄압했다. 이 지방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은 예수의 고향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이더넷 이더넷()은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LAN, MAN 및 WAN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기술 규격이다. '이더넷'이라는 명칭(이름)은 빛의 매질로 여겨졌던 에테르(ether)에서 유래되었다. 이더넷은 OSI 모델의 물리 계층에서 신호와 배선, 데이터 링크 계층에서 MAC(media access control) 패킷과 프로토콜의 형식을 정의한다. 이더넷 기술은 대부분 IEEE 802.3 규약으로 표준화되었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토큰 링, 등의 다른 표준을 대부분 대체했다. 이더넷은 1973년과 1974년 사이에 제록스 PARC에서 개발됐다. 로버트 멧칼프가 박사 논문을 위해 공부했던 ALOHAnet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졌다. 이더넷 아이디어는 멧칼프가 1973년 5월 22일에 쓴 글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는 "전자기파 전파를 위한 편재하는 완전 수동적 매체"로 존재할 것으로 예언된 루미 페루 에테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몇 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고안된 이더넷이 요청되자 1976년에 멧칼프와 그의 조수인 데이비드 복스는 《"Ethernet: Distributed Packet-Switching For Local Computer Networks"》라는 책을 출간했다. 멧칼프는 개인 컴퓨터와 LAN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 1979년에 제록스를 떠나 3Com으로 옮겼다. 그는 DEC, 인텔과 제록스와 1980년 9월 30일 이더넷 표준(DIX)을 촉진하기 위해서 공동 작업을 성공적으로 납득시켰다. 이더넷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각 기기들이 48비트 길이의 고유의 MAC 주소를 가지고 이 주소를 이용해 상호간에 데이터를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전송 매체로는 BNC 케이블 또는 UTP, STP 케이블을 사용하며, 각 기기를 상호 연결시키는 데에는 허브, 네트워크 스위치, 리피터 등의 장치를 이용한다. 이더넷은 CSMA/CD (carrier sense multiple access with collision detection 반송파 감지 다중 접속 및 충돌 탐지) 기술을 사용한다. 이 기술은 이더넷에 연결된 여러 컴퓨터들이 하나의 전송 매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컴퓨터가 이더넷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이더넷 스위치를 사용하여 스위치 방식의 네트워크(switched network)를 구성하는데, 이 경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더넷 허브()는 이더넷 네트워크에서 여러 대의 컴퓨터, 네트워크 장비를 연결하는 장치이다. 한 대의 허브를 중심으로 여러대의 컴퓨터와 네트워크 장비가 마치 별 모양으로 서로 연결되며, 같은 허브에 연결된 컴퓨터와 네트워크 장비는 모두 상호 간에 통신을 할 수 있게 된다. 허브에 라우터나 3계층 스위치 등의 장비가 연결되어 있으면 이를 통해 더 높은 계층의 네트워크(WAN, MAN 등)과도 연결할 수 있다. 허브와 컴퓨터 장비간의 연결에는 보통 UTP 케이블과 RJ45 커넥터가 쓰인다. 허브로 연결된 네트워크에서는 한 컴퓨터에서 주고받는 데이터가 같은 허브에 연결된 다른 모든 컴퓨터에 전달(broadcast)된다. 이 데이터는 맨체스터 코드를 사용하여 인코딩된다. 따라서 연결된 컴퓨터의 개수가 많아질 수록 네트워크에서 충돌(collision)이 많아지고 속도가 느려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데이터가 필요한 컴퓨터에만 전송하는 이더넷 스위치를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의 허브는 충돌을 탐지하기 위해 반이중(half duplex)만을 지원하는 데 반해, 대부분의 이더넷 스위치는 전이중(full duplex)을 지원한다. 이더넷 스위치는 허브와 목적이 거의 동일하지만, 훨씬 향상된 네트워크 속도를 제공한다. 이는 각 컴퓨터에서 주고 받는 데이터가 허브처럼 다른 모든 컴퓨터에 전송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필요로 하는 컴퓨터에만 전송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허브처럼 병목 현상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이더넷 스위치는 전이중 통신방식(full duplex)을 지원하기 때문에 송신과 수신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 훨씬 향상된 속도를 제공한다. 스위치는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각 컴퓨터의 고유한 MAC 주소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이 주소를 통해 어떤 데이터가 어디로 전송되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스위치를 이용하는 경우도 대량의 동보발송이나 스위치의 처리용량을 초과하는 데이터 흐름에 대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커다란 네트워크의 경우는 VLAN 스위치나 라우터 등을 이용해 네트워크 자체를 분리해야 한다. 스위칭 허브(switching hub), 포트 스위칭 허브(port switching hub)라고도 불린다. 보통 이더넷은 매체의 종류와 배선 방식, 지원 속도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나뉘는데 자주 쓰이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전건 전건(電鍵)은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여닫아 신호를 보내는, 전신기의 일종이다. 정리 정리(定理)는 수학에서 가정(assumption)으로부터 증명된 명제를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그와 같은 명제들 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일컫는다. 이런 의미에서의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보조적인 명제를 보조정리(lemma)라 하고, 정리로부터 쉽게 도출되는 부가적인 명제를 따름정리(corollary)라 한다. 보조정리 보조정리(補助定理, )는 수학에서 이미 증명된 명제로서 그 자체가 중시되기보다 다른 더 중대한 결과를 증명하는 디딤돌로 사용되는 명제이다. 클라이페다 클라이페다(, , )는 발트해에 있는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구 도시이다. 네만 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과 이어지는 주요한 페리 항이다. 클라이페다는 12세기에 발트 민족이 세웠다. 오랫동안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으면서 메멜(Meme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발트해에 접한 항구는 1252년 튜턴 기사단이 만들었고 라틴어로 'Castrum Memele'(독일어로 'Memelburg')라 기록되고 있다. 그 지역은 튜턴 기사단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1422년 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의 경계가 정해지면서 메멜은 1919년까지 프로이센에 속하게 되었다. 이 국경은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된 경계선이다. 1629년부터 1635년까지 스웨덴의 공격을 받았다. 그 뒤로 오랜 시간 동안 복구를 했고 75년이 지나 메멜의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메멜은 1871년 통일된 독일제국이 형성되면서 독일의 최북동단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다. 옛 독일의 국가에도 독일에서 가장 끝에 있는 지방으로 등장한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면서 메멜은 프랑스령이 되었다. 1923년 리투아니아의 공격을 받아 프랑스 군은 도시를 떠났다. 1939년 3월 22일에는 다시 독일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1944년 메멜에 사는 거주자들의 대부분은 도시를 떠났다. 1945년 1월에 붉은 군대에 점령되었고 다시 도시는 소비에트 연방의 리투아니아로 돌아갔다. 남아 있는 독일인들은 대부분 시베리아나 독일로 추방당했다. 1588년 1588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679년 1679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조지 W. 부시 조지 워커 부시( , , 1946년 7월 6일 ~ )는 미국의 정치인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2001년부터 43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했으며, 2004년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2009년 1월 20일까지 재임하였다. 1989년 ~ 1993년 41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한 조지 H. W. 부시의 장남으로, 역대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 재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집권 기간 중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이 일어났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책임으로 수없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조지 워커(W.) 부시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번에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부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미국에서 여러 대 째 이어오는 부유한 명문 집안이며, 조부 프레스컷 부시는 유명한 기업가 출신으로 후에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의 출생 당시 부친 조지 H. W. 부시는 뉴헤이번에 있는 예일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부친은 곧바로 석유 사업을 위해 텍사스주 미들랜드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 조지는 미들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휴스턴의 명문 사립 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 집안 대대로 다니던 매사추세츠주의 유서 깊은 사립 고등학교인 필립스 앤도버 학교를 거쳐 예일 대학교에 입학했고, 역사학을 전공했다. 1968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텍사스 주방위군에 장교의 신분으로 입대하여 중위로 퇴역했다. 군복무와 함께 텍사스 대학교 로스쿨에 지원했으나, 낙방했으며, 1973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뒤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취득했다. 이 기간 중 그는 이전부터 즐기던 술에 더욱 빠져들어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며, 1976년에는 음주운전으로 벌금 150달러를 물고 운전면허를 일시 정지당하기도 했다. 술은 결혼 후 줄이기 시작했으며, 1986년 40세 생일 이후로는 완전히 끊었다. 1977년 미들랜드 출신의 도서관 사서인 로라 웰치를 만나 결혼했다. 조지는 결혼과 함께 집안에서 믿던 성공회에서 부인을 따라 감리교로 개종했다. 부부는 1981년 쌍둥이 딸 제나와 바버라를 낳았다. 결혼 후 미들랜드에 정착하여 석유 사업에 관계하는 동시에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정계 진출을 시도하였다. 1978년, 텍사스 주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구의 연방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원 진출에 실패한 후, 석유 회사를 설립하고 다른 석유회사를 합병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 활동을 했으나, 석유값 하락으로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6년 합병 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스펙트럼 7 석유 회사를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 후 워싱턴으로 옮겨,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부친의 선거운동 본부에서 일하며 정치를 익혔다.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는 텍사스 주로 돌아가 동업자들과 함께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MLB) 구단인 텍사스 레인저스를 매입했다. 대통령의 아들로 그는 팬들과 함께 자주 경기를 관전하며 텍사스 주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인기를 얻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부친의 선거 운동을 다시 도왔으나, 부친은 재선에 실패했다. 젊어서 그는 마약을 복용하여 아버지 조지 H. W. 부시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주지사 재직 중 그는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다. 그러나 주지사 재직 중이자 예비후보로 거론되던 2000년 마약복용 경력 등이 터져나왔으나 그는 무난히 대통령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2000년 11월 7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던 앨 고어와 맞대결을 펼쳤다. 투표 결과 선거인단 수에서는 271 대 266으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총 득표율은 오히려 엘 고어에게 패했으나 미국의 선거방식 덕분에 엘 고어보다 적은 표를 받고도 당선되었다. 미국의 대선 선거방식은 각 지역구마다 선거인단을 두는 제도로 각 선거구마다 이기면 자신이 이긴 선거구의 선거인단을 모두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런 즉 부시는 고어를 이긴 선거구는 선거인단이 더 많은 선거구였으나 이길땐 간발의 차이로 이기고 패할땐 일방적으로 패했다. 2004년 11월 2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도전했다. 부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존 케리를 선거인단 수에서 286 대 251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취임한 지 8개월 후인 9월 11일, 부시와 미국은 9.11 테러에 마주쳤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여객기들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에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은 무너지고 펜타곤의 한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약 3,000명의 희생자외 6,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내었다. 미국은 곧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재벌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테러리스트 기구 알카에다가 9.11 테러 뒤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빈 라덴의 본부들과 테러리스트 훈련소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의 통치 단체 탈리반에 빈 라덴을 넘겨주고 훈련소들을 문닫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탈리반이 거부하자, 부시는 테러에 전쟁을 선언하여 군사를 조직한다. 전쟁 선언은 연방 의회에 그 권한이 있다. 엄연히 말해자면, 이라크 전쟁은 국제정세 안정을 위한 미국의 치안 행위였을 뿐, 공식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하여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국은 이와 같은 입장을 보였었다. 2001년 10월에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선전을 하였다. 2001년 3월부터 미국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9.11 테러 후에 실업률이 늘고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항공사들을 포함한 회사들이 경기 침체 속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몇몇의 미국 항공사들은 파산되었고, 테러 후에 그들의 보안 시스템에 값비싼 정밀 검사를 해야 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여행을 하는 데 두려움을 느껴 항공사들의 소득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의회는 현금 15억 달러의 일괄 예산을 통과시켜 국채가 피해를 입은 항공사들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국가의 경제적 어려움은 2002년과 2003년에 계속 되었다. 경기 부양책으로 부시는 감세와 실업자 보조를 실시했다. 그는 또한 다른 나라들과 무역 협정들을 협상하는 데 더 넓은 권위를 의회에 물었다. 의회는 부시의 계획을 옮기는 데 법률 제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부시가 요구한 것들보다 더 작은 감세를 통과시켰다. 2007년에는 미국의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들이 파산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 시장에 큰 영향를 끼쳤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의 원인으로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지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간의 많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 무장 항쟁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추인하는 일부 서남아시아 국가들과의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02년 국정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표현해 화제가 됐다. 2003년에는 '무법 정권'(Outlaw Regim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2004년에는 '가장 위험한 정권'(the most dangerous regime)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2001년에는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 등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적용해서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투입하여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를 붕괴시켰다. 2003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소지했다는 점을 들어 4년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없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뒤 2006년 12월에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을 처형하고 이라크에 과도정부를 수립했으나 정치적 이견으로 이라크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도중에 끊임없이 인질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내에서는 평화주의자들의 전쟁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9.11 테러 이후 체포된 테러 용의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쿠바 관타나모 만에 관타나모 만 수용소를 세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권 침해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1985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2000년 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나는 교회를 사랑하고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며 매일 기도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단순한 여행 목적으로 2009년 7월 31일 '전국경제인연합회 2009 제주 하계포럼' 참석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8월 3일에는 대한민국의 안동을 방문하였다. 방한 기간 동안 이명박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재계인사 등을 만나는 등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관계를 드러내기도했다. 그는 "퇴임 이후 행보는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 구현에 맞추고자 한다"며 "이를 위해 '부시 기념 도서관'과 '정책연구소'를 설립 중에 있다"면서 "전 세계 독재국가와 민주주의가 핍박받고 있는 나라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인사들의 글과 자료도 전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청계재단 설립 소식을 접하고는 "이명박 대통령이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단한 일"이라고 평했다. 볼링 볼링(, )은 공을 굴려 핀이나 다른 목표물을 쓰러뜨리는 스포츠이다. 일반적으로 매끄러운 나무, 혹은 합성 재질로 된 바닥에 공을 굴려 핀을 맞추는 방식이다. 야외에서 하는 경우 잔디밭에 공을 굴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핀 종류로 10핀 볼링(), 9핀 볼링, 5핀 볼링, 캔들핀 볼링, 덕핀 볼링 등이 있다. 볼링화를 신고 하는데, 이는 나라마다 규격이 다르다. 88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아시안 게임의 정식 종목 중의 하나이다. 현재는 90개국 이상에서 9,5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볼링을 즐긴다. 원시 형태의 볼링은 고대 이집트 와 로마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3~5천 년 전에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볼링 공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가죽으로 만든 겉부분에, 속은 곡식 껍질로 채워져 있었고, 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또 다른 공은 자기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무게와 크기 면에서 던지는 방식보단 굴리는 방식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도 볼링을 찾아볼 수 있다. 약 2,000년 전에는 로마 병사 사이에서 비슷한 스포츠가 유행했다. 돌을 다른 돌에 최대한 가까이 던지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현대 이탈리아의 보체, 혹은 야외 볼링의 기원이 되었다. 유럽의 볼링은 13세기부터 14세기 사이의 중세 시대 때 등장했다. 중세 시대 때의 볼링은 스포츠가 아닌 종교 의식이었는데, 독일의 교회에선 곤봉을 악마로 놓고, 공을 굴려 넘어뜨리는 종교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후 종교적인 의미가 사라지고, 스포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마틴 루터는 생전에 볼링을 즐겨 했었으며, 핀 9개를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세우도록 규칙을 만들었다. 1625년부터 유럽 이민자들을 통해 미국에도 볼링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볼링이 도박으로 변질되어 청교도인들이 항의했고, 1841년에 뉴욕 시는 9핀 볼링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사람들은 항의의 의미로 핀 10개를 정삼각형으로 세우도록 규칙을 변형해 볼링을 즐겼다. 핀에 대한 최초의 표준화된 규칙은 1895년 9월 9일 뉴욕 시에서 성립되었다. 볼링 규칙의 발전은 대부분 영국식 볼링 규칙을 채택한 국가에서 진행되었다. 1905년에는 국제 볼링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세계 여러 곳의 특색있는 규칙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스코틀랜드 볼링 협회의 규칙을 채택했다. 오늘날 볼링은 90개국 이상에서 9,5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즐기는 스포츠로 발전했으며, Wii 등의 가정용 게임으로도 발전했다. 1952년 7월에 용산구 미군기지에 수동 6레인 볼링장이 생기면서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볼링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볼링장은 1967년 10월에 개설된 워커힐 지하 호텔의 볼링장이었다. 이 시절 볼링은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 1969년 8월 16일 코리아볼링센터에 개설된 20레인 볼링장을 시작으로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되었으며, 1971년에 개설된 센추럴 호텔의 볼링장을 시작으로 볼링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볼링 사업이 잠시 주춤했지만 1974년에 한강 볼링장에 자동 핀 볼링장이 개설되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5가지 주요 핀이 북아메리카에서 만들어졌으며, 뉴잉글랜드와 캐나다 일부 지방에서 그 종류가 다양하다. 다른 투구 방식의 볼링은 주로 야외 볼링이다. 야외 볼링은 주로 지정된 장소에 가장 가깝게 공을 굴리거나, 공을 굴려 구멍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볼링 장비로는 공과 신발, 핸드 가드(hand guard), 보관용 가방이 있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 약칭 마다가스카르(), )는 아프리카 동쪽에 있는 공화국이며 섬나라이다. 수도는 안타나나리보이며, 공용어는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이다. 인구는 약 2,550만 명이고, 주민은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족과 가까운 말라가시인(Malagasy people)이 다수를 차지한다. 소규모 부족국가들이 난립하다가 18세기경 메리나 왕국을 중심으로 섬의 대부분이 통일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1897년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57년에 자치령 말라가시 공화국이 되었다가, 1960년 6월 26일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1972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후 1975년에 국명을 마다가스카르 민주 공화국으로 바꾸었으나, 1991년에 경제 악화 등으로 민주화 요구가 일어나 1992년에 신헌법을 제정하고 국명을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2007년에 신헌법이 다시 제정되었다. 2014년 1월 25일에 안드리 라조엘리나가 물러나고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가 취임했다. 마다가스카르 섬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마다가스카르의 전체 면적은 587,041km²로 세계에서 46번째로 큰 나라이다. 동쪽으로는 가파른 절벽이 있어 중앙 고원이 있고 열대우림과 마주한다. 이 섬은 아프리카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어 호랑이꼬리여우원숭이 등 이 섬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동식물종이 많다. 수도는 안타나나리보이다. 줄여서 타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나는 천명의 군인을 의미한다. 마다가스카르는 6개의 주로 이루어져있다. 마다가스카르의 북부는 열대, 중부 고원 지대는 아열대 및 온대, 남부는 약간의 사막성 기후와 온대로 이루어진다. 이 나라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북반구와는 계절이 반대이다. 이 나라는 보통 흑인이 다수 국가들인 아프리카와 이질적인 주민의 대다수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를 쓰는 말레이계의 후손이며, 메리나족이 26%으로 다수를 차지하며, 그 밖에 베티미사라카족이 15%, 베틸레우족이 12%, 투미헤티족이 7%를 차지한다. 2010년 11월 17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확정된 새 헌법을 12월 11일에 공포하였는데, 새 헌법은 제4조제1항에 "말라가시어는 국어이다."라고 규정하고 같은 조 제5항에 "공식어는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이다."라고 규정하였으며, 이로써 2007년 헌법에서 도입한 영어 도입은 박탈되었다. 이 나라는 프랑스 식민 지배 영향으로 인한 이유에서, 영어는 통용이 되지 못한다. 이 나라의 주민의 대다수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표준 말라가시어를 사용하며, 방언도 조금씩 갈라져 있으며, 마다가스카르는 단일어를 사용하는 소수 아프리카 국가이다. 프랑스어는 국가의 준공용어이며, 이는 프랑스의 식민통치의 영향 때문이며, 나머지 일부 언어는 소수가 사용한다. 애니미즘 등의 토착 종교가 절반을 차지하고, 기독교가 41%, 이슬람교가 7%를 점하고 있다. 이 나라는 흑인등의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다수 국가들과 이질적인 면이 많으며, 특히, 언어나 생활풍습 등 여러 면에서 동남아시아 국가인 인도네시아ㆍ말레이시아ㆍ필리핀과 비슷한 경향으로서, 이들의 조상은 인도네시아에서 넘어온 말레이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농업이 중심 산업이고, 수출품으로는 바닐라, 쌀, 설탕이 있다. 전 세계 바닐라 생산의 60%를 생산하고 있다. 광물 자원은 적고 개발도 늦은 편이다. 마다가스카르는 1962년에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나, 1972년에 10월 유신 정권이 수립되면서 같은 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당시 마다가스카르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단교하였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의 마다가스카르는 서울에서 열린 1988년 하계 올림픽에 불참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의 영향으로 마다가스카르에도 사회주의 독재 정권이 끝나면서 1993년에 대한민국과 다시 수교하였다. 마다가스카르와 한국 모두 양국에는 대사관이 없으므로 한국 측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리토리아에서, 마다가스카르 측은 일본의 도쿄도에서 각각 상주공관을 겸임했으나, 마다가스카르에는 2016년 한국 대사관이 개관되었다. 신설된 대사관은 코모로, 세이셸, 모리셔스를 겸임국 역할을 하고있다.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식민 통치했기 때문에 마다가스카르 국민들은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나, 최근에는 조금씩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마셜 제도 마셜 제도 공화국(마셜 諸島 共和國, , , )은 오세아니아에 존재하는 섬나라이며, 마주로를 수도로 정하고 있다. 1986년 10월 21일, 미국의 신탁통치령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미크로네시아계의 카나카족이 대부분이며 미국인도 거주한다. 마셜어와 영어가 공용어이며 일본어도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의 인구가 기독교를 믿는다. 인구의 51.5%가 통일 그리스도 교회에 속해 있고, 오순절교회가 24.2%, 로마 가톨릭교회가 8.4%, 몰몬교가 8.3% 등이다. 현재 이 나라의 경제력은 나우루처럼 열악한 상태에 있다. 대한민국과 마셜제도는 1991년 4월 5일 수교했다. 양국은 1991년 수교한 이래 지금까지 상주 공관을 두지 않고 대한민국은 주피지 대사관(주 피지 대사 조신희, 2018년 3월 현재)이, 마셜제도는 주일본 대사관이 업무를 겸임해왔다. 그러나 먀셜제도는 2015년 12월 한국에 대사관(주한 마셜제도 대사 케조 비엔, 2015년 현재)을 설치했다. 마셜제도가 재외공관을 두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7개국밖에 없다. 마셜 제도의 대(對) 한국 수출은 47,000 미국 달러(코코넛, 코프라), 한국의 대(對) 마셜 제도 수출은 22억 7,882만 미국 달러(석유 등, 각 2007년)이다. 한국 교민은 6명, 체류자는 28명(2007년 5월 1일 기준)이다. 마셜제도는 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는 20개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북마케도니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 ), 약칭 북마케도니아(, )는 남동부 유럽 발칸반도 한가운데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으로 세르비아, 동쪽으로 불가리아, 남쪽으로 그리스, 서쪽으로 알바니아와 접한다. 수도는 스코페이며, 그 밖에 주요 도시로는 비톨라, 쿠마노보, 프릴레프, 오흐리드, 벨레스, 슈티프, 코차니, 고스티바르, 스트루미차 등이 있다. 국토 내에는 50개가 넘는 호수가 있으며, 2,000 m가 넘는 산도 16곳이 있다.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영토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남단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국경 변경 없이 평화적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했다. 마케도니아는 북마케도니아뿐 아니라 그리스, 불가리아에 걸친 역사상의 지방을 이르는 이름으로, 그리스에도 마케도니아로 명명한 행정 구역이 있다. 1993년 유엔에 가입했으나 나라 이름을 "마케도니아"로 쓰는 데 그리스가 반대하여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 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이라는 잠정 명칭을 받아들였다. 북마케도니아는 유엔과 더불어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다. 2005년 12월부터 유럽 연합(EU) 가입 후보국이 되었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도 가입을 신청했다. 하지만 유럽 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인 그리스가 국명 및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가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입이 어려운 상태였다. 2018년 6월 12일 마케도니아 공화국 정부와 그리스 정부는 국명 문제 해결을 위해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공식 국명을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꾸자는 프레스파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019년 1월 마케도니아 공화국 의회와 그리스 의회가 합의안을 가결시키면서 2019년 2월 13일 국명이 "북마케도니아"로 공식 변경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북마케도니아는 곧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 가입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고대에 북마케도니아 영토 거의 대부분은 트라키아인 계통의 파이오니아 왕국에 속했다. 또, 일리리아인 민족이 살던 고대 일리리아 와 다르다니이 도 이 땅의 일부를 차지했으며, 몰로소이족이 사는 륀케스티스와 펠라고니아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 정해진 경계는 없었으며, 때로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종속돼 있다가 떨어져 나갈 때도 있었다.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는 왕국의 북부와 파이오니아 남부가 속한 상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는데, 이 땅은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일부가 된다.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곳의 나머지 지방도 정복하여 도나우 강까지 진출하여 자신의 영토로 복속했다. 로마인들은 현 북마케도니아 영토의 상당수 지방을 마케도니아 속주로 편입했으며, 북단 일부 지역은 모이시아 속주로 두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두 속주는 세분되어 현 북마케도니아의 영토는 마케도니아 살루타리스(Macedonia Salutaris)와 모이시아 프리마(Moesia Prima)로 갈라졌다. 서기 580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문헌에서는 아바르족과 불가르족의 도움을 받아 마케도니아 지방의 제국 영토를 침략한 슬라브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680년경 쿠베르(Kuber)라는 불가르인이 이끄는 불가르족과 슬라브족 비잔티움 사람들이 비톨라 시를 중심으로 한 케라미시안(Keramisian) 평원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불가리아의 프레시안 1세 시대에 불가리아는 슬라브족과 함께 마케도니아 지방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9세기경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 차르 치세에 마케도니아 지방에 살던 슬라브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1014년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레이오스 2세 황제는 불가리아의 사무일 차르 군대에 치명타를 가해 1018년에 7세기 이래 처음으로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발칸 전역의 지배권을 회복한다. 그러나, 12세기 말에 비잔티움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여러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080년대에는 노르만족이 잠시 지배하기도 했다. 13세기 초에 불가리아 제국이 부흥하여 이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은 정치적 혼란에 시달리다 결국 14세기 초에 이 땅을 비잔티움 제국에 내준다. 14세기에 마케도니아 땅은 슬라브 민족의 해방자를 자처한 세르비아 제국에 복속된다. 스코페가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차르의 수도가 되었다. 두샨이 죽자 나약한 후계자가 황위를 잇고 귀족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발칸은 다시 쪼개졌고,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진입했다. 14세기에 세르비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프릴레프 왕국이 들어섰으나 단명했다. 이로써 발칸 반도는 중북부까지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세기 초 불가리아 민족 부흥이 시작될 당시 이 지역에는 밀라디노프 형제, 라이코 친지포프, 요아킴 크르초프스키, 키릴 페이치노비크 등 여러 개혁자가 나왔다. 스코페, 데바르, 비톨라, 오흐리드, 벨레스, 스트루미차의 주교들은 투표를 통해 1870년에 생긴 불가리아 주교구에 합류하기로 했다. 19세기 말부터 마케도니아 지방 전역을 아우르는 자치을 수립을 위한 여러 운동들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조직은 '불가리아-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혁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1905년에 '내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폴리스 혁명단'(Internal Macedonian-Adrianople Revolutionary Organization)으로 개칭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내부 트라키아 혁명 기구'로 분리되었다. 초기에 이 조직은 어떠한 민족 정체성도 주장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민족성에 상관 없이 마케도니아와 아드리아노폴리스 지역의 모든 불만 세력을 통합"하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당시 마케도니아 지방에는 마케도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알바니아인, 터키인 등이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혁명단 다수는 마케도니아 불가리아인이었다. 1903년에 마케도니아 혁명단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에 반란'을 일으켜 다수 사상자를 내었으나, '크루셰보 공화국'을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이 반란과 크루셰보 공화국 성립은 '마케도니아 공화국'을 세운 주춧돌로 평가받고 있다. 1912년과 1913년의 두 번의 발칸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해체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의 영토 대부분은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나눠 가지고, 알바니아는 독립하였다.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영토는 당시 '남부 세르비아'()로 명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일부가 된다. 1929년 이 왕국은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꾸고, 현재의 북마케도니아 영토가 포함된 남부 세르비아를 '바르다르 주(Vardar Banovina )'로 개편하였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토도르 알렉산드로프, 알렉산다르 프로토게로프, 이반 미하일로프 등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 지도자들은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점령한 영토를 해방하고 지역이나 민족성과 상관 없이 모든 마케도니아인들을 위한 마케도니아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의 마케도니아 통일 사상을 내세웠다. 1918년 알렉산데르 말리노프의 불가리아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러한 목적을 위해 피린 마케도니아(Pirin Macedonia)를 내놓겠다고 제의했으나,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이를 반대하였고 열강들 역시 이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르다르 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은 이에 뛰어들었고, 이와 함께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단도 바르다르 주의 세르비아 관청과 군대에 게릴라 공격을 감행했다. 1923년 슈티프에서는 세르비아 게릴라들이 조직한 준군사 조직인 '불가리아 도적 대항 연합'과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의 변절자들 및 마케도니아 연방단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과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단에 대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에 점령당했다. 이 시기에 바르다르 주는 불가리아와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로 분할되었고, 불가리아 행동 위원회가 들어서 불가리아 정부와 군대를 위해 일했다. 행동 위원회는 대부분 과거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단 출신 단원들이 결성하였으나, 판코 브라슈나로프, 스트라힐 고고프, 메토디 샤토로프와 같은 공산주의자도 참여했다. 마케도니아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샤토로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서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적을 옮겼으며, 불가리아군과 싸우기를 거부했다. 불가리아 당국은 독일의 압력으로 스코페와 비톨라에서 7,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점령군의 잔혹한 통치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은 1943년 이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공산주의 빨치산 저항 운동을 지지했고, 마케도니아 민족 해방 전쟁이 뒤따라 일어나 1944년 말에 마케도니아에서 독일군은 쫓겨났다. 1944년 불가리아 군사 정변 이후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군은 독일군에 포위되어 옛 불가리아 국경까지 물러가 저항했다. 같은 해 9월에 3개 불가리아군(총 455,000여명 병력)이 유고슬라비아로 진입했으며, 그리스에서 철수하는 독일군을 차단하는 전략적 임무를 맡아 소피아에서 니시와 스코페로 진군했다. 세르비아의 남부와 동부 및 마케도니아는 한 달도 안 돼 해방되었다. 1945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통일 마케도니아 건국을 위해 피린 마케도니아 할양을 재차 제시했다. 1944년 마케도니아 인민 해방을 위한 반파시즘 의회는 마케도니아 인민 공화국이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인민 연방 공화국'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반파시즘 의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질적인 정부로 기능했다. 반파시즘 의회의 언어학자들은 마케도니아어 문자를 제정했다. 새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여섯 공화국 가운데 일원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1963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개칭하자, 마케도니아 인민 공화국도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그리스 내전(1946년~1949년) 당시 마케도니아 공산주의 반군이 그리스 공산주의자를 지원했다. 이후 그리스에서 난민들이 마케도니아로 많이 들어왔다.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와 소비에트 연방간의 코민포름 분쟁 이후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자, 티토는 마케도니아어의 독자성과 역사 교육을 인정해주었고, 마케도니아 정교회가 세르비아 정교회에서 분리 독립하도록 지원해주었다. 1991년에 마케도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평화로이 분리 독립하였고, 국호에서 '사회주의'를 뺐다. 북마케도니아는 1991년 9월 8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했는데, 이 날 북마케도니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으며, 다만 차후 구유고슬라비아 국가의 후신에 참여하기로 법제화했다.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에 반란'이 시작된 날(성 일리야의 날)인 8월 2일도 공화국의 날로 공식적인 차원에서 기념한다. 북마케도니아는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전쟁 와중에도 평화를 지켰다. 유고슬라비아와 북마케도니아 사이의 국경 문제를 놓고 소소한 변화를 합의한 정도 외에 북마케도니아는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연합 회원국인 그리스는 자국이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역사적 당위성과 정통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북마케도니아 독립에 강력히 반발하여 1994년에는 양국이 군사 대치 사태까지 갔다. 이에 미국과 유럽 각국이 북마케도니아 문제에 개입하여 1995년 9월에 북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으로 지칭한 1993년의 UN 중재안을 받아 들여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또, 1999년에는 코소보 전쟁으로 코소보에서 36만여명의 알바니아계 난민들이 피난오면서 북마케도니아는 심각한 불안(不安) 사태를 맞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들은 북마케도니아를 떠났지만, 양국 국경지대의 알바니아인 급진주의자들이 북마케도니아 영토에 사는 알바니아인들의 자치와 독립을 위해 반란하였다. 2001년 6월에 알바니아계 반군과 정부간에 내전이 북마케도니아 북부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 전쟁은 나토 휴전 감시군이 개입하면서 끝난다. 오흐리드 협정에서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알바니아계 집단에게 자치 권력의 이양과 문화 인정을 확대하고, 알바니아인들은 분리 요구를 포기하고 북마케도니아 체제를 완전히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오흐리드 합의에 따라 알바니아계 민족해방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나토군에 넘겼다. 북마케도니아의 면적은 25,713 km이며 동경 20°~동경 23°, 북위 40°~북위 43°에 위치한다. 국경의 길이는 748km에 달한다. 북쪽으로 세르비아와 63km를 맞닿으며,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와 148km를, 남쪽으로 그리스와 228km를, 서쪽으로 알바니아와 151km를 맞닿아 있다. 이 나라는 그리스에서 발칸반도를 통해 동서유럽과 중부 유럽을 잇고 불가리아를 통해 동방을 잇는 교역로이기도 하다. 북마케도니아는 역사상의 마케도니아 지방의 일부에 불과하며, 같은 이름을 가진 그리스 북부 지방과 불가리아 남서부의 블라고에브그라드주 역시 옛 마케도니아 왕국의 땅이었다. 북마케도니아는 지리상 바르다르강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 산맥을 국경선으로 삼는 내륙국이다. 샤르산맥에서 오소고보에 이르기까지 국토는 바르다르강 협곡을 사이로 대개 거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바니아 및 그리스와 접한 남쪽 국경에는 큰 호수 세 곳 - 오흐리드호, 프레스파호, 도이란호 - 가 있다. 오흐리드호는 세계에서 매우 오래된 호수이자 생태계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지진 활동이 활발하며 과거에도 심각한 지진이 발생한 바 있는데, 1963년 스코페에서 큰 지진이 나서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기도 했다. 북마케도니아는 주로 산악 경관을 보인다. 주요 산맥이 둘 있는데, 첫째로 샤르산맥 은 디나르산맥으로도 알려진 서부 바르다르/펠라고니아 산악군(바바산, 니드제산, 코주프산, 야쿠피카산)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로도피산맥으로도 알려진 오소고소산-벨라시카산맥이다. 샤르산맥과 서부 바르다르/펠라고니아 산악군에 속하는 산들은 오소고보-벨라시카산맥보다 더 최근에 형성된 것으로 높이도 더 높다.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경계에 있는 샤르산맥의 코라브산은 2,764m로서 북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높다. 북마케도니아에는 큰 수원지가 1,100곳 있다. 강은 에게 해와 아드리아해, 흑해의 분지로 흘러나간다. 이 가운데 에게 분지가 가장 넓은데, 국토의 87%인 22,075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에게 분지에서 가장 긴 강인 바르다르강을 통해 국토의 80%에 해당하는 20,459평방킬로미터의 강물이 흐른다. 바르다르 강 유역은 마케도니아 경제와 통신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츠른 드린 강이 흘러 형성된 아드리아 분지는 국토 면적의 13%인 3,320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한다. 오흐리드호와 프레스파호의 물이 이 강을 통해 흘러나간다. 흑해 분지는 37km로 가장 짧은 강으로, 스코프스카 츠르나 고라산 북쪽 지역이다. 이곳은 비나츠카 모라바강의 수원으로, 모라바강과 다음으로 도나우강과 합류하여 흑해로 흐른다. 북마케도니아는 내륙국이긴 하지만 거대한 자연 호수인 오흐리드호, 프레스파호, 도이란호를 비롯해 50여곳의 작은 호수가 있다. 마케도니아어로 온천을 반야(бања)라고 하는데, 이 나라에는 9곳의 온천 도시와 휴양지가 있다. 바니슈테, 반야 반스코, 이스티반야, 카틀라노보, 케조비카, 코소브라스티, 반야 코차니, 쿠마노프스키 반이, 네고르치가 바로 그러하다. 북마케도니아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대륙성 기후로 가는 점이적인 기후를 보인다.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약간 춥다. 연평균 강수량은 서부 산지의 1,700mm에서 동부 지역의 500mm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이 나라에는 온난한 지중해성, 산악 및 온화환 대륙성 기후 이 세 기후대가 있다. 바르다르강과 스트루미차강이 흐르는 유역을 따라 게브겔리야, 발란도보, 도이란, 스트루미차, 라도비시 지역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데미르카피야와 게브겔리야 지역은 가장 따뜻한 곳으로, 7, 8월 기온은 40℃가 넘는다. 산악 기후는 국토의 산지에서 나타나며,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며 여름은 짧고 서늘하다. 봄은 가을보다 춥다. 북마케도니아 국토 대부분은 온난한 대륙성 기후로, 여름에는 온난 건조하고 겨울에는 비교적 한랭 습윤하다. 국토 내에 주요 기상 관측소는 30곳이 있다. 북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비중이 큰 민족은 마케도니아인으로 전 인구의 64.2%를 차지한다. 두 번째는 인구의 25.2%인 알바니아인인데, 국토 서부의 상당 지역을 차지한다. 그 밖에 터키인이 3.9%, 롬족이 2.7%, 세르비아인이 1.8%, 보스니아인이 0.8%이다(2003년 현재). 마케도니아인은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마케도니아 땅에 이주한 슬라브족의 후손이다. 불가리아인은 인종/언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인이 불가리아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마케도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불가리아인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알바니아인들은 북마케도니아의 북서부에 주로 거주한다. 이들은 주로 이슬람교를 믿으며 알바니아어를 사용한다. 공용어는 마케도니아어로서, 이를 모어(母語)로 쓰는 인구는 66.5%이다. 그 밖에 다른 언어로는 알바니아어가 25.1%, 터키어가 3.5%, 롬어가 1.9%, 세르비아어가 1.2%, 보스니아어가 0.4%이다. 전국 수준의 공용어는 마케도니아어가 유일하며, 지자체에서 주민의 2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마케도니아어와 함께 그 지자체에서 공용어가 될 수 있다. 북마케도니아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준회원국에서 2006년에 정회원국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어는 불가리아어와 상호 의사 소통성을 가지는 언어이다. 또한 남부 세르비아와 서부 불가리아에서 쓰이는 토르락과 샤피 방언과의 유사성을 지니며 북동부 마케도니아에서 종종 쓰기도 한다. 최근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1,344,815명의 시민이 마케도니아어를 하며, 507,989명이 알바니아어를, 71,757명이 터키어를, 38,528명이 롬어를, 6,884명이 아르메니아어를 사용하고, 24,773명이 세르비아어를 사용하며, 8,560명이 보스니아어를, 19,241명이 그 외 언어를 사용한다. 소수의 아디게야어과 그리스어 사용자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기도 하다. 종교는 마케도니아 정교회 인구가 64.7%를 차지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이슬람교 인구가 33.3%를 차지한다. 마케도니아인 무슬림은 '토르베시인'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터키(96%), 코소보(90%), 알바니아(56.7%),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45%)에 이어 무슬림 인구비율이 높아 15대 유럽 무슬림 국가에 속한다. 북마케도니아의 요리는 발칸반도와 마케도니아 지방의 특질을 살린 요리로서 터키 요리와 그리스 요리, 중앙 유럽 요리의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요리와 지중해식 식단이 다수 존재하며 헝가리 요리의 형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 덕택에 채소류나 허브, 과일이 아주 많아 관련 요리도 많다. 채소류와 과일을 한데 모아 만든 쇼프스카를 주식으로 삼으며 포도주와 라키자, 마스티카라고 하는 주류가 소비되고 있다. 다른 주식으로는 북마케도니아의 전통 음식인 타브셰-그라브셰(구운 콩에 고기를 얹은 음식), 후식으로는 튀김반죽에 시럽을 넣어 만든 투룸바나 복숭아, 딸기 등을 설탕에 절인 컴포트 등을 먹는다. 북마케도니아는 2004년 8월 기준으로 84개 지방 자치체(마케도니아어: општини, opštini, 복수형 општина, opština)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10개 지방 자치체는 북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 도시권을 형성한다. 현존하는 북마케도니아의 지방 자치체 가운데 대부분은 1996년 9월에 신설된 123개 지방 자치체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큰 변동은 없지만 몇몇 지방 자치체는 합병되기도 했고 경계선이 변경되기도 했다. 북마케도니아는 8개 지방(регион, regioni)으로 나뉘지만 독자적인 지방 정부를 가진 행정 구역은 아니며 통계 목적으로 사용된다. 스코페 지방은 스코페 도시권과 주변 지역을 포함한다. 북마케도니아는 유엔 가입국으로, 전 세계적으로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약 30개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 나라들과 수교하고 있다. 북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국호인 마케도니아 문제로 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지방 명칭이라며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993년 북마케도니아가 유엔 정회원국으로 가입할 당시, 1945년부터 유엔 정회원국이었던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라는 국호를 사용하면 가입을 승인할 수 없다고 주장함에 따라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YROM)이라는 잠정 국호로 가입하였다. 특히 북마케도니아는 독립 당시 국기를 빨강 바탕에 16개의 태양의 햇살을 지닌 국기를 제정,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그리스 정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연관이 깊다는 이유로 이 국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강력 반발하였으며, 북마케도니아는 1993년 UN 가입 당시 이 국기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국기를 일부 수정하여 빨강 바탕에 햇살을 8개로 축소한 현재의 국기로 변경하였다. 이후에도 국명(國名)을 둘러싼 그리스와의 대립은 계속되어 왔으나,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는 IOC 회원국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2018년 6월 17일에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북마케도니아의 조란 자에프 총리가 프레스파 협정이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협정에 정식 서명했다. 이 협정은 북마케도니아는 국호를 마케도니아 공화국에서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변경하는 대신에 그리스는 북마케도니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 구유고슬라비아 출신 독립 국가들과도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마케도니아는 1993년부터 2019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단독 수교국이었다.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대한민국 측에 수교를 요구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 참전국이자 전통적 우방인 그리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명 변경 이전에는 북마케도니아와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는 북마케도니아와 수교한 상태이다. 대한민국은 북마케도니아로부터 주로 동, 납, 아연과 같은 지하자원을 수입하고, 기계, 섬유류를 수출하며, 현지의 영사 업무는 불가리아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대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프레스파 합의협정 이후 북마케도니아와 수교 의사를 타진하겠다고 밝혔고 그 결과 2019년 7월 18일 대사급 관계에 따라 공식적으로 수교하였다. 북마케도니아는 덴마크, 영국, 프랑스 등 여러 EU소속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북마케도니아는 EU가입 후보국에 올라있으나, 국명 변경 이전에는 정회원국인 그리스가 가입을 반대하였다. 말라위 말라위 공화국(, )은 과거 니아살랜드라고 불리던 동남부 아프리카에 있는 내륙국이다. 북서부로는 잠비아, 북동부로는 탄자니아, 동부, 남부, 서부로는 모잠비크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말라위 호에 의해 탄자니아와 모잠비크로 나뉘어 있다. 영토는 118,000km(45,560 sq mi)를 넘고 추정 인구는 1390만명 이상이다. 수도는 릴롱궤이며 두 번째, 세 번째로 큰 도시는 각각 블랜타이어와 음주주이다. 국명 말라위는 그 지역에 사는 냔자족의 오래된 이름인 '마라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말라위는 현재 민주주의,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소수의 육·해·공군을 보유하고 있다. 말라위의 대외 정책은 친서방적이며 국제 기구 참가, 대다수 국가와의 긍정적 외교 관계를 지향한다. 말라위는 세계에서 가장 저개발된 국가군에 속하며 인구 밀도도 매우 높다. 경제는 농업 중심이며, 인구 다수는 비도시 지역에 산다. 2000년부터 줄어 들고 있으나, 말라위 경제는 해외 원조 의존도가 높다. 말라위는 평균 수명이 낮고 유아 사망률이 높다. HIV/AIDS이 만연하여, 이 때문에 노동력 감소와 에이즈를 막기 위한 국가지출 비중이 높은 원인이 된다. 과거에는 부족 갈등이 있었지만, 2008년 이후에는 상당히 줄어들었고 부족 정체성보다 말라위인이라는 국민적 유대감이 형성되어 가는 중이다. 말라위의 문화는 스포츠,예술,춤,음악등의 분야에서 토착 문화와 영국 식민지 문화가 결합되어 있다. 말라위는 10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1891년까지는 원주민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 1891년에는 영국의 보호령인 니아살랜드가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남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결성했지만 1963년에 탈퇴했고 1964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독립 쟁취 이후에 헤이스팅스 반다 대통령에 의한 일당제가 실시되었고, 반다가 권력에서 밀려났던 1994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말라위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동부에 있다. 그레이트 리프트 벨리가 남북으로 전체를 지나다닌다.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인 말라위 호수가 있기도 하며 이 호수는 세계에서 10번째로 큰 호수이다. 때때로 달력 호(Calendar Lake)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쉬레 강이 남쪽 긑의 호수에서 흘러 가며 잠베지 강으로 합류한다. 동서쪽에는 리프트 밸리가 있는데 고평원이 있으며 대개 해발고도는 900~1,200m 정도이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질수록 고도가 낮아져서 100m를 넘지 않는다. 말라위는 사하라사막 이남 국가 중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1971년 이후로 말라위의 수도인 릴롱퀘는 인구가 사십 만에 육박한다. 모든 정부 부처와 국회가 이곳에 있다. 말라위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국가로서 12월에서 4월까지가 우기이다. 5월에서 11월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무덥다. 수도인 릴롱궤도 우기 동안에는 비가 많이 내리며 남쪽에는 비가 덜 오는 편이다. 다른 지방의 경우 따뜻하고 비가 그리 많이 오지 않는다. 6월에서 8월까지 내륙및 호수 지역에는 상당히 따뜻한데 밤에는 영상 14도까지 떨어져 매우 춥기도 하다. 치체와족, 툼부카족, 고니족, 야오족, 날자족, 치포카족, 통가족 등(말라위에는 40개 정도의 민족 집단이 있다고 하지만, 각각의 민족 집단은 애매하다) 전체 인구 1천 5백만명의 전문의 숫자가 2011년 기준으로 260명(한국:1,000명당 2명)이고, 총 간호사는 7,264명으로 인구 1,000명당 0,589명(한국:1,000명당 4명)으로서 WHO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전문의가 가장 부족한 나라이다. 또한 말라위 임산부 100,000명 중 1,100명이 출산 중 또는 출산 직후 사망(한국 14명, 북한 370명) ,1,000명의 아동 중 110명이 5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다.(한국 5명, 북한 55명) 에이즈와 말라리아 그리고 각종 질병으로 매일 200여명이 죽고 있는 가운데 고아들이 날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가정의 붕괴와 함께 말라위 평균 연령도 39세이고 가난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치체와어(국어), 영어(공용어), 날자어, 툼부카어, 마쿠아어, 야오어, 그 외 부족 언어가 존재한다. (소수의 프랑스어 사용자도 존재) 전통적 종교·토착 신앙, 기독교, 이슬람교(말라위 남부지역과 호수 주변에는 대부분 무슬림들이 거주한다.)가 존재한다. 모계 중심의 사회다. 독립 전사의 날인 매년 3월 3일은 이 나라에서 개최되는 모든 스포츠 경기가 금지되어 있어서 말라위에서 열리는 스포츠 대회에 3월 3일이 끼어 있으면 3월 3일에 열리는 경기를 취소하고 3월 4일로 미룬다. 국민들은 진흙으로 만든 적벽돌에 갈대로 만든 초가지붕 집에서 산다. 말라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다. 나라의 경제는 농업에 의존하지만 국토의 약 3분의 1만이 농업 지대에 알맞은 편이다. 중요한 농작물은 담배이고, 차가 주요 수출품이 되고 있다. 또한 옥수수, 목화, 땅콩, 사탕수수, 커피의 재배도 성하다. 니아사 호에서 어업이 성하고, 공업은 벽돌, 면 제품, 시멘트, 식품 가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말라위는 기아문제 역시 매우 심각하다. 매년 아일랜드의 NGO인 컨선월드와이드(Concern Worldwide), 독일의 NGO인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 그리고 미국의 연구기관인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협력하여 발표하는 세계기아지수(GHI)에 따르면 2016년 말라위의 기아지수는 100점 만점 중 26.9점으로 가장 심각한 기아점수를 기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46.1점과 비교하면 절반정도의 수준이다. 이는 조사 대상이었던 118개의 개발도상국 중 89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아직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말라위는 3개 주와 28개 현으로 나뉜다. 대한민국과 1965년 수교하였다. 한때 현지공관이 설치되었으나 1998년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때 대사관을 폐쇄하여 주 짐바브웨 대사관이 겸임토록 변경하자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기도 했으나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196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에는 주변국들이 공산주의 국가였지만 남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친서방 국가로서 1965년에 한국과 수교하였다. 이러한 외교관계로 말미암아 수도 릴롱궤에 위치한 국제공항과 정부 종합청사 그리고 최고급 숙박시설인 캐피탈 호텔 등 주요건물들이 한국기업을 통해서 건설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2년에 수교했다. 중화민국과 41년 간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나 2008년에 중화민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 북중국해로 나뉜 말레이 반도 지역과 보르네오 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국,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 국경은 싱가포르와 베트남, 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지만,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18세기부터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 말레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은 해협식민지로 불리었고, 다른 곳들은 보호령이 되었다. 1946년 말레이 반도의 주들이 연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세웠고, 1948년 연합을 재편성하여 말라야 연방이 설립되었다.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되었으며,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은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와 연합하면서 Malaya란 이름에 si를 추가해 Malaysia가 되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싱가포르는 정부와의 마찰로 연방에서 승급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이후 아시아에서 최고의 경제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50년동안의 GDP 성장률이 평균 6.5%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천연 자원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과학, 관광, 무역, 의료관광 등의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입헌군주국이며, 국가 원수인 군주(국왕)은 9개 주에 있는 술탄에 의하여 5년에 한 번씩(단, 궐위가 있을 경우에는 예외) 호선으로 선출한다. 군주의 칭호는 양디-퍼르투안 아공이며, 지금 군주는 파항주의 술탄 압둘라이다. 정부의 장은 수상이다. 정부체제는 웨스트민스터 체제에 가깝고, 법체계는 영국의 법에 기초한다. 말레이시아는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 헌법상 종교의 노에는 인정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라시아 본토의 최남단 지역인 탄중피아이가 있고, 적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 기후의 국가이다. 다양한 서식물군이 있어 생물 다양성이 작은 국가이다. ASEAN, 이슬람 회의 기구의 창립멤버이며, APEC, 영국연방, 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이다. 2018년을 기점으로 말레이시아의 구매력 평가는 1인당 $30,860로 평가되었다. 약 4만년 전 지금의 말레이시아 땅에 인류의 거주지들이 형성된 기록이 있다. 이는 말레이시아가 고로 신생국가가 아님을 증명한다. 현재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에 해당되는 말레이 반도의 첫 정착민은 검은 피부를 가진 네그리토로 추정된다. 기원후 시대 초기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레이 반도는 동서양 무역상 및 여행객들의 장소였는데, 2~3세기경 그들은 이곳에 무역항과 해안 마을을 건설했다. 그 결과 인도 및 중국 문화가 현지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유입된 힌두교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4~5세기경 산스크리트어로 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세기 무렵 말레이 반도 북부의 랑카수카 왕국이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까지 존속했다. 7~13세기 말레이 반도 남부 해안 지역은 스리비자야 제국의 일부였다. 스리비자야 제국의 멸망 이후 등장한 마자파힛 제국은 말레이 반도와 말레이 제도 일대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14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가 되는 시초가 되었다. 15세기 초 구 스리비자야 제국의 왕자였던 파라메스와라가 지금의 말라카 지역에 말레이 반도 최초의 독립 국가로 간주되는 말라카 술탄국을 건설했다. 지리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말라카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써 매우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이 번영의 말라카도 1511년 포르투갈의 침공과 함께 몰락했다. 포르투갈이 침공한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권을 확장하는 한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말라카 주민들은 포르투갈의 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1641년 이 지역을 노린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포르투갈의 지배도 끝이 났다. 이어 네덜란드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나, 1786년 크다의 술탄이 피낭을 영국령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면서 대영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1819년 싱가포르를 획득했고, 이후 기존에 말라야를 지배하던 네덜란드와 마찰이 발생하자 1824년 영국-네덜란드 협정을 맺어 세력범위를 확정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서 북부는 영국이, 남부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도록 했는데 말라카는 영국이 가져가는 대신 자신들이 지배하던 벤쿨렌(방카훌루)을 네덜란드에 양도했다. 이후 영국의 세력범위는 영국령 말라야라 하여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되었고 네덜란드의 세력범위는 네덜란드령 인도라 하여 오늘날의 인도네시아가 되었다. 1826년 영국은 피낭, 말라카, 싱가포르, 라부안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이 지역에 직할식민지의 일종인 해협 식민지를 건설했다. 20세기 무렵 파항, 슬랑오르, 페락, 느그리슴빌란으로 구성된 연합 말레이 주에 영국이 눌러앉기 시작했는데 각 주의 말레이 지도자들이 자신들과의 협정을 거부할 것이 확실해지자 그들을 조언해 영국 지도부를 임명하게 했다. 나머지 5개 주는 비연합 말레이 주라 하여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았는데 20세기 영국인 조언자가 있게끔 전환되었다. 19세기까지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의 발전은 대개 큰 관련이 없었다. 영국은 지배 기간 동안 중국과 인도에서 수입된 노동자들의 이민을 장려했다. 현재 사바주에 해당되는 지역은 1877년부터 1878년 사이 브루나이와 술루의 술탄이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하면서 영국령 북보르네오가 되었다. 지금의 사라왁주에 해당되는 지역은 영국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1842년 브루나이 술탄으로부터 양도받은 뒤 사라왁 왕국이 되었으며, 1946년 직할식민지로 개편될 때까지 백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말라야,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를 점령했으며, 1945년 항복할 때까지 3년간 통치했다. 비록 3년으로 말레이시아를 지배한 그 어떠한 나라보다도 짧게 통치했지만, 더 잔인했으며, 특히 중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일본은 이 지역의 중국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중국인뿐 아니라 청년들은 태국을 거쳐 미얀마까지 이어지는 철로를 건설하는 데 동원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막노동에 영양 실조 등으로 희생되어 이 철로는 '죽음의 철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으며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음으로써 경제난에 시달렸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들의 산악전이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인종적 긴장 상태 및 민족주의가 성장하였다. 민중의 항의가 이어졌으며,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영국이 재점령했다. 이에 민족주의가 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재점령 이후 영국은 1946년 싱가포르를 제외한 영국령 말라야 지역에 직할 식민지인 말라야 연합을 건설했다. 말라야 연합의 이민법은 출생지주의(jus soli)를 강조했는데, 이 이민법에 따라 말레이인 또는 말라야 연합 및 싱가포르 출신자들은 자동으로 시민권이 주어지며, 중국인(명나라, 청나라 출신) 및 인도인(영국령 인도 출신) 등 외족도 1942년 2월 15일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으면 시민권이 주어졌다. 이민법은 모든 민족에게 평등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말레이인들은 이 결과로 외국인들의 힘이 세져 자신들의 지위가 더 추락할까봐 두려움을 느꼈으며, 말레이인들의 상징이었던 술탄제를 폐지함으로써 말레이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말라야 연합은 해체되었고, 대신 1948년 말라야 연방이 결성되었다. 이후 말레이인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들이 시작되는 가 하면 영국의 보호 아래 말레이 주의 지도자들의 자주성을 회복시켰다. 이 무렵 말라야 공산당(PKM) 소속 중국계 게릴라들이 영국을 자국에서 축출하는 목적으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이에 동년 말라야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영국 연방 국가들의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였다. 비상사태는 독립 후인 1960년까지 지속되었다. 말라야의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 1955년 총선이 실시되었고, 이어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지도자였던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느그리슴빌란 주의 최고지도자(Yang di-Pertuan Besar; 종종 '술탄'으로 간주됨)였던 투앙쿠 압둘 라만(Tuanku Abdul Rahman)이 초대 국왕이 되었다. 말라야 인들의 소원이었던 독립을 쟁취했으나, 갈 길은 멀고 험난했다. 나라 안은 말레이인과 중국인 등 민족간의 갈등이 심했고, 말라야 연방 홀로는 국제 사회에 나설 수 없었다. 또한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될 만한 자원이 부족했고, 원주민의 수가 부족하여 말레이인들을 우대하는 데 크게 불리했다. 마침 영국의 또다른 식민지였던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 브루나이에서도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말라야 연방 정부는 이 지역에 자국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당초 브루나이가 먼저 동의함으로써 1961년 말라야 연방의 가입했으나, 석유라는 최고의 경제적 조건을 갖춘 브루나이는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쇠퇴할 것을 우려, 1년만에 탈퇴했다. 한편 북보르네오(사바), 사라왁, 싱가포르는 당초 이를 고사했으나, 싱가포르가 가입을 결정했고, 싱가포르와 깊은 인연이 있던 북보르네오와 사라왁도 가입을 결정했다. 1963년 세 나라 모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9월 16일 현재의 말레이시아 연방을 성립하였다.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가 말레이시아를 결성했다. 2년 뒤 싱가포르가 탈퇴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로 지속되고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10개 회원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1957년 독립한 말라야 연방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툰쿠 압둘 라만은 말라야 연방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싱가포르, 사라왁, 북보르네오(사바)에 자국 가입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1963년 9월 16일 지금의 말레이시아가 출범했고, 그는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라만 정부는 지배계층이며, 말레이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말레이인들을 우대했다. 이는 낮은 경제수준으로 사회에서 밀릴 걸 우려한 말레이인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들이 다수를 점한 싱가포르 주의 반발을 가져왔다. 싱가포르 주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중국인도 말레이 원주민과 같은, 엄연한 부미푸트라이다"라고 주장했으며,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강조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전체를 두고 보면, 말레이인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결과 싱가포르 주정부와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 간의 마찰이 빚어졌다. 1964년 싱가포르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했고, 양측 간의 골이 깊어지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싱가포르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며 자국에서 추방키로 했다. 1965년 싱가포르 정부는 말레이시아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고, 8월 9일 말레이시아에서 완전히 독립했다(싱가포르 입장에서 보면, 원치 않은 독립이다). 라만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말레이시아는 출범 이후 국제적 지위가 높아졌고, 1967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5개국이 가입한 ASEAN의 결성을 실현하였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국부로 추앙받았으나, 인종 대립이 심해져 1969년 5월 13일 대폭동으로 이어졌다(일명 5·13 사건). 동년 총선에서 집권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많은 의석을 잃었고, 국민들은 물론 당 내에서도 사퇴 압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만은 계엄령을 선포해, 철권을 휘두르는 등 독재자로 변모했다.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졌으며, 1970년 총리직을 사임했다. 부총리였던 압둘 라자크 후세인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1970년 신임 총리에 취임한 압둘 라작은 집권 후 사회의 안정을 목적으로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의한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했으며, 반대파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그는 민주적인 정치 참여가 인종간의 갈등을 조장한다며 말레이시아를 비정치화했고, "평화를 원한다면 BN"을 택해라" 등으로 국민들을 위협하고 중국인들의 시위를 비합법화했다. 라작 정부는 기존의 말레이인 우대 정책으로는 실효가 없다고 판단, 이른바 '부미푸트라 정책'을 작성했는데 이에 따라 말레이인들을 우대하고 외국인들의 이민을 제한하여 현재 말레이시아의 폐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모습을 구축했다. 말레이인들과 무슬림들은 정치적으로 우대를 받는 가 하면, 인종 분쟁을 해소하려 했으나 오히려 조장해, 현재 중국인들이 말레이인에 대한 반감을 갖는 요인이 되었다. 라작 정부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실현에 옮기고자 했으나, 1976년 1월 14일 라작이 급서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부총리 후세인 온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라작의 뒤를 이은 후세인 온은 라작이 두고 간 부미푸트라 정책을 실현에 옮겼으며, 이에 따라 말레이인들을 사회적으로 우대하고 외국인들의 유입을 차단해,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정치적 단결을 강조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1981년 4월 20일 통합국민신뢰계획을 발표했다. 한편으로는 인종 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주력했다. 후세인 온은 부총리였던 마하티르 모하마드와 종종 마찰을 빚었으며, 마하티르의 도움을 받아 이뤄낸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세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으며, 7월 17일 총리직을 사임 함에 따라 마하티르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1981년 7월 17일 새 총리로 임명된 마하티르 모하마드는 대대적인 경제 발전과 현대화를 추구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는 소위,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펼쳤다. 기존 잔인과 독재로 얼룩진 통치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유화조치를 펼쳤는데, 일례로 국가보안법 수감자 21명을 석방했다. 집권세력의 확장을 위해 ABIM의 지도자였던 안와르 이브라힘을 UMNO로 편입시켰으며, 이듬해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각 주의 지도자인 술탄 간의 대립을 완화시켰고,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현재 말레이시아가 산업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인종 분쟁을 줄이기 위해 부미푸트라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인들의 안전을 담보해 주는 방식으로 인종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1990년대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인구 과밀화를 막고 분산시키기 위해 수도 천도 정책을 펼쳐, 행정 수도인 푸트라자야가 새로 설치되었다. 이처럼 국가를 위해 노력한 지도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전직 총리보다도 더 강력한 독재정치를 펼쳐 재야인사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인종간의 갈등을 해소한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말레이인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대학교에서 멀쩡히 다니고 있던 비말레이인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퇴학시키는 한편 비말레이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예를 들어, 말레이인은 적정 선 한에서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지만, 중국인은 조금의 비판도 할 수 없었으며, 반대자들은 가차없이 구속, 수감되었으며 심문과 고문, 심하면 사형도 잇따랐다. 1987년 한 중국계 초등학교에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임명되자 이에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잇따랐는데, 이 때 야당 인사, 시민활동가 등 총 106명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수감된 사건이 있었다. 집권 UMNO 내의 부정경선도 있었으며, 이 때문에 1988년 위헌정당으로 해산되었다가 新UMNO를 창당하기도 했다. 1998년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을 동성애 혐의로 파면했는데 이 역시 정부가 꾸며낸 자작극이라며 비판받는다. 동년 APEC 정상회의 차 해외의 정상들이 입국했을 때 인권 문제가 노출되어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2003년 경제 발전의 또다른 일원으로 중학교에서 수학과 과학 과목을 영어로 전환했으며, 동년 10월 31일 22년의 장기집권을 마치고 퇴임했다. 2003년 10월 31일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가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하티르의 독재정치에 대한 유화조치를 펼치면서도, 부미푸트라 정책 등 기존의 정책들에 손을 대지 않았다. 재직 중 초등 교육을 무상·의무화 하여 가난한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 결과 말레이시아인의 문해율과 교육률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 결과로 '인적자원 개발의 아버지'로 호칭되었다. 그는 민족의 단결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몇 가지 정책을 펼쳤으나, 여전히 말레이인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사회의 발전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져 민주화라는 큰 문제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2008년 마하티르 정권 시절 투옥된 안와르 이브라힘의 집행유예기간이 만료되면서 UMNO의 지지도가 야권으로 이탈하는 결과가 벌어졌다. 그 결과 2008년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개헌저지선을 초과하면서 UMNO의 패배를 가져왔고, 당 내에서 나온 사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2009년 총리직을 사임했다. 2009년 4월 3일 나집 라작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2대 총리 압둘 라작의 아들이며, 유력 정치 가문 출신으로 주목받았다. 취임 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는데, 예를 들어 말레이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했던 부미푸트라 정책의 완화를 추진해 외국인들에게 지나쳤던 차별을 대폭으로 완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 정책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종종 민주화 시위에 직면해오고 있다. 부정 선거 관행을 고치고 있지 않아, 2013년 총선에서 야권이 더 많은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와 게리맨더링으로 UMNO의 재집권을 이끌었다. 한편 완화를 추진하던 부미푸트라 정책을 다시 강화해 더 강력한 인종차별과 이민제한을 추진하고 있으며, '악법'으로 꼽혀온 국가보안법을 폐지한 대신 새로운 법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선동처벌법 강화 등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야권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으며, 최근 그는 말레이시아를 UMNO의 일당독재체제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다. 2015년 국영기업 1MDB와 연계된 부패 스캔들을 계기로 야권 인사들과 국민들의 큰 저항에 맞부딪치고 있으며, 8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운동 단체 버르시 4.0 등의 시위 등, 나집 정부는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마하티르 전 총리가 동참하는 등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7월 1MDB 스캔들에 관해 해명을 요구한 관계로, 무히딘 야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및 압둘 가니 파타일 검찰총장 등 일부 공무원들이 경질되었다. 말레이시아는 연방제 국가이며, 선거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나라다. 현재 말레이시아의 정치 체제는 웨스트민스터 체제와 유사한데, 이는 영국 식민지의 유산이다. 국가 원수는 양디퍼르투안 아공인데, 흔히 왕으로 부른다. 왕의 임기는 5년이며, 피낭, 믈라카, 사바, 사라왁을 제외한 9개 각 주의 술탄(Sultan) 중에서 교대로 선출된다. 현재의 왕은 2019년에 선출된 파항주의 압둘라이다. 왕은 총리와 내각을 임명할 권리와 군대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통솔권 등을 갖는다. 1994년 헌법 개정 이후 왕은 대개 의례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인종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되며, 많은 정당들이 인종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신경제정책 또는 대체된 국가개발정책 등 확정적인 정책들이 부미푸트라(말레이인 또는 말레이시아 내 원주민/토착민)를 화족이나 인족 등 비부미푸트라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려놓기 위해 시행되고 있다. 이 정책에 따라 부미푸트라는 고용, 교육, 학사, 사업은 물론 값싼 집을 구매하거나 지원받는 데 있어 우선권을 갖는다. 이 때문에 비부미푸트라 및 외국인들의 반발이 심하며, 일각에서는 이를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 말레이시아의 법과 사회가 세속주의를 추구해야 하느냐, 아니면 이슬람 원리주의를 추구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일례로 1993년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는 이슬람 과격정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을 주도로 하는 클란탄 주의회가 통과시킨 형사법의 시행을 금지한 적이 있으며, 연방 정부는 형사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임을 밝혔다. 의회는 연방의회와 주의회로 나뉜다. 양원제로 상원(원로원)과 하원(대의원)이 존재한다. 현재 국회의원은 총 222명이고, 최대 5년 임기를 갖는다. 상원의원 70명은 3년 임기를 갖으며, 그 중 26명은 13개의 주의회에서 선출되고, 나머지 44명은 총리의 제안에 따라 국왕이 임명한다. 국회는 다당제를 기초로 하며, 소선거구제 형태로 선출한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독립한 직후 여러 개의 정당이 연합해 만든 국민전선(Barisan Nasional, BN)이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각 주에는 단원제 성격의 주의회가 존재하며, 이 의원들은 단일 선거구에서 당선된 이들이다. 주정부는 주수상이 지도하며, 주수상은 주의회 내 다수당 소속 의원이다. 각 주에는 세습형 지도자가 있는데, 주수상은 대개 말레이인이어야 하며 총리의 추천에 따라 지도자가 임명한다. 하지만 꼭 말레이인인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사라왁의 초대 주수상 스테픈 칼롱 닝칸, 사바의 초대 주수상 툰 푸아드 스테픈스, 전 주수상 총카키엣 등 비말레이인들도 있다. 국회의원 선거(총선거)는 5년 이내로 치러지며, 가장 최근에 치러진 총선은 2013년 5월에 있었다. 21세 이상의 등록된 유권자는 대의원 후보자들에게 투표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주의회 의원들도 선출할 수 있다. 의무투표제를 시행하지 아니하며, 사라왁은 예외적으로 주 총선이 연방 총선과 동시에 치러지도록 하는 협약이 있지만 독자적인 주 총선도 치러진다. 행정부는 내각으로 구성되며, 총리가 주도한다. 총리는 대의원 의원이어야 하며, 국왕을 조언하고 의회 다수당을 지도한다. 내각 의원들은 원로원 의원과 대의원 의원 양측에서 선택될 수 있다. 총리는 내각의 수장이자 정부의 수장이다. 현재 총리는 2009년에 임명된 제6대 나집 라작이다. 말레이시아의 법률 체계는 영국의 관습법에서 유래했다. 이론적으로 사법부는 독립되어 있지만, 이 독립성은 판사의 임명 과정에서 낮은 책임성과 투명성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고 법원은 연방 법원이며, 그 밑으로는 상소 법원과 대법원(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 양측에 각각 하나씩 존재)이 있다. 또한 왕실에 반하는 행위를 처리하는 특별 법원이 있다. 사형제는 살인, 테러, 마약밀매 등 중범죄자들을 처리하는 데 적용된다. 시민법원과 같지만 다른 샤리아 법원이 존재하며, 샤리아 율법에 따라 무슬림의 가족문제 또는 종교 관련 문제를 다룬다. 말레이시아의 정당들을 주로 단독으로 활동하지 않고 연합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정당연합은 선거뿐 아니라 국정을 총괄할 때도 유지된다. 대표적인 정당연합은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이며, 현재 집권연합이다. 국민전선에는 독립 후 쭉 집권하고 있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말레이시아화교협회(MCA), 말레이시아인도인회의(MIC) 등이 있으며, 이 3당은 단일민족 정당인데 UMNO는 말레이인, MCA는 중국인, MIC는 인도인, 특히 타밀인을 대변한다. 주요 야당으로는 인민정의당(PKR), 민주행동당(DAP),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PAS가 이슬람 과격주의를 추구하는 것 외에 민족/종교주의적 성향은 없다. 다만 DAP는 중국인, PKR은 인도인의 성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가 처음부터 동일했던 건 아닌데, 한 예로 PAS는 한때 국민전선의 일원이었다가 축출된 뒤 인민동맹의 일원으로 있었다. 국민전선은 부미푸트라, 특히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는데 반해, 야당은 논부미푸트라, 특히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중국인을 대표하는 정당인 MCA나 인도인을 대표하는 MIC는 국민전선의 일원이다. 연합에 속하지 않은 정당들은 군소 정당들인데, 대표적으로는 민중운동의 성과인 사회당(PSM), 인민당(PRM) 등이 있다. 동말레이시아, 특히 사라왁과 사바에는 각 주를 대표하는 정당들이 있는데, 그 예로 사바통일당(PBS), 사라왁인민당(PRS) 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국민전선에 소속되어 있다. 공산주의를 금기하므로 공산당의 결성은 불법인데, 한때 존재했던 말라야공산당(PKM), 북칼리만탄공산당(NKCP) 역시 불법이었다. 헌법상 복수정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상 국민전선, 특히 UMNO에 의한 일당독재체제이다. 집권연합인 국민전선은 철저한 부정선거 및 개리멘더링 선거구로 60년 가량 장기집권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 및 인권침해라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22년간 장기집권한 마하티르 모하마드는 집권 시 '경제발전'을 명목으로 강도높은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시기 정권을 비판한 비말레이계 청년들이 구속, 수감되었다. 2013년 총선에서 인민동맹이 더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조작 및 협박 등으로 국민전선의 승리를 이끌어,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는 야권지도자 안와르 이브라힘 및 야권 소속 의원 티엔 추아 등을 구속, 수감 및 위협할 정도로 야권인사 및 야당에 대한 탄압이 매우 심각하며, 미국 등 서방의 비판을 종종 받는다. 사라왁, 사바에서는 특히 현지인을 대변하고 분리독립을 추진하려는 정당들이 심하게 탄압받는데, 일례로 1990년대 초반 PBS 소속 당원들이 대규모로 구속, 수감된 사건이 있었다. 사건 후 해당 정당들은 국민전선에서 축출되었으나, 현재 재가입했다. 정치적 갈등은 심하며, 야권 내에서도 갈등은 존재한다. 특히 PAS의 이슬람 극단주의적 법안 관련 문제로 기존의 인민동맹이 해체되었으며, 기존에 남은 DAP와 PKR이 국가신뢰당(Amanah)과 함께 '희망전선(Pakatan Harapan; PH)'을 새로 결성했다. 말레이시아는 13개 주 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두 개의 큰 지역으로 나뉘는데 11개의 주와 2개의 연방 직할구가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에 있고 2개의 주와 1개의 연방 직할구가 동말레이시아에 있다. 각 주는 시 또는 구역으로 나뉘며, 또다시 소구역(mukim)으로 나뉜다. 사바와 사라왁의 구역들은 분할에 따라 묶인다. 1963년 말레이시아가 신설되었던 당시 총 14개의 주만 있었으나, 1965년 싱가포르가 탈퇴하여 13개로 줄어들었다. 당초 연방 직할구는 없었으나, 1974년 쿠알라룸푸르가 슬랑오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시작으로 생겼으며 이후 푸트라자야와 라부안이 신설되었다. 주의 관할은 연방 정부와 주 정부 둘 다인데, 각각 다른 권한을 갖고 있으며 연방 직할구는 연방 정부가 직접 관할한다. 비록 자치법령의 몸체가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제정하여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지만, 시의회, 구의회, 지방의회 등 하위 관할은 각 지역이 맡는다. 연방 헌법은 연방 직할구 외의 지역 관할을 각 주의 전담관할로 하지만, 실제로는 연방 정부가 각 지역의 부의 내정에 간섭한다. 총 144개의 지역의회가 있는데, 11개는 시의회, 33개는 지방의회, 97개는 구의회이다. 13개의 주 모두 역사 속의 말레이 왕조를 바탕으로 하며,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의 주 11개 중 9개는 말레이 주(또는 이슬람 주)라 하여 고유의 왕실을 두고 있다. 국가원수인 양디-퍼르투안 아공(국왕)은 5년마다 이 9개의 주의 지도자(술탄)가 번갈아가며 선출한다. 이렇게 해서 선출된 왕은 군주제를 시행하지 않는 주에서 각 주수상과의 합의를 거쳐 4년간 업무를 수행할 정부 수반을 임명한다. 각 주에는 주의회로 알려진 단원제 의회가 존재하며, 나름의 주 헌법을 작성한다. 사바와 사라왁은 다른 주에 비해 더 많은 자치권이 있는 주로 간주되며, 명백히 다른 이민법과 통치권, 독자적인 영주권 제도가 존재한다. 그런데, 최근 이 주는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은 사바주 일부 지역에 관한 분쟁을 외교 문제화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2003년 브루나이와 분쟁 중인 대륙붕 지역에서 가스 및 석유 채굴작업을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과거 싱가포르가 탈퇴하기 전에는 인도네시아와 리아우 제도를 두고 영토 분쟁을 벌였으며, 후에 싱가포르의 탈퇴로 싱가포르와 그리 좋지 않은 관계에 놓여 있다. 2002년 한때 싱가포르의 조호르 해협 매립 관건으로 양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2013년에 말레이시아는 부정선거 및 반대파 억압은 물론, 일당독재체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 등으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대한민국과 말레이시아는 1960년에 수교하였다. 1960년 2월 23일,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2년 5월 쿠알라룸푸르에 주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관이, 1964년 4월에는 서울에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대한민국의 대(對)말레이시아 수출은 62억7513만USD, 말레이시아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04억6781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말레이시아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21위의 수출국이자 제14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14,409 명(재외국민 14,403 명, 시민권자 6 명)의 한민족들이 말레이시아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전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는 소위,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펼쳤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장학생을 대한민국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의 최규하 전 대통령(1979-1980 재직)이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하였으며, 이로써 남북 모두와 수교하는 나라가 됐다. 사라왁 주와 북한은 한 협정을 통해 북한 인부들이 사라왁의 탄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이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를 합법적인 고용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정치 사상을 전파하지 않는 한 취업허가서를 발급해주고 국적을 문제삼지 않는다. 라마 1세(재위 1782년 - 1809년)는 태국 세력을 크게 확장해 말레이 반도의 클란탄까지 지배하였다. 그러나 곧 영국이 들어오고 영국과 협상을 하여 경계를 확정하는데 이 때 퍼를리스, 크다흐, 클란탄, 트렝가누는 영국령으로, 파타니, 나라티왓, 얄라, 사툰은 태국으로 편입되게 했다. 싱가포르는 1963년 사바, 사라왁과 함께 신설 말레이시아에 가입했으며, 당시에는 싱가포르 주()라는 말레이시아의 한 주였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말레이시아 정부와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인종 문제였다. 싱가포르만 따지고 보면 인구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지만, 말레이시아 전체에서는 말레이인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싱가포르 주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내세워, 말레이인을 우대하고 편애했던 툰쿠 압둘 라만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를 비판했다. 1964년 싱가포르에서 인종 폭동이 발생했고, 이후 적지 않은 마찰이 빚어지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사실상 싱가포르를 축출했다(그러나 실제로는, 정부의 압력 상황에서 싱가포르가 자발적으로 탈퇴한 것이었다).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독립했다. 양국은 한편으로는 교류도 하면서 어느 정도 괜찮은 관계를 보이는 듯 했으나, 실제로 그 안에는 씻기 어려운 앙금이 있었으며, 심지어 2002년 당시에는 양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조차 있었다. 싱가포르는 영토가 너무 작아 간척사업을 통해 영토를 인위적으로 늘렸는데, 이 과정에서 양국의 국경이 되는 조호르 해협에 대한 매립을 논의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가 조호르 해협을 매립하여 각국 선박들의 말레이시아의 탄중플르파스 항 이용을 방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문화적, 민족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은 나라다. 두 나라 다 말레이인, 또는 말레이 계열의 민족들이 대부분이며 언어도 말레이어를 사용하지만, 서구 열강들의 분단으로 인해 서로 다른 생각과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다. 말라야가 1957년 독립한 이후 수하르토는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ja; 말레이시아에서는 '위대한 말라야'라는 뜻으로 'Melayu Raya')를 주장하며 말라야와 함께 대(大)말레이 국가의 건설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파열음이 생겼고, 말라야가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를 합병한 뒤 '말레이시아'를 건국하려 하자 관계가 틀어져, 결국 위대한 인도네시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인도네시아는 사바를 무력으로 합병하였고, 이에 말레이시아가 군을 보내 사바를 되찾았다. 1960년대 양국간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으며, 1965년 1월 1일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가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으로 선임된데 대하여 항의의 표시로 유엔을 탈퇴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영토분쟁 등 모든 것이 그나마 해결됐지만, 현재도 양국간의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외국인 배척 및 탄압이 심한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강제추방, 심문, 고문, 심지어는 강제처형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있다. 2014년 12월 말레이시아 정부가 자국에 불법체류 중인 인도네시아인 7만명을 추방시켜, 인도네시아 측의 비난을 받았다. 2015년에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말레이시아 나집 라작 총리를 방문했으며, 조코위는 자국 여성들의 해외 가정부 취업을 즉각 중단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주로 주석, 팜유, 석유를 생산.수출하며, 제조업과 관광업을 주요 산업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 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자체적으로 극복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98년 9월 초 환율을 고정시키는 조처와 함께 자본통제에 들어갔다. 자기나라 통화인 링깃화의 달러화 환전을 못하게 하고, 나라 밖에 있는 링깃화는 2달 안에 모두 국내로 갖고 들어오도록 하여, 외국에 그냥 놔 둔 링깃화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또 국내 증권을 산 외국인이 그 증권을 다시 팔려면 1년을 기다리도록 했다. 자본통제는 국내경제를 해외 금융·외환시장과 차단한 뒤 경기부양 정책을 펴기 위한 사전조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런 조처 뒤 통화량 확대공급, 금리인하, 공공지출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기부양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취해 나갔다. IMF의 통계에 의하면, 말레이시아의 2008년 국내총생산(GDP)은 2216.06억 달러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부터 고무의 플렌테이션과 주석의 채굴, 천연가스의 채굴 등 특정한 농작물과 광물의 생산이 번성하였으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총리가 내세웠던 "와와산 (말레이어로 비젼의 뜻) 2020"(비젼 2020, Vision 2020) 정책에 따라, 종래의 농작물과 광산물의 수출, 관광업에 의존하였던 체질로부터 탈피하여 2020년까지 말레이시아의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0년 6월,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위해인프라 프로젝트에 700억달러 규모의 자금 투입과 연 경제성장률 6% 달성 등을 핵심으로 하는 향후 5년간의 제10차 말레이시아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나지브 총리는 “말레이시아는 해외 투자자들을 더 많이 유치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재능있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현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의 통화 단위는 말레이시아 링깃(RM)으로, 1링깃은 약 325원 정도이다. 보조통화는 센(SEN)이라고 하며, 1링깃은 100센에 해당한다. 지폐는 100링깃, 50링깃, 20링깃, 10링깃, 5링깃, 1링깃의 6종류가 있고, 동전은 50센, 20센, 10센, 5센, 1센의 5종류가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공항이나 시중 은행, 호텔, 환전소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생수 500ml의 경우 약 1링깃(400원 정도), 택시의 기본 요금은 3링깃(1200원 정도)이다. 경제는 전적으로 농업, 광업 등 1·2차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최대 주석, 천연 고무, 팜유 생산국으로 1960년대 만 해도 주요수출품이 주석과 팜유였다. 이후 정부의 강력한 경제정책으로 말레이시아는 동남아국가 중 3번째로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으며, 주요 산업도 관광업과 제조업으로 전환되었다. 농업에 있어서는 주산물이 쌀, 고무, 코프라 등이다. 쌀은 국민의 주식이지만, 쌀 자급률이 30%에 불과해, 자급자족하지 않고 매년 다량의 쌀을 수입한다. 따라서 정부는 관개사업 실시, 벼의 품종 개량 등을 통해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수출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합성고무의 발달, 고무 농원 노동자 등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외에도 열대과일 재배, 도시근교 채소, 원예농업이 발달되어 있다. 광업에서는 주석광(錫鑛)과 철광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대 주석 생산국으로 주석광은 서해안 몬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충적토를 준설(浚渫)하여 채굴하며 주석을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되어있다. 철광은 동해안에 있으며 그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된다. 그리고 석유산업도 사라와크 주에서 소량 산출되었으나, 그 후 사바주·사라와크 주에서 대규모 해양유전이 개발되면서 석유채취, 가공산업도 주요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정제기술이 발달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석유는 산유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석유 고갈에 대비해 대규모의 유전은 하지 않고 있다. 제조업은 1970년대 말부터 개발하기 시작해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 제조업이 발달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주로 전기·통신기계와 수송기계 생산을 하고 수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관광업도 이 나라의 주 수입원이다. 고무, 주석광, 철광석은 수출하며 식량과 공업제품을 수입한다. 따라서 경제는 고무, 주석, 철의 국제가격의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약간의 1차 산품만을 생산하는 산업구조는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이 외에도 말레이시아산 저가 과자의 수출도 활발하다. 육상교통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잘 발달해 있다. 모노레일도 운행 하고 있으며 특히 서해안을 따라 포장도로와 철도가 잘 정비되어 있다. 말레이시아의 도로망은 98,721km에 달한다. 그 중 1,821km는 고속도로이다. 차량은 좌측통행을 한다. 또한 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진 넓은 국토의 영향으로 국내선을 포함한 항공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말레이 철도의 노선망이 있다. 일반 철도(고속 철도 포함), (MRT), 경전철(LRT), 모노레일 그리고 케이블 카가 있다. 일반 철도는 대부분 도시간 승객 수송과 화물 운송, 그리고 일부 시내 대중교통으로 사용된다. 긴 반도의 서해안 끝의 조호르바루(Johor Bahru)에서 태국 접경의 파당브사르(Padang Besar)까지 서해안 950km를 연결하고 있으며 동해안선은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은 게마스에서 태국 동해안쪽 접경 툰팟까지 528km를 잇고 있다. 서해안선과 동해안선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의 고산지대와 열대우림지대를 버스가 연결시켜 주고 있다. 경전철은 시내 대중교통이나 공항 내 청사 간의 승객 수송과 같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된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과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잇는 고속철도 노선도 있다. 이 노선에는 2가지 열차편이 운행 중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한 모노레일 노선은 쿠알라룸푸르의 대중교통으로 이용되는 것이고, 유일한 케이블 카는 피낭에 있다. 쿠알라룸푸르 주변에는 모노레일을 위시한 각종 통근 철도가 발달해 있다. 자동차는 약 900만대이며 인구 3명당 1대이다.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부터 도로가 정비되어 왔다. 말레이시아 항공과 에어아시아 등에서 국내외 항로에 취항하고 있다. 특히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항로의 주요 경유지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파이어플라이 항공이 합세하였다. 말레이시아의 면적은 329,758km이며, 세계에서 67번째로 큰 나라이다. 말레이시아는 크게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흔히 '반도'를 뜻하는 '스므난중'으로 알려져 있음)와 보르네오 섬 북부의 동말레이시아로 나뉘는데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는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좁은 코스웨이와 다리 하나가 국토를 싱가포르와 연결한다. 베트남, 필리핀과 해상 국경을 맞대고 있다. 토지의 경계는 프를리스 강, 골록 강, 파갈라얀 운하 등 자연경계로 나뉘기도 하는데 일부는 분쟁 중이다. 브루나이는 사라왁 주에 의해 연결되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며, 사실상 말레이시아 내 소수민족 거주지나 다름 없다. 말레이시아는 유라시아 본토와 말레이 제도 둘 다 영역이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남부 조호르 주의 탄중피아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말라카 해협은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위치하며, 무역의 40%를 이끌어 오래 전부터 국제 무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3/4가 밀림 및 습지대로 구성된다. 말레이시아는 동중국해에 의해 둘로 나뉘며,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 양쪽다 해안지대에서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여러 자연적 특색들을 고유한다.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는 말레이시아 영토의 40%를 차지하며, 길이는 북에서 남으로 740km(460마일), 동서의 폭은 최대 322km(20마일)이다. 2,183m(7,162피트)의 코르부산 을 최고봉으로 하는 티티왕사 산맥이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를 동해안과 서해안으로 나누며 반도의 중심으로 내려온다. 이 산들은 대개 숲지대이며, 주로 화강암 및 기타 화성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암석들은 차츰 부식되어 카르스트 지형을 형성한다. 이러한 지대는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의 수계(水系)에서 유래했다.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의 해안지대의 폭은 최대 50km(31마일)이며, 해안선은 1,931km(1,200마일)이나 항만들은 서해안에서만 가능하다. 말레이시아는 아시아 대륙 본토에서 유일하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군주국이다. 동말레이시아는 보르네오 섬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해안선은 2,607km(1,620마일)이다. 동말레이시아는 해안지대, 언덕지대, 계곡지대, 산악지대로 구분된다. 크로커 산맥이 사라왁 주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며, 사바 주에 의해 나뉜다. 말레이시아의 최고봉인 키나발루산이 존재하는데 높이는 4,095m(13,435피트)이다. 키나발루산은 키나발루 국립공원에 의해 보호되며,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이다. 높은 산악지대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간의 경계를 형성한다. 사라왁에는 세계 최대의 동굴인 물루동굴이 위치한다.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 양쪽 다 여러 개의 섬이 있는데, 가장 큰 섬은 방기 섬이다. 기후는 적도 기후이며 매년 남서(4월 내지 10월) 또는 북동(10월 내지 2월)지역의 몬순에 의해 결정된다. 온도는 주위 바다에 의해 적정히 유지된다. 습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며, 연간 평균 강수량은 250cm(98인치)이다.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와 동말레이시아의 기후는 다른데,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가 즉시 본토 바람의 영향을 받는 반면 동말레이시아는 해양성 기후를 띈다. 국지 기후는 고지대, 저지대, 해안지대에 따라 나뉜다. 기후변화는 해수면과 강수량의 영향을 받으며, 홍수의 위험이 높아지고 가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적도와 가깝다는 점 때문에 4계절이 없고 우기와 건기가 있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에 속한다. 열대지역에 속하는 말레이시아의 기후는 연중 고온 다습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이 21~32℃로 연평균 강우량 2,000~2,500mm, 평균 습도는 63~80%이다.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의 기온 차는 9~12℃ 전후로 낮에는 30℃를 웃돌다가도 저녁과 밤에는 매우 선선한 기후를 유지한다. 건기와 우기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며, 우기라도 일시적인 열대성 소나기의 횟수가 증가하는 것이므로 여행에는 불편함이 없다. 온건주의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 사는 다민족 국가이다. 최근 저렴한 물가 등으로 외국인들의 대표적인 유학 장소로 꼽히고 있으며, 임금 및 근로환경이 양호해 해외 노동자들, 특히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진출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 뒤에는 심각한 분열과 인권 탄압이 숨어져 있다. 2010년 조사에 따르민 인구는 28,334,135명이며, 말레이시아는 세계에서 42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이 안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인구의 91.8%가 말레이시아 시민권자이며 이 중 67.4%가 부미푸트라이다. 헌법상 말레이인은 무슬림들이며 말레이 문화와 관습을 따른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개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이들의 후손이며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부미푸트라는 꼭 말레이인이 아니더라도, 타이인, 크메르인, 시암인 및 사라왁, 사바인도 포함한다. 비말레이계 부미푸트라는 사라왁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사바 인구의 ⅔ 이상을 차지한다. 말라야 지역에는 어보리진 계열의 오랑아슬리들이 소수 거주한다. 주마다 부미푸트라가 갖는 법적인 지위는 다르지만, 이들은 타 민족에 비해 월등히 높은 지위에 있으며, 정치적 혜택 등으로 종종 비판을 받고 있다. 부미푸트라의 지위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하는 타 민족들도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24.6% 가량은 화족이며 7.3% 가량은 인족 들이다. 화족들은 역사적으로부터 사업과 경제 등에서 우위를 점하며, 풀라우피낭 주에서는 다수 민족이다. 인족 들은 대부분이 남부 인도 계열인 타밀인이며 19세기 초반 말레이시아에 유입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단순히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으나, 해외에서 말레이시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시민권이 주어진다. 이중국적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이민자의 시민권 취득은 보르네오 지역(사라왁, 사바)과 말라야 지역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모든 시민들은 12세에 마이카드(MyKad)라고 불리는 신분증을 발급받는데 생물학적 스마트 칩이 내장되어 있어 논란이 되고 있으며, 어딜 가든 무조건 갖고 다녀야 한다. 2009년 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6명이었으며 기대 수명은 75세였다. 말레이시아를 의료관광목적지로 발전시키려는 목표에 따라, 5%의 사회개발영역 정부예산이 보건에 사용된다. 인구의 대부분은 말라야 지역에 집중돼 있으며 약 2800만 명 중 2000만 명 가량이 말라야 지역에 살고 있다. 인구의 70%가 도심 지역에 살고 있다. 쿠알라룸푸르는 수도 이자 말레이시아의 최대 도시이며, 통상과 재무의 중심지이다. 1999년 계획되어 현재 건설 중인 푸트라자야는 정부의 중심지이며, 쿠알라룸푸르의 혼잡을 최소화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는데 행정부와 사법부의 상당 부분이 존재한다. 노동 집약적 산업의 발달로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3백만 명의 이주 노동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바에 중심을 두고 있는 비정부기구들은 사바 인구 3백만 명 중 2백만 명이 불법이민자로 추정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171,500명의 난민과 망명인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79,000명은 미얀마, 72,400명은 필리핀, 17,700명은 인도네시아인이다. 말레이시아는 2007년 공식적으로 인신매매범들을 강제 추방키로 했으며, 논란의 역사를 갖고 있는 자원군 RELA를 고용하여 해당 이민법을 실시했다. 유아 교육(어린이집, 유치원)은 의무가 아니지만, 초등 교육은 모든 말레이시아인들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초등 교육은 총 6년이며 그 다음에는 중등 교육을 받는데 이 이상은 의무가 아니다.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다. 초등학교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말레이어를 쓰는 공립학교와 중국어나 타밀어를 쓰는 문화학교가 있다. 초등 교육은 총 6년이며,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UPSR이라는 시험을 보게 된다. 그 뒤 중학교로 배정된다. 중학교도 초등학교와 비슷하게 공립학교와 문화학교 계열로 나뉘나, "문화학교"라는 표현 대신 "자율형 사립 중학교"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중등 교육은 총 5년인데 하급 3년과 상급 2년이 포함된다. 3학년 학생들은 PT3, 5학년 학생들은 SPM(Sijil Pelajaran Malaysia)이라고 불리는 대학 입시 시험을 보게 된다. 대학은 대개 4년이지만, 일부 사립학교들이 시행하고 있는 파운데이션(Foundation)은 정식 과정이 아닌 차에서 3년인 경우가 많으며, 디플로마(Diploma)는 2년이다. 대학교는 공립대와 사립대로 나뉘는데 사립대는 흔히 유니버시티(university)와 컬리지(college)로 나뉜다. 공립대는 9월에 학기가 시작되며, SPM 이후 최소 9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1999년부터 대학 입시 프로그램이 시행됨에 따라 12개월의 대학 입시 프로그램을 거친 학생들은 공립대에 입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부미푸트라에게는 10%만 열려있어, 실제로 비부미푸트라의 공립대 입학은 어렵다. 뿐만 아니라 공립대 입학 시 부미푸트라에게 가산점을 붙이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비부미푸트라 학생들이 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들은 사립대로 주로 간다. 사립대는 1월에 학기가 시작한다는 점 때문에 긴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해외 명문대로 편입되도록 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어 외국인들이 많이 선호한다. 다만 SPM 성적이 3월에 나오는 관계로 다른 성적을 통해 미리 입학시키곤 한다. 물론 불법이다. 말레이시아 헌법에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2010년 인구 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민족과 종교가 꽤나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구의 61.3%가 이슬람교를 믿으며, 19.8%가 불교, 9.2%가 기독교, 6.3%가 힌두교, 1.3%가 유교, 도교 등의 전통 중국 종교를 믿는다. 0.7%가 무교이며, 1.4%가 다른 종교를 믿거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수니파와 샤피파가 말레이시아 이슬람의 지배적인 세력이다. 말레이시아 헌법은 "말레이인"을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주로 무슬림이나, 말레이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말레이 문화를 따르거나,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살거나 그쪽의 후손인 사람들을 말레이인으로 보고 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의 83.6%가 불교도이고, 3.4%가 도교도, 11.1%가 기독교도이며, 풀라우피낭 주에는 휘무슬림(Hui-Muslim)이라고 불리는 중국계 이슬람교도가 소수 존재한다. 인도인의 86.2%가 힌두교도이며 6.0%는 기독교도, 4.1%는 무슬림이다. 비말레이계 부미푸트라 사이에서는 기독교도가 46.5%로 매우 두드러졌으며, 40.4%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무슬림들은 종교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무적으로 샤리아 법원에 문제를 맡겨야 한다. 이슬람 판사들은 말레이시아의 주요 마다브인 샤피이슬람법학교의 규율을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샤리아 법원의 사법권은 무슬림들의 결혼, 상속, 이혼, 배교, 개종, 양육권 등의 문제에 제한되어 있다. 기타 범죄 또는 민사위반죄 등의 사법권은 없으며, 이는 시민재판소에도 없다. 대법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시민 법원은 종교적 문제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사회적으로 우대받으며, 같은 부미푸트라라도 무슬림 부미푸트라가 비무슬림 부미푸트라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예를 들어, 공립 대학교에 입학할 때 무슬림들은 가산점을 받아, 성적이 비록 낮게 나오더라도 입학하거나, 시험에서 쉽게 합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보다 성적이 높게 나온 비무슬림들이 시험이나 입학 과정에서 탈락하여, 무슬림 혜택은 종종 종교차별이라고 비판받는다. 또한 비무슬림이 무슬림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고 판단되거나, 무슬림처럼 행동하는 행위(예: 꾸란이나 샤하다가 적힌 옷을 입는 것, 무슬림들에게 무슬림식 인사를 하는 것, 무슬림들에게만 허락된 행위를 하는 것)는 무슬림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판단하여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실제로 대한민국의 가수 그룹 B1A4는 무슬림들의 허락을 받고 그들과 같이 퍼포먼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아 처벌을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또한 무슬림들을 상대로 한 선교활동은 금물이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편이며, 오히려 이슬람 과격주의, 원리주의, 테러주의 따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슬람을 위한 모스크, 불교 신도를 위한 사찰, 힌두교의 힌두 사원, 그리고 교회와 성당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 각 종교의 축제마다 타종교인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함께 초대하여 즐기는 ‘오픈 하우스(Open House)’라는 행사를 개최한다. 종교 관련 축제 시기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말레이시아 특유의 성숙된 관용의 문화를 실제로 관찰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는 말레이시아어(Bahasa Malaysia)이며, 이는 말레이어가 표준화된 형태이다. 정부 정책에 따른 전문용어는 말레이시아어이나, 법률적으로는 공용어를 말레이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어는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로,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내의 논부미푸트라(Non-Bumiputera)들도 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일부는 이를 구사하지 못한다. 말레이어의 또 다른 표준인 인도네시아어와 매우 흡사하여 의사소통에도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다만, kantor, mampir, apotek, karcis, akuntabel 등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비슷도 하지 않은 단어들을 사용할 경우 큰 지장이 생길 수 있다). 본래 말레이어의 철자법은 영국이 정한 걸 개정한 자아바(Za'aba)였으나, 네덜란드식 철자법을 개정한 수완디(Soewandi)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와 마찰을 일으키자 합의하여 완전한 철자법(EYD; Ejaan Yang Disempurnakan)을 제정했다. 표준 말레이어는 구 조호르리아우어와 고급 말레이어의 중간 위치를 점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공용어법에 따르면 "말레이어의 문자는 루미(로마 문자)로 한다"고 하지만, 이는 말레이 문자라고 하는 자위(아랍 문자)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적으로 루미를 훨씬 더 선호하며, 자위는 대개 이슬람교에 관련된 부분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일상적으로 변칙어(broken language) 형태의 말레이어를 사용하며, 이것은 어디나 일상화돼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어디 가냐고 물을 때 주로 'Kau pigi mana?'를 사용하지만, 제대로 된 형태는 'Di manakah (yang) engkau pergi?'이다. 심지어 'yg(원래는 yang)', 'utk(원래는 untuk)', 'm'cri(원래는 mencari)' 등 축약형들까지 널리 사용된다. 정부는 변칙 말레이어의 사용을 배제하고 있지만, 생활에 깊숙히 배어있는 건 물론 광고에서조차 널리 사용되어, 실질적으로 배제할 순 없는 실정이다. 현재는 전 지역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지역에 다라 조금씩, 때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보르네오 지역(사바, 사라왁, 라부안) 주민들이 사용하는 말레이어와 말라야 지역(쿠알라룸푸르, 슬랑오르 등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사용하는 말레이어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데, 예를 들어 'a'로 끝나는 단어들은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아' 그대로 발음하지만, 말라야 지역에서는 '으'와 '어'의 중간정도로 발음한다. 또한 '망가진, 훼손된'을 뜻하는 단어인 'rosak'도 보르네오 지역, 특히 사바와 라부안에서는 인도네시아어인 'rusak'에 가깝게 발음한다. 또한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말라야 지역에서 사용되지 않는 'anu'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밖에 클란탄 주에서는 태국어의 영향이 큰 클란탄팟타니어, 또는 클란탄 말레이어를 사용하는데 말레이시아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다. 특히 '먹다'를 뜻하는 'makan'을 'make', '안된다'를 뜻하는 'jangan'을 'jange'라고 하는 등 'an', 'am' 등으로 끝나는 단어를 'e'로 끝낸다. 말레이어 외에도 영어 역시 상업과 공업에서 널리 쓰이며, 말레이시아 학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어 교육을 받는다. 영어는 역사적으로 공용어였지만, 1969년 5·13 사건 이후 말레이어가 두드러졌다. 1967년 공용어법에 따라 영어는 일부 공식적 자리에서 공용어로서의 역할을 하나, 꼭 공용어라 하긴 어렵다. 영어는 대부분의 국민이 제2언어로 사용하며, 사업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은 물론 대학에서도 대개 이 언어 위주로 사용한다. 말레이시아에서 규정하는 표준 영어는 '말레이시아 표준 영어'로 영국식 영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학교 교육 역시 영국식 영어로 가르친다(다만, 일상 또는 온라인 상에서는 미국식 영어를 섞어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말레이시아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는 싱글리시와 유사한 소위 '맹글리시(Manglish)'나 '망글리시'로 불리는 독특한 영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영어권 화자들이 전혀 알아듯지 못하는 상당한 부분을 포함하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변칙영어(broken english)가 만연하다. 예를 들어 맹글리시 단어 중에는 'where got'이 있는데, 이는 말레이어 'mana ada'를 그대로 직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영어로는 'What are you talking about'이다. 맹글리시는 싱가포르의 싱글리시처럼 문장 끝에 'lah'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말레이어 단어나 중국어 단어를 넣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어 'disturb'대신 'kacau'를, 'very' 대신 'sibeh'를 사용한다. 말레이시아는 한 문장에 4개국어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한 변칙영어 때문에 외국인들 앞에서 자칫 망신을 당할 수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와 장소를 구분하여 맹글리시이와 잉들리시 자유자재로 바꿔 쓸 수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말레이시아인의 상당수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지만 영어로 일상 회화가 가능하다. 말레이시아 내 중국계들은 중국어를 사용한다. 표준 중국어인 만다린 외에도 방언인 객가어, 광둥어 등 종류가 다양한데 말레이시아 중국어는 이들이 전반적으로 섞인 편이다. 풀라우피낭 주에서는 '피낭 호키엔(피낭 객카어)'이라 불리는 독특한 방언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류를 떠나서 말레이시아 중국어에는 액선트를 표준 중국어와 같이 강하게 하지 않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인들은 중국어뿐 아니라 공용어인 말레이어와 통용어인 영어까지 총 3개국어(때로는 그 이상) 이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외국에서 말레이시아 중국인들의 이런 점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내 인도인들은 주로 남부 인도인들로, 힌디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타밀어인데 말레이어를 주로 사용하는 말레이인, 중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중국인과는 달리 타밀인들은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타밀어를 할 줄 모르는 인도인도 적지 않다. 인도인의 한 갈래로 전반적인 상류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들은 대부분 영어를 구사할 줄 알며, 이들의 영어는 말레이인이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영어보다 수준이 높다. 동말레이시아의 원주민들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다. 사라왁 주에는 이반어, 다약어가 있고 사바 주에는 카다잔어, 두순어, 무룻어, 바자우어 등 종류가 다양한데 이 중 카다잔어와 두순어는 매우 흡사하여 "카다잔두순어"라는 통일적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언어들은 말레이어와는 계통 자체가 다르지만, 일부 비슷한 점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특히 이반어에는 말레이어 차용어들이 많다. 1973년 동말레이시아의 자치권이 소멸된 이후 이 언어들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많은 원주민들이 자기 부족의 언어 대신 말레이어나 영어를 더 선호하는 경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각 언어학회들이 생기면서 이 언어들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적어도 70여 개의 다른 어족(語族)에서 생성된 다양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언어들은 사업, 여행, 산업, 라디오, TV 뿐만 아니라 교육기관 등에서 쓰이고 있으며, 최근 말레이시아를 자녀들의 유학 목적지로 선택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오랫동안 반대파 억압, 불법 투옥, 심문, 고문, 강제처형 등 극단적인 인권 유린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1957년 독립 이후 현재까지 5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은 야권 탄압 등 권위주의 통치로 비판을 받고 있으며, 특히 시위자들에 대한 불법적인 처벌이 가능한 '국가보안법' 및 부미푸트라들을 전적으로 우대하는 식의 인종차별 정책 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UMNO는 지난 60여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야권 탄압 등으로 비판을 받아 왔으며, 이 과정에서 1만 명 이상의 반체제 인사들이 구금되거나 살해되었고 일부는 추방당했다.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들로는 안와르 이브라힘, 티엔 추아, 림관엥, 닉 아지즈 빈 닉 맛, 압둘 하디 빈 아왕 등이 있으며, 특히 정부의 눈엣가시로 간주되는 이는 종종 감시의 대상이 된다. 당초 이 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98년 11월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 세계 정상들이 말레이시아에 입국했을 때 하나둘 씩 드러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도착하자마자 그를 만나지 않고 당시 구속된 안와르의 부인 완 아지자부터 만나는 가 하면 각국의 사회운동가 600여명도 몰려들어 내정을 문제삼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시위가 터졌는데, 곧바로 유혈사태 직전까지 가더니, 시위자 색출을 위한 노란색 물대포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총리였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홀로'를 고집해 비판을 받았다. 2012년 12월 한 대학생이 정부의 대학 학자금 융자 규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동료 학생운동가를 체포하려 하자 이를 가로막은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경찰이 선거법 개혁 요구 시위를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강경 진압해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에 사회단체들과 야권은 이번 판결에 대해 총선을 앞두고 잇따라 개혁 입법 조처를 한 나집 라작 총리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며 반발하였다. 3개월 뒤인 2013년 3월에는 말레이시아에 체류하고 있는 필리핀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필리핀 내 무슬림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시위였다. 말레이시아는 197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인 이민자 제한 및 외국인 탄압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은 단지 비자문제가 까다로운 정도로 끝나지만(그것도 종종 불만을 품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들은 아예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당하는 등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불법체류자들은 발각 시 강제 추방되거나, 고문, 심문, 심하면 강제처형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등 서방에서는 말레이시아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말레이시아는 헌법상 다당제(또는 복수정당제)를 택하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UMNO에 의한 일당독재체제이며 표현의 자유는 크게 제한되어 있다. 야당의 경우, 정부가 자신들의 눈엣가시처럼 보일 경우, 죄를 거짓으로 꾸며 야당 정치인들을 투옥하거나 고문, 심문하며, 최근 야당 지지율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게리맨더링, 선거 결과 조작, 야권 성향 언론 탄압 등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야권의 승리가 짐작되던 2013년 총선에서 UMNO를 포함한 BN 연합이 과반의석을 차지했으며, 이는 부정선거라는 비판을 받는다. 20년 가까이 반체제 활동을 하고 있는 안와르 이브라힘은 정부로부터 '동성애' 혐의를 받아 수차례 투옥됐으며, 2015년에 그 혐의가 인정돼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정권의 정적을 숙청하려는 의도'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14녀에 정부는 새로 개정 및 강화된 선동처벌법을 통과시켰으며, 이 때문에 14명이 넘는 야당 의원, 학자, 언론인들이 구속되어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정치적, 문화적 부분에서 매우 민감한 나라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인들은 자신이 말레이시아인들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말레이시아를 모욕하는 외국인들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나 유럽의 스페인처럼 지역마다 독특한 감정이 매우 심한 편이며, 아직까지 무장 게릴라 따위는 없으나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말레이시아인들은 민족별로 자신의 민족을 가장 최고로 여기는 경향이 세며, 특히 말레이시아의 실질적인 본토이자 구 말라야 연방의 영토였던 말라야 반도 주민들은 아예 자신의 민족이 아니면 아예 "벽을 쌓는" 경우가 매우 크다. 특히 중국인들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스스로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정치적으로는 말레이인보다 낮은 지위에 있어 말레이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이슬람 주(술탄이 존재하며, 주로 Darul... 하는 주)에서는 더욱 심하며, 특히 클란탄 주가 가장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전반적으로 경제적 수준이 낮은 말레이인들은 경제적 수준이 높은 중국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일각에서는 말레이인들을 중국인들의 '종'으로 보기도 한다. 양대 민족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으며, 때로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1969년의 5·13 사건 이나 1987년의 제거 작전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사라왁, 사바 등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덜 심한 편이지만, 반대로 특유의 지역주의가 심한 편이다. 특히 적지 않은 사라왁, 사바인들은 스스로를 '말레이시아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사라왁과 사바가 말레이시아와는 전혀 다른 독립국가임을 주장하고 있다. 아직까지 바스크나 아체처럼 무장투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으나, 최근들어 독립운동이 세지면서 서서히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는 '말레이시아가 우리 지역을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사바 사라왁이 말레이시아를 떠나다(SSKM)' 등 독립운동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추후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에 자연도 깨끗한 편이며, 물가도 저렴해 외국인들의 대표적인 이민지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태국같은 다른 나라들이 쿠데타, 시위 등 정치적 혼란으로 위험한 데 반해, 말레이시아는 비교적 안정된 사회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어 이민자들의 선호를 받기도 한다. 외국인, 특히 한국인들이 주로 선호하는 이민지는 암팡, 피낭, 코타키나발루인데, 특히 암팡은 한국 가게, 식당, 시설들이 가득해 한국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나라에서는 영어를 기본 구사할 수 있으며, 영어 외에도 중국어나 말레이어 등 다른 언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표적인 이민지로 꼽히고 있다. 은퇴한 이들이 이곳에 이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난 2001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말레이시아 마이 세컨드 홈(MM2H; Malaysia My 2nd Home) 프로그램에 따르면 일정 이상의 재정조건 충족 시 누구나 영구 거주할 수 있다. 이렇듯 말레이시아는 스웨덴처럼 이민자에게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말레이시아는 원칙적으로 이민제도가 없으며,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10년 내지 12년을 거주해야 하며, 그 후 이민국의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한다. 또한 이중국적 불허에 따라 자신의 본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말레이어를 '생활에 무리없는 수준'만큼 구사해야 하며, 사회에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말레이시아는 1970년대 중후반부터 부미푸트라 정책에 기반해 외국인들의 이민을 강력하게 제한하고 있으며, 외국인들에게 국적을 쉽게 주는 나라가 아니다. 때문에 일부 외국인들이 '미국같은 서양에서는 10년 정도만 살아도 시민권 나오는데 여기서는 몇 십년을 살아도 안 나온다'는 식으로 불평을 하곤 한다. 또한 현지에서 출산해도 배우자가 자신처럼 외국인일 경우, 자식도 외국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자식의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본국에서 출생신고를 해야만 한다. 미국처럼 외국인들의 불법이민이 잦으며, 당국은 이런 사람들을 강제추방 및 입국금지 처리하기도 한다. 한편 동말레이시아는 본토와 분리된 별도의 이민법을 갖고 있는데, 외국인의 경우 신청을 통해 해당 지역의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또한 동말레이시아는 현지에서 본토인의 힘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본토인의 입국을 제한하고 있는데, 가령 동말레이시아인이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에 갈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반도 말레이시아(서말레이시아)인이 동말레이시아에 갈 때는 90일짜리 무비자를 받아야 한다. 예전에는 동말레이시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경우 새로운 90일 무비자를 받았지만, 이제는 무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돌아올 경우 새 무비자를 받을 수 없다. 입학이나 취직, 또는 영구 이주의 경우 허가가 필요하다. 특히 사라왁이 그러하며, 사라왁인은 말레이시아 전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주민들은 사라왁에 들어올 때 무비자나 비자 신청 등이 필요하다. 이는 사바인에게도 동일하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이다. 지역의 전통 문화는 원주민들에게서 내려오며, 후에 인도네시아로부터 이주해 온 말레이인들로부터도 내려온다. 중국 및 인도 문화의 영향력이 상당하며, 이는 해외 무역이 시작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르시아, 아랍, 영국 문화의 영향도 있으며, 정부의 사회계약을 통해 보호받는 소수민족 문화들도 있다. 1971년 정부는 말레이시아 문화에 대해 규정하는 국가문화정책(National Cultural Policy)을 제정했다. 이 정책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문화는 말레이시아 원주민 문화에 기반해야 된다고 하며, 타 문화에서 유입된 적절한 부분을 포함하고 이슬람교가 일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말레이어를 다른 언어보다 더 많이 홍보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조정은 문화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걸 느낀 일부 비말레이인들 사이에서 불만을 일으켰다. 중국인 협회와 인도인 협회는 비민주적인 문화 정책을 비난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말레이시아와 이웃 나라인 인도네시아 사이에는 종종 문화 분쟁이 일어나곤 한다. 공통적으로 두 나라 다 비슷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고, 여러 전통과 무품들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에서 말레이시아의 국가(國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쟁이 일어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민족들이 몇 세대에 걸쳐 함께 살아왔다. 이들은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융화와 변화를 통해 진정한 말레이시아 문화를 형성했다. 말레이시아 인구는 대부분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바 주와 사라왁 주에는 독특한 문화와 유산을 간직한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 최대 규모의 민족은 말레이인이며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라는 말은 이슬람교와 말레이 전통을 따르고, 말레이어로 말하며, 말레이인을 조상으로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1400년대에 이르러 힌두교와 소승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말라카 왕립 재판소의 판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말레이인은 온화한 성품과 풍부한 예술성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은 전체 인구의 약 25%로, 두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19세기에 이민 온 중국인들의 후손으로 모든 일에 근면하며 날카로운 비즈니스 감각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은 다 만다린(북경어) 할 줄 안다. 하지만 지억에 따라서 주로 쓰는 방언도 따로 있다. 페낭 섬이랑 남쪽의 조호 주 호키엔 사용하며, 수도 쿠알라 룸푸르에는 광동어, 코타키나발루에서는 하카를 쓴다.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은 전체 인구의 약 10%로 세 주요 민족 중 가장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당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더 나은 삶을 꾸리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이주를 택한 남인도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지금의 인도계 말레이시아인들은 대부분 그들의 후손이다. 타밀어를 사용하고 주로 힌두교를 믿는 이들은 아름다운 사원과 매운 요리, 세련된 사리(saree:여성 힌두교도 의상)와 같은 다양한 문화도 함께 들여왔다. 오랑 아슬리오랑 아슬리(Orang Asli)는 말레이 반도에서 거주하는 모든 원주민 민족 집단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다. 이들은 네그리토(Negrito), 세노이(Senoi), 원시 말레이(Proto-Malay) 등 세 부족으로 나뉘는데 주로 네그리토는 북부, 세노이는 중부, 원시 말레이는 남부에 거주한다. 각 부족 또는 하위 부족들은 자신만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어부,농부, 반유목민등의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바 주에서 가장 큰 원주민 집단은 카다잔 두순(Kadazan Dusun), 바자우(Bajau), 무룻(Murut)이다. 두순사바주 최대 부족인 카다잔 두순은 사바 인구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는 카다잔과 두순이라는 두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 부족으로 묶였다. 하지만 카다잔은 주로 벼농사에 도움이 되는 삼각주의 평평한 분지에 거주하는 반면, 두순은 전통적으로 사바 내륙쪽의 구릉지에 거주한다. 바자우사바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부족인 바자우는 사바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바다의 신인 옴보 딜라웃(Omboh Dilaut)을 숭배하며 어부로 생활하는 유목민들로 '바다의 집시'라고도 불린다. 어부 생활을 그만둔 사람들은 농부가 되거나 가축 사육을 하며 살아간다. 매년 코타 벨루드(Kota Belud)에서 열리는 타무 베사르(Tamu Besar) 축제에서 공개적으로 선보이는 훌륭한 기마 기술 때문에 바자우인들은 '동쪽의 카우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무룻사바 주에서 세 번째로 큰 부족인 무룻은 사바 인구의 약 3%를 차지한다. 전통적으로 북쪽 보르네오 섬 지역에서 살아온 무룻족은 사바 주에서 가장 최근까지 인간 사냥을 해온 원주민이다. 현재 이들 중 대부분은 구릉지대에서 쌀과 타피오카를 재배하는 농부로 생활하며, 부족한 식량은 대롱으로 하는 사냥과 낚시로 보충하고 있다. 사바 주 대부분의 원주민 부족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전통 의상은 독특한 구슬 공예로 장식되어 있다. 사라왁 주의 대표적 민족은 다약(Dayaks), 이반(Iban), 비다유(Bidayuh), 오랑 울루(Orang Ulu)라고 집합적으로 알려진 민족들입니다. 상류 또는 내륙이라는 의미의 다약은, 이슬람 사람들이 200여 개의 부족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이들은 주로 20~100개 가구를 동시에 수용하는 전통 공동 주택인 롱하우스(Longhouse)에 거주합니다. 이반사라왁 주민의 30%를 차지하는 이반은 사라왁 최다수 민족입니다. 배를 다루는 기술이 좋아 바다의 다약(Sea Dayaks)이라고 잘못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칼리만탄(Kalimantan) 중심부에서 온 강 상류 지역 부족입니다. 과거에는 사람 사냥과 해적으로 유명한 공포의 전사 민족이었으며, 전통적으로 새의 모습을 한 전쟁 신 싱가랑 부룽(Singalang Burung)의 수하에 있는 삼인조 신을 숭배합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지만 전통 관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다유평화를 사랑하고 낙천적이며 온순한 비다유 족은 친절함과 쌀로 빚은 술 뚜악(Tuak)으로 유명합니다. 주로 사라왁의 산악 지대에 살며 대부분 농사와 사냥을 합니다. 사람 사냥을 하던 과거에는, 전리품인 해골을 '바룩(Baruk)'이라고 하는 약 1.5 미터 높이의 원형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정령을 숭배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오랑 울루이들도 사라왁의 강 상류 지역 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라왁 인구의 약 5.5%를 차지하며, 오랑 울루 족은 10만이 넘는 다양한 부족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벽화와 정교한 목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롱하우스, 섬세한 구슬 장식의 가정 용품과 귀족 여성들의 정교한 문신까지, 이들은 보루네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술 감각을 자랑합니다 말레이시아의 전통 예술은 주로 조각, 조립, 은세공을 바탕으로 한다. 전통 예술은 시골 지역의 수직(手織) 바구니에서 말레이 왕실의 은그릇까지 다양하다. 대표적인 공예품으로는 장식용 단도(kris), 딱정벌레 머리 세트, 밀랍 염색 천, 송켓(songket) 직물 등이 있다. 동말레이시아의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나무 탈로 유명하다. 각 부족들 집단에는 일부 흡사하나 독특한 공연 예술이 있다. 그러나 말레이 예술은 과거 인도의 영향으로 북인도 예술의 특징을 일부 볼 수 있다. 말레이, 중국, 인도, 유럽, 그리고 다양한 원주민들의 문화가 섞인 말레이시아의 음악은 다양하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의 전통 음악은 이라마(Irama)라고 하는데 오래 전부터 대중적인 장르로 손꼽히고 있다. 전통 음악과 공연 예술은 인도,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의 영향을 받은 클란탄-팟타니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전통 음악은 타악기를 주로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근당(gendang)이라 불리는 일종의 드럼이다. 최소 14종의 전통 드럼이 있다. 드럼과 전통 타악기들은 주로 천연재료로 만들어진다. 전통적으로 음악은 스토리텔링(판소리와 유사), 일상적인 일들을 기념하고, 추수감사 등을 기념할 때 사용된다. 한때는 장거리 통신에도 사용되었다. 동말레이시아에는 아궁(agung)이나 쿨린탕(kulintang) 등 공(gong)을 중심으로 하는 앙상블이 있으며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세레머니에 주로 사용된다. 이 앙상블은 인근의 민다나오(필리핀)나 칼리만탄(인도네시아), 브루나이에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영국의 영향을 받은 팝이 더 주목을 받는 편이다. 말레이시아 팝은 말레이, 이슬람, 중국, 인도 가락 등이 섞인 로컬 팝과 서구적, 현대적 스타일이 강한 모던 팝 등으로 나뉜다. 대표적인 팝 아티스트로는 시티 누르할리자, 지아나 제인, 닝 바이주라, 나즈와 라티프, 샤리파 아이니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시티는 데뷔 이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락이나 힙합도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잡은 지 오래인데, 대표적인 락 아티스트로는 파이잘 타히르 등이 있다. 이 중 시티 누르할리자, 수디르만 아르샤드, P. 람리는 국민가수로 꼽히고 있다. 말레이시아 내에서 외국 노래들도 자국 노래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주로 한국,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등이다. 인도네시아 가수 크리스다얀티는 시티와 함께 듀엣 앨범을 내놓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시티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문자가 들어오기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한 구전 전통이 있다. 각 말레이 술탄국은 그들 고유의 문학 전통을 창시했으며, 현존 이전의 구전 이야기와 이슬람교와 함께 들어온 이야기들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말레이 문학은 아랍 문자로 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된 말레이 문자는 1303년에 씌여진 트렝가누 석재이다. 말레이시아 내에서 중국어와 힌디어(또는 타밀어)의 화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중국 및 인도 문학도 흔해졌고, 19세기부터 현지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어도 흔한 문학언어로 자리잡았다. 1971년 정부는 문학들을 언어별로 정의하기 시작했는데, 말레이어 문학은 "국민문학"으로, 기타 부미푸트라어 문학은 "토착 문학", 외국어로 된 문학은 "지방적 문화"로 정의되었다. 말레이 시는 고도로 발달했으며, 다양한 체가 있다. 히카얏(hikayat) 체는 매우 유명하며, 판툰(pantun)은 말레이어에서 타 언어로 전파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요리는 인종만큼이나 다양하다. 주로 주변국이나 주민들의 조상의 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개 말레이, 중국, 인도, 태국, 자바, 수마트라 지역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과거 향료무역의 영향이 크다. 말레이시아의 요리는 싱가포르나 브루나이와 비슷하며, 필리핀 요리와 흡사한 부분도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요리가 있으며 전통과 다른 것도 많다. 때로는 그 원천의 문화와 관계 없는 음식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 내 중국 음식점들은 종종 말레이 음식들을 서빙하기도 한다. 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요리가 다른 문화의 방식으로 요리되기도 하며, 이는 각 요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더라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음을 보여준다. 쌀은 주식으로 다양한 요리에 사용된다. 향료나 양념은 종종 사용되지만, 실제 매운맛을 내는 편은 아니다. 면 요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식 중 하나이며, 그 면 종류 또한 다양하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면은 꿰띠아오(kway teow), 미(mee), 미훈(meehoon)인데, 이 중 꿰띠아오와 미훈은 쌀로 만들며 미는 밀로 만든다. 미는 한편으로는 스파게티 면과 유사하나, 비교적 기름기가 많다. 이뿐 아니라 라면 면발과 유사한 것도 있는데, 이는 투아란면(Tuaran mee)이며 사바 주에서 주로 즐겨먹는 면이다. 한국인들이 먹는 당면류도 있는데 대개 유리면(glass noodle)으로 부른다. 당면처럼 투명하지만, 명반이 첨가되어 있으며 면이 불 경우 잘 들러붙는다. 비프숲(beef soup)이나 용타우푸(yong tau fu) 등 국물 국수 요리부터 고렝(goreng)으로 불리는 볶음 국수 요리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말레이시아의 면요리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인기있다. 말레이시아의 주요 신문들은 정부 및 여권연합 소속 정당들의 소유이며, 몇몇은 주요 야당들이 소유하고 있다. 언론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말라야 지역에 기반한 언론들은 보르네오 지역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들을 내보내며, 종종 말라야의 식민지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언론들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간의 긴장 상태가 심화됨에 따라 더 높은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말레이시아인을 나쁘게 묘사하기도 한다.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 언론이 있다. 출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때문에 일부 출판권과 정보 보급이 제약받는다. 과거 정부가 선거 전 야당 신문들을 엄중 단속하려 한 적이 있었다. 2007년 정부관계기관이 모든 민영방송사에 야당 지도자들의 연설을 내보내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으며, 야당인 민주행동당에서 이를 규탄한 적이 있었다. 또한 선거 기간 동안에는 야권 성향의 매체들을 탄압하기도 한다. 사바 주는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언론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인쇄출판법 같은 관련법들이 언론의 자유를 축소시킨다고 비판을 받는다. 말레이시아인들은 매년 다양한 휴일과 축제를 경험한다. 일부는 연방 정부에 의해 관보로 제정되는 휴일이 있는 가 하면 일부는 각 주에서 제정하기도 했다. 축제들은 민족별, 종교별로 다양하며 각 민족들이 주요 휴일로 선언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공휴일은 독립기념일(Hari Merdeka/Hari Kemerdekaan)이며 8월 31일인데 1957년 당시 말라야의 독립을 기념한다(단, 사라왁에서는 독립 문제로 7월 22일에 독자적인 독립기념일을 기리며, 사바의 독립일은 이 날과 같지만 독자적인 행사를 치른다). 말레이시아의 날(Hari Malaysia)는 9월 16일로 1963년 당시 말레이시아의 결성을 기념하는 것인데 제2의 독립기념일로 간주된다. 또다른 주요 기념일은 노동절(5월 1일)과 국왕의 생신(랜덤이나 현재는 6월 첫째 주)이다. 무슬림들만의 휴일은 이슬람 주에서 매우 중요한데, 대표적인 것이 하리라야 아이딜피트리(Hari Raya Aidilfitri이며 이드 울피트르를 말함), 하리라야 하지/아이딜라다(Hari Raya Haji/Aidiladha이며 이드 울아다를 말함), 마울리두르 라술(선지자의 생신) 등이다. 중국인들은 춘절(Chinese New Year) 및 전통 중국 기념일을 기념하는데 찹고메(Capgome), 공시팟차이(Gong Xi Fatt Chai) 등으로 불린다. 힌두교도들은 디파발리(Deepavali)라고 불리는 등불행사를 기념하며, 바투동굴에서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순례자를 만나는 종교의식 타이푸삼(Thaipusam)을 기념한다. 기독교도들은 주로 기독탄신일(Christmas)이나 부활절(Easter) 등 기독교 기념일을 즐긴다. 보르네오 지역에서는 가와이나 카아마탄 등의 추수감사제를 기념한다. 민족별, 종교별로 각각의 휴일과 행사가 있지만, 모두가 함께 기념한다. 소위 "오픈하우스"라 불리는 관습에 따라 말레이시아인들은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집단 외의 기념일에 참여하기도 하며, 종종 관련된 집에 방문하기도 한다. 새해는 1월 1일이지만, 이 1월 1일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레고리력의 1월 1일을 새해로 하며, 중국인들은 음력의 1월 1일을, 무슬림들은 이슬람력의 1월 1일을 새해로 한다. 이는 법으로도 옮겨지며, 따라서 이슬람 주에서는 그레고리력의 1월 1일을 새해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주가 토요일과 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데 반해, 일부 이슬람 주에서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공휴일로 한다. 방학의 경우 3월 중순, 5월 말 내지 6월 초, 9월 초중순, 11월 초부터 연말까지 총 4개로 나뉘어 있지만, 이는 중학교까지에 해당되며 대학교나 국제학교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의 기념일/공휴일은 싱가포르와 유사하다. 말레이시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는 축구, 배드민턴, 필드하키, 볼링, 테니스, 스쿼시, 무술, 승마, 보트타기, 스케이트보드타기이다. 축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이며, 2034년 FIFA 월드컵에 역사상 최초로 참가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배드민턴 경기는 수천명의 관객들을 유혹하며, 1948년 이래 말레이시아는 토머스컵(남자들이 참여하는 세계 배드민턴 선수권 대회)을 개최한 4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97년 말레이시아 론볼링 연맹이 등록되었다. 스쿼시는 영국군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1939년 첫 경기가 열렸다. 1972년 6월 25일 말레이시아스쿼시협회가 창설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축구연맹에 제의한 상태이다. 2014년 12월 남자 필드하키 국가대표팀이 세계에서 12번째를 기록했다. 제3회 하키 월드컵이 쿠알라룸푸르의 독립광장에서 개최되었으며 10위를 기록했다. 말레이시아에는 포뮬러 원 트랙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팡 인터내셔널 서킷이다. 1999년 첫 그랑프리 대회를 열었으며 총 310.408km(192.88마일)를 달렸다. 말라야 연방 올림픽위원회가 1953년에 창립되었고, 바로 이듬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의해 승인되었다. 말레이시아는 1956년 멜버른 하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1964년 말라야 연방 올림픽위원회가 말레이시아 올림픽 위원회로 개편되었고, 곧바로 모든 경기에 참여했다. 최다 선수가 참여한 올림픽 경기는 1972년 뮌헨 하계 올림픽으로 57명이 참가했다. 말레이시아는 올림픽에서 총 6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중 5번은 배드민턴, 한 번은 플랫폼다이빙에서 승리했다. 1950년부터 1962년까지는 말라야라는 이름으로, 1966년부터는 말레이시아라는 이름으로 코먼웰스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말레이시아에서 개최한 건 1998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것이 처음이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무술로는 실랏 믈라유(Silat Melayu), 킥복싱, 토모이(Tomoi)가 있다. 말리 말리 공화국()은 아프리카에 있는 공화국이다. 사하라에서 서아프리카로 광대한 국토가 펼쳐지는데, 기후는 북반부가 사막성이고 남으로는 스텝성 열대사바나성으로 건조한 땅이다. 주요 거주지역은 니제르강 유역과 남부의 사바나 지역으로,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고 있다. 구 프랑스령 수단. 1960년 3월 세네갈과 더불어 중세의 이 지방에서 위세를 떨친 말리 제국의 이름으로 연방을 결성, 독립했으나, 세네갈이 분리한 후에는 말리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후 국영농장과 각종 국영기업을 일으켜 사회주의를 지향했으며, 외교면에서도 구 소련, 중공과 손을 잡고 아프리카 급진세력의 선두에 섰다. 1968년 11월 19일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트라오레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1991년 타도되고 현재는 민주개혁이 추진중에 있다. 니제르 강 유역의 농업과 금 수출이 이 나라 경제의 중심이다. 주민은 밤바라, 말링케, 송하이, 풀라니 등의 흑인종과 북아프리카계의 투아레그, 무어 등의 여러 부족이고,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종교는 주민의 90%가 무슬림이다. 도시로는 바마코 외에 팀북투, 가오 등 옛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 있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는 프랑스령 수단이었다가 1959년 현재의 세네갈과 함께 말리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지만 1960년 세네갈이 연방을 탈퇴하여 말리 연방은 붕괴되었고 현재의 말리 공화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2012년 4월 6일 아자와드(수도는 가오)가 이 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기독교 전례력으로는 성 금요일이다. 말리 북부는 이슬람 무장세력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으며, 이슬람급진파들은 이슬람율법을 적용해서 공개처형을 하기도 했다. 2012년 10월 6일에 팀북투에서는 여성들이 베일착용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였다. 말리는 내전이 확대되면서 2013년 1월 11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프랑스는 말리 정부의 요청으로 군사개입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말리내전에 참여한지 3주째만에 말리군과 함께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부지역의 마을들을 탈환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말리군은 가오를 기습한 이슬람반군세력을 격퇴했다. 2012년 3월 23일 아마두 사노고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아마두 투마니 투레를 축출하고, '민주회복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맡아 국가원수로 재직하였다. 이후 4월 12일 아마두 사노고는 디온쿤다 트라오레에게 대통령 대행직을 맡기고 퇴임하였으나 일정 부분에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2013년 7월 28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27명의 후보자 중 총리를 지낸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후보가 39.2%의 득표율로 1위, 수말리아 시세 후보가 19.4%로 뒤를 이었다. 과반수의 득표자가 없어 2013년 8월 11일에 결선 투표가 열렸고, 케이타는 여기서 1위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말리의 전체 면적은 1,240,000 km²에 달하여 세계에서 24번째로 큰 나라이다. 사하라 열풍이 건기 동안에 심하게 불어 가뭄이 들기도 한다. 금과 우라늄, 염암, 석회암 등이 주요 자원으로 채굴된다. 아열대 기후로서 상당히 건조하고 온도차도 심하다. 북쪽의 사하라 사막은 뜨겁고 건조한 사막이며 반건조 지대인 사헬 사막이 동서쪽에 이루어져 있고 중부지역에까지 미친다. 남서지방에 수단 사바나 지대가 나타나며 건조하고 열대기니와 국경을 접하며 코트디부아르와도 만난다. 1992년 헌법을 보면 "프랑스어는 공식적인 표현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내의 다수 부족이 사용하고 있는 4개의 언어를 국어로 정하여 교육 외의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다. 말리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말리의 총 인구는 2015년 현재 17,599,694명이다. 인구 증가율은 2.98%(2010년~2015년)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밀도는 14.4명/Km²이며 세계 평균인 56.5/Km²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이며 전체 인구의 39.9%(2015년)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중위연령은 16.2세로 매우 낮은 편이다. 말리 인구 중 90%가 이슬람교도이며, 토착 종교와 기독교는 신자는 소수이다. 종교 휴일은 이드 울피트르, 이드 알아드하, 크리스마스 등이 있다. 8개 주와 바마코로 구성된다. 주()에는 군()이 속한다. 니제르 강 유역의 농업과 금 수출이 이 나라 경제의 중심이다. 인광석, 금, 우라늄 등의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 그중에서도 우라늄은 일본이 독점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그 외에도 목축업, 수산업이 있다. 상품작물로서 쌀, 땅콩, 사탕수수, 면화가 재배되나, 관개설비가 약하고 또 사막화의 영향을 받아, 수확량은 날씨에 크게 좌우된다. 주요 수출품은 금 외에도 가축, 건어, 면화, 땅콩 등이다. 다른 구 프랑스 식민지와는 달리 무역에 있어서의 대(對) 프랑스 의존도가 낮고 구 소련, 중국 등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내륙국이기 때문에 수송 문제에 애로가 많다. 수출입의 경로는, 독립 이전에는 세네갈의 다카르 항으로부터 다카르 - 니제르 철도 경유가 압도적이었으나, 말리 연방 붕괴시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하여 코트디브와르와의 연결이 강화되어, 1997년에는 수출입의 70%가 코트디브와르의 아비장을 경유, 30%가 다카르 경유가 되었다. 북부에서는 투아레그족이 유목을 행하고 있다. 국내 산업으로는 노동력이 흡수되지 못하고, 이주가 활발하다. 코트디브와르와 프랑스로 많은 이주자들은 건너갔다. 코트디브와르에서는 원주민과 이민온 부르키나파소인, 말리인 간의 대립이 격결해져, 코트디브와르 내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바마코 시내라 하더라도 실질생활에서는 전기가부족하여 자주 정전이 발생한다.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농촌 지역에는 말라리아가 널리 퍼져 유아 사망률이 높은 편이다. 대략 90%의 말리 사람들이 수니 이슬람을 따른다. 하지만 항상 전통적인 종교의 신앙이나 관습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무슬림들은 학사나 박사 연구 수준까지 이끄는 그들의 교육제도가 있다. 점점 증가하는 많은 무슬림들은 메카로 향하는 성지 순례단을 만들기도 하고 아랍국가로 가서 공부하기도 한다. 프랑스 식민지 지배 아래 이슬람 지역 속으로 선교사의 소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에도 기독교인은 인구의 약 1% 정도이다. 식민지 언어인 프랑스어 능력은 낮으며 주로 도시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인구의 약 60%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지만 프랑스어만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며 응코 문자로 표기되는 Bamanakan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들은 코란 학교를 다니며 아랍어를 사용한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중 하나인 팀북투에 있는 산코레 대학이 있으며 13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의 손원일(당시 주서독 대사) 특사 일행은 1960년 7월, 말리를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1960년 수교하였고, 1990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수교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IOC 정회원국으로 6명의 선수 및 임원단을 파견하였다. 한국과 말리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 등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말리에 갈 수 있다. 한국과 말리 양국 모두 상주공관이 서로 없기 때문에, 말리 측은 일본 도쿄도에서, 대한민국 측은 세네갈 다카르에서 각각 서로 상주공관을 겸임하고 있다. 멕시코 멕시코(, ) 또는 멕시코 합중국( , )은 북아메리카남부에 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멕시코시티이며 2016년 인구는 약 1억 2863만 2천 명으로 세계 10위이다. 북쪽으로는 미국, 서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과테말라와 벨리즈, 동쪽으로 카리브 해와 접한다.주요 도시로는 멕시코시티, 몬테레이, 과달라하라, 푸에블라, 메리다, 캉쿤 등이 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멕시코는 국민의 88.0%가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이며, 10%가 토착인 또는 원주민(나우아족(Nahua), 마야족(Maya), 사포테카스족(Zapotecas), 믹테카스족(Mixtecas), 토토나카스족(Totonacas), 오토미족(Otomi), 마사우아족(Masaua), 우아스텍스족(Uasteks), 푸레페차족(Purepecha))이다. '멕시코(México)'라는 이름은 수도 멕시코 시에서 왔는데, 멕시코 시의 이름은 아즈텍 문명 때 붙은 이름으로 ‘멕시틀리 신의 땅’이라는 뜻이다. 전쟁의 신 멕시틀리의 이름은 metztli(‘달’)와 xictli(‘배꼽’)에서 온 말로 ‘달의 자식’이라는 뜻이 된다. 스페인인들이 멕시코 지방에 왔을 때, 나우아틀어의 소리가 스페인어에서 x로 표기하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에 멕시틀리를 Mexitli로 쓰는 등 그 소리를 x로 표기했다. 현대 나우아틀어로 멕시코를 부르는 말은 Mēxihco()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페인어의 발음이 바뀌어서 x는 로 소리나게 되었고, 로 소리나던 j도 로 소리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인들은 두 소리를 모두 j로 쓰도록 철자법을 고쳤다. 예를 들어 돈 키호테는 현대 스페인어로 Don Quijote로 쓰는데, 원래 표기는 ‘돈 키소테’에 가까운 Don Quixote였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관습상 x를 고수하고 있으며,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에 이 옛 표기법을 권장하고 있다. 스페인 한림원에서는 두 가지 표기법을 인정하고 있으며, 많은 스페인어 사전에서 México를 표제어로, Méjico를 다른 표기로 등재하고 있다. 멕시코 밖의 스페인어권 나라에서 멕시코의 표기로 México를 쓰는 비율은 인구의 0.35%(코스타리카)에서 10%(스페인) 정도이다. 멕시코의 발음 는 ‘메히꼬’에 가깝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의 영향으로 ‘멕시코’로 표기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스페인어 원어에 가깝게 ‘메히꼬’라고 한다. 이 지역은 기원전 2만 년경에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선고전기 중기인 기원전 1300년경 멕시코 만을 중심으로 올멕 문명이 발흥했다. 올멕 문명은 그들의 지배자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흑인 인종의 특징을 가진 거대한 석상 두상으로 알려져 있다. 선고전 시대의 말기에 멕시코 중앙 고원 텍스코코 호수 남쪽에 원형의 대형 피라미드로 알려진 쿠이쿠일코(Cuicuilco) 동쪽으로 테오티우아칸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세워졌다. 그 후에도 후기 마야 문명과 아즈텍 문명과 같은 여러 고급 원주민 문명의 거점으로 14세기 후반, 텍스코코 서쪽에 있던 테파넥 족 국가의 아스카포찰코(Azcapotzalco)에 테조조목이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였다. 그가 이끌던 용병부대였던 아즈텍은 테조조목 사후, 15세기 초반에 텍스코코, 틀라코판과 함께 아즈텍 삼국 동맹을 맺었고, 텍스코코의 이름난 군주였던 네살왈코요틀의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지도력을 갖추고 주변국을 정복하여 아즈텍 호수 위에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아즈텍 제국을 형성하였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달 이후, 16세기 초 1519년에 스페인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했다. 코르테스가 이끄는 정복자들은 아즈텍의 내분과 전승 신화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고, 1521년에 황제 쿠아우테목을 처형하고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후 스페인은 이 땅에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스페인)이라는 부왕령을 창설했다. 페루 부왕령과 함께 인디아스 식민지의 중심으로 멸망된 테노치티틀란의 위에 멕시코시티가 건설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스페인어와 가톨릭교가 보급되고, 인디오와 스페인인 사이에 혼혈이 진행됐으며, 스페인 기원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 제도가 생겨났다. 스페인의 지배는 300년을 이어졌으며, 18세기에 들어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의 영향을 받아 토착 크리올들 사이에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즉위시켰다. 그것에 반발하는 스페인 민중 봉기를 계기로 스페인 독립 전쟁이 시작되면서, 인디아스 식민지도 가짜 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다. 1809년부터 1810년까지 키토, 라파스, 산티아고, 카라카스, 보고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인디아스 각지에서 크리올료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가운데 멕시코에서도 1810년 9월 15일 미겔 이달고 신부 등의 스페인 타도를 외치는 멕시코 독립 전쟁이 시작되면서 오랜 전쟁의 시작이 막을 올렸다. 멕시코의 크리올료는 페루의 크리올료와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의 민중 반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독립 운동에는 소극적이었고, 이달고도, 반란을 이어받은 메스티소의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왕당파 군에게 패했다. 그러나 모렐로스의 난이 진압된 후 1820년 경에는 남부에서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마르틴 등이 이끄는 해방군이 각지에서 해방시켰고, 인디아스에 남는 식민지는 도서 지역과 브라질을 제외하면 페루, 중미, 멕시코 만 밖에 없었다.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파가 정권을 잡으면서(리에고 혁명), 1821년 9월 15일에 보수파 크리올료를 대표하는 독립 지도자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였고, 반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투르비데가 멕시코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던 반대파 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는 멕시코 입국을 거절하였고, 자신이 황제에 즉위하는 형태로 제1차 멕시코 제국이 건국되었고, 중앙아메리카를 병합했다. 독립 이후 혼란은 계속되었고, 1823년에는 황제가 퇴위하고 제국이 붕괴하면서 멕시코 연방 공화국(19세기)이 되었고, 이때에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이 독립했다. 독립 후 내전에 의한 농업 생산력의 저하, 광산의 생산력 저하, ​​카우디요 등의 군웅 할거로 유통의 혼란 등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가 이어졌다. 1835년 10월 23일부터 1846년 8월 22일까지는 중앙 집권 국가인 멕시코 공화국이 있었다. 또한 코아우일라이테하스 주에 미국 이주민의 정착을 인정하였고, 1835년에는 앵글로 색슨 계 이주민이 반란을 일으켜 1836년에 멕시코령 테하스는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을 했다. 그 후, 미국이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하자, 1846년에는 텍사스를 둘러싸고 미국과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하고, 1848년에 패배하면서 텍사스를 매각하고 뉴멕시코주·캘리포니아주 등의 땅을 미국에게 팔았다. 결국 멕시코는 리오브라보 강 이북의 영토 (이른바 멕시코 할양지)를 상실했다. 영토 상실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은 깊어졌지만, 1861년 미국의 남북 전쟁 발발과 함께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출병을 시작했다. 1863년에는 멕시코시티를 함락당하고, 프랑스의 괴뢰 정권인 멕시코 제2제국이 건국되는 상황이 되었다. 인디오 출신이었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군에 맞서 1866년에 주권을 회복했지만, 이것은 두고두고 미국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후아레즈는 자유주의자로 레포르마 (개혁)을 추진했지만, 1872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후아레즈의 뒤를 이은 테하다 대통령은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지도력의 부족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1876년 프랑스 개입 전쟁의 영웅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취임했다. 디아스는 30년 이상에 걸친 강압적인 독재를 펼쳤으며, 외자를 도입하고 경제를 확장시켰지만, 비민주적인 정권 운영으로 국내 각지에 소요를 유발했다. 1907년 공황의 영향이 멕시코에 미치자 각처에서 노동쟁의가 발발하였고, 1910년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다. 디아스가 상대 후보인 프란시스코 마데로를 체포 감금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판초 비야, 에밀리아노 사파타, 베누스티아노 카란, 알바로 오브레곤 등이 이끈 혁명군은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군을 물리치고 1917년에 혁명 헌법을 반포하면서 혁명은 끝이 났다. 혁명은 끝났지만, 지도자들 간의 노선 대립으로 잠시동안 정치적 불안 상태가 이어졌다. 1929년에는 국내의 다양한 혁명 세력을 하나로 묶어 국민혁명당(PNR)이 결성되어 71년간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1934년에 성립된 라자로 카르데나스 정부는 유전 국유화 사업이나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국내의 경제 구조는 안정되었다. 이후 당명을 제도혁명당(PRI)으로 바꾸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사이에 두고 일당 독재 하에 국가의 개발을 진행했다. PRI는 국내에서는 일당 독재를 추진하고, 미국과 서방의 자본에 의해 경제를 확대했지만, 다른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권과의 관계도 밀접하게 가져갔으며, 정책이 모순된 체제면서도 냉전이 종결된 20세기 말까지 여당으로서 정치를 지배했다. 또한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석유와 실버의 생산과 수출이 큰 부를 가져다줬지만, 동시에 진행된 근대산업화 과정에서 막대한 대외 부채를 안게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일부 부유층에 집중된 부의 불균형, 그리고 자원 가격 폭락에 따른 경제 위기 등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민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최남단 과테말라 국경 지대의 치아파스주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1994년 1월 1일 무장봉기한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에 의한 통치가 이어져 사실상 해방구가 되었다. 1994년에 발효된 NAFTA는 미국, 캐나다와의 무역을 확대하는 한편 빈부격차를 일시적으로 확대하고 전통적인 공동체에 사는 인디오의 공유지를 해체하고, 미국산 옥수수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농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해 1월 1일에 마르코스 부사령관 등이 이끄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 가난한 주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했다. 사파티스타는 전투를 끼운 후 치아파스 주를 해방구로 선포하고 반세계화 운동의 최대적 존재로서 내외의 지원을 받아 현재도 정부군과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그 후 2000년에 PRI는 만연한 부패와 침체된 경제 실책에 대한 책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봉기 등의 책임을 지고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국민행동당을 이겨서 71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현재도 강력한 정당으로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현재에 이른다. 2000년대, 특히 2005년 이후 마약 카르텔의 항쟁에 의해 치안이 악화된다. 전 정권인 칼데론 정부는 마약 카르텔과 유착한 경찰 간부와 주지사 조차도 체포하겠다는 강경 자세로 군을 이끌었고, 마약 범죄 조직을 단속했다. 이에 따라 카르텔의 폭력에 의한 사망자가 급증하였고, 2010년에는 매년 1만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는 사태가 되었다 (멕시코 마약 전쟁). 한편, 원유가의 상승이나 NAFTA 체결 후 수출 물량 증가, 또한 내수 확대에 의해 중산층이 증가하고 넥스트 일레븐의 한 국가로 꼽히고 있다. 경제 정책에서는 유가 상승에 따라 휘발유 가격을 지속적으로 인상하여 국민들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2009년에 들어 와서는 캐나다와 미국과 함께 신종플루(H1N1)의 발상지가 되었다. 2010년 7월 4일, 전국 32개 주 중 14개 주에서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다. 2000년까지 집권당이었던 야당 제도혁명당(PRI)이 압승(지사 선거가 실시된 12개 주 중 10개 주에서 당선)을 했다. 2012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주의 정당인 제도혁명당(PRI)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임기 : 2012년 12월 1일 ~ 2018년 11월 30일)가 선출되어 대통령 직을 수행하여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에게 정권을 내주고 퇴임하였다. 2018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재건운동을 창당한 멕시코 정치의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당선이 확정되어 1929년 대통령 선거 이후 89년 만에 좌파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북아메리카 남부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잡은 멕시코는 세로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3,000 킬로미터 넘게 뻗어 있다. 가로 폭은 위치에 따라 다른데, 북쪽에는 폭이 2,000 킬로미터가 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남쪽 테우안테펙 지협의 폭은 220 킬로미터 이하까지 줄어든다. 멕시코는 북쪽으로는 미국과, 남쪽으로는 벨리즈, 과테말라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는 멕시코 서쪽의 1,250 킬로미터짜리 반도로서 캘리포니아 만을 형성한다. 동쪽에는 멕시코 만과 멕시코의 또다른 반도인 유카탄 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캄페체 만이 있다. 멕시코 중부는 광대하고 높은 고원 지대이다. 지형과 기후는 거친 사막인 북쪽에서 열대 우림인 남쪽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있다. 멕시코의 큰 강으로는 북쪽 국경의 리오그란데 강이나 남쪽 국경의 우수마신타 강 등이 있다. 해안저지는 열대 내지 아열대이다. 북서쪽 연안의 저지는 반사막이 펼쳐지는 건조지대이다. 중앙부의 멕시코 고원은 그 고도로 인하여 4계절 내내 온대적인 기온이며, 수도의 월 평균기온은 12∼18℃이다. 강우량은 일반적으로 적으나 남쪽으로 갈수록 많아져서 남부에서는 약 600mm, 북부에서는 약 200mm이다. 멕시코 기후의 특징은, 고도차에 따라 기후와 식생이 현저하게 변하는 일이다. 열대 저지, 온대 고원, 냉대 침엽수림, 알프스형 초지, 만년설 고산대가 고도차에 따라 관찰된다. 멕시코 합중국은 연방 국가로, 연방 정부는 대의제를 따르는 민주주의 공화국이며 1917년 헌법에 따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은 세 단계의 정부를 규정하고 있다. 연방 정부, 주 정부, 지방 정부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단계의 정부에서 공무원은 단순 다수제(first past the post)나 비례 대표제 선거 혹은 다른 선출직 공무원의 권한으로 임명된다. 연방정부는 삼권분립 제도를 기반으로 구성된다. 행정부의 모든 선출직 공무원은 다수득표제에 따라 선거를 치른다. 의회 의원직은 다수득표제와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가 적용된다. 하원의 경우 300명은 다수득표제로, 200명은 전국 5개 선거구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상원은 모두 128명인데, 연방 구역과 각 주마다 2명씩 다수득표제로 64명, 그리고 연방 구역과 각 주마다 1명씩 차등 득표자(first runner up)로 32명, 그리고 전국 단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32명을 선출한다. 멕시코 헌법에 따르면 모든 주 정부는 일개 공화국의 형태로 행정부(주지사와 각료), 단원제 의회, 법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각 주마다 주 단위의 법령을 제정할 수 있다. 2006-2009년 멕시코 의회에는 여덟 정당이 있으나 그 중 다섯 정당은 전국에서 4%이상 표를 얻지 못해 원내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아래 세 개 정당만이 멕시코 정치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으나 현재는 국가재건운동이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1929년부터 제도혁명당은 멕시코 정계에서 독보적인 패권을 가졌다. 1977년부터 잇따른 선거 개혁으로 야당이 지역, 연방 의회에서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은 2000년 대선에 정점에 이르러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가 71년 만에 非제도혁명당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2012년 엔리케 페냐 니에토의 당선으로, 12년만에 재집권하게 되었다. 2006년 대선에서 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이 민주혁명당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와 근소한 격차(0.58%)로 이겼다. (멕시코에는 결선투표 제도가 없다.) 선거 재판소는 펠리페 칼데론을 대통령으로 판결했다. 2006년 12월 1일 자정에 그의 내각이 출범했으며 로스 피노스에서 비센테 폭스 전 대통령에게서 칼데론은 대통령 현장(懸章)을 받았다. 그는 2006년 12월 1일 아침에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2012년 12월 1일 후임자인 제도혁명당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가 선출된 상태에서 6년의 임기를 보장을 받고 퇴임을 했으며 2018년 7월 1일에 국가재건운동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승리하여 1929년 이후 89년 만에 정권 교체를 하여 2018년 12월 1일에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을 하였다. 멕시코는 31개의 주와 1개의 특별구로 나뉘어 있다. 멕시코의 외교관계는 대통령이 직접, 그리고 외교부를 통하여 관리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멕시코 정부는 정치/경제적 압박보다는 주로 도의적 설득을 통해 해외의 이익을 유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멕시코 혁명 이래 그리고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때까지 멕시코의 외교 정책은 에스트라다 독트린("Doctrina Estrada", 제안자 헤나로 에스트라다의 이름에서 나왔다.)이었다. 에스트라다 독트린이란 주권 중심의 외교적 가이드라인이었다. 이에 따르면 외국 정부는 좋고 나쁘고 여부를 떠나 다른 나라의 정부나 그 변화에 대해 판단해서는 안되며 그런 행동은 주권 침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불간섭 원칙, 태평양 문제(Pacific Solution to Controversies), 민족 자결에 기반을 두었다.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호르헤 카스타녜다를 외무성 장관으로 임명했다. 카스타녜다는 즉시 에스트라다 독트린을 깨고 그의 비판자들이 카스타녜다 독트린으로 불리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새 외교 정책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수용하고 개방하여, 국제 사회에 멕시코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끔 했다. 개방적인 외교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몇몇 정당은 멕시코의 육해공군이 유엔의 평화유지 임무에 동참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국가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헌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멕시코는 미국과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도로망의 근대화는 라틴아메리카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수도 주변에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항공도 발달해 있다. 한편, 멕시코의 인종 구성은 현재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약 60%, 30%가 아메린디아인 또는 원주민, 9%가 백인이다. 흑인은 초기 식민지 시대에 대농장의 노예 노동력으로서 이입된 자들의 후손이다. 그러나 대체로 메스티소의 증가와 인디오의 감소라는 경향이 보인다. 또 스페인어 가 국어이지만, 원주민 중에서 100만을 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모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가 사실상 공용어이다. 멕시코에서 사용하는 스페인어는 스페인에서 쓰는 스페인 스페인어와는 다른 어휘와 어법을 사용하는 멕시코 스페인어라고 하는 별도의 방언을 사용한다.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영어도 사용되며,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도 외국어로서 조금 쓰인다. 중국어, 아랍어, 이디시어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쓰이고, 원주민들은 마야어, 나우아틀어 등 여러가지 언어와 방언을 쓴다. 스페인 식민지의 영향으로 대부분 토착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믿는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11년 멕시코 혁명전까지 기득권층의 일부를 형성했으나, 혁명정부의 사회개혁으로 기득권을 잃게 되었다. 실례로 혁명정부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 성직자가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교회의 정치적 간섭문제를 개혁하였다. 20세기초 성공회(Anglicana)와 개신교(Evangelica)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문맹퇴치사업으로 멕시코 정부의 원주민 동화정책에 기여했다. 원주민 고유의 토착 종교도 소수 존재한다. 멕시코의 주요 대도시별 광역권 인구와 순위는 다음과 같다. 멕시코 대도시(광역권) 순위 멕시코 전체 인구 약 1억 2,800만 명 1.멕시코시티 : 20,400,000명 2.과달라하라 : 4,796,050명 3.몬테레이 : 4,520,329명 4.푸에블라 : 2,929,347명 5.톨루카 : 2,170,000명 6.티후아나 : 1,895,797명 7.레온 : 1,887,703명 8.시우다드후아레스 : 1,506,198명 9.토레온 : 1,275,993명 10.메히칼리 : 1,102,342 명 11.케레타로 : 1,097,028명 12.산루이스포토시 : 1,097,906명 13.메리다 : 1,035,238명 14.아구아스칼리엔테스 : 1,000,000명~1,225,432명 15.아카풀코 : 1,021,000명 16.쿠에르나바카 : 1,000,000명 17.치와와 : 960,000명 멕시코의 학교 교육에서는 스페인어와 영어가 필수이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등이 있다. 이 나라의 UNAM이라는 대학은 등록금이 원화로 단돈 500원에 이를 정도로 싸다. 멕시코는 신흥공업국으로 분류된 국가이다. 풍부한 노동 인력과 석유 등의 지하자원, 미국과의 근접성을 바탕으로 60~70년대를 기하여 상당한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이 부유하지는 않다. 2010년 기준 지니계수가 47.2 가량으로 불평등한 소득 구조를 보이는 편이다. 또한 페멕스가 정부 수입의 37% 가량에 달하는 등 소수 기업들의 경제 편중도가 높은 편이기도 하다. 미국과 NAFTA를 체결하였으며 OECD, G20 공업 국가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멕시코를 넥스트11로 꼽기도 한다. 미국과의 불평등한 자유무역 협정을 통해 빈부격차가 심화 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멕시코의 주요 수출국은 미국(79.95%), 캐나다(2.78%), 독일(1.7%), 중국(1.64%), 스페인(1.04%)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미국(46.39%), 중국(17.64%), 일본(4.33%), 독일(3.91%), 한국(3.75%)으로 주요 수출입 상대국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09,451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20,369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26,904,732.58백만 달러), 석유(19,930,449.11백만 달러), 반도체(18,770,249.46백만 달러), 통신기기(16,315,314.57백만 달러), 트럭(16,182,444.20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24,825,059.80백만 달러), 직접 회로(16,376,734.34백만 달러), 자동차(6,472,373.01백만 달러), 통신기기(6,078,934.26백만 달러), 전자 부품(5,899,990.79백만 달러)이다. 멕시코에는 겔라게차 라는 축제가 있다. 멕시코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축구, 복싱, 야구, 레슬링 등으로 동남부 유카탄지방과 서북부 켈리포니아반도 지방에서는 축구보다 야구가 매우 인기있다. 멕시코의 전통의상은 원래 면, 나무껍질, 용설란의 줄기등으로 만든 옷감이 많았지만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실크등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멕시코 전통의상은 '우이필'이 있다. 또, '레보소'도 있다.우이필은 위필 또는 웨필리 라고도부른다. 멕시코의 농사일을 하는 여자들이 입는 민족 의상으로서, 소매없는 블라우스 모양의 관두의 또는 중남미, 특히 과테말라의 토착원주민 여성들이 이용하는 폰초식의 의복이다. 레보소는 머리를 두르거나 옷감의 재료로 많이 사용한다. 모자는 솜브레로가 있다.또 판초도 쓴다. 옥수수가 주식인 멕시코에서는 말린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만든 토르티야에 다진 고기 등 각종 음식을 넣어 먹는 타코를 대표 음식으로 친다. 멕시코식 샌드위치라고 보면 된다. 토르티야를 바삭하게 하거나 부드럽게 해서 색다른 맛을 즐긴다. 타코는 손바닥 크기만큼 동그랗게 부쳐낸 토르티야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각종 육류 및 고추, 피망, 선인장 열매 등 다양한 야채들을 각기 볶아낸 소를 쌈처럼 싸먹는 전형적인 멕시코 요리다. 맛은 의외로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며, 무엇보다도 취향에 따라 소를 고를 수 있어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이 장점이다. 뿐만 아니라 손에 들고 다니면서 먹기 쉬워 한끼를 간편하게 때우기에는 최고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타코는 대중적인 멕시코 요리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가게를 찾을 수 있다. 아주 전형적인 멕시코 음식으로는 포솔레(pozole)가 있다. 돼지 머리고기와 커다란 옥수수 덩어리들이 하얀 국물에 담겨 나오는데, 여기에 레몬 즙과 순무, 양파와 향초, 고추 그리고 마지막으로 뻘건 고추양념을 넣고 휘저여 먹는다. 매콤한 돼지고기 국물 맛이다. 주요 음료는 오르차타이며 쌀 음료다. 약간 계피향이 난다. 주류는 메스깔 등이 있고, 그 종류 중에 잘 알려진 테킬라가 있고 테킬라는 용설란으로 만든 술 모나코 모나코()는 유럽에 있는 작은 공국으로 공식 명칭은 모나코 공국(, , )이다. 이 나라는 도시 국가이며, 유럽과 세계의 주권 국가 중에서 바티칸 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영토가 작은 나라이다. 바티칸 시국은 유엔에 가맹하지 않았으므로, 유엔 회원국 가운데 모나코의 국토 면적이 가장 작다. 한국으로 치면 한개 동(洞)에 해당하는 규모여서 공항은 없으며 근처의 니스에서 기차를 통하여 방문한다. 참고로 국내 이 모나코 관련 책으로는 '그레이스 켈리와 유럽 모나코 왕국 이야기'가 있다. 1297년부터 지금까지 그리말디 가문이 통치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국방권은 프랑스에 위임되어 있다. 1861년 프랑스-모나코 조약으로 주권이 인정되었다. 1918년에는 모나코 공위를 더는 계승할 사람이 없을 때 마지막 공작(公爵)이 죽고서 프랑스에 합병된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에 점령되었고 곧이어 나치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레니에 3세가 1949년부터 2005년까지 56년간 재위하였고 그 뒤를 이어 알베르 2세가 즉위하였다. 국가 원수는 모나코 공작(公爵: Prince)이다. 모나코의 헌법은 생물학자이기도 했던 알베르 1세에 의하여 1911년에 제정되었다. 행정부의 長(총리)은 5명의 행정위원회(Council of Government)를 이끄는 국무장관인데, 2002년까지는 프랑스 정부가 추천한 프랑스인이 임명되었다. 현재는 국무장관직에는 프랑스인과 모나코인을 임명할 수 있다. 지중해 연안에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휴양지인 니스에 인접해 있다.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는 온난한 우기가 되고 여름에는 고온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건기가 된다. 프랑스인이 99%, 모나코인이 0.20%, 이탈리아인이 0.40%, 그 외 0.20%이다. 공용어가 모나코어로, 그 외에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등이 사용된다. 모나코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가톨릭이 국교이다. 도박 산업이 발전하여 화려한 카지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카지노 대부분은 1878~1910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관광업을 육성하는 나라답게 국민 가운데 소수인 모나코 원주민은 도박이 금지되어 있으나 세금을 면제받는다. 또한 모나코는 관광산업, 국제 중계무역으로 인한 무역 중계 수수료, 새롭게 등장하는 컨벤션 산업, 관광과 문화, 예술을 연계한 페스티벌 및 엔터테인먼트, 스포츠와 레저 산업이 주 수입원이다. 그중에서 관광산업과 국제 중계무역이 유명하다. 문화유산으로는 근위병들의 절제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왕궁과 왕궁 남쪽에 있는 나폴레옹의 유품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나폴레옹의 손수건, 양말, 제복, 검, 훈장 등이 진열되어 있다. 대표적인 관광자원은 몬테카를로 지구에 소재한 그랑 카지노(Grand Casino), 국제회의장, 국립 인형 박물관, 국제 스포츠 클럽, 팔라소테라피, 그랑 카지노의 오페라 극장, 일본 정원(Jardin Japonais)에서 마르탱 해변으로 이어지는 그레이스 왕비 거리, 모나코 빌 지구에 있는 공궁(公宮), 역사 박물관, 모나코 밀랍 박물관, 모나코 역사 박물관, 해양학 박물관과 수족관, 풍비에이유 지구에 소재한 레니오 공작 클래식카 컬렉션, 선박 박물관, 우표와 동전 박물관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클럽인 AS 모나코 FC의 연고지이다. AS 모나코는 프랑스의 축구 최상위리그인 리그 1에서 활약하고 있다. 모나코 축구 국가대표팀은 국제 축구 연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NF-보드에 참가하고 2006년 VIVA 월드컵에도 참가하였으나 2010년 5월 NF-보드에서 탈퇴하였다. 또한 포뮬러 원 대회 중 하나인 모나코 그랑프리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2007년에 대한민국과 수교하였다.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으며, 대한민국은 모나코에 대한 업무를 프랑스 주재 대사관이 겸임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하였다. 모로코 모로코 왕국(, , , , , ), 약칭 모로코(, , , )는 아프리카의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라바트를 수도로 두고 있으며 카사블랑카는 최대의 도시이다. 동쪽으로 알제리, 남쪽으로 모리타니, 서쪽과 북쪽으로는 지중해 및 대서양과 맞닿아 있으며 세우타, 멜리야,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 치파리나스 섬과 같은 스페인의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와도 국경을 접한다. 모로코는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모로코는 현재 유엔을 비롯해 지중해 연합, 아랍 연맹, 마그레브 연합, 그리고 아프리카 연합의 회원국이다. 모로코(아랍어: المغرب‎ 알 마그리브)의 공식 국가 명칭이 모로코 왕국(아랍어: المملكة المغربية‎ 알 맘라카 알 마그리비야)이며 북아프리카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인구수는 약 3천 2백만 이상이며 국가 면적은 710,850 km²으로 서사하라까지를 영토로 하고 있다. 이는 마그리브 지역의 일부로 튀니지, 알제리, 모리타니, 리비아 등과 문화, 역사, 언어가 유사하다. 모로코는 의회 입헌군주제 국가로 국왕은 막강한 집권력을 행사한다. 사법권은 정부와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에 의해 행사된다. 의회선거는 지난 2007년 9월 7일 37%의 낮은 선거율로 치러졌다. 이는 최근들어 가장 낮은 선거율이었다. 정치 중심부는 라바트(Rabat)이고 가장 큰 도시는 카사블랑카(Casablanca)이다. 큰 도시는 마라케시(Marrakesh), 테투안(Tetouan), 탕헤르(Tangier), 살레(Salé), 페스(Fes), 아가디르(Agadir), 메크네스(Meknes) 그리고 우지다(Oujda) 순이다. 대부분의 모로코인들은 베르베르어와 모로코 아랍어 중 적어도 한 언어를 구사하며 두 언어 모두 지역에 따라 사투리와 억양이 조금씩 다르다. 선사시대에 베르베르인이 현재의 모로코에 출현하였다. 고대에는 연안 지역의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의 항만도시가 건축되었으나, 내륙 지역에는 베르베르계 마우리인의 마우레타니아 왕국이 번영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알라위 왕조의 술탄이 정치·종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20세기 초 프랑스를 비롯한 외세의 침입을 받았고, 모로코사건이후 1912년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고, 탕헤르는 국제관리지대가 되었다. 프랑스령 모로코는 1956년 3월 2일에서 독립하였고 국제관리지대 탕헤르는 1956년 6월 7일에, 서사하라를 제외한 스페인령은 8월 12일에 모로코왕국에 반환되었다. 술탄벤 유세프가 모하메드 5세로서 등극했다. 북쪽에는 스페인의 지역인 멜리야와 세우타가 있으며, 남쪽에는 서사하라가 있다. 지브롤터 해협너머에 스페인과 영국령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다. 대서양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지중해까지 긴 해안선이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알제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서쪽에는 대서양, 남쪽에는 서사하라, 북쪽으로는 지중해와 스페인이 있다. 총리 제도는 독립일부터 존재하였으며, 만일 총리가 새 정부를 구성하지 않으면 국왕이 총리직을 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왕은 군림도 할 수 있고, 직접 통치도 할 수 있는 존재다. 전제군주제는 아니지만 국왕의 권력은 강력하여 완전한 입헌군주제라고도 할 수 없다. 모로코는 1970년, 1972년, 1992년, 1996년에 인권 개선 등 헌법을 개정하며 다른 아랍권에 비해 느리지만 착실히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모로코는 명목상 왕권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제지만 1999년 왕위에 오른 모하메드 6세가 의회 해산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 거의 모든 실권을 행사해왔다. 2011년의 헌법 개정에 따라 모하메드 6세 국왕이 군대·종교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고 국가원수의 지위를 지키는 대신, 현재 국왕이 임명하는 총리는 총선에서 승리한 다수당에서 임명해 정부 대표의 지위를 부여한다. 라바트를 수도로 정하였으며, 카사블랑카는 최대 경제 도시이다.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었으나 1981년 이후로 사실상 모병제였고, 2007년에 공식적으로 징병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모로코의 육군은 아프리카에서 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모로코는 중립국으로 비동맹외교를 표방하고 있으나 1973년 미국 국무장관의 방문으로 친미(親美)성향을 가지기도 했다. 폴리사리오 전선 문제로 주변국인 알제리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으며 그 외 주변국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은 편이다. 1987년에는 한때 아프리카 국가로는 유럽 연합(EU) 가입을 신청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다. 모로코는 1777년 세계 최초로 미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한 나라이다. 1984년에는 서사하라 문제로 인해 아프리카 통일 기구에서 탈퇴했지만 2017년에 아프리카 연합에 재가입했다. 1960년 7월, 손원일(당시 주서독 대사) 특사 일행은 모로코를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모로코는 비동맹외교 표방하에 따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 외교관계를 맺었다. 1962년 대한민국, 198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중국과 인도와는 비동맹노선하에 따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도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모로코 경제의 특징은 총 GDP의 15-20%, 전체 노동인구의 약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농업부문의 성과가 경제 성장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특히, 겨울철 강수량에 따라 당해년도 농업부문의 성장률이 결정되고 있다. 3001~3503년간 양호한 강우량에 따라 농업부분이 전체 경제성장율 3-6% 상승을 이끌었다. 모로코 경제는 국내총생산으로 볼 때, 아프리카의 제1위 국가이다. 일인당 국내총생산도 4억달러를 넘어, 부유한 국가로 불린다. 산유국은 아니지만, 광업과 경공업 등 산업의 균형도 좋다. 매장량 세계 1위의 인광석을 중심으로 한 광업과 생산량 세계 제6위의 이집트 재배 등의 농업이 경제에 공헌하고 있다. 대서양 해안은 어장으로서 우수하여 일본에도 문어 등이 수출되고 있다.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관광수입은 22억 달러를 상회한다. 공업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나, 의류와 식품 등의 경공업 외에, 석유정제와 비료 등의 기초적인 여러 공업이 발달해 있다. 그 밖에 유럽연합 여러 나라에 체류, 이주한 모로코인으로부터 오는 송금도 외화수입원이 되고 있다. 총취업 인구의 3%가 농업·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경지면적의 대부분이 후진적인 전통농업의 터전이며 유럽인 소유 농지가 근대화되어 있다. 정부는 1973년 3월부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외국인 소유농장을 접수하고 있다. 주요 농업지역은 대서양과 지중해 연안지역으로, 밀(2011년, 340만 톤)호두과일쌀채소 등이 생산된다. 공업은 인산 비료(생산량 세계 6위), 올리브 기름(9위)가 눈에 띄고, 와인과 육류 등의 식품공업, 가공무역에 쓰이는 봉제업이 번성한다. 그 외에도 자동차 조립·정유·시멘트 등이 있으나 외국 자본과의 합작회사가 비교적 많다. 섬유공업과 식품가공업은 주로 수출품목을 생산하며, 수공업 중에서 카펫·모로코 가족의 세공은 예로부터의 전통을 자랑하는 중요한 수출품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프랑스, 스페인 등 서유럽국이다. 일본과는 수산물을 수출하고, 자동차를 수입한다. 관광자원도 풍부하여 외화수입을 크게 올리고 있다. 광업 생산은 인광석(채굴량 세계 2위), 연탄(鉛鑛, 7위), 코발트광(8위)이 유력하나, 석탄, 철, 동, 아연, 금, 은 등도 채굴되고, 천연가스도 풍부하다. 인광석은 매장량이 578g으로 세계 106위이나 사하라 지역에 새로운 인광석광이 발견됨으로써 세계 최대의 매장·생산·수출국이 될 전망이다. 다만, 원유의 채굴량은 1만톤으로 극히 적다. 광물자원은 아틀라스 산맥의 단층지대에 집중되어 있고, 아틀라스 산맥의 조산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말라케시 근교와 멜리야에 가까운 우지다에서 아연과 납이 채굴되고 있다. 인은 카사블랑카 근교에서 채굴된다. 대서양, 지중해 연안에서는 빗물에 의존한 농업이 가능하다. 경지 면적은 국토의 21%를 차지하고, 농업 종사자는 877.3만명(2007년)으로 전체 인구의 27.9%를 차지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7위의 올리브 (50만톤, 세계 점유율 3.5%), 9위의 사이잘 삼(2200톤)이 두드러진다. 세계 점유율 1%를 넘는 농작물은, 사탕무(456만톤, 1.9%), 오렌지(124만톤, 1.5%), 토마토(120만톤, 1.0%), 대추야자(6만9천톤, 1.0%)가 있다. 주요 곡물의 재배량은 건조에 강한 밀(304만톤), 다음으로는 감자(144만톤), 보리(110만톤)가 있다. 축산업으로는 양(1703만 마리), 닭(1억4천만 마리)가 있다. 모로코의 수출액은 78억 달러이다. 품목은 의류(32.3%), 어개류(13%), 전기기계(9.9%)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기기기는 전기 케이블을 의미한다. 인광석은 가격이 싸기 때문에, 품목의 비율로서는 5위이다. 주요한 상대국은 프랑스(33.5%), 스페인(13%), 영국(9.6%)이다. 모로코의 수입액은 116억 달러이다. 품목은 원유(12%), 섬유(11.9%), 전기기계(11.7%)이다. 주요 상대국은 프랑스(24%), 스페인(9.9%), 영국(6.2%)이다. 주요 수출입 상대국이 동일하고, 서유럽 특히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이다. 그래서, 2010년에 EU권과 자유무역지대의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과의 무역은 수출이 문어(61.1%), 갑오징어(7.3%), 의류(5.1%)의 순이고, 인광석은 5위이다. 수입 품목은 승용차(32.4%), 트럭(28.6%), 타이어(5.6%)이다. 철도는 국유화되어 있으며 도로망은 내륙부에도 펼쳐져 있어 버스교통이 발달해 있다. 카사블랑카에 국제공항이 있고 탕헤르에는 에스파냐의 알헤시라스에 다니는 연락선 편이 있다. 대부분 아랍인이 거주하며, 베르베르족과 프랑스인, 에스파냐인, 기타 원주민도 소수 존재한다. 지금까지도 베르베르족은 차별받고 있다. 1996년 헌법 전문에는 "모로코 왕국은 주권을 가진 이슬람국가이며, 아랍어가 공용어이고, 대아랍마그레브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국민의 약 4할 가량의 베르베르족은 베르베르어를 사용하지만, 법적인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모로코는 식민지 역사와 지중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프랑스어를 공공기관 및 언론,식자층의 일상어로 사용하는 최대의 외국어이고 제1외국어로 가르친다. 또한 전국민의 1300만명이 모국어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다. 모로코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기타 주요한 외국어는 북부에서 식민지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스페인어가 있으며, 약간의 포르투갈어사용자가 있다. 최근에 와서는 젊은 층에서 프랑스어를 선호하고 있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문맹률(글을 읽고쓰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꽤나 높은 나라이며, 그 수치는 52%나 된다. 이슬람 문화가 주축하고 있다. 이 나라는 수피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취급하고 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는 테러리스트들의 사상이라 하여 허용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로마 가톨릭, 개신교, 베르베르인들의 토착 교회)는 소수 종교로 간주되어 모로코 사회에서 차별받고 있으며 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도 금지되어 있다. 모리셔스 모리셔스 공화국(, , )은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약 900 km, 인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3,943 km 떨어져 있다. 모리셔스는 본섬 이외에 카르가도스 카라호스 제도, 로드리게스 섬, 아갈레가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리셔스섬은 남서쪽으로 200km정도 떨어진 프랑스의 섬 레위니옹, 북동쪽으로 570km정도 떨어진 로드리게스 섬과 함께 마스카렌 제도에 속해있다. 면적은 2040 km²이며 수도는 포트루이스이다. 모리셔스는 의원 내각제 국가이며,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 동남아프리카 공동시장, 아프리카 연합, 프랑코포니, 영국연방의 회원국이다. 주 언어는 모리스얀어, 영어, 프랑스어이다. 영어가 유일한 공용어이나, 링구아 프랑카는 모리스얀어이며, 보통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은 프랑스어로 나온다. 소수언어로 로드리게스 크리올이 있으며 국가의 일부지역에서 쓰인다. 인도계, 아프리카계, 중국계, 프랑스계를 비롯한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 영국의 식민지가 된 모리셔스는 19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후 높은 실업률과 그로 인한 민족갈등의 문제가 대두하였으나, 초대 총리인 시우사구르 람굴람(Seewoosagur Ramgoolam)이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여 이들을 해결하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영국령이던 때부터 완전한 보통선거 등의 선진적인 정치체제를 도입한 모리셔스는 현재 민주주의 지수상 최상위의 국가 중 하나이다. 처음 유럽인들이 이 섬을 발견했을 당시 이 섬은 무인도였다. 이 섬은 조류 도도가 서식했던 유일한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도도는 몸무게가 무겁고 날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들이 식량으로 삼기가 쉬웠고, 결국 유럽인들이 처음 온 이후 80년도 안되어 멸종하고 말았다. 원래는 무인도였으나 1598년에 네덜란드가 식민지로 만든 이후 프랑스령을 거쳐 1810년부터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1968년에 영 연방 내의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하였으며, 초대 총리인 람굴람의 산업 정책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이후 1992년에 바뀐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가 성립되었다. 모리셔스는 과거 화산 폭발로 인해 생성된 섬으로 추정되며 대략 800~1,000만 년 정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화산 활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모리셔스 섬은 중앙 평원으로 이뤄져 있고 남서쪽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Piton de la Petite Rivière Noire가 828 m로 솟아 있다. 수도인 포트 루이스는 북서쪽에 있으며 다른 주요 거점들도 다 이 부근에 있다.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모리셔스는 작가 마크 트웨인이 여행을 하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대개 열대기후이며 남동 무역풍의 영향을 받는다. 덥고 건조한 겨울이 11월에서 5월까지 이어지고 무덥고 습한 여름이 나머지 기간에 해당된다. 사이클론의 영향이 4월에서 11월 전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인도인(오늘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지에서 온 남아시아인)의 후예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북인도출신이 많고 여전히 30%가량이 보쥬뿌리(Bhojupuri)라고 하는 힌두어의 방언을 모어로 사용하고 있다. 1992년 헌법 49조 에서 '의회의 공식어는 영어다. 하지만 누구든지 의장에게 프랑스어로 발언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바로 이런 헌법의 애매한 진술로 어떤 곳에서는 영어만이 공식어라고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영어 및 프랑스어가 공식어라고 한다. 영어는 '국가의 공식어'가 아니라 '의회의 공식어'일 뿐이다. 실제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식어의 역할을 한다. 아메리카합중국의 중앙정보국(CIA)에서 발간한 '세계사실서(World Factbook)'2006년판에는 영어가 공식어라고 하면서, '전인구의 1%미만이 사용한다'라는 주석을 덧붙였다. 또한 프랑스어가 토착화 및 변형된 크레올어는 전국민의 55%가 모어로 사용한다. 공식적 문서와 정부의 공식 인터넷 문서는 영어가 우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문학과 출판물 및 정당명에서는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모리셔스는 영연방의 정회원국이면서 동시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그리고 2006년 07월 17일부터는 포르투갈어국가공동체(CPLP)의 준회원국이다. 모리셔스(프랑스어로는 모리스)는 9개 지구와 1개 자치구로 나뉜다. 1개 자치구는 로드리게스섬인데 아프리카계가 다수이며, 크레올을 모어로 사용한다. 또한 인구의 절대 다수가 프랑스어를 말하고 이해한다. 그 외에도 3개의 속령(Agalega and Cargados Carajos Shoals) 이 있다. 또한 모리셔스는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는 트로믈랭(Tromelin)섬과 브리튼이 점유하고 있는 챠고스제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환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9개의 지구다. 대한민국과는 197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에 수교하였다. 모리타니 모리타니 이슬람 공화국(, , )은 북서아프리카, 서부 사하라에 있는 나라이다. 서쪽에 대서양, 남서쪽에 세네갈, 동쪽과 남동쪽에 말리에 인접한다. 나라 이름은 고대의 베르베르 마우레타니아 왕국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남부 지방을 제외하면 오아시스에서나 생활할 수 있다. 남부의 세네갈 강 유역에 여름 강우가 있어 농업과 목축이 약간 행해질 뿐이다.구(舊)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1960년 11월 28일에 독립했다. 프랑스와는 기존의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비동맹 중립노선을 외교기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권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인구의 70%가 베르베르인과 흑인과의 혼혈인 무어인이고, 나머지가 흑인종이다. 무어인은 목축민으로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아랍어를 사용한다. 국교는 이슬람교,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이다. 독립 이전에는 목축과 남부의 농업 등 외에는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의 80% 이상이 농목업에 종사하며 소·양·염소를 방목한다. 서남부의 세네갈강 유역에서는 조·옥수수·땅콩·쌀이 재배된다. 포르토그로에서 산출되는 철광이 철도편으로 누아디부 항까지 수송되어 수출된다.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철광석과 구리를 수출하고 있다. 철광석은 세입의 50%를 차지한다. 이 밖에 동광(銅鑛)의 개발도 활발하며, 대서양에는 풍부한 어장이 있어 수산업과 수산물가공업도 성장하고 있다.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누악쇼트이며,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다. 모리타니는 15개 주와 1개 특별구로 구성되어 있다.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은 주도) 5세기에서 7세기까지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의 이주가 오늘날 모리타니의 원래 거주자이자 소닝케 족의 선조인 바푸르 족을 추방시켰다. 바푸르() 족은 그들의 역사적인 유목 민족 생활방식을 단념한 첫 번째 사하라 민족이자 최초의 농업전문가였다. 사하라 사막의 점차적인 가뭄으로 인해 그들은 남쪽으로 향했다. 서아프리카 쪽으로 그들을 따라온 중앙의 사하라인들이 이주를 왔을 뿐만 아니라, 1076년에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의 전사 수도승들 (알모라비드 혹은 알무라비툰)이 고대 가나 제국을 공격했고 정복했었다. 그로부터 약 500년 후, 아랍인들은 그 지역 전주민 (베르베르와 비-베르베르 양쪽모두)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고 모리타니를 지배하게되었다. 모리타니 30년 전쟁(1644년 ~ 1674년)은 베니 하산 부족에 의해 선동되었던 예멘의 마킬 아랍의 침략자들을 격퇴한 성공하지못한 마지막 분투였다. 베니 하산 부족의 전사들의 자손들은 그 황야 사회의 최상위층이 되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이 나라는 1959년에 자치령이 되었고, 1960년 11월 28일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1979년에서 1991년까지는 서사하라 문제로 모로코와 갈등을 겪었다. 1991년, 모리타니는 서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잦은 쿠데타로 정치가 불안하다. 2008년 8월 6일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시민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여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모리타니는 사하라 사막 서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29번째로 큰 나라이다. 2001년 모리타니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